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공 문성공 (시조공)/전주최공 시조공 산소

전주최공 문성공 휘 아 (시조공 산소 탐방)

아베베1 2011. 8. 29. 19:43

 

 

 

 

 

 

 

 

 

 

 

 

 

 

 

   전주최씨 시조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묘

완산부개국백 문열공(文烈公)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완산군 (完山君)에 봉해진 최아(崔阿)의 묘다. 우뚝 솟은 주산아래 안산이 가깝게 옥대사를 두르고 있으며 주위에 사격들이 장관이다. 누구나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전주최씨는 고려조와 조선조 양조를 거쳐 명문가로 이름 높은 가문이다.
조선조에만 109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최씨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이중에서 정승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을 배출했다.

[문성공 제단 비문(祭壇 碑文)]

"우리 동방의 전주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
공의 휘는 아이고 벼슬은 문하시중으로 문성은 공의 시호이다. 공은 네 분의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 최용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최용각은 검교대호군을 지냈으며 셋째아들 최용갑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를 지냈고 막내아들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
공의 후손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와 중랑장공 최용봉의 후손만 하더라도 향사(享祀)가 열 여섯이고 정려(旌閭)가 여섯이며 문과 급제가 41명 무과 급제가 67명이고 생원과 진사가 84명이다. 그 외의 대소 관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여기에다 다 적을 수가 없다.


할머님에 대해서나 공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산소의 위치 등의 기록은 오랜 세월과 그 동안의 수많은 전쟁으로 없어져 전해오지 않는다.
전주 주덕산에 있는 분토동에는 전주최씨의 선산이 있고 또 옛날 노인들의 입을 통해 공의 현손 존양당공 최덕지(存養堂公 崔德之)의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 무덤(大人葬)이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정조년간 병진년에 봉분(封墳)을 열고 발굴 조사를 했으나 광(壙) 위에는 넓은 돌 하나가 덮여 있을 뿐 다른 유물(遺物)이나 지석(誌石) 등 공의 산소라고 증거 할 만 한 자료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다음해인 정사년에 후손들이 합의하여 산소라고 전해오는 장소에서 북쪽으로 수궁허(數弓虛)에 제단(祭壇)을 쌓고 위토(位土)를 두어 제사를 올리니 전해오는 이야기만 그대로 믿기 어렵다.
경진년에 다시 표석(標石)과 산문(山門)을 세워 예전에 못 이룬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 눈이 미치지 못하여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옛날 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조선 순조 21년 경진년 통훈대부 경기전령 이병운 근지"라고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