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한산 이곡 신도비문

한흥군(韓興君) 이공(李公) 신도비명 이여발 신도비

아베베1 2011. 9. 30. 14:55

 

 

  이미지사진은 삼각산 만경대의 모습

서계집 제11권
 비명(碑銘) 5수(五首)
한흥군(韓興君) 이공(李公) 신도비명


공은 휘는 여발(汝發), 자는 군실(君實), 성은 이씨(李氏)이니, 그 선대는 한산인(韓山人)이다. 문효공(文孝公) 곡(穀)은 고려 말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호는 가정(稼亭)이다. 이분이 색(穡)을 낳았는데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고 호는 목은(牧隱)이다. 부자가 문장과 충절로 전조(前朝)에 이름이 드러났다. 목은이 종선(種善)을 낳았는데 본조의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종선이 계전(季甸)을 낳았는데 정난좌익 공신(靖難左翼功臣)에 훈록(勳錄)되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계전이 우(堣)를 낳았는데 마지막 관직이 대사성이었다. 5대를 전해 흥준(興畯)에 이르렀는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한양군(韓陽君)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흡(洽)은 장령을 지냈다. 조부 휘 의배(義培)는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한천군(韓川君)에 봉해졌으며 공청 병마절도사(公淸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 근왕(勤王)했다가 쌍령(雙嶺)에서 전몰(戰歿)하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목(穆)의 나이 26세에 역적 이괄(李适)이 경사(京師)를 범하자 부원수(副元帥) 이서(李曙)가 개성(開城)에서 막았는데, 부군(府君)이 생질로서 따라갔다. 군사가 패하게 되어 이괄이 진격해 경성(京城)을 함락하자 부군이 적(賊)의 진영에 잠입하여 동태를 엿보다가 붙잡혔다. 이괄이 병기로 위협하면서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꾸짖으며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 특별히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에 추증되고 뒤에 호조 판서로 올려 추증되었으며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양세(兩世) 모두 정려(旌閭)가 섰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현령 희온(希溫)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 13년 신유년(1621) 10월 16일에 태어났다. 4세 때에 한원군이 몰세하여 안마(鞍馬)만 돌아오자 자꾸 부르면서 찾았는데 나중에 비로소 전말을 듣고는 땅에 엎어져 곡하니, 보는 이들이 안쓰러워하였다. 어느 날 이 부인(李夫人)이 공을 데리고 완풍군(完豐君)을 만나러 갔다. 공에게 고기를 먹이고 일어나 춤을 추게 하니, 공이 울면서 이 부인을 찾았다. 까닭을 물으니, 귀에 대고 말하기를, “제가 비록 어리나 상제입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이고 춤을 추게 합니다.” 하니, 좌중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완풍군이 공을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이씨 가문을 키울 것이다.” 하였다. 한원군이 해를 당한 곳이 소덕문(昭德門) 안에 있었는데, 공은 장성한 뒤로는 종신토록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김 부인(金夫人)은 단정하고 점잖았으며 자애롭고 순한 성품이었는데 공은 가르침을 받들매 어김이 없었다.
16세에 초시(初試)에 입격하였다. 이해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호란이 나자 공은 대부인(大夫人) 두 분을 모시고 병화를 피해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이듬해 봄에 성이 함락되자 두 부인은 말 한 필에 함께 타고, 공은 고삐를 잡고 달려가 해안에 이르렀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배가 있었으나 건네주기를 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사공이 사람이 많은 것에 겁을 먹고 모두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자 공이 홀로 물에 뛰어들어 애절하게 빌면서 얼음 조각들이 어깨를 덮는데도 꼼짝 않고 서 있으니, 사공이 그 지극한 정성을 가엾게 여겨 배 위로 끌어 올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공과 두 부인이 모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천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이르자 들판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시신을 찾아서 돌아와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모친을 모시고 묘하(墓下)에 거처할 때 효성과 봉양이 매우 지극하였다. 아는 사람이 염병에 걸려 공이 찾아가 문안하였는데 병자가 갑자기 일어나 말하기를, “대장군이 오시니 뭇 귀신이 제 발로 도망간다.” 하였는데, 이어 병이 낫게 되니,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날래고 민첩하여 소 두 마리의 등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힘은 몇 사람을 당해낼 수 있었으며, 기사(騎射)를 잘하였다. 효종 2년(1651)에 무과에 등제하니, 공의 나이 31세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비변사 낭청이 되었다. 공문서를 가지고 밤에 박공 서(朴公遾)에게 갔는데 밤이 더욱 깊었다. 공을 문밖에 앉게 하고 공문서 가운데 있는 말을 물으니, 촛불이 없는데도 틀리지 않고 읽었다. 박공이 기특하게 여기고 공석(公席)에서 칭찬하자, 공이 사양하기를, “그날 마침 화로가 옆에 있었으므로 그 불빛에 의지하여 잘 볼 수 있었습니다.” 하니, 박공이 더욱 그 솔직함을 칭찬하였다. 겨울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배수되었고, 경력(經歷)으로 전직되었다.
계사년(1653, 효종4)에 숙천 부사(肅川府使)에 제수되어 지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갑오년(1654)에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천전(遷轉)되었다.
을미년(1655) 가을에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옮겨졌다. 겨울에 조모 이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무술년(1658)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에 배수되었다. 겨울에 충청 병마절도사에 천전되었다.
기해년(1659)에 절도사에서 해면되어 금군 별장(禁軍別將)에 배수되었다가 특별히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이 올랐고 한흥군(韓興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으로 오랑캐 땅에 가까워 교역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저들이 오는 숫자가 정해진 것이 없고 머무는 기한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저들의 침탈과 저들을 접대하는 데 따른 피해가 적지 않자 공은 도신(道臣)을 통해 조정에 보고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어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후로는 오는 자가 320인을 넘지 않고 머무는 기간이 20일을 넘지 않게 되니, 북방 사람들이 그 덕을 보았다. 공이 처음 도임하였을 때 개시(開市)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차관(差官)이 지름길로 와서 동문(東門)으로 들어오자 공이 일부러 맞이하지 않고 역관(譯官)을 형틀에 묶고는 베고자 하는 뜻을 보이니, 차관이 부끄러워하며 “잘못은 내게 있으니, 죽이지 말고 용서하소서.” 하였다. 이에 앞서, 무리 지어 나오는 오랑캐들이 마구 횡포를 부리는데도 금하지 않아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였다. 이에 공이 저들과 약속을 맺어 까닭 없이 관사(館舍)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안도하였고 비석을 세워 이 일을 기록하였다.
현종 원년(1660) 봄에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로 이배되었으나 이내 부임하지 않았다.
신축년(1661, 현종2) 여름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배수되었다.
계묘년(1663)에 내직으로 들어와 부총관 겸 훈련원마병별장(副摠管兼訓鍊院馬兵別將)이 되었다.
갑진년(1664, 현종4) 가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천전되었다.
병오년(1666)에 임기가 차자 정공 태화(鄭公太和)가 공이 청렴하고 근신(謹愼)하여 군민(軍民)이 편하게 여긴다고 아뢰니, 1년 더 유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미년(1667) 여름에 돌아와 부총관 겸 어영청중군(副摠管兼御營廳中軍)에 배수되었다. 겨울에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배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총관, 포도대장, 금군 별장을 겸하였다.
무신년(1668) 정월에 현종이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특별히 병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사직하여 면직되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배수되었다가 이내 또 특별히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기유년(1669) 1월에 평안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하직 인사를 할 때 상이 인견(引見)하여 변방의 일을 물으니, 혹자가 안주(安州)는 성지(城池)가 완비되지 않아 유사시에 보장할 수 없으니, 의당 방어선을 뒤로 물려 약산(藥山)을 지켜야 된다고 하자, 공이 절하고 아뢰기를, “신은 무부(武夫)입니다. 군려(軍旅)로써 전하를 섬기니, 오직 사수하는 것만 알 뿐 다른 것은 모릅니다.” 하였다. 도임하여 사예(射藝)를 익히게 하고 병장기를 수선하는 등 제대로 거행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서북은 성지를 수리하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공이 늘 이를 개탄하여 회령에 있을 때에는 적루(敵樓)를 만들었고 행영(行營)에 있을 때에는 무너진 성루를 수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무를 베고 벽돌을 운반하여 일을 해보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나 반년이 채 못 되어 해면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 가을에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면직되자 정 상국(鄭相國)이 말하기를, “전(前) 대장이 법이 분명하고 명령이 미더워 모든 일이 정연하게 진행되었으니, 반드시 중후하고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그 뒤를 이어야만 한다.” 하였다. 이에 공을 천거하여 대신 맡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혐의가 있어 어영대장으로 이배(移拜)되었다가 우윤에 배수되고 비국 제조와 포도대장을 겸하였다.
경술년(1670)에 각질(脚疾)을 앓아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어의(御醫)에게 간병케 하였다.
신해년(1671, 현종12) 2월에 말미를 청해 온천에서 목욕하였다. 하직하고 떠날 때 밀부(密符)를 반납하니, 받아들이지 않고 이어 선온(宣醞)과 하사(下賜)를 매우 넉넉하게 내렸다. 4월이 되어도 공이 돌아오지 않아 금려(禁旅)가 오래도록 대장이 없는 채로 있게 되니, 대각이 이를 언급하였다. 공이 극력 사직하였으나 소장이 들어간 지 39일이 되도록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돌아와서 또 사직하고서야 해면될 수 있었다. 가을에 부총관과 총융사에 배수되었다. 겨울에 다시 어영(御營)으로 들어가 비국(備局)을 겸관(兼管)하였다.
그해(1672)에 좌윤에 배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개차되었다. 가을에 소분(掃墳)을 청하니, 직임을 띤 채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계축년(1673)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금상(今上 숙종) 원년 을묘(1675)에 우윤에 배수되었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정사년(1677, 숙종3) 봄에 다시 어영으로 들어가 비국과 포도대장을 겸하였다. 귀가 먹은 것을 이유로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고, “경은 숙장(宿將)이니, 안심하라.” 하였다. 여름에 재이(災異)로 인해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하자, 공은 과도한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기를 청하였다.
무오년(1678)에 병이 심해지자 어의가 약을 가지고 와서 병세를 살피고 녹계(錄啓)하였다. 공이 사직하니, 답하기를, “경의 병을 매우 염려하였는데 점점 차도가 있다고 하니 매우 기쁘다.” 하였다. 또 여러 직책을 해면시켜 주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기미년(1679)에 충훈부(忠勳府)의 유사 당상이 되었다.
경신년(1680)에 자급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랐다.
임술년(1682)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전후에 걸쳐 충훈부의 유사 당상을 누차 사직하였지만 소장이 상달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사직하여 마침내 해면되었다.
계해년(1683) 5월 16일에 졸(卒)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집에는 죽을 끓일 거리조차 없어 장사를 지낼 수가 없자 재상이 아뢰기를, “공은 누차 대장이 되어 부지런히 일한 것이 실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죽고 나서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지낼 수가 없다고 하니, 의당 휼전(恤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사 지내는 비용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해 9월에 인천(仁川) 신현(新峴)에 있는 방곡(芳谷)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상여의 끈을 잡고 곡하면서 영결하는 휘하의 장졸들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공은 용모가 헌걸차고 과묵하였고 희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창졸간에도 말을 경솔히 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현종의 지우(知遇)를 입어 전후로 발탁되니,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봉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이 나자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은혜를 입고도 갚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한이 남을 것이다.”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상을 당했을 때에는 극도로 슬퍼하여 한더위에도 최마(衰麻)를 벗지 않았다. 성품은 진실하고 정성스러워 허식이 없었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청백한 지조를 지켜 의로운 것이 아니면 하찮은 것 하나라도 취하지 않았다. 외직에 있었을 때에는 뇌물로써 사람을 사귀지 않았으며, 조상이 물려준 것 이외에는 집 한 칸, 밭 한 뙈기도 넓히지 않고 노복을 한 명도 늘리지 않았으며, 처가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을 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남에게는 너그럽게 대하고 계교(計較)하지 않았으며,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엄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대장이 되었을 때에는 사졸들을 어루만지고 장교들을 예우하니,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쓰이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더욱이 삼가고 조심하며 겸손하고 공손하여 매번 관직에 제배(除拜)될 때마다 번번이 안절부절 불안해하면서 서너 차례 면직해 주기를 청하고 나서야 나갔다. 이런 까닭에 조정에 벼슬한 30여 년 동안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견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종실(宗室) 귀인(貴人)이 공과 도총부에서 반직(伴直)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종실이 공을 찾아오자 공은 사절하면서 말하기를, “외조(外朝)와 종반(宗班)은 길이 다릅니다. 더구나 곤임(閫任)을 맡고 있으니, 더더욱 오셔서는 안 됩니다.” 하니,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도적을 금단(禁斷)하는 관사에서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형신(刑訊)을 받는 자가 거짓으로 자복(自服)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이 죄수들을 다른 옥사(獄舍)에 가두어 서로 말을 맞추지 못하게 하고서 죄상을 캐물어 실정을 심문하니, 종종 고문도 하기 전에 실토하였고, 억울한 누명도 신원될 수 있었다. 경조(京兆)에 있을 때에 아전이 위조문서를 만들어 여러 차례 공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처음에는 위조된 문서를 뽑아내어 아전을 향해 부채질을 하고, 두 번째에는 자리 밑에 놓아두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중률(重律)로 다스렸는데, 부중(府中)에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공은 평소 술을 좋아하여 현종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 경계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는 술잔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일은 금방 효과가 있기를 구하지 않았고 반드시 먼 앞일까지 헤아렸다. 군졸과 장교에 대한 상사(賞賜)를 남발하는 일이 전혀 없었으니, 공은 말하기를, “일이 없는 때에 상을 후히 내리면 어려움에 임해 무엇으로 권면하겠는가.”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지 않게 여겼으나 유독 정공 태화(鄭公太和)만은 잘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상국(相國) 여성제(呂聖齊)가 일찍이 군막(軍幕)에서 공을 보좌하였는데 공을 깊이 공경하여 삼사(三司)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자주 집으로 찾아와 공에게 문안하였다. 공이 졸하였을 때에 이공 상진(李公尙眞)이 만사(挽詞)를 짓기를,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기는 문사(文士)와 같았고 청렴함과 재능은 바로 무인(武人)의 으뜸이셨네.” 하였다.
전 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대사간 진(袗)의 따님으로 자애롭고 어질며 정숙하고 현명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졸하여 덕산(德山) 봉명동(鳳鳴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후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공량(公亮)의 따님으로 근신(謹愼)으로 부도(婦道)를 지키고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었으며, 몸종을 부릴 때에 그 마음을 얻었으며,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무당이 집안에 드나드는 일이 전혀 없었다. 정묘년(1687, 숙종13)에 졸하니, 향년 60세였다. 공의 무덤에 부좌(祔左)하였다.
전 부인 소생이 1녀이니, 사위는 현감 정행만(鄭行萬)이다.
후 부인 소생이 4남 2녀이니, 아들 기하(基夏)는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兵曹參判兼訓鍊大將)으로 한성군(韓城君)에 습봉(襲封)되었고, 다음 기한(基漢)은 봉사(奉事)이고, 다음으로 수천(壽千)과 기명(基明)이 있고, 사위는 봉사 서종진(徐宗震)과 장령 양성규(梁聖揆)이다.
측실(側室)이 4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 기형(基亨)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이고, 다음으로 기화(基華), 기방(基邦), 기만(基萬)이 있고, 사위는 찰방 구태주(具泰柱), 정영(鄭寧), 김희경(金熙敬)이고, 딸 하나는 현감 방만원(方萬元)의 첩이 되었다.
세당이 일찍이 병마 평사(兵馬評事)로서 북막(北幕)에서 공을 섬겼는데, 한성군(韓城君)이 구료(舊僚) 가운데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하면서 묘비명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늙고 병들어 정신이 흐릿한지라 공의 성대한 공로와 미덕을 드러내 밝히지 못할까 두려웠으나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행장에 근거하여 차례로 행적을 기록하고 그 끝에 시(詩)를 붙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가정이 살았던 시절에는 / 稼亭之世
대대로 사장(詞章)을 전하였고 / 世傳詞學
제비턱의 골상으로 제후에 봉해진 것은 / 燕頷封侯
한천군이 떨친 자취이니 / 韓川奮跡
임금을 보좌할 때 충성이 깊었고 / 夾日忠深
임금을 위해 죽는 의리 격절하였네 / 殉君義激
기개 열렬한 한원군은 / 烈烈韓原
정훈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 庭訓不辱
서슬 퍼런 칼날 무릅쓴 용기는 / 白刃勇蹈
소년 왕기(汪踦)도 미치지 못한다네 / 童踦未若
조부와 부친이 나란히 / 是祖是父
죽백에 이름이 기록되었더니 / 聯聲汗竹
공이 선대를 이어 일어나 / 繄公嗣興
두각을 드러내었다네 / 挺出頭角
자태는 헌걸차고 / 魁傑之姿
지략은 웅대하였으니 / 沈雄之略
한나라에서 칭송했던 구순처럼 / 漢稱寇恂
목민과 어중에 아울러 능하였네
/ 兼長御牧
아득히 먼 저곳 회령은 / 邈彼會寧
동북의 울타리와 같은 곳 / 藩蔽東北
공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 公臨未久
명망과 공적이 크게 드러났네 / 大著名績
약속하여 정한 것이 이미 분명하매 / 約信旣明
오랑캐가 못된 짓을 그만두었고 / 狼虎戢伏
변방의 백성들이 안도한 것은 / 邊氓按堵
오랑캐의 습속을 위엄으로 바로잡았기 때문이네 / 威懾異俗
역임했던 네 진은 공의 거취 따라 / 去來四鎭
경중이 달라졌다네 / 輕重所歷
북방 관문의 열쇠를 맡게 되어서는 / 北門持鑰
임금의 선발이 더욱 빛을 발하였으니 / 尤光愼擇
유임을 은혜로이 허락한 것은 / 恩許借留
변방의 백성을 염려해서라네 / 念玆遐服
성군의 지우를 입어 / 受知聖君
참판에 발탁되었으며 / 貳卿是擢
안으로 중앙의 병권을 관장하고 / 內掌戎權
대문에는 극삭이 걸렸는데 / 門有戟槊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풀매 / 威惠竝行
대오가 화목하였네 / 士伍輯睦
임금이 간성으로 여겨 의지하였고 / 干城倚仗
고굉(股肱)으로 삼아 의탁하였더니 / 心膂寄託
하늘이 재앙을 고해 별이 떨어지니 / 災告星隕
울음바다가 된 골목엔 슬픔이 넘쳤네 / 悲纏巷哭
세상에 양웅(揚雄)이 없어 / 世無黃門
조충국(趙充國)을 위해 찬(讚)을 짓지 못하니
/ 圖贊充國
후생(後生)들 그 누구든 / 來者何人
내가 새긴 명문을 보시게나 / 視我銘刻


 

[주D-001]제비턱의……것 :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서생으로 있을 적에 관상쟁이에게 가서 물었더니, ‘제비턱에 범의 목〔燕頷虎頸〕’을 하고 있으니 만리후(萬里侯)의 상이라 하였는데, 과연 반초는 서역(西域) 50여 나라를 평정하고, 그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十八史略 東漢》
[주D-002]소년……못한다네 :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소년 왕기(汪踦)보다 낫다는 말이다. 왕기는 춘추 시대 노나라의 소년으로 제나라와의 싸움에 참전했다가 희생되었는데 공자가 칭찬하였다. 《禮記 檀弓下》
[주D-003]한(漢)나라에서……능하였네 : 구순(寇恂)은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으로, 광무제가 하내(河內)를 평정하고 나서 장수들 가운데 태수로 적합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등우(鄧禹)가 말하기를, “지금 하내는 황하를 끼고 있는 험고한 곳이고 호구가 넉넉하며, 위로 상당(上黨)으로 통하고 남쪽으로 낙양(洛陽)이 가까이 있습니다. 구순은 문무를 겸전하여 목민(牧民)과 어중(御衆)의 재주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구순을 하내 태수로 삼았는데, 과연 구순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後漢書 卷46 寇恂列傳》
[주D-004]대문에는 극삭이 걸렸는데 : 권귀(權貴)의 가문임을 이른다. 극(戟)은 방패이고 삭(槊)은 긴 창인데, 고대에 품계에 따라 개수를 달리하여 3품 이상의 집 대문에 벌여 세워 존귀함을 나타냈다. 《新唐書 卷23下 儀衛志》《太平御覽 卷218 職官部16 屯田郞中》
[주D-005]세상에……못하니 : 한나라 선제(宣帝)가 조충국(趙充國), 곽광(霍光) 등 공신 11인의 초상화를 기린각(麒麟閣)에 그려 두고 기념하였는데, 조충국은 선제 때 70여 세의 나이로 서강(西羌)의 침입을 격퇴한 명장이었다. 성제(成帝) 때 다시 서강의 경보(警報)가 급해지자 옛날의 조충국과 같은 장수를 간절히 생각하며 당시 황문랑(黃門郞)이었던 양웅(揚雄)을 불러 그의 초상화 앞에서 송(頌)을 짓게 하였다. 《漢書 卷69 趙充國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