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上黨府院君 한공(韓公) 한명회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한명회 청주인)

아베베1 2011. 8. 17. 15:00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의 雲霧) 의 모습

 

사가문집보유 제1권

 비지류(碑誌類)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예로부터 성군(聖君)이나 명주(明主)가 천운(天運)을 만나 나라를 창업할 적에는 반드시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같이하는 영웅호걸의 선비가 있어서 백성을 도와 스스로 살게 하고 사방에 힘을 펼칠 때에 조언하고 도와서 세상에 드문 공적을 이룬다. 이 때문에 주 선왕(周宣王)이 나라를 중흥할 때에 방숙(方淑)과 소호(召虎)가 보좌하였고, 한 광무(漢光武)가 나라를 광복(光復)할 때에 가복(賈復)과 등우(鄧禹)가 도왔던 것이다. 우리 세조께서 크게 일어나 보위에 오르실 적에 인재를 불러 모아 수용함에 따라 호걸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으나 훌륭한 계책을 올려서 대업을 도와 이루게 한 공으로는 곧 상당(上黨) 한 충성공(韓忠成公)이 제일이었다.

 

공의 휘(諱)는 명회(明澮)이고, 자는 자준(子濬)이다. 한씨는 본래 청주의 대성(大姓)으로, 원조(遠祖) 휘 란(蘭)이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으며,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 나갔다. 휘 강(康)은 고종조(高宗祖)에 벼슬하여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事)가 되었다. 휘 사기(謝奇)는 첨의 우간의대부(僉議右諫議大夫)이고, 휘 악(渥)은
삼한삼중(三韓三重)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이며, 휘 공의(公義)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다. 휘 수(脩)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로 좌의정에 증직되었는데, 공에게 증조가 된다. 휘 상질(尙質)을 낳으니,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로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감찰 휘 기(起)를 낳으니, 바로 공의 황고(皇考)이다. 공의 공훈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에 증직되었다. 황비(皇妣)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여흥(驪興)의 명망 있는 집안인 예문관 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영락(永樂) 을미년(1415, 태종15) 10월 기축일(25일)에 공을 낳았다. 대부인이 공을 회임하고 겨우 7개월 만에 낳아 사지가 처음에 온전하지 못하자 온 집안이 거두려 하지 않았다. 늙은 여종이 해지고 오래된 목화솜 속에 두고 매우 정성스럽게 돌보니, 몇 개월이 지나 점차 총명해졌다. 배와 등에 검은 사마귀가 있어 별무늬를 닮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영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중에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韓尙德)에게 가서 의지하니, 참판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그릇이 범상하지 않으니, 끝내는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킬 자이다.”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과거를 위한 공부를 배웠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태연자약하여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 간혹 묻는 자가 있으면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의 궁달(窮達)은 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꼭 썩어 빠진 유자(儒者)나 속된 선비들이 실의에 빠져 슬퍼하고 속상해하는 짓을 본받겠는가.”
하였다.

 

길창(吉昌) 권공 람(權公擥)과 사우(死友)를 맺으니, 서로 뜻이 맞는 즐거움은 비록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권공과 의기투합하여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며 혹 유유자적할 곳이 있으면 한 해가 다가도록 돌아올 것을 잊곤 하였으며, 명리(名利)에는 담담하였다. 공이 일찍이 길창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

“문장과 도덕은 내가 참으로 그대만 못하나 사업을 경륜함에 이르러는 내가 어찌 크게 뒤지겠는가.”
하더니, 논의에 발현된 것이 모두 탁월하고 훌륭하자 사람들이 다 큰 그릇으로 지목하였다.
임신년(1452, 문종2) 공의 나이 38세에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보임되었다. 이때에 현릉(顯陵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왕이 보위에 있으니, 권신과 간신이 권력을 쥐고 흔들어 나라 형세가 위태로웠다. 공이 항상 세상을 분히 여기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하루는 길창에게 말하기를,
“세상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안평(安平)이 신기(神器)를 넘보아 몰래 대신과 결속하여 자기 성원(聲援)을 만들고, 여러 불량한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결탁하니, 화란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오. 그대는 유독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않는단 말이오?”
하니, 길창이 말하기를,
“그대의 계책이 옳지만 그 계책을 장차 어디로 낸단 말이오?”
하자, 공이 말하기를,
“화란을 평정하는 것은 세상을 구제하고 난리를 다스릴 군주가 아니면 안 될 것이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활달하기가 한 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英武)한 성품은 당 태종(唐太宗)과 같으니,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환히 알 수 있소. 지금 그대가 필연(筆硯)으로 모시고 있으니, 어찌 조용히 건의하여 일찍 결단하지 않는단 말이오.”
하였다. 길창이 공의 계획을 세조에게 고하고 다시 말하기를,
“한생(韓生)은 일을 처리하는 재간과 능력이 있으니, 비할 데 없는 국사(國士)로 오늘날의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입니다. 공께서 연릉(延陵)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신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이 세상을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한생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급히 공을 불러들이자 공이 복건을 쓰고 들어가 알현하였다. 세조가 한 번 보고는 옛 친구같이 여겨 대번에 앞으로 나가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어찌 이제야 만났단 말인가. 지금 주상이 비록 어리시나 잘 보좌하면 수성(守成)할 수 있는데, 간사한 대신들이 용(瑢 안평대군)에게 다른 마음을 품어 선왕께서 어린 손자를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고 있으니, 조종(祖宗)의 선령(先靈)께서 장차 어떤 상황에 놓이시겠는가.”
하더니,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렸다. 공도 또한 강개하여 반정(反正)에 대한 계책을 극력 진술하였는데, 세조가 말하기를,
“형세가 외롭고 약하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명공(明公)께서 종실의 후손으로서 사직을 위하여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것인 만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니 절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옛말에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앙화를 받는다.’ 하였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경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내가 마음을 정하였다.”
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은밀한 계책과 꾀를 모두 공에게 맡겨 계획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하고, 드디어 용맹과 지략이 있는 무신(武臣) 수십 명을 천거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1) 10월에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하는데, 한두 명이 의구심을 품고 군중을 저지하는 자가 있자 공이 칼을 뽑아 들고 크게 외치기를,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은 사람이라면 면하기 어려운데,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그래도 헛되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감히 다른 마음을 갖는 자는 벨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드디어 원흉을 제거하였는데, 머리를 빗고 벼 사이의 잡초를 제거하듯이 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다. 이는 비록 세묘(世廟)의 영명한 계책과 슬기로운 결단에서 나온 것이지만 궁리하고 계획하여 계책을 결단한 공에 있어서는 공의 힘이 실로 많았다. 드디어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에 발탁되었다가 이윽고 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으로 옮기고, 책훈(策勳)되어 수충위사협책정난 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갑술년(1454, 단종2)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을해년(1455, 세조1) 6월에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우부승지로 승차(陞差)되었다.
병자년(1456) 5월에 명나라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尹鳳)을 보내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다. 세조가 6월 1일에 광연루(廣延樓)에서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는데, 역당(逆黨) 이개(李塏)와 성삼문(成三問) 등이 이날 대사를 거행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광연루는 장소가 협소하니, 세자를 잔치에 참석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검(雲劍)의 여러 장수들 역시 입시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 운검을 차고 곧장 들어가자 공이 꾸짖어 제지하니, 역당은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먼저 공을 해치려 하는 자가 있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대사를 이루지 못할 바에야 한모(韓某)를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튿날 일이 탄로나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광연루의 잔치에 세자를 참석시키지 않고 무사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청한 그 깊은 꾀와 원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왔으니, 원흉이 과연 간계를 부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비록 조종이 저승에서 도와준 힘이기는 하나 역시 모두 공의 충성이 묵묵히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또한 도와준 것이다. 겨울에 도승지에 승차되어 항상 유악(帷幄)에 거처하며 중요한 정사를 은밀하게 보좌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모는 나의 장자방(張子房 장량(張良))이다.”
하였다.

 

정축년(1457)에 자급이 뛰어올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 판서 상당군(上黨君)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세자 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갔다. 무인년(1458)에 병조 판서로 옮겼는데, 이때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세 도에 흉년이 들었다. 명을 받아 순찰사가 되어 마음을 다해 진휼(賑恤)하니, 백성이 힘입어 살아났다. 이에 앞서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이 건의하기를,

“세 도의 주현(州縣)이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경계가 바르지 않으니, 큰 고을을 떼어 작은 고을에 합쳐서 그 중을 취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경상도의 지세포(知世浦), 조라포(助羅浦), 연화도(蓮花島), 욕지도(浴知島) 등은 모두 혁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주현을 서로 맞물리도록 만든 것은 큰 고을과 작은 고을이 서로 연합하여 유지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하물며 경계가 정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아침에 변경한다면 백성이 반드시 소란을 피울 것입니다. 그리고 두 포구와 두 섬은 왜인(倭人)에게 고기 잡는 것을 허락해 주고 노인(路引)을 지급하여 세금을 거두면서 그들의 왕래를 기찰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법은 없습니다. 지금 혁파한다면 이것은 울타리를 치우고 호랑이와 표범을 들이는 격이니, 변방에 근심이 있게 될까 걱정입니다.”
하니, 논의가 마침내 종식되었다. 능성군이 또 건의하기를,
“우리 동방은 삼국이 정립(鼎立)하여 있을 때에는 나라마다 각각 1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본조에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지만 군사의 수는 도리어 미치지 못하니, 누락된 호구와 등록되지 않은 장정을 낱낱이 적발하여 군대에 편입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담당한 관리가 인원수를 불리는 데에만 힘써 한 집에 남자가 10명이면 9명을 뽑아 군사를 만드니, 백성이 견디지를 못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군사는 정예롭기를 힘써야지 수가 많기를 힘쓸 필요는 없으니, 정지하소서.”
하였다. 상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칭찬하고, 여론이 모두 속 시원하게 여겼으나 군적이 이미 정비되어 갑자기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그 폐단이 지금까지도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기묘년(1459, 세조5)에 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길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었다. 어루만져 다스리고 조처하는 것이 그때마다 시기나 경우에 적절히 맞으니, 교서(敎書)를 내려 표창하고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를 더하였다. 경진년(1460, 세조6)에 상이 서쪽 지방을 순행할 적에 공이 영접하여 길옆에서 알현하니, 상이 정성스럽게 위로하였다. 어가(御駕)가 순안(順安)에 이르렀다가 장차 환궁하려고 할 적에 공이 호종(扈從)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라의 장성(長城)이다. 동요해서는 안 되니, 가서 진무(鎭撫)하라.”
하였다.

 

신사년(1461)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올라 병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국가가 경진년에
북정(北征)한 이후로 여러 종족의 야인(野人)이 벌처럼 진 치고 개미처럼 집결하여, 기회를 타 은밀한 가운데 도발하니, 변경에 근심이 많았다. 상이 노하여 친히 정벌하고자 하니, 공이 아뢰기를,
“하찮은 오랑캐 때문에 성무(聖武)를 번거롭게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으나 충분히 제지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을 의지함이 우뚝한 장성과 같으니, 경이 간다면 다시 북방을 염려해 잊지 못하는 근심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대궐에 나아가 하직을 고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계책을 받들어 일을 행하는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원하는 것은 항복을 받는 것이요, 한갓 목을 베어 바치기만을 일삼지는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곤외(閫外)의 일은 경의 처리에 맡기겠다.”
하였다. 공이 육진(六鎭)에 당도하여 공격 무기를 대대적으로 정비해서 먼저 위엄과 무력을 과시하고, 첩자(諜者)를 시켜 적에게 말하기를,
“처자식을 보호하고 가옥을 아끼는 것은 인정에 있어 똑같다. 너희들이라고 어찌 이 마음이 없겠는가. 너희가 만약 속히 항복한다면 그만둘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소굴로 깊이 들어가 소탕하여 모두 섬멸하고야 말 것이다.”
하니, 추장이 와서 배알하고 말하기를,
“자식이 죄가 있으면 아비가 마땅히 매를 때려야 하지만 만약 능히 허물을 고친다면 어루만져 주는 것이 옳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소서.”
하였다. 공이 그를 대하기를 처음과 같게 하니, 여러 종족의 야인이 서로 이끌고 와 성심으로 귀의하였다. 상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 상대 군사를 굴복시켰으니, 선계(善計) 중의 선계이다.”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8) 여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고, 그대로 네 도(道)의 체찰사(體察使)를 겸직하였다. 계미년(1463)에 좌의정으로 승차되었는데, 네 도를 순찰하러 갈 적에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보제원(普濟院)까지 나가 전송하게 하였다. 갑신년(1464)에 공이 아뢰기를,
“의주(義州)는 하류(下流)에 진(鎭)이 없어 만약 적변(賊變)이 있게 되면 고립된 성에 구원 세력이 없는 처지이고, 희천(熙川)과 영흥(永興)은 서로 거리가 너무 멀어 혹시라도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멀리서 구원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의주의 하류에 인산진(麟山鎭)을 두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 영원군(寧遠郡)을 두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술년(1466)에 영의정에 승차되고 예문관홍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藝文館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를 겸임하였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정해년(1467) 가을에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온천(溫泉)에 가는데, 세자에게 명하여 제천정(濟川亭)까지 나가 전송하게 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유교(遺敎)를 받들어 한두 명의 대신으로 하여금 정원(政院)에 윤번으로 나와 모든 정무를 결정하게 하였다. 하루는 혜성(慧星)이 나타나자 공이 아뢰기를,
“천변(天變)은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창덕궁(昌德宮)은 성(城)이 없어 막아 지키는 것이 소홀하니,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처형되었다. 책훈되어 정난익대 공신(定難翊戴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기축년(1469, 예종1) 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사직을 청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수하였다.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고, 전하가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임시로 정책 결정을 함께 하면서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겸하라고 명하니, 공이 힘써 사양하였다. 왕후가 이르기를,
“선왕께서 경을 일러 사직의 신하라고 하셨다. 지금 국상(國喪)이 내리 겹쳐 인심이 두려워하며 허둥지둥하고 있으니, 대신이 홀로 편안히 있을 때가 아니다. 경은 선왕의 은혜를 잊었는가.”
하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만을 도모할 것입니다. 다만 노신(老臣)이 재주는 부족하고 권세만 중하여 나랏일을 그르칠까 걱정일 뿐입니다.”
하였다. 왕후는 공의 뜻이 견고함을 알고 명하여 병조 판서만을 겸직하게 하였다. 공이 기무(機務)에 마음을 다하여 비록 병정(兵政)의 소관이 아니라도 건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묘년(1471, 성종2)에 책훈되어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갑오년(1474)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사직하였다. 을미년(1475)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들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일찍이 의견을 올린 자가 있어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를 혁파하려고 하니, 여러 신하에게 논의할 것을 명하였다. 모두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으나 공이 홀로 말하기를,
“남도(南道)를 설치한 목적은 북도(北道)를 응원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당했을 때 만약 남도가 있어서 북도와 호응하여 안팎으로 서로 제어하였다면 저 하찮은 녀석쯤이야 주머니 속의 물건을 더듬어 찾는 것과 같을 뿐이니, 무슨 입에 올릴 가치조차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기회를 잃어 적의 형세가 커졌던 것이니, 매우 분개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세묘(世廟)께서 새로 설치하신 본의야 얕은 소견이나 사사로운 지혜로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혁파하자는 논의가 옳은 것인지는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구나.”
하였다.
하루는 공이 조용히 아뢰기를,
“성균관은 인재를 육성하는 곳인데, 보유한 서적이 적어서 학관(學官)이나 유생들이 열람하기가 어렵습니다. 서각(書閣)을 세웠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고, 명륜당(明倫堂) 북쪽에 서각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서각이 낙성되자 대내(大內)의 장서(藏書)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각각 10질씩 내리고, 또 전교서(典校署)에 유시하여 8도에 서판(書板)이 있는 곳마다 인쇄한 다음 장정해서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이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및 제자(諸子)의 잡서(雜書)가 무려 수만 권에 달하였다. 공이 다시 사재(私財)를 털어 비용에 보조하니, 사림(士林)이 칭송하였다.
기해년(1479, 성종10)에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려고 하면서 본국에 칙서를 내려 원조를 요구하였다. 이에 어유소(魚有沼)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강이 얼지 않은 데다 눈은 쌓이고 길은 험하니, 출전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공이 아뢰기를,
“본국이 조종(祖宗) 때부터 줄곧 지성으로 대국을 섬겼고, 중국도 우리나라를 한 나라로 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달려가 구원하지 않는다면, 방어하고 호위하는 번병(藩屛)의 의리를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뒷공론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다시 중한 장수를 보내 출전하게 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논의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두 번이나 거병(擧兵)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고집하여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논의하는 자들은 자신이 편할 계책을 논의하는 것입니다만, 노신(老臣)이 중하게 여기는 바는 국가의 대체입니다. 왕이 분개하는 대상을 대적하는 것은 마땅히 급히 해야 할 바이니,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마침내 우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가서 정벌하게 하니,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상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의 계책으로 재차 거병하여 공을 이루었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하고, 상을 성대하게 내려 주었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왕비 책봉과 궁각(弓角)에 관한 일로 중국에 가서 보고를 훌륭하게 하였다. 황제가 위로하고 유시하기를,
“노한(老韓)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선비이다.”
하고, 주청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였다. 계묘년(1483) 봄에 세자 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중국에 갔다. 이해에 공의 나이가 69세인데 먼 길을 떠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공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중한 은혜를 입고 후한 녹을 먹었으니, 비록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와 나랏일에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사양해선 안 되는데, 하물며 상국에 조회하고 사신으로 가는 일이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전송하였다. 중국 경사(京師)에 당도하니, 황제가 공이 당도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말하기를,
“충직한 노한이 다시 왔구나.”
하고, 서대(犀帶), 채단(彩段), 백금(白金)을 하사하였으며,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중사(中使)를 보내 통주(通州)까지 전송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은총이 이토록 중한 적은 전고에 없던 일이었다.
공이 일찍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강을 따라 위아래로 장성(長城)을 쌓았으나 공사가 워낙 커서 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다시 정비하여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좌의정 홍응(洪應)을 보내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가을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고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공훈은 누대의 으뜸이고, 재능과 식견은 한 세상을 울렸으며, 한마음으로 임금을 섬기고 온갖 염려로 나라를 근심하였다. 논의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근거가 있었고, 말한 것을 증험해 보면 반드시 적중하였으니, 원로(元老)가 조정에 있는 것은 나라의 영화이고, 고굉(股肱)과 같은 신하가 애써 주선하는 것은 임금이 의지하는 바이다. 비록 오래전에 병이 들었으나 약을 내려 준 것도 많으니, 부디 몸조리하고 보양한 다음 경을 그리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만약 그리한다면 경에게는 노퇴(老退)를 고한 편안함이 있을 것이고, 나는 구신(舊臣)을 버리는 과실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갑진년(1484, 성종15) 봄에 70세의 나이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내려 주었다. 을사년(1485) 봄에 풍덕(豐德)의 별장으로 가서 휴양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 술과 음식을 내려 주고 위로하였으며, 이어 어찰에,
“경은 나라의 원훈(元勳)이며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이니, 사직(社稷)에 있어서는 이미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중임을 맡은 인물이 되었고 내게 있어서는 실로 소금과 매실 같은 훌륭한 능력에 힘입는 인물이었다.”
라는 말이 있었다. 정미년(1487)에 또 풍덕에서 휴양하니, 어찰을 내려 위로하기를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겨울에 병이 들어 누우니,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중사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승지를 보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느 왕보다 훌륭하신 성상께서 우매한 신을 이리 돌아보시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 몸이 아침 이슬마냥 스러져 태평하고 밝은 세상을 영원히 하직하게 되니, 오직 이것이 섭섭할 뿐입니다.”
하였다. 연달아 중사를 보내 병문안하였는데, 마침 공이 눈을 감고 숨이 끊어지려 하는 차에 중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관디(冠帶)를 몸에 얹어 놓게 하고 목구멍 속에서 내는 말로 말하기를,
“성상의 밝음은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끝에 가서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게 하소서.”
하였다. 말을 마치자 절명하니, 향년이 73세였다. 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상의 음식을 줄이고 조회를 정지하였다. 중사를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기를,
“경은 공과 덕이 세상을 뒤덮었으니, 다른 신하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과인에게는 한집안과 같은 의리가 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심정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부의와 치제(致祭)를 상례보다 등급을 더 높여 내리고, 백관에게 명하여 장례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공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원근을 막론하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목동이나 마부까지도 모두 탄식하며 애석해하였다.
공은 도량이 넓고 크며, 사려가 깊고 원대하였다. 얼굴이 잘생기고 체구가 커서 바라보면 우뚝하여 눈에 띄었다. 출세하기 전에는 호걸들과 교제를 맺어 규모와 기개가 우뚝이 무리에서 돋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의 인물로 기대하였다. 오랫동안 낮은 자리에 머물면서도 편안하고 흡족하게 자득(自得)한 모습이더니, 급기야 세묘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어서는 임금을 보좌하는 중요한 신하가 되어 계책을 운용하고 결단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다. 포의(布衣)로 지내던 시절에서 몇 해 안 되어 재보(宰輔)의 자리에 이르렀으나 대사를 논하고 결단함에 있어 처리하는 것이 매우 여유로웠으니, 정사의 처리에 있어 대체에 힘썼지 자잘하고 말단적인 것은 일삼지 않았다. 세 조정을 내리 섬겨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다. 네 번 인각(麟閣 충훈부)의 으뜸 공신이 되어 공로가 백대에 높았고, 다섯 번 암랑(巖廊 의정부)의 수장이 되어 명망이 한 세상을 덮었으며, 게다가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구(國舅 부원군)라는 존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공을 이루고서도 자처하지 않고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은 되레 겸손하였다.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어 국가의 안위가 그 한 몸에 달린 세월이 30여 년이었으니, 공명과 부귀와 복록의 성대함은 고금에 견줄 이가 없다. 만년에 넘치도록 가득 찬 것을 스스로 경계하여 성 남쪽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압구정(狎鷗亭)이라고 하였으며, 늙음을 고하고 사직을 청하고자 하였다. 상이 지어 준 근체시(近體詩) 절구(絶句)가 또한 두 편이니, 규벽(奎璧)의 문채가 환히 빛나 압구정의 편액이 광휘를 더하였다. 조신(朝臣)으로서 응제시(應製詩)를 지은 자가 무려 60여 명이었으며, 중국의 문사들도 제영(題詠)한 자가 많았다. 성상의 은혜가 나날이 깊어져서 결국은 은퇴하고자 하는 뜻을 보상받지 못하였다. 공은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처음과 끝을 능히 온전하게 지켰으니, 옛 시절에서 구해 보더라도 이에 짝할 만한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아, 성대하다.
공의 배필은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민씨(閔氏)이니, 증 우의정 민대생(閔大生)의 딸이다. 1남 4녀를 낳으니, 아들 보(堢)는 무과에 올라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고 낭성군(琅城君)에 봉해졌다. 장녀는 봉례(奉禮) 신주(申澍)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영천군(鈴川君) 윤반(尹磻)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 비)로 공릉(恭陵)에 장사하고, 다음은 공혜왕후(恭惠王后 성종 비)로 순릉(順陵)에 장사하니, 모두 일찍 승하하였다. 부실(副室) 소생이 7남 6녀이다.
낭성군은 좌참찬 이훈(李塤)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으니, 장남은 경기(景琦)이고, 딸은 이광(李光)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봉례 신주는 3남을 낳으니, 신종흡(申從洽)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고, 신종옥(申從沃)은 호조 정랑이고, 신종호(申從濩)는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이다. 영천군이 2남 5녀를 낳으니, 아들은 윤수강(尹秀岡)과 윤수륜(尹秀崙)이다. 장녀는 홍의손(洪義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이수량(李守諒)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문미수(文眉壽)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양숙(梁淑)에게 시집갔다. 공릉은 인성대군(仁城大君)을 탄생하였다.
무신년(1488, 성종19) 1월 병오일(11일)에 청주(淸州) 장명리(長命里)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장사를 끝내고 낭성군이 행장을 갖추어 신도비명을 청해 왔다. 아, 내가 어찌 차마 명을 짓는단 말인가. 내가 나이 20세 되기 전에 태재(泰齋) 유 선생(柳先生)을 북원(北原 원주(原州))에서 뵙고 그 문하에서 학업을 받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공과 길창(吉昌)이 뒤이어 왔다.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토론하고 결론지으며 몇 년을 지내는 동안에 마침내 망년(忘年)의 교분을 맺었다. 나는 요행히 제일 먼저 과거에 등제하였으나 공과 길창은 오래도록 막혀 출신하지 못했는데, 급기야 두 공이 함께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지위가 높이 재상에 올랐다. 나는 사람이 못나 이름을 떨치지 못하다가 두 공의 천거로 인하여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길창은 일찍 작고하였으니, 세한(歲寒)에도 변치 않을 우정으로는 오직 내가 있을 뿐이다. 공이 평소에 매양 뒷일을 나에게 부탁했었는데, 지금은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쓰러졌으니 다시 우러를 곳이 없다. 대략 공의 평생의 공훈과 덕을 요약하여 기술하고 명을 지으려니, 눈물이 뒤를 따른다. 아,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천지는 영기(英氣)를 모으고 / 天地鍾英
산하는 세상에 드문 기운을 내었으니 / 山河間氣
세상을 울리는 재주요 / 命世之才
나라를 경륜하는 그릇이었네 / 經國之器
공이 옛날 불우했을 적에는 / 公昔未遇
동산에 은거할 뜻 지녔더니
/ 東山其志
때에 따라 굽히고 폄은 / 時哉屈伸
남양의 용이었구려
/ 南陽之龍
세묘의 지우(知遇)야말로 / 遭遇世廟
천년에 한 번 있을 기이한 만남이니 / 千載奇逢
계책을 운용하고 책략을 결단하여 / 運籌決策
대업을 도와 이루었네 / 贊成大業
하늘을 찌르고 해를 꿰는 듯한 / 撑天貫日
밝고 밝은 그 충정이여 / 昭哉忠赤
태산이 숫돌 되고 황하가 띠 되도록 / 礪山帶河
공훈이 환히 빛나리라 / 有炳勳烈
깊고 깊은 상부와 / 潭潭相府
높고 높은 인각에 / 峩峩麟閣
나가면 장수요 들어오면 정승으로 / 出將入相
나라의 주석이 되었지 / 爲國柱石
한 몸에 안위를 꿰차고 / 身佩安危
기쁨과 슬픔 나라와 함께하였네 / 與國休戚
나이 칠순이 넘도록 / 年踰七旬
복을 누려 다함이 없으니 / 享福無疆
노국과 맞먹고 / 伯仲潞國
분양과 시종이 같다네
/ 終始汾陽
하늘이 앗아감 어찌 이리 갑작스러운가 / 天奪何遽
거울 하나가 없어졌구려 / 一鑑云亡
사람은 비록 없으나 / 雖則云亡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있나니 / 不朽者存
바로 성대한 덕과 성대한 공이요 / 懋德懋功
그 충정과 그 근면함일세 / 曰忠曰勤
누가 그 미덕을 퍼트려 알릴까 / 孰揚厥美
역사책 속에서 빛을 발하리 / 簡策煌煌
저 서원을 바라보니 / 瞻彼西原
바로 공의 묘로구나 / 是公玄堂
하늘이 상서를 내려 / 天降之祥
자손이 창성하였네 / 子孫其昌
혹시나 믿지 못하거들랑 / 厥或不信
나의 명을 볼지어다 / 眎我銘章


 

[주D-001]삼한삼중(三韓三重) : 삼한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의 준말이고, 삼중은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준말로, 고려 때 정1품 품계이다. 충선왕 때 처음으로 정1품을 두면서 삼중대광이라고 하였는데 다시 벽상삼한이라는 칭호를 더했다가 없앴고, 공민왕 때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였는데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고쳤다가 다시 특진보국삼중대광(特進輔國三重大匡)으로 고쳤다. 《국역 동사강목 1 도하 관직연혁도》
[주D-002]안평(安平) :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강화(江華)에 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시호는 장소공(章昭公)이다. 《국역 연려실기술 1 권4 단종조 고사본말》
[주D-003]연릉(延陵)의 절개 : 연릉은 오나라 왕 수몽(壽夢)의 넷째 아들인 계찰(季札)이다. 연릉에 봉해져서 호를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한다. 수몽이 계찰을 어질게 여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절개를 말한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주D-004]한 고조가 …… 썼다 : 문신의 계책도 필요하지만 훌륭한 무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한 고조의 모신(謀臣)이고,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는 당 태종 때 함께 정치를 담당했는데, 방현령은 계획을 잘 세우고, 두여회는 결단을 잘 내린다는 평가가 있다. 포공(褒公)과 악공(鄂公)은 당나라의 개국에 공헌한 명장(名將)으로 포국공(褒國公)에 봉해진 단지현(段志玄)과 악국공(鄂國公)에 봉해진 울지경덕(尉遲敬德)을 가리킨다.
[주D-005]욕지도(浴知島) : 대본은 ‘浴花島’인데, 《세조실록》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노인(路引) : 일종의 통행권으로 상인에 대한 징세(徵稅)와 통제, 그리고 군사적인 목적 이외에 조선에 도항(渡航)하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서 도서(圖書), 서계(書契)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주D-007]북정(北征) : 1460년(세조6)에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양정(楊汀)이 야인(野人)의 침략을 장계로 급히 알리자 신숙주(申叔舟)를 시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정벌한 일을 말한다. 《世祖實錄 6年 3月 22日》
[주D-008]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 : 영안남도는 함경남도의 이칭이다. 1467년(세조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1470년(성종1)에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고 관찰사의 본영을 영흥부(永興府)로 옮기면서 영흥부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이름을 따서 영안도(永安道)라고 하였고, 1509년(중종4)에 다시 함흥부와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라고 한 것이다.
[주D-009]이시애(李施愛)의 난 : 1467년(세조13)에 함경도에서 일어난 난이므로 한 말이다.
[주D-010]왕비 …… 일 : 왕비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말한다. 1479년(성종10)에 폐비 윤씨가 쫓겨나고, 이듬해에 숙의(淑儀)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이 책봉을 주청한 일이다. 궁각(弓角)은 활을 만드는 재료인 무소뿔로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중국에서도 귀하여 매년 한 차례 50부(副)만 수매(收買)하도록 허락한 품목인데, 한정한 액수를 풀어 줄 것을 주청한 일이다.
[주D-011]말가죽에 …… 돌아와 :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마원(馬援)이 “남아는 의당 변방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반장하면 그만이지, 어찌 와상에 누워 아녀자의 손에 죽겠는가.[男兒要當死於邊野 以馬革裹屍還葬耳 何能臥牀上在兒女子手中耶]”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12]과인에게는 …… 있으니 : 성종의 첫째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가 한명회(韓明澮)의 딸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공혜왕후는 1467년(세조13)에 당시 자산군(者山君)이었던 성종에게 출가하여 성종이 즉위한 해인 1469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명이 짧아 1474년(성종5)에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역 연려실기술 2 권6 성종조 고사본말》
[주D-013]30여 년 : 대본은 ‘餘二十年’인데, 《동문선(東文選)》 권20에 수록된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 한공 신도비명〉에 의거하여 대본의 ‘二’를 ‘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규벽(奎璧)의 …… 빛나 : 규와 벽은 28수(宿) 가운데 두 별의 이름으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이다. 주로 문필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어제시(御製詩)를 칭송한 것이다.
[주D-015]태재(泰齋) 유 선생(柳先生) : 유방선(柳方善, 1388~1443)으로,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의 문인(門人)이다. 금고를 당하여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문명(文名)이 있었고, 원주(原州)에서 살았다. 자는 자계(子繼)이고, 태재는 호이다. 《국역 연려실기술 1 권3 세종조 명신》
[주D-016]공이 …… 지녔더니 : 동산(東山)은 진(晉)나라 사람 사안(謝安)이 젊은 시절 관직을 버리고 은거했던 회계(會稽)의 동산을 말하는데, 혹은 임안(臨安)과 금릉(金陵)에도 동산이 있어 후에 사안이 이곳을 유람하며 휴식을 취했으므로 임안과 금릉의 동산을 말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동산은 은거하는 곳, 혹은 유람하며 휴식을 취하는 곳의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한명회가 오랫동안 벼슬길에 들어서지 못하면서도 유유자적하며 지냈던 것을 말한다.
[주D-017]때에 …… 용이었구려 : 남양(南陽)의 용이란 남양의 초당에 은거하였으며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고 불렸던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제갈량이 유비(劉備)를 만나 나라를 경륜한 공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8]나이 …… 같다네 : 노국(潞國)은 송 신종(宋神宗) 때의 재상 문언박(文彦博)의 봉호이고, 분양(汾陽)은 당(唐)나라 때의 명장(名將)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문언박은 장수를 누려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과 함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고, 곽자의는 자손이 많고 다복(多福)하기로 유명하다.
[주D-019]거울 하나가 없어졌구려 : 당 태종(唐太宗)이 재상 위징(魏徵)을 잃고 “구리를 거울삼으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옛 사적을 거울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삼으면 잘잘못을 밝힐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가지 거울을 보전하여 안으로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졌구나.” 하고 한탄한 데서 나온 말이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