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9.14. 삼각산 산행

2011.9.15. 삼각산(효자비 능선 숨은벽 노적봉 효자비)

아베베1 2011. 9. 15. 16:50

  오랜만에 삼각산 산행을 다녀왔다  여러가지 일로 인하여 미루다가 산행을 시작 하였다

 집에서 전철로 의정부역 으로 이동하여 의정부역앞에서 23번 버스에 승차 송추유원지 입구에 하차하여 30번 버스에 승차하여 효자비 앞에 내려서 일행과 약한시간 차이 로 출발하여 북문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진행하는데 효자비능선으로 올라서 숨은벽 능선으로 접근하여 숨은벽능선을보고 안개속에 가려져 있는 숨은벽이었다  백운대를 우회하여 노적봉으로 놀랐다 그곳에서 일행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노적봉슬랩으로 하산하여 계곡으로 북문 효자비로 이동하였다

 어느듯  산행하기에 좋은 계절이 된듯하다 ... 

 

                                삼각산(三角山) 산행을 마치고

 

                 중국에서 뻗어내려 오는  산줄기는 백두산 정상에서

             백두대간룡을 따라서 한북정맥으로 이어져  내려와서 삼각산을 이루고      

           

            저멀리 백제의 온조가 터전을 잡은곳 (부아악 화산 삼각 북한산불려져오고)

            현재는 서울의 병풍산이 되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세계의 명산이 되었네

            

           눈앞에 펼쳐지는  백운봉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을 타고 넘는

           운무는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하는  장관이었네

 

           오늘도 산우님은 백운대 인수봉 정상에 올라서 

           먼곳을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즐거워 하는 구나  

  

           자주로 올랐던 그곳 이지만 오늘은 새로운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구나 

 

           암릉 아래 명당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

           원효사 국녕사 노적사 상원사의 모습은 고요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산사 스님의 독경소리는 

          나그네의 귓전에 들려오고 있구나 

 

         오늘도 삼각산의 자연속에서 가을 산행을 

         즐기는 산나그네 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네 ...     

                 

                                     삼각산 산행을 마치고 

                         신묘년 팔월 십팔일  本人 書  

              

  이곳이 노적봉 (路積峰)의 모습이다 정말 큰 암릉이다

   노적봉 정상에서 바라본 백운봉 만경대 인수봉

  노적봉에서 하신길

 노적봉에서 일행분과 백운봉을 배경으로  

   노적봉에서 잠시 휴식시간 일행과

   나폴레옹바위

 

  뒤에보이는 봉우리가 만경대 의 모습이다

 

  상원사의 모습

  백운대 정상부의 모습   

 

 

 

 

 

 숨은벽능선

 

 

  멀리서 바라본 노적봉의 모습

 

 

 

 

 

 

 

 

 

 

 

 

 

 

 

 군정편 3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목은시고 제3권
 시(詩)
삼각산을 지나다.


소년 시절 책을 끼고 절간에 머무를 적에 / 少年挾冊寄僧窓
돌다리에 뿌리는 폭포 소리 조용히 들었네 / 靜聽飛泉洒石矼
멀리 뵈는 서쪽 벼랑엔 밝은 빛이 역력한데 / 遙望西崖明歷歷
두어 마디 종소리가 석양을 향해 울리누나 / 數聲鐘向夕陽撞

만 길 푸른 봉우리가 중천에 높이 꽂히어 / 高插中天萬仞靑
쌀쌀한 솔바람이 별을 흔들려고 하누나 / 松風颯颯欲搖星
당년엔 높은 꼭대기를 나는 듯이 올라가 / 當年飛上崔嵬頂
산허리에 천둥 치는 걸 내려다보았었네 / 俯視山腰擊迅霆

말 타고 중원을 두루 돌아다니려 했다가 / 欲將馬迹遍中原
중도에 되돌아오니 날이 아직 안 어둡네 / 半道歸來日未昏
일찍이 듣자 하니 화산의 선인장 곁에는 / 聞有華山仙掌側
거령이 쪼갠 곳에 높은 산이 서 있다 하대
/ 巨靈擘處立高根

큰 소나무 그늘 밑에서 동파집을 읽으며 / 長松影裏讀東坡
마음 정하여 고담준론 거침없이 나누고 / 定水高談似決河
다시 관솔 가져다가 횃불 만들어 태우니 / 更把松明燒作炬
낯에 그을음 가득해라 밤이 하마 어느 땐고 / 煙煤滿面夜如何


 

[주D-001]화산(華山)의 …… 하대 : 중국 화산의 동봉(東峯)을 선인장봉(仙人掌峯)이라 하는데, 봉우리 곁의 돌 위에 완연히 다섯 손가락을 갖춘 손바닥 하나의 흔적이 있으므로 지어진 이름이고, 거령(巨靈)은 하신(河神)의 이름으로, 거령이 화산을 반으로 쪼개어 하수(河水)를 개통시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삼각산의 별명이 화산이므로 한 말이다.

 

 

목은시고 제19권
 시(詩)
삼각산(三角山) 위의 구름을 바라보다.


삼각산 꼭대기에 날아가는 흰 구름아 / 華山絶頂白雲飛
무심함을 자부하며 그 어디로 가느냐 / 自負無心何處歸
내가 어찌 바위 밑에 잘 줄을 모르랴만 / 我豈不知巖下宿
배움 끊은 도인이 드문 걸 꺼려서란다 / 只嫌絶學道人稀

내 생의 가고 머묾은 여유가 작작하기에 / 我生行止儘悠悠
성쇠 변화 따위는 전혀 걱정치 않는다오 / 消息盈虛摠不憂
또 묻노라 무심한 걸 배울 수만 있다면 / 且問無心如可學
상산사호인들 어찌 찾기가 어려울쏜가 / 商山四皓豈難求

구름과 묻고 대답한 게 다 진정이고말고 / 問雲雲答語皆眞
내 또한 당시에 세속 초월한 사람이거니 / 我亦當時洒落人
내 맘속에 티끌 있다고 이르지 말거라 / 莫道心中有査滓
요즘 그 어딘들 풍진 피할 곳이 있더냐 / 邇來無處避風塵


 

[주D-001]배움 끊은 도인 : 당(唐)나라 선승(禪僧) 영가 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에 “그대는 못 보았나 배움 끊고 하는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안 없애고 진도 구하지 않는다네. 이름 없는 실성이 그게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이 몸이 바로 법신이라네.[君不見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상산사호(商山四皓) :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戰亂)을 피하여 상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4인의 백발 노인인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