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현감 송이석 묘표(감찰공 사위)

比安縣監宋公墓誌銘 幷序 公恩津人。尤菴先生從孫也

아베베1 2011. 9. 18. 17:09

 

 

 

문성공 12세손 (증 도승지 휘 탁)

         13세손 (증 참  판  휘 세영 )--- 

                  참판공  사위  현감   송이석  (은진인 우암선생의 재종손)

                                           송이석의 사위 -- 

                                                       연안인  월사 이정구      

 

  문성공 저의 13세손  휘 세영 (증 참판의  사위분은 은진인  송이석 , 외손녀 사위는 월사 이정구 선생이라는 사실이다)  

三淵集拾遺卷之二十五
 行狀 附言行錄
監察崔公行狀 a_167_138b


公諱世榮字夢與。全州人。高麗侍中文成公河之後。167_138c 再傳而入我朝有諱霮。官至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是生諱德之號烟村。早擢文科。以淸名直道。爲世所重。文廟時以藝文直提學。引年告退。朝廷惜其去。六臣諸賢皆贈詩以送。比之二䟽云。歷三世而爲濟用監副奉事諱彦淸。卽公之高祖。以一蠧鄭先生彌甥。有所肖似。謝官守靜而終。曾祖諱稀壽。安東判官。本作擢司馬典七邑有聲績 祖諱應夏監鎭岑縣。以長德見稱於沙溪金先生。考諱琢 一作有昏朝時三字 以上庠生。倡多士論斥爾瞻。仁廟改玉。闡文科。所與交盡一時名賢。而以無要路跡。蹭蹬半世。官止兵曹正郞。尤菴167_138d 宋先生銘其墓。妣平康蔡氏。贈司僕寺正忠益之女。外祖曰古玉鄭先生。稱其賢淑。壼範可知。以萬曆癸丑十一月二十日生公。天姿厚重。弱不好弄。自課讀書。中庚寅司馬。正郞公遘疾淹歲。公晝夜扶護。衣不解帶者如一日。逮創巨雖甚貧空。竭誠盡禮。送終得無憾。服闋拜典牲署參奉。時兼管司畜之任久矣。公以謂祭享重事。不當混倂於待虜使。尤菴聞而然之。遂卽入告。而別其署。司畜之復舊。盖由於此。未幾陞本署奉事。公以親志不廢擧業。値慶科做點於泮宮。爲媢嫉者所搆以詆訿國子長。橫遭白簡。人多寃167_139a 之。厥後㙜官慚悔來謝。國子長亦知其誣而釋然。及其東銓。擧爲寧陵參奉。陵寢適有無妄之災。同僚不欲自當。推諉於公。公與之就理者再。終無幾微色。聞者以爲難。當弘濟洞遷封時。例當用勞陞出。而選部有可通之便。人多勸公一言。而公以蔭路序進。自有常典。不當以遅速爲意。終不聽。竟以常格遷司贍署奉事。其恬於宦情如此。甲寅夏以山陵監造官超敍司圃署別提。出爲三嘉縣監。視事無何。有邑儒權鑑之獄。權與儕流曾爲尤菴先生見仇於星州之兇黨。方伯必欲鍛鍊。而公終始秉正。毅然不少撓。167_139b 方伯大加慍恚。遂移其獄。及御史至。將列其善狀。又慫慂使不得純褒。時公年近七耋。而望闕禮及聖廟焚香。以至社稷城隍等祀必躬行。不以寒暑而少怠。遇旱走群望虔禱。雨輒立應。衆皆稱之曰雖古之崔少府。亦無以過也。邑下曠野植以松杉甚衆。人未喩其意。及至旱炎。人多賴之。其爲民慮遠類如此。有一時相子姓曾畜一妓而居在鄰壤者。橫恣無顧忌。公特惡而 一有面字 斥之。其人含之次骨。適會繡衣。乃其時相私人。相與媒糵而中之。遂下廷尉問。人皆代怖。公對簿甚晳。而掇拾猶未已。究覈經年。卒無絲毫實167_139c 乃已。使其時有萬一近似則必不免禍罟云。壬戌拜司憲府監察。本府直宿之䂓。廢却盖久矣。公獨行之。諸寮或厭苦。而亦不敢崖異焉已。除平陵察訪。時値荐飢。驛路凋弊。公盡心撫摩。郵卒以蘇。馬政亦擧。所有支供漁戶。在前率皆侵剝。以充苞苴者多矣。公務從省約。使不失所。衆皆懷惠。至今歌詠。秩滿閑居。以丙寅五月二十日暴病卒。享年七十 一有有字 四。公事親承顔盡歡。左右無違。前後喪皆率禮罔愆。享先極其誠愨而猶若歉然。與季氏友愛篤至。日夕相守怡怡如也。及喪自鬻其田而完葬。撫視諸孤如己出。睦167_139d 婣親族。以至接人一以悃愊爲主。客至不問貴賤小大。必與之從容談笑。坦然開懷。人莫不愛慕。平生無强暴之言峭刻之行。雖於家人子弟。見有不及。亦未甞形於聲色。一作其恢弘如此 喜飮酒。至居官絶不近口。莅民以如傷爲心。興利除害。如己嗜慾。律己甚嚴而接下以寬。故吏民俱安。庶事自理。去後民追思碑之。年久而猶誦其遺愛也。居家不事産業。罷官歸槖如洗。僦屋蕭然。簞瓢屢空。處之晏如也。常謂人家譜牒不明。幾於知父而不知祖。間有承訛襲謬。而甚至移宗冒族者亦多。此豈爲人之道乎。遂裒稡諸宗家乘而167_140a 編摩之。積勞淹歲。始克成書。其明譜係正倫理之意。可謂篤矣。配連山徐氏。贈戶曹佐郞效 一作善 積之女。姿 一作稟 質慈惠。致謹於滫瀡蘋藻。又處貧以泰。隨公之官。不以一縷凂其治。宗黨歸其仁。後公十年而沒。始從葬于交河某洞。以丙戌十月日。移葬公州某向之原。有三男二女。男長邦彦。由薦入仕。今爲老職僉樞。次邦藎早死。邦顯。一有女長宋彛錫縣監次許坪通德郞 其餘曾孫某某。昌翕以里中小兒。甞挾冊趍隅。蒙公誘掖之勤矣。甞記其德宇鴻厖。藹然和氣之薰人。所聞於維楊鄕黨則稱公長德之懿。與操執堅確。非衰世人物。167_140b 惜乎其晩仕多枳。未及有所施爲。窃所嗟惋矣。今僉樞公以昌翕有親炙之素。屬以狀述。意甚切至。誼不敢以不文辭。謹就行錄。略加詮次。以俟立言者之財擇焉。


 

 

 

寒水齋先生文集卷之三十一

 墓表
監察贈參判崔公 世榮 墓表 a_151_087c


 

光海昏亂。賊臣爾瞻倡讎母論。勢焰黨天。時則有若151_087d太學生崔公琢。倡多士抗章。直斥其兇邪。聲名震一時。遂杜門田廬。與世相忘者十餘年。仁廟改玉。擢文科官郡守。尤菴宋先生銘其墓。亟稱其賢。有丈夫子二人。公其長也。諱世榮字夢與。生於萬曆癸丑復月廿日。天資厚重。不妄游戲。自幼好讀書。及長修擧子業。有名場屋。庚寅中司馬。壬辰丁外艱。居喪盡禮。制終奉母夫人居于墓下。爲力田專養計。戊戌筮仕爲典牲參奉。庚子陞奉事。乙巳母夫人下世。公年已衰而率禮如前。公嘗爲奉事時。値慶科。做點于泮宮。臺官流言以詆訾國子長劾遞。後國子長秉銓。知151_088a其誣。首先牽復。除寧陵參奉。例遷司瞻奉事。仁宣大妃之喪。以山陵監董勞陞司圃別提。出爲三嘉縣監。時邑儒權鑑以尊尙儒賢。見仇於兇黨。方伯欲鍛鍊成獄。而公終始守正。確然不撓。方伯大加慍怒。而亦不敢中傷。有一勢家子畜邑妓橫甚。公大斥不饒。其人銜之。嗾繡衣構誣。經年逮獄。卒無事實。壬戌拜司憲府監察。有盡職稱。秋除平陵察訪。時値荐饑。盡心撫摩。郵卒穌馬政擧。漁戶徵供。一倂蠲除。積瘼如洗。衆皆懷惠。秩滿閒居數年。氣力康健。丙寅五月廿日無疾而逝。壽七十四。始葬交河綱橋里。丙戌151_088b移窆于公州治西曲火川負坎之原。後以長子貴贈嘉善大夫戶曹參判。二配俱贈貞夫人。淑人徐氏祔焉。公性至孝。竭力事親。左右無違。奉先極其誠敬。與弟世章友愛篤至。世章早歿。躬莅凡百。至鬻己田而營葬。撫視諸孤如己出。推以至於宗族。無不得其歡心。所與交皆當世賢人君子。平生無躁暴之言。峭刻之行。酒戶甚寬。而居官未嘗近口。律己甚嚴而撫下以仁。去後民追思不忘。樹石而誦之。蓋其廉節。是公之長物。所至不以一毫自累。及歸環堵蕭然。而處之晏然。常以爲譜牒不可不明。裒稡氏族之書。編151_088c成一部。以爲講睦之資。全州之崔。以高麗侍中阿爲上祖。入我朝。有曰霮。集賢殿提學。有曰德之。藝文館直提學。世號煙村先生。立祠俎豆。高祖諱彥淸。奉事。是一蠹之彌甥。人稱小一蠹。曾祖諱稀壽。判官。祖諱應夏。縣監。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之女。尤齋先生撰郡守公墓表。備列其賢德。淑人貫連山。其考贈佐郞效積。稟性淑哲。取與不妄。甘旨之供。蘋蘩之薦。一出於至誠。宗門式之。年八十六。歿於乙亥八月十日。擧三男二女。男長邦彥。以學術屢登別薦。歷幾官。今爲老職同樞。次邦藎,邦顯。女適宋彝錫縣監。次151_088d許玶。邦彥四男。守綱,守紀,守經,守約。守紀爲邦藎後。四女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壽兼。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安希仁,尹侃。宋壻三男百源,性源參奉,萬源。四女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敍,趙明濟。許壻二男紳,繗。女未行。內外曾玄不盡錄。嗚呼。公以名父之子。祇承慈訓。行誼兼備。文藝夙成。宜其早揚王庭。大鳴于世。而不幸蹉跎。棲遲朱墨之間。惜哉。余綴戚屬。自幼周旋於牀下。景仰有素矣。顧今長老零落已盡。知公之詳莫余若也。同樞公徵以墓文。義不敢辭。遂撮少日所見聞。略序如右。


 

 

 

 

陶谷集卷之十七

 墓誌銘
比安縣監宋公墓誌銘 幷序 a_181_202a


 

公恩津人。尤菴先生從孫也。尤菴以道德學問。伏一世。門族承化。咸歸軌度。公旣屬邇而居近。薰襲最久。其賢於人宜也。若泝其先懿。則雙淸堂愉。以肥遯著媺於國初。名德相承。爲聞家。雙淸之後西阜公龜壽。孝義卓殊。有孫邦祚官佐郞。號習靜。以剛直爲士友所重。習靜之子時瑩。以兄忠顯公時榮殉節虜難。嘗181_202b 拜大君師傅。引義辭赴瀋。遂閉伏以終。寔公之祖考也。考基善亦守志不仕。娶全義李氏牧使聖基女。生公於崇禎辛巳。公生有令質。自拔於倫類。孝友克篤。常以未得終養爲至痛。喪餘哀動傍人。尤潔修祭奠。廟器齋服。亡不致虔。弟妹惸孑。力爲佽助。使各有歸處。相對怡愉。歡意可掬。又作堂。名以聯棣。尤菴記之。有勉勖語。公奉持服行。畢身靡懈。平居。言行必飭。每自警省曰。得無有乖於則否。待人亡裏襮。一飮以和。然見其非。略不假借。皆嚴憚之。仕爲繕工監役。轉典牲主簿。出比安縣監。其爲官。一以奉公勤事爲181_202c 主。在將。作梏制奄人。使不得作奸。遇重傷而不顧。莅外邑。戢吏寬民。興學校奬儒術。居一年。闔境騰頌。公素無宦情。特黽勉耳。及歸。喜反初服。悠然也。亡何。己巳之禍作。尤菴受後命。自是尤無意於世。屛跡西原山中。與尤菴孫校理疇錫議倣花樹故事。而校理公卒。事雖不就。其志可見也。公年五十四。以甲戌十二月二十五日卒。與配完山崔氏合窆于淸州晩山。崔氏監察世榮女。有婦德。克承公。男百源,性源,萬源俱無嗣。甲相,復相爲伯仲繼子。四女爲李興朝,李思道,金時叙,趙明濟妻。公諱彝錫。字君叙。性源仕爲郡守。181_202d 銘曰。
市津之氏。崇學尙志。爲世所右。高賢挺起。臨敎門戺。公爰敬受。家焉而軌。仕以之理。允矣無咎。而摭而誌。曰石于隧。千其壽。

陶谷集卷之九
 神道碑銘
左參贊梅澗李公神道碑銘 幷序 a_181_018d


181_019a延安李氏。自月沙文忠公用文章雪國誣致大名。其二子白洲,玄洲公。俱以詞學黼黻王家。世數文章家。必以延安氏爲稱首。二公各有四子。又克嗣先業。諱翊相字弼卿者。玄洲公季子也。學語。便曉文字。稍長。藻思日進。二十七。魁司馬試。明年。發解東堂。名聲大振。三十五。逐魁泮選。命直赴庚子式年。登乙科。又三年。中文臣庭試。膺臯比之錫。朝廷方重文士。處公皆館閣淸要。藝文館則自檢閱陞待敎,奉敎。侍講院則文學,兼司書,兼輔德,弼善,輔德。弘文館則副修撰,校理,副校理,應敎。兼西學敎授,校書館校理。常帶知181_019b 製敎。顯廟上昇。差行狀纂集堂上。莊烈王后喪。差誌文製述官。屢拜成均館大司成,弘文館副提學。前後兼承文校書,提調,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知經筵春秋館事。顯廟實錄。爲羣奸所誣亂。更化初。設局改修。極遴三長才。公爲都廳堂上。國制兩館提學。所以儲擬文衡。最爲詞垣高選。公拜藝文提學。辭曰。臣家世掌絲綸。自臣祖至臣身。爲是任者。三世五人。臣實空疎。懼不堪。上溫諭不許。公雖以文事任用。立朝言議不苟。遇事侃侃。乙巳。爲正言。論醫官骫法寬貰。寢郞勘律太過。嚴敎特遞。已復拜。請收趙181_019c 絅無名之俸。劾外藩私獻。丁未。兩司論相積被竄。公旣爭論。復申疏。語多切直。又特遞在玉堂。論譴責銓長新構殿閣之過。請勿許參贊宋浚吉歸。極論神德王后祔廟之合禮。庚戌。爲司諫。論不當抑買民家營主第。爲執義。論李元禎,李台瑞等科塲用私之罪。辛亥大飢。公爲大司諫。請蠲减宿逋。別擧救民之政。冬有雷。延訪諸臣。公請斥絶左道。毋留心玩好。痛禁糜費。仍引古高䯻一尺語。反復陳戒。上爲之改容。積寵任益專。同春宋文正公疏斥忤旨。諸臣相繼獲罪。公連啓力爭。癸丑。爲吏曹參議。注擬不承上意。181_019d 嚴旨特罷。大臣以下爭不能得。肅廟嗣位。以諫長上箚請依明宣兩朝故事。卒哭前頻御經筵。又引范祖禹凡人進學。罔不在少時之語。懇懇不已。上嘉納。有郭世楗者。投匭齕尤庵宋文正公。公以承旨。論列情狀。又登筵面斥尹鑴,許穆。爲大司憲。劾穆及其倘與。羣小積忿恨劾罷之。復左補江陵府使。及歸。有李有湞,李煥等兇書。公名入其中。鑴輩嗾之也。鑴又上密箚請鞫。禍且不測。賴上燭其奸。不得售。庚申。奸倘逬黜。除公憲長。公論逆宗楨,柟及柳赫然,權大運,閔煕等或拿或竄。輿論韙之。其爲副學。遇詢181_020a 永昭殿練祭當否。對以當行。援據典禮確甚。上亟稱其明快。時刊心經釋疑。公疏論此書本非李滉手勘。門徒各記師說。多疎略。請令宋時烈釐正。許之。尤庵造朝懇乞致仕。獲允。公言出入筵席。補益弘多。遽許休致。朝野缺望。宜積誠勉留。諮訪治道。嘗侍講筵。言婦寺相倚爲奸。固當並爲深戒。奄禍甚女寵。漢唐事可見。又以唐玄宗,德宗始初淸明。終任匪人致寇亂。申戒切至。時朝論睽乖日甚。跡不安。出爲開城留守。頃之。復以憲長召。羅良佐誣辱尤庵竄邊。其倘力護。反斥斥良佐者。公爲別白是非。固不能平。及公爲181_020b 吏曹判書。遂恣意擊去。亡何。有長秋易位之變。公驚痛涕泣。爲繳爭計。趣駕赴闕庭請。已罷。轉往楊州丙舍。辭解兼帶諸任。疾病。語子弟曰。生丁不辰。見今日景象。一朝溘然。眞是極樂世界。盖公爲人雖沖和樂易。素以名節飭躬。當消長之會。必挺然有立。其出東府也。尤菴以爲事光竹帛。少與尹鑴善。後得其心術。絶之。性簡靜。不喜徵逐。所居有林壑之勝。日吟哦松竹間。於外累泊如也。淸儉自律。愼於辭受。商胥無敢跡其門。最惡朝士營利之習。常痛戒家人。內行純篤。以大夫人殉節江都。不忍履其地。待庶母事伯兄。181_020c 各盡其道。二兄早世。撫孤如己出。公辛亥。以春坊官。贊相東宮嘉禮。陞通政。乙卯。特陞漢城府右尹。辛酉。視作翼陵。陞嘉義。癸亥。掌太祖上諡事。陞資憲。戊辰。又治徽陵方上。陞正憲。歷職甚多。前所列者不擧。未第時。爲靖陵參奉。旣第。分隷承文院。自正字。例陞至博士。爲成均館典籍,直講,司成,兵吏曹佐郞,正郞,司憲府持平,司諫院獻納,咸鏡北道兵馬評事,議政府舍人,尙衣院正。陞緋爲五衛將,兵曹參知,禮戶工三曹參議。在亞卿爲左尹。遍歷六曹參判。迭兼金吾捴管。屢爲都承旨。及陞八座。爲工曹判書,181_020d 左右參贊,知中樞府事。終焉。肅宗十七年辛未八月二十二日也。距其生天啓乙丑。爲六十七年。月沙公諱廷龜。官左議政。玄洲公諱昭漢。刑曹參判。其媲驪州李氏。左贊成尙毅之女。公媲晉州柳氏。統制使琳之女。與公合德。後公十三年癸未卒。壽七十六。同公葬廣州文暎山下。有三男。光朝都正,興朝進士,昌朝。一女適主簿尹寔。光朝娶大司憲金益炅女。生男彦臣直長,良臣。女適校理沈泰賢,縣令宋文相,判官尹潝,參奉金聖梓,士人趙榮後。興朝先後娶承旨趙胤錫,縣監宋彝錫。無育。子良臣。昌朝娶觀察使181_021a 南正重女。生男世臣。公別自號梅磵翁。有文集七卷行于世。肅宗丁酉。賜公諡文僖。博聞多見曰文。小心恭愼曰僖。世常謂文人鮮實用此。未必然。公文詞旣美。而諸所風議。又足以裨益世道。則其爲用也大矣。烏可曰鮮乎哉。是宜銘。銘曰。
考公之世。奎壁委彩。華國盛名。汔于累代。公承徽跡。乃訓克邁。翺翔藝林。秀出倫輩。孰播其英。而弗敦實。我有素守。匪禍是怵。講筵臺席。昌言勁筆。激揚斯在。正慝爰別。竹帛有光。大老攸歎。節惠象行。身名具完。墓之有石。昭美于刊。質而不諛。永垂後觀。


송자대전 제113권
 서(書)
박사원(朴士元)에게 답함 - 경신년(1680, 숙종 6년, 선생 74세) 1월 12일


보내온 편지에 당연히 권면(勸勉)해 줄 것을 권면해 주지 않고 감싸 주는 뜻이 없지 않으니, 이것이 비록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자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네. 그러나 기왕의 일은 버려두고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오직 앞으로의 일은 아마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다만 ‘부도즉행(符到卽行)’ 네 글자가 있을 따름일세.
그리고 별지(別紙)에도 감히 말이 없을 수 없어 이렇게 반복하여 시금(時禁)을 범하였으니 죽을죄를 지은 것이네. 병 때문에 남을 시켜 쓰므로 할 말 다하지 못하네.


별지
‘사물을 궁리하여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格物而至於物]’에서의 물(物) 자도 보통 의심하여 어떤 사람은 극(極) 자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 자 아래에 ‘지극(之極)’ 두 자가 빠졌다고 의심을 하기도 하네. 그러나 《이정전서(二程全書)》 및 《근사록(近思錄)》의 주(註)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모두 ‘지어물(至於物)’로 되어 있으니, 어찌 감히 함부로 논의(論議)하겠는가.
나는 이 한 구절의 주의(主意)는 오로지 지(至) 자에 있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만물(萬物) 만사(萬事)가 극(極)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르렀다[至]’고 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렇다면 지(至) 자는 자연 극(極) 자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다시 극 자를 첨가하지 않아도 뜻이 이미 충분한 것이네. 이렇게 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네. 어떤 사람은,
“물(物) 자 아래의 칙(則) 자는 법칙(法則)의 칙 자로 해석해야 되니, 주자(朱子)가 이 구절을 해석한 글에 ‘물은 형체이고 칙은 이치이다. 운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정자(程子)도 일찍이 ‘사물(事物)에는 모두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에 이르는 것이 곧 격물(格物)이다.’ 하였으니, 말뜻이 또한 주자의 해석과 서로 합치된다.”
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떠한가? 아울러 소상히 살펴보기 바라네. 인편이 있는 대로 가르쳐 준다면 매우 다행이겠네.
보내온 편지에, 두 물(物) 자가 중첩된 것을 가지고 의심을 했는데, 이것은 그렇지가 않네. 주자가 논한,
“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구하되 그 사물의 궁극(窮極)에 이르지 못하면 이치가 궁구(窮究)되지 않음이 있어 아는 것 역시 극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궁극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다…….”
한 말로써 본다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오로지 지(至) 자에 있고 물(物) 자는 다만 조어(措語) 사이에 끼어 넘어가는 것일 뿐이네.
‘태극이 동하여 양을 생한다.[太極動而生陽]’에 대하여.
정자(程子)의,
“음양(陰陽)은 시작이 없고 동정(動靜)은 먼저가 없다.”
는 설과, 주자의,
“음(陰)이 되기 전은 바로 양(陽)이고 양이 되기 전은 또 바로 음이다.”
고 한 설을 보면 의심스러운 바가 없을 것이네.
대개 음양ㆍ동정은 서로 무궁(無窮)하게 추이(推移)하는 것이나 태극이 그 체(體)일세. 그런데 지금 태극을 현공독립(懸公獨立)한 것이라 한다면 아주 잘못된 것이네. 그리고 자네가 말한,
“기기(氣機)를 타고 움직인다.”
한 것도 조금은 병통이 있는 듯하네. 대개 움직이기 전에 태극(太極)이 타는 것이 기기(氣機)이고 움직인 때에 비로소 기기를 타는 것이 아닐세. 움직이지 않았을 때 타는 것은 정기(靜氣)로서 음에 속하고, 움직이려 할 때 타는 것은 동기(動機)로서 양(陽)에 속하네.
대저 태극에는 태음(太陰)ㆍ태양(太陽)이 있고 소음(小陰)ㆍ소양(小陽)이 있으니, 태극의 미동(未動)과 이동(已動)은 바로 태음ㆍ태양이고 동정(動靜)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바로 소음ㆍ소양이네. 음양이 결합하여 오행(五行)을 낳는 것은 작은 중의 작은 것이고 오행이 변화하여 인물(人物)을 낳는 것은 작은 것 중에 더욱 작은 것이네. 이와 같이 이회(理會)한다면 의심되는 것이 없을 것일세.
‘조모(祖母)와 아비의 상을 함께 당했으면 어떤 복(服)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과거에 나의 종형 시영(時瑩)의 손자 이석(彛錫)이 이러한 변례(變禮)를 당했는데, 장사 때에 사우(士友)들이 많이 모였고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윤공(尹公) 같은 사람도 와서 의논이 분분하였으니, 이는 대개 복(服)으로 말하면 참최(斬衰)가 중하고 재최(齊衰)가 경하지만 이치로 말하면 이 재최는 바로 아비를 위하여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네. 또 대전(大傳 《예기(禮記)》 편명(篇名))에,
“은혜를 사용하여 부모로부터 차등 있게 올라가 조(祖)에 이르는 것을 경(輕)이라 하고, 의(義)를 사용하여 할아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 예(禰)에 이르는 것을 중(重)이라 하니, 한 번은 경하고 한 번은 중한 것은 그 사의(事宜)가 그러한 것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상례(喪禮)는 의(義)로써 단정(斷定)하는 경우가 많네.
또 어떤 사람의 설(說)은,
“《예기(禮記)》에 병상(並喪)의 제사에 대하여 논(論)하기를 ‘중(重)한 것을 먼저하고 경(輕)한 것을 뒤에 한다.’고 했는데 지금 이 양상(兩喪)의 제사에 대해서는 어느 쪽을 중히 여겨서 먼저 제사를 올려야 하는가.”
하였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의심하다가 결정짓지 못하고 파하였네. 그후에 이석(彛錫)은 항상 재복(齊服)을 입고 다녔네. 그 마음속에는 미안한 바가 있는 듯하였으나 자연(自然)의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예(禮)에는 없으나 그 중도(中道)를 얻은 것인가 싶네. 그러나 끝내는 그 득실에 대해서는 감히 결정하지 못하겠네.
출계(出系)하여 남의 후사(後嗣)가 되어 그 후계로 들어간 집의 아들이 죽은 지가 오래되지 않았다면 후계로 들어간 아들이 추복(追服)하여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이것 역시 변례(變禮)이므로 단정하기가 어렵네. 그러나 증거로 인용할 만한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상복소기(喪服小記 《예기(禮記)》의 편명)에,
“생전에 만나 보지 못한 조부모(祖父母)와 제부 곤제(諸父昆弟)에 대해서 나의 아버지는 태상(稅喪)을 입지만 나는 복을 입지 않는다.”
고 했는데, 정현(鄭玄)의 주(註)에,
“타국에서 태어났고 조부모와 제부 곤제는 모두 본국에 있다면 내가 모두 알지 못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지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죽은 시일이 오래되었다면 아버지는 추급하여 복을 입어야 하지만 나는 입지 않는다.”
했네. 그런데 북제(北齊)의 장량(張亮)이 정현의 주를 반박하기를,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生不及]는 것은 바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대개 생존한 대(代)가 다르면 다시 추복(追服)하지 않는 것이다. 운운”
하였네. 지금 후계로 들어간 집의 아들이 내가 출계하기 전에 죽었다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예(例)를 준용(準用)해야 하네. 정주(鄭註 정현(鄭玄)이 낸 주석(註釋))가 비록 장씨에게 반박을 당하였지만, 그가 말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는 설이 오늘날의 증거가 될 만하네. 나의 뜻은 이와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에게 출계(出系)한 자는 예(禮)가 이미 중자(衆子)들과 동일하니, 그 장자(長子)를 위하여 참최(斬衰)를 입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네. 대저 자식을 위하여 참최를 입는 것은 예에 의거하면 반드시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한 자라야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한다.’고 하는 것은 조부 이상이 모두 장자로서 서로 계승한 것을 말하며, 그 사이에 만약 지자(支子)가 전중(傳重)하거나 다른 사람의 자식을 양자로 삼아 후사로 삼은 자가 있으면 비록 여러 대 뒤라 하더라도 장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을 수 없는 것이네.
그러나 주 선생(朱先生)의 고조(高祖) 진(振)이 사실은 그 아비 유보(惟甫)의 지자(支子)이었으니,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한 것이 아닌데도 선생은 그 장자 숙(塾)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었던 것을 보면 비록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하지 않았더라도 할아비와 아비의 뒤를 계승했으면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할 것이네.
그리고 아래 조항에 물은바 갑을(甲乙)의 설(說)도 이 뜻으로 단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일세. ‘아비를 계승한 자식은 할아비에게 뵙는다.[繼禰之子朝祖]’라고 하였는데, 조묘(祖廟)가 한 마을에 있고 생존시에 드나들며 배알(拜謁)했었다면 지금 어찌 뵙지 않겠는가. 그러니 부제(祔祭)를 조묘에 행하는 일은 더욱 의심할 것이 없네. 그러나 한 마을에 함께 살더라도 형편이 곤란한 경우에는 지방(紙榜)으로 행하는 것도 무방하네. 그러나 감히 단정하여 말하지는 못하겠네.


 

[주D-001]태상(稅喪) : 시일이 경과한 뒤에 비로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추복(追服)을 입는 것이다.
[주D-002]전중(傳重) : 적자(嫡子)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조부모의 복을 입는 것이다. 곧 아비가 죽은 적손이 조부모의 계통(系統)을 이어받아, 상제(喪祭)와 종묘(宗廟) 제향(祭享)의 중임(重任)을 전수받는 것이다. 《儀禮 喪服》
[주D-003]부제(祔祭) : 삼년상을 마친 뒤 신주(神主)를 조상의 신주가 있는 사당(祠堂)에 모시고 지내는 제사이다.

 

송자대전 제143권
 기(記)
연체당 기(聯棣堂記)


삼가 생각건대, 우리 집의 세덕(世德)은 예부터 효우(孝友)로 전해 왔다. 서부 부군(西阜府君)께서는 지극한 성품이 순후(純厚)하고 독실(篤實)하였다. 규암 선생(圭菴先生 송인수(宋麟壽))이 사천(泗川)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매양 해와 달에게 기도(祈禱)하여 바삐 사유(赦宥)를 받아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 뒤에 사유를 받아 돌아와서는 슬픔과 기쁨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병이 들어서 별세하였다.
우리 숙부(叔父) 습정공(習靜公)은 또 나의 선부군(先府君) 수옹공(睡翁公)과 더불어 영동(永同)ㆍ옥천(沃川) 경내에 우거(寓居)하여 서로의 거리가 10리쯤 되었는데, 사흘이 멀다고 자주 오갔다. 술이 익으면 서로 불렀고,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서로 기다렸다. 발자국에 고인 물이 마르기도 전에 문득 모였고, 모이면 반드시 두 사람이 다 자기의 가사(家事)를 잊고서 오히려 함께 살지 못함을 한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습정공이 북도 찰방(北道察訪)으로 좌천된 뒤에 보낸 시(詩)에,
기러기는 넓은 호서를 향해 가는데 / 鴈向湖西闊
사람은 머나먼 새북의 나그네 되었네 / 人羈塞北幽
하였다. 선부군은 이 시를 읊조리다가 눈물이 글썽하였고, 항상 벽에 걸어 두고서 눈여겨보며 직접 얼굴을 대하듯 했다. 그후 습정공이 관서(關西)에서 별세하자, 선부군이 쇠를 녹이는 듯한 무더위를 무릅쓰고 필마(匹馬)로 분곡(奔哭)하였다. 6월부터 동짓달까지 바깥채에 거처하면서 고기를 들지 않다가 장사를 마친 다음에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일찍이 알았더라면 어찌 하루라도 떨어져 있었겠는가.”
하였다.
야은공(野隱公)은 동기(同氣)가 여섯 사람으로 모부인(母夫人)을 함께 봉양(奉養)하였는데 정성껏 봉양하고 예(禮)대로 제사하여 향리(鄕里)가 모두 감화되었다. 형제가 한 이불 밑에 잠자며 밤낮으로 화락하였고, 아주 가까운 곳이라도 가고 올 적에는 반드시 서로 따라다녔다. 야은공은 성품이 엄해서 여러 아우 중에 조금이라도 허물이 있으면 질책해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나 여러 아우가 모두 사양하고 자책하여 화평한 기색을 끝내 잃지 않았다. 양친(兩親)을 다 여의게 되어서는 가난에 쪼들려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모부인(母夫人)의 상담(祥禫 대상(大祥)과 담제(禫祭))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서로 헤어질 때 잡은 손을 차마 놓지 못하였다. 가는 이는 돌아보고 보내는 이는 눈물지으니, 보는 자가 모두 낯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둘째인 진사공(進士公)의 자질이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김씨에게 출가(出嫁)한 매씨(妹氏) 집에 갔다가 그의 가난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러므로 그 누이동생이 함께 앉아 있었으나, 차마 가난함을 말하지 못하였다. 공이 그의 자녀(子女)를 불쌍하게 여겨 항상 돌보아 주고 혼가(婚嫁)를 반드시 자신이 주장하였다. 진사공이 별세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 누이동생은 항상 ‘나의 자부(慈父)를 잃은 듯하다.’ 하였다.
대저 우리 집의 인후(仁厚)한 가풍(家風)에 대해서는 듣고 본 것이 이와 같다. 진사공의 손자로 이석(彝錫)이 있는데, 그 부모가 모두 한창 나이에 불행하게 사망하였다. 아우와 누이 6, 7명이 모두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하였고, 이석의 그때 나이가 겨우 약관(弱冠)이었으나, 일체 양육(養育)하여 성심을 다하였다. 그후 딴 성씨(姓氏)들을 맞이하게 되자, 둥근 뚜껑에 모난 바닥처럼 어긋남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잃지는 않았다. 화난을 만나 고단하던 때를 돌아본다면 의당 집안이 멸망해 버린 지 오랬을 텐데 능히 그 문호(門戶)를 보존하고 선대 제사를 받들어 온 것은, 다만 이석의 행의(行義)가 훌륭하였을 뿐 아니라 선대의 혼령(魂靈)이 굽어 살펴서 묵묵히 도와줌에 힘입었던 것이다. 그가 이번에 서울 집을 팔고 서교(西郊) 밖에 옮겨 살면서, 농사를 힘써 지어 자급(自給)하고 그 당(堂)을 연체(聯棣)라 이름했는데 아, 그 사실을 고찰(考察)하지 않더라도 우선 이름부터가 좋다. 아, 이석의 현명함이야 어찌 꼭 권장해 주어야만 시종(始終)이 변치 않겠는가. 장차 당 뒤의 나무가 빽빽하게 연해서 나고 그 위에 깃들이는 새들이 그 새끼를 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대도 선대의 분묘(墳墓) 앞에 배례(拜禮)하면서 부끄러운 빛이 없을 것이요, 또한 우리 선조(先祖)의 덕이 두터워서 그 은택(恩澤)이 빛날 것이다. 이석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계하고 채찍질하는 말을 주시면 받들어 지키겠습니다.”
하였다. 대저 경계하고 채찍질하는 훈계는 《소학(小學)》에 갖추어져 있는데도 내가 먼저 세덕을 들어서 번거로이 말한 것은 본보기가 가까우면 본을 받기가 쉽고, 사모함이 깊으면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학》에 기재된 유중도(柳仲塗)의 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숭정 기원 후 병진년(1676, 숙종2) 5월에 숙조(叔祖)는 쓴다.


송자대전 부록 제14권
 어록(語錄) 1
이희조(李喜朝)의 기록


계축년(1673, 현종14) 1월 25일, 나는 선생의 문하(門下)에 이르러 명함을 드리고 뵙기를 청하였다. 시자(侍者)가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께서 현재 병환이 나 누워계신다.”
하고는 나를 인도하여 침방(寢房)으로 들어갔다. 내가 나아가 절하자, 선생은 이불을 헤치고 답배하신 다음 앉으셨다. 인사를 마친 후에 나는 말했다.
“지난번 하서(下書)를 받자오니 지도하신 말씀이 계시므로 성의(盛意)를 몹시 감사해 합니다.”
[선생] 존대인(尊大人)께서 나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어 만년에 자못 사랑해 주셔서 정의가 한집안 같으므로 지난번에 감히 나의 소회를 말했다. 계축년 화양동(華陽洞)에서 말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하도 같다.
내가 나아가 가장(家狀)을 올리자 선생은 다 보시고는 물으셨다.
[희조] 그 일에 비하신 것은 아니고, 다만 서로 유사한 점을 취하여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한 것인데, 이제 이것을 행장 속에 넣은 것은 다만 그 눈물을 흘린 실상(實狀)을 나타내려 한 것 뿐입니다.
[선생] 옳다. 옳다.
또 말씀하셨다.
“좀 머물러서 문자를 받아가려고 하는가. 만일 지체하기 어렵거든 종[奴] 하나를 머물러 두고 가는 것도 무방하다.”
[희조] 몸소 친히 받아가기를 청합니다.

내가 나아가 말씀드렸다.
“소생이 책을 읽어 선(善)으로 향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나 입지(立志)가 굳지 못하며, 또 선인(先人)을 잃고부터는 또 배움을 청할 곳이 없어 세속의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며 진보할 방법이 없습니다. 매양 와서 함장(函丈 선생을 가리킴)을 모시고 몸을 바쳐 가르침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가정이 빈곤하고 어버이가 늙어 능히 결심하고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진실로 명문(銘文)을 청하기 위해서 왔으나 또한 훌륭한 얼굴을 우러러 뵙고 직접 아름다운 덕을 배워 다소나마 개발(開發)하고자 해서입니다.”
[선생] 내가 어찌 남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자네의 인척에 박화숙(朴和叔 박세채(朴世采))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멀리 타인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제공(諸公)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한마디 말로써 대답한다. 맹자(孟子) 이후로는 우리 도(道)가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춘추(春秋)》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 등 여러 경서를 스승이나 벗을 의뢰하여 서로 전수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송(宋) 나라 유현(儒賢)들이 나온 뒤부터는 이 도가 크게 밝혀져 다시는 드러나지 못한 여온(餘蘊)이 없다. 그러나 염계(濂溪)ㆍ명도(明道)ㆍ이천(伊川)ㆍ횡거(橫渠)의 말씀은 또한 이해하여 알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주석을 낼 적에 경서보다도 도리에 더 힘을 쓰셨다. 주자 자신의 말에 이르러는 반드시 남들이 알기 쉽게 하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글이 명백하고 통창하여 심히 어렵지 않으니 학자들이 진실로 이것을 미루어 연구해서 사서(四書)ㆍ삼경(三經)의 뜻을 통한다면 거의 알게 될 것이다.
[희조] 문인 중에 누가 학문을 가장 좋아합니까?
[선생] 나는 진실로 사람을 개발시키지 못하며, 혹 그러한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붕우(朋友)들은 매양 윤증(尹拯)을 추장(推奬)한다.
[희조] 그 밖에 딴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 번 물었으나 선생은 물을 때마다 모른다고 하셨다.
[희조] 박숙(朴叔)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선생] 나는 전에 책을 볼 때에 의문과 모르는 곳이 산처럼 쌓였는데 차기(箚記)하지 못하였다. 지금부터는 책에 쪽지를 붙여 의심스러운 것을 기록해서 화숙에게 질문하려고 한다.
[희조] 박숙과 윤 징사(尹徵士 윤증을 가리킨다)의 우열은 어떠합니까?
[선생] 윤증은 어릴 때부터 함께 거처해 왔다. 인정은 대체로 가까운 사람은 가볍게 여기고 먼 사람을 중하게 여긴다. 화숙과는 비록 오랫동안 함께 거처한 적은 없으나 기대하고 바라는 뜻은 두텁다.
[희조] 이성(尼城)의 노서서원(魯西書院)에 대하여 선생님의 뜻은 빨리 했으면 하지 않습니까?
[선생] 나는 대체로 그런 뜻이 있다. 연전에 사계(沙溪) 선생이 돌아가신 뒤인 소상(小祥) 날에 비로소 선생을 모시자는 의논이 나왔고 대상(大祥)후에 비로소 사우(祠宇)를 세웠다. 그때 존숭(尊崇)하던 자들이 어찌 지극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또 도덕이 높으신 우계(牛溪)로서도 율곡을 석담(石潭)에 배향하자는 의논에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어찌 감히 그 사이에 이렇다 저렇다 하겠는가. 이것은 이미 반혼(返魂)하기 전에 이런 의논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간략히 사계서원에서 이미 행한 고사를 가지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박(浮薄)한 무리들은 나더러 그 의논을 저지 억제했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저지 억제란 것은 ‘그 사람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인데, 내가 말한 것은 다만 아직 늦추고자 했을 뿐이다. 이는 도리어 가소로운 일이다.
[희조] 팔송(八松)은 어떠합니까?
[선생] 팔송은 일찍부터 우계의 문하에 들어가 우계의 추중(推重)한 바가 되었으며 정묘년에 세운 절의(節義)가 높다.
나는 다시 서원의 본의를 물었다.
[선생] 옛날 향교(鄕校)와 문묘(文廟)는 차이가 있었으며 서원과 사우도 차이가 있었다. 향교와 서원은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고 문묘와 사우는 바로 선현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서원이 있는 다음에 그 고장 선현 중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분으로써 사우를 세워 제사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반드시 제사할 만한 분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서원을 세우고는 ‘누구의 서원’이라고 한다.
[희조] 그렇다면 반드시 도덕이 높아서 많은 선비들의 사표가 될 만하여야 비로소 서원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선생] 그러하다.
[희조] 그렇다면 절의가 높은 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이는 곧 향선생(鄕先生) 따위이다. 사우는 주 부자(朱夫子)께서 하신 것으로 보더라도 꼭 도덕이 지극한 다음에야 한 것은 아니다.

[희조] 율곡 선생의 비문은 장차 선생님이 지으신 것으로 고치려고 한다 하는데, 옛 비석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선생] 한비(韓碑)로 상고해 보면 또한 두 개를 아울러 세운 예(例)가 있다. 옛 비는 선배들이 지으신 것이니 어찌 버릴 수가 있겠는가.
[희조] 이장(移葬)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선생] 거행하기가 중난(重難)할 뿐만 아니라 소점(所占)한 자리가 매우 나쁘다 하니, 그대로 두어야 할 듯하다.

[희조] 동춘당(同春堂)께서 병환이 위독하실 때에 선생께서 가셔서 영결(永訣)하셨습니까?
[선생] 11월 24일, 조카들의 편지를 보고 그의 병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날 밤 달려가 보니 병은 이미 어떻게 고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 다 변하지 않아 내가 찾아와 본 것을 기뻐하며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희조] 무슨 말을 주고받으셨습니까?
[선생] 나는 그에게 ‘공(公)의 병환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소 강절(邵康節)이 잡담으로 해학한 것과 같이 하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동춘은 ‘내가 무슨 지식이 있어서 능히 그것을 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성상(聖上)께 다시 드리고 싶은 말이 없는가?’ 하고 물었더니, 동춘은 ‘진언(陳言)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어찌 감히 하겠는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이외에도 소소하게 주고받은 말이 많은데, 간혹 헛소리와 비슷한 것도 없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민 판서(閔判書)가 자상하게 탑전(榻前)에게 아뢰어 약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당시에 듣고는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며칠 후 과연 김 판서(金判書)가 임금께 아뢰어 어의(御醫)가 약을 가지고 왔다. 민(閔) 자는 아마도 김(金) 자의 잘못이었나보다. 이는 비록 헛소리와 같았으나 혹 이와 같은 감응(感應)의 이치가 없지 않은 듯하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26일, 조반(早飯)을 마치고 나아가 선생을 뵈었더니,
“내가 일찍이 선존장(先尊丈 별세한 남의 부친을 이르는 말)께서 시강원(侍講院)에 계실 때 보니, 먹고 마시는 것이 매우 적었으며 또 맛있는 음식을 즐기지 않으셨으나 그래도 부지하셨다. 나는 병으로 앓은 이후 식음을 전폐하였는데 매양 선존장의 하신 일을 생각한다.”
하시고는, 인하여 물으셨다.
“독서할 때에 마음이 딴 데로 나가지 않던가?”
나는 그때 마침 이 병통이 생각나서 여쭙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선생께서 먼저 물으셨으므로 즉시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능히 그러하겠습니까. 소생은 독서할 때마다 매양 생각이 어지럽고 동요되며, 곧 이것을 깨닫고 다시 책에 뜻을 집중시키려 하면 이 뜻이 또 책과 배치(背馳)됩니다. 어떻게 이 병통을 없앨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마음은 바로 활동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는 속히 제거하기는 어렵다. 주자는 학자들에게 경경조관(輕輕照管)하게 하였다. 이미 이 마음이 딴 데로 나가는 것을 알고 다스리려고 한다면 이미 공부의 절반은 한 것이다. 만일 오래오래 고요히 있으면 이 마음이 자연히 수렴(收斂)될 것이다. 혹 분분하게 출입하면서 방심(放心)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렵다. 이렇기 때문에 주자 역시 일찍이 여러 번 운곡(雲谷)과 무이(武夷) 등의 곳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희조]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인사란 처리하기가 심히 어려우니, 만일 일일이 수검(修檢)하려고 하면 자연 분분하게 출입함을 면치 못합니다.
[선생] 마땅히 일의 완급(緩急)을 살펴서 하는 것이 옳다.

[희조] 과거(科擧) 공부는 선현들이 비록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공부가 역시 전일(專一)하지 못하니, 학문을 하려고 한다면 그 해가 적지 않을 듯합니다.
[선생] 과거는 부화(浮華)한 풍습을 조장시킬 뿐만 아니라 급제하고 낙제하는 즈음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가장 큰 해이다.
[희조] 지금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옛날과 다릅니까?
[선생] 현재 우리나라는 천지(天地)가 번복(飜覆)되었다. 만일 성인(聖人)의 공심(公心)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세상에 나와서 큰 의리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능히 성공하지 못하고 한갓 실신(失身)만 할 것을 안다면 차라리 은거(隱居)하고 나오지 아니하여 몸을 깨끗이 해서 완전무결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희조] 선생께서 선조(先朝 효종(孝宗)을 가리킨다)에게 몸을 허락하여 담당하셨으니, 과연 거사(擧事)하려고 하셨습니까?
[선생] 내가 무슨 재주와 힘이 있어서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선왕(先王)께서 빛나게 큰 뜻을 두시어 10년 동안 병력(兵力)을 기르면 장차 거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선왕은 일찍이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국가가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셨다. 선왕은 오랫동안 저들의 땅에 거주하셨는데 묵묵히 형세를 살펴보니 약간은 어렵지 않을 것도 같으며, 또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반드시 민멸(泯滅)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니, 저들 또한 우리의 거사에 호응하는 일이 없겠는가 생각하셨다. 이러므로 선왕의 뜻은 어렵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희조] 지금의 도리는 마땅히 국가의 존망을 헤아리지 않고 한번 거사하여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자강(自强)할 계책을 충분히 강구하여 국세가 다소 떨쳐지고 민심이 후하게 맺어져 모두 웃사람을 친히 하고 정부를 위하여 결사할 마음이 있어서 거의 성사할 수가 있게 한 다음에 하는 것이 옳습니까? 저의 어리석은 소견은 후자와 같은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하여 경종(耕種)에 힘쓰게 한 다음에 몽둥이를 만들어야 진(秦)ㆍ초(楚)의 정예한 무기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초 나라에 비하면 비록 뒤떨어지지만 제(薺) 나라에는 당할 수가 있다. 만일 잘 사용한다면 될 수 있다. 어찌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대번에 사공(事功)을 바라겠는가. 송(宋) 나라는 오랑캐인 금(金) 나라에 비하면 우리나라와 다름이 없었지만 주자(朱子)는 오히려 ‘우리 힘의 강약(强弱)을 헤아리고 저들의 심천(深淺)을 보아 서서히 거사하여 도모한다.’ 하셨으니, 여기에서 그 의(義)를 볼 수 있다.
[희조] 당시에 무신(武臣) 중에는 누가 이 일에 뜻을 두었습니까?
[선생] 유 대장(柳大將 유혁연(柳赫然)을 가리킨다)은 일찍이 경력(經歷)하지 않았으므로 쉽게 말하였고, 이 대장(李大將 이완(李浣)을 가리킨다)은 호란(胡亂)을 경력했기 때문에 자못 근신(謹愼)하였다.
[희조] 근신하면서도 반드시 이렇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쉽게 말한 자보다 나을 듯합니다.
[선생] 그는 꽤 신중하였다.
[희조] 당시에 문신(文臣)은 누가 여기에 뜻을 두었습니까?
[선생] 허상(許相 허적(許積)을 가리킨다)이 자못 뜻이 있었다. 선왕은 일찍이 ‘강(强)하고 용기가 있어야 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연전의 상소에 말한 것이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희조] 지금의 무장(武將) 중에 큰일을 맡길 만한 자가 있습니까?
[선생] 무사(武士)는 난리가 나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왕은 일찍이 하교(下敎)하시기를 ‘내가 만일 먼저 내 몸을 수행하고 신하들을 책한다면 신하들은 반드시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미 내 몸을 수행하여 부끄러움이 없게 한 뒤에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비록 살륙(殺戮)을 행하더라도 무엇이 나쁘겠는가. 만일 저 오랑캐에게 개인적인 원수가 있는 자는 반드시 우리와 힘을 합할 것이니, 나는 이들과 일을 함께하려고 한다.’ 하시고는, 인하여 팔도(八道)에 어사(御史)를 뽑아 보내어 먼저 내수사(內需司) 및 여러 궁가(宮家) 중에 폐단을 일으키는 자들을 살펴서 하나하나 자세히 물어 오게 하셨다. 선왕의 뜻은 먼저 임금 자신으로부터 솔선한 다음에 신하들을 책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사가 아직 돌아오기도 전에 선왕께서 곧 신민(臣民)들을 버리고 승하(昇遐)하셨다. 지금까지도 그 봉서(封書)가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희조] 무신년(1668, 현종9) 선생께서 상경하실 때에 성상(聖上)께서도 분발하려는 뜻이 있는 듯했는데, 선생께서 돌아온 것은 한갓 서필원(徐必遠)의 상소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오랫동안 물러가실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선생] 당시에 성상께서도 자못 의지가 있었으므로 나는 내수사 및 여러 궁가(宮家) 제택(第宅)의 일을 가지고 임금께 품했던 것이다. 나의 뜻은 임금부터 사(私) 자 하나를 타파하신 다음에야 정사를 할 수 있으며, 만일 이 사자를 능히 버리지 못하면 끝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이것으로써 시작을 삼았던 것인데 임금의 뜻이 낙락(落落)하여 따를 가망이 없었다. 서필원 마음이 사곡(邪曲)한 자는 아니고 다만 어리석은 자였는데, 허상(許相)이 유인하여 이런 짓을 하게 해서 비로소 공격과 배척을 가하니, 내가 어찌 물러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희조] 사(私) 한 글자는 사람이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바이니, 한번 말했다고 해서 곧 윤허(允許)하여 따르는 것은 쉽지 않을 듯합니다. 만일 임금께서 글을 읽고 학문하여 의리의 당연함을 분명하게 아신다면 자연히 혁파(革罷)하실 것입니다. 서서히 정성을 쌓아서 임금님 마음에 깨우쳐지기를 바라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선생] 그렇지 않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범인들과는 달라서 학문과 사업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일을 당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도 학문임에랴. 또 비록 범인이라 하더라도 우선 격물(格物)만 하고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격물을 완전히 다한 뒤에 비로소 성의ㆍ정심ㆍ수신(修身) 공부를 한다.’고 하겠는가. 자네는 서울에 있었지만 반드시 내수사에 간직되어 있는 쌀의 두수(斗數)를 자세히 알지 못할 걸세. 그런데 임금께서는 이것까지도 모두 친히 살피시니, 이런 일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공자(公子)와 부마(駙馬)의 집이라 해서 어찌 반드시 넓게 차지한 뒤에야 거처할 수 있겠는가. 인경궁(仁慶宮)은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친히 어거(御居)하신 곳일 뿐만 아니라, 광해(光海)가 술자(術者)의 ‘이곳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궁궐을 지어 누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말에 의해 지었다. 그 말은 요망하고 허탄하여 믿을 것은 못 되지만 이미 이런 말을 하였은즉, 부마들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들어가 거처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으로써 임금께 말씀드렸는데 따르진 않으셨으나 청평(靑平)ㆍ인평(寅平) 등 여러 집에서 나의 이러한 말을 듣고부터는 비로소 나가 딴 곳에 거처했었다.
또 선왕의 잠저(潛邸)는 만일 대군(大君)에게 전해 준다면 괜찮지만 부마에게 물려주어 사가(私家)를 삼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의 명언이 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어른께서 대사헌(大司憲)으로 계실 때에 장씨(張氏)의 집이 제도에 넘는다 하여 장차 제재를 가하여 철훼(撤毁)하려고 하자, 동계는 ‘집은 임금께서 철훼할 수 있으나 만일 아랫사람들이 철훼한다면 반드시 환(患)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다. 나는 궁가가 제도에 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번 임금께 말씀드렸는데, 임금의 뜻이 끝내 낙락(落落)하셨다. 동춘(同春)도 ‘만일 한결같이 법제(法制)를 따른다면 반드시 집이 좁아 용납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와 부마의 집은 법제에 본래 50칸으로 되어 있으니, 50칸이면 무엇이 좁겠는가.
[희조] 그들의 궁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익평위(益平尉)의 신궁(新宮)을 때때로 지나다 보는데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할 만합니다.
[선생] 연전에 감사(監司) 김징(金澄)이 그의 선친(先親)인 상국(相國)을 어탑(御榻) 앞에서 반박하기를 ‘흉노(匈奴)를 멸하지 못했는데 무슨 집을 짓는단 말입니까.’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통렬하다.
[희조] 선왕께서는 어찌하여 내수사(內需司)를 혁파(革罷)하지 않았습니까?
[선생] 이 관사(官司)는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다. 《주례(周禮)》에 소부(小府)가 있으니, 내수사는 소부와 같은 것이다. 모든 물건은 반드시 호조(戶曹)로부터 출납하여야 하지만 만일 소소한 물건이라면 어찌 매양 호조에서만 출납할 수 있겠는가. 이는 소부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총재(冢宰)에게 맡겨 두고 잡된 일에 쓰지 않으면 된다. 송 나라 태조는 내탕(內帑)을 지출하여 구황(救荒)의 자금으로 삼았고, 고종(高宗)도 오랑캐에게 보내는 폐백의 자금으로 삼았다.

[희조] 지금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 조정에 벼슬하는 자들은 모두 실절(失節)하게 됨을 면치 못합니까?
[선생] 율곡께서 ‘허노재(許魯齋)더러 실신(失身)했다고 하는 것은 되지만 실절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셨으니, 참으로 옳다.
[희조] 주자(朱子)의 출처(出處)에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때를 당해서 어찌 벼슬하러 나오신단 말입니까?
[선생] 그렇지 않다. 주자는 역량(力量)이 충분이 하실 만하므로 나오셨으니, 참으로 이른바 성인(聖人)의 공심(公心)이란 것이다. 벼슬하러 나오실 때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에도 이미 계책을 말씀드린 것이 있으며, 조정에 벼슬하시게 되자 반드시 《대학(大學)》으로써 임금께 진언(陳言)하고 다음에 복수(復讎)하는 의논을 우선하여 언급하였다.
[희조] 주자께서도 일찍이 사관(祠官 능침(陵寢)을 지키는 관원)이 되셨으니, 반드시 복수로써 출처를 하지는 않으신 듯합니다.
[선생] 주자는 진실로 일찍이 사관의 녹봉을 받으셨다. 지금 사람들이 만일 애통함을 참고 원통함을 간직한 채 사세가 부득이해서 하는 마음이 있다면 또한 무엇이 나쁘겠는가.
[희조] 어찌 모두들 마음에 달갑게 저들을 섬기겠습니까.
[선생] 지난해 김만균(金萬均)의 일을 제공(諸公)들은 배척하기를 매우 강력히 하였는데, 이해할 수가 없다.
[희조] 이 일은 마땅히 어느 원수까지 국한해야 합니까?
[선생] 주자께서는 ‘5세(世)로부터 종형제(從兄弟)와 붕우(朋友)의 원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서 보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우리나라는 다만 부모의 원수만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말하기 매우 어렵다.
[희조] 삼촌(三寸)과 형제간의 원수는 동일합니까?
[선생] 똑같이 기년복(期年服)이니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희조]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만일 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애당초 벼슬하러 나오지 않는 것만 못하다.
[희조] 이미 벼슬하러 나왔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이미 벼슬하러 나왔다 하더라도 어찌 들어갈 수 없겠는가. 연전에 윤집(尹集)의 아들 윤이선(尹以宣)이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현재 이판(吏判)이 영백(嶺伯)으로 있을 때에 그를 파직시키면서 ‘내직(內職)은 그래도 괜찮지만 외임(外任)은 부당하다.’ 하였다. 이 어찌 피차를 분별하여 ‘이것은 마음에 달게 여겨 섬기고 저것은 섬길 수 없다.’ 하겠는가. 그 뜻을 알 수 없다. 또 내직 중에서도 만일 재물이나 비단이 있는 것이라면 외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희조] 영백이 이것을 이유로 해서 파직시킨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짓입니다. 그러나 만일 윤이선의 도리로 논한다면 종사(從仕)하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선생] 참으로 그러하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국가에서 만일 별도로 표창하여 구휼해 주는 은전(恩典)이 있어서 혹 특별히 녹봉을 준다면 좋을 것이다. 다만 국가 재정이 심히 궁색하여 벼슬하는 자에게도 오히려 녹봉을 주지 못하는데, 하물며 벼슬하지 않는 자에게 녹봉을 줄 여유가 있겠는가.
[희조] 만일 쓸데 없이 허비되는 비용을 이런 따위의 일에 전용(轉用)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선생] 그러하다.

[희조] 사람의 집에 대종가(大宗家)의 제의(祭儀)가 만일 일일이 예(禮)에 합하지 않으면 소종가(小宗家) 단독으로 고례(古禮)로써 고치는 것은 불안하지 않습니까.
[선생] 대종가의 제의가 예가 아니라면 어찌 반드시 따라야 하겠는가.

[희조] 생일날 전(奠)을 올리는 것은 정리(情理) 및 속절(俗節)에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헤아려 본다면 이 역시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선생] 만일 아버지만을 잇는 종자라면 괜찮지만 할아버지를 잇는 종손부터는 일이 편치 못하다. 만일 한 신위(神位)의 생일이라 해서 여러 신위에게 전부 제사한다면 이는 고거(考據)가 없는 것이고, 만일 해당하는 신위만을 정침(正寢)에 내다가 받드는 것은 또 너무 중난하다.
[희조] 지금 사람들이 생일날 제사하지 않으면 마음에 편켔는가 한 말 때문에 마침내 산 사람의 생일에도 간혹 사당에 음식을 올리는 자가 있는데, 이는 어떠합니까?
[선생] 매우 부당한 짓이다.
[희조] 생일에 음식을 장만하여 즐기는 것은 구경(具慶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신 것)한 자라면 괜찮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편친(偏親)만 있고 구경하지 못한 자는 할 수 없습니까?
[선생] 비록 구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한 어버이가 계시면 불가할 것은 없을 듯하다.

[희조] 사람이 정(情)에서 발하여 소상(小祥)이 지난 후에도 오히려 조석곡(朝夕哭)을 폐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떠합니까?
[선생] 이는 너무 과하다. 선왕(先王)이 예(禮)를 제정하였으니, 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연전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께서 송강(松江)의 행장(行狀)을 지으실 적에 ‘매양 부모의 산소에 올라가서 반드시 곡했다.’ 하는 한 대문은 곤란한 부분이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이것은 예가 아니니 기록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으며 정 간성(鄭杆城 간성 원으로 있던 정양(鄭瀁))의 의향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이는 비록 예가 아닌 예이지만 이미 지극한 정에서 나왔다면 기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 송강의 하신 일이 어찌 일일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없겠는가. 비록 예에 지난다 하더라도 한 일이 만일 이와 같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사람들도 누가 송강을 중용(中庸)의 사람이라고 즐겨 말하겠는가. 그러나 신독재는 끝내 기록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뒤에 남헌(南軒 장식(張栻))의 말씀에 ‘스스로 산소에 올라 갈 때마다 반드시 곡하였다.’ 한 것을 보고는 비로소 선현들도 이런 것을 하셨음을 알았다.

28일, 또 선생을 뵙고는 조용히 모시고 앉았었다.
[희조] 선생께서 사계 노선생(沙溪老先生)을 따라 공부하신 지가 모두 몇 해입니까?
[선생] 몇 십 년이 된다.
나는 나아가 말하였다.
“감히 도(道)에 들어가는 순서를 묻겠습니다.”
[선생] 도에 들어가는 순서라고 하는 것은 도가 있는 자의 말이다. 지금 나는 이미 도가 있지 못하니 어찌 순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맨 처음 노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노선생께서는 ‘처음 배우는 자가 몸을 검속(檢束)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가례(家禮)》와 《소학(小學)》을 배워야 하고, 의리(義理)를 알고자 한다면 또 마땅히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먼저 배워야 하니, 이 네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다. 사서(四書)는 내가 이미 읽었으므로 나에게 의심스런 곳만을 질문하게 하였으며, 또 뒤를 이어 《주역(周易)》을 읽히셨다. 노선생께서는 또 ‘반드시 문장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작문하는 법을 안 다음에야 세상에 응하여 쓸 수가 있다.’ 하셨다. 그러므로 한문(韓文 한유(韓愈)의 문집(文集)) 전질(全帙)을 신독재에게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실서(實書)에 공부를 옮기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희조] 학문하는 법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생] 주자의 말씀에 ‘학문하는 길은 격물치지(格物致知)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하였는데, 격물치지의 요점은 또 독서에 있고 독서의 요점은 또 존심(存心 마음을 수양해서 보존함)에 있다.

[희조] 우리나라 유학자(儒學者)는 누가 정종(正宗)입니까?
[선생]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말에 ‘율곡(粟谷)은 정암(靜菴)과 퇴계(退溪)와 학문을 겸하고 또 경제(經濟)의 재주가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마땅한 듯하다.

[희조] 근래에 조낙정(趙樂靜 조석윤(趙錫胤))과 유시남(兪市南 유계(兪棨))의 우열은 어떠합니까?
[선생] 자질이 높기는 낙정이 나으나 큰 것에 있어서는 혹시 남에게 뒤질 것이다.
[희조] 이 두 분은 일찍이 서원(書院)에 모시자는 의논이 있다 하는데, 어떠합니까?
[선생] 누가 당상(堂上)의 인물이기에 능히 당하(堂下) 사람의 잘잘못을 분별하겠는가. 이 일은 극히 정하기 어렵다. 만일 사림(士林)에서 일제히 발의한다면 반드시 그런 분이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저지하는 자가 많다면 또한 곤란하다.

[희조] 현재 조정의 인물은 누가 제일입니까?
[선생] 내가 어찌 알겠는가. 민태(閔台) 3형제는 그의 공적은 어떨지 모르지만 국가를 위하는 정성만은 따르기 어렵다.

[희조] 문장은 누가 제일입니까?
[선생] 시(詩)는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매우 높고 문(文)은 이단하(李端夏)이다.
[희조] 태학사(太學士 대제학(大提學) 김만기(金萬基)를 가리킨다)의 문장은 어떠합니까?
[선생]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숙성하다고 했다.
[희조] 좌상(左相 김수항(金壽恒)을 가리킨다)의 문장은 어떠합니까?
[선생] 이 문인(文人)도 두루 잘 한다고 하였다.
[희조]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문장은 명(明) 나라에서는 당할 만한 자가 없습니까?
[선생] 그렇다. 명 나라 때의 사람들은 자기의 역량은 헤아리지 않고 망녕되이 진(秦)ㆍ한(漢)을 모의하려고 하였으니, 모두 가문(假文)이다.

[희조] 근래 세속의 혼례(婚禮)에 만일 그 형이 연고가 있어서 쉽게 혼인할 수가 없으면 먼저 아우의 혼인을 행하는데, 이는 의리에 어떠합니까?
[선생] 형제의 순서로써 행하는 것이 진실로 순리이다. 그러나 만일 연고가 있을 경우, 여혼을 먼저 하는 것은 괜찮지만 남혼은 불가하다. 옛날에 30세에 장가들고 20세에 시집갔으니, 형편상 자연히 여자를 먼저하고 남자를 뒤에 하기 때문이다.

[희조] 지금 사람 중에 혹 이미 납채(納采)를 행했는데, 장차 남편이 될 사람이 죽은 경우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예기(禮記)》에 ‘마땅히 분상(奔喪)하고 가서 곡(哭)한 다음 이미 장례하면 복을 벗는다.’ 하였는데, 남편이 죽었거나 아내가 죽었거나 모두 각각 이와 같다. 이러한 예는 지금 실행하기는 어려우니, 다만 납채를 되돌려 보내야 한다.

29일, 또 나아가 선생을 뵈었다.
[선생] 일찍이 주자의 글을 읽었느냐?
[희조] 아직 못 읽었습니다.
[선생] 옛날 유시남(兪市南)은 일찍이 ‘주자는 천하의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글을 널리 인용한바,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아 흔적이 없다.’ 하였는데, 그 말이 옳다. 이 책은 착실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희조] 그렇다면 사서(四書)ㆍ삼경(三經)을 배우기 전에 먼저 이것을 읽어야 합니까?
[선생] 아니다. 만일 먼저 경서를 읽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그 의미를 알겠는가.

[선생] 근래 서울에 나이가 적은 사람들 중에 능히 독서하여 뜻이 선 자가 누구인가?
[희조] 소생은 문견이 고루하여 누가 어떤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임영(林泳)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 일찍이 선인(先人)의 문하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익히 압니다. 이 사람은 꽤 총명하고 학문에 힘써서 가장 가망이 있습니다.
[선생] 일찍이 이 사람이 당한 일을 들었다. 그러나 그 말이 본래 실성(失性)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니, 미친 사람의 말을 어찌 족히 믿겠는가.
또 선생은 나주(羅州) 하인(下人)들의 편당(偏黨)하는 말이 극성(極盛)했음을 논하셨다.
[희조] 서울도 그렇다 합니다.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셨다.
[선생] 우리 국가의 당론(黨論)이 이에 이르렀으니, 끝내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백마하(白馬河)와 같은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깊이 우려된다.

[희조] 어떻게 하면 편당(偏黨)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생] 이 역시 사심(私心)이다. 다만 마음을 공정하게 가지면 된다.
인하여 동서분당(東西分黨)한 일을 논하시고는 또 말씀하셨다.
“송강(松江)께서는 과격하신 일이 많아 지금까지 훼방이 끊기지 않으니, 이는 모두 자취한 것이다. 어찌할 수 있겠는가.”
얼마 후 지으신 묘갈문(墓碣文)을 꺼내어 보여 주셨다. 나는 공경히 받아서 한 번 읽어 본 뒤에 일어나 절하고 인하여 감사한 심정을 말씀드렸다.
[선생] 평소의 정의로 헤아려 보건대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만 불후(不朽)의 전함에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인하여 종이를 갖다 드리고 대자(大字)를 써 주실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다 쓰셨다. 나는 또 거실(居室)의 이름을 지어 주실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주자의 문집을 갖다가 펴 보신 다음 말씀하셨다.
“지사(志事)라고 이름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효자는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고 어버이의 일을 잘 완성시킨다.[孝子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나는 또 지은 시(詩)와 시문을 갖다 드렸더니, 선생이 다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참으로 좋다. 참으로 좋다. 마땅히 다시 화답(和答)해서 작별하겠다.”

[희조] 조정에서 근래에 청색의 옷을 입으라는 법이 있는데, 이는 과연 어떠합니까?
[선생] 옛날에 흰옷으로 조상(吊喪)하는 옷을 삼았으니, 평상시에 항상 입을 것이 못 된다. 근래에 사람들은 청색 옷을 입는 자가 많다. 그러나 옛날에는 황색 옷과 검정 옷을 입는 자가 많았다.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의 아들은 항상 황색 옷을 입었는데 나도 보았다.
[희조] 황색 옷은 풍속과 달라 해괴할 듯하니, 검정 옷을 입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선생] 그렇다.

2월 초하루,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아가 뵈었더니, 선생은 화답한 시를 꺼내어 보여 주셨다. 나는 나아가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 어제 이미 지사(志事)로써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오늘 저에게 주신 시에도 성광(聖狂)을 경계하신 말씀이 있으시니, 선생님의 가르침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소자(小子)는 바야흐로 돌아갈 것을 고하오니, 혹시라도 다시 교훈을 주실 것이 있으시겠습니까?”
[선생] 나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로는 우리 도가 크게 밝혀졌으니, 다만 공부하는 당자에게 달려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희조] 어찌 절실하게 받들어 지키며 행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선생] 옛적에 어떤 사람이 ‘《논어(論語)》 중에 무엇이 가장 절실하고 긴요합니까?’ 하고 묻자, 정자는 ‘절실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근사록(近思錄)》 가운데 태극도(太極圖)와 정성서(定性書)ㆍ생지위성(生之謂性) 세 글의 의심스러운 곳을 여쭈어 질정하고 또 물었다.
[희조] 나이가 젊은 사람으로 서울에 있는 자 중에 더불어 종유(從遊)할 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선생] 이기주(李箕疇)라고 하는 자가 책을 꽤 통했으며, 시골에 있는 자는 윤증(尹拯)이다.

[희조]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분치(忿懥)한 바로 둔다.’ 하였는데, 이것이 체(體)입니까. 용(用)입니까?
[선생] 분치한 바가 있는 것도 용이고 그 바름을 얻지 못함[不得其正]도 또한 용이다. 용은 똑같은데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의 용이 분치의 용에 비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주자는 ‘용의 행하는 바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또 말씀하셨다.
“정심은 바로 용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자사(子思) 이후에 비로소 체를 말했다.”
또 말씀하셨다.
“일이 지나면 마음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 ‘두지 않음[非有所]’의 정확한 뜻이 된다. ‘기대(期待)와 응사(應事)’는 모두 장구(章句)를 미루어 말한 것이며 ‘공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한다.[敬以直內]’는 것도 이것을 미루어 넓혀서 말한 것이다.” 계축년 장흥사(長興寺)에 계실 때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이하도 같다.

[희조] 승려(僧侶)들의 풍경 소리는 정신을 깨치게 하는 힘이 있으니, 우리들도 하는 것이 혹 무방합니까?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께서 방울을 차신 것이 이러한 뜻인가 봅니다.
[선생] 이런 짓은 굳이 해야 할 것은 없다.
또 말씀하셨다.
“노씨(老氏 도가(道家)를 가리킨다)는 그런 이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다만 천리(天理)에 위배된다.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는 것도 그러하다.”

선생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문장은 의리에 깊으니, 문장가일 뿐만이 아니다. 그 웅대함이 마땅히 저헌(樗軒 월사의 선조인 이석형(李石亨))보다 나을 것이다.”
하시고 또 선고(先稿)의 문장은 선세(先世)보다는 못한 듯하나 사실은 낫다 하셨다.

선생은 하루 저녁 대청 사이를 산보하셨다. 나도 이형(李兄 이행(李荇)을 가리킨다)과 함께 뜰에서 마주 섰었는데, 선생은 시 한 수를 외시고 그 뜻을 해석해 주셨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찬 이슬 떨어져 / 玄天墮寒露
푸른 연꽃 잎에 방울져 있네 / 滴在靑荷葉
물의 성품은 일정한 태도가 없는데 / 水性無定態
연꽃 가지는 기울고 거꾸러짐 좋아하네 / 荷枝喜傾倒
둥글고 맑은 물방울 사랑스럽긴 하나 / 團明雖可愛
흩어지면 도리어 잃기 쉽네 / 渙散還易失
그대와 함께 사흘 밤을 앉아 / 從君坐三夜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법을 묻노라 / 請問安心術

나는 이에 이렇게 청하였다.
“소생들이 여기에 온 지 이미 사흘이 되었는데, 이 시구는 바로 지금 저희들의 일을 써 놓았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여기에 한 물건(마음을 가리킴)이 있으니, 쥐면 깨지고 쥐지 않으면 떨어진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선유(先儒)의 말씀이다.
뒤에 그 시를 상고해 보니, 유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집에 실려 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하여 속히 하려고 하는 병통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을 묻고 약을 구했더니, 선생은 맹자(孟子)의 ‘잊지 말고 돕지 말라[勿忘勿助]’는 교훈을 여러 번 들어 힘쓰게 하셨다.

갑인년(1674, 현종15) 5월 20일, 이형 행(李兄涬)ㆍ김형 창협(金兄昌協)과 함께 동행하다가 선생을 양주(楊州)ㆍ여주(驪州) 사이의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잠깐 휴식하고는 이어 모시고 용문사(龍門寺)로 향하였다. 오후에 용문서원(龍門書院)을 지나는데, 서원 앞에 조그만 나무를 세워 ‘대소인 모두 하마하라[大小人皆下馬]’고 써 놓았다. 송군 이석(宋君彝錫)도 이때 함께 따라왔었는데, 즉시 하마하면서,
“아차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났구나.”
하였다. 선생은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문묘(文廟)ㆍ향교(鄕校) 외에도 지나다가 말에서 내리는 곳이 있느냐?”
물으시므로 우리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대답하였다.
서원에 이르자, 선생이 즉시 강당에 앉으시니, 제생들도 모두 자리를 정하였다. 이행이 나아가 물었다.
오현(五賢)의 서원과 사당에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합니까?”
[선생] 알지 못하겠다. 다만 조정에서 그분들을 심히 우대하시니, 마땅히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보다. 내가 일찍이 공암서원(孔巖書院)을 보니, 여기에는 주자(朱子)를 제향하기 때문에 모두들 말에서 내렸다. 이는 그 사람이 얼마만큼 경앙(景仰)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한결같이 법을 세워 단정할 수는 없다.
내가 나아가 여쭈었다.
“일찍이 들으니, 선생께서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지나시면서 ‘한강 선생(寒岡先生)을 절하고 뵈었다.’고 쓰셨다 하는데 과연 그러하셨습니까?”
[선생] 그때에 조근(趙根)이 이와 같이 썼는데, 나는 진실로 이미 시끄럽게 될 것을 염려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곧 ‘만일 비방하는 자가 있으면 내 스스로 당하겠다.’ 하였다. 그후로 비방하는 말이 떠들썩하여 모두 나에게 죄를 돌렸다.
선생은 또 말씀하셨다.
“들으니 영남(嶺南)에 문경호(文景虎)의 서원이 있다 한다.”
이어 당시의 박성(朴惺)ㆍ경호ㆍ정인홍(鄭仁弘) 등의 일을 자세히 말씀하고, 또 말씀하셨다.
“인홍은 높은 풍도의 정맥(正脈)이 있어 글을 꽤 잘 지었으니, 한번 구해서 볼만하다.”
[희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박성의 행장(行狀)을 찬하면서 지극히 칭찬하고 우계(牛溪)를 공격한 한 조항은 언급하지 아니하여 자못 그 사실을 인멸했으니, 이는 크게 의심스럽습니다.
[선생] 그러하나 또한 약간은 알 수가 있다. 연전에 윤길보(尹吉甫)가 여헌이 지은 박성의 행장 가운데에 ‘인홍이 잘못 데리고 들어갔다.[仁弘誤入]’는 말 때문에 자못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희조] 여헌이 인홍에게 어찌 과격하지 않은 말을 했습니까?
[선생] 아마도 평소에 잘 아는 사이라서 잊기 어려워 그랬는가 보다.
[희조] 일찍이 김우옹(金宇顒)의 문집을 보니,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는 일로 상소하여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그 말이 어떠합니까?
[선생] 크게 옳지 않다. 만일 임금께서 재취할 때에 간했다면 괜찮지만, 이제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고 또 일찍이 부묘하고 능(陵)을 봉했으니, 어찌 《춘추(春秋)》의 재취하지 않는 의(義)로써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심히 미혹(迷惑)된 것이다.
선생은 제생들을 거느리고 사당 문 안에 들어가 계단 아래에 선 다음, 우리들을 돌아보시며,
“제군들은 이미 자리를 정했는가?”
하시고는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오시며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봉심(奉審)하는 것이 좋다.”
저녁 때에 용문사에 이르러 곧바로 법당(法堂)에 올라가 두루 보신 다음 서쪽을 향하여 앉으시니, 제생들도 앉았다. 중들은 모두 법당 앞에서 합장하였다.
[선생] 내가 일찍이 계해년(1623, 인조1)에 이곳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중으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가 있는가?
이어 세조(世祖)의 고적(古蹟)을 하나하나 말씀하셨다. 정원(淨源)이라고 하는 중이 있었는데, 꽤 이야기할 만하였다. 선생은 그에게 물으셨다.
“선(禪)과 교(敎)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그는,
“선이 어렵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인하여 그와 한동안 토론하시고는,
“이 중은 향도(向道)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하시고, 또 한 중에게 묻기를,
“너희 도는 천지(天地)와 인물(人物)을 모두 환망(幻妄)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이는 전체가 도무지 환망인 것이다. 비록 해와 달이 박식(薄蝕)하고 애비와 임금을 해치더라도 나쁠 것이 있겠느냐?”
하시자, 그는,
“환망 가운데에도 선과 악이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웃으시면서,
“이는 너희 불가의 군색한 변명이다. 이미 환망이라 하였는데 또 어찌 선이 있단 말인가.”
하시고, 이어 존심(存心)의 어려움은 유가(儒家)나 석가(釋家)가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셨다.
유주상(流注想)이 가장 두렵다.”
[희조] 선생의 현재 지위는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비록 주자 같은 아성(亞聖)으로서도 오히려 스스로 ‘종소리가 그치기 전에 이 마음이 벌써 달아났다.’ 하셨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겠는가. 아마도 변화될 날이 없을 듯하다. 시험 삼아 독서할 때로써 말하건대, 마음이 보존되어 있을 때에는 그 맛이 매우 진진한데, 마음이 보존되지 않았을 때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
[희조] 독서할 때에 마음을 보존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선생께서도 젊었을 때에 이런 병통이 계셨습니까?
[선생] 어찌 없을 수 있었겠는가. 책을 이리저리 보면 기억되고 외는 것은 비록 쉬웠으나 의미가 진진하지 못하였다.
[희조]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면 혼매(昏味)하지 않으면 반드시 산란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청정(淸淨)한 때가 없습니다. 혼매와 산란 중 산란한 때가 더욱 많아, 졸음이 오는 때가 아니고는 모두 밖으로 향하여 달아납니다. 생각건대 성인은 잠깐 동안이라도 이러한 병통이 없으리니, 이것으로 보면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선생] 이 때문에 율곡 신생은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미발(未發) 상태인 때가 없다.’ 하셨으니, 비록 잠깐 동안 한번 깨닫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극히 적고 약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은 밝은 거울과 잔잔한 물과 같으니, 삽시간인들 혼매하거나 산란함이 있겠는가. 학문하는 길이 네 가지가 있으니, 격치(格致)ㆍ존양(存養)ㆍ성찰(省察)ㆍ역행(力行)이 바로 그것인데, 존양은 종(終)과 시(始)를 꿰뚫는다. 성인(聖人)을 어찌 대번에 배울 수 있겠는가. 다만 순서를 따라 서서히 공부해가면 자연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석시(釋氏)처럼 하루아침에 돈오(頓悟)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또 물으셨다.
“혼매와 산란 중 어느 것이 다스리기 쉬운가?”
[행] 혼매한 병통이 혹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까?
[창협] 이 두 가지는 아마도 두 병통이 아닌 듯합니다. 산란한 나머지에는 곧 혼매해집니다.
[선생] 그렇다. 이 두 병통은 정히 서로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마치 물을 하루종일 교란시키면 마침내 혼탁해져서 맑힐 수 없는 것과 같다.
[희조] 한가하게 홀로 있을 때에는 혹 안정했다가도 일이 목전에 닥쳐오게 되면 곧 어그러지니, 이런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선생] 이런 곳은 참으로 성찰(省察) 공부를 하여야 하니, 한갓 존양(存養)만 해서는 되지 않는다. 옛사람들의 이른바 ‘거처하기를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하기를 공경히 한다.[居處恭執事敬]’는 말씀은 학자들의 법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마음은 활동하는 물건으로서 제어하기가 극히 어렵다. 마음을 유지해서 뜻을 보존하는 것은 독서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독서를 오래하면 점점 방심(放心)되지 않을 것이다. 주자의 글이 제일 보기가 좋다. 이천(伊川)의 글은 사람들이 읽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끝내 주자의 명백하고 통쾌한 것만 같지 못하다.
[희조] 학자로서 주자의 글에 익숙하지 못하면 유학자의 일을 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선생] 그렇다.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정원(淨源)에게 물었다.
도겸(道謙)이 어느 곳에 거처했느냐?”
[정원] 복당(福唐)에 거처했습니다.
[선생] 도겸이 개선사(開善寺)에 거처했으니 연평(延平 주자의 스승인 이동(李侗))의 이른바 ‘겸개선(謙開善)’이란 것으로, 겸은 곧 도겸이고 개선은 곧 절 이름이다. 그런데 퇴계께서는 ‘성명(姓名)’이라고 하셨으니, 잘못인 듯하다.
또 물으셨다.
“옛사람들은 도를 깨달았을 때에 온몸에서 땀이 나온 자가 있었는데, 무슨 까닭인가?”
[정원] 참으로 있었습니다. 이는 자기가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 때문입니다.
[선생] 이것은 그러한 이치가 없지 않다. 무릇 사람들이 수치스런 일이 있으면 곧 땀이 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선생은 저녁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당(禪堂)에 내려오시어 또 정원과 불경을 논하셨는데 매우 자세히 하셨다.
[선생] 내가 일찍이 각성(覺性)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선사(禪師)와 서로 사귐은 심히 두렵다. 옛날 한 문공(韓文公)은 평생 동안 불교를 배척했었는데, 뒤에 중들은 「문공이 태전(太顚)의 도통(道統)을 이었다.」고 하니, 이는 두렵다.’고 하였다. 각성은 ‘지금 세상에는 문공 같은 분은 계시지만 태전 같은 승려는 없으니, 공은 두려위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는 은연중 내 말을 기롱한 것이다.

[희조] 박숙(朴叔)이 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처음에 이미 이렇게 자처하였으니, 이제 와서 곧바로 돌아가는 것은 심히 이유가 없는 짓이다. 어찌 기한을 둘 수 있겠는가. 《주역》의 이치로 보면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반드시 10년마다 변한다. 우선 10년으로 기한을 삼으면 그사이에 어찌 결말이 없겠는가.”
[희조] 만일 10년 안에 결말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그렇다면 형편상 그대로 머물러 기다려야 한다. 갑인년 용문사어록(龍門寺語錄). 이하도 같다.

[선생] 국휼(國恤 임금이나 왕비의 초상)의 졸곡(卒哭) 전에 사제(私祭)를 지내는 조목에 있어 선유(先儒)의 말씀한 것이 모두 다르다. 또 삭망(朔望)에 참배(參拜)하는 것은 모두 ‘폐할 수 없다.’ 하였는데, 묘제(墓祭)에 있어서는 혹은 ‘간략하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하고, 혹은 ‘마땅히 폐하여야 한다.’ 하고, 혹은 ‘재실(齋室)에서 행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정확하게 누구의 말을 따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정은 제사에 있어 폐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 진실로 일분(一分)만이라도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내 의견을 말한다면, 비록 묘제라 하더라도 다만 일헌(一獻 술 한 잔만 올림)을 하고 축문(祝文)을 읽지 않으며 재실에서 행한다면 참배하는 예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는 행하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다만 묘소에 올라가는 것만은 국가에서 행하지 않는 바이니, 감히 할 수 없다.
[희조] 삭망에 참배하는 것도 종묘(宗廟)에서 폐한 바이니, 이는 어떠합니까?
[선생] 이는 선유의 말씀이 모두 그러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또 말씀하셨다.
“옛사람들은 서인(庶人)과 대부(大夫)를 둘로 나눈 것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서인과 대부가 평소의 제사하는 예절에 조금도 차별이 없으며 또 국휼에 모두 흰옷, 흰 갓으로 3년을 마치고 있으니, 이것만 홀로 구별하는 것은 곤란할 듯하다.”
[희조]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 가운데에 논한 상제(喪制)는 서인(庶人)들도 똑같이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합니까?
[선생] 그렇지 않다. 주자는 일찍이 ‘3년 동안 분홍 옷이나 자주색 옷을 입지 말라.’ 하였다.
[희조] 서인 이외에는 차별이 없습니까? 상장(喪杖)으로써 달관(達官)의 장(長)을 나눈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상장만 차별이 있을 뿐이고 상장 이외는 모두 동일하다. 우리나라는 정(正) 이하는 모두 제조(提調)가 있어 달관의 장이 될 수 없으므로 할 수가 없다.

[희조] 《맹자(孟子)》 호연장(浩然章)에 ‘이것이 없으면 뇌핍(餒乏)된다[無是餒]’의 시(是) 자와 ‘이는 의를 모은 것이다[是集義]’의 시(是) 자를 소주(小註)에 각기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였는데,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선생] 이는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다. 《맹자》 한 책 중에 이 편이 지극히 알기 어렵다. 지난번 윤증(尹拯)이 뵈러 왔기에 나는 그를 위하여 통독(通讀)하고 물었더니, 그도 자세히 강독하지 못한 듯하였다. ‘말에 얻지 못하거든 기에 구하지 말라.[不得於言 勿求於氣]’는 한 조항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맹자는 어찌하여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만을 말하고 자기의 부동심은 말씀하지 않았는가?
[희조] 가하다[可也]는 것도 미진(未盡)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고자의 잘못을 말하였으니, 맹자의 ‘마음에 구하고[求於心] 기에 구한 것[求於氣]’을 저절로 볼 수 있습니다.
[선생] 만일 공손추(公孫丑)가 총명하였다면 굳이 다시 묻지 않았을 터인데, 이미 또 ‘무엇을 더 잘하십니까[惡乎長]’ 하고 물은 다음에야 맹자는 부득이 ‘말을 알고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知言善養吾浩然之氣]’고 대답하셨다. 여기에서 말한 두 기(氣) 자는 위에서 말한 두 기(氣) 자와 상응(相應)이 되는데, 심(心) 자만이 홀로 빠졌었다. 그러다가 ‘그 마음에 생긴다.[生於其心]’ 하고 말한 뒤에야 비로소 위 글의 심(心) 자와 상응하게 되었다.

을묘년(1675, 숙종1) 정월 16일, 나는 이행(李涬) 형, 김만길(金萬吉)군과 함께 출발하였는데, 한성우(韓聖佑)군도 뒤따라 이르러 경안역(慶安驛)에 머물렀다. 18일 새벽 선생을 사기막(沙器幕)에서 맞이하여 뵈었다. 이때 나는 큰 병을 앓고 겨우 일어났었다. 선생은 몹시 걱정하시면서,
“이러한 병이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발섭(跋涉)하여 멀리 왔는가. 우리들의 운수가 이와 같으니, 자네의 병도 염려된다.”
하시고는 이어 말씀하셨다.
“동파(東坡 소식(蘇軾))는 하나의 문인(文人)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죽을 때를 당하여 걱정하지 않고 담소(談笑)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들이 득력(得力)해야 할 점이다.”
[희조] 선생께서는 비록 이와 같다 하시더라도 저희들의 마음에는 끝내 슬프고 원통하여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 뭐 그럴 것이 있겠는가.
나는 그윽이 선생을 살펴보니 용모(容貌)와 사기(辭氣)에 조금도 그런 기미가 없었다. 을묘년 광릉어록(廣陵語錄)

경신년(1680, 숙종6) 10월 13일, 나는 선생이 우거(寓居)하고 계신 정릉동(貞陵洞)으로 찾아가 뵈었더니, 선생은 반가워하시고 나로 하여금 옆에 앉게 하셨다.
[희조] 오늘날 이러한 경사가 있게 된 것은 진실로 뜻밖입니다. 이는 성상의 은혜이니 감사할 뿐 무슨 말씀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오늘 선생의 얼굴을 뵈니 전보다 기운이 크게 감퇴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이는 더욱 사문(斯文)의 다행입니다.
[선생] 미록(麋鹿)의 형상이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어 물으셨다.
“요즘 무슨 책을 읽는가?”
[희조] 읽은 바가 없습니다.
내가 이어 물었다.
“선생께서 어제 임금을 뵈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어제 마침 밤을 무릅쓰고 들어가 뫼셨는데, 임금께서 옛일을 제기하려고 하시므로 천신(賤臣 자신의 겸칭)은 굳이 그러하실 것이 없다고 하였다. 천신은 또 ‘옛날 주자가 장남헌(張南軒)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밤에 임금을 대할 때에 임금의 학업이 얼마나 도저한가를 묻게 하였습니다. 오늘 마침 밤에 성상을 대하오니 신(臣)은 감히 주자의 말씀에 의하여 성상의 학업이 얼마나 도저하신가를 묻겠습니다. 전에 신이 성상을 동궁(東宮)에서 뵈었는데 그때는 《소학(小學)》을 읽으셨습니다. 그후로 성상의 학문이 얼마나 성취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더니, 임금께서는 중간에 읽으신 책의 순서를 매우 상세하게 답하시고, 또 ‘이제 거의 《서전(書傳)》을 마치게 되었으니, 마땅히 뒤를 이어 《시전(詩傳)》을 읽어야겠다.’ 하셨다. 천신은 또 아뢰기를 ‘군신(群臣)들이 부복(俯伏)하는 것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는 도(道)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높고 낮음은 본래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신하들에게 앉아서 강독하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보아야만 얼굴이 익숙해지고 정의(情義)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하물며 신은 병이 있어 오랫동안 부복해 있을 수가 없사오니, 앉아서 천안(天顔)’을 우러러 뵈었으면 합니다.’ 하였더니, 임금께서는 ‘일어나 앉으라.’ 하셨다. 천신은 또 ‘임금의 학문은 몸으로 체행(體行)하고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오니, 바라옵건대 여기에 치력하시어 한갓 구이(口耳)의 자료로 삼지 마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區區)한 소망이옵니다.’ 하였더니, 임금께서는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하셨다.
천신은 또 나아가 아뢰기를 ‘《중용》과 《대학》은 그 요점이 근독(謹獨)에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깊은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시는데,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과 서로 대하실 때에 능히 정제(整齊)하고 엄숙히 하시어 한결같이 신하들을 대하실 때와 같이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여기에 유의하소서.’ 하였더니, 임금께서는 ‘내 비록 불민(不敏)하나 감히 태만이 하거나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 하셨다. 천신은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이와 같으시니 실로 우리나라 만대(萬代)의 무궁한 복이옵니다.’ 하였다. 어제 이야기한 것은 대략 이와 같으니, 참으로 이른바, ‘천안이 온화하시어 수작함이 메아리 같다.’는 것이 같았다.
선생은 다시 나에게,
“자네는 현재 무슨 책을 읽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요즘 《가례(家禮)》를 봅니다.”
하였다. 이때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임금께서 때때로 《강목(綱目)》을 강독하신다.’고 말하자, 선생은 또 말씀하셨다.
“옛 현인들이 ‘경서(經書)는 냉담하고 사서(史書)는 열뇨(熱閙 흥분시킴)한다.’ 하였는데, 《가례》는 참으로 냉담과 열뇨의 중간이다.”
[희조] 어찌하여 이와 같습니까?
[선생] 대문(大文)은 냉담하고 주각(註脚)은 열뇨하다.
이때 대사성(大司成) 남이성(南二星)도 한자리에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저의 망녕된 뜻에는, 임금께서 《강목》을 읽으신다면 한참에 10여 장을 강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이것으로 임금께 우러러 청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을 가리킴)의 유신(儒臣)은 또 ‘하루에 강독하는 것은 다만 1, 2장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생] 옛사람들이 진실로 ‘경서는 정하게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서(史書)는 반드시 한참에 몇 장을 곧바로 읽거나, 혹은 한 편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사건의 처음과 끝의 득실을 볼 수 있다.
나는 날이 저물었으므로 하직하고 물러왔다. 경신년 낙하어록(洛下語錄). 이하도 같다.

다음날 다시 선생을 안국동(安國洞)에서 뵈었다. 이날 임금께서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옥당(玉堂)의 관원이 선생께서 입조(入朝)했을 때에 태극도(太極圖)와 서명(西銘) 두 글을 강독할 것을 청하여 윤허(允許)를 받았다. 임덕함(林德涵 임영(林泳))이 수찬(修撰)으로서 아침에 이미 와서 두 글에 현토(懸吐)하고 갔다. 선생은 뒤따라 장차 대궐에 가려 하시므로 시자(侍者)가 관디를 갖다 드릴 것을 청하자, 선생은 물리치시면서,
“대궐에 이르러 입은들 어찌 해롭겠는가.”
하셨다. 이때 마침 내가 옆에 있자 선생은 희롱하시면서,
이런 관복 같지 않은 것을 입고 동보(同甫)와 같은 고사(高士)를 보니 또한 부끄럽다.”
하셨다. 이때 악장(嶽丈)이 오셔서 뵙자, 선생은 악장에게 이르기를,
“내가 임금을 뵈었을 때에 성상께 아뢰기를 ‘정(楨)의 죄는 죽어야 하니 진실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신(刑訊)하는 것은 공족(公族)을 대우하는 도리에 부당한 듯하니, 이는 인조(仁祖)께 가깝기 때문입니다. 연(㮒)으로 말하면 이미 용서하여 죽지 않았으니, 좋은 곳에 거하게 하여 안개나 이슬의 해가 없도록 하소서. 신이 그의 거처하는 곳을 보니, 장독(瘴毒)이 심한 바닷가로서 사람이 견디지 못할 지역이었습니다. 마땅히 변통하시어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소서.’ 했다.”
하셨다. 또 묻기를,
오시수(吳始壽)는 죽음을 면할 단서가 없겠는가?”
하셨다. 이는 시수의 어머니가 여러 대신들에게 살려 주기를 애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12월 23일, 선생은 서교(西郊)로부터 성안에 들어가셨는데, 이때 나는 북동(北洞)에 있다가 도보로 벽장동(壁藏洞)에 가서 선생을 뵈었다.
[희조] 선생께서 오늘 무엇 때문에 까닭없이 갑자기 대궐에 들어가셨습니까?
[선생] 감히 말할 수 없는 특이한 예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희조] 감히 그 이유를 묻겠습니다.
[선생] 자성(慈聖)의 수찰(手札)을 내려 부르셨는데, 대의(大意)는 ‘현재 재변이 매우 참혹하고 근심스러운 일이 많은데 주상(主上)께서 나이가 어리시니, 그대는 어찌하여 오지 않는가.’ 하셨고, 끝에는 또 ‘나는 바깥 조정의 일은 본래 간여할 수가 없으나 이것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다. 이 명령을 전한 자는 김석연(金錫衍)이었는데, 그는 갑자기 빈객들이 모인 좌중에 소매 속에서 내주므로, 나는 겨우 부복(俯伏)만 하고 받았을 뿐, 미처 관복을 입지 못했다.
[희조] 이는 증거할 만한 고사(古事)가 있습니까?
[선생]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낙양(洛陽)으로 돌아오자 고 태후(高太后)가 수조(手詔)를 내려 만류하였다.
[희조] 그때는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있었으니, 수조를 내린 것이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고 마침내 개인을 시켜서 이 글을 전했으니, 미안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선생] 자교(慈敎 자성의 교서)에도 ‘주상이 어리다.’ 했다.
[희조] 주상께서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선왕(先王 현종을 가리킴)이 즉위하신 나이에 비하면 이미 한 살이 많으며, 또 갑인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성께서 만일 안에서 성상의 미급한 것을 보조하신다면 참으로 좋지만, 이와 같이 스스로 조서(詔書)를 내리시는 것은 끝내 미안할 듯합니다. 설령 스스로 조서를 내리신다 하더라도 만일 승정원(承政院)에 곧바로 하달하여 이러한 뜻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면 어찌 광명정대하지 않겠습니까?
[선생] 시행함에 있어 다만 제대로 되지 못했을 뿐이다.
[희조] 그렇다면 선생께서 오늘에 명령을 받은 것은 지난번에 사은(謝恩)하고 능지(陵誌)를 찬하실 때와 자연 다르니, 장래의 거취를 마땅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차 진달하는 바가 있어 조짐을 삼겠습니까?
[선생] 진실로 그렇다. 나의 거취는 매우 쉬우니, 한번 오활한 말을 꺼내어 들어주지 않으면 다만 도피하여 은둔할 뿐이다.
[희조] 소위 오활한 말씀이란 곧 어떤 말씀입니까?
[선생] 대의(大義)가 바로 그것이다.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에 삼강(三綱)을 버리고 정치를 하는 자는 있지 않다.
[희조] 대의는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의(時義)로써 논한다면 더욱 긴요하고 급한 것이 있을 듯하오니, 대의는 마땅히 표준과 귀취가 될 뿐입니다.
[선생] 진실로 그렇다. 송 고종(宋高宗) 때에도 주자(朱子)는 오히려 ‘저들 틈의 깊고 얕음을 관찰하고 우리 힘의 강약을 헤아려야 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의 오늘날 형세이겠는가.
[희조] 그렇다면 지금의 급선무는 무엇입니까?
[선생] 조정을 청명(淸明)하게 하고 민생을 편안히 보호하는 것이 오늘날 제일의 도리이다.
[희조] 조정을 어떻게 하여야 청명해지며 민생을 어떻게 하여야 편안히 보호할 수 있습니까?
[선생] 안으로는 각 관사(官司)로부터 밖으로는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일체 깨끗이 도태해야 하니, 이것이 중요한 급선무가 된다.
이어 ‘유사(有司)를 먼저 단속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희조] 반드시 널리 찾은 다음에야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 요즘 사람들은 매양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을 말하지만 실제는 초야에 있는 사람도 반드시 쓸 만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수령이 되면 탐욕을 부리는 것이 반드시 심하다. 나의 생각에는 서울 양반의 자제들이 오히려 명절(名節)을 세우려고 스스로 힘쓰니, 이들이 초야에 있는 사람보다 나을 듯하다.
[희조] 선생께서는 시골 사정을 익숙히 아시기 때문에 소견이 이와 같으십니다. 매양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의논을 들어 보면 뜻이 항상 초야에 있습니다. 이 아저씨는 서울 사람에 대하여 매우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초야에 있는 사람이 끝내 서울에 있는 사람보다 나을 이치가 없다.
[희조] 오늘날 함께 일해야 할 사람은 과연 누구누구입니까?
[선생] 형편상 현재 국정을 맡은 대신들과 일을 같이 해야 할 것이다.
[희조] 대의(大義)는 진실로 맨 먼저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웃사람과 아랫사람이 미처 믿기도 전에 만일 당장 북벌(北伐)하고자 한다고 하면 반드시 장차 인심이 소란해져서 일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뜻만은 진실로 이렇게 가져야 하지만 또한 경솔하게 거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나라 형편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대단하게 자강(自强)한 다음에야 하늘에게 영원한 천명(天命)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주 부자(朱夫子)는 비록 강력하게 국토 회복을 주장하였지만, 말년에 이르러는 ‘하찮은 동남 지방의 일도 오히려 이루 다 생각할 수 없는데, 하물며 국토 회복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셨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오늘의 일이 바로 이와 같으니, 이 뜻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 자네 말이 옳다.
이어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망하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어떤 인물에게 국정을 맡겨야 국세를 만회할지 모르겠다. 《시경(詩經)》에 ‘경경하여 잠을 못 이루니, 마음속에 숨은 근심이 있는 듯하다.[耿耿不寐 如有隱憂]’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나의 오늘날 심사(心事)를 말한 것이다.”

말씀을 드리다가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이 참판(李參判)의 일에 미치자, 선생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종전에 자네가 여러 번 물었지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다지도 이 사실을 알려고 하는가. 내가 오늘에 자네를 위하여 자세히 말해 주겠네. 예론(禮論)에 대하여 의견이 다르거나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은 모두 해로울 것이 없네. 이는 다만 적(嫡) 자의 뜻을 발명함에 있어 어의(語意)가 혹 너무 지나쳐 그러한 것이니, 이는 내버려 두는 것이 좋네. 다만 예론이 변한 뒤로부터 이 노인이 지나치게 두려움을 품어 저 지경에 이르렀네. 공주(公州)에 김주일(金宙一)이란 자가 있는데 그는 곧 윤휴(尹鑴)의 가까운 친척이네. 이 노인이 김가에게 이르기를 ‘송모(宋某 송시열을 가리킴)의 예론(禮論)에 대한 죄는 비록 일죄(一罪)로써 논단(論斷)하더라도 마땅하다.’ 하였네. 이 말을 김가는 윤의제(尹義濟)에게 전했고 의제는 그의 처조카인 권유(權惟)에게 전했고 권유는 나에게 전하였네. 나는 처음에 이 말을 듣고 ‘이 노인의 말은 반드시 내가 기휘(忌諱)할 줄 모르고 함부로 말해서 숨기지 않는 자라 하여, 일죄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생각하였네. 이것이 첫 번째 일이네.
내가 덕원(德源)으로 귀양 간 뒤에 김익견(金益堅)의 편지에 ‘초려의 조카 이의석(李懿錫)의 상소에 「7일 성복(成服)이 이미 지났고 기년복제(期年服制)가 이미 정해졌다.」 하였으니, 이는 3년을 옳다고 생각하여 행하지 못한 것을 한하는 뜻이다.’ 하였네. 나는 답장에 ‘석지(錫之 이의석)는 석지이고 초려는 초려이니 관계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일이네.
내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배(移配)되었을 때에 김군이 또 흥해(興海)로 와서 보고는 이 노인의 일을 말한 것이 매우 많았네. 나는 비록 그를 꾸짖었으나 그래도 그는 그치지 않았으니, 이는 김군이 나를 몹시 사랑하며 그의 사람됨이 우직하고 또 광기(狂氣)가 있기 때문이었네. 이것이 세 번째 일이네.
내가 봉산(蓬山 거제도(巨濟島)를 가리킨다)에 있을 때에 김군은 편지를 보내어 ‘와서 방문하고 싶다.’ 하였기에, 나는 답장에 ‘만일 전과 같이 초려의 일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방문하러 오는 것이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와서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김군은 끝내 오지 않았네. 이는 그 스스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네. 이것이 네 번째 일이네.
그 뒤에 이 노인은 편지를 보내어 변명하였는데, 나는 가소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소(一笑)에 불과하다.’고 답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었네. 저는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도리는 마땅히 간곡한 정으로써 서로 고(告)해야 하는데 마침내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지금까지도 나는 후회스럽고 한스럽네. 그는 두 번째 편지에서 오로지 나를 권세가 있는 자라 하였네. 그때는 저쪽 무리들이 나를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있다.’ 하여 장차 나를 죽이려 하는 참이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하여 저들의 말을 실증(實證)해 주었고, 또다시 여러 곳에 두루 편지를 보내어 마침내 수많은 말을 하였네. 이숙(李䎘)이 일찍이 나를 봉산으로 찾아와서 이 노인이 보낸 편지를 보여 주었는데 이 편지에 ‘인조(仁祖)의 적통(嫡統)을 아울러 빼앗으려 했다.’는 말이 있었네. 나는 이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써늘해져서 ‘우리들은 삼족(三族)을 멸하는 화를 당하겠다.’ 하였네. 이때 송상민(宋尙敏)이 옆에 있었는데 홀로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가 천명(天命)이니 이 노인이 어찌 사람을 살리고 죽이겠는가.’ 하였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으로 말하면, 내가 들으니 그의 자제들이 또 화를 벗어날 계책을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네. 그러나 이 노인은 숙범(叔範 홍득우(洪得禹))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 문하(門下)의 여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비방을 조작해서 이렇게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하였네. 예로부터 어찌 거짓말 때문에 중대한 죄를 사면할 리가 있겠는가.
내가 귀양 가 있을 때에 또 들은 것이 있네. 금산(錦山)에 이 노인의 일가 자제가 있으며, 또 임가(林哥)ㆍ이가(李哥) 두 사람이 나의 문하에 출입한 자가 있었는데 그는, 내가 임가ㆍ이가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노인이 당시 재상에게 부탁했다.’ 하여 몹시 힐책했다고 하고는, 심지어 이 말을 들은 곳까지 증거하였네. 이 때문에 변정(辨正)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태수(太守) 이중휘(李重輝)는 점잖은 사람이었네. 그리하여 태수가 극력 저지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마침내 잠잠해졌네. 이는 그가 고의로 이러한 말을 해서 반드시 사람들에게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알리려고 하는 것이었네. 요즘 들으니 이 노인의 자제가 이 일로 해서 선비를 구타하기까지 하였는데, 구타를 당한 사람은 바로 나와 친한 사람이었네. 또한 이 때문에 순영(巡營)에 제소(提訴)하였는데, 감사(監司)가 ‘따지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희조] 이 노인이 염려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했습니다. 선생께서 화를 당한 것과 비교하면 어찌 천심(淺深)의 차이가 없겠습니까.
[선생] 참으로 그렇다. 이미 멀리 귀양 갔으니, 어찌 그 뒤에 다시 어떻게 될 것을 알겠는가.
[희조] 이 노인이 평소에 학문한 바가 어떠했기에 이처럼 낭패한단 말입니까?
[선생] 참으로 알 수 없다.
[희조] 일찍이 선생께서 효종(孝宗) 때에 비밀히 올린 상소를 보니, 이 노인과 유시남(兪市南 유계(兪棨))을 ‘유림(儒林)에 중한 명망이 있고 성대(聖代)의 명신(名臣)이다.’고 칭하셨습니다.
[선생] 이 노인이 낭패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살을 깎는 것과 같다.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동한(東漢) 때 당인(黨人)의 일을 논하셨다.
“사람들은 ‘동한이 망한 것은 당고(黨錮)된 여러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때를 당해서 한 나라 황실이 다소라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힘이었다.”
또 말씀하셨다.
“주자의 취성정(聚星亭) 찬(贊)에 진 태구(陳太丘)를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無可不可]’ 하셨는데, 이는 본래 성인(聖人)의 일인 것을 태구에게 사용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다. 이는 아마도 마원(馬援)이 한 고조(漢高祖)를 논하면서 또한 이와 같이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인용했나 보다. 또 진번(陳蕃)을 ‘높은 풍도[高風]’가 있다고 칭했으니, 무엇 때문인가.”

[선생] 요즘 무슨 책을 보는가?
[희조] 현재 《소학(小學)》을 보고 있습니다.
[선생]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종신토록 이 책을 읽어서 득력(得力)한 것이 많았다.
이어 ‘윤화정(尹和靖)이 이천(伊川)을 뵌 지 반년 만에 《대학(大學)》과 서명(西銘)을 보았다.’는 말을 하셨다.
[희조] 소위 반년이란 것은 아마도 반년이 된 뒤에 비로소 이 두 책을 보았음을 말하는가 봅니다. 아니면 오로지하고 정독(精讀)한 때문에 두 책을 끝낸 것이 반년이 걸렸단 말입니까?
[선생] 《근사록(近思錄)》 주에는 ‘성의를 쌓은 다음에 비로소 두 책을 보았다.’ 하였는데, 주자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희조] 호포(戶布)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시남(市南)으로부터 발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법이 옛날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이는 주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주자가 처음에는 불가하다고 했다가 끝내는 괜찮다고 했다.
이어 《주자대전(朱子大全)》 제60권에 있는 독고급(獨孤及)의 글에 발문(跋文)한 것을 보여 주시고,
“이것은 불가하다고 한 것이다.”
하신 다음, 또 제18권 장남헌(張南軒)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 주시고,
“이것은 괜찮다고 한 것이다.”
하셨다.
[희조] 이 법을 지금에도 시행할 수가 있습니까?
[선생] 지금의 세도(世道)로는 결코 시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남도 일찍이 ‘위에 있는 자가 먼저 시행하여 아래에 있는 자들이 부러워하게 한 다음에야 시행할 수 있다.’고 했다.
[희조] 주자가 말씀한 것은 인구(人口)에 대한 부세를 지칭한 듯한데, 지금에 말하는 것은 바로 호(戶)에 대한 부세이니, 이는 동일하지 않은 듯합니다. 어떠합니까?
[선생] 호(戶)에 대한 것은 이미 시행하고 있다. 현재 집터에 모두 복(卜)ㆍ속(束)이 있어 납세한다. 주자가 말씀한 것은 바로 신역(身役)이다.
[희조] 현재 의논하는 자들은 ‘신역을 대신 이하에게 징수하는 것은 부당하고, 호역만은 전세와 다름없으니 혐의할 바가 없다.’고 합니다.
[선생] 그렇지 않다. 호역(戶役)은 이중으로 징수(徵收)할 수는 없다. 임술년 화양어록(華陽語錄). 이하도 같다.

[희조] 선기옥형(璿璣王衡)의 제도를 도식(圖式)으로 보면 끝내 이해되지 않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도식은 매우 알기 어렵다. 만일 그 제작한 제도를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다.
이어 시자(侍者)에게 가지고 있는 선기옥형을 꺼내 오게 하시고는 먼저 조그마한 백지로 한가운데 두 고리[環]의 반에 붙여서 하지(夏至)와 동지(冬至)의 일도(日度)를 나눈 다음 본래의 학설(學說)을 갖고 하나하나 지적하여 매우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니, 나는 말을 들으면 즉시 깨달을 수가 있었다.
[선생] 이것은 바로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첩의 아들인 이민철(李敏哲)이 만든 것이다. 이군은 또 1본을 만든 것이 있는데, 치수가 매우 크고 또 물을 부딪히게 하여 돌리는 법이 있는데 소제(蘇堤)에 있다.
또 말씀하셨다.
“자네가 만일 이 기구를 만들고 싶거든 김 정승(김수흥(金壽興)을 가리킴)에게 권하여 이군을 불러다가 만들게 하면 즉시 장만할 수 있다.”

[희조] 구족(九族)을 집전(集傳 《서경(書經)》 전(傳)을 말한다)에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의 친족까지이다.’ 하였으니, 이는 자기까지 계산하여 합해서 구세(九世)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소주(小註)에는 또 ‘부족(父族)이 넷, 모족(母族)이 셋, 처족(妻族)이 둘이다.’ 하였으니, 두 말 중 어떤 것을 따라야 합니까?
[선생] 이 두 말은 두 가지로 볼 수가 없다. 부족ㆍ모족ㆍ처족도 고조 이하의 친족에 포함된다. 이 때문에 집전에도 ‘가까운 것을 들어 먼 것을 포함시켰으니, 오복(五服) 이성(異姓)의 친척도 이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였다.
[희조] 오복 이성의 토(吐)는 마땅히 오복과(果) 이성 …… 이라고 해야 합니까?
[선생] 당연할 듯하다.
[희조] 예조(藝祖)와 문조(文祖)는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선생] 이는 알 수가 없다. 소위 조(祖)라고 하는 것은 조선(祖先)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다만 종묘(宗廟)의 이름인 듯하다. ‘조에서 맹약을 했다.[盟于祖]’는 조(祖)로 보면 그럴 것 같다.

[희조] 제가 올 때에 여양(驪陽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을 가리킴)이 한 가지 의심스러운 예(禮)가 있어서 선생께 여쭙기를 바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만 형제밖에 없었는데, 형은 아들이 없고 아우만 독자를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로 형의 뒤를 이어서 자기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한바, 자기는 무후(無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두 아들을 낳아서 장자는 큰집을 받들게 하고 차자는 또 본생 조부(本生祖父)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이 경우 신주(神主)의 열에 쓰는 것과 복제(服制)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이 일은 계후(繼後)로 논할 수는 없으니, 신주의 옆에 쓰는 것은 말할 것이 없을 듯하다. 복제는 다만 본복(本服)에서 한 등급을 내려서 입는 것이 옳다.
[희조] 명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조(從祖)라고 칭해야 합니까?
[선생] 만일 종조라고 칭한다먼 복은 마땅히 소공(小功)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이것은 바로 대공(大功)이다. 대공복을 입으면서 종조라고 칭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희조] 고례(古禮)에 명칭과 복제가 또한 다른 곳이 있으니, 종조라고 칭하면서 대공복을 입는 것이 어찌해서 불가합니까?
[선생] 진실로 다른 곳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조] 그렇다면 평상시에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다만 본생 조부라고 하는 것이 옳다.
[희조] 제사를 받드는 자가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어떠합니까?
[선생] 옳은 점을 발견할 수 없다.

[희조] 죽은 누이의 소상(小祥)이 이미 임박하였는데, 저 집에서도 제사에 대한 일을 알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면 장자의 복에 상장(喪杖)을 짚지 않으며, 상장을 짚지 않으면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는 것은 분명히 《예기집주(禮記集註)》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여쭙니다.
선생은 《예기》의 본문을 내보여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도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 의심이 있었다. 경문(經文)에 다만 ‘아내를 위해서[爲妻]’라고 하였는데, 주에서 비로소 아버지가 생존해 있느냐의 여부를 말했다.”
또 말씀하셨다.
“종자(宗子)는 어머니가 생존해 계셔도 담제를 지낸다 하였으니, 이는 종자가 아닐 경우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면 담제를 지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딴 곳에서는 모두 ‘아버지가 작고하시고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면 모두 상장을 짚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처럼 차이가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희조] 선생 집안에도 손부(孫婦)의 상이 있으신데, 장차 담제를 지내시겠습니까?
[선생] 큰 집에서 만일 행하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기가 진실로 어렵다. 다만 이 경우에는 이미 아들이 있으니, 그 아버지는 비록 아내를 위해서 담제를 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들이야 어찌 담제를 지내지 않겠는가.
[희조] 저의 집에서도 굳이 담제를 지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례비요(喪禮備要》와 《가례문해(家禮問解)》에 모두 이와 같이 말했기 때문에 선생께 여쭈어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 이는 지극히 결단하기 어렵다.
[희조] 만약 선생께서 이 경우를 당하셨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선생] 이는 마땅히 행하겠다. 경문에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가의 여부를 말하지 않았으며, 아내의 상(喪)은 3년의 체(體)를 갖춘 것이니, 예는 마땅히 후(厚)한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한 학생이 와서 《가례(家禮)》의 서문을 배우고 있었다. 선생이 나에게 물으셨다.
“‘대개 두 가지를 병통으로 생각한다.[盖兩病焉]’ 한 두 가지 병통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가?”
나는 분명하게 대답을 못하였다.
[선생] 이는 곧 위 글의 두 연(然)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계(沙溪) 선생께서 ‘이는 지극히 알기가 어렵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들 모르고 오직 장유(張維)와 정경세(鄭經世)만이 알았다.’고 하셨다. 뒤에 현석(玄石)이 표제(標題)한 것을 보니, 연역(然亦)과 지혹(至或)을 두 가지 병통으로 삼았으니, 이 역시 본문의 뜻을 잃은 듯하다.

내가 감실(龕室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의 제도를 물었다.
[선생] 탁자를 감실 가운데에 놓고 신주를 탁자의 북쪽에 봉안(奉安)한다.

[희조] 생존해 있을 때에 서재를 세워 거처하다가 죽은 뒤에 그대로 사당을 만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생] 아마도 평소에 거처한 곳이기 때문에 정신이 붙어 있다 해서 그러는가 보다.

[희조] 일찍이 선생의 하교(下敎)를 받자오니, 매양 우리나라의 사전(祀典)을 말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봉사(封事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마침내 다시 극구 말씀하시어, 전에 말씀하신 것과 같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생] 지금은 조정에서 장차 행하려고 하여 전과 사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희조] 선생께서 일찍이 ‘우리나라 유현(儒賢) 중 만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ㆍ퇴계(退溪)ㆍ율곡(栗谷) 이 네 선현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다면 그 누가 감히 이의를 하겠는가.’ 하시고, 당시에는 일찍이 사계(沙溪)는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소문에서 비로소 사계를 말하셨습니다. 비록 네 유현을 종사하더라도 사계를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선생] 당연할 듯하다.
[희조] 사계와 율곡은 차등이 없습니까?
[희조] 내가 일찍이 노선생(老先生)의 행장(行狀)을 찬했는데, 여기에 율곡을 문왕(文王)이 기산(岐山)을 다스린 것에 비유했고, 사계를 주공(周公)이 예악(禮樂)을 지은 것에 비유했다.
[희조] 그렇다면 문왕과 주공은 똑같은 성인이니 마땅히 분별이 없겠습니다.
[선생] 주공이 어찌 문왕만 하겠는가. 문왕은 요(堯)ㆍ순(舜)과 같고 주공은 우(禹)ㆍ탕(湯)과 같으신 분이시다. 사계와 율곡의 사이에 어찌 감히 차등이 없다고 하겠는가.

권시(權諰) 공의 일을 논하였다.
[선생] 이 사람은 마음이 선량하고 딴 사심(邪心)이 없다. 다만 중심에 주장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의 상소가 저러하다. 내가 일찍이 청풍(淸風)에 갔었는데, 선존장(先尊丈)께서 나와 함께 배를 타고 한벽루(寒碧樓) 아래서부터 하류(下流)에 이를 때까지 한나절 동안 말한 것이 모두 이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선존장은 ‘일찍이 그와 함께 경연(經筵)에 들어갔었는데, 그의 소행과 말하는 것을 보니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더라.’고 하셨다.
[희조] 일찍이 들으니, 이 사람이 경연에서 정인홍(鄭仁弘)의 일을 칭송하므로 선인(先人)께서 일찍이 면박을 하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선생] 그때 선존장께서 강력히 말하여 크게 배척하셨기 때문에 그가 조정에 있지 못하고 마침내 인천(仁川)으로 나갔다. 이후로 효종 때에는 다시 조정에 들어오지 못했다.

[희조] 근대의 명공(名公)ㆍ대인(大人)의 묘도문자(墓道文字 묘비문(墓碑文)을 가리킴)를 거의 모두 선생님이 지으셨는데, 과연 모두 일일이 사실과 부합하여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함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딴 사람들의 문자는 진실로 혹 범연하기도 하나 명인에 있어서는 감히 함부로 지나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성(尼城)의 일에 운운(云云)한 바가 있어 마침내 이처럼 시비가 분분하게 되었다.

[선생] 신재(愼齋 김집(金集))는 일찍이 ‘우계(牛溪)의 학문이 퇴계(退溪)보다 낫다.’ 하였고, 조중봉(趙重峯)은 우리나라의 포은(圃隱)과 율곡(栗谷)을 진유(眞儒)라 하고 나머지는 넣지 않았다. 신재도 일찍이 퇴계와 우계를 미진(未盡)하다고 했다.

[희조]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은 어떠한 분입니까?
[선생] 이분은 기절(氣節)이 있어서 남쪽 지방 선비들이 이 어른을 힘입어 갈 길을 잃지 않은 자가 매우 많다. 남중(南中 남쪽 지방으로 호남(湖南)을 가리킴)에 지극히 공이 있다.

[선생] 대신들이 자기 몸을 청백하고 엄하게 다스린 다음에 백관(百官)을 감독하여 바로잡고 만일 법대로 이행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일일이 도태하면 조정이 어찌 청명(淸明)해지지 않겠는가.

[선생] 국가의 일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 지난날 베[布]를 거두는 조항에 있어 오승포(五升布) 30척을 받는 것이 국가의 정해진 법령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매양 ‘오승포는 몹시 거칠어 입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아전들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이다. 만일 백성들에게 스스로 오승포를 짜 가지고 오게 한 다음에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어찌 알 수 없겠는가.
이때 마침 북쪽 지방에서 와서 배우는 자가 함께 자리에 있었다. 선생이 그에게,
“자네가 입고 입는 도포는 몇 승(升)인가?”
하시자, 그는,
“이것은 오승포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내가,
“내가 입은 것은 몇 승이나 되어보이는가?”
하였더니, 그가,
“거의 육승(六升)쯤 되어보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또,
“소위 오승포란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입지 못하겠는가. 만일 잠곡(潛谷 김육(金堉))공이 지금까지 조정에 있었다면 이 일은 반드시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시고 오랫동안 탄식하셨다.
[희조] 일찍이 여양(驪陽)의 말을 들으니 ‘처음에는 비록 오승포로 기준을 삼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점점 높아질 것이니, 1필(疋)을 감하고 다만 1필을 바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해야 폐단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떠합니까?
[선생] 이 역시 무방하다.

[선생] 오늘날 세도(世道)를 맡길 만한 자가 없으니, 지극히 염려스럽다. 화숙(和叔)이 어찌하여 세상에 나와 세도를 담당하지 않는가.
[희조] 이 아저씨가 스스로 ‘재주와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며, 만일 선생께서 국정을 맡으시고 부르시면 마땅히 나와서 함께 일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선생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화숙이 만일 나와서 담당한 다음에 나를 부른다면 내가 어찌 달려가지 않겠는가.”

[희조] 그동안 사람들은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한 문서(文書)를 비밀히 선생께 부쳤다.’ 하는데 사실입니까?
[선생] 대개 있었다.
이어 말씀하셨다.
“정유년(1657, 효종8) 내가 상제(喪制)를 마친 뒤에 호백(湖伯 충청 감사(忠淸監司))이 계문(啓聞)하자, 효종께서는 즉시 어찰(御札)로써 하문(下問)하셨는데 말씀하신 뜻이 지극히 비밀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찰을 가지고 온 자도 곧 바로 가 버려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또 효종께서는 천신(賤臣)에게 그 말을 퍼뜨리지 말고 그 종이를 찢어 버리라고 하셨으므로 감히 어기지 못하고 즉시 성상의 말씀과 같이 하였다. 지금도 사람을 대하여 감히 그 말씀하신 뜻을 말할 수 없다. 그후 기해년(1659, 효종10) 성상께서 승하(昇遐)하시기 전 내가 조정에 있을 때에 다시 어찰을 내리시어 말씀을 매우 많이 하셨는데, 대개는 서글퍼 하는 내용이 많았다. 이는 스스로 대명(大命 임종)이 이미 임박하였음을 아신 것이다.”
선생은 탄식하다 한숨을 쉬시고는 말씀하셨다.
“김적(金賊 김자점(金自點)을 가리킴)의 해골이 현재 어느 곳에 묻혀 있는가?”
[희조] 효종께서 꿈에서도 이 역적 때문에 불길한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선생] 그렇다.
[희조] 그 어찰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까?
[선생] 있다.
[희조] 소위 문서란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선생] 이것을 가리킨다.
[희조] 지난번 성상께서 만일 이것을 보셨더라면 유익한 바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어찌 감히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그 가운데 말한 것은 외인들이 함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실로 복심(腹心)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하였겠는가. 이는 혹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집의 애들은 이것을 임금께 바칠 것을 바라지만 내 어찌 차마 이것을 내놓아 면하기를 바라겠는가. 이것을 안고 지하(地下)에 들어가고 싶다.
[희조] 만일 유익함이 있다면 영손(令孫)들이 어찌 몰래 훔쳐서 임금께 바치지 않습니까?
[선생] 아이들 마음이야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다만 그 보관한 곳을 나만이 알고 저들은 모른다. 비록 훔치고 싶으나 어찌하겠는가.

[선생] 송자신(宋子愼 자신은 송상민(宋尙敏))은 절의(節義)가 심히 높을 뿐만 아니라 학문이 정미(精微)하고 엄정(嚴整)하여 평소에 행하는 바가 모두 훌륭하다. 이 때문에 이웃 마을도 모두 감화(感化)되었다.
또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조예가 정심(精深)하니,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 비하면 도리어 낫다.”
또 말씀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이것은 괜찮을 수도 있으나 정승 이산해(李山海)를 호칭할 때에도 반드시 자(字)를 썼으니, 이는 더욱 타당치 못하다. 아마도 그와 아는 사이이기 때문인가 보다.”
또 말씀하셨다.
“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가서 유숙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새벽이면 곧 그 어버이의 묘소에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을 비방하는 자들은 마침내 ‘평소에는 일찍이 이렇게 하지 않다가 내가 가서 유숙했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하고, 이어 열 가지 죄목(罪目)에 넣었으니, 이 일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 박대숙(朴大叔 박심(朴鐔))은 요즘도 독서를 하는가. 이 사람은 뜻이 높고 행실이 독실하여 가상하다. 다만 자기의 의견을 너무 자신하여 주자의 법문(法門)을 따르지 아니해서 잘못 들어가기가 매우 쉬우니, 이것이 염려스럽다.

선생은 주자가 장남헌(張南軒)과 함께 수창(酬唱)한 시인,
유라고 하자니 어찌 자취가 있으며 / 謂有寧有跡
무라고 한다면 다시 무엇이 존재하는가 / 謂無復何存
한 글귀를 보여 주시면서,
“이 글귀의 뜻은, 만일 태극(太極)이 참으로 그 물건이 있다고 한다면 본래 말할 만한 형상이 없고, 만일 없다고 한다면 어찌 다시 존재하는 것이 있겠느냐는 뜻이니, 이를테면, 태극이 없으면 또한 물건도 없기 때문이다. 그 뜻이 분명히 이와 같은데, 퇴계(退溪)의 해석하신 것은 그렇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하시고 이어 말씀하셨다.
“퇴계가 논설한 것에 의심할 만한 것이 많은데 나는 일일이 분변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만일 영남(嶺南)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나의 한 가지 큰 죄안(罪案)이 될 것이다.”

[선생] 사람들은 ‘《주역》을 읽기 어렵다.’ 한다. 그러나 《중용》처럼 어렵지는 않다. 내 생각에는 《중용》이 오히려 《맹자》 호연장(浩然章)처럼 어렵지는 않다고 본다. 나는 이 호연장을 젊었을 때부터 가장 많이 읽었으나 아득하여 소득이 없었는데 노래(老來)에 이르러서야 대강 줄거리를 알게 되었다.
[희조] 이 호연장은 심오한 뜻이 있어 난해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문장과 어맥(語脈)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알지 못할 뿐인 듯합니다.
[선생] 그렇다.
이어 한 장(章)의 위ㆍ아래가 서로 대응(對應)되는 곳을 들어서 말씀해 주셨다.

[선생] 곧음으로써 기른다[以直養]의 직(直) 자는 곧 도의(道義)이다. 이미 도의로써 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양성한 뒤에는 이 호연지기가 또 저 도의를 부조(扶助)하니, 이것이 이른바 ‘의와 도가 배합하여 돕는다.[配義與道]’는 것이다. 여자약(呂子約 여조겸(呂祖謙))은 능히 이 대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자는 ‘가슴속이 어쩌면 이리도 깜깜하단 말인가.’ 하였다.

선생은 《논어(論語)》 자장편(子張篇)의 자하선전근소장(子夏先傳近小章)을 내어 집주(集註)의 우안조(愚按條)를 보여 주셨다.
[선생] 이 조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희조] 비위(非謂)의 뜻이 재차(在此)에까지 가야 할 듯합니다. 이 장(章)의 주의(主意)가 먼저 가깝고 작은 것을 가리킨 뒤에 멀고 큰 것을 가리킴에 있는 때문입니다.
[선생] 옳게 보았다. 그런데 퇴계는 이에 대하여 비위(非謂)의 뜻이 시본(是本)에서 그치는 것으로 해석하셨다. 나는 일찍이 이것을 의심하여 화숙(和叔)에게 물었더니, 화숙은 처음에는 퇴계의 말씀을 옳다고 하다가 뒤에는 다시 내 말을 옳다고 했다.

내가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가려 했다.
[선생] 나는 나이가 늙고 병이 깊어 다만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마도 다시 보지 못하고 죽을 듯하다.
[희조] 선생께서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의 구구한 소망은 백세 상수(百歲上壽)를 빌 뿐만 아니라, 선생께서 다시 조정에 돌아가 한 세상을 태평성대로 만들어 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선생] 이를 어찌 기대하겠는가.
선생은 또 말씀하셨다.
“옛날 우계(牛溪)와 구봉(龜峯)이 서로 모여서 ‘이치를 논한 예는 적고 일을 논한 예는 많았다.’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임이 또한 이와 같으니, 참으로 후회스럽다.”


 

[주D-001]존대인(尊大人) : 남의 부친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 별세한 후에는 선대인(先大人), 또는 존선대인(尊先大人)이라 한다. 여기서는 이희조(李喜朝)의 부친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을 가리킨다.
[주D-002]이천(伊川)이 …… 비하셨는가 : 부공(富公)은 송 영종(宋英宗) 때의 명상(名相)인 부필(富弼)로,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으므로 부 정공(富鄭公)이라 불리운다.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은 효종의 능을 가리킨다. 이천은 일찍이 부필에게 편지를 보내어 인종(仁宗)의 능인 소릉(昭陵)을 잘못 만들었음을 말하였다. 《二程全書 伊川文五 上富鄭公書》 우암은 효종의 상(喪)에 총책임자가 되어 현재 서울의 화양동(華陽洞)에 장례했으나 얼마 후 장마로 인하여 봉분이 갈라지는 변이 생겼다. 이에 남인 일파에서는 우암을 모함하기 위하여 장지(葬地)를 잘못 선택했느니 감독을 태만히 했느니 하는 구실을 붙여 결국 지금의 여주(驪州)로 이장하였다.
[주D-003]박숙(朴叔) : 박씨 아저씨란 뜻으로 박세채(朴世采)를 가리킨다. 이희조의 조부(祖父)인 이명한(李明漢)은 박세채의 조부인 박동량(朴東亮)의 사위이므로, 박세채는 이희조의 진외당숙이 되기 때문에 일컬은 것이다.
[주D-004]이성(尼城)의 노서서원(魯西書院) : 노성(魯城)에 있는 노강서원(魯岡書院)으로 팔송(八松) 윤황(尹煌)을 주향(主享)하였다.
[주D-005]율곡을 석담(石潭)에 배향 : 율곡은 일찍이 해주(海州) 석담에 정사(精舍)를 짓고 문도들을 가르쳤으며, 주자의 사당을 세우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배향하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율곡이 별세한 후 2년째 되던 해에 문인들은 유지(遺志)를 받들어 사당을 세우고 율곡도 함께 배향하였다. 《栗谷全書 卷34 附錄 年譜》
[주D-006]팔송(八松) : 윤선거의 부친인 윤황(尹煌)의 호. 그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병자호란 다음해인 정축년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에도 척화를 강력히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이 척화신(斥和臣)으로 청 나라에 잡혀가게 되자 대신 잡혀갈 것을 자청하였다.
[주D-007]향선생(鄕先生) : 그 지방 출신 대부(大夫)로서 벼슬을 내놓고 시골에 내려와 서당을 세우고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 뒤에 그가 죽으면 그 서당에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한다. 한유(韓愈)의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에 “옛날에 이른바 향선생으로 죽으면 서당에 제사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 하였는데 이는 큰 유현(儒賢)이 아니더라도 그 지방 출신의 학자나 절의가 높은 사람이면 사당을 짓고 제사할 수 있음을 뜻한 것이다.
[주D-008]옛 비석 :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찬한 율곡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가리킨다. 그후 우암은 선배가 지은 신도비를 없애기 어렵다 하여 자기가 지은 비문은 율곡의 장지인 파주의 자운산(紫雲山) 아래에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의 묘정비(廟庭碑)로 썼다.
[주D-009]한비(韓碑)로 …… 세운 예(例) : 한비는 한유(韓愈)의 비를 가리킨 듯하나 미상이다.
[주D-010]소 강절(邵康節)이 …… 해학한 것 : 강절은 소옹(邵雍)의 시호. 역리(易理)와 추수(推數)에 밝았던 소옹은 임종할 당시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문병을 가자, 그에게 “자네는 ‘생강이 나무 위에서 난다.’ 하였는데, 나도 자네 말을 그대로 따르겠다.” 하며 해학만을 하였다. 이는 그가 천명(天命)을 순히 받으려는 높은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슬퍼하지 않고 여유가 만만했던 것이다. 또한 임종에 대비한 여러 사람들이 소옹에게 시끄러움을 끼칠까 염려하여 모두 밖에 나가 가만가만 이야기했으나 소옹은 내용을 자세히 알아들었다. 이는 마음이 허명(虛明)하여 이처럼 영묘(靈妙)한 것이라 한다. 《二程全書 遺書 卷18》
[주D-011]김 판서(金判書)가 …… 왔다 : 김 판서는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수흥(金壽興)을 가리킨다. 현종(顯宗) 13년 11월 호조 판서 김수흥은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할 것을 청하면서 송준길(宋浚吉)의 병환을 말하자, 현종은 즉시 어의(御醫)를 명하여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顯宗改修實錄 卷26 13年 11月》
[주D-012]경경조관(輕輕照管) : 마음을 존양(存養)하는 법의 하나로, 밖으로 달리는 마음을 살며시 챙기는 것을 말한다. 만일 방심(放心)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무겁게 다스리려고 하면 이것 자체가 마음의 안정을 빼앗아 도리어 해가 된다 한다.
[주D-013]현재 …… 번복(飜覆)되었다 : 문명국인 명(明) 나라가 망하고 오랑캐인 청(淸) 나라가 황제국(皇帝國)이 된 것을 가리킨다.
[주D-014]형벌을 …… 것이다 : 이 말은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상(上)에 나오는 말로, 백성을 잘 살게 하면 강대국을 대항할 수 있음을 말한다.
[주D-015]격물(格物)만 …… 하겠는가 : 이는 《대학(大學)》 팔조목(八條目)의 순서로 격물은 물건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 성의(誠意)는 뜻을 성실히 하는 것. 정심(正心)은 마음을 바루는 것. 수신(修身)은 자신의 몸을 수행하는 것. 원래의 순서는 격물치지로 지식을 넓힌 다음 성의ㆍ정심ㆍ수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만, 지공부(知工夫)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 행공부(行工夫)를 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주D-016]청평(靑平)ㆍ인평(寅平) : 청평은 효종의 둘째 부마인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을 가리키며, 인평은 넷째 부마인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을 가리킨다.
[주D-017]장씨(張氏)의 집 : 효종의 국구(國舅)인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집을 가리킨다.
[주D-018]익평위(益平尉) : 효종의 둘째 부마인 홍득기(洪得箕).
[주D-019]그의 선친(先親)인 상국(相國) : 익평위 홍득기의 부친인 우의정(右議政) 홍중보(洪重普)를 가리킨다.
[주D-020]흉노(匈奴)를 …… 말입니까 : 원래 이 말은 한 무제(漢武帝)가 장군인 곽거병(霍去病)에게 집을 마련해 주자, 당시 흉노족이 완전히 정복되지 못했으므로 곽거병이 집을 사양하면서 한 말인데, 뒤에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익주(益州)를 평정하고 성도(成都)에 있는 집과 토지를 제장(諸將)들에게 나누어 주려 하자, 조운(趙雲)이 곽거병의 이 말을 들어 반박한 뒤로부터 과격한 충언(忠言)이 되었다. 《漢書 卷55 霍去病傳》 《三國志 蜀書 趙雲傳》 한편 주자는 당시 국가가 금(金) 나라에게 침략을 당하여 매우 위급한 상황인데도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유공(劉珙)에게 다시 이 말을 들어 꾸짖었는데, 우암도 효종 8년 8월 찬선(贊善)을 사직하는 소(疏)에서 이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 지나치게 장려(壯麗)한 공주(公主)들의 저택을 말한 적이 있다. 《孝宗實錄 卷19 8年 8月》
[주D-021]허노재(許魯齋)더러 …… 잘못이다 : 노재는 송(宋)의 학자 허형(許衡)의 호. 그는 송 나라가 망한 뒤에 오랑캐인 원(元) 나라의 부름을 받고 좨주(祭酒)가 되었다. 그는 원래 송 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실절(失節)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랑캐에게 벼슬했으므로 실신(失身)이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주D-022]김만균(金萬均)의 일 : 현종(顯宗) 4년 11월 청 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이때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던 김만균이 자기 조모 서씨(徐氏)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죽었으므로 사무를 볼 수 없다 하여 상소했다가 탄핵을 받고 의금부(義禁府)에 갇힌 일을 가리킨다. 《顯宗實錄 卷7 4年 11月》
[주D-023]현재 …… 하였다 : 영백(嶺伯)은 경상 감사(慶尙監司)를 가리킨다. 당시의 이조 판서인 이상진(李尙眞)은 일찍이 경상 감사로 부임한 다음, 청 나라와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죽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윤집(尹集)의 아들 윤이선이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청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때에 지방관으로 봉직한 것은 불가하다 하여 파직시켰었다.
[주D-024]민태(閔台) 3형제 : 태(台)는 삼태성(三台星)으로 삼공(三公)의 고관(高官)을 가리킨 것으로 곧 민시중(閔蓍重)ㆍ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을 말한다.
[주D-025]백마하(白馬河) : 황하(黃河) 가에 있는 백마역(白馬驛)을 가리킨다. 당 애제(哀帝) 때 주전충(朱全忠)은 당시의 명사(名士)인 배추(裴樞) 등 수십 명을 백마역에서 살해한 다음 시체를 황하에 버렸다. 이보다 앞서 주전충의 아전인 이진(李振)이 “이들은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황하에 버려 탁류(濁流)를 만들어야 한다.” 하자, 주전충이 승락한 것이다. 《唐書 卷140 裴樞列傳》
[주D-026]성광(聖狂)을 …… 있으시니 : 성(聖)은 사리(事理)를 밝게 통한 것을, 광(狂)은 사리를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 말은 《서경(書經)》 다방(多方)의 “성이라도 선(善)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이 되고, 광이라도 선을 생각하면 성이 된다.” 한 말에서 온 것인데, 우암이 이희조(李喜朝)에게 차증이생(次贈李生)이란 오언 율시(五言律詩)를 지어 주었는데 거기에 “어진 아들 먼 곳에서 오니 무덤에 묵은 풀 한만 길구나. 작별에 부탁할 딴 말이 없으니 기미에 성과 광을 경계하라.[賢兒來自遠 宿草恨空長 贈別無餘說 幾微戒聖狂]”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주D-027]태극도(太極圖)와 …… 세 글 : 태극도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것으로 이에 대한 글이 있어 태극도설(太極圖說)이라고 부르는데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기초가 된다. 정성서(定性書)는 정호(程顥)가 장재(張載)와 문답한 내용인데 태극도설과 함께 성리학의 표리(表裏)가 된다. 생지위성(生之謂性)은 원래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고자의 말로서 생(生)은 인물(人物)의 지각 운동(知覺運動)하는 원인을 말하는데, 이것을 정호가 부연 설명한 것이다. 《近思錄 卷1, 卷2》
[주D-028]분치(忿懥)한 …… 용(用)입니까 : 분치는 성내는 것.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마음에 분치한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공구(恐懼)한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호요(好樂)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우환(憂患)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분치 등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용(用)으로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번 마음을 살피지 못하면 욕심이 나오고 감정이 치우쳐져서 용의 행하는 바가 그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주D-029]일이 …… 말한 것 : 두지 않음[非有所]이란 《대학장구》 본문 중 유소분치(有所忿懥) 등 네 구의 앞에 붙은 유소의 반대를 가리킨다. 주자는 “마음이 잠깐 동안이라도 물건에 매어 있으면 곧 동요된다. 마음이 물건에 매어 있게 되는 것은 세 가지 일 때문이니, 일이 아직 닥쳐오기 전에 미리 기대(期待)하는 마음이 있는 것, 일이 이미 지났는데도 그 일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 일을 응할 때에 마음이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모두 장구(章句)의 뜻을 부연한 것이다. 《大學章句 傳7章小註》 《心經 卷2》
[주D-030]선고(先稿)의 …… 선세(先世) : 선고는 이희조의 선친인 이단상(李端相)의 문집을 가리키며, 선세는 이희조의 조부인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과 증조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를 가리킨다.
[주D-031]맹자(孟子)의 …… 교훈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마음에 잊지 말고 자라는 것을 억지로 돕지도 말라.[心勿忘 勿助長也]”를 줄인 것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주D-032]용문서원(龍門書院) : 지평(砥平)에 있는 운계서원(雲谿書院)으로 조성(趙晟)ㆍ조욱(趙昱)을 모셨다. 안의(安義)에 있는 용문서원과는 다르다.
[주D-033]오현(五賢) : 그 당시 문묘(文廟)에 이미 배향한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황(李滉)ㆍ이언적(李彦迪)의 다섯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주D-034]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 : 신덕왕후는 태조(太祖)의 제이비(第二妃)인 강씨(康氏). 부묘는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것으로 폐위되었던 강씨를 복위시킨 일을 말한다.
[주D-035]해와 달이 박식(薄蝕) : 박(薄)은 해와 달이 광채가 없는 것, 식(蝕)은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을 가리킨다. 옛날 해와 달이 박식하는 것은 천변(天變)이라 하여 큰 변괴로 알았으므로 한 말이다.
[주D-036]유주상(流注想) : 상념이 집중되지 않고 자꾸만 딴 곳으로 흘러가는 것. 불가의 참선(參禪)이나 유가의 정좌(靜坐)는 모두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인데 이 유주상이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 한다.
[주D-037]미발(未發) 상태인 때 : 마음에 아무런 정(情)이 발하지 않아 고요하고 잔잔하여 본체(本體)를 잃지 않은 상태.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희(喜)ㆍ노(怒)ㆍ애(哀)ㆍ낙(樂)이 미발한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희ㆍ노ㆍ애ㆍ낙이 발하여 모두 예절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은 천하의 대본(大本)이고 화는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하였는데, 대본이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본성(本性)을 가리키며, 달도란 부자유친(父子有親) 등의 오륜(五倫)을 가리킨다. 율곡은 “중인(衆人)의 마음은 혼매(昏昧)하지 않으면 어지러워 미발의 상태가 없다.” 하였다. 《栗谷全書 卷21》 《聖學輯要 正心章》
[주D-038]격치(格致) …… 역행(力行) : 유학에 있어 지(知)ㆍ행(行), 동(動)ㆍ정(靜) 공부의 근간이 된다. 격치는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물건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이고, 존양(存養)은 마음을 언제나 잘 보존하여 기르는 것으로 《대학》의 정심(正心)과 같은데 주로 정공부(靜工夫)를 말하며, 성찰(省察)은 마음이 발했을 때 선악(善惡)을 철저히 살려 악념(惡念)을 제거하는 것으로 《대학》의 성의(誠意)에 해당되는바, 동공부(動工夫)를 말한다. 역행은 행공부(行工夫)를 힘쓰는 것으로 《대학》의 성의ㆍ정심ㆍ수신(修身)이 모두 이에 포함되어 지공부(知工夫)인 격치와 대가 된다.
[주D-039]도겸(道謙) : 주자 당시의 승려(僧侶)로 주자는 일찍이 그를 스승으로 받든 적이 있다.
[주D-040]한 문공(韓文公)은 …… 이었다 : 문은 한유(韓愈)의 시호. 태전(太顚)은 한유가 조주(潮州)로 귀양 갔을 때에 사귄 노승(老僧)의 호. 한유는 그와 많은 글을 주고받았으며 그의 집에 찾아가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한유가 불교를 신봉했느니, 혹은 태전의 도통(道統)을 이었느니 하는 낭설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리하여 한유는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서 이를 강력히 부인한 적이 있다. 《韓昌黎文集 卷3 書》
[주D-041]박숙(朴叔)이 …… 있는데 : 박세채(朴世采)는 효종(孝宗)이 죽자, 인조의 비(妃)인 조 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에 있어 우암과 함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었는데 현종은 늘 여기에 의심을 품어 오던 중, 현종 14년 민업(閔嶪)이 죽자 그의 아들 세익(世益)이 미친병이 있었는데, 박세채ㆍ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등은 마땅히 세익의 아들 민신(閔愼)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신은 자기 아버지를 제쳐 놓고 대신 참최(斬衰) 삼년을 입었는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우명(金佑明)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와 경연(經筵)에서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박세채는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형조(刑曹)에 잡혀가서 명령을 기다렸으며 민신은 결국 귀양 갔다. 《顯宗實錄 卷21 14年 9月 乙亥》 《顯宗改修實錄 卷27 14年 9月》
[주D-042]정(正) 이하는 …… 있어 : 조선조의 관제(官制)는 봉상시(奉常寺)ㆍ상의원(尙衣院) 등의 관서(官署)에는 모두 대신 겸직인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가 있어 정3품의 실직(實職)인 정(正)까지도 사실상 달관이 될 수 없다.
[주D-043]《맹자(孟子)》 …… 듯합니다 : 호연장(浩然章)은 맹자가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에 “그 기운됨이 의와 도를 배합하여 의와 도를 힘차게 행하도록 도와주니 이것이 없으면 뇌핍(餒乏)된다.” 하였고, 이어서 “이는 의를 많이 쌓아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갑자기 한 가지 의로운 일을 했다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였는데, 이 소주(小註)에 주자의 말을 기록하여 “위 세 구(句)는 본래 기(氣)를 말한 것이고, 아래 두 구는, 시(是) 자는 비(非) 자와 상대되고 습(襲) 자는 생(生) 자와 상대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아래의 시 자는 ‘바로’란 뜻으로 해석한 것인데, 이희조는 모두 호연지기를 가리킨 것으로 본 것이다.
[주D-044]말에 …… 한 조항 : 공손추가 맹자에게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告子)의 부동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자, 맹자가 “고자는 ‘말에 얻지 못하거든 마음에 구하지 말고 마음에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구하지 말라.’ 하였는데, 마음에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구하지 말라는 것은 가(可)하지만 말에 얻지 못하거든 마음에 구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하다. 뜻이란 기운의 장수이고 기운은 몸에 충만되어 있는 것이니, 뜻이 최고이고 기운이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뜻을 잘 갖고 또 기운을 폭해(暴害)하지 말라.’ 했다.” 하였다. 부동심이란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음을 말한다.
[주D-045]가하다[可也]는 …… 이르는 말 : ‘가하다’는 그런대로 겨우 될 수 있다는 뜻으로서, 고자의 “마음에 얻지 못하면 기운에 구하지 말라.”는 것은 가하다는 것도 완전하지는 못하여 미진(未盡)함이 있고, 반드시 맹자의 “뜻을 잘 갖고 또 기운을 폭해(暴害)하지 말라.”는 말처럼 하여야 완전한 것이 된다 한다. 《孟子 公孫丑上 朱子集註》
[주D-046]여기에서 …… 되는데 : 여기에서 말한 두 기(氣) 자란 맹자가 호연지기를 설명하면서 “그 기운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치지 않는다면 천지 사이에 꽉 찬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 無害 則塞于天地之間]”는 것과 “그 기운됨이 의와 도를 배합한다.[其爲氣也 配義與道]”는 두 절(節)의 기 자를 가리키며, 위에서 말한 두 기(氣) 자란 맹자가 고자의 부동심(不動心)을 말하면서 “뜻이란 기운의 장수이고, 기운은 몸에 충만되어 있는 것이다.[夫志氣之帥也 氣體之充也]” 한 절의 두 기 자를 가리킨다.
[주D-047]을묘년(1675, 숙종1) …… 출발하였는데 : 숙종 1년 1월, 우암은 기해예송(己亥禮訟)과 효종의 능(陵) 봉분에 금이 간 사건을 추죄(追罪)받아 덕원(德源)으로 귀양 갔으며, 6월 장기(長鬐)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므로, 우암을 전별(餞別)하기 위하여 떠난 것이다.
[주D-048]경사가 있게 된 것 :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난 후 허적(許積)ㆍ윤휴(尹鑴)가 처형되고 남인이 실각되자, 우암은 위리안치에서 풀려나 정1품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주D-049]미록(麋鹿)의 형상 : 미록은 사슴으로, 산림(山林)에 은둔해 있는 자신을 겸칭하여 이르는 말.
[주D-050]《중용》과 …… 있습니다 : 근독(謹獨)은 홀로를 삼가는 것으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유독(幽獨)의 곳에서 조심하는 것과, 남이 모르고 자신만이 아는 은미(隱微)한 마음을 삼가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숨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세미한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하였으며,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에는 “이른바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자기(自欺)함이 없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되 악취를 미워하듯 하고 선을 좋아하되 미색(美色)을 좋아하듯 하는 것을 자겸(自謙)이라 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毌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하였다. 자기는 선ㆍ악을 알면서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고, 자겸은 이와 정반대여서 스스로 쾌하고 만족함을 이른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원래는 모두 신기독(愼其獨) 즉 신독(愼獨)으로 썼었는데, 주자 당시 휘(諱)를 피하기 위하여 근독으로 쓴 것이다.
[주D-051]이런 …… 않은 것 : 청 나라 제도를 따른 관복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52]악장(嶽丈) : 처부(妻夫)를 이르는 말. 여기서는 이희조의 장인인 김수흥(金壽興)을 가리킨다.
[주D-053]정(楨)의 죄 : 정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며 인조의 손자인 복창군(福昌君)의 이름. 아우인 복선군 남(福善君柟)ㆍ복평군 연(福平君㮒)과 함께 삼복(三福)으로 불리는데,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함께 역모(逆謀)를 했다 하여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에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주D-054]오시수(吳始壽) : 숙종 때의 문신(文臣). 숙종 5년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나 경신대출척 때 허적(許積) 등 남인 일파가 거세됨에 따라 이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주D-055]자성(慈聖)의 수찰(手札) : 자성은 숙종의 어머니이며 현종의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를 가리킨다. 명성왕후는 시정(寺正) 김석연(金錫衍)을 보내어 우암에게 언찰(諺札)을 보냈는데, 원문 전체가 본집(本集) 부록 송서습유(宋書拾遺)에 수록되었다.
[주D-056]옛날 …… 만류하였다 : 온공(溫公)은 사마광(司馬光)의 봉호. 고 태후(高太后)는 여중요순(女中堯舜)으로 알려진 송 신종(宋神宗)의 비인 선인 고 황후(宣仁高皇后)를 가리킨다. 고 태후는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섭정(攝政)하면서 왕안석(王安石) 일파를 축출하고 사마광 등을 등용하였는데 이때 사마광이 고향인 낙양으로 돌아가려 하자,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다.
[주D-057]갑인년 :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던 해(1674)를 가리킨다.
[주D-058]유사(有司)를 …… 말씀 : 유사는 책임자 밑에 있는 여러 관원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중궁(仲弓)이 계씨(季氏)의 재상이 되어 정사하는 법을 묻자, 공자는 ‘유사를 먼저 단속하고 조그마한 허물을 용서해 주며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했다.” 하였다.
[주D-059]일죄(一罪)로써 논단(論斷) : 일죄는 최고의 죄로 사형(死刑)을 뜻하며, 논단은 논죄(論罪)하여 결단하는 것.
[주D-060]인조(仁祖)의 …… 했다 : 기해예송(己亥禮訟) 당시 인조의 비인 조 대비(趙大妃)는 이미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위하여 장자복(長子服)인 참최 삼년을 입었다. 그러므로 우암은 효종을 위하여 서자복(庶子服)인 기년복을 주장하였으며 적자(嫡子)란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태는 우암과 약간 달리 효종을 적자라 하였다. 이것이 소위 갑인예설(甲寅禮說)인데 우암의 문인들은 이것을 보고는 이유태가 배신했다 하였으며 특히 송상민(宋尙敏)이 이를 들어 반박하자, 이유태는 이숙에게 보낸 편지에 “송상민이 인조의 적통을 아울러 빼앗으려 한다.” 하였다.
[주D-061]취성정(聚星亭) : 덕성(德星)이 모인 정자란 뜻으로 주자가 살던 고정(考亭)에 있었다. 후한(後漢) 때 명사인 진식(陳寔)은 일찍이 태구(太丘)의 원이 되었으므로, 진 태구(陳太丘)라 불렀는데, 그는 일찍이 명사인 순숙(荀淑)을 초청할 적에 가난하고 검소하여 노복이 없었으므로 장자인 기(紀)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차자인 심(諶)은 지팡이를 잡고 뒤를 따르게 했으며, 손자인 군(羣)은 아직 어리므로 수레에 태우고 갔다. 한편 순숙은 아들 8형제가 모두 훌륭하여 팔룡(八龍)이라 불렀는데, 진식 부자를 맞이하여 3자인 정(靖)으로 문에서 응접하게 하고 6자인 상(爽)으로 술을 따르게 하고 나머지 여섯 아들은 밥을 나르게 했으며 손자인 욱(彧)은 아직 어리므로 무릎 위에 앉혔다. 여기에 모인 두 집안사람들은 모두 제일가는 명류(名流)가 되었는데, 이때 덕성이 모였으므로 태사관(太史官)은 “5백 리 안에 현인이 모였다.”고 아뢰었다. 주자는 이 고사를 병풍에 그리고 찬문(贊文)을 지었다. 《朱子大全 卷85 聚星亭畫屛贊序》
[주D-062]가함도 …… 하셨는데 : 원래 이 말은 공자가 백이(伯夷)ㆍ숙제(叔齊) 등 은사(隱士)들의 행동을 나열하고 “나는 이와 달라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한 것에서 나왔는데, 이는 곧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수시종도(隨時從道)하는 것으로서 성인만이 가능하다 한다. 《論語 微子》
[주D-063]윤화정(尹和靖)이 …… 보았다 : 화정은 정이(程頤)의 문인인 윤돈(尹焞)의 호. 서명(西銘)은 장재(張載)가 지은 정완(訂頑)을 정이가 개칭한 것이다.
[주D-064]선기옥형(璿璣玉衡) : 고대에 천문(天文)을 보던 기기(機器). 현재의 혼천의(渾天儀)와 같다 한다.
[주D-065]소주(小註)에는 …… 둘이다 : 부족(父族) 넷은 본족(本族)과 고모의 시가(媤家), 자매의 시가, 딸의 시가를 가리키며, 모족(母族) 셋은 어머니의 본족과 어머니의 외가(外家) 및 이모의 집을 가리키며, 처족(妻族) 둘은 아내의 본족과 아내의 외가를 가리킨다.
[주D-066]예조(藝祖)와 문조(文祖)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돌아와 예조에 제사하면서 소를 썼다.[歸格于藝祖 用牲]” 하였고, 또 “정월 초하루에 정사의 마무리를 문조에서 받았다.[正月上日 受終于文祖]” 하였는데, 채침(蔡沈)의 《서경집전(書經集傳)》에는 “문조는 요(堯) 임금 시조의 사당이다.” 하였으며 “예조도 문조와 같다.” 하였다. 후세에는 고조(高祖)와 태조(太祖)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주D-067]소공(小功)이 …… 대공(大功)이다 : 소공은 5월복이고 대공은 9월복이다. 원래 조부는 기년복인데 이 경우 강일등(降一等)해서 대공복이 된 것이다.
[주D-068]심상 삼년(心喪三年) :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부친이 생존해 있든가 적모(嫡母)가 있을 경우 압존(壓尊)되어 상복은 3년 동안 입지 못하나 마음으로 슬퍼하여 3년을 마치는 것. 스승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주D-069]대개 …… 생각한다 : 주자의 서문에 “삼대 때에 예경(禮經)이 구비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남아 있는 것은, 집 또는 기물ㆍ의복의 제도와 출입ㆍ기거의 절차가 모두 이미 현세에 마땅하지 못하다. 세상의 군자들은 혹 고금의 변한 것을 참작하여 한 시대의 법으로 고쳐 만들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혹은 상세하고 혹은 간략하여 절충한 바가 없으며, 혹은 그 근본을 버리고 끝만을 힘쓰며 실제는 경홀히 하고 문(文)만을 급하게 여긴다. 이리하여 뜻이 있고 예를 좋아하는 선비도 오히려 그 요점을 능히 들지 못하며, 가난에 시달리는 자들은 더욱 끝내 예에 미칠 수 없음을 근심한다. 어리석은 나는 대개 이 두 가지를 병통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주D-070]위 글의 …… 것이다 : 우암은 연기존어금자(然其存於今者)로부터 개이불의어세(皆已不宜於世)까지를 하나로, 연역혹상혹략(然亦或詳或略)으로부터 우환기종불능유이급어례야(尤患其終不能有以及於禮也)까지를 또 하나로 본 것이다.
[주D-071]연역(然亦)과 …… 삼았으니 : 박세채는 연역혹상혹략 무소절충(然亦或詳或略 無所折衷)을 하나로, 지혹유기본이무기말 완어실이급어문(至或遺其本而務其末 緩於實而急於文)을 또 하나로 본 것이다.
[주D-072]선인(先人) : 별세한 부친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희조의 부친인 이단상(李端相)을 가리킨다.
[주D-073]이성(尼城)의 …… 있어 : 우암이 지은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비문에 박세채의 말만을 인용한 것으로 하여 윤증(尹拯)과 결별한 일을 가리킨다.
[주D-074]오승포(五升布) : 매우 거친 삼베. 1승(升)은 한 새로 80개의 올인데, 모두 4백 올로 짜진 것이다.
[주D-075]효종께서 …… 봅니다 : 효종 8년 효종이 우암에게 내린 밀찰(密札)에 “3월 26일 새벽 꿈에 김적 자점(金賊自點)이 칼을 들고 나의 와내(臥內)로 들어오므로 나는 크게 놀라 일어났는데, 꿈이 깨자 근시(近侍)들이 큰 눈이 내렸다고 아뢰었다. 이 어인 괴몽(怪夢)인가.” 한 말이 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주D-076]구봉이 …… 여겼다 : 숙헌(叔獻)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자이며, 호원(浩原)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자. 옛날 호칭에 있어 높은 존장에게는 호를, 평교(平交)에는 자를, 아주 낮은 사람은 직접 이름을 불렀다. 송익필(宋翼弼)은 당시 노비(奴婢)의 후손이고 간신 송사련(宋祀連)의 아들이라 하여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렸으나 율곡ㆍ우계만은 끝까지 친하게 지내었다. 송상민은 송익필이 이이를 율곡, 성혼을 우계라고 부르지 않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것이다.
[주D-077]이산해(李山海)를 …… 못하다 : 이산해의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우암은 이산해는 소인(小人)이니, 마땅히 척호성명(斥號姓名 직접 이름을 부르는 것)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주D-078]곧음으로써 …… 도의(道義)이다 : 맹자는 공손추(公孫丑)에게 호연지기를 말하면서 “그 기운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곧음으로써 기르고 해치지 않는다면 천지 사이에 꽉 찬다.” 하였으며, 이어 “그 기운됨이 의(義)와 도(道)를 배합하여 의와 도를 힘차게 행하도록 도와주니 이것이 없으면 뇌핍(餒乏)된다.” 하였다.
[주D-079]자장편(子張篇)의 …… 우안조(愚按條) : 자유(子游)는 “자하(子夏)의 문인들이 청소하고 응대(應對)하며 진퇴(進退)하는 소소한 예절은 잘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末)이다. 근본인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은 없으니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자하는 이말을 듣고 “아, 자유가 잘못이다. 군자(君子)의 도(道)가 어느 것을 먼저하여 전하며 어느 것을 뒤에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하였다. 주자의 집주(集註)에 정자(程子)의 “군자가 사람을 가르침이 순서가 있으니, 먼저 작고 가까운 것을 전수해 준 뒤에 크고 먼 것을 가르친다. 가깝고 작은 것을 전수해 주고 뒤에 멀고 큰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君子敎人有序 先傳以小者近者而後敎以大者遠者 非先傳以近小而後不敎以遠大也]” 한 말을 첫 조항에 수록하고, 또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도 곧 형이상(形而上)이니 이치는 크고 작음이 없기 때문이다.”와 “성인의 도는 다시 정(精)ㆍ조(粗)가 없어 꿰뚫으면 다만 한 이치일 뿐이다.”와 “모든 물건에는 본(本)ㆍ말(末)이 있는데 본ㆍ말을 나누어 두 가지로 하는 것은 불가하다.”와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으로부터 올라가면 곧 성인의 일에 이른다.”의 네 조항을 수록한 다음 “나는 상고하건대 정자의 첫째 조항 말씀이 이 장의 글 뜻을 가장 자세히 나타내었다. 그 뒤의 네 조항은 모두 정ㆍ조와 본ㆍ말의 분별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니, 학자들은 마땅히 순서를 따라 점진해야 할 것이요 끝을 싫어하고 근본을 구해서는 안 됨을 밝힌 것으로, 첫째 조항의 뜻과 실제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지, 말이 곧 근본이라 여겨 다만 말만 배운다고 해서 본이 곧 여기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주D-080]비위(非謂)의 …… 해석하셨다 : 원문의 ‘非謂末卽是本 但學其末而本便在此也’를 퇴계는 “말이 곧 본이란 것은 아니고, 다만 말을 배우면 본이 곧 여기에 있는 것이다.”로 해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