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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7대 임금 세조조 세조조 고사본말(世祖朝故事本末

아베베1 2011. 8. 17. 15:23

 세조는 조선4대 임금이신 세종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휘는 유(瑈)이며, 자는 수지(粹之)이요, 세종의 둘째 아들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소생으로 영락(永樂) 15년 정유 태종 17년 9월 29일 병자에 본궁(本宮)에서 탄생하였다. 선덕(宣德) 3년 무신 세종 10년 에 처음 진평대군(晉平大君)으로 봉해지고, 뒤에 함평(咸平)으로 고쳐지고 또 진양(晉陽)으로 고쳐지고, 다시 또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되었다

 

연려실기술 제5권

 세조조 고사본말(世祖朝故事本末)
세조(世祖)


세조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은 휘는 유(瑈)이며, 자는 수지(粹之)이요, 세종의 둘째 아들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소생으로 영락(永樂) 15년 정유 태종 17년 9월 29일 병자에 본궁(本宮)에서 탄생하였다. 선덕(宣德) 3년 무신 세종 10년 에 처음 진평대군(晉平大君)으로 봉해지고, 뒤에 함평(咸平)으로 고쳐지고 또 진양(晉陽)으로 고쳐지고, 다시 또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되었다. 경태(景泰) 6년 을해 윤6월 11일에 수선(受禪 임금이 죽기 전에 왕위를 물려 받는 것)하고, 8년 정축에 승천체도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의 존호를 받았으며, 성화(成化) 4년 무자 9월 7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하고, 8일 갑자에 수강궁(壽康宮 지금의 창경궁(昌慶宮))의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지 13년. 수가 52세였으며, 명 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혜장(惠莊) 부드러운 자질과 자애롭고 어진 것을 혜(惠)라 하고, 엄하며 공경으로서 백성에게 임하였음을 장(莊)이라 하였다. 이었다. 세실(世室)로 정해졌으며 그 연월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진[睟容] 두 벌이 있었는데,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고 한 벌은 인조(仁祖) 정축년에 봉안하였고, 또 한 벌은 영종(英宗) 정묘년에 거듭 모사하였다. 능은 광릉(光陵) 양주(楊州) 동편 주엽산(注葉山) 직동(直洞) 자좌(子坐)인데, 무자년 11월 28일에 장사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다.

 

○ 비(妃) 자성흠인경덕선렬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 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증 영의정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정정공(貞靖公) 반(璠)의 딸이다. 영락 무술 11월 11일에 홍주(洪州) 군아(郡衙)에서 탄생하여 선덕 무신년에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졌다가 경태 을해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세조 정축년 존호 자성(慈聖)을 받았다가 예종 기축년에 흠인경덕선렬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가 더해졌다. 또 성종(成宗) 신묘년에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의 존호를 더하였다. 성화 계묘년 성종 14년 3월 30일 임술에 온양 행궁에서 승하하니 춘추가 66세였다. 광릉에 장사하였다.
대왕의 능에서 동편 언덕 축좌(丑坐)이며, 계묘 6월 12일에 장사하였다.

 

○ 4남 1녀를 두었다.

사왕(嗣王) 덕종대왕(德宗大王)
사왕 예종대왕(睿宗大王)
첫째 딸 의숙공주(懿淑公主)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편정공(偏玎公) 정현조(鄭顯祖)의 아내였으니, 현조는 성화 무자년에 문과에 올랐었다.
첫째 아들 덕원군(德源君) 서(曙)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낳았다. 익대 공신(翊戴功臣)이요, 시호는 소간공(昭簡公)이다.

 

○ 경주 김씨(慶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증 찬성(贈贊成) 종직(從直)의 딸이요, 함안 윤씨(咸安尹氏)에게 재취하였으니 함안군(咸安君) 말손(末孫)의 딸이요, 청주양씨(淸州楊氏)에게 삼취하였으니 참지(參知) 일원(逸源)의 딸이다.

둘째 아들 창원군(昌原君) 성(晟) 근빈 박씨가 낳았다. ○ 교하 노씨(交河盧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 증 찬성(正贈贊成) 호신(好愼)의 딸이요, 광주 정씨(光州鄭氏)에게 후취하였으니 증 찬성 익(益)의 딸이다.

 

○ 세조는 체구가 크고 활쏘기와 말 달리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講武) 할 때 하루 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서 피묻은 털이 바람에 날아와서 겉옷이 다 붉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니다.” 하였다. 문종(文宗)이 그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 鐵石其弓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 霹靂其矢
당기는 것은 보겠으나 / 吾見其長
늦춤은 못 보겠네 / 未見其弛

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 잡을 때 세조와 안평대군(安平大君) 및 다른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삼각산(三角山) 보현봉(普賢峯)에 올라서 해 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예측할 수 없는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세조만은 나는 듯이 걸어가서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사람들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늘 넓은 소매 옷을 입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처럼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처럼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에 나이가 14세에 어떤 기생집에서 자는데, 밤중에 기생과 관계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들었다. 세조가 놀라서 발로 뒷벽을 차서 벽이 자빠지자 곧 밖으로 나와 몇 길이나 되는 담을 뛰어 넘자, 그 사람 역시 뒤를 따라 넘으므로 세조는 또 이중의 성을 뛰어 넘으니 그 사람 역시 뛰어넘었다. 세조가 일 리쯤 가다가 길 곁에 늙은 버들 한 그루가 속이 텅 비었기에 마침내 그 속에 숨었더니 그 사람이 따라오다가 찾지 못하여 그 자취를 잃고는 투덜거리면서 가 버렸다. 조금 뒤에 어떤 점잖은 분이 나무 곁에 있는 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 작은 다리 옆에서 소변을 보더니 하늘에 별을 쳐다보면서 혼자서 말하기를, “자미성(紫薇星)이 유성(柳星)에 걸려 있으니 괴이한 일이로다.” 하고는 한참 만에 도로 들어갔었다. 세조가 돌아와서 그 이튿날 수소문하여 보니 그는 곧 관상감(觀象監)에서 천문을 잘 보는 자였다. 세조가 등극한 뒤에 찾았으나 그 사람에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그 아들에게 후히 하사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계유에 세조가 사은사로 명 나라에 갔더니 길에서 보는 사람이 반드시 그를 대장군이라 하였다. 북경 대궐문 밖에 서 있던 코끼리 여덟 마리가 그를 보고는 일시에 물러가 움츠리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었다. 명으로 떠날 때, 권람(權擥)에게 서장관이 될 만한 자를 물었더니 신숙주를 추천하였고, 또 돌아오기 전에 사변이 있을까 우려하여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와 황보인(皇甫仁)의 아들 석(錫)과 함께 떠났다.
《동각잡기》

 

○ 세조는 하늘이 낳은 호방한 인물이라 평시에 개연히 당 태종(唐太宗)을 사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박하게 여겼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세조는 성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신하들이 일찍이 내전에 들어가보니, 감색 무명 호구(虎裘)를 입고 푸른 짚신을 신고 나무 갓끈에 대나무 지팡이를 끌었으니, 이는 비록 씻은 옷을 입은 한 문제(漢文帝)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일찍이 평양에 거둥할 때 중로에서 어떤 군인의 깃대를 바라보고는, “저 몇 번째의 기를 갖고 오라.” 하니 그것이 참 기이한 대나무였다. 명하여 저를 만드니 그 소리가 절묘하였다. 옛날 채백개(蔡伯喈)가 가정(柯亭)의 서까래 대[椽竹]를 취해서 저를 만들었더니, 역대로 보배로서 전해왔으니 그 일이 이와 대체로 같으나, 채백개가 가까이서 본 것은 세조가 멀리서 알아맞힌 것보다는 못하리라 생각된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2년 병자에 공조에서 중궁(中宮) 주방(酒房)의 금잔(金盞)을 만들기를 청하니, 명하여 그림 그린 자기로써 대신하게 하였고, 상의원(尙衣院)에서는 은으로 동궁의 연적과 화로를 만들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이 대언사(代言司)에게 이르기를, “자제를 가르칠 때 마땅히 먼저 검소한 덕으로 하여야 할 것이니, 뒤를 이어받을 자손이 궁중에서 생장하여 사치한 마음이 생기기 쉬운 것인데 어찌 사치로써 인도하리오. 옛날 당 나라 현종(玄宗)이 구리로 화로를 만들었으니, 천하를 차지한 부력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야 말할 것이 있느냐.”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종묘에 친히 제사하고 경회루에서 음복연(飮福宴)을 벌이고 정대업(定大業)의 춤을 출 때 세조가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기를, “이 춤을 보면 조종(祖宗)의 창업하시기 어려움과 세종께서 제작하신 뜻을 알 것이오.” 하였다. 정인지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이것이 곧 안일한 가운데 수고로움을 생각하고, 편안한 가운데 위태로움을 생각하는 뜻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이 옳다 하고 “마땅히 모든 신하로 하여금 시를 읊어서 오늘의 일을 잊지 말게 하라.” 하고 그의 말을 칭찬하였다.

 

○ 4년 무인 봄에 세조가 세자(世子)로 하여금, 성균관에 모신 선성(先聖)을 뵙게 하고 입학할 때
치주례(齒冑禮)를 행하고 또 친히 훈사(訓辭) 한편을 지었으니, 항덕(恒德)ㆍ경신(敬神)ㆍ납간(納諫)ㆍ두참(杜讒)ㆍ용인(用人)ㆍ물치(勿侈)ㆍ사환(使宦)ㆍ신형(愼刑)ㆍ문무(文武)ㆍ선술(善述) 등 열 가지를 조목으로 하여 나라 다스리는 중요한 일을 갖추어 서술하여 늘 외게 하였다.
○ 임금이 후원에서 구신(舊臣)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활쏘기를 할 때, 임금이 쏘면 반드시 과녁을 맞히므로 시를 지어 축하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수찰(手札)을 내리기를, “내 젊을 때에는 기운이 웅대하고 마음이 장하여 스스로 활쏘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렇지 않으니 만일 한갖 풍부(馮婦)처럼 힘만 조절할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니라.” 하고는 또 모든 신하의 시에 모두들 경계하는 말이 있음을 보고서 시를 지어 회답하기를,

욕심이 적어야만 채울 수도 있을 거요 / 欲少欲可滿
일이란 간략해야 공을 가히 이루리라 / 事簡功可成
하늘을 공경하면 하늘이 보전하게 하실 거요 / 敬天天乃保
백성을 사랑해야 백성이 편하리라 / 勤民民乃寧
하찮은 활쏘기야 관심할 것 없거니 / 小藝莫致慮
큰 정사에나 정력을 기울이리 / 大政宜致精

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모든 근심 걱정은 안락에서 나는 거요 / 憂患生安樂
유쾌함이 곤궁에서 싹튼다오 / 暢達荄困窮
진실로 천명이란 떳떳하지 않은 것이요 / 天命固靡常
오직 착한 이에게 곧장 따르리라 / 唯善以爲從
닦을 것을 아예 잊지를 마소 / 毋忘交修志
시종이 한결같기를 생각하리로다 / 思與有始終

하였더니, 권람(權擥)이 화답하여 올리기를,

나무가 굽다 하나 먹줄에 발라지고 / 木從繩則正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되지 않으리라 / 玉不琢不成
썩은 새끼 고삐인양 조심을 하옵소서 / 凛乎馭朽索
근본이 굳어야만 나라가 편하리다 / 本固邦其寧
밤이나 낮이나 부지런히 하옵시면 / 宵旰更憂勤
어리석은 신하들도 힘껏 하여 보오리다 / 愚臣當竭精
하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 6년 경진에 사방에 순행하여 이르는 곳마다 무과를 보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무거전고(武擧典故)》
이 해에 임금이 서도로 거둥하여 지방을 순시할 때, 양서 체찰사(兩西軆察使) 한명회(韓明澮)가 길에서 맞이하고 세조의 행차가 돌아올 때 명회가 모시고 오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는 나라의 장성(長城)인만큼 움직일 수 없느니라.” 하고는 어의를 벗어 입혀 주었다. 《명신록(名臣祿)》
○ 이 해 겨울에 친히 순행하여 평양에 이르러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가서 시를 쓰고 뭇 신하에게 화답해 올리게 하고 양서(兩西)의 유생을 모아놓고 두 가지의 책문(策問)을 내려서 시험을 보일 때 서쪽 뜰안 석탑 밑에는 문장(文場)을 베풀고 동쪽 뜰안 석벽 밑에는 무장(武場)을 베풀어서 전지를 내리기를, “서방 사람이 아니면서 과거보는 자 있다면 베리라.” 하였는데,생원 유자한(柳自漢)이 타도의 출신으로서 수석으로 합격되었으므로 임금이 크게 노하여 즉시 베기를 명하였다. 자한이 꿇어앉아 고하기를, “으레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알았아오나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 하였으니 신이 감히 죽음을 사양하지는 못하옵니다.” 하였다. 세조가 웃으면서 그만 두고는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그 일의 시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국조방목(國朝榜目)》
○ 9년 계미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타던 명마 열두 필의 이름을 적어서 내리고 당 나라의 옛일을 의방(依倣)하여 그림을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첫째는 정세표(靖世驃)요, 둘째는 유하류(流霞騮)요, 셋째는 이화리(梨花驪)요, 넷째는 옥영규(玉英虬)요, 다섯째는 능공곡(凌空鵠)이요,여섯째는 축풍구(逐風駒)요, 일곱째는 치운리(黹雲螭)요, 여덟째는 등무표(騰霧豹)요, 아홉째는 일경송(軼驚鴻)이요, 열째는 익비룡(翼飛龍)이요, 열한째는 대야린(戴夜麟)이요, 열두째는 조야기(照夜驥)라 하였는데, 최항(崔恒)이 서(序)를 지었었다. 《문헌비고(文獻備考)》
○ 12년 병술 강릉 오대산에 거둥하여 어림대(御林臺)에 행차를 멈추고 무사를 시험하여 급제를 주었다. 《송와잡기》
○ 임금이 일찍이 조용히 서거정(徐居正)에게 이르기를, “너는 유학자이다.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여야 하는가. 숨김 없이 대답하라.” 하였더니 아뢰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때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절하는 것의 가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현재불은 과거불에게 절하지 않는답니다.’ 하여 태조가 웃으면서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옳은 일이요, 절을 함은 권도라 생각하옵니다.” 하여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종이 말년에 불경을 좋아하더니 그 때에 준화상(俊和尙)이 가장 경률(經律)에 이름이 높았으므로 만기(萬機)의 여가에 친히 강론하기가 어려워서 세조와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가서 배워 가지고 들어와 여쭙게 하였다. 그리하여 안평과 세조가 깊이 불경에 통하였다. 《소문쇄록(謏聞瑣祿)》
○ 13년 정해 평안 절제사(平安節制使) 양정(楊汀)이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임금이 술을 내리고 위안하였다. 양정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계신 지 오래 되었으니 마땅히 편히 쉬셔야 하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묻기를, “그것이 곧 사시(四時)의 순서에 공이 이루어지면 물러간다는 뜻인가.” 하였다.양정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재빨리 어보(御寶)를 들여 오라 하여 장차 동궁에게 전위하려 하시니, 좌우 여러 신하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숙주가 한사코 어보를 바치지 않았다. 여러 신하가 양정이 난언(亂言)한 죄를 논하매, 명하여 베게 하였다.
○ 14년, 임금의 병세가 매우 급하여지매 한계희(韓繼禧)를 불렀더니 세자가 곁에 모시었다. 임금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평일에 조훈(祖訓)과 같은 조장(條章)을 지어 너에게 주려 했으나, 이제는 할 수 없으니 대략 그 요체만 들어 말하겠다. 첫째는 경천사신(敬天事神)이요, 둘째는 봉선사효(奉先思孝)요, 셋째는 절용애민(節用愛民)이니,네가 이를 유의하여 나의 명을 허물지 말라.” 하고는 곧 계희로 하여금 세자에게 마지막 부탁을 전하게 하고 곤룡포와 면류관을 가져다가 세자에게 내리고 그 이튿날에 승하하였다. 《사가집(四佳集)》 <한계희 비문(韓繼禧碑文)>
○ 임금이 신하들을 몹시 사랑하여 접견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으니 사정전(思政殿)에서 하기도 하고 또는 충순당(忠順堂)ㆍ화위당(華韡堂)ㆍ서현정(序賢亭)에서도 하고, 겨울이면 비현각(丕顯閣)에서 하였다. 강녕전(康寧殿)ㆍ자미당(紫微堂)ㆍ양심당(養心堂)과 같은 내전의 깊은 곳까지 때로 외신이 드나 들었다.영순군(永順君) 부(溥)ㆍ귀성군(龜城君) 준(浚)ㆍ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가 사종(四宗)이 되고, 신종군(新宗君) 효백(孝伯)ㆍ거평정(居平正) 복(復)ㆍ진례정(進禮正) 형(衡)ㆍ금산정(金山正) 연(衍)ㆍ율원부정(栗元副正) 종(徖) 제천부정(堤川副正) 온(蒕), 곡성정(鵠城正) 금손(金孫) 등이 사종(射宗)이 되고,또 문신 몇십 명을 뽑아서 겸예문(兼藝文)이라 이름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기도 하고 나라를 경륜하는 큰 계책을 묻기도 하였다. 또 무신을 불러서 활을 쏘아서 과녁을 맞춘 자에게는 순서에 관계없이 승진시켰으며, 혹은 어찬(御饌)을 내려서 장려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힘을 써서 자급을 뛰어넘어 등용된 자도 적지 않았다.임금이 흔히 여러 신하와 더불어 놀기를 좋아하여 사종(射宗)으로 하여금 쥐나 거미 등을 잡게도 하고, 때로는 임금의 뜻을 따라 시키는 대로 나뭇잎이나 또는 채소줄기에 활을 쏘아서 맞추는 자에게는 물건을 내렸다. 임금이 한여름에 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에 벌여 놓으니, 예문(藝文)의 모든 선비가 뜰 아래 앉아서 종일토록 햇볕을 쪼이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디어 본 연후에야 가히 큰 일을 맡을 수 있으리라.” 하였다. 만년에 임금의 몸이 편치 않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유신을 불러서 경서를 강론하기도 하고, 잡류(雜類) 최호원(崔灝元)ㆍ안효례(安孝禮) 등을 불러들여 각기 그가 지닌 기술을 서로 다투어 입가에 거품을 일으키게도 하고, 또 때로는 팔을 걷어붙이고 꾸짖고 하소연하여 제멋대로 날뛰면 임금 역시 밤낮으로 안석에 기대어 듣고 있었다.임금이 비록 심심풀이로 그들을 불러왔으니 실은 배우로서 길렀을 뿐인데 두 사람이 교만하여 은혜를 바라고 호원이 사사로 효례더러 말하기를, “나는 승지벼슬은 받고 너는 첨지벼슬을 받을터인데 어찌 이리 더디단 말이냐.” 하니, 듣는 자가 우스워 입을 가리며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임금이 일찍이 어떤 낮은 자리에 있는 한 사람을 탐탐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의 벼슬을 여러 해 동안 옮겨주지 않았다. 어느날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더니 여러 재상이 모두 전(殿) 위에 올라와 있는데 돌아보니 그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도 금대(金帶)를 띠었기에 임금이 놀라서 잔치가 끝난 뒤에 급히 이조를 시켜 그 사람의 이력을 살펴 보니 실력으로서 승진하였는데 과연 모두 청반(淸班)으로부터 뽑혀서 승진한 것이었다.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의 귀천이란 운명이 있는 것이어서 임금의 힘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가 보다.” 하였다. 이조에서 벼슬을 추천할 때에 반드시 세 사람의 이름을 갖추어서 들이면 세조는 붓으로 묽은 먹물을 듬뿍 적시어 세 사람 이름 위에 들고서 그 먹이 떨어진 곳에다가 낙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궁인 중에서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자를 시켜서 낙점하고는 이르기를, “이것 역시 운명이야.”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치주례(齒胄禮) : 주(冑)는 맏아들이란 말이오, 치(齒)는 참례한다는 뜻이다. 예전에 태학은 맏아들에게만 가르치게 되었으므로 태학[成均館]에 왕세자가 입학하여 주자들 틈에 참례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와 같은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주D-002]풍부(馮婦) : 옛날에 호랑이를 잘 잡은 사람.

동문선 제24권
 교서(敎書)
수양대군 공신 교서(首陽大君功臣敎書)


유성원(柳誠源)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사직을 위하여 어진 이를 내니 대개 기수(氣數)에 관계가 있고, 임금이 벼슬과 땅을 주어 명을 내리니 진실로 훈공(勳功)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에 일정한 법규에 의하여 뚜렷이 상전(賞典)을 보인다.
숙부(叔父)는 삼광(三光)과 오악(五嶽)의 정기로 태어나고, 바람과 서리에 절개를 가다듬었다. 기우(器宇)와 국량은 준엄하고 깊었으며, 지조와 기개는 확고하고 엄정하였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 박혔고 충성과 의리는 지성에서 우러났다. 호걸의 재주요, 성현의 학문이었다. 기운은 한 세상을 덮었고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다. 덕망은 종친 가운데 무거웠고, 풍채는 조정의 반열에 뛰어났다. 착한 일을 가장 좋아하여 부귀나 성색도 그 마음을 흔들 수 없고,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이험(夷險)과 종시(終始)에 그 지조를 변하지 않았다. 우뚝하여 나라의 성(城)과 같고, 확고하여 대절(大節)에 임하였다.
어린 내가 가운(家運)이 불행함을 만나 어렵고 큰 일을 널리 구하려는 생각으로 기무를 신하들에게 위임하고 바야흐로 보필을 기대하여 융성과 태평을 도모하기를 기약하였다. 이때에 있어서 용(瑢)이 지친의 처지에 있으면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축적하였다. 과인이 어려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간계를 쓰면 왕위를 혹시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후하게 은혜를 베풀어 사람에게 명예를 구하고 여러 소인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사사 집에서 당파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부도한 흉계를 품어서 만 가지로 노려왔다.
간신(姦臣)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이양(李讓)ㆍ민신(閔伸)ㆍ조극관(趙克寬) 등은 내가 총애하여 맡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몰래 흉악한 화란을 일으킬 계책을 품어 음으로 당(黨)과 후원을 만드니 모두들 흡연히 따라 붙었다. 나의 나이 어리고 약함을 멸시하여 나의 위엄과 복을 도둑질하였다.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은혜를 사사로 팔았다. 벼슬은 함부로 친척과 인척에게 돌리고, 뇌물은 공공연하게 안팎에 행하였다. 부역이 번거로워서 공사(公私)가 함께 곤하고,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어 재물과 힘이 다하였다.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임금의 덕택을 막아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도(公道)는 일식(日食)이 일어나듯이 어두워지고, 사의(私意)는 홍수(洪水)처럼 흘러 넘쳤다. 하늘이 위에서 노하여도 내가 알지 못하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여도 내가 깨닫지 못하였다.
숙부가 일찍이 그 연고를 분하게 여기어 글을 올려 항쟁하였으나 내가 또한 심상하게 여기어 살피지 못하였다. 대개 용(瑢)에게 붖좆는 것이 저와 같으므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것이 이와 같았다. 흉한 꾀가 더욱 깊이 들어가서 매일 밤 사사로이 모이었다. 안으로는 근시(近侍)와 환관을 통하여 동정을 살피고, 밖으로는 방진(方鎭)과 장수를 달래어 몰래 날짜와 시기를 약속하였다. 도당(徒黨)이 이미 많아지매 형세가 날마다 치성하였다. 큰 간흉(奸兇)이 뿌리를 단단히 박아서 뽑을 수가 없는데, 과인의 몸은 고립이 되었으니 무엇을 하겠는가. 종사와 국가의 편안하고 위태로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었다.
숙부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를 갈고 마음을 썩혔다. 천지가 용납하지 않으니 군흉(群兇)들의 악역(惡逆)을 참을 수 있으며, 사직(社稷)이 기뻐하실진데 어찌 일신의 사생을 돌아보겠는가. 웅대한 결단과 영명한 계책으로 정의(正義)와 용맹을 분발하여, 이 충의(忠義)의 장사를 거느리고 저 흉악한 무리를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쓸어버리니 조정이 서로 경하하고 길가는 사람이 다투어 기뻐하였다. 나라의 근본이 거의 흔들렸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고, 신기(神器)가 장차 기울어지려다가 다시 안정되었다. 이것은 대개 꾀를 단단히 하고 마음을 깊이 가져, 정성은 귀신을 감동시키고 충성은 일월(日月)을 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흉(群兇)을 능히 잠깐 사이에 베어 하루아침이 지나기 전에 맑아졌다. 공렬이 매우 빛나서 고금에 탁월하다. 숙부가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었겠는가. 진실로 천지 조종의 신령이 모르는 가운데 도와서 숙부의 손을 빌려 화란을 평정한 것이다. 그 출생(出生)함이 기수(氣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충성을 권념(眷念)하여 장수와 정승의 권세를 겸하게 하였다.
나는 속마음을 피력하면서 위임하였고, 경은 대신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여 충성을 극진히 하였다. 제왕의 어진 은혜를 권하여 선포하였고 권간의 나쁜 정치를 모조리 개혁하였다. 성색(聲色)에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같이 편안하게 만들었으며, 병과(兵戈)를 쓰지 않고 백성들이 태평을 누리도록 만들었다. 몸이 나라의 기둥이 되매 사람들이 의지하여 무겁게 여기고, 공이 하늘에 덮였는데 스스로 낮추고 겸손해 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고자(孤子)를 부탁하고 목숨을 의지할 수 있는 사직의 중신(重臣)이라 하겠다. 옛적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베어 왕가(王家)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큰 의리가 소소하여 만고에 빛났다. 지금을 미루어 옛일과 비교하면, 세상은 다르나 부합된 것은 같다.
이에 공훈(功勳)을 책정하여 정난(靖難) 일등공신으로 삼아 분충장의 광국보조 정책정란(奮忠仗義匡國輔祚定策靖難)의 호(號)와 식읍일천호 식실봉오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五百戶)를 내리고, 해마다 별봉(別俸) 6백 석, 노비 6백 구, 밭 5백 결, 황금 25냥, 백은 1백 냥, 안장을 갖춘 말 네 필, 안팎 옷감 열 끗, 사(紗)와 나(羅) 각각 다섯 필, 옷 한 벌, 서각대(犀角帶) 한 개, 사모(紗帽)ㆍ갓ㆍ신 등 여러 물건을 내린다. 경의 공은 많은데, 나의 상은 적으니, 경이야 무슨 바람이 있을까마는, 내게 있어서는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지극한 뜻을 생각하여 받아주기 바란다.
아, 경은 주공(周公)의 아름다운 재주가 있고, 또 주공의 큰 공훈을 겸하였으나, 나는 오히려 성왕(成王)의 어린 나이로 또한 성왕의 어려움을 만났다. 이미 성왕이 주공에게 책임하던 것으로 숙부에게 책임하였으니, 마땅히 주공이 성왕을 돕던 것으로 과인을 도우라. 그리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 닦아가면 성공하지 못할 염려가 무엇이 있겠는가. 충렬(忠烈)을 돌아보매 실로 의지하는 마음이 깊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