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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열왕후 장릉 지문[仁烈王后長陵誌]

아베베1 2011. 8. 13. 22:24

계곡선생집 제11권
 묘지(墓誌) 6수(首)
인열왕후 장릉 지문[仁烈王后長陵誌]


한씨(韓氏)의 기원은 서원(西原 청주(淸州)의 옛 이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계속 덕을 쌓아 온 신령스러움이 발하여 누차 사록(沙麓)의 상서로움을 드러냈으므로 대개 우리 동방의 지신(摯莘)이라고 일컬어져 온다.
그 선조 가운데 휘(諱)가 난(蘭)이라는 분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관직이 태위 삼중대광(大尉三重大匡)에 이르렀는데, 이로부터 고관이 계속 배출되어 5세에 이르도록 서로 잇따라 재상으로 국권(國權)을 잡았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 상경(尙敬)이 개국공신에 책훈(策勳)되면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그 손자인 문정공(文靖公) 계희(繼禧)는 의정부 좌찬성으로 서평균(西平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왕후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인 휘 승원(承元)은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좌찬성을 증직받았고, 증조 휘 여필(汝弼)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으로 영의정을 증직받았으며, 조 휘 효윤(孝胤)은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으로 영의정을 증직받았다.
고(考) 휘 준겸(浚謙)은 실로 장상(將相)의 덕업(德業)을 소유한 분으로서 팔좌(八座 판서)와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를 역임한 뒤 국구(國舅)에 대한 은례(恩例)에 따라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으로 관작이 올라가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부인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황씨(黃氏)는 창원(昌原)의 대족(大族) 출신으로 예조 좌랑을 지내고 참판을 증직받은 휘 성(珹)의 딸인데, 만력(萬曆) 갑오년 7월 정축에 왕후를 낳았다.
왕후는 태어나면서부터 바탕이 남달라 함부로 장난을 치지도 않았으며 말하는 모습이나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태어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황 부인이 별세하였다. 조금 자라나 서평공(西平公)을 모시면서 아침저녁으로 문후를 드릴 때면 언제나 여러 오빠와 언니들보다 먼저 하곤 하였다.
병오년, 왕후의 나이 13세 되던 해에 마침 처자를 간선(簡選)하는 일이 있었는데, 선묘(宣廟)가 그 훌륭함을 알고서 우리 전하에게 장가들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일단 납폐(納幣)하고서 선묘가 승하하였으므로 3년이 지난 경술년 9월에 가서야 비로소 친영(親迎)하는 의식을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의 봉호를 받았다.
전에 왕후가 처녀 시절에 언젠가 밤에 꿈을 꾸다가 갑자기 가위에 눌린 듯 깜짝 놀라 깬 일이 있었다. 이에 서평공이 왕후에게 가서 물어보니, 왕후가 말하기를 ‘꿈에 집의 지붕이 활짝 열리면서 해와 달이 하늘에서 떨어져 가슴속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혼례를 치르려 할 즈음에 홍역을 앓아 거의 위험한 상태에 도달했는데, 서평공의 꿈에 선묘가 나타나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병은 자연히 낫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얼마 있다가 그 말대로 되었으므로 서평공이 더욱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당시에 원종 대왕(元宗大王 인조(仁祖)의 아버지로 선조(宣祖)의 5남)이 정원(定遠)의 저택에 거하고 있었는데, 왕후가 일단 그 집에 들어간 뒤로는 시부모를 모심에 성효(誠孝)를 극진히 하였고 여러 시동생들을 사친(私親)보다도 더 각별하게 대우하였다. 능창(綾昌 인조의 동생.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를 받고 광해군에게 사형당했음)의 화(禍)가 일어났을 때 내외의 권행(權倖)들이 이때를 놓칠세라 뇌물을 요구해 왔는데 그들의 욕심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이에 왕후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화(財貨)를 다 털어 내놓으면서 진귀한 보배들도 전혀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원종(元宗)이 가상하게 여겼다.
계해년에 정사(靖社)의 의거를 일으킬 때 왕후가 실제로 비밀 모의에 참여하면서 남몰래 도와준 공이 참으로 많았다. 이윽고 상이 대위(大位)에 오르자 왕후도 곧이어 책례(冊禮)를 받게 되었다. 천계(天啓) 을축년(1625, 인조 3)에 명 나라에서 귀인(貴人 총애받는 내관(內官)의 뜻으로 환관을 말함) 왕민정(王敏政)ㆍ호양보(胡良輔)를 보내 우리 전하를 책봉(冊封)해 주면서 왕후에게도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함께 내렸다.
왕후가 장추(長秋 황후가 거하는 궁전을 말함)에 자리를 바로하고 국모의 위의(威儀)를 갖추고서 전하를 도와 음덕(陰德)으로 교화를 펼쳐온 지 13년째 되던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 13) 겨울, 아들을 잉태하여 낳아 놓고도 곧바로 기르지 못하게 되자 왕후가 애끓는 슬픔 속에 열병이 발작하더니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마침내 12월 9일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훙(薨)하였다. 춘추 42세였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을 의논한 결과 ‘인의를 몸소 실천한 것을 인(仁)이라 하고 백성을 안정시킨 공로가 있으니 열(烈)이라 한다.’ 하여 마침내 인열(仁烈)이라는 존귀한 시호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을유에 장릉(長陵)에다 장례를 지내었는데, 이곳은 파주(坡州)의 읍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으로서 묘역은 갑방(甲方)으로 머리를 두르고 경향(庚向)을 향하고 있다.
왕후는 품성이 유순하고 정숙하였으며 인효(仁孝)한 덕성은 천성적인 것이었다. 성품이 엄하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모시면서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심지어는 방측(旁側 근시(近侍))과 장어(長御 태후를 모시는 관직 이름)에게도 모두 곡진하게 예의(禮意)를 행하였으므로 양궁(兩宮) 사이의 자효(慈孝)가 시종 일관 간격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비가 세상을 떠나심에 미쳐서는 또 슬퍼하고 사모하면서 예를 극진히 하였다.
상을 섬김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공경과 순종을 위주로 하였다. 상이 혹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앉아서 새벽을 기다렸고, 일에 따라 적절히 잠규(箴規)를 하여 보탬을 준 경우도 많았다. 상이 언젠가 복주도(覆舟圖)를 관람하고 있을 때 왕후가 나아가 말하기를,
“원컨대 상께서는 이 그림을 보고서 위태로움을 생각하며 두렵게 여기시고 한갓 눈요기로만 치부하지 마소서.”
하였으며, 상이 혹 원유(苑囿)를 수치(修治)하려고 할 때면 왕후가 번번이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상이 이 때문에 공사를 중지시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또 상이 언젠가 언관(言官)을 특별히 체직시켰을 때에는 왕후가 간하기를,
“말이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간의 이름을 지닌 관직인 이상 처치할 때 공의(公議)를 따르지 않는다면 군덕(君德)에 누(累)를 끼치고 언로(言路)를 막게 될 듯싶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내외를 구분하는 왕후의 자세는 더욱 엄격한 것이었다. 조정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아예 참여하려 하지 않았고, 외가(外家)를 위해서 은택을 바라며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친속(親屬)이 혹 누차 의망(擬望)되었다가 낙점(落點)을 받지 못해도 이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 없었으며, 가령 관직을 얻게 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왕후가 혹 모르기도 하였고 상 역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지를 않았다.
궁위(宮闈)의 안은 질서가 정연한 가운데 엄숙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자연스럽게 의칙(儀則)에 합치되었다. 평소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에 뜻을 두어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비축하고 저장하는 일은 아예 하지 않았다. 여러 자제들을 그지없이 자애롭게 대하면서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의리에 입각하여 하였다. 그리고 친척들을 두루 보살피면서도 항상 내친(內親)을 우선하고 외친(外親)은 뒤로 돌렸으며, 아랫사람들을 부림에 있어서도 관후하고 공평하게 하면서 위엄과 은혜가 조화되게 하였다.
숙의(淑儀) 장씨(張氏)가 들어왔을 때에도 은혜롭게 대하며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므로 아랫사람을 보살펴 주는 그 인자함에 사람들 모두가 열복(悅服)하였다. 또 엄동설한이나 무더운 여름철에는 위사(衛士)들이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때때로 음식을 내려 주곤 하였다. 그래서 왕후가 승하하던 날에는 궁박한 시골의 아녀자들까지도 모두 달려 나와 호곡(號哭)하며 사모하였던 것이다.
왕후는 아들 삼형제를 키웠다. 왕세자는 세적(世適 뒤를 이을 적사(嫡嗣))으로 저이(儲貳)에 거하고 있고, 다음은 봉림대군 호(鳳林大君淏)이며, 다음은 인평대군 요(麟坪大君㴭)이다. 왕세자는 대사헌 강석기(姜碩期)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봉림은 신풍군(新豐君) 장유(張維)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인평은 교리 오단(吳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내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흥기(興起)할 때에는 반드시 현철(賢哲)한 후비(后妃)가 도우면서 안을 다스렸다. 그래서 10난(亂)의 반열에도 부인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천명(天命)의 청화(淸和)한 기운을 받으시고 종사(宗社)를 안정시킬 적에 왕후가 하늘이 맺어준 배필로서 은밀히 대업(大業)을 찬조하며 그윽한 미덕을 발휘하여 건극(乾極)의 뜻을 순종해 받들었다. 그리하여 장차 효경(孝敬)의 가르침과 자인(慈仁)의 교화를 내보여 온 누리에 가득 펼쳐지게 함으로써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노래에 걸맞게끔 우리 동방에 무궁한 태평성대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오래도록 누려야 할 수명을 하늘이 그만 빼앗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하겠다. 이에 내가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왕후의 덕행을 정리해 기록하고 현궁(玄宮)의 돌에 새겨 넣음으로써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는 바이다.


 

[주D-001]사록(沙麓)의 상서로움 : 왕비가 배출된 것을 뜻한다. 사록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땅 이름인데, 사록이 무너진 일이 있었을 때 진사(晉史)가 점을 치기를 “성녀(聖女)가 출현할 조짐이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2]지신(摯莘) : 지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의 출신지이고, 신은 문왕의 부인이자 무왕(武王)의 어머니인 태사(太姒)의 출신지로, 왕비(王妃)의 출신 지역을 가리킨다. 《詩經 大雅 大明》
[주D-003]복주도(覆舟圖) : 배를 5번씩 뒤집어 이상 유무를 철저히 살핀 다음 배를 타고 나가 다랑어를 직접 잡아서 종묘에 올리고 보리가 익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禮記 月令 季春之月條》
[주D-004]10난(亂)의 …… 것이다 :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신하 10인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난(亂)은 치(治)의 뜻이다. 《서경(書經)》 태서 중(泰誓中)에 “나에게 난신(亂臣) 10인이 있어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같이하였다.” 하였는데, 그 석문(釋文)에 10인의 이름을 열거한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문모(文母)가 들어 있다. 그런데 《논어(論語)》 태백(泰伯)의 난신 10인에 대한 집주(集注)를 보면 “아들이 어미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는 만큼 대개 읍강(邑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한 유시독(劉侍讀)의 주장이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