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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아베베1 2011. 8. 18. 10:13

 

 

                                        ◆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미륵봉의 모습 이다  ◆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단종(端宗)


단종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 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은 이름은 홍위(弘暐)이니 문종의 큰아들이다. 현덕왕후가 정통(正統) 6년 신유(辛酉) 세종 23년 7월 23일 정사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왕을 낳았다. 무진년 세종 30년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冊封)되고,경태(景泰) 원년 경오(庚午) 7월에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었으며, 임신년 5월에 왕위에 올랐다. 을해년 윤 6월 11일 을묘에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전하고, 7월 갑신에 높여 공의 온문 태상왕(恭懿溫文太上王)이 되었으며 천순(天順) 원년 정축 6월에 궁밖으로 물러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가 《국조보첩(國朝寶牒)》 구주(舊註)에는 ‘을해년에 강봉해서 군으로 되다’했고,《현덕왕후 천릉지(顯德王后遷陵誌)》에는 ‘병자년 5월에 밖으로 물러나 군(君)으로 강봉되었다’했고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정축년 6월에 밖으로 물러나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고 했다. 10월 24일에 영월(寧越)에서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는 3년이요, 상왕위에 있은 지는 2년이며, 나이는 17세였다.숙종(肅宗) 7년 신유에 대군으로 추봉(追封)되고 24년 무인에 왕위에 추복되었으며, 정조 6년 임인에 대왕에 대한 보감(寶鑑) 한 권을 엮어서 올렸다. 능은 장릉(莊陵)이다. 영월 북쪽 동을지(冬乙旨) 신좌(辛坐)에 있고 표석(表石)이 섰다. ○ 《선원보략(璿源譜略)》
○ 왕비 의덕단양제경정순 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송씨는, 본관은 여산(礪山)이오 판돈녕부사 여양군 증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判敦寧府事礪良君贈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 현수(玹壽)의 딸이다. 정통 5년 경신에 탄생하여 갑술년 정월 22일 갑술에 왕비에 책봉되고,을해년 7월에 높여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되었다가 정축년(1517) 6월에 강봉되어서 부인(夫人)으로 되었으며, 정덕(正德) 16년 신사(1521) 중종16년 6월 4일 갑신에 죽으니, 수(壽)는 82세이다. 숙종 무인년(1698)에 왕비위에 추복되었다. 능은 사릉(思陵)이다. 양주(楊州) 남쪽 군장리(群場里) 계좌(癸坐)에 있고 표석(表石)이 있다. ○ 《선원보략(璿源譜略)》
○ 세종신유년에 원손(元孫)이 탄생하니, 세종은 크게 기뻐하여 곧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군신의 조하(朝賀)를 받고 전 경내 죄인을 사하였다. 《모재집(慕齋集)》 《현릉개장지(顯陵改葬誌)》
○ 문종이 승하할 때 세자는 어리고 종실(宗室)은 강성한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에게 특히 명하여,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임금을 보필하라.” 하였다. 《야언별집(野言別集)》
○ 임신년에 단종이 왕위에 오르니, 나이가 12세라 영의정 황보인ㆍ좌의정 남지(南智) 병으로 휴가 중에 있었음ㆍ우의정 김종서 새로 임명되었음.ㆍ좌찬성 정분(鄭苯) 남지를 대신하여 정승이 되었음ㆍ우찬성 이양(李穰)ㆍ병조 판서 민신(閔伸) 후에 조극관(趙克寬)이 대신함ㆍ이조 판서 이사철(李思哲)ㆍ호조 판서 윤형(尹炯)ㆍ예조 판서 이승손(李承孫)ㆍ지신사(知申事) 강맹경(姜孟卿)ㆍ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신석조(辛碩祖) 등이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보좌하였다.
○ 헌부(憲府)가 정부의 당상관 및 여러 대군의 집에 잡인의 방문(분경(奔競))을 금하자고 청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현로(李賢老)가 대신에게 헌책(獻策)해서 이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세조는 안평대군과 도승지 강맹경을 통하여 여러 집정(執政)에게 “우리들에게 잡인의 방문을 금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의심함이니 우리들은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살 것인가. 분경에 관한 법은 일찍이 세종 및 대행왕(大行王)이 불가하다고 하셨다. 지금 임금이 그 즉위 초에 제일 먼저 종실을 의심해서 방금(防禁)을 가하니 이는 착한 이름을 펴지 못하고 고립되어 도울 이가 없게 되지 않겠는가, 이는 분명히 스스로 그 우익(羽翼)을 자르는 것이다.우리들은 국가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는 몸이니 감히 무심코 있을 수 없어서 말하는 것이니 이 위태롭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마음과 힘을 기울여 여러 대신과 더불어 같이 난관을 구제하려 했는데, 어찌 도리어 시기와 의심을 받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우리들은 주상에게 글을 올려 하소연할까 하다가 혹시 유사의 실수인지 몰라서 먼저 대신에게 고한다.”고 말하니, 황보인은 크게 놀랐으나 짐짓 모른 체 하면서 헌부에 허물을 뒤집어 씌웠다. 《황토기사(黃兎記事)》 ○ 이현로(李賢老)의 죽음은 다음 정난(靖亂)의 사항에서 보라.
○ 계유 원년, 이때에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여덟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근심하였다. 황보인ㆍ김종서ㆍ정분이 삼공이었는데, 종서는 지략이 많아 당시 사람이 대호(大虎)라 평하니,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였다. 《동각잡기》
○ 봄에 대사헌 기건(奇虔)은 글을 올려 시사를 극력 간하니 첫째 대신이 정부를 겸령(兼領)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대신을 높이고 제조의 임무에 전심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이며, 둘째는 창덕궁 수리낭청(修理郞廳)을 혁파하라고 청했으며, 셋째는 내의(內醫)김순의(金循義)ㆍ최읍(崔浥)ㆍ변한산(邊漢山) 등이 선왕의 병환을 돌볼 때에 태만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이것을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영상 황보인 등은 조종조에도 모두 대신으로써 겸령시켰다고 하여 기건의 의론을 따르지 아니하고,다만 김순의 등을 내의에서 제명하였다. 얼마 안 가서 기건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나가고 다시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옮겼다. 《야언별집(野言別集)》
○ 계유년(1453)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이룩되었다. 처음에 세종이 집현전 유신(集賢殿儒臣)에게 명하여 《역대병요》를 편찬하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책이 비로소 완성되자, 세조는 대궐에 나아가 편찬에 관여한 여러 선비에게 관자(官資)를 올리고,상급(賞給)을 주어 그 수고에 보답하기를 청하니, 이에 성삼문ㆍ유성원(柳誠源) 등 그 일에 참여한 이는 다 상급과 관자를 받았는데, 하위지(河緯地)만은 그때 사헌부 집의가 되어 중훈(中訓) 자급으로써 중직(中直)에 올랐으나 극력 사양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그는 “지금 임금이 어리고 나라에 의심이 짙은데 종실이 관직과 상여로써 조신을 농락하여서는 안 되고, 조신들도 종실에게 농락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여러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그 사양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하루는 면대해서 생각한 바를 다 말씀드리겠다고 청하였다.임금이 이를 대신에게 물으니, 황보인ㆍ김종서 등은, “대군이 전례에 따라 상을 청한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오며, 세종조에서는 위지가 찬집(撰集)한 공로로써 상급과 관자가 있어도 사양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단독으로 이와 같이 함은 옳지 못하오며, 일개 유신의 저 잘난 체 하려는 것 때문에 일을 바꿀 수 없으니 면대를 허락하지 마소서.” 하였다.위지는 또 아뢰기를, “세종조에서는 은혜가 위에서 나왔으므로 받았지만 지금은 은혜가 아래에서 나오니 받지 아니하려는 것이오며, 신은 형세가 매우 궁하고 사리가 극에 이르렀으니 조정에 설 수 없습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부득이 집의를 갈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명하였다. 얼마 후에 위지는 병을 핑계대고 시골에 내려갔다. 《서애집(西崖集)》 《정원일기(政院日記)》


 

[주D-001]고명 :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것.
[주D-002]대행왕 : 임금이 죽은 뒤 시호(諡號)를 아직 올리기 전의 칭호이니, 여기서는 문종(文宗)을 이른다.
[주D-003]여덟대군 :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ㆍ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ㆍ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등이 여덟 사람의 대군을 가리킨다.
[주D-004]삼공 : 3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주D-005]내의 : 내의원(內醫院)의 의관(醫官).
[주D-006]중훈 : 중훈대부(中訓大夫)를 이름이니, 종삼품(從三品) 관계(官階)이다. 중직대부(中直大夫)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