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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선생(河先生)의 묘갈명(墓碣銘) 사육신 하위지 선생 묘갈명

아베베1 2011. 8. 9. 13:56

 

 

 

 

여헌선생문집 제12권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하 선생(河先生)의 묘갈명(墓碣銘)


선생은 휘가 위지(緯地)이고 자가 천장(天章)이다. 하씨는 진양(晉陽)을 관향으로 하였는데, 선대로부터 선산(善山)에 와서 거주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담(澹)인데 청송 군사(靑松郡事)이며 왕고(王考 조고를 가리킴)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선생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다. 어렸을 때에 한 작은 서재(書齋)를 마련하고 형제와 함께 거처하며 문을 닫고 책을 읽으니,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조(世宗朝) 무오년(1438,세종20)에 선생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있으면서 항상 경악(經幄)에서 세종을 보필하였다. 문종(文宗) 때에 선생은 그대로 집현전에 있으면서 명령을 받들어 여러 유신(儒臣)들과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였다.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을 가리킴) 초년에 선생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었는데 《역대병요》가 완성되었다. 세조(世祖)는 이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으면서 《역대병요》를 편찬한 신하들에게 직책과 품계를 올려줄 것을 청하여, 선생은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있다가 중직(中直)으로 승진하였다. 선생은 홀로 아뢰기를, “품계를 올려주자는 요청이 아래에서 나왔으니 이제 그 농락(籠絡)을 받을 수 없다.” 하고는 굳이 사양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의에서 체직되어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마침내 병으로 온천에 목욕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죽임을 당하자, 선생은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없었다.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겨우 길에 올랐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인하여 글을 올려 소회를 진술하였다. 그리하여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冰至]는 경계와 국사를 미리 대비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말과 내치(內治)를 엄격히 하고 권문 세가를 막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으로 은근함을 다하였으니, 바람이 간절하고 염려함이 깊었다.
을해년(1455,세조1)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적에 선생은 부름을 받고 예조 참판이 되었는데 그 뜻은 진실로 다른 데 있었다. 그리하여 하사받은 녹봉을 따로 저축해 두고 먹지 않았다. 다음 해인 병자년에 김질(金礩)의 고변(告變)으로 즉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과 같은 날에 죽임을 당하니, 아! 이것이 선생의 처음과 끝이다.
선생의 묘소는 선산부(善山府)의 서쪽 고방산(古方山)의 언덕에 있으니, 부인 김씨와 유택(幽宅)을 함께하였다. 옛날에 작은 비갈(碑碣)이 있었는데, 지난해 왜구가 부(府)를 점거했을 때에 쓰러져 파손됨을 면치 못하였다. 이제 선생의 외 5대손인 김곤(金崑)이 옛 비갈을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옛날에 새긴 글을 잃었으므로 새 글을 얻어 비석을 세우기를 원하였다.
아! 선생의 사업은 해와 달과 같아 광채가 스스로 빛나니 그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천지가 알고 있으니, 또 어찌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 있겠는가. 또 심상(尋常)한 문장력으로 어찌 그 만분의 일을 발양(發揚)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자, 김군은 말하기를, “전인(前人)이 이미 비석을 세워 비석의 댓돌이 아직 남아 있으니 결코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여러 번 와서 그만두지 않으며 더욱 굳게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비로소 감히 그 전하여 들은 바를 대략 서술하는 바이다.
선생의 아름다운 말씀과 훌륭한 행실로 세상의 가르침이 될 만한 것에 이르러서는 어찌 한두 가지일 뿐이겠는가. 그러나 집이 적몰되어 전하는 것이 없고 오직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만이 세상에 전한다. 여기에 선생을 일컫기를,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과묵하여 입에 버릴 말이 없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세종이 인재를 길러 당시에 인재가 가장 많았는데 당시의 의논이 선생을 으뜸으로 추존했다.” 하였으니, 이 또한 선생을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평소 수양할 때에 수립한 것이 근본이 있었기 때문에 필경에 나온 것이 마침내 이처럼 큰 절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형 강지(綱地)는 선생보다 먼저 급제하였고 아우 기지(紀地)는 선생과 함께 동방 급제(同榜及第)하였으며 막내아우인 소지(紹地)는 생원이었다. 선생은 아들 연(漣)이 있었는데 또한 생원이었으나 함께 화를 당하였다. 이유의(李惟義)에게 시집간 딸이 있었으며 이씨의 사위는 현감 김중경(金仲卿)이니, 김곤(金崑)은 바로 그 증손이다.
김곤이 이 비석을 만들 적에 홍공 서익(洪公瑞翼)은 이 고을의 수령으로 많이 찬조하여 완성되도록 하였으며 묘를 지키는 종 약간 명을 내어 대대로 지키게 하고 또 김곤의 서자와 조카 네 명을 복호(復戶 모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함)하여 향화(香火)를 맡게 하니, 윤리를 붙들어 세움에 유념함이 또한 정성스럽다. 비를 세운 것은 만력 44년(1616) 여름 4월이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군자가 변에 처하는 사업이 있으니 / 君子有處變事業
이 또한 하나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네 / 蓋亦成就一箇義
하고자 하는 바가 사는 것보다 심함이 있으면 / 所欲有甚於生
사는 것도 버리며 / 生可捐棄
싫어하는 바가 죽는 것보다 심함이 있으면 / 所惡有甚於死
죽는 것도 회피하지 않네 / 死不違避
몸은 도끼에 기름칠이 되었으나 / 身膏鈇鉞
공로가 강상에 남아 있네 / 功在綱常
넉 자의 황폐한 무덤은 / 四尺荒封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털이 꼿꼿이 서고 뼛골이 시리게 하니 / 令人髮竪而骨凛
이곳이 바로 선생의 의관을 보관한 곳이라오 / 是先生衣冠之藏


 

[주D-001]서리를 밟으면……얼음이 이른다 : 가을에 날씨가 추워지면 기온이 점점 하강하여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된다는 뜻으로, 악이 점점 쌓여감을 의미한다. 《周易 坤卦 初六 爻辭》

 

丹溪先生遺稿附錄
 附錄
事實 a_008_554d


天順皇帝沒北虜。時河緯地常感慨曰。天子蒙塵。天下所共憤。我輩雖海外陪臣。豈可恬然不預其憂乎。每處外廊。不入寢室。斯人之志行如是。其忠義殉國可知。 出戊寅記聞佔畢齋 金宗直 善山十絶迎鳳里詩曰。鄕人終古重膠庠。翹楚年年貢舜廊。一片城西迎鳳里。靑衿猶說壯元坊。 迎鳳里人兪勉,田可植,鄭之澹皆壯元。先生之父澹。太宗壬午榜副元。先生。世008_555a宗成午壯元故云。○出輿地勝覽我國文章始發揮於崔致遠。而至我世宗朝。始設集賢殿。延文學之士。有如申高靈,崔寧城,李延城與朴仁叟,成謹甫,柳太初,李伯高,河仲章。皆擅名一時而仲章長於對策疏章。然皆被誅。其所著不顯於世。出慵齋叢話昌寧成先生聯句小序曰。正統壬戌。余與平陽朴彭年 仁叟, 高靈申叔舟 泛翁, 韓山李塏 淸甫, 赤村河緯地 仲章,延安李石亨 伯玉。受命讀書于三角山津寬寺。做業之暇。相與酬唱。 紙燈聯句見上008_555b世宗始設集賢殿。招聚文學之士。朝夕延訪。猶慮文學未振。更選其中年少聰敏者上寺讀書。供億甚豐。正統壬戌。平陽朴仁叟,高靈申泛翁,韓山李淸甫,昌寧成謹甫,赤村河仲章,延安李伯玉受命讀書于三角山津寬寺。做業甚勤。酬唱不休。有釋一菴恒隨之。得傳寫焉。 出慵齋叢話○津寬要覽一卷。曾在弘文館。而見失於丙子之亂。皇明景泰元年閏正月日。翰林侍講錢塘倪謙與刑科給事中司馬恂奉詔來宣。一國臣民無小大。罔不瞻望慶忭。浹旬而星軺言旋。內翰公天資粹008_555c美。飾以詩書。搢紳之士。咸惜其去。於是高靈申公叔舟爲之序。昌寧成公三問作跋。晉陽河公演,河東鄭公麟趾,河陽許公詡,坡平尹公炯,昌寧成公念祖,光山李公先齊,晉陽鄭公陟,圓山高公得宗,驪江李公審,完山李公思哲,韓山李公季甸,東萊鄭公昌孫,月城金公鉤,鷲山辛公碩祖,㠉梁崔公恒,咸從魚公孝瞻,延山李公石亨,晉山姜公孟卿,平陽朴公彭年,韓山李公塏,陽城李公芮,魯山李公永瑞,陽城李公承召,達城徐公居正,西原韓公繼禧及先生。各賦詩以贐。其後有人購書燕肆。得008_555d一書名遼海編。乃倪學士在本國時與諸公酬唱之什也。其流布於中國如此。 先生詩見上給事中司馬恂。卽涑水之後。學有淵源。才兼經濟。與倪公來布詔條。竣事而還。昌寧成公三問爲之序。晉陽河公演諸人及先生亦各賦詩以贈之。 先生詩見上世宗朝設集賢殿。揀文士有名者二十人。兼帶經筵。凡諸文翰之事。悉委任之。早仕晚罷。日官奏時。然後乃得出。朝夕飯時。以內官爲對客。其隆待之意至矣。由是爭相勸勉。雄才鉅士多出。如鄭河東008_556a等十五人及成三問,朴彭年,李塏,柳誠源,河緯地。皆傑然者也。 出慵齋叢話世宗勵精文治。高出萬古。歲庚子。始置集賢殿。選文士充之。後增三十員。又改二十員。十人帶經筵。十人帶書筵。專任文翰。討論今古。朝夕論思。文章之人。彬彬輩出。得人甚盛。又如朴仲林,朴彭年河緯地,成三問,李塏,柳誠源。一時顯隆。 出筆苑雜記世宗末。命集賢諸儒纂兵要書。以首陽大君監總之。至魯山初。書始成。大君啓請加秩。諸臣皆拜命。緯地時爲執義。獨固辭。且請面陳所懷。008_556b魯山問可否於首相金宗瑞。宗瑞曰。先王嘗酬勞。今獨辭不可。且微臣請對。尤不可。緯地曰。此豈宗瑞所知乎。臣方司法。義不可受人籠絡。所以異於先王末年者也。朝廷不能強。卽移集賢殿直提學。緯地終辭不受。退居善山。 出琴易堂集癸酉十月癸巳。金宗瑞,皇甫仁,李穰,閔伸,趙克寬,尹處恭,李命敏等誅。數日命召緯地曰。曩者請對。予欲面聽。乃爲權奸所沮。未卽引見。爾亦引病而去。權奸今已伏辜。實是更始之初。特除爾爲司諫。可便力疾就道故諭。緯地又上疏辭。 先生辭左司諫疏見上008_556c光廟受禪之日。朴彭年臨慶會樓欲自投。成三問止之曰。今神器雖移。尙有上王。我輩不死。猶且後圖。不成而死不晚。彭年然之。遂與三問,河緯地,柳誠源,李塏,兪應孚等數十人。約於皇敕出來時使雲劍成勝,兪應孚擧事。會其日。以地窄命罷雲劍。計遂不行。司藝金礩始與謀。知事不成。與其妻父贊成鄭昌孫告變。命急召承旨。三問以承旨入侍。上命武士捽下。三問請與礩面質。語未訖。三問曰。勿盡言。所言大同。上命枷鎖親問曰。何以反我。三問抗聲曰。欲復故主耳。上問與謀008_556d者。對曰。臣實與朴彭年,河緯地,李塏,柳誠源同謀。上曰。非特此也。汝宜盡言。對曰兪應孚,朴崢亦知之。於是朴彭年等四十一人皆死。 出莊陵事實。下同。工曹參議李徽亦與謀。聞事覺。詣政院告三問等謀曰。臣卽欲進啓。未得其實。不敢卽啓。上引見李徽。更拿三問等。又捕彭年鞫之。問黨與。彭年曰。三問,河緯地,柳誠源,李塏,金文起,成勝,朴崢,兪應孚,權自愼,宋石同,尹鈴孫,李徽及臣父耳。更問。對曰。臣父尙不欺隱。況他人乎。問其施爲。對曰。成勝,兪應孚,朴崢皆爲別雲劍。何難之有。008_557a河緯地預成三問之謀。光廟愛其才。密諭曰。汝若諱初謀則可免。緯地笑曰。人臣加以叛逆之名。其罪應死。更何所問。光廟怒弛。獨不施烙刑。 出東閣雜記李塏 公澮 河緯地 璉班 朴仲林彭年 憲珣奮等幷今年生八人 大年水年引年耆年成勝三問 孟瞻孟年孟終等幷今年生七人 三聘三省三顧柳誠源 貴連松連 權自愼 仇之 金文起 玄錫 兪應孚思守 朴崢 崇文等三人 宋石同 昌寧等四人 崔得地 致地 尹鈴孫沈愼李禎祥李智英 義英 李裕基 裕一作佑 權署 崔斯友鄭冠奉汝諧金堪 漢之 金善之李昊 一作吳 張貴▓008_557b李末生李午沈上佐黃善寶趙淸老李徽金九智智一作知 許慥 延齡九齡○以上四十一人。東鶴寺招魂記。丙子之禍。河緯地妻子在一善。以連坐。遣禁府都事處之。緯地二子。長曰琥。次曰珀。珀年未弱冠。略無懼色。動止自若。顧謂都事曰。萬無亡命之理。願少緩之。不得已與母有告訣之言矣。都事聽之。珀入門跪告於其母曰。死不難也。父旣被殺。子不可獨生。雖無朝廷之命。猶當自決。但有一妹年將就䈂。雖沒爲賤隸。婦人之義。猶當從一而終。勿爲狗彘之行於他日。遂再拜而出。從容就死。人皆謂緯地008_557c又有子矣。 出松窩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