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해창군 영의정 윤상국 신도비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윤방 신도비문)

아베베1 2011. 9. 13. 01:38

  

 택당선생 별집 제7권
 비명(碑銘)
영의정 해창군(海昌君) 윤공(尹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


내가 예전에 사국(史局)의 관리로 몸담고 있을 당시에, 해창 윤 상국(尹相國)이 총재(摠裁)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때에 여러 동료들이 시정 본기(時政本記)에 의거하여 공의 덕량(德量)이 훌륭하다고 기록한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것을 보고는 곧바로 산삭(刪削)하여 없애 버렸다. 이에 내가 아무리 쟁집(爭執)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공이 얼마나 겸손한 뜻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고서 심복(心服)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행히 금방 죽지 않아 개인적으로나마 전송(傳誦)하고 기술(記述)할 수가 있게만 된다면, 제일 먼저 이 사실을 기록하여 빠진 사료(史料)를 보충해야겠다고 늘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상국의 두 자제가 바야흐로 상국을 위해 거상(居喪)하고 있는 몸으로, 행장(行狀)을 나에게 건네 주면서 신도비의 서(序)와 명(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이에 내가 미천하고 졸렬하다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한 채, 예전에 마음먹은 뜻을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보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상국이 예전에 이미 그토록 겸양하는 자세를 보였고 보면, 내가 또 어떻게 감히 가식적(假飾的)으로 아첨을 하여 공이 평소에 지녔던 뜻을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해창군(海昌君) 윤공은 휘(諱)가 방(昉)이요, 자(字)는 가회(可晦)요, 호(號)는 치천(稚川)이다.
윤씨는 본래 해평현(海平縣)에서 유래하였다. 고려(高麗)의 좌복야(左僕射) 윤군정(尹君正)으로부터 비로소 크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4대(代)에 걸쳐 모두 훈작(勳爵)을 계승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문과(文科) 출신으로 목사(牧使)를 역임한 휘 창(彰)이 현감 휘 달성(達成)을 낳았고, 그가 진무부위(進武副尉) 휘 연령(延齡)을 낳았고, 그가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계정(繼丁)을 낳았는데, 이분이 공에게 고조고(高祖考)가 된다.
증조고 휘 희림(希琳)은 사용(司勇)으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받았고, 조고 휘 변(忭)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역임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여기에서 휘 두수(斗壽)가 태어났으니, 영의정으로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인데, 아우인 문정공(文貞公 윤근수(尹根壽)의 시호임)과 함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양조(兩朝)에 걸친 명신(名臣)으로서 왕실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비(妣)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관찰사 황기(黃渏)의 손녀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인데, 아들 네 명이 모두 문과에 등제하여 열경(列卿)과 방백(方伯)의 지위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공이 맏아들로서 가장 먼저 관직에 진출하여 부친에 이어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랐으니, 전대(前代)의 아름다움을 성대하게 계승한 이 일이야말로 옛날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공은 가정(嘉靖) 계해년(1563, 명종 18) 6월 무진일에 태어났다. 공은 집안의 문한(文翰)을 전수받고 약관(弱冠)에 문업(文業)을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 15)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뒤를 이어, 무자년(1588, 선조 21)의 문과에 등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선발되었다.
이때 문정(文靖)이 관서(關西) 지방을 안찰(按察)하고 있었는데, 선묘(宣廟)가 그를 아끼며 보살피는 은총이 특별하였다. 일찍이 금대(金帶)를 안에서 내리면서 공에게 부쳐 준 뒤 체송(遞送)토록 한 적이 있었다. 이에 공이 즉시 뜰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받은 뒤에 도로 사자(使者)에게 주며 말하기를, “하사하신 물품이 정원(政院)을 통해서 내려오지 않았으니, 신이 감히 사사로이 받아서 전해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문정이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아이가 제대로 처신하였다.”고 하였다.
천거를 받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마침 정청(庭請)을 하여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이 있었는데, 공이 창도(唱導)를 하며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필(史筆)을 잡고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몸들이다. 따라서 지금 백관들과 함께 정청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자, 여러 동료들이 이 말을 따랐다. 사관(史官)이 정청에 참여하지 않게 된 것은 대개 공으로부터 그 예가 시작된 것이었다.
자리를 옮겨 봉교(奉敎)에 이르러서 예조 좌랑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사간원 정언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이때 병조 판서 이양원(李陽元)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고 환관(宦官) 방준호(方俊豪)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아우를 선전관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보였는데, 공이 이를 탄핵하니 물론(物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그 뒤에 체직(遞職)되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당화(黨禍)가 일어나면서 문정(文靖)이 제일 먼저 변방으로 유배되는 일을 당하자, 공이 즉시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집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 임진년에 왜변(倭變)이 발생하여 졸지에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는데, 상이 서쪽으로 파월(播越)하려고 하면서 제일 먼저 문정을 일으켜 세워 재상에 임명하고 호가(扈駕)하게 하였다. 이에 공도 예조 정랑으로 수행(隨行)하다가 병조를 거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때 길에서 대부인(大夫人)이 서거(逝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상이 특명(特命)을 내려 기복(起復)시키고는, 공이 세 차례나 사직을 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청요직을 두루 제수하고, 이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승진시키기까지 하였으나, 공이 모두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당시 왜적이 사방에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낮에는 숨고 밤에 달려가 몰래 빈소(殯所)에 이르러서는 곡읍(哭泣)을 하며 자리를 지켰는데,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어도 다행히 빠져 나오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일컬었다.
상복(喪服)을 벗고 나서 다시 응교가 되었는데, 공이 사직하여 직강(直講)으로 체차(遞差)된 뒤 사예(司藝)로 전직(轉職)되었다. 그런데 이때 당론(黨論)이 다시 치열하게 일어나 예전의 일을 끄집어내며 트집을 잡는 바람에, 문정이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공도 대각(臺閣)의 직책을 사직하여 면직(免職)받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 되었다가, 경상도 지방에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나가 유지(有旨)에 걸맞게 안핵(按劾)을 하였으며, 군기시 정으로 승진된 뒤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갔다가 조정에 들어와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
이때 이몽학(李夢鶴)의 역당(逆黨)을 국문(鞫問)하는 데에 공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죄인에 대한 판결을 끝내고 나서 논상(論賞)을 할 적에, 공이 응당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에 올라야 하였으나 한 단계의 자급(資級)을 아직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담당 관리가 공이 예전에 응당 받았어야 할 자급이 누적되어 있는 만큼 추가로 적용하여 그 자급을 채운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규례(規例)를 고수하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추가로 적용을 받아 직질(職秩)이 오른 자가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부끄러워하기도 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적이 다시 깊이 침입해 왔는데, 상이 공의 중자(仲子)인 해숭위(海嵩尉)가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공에게 비빈(妃嬪)과 여러 자녀들을 배종(陪從)하여 해서(海西) 지방으로 먼저 떠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이 상소하여 간절하게 사양을 하면서, 부자(父子) 모두 주상(主上)을 호위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으로써 보답하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의롭게 여겨 허락하였다.
얼마 뒤에 중국 군대가 대거 출동하자, 다시 순안어사의 명을 받고 양초(糧草)에 대한 일을 감독하였다. 그리고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옮겨졌는데, 맑고 엄하면서도 관대하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그 치적(治績)이 한 도 안에서 으뜸으로 꼽혔다. 이에 방백(方伯)과 어사(御史)가 누차 그 치적을 위에 보고드리자, 상이 표창하여 비단을 하사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직질을 올려 주었다. 그리고 공이 고을에 있으면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무(時務)의 편의책(便宜策)을 극구 진달 드리자 상이 자못 채용을 하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공이 동부승지로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돌아가게 되자 이민(吏民)들이 사모하여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되었을 때에 문정공(文靖公)의 상을 당하였으며, 상복을 벗고 나서 동지사(冬至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새로 훈작(勳爵)을 받고 회맹(會盟)에 참여하여 직질이 올라가면서 작위(爵位)를 이어받고 군(君)에 봉해졌으며, 부총관(副摠管)을 겸대하였다. 병조 참판에 임명되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대하다가 도승지(都承旨)로 자리를 옮겼다. 주(朱)와 양(梁) 두 조사(詔使)가 왔을 적에 빈접사(儐接使)를 도와 원만하게 일을 마쳤으므로 관례에 따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올랐으며,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면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도총관(都摠管)을 겸하게 되었다.
광해(光海) 초에 형조 판서로 전임(轉任)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다가 복명(復命)을 하고 나서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에 임명되었고, 임기가 만료되자 경상도 순찰사를 제수받았다. 번잡한 지방을 간이(簡易)하게 다스리면서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면목을 일신하게 하였으며, 학정(學政)을 닦고 군안(軍案)을 개정하면서 모두 조례(條例)를 세워 후대에 준수(遵守)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그 지방의 사민(士民)들이 지금까지도 일컫고 있다. 병으로 사직하고 조정에 돌아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하면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였다.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또 사은사로 중국에 가서 주본(奏本)과 자문(咨文)을 아울러 올렸으며, 일을 마친 뒤에 복명하고 나서 은상(恩賞)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공은 왕실과 인척(姻戚)의 관계를 맺으면서부터 통렬하게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면서 사사로운 샛길을 근절시켰으므로 자제와 노복(奴僕)들이 감히 이를 빙자(憑藉)하는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궁중에서는 공이 집안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인척 관계를 맺은 후의(厚意)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까닭에 공 역시 보통 사람처럼 규례에 따라 자급이 올라가기만 했을 뿐, 더 이상의 은수(恩數)가 가해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광해의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인척 집안의 중신(重臣)들이 모조리 화망(禍網)에 걸려들었을 적에도 공의 경우만은 초연(超然)히 면할 수가 있었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공은 혼탁한 정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목도(目睹)하고서, 계축년(1613, 광해군 5) 이후로는 교외의 집에 물러나 칩거(蟄居)하면서 친지나 옛 벗들과 왕래하는 일조차 완전히 끊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이르러 폐모론(廢母論)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공은 군(君)에 봉해진 신분 때문에 수의(收議)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곧장 말미를 청하여 성묘 길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시 돌아왔을 적에 또 대신(大臣)이 바야흐로 백관을 이끌고서 정청(庭請)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공은 곧바로 대궐에 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고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왔다. 이때 정청에 참여하기 위해 들어가는 재신(宰臣) 한 사람을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곧장 돌아가는 공을 보고는 놀라워하며 말하기를, “공은 수의할 적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또 정청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묻자, 공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하기를, “그 일이 사리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그 사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공을 위태롭게 여겼는데도 공은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칭임)가 합계(合啓)하여 멀리 귀양보내는 율(律)을 적용하여 탄핵하는 등 장차 헤아릴 수 없는 화(禍)를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폐모론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죄를 심판하여 결정하는 일이 유보되었으므로, 공이 교외에서 대죄(待罪)를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무려 6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금상(今上 인조(仁祖)를 가리킴)이 반정(反正)을 하고서는 곧장 공을 불러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임명한 뒤 당시의 불안한 정국(政局)을 진압하게 하였으며, 뒤이어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제수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간당(奸黨)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되었는데, 공은 오직 평번(平反)하는 데에 힘썼으므로, 그 덕분에 온전히 목숨을 건진 자가 또한 많았다.
공은 젊었을 적부터 재상(宰相)의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광해(光海)의 위태로운 조정을 거쳐 오면서도 오점(汚點) 하나도 남김없이 큰 절조(節操)가 우뚝하기만 하였으므로, 반정으로 새 정치를 펼칠 때에도 재상의 자격을 갖춘 이로는 공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중론(衆論)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조금 있다가 좌의정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공은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해서 제일 먼저 임금이 갖추어야 할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에 대한 의논을 개진하면서, 홍범(洪範)에 나오는 황극(皇極)에 대한 말을 사표(師表)로 삼도록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 말을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도화(圖畫)로 작성해서 바치도록 명한 뒤에 항상 좌우에 비치(備置)토록 하였으며, 공 자신도 늘 이것에 의거하여 임금을 바른길로 유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이때 서쪽 변방의 일이 걱정스러웠으므로 일단 두 명의 원수(元帥)를 파견하였는데, 그 뒤에 잇따라 상이 친정(親征)해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나면서 공을 경성 수어 대사(京城守禦大使)로 삼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공은 나라의 환란이 이제 겨우 진정된 마당에 스스로 지킬 병력도 부족한 상황이니 섣불리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걱정하였으나, 중론은 그것을 온당하게 여겨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중외(中外)가 진동하며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공은 금중(禁中)에 조용히 앉아서 기무(機務)를 재결(裁決)하며 신기(神氣)가 태연자약하기만 하였는데, 조정에 들어가서 공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나온 자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모상(某相)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적이 저돌적으로 돌진해 온다 할지라도, 나라에는 끝내 걱정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하기도 하였다.
적이 이미 경성(京城)에까지 육박해 오자, 훈신(勳臣)이 혹시나 내응(內應)이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남쪽으로 파월(播越)할 계책을 정하게 되었는데, 대가(大駕)가 천안(天安)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적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먼저 경성에 들어가서 수습하겠다고 자청하고는 단기(單騎)로 치달려 들어가 보니, 도성 사람 가운데 적을 따랐던 자들이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관망(觀望)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공이 수악(首惡) 약간 명만을 본보기로 처형한 다음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살려 주어 새로운 길을 걷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역적을 따른 사람 수천 인의 명단이 적힌 문안(文案)이 발견되었으므로, 종사(從事)하는 관원들과 친근한 사람들이 다투어 살펴보려고 하였는데, 공이 이것을 모두 가져다가 불태워 버리니 도성 안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로도 역변(逆變)을 고발하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는데, 공이 그 허실(虛實)을 상세히 조사하여 치죄(治罪)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자들이 무척 많았다. 이에 그들이 모두 공의 집 문을 가득 메우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를 드렸는데, 공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성상의 뜻에서 나온 일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장남인 참판공(參判公)이 당시에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있었는데, 기맥(歧麥)의 이적(異蹟)이 일어나자, 어떤 이가 조정에 보고하도록 권하기도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 현상은 우연히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시기에 그런 것을 위에 아뢰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재상의 지위에 있게 되자 스스로 겸연쩍어하면서 누차 사직소를 올려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에 상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경이 없었던들 국가에 오늘과 같은 날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는데, 공이 수상(首相)으로 승진되어 임명된 뒤에 강도(江都)로 상을 호종(扈從)하게 되었다. 이때 강화(講和)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이의(異議)가 분분한 가운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결정이 되었는데, 공은 양쪽의 타당한 의견을 절충하여 수용하면서 모두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감히 지적하여 말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며 인피(引避)하였는데, 누차 소장을 올려 체직을 얻고 나서는 남쪽 교외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공은 일찍이 차자(箚子)를 올려 서로(西路)에 대한 편의책(便宜策)을 10여 개 조목으로 나누어 논한 바가 있었는데, 그때 ‘화의(和議)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화(禍)를 완화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인 만큼 장구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못 되니, 조속히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에 다시 수상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더더욱 두려워하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항상 국가의 근본이 견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론(士論)이 심하게 갈등을 빚는 현상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바른길로 유도할 방도를 생각하며 양쪽 모두가 만족하게 되도록 조화시키면서 오직 진정시키려고 노력을 하는 가운데 특히 강역(疆域)에 흔단(釁端)이 생기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였으니, 어려운 국면을 떼워 넘기며 몇 년 동안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갑술년(1634, 인조 12)에 공이 병들어 눕자, 상이 승지를 보내고 세자 또한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그러다가 병세가 이윽고 위독해지자 공이 차자를 올려, 김상헌(金尙憲)이 강방(剛方)하고 정직(正直)하니 자신의 후임자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이르러 오랑캐의 사신이 와서 칭제(稱帝)의 의논을 거론하였다. 이에 사론(士論)이 격분한 나머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감히 이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오랑캐 사신이 그만 성을 내며 돌아갔다. 이때 공이 마침 산릉(山陵)을 보수하기 위해 밖에 나가 있다가 복명(復命)을 하였는데, 상이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여 대책을 하문해도 논의가 분분하기만 하였으므로, 공이 독대(獨對)하여 아뢰기를, “뭇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화의에 대한 일은 이미 끝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강도에 가서 보존할 계책을 강구하고 험요지(險要地)에 의거하여 적의 침입에 대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일어나면서 공이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였다고 배척하자, 공이 마침내 극력 사직한 끝에 체직을 허락받고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깊은 시름 속에 빠진 채 침식(寢食)을 폐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묘당의 여러 재신들이 간혹 공을 찾아와서 변방의 일을 의논하기도 하였는데, 공은 그때마다 문득 말하기를, “병사(兵事)는 이제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오랑캐가 몇 년 동안만 침입해 오지 않는다면, 내치(內治)를 닦고 외적을 막을 수도 있으련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쳐들어올 날이 멀지 않았으니, 승여(乘輿)가 파월(播越)하는 일을 또 면하지 못할 듯싶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과연 대대적으로 침입을 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지 사흘 만에 곧장 기전(畿甸)까지 육박해 왔다. 이때 공은 단지 묘사 제조(廟社提調)의 직책만을 띠고 있었는데, 상이 공에게 명하여 묘사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강도로 먼저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러고 나서 대가(大駕)가 잇따라 출발을 하였으나, 남대문(南大門)에 도착하였을 때 벌써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서쪽 교외에까지 이르렀다는 보고를 접하였으므로,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행(行幸)하게 되었는데, 그만 곧바로 포위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조정 신하들의 계책이 천박해서 적을 불러들였다고 비난을 하면서, 공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던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공이 강도에 들어갔을 그 당시에, 장신(張紳)과 김경징(金慶徵)이 검찰사(檢察使)로서 빈궁(嬪宮)을 호위(扈衛)하고 있었으며, 장신은 또 유수(留守)로서 주사(舟師)를 아울러 지휘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이를 견제(牽制)하지 못하게 하는 행조(行朝)의 명령이 이미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공과 전(前) 의정(議政)인 김공 상용(金公尙容)이 바람직한 논의를 제기하였어도 가로막혀 시행되지 못하게 된 바람에, 마침내는 강도의 관문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에 적병이 졸지에 들이닥치자, 공이 김상(金相)의 손을 잡고 서로 죽음의 이별을 나누려고 하였는데, 김상이 말하기를, “공은 종묘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있는 몸인 만큼, 나와는 사정이 다르니 무턱대고 죽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래서 공이 마침내 묘문(廟門)에 나아가 부복(俯伏)한 채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였는데, 이때 장신은 주사를 이끌고서 벌써 뒤로 물러나 도망친 뒤였다.
오랑캐가 처음에는 나루를 건너온 병력이 소수인 데다 주사가 후방을 차단할까 염려한 나머지 마침내 병력을 단속시키고는 우리에게 강화를 하도록 협박해 왔다. 그래서 대군(大君)이 승지 한흥일(韓興一) 등을 보내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노왕(虜王)이 대신(大臣)을 보내 줄 것을 청했으므로, 대군이 공에게 가 주기를 간절히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종묘와 빈궁의 중함을 염두에 떠올리는 한편, 행조에서도 바야흐로 대신을 보내 강화를 의논토록 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교자(轎子) 위에 몸을 싣고 곧장 적진(敵陣)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 적진의 군사가 큰소리로 야단을 치며 교자에서 내리도록 하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는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고는, 마침내 부축을 받고 들어가 자리로 나아갔다. 공이 절을 하지 않자 오랑캐가 칼을 빼들고 성을 내면서 절을 하도록 윽박질렀으나, 공은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왕이 공의 나이가 연로(年老)한 것을 보고서 예모(禮貌)를 갖추며 눈짓으로 좌우를 만류하고는, 대군이 직접 와서 보기를 잇따라 청하면서 호의(好意)를 보이며 대접하였다. 그리고는 포로로 잡힌 수천 명을 풀어 주어 돌려보내는가 하면 이틀 동안이나 군대의 행동을 자제시켰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쳐서 빠져 나간 사민(士民)들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이윽고 오랑캐의 군대가 뒤따라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였으므로, 공이 묘우(廟宇)의 문을 몸으로 막아 서서 지켰으나, 형세상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게 되자, 두 낭료(郞僚)와 함께 밤에 베 주머니를 만든 뒤 40여 개의 신주(神主)를 나누어 담아 땅을 파고 묻기로 하였다. 이때 이졸(吏卒)들도 모두 흩어졌기 때문에 공이 직접 삼태기와 삽을 들고서 땅을 파고 묻는 작업을 하다 보니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오랑캐 군대가 불을 질러 묘우가 모조리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그런데 남한산성에서 이미 화의를 맺고 나자, 오랑캐가 빈궁과 대군을 맹약(盟約)의 장소에 모이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공이 마침내 묻었던 신주를 꺼내어 두 명의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짊어지고 가게 하다가 길에서 말을 얻어서 그 위에 싣고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포(金浦)에 이르렀을 때, 세자(世子)가 먼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공이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 혼자 먼저 말을 치달려 앞으로 나가면서, 두 낭료로 하여금 계속해서 신주를 모시고 뒤따라오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에 머물러 있던 오랑캐 군사들이 재물을 약탈하는 바람에 공사(公私) 간에 숨겨 보관해 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파헤쳐지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으니, 종묘의 신주가 전후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왕후(王后)의 신위(神位) 하나가 없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상하 모두가 그래도 신위 전부가 소실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태가 일단 진정된 뒤에 조정이 뒤바뀌면서 일종의 근거 없는 의논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노왕에게 절을 하고 신주를 빠뜨렸다고 무함하면서 당시에 죄를 지은 자들 중에 으뜸으로 율(律)을 적용하고는, 그 반면에 일을 그르치고 군사작전을 망친 여러 신하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의식적인 실수로 간주하여 그냥 놔두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양도(兩都)의 신하들 가운데 오랑캐의 진영에 가서 절을 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 사실에 대해서 대군이 실로 증명을 해 주자, 상이 근거 없이 탄핵을 하였다고 특별히 유시(諭示)를 내렸으므로, 대간의 장소(章疏)에서 그 말이 삭제되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파직만 되었다가 조금 뒤에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서용(敍用)되었는데, 공이 죄를 자인하며 사직을 하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경(卿)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므로, 혼자서 깊이 후회하며 한스럽게 여긴다마는, 이젠 모두가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경이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연소(年少)한 무리들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들을 경은 개의치 말라.”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잇따라서 유백증(兪伯曾)이 앞서 논했던 내용을 거듭 아뢰면서 또다시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말을 꺼내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말한 내용이 너무나도 잘못되었고 죄목(罪目)도 사실과 다르기만 하니, 내가 보기에 공론(公論)이 아닌 듯싶다.” 하고, 또 이르기를, “윤모(尹某)로 말하면, 맑은 덕성이 남보다 뛰어나 혼조(昏朝)에서도 절조(節操)를 세운 사람이다. 직접 적진에 갔던 것은 실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그때에 만약 그런 식으로 임기응변을 하지 않았다면, 빈궁 이하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논하는 이들은 근거 없는 사실을 끊임없이 날조하여 무함하면서, 신주를 불경(不敬)스럽게 받들어 모신 정상에 대해 궁관(宮官)을 끌어들여서 증거를 대기까지 하였다. 이에 상이 그 증거에 대해 끝까지 근거를 규명해 내도록 명하였는데, 궁관 모두가 그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실토하자, 상이 무함한 일인 줄을 알아채고서 유백증의 파직을 명하는 한편, 유지(有旨)를 내려 엄하게 꾸짖으니, 그 논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이회(李檜)라는 자가 자기가 직접 그러한 일을 눈으로 확인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논을 실증(實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을 당시에는 두 사람의 낭료가 배행(陪行)하며 함께 일을 수행했었는데, 그 낭료 두 사람도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스스로 해명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이 여전히 그치지 않는 가운데, 심지어는 옥환(玉環)을 훔친 고사에 그 일을 비유하면서 위에 관련이 되는 말까지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대가 되자, 대신(大臣)이 소장(疏章)을 올려 신리(伸理)를 하는가 하면, 대신(臺臣)들도 대부분 쟁변(爭辨)하며 인피(引避)를 하여 모두 배척을 받고서 떠나가게 되었으므로, 상이 어쩔 수 없이 공을 중도부처(中途付處)시키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묘년(1639, 인조 17) 6월에 연안(延安)으로 배소(配所)를 옮기게 하고, 8월에 전리(田里)에 돌아가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상이 본래부터 공에게 벌을 줄 뜻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공이 몸을 세우고 나라를 섬김에 있어서 본래 선후(先後)가 분명하였으므로 평소 남에게 비난받는 말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큰 변란(變亂)을 당했을 적에도 공이 처치한 것을 보면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일관하였을 뿐 다른 마음이 없었는데도 끝내는 억울하게 재앙을 당하는 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연고인가.
공은 조정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권세(權勢)를 피하여 자신을 단속하였으므로 후진(後進)들이 대부분 공에게 빌붙지를 않았다. 그리고 공의 두 사손(嗣孫) 역시 일찍 대각(臺閣)에 올라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마음가짐으로 편당(偏黨)을 짓지 않은 채 과감하게 탄핵을 가한 일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그동안 원수로 알며 미워해 오던 자들이 모두 양대(兩臺 사간원과 사헌부)에 있게 되자, 공공연히 트집을 잡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법문(法文)을 적용하는가 하면, 모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서도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되었으니, 한세상을 살아가며 처신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고 하겠다.
그해 겨울에 다시 신리해 주는 대신(大臣)의 말이 있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복귀시켜 서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경진년(1640, 인조 18)에 교외의 집에서 병들어 눕게 되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공이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는 유소(遺疏)를 작성하여 상에게 올리면서, 현인(賢人)을 가까이하고 간인(奸人)을 멀리하여 현혹됨이 없이 변별(辨別)할 것과 순량(循良)한 자들을 선발해서 민생(民生)을 보살펴 주도록 할 것을 권하니, 상이 너그러운 유지(有旨)로 비답을 내려 위로하였다.
임종(臨終)할 때에도 공은 의기(意氣)가 편안하고 한가롭기만 하였으며 사적(私的)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소 ‘낙천지명 승화귀진(樂天知命乘化歸盡)’이라는 여덟 글자를 썼는데, 자획(字畫)이 평상시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리에 누워 운명하였으니, 그해 8월 7일로 공의 나이 78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애도하고 조문하며 부의(賻儀)를 내리는 한편,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관에서 보살펴 주게 하면서 상전(常典)보다 더 추가하게 하였다. 11월 7일에 장단(長湍) 오음리(梧陰里) 선영 옆에 장사를 지내었다.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씨(韓氏)는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의 손녀요, 판관(判官) 한의(韓漪)의 딸인데, 공보다 38년 앞서 계묘년에 죽어 근처 언덕에 묻혔다가, 이때 묘소를 이전하여 공과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덕기(德氣)가 흘러넘쳤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바라보기만 해도 공이 대인(大人)이요 장자(長者)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극한 성품으로 순후하고 근실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으며, 관직 생활을 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경계(境界)를 두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는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공은 풍도(風度)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종신토록 옆에서 모신 자도 공이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공의 덕량(德量)과 기국(器局)을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공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공이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로 말하면, 그야말로 난세(亂世)를 평정하고 새로운 개혁 정치를 행하려던 때였다. 그래서 훈신(勳臣)과 명사(名士)들이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고 있었고, 여러 대신(大臣)들도 이에 따라서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공은 오직 성심(誠心)으로 대하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쪽에 가담하였을 뿐, 편당(偏黨)을 지어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기 때문에, 여론에 막히는 일이 없는 가운데 모두들 공을 모시고 일하기를 즐겨하였다.
시의(時宜)에 합당하게 조정에서 의논한 계책 가운데, 가령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병력을 증강시키게 한 것이라든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선혜청(宣惠廳)을 세우게 한 것이라든가 전폐법(錢幣法)의 시행을 창시하고 복구시킨 것 등은 모두 공이 주장한 것이었는데, 끝내는 사변(事變)으로 말미암아 그 의논이 중지되는 바람에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론(士論)으로서 세도(世道)와 관련된 것 가운데, 가령 신묘년(1591, 선조 24)의 억울한 무함을 신설(伸雪)토록 한 것이라든가 유일(遺逸)인 김장생(金長生)을 초빙(招聘)토록 한 것 등은 모두 공이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쟁론(爭論)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또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와 관련하여 이의를 제기하다가 죄를 얻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두 공이 구제해 주려고 해명하며 누차 소장을 올려 간절히 간함으로써 대부분 상의 은혜를 받게 하기도 하였다.
공은 또 혼조(昏朝) 때의 사적(史籍)이 갑자년(1624, 인조 2)의 난리로 흩어져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돈을 주고 사 모으는 등 수습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특별히 수찬관(修撰官) 4인을 증원하도록 요청한 결과, 나와 이명한(李明漢)과 정백창(鄭百昌)과 이민구(李敏求) 등이 일시에 이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데,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시비(是非)와 거취(去就)가 한결같이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되어 끝내는 완전한 역사책을 편찬할 수가 있었다.
언젠가 공은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묘당(廟堂)에 몸담고 있으면서 비록 훌륭한 점을 내세울 것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인재를 뽑아서 좋게 하려고 하는 점 하나는 가지고 있다.”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도 공이야말로 옛날에 일컬은바 ‘단단일개신(斷斷一介臣)으로 휴휴유용(休休有容)한 분’이라고 말들을 하였다. 사실 공의 추천을 받고 발탁된 사람들 중에는 지명지사(知名之士)가 많았는데, 출척(黜陟 관원을 진퇴(進退)시키는 것)을 행할 즈음에 그 뜻을 제대로 다 펼칠 수 없었던 것은 시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었다. 당시 정치는 혼란스럽게 무너져 내리고 세상에 보기 드문 액운(厄運)이 또 겹치는 상황이어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임기응변할 수 있는 여지가 본래 없었다고 할 것인데, 그래도 오직 나라의 기맥(氣脈)을 우뚝 세우고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천명(天命)을 계속 이어가게 해야겠다는 것이 바로 공이 뜻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공은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부모의 안색을 살피며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적에는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것이 거의 일 년이나 되기도 하였다. 형제로부터 시작해서 내외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집안이 성대하였는데, 공은 치우침이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모두 공을 의지하며 귀의하였다.
공은 세 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는데도 돌아오는 보따리 속에는 중국 물건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조정에 몸담은 50년 세월 동안 여러 번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도 끝내 전장(田庄) 하나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집에는 사방에 벽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따름이었으며, 의복(衣服)이나 기용(器用)을 보아도 검소하기가 마치 빈한한 선비의 생활을 연상케 하였다. 이처럼 청렴결백한 절조가 당대에 둘도 없을 정도였는데도, 정작 공은 털끝만큼도 자긍(自矜)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소싯적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임)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임)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경전(經傳)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하여 가끔씩 창을 들고 방에 들어가곤 하니, 그때마다 두 분 선생께서도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공의 문장은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며 화려하면서도 질박한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전후(前後)의 명가(名家)의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자신은 더더욱 이 분야에 종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문으로 수창(酬唱)하거나 담론하는 일이 전혀 없었으므로, 사람들도 그 수준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 간행된 공의 저술로는 시문 10여 권과 소차(疏箚) 3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병화(兵火)로 모두 없어지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한 부인(韓夫人)은 곧고 단정하여 내칙(內則)이 있었는데,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장남 윤이지(尹履之)는 문과에 등제하여 관직이 병조 참판이며, 차남 윤신지(尹新之)는 바로 해숭위(海嵩尉)로서 자계(資階)가 1품(品)이다. 참판은 김상준(金尙寯)의 딸에게 장가들어 8남 1녀를 두었으니, 윤탄(尹坦)은 군수이고, 윤강(尹堈)은 사평(司評)이고, 윤식(尹埴)은 사과(司果)이고, 윤우(尹堣)는 현감이고, 윤점(尹坫)은 감찰이고, 윤개(尹塏)는 판관이고, 윤성(尹城)은 진사이고, 윤전(尹㙉)은 거인(擧人)이며, 딸은 승지 송시길(宋時吉)에게 출가하였다. 이 밖에 측실 소생으로 3남이 있으니, 윤숙(尹塾)과 윤규(尹奎)와 윤견(尹堅)이다. 해숭위는 2남을 두었으니, 윤지(尹墀)는 행 홍문관부제학(行弘文館副提學)이고, 윤구(尹坵)는 이조 정랑이다.
증손으로 남녀 20여 인이 있다. 윤탄(尹坦)은 윤세교(尹世喬)ㆍ윤세휴(尹世休)ㆍ윤세로(尹世老)를 낳았고, 딸은 진사 이경휘(李慶徽)에게 출가하였다. 윤강은 윤세창(尹世昌)을 낳았고, 딸은 진사 조귀석(趙龜錫)에게 출가하였다. 윤식은 윤세보(尹世輔)ㆍ윤세명(尹世鳴)ㆍ윤세호(尹世豪)를 낳았고, 딸은 현감 김천석(金天錫)에게 출가하였다. 윤우는 윤세미(尹世美)를 낳았다. 윤점은 윤세현(尹世賢)ㆍ윤세규(尹世揆)ㆍ윤세헌(尹世獻)을 낳았다. 윤개는 윤세형(尹世馨)과 윤세주(尹世冑)를 낳았다. 윤성은 윤세익(尹世翼)을 낳았고, 딸은 황휘(黃暉)에게 출가하였다. 윤지는 1녀를 두었는데 생원 김익겸(金益兼)에게 출가하였고, 측실 소생으로 아들 윤세번(尹世蕃)을 두었다. 이 밖에 외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싣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이 동방에 재앙을 내려 / 天割我東
황복의 운세를 맞게 했나니 / 運屆隍覆
군자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 不頼君子
어떻게 세상을 정화할 수 있으리오 / 其何能淑
선조께서 중흥(中興)을 이루실 적엔 / 宣祖重恢
해원이 정승으로 도와 드렸고 / 相惟海原
다음에는 우리 공이 부업(父業)을 계승하여 / 我公肯構
신령스런 손자를 실로 보좌하였도다 / 實佐神孫
황극을 세우도록 임금을 이끌면서 / 皇極是訓
국가의 근본을 급선무로 여겼는데 / 邦本是急
너무나도 어려운 당시의 상황 속에 / 勢有孔艱
꾀하는 이 하도 많아 제대로 되지 않았어라 / 謀用弗集
나의 말을 망녕이라 여기고들 있다마는 / 謂我言耄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손을 쓸 것인고 / 有戎誰恤
우리 공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자마자 / 公歸私第
대가(大駕)가 몽진(蒙塵)하는 운명을 맞았도다 / 國罹播越
뜻밖에도 배도가 갑자기 기울어져 / 陪都奄傾
대군(大君)과 빈궁(嬪宮)이 위급하게 되었을 때 / 儲閫方殆
우리 공이 묘사(廟社)의 신주(神主) 받들었나니 / 公奉廟祏
모든 이가 원로 재상 믿고 의지하였어라 / 衆倚耆宰
임기응변 없이는 구제할 수 없는 터에 / 非權莫濟
그저 혼자 죽는다 한들 무슨 보탬 되었으리 / 徒死何裨
위로해 주는 일을 아끼지 말아야 하였거늘 / 勞之不鄙
온전히 하려다 나온 실수 헐뜯기만 하였도다 / 毁全爲疵
숭산(嵩山) 교악(喬岳)처럼 두터운 덕성이요 / 嵩喬厚德
솔과 계수(桂樹)처럼 고상했던 공의 절조 / 松桂亮節
덮으면 덮을수록 더욱 뚜렷해졌거늘 / 掩而益明
원수들은 이를 갈며 입방아를 찧었어라 / 仇者所呾
공의 묘소 앞에 새긴 나의 비명(碑銘) / 我銘公墓
공께서 어찌 자랑스럽게 여기리오 / 公豈斯矜
먼 뒷날 백세가 다 지나도록 / 百世在後
역사의 기록 통해 징험할 수 있으리라 / 史氏有徵


 

[주D-001]해숭위(海嵩尉) :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한 윤신지(尹新之)를 가리킨다.
[주D-002]주(朱)와 양(梁) 두 조사(詔使) : 황태손(皇太孫) 탄생의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온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주지번(朱之蕃)과 형과 도급사중(刑科都給事中) 양유년(梁有年)을 말한다.
[주D-003]평번(平反) : 억울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해 주거나 처벌을 경감(輕減)해 주는 것을 말한다.
[주D-004]황극(皇極) : 제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준칙(準則)이라는 말로,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다섯 번째는 황극이니, 이는 임금이 세상을 위한 표준으로서 대중지정의 도를 세우는 것이다.[五 皇極 皇建其有極]”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기맥(歧麥) : 보리에 두 개의 이삭이 달리는 것으로, 풍년이 들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겨졌으며, 관리의 탁월한 치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後漢書 卷31 張堪列傳》
[주D-006]옥환(玉環)을 훔친 고사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모신 사당에서 옥환을 훔친 도둑에 대해, 정위(廷尉) 장석지(張釋之)가 ‘도종묘복어물(盜宗廟服御物)’의 율(律)을 적용하여 기시(棄市)의 형벌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자, 한 문제(漢文帝)가 멸족(滅族)을 시켜야 한다면서 크게 노하였는데, “그렇다면 한 고조의 능묘(陵墓)를 파헤치는 사건이 만약에 일어날 경우, 그때에는 무슨 형벌을 가해야 하느냐.”는 장석지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긍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2 張釋之列傳》
[주D-007]공평무사(公平無私)한 …… 않은 채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군자는 공평무사할 뿐 편당을 짓지 않는 데 반해, 소인은 편당을 짓기만 하고 공평무사하지 못하다.[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8]단단일개신(斷斷一介臣)으로 휴휴유용(休休有容)한 분 : 한결같이 성심(誠心)으로 대하면서 남을 포용하는 아름다운 덕을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대학(大學)》에, “가령 어떤 한 신하가 있어, 그저 한결같이 정성스럽기만 할 뿐 다른 특별한 재주는 없다 하더라도, 그 마음씨가 아름다워 남을 포용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으면 …… 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서경(書經)》 진서(秦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주D-009]가끔씩 …… 하니 : 간혹 스승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안목을 보였다는 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과 비슷한 뜻이다. 후한(後漢)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서 저술을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여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잡고서 나를 치는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강성(康成)은 정현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주D-010]황복(隍覆) : 《주역(周易)》 태괘(泰卦) 상육효(上六爻)에 나오는바 “성이 무너져 다시 웅덩이가 된다.[城復于隍]”는 뜻으로,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말하는데, 본문에서는 복(復) 자를 복(覆)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주D-011]해원(海原) :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를 가리킨다.
[주D-012]신령스런 손자 : 선조(宣祖)의 손자인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주D-013]꾀하는 …… 않았어라 : 조정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갈등을 빚는 바람에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꾀하는 이 하도 많아, 일이 제대로 되지 않네.[謀夫孔多 是用不集]”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4]나의 …… 있다마는 : 《시경》 대아(大雅) 판(板)에, “내 말은 결코 망녕이 아닌데도, 그대들은 내 걱정을 장난으로만 아는구려.[匪我言耄 爾用憂謔]”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5]배도(陪都) : 정식 수도(首都) 이외에 별도로 설치한 수도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강도(江都), 즉 강화(江華)를 가리킨다.
[주D-016]온전히 …… 실수 : 왕후(王后)의 신주(神主) 하나를 분실했다는 죄목으로 곤욕을 당한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뜻하지 않게 듣게 되는 칭찬이 있는가 하면, 온전하게 하려다가 받게 되는 비방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