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호남인물열전] [5] 최덕지

호남인물열전] [5] 최덕지… 세종 때 젊은 학사들이 존경 (신문등 스크랩)

아베베1 2011. 8. 10. 10:00

전주최문

문성공 휘 아 고려문화시중

5세손 연촌공

저의 19대조  연촌공 휘 덕지 관련 자료

 

 

[호남]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5] 최덕지… 
영암에 뿌리내려  (조선 일보 2011.5.11. 기사내용)

  • 이종범 교수

 

 

 
반촌으로 잘 알려진 전남 영암군 덕지면 영보리에 전하고 있는 최덕지 영정(보물 제594호). 그 마을엔 영보정(永保亭·도지정 기념물 제104호)도 있다. /송태갑씨 제공

세종 치세는 겨레문화의 황금기였다. 성찰과 치유의 힘이 바탕에 있었다. 일례로 윤리도덕에 관한 국정교과서 『삼강행실도』(1429)다. 여기에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봉직하기를 거부한 정몽주와 길재가 충신으로 올라있다.

세종 또한 각별하였다. 부왕에게 죽임당한 방번(芳蕃)ㆍ방석(芳碩)의 사당을 세우고 두 대군을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왕실이 인륜회복의 모범을 보인 셈이다.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예의염치를 중시하는 풍조가 확산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시절 최덕지(崔德之·1384∼1455)가 남원부사를 마치고 고향인 전주로 가지 않고 처가 고을인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촌으로 내려왔다. 혹여 장모를 모셨을지 모르는데, 효녀며 열부로 정려(旌閭)를 받았었다.

존양루(存養樓)에서 홀가분하였다.

"한 말 쌀이 돈 세 푼이라 실로 태평성세로세! 성군의 왕업은 하늘과 더불어 오래가리라."

동료 기건(奇虔)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자는 자세로 살아가는 벗이 부러웠다. "월출산 구름 짙어졌다가 엷어지면, 덕진강 물길은 하늘 끝까지 멀리 흐르겠구먼." 훗날 조선성리학의 기수로 등장하는 기대승(奇大升)의 고조부이다.

최덕지는 60대였지만 건강하였다. 부친 또한 여든이 넘어서도 지팡이 없이 걷고 남의 부축 없이 말을 탔었다. 전주 완산구 교동에 한벽당(寒碧堂)을 조성한 최담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종이 즉위하며 불렀던 것이다. 잠시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으로 봉직하였는데, 일흔이 가까운 터라 계면쩍었음일까? 사직장을 올리고 귀향을 허락받았다.

문종 원년(1451) 겨울, 환송식은 성대하였다. 하연(河演)ㆍ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ㆍ안지(安止)ㆍ이선제(李先齊) 등이 직접 참석하였거나 전별시를 보냈다. 특히 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와 같은 젊은 학사들의 아쉬움은 컸다.

특히 성삼문(成三問)은 "시종일관 의리를 다하신 선생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로세"라 했다. 유성원(柳誠源)은 "어여쁜 사람아, 어디로 가시는가? 한 해 저물어 눈보라 휘날리지 않는가!"로 시작하는 장편시를 올렸다.

신숙주도 빠지지 않았다. 다섯 수를 연거푸 적으면서 "급류에 용퇴한 사람이 얼마나 되던고?" 하다가 부친을 회고하며 울컥하였다.

"선친과는 일찍이 상투 틀면서부터 노니셨는데, 지금 한 분은 아니 계시고 한 분은 떠나가신다니 두 줄기 눈물이 주룩주룩."

박팽년이 갈무리하였다. "지금 선생의 귀향에 즈음하여 왜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고 칭송하는가? 인심을 감동시키는 중망이 조정에 있지 않고 전리(田里)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 인심이 조정을 떠나겠는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문종은 병이 이미 깊고 세자는 어리며, 수양대군이 은근히 위세를 드러내던 참이었다. 신숙주의 당부로 적은 발문이었다.

 

 

 

마을입구 600살 은행나무 최근 6년새 아들·손자목 얻어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만고풍상을 온몸으로 버텨온 거대한 은행나무(위)가 눈에 들어온다. 높이가 16m에 이르고 몸통은 어른 팔로 두 아름에 이른다. 이 나무가 ‘천년 고도’ 전주시를 상징하는 은행나무의 조상이다.

수령이 600년을 넘는 이 거목은 아직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몸통이 훼손돼 대수술을 받았지만 여름이면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자손을 퍼뜨린다.

풍남동 은행나무는 고려 우왕 9년(1383년) 조선의 개국공신 월당 최담 선생이 귀향, 후진양성을 위해 학당을 세우면서 전주 최씨 종대 뜰안에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슬지 않아 관직에 진출할 유생들이 부정에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 심었다.

은행나무 밑에서 심호흡을 다섯번 하면 정기를 받게 된다 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이 은행나무와 관련된 또 다른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최담 선생의 넷째 아들 최덕지(崔德之)가 조선 태종 2년에 이 나무를 심었다는 설이다.

최덕지는 인품이 특출난 데다 오복을 다 갖춰 흠모하는 후학들이 많았다. 또 여인네들이 상사병을 앓을 만큼 남자다운 기상이 넘쳐 흐르는 인물로 알려졌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들이 급제를 위해 이 은행나무 앞에서 그의 학문을 숭상하는 묵념을 올리는 관습이 생겼다. 후학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제사를 지냈다.

또 이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면 떡두꺼비 같은 사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도 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같은 연유로 완산부성(현 전주시) 내에는 은행나무가 많고 은행나무 길이 명성을 떨쳤다. 오늘날에도 은행나무 앞에서 묵념을 올리는 여인네들이 간혹 눈에 띈다.

 

 

이 은행나무는 최근 ‘자식과 손자’(아래)를 얻은 것으로 확인돼 화제가 되고 있다.

몸통이 훼손돼 수세가 약해지던 이 나무 뿌리에서는 6년 전부터 새로운 줄기가 뻗어 의젓하게 자라고 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본체와 거의 한 몸처럼 자라는 이 새 줄기는 국립산림과학원이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결과 씨앗이 떨어져 발아한 것이 아니라 뿌리에서 직접 돋아난 맹아묘로 확인됐다. 올해는 다시 자식 나무 뿌리에서 두 줄기 새순이 나와 손자를 얻은 은행나무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시민들은 풍남동 은행나무가 아들과 손자까지 얻은 것은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길조라며 반기고 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최 제학 덕지 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 德之 還鄕] 근보 성삼문 시

전원에 돌아감이 은둔의 계교 아니로세 / 歸田非隱計
나오고 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 出處政如斯
한 나라 임금께선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 나라 조정에선 공규를 중시했네 / 唐朝重孔戣
강산이 그를 기다리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도 또한 알아주네 / 猿鳥亦相知
처음에서 끝까지 의리를 다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사람 바로 나의 스승일세 / 如公我所師

최덕지(崔德之)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존양당(存養堂)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급제하여 누차 고을을 맡았었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을 쌓았다. 세종(世宗) 때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로 이름이 났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영암(靈巖)에서 늙으려 하니, 당시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희현당 책에 제(題)하기를,
이윤(伊尹 탕(湯) 임금을 도와 상(商) 나라를 세운 어진 신하)의 자임하는 것과 안회(공자의 수제자)의 현명함으로 / 尹之任回也賢
혹은 즐겁게 요순의 도를 즐기고 / 或囂然而樂堯舜
혹은 길게 한숨 쉬며 높고 굳은 경지를 탄식하였다 / 或喟然而歎高堅
이 같은 행동하면 역시 이 사람이 되거늘 / 有爲亦若是
내가 어찌 홀로 그렇지 아니하리 / 余何獨不然
하였다.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최덕지(崔德之)


○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스스로 존양당(存養堂)이라고 호했다. 우리 태종(太宗) 때 급제하고, 여러 차례 주(州)ㆍ군(郡)의 수령을 맡아 왔는데, 모두 치적을 남겼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고, 시에 이름이 높았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암(靈岩)으로 물러가 살았는데, 그때의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시를 지어 주기를
고향으로 돌아감은 은둔한 계책이 아닐 것이니 / 歸田非隱計
출처는 정히 이같이 하느니 / 出處正如斯
한주는 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종은 규공을 중히 여겼다오 / 唐宗重戣孔
강산은 공을 기다리고 있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 / 猿鳥亦相知
종히 의리를 온전히 할 수 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이는 나의 스승인 것을 / 如公我所師
하였다. 〈본록(本錄)〉
○ 익산(益山) 수령이 되어 몸을 처신함이 검약(儉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세하고 밝게 하였다. 《명환록(名宦錄)》


 

 

 

2011. 4. 7. 11 : 00(목요일)

 

이른 아침 모텔에서 창문을 열으니 눈 앞에 월출산이 들어오고,  새벽부터 내리는 봄비가 비구름를 띄우며 상긋함을 더해준다. 
군청 앞의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맛있게 들고 시간에 맞추어 월출산 밑에 자리한 녹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재실에서 영암 향교의 유생들과 그리고 남원, 정읍, 전주, 등지에서 유생과 전주최씨 후손들이 70여명 모여 가란비가 오는 우중에 향사를 봉행하였다.
오김에서는 종헌관으로 대종중 부회장이며 대한 서예가 협회 초대작가인 벽천 세한 족숙이 제관으로 4현의 신위전에 잔을 올렸다.

 

 



 영암녹동서원(靈巖鹿洞書院)

 

 

  지정번호 : 전남유형문화재 제183호

 

 지정연도 : 1992년 11월 30일

 

 소재지 :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356

 

 

  1992년 11월 30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녹동서원은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1630년(인

 

조 8) 창건된 뒤 녹동(鹿洞)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에는 최덕지(崔德之:1384∼1455), 최충성(崔忠

 

成:1458∼1491), 김수항(金壽恒:1629∼1689), 김창협(金昌協:1651∼1708) 등을 배향하고 있다.

 

녹동서원에는 많은 고문서류와 목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은 봉안 인물의 문집인 《연촌유사》 26판, 《문곡집》 560판, 《산당집》 60판 등과 인근 지역 인물인 임억령의 《석천집(石川集)》, 강항의 《강감회요(綱鑑會要)》 등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지정된 목판은 《연촌유사》 26판, 《문곡집》 560판, 《산당집》 54판 등 총 642판에 이른다. 이 목판은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녹동서원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868년 서원 훼철 이후 현재 보관장소인 덕진면 영보리에 있는 합경당의 목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고문서로는 원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서원청금안(書院靑衿案)》(1690∼1844) 25책, 《서원서재유안》 2책, 《합경재청금안》 3책(1807, 1822, 1844) 등 30책에 달하는 유안(儒案)이 있다. 이 중에 가장 오래된 유안은 1690년에 등재된 것으로 수록 인원은 140여 명에 이르며, 여기에 등재된 대표적 씨족으로는 전주최씨, 거창신씨, 함양박씨 순으로 나타나 있다. 이밖에도 《심원록(尋源錄)》 5책(1723∼1811), 《합경재보노안(合敬齋保奴案)》 3책(1822, 1823, 1840) 등을 합하여 모두 38책이 보존되어있다.

 

기타 고문서로 1659년에 작성된 존양녹동서원 영선물자수집 통문(通文) 1매, 1701년에 작성된 청액시의 경비와 노비 방매의 내용이 기록된 완의(完議) 1매, 영당에 노비를 기증한 내용의 명문(明文) 1매(1716년 작성), 노비 기증 완의 1매(1719년 작성), 면역조처를 내린 예조 완의 1매(1803년 작성), 면역(免役)을 청하는 상서 1매(1818 작성), 1868년의 서원 훼철시에 작성된 순영감결(巡營甘結) 1매 등 7건의 낱장 문서가 있다.

이상의 녹동서원 소장 자료는 조선 후기 서원의 연혁, 조직과 운영, 유생명단, 경제기반, 사회적인 위상, 제향인물사 등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와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의 저술을 판각한 목판까지 소장하고 있어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文簡公 農巖 諱昌協 禮曹判書 正二品職

   (문간공 농암 휘창협) 예조판서 정 2품직

 

본관은 안동(安東). 字(자)는 중화(仲和) 號(호)는 농암(農巖). 孝宗(효종) 2년(1651) 辛卯(신묘) 1월 2일 과천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玄祖(현조)는 信川公[(신천공) 신천군수(信川郡守) 諱生海(휘생해)]이고, 高祖(고조)는 都正公[(도정공)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諱克孝(휘극효)]이며, 증조는 文正公[(문정공) 文衡(문형) 淸白吏(청백리) 左議政(좌의정) 贈領議政(증영의정) 淸陰(청음) 諱尙憲(휘상헌)]이니, 할아버지는 同知公[(동지공)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영의정(贈領議政) 휘광찬(諱光燦)]이요, 아버지는 文谷公[(문곡공) 영의정(領議政) 휘수항(諱壽恒)과 어머니 정경부인 安定羅氏(안정나씨)의 6남 1녀 중 次男(차남)이다.

顯宗(현종) 10년(1669) 己酉(기유) 19살에 식년시 3等(등) 44位(위)로 진사(進士)가 되어, 肅宗(숙종) 8년1682) 壬戌(임술) 11월14일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35인을 뽑는데, 전시장원(殿試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으로 출사(出仕) 한 뒤, 이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보했다.

肅宗(숙종) 9년(1683) 癸亥(계해) 4월 23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같은 해 6월 13일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을 뽑을 때 11인 중에 들었고, 같은 해 6월15일 부수찬(副修撰), 같은 해 윤 6월 19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같은 해 윤 6월 26일 수찬(修撰), 같은 해 9월 27일 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肅宗(숙종) 10년(1684) 甲子(갑자) 1월 10일 교리(校理), 같은 해 2월 14일 교리(校理). 같은 해 6월14일 이조좌랑(吏曹佐郞), 같은 해 9월 10일 헌납(獻納)을 역임했다.

肅宗(숙종) 11년 을축(1685) 2월 20일 부교리(副校理), 같은 해 9월 6일 교리(校理), 肅宗(숙종) 12년(1686) 丙寅(병인) 1월 10일 이조정랑(吏曹正郞), 같은 해 2월 14일 수찬(修撰), 같은 해 3월 27일 이조정랑(吏曹正郞), 같은 해 윤 4월 28일 헌납(獻納), 같은 해 5월 5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해 6월 16일 집의(執義), 같은 해 6월 17일 승지(承旨), 같은 해 7월 20일 대사성(大司成)에 보하였다.

肅宗(숙종) 13년(1687) 丁卯(정묘) 1월 19일 대사간(大司諫), 肅宗(숙종) 15년(1689) 己巳(기사) 윤3월 21일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 아버지가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어 다음달 9일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이 영평(永平=현 경기도포천) 산중(산중)에 숨어 지내다가 肅宗(숙종) 20년 (1694) 甲戌(갑술) 4월 2일 선친이 사면복관(赦免復官) 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6월 21일 대사간(大司諫), 같은해 9월 4일 승지(承旨), 肅宗(숙종) 21년(1695) 乙亥(을해) 4월 1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7월 12일 개성유수(開城留守), 같은 해 11월 6일 대사헌(大司憲), 肅宗(숙종) 22년(1696) 丙子(병자) 5월 15일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같은 해 6월 29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9월 21일 이조참판(吏曹參判), 肅宗(숙종) 24년(1698) 戊寅(무인) 7월 26일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肅宗(숙종) 25년 기묘(1699) 10월 1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12월 10일 이조참판(吏曹參判), 肅宗(숙종) 26년 (1700) 庚辰(경진) 6월13일 대사헌(大司憲), 肅宗(숙종) 27년(1701) 辛巳(신사) 2월 5일 대사성(大司成), 같은 해 11월 11일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肅宗(숙종) 28년(1702) 壬午(임오) 7월 26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같은 해 8월 15일 부제학(副提學), 肅宗(숙종) 31년 乙酉(을유) 11월 5일 한성좌윤(漢城左尹), 같은 해 11월 22일 이조참판(吏曹參判), 같은 해 11월 8일 대사간(大司諫)에 보했다.

肅宗(숙종) 32년(1706) 丙戌(병술) 2월 5일(大提學), 같은 해 4월 9일 형조판서(刑曹判書), 같은 해 5월 1일 예조판서(禮曹判書), 같은 해 8월9일 대사헌(大司憲), 肅宗(숙종) 34년 (1708) 戊子(무자) 4월 11일 享年(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난 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 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 (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 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李珥(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氣(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理(이)와 氣(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 부터 기가 주된 것이라고 해 이황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 였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그는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 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악론변 性惡論辨〉에서 그는?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 (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善)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기설에서 대체로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 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썼다.

숙종 31년(1705) 문정공(文貞公李端相碑) ․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 김숭겸표(金崇謙表) ․ 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配位(배위)는 정부인 연안이씨로 서기 1651년 辛卯(신묘) 孝宗(효종) 2년에 태어나, 서기 1708년 戊子(무자) 肅宗(숙종) 34년 2월 1일 58세에 卒(졸)하였다. 아버지는 文貞公(문정공) 靜觀齋(정관재) 端相(단상)이고, 祖(조)는 대제학 白洲(백주) 明漢(명한)이며, 증조는 좌의정 廷龜(정구)이니, 외조는 우의정 李行遠(이행원)으로 본은 전의이다.

膝下(슬하)에 1南(남) 5女(녀)를 두니, 1남은 崇謙(숭겸)이고, 1녀는 군수 徐宗愈(서종유)로 달성인이며, 2녀는 도정 李台鎭(이태진)으로 덕수인이니, 3녀는 정랑 吳晉周(오진주)로 해주인이요, 4녀는 지중추부사 朴師漢(박사한)으로 반남인이고, 5녀는 증이조참판 兪受基(유수기)로 기계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先兆下(선조하) 庚坐(경좌) 合窆(합폄)이고, 묘지 및 묘표는 동생 창흡이 撰(찬)하고, 陰記(음기)했으며, 海昌尉(해창위) 吳泰周(오태주)가 썼다.

肅宗(숙종)의 廟廷(묘정)에 配享(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는 선친인 문곡(文谷) 휘 수항(壽恒)과 함께 배향(配享) 되었다.

저서로는《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 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등 많은 편집 하였다.

 

※【참고문헌】숙종실록 농암집(김창협)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54)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황보인(皇甫 仁) 《세종조 상신록》
김종서(金宗瑞) 《문종조 상신록》
정분(鄭苯) 《상신록》
이양(李穰)
이양은, 종실 사람이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고, 세종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어서 정일품(正一品)에 오르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조극관(趙克寬)ㆍ조수량(趙遂良)ㆍ조번(趙藩)

조극관은, 본관이 양주(楊州)인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요,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의 조카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에 오르고, 세종조에 경상 감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향교동(鄕校洞) 네거리에서 죽었는데, 적몰하고 연좌되었다가 예종(睿宗)조에 해금되었다.조수량은 극관의 아우인데, 세종 경자에 문과에 오르고 계유년에 평안 감사가 되어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난을 만나 영광(靈光)으로 귀양갔다 《해동야언》에는 고성(固城)으로 귀양갔다 하였다 가 조금 뒤에 사사되었다.
조번은 극관의 종제인데, 계유년에 같이 화를 입었다.
번의 아우 이(籬)가 진사로서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었고, 김시습(金時習)ㆍ서거정(徐居正)과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다. 성종조에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상은 양주 조씨의 족보


민신(閔伸)

민신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조에 병조 판서가 되고 곧이어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뒤에 보관(復官)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임신에 세조가 연경에 갈 때에 신을 부사(副使)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민신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계유년에 정수충(鄭守忠)이 세조께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용(瑢)에게 붙었으니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황보인(皇甫麟)의 무리를 베는 시기에 이르러 신이 마침 현릉(顯陵)에 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삼군 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역사하는 장소에서 베었다. 신의 아들 보창(甫昌)ㆍ보해(甫諧) 등 다섯 사람도 모두 죽었다.


허후(許詡)

허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니, 영상 문경공(文敬公) 조(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에 문과에 오르고, 병진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더불어 문종의 고명을 받았는데, 계유년에 좌참찬으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 공의 가문은 충효를 대대로 가풍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여의고 상주 노릇함에 극히 애통히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기쁘게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세종조 20여 년 동안에 몸을 조심하고 입을 삼가 지켰다. 《추강집 본전》
○ 처음에, 허후가 승지에 올랐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아버지 허조는 홀로 근심하는 안색을 띠고 밤새 자지 않았다. 혹자가 물으니, 조가 말하기를, “천도로 보면 무엇이든지 차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인데, 내가 세상에 공덕도 없이 관품이 신하로서는 최고인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고, 자식도 승지가 되었으니. 허씨의 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들어맞았다. 《추강집》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안평대군 용은,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는 비해당(匪懈堂)이요,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계유년에 강화(江華)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장소공(章昭公)이다.
○ 공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와 문에 더욱 능하였으며,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좋은 경치를 찾아서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고, 또 남호(南湖)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십이경시(十二景詩)>를 짓고, 또 <사십팔영>을 지었으며, 밤에 등불을 켜 달고 얘기하기도 하고 달빛 아래 배를 띄우기도 하며, 연구(聯句)를 짓기도 하며,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하니,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 소리를 하며,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는데,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으며, 바둑알에 도금(鍍金)도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얇은 비단을 짜게 해서 진서(眞書)ㆍ초서ㆍ행서를 휘갈겨 써서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 하는 처사가 모두 이와 같았다. 《용재총화》
○ 성간(成侃)이 크게 이름이 났으므로, 공이 사람을 시켜 청하니, 간이 가보고 시부로 화답하였다. 공경히 대접하여 보내고 후일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간의 어머니가 간에게 말하기를, “왕자의 도리로는 마땅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근신하며 다른 일이 없어야 하니, 어찌 사람을 모아 패거리를 만드는 일을 하겠는가.그 실패할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는 함께 사귀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두세 번 성간을 불렀으나, 끝내 왕래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공이 실패하여 죽었으니, 간의 집안 사람이 모친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은 용재의 중형이다.
○ 안평의 필법이 뛰어나고 갸륵하며 재기가 가장 우수하여, 조자앙(趙子昻) 맹부(孟頫)와 서로 견주어야 마땅한데, 공은 조자앙의 필법만을 본받았기 때문에, 속스러운 것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안평이 귀공자로서 처음으로 이 필법을 주창하여 온 세상을 휩쓸었다. 이 때문에 그 뒤 역대의 어필(御筆)이 우연히 모두 이 필법을 써서,드디어 나라 습속이 되었다. 근년까지 온 세상이 이 필법에 쏠려서 왕우군(王右軍 왕희지)과 자앙을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 “청지(淸之 안평(安平))가 왕우군의 필획으로 조자앙의 서체를 썼다.”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원교필결(圓嶠筆訣)》


박팽년(朴彭年)

박팽년은,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형조 참판으로 아버지 판서 중림(仲林)과 아우 네 사람과 아들 헌(憲) 등과 함께 모두 죽었다. 숙종 때에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려 주고, 영조 무인(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책에 나오는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였다. 문장이 온화하고 맑으며 필법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추강집본전》
○ 공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충성심이 있어 명 나라의 천순(天順)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는 정침(正寢)에서 자지 않고 항상 지게문 밖에 짚자리를 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답하기를,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있어, 천하가 당황하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치재일기(耻齋日記)》 ○ 《무인기문(戊寅記聞)》에는 이것을 하위지의 말이라 하였고, 혹은 두 공이 다 행하였다 한다.
○ 집현전의 문학하는 선비에 신숙주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ㆍ정인지 등이 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와 함께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는데, 성삼문은 문란(文瀾)이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하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제배들이 모두 팽년을 추앙하여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으니, 그가 경학ㆍ문장ㆍ필법에서 모두 능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모두 참화(慘禍)를 입어서 저술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용재총화》
○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서 부중(府中)에서 잔치하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풍악 소리 구슬프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가 오늘에는 도무지 모를레라 / 萬事如今摠不知
풍이 솔솔 불고 버들가지 푸르른데 / 柳綠東風吹細細
꽃이 핀 밝은 봄날 길고 기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이 이룬 대업은 금궤에 있는 책을 찾아 놓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취하도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아니하고 어이하랴 / 不樂何爲長不樂
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 노래하세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그 시를 부중에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신할 때에 김질(金礩)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성삼문은 정포은의 노래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지어 이르되,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소냐.” 하였다.[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며 女必從夫라 들 님마다 조츨소냐] 《추강집》
○ 공이 처형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들을 난신(亂臣)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년 때 사람(김종서 등을 말함)과 같지 않다.” 하였다.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군부(君父)에게 불효를 저질러 이런 화를 당하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되,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니 할 수 없다.” 하였다. 《추강집》
○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장성한 뒤 성종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지금 박 동지(同知) 충후(忠後)가 그 자손이다. ○《장빈호찬(長貧胡撰)》 《노릉지(魯陵誌)》
○ 부인 이씨(李氏)는 관비가 되어서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 공이 그 사위 이공린(李公麟) 평안 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이요,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아버지이다. 을 맞던 날에 공청에서 물러 나와 묻기를, “납폐하였는가?”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납폐는 하였지만 폐백을 대광주리에 담았으니, 이것이 무슨 무례인가요.”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취한 것이 이 때문이요” 하였다. 《병자록》 ○ 공린이 무과를 하였는데, 장인에게 연좌되어 폐고(廢錮)되었다가 성종조에 서용되어 현령이 되었고 연산조(燕山朝)에 또 아들 원에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 청주에 물러나서 살았다.
○ 공이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번드는데, 세종이 친히 나와서 잔에 술을 부어 돌렸다. 공이 취하여 엎어져서 고꾸라지매, 세종이 비단 남빛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 죽은 뒤에 공의 자손이 이 옷만을 여러 대 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옷과 신주를 함께 땅에 묻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보니, 신주는 완전하나 옷은 썩었다고 한다. 《병자록(丙子錄)》
○ 공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에 들었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명부에서 빼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고, 선조 초년에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밭을 주려 하매,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거마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마는 혐의스러우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 공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선조 신미에 처음으로 녹용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제수 받았다. 일찍이 계창이 공의 기제사날 꿈에 여섯 사람이 사당 문 밖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곧 여섯 분의 제사를 지냈다. 박숭장(朴崇章)이 기록한 것에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사대부 집에 훈공이 있어서 군을 봉한 조상은 의례 시조가 되어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선생의 사업은 어찌 봉군뿐이겠는가’ 하며, ‘영원히 조천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정식(定式)삼았다.” 하였다.
○ 대대로 회덕(懷德)에 살다가, 뒤에 전의(全義)로 옮겼는데, 지금도 박동(朴洞)에 유지(遺址)가 있다. 《노릉지(魯陵誌)》


박중림(朴仲林)

박중림은,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오르고, 정미에 중시에 뽑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박팽년과 같이 죽었다. 과보(科譜)에는 계유년에 죽었다 하였다.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장성하여서는 경적(經籍)에 정통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두니, 공이 문장과 덕행이 있다는 이유로 뽑히었다.
○ 병자에 박팽년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같이 죽었다. 처형에 임하여 여러 아들이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니, 효도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니라.”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성승(成勝)

성승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성삼문과 같이 죽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 을해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에 공이 도총부에서 번들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 하고, 곧 말을 몰아 돌아왔는데 딴 방에 누워서 집 사람들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사람을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병자년에 성삼문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여,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공과 유응부와 박정(朴崝)이 운검(雲劒)이 되었는데, 이 날 전내(대궐안)가 좁으므로, 운검을 그만 두게 되었다. 공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전교가 내렸으니,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공이 명회 등을 치려 하매 성삼문이 말렸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은,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세종 무오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에 중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병자년에 승지로서 아버지 승과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숙종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주고,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적동리(赤洞里)) 외가에서 났는데, 날 때에 공중에서 “났느냐.”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기 때문에 성삼문으로 이름 지었다. 사람됨이 소탈하여 얘기와 농담을 좋아하고 앉고 눕는 것도 절도가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주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뜻은 단단하고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한다. 《추강집》
○ 항상 임금을 경연청(經筵廳)에서 모시며, 보좌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병이 있어 여러 번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편복(便服) 차림으로 늘 성삼문과 이개에게 대가(大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니,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북경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로(白鷺) 그림에 넣을 시를 써 달라고 청하여서, 공이 건성으로 부르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 / 雪作衣裳玉作趾
갈대 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 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어 아랫 구절을 채워서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野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池)에 잘못하여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

하였다. 패관잡기
○ 북경에 가는 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쓰기를,

말머리를 잡고 두드리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 나라의 비와 이슬에 자랐는데 /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고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짓기를,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落落) 장송(長松)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이몸이 죽어가서 무어시될고 니 蓬萊山第一峯의 落落張松되여읜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 리라]” 하였다.
○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원(元)이다. 그 아내가 관비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추강집》
○ 명 나라 급사(給事) 장녕(張寧)이 시강(侍講) 예겸(倪謙) 문희(文僖) 에게 배웠는데, 예겸보다 십 년 뒤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다. 그때에 나이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스승 예시강(倪侍講)이 동국에 재사가 많다고 말하였는데,어찌 눈앞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하며, 이 때문에 시의 수창(酬唱)에 뜻이 없었다. 장녕이 지은 <예양론(豫讓論)>을 혹자는 의심하기를, “의도가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중종조에 박호(朴壕)가 과거에 올라 육품관이 되었다가, 곧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대사간으로 있는 조(趙)라는 성을 가진 자가 반론하기를, “역신의 후손이 간관(諫官)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자, 조(趙)의 동배(同輩)들이 책하기를, “네가 감히 명신의 후손을 탄핵하고 논박하니,이렇게 무식하고서야 어떻게 그대로 간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조가 곧 병을 핑계하여 체직되고, 박이 도로 청반(淸班)에 올라 이조 판서까지 되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현종(顯宗) 임자년(1672)에 호조 아전[戶曹吏] 엄의룡(嚴義龍)이 우연히 인왕산(仁王山) 비탈 무너진 곳에서 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故)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성 승지의 신주는, 겉면(面)에는 성삼문(成三問) 무술생이라고 쓰고, 신주의 감중(坎中)에도 또 그와 같았다.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하고 신여(神輿)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공의 외후손인 진사 박엄찬(朴嚴纘)의 집에 봉안하고, 곧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에게 기별하니 와서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홍주 노은골에 아직도 공의 옛 생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기 감사는 김우형(金宇亨)이었는데, 연로(沿路)의 관원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영송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혹은 제수를 갖추어 제사지내는 이도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이로 말미암아 감동하여 구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 당시의 동지였던 다섯 분을 아울러 향사하기로 하고, 병진 여름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웠다.공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신주가 외손 박호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기 집 신주와 함께 묻었다. 이백여 년 뒤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장릉지》


이개(李塏)

이개는, 자는 백고(伯高) 또는 청보(淸甫)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 색(穡)의 증손이요, 종선(種善)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문장에 능하였다. 세종 병진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 중시(重試)에 뽑혀 직제학까지 지내다가 병자년(1456)에 죽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요,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 시와 문이 맑고 절묘하여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동각잡기》
○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대단히 친밀하여 출입하므로, 개가 경계하였다. 병자년에 일이 발각되매,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바보스럽게 여겼더니, 과연 비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구나.” 하였다. 《동각잡기》
○ 몸이 여위고 가냘퍼서 옷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신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추강집》
○ 단가를 짓기를,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가마귀눈비마자희난듯검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向 一片丹心이야 變줄이잇시랴]” 하였다.
○ 공이 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박사 성 간(成侃)과 집현전에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옥당에 봄은 따뜻하고 날은 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 玉堂春暖日初遲
졸며 남창에 의지하여 백치(白痴)를 기른다 / 睡倚南窓養白癡
우는 두어 마리 새의 소리는 낮 꿈을 놀래게 하고 / 啼鳥數聲驚午夢
살구꽃의 아리따운 웃음은, 새 시에 들어온다 / 杏花嬌笑入新詩

하였다. 성간이 차운(次韻)하기를,

어린 제비와 우는 비둘기 낮 시간이 더딘데 / 乳燕鳴鳩晝刻遲
봄이 찬 연못에는 버들이 어리석은 것 같구나 / 春寒太液柳如癡
집현전에서 졸음을 파하매, 바쁜 일이 없어서 / 鑾坡睡罷無餘事
때로 종이를 펼치고 작은 시를 쓴다 / 時展蠻牋寫小詩

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이 일찍이 그 형 성임(成任)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백고(李伯高)가 용이 되었다. 내가 붙들고 날아서 강을 건너는데, 떨어질까 두려워하였더니, 용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뿔만 굳게 잡으라’하였다.”고 하였다. 임(任)이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 명망이 높고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자네가 그 뿔을 붙잡았으니, 반드시 중시 장원에 뽑힐 것이라.” 하였다. 얼마 안되어,공이 죽임을 당하고 간도 또한 병으로 죽었다. 《용재총화》 ○ 총화에는 모두 공을 백고로 일컬었는데, 상촌집(象村集)에 끌어서(引用) 변명하기를, “백고는 청보의 또 하나의 자(字)인가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하건대, 《노릉지(魯陵誌)》에 《추강집(秋江集)》에 있는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청보라 하지 않고 백고라고 하였으니, 상촌이 《추강집》을 보지 못하고 이런 논란을 한 것이 아닌가.


하위지(河緯地)

하위지는,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자원하였고, 병자년(1456)에 예조참판으로 죽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공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말을 함에 버릴 것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禮)에 밝아,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비가 와서 땅이 질더라도 한번도 통행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 항상 집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경연에서 강의하여, 보정(補正)한 사항이 많았다. 《추강집》
○ 천순(天順)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 공이 일찍이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몽진(蒙塵)한 것은 천하가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지만, 어찌 황제의 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매양 바깥 사랑에 거처하고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으니, 능히 충의로 순국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단종이 왕위를 이으니,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공에게 도롱이를 빌렸는데, 공이 시로 답하기를,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는 분명히 백일이 임하여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주는 것이 아마도 뜻이 있으리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연우(煙雨)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하였는데, 대개 시사(時事)를 슬퍼함이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매, 공이 조복(朝服)을 다 팔아버리고, 전 사간(前司諫)으로 선산(善山)으로 퇴거하였다. 세조가 임금께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을해에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교서를 내리어 간곡히 불렀다. 공이 부름에 응하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녹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을해 이후의 녹은 따로 한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추강집》
남 추강(南秋江)의 《육신전》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승지로 승정원에 있을 때에 《노산조일기(魯山朝日記)》를 보았는데, 계유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편찬되자, 공에게 편찬에 참가한 공로로 상을 주었더니, 극력 사양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추강집》에 보인다.집의로 직제학이 되었다가 이어 병으로 휴가를 신청하여, 영산(靈山) 온천에 목욕한다고 하고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해 10월에, 세조가 정난(靖難)하자 임금께 아뢰기를, “지난번 하위지가 면대를 청하였을 때에 김종서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것과 같습니다. 위지를 다시 불러 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이에 드디어 좌사간에 임명하자, 공이 상소하였다. 추강이 기록하기를, “계유10월에 공이 조복을 팔고 전 사간으로 선산에 퇴거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불러서 나아가니, 예조 참판을 제수하고 심히 총애하였다.” 하였는데, 공이 선산으로 물러갔다는 것은 그럴듯하나, 그가 벼슬에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듯 하다.아마도 공이 상소한 뒤에 얼마 안되어 조정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이때에는 노산이 아직 왕위에 있었던 듯 하다. 《서애집》
○ 단종 즉위 초에 공이 병을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가 있는 중 김종서 등이 피살되매,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었다가,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부르므로 나와 예조 참판이 된 것은, 그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여헌집(旅軒集)》 <묘갈(墓碣)>
○ 세조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공이 형신을 받을 때에 비밀히 달래기를, “네가 만일 음모에 참가한 사실을 숨기면 면할 수 있다.” 하였더니, 공이 웃고 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배양한 인재 중에 공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동각잡기》
○ 공은 선산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는데, 어렸을 때에 작은 서재를 짓고 형제와 더불어 문을 닫고 글을 읽어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묘가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는데, 부인 김씨와 합장(合葬)하였다. <묘갈(墓碣)>
○ 공의 처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금부 도사가 그 아들들을 잡으러 왔다. 공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호(琥)요, 차자는 박(珀)이었다. 《동학사 초혼기(東鶴寺招魂記)》에는 연(璉)ㆍ반(班)이라 기록되었다. 박은 나이 이십 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도사에게 말하기를,“원컨대,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어머니에게 고할 말이 있소”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매, 박이 문안에 들어가 꿇어앉아 어머니께 고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니, 자식이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하여야 합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천한 종이 되더라도 부인의 의리로 마땅히 한 사람을 따를 것이요, 개와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드디어 재배하고 나와서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과연 공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유성원(柳誠源)

유성원은, 자는 태초(太初)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요, 사인(舍人) 사근(士根)의 아들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사예(司藝)로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 세종조에 《송사(宋史)》가 우리나라에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여러 번 명 나라에 청하였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송 나라 조정의 인물을 논하다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이 《송사》의 어느 전(傳)에 들었을까?” 하였다. 여러 사람은 “왕안석이 간신전에 들어야 한다.” 하였다.한두 사람이 반박하기를, “안석이 신법을 만들어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진실로 소인이다. 그러나, 문장과 절의가 일컬을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을 뿐이다.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다만 오활하고 고집이 셌기 때문이니,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의 무리에 넣을 수는 없고, 열전(列傳)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더니,공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사가 나왔는데, 과연 <열전>에 있었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강목(綱目)》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 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紀)》를 읽다가 탄식하고 시 한 구를 지었는데,
어쩌면 주의 여분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이었는고[那將周餘月 續我唐日月]” 하였더니, 뒤에 《강목》을 얻어 오니, 주자가 과연 주(周)를 내치고 당을 높였는지라, 익재가 매우 자부하였는데, 아무개를 감히 익재에게 견줄 수는 없지마는, 마땅히 제군의 항복을 받을 만은 하다.” 하였다. 《필원잡기》 《명신록》
○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기사 경오년 간에 흰 까치가 와서 깃들고 새끼가 모두 희었으며, 계유년에는 나무가 홀연히 다 말랐으므로, 공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화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더니, 공이 패하고 조금 뒤에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필원잡기》


유응부(兪應孚)

유응부는, 본관이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랐고,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莊)하고 날래며 활쏘기를 잘하며, 능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병자년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였다.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활쏘기와 사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새와 짐승을 만나면 쏘아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으나,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는 넉넉히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 농장에 왕래할 때, 형제가 따라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기러기를 쏘매,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추강집》
○ 공이 일찍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서 시를 짓되,

장군이 절(節)을 가지고 와서 국경을 진정시키니 / 將軍持節縝夷蠻
변방에 티끌이 없어지고 군사들이 조는도다 / 塞外塵淸士卒眠
해 긴 낮 빈 뜰에서 무엇을 구경하는가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 백 마리 누 앞에 앉았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다. 가히 그 기상을 알 수 있다. 《추강집》 《명신록(名臣錄)》
○ 일찍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에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주먹을 자랑하며 말하기를, “한명회와 권람을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긴 창과 큰 칼이 필요 없다.” 하였다.
《동각잡기》 《추강집》
○ 공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 양식이 떨어졌었다. 죽던 날에 그 부인이 울며 말하기를,“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화를 얻었다.” 하니,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에서 그 가산을 몰수하는데, 방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이 있었다.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동각잡기》 《추강집》
태사씨(太史氏)가 말하기를, “누군들 신하가 아니리요마는, 지극하다, 육신(六臣)의 신하 노릇함이여. 누군들 죽지 않으리요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받들 때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의 절개를 세웠다. 충분(忠憤)이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가을 서리 보다 늠름하여,백세 후에 신하된 자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충절은 천금(千金)이요, 한 몸을 터럭같이 여겨서 몸을 죽여 인을 이루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였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은 나라의 삼인(三仁)과 동국의 육신(六臣)이 행적은 다르나, 도는 같은지라, 이 또한 장하구나.’ 하였다. 세조가 정승이 되어서는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고, 왕위에 나가서는 덕이 우순(虞舜)을 짝하여 높고 크고 넓어서 이름할 수 없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세조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 고사리를 캐었으나, 주 무왕의 덕이 떨어지지 않았고,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에서 고기를 낚았어도, 한 광무(漢光武)의 공이 손상되지 않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만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가게 하였더라면, 상왕(上王)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덕이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졌도다. 공경히 조사를 지어 가로되,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 厲氣初濟
뭇 구멍이 막혔도다 / 衆窺爲塞
서리와 눈이 희게 덮였는데 / 霜雪皎皎
소나무만이 홀로 푸르도다 / 松獨也碧
신하의 머리는 / 有臣之首
임금 위한 마음으로 희었거니 / 愛君而白
그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 有頭可截
굽힐 수 없는 절개로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의 곡식은 / 他人之粟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孤竹)의 맑은 바람이요 / 孤竹淸風
시상(柴桑)의 밝은 달이로다 / 柴桑明月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가 한 움큼이로다 / 寃血一掬

하였다. 《추강집》 《육신전》
○ 노량(鷺梁) 남쪽 언덕 길가에 다섯 무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여기에서 죄인을 죽였다 한다. 이 있는데, 그 앞에 각각 작은 돌을 세워 표지를 하였다. 가장 남쪽은 박씨의 묘라 하고, 다음 북쪽은 유씨(兪氏)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이씨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성씨의 묘라 하고,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십여보 사이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어떤 중이 육신의 시체를 져다가 묻었는데 그 중은 김시습(金時習)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의 두 묘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성씨 부자의 묘인데,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 한다. ○ 일설에는 육신 묘가 다섯 무덤만 있고 하나는 없다 하는데, 하위지의 묘가 선산부 서쪽에 부인의 묘와 같이 있다는 것이 장현광(張顯光)의 기록에 보였으니, 하공은 시골에 반장(返葬)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허봉(許篈)이 말하기를, “부인을 씨(氏)라고 일컫는데, 지금 다섯 묘가 한 곳에 늘어 있으니, 부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반드시 관직을 일컫는데, 지금 씨(氏)라고만 일컬었으니, 당시의 의사가 오신(五臣)을 여기에 묻어 놓고는 감히 드러내어 새기지 못하고, 이렇게 일컬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지봉(芝峰)이 세 묘만을 일컬어 말하기를, “성삼문ㆍ박팽년ㆍ유응부의 묘가 틀림없다.”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어떤 사람이 가보니, 비석은 그대로 있는데, 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장릉(章陵)을 발인(發靷)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孝宗) 경인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崇古)가 다시 분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지봉유설》 《미수기언》 《노릉지》 《장릉지》 ○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갈(碣)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었다.
영남 일선부(一善府)에 하씨의 묘가 있고, 유씨(柳氏)만은 장사지낸 곳이 없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는 외손이 있는데 전하기를, “성씨 묘라는 것은 그 한 몸의 한 부분을 묻은 것이다.”고 하였다. 《기언》 ○ 숭고는 곧 박팽년의 칠대손이다.
○ 성종조에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종직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일 변이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장릉지》
○ 인종조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가 박팽년 등을 마음으로는 가상히 여기나, 위태롭게 의심하는 시기에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찍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당대에는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으니, 후세에 그 자취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이 말씀을 하여서 자손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동각잡기》 《노릉지》
○ 선조 병자에 박계현(朴啓賢)이 경연(經筵)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의 충성을 논하여 말하기를, “《육신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저술한 것인데, 전하께서 취하여 보시면, 그 자세한 사항을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육신전을 가져다 보고 놀랍고 분하여 이르기를, “지금 소위 《육신전》이라는 것을 보니, 극히 해괴하여 춥지 않아도 소름이 끼친다.옛적에 우리 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여, 하늘이 주고 백성이 귀의하였는데, 예부터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끝을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하고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이 자는 아조(我朝)의 죄인이다.옛적에 최호(崔浩)가 국사를 폭로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니, 이 사람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반드시 엄하게 국문하여 치죄할 것이다. 저 육신이 충신이라면, 왜 선위를 받던 날에 쾌히 죽어서 인신의 절개를 바치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리하지 못했다면, 왜 도망하여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지 못하였는가. 이미 세조를 신하로서 섬겨놓고 또 임금을 해치기를 몰래 도모하는 것은 옛날 예양(豫讓)이 깊이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저 육신이란 자들이 우리 조정에 무릎을 꿇고서 자객의 음모를 하여,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다가 일이 실패한 뒤에 의사로 자처하였니, 마음이나 행동에서 낭패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헛되게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이름을 없애는 것이 덕으로 갚는 것만 못하다.’ 하는데,성삼문 등의 마음이 잠시라도 그 임금[단종]에게 있지 않음이 없으면서 일부러 세조의 조정에 신하 노릇하여 장차 다른 날에 성공을 기약하였다. 어찌 못난 사람들처럼 스스로 개천에 목매어 죽어서 아는 이가 없게 하리오 했다면 이는 옳지 못한 처사이다. 만일 성공하는 것만 귀하게 여기고, 원수에게 신하 노릇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백이ㆍ숙제(伯夷叔齊)와 삼인(三仁)이 반드시 꾀하여 주 나라에 신하 노릇하면서 은(殷) 나라의 흥복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무리가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의 옳지 못함을 드러내어 의논한다. 이 글은 오늘날 신자(臣子)가 볼 것이 못되니, 내가 모두 거둬다가 불사르려 한다.만일, 이 책에 있는 말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엄중히 다스리려 한다.” 하였다. 삼공이 답하기를, “이 책이 민간에도 드물고 연대가 오래되어 없어졌는데 만일 수색하는 거조를 내린다면, 반드시 큰 소란만 일어나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홍섬(洪暹)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성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언사가 지극히 간절하여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선조가 이에 감동하여 깨달아서 그만 두었다. 《석담일기》 《장릉지》
삼가 상고하건대, 육신은 참으로 충절의 선비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말할 바가 아니요, 《춘추(春秋)》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기는 것도 또한 고금을 통한 의리라.” 하였거늘 박계현이 경솔하게 때아닌 의논을 내 놓아 주상께서 잘못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하겠다. 애석하게도 모신 신하들 중에, 김종직이 성종께 대답한 말을 임금 앞에서 아뢴 자가 없었다. 《동각잡기》 《노릉지》
○ 효종 3년 임진년(1652)에 태학생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정몽주(鄭夢周)의 무리에게는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박팽년ㆍ성삼문 등에게는 정려(旌閭)하는 은전(恩典)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명 나라 문황(文皇)이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들의 삼족(三族)을 멸하고서도, 마침내 말하기를, ‘자녕이 있으면 짐이 마땅히 쓰겠다.’ 하였고, 만력(萬曆) 초에 이르러 혁제(革除)할 때에 죄를 진 여러 신하들의 분묘에 유사(有司)를 시켜 제사지내고, 후손들을 후하게 구하고 등용하여 충절을 표창하고 장려하였는데, 우리 선조 대왕께서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여 교서를 내리어 육신의 후손을 등용하였으니, 전에 없는 넓은 은전(恩典)이 신종(神宗)과 일치하였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그들의 사당과 분묘에 충절을 표창하여, 선조 대왕의 뜻을 확장시켜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듣건대, 성삼문의 홍주(洪州) 옛 집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니, 만일 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表)한 것같이 하시면 지하의 썩은 뼈를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선왕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준수하고 드러내어 후세에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 《장릉지》
○ 효종(孝宗) 8년 정유년(1657)에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명 나라의 방효유는 실상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라, 수년이 못되어 그 문집을 간행하고 전사(專祠)를 지어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관대하고 심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삼문과 박팽년의 무리는 실로 방효유의 짝입니다.일찍이 성삼문은 연산(連山)에 살았고, 박팽년은 회덕(懷德)에 살았는데, 연산과 회덕에 모두 유현(儒賢)의 사당이 있으므로, 학자들이 두 사람을 함께 향사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의 전사에 비교할 것은 아닌데, 이것도 감히 못하옵니다. 전하께서 명 나라의 전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허락하여 주시어 한 지방사람들의 소원에 맞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효종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행하지 못하였다. 《육신유고(六臣遺稿)》 《장릉지》
○ 숙종(肅宗) 5년 기미년(1679)에 노량에 행차하여 군사를 사열할 때에, 영부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강 건너편에 성삼문 등 육신의 묘가 있는데, 지금 듣건대, 그 무덤이 모두 무너져서 평토가 되었다 합니다. 세조조에 역률(逆律)로 논하였지마는, 일찍이 선조조에 신하가 각각 제 임금을 위한 행동이라 하여 그 자손을 등용하였으나,이번에 가까운 곳에 행차하신 때를 계기로 만일 그들의 무덤을 봉식(封植)하는 특전을 내리시면, 실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도리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숙종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자손을 등용하는 처사가 있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그 무덤을 봉식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숙종 6년 경인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육신 및 황보인, 김종서의 원통함을 논하여 말하기를, “저 여러 신하들은 천명이 이미 구주(舊主 단종 (端宗))에게 끊어지고 운명이 이미 진인(眞人)에게로 돌아간 것을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끝내 본래의 뜻을 지키어 죽음에 이르러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각각 제 임금을 위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세조께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절을 만나 그들을 베었지마는 실로 그들의 지조를 가상하게 여겼으므로, 당시에 말씀하시기를, ‘삼문 등은 오늘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고, 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기를, ‘나는 둔(屯)한 때를 만났고 너는 태(泰)한 때를 만났으니, 일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다.만일 나의 한 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네모진 물건을 끼우는 것이다.’ 하였고, 세조가 병환이 있으실 때를 당하여, 예종이 정무에 참여하여 결재하는데, 첫째로 명하여 계유 병자에 죄를 입은 사람에 연좌된 이백여 인을 모두 방면하였으니, 이러한 은전이 이미 세조가 계신 때에 행해졌습니다. 선조의 유신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 등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선왕께서 심히 칭찬하시기를, “성삼문 등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라 하셨으니, 열성조의 남겨주신 뜻을 이어서 여러 신하의 죄명을 씻는 것은 전하께서 선대의 뜻을 계술(繼述)하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숙종이 답하기를, “육신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열성조에서 죄를 용서하지 않았으니, 분묘를 봉식하거나 선비들이 존묘(尊墓)하는 것만 금지하지 않을 뿐이요, 이 밖에 따로 은전을 가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국조보감》
○ 숙종 7년 신유년(1681)에 과천(果川) 유림이 통문(通文)을 내어 관학(館學)에 고하고, 노량강 남쪽 언덕에 육신의 사원(祠院)을 처음으로 세웠다. 구월에 상량하는데,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상량문을 짓고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다. ○ 《장릉지》
○ 숙종 17년 신미 9월에, 능에 거둥할 때에 노량진을 건너다가 육신 묘를 보고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판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육신묘가 비록 예로부터 전설은 있으나, 아직도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박팽년의 후손인 고(故) 군수(郡守) 숭고(崇古)가 표석을 고쳐 세워서,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할 뿐이요, 감히 분명히 조상의 분묘라고 말하지 못하여, 한 번도 제사를 무덤 앞에서 행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 이제 갑자기 행하면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노량 가에 육신의 사우(祠宇)가 있으니, 여기에서 치제하는 것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목창명(睦昌明)은 말하기를, “육신이 일찍이 복관(復官)된 일이 없으니, 나라에서 치제한다면, 제문에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절의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지금까지 복관을 하지 않았는가?” 하였으며, 덕원이 아뢰기를, “방효유 등 여러 사람들은 두어 대 후에 모두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같이 관대하지 못하여,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특별히 명하시면, 무엇이 불가 하오리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내 뜻은 다만 그 절의를 가장(嘉獎)하고자 하는 것이니,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그 사우도 사액(賜額)하고, 치제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일을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니,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하다고 허락하였다. ‘체제는 아직 천천히 하라.’ 하였다.《장릉지》
○ 이에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소를 올렸는데,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이 곧 임금의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숭장(崇獎)의 은전을 속히 베풀지 못하게 한 것을 공박하고, 이어서 복관(復官)ㆍ사액ㆍ치제를 빨리 거행하여 육신을 포숭(褒崇)하고 격려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분부하겠다.” 하였다.
숙종이 대신들을 인견할 때에 영상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 일로써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허목이 답하기를, “매우 불가하다.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 만세에 바뀌지 않는 정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좌상 목래선(睦來善)은 아뢰기를,“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뜻한 바가 있는 것 같고, 선배의 의논도 또한 여러 갈래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고, 우참찬 유명천(柳命天)은 아뢰기를, “그 자손을 등용하고 사우(祠宇) 세우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육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으니, 복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실상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하였고, 병판 민종도(閔宗道)는 아뢰기를,“제왕가의 일은 필부(匹夫)와 다르니, 오늘날 만일 포창의 거조가 있으면, 사방이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흠앙하여 마지않을 터인데, 어찌 시비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형판 윤이제(尹以濟)는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을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판 유명현(柳命賢)은 아뢰기를, “육신의 일은 사람마다 그들의 지조를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전하의 행차가 지나시는 즈음에 이미 느끼신 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한번 치제하시옵소서.” 하였고, 부제학 권해(權瑎)는 아뢰기를, “육신의 충절은 만고에 빛나는데, 세조가 말씀하시기를 당세의 난신이라고 한 것은 후세로 하여금 포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포창하는 은전이 전하의 마음으로써 결정되었으니, 참으로 거룩하신 일입니다.” 하였고,교리 이동표(李東標)는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신중한 의논은 육신의 절의를 높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뜻은 있습니다. 세조께서 난신으로 베고는 충의로 포창하였더라면 어찌 천고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와는 조금 다르나, 전하께서 그 절의를 포창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지금 자기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포창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왕가의 일은 선조(先朝)에 득죄한 자도 후에 추장(追獎)하는 일이 많은데, 오늘 전하의 말씀은 매우 훌륭하니, 신하들이 받들어 거행하는 데에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모든 신하들의 갑논을박이 각각 견해가 있어, 그러할 것이나 방효유의 빛나는 충절을 이미 성조가 인정하였고, 그 뒤에 시호를 준 것이 또한 관대한 은전에서 나왔으며, 세조께서 그들에 대하여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은, 그들을 가상히 여기시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춘추에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내가 알지 못함이 아니나, 제왕가의 일은 필부와 다르므로, 다만 그 절의를 포창하고 후인을 격려하고자 함이니, 오늘의 이 일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또 제문의 문자에 꺼리고 구애받음이 있다는 논의에 대하여는 지금 포창하려는 것은 오직 절의를 가상히 여기는 데 있으니,제문을 지을 때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도리에 신중해야 하며 용이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예랑(禮郞)을 시켜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 진사 민언심(閔彦諶)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급히 쾌한 결단을 내리시어 거듭 치제ㆍ복관ㆍ사액의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하였다. 숙종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본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으나, 다만 도리(道理)에 신중하게 해야 하기에 널리 물어서 재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였다.
○ 이조 참판 이현일(李玄逸) 지방에 있는 유신 의 논의의 대략에, “세조가 천명과 인심에 핍박되어 부득이 단종에게서 전위를 받았는데, 저 육신들이 자기가 섬기던 임금[端宗]에게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절개를 지켜 항거하고 충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일은, 주의 한통(韓通)ㆍ명의 경청(景淸)ㆍ고려의 정몽주와 같습니다. 대개 백이가 무왕을 그르게 여겼지만 공자가 가로되, ‘백이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하였으니, 백이를 칭송한 까닭으로 해서 무왕에게 해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한통이 주(周)에 충성을 바쳐 죽었는데, 송 태조가 후하게 추증하였고, 경청과 정몽주가 섬기던 임금에게 절개를 다하였는데, 명 나라 선종(宣宗)과 우리 태종이 복관도 명하고,포증(褒贈)도 명하였으니, 모두 절의를 숭장하여 후세 신하의 충의를 권한 것입니다. 하물며 세조가 육신을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이 실상 송 태조가 한통을 추증한 뜻과 같고, 또 은미한 뜻을 후세 자손에게 보인 것이니, 지금 이 일은 실로 선왕의 뜻을 잘 이어 받들어 실행하는 것입니다.또 어찌 털끝만한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 어름어름 선대의 일을 숨기려고 하면 도리어 세조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을 순히 한 거사에 누가 되고, 선조의 너그럽고 넓은 도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12월에 특명으로 육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민절사(愍節祠)라 사액(賜額)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국조보감》 ○ 또 명하여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벼슬을 회복하고 연산(連山)에 있는 성씨의 밭과 노비를 도로 내어 주었다. 전교하기를, “대개 국가가 먼저 힘쓸 것은 절의을 숭장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고,신하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또한 절의에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옛적 제왕들이 절의를 지키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고 포창을 한 이유이다. 생각건대, 저 육신들은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으리요마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충절이 수백 년 후에도 늠름하게 떨쳐져서 명 나라의 방효유ㆍ경청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침 선릉(先陵)에 행차하는 일이 있어 연(輦)이 육신묘 옆을 지나다가 내 마음에 더욱 느낀 바가 있었음에서랴. 슬프다,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모르겠는가. 내가 포창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들의 절의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후세의 충신이라 하신 세조의 말씀에 뜻이 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세조의 남겨준 뜻을 계승하고 세조의 거룩한 덕을 빛내는 것이다.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있으랴. 성삼문 등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치제하여 백대의 풍성(風聲)을 세우라.” 하였다. 《장릉지》
우승지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육신 중에 박팽년만이 혈족이 있어서 나라에서 써 주었고, 성삼문은 자손이 없고 외손만 있었는데, 연전에 서울 인왕산에서 우연히 매장된 신주를 얻었다 합니다. 지방에 유락(流落)한 외손이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오니, 만일 그곳의 감사로 하여금 그 성명을 찾아 아뢰게 하여, 써 주시면 더욱 전하의 거룩한 덕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지》
○ 장릉(莊陵)을 능으로 봉한 뒤에 총리사(摠理使) 최석정(崔錫鼎)이 장계(狀啓)하기를, “지난 을축 연간에 육신의 사당을 단종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던 옛 사당 남쪽에 창설하였는데 감사 홍만종(洪萬鍾)ㆍ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ㆍ군수 조이한(趙爾翰)이 상의하여 창건하고 엄흥도(嚴興道)를 배향하였다.보통 규정으로 말하면 능침(陵寢)과 화소(火巢) 안에 신하의 사당을 둘 수 없지마는, 능의 멀리 지방의 외진 곳에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육신들이 능침을 모시고 호위하는 것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만일 능에 봉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육신의 사당을 헐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보더라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니, 헐지 말고 그대로 두어 동시에 제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숙종이 대신들을 불러 볼 때에 영상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사당은 분묘와 다르니, 능의 화소 안에 그대로 두는 것이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촉한(蜀漢) 무후(武侯 제갈량)의 사당이 소열(昭烈)황제의 사당 근처에 있으므로, 두보(杜甫)의 시에 ‘군신(君臣) 일체로 제사를 같이한다.[一體君臣祭祀同]’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을 그대로 능 안에 두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상운이 아뢰기를, “소열황제의 사당은 촉한 때에는 반드시 백제성(白帝城)에 따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요, 뒷사람이 창설한 것 같으니, 오늘 이 일을 증거 삼을 수 없고, 또 봄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왕릉의 정자각(丁字閣)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육신의 제사를 행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최석정이 아뢰기를, “단종은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영녕전(永寧殿)에 올려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공신이 없었는데, 육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능에 모시어 호위하게 하는 것은 이승이나 저승이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들의 사당을 화소 밖에 옮겨 세운다면 섭섭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경(經)과 권(權)이 있어서, 반드시 전례(前例)에 구애될 것이 없으니, 사당을 그대로 두어서 옮기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호판(戶判)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정자각에서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예판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조천(祧遷)된 능에는 한식 차례 외에 없는데, 육신의 사당에는 춘추의 제향이 있을 것이니,이것도 또한 장애가 됩니다.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참찬(右叅贊) 서종태(徐宗泰)ㆍ이조 참판 이인환(李寅煥)ㆍ부제학 조상우(趙相愚)ㆍ우부승지 김우항(金宇杭)은 모두,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신리(神理)와 인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육신은 다른 신하와 처지가 다르니, 사당을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운다는 것은 옳은 줄로 모르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공신을 능에 모신 예가 있고, 이번에 사릉(思陵) 근처에 정씨(鄭氏) 분묘도 파서 옮기지 않기로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에도 그런 예를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사당은 그대로 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그 뒤에 화소 밖으로 옮겨 세웠다.


엄흥도(嚴興道)

엄흥도(嚴興道)는 영월(寧越) 호장(戶長)인데, 숙종 조에 공조 참의를 증직하고 영조 무인에 종이품을 증직하고, 뒤에 공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 선조 을유년(1685)에 군수 김늑이 흥도의 종손(宗孫)인 정병(正兵) 한례(漢禮)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고, 이어서 그 고을에 있는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고, 문안(文案)을 만들어 주었다. 《조야기문》
○ 숙종 무인년(1698) 겨울 주강(晝講) 때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엄흥도의 자손을 돌보아 주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한데, 근래에 들으니, 그 7대손 신무(信武) 형제가 청주 땅에 살고, 그 밖의 족속도 많다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본 뒤에 처분을 내려주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최석정이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주는 편지에 말하기를, “엄호장이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의를 붙든 것에 감탄하고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지금 후손의 등용에 대하여 어찌 인색하게 돌아보지 않을 뜻이 있으리오. 다만 엄신무가 말하기를, ‘그 아비 생존시에 송상(宋相) 시열(時烈)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었는데, 그 선조 호장의 사적을 기술하여 주기를 청하니, 송상이 허락하고 이루지 못하였으며, 계축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천봉(遷奉)할 때에 송상이 화양동에서 능 아래로 가는데, 그 아비가 따라 갔다.’ 한다. 내가 장릉에 있을 때에 육신 사당에서 기문(記文) 현판을 보았는데, 곧 송상이 지은 것으로서, 그 글에 이르기를, ‘무신 년간에 내가 경연에서 호장의 자손을 등용하자는 뜻을 아뢰고 그 뒤에 여러 곳으로 알아보았으나,찾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하였다. 이 글은 을축년에 지은 것이어서 엄신무의 아비가 송상을 따라다녔다는 계축년으로부터 십여 년이 되거늘,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무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영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장이 늙어 죽은 뒤에 자손이 없으므로 영월에 있는 분묘를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였다. 《명곡집(明谷集)》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인데, 문종의 부마(駙馬)이다.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에 봉해졌다. 시호는 헌민공(獻愍公)이다.
○ 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


정보(鄭保)

호는 설곡(雪谷)이요, 본관은 연일(延日)이니, 포은 정몽주의 손자요, 이조 참의 종성(宗誠)의 아들이다. 벼슬이 감찰ㆍ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윤정(允貞)이니, 주부이고, 다음은 윤화(允和)요, 끝은 윤관(允寬)이다. 윤화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올랐는데, 창방(唱榜)할 때에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공이 슬퍼하여 마침내 홧병을 얻었다. 병자의 변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월정만필》


권절(權節) 중귀(重貴)의 아들 엄(嚴)이 고려의 집의(執義)로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을 권(權)으로 회복하였다. 백 세(百歲)를 살았는데, 집에 있은 지 50 년에 한 번도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는 단조(端操)요,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집의(執義) 엄(嚴)의 손자요, 밀직사(密直司) 왕중귀(王重貴)의 증손이다. 고려말의 정승 왕후(王煦)는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아들이요, 아홉 봉군[九封君]중의 하나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길러서 아들을 삼고 성을 왕씨로 주었다.아들 중귀(重貴)가 밀직사로 공민왕 때에 화를 입었다. 중귀의 아들 숙(肅)ㆍ엄(嚴)이 이씨 조선에 들어와 성을 권으로 회복하였다. 세종 정묘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교리를 지냈는데, 병자 이후에는 미친 병을 칭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 어려서 기이한 상모(相貌)가 있고 힘이 남보다 뛰어나 남이(南怡)와 한 때에 함께 이름을 날렸다.
○ 세종조에 과거에 올랐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문무(文武)에 큰 재주가 있으니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여 그 그릇을 성취시키겠다.” 하여 특별히 사복 직장(司僕直長)을 제수하였다가 이어서 집현전 교리를 시켰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친밀히 하며 은밀히 대사를 귀띔하였다.공이 귀먹은 체 하며 응하지 않고, 드디어 자취를 감출 생각으로 미친 병을 칭탁하고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았으니, 절(節)이라는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그 재주와 그릇을 아끼어 첨추(僉樞)에 제수하고 충청 감사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죽은 뒤에 교리(校理)라는 관직명을 묘비에 썼다. 《지봉유설》 《후촌만록》
○ 처신할 방법을 그 조카인 은군자(隱君子) 권안(權晏)과 상의하여 몸가짐과 일에 대응함에 있어 검속을 하지 않고 정신병 든 사람같이 하며 그 몸을 마쳤다. 《율곡집(栗谷集)》 <율정난고서(栗亭亂稿序)>
○ 단종에게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는데, 공과 원호(元昊)의 무리가 생육신이 된다. 일찍이 남의 집의 묵은 편지첩을 보니 공의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가 멀리 세상을 떠나버리니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후촌만록》
○ 공이 어렸을 때, 친척의 집안 여종이 와서 공의 어머니에게 말을 전하느라고 중문 옆에 섰는데, 공이 지나다가 기둥을 들고 여종의 치마폭을 그 밑에 넣었으나 여종은 알지 못하였다. 갈 때에야 알고 울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의 누이가 역시 엄청나게 힘이 세어 기둥을 들고 꺼내주었다. 권씨 옛 집에 맷돌 한 쌍이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전하기를, 공이 평일에 들고 치던 것이라 한다. 《후촌만록》
○ 공이 산에서 놀다가 이상한 중을 만났는데, 일부러 와서 힘자랑을 하였다. 공이 절에 있는 사기그릇을 모으게 하니 열 죽이나 되었다. 중으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퉁겨서 깨뜨리게 하였다. 두 죽까지 깨뜨리고 나서는 중이 손톱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공이 이어서 잠깐 사이에 여덟 죽을 다 깼는데 그 손톱 자국이 사기 그릇 죽마다 모양이 달랐다.어떤 것은 열 개의 눈썹같이 되고 어떤 것은 열 개의 화판(花瓣)같이 되었는데, 예리한 칼로 오린 것 같았다. 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공은 하늘이 내린 분이라.” 하였다. 《후촌만록》. 방언에 그릇 열 개를 한 죽이라 한다.
○ 숙종 임오에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육신 사당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고, 갑신에 경기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에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어 정려(旌閭)를 명하고 이조 판서의 증직과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영조 임자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 사당 옆에 세웠는데 팔현은 즉 김시습(金時習)ㆍ남효온(南孝溫)ㆍ원호(元昊)ㆍ권절(權節)ㆍ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정보(鄭保)ㆍ성담수(成聃壽)다. 뒤에 신설한 모든 사당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이 있어서 헐었더니 삼일 뒤에 예조의 공문이 내려왔는데 팔현사는 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미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조공(曺公) 하망(夏望)이 그 때에 부사로 있었는데 그 아들 명후(命後)가 친히 보고 아주 자세히 전하였다.


원호(元昊)

원호는,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호는 관란(觀瀾)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숙종조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무인에 최석정의 아룀으로 인함.
○ 단종 초기에 공이,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보고, 집현전 직제학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원주 남송촌(南松村)에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단종이 영월로 내쫓기니, 공이 영월 서쪽에 나가 집을 짓고 관란(觀瀾)이라는 호를 짓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읊조리기도 하고, 문을 닫고 책도 지으며, 아침저녁으로 단종 있는 쪽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정축에 단종이 승하한 뒤에, 3년상을 입고 복이 끝나매 다시 원주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문밖으로 나오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촌인 판서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하인들을 대동하지 않고 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으나, 굳건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동으로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으로 머리 두니, 장릉(莊陵)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명곡집 묘비(明谷集墓碑)>
○ 친지들 가운데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많이 와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절대로 접하지 않았다. 한 관찰사가 따르는 하인들을 떼어놓고 평복차림으로 찾아갔다. 공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나와 만나서 대면하니 관찰사였다. 곧 손을 내두르며 달아나 들어가서 장차 몸을 더럽혀질 것 같이 하였다. 관찰이 무안하고 섭섭하여 돌아갔다. 관부(官府)와 가까운 것을 싫어하여 주천현(酒泉縣) 산골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마쳤다. 묘는 남송에 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공의 손자 숙강(叔康)이 예종조(睿宗朝)에 사관으로 화를 입으니, 공이 평생의 저술과 소장을 다 태워버렸다. 또 그 자제를 경계하되, “다시는 글을 읽어서 명리를 구하지 말라.” 하였다. <묘비> ○ 숙강의 일은 예종조에 보인다.
○ 군자가 말하기를,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은 지금의 백이(伯夷)요, 육신은 지금의 방효유(方孝孺)ㆍ연자녕(練子寧)이요,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ㆍ무항(霧巷 공의 사는 곳)은 육신보다도 오히려 기상이 높다.” 하였다. <묘비>


최덕지(崔德之)

최덕지는 호는 연촌우수(煙村迂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태종 을유(乙酉)에 문과에 올랐으며,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영암(靈岩)의 영보(永保)에 퇴거하여 그 서실(書室)을 존양(存養)이라 편액하였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 직제학을 제수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가서 나이 72세에 죽었다.
○ 계유년(1453)간에 국가에 사고가 많았으니, 공이 물러간 것은 참으로 기미를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기를, “밝은 지혜와 바른 학문과 높은 절개가 견줄 데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선현(先賢)으로 기록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명신록》


기건(奇虔)

기건은, 호는 청파(靑坡)이며, 본관은 행주(行州)이다.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제수받아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요,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 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민하고 학업이 정민하고 순수하였다. 집이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웠다. 《월사집(月沙集)》 <기대헌비(奇大憲碑)>
○ 공은 단종조부터 벼슬을 쉬고, 문을 닫고 인사를 사절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세 번이나 공을 집으로 찾았는데, 공이 청맹(靑盲)으로 칭탁하였다. 세조가 바늘을 가지고 찌를 것처럼 하여 시험하니, 공이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았다. 세조는 마침내 공을 등용치 못하였고 공도 화를 면하였다. <묘비>
○ 이씨 조선의 인재가 세종조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도 지평에 뽑혔으니, 공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높은 이름이 일세의 중망을 받은 것이 어떠했겠는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이미 몸을 바치고서, 시국이 어지럽고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는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고,병을 핑계로 자취를 감추어 천년(天年)을 마침으로써 끝내 절개를 변치 않았으니, 명예도 또한 보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으로 임을 섬기고 선도(善道)로 명철보신한 것’이아닌가. <묘비>
○ 옛날에는 부인이 출입할 때, 머리쓰개가 없었는데, 공이 그것을 속칭으로 소위 너울[羅兀]이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 궁녀가 밖에 나갈 때에 쓴다 처음 만들어 바치니 지금도 쓴다.
○ 연안(延安)에 붕어가 나는 큰못이 있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관에서 붕어를 징수하거나 개인적으로 붕어를 요청하는 폐가 백성에게 미치므로, 사람들이 그 연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였다. 공이 부사가 되어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 하였다. 드디어 끊고 먹지 않으며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필원잡기》 <묘비>
○ 공은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한다.” 하였다. 《용재총화》
○ 제주의 예전 풍속에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장 언덕이나 구렁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제주 사람이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니,삼백여 명이 뜰 아래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땅에 드러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것이 없으니, 공이 응당 금년에 어진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까지 공의 세 아들이 다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 축(軸)이 아들 찬(禶)을 나아서, 뒤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월사집(月沙集)》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경은(耕隱)이요,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판(兵判)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심지가 먼저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밑에 살았다. 세종 정미에 문과에 뽑혔고, 한림(翰林)ㆍ정언(正言)을 거쳐 외임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갑술년간에 나라 일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선산 강정리(綱正里)에 살면서, 귀먹고 청맹이 되었다고 칭탁하여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은지 30여 년이었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궐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집이 가난하여 앉을 돗자리가 없었고, 먹을 때에 수저가 없었으나 태연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손이 많았으며 자녀가 아홉 사람 출입하는 데는 탈것이 없어서 걸어 다녔다. 사실이 《청백전》에 실렸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 김숙자(金叔滋)가 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귄 친구가 되었는데, 만년에는 병을 칭탁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김종직(金宗直)이 들어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였고,간혹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한집안의 처자라도 청맹이 거짓으로 칭탁한 줄 알지 못하였는데, 죽을 때에 임해서야 비로소 알았다. 부인 김씨와 함께 모두 나이 90세 죽었다. 《일선지(一善志)》 《해동잡록(海東雜錄)》 ○부제학 이준(李埈)의 일선지(一善志) 발문


조상치(曺尙治)

조상치는, 자는 자경(子景)이며, 호는 단고(丹皐)이다. 또는 정재(靜齋)라고도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문과로 병사(兵使)가 된 신충(信忠)의 아들이다. 기해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이 세종ㆍ문종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입어 오래도록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공양에 편리하도록 자청하여 합천(陜川)ㆍ함양(咸陽)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때에 집현전이 창설되었는데, 공이 부제학으로 뽑혔다.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드디어 문을 닫고 병을 일컬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이가 은퇴할 때가 못되었는데,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칭탁하기를,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세조가 그의 속뜻을 알고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다릿병을 칭탁하고 들어가 사은하지 않았다. 세조가 백관을 시켜 동대문에서 전송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벗어나 돌아갔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의 절조가 아니면 한 광무(漢光武)에게 용납될 수 없고, 한 광무의 성스러운 덕이 아니면 엄자릉의 높은 절조를 이루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유사(遺事)》
○ 단종조에 벼슬이 부제학이었는데,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마단(麻丹)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 이름이다. 에 퇴거하여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일찍이 큰 돌 한개를 얻어서 쪼지 않고, 꾸미지 않고, 그 표면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曹某)의 묘’라 하고, 자서(自序)하기를,‘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 앞에 세워라.” 하였다. 공이 죽으매, 여러 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었다.공이 일찍이 자규(子規 두견새)를 읊은 사(詞)에,

접동 접동 접동새 소리 / 子規啼子規啼
그 무엇을 호소하노 /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 돌아가리 / 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 땅을 날아서 건너고저 / 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는 깃을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 看他衆鳥摠安巢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 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로웁고 그 모습 초췌하다 / 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뉘라서 널 돌보리 /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랴 / 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 강개불평(慷慨不平)은 /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못 셀 것을 / 屈指難盡數

하였는데, 대개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자규 노래를 듣고, 느낌이 있어 화답한 것이다.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박팽년이 보내 편지에 말하기를, “행차 뒤에 일어나는 티끌을 멀리서 바라보니 높아서 미치기 어렵도다.” 하였고, 성삼문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箕山)ㆍ영수(潁水)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장(曺丈)의 죄인이라.” 하였다. 《영남가찬(嶺南家撰])》


조변륭(曺變隆)

조변륭은, 본관은 창녕이니, 단고(丹皐) 상치의 아들이다. 세종 갑자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 상치가 영남에 돌아가 숨던 때에 그의 아들인 변륭은 어버이가 영남에 있으므로 벼슬에 종사할 형편이 못되어 드디어 같이 돌아갔다. 뒤에 발탁되어 예조 참의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자손에게 유언하여 노릉조(魯陵朝) 부지괴원정자(副知槐院正字)라 묘석에 표하고 참의(叅議)직함은 쓰지 말라 하였다.


조려(趙旅)

조려는, 자는 주옹(主翁)이며, 호는 어계(漁溪)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니, 계유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종직의 방하(榜下).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단종이 내쫓긴 뒤에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고을 서쪽 원북동(院北洞)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수목이 울창하였는데, 공이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어계(漁溪)라 하였다. <본전(本傳)> 《성창랑집(成滄浪集)》 ○ 《어계집(漁溪集)》이 한 권을 후손 영호(榮祜)가 안음(安陰) 군수로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 낙동(洛東)에 돌아와서 낚시질로 몸을 마치었으니,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金時習)과 같았다. 깊이 스스로를 숨겨서 사람들이 일컬을 것이 없었다. 일찍이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지은 그 시의 대략에,

머리 돌려 눈을 드니 강산은 저물었고 / 回頭擧目江山暮
땅은 넓고 하늘은 아득하니, 생각 또한 아득하다 / 地闊天張思渺茫
만고풍류 두목지(杜牧之)는 취미수(翠微峀)에 올랐는데 / 杜牧旣上翠微峀
국화 따는 도연명(陶淵明)은 술 오기만 기다림을 / 陶潛悵望白衣郞
복희씨와 헌원씨는 아득하여 슬픔이 한이 없고 / 羲軒遠矣悲何極
요임금과 순임근은 뵐 수 없어 절로 마음 슬프네 / 勛華不見心自傷
시 읊는 붓 밑에는 하늘땅이 넓었는데 / 沈吟筆下乾坤闊
취해서 어지러운 술잔 앞엔 세월마저 더디도다 / 爛醉樽前日月長
슬프다, 늙은 몸이 살아 늦도록 고생하니 / 嗟哉潦倒生苦晩
일편단심 고운 님을 꿈속엔들 잊을 소냐 / 懷佳人兮不能忘

○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 속에 싸서 두고 그 빛을 감추고 초목과 같이 썩어도 뉘우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 후인이 측량할 수 없다. 만일 서산(西山)의 백이ㆍ숙제가 당시에 났더라면 반드시 서로 더불어 마음을 터 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을 것이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지은 <비문>
○ 공이 일찍이 백이산(伯夷山) 밑에 살았는데, 숙종 기묘에 단종이 복위된 뒤에, 영남 선비 신만원(辛萬元) 등이 공의 절개와 행실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산 밑에 사당 서산서원(西山書院)이다. 을 세웠는데, 공과 김시습ㆍ원호ㆍ이맹전ㆍ성담수ㆍ남효온을 향사하였다.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자는 이수(耳壽)이며, 호는 문두(文斗)이다. 본관은 창녕이니, 교리 희(熺)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다.
○ 아버지 희가 성삼문에 연좌되어 폐고(廢錮 벼슬길을 막는 것)되었는데, 공은 지극한 행실과 높은 식견으로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물러가 살면서 한 번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 그 때 죄인의 자제는 의례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去就)를 보는데 머리를 숙이고 취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 공이 높은 가문의 자제로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촌사람들이 보기를 농사꾼같이 하였다. 그 조카 몽정(夢井 교리 담년(聃年)의 아들)이 경기 감사로 순시하던 차, 그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았으나, 고을 사람이 그의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물색하여 알아 가지고 그 문에 이르니, 초가집이 엉성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요,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는데, 공이 손을 저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우계집(牛溪集)》


윤혜(尹譓)

윤혜는,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관찰사 임(臨)의 손자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르렀다.
○ 단종이 내쫓기니, 공이 예조 좌랑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갔다. 임종시에 충효(忠孝) 두 글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 공의 숙부 지정(之定)이 딸이 있어 권완(權完)에게 출가하였는데, 완의 딸이 단종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완이 형을 받아 죽으니, 공이 밤에 신을 벗고 한강가로 도망하였으며, 이어서 가족을 끌고 호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본전(本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자는 열경(悅卿)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고려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일성(日省)이요,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인데,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동봉(東峰)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청간공(淸簡公)이다.
○ 숙종조에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사인(士人) 김시습이 중이 되어 세상에서 도망하였는데, 그 문장과 절행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뒤의 명현(名賢)들이 지금 세상의 백이(伯夷)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증직하고 치제하면 절의를 격려하는 도리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특별히 증직하라.” 하니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장릉지(莊陵志)》
○ 공이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능히 글을 알았다. 일가 할아버지[族祖]인 최치운(崔致雲)이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말은 늦게 하나 정신은 민첩하여 글에 대하면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 세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물었다.[桃紅柳錄三月暮]”는 것과,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珠貫靑針松葉露]”는 것 등이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읊기를, “비도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고. 누런 구름이 쪼각쪼각 사방으로 흩어지누나.[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다섯 살에 대학을 통하고 능히 글을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이름이 났다. 허 정승 조(稠)가 찾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자(老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다.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老木開花心不老]” 하매, 허정승이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 바 신동이다.” 하였다. 세종이 듣고 명하여 승정원으로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이 시험하기를, “동자의 공부는 백학(白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하매, 공이 대답하기를,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에 뒤집는도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하였다. 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앉아서, 시를 짓게 한 것이 많았다. 이창이 벽에 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이 그림을 두고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매, 곧 대답하기를,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가.[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혹은 그 아버지 일성(日省)을 불러서 전교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고자 하나, 남이 들으면 해괴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가르치고 길러,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곧 비단 오십 필을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니 공이 그 끝을 모두 이어서 끌고 나갔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명성이 한 나라에 진동하여 ‘다섯 살’이라고 불렀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이 임금의 포장을 받고서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단종 을해에 바야흐로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중이 되어 절에 의탁하였다. 《율곡집(栗谷集)》 《명신록(名臣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영발(映發)하며, 간솔(簡率)하고 경직(勁直)하였다. 시사를 슬퍼하고, 세속에 분개하여, 울적한 기운을 펴지 못하고 시속을 따라 처세하지 못하여, 드디어 물외에 방랑하였다.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렀다. 고도(故都)에 유람하여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온갖 서적에 빠짐없이 통달하여 사람이 거론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곧장 말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상하고 강개한 마음을 풀 데가 없어서, 세상 풍운ㆍ천석ㆍ화과(花果)ㆍ조수ㆍ인사의 시비ㆍ득실과 귀천ㆍ사생으로부터 성명ㆍ이기ㆍ음양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문장에 붙였기 때문에 그 글이 물이 솟구치고 산이 일어나듯 하며,산이 온갖 물상을 간직하듯이, 바다가 모든 생물을 감추듯이, 신(神)처럼 부르고 귀(鬼)처럼 화답함이 번갈아 나타나고, 단계별로 나와서 성률과 격조에 그리 유념하지 않아도 생각과 운치가 높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도리에 정밀하여 연구하고 수양하는 공부는 적으나,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여 자연스럽게 해득함이 있어서 의논이 유가(儒家)의 종지를 잃지 않았고,선교(禪敎)ㆍ도교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병폐의 근원을 연구하였으며, 선어(禪語)를 하기를 좋아하여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므로, 늙은 중으로서 그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자라도 감히 대항하여 변론할 이가 없었다. 명성이 일찍 드러 났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마음은 유(儒)이면서 행적은 불(佛)이었는데,세상 사람들이 해괴히 여길까 하여 짐짓 미친 태도를 취하여 실상을 숨기려 한 것이다. 선비가 글을 배우고자 찾아오면 나무나 돌로 때리거나 활을 쏘려 하면서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산전을 개척하기를 좋아하여 귀한 집 자제에게도 반드시 밭일을 시키니 끝까지 수업하는 자가 적었다.
○ 수락정사(水落精舍)에 들어가 살면서 도를 닦았다. 유생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법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또한 말하여 주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한 세상을 조롱하였다. 비록 불가에 들어가 세상을 피하였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거리에 자나다가 눈으로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한참 동안 박힌 듯이 서 있기도 하고,간혹 거리에서 소변을 보면서 뭇 사람들이 보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서로 다투어 기와조각과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아다녔다. 《명신록》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세조가 내전(內殿)에 중을 불러들여 법회(法會)를 벌였을 때, 공도 또한 뽑혀서 참여하였는데, 홀연 이른 새벽에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뒤를 밟으니,일부러 거리의 거름구덩이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거느리고 다니는 상좌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音調))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감돌았다. 매양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상좌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번 읊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성품이 술을 즐기어 취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세종 대왕을 뵈올 수가 없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며 지성껏 섬겼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이 대사를 받든 지가 오래나, 아직도 한번 설법을 들려주지 아니하니 대사의 청정(淸淨)하신 법안(法眼)을 마침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저희들이 방향을 잘 알지 못하니, 금 집게로 눈에 가린 것을 벗겨 주소서”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크게 법연(法筵)을 열라.” 하고, 공이 가사(袈裟)를 갖춰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중들이 가득 모여서 합장하고 꿇어 앉아 듣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모르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에 매었다.공이 또 말하기를, “소 먹일 꼴을 가져 오라.” 하여 소 엉덩이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사람의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담에 말하기를 소 뒤에 꼴이라 한다. 여러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책《금오신화(金鰲神話)》을 저술하여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후세에 반드시 설잠(雪岑)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책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전등신화(剪燈神話)》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평소의 심회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었다. 시집(詩集)에 미자(薇字)ㆍ궐자(蕨字)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에 비가 내린 뒤에 시냇물이 불어서 넘쳐 흐르는 때를 만나면 종이를 썰어 100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에 따르게 하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반드시 물살이 급한 곳을 택해 앉아서 읊조렸다.율시(律詩)나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지어 종이에 써서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고,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지은 시가 거의 100여 수나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 생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서 있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 문득 곡하며 그 부분을 깎아버렸다. 어떤 때는 종이에 시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 어떤 때는 나무로 농부의 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어서 책상 옆에 두고 하루종일 들여다 보다가 곡하고 불태워 버렸다.어떤 때에는 자신이 심은 벼가 심히 무성하여 이삭이 탐스러워 볼 만한데도, 술이 취한 때에 낫을 내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버리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달밤에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기를 좋아하였는데, 외우고 나면 반드시 울었다. 제목(除目)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대관이 된 자가 혹시라도 인망이 없으면 반드시 울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슨 죄를 졌는가.” 하였다. 《장릉지》
○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 등이 공을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막 대궐에 들어가느라고 사람을벽제(辟除)하고 있는데, 공이 헤진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띠고 패랭이를 쓰고 거리에서 거정을 만났다. 비켜서지 않고 머리를 제치고 쳐다보며 부르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 이 평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고 대답하며 초헌(招軒)을 멈추고 얘기하니, 온 거리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그때에 조정 벼슬아치 중에 공에게 모욕을 당한 자가 있어서 서거정을 보고 조정에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만 두게 그만 두게, 미친 사람을 상관할 것 있나. 지금 이 사람을 죄 주면 후세에 반드시 자네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네” 하였다. 《명신록》
○ 지관사(知館事) 김수온(金守溫)이, “맹자가 양(梁) 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본 일을 논함”이라는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 보였다. 유생 한 사람이 삼각산에 가서 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호 가 장난을 좋아하도다. 이것이 논제(論題)에 합당한가.”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런 제목을 못 낼 것이다.” 하고 붓을 달려 한 편을 지어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게.” 하였다.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읽다가 끝마치기 전에 갑자기 묻기를,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절에 있는고” 하였으니, 그를 알아봄이 이와 같았다. 그 논(論)에 대략 말하기를 “양혜왕은 본시 제후(諸侯)로서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가히 볼 것이 아니라.” 하였다. 《율곡집》 《명신록》
○ 도성에 들어오면 매양 향교동(鄕校洞) 남의 집에 붙어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이 찾아오면 공이 예(禮)를 갖추지 않고,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얘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모가 서대감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뒤에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수일 뒤에 서거정이 매양 다시 찾아와 보았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신숙주가 소시에 친한 친구로서, 공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 주인을 시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눕게 한 뒤에 가마에 태워 신숙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이 깨어 속은 줄 알고 놀라 일어나서 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열경이 어째서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였다. 공이 입을 다물고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그 뒤에는 종적을 더욱 비밀히 하였다.
○ 엄자릉(嚴子陵)의 조어도(釣魚圖)에 시를 지어 쓰기를,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위에서 연파(烟波) 낚는 저 늙은이 / 桐江江上釣煙波
생계는 소연(蕭然)하여, 도롱이 하나뿐이로다 / 生計蕭然一箇蓑
한(漢) 나라 천문대에 객성(客星) 아니 비쳤던들 / 漢殿若無星象動
깨끗한 몸 천추 뒤에 누명은 없을 것을 / 千秋定不婁名侯

하였다. 《노릉지》 ○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숙주가 태공(太公)ㆍ자릉(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시를 지어서 조롱하였다.” 하고 《후정쇄어(候鯖瑣語)》에는 태공의 조어도 시는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 하였으므로 서거정의 아래에 기록되었다.
○ 어떤 사람이 김수온이 좌정하고 일을 전하매, 공이 말하기를, “괴애(乖崖)가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좌화(坐化)하는 것이 예(禮)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만 귀히 여기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조우(祖雨)라는 중이 일찍이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자(莊子)》를 배웠다. 그 중이 어떤 종실(宗室)의 집에 이르렀는데 공이 뒤늦게 도착하여 짐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가 노(盧)에게 수학하였다 하니 그게 사람 축에 드는 자인가, 만일 여기 오면 내가 꼭 죽이겠다.” 하였다.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툭 뛰어 나오며 말하기를,“공이 감히 정승에게 공공연히 욕을 하니 나를 죽이고 싶거든 죽여 보라.” 하였다. 공이 조우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 하니,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싸움을 뜯어 말려서 조우가 간신히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그 뒤에 조우가 공을 수락산(水落山)에서 만났는데 공이 반가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찾아 왔는가?” 하고 밥을 지어먹게 하였다.밥이 들어와서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할 때, 숟갈을 입에 이르려 할 때마다 공이 미리 발로써 땅 위의 먼지를 밥숟가락에 묻혀서 한 술도 떠먹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노모(盧某)에게 수학하였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
○ 학조(學祖)는 공의 일가로서 중이 된 자인데, 공에게 승복하지 않고 매양 더불어 항거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동행하는데, 그 때에 날이 비로소 갰는데 길 옆에 산돼지가 칡뿌리를 파내서 깊은 웅덩이가 생긴 곳에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이 속에 들어가서 한번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려 하는데,네가 나를 따를 테냐?” 하고, 곧 둘이 흙탕물에 들어가서 철벅거리다가 나왔다. 공은 몸과 의복에 한 군데에도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다 젖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나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월정만필》
○ 신축 연간에 공이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고 나이 43세 글을 지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었는데, 그 대강에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펴신 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첫머리요, 삼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옵거늘, 어리석은 불효자가 가계를 이어받고도 이단(異端 불교)에 미혹타가 늦게 서야 후회하노라.[帝敷五敎 有親居先 罪列三千 不孝爲大 愚騃小子 似續本支 沈滯異端 末路方悔]” 하고,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전처럼 하다가 얼마 후에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중이 되었다. 《명신록》 《추강냉화》
○ 임인 이후에 세상이 장차 쇠락할 것을 알고 여염간에 버린 사람으로 처신하며 날마다 장예원(掌隸院)에서 노비에 관련된 문제로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말하기를, “너 그만 두어라.” 하였다. 정이 못 들은 체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위태롭게 여겨서 예전에 교유(交遊)하던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공이 혼자 거리의 불량한 자들과 같이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서 늘 바보처럼 웃었다. 뒤에 혹은 설악산(雪岳山)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春川)산에도 살기도 하여 출입이 일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천 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 자는 정중(正中)ㆍ홍유손(洪裕孫) 자는 자용(子容)ㆍ안응세(安應世) 자는 자정(子挺)ㆍ남효온(南孝溫)이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그의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빼앗아가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다시 홀연히 그 사람에게 반환을 청구하니, 그 사람이 주려하지 않았다. 공이 송정(訟庭)에 나가 대면하여 떠들썩하게 다투는데 무식한 장돌뱅이들 같았다. 마침내 승소하여 문서가 완성되니 품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개천 속에 던졌다.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무시함이 이와 같았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공이 풍악(楓岳)에 놀러가려 하는데 전날에 여러 명사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서로 대하여 담소하다가 홀연 몸을 창 바깥 두어 길 되는 곳으로 떨어뜨려 매우 다치고 숨도 못 쉬니 여러 손님들이 분주히 구환하여 깨어났다. 손님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하니 공은,“자네들은 다락원에 가서 나를 기다리기나 하게. 내가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리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손이 같이 다락원으로 가보니 공은 먼저 와 있었는데 조금도 떨어져 다친 기색이 없었다. 효온이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하여 환술(幻術)로 우리들을 공갈하고 속이는가.” 하였다.
○ 계축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나이 59세였다.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3년만에 사람들이 열어보니 얼굴이 산 것 같았다. 이분은 부처라 하면서 마침내 화장(火葬)을 하고, 그를 위하여 부도(浮圖)를 세웠다. 《명신록)》
○ 손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화상 두 본을 그리고, 스스로 찬(讚)을 짓기를, “네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네 말이 혹은 심(心) 매우 어리석으니, 너를 산골짝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다.[爾形至藐 爾言(一作心)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다. 《율곡집》 《미수기언(眉叟記言)》
○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 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세우고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저술한 시가 수만여 편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간혹 표절하여 자기가 지은 것으로 삼았다. 《사우행록》
○ 《사방지(四方志)》 1600, 《기산기지(紀山紀志)》 2백이 있고, 시권(詩卷)이 있는데 이자(李耔)가 그 글을 읽고 말하기를, “행색은 불가요, 행실은 유가라.” 하였다. 《미수기언》
○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사이에서 노닐기 좋아하였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공을 예로 대접하고, 다시 세속 살림을 회복하기를 권하니, 공이 편지로 사절하여 말하기를 “장차 긴 삽을 만들어서 복령(茯苓)과 백출(白朮)을 캐고, 일만(一萬) 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에 중유(仲由)의 무명옷을 기워 입고, 일천(一千) 산에 눈이 쌓일 때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떨쳐입으려 한다. 낙백(落魄)하여 세속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년 뒤에 나의 본 마음을 아는 이 있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율곡집》
○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맑고 흐리고 후하고 박함의 다름이 있어서 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의리(義理)로 말한 것이다. 김시습 같은 이는 글에 있어서는 천성적으로 얻었으니 문자(文字)에도 생지(生知)가 있는 것이다.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하는 것이 은미한 뜻은 숭상할 만 하나,꼭 명교(名敎)를 포기하고 멋대로 방자하게 처신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 그리하였는가.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어 후세에 김시습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하고 윤기(倫紀)를 붙든 것이 일월과 빛을 다툴 수 있어서 그 풍도를 듣고 나약한 사람도 태도를 확립할 수가 있었으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할 것이다. 《율곡집》
○ 명 나라의 천연(天淵)이란 사람은 원 나라 말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데 원 나라가 망하니,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은 내복(來復), 자는 견심(見心)이라 하였다. 수염은 깎지 않고 길렀다. 고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앤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뒤에 시를 지었는데 기롱하고 풍자하는 뜻을 머금고 있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아조의 매월당도 중이 되어서 수염을 기르고 말하기를, “머리를 깍은 것은 당세를 피한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는데 모르겠다. 내복의 기상을 사모함이 있어서 본받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부합한 것인가. 두 공의 절개가 대강같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계곡만필(溪谷漫筆)》
○ 허 하곡(許荷谷) 봉(篈)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이 되었으니 족히 볼 것이 없다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일절(一節)이 실로 중용(中庸)의 도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처신은 청(淸)에 맞고 폐인 노릇한 것은 권도(權)에 맞다[身中淸廢中權]는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였다.대답하기를, “매월(梅月)은 일종의 이상한 사람이다. 색은(索隱)ㆍ행괴(行怪)에 가까운 사람인데, 만난 시대가 마침 그러하여서 그 높은 절개를 이룬 것뿐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와 《금오신화(金鰲新話)》 같은 것을 보면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하다.” 하였다.


[주D-001]주의 …… 있었는고 : 당(唐) 나라 무후(武后)가 여주(女主)가 되어 당 나라의 국호를 없애고 주(周)라 하였다가 그가 죽은 뒤에 당 나라가 다시 회복되었다.그러므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무후의 집권시대에는 주의 연호를 썼는데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으면서 주의 연호를 빼고 대신 당의 연호를 썼다.
[주D-002]삼인(三仁) : 《논어》에 말하기를, “은 나라에 세 인인(仁人)이 있는데 미자(微子)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은 나라의 충신이다.
[주D-003]엄자릉(嚴子陵) :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친구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주D-004]고죽(孤竹) :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임.
[주D-005]시상(柴桑)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동리.
[주D-006]장릉(章陵) :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능호.
[주D-007]예양(豫讓) : 전국(戰國)시대 진(秦) 나라의 예양이 그의 주군인 지백(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고생을 겪으므로 그의 친구가 권하기를, “조양자 곁에 붙어서 신하 노릇을 하다가 기회를 노려 암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한 즉 그는 답하기를, “나도 그렇게 하면 일이 쉬울 줄 알지만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되어서 두 마음 갖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8]구언(求言) : 나라에 위급한 일이나 재변이 있을 때에 정치에 관한 좋은 의견을 해줄 것을 국중(國中)에 널리 구하는 것.
[주D-009]방효유(方孝孺) :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건문제(建文帝)의 왕위를 빼앗을 때 죽은 충신.
[주D-010]혁제(革除) : 명 나라 성조가 건문제를 제거한 것을 혁제(革除)라 함.
[주D-011]계유ㆍ병자 : 계유년(癸酉年)은 김종서가 죽은 해이고 병자(丙子)는 성삼문(成三問)이 죽은 때이다.
[주D-012]춘추에 …… 의리 :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지극히 엄하나 친(親)을 위하여 어버이에 관련된 나쁜 사실을 숨긴다 하였다.
[주D-013]한통(韓通) : 송 태조(宋太祖)가 임금이 되는 날에 후주(後主)의 신하 한통(韓通)이 대항하다가 죽었다.
[주D-014]경(經)과 권(權) : 경(經)은 정상적인 도리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한 도리를 말한다.
[주D-015]사릉(思陵) : 단종(端宗) 왕비 송씨의 능.
[주D-016]정려(旌閭) : 충신ㆍ효자ㆍ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
[주D-017]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 두견새는 임금이 죽은 혼이므로 존숭(尊崇) 한다는 말을 썼다.
[주D-018]기산(箕山)ㆍ영수(潁水) : 옛날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세상의 영화를 마다하고 숨어 살던 곳.
[주D-019]국화 따는 …… 기다림을 :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에 국화를 따고 있는데, 마침 흰옷을 입은 사람이 술을 가져 왔으니, 그것은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것이었다.
[주D-020]《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源)이 임금에게 쫒겨나서 애국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를 지었다. 이소는 장편의 운문(韻文)으로서 중국 사부(辭賦)의 조(祖)가 되었다.
[주D-021]미자(薇字)ㆍ궐자(蕨字) : 미(微)자ㆍ궐(蕨)자를 많이 쓴 것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꺾은 것을 의미한 것임.
[주D-022]제목(除目) : 관리(官吏) 임명(任命)의 명부.
[주D-023]벽제(辟除) : 재상이 출입할 때에 앞에 잡인이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
[주D-024]역책(易簀) : 죽을 때에 임하여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꾼다는 말.
[주D-025]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 자로(子路)가 죽을 때에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26]중유(仲由)의 무명 옷 :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인데 무명옷을 입고 좋은 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논어(論語)》에 있다.
[주D-027]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 : 진(晋) 나라 명사인 왕공(王恭)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눈 속에 걸어다니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했다.


면암선생문집 제20권
 기(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


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주D-001]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 :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
[주D-002]소광(疏廣)ㆍ소수(疏受) : 소광은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태자 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조카인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광이 수에게 말하기를 “벼슬이 높고 이름이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 하고 둘이 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漢書 卷71 雋疏于薛平彭傳》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龜)]


지제교 어유귀(魚有龜) 지음

계사년 6월 병자삭 12일 정해에 국왕은 신 예조 정랑 길경조(吉景祖)를 보내어 고 직제학(直提學) 최덕지(崔德之), 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고 사인(士人) 최충성(崔忠成),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 네 신하의 영전에 하유하고 제사를 지낸다. 국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도학이며 절행은 / 道學節行
세상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일 / 世所矜式
어질고 덕 있는 자 향사하라는 / 祀賢饗德
이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다네 / 邦有典則

강직하고 올곧은 학문을 지녀 / 侃侃直學
명망과 내실 모두 성대했는데 / 望實俱赫
영릉이라 세종 때 마침 만나서 / 遭際英陵
만리 전도 앞길이 창창하다가 / 進途方闢
고을 수령 인끈을 던져 버리고 / 一投州紱
월출산 산기슭에 편히 누워서 / 高臥月出
문 닫고 성현 글을 익혔었는데 / 杜門講學
무엇보다 맹자의 말씀 궁리해 / 玩賾鄒說
존양이란 편액을 걸어 붙이고 / 堂扁存養
힘쓰기를 깊고도 정밀히 하자 / 用功微密
문종께서 마침내 가상히 여겨 / 文廟乃嘉
조정이라 대궐로 불러와서는 / 召致內閣
순결하고 진실함 치하하시어 / 賞其純實
은총이며 예우가 두터웠건만 / 恩顧優渥
상소로 물러감을 자청하고서 / 尺疏乞骸
처음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 / 復遂初服
심산계곡 속에서 생을 마치니 / 終身邱壑
무너진 세상 풍속 감화되었네 / 風勵頹俗

그 뒤에 가정교훈 영향을 받아 / 庭訓所漸
태어난 손자 또한 어질었나니 / 有孫亦賢
스승의 문하에서 덕성 기르고 / 薰德師門
어린 나이 묘령에 도에 뜻 두어 / 志道妙年
식견이 고매하고 행실 독실해 / 識高行篤
마침내 가문 전통 계승하였네 / 遹紹家傳

어허, 나의 어질고 유능한 보좌 / 繄我良佐
이 나라의 귀감이 분명했거니 / 邦國蓍龜
충직하고 순수한 절조에다가 / 忠純其操
씩씩하고 공손한 자질을 지녀 / 莊穆其資
이름난 조부에게 직접 배우고 / 親炙名祖
큰 스승 문하에서 갈고닦은 뒤 / 切磋大老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걸 행해 / 尊聞行知
평소에 지닌 포부 크게 펼쳤네 / 大展抱負
세상의 도덕 풍속 책임지고서 / 身任世道
음기를 억누르고 양기 붙들며 / 抑陰扶陽
한 절개로 세 조정 섬기는 동안 / 一節三朝
도덕 업적 한층 더 빛이 났었네 / 德業彌章
의정부 들어온 게 네 번이었고 / 四入中書
남쪽에 귀양 간 게 두 번이거니 / 再遷南裔
오로지 우리 경의 진퇴에 따라 / 惟卿進退
시운의 길흉 성쇠 점칠 수 있어 / 占時否泰
무진 기사 그 당시 생각노라면 / 永言龍蛇
슬픔이며 후회를 어이 가누랴 / 曷勝悼悔
저기 저 영암 땅을 돌아다보면 / 睠彼朗山
충성스런 경의 넋 서린 곳으로 / 是卿湘沅
내 남쪽 선비들을 계도했는데 / 迪我南士
남긴 교훈 아직도 그대로 있어 / 餘敎斯存
학문을 강습하던 생각 일어나 / 淇竹興思
세상 떠날 때까지 잊지 못하네 / 沒世不諼

그리고 또 상서는 지혜 출중해 / 嶷嶷尙書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밟아 / 趾美先躅
시례의 가업 전통 계승하였고 / 業承詩禮
재덕의 도량 인품 가슴에 품어 / 器鞰珪璧
경연에서 왕도정치 토론을 하고 / 經幄討論
바른말로 임금을 인도하다가 / 昌言啓沃
불행히도 중도에 변고를 만나 / 中罹變故
황량한 골짝으로 은둔하였네 / 遯于荒谷
성현 학문 부단히 스스로 닦아 / 俛焉自修
일심으로 도리를 탐구하였고 / 一心求道
주자 연원 거슬러 올라가서는 / 探溯紫陽
빗장 열고 심오한 이치 더듬어 / 叩抽鍵奧
진정으로 알았고 실천했기에 / 眞知實踐
조예가 날로 더욱 정밀해지자 / 造詣益精
유학을 붙들어서 보호하였고 / 扶植世敎
후생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되니 / 模範後生
기풍이며 영향이 두루 미치어 / 光塵所曁
선비들 너나없이 흠모하였네 / 衿紳均慕

앞 시대와 뒤 시대 현인 네 사람 / 前後四賢
이 고장에 자취를 남기었는데 / 跡留斯土
조부와 손자 서로 대를 이었고 / 祖孫相望
부자가 아름다움 함께 하였네 / 父子並美
선비들이 다 함께 상의한 끝에 / 多士協謀
사당 세워 제사를 지내 주면서 / 立廟以祀
오른쪽 위치에다 배향을 하되 / 齊享于右
차례대로 줄지어 봉안하였네 / 列配其次
아름다운 편액을 이에 내리어 / 玆宣華額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했는데 / 俾聳瞻聆
백록동 서원 이름 서로 같아서 / 名叶鹿洞
천년을 사이 두고 함께 빛나네 / 輝映千齡
제관 보내 제물을 올리게 하니 / 遣官致酹
희생도 살 오르고 술맛도 좋다 / 牲酒肥香
영령들이여 부디 강림을 하여 / 靈其來格
아무쪼록 이 술잔 받아 들게나 / 庶歆此觴


 

[주C-001]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 녹동서원은 1630년(인조8)에 전라도 영암(靈巖)에 세웠는데, 1713년(숙종39)에 사액하면서 고유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최덕지와 함께 배향된 성종 때의 학자 최충성 및 농암의 부친 김수항, 농암 등의 순으로 열거하며 공덕을 기렸다.


간본 아정유고 제6권
 문(文)-서(書)
이낙서(李洛瑞) 서구(書九) 에게 주는 편지


비 내리는 밤에 등불을 밝히고 양철애(楊鐵崖 철애는 명(明) 나라 시인 양유정(楊維楨)의 호)의 시를 읽으니 그 시가 힘차고 쾌활하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이후의 재자(才子)들이야 여기에 비교하면 참으로 모기 소리와 같소.

족하가 나에게 부탁하여 그 장서(藏書)를 나의 자필로 교정하고 평점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내가 18~19세 때에 거처하던 집의 이름을 구서재(九書齋)라 하였는데, 이는 바로 독서(讀書)ㆍ간서(看書)ㆍ장서(藏書)ㆍ초서(鈔書)ㆍ교서(校書)ㆍ평서(評書)ㆍ저서(著書)ㆍ차서(借書)ㆍ폭서(曝書)를 일컬은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족하의 명자(名字)와 상부하게 되니 우연한 일이 아니오. 일찍이 구서재에 대한 시조를 지었으나 지금은 잊어 기억하지 못하오. 심초연(沈蕉硏 초연은 심염조(沈念祖)의 호)이 일찍이 도곡상공(陶谷相公 도곡은 이의현(李宜顯)의 호)의 소장서를 손수 평점하고 또다시 나에게 교점(校點)을 부탁하니, 그 책은 바로 《이십일사(二十一史)》인데 이는 모두 고인들이 남긴 전아(典雅)한 뜻을 이어받은 것이었소. 또 새해가 되었으니 족하는 많은 기서(奇書)를 얻어 슬기로운 지식이 날로 더해지기를 바라오. 나는 한가롭고 탈없이 지내는 형편이라, 창문에 비치는 햇빛이 항상 선명하며, 밤에는 잇달아 등(燈)을 밝힐 뿐이오. 여염의 나이든 친구인 간취자(看翠子) 이수익(李壽益)이 쓴 《금강기(金剛記)》 속에 낭선군(朗善君 종실로 이름은 우(俁))을 일컬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보내드리오. 마침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일본 종이를 보내왔으므로 시험삼아 먹을 갈아 놓고 붓을 휘둘러 옛사람들의 좋은 일을 찾아 쓰고 싶었소. 동성(同姓)ㆍ동한(同閈 같은 마을에 사는 것)ㆍ동지(同志)들 중에 좋은 사람을 회상해 보니 족하(足下)보다 더 좋은 이가 없소. 족하가 이미 나의 변변치 못한 편지를 간직하였으니, 종이가 나비 날개 같고 자획이 모기 다리 같더라도 모두 보내 주오. 내가 뽑아 등초하여 정의를 두터이하겠소.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다만《맹자(孟子)》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자여씨(子輿氏 맹자(孟子)를 가리킨다)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생(左丘生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킨다)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하여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이 참으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요, 당장에 팔아서 한때의 취포(醉飽)를 도모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서글픈 일이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파성(婆城)의 조경암(趙敬菴)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학문을 권면한 것이라 읽어 볼 만하였소. 세속 부랑자들은 《소학(小學)》 두 글자를 들으면 비평하고 나무라며,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기지개를 켜고 누우려 하니, 참으로 너무나 얄밉소. 족하는 심상한 말로 보아넘기지 않기를 바라오.

일본(日本)에서 모각(摸刻)한 역산비(嶧山碑 이사(李斯)의 글씨로 된 진(秦)의 덕을 칭송한 비)는 전가(篆家)에서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화악묘비(華嶽廟碑 한(漢) 나라 때의 비로 화산(華山)에 있었다)는 예서(隸書) 중에서 오확(烏獲 진(秦) 나라의 용사)과 임비(任鄙 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역사(力士))처럼 힘찬 것이라, 그것을 대하면 소름이 끼치며 떨리는 것이 마치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굵은 모래가 튀는 것 같고 군데군데 부러진 칼과 활촉이 노출된 격이라 장사(將士)의 가슴을 뚫고 표한한 장수의 목구멍을 찌르는 것이 연상되오. 족하는 세밀히 살펴보시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만은 그렇지 못하오. 그는 세 차례나 단 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먹곤 하오. 친구의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 주기 바라오.

나는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ㆍ《반계수록(磻溪隨錄)》ㆍ《동의보감(東醫寶鑑)》이니, 하나는 도학(道學), 하나는 경제(經濟),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방술로 모두 유자(儒者)가 할 만한 것이오. 도학은 진실로 사람됨의 근본이 되는 일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요즈음 세상에는 오로지 사한(詞翰)만을 숭상하며 경제를 멸시하니, 의술(醫術)이야 그 누가 밝히겠는가?
옛날부터 전해 오는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으니, 진명경(陳明卿 명경은 명(明)의 진인석(陳仁錫)의 자(字))은 청초한 문인이지만 경제에 몰두하였고, 왕자안(王子安 자안은 당(唐)의 왕발(王勃)의 자)은 경박한 재사이지만 의술에 통달하였다 하오. 나는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일찍이 기특히 여기며 사랑하였는데, 지금 족하는 침착하고 슬기로워 바탕과 재질을 갖춘데다가 나이 또한 한창이니, 사장(詞章)에만 전심하지 말고 항상 이와 같이 참다운 마음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일에 심력을 기울이시오. 그러면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는 탄식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되오. 창고 속에서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은 나야 말할 것도 없소. 이 두 책을 봉정(奉呈)하고 내키는 대로 세 책을 더 뽑아 보내니 이미 열람한 것은 중복해 보지 마시오.

삼가 이백시(李伯時 백시는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의 자)가 석탑(石榻)에 그린 선성(先聖 공자를 말한다)의 화상 및 72제자(弟子)의 화상을 보니, 자연(子淵 안연(顔淵)의 자)은 하관이 풍후하게 되어 빈요(貧夭)하지 않을 것 같고, 자공(子貢)은 얼굴이 파리하게 되어 재물을 많이 늘릴 것 같지 않고, 안쾌(顔噲)의 얼굴은 사납기가 번쾌(樊噲)와 같고, 번수(樊須)의 수염은 참으로 번수(繁鬚 텁석부리)이고, 양전(梁鱣)은 전어(鱣魚)를 들고 있으니 또한 무슨 의미요? 아마 백시(伯時)가 자기의 신통한 붓을 멋대로 내두른 것인가 보오. 그러나 관복(冠服)이 예스럽고 엄연하니, 마땅히 그것을 음미해 볼 것이지 까다롭게 그 수염에서 구해 볼 필요는 없는 것이오.

고종(高宗)이 찬(讚)을 지은, 후자리(后子里)ㆍ악자성(樂子聲)의 무리는 사적이 없는데도 억지로 그 찬을 꾸미고 보니 너무나 무미하여 도리어 붓을 휘둘러 의미를 붙인 백시의 것만 못하오. 한 위공(韓魏公 위공은 송(宋) 나라의 한기(韓琦)의 봉호)이 짓고 쓴 북악비묘(北嶽碑廟)는 은은하고 질박하며 아담하고 정제하니 참으로 대신(大臣)의 것이오. 서맥(書脈)은 노공(魯公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을 모방하였는데, 다만 자획이 보다 비대하면서 약하오. 왕원미(王元美 원미는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자)가 이를 보고 ‘칼날이 사방으로 뻗쳐 바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옳은 평가가 아니오. 난시(亂時)의 절신(節臣 노공(魯公)을 가리킨다)과 치세(治世)의 보상(輔相 한 위공(韓魏公)을 가리킨다)을 그 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오.

전에 남의 책을 빌어다 읽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문득 나도 그를 답습하여 눈이 어둡고 손이 부르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참으로 사람은 자신을 요량하지 못하는 것이오. 《유계외전(留溪外傳)》 첫 권을 보내니 저녁에 한 번 읽어 보고 내일 이른 아침에는 돌려 주오. 이는 모두가 효자(孝子)ㆍ충신(忠臣)ㆍ열처(烈妻) ㆍ 기부(畸夫)에 관한 것인데 세도(世道)에 보익이 되는 글이라, 매양 갑신년 대목을 읽을 때에는 눈물이 어리고 뼈가 아프며 간담이 서늘하오.
어떤 이가 나에게 소책(素冊 지금의 공책과 같다)을 주기에 그것을 벼루 머리에 두고, 한적할 때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고인들의 득의한 명문(名文)을 아무것이나 뽑아 낭독하고 나서, 급히 먹을 갈아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그 글을 쓰면 마음이 몹시 즐거웠소. 이때에는 비록 좋은 술과 아름다운 꽃이라도 이 즐거움과 바꿀 수 없었소. 이제 문득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명(明) 나라 문인 이몽양(李夢陽)의 자)의 글이 생각나서 한두 수를 기록하여 보내려 하는데, 이것은 내가 7~8년 전에 읽은 것이오. 《설부(說郛)》 1권을 돌려보내오.

내가 어제 남한(南漢)에서 돌아왔는데, 물이 깊고 맑으며 하늘이 드높았소.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회포를 참지 못할 것이 산음(山陰) 길만 못하지 않소.
《수색집(水色集)》에 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전고(典故)에 익숙한 이가 아니면 그가 공신(功臣) 허적(許)임을 알 수 없고, 서문을 짓는 이도 성명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허균(許筠)으로 생각되오. 그 책을 찍어내어 없애지 않으려 하면서도 누구인가를 숨기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매한 것이 이와 같소. 아는 이라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산해경(山海經)》의 글을 뽑고자 하니 잠깐 빌려 주시겠소? 연선(演蟬)을 보내니 이것은 족하의 필적인 듯하오.

내가 비록 학자는 아니나 매양 《근사록(近思錄)》을 애중하여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3~4조목씩 보아 남몰래 경계를 삼는 터이라, 잠깐도 놓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나 족하의 소청을 어떻에 따르지 않겠소. 9책을 모두 보내오. 이를 보내고 나면 내가 볼 책이 없으니, 《원문류(元文類)》나 혹은 《송시초(宋詩抄)》 두 책 가운데 하나라도 빌려 주는 것이 어떠하오.

해가 새로 바뀌고 사람은 점점 늙어가오. 군자는 밝은 덕을 높여야 할 것인데, 나는 해가 바뀐 후 남의 집 손이 되지 않으면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한 번도 한가한 틈을 타 상봉하지 못하니 마음이 불안하오. 그러나 창문의 햇볕은 따뜻하고 벼루의 얼음이 풀리므로 전에 하던 공부를 되찾고자 하오. 《전당시(全唐詩)》를 인편에 보내 주면 좋겠으며, 윤회매(輪回梅) 2수도 돌려보내 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일지록(日知錄 명말 청초(明末淸初) 고염무(顧炎武)의 저술)》을 3년 동안이나 고심하면서 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남이 비장(祕藏)해 둔 것을 얻어 읽어 보니, 육예(六藝)의 글과 백왕(百王)의 제도와 당세의 일에 그 근거를 고증한 것이 분명하였소. 아,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은 참으로 옛날의 기풍이 있는 큰 선비요.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족하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가 다시 이를 초(鈔)하겠소. 4책을 우선 보내니 잘 간수하여 보기 바라오. 전에 보내 준 조그마한 책(쓰지 않은 책을 가리킨다)은 아미 다 썼으니 족하는 계속 보내 주어 나의 초하는 일을 마치게 해주기 바라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또 여름이 되었소. 족하를 따라 경사(經史)를 토론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천 그루 도화(桃花) 속에서 미친 듯이 통음(痛飮)하거나, 아니면 문을 닫고 굶주리고 누워 빈사전(貧士傳)이나 읽으면서 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의 글자 주(注) 내는 일 때문이오. 여러 운사(韻士)들의 시권(詩卷)을 보내니 한 번 보고 돌려주기 바라오.

어제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의 자)과 함께 묵계(墨溪)에 가서 용촌(龍村) 사는 임장인(林丈人 임씨의 어른이라는 뜻)과 만났는데, 장인은 소명하고 온화하며 자상한 분이었소.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낙서(李洛瑞)를 칭찬하면서 세 번이나 치사하였소. 이때 모인 사람은 10인인데 시를 지은 사람은 7인이었소. 장인이 굳이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도 마지못해 지었소. 이제 장인이 하신 말씀을 써서 보내거니와 ‘과거(科擧)는 장사꾼이요, 문장은 이단이다.’ 하였소. 이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헤어져서, 오늘은 나는 듯이 미호(渼湖)로 향하여 가고 있소. 담원팔영(澹園八詠)을 보내 주면 좋겠소. 밤중에 차[茶]를 빌려가기에 족하가 편찮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병환이 어떠하오?

나처럼 나태한 사람이 어떻게 날마다 자전각(字典閣)에 나아가 허다한 글자를 교열하겠소? 옛날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송 선생(宋先生)은 반드시 남에게 책을 빌려 주고 독서를 권하였다가, 빌려갔던 사람이 책을 돌려왔을 때 책에 보풀이 일지 않았거나 때가 묻지 않으면, 선생은 반드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다시 빌려 주곤 하였소. 그런데 어느 악소년(惡少年)이 책을 빌어다가 읽지 않고 돌려 주면서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 그 책을 밟고 문질러 많이 읽은 것처럼 꾸민 일이 있었소. 족하는 송 선생의 중후함을 본받으면 좋겠소. 하물며 내가 악소년처럼 밟고 문지르지 아니함에랴?

고려 말년 제공(諸公) 중에서 당(唐) 나라의 문장을 이을 만한 이는 포은(圃隱) 선생이오. 그러나 화려한 것이 익재(益齋)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고, 기이하고 웅건한 것이 목은(牧隱)에 미치지 못하오. 대개 익재는 원(元) 나라 격조요, 목은은 송(宋) 나라 문체이니, 어찌 일찍이 포은의 유연한 운치에 미치겠소? 또 명가(名家)의 글이 있거든 보내 주면 좋겠소.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소. 그러나 박식한 이에게 강문(講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족하는 근본을 안다고 할 만하오. 내가 먼저 찾아갈 것이니 기다려 주기 바라오. 이공(李公)께서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의 호)의 《여지(輿地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말함)》를 보겠다고 하므로 내가 가져다 보여 드리려 하니, 보내 주기 바라오.

춘추 시대 1백 24개 열국에 외자로 된 국호가 많고 간혹 두 자로 된 국호가 있으니, 두 자로 된 것은 소주(小邾)ㆍ남연(南燕) 같은 것이오. 이 책에는 잇달아 써서 기본 숫자에 차지 않으니, 두 자 국호까지 분정하여 기본 숫자를 채워 보내 주기 바라오.

원(元) 나라 태정제(泰定帝)가 천하를 나누어 18로(路)를 만들었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문헌통고(文獻通考 송(宋)의 마단림(馬端臨)의 저서)》와 《청일통지(淸一統志 화신(和珅) 등이 지은 전국의 지리서)》에서 연혁(沿革)을 상고해 내서 18로를 채워 쓰게 되었으니 지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내 주기 바라오.

나의 생각에는, 중원(中原)은 원기(元氣)가 모인 곳이라 일월(日月)이 바로 비추고 수토(水土)가 그 조화를 이루어, 성현의 기지가 되고 문헌의 육성지가 되었다고 보오.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의 지역으로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1만여 리가 되나 역대의 문물이 왕성하여 볼 만하고, 유구(琉球)는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하나의 섬이나, 자손들을 중원에 입학시켜 명(明)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근실하므로 오랑캐의 풍속을 크게 혁신하였소. 이는 모두 내가 전적(典籍)에서 상고한 것으로 나만이 흠모할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오.

우리 조선은 기성(箕聖)이 피난 온 곳으로 요동(遼東)과의 거리가 1천여 리밖에 되지 않고, 전장(典章)과 예악(禮樂)은 사이(四夷)의 으뜸이라, 저 교지ㆍ유구와 비교해 볼 때 그 문명이 어떠하겠소? 그리하여 전사(前史) 외이열전(外夷列傳)을 두루 읽어 보니 조선이 제일이요, 다음은 안남(安南)이요, 그 다음은 유구의 차례로 되어 있으니 이는 세력이 강한 것을 이름이 아니라 문명으로 따진 것이오. 그러므로 최치원(崔致遠)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승우(崔承祐)가 당(唐) 나라 조정에 과거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고, 박인량(朴寅亮)이 송(宋) 나라에 사신가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하면서 김부식(金富軾)을 특별히 세가(世家)에 나열하였소.
호원(胡元)에 이르러서는 익재(益齋) 이공(李公)이 서천(西川)에 봉사(奉使)하고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였으며,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가 제과(制科)에 올랐소. 우리 조선의 개국(開國)은 황명(皇明)과 함께 일어났는데,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거의 없는 해가 없었소. 이와 같이 2백 년 동안 계속하여 그 주고 받은 의식의 성대함과 보고 느낌에 진지한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오. 그러나 도리어 세 조정(당(唐)ㆍ송(宋)ㆍ원(元))만큼 성대하지는 못하오.

묵장(墨莊)이 나에게 먼저 《패문시운(佩文詩韻)》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운략(韻略)》을 청하였더니, 《운략》은 희귀한 책이라, 유리창(琉璃廠) 20여 서방(書坊)을 뒤져 찾은 끝에야 비로소 이 책을 얻었다 하오. 그처럼 두터운 정의에 참으로 감격하였소. 갈 길이 바빠 미처 볼 겨를이 없었는데, 족하는 먼저 그 범례를 깨달아 우리들의 운문(韻文)에 대해 모두 금쪽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반공(潘公)이 이른바 ‘문운(文運)에 관계가 있다.’고 한 말이 허언이 아닌 듯싶소.

《통지(統志)》포주(蒲州)조에 이른 ‘기자묘(箕子墓)’는 몽현(蒙縣)에 있는 기자묘를 인증함에 불과하고, 별도로 포주에 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대개 기자묘가 셋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몽현에 있고, 하나는 평양(平壤)에 있고, 하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소.

편지를 받고 근간의 기거(起居)가 편안함을 들으니 우러러 위로되는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소. 이 못난 사람은 이원(摛院)에 번들어서 날마다 1만에 가까운 많은 말을 쓰니 손가락이 마비되었고, 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널 날이 한 열흘 남았는데 두목(頭目 중국 사신 중에 무역을 위해 따라온 상인)을 공궤(供饋)하기 위하여 내일은 고을로 돌아가야 되겠소. 이처럼 수고로우니 크게 탄식한들 어찌하겠소.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지금 서 직각(徐直閣 직각은 벼슬 이름. 서영보(徐榮輔)를 말함) 댁에 있고, 기타는 모두 고을 관아에 있으므로, 《청정국지(蜻蜓國志)》2책만 보내드리오.

《지지(地志)》의 초본을 한 번 자세히 보니 참으로 물샐틈 없이 잘되었다고 할 만하나 명환인물(名宦人物)은 실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 못난 사람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한결같이 《승람(勝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말함)》에 의존하여 기록하고,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에서 세밀히 간추려 《승람》에 누락된 것을 하나하나 다 보충해야 할 것이오. 또 반계(磻溪 반계는 유형원(柳馨遠)의 호)의 《지지(地志)》와 최연촌(崔煙村 연촌은 최덕지(崔德之)의 호)의 《유초(流鈔)》에 의해 수록하되, 명종조(明宗朝)로 한계를 하고, 선조(宣祖) 이후는 우선 생략하였다가 가능할 때에 처리하였으면 하오. 《승람》에 기록된 것에 지나치게 소략하거나 잘못된 부분은 신빙성이 있는 책을 참고하여 첨부할 것이며, 효자(孝子)ㆍ열녀(烈女)에 이르러서도 《명사(明史)》의 예에 의거하시오. 이미 어제 만나 의논했듯이 《여지(輿地)》도 사류(史流)에 관계되는 것이니, 십분 신중하여 주기를 바라오.
인생의 이합(離合)이 흐르는 물과 뜬구름 같아서 본래 정처가 없는 것이나, 금년 봄처럼 분장(分張)이 극심한 적은 없었소. 나는 다행히 병이 없고 지난달부터 또다시 《무예도보(武藝圖譜)》의 일을 계속하였는데, 미구에 일을 마치겠으나 곧 내각(內閣)으로 들어가 어제(御製)를 교열하게 되었소. 유료(柳寮 유득공(柳得恭)을 가리킨다)도 이 일로 여지국(輿地局)에 있지 않소. 그 부하(府下)에 사는 사인(士人) 이인섭(李仁燮)은 곧 나와 단문지친(袒免之親 삼종(三從) 또는 사종(四從)의 친족)이오. 지난번에 연동(蓮洞) 장신(將臣)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갔었는데, 인섭이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곧 본부 향인의 데릴사위가 되었소. 지금 자녀를 낳았으나 영원히 먼 곳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소. 곧 하인을 보내 찾아 보고 무슨 일이건 곡진히 돌봐 주며, 그로 하여금 관아에 출입하게 하여 믿고 의지할 곳이 있게 하면 매우 다행하겠소. 또한 그 사람됨이 근실하기만 하지 다른 재주는 없는지라 친근히 한다 하더라도 세도를 끼고 폐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오. 더구나 나의 족질(族姪)이 귀부의 부민(部民)이 되었으니 역시 드문 일이오.
또 들으니, 길현(吉衒)이란 자가 전관(前官) 별감(別監)이었는데 사건에 연루되어 부옥(府獄)에 구금되었다고 하니, 그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조부 고(故) 별제(別提) 인화(仁和)는 곧 관서(關西)의 부자(夫子 스승)였소. 향천(鄕薦)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신임무옥(辛壬誣獄)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소.
선조는 그 당시에 주서로 물러났고 / 先祖當年注書退
미손(微孫)은 오늘날 별제로 돌아오네 / 孱孫今日別提歸
성세에 어찌 감히 기미 알아 간다 하랴 / 敢言聖世知幾去
가을철의 살찐 노어 생각나서라네 / 却憶鱸魚秋正肥
선왕이 그 자손 연(衍)을 불러 보고 그 시(詩)를 읊조리며 가상히 여겨 포상하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오? 현(衒)의 죄가 이미 원악대대(元惡大憝 반역죄를 범하거나 크게 악한 것을 말함)가 아니라면 그 어찌 옛날을 생각하여 용서해 줄 길이 없겠소? 모름지기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여 되도록이면 속히 감방(勘放)하여 현인의 손자로 하여금 그 가문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거듭 편지를 받아 읽으니 손을 잡고 마주앉아 자세한 일까지 얘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더구나 ‘요즈음은 늘 화도시(和陶詩)만 읊조리고 조굴부(吊屈賦)는 짓지 아니하며 운명에 맡겨 버린다.’ 하니 흠모하오. 나는 또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일을 당하여 글자를 간추리고 자획을 조사함에 털끝처럼 미세한 데까지 이르고 있는데,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니 심력이 쉽게 풀어지고 그 번뇌를 이겨내지 못하겠소. 자신의 잔약한 몸뚱이를 돌아보매 겨우 형체만 갖추고 있는데, 나이 50에 믿는 것이라고는 밝은 눈 하나뿐이었소. 향조(香祖 청(淸) 나라 반정균(潘庭筠)의 호)가 말하듯이 다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고 하나, 운자(韻字)를 편집한 뒤부터는 공중을 쳐다보면 어른거리니 이는 실로 작은 일이 아니오.
근자에 영공(令公)을 양이(量移 죄수의 유배지를 가까이로 옮기는 것)한 것은 대개 《여지(輿地)》를 쉽게 성취하려는 것이니, 비와 이슬을 내리고 서리와 눈을 내리는 것이 모두가 조화 아닌 것이 없소. 편지 속의 허다한 가르침을 각중(閣中)의 여러분들과 의논하니, 대개 착수가 너무 늦어진 것을 한탄하나 내각(內閣)의 서적을 함부로 시골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소. 그리고 좌보(左輔)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차츰 옮겨 가까워지면 몹시 편리하겠으나, 이마 적적(謫籍)에 있으니 뜻대로 될지는 기필할 수 없소. 붓과 먹과 종이는 전과 같이 보내 준다 하니 그 말이 불가한 것은 아니오. 지금 보여 준 네 가지 어려움은 영공이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소. 대략 수찬(修纂)하였다가 후일에 다시 정정을 더해 완료하는 것이 일의 순서일 듯하오. 가능한 한 편리한 방법을 따라 속히 손을 써주기 바라오.
《인물고(人物考)》는 내각에 그 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기회를 보아 각신(閣臣)에게 요청하려 하나 기필할 수는 없소. 이 일이 마치 서담포(徐憺圃)가 전리(田里)에 쫓겨나가 《일통지(一統志)》를 편찬한 것과 흡사하니 어찌 이처럼 기이하게 일치하오? 《장릉지(蔣陵志)》 역시 지금까지 끌어올 일이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개정할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모(某) 태수(太守)를 두려워하겠소? 그 책이 모두 심대교(沈待敎 심염조(沈念祖))의 집에 있으니, 이는 그 배식록(配食錄)을 개수(改修)하기 때문이오. 찾아다가 교열하기 바라오. 배식록은 고증한 증거가 자세하고 명백한 것이라 없애지 못할 전적(典籍)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수정하면 본지(本志)의 힘이 덜할 것이오. 다만 초고(草藁)는 비장해 두고 내지 아니하니 어찌하겠소? 《경도지(京都志)》는 각중(閣中)에 있으니 거두어 보내겠소. 《황화여고(黃華旅稿)》는 내 마음대로 평점하여 감히 공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소. 다시 10여년 전 일부터 계속하면 그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전운(全韻)》초고 7장을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어 교열한 다음에 그곳으로 보내니 반드시 상세히 보아 주(注)를 달고 만약 잘못된 곳이 있으면 쪽지를 붙여 주시오. 간명(簡明)을 기하려 하나 어떻게 진선진미하기를 바라겠소. 만약 사반공배(事半功倍)의 방법을 얻는다면 글을 다루다가 머리가 희었다는 나무람을 면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니 하인을 보내거든 즉시 그 편에 부쳐 보내어, 여러 곳에 돌려 보여서 짧은 기일내에 완공하면 그 얼마나 시원하겠소? 결락된 곳은 대강 보충하여 뒤로 물리거나 도려내고 덧붙이는 지경이 되지 않게 하기 바라오. 돌려 보는 순서는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고, 다음은 집사(執事), 다음은 유(柳 유득공(柳得恭)), 다음은 박(朴 박제가(朴齊家)), 다음은 내각(內閣), 다음은 이 영공(李令公 영공은 존칭)으로 하여 물레바퀴와 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돌리려 하오. 7장을 지금 보내니 오전에 다 보아 주기 바라오.

지금 온 다섯 장에 부전이 둘만 붙었으니 좌우(左右 상대에 대한 존칭)는 피곤한가 보오. 조금 전에 내각에 불려갔었는데, 여러 곳의 지속(遲速)이 한결같지 않으니 극히 민망하오. 어제 물어 온 세 글자의 뜻은 명백하지 못하니 답답한 일이오. 난수(灤水)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명백하고 하나는 분명치 못하니, 요서(遼西)의 수명(水明)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경측(瓊畟)이 《한단순예경(邯鄲淳藝經)》을 보았는데 거기에 ‘― ―’라 한 것은 지금의 투(骰) 자요. 세(勢) 자의 훈(訓)은 지금 그 장이 있지 않으니 다시 상고하기 바라오. 좌우께서 하시는 교정이 정밀하여 다시 적수가 없는데, 유혜보(柳惠甫 혜보는 유득공의 자)가 그 뒤를 이어 탐구해 찾아내 좌우께서 알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니 혜보가 교서(校書)에 공부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교서의 묘리가 끝이 없어서인가 하오. 또 12장을 바꾸어 보내니 전의 것과 아울러 62장이라, 이틀 동안이면 마칠 수 있을 것이오. 성시도(城市圖)와 금강봉시(金剛峯詩)를 보내 드리오.

종용(慫慂)의 종(慫) 자는 권(勸 권면하는 것)자로 해석되니 글자 그대로 종용인 것이오. 지금 이 운례(韻例)에 용(慂) 자에다 권(勸)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고 종(慫) 자에 또 다시 경(驚 경동하는 것)의 뜻으로 해석을 붙였으니, 종 자 밑에는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오. 만약 종 자에 따른 해석이 없다면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오.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다름이 없소.

흉용(洶溶)의 용(溶) 자는 과연 오서(誤書)된 것이나, 강(洚) 자는 곧 강(降) 자인데, 하내(河內)의 물이름으로 홍수(洪水)와 같은 뜻이니 참작하여 개정하시오. 옥(剭) 자의 해석을 ‘주(誅 목을 베는 것)라 형(刑 형벌하는 것)이라’ 한 것은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오. 규(葵) 자 밑에 퇴(椎 방망이)의 뜻으로만 붙여 놓은 해석은 어제 삭제하려다가 말았는데, 종규(終葵)로 해석을 붙인다 하더라도 긴밀하지 못하오. 이미 본의(本意)가 있으므로 이와 같은 해석을 덧붙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는 운부(韻府)에 엮어진 문자(文字)와 흡사하기 때문이오. 규(葵) 자 밑에 성(姓)이라 써야 한다고 하나, 대개 성명(姓名)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는 것은 성과 인명으로 발음되는 것으로 사람의 성명에 따라 특별하게 하나의 별개 음(音)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니 바로 묵기[万俟]와 이기(食其) 같은 것이오. 그러나 규(葵) 자에 대해서는 그 음이 한 가지뿐이니 특별히 성(姓)이라는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소.
비(庳) 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례(義例)에 관계되는 것이니, 나타낼 만한 사람이 없으면 국명(國名)으로 해석을 붙일 뿐이오. 미(湄) 자에 대한 해석을 수초교(水草交 물과 풀이 한데 뒤엉키는 것)라 한 것이 가장 타당하니 그대로 바루어야 하겠소. 한 글자로 특별히 달리 발음되는 것은 두 가지 음으로 주(注)를 달 것이니, 항(缸) 자의 음이 강(江)과 항(降)으로 발음되는 따위오.
또 음은 같고 뜻이 다른 것과 글자의 뜻은 같고 음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본주(本注) 밑에 권(圈 둥근 계선)을 치고 별도로 주를 달아야 할 것이니 권을 치지 않으면 본주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오. 이(黟) 자 밑과 기기(庪觭) 자 밑에는 여백이 있으니 주(注)를 첨부할 것이요, 이(餌) 자 밑에 기(耆) 자를 도려내고 붙인 것은 잘못이니, 이(餌) 자는 곧 저(底) 자요. 이와 같은 곳을 귀신같이 적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등에 찬물을 끼얹듯이 써늘하게 하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옹(翁) 자의 해석에 조경모(鳥頸毛 새의 목털)라 한 것을 고집하면서 ‘《설문(說文)》ㆍ《급취(急就)》에서 나온 것이라,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지는 않으리라.’고까지 하니, 족하는 어찌 이처럼 답답하게도 물정을 모르시오? 조경모(鳥頸毛)가 2책에 나왔다는 그것이 곧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오. 도대체 《설문》이란 무엇이며, 《급취》란 무슨 물건이오? 또한 저 새[鳥]가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소? 왈칵 성을 내며 홀(笏)을 이끌고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오. 또한 그 많은 글자마다 다 본의를 갖추기 위해 해석을 붙인다면 불(不) 자 밑에도 화부(花跗)란 해석을 붙여야 하고, 언(焉) 자 밑에도 황조(黃鳥)란 해석을 붙인 다음이라야 그 근원을 추구하였다고 할 것이나 누가 이를 다 알겠소? 명철한 족하가 한바탕 웃으라고 이와 같은 해담(諧談)을 하였소. 지금 교정해 온 다섯 장을 일체 개정하였으니, 분명하게 서로 일치되었다 하겠소.


[주D-001]갑신년 : 명 의종(明毅宗)이 순국(殉國)하고 여러 충신들이 절사(節死)하였던 1644년(인조 22)을 가리킨다.
[주D-002]산음(山陰) :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처하던 곳으로 경치가 좋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왕휘지에게 산음(山陰)의 산수(山水)를 물으니, 왕휘지는 “천암(千巖)이 경수(競秀)하고 만학(萬壑)이 쟁류(爭流)한다.” 하였다.
[주D-003]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 : 오릉(於陵) 집의 벌레먹은 오얏.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이지만 3일을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자 엉금엉금 기어가 우물 위에 있는 벌레먹은 오얏을 따 먹은 뒤에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말이 있다.《孟子 滕文公下》
[주D-004]신임무옥(辛壬誣獄) : 경종(景宗) 원년에 왕위의 계승을 에워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당쟁의 화옥(禍獄). 신축년(1721, 경종 1)ㆍ임인년(1722, 경종 2) 두 해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무옥 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주D-005]화도시(和陶詩) : 소동파(蘇東坡)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의고시(擬古詩)에 화답한 화도연명의고(和陶淵明擬古)를 가리킨다. 이 시는 대개 자연스럽고 한적한 정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古文眞寶 前集》
[주D-006]조굴부(弔屈賦)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굴원(屈原)을 조상하는 조굴원부(弔屈原賦)를 가리킨다. 이 부는 강개 비분한 뜻이 내포되었다.《古文眞寶 後集》


청장관전서 제59권
 앙엽기 6(盎葉記六)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송성명(宋成明)이 엮은 《국조명신언행록》이 아직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목록을 적어 본다.
전집(前集) ○ 제1권 : 조준(趙浚) 송당(松堂)ㆍ남재(南在) 귀정(龜亭)ㆍ심덕부(沈德符)ㆍ성석린(成石磷) 독곡(獨谷)ㆍ민제(閔霽) 어은(漁隱)ㆍ조인옥(趙仁沃)
○ 제2권 : 하륜(河崙) 호정(浩亭)ㆍ권근(權近) 양촌(陽村)ㆍ조영무(趙英茂)ㆍ유정현(柳廷顯)ㆍ한상경(韓尙敬) 신재(信齋)ㆍ박은(朴訔) 조은(釣隱)ㆍ이원(李原) 용헌(容軒)ㆍ유관(柳觀) 하정(夏亭)ㆍ이직(李稷) 형재(亨齋)ㆍ이래(李來)ㆍ함부림(咸傅霖) 난계(蘭溪)
○ 제3권 : 황희(黃喜) 방촌(厖村)ㆍ맹사성(孟思誠)ㆍ조연(趙涓)ㆍ변계량(卞季良) 춘정(春亭)ㆍ허조(許稠)ㆍ조말생(趙末生) 두곡(杜谷)ㆍ한상덕(韓尙德)ㆍ이맹균(李孟畇)ㆍ이종무(李從茂)ㆍ최윤덕(崔潤德)
○ 제4권 : 노한(盧閈)ㆍ신개(申槩) 인재(寅齋)ㆍ하연(河演) 경재(敬齋)ㆍ권홍(權弘)ㆍ윤상(尹祥)ㆍ박안신(朴安信)ㆍ윤회(尹淮)ㆍ남지(南智)ㆍ허성(許誠)ㆍ박연(朴堧)ㆍ어변갑(魚變甲)ㆍ정척(鄭陟) 정암(整庵)ㆍ안지(安止) 고은(皐隱)ㆍ김구(金鉤)ㆍ김반(金泮) 송정(松亭)ㆍ김말(金末)ㆍ정갑손(鄭甲孫)ㆍ최치운(崔致雲)
○ 제5권 :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ㆍ한확(韓確)ㆍ김숙자(金叔滋)ㆍ이맹전(李孟專)ㆍ 이변(李邊)ㆍ기처(奇處)ㆍ강석덕(姜碩德) 완역재(玩易齋)ㆍ신석조(辛碩祖) 연빙당(淵氷堂)ㆍ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 매헌(梅軒)ㆍ남수문(南秀文)ㆍ정창손(鄭昌孫)ㆍ이계전(李季甸)ㆍ어효첨(魚孝瞻)ㆍ구치관(具致寬)ㆍ황수신(黃守身) 나부(懦夫)ㆍ최항(崔恒) 태허정(太虛亭)ㆍ박원형(朴元亨) 만절당(晩節堂)
○ 제6권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保閑齋)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윤자운(尹子雲) 낙한정(樂閒亭)ㆍ이석형(李石亨) 저헌(樗軒)ㆍ김수온(金守溫) 괴애(乖崖)ㆍ양성지(梁誠之) 눌재(訥齋)ㆍ이예(李芮)ㆍ강희안(姜希顔) 인재(仁齋)ㆍ홍일동(洪逸童) 마천(麻川)
○ 제7권 : 서거정(徐居正) 사가정(四佳亭)ㆍ강희맹(姜希孟) 사숙재(私淑齋)ㆍ임수겸(林守謙) 갈곡(葛谷)ㆍ성임(成任) 안재(安齋)ㆍ이극배(李克培)ㆍ한계희(韓繼禧)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이약동(李約東)ㆍ이파(李坡)ㆍ성간(成侃)ㆍ손순효(孫舜孝) 물재(勿齋)ㆍ윤효손(尹孝孫)ㆍ어유소(魚有沼)
○ 제8권 : 허종(許琮) 상우당(尙友堂)ㆍ어세겸(魚世謙)ㆍ어세공(魚世恭)ㆍ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ㆍ이종생(李從生)ㆍ이덕량(李德良)ㆍ성현(成俔) 용재(慵齋)ㆍ유순(柳洵) 노포(老圃)ㆍ이륙(李陸) 청파(靑坡)ㆍ허침(許琛)ㆍ노공필(盧公弼) 국일(菊逸)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ㆍ이손(李蓀)ㆍ권경우(權景祐)ㆍ김흔(金訢) 안락당(顔樂堂)ㆍ유호인(兪好仁) 뇌계(㵢溪)
○ 제9권 : 김수동(金壽童)ㆍ송일(宋軼)ㆍ김응기(金應箕)ㆍ이집(李諿)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인락당(仁樂堂)
○ 제10권 : 임유겸(任由謙)ㆍ성세순(成世純)ㆍ조원기(趙元紀)ㆍ성몽정(成夢井)ㆍ이사균(李思鈞) 눌헌(訥軒)ㆍ이현보(李賢輔) 농암(聾巖)ㆍ박상(朴祥) 눌재(訥齋)ㆍ우맹선(禹孟善)ㆍ허굉(許硡)ㆍ이자(李耔) 음애(陰厓)ㆍ홍언필(洪彦弼) 묵재(黙齋)ㆍ권벌(權橃)ㆍ성세창(成世昌) 돈재(遯齋)ㆍ임추(任樞)
○ 제11권 : 신광한(申光漢) 기재(企齋)ㆍ소세양(蘇世讓) 양곡(陽谷)ㆍ심연원(沈連源) 보암(保庵)ㆍ상진(尙震) 범허정(泛虛亭)ㆍ정옥형(丁玉亨)ㆍ임권(任權)ㆍ안현(安玹)ㆍ장언량(張彦良)ㆍ심광언(沈光彦) 둔암(鈍庵)ㆍ조광원(曺光遠)ㆍ오겸(吳謙)ㆍ이윤경(李潤慶)
○ 제12권 : 이준경(李浚慶) 동고(東皐)ㆍ홍섬(洪暹) 인재(忍齋)ㆍ권철(權轍)ㆍ임호신(任虎臣)ㆍ조언수(趙彦秀)ㆍ조사수(趙士秀) 송강(松岡)ㆍ민기(閔箕) 관물재(觀物齋)ㆍ이탁(李鐸)ㆍ심달원(沈達源) 효창(曉窓)ㆍ이택(李澤)ㆍ남치근(南致勤)ㆍ장필무(張弼武)
후집(後集) ○ 제1권 : 백인걸(白仁傑) 휴암(休庵)ㆍ정유길(鄭惟吉) 임당(林塘)ㆍ노수신(盧守愼) 소재(蘇齋)ㆍ정종영(鄭宗榮) 항재(恒齋)ㆍ이준민(李俊民) 신암(新菴)
○ 제2권 : 박순(朴淳) 사암(思庵)ㆍ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ㆍ박응남(朴應男) 퇴암(退庵)ㆍ이후백(李後白) 청련(靑蓮)ㆍ정탁(鄭琢) 약포(藥圃)ㆍ정지연(鄭芝衍) 남봉(南峯)
○ 제3권 : 황정욱(黃廷彧) 지천(芝川)ㆍ구사맹(具思孟) 팔곡(八谷)ㆍ윤두수(尹斗壽) 오음(梧陰)ㆍ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ㆍ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ㆍ구봉령(具鳳齡) 백담(柏潭)ㆍ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 제4권 : 정철(鄭澈) 송강(松江)ㆍ홍성민(洪聖民) 졸옹(拙翁)ㆍ이해수(李海壽) 약포(藥圃)ㆍ배삼익(裵三益) 임연(臨淵)ㆍ김명원(金命元) 주은(酒隱)ㆍ이제신(李濟臣) 청강(淸江)ㆍ변협(邊協)
○ 제5권 :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ㆍ이산보(李山甫) 명곡(鳴谷)ㆍ이정암(李廷馣) 월천(月川)
○ 제6권 :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ㆍ권율(權慄)ㆍ이순신(李舜臣)
○ 제7권 : 이원익(李元翼) 오리(梧里)ㆍ정곤수(鄭崑壽) 백곡(柏谷)ㆍ심희수(沈喜壽) 일송(一松)ㆍ유근(柳根) 서경(西埛)ㆍ윤기(尹祁) 간보(艮輔)ㆍ한응인(韓應寅)ㆍ홍이상(洪履祥) 모당(慕堂)
○ 제8권 : 이덕형(李德馨) 한음(漢陰)ㆍ이항복(李恒福) 백사(白沙)ㆍ장운익(張雲翼)ㆍ오억령(吳億齡) 만취(晩翠)ㆍ이호민(李好閔) 오봉(五峯)ㆍ박동현(朴東賢) 활당(活塘)ㆍ나급(羅級)
○ 제9권 : 한준겸(韓浚謙) 유천(柳川)ㆍ구성(具宬) 초당(艸塘)ㆍ서성(徐渻) 약봉(藥峯)ㆍ이수광(李睟光) 지봉(芝峯)ㆍ정엽(鄭曄) 수몽(守夢)ㆍ정경세(鄭經世) 우복(愚伏)
○ 제10권 : 신흠(申欽) 상촌(象村)ㆍ황신(黃愼) 추포(秋浦)ㆍ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 제11권 : 김상용(金尙容) 선원(仙源)ㆍ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ㆍ박동량(朴東亮) 오창(梧囱)
○ 제12권 : 김류(金瑬) 북저(北渚)ㆍ이귀(李貴) 묵재(黙齋)
○ 제13권 : 홍서봉(洪瑞鳳) 학곡(鶴谷)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ㆍ구인후(具仁垕) 유포(柳浦)ㆍ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ㆍ유행(柳珩)ㆍ정충신(鄭忠信)
○ 제14권 :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ㆍ정온(鄭蘊) 동계(桐溪)ㆍ윤황(尹煌) 팔송(八松)ㆍ이안눌(李安訥) 동악(東岳)
○ 제15권 : 최명길(崔鳴吉) 지천(遲川)ㆍ장유(張維) 계곡(谿谷)
○ 제16권 :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김시양(金時讓) 하담(荷潭)ㆍ이경직(李景稷) 석문(石門)
○ 제17권 : 이경여(李敬輿) 백강(白江)ㆍ이무(李楘) 송교(松郊)
○ 제18권 : 임숙영(任叔英) 소암(疏菴)ㆍ민응형(閔應亨)ㆍ유백증(兪伯曾) 취헌(翠軒)ㆍ강석기(姜碩基) 월당(月塘)ㆍ신익성(申翊聖) 낙전당(樂全堂)ㆍ이명한(李明漢) 백주(白洲)ㆍ김육(金堉) 잠곡(潛谷)
외집(外集) ○ 제1권 : 김굉필(金宏弼) 한훤당(寒暄堂)ㆍ정여창(鄭汝昌) 일두(壹蠹)ㆍ정붕(鄭鵬) 신당(新堂)ㆍ박영(朴英) 송당(松堂)ㆍ유우(柳藕) 서봉(西峯)ㆍ김안국(金安國) 모재(慕齋)
○ 제2권 :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ㆍ김정국(金正國) 사재(思齋)ㆍ조성(趙晟) 양심당(養心堂)ㆍ조욱(趙昱) 보진암(葆眞庵)
○ 제3권 :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ㆍ채세영(蔡世英) 임진(任眞)ㆍ박소(朴紹) 야천(冶川)ㆍ성운(成運) 대곡(大谷)ㆍ홍인우(洪仁祐) 치재(恥齋)
○ 제4권 : 이황(李滉) 퇴계(退溪)ㆍ성수침(成守琛) 청송(聽松)
○ 제5권 :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ㆍ유희춘(柳希春) 미암(眉巖)ㆍ이항(李恒) 일재(一齋)ㆍ성제원(成悌元) 동주(東洲)ㆍ이중호(李仲虎) 이소재(履素齋)ㆍ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 제6권 : 조식(曺植) 남명(南冥)ㆍ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ㆍ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 제7권 : 송인(宋寅) 이암(頤庵)ㆍ서기(徐起) 고청(孤靑)ㆍ이지남(李至男) 영응(永膺)ㆍ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ㆍ정지운(鄭之耘) 추만(秋巒)ㆍ민순(閔純) 행촌(杏村)ㆍ한호(韓濩) 석봉(石峯)ㆍ박민헌(朴民獻) 슬한재(瑟僩齋)ㆍ남언경(南彦經) 동강(東岡)ㆍ박지화(朴枝華) 수암(守庵)
○ 제8권 : 김우옹(金宇顒) 동강(東岡)ㆍ오건(吳健) 덕계(德溪)ㆍ최영경(崔永慶) 수우당(守愚堂)
○ 제9권 :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ㆍ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ㆍ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 제10권 : 조헌(趙憲) 중봉(重峯)ㆍ정구(鄭逑) 한강(寒岡)
○ 제11권 : 조목(趙穆) 월천(月川)ㆍ이정(李楨) 귀암(龜巖)ㆍ남치리(南致利) 분지(賁趾)ㆍ권호문(權好文) 가암(柯巖)ㆍ권춘란(權春蘭) 해곡(海谷)ㆍ박형(朴浻) 정산(鼎山)ㆍ송익필(宋翼弼) 귀봉(龜峯)
○ 제12권 : 이이(李珥) 율곡(栗谷)
○ 제13권 : 성혼(成渾) 우계(牛溪)
별집(別集) ○ 제1권 :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ㆍ박순(朴淳)ㆍ정본(鄭苯)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시습(金時習) 동봉(東峯)ㆍ권절(權節) 율정(栗亭)ㆍ조려(趙旅) 어계(漁溪)
○ 제2권 : 김종직(金宗直) 점필재(佔畢齋)ㆍ조위(曺偉) 매계(梅溪)ㆍ최보(崔溥) 금남(錦南)ㆍ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ㆍ이종준(李宗準) 용헌(慵軒)ㆍ무풍부정총(茂豐副正摠) 서호주인(西湖主人)ㆍ박한주(朴漢柱) 우졸자(迂拙子)ㆍ이계맹(李繼孟) 묵암(墨巖)ㆍ이목(李穆)ㆍ임희재(任熙載) 물암(勿庵)ㆍ허반(許磐)
○ 제3권 : 윤필상(尹弼商)ㆍ홍귀달(洪貴達) 함허당(涵虛堂)ㆍ성준(成浚)ㆍ표연말(表沿沫) 남계(藍溪)ㆍ조지서(趙之瑞)ㆍ정성근(鄭誠勤)ㆍ주계정 심원(朱溪正深源) 성광(醒狂)ㆍ정희량(鄭希良) 허암(虛菴)ㆍ김천령(金千齡)ㆍ박은(朴誾) 읍취헌(挹翠軒)ㆍ권달수(權達手) 동계(桐溪)ㆍ이원(李黿) 재사당(再思堂)
○ 제4권 : 안당(安瑭)ㆍ김정(金淨) 충암(沖庵)ㆍ김식(金湜)ㆍ한충(韓忠) 송재(松齋)ㆍ기준(奇遵) 복재(服齋)
○ 제5권 : 이장곤(李長坤) 금헌(琴軒)ㆍ유운(柳雲)ㆍ김구(金絿) 자암(自庵)ㆍ박세희(朴世熹) 도원재(道源齋)ㆍ박훈(朴薰) 강수(江叟)ㆍ이연ⲽ(李延慶) 탄수(灘叟)ㆍ정완(鄭浣)ㆍ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ㆍ경세인(慶世仁) 경재(敬齋)
○ 제6권 : 유관(柳灌) 송암(松庵)ㆍ유인숙(柳仁淑) 정수(靜叟)ㆍ송인수(宋麟壽) 규암(圭庵)ㆍ박광우(朴光佑) 필재(蓽齋)ㆍ정희등(鄭希登)ㆍ송희규(宋希圭)ㆍ이림(李霖)ㆍ나식(羅湜) 장음정(長吟亭)ㆍ이약빙(李若氷) 준암(樽巖)ㆍ이해(李瀣)ㆍ임형수(林亨秀) 금호(錦湖)ㆍ임억령(林億齡) 석천(石川)ㆍ정황(丁瑝) 유헌(游軒)ㆍ이담(李湛) 정존재(靜存齋)ㆍ민기문(閔起文) 역암(櫟菴)ㆍ김난상(金鸞祥)ㆍ김저(金䃴)ㆍ윤결(尹潔) 취부(醉夫)
○ 제7권 : 고경명(高敬命) 제봉(霽峯)ㆍ송상현(宋象賢) 천곡(泉谷)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란(李廷鸞)ㆍ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ㆍ김여물(金汝岉)ㆍ유극량(劉克良)ㆍ황진(黃進)ㆍ원호(元豪)
○ 제8권 : 박진(朴晉)ㆍ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ㆍ김덕령(金德齡)ㆍ정문부(鄭文孚) 농포(農圃)ㆍ김시민(金時敏)ㆍ정담(鄭湛)ㆍ이대원(李大源)
○ 제9권 : 김덕함(金德涵) 성옹(醒翁)ㆍ정홍익(鄭弘翼) 휴옹(休翁)ㆍ귀천군 수(龜川郡睟)ㆍ금산군 성윤(錦山郡誠胤)ㆍ정택뢰(鄭澤雷)ㆍ조직(趙溭) 입재(立齋)
○ 제10권 : 김응하(金應河)ㆍ남이흥(南以興)ㆍ이중로(李重老)ㆍ김준(金浚)ㆍ김양언(金良彦)ㆍ이희건(李希建)
○ 제11권 : 홍명구(洪命耈)ㆍ최진립(崔震立)ㆍ임경업(林慶業)ㆍ이상길(李尙吉)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 죽창(竹囱)ㆍ윤계(尹棨)ㆍ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속집(續集) ○ 제1권 : 최덕지(崔德之) 연촌(煙村)ㆍ남효온(南孝溫) 추강(秋江)ㆍ최수성(崔壽城) 원정(猿亭)ㆍ정렴(鄭磏) 북창(北囱)ㆍ이몽규(李夢奎) 천휴(天休)ㆍ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ㆍ이지함(李之菡) 토정(土亭)ㆍ이의건(李義健) 동은(峒隱)ㆍ성윤해(成允諧) 판곡(板谷)ㆍ성로(成輅) 석전(石田)ㆍ문위(文緯) 모계(茅溪)ㆍ최명룡(崔命龍) 석계(石溪)ㆍ안방준(安邦俊) 우산(牛山)

해동역사 제43권
 예문지(藝文志) 2 ○ 경적(經籍) 2
우리나라 서목(書目) 2 사(史), 자(子), 집(集)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사기》 50권은 고려의 김부식이 찬한 것으로,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기록하였으며, 다음으로 백제를 기록하였는데, 기(紀)와 표(表)가 있다. 《옥해(玉海)》
○ 순희(淳煕) 원년(1174, 명종4) 5월 29일에 명주(明州)의 진사 심문(沈忞)이 해동(海東)의 《삼국사기》 50권을 올리자, 금폐(錦幣) 1백을 하사하고 책은 비각(祕閣)으로 넘겨주었다. 《상동》
○ 《삼국사기》 50권은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다른 내용이 있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삼국사기》 제13권부터 22권까지는 고구려본기인데, 우리 일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조잡하고 소략함이 심하다. 《상동》
살펴보건대, 《삼국사기》는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의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 공신(輸忠征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태보 복야 상서 겸 예부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太保僕射尙書兼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으로 치사(致仕)한 신하 김부식이 선지(宣旨)를 받들어서 찬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르기를, “인종 23년(1145) 12월 임술에 김부식이 그가 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사기를 올렸다.” 하였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이르기를, “전조(前朝)의 문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수하였는데, 방언(方言)이나 이어(俚語)가 뒤섞여 있고, 잘한 정사나 좋은 계책은 드물게 전하였으며, 필삭(筆削)한 것이나 범례(凡例)를 정한 것이 아주 합당치는 않다. 이는 대개 그 당시 전적(典籍)이 대부분 없어졌으므로 박식하였던 김 시중(金侍中)으로서도 상고할 길이 없어 간간이 올바르지 못한 고기(古記)의 설을 취하여 소략하게 됨을 면치 못한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고득상(高得相)의 《삼국통력(三國通曆)》
○ 해동의 《삼국통력》 12권은 고려의 고득상이 찬한 것으로, 중국 역대의 정삭(正朔) 아래에 기록하였다. 《옥해》
○ 해동의 《삼국통력》은 10권이다. 《통지(通志)》 예문지(藝文志)

해동의 《삼국통록(三國通錄)》
○ 해동의 《삼국통록》은 이름이 빠졌다. 《수초당서목(遂草堂書目)》
살펴보건대, 《삼국통록》과 《삼국통력》은 혹 같은 책인데 이름을 달리한 것인가? 상고할 수가 없다.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사》의 뒤에 쓴 발문’에,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 합계 139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나라 사람인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정인지 등 32인이 편찬하였다. 명나라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 8월에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이를 간행해서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 체제와 범례를 보니 조리가 있어 어지럽지 않은바, 왕씨 고려 한 시대를 징험할 수 있는 문헌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려사》에 나오는 악지(樂志)의 가사(歌辭)는 대부분 송나라 유릉(裕陵)이 하사한 대성부(大晟府)의 악보(樂譜)이며, 여복지(輿服志)의 경우에는 ‘몽고(蒙古)에는 머리를 정수리까지 깎아 그 모양을 네모지게 하고 그 중간 부분의 머리카락은 남겨 두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개체(開剃)라고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충렬왕 4년(1278) 2월에는 온 경내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상국(上國)의 의복을 입게 하고 개체를 하게 하였으며, 16년(1290) 9월에는 백관들이 비로소 삿갓을 쓰고 조알(朝謁)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런 것들은 《원사(元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경신년(1320, 충숙왕7)에 임금이 사막으로 도망쳐 달아난 뒤의 일과 같은 경우는, 원나라 군신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간혹 사신을 보내 통교하면서 북원(北元)이라고 칭하였다. 북원의 임금이 응창(應昌)으로 달아났다가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경술 4월에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혜종(惠宗)이란 시호를 올렸는바, 이가 바로 순제(順帝)이다. 그의 아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남은 군사를 데리고 화림(和林)으로 달아났다. 10년(1377, 우왕3) 정사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도착해서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또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파견하여 천원(天元)이라는 기년(紀年)을 통고하였는데, 신우(辛禑)가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가서 축하하게 하였다. 서로 전해 자리에 선 지 11년 만에 죽으니 북원에서 시호를 내려 소종(昭宗)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은 명나라의 전적에서는 모두 숨기고 기록하지 않은 것들인데, 《고려사》에 의지하여 그 사적들이 약간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니 후대에 세대를 논하고 연호를 기록하는 자들이 마땅히 이어받을 바이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정난군신(靖難君臣)들이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을 개수(改修)한 것은 방효유(方孝孺)로 인해서였는데, 방효유의 아버지인 방극근(方克勤)은 순리(循吏)였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관(黃觀)과 경청(景淸)이 《서전회선(書傳會選)》을 찬수하면서는 그 이름을 삭제하고 또 ‘방 선생(方先生)이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하였다.’고 거짓으로 썼다. 정인지가 찬한 《고려사》를 보면,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죽이려고 도모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방원은 오히려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줄 줄 알았으며, 정인지 등도 역시 그 사실을 직서(直書)하였다. 이것은 하국(下國)의 사관(史官)이 양사기(楊士奇) 등의 무리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것이니, 탄식할 만하다. 《상동》
○ 《고려사》는 2권이다. -편수(編修) 왕여조(汪如藻)의 가장본(家藏本)이다.- 구본(舊本)에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成均館大司成) 정인지가 왕명을 받들어 찬수하였다고 제(題)하였다. 《명실록(明實錄)》을 상고해 보니,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에 고려의 사신 정인지가 일찍이 표문을 올려 이 책을 조정에 올렸는데,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이었다. 주이존(朱彝尊)의 《폭서정집》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제발(題跋)에, ‘체제와 범례가 볼만하고 조리가 있어서 어지럽지 않다.’ 하였다. 지금 이 본은 세가(世家) 한 권과 후비열전(后妃列傳) 한 권만이 겨우 남아 있으니, 이는 대개 우연히 보존되었다가 잔결(殘缺)된 것으로, 완전한 책이 아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경태 2년 8월, 즉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원년 신미에 전(牋)을 올렸는데, 32왕의 세가(世家)가 46권이고, 12항목의 지(志)가 39권으로 천문(天文), 역(曆), 오행(五行), 지리(地理), 예(禮), 악(樂), 여복(輿服), 선거(選擧), 백관(百官), 식화(食貨), 병(兵), 형법(刑法)이며, 연표(年表)가 2권이고, 열전(列傳)이 50권으로 후비(后妃)ㆍ종실(宗室)ㆍ공주(公主)의 열전이 있고 그다음에 명신(名臣) 열전이 있고 그 아래에 양리(良吏), 충의(忠義), 효우(孝友), 열녀(烈女) 및 방기(方伎), 환자(宦者), 혹리(酷吏), 폐행(嬖幸), 간신(姦臣), 반역(叛逆) 등의 열전이 있으며, 목록(目錄)이 2권으로, 총 합계 139권이다.
찬수한 사관(史官)은 32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인지(鄭麟趾),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조(金銚)ㆍ이선제(李先齊), 겸 춘추관 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정창손(鄭昌孫)ㆍ신석조(辛碩祖)ㆍ최항(崔恒)ㆍ노숙동(盧叔仝), 겸 춘추관 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 이석형(李石亨)ㆍ신숙주(申叔舟)ㆍ최덕지(崔德之)ㆍ어효첨(魚孝瞻)ㆍ김예몽(金禮蒙)ㆍ김순(金淳)ㆍ양성지(梁誠之)ㆍ이예(李芮)ㆍ김지경(金之慶)ㆍ김윤복(金潤福), 겸 춘추관 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이극감(李克堪)ㆍ윤기견(尹起畎)ㆍ박원정(朴元貞)ㆍ김명중(金命中)ㆍ조근(趙瑾)ㆍ홍우치(洪禹治)ㆍ예승석(芮承錫)ㆍ윤자운(尹子雲)ㆍ이효장(李孝長)ㆍ이인전(李仁全)ㆍ유자문(柳子文)ㆍ김효우(金孝宇)ㆍ김용(金勇)ㆍ한서봉(韓瑞鳳)ㆍ오창백(吳昌伯)이다. 단종(端宗) 2년(1454)에 처음으로 간행해서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또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찬수한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이 있다. 이것은 바로 태조조에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편년체(編年體)의 방식으로 편찬하였다가 태종조에 와서 다시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교정한 것인데, 정인지가 올린 전문(箋文)에서 “작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사서(史書)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 고려의 정가신이 세자를 따라서 원나라에 갔을 때, 자단전(紫檀殿)에서 소대(召對)하고는 시를 읊게 하였다. 정가신은 동국에 있으면서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정가신열전을 보면, 정가신의 자(字)는 헌지(獻之)이고 나주인(羅州人)이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일찍이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또 세가(世家)를 보면, 공민왕 20년(1371) 4월 계유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고려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게 하였다.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 민지가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하였는데, 7권으로 되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의 자는 용연(龍涎)이고 여흥인(驪興人)인데,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이 찬한 《천추금경록》을 증수하게 하였다. 그 뒤에 권보(權溥)와 함께 교정하여 완성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한 다음 올렸다. 경호대왕(景虎大王)부터 원왕(元王)에 이르기까지를 7권으로 나누어 만들고 세계도(世系圖)와 함께 올렸다.

고려의 《편년강목(編年綱目)》
○ 민지가 또 본국의 《편년강목》 42권을 편찬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책을 얻어볼 수가 없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가 또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였는데, 위로는 국조(國祖)인 문덕대왕(文德大王)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였으며, 책은 총 42권인데, 소목(昭穆)에 대한 논은 《편년절요》와 다르다. 또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를 보면, 4월 경자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가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여 올렸다. 또 충목왕세가(忠穆王世家)를 보면, 2년(1346) 10월에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이곡(李穀), 안진(安震),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편년강목》을 증수해서 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고려의 《고금록(古今錄)》
○ 고려에서 기록한 《고금록》에, “대요(大遼) 통화(統和) 12년(994, 성종13)에 비로소 역법(曆法)을 고치고 정삭(正朔)을 반포하였다.” 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고려사》 박인량열전(朴寅亮列傳)을 보면, 박인량은 문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문사(文詞)가 고상하고 아름다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에 올리는 고주(告奏)와 표장(表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일찍이 《고금록》 10권을 찬하여 비부(祕府)에 보관하였다. 또 세가를 보면, 충렬왕 10년(1284) 6월 병자에 감수국사(監修國史) 원부(元傅), 허공(許珙), 한강(韓康) -나의 선조인 문혜공(文惠公)이다.- 등으로 하여금 《고금록》을 찬하게 하였는데, 10월에 이르러서 책을 완성하였으며, 공민왕 6년(1357) 윤8월 을사에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고문록(古文錄)》을 편수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요사(遼史)》에서 칭한 바는 바로 박인량이 찬한 책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 외국의 서책으로는 오직 고려에서 저술한 것만이 가끔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정인지의 《고려사》,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부터 《동국통감》이나 《동국사략(東國史略)》 등 여러 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고증할 수가 있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동국통감》 56권은 조선의 서거정 등이 찬수한 것으로, 삼한(三韓)의 시종(始終)을 기술한 책인바, 그 사이에는 가끔 일본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드러내었는데, 오직 한스러운 것은 근대(近代)의 일에 대해서는 하찮은 일까지 기록하였으면서 상대(上代)의 일에 대해서는 큰일도 대부분 빠뜨린 것이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살펴보건대, 《동국통감》 57권은 성화(成化) 21년(1485), 우리 성종대왕 16년 을사 7월 26일에 순성명량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달성군(達城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서거정 등이 교지를 받들어서 찬한 다음 전문(箋文)을 올려 진헌하였다. 이 책을 찬집(撰輯)한 여러 신하는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행 호군(行護軍) 정효항(鄭孝恒), 참의 손비장(孫比長), 행 호군 이숙감(李淑瑊), 전 도사(都事) 김화(金澕), 교리(校理) 이승녕(李承寧), 사의(司議) 표연말(表沿沫), 전적(典籍) 최보(崔溥), 박사(博士) 유인홍(柳仁洪) 등 10인인데, 이극돈이 서문을 짓고 서명하기를, “순성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겸 동지의금부사 세자우부빈객(兼同知義禁府事世子右副賓客) 신(臣) 이극돈은 삼가 서(序)합니다.” 하였다.

《조선사략(朝鮮史略)》
○ 《조선사략》은 12권이다. 이 책을 찬한 사람의 성명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편년체(編年體)의 체제를 모방하여 조선 제국(諸國)의 흥폐(興廢)의 시말을 기록하고 사신(史臣)의 사론(史論)을 붙였다. 첫 권에는 단군(檀君), 기자(箕子) 및 삼국이 처음 선 것을 기록하였으며, 2권에서 4권까지는 신라(新羅)를 기록하였고, 5권에서 12권까지는 고려(高麗)를 기록하였는데, 기년(紀年)은 요(堯) 임금 무진년부터 시작하였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조선사략》은 6권이다. -절강(浙江)의 포사공(鮑士恭)의 가장본(家藏本)이다.- 일명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 하며, 찬한 사람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다.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그 나라의 치란과 흥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단군(檀君)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공양왕 왕요(王瑤)에서 끝났다. 신라의 박씨(朴氏) 이전은 소략하고 고려 왕씨(王氏) 이후는 모두 편년체로 기재하였는데, 사적(事蹟)이 자못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 이방원(李芳遠)을 태조(太祖), 태종(太宗)으로 칭하였으니, 이는 그 신하들의 말이다. 또 간간이 사신의 사론과 역년도(歷年圖) 등을 붙였다.
대개 정인지의 《고려사》는 기전체(紀傳體)를 모방하였고, 이 책은 편년체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가 유포되어 있다. 전증(錢曾)의 《독서민구기(讀書敏求記)》를 보면, 왕씨(王氏)의 유신(遺臣)인 정몽주(鄭夢周) 등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없애지 않은 것을 가지고 양사(良史)라고 하였다. 지금 일을 서술한 것이 자세한가 소략한가를 보니, 비록 체요(體要)에 잘 부합되지는 않으나, 유문(遺聞)을 모아 편집한 것이 자못 잘 갖추어져 있는바, 일을 열거한 외국의 전(傳)을 보는 자들이 역시 이를 보고 참고할 수가 있다.
책 끝에는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쓴 조기미(趙琦美)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거기에 “풍중영(馮仲纓)의 집에서 빌려다가 기록하였다.”고 하였는바, 대개 왜(倭)가 조선을 함락하여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원할 때 얻은 본이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동국사략》은 두 가지 본이 있다. 한 본은 태종 3년(1403) 계미에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하륜(河崙), 이첨(李詹)과 같이 수찬(修撰)하여 올리게 한 것이고, 한 본은 세조 때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가 찬한 것이다.

《대요사적(大遼事蹟)》
○ 고려에서 올린 《대요사적》에는 여러 왕들의 책문(冊文)이 실려 있으며, 월삭(月朔)이 자못 보이므로 인하여 첨부해서 기입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대요사적》은 바로 고려에서 찬하여 요나라에 올린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 4년(1343) 3월 임오에 원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 실덕(實德)을 파견하여 송(宋), 요(遼), 금(金) 세 나라의 사적(事蹟)을 찾아가지고 갔는데, 바로 이 책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주이존의 ‘《해동제국기》 발문’에,
“속국(屬國)들 가운데에는 오직 고려만이 역사책이 있어 《동국통감》, 《동국사략》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안남국(安南國) 사람들의 지략(志略)이 있으며, 일본의 《동감(東鑑)》과 같은 책들은 방언으로 써서 뜻을 알 수가 없다.
전에 망우(亡友) 종광한(鍾廣漢)이 《역대건원고(歷代建元考)》를 찬하면서 백성들이 처음 생긴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기록하였는데, 밖으로는 먼 외국까지 기록하였으며, 참호(僭號)까지도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동감》을 구하고서는 기쁨이 극에 달해 기록으로 남겨 드러내었다.
그러나 《동감》은 단지 그 나라 87년간의 일만을 기록하였을 뿐, 오히려 중간에 빠진 것이 많았다. 내가 뒤늦게 조선 사람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얻었는데, 비록 완전한 책은 아니지만 일본의 군장(君長)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고 연호를 정한 것에 대해 주(周)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에 이것을 취해 종광한이 남긴 책을 보충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국토 넓이와 8도(道) 66주(州)가 마치 눈앞에 쌀을 모아 놓은 것과 같고 산천이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바, 장홍(張洪)이나 설준(薛俊), 후계고(候繼高), 이언공(李言恭), 정약증(鄭若曾) 등이 서술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일목요연하였다.
신숙주의 자는 범옹(汎翁)이고 조선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는데,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 12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恭)이 《일본고(日本考)》를 찬하여 그 나라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토속(土俗)을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그러나 국왕들이 대를 전한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못한바, 이 편들을 합하여 《해동제국기》와 비교해 보면, 신숙주가 요체를 얻은 것만 못하다. 《상동》
○ 신숙주가 성화 7년 12월에 국가의 명을 받아 《해동제국기》를 찬하였는데, 책을 완성하고는 서문을 지어 일본의 대서(代序)와 8도, 66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 명나라 성화 7년 신묘 겨울에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의 서문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동해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나, 그 가운데에서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그 땅은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제주도 남쪽에까지 이르며, 유구국(琉球國)과 서로 접하여 있는바, 그 지세가 몹시 깁니다. 그 초창기에는 곳곳에서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이루고 있었는데, 주(周)나라 평왕(平王) 48년(기원전 772)에 그의 시조인 협야(狹野)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여 비로소 주군(州郡)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들이 각자 점령하고 통치하였으니, 마치 중국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 같아 그다지 심하게 통속(統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창칼을 잘 쓰고 배를 모는 데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그들을 제대로 잘 무마한다면 예의를 차려 조빙(朝聘)할 것이고,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면 함부로 노략질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협야는 협야존신무천황(狹野尊神武天皇)이다. 뒤에 천하를 평정하고 8주(洲)를 차지하였으므로 다시 호를 올려 신일본반여언존(神日本磐余彦尊)이라고 하였다. 기록한 전후 일본도(日本圖)는 잘못되어 참모습을 잃었으며, 그 외군(外郡)과 마을, 섬의 이름은 대부분 틀리게 전해졌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제국기》는 성화 신묘년, 즉 우리 성종 2년에 해동의 제국이 조빙하러 왕래한 예전 일과 관소(館所)나 음식 및 접대하는 규례를 찬수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나라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리고, 세계(世系)의 시말과 풍속이 숭상하는 바에서부터 우리 사신을 접대하는 절목 등을 대충 서술하여 이를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해동제국기》에 이르기를, ‘도로는 일본의 이수(里數)를 썼는데, 그들의 1리는 우리나라의 10리에 준한다.’ 하였다.”고 인용하였다.

백제(百濟)의 지리서(地理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의 중 관륵(觀勒)이 와서 지리서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구려(高句麗)의 봉역도(封域圖)
○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628, 영류왕11)에 고구려의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바쳤다. 《구당서(舊唐書)》

고려의 지리도(地里圖)
○ 성종(聖宗) 통화(統和) 3년(985, 성종4) 7월 신축에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고려의 지리도를 바쳤다. 《요사(遼史)》

조선의 《팔도지도(八道地圖)》
○ 조선의 김안국(金安國)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보낸 편지에 ‘제포(薺浦)에 머물러 있는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도주에게 보내니 그들의 죄를 다스리라.’ 하였는데, 내가 조선의 《팔도지도》를 구해서 조사해 보니, 제포는 경상도 웅천(熊川)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칭일본전》

《조선지(朝鮮志)》
○ 《조선지》 2권은 조선의 소 찬성(蘇贊成)이 편찬하였다. 가정(嘉靖) 연간에 시독(侍讀) 화찰(華察)이 사신으로 나갔을 때 그 나라에서 찬성에게 명하여 이 책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나라 안의 산천(山川), 고적(古蹟), 풍속(風俗)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권의 끝에는 조자(跳咨)의 발문이 있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살펴보건대, 소 찬성은 바로 소세양(蘇世讓)이다.
○ 《조선지》는 2권이다. -절강(浙江) 범무주(范懋柱)의 집에 있는 천일각(天一閣) 소장본(所藏本)이다.- 찬한 자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책 속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만들어진 책이다.
권의 앞머리에 강역(疆域)의 연혁(沿革)을 대략 서술하였으나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그 아래에 6항목의 대강(大綱)을 나누어 경(經)으로 삼았는데, 경도(京都), 풍속(風俗), 고도(古都), 고적(古迹), 산천(山川), 누대(樓臺)이다. 소속된 8도(道)를 위(緯)로 삼았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 서남쪽을 충청(忠淸), 동남쪽을 경상(慶尙), 남쪽을 전라(全羅), 서쪽을 황해(黃海), 동쪽을 강원(江源) -살펴보건대, 마땅히 강원(江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을 평안(平安), 동북쪽을 함경(咸鏡)이라 하였다.
모두가 중국의 지지(地志)와 대략 같은데, 오직 경도(京都)에는 궁전(宮殿)과 조서(曹署)만 기재하고 성시(城市), 풍속(風俗)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그 나라의 전제(典制)를 기록하였는데, 고사(故事)와 뒤섞어서 한 편을 만들었다. 또 여러 도에는 모두 사지팔도(四至八到)가 없으며, 고적에는 대부분 신기하고 괴이한 일이 뒤섞여 있어서 자못 소설(小說)과 같은바, 체례(體例)에 있어서는 모두 흡족하지 못하다. 그러나 유문(遺聞)과 쇄사(鎖事)가 있어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 가끔씩 들어 있어서 고증하는 참고 자료로 삼기에 충분하다. 서술한 것 역시 고상하고 깨끗하여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통서(統緖)가 없는 여러 주군(州郡)들의 여도(輿圖)와 비교해 볼 적에는 오히려 낫다.
송(宋)나라 왕운(王雲)이 일찍이 《계림지(鷄林志)》를 찬하였으나 그 책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산천(山川)과 고적(古跡)에 대해서는 역시 소략하다. 이 책은 그 나라 사람이 서술한 데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사실 그대로를 서술하였을 것이다. 《사고전서총목》
○ 《조선국지(朝鮮國志)》 -범무주의 천일각 소장본이다.- 는 찬한 사람의 성명이 드러나 있지 않다.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오직 경도(京都), 풍속(風俗), 산천(山川), 고도(古都), 고적(古跡) 다섯 부문만 남아 있다. 그 내용 중에 ‘우리 강헌왕[我康獻王]’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조선 사람이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인용하면서 ‘대명(大明)’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왕씨(王氏)의 여러 왕들을 칭하면서 고려 왕(高麗王)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중엽에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 다음 조선(朝鮮)이라고 국호를 개칭한 뒤에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조선지》와 《조선국지》는 같은 책이며, 지금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낙랑(樂浪)의 《설령(挈令)》
○ 낙랑의 《설령》에는 직(織) 자를 쓰면서 실사변[糸]에 식(式)을 붙여 썼다. 신(臣) 현(鉉) 등이 말하기를, “《설령》은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다.” 하였다. 《설문(說文)》

최항(崔恒)의 《경국대전(經國大典)》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경국대전》은 조선의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 등 9인이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 사자조(寫字條)에, ‘왜학(倭學)《이로파(伊路波)》, 《소식(消息)》, 《서격(書格)》, 《노걸대(老乞大)》, 《동자교(童子敎)》, 《잡어(雜語)》, 《본초(本草)》, 《의론(議論)》, 《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정훈왕래(庭訓往來)》, 《응영기(應永記)》, 《잡필(雜筆)》, 《부사(富士)》로 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이로파》, 《소식》 이하는 대부분 국속(國俗)에 관한 비천한 책이고, 호어(胡語)에 관한 책인 《노걸대》가 뒤섞여 있어서 애석하게도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일본의 국사(國史)에 관한 여러 책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극증(李克增)의 《대전속록(大典續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대전속록》은 조선의 광천군(廣川君) 이극증 등 8인이 함께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의 대사객조(待使客條)에 왜인을 접대하는 규례가 있고, 제5권 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에 ‘왜인들이 가지고 오는 잡물(雜物)을 포소(浦所)에서 몰래 무역한 사람 및 그 실상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통사(通事)는 《경국대전》의 잠매금물조(潛賣禁物條)에 의거하여 논죄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경국대전》은 세조조에 편찬하도록 명하여 성종 2년(1471) 신묘에 이르러서 완성하였고, 《대전속록》은 성종 24년(1493) 계축에 반포하였고,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에는 또 《후속록(後續錄)》을 반포하였으며, 정조(正祖) 갑인년(1794, 정조18)에 이르러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어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 크게 갖추어졌다.

설순(偰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설순이 편찬하였다.” 하였다. 《상동》

신용개(申用漑)의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남곤(南袞)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정덕(正德) 9년(1514, 중종9)에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신용개 등이 찬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정덕 9년은 바로 중종 9년 갑술인데, 신용개가 남곤 등과 함께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봉사어록(奉使語錄)》
○ 고려 김부식의 《봉사어록》은 1권이다. 《송사(宋史)》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徵毖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징비록》은 조선의 체찰사(體察使) 유성룡이 지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상은 사류(史類)이다.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 《고려사》를 보면, 권근의 자는 사숙(思叔)이고, 신우(辛禑)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며, 《입학도설》을 지었다. 《경의고(經義考)》

고려의 《박학기(博學記)》
○ 주(周)나라 세종(世宗) 때 수부랑(水部郞) 한언경(韓彦卿)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한언경이 《박학기》라는 책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3백여 가지의 일을 베꼈는데, 지금 천부(天部) 가운데에서 7가지 일을 초록(抄錄)하였는바, ‘하늘을 가려 걷기에 장애가 되는 것[迷空步障] -안개[霧]를 가리킨다.-, 두려운 가루[威屑] -서리[霜]를 가리킨다.-, 물이 맺힌 것[敎水] -이슬[露]을 가리킨다.-, 얼음의 아들[冰子] -우박[雹]을 가리킨다.-, 공기의 어미[氣母] -무지개[虹]를 가리킨다.-, 금가루를 뿌린 것[屑金] -별[星]을 가리킨다.-, 가을 하늘의 큰 노인[秋明大老] -은하수[天河]를 가리킨다.-’이다. 《청이록(淸異錄)》

김시습(金時習)의 《유금오록(游金鰲錄)》과 《관동일록(關東日錄)》
○ 조선의 《매월당시권(梅月堂詩卷)》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른다. 그 안에는 《유금오록》과 《관동일록》이 있는데, 대부분 신라의 고사(故事)를 기록하였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단종조 사람이다.

백제의 천문서(天文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에서 승려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서를 보내자, 대반촌주(大伴村主) 고총(高聰)으로 하여금 천문(天文)을 배우게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사(高麗師)의 《성요서(星曜書)》
○ 《성요서》는 고려의 국사(國師)가 찬한 것인데, 국사에게서 얻었다.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고려일력(高麗日曆)》
○ 수술가류(數術家類)에는 《고려일력》 1권이 있다.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

《중간신응경(重刊神應經)》
○ 한계희(韓繼禧)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이다.- 가 지은 《중간신응경》의 서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 6년(1475)에 예조에 명하여 의교(醫敎)를 엄하게 하는 데 관해 신칙하고 침구전문법(鍼灸專門法)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의술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자질이 밝고 민첩한 자를 뽑아 제자로 삼아, 권장하고 격려하는 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의 승려 양심(良心)이란 자가 《신응경(神應經)》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며, 겸하여 일본의 신의(神醫)인 화개씨(和介氏)단파씨(丹波氏)의 종기를 치료하는 팔혈법(八穴法)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팔혈법을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신응경》은 전수된 것이 멀리 근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논한 절량보사법(折量補瀉法)은 모두 옛날 현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혈(穴)을 취한 것도 대부분 옛사람이 미진하였던 부분을 계발한 것들이며, 혈을 드러낸 것은 모두 요체를 뽑아내어 많은 효험을 얻은 것들입니다. 글은 간략하면서도 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바, 사람들이 책을 펼쳐 보면 잠깐 사이에 증세와 혈이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팔혈법을 《신응경》 끝에 붙여 인쇄해서 널리 배포하게 하였으며,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의료(醫療)의 처방은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를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하거나 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약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자못 많은바, 대개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 모두 중국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아닌 탓에 시장을 전전하면서 구하더라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모두 진짜와 가짜, 묵은 것과 새것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아랫사람들이나 먼 외방에 사는 사람들은 역시 두루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침과 뜸의 처방은 재물을 허비하면서 멀리까지 가서 구하는 수고나 채집하여 말리고 조제하는 어려움이 없이 침 한 방 뜸 한 번에 모든 처방이 다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손바닥 사이에서 운용하고 담소하는 사이에 판별되어 빈부귀천이나 원근 완급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효험을 보는 것이 항상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공용(功用)의 신묘함을 다 말할 수조차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용렬한 의원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모욕하면서 쓰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병든 자들이 생사(生死)와 요수(夭壽)를 모두 무당이나 음사(淫祀)에 맡기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런 점을 민망하게 여기시어 전문(專門)을 설치하고 과정(課程)을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먼 외방에서 와서 바친 것이 진기하여 완상할 만한 이상한 물품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신묘한 처방이었는바, 이를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 바쳐 백성들을 아끼고 만물을 사랑하는 성상의 성대한 덕에 부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성화(成化) 10년(1474, 성종5) 11월 21일에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서평군(西平君) 신(臣) 한모(韓某)는 삼가 서합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9년(1473, 성종4)은 일본의 후토어문원(後土御門院) 문명(文明) 5년인데, 이때 능등국 자사(能登國刺史) 전산의통(畠山義統)이 신농국(信濃國) 사람 양심(良心)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양심은 중이면서 의원인 자이다. 화개씨(和介氏)는 화기씨(和氣氏)로, 화기시우(和氣時雨)와 단파강뢰(丹波康賴)가 모두 의술로 이름을 드날렸으며,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의술이 더욱더 정밀해졌다. 대개 삼장지방(三藏之方)이나 팔처구법(八處灸法)은 모두 신대(神代) 때부터 전해져 온 법이다.” 하였다. 《상동》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 《동의보감》은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찬한 책이다.
살펴보건대, 조선의 풍속은 본디 문자를 알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데다가 허씨(許氏)는 또 세족(世族)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허봉(許篈)과 허성(許筬), 허균(許筠) 삼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의 누이동생 경번(景樊)은 재주와 명성이 오빠들보다 위로, 중국 북방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걸출한 집안이다.
동의(東醫)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동쪽의 의술이란 뜻에서 동의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이동원(李東垣)이 《십서(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라는 이름으로 강주(江州)와 제주(淛州)에서 행세하였고, 주단계(朱丹溪)가 《심법(心法)》을 지어 남의(南醫)라는 이름으로 관중(關中)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지금 양평군은 궁벽한 번방에 살면서도 능히 책을 지어 중국에서 행하니, 전하기에 족한 말은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전해지는 것이다.
보감(寶鑑)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햇빛이 뚫고 나오고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몸 안이 속속들이 다 보이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펴면 환하게 빛이 비치는 것이 거울과 같게 해서이다. 옛날에 나익지(羅益之)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어 모두 감(鑑)으로써 이름을 삼으면서 과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가만히 논해 보건대, 사람은 오장(五臟)이 있고 병은 칠정(七情)에 그친다. 그 사이에는 품부받은 것에는 치우치고 온전한 차이가 있고, 감염된 정도에는 깊고 얕은 차이가 있으며, 증세에는 통하고 막힌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맥박이 뛰는 것을 짚어 보면 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의 삼부(三部)가 있는바, 이를 상세히 살펴보면 밭이랑을 가르는 것과 같아 뛰어넘을 수가 없으며, 횃불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황(大黃)이 체한 것을 내리게 한다는 것만 알고 속을 차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한 기력을 보한다는 것만 알고 독을 남긴다는 것을 모르면 구제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병이 발생하기 전에 치료하고, 이미 병이 생긴 이후에는 치료하지 않는 법으로, 병이 이미 발생한 뒤에야 비로소 치료한다면 이는 의술에 있어서 하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든 이후에도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니 어찌 치료될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이익을 생각하는 자는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처음 의술에 종사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면서 의술을 배우기까지 한다. 그러니 《대역(大易)》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괘남쪽 사람들의 항심(恒心)이 없으면 의원도 될 수가 없다는 경계는 일찌감치 이런 무리들을 위하여 가리어진 것을 제거해 준 것이다.
편작(扁鵲)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병통은 질병이 많은 것이 병통이고, 의원들의 병통은 병을 치료하는 방도가 부족한 것이 병통이다.” 하였다. 그러나 헌기(軒岐) 이래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나와서 지금까지 저술한 의서(醫書)가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 안에 쌓으면 마룻대까지 닿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의서가 적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술에는 효험이 있는 것과 효험이 없는 것이 있으니, 이 어찌 옛사람들이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의술이 정밀하지 않으면 말이 상세하지 못하고, 한 가지에 빠져 들면 도를 해치게 되는 법이니, 이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뜻을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동의보감》을 보니 앞부분은 내경편(內景篇)으로 병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다음은 외형편(外形篇)으로 몸의 겉에 생기는 병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그다음은 잡병편(雜病篇)으로 증세에 대한 처방을 설명하였고, 끝 부분은 탕구편(湯灸篇)으로 처방을 설명하였다.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서목(書目)은 《천원옥책(天元玉冊)》에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에 이르기까지 총 80여 종인데, 대부분이 우리 중국의 의서이며 동방에서 찬한 의서는 3종에 불과할 뿐이다.
허준은 옛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의술을 따르면서 능히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여 밝혔는바, 둘 사이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여 천하에 따스한 햇볕을 퍼뜨렸다. 책을 완성하고는 대궐에 바쳤는데, 도리어 책이 비각(祕閣)에 보관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구해 볼 수가 없었다.
전 차사(醝使)인 산좌(山左) 사람 왕공(王公)이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월(粵) 지방에 와서는 의원들이 잘못 처방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해 도성에 가서 초록(抄錄)해 오게 하였는데, 미처 간행하기도 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순덕(順德)의 명경과(明經科) 출신인 좌한문(左翰文)은 내가 총각 때부터 사귄 사람인데, 《동의보감》을 간행해서 널리 퍼뜨릴 생각을 품고서 3백여 민(緡)을 쓰면서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개 그 마음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고, 그 일은 음(陰)과 양(陽)을 조섭(調燮)하는 일이다. 천하의 보배는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법이니, 좌한문은 대단히 어진 사람이라고 하겠다.
판각을 다 마치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책 끝에다가 쓴다. 원임(原任)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인 반우(番禺)의 능어(凌魚)는 찬한다. 《동의보감 서문》
살펴보건대, 《동의보감》은 선묘조(宣廟朝) 때 허준에게 명해서 찬집(撰輯)한 것으로, 모두 25권인데, 내경(內景) 4편, 외경(外景) 4편, 잡병(雜病) 11편, 탕액(湯液) 3편, 침구(鍼灸) 1편, 목록(目錄) 2편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비기(祕記)
○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가언충(賈言忠)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이 못 되어 80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擧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기는 바로 진(秦)나라의 녹도(錄圖)나 한나라의 부참(符讖)과 같은 것이다.

이상은 자류(子類)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사륙문(四六文)》과 《계원필경(桂苑筆畊)》
○ 최치원은 고려(高麗)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고변(高騈)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군하였다. 《사륙문》 1권을 저술하였으며,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 최치원은 《사륙문》 1권이 있으며, 당(唐)나라 사람이다.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는바, 당나라 최치원의 표전(表牋)과 격문(檄文)이다.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살펴보건대,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며, 신라 사람이다. 나이 12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 건부(乾符) 원년(874, 경문왕14) 갑오에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고변의 행영(行營)에서 종사(從事)하면서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었다. 대개 《당서》가 송나라 때 만들어졌으므로 신라를 고려라고 한 것이다.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삼한시귀감》 상권과 하권은 석간(石澗) 조현흘(趙玄仡)이 정선(精選)하고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비점(批點)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살펴보건대, 조현흘은 마땅히 조운흘로 되어야 한다. 인물전(人物傳)에 상세히 나온다.

《서상잡영(西上雜咏)》
○ 고려의 시 3권이 있다. 조씨(晁氏)가 말하기를,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에서 최사제(崔思齊), 이자위(李子威), 고호(高號), 강수평(康壽平), 이수(李穗)를 보내어 조공하게 하였는데, 상원일(上元日)에 동쪽 궁궐에서 잔치를 하였다. 신종(神宗)이 어제시(御製詩)를 관반(館伴)인 필중행(畢仲行)에게 하사하자, 필중행과 이들 5인 및 양부(兩府)의 신하들이 모두 화답하여 올렸다. 그 뒤에 사인(使人) 김제(金稊), 박인량(朴寅亮), 배□(裵□), 이강손(李絳孫), 노류(盧柳), 김화진(金化珍) 등이 도중에서 70여 편을 창화(唱和)하여 스스로 편찬한 다음 《서상잡영》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강손이 서문을 지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설손(偰遜)의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 설손은 회골(回鶻)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역임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에 선발되었다. 공민왕 7년(1358)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가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으며, 《근사재일고》를 지었다. 《명시종(明詩綜)》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집(圃隱集)》
○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이고 고려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해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포은집》이 있다. 《상동》 ○ 이 이하의 여러 사람들의 관작과 관향 및 사실은 인물전에 상세히 나온다.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포은집》은 정몽주가 지은 것이다. 정몽주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권채(權採)의 《포은집》 서문에 이르기를,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조회하고, 동쪽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포은봉사고(圃隱奉使藁)》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정몽주는 홍무(洪武) 정사년(1377, 우왕3)에 우리 일본에 사신으로 왔다가 《포은봉사고》를 지었는데, 좋은 작품이 많다. 또 《포은집》이 있는데, 보지는 못하였다.” 하였다. 《상동》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 이색의 자는 영숙(頴叔)이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다음 해에 원나라에 가서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2갑(甲)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한산 백(韓山伯)에 봉해졌다. 《목은집》이 있다. 《명시종》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 이숭인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도은집》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에 이르기를, “《도은집》에는 황명(皇明)의 문화전 대학사(文華殿大學士) 장부(張溥)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고손지(高巽志)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하였다.

허금(許錦)의 《야당집(野堂集)》
○ 조선의 허종(許琮)의 증조부인 허금은 자가 재중(在中)이며, 《야당집》이 있는데,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 두 사람의 서문이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집(惕若齋集)》
○ 김구용은 자가 경지(敬之)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제수되었다. 《척약재집》이 있다. 《명시종》

최해(崔瀣)의 《동문선(東文選)》
○ 고려는 문교(文敎)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뛰어났는바,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계림인(鷄林人) 언명보(彦明父) 최해(崔瀣)가 원나라 이전의 시를 뽑아서 기록하고 이름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생각건대 반드시 볼만한 책일 것인데, 애석하게도 구해 볼 길이 없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최해는 자가 언명(彦明)이고 호가 졸재(拙齋)이며 계림 사람이다. 9세 때 능히 시를 지었고, 고려 충렬왕 계묘년(1303, 충렬왕29)에 박리(朴理)의 방(榜)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에 원나라 조정의 신유년(1321, 충숙왕8) 제과(製科)에 급제하였다. 관직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벼슬이 오르거나 깎이는 것으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않으면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일찍이 우리나라 명현들이 지은 시를 뽑아 모은 다음 제목을 《동인지문》이라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속동문선(續東文選)》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동문선》은 130권이고 목록이 상, 중, 하 3권이다. 대개 탈간(脫簡)이 많은데, 목록 상권과 하권을 검색해 보면 제8권에 윤소종(尹紹宗)의 ‘이 상국이 왜구를 대파하고 군대의 위세를 떨치면서 환도한 것을 축하하다.[賀李相國大破倭寇振旅還都]’라는 시와 신숙주(申叔舟)의 ‘일본의 승려 수린의 시축에 제하다.[題日本僧壽藺詩軸]’라는 칠언 고시(七言古詩)가 있고, 제18권에 권근(權近)의 ‘일본의 승려 대유가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다.[送日本釋大有還國]’라는 시와 최항(崔恒)의 ‘일본의 사에게 제하다.[題日本師]’라는 칠언 배율(七言排律)이 있고, 제88권에 이숭인(李崇仁)의 ‘정달가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와 서문[送鄭達可奉使日本詩序]’ 및 ‘일본의 천우상인이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日本天祐上人還國序]’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빠져 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권근(權近)의 《응제집(應制集)》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 권 수재(權秀才)의 《응제집》 발문’에,
“고려의 수재 권근은 자가 사숙(思叔)이고 별호(別號)는 양촌(陽村)이다. 홍무 연간에 남경(南京)에 왔었는데, 고황제(高皇帝)께서 예의로써 접대하고 옷과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이어 시를 읊게 하였다. 그러자 양촌은 먼저 본국 흥폐의 전말과 사신으로 오면서 지나온 곳에 대해 읊었으며, 다음으로 본국 이합(離合)의 형세와 산하(山河)의 경치, 인국(隣國)의 정세에 대해 읊고, 겸하여 동인(東人)들이 감화를 받은 뜻에 대해 서술하였다. 시를 다 읊고 나자 정화(精華)가 환히 빛나고 소리가 쟁쟁하였다.
황제가 보고서는 칭탄하면서 인하여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 경청(景淸), 대덕이(戴德彝), 장신(張信) 등에게 명하여 함께 남시루(南市樓), 북시루(北市樓), 내빈루(來賓樓), 중역루(重譯樓), 학명루(鶴鳴樓), 취선루(醉仙樓) 등을 유람하게 하였다. 황제가 또 3편의 어제시(御製詩)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홍무 병자년(1396, 태조5)의 일이었다.
건문(建文) 4년(1402, 태종2) 봄에 조선의 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이 지신사(知申事) 박석(朴錫)으로 하여금 의정부에 내려 판각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이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인 그 나라 사람 이첨(李詹)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림사관 병부주사(翰林史官兵部主事)인 금릉(金陵) 사람 단목효사(端木孝思)가 나란히 서문을 지었으며, 회남(淮南) 사람 육옹(陸顒)과 반이(番易) 사람 축맹헌(祝孟獻)이 그 뒤에다가 제시(題詩)하였다. 황제가 양촌에게 주루(酒樓)를 유람하도록 한 사실은 실록(實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응제집》을 보니, 천순(天順) 원년(1457, 세조3)에 조선에서 간행한 본이었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권근의 《응제집(應制集)》에 공경히 제하다.
황제의 어제시와 권근의 응제시는 합하여 한 질인데, 선배들이 제하거나 찬한 것이 상세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구나 황제가 지은 어제시는 고금을 내리비추고 우주에 아득한 데이겠는가. 권근의 시어(詩語)도 역시 부드럽고 순하여 문체(文體)를 얻었는바, 읽어 보면 기뻐할 만하여 나라에서 소중히 보관하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홍무(洪武) 시대에서 지금까지는 세차(世次)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조선의 시가 과연 모두 권근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시경》 삼백편(三百篇)이 나온 이후로 시는 당나라 때보다 더 성한 적이 없었다. 양백겸(楊伯謙)의 저술에서는 이 시기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초당(初唐)의 음(音)은 오히려 풍부하였으며, 성당(盛唐) 때에는 침착하였고, 만당(晩唐)의 유향(遺響)은 점차 유창하고 아름다워졌다. 이는 모두 당시의 정치가 감응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군국(郡國)과 향리(鄕里)에서 숭상하고 좋아하는 바가 서로 달라 마침내 처음의 뜻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대하였던 주(周)나라 이후에도 정위(鄭衛)의 음악은 끝내 변하지 못하였고, 오초(吳楚)의 시(詩)는 저술이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천자께서 거룩한 자질로 거룩하신 분들의 뒤를 이었으므로 조선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는바,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점점 물들어서 처음의 뜻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대가 오래되고 치도가 이루어졌으니 필시 더욱더 나아진 점이 있을 것이다. 성음(聲音)의 도는 정치의 도와 서로 통하는 법으로, 도움 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니, 그 처음을 높이고 그 끝을 아름답게 하면 아마도 제후의 법도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에 그 시를 장엄하게 외운 다음 다시 시를 지어 뒤를 잇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은하수에 해와 별이 드리워짐에 / 雲漢垂日星
반짝반짝 저 하늘에 달려 있구나 / 煌煌麗穹昊
하수와 낙수에서 도서 나오매 / 河圖與洛書
천년토록 지극한 도 이어받았네 / 千載承至道
삼가고 삼가는 동국의 신하 / 斤斤東國臣
마음과 시 조서와 들어맞았네 / 心聲契敷詔
잘 간직해 잊지 않길 맹서했으니 / 什襲矢弗諼
두 나라가 영원토록 잘 지내리라 / 邦土永爲好
누려온 세월 이미 오래됐으니 / 歷年亦已久
풍아가 날마다 묘해질 걸세 / 風雅日臻妙
내 어찌 알았으랴 지역 다른데 / 焉知地尙殊
처음 뜻이 작아지지 아니했을 줄 / 初意弗微眇
옛날에는 도타움을 숭상했는데 / 古則貴敦柔
중간에는 시끄러움 많아졌다네 / 中更多叫噪
그 어찌 시어에만 그러하리오 / 豈惟詞語間
정치에도 요체가 되는 거라네 / 政治實樞要
나의 걸음 날마다 나라 지나매 / 我行日逾邁
풍속 보고 심오함을 내 알았다네 / 觀風知蘊奧
충정은 대대로 더욱 도탑고 / 忠貞世彌篤
문헌은 계속해서 이어나가리 / 文獻須繼紹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할 적에 / 歸當告天子
시 올려서 덕화 더욱 펴게 하리라 / 陳詩補聲敎
마음속에 무언가를 얻은 듯하여 / 充然如有得
머리를 조아리며 예 올리누나 / 稽首三舞蹈
《장영(張寧)의 봉사록(奉使錄)》

살펴보건대, 《양촌집》을 보면, 홍무 29년 병자 7월 19일에 표문(表文)을 찬출한 일로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9월 11일에 입조(入朝)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칙명을 내려 문연각(文淵閣)에 머물러 있게 하고 3일 동안 유관(游觀)하도록 명하였으며, 잔치를 하사하고는 명제(命題)하여 시 24편을 읊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하였다. 그다음 해 3월에 칙서를 받들고서 귀국하였다.
양촌이 직접 쓴 《응제집》 발문은 다음과 같다.
“홍무 병자년 여름에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지은 자를 징소(徵召)하였는데, 신(臣) 근(近)이 표문을 다듬는 데 참여하였던 까닭으로 우리 임금에게 고하고 명나라 조정에 달려갔다. 그러자 황제는 죄를 용서하여 불문에 붙이고는 은혜로운 명을 내려 문연각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열을 따르게 하고, 광록시(光祿寺)에서 음식을 하사하고 내부(內府)에서 옷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3일 동안 유가(游街)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명제(命題)하여 시 몇 수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장구(長句) 사운(四韻)의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해 주었다. 이는 천광(天光)이 내리비추어 미물(微物)을 꾸며 준 것으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특별한 은총이다.
나는 그때 또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와 교분을 맺게 되었는데, 유삼오는 연치와 덕망이 모두 높았으므로 내가 태산 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렀다. 그리고 허관(許觀), 경청(景淸), 장신(張信), 대덕이(戴德彝) 등 제공(諸公)들은 모두 난새나 봉황처럼 영준하여 궁궐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나를 해외(海外)의 소생(小生)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예로써 대우하여 따뜻한 얼굴로 대해 주었다. 이에 나는 매양 공손하게 옷자락을 걷어잡고 나아가 수업하면서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가 다르고 또 통역할 사람조차 없어서 마침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갑자기 칙지(勅旨)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추억해 보니, 꿈속에서 천상에 올라갔다가 깨고 보니 진토(塵土)에 있는 것만 같이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제께서 내려 주신 어제시가 책 상자 안에서 빛나고 있으니, 마땅히 열 겹으로 잘 싸서 고이 간직하여 자손 대대로 영원토록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홍무 30년(1397, 태조6) 정축 3월 상순에 양촌 권근은 본국에 와서 쓴다.”

신숙주(申叔舟)의 《범옹집(汎翁集)》
○ 신숙주의 자는 범옹이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공이 있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범옹집》이 있다. 《명시종》
○ 신숙주가 지은 시집(詩集) 20권은 그의 손자인 신종호(申從濩)가 편찬하였으며, 영도(寧都) 사람 상서(尙書) 동월(董越)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정통(正統) 10년(1445, 세종27)에 주사(主事) 황찬(黃瓚)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범옹이 당(堂)의 현판을 써 주기를 요청하자, 황찬이 마침내 희현당(希賢堂)이라고 당호를 써 주고, 이어 《희현당시집(希賢堂詩集)》의 서문을 지어 주었다.

강씨(姜氏)의 《진산세고(晉山世稿)》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진산세고》 4권은 조선의 하관(夏官) 강 상공(姜相公)이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 삼대가 지은 것을 편찬한 것인데, 편찬한 시기는 명나라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이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를 보면, 《진산세고》는 본조의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강회백의 아들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의 아들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삼대의 세고(世稿)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북정고(北征藁)》
○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이고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는데, 저술한 것으로는 《북정고》가 있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북정고》는 천순(天順) 경진년(1460, 세조6)에 서거정이 왕명으로 들어와 조근(朝覲)할 적에 지은 것이다. 주사(主事) 기순(祁順)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 조선의 《매월당시(梅月堂詩)》 2권은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 모르는데, 시가 몹시 천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에 이르기를, “십 년 동안 유락하여 신도를 바라봤네.[十年流落 瞻望神都]”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능은 어찌하여 끝내 오랑캐에게 투항하려 하였으며, 오원은 어찌하여 오나라에서 죽음 면하기를 기약하였나.[李陵豈欲終投虜 伍員何期免死吳]” 하였으며, 또 “□□□□대군이 서울에 잡아두려고 하기에 산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면서 지었다.” 하였다. 《열조시집》

허기(許愭)의 《매헌집(梅軒集)》
○ 조선 사람 허종(許琮)의 할아버지인 허기는 자가 원덕(原德)이고, 관직이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으며, 《매헌집》이 있다. 《정지거시화》

허종(許琮)의 《상우당시집(尙友堂詩集)》
○ 허종의 자는 종경(宗卿)이고 안흥(安興) 사람이다.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참정부 의정(參政府議政)에 이르렀다. 《상우당시집》이 있다. 《명시종》

허씨(許氏)의 《양천세고(陽川世藁)》
○ 허흡(許洽)과 그의 동생 허항(許沆)이 모두 시로 이름이 났는데, 일찍이 선대(先代)의 시를 모아서 《양천세고》라고 이름하였다. 허항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형제가 모두 국정(國政)을 잡았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를 보면, 《양천세고》는 바로 야당(野堂) 허금(許錦), 허금의 아들인 매수(梅叟) 허기(許愭), 허기의 손자인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 허종의 동생인 이헌(頤軒) 허침(許琛), 허종의 종질인 문병(文炳) 허반(許磐) 등 4대, 5인이 지은 것이며,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서문을 짓고는 소노(蕭盧)라고 지목하였다.

이희보(李希輔)의 《안분당집(安分堂集)》
○ 이희보의 자는 화종(和宗)이고,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분당집》이 있다. 《명시종》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시집(淸心堂詩集)》
○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이다. 처음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다가 호조 판서로 옮겼으며,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청심당시집》이 있다. 《상동》

김안국(金安國)의 《모재집(慕齋集)》
○ 김안국의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모재이며, 형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모재집》이 있다. 《상동》

신광한(申光漢)의 《기재집(企齋集)》
○ 신광한의 자는 한지(漢之)이고,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기재집》이 있다. 《상동》

서경덕(徐敬德)의 《화담집(花潭集)》
○ 서경덕은 조선의 생원(生員)이며, 《화담집》이 있다. 《상동》
○ 《서화담집(徐花潭集)》은 2권이다. -절강 순무(浙江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本)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조선의 생원 서경덕이 찬하였다. 서경덕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학문을 강마하여 56세 때 그 나라의 제학(提學) 김안국(金安國)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극력 사양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는 화담(花潭)에 거처하면서 인하여 화담으로 호를 삼았다.
이 문집은 잡문(雜文)과 잡시(雜詩)가 모두 2권이다. 그 글 가운데 원이기(原理氣) 1편의 끝에는 부기(附記)가 있는데 ‘선생(先生)’이라고 칭하였으며,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 1편의 끝에도 역시 부기가 있는데, 거기에 ‘이상 4편은 모두 선생께서 병이 위독할 때 지은 것이다’ 하였으며, 시 가운데 ‘신기재의 운을 차운하다[次申企齋韻]’ 1수에는 원작(原作)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기재(企齋)가 선생께 준 시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는 대개 문인(門人)들이 편집한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은 한결같이 송유(宋儒)를 조종으로 삼았는데, 특히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자(邵子)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다. 문집 가운데 잡저(雜著)에서는 모두 이 두 책의 종지(宗旨)를 발휘하였다. ‘심 교수를 전송하는 서[送沈敎授序]’에는 전체가 소자의 학문이며, ‘상제를 논한 소[論喪制疏]’와 ‘박지화에게 답한 편지[答朴枝華書]’ 역시 자못 예제(禮制)에 대해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으니, 대개 정학(正學)에 힘쓴 동국의 선비인 것이다.
시의 경우는 억지로 말하면 격양집파(擊壤集派)라고 하겠으나, 또한 그 나라의 방언(方言)이 뒤섞여 있으며, ‘가을이 다 지나고 계절 바뀌자, 낙엽 져서 천지가 삐쩍 말랐네.[窮秋盛節換 木落天地瘦]’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그 체가 교도(郊島)와 근사하나,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나머지 무현금명(無絃琴銘)의
거문고의 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 不用其弦
그 현을 타는 것을 쓰는 거라네 / 用其弦弦
음률 밖에 울리는 궁상 소리를 / 律外宮商
내가 그 참모습을 깨달았도다 / 吾得其天
소리로써 즐기는 것이 아니라 / 非樂之以音
음악의 소리를 즐기는 거고 / 樂其音音
귀로다가 소리 듣는 것이 아니라 / 非聽之以耳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 거라네 / 聽之以心
음악 듣기 잘 하였던 저 종자기는 / 彼哉子期
어찌하여 내 거문고 소리 안 듣나 / 盍耳吾琴
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은 소황(蘇黃)의 뜻을 얻었으나,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합치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문사(文士)들 가운데 음영(吟詠)으로 상국(上國)에 알려지고, 우뚝하게 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을 전하여 향리에서 가르친 것은 서경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역시 호걸스런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은 비록 격이 낮지만 특별히 표목(標目)을 보존하여 그 사람을 드러내는 바이다. 《사고전서총목》

유근(柳根)의 《서경집(西坰集)》
○ 유근의 자는 회부(晦夫)이고 과거에서 장원하였으며, 자호(自號)는 은병거사(隱屛居士)이다. 《서경집》이 있다. 《명시종》

이호민(李好閔)의 《오봉서소집(五峯書巢集)》
○ 이호민의 자는 효언(孝彦)이고 과거에서 탐화(探花)를 차지하였으며, 추상(樞相)을 지냈다. 《오봉서소집》이 있다. 《상동》

허균(許筠)의 《백월거사집(白月居士集)》
○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허봉(許篈)의 동생이다. 형과 더불어 모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자호는 백월거사이다. 문집이 있다. 《상동》

이달(李達)의 《손곡집(蓀谷集)》
○ 《손곡시집(蓀谷詩集)》은 6권인데, 지은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억석행을 읊어 정랑 신설에게 주다[憶昔行贈申正郞渫]’라는 시(詩)로 보아 만력(萬曆) 연간에 조선의 배신(陪臣)이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속국(屬國)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뒤에 이 시를 지어 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계(天啓) 연간에 총병(摠兵) 모문룡(毛文龍)이 피도(皮島)를 지키고 있을 적에 그에게 동국의 도적(圖籍)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이 문집을 구하여 보내왔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이달의 자는 달부(達夫)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열조시집》에 손곡의 시 36수를 실으면서도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죽타(竹坨) 주이존(朱彝尊)의 《명시종(明詩綜)》에서는 이미 이달의 시 1수가 실려 있고, 또 손곡의 시 5수가 실려 있는데도 말하기를, ‘그 이름이 상세하지 않다’ 하였으니, 중국 사람들이 외국의 시를 기록함에 있어서 소루하기가 이와 같은 것은 괴이할 것도 없다.

최전(崔澱)의 《양포집(楊浦集)》
○ 최전의 자는 언침(彦沈)이고, 해주(海州) 사람이며,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양포집》이 있다. 《명시종》

정사룡(鄭士龍)의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
○ 정사룡의 자는 운경(雲卿)이고, 정진(鼎津) 사람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다. 《호음초당집》이 있다. 《상동》

김안로(金安老)의 《명허헌집(明虛軒集)》
○ 김안로의 자는 이숙(頤叔)이고,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다. 《명허헌집》이 있다. 《상동》

김상헌(金尙憲)의 《조천록(朝天錄)》
○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이며, 《조천록》이 있다. 《어양시화(漁洋詩話)》

이숙원(李淑媛)의 《옥봉집(玉峯集)》
○ 이숙원은 자호(自號)가 옥봉주인(玉峯主人)이며, 승지학사(承旨學士) 조원(趙瑗)의 첩이다. 문집이 있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조원은 호가 운강(雲江)이고, 시는 만당(晩唐) 시대의 것과 비슷하다. 소실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의 후예로, 호가 옥봉이며, 시 32편이 있는데 11편이 《열조시집》에 기록되었다.

허씨(許氏) 누이동생의 《난설헌집(蘭雪軒集)》
○ 허경번(許景樊)은 자가 난설(蘭雪)이고 조선 사람이며, 그의 오빠는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다. 금릉(金陵)의 주 장원(朱壯元)이 동국에 사신 나갔을 때 그의 문집을 구해 돌아와 드디어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상동》
살펴보건대,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과 한림(翰林) 양유년(梁有年)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둘 다 《난설헌집》의 소인(小引)을 지었는데, 그 글이 본 문집에 실려 있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동인시화》 상권과 하권은 조선의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이 저술한 것이다. 《이칭일본전》

《황화집(皇華集)》
○ 《황화집》 30권 -내부(內府) 소장본(所藏本)이다.- 은 명나라 때 사신들이 창화(唱和)한 작품을 조선국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천순(天順) 원년, 2년, 3년, 4년, 8년, 성화(成化) 12년, 굉치(宏治) 원년, 5년, 정덕(正德) 16년, 가정(嘉靖) 16년에 지은 시만 수록되어 있다.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때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겨우 10년에만 그치지 않는바, 빠진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해지는 본(本)이 모두 같으니, 혹 사신들이 모두 시에 능하지는 못하여 이 《황화집》을 만든 자가 이에 그친 것인가? 《사고전서총목》
○ 진감(陳鑑)의 자는 즙희(緝煕)이며, 개주위(蓋州衛) 사람이다. 정통(正統) 연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한림 학사가 되었다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을 때 편찬한 《황화집》이 사람들에게 칭해진다. 《청일통지(淸一統志)》
살펴보건대, 진감은 천순 원년(1457, 세조3)에 고윤(高閏)과 함께 사신으로 나왔다.
○ 정지(靜之) 장영(張寧)은 해령(海寧) 사람이며, 호가 방주(方洲)이다.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을 적에 조선 사람들이 존중하였는데, 그가 지은 글을 모아 판각하여 《황화집》을 만들었다. 《서호지여(西湖志餘)》
살펴보건대, 장영은 천순 4년(1460, 세조6)에 사신으로 나와 《황화집》을 지었는데, 우리나라의 최항(崔恒)이 서문을 썼다.
○ 조선의 병조 판서 어세겸(魚世謙)이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황화집》의 서문을 지었으며, 성현(成俔)의 시 4수를 기록하였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홍치 원년에 동월(董越)이 사신으로 나왔을 때 지은 《황화집》이다.
○ 《황화집》은 2권이고, 《속집(續集)》은 1권이다. -안휘 순무(安徽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이다.-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가 정덕(正德) 16년(1521)에 세종(世宗)이 즉위한 데 대한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그 나라의 번신(藩臣)과 날마다 창화(唱和)하였는데, 조선의 국왕이 특별히 서국(書局)에 명하여 이 《황화집》을 편찬하게 하였다.
《황화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嘉靖) 원년(1522, 중종17)에 의정부 좌의정 남곤(南袞)이 쓴 서문이 실려 있으며, 두 사신이 국경에 도착해서부터 귀국할 때까지 의정부 우의정 이행(李荇) 등과 창화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황화속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 원년에 쓴 이행의 서문이 실려 있으며, 오직 당고가 국왕과 이별하면서 준 율시(律詩) 2편과 의정부 영의정 김전(金詮) 이하가 화답한 시만 실려 있다.
상고해 보건대, 당고가 사신으로 간 사실은 《명사(明史)》 본기(本紀) 및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세종실록(世宗實錄)》에만 그 일이 8월 을사조에 실려 있다. 남곤이 쓴 이 책의 서문에 이르기를, “12월 을유에 왕경(王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명을 받든 때부터 거의 5개월이나 지난 뒤이다. 또 남곤이 쓴 《황화집》 서문에는 이르기를, “처음 서울에 들어온 때부터 국경을 나갈 때까지 겨우 30일 남짓하였는데, 기행(紀行)의 작품이라든지 높은 데 올라가 읊은 시가 약간 편이 있다.” 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황화집》 가운데 처음에 국경에 들어가서 지은 것으로는 당고의 ‘영훈루에 올라서[登迎薰樓]’라는 시가 있는데, 그 표(標)에 이르기를, “동지(冬至)로부터 10일 뒤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1월 14일이 동지였으니, 이 시를 지은 날짜는 24일이다. 그리고 국경을 나갈 때 지은 시로는 당고의 ‘안산에 이르러 번경(藩京)의 여러 군자들에게 회포를 부치다.[至鞍山寄懷藩京諸君子]’라는 시가 있는데, 표에 이르기를, “납월(臘月) 신축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2월 기묘일이 초하루이니, 신축일은 바로 이달 23일이다. 그러니 서문에서 창화한 것이 30일 남짓하였다고 이른 것과 서로 딱 맞아떨어진다. 《사고전서총목》
○ 가정(嘉靖) 16년(1537, 중종32)에 수찬으로 있던 명치(鳴治) 공용경(龔用卿)과 자순(子醇) 오희맹(吳希孟)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자 조선국왕이 배신(陪臣) 10인을 파견해 잔치를 벌이게 하였는데, 모두 시편(詩篇)을 지어 화답하여 동국의 일대 성사가 되었다. 이 《황화집》은 김안로(金安老)가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황화집》의 발문’에,
“본조의 시종신(侍從臣)들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면 으레 《황화집》을 짓는데, 이 《황화집》은 가정 18년(1539, 중종34) 기해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의 태호(泰號)와 황조(皇祖)와 황고(皇考)의 성호(聖號)를 올린 데 대해 조서를 반포할 적에 석산(錫山) 사람 수찬 화찰(華察)이 가서 조서를 반포하고 유시할 때 지은 것이다. 동국은 문체(文體)가 평탄하고 직설적이어서 사림(詞林)의 제공들이 격조를 폄하하기를 아끼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서는 먼 데 사람을 회유하는 뜻을 붙인다. 그러므로 화려한 말을 쓰는 경우가 아주 적다. 배신(陪臣)들이 시를 지을 때에는 매번 두 글자를 가지고 일곱 글자의 뜻을 함축하는데, ‘나라[國] 안에 창[戈]이 없으니 한 사람이 앉아 있네.[國內無戈坐一人]’라는 시구와 같은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동파체(東坡體)라고 하는 것인데, 제공들은 이 시에 대해 수답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학집(有學集)》
○ 가정 23년(1544, 중종39)에 태감(太監) 곽방(郭)과 화정(華亭) 사람인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중관(中官)이 함께 가 도중에서 수창한 작품이 없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올 적에 시를 봉해서 관반(館伴)에게 주고는 서로 더불어서 화답하였다. 그러자 이를 간행해서 《황화집》 1권을 만들었는데, 정사룡(鄭士龍)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가정 25년(1546, 명종1)에 행인 왕학(王鶴)이 책립(冊立)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조선 사람들이 《황화집》을 판각하였다. 그러자 국왕이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후서(後序)를 짓게 하였다. 《열조시집》
○ 문목공(文穆公) 허국(許國)은 자가 유정(維楨)이다. 융경(隆慶)으로 개원(改元)한 뒤에 한림 검토(翰林檢討)에 제수되어 조서를 받들고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사신의 행차가 지나는 곳마다 경치를 감상하고 풍속을 살폈으며, 간간이 기술한 것이 있는데, 《황화집》의 ‘조기자(弔箕子)’라든지 ‘알단군(謁檀君)’ 같은 여러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하여 외우고 있다. 《복숙산방집(復宿山房集)》

이상은 집류(集類)이다.


[주D-001]유릉(裕陵)이 …… 악보(樂譜)이며 :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한 것은 휘종(徽宗) 정화(政和) 5년(1115, 예종10)인바, 유릉(裕陵)은 영우릉(永祐陵)의 잘못인 듯하다.
[주D-002]응창(應昌) : 열하성(熱河省)의 서쪽, 찰합이(察哈爾)의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곳에서 죽었다.
[주D-003]화림(和林) : 수원성(綏遠省)에 있는 지명으로, 화령(和寧)이라고도 한다.
[주D-004]10년 …… 행하였으나 : 이때 북원(北元)에서 두개달(豆个達)을 파견하여 경효대왕(敬孝大王) 즉 공민왕을 제사하자, 비로소 북원의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주D-005]방효유(方孝孺) : 원문에는 ‘方孝儒’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6]서전회선(書傳會選) : 명나라 태조가 채침(蔡沈)의 《서전》에 나오는 상위(象緯)의 운동과 주자(朱子)의 《시전(詩傳)》에 나오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을 보고는 천하의 유신들을 모아 정정하게 하여 만든 책이다.《明史 卷141 方孝孺列傳》
[주D-007]정몽주(鄭夢周)가 …… 알았으며 : 이 부분이 원문에는 ‘몽주유화증관역명(夢周猶和贈官易名)’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폭서정집》 권44에 의거하여 ‘몽주도이성계불극 위방원소살 방원유지증관역명(夢周圖李成桂不克 爲芳遠所殺 芳遠猶知贈官易名)’으로 바로잡았다.
[주D-008]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 원문에는 ‘忠肅王世宗’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09]이성계(李成桂) …… 말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其稱太祖太宗乃其臣子之事’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권14에 의거하여 ‘其稱李成桂李芳遠爲太祖太宗乃其臣子之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봉역도(封域圖) : 봉역(封域)은 제후가 분봉(分封)받은 지역이다. 봉역도는 제후국의 지도를 말하는데, 이를 바치는 것은 종주국(宗主國)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주D-011]지리도(地里圖) : 원문에는 ‘地理國’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12]조자(跳咨) : 인명인 듯한데,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주D-013]사지팔도(四至八到) : 사지는 동, 서, 남, 북을 말하고, 팔도는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을 말하는데, 옛날의 지리도서(地理圖書)에서는 이를 가지고 주현(州縣)의 방위나 거리를 표시하였다.
[주D-014]왜학(倭學) : 조선 시대 때 사역원(司譯院)에 딸린 일본어를 전문으로 학습하던 곳이다.
[주D-015]이로파(伊路波) : 일본어 학습의 기초가 되는 서적으로, 같은 글자를 반복하지 않고 지은 시인데, 한글로 발음이 표기되어 있다. 성종 23년(1492)에 간행한 본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6]소식(消息) : 일본의 서간문(書簡文)을 모은 책으로 보이며, 현재 일본에 있는 소식류(消息類)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가마꾸라막부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7]서격(書格) : 현존하지 않는 책으로, 내용을 알 수가 없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8]노걸대(老乞大) : 몽어학(蒙語學)의 학습서로,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내용은 중국의 북부 지방을 여행하는 고려인과 중국인 사이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 이외에 몽고어와 왜어로도 번역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9]동자교(童子敎) : 일본인의 초학(初學) 교과서로 14, 5세기경에 널리 읽혔으며, 그 내용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오언시(五言詩)로 읊고 그 오른쪽에 일본음으로 풀어쓴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0]잡어(雜語) : 현존하지 않는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1]본초(本草) : 송나라의 당신미(唐愼微)가 편찬한 의서(醫書)로, 여기서 말하는 《본초》는 일역본(日譯本)으로 보인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2]의론(議論) : 원문에는 ‘譏論’으로 되어 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의론》은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3]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 일본 어학 서적의 일종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4]정훈왕래(庭訓往來) : 14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일본어 초등 교과서로, 그 내용은 일본 무사들이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서간문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5]응영기(應永記) :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전기 사이의 전쟁터에서 쓰인 서간문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6]잡필(雜筆) : 중급 무사(中級武士)들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사항을 광범위하게 서술한 경구(警句)나 단문(短文) 등을 불규칙하게 배열해 놓은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7]부사(富士) : 부사평야(富士平野)의 사냥터에서 띄운 5통의 편지로 되어 있으며, 15세기 후기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8]갑인년(1794, 정조18) : 《대전통편》은 정조 8년(1784)에 편찬을 시작하여 정조 10년(1786)에 완성하였는바, 잘못된 것인 듯하다.
[주D-029]화개씨(和介氏) : 화기씨(和氣氏)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화기광세(和氣廣世) 때부터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그 의술이 화기정설(和氣貞說) 등으로 전해졌다.
[주D-030]단파씨(丹波氏) : 화기씨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로, 단파강뢰(丹波康賴) 등이 배출되었다.
[주D-031]단파강뢰(丹波康賴) :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912년에서 995년까지 살았으며, 《의심방(醫心方)》을 저술하였다.
[주D-032]경번(景樊) :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별호(別號)이다.
[주D-033]이동원(李東垣) : 동원은 금(金)나라 이고(李杲)의 호이다. 이고는 《주역》과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 《난실비장(蘭室祕藏)》 등을 저술하였다.
[주D-034]주단계(朱丹溪) : 단계는 원나라 사람인 주진형(朱震亨)의 호이다. 주진형은 의술에 아주 뛰어났으며, 《국방발휘(局方發揮)》, 《단계심서(丹溪心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D-035]칠정(七情) : 한의학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희(喜), 노(怒), 출(怵), 사(思), 비(悲), 공(恐), 경(驚)을 말하는데, 희가 지나치면 심장을, 노가 지나치면 간을, 사가 지나치면 비장을, 비가 지나치면 폐를, 공이 지나치면 신장을 손상시키며, 걱정을 오래하면 기가 막히고, 갑자기 놀라면 기가 위축된다고 한다.
[주D-036]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 : 부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 맥으로 양맥(陽脈)에 속하며, 침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는 맥으로, 음맥(陰脈)에 속한다.
[주D-037]대황(大黃) : 1.5m가량 자라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북부 고산지대에서 나며, 성질이 차서 뿌리를 대소변이 불통하는 것을 치료하는 데 쓴다.
[주D-038]부자(附子) : 바곳의 구근(球根)으로, 성질이 열(熱)하고 양기(陽氣)를 돋우므로 체온이 부족하여 생기는 모든 병에 쓴다.
[주D-039]대역(大易)의 …… 점괘 : 《대역》은 《주역(周易)》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예기치 않았던 병이다. 약을 쓰지 말라. 기쁨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D-040]남쪽 …… 경계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 사람들의 말에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될 수가 없다.’고 하니, 이는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주D-041]헌기(軒岐) :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그의 신하인 기백(岐伯)의 병칭이다. 황제가 기백으로 하여금 초목(草木)을 맛보면서 약초를 가려내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므로, 중국 의학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진다.
[주D-042]월(粵) : 고대에 월(粵) 종족이 살던 지방으로, 중국 남부 지방을 가리킨다.
[주D-043]반우(番禺)의 능어(凌魚) : 반우는 광동성(廣東省)에 속하는 현의 이름이고, 능어는 청나라 사람으로, 자가 서파(西波)이고 《운재집(耘齋集)》을 저술하였다.
[주D-044]고려(高麗) : 여기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주D-045]서상잡영(西上雜咏) : 원문에는 ‘西上新咏’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46]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 : 원문에는 ‘恭定王’으로만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보충해서 번역하였다.
[주D-047]실록(實錄) : 원문에는 ‘寶錄’으로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48]양백겸(楊伯謙) : 백겸은 명나라 양외(楊巍)의 자이다. 양외는 시를 잘 지었으며, 만력 연간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존가시고(存家詩稿)》가 있다.
[주D-049]정위(鄭衛)의 음악 : 춘추 시대 정나라와 위나라의 민간 음악으로, 난세(亂世)의 음악인데,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주D-050]하수(河水)와 …… 나오매 : 복희씨(伏羲氏) 때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도(圖)를 등에 업고 나왔으며,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마흔다섯 점으로 된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주D-051]斤斤 : 원문에는 ‘斥斥’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52]강 상공(姜相公) : 강희안(姜希顔)을 가리킨다.
[주D-053]격양집파(擊壤集派) : 《격양집》은 송나라 소옹(邵雍)이 찬한 책이다. 시풍(詩風)은 백거이(白居易)에 근원을 두었는데, 대개 논리를 근본으로 삼고 수식을 말단으로 삼았는바, 억지로 교묘하게 읊는 것을 배격하였다.
[주D-054]교도(郊島) : 당나라의 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말한다.
[주D-055]궁상(宮商) : 궁은 슬픈 소리이고 상은 쇳소리와 같은 소리인데, 합하여 음률(音律)을 말한다.
[주D-056]종자기(鍾子期) : 옛날에 음악을 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列子 湯問》
[주D-057]소황(蘇黃) : 송나라 때의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58]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학설로, 송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말한다.
[주D-059]주 장원(朱壯元) :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주지번은 선조 39년(1606)에 사신으로 나왔다.
[주D-060]굉치(宏治) : 홍치(弘治)를 가리킨다. 《사고전서총목》이 청나라 고종 때 편찬되었는데, 고종의 이름이 홍력(弘曆)인바, 황제의 이름을 휘하여 굉치로 쓴 것인 듯하다.
[주D-061]명을 …… 뒤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趾奉命幾五月也’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총목》 권39에 의거하여 ‘距奉命幾五月也’로 바로잡았다.

해동잡록 4 본조(本朝)
성삼문(成三問)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자는 근보(謹甫)이고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스스로 〈독서암(讀書庵)〉이라 호하였다. 세종[英廟]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 3품 이하의 문관만이 응시하는 문과의 재시험)에 장원(壯元)으로 뽑혀 언제나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뫼셔 계옥(啓沃 임금을 깨우치고 돕는 것)한 점이 많았다. 세조[光廟]가 왕위을 물려받자 성삼문이 예방승지(禮房承旨)가 되어 국새(國璽)를 받들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박팽년(朴彭年) 등과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그의 부친 성승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성근보(成勤甫)는 찬란하고 호방(豪放)하였으나 시(詩)는 잘하지 못하였다. 용재총화
세종 임술년 여름에 망한 원(元) 나라 잔당들이 우리 나라에 글을 보냈으나 변방을 지키던 장수가 그 사신을 거절하고 입국시키지 않았다. 임금께서 친히 이변(李邊)을 보내어 이 일을 중국 조정에 알리니 성삼문이 서장관(書狀官 비서격)으로 수행하였다. 을축년 봄에 임금께서 성운(聲韻)을 크게 바로잡을 뜻을 가지고, 마침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학문이 있는데 요양(遼陽)으로 귀양왔다는 말을 듣고 신숙주(申叔舟)에게 가서 교정(校正) 받아 오라 명령하였는데, 성(成)선생 역시 함께 갔다. 그 해 가을 박연(朴堧)이 천자(天子)의 생일을 축하하러 북경(北京)에 가는데 신선생ㆍ성선생이 또 〈요양으로〉 갔다. 먼저 세 번째 갈 적에는 여러 선생이 모두 시를 지어 주었으나 뒤에 두 번째는 간혹 신선생과 합하여 지어 준 적이 있었다. 신선생이 요양(遼陽)에서 창화(唱和 남이 보낸 글에 맞추어 짓는 것)한 것이 몇 편 있었는데, 성선생이 이것을 모아 책 한 권을 만들어 노경(老境)에 한가하게 읽으려고 〈독서암한완(讀書庵閒玩)〉이라 이름하고 김수온(金守溫)이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붙였다. 본서(本序)
○ 임금이 내린 옷은 버리고 초야(草野)의 편복을 입었고 임금이 내린 역말은 두고 흰 채찍과 푸른 나귀를 탔다. 〈성삼문설원기(成三問雪冤記)〉
수찬 성삼문이 일찍이 어가를 호위하여 희우정(喜雨亭)에 가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따라 강에 나가 달을 완상(玩賞)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세자인 문종(文宗)이 환관들에게 시를 구하려 귤(橘) 한 쟁반을 주었다. 귤이 없어지자 시가 나타나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영광으로 생각하고 각자 시를 지어 올렸다. 그 장면을 그려서 오래 전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신숙주가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의 서문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였다. 본집(本集)
○ 병자년의 변고에 성삼문이 대궐 마당에 끌려 나갔을 때 신숙주를 보고 말하기를, “처음 그대와 집현전에 같이 있었을 때 세종께서 매일 왕손(단종)을 안고 집현전에 나와 산보를 즐기시면서 여러 학사들을 보고, ‘내가 죽은 뒤에 경들은 모름지기 이 애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대 혼자 잊어버렸느냐?” 하였다. 다시 문초할 때 임금이 신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강희안(姜希顔)이 공술(拱述)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으니 임금이 묻기를, “강희안과 함께 모의하였느냐?”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정말 알지 못하오. 나으리[進賜]가 명사(名士)를 다 죽이니 이 사람은 남겨두었다 쓰는 것이 옳으리다. 정말 훌륭한 선비요.” 하여, 강희안이 이로 말미암아 화를 면하였다. 성삼문에게 형틀을 씌워 뜰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임금이 친히 심문하기를, “너희들의 이번 일은 무슨 일인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이 소리 지르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는 거요. 천하에 어찌 자기 임금과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내 마음은 나라가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하여 묻는 거요?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뺏앗아갔소. 나는 남의 신하가 되어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러는 거요. 나으리가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 주(周) 나라 성왕(成王)의 숙부로 어린 성왕을 끝까지 보좌했다)을 자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하니, 세조가 발을 구르며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위를 물려받을 때는 무엇 때문에 말리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 와서 나를 배반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내가 처음 금지시킬 수 없었던 것은 형세상 그리하였소. 나는 기왕에 나아가서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을 알고 물러나 죽음이 있을 뿐인 것을 알았으나 헛되이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 때문에 오늘이 있기를 기다려 일의 결과를 노렸던 것이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는 신(臣)이라 하지도 않고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너를 병방 승지에서 예방 승지로 바꾼 것은 그 일을 잘하라고 한 것인데, 말은 상왕(上王)을 복위시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上王)이 계시는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할 수 있소. 나는 사실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만약 믿어지지 않으면 나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계산해 보시구려. 나으리의 말씀은 모두 허망된 것으로 쓸데가 없소.” 하니, 세조가 크게 노하여 무사를 시켜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찌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팔이 끊어져도 굴복하지 않고, 천천히,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구려.” 하고, 안색을 변하지 않으면서 쇠가 식자 말하기를, “다시 달구어 오너라.” 하니 또 팔을 끊었다. 부친 성승(成勝)과 동생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함께 죽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우리 세종(世宗)께서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그 나라의 음으로 된 글이 있어서 그것으로 그 나라의 말을 적는데 우리 나라만 글이 없으며, 우리 나라의 음운(音韻)이 비록 중국과는 다르나 아(牙)ㆍ설(舌)ㆍ순(脣)ㆍ치(齒)ㆍ후(喉)ㆍ인(咽) 등 음과 음의 청탁ㆍ고저는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없다. 언문(諺文) 자모(子母) 28자를 짓고, 궁중에 국(局)을 설치하여 성삼문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 등을 시켜 수정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의 황찬(黃瓚)이 요동(遼東)에 귀양와 있어서 삼가 신숙주를 시켜 중국에 들어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음운(音韻)을 질문하게 하였는데 무려 13번을 내왕하였다.동상
○ 문종이 동궁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서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달이 밝고 사람이 잠든 뒤면 간혹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와서 어려운 것을 물었다. 당시 성삼문 등은 숙직할 때에 밤이라도 감히 의관을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세자[鶴駕]가 오지 않을 줄 알고 옷을 벗고 누으려다가 갑자기 문밖에 신발소리가 나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라고 부르면서 오니, 놀라 당황하여 얼떨결에 절할 정도였으니, 학문에 대한 근면과 신비를 좋아하던 마음은 천고에 드문 일이었다. 《용천담적기》
성삼문이 형벌을 받으러 수레를 타고 갈 때 그 집 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삼문이 꾸부려 마시고 곧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임금이 내린 밥 먹고 임금이 주신 옷 입으며 / 食君之食衣君衣
예부터 먹은 마음 평생에 어김없기 바랐노라 / 素志平生願莫違
마음은 충과 효가 있을 뿐 / 心上但知忠與孝
현릉(문종의 묘)의 송백이 꿈에 아련하여라 / 顯陵松柏夢依依
하였다. 〈본전(本傳)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안색이 변하자, 공(公)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약 변고가 있으면 신은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낯빛이 평온해졌다. 《석담유사(石潭遺事)》

팔준도명(八駿圖銘) 병인(幷引) 동문선에서 나옴

혹독한 추위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오고, 급한 여울 아래에는 반드시 깊은 못이 있기 마련이니 평화와 혼란이 서로 이어 내려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옛날 고려가 성하지 못하여 천명이 이미 가버렸으니 위에서 허물어지고 아래에서 쇠하여져 시랑(豺狼)을 풀어 놓아 길목에 앉아 있게 하고 문관과 무관이 안일하고 향락만을 일삼아 전쟁이 교외(郊外)에서 일어나게 되니 어리석은 백성은 도탄에 신음하게 되었다.
천하를 잃어버리니 조계박압지대업(操鷄搏鴨之大業)도 마침내 없어질 것이고 우(禹) 임금이 없었던들 백성들은 물고기가 되었을 것이니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책임은 뉘에게 돌아갈 것인가. 오로지 우리 태조 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께서 천년의 기회에 맞추어 상성(上聖)의 자질을 타고 났으니 실로 하늘이 낳은 덕이요, 신과 함께 모의하셨네. 한 번 크게 노하여 사악한 중을 몰아내니 사직(社稷)은 빈터가 되지 않았으며 만전(萬全)의 계획을 내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니 종묘(宗廟)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나하추[納哈出]를 쫓고 올랄(兀剌 두만강의 여진족)을 정벌할 때 태산(泰山)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같이 쉬웠고 지리산(智異山)에서 싸우고 운봉(雲峯)에서 승리하니, 질풍(疾風)이 어찌 떨어진 잎사귀 하나 쓸기 어려우랴. 토동(兎洞)에 말 안장을 푸니 해로운 기운은 바다 밖에 사라지고 압록강에서 고삐를 돌리니 대의(大義)는 해와 별보다 빛났어라. 수십 회 전장에 출입하며 한 고조(漢高祖)처럼 상처를 만지시기 몇 번이며, 천만 리를 달리시니 촉 나라 선주(先主 유비(劉備))같이 넓적다리의 살이 빠졌어라. 남쪽을 치면 북쪽에서 원망하며 대국은 두려워하고 소국은 그리워하여 가는 곳마다 서로 경하하니 정말 그 공훈 크게 이루었도다. 5백 년 만에 성인(聖人)이 나시니 칠덕(七德)은 이미 5백 년을 가름하였고 삼천의 암말[牝]인 신물(神物)이 나왔으니 한결같은 마음은 삼천여 명이 맞았어라[允協於三千]. 달리는 발굽은 법도에 맞고 부드러운 마음은 사람을 순하게 하네. 마음은 간절히 진영에 돌아가고 싶고 지혜는 익숙하여 잃었던 길로 도로 찿네. 오늘의 액운은 노력으로 풀 수 있고 내 채찍 가리키는 곳 어디고 건너가네. 생사를 서로 의탁함이 가볍지 않으니 문무의 공이 더욱 드러나네. 수레 소리 장대한 모양은 주 나라 원마(騵馬)와 가지런하고, 말이 크고 살찐 모양은 어찌 노(魯) 나라 수말에 뒤지겠는가. 태을(太乙)이 정기를 모았으니 하늘의 보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고 구오(九五)의 때를 얻으니 곤(坤)의 정(貞)에 부합하여 하늘같이 끝없어라. 활과 화살을 활집에 거둬들이고 신음하는 소리를 노래 소리로 변하게 하였으며, 산과 물길로 남만(南蠻)에 통하고 북쪽 풍속이 관대(冠帶)를 쓰게 되었다. 만세의 도덕정치[垂衣]를 열었으니 하늘의 아름다움이 진실로 오늘에 이르렀고, 삼한(三韓)을 안정시켜 베개를 높이 베게 하니 임금의 덕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네. 이것은 비록 신무하심으로 사방을 정벌한 위엄도 크지마는 또한 준마(駿馬)들의 신통한 재주로 내달리는 효력을 얻은 덕도 있는 것이니 미물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할 것인가. 모두가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삼가 생각하면, 우리 주상전하께서 하늘의 총명을 법받으시고 조상의 밝은 뜻을 이으셨네. 크게 어려운 일을 물려받아 뒤를 이어 어긋남이 없도록 생각하시고, 즉위하여 예교(禮敎)를 베풀고 차례를 계승하여 길이 잊지 않을 것을 생각하시며, 우러러 밭 이루고 집 터닦아 나라의 기초를 세우던 노고를 생각하사 매번 국을 대하고 담장을 볼 때마다 선조를 간절히 추모하셨네. 제왕의 업을 일으키는 것은 한 사람이 성공시키기 어려운 일이며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만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공신을 책봉하여 대려(帶礪)의 맹세가 단단하였고 동물에까지 미치는 개유(蓋帷)의 은총이 또한 융성하셨다. 그러므로 여러 공신은 이미 운대(雲臺)에 화상을 그렸으나 팔준(八駿)은 아직도 소릉(昭陵 종묘 다음 가는 묘)에 진열한 것이 없었다. 드디어 윤음을 내리어 그림을 그리게 하니 호두(虎頭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 같은 화가가 윗도리를 벗어젖히고 그리기 시작함에 용함(龍頷 용의 턱)이 몰려 바다에서 나왔도다. 줄줄이 붉은 피 같은 땀 흘린 공로 완연하고 화살이 흰 살에 박혔으니 전쟁 치른 늠름한 모습이라. 화가의 손에 따라 죽은 뼈도 살릴 수 있고 눈으로 보면 썩은 고삐[朽索]를 경계할 것이니 여러 자손들이 한가한 때에 이 팔준도(八駿圖)를 보면 부귀는 말 위에서 얻은 것을 알 것이다. 겹 방석 위에 앉게 되면 바람에 빗질하고 비에 목욕하던 시절을 상상하게 될 것이며 여덟 가지 진미를 대하더라도 콩죽과 보리 밥 먹던 때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방탕하게 노는 것이 잠명(箴銘)함에 비유되고 산천은 얻기 쉬운 것이 아니라고 여기리니, 대동팔준(大東八駿)의 그림 한 폭이 마땅히 《시경(詩經)》의 빈풍(豳風) 칠월(七月 주 나라 건국을 노래한 시)편과 가지런한 것을 알 것이니, 아름답도다! 나는 새도 발꿈치가 변하고 튀어나오는 쥐가 수레를 망칠 수 있는 법이니, 주 목왕(周穆王)이 서왕모(西王母 곤륜산에 살았다는 신선으로 주의 목왕(穆王)이 선도(仙桃) 세 개를 얻었다 함)와 술 마실 때에 수레바퀴 자국은 온 누리에 가득하였고, 한(漢) 나라가 이사성(貳師城)을 포위하였을 때 나르는 수레가 지역 밖에 이르렀다. 말[馬]이 많다고 믿었으나 진(晉) 나라는 위험을 면할 수 없으며 말이 4천 필 되어도 제(齊) 나라는 일컬어지지 않았으니, 혹은 뜻을 잃어 덕을 더럽혔고 혹은 백성을 괴롭혀서 나라를 병들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제왕의 법을 황폐하게 하여 뒷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아! 당(唐) 나라에 충성하고 수(隋) 나라에 간사한 것은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쓰면 호랑이가 되고 쓰지 않으면 쥐가 되가 되는 미물을 어찌 탓하리! 후일 왕께서 이 그림을 보시고 황조(皇祖)를 법도로 삼아 계승하실 것을 생각하시고 몇몇 그릇된 임금을 경계삼아 하루 이틀만이 아니라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면 실로 우리 조선 만대의 복이도다. 신은 들으니 “선조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지극한 효도이며,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크나큰 교훈이다.” 합니다. 선조에 착한 일이 있었어도 이것을 모르면 현명하지 못하고, 알고도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는 공경하심이 선조를 높이시고 은혜 베푸시는 것이 미물에 미치시어 선조께서 일컬은 바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한 일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오늘날 사모하고 염려하는 회포가 한없이 아름다우며 또 한없이 근심하여 후손들이 지켜갈 법규로 삼으시며 효도와 공경이 아울러 융성하고 현명하시고 인자하심이 두루 갖추어지셨으니, 가송(歌頌)을 지을 때가 바로 이때이기에 찬양하는 말씀을 어찌 않을 수 있겠나이까. 그러나 신의 기술은 마치 금(黔) 땅의 나귀같이 짧고 한문은 노(魯) 자와 어(魚) 자를 구별할 수 없으니 연대(燕臺 연(燕) 나라 소왕(昭王)이 대(臺)를 짓고 현인(賢人)을 구하였다)에서 현명한 사람을 구하는데, 천리를 달려갈 재주가 없으면서 들어온 것이 부끄러우며 한 나라 궁문에서 조서를 기다리는데 잘못 일고지가(一顧之價 백락(伯樂)이 한 번 돌아보면 말 값이 올랐다)를 더하여 벼슬을 얻었으나 어리석고 둔하여 비록 멀리 갈 자격은 없으나 닭의 울음과 개의 짖음으로 그 능력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물며 성스러운 공을 널리 펴는 것이 당연한 직분이기에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받들어 효성을 기술하여 기린(麒麟)의 덕을 만분지일이라도 노래하여 크나큰 아름다움을 미래에 전파하려 하나이다.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올리나이다.

외나무 횡운골(橫雲鶻)

횡운골이여 길들었고 건장하니 / 橫雲鶻閑且佶
만리의 피땀이이요 천금의 뼈로다 / 萬里血千金骨
소나기 같이 다리를 넘어 사라지듯 / 驟徒略彴滅若沒
높이 든 네 발굽은 한 번도 헛디딤 없어라 / 超據四足無一蹶
우리 태조 비바람 속에 고생하던 때 / 我祖辛勤沐以櫛
위험한 고비는 몇 번이나 같이하였던가 / 乘危幾時同倉卒
우리의 터전을 크게 닦아 오늘이 있으니 / 基我丕丕有今日
횡운골이여! 그 공 제일이로세 / 橫雲鶻功第一

유린청(游麟靑)

유린청이여 몸이 봉우리같이 우뚝 솟았으니 / 游麟靑體峯生
순하면서 굳세니 동의 영기로세 / 地之類銅之英
어진 상서 들춰내어 임금을 받들었고 / 振之仁瑞聖明
나이 들수록 기예도 성숙하네 / 齒歷延長藝老成
사방으로 간악한 무리들을 짓밟아 나라가 편안하네 / 四踣艱頑邦以寧
31년 그 영기를 빛내고 / 三十一祀耀厥靈
죽어서 돌구유 남아 있어 큰 이름을 떨치니 / 死有石槽留雄名
유린청이여! 그 덕 어찌 다 말하리 / 游麟靑德馬稱

추풍조(追風鳥)

추풍조여 오랑캐 땅에서 들어오니 / 追風鳥來自胡
나라의 보배요 천하에 둘이 없네 / 域中寶天下無
소리 타고 해를 좇아 허공에 오르니 / 乘聲逐日騰半虛
단번에 임금 은총 입었구나 / 一見特荷乾心紆
험난한 곳을 사람과 드나들어 / 入險濟難與人俱
신무를 도와 나라를 평정했네 / 替揚神武淸坤隅
소릉(당 태종)의 백제공과 비슷하니 / 昭陵白帝功爲徒
추풍조여! 하도복희 시대에 용마(龍馬)가 하도(河圖)를 지고 나왔다 함)에 응해 나았구나 / 追風鳥生應圖

발전자(發電赭)

발전자여! 용이냐 말이냐 / 發電赭龍邪馬
기예의 용무함 짝할 이 적으리라 / 藝之武匹也寡
제 그림자 돌아보며 머리 들어 한 번 우니 / 顧影長嗚脰一騀
기북(말의 산지)의 만필 말이 모두 아래로세 / 冀北萬匹材盡下
치달리면 법에 맞아 조금도 어김없어 / 馳驤合規無偏頗
채찍 한 번 휘둘러 사직을 안정시켰네 / 一鞭攸指定稷社
대동 천년이 길이 편안하리니 / 大東億載長帖妥
발전자여! 참으로 훌륭한 말이로다 / 發電赭吁駉者

용등자(龍騰紫)

용등자여! 천마의 새끼로다 / 龍騰紫天馬子
번개 같은 눈동자에 통 같은 귀로세 / 散電睛揷筩耳
달 가운데 영기를 받고 황하의 기운 모아서 / 稟靈月窟河聚氣
우리에게 진룡을 선사하니 변화가 귀신 같네 / 貺我眞龍化若鬼
오래도록 전쟁터에서 생사를 의탁하여 / 久矣臨陣托生死
너긋하게 진흙 천지를 거부하지 않았네 / 容與一世泥淖地
공로는 적로가 단수(형주(荊州)에 있는 시내인데 유비(劉備)가 적로를 타고 액을 면했던 곳)를 뛰어 넘은 것과 같으니 / 功符的盧躍檀水
용등자여! 만년을 빛나리 / 龍騰紫光萬祀

응상백(凝霜白)

응상백이여 힘만 칭찬할 것이 아니로다 / 凝霜白匪稱力
크기도 크고 굳세고 슬기롭네 / 大有顒剛且淑
압록강 물 출렁이며 기슭은 천 길인데 / 鴨水湯湯岸千尺
흰 화살 날아가며 붉은 활 번쩍인다 / 白羽昕晣晣彤弓赫
밤을 비치는 광경이 휘영청 밝은데 / 照夜光景輝相燭
나부끼는 깃발이 발굽을 따라가네 / 央央義斾隨踠之
한 번 삼한을 돌아 백성의 뼈에 살을 부쳐 주었으니 / 一回三韓骨而肉
응상백이여! 싫어함이 없었어라 / 凝霜白而無斁

사자황(獅子黃)

사자황이여 가는 길 막을 이 없네 / 獅子黃行無疆
승상은 현명하고 장군은 강하였다 / 丞相明將軍强
하늘이 한 번 불어 기운 모아 상서를 내어 주어 / 天一翕聚呈厥祥
용의 새끼가 바다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었네 / 龍媒闖然海之央
두류산(지리산) 바위마다 도적 기세 창궐한데 / 頭流岩岩賊氣張
한 번 뛰어 무용을 뽐낼 적에 칼 빛이 뒤따랐네 / 一超奮武隨劍光
적의 머리 산같이 베어 바치니 / 坐見獻級如崇岡
사자황이여 정말 훌륭하여라 / 獅子黃思斯戚

유현표(維玄豹)

유현표여 으르렁 소리 내며 사납다 / 維玄豹闞以虣
오래 적수 없었으니 뉘에게 비교하리 / 久無敵誰與
방성의 정기 모여 잠저에 비치더니 / 房星摛精潛邸耀
드디어 뛰어난 말이 태어났다 / 胚胎逸蹄殊踸踔
토동에 안장 푸니 신기한 공을 세웠으며 / 解鞍兎洞輸奇効
섬 오랑캐는 백 척 배가 한 척도 못 돌렸네 / 島夷百艘無回櫂
단청으로 그린 화상도 늠름하니 / 畫上丹靑凜惟肖
유현표의 위풍이 당당하여라 / 維玄豹之蹻蹻

차원부의 원한을 씻어준 응제 두 수[車原頫雪寃詩應製二首]

원 위에 거센 바람에 사기가 기우는데 / 原上風顚舍杞傾
반암에 맑은 물을 누가 보호하는고 / 半岩誰護舊雙淸
두어 굽이 물에는 오로지 두 여울물 있어서 / 數灣唯有二灘水
한결같이 네 악한을 소리치며 꾸짖는다 / 一樣喧訶四孼生
공이 스스로 주(註)하기를, “원(原)이란 송원(松原)과 마원(麻原) 두 재[嶺]를 말하며 우봉(牛峯)과 송경(松京 개성)의 경계에 있다. 차원부(車原頫)는 공리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하륜(河崙)이 악한 일 할 기미를 알고 평산(平山)으로 갔다. 사기(舍杞)는 차원부(車原頫)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정(恭定 태종(太宗))께서 마침내 차원부가 무고히 살해당한 것을 알고 노하여 하륜을 꾸짖기를, ‘나의 기(杞)와 재(榟 모두가 좋은 목재)가 이제 다 쓰러졌다.’ 하였다. 반암(半岩)이란 반산풍월(半山風月)로 매화(梅花)라는 뜻이며, 차원부가 있던 평산(平山) 수운암(水雲岩)의 동구(洞口)를 말한다. 차원부가 그곳에 살 적에 몇 그루의 매화를 바위가에 심어놓고 천 포기의 국화를 못 위에 심었다. 그래서 스스로 매화의 뜻을 취하여 그 골짜기에 사람은 없고 다만 매화와 국화의 두 가지 청신함만 있는 것을 길게 한탄한 것이다. 두 여울물이라는 것은 수운동(水雲洞)이 동북면(東北面)에 있는 것을 말하며, 네 악한[四孼生]이란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ㆍ하륜(河崙)ㆍ함부림(咸傅霖)을 가리킨다.” 하였다.
봄산을 향하여 우는 자규에게 묻노니 / 哭向春山問子規
그 사람 무슨 일로 이 지경이 되었는가 / 幽人何事至於斯
어찌 알리, 어젯밤 용루의 나비 날아와 / 那知昨夜龍樓蝶
운암동 바둑판을 장난으로 휘저은 일을 / 飛戲雲岩洞局棊
공이 스스로 주(註)하기를, “자규에게 묻는다는 것은 시인의 뜻이다. 그 사람[幽人]이란 차원부(車原頫)를 두고 한 말이고 용루의 나비란 태조께서 꿈에 차원부를 보았다는 뜻이다. 날아와 운암동의 바둑판을 희롱하였다는 것은 나비가 날아와 차원부의 바둑 두는 것을 휘저어 희롱하였다는 뜻이다. 차원부는 본시 처사로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바위 골짜기에다 집을 짓고 서너 명의 형들과 더불어 도[天眞]를 닦고 있었다. 태조가 나라의 근본인 중대사를 의논하려 하였으나 미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없어 아쉬워할 적에 갑자기 꿈을 꾸고 깨달은 점이 있었다. 과거에 위화도 회군을 의논하였을 적에 다섯 번의 칙서(勅書)를 내려 한 달에 사흘은 방문해 주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자(庶子)가 적자(嫡子)를 싫어하는 태자들의 난이 일어나게 되어 네 형(兄)과 함께 주살되고 말았으니 이때의 사실을 누가 감히 명백하게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또 중병이 있어서 마음과 정신이 어지러워 실수가 많아 평상시의 일을 기억하려 하나 잊어버리고 보답하지 않았다. 그 많은 은총에 보답 하나 못하였으니 신이 만 번 죽어도 죄를 용서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차원부가 원을 풀게 되었으니 어찌 시운의 성쇠에 따른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오로지 성상께서 선대의 유의(遺意)를 이어서 살펴보신 결과인 것이다.” 하였다.

동자습서(童子習序)

동방에 있는 우리 나라는 해외에 있기 때문에 말이 중국과 달라 통역을 하여야만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대 임금부터 대국을 지극하게 섬겨 승문원(承文院)을 두어 이문(吏文)을 관장하게 하고, 사역원을 두어 통역을 관장하게 하여, 각기 그 본업에 전념하며 오래도록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니 그 생각이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자의 음을 배우는 사람들이 계속 전해 내려와 이어받는 지 오래되어 잘못되고 틀린 것이 점점 많아져서 종(縱)으로는 사성(四聲)의 빠르고 느린 것이 문란하고, 횡(橫)으로는 7음(七音 순(脣)ㆍ설(舌)ㆍ치(齒)ㆍ아(牙)ㆍ후(喉)ㆍ반설(半舌)ㆍ반치(半齒))의 청탁을 잃게 되었는데, 또 중국의 학자들이 옆에서 바로잡아 주는 일도 없기 때문에 비록 노숙한 학자나 익숙한 역관이라도 일평생 그대로 따라가 마침내 고루하게 되고 말았다. 세종과 문종(文宗)께서 이것을 걱정하시고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소리는 이것으로 적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여 중국의 음(音)을 바로잡고 또 그것으로 《동자습(童子習)》을 직해(直解)하니 번역한 뜻이 평탄하고 부드럽게 되어, 중국말을 배우는 입문서가 되었다. 지금 부승지 신숙주(申叔舟)ㆍ겸승문원교리(兼承文院校理) 조변안(曹變安)ㆍ행예조좌랑(行禮曹佐郞)ㆍ김증(金曾)ㆍ행사정(行司正) 손수산(孫壽山) 등에게 명하여 정음(正音)으로 한자의 뜻을 옮기도록 하여 글자마다 밑에 가늘게 쓰게 하였으며 또 방언을 써서 그 뜻을 해석하게 하였다. 이어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ㆍ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등에게 명하여 이 일을 감독하도록 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하(金何)ㆍ경창부윤(慶昌府尹) 이변(李邊) 등을 시켜 의심스러운 것을 증명하게 하여 마침내 이두 책의 음과 뜻이 명확히 드러나서 마치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였다. 통탄스러운 일은 책이 겨우 이루어지자마자 활과 칼을 계속하여 버리신 것이다. 세종ㆍ문종이 승하한 것 삼가 금상전하(今上殿下 단종)께서 즉위하신 초에 선왕(先王)의 뜻을 추모하여 급히 책을 간행하도록 하시고, 또 신 삼문(三門)도 교열에 참가하여 서문을 쓰라고 명하셨다.
신이 생각하건대, 사방의 말이 비록 남북이 서로 다르지만 말의 소리가 아(牙)ㆍ설(舌)ㆍ순(脣)ㆍ치(齒)ㆍ후(喉)에서 나는 것은 남과 북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알면 말의 소리가 어려울 것은 없다. 우리 동방에서 나라가 생긴 지 몇 천 몇 백 년을 지나 사람들은 날마다 말을 쓰고 있으나 우리에게 7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7음마저 모르는데 하물며 청탁과 경중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한어(漢語)가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 책이 번역되어 칠음(七音)과 사성(四聲)이 입만 벌리면 자연히 분별되고 종으로 횡으로 서로 정연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옆에서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무슨 걱정될 것인가. 학자가 먼저 정음 몇 자만 배우고 다음에 이 책을 읽어 열흘 동안이면 한어를 통할 수 있으며 운학(韻學)도 명백하여져서 대국을 섬기는 일은 이로써 다 될 것이다. 두 성인(聖人 세종ㆍ문종)이 제작하신 오묘하심은 백대에 높이 뛰어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은 하늘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잘 보호하는지극한 계획이 아님이 없으니 우리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잘 이으시고 잘 실행하시는 아름다움도 또한 지극하도다.

최 주부가 봉양하려 귀향함을 전송하는 시의 서문[送崔主簿歸養詩序]

나의 벗 최지보(崔智甫)는 근실하고 정성스런 사람이다. 나와 서로 알게 된 것은 계축년 봄부터의 일로, 그 당시에는 최후(崔侯 지보(智甫))의 부친이 서울의 저택에 있어서, 최후가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효성이 지극하여 맛있는 음식을 잘 받들면서도 언제나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같이 생각하였다. 내가 때로 왕래하며 이것을 목격하고 정말 최후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때부터 교제가 더욱 두터워졌다. 지금 그 아버지는 양지(陽智)의 촌가(村家)에 가 계시는데, 내가 최후에게, “왜 모시고 와서 봉양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더니, 최후는 슬픈 듯 얼굴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부모가 거기 계시는 것이 그 마음이 편하시기 때문이니, 내가 그것을 어기지 못한다.” 하고, 곧 조정에 고하여 그 직위를 떠나서 처자를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전 예문관 직제학 최선생이 먼저 사운시(四韻詩)를 지어서 그의 가는 것을 노래하니 내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공경하면서 서문을 써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여러 성스러운 임금께서 서로 이어서 효도로 다스렸기 때문에 대부(大夫)나 사(士)의 어버이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버이의 나이 많아지면 돌아가 봉양하겠다는 뜻을 들어주어 어버이된 사람들로 하여금 봉양을 받게 하고, 자식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 효심을 다하게 하니, 임금께서 늙은이를 늙은이답게 대접하여 효도를 진작시킨 것은 그 은혜가 지극하도다. 다만 자식된 사람이 공경하게 그 덕의(德義)를 이어 받들고 내 마음의 정성과 공경을 일으켜 돌아가 봉양하는가 안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가 보니, 사대부 중에 높은 관을 쓰고 홀(笏)을 단정하게 하고 천천히 걷고 느릿느릿 행동하는 것이 마치 아무 근심없이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어버이를 사별하여 발을 구르며 통탄하며 비로소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아아! 어버이가 집에 계실 때 돌아가 봉양하여야 하는 것을 누가 하지 못하게 금하여서 하지 않았으며 누가 가지 못하게 말려서 가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치고, 돌아가 봉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며 돌아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한 일인 줄 누가 모르리오. 그러나 금지하지 않는 데도 하지 않으며, 말리지 않는 데도 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마음으로 흠모하는 것이 이 벼슬에 있기 때문이다. 자식된 사람이 이 벼슬을 흠모하지 않는다면, 현명하고 효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崔侯)의 가는 것을 따를 수 없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최후의 가는 것이 어찌 나의 마음이 이처럼 공경하도록 하겠는가.” 하였다.

팔가시선서(八家詩選序)

내가 하루는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지은 《당송팔가시선(唐宋八家詩選)》을 얻어 와서 향을 피우고 옷을 단정히 하고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는 삼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시체(詩體)는 고금의 변함이 있으나 학자들이 다 같이 배워서 만세에 바꿀 수 없는 것이 네 가지 체(體)가 있으니 아송(雅頌)ㆍ소사(騷些)ㆍ고시(古詩)ㆍ율시(律詩)가 그것이다. 소위 아송이란 것은 성인의 손에서 나와 만세의 교훈을 세운 것이며, 소사(騷些)는 곧 주자(朱子)가 주해한 초사(楚辭)이며, 고시는 곧 유리(劉履)의 선시(選詩)로 세상의 학자들은 또 그 계통을 알고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율시(律詩)에 있어서는 그것을 뽑은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며, 모두 푸른 것을 뽑아 흰 것에 배합하는 식으로 부드러운 살과 연한 뼈만 찾는 것을 숭상하고 있으니 훌륭한 군자로서는 탐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선집을 보니 팔가(八家) 이외 다른 사람들의 작품은 모두 싣지 않았다. 선택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정밀하고 엄정하여 일반적인 것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멀고 작자 또한 많은데 지금 단지 팔가(八家)의 시에만 그쳤으며, 팔가 가운데서도 몇 수만을 고르는데 그쳤으니 어떤 사람들은 넓게 취하지 못한 것을 의심할지 모른다. 대체로 좋은 옥을 산출하는 곳이 곤륜산(崑崙山)만이 아닌데, 천하에 옥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곤륜산을 제일로 삼기 때문에 곤륜산이 천하에서 옥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것이다. 곤륜산 옆에 있는 사람들은 까치를 잡는 데도 옥돌을 사용하니 옥이 정말 많은 것이다. 그러나 옥을 캐서 갖는 것은 반드시 그 빛깔이 온아하고 윤택하며 옥결이 치밀하고 부드러워 밤[栗] 같으며 그것을 두드리면 소리가 맑고 길게 여운이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니, 옥을 선택하는데 오묘한 점이 있다. 군자가 취하는 것 또한 이것과 같은 것이다. 시를 지은 것이 정말 성정(性情)에서 출발하여 풍속과 교화에 관한 것이 아니며 선과 악이 사람을 징계하고 권고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취할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아아! 시는 주 나라에 와서 극성하였으나 성인이 교화를 위하여 선택한 것은 단지 3백 11편이면 충분하였고, 굴원(屈原)ㆍ송옥(宋玉)ㆍ소무(蘇武)ㆍ이릉(李陵) 이후로 시와 부(賦)를 짓는 것이 주(周) 나라의 배가 되었어도 주자와 유씨(劉氏)가 교록(校錄)한 것이 또 많지 않았으니 시가 어찌 많다고 좋은 것이겠는가.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아! 만세(萬世)의 장벽(墻壁)을 뚫어서 학자들로 하여금 밝은 길로 인도한 것은 부자(夫子 공자)가 시를 산삭하신 공이다. 초사와 시선을 만든 것도 모두 아송(雅頌)을 도와서 성교(聖敎)에 큰 공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선집(選集)은 명현(名賢)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모아서 시학(詩學)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지금 사람과 장래 사람들로 하여금 시와 소(騷)의 여운을 알게 하여 느껴서 분발하고 경계하여 징계된다면 이 역시 성현의 뜻인 것이다.” 하였다. 삼문(三問)이 직접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글을 썼다.

두보의 시운을 써서 신범옹 신숙주 에게 보이다.[用工部韻示申 泛翁 申叔舟]

삼한 서북땅은 의주인데 / 三韓西北是義州
긴 강이 만고토록 성 아래 흐르누나 / 長江萬古城下流
청춘에 이곳을 지나는 것 벌써 두 번인데 / 靑春過此己云再
다음 세 번째는 가을에 갈 것 같다 / 第三行色如在秋
그대 이 걸음이 응당 잦을 것이니 / 君之此行應頻頻
이 걸음 잦은 것을 그대 근심말지어다 / 此行頻頻君莫愁
하루아침의 근심이 어찌 군자의 근심이리오 / 一朝患豈君子患
종신의 근심이 장부의 근심이라 / 終身憂是丈夫憂
입으로는 주공 공자의 말을 하며 손에는 시서를 놓지 않고 / 口談周孔手詩書
행차에는 살찐 말이 있고 추위에 가벼운 갖옷이라 / 行有肥馬寒輕裘
마음가짐 그대는 쇠같이 굳건하니 / 操心君可堅似鐵
일을 만나면 그대는 갈쿠리같이 굽지 말라 / 遇事君休曲如鉤
곤궁하여도 마음을 편히하여 천명을 즐길 것이요 / 窮也慰慰樂天命
나아가면 마음 넉넉하여 나라의 정사를 펼 것이다 / 達則優優敷國政
독선과 겸선은 궁과 달을 따르시니 / 獨善兼善隨窮達
군자의 한결같은 덕이 어찌 성하지 않는가 / 君子一德豈不盛

범옹이 차운한 시를 부치다 [附泛翁次韻]

그대의 재주와 명성 중국 천지 흔들어서 / 吾子才名動神州
중화인도 벌써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아네 / 華人已識非凡流
시상과 글씨는 대적할 이 없고 / 詩腸筆陣莫如敵
인품은 노성하였으나 연세는 젊었어라 / 器宇雖老富春秋
사방을 경영할 장한 뜻 어릴 적부터 품고 있으니 / 桑弧壯志自齠齕
가슴에 어찌 이별의 슬픔 있을 건가 / 胸中肯遣生離愁
객창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은 적 없으니 / 客窓卷帙手不釋
요순 같은 군신 되려 항상 근심을 품네 / 堯舜君臣常懷憂
청운의 발걸음 하늘 길 트여 있고 / 靑雲步武天路遠
전해오는 가업을 계속하여 이어오네 / 家業人道傳箕裘
음운을 탐구함이 뉘 가장 앞섰던가 / 探音究韻誰最先
먼 것도 따오고 깊은 것도 찾아낸다 / 遠亦摘之深亦鉤
스스로 궁과 달은 운명이 있다고 말하니 / 自言窮達天有命
궁하면 자신을 지키고, 달하면 정치하네 / 窮來自守達聞政
원하노니 이제부터 그대 더욱 노력하여 / 願子從今更努力
공업을 청사에 크게 적게 하라 / 功業書之靑史盛

범옹이 두보의 시운을 써서 지은 시에 차운한 시[次泛翁用工部韻]

나그네 혼이 어찌 어둑한 듯 녹아날까 / 客魂那用黯然銷
모이고 흩어지는 구름 바람에 떠간다 / 聚散雲在風中漂
좌중에 오랑캐 장사치 돈을 자랑하며 / 座上商胡弄緡錢
나를 꼬이고 나에게 오만 부리며 말에 교만함이 많구나 / 財我傲我言多驕
그 중에도 한 둘은 문자를 알아 / 中有一二識文字
나를 좋아하여 술 사들고 찾아온다 / 愛我携酒來相要
창자 채울 것으로는 싣고 온 쌀이 있고 / 撑腸只有駄來米
땔나무도 좋아서 객중에 걱정 없다 / 薪桂客中難蘇樵
험하고 평탄한 것 만남을 따라 자리 정하면서 / 險夷隨遇爲之所
자유스럽게 휘파람 길게 불며 여사에 누웠구나 / 偃蹇長嘯臥逆旅
10년 한학 무슨 소용된단 말인가 / 十年漢學知何用
지금에야 겨우 한두 마디 얻었노라 / 今來只得二三語
고향에 돌아갈 제는 은ㆍ근 두 글자 변별하리니 / 還鄕應辨銀根二
형제와 붕우들이 허락하여 주리라 / 弟兄朋友許相許
아서라 천운이 이와 같으니 / 已哉天運苟如此
술 더 내고 안주 들자 / 且添罇酒添魚煑

두보의 시운 써서 범옹에게 보이다[用工部韻示泛翁]

산 것은 뜬 구름 같고 죽으면 그만인데 / 生也如浮死也休
인생 백년을 어찌하여 오래 오래 근심하리 / 百年何必長愁憂
요동의 여관에는 아무런 할 일 없어 / 遼東館裏一事無
며칠을 술 주전자와 서로 머뭇거리누나 / 數日罇酒相淹留
인생이 이쯤 되면 저절로 즐거우니 / 人生如此自有樂
무엇하러 방외(세상밖)의 단구(신선)를 구할건가 / 不用方外求丹丘
마른 웅어 거친 밥이 내 허기 채워주는데 / 脩鱅蔬糲飽我飢
항차 도서가 있어 맑고 아담한 것 제공하네 / 況有圖書供淸幽
하늘과 땅은 넓고 이 몸은 작은 것이 / 乾坤納納此身小
마치 아홉 소에 한 털이라 / 正如一毛傳九牛
귀한 것도 운명이요 천한 것도 운명이니 / 貴也命也賤也命
귀하다는 것 반드시 왕후로 봉함을 받는 것 아니리라 / 所貴未必封王侯
옛 성현과 통달한 선비 지금 어디 있나 / 古來賢達今何處
긴 노래 한 곡조에 마음만 유유하다 / 長歌一曲心悠悠
간 곳마다 주인이 날 취하게 하니 / 在在主人能醉我
누가 나그네 설움 알겠는가 / 誰知客裏悲貂裘
요순 같은 군신 내 힘으로 안 되는 것 / 堯舜君民非我力
빛나는 좋은 선비들 왕국에 가득 찼다 / 藹藹吉士多王國
내 몸 춥지 않고 배마저 안 고프니 / 吾身不寒腹不飢
성대의 포난이 이만하면 만족하지 / 聖代飽煖亦自得

범옹이 차운한 시를 부록하다[附泛翁次韻]

인생 만사 쉬는 것만 못하나니 / 人生萬事莫如休
세상의 무슨 일이 근심 없을쏘냐 / 世間何事無愁憂
광음은 흘러 동으로 흐르는 물과 같고 / 光陰倏忽東流水
태양은 어찌 날 위하여 머물겠는가 / 白日爲我寧淹留
나이는 삼십인데 살쩍은 반백이요 / 年來三十鬂毛班
단약(신선이 되는 약)을 찾으려도 단구를 찾을 길 없네 / 還丹無處尋丹丘
객중에 찌푸린 눈썹 누구와 펴볼꺼나 / 客中雙眉誰與伸
다행히 하산(성(成)씨의 본관)이 있어 그윽한 정 읊어보네 / 幸有夏山吟淸幽
거칠고 졸렬한 내 재주로 기이한 칼날과 맞서보니 / 欲將荒拙當奇鋒
천균(1균은 30근)같이 무거워서 아홉 소를 돌리는 듯 / 千鈞撞回九牛
하산의 재주 본시 대적할 이 없어서 / 夏山才調木無敵
천 수의 시를 지어 왕후라도 경멸하네 / 詩成千首輕王侯
여사로 시를 지어 심오하게 달통하였는데 / 餘事聲韻通幾微
부끄럽다 내 재주 거칠어서 부질없이 이렁저렁 / 愧余魯莽空悠悠
다만 술잔 있어 즐거울 수 있으니 / 只有杯樽可爲樂
요양의 봄 술을 돈피[제일 좋은 모피(毛皮)] 갖옷으로 바꾼다 / 遼陽春酒捐貂裘
명성이 중화에 떨치는 것 어찌 나의 힘이겠는가 / 名動中華豈我力
예의의 우리 나라에 힘입었네 / 禮義每賴吾王國
태평 세월 떳떳하여 남과 북이 따로 없어 / 太平有常無南北
객창에서 너와 함께 여전히 만족하려 하네 / 客裏與爾還自得

삼가 유별시에 차운하여 중국 사신 내한 예겸을 전송하다[敬次留別韻奉送 天使倪內翰

서로 만난 그날로 마음을 알아 즐겁고 / 相知卽日喜心知
이별 뒤에 서로 생각하는 것 얼마만한 세월인고 / 別後相思問幾時
학령(요동의 산)에 구름 차서 섣달 눈 쌓였는데 / 鶴嶺雲寒仍臘雪
압록강 푸른 파도 벌써 봄 자취로다 / 鴨江波綠已春姿
비단 주머니는 단지 해노(종)의 줍는 것 없을 뿐 / 錦囊只乏奚奴拾
말 술은 원래 번쾌(한 고조(漢高祖)의 신하)의 사양이 아니라 / 斗酒元非奱噌辭
천리 길 그대 보내는 오늘의 마음 / 千里送君今日意
남포(이별하는 곳을 말함)에 한 잔술로 차마 못 헤어지네 / 一杯南浦忍分離

내한 예겸의 시를 부록하다[附倪內翰韻]

해상에서 서로 만나 즉석에서 친구 되어 / 海上相逢卽故知
한가한 담소에 매양 시간 가는 줄 몰랐어라 / 燕閑談笑每移時
같은 마음은 금난계를 맺었고 / 同心好結金蘭契
서로 시를 읊으니 옥수같은 자질이 어여쁘다 / 共吟偏憐玉樹姿
감히 양웅이 글자 많이 안다 하겠는가(자신을 비유한 말) / 敢謂楊雄多識字
본래부터 자우(춘추시대 정(鄭) 나라 사람)가 수사 잘하는 줄 알았어라(상대방을 찬양하는 말) / 雅信子羽善修辭
강가에는 이별의 정 견딜 길이 없어 / 不堪別袂臨江渚
동풍에 말을 멈추어 이별을 원망한다 / 勤馬東風怨別離

최 제학 덕지 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 德之 還鄕]

전원에 돌아감이 은둔의 계교 아니로세 / 歸田非隱計
나오고 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 出處政如斯
한 나라 임금께선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 나라 조정에선 공규를 중시했네 / 唐朝重孔戣
강산이 그를 기다리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도 또한 알아주네 / 猿鳥亦相知
처음에서 끝까지 의리를 다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사람 바로 나의 스승일세 / 如公我所師
최덕지(崔德之)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존양당(存養堂)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급제하여 누차 고을을 맡았었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을 쌓았다. 세종(世宗) 때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로 이름이 났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영암(靈巖)에서 늙으려 하니, 당시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희현당 책에 제(題)하기를,
이윤(伊尹 탕(湯) 임금을 도와 상(商) 나라를 세운 어진 신하)의 자임하는 것과 안회(공자의 수제자)의 현명함으로 / 尹之任回也賢
혹은 즐겁게 요순의 도를 즐기고 / 或囂然而樂堯舜
혹은 길게 한숨 쉬며 높고 굳은 경지를 탄식하였다 / 或喟然而歎高堅
이 같은 행동하면 역시 이 사람이 되거늘 / 有爲亦若是
내가 어찌 홀로 그렇지 아니하리 / 余何獨不然
하였다.

범옹이 두보의 시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韻]

지맥은 요동 경계에 이어졌고 / 地脉連遼境
강 흐름은 바다 어구에 접하였다 / 江流接海門
고기잡이와 나무꾼은 언제나 곳곳에 모여 있고 / 漁樵常頓頓
꽃과 버들은 동산을 이뤘구나 / 花柳自園園
이슬이 무거우니 붉은 꽃은 언덕에 기대었고 / 露重江欹岸
불타고 남은 곳은 푸른 풀이 무성하다 / 燒殘綠遍原
봄빛이 멀리 바라보게 하니 / 春光供遠矚
산에 나무는 점점 번성해 가는구나 / 山木漸成繁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의주는 큰 진으로 / 義州爲鉅鎭
나라 서문의 자물쇠 같아라 / 鎖鑰國西門
혹독한 추위에 봉화 오르지 않고 / 極寒無烽燧
농촌은 밭과 동산 안고 있네 / 村居按圃園
백성이 편안하여 밤에 문을 열어놓고 / 民安開夜戶
보리는 피어나서 봄의 언덕 컴컴하네 / 麥秀暗春原
나그네의 감상은 시절 따라 일어나니 / 客子感時物
꽃은 시들면서 녹음이 짙어간다 / 紅殘綠漸繁

범옹이 두보 추청(秋晴) 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秋晴韻]

꽃에 눌려진 물은 거울 같고 / 花壓水爲鏡
가는 풀을 바람이 빗질하네 / 草纖風作梳
맑은 흥취 시절따라 일고 / 淸興因時得
그윽한 수심 술로써 제거한다 / 幽愁用酒除
삼춘은 나그네 길에 남아 있고 / 三春殘客路
한 달 지났어도 집의 편지 아직 없네 / 一月隔家書
시구마다 선생이 걸출하여 / 句句先生傑
읊을 제마다 못 따름을 부끄러워하네 / 吟吟愧不如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 [附泛翁元韻]

객창에 도리어 일이 많아 / 客裏還多事
머리는 게을러서 한 달에 한 번 빗네 / 頭慵一月梳
산빛은 창문으로 들어오고 / 山光侵戶牖
풀빛은 뜰 위로 올라오네 / 草色上庭除
근심에 드는 술잔 이제사 익어가고 / 慣把澆愁酒
멀리 보내는 편지에 시름을 담아보네 / 憂緘寄遠沓
타향이 강 북쪽 이곳이니 / 他鄕江北是
내일은 또 어떠할꼬 / 明日更何如

범옹이 두보 중소(中宵)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中宵韻]

지금 사람 옛날의 도를 버려 / 今人棄古道
귀하고 천한 것 가리어서 친하고 소원하구나 / 貴賤作親踈
몸은 세상에 기생하는 것임을 알았으며 / 已識身如寄
이름은 또 헛된 것을 이제사 알았도다 / 從知名又虛
성밖은 요양 길이요 / 城外遼陽路
쟁반에는 패수의 생선일세 / 盤中浿水魚
창자를 채울 것이 무엇이 있나 / 撑腸何所有
가득 쌓인 다섯 수레의 책이네 / 磊落五車書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의주진 1천 집에 / 義州鎭千戶
말도 타고 소도 잘 쓴다 / 騎馬能射疏
풍월은 읊는 중에 지치고 / 風月吟中困
강산은 눈 아래에 비었구나 / 江山眼底虛
단지 잔에 술 있는 것 알 뿐이요 / 但知杯有酒
먹는데 생선 없는 것 탄식 않노라 / 不歎食無魚
끝내는 활과 칼을 쓰게 되니 / 畢竟趨弓劍
지금까지 글을 읽은 것이 잘못이네 / 從來誤讀書

범옹이 두보 시의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韻]

여관 생활 한가하여 담소함이 말숙하나 / 旅館乘閑笑語淸
오래 묵게 되니 의주성이 싫증나네 / 留連猶厭義州城 /
꽃 지니 봄 가는 것이 언제나 애석하고 / 花殘每惜春光老
구름 일어나니 나그네 시름 금할 길 없다 / 雲起難禁客恨生
돌아갈 길은 산이 깊어 궁벽한 곳으로 다니고 / 去路山深從地僻
돌아갈 날 임박하니 하늘 맑기 소원일세 / 歸心日迫願天晴
동서남북 다니면서 무엇을 하는가 / 東西南北何爲者
뜬 세상 뜬 인생이라 이름도 소용없네 / 已識浮生不用名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긴 압록강 객창에도 맑았는데 / 鴨綠長江客裏淸
나팔 소리 비장하게 변방의 성을 흔들도다 / 角聲悲壯撼邊城
취중에 그윽한 흥은 춘삼월에 저물었고 / 醉中幽興三春暮
보이는 곳 높은 구름 만리에 솟아난다 / 眼底高雲萬里生
오늘은 채찍 들고 곧장 가지마는 / 今日一鞭直去住
내일 아침은 여덟째 역에서 맑고 흐림 기다린다 / 明朝八站候陰晴
재주 없어서 스스로 헛되이 늙은 것만을 한탄하며 / 才疎自恨年空老
요동을 향하여 이름 말하기도 부끄러워하노라 / 羞向遼東說姓名

두보 시운을 써서 범옹과 자후에게 보이다.[用工部韻示泛翁子厚]

요양으로 돌아갈 길 바라보니 아득한데 / 遼陽歸路望中遙
가는 말에 채찍 치며 성스런 조정 기원한다 / 策馬行行願聖朝
흐르는 물결이 번쩍이는데 짧은 젓대 불고 / 流水波飜吹短篴
먼 하늘에 처절한 저 소리는 구슬픈 퉁소로다 / 遠天聲切動悲簫
다행히 이 시대 세상이 통일됨을 만났으니 / 幸逢今日車同軌
고려 사람 부질없이 다리 놓은 것 웃었노라 / 閑笑麗人浪作橋
이곳은 삼한의 서북 끝 / 此是三韓西北極
백성들 나무하며 희희낙락 즐거워함을 기쁘게 여긴다 / 喜看糄戶樂蘇樵

범옹이 차운한 시를 부록하다[附泛翁次韻]

굽이진 압록강 하늘같이 아득하고 / 鴨江縈紆天與遙
동쪽 향하고 백 번 꺾여 바다로 향하는 듯하여라 / 向東百折若宗朝
봄바람 한가한 정취 방초에 둘려 있고 / 春風閑趣回芳草
먼 나그네 시름을 퉁소에 의지한다 / 遠客歸心寄短簫
오늘은 외로운 배 계수나무 삿대 저어가고 / 今日孤舟遙桂棹
초봄에는 한 죽장으로 얼음 다리 밟았었네 / 初春一篳踏氷橋
장하도다, 천연적으로 참호되어 동북을 나눴는데 / 壯哉天塹分東北
강가의 마을 노래 소리는 해 저문 나무꾼일레 / 江上村歌日暮樵

범옹이 서울 제공들의 송별시 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京洛諸公送行韻]

나의 학문이 그대처럼 정밀치 못함이 부끄러운데 / 慙余學未似君精
요양의 만리 길을 서로 같이 동행하네 / 同作遼陽萬里行
침대 위에서 오랑캐 장사치 우리와 무릎 같이하고 / 榻上賈胡連我膝
하늘 끝 나그네 인정을 애석해 하네 / 天涯遠客惜人情
꿈속에서 가는 고향 참으로 가는 것 못 되고 / 夢中鄕國非眞到
봄 지난 동산 숲은 푸르기만 하구나 / 春後園林只是靑
시구마다 짓는 것이 모두 백설이라 / 句句吟成皆白雪
화답하려 하니 내 어찌 수심을 면할쏘냐 / 和來能免百愁生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치ㆍ설ㆍ아ㆍ순의 음이 아직 정밀치 못한데 / 齒舌牙唇尙未精
중원에 쓸데없이 질문하러 가는구나 / 中原虛作問奇行
삼경에 새 달은 고향 꿈꾸게 하고 / 三更新月生鄕夢
한 침대 훈훈한 바람 나그네 마음 움직이네 / 一榻薰風動客情
먼지 이는 요동 하늘 아득히 멀었고 / 塵起遼天迷遠大
구름 걷힌 골령엔 푸른빛이 드러난다 / 雲收骨嶺露餘靑
소매 안의 여러 공의 지은 시 때때로 내어 보며 / 袖中時見諸公子
되는 대로 읊어보니 이별 시름 솟아난다 / 信口吟來別恨生

범옹이 두보의 시운으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泛翁用工部韻]

이 몸은 붙어 사는 것 같을 뿐 / 此身如寄耳
운명이라면 스스로 편안할 것을 / 若命當自安
마음이 이미 이러하니 / 寸心已如此
생사를 그 뉘가 어렵게 하리오 / 生死誰避難
인생에 누가 근심 없으리 / 人生孰無憂
근심은 술만이 풀 수 있네 / 憂來酒可寬
예림에 이미 말 달렸고 / 藝林曾掉鞅
학해에서 이미 파도도 보았노라 / 學海嘗觀瀾
농사짓지 않아도 아내 배곯지 않고 / 不耕妻不飢
누에치지 않아도 아이 춥지 않네 / 不蚕兒不寒
평생의 뜻 사방에 있으니 / 平生志弧矢
가는 곳마다 술상 있구나 / 到處有杯盤
다만 팽택(도연명)같이 취하기 바랄 뿐 / 但成彭澤醉
어찌 문원의 마른 것 걱정하리 / 肯患文園乾
술 깨어 비로소 눈뜨니 / 酒醒始張目
노복(奴僕)이 밥먹기 권하네 / 僕夫勸飯飡

범옹의 원시를 부록하다[附泛翁元韻]

국사가 나라 일을 견고하게 아니할 수 없는데 / 王事固靡鹽
소신이 어찌 편안할 것 생각하리 / 小臣敢懷安
작은 몸을 이미 맡겼으니 / 日已委微質
눈앞에 험하고 어려운 것 없다 / 眼前無險難
고향집은 동남쪽으로 멀고 / 故業東南遠
요동 하늘은 서북으로 넓혀 있다 / 遼天西北寬
속음의 정ㆍ변도 모르면서 / 俗音昧正變
재주 생각 않고 거센 파도 돌리려 하네 / 不量回驚瀾
사람만 만나면 빈번히 물었어도 / 逢人煩問訊
흉내 내려니 이빨만 차가워진다 / 欲效牙齒寒
덮어두고 말하지 말자 / 置之不必道
다시 술잔이나 대할 것을 / 且復臨杯盤
옷은 취하면 젖고 / 衣裳醉時濕
목구멍은 깨면 마르는 것 / 咽喉醒後乾
멀리 유람하니 쉬 감상이 일어나네 / 遠遊易感人
언제 풍찬(야숙(野宿)하는 것)을 그칠 건가 / 何日休風飡


 

[주D-001]조계박압지대업(操鷄搏鴨之大業) : 계림(鷄林) 즉 신라를 얻고 압록강까지를 정복하여 삼한을 통일했다는 말
[주D-002]한결같은 마음을 …… 맞았어라[允協於三千] : 주왕(紂王) 수(受)는 신하가 매우 많았으나 마음이 각기 다르고, 무왕(武王)은 신하가 단 3천 명이었지만 오로지 한마음이었다는 뜻임. 《서경 태서(泰誓)에 나오는 말임》
[주D-003]구오(九五)의 때를 얻으니 :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말이 있는데 천자가 등극하는 것을 말한다.《易 乾卦》
[주D-004]임금의 덕이 …… 있는가 : 해가 뜨면 심고 날이 지면 쉬고, 우물은 파서 마시고 밭은 갈아 먹는데, 제왕이 우리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격양가〉의 구절로 태평성대를 말함.
[주D-005]매번 국을 …… 추모 : 요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국을 대하여도 요임금이 보이고 담을 대하여도 요임금이 보였다는 고사.
[주D-006]대려(帶礪)의 맹세 : 공신을 책봉하고 작위를 주며 맹서하기를, “황하의 물이 띠처럼 줄고, 태산이 숫돌만큼 낮아지도록 나라를 영구히 보존하여 먼 후손까지 이르게 한다.” 하였다.
[주D-007]개유(蓋帷) : 떨어진 휘장을 버리지 않는 것은 말을 싸서 묻기 위함이요, 떨어진 수레 덮개를 버리지 않는 것은 개를 싸서 묻어 주기 위한 것이다. 《禮記 檀弓》에 나오는 말임.
[주D-008]썩은 고삐[朽索] : ‘내가 만백성을 대하니 썩은 고삐로 여섯 말[馬]을 모는 듯 두려움을 느끼니 사람 위에 앉은 사람이 어찌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나오는 구절.
[주D-009]방성(房星) : 28수(宿)중의 하나인데 세상의 말을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주D-010]하늘을 두려워 …… 보호하는 :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을 낙천(樂天)하는 것이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畏天] 것이다. 낙천하는 삶은 천하를 보호하며,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맹자》에 나옴.
[주D-011]3백 11편 : 《시경》에 모여 있는 시가 모두 3백 5편으로 여기서는 시를 가리킴.
[주D-012]사방을 경영할 장한 뜻 : 고대 중국에서 남자를 낳으면 뽕나무활과 쑥대살로 천지(天地) 사방을 쏘아서 성공을 기원하였다고 함. 남자가 큰 뜻을 품고 웅비(雄飛)하여 성공하라는 뜻.
[주D-013]금난계(金蘭契) :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면 그 날카로움이 금도 끊을 수 있고, 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냄새가 마치 난초같이 향기롭다 한다.
[주D-014]소광(疏廣) : 한(漢) 나라 난릉(蘭陵) 사람으로 자는 중옹(仲翁), 〈춘추전(春秋傳)〉에 밝았다. 선제(宣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다음에 태자태부(太子太夫)가 되어 5년 뒤에 늙어서 사퇴하였다. 선제와 태자가 많은 물건을 주었으나 모두 친우들에게 나누어주고, “사람이 현명하고 재물이 많으면 그 뜻을 손상시키고, 어리석은데 재물이 많으면 잘못을 더욱 많이 저지르게 된다.”하고, 자손들에게 재물을 남겨 주지 않았다.
[주D-015]공규(孔戣) : 당(唐) 나라 목종(穆宗) 때 사람으로 자는 군엄(君嚴)이며 벼슬은 예부상서를 지냈다. 한유(韓愈)가 소(疏)하기를, “조정에 공규(孔戣)와 같은 사람이 불과 2,3명밖에 없다.”고 칭찬한 사람이다.
[주D-016]시구마다 …… 백설(白雪)이라 : 예전 초(楚) 나라 서울 영(郢)에서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르는데 처음에는 보통 유행가인 하리(下里) 파인(巴人) 같은 것을 불렀더니, 같이 합창하여 부르는 자가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러나 수준이 높은 노래를 부르니 따라서 합창하는 자 10여명에 지나지 않았고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최고의 노래를 부를 적에는 따라 부르는 자가 아주 없었다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敬齋先生文集卷之一
 
崔德之存養堂 a_008_438a


經營制度出心香。存養知行自義方。匪好赤松空却老。還如五柳恥爲郞。龍光遠映三垂豁。鵬翮高登萬里長。鶴詔應飛山水窟。鷗盟豈徙風雲場。心香。一作尋常。
太虛亭詩集卷之一
 七言律詩
送崔直提學歸田。 三首。 a_009_168d


始終忠直荷恩綸。藉甚名高動縉紳。夬夬危機知足客。紛紛要路折腰人。無何鄕裏忘塵慮。存養堂난001009_169a中葆性眞。太史明朝應有奏。壽星還與少微隣。

昂昂獨鶴出群鷄。綽綽行藏命與偕。應鵠已能依日月。縶駒終得老山谿。紆靑有客爭彈指。垂白無人解乞骸。自笑悠悠俄十載。五湖風月夢中迷。

每詠何曾欲厚顏。果哉今古似君難。一區泉石誰爭所。四座琴書自適閑。淸夢幾曾尋綺陌。塵蹤那得訪仙關。離觴且擧江之滸。回首湖南思未闌。

[난-001]存養堂 : 存養堂乃完山崔德之

 

 

觀瀾先生遺稿事蹟卷之二
 實記
傳 a_009_228a


元先生諱昊。原州人。高麗門下侍中弘弼之後。永樂二十一年癸卯。登第。實本朝世宗莊憲大王四年也。逮事文宗。官至直提學。魯山幼沖嗣服。時事艱危。公謝病。退居子鄕。迨魯山遜于越也。公就越之西思乃坪。居焉。其傍有崇丘臨江。際土爲臺。因樹爲亭。號觀瀾。日登臨東望。累欷不已。魯山終命。泣血居廬。朝夕盡哀。方喪三年。後還歸原州之南村。名009_228b其洞曰霧巷。其平生詩文。悉傅諸火。誡子孫使勿復學業。服田力穡。其子一遵其志。光廟以戶曹參議徵。不起。隱淪終其身。其孫叔康。以己丑史官。死於史事。嗚呼。先生。英廟培養中人也。計其昵侍帷幄。備對顧問。蜚英於藝文之場者。如何也。當乙亥丙子之際。處明夷之艱。利箕子之貞。以晦其跡。故世莫知其出處。然其所處變。心事不失時宜。超乎榮辱之外。不受刀鉅之禍。隱然與西山之節。千古同調。殆未可易以死生論之歟。則百世之下。必有折衷者矣。觀瀾臺一邱地。至今田夫野人。聞能言之。公其不朽哉。 同時有靈009_228c巖人崔德之。亦退居原州。自號煙村。朝中名士。賦序跋。而公亦追跋云。今不可考。
崇禎後辛酉四月。寧越府使郭世翼。撰。


山堂集卷之四
 附錄
請賜額疏 農巖金昌協 a_016_614c


伏以臣等竊觀自古以來。朝廷之士。入而不出。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其能決然勇退。不爲富貴所沒溺者。廑可指數。然考論其世。又皆遭時衰亂。怵迫016_614d禍患。思所以自全。而不者亦以名位已極。無所覬於後耳。若乃處明聖之世。嚮用未艾。而能從容自引去者。千百無一焉。況能不以一節自喜而志乎大道。不以閒散自適而力於實踐者。豈不益卓絶難覯哉。臣等下邑蒙士。耳目不遠。而獨聞我世宗文宗之世。有臣崔德之。其仕嘗自翰苑。歷玉堂,臺閣而後以南原府使。退居本邑。築書樓。扁以存養。杜門不出。時則世宗晩年也。及文宗卽位。召拜藝文直提學。奬以純實。且將留用。而在朝不二年。上書乞骸骨歸。遂不復起焉。臣等竊念本朝治化。莫盛於世016_615a文兩廟之際。當是時。才俊應運。鱗集雲蒸。經學文章之士。瑰瑋卓犖。比肩立朝。咸以功名自奮。蓋亦千載一時也。以德之之賢。翺翔其間。亡所與讓。使其從容逶蛇。附會時運。亦可以致位卿相。功名爛然矣。顧乃棄而不取。高蹈遠引。棲遯山海。以沒其身。此非審乎外內之辨。超乎榮辱之境者。不能也。彼世之審機逃禍。與位極乃止者。殆不足道也。且自古退遯之士。率多自標其高。以爲極致。而優游放曠。無所用心。是雖賢於沒溺富貴。終身不返者。而去道則亦遠矣。今德之之歸也。乃取孟氏所稱存心養性者。名其所居之016_615b室則其留心正學。不忘進修之實。槩可見矣。昔朱子有言曰。取舍之分明。然後存養之功密。存養之功密。則其取舍之分益明矣。若德之者。其庶乎此矣。惜乎史乘疏略。其言論風旨。無得以考其詳也。然其所立之高。所存之正。亦旣遠過於人。而足爲後來之師範矣。是以。及其孫而有忠成者。學於文敬公金宏弼之門。茂材篤學。克稱高弟。是其師友淵源。固有然者。而亦不可謂不漸於先訓矣。蓋自德之之世。今已二百餘年。而人猶慕之不衰。士大夫之道南州者。必問其所謂存養樓者。瞻禮其遺像。咨嗟歎息而不能去。其016_615c遺風餘韻。感人亦深矣。往在庚午年間。一邑章甫。協力建祠。以祀德之。且以忠成配焉。俎豆之事。久益不懈而顧以遐遠固陋。尙未能請額于朝。以爲多士羞。今者竊見聖明。尊賢重道。凡斯文曠典。士所願行者。無不樂施。臣等以爲此時不可失也。遂敢相率以來。請命于闕下。伏惟殿下覽察德之出處本末。學問大致。宜爲多士所尊奉。特命有司。宣賜恩額以褒奬之。使下邑之士。得遂尊賢之誠。而來者有以觀感興起。不勝大願。臣等無任仰首祈懇之至。
016_615d山堂集卷之四

山堂集卷之四
 附錄
甲申十一月日。請額疏章。 a_016_620b


伏以臣等竊惟賢人者。一代之矜式。多士之師表也。雖在百世之久。千里之遠。猶令人聞風興起。俎豆崇奉之不暇。況乎生幷一世。居同一道。漸染於敎導之化。薰陶德美之盛者。其所以尊慕愛悅者。尤當如何而立廟享祀之典。烏可已乎。然則頒額表章之擧。自不能無於右文之聖朝。而在聖朝褒賢興學之政。亦安可聽之邈邈。視若常謝煩外之請也哉。臣等所居靈嚴。雖曰海濱一小邑。而卽故名臣崔德之及其孫忠成棲息之所也。故相臣金壽恒偏配之地也。曾在016_620c崇禎庚午。一道章甫。始爲崔德之。創建書院于本郡而以忠成配焉。逮至乙亥。又以金壽恒。幷享一祠。而朝家宣額之典。尙今闕焉。爲此之羞。陳疏仰精者凡兩度俱該曹。而其在辛酉春則適當朝家多事。終無回啓之擧。其在壬午春則或稱金某不爲別立一祠。或稱建院旣久。猝難輕施。而仍爲防啓。臣等於此。誠不勝訝惑之至也。蓋本朝書院之設。眆於明廟中年。而恩額之宣。始於宣,仁兩朝。其間年數。實爲七八十年之久。而近年以來。年久書院之請額蒙許。亦不止一二則其所謂年久難施。何所據也。事儀應行016_620d之典。而祖宗朝所未遑者。其將一皆以年久爲諉。而莫之擧耶。此誠臣等之所未曉也。列邑書院旣建之後。復有後人幷美於前輩者。則仍爲追享於一廟者。歷數八路。若此類何恨。而曾未聞士林之議以此爲非者。則獨於臣等之請。諉而不爲別立。而有所靳許者。亦何所據也。稽之於國家之典。考之於古今之例。臣等之請。無一可疑。而姑爲稱托之辭。沮遏多士之望。臣等安得不抑鬱恨也哉。三臣之學問德業。固已略陳於前後兩疏。而一經睿覽後。日月已久。或萬機之中。有難留槪於宸衷。茲敢將其一二。仰達於紸016_621a纊之下。冀蒙聖明之垂察而俯許焉。蓋德之。登我世宗朝文科。歷翰苑三司。出爲南原府使。自南原棄官歸靈巖。築書樓以居而扁存養。杜門不出。逮于文廟初年。召拜藝文館直提學。亟加褒奬。且將大用而在朝未久。卽又乞骸而歸。遂終老不起。此其出處之大略也。是以。故判書臣李植蓋嘗評之曰。純實之行。著於聖諭。純德也。中歲納履。遯跡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此。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乎。植之文學德望。爲世所信服則此爲百世之正論也。其孫忠成。又就從文敬公臣金宏弼學。016_621b而其茂材博學。世皆推以爲高弟。是其師友淵源。固有所自。而亦可見其有得於先訓矣。所謂存養樓。在於世居之地。歷數百年。遺像存焉。人慕之愈久而愈不衰。搢紳之道南州者。必問存養樓在於何處。而致其瞻拜之禮。咨嗟歎息。而不能去。其遺風餘韻之感人也亦深矣。至於金壽恒。旣是聖主之所嘗任使者也。行己本末。立朝大節。固不暇臣等之一一指陳。而因乙卯一疏。謫居是邑凡四載。而一郡縫掖。莫不慕其名而愛其德。一接容儀。如襲春風。其薰炙濡染之化。不特負笈問學者爲然。則泰山喬嶽之功。信其及016_621c人之深矣。昔唐臣韓愈在潮州。未滿壹歲。所授未過章句而立祠饗之。況今臣等之於某。實非區弘趙德之所得於韓愈者。則追慕報祀之擧。蓋出於好德之良心。而有不能自已者矣。噫。此三臣者年代雖殊。其有功於南土則前後一揆。故遠近章甫。詢謀僉同。立廟享祀。已多年所而登聞朝廷。祈請恩額。今且至三。臣等其心悅誠服。而寓沒世不忘之思者。亦已至矣。今若復爲該曹之所沮格。終靳宣額之命則此豈但士林之缺望而已。噫。若以三臣學問德業。爲有歉於享祀則已。若而臣等依見向日該曹啓辭中褒美016_621d三臣。靡有餘憾結之誠如疏中所陳。而末乃以勿施靳定者。何也。豈出於一時偶未之思耶。以故士氣之鬱抑。愈往愈甚。茲敢裹足千里。復此來籲於象魏之下。伏乞殿下。察三臣事業之卓異。念多士尊慕之至誠。亟命有司。頒以華額。以示尊賢象德之盛意。千萬幸甚。臣等無任瞻天仰聖激切祈祝之至。謹昧死以聞。

山堂集卷之四
 附錄
壬辰十一月十九日請額疏 宋判書相琦製 a_016_621d


伏惟尊賢建祠。士林衛道之至意。揭虔宣額。國家尙德之盛典。是以。尊之斯有祀。祀之斯有額。下必伸其016_622a懇。上必準其請。實次第當行之事也。惟我國家。崇儒重道。褒德衆賢。群敎所曁。文化大興。上下三百餘年之間。名臣碩士。彬彬輩出。其出而仕於朝。退而處於野者。論其德學行業。雖有淺深高下之差殊。而其生而有補於世道。沒而作範於後學則均也。是以。凡我冠章甫而衣縫掖者。體列祖尙賢之盛意。仰前輩啓後之遺風。或興起於想像欣慕之餘。或感發於耳目濡染之地。設俎豆以奉之。徼恩額以賁之者。歷數八路。在處皆然。此固出於高山景仰之誠。同得於秉彝好德之天。而亦莫非國家風勵振作之效有以016_622b致之也。苟有可尊之賢而不尊而祀。可請之額而不請而賁之。則不但爲多士之羞。其爲有慊於聖朝倡導之化者豈淺淺者哉。此臣等之所以敢陳故直提學崔德之及其孫忠成。故領議政臣金壽恒及其子判書臣昌協立祠尊祀之大略。以祈宣賜恩額之典者也。夫四臣事蹟本末。固非如臣等晩出蒙士所可揄揚其萬一。而略敍鄕邦之所傳誦。平昔之所覩記。以備裁察。伏願殿下。少垂納焉。蓋聞崔德之。當我世宗朝。歷踐翰苑三司。而後以南原府使。退居本邑。取孟子存心養性之訓。以名其所居之書樓。留心正016_622c學。杜門不出。及文宗卽位。召拜直提學。奬以純實。且將留用。而上書乞骸。長往不返。噫。發軔榮道。卿相在前而芥視富貴。賁趾邱園。其高風淸節。足以立懦廉頑。而玩書樓二字之扁。可知其存養之功。觀聖朝一言之褒。可得其純實之資則其所立之高。所存之正。實有遠過於人而足爲後來師範也。抑臣等於此。又有所感焉。德之退歸。在於文廟二載。一時名賢。送行惜去。見於篇什者甚多。而六臣之詩若文。竝在其中。稱慕企羨之意溢於言外。則德之之於六臣。可謂合志同方。而其後國家多故。六臣者終不免。然德016_622d之勇退。有若見機知者歟。此豈常人所可及者。而至今聞其風者。尙且咨嗟想像。有所興起。則其樹立之卓。有所補於世敎。亦豈下於當時自靖之諸賢哉。此尤聖朝之所當亟加褒闡。不可少緩者也。至如忠成。受學於文敬公金宏弼之門。學以小學爲本。尤用功於心經,近思等書。而諸子百氏。靡不染指。文章行誼。爲世所推而且以明人倫。闢異端爲己任。雖不幸短命。而其茂材篤學。克稱入室之高弟。是其師友淵源固有然者。而亦不可謂不漸於先訓矣。且夫金壽恒。剛方正直。忠謹謙恭。士林推之爲領袖。國家倚之016_623a爲柱石。一進一退。而卜消長之幾。其生其逝。而關盛衰之運。德望尊乎當時。事業炳於後世。此實聖朝之所洞悉。而婦孺之所公誦者也。固不待臣等一二論。而其謫居本邑也。閉門求道。着工向裏。四子諸書。循環誦讀。微辭奧義。領悟融解。尤用力於朱子全書。體驗躬行。以爲一生受用之資。雖以微臣等之蒙陋。未能窺測所造之至於何極。而以其見於外者言之。平居儼然。終日矜莊。而接人應物。渾是一團和氣。聽其辭氣。觀其德容。莫不心醉而起敬。以故士林歸仰。望若山斗。此固遠邇之所同然。而薰腴所被。在臣等016_623b爲尤甚且切。使窮鄕僻邑之人。得知學問之根基。爲人之規範者。實壽恒之賜也。若乃昌協。早襲庭訓。躬服儒行。嘗隨壽恒。往來于茲邑。臣等亦嘗景而服之有素矣。蓋其仕於朝也。經筵啓沃。發揮心學。章奏勤懇。講明治體者。莫非學問中流出。而及其屛處之後。尤以斯道爲己任。囂囂畎畝。矻矻墳典。潛心於格致誠正之學。着力於操存涵養之功。刻勵奮發。眞知力踐。參證論卞。提示幽眇之旨。造詣成就。幾臻高明之域。雖其苦心靡改。礭節難拔。終未得羽儀朝端。翊贊儒化。使一世之人咸被其澤。而其有補於世道。作範016_623c於後學。則雖謂之儒門之大宗師。不爲過言。是以。一邑多士。興起於想像欣慕之餘。感發於耳目濡染之地。協力建祠。以祀德之於前而且以忠成配焉。齊聲倡義。幷享壽恒於後。而又以昌協配焉。以伸一方景仰崇奉之意。而第以遐遠편001陋。尙未能請額于朝。使前賢妥靈之所。不得列於邦家之祀典。而聖朝右文之化。不能宣於海嶠之下邑。此實臣等之罪也。茲敢重繭於百舍之外。齊籲於九重之下。伏乞聖明。覽察四臣之盛德邃學。淸芬遺韻。合爲士林之所尊奉。朝家之所表章。特命有司。賜以華額。俾遂多士016_623d尊賢之誠。幸甚。臣等無任激切祈懇之至。

[편-001]撲 :

 

 

山堂集卷之四
 附錄
禮曹請額回啓 a_016_623d


禮曹爲相考事節。啓下敎是內。靈巖幼學文獻緯等上疏。據曹啓目。粘連啓下是白有亦。觀此靈巖幼學文獻緯等上疏。則以爲故直提學崔德之。世宗朝以南原府使。退居本邑。留心正學。文宗朝。召拜直提學。奬以純實。上書乞骸。長往不返。其孫忠成。受學於文敬公金宏弼之門。茂才篤學。克稱入室之高弟。且金壽恒。剛方正直。忠勤謙恭。士林推爲領袖。國家倚以柱石。其謫居本邑也。閉戶求道。用力016_624a於朱子書。體驗躬行。使窮鄕之人。得知學問規範。實壽恒之賜也。若乃金昌協。早襲庭訓。躬服儒行。隨壽恒于茲邑。臣等景服之有素矣。一邑多士。協力建祠。以祀德之於前而以忠成配焉。幷享壽恒於後而以昌協配焉。遐遠편001愚。尙未請額于朝。特命有司。賜以華額亦爲白有臥乎所。崔德之等四臣。淸節德望。懿範邃學。實合於俎豆之享。而所建祠宇。今已年久。則營建在於禁令之前是白遣。四臣中金壽恒。雖有他院配享之所是乎乃。旣非主享則亦不當以疊設論之。似當依疏辭施行是乎矣。恩額重典。不敢自下擅016_624b便。上裁何如。
康煕五十二年五月十六日。右副承旨李德英次知啓。特爲賜額爲良爲敎事是去有等。啓下內辭緣。奉審書院良中。知委施行爲乎矣。到付日時移文向事。五月十八日禮曹。二十三日巡營。二十五日本邑。


[편-001]撲 :

山堂集卷之四
 附錄
延額時賜祭文 知製敎魚有龜製進 a_016_624b


維歲次。康煕五十二年癸巳六月丙子朔。十二日丁亥。
國王遣臣禮曹正郞吉景祖。諭祭于故直提學崔德016_624c。故領議政金壽恒。故士人崔忠成。故判書金昌協四臣之靈。
王若曰。道學節行。世所矜式。祀賢饗德。邦有典則。侃侃直學。望實俱赫。遭際英陵。進途方闢。一投州紱。高臥月出。杜門講學。玩賾鄒說。堂扁存養。用工微密。文廟乃嘉。召致內閣。賞其純實。恩顧優渥。尺疏乞骸。復修初服。終身邱壑。風勵頹俗。庭訓所漸。有孫亦賢。薰德師門。志道妙年。識高行篤。遹紹家傳。繄我良佐。邦國蓍龜。忠純其操。莊穆其資。親炙名祖。切磋大老。尊聞行知。大展抱負。身任世道。抑陰扶陽。一節三朝。德▣016_624d彌章。四入中書。再遷南裔。惟卿進退。占時否泰。永言龍蛇。曷勝悼悔。眷彼朗山。是卿湘沅。迪我南士。餘敎斯存。淇竹興思。沒世不諼。嶷嶷尙書。趾美先躅。業承詩禮。器鞰珪璧。經幄討論。昌言啓沃。中罹變故。遯于空谷。俛焉自修。一心求道。探泝紫陽。叩抽鍵奧。眞知實踐。造詣益精。扶植世敎。模範後生。光塵所曁。衿紳均慕。前後四賢。跡留斯土。祖孫相望。父子幷美。多士協謀。立廟以祀。齊享于右。列配其次。茲宣華額。俾聳瞻聆。名叶鹿洞。輝映千齡。遣官致酹。牲酒肥香。神其來格。庶歆此觴。
龍洲先生遺稿卷之十六
 墓碣
直提學松湖趙公墓碣銘 井序 a_090_294d


恬退之士。豈易得哉。在漢有疏廣,受。在晉有陶元亮。在宋有錢若水。降而至明。有薛敬軒,吳康齋若而人已。吾東則英廟時有崔德之,魚變甲,穆廟時又有趙直學汝直公云。直學之恬退最早。而所遭時最難也。不知古之人亦能收筋力於強仕之日。謝簪笏於中興之時。如直學者乎無也。篤論之士咸以爲090_295a直學之明哲。雁行二疏。學問貞固。比肩敬軒,康齋。崔,魚不足多也。直學旣歿。門人知舊相與議而言曰。賢如吾直學。學如吾直學。脫身名利。振衣千仞岡如吾直學。而使其言論風采。進退以義。歷官次序與夫家世樹惇而文者。日就泯沒無稱。則平日從直學游學者。安所逃其責哉。遂相與閱家中舊書。得直學所著如干篇及權公得己之狀爲一通。以付直學舅氏金參贊壽賢公屬不佞絅曰。子爲太史。而不論載吾甥汝直事乎。未幾。參贊下世。絅又顚頓狼狽失其官。于今二十載矣。今年冬。直學孫德薰自平原奉其父命090_295b叩余曰。吾祖之墓木不翅拱矣。執事其忘金參贊之托乎。敢藉參贊靈。敢請不朽吾祖。絅於是聞言而愴然曰。始不佞以郞僚事參贊公。又與之隣好。知余之景慕直學異夫人。朝夕吃吃道直學事非止一二談也。顧不佞今逼耄期矣。其何能噓起已竭之精神。形容大君子盛德之萬一乎。惟吾子少安毋躁。歸而寬我。老病少間。按狀。公諱正立。汝直其字。號松湖。橫城人。橫城之趙。自麗翰林學士諱昱顯。其後侍中承藺,太學士潤益,僕射時彥,侍中文景公永仁,太尉文正公沖,參政光定公季珣。勳賢相業震耀當時。四傳至090_295c左尹弘道。入我朝也。公曾祖曰諱俊。平壤庶尹。祖曰諱應世。濟用副正。考曰諱進。司圃別提。聘豐山左通禮金鎭之女。此公之世譜也。金夫人淑哲靜嘉。媲德娠賢。有以也。以嘉靖庚申十月九日生公。公幼不好弄。沈默重遲。見者異之。及長。卓然早成。萬曆己丑。成進士。辛卯。登上第。選入槐院。由正字至博士。乙未。陞典籍。轉騎省郞。拜薇垣正言者再。丙申。由禮郞選入弘文館修撰,知製敎,司憲府持平,銓部員外。時佐貳缺。銓長欲擬者非其人。公執不可。由是左於時。丁酉。遞付典籍。戊戌。歷校理,直講。又還粉署。陞春坊090_295d輔德。遷司諫。秋七月。以司成兼執義朝京。己亥。拜安邊府使未赴。丁父憂。制除。授司藝。轉副應敎。癸卯。遷舍人。明年。遞爲直講。時堅忮當路。孔吏部不欲居朝廷始此。自甲辰至丙午。或以中書。或以應敎。或以典翰皆辭。末乃上陳情疏。戊申。拜中丞又辭。俄遭穆廟上賓。公奔哭。禮訖卽退。光海初。以司諫召不起。上八條疏。蓋累千言也。大要盡喪禮。盡孝大妃。盡恩義同氣。待賢相擇秉銓。親君子遠小人。且勸學問操存之道。言言中端。如使光海惕然用其言十一二。惡至於失君道。後以應敎,執義,輔德召者屢。不至。已090_296a酉。改司成。遷執義。又除典翰,直提學。辭以心疾大發。無一語及他。蓋公已占危遜也。壬子中丞,春坊之命。皆不至。及金直哉獄起。光海疑公不奔問。公卽俟譴轂下。又授直提學。公於是感霜露。疾漸革。不能肅謝。十二月。啓手足京家正寢。享年五十三。此公歷官行業也。明年癸丑三月。葬于原州法川里。後用卜人言。遷竁蓀谷里己向之原。於乎。世之論公者。但高公之勇退。而不知公之盡節所事也。但知公之廉潔自守。而不知公之學問慥慥。至死如一日也。公爲人弘毅篤實而辨於文。自十七八時始讀學庸。有味乎誠敬090_296b之胾。委己於學。乾乾夕惕。焚膏繼晷。以操存省察。不愧屋漏。爲頂門第一鍼。入而事其父兄。處姊妹妻孥之間。各適其道。出而事君上。與朋友持是道無毫髮爽。及其造道熟也。著陰陽性情道器三圖。其說無一句一字不本於濂溪兩程之說。殆尹和靖之於聖人之言。耳順心得。如出諸己者非耶。其它誨子之說。以小學四書爲漑根食實用力之地。讀書致知之法。密而不滲。事其仲父漣川公。一如先嚴。漣川公以易學名。公之過庭而質疑者亦多云。與愚伏鄭公經世,久庵韓公百謙爲道義交。於久庵。往復論學者不一。權090_296c公得已齒差公。而苦節臭味等也。公於遠色。持戒甚嚴。酒戶亦寬。平生人未嘗見其把鴟。及昏朝。聞斁倫事發。仰屋長吁者良久。已命酒終夜無醉。家子弟始知公酒量也。公裏襮純一。色夷氣淸。人無賢愚。莫不愛而敬之。出入臺省二十餘年。世之滋垢。不敢近焉。眞所謂皭然涅而不滓者也。然其講明修齊之學。童而紛如也。則夫豈無意於斯世生民者哉。悲夫。有銜不祛。秪以恬退歸公者。庸非人之淺之爲丈夫哉。我故曰。求之古人。其敬軒,康齋之匹也。後之君子必有能辨之者。蔡中郞有言曰。吾於郭有道碑。無愧焉。吾090_296d以不文。或銘士大夫功德。擧不免慙色。獨於公之碣。有無媿焉。公凡三娶。文化柳氏。繕工監正永緖之女。生一男二女。男㠍。宗廟令。女士人朴明鎬,監司丁彥璜。全州李氏。某官某之女。無子。▣▣尹氏。某官某之女。生二女。士人李光圭,李。㠍初娶監司李稢女。生二男一女。男德薰,德潤。盧思兼。壻也。再室金爰立女。生二女。長辛得說。時翰。生員。監可出也。在雅,在夏。李光圭出也保翰,保胤。李出也。德薰男女各三。洸,泂,況。女柳長漢。德潤生五女。長適李煒。時翰男四女一。男道元。進士。道謙。承文正字。皆蚤死。道震。餘幼。思090_297a兼男三女二。內外孫曾多不載。銘曰。
晢於未萌。知善卷懷。懿哉先生。不名一佳。砥勵之學。敬義夾持。糠粃康濟。志豈人窺。壽胡不遐。時胡不逢。歸咎何處。曷渝蒼穹。人仰末照。謖謖淸風。

최덕지(崔德之)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D5CB355C9C0B1384X0
가구(可久)
연촌(烟村)/존양(存養)
생졸년 1384 (우왕 10) - 1455 (세조 1)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최덕지(崔德之)에 대하여
1384년(우왕 10)∼1455년(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참의 담(霮)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文宗實錄  國朝榜目 山堂集  東儒師友錄  國朝人物考

[이미지]

문종 10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10월 29일(갑오) 2번째기사
예문관 직제학 최덕지가 사직하고 물러나다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최덕지(崔德之)가 늙었다고 고(告)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윤대(輪對)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 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최덕지는 나이가 68세였다. 세상에는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서는 자가 많은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 아니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44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책수
烟村遺事 저자 崔德之 저
연촌유사 간행년대 1805년(순조 5).
古4650-20
1책 판본 사이즈 16.5×10.5㎝.
본문

"조선초의 문신 崔德之(1384~1455)의 시문집. 1805년(순조 5) 崔世榮이 편찬하였다. 권두에 宋煥箕의 서문이 실려 있다. 최덕지의 자는 可久, 호는 烟村․存養, 본관은 全州다. 1405년(태종 5) 式年文科에 同進士로 급제한 뒤 監察 등 三司의 淸要職을 거쳐, 김제군수․남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에는 영암의 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藝文館直提學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致仕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年老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詩賦를 지어주고 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친 인물로 평가된다. 전주의 西山祠, 남원의 舟巖書院, 영암의 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肅이다. 송환기의 서문에 이어 목록이 있고 뒤이어 최덕지에 대한 出處事蹟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 최덕지의 저작인 〈論貢法踏驗便否疏〉 1편과 〈題存養樓〉 2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어 朴彭年의 〈貢院唱和詩序〉와 河演의 元韻에 이어 차운시들이 모두 11수 수록되어 있는데, 申叔舟․成三問․河緯地․徐居正․姜希孟 등과 함께 최덕지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 이후 차례로 최덕지가 사임할 때 李成이 써 준 〈退休時送別詩序〉와 柳誠源․成三問․李塏․河緯地․鄭麟趾․申宿舟 등이 지은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朴彭年의 跋, 金宗瑞․安止․金銚․李先齊․鄭麟趾 등의 追詠, 宋乙開의 〈存養樓記〉, 李石亨 등 3인의 〈題存養樓〉 3수, 崔孝孫 등 13인이 〈題存養樓〉에 차운한 시 16수, 崔鳴吉․李景奭 등 6인의 追詠 16수, 金壽恒이 지은 〈題存養書院〉 1수, 金鎭商이 지은 〈題烟村先生畵像〉 1수, 金昌協의 〈書院請額疏〉, 愼天翊의 〈畵像贊〉과 〈畵像改粧贊〉, 후손 珽敬이 쓴 〈亂後文稿收錄誌〉가 실려 있다. 끝으로 李植의 後敘 (〈烟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敘〉), 宋時烈․朴世采․李端夏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元昊의 碣銘이 간략하게 붙어 있다. 부록으로 〈參議公遺事〉와 〈諸公讚詩〉, 〈小尹公墓碣〉이 수록되어 있다.최덕지의 글은 疏 1편과 詩 3수일 뿐인데, 〈論貢法踏驗便否疏〉는 일정한 크기의 논밭에서 일정한 양을 거두게 된 공법과 논밭에 가서 실제로 작황을 조사, 조세를 알맞게 정하는 損實踏驗法의 편리 여부를 가지고 고심하는 世宗에게 踏驗法을 시행하도록 권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조선 초기의 세법관계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또, 박팽년의 〈貢院唱和詩序〉는 당시 科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안순태)

 

 

頭陀草冊十
 詩○南行集[下]
謁鹿洞書院有感 是烟村崔先生書院。文谷,農岩俱躋享。文谷又有影子。 a_191_380a


月山之北朗州東。父子同躋一廟宮。梁木已摧懷往日。畫啚今幸識春風。家聲獨紹千年遠。人事空悲廿載中。回首三洲何處在。暮雲寒雪意無窮。文谷之受禍在己巳。而余時幼少。未及瞻拜顔色。世傳文谷儀容極端麗。今拜遺像果然。第四句及之。난001


[난-001] : 此注直爲雙書於意無窮下


택당선생집 제9권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

 

《맹자(孟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구절로, 방훈(放勳)의 교훈을 인용한 것이다. 거기에 “방훈이 말씀하기를 ‘위로하고 오게 하며, 바로잡아주고 펴주며, 도와주고 도와주어 스스로 본성을 얻게 하고, 또 따라서 진작하고 은혜를 베풀어준다.’ 하셨는바, 성인이 백성을 걱정함이 이와 같으시니, 어느 겨를에 밭을 갈겠는가.[放勳曰 勞之來之 匡之直之 輔之翼之 使自得之 又從而振德之 聖人之憂民 如此 而暇耕乎]”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