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조선11대 왕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아베베1 2011. 8. 17. 17:34

연려실기술 제7권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中宗)


중종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 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은 휘는 역(懌)이며, 자는 낙천(樂天)으로,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이다.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홍치(弘治) 원년 무신년(1488) 성종 19년 3월 5일 기사일에 낳았다. 처음에는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封)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1506) 9월 무인일에 즉위하여 가정(嘉靖) 23년 갑진년(1544) 11월 14일에 인종(仁宗)에게 전위(傳位)하였으며 15일 경술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하니, 재위 39년이요, 수는 57세이다.명(明) 나라에서 공희(恭僖) 공경히 위를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조심스럽고 공순함을 희(僖)라 한다. 라는 시호를 주었다. 능은 정릉(靖陵) 광주(廣州) 선릉(宣陵) 동편 건좌(乾坐 북서)이다. 을사년 2월에 처음 고양(高陽) 희릉(禧陵)에 모셨다가 명종(明宗) 17년 임술 9월 4일에 이장하였으며, 표석이 있다. 명종 때 홍춘경(洪春卿)이 지은 묘지에 정릉으로 이장한 자세한 사적이 적혀 있다. 이다.
○ 비(妃) 공소순렬단경 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좌의정 증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 수근(守勤)의 딸이다. 성화(成化) 23년 정미년(1487) 성종 18년 1월 14일에 태어났고, 기미년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부부인(府夫人) 군호(君號)는 자세하지 않다. 에 봉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 (1506) 9월 2일에 중전이 되고, 9월 9일에 사제(私第)로 쫓겨났으며 가정 정사년(1557) 명종 12년 12월 7일 병술에 승하하였다. 본가(本家)의 기록에는 12월 5일로 되어 있으나 실록(實錄)에는 7일로 기일(忌日)을 삼고 있으므로 지금 그에 따르고 있다. 수는 71세이다. 영조(英祖) 15년 기미년(1739)에 복위(復位)되어 종묘에서 제사 지낸다. 능은 온릉(溫陵) 양주(楊州) 서쪽산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 해좌(亥坐 북서)이다. 이다.
○ 계비(繼妃) 선소의숙장경 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 정헌공(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靖憲公) 여필(汝弼)의 딸이다. 홍치 4년 신해년(1491) 성종 22년 7월 6일 경진에 호현방(好賢坊) 집에서 태어났다. 정덕 병인년(1506)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정묘년에 마침내 왕비로 책봉(冊封)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 10년 3월 2일 기미에 경복궁(景福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하니, 수는 25세이다.숙신명혜(淑愼明惠) 숙(淑) 자가 겹치기 때문에 어첩(御牒)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라는 휘호(徽號)를 올렸다. 명종 정미년에 선소의숙(宣昭懿淑)이라는 휘호를 더 올렸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능은 희릉(禧陵) 고양(高陽) 남쪽 원당리(元堂里) 간좌(艮坐 북동)이다. 처음에는 을해년 윤4월에 광주(廣州) 헌릉(獻陵) 바른편 산에 모셨다. 김안로(金安老)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중종 32년 정유에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다.
○ 계비(繼妃) 성렬인명문정 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 정평공(領敦寧府事坡山府院君靖平公) 지임(之任)의 딸이다. 홍치 14년 신유년(1501) 연산 7년 10월 22일 정묘에 태어나 정덕 정축년(1517)에 왕비로 책봉되어 태평관(太平館)에서 가례를 행하였다.명종 정미년에 성렬(聖烈)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9월에 다시 인명(仁明)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 44년 을축(1565) 명종 20년 4월 7일 계유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수는 6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능은 태릉(泰陵) 양주(楊州) 남쪽 노원면(蘆原面) 임좌(壬坐 북)이다. 을축년 7월 1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아들 아홉과 딸 열 하나를 두었다.
사(嗣) 인종대왕(仁宗大王)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았다.
사(嗣) 명종대왕(明宗大王)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았다.
1녀 효혜공주(孝惠公主) 장경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로,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아버지는 안로(安老)이다.
2녀 의혜공주(懿惠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아버지는 첨지 승권(承權)이다.
3녀 효순공주(孝順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능원군(綾原君) 구사안(具思顔)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아버지는 현감 순(淳)이다.
4녀 경현공주(敬顯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영천위(靈川尉) 신의(申檥)로,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아버지는 목사 수경(秀涇)이다.
5녀 인순공주(仁順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1남 복성군(福城君) 미(嵋)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낳았다. ○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현감 증 찬성(贈贊成) 인범(仁範)의 딸이다. 정해년에 화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신성군(信城君)이 봉사(奉祀)한다.
2남 해안군(海安君) 희(㟓) 숙의 홍씨(淑儀洪氏)가 낳았다. ○ 부인은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진산군(晉山君) 증 찬성 홍(泓)의 딸이며, 후처는 거창 신씨(居昌愼氏)로, 참봉 증 찬성 홍유(弘猷)의 딸이다.
3남 금원군(錦原君) 영(岭)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낳았다. ○ 부인은 해주 정씨(海州鄭氏)로, 도사 증 찬성 승휴(承休)의 딸이다.
4남 영양군(永陽君) 거(岠)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 부인은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판관 증 찬성 세형(世亨)의 딸이다.
5남 덕양군(德陽君) 기(岐) 숙의 이씨(淑儀李氏)가 낳았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판서 증 찬성 찬(纘)의 딸이다.
6남 봉성군(鳳城君) 완(岏)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낳았다.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 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정(正) 증 영상(贈領相) 유인(惟仁)의 딸이다.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 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로, 판중추부사 증 영의정 세호(世虎)의 딸이다.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낳았다. ○ 남편은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아버지는 참의 헌윤(憲胤)이다.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 경빈 박씨가 낳았다. ○ 남편은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로, 정해년에 화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서주(叙疇)이다.
3녀 정순옹주(貞順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 남편은 여성위(礪城尉) 문단공(文端公) 송인(宋寅)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아버지는 첨지 지한(之翰)이다.
4녀 효정옹주(孝靜翁主) 숙원 이씨가 낳았다. ○ 남편은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으로,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아버지는 부사 침(琛)이다.
5녀 숙정옹주(淑靜翁主) 숙원 김씨가 낳았다. ○ 남편은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아버지는 부정(副正) 신경(信璟)이다.
6녀 정신옹주(靜愼翁主)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 남편은 청천위(淸川尉) 한경우(韓景祐)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아버지는 현감 자(慈)이다.
○ 신비(愼妃)가 사제로 쫓겨나자 예조 판서 송일(宋軼)과 참판 정광세(鄭光世)가 아뢰기를, “신씨가 나갔으니 처녀를 뽑아 내직(內職)을 갖추게 하고, 또 중궁을 책봉하는 일도 미리 거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정묘년(1507) 6월에 좌의정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비를 책봉할 것을 청하니, 곧 윤 숙원(尹淑媛)을 왕비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조야기문》
○ 정묘년에 김안국(金安國)이 중시(重試)에 뽑혀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의 혼정(昏政)의 잔재가 남아서 상례(喪禮)가 행해지지 않은 채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김안국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삼강(三綱)은 천지의 큰 도리로서 옛 사람이 ‘하늘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라고 하였으니 하루도 폐할 수 없습니다. 폐주(廢主 연산군)가 단상법(短喪法)을 쓴 뒤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어버이를 잊고 예를 저버려 윤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분명하게 하교를 내려 특별히 권선징악하는 법을 보여 풍속과 교화를 세우소서.” 하였다. 《조야기문》
○ 무진년 검열 권벌(權橃)이 봉교 이희증(李希曾)ㆍ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ㆍ정웅(鄭熊), 검열 문관(文瓘)ㆍ김희수(金希壽)ㆍ소세양(蘇世讓) 등과 함께 무오 사국(戊午史局)에 관한 일을 논계(論啓)하며, 이극돈(李克墩)을 추죄(追罪)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원통함을 풀어주기를 청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 무진년에 중종이 직접 글을 써서 정원에 내리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그 허물을 듣기 좋아하는 이는 적고 듣기 싫어하는 이는 많았다. 신하로서 그 임금의 허물을 알고 과감히 간(諫)하여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는 곧 곧은 신하요, 그 임금의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하느라 잘한다고 하는 자는 곧 아첨하는 신하이다.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밖으로는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부끄러울 만한 일이 있었으니, 나는 감히 하지 못한다.만약 과실이 있다면 외정(外政)의 신하들도 모두 다 말해야 하는데, 더구나 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 있어서랴. 바야흐로 지금 나의 잘잘못에 대해 너희들이 각각 숨김 없이 말하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죄주지 않겠다.” 하였다. 이어 황모필(黃毛筆) 40자루와 먹[墨] 20홀(笏)을 정원과 보문관(寶文館)에 내려주며 이르기를, “지금 하사한 붓과 먹은 무릇 나의 과실을 숨김 없이 말하여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갑술년에 이조에 특별히 유시하여 고세보(高世輔)를 숨김없이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삼았다. 세보의 아들 증(曾)이 혜민서 교수로 있었는데, 이조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또 활인서 제조 하해종(河海宗)과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세보와 해종은 모두 연산조 때 음란을 일삼던 신하인데, 세보가 더욱 연산군의 음란을 부추긴 엉큼한 자였다. 반정(反正) 후에 이내 수의(首醫)가 되고 청탁질을 많이 하여 이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벼슬을 준 것이다. 임금은 또 잡술(雜術)에 마음을 두어 지관(地官)과 복자(卜者)들을 모두 불러 보고 어의(御衣)를 내려주었는데, 술객(術客) 조륜(趙倫)은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음애일기(陰崖日記)》
○ 과거에 완성군(莞城君) 귀정(貴丁)을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승진시켜 군(君)을 봉하였는데, 3년 뒤에 간관들이 반정 때에 하찮은 공으로 높은 벼슬을 받은 이들을 논열(論列)하여 몇 달을 두고 항쟁(抗爭)하는 소(疏)를 올렸다. 이에 임금은, 완성군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이고 또 종친의 늙은이이므로 특별히 고칠 수 없다고 유시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윤허하였다. 심사순(沈思順)이 지은 완성군의 <묘표(墓表)>.


 

錦湖遺稿
 
有明朝鮮國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靖陵誌 a_032_236a


恭惟我中宗大王諱某。成宗第二子也。成宗032_236b在潛邸。聘領議政韓明澮之女。及卽位。封爲妃。無子薨。陞淑儀尹氏爲妃。卽判奉常寺事起畎之女。生世子。妃性行不淑。廢之。又陞淑儀尹氏爲妃。卽右議政壕之女。弘治元年戊申三月己巳。誕生大王。封晉城大君。少有異質。成宗特奇愛之。歲甲寅。成宗薨。嗣君失道。宗社將傾。丙寅九月。知中樞府事朴元宗,前參判成希顏,吏曹判書柳順汀。首建大義。承慈順王大妃敎。廢爲燕山君。迎大王於私第。大王牢讓不獲。卽位於景福宮。遂請命于朝。下敎凡非罪流竄者悉皆召還。枉被刑戮者咸加褒贈。除害032_236c民之政。復先王之舊。朝野抃舞。如獲重生。修明學校。崇奬節義。苟有一善一行。無不褒奬。至於淸白忠義之後。亦皆收敍。博選弘儒碩士。置諸經幄。日三進講。夜又召對。論難經義。商確治道。下素屛於弘文館。書歷代帝王爲治之道。以備觀覽。丁卯三月。幸學。橫經問難。八月。命印領三綱行實。戊辰二月。帝遣太監李珍,陳浩。賜誥命冕服。封爲王。壬申八月。行養老宴于闕庭。六月。遣官以小牢。祀崇義殿。殿卽高麗王氏之廟也。命製酒戒。須賜臣工以警之。丁丑五月。王以世子三歲能知學文向方。手書箴詞以戒。皆古032_236d聖賢格言也。母妃未寧。王晝夜侍側。湯藥必親躬禱後園。未幾疾瘳。人以爲誠孝所感。王幸學。講論經義日昃而罷。敎曰。學校。風化之原。人材之府。爲國之道。莫重於此。予今竭誠圖治。夙夜軫念。今賜土田臧穫。以爲養育賢材之資。庚辰四月。冊封世子。辛巳五月。帝遣太監陳浩等來賜命。壬午十月。行世子冠禮。頒赦境內。所以重國本也。癸未。命印譯解小學。宣布中外。欲使閭巷婦人小子。皆得以知之。八月。島夷犯上國地面。搶虜人民。漂到我界。邊將俘斬以聞。王遣臣悉獻俘馘。帝嘉之。降勅賜物032_237a褒美。戊子。幸驪州。祭英陵。賜州民田租之半。庚寅八月。母妃薨。喪制一依禮文。常處外閤。卒哭後。大臣請還大內。王不從。甲午八月。幸學大射禮。乙未九月。幸開城府。祭齊陵。翌日。幸學取士。賜學生米百斛。庚子夏。大旱。遍禱于山川。不雨。王去輦乘轝。曝日親禱于風雲壇。遂得三日雨。甲辰冬十月。王有疾。十一月十四日。疾大漸。召左議政洪彥弼,右議政尹仁鏡入臥內。敎曰。予疾甚。欲傳位於世子。翌日庚戌。薨于正寢。享年五十七。王仁慈忠孝。力學慕古。勤於聽納。存恤民隱。尤謹祀事。寅恭祗畏。至誠事032_237b大。終始不替。培養人才。文敎大興。尊禮大臣。國事必與謀議而後行。撫愛宗戚。皆得其歡心。敎戒王子。盡其義方。無有驕奢之習。多聚經術之士。講明性理之學。夜以繼日。亹亹忌倦。無遊畋聲色之娛。絶玩好奢靡之事。在位三十九年。人民樂業。生齒日繁。島夷山戎。慕義歸順。邊境無虞。不識兵革。致治之美。將升大猷。而八音遽遏。嗚呼慟哉。我殿下亮陰在疚。哀慕罔極。率群臣上尊諡曰。徽文昭武欽仁誠孝。廟號中宗。以其撥亂反正。中興功德。儷美商宗周宣也。乙巳二月九日某甲。安厝于高陽郡治南蘆洞壬坐丙向之原。032_237c卽章敬王后所厝禧陵之右。改號曰靖。初王在潛邸。聘愼守勤之女爲妃。以守勤有罪廢之。陞淑儀尹氏爲妃。卽領敦寧府事汝弼之女。辛未。生一女。曰孝惠公主。下嫁延城尉金禧。乙亥二月二十五日。誕我殿下。仍有疾。越三月二日薨。歲丁丑。聘領敦寧府事尹之任女爲妃。殿下在東宮。聘贈右議政朴墉之女爲嬪。及卽位。封爲妃。王妃尹氏爲王大妃。大妃生一男四女。曰懿惠公主。下嫁淸原尉韓景祿。曰孝順公主。下嫁綾原尉具思顏。曔顯公主。下嫁靈川尉申檥。曰諱封慶原大君。娶別坐沈綱女。次幼。敬嬪032_237d朴氏生一男二女。曰嵋。福城君。娶縣監尹仁範女。曰惠順翁主。下嫁光川尉金仁慶。曰惠靜翁主。下嫁唐城尉洪礪。煕嬪洪氏生二男。曰岭。錦原君。娶都事鄭承休女。曰岏。鳳城君。娶正郞鄭惟仁女。淑媛洪氏生一男。曰㟓。海安君。娶參奉愼弘猷女。淑媛李氏。生二女。曰貞順翁主。下嫁礪城尉宋寅。曰孝靜翁主。下嫁淳原尉趙義貞。淑容安氏生二男二女。曰岠永陽君。娶縣監安世亨女。曰岹。德興君。娶中樞府事鄭世虎女。曰靜順翁主。下嫁淸川尉韓景祐。淑媛李氏生一男。曰岐。德陽君。娶參議權讚女。淑容金氏生一女。曰032_238a淑靜翁主。下嫁綾昌尉具澣。孝惠生一女。適幼學尹百源。懿惠生一女。幼。嵋生一女。適幼學崔禮秀。岭生一女。幼。惠靜生一女。適幼學尹琥。貞順生一男。孝靜生一男。靜愼生一男。岐生一男。皆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