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시랑공 최척경 관련자료

완산인 시랑 최척경 관련자료

아베베1 2011. 9. 17. 19:51

 

 

 

 명종 광효대왕 2(明宗光孝大王二)
병오 16년(1186), 송 순희 13년ㆍ금 대정 26년

○ 봄 정월에 영동정(令同正) 박원실(朴元實)이 떠도는 말을 갖고서 중방(重房)에 알리기를, “교위(校尉) 장언부(張彦夫) 등 8명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하므로, 중방에서 잡아 캐어 물으니 언부가 대답하기를, “지금 권세를 잡은 사람이 욕심이 많고 비루하므로 백은(白銀)을 몹시 좋아하여 돈이나 재물을 받고 벼슬을 시키며 법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그 입에 은(銀)을 물려서 널리 조정과 민간(民間)에 보이어 사람들에게 은을 탐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하였다. 언부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 시랑(侍郞) 문의혁(文義赫)을 금 나라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게 하고, 예빈경(禮賓卿) 유공권(柳公權)에게는 만춘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소의 대장군(昭毅大將軍) 야율리(耶律履)를 보내와서 왕의 생신을 하례하였다.
○ 2월에 금 나라에서 태부감 야율규(耶律圭)를 보내와서 왕의 기복(起復)을 끝내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정당문학으로 치사(致仕)한 최여해(崔汝諧)가 졸하였다. 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여해가 그 부(府)의 전첨(典籤)이 되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서 왕에게 마음을 귀의하였다. 나주 판관(羅州判官)이 되었을 때에 좋은 과실과 해포(海脯)를 구하여 부(府)에 많이 공궤(供饋)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왕이 즉위하자 여해가 표문을 가지고 대궐에 나아가서 예(例)에 따라 조회에 참예하였지만 왕은 알지 못하였다. 왕에게 하직할 때에 환관을 통하여 아뢰니 왕이 그제야 놀라며 말하기를, “최 전첨(崔典籤)이 왔는데 짐이 살피지 못했다."고 하면서 불러보고 그를 위로하였다. 조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하였다가 갑자기 시어사(侍御史)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를 역임하였으니 나이 이미 70세였다. 여해가 아뢰기를, “이부(吏部)에서 잘못하여 사적(仕籍)에 나이를 감산(減算)하였사오나 신의 나이 지금 정년(停年)에 해당되니 관례에 따라 치사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부에서 명부에 나이를 잘못 감산한 것은 하늘이 시켜 그렇게 된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추밀사가 되어서 사직을 청하니 특별히 정당문학을 임명했다가 곧이어 치사하게 하였다. 성품은 너그러웠으나 행정 사무에 익숙하지 못하고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았는데 잠저(潛邸)의 옛날 요속(僚屬)이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 송돈광(宋惇光) 등 33명과 명경(明經) 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송 나라에서 풍랑(風浪)에 밀려간 우리나라 사람 이한(李漢) 등 6명을 돌려보냈다.
○ 6월에 금 나라 횡선사(橫宣使)로 대리경(大理卿) 이반(李槃)이 왔다. 이반이 우리 국경에 들어온 후로 이르는 관사(館舍)마다 비단 장막과 비단 이불을 반드시 걷어치우게 하고, 또 짐승의 도살을 금지시키며, 매양 남은 음식이 있으면 문득 종자(從者)를 시켜 전대[橐]에 넣어 가다가 길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만나면 이들에게 모두 주었다.
○ 문무 참관(文武叅官) 이상과 근신에게 양(羊)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비서감 최척경(崔陟卿)이 졸하였다. 척경은 성품이 청렴하고 결백하며, 과거에 뽑혀 경산부 판관(京山府判官)에 보직되었었다. 관직의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에 돌아왔으나 발걸음이 공경(公卿)의 집 문 앞에 이르지 않은 지가 10여 년이나 되었다. 판이부사 최윤의(崔允儀)가 척경에게 말하기를, “탐라(耽羅)는 지역이 멀고 풍속이 사나와서 수령 노릇하기가 어렵다. 그대가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하니, 꺼려하지 말고 한번 가서 다행히 먼 곳의 백성을 어루만져 국가의 근심이 되지 않게 한다면 마땅히 좋은 벼슬로써 보답하겠다." 하였다. 척경이 탐라에 부임하여 백성에게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고 폐단되는 점을 개혁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게 여겼다. 척경이 돌아오니 윤의가 죽은 뒤였다. 서울에 있은 지 3년에 가난이 심하여 살아갈 수 없으므로 장차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때마침 탐라 사람이 영위(令尉)의 포학에 시달려 반역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만약 척경을 영(令)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무기를 버리겠다." 하였다. 왕이 재상 최유칭(崔褎偁)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은 현인이 있는데 어찌 쓰지 않으리오." 하고, 즉시 탐라령(耽羅令)에 임명하니 탐라 사람이 척경을 보고는 모두 창을 던지고 열을 지어 절하며 말하기를, “공이 왔으니 우리들은 다시 살았다."고 하면서, 그전처럼 편안히 지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으며 청렴하다는 명망과 굳센 절개가 늙어도 쇠하지 않았다.

○ 가을 7월에 어떤 사람이 탐라가 반역하였다고 고하니 왕이 몹시 놀라서 양부(兩府)를 불러 처치할 방략을 묻고 즉시 합문지후 독고충(獨孤忠)과 낭장 지자심(池資深)을 안무사로 삼고 식목녹사(式目錄事) 장윤문(張允文)을 대부주부 행탐라현령(大府注簿行耽羅縣令)으로 삼아 각기 무늬 있는 비단을 내려 주며 독촉하여 곧 길을 떠나게 하고, 조서로 전 영위(令尉)에게는 모두 중한 벌을 주게 하였다. 조금 후에 소식을 들으니 반역한 형상이 없었다고 하나 조명(詔命)이 이미 내려졌으므로 윤문(允文)이 부임하고 전 영위(令尉)는 마침내 면직되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명종(明宗)이 남의 거짓말에 미혹된 것은 이른바 '그럴듯한 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 는 것으로 허물될 것이 없으나 후에 그것이 실상이 아님을 알고서도 고발한 자에게 무망(誣罔)의 죄를 주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것이 참적(讒賊)의 입을 불러 오고 화란(禍亂)의 단서를 발생하게 한 까닭이다."하였다.
내시원(內侍院)에서 아뢰기를, “지금부터는 어선(御膳)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다만 술과 과실만 주고 포백(布帛)은 주지 말도록 하소서. 포백은 한정된 수량이 있으나 어선을 바치는 자의 수는 한정이 없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조(詔)하기를, “짐이 만물에게 은택을 입히고자 하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까닭에 그 박(薄)한 물건으로 인하여 반드시 후한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다. 포백이 비록 허비되더라도 모두 나라 사람이 이익을 입는 것이니 아깝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왕이 즉위한 후로 어선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비록 변변치 못한 물건일지라도 문득 포백을 후하게 주는 까닭으로 이익을 탐하는 무리 중에 다른 지방에서 물건을 구하여 바치는 자까지 있었다.
○ 윤월에 제(制)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근래에 수령이 그 백성을 수탈하면서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으니,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유리(流離)하는 백성이 날로 늘어가기에 내가 매우 슬피 여긴다. 너희들 유사(有司)는 탐욕스런 관리를 엄하게 징벌하여 뒷사람을 경계하며, 만약 백성에게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뇌물을 요구해 받은 자가 있으면 받은 것이 비록 적더라도 모두 중한 죄로 논단(論斷)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 권경중(權敬中)이 말하기를, “《논어》에, '그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고, 그 몸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명종(明宗)이 몸소 실행하는 일은, 환제(桓帝)ㆍ영제(靈帝)이면서 입으로 하는 말은 문제(文帝)ㆍ경제(景帝)와 같으니, 몹시 슬퍼한들 그 오얼(五孼) 칠폐(七嬖)가 권력을 남용하고 관작을 팔아먹는 폐단에는 어찌 하랴. 관리가 고치지 않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였다.
○ 8월에 왕이 장릉(長陵)과 순릉(純陵) 두 능에 배알하였다.
○ 유사(有司)가 진주수(晉州守) 김광윤(金光允)과 안동수(安東守) 이광실(李光實)이 욕심이 많고 잔인하여, 백성을 침해(侵害)한 죄를 논하므로 이를 모두 귀양보냈다.
사신 권경중이 말하기를, “경인(庚寅)ㆍ계사년(癸巳年)의 정변 이후로, 시정(市井)에서 짐승 잡고 술 팔던 무리와 활을 당기던 군사 중에 부당하게 외직의 수령에 참여한 자가 많았다. 저 광윤(光允)의 무리들은 평일에 송곳끝만한 이익과 한 되 한 홉의 이익을 다투어 약탈하는 것과 속여서 매매하는 것으로써 좋은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러한 때에 어찌 염치가 나라의 기강이 되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 됨을 알았겠는가. 하루아침에 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주고 빼앗는 권한을 가지게 되면, 그들이 재물을 몹시 탐내고 이익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 벼와 기장 밭에 소와 말을 놓아 두고 꿩과 토끼가 있는 곳에 매[鷹]와 사냥개를 풀어 놓고서 그 짐승들이 뜯어 먹고 물어 뜯는 것을 금하고자 하면 그것이 되겠는가." 하였다.
○ 9월 신유일에 진성(鎭星)이 목성(木星)을 범하니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내란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광암사(光嵒寺)ㆍ총지사(摠持寺) 두 절에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을 설치하고 또 명인전(明仁殿)에서 《인왕경(仁王經)》을 읽어 재앙을 물리치소서."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어긋나서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하는 까닭으로 일식과 월식이 생기고 혜성이 나타나게 되니, 모두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왕은 재앙을 만나면 마땅히 자책하고 덕을 닦아 화란의 조짐을 소멸시켜야 될 것인데, 음양을 맡아 살피는 관원이 오로지 부처에게 빌고 푸닥거리로써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여, 왕의 마음을 미혹시키는데도 재상과 대간(臺諫)으로서 바르게 간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였다.
○ 좌창(左倉)의 물자가 다 없어져서 봉록을 줄 수 없으므로 전목사(典牧司)에 저장된 백금(白金) 6백 24근과 베 6천 필과 장작감(將作監)의 베 3만 필을 빌려 와서 이를 보충하였다.
○ 겨울 10월에 참소한 사람 박돈부(朴敦夫)를 먼 곳의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익명서(匿名書)가 매우 많아서 남에게 죄과(罪過)를 무함하여 죄를 뒤집어 쓴 자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사람마다 두려워하므로 중방(重房)에서 비밀히 금군(禁軍)을 시켜 이를 정탐하게 했더니 돈부가 글을 가지고 문에 붙이려 하므로 잡아서 이를 귀양보냈는데 길에서 죽었다
○ 조(詔)하여 장군 차약송(車若松) 등 43명을 내시원(內侍院)과 다방(茶房)에 겸속(兼屬)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방(重房)에서 아뢰기를, “경인년 이후로 무관이 모두 문관직을 겸했는데도 내시원과 다방만은 홀로 겸하지 못하였으니, 겸속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무관이 내시원과 다방을 겸속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공화후(恭化侯) 영(瑛)이 졸하였다. 영은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아들로서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욕심이 적고 학문에 뜻이 독실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보고자 했으나 전례(前例)가 없으므로 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불법(佛法)을 몹시 좋아하였다.
○ 왕이 친히 태묘에 협제(祫祭)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 처음에 상장군 석린(石隣)이 역리(驛吏)가 뇌물로 주는 은(銀)을 받고 서해도안찰 강용유(康用儒)에게 일을 청탁하였으나 용유가 따르지 않으니, 석린이 원한을 품고 용유를 왕에게 무함하여 그 관직을 파면시키기를 청하였다. 왕이 듣지 않으니 석린이 노하여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불끈 쥐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다시 벼슬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드디어 띠를 풀어 땅에 던지고 가버렸다. 왕이 내시를 보내어 만류하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석린이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또 병부 상서 양익경(梁翼京)에게 명하여 만류하게 하니, 익경이 석린의 소매를 당기며 타이르기를, “어디에 왕이 부르는 데도 오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고 하니, 석린이 그제야 내전에 들어왔다. 왕이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타이르며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용유를 파면시켜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였으나 석린이 물러가자 그 명을 도로 철회하였다. 석린이 수일 동안이나 관아에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관직에 나아가기를 명하였으나 석린이 오히려 교만하여 조회하지 않았다. 석린은 지체가 미천하여 대대로 창고 곁에 살면서 낙정미(落庭米)를 주어서 생활했었는데, 금군에 보직되어 경인년의 난리에 이의방이 그를 낭장으로 발탁하여 드디어 현달하였다.
○ 11월에 형부 시랑 우술유(于述儒)를 금 나라에 보내어 기복(起復)을 끝내게 해 준 것을 사례하게 하고, 예부 시랑 임유(任濡)는 횡선사를 보내 준 데에 사례하게 하며, 중랑장 노효돈(盧孝敦)은 생신을 하례해 준 것을 사례하게 하고, 낭장 최광보(崔光甫)는 정조(正朝)를 하례하게 하였다.
○ 12월에 상장군 최세보(崔世輔)를 동수국사(同修國事)로 삼고, 장군 최연(崔連)과 김부(金富)를 함께 예부 시랑으로 삼았는데, 세 사람은 모두 무관이었다. 무관이 유관(儒官)을 겸한 것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이 중방에 호소하기를, “수국사(修國史) 문극겸이, 의종(毅宗)이 시해당한 사실을 그대로 바로 썼는데, 주상을 시해한 것은 천하의 대악(大惡)입니다. 마땅히 무관으로 하여금 수국사를 겸임시켜 사실을 바르게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극겸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왕에게 비밀히 아뢰니, 왕이 무신의 뜻을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나, 그것이 옛 제도가 아님을 미워하여서 이에 제(制)하여 동수국사(同修國事)로 삼았더니, 세보(世輔)가 청하지도 않고 바로 사(事) 자를 사(史) 자로 고쳤다. 이로 말미암아 《의종실록(毅宗實錄)》이 소홀하게 되어 사실과 틀린 것이 많았다. 극겸이 일찍이 사당(史堂)에서 세보에게 희롱하기를, “유관(儒官)이 상장군이 된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무관이 동수국사가 된 것은 또한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면서,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사관이 만세의 시비를 공정하게 함은 후세에 착한 일을 권장하고 나쁜 일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므로, 제(齊) 나라 최저(崔杼)가 장공(莊公)을 시해했을 적에 태사(太史)의 형제 세 사람이 잇달아 살해되어도 기록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시역(弑逆)의 무리들이 악명(惡名)을 없애려고 스스로 수국사를 겸하여 그 자취를 감추고자 하지마는,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은 감추고자 할수록 더욱 드러나게 됨을 알지 못하니 어리석지 않으냐." 하였다.

[주D-001]그럴듯한……있다 : 《논어》에 "군자가기이기방(君子可欺以其方) "이란 말이 있다.
[주D-002]몸소……같으니 : 환제(桓帝) ·영제(靈帝) 는 후한(後漢) 의 말기에 벼슬을 팔고 환관을 등용한 어질지 못한 임금이며, 문제(文帝) ·경제(景帝) 는 전한(前漢) 때의 정치를 잘하여 태평을 이룩한 어진 임
[주D-003]제(齊) ……살해되어도 : 제(齊) 나라 대신 최저(崔杼) 가 임금인 장공(莊公) 을 시해(弑害) 하였으므로, 태사(太史) 가 사필(史筆) 에 쓰기를, “최저시기군(崔杼弑其君) "이라 하니, 최저가 그를 죽였다. 태사의 아우가 또 쓰니 또 죽였다. 끝의 아우가 또 썼는데 그는 죽이지 않았다.

 

동사강목 제9상
무자년 의종 22년(송 효종 건도 4, 금 세종 대정 8, 1168)


춘정월 초하루에 왕이 관북궁(館北宮)에서 하례를 받았다.

3월 왕이 서경(西京)에 행행하였다.
왕의 아우 익양후(翼陽侯)ㆍ평량후(平凉侯)가 자못 뭇사람의 심복을 받으므로 왕이 변란이 있을까 의심하고 이어하여 피했다. 묘청(妙淸)의 난 이후로 왕이 처음으로 서경에 행행하였다.
○ 신령(新令) 6조(條)를 반포하였다.
왕이 서경에 이르러 관풍전(觀風殿)에 나와 교서를 내리고 신령 6조를 반포하였다.
1. 음양를 받들어 따르라. 무릇 형벌과 상사(賞賜)는 다 월령(月令)에 따르라.
1. 불사(佛事)를 높이고 공경하라. 모든 사사(寺社)를 수리하라.
1. 사문(沙門)을 존경하라. 무릇 고승이 있는 곳을 심방하라.
1. 삼보(三寶)를 보호하라. 불사(佛舍)의 진귀한 보물과 양식은 제사(諸司)에서 가져다 쓰는 것을 금한다.
1. 선풍(僊風)을 숭상하려 따르라. 조종 이래로 신라 때를 숭상하여 선풍이 크게 행해졌다. 지금부터 팔관회(八關會)에는 양반으로 재산이 넉넉한 자를 택해서 선가(僊家)로 정하고 옛 풍습에 따라 행하라.
1. 백성들을 구휼하라. 굶주리고 병들고 의탁할 데가 없는 자를 모아 구휼하라.

가을 왕이 환궁하였다.
명승지에 두루 다니고 악공과 잡희(雜戱)에게 상을 내린 것이 절도가 없었다.

동11월 최척경(崔陟卿)을 탐라령(耽羅令)으로 삼았다.
척경은 완산인(完山人)으로 일찍이 경산부 판관(京山府判官)이 보해졌었는데 임기가 만료되여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공경(公卿)의 문에 이르지 않은 지가 10여 년이 되었었다.
최윤의(崔允儀)가 판이분(判吏部)로 있으면서 그의 청렴 강직함을 알고 탐라령을 배수해서 거친 풍속을 누르게 하였는데, 복리를 일으키고 폐단을 고쳐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게 여겼다. 돌아왔을 때는 윤의는 이미 죽었고, 개경에 3년 동안 살았는데 빈곤해서 생활을 지탱하지 못해 가솔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때마침 탐라 사람들이 영위(令尉)의 침탈과 포악에 시달려 반란을 일으켰다.
탐라는 험하고 멀어 공전(攻戰)이 미치지 못하였다. 왕이 전라안찰사(全羅按察使) 조동희(趙冬曦)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적이 말하기를,

“만약에 척경을 영(令)이 되게 해준다면 틀림없이 군사를 풀겠다.”
하여, 동희가 급보로 아뢰자 곧 척경을 다시 임명하였다. 척경이 가솔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탐라령에 임명된 자가 아내와 같이 가는 것은 척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탐라 사람들은 척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경쾌한 배를 마련하여 그를 맞이하였고, 그 땅에 들어서자 다들 창을 던지고 늘어서서 배례하고 말하기를,
“공이 오셨으니, 우리 족속들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하고 전과 같이 안도하였다. 동희는 적의 괴수 양수(良守) 등 2인과 그 도당 5인을 참하고, 나머지는 모두 곡식과 포백(布帛)을 내려서 무마하였다.

동사강목 제9하
병오년 명종 16년(송 효종 순희 13, 금 세종 대정 26, 1186)


춘정월 교위(校尉) 장언부(張彦夫) 등이 반란을 꾀하므로 주살하였다.
언부 등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발을 받고 중방(重房)이 잡아다가 그들을 힐문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권세를 부리는 사람은 욕심이 많고 비루하여 백금(白金)을 몹시 좋아해서 돈을 받고 관직과 작위를 팔아 법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행하므로 이런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 그 입에 은(銀)을 물리고 널리 조야(朝野)에 알려서 사람들에게 은을 탐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죽였다.

하6월 비서감(秘書監) 최척경(崔陟卿)이 졸하였다.
척경은 성품이 청렴하고 개결하여 가는 데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사나운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 소문이 났으며 청렴한 명성과 굳센 절개가 늙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앞서 시랑(侍郞)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글짓기로 여러 아이들을 뽑아 척경과 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뒤에 모두 명사(名士)가 되니 완산의 삼최(三崔)라 일컬었다.

추7월 탐라(耽羅) 영위(令尉) 등의 관리를 면직하였다.
어떤 사람이 ‘탐라가 반역하였다.’고 고(告)하니 왕이 몹시 놀라서 영위(令尉)를 불러 모두 중한 벌(罰)을 가하였으나 반역했다는 증험이 없었다. 그러나 영위는 끝내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명종(明宗)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발한 자의 죄는 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소위 참적(讒賊)의 입을 초래하고, 화란(禍亂)의 단서를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윤7월 제(制)하여 탐오(貪汚)를 금지하였다.
제(制)하기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요사이 수령(守令)이 그 백성을 착취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떠도는 자가 날로 불어나니, 내가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오직 너희들 유사(有司)는 탐욕스러운 관리를 엄하게 징벌하여 뒤에 관리가 될 자를 경계하도록 하라. 만약 백성에게서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뇌물을 요구하여 받는 자가 있으면 받은 것이 비록 적더라도 모두 중하게 논죄하라.”
하였다.
사신(史臣) 권경중(權敬中)은 이렇게 적었다.
“경(經)에 이르기를 ‘그 몸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하게 되고, 그 몸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명종(明宗)이 몸소 행하는 것은 환제(桓帝)ㆍ영제(靈帝)이면서도 입으로는 문제(文帝)ㆍ경제(景帝)와 같다. 조서는 애통하지마는 그 오얼(五孽 왕의 서자 5명)ㆍ칠폐(七嬖 궁중 나인 7명)가 권력을 남용하고 관직을 팔아먹는 폐단이야 어찌하겠는가? 관리가 개전(改悛)하지 않으니 백성이 편안하지 못함은 당연하다.”
이때에 내시원(內侍院)에서 아뢰기를,
“이제부터 어선(御膳)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다만 술과 과일만 주고 포백(布帛)은 사용하지 마소서. 포백은 한정된 수량이 있는데 어선을 바치는 자의 수는 한이 없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朕)이 만물(萬物)에 은택을 입히고자 하는 그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박(薄)한 물건으로 인하여 반드시 후한 은혜를 베풀게 되니 포백이 비록 허비되더라도 모두 나라 사람이 이익을 입는 것이니 인색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어선을 바치는 것이 비록 미미한 물건이라도 번번이 포백을 후하게 내리기 때문에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다른 지방에서 구하여 바치는 자까지 있었다.

8월 진주수(晉州守) 김광윤(金光允)ㆍ안동수(安東守) 이광실(李光實)이 죄가 있어 귀양보냈다.
이들은 탐잔(貪殘)에 연좌된 것이다.
사신(史臣) 권경중(權敬中)은 이렇게 적었다.
“경자년ㆍ계묘년 이래 도살(屠殺)하고 술 팔던 무리와 쇠뇌[弩]를 당기던 군사들이 부당하게 외직에 참여하였다. 저 광윤의 무리들은 평소에 송곳 끝만한 이익과 승(升)ㆍ홉[合]의 이익을 다투어 약탈하는 것과 속여서 매매하는 것으로써 좋은 계책을 삼으니 어찌 염치(廉恥)가 나라의 기강이 되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됨을 알겠는가? 슬프다, 벼와 기장 밭에 소와 말을 놓아 두고, 꿩과 토끼가 있는 곳에 매[鷹]와 사냥개[犬]를 풀어 놓고서 그 짐승들이 뜯어 먹고 물어 뜯는 것을 막고자 하면 되겠는가?”
○ 큰 우박이 내렸다.
동주(東州)와 장주(漳州)의 두 고을 지금의 철원(鐵原)과 연천(漣川) 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주먹만하여 지붕의 기와가 모두 부서졌다.

9월 진성(鎭星 토성(土星))이 세성(歲星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내란(內亂)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을 설치하고 또한 명인전(明仁殿)에서 《인왕경(仁王經)》을 읽어 기도하소서.”
하였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인군(人君)이 재앙을 만나면 마땅히 몸소 수양하고 반성하여 화(禍)의 싹을 없애야 하는데 후찰의 관원[候察之官 음양을 맡아 살피는 관원]이 오로지 부처에게 빌고 푸닥거리만 하려 하여 왕의 마음을 미혹시키는데도 재상(宰相)이나 대간(臺諫)으로서 간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이유일까?”

동10월 무관(武官)에게 내시원(內侍院)과 다방(茶房)을 겸속(兼屬)하도록 하였다.
중방(重房)이 아뢰기를,
“근래 무관(武官)이 문관(文官)을 겸하였는데 내시원과 다방만은 겸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겸속하는 것을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이에 따라 장군 차약송(車若松) 등 43인을 모두 겸하게 하여 무관의 겸속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2월 상장군(上將軍) 최세보(崔世輔)를 동수국사(同修國史)로, 장군 최연(崔連)ㆍ김부(金富)를 아울러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삼았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중방에 호소하기를,
“수국사(修國史) 문극겸(文克謙)이, 의종(毅宗)이 시해당한 일을 그대로 바로 썼는데, 마땅히 무신(武臣)으로 하여금 이를 겸하게 하여 바로 쓰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극겸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왕에게 비밀히 아뢰었다. 왕은 무신의 뜻을 어기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나 그것이 옛 규례가 아닌 것을 싫어하여 곧 세보를 동수국사(同修國事)로 제수했더니, 세보가 자기 마음대로 ‘사’(事) 자를 ‘사’(史) 자로 고쳤다. 이로 말미암아 《의종실록(毅宗實錄)》이 빠지고 생략됨이 많아 부실(不實)하였다. 극겸이 항상 세보를 희롱하여 말하기를,
“유관(儒官)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된 것은 나로부터 비롯되었고, 무관으로 동수국사가 된 것은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였다. 당시 한 의관(醫官)이 스스로 옥당(玉堂) 사람이라 일컬었는데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의관이 시(詩)로 대답하기를,
싸우는 장수가 이제 수국사 되었으니 / 戰將今爲修國史
의원이 옥당인이 되었다고 잘못이랴 / 不妨醫作玉堂人
하니, 듣는 자가 냉소하였다.
○ 경상도(慶尙道)와 진합도(晉陜道)를 합쳐 경상주도(慶尙州道)라 하였다.


[주D-001]환제(桓帝)ㆍ영제(靈帝) : 모두 후한의 황제인데, 환관(宦官)에게 견제를 당하여 나라를 망쳤다. 《後漢書 卷7 孝桓帝紀, 卷8 孝靈帝紀》
[주D-002]문제(文帝)ㆍ경제(景帝) : 모두 전한의 황제로 절검하고, 비방이나 요언(妖言)을 물리쳐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린 현군이다. 《漢書 卷4 文帝紀, 卷5 景帝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


동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6리,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1백 2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99리,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49리,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지례현(知禮縣) 경계까지 62리, 북쪽으로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38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20리, 서울까지 6백 27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본피현(本彼縣)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성산가야(星山伽倻)로서 여섯 가야 중의 하나로 삼았으니, 의심하건대 신라가 빼앗아서 본피현을 두었나보다. 김해부(金海府) 산천 아래에 자세히 보인다. 경덕왕(景德王)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붙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경산부(京山府)로, 경종(景宗)이 강등시켜 광평군(廣平郡)으로, 성종(成宗)이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로, 현종(顯宗)이 단련사를 폐지하여 다시 경산부로, 충렬왕(忠烈王)이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으로 만들었고, 충선왕(忠宣王)이 강등시켜 경산부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어태(御胎)를 부(府)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목으로 만들었다.
【속현】 가리현(加利縣) 주 남쪽 59리에 있다. 본래 신라 일리현(一利縣)인데 경덕왕이 성산군(星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였다. 별호는 기성(岐城)이다. 팔거현(八莒縣) 주 동쪽 72리에 있다. 본래 신라 팔거현(八居縣)인데, 일설에는 ‘인리(仁里)’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팔리(八里)로 이름을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高麗)에서 다시 팔거(八居)로 일컬었는데, 뒤에 ‘거(居)’가 변하여 ‘거(莒)’가 되었다. 현종(顯宗) 때에 와서 붙였다. 별호는 칠곡(七谷)이다. 화원현(花園縣) 주 동쪽 71리에 있다. 본래 신라 설화현(舌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붙였고, 뒤에 대구(大丘)에 옮겨 붙였다가 뒤에 다시 붙였다. 별호는 금성(錦城)이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본피(本彼)ㆍ성산(星山)ㆍ가야(伽倻)ㆍ신안(新安)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대주(岱州)ㆍ경산(京山)ㆍ흥안(興安).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배(裵)ㆍ여(呂)ㆍ백(白)ㆍ전(全)ㆍ차(車)ㆍ박(朴), 임(林) 개경(開京). 강(姜)ㆍ손(孫)ㆍ김(金)ㆍ조(趙) 모두 내성(來姓)이다. 팔거(八莒) 도(都)ㆍ현(玄)ㆍ임(任)ㆍ전(田)ㆍ변(卞), 배(裵)ㆍ임(林) 모두 내성(來姓)이다. 가리(加利) 윤(尹)ㆍ조(趙)ㆍ이(李)ㆍ홍(洪)ㆍ정(鄭)ㆍ김(金). 화원(花園) 정(丁)ㆍ조(曺)ㆍ갈(葛)ㆍ서(徐)ㆍ석(石), 한(韓)ㆍ이(李)ㆍ백(白)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한다 《지리지(地理志)》에,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매와 개를 좋아한다.” 하였다. 여공(女功)을 잘한다. 관풍안(觀風案).
【형승】 산천이 빼어나고 특이하다.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연한 봉우리와 중첩한 병장(屛嶂). 긴 내와 평평한 숲 이숭인(李崇仁)의 몽송루기(夢松樓記). 도(道) 가운데에 있다. 땅이 요충(要衝)에 있다 모두 신숙주(申叔舟)의 기(記).
【산천】 인현산(印懸山) 주 북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조곡산(祖谷山)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太宗)의 태를 봉안하였다. 선석산(禪石山) 주 북쪽 28리에 있다. 세조(世祖)의 태를 봉안하였다. 적산(積山) 주 서쪽 25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화원현(花園縣) 10리에 있다. 성산(星山) 주 동쪽 8리에 있다. 비지산(斐旨山) 주 서쪽 21리에 있다. 공산(公山) 팔거현(八莒縣) 동북쪽 20리에 있다. 산의 동쪽은 영천(永川)ㆍ신녕(新寧)ㆍ하양(河陽), 남쪽은 대구(大丘), 북쪽은 의흥(義興), 서북쪽은 인동(仁同) 경계다. 가야산(伽倻山) 주 서남쪽 48리에 있다. 또 합천(陜川)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가야산 천만 겹을 그림으로는 다하기 어려우리. 연기와 구름은 곳이 없어 뿌옇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는 찬 데도 무성하다. 끊어진 석벽은 우뚝 서서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흐르는 샘은 곧장 쏟아져 흰 무지개를 끈다. 봄 아침에는 꽃을 꺾고, 가을에는 달을 구경하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고, 겨울에는 눈을 본다. 가야산의 사시를 뉘 있어 알리. 염공(廉公 안렴사(按廉使))이 일을 좋아하여 험한 산길을 만홀히 여긴다. 2년을 나쁜 진토(塵土)에서 노고할 때, 맑은 꿈 밤마다 하늘 남쪽에 달렸었네. 아름답다 가야산, 참으로 드물다. 하물며 성주(星州)는 나의 고향 선생의 초가집은 산 동쪽에 있고, 상인(上人 승려)의 연사(蓮社 절)는 산 가운데 있다. 시 읊고 설법하는 것, 두 가지 다 맑은 것이 짝 없으니, 언제나 손을 잡아 굶주리고 목마름을 위로하리.” 하였다. ○ 성주 경계에 진산이 되었고, 합군(陜郡) 동쪽에 형상을 뻗쳤다. 푸른 뿌리는 두터운 땅에 서리고, 푸른 빛은 갠 공중에 가득하다. 원숭이와 학은 여러 해 동안 이별하였는데 연기와 놀은 옛날과 같도다. 내가 와서 절정에 오르니 망부산(望夫山)이 제일 높다. ○ 산 돌이 험하고 높아 오르기 어려워, 나귀는 놓아두고 마음대로 지팡이를 짚는다. 구름이 열리니 한자(韓子)의 정성을 감동시켰고, 꽃이 떨어지니 유랑(劉郞)의 물색(物色)이 아득하다. 길고 짧은 등나무 가지는 옛길에 너우러지고, 높고 낮은 나뭇잎은 맑은 시내를 덮었다. 한종일 다녀도 얘기할 사람은 없고, 오직 그윽한 새만이 제 맘대로 운다.” 하였다.
수도산(修道山) 주 서쪽 85리에 있고, 지례(知禮)ㆍ거창(居昌) 두 고을 경계다. 적현(赤峴) 주 서쪽 52리 거창군 경계에 있다. 태자암(太子巖) 주 서쪽 12리에 있다. 둥근 돌이 삼층으로 쌓여 높이가 아홉 자이고, 원(圓)의 직경이 13척인데 매우 기괴하다. 가물 때에 비를 빌면 곧 응험이 있다. 태평촌(太平村) 팔거현(八莒縣) 서쪽 15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누가 이 땅을 태평촌이라 일렀는가. 부역이 무거워 백성들이 반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두어 집이 있어 손을 재우는데, 솔 껍질을 먹으니 아마도 적송자(赤松子)의 후손인가보다.” 하였다.
동안진(東安津) 주 동쪽 26리에 있고,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 채련(蔡璉)의 시에, “긴 물결은 출렁거리고 푸른 비늘(물고기)은 살쪘는데, 손을 익히 본 모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지 않는다. 만리에 길들이기 어려운 것이 너 하나뿐 아니다. 흙먼지가 사람의 옷을 더럽혔다고 무시하지 말라.” 하였다. 무계진(茂溪津) 주 남쪽 49리에 있고, 동안진(東安津) 하류이다. 소야강(所耶江) 주 동쪽 20리에 있고, 인동현(仁同縣) 칠진(漆津)의 하류다. 이름은 고도암진(高道巖津)이고, 배 열부(裵烈婦)가 순절(殉節)한 곳이다. 마포천(馬舖川) 주 북쪽 11리에 있다. 근원이 대야원동(大也院洞)에서 나와서 고을 동남쪽 15리에 이르러 이천(伊川)과 합한다. 가천(伽川) 주 서남쪽 47리에 있다. 근원이 가야산 동남쪽에서 고령현(高靈縣) 지경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천(伊川)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적산(積山)에서, 하나는 비지산(斐旨山)에서 나와서, 주 서쪽 5리에서 합하여 성을 안고 동으로 흘러 동안진(東安津)으로 들어간다. 방문중(房文仲)의 향교루(鄕校樓) 시에 말한, “뜰 밑의 이천(伊川)ㆍ사수(泗水)에 연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라지(紗羅池) 팔거현(八莒縣) 서쪽 20리에 있다. 잉화포지(仍火浦池)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동지(鼎洞池) 팔거현 동쪽 5리에 있다. 동정지(東亭池) 주 동쪽 4리에 있다. 여근내지(汝斤乃池) 주 동쪽 14리에 있다. 박외지(泊畏池) 주 남쪽 24리에 있다. 동만지(同萬池) 주 남쪽 4리에 있다. 거류지(巨留池) 주 남쪽 5리에 있다. 조시지(助是池) 주 북쪽 6리에 있다. 대가곡지(大家谷池) 주 서쪽 15리에 있다. 극지지(極只池) 주 북쪽 20리에 있다. 죽지(竹池) 주 북쪽 12리에 있다. 소이지(所伊池) 팔거현 북쪽에 있다. 수향지(水向池) 팔거현 서쪽에 있다. 효성지(曉星池) 화원현(花園縣) 동쪽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옻[漆]ㆍ꿀[蜂蜜]ㆍ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잣[海松子].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13척, 나각(羅閣)이 5백 52칸, 안에는 샘 7개 못 2개가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진(庚辰)에 돌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9척이다.

【봉수】 성산 봉수(星山烽燧) 남쪽으로 가리현(加利縣) 이부로산(伊夫老山)에,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북쪽 20리에 있다. 북쪽으로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 박집산(朴執山)에, 남쪽으로 성산(星山) 및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응한다. 말응덕산 봉수(末應德山烽燧) 가리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남쪽으로 현풍현(玄風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성산봉수(城山烽燧) 화원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서쪽으로 말응덕산(末應德山)에 응한다. 이부로산 봉수(伊夫老山烽燧) 가리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망산(望山)에, 북으로 성산(星山)에 응한다.
【궁실】 실록각(實錄閣) 성안 객관(客館) 동북쪽에 있는데, 본조(本朝)의 실록을 간직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봉안(奉安)하는 시에, “헌원씨(軒轅氏)의 봉력(鳳曆)왕춘(王春)을 기록하였다. 구오(九五)의 용이 나니, 대인(大人)을 보았도다. 석실(石室)에 쇠를 잠가 실록을 간직하니, 멀리 활과 칼을 생각하니 마음이 배나 슬프다.” 하였다. 백화헌(百花軒) 곧 동헌(東軒)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중영기(重營記)》에, “고을에 관사(館舍)와 해우(廨宇)가 있는 것은 사신(使臣)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자는 것이니, 고을의 수령이 된 자가 마땅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고을이 비록 작고 땅이 궁벽지더라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고을이 크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이랴. 성주(星州)가 고을로 세워진 것은 신라(新羅) 초기부터 현(縣)에서 군(郡)으로, 군에서 부(府)로, 부에서 주(州)가 되어 지역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횟수를 지나온 것이 남방 고을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또 속현(屬縣)이 셋이나 되어 땅이 크고 백성이 호강(豪强)하고, 고을의 치소(治所)가 도(道)의 중앙에 있어서 역마를 탄 사신이 번갈아 이르고 손과 나그네가 모여드는데, 관해(館廨)가 세월이 오래 되어서 빈객과 사신을 접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법이 엄하고 백성이 사나워서 고을을 지키는 자가 모두 역사(役事)를 일으키기를 어렵게 여겨 관해(館廨)가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돌 한 개, 기와 한 장이라도 다시 수리하여 정리하지 않고 수수방관(垂手旁觀)하여 교체되기를 기다린다. 우리 동년(同年) 김유선(金有銑) 군이 목사가 된 지 돌이 못 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간략해졌다 하여 탄식하기를, “성주가 남방의 큰 고을이고 땅이 요충(要衝)에 있는데, 관해가 이와 같아도 수령이 된 자가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옳은가. 법이 엄하더라도 법을 범하지 않으면 법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백성이 사납더라도 백성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 백성에게 꺼릴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에 재목을 모으고 공장이를 명하여 먼저 정청(正廳)의 동헌을 짓되, 예전 제도를 인습하여 넓힌 지 두어 달이 못 되어 준공하였다. 모두 2칸인데, 앞에 횡랑(橫廊)이 있어 밝고 통창하고, 뜰 가에는 화단이 있어 여러 가지 꽃을 심었다. 그리하여 아전을 보내어 편지를 달려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군이 의주(義州) 목사로 있을 때 눈여겨보았는데, 알고는 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지런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주라는 고을은 지경이 중국과 연하여 사신이 모이는 곳이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다스리기가 어렵기로 이름이 났는데, 군이 칼을 놀리는 것이 여유가 있었다. 우리 벗 김자호(金子灝) 공(公)이 사람에 대하여 허여(許與)하는 것이 적은데, 영남을 안찰(按察)하고 돌아왔기에 남쪽 고을의 다스림을 물으니, 군을 제일로 들면서 말하기를, “일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과감하다.” 하였다. 자호씨의 말하는 것이 내가 전날 본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자호씨가 세상을 떠나서 다시 볼 수 없음을 매양 슬퍼하며, 그 말을 생각하니 더욱 군을 믿노라. 일 없을 때에도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법을 범하지 않는 자가 오히려 적거늘, 큰 공사를 일으켜[工作] 남이 감히 하지 못할 것을 하면서도 능히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내력이 없겠는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은 인(仁)이요, 법을 범하지 않는 것은 의(義)요, 게으르지 않은 것은 부지런한 것이요, 과감하게 하는 것은 민첩한 것이다. 인과 의는 덕(德)의 부고[府]요 몸을 보전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스스로 처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함으로써 행하면 무엇인들 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이 동헌이랴! 김군은 자호씨의 알아줌을 저버리지 말고, 내가 군을 믿는 것에 맞출지어다. 숙주(叔舟)는 공명(功名)으로 세상을 속인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남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나의 시골이 성주와 접경하였으니, 만일 한 번 빈객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면 동헌의 좋은 경치를 그대를 위하여 시로 지으리라.” 하였다.
○ 고려(高麗) 이조년(李兆年)의 시에, “부탁하노니, 꽃을 심는 것을 다시 더하지 말라. 수효가 백에 차면 되지. 더할 필요는 없다. 매화와 국화의 맑은 표격(標格) 이외에, 잡되게 붉은 것들이 많은 것은 부질없지.” 하였다. ○ 고려 왕강(王康)의 시에, “세상일 시끄러움 날마다 더해지는데, 정화(菁華)는 그럭저럭 눈앞에서 지나간다. 한 헌(軒)의 꽃 피고 지는 것 흥미없지만, 오히려 맑은 읊조림이 늘그막에 많음을 기뻐한다.” 하였다. ○ 남재(南在)의 시에, “만가지 일이 해마다 귀밑의 눈(雪)만 더한다. 청춘 시절이 마치 망아지가 틈을 지나는 것 같구나. 백화헌(百花軒) 위에 거듭 노는 날에, 금정(金井) 가을 오동(梧桐)이 많은 생각을 자아내리.” 하였다.
흥민각(興民閣) 객관 남쪽에 있다. 좌우에 홍련(紅蓮)ㆍ백련(白蓮) 두 당(堂)이 있고, 모두 연못이 있다. 목사 민영견(閔永肩)이 세웠다.
【누정】 임풍루(臨風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성주 고을 생긴 것이 산천이 수려 기이하고, 인물이 번화하여 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경주(慶州)ㆍ복주(福州)와 더불어 남방에서 서로 상하를 다툰다. 그 때문에 비록 한 지경의 우두머리는 되지 못하나, 특별히 목(牧)으로 일컬은 것이다. 내가 옛날 벼슬하여 돌아다닐 때에 두세 번 이르렀는데, 한없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객관 동쪽에 주(州)의 청사가 바짝 닿아 담을 연하여서, 구경하고 바라보는 데 장애가 있었다. 좌우들에게 물어보니 지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연월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헐면 고을 사람들에게 해로움이 닥칠까 백여 년을 지내오면서 고치지를 못한다.” 하였다. 성주는 큰 고을이어서 국가에서는 반드시 진신(搢紳) 가운데의 영준(英俊)한 사람을 뽑아서 목사로 보내니, 이 선발에 응하는 사람은 참으로 강명(剛明) 준걸한 인재가 아니면 칼날이 무디어져서 그 극무(劇務)를 이기지 못하고 명예는 곧 떨어진다. 경태(景泰) 2년 신미(辛未)에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두번째 목사로 나왔는데, 닭을 베는 재능이 있어 폐단되는 것은 제거하고, 이익되는 일은 일으켜서 명성과 공적이 멀리 알려졌다.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주(州)의 청사를 빈땅에 넓히고 새 다락을 일으키는데, 재목은 폐사(廢寺)를 뜯어오고, 힘은 관청의 심부름하는 한가한 군사들을 이용하며, 기와는 새로 굽지 않고, 돌은 애써서 치지 않게 하여 잠깐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내 단청(丹靑)을 칠하니 화려하고 높은 것이 꿩이 나는 것 같고, 새가 날개 버린 것 같아서 우뚝하게 고을의 장관(壯觀)이 되어 비로소 영남루(嶺南樓)ㆍ촉석루(矗石樓)와 아름다움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한 가지 작은 일로도 후(侯)의 지혜와 용단이 전 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을 볼 수 있다. 을해(乙亥)년 봄에 후가 전(箋)을 받들고 서울에 와서 본말을 갖추어 말하고 또 이름과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객관과 주(州)의 청사가 서로 붙어 있는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이다. 예전에 막혔던 것이 지금은 통하고, 예전에 좁던 것이 지금은 통창하여졌으니, 전에는 어찌 그리도 구애되었고 뒤에는 어찌 그리도 통창하게 되었는가. 열자(列子)의 냉연(冷然)한 것초왕(楚王)의 쾌재(快哉)의 당함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름을 임풍(臨風)이라 하라. 관리가 정무에 분망하다가 막히고 답답한 것을 소창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여, 영귀(詠歸)의 흥을 발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것이요, 묵객(墨客)이 시를 읊조리어 꽃과 달을 희롱하고 정회를 펴서 호탕(浩蕩)한 기운을 붙이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하물며 주인이 술을 내고, 좋은 손이 자리에 앉아 눈을 천리까지 바라볼 수 있어 만가지 경치를 거두어 들이고 젓대[笙]와 피리가 어우러지고 주고받는 술잔이 서로 섞이어 노래 소리는 바람을 쫓아 날고 춤추는 소매는 바람에 나부끼어 들면, 어찌 한 번 조이고[一張] 한 번 늦추는[一弛]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강산과 풍월이 그 전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산만하여 통속이 없다가 지금 이 한 다락을 세우매 모두 궤석(几席) 아래에 집중되었으니, 그런 후에야 풍경에 부끄러움이 없고 후(侯)의 공이 천만 배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어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증』 강혼(姜渾)의 시에, “비 뒤에 강물이 불어서 노[篙]가 빠져서 오는데, 기둥에 기대어 물결을 보니 장하기도 하다. 첩첩한 물결은 푸른 풀 물갓을 완전히 쌌고, 연이은 봉우리의 반은 흰 구름 무더기에 들어갔다. 짧은 짐대[棹]를 끌고 고깃배에 오르고 싶기도 하고, 긴 낚싯대를 잡아 낚시터에 오르고도 싶다. 10년 동안 강해(江海)의 뜻이 오늘 아침에 흥이 나서 술 석잔 마시네.” ○ “시험삼아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읊조리어 하늘이 아끼는[天慳] 것을 발로하니, 마침 다락 가운데에 부서(簿書 공무 처리) 한가함을 만났도다. 붉은 제비가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푸른 개구리가 어지럽게 우니 비가 산에 어둡다. 일생 동안 훼방을 받으니 몸에 병이 많고, 반년을 달려 다니니 귀밑이 얼룩지려 한다. 황각(黃閣 정승의 집) 친구의 편지가 끊어졌으니, 객의 형색이 쓸쓸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도다.” ○ “구름 사다리가 높이 하늘에 기대었는데, 달 밝을 때 다락에 오르니 젊은 나이가 아니로세. 산수의 굴(窟)에서 길이 읊조릴 흥이 있고, 비단 자리에서 한 번 취할 마음도 없네. 아침 정원에는 실 같은 비요, 저문 날 촌락에는 담담한 연기로다. 청천(晴天) 방초(芳草)의 구(句)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두니, 당 나라 시인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용(龍)이 게으름에서 일어나 기이한 공을 자랑하노라고 여러 날 동안 침침한 구름이 하늘을 막았네. 평지에는 넉넉히 석자의 물결이 더하였고 긴 강에는 누가 반 돛의 바람을 빌릴까. 누대(樓臺)는 꾀꼬리와 꽃 속에 은은히 보이고 염막(簾幕)은 연기와 안개 가운데에 흐릿하도다. 사모(四牡)로 상재(桑梓)의 고을을 물으니, “고향을 생각하는 왕찬(王粲)은 나와 같기 어렵다.” 하였다.
청운루(靑雲樓) 성 동문 안에 있다. ○ 고려(高麗) 안유(安裕)의 시에, “초여름에 절월(節鉞)을 나눠 받아 삼복(三伏) 동안을 바닷가 치원대(致遠臺)에서 읊조리며 지냈다. 역마를 탄 사자(使者)가 번개처럼 달리어 비밀 명령을 전하니, 과거(科擧)에 어진 재주를 뽑으라고 불같이 독촉한다. 성산(星山)의 급한 장마 물을 뗏목으로 건너고, 월굴(月窟)의 맑은 바람은 계수나무 기르는 것을 재촉한다. 미리 상상하노니, 글을 아뢰고 경사를 여는 자리에 봉의 피리와 단판(檀板)이 천 무더기이리.” 하였다. ○ 임춘(林椿)이 잠깐 이 고을에 놀러 왔는데 고을 원이 이름난 기생을 시켜 모시고 자게 하였더니, 밤이 되자 도망하여 돌아갔다가 이튿날에 연석(宴席)으로 바로 가서 시를 짓기를, “홍장(紅粧) 미인이 새벽을 기다려 금전(金鈿)을 붙이는 것은 재촉하는 부름을 입고 비단 자리에 나온 때문이지. 장관(長官)의 엄한 호령도 두려워하지 않고, 공연히 나그네의 나쁜 인연(因緣) 나무라네. 다락에 올라 퉁소 부는 짝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달[月]로 달아나서 약을 훔치는 신선이 되었네. 청운(靑雲)의 어진 학사(學士)에게 말을 전하노니, 어진 마음으로 포편(蒲鞭)을 쓰지 말게나.” 하였다. ○ 박효수(朴孝脩)의 시에, “누(樓) 아래 사는 사람들의 우스개 말 시끄럽고, 다리 밑 흐르는 물에 버들 그늘이 짙구나. 최호(崔顥)의 방초(芳草)를 쓸 수 없는 것이 한이다. 누가 등왕각(騰王閣)을 위하여 낙하(落霞)를 읊으리. 새벽에 산 비는 대순을 구워 먹는[燒筍] 흥을 재촉하고, 들바람은 모 심는 노래를 보낸다. 억지로 졸한 글귀를 써 두니 참으로 운치로구나. 벽에 가득히 용처럼 날치는 취한 붓글씨가 비껴 있다.” 하였다.
몽송루(夢松樓) 옛터가 성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중수하여 정자를 만들었다. ○ 이숭인(李崇仁)의 누기(樓記)에, “홍무 기원(洪武紀元) 8년에 의성(義城) 정후(丁侯)가 선발되어 경산(京山 성주)을 다스리는데, 부임한 뒤에 정사가 잘 되고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즐겁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읍내 북쪽에 다락을 짓는데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굽는 것을 농사철 아닌 때를 맞추어 하고, 공장이는 노는 사람을 부리었다. 다락의 구도는 동마루와 처마 끝을 높게 하여 그 바라보는 것을 넉넉하게 하고, 단청을 얇게 하여 검소한 것을 표하였다. 준공이 되자 여러 노선생들을 초청하여 술을 내어 낙성(落成)을 하고 또 이름 지을 것을 생각하는데, 술이 반쯤 되자 후(侯)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다락이 이루어졌으니 이름을 지어달라.” 하였다. 노선생 제공(諸公)들이 다락은 후가 지은 것이므로 몽송(夢松) 두 글자를 들어서 편액(扁額)하였으니, 대개 옛 사람의 사업과 명위(名位)를 후에게 바란 것이었다. 후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 선생이 다락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대는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무릇 놀고 구경하는 누대(樓臺)를 설치한 것은 그 낙(樂)을 붙이자는 것인데, 낙(樂)은 형상이 없으니 반드시 저기에 붙인 뒤에야 형상되는 것이다. 소위 낙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얻는 것인데, 그 즐거운 것을 미루어 넓히면 백성은 내 동포 형제이고, 물(物)과 내 무리[與]가 되어서 훈훈[和]한 기운과 무르녹은 은혜의 진액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니, 한갓 저 놀고 구경하는 것에 힘쓰는 자의 즐거움이란 것이 너무 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남의 관장(官長)이 된 자는 그 즐거워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 후가 이 다락에 오르면 다른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 긴 내와 질펀한 숲이 연기와 구름 아득하고 흐릿한 사이를 숨었다 나타났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여 바라보기는 하여도 끌어올 수는 없던 것이 궤와 책상에 있는 것같이 되었다. 나무꾼은 숲에서 노래하고, 농사꾼은 들에서 노래하고, 길 가던 나그네가 그늘에서 쉬는 것, 소와 말이 흩어져 있는 것,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에 이르기까지 물(物)이 모두 제 낙을 낙으로 여기고, 후(侯)가 물과 함께 하는 것도 또한 한 번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유쾌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가 여기에 이른 것은 단묵(丹墨) 부서(簿書) 밖에 있는 것이 있으리라. 훗날 후가 순리 명관의 으뜸으로서 재상이 된다면 제공들이 다락의 이름을 지은 것이 더욱 징험이 될 것이다. 나는 원래 후의 정치가 착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의 일이 물(物)과 함께 즐기는 뜻이 있기 때문에 기(記)를 짓고 굳이 사양하지 않노라. 혹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공사(工事) 일으킴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쓴 것은 칭찬하지 않는 뜻이다. 그대의 기(記)는 어디에 속하는가. 전(傳)에, ‘때는 굴(屈)한데 일은 지나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나의 기(記)가 춘추의 필법에 있어서는 일은 같으나, 아름답고 악한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하였다. 동정(東亭) 주 동쪽 5리에 있다. 못 위에 돌기둥을 세워서 정자를 지었다.
『신증』 남정(南亭) 주 남쪽 1리에 있다. 김우(金祐)가 지었다. ○ 황필(黃㻶)의 기(記)에, “성주가 영남 상류(上流)에 있어 호구의 번성한 것과 송사의 번다한 것과 빈객의 모이는 것이 한 도(道)의 제일이니, 참으로 통달하고 민첩한 인재가 아니면 반근착절(盤根錯節)에 시험하여 그 효용(效用)을 보기 어렵다. 정축(丁丑)년 가을에 김우(金祐)가 성주 목사로서 일을 본 지 1년 만에, 정사가 간략하여지고 교화가 행하고, 나그네가 그 길에 다니고자 하며 쇠한 것이 일어나고 묵은 것이 새로워졌다. 고을에 전부터 토성(土城)이 있는데 치첩(雉堞)이 기울어 무너졌고, 나각(羅閣)이 모두 백여 칸인데, 모두 촌 백성을 시켜 보존하고 지키게 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었다. 김후가 감사 김극성(金克成) 공(公)에게 보고하고 조정에 아뢰고는 경진(庚辰)년 겨울 10월에 일을 시작하였다. 역사가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성이 이루어졌다. 높이는 선 것과 같고 길이는 끄는 것 같아 천연(天然)으로 세워진 것 같으니, 보장(保障 군사상(軍事上) 방어(防禦))의 웅대한 것이 으뜸이었다. 성의 남쪽 모퉁이를 보니 빈 땅이 있는데, 오랫동안 풀이 우거진 언덕이었다. 올라서서 바라보니 냇물이 삼면에 둘러 있고, 봉만이 사면에서 읍(揖)하는 것 같고, 푸른 눈썹 같은 공산(公山)과 연기와 구름이 낀 가야산(伽倻山)과 창ㆍ칼 같은 금오산(金烏山)을 궤안(几案) 사이에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생각건대 당시의 산천과 초목이 최고운(崔孤雲)의 해타(咳唾)를 겪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요, 여리(閭里)와 향당(鄕黨)이 길야은(吉冶隱)의 시서(詩書)의 유풍(遺風)에 흥기됨이 있었을 것이다. 개천과 두렁이 서로 얽히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며 봄에는 가는[耕] 것을 살피고 여름에는 일을 권하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피는 일을 여기에 앉아서 다 할 수 있다. 후(侯)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여기에 정자를 지을 수 있다.” 하고, 판관(判官) 박주형(朴冑亨) 군과 의논하여 곧 그 땅을 다스려 평평하게 하고 정자 3칸을 지었는데, 제도가 매우 한가롭고 통창하여 손의 자리를 펴고 노래와 춤을 벌이기에 여유가 있었다. 또 부엌 몇 칸을 세우고 측간[厠]과 담을 모두 갖추었다. 재목은 폐사(廢寺)의 것을 취하고 기와는 나각(羅閣)의 묵은 것을 쓰고, 공장이는 잘하는 솜씨에 맡겨 백성에게 빌리지 아니하여 두어 달이 못 되어 정자가 새롭게 되었으니, 그 땅의 웅장함과 경개의 절승함이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와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백중(伯仲)을 다투게 되었다. 아, 어찌 그리 신기한가. 고을에 예전에 동ㆍ북 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남정(南亭)으로 이름 지었다. 정자가 이루어진 뒤에 내가 곤남(昆南)에서 선산(善山)으로 향하는데 이 고을로 지나게 되었다. 후가 나를 정자 위에 앉혀 술을 권하고 기(記)를 부탁하였다. 내가 거칠고 졸한 글로 정자의 벽을 더럽힐 수는 없지마는 생각하건대, 후가 돌아가신 나의 맏형과 동갑이기 때문에 의(義)가 형제의 분(分)이 있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토지의 성쇠와 물리(物理)의 성훼(成毁)는 운수가 그 사이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고을이 성립된 것이 몇 천 년 전인지 알지 못하고, 고을의 목사가 된 자가 전후에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고 알아도 성취하지 못한 자가 또한 있어서 반드시 우리 김후를 기다렸으니, 이것은 성주의 토지ㆍ성곽ㆍ정관(亭館)ㆍ문물(文物)이 김후를 만나서 한 번 재조(再造)된 것이다. 한(漢) 나라의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표창하는 것을 지금에도 바랄 수 있거니와 다른 날 순리(循吏)의 전(傳)을 쓰는 자가 이 사람을 빼고 누구를 쓸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쓸 만한 것이다. 후의 자는 길부(吉夫)요, 광산(光山) 사람인데, 젊어서 성균관에서 영준(英俊)들과 교유(交遊)하였고, 수령이 되어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모두 제1이었고, 뒤에 큰 고을 충주(忠州)ㆍ양주(楊州)의 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혁혁한 명성 때문에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 하였다. 향사당(鄕射堂) 곧 용흥폐사(龍興廢寺)다.
【학교】 향교(鄕校) 주 북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가 모두 흙으로 만든 상(像)인데,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에 향교의 종이 개성(開城) 대성전(大成殿)에 가서 한 번 보고 돌아와서 똑같이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하였다. ○ 허종항(許從恒)의 시에, “묘전(廟殿)이 높직하여 학교를 누르고 있다. 남으로 향한 초상이 몇 가을을 지냈는고. 은근히 뜰 앞의 은행나무에게 묻노니, 누가 안자(顔子)ㆍ증자(曾子)이고, 누가 자공(子貢)ㆍ자로(子路)인가.” 하였다.
【역원】 답계역(踏溪驛) 주 북쪽 10리에 있다. 안언역(安偃驛) 주 남쪽 28리에 있다. 무계역(茂溪驛) 무계진(茂溪津) 동쪽에 있다. 설화역(舌火驛) 화원현(花園縣) 서쪽 5리에 있다. 고평역(高平驛) 팔거현(八莒縣) 서쪽 5리에 있다. 인화원(仁化院) 주 동쪽 8리에 있다. 사원(蛇院) 주 남쪽 34리에 있다. 동안원(東安院) 동안진(東安津) 언덕에 있다. 공배원(公排院) 주 동쪽 25리에 있다. 이동원(李同院) 주 남쪽 42리에 있다. 약보원(若寶院) 주 북쪽 2리에 있다. 광대원(廣大院) 주 서쪽 20리에 있다. 인원(引院) 화원현(花園縣) 남쪽 2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주 북쪽 29리에 있다. 봉서원(鳳棲院) 팔거현 북쪽 15리에 있다. 숭유원(崇儒院) 팔거현 북쪽에 있다. 예전 이름은 독유(獨儒)인데, 관찰사 손순효(孫舜孝)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원(院)에 다락이 있다. 다른 이름은 척이(斥異)다. 유원(柳院) 팔거현 남쪽 5리에 있다. 작원(鵲院) 팔거현 남쪽 10리에 있다. 흥왕원(興王院) 화원현 서쪽 1리에 있다. 사읍제원(沙邑梯院) 가리현(加利縣) 동쪽에 있다. 다품원(多品院) 주 북쪽 11리에 있다. 월항원(月恒院) 주 북쪽 18리에 있다. 퇴계원(退界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주 남쪽 22리에 있다. 통신원(通信院) 주 동쪽 30리에 있다.
【창고】 화원창(花園倉) 예전에는 인흥사(仁興寺)를 빌려서 본현(本縣)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세조(世祖) 때에 현 읍내 남쪽에 따로 세웠다. 왜국 사신이 가지고 오는 동(銅)ㆍ철(鐵)ㆍ소목(蘇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여기에 저장하여, 지출하고 사용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불우】 용흥사(龍興寺) 고을 성북 문 밖에 있다. 대장당(大藏堂)이 있는데, 이인복(李仁復)이 기를 지었다. 인흥사(仁興寺)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액자(額字)를 썼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흥인사(興仁寺)가 포산(苞山 현풍(玄風)) 기슭에 있는데, 내가 옛날에 놀 때에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았다. 시주(施主)는 때때로 부처에 예를 하고, 중은 맑은 낮에 앉아서 경(經)을 말한다. 뜰에 서 있는 탑은 우뚝하고 희며, 길을 끼고 있는 긴 솔은 낱낱이 푸르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황금(黃金)의 천상필(天上筆)이 지금도 광채가 빛나는 별빛이 화성(華星) 쏜다.” 하였다. 심원사(深源寺)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심원의 옛 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ㆍ잣나무 그늘 가운데에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楞嚴經)을 듣고 미묘한 뜻을 물어보려 하는데, 이 몸의 한가함으로 빌어 얻을 수 있을는지.” 하였다. 안봉사(安峯寺) 주 서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이장경(李長庚)ㆍ이조년(李兆年)ㆍ이숭인(李崇仁)의 진영(眞影)이 처음에는 선석사(禪石寺)에 있었는데, 세조(世祖)의 태(胎)를 선석산(禪石山)에 봉산하여 그 절을 철폐하자, 이씨의 자손들이 그 진영을 이 절에 옮겼다. 적산사(積山寺) 적산에 있다. 곧 이직(李稷)의 고택(故宅)인데, 지금은 절이 되었다. 용연사(龍淵寺)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다. 법수사(法水寺) 가야산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신증』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예전에는 소상(塑像)으로 만들었는데, 목사 강중진(康仲珍)이 위판(位版)으로 고쳤다. 성황사(城隍祠) 주 성안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城山) 화원현(花園縣) 북쪽 5리에 있다. 작은 산이 큰 강을 베고 있는데 그 위가 평평하고 넓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왕이 꽃을 구경하던 곳이므로 화원현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한다. 그 아래에 예전에 금강정(錦江亭) 오류정(五柳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강 북쪽에 상국리(上國里) 세자지(世子旨) 등의 땅이 있는데 모두 신라 왕의 장전(帳殿)의 터다. 가야산성(伽倻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5천 9백 35척, 높이가 5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서 여섯 시내와 열 개의 샘이 있다. 평탄하고 험한 것이 반반이다. 독용산성(禿用山城) 주 서쪽 3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8천 64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시내 셋과 샘 하나가 있다. 팔거산성(八莒山城) 현 동쪽에 있다. 주(州)까지 78리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23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샘 둘과 못 하나가 있다. 도산현(都山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적산현(狄山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신곡부곡(薪谷部曲) 주 서북쪽 30리에 있다. 위곡부곡(葦谷部曲) 주 동쪽 30리에 있다. 선남부곡(船南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이총언(李忩言) 태조(太祖) 초년에 본부(本府) 장군이 되어 본성(本城)을 지켰는데, 임금이 친히 쓴 조서로 금석(金石) 같은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여 말하기를, “백자(百子) 천손(千孫)까지 이 마음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총언이 시종 한결 같은 절개를 지키었다. 임금이 명하여 옆 고을의 민구(民口)를 주어 그 호구(戶口)를 보태고 또 소금과 곡식 4천여 곡(斛)을 상으로 주었다. 김황원(金黃元) 선종(宣宗) 때에 부사가 되었다. 아전이 살인 강도를 잡아 오자 황원이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도적이 아니다.” 하고, 빨리 석방하게 하였다. 판관 이사강(李思絳)이 힘써 다투기를, “이 도적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다른 도적이 잡혔는데 과연 지난번에 살인한 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그 신명(神明)함에 탄복하였다. 이영(李永) 숙종(肅宗) 때에 경산 부사가 되었다. 최척경(崔陟卿) 판관이 되었는데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고 두려워하였다. 왕세경(王世慶)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올라 경산 부사가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윤택(尹澤)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부사가 되었을 때에 길에서 여자가 우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하고 붙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인 자였다.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이 내 소의 혀를 잘랐다.”고 고소하였는데, 이웃 사람이 자백하지 않았다. 보림(寶林)이 그 소를 목마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물에 간장을 타서 명령하기를, “차례로 소에게 물을 먹이되 소가 물을 마시려 하거든 곧 다시 빼앗으라.”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고소를 당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소가 놀라 달아났다. 심문하니 과연 자백하였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이 달아나서 남의 보리 싹을 거의 다 뜯어 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고소하려 하자 말 주인이 말하기를,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너의 보리가 수확이 없거든 내 보리를 너에게 주겠으니 고소하지 말라.” 하므로 보리 주인이 승낙하였었다. 여름이 되어 보리가 다시 싹이 나서 조금 수확할 수가 있었다.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네 보리도 결실하였다.” 하고 주지 않았다. 보리 주인이 고소함에, 보림이 명령하여 말 주인은 앉고 보리 주인은 서게 하고 말하기를, “경주(競走)를 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더니 말 주인이 따르지 못하였다. 왜 졌느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따를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보림이 말하기를, “보리도 그러하다. 뜯어 먹은 뒤에 다시 싹이 났으니 온전한 수확이 될 수 있느냐. 네가 말을 놓쳐서 보리를 먹게 하였으니 죄가 한 가지요, 고소하지 못하게 빌었으니 죄가 두 가지요,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았으니 죄가 세 가지다.” 하고,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고소한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정치를 하는 것이 엄하고 밝기가 이와 같았다. 본조 권득경(權得經) 목사가 되었다. 정치가 맑고 공평하여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였다. 관(官)에서 죽었다. 손소(孫昭) 목사가 되어 명성과 치적이 있다.
『신증』 윤석보(尹碩輔) 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밝은 정치를 하였다. 김우(金祐)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이장경(李長庚) 본래 고을 아전이다. 집에 있다가 귀한 사람이 지나가는 벽제(辟除) 소리를 들으면, 곧 방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서 지나간 뒤에 일어났다. 뒤에 정승(政丞)에 증직되고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봉해졌다.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이천년(李千年)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만년(李萬年) 장경의 아들이다. 이조년(李兆年) 장경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비서랑(祕書郞)에 옮겨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조회하였다. 뒤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 나라에 머물러 있는데, 조년이 분히 여겨 원 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바쳐 왕의 죄 없는 것을 하소하니,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숙위(宿衛)하여 있을 때에 자못 근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조년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기를, “전하가 천자를 섬기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 새로워야 하겠는데, 어째서 예(禮)를 버리고 정욕에 방종하여 스스로 누(累)를 초래(招來)하십니까. 좌우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니 어디에서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원하건대 행실을 고쳐 경계하고 유아(儒雅)한 선비를 친히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싫어하여 담을 넘어서 달아났다. 조적(曺頔)의 난에 백관들이 적에게 붙었는데 조년이 의리로 적(頔)의 당을 효유하여 듣는 자가 모두 감격하였다. 왕이 아첨하는 소인을 가까이하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여 조년이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송강(松岡)에서 탄자(彈子)로 참새를 잡을 때 조년이 끓어 앉아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명이(明夷)의 때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년들이 전하의 위력을 빙자하여 부녀자들을 노략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니, 신은 화가 조석에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작은 오락에 빠지십니까. 전하가 늙은 신의 말을 들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버리고,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쓰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것입니다.” 하였다. 자주 간하여도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식하기를, “자주 간하여도 듣지 않으니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다. 이미 그 아름다움을 순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악함만 더하게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니, 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에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가서 인간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직함으로서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포(李褒) 조년(兆年)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후하여 예법대로 행동하였다. 벼슬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이승경(李承慶) 장경(長庚)의 손자다. 원 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6년에 어머니 상사에 분상(奔喪)하여 환국하였는데, 이듬해에 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이백전(李百全) 사부(詞賦)로 진용(進用)되어 벼슬이 국자감 대사성 보문각 학사(國子監大司成寶文閣學士)에 이르렀다. 이승휴(李承休)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학문에 힘써서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구함이 없었다. 뒤에 두타산(頭陀山) 귀동(龜洞)에 들어가서 몸소 밭갈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곳에 산 지 10여 년에 안집사(安集使) 이심돈(李深敦)이 권하여 서울에 갔는데,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어 소(疏)를 올려 옳고 그른 것을 지극히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파하고 구동 전날 숨었던 곳으로 돌아와서 따로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저술하였다. 10년 만에 충선왕(忠宣王)이 글을 내리어 부르니 승휴가 늙고 병들었음으로써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글을 내리기를, “과인(寡人)이 평소에 경의 이름을 듣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여 지금 경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주는 것이니, 창생(蒼生)을 위하여 한 번 일어나시오.” 하니, 승휴가 이에 일어났다.
이인복(李仁復) 자는 극례(克禮)며, 포(褒)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올라 복주 사록(福州司錄)이 되고 춘추공봉(春秋供奉)에 전직되었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대령로(大寧路) 금주 판관(錦州判官)이 되었다. 동으로 돌아왔을 때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였는데, 인복이 명망이 있으므로 네 번 옮기어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 공민왕이 원 나라에 아뢰어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하였더니, 신돈(辛旽)에게 거슬려 파면되었다. 흥안(興安) 부원군으로 봉하고 조금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죽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인복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충렬ㆍ충선ㆍ충숙 세 왕조의 실록(實錄), 《고금록(古今錄)》ㆍ《금경록(金鏡錄)》을 편찬하였다. 인복이 가만히 아뢰기를, “신돈이 훗날에 반드시 변이 있을 것이니 멀리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신돈이 처단을 당하자 왕이 인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탄복하였다. 인복이 그 아우 인임(仁任)ㆍ인민(仁敏)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패하고 집을 망칠 자는 반드시 두 아우라.” 하더니 뒤에 과연 패하였다. 뒤에 충정왕(忠定王)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숭인(李崇仁)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올랐다. 본국에서 문사를 뽑아서 원 나라 서울에 응시(應試)하는데, 숭인이 첫째로 뽑혔으나 나이 아직 25세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신우(辛禑) 때에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서연(書筵)에 들어갔는데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 청주(淸州)에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소환되어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知密直司事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또 정몽주(鄭夢周)의 당으로 멀리 귀양갔다가 조금 뒤에 죽었다. 숭인(崇仁)은 자질이 총명 민첩하고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였다. 이색(李穡)이 매양 탄복하여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여 보더라도 시대마다 이런 사람 흔치 않다.” 하였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숭인이 지은 표(表)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어, “표의 문사가 참으로 간절하다.” 하였고, 중국의 사대부들이 숭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도은집(陶隱集)》이 세상에 행한다. 배극렴(裵克廉) 개국공신이고 좌시중(左侍中)이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이직(李稷) 포(褒)의 손자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고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공신(左命功臣)이 되어 성산(星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사후(師厚)는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사원(師元)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사순(師純)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이견기(李堅基) 포(褒)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당시에 장자(長者)로 일컬어졌으며, 시호는 안성(安成)이다. 이함녕(李咸寧)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이정녕(李正寧)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원위(星原尉)가 되었다. 시호는 장절(章節)이다. 배규(裵規) 세종(世宗) 때 사람이다. 아들 윤(閏)과 한(閑)이 모두 과거에 올라 부자가 연이어 간원(諫院)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신증』 이집(李諿)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자견(李自堅)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자건(李自健) 자견의 아우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자화(李自華) 자건의 아우다. 기개가 있고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우거】 고려 김수(金洙) 선산부(善山府) 조에 자세히 나왔다. 본조 김맹성(金孟性) 수(洙)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고 조행이 있었다.
【효자】 본조 김문상(金文尙) 수(洙)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전후 6년을 시묘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였다. 김자강(金自强)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서 치상하는데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고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의하였다. 장사할 때에 아버지 무덤을 옮기어 합장하고 3년을 시묘 살면서 신을 신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 또 추후로 아버지를 위하여 다시 3년을 시묘하려 함에, 아내의 친정 가족들이 끌고서 돌아오게 하고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다. 자강(自强)이 연기 나는 것을 돌아보고,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들겼다. 이에 힘껏 떠밀치고 다시 돌아가 무덤 앞에 엎드려서 3일 동안을 일어나지 않았다. 인아(姻婭) 친척이 효성에 감동되어 다시 여막을 지어 주었다. 자강이 또 3년을 처음과 같이 살았다. 박구(朴矩) 벼슬이 가정(嘉靖)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승득(金承得)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좇고 불교 의식을 좇지 않았으며, 3년을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방계(金邦啓)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고 또 조부상을 입어서 모두 9년을 시묘하였는데,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신환(金信還) 어버이가 죽자, 장사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3년을 시묘하였다. 나라에서 물품을 주었다. 『신증』 배경동(裵敬同) 어머니가 악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먹이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이식(李植)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함께 죽자 조석으로 전(奠)을 드리는 정성을 다하여 6년을 마치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열녀】 고려 배씨(裵氏) 이숭인(李崇仁)의 〈배열부전(裵烈婦傳)〉에, 배씨(裵氏)는 진사(進士) 배중선(裵中善)의 딸이다. 15세가 넘은 뒤에 사족(士族)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내정의 일을 잘 다스렸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왜적이 경산(京山)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소요하여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동교는 그때 합포(合浦) 원수(元帥)의 막(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적병이 배씨의 사는 동네에 돌입하자, 배씨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다. 적이 쫓아서 이르렀는데 강물은 바야흐로 창일하였다. 배씨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어린 아들을 언덕 위에 놓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적이 활을 겨누며 말하기를, “나오면 죽이지 않겠다.” 하였다. 배씨가 적을 돌아보고 꾸짖기를, “왜 나를 속히 죽이지 않는가. 내가 어찌 적에게 더럽혀지랴.” 하였다. 적이 화살을 쏘아 어깨를 맞추었다. 두 번 쏘아 두 번 맞아, 강 가운데에서 죽었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임금께 아뢰어 정려하였다. 나씨(羅氏) 감찰(監察) 나상(羅尙)의 딸이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배윤(裵閏)의 아내다. 윤이 죽었을 때 나씨의 나이 젊은데 머리를 깎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며, 무릇 상례와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불교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본조 눌덕(訥德) 그 남편 정수(鄭守)가 호랑이에게 잡혔는데 눌덕이 칼을 가지고 호랑이를 쳐서 남편이 벗어났다.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려하였다. 『신증』 문덕(文德) 서원(書員) 김계하(金戒河)의 아내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곡읍(哭泣)을 끊지 않고 3년상을 마치었다.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자 곧 머리를 깎고 시부모의 집으로 가서 15년이 넘도록 마늘ㆍ파ㆍ술ㆍ고기를 먹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제영】 교목구려회세덕(喬木舊閭懷世德) 이곡(李穀)의 시에, “교목과 옛 거리는 세덕을 생각하고, 낙하(落霞) 고목(孤鶩)은 재주 없음이 부끄럽다.” 하였다. 일렴향무금성퇴(一簾香霧錦成堆) 전 사람의 시에, “다시 백화헌(百花軒) 속에서 자려 하니, 발에 가득한 향기 안개요, 비단이 무더기를 이루었다.” 하였다. 강분낙수천지준(江分洛水天池濬) 이첨(李詹)의 시에, “강은 낙수를 나누었으니 천지가 깊고, 눈[雪]은 가야산(伽倻山)을 눌렀으니 지축(地軸)이 웅장하다.” 하였다. 호산형승갑남주(湖山形勝甲南州)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호산의 좋은 경개가 남주에서 으뜸인데, 백 가지 온갖 모양 봄빛이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구나.” 하였다. 교목한연쇄고주(喬木寒煙鎖古州)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교목의 찬 연기는 옛 고을에 잠겼는데, 집집의 감과 밤은 서리 가을을 만났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7년에 신안 현감(新安縣監)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인 이창록(李昌祿)이 시사(時事)를 논하여 대역죄(大逆罪)로 국문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동 7년에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 박흔(朴訢)이 목베어 죽었기 때문이다. 효종 4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영조 1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읍인(邑人)이 목사를 독살하였기 때문이다. 동 2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주내(州內)ㆍ강남(舡南) 본래 강남(舡南)의 부곡(部曲)인데, 동쪽으로 20리다. 화곡(禾谷) 동쪽으로 20리다. 오도(吾道) 동쪽으로 30리다. 대동(大同) 동쪽으로 35리다. 용산(龍山) 동남쪽으로 10리다. 산남(山南) 동남쪽으로 15리다. 초곡(草谷) 동남쪽으로 20리다. 두의(豆衣) 동남쪽으로 30리다. 조곡(祖谷)ㆍ다질(茶叱) 모두 동남쪽으로 40리다. 벌지(伐旨) 동남쪽으로 60리다. 남산(南山) 남쪽으로 10리다. 지사(知士) 남쪽으로 15리다. 성법산(省法山) 남쪽으로 20리다. 운라(雲羅) 남쪽으로 30리다. 소야(所也)ㆍ흑수(黑水) 남쪽으로 50리다. 대척(大尺) 남쪽으로 40리다. 사등(沙等) 서남쪽으로 15리다. 대리(大里) 서남쪽으로 30리다. 소건(所件) 서남쪽으로 35리다. 오차(吾次) 서남쪽으로 60리다. 운곡(雲谷)ㆍ본아(本牙) 모두 40리다. 대가곡(大家谷) 서쪽으로 10리다. 명암(明巖) 서쪽으로 30리다. 덕곡(德谷) 남쪽으로 30리다. 금물(今勿) 서쪽으로 40리다. 증산(甑山) 서쪽으로 50리다. 초전(草田) 서북쪽으로 30리다. 신곡(薪谷) 본래 신곡의 부곡인데 서북쪽으로 40리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10리다. 당소(唐所) 북쪽으로 30리다. 비호석(非乎石) 북쪽으로 20리다. 이물(爾物) 서쪽으로 50리다. 노장곡(蘆長谷)ㆍ유동(柳洞) 동쪽으로 10리다. ○ 위곡(葦谷)의 부곡인데 동쪽으로 30리다.
【성지】 읍성(邑城)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중종 15년에 돌로 고쳐 쌓았다. 선조 24년에 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6천 53척인 둥근 성이다. 청동문(淸東門)에 있는 누는 영춘루(迎春樓)라 하고, 북문 바깥에는 용흥사(龍興寺)가 있다. 독용산성(禿用山城) 본래 도산성(都山城)인데 서쪽으로 33리다. 수도산(修道山)의 동쪽인데 옛날 돌로 쌓았다. 숙종 원년에 고쳐 쌓았다. 둘레가 4천 5백 81보며, 옹성(甕城)으로 일포루(一砲樓)다. 개천 네 개, 샘 두 개이며, 평탄하고 험함이 반반이다. ○ 속읍은 성주ㆍ고령(高靈)이다. ○ 수성장(守城將)이 본래 목사 겸 별장을 겸하였으며 1명이다.
【누정】 호산정(湖山亭)ㆍ쌍도정(雙島亭).
【진도】 동안진(東安津) 동쪽으로 20리,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무계진(茂溪津) 동남쪽으로 50리, 동안진의 하류다.
【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감.
【창고】 읍창 두 개. 동안창(東安倉) 동쪽으로 26리에 있다. 달창(達倉) 서북쪽으로 25리에 있다. 가리고현창(加里古縣倉)ㆍ산성창(山城倉)ㆍ남창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천평창(泉坪倉)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능묘】 관왕묘(關王廟) 선조 정유년 천장(天將) 제국기(第國器)가 세웠는데, 영조 정미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우(關羽) 경도(京都) 동묘(東廟) 편을 보라.
【사원】 천곡서원(川谷書院) 중종 무자년에 세우고 선조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숙자(程叔子)ㆍ주자(朱子)ㆍ김굉필ㆍ이언적(李彦迪) 모두 문묘편에 보라. 정구(鄭逑) 충주 편을 보라. 장현광(張顯光)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며 인동(仁同) 사람이다. 벼슬은 우참찬 증영의정(右參贊贈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인조 정묘년에 세우고 숙종 5년에 사액하였다. 정구 충주 편을 보라. ○ 충렬사(忠烈祠) 숙종 기유년에 세우고 정조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제말(諸沫) 선조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는데, 벼슬은 성주 목사 증병조판서(星州牧使贈兵曹判書)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이사룡(李士龍) 본주(本州) 포수(砲手)였는데, 인조 무인년에 청(淸) 나라 징병으로 요동(遼東)에 들어가서 금주(錦州) 송산에서 순절하였다. 성주 목사에 추증되었다.


[주D-001]구름이……감동시켰고 :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에 올라가서 여러 날 비를 만나 걱정하다가 형악묘(衡岳廟)에 빌었더니 곧 맑게 개었다. 그의 시에, “묵도(黙禱)하였더니 감통(感通)되었다.”는 말이 있다.
[주D-002]꽃이……아득하다 : 진 나라 유신 완조(阮肇)가 천태산(天台山)에 놀러 가서 선녀(仙女)를 만나 놀다가 돌아와서 뒤에 다시 찾아갔다.
[주D-003]적송자(赤松子) : 옛 신선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송자(松子)를 두고 한 말이다.
[주D-004]만리에……어려운 것 : 두보의 시에, “백구가 호탕한 물결에 빠졌으니 만리에 누가 길들일꼬.[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하였다. 여기서는 자신이 백구처럼 한가롭다는 뜻.
[주D-005]봉력(鳳曆) : 봉(鳳)이 천시(天時)를 아는 때문에 봉으로 역정(曆正)의 벼슬을 이름하였다.
[주D-006]왕춘(王春) : 《춘추(春秋)》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것을 말함.
[주D-007]구오(九五) :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효(九五爻)에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되는 괘(卦)라 한다.
[주D-008]활과 칼 :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오를 때에 황제의 활과 칼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서는 임금이 승하한 것을 말함.
[주D-009]칼을 놀리는 것 : 소를 잘 잡는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에 칼 놀리는 것이 여유가 있듯이, 고을 다스리는 일에 잘 하는 것을 말함.
[주D-010]금정(金井) : 우물 난간을 아로새겨 꾸민 것을 금정이라 함. 오동 잎이 금정에 떨어진다는 시가 있음.
[주D-011]닭을 베는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가본즉 선비들의 공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웃으며 농담으로,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왜 쓰느냐.” 하였는데 그 말은 나라를 교화시키는 법을 작은 고을에 쓴다는 뜻으로 칭찬하는 말이다.
[주D-012]열자(列子)의 냉연(冷然)한 것 : 《장자(莊子)》에,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매 서늘하게[冷然] 좋았다.” 하였다.
[주D-013]초왕(楚王)의 쾌재(快哉) : 송옥의 풍부[宋玉風賦]에 초 양왕(楚襄王)이 난대(蘭臺)에 놀다가 바람이 쏴하고 불어오매 왕이, “옷깃을 헤치고 바람을 쐬면 상쾌하다 이 바람이여.” 하였다.
[주D-014]한번……늦추는[一弛] : 《예기》에, “한 번 버티고 한 번 푸는 것은 문무(文武)의 도다.” 하였다. 그 주에는 한때 괴롭다가 한때는 편해야 한다는 뜻이라 하였다.
[주D-015]청천(晴川) 방초(芳草)의 구(句) : 최호(崔顥)의 황학루시(黃鶴樓詩)에, “청천역력한양수(晴川歷歷漢陽樹) 방초처처앵무주(芳草萋萋鸚鵡洲)”라는 시구(詩句)가 유명하다.
[주D-016]사모(四牡) : 사모(四牡)는 옛날 사신의 수레를 끄는 네 말을 말함인데, 《시경》에 사모편(四牡篇)이 있다.
[주D-017]치원대(致遠臺) : 최고운의 유적인 동래 해운대(海雲臺)나 월영대(月影臺)를 말한다.
[주D-018]월굴(月窟)의……재촉한다 :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비유한 것.
[주D-019]퉁소 부는 짝 : 춘추(春秋) 때 사람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을 아내로 주었는데 농옥에게 퉁소 부는 것을 가르쳤다.
[주D-020]달로……되었네 : 예(羿)가 불사약(不死藥)을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어 왔는데, 항아(姮娥)가 훔쳐 가지고 월궁(月宮)으로 달아났다.
[주D-021]포편(蒲鞭) :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서 아전과 백성이 죄가 있으면 부들 채찍을 써서 벌을 줄 뿐이었다.
[주D-022]몽송(夢松) : 오(吳) 나라 정고(丁固)가 꿈에 배 위에 소나무가 났었는데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송자(松子)는 십팔공(十八公)이니 이 뒤 18년만에 삼공(三公)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주D-023]순리 명관 : 법도를 따르는 어진 관원을 말함인데, 《사기(史記)》에 순리전(循吏傳)이 있음.
[주D-024]때는……않았는가 : 시기는 그렇지 못한데 큰 일을 한다는 뜻이다.
[주D-025]아름답고……다르다 :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어 좋은 일은 포상[褒]하고 나쁜 일은 폄(貶)하는데, 같은 일에도 경우에 따라서 포(褒)와 폄(貶)이 다르기도 하였다.
[주D-026]반근착절(盤根錯節) : 옛글에, “서리서리 얽힌 나무뿌리나 어긋난 마디가 있는 재목을 만나지 않으면, 잘 드는 연장을 구별할 수 없다.” 하였다. 어려운 일을 만나야 잘 처리하는 재주를 알아낸다는 뜻이다.
[주D-027]나그네가……하며 : 《맹자》에서 나온 말인데 정치를 잘하는 나라에는 사람들이 따른다는 뜻이다.
[주D-028]해타(咳唾) : 어진 사람이 남긴 말이나 글을 기침과 침에 비하여 그것이 주옥(珠玉)과 같다 한다.
[주D-029]길야은(吉冶隱)의……유풍(遺風) : 길야은이 글을 가르치고 행실을 닦아서 향리(鄕里)를 감화시켰다.
[주D-030]눈과……짝 삼았다 : 옛날에 강필(江泌)은 밤에 촛불이 없어 눈[雪]에 비춰 글을 읽었고, 차윤(車胤)은 반딧불을 모아 엷은 비단 주머니에 달아서 글을 비추었다.
[주D-031]오성(五聖)과 십철(十哲) : 공자ㆍ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를 오성(五聖)이라 하고, 안연(顔淵 안자)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ㆍ염유(冉有)ㆍ자로(子路)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십철(十哲)이라 한다.
[주D-032]장전(帳殿) : 왕이 임시로 장막[帳]을 치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D-033]명이(明夷)의 때 : 《주역(周易)》 명이괘(明夷卦)에 해가 땅속으로 들어가면 밝은 것이 상한다 하였는데, 어진 사람이 뜻을 얻지 못하여 참소를 근심하는 것을 명이(明夷)라고 한다. 여기서는 충혜왕이 원 나라에서 참소를 만났던 때를 말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옥야현(沃野縣)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진관】 군(郡)이 6이다. 익산(益山)ㆍ김제(金堤)ㆍ고부(古阜)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여산(礪山) , 현(縣)이 11이다. 정읍(井邑)ㆍ 흥덕(興德)ㆍ부안(扶安)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금구(金溝)ㆍ용안(龍安)ㆍ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
【관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성씨】 본부(本府) 이(李)ㆍ최(崔)ㆍ유(柳)ㆍ박(朴)ㆍ전(全)ㆍ경(庚)ㆍ한(韓)ㆍ백(白), 방(房) 내성(來姓)이다. 양(梁) 주계(朱溪). 장(張) 결성(結城). 김(金) 모평(牟平). 우주(紆州) 박(朴)ㆍ이(李)ㆍ정(鄭)ㆍ황(黃)ㆍ최(崔)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홍(洪). 양량(陽良) 백(白)ㆍ나(羅)ㆍ강(康)ㆍ유(劉). 이성(利城) 이(李)ㆍ백(白)ㆍ정(鄭)ㆍ손(孫)ㆍ진(陳)ㆍ최(崔). 두모촌(豆毛村) 책(冊)ㆍ최(崔)ㆍ이(李). 이성(伊城) 조(趙)ㆍ배(裵)ㆍ장(張)ㆍ구(仇)ㆍ염(廉)ㆍ고(高)ㆍ온(溫). 옥야(沃野) 임(林)ㆍ장(張)ㆍ염(廉)ㆍ구(仇)ㆍ양(梁). 경명(景明) 김(金)ㆍ임(林)ㆍ배(裵)ㆍ인(印).
【풍속】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주기(州記)에,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고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하였다. 백성들이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볼 만하다.”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자는 대부분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한다. 이경동(李瓊同)의 기(記)에 있다.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물건을 싣는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형승】 국가의 풍패(豐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 윤곤(尹坤)의 기(記)에 있다. 주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모두 서거정의 기에 있다. 안팎으로 산과 개천이 있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안팎의 산과 강이 판적에 들어 있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止山)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 완산(完山)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 일명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는데, 읍을 설치한 후로부터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덕산(高德山)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 무악산(毋岳山)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 기린봉(麒麟峯)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작은 못이 있다. 청량산(淸涼山) 부의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방산(西方山) 부의 동북쪽 25리에 있다. 가련산(可連山)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사람들의 말이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가련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여현(礪峴) 부의 남쪽 42리에 위치한다. 웅현(熊峴) 부의 동쪽 47리, 진안현(鎭安縣) 경계에 있다. 서고산(西高山)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태실산(胎室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여기에 예종(睿宗)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 황화대(黃華臺)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읍인(邑人)들이 봄ㆍ가을로 올라가 제사술을 마셨다. 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하였다. 안천(雁川) 주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즉 고산현(高山縣) 남천(南川)의 하류가 주계(州界)에 이르러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이 되며,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와서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남천(南川)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금상 4년에 시내를 막고 돌을 쌓으니 길이가 6천 자나 되었다. 남천(南川)의 근원은 여현(礪峴)에서 나오는데 부의 동남에 이르러 성을 둘러 북으로 가련산(可連山)을 지나 추천이 되고, 무악산(毋岳山)에서 나온 물과 합해서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 다시금 고산(高山) 웅현(熊峴)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洄浦)가 되며, 조수(潮水)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옥야(沃野) 이성(利城)을 지나서 신창진(新倉津)이 되었다. 신창진(新倉津)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김제군(金堤郡)과 만경현(萬頃縣) 조에도 있다. 덕진지(德眞池)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西北方)이 비어 있어 전주의 기맥(氣脈)이 이쪽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기운을 멈추게 하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천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한번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쳐 있네. 옛부터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 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 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깊고 맑은 물에 허공이 비쳐 있고, 덕을 쌓았으니 제물(濟物 사물을 구제하는 것)하는 공(功)을 갖추었네. 이곳에 참 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뇌풍(雷風)을 찾았으리오.” 하였다. 공덕지(孔德池)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판토포지(板吐浦池)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굴연(堀淵)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돌기둥 여섯 개가 있는데 녹담정(綠潭亭)의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신증』 발산(鉢山)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우락암(于樂巖) 옥야창(沃野倉) 북쪽 2리에 있다. 그 위에 50여 명이 앉을 수가 있다. 봉황암(鳳凰巖)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황학대(黃鶴臺)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석봉(石峯)이 솟아 있고, 큰 시내가 끼고 돌아간다. 전하는 말에 황학(黃鶴)이 놀던 곳이라 한다.
【토산】 석류(石榴), 종이 상품(上品)이다. 생강[薑]ㆍ울금초(鬱金草)ㆍ벌꿀[蜂密]ㆍ웅어[葦魚]ㆍ옻[漆]ㆍ사기그릇[磁器].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5천 3백 56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그 안에 2백 23개의 우물이 있다.
【궁실】 경기전(慶基殿) 부성(府城)의 남문(南門) 안에 있다. 영락(永樂 명(明)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경인년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였다. 참봉(參奉) 2명을 두었다. 유순(柳洵)의 시에, “시기에 호응하여 도록(圖錄)에 맞게 동한(東韓)을 평정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도다. 성덕(聖德)을 마땅히 백세에 제사하리니, 천추에 묘모(廟貌)는 단청(丹靑)이 맑으리라.” 하였다. 실록각(實錄閣) 경기전(慶基殿)의 동쪽 담 안에 있는데 본조의 실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김길손(金吉孫)의 기(記)에, “아국(我國)은 조종(祖宗) 이래로 세대에 따라 실록을 편찬하여 안과 밖에 수장하였으니, 안에는 춘추관(春秋館)이 있고, 밖에는 충주(忠州)ㆍ성주(星州)와 같이 모두 장서각(藏書閣)이 있는데, 오직 본부(本府)만이 없었다. 을축년 겨울에 비로소 부성(府城) 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갑신년 가을에 진남루(鎭南樓)에 이안했다. 세조께서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각(藏閣)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연이어 흉년이 들어 공역(工役)을 중흥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미루어오다가, 임진년 봄에 세조와 예종(睿宗)의 양조 실록이 이루어지니, 주상께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양성지(梁誠之)를 파견하여 이것을 부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상국(相國) 김지경(金之慶)은 본관(本館)의 구신(舊臣)으로서 이곳에 안찰(按察)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장각을 세우고자 하여, 양공(梁公)과 더불어 경기전(慶基殿)의 동편에 자리를 정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계(狀啓)를 올리고, 인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백 명을 역군으로 하고, 부윤인 상국(相國)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하였으며, 순창(淳昌) 군수 김극련(金克鍊)으로 하여금 감독하도록 하여, 지난해 12월 중공(衆工)이 일을 같이하여 금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하였다.
객관(客館) 이경동(李瓊同)의 〈서헌기(西軒記)〉에, “신묘년에 우리의 좌주(座主) 조근(趙瑾) 공이 전주 부윤으로 왔는데,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 교화에 좇았다. 공은 판관(判官) 김신(金信)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에게 도모하여 말하기를, ‘부의 관(館)은 대청(大廳)에 중앙에 있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있는데, 동편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동편은 넓고 서쪽은 좁은데, 다행히 창리고(創吏庫)에 남은 재물이 있어 서헌(西軒)을 고쳐 동헌(東軒)과 같이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민(吏民)들이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에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다른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건물이 새로워지니, 주(州)의 남녀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건물이 고쳐진 것만 볼 뿐이요, 공역(工役)이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공의 뒤를 잇는 사람도 백성 사랑하기를 공과 같이 하고 관직 수행을 공과 같이 하며, 건물과 장벽(墻壁)을 늘 보수(補修)하여 임금의 세계근원(世系根元)이 길이 발상한 이 고장으로 하여금 그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疆)한 복조와 더불어 상서(祥瑞)를 같이한다면, 어찌 우리 부의 큰 행복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누정】 진남루(鎭南樓) 공관(公館)의 후원(後園)에 있으며 영락(永樂) 기축년에 감사(監司) 겸 부윤인 윤향(尹向)이 지은 것이다. 신유년에 부윤 한승순(韓承舜)이 중수하고 정곤(鄭坤)이 기문을 썼다. 윤향(尹向)의 시에, “백제성 중에 백척 루며 경영은 바야흐로 태평시기에 당하였네. 기린봉(麒麟峯)에 비 뿌리어 주렴(珠簾)을 흔들고, 무악산(毋岳山)에 구름 이어 그림 기둥에 떠있네. 기둥에 기대어 동남으로 몇 개 군에 임하고, 난간에 의지하여 서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누에 오르니 3년을 지낼 손[客]이 가소롭고 호기(豪氣)는 오히려 바다 구석까지 넘쳐 있네.” 하였다. ○ 허주(許周)의 시에, “맑은 경치를 연유하여 새 누각에 의지해 섰네. 눈은 깜짝 지는 잎을 보고 가을을 깨닫도다. 수많은 민가의 저녁 연기는 어렴풋이 푸르고, 사산(四山)의 아리따운 기운은 무성하게 피어오르네. 유수(留守)의 부절을 나누니 2천 석이요, 월(鉞 군(軍)이나 지방 장관의 표시로 임금이 준 도끼)을 짚고 서서 50주를 관풍(觀風)하네. 다행히 세월은 성시(盛時)를 당했으니,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궁촌에까지 들리네.” 하였다. ○ 이경동(李瓊同)의 기문에,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 땅인데, 당(唐) 나라 현경(顯慶 당 고종의 연호.) 연간에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신라(新羅)에 들어왔다. 경덕왕(景德王)이 처음으로 전주(全州)라 불렀는데, 신라가 기울자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 하였다. 40년이 지난 뒤 고려의 태조가 이를 멸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곧 다시 전주라 하였다. 뒤에 혹 승화(承化)라 하기도 하고, 또는 순의(順義)라고도 하여 비록 그 연혁(沿革)은 일정하지 않으나, 언제나 남방에 있어서 큰 고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선조(先祖)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땅을 근원해서 주(州)를 승격하여 부로 하고, 자제(子弟)들을 뽑아서 숙위(宿衛)에 넣음으로써 총애를 유달리 하였으며, 승하하신 뒤에는 경기전(慶基殿)을 지어 수용(晬容)을 봉안하니, 전주를 중요히 여김이 이에 성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언제나 재상(宰相) 중에서 위망(威望)이 있고 다스림의 대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뽑아 부윤으로 삼았다. 우리 성상께서 태묘(太廟)에 제사한 다음해에 남원(南原)의 윤효손(尹孝孫) 공이 당시 예조 참의(禮曹參議)였는데, 늙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하고 임금의 특별한 임명을 받고 전주의 부윤으로 내려왔다. 공의 덕으로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으며 뛰어난 정치를 베풀었다. 귀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니,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말한다.)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갔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는 매양 기도를 올리면 곧 감응이 있었다. 노인을 공양하는 외로운 사람을 돕는 일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첩소(牒訴)는 바쁜 중에도 모두 손수 써서 처리하였으며, 부역을 간소하게 하고 세금을 고르게 하며, 형벌은 가볍게 하고 정치는 맑게 하니, 백성이 마침내 기쁨으로 복종하였다.
임금이 그 정치가 뛰어남을 들으시고 을미년 여름 6월 21일에 교서를 내려서 포장(褒獎)하여 이르기를, ‘민생의 즐거움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렸다. 이전에 전주 백성이 재해를 입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었는데, 그대가 백성을 다스리면서부터 많이 구제하여서 걸인이 목숨을 부지하고 유랑하는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특히 정사를 고르게 하고 소송을 다스리니, 백성은 편안히 살게 되고, 치적 또한 남다른 바가 있으니, 그 백성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 당의(唐衣) 표리(表裏) 한 벌로 그대의 뛰어난 치적을 표창하노라.’ 하고, 곧 감사에게 명하여 포상(褒賞)하는 의의(意義)를 열읍(列邑)에 널리 알려 그 나머지 사람들을 권장하니, 아름답도다. 그 가상함이 이에 이르니 그 누가 감동되지 아니하랴. 당시의 통판(通判) 김신(金信)이 또한 엄명(嚴明)하고 청신(淸愼)하여 간활한 자들을 복종시키고 공을 보좌함에 공로가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가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직책을 맡아 주야로 바삐 잘못이 없을까 두려워하였는데, 홀연히 임금의 은명(恩命)이 내리니, 이는 비록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죄 피할 길이 없다 하겠으나, 이전 재신(宰臣) 중에도 없던 영광된 일이라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은총을 탐하여 사적인 것으로 삼으리오. 마땅히 성은을 넓혀 영광을 막료들과 함께 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김후(金侯 김신(金信))가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두 공(부윤과 통판)이 성상(聖上)의 돌보아 주심이 중한 것을 체득하고 계속 교화를 넓혀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하게 하여, 은혜와 위엄이 다 같이 드러나고 기강(紀綱)이 크게 행해졌으니, 전주 백성의 은혜 받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부의 북쪽에 누(樓)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여기에 본조실록(本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정의(政議)에서 너무 소홀하다고 하여 달리 각(閣)을 세우고 실록을 옮겨 놓으니, 드디어 진남루는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하루는 공을 찾아뵈니 공이 자리를 내어주고, 이 누각의 연고를 언급하고 나에게 기문을 쓰게 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완산(完山)이 주가 된 것은 양(梁 중국 육조(六朝) 중의 소연(蕭衍)이 세운 나라) 나라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정치의 잘못과 풍속의 선악은 때에 따라 서로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책을 끼고 어른을 따라 거리에서 놀 때는, 풍속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검소한 것을 즐기지 아니했고, 후생들은 노는 데에만 힘쓸 뿐 책을 읽고 활쏘기와 차 모는 것을 익히는 자는 아주 적었다. 그런데 그 후에 습속이 크게 변하여, 자제들은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고 성균관(成均館)에 뽑히는 자가 시험 때마다 7ㆍ8명에 이르고, 문과와 무과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시험 때마다 빠지는 수가 없었다. 사시(四時)로 연방회(蓮榜會)를 열면 참여하는 자가 언제나 수십 명이 되었으니, 후진은 흥기하고, 상숙(庠塾)에는 글을 강론하고 배우는 소리가 높았다. 봄 가을 향사(鄕射)에는 활을 쥐고 술잔을 높이 든 자 쏘면 반드시 명중하니 간성(干城)의 재목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자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는 여자와 같이 수레를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옛날에 보던 바와는 크게 상반된다고 하겠다. 일찍이 《지리지(地理誌)》를 보니, ‘풍속은 교활하고 늙은 사람이 보면 창피한 일도 있다.’ 하였는데, 내가 보고 기억한 바로는 어려서 장성하기까지 수십 년에 불과하나 풍속은 많이 변하여서 기약한 일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졌으니, 다시 한번 좋아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제 성상께서 바야흐로 흥운(興運)을 융성하게 하고, 윤공(尹公)이 처음으로 총명(寵命)을 받아 우리 호남(湖南) 50여 주의 열백(列伯)을 창도(唱導)하여 우리 완산(完山) 1천여 년의 구도(舊都)를 거듭 새롭게 하니 정치의 융성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때를 당하여 더욱 중하도다. 아, 주는 비록 오래나 천명은 새롭고, 누각은 오래나 그 이름은 처음이니, 옛날에 숨었다가 오늘에 드러남이여, 그 기대함이 있음이로다. 산하(山河)의 뛰어남과 경치의 부미(富美)함은 정사(政事)의 급한 바가 아니므로 굳이 기록하여 뒤에 전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것으로 기문을 대신하노라.’ 하였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계묘년에 부윤 이봉(李封)이 세웠다. 『신증』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매화[梅兄]와 달[桂魄]이 다 같이 청신(淸新)하여, 높은 정자를 웃고 차지하여 주인이 되었도다. 호반(湖畔)에서 임포(林逋)의 신선된 이야기를 들었더니, 지금은 들보 위에 이백(李白)의 전신구(傳神句)를 보겠네. 찬 겨울에 처음으로 매화 향기 언덕에 퍼지고, 가을이면 둥근 달이 그림자를 비치네. 담장 구석에 대나무도 쓸쓸히 서 있으니, 바람에 말을 전하여 같이 친해보자.” 하였다. ○ 허침(許琛)의 시에, “가련하다, 매화 꽃술 달 가운데 청신하니, 냉담(冷淡)한 심기(心期)를 몇 사람이나 알아줄까. 구름이 끊어진 곳에 참 모습을 더하고, 눈이 차가운 곳에 옛 정신을 비치네. 주렴이 흔들거리니 성긴 그림자가 비끼고, 지붕 모서리에 창랑히 반달이 나왔으니, 다 같이 세간에 속물이 아닐진대, 나도 한몫 끼어 서로 친해본들 어떠리.”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매화[玉蕊]와 달[金波]이 서로 청신함을 다투어, 맑은 빛 담담한 모습이 우리의 벗이로다. 달 그림자[廣寒影]가 천상에 춤추니, 고야산(姑射山)에 아가씨처럼 고운 신선이 그 아닌가. 눈이 깊으니 달 속 두꺼비는 뼛속까지 차갑고, 바람 탄 무학(舞鶴)은 날개가 바퀴처럼 크구나. 나부산(羅浮山)은 고래로 신선과 진인(眞人)이 사는 곳. 사웅(師雄)으로 하여금 하룻밤을 친하게 한들 어떠리.” 하였다.
제남정(濟南亭) 성의 남쪽 시내 위에 있다. ○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계축년 봄에 이곳의 부윤으로 와서 하루는 과업을 권장하러 남문을 나섰다가, 동천(東川) 가에 누(樓)가 있고, 한쪽에 고인의 시판(詩板)이 있었는데, 또한 목은(牧隱) 선생이 남겨 놓은 시가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것을 다시 세울 생각을 가졌다. 놀고 있는 사람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으고 있는 중 갑인년 가을에 나는 병으로 면직이 되고, 동년(同年)인 조종생(趙從生) 공이 대신 와서 나의 뜻을 이어서 경영을 하며, 규모를 넓히고 단청(丹靑)을 선명하게 하여 그 오른편에 송백(松柏)을 심어 놓으니, 실로 제향(帝鄕)의 승관(勝觀)이더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남(橋南) 교북(橋北)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니,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여기를 바라고 지나가네. 높은 정자가 강가에 있으니 올라가 바라보는 이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에, “나의 벗 이백승(李伯勝) 후(侯)가 전주 부윤이 된 지 3년에, 진남(鎭南)ㆍ제남(濟南) 두 누각의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직접 내 발로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내 눈으로 그 경치를 보지 못한 터에, 후(侯)가 나에게 기문을 쓰라고 하니, 내가 후를 위해 기문을 쓴다 하면 마음과 안목(眼目)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니, 바람을 잡고 달을 잡는 것처럼 효험 없는 일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예전에 한창려(韓昌黎)는 등왕각(滕王閣)을 보지 않고 기문을 쓴 일이 있는데, 다만 세월만 서술하고 광경은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나의 기문이 이와 비슷해야 하나. 삼가 글을 보고 말하건대, 누(樓)는 주성의 남문(南門) 밖에 있으니 어느 때 지은 것인지 모르겠다. 목은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가 남아 있고, 홍여방(洪汝方) 공이 중수하였는데, 연대가 오래되니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손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안침(安琛)이 남방의 감사로 와서 이 누각을 보고 다시 고칠 뜻이 있었으나 임기가 문득 차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후가 와서 안공(安公)이 부지런히 부탁하기에, 감사에게 청하여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모집하여 그 제도(制度)를 일신하고, 문식을 더하였다. 또한 담장을 쌓아 빙 둘려서 관문(館門)에까지 닿게 하였다. 그러한 뒤에 형세는 장대하고 누의 경개(景槪)는 또 뛰어나게 되었다. 대천(大川)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누각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그 동서로는 돌을 쌓아 방죽을 이루어 물이 언덕을 깎아먹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 밖으로는 뭇 산이 둥글게 줄을 지어 손을 마주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읍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경대(萬景臺)는 유리알 같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린봉(麒麟峯)은 동쪽 구석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논밭은 수놓은 것 같고 촌락은 즐비하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는 수목 사이에 어렴풋하고 망망한 넓은 들은 안계(眼界)가 공활(空闊)하다. 오르는 자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 흥취(興趣)가 무궁하다. 대개 유락(游樂)의 적취(適趣)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깊은 것과 넓은 것이 그것이다. 만약 여러 귀빈을 초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촛불 들고 밤까지 노는데, 예로써 대접함에는 진남루(鎭南樓)의 깊은 것이 좋고,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성정을 즐겁게 하고 울적함을 풀기에는 제남루(濟南樓)의 넓은 것이 좋으리라. 주의 인물은 풍성하고, 예문(禮文)은 번다하며, 소송 문서는 밀려 좌우로 지휘하며 응접할 겨를이 없다가, 하루아침 이 누각에 오르면 사람의 왕래는 무한하고, 물상이 널려 있는 것은 무궁하여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그 마음에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천부(千夫)의 삼태기와 가래로 애써 농사한 자는 조세를 왕실에 먼저 바치고, 십묘(十畝)의 상자(桑柘)로 부지런히 길쌈하는 자는 비단을 귀가[閭右]에 먼저 올리며 어부는 고기를 잡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목자(牧者)는 말을 먹여도 자기는 타지 못한다. 짐을 지고 실어 허리 굽혀 왕래하는 자 그 누구나 다 의식(衣食)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고, 추운 자는 옷을 입게 하고자 하며, 피곤한 자는 휴식시키기를 하고자 하여서 백성의 편안하지 못한 것을 보기를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면 남방 백성을 구제하려 하는 마음이 공황(龔黃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둘 다 한(漢) 나라 신하)의 정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정교(政敎)에 도움이 어찌 적다고 하랴.”라고 하였다.
공북정(拱北亭) 부(府)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부의 북쪽 5리쯤에 정자가 있으니 공북정이라 한다. 조정에서 덕음(德音)을 펴거나 사명(使命)이 있으면 부윤이 관리들을 인솔하여 의관을 갖추고 이곳에 나와서 경례하여 맞이하며, 만약 국왕의 생일이나 국가의 큰 경사, 큰 상서를 만나면 부(府)와 주(州)가 각기 전문(箋文)을 받들어 대궐을 향하여 예를 행하고, 또한 여기에서 사신을 떠나보낸다. 그런데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거의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예를 행하는 자가 들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이언(李堰)이 부윤이 되어 개연(慨然)히 이를 다시 세울 뜻을 가지고 바야흐로 일을 경영하려 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전임이 되었다. 이형손(李亨孫)이 후임으로 와서 공인을 모으고 자재(資材)를 갖추어 거의 일이 되어가는 차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또 교대되어 갔다. 계속해서 부윤 이번(李蕃)과 통판(通判) 최지(崔漬)가 와서 공사를 완결시키기를 도모하고, 읍인 김사효(金思孝)를 시켜 공사를 독려하였다. 일 없이 노는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농민들을 괴롭히지 아니하였으며, 수개월이 지나 완성을 보자 주의 부로(父老)들이 이 일을 자랑하고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전주(全州)는 산천의 좋은 기운이 얽히고 서려 왕업의 자취를 창립하였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주(周) 나라의 태빈(邰豳)과 같은 곳이요, 목조(穆祖)가 북방으로 옮겨간 것은 마치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열고, 열조의 성군이 서로 이어받아 부(府)를 설치하고 윤(尹)을 두어 한 도의 머리가 되게 하니, 대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주의 부로와 자제들이 오래 선왕(先王)의 남은 교화를 입고 열성(列聖)의 깊은 은혜를 받아 풍패(豐沛)에 살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니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 실로 만 배나 더하리라. 전후로 내려온 수령들은 모두가 조정에서 중선(重選)된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부윤과 통판(通判)이 또한 일시(一時)의 명망(名望)을 받는 이들로 정사(政事)는 왕명을 공경하고 왕사(王使)를 예로 맞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이는 곧 공북(拱北)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아, 고인이 말하기를, ‘그 경내(境內)에 들어가면 교화(敎化)를 안다.’고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전주(全州)를 지나면서 우리의 풍속을 물으면 우리의 풍속이 어떠하며 우리의 고장이 어떠한가를 알 것이니, 춘추(春秋) 시대에 왕을 높이던 그 의(義)와 예(禮)를 깊이 체득하는 것이 반드시 이 정자(亭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정자를 수리함이 미관상 아름답게 하여 노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두 분 부윤과 통판의 뜻을 모르는 말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새로 고친 거룩한 뜻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신증』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완산국(完山國)의 번영을 다 흠모하니, 성안에 가득찬 문물(文物)이 무성한 귀인[纓簪]이네. 덕음(德音 임금의 말)이 널리 퍼져 교외에까지 나아가 다투어 맞이하니, 북궐(北闕)에는 언제나 임금을 받드는 마음[捧日心]이 걸려 있더라.”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임금의 명령을 지니고 달려가니 스스로 공경하네. 우연히 정자 위에 오르니 귀현[華簪]들이 모였구나. 팔마(八馬 고관의 행차 앞에서 교통을 정리하며 가는 사람) 남행하는 나그네 다시 임금 생각하는 마음 간절함을 누가 알리요.” 하였다. 내사정(內射亭) 성내(城內) 남쪽에 있다. 부윤 정자제(鄭自濟)가 지었다.
쾌심정(快心亭)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이 끊어지고 물이 돌아 내려가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돌을 쌓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강물은 길이 흘러 운잠(雲岑)을 둘렀는데, 강 위 높은 정자에는 꽃과 대[竹]가 깊구나. 붉은 난간을 서성거리며 두 눈이 맑으니 세상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가리랴.” 하였다. 『신증』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기루재(倚樓才 시를 빨리 쓰는 재주)를 빌릴 필요가 없네.”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부윤 강징(姜澂)이 세웠다. 만화루(萬化樓) 향교(鄕校)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학교[庠序]는 궐리당(闕里堂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세운 집)에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교학(敎學)을 시행한 집과 비슷하고, 장수(藏修)는 모두가 초국(楚國) 재목이로다. 연어(鳶魚)는 호호(浩浩)하게 천지(天地)를 나누었고, 현송(絃誦)은 양양하게 담 밖으로 퍼지는구나. 물이 방지(方池)에 출렁이니 가슴속 생각이 깨끗하고, 바람이 문행(文杏) 나무를 흔드니 웃음 소리가 시원하도다. 학생들을 분발 흥기시킴에 내가 방책이 없으니, 누전(樓前)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행실을 행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는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비록 궁벽한 고을이라도 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전주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 땅이며 남쪽 지방의 인재가 모인 같은 곳이니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러니 교육을 제일로 삼고 고을의 자제들이 또 문헌세가(文獻世家)들이 많아 선(善)을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일향(一鄕)의 교화가 잘되고 많은 인재가 그 중에서 배출되니, 이는 비록 지령(地靈)의 좋은 기운이 모여서 된 것이라고는 하나 또한 교육에 바탕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부의 학[序學]이 이전에는 정청(政廳)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에 태조의 빛나는 용상(容像)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와 태만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었다. 마침내 성의 서쪽 6ㆍ7리 되는 곳으로 옮겼는데 무릇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재랑(齋廊)과 부엌이 차례로 완비되었다. 그러나 부지가 매우 넓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도적이나 범의 화가 근심이 되어 담장을 두르고 자물통을 단단히 하니, 오직 단단하고 치밀한 것을 제일로 하였다. 기해년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부윤으로 와서는 먼저 선성(宣聖 공자를 말함)을 뵌 다음에는 제생을 불러들여 제사 지내는 일에 관해서 강론하고, 교화를 일으키고 어진 이를 독려함을 마음으로 삼고, 학과에 순서가 있고 공급(供給)은 넉넉하며, 수선(修繕)하는 작은 일도 여유있게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 봄에 다섯 채의 새 누각을 지으니, 높고 밝아서 제반 마련이 알맞았다. 완성을 본 다음에는 선생이 제생을 인솔하고 누에 올라 술잔을 기울여 낙성식을 하였다.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그대들이 이 누각에 올라오니 얻은 바가 있는가.’ 하니, 제생이 대답하기를, ‘전에 누각을 짓기 전에는 교사가 낮고 좁아서 우리가 책을 읽는 여가에 비록 답답함을 풀고 정신을 맑게 하고자 하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쉴 자리와 놀 자리가 없어 늘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오르니 우리의 번거로운 마음을 씻어 주고 막힌 생각을 밝게 해서 산을 보고서는 인(仁)을 체득할 수 있고, 물을 보면 지혜를 기를 수 있으며, 솔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물 속에 뛰노는 것을 보고 도체(道體)의 밝게 드러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한번 내려보고 우러러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요, 한번 움직이고 고요함이 또한 배우는 것이라, 무릇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천지간 만물의 많은 것이 그 어느 것인들 천성을 기르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공(功)을 미루어 나가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天地)와 그 공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니, 선생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지극함이 있습니다. 만약 유락(遊樂)에 빠져 흥청거리는 것이나 강송(講誦)을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선생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니 제생이 공(公)의 주신 은혜를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이 속해 있는 사람으로 그 뜻을 사양할 수 없노라.” 하였다.
【역원】 삼례역(參禮驛)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열두 개이니 반석(半石)ㆍ오원(烏原)ㆍ갈담(葛覃)ㆍ소안(蘇安)ㆍ재곡(材谷)ㆍ양재(良才)ㆍ앵곡(鸎谷)ㆍ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영원(瀛原)ㆍ부흥(扶興)ㆍ내재(內才)가 그것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 병사를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들에 엎드려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상주(上奏)하기를,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이니, 청하건대 왕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반석역(半石驛)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앵곡역(鸎谷驛) 옛날에는 장곡역(長谷驛)이라 하였다.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 고려 현종이 이 역에 묵었다. 이날 밤에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이 역에 머무르게 하고, 왕을 끼고 호령을 하고자 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이 흰 깃대를 관(冠)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치며 들어오므로 지채문(智蔡文)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금광원(金光院)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숙점원(宿店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안덕원(安德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대원(四大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허고원(虛高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 상관원(上館院)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추천원(楸川院)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월당원(月塘院)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金廷雋)이 세우고, 재호(齋號)는 월당(月塘)을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 읍에 전하니 월당(月塘)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皮界院)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산원(補山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초원(大初院)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탄현원(炭峴院) 부의 서쪽 16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남복원(南福院)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모즐지원(毛叱知院)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내현원(奈峴院)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불우】 귀신사(歸信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왜병(倭兵) 3백여 기(騎)가 주성(州城)을 함락하고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북쪽 뜰에는 산들바람 대밭에 불고, 남향 창문을 열면 넓고 아득한 만겹 산이로구나. 소나무 관문과 돌길 시내 건너 들어와서, 고승(高僧)을 대하고 앉아 잠시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를 보광사(普光寺)라 한다. 실로 백제(百濟)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比丘)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 뜻을 품었는데, 주(州)의 사람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鳳) 공이 황제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원통(元統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공(高公 즉 고룡봉(高龍鳳))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난 몸으로 상국(上國)에 와서 이토록 뜻을 얻으니 어찌 인과(因果)가 아니겠습니까. 공은 군상의 측근에서 주야로 반걸음도 좌우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군상(君上)의 은택에 빛남과 여복(輿服 타는 수레와 입는 옷)의 아름다움을 고향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이 알 수가 없으니, 소위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향에 절을 지어서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아래로 대중들과 복을 같이하여 우뚝하게 한 자리 귀앙(歸仰)할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옷을 입는 격[晝錦]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 불교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을 두게 했다. 그 뒤 공은 재신(宰臣)의 이간질을 당하여 남방에 출거(出居)하게 되고 중향(中向)도 또한 산으로 돌아와서 건물을 수리하고 공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지정(至正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으로 개원(改元)하기 2개월 전에 간신들을 출척하고, 정화(政化)를 다시 베풀어 바람과 우레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성과 비처럼 시행하자, 공은 다시 사환(賜環)되어 임금의 사랑이 더욱 새로웠다. 중향은 다시 경사에 들어갔는데 공은 전에 뜻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그 비용을 더해서 공사를 독려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세시(歲時)에 전장(轉藏)하고 전후로 보시(布施)한 것을 합하니, 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 50명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사람이 15명이며, 백금으로 새겨서 기명(器皿)을 장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무릇 건물의 기둥은 1백여 개나 되는데, 정축년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 겨울에 완성을 보았다. 일이 끝나는 달에는 산인(山人) 담숙(旵淑) 등이 시주를 널리 모아서 크게 화엄회(華嚴會)를 개최하여 낙성식을 하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 3천명이요, 시일은 50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공양(供養)하고 찬탄(讚嘆)하니,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에 넘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중향(中向)이 마땅히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다 하여 고공(高公)의 명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견훤씨(甄萱氏)가 본국에 들어온 지 4백 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에 창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비(碑)나 기문도 없어 그 세월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키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공(高公)을 기다려서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三韓) 땅에 태어났으니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인데, 인연이 닿아서 일월(日月) 같은 천제(天帝)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 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향국(鄕國)에 그 여택이 많이 미쳤다. 또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고[祝釐] 근본을 갚아서[報本] 끝없이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서고사(西高寺) 서고산(西高山)에 있다. 남고사(南高寺)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부의 동쪽 성 밑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온 집이 푸른 산 옆에 와서 산다네. 얕은 모자 가벼운 옷으로 침상에 누웠네. 폐부가 마르니 촌 술맛이 더욱 좋고, 정신이 혼미하니 들차[野茶] 향기가 또한 좋구나. 대나무 뿌리는 지상에 흩어져 뻗으니 용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 같고, 파초 잎이 창 앞에 닿으니 봉의 꼬리처럼 길구나. 삼복(三伏)이 일찍 그치고 백성의 송사가 적으니, 이때 다시 부처님을 섬김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고달산에 있다. 이절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普德大士)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기(記)에,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주하였다. 어느날 홀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니,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明德)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 한다.
임천사(臨川寺) 서산(西山)에 있다. 사대사(四大寺)ㆍ흑석사(黑石寺) 두 절 모두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원암사(圓巖寺) 청량산에 있다. 봉서사(鳳棲寺) 서방산에 있다. 대원사(大圓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박춘령(朴椿齡)의 시에, “문서 다루는 3년 생활에 몸에는 백 가지 병이라, 공사에서 물러나 때때로 옛 정이 든 벗을 찾아가네. 높고 낮은 데 수목은 빽빽하여 길이 없나 의심하고, 철 따라 꽃이 피니 달리 봄이 있도다. 골짜기는 음청(陰晴)하여 부앙(俯仰)간에 다르고, 연기와 노을은 자색과 푸른색으로 아침저녁 다르네.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 산인(山人)들이 스스로 보내고 맞이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기린봉(麒麟峯)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몽험기(夢驗記)〉에, “나는 일찍이 완산(完山)에 장서기(掌書記) 벼슬로 있었다. 평소에 성황사에 가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에 사당에 가서 당하에서 절하였는데 법조(法曹)의 동배자(同拜者)가 있는 듯하였다. 법왕(法王)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기실(記室 고을 원의 비서일은 맡은 사람)은 계(階)에 오르라.’하였다. 내가 청사에 올라서 재배(再拜)하니 법왕이 베로 된 모자에 검은 빛의 유의(襦衣)를 입고 남쪽 뜰에 앉았다가 일어나 답배(答拜)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끌어 앞으로 오게 하니 홀연히 한 사람이 탁주를 들고 와서 부었는데 술과 찬이 또한 초라하였다. 한참 동안 같이 마시다가 말하기를, ‘들으니 목관(牧官)이 근자에 새로 12국사를 찍었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어찌 나에게 주지 아니하는가. 내가 여러 아들이 있는데 읽도록 하고 싶으니 몇 책을 보내줄 수 있는가.’ 하였다. 내가 예예 하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아전의 우두머리 누구는 좋은 사람이니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노라.’ 하였다. 내가 다시 승낙하고, 화복이 어떨지를 물었더니 법왕이 길 위에 달리다 축이 꺾인 수레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그대의 운수가 마치 이 수레의 모양이니, 금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주를 떠나리라.’하고 곧 가죽띠 두 개를 가지고 나에게 주면서 말히기를, ‘자네는 존귀할 것이므로 이것을 준다.’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당시에 안렴사(按廉使) 낭장(郎將) 노공(盧公)이 목관을 시켜 12국사를 새로 찍게 한 일이 있고, 또 관리 중에 아무개가 내 뜻에 맞지 않아서 어떤 일로 인하여 내몰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낮 그 아전을 불러 12국사 두 책을 갖다가 바치게 하였고, 그 사람의 죄는 불문에 부치었다. 이 해에 과연 동료자의 고소로 파직을 당하고서 비로소 차축에 비유한 말을 깨우쳤다. 그러나 한가한 생활 7년에 한 번도 벼슬을 받지 못하여 곤란이 막심하였으므로 다시는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요직을 지내고 벼슬이 3품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깊이 믿지를 아니하다가 이제 상국(相國)의 지위를 제수받고서야 이에 존귀하게 되리라 하던 말이 부합되어 틀림이 없는 것을 크게 믿게 되었다. 아, 신도(神道)의 그윽한 감응도 역시 때로는 믿을 만하니 어찌 모두가 허망하다고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증』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소상(塑像)을 부셔버리고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적】 고토성(古土城)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 고덕산성(高德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천 9백 20척(尺),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7개, 시내 하나가 있다. 우주 폐현(紆州廢縣) 우(紆)는 오(汚)로 쓰기도 한다.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인데, 신라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성 폐현(利城廢縣) 주의 서쪽 7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경명향(景明鄕) 영명(榮明)이라고도 한다. 부의 북쪽 1백 20리에 있다. 양량소(陽良所) 우주(紆州)의 동북쪽, 즉 우양촌(右楊村) 철소(鐵所)에 있다. 두모촌소(豆毛村所) 이성현(利城縣)에 있다. 녹균정(綠筠亭) 청사(廳事)의 북쪽에 있다. 지정(至正) 정미년에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亭)을 바꾸어 누(樓)로 만들었다. 이달충(李達衷)이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는데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다. 효자리(孝子里)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돌을 세워 효자를 표창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고.” 하였다.
【명환】 신라 용원(龍元) 신문왕(神文王) 때 총관(摠管)이다. 김웅원(金雄元) 헌덕왕(憲德王) 3년 도독(都督)이 되었다. 고려 정항(鄭沆) 예종(睿宗) 조의 우정언(右正言)이며, 시사를 의논할 적에 곧게 직면하여 권신들에 거슬리어 통판(通判)으로 나갔다가 불려와 사간(司諫)이 되었다. 오연총(吳延寵) 전주 목사이며, 정사가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가혹하지 아니하였으며, 아전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뛰어난 치적이 알려져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소배(召拜)되었다. 박춘령(朴椿齡) 완산(完山)의 수령이다. 조영인(趙永仁)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는데 정무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규보(李奎報) 신종(神宗) 2년 기미년에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에 임명되었다. 박원계(朴元桂) 사록(司錄) 겸 장서기였다. 경내에 호랑이 소동이 났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를 못하고 박원계(朴元桂)에게 맡겼더니 원계가 말을 타고 좁은 지역에서 한 화살로 적중시켜 죽였다. 백득주(白得珠) 장원하여 서기(書記)가 되었다. 당시에 안렴사가 대궐로 가면서 절구 한 수를 남기었다. 백득주가 화답하기를, “사신[星使]이 임금께 돌아간 후에 유영(柳營)은 벌써 봄이네. 무정한 푸른 풀도 원망을 하거늘, 하물며 정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랴.” 하였다. 안렴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고 작별했다. 곽예(郭預) 고종(高宗) 때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지대(金之垈) 고종 때 사록에 임명되었다.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고 부호와 강포한 사람들을 누르고 잘못을 귀신처럼 적발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정선(鄭僐) 원종(元宗) 말에 사록이 되었다. 한공의(韓公義) 충혜왕(忠惠王) 때 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였다. 이우(李瑀) 이암(李嵒)의 아버지이다. 재간(才幹)이 있어 목사가 되어 나갔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이다. 처를 거느리고 집에서 사는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래 판결을 보지 못했다. 정운경이 그 처가 사통하는 자가 있는가 물었으나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만 이웃에 한 놈이 늘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으면 일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놈을 밖에 잡아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여 말하기를, “모월 모일 너의 자식이 집에 있었느냐, 아니면 나갔느냐.” 하니, 어미의 말이, “이날 밖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친구와 술을 마셔 취하였다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즉시 이웃 남자에게, 같이 술마신 자가 누군가 물으니 바로 사실을 자복하였다. 김도(金濤) 공민왕 때 사록(司錄)이 되었다. 윤곤(尹坤) 부윤이 되었다.
본조 허조(許稠) 태종 때에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청절(淸節)을 지키고 강직하고 현명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그릇된 법으로 일을 처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非法斷事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작은 판에 써서 청사에 걸었다. 권담(權湛) 세종 때의 부윤이다. 홍여방(洪汝方)ㆍ김길통(金吉通) 다 같이 부윤을 지냈다. 이언(李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세조께서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봉(李封) 부윤이 되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유인(李有仁) 부윤인데 치적이 있다. 학교를 증수(增修)하니 교생들이 그가 죽은 날에는 제사를 차렸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부윤인데, 정사는 자비롭고 어진 것을 숭상하였고 아전들과 백성이 그를 사랑하므로 포상하여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렸다. 김선(金瑄) 부윤인데, 정사를 부지런히 삼가하였다. 가선(嘉善)으로 포상하여 올려 주었다. 최자숙(崔自淑) 판관인데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인물】 고려 최균(崔均)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출중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주 벼슬이 올라 소부(少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의 재상(宰相) 최윤의(崔允儀)가 봉지(奉旨)하고, 문사(文士)를 택하여 예의(禮儀)를 상정(詳定)함에 있어서 최균(崔均)을 제일 먼저 뽑았다. 뒤에 최윤의가 임종할 때에 홀로 최균을 천거하여 임금은 각문지후(閣門祗侯)를 제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예부시랑으로서 병마부사(兵馬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을 공격하다가 잡혀 해를 입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최척경(崔陟卿) 아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초에 경산부(京山府) 판관(判官)이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에 돌아와서는 10여 년간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했다. 뒤에 다시 탐라령(耽羅令)이 되었다가 자주 옮겨 감찰어사가 되고,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예부시랑 비서감(禮部侍郞祕書監)까지 지냈다. 맑은 이름과 굳은 절개는 늙어서도 쇠하지를 아니했다. 애초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연구(聯句 몇 사람이 함께 연철(聯綴)해서 시를 완성하는 형식)로써 군동(群童)을 뽑는데, 최척경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함께 데리고 가서 권하여 학문을 시켜, 뒤에 세 사람이 다 명사(名士)가 되었으니, 당시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라 불렀다. 이준양(李俊陽) 청백함으로 유명하고, 의종(毅宗)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최보순(崔甫淳) 최균(崔均)의 아들인데 벼슬은 평장사,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광식(柳光植) 풍도와 모습이 매우 크고 청검하고 절약하였으며 신중하고 말이 적었다. 중외(中外)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는데, 세칭 수부쌍전(壽富雙全)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대숙(戴肅)이다. 유소(柳韶) 유광식의 아들인데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꿋꿋했으며 남을 인정함이 적었고,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으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성지(崔誠之)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이며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인데,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광양군(光陽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성품은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했고 글씨는 매우 반듯하였다. 시(詩)는 온자(溫藉)해서 좋고 음양 술수를 잘했다. 풍헌(風憲)과 어사직(御史職), 선거(選擧)와 이부직(吏部職)ㆍ성관(星官 천문관직(天文官職))ㆍ예원(藝苑 한림원직(翰林院職)) 등을 20년간 역임을 했다. 유방헌(柳邦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득평(崔得枰) 성품이 염정(廉靜)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벼슬은 이부(吏部)의 전서(典書)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충렬(忠烈)ㆍ충선(忠善)ㆍ충숙(忠肅)의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 중에 충선왕이 더욱 중용하였다. 최재(崔宰)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고 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뒤 면직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끌려간 뒤 임금이 설치한 것은 모두 다시 바뀌었는데, 도감(都監)을 세우고 최재(崔宰)를 판관(判官)으로 삼으니 최재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실덕은 임금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좌우에서 임금의 과실을 유도하여 인도한 것이다. 앞에서 맞이하고 뒤에서 맞아 들쳐 올리니, 내가 실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하고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하였다.
최용갑(崔龍甲)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이자을(李資乙)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최용갑(崔龍甲)과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곡(李穀)의 〈완산도중시(完山途中詩)〉에, “장원(壯元)한 최(崔)ㆍ이(李)의 재명(才名)이 크고, 경계 머리[界首] 완산(完山)이 전라도에 기상이 웅장하구나. 과객은 신분이 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 공경(公卿)이 이 한 고을에서 많이 나왔네.” 하였다. 최칠석(崔七夕) 장수(將帥)의 재량이 있었다. 이문정(李文挺) 지순(至順) 경자년 과시에 뽑히어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최부(崔府) 벼슬은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백유(李伯由) 이문정(李文挺)의 손자인데 개국공신이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하였다. 이의손(李義孫)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이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사철(李思哲) 과거에 급제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최경지(崔敬止) 함열(咸悅) 우거(寓居) 편에 보인다. 이경동(李瓊仝) 이문정(李文挺)의 4대손이며,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과에도 합격하여 벼슬은 병조 참판까지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신증』 유헌(柳軒)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었으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숭조(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동지(同知)를 지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효행이 있었다. 『신증』 오영로(吳齡老) 생원(生員)인데 계모의 상을 입고 기년(期年)에야 비로소 소식(疏食)을 시작했다. 연산(燕山) 때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오영로는 오히려 예대로 상을 입었다. 금상 4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세직(朴世直) 생원(生員) 나이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 동안 슬프게 울었으며, 아버지가 작고해서는 묘막에서 죽으로 3년상을 마치었다. 금상 23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김천동(金千同) 사노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임씨(林氏) 낙안군사(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처이며,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임씨가 피난하여 달아나자 왜구가 쫓아와서 욕보이려 하였다. 굳게 항거하니 왜구가 한 팔을 끊었는데 그래도 따르지 아니했고, 또다시 다른 팔을 끊어도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최이원(崔以源)의 처인데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그 뜻을 뺏고자 하니 이씨는 밤에 시부모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부모가 후회하고 개가시킬 것을 포기하였다. 세종 24년에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박형문(朴衡文)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3년간 머리를 빗지 아니했다. 조석으로 직접 상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시절에 따라 옷을 지어 신주(神主)에 바치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욕방의관비왕사(欲訪衣冠悲往事) 이색(李穡)의 시에, “견성(甄城)의 경치가 오르기를 권하니, 옛 사람을 위무(慰撫)하며 유연히 웃음을 머금도다. 의관을 찾고자 하니 지나간 일들이 슬퍼지고 부질없이 도기(圖記)만을 가지고 옛 궁터를 말하네. 술은 황국(黃菊)에 맑은 서리 내린 후 맛을 다하고, 주렴(珠簾)은 청산(靑山) 낙조(落照) 사이에 걷혀 있네. 고금(古今)의 영웅이 지나가는 새와 같으니, 피곤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갈 줄을 알아야 하겠네.” 하였다. 견훤농병지(甄萱弄兵地) 정추(鄭樞)의 시에, “중간에 길이 산과 강을 갈라 놓으니, 남주(南州)의 물색(物色)이 구분되었네. 얽힌 소나무는 옛날 역원(驛院)을 알리고, 긴 대나무는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네. 말[馬] 그림자는 거치른 다리에 비치고, 까마귀 소리는 황폐한 절간의 구름 속에서 들리네. 견훤이 군병을 지휘하던 땅, 물가에 임하여 싸립문이 걸렸네.” 하였다.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 권근(權近)의 시에,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하였다. 완산거진승남양(完山巨鎭勝南陽)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 하였다. 세마기가누근수(洗馬幾家樓近水)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비둘기, 비는 촉촉이 내리네.” 하였다. 남리임구제효우(南里林鳩啼曉雨) 성임(成任)의 시에, “남리(南里) 수풀 속 비둘기는 새벽비에 울고, 동풍(東風) 연기 속 버들은 봄 성(城)에 어둡다.” 하였다. 압계공업서하산(鴨鷄功業誓河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대세(大勢)를 반드시 휼방(鷸蚌)의 고사를 참고로 해서 보아야 하네.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을 산하(山河)에 맹세하도다. 추풍이 한 번 견훤을 위하여 웃으니, 노발(怒髮)은 무단히 관을 들먹거리는구나.” 하였다. 완산가려고명도(浣山佳麗古名都)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옛날의 명도(名都)로다. 용호(龍虎)가 서리고 걸터앉은 듯 울성하게 얽혀 있네. 정령(精靈)이 쌓여 지키고 도우니, 기운(氣運)도 아름다워라. 때에 발설하니 바른 부서(符瑞) 이루었네. 국조의 근원이 이곳에서 비롯되니, 대대로 맑은 덕음(德陰)이 동우(東隅)에 덮였어라. 신풍(新豐) 계견(鷄犬)을 어찌 족히 비기리요. 충후(忠厚)는 빈풍(豳風)과 다를 것이 없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부동(府東) 끝이 5리이다. 부서(府西) 끝이 5리이다. 부남(府南) 끝이 10리이다. 부북(府北) 끝이 7리이다. 봉상(鳳翔) 동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40리이다. 귀이동(龜耳洞)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림곡(雨林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조촌(助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양량소(陽良所) 원래의 양량소는 북쪽에 있으며, 처음이 1백 1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연산(連山) 남쪽이고, 진산(珍山)의 서쪽이며, 고산(高山)의 북쪽이고, 은진(恩津)의 동쪽에 있다. 초곡(草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양(所陽)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완전(薍田)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전포(田浦)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용진(龍進)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상관(上關)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오백조(五百條)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우동(紆東)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서(紆西)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우북(紆北)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위의 3면은 우주(紆州)이다. 이동(伊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이남(伊南)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서(伊西)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이북(伊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의 4면은 이성(伊城) 땅이다. 이동(利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이서(利西)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이북(利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 3면은 이성(利城) 땅이다. 동일도(東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남일도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이도(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북일도(北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북이도(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6면은 옥야(沃野) 땅이다. ○ 이성(利城) 3면은 동쪽으로 익산(益山)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김제(金堤)ㆍ만경(萬頃)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임피(臨陂)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함열(咸悅)과 접한다. ○ 옥야(沃野) 6면은 남쪽으로 사수(泗水)와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金堤)와 접한다. 낭산(朗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귀산(歸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경명향(景明鄕)ㆍ북일백(北一百)ㆍ두모촌(豆毛村)은 이성(利城) 땅이다.
【창고】 창고(倉庫)가 3곳이 있다. 본읍. 고(庫)가 10곳이 있다. 감영(監營)이 성내에 있다. 옥야창(沃野倉) 서쪽으로 70리이다. 이성창(利城倉) 서쪽으로 60리이다. 우주창(紆州倉) 북쪽으로 10리이다. 봉익창(鳳翔倉) 동리쪽으로 40리이다. 외성창(外城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내성창(內城倉)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있다. 양량소창(陽良所倉) 동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진도】 신창진(新倉津) 서쪽 70리에 있으며, 김제(金堤)와는 남쪽으로 20리 거리이다. 사천진(沙川津) 횡탄(橫灘) 아래쪽에 있다.
【토산】 대[竹]ㆍ감ㆍ붕어[鯽魚]ㆍ게[蟹].
【누정】 호경루(護慶樓) 남천(南川) 곁에 있다. 큰 시내가 누정 밑을 둘러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푸른 산이 둘러 있다. 만화루(萬化樓) 위와 같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궁실】 조경묘(肇慶廟) 부성(府城)의 동문(東門) 안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있다. 영종(英宗) 47년에 세웠다. 이조(李朝)의 시조(始祖)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있다. 성은 이씨이고 휘는 한(翰)이며, 신라 때 벼슬은 사공(司空)이다. 배필은 김씨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인데, 신라 태종(太宗)의 10세 손이다. 봄과 가을에 상삭(上朔)에서 상순(上旬) 사이에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 영(令) ㆍ별검(別檢)이 각 1명이다.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선조 무인년에 세우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송인수(宋麟壽) 청주(淸州) 편에 보인다.


 

[주D-001]풍패(豐沛) : 풍패(豐沛)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다. 여기서는 태조(太祖)의 선대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기 때문이다.
[주D-002]예를……되었다 : 《좌전(左傳)》에, “정국(鄭國)에 큰일이 있으면 자피(子皮)를 싣고 들에 가서 모의한다.” 하였다.
[주D-003]태빈(邰豳) : 주(周)의 선대가 일어난 땅이다.
[주D-004]주의 태왕이……때이다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태왕(太王)이 침략하는 적인(狄人)을 피하여 도읍지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가매 백성들이 따라갔다.
[주D-005]사환(賜環) : 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쫓겨났을 때에 구경에 가서 처분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결(訣)을 주면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요, 환(還)을 주면 돌아오라는 뜻이다.
[주D-006]전장(轉藏) : 불교의 장경(藏經)을 독송강설(讀訟講說)하는 것이다.
[주D-007]원공(遠公)은……건너지 마소 : 동진(東晉)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호계를 넘었다.
[주D-008]유애(遺愛) : 그 사람이 간 뒤에도 백성에게 대한 사랑이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어 잊지 않는 것이다.
[주D-009]병상[蟻床] :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마음에 병이 있어, 평상 밑에 개미들 싸우는 것이 마치 소싸움[鬪牛]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다.
[주D-010]휼방(鷸蚌)의 고사 : 휼새[鷸]가 조개[蚌]를 쪼아 먹으려고 조개의 벌린 껍질 속에 입을 넣었다가, 서로 버티는 동안에 어부(漁父)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갔다는 것이다.
[주D-011]오리와 닭의 공업(功業) : 태봉(泰封) 말기의 참서(讖書)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 하였는데, 과연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 신라)을 먼저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주D-012]신풍([新豐) : 풍(豐)은 한 고조의 고향으로, 한(漢)의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성과 거리의 모양을 풍(豐) 땅과 같이 만들어 놓고 풍 땅의 백성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신풍(新豐)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동쪽은 정의현(旌義縣) 경계까지 80리이고, 서쪽은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81리이며,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1백 20리이고, 북쪽으로 바다까지 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탐라국(耽羅國)인데 혹은 탁라(乇羅)라고도 한다.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넓이가 4백여 리이다. 처음에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고,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아우 두 사람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에 조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 성주(星主)라 칭호하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내려주었다. 《고려사(高麗史)》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인물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 진산(鎭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는 구멍이 있으니, 이곳이 세 신인이 나온 땅이다. 맏이는 양을나이고 다음은 고을나이고 세 번째는 부을나인데, 세 사람이 궁벽한 황무지에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하루는 보니, 붉은 진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동해 가에 떠 이르렀다. 가까이 가서 열어보니, 안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주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왔다. 석함을 여니 푸른옷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ㆍ송아지와 오곡의 종자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日本國) 사신인데,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 이르기를, 「서해 가운데 있는 산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나라를 열려고 하는데 배필이 없다.」 하고, 이에 신에게 명하여, 세 딸을 모시고 왔으니, 배필을 삼아 큰 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나누어 장가들었다.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한 곳에 나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하고 번성해졌다. 15대 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닿았으니, 이때는 신라의 융성한 시대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보였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회할 징조이다.’ 하였다. 고후의 무리가 이르자 왕이 가상히 여기어 고후에게 성주(星主)란 칭호를 주었으니 객성이 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고청을 자기의 가랑이 아래로 나가게 하고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여 왕자(王子)라고 일컫고 그 막내를 도내(都內)라고 일컬었다. 고을 이름은 탐라(耽羅)라 하였으니, 처음 올 적에 탐진에 닿아서 신라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寶蓋)와 옷을 주어 보냈다. 이때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신라를 공경히 섬기니, 드디어 고(高)를 성주로 삼고 양(良)을 왕자로 삼고 부(夫)를 도상(都上)으로 삼았다. 뒤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하였다.” 하였다. 그 뒤에 백제에 복종하여 섬겼는데, 동성왕(東城王) 21년에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그 성주가 듣고 사자를 보내어 죄를 용서하기를 비니, 이에 그만두었다. 백제가 멸망함에 미쳐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의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0년에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조회하니,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숙종(肅宗)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만들었고, 의종(毅宗)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4년이 지나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는데,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 나라 승상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우리에게 예속시켰다. 이듬해에 제주(濟州)로 고치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다. 26년에 원 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 그 땅에 말을 방목하다가 31년에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에 좀도둑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미니, 그 지방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모두 베고 원 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원 나라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원 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아단불화가 본국의 천한 노예 김장로(金長老)와 함께 주(州)에 이르러 만호 박도손(朴都孫)을 매질하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16년에 원 나라가 이 주(州)를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에 원 나라 목자(牧子)들이 사나워서 여러 번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죽이고 배반하였다. 김유(金庾)가 토벌하게 되니 목자들이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를 청하였다. 왕이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목자들이 기른 말을 가려 바치기를 전례와 같이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대로 좇았다. 18년에 원 나라 목자 하치[哈赤]가 제 마음대로 날뛰어 관리를 살해하니, 6년 뒤에 왕이 도통사 최영(崔瑩)을 보내어 하치를 쳐서 멸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태종(太宗) 2년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의 무리가 성주 왕자의 호가 참람하다 하여 고치기를 청하니,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삼고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삼았다. 세조(世祖) 12년에 안무사를 고쳐 병마수군절제사를 삼았다가, 뒤에 목사로 고치고 진(鎭)을 두었다.
진관(鎭管) 현(縣)이 2 정의(旌義)ㆍ대정(大靜).
【관원】 목사ㆍ판관ㆍ교수 각 1인.
【군명】 탐라(耽羅)ㆍ탁라(乇羅)ㆍ탐모라(耽毛羅)ㆍ동영주(東瀛州).
【성씨】 본주 고(高), 양(良) 양(良)은 뒤에 양(梁)으로 고쳤다. 부(夫), 문(文) 처음에 보성군(寶城郡) 복성현(福城縣) 사람이 와서 고씨(高氏)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 자손이 고씨를 이어서 왕자(王子)가 된 자가 있다. 정(鄭)ㆍ김(金)ㆍ이(李)ㆍ문(文)ㆍ안(安)ㆍ현(玄)ㆍ함(咸)ㆍ양(楊) 모두 속현(屬縣) 성씨이다. 김(金)ㆍ이(李)ㆍ박(朴)ㆍ임(林)ㆍ유(兪)ㆍ주(周)ㆍ조(趙)ㆍ송(宋)ㆍ정(鄭)ㆍ홍(洪)ㆍ서(徐)ㆍ최(崔)ㆍ오(吳)ㆍ차(車)ㆍ지(池)ㆍ한(韓)ㆍ마(馬) 모두 내성(來姓)이다. 조(趙)ㆍ이(李)ㆍ석(石)ㆍ초(肖)ㆍ강(姜)ㆍ정(鄭)ㆍ장(張)ㆍ송(宋)ㆍ주(周)ㆍ진(秦) 원(元). 양(梁)ㆍ안(安)ㆍ강(姜)ㆍ대(對) 운남(雲南). ○ 명(明) 나라 초년에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옮겨 제주에 안치하였다.
【풍속】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검소하며 예절이 있다.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검소하며, 또 초가가 많고 빈천한 백성들은 부엌과 온돌이 없고 땅바닥에서 자고 거처한다. 남녀가 짚신 신기를 좋아하고 방아가 없으며, 오직 여자가 손으로 나무 절구에 찧는다. 등에 나무통을 짊어지고 다니고 머리에 이는 자가 없다. 잘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남자나 여자나 관원을 길에서 만나면 달아나 숨고 남자는 길 옆에 엎드린다.
사투리가 난삽하다. 촌 백성의 말이 난삽하여 먼저는 높고 뒤는 낮다.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 상사를 마친 지 백일이면 복을 벗고 밭머리를 조금 파고 무덤을 만든다. 간혹 삼년상을 행하는 자도 있다. 풍속이 풍수지리와 점을 사용하지 않고 또 부처의 법도 쓰지 않는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풍속이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산과 숲, 내와 못, 높고 낮은 언덕, 나무와 돌에 모두 신의 제사를 베푼다.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남녀 무당이 신의 기(旗)를 함께 받들고 경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하는데 징과 북이 앞에서 인도하며 동네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어 제사한다. 또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 금녕(金寧) 등지에서는 나무 장대 열둘을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한다. 애월포(涯月浦)에 사는 자는 나무 등걸 형상이 말머리 같은 것을 구해서 채색 비단으로 꾸며 말이 뛰는 놀이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날이 되면 그만두는데, 그것을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이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한다. 또 봄가을로 남녀가 광양당(廣壤堂)과 차귀당(遮歸堂)에 무리로 모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한다. 또 그 땅에 뱀ㆍ독사ㆍ지네가 많은데 만일 회색뱀을 보면 차귀(遮歸)의 신이라 하여 죽이지 말라고 금한다.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 지방 사람이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 팔구십 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
일기가 항상 따뜻하다. 봄 여름에는 운무가 자욱하게 끼고 가을과 겨울이 되면 갠다. 초목과 곤충이 겨울을 지나도 죽지 않으며 폭풍이 자주 인다.
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다. 호랑이ㆍ표범ㆍ곰ㆍ승량이ㆍ이리 등 사람을 해하는 짐승이 없고 또 여우ㆍ토끼ㆍ부엉이ㆍ까치 등속이 없다.
그물을 쓰지 않는다. 산과 바다가 험악하여 그물을 쓰지 못한다. 고기는 낚고 짐승은 쏜다. 조리희(照里戲) 매년 8월 15일이면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왼편 오른편으로 나누어 큰 동아줄의 두 끝을 잡아당겨 승부를 결단하는데 동아줄이 만일 중간에 끊어져서 두 편이 땅에 자빠지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이것을 조리(照里)의 놀이라고 한다. 이날에 또 그네 뛰는 것과 닭 잡는 놀이를 한다.
풍속이 별나고 군사는 사납고 백성은 어리석다. 권근(權近)이 목사 이원항(李元恒)을 보내는 서(序)에, “탐라가 바다 가운데 있어 처음에 신라 때로부터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아 우리의 부속국이 되었는데, 고려 때에 제주목을 두었고, 국가에서 그대로 하여 반드시 조정 신하 중에서 문무의 재주와 지략이 있고 위엄과 은혜가 평소에 드러난 자를 뽑아서 목사를 시킨다. 그러나 바람에 돛을 달고 바다에 떠서 아득하고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에 수백 리 무서운 파도와 한없이 험한 것을 건너서 도착하고 보면, 풍속은 별나고 군졸은 사납고 백성은 어리석어서 기쁠 때는 사람이지만 성내면 짐승 같아서 제어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 고려 문종(文宗) 12년에 문하성이 아뢰기를,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목도(木道)질로 생활을 영위한다.” 하였다.
풍속이 야만스럽고 거리가 멀다. 정이오(鄭以吾)가 박덕공(朴德恭)을 임지로 보내는 서(序)에, “그 풍속이 야만스럽고 거리도 먼 데다가 성주(星主)ㆍ왕자(王子)ㆍ토호(土豪)의 강한 자가 다투어 평민을 차지하고 사역(使役)을 시켜, 그것을 인록(人祿)이라 하여 백성을 학대하여 욕심을 채우니, 다스리기 어렵기로 소문이 났다.” 하였다.
돌을 모아서 담을 쌓았다. 《동문감(東文鑑)》에,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ㆍ콩ㆍ조만이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의 고충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하였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혼인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춘다. 납채(納采)를 하는 자도 그렇다. 혼인날 저녁에 사위가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에게 뵙고 취한 뒤에야 방에 들어간다. 풍속이 소주를 많이 쓴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은데, 중이 모두 절 옆에 집을 짓고 처자를 기른다.
【형승】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을 대하였다.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 위와 같다. 바다가 아득하고 멀다. 정이오(鄭以吾)의 서(序)에, “본토에서 탐라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속국과 같다.” 하였다. 치고 싸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의종(毅宗) 13년에 안무사 조동희(趙冬曦)가 들어와 뵙고 말하기를, “탐라는 험하고 멀어서 치고 싸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가운데는 대단히 넓다. 《동문감》에, “남해 가운데에 있어 수로로 무려 백 리나 되고 그 가운데가 대단히 넓다.” 하였다.
【산천】 한라산(漢拏山) 주 남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 은하(銀河))을 나인(拏引 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頭無岳)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圓山)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다. 5월에도 눈이 있고 털옷을 입어야 한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푸르고 푸른 한 점 한라산 멀리 넓은 물결 아득한 사이에 있다. 사람은 별을 움직이게 하면서 바다 나라에서 왔고, 말은 용종(龍種)을 낳아서 임금의 마구에 들어온다. 땅이 편벽되나 백성의 생업은 이루어지고, 바람편에 장삿배가 임의로 왕래한다. 융성한 시대에 직방씨(職方氏)가 판도(版圖)를 닦을 때에, 이 나라가 비록 누추하기는 하나 깎을 것은 아니다.” 하였다.
장올악(長兀岳) 한라산 중턱에 있는데 주에서 36리이다. 산 위에 못이 있다. 갈악(葛岳) 주 남쪽 17리에 있다. 다랑시악(多郞時岳) 주 동쪽 65리에 있는데 둘레가 34리이다. 금물악(今勿岳) 주 남쪽 17리에 있다. 저악(猪岳) 주 동쪽 61리에 있는데 둘레가 85리이다. 장악(獐岳) 주 동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43리이다. 사라악(沙羅岳) 주 동쪽 7리에 있다. 별도악(別刀岳) 주 동쪽 17리에 있다. 원당악(元堂岳) 주 동쪽 17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 못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못에는 마름과 거북ㆍ자라가 있다. 서산악(西山岳) 주 동쪽 34리에 있다. 입산악(笠山岳) 주 동쪽 50리에 있다. 산 위에 못이 있는데 연꽃과 순채(蓴菜)가 난다. 도도리악(道道里岳) 주 서쪽 13리에 있다. 수산악(水山岳) 주 서쪽 32리에 있다. 고내악(高內岳) 주 서쪽 57리에 있다. 곽지악(郭支岳) 주 서쪽 45리에 있다. 피문악(皮文岳) 주 서쪽 30리에 있다. 판을포악(板乙浦岳) 주 서쪽 80리에 있다. 파마지악(破磨只岳) 주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18리이다. 문사내악(文士乃岳) 주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42리이다. 금물덕악(今勿德岳) 주 서남쪽 39리에 있다. 효별악(曉別岳) 주 서남쪽 59리에 있으며 둘레가 18리이다. 상시사리(常時舍里) 주 서쪽 65리에 있는데 둘레가 70리이다. 흘전리(訖田里) 주 서쪽 82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금녕수(金寧藪) 주 동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50여 리이다. ○ 수(藪)는 지방 말로 화(花)라 한다. 이마수(尒亇藪) 주 동쪽 79리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말응내수(末應乃藪) 주 서남쪽 62리에 있다. 개리사수(介里沙藪) 주 서쪽 75리에 있는데 둘레가 50리이다. 사야수(斜野藪)ㆍ궁괘로개수(弓掛老介藪)ㆍ복현수(卜懸藪) 모두 한라산 가운데 있다. 괴질평수(怪叱坪藪) 주 동남쪽 23리에 있다. 말질가리수(末叱加里藪) 주 동쪽 31리에 있다. 등어리지(等於里池)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둘레가 25리이다. 추수(楸水) 주 서남쪽 60리에 있는데 둘레가 29리이다. 천미수(泉未水) 둘레가 25리이다. 감물덕천(甘勿德川) 주 서쪽 90리에 있다. ○ 이상 장올악 이하에는 모두 목장이 있다.
산저천(山底川) 주 성 동쪽에 있다. 병문천(屛門川) 주 성 서쪽에 있다. 별도천(別刀川) 주 동쪽 8리에 있다. ○ 이상 세 내는 모두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난다.
대천(大川) 주 서쪽 3리에 있다.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나는데, 물이 우묵한 곳에 이르러 저수지가 되어 그 깊이가 밑바닥이 없는데 이름을 용추(龍湫)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해에는 나가서 기도한다. 도근천(都近川) 주 서쪽 18리에 있다. 일명 수정천(水精川) 또는 조공천(朝貢川)이라고도 하는데 지방 사람들의 말이 난삽하여 도근(都近)은 곧 조공(朝貢)이란 말의 그릇된 것이다. 언덕은 높고 험하여 폭포가 수십 척을 날아 흘러 그 밑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7, 8리에 이르러 돌 사이로 솟아 나와 드디어 대천의 하류를 이루었는데 도근포(都近浦)라 일컫는다. 이 아래에 깊은 못이 있는데 모양이 수달 같은 동물이 잠복하고 있어 변화를 일으켜 사람의 보물을 보면 끌어당기어 못 속으로 들어간다. ○ 이상의 병문천(屛門川) 이하는 근원이 모두 한라산 북쪽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양쪽 언덕에 석벽이 깎은 듯 서 있고 가운데는 암석이 깔렸다. 그 근원이 혹은 잠복하고 혹은 흐르는데 도근천이 그 내 중의 큰 것이다.
두천(斗泉) 병문천(屛門川) 서쪽 50보에 있는데 그 모양이 말[斗] 같으므로 이름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샘물을 마시면 능히 백 보를 날 수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그 기운을 눌렀기 때문에 마침내 없어졌다.” 한다. 가물면 맑아지고 비가 오려면 금(金)기운이 물 위에 뜬다. 추자도(楸子島) 주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가 30리이고 수참(水站)의 옛터가 있다. 모든 제주에 가는 자가 나주(羅州)에서 떠나면 무안(務安)ㆍ대굴포(大崛浦)ㆍ영암(靈巖)ㆍ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ㆍ해남(海南)ㆍ오란량(於蘭梁)을 거쳐 이 섬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로 좇아 거요량(巨要梁)ㆍ삼내도(三內島)를 거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로 좇아 고자황이노슬도(高子黃伊露瑟島)ㆍ삼내도를 거치는데, 모두 삼 주야라야 이 섬에 이른다. 여기를 경유하여 사서도(斜鼠島)와 대화탈도(大火脫島)ㆍ소화탈도(小火脫島)를 지나 애월포(涯月浦)와 조천관(朝天館)에 이른다. ○ 고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탐라에 들어와서 내외성을 쌓고 험함을 믿고 더욱 창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흔도(忻都)와 더불어 추자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밤중에 바람이 급하여 지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더니, 새벽에 보니 이미 탐라에 가까워졌는데 바람과 큰 파도가 세차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이 한 번 싸움에 달렸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니, 조금 뒤에 풍랑이 그쳐 마침내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탐라 사람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신도(身島) 곧 추자도의 주봉(主峯)이다. 청로도(淸路島)ㆍ지도도(知道島)ㆍ초란도(草蘭島)ㆍ수덕도(愁德島) 모두 추자도 남쪽에 있다. 사여서도(斜餘鼠島)ㆍ사서도(斜鼠島) 모두 추자도 동쪽에 있는데 두 섬에 모두 샘이 있고, 그 남쪽에는 어선이 모여든다. 대화탈도(大火脫島) 추자도 남쪽에 있는데 돌봉우리가 삐쭉삐쭉하고 그 꼭대기에 샘이 있다. 수목은 없고 풀이 있는데 부드럽고 질겨 기구를 만들 만하다. 소화탈도(小火脫島) 추자도 서남쪽에 있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 있고, 양 섬 사이로 두 물이 합쳐서 흘러 파도가 높고 급하므로 배가 많이 표류하고 침몰되니, 왕래하는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긴다.
우도(牛島) 둘레가 백 리인데 주 동쪽 정의(旌義) 경계에 있다. 사람과 말[馬]이 떠들면 풍우가 일어난다. 섬의 서남쪽에 구멍이 있는데 작은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조금 나아가면 배 오륙 척을 감출 만하다. 그 위에는 큰 돌이 집 같은데, 마치 햇빛이 떠서 비치고 별들이 찬연하게 벌여 있는 것 같고 기운이 심히 차고 냉하여 머리털이 쭈뼛한다. 세속에서는 부르기를 신룡(神龍)이 있는 곳이라 부르는데, 7, 8월 사이에는 고기잡이 배가 가지 못한다. 가면 크게 바람이 일어나고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져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손상시킨다. 그 위에는 닥나무가 많다.
비양도(飛揚島) 주 서쪽 80리에 있는데 수로가 5리이다. 둘레가 10리이고 양을 기르는 목장이 있다. 재암(財巖) 명월포(明月浦) 서쪽 5리에 있는데, 집과 같이 둥글넓적하고 그 위에는 흰모래로 깔렸고 그 밑에는 큰 구멍이 있다. 사람이 횃불을 가지고 들어가면 그 가운데가 넓어서 80보는 될 만하다. 석종유(石鐘乳)가 산출된다. 그 서북쪽에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소협재(小夾財)라 한다. 모두 석종유가 산출되고 그 가운데가 넓어서 50보쯤 된다. 명월포(明月浦) 주 서쪽 60리에 있는데 바다 어귀에 선박을 댈 만하다. 최영(崔瑩)이 하치[哈赤]를 토벌할 때 목자(牧子) 질리필사(迭里必思)의 무리가 30여 기(騎)로 이 포구에서 막으니, 큰 군사가 일제히 나가 힘껏 쳐서 크게 물리쳤다. 판포(板浦) 주 서쪽 95리에 있다. 북포(北浦)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염분(鹽盆)이 있다. 이포(泥浦) 주 서쪽 9리에 있다. 도도리포(道道里浦) 주 서쪽 10리에 있다. 귀일포(貴日浦) 주 서쪽 27리에 있다. 고내포(高內浦) 주 서쪽 40리에 있다. 귀덕포(歸德浦) 주 서쪽 47리에 있다. 독포(獨浦) 주 서쪽 61리에 있다. 배령포(杯令浦) 주 서쪽 63리에 있다. 함덕포(咸德浦) 주 동쪽 31리에 있다. 어등포(於等浦) 주 동쪽 64리에 있다. 도의탄포(道衣灘浦) 주 동쪽 72리에 있다.
【토산】 산도(山稻)ㆍ기장ㆍ피ㆍ조ㆍ콩ㆍ팥ㆍ메밀ㆍ보리ㆍ밀, 말 원 나라 지원(至元) 시대에 탐라를 방성(房星) 분야(分野)라 하여 목장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記)에, “말이 생육되는 것이 진(晉) 나라의 굴산(屈産)과 같아서 여러 고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목장이 4군데인데, 정의(旌義)와 대정(大靜)도 같다.검정소ㆍ누런소ㆍ얼룩소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뿔이 매우 아름다워 술잔을 만들 만하다. ○ 집집마다 목축하여 수백 마리로 떼를 이룬다.
궤자(麂子)ㆍ미록(麋鹿) 이 고을에서만 생산된다. 가죽이 세밀하고 질겨 가죽신을 만들 만하다. 해달(海獺)ㆍ지달(地獺)ㆍ환(獾)ㆍ진주[蠙珠] 고려 충렬왕(忠烈王) 2년에 원 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을 보내어 탐라에서 구슬을 채취하다가 얻지 못하고, 민간이 간직하여 둔 것을 백여 개 가지고 돌아갔다. 대모(玳瑁)ㆍ자개[貝]ㆍ앵무라(鸚鵡螺) 이상 세 물건은 모두 우도(牛島)ㆍ대정(大靜)ㆍ가파도(加波島)에서 난다.
감(柑) 황감(黃柑)ㆍ유감(乳柑) 등 몇몇 종류가 있다. 귤(橘) 금귤(金橘)ㆍ산귤(山橘)ㆍ동정귤(洞庭橘)ㆍ왜귤(倭橘)ㆍ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청귤은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 유자[柚]ㆍ비자(榧子)ㆍ치자(梔子)ㆍ밤 적률(赤栗)ㆍ가시율(加時栗) 두어 종류가 있다. 과실이 과원(果園)에서 나오는데 과원은 모두 담을 쌓았다. 모두 열아홉 곳인데, 대정이 여섯 곳이고 정의가 다섯 곳이다. 무환자(無患子) 잎사귀가 창백하다. 무회목(無灰木) 우도(牛島)에서 난다. 바다 가운데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여 물결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물 밖에 나오면 굳고 단단하여진다.
산유자ㆍ이년목(二年木)ㆍ노목(櫨木)ㆍ두충(杜冲)ㆍ지각(枳殼)ㆍ후박(厚朴)ㆍ동실(棟實)ㆍ동근(棟根)ㆍ영릉향(零陵香)ㆍ안식향ㆍ향부자(香附子)ㆍ청피(靑皮)ㆍ해동피(海東皮)ㆍ촉초(蜀椒)ㆍ진피(陳皮)ㆍ필징가(蓽澄茄)ㆍ팔각(八角)ㆍ표고버섯ㆍ목의(木衣)ㆍ석곡(石斛)ㆍ석종유(石鐘乳)ㆍ백납(白蠟)ㆍ소금ㆍ미역ㆍ우뭇가사리ㆍ게ㆍ소라ㆍ전복ㆍ석결명(石決明)ㆍ황합(黃蛤)ㆍ해의(海衣)ㆍ오징어ㆍ은어[銀口魚]ㆍ옥두어(玉頭魚)ㆍ상어ㆍ갈치ㆍ고등어ㆍ행어(行魚)ㆍ문어.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3백 94척이고, 높이가 11척이다. 성 안에는 물이 없고 성 남쪽 큰 돌 밑에 큰 구멍이 있어 물이 솟아나오는데 이름이 가락귀(嘉樂貴)이다. 깊이가 10척 가량 된다. 흐름을 가로막아서 겹성을 쌓았는데 성 안 사람들이 길어다 마신다.
【관방】 조천관 방호소(朝天館防護所) 주 동쪽 25리에 있다. 금녕포(金寧浦) 방호소 주 서쪽 51리에 있다. 도근천(都近川) 방호소 주 서쪽 17리에 있다. 애월포(涯月浦) 방호소 주 서쪽 42리에 있다. 명월포(明月浦) 방호소 주 서쪽 60리에 있다. ○ 이상 방호소에는 모두 진수(鎭戍)하는 군졸을 두어서 지킨다. 정의와 대정도 같다. 『신증』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0척이요, 높이가 8척이다. 동쪽 서쪽 남쪽에 문이 있고 성 안에 샘이 있어 냇물처럼 솟아나온다. 예전에 성이 없었는데, 정덕(正德) 경오년에 이 땅이 비양도(飛陽島)로 왜선(倭船)이 가까이 대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쌓았다.
건입포 수전소(巾入浦水戰所) 주 동북쪽 1리에 있다. 조천관포구 수전소(朝天館浦口水戰所)ㆍ금녕포구 수전소(金寧浦口水戰所) 이상 세 곳은 좌방(左舫)에 속한다.
벌랑포 수전소(伐郞浦水戰所) 주 서쪽 20보에 있다. 도근천포구 수전소(都近川浦口水戰所)ㆍ애월포구 수전소(涯月浦口水戰所)ㆍ명월포구 수전소(明月浦口水戰所) 이상 네 곳은 우방(右舫)에 속한다. 여러 곳에 모두 전선(戰船)이 있고, 또 군사가 있어 번갈아서 나누어 지킨다. 모든 공납물과 선물(膳物)이 차례대로 바다를 건넌다. 정의와 대정도 같다.
『신증』 별방성(別防城) 주 동쪽 7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90척이고 높이가 7척이다. 동쪽 북쪽에 문이 있다. 정덕(正德) 경오(庚午)에 이 땅이 우도(牛島)로 왜선이 가까이 대일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성을 쌓고 금녕 방호소(金寧防護所)를 여기에 옮기고 별방(別防)이라 이름하였다. 좌우위(左右衛) 예전에는 객사 문밖에 있었는데 김석철(金錫哲)이 목사로 있을 때에 관덕정(觀德亭) 동쪽으로 옮겨 지었다.
【봉수】 사라악 봉수(沙羅岳烽燧) 서쪽으로 도도리악(道道里岳)에 응하고 동쪽으로 별도(別刀)에 응한다. 별도 봉수 서쪽으로 사라악에 응하고 동쪽으로 원당악(元堂岳)에 응한다. 원당악 봉수 서쪽으로 별도(別刀)에 응하고 동쪽으로 입산악(笠山岳)에 응한다. 입산악 봉수 서쪽으로 원당악에 응하고 동쪽으로 정의(旌義) 지미산(只未山)에 응한다. 도도리악 봉수 동쪽으로 사라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산악(水山岳)에 응한다. 수산악 봉수 동쪽으로 도도리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내악(高內岳)에 응한다. 고내악 봉수 동쪽으로 수산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판을포악(板乙浦岳)에 응한다. 판을포 봉수 동쪽으로 고내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대정(大靜) 차귀악(遮歸岳)에 응한다.
【궁실】 홍화각(弘化閣) 성 안에 있는데, 최해산(崔海山)이 세운 것이다. 곧 옛날 안무사의 영(營)인데 지금은 절제사의 영청(營廳)이 되었다. ○ 고득종(高得宗)의 기(記)에, “갑인년 가을 8월에 전 공조 참판 익양(益陽) 최해산(崔海山)이 도안무사가 되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우선으로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를 마음에 급급하게 먹고, 슬퍼하고 불쌍히 여겨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은혜를 내리는 한편,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다스리자 옥에는 연체된 송사가 없어졌고, 교화를 베풀자 백성이 예의를 알게 되었다. 말을 기르는 방법과 적의 침입을 막는 방비와, 학교를 일으키고 농사를 권하며, 재해를 구제하고 환란을 불쌍히 여기는데 이르기까지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남김없이 다하였다. 또 신을 섬기기를 정성으로 하여 마음을 재계하고 생각을 깨끗이 하였다. 다음해에 풍우가 철에 맞게 내리고 순조로워 곡식이 풍년들어 백성은 배를 두드리며 즐기고 말은 크게 번식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어진 사람을 가리신 은혜가 깊고 또 지극하다. 공이 정사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평해지자, 관청의 퇴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문을 닫은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치는 당과 욕실ㆍ부엌ㆍ낭사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세 칸을 세워서 당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광대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반자(半刺 군의 보좌관)의 당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를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따로 문루(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藥)창고와 기(旗)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치하게 하였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니, 집이 도합 2백 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하지 않은 것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적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의 지시와 계획에서 나왔다. 공이 하루는 각(閣) 위에 앉아서 고을의 부로들을 소집하여 낙성을 하고 또 이름지을 것을 의논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예전에 만경루(萬景樓)라는 이름이 있었으니, 지금 회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집을 세운 것은 놀고 구경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다. 옛적 주(周) 문왕(文王) 때에 주공(周公)은 안에서 다스리고 소공(召公)은 밖에서 다스려서 교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같이 미쳐서, 당세의 사람들이 덕화에 고무되지 않음이 없었는데, 지금 성스럽고 밝으신 임금이 위에 있고 원로의 재상들이 모두 공경하고 화합하여 어진 사람을 급히 구하여 나누어 보내 밖에서 다스린다. 그러나 오히려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정치의 교화가 흡족하지 못한 것은, 위임받은 자가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받들어 행하는 것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지방관이 날마다 이 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욕심을 방종히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 백성의 사정을 뚫어주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주(周) 나라의 다스림을 오늘에 다시 볼 수 있고, 제주의 백성들이 마땅히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 하였다. 이에 듣는 자가 모두 절하고 사례하기를, ‘공께서 이름 지으신 것이 능히 뒤를 잇는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점이 있고, 우리 백성들은 길이 어진 덕화를 입을 것을 더욱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나에게 청하여 홍화각(弘化閣) 세 글자를 써서 걸었다.” 하였다.
조천관(朝天館)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에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
『신증』 우련당(友蓮堂) 영문(營門) 밖에 있다.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성안에 우물이 없음으로 못을 파서 물을 채워 연을 심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누정】 관덕정(觀德亭) 홍화각(弘化閣) 남쪽에 있다. 신숙청(辛淑晴)이 세웠고, 성화(成化) 경자년에 목사 양찬(梁瓚)이 중수하였다.
○ 신석조(辛碩祖)의 기문에, “동지중추원사 고상공(高相公)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 제주가 비록 먼 곳에 있으나 특별히 성스러운 임금의 덕화를 입어서, 가르치고 다스려서 문(文)에 대한 일이나 무(武)에 대한 방비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안무사영(安撫使營) 남쪽에 사청(射廳) 한 구역이 있는데 사졸을 훈련하는 곳이다. 예전부터 집이 없어 보기에도 장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추위와 더위에도 가릴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안무사 신후(辛侯)가 정사를 시작한 다음해 무진년 가을에, 일이 닦아지고 풍년이 들어 노는 목수들을 불러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새 정자를 그 위에 일으키고, 이름을 관덕(觀德)이라 하였다. 모두 세 칸이고, 앞 퇴를 달고 좌우에 날개를 벌려 넓게 하고 약간 단청을 가하니, 크고 넓고 선명하며 높고 화려한 것이 제도에 알맞아서 참으로 한 고을의 장관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경사로 여겨 모두 사문에 의탁하여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이기를 원하니, 자네는 나를 위하여 그 전말을 써주게나.’ 하니, 글이 졸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일찍이 《예기(禮記)》의 사의편(射義篇)을 보니, 이르기를, ‘활쏘기는 성한 덕을 보는 것이다.’ 하여, 전편에 말한 것이 성인이 활쏘기에 대하여 정성을 다한 것이 지극하였다. 천하에 일이 없으면 예의(禮義)에 쓰니, 대사(大射)와 향사(鄕射)는 용의(容儀)를 익히고 기예를 보는 것이고, 천하에 일이 있으면 싸워서 이기는 데 쓰니, 가죽을 꿰뚫는 것을 주로 하여 힘을 나타내는 것은 외적을 막아 이기는 것이어서 하루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성군이 있어 광휘를 거듭하고 은덕이 널리 퍼져 문교의 성함이 옛날을 초월하고, 사방이 편안하고 맑아 오병(五兵)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편안한 때에 위태함을 잊지 않아서 더욱 무(武)를 닦아서 군졸을 훈련하고 병기를 가다듬어, 항상 적국이 문과 뜰 밖에 있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수령은 모두 통솔과 훈련의 직책을 띠고 있으니, 무기와 군사를 교련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것에 생각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제주는 예전의 탐라이다. 멀리 바다 가운데 있으니, 전쟁의 대비를 더욱 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신후(辛侯)가, ‘이 정자를 급히 지어야 한다.’ 하였고, 또 하물며 관덕(觀德)으로 편액하였으니, 그 쓰는 것이 관혁에 있지 않고 진퇴(進退)ㆍ주선(周旋)하는 즈음에 그 덕행을 살펴서 예악으로 신칙할 뿐이니, 삼대(三代)의 활쏘는 뜻을 얻었다 하겠다. 일이 비록 마땅한 것을 얻더라도 거행하는 것이 그 시기를 얻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지금 무예를 훈련하는 장소를 닦지 않을 수 없는데, 풍년을 만나고 사람들은 하고자 하기 때문에 재물을 손상치 않고 백성도 해치지 않고서 전날에 없던 새 정자를 창건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게시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활쏘는 데에 뜻을 다하고 몸을 바르게 하기를 구하도록 하여, 공이 이루어지고 나라가 편안해지는 효과를 이룬다면 이 정자의 세운 것이 참으로 놀고 잔치하는 장소에 비교할 것이 아니고, 정치하는 도리에 관계되는 점이 클 것이니, 이것은 고을 사람들이 서로 경사로 여겨 기록하여 잊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후의 이름은 숙청(淑晴)인데 장수의 지략이 있으므로 알려졌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수기에, “좌주(座主) 남원(南原) 양 판상(梁判相)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의 아들 찬(瓚)이 제주 목사가 되어 관덕정(觀德亭)을 중수하였으니, 청컨대 선생은 기문을 지어서 빛나게 하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제주는 본래 옛날의 탁라국(乇羅國)인데, 곧 우리 동방의 구한(九韓)의 하나다. 신라 때에 비로소 와서 조회하였고, 고려 초년에 와서 항복하여 나라가 없어지고 현(縣)이 되었다. 고려 말년에 기 황후(奇皇后)가 빌려 목장(牧場)을 두었는데, 명(明) 나라 때에 이르러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제주가 바다 가운데 있어서 땅의 넓이가 거의 5백 리나 되고 사는 백성이 8, 9천 호나 되고, 기르는 말이 또한 수만 필이나 되며, 그 산물(産物)의 풍부한 것이 다른 고을의 배나 된다. 고을이 또 일본(日本)과 서로 이웃하였으니, 방비하는 방책이 실로 복잡하고 어렵다. 조정에서 목사를 뽑으려면 매양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데, 지금 후(侯)가 그 선발함을 받아서 먼 바다 건너기를 평탄한 길과 같이 하여 이불을 가져가면서도 중얼거리는 기색이 없었으니, 후는 참 어질도다. 부임하여 부지런하고 간절히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아서 다스린 지 3년에 사람들이 매우 화평해졌다. 이에 그 지방의 호족 고윤(高潤)의 무리 수십 명이 청하기를, ‘관덕정(觀德亭)은 고을 사람들이 활쏘는 것을 익히는 곳인데, 여러 해가 되어서 기울고 허물어져서 활쏘기를 익힐 곳이 없으니, 매우 우리 고을의 결함입니다.’ 하였다. 이에 후가 옳다 하고, 통판 하공(河公) 주(澍)와 의논하여 재목을 모으고 목수들을 불러 경영하고 구축하니, 한 달이 못 되어 완성되었다. 이에 활쏘기를 익히는 것이 장소가 있고 무비(武備)가 더욱 엄해졌으니, 공은 먼저 힘쓸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하물며 이 정자의 지은 것이 놀고 구경하는 것을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고 본래 무예를 훈련하기 위한 것이니, 이제부터 고을 사람들이 날마다 여기에서 활 쏘는 것을 익혀, 한갓 활쏘기만이 아니라 말 타고 활 쏘는 것도 익히고, 한갓 말 타고 활 쏘는 것만 익힐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싸우고 진치는 것을 익혀, 왜적의 변란이 있을 때에는 세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상산(常山)의 형세를 지어서 수군ㆍ육군ㆍ보병ㆍ기병이 각각 죽을 힘을 내어 다투어 적의 머리를 베어 부모처자를 구출하고 그리하여 한 고을을 보존하고,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어서 공명을 죽백(竹帛)에 세우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갓 무비(武備)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 고을 사람이 문장과 사업으로서도 세상에 울린 이가 고 평장(高平章) 조기(兆基)로부터 내려와서 고 선생(高先生) 득종(得宗), 좌윤(左尹) 태필(台弼) 4형제에 이르러 모두 입신양명하여 현직을 지냈고, 다른 세 고을의 자제도 고을에 있을 때는 공물을 바치기에 부지런하고, 조정에 들어오면 숙위(宿衛)를 조심스럽게 하여, 그 풍속의 후한 것이 바다 안의 여러 고을과 견줄 만하다. 후가 문벌의 자손으로서 무사(武事)에 익숙하고 특이한 재주가 있어, 우리 열성(列聖)의 알아줌을 만나 이내 지방관이 되어, 삼척(三陟)과 웅천(熊川)에 있을 때의 명성과 공적을 사람들이 모두 자자하게 칭송하고, 지금 또 동떨어진 곳에서 이름을 날려 그 성취한 것이 이렇게 탁월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후의 자(字)는 여옥(如玉)인데 남원(南原)의 동생의 셋째 아들이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윤건(綸巾)과 우선(羽扇)으로 아름다운 군사를 사열하니, 몸이 장성(長城)이 되어 민정을 진무하네. 약속을 행할 때에 조주(潮洲)의 악어가 옮겨가고, 위험이 떨치는 곳에 초(楚) 나라 요기(妖氣)가 밝아진다. 일천 숲에 불을 뿜는 듯한 서리맞은 귤의 빛이요, 일만 북을 일제히 치는 듯한 바다 물결 소리로다. 뽕나무밭 밖에 아침저녁으로 밥짓는 연기, 분명히 풍년임을 말해주도다.” 하였다.

『신증』 정원루(定遠樓) 바로 남문 초루(譙樓)다.
【학교】 향교(鄕校) 성 안에 있다. 김처례(金處禮)가 지은 비문(碑文)에,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성균관이 이루어지고 세종(世宗) 17년 을묘에 향교가 지어졌다. 성화(成化) 병술년 봄에 완산(完山) 이유의(李由義)가 제주의 목사로 임명되어 맨 처음 문묘에 참배하고 그 집이 퇴락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개연히 새롭게 하려 하여, 판관 장흥(長興) 이인충(李仁忠)과 의논하여, 드디어 영졸(營卒)에게 명을 내려 순번에 따라 일에 종사하게 하고, 교수관(敎授官) 문소조(文紹祖)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니, 선비는 학업을 던져두고 분주하고 목공은 재주를 다하여 경영하였다. 목사가 매번 공사의 여가에 친히 임하여 지휘하니, 이에 묘무(廟廡)와 재사(齋舍)와 문장(門墻)과 당옥(堂屋)과 변두(籩豆)와 보궤(簠簋 제기(祭器)의 한 가지)와 궤안(几案)과 위판(位板)과, 부엌ㆍ창고ㆍ마구ㆍ변소ㆍ뜰ㆍ도로까지 수십 일이 못 되어 빛나게 새로워졌다. 고을의 부로들과 학생ㆍ아이ㆍ어른이 듣고 보고 다투어 하례하고 학업으로 서로 권하며 또 말하기를, ‘목사의 공은 이 고을의 전에 없던 것이니, 어찌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이지 않으리요.’ 하고, 처례(處禮)에게 촉탁하여 명(銘)을 짓게 하였다. 처례가 말하기를, ‘학교의 흥하고 폐하는 것이 정치의 성하고 쇠함에 크게 관련된다. 학교가 이미 수리되었으니, 학교의 규칙도 마땅히 새로워져야 하겠다. 스승된 자가 진실로 능히 세종(世宗)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서적을 받들고 성현이 지으신 경전을 가지고서, 학생들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아침에 배우고 저녁에 익히도록 하며, 회옹(晦翁)의 백록동(白鹿洞) 규칙을 게시하여 우러르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목사가 중수한 아름다운 뜻을 살펴 물 뿌리고 쓸기를 싫어함이 없어서, 지(知)와 행(行)이 아울러 나아가면 성현되기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열 집이 되는 고을에도 오히려 충신 한 사람이 있거든 세 성[三姓]이 사는 땅에 어찌 걸출한 이가 없겠는가. 집에 있어서는 자제를 교훈하여 효도를 옮겨 충성을 하게 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조정 일에 분주하여 이름을 후세에 날려, 융성한 조정에서 교화하여 성취시킨 뜻에 부응한다면 어찌 고을 사람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월계정사(月溪精舍) 예전 명월현(明月縣)에 있다. 금녕정사(金寧精舍) 예전 금녕현(金寧縣)에 있다. 주(州)에서 월계(月溪)로 서재(西齋)를 삼고 금녕(金寧)으로 동재(東齋)를 삼아 향교의 유생을 나누어 각각 사는 데서 가까운 곳에 따라 여기에서 글을 읽게 하고, 지방 사람의 학식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학장(學長)으로 삼았다. 성안에는 또 향학당(鄕學堂)이 있다.
【교량】 별도교(別刀橋) 별도천(別刀川)에 있다. 대천교(大川橋) 대천(大川)에 있다. 석량(石梁) 도근천(都近川)에 있다. 석교(石橋) 함덕포(咸德浦)에 있는데 길이가 1백 10보이다. 다리 북쪽에는 해안이 벽처럼 솟아 높고 급하다.
【불우】 존자암(尊者庵) 한라산 서쪽 고개에 있다. 그 골짜기에 돌이 있는데 마치 중이 도를 닦는 모양 같다. 속설에 전하기를 수행동(修行洞)이라고 한다. 월계사(月溪寺) 독포(獨浦) 동남쪽에 있다.
수정사(水精寺) 도근천(都近川) 서쪽 언덕에 있다.
○ 이제현(李齊賢)의 해가시(解歌詩)에, “도근천에 물 막는 둑이 무너지면, 수정사 안이 또한 바다가 되리.” 하였는데, 곧 이 절의 고사이다.

묘련사(妙蓮寺) 주 서쪽 25리에 있다. 중 혜일(慧日)의 시에, “남해의 천기가 자주 흐리기를 좋아하는데, 오늘 저녁은 새로 개여 손의 마음을 씻는구나, 한 꿈 같은 인생은 영화와 쇠하는 것이 있으나, 중추에 달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멀리 아득한 데 다다르니 포구(浦口)가 넓고, 비낀 그림자가 침침하니 연기 낀 대숲의 집이 깊도다. 밤늦도록 구경하니 맑은 것이 생각에 들어와, 머리 기울이며 가느다랗게 읊조림이 나옴을 금하지 못하네.” 하였다.
문수암(文殊庵) 주 서남쪽 27리에 있다. 해륜사(海輪寺) 일명 서자복(西資福)이다. 주 서쪽 독포(獨浦) 어귀에 있다. 만수사(萬壽寺) 일명 동자복(東資福)이다. 건입포(巾入浦) 동쪽 언덕에 있다. 강림사(江臨寺) 주 동쪽 함덕포(咸德浦) 어귀에 있다.
보문사(普門寺) 거구리악(巨口里岳) 북쪽에 있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절이 궁벽하여 거친 지경에 의지하였는데, 샘물이 단 것은 꿈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연장(蓮場)에 좋은 일을 만났고, 불법의 유풍을 잇는다.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고, 담쟁이는 장기(瘴氣)로 인하여 붉지 못하네. 원통문(圓通門)은 스스로 열렸는데, 먼 기러기가 긴 하늘에서 부르짖는다.” 하였다.
서천암(逝川庵) 조공천(朝貢川) 위에 있다. ○ 중 혜일의 시에, “한라산이 높기가 몇 길인가, 절정 위에는 신비한 못물이 고였다. 나누어 나와 북으로 흘러가서, 아래에 조공천이 되었네. 폭포가 어지러이 물방울을 뿜어, 둥근 구슬들같이 달아나네. 놀란 여울이 여러 돌에 부딪치다가, 간혹 항아리와 동이같이 파여지기도 한다. 편안히 흐르는 것이 몇 리가 되는데, 맑고 깨끗하여 푸른 하늘을 비치네. 도 닦는 사람 종해(宗海)란 이가 있어, 냇가에 암자를 세웠네. 이미 산수의 낙을 따르고, 또 향화(香火)의 인연을 부쳤네. 서늘한 가을 아름다운 달밤에, 바위를 쓸고 차 마시는 자리를 열었다. 새것을 맛보려고 대추ㆍ밤을 따고, 옛것을 얘기하여 깊고 미묘한 것을 다한다. 인하여 중니(仲尼)의 말을 생각하고, 자못 소성(小聖)의 선(禪)도 생각한다. 무생(無生)의 이치로 서천(逝川)이라 이름지어, 오래 전하기를 기약한다. 만일 드높이 깨달아 잡는다면, 물결이 모두 옮기지 않으리라.” 하였다.
소림사(小林寺) 주 동남쪽 10리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조천관포(朝天館浦)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남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광양당(廣壤堂) 주 남쪽 한라 호국신사(護國神祠)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 때에 송(宋) 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제어하고 바다에 떠서 돌아가는데, 신이 화하여 매가 되어서 돛대 머리에 날아 올랐다.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서 종단의 배를 쳐부셔 서쪽 지경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었다. 조정에서 그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본조에서는 본읍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하였다. ○ 상고하건대 호종단이 와서 고려에 벼슬이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이르고 죽었으니, 와서 땅을 제어하다가 배가 침몰되었다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차귀사(遮歸祠) 주 서쪽 3리에 있다. 천외사(川外祠) 주 서쪽 70리에 있다. 초춘사(楚春祠) 주 동쪽 70리 정의현(旌義縣) 경계에 있다. 여단(厲壇) 주 동쪽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주 남쪽 16리 한라산 아래에 있다.
【고적】 모흥혈(毛興穴) 주 남쪽 2리에 있다. 건치연혁의 주에 자세하다. 서산(瑞山) 고려 목종(穆宗) 5년 6월에 산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나왔는데 산에 네 구멍이 뚫리고 용암이 솟아나와 닷새 만에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엉기어 기왓돌[瓦石]이 되었다. 10년에 상서스러운 산[瑞山]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나왔다.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우레 소리를 내며 땅이 움직였는데, 일곱 주야 만에 비로소 개였다. 산의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되고 주위가 40여 리나 되는데,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에 덮이고 바라보기에 석류황(石硫黃) 연기 같아서 사람들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공지(拱之)가 친히 산밑에 이르러 그 모양을 그려 바쳤다.” 하니, 지금 대정현(大靜縣)에 속한다.
칠성도(七星圖) 주 성 안에 있다. 돌로 쌓았던 옛터가 있다. 삼성(三姓)이 처음에 나와서 삼도(三徒)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성 모양으로 대를 쌓아 나누어 웅거하고 인하여 칠성도(七星圖)라고 이름하였다. 대촌(大村) 삼도(三徒)를 합하여 살아서 큰 마을이 되었는데, 곧 지금의 주성(州城)이다. 고을 사람들이 성 안을 대촌(大村)이라고 한다. 고령전(高齡田)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唐) 나라 배가 와서 파선한 곳이다.” 한다. 지금도 밭을 가는 사람들이 혹 마노(碼碯) 등 보물을 파서 얻는데 당 나라 사람들이 유실한 것이라 한다. 지금 한라산 밑 바닷가에 있는 바윗돌을 보면 모두 바닷물에 깎인 곳이 있으니, 의심컨대 상고(上古)에는 모두 바다였던 것이 지금은 변하여 밭이 되었나보다.
동무소협(東巫小峽)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한라산의 일명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嶠山)이고 그 동쪽은 동무소협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하였다. 고토성(古土城) 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고성(古城) 주 성 서북쪽에 고성의 남은 터가 있다. 고장성(古長城) 바닷가에 따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백여 리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高汝林)의 무리를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비하고, 인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성 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여 물리칠 때,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 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보(尹邦寶)를 시켜 원 나라 군사 4백 명과 관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애월목성(涯月木城) 주 서쪽 42리에 있는데 곧 삼별초가 쌓은 것으로서 관군을 막던 곳이다. 지금은 반은 퇴락하였다. 동제원(東濟院) 주 동쪽 9리에 있다. 남은 터가 있는데 곧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진쳤던 곳이다. 장평(長坪) 주 서쪽 6리에 있다. 고려 원종 때에 문행노(文幸奴)가 난을 일으켜 군사를 장평(長坪)에 주둔시켰는데, 부사 최탁(崔托)과 성주(星主) 양호(梁浩)의 무리가 쳐서 평정하였다.
다루가치부[達魯花赤府]ㆍ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 탑라치[塔羅赤]가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을 싣고 와서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는데 말이 번식하였다. 이 뒤에 원 나라에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총관부(摠官府)를 설치하고 고인단(高仁旦)을 총관으로 삼아 부의 행정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그 뒤에 또 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를 설치하고 탑치(塔赤)로 다루가치를 삼아 부의 일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또 파하고, 도로 고려에 예속시켰다. 지금 주 성 북쪽 해안에 옛 관부의 남은 터가 있는데, 의심컨대 곧 그 땅인 듯하나, 상고할 수 없다. 송담천(松淡川) 주 동쪽 13리에 있다.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놓아 불사르고 약탈하니, 고여림(高汝林)의 무리가 이곳에서 맞아 싸워 이기지 못하였다. 문경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조천포(朝天浦)에 웅거하였다. 귀일촌(貴日村) 주 서쪽 20리에 있다. 고내현(高內縣) 주 서쪽 45리에 있다. 애월현(涯月縣) 주 서쪽 42리에 있다. 곽지현(郭支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귀덕현(歸德縣) 주 서쪽 60리에 있다. 고려 희종(熙宗) 7년에 주의 석천촌(石淺村)을 승격하여 귀덕현을 만들었다. 명월현(明月縣) 주 서쪽 60리에 있다. 신촌현(新村縣) 주 동쪽 25리에 있다. 함덕현(咸德縣) 주 동쪽 30리에 있다. 금녕현(金寧縣) 주 동쪽 50리에 있다. ○ 이상 각 현이 모두 직촌(直村)이 된다.
『신증』 시사석(矢射石) 주 동쪽 12리에 있다. 고로들이 전하는 말에, “삼성(三姓)이 터를 정할 때에 활을 쏜 것인데, 지금도 쏜 자국이 아직 남아있다.” 하였다.
【명환】 고려 최척경(崔陟卿) 의종(毅宗) 때에 판이부사 최윤의(崔允儀)가 척경의 맑고 곧음을 듣고 탐라 영(耽羅令)을 제수하였다. 척경이 관청에 이르러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일으키고 폐단이 되는 것을 고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히 여겼다. 그 뒤에 탐라 사람들이 현령(縣令)이 침노의 사나운 것을 괴롭게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말하기를, “만일 최척경으로 현령을 삼는다면 무기를 버리겠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런 어진 사람이 있다면 왜 쓰지 않으랴.” 하고, 불러서 비단을 주고 곧 탐라 영을 제수하였다. 탐라 사람들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곧 가벼운 작은 배를 갖추어 맞아서 지경에 들어오자 모두 창을 던지고 나열하여 절하면 말하기를, “공께서 오셨으니 우리들은 살았습니다.” 하고, 전과 같이 편안히 살았다.
조동희(趙東曦) 의종(毅宗) 12년에 왕명을 받들고 선유하여 안무사가 되었다. 김구(金坵) 주의 판관이 되었다가 만기가 되자, 들어와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경세봉(慶世封) 청백으로 일컬어졌다. 김지석(金之錫) 고종(高宗) 때에 부사가 되었다. 주의 풍속에 남자가 나이 15세 이상이 되면 해마다 콩 10두(斗)를 바치고, 아문(衙門) 아전은 해마다 말 한 필씩을 바쳐 부사와 판관이 나누어 받았다. 지석이 고을에 이르는 날에 곧 면제하였다. 정사가 맑기가 물 같으니, 백성들이 그 덕을 생각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에는 세봉(世封)이 있고 뒤에는 지석이 있다.” 하였다.
최서(崔瑞) 충렬왕(忠烈王) 때에 목사가 되었다. 이백겸(李伯謙) 충숙왕(忠肅王) 때에 제주의 도적 괴수 사용(使用)ㆍ김성(金成) 등 무리가 흉한 도당을 불러 모아 성주(星主) 왕자(王子)를 쫓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토벌하고자 하나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적의 도당이 모두 말하기를, “만일 이백겸(李伯謙)ㆍ이영(李英)이 와서 무마한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모반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백겸과 영을 보내어 무마하니 얼마 안 되어 적이 평정되었다. 백겸이 일찍이 목사가 되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랑하고 두려워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전록생(田祿生) 충혜왕(忠惠王) 때에 과거에 올라 제주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원항(李元恒) 목사가 되었다. 윤시우(尹時遇) 공민왕(恭愍王) 5년에 찬성사로서 도순문사가 되었다. 임희재(林熙載) 공민왕 6년에 안무사가 되었다. 박윤청(朴允靑) 공민왕 18년에 목사가 되었다. 조익청(曹益淸) 안무사가 되었다. 성준덕(成俊德) 공민왕 때에 성주 고복수(高福壽)가 반란을 일으키고, 원 나라에 예속되기를 청하니, 왕이 준덕을 목사로 삼아서 진압하였다.
임박(林樸) 공민왕 때에 선무사(宣撫使)가 되었다. 고을에 이르자 만호(萬戶)에게 이르기를, “달달목자(達達牧子)가 반역하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무마하고 회유하라.” 하고, 또 성주(星主) 왕자(王子)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여러 대를 복종하여 섬겨왔고, 역대로 그대들을 대접하기를 또한 심히 두터이 하였으니, 마땅히 각각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목자(牧子)로 더불어 반란을 선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성주 왕자와 군사와 백성이 모두 꿇어 엎드려서 말하기를, “조정이 보낸 관원이 모두 임선무(林宣撫) 같다면 우리들이 어찌 반역하는 데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이하생(李夏生) 공민왕 때에 안무사가 되었다.
본조 최해산(崔海山) 홍화각(弘化閣) 기문에 자세하다. 오식(吳湜) 정의(旌義) 연혁에 자세하다. 신숙청(辛淑晴) 관덕정(觀德亭) 기문에 자세하다. 기건(奇虔) 성품이 고집이 있고 청렴하고 근신하여 일찍이 안무사가 되었을 때에, 고을에서 전복이 나는데 그것을 바다에서 따려면 백성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기건이 말하기를,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것이 이와 같은데 내가 차마 먹겠는가.” 하고 드디어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따라서 먹지 않고, 모두 그 청렴한 것을 탄복하였다. 이유의(李由義)ㆍ문여량(文汝良)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이약동(李約東) 목사가 되어 대체를 알았다. 지금까지 칭송한다. 이종윤(李從允) 목사가 되어 정사가 맑고 간이함을 숭상하였다. 아전이 사랑하고 백성이 기뻐하여 임기가 다 되자 글을 올려 유임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관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신증』 민휘(閔暉)ㆍ김률(金硉)ㆍ방유녕(方有寧)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다같이 청렴하고 간이하다고 일컬어졌다.
【인물】 신라 고후(高厚)ㆍ고청(高淸) 연혁에 나왔다.
고려 고유(高維) 정종(靖宗) 때에 과거를 보아 이작정(李作挺)의 방(榜) 제삼인(第三人)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고씨(高氏)가 조정에 벼슬한 것이 유(維)로부터 시작하였다. 고조기(高兆基) 유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인데 성품이 개결하고 서적을 널리 보았다. 예종(睿宗) 때에 과거에 올라 나가서 남방 고을에 수령이 되었는데 청백하게 행정하였다. 벼슬이 정당문학 참지정사에 이르고 중서시랑 평장사에 승진하였다. 고적(高適) 조기(兆基)의 손자인데 본주의 유총관(留摠官)이 되었다.
본조 고득종(高得宗) 과거에 올라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성주(星主) 고씨(高氏) 가전(家傳)에,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한 처음에, 성주 고자견(高自堅)과 왕자 양구미(梁具美)가 역대로 한번 조회하여 뵈였고, 조정에 벼슬하여 크게 나타난 자는 없었다. 고유(高維)가 비로소 빈공(賓貢)으로 정왕(靖王) 을유년에 첫째로 남성(南省)에 합격하고, 이듬해 병술년에 이작정(李作挺)의 방 가운데의 셋째가 되어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아들 조기(兆基)는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인데 예왕(睿王) 정해년에 한즉유(韓卽由)의 방에 과거하여 벼슬이 평장 이부사(平章吏部事)에 이르렀다. 아들은 정익(廷益)인데 정익의 아들 적(適)이 조기의 시집(詩集)의 서문에 쓰기를, ‘아들 정호(廷琥)는 관직이 삼품(三品)에 그쳤는데, 그 아우 성명(誠明)과 함께 모두 일찍 죽었고, 오직 정익만이 원왕(元王) 계사년에 물러가기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였는데, 선유 최해(崔瀣)가 동인문(東人文)에 주를 달기를, ‘조기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다.’ 하였으니, 이는 알지 못한 것이다. 고적(高適)은 원왕 신유년에 과거하여 곧 금규(金閨)에 들어갔었는데, 근친(覲親)으로 인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원왕 8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 삼별초가 반란하여 탐라에 들어오니, 국가에서 군사를 보내어 쳐서 다 죽이고 고적(高適)을 유총관(留摠官)으로 삼아서 특별히 명하여 남은 백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무인년 여름에 조정에 들어오니, 왕이 친히 금패(金牌)를 주었다. 대를 이어 드디어 현달한 5세손 인탄(仁坦)은 작위를 이어받았고 아들 고석(高碩)은 서도 부천호(西道副千戶)가 되었고, 석의 아들 순량(順良)이 성주의 지위를 이어받아 아우 순원(順元)이 이었고, 아들 호조 전서(戶曹典書) 신걸(臣傑)이 이었다. 신걸의 아들은 넷인데, 인봉(仁鳳)ㆍ의봉(義鳳)ㆍ예봉(禮鳳)ㆍ지봉(智鳳)이다. 지봉은 곧 득종의 아버지이다.” 하였다.
고태필(高台弼) 득종(得宗)의 아들인데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고, 아우 태정(台鼎)은 기묘년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이 봉상시 정(奉常寺正)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김평(金枰) 고을 아전이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서 기절하자 두 번이나 정강이 살을 베어 피를 내어 술에 타서 드렸는데 병이 드디어 나았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내렸다.
【제영】 본토의 성(姓)은 성주(星主)를 높인다. 이첨(李詹)의 시에, “본토의 성은 성주(星主)를 높이고, 산 이름은 한라(漢拏)라고 부른다.” 하였다. 깊은 겨울의 귤과 유자는 서리를 맞아 지붕에 매달렸도다.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깊은 겨울의 귤과 유자는 서리를 맞아 지붕에 매달렸고, 몇 곳의 갈대밭 사이로 달이 배에 가득하구나.” 하였다. 땅이 궁벽하니 노는 사람이 적다. 중 혜일(慧日)의 시에, “매화 언덕에 바야흐로 섣달이 늦었는데, 서리가 내린 나뭇가지에 홀연히 봄이 피어난다. 차가운 향기가 비록 사랑스러우나, 땅이 궁벽하니 놀러오는 사람이 적구나.” 하였다.
악와(渥洼)의 용종(龍種)은 기린(麒麟)을 낳는다. 권우(權遇)의 시에, “동정(洞庭)의 천향(天香)은 감귤(柑橘)이 있고, 악와(渥洼)의 용종은 기린을 낳는다.” 하였다. 만 필이나 되는 준마는 한가하게 들에 놓았다. 이흥문(李興文)의 시에, “만 필의 준마는 한가하게 들에 놓았고, 천 그루의 귤과 유자는 교묘하게 가을을 단장하였다.” 하였다. 향기가 발에 스며드니 귤이 있는 것을 알겠다. 이유의(李由義)의 시에, “향기가 발에 스며드니 귤이 있는 것을 알겠고, 바람이 빈 집에 불어오니 가을 기운이 나는 것을 깨닫겠다.” 하였다. 도근천(都近川)이 살쪘으니 조수가 긴 밤이다. 민수(閔粹)의 시에, “도근천이 살쪘으니 조수가 긴 밤이요, 한라산이 야위었으니 잎사귀가 시드는 가을이로다.” 하였다. 돌담과 판잣집은 백성 사는 곳이 궁벽하다. 전 사람의 시에, “물 나라의 갈대는 운몽(雲夢)의 저녁이요, 산성의 귤과 유자는 동정(洞庭)의 가을이로다. 돌담과 판잣집은 백성 사는 곳에 궁벽하고, 다른 옷과 다른 말 소리는 손된 사람의 근심이로다.” 하였다.
땅은 유기(幽冀) 같아서 말이 좋은 것이 많다.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풍속은 주진(朱陳) 같아서 백성이 부리기가 쉽고, 땅은 유기(幽冀) 같아서 말이 좋은 것이 많다. 뽕나무와 삼밭에 비가 족하니 집집마다 기뻐하고, 귤과 유자에 서리가 무르익으니 나무 향기로다.” 하였다. 구름이 봉도(蓬島)에 열리니 오잠(鰲岑)이 가깝도다.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눈이 꽃 사이에 가득한데 푸른 새가 울고, 서리가 울타리가에 깊었으니 누른 감자(柑子)가 익었도다. 구름이 봉도에 열리니 오잠이 가깝고, 해가 부상(扶桑)에 나오며 바다 기운 휩싸네.” 하였다. 향기로운 감자(柑子)는 한(漢) 나라 포도(葡萄)보다 더 좋다. 앞사람의 시에, “땅이 선도(仙島)에 연하였으니 사람 살기가 좋고, 공(貢) 바치는 것이 조정에 들어가니 산물이 풍부하도다. 이름난 기마(驥馬)는 이미 대원(大宛)요뇨(騕褭)보다 낫고, 향기로운 감자(柑子)는 한(漢) 나라 포도보다 더 좋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예종 원년에 목사를 다시 두었으며, 후에 또 방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인조 20년에 방어사를 없앴다가 후에 겸하게 하였다.
【읍호】 영주(瀛州).
【관원】 목사 제주진(濟州鎭)의 병마수군절제사와 방어사를 겸한다. 판관 제주진의 병마수군절제도위와 교수ㆍ감목관을 겸한다. 각 1인. 역학(譯學) 2원 한학(漢學)ㆍ왜학(倭學). 심약(審藥)ㆍ검률(檢律) 각 1인.
【방면】 동도(東道)ㆍ서도(西道) 도약정(都約正)ㆍ약정(約正)ㆍ직월(直月)을 동서도(東西道)에 각각 세 사람씩 배치하였다. 이십칠면(二十七面) 면마다 권농(勸農)ㆍ이정(里正)을 각각 한 사람씩 두었으며, 리(里)마다 좌주(座主)ㆍ좌상(座上)ㆍ소무(所務)를 각각 한 사람씩 두었다.
【성지】 고성(古城) 제주성 서북쪽에 있으며 옛터가 남아 있다. 고토성(古土城) 서남쪽으로 36리에 있으며 둘레는 15리이고 삼별초가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서쪽으로 20리에 있으며 가운데 커다란 샘물이 있다. 삼별초가 이 성을 근거지로 삼고 항거하니, 김방경(金方慶)이 공격하여 정벌하였는데, 원(元) 나라 병사 4백 명과 더불어 진에서 1천여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고장성(古長城) 바다에 연하여 둥그렇게 쌓였으며 길이는 모두 3백여 리이다. 삼별초의 반란군이 근거지로 삼았으며 왕이 파견한 시랑 고여림(高汝霖) 등이 진도에서 이곳으로 와서 탐라의 반란군 1천여 명에 대비하여 긴 성을 쌓았다.
○ 제주는 동서가 2백 리이고 남북이 1백 20리이다. 섬은 모두 석벽으로 둘러싸였으며 바다에는 뾰쪽한 바위들이 깔려 있어 배가 정박할 수 없다. 근래에 오직 어천포(於川浦) 입구에 석보(石堡)를 설치하여 방어에 대비하였다.

【영아】 방영(防營) 연혁(沿革)에 보인다. 병마수군방어사 목사가 겸하였다. 중군(中軍) 판관이 겸하였다.
【봉수】 시리(時里)ㆍ도내악(道內岳)ㆍ왕가(往可)ㆍ사라(紗羅)ㆍ서산(西山).
【창고】 창(倉)은 2개 있고 고(庫)는 8개 있다. 모두 성안에 있다. 동별창(東別倉) 별방소(別防所)에 있다. 서별창(西別倉) 명월포(明月浦)에 보인다.
【목장】 장올악(長兀岳)으로부터 감은덕악(感恩德岳)까지 모두 6곳이 있고, 또 우둔(牛屯)ㆍ산둔(山屯)ㆍ을병별둔(乙丙別屯)ㆍ청마별둔(淸馬別屯)ㆍ양잔고유저권(羊棧羔囿猪圈)이 있다. 본주 사람으로서 감목관이 한 사람 있는데, 본주 사람만으로 차출한다. 본래 원 나라 때의 동서합적(東西哈赤)이었는데 후에 동서아막(東西阿幕)으로 되었다.
○ 충렬왕 3년에 원 나라에서 목장을 만들어 단사관(斷事官)을 보내거나 혹은 만호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량】 감덕포석교(感德浦石橋) 길이가 1백 10보이고 다리의 북쪽은 바다에 연하였는데 높고 준험한 절벽이다. 가락교(嘉樂橋) 동문 안에 있다. 화북천교.
【누정】 망경루(望京樓).
【단유】 한라산단(漢拏山壇) 본조 숙종조에 처음으로 제사하였다. 광양단(廣壤壇) 남쪽으로 3리에 있는데 한라의 호국신단(護國神壇)이다. 고려 때 광양(廣壤)이라 하였고 3년이 지난 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토록 하였다. 본조에서도 본읍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있었는데 중간에 폐하였다가, 본조 숙종 기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사원】 삼성사(三姓祠) 영종 계미년에 건립하였으며 성종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
○ 귤림서원(橘林書院) 선조 무인년에 건립하였으며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김정(金淨)ㆍ송린수(宋麟壽) 모두 청주(淸州)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태묘에 보인다. 정온(鄭蘊) 광주(廣州)에 보인다. 송시열(宋時烈) 문묘에 보인다. 이약동(李約東) 자는 춘보(春甫)이고 호는 노촌(老村)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벼슬은 지중추였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이회(李檜) 자는 자방(子方)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벼슬은 목사였다.
○ 위의 두 사람은 현종 기유년에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주D-001]직방씨(職方氏) : 직방씨는 벼슬 이름인데 천하의 지도를 맡고, 사방 직장의 직공(職貢)을 주관한다.
[주D-002]방성(房星) : 방성은 이십팔 수(宿)의 하나인데 거마(車馬)를 맡은 별이다.
[주D-003]굴산(屈産) : 《좌전(左傳)》과 《곡량전(穀梁傳)》 주에는, 굴(屈)은 고을 이름이요, 산(産)은 말을 산출하는 것이라 하였고, 《공양전(公羊傳)》 주에는 굴산(屈産)은 땅 이름인데 명마를 산출하는 땅이라 하였다.
[주D-004]오병(五兵) : 과(戈)ㆍ수(殳)ㆍ극(戟)ㆍ추모(酋矛)ㆍ이모(夷矛) 다섯 가지 무기를 말한다.
[주D-005]상산(常山) : 회계(會稽)의 상산에 뱀이 있는데,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이르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이르고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이른다. 예전의 진세(陳勢)에 많이 모방하였다.
[주D-006]간성(干城) : 밖을 막고 안을 호위하는 것을 말함. 시경에 공후간성(公侯干城)이라는 말이 있다.
[주D-007]죽백(竹帛) : 예전에 문자를 기록하는 데에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죽간과 목간을 사용하였는데, 진(秦) 나라 때에 백(帛)으로 대신하였다.
[주D-008]조주(潮洲)의 악어 :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洲刺史)로 있을 때에 〈축악어문(逐鱷魚文)〉를 지어서 제사하였는데 악어가 물러갔다.
[주D-009]초루(譙樓) : 이른바 고루(鼓樓)라는 것인데 문 위에 높은 다락을 지어서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D-010]백록동(白鹿洞) : 백록동은 강서(江西)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밑에 있다. 송 나라 초년에 서원(書院)을 두었다가 폐지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로 있을 때에 중건하고 여기에서 강학하였다.
[주D-011]남성(南省) : 상서성(尙書省)을 남성이라 한다.
[주D-012]금규(金閨) : 금규는 곧 금마문(金馬門)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학사(學士)로 하여금 금마문에서 조서를 기다리게 하였다.
[주D-013]운몽(雲夢) : 운몽은 소택(沼澤) 이름인데 호북성(湖北省) 안륙현(安陸縣) 남쪽에 있다.
[주D-014]동정(洞庭) : 동정은 동정호(洞庭湖)를 말함인데 귤 이름에 동정귤(洞庭橘)이 있다.
[주D-015]주진(朱陳) : 서주(徐州) 고풍현(古豐縣) 어떤 마을에 주씨(朱氏)ㆍ진씨(陳氏) 두 성만 살아서 대대로 혼인을 하기 때문에 그 마을을 주진촌(朱陳村)이라고 하였다.
[주D-016]유기(幽冀) : 유주(幽州)ㆍ기주(冀州)는 좋은 말이 많이 산출되는 땅이다.
[주D-017]봉도(蓬島) : 봉도는 곧 봉래산인데 삼신산의 하나로 발해 가운데에 있다 한다.
[주D-018]오잠(鰲岑) : 오잠은 오배삼산(鼇背三山)을 말함. 발해 동쪽에 산이 있어 물결에 따라 왕래하므로 큰 자라 열다섯 마리를 시켜 산을 이고 있게 하였다 한다.
[주D-019]대원(大宛) : 대원(大宛)은 예전 나라 이름인데 지금 중앙 아시아에 있는 땅이다.
[주D-020]요뇨(騕褭) : 요뇨는 예전 신기한 말의 이름인데 주둥이는 금빛이 나고 몸둥이는 붉으며 하루에 1만 8천 리를 간다고 하였다.
[주D-021]포도 : 한(漢) 나라 때에도 이미 포도주가 있었는데, 역시 서역에서 전래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2권
 평안도(平安道)
안주목(安州牧)

동으로는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35리,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52리, 남으로는 숙천부(肅川府) 경계까지 48리, 서쪽으로는 노강진(老江鎭)까지 60리, 북으로는 박천군(博川郡) 경계까지 8리, 영변부(寧邊府) 경계까지 9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쳤고, 고래 태조 때는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으며 14년에는 안북부(安北府)를 두었고, 성종 때는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라 칭하였으며 현종 때는 안북대도호부라 칭하였다. 고종 43년에는 몽고군을 피하여 창린도(昌麟島)로 들어갔다가 다음에 육지로 나왔으며 의종 때에는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후에 폐하였으며 공민왕 18년에는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좇았다. 세조조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목(牧) 1 정주(定州). 도호부(都護府)가 1 숙천(肅川). 군(郡) 1 가산(嘉山). 현(縣) 1 영유(永柔).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군 계해(癸亥)에 본주가 조잔하다하여 판관으로 고쳤다.
【군명】 안릉(安陵)ㆍ밀성(密城)ㆍ식성(息城)ㆍ중반(重盤)ㆍ팽원(彭原)ㆍ안북(安北)ㆍ영주(寧州).
【성씨】 본주 오(吳) 해주(海州). 김(金) 해주ㆍ풍주(豐州)ㆍ교하(交河)ㆍ안산(安山)ㆍ수주(水州)ㆍ장사(長沙)ㆍ광양(光陽)ㆍ온수(溫水). 최(崔) 해주ㆍ풍주. 강(康) 정주(靜州)ㆍ남원(南原)ㆍ등주(登州)ㆍ백주(白州). 서(徐) 성주(星州)ㆍ봉성(峯城). 지(池) 수주(水州). 문(文) 전주(全州)ㆍ장연(長淵). 박(朴) 교동(喬桐). 노(魯) 진강(鎭江). 장(張) 부녕(扶寧). 송(宋) 용성(龍城)ㆍ송림(松林). 이(李) 철야(鐵冶)ㆍ수안(遂安). 한(韓) 재령(載寧). 견(甄) 전주. 방(方)ㆍ임(林) 모두 풍주.동주(東州). 안융(安戎) 최(崔)ㆍ김(金) 모두 내성(來姓).
【형승】 안팎 호와 산[湖山]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총총히 성한 정기 외로운 성 얼싸안고, 안팎 호와 산엔 정말 영물(靈物) 있네.” 하였다. 바다는 서쪽 벽에 연이어 통하고, 산은 동쪽 이웃에 솟아[海連西壁山聳東隣]. 이색의 시에, “바다는 서쪽 벽에 연이어 남국(南國)으로 통하고, 산은 동쪽 이웃에 솟아 북방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산천】 가두산(加頭山) 주의 동쪽 3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태자산(太子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悟道山) 원통산(元通山)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왕산(王山) 주의 동쪽 15리에 있다. 마두산(馬頭山)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봉덕산(鳳德山) 주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9층의 철(鐵)로 된 부도(浮屠)가 있다. 바다 안융진(安戎鎭)에 있는데 부와는 서남쪽으로 60리다.
청천강(淸川江) 살수(薩水)라고도 이름하는데 묘향산(妙香山)에서 나와 주의 북쪽 성(城) 밑을 지나 서쪽으로 30리를 흘러 박천강(博川江)과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수(隋)의 우문술(宇文述) 등이 고구려 군사를 치려고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는 30리 거리에 이르러 산에 영을 쳤다가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거짓 항복에 따라 군사를 돌려 청천강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너자 을지문덕은 급히 그 후미를 공격하여 우둔위(友屯衛) 장군을 죽이니 신세웅(辛世雄)과 수 나라 군사가 거의 궤멸되었다. 평양의 인물조에 자세하다. ○ 김극기의 시에, “길 다하여 잠깐 고삐를 푸니, 연기 찬 개포[浦]에 바람배 올라오네. 가득한 물은 푸른 물결 보내고, 삐쭉한 산은 푸르게 빼어났네. 등나무 가지는 언덕에 나직하고, 버드나무 가지는 물가를 길게 쓰네. 만고에 혼(魂) 녹인 곳, 푸른 물결은 객정(客亭)을 돌아가네.” 하였다. ○ 조준의 시에, “살수(薩水) 출렁거려 푸른 하늘에 잠겼는데, 수병(隋兵) 백만이 고기가 되었구나. 지금도 아직 어초부(漁樵夫)의 이야기 남았으나 나그네의 한갓 웃음거리도 되지 않네.” 하였다. ○ 축맹헌(祝孟獻)의 시에, “수병(隋兵) 다시 일면 어찌 허사이겠는가, 이 땅은 몇 번이고 학철어(涸轍魚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고기)가 되리니. 당시 당 나라 이(李 세적(世勣))와 설(薛 인귀(仁貴))을 못했는가. 깃발을 휘두르며 곧장 부여로 오리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조선[東藩] 수십 주를 두루 돌아서 물가 정자 구름속 높은 누각(樓閣)에 머무는 것 버릇되었네. 오래도록 경치를 대하면 흥 절로 일어나, 곳마다 산을 보며 이르지 않은 곳 없네. 성긴 비 몇 번이나 혹서(酷暑)를 피했는지, 긴 강의 유월이 마치 맑은 가을 같구나. 술잔과 시권(詩卷)은 언제나 있어, 눈에 찬 풍연(風煙)은 걷히지 않네. ○ 가득한 맑은 물은 박천(博川)을 닮았으며, 두 강은 서로 가까우나 연하지 않았더라. 늘어선 산[連山] 끊어진 곳엔 모래 많고, 길은 평평한 들녘을 돌 때는 수전(水田) 사이를 지나네. 나루터 한가한 정자(亭子) 나직한 나무 스치고, 성두(城頭)의 높은 누각(樓閣) 하늘까지 솟았더라. 한때에 말 탄 하인 비같이 따라 오는데, 사람은 훈풍이 불어오는 호화선[畫船]에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살수 흐르는 곳 얼마나 깊었는가, 춘풍에 사절(使節) 가지고 우연히 등림(登臨)하니, 양 언덕 끊어져 막힌 곳 티끌 흔적 하나 없고, 한 거울 평평하게 열어 논 듯 도심(道心)을 본 듯하네. 눈 쌓인 한 산은 백벽(白壁)을 안은 듯, 구름 깨고 나온 햇빛 황금 물결에 출렁이네. 성두(城頭)의 피리 북소리 갈 길을 재촉하니, 중류(中流)에 띄워 놓고 시를 읊노라.”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비 갠 새벽 노를 울려 두 물을 건너가니, 물결은 잔잔하여 편히 앉은 초정선(草亭船)이네. 온 둑의 꽃이 지니 붉은 비 날리고, 몇 점 백구 날라 푸른 연기 깨는구나. 사람 그림자 물거울 속에서 번번이 움직이고, 노래 소리 멀리 바다 구름 뚫네. 나는 어떻게 영풍(靈風) 만나, 신선의 배를 얻어 곧장 하늘에 오르리.” 하였다.
무골도(無骨島) 주의 동쪽 22리인 청천강(淸川江) 가운데에 있다. 누영지(漏盈池)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개지(介池) 안융(安戎)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 마노[碼碯石] 안융에서 난다. 닥종이[楮]ㆍ왕골[莞草]ㆍ잣ㆍ수유(酥油)ㆍ숭어ㆍ은어[銀口魚]ㆍ준치[眞魚]ㆍ붕어ㆍ굴[石花]ㆍ게ㆍ새우.
【성곽】 읍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2백 55척, 높이가 12척이며 안에 우물과 샘이 18개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는데 평양(平壤)ㆍ삼화(三和)ㆍ용강(龍岡)ㆍ강서(江西)ㆍ삼등(三登)ㆍ중화(中和)ㆍ성천(成天) 등의 조세를 이곳에서 모은다.
【관방】 노강진(老江鎭) 주의 서남쪽 65리인 청천강 어구에 있는데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있다. ○ 첨절제사 1인.
【봉수】 성황당 봉수(城隍堂烽燧) 북으로는 박천군 독산(禿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청산(靑山)에 응한다. 청산 봉수(靑山烽燧) 주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북으로는 가산군(嘉山郡) 연지(蓮池)에 응하고, 남으로는 오도산(悟道山)에 응한다. 오도산 봉수(悟道山烽燧) 북으로는 청산에 응하고, 남으로는 소리산(所里山)에 응한다. 소리산 봉수(所里山烽燧) 주의 남쪽 47리에 있는데 동으로는 오도산에 응하고, 남으로는 숙천부(肅川府) 도영산(都迎山)에 응한다. 제비통 봉수(諸非筒烽燧) 주의 서쪽 43리에 있는데 북으로는 박천군(博川郡) 덕간곶(德間串)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노강(老江)에 응한다. 노강 봉수(老江烽燧) 주의 서쪽 66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숙천부(肅川府) 식포(息浦)에 응하고, 동으로는 제비통(諸非筒)에 응한다.
【누정】 백상루(百祥樓) 주의 북쪽 성안에 있다. ○ 고려 충숙왕의 시에, “청천강 위 백상루에, 삼라 만경 벌려 있어 한 눈에 보기 어렵고, 풀은 멀리 긴 둑에 한 줄로 푸르렀네. 하늘에 뻗은 멧부리 천으로 줄지었고, 비단 병풍 속을 나는 외로운 따오기, 옥 거울 속에 뜬 한 점의 작은 배이네. 속세에 선경(仙境)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았더니, 오늘 밀성(密城)에 영주(瀛洲)를 보는구나.” 하였다. ○ 승 정지(定志)의 시에, “옷 걷고 다시 제일 높은 누(樓)에 오르니, 멀고 가까운 평원에 저문 안개 걷히네. 몇 점 조는 물오리는 붉은 여뀌꽃 언덕에 기댔으며, 한 대낚시 던지고 있는 어부 푸른 물결 위에 있네. 연기는 넓은 들에 비껴 있고 구름은 산마루에 누웠으며, 바람은 긴 강에 가득하고 달은 배에 가득 찼네. 돌아보니 외로운 따오기 해지는 놀에 떨어지는데, 조각 돛이 백구 나는 물가에 왕래하네.” 하였다. ○ 문노(文魯)의 시에, “나그네 길에 한가하여 잠깐 누에 올라와서, 눈 돌려 바라보니 여러 생각 거둘 수 없네. 맑은 강 뱀같이 돌아 성 아래 푸르고, 푸른 산 소라처럼 넓은 들에 벌려 있네. 빽빽한 연기 숲에 작은 술집 감췄으며, 줄줄이 내리는 비 조각 배를 씻어 주네. 구름 날고 학이 간 지 몇 천 년이 되었는가. 꽃다운 풀 앵무주(鸚鵡洲)에 의연히 피어 있네.” 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강 위 우뚝한 산에 수루(戍樓)를 지었으니, 바람마저 맑은 휘파람 불어 저문 안개 걷어가네. 한 구석 산수는 진 나라 관문[秦陘口]이며, 백 전 성지(城池)는 진(晉) 나라 석두성(石頭城)인가. 푸른 풀 둑에는 한 필의 말 울고 있고, 녹양(綠楊) 그늘 아래 외로운 배 매었더라. 천 년이 지난 일을 누구에게 물어보리, 오로지 물소리만 해 저문 물가에 울리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띠처럼 둘린 청천(淸川) 벽공(碧空)에서 쏟아지고, 백구는 날아가니 석양 놀 붉었더라. 새는 비단 자리 꽃가지에 날아 앉고, 사람은 구슬 누(樓)의 아지랑이 속에 앉았구나. 목동의 피리 소리 소의 등 달에 한가롭게 불어오고, 고기잡이 배 낚시 줄은 바람에 가볍게 날리네. 취해 돌아올 제 등고(登高)한 것 잊었으니, 발 아래 구름다리는 몇 겹이나 되는고.”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누각 높고 경치 좋아 그 정말 좋을시고, 사면(四面)의 산을 보니 그 모두 기이하네. 풍경이 특수하니 왕마힐(王摩詰)의 그림인가, 재주 정취 도와주니 두소릉(杜少陵)의 시(詩) 그것일세. 평평한 시내 날은 따스하여 얼음도 쉬 녹고, 먼 국경 하늘 높아 새도 나는 것 더디구나. 마음은 제궁(帝宮)에 있으나 몸은 나그네로 오색 구름(황궁(皇宮)을 말한다.) 머리 돌려 보니 임금 생각 멎지 않노라.”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고루(高樓)에 다시 오르니 생각이 그침없고, 취하여 난간에 기대어 먼 하늘을 바라보네. 바다 물결 붉게 타니 아침 해 솟아나고, 수림(樹林)에 푸른 것 싸였음은 저녁 연기 오름일세. 멀고 먼 들 언덕에 길손도 많고, 아득한 강파(江波)에는 낚싯배 떠 있네. 소탈하고 미친 흥 거듭 연정 둔다, 괴이하게 여기지 마오. 이 안의 풍경이 모두가 정을 끄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나를 듯 높게 지어 물 갈래 굽어보니, 조정 신하 조서(詔書) 받들고 몇 번이나 지나는고. 비[雨] 뒤의 동령(東嶺) 보리는 두 이삭이요, 가을 맞은 북천(北川)의 벼는 아홉 이삭이로다. 청춘사녀(靑春士女)는 한가한 정(情) 적으련만, 백발 거사(居士)는 즐거움 많을세라. 눈에 가득한 구름과 안개 볼수록 싫지 않고, 다시 들으니 해상에는 고래 물결이 잠잔다 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상서(祥瑞)와 우수(優秀)한 것 모아 짓기도 공교롭고, 굽어 맑은 강 보니 하나의 거울이네. 신기(蜃氣)인들 이 동우(棟宇)에 가지런할까, 달빛은 발 안에 쉬 들어오네. 희한하게 영주(瀛洲) 해변에 의지한 집은 봉래산 정상의 선궁(仙宮)과 방불하네. 술을 파하고 난간에 기대어 북쪽을 바라보니, 취한 혼 날아가서 오운(五雲 황궁(皇宮)을 가리킨다.)에 들어가네.” 하였다. ○ 최숙(崔淑)의 시에, “살수(薩水) 동쪽 백척루(百尺樓), 홍진(紅塵) 하나 없고 푸른 연기 걷혀가네. 큰 사원기(四元氣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 안아 싸고, 평평하게 세 가지 빛을 집어 머리에 접했구나. 석양에 남은 구름 먼 산에 연이었고, 긴 바람 세우(細雨) 몰아 고주(孤舟)에 들어오네. 올라 앉아 천 병 술을 마실 만하니 이것이 강남(江南)의 앵무주(鸚鵡洲)인가 하노라.”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강(江) 구름 나무 그림자 다 같이 유유하고, 만리 풍연(風煙)은 눈을 비쳐 트였구나. 자금궁(紫禁宮)은 멀리 하늘 북극(北極)에 연이었고, 석양은 한가하게 서쪽 누에 의지했네. 희미하게 작은 물은 현포(玄圃)에 통해 있고, 지척의 부상(扶桑)은 봉황주(鳳凰洲)와 격했구나. 하늘 끝 좋은 경치 다 보려 하는 나요, 한 잔 기울여 고금의 근심 지워보세.”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상루에 올라 봄은 이번이 처음인데, 우연히 돌아가는 길에 잠깐 수레 멈추었네. 띠 같이 빙 두른 얼어붙은 시내 빛도 깨끗하고, 숲의 연기 낀 나무 그림자 쓸쓸하네. 다정한 여관 주인 상객(賞客)을 맞았으니, 어디메 선인(仙人)이 홀로 좋아 앉았는가. 술 파하고 찻잔도 모두 돌리니, 눈 바람 송곳같이 문틈으로 스며드네.” ○ “안흥(安興)으로 나오는 길 가까이 냇물 있으니, 몇 층 누각은 성곽에 기대어 우뚝하네. 물빛 멀리 어른거려 눈[銀海]을 미혹하고, 햇빛은 산에 비쳐 자연(紫煙)만 나는구나. 아득하게 한강에서 밤에 술 싣고 배 띄운 것 생각하니, 패수(浿水)에서 낮에 띄운 배와 같더라. 동국에 와 곳곳에 올라 보니, 사신의 수레 바다 하늘 끝에 이르른 것 헛되지 않구나.”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백 길 푸른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누각, 발 걷어 보니 뭇 산이 흩어져 있네. 출렁출렁 긴 강물 들판 밖에 누워 있고, 층층히 높은 누각 언덕 위에 기대 있고, 백로는 고기 물고 낚싯배 스쳐가네. 지친 나그네 높은 데 올라 생각이 하염없고, 늦은 바람 비를 몰아 긴 섬을 지나가네.” 하였다.
만경루(萬景樓) ○ 진감(陳鑑)의 시에, “홀로 높은 누에 올라 경기(京畿)를 바라보니, 만공(滿空)에 차가운 안개 나그네 옷 적셔주네. 만 그루 송음(松陰)의 푸른 언덕 희미하고, 사면의 성문은 푸른 산을 굽어보네. 사람은 산을 향해 송아지를 타고 가고, 중은 나루터로 시주 양식 얻어 돌아가네. 오운(五雲 임금이 있는 곳)은 어디메인가 머리를 들어 보니, 조수 떨어진 맑은 물에 백조가 날고 있네.” 하였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높은 누각 우뚝하게 하늘에 솟아 있어, 멀거니 홀로 서 있으니 석조(夕照) 비쳐 붉었어라. 고구려와 백제가 이 안에서 싸웠으며, 수당(隋唐)의 침략도 이제는 담소(談笑)로다. 그림 난간 굽어보니 천 이랑에 기장이요, 작은 배 끌려감은 만리에 부는 바람. 사해(四海)가 한 집이라 지극한 평화 맞았으니, 산하(山河)가 백천 겹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하였다. ○ 장녕(張寧)의 시에, “강상에 높은 누각 속기를 떠났건만, 첫 봄에 날 때는 듣지도 못하였네. 바람 구름 언덕 골이 높고 낮게 보이고, 초목과 인가는 멀고 가까이 나뉘어 있네. 낮 부엌에는 차(茶) 연기 면면하고, 네모진 연못에는 복숭아 꽃 이렁이렁. 사신(使臣)의 자순(咨詢)은 이미 모두 마쳐 돌아갈 길 바쁘고, 아롱진 난간에 기대보니 날 또한 저물었네. ○ 아홉 하늘 서쪽 가면 그곳이 황기(皇畿)인데 만경루(萬景樓) 안에 들어 잠시 옷을 풀어보네. 하늘은 먼데 강은 흘러 어디메서 다하는고, 봄 깊어 시흥(詩興)은 근래에 드물었네. 노래 소리 개포를 건너 졸던 백구 일어 날고, 소나무 그림자 바람 맞아 춤추는 학 돌아가네. 철 만난 물건 풍성하지 못하여 맑은 완상(玩賞)도 지쳤노라. 마지못해 돌아보니 백운(白雲)이 날아 있네.”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주(州)의 성 꾸불꾸불 맑은 강 바라보니, 백성들 집 다닥다닥 젖은 연기 일어나네. 몇 리(里)에 줄지은 소나무 푸르러 해 빛을 가리고, 사방의 푸른 산빛 하늘에 연이었네. 이 지방 방언은 민남(閩南) 지방 비슷하고, 논의 벼는 제우(淛右 절강성(浙江省) 서쪽 지방)의 논 닮았네. 이역(異域) 풍광이 중국과 같으니, 임금님 은혜는 곧장 해동(海東)의 구석까지 입고 있으리라. ○ 누각 밖 연기와 아지랑이 푸른 기에 젖어 있고, 지저귀는 새 소리 고요한 속에 들려 오네. 계단에 비친 풀빛 봄이 와 푸르고, 길에 둘린 솔 순은 비 와서 선명하네. 황학은 돌아오지 않고 구름만 아득한데, 백구는 날아가서 물결만 출렁이네. 한 단지 술로는 등림(登臨)한 흥 다하지 못하니 앞 산에 지는 저녁놀을 어찌 하랴. ○ 층층의 난간을 옮겨 기대어 황기(皇畿)를 바라보니, 산의 푸른색은 나그네 옷 물들이네. 백으로 지저귀는 새벽 꾀꼬리 노래 들리고 밖에는 꽃 느릿느릿, 만가(萬家)의 봄 나무는 우중(雨中)에 희미하네. 바람의 들노래는 초부(樵夫)가 나루를 건넘이요, 들보에서 떨어지는 진흙 향기는 제비가 돌아온 것일세. 임금과 부모 생각 언제나 있는 것이, 한 조각 구름에도 고향 생각 일어나네.” 하였다. ○ 기순의 시에, “눈[六花]이 아롱지게 안주(安州)에 두루 내려, 흥겨워 다시금 만경루에 오르네. 천리 강산은 온통 은세계요, 사방의 빙옥(氷玉)은 도랑과 들에 걸려 있네. 빛이 뜰에 드니 먼저 새벽을 알려 주고, 윤택한 기운 밭고랑에 스몄으니 풍년을 예상하네. 성스러운 세상 화기가 흡족하니, 하늘의 은혜는 해동(海東)까지 미쳐 있네. ○ 당년의 걸출한 집 분애(氛埃) 밖에 빼어나고, 종적(蹤跡)은 아직 남아 예전대로 들려오네. 멀고 가까운 인가의 연기 성벽으로 끊겨 있고, 높고 낮은 밭 이랑은 길을 고루 나누었네. 푸르게 북새(北塞)에 이어진 천 봉우리 묘연하고, 푸른 물결 동해에 일어 큰 물이 넘실넘실. 어찌 겨를 얻어 자주 이곳에 와서, 서로 만나 시주(詩酒)로서 아침 햇빛 즐겨볼까. ○ 나그네 길 서쪽으로 가 경기(京畿)를 가리키고, 삼월(三月)의 이역(異域)에서 옷 아직 못 받았네. 요동(遼東) 동쪽 늦은 산은 비를 맞아 푸르고, 계주(薊州) 성문 봄 나무는 연기 머금어 희미하네. 인정은 승경(勝景)을 즐겨 두 눈동자 탁 트이고, 시(詩)는 행낭(行囊)에 들어와 만상(萬象) 그려 돌아가네. 신선의 학 돌아오지 않아 천지는 늙어가고, 흰 구름 하염없이 옛 처마 곁을 나네.” 하였다.
【학교】 향교 주의 성안 동쪽에 있다.
【역원】 안흥역(安興驛) 성의 안에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낙락장송(落落長松) 울창한 숲이, 잎새와 가지 얽혀 낮에도 침침하네. 말 달려 곧장 뚫는 침침한 길 속이라, 찬 눈이 옷깃을 적시는 줄 모르고 가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어제의 음산한 구름과 어젯밤 바람, 새벽에 갑자기 하늘 가득히 눈 내리네. 담비 가죽 옷 여우 가죽 옷은 바로 훈공(勳功)의 표시요, 흰 띠 술잔에 시구(詩句) 또한 기교롭네. 지키는 군졸들의 어금니[牙] 쪼는 소리처럼 딱딱거리고, 정부(征夫)의 삿갓 다툼은 밀봉(蜜蜂)처럼 웅웅거리네. 평생 조선 풍경에 익지 않았으나, 이 광경에 다시금 아찔하네.”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하늘이 얼음 꽃[氷花]을 가위질하여 새벽 바람에 흩어지니, 천산일색(千山一色)이 흔연히 비어 하나네. 날이 밝아 아름다운 관(館)에서 새 시구를 재촉하고, 어둠이 붉은 누에 들어 정교하기 서로 다투네. 그윽한 골짜기에 희미한 건 초부(樵夫)들 가는 길이요, 추운 강에 단장한 건 사립 쓴 어옹이네. 눈[雪] 떠다 차 끓이니 금을 녹일 만한 따스한 안방 같음을 알겠네.” 하였다. 마고개원(亇古介院) 주의 남쪽 9리에 있다. 신원(新院)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운암원(雲巖院)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풍천원(楓川院) 주의 남쪽 48리에 있다. 남정원(南亭院)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재천원(載川院) 주의 남쪽 50리에 있다.
【불우】 칠불사(七佛寺) 북성(北城) 밖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隋) 나라 병사가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배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곱 중[僧]이 강가에 와서 여섯 중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거늘 수 나라 병사가 보고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아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일곱 중처럼 일곱 돌을 세워 놓았다.” 한다. 천왕사(天王寺) 성안에 있다. ○ 권근의 시에, “적적한 절은 주(州)의 성문에 있어, 6월 창문 가에 살 만하네. 나루터 행인은 물이 물러간 뒤에 가고, 밭 가운데 김매는 노인은 비 개고 나왔더라. 산은 들 밖을 비껴 있어 평원도 넓을시고, 물은 성모퉁이를 돌아가니 옛 성의 자리로다. 날마다 누에 올라 시 읊는 흥도 많아, 우연히 시가 되면 벽 틈에 적어보네.” 하였다. 장락사(長樂寺) 봉덕산(鳳德山)에 있는데, 9층의 동탑(銅塔)이 있다. 승현사(僧賢寺)ㆍ석천사(石泉寺) 모두 고맹주(古孟州)에 있다. 화엄사(華嚴寺) 갈두산(乫頭山)에 있다. 정수사(淨水寺)ㆍ미타사(彌陀寺) 모두 마두산(馬頭山)에 있다. 영천사(永川寺)ㆍ백학사(白鶴寺)ㆍ경운사(慶雲寺)ㆍ원통사(圓通寺)ㆍ청룡사(靑龍寺)ㆍ문수사(文殊寺)ㆍ보현사(普賢寺)ㆍ개법사(開法寺)ㆍ운주암(雲住菴)ㆍ금동사(金洞寺) 모두 오도산(悟道山)에 있다. 영화사(靈華寺)ㆍ은적사(隱寂寺) 모두 왕산동(王山洞)에 있다.
【사묘】 사직단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의 동쪽 3리에 있다. 청천강신사(淸川江神祠) 강가에 단(壇)이 있는데 춘추로 향축(香祝)을 내려 치제(致祭)하였는데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여단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맹주(古孟州) 주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맹산(孟山)이 본주의 속현이었을 때의 치소(治所)였다. 안융진(安戎鎭) 융(戎)을 인(仁)으로도 쓰는데 주의 서쪽 65리 바닷가에 있는데 토성(土城)이 있다. 고려 광종(光宗) 25년에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90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고석성(古石城) 주의 동쪽 6리에 있는데 둘레는 6천 5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명환】 고려 최척경(崔陟卿)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副使)였다. 유석(庾碩) 고종 때 부사가 되었다. 본조 최윤덕(崔潤德) 도절제사(都節制使)로써 목사(牧使)를 겸하였다. 고거정(高居正) 목사가 되었다.
【효자】 본조 노사점(魯師點) 성질이 지극히 효도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여묘를 살면서 3년이나 동구에 나가지 않아 이 일이 알려져 동부 녹사(東部錄事)를 받았다. 오유린(吳有麟)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리자 우측 무명지를 베어 약에 타 드리니 나았다.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이명지(李明智) 지극히 효도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여묘를 3년이나 지냈는데 이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신증』 박덕(朴德) 12살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국에 타서 드리니 나았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열녀】 본조 한씨(韓氏) 부정(副正) 오지계(吳之界)의 처로 홍무(洪武) 임오년에 남편이 애전(艾田)의 역(役)에 죽자 애통해 하여 재가하도록 친척들이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부조를 하고 정문(旌門)하였다.
【제영】 청천강에 이르니 강물이 부끄럽다. 축맹헌(祝孟獻)의 시에, “인정이란 애석해하지 않음 없나니, 항차 나는 지금 소장(少壯)도 아닌 때라, 청천강에 이르니 강물이 부끄럽네. 몇 번이나 남으로 건너 다시 시를 지어 볼까.” 하였다. 열 두 아롱진 난간 푸른 놀에 싸여 있다. 장성(張珹)의 시에, “푸른 느티나무 높은 버들 남풍을 막아서고, 열둘 아롱진 난간 푸른 놀에 싸여 있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 6년에 절도사(節度使)가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고, 따로 판관(判官)을 두었다. 숙종 8년에 목사(牧使)를 두고 판관(判官)을 감하였다. 정종(正宗) 10년에는 안북현(安北縣)으로 강등하였다. 모역죄(謀逆罪)를 범한 사람이 읍에서 났기 때문이다. 뒤에 다시 승격시켰다.
【읍호(邑號)】 밀성(密城).
【관원】 목사(牧使) 안주진 병마첨절제사(安州鎭兵馬僉節制使)를 겸한다. 1인이다.
【방면】 읍사부(邑四部) 주내(州內) 동남쪽으로 끝이 20리이다. 동주내(東州內)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75리이다. 운곡(雲谷) 동남쪽으로 끝이 60리이다. 문곡(文谷) 독곶(禿串)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갈화(葛花) 갈곶(葛串)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대대(大代)ㆍ누천(漏泉)ㆍ용두(龍頭) 모두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남면(南面)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연동(燕洞) 서쪽으로 끝이 60리이다. 청산(靑山)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평호(平湖) 위와 같다. 제비동(諸非洞)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곡(金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성지】 신성(新城) 서쪽 안체성(按體城)은 둘레가 4백 10보이며, 초루(醮樓)가 둘, 장영(將營)이 둘이고, 남쪽으로 문이 하나 있는데 신문(新門)이라 하고, 남쪽으로 수혈(水穴)이 하나 있다. 남당성(南塘城) 영종(英宗) 45년에 부읍성(附邑城)을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보이다. 외성(外城) 흙으로 쌓았는데 스스로 역(役)을 감독하여 허물어지는 것을 따라서 보수한다. 둘레는 1천 8보이며 초루가 5개, 한문(捍門)이 넷, 수문(水門)이 하나, 수구(水口)가 하나 있다.
【영아】 병영(兵營) 주성(州城)의 가운데 있으며 세종 11년에 비로소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영변에 설치하였고, 세조 13년에 이를 나누어 좌(左)ㆍ우(右)ㆍ중(中) 3도로 하였다. 하나는 영변이니 중도(中道)요, 또 하나는 강계(江界)이니 좌도(左道)요, 나머지 하나는 창성(昌城)이니 우도(右道)이다. 예종 원년에 다시 한 진(鎭)으로 합해서 영변에 두었다. 인조 5년에 양서순변사(兩西巡邊使)를 겸하고, 6년에는 순변사를 감하고 영을 본주(本州)로 옮겼다. 관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중군(中軍) 우후(虞候)가 토포사(討捕使)를 겸한다. 숙종 원년에 설치하였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세종 5년에 설치하였다가 19년에 없앴다. 병마평사(兵馬評事) 세조 8년에 설치하였다가 광해주(光海主) 14년에 없앴다. 심약(審藥)ㆍ역학훈도(譯學訓導) 각 1인이다. 속영전영(前營)은 숙문(肅門). 좌영(左營)은 덕천(德川). 중영(中營)은 중화(中和). 우영(右營)은 순천(順川). 후영(後營)은 함종(咸從). 방영(防營)의주(義州)ㆍ창성(昌城)ㆍ강계(江界)ㆍ삼화(三和)ㆍ선천(宣川). 독진(獨鎭)정주(定州)ㆍ선주(宣州)ㆍ곽산(郭山)ㆍ철산(鐵山)ㆍ용천(龍川)ㆍ의주ㆍ삭주(朔州)ㆍ창성ㆍ강계ㆍ위원(渭原)ㆍ초산(楚山)ㆍ벽동(碧潼)ㆍ삼화ㆍ영원(寧遠) 및 23진이 있다. 산성(山城)철옹(鐵甕)ㆍ백마(白馬)ㆍ용골(龍骨)ㆍ운암(雲暗)ㆍ서림(西林)ㆍ일산(釰山)ㆍ동림(東林)ㆍ능한(凌漢).
【봉수】 조청산(蔦靑山)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동을랑산(冬乙郞山) 서쪽으로 60리에 있다. 호혈(虎穴) 서쪽으로 40리 우수로(右水路)에 있다.
【역참】 관문참(官門站).
【진도】 상진(上津) 통착진(統鑿津)이라고도 하는데 영변(寧邊)의 대로(大路)와 통한다. 하진(下津) 독창진(獨倉津)이라고도 하는데 운산(雲山) 대로와 통한다. 풍포진(楓浦津) 주의 북쪽 성밖에 있으며, 박천(博川) 가산(嘉山) 대로와 통한다. 전항포진(戰舡浦津) 정주(定州)의 사잇길과 통한다.
【교량】 연청교(連淸橋)ㆍ통진교(通津橋) 모두 성밖에 있다. 신천교(新川橋) 남쪽 5리에 있다. 장평교(長坪橋)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대교(大橋)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금곡원(金谷院) 동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자산(慈山)ㆍ순천(順川) 대로와 통한다.
【누정】 청조루(聽潮樓)ㆍ자전루(紫電樓)ㆍ백승정(百勝亭) 모두 성안에 있다. 망경루(望京樓) 주 동쪽 성 위에 있다.
【사원】 청천사(淸川祠) 현종(顯宗) 경술년에 건축하여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 평양 편에 보라. 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 모두 문묘(文廟) 편에 보라. ○ 충민사(忠愍祠) 숙종 신유년에 건축해서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남이흥(南以興) 자는 자호(子豪), 호는 성은(城隱)인데, 의령인(宜寧人)이다. 벼슬은 평안병사 부원수 의춘군(平安兵使副元帥宜春君)이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박명룡(朴命龍) 벼슬은 평안 우후(平安虞候)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준(金俊) 고부(古阜) 편에 보라. 이상안(李尙安) 자는 정이(靜而)이니 광주인(廣州人)이다. 벼슬은 강계부사(江界府使)였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의상(金毅尙) 벼슬은 귀성 부사(龜城府使)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희건(李希建) 홍주인(洪州人)으로 벼슬은 용천부사 홍양군(龍川府使洪陽君)이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송도남(宋圖南)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이니, 벼슬은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장돈(張暾) 인동인(仁同人)이니, 벼슬은 개천 군수(价川郡守)였으며, 옥산군(玉山君)에 추증되었다. 김양언(金良彦) 평양 편에 보인다. 송덕영(宋德榮) 연안인(延安人)이니, 벼슬은 맹산 현감(孟山縣監)이었다. 김언수(金彦壽) 자는 명수(命叟)이고, 벼슬은 훈련봉사(訓鍊奉事)였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한덕문(韓德文) 자는 윤신(潤身)이니, 벼슬은 훈련봉사였으며 훈련정(訓鍊正)에 추증되었다. 윤혜(尹惠) 벼슬은 박천 군수(博川郡守)였다. 함응수(咸應壽) 자는 사미(士美)이고,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이었으니,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양진국(梁晉國) 자는 순향(侚鄕)이고, 벼슬은 본주(本州) 중군(中軍)이었으며 동중추(同中樞)에 추증되었다. 임충서(林忠恕) 자는 국인(國仁)이며, 벼슬은 본주 천총(本州千摠)이었고, 훈련정(訓鍊正)에 추증되었다. ○ 이상은 인조 정묘년에 전란(戰亂)으로 없어졌다.
第五集政法集第二十九卷○牧民心書卷十四
 解官六條遞代,歸裝,願留,乞宥,隱卒,遺愛。
願留解官第三條 a_285_618d


惜去之切。遮道願留。流輝史冊。以照後世。非聲貌之所能爲也。
後漢第五倫守會稽。妻自炊爨。及代當還。民攀馬號呼曰。舍我何之。〇孟嘗爲合浦太守。當還。吏人攀車請之。令不得進。乃附商人船。夜遁去。李元紘治潤州。有惠政。代去。吏民遮留。烏鵲羣飛。亦擁車行。
後漢侯霸爲淮陽太守。被召詣都。百姓號哭。遮車攀轅。臥於轍中。乞留霸一年。乃戒其乳婦棄其子。以侯君當去不能全。
285_619a唐姚元崇牧荊州。受代日。民擁馬首遮道不使去。乘馬鞭鐙。民皆截留之。
唐劉寬爲平陵令。滿秩而去。百姓攀車拒輪。充塞道中。〇顏斐尹京兆。徙平原太守。吏民號泣遮道。步步稽留。日行數十里。旣去。立碑作頌。
唐袁滋爲華州刺史。爲政淸簡。政滿。楊於陵代之。滋行。耆老遮道。不得去。於陵使喩曰。吾不敢易袁公之政。人皆羅拜流涕。乃得去。
曾子固在齊。會朝廷變法。遣使四出。公推行有方。民用不擾。旣罷。州人絶橋閉門。遮留之。夜乘間乃去。
曾致堯守壽州。有惠政。旣去。壽人遮留數日。以一騎二卒逃去。過他州。壽人猶有追之者。
姚蓋恭知頃城縣。境內大治。民遮道乞留。賜璽書賞粟帛。〇楊繼宗知嘉興府。止帶蒼頭一人。如旅寓然。滿九載。民老幼遮道留之。
陳鎰鎭편001十餘年。民親愛之。以其美鬚。呼爲鬅子爺。嘗以議事還朝。民285_619b 訛傳得代。遮道借留者數千人。衢路至不能行。鎰喩以當復來。始稍散去。
兪㯙爲醴泉郡守。未幾。郡大治。邑有歧麥之瑞。已公有謝歸。意歸寧久不還。郡人日造門以請。公曰。郡多逋負。余不喜鞭督。以故將免去。於是士民相告語。一竝盡輸焉。
柳正源爲慈仁縣監。受暇治還。仍有棄官之意。邑民守衙門三日夜不去。公爲留衙眷。示復來意。及歸。三呈辭狀。巡使不許曰。民情遑遑。如失慈母。不宜循私而廢公也。公不得已還官。邑民皆出郊歡迎。
金熙采爲長連縣監。慈良爲治。及移安峽。部民遮道十帀。公乘夜脫身逃去。詳見救災條。
奔赴闕下。乞其借留。因而許之。以順民情。此古勸善之大柄也。
後漢寇恂爲穎川太守。徵爲執金吾。從上過穎川。百姓遮道。願借寇恂一年。上乃留拜之。
285_619c後漢陽君爲繁陽令。委策輕擧。吏民上書請運穀萬斛。助官賑貧。以乞君還。
种暠爲梁州太守。被徵。吏民詣闕乞留一年。遷漢陽守。夷狄男女。送到漢陽。暠與相揖。十里不絶。
隋魏德深治貴鄕。轉館陶長。貴鄕父老詣闕。請留德深。詔許之。民士歌呼滿道。互相稱慶。
唐李君奭爲醴泉令。爲政得人和。上校獵城西。漸入渭水。見父老數十人於村佛祠設齋。上問之。父老曰。醴泉縣令李君奭有異政。考秩已滿。百姓借留。詣府乞未替。兼此祈佛力也。上默然還宮。於御扆上。大書君奭名。中書兩擬醴泉令。上皆抹去之。踰歲以懷州刺史闕。請用人。御筆曰。醴泉縣令李君奭可。中外莫測。後始聞其事。宣宗時。
李仲芳通判冀州。冀人乞留。許留一歲。歲晚將去。冀民夜私入其府。塹其居。若不可出。公諭之乃得去。
285_619d宋王允規知河淸。僧道士人等乞留云。本官到任有十奇。甚得民情。上令審官院。記其姓名。
范衷爲壽昌知縣。闢荒田二千六百畮。興水利三百四十有六區。正統五年。三考報最當遷。邑人頌德乞留。御史以聞。朝廷許之。
高麗王諧爲晉州副使。吏畏民懷。及遷東都留守。晉民涕泣。願留遂懇。乞于朝曰。借我王君一年。乃復舊任。
高麗李惟伯爲交州判官。今淮陽。東北路監倉使奏。惟伯繕理城池。修備器械。爲諸郡第一。所部連城長楊吏民等言。惟伯勸農恤民。雖秩滿當代。願見得借。王嘉之。付尙書吏部。
姜秀崑爲高敞縣監。以事責罷。縣父老遮道。乞留於方伯。民間爭出軍餉。以贖其罰。旣不得則皆涕泣如失親戚。
聲名所達。或鄰郡乞借。或二邑相爭。此賢牧之光價也。
向忞所莅州縣。皆有治聲。蔡州闕守。州人邀使者曰。願得向忞三年。
285_620a宋杜衍知乾州未朞。安撫使察其治行。以公權鳳翔府二邦之民。爭於界上。一曰此我公也。汝何奪之。一曰今我公也。汝何有焉。
李挺岳爲瑞山郡守。時大駕連歲幸溫泉。顯宗朝。雖有省約恩言。而列邑勞費尙不貲。公財處得意。吏民不知車駕近臨也。朝廷竟拜公坡州牧使。瑞人如失慈母。至相率冤편002曰。奚奪此與彼。
或久任以相安。或旣老而勉留。唯民是循。不爲法拘。治世之事也。
劉綱知寧州。莅任三十四年。民每乞留也。仁宗嘗賜酒饌。人以爲榮。正統中。請老去。民送之。涕泣載道。及卒。寧民祠之狄仁傑祠中。
史誠祖爲汶上知縣。爲治廉平寬簡。永樂七年。成祖北巡。遣御史考核285_620b 郡縣長吏賢否。還言誠祖治第一。賜璽書十行勞之。特擢濟寧知州。仍視汶上縣事。竝賜內醞一尊。織金紗衣一襲。鈔千貫。〇其後屢當遷職。輒爲民奏留。閱二十九年。竟卒於任。士民哀號。留葬城南。歲時奉祀。〇按唐虞之制。九載三考。始行黜陟。自漢以來。六期爲斷。歷代因之。我朝郡縣之官。亦以六期爲滿。而秩高者。又以三期爲滿。使臣以二周爲滿。乃皇明之制州縣官。多以九載爲限。散見上諸條。此誠爲官擇人。制法安民之良憲也。況此劉綱史誠祖等。因民籲乞。久任至三十年。此誠度越古今。孚協上下之遠猷也。近世銓官。以市恩爲急。臺臣出宰者。纔經一周。卽已內遷。以此之故。爲吏者無長慮久計。唯以剝割探胠。爲家私之計。其視大明之法。相去遠矣。
郭南知常熟縣。正統十二年。以老致仕。父老乞還任。英宗許之。〇案守令年限之法。堂下官以六十四爲限。堂上官六十七爲限。蓋於七十之前。得了此六朞三朞也。然人之精力。或相懸絶。苟有聲편003素著之人。相臣銓臣。特奏而差遣之。抑所宜也。
因民愛慕。以其聲績。得再莅斯邦。亦史冊之光也。
漢黃霸爲穎川편004太守。賜車蓋特高一丈。別駕主簿車緹油屏泥於軾前。以章有德。霸外寬內明。得吏民心。戶口歲增。治爲天下第一。徵守京兆285_620c 尹。尋坐事。再爲穎川太守。前後八年。郡中大治。〇按黃霸再爲穎川。魏相再爲河南。寇恂再爲河內。又如陳편005之樂安。陶侃之荊州。郭伋之幷州。皆再任也。或因民呼籲。或察其聲績。使之撫綏此一邦也。宋張詠再任益州。梁習爲幷州刺史。召其豪右。邊境咸安。兼貢達闕士。咸顯於世。武帝善之。文帝卽位。以君有譽幷土。重授幷州。爲天下最。
徐榮知藁城縣。親喪去官。服闋。部民乞罷新令而還榮。英宗許之。秩滿復乞留。許之。以下明史。
康彦民知天台縣著績。永樂初罷歸。洪熙元年。御史巡按。至天台縣。民二百餘人言。彦民廉公。有爲乞還之天台。以慰民望。御史以聞。宣宗歎曰。彦民去天台二十餘年。民猶思之。其善政可知。乃除江寧縣。
謝袞字子襄。爲靑田知縣。九載課最當遷。其部民相率訴於上官。乞再任。上官以聞。帝嘉之。卽擢處州知府。俾得治其故縣。子襄知處州。聲績益著。有虎遁蝗死之異。有牛將屠而逸。至前俛首若有訴。乃捐俸贖還之。285_620d 萬觀知嚴州。九年考績。治行爲海內第一。旣以憂去。將除服。嚴州民預上章。願復得觀。金衢民亦上章乞之。朝廷異焉。補平陽。有芝生堯祠。
薛愼知長淸縣。以親喪去。洪熙元年。長淸民知愼服闋。相率詣京師。乞再任。吏部尙書蹇義言。交代已久。卽如民言。又當更易。帝曰。國家置守令。但欲其得民心。雖屢易何害。遂還之。
高麗崔陟卿爲耽羅令。興利革弊。民皆安之。及還。耽羅人作亂。全羅按察使馳奏。耽羅人告。令尉侵暴以反。乃曰。若得陟卿爲令當釋兵。王謂宰相曰。有賢如此。何不用之。召賜綾絹。卽除眈羅令。耽羅人聞陟卿來。卽具輕艦迎之。比入境。皆投戈羅拜曰。公來吾屬再生矣。安堵如故。
高麗李伯謙嘗爲濟州牧使。有善政。忠肅王時。濟州賊魁。使用金成等。嘯聚兇徒。逐星主王子以叛。欲討之。難其人。賊黨咸曰。若得李伯謙,편006英來撫。吾豈敢叛乎。乃遣伯謙,英招撫之。未幾賊平。
高麗蔡靖掌慶州書記。其後東京人。與永州作亂。朝廷議遣按撫使。難285_621a 其人。聞東京人思靖不已。乃拜靖留守副使。單騎之任。東京人聞其至。反側悉安。
兪省曾爲羅州牧使。多善政。宣祖時。邑人詣闕上書。乞復借之。特命再除。
其遭喪而歸者。猶有因民不舍。或起復而還任。或喪畢而復除。
項忠爲陜西편007按察使。適陜饑。忠不待奏報。輒發倉賑之。民感其惠。聞繼母喪。民詣闕乞留。詔奪服反任。明年。徵爲大理卿。陜人復赴闕借留。天子許之。軍民喜忠復來。焚香迎迓。
孫浩永樂中知邵陽。遭喪去官。按察使頌浩善政。宣宗嘉歎。卽命起復。張璟知平山縣。秩滿。士民乞留。英宗命進秩復任。景泰初。以母憂去。復從士民請。奪情視事。
劉永事荊州知府。遭父喪。軍民萬八千餘人乞留。英宗命奪情視事。
盛顒知束鹿邑。豪右聞其來。相戒曰。是嘗劾石總兵者。其人不可犯也。285_621b 未幾丁內艱去。民留之不可。俟其服闋。相率詣闕。乞得顒再任。
暢宣知泰安縣。以母憂去。民頌於使司。仁宗命服闋還任。仁宗崩而服闋。吏部以請。帝曰。民欲之。監司言之。固當從。況有先帝之命乎。遂如其請。
劉伯吉知碭山縣。以親喪去。服除。碭山民守闕下求再任。吏部言。新令已在碭山二年矣。帝曰。新者勝舊。則民不復思。今久而又思。其賢於新者可知矣。遂易之。
宣和爲礪山縣監。恩威竝行。吏民懷之。以外喪去位。服闋。邑人上書還任。
陰與吏謀。誘動奸民。使之詣闕而乞留者。欺君罔上。厥罪甚大。
劉迪爲永寧稅課大使。秩滿。刲羊置酒。邀耆老請留。民詣闕奏乞。事覺。宣宗怒下之吏。〇王聚爲漢中同知。亦張宴求屬吏保。奏知府以聞。宣宗怒。竝屬吏罪之。自後部民奏留。率下所司覈實云。〇案明편008循吏傳285_621c 云。宣宗之世。最重循良。而吏部尙書。蹇義尤愼擇守令。考察明恕。若馬旭楊信之等十數人。皆九載奏最。爲民乞留。卽加秩留任。沿及英宗之世。吏治淳厚。部民奏留。率報可。然其間亦有作奸者。如劉迪,王聚之事是也。

[편-001]陜 :
[편-002]公 :
[편-003]續 :
[편-004]穎川 : 潁川
[편-005]審 :
[편-006]李 :
[편-007]陜西 : 陝西
[편-008]吏 :


高麗史節要 卷之十三
 明宗光孝大王[二]
[丙午十六年 宋 淳煕十三年,金 大定二十六年]

春正月,令同正朴元實,以飛語,告重房曰,校尉張彥夫等八人,謀亂,重房捕詰,彥夫對曰,方今用事者,貪鄙,酷愛白銀,賣官鬻爵,多行不法,故欲斷如此人頭,銜其口以銀,廣示朝野,使人人知貪銀以死也,彥夫,竟見殺。○遣侍郞文義赫,如金進方物,禮賓卿柳公權,賀萬春節。○金,遣昭毅大將軍耶律履,來賀生辰,○二月,金,遣大府監耶律圭,來落起復。○夏四月,政堂文學致仕崔汝諧,卒,王,在潛邸,汝諧,爲其府典籤,感異夢,歸心於王,爲羅州判官,求名果海脯,厚餽於府,王,深感之,及卽位,汝諧,賫表詣闕,隨例朝參,王,不之知也,及陛辭,因宦官以奏,王,始驚曰,崔典籤來矣,朕不省也,引見慰藉之,尋授正言,驟歷侍御史寶文閣待制,年已七十,汝諧奏,吏部錯減籍臣年,今實齒滿,例當致仕,王曰,吏部錯籍,天使然也,勿復有言,累遷樞密使,乞骸骨,特加政堂文學,仍令致仕,性寬厚,不閑吏事,才學淺短,以潛邸舊僚,得至大官。○賜宋惇光等三十三人,明經五人,及第。○五月,宋歸我漂風人李漢等六人。○六月,金,橫宣使,大理卿李槃來,槃,自入界,所至,館舍錦綺帳褥,必命撤之,又禁屠殺,每有餘食,輒令從者盛橐而行,道遇窮餓者,悉施之。○賜羊于文武參官以上,及近臣,有差。○秘書監崔陟卿,卒,陟卿,性廉介,擢第,補京山府判官,秩滿還京,足不至公卿之門者十餘年,判吏部事崔允儀,謂陟卿曰,耽羅地遠俗獷,難爲守令,聞子淸直,勿憚一往,幸撫遠民,不爲國家憂,則當報以美官,陟卿,就任,興利革弊,民皆安之,及還,允儀已死,居京三年,貧甚無以自存,將挈家還鄕,會耽羅人,苦令尉侵暴以叛,乃曰,若得陟卿爲令,當釋兵,王,謂宰相崔褒偁曰,有賢如此,何不用之,卽除耽羅令,耽羅人見,陟卿,皆投戈羅拜曰,公來,吾屬再生矣,按堵如舊,凡所至,皆有聲績,淸名勁節,老而不衰。○秋七月,有人,告耽羅叛,王驚愕,引兩府,問處置方略,卽遣閤門祗候獨孤忠,郞將池資深,爲安撫使,以式目錄事張允文,爲大府注簿,行耽羅縣令,各賜綾絹,因促上道,詔前令尉,皆加重罰,旣而聞之,無叛狀,然詔命已出,故允文上官,而前令尉,竟坐免。
史臣曰,明宗之惑人虛說,卽所謂可欺以其方,無足過者,及知其非實,而不加告者誣罔之罪,何哉,此所以來讒賊之口,生禍亂之階也。
內侍院奏,自今有進膳者,止給酒果,勿用布帛,布帛有數,而進膳者無窮,非長計也,詔曰,朕欲澤及萬物,而未遂其願,故因其薄物,必施厚惠,布帛雖費,皆是國人蒙利也,勿以爲吝,王自卽位以來,有進膳者,雖微物,輒厚賜布帛,故貪利之徒,至有旁求他方以獻者。○閏月,制曰,民惟邦本,本固,邦寧,比來,守令,刻剝其民,無所畏忌,人不堪苦,流離日多,予甚悼焉,惟爾有司,痛徵貪吏,以戒後來,如有誅求於民,招受賄賂者,所受雖微,皆從重論。
史臣權敬中曰,經曰,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雖令不從,明宗躬桓靈,而口文景,詔雖哀痛,其如五孼七嬖,招權鬻爵之弊,何,吏之不悛,民之不寧,宜矣。
八月,謁長純二陵。○有司,論晉州守金光允,安東守李光實,貪殘剝民之罪,竝流之。
史臣權敬中曰,自庚癸政亂以來,市井屠沽蹶張之伍,濫側外寄,多矣,彼光允輩,平日競錐刀之末,爭升合之贏,攻剽爲得計,欺賣爲良謀,當此之時,烏知廉恥,爲國維,生民,爲邦本哉,一朝宰百里之地,操與奪之權,其爲貪惏漁利,固其所也,嗚呼,放牛馬於禾黍之場,縱鷹犬於雉兔之原,欲禁其咬嚙搏噬,其可乎哉。
九月辛酉,鎭星犯歲,太史奏,恐有內亂,請於光嵒摠持兩寺,設佛頂消灾道場,又於明仁殿,講仁王經,以禳之。
史臣曰,人事失於下,天變應於上,故日月薄食,彗孛飛流,莫不有所爲而然也,人君遇灾,當責躬修德,以消禍萌,而察候之官,專欲事佛禳禬,以惑王心,而宰相臺諫,莫有規諫者,何哉。
左倉竭,無以頒祿,借典牧司所畜白金六百二十四斤,布六千匹,將作監布三萬匹,以補之。○冬十月,流讒人朴敦夫于遠島,時匿名書甚多,誣人罪過,有得罪者,莫知其由,人皆危懼,重房,密令禁軍伺之,敦夫懷書,將帖門,捕得流之,道死。○詔將軍車若松等四十三人,兼屬內侍院及茶房,先是,重房奏,自庚寅以來,武官皆兼文官,而內侍茶房,獨不得兼,請許兼屬,故有是命,武官兼屬,自此始。○恭化侯瑛,卒,瑛江陵公溫之子,性沈靜寡欲,篤志于學,嘗欲赴擧,以無舊例不果,晩年,酷好浮屠法。○親袷于大廟,赦。○初,上將軍石隣,受驛吏賂銀,屬事於西海道按察康用儒,不從,隣,憾之,誣構用儒於王,請免其職,王,不聽,隣,怒,瞋目張拳,厲聲曰,吾不復仕矣,遂解帶,投地而去,王,遣內豎,留之再三,隣,不奉旨,又命兵部尙書梁翼京留之,翼京,挽袖諭之曰,孰有主上命召,而不就者乎,隣,乃入內殿,王,溫言慰諭,因與之飮,詔罷用儒,以解其怒,隣退,還收其詔,隣數日不衛,王屢遣人,命就職,隣猶偃蹇不朝,隣,寒微,世居倉旁,拾落庭米以生,補禁軍,庚寅之亂,從李義方擢郞將,遂顯。○十一月,遣刑部侍郞于述儒,如金,謝落起復,禮部侍郞任濡,謝橫宣,中郞將盧孝敦,謝賀生辰,郞將崔光甫,賀正。○十二月,以上將軍崔世輔,同修國事,將軍崔連,金富,竝爲禮部侍郞,三人,皆武官也,武官之兼儒官始此,時,有人,訴重房曰,修國史文克謙,直書毅宗被弑之事,弑君,天下之大惡,宜令武官兼之,使不得直書,克謙,聞之懼,密奏於王,王,不敢違武臣意,然,惡其非舊制,乃下制,同修國事,世輔不請,而直以史字改之,由是,毅宗實錄,脫略多不實,克謙嘗於史堂,戱世輔曰,儒官之爲上將軍,忝自我始,武官之同修國史,亦自公始,相與一噱。
史臣曰,史宮,公萬世之是非,所以垂勸戒於後世,故,齊崔杼之弑莊公也,太史兄弟三人,相踵就僇,而書者不止,今弑逆之儔,將逃惡名,自兼國史,而欲滅其跡,不知滔天罪惡,欲蓋而彌彰,不亦愚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