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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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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有三奇。自古及今。奇不自奇。在人心。德有三奇。以類而尋。是以爲亭。及公而占。公心如水。政淸不息。公心有石。確乎不拔。公心有松。後凋其節。三奇爲亭。不顯其德。亭廢名存。垂五百年。顯晦有時。有石屹然。不亭伊石。以永其傳。三三各一。聿修有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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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7일 (계축) | |||||||||||||
고산 현감(高山縣監) 최득지(崔得之)가 하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해마다 가물어서 화곡(禾穀)이 흉년이 들었으니, 민생(民生)이 염려된다. 오직 본도(本道)는 지난해에 조금 풍년이 들었고, 금년에 비가 또 흡족하나, 다만 곡식을 옮기[移粟]는 것으로 인하여 인력(人力)이 매우 피곤하여졌으니, 네가 그 고을에 가서 마땅히 환상(還上)을 거두고 흩어 주는 법과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는 사무에 유의하여, 오직 이를 힘쓸지어다.” 하니, 득지(得之)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은택이 넘쳐 흐르오니, 백성들이 베개를 편안히 하여야 할 터인데, 혹 소요(騷擾)한 폐단이 있는 것은 특히 수령이 직책을 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말이 대단히 내 뜻에 합한다. 이 말을 폐하지 말아서 나의 지극한 뜻에 맞게 하라.” 하였다. 【원전】 4 집 22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농업-농작(農作) / *농업-권농(勸農) / *재정-창고(倉庫)
사람들은 으레 말하면 꼭 요순(堯舜)을 들먹이곤 한다. 이는 문명이 처음 열리는 시기로서 천지의 정오(正午) 운수에 해당하여 풍기(風氣)가 처음 열리고 인문(人文)이 처음 갖추어졌기 때문에 공자가 《서경》을 서술할 적에 요순으로부터 끊었으며, 중화(重華)의 전(傳)에 이르기를, “요임금이 이미 빛남을 두었고 순임금 또한 빛남을 두었다.” 하였고, 공자는 말하기를, “찬란하다, 그 문장(文章)이 있음이여.”라고 하였다. 이미 ‘빛남’, ‘문장’이라 말하였으니 이는 단순히 덕성을 가리켜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전(二典)을 살펴보면 순전은 규모와 제도에 관해서 얼마나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가. 그런데 요전에서는 역상(曆象)과 수시(授時) 하나의 일 이외에 예악과 제도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에 대한 말을 듣고자 한다.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이전의 문장에는 상세함과 간략함의 차이가 있으나 실로 하나로 합하여 보아야 합니다. 이제 그 대강(大綱)을 말하면 요전의 역상(曆象)과 수시(授時)는 천도(天道)의 이해를 말한 것이며, 계절을 따르고 일을 순히 함은 인도(人道)의 이해를 말한 것이며, 사악(四岳)에게 묻고 홍수를 다스림은 지도(地道)의 이해를 말한 것입니다. 이로써 삼재(三才)의 책무를 다하여 백성을 위하여 최고 준칙을 세웠음을 볼 수 있습니다. 순임금의 선기옥형(璿璣玉衡), 조근(朝覲), 순수(巡狩), 봉산(封山), 준천(濬川) 등의 일 또한 이와 같은 것을 위한 것에 불과하니, 규모와 제도는 바로 그 절목 사이의 일입니다. 요전에서는 예악과 제도를 말하지 않았지만 예악과 제도가 되는 바는 이미 그 뜻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더구나 순전의 문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 또한 순임금이 섭정할 때 있었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요임금이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어 이러한 덕업과 공업을 이룬 것이니, 더욱 참고하고 서로 인증할 만합니다. ‘흠명문사(欽明文思)’의 흠(欽) 자에 대해 《집전》에서는 책을 펼치면 맨 처음 볼 수 있는 뜻이라 하였다. 이 흠(欽) 자는 《주역(周易)》의 ‘경이직내(敬以直內)’, 《예기(禮記)》의 ‘무불경(毋不敬)’과 일치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또다시 선유가 논한 주일무적(主一無適)의 경(敬)으로써 그 뜻을 해석할 것이 있겠는가? [홍이건(洪履建)이 대답하였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은 경(敬)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이 흠(欽) 자는 상하를 통하고 내외를 합하고 공효를 겸하여 말한 것입니다. ‘오변(於變)’의 변(變) 자에 대하여 《집전》에서는 악을 변화시켜 선이 되게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나쁜 풍속을 변화시켜 좋은 풍속이 되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요임금이 제왕의 지위에 오른 것은 고양씨(高陽氏)ㆍ고신씨(高辛氏)의 뒤를 계승한 것으로, 탕(湯)이 걸(桀)을 정벌하고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했던 것과는 다르니, 지극히 잘 다스려진 태평성대에 무슨 변화시킬 만한 나쁜 풍속이 있겠는가? 만일 악한 사람을 변화시켜 선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이라면 그 당시 집집마다 모두 벼슬에 봉할 만한 인물들이라고 말하지만, 또 얼마쯤의 불초한 자들이 그 사이에 뒤섞여 있었던 까닭에 구적(寇賊), 간궤(姦宄), 호종(怙終), 적형(賊刑)이라는 말들이 역력히 이전(二典)과 삼모(三謨) 가운데 나타나 있으며, 오품(五品 오상(五常)을 말함)이 손순(遜順)하지 못한 것이 걱정이 되는 데 이른 것이니, 어떻게 악한 사람을 모두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종섭(李宗燮)이 대답하였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요임금이 임금이 된 것은 고양씨, 고신씨의 뒤를 이은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제지(帝摯)의 거칠고 음란한 시기를 직접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이로 보면 어찌 백성의 풍속에 오래된 더러움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해 주고 오도록 하고 바로잡아 주고 바르게 한’ 정치와 ‘지나는 곳마다 사람이 교화되고 마음을 두면 신묘(神妙)하게 되는’ 오묘함은 오변(於變) 두 글자가 아니면 그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집전》의 “악을 변화시켜 선이 되게 한다.”는 것은 나쁜 풍속, 악한 사람들이 모두 변하여 선하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악(惡)’ 자를 빌려 이로써 선(善)이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고 말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찌 구태여 악이라는 한 글자에 집착하여 볼 것이 있으며, 또 굳이 나쁜 풍속, 악한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구적(寇賊), 간궤(姦宄), 호종(怙終), 적형(賊刑) 등은 일반적으로 백성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음을 말하여 아래 문장에서 형벌을 제정하게 된 의의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품이 손순하지 못하다.”에 대해 주자(朱子) 또한 “이랬을까 의심된다.”는 말로써 혹인(或人)의 물음에 답하였습니다. 이는 성인이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을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이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세차법(歲差法)은 수대(隋代)ㆍ진대(晉代)의 제가(諸家) 설이 같지 않으나 요임금 때 묘중(昴中)이 주자 때에는 벽중(壁中)이 되었으니 세차(歲差)가 있음은 분명한 것이다. 《집전》에서 이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하늘에는 365도(度)와 4분의 1도가 있고 해[歲]에는 365일(日)과 4분의 1일이 있는데, 천도(天度)는 4분의 1도의 여유가 있고, 세일(歲日)은 4분의 1일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천도(天道)는 항상 평평히 운행하여 여유가 있고 일도(日道)는 항상 안으로 선회하면서 위축되어 하늘은 점차 서쪽으로 어긋나 가고 해는 점차 동쪽으로 어긋나 간다.” 하였다. 세(歲)에 365일과 4분의 1일이 있다는 것은 공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365도와 4분의 1도가 있는 것으로 인한 것이다. 천도에 여유가 있다면 세일(歲日) 또한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며, 세일이 부족하면 천도 또한 부족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평평히 운행하는 것’과 ‘안으로 위축되는 것’의 차가 생길 수 있는가. 하늘과 해[歲]에 다른 법이 없다면 금년 동지(冬至)에 해가 모성(某星)ㆍ모도(某道)에 있던 것이 내년 동지에도 반드시 모성ㆍ모도에 있어 터럭만큼의 차이가 없이 설령 천만년이라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인데, 혼중(昏中)이 묘성(昴星)으로부터 벽성(壁星)으로 변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컨대 그것에 대한 말을 듣고자 한다. 또, 세차(歲差)의 세(歲) 자는 해[日]를 말한 것인가, 별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오위(五緯)의 세성(歲星)을 말한 것인가? 만일 해를 말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해가 점점 어긋난다 말하지 않고 세가 점점 어긋난다고 말하였겠는가. 만일 별을 말한 것이라면 별은 곧 천체이니 하늘이 이미 서쪽으로 어긋나 간다면 또 어째서 점차 동쪽으로 어긋나 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오위의 세성을 말한 것이라면 《천관서(天官書)》를 살펴보면 “세성이 12년에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는데 요즘의 세차법은 가깝게는 50년의 1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는 것을 논한다면 마땅히 1만 8천 년 뒤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로 보면 이른바 세차의 세(歲)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세차에 관한 설은 고금 역가(曆家)로서도 결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고대의 역법(曆法)은 간단하여 차법(差法)을 세우지 않았으니 차법(差法)을 논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인데, 진(晉) 우희(虞喜)에 이르러 처음으로 세차가 있음을 깨닫고 50년에 1도가 물러난다고 하였고, 하승천(何承天), 유작(劉焯)과 같은 이들은 그 숫자를 가감하였지만 또 정밀하게 부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로부터 세차법의 성립이 정밀하지 못했던 것이지, 세차의 이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 이치를 밝히려면 먼저 ‘세(歲)’ 자의 의의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세’라는 것은 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별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해와 하늘이 만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천체는 지극히 둥글어 주위가 365도 4분의 1도이며 남극과 북극이 그 양단을 가지고 적도(赤道)는 그 중앙을 가로질러 그 절반에 해당되고, 태양이 운행하는 황도(黃道)는 적도와 더불어 비스듬히 교차하는데 동서로 교차하는 것을 춘분(春分)ㆍ추분(秋分)이라 하고, 남북으로 서로 거리가 가장 먼것은 대거(大距)라 하는데 해의 운행이 바로 그곳에 당한 것을 동지(冬至)ㆍ하지(夏至)라 합니다. 동지로부터 춘분을 거쳐 하지를 지나 추분을 거쳐 가면 또다시 동지가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입니다. 가령 올 동지에 해가 두수(斗宿) 몇 도 몇 분 몇 초에 있고 명년(明年) 동지에 또다시 이처럼 되어 터럭만큼도 차이가 없다면, 하늘과 해가 서로 만남에 영원히 이와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차법은 발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천체(天體)의 운행을 관측하여 보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올해의 해가 운행하여 동지에 남쪽으로 두수(斗宿) 몇 도 몇 분 몇 초에 이르렀던 것을 내년에 살펴보면 성도(星度)는 이미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서 동쪽으로 옮겨 가고, 남쪽으로 이르는 도수(度數)는 이미 약간의 차이로 서쪽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다만 그 차이가 너무나 미세한 까닭에 아무리 정교한 역가(曆家)라도 1년에 차이가 생기는 것을 갑자기 알 수 없으며, 반드시 여러 해가 축적된 이후에야 바야흐로 대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차(歲差)’입니다. 서로 차이가 나게 되는 원인은 오늘날의 시헌력(時憲曆)으로 말하면 해의 운행이 경성(經星)의 운행과 같지 않은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적도가 나누어지는 것 또한 해의 운행과 경성(經星)의 운행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1년이 1년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일전(日躔)’에 따른 태양의 운행이 적도 좌우에 출입한 데에서 연유합니다. 이제 이미 각기 다른 점이 있기에 차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고력(古曆)에 있어서는 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오직 《집전》에서 “천도는 평평히 운행하여 여유가 있고, 태양의 길은 안으로 선회하면서 위축된다.” 말하니, 이미 이전에 발견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여 십분 터득한 것입니다. 《어류(語類)》의 한 조목에서 또한 일찍이 “역서(曆書)를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태허(太虛)로써 수를 세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더욱이 일궤(日軌)와 성전(星躔) 이외에 별도로 1년이 이루어지는 소이연(所以然)을 분명하게 설파한 것입니다. 오위(五緯)의 세성(歲星)은 1년에 30도를 물러나 12년에 한 차례 하늘을 두루 선회한 까닭에 또한 ‘세(歲)’로써 이름한 것입니다. 그 실상은 ‘일전(日躔)’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에 이를 세차법과 함께 논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윤달로써 사시(四時)를 정하는 것에 대해 《집전》에서는 “기영(氣盈)과 삭허(朔虛)가 합하여 윤달이 발생한다.”고 한다. ‘기영’은 윤달이 될 수 있지만 ‘삭허’는 부족한 수인데, 어떻게 이를 합하여 윤달이 될 수 있겠는가. [홍이건이 대답하였다.] 해와 달이 한 번 만나면 그것이 한 달이 됩니다. 서로 만나는 그 분도(分度)를 계산해 보면 29일 절반이 조금 넘습니다. 그것은 이번 달의 합삭으로부터 다음 달 합삭의 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달의 숫자가 모두 30일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29일 499분일 뿐, 그 나머지 441분은 영수(零數)이니, 이를 ‘삭허’라 말합니다. 삭(朔)이라는 말은 일삭(一朔)의 허분(虛分)을 말합니다. 30일로 계산하면 비록 부족한 숫자라 하지만 29일 절반이 조금 넘는 것으로 계산하면 이는 남는 수가 됩니다. 그 여분을 ‘기영’의 여분에 합하여 모두 윤달로 귀결지은 것입니다. 홍수에 대해 《서경》에 나타난 것이 많다. 그러나 홍수의 피해만 말하였을 뿐, 그 홍수가 어디에서 발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맹자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홍수(洚水)라 이른다.” 하였으니, 이는 바다와 못이 넘치는 것을 말한 것 같으며, 장주(莊周)는 “요임금 때에 10년 사이에 9번 홍수가 났다.” 하였으니, 이는 장마가 오래 계속된 것을 말한 것 같다. 이른바 홍수란 과연 어떤 물을 말하는가? [박종정(朴宗正)이 대답하였다.] 홍수에 대한 해석은 마땅히 맹자(孟子)의 말로 정론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구주(九州)의 산하(山河)는 처음 개벽한 이후로 일찍이 한 번도 소착(疏鑿)의 일을 베푼 바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당우(唐虞) 시대에 이르러 산이 무너지고 온통 물바다를 이루어 하류가 모두 막히게 되니, 그 흘러가던 물들이 다시 역류하여 소용돌이치면서 산을 둘러싸고 언덕 위로 넘쳐흘러 하늘까지 넘실대는 홍수의 우환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물이 역행하여 홍수(洚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9번 홍수의 남은 재앙이 있어 홍수의 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저 칠원(漆園 장자(莊子)를 가리킴)의 궤변(詭辯)은 《회남자(淮南子)》의 “열 개의 태양이 함께 나왔다.”는 말과 같이 모두 황당무계한 말들인데, 어찌 많은 논변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상은 요전(堯典)이다. [주D-001]공자는 …… 하였다 :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2]위로해 주고 …… 한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위로해 주고 오도록 하고 바로잡아 주고 펴 주며 돕고 거들어주어 스스로 본성(本性)을 얻게 하고, 또 따라서 진작하고 은혜를 베풀어 준다.[勞之來之 匡之直之 輔之翼之 使自得之 又從而振德之]”라고 하였다. [주D-003]지나는 …… 되는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는 지나는 곳마다 사람이 교화되고 마음을 두면 신묘해진다. 그러므로 상하가 천지와 더불어 함께 흐르나니 …….[夫君子 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라고 하였다. [주D-004]묘중(昴中) : 중(中)이란 ‘초저녁 하늘 한가운데 보이는 별[昏之中星]’을 말한다. 묘중이란 남방 칠수(七宿)의 하나인 묘성(昴星)이 중성(中星)으로 있음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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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하전(魯論夏箋) 3 | ||||
자로편(子路篇) |
자로왈위군장(子路曰衛君章)
번지청학가장(樊遲請學稼章)
자위위공자형장(子謂衛公子荊章)
자왈구유용아자장(子曰苟有用我者章)
섭공문정장(葉公問政章)
자공문왈하여장(子貢問曰何如章)
자공문왈향인개호지장(子貢問曰鄕人皆好之章)
자왈강의목눌장(子曰剛毅木訥章)
[주D-002]허행(許行)이 …… 다스리려고는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3]안평중(晏平仲)의 …… 않았고 : 안평중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 대부 안영(晏嬰)으로, 평생토록 절검(節儉)과 역행(力行)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평중(平仲)은 그의 자이다. 안영의 집은 저자에서 가까운 곳에 있고 또 지대가 낮아 습기가 차고 협소하였는데, 경공(景公)이 집을 다시 지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고 또 저자에서 가까워서 물가(物價)도 알기 쉽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그가 진(晉) 나라에 사신 간 때를 이용해서 경공이 그의 집을 크게 다시 지어 놓았는데, 그는 사의(謝意)를 표한 다음 끝내 그 집을 헐고서 자신의 옛날 집을 복원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3年》
[주D-004]헌문자(獻文子)의 …… 들어왔는데 : 헌문자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경(卿) 조무(趙武)로, 헌문(獻文)은 그의 시호이다. 그가 집을 지어 낙성식을 할 때에 대부 장로(張老)가 축원하기를, “참으로 장중하고 아름답구려. 여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기에서 거상(居喪)하고, 여기에서 벗과 종족들을 모아 잔치를 여십시오.” 하자, 조무가 이 말을 받아서 “제가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고 여기에서 거상하고 여기에서 벗과 종족들을 모아 잔치를 연다면 여생을 탈 없이 누리고 지하에 계신 선대부(先大夫)를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복을 빌었다. 《禮記 檀弓下》
[주D-005]바람이 …… 하였으니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제5권 ‘진동보(陳同甫)에게 답하는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풍(大風)에 자신의 정자(亭子)가 쓰러진 것을 아쉬워하는 진동보에게 주자는 군자(君子)가 외물(外物)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주D-006]자공(子貢)이 …… 하였으니 :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7]방훈왈(放勳曰) 이하 여덟 절(節)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8]양을 …… 말한 것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9]백공 승(白公勝)의 …… 들어갔으니 : 백공 승이 초(楚) 나라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섭공이 난을 진압하러 들어가려 하자, 어떤 사람은 국인(國人)들이 섭공을 자애로운 부모처럼 생각하니 몸을 아껴야 한다며 투구를 쓰기를 권하였고, 어떤 사람은 섭공이 투구를 쓰지 않아야 사람들이 섭공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섭공이 투구를 벗고서 성으로 들어가서 국인들과 함께 백공을 공격하자 백공이 산으로 달아나 자살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10]남들이 …… 것입니까 : 공자가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 남들이 그 부모 형제의 칭찬하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11]부자께서 …… 하였는데 : 재여(宰予)가 낮잠을 잔 일로 공자가 꾸짖은 말이다. 《論語 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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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序類) | ||||
여묘(廬墓) 사는 박 청도(朴淸道)에게 주는 시의 서 |
교서랑(校書郞) 최직지(崔直之)가 그의 외할아버지 박군(朴君)이 임종할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한 시(詩) 한 절구를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육십난 효자 약을 맛보누나 / 六旬孝子藥先嘗
사생은 천명이라 피하기 어렵나니 / 死生存命終難避
너의 어미 무덤 곁에 나를 묻어 다오 / 近汝慈墳立壽堂
[주D-002]내시(內侍) : 고려 때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의 임무를 맡아 보던 관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의 자제 또는 시문에 능한 문신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주D-003]개풍 한천(凱風寒泉) : 개풍은 《시경》 패풍(邶風) 중의 편명. 한천은 개풍 중 ‘원유한천(爰有寒泉)’의 구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이는 자식들이 어버이를 잘못 섬기는 것을 자책한 시다.
[주D-004]내 손을……알았노라 : 증삼(曾參)이 병들어 제자들을 훈계한 말로,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죽는 것도 효도의 하나인데,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論語 泰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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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雜著) | ||||
독서기(讀書記) 홍범경전통의(洪範經傳通義) |
홍범 구주(洪範九疇)에 대한 선유(先儒)의 학설에 상수(象數)의 근원을 탐구하고 성인의 은미한 뜻을 밝히려는 것이 진실로 상세하고도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성인이 구주의 순서를 정한 본뜻은 조화를 주재하고 선치를 내는 강령을 파악하는 것이고, 구주의 뜻을 쓰는 것인즉 비록 이미 경문에 보이지만 고금에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여기에 지극히 뜻을 두지 않으니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자 한다.
경문에 ‘초일왈오행(初一曰五行), 차이왈경용오사(次二曰敬用五事), 차삼왈농용팔정(次三曰農用八政), 차사왈협용오기(次四曰協用五紀), 차오왈건용황극(次五曰建用皇極), 차육왈예용삼덕(次六曰乂用三德), 차칠왈명용계의(次七曰明用稽疑), 차팔왈염용서징(次八曰念用庶徵), 차구왈향용오복위용육극(次九曰嚮用五福威用六極)’이라고 한 이 65자가 곧 대우(大禹)가 차례를 정한 글이고 기자(箕子)가 전수한 말로서 천지의 본수(本數)와 성인의 미의(微意)가 여기에 모여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대개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복극(福極)의 아홉 가지에 천하의 일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에 이른바 경(敬), 농(農), 협(協), 건(建), 예(乂), 명(明), 염(念), 향(嚮), 위(威)인즉 바로 성인이 조지(操持)하고 운용(運用)하며 참찬(參贊)하고 좌우(左右)하는 것이니, 이로써 차례로 오행(五行)에서 육극(六極)에 이르기까지의 조리를 따라 천도를 순하게 하고 - 오행이다. - , 인사를 바르게 하고 - 오사이다. - , 왕정을 시행하고 - 팔정이다. - , 백성들에게 사시의 변화에 따라 일할 때를 알려주고 - 오기이다. - , 사람의 표준을 세우고 - 황극이다. - , 세상의 변고를 다스리고 - 삼덕이다. - , 귀신의 조화에 참여하고 - 계의이다. - , 기화(氣化)를 조절하고 - 서징이다. - , 휴상(休祥)을 맞이하고 - 오복(五福)이다. - , 재화(災禍)를 그치게 하는 - 육극(六極)이다. - 대경대법(大經大法)이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구주’는 천리와 인사를 합하여 말한 것이다. 오직 하늘이 사물을 제정함에 성인이 하늘을 이어받아 인사로써 천리에 합하게 하고 마음으로써 일을 제정하니 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경용오사(敬用五事)에 대하여
‘경(敬)’이라는 것은 천명을 두려워하고 인사를 닦는 것이며, 이 몸을 주재하고 - 모(貌), 언(言), 시(視), 청(聽)이다. -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 - 생각하는 것[思] - 이다. 요 임금의 ‘흠(欽)’과 순 임금의 ‘공(恭)’과 우 임금의 ‘지덕(祗德)’과 탕 임금의 ‘무덕(懋德)’이 대개 모두 이 경(敬)에 종사하는 것인데 하늘을 이어서 극(極)을 세우는 도리가 능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하늘이 사람을 냄에[天生蒸民] 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니[有物有則], 모습[貌], 말[言], 보는 것[視], 듣는 것[聽], 생각[思]은 일[物]이고, 공손한 것[恭], 순한 것[從], 보이지 않음이 없는 것[明], 들리지 않음이 없는 것[聰], 통하는 것[睿]은 그 일의 ‘법칙[則]’이다. 천하(天下)는 몸에서 근본하고 만화(萬化)는 마음에서 나오는데 ‘경(敬)’이라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 이 몸을 주재하고 이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며, 자기를 닦고 사람을 편안히 하며 덕에 힘쓰고 하늘에 짝하여 이로써 천하의 표준을 세우고 만사의 조화를 주재하는 것이다. 동묵시청(動默視聽)의 사이 - 언(言), 모(貌), 시(視), 청(聽)이다. - 에 익익(翼翼)하고 - 공경하는 것이다. - 기미유은(幾微幽隱)의 즈음에 긍긍(兢兢)하여 - 생각하는 것이다. - 늠연(凛然)히 천지의 귀신이 위에 임하고 곁에 있듯이 하여 - 조심하고 공경하는 것[兢翼]이다. - , 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하여 감히 방자하지 않고 감히 태만하지 않으며 - 동묵(動默)에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 동동(洞洞)하고 촉촉(屬屬)하여 마치 옥을 잡은 듯이 하고 가득한 것을 받든 듯이 한다. - 기미(幾微)를 살핌에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하는 것이 곧 ‘경’의 도이니 여기에 힘쓸 방도를 안다면 자연히 말이 순하게 되고,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귀는 들리지 않는 것이 없고, 생각은 은미한 데 통하게 되어 모습의 공손함이 엄정하게 되고, 말의 순함이 조리가 있게 되고, 눈의 밝음이 명철하게 되고, 귀의 밝음이 바르게 판단하게 되고, 생각의 통함이 성인의 일 - 오사(五事)이다. - 을 짓게 된다. 그리하여 ‘너의 천칙’을 세우고 - 삼간다. - , 성덕(聖德)을 닦고 - 삼간다. - , ‘너의 왕도’를 이룸이 행해지게 될 것이다. - 팔정(八政) 이하는 이 예를 따라 미루어 볼 수 있다. -
그러나 반대로 여기에 힘쓸 방도를 알지 못한다면 모습은 태만하고, 말은 어긋나고, 보는 것은 흐려지고, 듣는 것은 미혹되고, 생각은 가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태만함에 미치광이가 되고, 어긋남에 참람하게 되고, 흐려짐에 주저하게 되고, 미혹됨에 급하게 되고, 가려짐에 몽매하게 된다. 따라서 인도(人道)가 서지 않고 천직(天職)이 폐해지게 되며 백도(百度)가 어긋나고 만사(萬事)가 다스려지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경’이라는 것은 믿음을 체득하고 순리를 이루는 도리로서 총명예지(聰明睿知)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인데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를 받든다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경용오사(敬用五事)’가 그러한 것이다.
농용팔정(農用八政)에 대하여
‘농(農)’이라는 것은 이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왕정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란 무슨 마음인가. 《주역》에 ‘천지의 덕’이라 한 것과 《맹자》에 이른바 ‘선왕(先王)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 한 것 바로 이것이다. 덕으로 선정을 하는데 선정은 백성을 기르는 데 있는 것이다.
‘음식[食]’, ‘재화[貨]’, ‘제사[祀]’는 이른바 ‘천지 자연의 이로움을 인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삶을 기르고 죽음을 보내기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왕도의 시작’이라는 것이고,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인즉 ‘토지를 제정하고 전야를 경리하며 관직을 설치하고 학교를 흥기하며 포란(暴亂)을 금지하여 재성보상(裁成輔相)의 방도를 지극히 하는 것’이니, 이것이 왕도의 완성이다. ‘빈(賓)’, ‘사(師)’는 또 먼 곳의 사람을 예로써 복종시키고 천하에 병으로써 위엄을 떨치는 것으로서 내외의 다스림이 구비되는 것이다.
이에 백성이 급한 바가 무엇인지 알고 - 식(食), 화(貨), 사(祀) - , 백성이 그른 일을 하지 않도록 금지하고 -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 , 문으로 회유하고 - 빈(賓) - , 무로써 떨치면 - 사(師) - 비록 살리고 죽이는 정사가 다르나 은덕과 위엄이 아울러 행해지게 되는데, 오직 임금된 이가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름에 돈독하게 사랑하고 충후하게 하여 보호하기를 어린아이처럼 하고 보살피기를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뜻인즉 대개 일찍이 그 사이에 앙연(盎然)히 넘치고 옹연(雍然)히 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선왕이 백성의 부모된 마음을 가졌기에 죽여도 원망하지 않고 이롭게 함에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백성이 날로 선에 옮겨가되 누가 그렇게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 여기에 근본함이 있는 것이니, 선왕이 경(敬)으로 보존하고 정(政)으로 행하는 바가 오직 ‘이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호생(好生)의 덕이 백성의 마음에 가득하고 흠휼(欽恤)의 뜻이 법 밖에 행해진다.”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농용팔정(農用八政)’이 그러한 것이다.
협용오기(協用五紀)에 대하여
‘협(協)’이라는 것은 합하는 것이며 순하는 것이다. 책력을 만들어 사시를 밝히고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사시의 변화에 따라 할 일을 알려 주는 것은 진실로 왕정의 급무(急務)이고 생민의 대기(大紀)이다. ‘세(歲)’는 추위와 더위가 옮아가는 것이고, ‘월(月)’은 가득 찼다가 이지러지는 변화이고, ‘일(日)’은 낮과 밤이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것이고, ‘성신(星辰)’은 경위(經緯)가 서로 교차되어 벌여진 것이고, ‘역수(曆數)’는 추위와 더위의 차례를 삼고 가득 찼다가 이지러지는 것을 기록하고 밤과 낮을 정하고 경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대저 이미 차례를 삼고, 기록하고, 정하고, 바르게 한 연후에 그 ‘자연(自然)’의 때를 따라서 그 ‘당연(當然)’의 일을 행하여 크게는 농상(農桑)의 빠름과 늦음, 다음으로는 생살(生殺)을 쓰고 버림, 안으로는 관정(官政)의 선후, 가까이로는 동식(動息)의 조절, 밖으로는 덕위(德威)의 이장(弛張), 멀리로는 문질(文質)의 변역(變易)이 음양(陰陽)의 정에 순하고 풍기(風氣)의 마땅함에 합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천지의 귀신이 편안함에 이르고 백성이 의혹이 없어서 스스로 장차 천지의 화기(和氣)를 가다듬어 만물의 생육(生育)을 이룰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천인(天人)이 조화를 잃고 서적(庶績)이 응결되지 않고 기화(氣化)가 착란되어 요얼(妖孼)이 어지럽게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의 도를 근심함이 없고 사물의 이치를 끊음이 없고 인륜의 기강을 어지럽힘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협용오기(協用五紀)’가 그러한 것이다.
건용황극(建用皇極)에 대하여
‘건(建)’이라는 것은 세워서 바꾸지 않는 것을 말함이니, 《대학》에 이른바 “지선에 그친다.[止於至善]”는 말과 《중용》에 이른바 “몸을 닦고 도를 세운다.[修身立道]”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음양(陰陽)에 근본하고 물칙(物則)에 따르고 민치(民治)를 베풀고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하여 가운데서 자리를 이루어 군중(群衆)을 재제(宰制)하고 신명(神明)에 계모(稽謀)하고 천계(天戒)를 흠승(欽承)하고 명토(命討)를 엄숙히 하는 바의 것이다.
대개 태서편(泰誓篇)에 이른바 “진실로 총명한 이가 임금이 되나니 임금은 백성의 부모가 된다.[亶聰明作元后 元后作民父母]”는 것은 임금이 천덕(天德)에 자리하여 사해(四海)를 다스리는 것이니, 천지가 더불어 서고 귀신이 기대어 의지하고 백성이 우러러 바라보고 만화(萬化)가 달려 있고 백복(百福)이 모이는 바인지라, 이는 진실로 천하의 지중(至中)에 있어서 사방의 표준이 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함유일덕편(咸有一德篇)에 이른바 “하늘은 믿기 어렵고 명은 일정하지 않다.[天難諶 命靡常]”는 것은 안위(安危)의 추탕(推盪)과 치홀(治忽)의 의복(倚伏)과 성광(聖狂)의 분기와 위미(危微)의 기미가 일찍이 여기에서 그 갈래를 다투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갑편(太甲篇)에서 “천위는 어렵다.[天位艱哉]”고 말하는 것이다.
왕이 되기가 쉽지 않으니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능히 존망(存亡)을 알아서, 어렵게 여기고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여, 사특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며[閑邪存誠] 싫어함이 없으면서 또한 지킴[無射亦保]이 있는 것이다. 이는 《주역》 대축괘(大畜卦) 단사(彖辭)에서 공자가 이른바 “강건하고 독실하고 빛나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剛健篤實輝光 日新其德]” 한 것이고, 《대학장구(大學章句)》 제3장 ‘지어지선(止於至善)’을 풀이한 대목 가운데 ‘문왕이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慈)에 그치고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쳤던 것’과 같이 하여, 부부, 형제, 붕우가 되기에 이르러서와 일물(一物)에 응하고 일념(一念)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 의리의 당연함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어서 지선(至善)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 공을 이루어 간특한 소리와 요염한 여색이 어지럽게 할 수 없고 참소의 말과 어긋난 행실이 미혹시키지 못하고 아첨하는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뜻을 옮기게 하지 못하고 연안(宴安)과 탐일(貪逸)이 심지를 바꾸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일신(一身)에 법이 되고 조민(兆民)에 법이 되게 하는 것이 수연(粹然)히 평평(平平) 탕탕(蕩蕩)한 극치에 나아가 탁연(卓然)히 천하 사해의 가운데 서서 천지 사시가 변할 수 없으며 성명(性命) 기부(肌膚)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이 된다. 이에 천하의 사람들이 스스로 둘러서 바라보고 모여서 돌아가고 위엄을 느끼면서 사랑하고 본뜨고 따라 하여 마치 하늘의 별들이 북신(北辰)을 향하고 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과 같아, 작상(爵賞)으로 권하고 부월(斧鉞)로 다스리기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절로 신령함을 보존[存神]하고 지나는 곳에 교화[過化]되어 고무시킴에 응하고[動之斯和] 편안하게 함에 이르되[綏之斯來]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함이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이른바 ‘만물의 위에 나와서 만국이 모두 편안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이며 이괘(履卦) 단사(彖辭)에 이른바 ‘강중(剛中)의 덕으로 바르게 제왕의 자리를 밟아 허물이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정해짐에 천하가 복종한다.”고 하니, 성인이 그 도를 오래 유지한 뒤에 천하가 화성(化成)하는 것이다.
요(堯)ㆍ순(舜)ㆍ우(禹)의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음[允執厥中]’과 성탕(成湯)의 ‘순일한 덕으로 하늘을 섬김[一德享天]’이 어찌 여기에 스스로 힘을 다함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익직편(益稷篇)에 “하늘의 명을 경계함에 어느 때나 어느 일이나 경계한다.[勑天之命 惟時惟幾]”, “임금이 그치는 곳을 편안히 하여 일이 발함을 살피며 일이 편안함을 살펴야 한다.[安汝止 惟幾惟康]”, “날로 부지런히 힘쓰기를 생각한다.[思日孜孜]” 하고, 탕고편(湯誥篇)에 “놀라고 두려워한다.[慄慄危懼]”고 한 것은 또한 이를 보존하여 지킬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른바 “임금이 덕이 없으면 능히 스스로 설 수 없고 덕이 순일하지 못하면 움직일 때마다 흉하지 않음이 없다.[君無德 不能自 立德二三 動罔不凶]”는 것으로서 고인이 이른바 ‘대루(大累)’ ‘대위(大危)’라 한 것이니, 천하에 크게 벌을 당하게 됨[爲天下之大戮]이 그 또한 필연적으로 이르는 형세인 것이다. 이 또한 어찌 덕을 잡음이 굳지 못하고 윗사람이 되어서 경건하지 못하여 백성에게 우환을 끼치는 자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이른바 ‘건용황극(建用皇極)’이 그러한 것이다.
예용삼덕(乂用三德)에 대하여
‘예(乂)’라는 것은 재화(裁化)하고 제치(制治)하는 것을 말하니, 권병(權柄)을 가지고 위복(威福)을 잡아서 시변(時變)에 통하는 것이다. 제왕이 세상을 다스림에 때에 따라 정사를 펴고 일에 따라 명을 제정하는데, 중화(中和)로 베푸는 것이 있고 강제(剛制)로 다스리는 것이 있고 유도(柔道)로 행하는 것이 있다. 세도가 변함에 민속이 혹 다르므로 들어올려 중(中)으로 나가기도 하고 억눌러서 평(平)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은 곧 기질(氣質)이 다르고 성성(成性)이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저 이미 극처(極處)를 잡고 중정(中正)의 형세로써 천하를 본다면 천하의 사람이 진실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깨우치고 인위적으로 함이 없어도 다스려짐이 있을 것이다. 혹 습속의 강유(剛柔)와 민속의 고하(高下)에 따라 응하는 것이 혹 능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한결같지 않음이 있은즉, 이에 시변(時變)에 따라 제어하기를 부득이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전(三典)을 써서 나라를 평정하고 오형(五刑)을 써서 삼덕(三德)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선왕이 근본을 세우고 시변을 제어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용(大用)인데, 이로써 치란을 경륜하고 만물을 곡진히 이루는 것이다. 위로하며 이르게 하며 바르게 하며 곧게 하며 도와서 행하게 하며 부추겨 달리게 하고 또 따라서 진작(振作)시켜서 은혜를 더하니, 세상을 어루만지고 백성을 인도하여 풍속을 같게 하고 덕을 하나로 하여 천하를 황극(皇極)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지극하다. 그러나 반드시 재화(裁化), 제치(制治)에 감히 위거(違拒)가 없고 상벌(賞罰), 위애(威愛)에 혹 광요(狂撓)가 없어 건강(乾剛)의 덕을 떨치고 불반(不反)의 명을 행하여 규구(規矩)를 정성으로 진설함에 반드시 방원(方圓)이 있고 승묵(繩墨)을 정성으로 시행함에 반드시 정직(正直)을 봄이 있어야 한다. 대저 그러한 연후에 천하의 강기(綱紀)가 되고 만물의 권형(權衡)이 되어 시의(時義)에 따라 합당하게 조처하는 마땅함에 순하게 될 것이다.
탕평(蕩平)의 정치는 이른바 “부근(斧斤)이 무거우면 나무에 들어감이 깊고 상벌을 행하면 인심이 복종한다.”는 것이니, 대개 우레와 비가 내림에 백과(百果)의 씨가 터지고 바람과 서리가 내림에 만물이 반드시 흔들려 떨어진다. 그러므로 “사시가 통변(通變)함에 천도가 행해지고 삼덕이 추시(趨時)함에 왕정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왕은 이것을 잡은 방도가 사시와 같이 미덥고 이것을 행한 공정함이 천지와 같이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권병(權柄)을 잡고 위복(威福)을 행함으로써 시변을 제어하여 임금의 도리를 쓰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이미 권세를 잃은 임금으로서 한갓 군주의 자리에 처하여 정질(貞疾)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기를 마치 우유부단했던 한(漢) 원제(元帝)와 고식적인 조처를 취했던 당(唐) 대종(代宗)처럼 한다면, 한갓 왕령(王靈)이 떨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은택이 아래로 흐르지 못하여 그 폐단이 반드시 권병이 아래서 무너지고 위복을 행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근습(近習)을 잘 통솔하지 못하면 환관(宦官)의 우환이 있고 궁위(宮闈)에 옮기면 무려(武呂)의 재앙이 있고 강신(强臣)에게 빼앗기면 조소(操昭)의 변고가 있고 외척(外戚)에 빠지게 되면 기망(冀莽)의 간특함이 있고 흉한(凶悍)에 넘어가게 되면 기량(岐梁)의 난이 있고 사녕(邪侫)에 농락당하게 되면 진채(秦蔡)의 간사함이 있어서 천하의 우환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의 도리는 건강(乾剛)을 위주로 하고 권세와 위복은 윗사람이 잡는 것이라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예용삼덕(乂用三德)’이 그러한 것이다.
명용계의(明用稽疑)에 대하여
‘명(明)’이라는 것은 성인이 마음을 씻고 재계하여 은밀한 데로 퇴장(退藏)하는 것이니, 인모(人謀)를 변별하고 귀신(鬼神)에 질정하는 것으로서 《예기》 공자한거편(孔子閒居篇)에 이른바 “사방에 패함이 있음에 반드시 먼저 이를 안다.”고 함이 바로 이것이다.
대개 천하의 일에 측량하지 못할 이치가 있으며 능히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음은 한 사람의 지식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있는 모의는 혹 옳다 그르다 하는 사사로움이 없을 수 없으니, 진실로 눈을 밝게 하고 귀를 밝게 함으로써 천하의 공의(公議)를 살피며 수를 지극히 하고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효상(爻象)의 조짐을 결단함이 아니라면, 참으로 만물을 열고 일을 이루어서 천하의 길흉을 정함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문에서 말한 ‘모의가 자신의 마음[乃心]에 미치는 것’은 자신에게 지극하게 함이고, ‘모의가 경사(卿士)에 미치는 것’은 남들에게 물어서 공정하게 하고자 함이고, ‘모의가 서민에게 미치는 것’은 합하여 들어서 하늘의 뜻에 합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가려지고 남들이 통달하지 못하고 서민이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즉, 반드시 거북[龜]에게 살피고 시초(蓍草)를 참작하여 그 자연의 수를 헤아리고 바뀌지 않는 정리(定理)를 살펴서 천명을 소개(紹介)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리에 밝고 백성의 연고를 살펴서, 이에 신물(神物)을 일으켜 민용(民用)에 앞서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청명(淸明)이 몸에 있고 지기(志氣)가 신과 같아서 내 마음[方寸] 사이에 담연(湛然)히 일호(一毫)의 가려짐도 없어서 족히 신명(神明)에 묵계(默契)함이 있지 않다면, 또한 어찌 능히 깊은 것을 다하고 기미를 살피며이치를 탐구하고 은미함을 찾아내서 천하의 뜻을 통하고 천하의 의심을 결단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길흉에 백성과 걱정을 함께하여 신(神)으로써 앞으로 올 것을 알고 지(智)로써 이미 지나간 것을 간직하니 그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옛날의 총명(聰明)하고 예지(睿智)하고 신무(神武)하여 죽이지 않는 자일진저.”라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명용계의(明用稽疑)’가 그러한 것이다.
염용서징(念用庶徵)에 대하여
‘염(念)’이라는 것은 자기를 반성하여 마음에 경계하는 것을 말하니, 천위(天威)를 엄하게 하여 그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화(禍)를 돌려서 복(福)으로 하고 난(亂)을 바꾸어 치세(治世)를 만들고 덕(德)이 재(災)를 이기고 요(妖)가 상(祥)으로 변하게 하는 기틀인데, 태무(太戊)의 “두려운 마음으로 덕을 닦는다.[恐懼修德]”는 것과 선왕(宣王)의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허물을 생각한다.[側身思過]”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대개 천인(天人)의 즈음에는 정침(精祲)이 서로 침범하고 지기(志氣)가 서로 느끼는데, 인주(人主)의 한 몸은 만화(萬化)의 근본이니 언모(言貌)에 움직이고 시청(視聽)에 드러나고 심술(心術)에 나타나는 것이 진실로 천지를 움직이고 음양을 침박함이 있다. 그리하여 경문에 말한 것처럼 크게는 ‘경사(卿士)’, 다음은 ‘사윤(師尹)’, 작게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그 득실(得失) 안위(安危)의 극(極)이 하늘과 더불어 유통하여 가만히 서로 전달되지 않음이 없어서 왕래에 사이가 없다. 이것은 실로 상제(上帝)가 기뻐하고 노하는 기미이며 민생(民生)이 즐겁고 슬프게 되는 연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몇 가지가 그 도를 얻으면 오기(五氣)가 펴지고 사시(四時)가 순하여 군자가 무리지어 나아가고 백물이 넉넉하게 창성하여 다스려짐이 날로 더욱 진보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천지가 막히고 현인이 숨어서 구공(九功)이 다스려지지 않고 민물(民物)이 조락하여 어지러움이 날로 더욱 심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순 임금이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하고 주 나라는 보장(保章)을 세웠던 것이니, 대개 여기에 신중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마음에 공경하고 두려움을 보존하여 하늘의 경계를 정성스럽게 따라, 위로 보고 아래로 살펴 회고하고 반성하였다. 그리하여 일념(一念)이 싹트고 일언(一言)이 발함에 혹 천심(天心)에 어긋나고 천화(天和)를 범하는 일이 없는가 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졌으니, 그 마음에 대개 일찍이 하루라도 스스로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정신이 쌓인 바에 부경(孚敬)이 위로 통하여 고원(高遠)한 데에 감통(感通)하여 그 거처에 편안하게 흉화(凶禍)를 떨친다.”는 것이다. 안색의 표정을 살피며 기쁘고 성냄을 살펴서 형체가 없는 데서 보고 소리가 없는 데서 들으니, 인인(仁人)이 하늘을 섬기는 것과 효자(孝子)가 부모를 섬기는 것에 어찌 두 가지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의 생각이 마음에 움직이매 오성(五星)이 하늘에서 자리를 옮기고 선왕이 하늘에 응하는 실상이 성경(誠敬)의 일념에 있다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염용서징(念用庶徵)’이 그러한 것이다.
향용오복(嚮用五福) 위용육극(威用六極)에 대하여
‘향(嚮)’이라는 것은 향모(嚮慕)하여 이르게 하는 것이고 ‘위(威)’라고 하는 것은 외기(畏忌)하여 피하게 하는 것이다. 복이 생기는 것은 터전이 있고 화가 발하는 것은 연유가 있으며 명을 부여하는 것은 하늘이고 명을 제어하는 것은 임금이다. 요순(堯舜)의 백성이 어질고 오래 살지 않음이 없으며 걸주(桀紂)의 백성이 비루하고 일찍 죽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 어찌 선악(善惡)의 반응과 휴구(休咎)의 연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드러난 덕이 있어 그 유가 빛난다.[天有顯道 厥流惟彰]”고 하였다.
그러한즉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명을 다하여 일찍 죽는 화가 없고, 그 삶을 두텁게 하여 가난하고 괴로운 절박함이 없고, 몸은 건전하고 마음은 편안하여 질병과 우환의 침범이 없고, 덕이 닦이고 행실이 서서 ‘위로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떳떳하지 못함이 없는 즐거움’이 있고, 부모에게 받은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가 ‘살아서는 순하고 죽어서는 편안한 영화’가 있게 하니, 이것은 세상에 이른바 ‘길상선사(吉祥善事)’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가 되면 크게는 흉화(凶禍)가 몸을 멸하게 되고, 작게는 질고(疾痼)가 몸에 있게 되고, 밖으로는 기한(肌寒)이 피부에 절실하게 되고, 안으로는 우환(憂患)이 마음을 곤궁하게 하고, 혹 악을 행하되 꺼리는 바가 없게 되고, 혹 선을 보고도 스스로 힘쓰지 않게 되니, 이것이 세상에 이른바 ‘신이 복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임금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음에 억조의 백성이 여기에 힘입고 만방에 죄가 있음에 그 죄가 임금의 몸에 있다고 하는 것이 성군(聖君)의 마음이니, 진실로 임금된 이가 저기에 조심하여 두려워하고 여기에 스스로 힘쓸 바가 있음을 알아서, ‘이르게 하고 피하게 하는 것’에 장차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게 되면, 이에 음양의 기운이 화합하여 형상을 이루고 아름다운 상서가 크게 응하여 천지의 조화를 돌이키고 백성의 아름다운 명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며 살기를 즐거워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항물(恒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망(危亡)과 패복(敗覆)이 매양 세상에 전철(前轍)을 밟는 것은 곧 그러한 결과를 싫어하는 정을 머금었으면서 능히 그 유를 확충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진실로 능히 향모(嚮慕)함이 돈독하면 이르게 하는 것이 정성스럽고 외기(畏忌)함이 깊으면 피하게 하는 것이 힘이 있어, 향하고 맞이함에 급히 이르게 하고자 함에 있어서 “내가 상제의 신하를 감히 가릴 수 없고 오직 선택함이 상제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고, 위엄을 느끼고 두렵게 함에 걱정스레 피하게 하고자 함에 있어서 부득이한 점이 있어서 실로 ‘질통(疾痛)이 자신의 몸에 있는 것[癏恫乎乃身]’과 같이 하니, 이것은 곧 옛 성왕이 하늘을 받들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며 예의를 크게 하고 혼란을 없애는 도리로서, 선자(善者)에게는 복이 내리고 음자(淫者)에게는 화가 내리며 군자는 권면하고 소인은 징계하는 소이이다.
그러므로 대우모편(大禹謨篇)에서 말하기를 “공경히 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음을 신중히 하여 그 원함 직한 것을 경건히 닦도록 하라. 사해(四海)가 곤궁하면 천록(天祿)이 길이 끊어지리라.”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향용오복 위용육극(嚮用五福威用六極)’이 그러한 것이며, 제왕이 천하를 경륜(經綸)하는 능사(能事)가 마쳐지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근본하고 땅에 의지하여 - 용(用)은 말하지 않았다. - 음양의 유행(流行) - 행(行)이다.- 이 순하지 않음이 없고 자신을 닦기를 경(敬)으로 하여 - 공경하는 것이다.- 일신의 운위(云爲) - 일[事]이다. - 가 바르지 않음이 없으며, 백성에게 임하기를 인(仁)으로 하여 - 힘쓰는 것[農]이다.- 도화(道化) - 정사(政事)이다.- 가 행하고 하늘을 받들기를 순(順)으로 하여 - 조화시키는 것[燮]이다.- 민서(民敍) - 기율[紀]이다.- 가 다스려지며, 도를 체득하기를 용(庸)으로 하여 - 세우는 것[建]이다.- 표준(杓準) - 극(極)이다.- 이 중에 서고 세상을 다스리기를 권(權)으로 하여 - 다스리는 것[乂]이다.- 위복(威福) - 덕(德)이다.- 이 상에서 운행되며, 의혹을 변별하기를 지(智)로써 하여 - 밝히는 것[明]이다. - 시비 - 의문 나는 것이다.- 가 정해지고 간특함을 닦기를 성(誠)으로 하여 - 생각하는 것[念]이다.- 득실 - 징험이다.- 이 드러나며, 명명(明命) - 복(福)이다. - 을 공경하고 높이며 - 기르는 것[嚮]이다.- 천헌(天憲) - 법칙[極]이다.- 을 두려워하고 삼가서 - 경외[畏]하는 것이다.- 길흉이 쌓인 바 - 복(福)이다.- 와 흉얼(凶孼)이 가득한 바 - 곤액(困厄)이다. - 에 빠지지 않게 된다면, 참으로 천자가 백성의 부모가 되고 천하의 왕이 되어 대법(大法)을 행하고 상륜(常倫)을 펼쳐서 음우(陰祐)를 참찬(參贊)하고 민생(民生)을 좌우(左右)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우 임금에게 내려준 이치이고 우 임금이 구주(九疇)의 순서를 정한 뜻이니,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진술한 뜻이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대가 논한 바 구주(九疇)를 쓰는 뜻은 그러하다. 그러나 경(經)에 오행(五行)에 있어서는 그 쓰임을 말하지 않고 또 윤염(潤炎)의 속성과 산감(酸甘)의 맛만을 말하고 만 것은 무슨 이유인가.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도(天道)의 강령(綱領)이고 음양의 일이다. 그 기(氣)가 하늘에 운행하여 그치지 않는 것인즉 사시(四時)를 말하고, 그 이(理)가 사람에게 부여되어 어긋나지 않는 것인즉 오상(五常)을 말하는 것이다. 오상(五常)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정히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5장에 이른바 “인(仁)에 드러내고 용(用)에 감추어서 만물을 움직이되 성인(聖人)과 함께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고, 육부(六府)라고 하는 것인즉 또한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에 이른바 “용(用)을 이롭게 하여 내고 들여서 백성이 모두 쓴다.”고 한 것이다. 윤하(潤下)라는 것은 쓰임의 관결(灌決)이고, 염상(炎上)이라는 것은 쓰임의 분찬(焚爨)이다. 곡직(曲直)이라는 것은 동우(棟宇)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종혁(從革)이라는 것은 기용(器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가색(稼穡)이라는 것은 생식(生殖)의 근본이고, 고함(苦醎)이라는 것은 생양(生養)의 바탕이다. 까닭에 쓰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천도의 자연을 밝히고 그 ‘속성’과 ‘맛’을 드러냄으로써 인사(人事)의 쓰임이 여기에 있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 이치는 하늘이니 순하게 따르는 것이 도(道)이고 순하게 닦는 것이 교(敎)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하늘이 명하는 것’으로부터 ‘교’에 이르기까지 내가 여기에 더하거나 더는 것이 없다. 이러했기 때문에 바로 순 임금이 천하를 가졌으나 스스로 천하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저 계사하전(繫辭下傳) 제5장에 말한 바와 같이, 천하가 무슨 사려를 하겠는가. 성인은 함도 없고, 일도 없다. 오호라! 또한 그 말에 자연히 합하는 것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이치는 천지에 가득히 차고 인사의 기강이 되니, 경(敬)에 오사(五事)를 쓰면 사람에게 부여된 이(理)를 보존할 것이고 협(協)에 오기(五紀)를 쓰면 하늘에 운행하는 기(氣)를 일정하게 할 것이다. 황극(皇極)은 그 상(常)이고, 삼덕(三德)은 그 변(變)이고, 계의(稽疑)는 그 수(數)이고, 서징(庶徵)이라는 것은 진퇴(進退) 비복(飛伏)이 오기의 밖에 나오는 것이고, 복극(福極)이라는 것은 길흉(吉凶) 선악(善惡)이 황극의 느낌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행에 용을 말하지 않은 것은 가는 곳마다 용이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이 말이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어찌 오직 오사(五事)일 뿐이겠는가.
질문이 좋다. 하늘에 있을 때는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을 때는 ‘심(心)’이라고 한다. 고요한 것을 근본으로 하여 논한다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性)’이 있는데 곧 《중용》에 이른바 ‘천하의 대본(大本)’이고, 움직이기에 이르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있는데 이른바 ‘천하의 달도(達道)’라고 한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인즉 천(天)이고 인(人)이 아니니 자연(自然)을 ‘천’이라고 하고 일은 ‘인’인 것이다. 군자가 이것을 논함에 또한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할 것이며 용모를 움직임에 안색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고, 또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고 자신을 낮추어 공손히 함에 천리가 행해지고 그 공경이 절로 지극히 드러남에 천하가 평정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연비어약(鳶飛魚躍)’을 말하고 맹자(孟子)가 ‘필유사언이물정심(必有事焉而勿正心)’을 말했으니 그 뜻은 하나이다. 대개 군자가 여기에 누차 탄식을 했으니 선성(先聖)이 끼친 뜻과 후철(後哲)의 은미한 말을 학자가 그 또한 깊이 고찰하여 가만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사(五事)를 행하는 차례와 복극(福極)에 이르는 순서에 대하여 또한 그 이치를 말할 만한 것이 있는가.
천지의 조화가 유미(幽微)한 데서 쌓여 박후(博厚)한 공을 이루고 학문의 도리가 저현(著見)으로 인하여 표존(標存)의 힘을 이룬다. 복은 군자에게 내리는 까닭으로 그 말이 너그럽고 순하며 화는 소인을 치는 까닭으로 그 뜻이 엄하고 절실하니, 대개 자연의 순서를 따라서 참되고 지극한 이치를 깃들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구주(九疇)가 포함하는 바에 천하의 일이 또한 완비되었으나 하늘이 베푼 오상(五常)은 백성의 대륜(大倫)으로서 제왕이 세상을 다스리고 황극(皇極)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는데, 지금 유독 생략하고 열거하지 않았으니, 어찌 또한 작은 것을 상세하게 하고 도리어 큰 것을 빠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까. 아니다. 도리어 살피지 못한 것일 따름이다. 무왕(武王)이 이른바 ‘이륜(彝倫)’이라 한 것은 정히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기자(箕子)가 이른바 ‘홍범(洪範)’이라 한 것은 정히 이것을 펼쳐서 말하는 것이다. 대개 들으니, 천명(天命)의 항성(恒性)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고, 민생(民生)의 대도(大道)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부자(父子), 군신(君臣), 장유(長幼), 부부(夫婦), 붕우(朋友)이다. 인(仁)은 부자에 행하고 의(義)는 군신에 행하고 예(禮)는 장유에 행하고 지(智)는 부부의 사이에 분별하고 신(信)은 붕우의 교제에 쓰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대경(大經)을 세우는 것은 부자이고,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대의(大義)를 바르게 하는 것은 군신이고,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대순(大順)을 정하는 것은 장유(長幼)이고, 만화(萬化)의 돈독함이 근본하는 바가 있음은 부부이고, 백행(百行)을 닦음에 곧은 바가 있음은 붕우이다. 하늘에 근본하는 것은 오행(五行)이고, 마음에 갖춘 것은 오사(五事)이고, 일용에 행하는 것은 팔정(八政)이고, 확연히 천지에 짝하는 것은 오기(五紀)이고, 미루어 사해에 표준이 되는 것은 황극(皇極)이고, 치자(治者)는 이를 다스리나 난자(亂者)는 이를 어지럽히는 것은 삼덕(三德)이고, 그윽함이 귀신에 참여하는 것은 계의(稽疑)이고, 조화가 사시에 운행하는 것은 서징(庶徵)이고, 길자(吉者)는 이에 순하여 복을 받고 흉자(凶者)는 이를 어겨서 화를 입는 것은 복극(福極)이니 오행에 근원하고, 오사에 싣고, 팔정에 행하고, 오기에 달하고, 황극에 합하고, 삼덕에 헤아리고, 계의에 변별하고, 서징에 징험하고, 복극에 궁구한다.
경(敬)이라는 것은 이를 공경하는 것이고, 농(農)이라는 것은 이것을 후하게 하는 것이고, 협(協)이라는 것은 이것을 합하는 것이고, 건(建)이라는 것은 이것을 세우는 것이고, 예(乂)라는 것은 이것을 다스리는 것이고, 명(明)이라는 것은 이것을 밝히는 것이고, 념(念)이라는 것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향(嚮)은 이것을 향하는 것이며 위(威)라는 것은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강(紀綱)’이 되는 것이니 곧 ‘이륜(彝倫)’인 것이다. 이(彝)라고 말하는 것은 천지의 상경(常經)이며, 윤(倫)이라고 말하는 것은 민생의 대서(大叙)이다. 이것을 주는 것은 하늘이고 이것을 돕는 것은 임금이다. ‘음즐(陰騭)’은 묵묵한 것이니 민심에 정하는 것이고, ‘홍범(洪範)’은 큰 것이니 천하에 시작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복희(伏羲)가 ‘하늘을 이어서 극(極)을 세운 것[繼天立極]’과 헌황(軒皇)이 ‘때에 순하고 변에 통한 것[順時通變]’과 요(堯)의 탕탕(蕩蕩)과 순(舜)의 외외(巍巍)와 문왕(文王)의 경지(敬止)와 무왕(武王)의 계술(繼述)이 이 도가 아니고는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도란 무슨 도인가. 앞서 이른바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도’가 바로 이것이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도가 선 연후에 천도가 행해지고 인사가 서며 민직(民職)이 다스려지고 시정(時政)이 순하게 될 것이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도가 선 연후에 이로써 자기에게 체득한 것이 극(極)이 되고 이로써 사물에 내린 것이 덕(德)이 되니 귀신이 의지하여 하늘이 또한 어기지 않고 복상(福祥)이 이르러 재화(災禍)가 멀어진다. 그러므로 이 도를 펴게 되면 반드시 이 도를 행하게 되니 이 법을 행하는 것은 진실로 이 도를 펴는 소이(所以)인 것이다. 옛날에 이 도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하늘에 근본하고 자기에게 구하고 백성에게 미루고 때에 살펴서 위로는 표준(標準)을 세우고 아래로는 권형(權衡)을 행하고 그윽하게는 귀신에게 묻고 위로는 천의(天意)를 관찰하고 마침내는 세도(世道)를 궁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서면 도가 행해지고 도가 펴지면 법이 닦이는 것이다.
‘오행’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고, ‘오사’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팔정’은 백성에게 행하는 것이고, ‘오기’는 때에 합하는 것이고, ‘황극’은 자기에게 세우는 것이고, ‘삼덕’은 사물에 응하는 것이고, ‘계의’는 귀신에게 결단하는 것이고, ‘서징’은 기화(氣化)에 나타나는 것이고, ‘복극’은 세도(世道)에 징험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나와 그치지 않고 사람에게 있어서 어긋나지 않고 백성에게 행하여 폐가 되지 않고 때에 합하여 들어맞지 않음이 없는 것은 ‘황극’이 체(體)가 되어 ‘이륜’이 서게 되는 소이이고, 사물에 응하여 치란이 생기고 귀신에게 결단하여 길흉이 드러나고 기화(氣化)에 나타나 재상(災祥)이 나타나고 세도(世道)에 징험하여 화복(禍福)이 정하는 것은 ‘황극(皇極)’이 용(用)이 되어 ‘이륜’이 행하게 되는 소이이다. 이것을 행하는 것을 ‘황(皇)’이라 하고 이것을 세우는 것을 ‘극(極)’이라 하는데, 상제가 진노하니 곤(鯀)이 이에 이륜을 패하고 하늘이 우(禹)에게 주니 우가 이륜을 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경하여 농(農), 협(協), 건(建), 예(乂), 명(明), 념(念), 향(嚮), 위(威)에 쓰게 되니, 이에 경(敬)에 독실하고 인(仁)에 돈독하여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사시에 따라 할 일을 알려주며 중(中)을 잡고 권(權)을 써서 재계하여 그 덕을 신명하게 하여,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의 경사를 맞이하고 하늘의 벌을 조심하니, 이와 같이 하여 천명의 항성(恒性)이 서게 되며 민생의 대도(大道)가 행하게 된다.
이 도가 근본하는 것은 하늘이고 응결하는 것은 성인이고 차례대로 베푸는 것은 홍범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우에게 홍범 구주를 주니 이륜이 펴지게 되었다.”고 말했으니, 성인의 말씀이 진실로 이미 그 뜻을 다 드러내어 눈에 보이게 했다고 할 만하다. 여기에 통한 연후에 무왕이 자신을 비우고 기자가 경계를 거듭한 것이 지극히 정성스러워 본의가 실로 존재하는 바를 앎이 있을 것이다.
대저 홍범의 글은 그 말이 간이하고 그 이치가 넉넉하고 그 문사가 은미하고 그 뜻이 무거우니, 참으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굉심오아(宏深奧雅)하여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 있으나 시험삼아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재삼 반복해 읽으면 또한 환하게 명백하여 한 글자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는 말이 참으로 이치를 아는 말이라 하겠다. 학자가 여기에서 참으로 능히 그 수를 미루고 그 이치를 완미하며 그 글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이미 말한 것을 바탕으로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궁구한다면, 천인(天人)의 이치에 있어서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의 말이 충분하다. 그러나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고할 때 도리어 이런 데 관해서는 상세하게 하지 않은 바이고 반복한 바는 모두 그대가 논변한 바가 아니니, 또한 유독 무슨 이유인가.
성인과 성인이 서로 도를 전하고 말을 받음에 진실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대저 이미 그 강령을 잡아서 베풀어 말한즉 그 신도(神道)가 말없이 서로 합하여 이미 가슴 가운데 환하게 밝으니 어찌 말을 많이 할 것인가.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서로 전함이 중도를 잡으라는 ‘집중(執中)’의 한 마디 말에 지나지 않았고 공자(孔子)와 안연(顔淵)이 서로 고함이 ‘인의(仁義)’의 몇 마디 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천하의 이치가 무엇이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자의 말은 다만 그 강령이 되는 조목을 베풀어 말함으로써 그 나머지 뜻을 충분하게 한 것이니, 진실로 일찍이 구체적으로 경문(經文)의 뜻에서 드러냄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가 이른바 그 강령이 되는 조목을 베풀어 말함으로써 그 나머지 뜻을 충분하게 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계의(稽疑), 서징(庶徵), 복극(福極)을 말함에 있어서 모두 그 조목을 베풀어 말한 것이고, 황극(皇極)에 반복한 것은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임금이 이미 천하에 황극을 세워서 백성의 의표가 되고 또 반드시 ‘크게 포함하고 광대하며[含弘廣大] 두루 갖추고 자세한[周備遍悉] 뜻’을 가지며 천하의 사람을 인접(引接)하여 ‘겸하여 수용하고 즐겁게 기르며[兼收樂育] 장려하여 발탁하고 이어서 등용하는[獎拔承庸] 방도’를 다하여, 군자로 하여금 표변(豹變)하고 휘정(彙征)하여 사체(四體)를 펼쳐서 조정 위에 설 수 있게 하고 소인으로 하여금 훈계를 따르고 위덕(威德)을 가송(歌頌)하여 스스로 천자의 광채에 가깝게 함이 있은즉, 건강(乾剛)이 다하지 않아 상하가 사귀게 되고 군자의 도가 자라서 나라가 영구히 힘입을 것이다. 이것은 《주역》 건괘(乾卦) 상구효(上九爻)에 이른바 “군룡(群龍)을 보되 머리가 없으면 길하다.[見龍無首之吉]” 한 것으로서 문언전(文言傳)에서 공자가 이른바 “건원(乾元)이 구(九)를 씀은 곧 하늘의 법칙을 볼 것이다.[乾元用九 乃見天則]”라고 한 것이고, 《서경》 고요모편(皐陶謨篇)에 이른바 “합하여 받아들여 펼쳐서 쓰게 되면 구덕의 사람이 다 그 일을 하여 뛰어난 인재가 다 그 지위에 있다.[翕受敷施 九德咸事 俊乂在位]”고 한 것이고, 《시경》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에 이른바 “많은 선비가 성대하니, 문왕이 이로써 편안하다.[濟濟多士 文王以寧]”고 한 것으로서 요순(堯舜)의 즈음에 주도(周道)의 성대함을 여기에서 족히 볼 것이 있다.
삼덕(三德)에 경계를 거듭한 것은,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세상을 어루만짐에 진실로 강유(剛柔)로 다스리고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있으나 반드시 그 명분(名分)이 근엄하고 위복(威福)이 절로 나와야 곧 형상(刑賞)의 권병을 잡고 위경(威慶)의 정사를 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의 정사가 막혀서 아래로 통하지 않고 곧은 덕이 흉하게 되어 시행함이 있으나 빛나지 않으니, 위(魏)의 조모(曹髦)와 당(唐)의 소종(昭宗)의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어지럽고 인기(人紀)가 서지 않아 앞서 이른바 ‘천하의 우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을 여기에서 징험함이 있으니, 오히려 어찌 덕을 관찰하고 정사를 베풂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실로 극을 세우고 덕을 베푸는 데 서로 기다려 이루는 도리이니, 기자(箕子)가 경문(經文)을 우익(羽翼)하는 도리인 것이다. 이 어찌 이른바 ‘그 미비한 것을 충분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계의(稽疑)에 상세하게 말한 것과 같은 것은, 반드시 사람의 모의에 합하고 귀신에 의지하려는 것임을 보이는 뜻이다. 서징(庶徵)에 자세하게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재관(才官)이 훌륭하고 못함은 임금의 덕이 아름다운가 그릇되었는가에 달려 있고 서민이 기쁘고 슬픈 것은 국가가 다스려졌는가 어지러운가에 관련된 것임을 보이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이른바 “그 수를 미루고,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궁구한다.”고 한 것은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주자(朱子)가 이른바 “망묘(茫眇)하고 미매(微昧)하여 알 수 없다.”고 한 것인데 어찌 갑자기 말할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풀이와 김인산(金仁山)의 설명이 이미 갖추어졌다. 가만히 일찍이 그 뜻으로 인하여 미루어 보건대, 대개 우 임금이 홍범을 편 것이 비록 인사를 따른 것이지만 실로 천지에서 살핀 것이기 때문에 귀문(龜文)에 맞춘 것으로 생각된다.
천도(天道)로 말하자면 오행은 통(統)이 되고 오사는 기(紀)가 된다. 왕정(王政)으로 말하자면 팔정은 체(體)가 되고 오기는 용(用)이 된다. 군덕(君德)으로 말하자면 황극은 경(經)이 되고 삼덕은 권(權)이 된다. 민사(民事)로 말하자면 계의는 본(本)이 되고 서징은 말(末)이 된다. 오복, 육극으로 마친 것은 천인(天人)이 감응하는 도리가 여기에 이르러 그 상변(常變)을 다함을 뜻하는 것이다. ‘통’, ‘체’, ‘경’, ‘본’, ‘상’은 양위(陽位)를 얻어서 양수(陽數)를 다하고, ‘기’, ‘용’, ‘권’, ‘말’, ‘변’은 음위(陰位)에 있어서 음수(陰數)를 다하니, 이것은 곧 귀문(龜文)의 음양(陰陽)의 이치와 편정(偏正)의 체제가 그러한 것이다. - 1, 3, 9, 7, 5는 양(陽)이며 정(正)이고, 2, 4, 6, 8은 음(陰)이며 편(偏)이다. -
오행은 천도의 상(常)이고, 팔정은 왕정의 용(用)이다. 복극은 천인의 교감(交感)이며 화복의 정형(正形)이다. 계의는 민신(民神)의 참협(參協)이며 길흉(吉凶)의 조경(兆景)이다. - 양수(陽數)는 왼쪽으로 돈다. - 오사는 인성(人性)이 천명(天命)에 발원하는 것이다. 오기는 천시(天時)가 민용(民用)에 출입하는 것이다. 서징은 정침(精祲)이 서로 부딪치고 기화(氣化)가 변천하는 것이다. 삼덕은 득실이 서로 미루어지고 세도가 오르내리는 것이다. - 음수(陰數)는 오른쪽으로 돈다. - 오행과 복극은 음양의 품부와 선악의 보답이 서로 왕래하는 것이다. 팔정과 계의는 백성의 의(義)와 귀신의 모(謀)가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다. 오사와 서징은 휴구(休咎)의 움직임과 요상(妖祥)의 이름이 번갈아 서로 바뀌는 것이다. 오기와 삼덕은 천시(天時)의 변화와 세치(世治)의 변천이 번갈아 서로 경위(經緯)가 되는 것이다. - 음양이 상대(相對)하는 것이다. - 황극은 여덟 가지 유를 총괄하여 사방에 임하여 가운데서 도는 것이다. 이것인즉 천인의 교제(交際)와 상하의 유통(流通)으로서 수(數)의 유행(流行)과 위(位)의 대대(對待)인 것이다.- 1, 3, 9, 7, 2, 4, 8, 6은 유행이고, 1, 9, 3, 7, 2, 8, 4, 6은 대대이다. -
세상을 다스림에 오직 중도로써 함과 같은 것은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덕(德)이고, 자신을 닦기를 공경으로 함과 같은 것은 곤괘(坤卦) 육이(六二)의 움직임이다. ‘백성에게 임하기를 인으로 하는 것’은 진(震)에서 발생(發生)함이고, ‘하늘을 받들기를 순하게 하는 것’은 손(巽)에 섭화(燮和)함이다. 오행에서 근원하고 복극에서 다함은 삭역(朔易)에서 유행(流行)하여 남와(南訛)에서 전화(轉化)하는 것이다. ‘간특함을 닦기’를 정성으로 함과 같은 것은 대축괘(大畜卦)의 단사(彖辭)에 이른바 ‘독실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니 밖으로 건전함이고, ‘의혹을 분변하기’를 지혜로써 함과 같은 것은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에 이른바 ‘재계하여 그 덕을 신명하게 하는 것’이니 안으로 밝음이다. 9와 1은 종시(終始)이고, 인(仁)과 지(智)는 좌우(左右)이고, 강(剛)과 유(柔)는 상제(相濟)이고, 정성과 공경은 상자(相資)이다. ‘종시’는 정위(定位)이고, ‘좌우’는 상체(相逮)이고, ‘상제’는 상함(相咸)이고, ‘상자’는 상익(相益)이다. 이것은 또한 용(用)이 후천(後天)에 기록되고 위(位)가 선천(先天)에 합하는 것으로서 그 경위와 표리가 대개 ‘자연의 묘’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천지, 사시의 운화(運化)와 물리, 인사의 종시(終始)가 그 가운데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홍범(洪範)의 수를 낙서(洛書)에 합하게 한 것이 또한 어찌 수의 자연이겠는가.
그렇다. 1부터 9까지 허수(虛數)로 합하여 대연(大衍)의 수가 되고 오행으로부터 복극에 이르기까지 실수(實數)로 총괄하여 천지(天地)의 수가 된다는 것은 주자(朱子)의 설이다. 실수를 총괄하여 50이 되고 육극(六極)을 구별하여 십수(十數)를 쓴다는 것은 또한 고인의 설이다. 이것은 모두 나름대로 주장하는 설이 있는 것이다.
가만히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계의가 4인 것은 ‘경사(卿士)’, ‘서민(庶民)’, ‘귀(龜)’, ‘서(筮)’이고, 또는 9인 것은 ‘경사’, ‘서민’, ‘복오(卜五)’, ‘점이(占二)’이다. 서징이 9인 것은 ‘우(雨)’, ‘양(暘)’, ‘욱(燠)’, ‘한(寒)’, ‘풍(風)’, ‘세(歲)’, ‘월(月)’, ‘일(日)’, ‘성(星)’의 아홉 가지이다. 오복이 5인 것은 또한 육극과 함께 11이 되는 것이다. 그 강(綱)을 합하면 45가 되어 낙서(洛書)의 본수로 돌아가고, 그 목(目)을 다하면 대연(大衍)의 수 50이 되는데 도(道)가 그 가운데 1을 차지한다. 그 변수(變數)를 합하면 천지의 수 55가 되는데 천수 1은 쓰이지 않고, 그 자수(子數)를 다하면 81이 되어서 구궁(九宮)의 수를 다하게 된다. 이 또한 차례가 정연한 형상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대개 하늘이 신물(神物)을 내림에 성인이 이를 본받은 것이다. 하도가 나오고 낙서가 나옴에 성인이 이를 본받았으니, 성인의 독지(獨智)를 드러내고 자연의 성법(成法)을 취한 바의 것이 의도적으로 참고하고 고찰하여 반드시 같기를 구함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천지는 두 가지 이치가 없고 성인은 두 가지 마음이 없으니 도(圖)와 ‘홍범의 수’는 비록 때의 선후가 있고 일의 출입이 있으나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만히 저절로 합하는 것은, 그 사이에 인위(人爲)와 사지(私智)를 개입한 이가 억지로 견합(牽合)하고 천착(穿鑿)하여 말하지 못할 점이 있다.
또 일찍이 시험삼아 추론하여 다시 다음과 같은 한 설을 얻었다.
낙서(洛書)의 수는, 양은 3이 왼쪽으로 돌고 음은 2가 오른쪽으로 도는데, 양은 1에서 시작하니 1이라는 것은 천위(天位)이다. 1에 3을 곱하여 3이 되는 것은 삼공(三公)이고, 3에 3을 곱하여 9가 되는 것은 구경(九卿)이고, 9에 3을 곱하여 27이 되는 것은 이십칠대부(二十七大夫)이고, 27에 3을 곱하여 81이 되는 것은 팔십일원사(八十一元士)이다. 음은 2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은 양의(兩儀)이고, 2배가 되어 4가 되니 사상(四象)이고, 또 2배가 되어 8이 되니 팔괘(八卦)이고, 또 2배가 되어 16이 되니 십육상(十六象)이고, 또 2배가 되어 32가 되니 삼십이상(三十二象)이 되고, 또 2배가 되어 64가 되니 육십사괘(六十四卦)가 된다. 삼공이 다스리기를 돕고 구경이 직분을 나누어서 왕도(王道)가 완비되고, 이기(二氣)가 흘러 행하고 팔괘(八卦)가 서로 움직여 천덕(天德)이 드러난다.
천덕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오덕(五德)이 있는데 이는 실유(實有)의 이치이고, 왕도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오전(五典)이 있는데 이는 무망(無妄)의 도리이니, 음양의 변화(變化)와 만사의 운위(云爲)가 능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비운 것은 태극(太極)이 되고 채운 것은 황극(皇極)이 되는 것이니, 중(中)에 있으면서 하는 바가 없고 극(極)에 처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양은 5를 지나 장수(章數)가 구비되고 음은 6을 지나 괘상(卦象)이 다하게 된다. 5와 6은 천지의 수의 가운데이니 5에서 한 번 돌고 6에서 두 번 이르며 1과 2는 음양의 수의 시작이니 1에서 회복하고 4에서 반복하니, 이것은 “만물에 앞서서 대신 마친다.[首物代終]”는 뜻이다. 행하기는 3으로써 하고 돌기는 2로써 하는 것은 “전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반을 쓴다.[居全用半]”는 뜻이다. 음은 편(偏)이고 양은 정(正)이며 양은 순(順)이고 음은 역(逆)이며 음은 결(缺)이고 양은 전(全)이며 양은 전(專)이고 음은 변(變)이니, 이 또한 천지(天地)의 대의(大義)를 세우고 강유(剛柔)의 대분(大分)을 바르게 하는 것 아님이 없다. 양은 성대한 데서 흥하고 음은 어린 데서 일어나며 양은 생(生)에서 시작하고 음은 살(殺)에서 근본하니, ‘성대한 데서 흥함’은 초(初)에서 그치는 것이고 ‘어린 데서 일어남’은 진(盡)에서 늙는 것이며 ‘생(生)에서 시작함’은 역(逆)을 다하여 살(殺)이 되고 ‘살(殺)에서 근본함’은 순(順)을 다하여 생(生)이 되는 것이다. 화(化)에는 진퇴가 있고 덕(德)에는 생살이 있다.
천(天)은 도(道)를 본받고 음(陰)은 물(物)을 본받으니, 도는 본디 종시(終始)가 없으나 물은 진실로 성쇠(盛衰)가 있다. 20에서 1을 얻는데 이 1은 사물을 낳는 시초이고 24에서 6을 얻는데 이 6은 만물을 이루는 처음이다. 64에서 치음(穉陰)이 변하기를 다하고 91에서 노양(老陽)의 수를 다하는데, 그 수가 이루어짐은 양수가 오른쪽으로 돌면서 음수를 통괄하여 상생(相生)하고 음수가 왼쪽으로 돌면서 양수를 바꾸어 상성(相成)하는 것이다. - 1과 6이 어울려 7이 되고, 7과 2가 어울려 9가 되고, 9와 4가 어울려 3이 되고, 3과 8이 어울려 1이 되며, 2와 6이 어울려 8이 되고, 6과 8이 어울려 4가 되고, 8과 4가 어울려 2가 되고 4와 2가 어울려 6이 된다. -
양수는 능히 음수를 겸하지만 음수는 양수를 얻지 못하고 음수는 양수를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양수는 음수를 따를 수 없다. - 1과 3이 어울려 4가 되고, 3과 9가 어울려 2가 되고, 9와 7이 어울려 6이 되고, 7과 1이 어울려 8이 되며, 1과 8이 어울려 9가 되고, 3과 4가 어울려 7이 되고, 9와 2가 어울려 1이 되고, 7과 6이 어울려 3이 된다. - 앞에서 이른바 “중(中)에 있으면서 극(極)에 처하여 하는 바가 없으면서 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은 양이 얻어서 나란히 행하면서 벗을 얻음이고 음이 얻어서 홀로 가면서 짝을 얻는 것이다. - 1과 3이 5를 얻어서 9를 이루고, 3과 9가 5를 얻어서 7을 이루고, 9와 7이 5를 얻어서 1을 이루고, 7과 1이 5를 얻어서 3을 이루며, 2가 5를 얻어서 7이 되고, 6이 6을 얻어서 2가 되고, 8이 5를 얻어서 3이 되고 4가 5를 얻어서 9가 되는 것이다. - 1을 얻은 것은 생장하고 - 1에서 시작하여 또 1을 얻어 2가 되고 또 1을 얻어 3이 되어 1에서부터 8을 얻는다. ‘또’라는 것은 2의 상대이다. - 9를 얻은 것은 물러나고 - 9에서 다하는데 또 9를 얻어 8이 되고 또 9를 얻어 7이 되어 9에서부터 2를 얻는다. ‘또’라는 것은 8의 상대이다. - 5를 얻은 것은 이룬다. - 5에 중앙이 되어 1이 5를 얻어서 6을 이루고 2가 5를 얻어서 7을 이룬다. -
임금은 신하를 통솔하고 아버지는 자식을 통솔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솔하고 군자는 소인을 통솔하고 중국(中國)은 이적(夷狄)을 통솔하니, 신하가 임금에게 참람하게 할 수 없고 부인이 남편에게 대항할 수 없고 이적이 중국을 능멸할 수 없다. 따라서 대는 소를 겸하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며 흉은 길로 변하고 선은 악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늘이 오전(五典)을 펴니 오교(五敎)로써 백성에게 베풀고, 땅에 오행(五行)이 있으니 오운(五運)으로 마친다. 1을 얻어서 생장한다는 것은 근본을 따라 흥기함이고, 9를 얻어서 물러난다는 것은 항룡(亢龍)에 처하여 후회함이고, 5를 얻어서 이룬다는 것은 중(中)을 밟아서 성대하다는 것이다.
이에 하늘에 있어서는 상(象)을 이루고 땅에 있어서는 형(形)을 이루어어두운 데서는 귀신(鬼神)이 있고 밝은 데서는 예악(禮樂)이 있어 음양의 조화와 귀신의 변화와 예악의 수가 분리되었다가 합치하여 회통(會通)하고 교운(交運)하여 천지의 사이에 찬연(燦然)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도(河圖)는 상(象)의 근본이고 낙서(洛書)는 수(數)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릇 이것은 비록 선각(先覺)이 다 궁구하여 말하지 않은 바이나 깊이 완색하여 자득함이 있게 되면 혹 반드시 《주역》의 상(象)을 보고 사(辭)를 완색하는 데 일조(一助)가 되지 않음이 없고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차례를 정한 뜻에도 또한 일찍이 상호간에 드러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홍범(洪範)의 이치가 여기에서 다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하도와 낙서가 출현함에 천지의 이치를 미루어 알 수 있고 《주역》과 홍범이 지어짐에 성인의 마음을 볼 수 있으니, 변화는 팔괘(八卦)의 상에 나타나고 경륜은 구주(九疇)의 수에 구비되었다. 그러나 복희(伏羲)의 괘(卦)와 문왕(文王)의 단(彖)과 주공(周公)의 효(爻)와 공자(孔子)의 십익(十翼)과 정자(程子)의 전(傳)과 주자(朱子)의 본의(本義)가 있음으로 인하여 《주역》의 도리가 또한 거의 남김없이 밝혀지게 되었다. 오직 홍범의 수인즉 하늘이 우(禹) 임금에게 주고 기자(箕子)에게 전할 뿐이어서 그 홍경(弘經)과 대용(大用)이 천하에 나타나기가 어려웠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경기(經紀)하고 구복(究復)하고 중신(重申)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끌어서 펼치고 유를 따라 길게 하면 오히려 말할 만한 것이 있어서 능히 후인을 기다릴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의 마음은 보기가 쉽지 않고 성인의 뜻은 살피기 쉽지 않고 경륜의 대업은 말하기 쉽지 않으니, 화하여 재량하는 것은 변(變)에 있고 미루어 행하는 것은 통(通)에 있고 신묘하게 하여 밝히는 것은 그에 마땅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아아, 그럴진대 또한 어찌 갑자기 말할 수 있겠는가.
숭정(崇禎) 현익 대율(玄黓大律 임오(壬午) 1642, 인조20) 중추일에 구봉(九峯) 선생의 홍범전(洪範傳) 뒤에 쓰다.
하늘이 우(禹) 임금에게 홍범 구주를 줌에 이륜(彝倫)이 펴지게 되었고 무왕(武王)이 기자(箕子)에게 천도로써 묻자 구주(九疇)가 이에 펴지게 되었은즉, ‘홍범’이라는 것은 실로 제왕이 하늘을 이어서 황극을 세워 이 세상을 경륜하는 대법(大法)이다. 요순(堯舜) 삼대(三代)의 시절에는 이 도가 진실로 세상에 흥성하였고 진한(秦漢) 이하에도 학사대부들이 오히려 이를 전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오행을 풀이하는 전(傳)이 있었은즉 -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을 말한다. - 상서를 고찰하고 기이함을 징험하는 것이 상세했으나 연원(淵源)을 탐구하여 치도(治道)를 내는 것이 아니었고, 황극에 수(數)가 있었은즉 - 황극내편(皇極內篇)을 말한다. - 수를 다하고 일을 점치는 것이 깊었으나 본말(本末)을 꿰뚫어 대경(大經)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회암(晦菴)주부자(朱夫子)가 대중(大中)의 뜻을 분변하여 - 황극변(皇極辨)을 보라. - 족히 천년토록 이어온 그릇된 견해를 깨뜨렸고 독공(篤恭)의 설을 밝혀 - 주자가 말하기를, “홍범의 ‘경용오사(敬用五事)’는 곧 《중용》에 이른바 ‘독공(篤恭)함에 천하가 평정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홀로 능히 성인의 정미(精微)한 본의를 제시하였다. 그렇게 한 연후에 홍범을 옳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은미한 말이 간간이 있어서 자세하게 들을 수 없는 점이 있는데, 도리어 지금 채침(蔡沈)의 홍범전(洪範傳)에 보이는 것인즉, 또한 일찍이 그 스승 주자(朱子)의 설을 추본(推本)하여 다 천명(闡明)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반복하여 읽음에 능히 유감이 없을 수 없어 마침내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대개 일찍이 살펴보건대, 중묵(仲默 채침(蔡沈)의 자(字)임)의 설인즉 ‘경(敬)’과 ‘농(農)’으로써 몸을 정성스럽게 하고 삶을 후하게 하는 조목으로 삼고, ‘오사(五事)’와 ‘팔정(八政)’으로써 곧 몸을 정성스럽게 하고 삶을 후하게 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며, 모(某)의 설인즉 ‘오사’와 ‘팔정’을 다만 구류(九類)의 조목으로 삼고 ‘경’과 ‘농’이 실로 이 유를 써서 이 도를 넓히는 것일 뿐이니 구류에 미루어 보건대 다 그렇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한즉 ‘오사’는 일이고 ‘팔정’은 정사이고 ‘경’과 ‘농’은 곧 성인이 일을 바르게 하고 정사를 세우는 심법(心法)인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으로써 하늘에 합하게 하고 마음으로써 일을 제어하면 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앞의 두 가지 설 가운데 전설로 말미암아 본다면 홍범에는 일은 있으나 법이 없어서 성인이 도를 넓히는 뜻을 드러내지 못하였고, 후설을 말미암아 본다면 그 일을 근본으로 하여 그 법을 존재하게 하니 실로 성인이 세상을 경륜하고 이륜을 펴는 대법(大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개 그 차이는 비록 호리(毫釐)의 사소한 사이지만 보는 사람이 장차 그 말의 동정(動靜), 빈주(賓主), 경중(輕重), 천심(淺深)의 즈음에 마땅히 변별하여 천리(千里)에 어긋나는 현저한 오류를 말할 것이 있을 것이다. 또한 무왕이 이른바 ‘이륜(彝倫)’이라 한 것은 오품(五品)을 말함이고 기자가 이른바 ‘홍범(洪範)’이라 한 것은 바로 이것을 펴는 것으로써 말함이니, 어찌 드디어 홍범을 곧바로 이륜이라고 하여 오품의 상경(常經)이 도리어 족히 천하의 논치(論治)에 유무(有無)를 삼을 것이 없다고 할 것인가. 오호라! 선성(先聖)의 뜻이 막혀서 밝지 않음에 학자가 그 말을 외우면서 그 뜻을 상실하니, 이것이 바로 전철(前哲)이 탄식한 바이고 내가 죄로 여기는 바인 것이다.
비록 그러나 내가 언급한 바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전언(前言)에서 살펴 합치함이 있고 인심(人心)에서 나와 징험할 만한 것이어서 과거의 사람이 흥기한 바가 진실로 여기에 있고 미래의 사람이 지을 것이 있음에 반드시 장차 고찰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경(經)을 바탕으로 하여 아직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을 드러냄이고 일찍이 경을 벗어나 상세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상세하게 함이 아니니, 다만 천 년 후에 이를 아는 사람이 택하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그 밖의 전의(傳義)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아직 다 밝혀서 말하지 못한 것은 내가 이를 논하고 - 오행(五行), 오사(五事), 삼덕(三德), 황극(皇極)에 대한 전의(傳義)의 유는 모두 채침(蔡沈)의 홍범전(洪範傳)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미 밝힌 것에 나아가서는 내가 또한 다시 말하지 않았으니 보는 사람은 이를 상세히 살피기 바란다.
구주는 만사(萬事)이고 홍범은 심법(心法)이다. ‘오행(五行)’에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의 제도(帝道)를 알 수 있다. ‘경용오사(敬用五事)’는 요순의 심법(心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협용오기(協用五紀)’는 호천(昊天)을 공경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농용팔정(農用八政)’은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베풀되 너그럽게 하는 것이다. ‘건용황극(建用皇極)’은 탕(湯) 임금의 지지(遲遲)이니 곧 구위(九圍)에 모범이 되는 까닭이다. ‘예용삼덕(乂用三德)’은 우(禹) 임금의 미미(亹亹)이니 능히 상제(上帝)를 받드는 까닭이다. ‘명용계의(明用稽疑)’는 《주역》에 이른바 재계하여 그 덕을 신명하게 하는 것이다. ‘염용서징(念用庶徵)’은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몸가짐을 조심하여 행실을 닦았던 것이다. ‘향용오복(嚮用五福), 위용육극(威用六極)’은 주 나라 문왕(文王)이 덕을 밝히고 벌을 신중히 하며 마땅히 공경할 사람을 공경하며[祗祗] 위엄을 보일 바에 위엄을 보였던 것[威威]이다. 천성(千聖)이 전한 바와 백왕(百王)이 행한 바를 모두 족히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전언(前言)에서 살펴 합치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황극이 5의 수에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되는 도리이니 천지의 마음이고, ‘의(義)’라고 하는 것은 마땅하게 하는 이치이니 천하의 정로이고, ‘예(禮)’라고 하는 것은 도를 밟고 문채를 이루는 것이니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고, ‘지(知)’라고 하는 것은 혐의를 결단하고 물리를 분간하는 것이니 시비의 본심이고,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처음을 이루고 끝을 이루는 것이니 천하의 실리(實理)이다. 부모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도하는 것은 친함이 있기 때문이고, 임금이 명령하고 신하가 공손한 것은 의가 있기 때문이고, 어른이 온화하고 어린이가 순한 것은 차례가 있기 때문이고, 남편은 강하고 부인은 부드러운 것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고, 붕우 간에 공경하기를 오래도록 하는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사덕(四德)이 있으니 사시(四時)로써 만물을 이루고, 땅에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오행(五行)이 있으니 오운(五運)으로 마친다. 하늘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에는 오전(五典)이 있으니 오교(五敎)로써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다. 하도(河圖)에 5가 가운데 있는 것은 대연(大衍)의 수를 이루는 까닭이고, 낙서(洛書)에 5가 가운데 있는 것은 대칭이 되는 수를 서로 합하여 15가 되게 하려는 까닭이다. 비운 것은 태극(太極)이 되고 채운 것은 황극(皇極)이 되는 것이니, 중(中)에 있으면서 하는 바가 없고 극(極)에 처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오상(五常)은 그 이치이고 오륜(五倫)은 그 상도이다. 이것이 이른바 ‘이륜(彝倫)’이니, 제왕이 천하에 서는 소이(所以)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황극(皇極)이 5에 처함이 이러한 까닭인가. 어떻게 ‘황극에서 반복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경문에서 “임금이 그 극(極)을 세우시는 것이니 이 오복(五福)을 다 모아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황극(皇極)을 잘 보호하고 따라 행하게 될 것입니다.[皇建其有極 斂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라고 말한 것은 대개 제왕이 황극을 세워 정사를 펴서 복을 주고 극에 합하여 명을 보전하는 일을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 제왕이 이미 자신으로써 위에서 표준을 세워 천하의 법칙이 되고 또 작상(爵賞)과 위형(威刑)의 권병(權柄)을 총괄하여 아래로 덕을 펼치면, 천하의 백성들이 제왕이 세운 표준에 가서 따르지 않음이 없어서 서로 더불어 보호하고 지켜서, 제왕으로 하여금 길이 천하의 주인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복(五福)을 말하고 육극(六極)을 말하지 않은 것은, 또한 ‘누리게 하고 위엄을 보이는 제왕’은 덕에 맡기지 형벌에 맡기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
‘범궐서민 무유음붕(凡厥庶民 無有淫朋)’ 이하는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의 뜻을 거듭 말하는 것이다. - 임금이 이미 자신으로써 위에서 극(極)을 세우게 되면 천하의 사람들이 따라서 작상(爵賞)으로 권장하고 부월(斧鉞)로 징계하길 기다리지 않음이 있게 된다. 그러한 까닭에 백성들이 도리를 벗어나 편벽되게 무리를 지음이 없고 사대부가 편벽되게 짝을 짓는 마음이 없게 되니, 이것은 모두 지위에 있는 사람이 능히 위에서 법칙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일 따름이다. -
‘범궐서민 유유유위유수(凡厥庶民 有猷有爲有守)’ 이하는 ‘염시오복 용부석궐서민(斂時五福 用敷錫厥庶民)’의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 제왕의 도리는 이미 먼저 덕으로 교화하고 또 반드시 도로써 다스리면 그 황극을 세운 효과가 진실로 말하지 않아도 따르고 행하지 않아도 다스려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따르는 백성들 가운데 타고난 바탕이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가지런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모려(謀慮)가 있는 이도 있고 재력(材力)이 있는 이도 있고 집수(執守)가 있는 이도 있다. 임금이 진실로 마땅히 생각하고 잊지 말아서 이들로 하여금 왕정(王庭)에 드날리게 하여 천직(天職)을 함께하도록 해야 한다. 그 가운데 혹 선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큰 허물에 이르지는 않은 사람은 임금이 또 수용하여 가르쳐서 혹 너그럽게 용납하여 그 선을 기르게 하고 혹 엄한 소리로 위엄을 떨쳐서 그 악을 막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능히 덕을 좋아한다는 말로써 스스로 이름을 삼게 해야 한다. 그러한 연후에 임금이 또 작록을 주어서 더욱 장려하게 한즉, 저들이 또한 장차 덕을 생각하고 위엄을 항상 두려워하여 임금의 크나큰 교화에 도야(陶冶)되어 윗사람과 덕이 합하여 천하에 버려지는 재능이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또한 반드시 외로운 처지라고 하여 업신여기지 말고 고명한 자질이라 하여 성내지 않고 한결같이 오직 능히 선한 사람만을 친하기에 스스로 힘쓴다면 많은 인재들이 다투어 권면하고 나라의 형세가 불붙듯 창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무릇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안으로는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걱정이 없고 밖으로는 사체를 펼쳐서 스스로 왕사(王事)에 힘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능히 그렇지 못하다면 이 사람이 능히 스스로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작록은 가족을 부양할 수 없고 염치는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장차 죄와 허물이 자신에게 미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본심을 이미 기른 사람에게 임금이 작록을 주게 되면 이는 다만 임금을 움직여 옳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여 스스로 그 무리를 불어나게 하여 마침내 천하가 그 화를 받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
‘무편무파(無偏無陂)’ 이하는 ‘유시궐서민 우여극(惟時厥庶民 于汝極)’의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 임금이 이미 자신으로써 위에서 황극을 세워 천하의 백성들에게 보이고 또 은덕과 위엄, 주고 빼앗음으로써 그 사이에 조종(操縱)하여, 높이 서민의 위로 나오는 덕이 있고 널리 천하를 덮는 도가 있고 또 준재를 구하고 인재를 기르며 합하여 받아들여 펼쳐서 쓰는 정사가 있어서, 공평하게 하여 군재(群材)에게 직분을 줌으로써 들에는 등용되지 못한 어진 이가 없도록 하고 사물을 체험하여 백관(百官)에 밝게 임함으로써 조정에는 비워진 직분이 없게 한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비로소 치우친 마음과 편벽된 행실과 사사로이 좋아하고 사사로이 미워함이 없어져 한결같이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에 달려가 오직 임금에게 돌아가 의지하게 될 것이다. -
‘황극지부언(皇極之敷言)’ 이하는 ‘석여보극(錫汝保極)’의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 말하자면, 임금이 이미 자신으로써 위에서 황극을 세우게 되면 발하여 말하는 것이 곧 실로 천하의 상리(常理)와 천하의 대훈(大訓)이 되어서 하늘이 명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백성들이 이로써 외워서 본받고 따라서 행하여, 일용에 노래하고 펼쳐서 서로 더불어 날로 임금의 광화(光華)에 가까워 그 덕을 위로 돌릴 것이니, 아버지처럼 존경함이 있고 어머니처럼 친애함이 있게 된다. 이에 위엄과 은덕이 아울러 행하고 위와 아래가 서로 의뢰하여 임금의 도리가 서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석여보극(錫汝保極)’이 그러한 것이다. -
이것은 기자가 황극을 세우는 뜻을 거듭 말한 것인데 그 뜻에 순서가 있고 그 말이 정중하여 호호(灝灝)악악(噩噩)하고 연심(淵深) 은미(隱微)하며 곡진하고 상세하니, 정히 공자의 학통에 전하는 《중용》, 《대학》, 《효경》의 경전(經傳)에서 차례로 반복하는 뜻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는 것으로서 그 운어(韻語) 가영(歌詠)의 체제인즉 또한 《시경》과 《주역》의 권여(權輿)인 것이다. 이는 주자(朱子)가 이른바 “성인이 위에 입극(立極)한 바가 지극히 엄밀(嚴密)하고 아래서 인접(引接)한 바가 지극히 관광(寬廣)하다.”고 하신 말씀이 또한 그 요지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선유(先儒)의 말 가운데 ‘무편무파(無偏無陂)’ 일장(一章)으로써 ‘황극지부언(皇極之敷言)’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 것도 있고, 또 삼덕(三德)과 복극(福極)의 뒤에 바꾸어 놓아 나누어서 배열한 것도 있으니, 대개 그 입언(立言)의 체제를 깊이 고찰하지 못한 것이다. - 대개 황극은 구주의 추뉴(樞紐)이면서 또한 무왕의 시사(時事)인 것이니, 이것이 바로 기자가 거듭 말하고[申言] 길이 말하여[永言] 다만 일언(一言)에 그치지 않았던 까닭인 것인가.
처음에 내가 이미 이 설을 지었던 이유는 대개 날로 자신에게 없는 바를 알고 달로 능한 바를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일찍이 여기에서 스스로 더 진보하기를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2년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를 돌아보고 그 말을 살펴보건대 한퇴지(韓退之)가 이른바 “총명은 지난날에 미치지 못하고 도덕은 날로 처음 마음에 저버림이 있다.[聰明不及於往時 道德日負於初心]”고 하는 것이었다. 말은 있으면서 행실이 없는 것을 군자가 부끄러워하고, 이미 얻고서 또한 잃는 것을 군자가 부끄러워한다고 하니, 이 두 가지는 모두 나의 부끄러움이다. 또한 고인이 이른바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고 한 말이 정히 나를 위하여 한 말인 줄 알겠다.
일월(日月)이 매우 홀연히 지남을 슬퍼하고 전언(前言)이 인멸하여 어두움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지난번에 엮었던 것에 대략 수정을 더하고자 하나 곧 심하게 달라질 것이 없으니, 그간에 진보가 없었음이 심하도다. 또 말에 능히 왕래(往來)가 없으니, 짐짓 홍범전(洪範傳) 뒤에 붙여서 혹 후세에 전하여 나의 부끄러움을 표시하려 한다.
횡애 섭제격(橫艾攝提格 임인(壬寅) 1662, 현종3) 5월 병자(丙子)에 적다.
[주D-002]칠정(七政) : 일월(日月)과 수화금목토의 오성(五星)을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 “선기옥형을 살펴서 칠정을 가지런히 한다.[在璿璣玉衡 以齊七政]”는 말이 있다.
[주D-003]삼전(三典) : 경(輕), 중(中), 중(重) 등 세 종류의 형벌. 신국(新國)에는 경전(輕典)을, 평국(平國)에는 중전(中典)을, 난국(亂國)에는 중전(重典)을 써서 다스린다. 《周禮 秋官 大司寇》
[주D-004]오형(五刑) :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것[墨], 코를 베는 것[劓], 발꿈치를 베는 것[刖], 거세하는 것[宮], 사형에 처하는 것[大辟] 등 다섯 가지 형벌. 월(刖)은 비(剕)라고도 한다.
[주D-005]삼덕(三德) :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을 말한다. 《書經 洪範》
[주D-006]위로하며……더하니 : 요(堯) 임금이 신하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말하면서 “수고로운 사람을 위로하며, 오는 사람을 이르게 하며, 사특한 사람을 바르게 하며, 굽은 사람을 곧게 하며, 도우며 부추겨 스스로 본분을 얻게 하고, 또 따라서 진작시켜 덕을 베풀도록 하라.[勞之來之 匡之直之 輔之翼之 使自得之 又從而振德之]”고 한 말이 있다. 《孟子 滕文公上》
[주D-007]한(漢) 원제(元帝) : 선제(宣帝)의 아들. 선제가 죄인을 엄중히 처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고 생각한 나머지 유화정책을 폈는데, 우유부단하여 선제의 유업(遺業)이 쇠퇴하게 되었다. 《漢書 卷9》
[주D-008]당(唐) 대종(代宗) : 숙종(肅宗)의 맏아들로 총명하고 관후(寬厚)하였다. 그러나 재위 기간에 외이(外夷)의 침입이 많아 국가의 재정 형편이 어려워져 급한 데 쓸 돈을 마련해야 하였으므로 청묘전(靑苗錢)을 거두어들였으며, 또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 번진(藩鎭)이 발호하였는데 제압하지 못하여 당 왕조는 약해졌다.
[주D-009]무려(武呂) : 당(唐) 나라 무후(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와 한(漢) 나라 여후(呂后)를 말한다. 무후는 처음에 당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이었는데 태종이 죽은 후 중이 되었다가 고종이 서자 다시 궁으로 들어와 황후가 되었다. 고종이 죽고 중종(中宗)이 서자 무후가 정사를 천단하여 중종을 폐위하고 예종(睿宗)을 세웠다가 또 폐위하고 스스로 칭제(稱帝)하고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하여 음학(淫虐)을 자행하였다. 여후는 한 고조(高祖)의 황후인데 이름이 치(雉)이고 혜제(惠帝)를 낳았다. 혜제가 죽자 소제(少帝)를 세우고는 조정에 임하여 칭제하고 소제를 죽이고는 항산왕(恒山王) 의(義)를 세워 황제를 삼고 친정의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였다.
[주D-010]조소(操昭) : 조조(曹操)와 사마소(司馬昭)를 말한다. 조조는 후한 때의 패국(沛國) 사람으로 위(魏) 나라를 세웠다. 소시부터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다. 동탁(董卓)이 죽자 가재(家財)를 흩어서 병사를 모집하여 동탁의 잔당을 토벌하고 건안(建安) 연간에 낙양에 이르러 헌제(獻帝)에게 절월(節鉞)을 받은 후 승상(丞相)의 자리에 올라 위왕(魏王)의 봉작을 받고 스스로 주 나라 문왕에 비겼다. 《三國志 卷1》 사마소는 위 나라 온현(溫縣) 사람으로 의(懿)의 아들인데 조모(曹髦)가 재위할 때 대장군이 되어 국정을 전횡하고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었다. 후에 조모를 시해하고 원제(元帝)와 그 아들을 죽이고 위 나라를 빼앗았다. 《晉書 卷2》
[주D-011]기망(冀莽) : 양기(梁冀)와 왕망(王莽)을 말한다. 양기는 후한 순제(順帝)의 황후(皇后)의 오라버니. 영화(永和) 원년에 하남 윤(河南尹)이 되었고 6년에 부(父) 상(商)을 대신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축재(蓄財)를 하였으며, 질제(質帝)를 옹립하였는데 질제가 횡포하고 방자하다 하여 발호 장군(跋扈將軍)이라 하자 질제를 독살하고 다시 환제(桓帝)를 옹립하였다. 20여 년 동안 권좌를 차지하고 횡포가 극심하였으나 결국 자살하였다. 《後漢書 卷34》 왕망은 한 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한(漢) 나라 말엽에 평제(平帝)를 독살하여 가황제(假皇帝)라 칭하였으며 3년쯤 지나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망하였다.
[주D-012]기량(岐梁) : 이무정(李茂貞)과 주온(朱溫)을 말한다. 모두 당 나라 말엽의 군벌로서 당시의 실력자였다. 주온은 황소(黃巢)의 군에서 유력한 부장으로 있었는데 당 나라에 귀순하여 선무군 절도사(宣武軍節度使)를 지내고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천복(天復) 원년(901)에 양왕(梁王)에 봉해졌고, 천우(天祐) 원년(904)에 소종(昭宗)을 죽이고 애제(哀帝)를 세웠다가 선위(禪位)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국호를 양(梁)이라 하였으며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舊五代史 卷1~卷7》 《新五代史 卷1》 이무정은 사병(士兵) 출신으로 광계(光啓) 원년(885)에 희종이 흥원(興元)으로 갈 때 호가하여 무정군 절도사(武定軍節度使)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봉상 절도사(鳳翔節度使) 이창부(李昌符)가 거느린 군사를 공격하여 이창부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봉상 절도사가 되었고 농서군왕(隴西郡王)에 봉해졌다. 대순(大順) 2년(891) 양복공(楊復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소종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는데도 흥원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장안으로 육박하여 소종을 협박하였으며 진왕(秦王)에 봉해지고 흥원 윤(興元尹),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발호하였다. 건녕(乾寧) 3년(896)에는 병사를 이끌고 장안을 향해 전진하여 소종이 위북(渭北)을 거쳐 화주(華州)로 난리를 피하여 간 일도 있었다. 후에 기왕(岐王)에 봉해졌다. 천우(天祐) 4년(907)에 당이 망하고 후량(後梁) 태조가 즉위함에 제후 가운데 강한 자는 모두 차례로 황제라 일컬었는데 이무정만은 기왕이라 칭하였다. 동광(同光) 원년(923)에 후당(後唐) 장종(莊宗)이 후량을 멸하고 후당을 세우니 무정이 표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였다. 다음해에 병으로 죽었다. 《舊五代史 卷132》 《新五代史 卷40》
[주D-013]진채(秦蔡) : 송 나라 때의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을 말한다. 진회는 집정하는 기간 동안 악비(岳飛)를 모함하여 죽인 일을 비롯하여 충신(忠臣), 양장(良將)을 거의 죽였으며 평소에 성품이 음험하였고 만년에는 잔인하기가 더욱 심하였다. 《宋史 卷473》 채경은 성품이 흉악하고 철종 때 장돈(章惇)의 용사(用事)를 도와 간사한 짓을 일삼았으며 휘종 때는 재상이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을 행하고 원우구신(元祐舊臣)을 축출하고 사당(私黨)을 심어 천하에 크게 해독을 끼쳤다. 《宋史 卷472》
[주D-014]성인이……것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의 말이다.
[주D-015]만물을……정함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의 말이다.
[주D-016]하늘의……것이다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의 말이다.
[주D-017]깊은 것을……살피며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0장의 말이다.
[주D-018]이치를……결단함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의 말이다.
[주D-019]옛날의……자일진저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1장의 말이다.
[주D-020]오기(五氣)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는데 여기서는 오행의 기운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D-021]구공(九功) :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말한다. 육부는 수화금목토곡(水火金木土穀)이고, 삼사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이다. 《書經 大禹謨》
[주D-022]보장(保章) : 보장씨(保章氏). 주 나라 때 춘관(春官)에 속한 관명. 하늘의 별을 관장하여 일월성신의 변동을 기록함으로써 천하의 변천을 관찰하고 그 길흉을 변별하였다. 《周禮 春官 保章氏》
[주D-023]휴구(休咎) : 휴징(休徵)과 구징(咎徵). 아름다운 덕에 대한 하늘의 징험을 휴징이라 하고 그와 반대의 경우를 구징이라고 한다. 《書經 洪範》
[주D-024]내가……있다 : 은 나라 탕(湯) 임금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論語 堯曰》
[주D-025]질통(疾痛)이……것[癏恫乎乃身] : 이 말은 《서경》 강고편(康誥篇)에 나오는데, 무왕이 아우 봉(封)에게 백성의 불안을 보기를 마치 질통(疾痛)이 자신의 몸에 있는 듯이 하라는 당부이다.
[주D-026]요(堯)의 탕탕(蕩蕩) : ‘탕탕’은 넓고 멀다는 의미인데, 공자가 요 임금을 두고 말하기를 “크도다! 요의 임금됨이여. 높고 크기는 오직 하늘이 크거늘 오직 요 임금이 이를 본받으시니 탕탕하여 백성이 능히 이름을 붙일 수 없도다.[大哉堯之爲君也 巍巍乎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民無能名焉]”라고 하였다. 《論語 泰伯》
[주D-027]순(舜)의 외외(巍巍) : ‘외외’는 높고 큰 모습인데, 공자가 순 임금을 두고 말하기를 “외외하도다! 순 임금과 우 임금이 천하를 가졌으나 간여하지 않으심이여.[巍巍乎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라고 하였다. 《論語 泰伯》
[주D-028]문왕(文王)의 경지(敬止) : 《시경》 대아 문왕편에 “목목한 문왕이여, 계속하여 밝히고 경건하시도다.[穆穆文王 於緝煕敬止]”라고 한 말이 있는데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을 풀이한 전(傳)에서 이를 인용하여 부연한 바 있다.
[주D-029]무왕(武王)의 계술(繼述) : ‘계술’은 모두 계승하는 것을 말하는데, 공자가 무왕과 주공의 효를 ‘달효(達孝)’라고 규정하고 그 효를 말하면서 “대저 효는 선대의 뜻을 잘 이으며 선대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주D-030]표변(豹變) : 군자가 교화를 따라 선으로 옮겨서 울연한 문채를 이룸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周易 革卦 上六爻》
[주D-031]휘정(彙征) : 군자가 무리지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周易 泰卦 初九爻》
[주D-032]위(魏)의 조모(曹髦) : 자는 언사(彦士)로 위(魏) 문제(文帝)의 손자이다. 정시(正始) 5년에 고귀향공(高貴鄕公)에 봉해졌으며 소시에 학문을 좋아하였다. 제왕(齊王) 방(芳)이 폐해지자 공경(公卿)이 맞이하여 세웠다. 재위하는 동안에 사마사(司馬師)와 그의 동생인 사마소(司馬昭)가 차례로 실권(實權)을 잡고 국정을 전단하였다. 감로(甘露) 연간에 황룡이 영릉(寧陵)의 우물 가운데 나타나자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잠룡시(潛龍詩)를 지어 스스로 풍자했는데 사마소가 보고서 미워했으며, 7년 만에 사마소에게 시해당하였다. 《三國志 卷4》
[주D-033]당(唐)의 소종(昭宗) : 의종(懿宗)의 아들. 희종(僖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기울어가는 당을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했으나 환관이 국정(國政)을 어지럽히고 번진(藩鎭)이 발호하여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세력이 강해진 주온(朱溫)에게 시해당하였다. 《舊唐書 卷20上》 《新唐書 卷10》
[주D-034]오행은 천도의……것이다 : 이 단락은 홍범 구주의 내용과 위차에 대한 설명이다. 《서경(書經)》 권수(卷首) 홍범구주도(洪範九疇圖) 참조.
[주D-035]삭역(朔易) : 세말(歲末) 연초(年初)에 정사에 있어서 묵은 것은 덜고 새것은 구하여 고치는 일을 말한다. 《書經 堯典》
[주D-036]남와(南訛) : 경작(耕作) 또는 권농(勸農)의 일을 말한다. 《書經 堯典》
[주D-037]간특함을 닦기를……밝음이다 : 본문의 ‘간특함을 닦기’와 ‘의혹을 분변하기’라는 말은 공자의 제자 번지(樊遲)가 물은 조목에 있다. 이에 대해 공자께서 답변하시기를, “자기의 악을 다스리고 남의 악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간특함을 닦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잊어서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한다면 의혹됨이 아니겠는가.[攻其惡 無攻人之惡 非修慝與 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라고 하였다. 《論語 顔淵》
[주D-038]홍범(洪範)의……것 : 홍범(洪範)의 수를 낙서(洛書)의 내용과 대비한 것으로 《서경(書經)》 권수(卷首) 구주본낙서수도(九疇本洛書數圖)에 보인다.
[주D-039]대연(大衍)의 수 :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대연의 수가 50이니 운용하는 것은 49개’라고 하는데, 이것은 점서(占筮)의 법에 서죽(筮竹)의 가지가 50개인데 운용하는 데는 49개를 쓴다는 말이다. 여기서 50이라는 수는 천수(天數)와 지수(地數)를 합한 것임. 1, 3, 5, 7, 9를 천수(天數), 2, 4, 6, 8, 10을 지수(地數)라고 한다.
[주D-040]천지(天地)의 수 : 1, 3, 5, 7, 9를 천수(天數), 2, 4, 6, 8, 10을 지수(地數)라고 한다.
[주D-041]9와 4가……되고 : ‘9와 4가 어울려 3이 된다’는 것은 13에서 10을 덜고 남은 수 3을 말한다. 이하에서도 같은 경우이다.
[주D-042]오운(五運) :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오행의 운행.
[주D-043]하늘에……이루어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장의 말인데, 역(易)의 변화가 드러난 것을 말한다.
[주D-044]어두운……있어 : 《예기》 악기편(樂記篇)의 말인데, 예악이 천지와 함께 지극히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주D-045]구봉(九峯) 선생 : 송 나라 때의 학자인 채침(蔡沈)을 말한다. 누차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구봉(九峯)에 은거했던 까닭으로 학자들이 구봉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알려진 《서전(書傳)》은 그의 스승인 주자(朱子)의 영향으로 완성되었다. 《宋史 卷434》
[주D-046]지지(遲遲) :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시경》에 탕(湯) 임금의 덕을 말한 것 가운데 “성덕과 공경이 날로 올라, 밝게 상제께 이르러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상제가 이에 공경하여, 구위에 법이 되도록 명하였다.[聖敬日躋昭假遲遲 上帝是祗 帝命式于九圍]”는 말이 있다. 구위(九圍)는 구주(九州)를 말한다. 《詩經 商頌 長發》
[주D-047]미미(亹亹) : 힘쓰는 모습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에 “미미하신 문왕이여, 아름다운 성문이 그치지 않네.[亹亹文王 令聞不已]”라는 말이 있다.
[주D-048]주(周) 나라 선왕(宣王)이……것 : 주 나라 선왕(宣王)의 사실은 《모시》 운한편(雲漢篇)의 서(序)에 나타나 있는데 “선왕이 여왕의 뒤를 이어서 안으로 난을 떨칠 생각을 가졌는데 가뭄의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여 몸가짐을 조심하여 행실을 닦아 그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자 하니 천하의 사람들이 왕화가 다시 행하여 백성들이 보살핌을 받게 됨을 기뻐한 까닭으로 이 시를 지었다.[宣王承厲王之烈 內有撥亂之志 遇災而懼 側身脩行 欲銷去之 天下喜於王化復行 百姓見憂 故作是詩也.]”는 기록이 있다. 《毛詩 大雅 雲漢》
[주D-049]주 나라 문왕(文王)이……것[威威] : 문왕의 사실은 무왕이 아우 강숙(康叔)을 위후(衛侯)에 봉할 때 문왕의 정사를 명심할 것을 고하면서 “문왕이 능히 덕을 밝히고 벌을 신중히 하며 감히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마땅히 쓸 사람을 쓰며 공경할 사람을 공경하며 위엄을 보일 바에 위엄을 보였다.[文王克明德愼罰 不敢侮鰥寡 庸庸祗祗威威]”는 말에 보인다. 《書經 康誥》
[주D-050]호호(灝灝) : 뜻이 넓고 아득한 모양. 양웅(揚雄)이 《서경》의 상서(商書)를 두고 “상서는 호호하다.[商書灝灝爾]”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揚子法言》
[주D-051]악악(噩噩) : 뜻이 엄숙한 모양. 양웅(揚雄)이 《서경》의 주서(周書)를 두고 “주서는 악악하다.[周書噩噩爾]”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揚子法言》
[주D-052]권여(權輿) : 사물의 시초를 뜻함. 저울을 만들 때는 저울대[權]를 먼저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는 수레의 판자[輿]부터 먼저 만드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D-053]추뉴(樞紐) : 사물의 관건 혹은 상호 연계의 중심을 비유하는 말. 추(樞)는 문을 열고 닫는 지도리이고, 뉴(紐)는 기물을 달아매거나 잡는 끈을 말한다.
[주D-054]날로 자신에게……것 :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의 말에 “날로 자신에게 없는 바를 알고 달로 능한 바를 잊지 않는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고 한 말이 있다. 《論語 子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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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經一章演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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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堂先生文集卷之二
▶ 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주덕재 옆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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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8일 (계사) | |||||||||||||||||||||||||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우인(張友人)·장수 현감(長水縣監) 최득지(崔得之)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수령은 나가서 백 리의 땅을 맡아 다스리며 한 고을을 전단(專斷)하는 것이니, 그 임무가 가볍지 아니하다. 그래서 신중하게 선임(選任)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요역(徭役)을 경하게 하고 세금을 적게 하여 백성을 보호하라.” 하였다. 【원전】 2 집 70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대개 사람의 정(情)은 물(物)에 감동이 되어서 변하는데, 눈으로 보는 바는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냇물이 맑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연(本然)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고, 돌이 높게 겹친 것을 보면 확연(確然)히 뽑지 못하는 뜻이 더욱 굳어지며, 소나무가 늦도록 푸른 것을 보면 곧고 굳은 절개가 더욱 높아지는데, 이 산등성이의 세 가지 물건이 어찌 관람하는 데에 기이하고 무더운 여름철의 휴식하는 쾌락뿐이겠는가. 내가 보는 바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 올라서 감흥이 되어 마음을 붙이고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마음을 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목욕하고 바람 쏘이면서 읊조리고 돌아가는 즐거움이 될 것이니, 옛날에 내가 명명한 뜻을 대개 짐작할 것이다.” 하였다. 용계성(龍鷄城) 용계천(龍溪川)가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10리쯤 되고, 서북쪽으로 연산현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옛 성이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4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지금은 반절이나 무너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