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선조의 따님 정선옹주 묘지명

조선의 임금 선조 옹주인 정숙옹주 묘지명(貞淑翁主墓誌銘)

아베베1 2011. 8. 9. 14:12

 

계곡선생집 제10권
 묘지(墓誌) 6수(首)
정숙옹주 묘지명(貞淑翁主墓誌銘)


정숙옹주가 죽어서 장차 장례를 치를 즈음에 부마도위(駙馬都尉) 동양공(東陽公 신익성(申翊聖))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나에게 명(銘)을 부탁해 왔다. 내가 행장을 받아서 읽어 보건대, 참으로 훌륭하게 핵심을 언급하면서 글로 꾸며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그 행장에 의거하여 대략 교정을 가한 뒤 명을 붙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옹주는 선조(宣祖) 소경왕(昭敬王)의 넷째 딸이요, 어머니는 인빈 김씨(仁嬪金氏)로서 사헌부 감찰 한우(漢佑)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3월 무신에 창경궁(昌慶宮)에서 태어났다.
옹주는 어려서부터 소질이 남달랐다. 그래서 조금 컸을 때 선묘가 직접 글을 가르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고금의 득실(得失)에 대해 자못 통달하게 되었으나 이를 문사(文辭)로 스스로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다.
9세에 봉작(封爵)을 받으면서 정숙(貞淑)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3세에 신씨(申氏)의 가문에 출가하였는데, 신씨는 동양(東陽 평산(平山)의 옛 이름)의 대성(大姓)으로서 고려의 태사(太師) 숭겸(崇謙)의 후예였다.
처음에 선묘가 옹주의 뛰어난 자질을 아껴 훌륭한 배우자를 골라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동양공의 부친인 현헌공(玄軒公 신흠(申欽))이 문장과 아망(雅望)으로 선묘의 지우(知遇)를 받고 있었고, 또 동양공이 소년 시절부터 영특한 자질을 소유한 준재(俊才)였으므로 마침내 그를 선발하여 부마(駙馬)로 삼았던 것이다.
3년이 지나자 비로소 궁중 밖으로 나가 살도록 명하였다. 그때 옹주의 나이가 15세였는데 집안 살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며 규문(閨門) 안의 질서를 분명하게 바로잡은 결과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은 일이 없었다. 신씨는 내외가 모두 예법(禮法)의 가문으로 본래부터 이름이 나 있었는데, 옹주가 시부모를 그지없이 근실하게 모시는 한편 이런 자세를 미루어 나가 구족(九族)과 외친(外親)에게까지 친근하게 대했으므로 먼 친척들도 모두 격의 없이 지내게 되었다.
선묘가 승하한 지 6년이 되었을 때 계축년의 화변(禍變)이 일어났다. 이때 현헌공 역시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옹주가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 거적을 깔고 맨땅에 처하면서 어떤 음식도 물리치고 입에 대지 않은 지가 여러 날이나 되었다. 현헌공이 감옥에서 나와서는 김포(金浦)의 시골집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경사(京師)에서 몇 사(舍 1사는 약 50리)나 떨어졌지만 시절(時節)이 돌아올 때마다 찾아가 뵙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현헌공이 춘천(春川)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황량한 벽지에 거하다 보니 이따금씩 음식에 어려움을 겪곤 하였다. 이에 옹주가 밤낮으로 관심을 쏟아 넉넉히 공급함으로써 쌀, 소금 등 사소한 일 때문에 존장(尊章 시부모)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았고, 맛보기 힘든 귀한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시급히 보내 드리곤 하였다. 또 가묘(家廟)가 한성(漢城)에 그대로 있었으므로 옹주가 늘 철따라 제향을 모시면서 직접 제사 음식을 올리곤 하였는데 한번도 예법에 어긋나게 한 적이 없었다.
동양공의 누님이 춘천에 문안드리러 가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도중에 죽었다. 옹주가 그 소식을 듣고는 하던 일을 중지하고 즉시 의금(衣衾)을 만들어 입히는가 하면 상례(喪禮)에 필요한 제반 물품을 모두 그 집에서 마련해 주었으므로 그 덕분에 초상을 제대로 치를 수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형식과 내용이 모두 걸맞게 상례를 치렀다. 또 동양공의 막내 여동생이 처녀로 집에 있을 때에 옹주가 매우 돈독하게 보살펴 주었고, 시집을 갈 때에는 혼수 일체를 자기 손으로 마련하였고 심지어 여종까지도 나누어 주며 따라가게 하였다.
자녀에 대해서는 매우 엄한 교육 방식을 취하여 한번도 고식적으로 넘어간 적이 없었으며 어린아이 때부터 옷을 입힐 적에 화려한 옷감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에 근검 절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는 곧바로 주부의 일을 행하면서 종일토록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궁정에서 부왕(父王)을 알현하는 날이 올 때마다 여러 귀척(貴戚)들이 서로 뒤질세라 호화스럽게 꾸미고 나왔는데, 옹주만은 검소한 복장으로 나와 시어(侍御)하는 자들이 혹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였으나 옹주는 홀로 담담하게 대처하였다.
옹주의 효심과 우애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궁중에서 인빈(仁嬪)을 모실 적에는 거역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형제를 대할 때에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광해(光海) 때에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적이면 귀척들 모두를 꼭 참석시키곤 하였는데, 옹주는 자전(慈殿)이 기막힌 곤욕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마 연락(宴樂)에 참여할 수가 없어 궁중에 발길을 끊은 지가 10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광해가 장차 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동양공은 헌의(獻議)하려고도 하지 않고 정청(廷請)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어떤 객이 밤에 집을 찾아와 화복의 설을 가지고 꾀면서 매우 사납게 말을 하였으나 동양공이 응하지 않았다. 객이 가고 나자 옹주가 동양공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아까 객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는지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군자는 정도(正道)를 잃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꼭 죽게 되는 그런 경우도 아닌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궁벽한 산골짜기나 황량한 바닷가로 가게 된다 한들 못 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부군이 가시는 대로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하고는, 이어 대비와 공주가 처한 상황에 생각이 미치자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능창(綾昌)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감히 그를 위문한 귀척이 아무도 없었으나 옹주만은 홀로 눈물을 흘리며 더욱 보살펴 주었고, 의창(義昌)이 두문불출할 적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인(仁)의 바탕에 의(義)를 중하게 여긴 공주의 성품은 대체로 타고난 것이었다고 하겠다.
옹주는 평소 병이 없었는데 정묘년 11월에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지나 위독해져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향년 41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하며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와 이봉(貤封) 모두 보통 규정보다 더하게 하였으며, 네 전(殿)에서도 각각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문을 하고 호상(護喪)케 하였다. 그리하여 유사(有司)가 관아에서 상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준 가운데 이해 12월 신유에 광주(廣州)의 읍 소재지 동쪽 고랑리(古浪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었다.
옹주는 모두 13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생존한 자는 9인이다. 아들 중 장남 면(冕)은 생원시에 제1명으로 입격(入格)했고, 다음은 변(昪)ㆍ경(炅)ㆍ최(最)ㆍ상(晑)이며, 딸은 홍명하(洪命夏)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내가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전대의 귀주(貴主) 가운데 예의를 제대로 지켰다고 소문이 난 자를 찾아 보기가 매우 힘들다. 이것이 어찌 타고난 바탕이 모두 보통 사람들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귀한 신분과 부유한 생활이 교만함과 사치한 생활을 불러일으킨 데다 법도 있는 가르침으로 인도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본조(本朝)의 가법(家法)이야말로 가장 엄정(嚴正)하다고 할 만하다. 옹주가 일단 영숙(靈淑)한 자질을 품부받고 나온 위에 어려서부터 성조(聖祖)에게서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교화를 훈습받았고, 게다가 또 덕망 있는 가문에 출가하여 훌륭한 시부모의 가르침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선천적인 성품과 후천적인 학습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안팎으로 모두 아름다운 경지를 나투게 되었으니, ‘속에 갖추고 있는지라 밖으로도 근사하게 나타나도다.[惟其有之 是以似之]’라는 시야말로 바로 옹주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희(王姬)의 화기롭고 공경심 넘치는 모습에 대해서도 시인이 찬미하였으니, 옹주에 대해서는 더더욱 명(銘)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헌공은 이름이 흠(欽)으로 현재 영의정이고, 동양공은 이름이 익성(翊聖)으로 고문사(古文詞)에 능한데 나와 친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높고도 귀한 신분 / 生而尊貴
광채 안으로 수렴한 채 / 不顯其光
부왕의 가르침 직접 받고서 / 服訓于聖
양갓집 며느리 되었도다 / 歸逢其良
복록은 당연한 일 / 茀祿是宜
번영을 구가해야 마땅하거늘 / 而熾而昌
어찌하여 오래도록 살지 못하고 / 胡不永年
이렇듯 갑자기 떠나가셨나 / 而遽而亡
수목 울창한 이 묘소 / 有欝者宰
안식처 그윽한데 / 有窈其藏
후손 반드시 번창하여 / 其後必大
묘지명 사실임을 증명하리라 / 徵此銘章


 

[주D-001]능창(綾昌)의 옥사(獄事) : 능창대군은 선조(宣祖)의 손자로 인조(仁祖)의 동생이다. 광해군 7년(1615) 신경희(申景禧)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 한다는 죄수 소명국(蘇鳴國)의 무고로 교동(喬桐)에 안치되었다가 사형당했다.
[주D-002]의창(義昌) : 선조의 여덟 번째 서자(庶子)로 허성(許筬)의 딸과 결혼했는데, 광해군 10년(1618) 모반죄로 죽은 처족(妻族) 허균(許筠)의 사건에 연좌되어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왔다.
[주D-003]속에 …… 시 :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상자화(裳裳者華)에 나오는 시로 재와 덕(德)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음을 찬탄한 내용이다.
[주D-004]왕희(王姬)의 …… 찬미하였으니 : 왕희는 주(周) 나라 왕의 딸을 가리킨다. 왕희가 제후에게 시집갈 때 감히 귀한 신분임을 내세워 남편의 집에 교만을 부리지 않았던 것을 찬양한 시로서 《시경(詩經)》 소남(召南) 하피농의(何彼穠矣)에 “어찌 엄숙하면서 화기롭지 아니한가 왕희의 저 수레[曷不肅雝 王姬之車]”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