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은진송씨 가전

은진 송씨(恩津宋氏) 가전(家傳)

아베베1 2011. 8. 13. 16:12

송자대전 제215권
 전(傳)
은진 송씨(恩津宋氏) 가전(家傳)


집단 부군(執端府君)은 실로 평산 부군(平山府君)의 아우이고, 정랑 부군(正郞府君)은 곧 집단 부군의 현손(玄孫)이다. 족보(族譜)에,
“평상 부군이 정랑(正郞) 아무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하였다. 시서(時序)가 서로 멀어지고 소목(昭穆)이 서로 어긋남이 이와 같은데도 족보의 기록은 이러하니 자못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족보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평산 부군의 묘(墓)는 양주(楊州) 서산리(西山里)에 있는데, 그 밑에는 족숙(族叔) 송 별좌(宋別坐)의 아내인 허씨(許氏)의 묘가 있다. 별좌공(別坐公)의 고(考)인 부제학공(副提學公)이 허씨를 장사 지낼 때에 평산 부군에게 올린 제문(祭文)이 있다. 일찍이 김성(金姓)을 가진 사람이 부군(府君)의 묘 뒤에다 투장(偸葬)하였으므로, 무신년(1668, 현종9)에 소종자(小宗子) 도흥(道興)이 족인(族人)들을 거느리고 양주(楊州)의 관아(官衙)에 송사(訟事)를 걸어 이김으로써 김성을 가진 자가 그 묘를 옮겨 갔다. 그러기 수년 전에 족인들이 뜻을 모아 묘 앞에 표석(表石)을 세웠는데, 문(文)은 내가 짓고 글씨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집단 부군의 휘(諱)는 명의(明誼), 평산 부군의 휘는 사민(斯敏), 정랑 부군의 휘는 순년(順年), 부제학공의 휘는 응순(應洵), 별좌공의 휘는 현조(顯祚)이다.
우리 선대(先代)는 국초(國初)로부터 대대로 서울 반송방(盤松坊)의 유점동(鍮店洞)에서 살았는데, 대체로 정랑 부군은 안동 부군(安東府君)에게 전하고, 안동 부군은 가평 부군(加平府君)과 참봉 부군(參奉府君)에게 전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유점(鍮店)을 둘로 나누어서 각기 그 자손에게 전하였다. 가평 부군은 바로 별좌공의 증조(曾祖)이고, 참봉 부군은 바로 나의 고조(高祖)이다. 별좌공의 장형(長兄)인 판결공(判決公)이 말하기를,
“평산 부군이 국초에 송경(松京)의 구옥(舊屋)을 철거하고 유점에다 집을 고쳐 지었는데, 그 장량(長樑)에 아직도 단확(丹雘 고운 빨간 흙)을 칠한 흔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그 집이 불타 버렸다.”
하였다. 이상은 판결공이 항상 말씀하던 것으로, 그의 아들 승현(承賢)이 나에게 일러 준 것이다. 안동 부군의 휘는 여해(汝諧), 가평 부군의 휘는 세충(世忠), 참봉 부군의 휘는 세량(世良), 판결공의 휘는 석조(碩祚)이다.
규암 선생(圭菴先生 송인수(宋麟壽))이 화(禍)를 당하던 날에 참봉 부군의 신주(神主)가 감실(龕室)로 내려가 벽(壁)을 두드렸던 일은 매우 신기하고 이상하기 때문에 우리 자손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는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려 간행되었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군(府君)께서는 정신과 기백이 남보다 크게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부자간의 지극한 정리가 서로 감통(感通)되어 비록 유명이 다를지라도 이처럼 무간(無間)하였다. 나는 장남(長男)으로서 수년 동안 부군을 봉사(奉祀)해왔는데, 갑인년 화(禍)가 일어나던 날에 또한 이상한 일이 있었다. 이는 그 정신과 기백이 비록 오래되어도 그대로 남아 있었음은 물론, 그 서로 감통된 이치가 또한 친소(親疎)로 인하여 다른 점이 있지 않은 것이니, 자손치고 조상 제사에 정성이 없는 자는 참으로 죄인이다.

참봉 부군댁(參奉府君宅)으로 분가(分家)된 유점동(鍮店洞)의 집을 서부 부군(西阜府君)에게 전하였는데, 부군의 아우가 바로 규암 선생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집은 비록 성(城)안에 있었지만, 부형(父兄)이 유점동에 있기 때문에 공무(公務)의 여가(餘暇)에는 반드시 와서 모시었다. 봉사 부군(奉事府君)이 작고하자 참봉 부군은 청주(淸州)의 마암(馬巖)으로 돌아갔는데, 선생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 본댁으로부터 와서 서부 조비(西阜祖妣)를 매우 자주 배알(拜謁)하였고, 매양 외방에서 궤송(餽送)한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먼저 서부 부군에게 분송(分送)한 다음에야 비로소 취용(取用)하였다. 일찍이 세말(歲末)을 당하여,
“내가 얻은 것이 있을 때는 일체 모두 수씨(嫂氏 여기서는 형수를 말함)에게 나누어 드렸는데 이것이 끝내 내 마음에 맞지 않았으니, 올해의 세찬(歲饌)은 전부 다 드려야겠다.”
하고, 드디어 세말을 당해서는 유점(鍮店)의 외사(外舍)로 옮겨 거처하다가 무릇 10일 만에 돌아왔는데, 그동안 세궤(歲餽)의 물품을 하나도 간여(于與)하지 않았다. 서부 부군의 휘는 귀수(龜壽), 규암 선생의 휘는 인수(麟壽)이다. 서부(西阜)는 바로 유점(鍮店)인데, 경성(京城)의 서편(西偏)에 위치하여 부(阜)가 뒤에 있기 때문에 자호(自號)한 것이라고 한다.
규암 선생이 사천(泗川)에 귀양 가 있을 때 서부 부군은 근심 걱정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매양 일월(日月)에 기도해서 속히 방환(放還)되기를 기망(冀望)하여 어버이의 뜻을 위로하였고, 사면(赦免)되어 돌아온 후에는 또 기뻐함이 지나쳐서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작고하였다 한다.

참봉 조비(參奉祖妣)가 작고하자, 서부 부군 형제는 집상(執喪)하면서 매우 애도(哀悼)하자, 흰 제비가 여막(廬幕)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가 기르는 새끼도 모두가 빛이 희므로 사람들이 효감(孝感)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군 형제는 절대로 자처하지 않고 반드시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향리(鄕里)에서 감히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지 못하였고, 자손들도 그 뜻을 순종하여 정표(旌表)하자는 청을 드리지 못하였다. 서부 부군이 작고하자, 성동주(成東洲 성제원(成悌元))가 손수 묘표(墓表)에다 ‘효자 송모의 묘[孝子宋某之墓]’라고 썼다.
동주(東洲) 성공(成公)은 참봉 부군의 사위로서 서부(西阜)ㆍ규암(圭菴) 두 할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 모여서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하였으므로, 그분들이 거처한 곳을 사람들이 삼현각(三賢閭)이라 호칭하였다. 그 사적은 참봉 부군의 묘갈(墓碣)에 모두 실려 있는데, 그 문(文)은 모재 선생(慕齋先生) 김안국(金安國)이 찬(撰)한 것이다. 동주공(東洲公)의 부인(夫人)이 자식도 없이 별세하자, 동주공이 참봉 부군의 묘 왼편에 장사 지내고 손수 표(表)를 쓰기를 ‘아, 유명 조선국 창녕 성제원의 아내 송씨의 묘[嗚呼有明朝鮮國昌寧成悌元妻宋氏之墓]’라 하였다. 그런데 동주의 자손이 공주(公州)에 살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종가(宗家)에서 참봉 부군을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주과(酒果)를 올린다.
성동주(成東洲)의 묘는 공주 달전(達田)에 있는데, 내가 일찍이 가서 절하고 그 묘갈을 읽어 보니, 그 전배(前配)인 이씨(李氏)만을 서술하였고, 우리 고모(姑母)인 송씨(宋氏)는 서술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자손에게 물으니,
“이 묘갈은 바로 조모(祖母)의 종제(從弟)인 판서(判書) 송기수(宋麒壽)가 찬한 것인데 서술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이 조모가 돌아가셨을 때 동주 부군(東洲府君)이 가주(家主)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이 묘갈에 나타내지 않은 것이니, 이는 또한 부군(府君)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윽이 의아해 하면서, 이와 같다면 동주가 어째서 이 고모(姑母)의 묘표(墓表)에다 마치 공자(孔子)가 연릉 계자(延陵季子)에게처럼 도석(悼惜)하는 뜻을 나타냈을까 하고 항상 의심해 오다가, 뒤에 송 판서(宋判書)가 찬한 초본(草本)을 보건대, 거기에는 이 고모를 넣었는데, 그 각본(刻本)에서 삭제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규암 선생(圭菴先生)이 화(禍)를 당했을 때 사람들이 ‘송 판서도 또한 유력(有力)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그 이와 같은 점은 보지 못하겠고, 오직 그 허자(許磁)ㆍ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 등과 끝까지 동사(同事)하여 녹훈(錄勳)되기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선묘조(宣廟朝)의 제현(諸賢)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희생된 사류(士類)들을 설원(雪寃)함으로 인해 송 판서도 또한 녹훈(錄勳)이 삭제되었다. 그후 규암(圭菴)의 비(碑)를 의논하여 세울 때를 당해서, 조고(祖考) 도사 부군(都事府君)이 울면서,
“이 글을 짓는 일은 반드시 판서(判書) 아저씨에게 돌아갈 것이니, 군소배(群小輩)들을 회호(回互 잘못을 거짓 꾸미거나 변호하는 것)하는 설(說)이 없지 않을 것이나, 누가 감히 반대하겠는가. 차라리 다른 사람의 손에 부탁한 것이 나으련만 한 사람도 이 의논을 주장한 자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도사 부군(都事府君)의 휘는 응기(應期)이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일찍이 나의 부군(府君) 수옹공(睡翁公)에게 이르기를,
“우리 외옹(外翁 외조부(外祖父)를 가리킴) 판서공(判書公)이 이미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그를 좋게 여기지 않는데, 내가 이러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표(表)를 지어 달라는 청(請)에 못 이겨 장차 신도비(神道碑) 짓는 일을 면치 못할 것인데, 사론(士論)이 어떨지 모르겠소.”
하자, 선부군(先父君)께서,
“하나같이 실적(實跡)대로만 한다면 무어 걱정될 게 있겠습니까.”
하므로, 상촌(象村)이 말하였다.
“전혀 엄호(掩護)가 없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또 당시 사생(死生)이 당장 결단되는 판에 오직 권 충정(權忠定 권발(權撥)의 시호) 등 약간인(若干人) 외에는 하자가 전혀 없는 자는 매우 적었는데, 왜 반드시 우리 외옹(外翁)만 깊이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구씨(舅氏 외삼촌) 대간공(大諫公)이 율곡(栗谷)을 매우 헐뜯은 연후에야 그를 공박(攻駁)하는 자가 아울러 판서공(判書公)까지 공박하여 악명(惡名)을 가중시켰으니, 이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합니다.”

선부군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송 판서(宋判書)를 장사 지낼 때 순종(殉從 죽은 사람의 종자(從者)를 그의 곁에 생매장하는 일)을 했다는 설(說)이 있으나 실상은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 일찍이 첨지(僉知) 송황생(宋黃生)에게서 들어 보니 ‘그때에 조정(朝廷)에서 예장(禮葬)을 하였는데, 본가(本家)의 기구(器具)도 또한 성대하여, 밖에는 파자(笆子)를 설치하고 안에는 유장(帷帳)으로 둘러쳐서 잡인(雜人)들은 출입(出入)할 수 없었다. 본가(本家)에는 봉대(鳳代)하는 비(婢)가 있었고 또 한 족인(族人)이 있었는데, 나무[木]로 만든 비(婢)를 가지고 희롱하기를 「이는 봉대(鳳代)이다.」 하였고, 그 명기(明器)를 묻을 때에 또 희롱하기를 「봉대(鳳代)가 광(壙)으로 들어간다.」 하였으므로 밖에서 그 말을 들은 역부(役夫)가 참으로 비(婢)를 순장(殉葬)시키는 것으로 여겨, 그 설(說)이 일시(一時)에 전파되어 마침내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바로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했다.” 황생(黃生)은 청풍(淸風) 송세경(宋世勁)의 서자(庶子)이다. 선부군(先府君)께서 임진년(1592, 선조25)에 난리를 피하여 그의 집에 와서 우거(寓居)하였는데, 정의(情意)가 매우 후(厚)했다고 한다.
임진년(1592, 선조25) 난리에 신주(神主) 처리할 것을 의논한 사람은 나의 제부(諸父 삼촌숙부(三寸叔父)를 말함)와 판서공(判書公)의 자손이었는데, 서로 의논하기를,
“신주를 옮기어 받들어 가다가 사람이 도적(盜賊)에게 잡혀 죽어서 신주가 도로(道路)에 버려지기보다는, 차라리 사당(祠堂) 뒤에 신주를 매안(埋安)하여, 다행히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예전처럼 봉안(奉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이 의논이 정(定)해진 뒤에 판서공의 자손들은 밤중을 이용하여 남몰래 매안(埋安)하였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그를 보화(寶貨)로 알고 발굴(發掘)하였지만, 나의 제부(諸父)는 대낮에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에 신주를 넣어 구덩이에 매안하고는, 형제(兄弟) 내외(內外)가 모두 배곡(拜哭)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래서 와서 본 다음, 한참 뒤에 흙을 덮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주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발굴(發掘)되는 걱정을 면하였다고 하니, 이는 곧 이천(伊川)이 범순부(范淳夫)를 매장(埋葬)하던 여책(餘策)으로서 이는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임진년 4월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할 때 매우 급박하였다. 그 이전에 선부군(先父君)의 여러 형제(兄弟)들이 매일같이 궐하(闕下)에 가서 변보(邊報) 및 조가(朝家)에서 변(變)에 대처할 것을 알렸다. 이날도 아침 일찍 또 대궐을 향해 걸어 나가다가 겨우 경영(京營)의 대로(大路)에 나갔을 때, 월성군(月城君) 이공 정암(李公廷馣)이 급히 말을 달려와서,
“대가(大駕)가 이미 떠났는데도 우리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또 노방(路傍)에 버려진 연(輦)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이정암은,
“중전(中殿)이 이 연을 타고 나가다가 연을 모신 군졸(軍卒)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기 때문에 중전이 말을 타고 갔다.”
하였는데, 선부군께서는 매양 이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리셨었다.

선부군 형제가 난리를 피해 관동(關東)으로 향할 적에 서로 의논하기를,
“영동(永同)은 반드시 이미 적(賊)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니, 모름지기 한 사람을 급히 보내어 정씨(鄭氏) 집이 온전한가를 탐지(探知)하여 이르는 곳에 알리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때에 습정 숙모(習靜叔母)가 영동(永同)에 있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하자, 습정 부군(習靜府君)이,
“그렇지 않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생사(生死)를 묻는 것이 아내로서 남편의 생사를 묻는 것만 하겠는가. 마땅히 한 사람을 보은(報恩)으로 보내서 매씨(妹氏)를 위해 김랑(金郞)의 소식을 급히 탐지하는 것이 옳다.” 때에 김고(金姑 김씨 집으로 시집간 고모)가 막 결혼하였는데, 호군(護軍) 김호덕(金好德)이 돌아가 보은에 있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하여, 집안 의논이 마침내 정하여졌다.
제부 부군(諸父府君)들께서 서로 이끌고 영월군(寧越郡)으로 들어가 양민(良民)인 육평손(陸平孫)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육평손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때에 김고(金姑)가 일부러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서 여러 여자종 틈에 섞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육평손의 아내가 알아보고는,
“어찌 비(婢)들로서 언동(言動)을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우거(寓居)한 곳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서, 수시로 목맥말(木麥末 메밀가루)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좋은 꿀과 아울러 바쳤다.
제부 부군(諸父府君)은 오랫동안 영월(寧越)에 있다보니, 어떻게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남하(南下)할 것을 꾀하고 어스므레할 때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김고(金姑)는 보은(報恩)에 가 보니 호군공(護軍公)이 무사하였고, 습정 부군(習靜府君)은 영동(永同)으로 가 보니 정씨(鄭氏)의 집도 또한 무사하였다. 선부군(先府君)은 회덕(懷德) 주산(注山)에 이르러 첨지(僉知) 송황생(宋黃生)의 집에 우거(寓居)하였는데, 봉군(封君)된 사람만큼이나 부유(富裕)한 가노(家奴) 가미(加味)가 첨지의 집에서 1리(里)쯤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백부 부군(伯父府君)은 청주(淸州)의 마암(馬巖)에 옮겨 우거하였고, 중부(仲父)인 지례 부군(知禮府君)은 행조(行朝)에서 직책을 임명받았다. 습정 부군은 매양 선부군을 생각하여 자주자주 회덕(懷德)으로 와서 뵈었다. 하루는 서로 막 만났을 때, 지례 부군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영남(嶺南)으로 가면서 지나는 길에 주산(注山)을 들름으로써 갑자기 서로 기약 없이 만나게 되어 슬프고도 기쁜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례 부군은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하여 조금 머무르려 하므로 습정 부군이,
“아무리 태평한 때라 할지라도 임금의 명(命)은 지체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행조(行朝)의 명령이야말로 마땅히 빨리 전달해서 영남(嶺南) 백성들로 하여금 행조의 소식을 알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여러 종친(宗親)들이 막 주찬(酒饌)을 가져와서 그를 만류하려다가 습정 부군의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탄식하며 중지하였다.
나의 외조(外祖)인 봉사(奉事) 곽공(郭公)은 휘(諱)가 자방(自防)인데, 매우 효행(孝行)이 있었다.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賊)을 토벌할 때, 봉사공(奉事公)이 그 휘하에 들어가니, 조 선생이 기뻐하면서,
“우리의 일이 성취되겠다.”
하였다. 감사(監司) 윤선각(尹先覺)이 조 선생을 미워하여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의병(義兵)의 부모 형제를 모두 수금(囚禁)하게 함으로써, 봉사공의 고(考)도 역시 옥천(沃川)에 수감되었으므로, 봉사공이 즉시 돌아가서 문안을 드리자, 그 고(考)가 꾸짖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네가 감히 사적인 일을 돌보려느냐.”
하므로, 봉사공이 즉시 돌아와 조 선생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습정공이 선부군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은 이미 유리전패(流離顚沛)되었는데, 곽씨(郭氏) 집안은 바로 충효(忠孝)의 집안이라 하니, 네가 그 집으로 장가를 들어야겠다.”
하자, 선부군이,
“명령대로 따를 뿐입니다.”
하고는 드디어 약혼(約婚)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떻게 예(禮)를 갖출 수 없었고, 목안(木雁)도 구할 곳이 없었으므로 지례 부군(知禮府君)이 하룻밤 사이에 손수 만들었으며, 의복(衣服)은 모두 첨지군(僉知君)이 빌려 주었다고 한다.

노(奴) 가미(加味)는 난리를 당했을 때에 충심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제부(諸父)가 서로 의논하여 양민(良民)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지금은 그의 자손이 가계(家計)가 넉넉해져서 자못 자립(自立)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자손도 번창하여졌다. 그의 손자인 정방(廷芳)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초관(哨官)이 되었는데, 일찍이 군대를 거느리고 조련(操鍊)차 나가다가 길에서 황군 진 군미(黃君璡君美 군미는 자임)를 만나서는 군중(群衆)을 믿고 그에게 욕(辱)을 하였다. 그러자 동춘(同春) 등 제공(諸公)이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래어 문회(門會)에서 그를 불러다 놓고 치죄(治罪)하려다가, 그가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나에게 그 일을 맡기었다. 그래서 내가 종을 보내어 부르자 즉시 왔기에, 송촌(宋村 송씨 마을)에서 매를 때려 징계하였다.

제부 부군(諸父府君)께서 경성(京城)에서 영월(寧越)로 들어갈 때나, 영월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에 도로(道路) 사이가 매우 군급(窘急)하였지만, 습정 부군는 매양 일행(一行)에게 주의시켰다.
“지사(志士)는 시체가 구학(溝壑)에 뒹굴 것을 잊지 않는 법이니, 조금이라도 옳지 못한 일은 할 수가 없다.”

박씨(朴氏) 집으로 출가(出嫁)한 고모(姑母)는 성품이 매우 인자(仁慈)하고 용모(容貌)가 뛰어났다. 이미 박씨와 정혼(定婚)하였는데, 혼례(婚禮)를 치르기 수일(數日) 전에 도사 부군(都事府君)의 친우(親友)인 윤씨 어른[尹丈]이 또 일부러 와서 부군(府君)에게 책망(責望)하기를,
“장가들이고 시집보내는 일은 대사(大事)인데, 어째서 친구들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갑자기 사위를 골랐단 말인가.”
하고, 인하여 박씨(朴氏) 낭자(郞子)에게 좋지 못한 점이 매우 많은 것을 말하자, 부군이,
“맨 처음 상의(相議)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책망할 만하나, 이미 혼약(昏約)이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구려.”
하고는, 들어가서 조비(祖妣)를 보고 이 사실을 말하자, 조비가,
“딸자식 하나를 버릴지언정, 신의(信義)를 잃을 수는 없소,”
하였다. 그리하여 혼례가 이루어진 뒤에 날마다 그의 소행(所行)을 보니 하나같이 윤씨 어른의 말과 같았다. 하루는 고부(姑夫 고모부)가 경영(京營)의 큰길 옆에 취해 드러누워서 고모(姑母)에게 나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부군(府君)이 조비(祖妣) 및 여러 숙부(叔父)들과 의논한 끝에, 혹은 ‘아내란 순종(順從)을 의(義)로 삼는 것이니, 그 남편의 부름에 나가야 한다.’ 하고 혹은 ‘순종하는 것을 정(正)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순종할 만한 것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 것이니, 혹시라도 나갔다가 차마 당하지 못할 욕(辱)이라도 당한다면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부군(府君)이 지례 부군(知禮府君)을 시켜 비복(婢僕)을 거느리고 가 보게 한 결과, 고부(姑夫)는 고모가 오지 않았다고 화를 내어 지례 부군을 때리려 하므로, 지례 부군이 되돌아오면서 비복들까지도 그를 버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고부는 술이 깬 다음 뒤쫓아 와서 지례 부군에게,
“비복들까지도 나를 버려두고 가도록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공(公)은 왜 나를 때리려 하였는가. 나를 때리려는 마음으로 미루어 보건대, 비복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하겠기에 거기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니, 고부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때 도사 부군(都事府君)께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초 윤모(尹某)의 말을 들었을 때에 ‘신의를 버릴 수 없다.’ 하였는데, 오늘날 비록 이런 일을 당하여도 또한 후회하지는 않는다.”

우리 선부군(先府君)이 4세가 되었을 때 조비(祖妣)가 돌아가셨는데, 박씨 집으로 출가한 고모가 일찍 결혼하여 젖이 일찍 났기 때문에 항상 선부군에게 젖을 먹였다고 한다.

셋째 숙부(叔父)는 광주위(光州尉) 김인경(金仁慶)의 양녀서(養女壻)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두역(痘疫)을 앓다가 18세의 나이로 자식도 없이 작고하자, 숙모(叔母)도 하종(下從 아내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自決)함)하였다. 숙부는 용모(容貌)가 눈빛[玉雪]처럼 깨끗하고 재조(才調)가 뛰어났으므로 도사 부군(都事府君)께서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숙부가 작고하고부터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시기에 이르렀다고 하니, 애통하기 그지없다. 지금 숙부의 묘(墓)는 양근 읍내(楊根邑內) 김씨(金氏)의 족장(族葬) 곁에 있는데 기해년(1659, 효종10) 봄에 내가 그곳에 성묘(省墓)하기 위해 휴가(休暇)를 청하자, 효묘(孝廟)께서 특별히 윤허하였다. 그 묘(墓) 아래 김씨(金氏) 제종(諸宗)들이 주과(酒果)를 갖추고 이미 신(神)에게 고(告)하여 쌍분(雙墳)을 합쳐서 돌을 쌓아 하나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대체로 쌍분이었는데, 봉(封)의 흙이 무너져서 편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에 내가 석물(石物)을 세워 표(表)하고, 또 제전(祭田)을 약간 두어 제(祭)를 모시도록 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주 선생(朱先生)의 기(記)에 의하면, 정영세(程靈洗)의 묘(墓)는 돌[石]로 봉(封)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였다. 나의 선비(先妣)의 선대(先代)인 좌윤(左尹) 곽수원(郭綏元)은 국초(國初)의 인물로, 그의 묘는 옥천(沃川) 적등산(赤登山)의 동쪽에 있는데, 역시 돌로 봉을 지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완연하여 어제와 같으니, 이는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김 고모(金姑母)가 용모(容貌)는 박 고모(朴姑母)만은 못하나, 도량(度量)이 넓고 깊으며, 식견(識見)이 밝고 심원하여 경사(經史)를 통관(通貫)하지 못한 것이 없었고, 또한 작문(作文)도 잘하였지만 매양 숨겨서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기억력(記憶力)은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쇠퇴하지 않아서, 모든 국가(國家)의 고사(故事)나 선세(先世)의 유적(遺跡)을 마치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시집가기 전에 우봉 숙부(牛峯叔父)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哭)을 할 제, 사정(事情)이 망극하였다. 인하여 선고(先考)가 끼쳐 주신 기물(器物)을 꺼내서 점검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숙부(叔父)의 서찰(書札)을 찾아내어 가장(家狀)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 상자[篋] 속에는, 선고(先考)가 진사 조비(進士祖妣) 유씨(柳氏)의 행적(行跡)을 매우 자상하게 손수 기록해 두었다.”
하고, 인하여 그 글을 매우 익숙하게 외므로, 내가, 손수 기록해서 종족(宗族)에게 보일 것을 청하자, 고모가,
“나는 평생 동안 한 번도 문자(文字)를 지어서 남에게 보인 적이 없다”
하고는, 마침내 언서(諺書)로 써서 내놓았다. 효종(孝宗) 4년에 우리 종족(宗族)이 유씨(柳氏)의 절행(節行)에 대한 정표(旌表)를 청할 적에 다만 묘표(墓表)에 의거하여 장문(狀文)을 만들려고 보니, 묘표는 글 두어 줄 밖에 되지 않으므로, 드디어 고모가 외어 준 조고(祖考)의 기문(記文)을 들어 엮어서 올렸다. 고모는 이때 보은(報恩)에 계셨는데, 내가 그 언문(諺文) 기록을 급히 회덕(懷德)으로 보냈더니, 동춘(同春)이 열어 보고는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의리(義理)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는데, 동춘이 아니면 이럴 수가 있었겠는가.

동춘(同春)이 일찍이 상주(尙州)에 가서 그의 외구(外舅)인 정 문숙(鄭文肅 정경세(鄭經世)의 시호)을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은(報恩)에 들러 김 고모(金姑母)를 뵙고 돌아와 나에게 이르기를,
“어쩌면 그리도 언사(言辭)와 거지(擧止)가 하나같이 여러 형제(兄弟)들과 같은가.”
하였는데, 여러 형제란 대체로 우리 제부(諸父)를 말한 것이다.

김 고모(金姑母)의 큰아들 연(渷)은 자(字)가 제보(濟甫)인데 매우 재행(才行)이 있었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공 귀(李公貴)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그를 천거하여 금오랑(金吾郞)으로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돌아와서 죽으니, 고모는 그리 슬퍼하지 않으면서,
“운명(運命)인데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나는 매양 이르건데, 고모의 다른 일은 내가 오히려 따를 수 있겠지만, 이 일은 감히 바랄 수가 없다.

김 고모가 금오랑(金吾郞)의 상(喪)을 당하고 나서 또 수년 뒤에 남편의 상을 당하였는데, 갑자기 백연(白燕)이 날아와서 여막(廬幕)에 둥우리를 짓자, 고모가 울면서,
“우리 집에 백연이 어찌해서 다시 왔느냐.”
하였으니, 대체로 서부공(西阜公)의 일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 선부군(先府君)의 형제가 모두 5인(人)인데, 습정공(習靜公)이 넷째이고 선부군이 다섯째이다. 김 고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찍이 모씨(母氏)가 은밀히 숨겨둔 수기(手記)를 보니 ‘내가 허다한 자녀(子女)를 낳으면서 이상한 꿈을 꾼 일이 없었으나, 오직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에는, 천둥이 크게 몰아치더니 이윽고 하늘이 활짝 개는 꿈을 꾸었는데, 넷째 아들의 경우는 이런 꿈을 두 차례나 꾸었다. 매우 이상하기 때문에 이를 기록하여 그 징조를 증험하려 한다……’ 하였다. 이 기록은 상자[箱] 속에 숨겨 두었는데, 모씨(母氏)가 별세한 후에 상자가 해져서 그 기록이 저절로 발견되었다.”

김 고모가 매양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모씨(母氏)의 훌륭한 덕성(德性)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중에 큰 것만을 뽑아서 말하자면, 매우 듬직하여 요동되지 않고, 모든 일은 한번 상량(商量)하여 처치(處置)한 다음에는 아무리 큰 화복(禍福)으로 위협하더라도 한없이 침착하여 조금도 마음에 개의치 않았는데, 우리 형제들 가운데 넷째와 다섯째가 모씨를 닮았다.”

습정 부군(習靜府君)의 갈문(碣文)은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에게서 청해 얻어 왔는데, 그때의 행장(行狀)은 여러 종씨(從氏 종형제(從兄弟)을 가리킴) 및 가형(家兄)이 나로 하여금 초고(草稿)를 정(定)하도록 한 것인데 그 대개(大槪)는 갖추어 졌으나, 그 세행(細行)의 누락된 것은 자손들이 더욱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습정 부군은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고 어질고 착하며 매우 듬직하고 조용하고 엄숙하여, 바라보면 무서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정공 곡(鄭公谷)이 그의 장녀(長女 곧 나의 숙모(叔母)이다)를 현숙(賢淑)하게 길러서 매우 애써 사윗감을 고르던 중, 영동(永同)에서부터 서울로 달려가 여러 공가(公家)에게서 듣고 본 결과, 습정 부군을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정공(鄭公)이 유동(鍮洞)으로 가서 보기를 요구하자, 습정 부군이 나와 보면서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공은 습정 부군과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눈 끝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으로 복종하고 오직 정혼(定婚)이 안될까 염려하여, 남에게 이르기를,
“송모(宋某)를 보고 나서부터는 혹시라도 혼사(昏事)가 이뤄지지 못할까 염려되어 심화(心火)가 발동하여 마치 광증(狂症)이 발작할 것 같다.”
하였다. 정공(鄭公)은 또 어떤 인가(人家)에서 부군(府君)의 필적(筆跡)을 보고는 영동(永同)으로 돌아와서 말하였다.
“다른 것은 논(論)하지 않더라도 그의 필재(筆才) 하나만 가지고도 사위를 삼을 만하다.”

습정 부군이 이미 영동(永同)으로 장가를 들고 돌아왔는데, 그 의복(衣服)이 모두 향제(鄕制 시골에서 입는 복식(服式))였다. 그러자 김 고모가 이때 아직 시집가기 전이었기에, 부군(府君)에게 이르기를,
“이 의복은 반드시 경중(京中)에 가면 조소(嘲笑)를 받을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자, 부군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므로, 고모가,
“왜 꼭 일부러 남에게 조소를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부군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대략 고쳐 놓았었다. 그후 부군이 시골을 내려가자, 정공이 크게 노하여,
“무슨 처자(處子)가 그렇게 건방지단 말이냐.”
하였으나, 숙모(叔母)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편지를 통해 고모에게 칭사(稱謝)하였다. 우리 숙모의 덕성(德性)이 이와 같으니, 우리 숙부의 배필(配匹)이 되기에 마땅하다.

습정 숙부는 우리 선부군(先府君)과 우애(友愛)가 매우 지극하였다. 선부군께서는 옥천(沃川)의 구룡촌(九龍村)에 우거(寓居)하였고, 숙부는 영동(永同)의 고당포(高塘浦)에 계시어, 서로의 거리가 10여 리쯤 되었는데, 매양 4, 5일 만이면 반드시 한 번씩 서로 왕래(往來)하였으되, 때로는 혹 말을 타고 동복(僮僕)도 없이 다니기도 하였다. 숙부가 일찍이 구룡촌(九龍村)으로부터 저물게 영동(永同)으로 돌아갈 때, 선부군께서 한 종을 시켜 모시고 가도록 하였는데, 그 종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강 가에 이르러 그 종에게 이르기를,
“네가 병이 들어 찬 물에 들어가서는 안 되니, 네가 먼저 말을 타고 물을 건너가서 다시 그 말을 돌려보내라.”
하여, 말을 타고 건너도록 하였다. 그 숙부가 돌아가신 뒤에 그 종은 매양 울면서 말하였다.
“이러한 어지신 군자(君子)께서 어찌하여 장수(長壽)하지 못한단 말이오.”그 종의 이름은 종부(從扶)인데, 그의 자손(子孫)은 지금 곽검(郭檢)의 집에 있다.

나의 외조모(外祖母) 정씨(鄭氏)가 돌아가셨을 때, 습정 숙부는 이때 고당포(高塘浦)에 계셨는데, 마침 그 마을의 조그마한 잔치에 나가려다가 부음(訃音)을 듣고는 즉시 잔치에 나가지 않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강권(强勸)하기를,
“이는 친척(親戚)도 아닌데, 어찌 이렇게까지 합니까.”
하자, 숙부가,
“제부(弟婦 제수)는 한창 통곡을 하고 있을 터인데, 내가 잔치에 나가서 술을 마시는 것은 편안할 바가 아니다.”
하고는, 드디어 즉시 가서 조문(弔問)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차탄(嗟歎)해 마지않았다.

습정 숙부(習靜叔父)가 오랫동안 정씨(鄭氏)의 생관(甥館 사위가 거처하는 집을 가리킴)에 있으면서 사남(四男)ㆍ이녀(二女)를 길렀는데, 정공(鄭公)은 끝내 공경히 대우하였다. 다만 정공은 당론(黨論)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일찍이 이이(李珥)ㆍ성혼(成渾) 양현(兩賢)을 공박하자, 숙부가 애써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므로 정공이 매우 노여워하였다. 숙부가 동지(同知) 박정로(朴廷老)와 함께 옥천(沃川) 양산(陽山)의 강선대(降仙臺)에 가서 관어(觀魚 물에서 노니는 고기를 구경함)를 하려 하였으나, 정공이 말[馬]를 보내줄 뜻이 없으므로, 숙부는 또한 침착한 표정으로 종을 시켜 촌우(村牛)에다 안장을 채워서 그 소를 타고 갔다. 그러자 박씨 어른[朴丈]이 희롱삼아 묻기를,
“어찌해서 목동(牧童)의 행차가 되었는가.”
하므로, 숙부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속담에 ‘말[馬]이 가는 곳에 소[牛]도 또한 간다.’ 하였으니, 나도 공(公)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때 영동(永同)ㆍ옥천(沃川) 사람들이 강선대(降仙臺)에 많이 모여서, 소를 타고 온 이유를 서로 다투어 묻자, 숙부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소를 탔지만 말을 탄 사람과 함께 왔는데, 무엇을 물을 게 있겠습니까.”박씨 어른이 관계한 여자는 정공(鄭公)의 비(婢)였다. 박씨 어른은 그 비(婢)를 인하여 그 연유를 물어보고는 매양 탄식하기를 “그 넓고 큰 덕량(德量)을 나는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이공 여(李公勵)는 정승(政丞) 이탁(李鐸)의 손자로서 강개(慷慨)하여 대절(大節)이 있었다. 그 역시 영동(永同)의 대초촌(大草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고당포(高塘浦)와는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였으나, 이공(李公)이 정공(鄭公)을 꺼리고 미워하여 한 번도 강을 건너온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숙부(叔父)가 매양 이공에게 가서 담론(談論)하므로, 정공이 처음에는 자못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후에는 점차 숙부에게 감화(感化)되어 처음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두 사위는 모두 숙부의 동지(同志)들이었다. 한 사람은 김 선생(金善生)인데,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종제(從弟)이고, 또 한 사람은 조정란(趙廷鸞)인데, 이는 감사(監司) 정호(廷虎)의 아우이다. 이공(李公)은 뒤에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순절(殉節)하고 외로이 딸 하나가 있었으므로, 숙부가 그를 며느리로 삼았으니, 이가 곧 야은공(野隱公)의 아내이다.

습정 숙부(習靜叔父)가 영동(永同)에 있을 당시, 동지(同知) 박정로(朴廷老)의 아우 정량(定亮)은 중봉 선생(重峯先生)의 제자(弟子)로서 호협하고 쾌활하고 기위(奇偉)하였는데, 숙부가 이공 여(李公勵)의 집에 이를 때면 반드시 그를 초대하여 함께 담화(談話)를 나누었다. 이때에 중봉 선생의 서자(庶子) 완도(完堵)도 때로 가서 모시고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늘그막에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숙부(尊叔父)의 덕(德)을 알려면 정공(鄭公)을 감화 복종(感化服從)시킨 한 가지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옥천(沃川) 구룡촌(九龍村)에 유사(儒士)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가 습정 숙부를 지성(至誠)으로 존모(尊慕)하였는데, 그중에도 교관(敎官) 곽지인(郭志仁)과 참봉(參奉) 곽현(郭鉉)이 가장 존모하였다. 교관공(敎官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사우(祠宇)가 난잡(亂雜)하여 법도가 없기 때문에 나로서는 인정할 만한 분이 적은데, 송씨 어른[宋丈 송방조(宋邦祚)를 가리킴]의 경우는, 영동(永同) 사람들에게서 만일 향사(享祠)하자는 논의만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논의를 따를 것이다.”
하였다. 교관공은 젊은 시절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과거업(科擧業)을 폐하고 은거(隱居)하여 후진(後進)을 교수(敎授)하였다. 인조(仁祖) 때에 한 번 향시(鄕試)에 응시하고는 그만두었으며, 효종(孝宗) 때에는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취임하지 않고 졸(卒)하였다.

습정 숙부는 인후(仁厚)하고 충신(忠信)하여 아무리 하천배(下賤輩)일지라도 또한 지성으로 대우하였기 때문에 하천배들도 그를 믿고 사랑하여, 그가 이르면 환영(歡迎)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학장(學長) 김약허(金若虛)는 지벌(地閥)은 미약하나 힘써 학문(學問)을 하여 영동(永同)과 옥천(沃川) 사이에서 학자(學者)들을 교수(敎授)하였다. 그가 일찍이 전간(田間)에 앉아 곡식 거두는 일을 감시(監視)하고 있을 때 숙부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를 바라보고는, 말[馬]에서 내려 그에게로 가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의 전인(佃人 소작인(小作人)을 가리킴)이 집에서 내온 주식(酒食)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 공손히 드리면서,
“소인(小人)은 정성으로 드리오나, 어찌 감히 드시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자, 숙부가,
“네가 정성으로 나에게 음식을 주는데, 내가 먹지 않겠느냐.”
하고는, 곧 그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드시었다. 김 학장(金學長)은 매양 이 일을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남에게 좋아하기를 기대하여도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데, 송 정자(宋正字 정자는 관직임) 같은 이는 남에게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남들이 스스로 좋아하니, 《주역(周易)》에 이른바 ‘믿음이 돼지나 고기에까지 미친다.[信及豚魚]’는 것을 내가 송 정자에게서 증험했다.” 김 학장은 고청(孤靑) 서기(徐起)에게서 배웠는데, 읽지 않은 글이 없으되, 특히 사서(四書) 및 《주역(周易)》에 가장 공(功)을 들였다. ○ 김 학장의 말에 의하면, 그 전인(佃人)이 올린 밥상에는 삶은 토란(土卵)이 주발[椀]에 가득히 들어 있었는데, 숙부가 그것을 가장 좋아하여 드셨다고 하였다.

구룡촌(九龍村) 사람들은 주식(酒食)의 모임이 있을 때면 반드시 선부군(先府君)을 인하여 습정 숙부를 받들어 맞이하였는데, 숙부는 초대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오시어 조용히 담화(談話)하면서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말씀하였다. 숙부는 또 글씨를 잘 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구룡촌에 이를 때마다 사람들이 책첨(冊籤)을 써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는 바람에 서질(書帙)이 무더기로 쌓였으나, 먹물에 붓을 적셔 써 나가면 잠깐 동안에 다 쓰곤 하였다. 술이 취하면 더욱 글씨 쓰는 품이 민첩하고 신속하였으되, 그 글씨를 얻은 자가 물러가서 비교해 보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더욱이 신주(神主)를 쓰는 데 절묘(絶妙)하였으므로, 상가(喪家)에 찾아와 써 주기를 요청하면 그때마다 가면서,
“저 사람이 자기 부모(父母)를 위해 정성으로 나를 청하는데, 내가 무엇을 꺼리겠는가.”
하였다. 영동(永同)에 사는, 서파(庶派 서자(庶子)의 자손을 말함)로서 남성(南姓)을 가진 사람이 자기 아버지에게,
“지금 듣건데, 송 정자(宋正字) 나으리께서 장차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고 하니, 미리 신주를 써 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그 말을 듣는 자가 크게 웃었다. 그러나 또한 숙부가 남들에게 사모(思慕)하는 바가 됨을 볼 수 있겠다. 매양 신주(神主)를 쓸 때마다 자수(字數)를 속으로 생각하면서 붓을 놀려 쓰면, 그 가지런하고 똑 고르고 바름이 마치 줄을 쳐 놓은 사이에 쓴 것과 같았다고 한다.

습정 숙부가 일찍이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의 장구(章句)를 손수 써 가지고 조석으로 송독(誦讀)하여 비록 마상(馬上)에서도 송독을 폐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형강(荊江) 가에서 그 글을 유실(遺失)하였다. 이 글을 옥천(沃川)의 곽방영(郭邦英)이 습득(拾得)하였는데, 숙부가 사람을 시켜 돌려 달라고 요구하자 없다고 숨겨 버리므로, 그후로는 숙부가 곽방영을 만나더라도 묻지 않았다. 숙부가 작고하신 후에 야은공(野隱公) 형제가 곽방영에게 간곡히 요구하면서,
“이는 선인(先人)의 수필(手筆)일 뿐만이 아니라 선인께서 매우 아끼던 것이니, 만일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 주기를 바란다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드리리다.”
하였으나, 곽방영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곽방영의 자손은 지금 옥천(沃川)의 우치(牛峙)에 살면서 시배(時輩)들에게 붙었는데, 이들이 바로 정자(正字) 곽시(郭詩)의 후손이다.

옛 종[故奴] 수문(叟文)은 성(姓)이 강(姜)인데, 그의 어미 헌비(獻飛)가 이 판서(李判書) 정헌공(正獻公) 집에서 와 우리 선부군(先府君)을 길렀기 때문에 선부군께서는 수문(叟文)을 단순한 노복(奴僕)으로 보지 않았고, 수문도 또한 충성을 다하였다. 매양 습정 숙부가 구룡촌(九龍村)을 왕래하실 때는, 수문이 반드시 닭고기와 술을 미리 준비하고 큰 주발에다 술을 따라 올리면, 숙부는 반드시 그 닭고기와 술을 남김없이 다 드시었다.
무오년 6월에 관서(關西)로부터 숙부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수문이 지성으로 애통(哀痛)해 하면서 선부군을 모시고 관서에까지 달려가서 호상(護喪)하여 돌아왔다. 수문의 자손이 지금은 수백 명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충성에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숙부께서는 주량(酒量)만 매우 클 뿐 아니라, 식량(食量) 역시 컸으므로, 무릇 음식물을 만나면 반드시 남김없이 다 드시었다.

선부군(先府君)의 갈명(碣銘)은 청음(淸陰) 문정 선생(文正先生)이 찬(撰)한 것인데, 그 갈명을 청(請)할 때에 선우(先友) 제공(諸公)에게 각기 저술(著述)이 있었으나,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호임) 안씨 어른[安丈]께서 칭인(稱引 칭찬하여 추켜올림)한 것이 가장 중(重)하였으니, 후세의 자손들은 상고하여 이를 알아야 한다.
대저 선부군은 기상(氣象)과 언행(言行)이 습정 숙부와 대략 같았으나, 선부군의 성품은 엄중(嚴重)하시었고, 숙부의 성품은 인후(仁厚)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곽 교관(郭敎官) 어른에게 듣건대, 숙부와 논의(論議)를 할 때면 매양 애모(愛慕 사랑하고 사모함)의 정을 느꼈고, 선부군에게서는 매양 무서움을 느꼈다고 하였다.

선부군께서는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의를 지켜, 죽어서 시체(屍體)가 구학(溝壑)에 버려질 것으로써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사년(1617, 광해군9)을 당하여 혼자서 서궁(西宮)에 배례(拜禮)하고 돌아왔을 적에 와언(訛言 유언비어)이 날로 일어나, 조석(朝夕) 사이에 급보(急報)가 이를 것이라고 여겼는데, 선부군께서는 태연하여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고, 제배(儕輩)들이 와서 존경(尊敬)하여 복종(服從)하는 말을 하여도 또한 묵묵하여 마치 이런 일이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하였다. 어떤 이가 그 일의 곡절(曲折)을 물으면 다만,
“이것이 무어 그리 물을 만한 일인가.”
하고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향리(鄕里)의 사이에서 그 자세한 내력을 아는 자가 적다.

선부군이 집에 계실 때는 항상 재계(齋戒)하는 것처럼 공경하고 삼가며, 혹은 종일토록 말을 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크게 가뭄이 들어 경신년(1620, 광해군12) 봄에 죽으로 끼니를 해도 자주 거르는 형편이었는데, 선부군게서는 필사(必死)의 각오로 대처하면서,
“이도 또한 운명이다.”
하였다. 이때 이웃에 사는 상한(常漢 상놈)이 대두(大豆) 두 말[二斗]을 가져와 바치자, 선부군이 그를 물리치면서,
“받을 만한 의(義)가 없다.”
하였고, 제배(儕輩)가 물품을 보내어 도와주면 받았다.

정유년(1597, 선조30) 9월에 습정 숙부가 구룡촌(九龍村)으로 선부군을 찾아오시자, 촌중(村中)의 노소(老少)가 많이 모여 각기 닭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한창 마시는 도중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급히 외치기를,
“왜적(倭賊)이 이르렀다.”
하였다. 대체로 왜적이 소사(素沙)에서 명(明) 나라 장수 마귀(麻貴)에게 패(敗)한 자가 도망쳐 돌아온 것이었다. 숙부는 급히 고당포(高塘浦)로 돌아가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주피(走避)하였고, 선부군 역시 집 뒤의 산(山)으로 피신하였다. 수일(數日) 뒤에 지례 부군(知禮府君)이 청주(淸州) 청천현(靑川縣)의 청석교(靑石橋)에서 왜적을 만나 해(害)를 당했으므로, 때에 왜적이 원근(遠近)에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청석교(靑石橋)에 가서 분곡(奔哭)하고 청주(淸州) 마암(馬巖)에 돌아와 빈소(殯所)를 정한 연후에 돌아갔다.

습정 부군이 어렸을 적에 김 고모(金姑母)와 함께 두역(痘疫)을 앓다가 증상(症狀)이 모두 악화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틀림없이 죽을 것으로 짐작하였으나 두 분은 서로 희학질하며 웃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 도량(度量)이 젊을 때부터 이러하였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6월 초에 습정 숙부의 부음(訃音)이 평안도(平安道)로부터 이르렀는데, 이때가 막 정오(亭午)였다. 대체로 당시에 노(虜)가 한창 요심(遼瀋) 지방에서 창궐하여 우리 군사가 방금 평안도에 둔취(屯聚)해 있었기 때문에 뭇 간특한 무리들이 숙부를 가장 심하게 미워하여 이 사실(事實)은 지갈(誌碣)에 나타나 있다. 죽을 땅에 빠뜨린 것이었는데, 게다가 수은어사(搜銀御史)를 겸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역배(譯輩)에게 짐살(鴆殺)된 것이다.
선부군께서는 원통(寃痛)하여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이 밤낮으로 통곡(痛哭)을 하자, 때에 조문(弔問)한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선부군은 하인(下人) 수문(叟文)을 시켜 행장(行裝)을 갖추게 하고 이튿날 늦은 아침에 야은공(野隱公)이 영동(永同)에서 오기를 기다려 전로(前路)를 향해 함께 출발하였다. 야은공은 다만 복마(卜馬)를 탔고, 선부군은 다만 한 필(匹)의 말에 종자(從者)는 수문(叟文) 뿐이었다. 옥천(沃川)에서 용천(龍川)까지는 무려 2천 리나 되는데, 곡읍(哭泣)하기를 마치 야은공의 형제처럼 하였고, 노상(路上)에서 한 번도 일찍이 최복(衰服)을 벗지 않았으며, 조석(朝夕)으로 곡(哭)하고 상식(上食)드리는 일을 하나같이 모두 시행하였다.
이미 상(喪)을 따라 영동(永同)에 도착하여서는 계속 상차(喪次)에 계셨고, 비록 잠깐 집에 오시더라도 밖에서 거숙(居宿)하였다. 대체로 6월부터 그해 11월 장례(葬禮) 모시기 이전까지 거친 밥에 나물만 드시었으나 몸은 건강하였다. 이듬해 6월에 영동(永同)에서 복(服)을 벗고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와서 위로하자 선부군은 아직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당시에 선부군 및 상차(喪次)에 조문온 사람들이 곡(哭)하기를 마치 친척(親戚)에게 곡하듯 하였고, 장사할 때에는 장송(葬送)하는 자가 수리(數里)에 뻗쳤다.
대체로 선부군과 습정 숙부는 기품(氣稟)이 후(厚)하고 건장하시어 평생토록 일찍이 앓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백 세(百歲) 이상 장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모두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니, 애통하다. 김 고모(金姑母)의 품질(稟質)이 대략 그분들과 서로 비슷한데 유독 장수를 누렸다.

나의 외고(外姑 장모(丈母)를 말함) 박씨(朴氏) 이태연(李泰淵) 영공(令公)의 모부인(母夫人)이다 가 습정 숙모(習靜叔母)에게는 중표친(中表親 내외종(內外從) 형제를 일컽는 말임)이다. 숙부의 상(喪)이 끝난 후에 외고(外姑)가 가서 숙모를 찾아보고 인하여 숙모를 모시고 잤는데, 숙모가 밤새도록 울면서, 숙부가 집에 계실 때의 행실(行實)이 덕선(德善) 아님이 없었음을 말하였다. 외고가 일찍이 나에게,
“집안에 질병(疾病)이 있을 때에도 꿈에 자네의 숙부를 뵈면 반드시 기쁜 일이 있었네.”
하였다. 대체로 그의 덕(德)을 사모함이 깊기 때문에, 마음이 있는 곳에 정신(精神)이 은연중에 감통(感通)된 것이니, 참으로 이런 이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금오(金吾) 이공(李公)의 집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금오공(金吾公)의 외구(外舅)는 바로 동지(同知) 박정로(朴廷老)였다. 그는 습정 숙부를 매우 친애(親愛)하였는데, 나를 보고 이르기를,
“군(君)의 미목구비(眉目口耳)가 흡사 군의 숙부(叔父)와 같기에 내가 보고 매우 기뻐하였네. 그러나 용모(容貌)가 서로 같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덕(德)이 같기는 매우 쉽지 않는 걸세.”
하기에, 내가 사례하기를,
“숙부의 덕이야 나만이 감히 바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또한 어찌 따르기가 쉽겠습니까.”
하니, 박공(朴公)이 말하였다.
“군(君)의 말이 옳다. 나는 군의 숙부를 세상에 매우 드문 인물(人物)로 여기네.”

폐조(廢朝 광해군(光海君)) 때에 군소배(群小輩)들이 지기(志氣)를 만족하게 얻었는데, 뒤에 차츰 사류(士類)를 수습(收拾)하려 한 사람은 숙부와 계곡(谿谷 장유(張維))ㆍ택당(澤堂 이식(李植))ㆍ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등 제공(諸公)이 바로 그분들이다. 택당과 백강은 마치 자기 몸까지 더럽힐 것처럼 여기고 가 버렸지만, 숙부 및 계곡은 때로 혹 나아가서 그 무리들을 준엄하게 배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숙부가 승문원(承文院)에서는 계곡과 함께 권간(權姦)들의 자제(子弟) 10여 명의 진로(進路)를 막았고, 병조(兵曹)의 직방(直房)에서는 한찬남(韓纘男)의 죄악(罪惡)을 면척(面斥)하였다. 이 때문에 권간배(權姦輩)들이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일찍이 숙부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있으면서 공사(公事)를 가지고 박승종(朴承宗)에게 가자, 박승종이 매우 친근하게 대우하였으나 숙부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공사(公事)를 감심(勘審)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박승종이 즉시 강빙각안(江冰閣岸)의 글을 부르므로, 숙부가 즉시 그 글을 쓰니, 승종이 놀라면서,
“이 글은 출처(出處)가 매우 궁벽하여 사람마다 아는 바가 아닌데, 나는 여기에서 비로소 좌랑(佐郞)이 문(文)에 능함을 알게 되었소. 참으로 문리(文理)가 여기에 이른 줄은 뜻밖이었소.”
하였다. 이윽고 대동(帶同)한 하리(下吏)가 뒤에서 발을 밟으면서 은밀히 조그마한 문서(文書)를 보여 주었는데, 이는 바로 논핵(論劾)한 글이었다. 그리하여 숙부가 물러가기를 청하자, 승종이,
“왜 그렇게 갑자기 가려고 합니까?”
하므로, 숙부가 사실대로 말하니, 승종이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아배(兒輩)들이 한 짓이오. 그들은 실로 글[文]을 못하면서 요행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니, 괴원(槐院)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무식(無識)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것입니다. 부끄럽기 그지없으나, 좌랑(佐郞)께서는 개의(介意)치 말기를 바랍니다.”

숙부가 훈련도감(訓練都監)의 낭청(朗廳)이 되었을 때, 족질(族姪)인 진사(進士) 송석규(宋錫圭)가 유점(鍮店)으로 가서 뵙자, 짚자리[藳薦]를 드리워서 안과 밖의 사이를 막고 목판(木板 나무판자) 하나를 설치한 다음 그 위에 앉아서 즉시 그를 불러 서로 마주앉아 매우 반갑게 접대하였다. 대체로 송석규의 아버지 영조(榮祚)가 이이첨(李爾瞻)에게 붙었는데, 송석규가 바로 그의 쟁자(爭子 부모의 잘못을 간(諫)하는 아들)였기 때문에 그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으므로, 숙부가 진작부터 그를 가상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저녁때까지 얘기를 나누면서 숙부가,
“네가 객지(客地)에서 먹고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니, 모름지기 나에게서 먹고 지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밥상이 들어왔는데, 그 국[羹]은 숭어[秀魚] 한 마리를 가지고 가운데를 잘라 주인과 손의 국에 나누어 놓았다. 송석규가 막 고기를 먹으려 하자 숙부가,
“가만 있거라.”
하고는, 인하여 나직한 목소리로 안[內]을 향하여 숙모(叔母)를 불러서,
“이 고기가 어디서 온 것이오.”
하자, 숙모가 훈국(訓局)의 고자(庫子)가 바쳐온 것이라고 대답하므로, 숙부는 종을 시켜 그 고자를 불러오게 하고, 또 숙모에게 묻기를,
“고기가 이것뿐이오.”
하자, 숙모가 또 몇 마리가 더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숙부가 그 고기를 모조리 가져오게 하고 또 이미 끓인 국에 들어 있는 고기 두 도막을 아울러 취하여 두 도막을 한데 연해서 그릇에 담아 한곳에 별도로 둔 연후에 함께 밥을 먹었다. 이윽고 고자(庫子)가 오자, 숙부가 꾸짖기를,
“네가 이 고기를 나에게 보내 준 것은, 쌀을 거둘 때에 나로 하여금 네가 조롱(操弄 제멋대로 다룸)하는 것을 금하지 말도록 하려는 것이냐?”
하니, 고자(庫子)가 머리를 조아리며 죽여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그 고기를 아울러 돌려주어서 보내었다. 숙모가 그후로는 숙부의 명(命)이 없이는 지푸라기 하나도 남에게서 받지 않았다. 송석규(宋錫圭)는 병화(兵禍)를 피해 인동(仁同)에 가 있으면서 장응일(張應一)에게 붙어 그의 아들 지찬(之瓚)으로 하여금 유직(柳稷)이 상소(上疏)한 일에 가서 참여하도록 하고, 그 일에 분기(奮起)하여 이이(李珥)ㆍ성혼(成渾) 두 선생을 무함하였으니, 애석하다.

선부인(先夫人 작고한 어머니를 가리킴)께서는 성품(性稟)이 활달하여, 비록 매우 가난하였지만 또한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정사년(1617, 광해군9)에 선부군(先府君)께서 서궁(西宮)에 배례(拜禮)한 일로 인하여 군소배(群小輩)들에게 노염을 사서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날로 이르러, 조석(朝夕) 사이에 엄명(嚴命)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때 선부인(先夫人)께서,
“다행히 말감(末減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함)되어 귀양이나 가게 된다면 따라갈 노비(奴婢)가 없으니, 도시 너희들이 바가지를 들고 음식을 구걸해다가 서로 봉양할 수 밖에 없다.”
하였고, 모든 일에 대처하심이 여유 있고 침착하였다.
같은 마을에 박융(朴肜)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는 곧 박정길(朴鼎吉)의 당숙(堂叔)이었다. 그는 정길(鼎吉)에게 붙었고 또 폐모(廢母)하자는 상소(上疏)에도 참여하였는데, 그의 집에서는,
“장차 찰방(察訪)이 될 것이다.”
고 자랑하자, 선부인께서,
“모비(母妃)를 폐하고 이(利)를 얻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랑을 한단 말이냐.”
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을 함에 미쳐 선부군께서 즉시 관직(官職)을 받자, 선부인께서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남들이 혹 우리 집을 보고, 때를 만나서 일이 뜻대로 잘 되는 집이라고 한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흉년(凶年)이 들었는데, 가비(家婢)가 새 저울(新秤) 하나를 가지고 들어와서,
“이 저울 장수가 매우 배가 고파서 이 저울로 밥 한 그릇과 바꿔 먹기를 요청합니다.”
하자, 선부인이,
“우리가 만일 때를 타서 이(利)를 요구하였더라면 이렇게까지는 가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아침에 쑨 죽(粥)을 나누어 주고 그 저울은 돌려보냈다.

습정공(習靜公)이 평사(評事)가 되어 서관(西關 평안도)으로 갈 때에 열(熱)이 심하여 가죽신을 벗어서 역졸(驛卒)에게 맡기고 짚신을 신고 달려가는데 역졸이 그 가죽신을 잃어버리고는 죽기를 청하고, 또,
“하도 급하여 사려고 했지만 사지 못했습니다.”
하자, 공이 웃으면서,
“잃어버린 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얻는 자가 있겠느냐.”
하고는, 끝내 그 죄를 묻지 않고 친한 사람에게서 빌려 신었다. 그 역졸은 죽을 때까지 습정공을 울면서 생각하고 칭도(稱道)하였다.


 

[주D-001]갑인년 …… 날 : 현종 15년(1674)에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재차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논의되자, 송시열(宋時烈)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이 체택됨으로써 송시열이 이로 인해 관작(官爵)이 추탈(追奪)되고, 이어 유배(流配)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2]공자(孔子)가 …… 뜻 : 연릉 계자(延陵季子)는 오(吳) 나라 현인(賢人) 계찰(季札)이 연릉에 봉(封)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계찰의 묘(墓)가 상주(常州) 강음현(江陰縣)에 있는데, 공자가 그의 묘비(墓碑)에 “아, 오 나라 연릉 계자의 묘로구나.[嗚呼 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제(題)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주D-003]이천(伊川)이 …… 여책(餘策) : 이천은 정이(程頤)의 호. 순부는 범조우(范祖禹)의 자. 법조우를 장사 지낼 때에 이천 선생(伊川先生)이 그 장례를 맡아 하였는데, 두어 길[數丈]쯤 땅을 깊이 파고 부장품(副葬品)을 일체 넣지 않은 채, 수일 후 하관(下棺)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인근(鄰近)의 부로(父老)들을 모조리 초치(招致)하여 주식(酒食)을 대접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무덤은 뒤에 발굴(發掘)되는 변(變)을 모두 당했으나, 범조우의 묘만은 그 변을 면하였다고 한다.
[주D-004]강빙각안(江冰閣岸)의 글 :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에 의하면, 강 얼음[江冰]을 언덕 위로 올려놓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