선현 분의 문집/소수 서원기문

백운동 소수서원 기문[白雲洞紹脩書院記] 신광한(申光漢)

아베베1 2011. 7. 3. 14:58

 

 

 

 

 

   이미지 사진은 수락산 학림사 대웅전의 모습 (2011. 6. 28)

 

 

 

행록후

백운동 소수서원 기문[白雲洞紹脩書院記] 신광한(申光漢)


죽령(竹嶺) 동쪽에 순흥군이 있고 순흥군 동쪽에 소백산이 있으며, 소백산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그윽하고 아늑한 곳에 백운동이 있다. 그리고 죽계수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거쳐 흐른다. 죽계수가 경유하여 흐르는 이곳은 옛적 순흥부의 땅으로서 고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면서 독서하던 곳이다.
문성공(文成公)이 학문을 돈독히 하고 뜻을 밝혀 벼슬에 올라 현달(顯達)하게 되자 노비와 토지를 국학(國學)에 바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의 은택을 입고 있으니, 사문(斯文)에 끼친 그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 자손이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세대마다 저명한 인물이 나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된 바와 같이 고가(故家)의 유교(遺敎)가 아직 남아 있어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오래 되어도 쇠퇴하지 않았다. 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평소 유술(儒術)을 좋아하여 수년 간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서원을 창건했으며, 또한 문성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공부하는 자들의 마음에 순응하면서 흥기시켰다.
처음 서원의 터를 다듬다가 얼마간의 놋쇠를 얻었는데, 서원이 완성되자 이것을 가지고 서사(書史)를 구입하여 비치하였으며 아울러 식미(息米)와 학전(學田)을 설치하여 군내의 유식한 선비에게 주관케 하였다. 이에 학도들이 많이 모였는데, 생원(生員) 진사(進士)와 준수한 선비가 아니면 참여시키지 않으니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는 일이 날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 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공의 후손이었는데, 또한 주 군수(周郡守)를 이어 서원을 경영할 어염(魚盬) 등을 더해 주고 노비를 공급하여 서원을 영구히 보존되어 황폐됨이 없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다만 미흡한 것은 일찍이 군수는 조정에 청하지 않았고 관찰사 또한 아뢰지 않아 성상의 아름다운 뜻이 백성에게 전해지지 못하여 나타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이 조정에 의하지 못하고 일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여 또한 영구히 보존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 뒤 군수 이황이 이 점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원 창건의 전말을 갖추어 기록하여 관찰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올려, 백록동(白鹿洞) 고사에 따라서 편액(扁額)과 서책을 하사하여 조정의 학문을 숭상하고 교육을 중히 여기는 성대한 뜻을 밝혀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이황의 글을 올리니 임금께서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윤허하고 사안 처리를 하도록 예조에 내렸다. 이에 판서 윤개(尹漑)가 나에게 서원의 명칭과 명명(命名)한 의의(意義)를 쓰게 하여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반포케 하고, 서책을 보내줄 것을 주청하니, 임금께서 모두 윤허하셨다. 내가 명을 듣고 황송하여 절을 올리고 그 이름을 ‘백운동 소수서원’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학문의 도가 쇠퇴하여 강구되지 못한 지 오래이다. 배우고서 그 이치를 강명(講明)하지 않으면 몸을 닦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 하물며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서원 이름을 ‘소수(紹修)’라고 하게 된 까닭이다.
아, 삼대 말엽에 성인이 나오지 않아 상서(庠序) 학교가 있었으나 몸소 위에서 실천하여 인도한 이가 없었기에, 천하 학자가 혼미하여 숭상할 바를 알지 못함으로써 인의가 상실되고 밟은 덕이 어두워졌었다.
공자는 큰 성인이었으나 군사(君師)의 자리를 얻지 못하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하는 도를 강명(講明)하여,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수신(修身)으로 근본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고, 그가 가르친 바나 학문한 바는 내외를 닦는 도였다. 이 때문에 천하후세에 모두 공자를 종사(宗師)로 삼았다. 공자의 도가 쇠퇴할 때에 맹자가 나오니, 맹자는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전한 자이다. 그의 설은 마음을 수렴하고 호연지기를 함양하는 것으로 모두가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공부이니, 그 도는 비록 크지만 그 요점은 자신을 닦아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추로(鄒魯) 지방이 지금에 수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든 사람이 사모하여 문헌을 구할 때에는 으레 추로를 일컬어 왔다. 후세 현인으로서 비록 공자ㆍ맹자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실로 수기(修己)의 공부가 있었던 이에 대하여는 그가 살았던 곳을 빌려 학자들의 마음을 흥기시키기에 충분하였는데, 하물며 직접 군사(君師)가 되어 국학에서부터 교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이 마음먹는 바는 기미가 미미하더라도 교화를 이루는 효과는 크다. 그 사실을 나는 송 태종(宋太宗)의 일에서 본 바 있다.
한(漢)ㆍ당(唐)ㆍ위(魏)ㆍ진(晉) 이후 학교를 숭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모두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직접 인도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스림의 효과는 거의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태종(太宗)에 있어서도 몸소 실천하여 인도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들은 바 없지만, 임금이 뜻을 가져 이룬 효과를 서원을 통하여 볼 수 있었다. 태종이 천하의 군주로서 작은 지방 은사(隱士)의 서원에 편액과 서책을 하사하여 학문을 진작시킴으로써 송나라가 다할 때까지 진유(眞儒)가 배출되고 도학이 크게 천명되어 그동안 단절되었던 공맹의 도통을 계승하였다. 이를 본다면 송조에서 이룬 공효는 서원에서 나왔지 국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천하의 국학이 오히려 이발(李渤)이 몸소 수신하였던 장소보다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시고 문운(文運)이 형통하여 주세붕이 서원을 창건하고 이황이 조정에 청하여 권장토록 한 것은 비록 인위(人爲)에 의함이나 실로 하늘이 열어준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성심으로 도학을 숭상하고 교화의 근원에 독실하시어 의로운 일을 들으면 과감히 실천하고 선을 보면 즐거이 따르셨다. 성상께서 몸소 솔선하여 위에서 진작시키시니 학자들이 아래에서 감격하여 흥기하였다. 이는 상하가 모두 수신으로 근본을 삼고 내외(內外)를 함께 닦는 학문을 이어 나간 결과이다. 교화가 행해지는 것이 임금의 솔선수범에 기인하여 국학의 근원이 되고 국학에서 서원으로 서원에서 사방에 이르니, 그 힘은 실로 송조(宋朝)에 비할 바 아니다. 장차 바른 학문을 하는 서원이 우리나라에 많이 설립되어 많은 인재가 등용됨으로써, 백성들이 지극한 다스림의 은택을 입게 될 것이다. 이 어찌 송나라 유생처럼 조정에 등용되지 못하고 집에서 은거하며 수신만 하는 데 그치겠는가.
가정 29년(1550, 명종5) 4월 하순에 추성정란위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영성군(靈城君) 신 신광한(申光漢)이 삼가 절하고 쓰다.


 

[주C-001]백운동 소수서원 기문 : ‘脩’는 ‘修’의 오기임. 《企齋文集》 卷1에 수록되어 있고 제목은 〈紹修書院記 應製》이다.
[주D-001]신광한(申光漢 1484~155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ㆍ기재(企齋)ㆍ석선재(石仙齋)ㆍ청성동주(靑城洞主).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형(泂)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1513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ㆍ교리ㆍ정언ㆍ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이때에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이어서 다시 여주로 추방되어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 윤인경(尹仁鏡)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ㆍ한성부우윤ㆍ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기(官紀)를 엄히 하였다. 1542년 세자시강원의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5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거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이 되어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대제학ㆍ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ㆍ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ㆍ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를 겸임하였다. 뒤에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어 좌참찬ㆍ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48년(명종 3)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고, 이듬해에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53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54년에 사직하고 그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그에게 운집하였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와 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하였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는 《기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