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아베베1 2011. 8. 23. 21:54

 

연려실기술 제6권

 예종조 고사본말(睿宗朝故事本末)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성화(成化) 4년 무자에 남이와 강순(康純)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신숙주 등 36명을 공신으로 녹(錄)하고 그 칭호를 익대 공신(翊戴功臣)이라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후에 공신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고사촬요》
○ 남이는 의산위(宜山尉) 휘(暉)의 아들이고 태종의 외증손이다. 용맹이 특별히 뛰어나서 이시애(李施愛)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에 선두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1등 공으로 책정되고, 세조가 벼슬 등급을 뛰어 병조 판서로 임명하였더니, 당시 세자이던 예종은 그를 몹시 꺼리었다. 이때에 와서 예종이 새로 왕위에 올랐는데, 때마침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남이는 대궐 안에서 숙직하다가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배치하는 형상이다.” 하였다. 유자광은 평소에 남이의 재능과 명성과 벼슬이 자기 위에 있는 것을 시기했는데, 이날 또한 대궐에 들어와 숙직하다가 벽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서 그 말을 엿들었다. 곧 그 말에 거짓을 꾸며 보태어, 남이가 반역을 꾀한다고 은밀히 아뢰어 옥사가 일어나고 마침내 처형되었으니, 이때 남이의 나이는 28세였다. 《국조기사》 《동각잡기》
○ 어떤 사람이 남이가 공주(그의 어머니)와 관계하였다고 밀고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명으로써 그를 사형시켰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남이가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 豆滿江波飮馬無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 男兒二十未平國
뒷 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요 / 後世誰稱大丈夫

하였다. 그 말 뜻이 발호(跋扈)하여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가 어려웠다. 《지봉유설》
○ 남이가 국문을 당할 때에 강순(康純)이 영의정의 직책으로서 들어와 참관하였는데 남이가 “강순도 이 모의에 간여했습니다.” 하였다. 강순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밝으신 임금을 만나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는데 또 무엇을 구하려고 남이의 역모에 간여했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그렇게 여기었다.남이가 다시 아뢰기를, “전하께서 그의 숨기는 말을 믿으시고 죄를 면해 주신다면 어찌 죄인을 찾아 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강순도 국문케 하니 강순은 나이 이미 80세였으므로 고문을 견뎌 내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함께 죽었다. 그가 부르짖기를,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나를 무함하느냐?” 하였다. 남이는 “원통한 것은 나와 네가 매한가지다.네가 영의정이 되어 나의 원통한 것을 알고도 말 한 마디 없이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히 죽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강순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못하였다. 고발한 자와 추관들을 모두 훈공에 녹하고 그 자손들도 이익을 누리었다. 그러나 남이가 죽은 것은 지금까지도 그 죄명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변하지 못한 채이다. 《부계기문》
이때 남이가 심한 형벌로 다리 뼈가 부러지자, “강순이 나를 시켰다.”고 하였다. 그는 웃으면서 강순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복하지 않은 것은 뒷날에 공을 세울 것을 바랐던 때문인데 지금 다리 뼈가 부러져 쓸모 없는 병신 몸이 되었으니 살아 있은 들 또한 무엇을 하리요.나 같은 젊은 자도 오히려 죽은 것이 아깝지 않은데 머리털이 허옇게 센 늙은 놈은 죽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고의로 너를 끌어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은 “병조 판서 허종(許琮)도 역모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때 허종이 입시했다가 황송하여 땅에 엎드렸다. 남이는 “허종은 충신이므로 이것을 알지 못하오니 원컨대,이 사람은 쓰시고 의심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형을 당할 적에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면서, “젊은 애와 잘 지낸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하는구나.” 하였다. 지금도 남이의 옛 집터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감히 살지 못하고 채소 밭이 되었다. 《기재잡기》
○ 남이가 도총관이 되니 요속(僚屬)들이 으레 그 문 앞에 와서 명함을 내밀었으나 김맹(金孟) 일손(馹孫)의 아버지 만은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으로 있으면서 홀로 그렇지 아니 하였다. 남이가 죽음을 당할 때 그 집을 수색하여 명함을 둔 자를 잡아서 죽였는데 김맹만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해동잡록》
○ 일찍이 귀성군(龜城君) 준(浚)이 도총관이 되고 남이가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한계희(韓繼禧)가 세조에게 은밀히 아뢰기를, “준은 종실이니 금군을 맡을 수 없으며, 남이는 성질이 거칠고 사나우니 병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세조가 그 말을 받아들여 바로 그날 모두 해임시켰다. 이때에 와서 남이는 과연 형벌에 죽고, 준도 또한 그 후에 폐출되었다. 《사가집(四佳集)》의 한계희비(韓繼禧碑)
○ 일찍이 권람(權擥)이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하였다. 권람이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장이는 “이 분은 반드시 나이 젊어서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합니다.” 하였다. 자기 딸의 수명은 또 보게 하였더니, “이 분의 수명을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권람은 그 말에 따랐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극진히 입었으며 28세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람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 《부계기문》
민간에 전하기를, 남이가 젊었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보자기 위에 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그 가는 대로 따라 갔더니, 그 종은 어떤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물었더니, 주인 집 작은 낭자가 별안간에 죽었다고 하였다.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 하자, 그 집에서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하였다. 남이가 문에 들어가 보니 분 바른 귀신이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다가 남이를 보는 즉시 달아났는데, 그러자 낭자는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자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남이가 “어린 종이 가져온 상자 속에는 무슨 물건이 있었더냐?” 하고 물었더니, “홍시가 있었는데 낭자가 이 감을 먼저 먹다가 숨이 막혀서 넘어졌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가 본 대로 상세히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하였더니 남자가 살아났다. 이 낭자는 곧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인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좋은 날을 가려 혼인을 정하였다고 한다. 《국조기사(國朝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