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찬성 이공 행장(贊成李公行狀)

찬성 이공 행장(贊成李公行狀) 공의 휘(諱)는 직언(直彦)이요,

아베베1 2011. 8. 13. 22:17

계곡선생집 제15권
 행장(行狀) 5수(首)
찬성 이공 행장(贊成李公行狀)


공의 휘(諱)는 직언(直彦)이요, 자(字)는 군미(君美)이다. 공의 가계(家系)는 국성(國姓)에서 유래하는바, 공은 효령대군 보(孝寧大君輔)의 5세손이다. 고조 휘 채()는 가덕대부(嘉德大夫 종친에게 주어지는 종1품의 위호(位號)) 서원군(瑞原君)으로 이안공(夷安公)의 시호를 받았고, 증조 휘 훈(薰)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종친의 정3품 당상관 품계) 행 고림정(行高林正)으로 정의대부(正義大夫 종친의 종2품 품계) 고림군(高林君)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선손(璿孫)은 창선대부(彰善大夫 종친의 정3품 당하관 품계) 칠산정(漆山正)으로 승헌대부(承憲大夫 종친의 정2품계) 칠산군(漆山君)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형(泂)은 어모장군(禦侮將軍) 부호군(副護軍)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貞敬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비범하여 보는 이들마다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감지하였다. 조금 자라나면서 학문에 힘을 기울여 경사(經史)에 통하고 사부(詞賦)에 능했으므로 동배들로부터 일컬음을 받았다. 부친상을 당하자 묘소 아래에서 초막 생활을 하며 밥은 입에도 대지 않고 죽만 들면서 하루에 3차례씩 묘소를 참배하곤 하였는데 혹한기나 혹서기에도 이 일을 거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병자년 문과(文科)에 제2명(第二名)으로 급제하였다. 규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에 오른 다음 공조와 호조의 좌랑 및 사헌부 감찰을 거치고 나서 외방으로 나가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 영변부 판관(寧邊府判官), 삼화 현령(三和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고을을 다스릴 적에 엄격하고 분명하게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청렴결백한 자세로 자신을 단속하면서 월름(月廩)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직 대부인(大夫人)의 봉양만을 염두에 두면서 어떻게 해서든 기쁘게 해 드리려고 모든 힘을 기울였다.
계미년에 모친상을 당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부친상 때처럼 한결같이 예법에 따라 거행하였는데 너무도 슬퍼하여 건강을 상한 나머지 하마터면 몸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 다시 호조에 들어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가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는데 흔들림없이 곧게 행동하다가 체직되어 성균관 직강이 되었고, 다시 예조의 좌랑ㆍ정랑 및 성균관의 사예ㆍ사성으로 옮겨졌다.
병술년에 또 외방으로 나가 평산 부사(平山府使)가 되었다가 기축년에 해면(解免)되어 돌아왔다. 이후 교서관 교리 및 상의원과 사복시의 정(正)을 역임하였으며, 다시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맡았으며, 신묘년에는 평안도 재상경차관(平安道災傷敬差官)으로 나갔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사소한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임진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군기시 첨정이 되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신할 때 공은 통어사(統禦使)의 막좌(幕佐)로 있었기 때문에 수행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도보(徒步)로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행재(行在)에 입조(入朝)하였는데, 선묘가 공의 도착 소식을 듣고 하교하기를,
“그대가 어디 있다가 왔는가. 그지없이 기쁘면서도 한편 슬픈 생각이 든다.”
하고, 인하여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조목별로 작성해 올리게 하였다. 공의 답변서가 들어가자 상이 인견(引見)하였는데, 공이 연로(沿路)의 사정을 빠짐없이 진달하면서 나라를 회복할 계책을 아울러 진헌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술을 하사하였다.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이때 호남(湖南)의 수재(守宰) 한 사람이 공에게 부채 하나를 선물로 준 일이 있었는데, 공이 이 사실을 갖추어 진달하며 자신을 탄핵하였다. 동료들이 혹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냐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지금이 어떤 때인데 안부를 물으며 선물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아예 근원을 막아 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구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온 조정이 웅숭그리면서 경탄(敬憚)하였다.
장령에 임명된 뒤 요동(遼東) 군문(軍門)에 가서 군량을 요청하게 되었다. 당시 엄동설한에 노숙(露宿)을 하였는데, 역자(譯者)가 양털옷을 바치자 공이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초망(草莽)에 계시는 판에 신자(臣子)가 어떻게 따뜻한 옷을 입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사년 봄에 황해도 조도어사(黃海道調道御史)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차례로 관직을 역임한 뒤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대가를 따라 우회하여 영유(永柔)에 도착한 뒤 다시 어사(御史)가 되어 영남 지방을 선유(宣諭)하고 돌아와 또 사간이 되었다.
갑오년에 흉년이 크게 들자 또 구황어사(救荒御史)로 충청도와 경상도에 가서 온 힘을 기울여 진휼(賑恤)한 결과 많은 목숨이 구제를 받았다. 돌아와서 다시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차자(箚子)를 올려 8개 조목으로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척화론(斥和論)과 복수(復讐)해야 하는 의리를 진달드리자,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당시 재상이 고상(故相) 정철(鄭澈)에게 감정을 품고 추가로 죄를 더 주려고 하자 양사(兩司)에서 그의 뜻에 따라 그지없이 맹렬하게 논핵(論劾)을 가하였다. 이에 공이 정언 박동선(朴東善), 이시발(李時發) 및 집의 신흠(申欽)과 함께 정철의 원통한 정상을 극언(極言)하였는데, 이로 인해 시의(時議)의 미움을 크게 받아 오래도록 산질(散秩)에 몸담게 되었다. 그 뒤 외방으로 나가 양남 조도어사(兩南調度御史)가 되었으며 순안(巡按), 암행(暗行), 재상(災傷) 등의 일도 아울러 관장하였다.
병신년에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제수받았으나 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체직되었고, 곧이어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수원(水原)으로 옮겨져 제수되었는데, 인천 백성들이 공의 유임을 청하자 마침내 그대로 머물도록 명하였다.
무술년에 체직되어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가 되었다. 때마침 중국 군대가 대거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 군량이 계속 조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공을 영남 조도사(嶺南調度使)로 임명하였다. 공이 명을 받자마자 질풍처럼 달려가 밤낮으로 애쓰며 마련한 결과 군량이 부족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중국 장수들이 수고했다고 극구 칭찬했는데, 군대가 해산될 즈음에 미쳐서도 각 고을에는 곡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상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통정대부로 품계를 올려 주고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경자년에 진주사(陳奏使)로 경사(京師)에 가서 식량을 청하였는데 정성을 다 바쳐 부연해 아뢴 결과 요구 사항이 모두 관철되었다. 그리고 돌아올 무렵에 전대에 남은 돈을 모두 털어 궁각(弓角) 수백 대(對)를 사 가지고 와서 위에 바쳤다. 이에 상이 구마(廐馬) 1필을 하사하고, 호조 참의에 임명하였다.
신축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옮겨졌다가 좌부승지로 전임된 뒤 국옥(鞫獄)에 참여하였다. 옥사(獄事)의 처리가 일단락되고 나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부호군(副護軍)으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상이 염근(廉謹)한 관원을 선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조정을 통틀어 겨우 4명이 뽑힌 가운데 공이 참여되었다. 이에 마침내 가의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하게 되었다.
임인년에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겨졌는데, 온 도내에서 으뜸가는 정사를 행하고 있다고 어사(御史)가 표창 상신을 하자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고, 또 관찰사의 표창 상신이 올라오자 구마(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뒤에 어사가 또 표창 상신을 올리자 상이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려 줄 것을 명하고, 곧이어 본도(本道)의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승진 발령하였다.
을사년에 체직되어 돌아온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 관직)가 되었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정2품 관직)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한성부 판윤으로 옮겨졌는데, 항상 동지춘추관사, 동지의금부사 및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광해(光海) 초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때마침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그 일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경술년에 사은사(謝恩使)로 경사(京師)에 갔다. 마침 상원(上元 정월 대보름)을 맞아 등석(燈夕 제등의식(提燈儀式))을 행하느라 사녀(士女)들이 길을 가득 메웠는데, 부사(副使) 이하 모두가 문밖에 나와 마음껏 구경하는데도 공만은 홀로 관소(館所)에 머무르며 조용히 좌정하고 있었으므로, 중국 조정의 인사들이 공의 단정한 행동거지에 탄복하였다.
임자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면직되어 돌아왔다.
무신년 이래로 공이 역임한 관직을 살펴보면, 도헌(都憲)과 지추(知樞)가 된 것이 4차례, 판윤과 지돈녕이 된 것이 2차례, 공조ㆍ형조의 판서 및 정부의 참찬이 된 것이 각각 1차례씩이었으며, 춘추(春秋), 의금(義禁), 총관(摠管)을 이따금씩 겸대(兼帶)하곤 하였다.
계축년 변고가 일어날 때 권신(權臣)이 위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출 목적으로 대옥(大獄)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의 집안이 온통 참혹한 화를 당하는가 하면 자전(慈殿)에게까지 화가 미치려 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명경(名卿)과 선류(善流)들이 거의 대부분 구속되고 유배를 당하였으므로, 공이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근심하고 애상(哀傷)에 젖은 가운데 강개(慷慨)한 나날을 보내었다. 이로부터 장기간 공은 산반(散班)에 몸담게 되었다.
무오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 그러자 광해가 비로소 정신(廷臣)에게 각각 가부(可否)를 헌의(獻議)하도록 하였는데, 한마디라도 뜻을 거스를 경우에는 기막힌 화를 당장 받게 되는 상황 속에서 공은 끝까지 정대한 의논을 견지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날마다 대궐 앞에 엎드려 대비(大妃)를 폐(廢)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은 물론이요 아래로 민간의 하천배에 이르기까지 모두 협박하고 윽박질러 진청(陳請)하게 하였으므로 감히 이를 어기는 자가 없었고, 병 때문에 집에 거처하고 있던 사부(士夫)들도 기막힌 화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병을 무릅쓰고 나와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반열에 참여하곤 하였다. 그러나 공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끝내 한번도 참여하지 않은 채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처지에서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待罪)하였는데 그 기간이 무려 5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교외에 나가 거처하게 되었는데, 그 집에 졸암(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선유(先儒)의 잠(箴), 명(銘) 등 격언(格言)들을 집안 벽에 걸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읊어 보는가 하면, 또 직접 속심잠(續心箴), 인설(人說), 성신잠(省身箴) 등을 지어 반성의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또 사람들이 혹 공의 가난한 생활을 안타깝게 여겨 물품을 보내 주기라도 하면 번번이 물리치곤 하였다.
계해년 3월에 금상(今上)이 대비(大妃)를 받들어 모셔 복위(復位)케 한 뒤 흉도(凶徒)를 모두 복주(伏誅)시키는 한편 정도(正道)를 고수한 구신(舊臣)들을 거두어 불러들였다. 이에 공 역시 집에 있다가 나와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이 되었으며, 조금 뒤에 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좌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자년 봄에 연신(筵臣)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이모(李某)의 나이가 올해 80세인데 청렴결백한 그 절조(節操)로 말하면 세상에서 그 짝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선조(先朝) 때 뽑힌 염리(廉吏) 4인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사람으로는 단지 이모와 이원익(李元翼)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공의 자제들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또 승지 이정혐(李廷馦)이 아뢰기를,
“광해(光海)가 궁궐 공사를 일으키자 사대부들이 대부분 가동(家僮)으로 하여금 그 공사를 돕게 하면서 품삯을 받도록 하였는데, 유독 이모(李某)만은 그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궁궐 공사를 일으킨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내가 비록 직간(直諫)을 하여 그 일을 만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그 공사를 다시 도와 이루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가동에게 공사에 나가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을 보면 젊었을 적엔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다가도 늙어지면 혹 쇠해지곤 하는데 이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았던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이모의 나이가 높은 것 또한 숭상할 만한 일이다.”
하고 공의 품계를 숭정대부로 껑충 뛰어오르게 하는 동시에 의정부 우찬성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공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술을 하사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석 달이 지난 뒤에 병으로 판중추부사에서 해면되면서 판돈녕부사로 옮겨졌다. 이듬해 설날 아침에 상이 공에게 포목, 비단과 쌀, 고기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사양하니, 상이 분부하기를,
“경이 이제 팔순의 나이에 접어들었는데, 그 맑은 절조가 갈수록 견고해지기만 하니, 내가 마치 고인(古人)을 대하는 것처럼 경탄하는 마음이 들 뿐이다. 사소한 물품을 사양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계운궁(啓運宮 인조(仁祖)의 생모)의 상(喪)을 당하여 상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에 걸릴 위기에 처하자, 공이 상소하여 성궁(聖躬)을 조섭할 것을 청하였다.
가을에 소장을 올려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겨울에 이르러 상이 하교하기를,
“노인을 우대하고 현인을 존경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에서 행해야 할 첫째 가는 일이다. 나이 팔십이 넘고 1품의 지위에 오를 자로서 맑은 절조를 아울러 겸한 이에게는 유사로 하여금 새해에 옷감과 음식물을 하사하게 함으로써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공이 이상 원익(李相元翼)과 함께 지난해처럼 하사를 받았는데 물품이 더 늘어났다.
이듬해에 노적(奴賊 청(淸) 나라 누르하치의 군대)이 쳐들어오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였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자 조정이 우선 허락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극언(極言)하는 동시에 군대를 진격시켜 협격(夾擊)하자고 청하였는데, 그 어조가 매우 격렬하였다. 여름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무진년 4월에 병에 걸려 집에서 죽었다. 향년 84세였다.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도 정신과 생각이 혼란되지 않았으며 한마디도 집에 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이틀 동안 철조(輟朝)를 하고, 관원을 보내 예법대로 조제(吊祭)를 행하게 하였다. 관에서 장례일을 보살펴 주는 가운데 이해 모월 모일에 금천현(衿川縣) 선영의 묘역에다 안장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단정하였으며 거기에 공근(恭謹)한 미덕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공의 효성과 우애심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생전의 봉양과 상제(喪祭)를 모두 정례(情禮)에 맞게 극진히 행했으며,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마치 초상을 당한 것처럼 처하면서 몸을 마치도록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형제들에게도 격의 없이 우애심을 발휘하여 한 가지라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꼭 함께 나누어 먹곤 하였다. 그리고 과부가 된 형수를 매우 근실하게 보살피면서 조카들을 자기 아들처럼 어루만져 주었고, 내외의 친척들을 접대함에 있어서도 각각의 경우에 맞게 성의를 극진하게 표시하였다.
강직하게 할 말을 과감하게 하면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충군우국(忠君憂國)의 마음은 백발이 되도록 변하지 않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지팡이를 짚고 조정에 나가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번번이 모두 말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관절(關節 뇌물로 청탁하는 것)을 가장 미워하였으므로 감히 공에게 사적으로 청탁해 오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천성적으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서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늙도록 그 심오한 뜻을 찾아 음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법도에 맞게 행하였는데, 앉을 때에도 항상 북쪽을 등지지 않고서 말하기를,
“인신(人臣)의 도리상 비록 한가하게 있을 때라 하더라도 대궐을 등지고 앉을 수는 없다.”
하였다. 옷을 입는 것도 마치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사는 집 역시 비바람을 간신히 가릴 정도에 불과했는데, 공은 이곳에서 담박하게 거처하였다. 공이 타고 다니던 말이 병들어 죽었으므로 외출할 때면 문득 이웃에서 빌려 오곤 하였는데, 이에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선물하였으나 그 즉시로 돌려주고 말았다. 또 족인(族人)이 금관자(金貫子)를 선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받지를 않았다. 공이 사양하고 받는 데 있어 취한 엄격한 태도가 이와 같았다.
공의 처음 이름은 시언(時彦)이었으나 뒤에 피해야 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공의 자호(自號)는 추천거사(秋泉居士)이다. 공은 진사 우사겸(禹思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측실 소생의 아들로 재(在)가 있다.
공은 조정에 몸담은 53년 동안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하면서 국법을 받들어 직책을 수행하였고 염직(廉直)한 풍도를 세우려 노력하였다. 공의 행동은 돈독하면서 순의(醇懿)하였고 공의 절조는 정개(貞介)하여 습속을 멀리 벗어났는데, 위급한 상황에 처해서도 항상 정도를 고수하며 요지부동의 자세를 견지하는 등 옛날 직신(直臣)의 기풍을 연상케 하였다. 그런 가운데 크나큰 복을 향유하여 한세상의 대로(大老)로 존경받으면서 그 청아(淸雅)한 명망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었으니, 공과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한 시대의 완전한 인물에 해당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삼가 관직의 이력과 행실을 이상과 같이 추려 역명(易名)의 의전(儀典)에 자료로 참고해 주기를 청하는 바이다. 이상으로 삼가 행장의 기록을 마친다.
상촌선생집 제11권
 시(詩)○오언율시(五言律詩) 103수
이 찬성 직언 에 대한 만사[挽李贊成 直彦]

어지러운 물결 속 스스로 초탈 / 自拔頹波裏
많은 사람 취한 중 홀로 깨었네 / 孤醒衆醉中
험하든 평탄하든 절개 지키고 / 險夷持素節
임금께 건의할 땐 정성 다했네 / 獻納丹罄衷
이름은 삼달존에 부합되었고 / 名協三尊達
살림은 사방 벽이 텅 비었다네 / 家徒四壁空
여생에 봉황 떠나 흐느껴 우니 / 餘生泣鳳髓
어디서 맑은 바람 만나볼 건고 / 何處挹淸風

[주D-001]삼달존 :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존경하는 세 가지의 조건으로 높은 벼슬, 많은 나이, 훌륭한 덕행을 말함. 《孟子 公孫丑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