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휘 세영의 사위 송이석 묘갈명

縣監宋公墓碣 송이석 監察世榮之女

아베베1 2011. 9. 6. 21:04

13대조 휘 세영선조님의 사위 송이석  有諱彝錫字君叙者。尤菴從孫也

 

陶菴先生集卷三十三

 墓碣[三]
縣監宋公墓碣 a_195_176d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묘표(墓表)
감찰(監察) 증(贈) 참판(參判) 최공(崔公) 세영(世榮) 묘표

광해(光海) 난정(亂政)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앞장 서서 수모론(讎母論)을 주장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태학생(太學生) 최공 탁(崔公琢) 같은 분이 있어 많은 선비들의 앞에 서서 그의 흉물스럽고 간사함을 항장(抗章)으로 곧바로 배척하여 그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전려(田廬)에 앉아 세상을 잊고 살기를 10여 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우암(尤菴) 송 선생도 그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그의 어짊을 극구 찬양하였다.
그에게 장부다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공이 맏으로 휘는 세영(世榮) 자는 몽여(夢與)였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5) 1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중후하여 함부로 놀거나 장난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과거에 관한 공부를 하여 과거 마당에서 이름을 날려 경인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으면서 예도를 다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 아래에 살면서 오로지 농사지어 봉양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술년에 벼슬길에 올라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 되고 경자년에 봉사(奉事)에 올랐다. 을사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공이 그때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버지 상 때와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이 봉사로 있던 시절 경과(慶科)를 당하여 반궁(泮宮)에서 주점(做點)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국자장(國子長 성균관 대사성)을 공이 헐뜯었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공을 탄핵하고 체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국자장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이 무함인 것을 알고 공을 맨 먼저 복직시켜 영릉 참봉(寧陵參奉)을 제수하였다. 그 뒤 예에 따라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가 되었고, 인선대비(仁宣大妃 현종(顯宗)의 비)의 상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다스렸던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올랐다가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그 고을 선비 권감(權鑑)이 유현(儒賢)을 존중히 여긴다는 이유로 흉한 무리들이 원수로 여기고 방백(方伯)은 그것을 죄로 만들어 옥(獄)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정도를 지키며 확고부동하였다. 그리하여 방백이 그에 대해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감히 중상은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세력가의 자제가 읍기(邑妓)를 데리고 살면서 횡포가 심하자 공이 그를 용서없이 물리쳤는데, 그가 앙심을 품고 수의(繡衣)를 사주하여 공을 무함한 결과 1년 넘게 옥에 갇혔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어 풀려났다.
임술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책을 다한다는 칭송이 있었고, 가을에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기근이 거듭 닥친 때였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손을 써서 우졸(郵卒)도 되살아나고 마정(馬政)도 잘 되었으며, 어호(漁戶)의 징공(徵供)도 일체를 면제하여 쌓였던 폐단들이 씻은 듯 없어졌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은혜로움을 느끼었다. 질(秩)이 차고 나서 몇 년을 한가히 보내며 기력도 강건하다가, 병인년 5월 20일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74세였다. 처음에는 교하(交河)의 강교리(綱橋里)에 장사 지냈다가 병술년에 공주(公州) 읍 서쪽 곡화천(曲火川) 자좌(子坐)의 둔덕으로 이장하였는데, 그후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두 배위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숙인(淑人) 서씨(徐氏)가 부장되어 있다.
공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있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좌우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조상도 성경(誠敬)을 다하여 받들었다. 아우 세장(世章)과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세장이 일찍 죽자 모든 일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전답까지 팔아 장례를 치렀고, 아비 잃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겨레붙이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사귄 친구는 모두가 당대의 현인이요 군자였다. 공은 평소 조급해 하거나 폭언하는 일이 없었고 각박한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술도 무척 좋아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기 몸가짐은 매우 엄하게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하여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비를 세워 송덕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청렴한 절조야말로 공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될 정도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가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돌아오고 나면 온 집 안이 썰렁하였으나 자신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공은 항상 보첩(譜牒)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1권의 책을 만들어두고 그것을 화목을 다지는 자료로 삼았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국의 시중(侍中)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아조에 와서 담(霮)이라는 이는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었고, 덕지(德之)라는 이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세상에서 그를 연촌 선생(煙村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고조인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렀다. 증조의 휘는 희수(稀壽)로 판관(判官)이고, 조부의 휘는 응하(應夏)로 현감이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충익(忠益)의 딸인데, 우재(尤齋) 선생이 공의 아버지 군수공(郡守公)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부인의 현덕(賢德)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숙인(淑人)은 관향이 연산(連山)이고 그의 아버지는 좌랑(佐郞)에 추증된 효적(效積)이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 명철하고 주고받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시부모 봉양하는 일과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을 하나같이 지성으로 하여 온 집안이 존경하고 본받았다. 나이 86세로 을해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방언(邦彦)은 학술(學術)로 여러 번 별천(別薦)에 올라 몇 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노직(老職)으로 동추(同樞)가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방신(邦藎)과 방현(邦顯)이다. 큰딸은 현감 송이석(宋彝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평(許玶)에게 시집갔다. 방언은 4남을 두었으니 수강(守綱)ㆍ수기(守紀)ㆍ수경(守經)ㆍ수약(守約)인데, 수기는 방신의 양자가 되어 갔으며, 네 딸은 황준(黃鐏)ㆍ군수 이정영(李挺英)ㆍ김일정(金日井)ㆍ윤수겸(尹壽兼)에게 각각 시집갔다. 방현은 3남을 두었는데, 수손(守遜)ㆍ수도(守道)와 좌랑 수적(守迪)이고, 2녀는 안희인(安希仁)ㆍ윤간(尹侃)에게 시집갔다. 사위 송씨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백원(百源)ㆍ참봉 성원(性源) 그리고 만원(萬源)이고, 딸은 진사 이흥조(李興朝)ㆍ이사도(李思道)ㆍ김시서(金時叙)ㆍ조명제(趙明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허씨의 두 아들은 신(紳)ㆍ인(繗)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밖에 내외 증손과 현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했다.
아, 공은 이름 있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자훈(慈訓)을 잘 받아 행의(行誼)까지 겸하여 갖추었으며 문예(文藝) 또한 숙성하였으니, 일찍이 왕정(王庭)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을 크게 울렸어야 옳았을 것인데, 불행히도 길이 어긋나 주묵(朱墨 하급 관리를 의미함)의 사이에서 맴돌다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의자 밑에서 놀았기에 평소에 공을 존경하고 사모해 왔었는데, 지금 보면 장로(長老)들이 이미 다 가 버리고 없어 공에 관하여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동추공이 부탁한 묘도 문자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젊은 시절 듣고 보았던 것을 엮어 대략 이상과 같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