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청운군 심공 신도비명(靑雲君沈公神

청운군 심공 신도비명(靑雲君沈公神道碑銘) 병서

아베베1 2011. 8. 13. 22:10

계곡선생집 제14권
 비명(碑銘) 8수(首)
청운군 심공 신도비명(靑雲君沈公神道碑銘) 병서


청운공(靑雲公)이 죽자 장례를 치르고 나서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해 왔다. 그때 내가 예의상 사양하기는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응낙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에 걸려 하마터면 온전해지지 못할 뻔하다가 한참 뒤에야 다행히 조금 차도가 있게 되었는데, 그때는 벌써 공의 묘소에 풀이 두 번이나 묵고 난 뒤였다. 그 무렵 공의 두 계씨(季氏)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빗돌을 이미 삼가 갖추어 놓고 이제 글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굳이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아, 나는 공과 동년생(同年生)이다. 그런데 소싯적에는 겨우 한두 번 얼굴만 알고 지내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이르러 함께 일을 하며 주선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야 공의 재지(才智)와 기개(氣槩)가 그야말로 출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함께 본조(本朝)에서 일하는 동안 공의 심사(心事)를 충분히 살펴볼 기회를 가졌는데, 공이 꾸밈없는 충심으로 과감하게 발언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이 죽고 나서 평소의 행적을 자세히 듣게 됨에 미쳐서는 그 내행(內行)이 워낙 완벽해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대체로 나는 공에 대해서 사귀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모르던 사실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되었고 공이 죽고 나서야 공의 완전한 면모를 알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제 모두 끝났으니 내가 어떻게 차마 공의 묘비명을 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묘비명을 쓰지 않아 나에게 부탁해 온 공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을 또 어떻게 차마 할 수가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명세(命世)요, 자(字)는 덕용(德用)이다.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의 망족(望族)인데, 고려 말의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현달(顯達)하기 시작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諱) 온(溫)과 휘 회(澮) 두 분이 2세에 걸쳐 잇따라 영의정이 되고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또 3세를 지나 충혜공(忠惠公) 연원(連源)에 이르러서도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여기에서 휘 강(鋼)이 태어났는데 국구(國舅)로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고, 여기에서 휘 의겸(義謙)이 태어났는데 명종ㆍ선조 연간의 명신(名臣)으로 대사헌의 관직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휘 엄(㤿)이 태어났는데 관직을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마쳤으나 공의 훈귀(勳貴)로 인하여 영의정에 증직되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세부(世父 백부(伯父))인 군수 인겸(仁謙)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좌찬성으로 영의정을 증직받은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문의공(文懿公) 사맹(思孟)의 딸인데,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 20)에 공을 낳았다. 그런데 문의공으로 말하면 실로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조(仁祖)의 생모)를 탄생시킨 분이니, 공과 금상(今上)은 따라서 이종(姨從) 형제간이 되는 셈이다.
공은 어린아이 시절부터 출중하게 영걸스러웠다. 고(故) 황 문민공(黃文敏公 황신(黃愼))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문민공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자라나서는 큰 체격에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기개가 굳세고 의로운 행동을 좋아하여 옛날 협사(俠士)의 풍모가 있었다.
계축년에 집안이 참혹한 화를 당하자 이로부터 과거(科擧) 공부를 포기한 채 이리저리 떠돌며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 광해(光海)가 대비(大妃)를 유폐(幽廢)시킨 뒤 더욱 심하게 난정(亂政)을 행하자 금상(今上)께서 여러 원훈(元勳)들과 은밀히 대계(大計)를 정하였는데 이때 공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계해년 3월에 대의(大義)를 떨치고 일어날 때, 공이 그동안 모집해 두었던 병력을 비장(裨將)에게 맡겨 서쪽 교외에 집결토록 하는 한편, 공 자신은 대가(大駕)를 맞이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부지런히 주선하며 계책을 내어 보좌한 공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특히 더 많았다.
공조ㆍ형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복시 첨정이 되었으며, 책훈(策勳)되어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특별히 통정대부의 품계로 뛰어오르면서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라가는 동시에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하게 되었다.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인하여 상이 공산(公山)으로 행행(幸行)할 때 공이 운검(雲劍)의 직책을 수행하여 호종(扈從)하였다. 대가(大駕)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밤이 깊었을 무렵 상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는데, 조정 신하들이 미처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공이 동틀 때까지 옆에서 보살펴 모시며 지극한 정성으로 충성스럽게 애를 썼다. 적을 평정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다음 가의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공조 참판으로 호위장(扈衛將)을 겸하였다.
장차 세자빈(世子嬪)을 책봉하려 할 때 윤씨(尹氏)의 딸이 선발에 뽑혔는데, 그의 종형(從兄) 모(某)가 역모를 꾀하다 죽음을 당했으므로 그 아비도 마땅히 연좌법(連坐法)에 따라 해면(解免)되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에 공이 경연(經筵)에서 모실 적에 나아가 아뢰기를,
“세자의 배필은 훌륭한 가문에서 가려야 마땅하니, 악역(惡逆)을 범한 집안을 선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공의(公議)를 무시할 수 없어 마침내 가례(嘉禮)를 정지시키긴 하였으나, 공 역시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충주(忠州)로 귀양하게 되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대신과 대간(臺諫)이 쟁집(爭執)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는데, 이듬해에 가서는 결국 공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정묘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을 서용(敍用)하는 동시에 훈작(勳爵)과 봉호(封號)를 복구시켜 주도록 명하고 호위장(扈衛將)을 겸하게 하였다. 대가가 강도(江都)에서 돌아온 뒤 내섬시 제조를 겸하였다. 그리고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외방에 나가 몇 개월 지나는 사이에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는데 마침 병에 걸리는 바람에 면직되어 돌아왔다.
처음에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이 완성되었을 적에 장법(葬法)으로 보면 절지(絶地)에 해당된다고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가)가 많이 말하였고, 또 사관(祠官) 역시 말하기를 ‘장맛비가 올 때면 능 위의 벽돌을 이은 틈새에서 번번이 물이 솟구쳐 올라온다.’고 하였으므로 공이 이를 듣고는 늘 걱정해 왔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영릉(英陵 세종(世宗)의 능)의 고사(故事)대로 다시 길한 지역을 고르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을 조정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을 때에도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구릉(舊陵)을 파헤치고 보니 물이 전혀 나오지 않자, 논자들이 산릉(山陵)에 대해서 공이 함부로 의논을 꺼냈다고 맹렬하게 공격을 가해 왔는데, 상은 공에게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고는 끝까지 그들의 요구를 윤허하지 않았으며, 공이 소장을 올려 자신을 탄핵하였을 때에도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주었다.
공은 원주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해수병(咳嗽病)을 앓아 왔는데 그 뒤 3년이 경과하는 동안 병세가 계속 악화되었으나 정신만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가(朝家)의 잘못된 일을 들을 때마다 문득 하루 종일 분개하며 노여워하곤 하였는데, 언젠가 말하기를,
“내 병으로 말하면, 흉중(胸中)에 걸려 있는 근심 걱정은 하나도 없는데 오직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만은 나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어쩌면 이것이 또한 하나의 장애(障碍)로 작용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였다. 그러다가 임신년 4월 2일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마침내 후사(後事)를 여러 아우들에게 부탁하였는데, 집안 사람들이 둘러서서 눈물을 흘리자 공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인데 뭐가 슬퍼서 우는가.”
하였다. 죽었을 때의 공의 나이 고작 46세였다. 장차 염습(斂襲)을 하려고 하여 옷상자를 열어 보니 속옷 두 벌밖에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이 공동으로 수의(襚衣)를 마련해 주어서야 염습을 마칠 수 있었는데, 이를 본 자들이 그래서 더더욱 공의 청렴함과 검약 정신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부음(訃音)이 위에 전해지자 부의(賻儀)를 보내고 예법에 맞게 조제(弔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모월 모일에 유사(有司)가 장례 물품을 갖춘 가운데 원주 검단리(劍壇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정랑 유청(幼淸)의 딸로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그래서 공의 막내동생 희세(煕世)의 아들 격(格)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제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는다.
공은 성품이 소탈하고 진실한 위에 시원시원하고 솔직했으며 행동은 마냥 독실하기만 하였다. 중씨(仲氏)가 계축년의 옥사(獄事)에서 죽음을 당하고 백씨(伯氏) 역시 연좌되어 귀양을 가는 등 온 집안에 기막힌 불행이 잇따라 일어나자 공이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거두어 보살피는 한편, 집안의 일을 경영하는 데 있는 정성을 모두 기울였다.
선부인(先夫人)이 남중(南中 경기도 이남 지역)에서 별세하자 공이 예법을 벗어나 지나치게 슬퍼하며 몸을 상한 가운데 미음만 들면서 상(喪)을 마쳤다. 그리고 능창(綾昌 인조(仁祖)의 동생)이 감옥 안에서 죽었을 때에는 친척들이 모두 겁에 질린 나머지 감히 위문하지도 못하였는데, 공이 직접 나아가 시신(屍身)을 거두고 장례를 치러 주었으므로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이 그 의리에 감격하여 늘상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공은 또 재물을 가볍게 보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이를 자기 일처럼 급하게 여겨 화(禍)를 당하지 않도록 구해 주곤 하였는데, 정작 자신은 덕을 베풀었다고 여기지를 않았다.
나라가 중흥(中興)된 이후 왕실과 가까운 척족(戚族)의 신분으로 성스럽고 밝은 임금을 모시면서 더욱 발분하여 힘을 기울였고 일이 일어날 때마다 강직하게 발언하며 권귀(權貴)도 아랑곳 없이 비난을 가하곤 하였다.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도 공이 번번이 할 말을 다하면서 화복(禍福)이나 훼예(毁譽) 따위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공을 더더욱 물어뜯으려고 하였으나, 공을 아는 이들은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더욱 추모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아, 이 정도면 나의 명(銘)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씨는 청성백(淸城伯) 이후부터 / 沈自靑城
대대로 고관 대작 배출되었고 / 世載高勳
외가의 집안 역시 / 任姒之門
명신의 가문으로 이름 높았네 / 亦有名臣
대사헌 지낸 당당한 조부 / 堂堂都憲
명성에 걸맞는 복록 누리지 못했는데 / 祿不配名
그 뒤를 이은 훌륭한 손자 / 良孫繼之
뛰어난 식견에 기량 역시 대단했네 / 識通器閎
계해년 대사 일으켜 / 癸亥之事
인륜을 바로잡을 때에 / 人紀再正
공이 금상(今上) 도와 / 公扶日轂
온 누리 정화시켰지요 / 八區鏡淨
공신에 책훈되고 큼직한 봉호 받아 / 策勳疏封
선조들 더더욱 빛나게 하였는데 / 有光先烈
원훈(元勳)이 될 공적 어찌 없었으랴만 / 豈無元功
인척(姻戚)이요 근밀(近密)해서 그렇게 되었다오 / 公戚且密
말하기 어려운 일 / 事有難言
사람들 머뭇거릴 때에 / 萬口囁嚅
공이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 公奮直詞
나라 위한 마음으로 내 몸 돌보지 않았지요 / 殉國忘軀
말은 채용이 되었어도 / 言則用矣
탈 잡혀 낭패당했는데 / 身覆罹愆
병될 게 또한 뭐 있으랴 / 亦奚病焉
하늘이 알고 계시는 걸 / 知我者天
약삭빠른 인간들 피해 가는 길 / 巧夫所避
군자는 떳떳이 걸어가나니 / 君子是循
이는 오직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것 / 唯其自信
처음엔 굽혀져도 결국 펴지게 마련이지 / 始屈終伸
어찌하여 오래 살아 / 胡不壽考
우리나라 잘되게 돕지 않았는고 / 輔我王國
슬픈 마음 시로 지어 / 作詩孔哀
빗돌에 새기노라 / 爰刻山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