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하서 김인후

해동 18현 하서 김인후 선생관련

아베베1 2011. 7. 6. 11:20

 

 

  이미지사진은 도봉산 원통사 원통보전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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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대
1742년(영조18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216cm, 너비 95cm, 두께 41cm
출토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소재지
(한국)성균관대학교 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3가 성균관대학교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송시열(宋時烈) / 이재(李縡) / 미상


 

 

김인후신도비(金麟厚神道碑)

 

弘文館副修撰贈吏曹判書文靖公河西金先生神道碑」
有明朝鮮國務㓛郞守弘文館副修撰知製教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
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捴府都捴管 世子左賓客謚文靖公河西金先生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 經筵事後學宋時烈 撰」 資憲大夫知中樞府事知 經筵事李能 書」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金鎭商 篆」

 

國朝人物道學節義文章忒有品差其兼有而不偏者無㡬矣夫佑我東鍾生河西金先生則殆庻㡬焉先生諱麟厚字厚之蔚州之金盖出」
新羅金傅王鶴城府院君徳摯其別子也以至于 本朝直長義剛訓導九叅奉齡寔先生曾祖祖與考也妣玉川趙氏叅奉公孝謹好善有」
古君子風先生生而形貌端正風神秀朗數歲行必正履不由側逕身外之物一不經意惟書籍翰墨是好甞手擘菜皮必盡其心乃已曰欲」
見生理之本末九歲竒服齋遵見而異之曰子當為我世子之臣盖 仁廟性質生知臣民咸仰其聖德故也稍長常穆然黙㘴儼若對越講」
論到意會處輒欣然自得達曙不寐其所造已深遠矣 嘉靖辛卯中司馬時年二十二時經黨禍未乆士諱學問之名先生與退溪李先生」
志氣相得徃還講磨極有麗澤之益焉庚子登第分隷槐院 賜暇湖堂拜弘文正字陞博士兼侍講院說書 仁廟毓徳春宮聖學日躋得」
先生大悅恩遇日隆或親至直廬従容問難且特賜書冊又為墨竹以寓微意先生作詩以謝其印本為世所寶為副修撰因東宮火變上劄」
曰自古善治之主莫不以親賢才正士習為本盖必親賢才可以専輔翼而養氣質必正士習可以明彜倫而正風俗且如向来己卯之禍朝」
野無不愍其寃枉然而至今不能開陳本心顯白非辜上以釋 殿下一念之疑下以洒諸臣九原之憤而一有端言正色之人則輒斥以小」
學之徒士習不正職此之由願 殿下虛心静慮深惟致灾之原硏㡬扵講學而致曲於存察要使本原澄澈表裏皆實無一毫私僞以雜之」
則邪正不難辨是非有所定可以起已偷之士習可以振已觧之紀綱教化之陵夷風俗之頹敗有不足虞矣辭意剴切自此 中廟益知静」
菴諸賢之寃頗示悔悟而厥後申請者益衆卒至 仁廟初服快下伸雪之命先生盖發其機焉乞養得玉果縣監務循民情一境頼之明年」
乙巳詔使張承憲至召為製述官時 仁廟初即位時議咸欲留先生以補新化而時事顧有可憂者先生辭以親癠而歸七月 上猝然賔」
天先生聞訃驚慟㡬絶而蘇因以疾觧縣任歸自是凡有除拜皆不就連丁内外喪克盡情文至扵衰服之制一遵禮經喪除以校理 召又」
上箋辭 明廟諭以君臣大義先生亦極陳疾病難進之狀並辭食物之 賜庚申春忽感疾屬當上元命家人具時食薦于家廟事訖▨命」
勿用玉果以後官爵遂以翌日庚午壽五十一而歿訃聞 上驚悼特致賻儀先生淸明温粹胸次灑落人以為淸水芙蓉至其立志為學也」
積之以窮理主敬謹思明辨之㓛則其造詣之深人不能有所測知者矣盖先生初從金慕齋受小學書用㓛最深至扵大學則兀然端㘴而」
讀之至扵千餘遍反復紬繹不得不措自後雖以授門人弟子未甞以易此也甞曰大學一部之中體用具備條理不紊捨此無以進道矣不」
讀是書而欲㸔他經猶不築基址而先作室屋又曰讀此書無疑者未必有實得苟字字硏窮句句思量則必有未透處如扵章句未透叅以」
或問或問未透叅以諸家之說乆乆必見氷釋之效矣其扵語孟詩易覃思實踐而曰得力莫如語孟又甞謂太極圖說義理精深西銘規謨」
廣大不可偏廢常玩素不已至其持守則必以敬爲一心主宰日用之間儼然肅然辭氣安定視聴端直表裏無間動静如一情意之發獨先」
照扵㡬微事物之應必揆度扵義理善利公私之分益致其謹自其性命陰陽之妙以至人倫孝悌之實體在一身本末備具卓然乎大中至」
正之規矣故有言學當専務篤行者則曰知有不明行必窒礙有言學當専治其内者則曰外不整齊内必怠慢又甞曰學莫如知行幷進内」
外交修至其證訂諸說之未安者毫釐必辨於花潭則慮其獘流扵頓悟之捷徑扵一齋則病其道器之混爲一物論人心道心則黜羅氏體」
用之說至扵退溪李先生有四端七情理氣互發之論高峯竒先生深疑之質問於先生沛然無所凝滯遂以論辨扵李先生殆數萬言世所」
傳退髙徃復書者是也盖先生扵道理洞然無疑叩之斯應若取諸袖中而與之而無不曲當故難以退溪之精密亦屢舎己見而從之文元」
公金先生以先生說考證禮書者多有焉先生論議不惑於新竒不亂於繳繞平正明白使人易知攧擈不破然未甞以知道自居常若有不」
足者甞有詩曰天地中間有二人仲尼元氣紫陽真先生識趣大槩此可見矣先生少有經濟志當安老伏法之後金慕齋李晦齋諸先生稍」
稍進用而先生獨見㡬微即有歛退志及 仁廟賔天驚號殞絶如不欲生杜門自廢屛棄人間事頓無送徃事居之意每値七月一日輒入」
家南山谷中慟哭竟石而反盖當時不敢問故只自隐痛扵心而未甞形諸言語人終不能知也甞作有所思吊申生諸詞寄意激烈一篇之」
中屢致意焉讀之者自然髮竪而膽裂然竟莫測其㫖意之所在也歷覽古今至奸臣媒孽使君父嬰其禍者必扼腕慷慨不翅躬親當之者」
盖以一心而函三才造化之妙以一身而任萬世綱常之重者終有所不可誣者矣其家政必以正倫理篤恩義為主閨門之内和順雍睦而」
濟以嚴正入其家者如入治朝焉飮酒微醺繼以吟哦音調洪暢令人荘以和暇日必携冠童逍遥徜徉顧謂諸生曰學者時時體認沂水庭」
翠氣象然後方能少進爾後學之被其引接者如襲春風而覩慶雲也其述作根扵風雅叅以騷選李杜凢有感觸一扵詩發之淸而不激切」
而不迫樂而不至扵滛憂而不至扵傷皆所以理性情而涵道德其䟽章通暢典雅必以理勝真仁義之言也文集若干編行于世周易觀象」
篇西銘事天圖諸作逸而不傳惜㢤至扵天文地理醫藥占筮算數律暦無不通曉茟法勁健絶無姸媚態所謂徳性相關者然也配尹氏縣」
監任衡女二男從龍從虎三女壻趙希文梁子澂柳景濂也從龍男仲聦叅奉無嗣從虎察訪男南重其子亨福亨祿亨祐亨祉二女壻李奎」
明奇震發也亨福男昌夏泰夏亨祐男器夏亨祉男鳴夏大夏其出后亨祐者仲男也昌夏生翼瑞斗瑞時瑞泰夏生天瑞地瑞元瑞鳴夏生」
致瑞李壻男逸之實之苾之密之佶之竒壻男挺然挺之挺漢内外曽玄愡若干人以文行相尙其年三月癸酉葬于長城治西願當山先塋」
而陽之原門人創書院以享之 崇禎壬寅 顯宗大王賜額曰茟巖復命贈吏曹判書两館大提學謚文靖道徳博聞曰文寬樂▨終曰靖」
嗚呼 聖朝崇報之典至是而無遺憾矣盖海東自殷師世遠聖學不明至我 中明之世治教隆盛莫不以洛閩為凖則然扵道器危微之」
說尙多聴瑩者而先生自能獨見大意學問思辨直尋正脈 本朝宗儒名賢徃徃致身扵蔑貞之際周旋委蛇志欲扶社稷救士林身且不」
免而先生自能知微知彰遯世無悶以沒其世由是觀之其明知達識超乎事物紛紏之表而深造厚積進乎精密正大之域至其淸風大節」
聳動震耀使之頑廉而懦立則難謂之百世之師可也然而本之明實根扵道學之正然則人不可以不知道而欲知道捨學問何以㢤世徒」
以莭義論先生者可謂淺之為知也銘曰」
達道有五君臣父子此其大經 欲盡其理盍究聖經有知有行 學問之道亶在扵是捨是曷程 於惟先生大賦之異質粹氣淸 志豪」
力雄勇邁終古廣大髙明 旣極羣言反以約之允矣集成 君臣之義父子之仁各得其貞 其所及人沛然旁達式圍式型 世道人文」
天秩民彛炳如日星 循古訖今計㓛論德孰與先生 性朝褒崇多士尊慕岱宗魁衡 願堂之陽銘此豐碑維千萬齡」

崇貞紀元後再壬戌 月 日立」

 

김인후신도비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무공랑(務功郞) 수 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守弘文館副修撰)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 시(諡) 문정공(文靖公)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 후학(後學)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知中樞府事兼知經筵事) 이재(李縡)가 글씨를 쓰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진상(金鎭商)이 전서(篆書)를 쓰다.

국조 인물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 문장(文章)이 모두 품격에 차등이 있어서 셋 다를 아울러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자가 거의 없는 실정인데,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서 배출하신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만은 자못 예외인 듯하다.
선생의 휘(諱)는 인후(麟厚)이고 자(字)는 후지(厚之)이다. 울주김씨(蔚州金氏)는 신라왕(新羅王 :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에게서 나왔는데,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덕지(德摯)가 김부의 별자(別子 : 본부인이 아닌 딴 여자에게서 난 아들)이다.

 

본조에 들어와서 직장(直長) 의강(義剛)과 훈도(訓導) 환(丸)과 참봉(參奉) 영(齡)이 바로 선생의 증조, 조부,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참봉공은 효성스럽고 행실을 삼가며 선(善)을 좋아하여 옛날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었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풍신(風神)이 수려하고 명랑하였다. 서너 살 적부터 걸어 다닐 때 신발을 꼭 반듯하게 신었고 샛길로 다니지 않았다. 몸 바깥의 물건에는 한결같이 마음을 두지 않았고 오로지 서적(書籍)과 벼루와 먹만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손으로 나물 껍질을 벗길 때 그 속까지 다 벗기고서야 그만두며 말하기를, “생리(生理)의 본말(本末)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9세 때에 복재(腹齋) 기준(奇遵)이 선생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너는 우리 세자(世子 : 인종(仁宗)을 가리킴)의 신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인종의 타고난 성품이 생지(生知 : 배우지 않고서도 사물의 도리에 통달하는 것)인지라, 신하와 백성이 모두 세자의 성스러운 덕을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항상 의젓하게 말없이 앉아서, 점잖게 하늘의 상제(上帝)를 마주하듯 하였고, 강론을 하다가 뜻에 맞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득(自得)함을 기뻐하여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니 그 조예가 이미 깊고도 먼 것이었다.
가정(嘉靖) 신묘년(중종 26, 153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니 나이가 22세 때였다. 그 당시는 당화(黨禍)를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때라 선비들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였다. 선생은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 : 이황(李滉))과 더불어 지기(志氣)가 서로 들어맞아 왕래하면서 강론하고 연마하여, 벗끼리 도와가며 학문에 정진하고 수양에 힘쓰는 유익함이 매우 많았다.

경자년(중종 35, 154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 승문원(承文院))에 소속되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로 승진하고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를 겸하였다.
인종이 동궁(東宮)으로 있으면서 덕을 쌓고 성학(聖學)이 나날이 진보하더니 선생을 만나고 크게 기뻐하여 은혜로 대우함이 날로 융성하였고 때로는 직소(直所)에 친히 오셔서 어려운 문제에 대해 차분히 문의하였다. 게다가 특별히 서책(書冊)을 하사하고 또 묵죽(墨竹)을 그려 은미한 뜻을 부치시니, 선생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는데 그 인본(印本)이 세상에서 보물로 여기는 바가 되어 있다.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동궁에서 발생한 화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영명(英明)한 인군은 모두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왔으니 이는 대개 어진 인재를 가까이해야만 보필에 전념하도록 하여 기질을 잘 기를 수 있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아야만 이륜(彛倫 :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을 밝혀서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난번 기묘년의 화에 대해서는 조야에서 모두 억울하고 원통하게 화를 당한 신하들을 가엾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속마음을 털어놓고 무고(無辜)함을 밝혀서, 위로는 전하의 한결같은 의혹을 풀어드리고 아래로는 지하에 묻힌 제신(諸臣)의 울분을 씻어주지는 않고서, 정색을 하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있기라도 하면 곧장 하찮은 것만 배운 무리로 배척하고 마니, 선비의 풍습이 바로잡히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변(災變)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생각하고 깊이 숙고하여, 학문을 익히고 연마하는 데에서 사건의 기미(幾微)를 연구하고, 본심을 보존하여 기르고 성찰하는 데에서 곡절을 미루어, 본원(本源)을 맑게 하고 표리(表裏)를 다 같이 진실하게 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과 거짓됨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삿됨과 바름을 판별하기가 어렵지 않고 옳음과 그름을 판정할 수가 있어서, 이미 부박(浮薄)해진 선비의 풍습을 일으킬 수가 있고 이미 해이해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가 있으니, 쇠퇴한 교화(敎化)와 무너진 풍속을 염려하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말의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이로부터 중종이 정암(靜菴 : 조광조의 호)을 비롯한 제현(諸賢)의 원통함을 더욱 알게 되어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자못 보였다. 그 후에 신원(伸寃)을 청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져, 마침내 인종이 즉위한 다음 신원해 주라는 명령을 통쾌하게 내렸으니, 선생이 대개 그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가서는 백성의 실정에 맞는 정사를 펼쳐 한 고을이 혜택을 입었다. 이듬해 을사년(인종 1, 1545년)에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이 도착하자, 선생을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렀다. 당시 인종이 막 즉위한 때라 시의(時議)가 한결같이 선생을 조정에 머물게 하여 새 정치를 보필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시사(時事)를 돌아봄에 우려할 만한 것이 있어 선생은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사양하고 임지로 돌아왔다.
그해 7월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선생은 부음(訃音)을 듣고 놀라고 절통하여 거의 까무러쳤다가 소생했다. 그 길로 곧장 신병(身病)을 들어 현감의 직임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무릇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잇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마음을 다하고 의식(儀式)을 치르기를 극진히 하였으며, 상복(喪服)의 제도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랐다.
상을 마친 뒤에 교리(校理)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였다. 명종(明宗)이 군신(君臣)의 대의를 들어 유시하였으나 선생은 질병 때문에 나아가기 어려운 정상(情狀)을 극력 진달하고 아울러 하사하신 먹을거리와 물건까지 사양하였다.
경신년(명종 15, 1560년) 봄에 갑자기 병이 났는데 마침 정월 대보름이었다. 집안사람에게 시식(時食 : 시절에 알맞은 음식)을 갖추어 가묘(家廟)에 올리게 하고, -몇 글자 판독 불능- 옥과 현감 이후의 관작(官爵)은 사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튿날 경오일에 향년 5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부음을 듣고 상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선생은 천품이 청명하고 온화하고 순수하며 가슴속이 쇄락(灑洛)하여 사람들이 맑은 물에 피어난 연꽃으로 여겼으며, 뜻을 세우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이치를 궁리하고 경(敬)을 주로 삼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分辨)하는 공력을 쌓았은즉 그 깊은 조예는 남들이 헤아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대체로 선생은 처음 김모재(金慕齋)를 좇아『소학(小學)』을 배워 공력을 기울임이 가장 깊었고,『대학(大學)』에 있어서는 올연(兀然)히 단정하게 앉아 천 번 넘게 읽었는가 하면, 반복해서 읽고 실마리를 찾아내어 터득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비록 문인 제자들에게 수업할 때에도 일찍이 이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학』한 부(部) 안에는 체용(體用)이 구비되어 있고 조리(條理)가 문란하지 않다. 이것을 놓아두고서는 도(道)에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지 않고 다른 경전(經傳)을 읽고자 하는 것은 마치 집터를 닦지도 않고 방부터 먼저 들이려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책을 읽고 나서 의심이 생기지 않는 자는 진실한 소득이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글자마다 연구하고 궁리하며 구절마다 생각하고 헤아려 보았다면 반드시 사리를 꿰뚫어 환히 알지 못한 곳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구(章句)에서 환히 알지 못했다면 『혹문(或問)』을 참조하고『혹문』에 환히 알지 못할 것이 있으면 제가(諸家)의 설(說)을 참조하기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몇 자 판독 불능- 의 공효(功效)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역경(易經)』에 있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실제로 실천해 본 다음에 말하기를,
“득력(得力)하는 데는 『논어』,『맹자』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의리(義理)가 정밀하고 깊고 -몇 자 판독 불능- 광대하여 하나라도 폐지할 수가 없으니 항상 음미하고 사색하기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 본심을 보존하고 지조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경(敬)에 한결같이 마음을 두어 주재(主宰)로 삼아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의젓하고 숙연하여 말하는 기운이 안정되고 보고 듣는 것이 단정하고 바르며 겉모습과 속마음이 틈이 없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한결같으며 정(情)과 뜻이 발로되는 데에서는 먼저 기미를 보고 알아차리고, 사물을 접하는 데에서는 반드시 의리로 헤아려 선(善)과 이익, 공(公)과 사(私)의 구분에 더욱 신중하였다. 성명(性命)과 음양(陰陽)의 묘(妙)에서 인륜과 효제(孝悌)의 실제에 이르기까지 한 몸에 체득하여 지니고 본말을 구비하여,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리에 뛰어났다.
그러므로 학문을 함에 있어 독행(篤行)에 오로지 힘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앎’에 밝지 못함이 있으면 ‘행동’에 반드시 막히는 것이 있다고 말해 주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오로지 힘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행실이 정돈되지 못하면 마음이 반드시 태만해진다고 말해 주었다. 또 일찍이 학문이란 앎과 행동이 아울러 진전되고 마음과 행실이 함께 수련되어야 닦여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제가(諸家)의 합당하지 못한 설을 증명하고 정정하는 데에는 털끝만 한 것도 반드시 분변하였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 대해서는 돈오(頓悟)의 첩경(捷徑)으로 잘못 흘러들 것을 우려하였고 일재(一齋 : 이항(李恒)의 호)에 대해서는 도(道 : 리(理)))와 기(器 : 기(氣))를 혼동하여 한가지로 본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함에 있어서는 나씨(羅氏 : 명나라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의 체용설(體用說)을 비판하였고,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에 대해서는, 고봉(高峰) 기선생(奇先生 : 기대승(奇大升))이 깊이 의심을 하였는데 선생에게 질문하여 패연히 막힌 바가 없어졌고, 이 선생과 논변한 것이 수만 글자에 이르렀으니, 세상에 전해지는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편지가 바로 이것이다.
대개 선생은 도리에 환하게 트여 의혹됨이 없어서 묻는 대로 응답해 주기를 마치 소매 속에서 꺼내 주는 것같이 하되 곡진하고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비록 퇴계의 정밀함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 여러 번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선생의 견해를 따랐으며, 문원공(文元公) 김선생(金先生 : 김장생(金長生))도 선생의 학설로써 예서(禮書)를 고증한 것이 많이 있었다.
선생의 의논은 신기한 것에 현혹되거나 한계 속에 갇혀 어지럽지 않고 평정(平正)하고 명백(明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알 수 있게 하고, 쳐부수려 해도 부서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도를 안다고 자처하지 않고, 항상 부족함이 있는 듯이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공자는 원기요 주자는 진기로다.”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품은 지취(志趣)의 대강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선생은 젊어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뜻이 있었다. 김안로(金安老)가 복주(伏誅)되고 난 후에 김모재(金慕齋 : 김안국(金安國)), 이회재(李晦齋 : 이언적(李彦迪)) 등 여러 선생이 차츰 나아가 등용되었으나 선생은 홀로 기미를 알아차리고 곧장 물러날 뜻을 두었다.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서는 놀라서 부르짖기를 곧 숨이 끊어질 듯이 하여 살려는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문을 닫아걸고 집 안에 들어앉아 인간사를 끊어버렸으며, 죽은 자를 보내고 산 자를 섬기려는 뜻도 도통 없었다. 매년 7월 1일이 되면 선뜻 집 남쪽에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 통곡하다가 밤을 지새고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당시에 감히 인종이 승하한 까닭을 물을 수가 없어 다만 마음으로만 애통해할 뿐이었고 언어로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끝내 그 마음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생각한 바가 있어(有所思)’, ‘신생(申生)을 조문하며(弔申生)’ 등의 여러 사(詞)를 지었는데, 글에 부친 뜻이 격렬하고, 한 편 중에 그 뜻이 여러 차례 나타나 있어, 읽는 자가 자연히 머리칼이 곤두서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지만 끝내 그 지의(旨意)의 소재는 헤아릴 수 없다.
고금의 역사를 열람하다가 간신(奸臣)이 화(禍)를 꾸며내어 군부(君父)로 하여금 그 화에 걸려들게 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강개해하면서 자신이 직접 당한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무릇 한마음으로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가 조화된 묘리(妙理)를 머금고 일신(一身)으로 만세토록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할 중임을 맡았음을 끝내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윤리를 바르게 세우고 은의(恩義)를 독실히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집안이 화순(和順)하고 화목하면서도 엄정(嚴正)하여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마치 잘 다스려지는 조정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술을 마셔 조금 취하면 연이어 시를 읊조렸는데 음조가 우렁차고 툭 트여 사람들로 하여금 씩씩하면서도 화목한 기운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한가한 날에는 관(冠)을 쓴 어른과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이리저리 거닐면서 제생(諸生)에게 일러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때때로 ‘기수(沂水)와 정초(庭草)의 기상(氣像)’을 몸으로 깊이 체득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조금 진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후학으로서 선생의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접한 자들은 마치 봄바람을 쐬고 경사로운 구름을 보는 듯하였다.
그 저술(著述)은 풍아를 근본으로 하고, 소선,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참고로 하였다. 무릇 사물에 접촉하여 감동하는 바가 있을 적에는 한결같이 시를 지어 나타내되, 청정(淸淨)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절실하면서도 급박하지 않고 격절(激切)하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어지러운 데에 이르지 않고 근심스러우면서도 슬퍼서 상처를 받는 데 이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성정(性情)을 다스리고 도덕을 함양한 때문이다. 그 소장(疏章)은 조리가 분명하고 밝으며 법도에 맞고 단정하였으며 반드시 의(義)를 중요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인의(仁義)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문집(文集) 약간 편(編)이 세상에 전해지며『주역(周易)』 관상편(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등 여러 저작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선생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점서(占筮), 산수(算數), 율력(律曆)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필법(筆法)이 강건하고 힘이 있어 곱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태가 전혀 없었으니 이른바 덕성이 서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부인 윤씨(尹氏)는 현감 임형(任衡)의 따님이다. 아들은 둘인데 종룡(從龍)과 종호(從虎)이고, 사위는 셋인데 조희문(趙希文), 양자징(梁子徵), 유경렴(柳景濂)이다. 종룡의 아들 중총(仲聰)은 참봉(參奉)인데 후사가 없고 종호는 찰방(察訪)으로 아들 남중(南重)을 두었으며, 남중의 아들은 형복(亨福), 형록(亨祿), 형우(亨祐), 형지(亨祉)이고, 두 사위는 이규명(李奎明), 기진발(奇震發)이다. 형복의 아들은 창하(昌夏), 태하(泰夏)이고 형우의 아들은 기하(器夏)이고 형지의 아들은 명하(鳴夏), 대하(大夏)이며, 형록에게 후사로 나간 아들은 중남(仲男)이다. 창하의 아들은 익서(翼瑞), 두서(斗瑞), 시서(時瑞)이고 태하의 아들은 천서(天瑞), 지서(地瑞), 원서(元瑞)이고 명하의 아들은 치서(致瑞)이며, 이규명의 아들은 일지(逸之), 실지(實之), 필지(苾之), 밀지(密之), 길지(佶之)이고, 기진발의 아들은 정연(挺然), 정지(挺之), 정한(挺漢)인데, 내외 증현손(曾玄孫) 수십 명이 문장과 행실로 서로 숭상하고 있다.
그해 3월 계유일에 장성(長城) 고을 서쪽 원당산(願堂山) 선영의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문인들이 서원을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숭정(崇禎) 임인년(현종 3, 1662년)에 현종대왕(顯宗大王)이 ‘필암(筆巖)’이라는 현판을 내리고 다시 명하여 이조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하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시법(諡法)에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이라 하고 너그럽고 화락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을 정(靖)이라고 한다.’ 아, 성스러운 조정의 융숭한 보답이 여기에 이르러 아무런 유감이 없다.
대개 우리 해동(海東)이 은사(殷師 : 은(殷)나라의 기자(箕子)를 가리킴)의 세대와 멀어진 이후로 성학(聖學)이 밝지 못하였는데 우리 중종, 명종 대에 이르러 정치와 교화가 융성하여 모두가 낙민(洛閩 :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정자(程子) 형제와 주자(朱子)를 가리킴)으로 준칙(準則)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도기위미설(道器危微說)에 있어서는 오히려 의혹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선생은 홀로 대의를 간파하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여 곧장 바른 맥을 찾아냈다.

또한 본조(本朝)의 으뜸가는 유학자와 명망 있는 현인이 종종 바른 도리가 대접받지 못하는 시기에 몸을 바쳐 이리저리 주선하여 사직을 부지하고 사림(士林)을 구하려 하다가 목숨까지 잃고 말았는데, 선생은 스스로 은미함(微)과 드러남(彰)을 알아 세상을 등지고서 후회 없이 살다가 세상을 마쳤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그 밝은 지혜와 통달한 식견이 사물의 어지러운 겉모습에서 초월하였고 도(道)에 깊이 나아가고 덕(德)을 두텁게 쌓아 정밀하고 정대(正大)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맑은 풍모와 큰 절개는 천지를 진동시켜 욕심 많은 사람이 청렴해지고 겁 많은 자가 스스로 일어서게 되었으니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실로 도학(道學)이 바른 데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그런즉 사람이란 도를 알지 못해서는 아니 되며 도를 알려고 한다면 학문을 버리고서야 어찌하겠는가. 세상에서 한갓 절의(節義)로만 선생을 논하는 것은 일부만 보고서 안다고 여기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달도(達道 : 공통된 도)가 다섯 있으니
군신(君臣) 부자(父子)
이것이 가장 큰 것이니
그 도리를 다하고자 하면
어찌 성경(聖經)에서 구하지 않으리오.
지(知)가 있고 행(行)이 있으며
학문의 도가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이를 두고 어디로 가리오
아 선생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특이하고
기질이 맑고 순수하고
뜻과 크고 힘이 굳세어
용감하게 옛것에 매진하여
광대하고 고명(高明)하네
여러 학설을 이미 다 궁구하고
돌이키고 요약하였으니
참되도다, 집대성(集大成)함이여
군신(君臣)의 의(義)와
부자(父子)의 인(仁)이
각기 그 바른 것을 얻었으니
사람에게 미친 교화가
사방에 두루 퍼져
모범으로 삼았다네
세도(世道) 인문(人文)과
하늘이 정한 질서와 사람의 윤리가
해와 별처럼 밝았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공덕을 논한다면
뉘라 선생에 겨룰 수 있으리오
성조(聖朝)의 융숭한 기림과
많은 선비가 존경하고 사모함이
태산과 같고 북두와 같다네.
당(堂)의 남쪽에
이 비석을 세우나니
천만년토록 전해지기를.

 

 

山堂集卷之五
 附錄
擅勝樓題詠[金麟厚] a_016_627a


樓卽山堂公胤子萬戶公諱演文之別墅亭榭。而河西金先生麟厚。嘗枉訪題詩而改樓號曰淸遠樓。蓋取諸周濂溪愛蓮說香遠益淸之意也。五絶六首。石川林先生億齡之所題也。
連山南下群峯秀。大野西廻別浦遙。雨送曉禽天不盡。露迎朝日霧方消。荷蕖正好風翻葉。梅嶼便宜月上梢。靜聽幽泉寒瀉玉。綠楊多事妬輕腰。
地勝臨空闊。憑欄絶世紛。池涵山夜月。窓入海天雲。玉密深凝碧。金團晩吐芬。相忘魚鳥樂。終歲度朝曛。 右河西金麟厚


  하서 김인후 산당공 휘 충성 (전주최공 문성공 7세손) 17대 방조 에게 주신 오언절구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全羅道)
장성현(長城縣)


동쪽은 담양부 경계까지 28리, 서쪽은 고창현 경계까지 15리, 남쪽은 진원현 경계까지 17리, 북쪽은 정읍현(井邑縣) 경계까지 26리 이고, 서울에서 6백 44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광군에 붙였다가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고시이ㆍ갑성ㆍ오산(鰲山)ㆍ이성(伊城).
【성씨】 본현 이(李)ㆍ서(徐)ㆍ유(兪)ㆍ공(孔)ㆍ노(魯).
【형승】 산은 둘러있고 물은 굽이쳐 있다. 조종생(趙從生)의 시에, “산은 둘러있고 물은 굽이쳐 흐르니 하늘이 이룬 것이라네.” 하였다.
【산천】 금오산(金鰲山) 현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취령산(鷲嶺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현 동쪽 30리에 있다. 반등산(半登山) 현 북쪽 18리에 있으며, 고창현에 상세히 나온다. 입암산(笠巖山) 현 북쪽 20리에 있으며, 정읍현에도 나온다. 용두산(龍頭山) 현 동쪽 1리에 있다. 송현(松峴) 현 서쪽 15리에 있다. 위령(葦嶺) 노령(蘆嶺)이라고도 하는데, 현 북쪽 30리에 있으니, 요해의 땅이다. 처용암(處容巖) 입암산 남쪽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완연히 처용의 모습과 같으므로 이름지었다. 가천(可川) 현 남쪽 5리에 있는데, 위령에서 나온다. 황룡천(黃龍川) 일명 봉덕연(鳳德淵)인데, 단엄역(丹嚴驛) 동쪽에 있다. 백암산에서 나와서 진원현(珍原縣) 경내로 들어간다. 문필천(文筆川) 현 서쪽 7리에 있는데, 송현에서 나온다. 선연(船淵) 현 남쪽 25리에 있는데, 문필천ㆍ가천ㆍ봉덕연의 3물이 합치는 곳이며, 남으로 흘러서 광산(光山)의 생압도(生鴨渡)로 들어간다.
【토산】 생강ㆍ모시ㆍ대ㆍ비자(榧子)ㆍ감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류.
『신증』 【관방】 위령군보(葦嶺軍堡) 고갯길이 호젓하고 험해서 도적이 떼지어 모여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하므로 나그네가 지나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금상(今上) 15년에 보방수(堡防守)를 두었다.
【누정】 동루(東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단엄역(丹嚴驛) 현 남쪽 13리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한 소리 베갯머리에 들리는 것은 꽃 사이의 새요, 몇점 누각에 마주 선 것은 대숲 밖의 산이로다. 해가 다 가도록 돌아다니는 나 같은 이 또 있을까. 누에 올라 한가한 틈을 잠깐 만드네.” 하였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졸졸 시냇물은 마을 안을 흐르고, 골짜기 가득한 솔과 대에 땅은 더욱 그윽하네. 잔들고 권하는 데 풍설(風雪)이 차구나. 소리 낮춰 읊조리며 중선루(仲宣樓)에 기대었네.” 하였다.
득량원(得良院) 현 남쪽 15리에 있다. 가정원(可亭院) 고을 동쪽 18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현 북쪽 21리에 있다. 원 북쪽에 돌 미륵불이 있는데 높이가 4, 5길이나 되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보등원(寶燈院) 현 남쪽 4리에 있다.
【불우】 취서사(鷲棲寺) 취령산에 있는데, 석탑과 석종이 있다. 송(宋) 나라 때에 중 운묵(雲默)이 있었는데, 중국에 외유하였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그가 죽자 제자가 탑과 종을 세워서 유해를 안치하였다.
정토사(淨土寺) 백암산에 있는데,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삼중대광 복리군 운암 징공 청수(三重大匡福利君雲巖澄公淸叟)가 절간 윤공(絶磵倫公)으로 하여금 나에게 그 누각에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면서 삼봉 정씨(三峯鄭氏)의 기문도 함께 보여주었다. 절의 내력은 상세하나, 시내가 어떤지 누각이 어떤지는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았으므로 그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이에 절간에게 물으니, 절이 두 시냇물 사이에 있는데, 물이 절의 남쪽에서 합치며. 물의 근원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이 멀기 때문에 크고 작음이 있는데, 합쳐서 못이 된 뒤에 산을 나와서 흐른다고 한다. 절의 사면은 산이 모두 높고 험해서 무더운 여름날이면 시원한 바람을 맞을 곳이 없으므로, 이 두 시내가 합류하는 곳에 누각이 있어 왼쪽 물에 걸터앉아 오른쪽 물을 굽어보고 있으면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 아래로 서로 비치어 참으로 볼만하다고 한다. 경술년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 제방이 무너지매 누각도 따라서 무너졌다. 청수(淸叟)가 이르기를, ‘누각은 우리 스승이 세운 것인데, 이래서야 되겠는가. 나의 스승 각엄존자(覺儼尊者)께서는 스승과 제자로 서로 전해 온 지가 모두 5대나 되었다. 그런 까닭에 산문(山門)에 유의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누각이 지금 없어지면 책임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에 날짜를 기약하고 목공을 고용하여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는데, 썩은 것은 견고한 것으로 갈고 퇴색한 것은 선명하게 하니, 이에 위안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혹시나 우리 스승의 마음을 져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을 내 제자들이 꼭 알지 못할 것이요, 내 제자로서 나의 뒤를 이어 이 절에서 사는 자가 혹시 내 마음을 모른다면 산문의 일이 보존되지 못할 것이 어찌 누각뿐이겠는가. 불상에 먼지끼고 집에 비바람 치는 것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이러므로 한낱 누각의 다시 건축함을 비록 글로 쓸 만한 것은 못되나, 반드시 글 잘하는 이가 쓰기를 구하는 것은 후세에까지 전하기를 꾀하기 때문이며 내 제자들을 경계하려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행촌 시중공(杏村 侍中公)에게 사사하여 그 자질(子姪 이름은 암(岩))과 벗하고 놀았는데 그 스님은 그이의 계씨였다. 그 청을 어기기 어려워서 골짜기에서 들은 말을 따라 쌍계루라고 이름 지었다. 나는 이미 늙어서, 밝은 달이 누각에 가득 찼을 터인데, 그 안에서 한 번 자지 못하게 되었으니, 소년시절에 그 절의 객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 스승과 제자의 서로 계승한 것은 책에 있으므로 쓰지 않는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지금 시를 써달라 청하는 백암승(白岩僧)을 만나니, 붓을 잡고 침음(沈吟)하면서 재주없음 부끄럽구나. 청수가 누각 세워 이름이 이제 무겁고, 목옹(牧翁 이색)이 기문을 지어 값 더욱 더하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에서 시달렸는데, 어느날 옷을 떨치고 자네와 함께 올라 볼까.” 하였다.

『신증』 영천굴(靈泉窟) 정토사 북쪽 바위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샘이 있다. 굴 북쪽 작은 틈에서 솟아나오는데, 비가 오나 가무나 한결 같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망점산성(望岾山城) 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6백 척, 높이가 5척이고, 안에 작은 못이 있다.
【효자】 고려 서능(徐稜) 고려 때 사람인데, 벼슬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목에 종기가 나서, 서능이 의원을 청하자 와서 보고 “살아있는 개구리를 얻지 못하면 목숨을 건질 수 없다.” 하였다. 서능이, “때가 섣달이니, 어떻게 살아있는 개구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병환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슬피 울었다. 얼마 후에 의원이, “산 개구리가 없더라도 약을 만들어 보자.” 하여, 나무 아래에서 약을 달이는데, 갑자기 약탕관 안으로 떨어지는 물건이 있어서 보니, 곧 살아있는 개구리였다. 의원이 놀라서, “아들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바로 내려준 것이니, 어머니의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다.” 하고, 약에 합하여 종기가 난 곳에 붙이니 곧 나았다.
『신증』 본조 차순년(車舜年) 역리(驛吏)인데,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기기에 효성스러웠고, 가절(佳節)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마을 사람들을 맞아서 즐겼다. 아버지가 일찍이 임질을 앓아서 숨이 막혀 끊어지려 하자 순년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목숨을 빌었는데, 이윽고 숨을 쉬고 살아났다. 금상 23년에 복호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즉지(則只) 학생 김계창(金繼昌)의 아내다. 지아비가 죽자 3년을 곡하며 잔 올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수절하는 뜻을 빼앗으려 하니, 죽음을 맹세하고 좇지 않고, 사진을 벽에 걸고 종신토록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 금상 8년에 정려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정유왜란(丁酉倭亂) 후로 장성과 진원(珍原)이 매우 쇠잔하니, 진원과 합치고 치소(治所)를 성자산(聖子山) 밑으로 옮겼다. 옛 치소는 부(府)의 북쪽 20리 금오산(金鰲山) 밑이다. 효종 6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읍호】 오산이성(鰲山伊城).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나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鎭管兵馬同僉節制使)와 입암산성(笠巖山城) 수성장(守城將)을 겸한다. 1인.
【고읍】 진원(珍原)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구사진(邱斯珍)이다. 당 나라가 백제를 멸하고 귀차(貴且)라 고치고 분차주(分嵯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귀원(貴原)으로 고치고 압성군(押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9년에 나주에 속하게 하고 명종 2년에는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현감으로 고치고 선조 경자년에 내속시켰다.
【방면】 읍동(邑東) 동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읍서(邑西) 끝이 10리. 내동(內東) 남쪽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외동(外東)ㆍ남일(南一)ㆍ남이(南二) 모두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남삼(南三)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서일(西一)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서이(西二)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서삼(西三)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북일(北一)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북이(北二)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북상(北上) 처음이 15리 끝이 40리. 북하(北下)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 봉면(面)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
○ 마량부곡(馬良部曲)은 진원의 옛 현이다. 서쪽 20리에 있다.

【성지】 입암산성(笠巖山城) 북쪽으로 40리. 정읍(井邑) 경계에 있다. 전에는 석성의 옛터가 있었는데, 선조 30년에 수축하였고, 효종 4년에 둘레가 2천 7백 95보, 포루(砲樓) 넷, 성문 둘, 암문(暗門) 셋, 여울 하나, 연못 아홉, 샘물 열네 개로 개축하였다. ○ 수성장은 본부사가 겸한다. 별장 1인. ○ 속읍은 장성ㆍ광주ㆍ나주ㆍ고창ㆍ정읍ㆍ태인이다. ○ 장경(長慶)ㆍ흥경(興慶)ㆍ인경(仁慶)ㆍ고경(高慶)ㆍ옥정(玉井) 등 다섯 절이 있다. 승장(僧將) 1인. ○ 창(倉) 여섯.
장성고읍성(長城古邑城) 서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둘레는 2천 1백 척이고 우물이 셋이다.
진원고읍성(珍原古邑城) 구진성(丘珍城)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 15리 불대산(佛台山) 동쪽 기슭에 있다. 둘레가 1천 4백 척. 우물 셋, 여울 둘이 있다.
망점산고성(望岾山古城) 동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둘레는 2천 6백 척이며 연못이 하나 있다.
이척성(利尺城) 남쪽으로 10리. 불대산(佛台山) 서쪽 끝에 있다. 둘레가 1천 5백 20척이며, 우물 넷, 여울 여섯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사창(社倉)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창(城倉) 입암산성에 있다.
【역참】 영신역(永申驛)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토산】 죽전(竹箭)ㆍ닥종이ㆍ옻[漆]ㆍ뽕ㆍ차ㆍ매실ㆍ꿀.
【사원】 입암서원(笠巖書院) 선조 경인년에 건립하여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김인후(金麟厚) 문묘에 보인다.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다섯 살 때 지은 ‘대보름날 밤’이라는 시에,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에 따라 생기고 / 高低隨地勢
이르고 늦음은 자연 현상에서 이루어진다 / 早晩自天時
남의 말을 어찌 다 근심할 수 있겠는가 / 人言何足恤
밝은 달은 본래 사정이 없는 것이다 / 明月本無私

 

  하였으니, 만고의 공언(公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