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생육신/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先生傳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 수락산 산행

아베베1 2011. 10. 10. 02:09

 

 반남인 서계 선생의 석림암기의 내용중에

  그리고 수락산에 대하여 여러가지 기록등이 남아있음에도 섬세한 연구가 되지않은 부분이다  

水落山石林庵。僧錫賢與其徒致欽之所爲而吾所名也。水落山。在京城東三十里。與三角,道峯。鼎足而峙。雖峭拔之勢。少遜於二山。而水石之趣。獨勝焉。山之得名。意蓋以此。而名反爲二山所掩。俗鮮稱者。故今人遊跡亦不到。山之東。舊有梅月堂,興國寺,隱仙庵數寺。梅月堂。乃金悅卿所居。而年久已廢。悅卿賞愛玆山。自號東峯。興國寺最盛。今亦廢。但其所謂聖殿者未毀。居僧數人而已。隱仙。後起稍完。今有十六七僧居之。而山之西。獨無一寺。其西北峯下。有古蘭若遺址。又不知建於何時而今廢矣



壺谷集卷之十五

 
看瀑亭 a_131_343a



家於水落山之下。其間不五里而近。山卽楊州之巨嶽。而其上有梅月堂舊址。金悅卿棲息處也。懸瀑從鳧峯絶頂而下。層爲十二。而下二層最大。滙爲泓潭。有石伏於潭底。狀如穹龜。潭左蒼壁。屹然削立。幽夐奇勝。甲於近輔。古來文人韻士。率多稱賞而詠歌焉。余自童時游於此。欲架數椽。以爲登臨休憇之所。而性本鳩拙。佩州印按道節。俱不敢拮据矣。去年冬。乞暇歸山。隣有黃生辰燭者。尙意氣多技藝人也。慨而囑曰。豈可▦廬山眞境。獨無白鶴仙觀耶。遂手執斧鉅。破天慳地祕之界。殫鬼護神施之巧。立亭二間於瀑之右岸。因石而柱之。鋪板而樓之。地主趙侯。亦相斯後。纔數月而訖工。登玆以望。則洞門劈開。眼界通豁。瀑沫濺枕。魂夢亦淸。五十年經營之計。一朝而入手。余甚樂之。乃取李謫仙廬山絶句語。名之曰看瀑亭。此外曰香爐峯。曰紫煙臺。曰長川谷。曰飛流洞。曰千尺巖。曰銀河磯。曰九天門者。蓋一句各摘二字。名其所宜者而刻之。又綴二律。屬藝苑諸君子而張大之。退憂金相公僑居此州。時亦嘗有樂於此。而余有分華之約。故樂其成而首和其韻。金中丞遠明,趙學士子直。皆登覽而和之。於是携黃生邀地主。落而揚之曰。非黃生之勤苦。無以刱此亭。非地主之風流。無以樂此亭。非藝苑諸君子之和章。無以賁此亭。待他日楓丹月白。大會諸君子於亭上。嘯傲憑眺之際。黃生採曄曄之草。盈筐以進。相與歌紫芝之曲。浮大白之杯。侑之以長笛一聲。則此時倚樓之詠。非地主而誰。地主笑曰。善。地主名聖輔。字士俊。歲丙寅首夏上浣。亭之主人記。

企齋別集卷之一
 
新造駱峯瀑泉精舍成。嘉靖丙午端陽後三日。有同年之子新恩朴君 民獻 相訪。與之坐。指示嵒石曰。城中。復有儷美于斯者乎。朴君遽曰。吾先人有莊。在峯南偏。嵒石亦奇云。敢將豈其然之意。書一律。戲之。 a_022_394d



靑城一面駱峯奇。翠壁千尋瀑水垂。拄杖獨吟雲度後。開窓誰見雨來時。仙區幾處能如此。塵世何曾更有斯。何謂南莊新朴子。敢將淸勝等分之。



 

 

梅月堂詩集卷之十二

 詩○遊金鰲錄
詠山家苦 a_013_281a



渡水踰岡十里餘。依峯初見小茅廬。叱牛犂響空中落。知是民間種晚畬。

晡時畏虎掩門扉。至卯方吪煮蕨薇。縱是深山更深處。戶徭田賦可依違。

薄田苗長麇豝吃。莠粟登場鳥鼠偸。官稅盡輸無剩費。可堪私債奪耕牛。

農夫揮汗勤終歲。蠶婦蓬頭苦一春。醉飽輕裘滿城市。相逢盡是自安人。

長官仁愛猶能喘。幸遇豺狼足可憐。婦戴翁提盈道路。豈遭飢凍不豐年。

一家十口似同廬。丁壯終無一日居。國役邑徭牽苦務。弱男兒女把春鋤。

一年風雨幾勞辛。租稅輸餘僅入囷。巫請祀神僧勸善。費煩還餒翌年春。

幸今遭遇聖明朝。慈愛黔黎法帝堯。若喜土功鷹犬玩。生民糜敝不相聊。
自居金鼇。不愛遠遊。因之中寒。疾病相連。但優遊海濱。放曠郊廛。探梅問竹。常以吟醉自娛。辛卯春。因請入京。壬辰秋。隱城東瀑泉精舍。卜築終年云。癸巳春志。
梅月堂詩集卷之十二


列傳補遺 (13) 靖義諸臣列傳을 보충한 글. 金時習‚ 南孝溫‚ 李孟專‚ 趙旅‚ 元昊‚ 成聃壽‚ 權山海‚ 柳自湄‚ 李秀亨‚ 權策‚ 金係錦‚ 徐翰廷‚ 金漢啓‚ 沈璿 등 14명은 거듭 수록하고 있으며‚ 모두 87명으로 다음과 같다. 安平大君瑢‚ 錦城大君瑜‚ 和義君瓔‚ 漢南君@‚ 永豊君瑔‚ 權自愼‚ 鄭悰‚ 宋玹壽‚ 權完‚ 黃甫仁‚ 金宗瑞‚ 鄭苯‚ 閔伸‚ 金文起‚ 成勝‚ 朴崝‚ 朴仲林‚ 成三問‚ 朴彭年‚ 李塏‚ 河緯地‚ 柳誠源‚ 兪應孚‚ 許詡‚ 許慥‚ 李甫欽‚ 嚴興道‚ 趙遂良‚ 安完慶‚ 李耕㽥‚ 李賢老‚ 尹處恭‚ 李命敏‚ 黃義軒‚ 鄭孝康‚ 奉汝諧‚ 池淨‚ 朴夏‚ 李石貞‚ 趙完珪‚ 權署‚ 權箸‚ 庾龜山‚ 庾鰲山‚ 沈希括‚ 李澄玉‚ 金時習‚ 南孝溫‚ 李孟專‚ 趙旅‚ 元昊‚ 成聃壽‚ 權山海‚ 柳自湄‚ 李秀亨‚ 權策‚ 金係錦‚ 徐翰廷‚ 李種‚ 金漢啓‚ 沈璿‚ 安貴行‚ 朴審問‚ 李繼陽‚ 崔始昌‚ 崔沔‚ 柳義孫‚ 玄得元‚ 沈遜‚ 崔德之南須‚ 權自文‚ 金仁錫‚ 曹繼祖‚ 全希哲‚ 趙衷孫‚ 尹堭‚ 安淹慶‚ 孫叙倫‚ 尹匡殷‚ 郭都‚ 孫肇瑞‚ 崔尙柔‚ 權軾‚ 河潔‚ 河哲‚ 李智浩. 이 부분의 板次 <14>가 <18>로 誤記되어 있다.



 상기의 내용중에 저의 19대 조이신 휘  연손선생 이신 휘 덕지 (휘가 기록되어있다 ) 동시대를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오류 : 상기의 내용중에 금오신화 2수  중 3행에

 향삽농병궤오정-   향로에 향을 꽃고 개끗하게 책상에 앉아  :  향삽을 향관으로 정정

  揷 : 꽃을삽  淨으로 표기 된것은 - 靜 고요할정으로 

 

  정정 :

  향관과 동병과 오궤는 고요한데 / 香鑵銅甁烏几靜

   아무런 검정 없이 만들어진 자료 인듯하다 .. 

 


속동문선 제9권
 칠언절구(七言絕句)
금오신화 후 이수(書金鰲新話後二首)



김시습(金時習)

나직한 집의 푸른 담뇨에 따스한 기운 넉넉한데 / 矮屋靑氈暖有餘
창에 가득한 매화 그림자에 달이 처음 밝았다 / 滿窓梅影月明初
등불을 돋우고 긴 밤에 향을 사르고 앉아 / 挑燈永夜焚香坐
한가히 인간에서 보지 못한 글을 짓는다 / 閑著人閒不見書
옥당의 붓과 글에는 이미 마음 없거니 / 玉堂揮翰已無心
소나무 창 앞에 단정히 앉았는데 밤은 한창 깊었다 / 端坐松窓夜正深
향관과 동병과 오궤는 고요한데 / 香鑵銅甁烏几靜
풍류스런 기이한 이야기를 낱낱이 찾아 본다 / 風流奇話細搜尋

 

 

 

*매월당梅月堂김시습 한시 모음*


무제 1無題


石泉凍合竹扉關(석천동합죽비관) : 바위샘물 얼어붙고 합죽선 닫아걸고

剩得深閑事事閑(잉득심한사사한) : 마음의 한가함 얻으니 일마다 한가롭다

簷影入窓初出定(첨영입창초출정) : 처마 그림자 창에 들자 비로소 선정에서 나와

時聞霽雪落松閑(시문제설낙송한) : 가끔씩 소나무 사이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 듣는다


무제 2無題


不湏偸得未央丸(불회투득미앙환) : 구태여 미앙환을 탐낼 필요 없느니

境靜偏知我自閑(경정편지아자한) : 경계가 고요하여 내가 편안함을 조금 알겠도다

命僕竹筒連野澗(명복죽통연야간) : 하인에게 대통을 들판 개울에 이어 놓게하니

一條飛玉細珊瑚(일조비옥세산호) : 한 줄기 나는 옥 같은 물방울이 산호처럼 고아라


무제 3無題


十錢新買小魚船(십전신매소어선) : 십전 들여 작은 고깃배 사서

搖棹歸來水竹邊(요도귀래수죽변) : 노 저어 수죽가로 돌아왔도다

占得江湖風雨夢(점득강호풍우몽) : 강호의 바람과 풍우의 꿈을 얻으니

箇中淸興與誰傳(개중청흥여수전) : 그 속에 맑은 흥취 누구에게 전해줄까


서금오신화후 1書金鰲新話後


矮屋靑氈暖有餘(왜옥청전난유여) : 작은 집에 푸른 담요엔 따스한 기운 넉넉하고

滿窓梅影月明初(만창매영월명초) :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하고 달이 처음 밝아온다

挑燈永夜焚香坐(도등영야분향좌) : 기나긴 밤을 등불 돋우고 향 사르고 앉으니

閑著人間不見書(한저인간불견서) : 한가히 세상에서 보지 못한 글을 짓고 있노라


서금오신화후 2書金鰲新話後


玉堂揮翰已無心(옥당휘한이무심) : 옥당에서 글 짓는 것은 이미 마음에 없고

端坐松窓夜正深(단좌송창야정심) : 소나무 창에 단정히 앉으니 깊은 밤이라

香鑵銅甁烏几靜(향관동병오궤정) : 향관과 동병과 오궤는 고요하기만 한데

風流奇話細搜尋(풍류기화세수심) : 풍류스런 기이한 이야기 자세히 찾아본다


관소 灌蔬


蕭散遺人事(소산유인사) : 쓸쓸히 인생만사 잊고

持瓢灌小園(지표관소원) : 박을 들고 작은 밭에 물을 준다

風過菜花落(풍과채화락) : 바람이 스치지 나물 꽃 떨어지고

露重芋莖飜(노중우경번) : 이슬이 심하게 내려 토란 줄이 뒤집히네

地險畦町短(지험휴정단) : 땅이 험해 밭두둑 짧고

山深草樹繁(산심초수번) : 산이 깊어 초목은 무성하도다

晩年勸學圃(만년권학포) : 늙어서 채소재배 배우기를 권하나

 

 

 

 

 

 

 

 

 

수락산에는 매월당 김시습 관련 발자취가 남아있다

매월정이 있고 여러가지 기사가 있어서 자료를 수집하여 보았다

 

 

梅月堂集梅月堂傳

 
梅月堂先生傳 坡平尹春年著 a_013_057a



先生姓金。名時習。字悅卿。江陵人。高麗侍中台鉉之後。曾祖安州牧使久柱。祖五衛部將謙侃。父忠順衛日省。母張氏。先生生於宣德乙卯。有生知之質。三歲。能作詩。見乳母開花乳母名 碾麥。朗然吟之曰。無雨雷聲何處動。黃雲片片四方分。人皆神之。五歲。英廟召之于承政院。試之以詩。大加稱嘆。013_057b賜帛五十疋。使之自輸。先生遂各綴其端。曳之而出。人益奇之。路上老嫗有以豆腐饋之者。輒吟詩曰。稟質由來兩石中。圓光正似月生東。烹龍炮鳳雖莫及。最合頭童齒豁翁。於是。名動一國。人目之曰五歲。而不敢名。娶訓鍊院都正南孝禮之女爲妻。年二十一。景泰乙亥。讀書于三角山重興寺。人有自京城而還者。先生卽閉戶不出者三日。一夕。忽痛哭。盡焚其書。佯狂陷於溷廁而逃之。於是。削髮爲僧。名曰雪岑。或居013_057c于楊州之水落寺。或居于慶州之金鼇山。之東之西。靡有定處。而累變其號。曰淸寒子。曰東峯。曰碧山淸隱。曰贅世翁。曰梅月堂。世祖嘗設雲水千人道場于圓覺寺。諸僧咸曰。此會上不可無雪岑。上遂命召之。旣至。自投於寺廁中。諸僧以爲病狂黜之。然先生所造益深。聲聞益遠。人之欲問道者。咸歸之。以千百數。先生陽爲狂妄輕躁之態。或以木石擊之。或彎弓欲射013_057d之。以試其志。其弟子有曰善行者。事之累年。雖受箠楚。終不辭去。或怪而問之。行曰。吾師嘗於居山時。盛水于小瓢。捧跪于佛座前。自朝達夜。至于三日。禪定如此。卽是佛也。余心服而不能去云。先生雖於詩學爲餘事。然格高思妙。迥出常情。遣興述懷。放情肆筆。以紙窮爲限。成輒焚之。故世不多傳。成化辛丑。長髮還俗。作文以祭其祖父。遂娶安氏之女爲妻。出入閭閻。一日。被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呼之曰。奴汝宜013_058a休。或於月夜。誦離騷經。輒痛哭。其後妻歿。無所依賴。復還山。弘治癸丑二月日。卒于鴻山縣無量寺。遺命無燒葬。先生於平日。親畫其老少之二像。仍自贊。留于寺。其從遊之士。曰洪裕孫餘慶,南孝溫伯恭。其弟子僧。曰道義。曰學梅。世以先生爲多幻術。能驅役猛虎。變酒成血。吐氣作虹。邀請五百羅漢。然亦不可盡信。


梅月堂集序
 
梅月堂集序[李耔] a_013_053a



淸寒子姓金。名時習。字悅卿。本溟州舊族也。七八歲。通經籍。九歲。占詩文。名動京師。屢形天奬。性跌宕。苦厭羈束。忠義奮激。不能一日隨世低昂。遂托迹緇素。遍歷名山。攄發胸中磊塊。以爲雲泉勝業。觀其遊覽舊都。必徘徊躑躅。慷慨悲歌。累月忘歸。傷今悼古。類非詩人數宅藏點鬼簿者之所能辦。余甚奇其爲人。而言論風介。邈焉無微。嘗購求遺篇。而散逸殆盡。積十年。始得三卷。乃其手所纂錄。筆013_053b迹古淡。整斜勻適。若有意於傳後者也。而散落於崖谷。乾沒於凡俗者。不知其幾何。其一卷則搜剔於寸紙殘簡之中。令善書者傳錄。又其得於傳聞者。則余手錄之。總若干篇。嗚呼。思其人而不可見。誦讀詩文。森翫手迹。亦庶幾得其要領矣。其爲詩浩蕩。朝夕煙雲。驅風詈雨。怒嗔喜笑。皆成句語。不規規於聲律。而典章不紊。不刺刺於詞華。而大璞愈麗。至於理欲性命之說。形諸短句。毫髮不爽。非身履而有得者。何能躋斯域哉。聞諸長老。其爲013_053c人也。貌寢精悍。簡易少威儀。自以聲名大早。性復多迂。揆量時勢。亦難容處。故放狂詼浪。以翫流俗。人見其形骸。遽指爲輕躁。狎侮肆罵。不以爲忌。噫。此其人之所以爲樂。而人方落其度內。迺更校其得失。豈不爲大可笑哉。其於詩也亦然。啁噍之流。謗誣不淺。斯豈有關於淸寒哉。想其投迹禪穴。亦有所因。故雖深居窮嶺。未能果於忘世。凡聞大除拜。輒累日痛哭曰。斯民何罪。而此人當此任哉。若遇佳辰吉日。具明水香火。禮拜古先。或臨絶壑013_053d邀明月。揮涕忘返。或以木刻削。爲農夫耕耘之狀。多至百餘品。列置案邊。熟視終日。輒哭而焚之。又入一山。勸僧徒治火田。所收差饒。卽刻木作桶。列置澗曲。釀酒其中。持瓢導飮。經數月乃止。其憤世疾俗。精勤豪蕩。多類是。於釋典。亦洞徹無礙。發輝精微。一日過東都。劃然大悟曰。禪理頗深。思量五載。乃得透開。如吾道自有階級。若健者之升梯。纔擧一足。遽達一重。無頓悟快決之樂。而有優游涵泳之味。是其心地虛明。觸處洞然。而於眞贗賓013_054a主之分。固已氷釋而雲解矣。噫。古之所謂名緇者。或談論勝果。或游意篇什。而皆得立名當世。垂耀簡策。況吾淸寒。行儒而迹佛。明理而該釋。又其平生落拓不偶。踽踽荒虛。誠不足掩者哉。東方文獻無徵。雖當世名卿鉅公。勳業炳著。而自非國乘所載。並湮沒不存。況爲世所棄。存沒不錄。如淸寒者哉。若過十年。將並余今日所錄而亡之。可勝嘆哉。余平生不幸。名過實。爵浮德。依違漫浪。了無寸長。又不能先幾審處。爲世所訕。幸蒙天之佑。屛處013_054b田里。畢命丘壑。此余宿昔之願。而餘釁尙重。鬼責多端。尙仰人鼻息。以爲舒慘。其視淸寒放浪名敎之外。優游卒歲者。又何如哉。正德辛巳▣月初五日。韓山李耔次野。書。


修堂遺集冊七
 
書金東峯三角山詩後 a_349_526a



梅竹堂成公。與醉琴朴公,丹溪河公,白玉軒李公及申文忠叔舟。有三角山聯句。磅礴峻整之狀。欹危傴僂之態。固一山傳神。而諸公氣像之不侔。又可以因349_526b此想見。金東峯五歲時。承命賦三角山詩。淸峭奇秀。特立不拔之意。可伯仲於成朴諸公。故錄其詩。附于聯句之末。


修堂遺集冊七
 
書金東峯三角山詩後 a_349_526a



梅竹堂成公。與醉琴朴公,丹溪河公,白玉軒李公及申文忠叔舟。有三角山聯句。磅礴峻整之狀。欹危傴僂之態。固一山傳神。而諸公氣像之不侔。又可以因349_526b此想見。金東峯五歲時。承命賦三角山詩。淸峭奇秀。特立不拔之意。可伯仲於成朴諸公。故錄其詩。附于聯句之末。


梅月堂集序
 
梅月堂集序[李山海] a_013_055a



穹壤之間。有淸明精秀之氣鍾於人。而爲英銳絶倫之資。以至爲文章爲言語。浩汗若江河。鏗鍧若金石。大鳴于宇宙者。如本朝臣金時習是已。噫。天之生是材也。似非偶然。而其生也晚。旣不能摳衣於聖門弟子之列。遭遇盛際。又未獲揖讓於都兪吁咈之間。晦迹山林。窮餓以死。天果何心哉。恭惟我主上殿下。聖智首出。文思緝煕。凡所施措。度越013_055b前古。其於樂善愛士之誠。尤無所不用其極。苟有一才之可觀。一行之可取。則雖在千百代之上。無不嘉尙而表異。況如時習實本朝人物之傑然者乎。萬曆壬午秋。命大提學臣李珥。撰傳以進。旋命芸閣。印出其遺稿。嗚呼。天其有待於今日乎。時習於此。可以無憾矣。翌年冬。命臣山海序其卷端。臣以菲拙。何足以仰體013_055c盛旨。闡揚幽光。第臣嘗慕其爲人。挹遺馥於殘篇斷簡之中者。非一日矣。及得尹春年所編輯詩文。未嘗不三復而竊悲也。自在襁褓。已曉文義。聰警神悟。不俟傳授。四書諸經。迎刃自解。古今文籍。過眼輒記。至如道理精微。非有玩索之功。亦多領會之地。則蓋其所得於天者。固超邁迥絶。而資稟之美。雖謂之亞於上智。可也。其所以卷懷深藏。長往不返。拋棄名敎。幻形禪門。如病如狂。大駭流俗者。抑何意歟。迹其所爲。題詩013_055d而哭。刻木而哭。刈禾而哭。登嶺必哭。臨歧必哭。則平生微意所存。雖未可易窺。而大要皆不得其平者乎。至於超然高蹈。睥睨一世。嘯傲山水之鄕。放浪形骸之外。行止閑適。有同孤雲獨鳥。方寸瑩澈。無愧氷壺秋月。則其高風雅韻。有難以筆札形容。古人所謂特立獨行。亘萬世而不顧者。庶幾近之矣。其爲詩也。本諸性情。形於吟詠。故不事鍛鍊繡繪。而自然成章。長篇短什。愈出而愈不窘。其或憂愁慷慨之極。輪囷磊013_056a塊之胸。無以自暢。則必於文字焉發之。縱筆揮灑。初若玩弄戲劇。略不經意。而抑揚開闔。變動叵測。衆體具呈。萬狀畢露。或凌厲頓挫。幽眇回鬱。使人愴然而悲。肅然而恐。或豪儁跌宕。或蕭散沖遠。雜以恢諧放曠奇瑰之語。有可以感發懲創。有可以扶世敎厚民彝者。不一而足。是猶水之安流無濤。泓涵演迤。而及其遇驚颶觸崖磯。哮吼奮激而不知止。斯可謂不得其平而鳴者乎。自古文章之魁偉者。多出於羈旅草013_056b野。心之所存。旣不能和緩舒泰。則文辭之發。不期工而自工。信乎其愁思之聲要妙。而窮苦之言易好也。抑臣竊有所感焉。斯人之作。豈獨稟天地淸秀之氣。亦莫非我列聖培養振作之方。有以鼓舞而興起也。至于我先王。覆載之德。亦能優容而成就之。故閑放自適。任其天性。而逮我聖上。崇奬闡發之典。又曠古所無。則擧國之人。孰不仰013_056c大聖人所爲出於尋常萬萬乎。抑人主之勸善懲惡。初不在於慶賞威刑之末。而一號令一擧措之間。足以使瞻聆聳動。而士氣自勵。頑懦廉立。而薄俗丕變。則是集之行。有補於風化者。夫豈淺淺哉。若然則當時之湮鬱不平者。亦得以消融洞豁於九泉之下。而其文章言語之若江河若金石者。將垂不朽於無窮也必矣。其又何悲。萬曆十一年十二月十八日。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013_056d臣李山海。奉。


 

아계유고 제6권
 서류(序類)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맑고 정밀한 기운이 사람한테 모여서 영특하고 탁월한 자질이 되고 심지어 문장(文章)과 언어(言語)까지도 드넓기가 마치 강하(江河)와 같고 단단하기가 마치 금석(金石)과 같아서 우주에 크게 명성을 떨치는 자가 되는데, 예를 들면 본조(本朝)의 신하인 김시습(金時習)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아, 하늘이 이 인재를 태어나게 한 것이 아마도 우연은 아닌 듯한데, 그가 태어난 시기가 늦어서 이미 성문 제자(聖門弟子)의 반열에서 공경을 다하지 못하였고 왕성한 시대를 만나서 또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읍양하는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산림(山林)에다 자취를 감추고서 굶주리다 죽었으니, 하늘이 과연 무슨 마음을 가졌다 할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성지(聖智)가 탁월하셔서 훌륭한 문장과 심원한 생각을 계속해서 밝히시고 일반적인 시정(施政)도 앞시대를 넘어섰으며 그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는 정성에는 더욱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일이 없으셨다. 진실로 볼 만한 재주가 한 가지라도 있고 취할 만한 행실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비록 천백 년 전의 인물이라도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대우하셨다. 더구나 김시습은 실로 본조의 인물 중에서 걸출한 자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력 임오년 가을에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전(傳)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고, 곧바로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인출하라고 명하시니, 아, 하늘은 오늘을 기다렸던 것인가. 김시습도 이 점에 대하여 서운함이 없을 것이다. 다음해 겨울에 신 이산해(李山海)에게 그 책의 첫머리에다 서문을 쓰라고 명하시니, 신이 못난 재주를 가지고서 어찌 성대한 뜻을 우러러 체득하여 가리워진 광택을 천양(闡揚)할 수 있겠는가. 다만 신이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잔편(殘篇)과 단간(斷簡) 중에서 그의 체취를 느껴온 것이 하루만의 일이 아니었으며, 윤춘년(尹春年)이 편집한 시문(詩文)을 얻어 세 번 반복해서 읽어보고 삼가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유년기 시절부터 이미 글뜻을 깨우쳤고, 탁월한 정신력으로 전수(傳授)받은 일이 없이도 사서 제경(四書諸經)을 칼날이 닿자 스스로 갈라지는 대쪽처럼 그렇게 쉽게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고금(古今)의 문적(文籍)을 보는 대로 모두 기억하였으며, 도리(道理)의 정미(精微)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완색(玩索)의 공부가 있지 않았는데도 요령을 터득한 것이 많았으니, 대개 그가 천성적(天性的)으로 타고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이 훨씬 탁월하였지만 자품(資禀)의 아름다운 점으로 보면 상지(上智)의 성인(聖人)에 다음 간다고 하여도 가할 것이다.
그가 자기 생각을 깊이 간직한 채, 아예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명교(名敎)를 버리고 선문(禪門)에서 모습을 바꾸어 병이 든 자처럼, 미친 자처럼 행동하여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였을까. 그가 평소에 남긴 소행을 살펴보면, 시를 지어 놓고도 울고, 나무를 조각해 놓고도 울고, 벼를 베어 놓고도 울었으며, 재[嶺]에 오르면 반드시 울고, 갈림길에 임하면 반드시 울었으니, 한평생 간직했던 그의 은미한 뜻을 비록 쉽게 엿볼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요지는 모두 평이함[平]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초연한 듯 고답적인 자세로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을 찾아 즐기고 현상을 탈피한 경지에서 방랑 생활을 하였으니, 그러한 행동거지가 한적하여 마치 흘러가는 구름과도 같고 홀로 나는 새와도 같았다. 그리고 마음은 막힌 곳이 없이 훤하여서 얼음이 든 옥병과 가을달에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그의 고상한 풍격과 단아한 운치는 붓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하겠다.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우뚝 서서 홀로 가되 몇만 년이 흘러가도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것과 거의 유사할 것이다.
그가 시를 지을 때에는, 성정(性情)에 근본을 두고서 음영(吟詠)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에 단련(鍛鍊)이나 수회(繡繪)를 일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문장이 이루어져서 장편(長篇)이나 단시(短詩)가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군색하지 않고, 간혹 극도로 우수(憂愁)에 젖어들고 강개(慷慨)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거나 응어리진 가슴을 풀 수 없을 때는 반드시 문자로 나타내서 붓가는 대로 휘두르기도 하였다. 그것이 처음에는 희롱하는 듯, 연극하는 듯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처럼 하다가 억누르고 들추어내고 열고 닫고 하는 그 변동을 헤아릴 수 없으며, 여러 시체(詩體)를 다 제시하고 모든 현상을 다 드러내서 분연히 나아갔다가 갑자기 꺾이기도 하고, 그윽하고 작은 것을 회울(回鬱)하기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창연(愴然)히 슬프게도 하고 숙연(肅然)히 두렵게도 하였다. 혹은 호기가 있고 방자한 듯하며, 혹은 조용하고 한가해서 먼 곳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해학까지 곁들인 재치 있는 말에는 사람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말도 있고 징계시키는 말도 있으며, 세상의 교화(敎化)를 부지하고 백성의 윤리를 두텁게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는 마치 물이 파도가 없이 잔잔하게 흐를 때는 깊이를 알 수 없이 질펀하게 흐르다가 그 놀라운 회오리바람을 만나 언덕과 돌에 부딪치면 성내어 울부짖고 분을 내어 격동하여 그칠 줄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이런 것이 평탄함을 얻지 못하여 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로부터 탁월한 문장력이 있는 자는 대부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왔으니, 마음속에 느끼는 것이 이미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문자에 표현되는 것이 교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교묘해지는 법이다. 이것을 보면 시름에 찬 소리는 대부분 기발하고 곤궁한 자의 말은 격언이 되기 쉽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다.
그리고 신이 삼가 느낀 바가 있다. 이 사람의 작품이 어찌 홀로 천지의 맑은 기운과 빼어난 기운을 받은 것만으로 그렇게 되었겠는가. 역시 우리 열성조에서 배양하고 진작하는 방법이 그를 고무시키고 흥기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선왕(先王)께서 하늘처럼 덮어주고 땅처럼 실어주는 덕을 가지시고 또한 능히 너그럽게 포용해주심으로써 성취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한방 자적(閑放自適)함을 자기의 천성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성상(聖上)께서 내리신 장려하고 발양시켜주신 은전(恩典)은 또한 천고(千古)에 없던 일이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 어느 누가 대성인(大聖人)이 하신 일이 심상(尋常)한 데에서 만만번 벗어났다 하지 않겠는가.
또 임금이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도리가 처음부터 상을 주고 벌을 주는 말단적인 데에 있지는 않는 것이지만, 한 가지 호령과 한 가지 거조를 내리는 사이에도 충분히 보고 들어서 감동을 받게 함으로써 사기(士氣)가 스스로 격려되게 하고, 완악한 자가 청렴해지고 게으른 자도 분발하게 함으로써 야박한 풍속이 크게 변화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이 문집(文集)을 발간함으로써 풍화(風化)에 도움되는 면이 어찌 적다고만 하겠는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당시에 울분에 쌓여 불평하던 것이 깨끗이 녹아서 구천(九泉)의 아래에까지 확 트일 것이고, 그 강하(江河)와 같은 문장과 금석(金石)과 같은 언어들이 장차 영원히 썩지 않고 무궁할 것이 분명하니, 또 다시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신 아무는 서문을 쓰다.


 

 

 

梅月堂集金時習傳

 
金時習傳 [李珥] a_013_059a



金時習字悅卿。江陵人。新羅閼智王之裔。有王子周元。邑于江陵。子孫仍籍焉。厥後。有淵有台鉉。皆爲高麗侍中。台鉉之後久柱。官止安州牧。生謙侃。終五衛部將。謙侃生日省。以蔭補忠順衛。日省娶仙槎張氏。於宣德十年。生時習于漢師。生稟異質。離胞八月。自能知書。崔致雲見而奇之。命名曰時習。語遲而神警。臨文。口不能讀。意則皆曉。三歲。能綴詩。五歲。通中庸,大學。人號013_059b神童。名公許稠輩。多就訪焉。莊憲大王聞之。召致承政院。試以詩。果捷而佳。下敎曰。予欲親見。恐駭俗聽。宜勖其家。韜晦敎養。待其學成。將大用。賜帛還家。於是。聲振一國。稱曰五歲而不名。時習旣蒙睿奬。益懋遠業。景泰年間。英陵顯陵。相繼而薨。魯山以三年遜位。於是。時習年二十一。方讀書于三角山中。人有自京城013_059c來者。時習卽閉戶不出者三日。乃大哭。盡焚其書。發狂陷於溷廁而逃之。托跡緇門。僧名雪岑。累變其號。曰淸寒子。曰東峯。曰碧山淸隱。曰贅世翁。曰梅月堂。爲人貌寢身短。豪邁英發。簡率無威儀。勁直不容人過。傷時憤俗。氣鬱不平。自度不能隨世低䀚。遂放形骸遊方之外。域中山川。足跡殆遍。遇勝則棲焉。登覽故都。則必躑躅悲歌。累日不已。聰悟絶人。其於四書六經。則幼時受業于師。若諸子百家。則不俟傳授。無013_059d不涉獵。一記而終不忘。故平日未嘗讀書。亦不以書笈自隨。而古今文籍。通貫無漏。人有擧問者。應口說無疑。磊塊慷慨之胸。無以自宣。凡世間風月雲雨。山林泉石。宮室衣食。花果鳥獸。人事之是非得失。富貴貧賤。死生疾病。喜怒哀樂。至於性命理氣。陰陽幽顯。有形無形。可指而言者。一寓於文章。故其爲辭也。水湧風發。山藏海涵。神唱鬼酬。間見層出。使人莫知端倪。聲律格調。不甚經意。而其警者則思致高遠。迥出013_060a常情。非雕篆者所可跂望。於道理。雖少玩索存養之功。以才智之卓。有所領解。橫談豎論。多不失儒家宗旨。至如禪道二家。亦見大意。深究病源。而喜作禪語。發闡玄微。穎脫無滯礙。雖老釋名髡深於其學者。莫敢抗其鋒。其天資拔萃。以此可驗。自以聲名早盛。而一朝逃世。心儒跡佛。取怪於時。乃故作狂易之態。以掩其實。士子有欲受學者。則逆擊以木石。或彎弓將射。以試其誠。故處門者旣罕。且喜開山田。雖綺紈家013_060b兒。必役以耘穫甚苦。終始傳業者尤鮮矣。山行。好白樹題詩。諷詠良久。輒哭而削之。或題于紙。亦不示人。多投水火。或刻木爲農夫耕耘之形。列置案側。熟視終日。亦哭而焚之。有時所種禾甚盛。穎栗可玩。乘醉揮鎌。盡頃委地。因放聲而哭。行止叵測。大被流俗所嗤點。居山見客。問都下消息。聞人有肆罵者。則必色喜。若曰。佯狂而有所蘊云。則輒攢眉不怡。見除目達官或非人望。則必哭曰。斯民何罪。此人當此任耶。時013_060c名卿金守溫,徐居正。賞以國士。居正方趨朝。行辟人。時習衣藍縷。帶蒿索。戴蔽陽子。賤夫所著白竹笠。稱蔽陽子。遇諸市。犯前導。仰首呼曰。剛中居正字 安穩。居正笑應之。駐軒語。一市皆駭目相視。有朝士受侮者不能堪。見居正欲啓治其罪。居正搖首曰。止止。狂子何足與較。今罪此人。百代之下。必累公名。金守溫知館事。以孟子見梁惠王論。試太學諸儒。有上舍生見時習于三角山曰。乖崖守溫別號 好劇。孟子見梁惠王。豈合論題。時習013_060d笑曰。非此老。不出此題。乃走筆成篇。曰生員爲自製者。試瞞此老。上舍生如其言。守溫讀未終。遽問曰。悅卿住京山何寺。上舍生不能隱。其見知如此。其論。大略以爲梁惠僭王。孟子不當見云。今逸不收。守溫旣卒。人有言坐化者。時習曰。乖崖多慾。寧有是。就令有之。坐化非禮。吾但聞曾子易簀。子路結纓而已。不知其他。蓋守溫好佛故云。成化十七年。時習年四十七。忽長髮。爲文以祭祖若父。其文略曰。帝敷五敎。有親013_061a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愚騃小子。似續本支。沈滯異端。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講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在腆以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云云。遂娶安氏女爲妻。人多勸之仕。時習終不能屈志。放曠如舊。値月夜。喜誦離騷經。誦罷必哭。或入訟庭。持曲作直。詭辯必勝。案成。大笑破棄之。多與挑達市童傲遊。醉倒街013_061b上。一日。見領議政鄭昌孫過市。大呼曰。彼漢宜休。昌孫若不聞者。人以此危之。相識者絶交。惟宗室秀川副正貞恩,南孝溫,安應世,洪裕孫輩數人。終始不渝。孝溫問時習曰。我所見如何。時習曰。穴窓窺天。 言所見小也東峯所見如何。曰。廣庭仰天。 言見高而行未到也未幾妻歿。復還山。作頭陀形。 僧家。翦髮齊眉者謂之頭陀。喜遊江陵,襄陽之境。多住雪岳,寒溪,淸平等山。柳自漢宰襄陽。待以禮。勸復家業行于世。時習以書謝之。有曰。將製長鑱。用013_061c斲苓,朮。庶欲萬樹凝霜。修仲由之縕袍。千山積雪。整王恭之鶴氅。與其落魄而居世。孰若逍遙而送生。冀千載之下。知余之素志。弘治六年。臥病于鴻山無量寺。終焉。年五十九。遺戒無燒葬。權厝寺側。後三年。將葬啓其殯。顏色如生。緇徒驚歎。咸以爲佛。竟依異敎茶毗。 僧家燒葬之名 取其骨作浮圖。 小塔名 生時。手畫老少二像。且自贊。留于寺。贊之亂曰。爾形至眇。爾言大侗。宜爾置之丘壑之中。所著詩文散失。十不能存一。李耔,013_061d朴祥,尹春年。先後裒集。印行于世云。 謹按。人體天地之塞。以淸濁厚薄之不齊。有生知學知之別。此以義理言也。若如時習者。於文天得。則文字亦有生知矣。佯狂避世。微意可尙。而必拋棄名敎。蕩然自恣者。何歟。雖藏光匿影。使後世不知有金時習。抑何悶焉。想見其人。才溢器外。不能自持。無乃受氣豐於輕淸。嗇於厚重者歟。雖然。標節義。扶倫紀。究其志。可與日月爭光。聞其風。懦夫亦立。則雖謂之百世之師。013_062a亦近之矣。惜乎。以時習英銳之資。礱磨以學問踐履之功。則其所成就。豈可量乎。噫。危言峻議。犯忌觸諱。訶公詈卿。略無顧藉。而當時不聞有擧其非者。我先王之盛德。碩輔之宏量。其視季世使士言遜者。待失何如耶。嗚呼韙哉。萬曆十年七月十五日。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成均館事,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珥。奉013_062b敎製進。


梅月堂詩集卷之一
 詩○古風
古風。 十九首。 a_013_089a



山中何所有。白雲縈長松。只可尋常親。不可追其蹤。物外託交契。始終如駏蛩。變化頗閑妙。可以怡心胸。

上古結繩治。民物何煕皥。天地相交泰。日星垂顥顥。聖人繼天極。從容履中道。裁成而輔相。參贊乎天造。

虞唐法天運。玉衡齊七政。都兪一堂上。未施民013_089b先敬。奈何周衰後。貿貿趨華競。素王如不作。誰能繼前聖。

闊袖曳長裾。巍巍東魯翁。率其三千徒。啓迪民顓蒙。彈琴杏壇下。郁郁揚儒風。吁嗟道不行。擬欲浮海東。

鳳兮何德衰。麟也被西狩。列國競呑噬。紛紛相格鬪。仁義反爲迂。利名爭輻輳。聖賢雖復起。委靡莫能救。所以狂接輿。歌山木自寇。

皤皤柱下史。出關逢尹喜。授以道德經。仙遊終不死。至言和天倪。高談亂朱紫。大道自此歧。紛013_089c然異端起。

始皇倂六國。時號爲強秦。焚蕩先王書。四海皆鼎新。自稱始皇帝。率土皆稱臣。防胡築長城。望海勞東巡。驪山宮闕壯。複道橫高旻。楚人一炬後。空餘原上塵。

隆準隱芒碭。雲物騰蒼空。竟斬白帝子。巍峨坐法宮。三章除秦苛。炎祿何渢渢。皇天無私阿。有德必立功。

休言莽卓姦。便是人主頑。勿言房杜良。便是君德昌。源淸流益潔。鑑空照逾徹。頃刻如少弛。危013_089d亡從此始。

人性無不善。可以爲堯舜。只緣氣稟拘。有賢愚逆順。聖人拔乎萃。道之以忠信。行之則貞吉。否之則悔吝。

上智不思得。不勉而中道。困知親善人。力行而自保。下愚終不移。頑嚚多草草。禮樂與刑政。從此而肇造。

大道何寂寥。鳳兮何德衰。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携筇泣路歧。踽踽何所之。聖人如復起。敷衽陳其辭。

013_090a嗟嗟均賦命。愚智涇渭分。擾擾百年內。何足以云云。不如脫屣去。僻處遠囂紛。掬水可以飮。煮藜充飢窘。胡爲乎遑遑。與世相矛盾。

君子無所思。所思期保全。碌碌逐風塵。不如歸林泉。木以直而戕。膏以明而煎。無用足可用。謂之羲皇天。

古人何所樂。魚鳥忘其形。機心如或忘。喧靜應無名。名相旣兩立。厭嗜生乎情。偉哉君子人。存順沒吾寧。

坐久不能寐。手翦一寸燭。霜風聒我耳。微霰落床額。心地淨如水。翛然無礙隔。正是忘物我。茗椀宜自酌。

大樹何臃腫。大瓠何濩落。雖不通時用。自喜抱幽獨。逍遙天地間。得失誰能逼。

仲尼亦何人。喃喃說東北。阿誰聽爾言。空塡一丘壑。牟尼亦何人。吧吧千萬說。空演十二部。死化爲枯灰。平生謾多事。不如無事哉。

我語大迂闊。嚼來有滋味。譏我亦由此。賞我亦由是。已矣不須說。紙窮且止止。


梅月堂詩集卷之一
 詩○紀行余乘春時。自山訪舊友於京都。途中記其勝景。
蘆原草色 a_013_090c



長堤細草何毿毿。萋萋風際香馣馣。江淹別浦色愈碧。李白漢曲思何堪。蒙茸壟上沒黃犢。蔥蒨橋邊含翠嵐。惹得王孫多少恨。淡煙疏雨懷江南。


추강집 제4권
 편지(書)
동봉산인(東峰山人)에게 답하는 편지



지난번에 선생께서 더할 수 없는 호의를 베푸시어 산중에서 저를 전송하며 멀리 호계(虎溪)를 건너오셨으니, 은혜와 영광이 몹시 깊었습니다. 또 저를 천박하고 용렬하여 분발하거나 추론하는 지혜와 식견이 없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몸가짐과 시행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며 고의(古義)를 인용하여 간곡하게 반복하셨으니, 다행스러움이 또한 큽니다. 분골쇄신(粉骨碎身)하지 않고서는 보답할 길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일찍이 듣건대, 천 균(鈞)은 지극히 무겁지만 맹분(孟賁)이 들기에는 쉽고, 깃털 하나는 지극히 가볍지만 초파리가 짊어지기에는 무겁다고 했으니,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힘의 강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실행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저절로 도에 들어맞는 사람도 있고 억지로 힘써서 도를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억지로 힘쓰는 사람이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며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잡되고 탁한 기질을 태어나면서부터 품부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그 노력을 백 배 기울여 스스로 힘써 쉬지 않아야 하니,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덕의 후박(厚薄)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대저 술의 덕이 어떠한지는 오경(五經)과 자사(子史)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술이 그 중도를 얻으면 빈주(賓主)를 합할 수 있고 늙은이를 봉양할 수 있으며, 가까이 궤석(几席) 사이에 시행해도 문채가 있고 멀리 천지에 통해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수심에 찬 뱃속은 술을 얻어 풀리고 답답한 가슴은 술을 얻어 편안해져서 기쁘게 천지와 더불어 조화를 함께하고 만물과 더불어 조화를 통하기 때문에 옛 성현이 스승과 벗이 되고 천백 년이 한가한 세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를 잃으면 감옥살이하는 사람처럼 머리를 풀고서 항상 노래하고 어지럽게 춤추며, 백번 절하는 사이에 시끄럽게 부르짖고 서로 읍양(揖讓)하는 즈음에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절도 없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심한 경우에는 까닭 없이 마음을 풀어놓고 눈을 부라리다가 혹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더 나아가서는 집안을 망하게 하고, 크게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술의 재앙이 이와 같지만 주공(周公)과 공자가 쓰면 어지럽지 않았고, 술의 덕이 이와 같지만 진준(陳遵)주의(周顗)가 쓰면 몸을 죽였으니, 그 얻고 잃는 사이에는 한 터럭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은 견고하게 다잡지 않고 절도 있게 쓰지 않으면 맛있는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갈수록 어지러워지다가 점점 술주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주정하는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이치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선비로서 뜻이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응당 몸소 신칙(申飭)하고 안으로 꾸짖어서 어지러움의 뿌리를 막고 끊기를 보통 사람보다 백 배 더한 뒤라야 술의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서경》에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 《시경》에 〈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을 지었고 범 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술잔을 조용히 잡고서 향음주(鄕飮酒)와 향사(鄕射)의 사이에서 진퇴하고 읍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마음이 약하고 덕이 엷기에 그 맛을 달게 여겨 조절하지 못하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스스로 술을 이기지 못함이 초파리가 깃털 하나를 짊어질 수 없는 것과 같게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여 중년에 비난을 받은 일이 적지 않았지만, 방자하게 주광(酒狂)이 되어 영원히 버려짐을 자신의 분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몸은 외물에 끌려가고 마음은 육체에 부려져서 정신은 예전보다 절로 줄어들고 도덕은 처음 마음에서 날로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점점 부덕한 사람이 되어 집안에서 방자하게 주정을 부리다가 어머님께 크게 수치를 끼쳤습니다. 맹자는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불효라고 여겼거늘 하물며 술주정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술이 깨고서 스스로 생각건대 그 죄가 3천 가지 중의 으뜸에 해당되니,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겠습니까. 이에 천지에 물어보고 육신(六神)을 참례하고 제 마음에 맹세한 뒤에 자당(慈堂)께 아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군부(君父)의 명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술 취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제사 지내고 제육을 받아 음복한다거나 축수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았을 때에 달고 맛있는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제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저의 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선생께서 비록 술을 권하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약속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저의 말은 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제 마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귀신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은 기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천지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소홀히 대할 수 있다면 어느 곳에다 이 몸을 두겠습니까. 더구나 어머니께서 아들을 기르며 매양 술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다가 이 말을 들으시고 기쁜 빛이 얼굴에 감돌았으니, 술을 끊겠다는 맹세를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호라! 술이 깬 굴원(屈原)이나 술이 취한 백륜(伯倫)은 본래 둘이 아니고, 청백한 백이(伯夷)와 조화로운 유하혜(柳下惠)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선생께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목생(穆生)을 억지로 허물하지 마시고 한 글자로써 가부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하(仲夏)의 극심한 더위에 삼가 선생의 일상에 만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연단(鉛丹)을 제조하는 데 사용하는 신령스러운 복령(茯苓) 한 봉지를 올리오니, 선계(仙界)의 일월을 혼자만 대하지 마시고 베갯속의 《홍보(鴻寶)》로 야윈 이 몸을 구제해 주소서.

붙임 동봉산인(東峰山人)의 편지

그저께 선생을 모시고 천석(泉石) 위에서 노닐며 종일토록 서성이다가 청계(淸溪)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맑은 흥취가 다하지 않았건만 작별이 너무도 갑작스러웠으니, 어찌나 야속했는지 모릅니다. 봉별(奉別)한 이후로 지금 며칠이 되었지만 함께 얘기할 만한 사람이나 계산(溪山)에서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임이 없으니, 이른바 사흘 동안 도덕을 얘기하지 않으면 혀가 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줄기 푸른 산과 한 조각 흰 구름이 청하지 않는 벗이 되고 말없는 짝이 되어 여전히 서로 대하고 있으니, 이것들이 10년 동안 마음을 알아주는 제 벗들입니다. 성중(城中)에 또한 이러한 벗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나서 연단을 서로 얘기하며 등 뒤가 푸르고 맑은 신선의 무리로 말하자면, 이는 정히 선생이 날마다 서로 보는 사람이겠으나 저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니, 우습고 우습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보았을 때 선생이 술을 끊어 곧바로 주성(酒星)을 하늘의 감옥에 가두고 취일(醉日)을 진(秦)나라의 구덩이에서 불사르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아름답기는 아름답습니다. 대개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임금이 이 때문에 망했고,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선비들이 이 때문에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만세토록 마땅히 살피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옛사람이 술을 베풀었던 까닭은 본래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병을 다스리고 복을 빌고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복(百福)의 모임이 술이 아니면 행해지지 못했던 것이니,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술에 빠져서 덕을 잃으며 거동을 어지럽혀서 몸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옛사람이 술을 빚을 때 매섭게 취하게 하는 것을 술의 바른 맛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향이 짙은 것으로 맑은 술도 만들고 진한 술도 만들며, 맛이 단 것으로 기장 술도 만들고 단술도 만들어 후박(厚薄)과 농담(濃淡)의 차이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도 혹 어지러움에 이를까 염려하여 주례(酒禮)를 만들어 한 번 술을 올리는 예(禮)에 손님과 주인이 백번 절하여 종일 마셔도 취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서 또 제도를 만들어 개자(介者)를 두고 준자(僎者)를 두고 사정자(司正者)를 두고 상자(相者)와 찬자(贊者)를 두어 위의(威儀)를 돕게 했으니, 《시경》〈빈지초연(賓之初筵)〉에 “이미 감을 세우고 혹 사로 보좌하게 한다.〔旣立之監 或佐之史〕” 한 것이 이를 이르는 것입니다.
또 오히려 망녕되이 쓸까 염려했기 때문에 《서경》〈주고(酒誥)〉에 “제사에만 이 술을 쓴다.” 하고, 또 “부모가 기뻐하거든 스스로 깨끗이 하고 후하게 하여 술을 쓰도록 하라.” 했습니다. 《시경》〈녹명(鹿鳴)〉에 “내게 맛있는 술이 있으니, 아름다운 손님이 잔치에 와서 놀도다.” 했으니 이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고, 〈상체(常棣)〉에 “너의 대그릇과 나무그릇을 늘어놓아 실컷 술을 마시더라도, 형제가 모두 있어야 화락하고 또 길이 즐거우리라.” 했으니 이는 형제를 대접하는 것이고, 〈벌목(伐木)〉에 “아, 깨끗이 청소하고 음식을 온갖 그릇에 진열하노라. 이미 살진 짐승을 장만하여 여러 친구를 부르노라.” 했으니 이는 붕우와 친구를 대접하는 것으로, 이것이 술을 마시는 예법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에는 남은 음식이 있고, 집을 짓고 나서는 낙성식이 있고, 손님에게는 대접이 있고, 길 떠나는 사람에게는 송별연이 있고, 활을 쏘는 데는 내려와서 마시는 예가 있고, 고을에는 향음(鄕飮)의 예가 있고, 가정에는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고 축수(祝壽)를 올리는 예가 있고, 제사가 있으면 그 술을 맛봄이 있고, 잔을 올림이 있으면 돌려받는 잔이 있습니다. 이는 인정(人情)을 다하고 인사(人事)를 극진히 하려는 것이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웃통을 벗고 소리 지르며 소별(巢鼈)하여 마시며 개구멍으로 출입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살피지 않고 도리어 술이 재앙을 낳는다고 여겨서 곧바로 완전히 끊고자 하니, 이는 마치 밥을 짓다가 불똥이 튈까 염려하여 일생 동안 익힌 밥을 차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오로지 주정만 하는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지만, 완전히 끊는 것도 예에 크게 어두워서 중용을 잃음이 매우 심하니 군자가 행할 도리가 아닙니다. 만일 혹 끊어야 하는 것이라면, 《논어》에서 공자는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거나 “술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는 일이 어찌 내게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 무공(衛武公) 또한 일찍이 허물을 뉘우치며 말하기를 “세 잔에도 기억하지 못하거니 하물며 감히 또 더 마신단 말인가.” 했으니, 위 무공 또한 완전히 끊은 것이었습니까. 다만 경계했을 뿐입니다.
지금 선생이 만약 예의를 버리고 군친(君親)을 버리고 종족을 멀리하여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사신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예악과 문물이 있는 이 세상에 살면서 효도하고 공손하라는 선왕의 격언을 읽었다면 성급하게 이를 종신토록 행할 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끝까지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지만, 앞으로 제사 지내고 조(胙)를 받지 않으며, 잔치 자리에서 술을 올리기만 하고 돌려받지 않으며, 어버이를 공양하고 병을 돌볼 때에 다시는 먼저 맛보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까. 만약 절제한다거나 삼간다고 하면 괜찮겠지만 종신토록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저로서는 취하지 못할 바이니, 선생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더구나 일전에 보건대 선생의 용모가 옛날보다 수척해졌으니, 기우(氣宇)도 응당 또한 줄었을 것입니다.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몸이 여위고 쇠약하게 되면 당(堂)에 계신 어머님께서 반드시 걱정하실 것이니, 옛사람이 새 새끼를 희롱하고 거짓으로 넘어진 효성에 비추어 볼 때 어떻다 하겠습니까. 효자가 뜻을 거슬러서 이미 공경의 도리에 어긋났고 술을 끊어 근심을 끼침으로써 뒤에 다시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공경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선생 또한 일찍부터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선생께서 양찰(諒察)하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이 편지를 어머님 앞에 아뢰어 선생의 어머님으로 하여금 선생에게 정직하고 성실하며 보호하여 아끼는 벗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선생이 어버이에게 순종하고 벗을 믿는 실상을 다할 수 있게 하십시오. 저번에 허락하신 신령한 복령(茯苓) 약간을 보내는 사람 편에 내려 주소서. 삼가 시의(時宜)를 따라 자애(自愛)하고 진중(珍重)하기 바라며, 다 펼치지 못합니다.


 

[주C-001]동봉산인(東峰山人) :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의 별호이다.
[주D-001]산중에서……건너오셨으니 :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호계는 중국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내이다. 진(晉)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넘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廬山記》
[주D-002]분발하거나 추론하는 : 공자가 말하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으며,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어 주어 이로써 세 모퉁이를 반증(反證)하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하였다. 《論語 述而》
[주D-003]맹분(孟賁) :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이다.
[주D-004]주공(周公)과……않았고 : 《논어》〈향당(鄕黨)〉에 공자는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하였다. 주공과 관련된 사실은 《서경》〈주고(酒誥)〉를 말하는 듯하나 미상이다.
[주D-005]진준(陳遵) : 한나라 애제(哀帝)ㆍ왕망(王莽)ㆍ회양왕(淮陽王) 때의 사람으로, 성품이 방종불구(放縱不拘)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회양왕이 패했을 때에 술에 취해 있다가 적(賊)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漢書 卷92 陳遵傳》
[주D-006]주의(周顗) : 진(晉)나라 원제(元帝) 때의 사람으로,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의 실수로 자주 견책을 받았다. 뒤에 왕돈(王敦)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晉書 卷69 周顗列傳》
[주D-007]범 노공(范魯公)이……지었으니 :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노국공(魯國公) 범질(范質)을 가리킨다. 범질은 조카 범고(范杲)가 자신을 천거해 주기를 바라자, “너에게 술을 즐기지 말기를 경계하나니, 미치게 만드는 약이요 아름다운 맛이 아니다.〔戒爾勿嗜酒 狂藥非佳味〕”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주었다. 《小學 嘉言》
[주D-008]향음주(鄕飮酒)와 향사(鄕射) : 향음주는 고을 사람들이 때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 예(禮)이고, 이어서 활쏘기를 하는 것을 향사라고 한다.
[주D-009]장기……것 : 맹자가 지목한 다섯 가지 불효 중의 두 번째이다. 《孟子 離婁下》
[주D-010]그……해당되니 : 술주정으로 불효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오형의 종류가 3천 가지이지만 죄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罪莫大於不孝〕” 하였다. 《孝經》
[주D-011]술이 깬……백륜(伯倫) : 굴원(屈原)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충신이다. 그는 〈어부사(漁父辭)〉에서 “뭇사람이 모두 취했으나 나 홀로 깨어 있다.〔衆人皆醉 我獨醒〕” 하였다. 백륜은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유령(劉伶)의 자(字)이다. 그는 술을 몹시 좋아하여 〈주덕송(酒德頌)〉을 지었다. 《古文眞寶後集 卷1》
[주D-012]청백한……유하혜(柳下惠) :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는 성인으로서 맑은 분이고, 유하혜는 성인으로서 조화로운 분이다.〔伯夷聖人之淸者也 柳下惠聖人之和者也〕” 하였다. 《孟子 萬章下》
[주D-013]목생(穆生) : 전한(前漢) 초원왕(楚元王) 때의 사람이다. 초원왕이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목생을 위하여 항상 단술〔醴〕을 마련했다고 한다. 《漢書 卷36 楚元王傳》
[주D-014]홍보(鴻寶) : 한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베갯속에 비장(秘藏)하였던 도술 서적이다. 《漢書 卷36 劉向傳》
[주D-015]주성(酒星) : 술을 관장하는 별이다.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에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으리라.〔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하였다.
[주D-016]취일(醉日)을……하였으니 : 취일은 술에 취한 해이다. 취일을 구덩이에 묻는다는 것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차용하여 불사른다는 말로 호문(互文)하였다.
[주D-017]주례(酒禮)를……했습니다 : 《예기》〈악기(樂記)〉의 내용이다.
[주D-018]개자(介者)를……두고 : 향음주(鄕飮酒)를 행할 때에 손님을 돕는 사람을 개(介)라 하고, 주인을 돕는 사람을 준(僎)이라 한다. 《禮記 鄕飮酒義》
[주D-019]소별(巢鼈) : 미상이다.
[주D-020]세……말인가 : 《시경》〈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편은 위 무공(衛武公)이 술을 마시고 허물을 뉘우친 것을 읊은 시이다.
[주D-021]끝까지 : 원문은 ‘從’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3집에 수록된 《매월당집(梅月堂集)》 권21〈답추강서(答秋江書)〉에 근거하여 ‘終’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옛사람이……효성 : 초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가 두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나이 70세에 아이들의 장난을 하여 몸에 오색 무늬 옷을 입었고, 물을 떠가지고 당(堂)에 오르다가 거짓으로 넘어져 땅에 누워서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내었고, 새 새끼를 부모 곁에서 희롱하여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小學 稽古》

 

다산시문집 제22권
 잡평(雜評)
산행일기(汕行日記)



가경(嘉慶) 경진년(1820, 순조 20) 봄에 3월 24일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주(春州)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작은 배를 꾸며 협중(峽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나도 따라가서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청평산(淸平山) 폭포를 보고 절구시(絶句詩) 25수, 화두시(和杜詩) 12수, 잡체시(雜體詩) 10수를 지었다. 그후 4년이 지나 계미년(1823, 순조 23) 여름에 4월 15일 학연(學淵)이 대림(大林)을 데리고 춘주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역시 작은 배를 꾸며 협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내가 또 따라갔으니, 마음은 한계(漢溪)와 곡운(谷雲)에 있었다. 특별히 큼직한 고기잡이배를 구하여 마치 집처럼 꾸미고 그 문미(門楣)에다가 ‘산수록재(山水綠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이것은 내가 썼다. 그리고 좌우 기둥에는, 한쪽에는 ‘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張志和苕霅之趣]’라고 쓰고 한쪽에는 ‘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倪元鎭湖泖之情]’라고 썼으니 이는 승지(承旨) 신작(申綽)의 예서(隸書)이다. 또 학연의 배에 쓰기를 ‘유어황효녹효지간(游於黃驍綠驍之間 황효와 녹효 사이에서 노닌다는 뜻임)’ 이라 하고, 그 기둥에는 ‘부가범택(浮家汎宅 물에 뜬 집이라는 뜻임)ㆍ수숙풍찬(水宿風餐 물위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는 뜻)’ 이라 썼는데, 천막과 침구, 그리고 필기구, 서적에서부터 약탕관과 다관(茶罐), 밥솥 국솥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속으로는 화공 한 사람을 대동, 단연(丹鉛)과 담채(澹采)를 들려 수행시키면서 물이 다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이라든가, 버들 그늘이 깊고 꽃이 활짝 핀 마을에 이를 때마다 배를 멈추고 그 좋은 경치를 가려 제목을 붙이고 그리게 하고 싶었으니, 그것은 이를테면 ‘사라담에서 수종사를 바라보다.[沙羅潭望水鐘寺]’라든가 ‘고랑도에서 용문산을 관망하다. [皐狼渡望龍門山]’ 등으로서 모두 그려둘 만한 절경이었다. 선비 방 우도(方禹度)란 자가 산수화에 능하여 3ㆍ4중첩의 깊고 얕은 경지를 잘 그렸다. 학연이 몸소 찾아가 데려왔는데, 온 지 며칠 안 되어 한질(寒疾)이 생겨 대동할 수 없게 되어 유감천만이었다. 그 후 주위에 방 선비와 절친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그가 묵은 지 며칠이나 되며 그가 먹은 쌀은 몇 되나 되는가?"
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3일 동안 머물렀는데 끼니마다 반 되를 먹었다.”
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어허! 그 사람 가게도 되었군. 그는 한 끼에 두 되씩 먹어 하루 세끼 여섯 되의 밥을 먹는데 날마다 6분의 1을 먹었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가. 그가 가게 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하였다.
○ 약암(約菴) 이여홍(李汝弘)이 소식을 듣고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죽산(竹山)으로부터 1백 20리를 달려와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고, 서울 사는 소년 한만식(韓晩植)ㆍ우정룡(禹正龍)ㆍ오상완(吳尙琬)이 듣고 역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와서 배에 태워주기를 애원하였다. 내가 ‘배는 작고 짐이 무거워 탈 수 없다.’고 하자, 소년들이 모두 서운해하므로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4월 15일 갑인. 맑음. 일찍 일어나 발선(發船)하여 남자주(藍子洲)에 배를 대놓고 노와 닻줄을 손질한 다음, 공달담(孔達潭)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황공탄(惶恐灘)에 올라 호후판(虎吼阪)에서 잤다. 호후판은 단 세 집이 사는 마을인데, 두집은 서로 상투를 잡고 치고 받으며 싸워서 그 고함소리가 호랑이 우는 소리와 같았고, 한 집만이 문을 닫고 있어서 그 집을 빌어 유숙하는데, 마침 주인 노파가 산에 올라 화전에 불을 놓㋤가 나무 그루터기에 발꿈치를 찔려 밤새도록 그 고통을 부르짖으므로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자는 자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이 대개 이처럼 고경(苦境)이다.
○ 우생(禹生)이 몇 리를 가다가 멀미를 하여 뭍에 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내려 놓고서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고 연안을 따라 좇아오니 이것 역시 고심(苦心)이었다.
경진년 봄에 황공탄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 [節]
이 물은 곧 폭포수의 유니 / 玆是瀑布類
여울이라곤 이를 수 없네 / 不可湍瀨論
고요한 하늘에 질풍이 일어나니 / 靜天生疾飇
서늘한 바람에 봄 더위를 잊네 / 瀟瀟忘春暄

또 다음과 같다.
간신히 험준한 곳을 지나니 / 艱崎度絶險
다시 정연한 천지가 나오네 / 復得整乾坤
누른 꾀꼬리 녹음으로 날아드니 / 黃黧赴綠陰
아름다운 경치가 성황을 이루네 / 蔥然時景繁
지금 보는 경치도 이와 같으므로 다시 시를 짓지 않았다.

○ 절구시(絶句詩)는 다음과 같다.
청평의 마을 경치 강을 향해 열렸으니 / 淸平村色對江開
나직한 버들 흰모래 언덕 안고 돌았네 / 短柳晴沙抱岸廻
물이 다하여 근원 끊긴 곳에 이르니 / 直到水窮源斷處
푸른 산이 문득 한 척의 배 토했네 / 靑山忽吐一船來

○ 경진년에는 시(詩)로 행로(行路)를 기록하여 갈 때의 길은 상세히 기록하고 회로(回路)의 기록은 소략히 하였는데, 금년에는 특별히 물길을 기록하는 터이라, 갈 때의 길은 대략 기록하고 회로의 기록은 상세히 하였다. 이것은 피차를 서로 구비하려는 것이요, 또 수원을 따라 탐구하여 수경가(水經家)의 보주(補註)를 돕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 약암(李約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작은 배 가벼이 흔들려 베 포장이 열리니 / 舴艋輕搖布幔開
뱃머리에 걸린 편액 또한 기이하네 / 船楣揭額亦奇哉
녹효의 물이 우수산으로 통하였기에 / 綠驍之水通牛首
그 수원을 탐구하기 위해 여기에 왔네 / 秪爲窮源有此來

16일. 늦게 개었다. 학연(學淵)이 병이 났기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자잠포(紫岑浦)에서 조반을 먹고 복정포(福亭浦)에서 점심을 먹었다. 밤에는 안반촌(安盤村)에서 잤는데, 자던 집이 몹시 정결하였고 주인 노파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자잠(紫岑) 위에 송의항(松漪港)이 있는데 암석이 몹시 기괴하였다. 경진년 봄에 배턱에 배를 대놓고 그 암석 사이에 끼어 앉아 형제가 함께 밥을 먹었는데, 그 생각이 역력히 떠올라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았다. 이로 인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떠나지 못하고 한참동안 있었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동쪽으로 열린 협구 재갈풀린 입 같은데 / 峽口東呀似解箝
자잠의 모난 석각 구름 위에 솟았네 / 紫岑芒角入雲尖
신비한 십리 물길 꽃 띄워 흘러가니 / 靈源十里流花水
그 물결 한 자나 높아졌음을 알겠네 / 解使烟波一尺添

○ 또 다음과 같다.
송의마을 북쪽 석벽 높기도 높아 / 松漪村北石崔崔
하늘이 만든 금성 물을 등졌네 / 天作金城背水隈
마늘봉은 보루 쌓기에 좋다지만 / 可但蒜峯宜築堡
넓은 호수 동쪽 뫼 참으로 기묘하네 / 太湖艮嶽儘詼瓌

오장곡(鄔莊谷)서부터 산세가 수려한데, 녹효(綠驍)의 물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입천(笠川) 또한 아름답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오른쪽으로 홍천을 지나 입천에 와 닿아 / 右過洪川次笠川
유가만 아래 잠시 배를 멈추었네 / 柳家灣下乍停船
석양의 한 조각 외로운 노을은 / 夕陽一片孤霞影
먼 산봉우리에 걸쳐 타는 듯하네 / 斜曳遙峯熂爐煙

○ 또 입천도시(笠川渡詩)는 다음과 같다.
녹효수는 산수로 달리는데 / 綠驍赴汕水
두 언덕이 우뚝 마주섰네 / 對立雙斷岸
가느다란 물줄기 조용히 흘러 지나니 / 細流靜相過
강한에 비교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네 / 未足方江漢
우리집 문앞의 물과 비교해 보아도 / 眂我門前水
반의 반밖에 되지 않네 / 且爲半之半
생락함[節]
푸른 봉우리 저녁 아지랑이 걷히니 / 夕靄澹靑㟽
남은 노을 다시 엉겨 찬란하누나 / 餘霞復靡漫
배 멈추고 고기떼 굽어보니 / 亭舟頫魚隊
온갖 잠념 씻은 듯 없어지네 / 百慮淨蕭散

이 약암(李約菴)이 자잠(紫岑)을 지나면서 지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자잠 남쪽 기슭 오솔길 비꼈는데 / 紫崿南頭細徑斜
설암 옛터에 연하가 잠겨 있네 / 雪菴遺址鎖煙霞
복소궁 무너지고 여강은 차가운데 / 北蘇宮廢驪江冷
도원의 흐르는 물 꽃은 이미 져버렸네 / 流水挑源已落花

17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안개를 뚫고 석지산(石芝山)을 지나 곡갈탄(曲葛灘)에 올랐다. 언덕 위에서 말 모는 소리가 나기에 사실을 물어본 결과 윤종대(尹鍾岱)의 마부였다. 윤 종대가 앞서 약속하고도 떠날때 미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배를 좇아 앞질러서 마당촌(麻當村)에 이르러 쉬며 기다리고 있으니 기쁜 일이었다. 작탄(鵲灘)에서 조반을 먹고 마당촌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윤질(尹姪)을 싣고 현등협(懸燈峽)을 거쳐 신연(新淵)에 이르니 해가 벌써 너웃너웃 넘어가고 있었다. 사공이 죽전촌(竹田村)에서 자자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배를 재촉하여 황혼(黃昏)에 소양정(昭陽亭) 밑에 정박하였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일산만한 하늘 협구 따라 열렸는데 / 一蓋天從峽口開
가릉의 풍물 또한 아름다워라 / 嘉陵風氣赤佳哉
둘러선 석지산 푸르기도 한데 / 石芝山色逶迤綠
풍악소리 때때로 군수 찾아오네 / 絲竹時時郡守來

○ 또 다음과 같다.
남이점 밑 방아올은 방언에 도서(島嶼)를 점(苫)이라 한다.《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보인다. / 南怡苫下方阿兀
한자로 쓰자면 구곡이라 하네 / 譯以文之臼谷云
온조왕 회군한 곳 아! 바로 이 땅이다 / 溫祚回軍噫此地
함박눈 날리던 그 정경 머리에 떠오르네
/ 一天大雪想紛紛

○ 또 다음과 같다.
검정 돌 바둑처럼 널린 정족탄에 / 䃜石棊鋪鼎足灘
한 척의 작은 배로 푸른 물결 뚫고 나왔네 / 一梭穿出綠漪瀾
황효 어부 길에서 만나 / 黃驍漁子行相遇
또 다시 고기를 사 저녁 반찬 부탁하네 / 又買銀鱗付夕餐

○ 또 다음과 같다.
난산 한 지역 상기도 천황인데 / 蘭山一面尙天荒
공중에 달린 각도 십리나 기네 / 閣道飛空十里長
작뢰 동쪽에서 고개 돌려보니 / 鵲瀨東頭重回首
경기의 산빛 아득하누나 / 京畿山色已迷茫

○ 삼악시(三嶽詩)는 다음과 같다
높기도 할사 석파령은 / 崔崔席破嶺
삼악산의 지맥일세 / 是蓋三嶽餘
곱고 묘한 봉우리 없기는 하나 / 雖無娟妙峯
방어엔 자못 허술하지 않네 / 捍禦頗不踈
어이하여 왕조와 최리는 / 王調與崔理
부질없는 죽음당하였나 / 浪作釜中魚
한 나라 태수 공연히 바다를 건넜지 / 漢吏空越海
답답한 이 땅 어디에 살건가 / 鬱鬱安能居
막막한 저 청류관에 / 漠漠淸流關
초목이 비로소 눈이 트네 / 草木嫩初舒
생략함[節]

○ 그 현등협시(懸燈峽詩) 주(注)에 ‘현등(懸燈)은 등달(燈達)이니 방언에 현(懸 달현)을 달(達)이라 하고, 등달(燈達)은 배달(背達)이니 방언에 배(背 등배)를 등(燈)이라 한다.’ 하였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난산(蘭山)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배달현(背達縣)이다.’ 하였고, 현등협(懸燈峽)이 곧 삼악(三嶽)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니, 난산(蘭山)의 옛 고을은 삼악 남쪽에 있어야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현등은 옛날의 난산이라 / 懸燈古蘭山
그 절벽 초토를 이고 있네 / 絶壁戴焦土
두 언덕 서로 마주치려 하니 / 兩厓欲相撞
묶인 듯 좁은 골짜기 언제나 어둡네 / 束峽昏萬古
사람의 어깨도 걸릴까 걱정하여 / 直愁礙人肩
실오리 강물이 길을 통했네 / 江流通一縷
높이 달린 잎새는 하늘 바람을 흔들고 / 高葉搖天風
달리는 여울물은 지주를 흔드네 / 崩湍掀地柱
옹기종기 산봉우리 해를 가리우니 / 攢峯蝕太陽
맑은 낮에도 흙비가 날리네 / 淸晝騰霾雨

○ 석문시(石門詩)는 다음과 같다.
천지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니 / 二儀忽昭廓
들빛은 어찌 그리도 장한가 / 野色噫何壯
숨쉬기도 두렵던 긴장 이윽고 풀리나 / 悚息俄縱弛
산란하여 다시 향할 곳을 모르겠네 / 散朗疑所向
좁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나라이니 / 蕞爾曾亦國
하늘이 만든 별다른 지세일세 / 天作有殊狀
생략함[節]
삼한과 한 나라 바둑을 다투어 / 韓漢競弈棋
아침저녁 분분히 득실을 자주했네 / 蚤莫紛得喪
간교한 지모 염착도 / 廉鑡逞智詐
끝내 낙랑의 임금 되지 못했네 / 樂浪竟不王

○ 신연도시(新淵渡詩)는 다음과 같다.
사랑스런 이 선원수 / 愛此仙源水
그 근원 장안교에서 나오네 / 本出長安橋
일찍부터 명산 보기를 원했건만 / 夙昔名山願
늙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네 / 到老意蕭蕭
생략함[節]

○ 소양도시(昭陽渡詩)는 다음과 같다
우마 도두에 서 있는데 / 牛馬立渡頭
사수 또한 무량히 흐르네 / 沙水復平安
그 경치 도읍에 가까와 / 氣色近都邑
넓은 들 거침이 없네 / 曠莽無險難
강물이 둘러 누대가 통창하고 / 江繞朱樓鬯
산이 멀어 들이 넓네 / 山遠平蕪寬
넘실거리는 배 춤추듯 유연컨만 / 便娟有柔態
추악한 그 모습 광란에 부끄럽네 / 麤惡羞狂瀾
생략함[節]

18일. 소양정(昭陽亭) 밑에 머물렀는데, 날이 새기 전에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아침나절에도 계속 흐려 음산하다가 저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었다. 약암(約菴)과 연(淵), 그리고 운질(尹姪)ㆍ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이 모두 소양정에 올랐는데, 이 경지(李景祉) 광수(光壽)의 자이다. 가 정 중군(鄭中軍)과 현 파총(玄把摠)을 이끌고 주연을 열어 그 음악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꼼짝않고 누워 참석하지 않고 이르기를,
“소양정이 이제 예음정(曀陰亭)이 되었으니 오를 수 없다.”
고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호민(李好敏) 또한 함흥(咸興)ㆍ영흥(永興)의 제릉(諸陵)를 봉심(奉審)하고 돌아오다가 춘천을 거쳐 홍천으로 가면서 저녁에 소양정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나팔소리와 기치의 위의가 자못 성대하였다.
나 혼자 술집에 앉아 있는데 늙은 향갑(鄕甲 풍헌(風憲))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에게 전 도호(都護) 승지(承旨) 이인보(李寅溥)이다. 가 왜 그리 빨리 돌아갔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말이,
“이제 춘주(春州)는 망했습니다. 비록 선정을 베푸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터이라 결국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고가 다 비었기 때문에 갇히는 아전이 10여 명씩이나 되는데, 그 집을 적몰하려 해도 물건이 없고 그 일가를 찾아 물리려 해도 사람이 없습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군액(軍額)이 모두 빔으로써 향갑(鄕甲) 곧 풍헌(風憲)이다. 에게 독촉하여 전포(錢布)를 바치게 하는데, 한번 향갑을 지내면 패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요한 백성으로서 향갑의 인망이 있는 자는 모두 도망쳐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패랭이에 빗을 꽂은 미천한 사람뿐이니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화전세(火田稅)를 전에는 부(府)에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훈국(訓局)의 관리가 나와 거둬들여 그 횡렴(橫斂)이 한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산판이 드디어 묵게 되니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분원(分院)에 백토(白土)를 실어가는 그 배의 선가가 6백 냥인데 모두 이포(吏逋 아전들이 사사로이 이용하여 축냄)를 이루어 해마다 부과를 궐함으로써 사옹원(司饔院)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본 부(府)에는 아전이 본래 80여 명이나 되는데 근실한 자는 다 도망치고, 지금 30여 명이 부에 있을 뿐인데 모두 기아의 마귀가 되어 돈을 보나 곡식을 보나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지름 비록 공(龔)ㆍ황(黃)이 부임한다 하더라도 역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한다. 내가 생각건대, 춘천은 우리나라의 성도(成都)이다. 공명(孔明)은 촉(蜀) 땅을 점거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명황(明皇)은 촉땅으로 파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춘천 역시 국가에서 필히 보호해야 할 땅인데 지금 이와 같이 패망하였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다시 불러들여 안정시키자면 6~7년 동안이 아니고는 안 될 것인데, 지금 또한 아침에 제수하면 저녁에 옮기게 되었으니, 아!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

19일. 정자 아래에 머물렀는데 일기가 쾌청하였다. 약암(約菴)과 한(韓)ㆍ우(禹)ㆍ오(吳) 세 사람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폭포를 보고 저녁때 돌아왔으며, 연아(淵兒)는 샘밭[泉田]에 가서 참봉(參奉) 이목(李楘)과 여러 이씨(李氏)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윤 유청(尹唯靑)에게 대림(大林)을 데리고 도정촌(陶井村) 최씨(崔氏) 집으로 가게 하여 저녁때 연아(淵兒)와 그곳에서 희합하여 납징례(納徵禮)를 행하게 하였다. 나만이 홀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 경지(李景祉)가 같이 있어 주었다. 내가 약암(約菴)에게,
“기락각(幾落閣)은 포복천(匍匐遷)인데 농암(農巖)은 이를 부복천(扶服遷)이라 하였다. 부복(扶服)은 곧 포복(匍匐)이다. 잔도(棧道)가 매우 위태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어서 지나가는데, 그것을 방언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기(幾)는 포복(匍匐)이요, 낙이(落伊)는 출(出)이니 기어서 나가는 것[匍匐而出]을 이름이다. 중간에 석굴이 있는데 옛날에는 길이 이 석굴을 통하였기 때문에 기어서 나갔던 것이다. 나는 ‘곧 추락할 것 같다.[幾乎墮落]’고 해서 기락각(幾落閣)이라고 썼다. 옛날에 절도사(節度使) 이격(李格)은 소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는데 그대도 소를 타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약암의 대답이,
“아니다. 나는 감히 그리할 수 없다.”
고 하였다.

○ 경진년 봄에 지은 기락각시(幾落閣詩)는 다음과 같다.
깊은 협중에 해가 뜨니 / 絶峽破積陰
새벽 노을 강에 비쳐 붉네 / 晨霞照江赤
내려다보니 깊은 못이요 / 高臨不測淵
올려다보니 구를 듯한 바위일세 / 仰蒙將落石
서울에서 보면 이것이 북문이라 / 名都此北門
엄히 잠긴 빗장 철벽과 같네 / 嚴扃鎖鐵壁
가벼운 배 공연히 버려두고 / 輕舟漫自棄
짚신을 신고 산객을 따라가네 / 躡屩隨山客
넋이 떨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데 / 魄慄不敢前
새로운 진흙에 호랑이 자국이 있네 / 新泥印虎跡
수석은 본래 청한한 것이건만 / 水石本閒事
그 누구의 핍박한 바 되었던고 / 顧爲誰所迫
본성이 좋은 것을 어떻게 억제하랴 / 性好那可節
고라니 떼 저 늪속을 즐기네 / 麋麈悅林澤
훌륭하다 이자현이여 / 賢哉李資玄
깊은 산 이곳에 자적했네 / 深山自此適

○ 청평사(淸平寺)에서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節]
청평거사 진락공은 / 淸平居士眞樂公
꽃다운 이름 사책에 빛나네 / 史冊流徽光煜煜
생략함[節]
초도가 얼음산임을 이에 알았고 / 懸知椒塗氷作山
소장 안 바람이 촛불 끌 것을 미리 보았네 / 逆覩蕭牆風滅燭
칠귀수 풀어 던지고 삼베옷 걸쳤으며 / 解七貴綬穿麻衣
오후청을 싫다 하고 나물국을 먹었네 / 吐五侯鯖茹香蓛
궁중에선 까마귀가 떡을 쫀다 들었건만 / 已聞宮裏烏啄餠
어찌하여 산중에서 죽만 끊이고 있단 말가 / 何如山中缹作粥
생략함[節]
조그만 티는 백옥을 가리우지 못하고 / 微瑕未足掩白珩
흙 속의 벌레는 황곡에 비교하기 어렵네 / 壤蟲要難比黃鵠
이자현(李資玄)이 탐하고 인색한 흠이 있었기 때문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시에 이르기를 "조그마한 흠을 가지고 백옥을 가리우지 말라,[莫把微疵掩白珩]"고 하였다.

○ 관폭시(觀瀑詩)는 다음과 같다.
일백 번 변하여 고이고 흐르는 형세 / 百變渟流勢
그 근원은 한 줄기 샘이었네 / 由來一道泉
달릴 때야 누가 그를 잡으랴 / 走時誰迫汝
머무를 때엔 문득 소연해지네 / 留處忽蕭然
서글픈 낙화는 함께 가지만 / 怊悵花俱往
웅장한 돌은 옮기지 못하네 / 雄豪石不遷
알랴 이 산을 벗어나는 그날 / 須知出山日
넓게 퍼져 평천을 이루리 / 浩淼作平川

또 다음과 같다.
날카로움은 산을 뚫고 들어가려 하고 / 銳欲穿山入
요란함은 나무 흔들어 시원하네 / 喧能撼樹涼

○ 청평동구(淸平洞口)를 나오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소 타고 돌길 십리를 돌아 / 石逕騎牛十里廻
묵은 등나무 헤치자 동천이 열리네 / 壽藤披豁洞天開
맑은 강 저 일렁이는 물은 / 澄江一面漣漪水
청평산 폭포를 이루어 왔네 / 曾作淸平瀑布來

약암(約菴)의 관폭시(觀瀑詩)는 다음과 같다.
한 가닥 폭포수 몇 봉우리나 압도했나 / 一道飛泉倒幾峯
긴 바람 소리 성긴 송림 울리네 / 長風送韻入踈松
싸늘해진 의복 산비인가 놀라고 / 衣巾颯爽驚山雨
온갖 소리 울려나 청평사 종 화답한다. / 律呂琮錚和寺鍾
허리엔 흐르는 비단 묶은 듯 비껴 흩어지고 / 腰束流紈斜欲迸
입술엔 옥액을 머금은 듯 내려 찧네 / 脣含玉液下仍舂
당시의 진락공이 응당 이것 인연하였으리 / 當時眞樂應緣此
한 굽이 맑은 물에 만첩청산일세 / 一曲澄泓翠萬重

20일. 맑음. 약암(約菴) 등과 함께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여러 사람들의 시를 써서 건 다음, 정자 아래에 배를 띄우고 맑은 물 위를 소요하였는데, 현생(玄生)이 좋은 술 한 병을 보내왔다.
○ 해가 질 무렵에 복마(僕馬)가 비로소 도정(陶井)으로부터 돌아왔다. 드디어 약암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곡운(谷雲)으로 떠나는데, 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은 피곤하여 따를 수 없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時習)의 시는 다음과 같다.
새가 나는 밖에는 하늘이 다하고 / 鳥外天將盡
읊조리는 자리엔 감탄이 그치지 않네 / 吟邊恨不休
산은 대개 북쪽을 좇아 돌고 / 山多從北轉
강물은 스스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 / 江自向西流
기러기는 평원한 모래톱에 내리고 / 鴈下沙汀遠
배는 그윽한 옛 언덕으로 돌아오네 / 舟回古岸幽
어느 때 세상만사 모두 잊어버리고 / 何時抛世網
흥겨운 마음으로 이곳에 다시 노닐꼬 / 乘興此重遊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삼월 소양강 강 위에 선 누각 / 三月昭陽江上樓
누각 앞 풍경 노닐기에 좋아 / 樓前形勝最堪游
땅 트이고 하늘 높으니 등각에 비길 만하고 / 地逈天高擬滕閣
물 맑고 모래 희니 기주와도 같네 / 渚淸沙百似夔州
살구꽃 지고 복사꽃 시들어 / 杏花已落桃花老
왕손 돌아오지 않아라 방초의 시름일레 / 王孫未歸芳草愁
술 깨어 기대어서 휘파람 길게 불제 / 酒醒倚柱發長嘯
서산에 지는 해가 우두에 비치네 / 西山落日射牛頭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사에서 돌아올 땐 마음이 섭섭터니 / 山寺歸來意悵然
누각 앞에 이르자 눈이 환히 열리네 / 眼明還是此樓前
난간엔 언제나 햇살이 비껴 들고 / 闌干今古橫斜日
돛대는 이리저리 강물을 따라가네 / 舟楫東西閱逝川
맥국의 가을빛 벼가 들에 가득하고 / 貊國秋容禾滿野
우촌의 저녁 나무에 연기 나네 / 牛村晩景樹生煙
맑은 강에 명작의 마땅함을 알았으나 / 澄江最覺宜佳句
어찌하면 소사처럼 고운 시구 읊을꼬 / 安得詩如小謝姸

○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소양강 위에 높다란 누각 하나 / 昭陽江上有高樓
우리 조부 오셔서 노닐 만하다 하셨네 / 吾祖來臨曰可游
금대의 요지라 한남 땅에는 없고 / 襟帶將無漢南地
아름다운 풍경 패서를 압도하네 / 風流欲倒浿西州
노는 고기 즐거우니 발과 기둥 흔들리고 / 簾楹搖蕩游魚樂
지나는 기러기 수심은 아득한 모래톱일세 / 沙渚微茫過鴈愁
북쪽 바라보니 아득히 여운 이는데 / 北望迢迢生遠韻
푸른 아지랑이 경운(궁성) 머리에 떴네 / 靑嵐浮出慶雲頭

○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강 서리고 산 열려 정주가 나타나니 / 江盤峽坼見汀洲
평야는 아득한데 천지는 가을일세 / 平埜茫茫天地秋
높은 누각 낮은 산록에 걸터앉고 / 忽得危樓跨短麓
우뚝한 언덕 긴 강물을 굽어보네 / 高臨絶岸俯長流
뜰앞 가는 물 언제 멈춘 적 있던가 / 堦前浙水何曾住
난간 밖의 뭇산들 뜨고자 하네 / 檻外群山盡欲浮
날 저문 타향이라 올라 관망하며 한하건만 / 落日殊方登眺恨
갈대 물가 목욕하는 해오라긴 수심을 모르네 / 蒹葭浴鷺不知愁

○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의 시는 다음과 같다.
별계의 풍경이 십주와 같은데 / 別界風煙近十洲
뱃길과 들빛 모두 가을철에 마땅하네 / 船洄野望摠宜秋
산은 맥국을 둘러 하늘을 찌를 듯 솟고 / 山圍貊國攙天聳
물은 금강에서 발원하여 바다를 향해 흐르네 / 水自金剛學海流
햇빛 띤 찬 까마귀 아스라이 애처롭고 / 帶日寒鴉憐影遠
난간 앞 지나는 가벼운 익주(鷁舟) 마름과 함께 떠 있네 / 過欄輕鷁等萍浮
거문고와 술 겨를 많아 강만이 고요하니 / 琴尊多暇江蠻靜
읊조리는 흥취 유연하여 수심 따위 관계없네 / 吟興悠然不管愁

○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시는 다음과 같다.
정월에 소양정 위를 지나게 되었나니 / 正月昭陽亭上行
석옹이 떠난 후 감히 함부로 논평하네 / 石翁之後敢容評
멀리 연기 성긴 마을 사람 하나 가는데 / 遙村煙闊一人去
지는 해 찬 모래에 쌍학이 우네 / 落日沙寒雙鶴鳴
산의 눈 강의 얼음 한층 더 청절하고 / 山雪江氷更淸絶
하늘 높고 땅 멀어 분명함을 알겠네 / 天高地逈覺分明
말하지 말게나 이른봄보다야 늦은 봄이 좋다고 / 休言春晩勝春早
담담한 곳에서 진미가 나는 법이라네 / 眞味方從淡處生

○ 상국(相國) 조재호(趙載浩)의 시는 다음과 같다.
모래빛 솔안개 둘이 서로 배회하는 데 / 沙光松翠兩徘徊
원세 열린 곳 정자 하나 우뚝하네 / 亭在其間遠勢開
들은 맥국의 옛터 둘러 손바닥처럼 드러나고 / 野繞貊墟如掌出
강물은 인협을 따라 옷깃처럼 돌아드네 / 江從麟峽似襟回
가을들엔 마을 소 외로이 점쳐 있고 / 秋蕪孤點村牛細
해 저문 물가엔 기러기떼 울음소리 슬프네 / 晩渚群號客鴈哀
가무의 즐거운 연회 머무를 수 없으니 / 歌管初筵淹不得
그림 난간 비낀 해가 돌아가길 재촉하네 / 畵欄斜日故相催

○ 경진년 봄에 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어부가 수원을 찾아 동천으로 들어가니 / 漁子尋源入洞天
붉은 누각이 만정봉 앞에 날아드네 / 朱樓飛出幔亭前
궁ㆍ유의 할거는 혼연히 흔적이 없어졌고 / 弓劉割據渾無跡
한ㆍ맥의 싸움은 끝내 가련하게 되었네 / 韓貊交爭竟可憐
우수산 옛밭엔 봄풀이 아스라하고 / 牛首古田春草遠
인제 흐르는 물엔 낙화가 어여쁘네 / 麟蹄流水落花姸
사롱과 수불 어떻게 이어갈꼬 / 紗籠袖拂嗟何補
물가 버드나무 석양에 홀로 배를 푸네 / 汀柳斜陽獨解船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 낙랑 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이 바다를 건너와 점령, 북쪽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고 남쪽으로 진한(辰韓)을 공격하여 진한을 빼앗아 입국하였는데, 이때 낙랑의 근거지가 실제 춘천에 있었다.

○ 약암(約菴)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림 같은 강산에 높은 누각이 있어 / 江山如畵有高樓
맥국 옛터에 먼곳 손이 노니네 / 貊國遺墟客遠游
옛날 온조가 회군하던 곳 그 어디든고 / 溫祚回軍昔何地
팽오가 공격해 온 곳이 바로 이 고을일세 / 彭吳穿峽卽斯州
겹관문 싸안으니 험난함을 알겠고 / 重關拱抱方知險
비옥한 들 넓으니 걱정 잊을 수 있네 / 沃野平寬可滌愁
이 절승한 곳에 올라 굽어보니 / 最是登臨奇絶處
석양의 마을 연기 우두에 일어나네 / 村煙落日起牛頭

맥국에 대한 변증[貊辨]은 다음과 같다.
춘천(春川)은 맥국(貊國)이 아니다. 맥(貊)이라는 글자가 이(夷)ㆍ적(狄)ㆍ융(戎)ㆍ만(蠻)과 같이 정동(正東)을 이(夷), 정북을 적(狄), 동북을 맥(貊), 동남을 민(閩)이라 한다. 《주례(周禮)》에 보인다. 세상에 이국(夷國)도 없고 적국(狄國)도 없는데 어찌 유독 맥국(貊國)이 있겠는가. 맥에는 많은 종류가 있어 예맥(濊貊)ㆍ양맥(兩貊)ㆍ소수맥(小水貊)ㆍ구려맥(句麗貊)의 각각 같지 않은 것이, 마치 조이(鳥夷)ㆍ내이(萊夷), 적적(赤狄)ㆍ백적(白狄)과 같은 것이라 맥은 나라로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데, 춘천은 중국의 정동에 있으니 더욱 맥이라 이름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한(漢)ㆍ위(魏)의 즈음에 낙랑(樂浪)이 남하(南下)하여 춘천으로 옮긴 후, 혹은 한(漢)의 관리가 파견되어 지키기도 하고 혹은 토추(土酋)가 빼앗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랑의 근본은 평양(平壤)에 있었고 평양은 끝내 구려(句麗)에게 패망하였는데, 그 구려의 종족이 본래 맥과 더불어 혼합되었기 때문에 백제(百濟)ㆍ남한(南韓) 사람들이 다같이 낙랑을 가리켜 맥인이라 불렀으니, 그 근본은 평양으로부터 왔고 평양이 당시 구려맥(句麗貊)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와 김부식(金富軾)의 백제사(百濟史)에서 그 그릇된 점을 분별해 밝히지 않고 낙랑으로 맥인을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까지 그 그릇된 점을 그대로 답습하여 벗어날 줄 모른다. 맹자(孟子)의 말에 ‘맥에는 오곡(五穀)이 나지 못하고 오직 기장만이 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그러한가? 《한서(漢書)》 조조전(鼂錯傳)에는 이르기를 ‘호맥(胡貊)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6척이나 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그런한가? 강릉(江陵)이 예(濊)가 아닌 이유가 또한 이와 같다. 예인(濊人)은 남하하여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는데, 가섭원은 하서량(河西良)이다. 그러므로 강릉은 예가 아니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우수주시(牛首州詩)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절(節)]
아아, 이 낙랑성을 / 嗟玆樂浪城
그릇 전하여 맥향이라 부르네 / 冒名云貊鄕
나무 껍질은 한 치도 되지 않고 / 木皮不能寸
밭마다엔 오곡이 무성하네 / 五穀連阡長
따뜻한 지기(地氣)에 발육이 빨라서 / 地暄發生早
초여름에 벌써 나뭇잎 짙푸르네 / 首夏葉已蒼
뻐꾹새 소리 나무마다 요란하고 / 鳴鳩樹樹喧
꾀꼬리는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네 / 黃鳥弄柔簧
남한이 옛날에 순무한 적이 있고 / 南韓昔巡撫
한사가 건너던 내 지금은 흔적 없네 / 漢使川無梁
돌에 새긴 것이 오랫동안 매몰되어 / 勒石久埋沒
여운 끝내 없어지고 말았네 우두산(牛頭山)에 팽(彭)ㆍ오(吳)와 통래한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薰聲竟微茫
이는 대개 춘천이 맥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는 양이(兩李)와 함께 10리 거리에 있는 수운담(水雲潭)을 지난 다음 5리를 더 가서 보통점(普通店)에 이르렀는데, 학연(學淵)과 윤유청(尹唯靑)이 도정(陶井)으로부터 와서 만났다. 서북쪽의 여러 산세를 바라보니 울창하게 두루 얽혀 있고, 그 푸른 아지랑이 산 그림자에다가 향풍을 일으키는 옷자락은 표표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강을 낀 등로(磴路)를 보통천(普通遷)이라 부르는데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10리를 가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서원은 깊은 산중에 있어 평생에 서울 양반을 보지 못하는 터라 자못 분주히 접대하며 존경하는 기색이 있었다. 두 재실에 불을 넣어 온돌이 몹시 따스하였다.
○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주벽으로 모셨는데, 선생의 외가가 춘천에 있어 어렸을 때 노닐던 유적이 있어서다. 좌측에는 지퇴당(知退堂) 이공(李公) 휘는 정형(廷馨)이다. 을 배향하였으니 만년에 춘천에 퇴거(退居)하였기 때문이요, 우측에는 용주(龍洲) 조공(趙公) 경(絅) 을 배향하였으니 명환(名宦)으로 문화의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 연(淵)이 경지(景祉)ㆍ유청(唯靑)과 함께 예알(禮謁)하였다.

21일. 일찍 출발하였는데, 날씨가 흐려 비가 오려 하다가 늦게야 개었다. 서원에서 한 굽이를 돌아 침목령(梣木嶺) 무파래고개(巫巴來古介) 을 넘자 바로 침목천(梣木遷)을 만났는데, 까마득하게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마치 기락각(幾落閣)과 같이 위태로웠다. 특별히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새로 지나감으로써 편편하게 길을 잘 닦아 발을 붙일 수 있었다. 10리를 행하여 인람역(仁嵐驛)을 지난 다음 한 굽이를 돌아 강물 서쪽 산너머를 보니 황량한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이는 곧 절도사(節度使) 이천로(李天老)의 별장(別莊)으로서 지암정자(芝巖亭子)라고 하는 것이다. 5리를 더 가서 모진도(牟津渡)에 도착, 나루를 건너니 이곳이 원당점(員塘店)이다. 북쪽으로 산마루를 바라보니 그 위에 조그마한 촌락이 잇는데, 이는 곧 이경중(李敬仲) 익(益) 의 묘촌(墓村)이다. 3리를 걸어 마령(馬嶺)을 넘었는데, 몹시 험준하였다. 역시 예조 판서의 덕택으로 다행스럽게도 말이 지치지 않았다. 5리를 걸어 서오촌(鉏鋙村)에 이르렀는데, 그 동쪽은 곧 이 병사(李兵使) 형제의 전장(田莊)이다. 서북쪽으로부터 산을 돌아나오는 물이 있는데, 바로 곡운(谷雲)의 하류이다. 여기서 낭천(狼川)의 큰길을 버리고 소로로 들었는데, 몇 리 사이가 험난하더니 한 모퉁이의 산을 돌아나오자 다시 평탄해졌다. 7리를 걸어 이곡촌(梨谷村)을 지났는데 마을 형태가 몹시 밝아 보이고 유명한 배나무 1백여 주가 있었다. 5리를 더 걸어 사외창(史外倉)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 이날 관에서 양식을 방출하였는데 수십여 명의 산중 백성들이 모였다. 창고의 곡식이 많이 축나 허위로 양식을 방출하고 그 결점을 미봉하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모두가 처음 보는 지역이다. 비로소 새로 시(詩)를 지었다.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깊은 산 장수하는 곳 / 嶽麓藏修地
맑은 강물이 앞을 감돈다 / 滄江繞案回
재실은 함께 공부할 만한데 / 齋堪書共讀
선비들은 술 때문에 자주 찾아오네 / 儒以注頻來
풀은 우거져 돌층계를 덮었고 / 碧草深堦石
붉은 격자창은 재 속에 숨었네 / 紅欞隱竈灰
무슨 연유로 산중 스승이 되었는고 / 何由作山長
은둔하여 영재를 기르기 위해서네 / 遯跡育英才

○ 침목령(梣木嶺)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갯길 빙빙 돌아가도 되돌아오는 듯 / 嶺路盤紆往似廻
산머리 벌린 암혈 부는 바람 맞이하네 / 上頭呀穴受風來
대마디 같은 층층 여울 만날 때마다 걱정인데 / 愁臨竹節層層瀨
요란한 물소리 금강산 만폭일레 / 猶作金山萬瀑豗

○ 지암정(芝巖亭)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시냇가에 지암정자 세웠으니 / 芝巖亭子碧溪潯
남전에 감춘 자취 만년 계책 깊었네 / 屛跡藍田晩計深
지금도 말한다네 청평산 아랫길에 / 尙說淸平山下路
황소 타고 옛 송림 지나간 일
/ 黃牛叱過古松林

○ 모진도(牟津渡)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모진도 어구가 바로 원당인데 / 牟津渡口是員塘
사공은 삿대를 버티고 손님맞이에 분주하네 / 小豎撑篙接客忙
바라보니 인가는 산마루에 붙여 있어 / 試看人煙依絶巘
풍경이 옛날 본 봉명방과 흡사하네 / 風謠恰似鳳鳴坊 전에 곡산(谷山)의 봉명방(鳳鳴坊)을 보았는데, 백성들의 마을이 모두 산마루에 있었다.

○ 저찰촌(鉏札村)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험악한 암석이 문득 열리니 / 矗石喦磝忽打開
진흙 논배미가 시내를 끼고 돌았네 / 塗泥萬㽝來溪回
이랴이랴, 소모는 소리 봄물을 갈아대니 / 鳴犁札札耕春水
산봉우리 향하여 화전불 놓으러 가지 않네 / 不向峯頭放火來

○ 이곡(梨谷)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운 곡구에 작은 내 흐르고 / 梨雲谷口小溪長
입 속에서 녹는 특산 배나무 두어 줄 / 絶品含消立數行
길가 찔레꽃 눈앞에 가득한데 / 一路蒺藜花滿眼
가는 바람 술통 스쳐 주향을 풍기네 / 細風吹撲酒槽香

○ 창촌(倉村)에서 잠깐 쉬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작은 창고 쇠잔한 마을 기색이 처량한데 / 小廥殘村氣色涼
모를 심는 시절이라 으레 양식 분배하네 / 挿秧時節例頒糧
하늘에 가득한 소산기 뒤 능히 알리오 / 彌天蕭氣誰能辨
도호당 안에서는 도지개춤 흥겹네 / 都護堂中舞檠長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소산현(蕭山縣)의 아전들이 글장난을 잘하고 법문을 잘 농간질 하였는데, 왕 곡정(王鵠摀)은 모기령(毛奇齡)이 소산기가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오각(午刻 12시경)이 되어서야 출발하였는데, 나는 늙은 암소를 타고 약암(約菴)은 조그마한 가마를 타고 연(淵)은 나귀를 타고 경지(景祉)와 유청(唯靑)은 모두 말을 탔다. 화우령(畵牛嶺)을 넘어 하나의 냇물을 건넜는데 바로 곡운(谷雲)의 하류이다. 또 산령(蒜嶺)을 넘어 제 1곡(第一曲)인 방화계(傍花溪)에서 잠시 쉬고 곧바로 달려 곡운서원(谷雲書院)에 이르렀다.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사내창(史內倉)에 가서 잤다.
○ 화우령을 넘으면서 서쪽을 바라보니, 뭇 산봉우리가 군집하고 연기와 아지랑이 낀 산빛이 짙게 푸르른데 벌써 곡운 외부(外府)가 보인다. 몇 리를 더 가서 십감촌(十甘村) 마을 앞에 이르니, 절벽 위에 낙락장송이 나열해 섰고, 굽이치는 냇물을 내려다보니 맑은 물빛이 눈부시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 서쪽 산기슭을 보니 층암절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폭포가 흘러내렸는데 마치 소낙비가 오는 때 같이 자못 볼 만한 경관이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 산령을 만났는데, 영세(嶺勢)가 몹시 험준하고 산봉우리가 마치 꽃잎처럼 생겨 상봉(上峰)이 되었다. 그 이름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산마루에 오르니 곡운구곡(谷雲九曲)이 눈앞에 삼열(森列)하였다. 좌우의 산세는 마치 견아(犬牙)처럼 짜여들고 옷깃처럼 교접하여 그 주밀한 형세가 빈틈이 없었다. 과연 하늘이 만든 명구(名區)로서 특별한 하나의 고안을 완성한 것이라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산봉(蒜峯)은 곧 곡운의 외관(外關)이다. 이 영을 넘자 물은 한층 더 맑고 돌은 한층 더 희고 산은 한층 더 높고 초목은 한층 더 울창하다. 고개 아래에 내려와 얼마 안 가서 문득 비스듬히 누운 커다란 반석이 보이는데 거기에 비류(飛流)하는 물결이 허옇게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어보니 바로 제1곡의 방화계(傍花溪)였다. 흔연히 말에서 내려 가까이 보니 기기 괴괴한 형태를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쳐다보니 해는 이미 산봉우리에 걸려 있고 호랑이와 곰이 울어댔다. 오래 머무를 수 없어 드디어 모두 말에 올랐다. 명일에 구곡(九曲)을 자세히 보기로 의논하고 청류격단(淸流激湍)을 지날 때마다 문득 말을 달려 지나게 하였으니, 이는 혹시라도 절경에 이끌려 날이 어두울 때까지 지체될까 염려되어서였다. 들길이 몹시 험악하였다. 때로는 나무로 잔도를 만들어 평탄하다가도 조금 가면 다시 또 험악하곤 하였다. 2ㆍ3곡 이상으로부터는 험한 돌길이 점점 평탄해지고 산세도 점차 낮아졌으며, 5ㆍ6곡 이상에 이르러서는 산줄기가 끝나고 뽕밭과 삼[麻]밭들이 있었다. 다시 1곡을 돌아 서원(書院)에 이르렀는데 서원의 형색이 몹시 쓸쓸하였다. 또 다시 돌아 창촌(倉村)을 향하여 명월계(明月溪)를 건너서 우편으로 꺾어 드니, 이른바 융의연(隆義淵)ㆍ첩석대(疊石臺)가 있었는데 모두 길가에 있어 아름다운 경관도 없었거니와 또한 날이 어두워지므로 말을 달려 지나쳐 버렸다.

○ 화우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숲과 풀 어우러져 분별할 수 없는데 / 疊綠稠靑漭不分
막대머리 한 고개에 또 구름 비껴있네 / 杖頭一嶺又橫雲
문득 도흥경을 생각케 하니 / 令人却憶陶弘景
금롱보다 풍초를 좋아한 줄 알겠네
/ 豐草金籠識所欣

○ 산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한 겹산에 어울려 또 한겹산 달리는 ‘속안으로 외람되이 간산함을 미워하여 [生憎俗眼猥 着山]’라 하였다 / 一重山合一重山
하늘이 선계를 위해 철관을 튼튼히 했네 / 天爲仙區壯鐵關
정신차려 이곳을 지나가긴 하지만 / 只以銳心過此去
어떻게 돌아갈지 까마득하네 / 不知何計得回還

○ 동구(洞口)로 들어가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으로 접어들면서 굽이굽이 맑으니 / 自入山來曲曲淸
무어라 부를 수 없거니와 모두 이름이 없네 / 不勝名矣盡無名
속진에 막힌 심장 깨끗이 씻기우고 / 塵脾俗肺澄淘了
또다시 꾀꼬리 소리에 귀를 깨치고 / 又聽黃黧砭耳聲

○ 또 다음과 같다.
바람고개 몸을 솟구쳐 지나가니 / 風磴㩳身度
높은 봉우리는 이마 눌러 비껴 있네 / 危峯壓頂斜
시냇가엔 곰이 꺾은 나무 비껴 있고 / 溪橫熊折木
길가엔 사슴이 씹던 꽃잎 떨어졌네 / 徑落鹿銜花
고달픈 땅이지만 맑은 정신나고 / 苦境生淸想
천작의 경관에 자주 차탄을 발하네 / 天工發絫嗟
이래로 광달한 선비 / 由來曠達士
늙어 죽도록 집 생각 아니하네 / 終老不懷家

○ 약암의 시는 다음과 같다.
돌길이 강 서쪽에 비꼈는데 비록 구곡(九曲)이라곤 하지만 길이 한쪽 가로나 있어 한번도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 / 磴路橫斜著水西
녹음 속의 꾀꼬리 맘놓고 울어대네 / 綠陰幽鳥盡情啼
옆 사람이 웃으며 곰 지난 곳 가리키니 / 傍人笑指能熊過跡
꺾인 나뭇가지 시내에 쳐박혀 있네 / 折木杈枒倒碧溪

○ 또 다음과 같다.
마늘봉 뒤에 곡운이 열렸는데 / 蒜峯以後谷雲開
구곡의 선경 거쳐 왔네 / 九曲仙莊領略來
보건대 조물주가 그 기교를 다해 / 試着化工勞意匠
수석을 갈아 신기한 작품을 만들었네 / 磨礱水石有神裁

22일. 약간 흐렸다가 오정이 지나서야 개었다. 일찍 출발하여 서원에 도착하여 여러분들의 화상을 본 다음 차례로 구곡을 보았다. 제1곡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저녁 때 두 고개를 넘어 외창(外倉)으로 돌아와 잤다.
○ 서원은 사액(賜額)되지 않은 곳으로, 곡운(谷雲) 김공(金公) 휘는 수증(壽增)이다. 이 주벽으로, 삼연(三淵 김창흡의 호) 김공(金公)이 좌배(左配), 명탄(明灘 성규헌(成揆憲)의 호) 성공(成公)이 우배로 앉았다. 또 그 왼편 재실에 두 분의 화상를 봉안하였는데 곡운과 삼연 두 분의 진영(眞影)이며, 오른편 재실에 또 두 본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곧 제갈 무후(諸葛武侯)와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의 진영이다. 또 궤속에 두 분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우암(尤菴 송시열의 호)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곡운(谷雲) 의 아들 성천공(成川公)의 진영이다. 서루(書樓)에 또 공자(孔子)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동지(東紙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으로서 마치 어린아이들의 붓장난 같아 머리를 말[斗]보다 크게 그렸으니 이는 곧 하목해구(河目海口)를 형상한 것이나,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되었다. 그 나머지의 모든 화상은 약암(約菴)의 예알(禮謁)로 인해 같이 따라 들어가 상세히 보았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머리는 깎고 수염만 있으며 쓴 것은 조그마한 삿갓으로서 겨우 이마를 가릴 정도였고 갓끈은 염주(念珠) 같았다. 곡운은 우아하고 후중한 체구에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어 조정 대신의 기상이 있었다. 우암(尤菴)은 74세 때의 진영(眞影)으로서 수발(鬚髮)이 모두 희고 아랫입술은 선명하게 붉었으며 치아가 없으므로 턱은 짧았고 눈빛은 광채가 나서 1천 명을 제압할 만한 기상이 있었다. 삼연은 청화정숙(淸和整肅)하며 복건에 검은 띠를 띠고 있어 산림 처사(山林處士)의 기상이 있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는 삼각 수염에 이마는 뾰족하고 빰은 활등같이 그려 마치 불화(佛畫)의 명부상(冥府像) 과 같았다. 이것은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된다. 이곳에 와룡담(臥龍潭)이 있다 해서 무후의 진영을 걸어 놓았으나 아무런 의의도 없다. 이는 모두가 비천한 습속으로서 과감히 없애야 한다.

서원 안에 곡운 화첩(谷雲畵帖)이 있는데 9곡의 천석(泉石)을 그린 것으로서 그린 이는 조세걸 (曺世傑)이었고, 제어(題語)는 곡운이 지었다.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곡운이 제창하고 여러 자질(子姪)들이 각각 1곡씩 읊은 것인데 모두가 그의 수필(手筆)이다.

○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절경이라 성령 수양 알맞은데 / 絶境端宜養性靈
만년의 심적은 맑은 풍월 즐길 뿐이네 / 暮年心跡喜雙淸
백운산 동쪽 화산 북쪽이라 / 白雲東畔華山北
굽이굽이 시내소리 귀에 가득 들려오네 임신년 봄에 운옹(雲翁) / 曲曲溪流滿耳聲

○ 일곡이라, 좁은 동천 배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 一曲難容入洞船
복사꽃 피고지는 운천이 막혀 있네 / 桃花開落隔雲川
숲 깊고 길 끊겨 찾아오는 이 드문데 / 林深路絶來人少
어느 곳 선가에 개 짖고 연기이나 / 何處仙家有吠煙
운옹(雲翁)○ 1곡은 방화계(傍花溪)인데 서오촌(鉏鋙村)으로부터 서쪽으로 돌아 오리곡(梧里谷)을 지나 하나의 시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곧 곡운동구(谷雲洞口)이다 산현(蒜峴)을 넘으면 산수가 두루 돌고 수석이 맑고 장엄하니 이것을 방화계라 한다.

○ 이곡이라, 우뚝한 산 옥봉을 이뤘는데 / 二曲峻嶒玉作峯
흰 구름 누른 잎 가을 경치 이루었네 / 白雲黃葉映秋容
돌다리 가노라니 신선집이 가까워라 / 行行石棧仙居近
알랴 소란한 진세 천만중 막혔음을 / 已覺塵喧隔萬重
아들 창국(昌國)○ 2곡은 청옥협(靑玉峽)으로서 화계(花溪)로부터 5리를 지나 하나의 산을 돌면 석잔(石棧)이 옆으로 비껴 있어 좌측으로 위험한 시내를 내려다보게 되고 우측으로 층층이 높이 솟은 봉우리를 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옥협이다.

○ 삼곡이라, 신선 자취는 밤배가 아득한데 / 三曲仙蹤杳夜船
빈 누대에 송월만이 스스로 천년일레 / 空臺松月自千年
청한한 정취 초연히 깨쳤나니 / 超然會得淸寒趣
흰 돌 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 / 素石飛湍絶可憐
종자(從子) 창집(昌集) ○ 3곡운 신녀협(神女峽)인데, 옥협(玉峽)을 지나 약간 벌어지는 듯 이 시냇물을 따라가면 여기에 이르게 된다, 옛날 이름은 기정(妓亭)이다. 그래서 내가 신녀협(神女峽)이라고 하였다. 물위에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이 있다.

○ 사곡이라. 푸른 바위 의지해 내를 내려볼제 / 四曲川觀倚翠巖
가까이 솔 그림자 삼삼히 떨어지네 / 近人松影落毿毿
분류하는 물거품 그칠 때가 없어 / 奔潨濺沫無時歇
언제나 구름기운 못 위에 넘실대네 / 雲氣尋常漲一潭
종자(從子) 창협(昌協) ○ 4곡은 백운담(白雲潭)인데, 여협(女峽)으로부터 작은 시내를 건너 한 언덕을 돌아서 시내를 따라가면 여기에 이르게 된다.

○ 오곡이라, 시내 소리 깊은 밤에 더 좋아 / 五曲溪聲宜夜深
패옥처럼 쟁쟁하여 먼 숲을 울리네 / 鏘然玉佩響遙林
송문을 벗어나니 서리 언덕 고요한데 / 松門步出霜厓靜
둥근달 외로운 거문고 세상 밖의 심경일세 / 圓月孤琴世外心
종자(從子) 창흡(昌翕) ○ 5곡은 명옥뢰(鳴玉瀨)로서 운담(雲潭) 수백 보 위에 있다. 산밑에 두어 집 가복(家僕)이 살고 있다.

○ 육곡이라, 그윽한 집 푸른 물굽이 베개 삼아 / 六曲幽居枕綠灣
일천 자 깊은 못 그림자 솔문을 비치네 / 深潭千尺映松關
잠긴 용 풍운의 일 관여하지 않고 / 潛龍不管風雲事
깊은 물속에 오래 누워 스스로 한가롭네 / 長臥波心自在閒
아들 창직(昌直) ○ 6곡은 와룡담(臥龍潭)인데 명옥뢰(鳴玉瀨)와 서로 접해 있다. 버들숲가에 물이 쌓여 맑고 깊다. 서쪽으로 농수정(籠水亭)을 바라보면 은연히 송림(松林) 사이에 비친다.

○ 칠곡이라, 평평한 못 얕은 여울 연했는데 / 七曲平潭連淺灘
맑게 이는 잔물결 달을 향해 볼만하네 / 淸連堪向月中看
산도 비어 고요한 밤 지나는 사람없고 / 山空夜靜無人度
소나무 그림자만이 물속에 들어 차갑네 / 唯有長松倒影寒
종자(從子) 창업(昌業) ○ 7곡은 명월계(明月溪)인데 영당(影堂) 앞에 있다.

○ 팔곡이라, 맑은 못 넓게도 열렸건만 / 八谷淸淵漠漠開
이따금 구름 그림자 홀로 오르내리네 / 時將雲影獨沿洄
참 근원 지척이라 맑고 밝음 유별나니 / 眞源咫尺澄明別
오가는 피라미떼 앉아서도 보이누나 / 座見儵魚自往來
종자(從子) 창즙(昌緝) ○ 8곡은 융의연(隆義淵)인데, 영당(影堂) 서쪽에 있다.

○ 구곡이라, 암벽이 층층한데 / 九曲層巖更嶄然
겹벽이 대를 이뤄 맑은 내에 비치네 / 臺成重壁映淸川
흐르는 여울물 솔바람과 급하니 / 飛湍暮與松風急
그 울림소리 동천에 가득 요란하네 / 靈籟嘈嘈滿洞天
외손(外孫) 홍 유인(洪有人) ○ 9곡은 첩석대(疊石臺)이다. 또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면 좌우에 암석이 기괴하고 물이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탑이 있고, 그 가에 길이 있으니 백운령(白雲嶺)으로 향하게 된다.

○ 또 농수정(籠水亭)에 써 이르기를,
“청람산(靑嵐山) 한 가닥이 구불구불하게 뻗어내려 지세가 평탄하고 물은 만궁형(彎弓形)으로 돌았는데, 우리 집이 그 사이에 있어 화악산(華嶽山)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시냇가에 붙여 농수정(籠水亭)을 지었는데 동쪽으로 와룡담(臥龍潭)을 바라보게 된다.”
하였다.
○ 농암(農巖)이 부지암기(不知菴記)를 지어 이르기를,
“농수정(籠水亭)으로부터 남쪽으로 4~5리를 가 화악산(華嶽山)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을 평평하게 하여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사니, 산수가 첩첩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더욱 멀다. 이것을 일러 부지암이라 한다.”
하였다.
○ 또 삼일정기(三一亭記)에는 이르기를,
“정자가 곡운(谷雲)의 화음동(華陰洞)에 있으니 우리 백부께서 지으신 것이다. 어찌하여 삼일정이라 이름하였는가? 기둥은 셋이고 대들보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 원노(院奴)가 말하기를,
“화음동(華陰洞)에 복희팔괘(伏羲八卦)와 문왕팔괘(文王八卦)를 새긴 돌이 있다.”
고 하니, 이것이 바로 삼일정에 있다. 바빠서 가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은 다음과 같이 기(記)를 쓴다.
첩석대(疊石臺)는 원(院)의 서쪽 1리가 되는 곳에 있다. 물속에 3~4개의 선돌이 있어 그 크기가 마치 비석만큼씩이나 한데, 두어 겹의 횡문(橫紋)이 있고 위에는 사람이 앉을 수가 없다. 좌우는 편편한 밭과 큰길로서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이 없으니, 이곳은 아마도 은사(隱士)를 수용하지 못할 것 같다.
○ 융의연(隆義淵)은 그 하류 수백 보 위치에 있다. 위에는 화전(火田)이 있고 곁에는 보리밭이 둘려 있어 기괴한 암석도 없고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도 없다. 다만 시냇물이 흐르다가 정체한 곳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구곡(九曲)에 끼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 명월계(明月溪)는 원촌(院村) 앞에 있다. 우마견시(牛馬犬豕)의 오염과 티끌의 잡된 것의 그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형언할 수 없으며, 대교(大橋)가 걸쳐 있음으로써 수석이 오염되어 있으니, 이곳 역시 구곡에 넣기에는 불가한 곳이다.
○ 대개 와룡담(臥龍潭) 이상으로부터는 산세가 비속하고 물의 흐름이 또한 세차지 못하다. 그리고 뽕밭, 삼[麻]밭, 느릅나무, 버들 등의 그늘과 빽빽한 밭 도랑과 가옥들은 이미 인간의 속물이다. 다만 당시 정자가 여기에 있었고 이 노인이 늘 멀리 노닐 수 없어 보통 여기에 발걸음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상의 3곡이 외람되이 9곡의 수를 채우게 된 것이다. 주자(朱子)의 무의도가(武夷櫂歌)도 7곡(七曲)ㆍ8곡(八曲)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7곡의 벽탄창병(碧灘蒼屛)과 8곡의 고루기암(鼓樓寄巖)이 오히려 취할 만한 것이 있었고, 9곡에 이르러서는 상마우로(桑麻雨露)의 별다른 인간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 사례로 미루어 보면 의당 와룡담(臥龍潭) 으로 제9곡을 삼아 평천(平川)의 입시(入始)로 여길 것이요, 그 정자나 마을 이상은 아마도 다시 취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것 같다.

또 다음과 같이 기(記)를 쓴다.
○ 와룡담(臥龍潭)은 정자 터[亭墟]의 남쪽에 있는데, 언덕 아래 석벽(石壁)과 창병(蒼屛)이 없다. 그 주위는 1백 보에 불과하고 그 깊이 또한 물밑이 검도록 깊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역시 아름답기는 하다.
○ 명옥뢰(鳴玉瀨)는 곧 모여 있던 담수(潭水)가 쏟아져 내리는 곳이다. 반석이 넓게 깔리고 놀치는 물결이 구렁으로 달림으로써 옥설(玉雪)이 함께 일어나고 풍뢰(風雷)가 서로 부딪혀 진동한다. 여울물로서는 극히 아름다운 경관이다.
○ 백운담(白雲潭)은 마땅히 9곡 중 제1의 기관(奇觀)이 되어야 한다. 반석이 넓게 깔려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고 돌빛은 순전한 청색에 아주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이 기괴하고 웅덩이에서 솟아 넘치는 기운이 언제나 흰 구름 같다. 북쪽 암벽 석면에 ‘백운담(白雲潭)’ 세 자를 새겼는데 초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귀인(貴人)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많다.
○ 벽의만(碧漪灣)이란 내가 지은 이름이다. 백운담 아래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두 언덕의 장송(長松)들은 암벽을 의지해 섰고 맑고 긴 물줄기에 넓은 녹색 수면을 이루었다. 아래 화계(花溪)로부터 위로 용담(龍潭)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평평한 물이 없으니 이 또한 조물주의 기교라, 꼭 비류 급단(飛流急湍)이라야 선택에 드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고기잡이도 할 수 있고 배도 띄울 수 있는 곳이라 조그마한 배 한 척을 마련해 두고 풍월(風月)을 맞아 즐기기에 알맞다. 만약 9곡에서 이것이 없었다면 기변(奇變)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 신녀협(神女峽)은 벽의만(碧漪灣) 동쪽 한 화살 사정거리에 있어 상ㆍ하 두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위에 있는 웅덩이는 명옥뢰(鳴玉瀨)와 견줄 만하고 아래 있는 웅덩이는 너무나 기괴하여 형언할 수 없다. 양쪽의 언덕이 깎아지른 벽립(壁立)의 협곡이 아닌데도 협(峽)이라고 이른 것은, 대개 그 웅덩이의 형체가 마치 두 언덕으로서 협(峽)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다. 우레소리가 나고 눈처럼 흰 물결이 용솟음치며 돌 색깔 또한 빛나 반들반들하다. 과연 절묘한 구경거리이다.
○ 청옥담(靑玉潭) 담(潭)은 본래는 협(峽)으로 썼다. 또 신녀협 밑에 있어 맑은 못의 검푸른 그 물빛이 마치 청옥과 같으며, 북쪽 언덕의 넓다란 반석이 노닐 만하다. 그 물이 깊기로는 의당 9곡 중에 첫째가 될 것이며, 또한 배를 띄울 만하다.
○ 망단기(望斷碕)는 내가 선택한 곳이다. 청옥담 밑으로 산모퉁이 하나를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과 눈처럼 허옇게 일어나는 물이 있어 참으로 즐길 만하며, 넓다란 반석이 펑퍼짐하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그 위에 또 벽력암(霹靂巖)이 있는데, 높고 기이하여 과연 놀라운 경관이다. 이곳은 본명이 망단기(望斷碕)인데, 등로(磴路)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험하여 앞으로 나아갈 길이 끊어져 있음을 이른 말이다. 내가 약암(約菴) 등 여러 사람과 이곳에서 발을 씻었다.
○ 설벽와(雪壁渦)는 내가 지은 이름이다. 망단기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한 모퉁이의 산을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급류가 허연 물거품을 이루어 놀랍고도 즐길 만하다. 북쪽 언덕에 병풍처럼 두른 석벽이 옥설(玉雪)처럼 희고 석함(石陷)은 마치 절구통과 같아 설구와(雪臼渦)라 이름할 수도 있고 또 설벽와(雪壁渦)라 이름할 수도 있다. 또 그 밑으로 한 굽이를 돌면 여울물이 허연 물방울을 튀기면서 흘러 아끼며 즐길 만하다. 또 평평히 흐르는 물속에는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어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었으며, 물가에 흰 반석이 넓게 깔려 있어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내가 또 그것을 이름하여 영귀연(靈龜淵)이라 하였다.
○ 방화계(傍化溪)는 영귀연 아래 3~4 굽이를 지나 있다. 이는 곧 이를테면 악곡(樂曲)을 끝맺는 마지막 연주처인데, 저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은 악곡의 처음을 삼을 것이다. 북쪽 언덕에 큰 반석이 넓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고, 그 아래층에 또 하나의 큰 반석이 있어 색깔은 희고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남쪽 언덕은 허옇게 보이는데 모두가 풍림석벽(風林石壁)으로서 시냇물은 그 돌 위에서부터 흘러내려 절벽으로 달린다. 그러므로 천둥소리가 일어나고 허연 물이 용솟음쳐 공포를 느끼고 탄성을 발하게 하니, 이곳은 곧 백운담과 백중(伯仲)이 된다. 그 위는 맑은 못을 이루어 몹시 깊고 또 하나의 와폭(臥瀑)이 천둥소리를 내면서 이 못으로 달리며, 그 위에 또 하나의 급한 여울이 쏟아져 흐른다. 이는 바로 3곡이 합쳐 1곡이 된 것이다.

이날 절승한 경관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물가에 앉아서 혹은 술을 부어 서로 권하기도 하고 혹은 담배를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으면서 오르내렸으니, 이는 대개 특별히 선택한 세 곳으로 7ㆍ8ㆍ9곡의 탈락을 보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방화계(傍花溪) 위에 도착한 후 의논하여 개정하기를 ‘1곡은 망화계(網花溪), 이 땅이 마치 도원동구(桃源洞口)와 같기 때문에 방(傍)을 고쳐 망(網)으로 하였다. 2곡은 설벽와(雪壁渦), 새로 첨가한 것이다. 3곡은 망단기(望斷碕), 혹은 2곡을 영귀연(靈龜淵), 3곡을 설벽와(雪壁渦)라 하고 망단기는 취하지 않았다. 4곡은 청옥담(靑玉潭), 협(峽)을 고쳐 담(潭)으로 하였는데, 본래는 제 2곡이다. 5곡은 신녀회(神女匯), 협(峽)을 고쳐 회(匯)로 하였는데, 본래는 제 3곡이다. 6곡은 벽의만(碧漪灣) 새로 첨가하였다. 7곡은 백운담(白雲潭), 본래는 제 4곡이다. 8곡은 명옥뢰(鳴玉瀨), 본래는 제 5곡이다. 9곡은 와룡담(臥龍潭), 본래는 제 6곡이다. 이라고 하였으니, 이제야 명실 상부하다 하겠다.
대개 방화계 위로부터 청옥협에 이르기까지 6~7리 사이는 굽이마다 기절(奇絶)한데도 모두 빼놓고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운담(白雲潭) 상은 소나 먹일 곳에 불과한데도 3ㆍ4ㆍ5ㆍ6곡이 속속 잇닿았으며, 7ㆍ8ㆍ9곡에 이르러서는 외람되이 화려한 선택에 끼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치 재덕을 갖추지 못한 귀척근신(貴戚近臣)이 함부로 공경(公卿)의 자리를 차지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자는 훌륭한 포부를 품고도 늙어죽도록 버림을 받는 것과 같아 결코 순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삼가 고쳐보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비록 경솔한 처사로서 두렵기는 하나 공의(公議)에 있어서는 또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요약해 말하면, 곡운(谷雲)은 사방이 막힌 지역으로서 중간에 기름진 들이 열려 오곡이 잘 익는데 주위는 수십 리가 된다. 춘천(春川)으로부터 오는 길이 이처럼 험준하기로, 영평(永平) 길을 물어보니 그 험준한 것이 배나 더하다고 한다. 참으로 은자(隱者)가 거처할 곳이요 또 난세에 생명을 보전할 곳이다.

이날 의논하기를 ‘내창(內倉)과 외창(外倉)의 거리가 비록 30리 밖에 되지 않지만 절험(絶險)한 두 고개를 넘고 9곡의 기절한 경치를 보자면 하루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드디어 새옹 하나를 빌리고 쌀 한 전대를 싼 다음, 노복들이 먹을 밥과 말 먹일 콩을 모두 준비해 가지고 계류(溪流)를 따라 내려가다가 제 1곡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이때 마침 고기를 낚는 자가 있어 그에게 고기 한 꿰미를 사서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은 기절한 경관을 탐색하고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어 시는 한 수도 짓지 못하였다.

23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서오촌(鉏鋙村)을 지나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점심을 먹고, 배를 타고 수운담(水雲潭)에 와서 다시 말을 타고 소양정(昭陽亭)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 마령(馬嶺)을 넘어 인람역(仁嵐驛) 앞에 이르니 몸이 피곤하고 뼈대가 쑤시었다. 멀리 바라보니 강중에 조그마한 배 세 척이 떠내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서 서로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의 본의는 배를 타고 서오천(鉏鋙川)에 이르러 낭천(狼川) 근원을 엿보려 하였는데, 여울이 험악하여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끝내 말을 타고 가게 된 것이다. 지금 저 배를 타고 낭천물에 뜨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빨리 달려 침목천(梣木遷)을 넘어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이르러 종자(從者)로 하여금 배를 끌어대게 하였는데, 이른 다음에 보니 바로 가노(家奴) 용운(龍雲)의 배였다. 드디어 소아탄(小兒灘)에서 배에 올라 보통천(普通遷)을 지나는데 약간의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빙빙 도는 파문은 수면에 퍼져나가고 연운(煙雲)이 아득하게 끼어 그 청원(淸遠) 경치는 자못 정신을 맑게 하였다. 물 서쪽에 큰 마을이 있으니 이는 곧 서하(西下) 최씨(崔氏)들이 사는 곳이다. 동쪽으로 수운담(水雲潭)에 정박하니, 이곳은 수륙(水陸) 상인들이 모여 드는 지역으로 들어가 보니 좋은 술과 아름답게 단장한 계집이 마치 충주(忠州)의 목계(木溪)와 같았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곧바로 말을 타고 정하(亭下)에 이르니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대림(大林)이 그 유모(乳母)와 함께 와서 만났다.

24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Ⰰ 진시(辰時)가 되어서야 비로소 걷혔다. 소양정 밑에서 배를 타고 마당포(麻當浦)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금허(金墟)에서 잤다.
○ 소양정 아래에서 출발하여 맑은 못 한 굽이를 돌아 병벽탄(洴澼灘)으로 내려왔다. 올라올 때에는 10여 명이 배를 끌어 올리던 곳을 순식간에 지난 것이다. 또 맑고 깊은 물 한 굽이를 지나 노고탄(老姑灘)으로 내려왔는데, 그 북쪽이 곧 서하평(西下平)이다. 또 몇 리의 맑고 깊은 물길로 곡장탄(曲匠灘)에 내려왔는데, 흰모래가 눈부시게 빛나고 그 동쪽에 죽전촌(竹田村) 40여 호가 있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아올탄(阿兀灘) 병탄(幷灘)이라 부르기도 한다. 으로 내려왔는데, 이는 바로 소양수(昭陽水)와 모진수(牟津水)가 서로 합류하는 곳으로서 지금까지 10리를 내려온 것이다.
○ 두 물이 합하여 담수(潭水)는 매우 깊다. 또 한 굽이를 떠내려가니 여기가 곧 신연도(新淵渡)이다. 새로 오는 부사(府使) 김희화(金熙華)가 오늘 부임하는데 이미 배에서 내려 가버렸다. 여기서부터 물결이 세차기는 하나 여울을 이루기까지는 못하였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아자탄(啞者灘)에 내려오는데 쏜살처럼 지나가는데도 꽤 먼 거리였다. 삼악(三嶽)이 가까이 닥쳐옴에 뭇 산봉우리들이 언뜻언뜻 지나가 진정 상쾌하였다. 또 한 굽이를 떠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우수탄(右手灘)이다. 배가 석문(石門) 밑을 지날 때 암벽을 쳐다보니 그 기괴하게 높이 선 것이 마치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또 한 굽이를 돌아 교탄(橋灘)으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칠암촌(漆巖村) 앞으로서, 여기까지는 또 10리를 온 것이다.
○ 호로탄(葫蘆灘) 쇠오항(衰吾項)ㆍ학암탄(鶴巖灘)으로 내려가니 물길이 굽이쳐 북쪽에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현등협(懸燈峽)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이는 10여 리나 되었고, 협(峽)이 다하자 동부(洞府)가 깊숙하여 미원(迷源)과 같고 골짜기 물들이 흘러 들어오니 바로 춘천의 남부이다. 또 서쪽으로 한번 돌아 종당촌(宗塘村)을 지나서 차석탄(磋石灘)으로 내려갔는데, 윗여울은 극히 얕았고 아랫여울은 자못 험악하였다. 정족탄(鼎足灘)으로 내려갔는데 검은 돌이 바둑돌처럼 널려 있고 물길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마당촌(麻當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마을 북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이는 곧 석파령(席破嶺)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여기까지는 또 20리를 온 것이다.

또 한 굽이를 떠내려와 안보(安保)의 큰 마을을 지나니, 물 서쪽에 있다. 김청성(金淸城) 집안의 선묘(先墓)가 있었다. 양쪽 언덕에는 송림(松林)이 울창하고 강물은 매우 얕아 나무꾼들이 도보로 건너다녔다. 또 10여 리를 내려가니 물 서쪽에 두 마을이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위는 춘천(春川)에 속한 줄길(茁吉)이고, 아래는 가평(加平)에 속한 줄길(茁吉)인데, 글자로 풀이하면 줄(茁)은 방(錺)이 된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방천(錺遷)이라 하였다. 이곳이 경기(京畿)와 강원(江原)의 경계이다. 등로(磴路)가 몹시 길어 물 서쪽에 있다. 10여 리를 뻗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초연대천(超然臺遷)이다. 등로의 초입에 작탄(鵲灘)이 있고 등로가 끝나는 곳에 곡갈탄(曲葛灘)이 있는데, 돌이 험하고 여울이 거세어 물결이 집채 같이 높았다. 우측으로 가평의 물을 지나니 그 동쪽은 석지산(石芝山)이다. 석지산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벌어진 골짜기가 있어 그 속이 몹시 깊으니, 이를 장자곡(莊子谷)이라 하여 아직도 사람이 그 깊은 곳에 살고 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안반탄(安盤灘)으로 떠내려가니 그 동쪽은 바로 남이점(南怡苫)이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염창탄(鹽倉灘)으로 내려가니, 그 아래 두 곳의 조그마한 여울이 있는데 모두 이름이 없다. 또 몇 리를 떠서 수원탄(戍原灘)으로 내려가니 그 동쪽이 바로 구곡(臼谷)이다. 방아올(方阿兀) 또 산 한 모퉁이를 돌아 금허촌(金墟村)에 이르러 잤다. 마당으로부터 금허(金墟)까지 30리이다. 이곳은 판서 이희갑(李羲甲)의 묘촌(墓村)이다.
○ 이날은 수로(水路)로 1백 20여 리를 행하였다.
곡갈탄을 내려가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사공이 재촉하여 뱃머리를 돌리니 / 篙師催轉尾
여울물은 재촉하여 뱃머리를 흔들어대네 / 湍水戰風檣
돌 위의 달리는 물 따르기 어려운데 / 奔石狂難趁
나는 봉우리 아득히 숨네 / 飛峯杳已藏
익숙한 사공 솜씨 경탄을 하고 / 斡旋驚手熟
안전하게 떠가는 몸 기뻐하네 / 平泛喜身康
내리뻗은 저 지산빛 / 迤邐芝山色
석양빛 띠어 고웁네 / 娟娟帶夕陽

○ 또 대련(對聯) 한 귀는 다음과 같다.
외로운 나무 몸을 돌려 멀리 나그네 피하고 / 獨樹轉身遙避客
어여쁜 봉우리 목을 빼어 배를 엿보네 / 娟峯擢頸俯窺船
말이 각박한 것 같아서 이어 짓지 않았다.

○ 또 강촌(江村)에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물에서 자는 것 일정한 곳이 없어 / 水宿無常處
배 매는 곳 바로 집이 되네 / 維舟卽有家
보리밭 사이 묵은 길로 들어가니 / 麥中荒徑入
느릅나무 아래 낮은 삽짝문 비꼈네 / 楡下短扉斜
개 짖는데 부엌에는 불이 빤하고 / 犬吠廚明火
누에 오르니 대자리엔 모래가 있네 / 蠶登簟有沙
무슨 이유로 속세를 떠나 / 何由去俗累
이처럼 생애를 보낼꼬 / 如是度生涯

25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10여 굽이를 지나 송의(松漪)의 반석에서 조반을 먹고, 굴운(窟雲)의 응암(鷹巖)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부암(鳧巖) 아래 정박하였다.
금허(金墟)로부터 한 굽이 돌아 율현탄(栗峴灘)으로 내려가 유곡촌(柳谷村)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났으니 여기는 장씨(張氏)들이 사는 마을이다. 복정곡(福亭谷)을 지나다가 그물질하는 어부를 보았는데 이들은 모두 귀족들이었다.
또 광탄(廣灘)ㆍ호로탄(葫盧灘) 쇠오항(衰吾項)으로 내려가니 약간의 여울이 졌다. 또 한 굽이를 내려가니 이곳은 정족탄(鼎足灘)으로서 물속에는 검은 돌이 개의 이빨처럼 박히었다. 또 한 굽이를 떠서 입천곡(笠川谷)을 지나니 녹효(綠驍)의 물이 흘러 들어간다. 그 밑은 바로 오장곡(鄔莊谷) 양근(楊根)의 북계이다. 으로서 유씨(柳氏)들이 살고 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배뢰탄(㾦癗灘) 두두래(斗斗來) 으로 내려가니 여울이 험하고도 길었다. 또 한 굽이를 떠서 엄인촌(閹人村) 물 서쪽에 있다. 을 거쳐 송의항(松漪港)에 배를 대고 반석 위에서 밥을 먹었다. 이상은 소양정(昭陽亭) 이하 24개의 여울이다.
○ 식사가 끝나자 뱃줄을 풀어 흑앵탄(黑櫻灘)《지지(地志》에는 화피탄(樺皮灘)이라 하였다. 으로 내려가니 물줄기는 만곡(彎曲)을 이루었고 물살이 몹시 거세었다. 자잠촌(紫岑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나 병벽탄(洴澼灘) 발래탄(㗶唻灘)으로 내려가니 상ㆍ하 두 굽이가 있었다. 동쪽 물가 모래자갈밭 속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금을 채취해 일고 있었다. 주관자는 이씨(李氏)이다. 또 맑은 물길 몇 리를 내려가 호후판(虎吼阪)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고 고제탄(高梯灘)으로 내려가니 약간의 여울이 졌다. 이곳은 몇 리의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서쪽이 고제천(高梯遷)이다. 사덕다리(沙德多里) 맑은 못이 끝나자 황공탄(惶恐灘)에 당도하였는데 배를 타고 지나기에는 위험스러웠다. 우측으로 청평(淸平) 물을 지나는데 마을 경치가 아름다웠다. 4~5인이 모래 속에서 금을 채취하고 있었다. 또 한 굽이를 내려 우분촌(牛墳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나고, 또 한 굽이를 내려 원우천(遠于遷)을 거쳐 설곡촌(楔谷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노씨(盧氏)들이 산다. 또 약간 내려가 대동촌(大洞村)이 있으니 여기에는 남씨(南氏)들이 산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장탄(長灘)으로 내려가 대성촌(大星村) 물 서쪽에 있다.ㆍ화랑촌(花郞村)을 지나는데, 밤나무숲이 몇 리에 뻗쳐 있다.
○ 또 한 굽이를 돌아 곡갈탄(曲葛灘)으로 내려가는데 물속에 숨은 바위가 많고 뱃길을 분별할 수 없어 사공이 몹시 두려워했다. 굴운역(窟雲驛) 양주(楊州)의 땅 자기막(瓷器幕)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이씨(李氏)들이 산다. 이덕사(李德師)의 일족이다. 응암(鷹巖) 또한 기이하여 볼 만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출발하여 또 한 굽이를 돌아 검동촌(黔東村)물 서쪽에 있다. 을 거쳐서 남일원(南一園)에 이르고 마석뢰(磨石瀨)로 내려가는데 물살이 약간 거세었다. 수입촌(水入村) 무두리(蕪豆犂) 을 지나는데 마침 두 사람이 물가에 앉아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불러서 배에 같이 싣고 몇 리를 물 따라 내려가니 자못 적적한 심회를 달랠 만하였다. 신당촌(神堂村)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니 이곳은 바로 경성(京城)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다. 공곡천(孔谷遷)을 지나 어시탄(魚腮灘)으로 내려가니 그 동쪽은 화죽곡(花竹谷)으로서 밤나무숲이 자못 길게 뻗쳐 있었다. 수죽곡(壽竹谷)을 지나 괘탄(卦灘)ㆍ유정탄(楡亭灘)으로 내려가 석담(石潭)물 동쪽에 있다ㆍ고랑촌(臯狼村)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 십개탄(十開灘)상ㆍ하 두 굽이가 있다.ㆍ목탄(木灘)ㆍ대천탄(大千灘)으로 내려가서 초라담(鈔鑼潭)에 배를 대고 드디어 암하(巖下)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 이날 수로로 1백 20리를 행하였다.
○ 송의(松漪) 이하가 또 12탄이다. 소양정 이하의 것을 모두 합치면 36탄이다. 그 이름을 상세히 기술하여 수로(水路)의 상고에 대비하였다.

금허(金墟)에서 새벽에 출발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밤 공기에 강물도 자라나서 / 夜氣江能養
거울 같이 맑은 물 잔잔하네 / 油然鏡面平
고요히 산빛을 머금어 푸르고 / 靜涵山色綠
멀리 새벽빛을 맞아 밝네 / 遠迓曙光明
엷은 안개 처음 피어올라 곱고 / 薄霧憐初起
가벼운 노 소리남이 애석하네 / 輕橈惜有聲
어떻게 지나가랴 저 동구 밖을 / 那堪洞天外
바람이 일어나 물살이 거세지네 / 風起怒濤生

26일 맑음. 전날 저녁에 약암(約菴)은 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하여 두미(斗尾)에 나아가 잤는데, 협구(峽口)에서 바람을 만나 일찍 출발하였다.

28일 맑음.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수정하여 이틀 만에 마쳤다.

5월 1일. 산행일기(汕行日記)를 수정하여 4일 만에 마쳤는데 김종(金碂)이 도왔다.

4일. 약간 흐렸다. 곡운구곡시(谷雲九曲詩)를 추화(追和)하였는데,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차운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티끌 세상 아무데도 심령 기를 것 없어 / 塵塗無物養心靈
유벽한 이곳에 맑은 수석 간직했네 / 僻處天藏水石淸
온갖 생각 얽힌 어지러운 곳에서 와 / 須從百慮交喧地
운산 폭포 소리에 깨우치네 / 醒記雲山瀑布聲

○ 망화계시(網花溪詩)는 다음과 같다.
일곡이라, 시냇가에 배를 매지 마라 / 一曲溪頭菓繁船
망화 비로소 달리는 내로 나가려 하네 / 網花纔肯放奔川
뉘 알리 백첩의 영원 안에 / 誰知百疊靈源內
푸른 산 기슭 곳곳에 연기가 날 줄을 / 靑起山根處處煙

○ 설벽와시(雪壁渦詩)는 다음과 같다.
이곡이라, 하늘을 나는 듯 아련한 산봉우리 / 二曲天飛縹緲峯
날아내리는 여울 위아래 다투어 단장하네 / 風湍上下競修容
구슬 병풍 옥벼랑 신선이 노닐던 곳 / 瑤屛玉壁仙游處
구름다리 건너놓아 한 겹이 막혔다네 / 已道雲梯隔一重

○ 망단기시(望斷碕詩)는 다음과 같다.
삼곡이라, 구당협은 배 물리치려 하는데 / 三曲瞿唐欲退船
봉산과 약수 도리어 아득해지네 / 蓬山弱水轉茫然
꼭대기길 바라보며 몇 사람이나 포기했나 / 幾人望斷碕頭路
머리 긁적이며 주저하는 모습 가련하기만 하네 / 搔首踟蹰也可憐

○ 청옥담시(靑玉潭詩)는 다음과 같다.
사곡이라, 맑은 물결 흰 바위 잠기는데 / 四曲澄泓浸雲巖
매달린 담쟁이잎이 간들간들 드리웠네 / 垂蘿高葉裊
여울물은 댓결같이 급히 흐름 기운 삼고 / 湍如竹節抽爲氣
돌은 연꽃 같이 빙 둘러 못 이루었네 / 石似蓮花拱作潭

○ 신녀회시(神女滙詩)는 다음과 같다.
오곡이라, 봄산은 깊고 또 깊은데 / 五曲春山深復深
냉랭한 패옥소리 빈 숲을 울리네 / 冷冷環佩響空林
이로부터 정수의 소원 이루리니 / 自從立得貞修願
인간의 온전치 못한 마음 백번이나 씻어주리 / 百洗人間未了心
이는 본래 기정(妓亭)인데 김공(金公)이 정녀협(貞女峽)이라 고쳤다.

○ 벽의만시(碧漪灣詩)는 다음과 같다.
육곡이라, 잔잔한 물결 굽이굽이 푸르른데 / 六曲平漪翠一灣
혼연한 그 강빛 가시 삽짝을 비치네 / 渾如江色映柴關
나는 여울 급한 폭포 그 무엇 때문인가 / 飛湍急瀑誠何事
징홍의 자재함에 미치지 못해서라네 / 不及澄泓自在閒

○ 백운담시(白雲潭詩)는 다음과 같다.
칠곡이라, 맑은 물 쏟아져 여울 되니 / 七曲琳琅瀉作灘
구름 피듯 눈 끓듯 사람의 눈을 끄네 / 崩雲沸雪要人看
신선 속인 관계없이 / 仙凡雅俗何須問
이곳에선 찬 기운 뼈에 사무치네 / 只是當時徹骨寒

○ 명옥뢰시(鳴玉瀨詩)는 다음과 같다.
팔곡이라, 반석이 비스듬히 깔렸는데 / 八曲盤陀側面開
옥을 굴리듯 맑은 물소리 변함없네 / 琮琤玉溜故潔洄
자연의 묘한 음악 지금 이와 같으니 / 勻天妙樂今如此
험한 길을 거쳐온 것 한스럽지 않네 / 不恨從前度險來

○ 와룡담시(臥龍潭詩)는 다음과 같다.
구곡이라, 신령한 소 물이 맑은데 / 九曲靈湫水湛然
상마 우거진 옛 마을 맑은 시내 끼었네 / 桑麻墟里帶晴川
늙은 용 인간에게 비 내릴 것 안 살피고 / 老龍不省人間雨
곡식 기를 시절에 깊은 잠만 자고 있네 / 春睡猶濃養麥天


 

[주D-001]화두시(和杜詩) : 두시(杜詩)를 차운한 것. 두보(杜甫)가 촉(蜀) 땅으로 들어갈 때 고시(古詩) 12수를 지었는데, 저자는 우리나라 춘천(春川)의 산수가 바로 성도(成都)와 같다고 여겨 두보의 〈입촉(入蜀)〉 고시(古詩)의 운을 차운하였다.
[주D-002]장지화가 …… 취미 : 장지화는 당(唐) 나라 금화(金華) 사람으로, 만년에 강호(江湖)에 살면서 자칭 연파조도(煙波釣徒)라고 하면서, 배[舟]를 타고 초ㆍ삽 사이를 왕래하며 자유롭게 지냈다.《唐書 卷196》
[주D-003]예원진이 …… 정취 : 예원진(원진은 예찬〈倪瓚〉의 자)은 원(元) 나라 무석(無錫) 사람으로 시(詩)에 능하고 산수화를 잘 그렸다. 만년에 청한각(淸閑閣)과 운림당(雲林堂)을 짓고 편주(扁舟)로 호ㆍ묘를 왕래하면서 한가롭게 지냈다.《明史 卷298》
[주D-004]마늘봉은 …… 좋다지만 :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말에 민보(民堡)의 땅은 마늘봉[蒜峯]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하였다.
[주D-005]유가만(柳家灣) : 고흥 유씨(高興柳氏)들이 세거(世居)함으로써 이루어진 소지명.
[주D-006]북소궁(北蘇宮) : 고려 공민왕이 축조한 것으로, 신계현(新溪縣) 동쪽 70리에 있다.
[주D-007]온조왕 …… 떠오르네 : 온조왕(溫祚王)이 18년 겨울 11월에 낙랑(樂浪)의 우두 산성(牛頭山城)을 치기 위해 구곡(臼谷)을 지나다가 대설(大雪)을 만나 회군(回軍)하였다.《三國史記》
[주D-008]왕조(王調)ㆍ최리(崔理) : 이들은 모두 한 광무(漢光武) 때 낙랑(樂浪)의 토추(土酋)였는데, 왕조는 태수(太守) 왕준(王遵)에게 피살되고, 최리는 구려(句麗)의 침략을 당하여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三國史記》
[주D-009]태수(太守) : 한(漢) 나라에서 파견된 왕준(王遵)을 가리킨다.
[주D-010]간교한 …… 염착(廉鑡) : 염사착(廉斯鑡)이라 하기도 한다. 왕망(王莽) 당시 염사착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의 토지와 미인을 탐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침입하였다가 투항하였다. 당시 춘천은 한리(韓吏)가 와서 점거하였기 때문에 투항한 것이다.《魏略》
[주D-011]분원(分院) : 사옹원(司饔院)의 제작소. 관영(官營) 자기제조(磁器製造)를 맡아보던 곳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 설치하였다. 뒤에 분주원(分廚院)으로 개칭하였다.
[주D-012]공(龔)ㆍ황(黃) :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한(漢) 나라 때 순리(順吏)로서 치민리(治民吏)의 대표적 인물이다.
[주D-013]성도(成都)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분지(盆地). 삼국(三國) 때 촉한(蜀漢)의 도읍지이다.
[주D-014]납징례(納徵禮) : 혼례 육례(婚禮六禮) 중 한 가지. 성혼(成婚)의 증표로 예물을 드리는 예.
[주D-015]이자현(李資玄) : 고려조의 문신ㆍ학자. 자는 진정(眞精). 호는 식암(息菴) 또는 청평 거사(淸平居士). 문과에 급제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있다가 사직하고 춘천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선학(禪學)을 연구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며 저서는 《선기어록(禪機語錄)》 남유시(南游詩) 등이 있다.
[주D-016]초도(椒塗)가 …… 알았고 : 초도(椒塗)는 곧 후비(后妃)를 가리키는 말이며, 얼음산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비유한 것이다. 당시 이의(李顗)의 자매 3인은 문종(文宗)의 비(妃), 이호(李顥)의 딸은 선종(宣宗)의 비, 이자겸(李資謙)의 딸은 예종(睿宗)의 비가 되었는데, 이자현은 곧 이의의 아들이다. 이자현은 곧 이와 같은 척당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입산수도(入山修道)한 것이다.《高麗史》
[주D-017]소장(蕭牆) …… 보았네 : 소장은 담장, 즉 집안을 이르는 말로서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수금되고 그 지당(支黨)을 체포하자 임금은 화가 소장 안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高麗史》
[주D-018]칠귀수(七貴綏) : 칠족은 외척을 포함한 귀족으로 한(漢) 나라에서 여(呂)ㆍ곽(霍)ㆍ상관(上官)ㆍ왕(王)ㆍ조(趙)ㆍ정(丁)ㆍ부(傅)를 쳤다. 수는 인수, 즉 고위의 벼슬자리를 가리킨다.
[주D-019]오후청(五侯鯖) : 오후는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곧 오후가 먹는 진귀한 음식을 말한다.
[주D-020]궁중에선 …… 들었건만 :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독병(毒餠)을 임금에게 먹여 시해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그 떡을 까마귀에게 시험하여 그 까마귀가 죽었던 사실이 있다.《高麗史》
[주D-021]등각(滕閣)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등왕각(滕王閣)을 말한다.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이 세우고 왕발(王勃)이 서(序)를 썼다.
[주D-022]기주(夔州)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운양(雲陽)ㆍ무산(巫山) 등의 지역으로 경관이 절승한 곳이다.
[주D-023]우두(牛頭) : 춘천 서북쪽에 위치한 산 이름.
[주D-024]소사(小謝) : 송(宋) 나라 사영운(謝靈運)의 족제(族弟)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당대 문장가였는데, 시(詩)에는 사혜련이 보다 능하였다고 한다.
[주D-025]조부 …… 하셨네 : 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킨다. 청음(淸陰) 김상헌의 〈소양정(昭陽亭)〉 시에, ‘누전에 보이는 풍경 가장 노닐만 하네.[樓前形勝最堪游]’라고 하였다. 청음은 삼연(三淵)에게 증조부가 된다.
[주D-026]금대의 …… 없고 : 험한 산세는 옷깃[襟]처럼 감싸고 강물은 띠[帶]처럼 둘린 요충지로서 한수(漢水) 남쪽에는 그런 지역이 없다는 뜻이다.
[주D-027]패서 : 평안도(平安道)를 가리킨다. 산수가 수려하기로 팔도에서 손꼽힌다.
[주D-028]십주(十洲) : 선인(仙人)이 산다고 하는 10개의 주. 곧 조주(祖洲)ㆍ영주(瀛洲)ㆍ현주(玄洲)ㆍ염주(炎洲)ㆍ장주(長洲)ㆍ원주(元洲)ㆍ유주(流洲)ㆍ생주(生洲)ㆍ봉린주(鳳麟洲)ㆍ취굴주(聚窟洲)를 말한다.
[주D-029]사롱과 수불 : 좋은 시로 대우받음을 말한다.《청상잡기(靑箱雜記)》에, “위야(魏野)가 구래공(寇萊公)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다. 후일 다시 함께 그곳에 가니 관직이 높은 구래공의 시는 벽사(碧紗)로 감싸 놓았는데 위야의 시는 그대로 두어 먼지가 가득하였다. 동행한 기녀가 소매로 먼지를 털어내자 위야는 ‘때때로 붉은 소매 털어 줌이 있다면,[但得時將紅袖拂] 벽사로 감싼 것 그보다도 낫겠네.[也應勝似碧紗籠]’라는 시를 지었다.” 하였다.
[주D-030]온조가 회군 : 앞의 주 204) 참조.
[주D-031]팽오(彭吳) : 팽오는 복성(複姓). 팽오가(彭吳賈)가 협중을 공격하여 조선(朝鮮)을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고 한다.《史記 平準書》
[주D-032]지금도 …… 일 : 청평산은 고려조의 문신 이자현(李資玄)이 은거한 곳으로서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말함을 이름.
[주D-033]소산기 : 중국의 소산현(蕭山縣) 아전들이 농간질을 잘하므로 부정한 짓을 하는 아전들을 가리켜 소산기가 있다고 하였다.
[주D-034]도홍경(陶弘景)을 …… 알겠네 : 양(梁) 나라의 도홍경이 무제(武帝)의 부름을 받자, 소 두 마리를 그리되 한 마리는 풍성한 풀밭에 방목하는 형태로 그리고, 한 마리는 재갈을 물리고 머리를 얽어 사람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그려 무제에게 바쳐 출산(出山)하지 않을 뜻을 보였다. 화우령(畫牛嶺)이기에 인용한 고사.《梁書 卷51》
[주D-035]하목해구(河目海口) : 눈은 하수처럼 길고 입은 바다처럼 깊은 것으로, 공자(孔子)의 눈과 입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주D-036]목계(木溪) : 남한강 상류 충주읍(忠州邑) 서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나루터의 지명.
[주D-037]구당협(瞿唐峽) : 협곡의 이름.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절협(絶峽)으로서 두 언덕이 모두 현절하게 높아 이곳을 강관(江關)으로 삼았는데, 이곳 망단기(望斷碕)를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
[주D-038]봉산(蓬山)과 약수(弱水) : 모두 중국에 있는 산수로 구당협(瞿唐峽)과 연관되어 있다. 이곳 망단기의 주위 산수를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

 

속동문선 제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궁수(窮愁)



김시습(金時習)

곤궁한 시름 솜과 같아서 부딪치면 곧 붙이나니 / 窮愁如絮着旋粘
맑은 시 아니고 고칠 수 없네 / 除却淸吟不可砭
게으른 성질은 이미 나무에 깃드는 새와 같은데 / 嬾性已如樓木鳥
삶을 경영하는 것은 낚싯대에 걸리는 메기와 무엇이 다르랴 / 營生何異上竿鮎
대흠통 파서 찬 우물을 보태고 / 閑刳竹筧添寒井
소나무 가지 꺾어서 짧은 처마를 깁는다 / 爲折松枝補短簷
문을 닫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위로하나니 / 閉戶著書聊自慰
뜰에 가득한 성긴 비는 부실부실 나리네 / 一庭疏雨正廉纖


속동문선 제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담상 유감(潭上有感)



김시습(金時習)

봉우리 위의 푸른 단풍나무는 천만 가지인데 / 峯上靑楓千萬枝
봄을 슬퍼하는 정서는 어지럽기 실과 같도다 / 傷春情緖亂如絲
바위 곁에 핀 꽃 울긋불긋하여도 응당 주인은 없으리니 / 岩花灼灼應無主
나는 나비 쌍쌍으로 가는 것 슬퍼할 만도 하여라 / 胡蝶雙雙亦可悲
어떻게 하면 사람의 일이 수경같을꼬 / 人事那能如水鏡
까마귀 새끼의 수컷 암컷을 그 누가 분별하리 / 烏雛誰復識雄雌
진 나라의 구덩이와 한 나라의 금고가 다 이러하거니 / 奏坑漢錮皆如此
부는 것 어느 것이 참이요 어느 것이 거짓인가 / 孰是眞吹孰竊吹


 

[주D-001]수경(水鏡) : 물은 가만히 있으면 맑아지고 거울도 닦으면 밝아지므로 그같이 맑고 밝을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주D-002]진(秦) 나라의 …… 이러하거니 : 진(秦) 나라에서는 선비들이 소용없이 떠들기만 한다 하여 큰 구덩이를 파고 460여 명의 선비들을 산채로 쓸어 묻었었다. 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속동문선 제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화 기수운 이수(和箕叟韻二首)



김시습(金時習)

쓸쓸한 초가집에 가을 흥취가 길어 / 寥落精廬秋興長
때로는 소리 높이 시를 읊어 늙은이 미친 짓을 하네 / 朗吟時作放翁狂
산성의 소나기는 쇠잔한 더위를 거두고 / 山城驟雨收殘暑
바람 부는 나무에 간간이 우는 매미는 늦서늘함에 울도다 / 風樹疏蟬咽晩凉
상단의 고운 추위 늙은 뼈를 놀라게 하고 / 湘簟嫰寒驚老骨
혜천의 맑고 찬물 마른 창자를 씻나니 / 惠泉甘冽浣枯腸
근년 되어서 비로소 성상의 변함을 깨닫고 / 年來陡覺星霜變
단을 굽는 위백양을 배워 얻었노라 / 學取燒丹魏伯陽
달은 동쪽 숲에 밝아 가을밤은 긴데 / 月白東林秋夜長
소리 높여 외로이 읊조리며 매우 소광해 본다 / 放吟孤嘯大疏狂
가을 바람 만리에 갈대는 늙었고 / 金風萬里蒹葭老
이슬이 찬 온 하늘에는 별이 서늘하여라 / 玉露一天星斗涼
구름과 놀을 이미 친하여 늙고 옹졸함을 간직하고 / 已許雲霞藏老拙
다시 샘물과 돌을 가져다 간과 창자를 씻는다 / 更將泉石洗肝腸
서쪽 난간에서 왔다갔다 하매 정황이 많은데 / 西軒徙倚多情況
한가히 남으로 가는 먼 하늘의 기러기 소리를 듣는다 / 閑聽長空雁向陽


 

[주D-001]상단(湘簞) : 상(湘)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지방을 말하는 것이니, 그곳에 대[竹]가 많이 생산되고 그 대로 고운 자리를 만들어 내는데, 여름에 그것을 깔면 매우 시원하지만 가을이 되면 도리어 차져서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D-002]위백양(魏伯陽) : 한 나라 때 사람이다. 도수(道術)를 좋아하여 장생불사한다는 단약(丹藥)을 연구하였다. 제자 세 사람과 같이 산중에 들어가서 단약을 구워 만들어서 신선이 되었다 한다. 그의 저술에 《참동계(參同契)》라는 것이 유명하다.

 

 속동문선 제4권
 칠언고시(七言古詩)
만흥 사수(謾興四首)



김시습(金時習)

가을 물 건너편에 바라뵈는 저 임 / 美人望望隔秋水
송계가 천품 달라 정을 풀기 어렵네 / 松桂稟異難爲情
내가 가진 동견 좋은 한 필에 / 我有一匹好東絹
내 성명을 적어서 정회를 풀려하네 / 願紓情懷題姓名
가을 달 둥굴둥굴 가을 이슬 엉겼는데 / 秋月團團秋露凝
은하수가 산뜻하고 바람이 설렁설렁 / 明河皎潔風稜稜
베 이불이 선선하여 잠 못 이루노라니 / 布衾疏冷不成夢
이따금 메뚜기가 와서 등을 치는구나 / 時有草蟲來撲燈
산인이 나를 불러 돌아오라는 글 / 山人招我歸來篇
죽순이 숲을 이루고 밤이 주먹만 하다고 / 筍已成林栗如拳
뜰에 찬 풍우에 이끼가 길어나고 / 滿庭風雨養莓苔
가을 이슬에 거문고 줄이 젖어 늘어진다고 / 秋露濕緩梧桐絃
머리 가에 세월이 새마냥 지나가니 / 頭邊歲月一鳥過
인생 백년이 대관절 얼마인고 / 人直百歲能幾何
취생몽사 누구의 허물인고 / 騰騰兀兀是誰過
자승자박 누에 나방과 같은 신세 / 自繩自縛如蠶蛾

속동문선 제6권
 오언율시(五言律詩)
효행(曉行)



김시습(金時習)

새벽 빛은 수풀 언덕을 비추는데 / 曉色照林墩
닭 소리는 강 마을에 시끄럽다 / 鷄聲鬧水村
연기 빛깔은 들 밖에 어리었고 / 煙光凝野外
이슬 빛은 들판에 둘렀다 / 露色遍郊原
호탕하게도 건곤은 너르나니 / 浩蕩乾坤濶
미끄러지는 듯 세월은 내달린다 / 蹉跎歲月奔
사람들 모두 의탁할 데 있거니 / 衆人皆有托
무슨 일로 나 혼자 높이 들려 있나 / 底事獨高鶱


속동문선 제10권
 잡체(雜體)
동봉 육가(東峯六歌)



김시습(金時習)

객이 있다 객이 있다 동봉이라 부른단다 / 有客有客號東峯
엉클은 백발 구지레하기 짝이 없네 / 鬖髿白髮多龍鍾
나이 약관 못 되어서 글과 칼을 배웠는데 / 年未弱冠學書劍
사람됨이 신산한 선비 꼴 짓기 싫어하네 / 爲人恥作酸儒容
하루아침 살림살이 구름인 양 떠버리고 / 一旦家業似雲浮
물결 따라 휩쓸려서 뉘와 서로 따라 볼꼬 / 波波挈挈誰與從
아, 첫째 곡을 노래하니 그 노래 정히 슬프도다 / 烏虖一歌兮歌正悲
하늘은 창창하여 그저 아득하기만 하고녀 / 蒼蒼者天多無知

직률나무 그 가지엔 가시도 많을시구 / 楖搮枝多芒
붙들고 발섭하여 사방을 두루 놀 제 / 扶持跋涉遊四方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부상이라 / 北窮靺羯南扶桑
어느 곳에 시름 창자 묻을 건가 / 底處可以埋愁腸
해는 저물고 내 갈 길 머나머니 / 日暮途長我行遠
어쩌면 붕새 타고 구만리를 날아볼꼬 / 安得扶搖 摶九萬
아, 둘째 곡을 노래하니 그 노래 억양하여서 / 嗚呼二歌兮歌抑揚
북풍이 나를 위해 처량도 하여라 / 北風爲我吹淒涼

외할아버지 내 어릴 적 사랑하여 / 外公外公愛我嬰
돌 지나며 글 읽는 것 기뻐하시었네 / 喜我期月吾伊聲
배우는 것 분명하니 글과 계산 가르쳤소 / 學立亭亭誨書計
일곱 자 시 지어 사연 몹시 아름다워 / 七字綴文辭甚麗
영묘께서 들으시고 붉은 뜰에 부르셨네 / 英廟聞之召丹墀
커다란 붓 한번 둘러 용사가 비등했소 / 巨筆一揮龍蛟飛
아, 셋째 곡을 노래하니 그 노래 더디어라 / 烏虖三歌兮歌正遲
뜻과 소원 못 이루고 신세만 어기었네 / 志願不遂身世違
우리 어머니 맹씨께서 / 有孃有孃孟氏孃
사랑으로 길러내어 집을 세 번 옮겼으리 / 哀哀鞠育三遷坊
나에게 공자를 배우라 하였었소 / 使我早學文宣王
경술을 지니고서 당우 시대 만들라더니 / 冀將經術回虞唐
어찌 선비 이를 그릇되어 / 烏知儒名反相誤
십년 동안 관산 길에 분주하였소 / 十年奔走關山路
아, 넷째 곡을 노래하니 그 노래 오열하여 / 烏虖四歌兮歌鬱悒
어진 까마귀 반포하여 산골에서 우는구나 / 慈烏返哺啼山谷

푸른 공중 쓸어낸 듯 구름 없고 / 碧落無雲天似掃
모진 바람 애절히도 마른 풀에 불어오네 / 勁風浙浙吹枯草
시름 겨워 서 있으며 창공을 바라보니 / 佇立窮愁望蒼昊
이 몸이 쌀낟이라 하늘은 어이 늙었던고 / 我如稊米天何老
또 나는 어이하여 혼자서 괴롭던고 / 我生何爲苦幽獨
뭇 사람과 취미 아예 같지 않아 / 不與衆人同所好
아, 다섯 곡을 노래하니 그 노래 애끊네 / 烏虖五歌歌斷腸
혼아, 돌아오소서 사방에서 / 魂兮歸來無四方

내 활을 갖고 천랑성을 쏘려 하니 / 操余弧欲射天狼
태일이 정히 하늘 중앙에 있다 하네 / 太一正在天中央
긴 칼을 매만지며 큰 여우 치려 하니 / 撫長劍欲擊封狐
흰 호랑이 메를 지고 있어라 / 白虎正負山之隅
슬퍼라, 이 뜻을 펴지 못하고 / 慷慨絶兮不得伸
획연히 길이 휘파람 부니 곁에 사람 없는 듯이 / 劃然長嘯傍無人
아, 여섯째 곡을 노래하니 그 노래 슬프외다 / 嗚呼六歌兮歌以吁
장한 뜻 꺾이고 부질없이 수염만 쓰다듬네 / 壯志濩落兮空撚鬚


속동문선 제3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산재(山齋)



김시습(金時習)

산재 어젯밤에 비가 / 山齋昨夜雨
뚝뚝 빈 섬돌에 떨어지니 / 滴滴落空階
내가 시름에 겨워 잠 못 이루어 / 愁人臥不寐
밤새도록 회포가 많았네 / 達旦終永懷
대장부 굳센 뜻이 / 丈夫倔彊志
한 칼에 창애를 무찌르리니 / 一劒夷蒼崖
어찌 녹녹히 진흙 속에 서리어 / 豈可終泥蟠
한도 있는 인생을 처량하게 보낼 것인가 / 戚戚生有涯
한 번 건져 곤과 고래를 모조리 잡고 / 一摝盡鯤鯨
한 낚시에 육오를 연하여 잡고 / 一釣連六鷔
한 발로 봉래ㆍ영주를 거더차면 / 一足踼蓬瀛
대지가 가을 터럭만큼 모이련마는 / 大地如秋毫
아, 세상일 맘대로 안 되어 / 吁嗟事不諧
세상과 내 신세가 서로 어긋나누나 / 世與身相乖
오경에 닭의 울음소리에 강개롭게 차고 일어나노니 / 五更慷慨蹴雞聲
이 불평한 회포가 언제 풀어질꼬 / 崢嶸懷抱何時平


 

[주D-001]어찌 …… 서리어 : 용에 비유한 말이다.
[주D-002]육오(六鰲) : 《열자(列子)》에, “용백국(龍伯國)의 대인(大人)이 한 낚시로 〈바다에서〉 육오(六鰲)를 낚아서 합해서 지고 돌아왔다.” 하였다.

 명재유고 제20권
 서(書)
박태보 사원에게 보냄 4월 27일



동봉영당(東峰影堂)은 내 생각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를 유자(儒者)라고 주장하자니 명분은 바른데 사적이 뒷받침하기 어렵고, 승려라고 주장하자니 승려들이 그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그 허탄한 말을 빙자할 따름일 것이니 절의(節義)와 풍교(風敎)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참으로 옳지만은 않은 내 견해로 남의 다 된 일을 기필코 막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건물을 절반 이상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조만간 한번 찾아갈 것이니, 한가히 지내는 중에 좋은 감상거리가 하나 더해질 것입니다.
내가 당한 구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찍 장자(長者)에게 말하지 않고서 사적으로 공의(公議)를 등진 일을 논했다고 하여 그것을 죄로 삼고 있습니다. 전날 장문의 편지를 제때에 보내지 않은 일을 염려했던 그대의 견해 또한 명견(明見)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의리를 정밀히 분석한 공부에 대해 부끄럽고 탄복하였습니다. 기왕의 일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앞으로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두렵습니다.


 

[주D-001]동봉영당(東峰影堂) :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기언 제11권 원집 중편
 청사열전(淸士列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은 본디 창해(滄海 강릉) 사람이다. 태어난 지 8개월에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5세에 《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환히 읽어 어른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집현전(集賢殿)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를 보고 ‘뛰어난 인재이다.’ 하면서 이름을 시습, 자를 열경(悅卿)이라고 지어 주었다. 세종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 보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신분상 그럴 수 없어서 승정원을 시켜 불러다 보고 그의 집에 많은 하사품을 내리면서,
“잘 키워라. 크게 쓰일 것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에서는 그를 ‘오세동자(五歲童子)’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문종 때에 와서는 시습이 점차 장성하여, 벌써 널리 통달하고 남달리 유능하여 명예가 더욱 높았다. 노릉(魯陵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시습은 책을 다 불사르고 집을 떠나 절로 도피하여 속세에 발길을 끊었다.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 수춘(壽春 춘천)의 사탄향(史呑鄕), 동해가의 설악산(雪嶽山)ㆍ한계산(寒溪山), 월성(月城)의 금오산(金鰲山)이 모두 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스스로 호를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였는데, 혹은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이라고도 불렀다.
시습은 일찍이 높은 명예를 얻었다. 그런데 세상의 변고[世故 세조의 찬탈을 말함]를 만나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해 속세에 발길을 끊고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숨어 살았고 이상하고 기괴한 짓을 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치세(治世)에 살면서 몸만 조촐히 하며 인륜을 어지럽힘은 수치스런 행위이고, 난세(亂世)를 만나서 대중을 떠나 멀리 나섬은 훌륭한 일이라고 여겨서였던 것이다.
개연히 미련 없이 떠나 이름난 산택(山澤)을 찾아다녔으니, 마아갑(摩阿岬)을 유람하였고, 개성에 가서 국학(國學)을 관람하였고, 살수(薩水)에 가서는 칠옹중(七翁仲) 시를 읊었다. 평양에서 정전(井田)을 관람하고 보현봉(普賢峰)에 오르니 신기한 멧부리[神岳]가 8만 4천이고, 그 밖의 아득한 북녘 땅에는 이상한 풀도 많고 괴이한 짐승도 많았다. 강남(江南)ㆍ해양(海陽)에 이르러서 값지고 이상한 물산(物産)의 풍요함을 보고 ‘백제는 이 때문에 강성했었고 이 때문에 망했구나.’라고 말하였다. 지(志)에,
“이곳 풍속이 강하고 사나우면서 원수 갚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백제의 남은 기풍이 있어서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동으로 발길을 돌려 풍악산(楓嶽山)ㆍ오대산(五臺山)에 올라 동해 끝까지 다 구경한 다음 월송정(越松亭)에 노닐며 울릉(鬱陵) 우산도(于山島)를 바라보았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서 속세로 돌아왔는데, 어떤 이가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듣지 않고 발길 내키는 대로 떠돌면서 세상을 희평하며 유유자적하였다. 그의 편지에 보면,
“13세에 경사(經史)와 백가(百家)를 환히 통하였고, 활달한 기상에 비분강개한 큰 절개가 있었다. 19세에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배웠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다.”
하였다. 이어서 천지 만물의 조화를 서술하여 스스로의 울적한 회포를 풀었다. 또 어떤 이는,
“그는 욕심 없이 속세 밖을 노닐었고, 운명의 변화를 조정하는 술법에 능통하였다.”
한다. 자화상이 있는데, 그 찬에,
“네 모습 지극히 보잘것없고, 네 마음 너무나도 미련하니, 마땅히 너를 구렁텅이 속에 두련다.”
라고 하였다.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중의 차림으로 동해를 비롯 사방을 다니며 노닐었다.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마치니 59세였다. 주검을 불사르지 말라는 유언이 있어서 절 근처에 초빈하였다가 3년 후에 장사 지내려고 파 보았는데, 얼굴이 산 사람 같아 중들이 부처라 하였다. 화장을 한 다음 그곳에 부도(浮圖)를 세웠다. 저서(著書)로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산천 지리를 배경으로 쓴 작품 2백 편이 남아 있고, 이 밖에도 많은 시가 세상에 전해진다.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이 그 글을 읽어 보고,
“불가에 몸을 담고 유교를 행한 이다.”
라고 평하였다.


 

[주D-001]칠옹중(七翁仲) : 칠불사(七佛寺) 앞에 있는 7개의 돌기둥을 말한다. 수(隋) 나라 군사가 살수를 건너려 할 때, 배가 없어서 강가에 늘어서 있었는데, 갑자기 7명의 중이 나타나서 물을 건넜다. 그것을 본 수군들은 물이 얕은 줄만 알고 건너다가 모두 빠져 죽어 강을 메웠다. 그래서 칠불사라 하고 7개의 돌기둥을 세워 놓았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2》
[주D-002]정전(井田) : 9백 묘(畝)의 땅을 ‘정(井)’ 자 모양으로 백 묘씩 9등분하여 바깥의 8백 묘는 사전(私田)으로 여덟 농가에서 나누어 경작하고, 중앙의 1백 묘는 공전(公田)으로 공동 경작하여 나라에 바치도록 만들어진 농지를 말한다. 고대 은(殷) 나라 기자(箕子)가 평양에 와서 도읍을 정하고 정전을 구획하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 《燃藜室記述別集 卷11 政敎典故, 卷19 歷代典故》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 김굉필(金宏弼)은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이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나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될 바탕이 됨직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현손(李賢孫)ㆍ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과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도의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나서는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 蘭加從俗終當變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 자리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 匡君救俗我豈能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가 우졸하다고 조롱하지만 / 從敎後輩嘲迂拙
세도와 권리가 구구한 벼슬길은 탈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 안우(安遇)는 자(字)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그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중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점필재에게 학업을 닦았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비로소 점필재와 틈이 났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와서 회시(會試)에 응하려 하였는데, 사관소(四館所)의 연소한 자들이 오만하여, 나이든 지방 학생들을 때리려 하니,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없이 스스로 훼상시키면서까지 명예와 이익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장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 지조와 절개는 가히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할 만하다고 하겠다.
○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화청(和淸)이니, 나이는 나보다 20여 세나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말년에 세 익우(益友)를 만났다.” 하였는데, 이는 나와 정중(正中)과 극창(克昌)을 지칭한 것이다. 젊어서 무술에 능하여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된 일도 있었다. 사람됨이 청백하여 오능중자(於陵仲子)와 같았고, 산수를 좋아하고 도학과 진리를 좋아하며, 효제충신에 있어서는 그 이상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헐어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고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으며 짧은 베옷에도 소연하였다. 말년에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였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勗)이다.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한 가지이지만 갈린 끝이 다른 것을 알았고, 선(善)과 악(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의 도(道)는 같으나,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은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의 호)이 존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유생을 구하였는데, 성균관에서는 자욱이 제일이라 하여 천거하였고,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은 자욱을 경연에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자욱이 이를 사양하였다. 계묘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때 자욱의 나이가 적었으나 거상하는 데 결함이 없었고, 모상(母喪)에도 전례(典禮)의 수(數)나 죽을 먹는 일등을 일체 《가례》에 따랐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은 사림 중에 으뜸이라고 천거하여 특별히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시켜서 불렀으나 자욱은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았다. 자욱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항상 담담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대단히 영리하였다. 젊을 때 성균관에 유생으로 있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를 골며 졸았으나 누워 자지는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밤 최진국(崔鎭國)의 눈에 띄어서 성균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기를,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 하였다.
○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으며, 음를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꼭 눈물지을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돈후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히지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에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 이분(李坌)은 자가 자야(子野)며,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이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세력과 이욕에 담백하였으며 시를 잘하였다. 그의 심원한 기틀에 대해서 대유(大猷 김굉필)도 탄복하였다.
○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순서를 밟지 않은 공부나 조롱하는 글이나 과거의 재능 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거의 대유와 같았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다.
○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 이며,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그 학문은 공서(公緖 노조동)와 같으나, 시에 대한 재주가 월등하였다.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는데, 병오년에 죽었으니, 나이 22세였다.
○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속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커서 가난하여도 걱정이 없이 도를 즐기기를 담담히 하였다. 또 국량이 웅장하고 깊었으며 외형에 나타나지 않도록 수양을 닦아 총명이 날로 진전하였다. 유림들은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오직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만이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이다. 나이는 나보다 20세 위로,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를 동봉(東峯), 또는 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 했다. 세종 을묘에 태어났는데, 나이 5세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시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아버지를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정권을 잡게 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산(水落山)의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수련하였으나, 유생을 보면 말마다 공맹을 칭송하고 불법에 대하여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물으면 그는 또한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앉아 죽은 일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하기를, “앉아 죽는다는 것은 예(禮)에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을 귀한 것으로 알 뿐이요, 그 외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1481, 성종 12) 연간에는 육식을 하고 머리를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 제사하며 말하기를, “삼가 아뢰옵건대, 순제(舜帝)는 오교(五敎)를 펴는 데 유친(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를 3천으로 나열하되 불효함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그러므로 악독한 짐승에는 범과 늑대보다 더함이 없고, 미물의 충성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능히 제 어버이를 사랑하는 품성을 온전히 가졌으며 또한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삼가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리의 원래 그러한 것이요, 물욕이 이를 덮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미련한 소자도 근본과 지염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되 젊을 때 이단에 빠져 어리석게도 배우지 아니하였음을 슬퍼하여 장차 도(道)를 닦아 뛰어나보려고 하였으나, 윤회설과 같이 황당함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壯年)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뉘우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으며 먼 조상을 추모하는 넓은 의례를 정하고, 가난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소하고 깨끗함에 힘쓰고 제수를 차림에 정성으로서 하였나이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 때에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다고 하오며, 원(元) 나라 덕공(德公)은 백 세가 되어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에 감화했다고 하나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지나감을 근심하니, 놀라웁고 황공함이 끝이 없어, 한탄함이 자못 많사옵니다. 만일 지난 허물을 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된다면 행여 면목을 세워서 구천에서 조종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는 세상이 쇠하여감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남과 더불어 장예원(掌隷院)에서 송사를 한 일도 있었고,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시가를 자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하니, 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하게 여겨 전에 서로 사귀어 놀던 사람들도 다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홀로 시정배의 미치광이 같은 아이나 만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고 늘 어리석은 척하며 늘 웃고 지냈다. 뒤에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이 무상하니, 사람들은 그의 정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ㆍ자용(子容)ㆍ자정(子挺)과 나였다.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의 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
○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요, 호는 조총(篠叢), 또 광진자(狂眞子)라고도 하였다. 남양(南陽) 아전 순치(順致)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겨우 몸만 감싸고 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탐독하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향리를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 잘하는 것을 이유로 그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었더니, 그는 곧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때 점필재 선생은,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한 바를 본 사람이다.” 하였고, 학자들도 다 그를 존경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 학업을 닦고 서울에 올라와 점필재 선생이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못함을 간하여,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학을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학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여경(餘慶)을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항시, “여경은 속이는 자이다.” 하였으니, 여경 역시 그 행동을 감추고 호화스런 가정에서 의식을 하였을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에는 칠원(漆園 장자)과 같고, 시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비길 만하고 재주는 공명(孔明)을 지녔으며 행실은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
○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字)는 여등(如登)이다.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그 친구와 친척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었다.
○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는 덕부(德父)이고, 호는 풍애(風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뛰어나서 외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으로 영남에 내려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을 여막(盧幕)에서 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김물(金勿)은 자가 개중(介重)이다. 강진(康津) 사람으로 감사(監司) 반()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묵중하며 결백함을 좋아했다.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거듭 과거에 급제하였다.
○ 최하임(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으며,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해 여름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인 설의(雪義)를 시켜서 불상을 몰래 숨겨 돌리며 부처가 저절로 다닌다 하고, 곡식과 비단과 베 등을 매일 천여 건씩 거둬들였다. 태학생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요망한 중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 상소문은 다 진국의 손에서 된 것이었다. 병오년 7월에 죽으니, 나이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거두지 못하자, 그 친구들이 부의를 보내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안택기(安宅記)》가 있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착한 것을 좋아했다. 병오년에 셋째로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니,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질이 굳세고 대체를 알며 꾸밈이 없어서 강공직(姜公直 강응정(姜應貞)의 자)을 심히 미워하여 그이는 인정(人情)에 멀다고 하였으나, 늦게서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병오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다.
○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요, 호는 차군당(此軍堂), 또는 죽계(竹溪)라고도 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이를 좋아하며 공직(公直)ㆍ자욱(自勗 정여창의 자)ㆍ백연(伯淵)ㆍ화정(和情 권안(權晏)의 자)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벗들이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고 병오년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그는 젊어서 군요(君饒)의 집을 몰라,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밤을 타고 꽃을 완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거짓말로 군요에게,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이상한 사람이 글을 읊고 있기에 같이 데리고 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으며, 그 시를 보니 맑고 차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고 화식(火食)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아니니, 세상에 선인(仙人)이 있다 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 군요는 황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맞아들이며 서로 달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일부러 청수한 시태로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하고 궁벽한 곳까지 뛰어난 선비가 어떻게 나의 친구와 함께 오셨습니까. 천행이 아니오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중균은 굳이 가려고 하였다. 군요는 꿇고서 옷 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담소로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에 사는 진사 이종준(李宗準)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허락하는 친우가 되었다.
○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에 급제하고 지금은 예조 정랑이다. 신라의 왕족 계통인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이다. 응기의 아우로서 의분심이 강하고 절개를 중히 여겼는데, 아버지 방경이 이를 매우 사랑했다. 정유년 나이 20세에 평안도의 향공(鄕貢) 시험에 세 번 연거푸 장원을 했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가 시장(試場)에서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 총(摠) 종실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 부정(茂豐副正)을 지냈는다. 태종(太宗)의 증손(曾孫)이니, 거문고의 재주는 정중(正中 정은(貞恩)의 자)과 비슷했으나, 그의 넓은 도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진(楊花津) 입구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 배를 저었으며 자호하여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했다.
○ 현손(賢孫 종실)은 자가 세창(世昌)이요, 신요(神饒)의 아들이다. 벼슬은 명양 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는 나보다 13세나 적다. 매양 법도에 따라 몸을 자제하였으며, 독실한 몸가짐은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다음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유가 이것을 저지시켰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 윤신(尹信 종실)은 자가 임지(任之)다. 파주(坡州)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문숙공(文肅公)의 후예다. 몸가짐은 세창(世昌 현손(賢孫)의 자)과 비슷하였으나, 침착하고 원만한 것은 세창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 이적(李勣)은 자가 중율(仲栗)이다. 시에 뛰어났으나 뒤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道)를 맛보고는 시를 전공하지 않았다. 지향하는 바는 높고 원대하여 상투적인 일을 일삼지 않았고 위로 옛사람을 벗하였다. 평상시에도 의관을 갖추었다. 대유와 백연(伯淵)을 사사하였다.
○ 허반(許盤)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았다. 대유는 그의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경복하였다. 음직으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훗날 동방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몸이온데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가 적고 잡된 것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때가 많사오니, 청하건대…….” 하였다.
○ 민구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죽은 첨정 수(粹)의 아들이요,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얼마 아니하여 능하게 되자 또한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의 자)ㆍ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자)ㆍ중율(仲栗 이적(李勣)의 자) 등에 종유하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위인이 단정하고 우아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다. 대단히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와 문에 능하였다. 숙주(叔舟)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 면(沔)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다.
○ 이주(李冑)는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이다. 어질고 문에 능하였다. 용헌선생(容軒先生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 이원구(李元龜)는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요, 참판 박팽년(朴彭年)은 바로 그의 외조부다. 두 집의 현능함이 이원구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佔畢齋)가 그의 시문을 취택하였다. 전주(全州)에 살았는데 청수한 행동이 출중하였다.
○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숙기(叔琦)의 아들로 기개가 있었고 곧은 것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지조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 능숙하였다.
○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어머니를 섬겼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姓名)을 기록할 정도였다 한다.
○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요, 호는 박전(薄田)이다. 사람됨이 어리석어 시와 술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박전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박전은 그런 것도 몰랐다. 음직(蔭職)으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배명 받은 후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승진을 못하고 있으니, 세리(勢利)에 담담함을 알 수 있다.
○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요, 호는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고, 집이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장륙(莊六)이라 호하였는데,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니 지정은 허락하였다.
○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으로 자가 중인(仲仁)이요, 호는 호은(壺隱)이니, 문장의 명성이 있었고 기축년에 생원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였다. 또한 음양ㆍ추보(推步)ㆍ풍수ㆍ의술ㆍ선도ㆍ불도ㆍ승제(乘除 산술)의 법까지 섭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심원(深源 종실)은 자가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黙齋), 혹은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으로 나와 동년생이나, 달과 날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도 통하였다. 사람됨이 충효하고 무술(巫術)이나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관대를 하였으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 때는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서 주계 부정(朱溪副正)으로 진급하였다. 나이 25세에 전후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는데, 혹은 윤허를 받기도 하고 혹은 윤허를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이 무도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난하다가 조부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또 이천(伊川)에서 임금께 글을 올려 병중의 부모를 가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들이 간곡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 종친들만 보는 과거[宗親科]에서 경(經)ㆍ사(史)ㆍ강독에 제1등으로 뽑히어서, 임금께서는 약과 술을 내리셨고 계급은 2품으로 높아졌으나, 군(君)은 봉하지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祖父)에게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으며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3년 동안이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은 반드시 몸소 맛보고 바쳤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마당에 내려와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오는 손님은 반드시 의술가이니, 너의 어머니 병을 그에게 물어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과연 한 소년이 왔는데, 이름은 원(元)이라 하며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서 숙박하기를 청하므로 머무르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어보니, 한 마디 말에 과연 의약자(醫藥者)임을 알게 되어 소년의 말대로 시험해 본 결과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뒤에 부모상에 있어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여서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그 문에 효자의 정표(旌表)를 달았었고 집안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공직의 사람됨은 경서를 잘 외우며 사주ㆍ관상 등으로 인명(人命)을 예언하며, 또한 의술서를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 서적까지도 보았다. 젊어서는 태학에 노닐면서 장안의 준걸한 재사들과 더불어 주문공(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짓기도 하고, 혹 월삭(月朔)에는 《소학》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이는 다 한때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요, 신종호(申從護)는 자가 차소(次韶)요,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요,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無忝)이요,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요, 권주(權柱)는 자가 지경(支卿)이요,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요,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요,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인데 이들은 그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들을 비방하여 혹은 소학계(小學契)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효자계(孝子契)로 지목하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ㆍ사성(四聖)ㆍ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다가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훈도(訓導)가 되었다.
○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인데, 또는 구로지인(鷗鷺至人) 또는 연파조도(煙波釣徒),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도 하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담담하고 상쾌하며 가난한 생활에도 태연자약하여 분수를 달게 여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선불(仙佛)의 도(道)를 배우지 않고 장기와 바둑을 즐겨하고, 시를 잘하는데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그는, “의롭지 못한 재물을 집안에 보태두는 것이라든지, 의롭지 못한 음식으로 오장(五臟)을 보(補)한다는 것은 더욱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흰 옥에 흠이 있는 격으로, 그는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는데 그해 9월에 죽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를 알고 모르고 간에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니,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사람됨이 과거를 중시하였다.
○ 한훈(韓訓)은 자가 사고(師古)요, 아명은 학이(學而)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서울에 살았으며, 시에 조예가 있고 병오년에 진사를 하였다.
○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에게서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으며,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다음에 대유(大猷)에게서 《소학》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에게서 배웠으며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까지 가서 글을 읽었다.
○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으로 자는 성지(性之)이다.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를 좋아하였으며, 공명을 좋아하지 않고 침울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서 배웠는데, 시에 능하였다.
○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우온(于韞)이다.
○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 이장길(李長吉)
○ 최충성(崔忠誠)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 노섭(盧燮)
○ 유방(劉房)
○ 조원기(趙元紀)
○ 조광림(趙廣臨)
○ 정붕(鄭鵬)


 

[주D-001]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임종시에 대부의 대자리를 거두고 딴 자리를 바꾸어 깔고 죽었다.
[주D-002]자로(子路)가 결영(結纓) : 위(衛) 나라의 싸움에서 자로가 창에 맞아 관끈이 끊어졌는데,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 하고, 관끈을 매고 죽었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추강냉화(秋江冷話) 초입(抄入)



남효온(南孝溫) 찬(撰)
○ 병술ㆍ정해년 무렵에 향생(鄕生) 조기종(趙起宗)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선방(樂善坊) 제이리(第二里)에 우거하면서 나와 함께 남학(南學 서울 남쪽에 있던 4학의 하나)의 생도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조기종은 나이가 어려서 겨우 시문(詩文)의 구두를 깨칠 정도였고 시를 지을 줄은 아직 몰랐다. 하루는 꿈에 어떤 빈 집에 들어가니, 뜰 안이 널찍하고 쓸쓸한데 대추꽃이 새로 피어 있어 첫여름 같았으며, 뜰에는 풀이 갓 돋아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봄이었다. 두서너 사람의 서생이 거기에 있었는데, 평소에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조기종에게 시를 지으라고 권하니, 조기종은 즉석에서 한 수 짓기를,
나무에는 대추 꽃이 활짝 피었고 / 樹上棗滿開
빈 집에는 사람 없이 쓸쓸하도다 / 空家寂無人
봄바람은 끊임 없이 불어오고 / 春風吹不盡
만리엔 풀빛이 새롭도다 / 萬里草多新
하였다. 깨어난 뒤에도 그 시를 잘 기억하여 한 자도 남김 없이 같이 공부하는 벗에게 말해주고, 또 벽에 써놓고 깊이 그것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음 달에 조기종은 죽었다.
○ 《호산노반(湖山老伴)》 1부(部) 1백 14편은 나의 벗 고(故) 자정(子挺)이 지은 책이다. 자정은 세상에 드물게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 태어난 지 26년에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백의로 세상을 떠났다. 그 문장이나 몸가짐에 대해서는 내가 지문(誌文 죽은 사람의 성명ㆍ생졸 연월일ㆍ행적ㆍ무덤의 소재 등을 적은 글)에 자세히 적어두었다. 그는 천성이 산야에 묻혀 있기를 좋아하였고, 세상의 번잡하고 화려함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에 옛 사람의 고율가사(古律歌詞) 중에서 한적하고 가장 감상할 만한 것을 뽑아 모아 그 책을 《호산노반(湖山老伴)》이라 불렀다. 이는 생각건대, 끝내 강산(江山)에서 늙기를 꾀하면서 천고의 옛 사람과 벗하려는 뜻이리라. 아, 자정이 평소에 성정(性情)이 근엄하여 비록 백안(白眼)으로 세속을 대하지는 못했으나 사람을 허여함이 적었다. 그러나 나와의 사귐이 가장 깊었으므로 전부터 내가 병들고 기력이 약하니,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주었다. 하루는 나에게 와서 시를 이야기하다가 밤 늦게 돌아갔는데, 날이 밝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어제 이야기를 주고받았더니 내 마음이 매우 평온해졌소. 그런데 중도에서 문득 그대의 평소 병환을 생각하고, 혼자 말하기를, ‘모(某)가 만약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와 함께 나의 회포를 말할까.’ 하고,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돌아갔소.” 하였다. 자정의 이 말이 역력하여 오늘 들은 듯하다. 앓는 자가 살아 있고 튼튼한 이가 죽게 되어 자정의 슬픔이 내게로 옮아와 내가 도리어 자정을 슬퍼할 줄 뜻하였으리오. 자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겨울 10월에, 이 책을 궤 속에서 뒤져내어 펼쳐보며, 슬퍼함을 마지못한다.
○ 고순(高淳)의 자(字)는 희지(熙之)인데, 일찍이 귀머거리 증세가 있었으나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하루는 시를 읊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돌아간 아버지 중추공(中樞公)이 꿈에 나타나 이런 시 한 수를 들려주었다.
백발이 성성하여 옛 모습 줄어들고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쓸쓸히 산턱을 지키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네 시 읊는 소리에 나는 잠 못 들어 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내가 전날 그 시를 서하였는데 대략 이러하다. “천지에 있는 한 기(氣)는 와서 퍼졌다가 흩어져 되돌아가는데 그 실상은 하나이다. 따라서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기가 각기 자손의 몸에 분산해 있으면서, 그것이 자손에게서 움직임이 있으면 신명(神明)의 밝은 것에 감응(感應)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람이 반드시 곧고 오직 맑아서 슬프게 부모를 다시 보는 것과 같이 한 연후에야 부모의 혼령이 하늘에서 오르내려 늘 좌우에 있게 되는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맑은 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
자정(子挺)이 죽은 뒤 3년이 되는 임인년에, 고순(高淳)이 꿈에 자정을 쓸쓸한 들에서 만나보고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고 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자정이 백공(伯恭)은 잘 있는가를 묻기에 고순이 말하기를, “이미 절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있다.” 하였더니, 자정이 별로 기뻐하지 않고 곧 시 한 수를 지어 생에게 기탁하여 두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문장과 부귀가 모두 구름 같은데 / 文章富貴摠如雲
무엇 때문에 애써 글읽기에 힘쓰랴 / 何須勞苦讀書勤
돈이 있으면 술을 사 마실 것이요 / 但當有錢沽酒飮
세상 인사는 말할 필요가 없도다 / 世間人事不須云
하였다. 생이 깨어나서 그것을 나에게 적어주었다.
○ 홍유손(洪裕孫)의 자는 여경(餘慶)이요,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겉으로는 미쳐 실성한 듯하면서 속으로는 석가(釋迦)의 무(無) 자 화두를 잡은 지 10여 년에, 바야흐로 깨달았다. 돌아와서 우리 유서(儒書)를 읽고 크게 기뻐하기를, “이른바 천 리 타향에서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에 《논어(論語)》를 읽는데 그 첫면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만으로서 다른 20편 전부의 주요한 뜻을 모두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처음 앉으면 그 헛기침 소리만 듣고서, 그 사람의 말씨의 아름다움을 지레 짐작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했는데, 성광(醒狂) 백연(伯淵)만이 그것을 믿지 않고, “여경이 무(無) 자를 잡았다는 것은 겉으로 하는 말이다.” 하였다.
○ 자정(子挺)이 이태백(李太白)과 소동파(蘇東坡) 및 고려 이 상국(李相國 규보(奎報))의 시를 신통하지 않게 여겼다. 이종준(李宗準) 중균(仲鈞)이 그 문에 장난삼아 쓰기를, “자정이 태백을 주먹질하고, 자정과 동파는 평소에 알지도 못하고, 자정과 상국은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하였다. 자정이 그것을 읽고 붓을 들어 여동파매평생(與東坡昧平生)이란 여섯 자만을 지워버렸다. 내가 묻기를, “상국(相國)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 그 문장은 본래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청련거사(靑蓮居士 이태백의 호)는 풍아(風雅) 이후의 일인(一人)이었는데 그대가 중균의 ‘주먹질한다.’는 글을 달게 받는 것은, 그러면 청련거사가 동파의 아래란 말인가.” 하니, 자정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 문종(文宗)이 고려의 왕태조를 위하여 숭의전(崇義殿)을 마전군(麻田郡)에 짓고, 사람을 시켜 왕씨의 후손을 구하게 했으나 얻지 못하였다. 왕숭례(王崇禮)라는 사람이 성명(姓名)을 고치고 평민으로 있었는데, 이웃 사람과 밭을 갈다가 두둑 다툼을 하게 되어 그 이웃 사람이 그를 고하였다. 문종이 곧 그에게 벼슬을 주고 품계(品階)를 삼품(三品)에 올려 숭의전사(崇義殿使)를 시켜 왕태조의 제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는 우(虞) 나라가 단주(丹朱)를 손님으로 대접하고, 주(周)에서 미자(微子)를 손님으로 대접한 것과 같은 일이다. 계유년의 감시(監試 조선 시대 생원ㆍ진사를 뽑던 과거)에 숭의전 시를 출제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이르기를
숭의전이 마전에 있는데 / 崇義殿在麻
대대로 그 집을 복호하였도다 / 世世復其家
하였다.
○ 고려의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했더니, 모신(謀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여버리는 것이 낫다.” 하였다. 그러나 명분 없이 죽이기는 어려우므로, 물에 익숙한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갖추게 하고 여러 왕씨를 꾀어 말하기를, “교서가 지금 내렸는데 여러분을 섬안에 두어 서인을 만들라 하신다.” 하니, 여러 왕씨가 매우 기뻐서 다투어 배에 올랐다. 배가 해안을 떠나자, 뱃사람이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그 배에 구멍을 뚫었다. 물이 새어 들어와 배가 반쯤 잠길 때에, 왕씨와 본래부터 잘 아는 중이 해안에서 손을 들어 물에 빠져 들어가는 왕씨를 불렀다. 왕씨가 곧 한 수의 시를 지어 중을 불러 이르기를,
노젓는 한 마디 소리 푸른 물결 밖인데 / 一聲柔櫓滄波外
묻노니 산승이여 너를 어이하리 / 借問山僧柰爾何
하니, 중이 통곡하고 돌아갔다.
○ 세조가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을 명(明) 나라 서울로 보내어 동방에 전해지지 않은 범자(梵字)를 구하게 하였다. 괴애가 명 나라에 들어가 감로사(甘露寺)에 이르니, 그 주지는 중국에서도 이름이 높은 스님인지라. 괴애가 조선의 이름난 선비라는 말을 듣고 미리 의자와 탁자를 마련하고, 붓과 벼루와 아계지(鵝溪紙)를 그 위에 놓아 두었다. 괴애가 문에 들어서니 바람벽에 묵매(墨梅)가 있거늘, 곧 붓을 적시어 기둥 위에 쓰기를,
조계에는 황매 / 曹溪黃梅
감로사에는 묵매로다 / 甘露墨梅
빛깔로 본다면 / 若以色見
반야가 못 되오리 / 不是般若
하였더니, 주지가 뜰 아래 내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대뢰(大牢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바치던 일)로써 대접하고, 술과 고기를 갖출 대로 갖추었다. 내가 젊어서 시를 지을 때에 요점(要點)을 괴애 선생에게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젊은이에게 글짓는 법은 가르칠 만하지만 글씨 쓰는 법은 아주 다르다. 글을 짓는 요령은 먼저 기(氣)를 넓혀야 하고, 글씨를 쓰는 비결은 먼저 마을을 바로잡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처사 권안(權晏)은 선정(禪定)을 닦는 이름난 선비인데, 살고 있는 집이 헐어져 구멍이 수십 군데 뚫려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와도 손질하지 않았다. 그 아들이 장단(長湍)에 내려가 종들을 부려 농사를 지어 곡식을 매우 많이 거두어들였으나, 권처사는 기뻐하지 않고,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부자간의 정의를 상하겠구나.” 하였다.
○ 점필재(佔畢齋) 선생이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홍여경(洪餘慶)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더니, 참으로 헛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 2월 17일 증조모가 꿈에 보이므로 내가 묻기를, “제가 급제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대답이 없기에 다시 물으니, “급제하기는 어렵겠다.” 하더니, 이윽고 다시 내게 말하기를, “내가 금년 5월에는 꼭 급제하겠는데, 글짓기는 여러 선비의 으뜸이 되겠으나, 원수진 자가 들어가 시관이 되면, 뽑되 반드시 하제(下第)에 둘 것이다. 이것이 너의 급제가 어려운 까닭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지 귀신이 위에 있고 곁에서 질정(質正)할 것인데,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어찌 사사로운 생각을 거기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증조모께서 “네 말이 옳다.” 하였다.
○ 대교(待敎) 표연말(表沿沫)의 자는 소유(少遊)인데, 예문관에 봉직하고 있을 때에 한림(翰林)들이 새로 임명된 관원에 대하여 횡포하고, 금육(禁肉 당시 국법으로 먹기를 금한 고기)을 거두어들이고 여악(女樂)을 베풀어 술 마시기를 낙으로 삼고 있었는데, 임금이 알게 되어 표연말도 그 연석에 참석했으므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뒤로는 고을 모임에 금육을 내놓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 자리를 뜨면서 말하기를, “차마 다시 국법을 범할 수 없다.” 하였다. 부모상을 치를 때에도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점필재 선생이 그때 선산부사(善山府使)였는데 장계를 올려 그의 행적을 천거하니, 임금이 그의 벼슬을 한 등급 올려주었다.
○ 경징군(慶徵君)의 휘(諱)는 연(延)이며, 자는 대유(大有)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그의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회가 먹고 싶다고 하므로, 경징군은 얼음을 깨고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자 울며 말하기를, “옛 사람은 얼음을 깨뜨려서 고기를 잡았다는데, 지금 나는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못 잡으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 막혔도다.” 하면서, 두건과 버선을 훌렁 벗고 얼음 구멍에 서서 하룻밤을 새웠더니 검은 잉어가 잡혔다. 아버지가 또 승검초가 먹고 싶다 하였는데, 그가 울자 승검초가 돌연히 생겨 가져다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죽ㆍ채소ㆍ과일 등의 제사 음식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였고,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시기를 50살이 넘도록 조금도 변함 없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또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와 똑 같이 하였다. 세조[光廟]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今上 성종) 9년에 부름에 응하여 사재 주부(司宰主簿)가 되었는데, 내전으로 불려 들어갔더니, 임금이 묻기를, “듣건대, 경이 집에 있을 때에 얼음을 깨뜨려 고기가 뛰어나오게 했다 하는데, 정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겨울이라 고기가 없을 때이므로 아버지는 구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였는데 그물을 치고 매우 조심스럽게 구하여 다행히도 고기를 잡았더니, 아비가 기뻐하며 효성이 신령을 감동시킨 탓이라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듣고 살피지도 않고 또한 효성이 신령에 응감한 탓이라고들 했습니다. 신의 힘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 하므로,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읽었습니다.” 했더니, 임금이 또, “사서이경 중에 어떤 말을 제일의(第一義)로 삼는가.” 하여, 대답하기를, “사서이경 중에 순(舜) 임금의 큰 효도를 칭찬한 대목이 있사온데, 그것이 신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칭찬한 대목이 있사온데, 이것도 신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가상히 여기어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있었는데, 소행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경징군(慶徵君)이 도리(道理)로써 어버이를 섬겼다는 말을 듣고는 지난 날의 허물을 버리고 진실하게 아들의 도리를 지켜, 아침 저녁으로 어버이의 안부를 물어서 살피어 지극한 효도를 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당한 날에도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고,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에 술이나 과일을 먹지 않았다. 3년상이 끝난 뒤에도 3형제가 함께 살면서 즐거움을 극진히 나누고, 서로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다행히 남다른 소행이 있기는 했으나, 이 일을 경 생원이 듣는다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신축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이천(利川)에서 한 강도를 처단했는데, 처형하려 하자 강도가 하늘에 맹세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절도질을 배운 일은 있어도 강도질은 아직 한 일이 없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면 하늘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윽고 목을 베니, 과연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한 동네의 밭이 다 흙탕물로 덮였다.
○ 경자년에 사족(士族)의 딸 어우동(於宇同)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와 간통한 선비가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말이 생원 이승언(李承彦)에게 미쳐 그도 연루자로 곤장을 맞고 할 수 없이 자백을 했다. 이 생원이 형장을 맞는 자리에 꿇어앉아 하늘에 고하기를, “옛 사람은 한 사나이의 원한이 6월에 서릿발을 날린다고 했는데, 옛날 하늘이나 지금의 하늘이나 같은 하늘입니다. 내 죄는 원통하니 하늘에 어찌 변괴가 없으랴.” 하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화악(華嶽)으로부터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고, 우박이 뜰에 가득히 날리며, 우레와 벼락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사람을 놀라게 하니, 형리가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자백했으므로 시비를 가려 밝혀 줄 수가 없었다.
○ 김괴애가 좌화(坐化)했다고 하니, 동봉(東峯) 김열경(金悅卿)이 웃으며 말하기를, “괴애는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귀한 일은 아니다. 증자(曾子)가 죽을 때에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꾸어놓고 죽은 일과, 자로(子路)가 갓끈을 매고 죽었다는 일은 알지만, 그 밖의 것은 나는 모른다.” 하였다. 김열경이 술에 만취하여 길에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호통치기를, “네 이놈, 물러가라.” 했으나, 정 정승이 못 들은 척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재상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에, 우리 나라에서 붙잡혀 간 임산부가 있었는데, 문충공이 돌아오는 길에 비단을 주고 그 여자를 샀다. 배가 돌아오는 날, 큰 바람이 불어 돛대가 부러져 거의 건널 수가 없게 되자, 한 사공이 말하기를, “아이 밴 여인은 신룡(神龍)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니, 사공들이 다투어 그 여인을 잡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는 것을, 문충공은 자기 몸으로써 감싸며 말하기를, “고기 뱃속에 함께 장사지낸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 아니냐.” 하였다. 이윽고 건장한 청년이 돛대를 잡아매어 곧 배가 갈 수 있게 되었다.
○ 권경유(權景裕)의 자(字)는 군요(君饒)이고, 유순정(柳順汀)의 자는 지옹(知翁)인데, 젊어서 재주와 명성이 있었다. 일찍이 산방(山房)에서 학문을 익히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또한 중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다. 권경유와 유순정이, “너는 누구냐.”고 묻고, 또 말하기를, “네 얼굴을 보니 예쁘구나. 네 누이도 있느냐.” 하니, 누이 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누이는 본래 나주(羅州) 기생인데 이름은 옥부향(玉膚香), 아명(兒名)은 덕도(德島)이고, 얼굴과 재예(才藝)가 남주(南州)에서 으뜸갔다. 옥부향이 연전에 서울 교방(敎坊)에 뽑혀 들어가 거기에서도 또한 이름이 났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옥부향에 대한 그리운 정을 누를 길이 없어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먼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옥부향을 차지하기로 하자.”하고, 또 그 소년에게 나주 고향 마을의 꽃ㆍ나무ㆍ시내ㆍ돌 따위에 대하여 캐어물어 마음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
2ㆍ3년 뒤에 두 사람이 함께 급제하여 유순정은 함경도 평사(評事)가 되고, 권경유는 한림(翰林)이 되었다. 한림이 연석의 가기(歌妓) 중에서 옥부향을 발견하고 그에게, “네가 나를 아느냐.” 하니, 옥부향은 모른다고 하였다. 권경유는 곧 속여 말하기를, “네가 나주에 있을 때에 내가 아직 벼슬하지 못한 선비로서 나주에 들렸는데, 통판(通判) 모(某)가 너를 내 잠자리에 시중들게 하여 네 집에서 며칠 동안 묵고 떠나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의 이름은 누구, 네 할머니의 이름은 또 누구, 형의 이름은 아무개, 동생의 이름은 또 아무개, 문 앞에 있는 나무는 어떻고, 꽃은 어떻고, 시내는 어떻고 돌은 또 어떻고…… 이렇게 아직도 모두 잊지 않고 있다. 또 네가 나와 작별할 때에 말하기를, ‘제가 다행히 서울 기생이 되고 낭군도 과거에 급제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일생에 다시 한 몸이 될 때이지요,’ 한 것을 너는 잊었느냐.” 하니, 옥부향은 이상히 여겨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탄식하기를, “한림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습이 그때에 보던 바와는 매우 다르기는 하오나, 꼭 그런 일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하오나 저는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고 장서방, 이서방 사이를 옮아 다니느라고 그대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며, 오래도록 흐느꼈다. 이날 밤 평생의 약속이 이루어졌는데, 선비들 사이에 전하는 말이 모두들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永安)의 도산사(道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남빛 옷을 입은 한 늙은이가 마을로 쌀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서생을 만나 말하기를, “선비는 무슨 책을 애써 읽고 있소. 나는 평생을 걸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오.” 하고는 절구 한 수를 썼는데,
하염없이 사창에 기대 있으니 봄날이 더디고 / 懶倚紗窓春日遲
홍안은 속절없이 늙어 꽃 지는 시절이로다 / 紅顔空老落花時
세상 만사가 모두 이와 같은데 / 世間萬事皆如此
피리 불며 노래 부른들 그 누가 알리 / 叩角謳歌誰得知
하였다. 동국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재주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달할 수 있는데, 어찌 버려지는 인재가 있다는 탄식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아직 듣지 못한 이 늙은이와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전야에 묻혀 있으며, 몇 사람이나 시장에서 썩고 있을까. 한씨 서생은 학문이 있고 논의가 독실한 군자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를 위하여 이를 말한다.
○ 내가 관서(關西) 상원(祥源) 고을에 나그네로 머무르고 있었을 때, 침실 병풍에 삼소도(三笑圖)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 있었는데,
혜원이 잘고 간사하니 / 遠公細而黠
파계를 모를 바 아니로다 / 破戒非不知
잠깐 호계의 흥에 붙여 / 暫寄虎溪興
선비의 어리석음을 속이도다 / 欺謾措大癡
하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또 기뻐했더니, 그곳 군수가 말하기를, “손님이 놀라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관서 2백 일 동안의 여행에서 처음으로 이런 시를 보았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소. 또한 유생(儒生)이 이런 글귀를 보니 백금(百金)을 얻은 것보다도 나은데 어찌 기뻐 날뛰지 않겠소.” 하였다. 곧 그 시를 번안(飜案)하여 한 수 짓기를,
소년이 대년을 모르고 / 小年昧大年
소지가 대지를 모르는구나 / 小知迷大知
시를 쓴자 또한 조대(서생 또는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니 / 題詩亦措大
어찌 도연명과 육수정의 어리석음을 알랴 / 安知陶陸癡
하였다. 이에 군수에게 말하기를, “삼소도의 작자는 반드시 나의 친구일 것이오.” 하고, 서울로 올라와 널리 탐문했더니 그것은 역시 중균(中鈞)의 솜씨였다.
○ 사암(思菴) 유숙(柳淑)의 벽란도(碧瀾渡) 시에 이르기를,
오랜 강호의 기약을 저버리고 / 久負江湖約
홍진에 묻혀 20년이로다 / 紅塵二十年
백구는 반겨서 웃고자 하여 / 白鷗如欲笑
짐짓 누 앞에 다가오는 듯하도다 / 故故近樓前
하였다. 사암은 결국 속세에서의 화[厄]를 면치 못하고, 그 충성과 청렴한 큰 절개가 끝내 대의명분 아래 밝혀지지 못한 채 간사한 도적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남모르게 피살되었으니, 아, 슬프도다.
내 나이 36세에 벽란도를 지나가면서 한 수 짓기를,
얼마 안 되는 벼슬길이요 / 未幾靑雲路
강호에서 40년이로다 / 江湖四十年
사암은 도적의 손에 없어지고 / 思菴終賊手
나는 지금 백구 앞에 서 있도다 / 余在白鷗前
하였는데, 이것은 사암의 시를 번안(飜案)한 것이다.
구중인(丘仲仁)의 호는 호은(壺隱)인데, 신선을 좋아하면서 명리를 탐내다가 고죽(孤竹 황해도 해주의 옛 이름)에서 객사하였다. 내가 잠깐 관서지방에 놀러가 성천(成川)의 비류강(沸流江)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부고를 듣고 곧 시 4수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는데, 첫 수에 이르기를,
호은 선생은 나의 옛 친구 / 壺隱先生我故人
이름 떨친 마흔 한 살 봄에 / 聲名四十一年春
글 재주와 빛나는 인품 사라지고 / 鉛埋永沒胎光斃
묘목만 쓸쓸히 동빈을 가렸도다 / 墓木蕭蕭掩洞賓
하였고, 둘째 수는,
단약을 배우는 데 이미 고삐 잡는 것을 깨달았고 / 治丹已領執御轡
천태에 약 캐러 갈 기약도 아득하여라 / 採藥天台暗有期
과업에 애썼으나 이제 저승에 갔으니 / 科業剝人今鬼錄
아, 임의 큰 뜻 헛되이 웃음거리 되었도다 / 可憐鴻寶世空嗤
하였다. 자못 호사가들의 웃음거리로 전할 것이다.
○ 선조(先祖) 구정(龜亭)은 술을 좋아하고 큰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을 실수하는 일은 전부터 없었다. 손님과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쉬지 않았는데, 손님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살아있는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게 되면 말이 조정 일에 미치지 않기가 어렵다. 종일 바둑을 두고 있으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다.” 하여, 사람들이 그의 몸과 말을 삼가는 데 탄복하였다.
○ 선조 구정이 마음가짐을 크게 삼갔지만, 외형(外形)은 검속하지 않았다. 하루는 나라에서 금하는 옷을 입고 조회에 나가려 하니, 어떤 이가 집에서 간하기를 불러, “대신도 금복(禁服)을 입으십니까.” 하니, 구정은 깜짝 놀라 계집종을 불러, “내가 조회할 때에는 어떤 옷을 입었더냐.” 하므로, 사람들이 그의 아량이 넓어 의복을 가리지 않고 입는 데 탄복하였다. 윤경회(尹慶會)는 장흥(長興)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5ㆍ6년 동안에 두 아들을 낳았다. 내가 그 집에 객(客)으로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경회가 그의 첩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변보러 가려는데 중문에 문짝이 있느냐 없느냐.” 하였다. 그래서 내가 경회의 인품을 구정과 견주어 보았다.
○ 유시탄(兪豕坦)은 면천(沔川) 사람이다. 책을 끼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가 배운 많은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모두가 조정의 허물을 적절하게 맞히었으므로, 선비들이 모여 웃어대었다. 유시탄은 그의 정자를 청풍(淸風)이라 이름하였는데, 그의 친구 박(朴) 아무개가 자기 서재의 이름을 명월(明月)이라 하였다. 그래서 고관들 사이에 우스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유청풍(兪淸風), 박명월(朴明月)을 들추면서 빈정거렸다. 두 사람은 때를 만나지 못해 과거도 못했고, 또 벼슬할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었다.
○ 홍균(洪鈞)은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젊어서 무사로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어 있었다. 경태(景泰)ㆍ천순(天順) 무렵에 미치광이가 되어 거리로 다니며 구걸하였는데,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쌀과 술 한 병을 얻어 자루에 넣어서 차면 돌아오고, 차지 않으면 반드시 거리의 부녀에게서 억지로 뺏아서라도 받아 가지고 오되 한 줌에 지나지 않았다. 한 술집을 정해 두고 매일 한 번은 꼭 갔다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10여 년을 이렇게 지내어 단갈(短褐 굵은 베로 짧게 만든 옷으로 천한 사람이 입는다)이 목덜미를 가리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홍균을 말하였으나, 홍균의 하는 짓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주 다르다. 곧 그는 양생(養生)을 위하여 미치광이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은 글을 읽을 때, 글뜻에 구애되지 않고 대체의 요지를 보고, 중심이 되는 큰 뜻만을 음미할 뿐이었다. 내가 정부원(征夫怨) 10수를 지어 원유산시(元遺山詩)에 화답하였는데, 그 한 편에 이르기를,
풀은 서리에 모두 시들고 달은 하늘에 밝은데 / 百草凋霜月滿空
군마는 해마다 동서를 마구 달리네 / 年年鞍馬任西東
군령도 엄한 들판에 즐비한 막사의 밤이면 / 令嚴萬幕平沙夜
대오가 고각 중에 서로들 손짓하네 / 部伍相招鼓角中
하였더니, 동봉이 보고 실소하면서, “선비, 틀렸소. 군령이 엄한 때에 어떻게 서로 손짓을 할 수 있겠소.” 하고, 《시경》의 소아(小雅) 편을 가지고 나에게 보였는데 그 시에,
이 사람이 가니 / 之子于征
소문은 있으나 소리는 없도다 / 有聞無聲
진실로 군자여 / 允矣君子
진실로 대성하도다 / 展也大成
한 것이었다. 내가 그 말에 깊이 탄복하고, 돌아와 홍여경(洪餘慶)에게 말했더니 홍여경은 감탄하기를, “동봉의 독서가 가장 좋아, 가장 좋아.” 하였다.
○ 경진년 북정(北征 세조 때에 북쪽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때에 문충공 신숙주가 상장(上將)이 되었는데, 하루는 막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 때에 문충공은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여러 사람 가운데 시로써 오늘의 뜻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뽑아서 상객으로 대접할 것이다.” 하였더니, 별시위(別侍衛) 박위겸(朴撝謙)이 곧 읊기를,
10만 정병이 수루를 에워싸고 / 十萬貔貅擁戍樓
달 밝은 변경의 밤에 여우 갖옷이 싸늘하구나 / 夜深邊月冷狐裘
한 마디 긴 피리 소리 어디에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시름을 불어서다하는구나 / 吹盡征夫万里愁
하였다. 문충공은 기뻐하여 그를 뽑아서 상객으로 삼았다. 박위겸은 이로 말미암아 이름난 시인이 되었다.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압구(狎鷗)라 이름하였다. 임금을 세운 공로를 한충헌(韓忠獻)에게 비기고, 공을 세웠으나 벼슬에 욕심이 없어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말을 들으려고, 장차 사퇴하고 강호에서 늙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은 벼슬과 국록(國祿)에 미련이 있어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성종이 압구정에 시를 지어 보내니, 조정의 문사(文士)들이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한 것이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 판사(判事)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다. 그 시에,
임금의 은혜는 은근하며 대접 또한 융숭하니 / 三接殷勤寵渥優
정자는 있어도 놀지 못했도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 서린 기심이 고요하면 / 胸中政使機心靜
벼슬 바다 위에서도 갈매기와 친하리라 / 宦海前頭可狎鷗
하였더니, 한명회가 그것을 싫어하여 현판에 넣어주지 않았다. 뒤에 포의(布衣) 이윤종(李尹宗)이 그 아래로 지나가다가 정자 위에 올라가 쉬면서 장편 대작(長篇大作)을 지었는데, 그 마지막 귀에,
정자는 있었으나 돌아가지 않았으니 / 有亭不歸去
참으로 갓 씌운 원숭이로다 / 人間眞沐猴
하였다. 이윤종의 시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최경지의 함축성 있고 부드러우며, 점잖은 시보다 못하다. 내가, “기심(機心)을 잊고 갈매기와 친한다.” 함을 보고 반신반의하였다. 그런데 갑진년에 행주(幸州)에서 농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고기잡기를 할 때 갈밭 사이 썰물진 곳에서 그물질을 하다가 해를 쳐다보니 훤하게 밝았다. 내 마음속으로, “사람이 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을 용납할 수 있구나. 이 어찌 속일 수 있으랴.”고, 생각하였다. 내 곁에서 물새들이 매우 의좋게 지저귀며 노는 것을 보고 나는 문득 기심(機心)을 잊었다. 갈매기는 날아 가고 내가 기심을 잊은 것을 믿는 까닭은 곧 기심을 위하기 때문인가. 뒤에 이런 생각이 빌미가 되어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훤하게 비치고 / 日日昭昭於頭上
귀신은 좌우에서 굽어 살핀다 / 鬼神監臨於左右
의 14자를 얻어, 최경지의 서재 명[齋銘] 제 3연으로 삼았다.
○ 국오(菊塢 강희맹(姜希孟)의 호) 강경순(姜景醇 강희맹의 자)이 엮은 《진산세고(晉山世稿)》는 참판 김수녕(金壽寧)이 고치고 다듬은 것인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부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宣揚)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효도를 하였다고 하나 나는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사(上舍) 신영희(辛永禧)의 집안에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었으나, 친구들이 묻기를, “자네 집안의 문집이 간행할 만한가.” 하니 신영희는, “조부께서 비록 문명(文名)이 세상에 으뜸가기는 했으나, 집안 문집에 실은 것으로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소. 전일 한 문하생의 만시(挽詩)에,
서른 둘에 세상을 떠나니 / 三十二而卒
불행함이 안회와 같도다 / 不幸同顔回
한 것이 있는데 이 시 이외에 시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간행할 수 있겠소.” 하여, 남들은 그것이 불효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효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가 행한 일을 그대로 말하였으니, 그것이 곧 효도이다. 설사 말을 꾸며 부조(父祖)를 기린들 부조의 넋이 어찌 저승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은 젊을 때부터 재주가 있었다. 그는 만년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올라가 시 3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편에 이르기를,
흔한 산 어디엔들 오두막 못 지으랴 / 有山何處不爲廬
청산과 마주앉아 한 숨 길게 뿜어보네 / 坐對靑山試一噓
벼슬살이 10년에 다 늙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
백발로 귀거래를 짓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
하였다. 영천군(永川君) 정(定)의 자는 안지(安止)인데,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몹시 핍진(逼眞)하니, 서(徐)가 아니면 이(李)의 솜씨일 것이다.”라고 써두었다.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는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기 때문에 정(定)이 탄복한 것이다. 그후 다시 누각 아래를 지나가면서 전번에 써놓은 글을 읽으니, 그 아래에 또 써놓은 글이 있었는데, “이 시는 강산의 아취가 있고, 한 점의 속됨도 없으니, 이것은 반드시 세속에 얽매인 속된 선비가 지은 것이 아닐 것이다. 또 천지가 크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어 꼭 서씨나 이씨를 들추랴. 이 어찌 인재를 하찮게 생각하고 사람을 심히 멸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정(定)이 이 글을 보고 크게 뉘우쳐 앞서 써놓았던 비평문을 지워버렸다. 지금의 《진산세고》에는 3편이 모두 실리지 않았다. 강경순의 문집이 많지 않음이 이와 같다.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백욱(伯勗)인데,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말한, ‘하늘이 음양 오행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하였다.’는 것만 취하고,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가 또한 부여하였다.’는 것은 취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후기(後氣)의 이(理)가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높이 평가했으나 흠이 없을 수 없다. 이른바 이(理)가 기(氣)에 앞서는 것은 이의 체(體)요, 이른바 기가 이에 앞서는 것은 이의 용(用)이다. 만약 사람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모두 모아서 성(性)이라 하고, 인의예지의 끝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성(性)이라 하지 않으면 옳겠는가. 안시숙(安時叔 시숙은 안우(安遇)의 자)이 묵재선생(黙齋先生) 백연(伯淵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자)에게 묻기를, “어떤 이는 백이(伯夷)를 성자(聖者)라 하고 어떤 이는 생각이 좁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습니까.” 하니, 백연은, “임금과 신하가 자리를 바꿀 때에 대의(大義)를 아는 것은 성자요, 하늘이 버리면 임금이 필부(匹夫)가 되는 이치를 모르면 그것은 생각이 좁은 탓이요, 죽음과 삶이 하나임을 의심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알아서 편안히 처하면 인(仁)이다.” 하였다.
○ 안시숙은 또, “기(氣)에 이(理)가 있음이 마치 계란에 노른자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더니, 백연은, “그렇지 않다. 계란의 노른자는 본래 이(理)ㆍ기(氣)를 가지고 있고, 흰자도 이ㆍ기를 가지고 있다.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요, 보이지 않는 것이 이이다. 나누어지는 것은 이ㆍ기가 아니다.” 하였다.
○ 대유(大猷)는 《소학(小學)》의 가르침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옛 성인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후진을 불러 정성껏 쇄소(灑掃)의 예(禮)를 집행하여 육례(六禮)를 닦는 학자들이 그의 앞뒤에 가득하였으나,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비등하였다. 백욱(伯勗)이 권하여 말렸으나 대유는 듣지 않고 남에게 말하기를, “중 육행(陸行)이 불법을 가르치는데, 업(業)을 닦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벗이 그만두라고 말리면서, ‘화를 입을 것이 두렵다.’ 하니, 육행은, ‘먼저 안 사람이 뒤늦게 안 사람을 깨우치고, 먼저 도를 깨달은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릴 뿐이다.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하였다고 하니, 육행은 중이라서 취할 것은 없으나, 그의 말은 지극히 공명하다.” 하였다.
○ 양녕대군(讓寧大君) 제(褆)가 주색에 빠져 세자(世子)의 지위를 잃기는 했으나, 천성이 너그럽고 활달하여 평생토록 자기 몸을 잘 보양하였고, 주색과 사냥 이외에는 한 가지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아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가 불교를 좋아하여, 불사(佛事)를 하고 양녕을 청하였더니, 양녕이 사냥꾼과 활쏘는 사람을 거느리고, 사냥개와 사냥하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몰래 토끼와 여우를 잡게 하고, 자기는 가서 불사에 참례하였다. 조금 뒤에 사냥꾼은 짐승을 바치고, 음식 만드는 사람은 구운 고기를 가져오고, 모시는 사람은 술을 올렸다. 효령이 한창 부처에게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양녕은 고기를 씹고 술을 마시면서 태연자약하니, 효령이 정색하고 청하기를, “형님, 오늘은 술을 그만 두시지요.” 하니, 양녕은 웃으면서, “나는 평생에 하늘이 복을 후하게 주시므로 고생을 아니한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된다.” 하였으니, 부처란 효령을 가리킨 것인데, 선비들의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 천지의 정기(正氣)를 얻은 것이 사람이요, 한 사람의 몸을 맡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며, 사람의 마음이 밖으로 펴나온 것이 말이요, 사람의 말이 가장 알차고 맑은 것이 시(詩)이다. 마음이 바르면 시가 바르고, 마음이 간사하면 시도 간사해진다. 상(商)ㆍ주(周)의 송(頌)과 상간(桑間)의 풍(風)이 그것을 말한다. 태고(太古) 적에 사악(四岳)의 기운이 완전하고, 인물이 성하고 완전하여 나무하면서 노래 부른 것이 〈표매(標梅)〉와 〈격양(擊壤)〉의 노래가 되었고, 규방을 지키며 읊은 것이 〈한광(漢廣)〉과 〈표매〉의 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시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시는 저절로 정교하고 완전했는데, 그뒤부터 인심이 그릇되고 풍기(風氣)가 온전하지 못해서 풍(風)이 변하여 소(騷)가 되었는데, 그것은 원(怨)에 치우치고, 소가 변하여 오언시가 되었는데 그것은 지리하고, 오언시가 변하여 된 율시(律詩)는 구애됨이 많다. 동한(東漢)에서 위(魏)ㆍ진(晉)ㆍ당(唐)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옛날보다 못해졌다.
이태백과 유종원(柳宗元)을 당 나라의 시백(詩伯)으로 치지만, 이태백은 사언시를 생각하고, 유종원은 평회아(平淮雅)를 생각한 것이 오히려 세속을 면하지 못하고 옛날의 아녀자와 비교하여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들이 시에 많은 공을 들였다. 두시(杜詩)의,
만권 서적을 독파하니 / 讀書破萬卷
글을 쓰매 신이 돕는 듯하다 / 下筆如有神
한 것 같은 것은 구양수(歐陽修)도 삼상(三上)에서 그 시상(詩想)을 얻었고, 당 나라 말기의 선비들은 공을 2ㆍ30년이나 쌓아 비로소 풍아(風雅)와 비슷한 것이 간혹 생겼는데,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정백욱은 주정장주(周程張朱)의 견해가 있고 오경에 정통하면서도 홀로 시를 전공하는 선비를 뽑지 않으면서, “시란 정성(情性)에서 피어나는 것이니, 힘써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냐.” 하였다. 그 뜻은, 비록 시는 못 짓더라도 덕을 갖추고 경서에 능통하면 그만이지, 허물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지마는, 도대체 이런 생각은 썩은 선비의 소견과 다를 것이 없다.
옛 12율(律)ㆍ8음(音)ㆍ5성(聲) 같은 것은 마음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고 혈맥을 화창하게 하므로 성현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알지는 못하는 것이므로 공자가 장홍(長弘)에게 배웠으니, 시가 사람에게 절실함이 또 음률(音律)과 같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맑게 하고, 사람을 허심탄회하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고, 사람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게 한다. 천지에 넘치는 삼라만상을 모두 파악하여 표현하면서도 옛 사람의 자연과 일체가 된 경지를 얻기가 힘드니, 그러한 시는, 반드시 힘써 생각하고 공을 쌓는 뒤에라야 그 만분의 일에라도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소자(邵子 소강절(邵康節))나 주자(周子 주염계(周濂溪))가 시를 좋아하였고, 주문공(朱文公)도 만년에 두시(杜詩)와 《후산집(后山集)》 읽기를 좋아하여 초(楚) 나라의 소(騷)를 주해하고, 혹은 중과 서로 형산(衡山)의 시를 5일 동안에 백여 편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읊었다. 백욱은 시를 이단시했는데 그렇다면 주자(周子)ㆍ소자가 이단이란 말인가. 회암(晦庵 주자)이 이단이란 말인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김 선생이 말하기를, “시는 성정을 도야한다.” 했는데 나는 우리 스승의 말씀을 따른다.


 

[주D-001]남효온(南孝溫) : 단종 2년(1454)~성종 23년(1492).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김종직의 제자요, 전에 소릉(昭陵 문종의 비 권씨의 능) 복위를 상소한 일이 있다 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중종이 위에 오르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고, 숙종 때에는 함안(咸安)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을 세워 다른 생육신과 함께 배향되고, 다시 정종(正宗) 때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는 《추강집(秋江集)》ㆍ《추강냉화》ㆍ《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ㆍ《귀신론(鬼神論)》등이 있다.
[주D-002]자정(子挺) : 김시습 등의 친구 안응세(安應世)의 자.
[주D-003]성광(醒狂) 백연(伯淵) :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좌된 태종의 현손(玄孫)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호가 성광(醒狂)이며, 자가 백연(伯淵)이다.
[주D-004]미자(微子) : 은(殷) 나라의 충신으로 이름은 계우(啓紆)이며 왕의 서형(庶兄)이다. 기자(箕子)ㆍ비간(比干)과 함께 은 나라의 삼인(三仁)이라고 일컬어진다.
[주D-005]조계(曹溪)에는 황매 : 중국 불교의 선종(禪宗)의 5조(祖) 홍은대사(弘恩大師)는 황매산(黃梅山)에 있었고, 6조 혜능대사(惠能大師)는 조계산(曹溪山)에 있었다. 또 조계선종에 황매선사가 있었다.
[주D-006]성화(成化)ㆍ홍치(弘治) : 성화는 명 나라 헌종(憲宗) 때의 연호(1465~1487)이고, 홍치는 명 나라 효종(孝宗) 때의 연호(1488~1505)이다.
[주D-007]호계(虎溪) : 중국 진(晉) 나라의 혜원법사(慧遠法師)는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호계(虎溪) 동림사 앞 골짜기를 한 번도 건넌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의 전송을 나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건너 범의 울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깨뜨렸음을 깨닫고, 세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주D-008]소년(小年)이 …… 모르고 : 《장자(莊子)》에, “소년은 대년을 모른다[小年不知大年].”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小年不及大年].”는 구절이 있다. 소년은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사내아이 또는 생명이 짧음을 뜻하고, 대년은 그 반대의 뜻이다.
[주D-009]벽란도(碧瀾渡) : 고려 때 예성강(禮成江) 하류에 있던 중요한 나루터로서, 개성으로부터 황해도의 연안(延安) 해주(海州) 방면으로 통하는 큰 길은 이곳을 경유했다. 원래는 국도 개성의 문호를 이룬 예성강항(禮成江港) 안산(岸山)에 사신을 영송(迎送)하기 위하여 세운 벽란정(碧瀾亭)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위치는 예성강항과 벽란도와는 약간 그 지점을 달리하고 있는 것 같다.
[주D-010]경태(景泰)ㆍ천순(天順) : 경태(景泰)는 명 나라 태종(太宗) 때의 연호로, 세종 32년(1450)~세조 2년(1456)까지이고, 천순(天順)은 명 나라 영종(英宗) 때의 연호로, 세조 3년(1457)~세조 10년(1464)까지이다.
[주D-011]군령(軍令)도 …… 손짓하네 : 두보(杜甫)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모래 벌판에 즐비한 막사에서, 부오가 제각기 보며 손짓하네 / 平沙列萬幕 部伍各見招”
[주D-012]한충헌(韓忠獻) : 송(宋) 나라 정승 한기(韓琦)의 시호가 충헌(忠獻)이다. 한기는 정책(定策 새 임금을 들여 세움)한 공이 있는데, 한명회가 세조와 성종을 들여 세운 공을 한충헌과 비긴다는 것이다.
[주D-013]참으로 …… 원숭이로다 : 목후이관(沐猴而冠)이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인데, 옷차림은 훌륭하나 마음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이다. 옛날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가 진(秦) 나라를 무찌르고 유방(劉邦)을 추방하고 부귀를 마음껏 누리게 된 자기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해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에, 한생(韓生)이 도시 그런 의관을 할 사람됨이 못 된다고 비꼬아 말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4]사악(四岳) : 중국의 태산(泰山)ㆍ화산(華山)ㆍ형산(衡山)ㆍ항산(恒山)의 사악(四嶽)을 말한다.
[주D-015]삼상(三上) : 문장을 구상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되는 세 곳, 곧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 뒷간)을 말한다.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6]주정장주(周程張朱) : 성리학의 원조인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와 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ㆍ도학(道學)ㆍ주정장주(周程張朱)의 학이라고도 부른다.
속동문선 제4권
 칠언고시(七言古詩)
만흥 사수(謾興四首)

김시습(金時習)

가을 물 건너편에 바라뵈는 저 임 / 美人望望隔秋水
송계가 천품 달라 정을 풀기 어렵네 / 松桂稟異難爲情
내가 가진 동견 좋은 한 필에 / 我有一匹好東絹
내 성명을 적어서 정회를 풀려하네 / 願紓情懷題姓名
가을 달 둥굴둥굴 가을 이슬 엉겼는데 / 秋月團團秋露凝
은하수가 산뜻하고 바람이 설렁설렁 / 明河皎潔風稜稜
베 이불이 선선하여 잠 못 이루노라니 / 布衾疏冷不成夢
이따금 메뚜기가 와서 등을 치는구나 / 時有草蟲來撲燈
산인이 나를 불러 돌아오라는 글 / 山人招我歸來篇
죽순이 숲을 이루고 밤이 주먹만 하다고 / 筍已成林栗如拳
뜰에 찬 풍우에 이끼가 길어나고 / 滿庭風雨養莓苔
가을 이슬에 거문고 줄이 젖어 늘어진다고 / 秋露濕緩梧桐絃
머리 가에 세월이 새마냥 지나가니 / 頭邊歲月一鳥過
인생 백년이 대관절 얼마인고 / 人直百歲能幾何
취생몽사 누구의 허물인고 / 騰騰兀兀是誰過
자승자박 누에 나방과 같은 신세 / 自繩自縛如蠶蛾

 

속동문선 제6권
 오언율시(五言律詩)
낙엽(落葉)



김시습(金時習)

떨어지는 잎이라고 쓸 것 아니라오 / 落葉不可掃
맑은 밤에 그 소리 더욱 듣기 좋나니 / 偏宜淸夜聞
바람이 오면 그 소리 우수수하고 / 風來聲摵摵
달이 오르면 그림자 어지럽다 / 月上影紛紛
창을 두드려 손의 꿈을 놀래고 / 敲窻驚客夢
섬돌에 쌓여 이끼 무늬 없앤다 / 疊砌沒苔紋
비를 띠는 그 심정 할 수 없기에 / 帶雨情無奈
빈 산에 그 모습 한껏 여위었구나 / 空山瘦十分

속동문선 제9권
 칠언절구(七言絕句)
제 수락산 성전암(題水落山聖殿庵)



김시습(金時習)

산중에 나무 치는 소리가 정정한데 / 山中伐木響丁丁
곳곳의 그윽한 새는 늦게 갠 날을 희롱한다 / 處處幽禽弄晩晴
바둑을 파하고 개울 늙은이 돌아간 뒤에 / 碁罷溪翁歸去後
푸른 그늘에 책상을 옮겨 놓고 황정을 읽네 / 綠陰移案讀黃庭


속동문선 제9권
 칠언절구(七言絕句)
서 금오신화 후 이수(書金鰲新話後二首)



김시습(金時習)

나직한 집의 푸른 담뇨에 따스한 기운 넉넉한데 / 矮屋靑氈暖有餘
창에 가득한 매화 그림자에 달이 처음 밝았다 / 滿窓梅影月明初
등불을 돋우고 긴 밤에 향을 사르고 앉아 / 挑燈永夜焚香坐
한가히 인간에서 보지 못한 글을 짓는다 / 閑著人閒不見書
옥당의 붓과 글에는 이미 마음 없거니 / 玉堂揮翰已無心
소나무 창 앞에 단정히 앉았는데 밤은 한창 깊었다 / 端坐松窓夜正深
향관과 동병과 오궤는 고요한데 / 香鑵銅甁烏几靜
풍류스런 기이한 이야기를 낱낱이 찾아 본다 / 風流奇話細搜尋


명재유고 제20권
 서(書)
박태보 사원에게 보냄 4월 27일



동봉영당(東峰影堂)은 내 생각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를 유자(儒者)라고 주장하자니 명분은 바른데 사적이 뒷받침하기 어렵고, 승려라고 주장하자니 승려들이 그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그 허탄한 말을 빙자할 따름일 것이니 절의(節義)와 풍교(風敎)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참으로 옳지만은 않은 내 견해로 남의 다 된 일을 기필코 막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건물을 절반 이상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조만간 한번 찾아갈 것이니, 한가히 지내는 중에 좋은 감상거리가 하나 더해질 것입니다.
내가 당한 구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찍 장자(長者)에게 말하지 않고서 사적으로 공의(公議)를 등진 일을 논했다고 하여 그것을 죄로 삼고 있습니다. 전날 장문의 편지를 제때에 보내지 않은 일을 염려했던 그대의 견해 또한 명견(明見)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의리를 정밀히 분석한 공부에 대해 부끄럽고 탄복하였습니다. 기왕의 일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앞으로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두렵습니다.


 

[주D-001]동봉영당(東峰影堂) :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며 지은 시의 후서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은 도성 근교의 우뚝한 산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사방의 여러 산이 옷깃을 여미고 빙 둘러 향하고 있으니, 크고 작은 산들이 모인 형상이 마치 아들 손자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우뚝 솟은 형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갑을(甲乙)을 다투고 유심(幽深)하고 기이(奇異)함으로는 동봉(東峯)이 으뜸이다. 비록 함양(咸陽)을 누르고 있는 저 종남산(終南山)과 태화산(太華山)이나 낙양(洛陽)에 짝하고 있는 숭산(嵩山)과 소실산(少室山)인들 그 장엄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수락산만 못할 것이다.
일찍이 몇몇 사람들과 수락산 정상에 올랐었는데, 초입에서는 구불구불 깊숙이 들어가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거나 무덤 속에 떨어진 듯하고, 정상에 오르자 온 사방이 훤하게 트여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된 듯하였으니, 그야말로 인간사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성곽은 아련하고 집집마다 저녁연기 피어나며 강물은 구불구불 천 리를 달려 바다로 흐르며, 서남쪽으로는 운해가 자욱하고 동북쪽으로는 이내가 아득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경광이 발길을 따라 다른 것으로 말하면, 심목(心目)으로 그 요체를 잡을 수 없고 그림으로 그 절경을 그려 낼 수 없으니, 또 어찌 우내(宇內)의 아름다운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때는 마침 가을 경치가 저물어 강산(江山)이 맑고 쓸쓸한데 벼랑에는 붉은 단풍 시들고 연못에는 누런 국화 떨어지니, 오싹하여 감회를 자아내고 처량하여 감상(感傷)에 젖어든다. 더구나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의 구서(舊棲)에는 등나무가 늙고 수목이 시들며 사람은 가서 자취가 없는데, 서글프게 홀로 와 만 길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천고(千古)에 남긴 자취를 생각하노라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서글픈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밤에 선원(禪院)에서 묵은 다음 아침에 부지(鳧池)에서 물을 마시고 아쉬운 마음에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산천(山川)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하산하여 시 약간 수를 지었다.
정사년(1677, 숙종 3) 9월 그믐에 후서(後序)를 쓰노라.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림암기(石林庵記)



수락산(水落山) 석림암(石林庵)은 승려 석현(錫賢)과 그 문도 치흠(致欽)이 세운 암자로, 이름은 내가 지었다. 수락산은 경성(京城)에서 30리 동쪽에 자리하여 삼각산(三角山), 도봉산(道峯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솟아 있다. 비록 깎아지른 형세는 두 산보다 조금 못하지만 수석(水石)의 경치는 수락산이 으뜸이니, 이 산의 명칭은 이 때문에 얻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름이 도리어 두 산에 가려져 세상에서 이 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또한 이 산에 유람하러 오지 않는다.
수락산 동쪽에는 예전에 매월당(梅月堂)과 흥국사(興國寺), 은선암(隱仙庵) 등 몇 개의 절이 있었다. 매월당은 곧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이 거처하던 곳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미 없어졌다. 열경은 이 산을 매우 좋아하여 ‘동봉(東峯)’이라 자호(自號)하였을 정도이다. 흥국사가 아주 컸으나 지금은 역시 없어지고, 단지 ‘성전(聖殿)’이란 곳만 무너지지 아니하여 승려 두셋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은선암은 후대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온전하여 지금 16, 7명의 승려가 살고 있다. 그러나 산 서쪽에는 유독 하나의 절도 없다. 서북쪽 봉우리 아래에 절터가 남아 있기는 하나 또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며 지금은 절이 없다.
내가 석천(石泉)에 거처를 잡고 보니, 산 서쪽에 해당된다. 바위와 골짝이 그윽하고 시내와 폭포가 기이하여 경성으로부터 3, 4십 리 사이 삼각산과 도봉산 안팎에 있으면서, 세상에 명성을 독차지하여 사람들이 사모하고 구경하는 여러 샘과 골짝도 이곳에는 견줄 수 없으니, 이는 수락산만의 가장 빼어난 경치가 될 뿐만이 아니다. 내가 홀로 이곳의 경치가 몹시 빼어나다고 여겨 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산을 빛내는 이름나고 아름다운 가람이 없다. 그리하여 일찍이 은선암에 이르러 노승(老僧)들과 얘기를 나누며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때 마침 석현이 곁에 있다가 묵묵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이미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듯하다.
오래 뒤에 그 문도 치흠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 선생의 말씀에서 석현 스님도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병이 많아 몸소 할 수 없어서 저로 하여금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단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몇 달 뒤 치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절터를 찾았습니다. 채운봉(彩雲峯) 서남쪽 산속으로, 직소봉(直小峯)과 향로봉(香爐峯)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명년에 재목(材木)을 모아 일을 시작할 터이니, 선생께서는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해 가을 내가 통진 현감(通津縣監)을 사직하고 떠날 때 남은 녹봉으로 그 비용을 조금 보태 주었는데, 한 해 뒤에 돌아오니 암자가 완성되었다. 두세 칸 띳집이 바위를 등지고 골짝을 향해 있어 한적하게 진속(塵俗)을 벗어난 정취를 자아내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하여 즉시 이름하기를 ‘석림암’이라 하였다.
아, 이 산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니, 그 승경이 애당초 옛날이라 해서 더 낫고 지금이라 해서 더 못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이 산을 좋아한 자는 오직 열경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열경이 죽은 지가 또 300년이나 되니 열경을 이어 다시 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암자를 지은 것이 열경과 비교하여 그 뜻이 어떠한가. 석현과 치흠은 혹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또 옛날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 때, 종유(從遊)한 이가 도연명(陶淵明)이었다. 혜원이 결사(結社)할 때 연명이 그 모임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혜원이 계율을 지키느라 객을 만날 적에 술상을 차린 적이 없었으나 유독 연명을 위해서만은 술상을 차렸으며, 전송할 적에 자신도 모르게 함께 호계(虎溪)를 넘었으니, 그 행적이 또한 몹시 기이하다 하겠다. 형해(形骸)의 굴레를 벗어나 서로 교유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러할 수 있었겠는가. 석현의 청담(淸談)과 운치(韻致)는 비록 혜원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진실무위하여 속진에 물들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비루한 나로 말하면 어찌 감히 망녕되이 고인(古人)에 견주겠는가. 다만 석현과 서로 기약하는 것이 또한 연명과 혜원 사이의 교유와 같기를 바랄 뿐이다.


 

[주D-001]혜원법사(惠遠法師)가 …… 넘었으니 : 혜원법사는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虎溪)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ㆍ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추강집 제3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수락산(水落山)으로 청은(淸隱)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30리쯤 갔을 때에 계곡의 근원이 비로소 다하고 길에 드리워진 복숭아 열매가 있었다. 가지를 휘어잡아 열매를 따서 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 2수



온종일 험한 길 걸어 개울 하나 건너니 / 竟日崎嶇渡一溪
저녁 바람이 기이한 새 울음 불어 보내네 / 晩風吹進怪禽啼
산길 다한 바위 모퉁이의 복숭아꽃 나무 / 山窮石角桃花樹
가을 열매 주렁주렁 나그네 향해 드리웠네 / 秋實離離向客低



맹수들 막 지나가 발자국 마르지 않았는데 / 虎豹新過跡未乾
구름 깊은 어느 곳이 도인 사는 집이런가 / 雲深何處道人壇
수목들 하늘에 닿아 길이 없는가 했더니 / 參天樹木疑無路
고요히 보건대 날다람쥐 바위 사이 숨네 / 靜看蒼鼯竄石間


 

[주C-001]청은(淸隱) : 김시습(金時習)의 호 중 하나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다. 일찍이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에 은거한 적이 있다.

 

해동야언 2
성종(成宗)



○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신하들이 밤이 깊어서 크게 취하여 나가면 어전(御前)의 촛불을 주어 원(院)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곧 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이다. 《용재총화》이하 동
○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같은 것인테, 이것음 모두 내(성현)가 기억하는 바요, 그 밖의 인쇄한 제서(諸書)가 또한 많다. 또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다만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의 시문(時文)은 산일(散逸)이 되어서 인쇄를 못하였으므로 한스럽다.
○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장력이 걸출한 선비가 옥서(玉署 홍문관)에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를테면, 매계(梅溪 조위)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이며, 뇌계(㵢溪 유호인) 그리고 나의 선대인(先大人) 김흔(金訢) 같은 이들은 더욱 많은 은총을 입어서 항상 지은 바를 매월 써서 올리게 하였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다 하여 외직(外職)을 청하므로, 특별히 쌀과 콩을 주어 그 부모에게 넉넉하도록 하였다. 뇌계가 외직에 가면서 한 시구를 올리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군신간이 멀어졌고 / 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조용히 감상하며 이르기를, “호인(好人)이 몸은 비록 외방에 있으나, 마음은 군(君)을 잊지 않는구나.” 하고, 또 매계가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제사를 내려 영화롭게 하여 은총이 죽고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해 일어났다. 인재를 고무(鼓舞)하고 사기를 진작함에 있어 진실로 천세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성사라고 하겠다. 영상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의 정자(正字)로서 상사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복을 마치자 다시 벼슬을 주니, 전례대로 은명(恩命)을 사례하였다. 임금이 다시 불러 합문(閤門)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鷹) 하나를 팔에 얹어 가지고 와서 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노모가 있으니, 공사에서 물러나 틈이 있으면 교외에 가서 사냥하며 자미(滋味)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또 밤에 입대(入對)하니, 주과(酒果)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소매 속에 감귤을 열두어 개나 넣고는 인하여 취해서 엎드려 인사를 가리지 못하는지라 중관이 업고 나갔는데, 소매 속에 넣은 감귤이 모두 땅에 떨어진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은 감귤 한 쟁반을 옥당에 보내며 이르기를, “어제 성희안이 귤을 소매에 감춘 것은 그 노친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사한다.” 하였다. 공이 뼈에 새기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더니, 마침내 정국(靖國)의 거사로 보은하였다. 선묘(宣廟)의 선비를 대우하는 데 지성스러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한 식견이 진실로 사람이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이었으나, 공은 위태한 것을 개혁(중종반정)하여, 나라를 안정하게 하고 공훈이 사적에 오르니 역시 지우(知遇)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용천담적기》이하 동
○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지만, 다만 석각(石刻)한 수본(數本)만이 있을 뿐이고, 세상에 전하는 지극한 보배는 귀신이 감추어서 진적(眞跡)은 보기 드무니 아깝도다.
○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임금이 또 가끔 먹 장난에 뜻을 두고 소화(小畫)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으로 별로 모습(模習)조차 아니 하여도 그 오묘함이 옛 법도에 이르렀다. 온갖 정무를 보는 여가에 청연(淸讌)의 자리가 있으면 때때로 한묵(翰墨)과 친하여 간략하게 붓을 휘두르곤 했는데, 한 치 되는 쪽지나 한 자 되는 폭도 세상에 산락(散落)되어 그것을 얻은 사람은 공경하여 애완하여 깊이 싸두는 것이 아름되는 옥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은 글씨를 좀 잘 썼는데, 성묘가 이를 보고 가상히 여기며 그 고을에 글을 내리어 지필을 주게 하여 장려하니 영화가 향려(鄕閭)에 빛나서 경동(驚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무릇 재예 세기(才藝細技)가 어찌 족히 임금의 기림을 움직였으리오 마는 성능(聖能)하다 하여 그것을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장하기를 융성히 함은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文章)ㆍ서화(書畵)ㆍ공기(工技)ㆍ백술(百術)이 그 격려에 힘입어 정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성인의 고무(鼓舞) 전이(轉移)의 계기가 다만 한 번 빈소(嚬笑)하는 순간에 있음을 알았다. 만일 그 성의가 범정(凡情)에서 크게 초월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백방으로 권칙(勸勅)하더라도 엄정한 정과(正課)를 세움에 있어 다만 소란하여 점차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심정을 감동하는 데 이같이 깊음이 있으리오.
○ 성묘(聖廟)는 왕대비(王大妃)를 위하여 날마다 곡연(曲宴)을 베풀고 내수비(內需婢) 5ㆍ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항시 성종에게 눈짓을 마지않는지라 성묘가 그것을 보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는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로부터 곡연도 파하게 되었다. 또 성묘는 굳이 볼 일이 없으면 하루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었으며, 또 날마다 세 번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문안드리곤 하였다. 또 종실(宗室)을 데리고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난 뒤에는 종실과 마주 대하고서 반드시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거기에는 기악(妓樂)이 따랐으니, 이는 진실로 태평성사(太平盛事)였다. 그러나 어떤 의론하는 자는 혹 연산군(燕山君)이 연락(宴樂)을 탐한 것은 눈과 귀에 익숙해져서 그러하였다 하니, 아까운 일이다. 김흔의《전언왕행록》
○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상자 속에 거두어둔 절지 찰한(截紙札翰)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이르기를,
깊숙한 정자에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니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또,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듯 솟았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하였다. 또,
새 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같이 산듯하다 / 新瓜初嚼水精寒
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또,
형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시오 / 問兄何事送羲娥
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또,
친척과 모이기를 기약하고 / 期會親戚
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성묘가 평소 장난삼아 썼다가 버린 것임을 알겠다. 위에 두 절구는 반드시 그림에 쓴 시일 것인데, 누구의 소작인지 알지 못하겠고,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준 편지 초고이다. 성묘는 매양 월산대군을 내전에 데려다가 곡연(曲宴)을 베풀고, 나가면 편지로 수창(酬唱)한 것을 보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그 우애가 지극한 것이었다. 《소문쇄록》
○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經筵)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文苑)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丙子難 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藝文)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宣醞)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皁隸)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館官)을 분번(分番)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上巳 3월 3일)와 중양(重陽) 가절에는 주악(奏樂)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文)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이하 동
○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飯僧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寺社)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公卿)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殯所)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佛席)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七七齋)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포물(布物)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食齋)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지냈는데, 이것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度僧)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州郡)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牒)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物)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 태종이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鑄字)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古註)》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丁亥字)’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改鑄)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庚子字)’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서의 자(字)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대자(大字)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鉛)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訓義)”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文宗)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壬申字)’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乙酉字)’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王荊公)과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을 자본(字本)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辛卯字)’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綱目)》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癸丑字)’라고 한다.
○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면서 그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凶險)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寡人)의 몸에 흉처(凶處)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足跡 자손인 듯)을 삭거(削去)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宗社)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大義)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庶人)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外人)들이 원자(元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威福)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漢)의 여후(呂后)와 당(唐)의 무후(武后)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賜死)하였으니, 종사대계(宗社大計)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唐陽公主)가 죽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前事)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長公主)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地火)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晉)의 혜제(惠帝) 원희(元熙) 연간에 지연(地燃)이 있었고, 조(趙)의 석호(石虎)와 후진(後秦)의 부견(苻堅)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貞觀) 때에 백주(白洲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寧海)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尙州)에서 지화가 있었다.”고 하는지라, 내신(內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石塊)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 갑진년 9월에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恭威公)ㆍ편숙공(褊肅公) 그리고 제극공(齊克公)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과 윤계겸(尹繼謙)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偏急)하다고 하며, 조의(朝儀)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擬進)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恭肅公)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李繼孫)이 시호를 의진(擬進)하였는데, 장경공(長敬公)과 정헌공(玎憲公)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長)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玎)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李繼孫)은 영안도(永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誨人不倦)은 김구(金鉤)와 김말(金末)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善人君子)입니다만, 장(長)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述義不勉)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玎) 자는 불가하나이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敬憲公)이라고 써서 내렸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成慨)가 쓴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規警)을 삼으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帖裏 속옷)와 흑서피(黑黍皮 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金箋紙)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疏軸)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蓍龜)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위징)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楷正)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金友臣)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삼았다.
○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世子) 빈(嬪)을 납궁(納宮)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嬪父)인 좌참찬(左參贊) 신승선(愼承善)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婚日)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忠敏公) 《잡기》
○ 성묘조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군이 부하(負荷 임금의 큰 직무)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임금을 어탑(御榻)에 가까이 가서 용상을 어루만지며 청한 것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죄주기를 청하고, 또 어떤 밀계(密啓)인지 듣고자 하였지만, 임금은 “호색으로 나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하곤 끝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고려 때의 문사는 모두 《시경》과《이소경》으로 학업을 일삼더니, 오직 정포은(鄭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제창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권양촌(權陽村 권근)ㆍ권매헌(權梅軒 권눌) 형제가 능히 경학에 밝고 또 문장에 능하였다. 권양촌은 사서 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綠)》과《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서 유학에 우익(羽翼 보조)한 공이 적지 않다. 그 후임으로 스승된 자는 황현(黃絃)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잘 들을 수 없고, 윤상은 경전이 가장 정결하며, 작문(作文)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경전과 작문이 모두 정밀하였는데, 김말은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항시 의논이 있을 때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마지않으며, 수업(受業)하는 자도 역시 두 가지를 갖추었다. 두 공(김구ㆍ김말)이 모두 세조의 알아주심을 얻어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나이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끝내 그 고향에서 아사(餓死)하였다. 또 그 다음을 들어 말하면, 공기(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기(兪鎭頎)인데, 그들은 익살스럽고 말은 잘하나, 작문하는 데는 편지 같은 작은 문구도 한마디 못 지어서 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도 회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생원 김순명(金順明)이 마침 방에 있다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답장을 썼는데, 그 사어(辭語)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기(頎)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서 배웠는데, 자네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니, 진실로 청(靑)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쪽풀보다 푸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정자영(鄭自英)은 오경만 잘 알 뿐 아니라, 또한 능히 제사(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매우 출중하여 세조의 발탁을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유진기는 고집으로 사리에 불통하였다. 근자에는 노자형(盧自亨)과 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연로하다고 하여 우대하여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는데 모두 고향에 가서 죽었다. 《용재총화》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정자를 한수(漢水) 남쪽에 짓고 그 이름을 압구정(押鷗亭)이라고 하였다. 임금을 옹립한 공을 한 충헌공(韓忠獻公 충헌은 송 나라 명신인 한기(韓琦)의 시호)에게 견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늙었으므로 강호(江湖)로 사퇴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작록에 미련이 남아 있어 가지 못하더니, 임금이 작별의 시를 지어주니, 조중 문사(朝中文士)가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을 하여 수백 편이 되었다. 그중 판사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세 번 불러 보심이 은근하여 두터운 총애를 받았으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라고 하였더니, 한명회가 미워하여 현판 다는 데 끼워넣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어릴 때부터 출중 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나이 12ㆍ3세 때에 여러 아이들과 같이 절에 가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야반에 도적이 와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도적질해 갔다. 이튿날 여러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흩어졌으나, 허종은 홀로 끄떡도 하지 아니하고 베개를높이하고 길게 누워 붓을 들고 벽에 글을 쓰기를, “내 옷은 탈취해 갈지라도, 내 신은 훔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옷도 신도 모두 탈취해 갔으니, 내 생각에는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좋지 않게 여기노라.”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이미 그 바탕이 비범함을 알았다. 《사재척언》
○ 양천군(陽川君) 허종은 생김새가 훤칠하고 풍채가 점잖아서 당시에 대인군자로 추중하였다. 젊어서부터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천문(天文)ㆍ역률(曆律)ㆍ의복(醫卜)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므로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가산(家産)은 돌보지 아니하여 사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볕을 가릴 정도이면서도 항시 공은 담담하게 여겼다. 《청파극담》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신년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給事) 왕창(王敞)이 효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는데, 허 충정공(許忠貞公)이 원영사(遠迎使)로 의주에 마중갔는데, 양사(兩使)는 잘난 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며, 좌우의 집사(執事)가 조금만 실수하면 성내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환관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하고 꾸짖었으니, 이는 지난날 봉사자(奉仕者)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환관된 자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종을 만나니, 공의 큰 키와 단정히 서 있는 자태며 의관이 위연(偉然)함을 보고, 양사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짓하고 말하기를, “당당한 인품이로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더니, 이로부터 엄하고 모난 것이 조금 누그러져서 좌우에서 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매양 공을 보면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면, 밤이 깊어야 파하더니, 하루는 왕 급사(王給事)가 사신으로 촉(蜀)에 간 일이 있다고 말하니, 공이 묻기를, “촉을 가려면 두 길이 있습니다. 곧 육로는 포사(褒斜)에서 들어가고, 수로는 형문(荊門)에서 들어가는데, 공은 어느 길로 들어갔습니까.” 하니, 왕 급사가 답하기를, “강을 타고 들어갔소.” 하는지라, 공이 또 묻기를, “강이 민강(岷江)에서 시작하여 기산(■山)의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물이 극히 험하다가, 이릉(夷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흐른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던가요.” 하였다. 다시 말을 이어, 강이 모모(某某)란 곳에 이르는 강 연안 위아래의 양(襄)ㆍ번(樊)ㆍ형(荊)ㆍ악(鄂) 등지의 수천 리 사이를 산천의 원근과 호구(戶口)의 다과며 고금 영웅들의 뺏고 차지하고 나누어 점령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들어 세니, 양사가 심복하고 공의 손을 잡으며, “만일 가슴속에 만권 서책을 갈무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겠소.”라고 말하였다. 또 공이 중국 전고(典故)를 물으면 비록 궁중에서 금하는 비결이라도 공을 위하여 모두 말하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양사가 돌아가려고 강에 왔을 때에는 섭섭하여 차마 작별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빨리 조회하러 사신 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다. 환조하여 진신(縉紳)들에게 떠들고 찬양하며 말하기를, “천상(天上)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짝할 이가 없다.” 하였다. 그 후에 낭중(郞中) 애복(艾璞)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사람됨이 거만하고 외람되어 경상(卿相) 같은 귀인을 만나도 모두 흘겨보면서 예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국경에 들어와 첫말에 공의 기거(起居)를 묻더니, 공을 본 뒤에는 얼굴빛을 고치고 기색을 화하게 하여 대하고, 영송(迎送)하는 데 자신을 낮추며 대우하는 예법이 심히 정중하였다. 《패관잡기》
○ 이음애(李陰崖 이자)가 상우당(尙友堂 허종) 시집에 발문(跋文)하여 이르기를 “국조의 명신으로 말하면 영릉(英陵 세종) 때는 황희(黃喜)ㆍ허주(許稠)요, 선릉(宣陵 성종) 때는 허공이니, 휘(諱)는 종(琮)이요, 자(字)는 종경(宗卿)이요,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할 때에 불교를 만만(謾謾)히 본다고 역정을 받아 광릉(光陵 세조)이 지나친 위엄으로 눌러서 그 뜻가짐을 시험하고서야 곧 벼슬을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조용하게 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순서를 뛰어 재상에 이르렀고, 계급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체격과 용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화하고도 엄숙하여, 마치 가을 하늘과 겨울 날씨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가까이 나아가 대하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차분히 상고하고 연구하였으니, 대부분 그가 자득한 것은, 한 푼어치씩 쌓고 한 치 길이씩 덧붙여서 이목(耳目)에 칠한 정도의 자와는 비유가 되지 아니했다. 또한 모든 역사에 통달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20일 만에 끝마치니, 그 정근(精勤)하고 준민(俊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처리한 것이 모두 본받아 법으로 삼을만했다.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되어 그 덕이 원수(元首 임금)와 비등하여, 들어와서는 고요(皐陶) 기(夔) 같은 명신(名臣)이 되고, 나아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중신(重臣)이 되었다. 기뻐하고 고무되어 대유(大猷 큰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급작스레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의 시와 문도 그 덕망과 같아서, 깎고 다듬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여서도 혼후(渾厚)하면서 단정하고 정성스러워서 자연히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더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병진정사록》
○ 손 판원(孫判院 손순효)은 삼휴설(三休說)과 사휴설(四休說)을 취합하여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해서 다른 일이 없었으며, 매양 곧은 뜻으로 곧은 행실을 하였으나, 풍속과 강상(綱常)에 관한 일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가다듬었으며, 취하면 호기스런 말이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에 마침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守令)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하늘이 감동하여 반드시 응해 줄 것이다.” 하며,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몸소 나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그 날 밤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고, 관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 절하였다. 우세가 점차 급하여, 한 아전이 우산을 가져다가 받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높으신 어른 앞에서, 어찌 우산이 필요하랴.” 하고, 명하여 가져가게 하니, 의복이 다 젖어 있었다. 또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효자와 열녀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비록 비가 올지라도 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때에 도사(都事) 이집(李緝)이 도롱이를 두르고 밭에 앉아 있는지라 공이 재배를 마치고 도사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이집이 대답하기를, ”나는 영감(令監)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므로, 좌우에서 입을 가리고 웃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또 평양에 갔을 때에는,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말에서 내려 우러러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동쪽 사람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교훈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한번은 천령(穿嶺)에서 사냥에 배행한 일이 있었는데, 맹호를 포위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나무화살을 뽑아 활에 메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쏘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항시 임금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서 지성스럽게 진계(陳啓)하니, 성종이 충직하다고 여겨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공은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이 더욱 검약하여 매양 술상에는 흑두채(黑豆菜)나 고채(苦菜 씀바귀)가 아니면 송아(松芽) 같은 것으로 안주로 삼았고 오로지 번화한 것은 싫어하였다. 《용재총화》
○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이 예전에는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칠휴공(七休公)이 이 도(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순찰하여 영천(永川) 군경을 지나다가, 마상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어 혼혼(昏昏)히 졸면서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가는데 꿈에 빈발(鬢髮)이 하얗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이 희미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포은(圃隱)이라 하며 말하기를, “사는 집이 퇴폐하여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의 뜻이 있는 듯한지라, 칠휴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옛 노인에게 물어서 그 고지(古趾)를 찾아서 군민들을 권면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제물을 갖추어 몸소 전을 드리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고 취하여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承相 남송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과 충의백(忠義伯 포은의 봉호가 충의백임) 두 선생은 간담(肝膽)이 서로 비치도다. 일신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강을 세웠으니, 천만 세를 두고 경앙(景仰)하여 마지않는도다. 이(利)가 있는 곳을 찾아 고금이 분주하건만, 서리와 같이 맑고 눈같이 희며, 송백(松栢)과 같이 창창(蒼蒼)하도다. 여기에 한 칸 집을 얽어서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공의 영혼이 편안할 때, 내 마음도 편안하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충성된 혼과 굳센 넋은 천지간에서 애연(藹然)한 화기로 조화원기(造化元氣)와 같이 흐르나니, 어찌 구구히 사당집의 성하고 헐어진 것으로써 인간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으리오마는, 생각건대 이 늙은이의 흉중이 평화하고 아름다우며 평소에 충서(忠恕)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혹 황홀한 사이에 서로 감통(感通)할 수 었었던 것인가. 《용천담적기》
○ 칠휴가 열읍(列邑)을 안행(按行)하면서 길가에 있는 효자와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전배(展拜)하며 지나는데, 어느 날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길재(吉再) 선생의 고거(故居)에 나아가서 글을 지어 전드리기를, “사당 아래서 우러러 절하니, 생시의 모습이 방불하외다. 오직 오산(烏山)과 낙수(洛水)는 예 같은데, 선생을 생각함이여, 어디 계신지요. 누른 파초 열매와 붉은 여자(荔子 과일 이름)를 전드리니 영령(英靈)이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이 늙은이는 문자를 깎고 다듬는 데에 뜻이 없으면서도 흉중에서 나오는 바가 자연히 이와 같았으니, 그 풍개(風槩)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천담적기》
○ 손물재(孫勿齋 손순효)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가뭄을 만나면 매양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서 비를 비는데, 문득 응하여 비가 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노(怒)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를 너에게 빌었는데, 너는 비를 주지 아니하니, 어찌 된 것이냐.” 하였으니, 신을 노하게 하는 말은 비록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아니나, 만일 자신이 정성스럽지 아니하였으며, 반드시 능히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병진정사록》
○ 무릇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나, 귀화자(歸化者 죽는 자)가 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二相) 손순효(孫舜孝)는 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통이 없이 죽기를 원한다.” 하더니 하루는, 재상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담화하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불편하니 아이들을 불러오고 속히 밥을 지으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책을 끼고 사문(師門)에 다니던 것을 흉내내 보겠다.” 하고는 이에 한 권의 책을 끼고 계단을 두어 차례 오르내리더니, “피곤하다. 내 쉬겠다.” 하고서는, 가만히 베개에 누우니, 집안 식구는 잠들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얼마 후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좋은 소주를 큰 병에 넣어 영석(靈石) 아래 묻어 두라고 전부터 명(命)하여서, 그같이 하였다. 《소문쇄록》
○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는 성묘조 때에 감찰로 있으면서 서장관이 되어 중국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역관들이 과대하게 물화를 가져오므로 역로(馹路)가 떠들썩하였다. 그 물화를 부탁한 것은 권귀의 집안과 많이 관련되었는데, 공은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게 하되 한 필의 직물이라도 부탁한 자는 모두 조옥(詔獄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승진하게 되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대간을 창도하여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임사홍이 그날 밤에 공의 집에 가서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언론을 하였는가.” 하니, 공이 솔직히 대답하기를, “오직 나라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소.”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히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홍문관에 있을 때 말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염(閭閻)집에 함부로 처해 있을 수는 없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음흉하게 세자에게 붙어서 후일의 영화를 바라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하옥을 명하고 많이 힐책하니, 공이 조금도 막히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역대 임금의 폐비에 대한 일을 끌어다 증거로 진술하니, 그 말이 더욱 개절(剴切)한지라, 임금이 이에 노여움을 풀고 그의 관직만 파하였다. 《패관잡기》
○ 판서 정석견(鄭錫堅)은 시원스러워서 작은 예절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홍문관은 본래 구사(丘史)가 없고, 다만 선노(選奴) 하나만 있었다. 그러므로 관원들이 출행할 때에는 타사(他司)에서 구사를 빌리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는데, 정석견은 응교(應校)가 되어서도 홀로 구사를 빌리지 아니하고, 다만 납패(蠟牌)를 든 조졸(皁卒)이 앞에서 인도하여 가운데서 말을 타고, 그 뒤에 종 하나만 따라가는지라, 길에서 보는 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자관원(山字官員 셋만 늘어선 것이 산(山) 자와 같음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였다. 동료가 희롱하기를, “한 번 구사를 빌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의에 어긋나기로 이같이 위엄을 잃느냐.” 하니, 정석견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사를 빌리는 것은 남의 눈앞의 일이요, 호위하는 자의 많고 적은 것은 등 뒤의 일이다.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남의 앞에서 구차한 말을 하는 것은 내 맹세코 하지 않겠다. 차라리 산자관(山字官)이 될지언정, 남에게 구사를 빌리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대소하였다. 《사재척언》
○ 청성군(淸城君) 한치형(韓致亨)이 형조 판서가 되어서 근무가 심히 성실하여 그 밑에 있는 낭관들이 아침저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족질인 한건(韓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틈이 있을 때에 문안차 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는 비록 늦게 출근하여 일찍이 파하여도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데, 존숙(尊叔)은 어찌 노고를 이렇게 많이 하시나이까.” 하니, 한 청성군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함종은 도덕과 문장이 모두 우수하여 비록 송사를 결단함에 게으르더라도 취할 바가 있지만, 나와 너는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직무에 부지런한 것이 좋지 아니하냐. 나의 뜻은 이렇다.” 하니, 한건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충민공잡기》
○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齋)며 은진(恩津)에 살았고, 효행으로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 병환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고 드리더니, 하루는 꿈에 천신이 뜰에 내려와서 강공직에게 말하기를,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니, 반드시 너의 어머니 병을 치료하리라.”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 과연 한 소년이 와서 이름은 원의(元義)이며 윤왕동(輪王洞)에 산다면서 유숙하기를 청하는지라, 공직이 쉬게 하였다. 어머니 병을 물으니, 소년이 과연 의약을 알므로 소년의 말에 따라 시험하였더니,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후일 부모상에 거할 때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고, 겨울에도 맨발에 솜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정문을 짓고 그 집에는 정역(丁役)을 면하게 하였다. 강공직은 사람됨이 경서를 잘 외우며, 인명(人命)에 대해 추점(推占)을 하였고 또 의술을 알았고, 겸하여 《지리서(地理書)》에도 능통하였다. 소시에 태학(太學)에서 놀며 장안의 준사(俊士)와 함께 주문공의 향약(鄕約) 고사에 따라 아침과 밤에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 이를테면 김용석(金用石)자는 연숙(鍊叔)ㆍ신종호(申從濩)자는 차소(次韶)ㆍ박연(朴演)자는 문숙(文叔)ㆍ손효조(孫孝祖)자는 무첨(無忝)ㆍ정경조(鄭敬祖)자는 효곤(孝昆)ㆍ권주(權柱)자는 지경(枝卿)ㆍ정석형(丁碩亨)자는 가회(嘉會)ㆍ강백진(康伯珍)자는 자온(子蘊)ㆍ김윤제(金允濟)자는 자주(子舟) 들인데, 이들은 그 우두머리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를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어 말하되, 소학계 혹은 효자계라고 지칭하며, 부자(夫子)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에 비기며 조롱하였다. 공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남효온 사우명행록》
○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행실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돈독하여, 평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였고 인정(人定)을 친 후에야 취침하며, 닭이 울면 곧 일어났다. 그리고 정실(正室)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에는 《소학》을 놓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혹 국가사를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大議)를 알겠냐.”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문학을 배우면서 여전히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여도 《소학》을 읽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친다.”라고 하였는데,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 글은 성인을 배우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齊 원 나라의 허형)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30세 후에야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이현손(李賢孫) 명양부정(鳴陽副正)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참(朴漢參)ㆍ윤신(尹信)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좋은 인재로서 독실한 행실이 또한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세상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나 세상 사람도 역시 알았다. 필재(畢齋)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건의하는 일이 없으니, 김대유(金大猷)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도가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데 있다지마는 / 道在冬裘夏飮氷
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말을 싫어해서 지은 글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달리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상(父喪)을 만나서는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대유는 《소학》에 의하여 몸가짐을 하며, 옛 성인으로써 준칙을 삼고, 또 후학(後學)을 불러들였는데, 순순(恂恂)히 쇄소(灑掃)하는 예를 지켜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제자가 전후에 가득한지라, 비방하는 여론이 바야흐로 비등하니, 정자욱(鄭自勗 정여창)이 그만둘 것을 권하였으나, 대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 행(陸行)은 선교(禪敎)를 베풀고, 제자 천여 명이 학업을 하는데, 그 벗이 만류하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답하기를, ‘선지 선각(先知先覺)로 하여금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를 깨우쳐 주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남에게 일러줄 뿐이다. 화복이 있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리요.’ 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나, 어찌 취할 말이 없으리오. ” 하였으니, 그 말이 지공(至公)하다고 하겠다. 《추강냉화》
○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淵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송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므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므로,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백공(伯恭 남효온)ㆍ백원(百源 이총)ㆍ정중(正中 이정은)ㆍ문병(文柄 허반)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晉)은 청담(淸淡)이 누(累)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므로,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신영희(辛永禧)《사우언행록》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자욱(自勗)인데,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3년을 나오지 아니하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궁극하고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사물의 본체와 작용이 근원은 같으나 나누어진 것이 다른 것을 알았으며, 선악이 본성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석(儒釋)이 도(道)는 같으나 행적(行迹)의 차가 있음을 알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성(性)을 깨달으니, 성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들까지도 모두 공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에 조서를 내려 경전에 밝고 덕행이 있는 유생을 구하라 하니, 관중에서 정자욱(鄭自勗)이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에게 강경을 하도록 하려고 하니, 자욱이 그만 물러났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부친인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죽었는데, 그때 자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상례 치른 일은 알 수 없으나, 후에 모친의 거상에는 전례(典禮)하는 법도와 죽 먹는 것을 일체 《주자가례》에 의하여 지극히 하였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행이 사림에서 견줄 이가 없다고 천거하여서, 특별히 조정에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는데, 자욱이 상서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포상한지라 이름이 더욱 중하여졌다. 자욱은 사람됨이 성품이 단중(端重)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며, 또 우마육(牛馬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지만, 내심은 분명하였다. 젊어서 학관에 있을 때 남과 같이 잠을 자되, 코를 골면서도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최진국(崔鎭國)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관중에서 정아무개가 참선(參禪)하고 잠을 안 잔다고 떠들어 대었다. 《사우언행록》
○ 정자욱 선생은 소시 때에 술을 즐겨하였는데, 하루는 벗들과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들판에 넘어져서 밤을 새고 돌아오니, 그 모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이같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의뢰하겠는가.” 하니, 선생은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임금이 주는 술이나 음복주 이외엔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정 선생은 젊어서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기슭에 정자를 복축(卜築)하고 만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더니, 성묘(成廟)가 소격서 참봉을 주고 부르자 선생은 간곡히 사임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이에 나오게 되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심히 엄격하여, 종일토록 단좌하고 있으면서 비록 아주 더운 날이라도 그 처자도 살갗을 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만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창포는 바람에 날려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데 / 風蒲獵獵弄泛柔
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알겠다. 화개(花開)고을 이름이다.
○ 포은(圃隱 정몽주) 이후에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대유(金大猷)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동지(同志)인 정 선생 자욱(自勗)도 성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대유는 이(理)에 정밀하고 정자욱은 수(數)에 정밀했는데, 아깝게도 상서로운 때를 만나서 못하여 비명으로 죽었으니, 창창(蒼蒼)한 저 하늘이 그를 어찌 하겠느냐. 중묘조 때에 다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고 한다. 재행(才行)이 탁월(卓越)하나 항시 의식(衣食)이 거칠고, 또 조랑말을 타고 다니므로 아동과 부녀자가 서로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며 웃곤 하였다. 성질이 술을 즐기었는데, 그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서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짓고 10년을 마시지 아니하더니, 풍병이 나자 다시 마시었다가, 병세가 좀 가라앉자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후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같이 생애하며 벼슬도 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폐조(廢朝)에서는 점필재 문도라고 하여 대유를 처형하였고, 또 소릉(昭陵)의 복위 상소를 하였다 하여 백공의 시체를 능지처참하였다. 옛날 범희문(范希文) 공이 말하되, “충신(忠信)한 분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이유일까.”《사우언행록》
○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였는데,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를 스승으로 삼고 물질 이외의 세상에 노닐면서 세속과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에게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한 일이 있었고, 때로는 시사에 울분하면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는데, 시사를 논할 때는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비록 꺼리고 숨기는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는지라, 대유와 자욱이 경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김ㆍ정 두 공은 성리학에 밝고 모든 조행은《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그 하는 바가 실로 남추강과 다르다. 그러나 교분에 있어서는 서로 두터워 진실로 소위 ‘지란동취(芝蘭同臭)’라고 하겠다. 《병진정사록》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과 안응세(安應世) 자정(子挺)과 벗이 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동문과 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니, 그 자친이 권유하므로 때로는 시험에 나갔으나,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겨우 39세로 졸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내가 서울에 불려가 장차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남백공이 나의 시축을 구경하고 나를 한강에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같이 송도에서 놀며 천마산(天磨山)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집이 고양(高陽)에 있었으므로, 당나귀를 몰아서 서로 찾아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 짓는 것으로 밤을 새웠다. 나의 소개로 점필재를 호남에서 보았는데, 전부터 그의 시를 사랑한다면서 고인(古人)에 비교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남은 아들 충서(忠恕)가 미친병이 있어서 또 비명으로 죽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위뿐이어서 문집 초고를 모으지 않았다. 《소문쇄록》
○ 한훤(寒暄 김광필) 선생은 좌랑으로 있을 때에 진사 신영희(辛永禧)씨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그대와 절교를 하겠다. 지금 사기(士氣)를 보면 동한(東漢)의 말과 같아서 어느 때에 무슨 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화가 박두하여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대들은 멀리 고향에 가서 숨어 사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절교하겠노라. 내 말을 잘 들어 주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면서 다짐하는지라, 신공은 이로 인하여 직산(稷山)으로 내려가서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안정(安亭)이라고 호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ㆍ홍유손(洪裕孫)과 같이 죽림(竹林) 우사(羽士 신선)를 맺은 일도 있어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당시 영수였으므로, 남으로 지나는 자는 그 문에 예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경현록》
○ 강국오(姜菊塢) 경순(景醇)은 진산 강씨(晉山姜氏)의 세고(世稿)를 편찬하면서, 김 참판(金參判) 수령(壽寧)과 같이 그 시문을 메우고 고치고 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으며, 부조(父祖)의 시명을 후세에까지 떨쳤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생각한다. 또 상사(上舍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 신영희(辛永禧)의 집에는 그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는데, 그 우인이 말하기를, “자네의 가집(家集)을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영희가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는 비록 글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가집(家集)에 실려 있는 것은 하나도 전할 것이 없고, 다만 한 문생의 만장 시에 말한, ‘32세에 졸하였으니, 불행한 것 안회(顔回)와 같도다.’ 라고 한 구절 외에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가히 간행하겠는가.” 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불효라고 하지만, 나는 효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祖父)의 행예(行藝)를 바른 대로 기술하여야 비로소 효행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공교한 말과 허식하는 붓을 빌려다가 칭예한다면 그 부모의 영혼이 있을진대, 부끄러운 마음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 남효온과 신영희는 모두 상사로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들은 사람됨이 옛 일을 좋아하고 기개가 있으며,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세속의 틀에서 벗어났다. 효온의 견흥시(遣興詩)에,
괴생이 안기(安期 예전 신선)와 벗을 삼으니 / 蒯生友安期
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또,
필부인 양왕손은 / 匹夫楊王孫
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사종(嗣宗 완적(頑籍))은 망위(亡魏)를 위하여 / 嗣宗爲亡魏
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47회나 올린 상소 / 四十七奏疏
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호원이 대송을 몰아내니 / 胡元駈大宋
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라 하였고 신영희의 우의시(愚意詩)에는,
남복은 뜰을 소제하고 / 男僕掃庭除
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말달려 급한 언덕 내리달려 / 走馬下急坂
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또,
꽃까지 꺾어 해진 갓 꽂았으나 / 花枝揷破笠
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하였다. 영희는 기개가 있었으나, 세상에는 뜻을 잃었다. 어느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었다가, 그 상전에게 욕을 보고 화가 나서 세상을 떠났고, 효온도 죽은 뒤에 참화를 만났으니, 어찌 이들의 운명이 이렇게 기박할까. 《소문쇄록》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인(江陵人)이며, 신라의 후예이다.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한다. 세종 을묘생인데, 5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서 부시를 짓게 하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어, 그 부친을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광묘가 섭정하자, 사문(沙門)에 들어가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정사(水落精舍)에 거하면서 수도연형(修道煉形)을 하였다. 유생(儒生)을 보면, 말마다 공맹(孔孟)을 칭하고 입으로 불법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수련(修煉)의 일을 물어도 또한 즐겨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예(禮)에 좌화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죽음에 있어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 연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글을 지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이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제(帝)가 오륜(五倫)을 베풀었사온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먼저가 되고, 3천 가지 죄 중에서 불효가 제일 크다 합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오리까. 그러므로 호랑(虎狼)이 같은 악수(惡獸)며, 수달(豺獺) 같은 미충(微虫)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할 수가 있고, 또 근본을 알며 갚은 정성을 삼가나이다. 이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당연함 이어서 물욕(物慾)에 가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둔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이으려고 젊어서는 이단(異端)에 침체되어 미몽(迷懵)하여 강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장차 수도(修道)로써 발탁될 것이요, 황설(謊說)로 윤회(輪回)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수도하였지만, 말년에 바야흐로 뉘우쳐서 이에 예전(禮典)과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찾아서 추원(追遠)하는 홍의(弘儀)를 고정(攷定)하였고, 청빈한 활계(活計)로 참작(參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간략(簡略)하면서 조촐히 할 것을 힘쓰며, 풍부히 하며 정성스럽게 하나니, 한 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백 세가 되고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화에 감화되었나이다. 상로(霜露)에 젖음을 느끼고 세월이 감을 근심하니 경황(驚惶)함을 마지아니하며, 탄아(嘆訝)마저 진실로 많습니다. 그저 죄를 속(贖)할 수 있어서 천지의 양제(兩際)에서 용납된다면 혹시나 면목을 가지고 구원(九原)에서 조종(祖宗)을 뵈려고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서는 세상이 쇠하려는 것을 보고 시달려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閭閻間)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로 남과 더불어 장례원(掌隷院)에서 다투고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시중을 지나가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네 놈도 그만 쉬어라.” 하고 외치니, 정창손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태롭게 여겼으며 일찍이 교유하던 자들도 모두 절교하며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홀로 시중의 정신병자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고 때로는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거꾸러지는가 하면, 늘 헛웃음을 웃고 하더니, 후일에 설악산(雪岳山) 또는 춘천산(春川山)에 들어가 있으면서 출입이 무상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중(正中 이정은)ㆍ자용(子容 우선언)ㆍ자정(子挺 안응세), 그리고 나남효온이다. 그가 시문을 지은 것이 수만 편인데, 옮겨갈 때에 흩어져서 거의 없어졌고, 간혹 조정의 신하와 유사들이 절취하여 자기 소작으로 만들었다. 《사우명행록》
김시습은 유양양(柳襄陽 유자한)에게 수백 마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을 말하자면, “나는 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 되는 최치운(崔致雲)이 나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3세 때에 능히 글을 엮었는데, 거기에,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러 3월이 저물었는데 / 桃紅柳綠三月暮
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었다. 5세 때에는 《중용》과《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는데, 그때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설(字說)을 지어 달라고 명하여 지어준 일도 있다. 정승 허조(許惆)가 나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노자(老字)를 운(韻)으로 시를 지어라.’ 하므로, 내가 그 소리에 응하여서
늙은 나무가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안 늙었네 / 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하였더니,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고, ‘이는 이른바 신동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세종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대언사(代言司)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시험하라고 명하니, 박이창은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벽화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저 벽화를 두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기로, 내가 응하기를,
작은 정자에 배가 매인 집은 누가 사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같이 작문 작시(作文作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종이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친히 데려다 보고자 하나 사람들이 듣고 해괴히 여길까 두려워한다. 가리고 숨겨 키워서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서 장차 크게 쓰겠노라.’ 하면서, 물건을 주시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13세 때에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논어》ㆍ《맹자》ㆍ《시전》ㆍ《서전》, 그리고 《춘추》를 읽었으며, 또 대사성 윤상(尹祥)에게 가서 《주역》과 《예기》, 그리고 제사(諸史)를 읽었다. 좀 장성하여서는 영달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친척과 이웃에서 넘치게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세상과 내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곤란하게 되는 차에,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고, 세종 초기에 원로(元老)와 대가들이 모두 귀신의 명부(鬼簿)에 오르고, 다시 이교(異敎 불교)가 크게 일어나 사문(斯文 유교)을 능멸하니, 나의 뜻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졌다. 드디어 중과 짝을 하고 산수를 찾아 놀았으니,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이도(異道)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자 하였으므로, 세조가 전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은 더욱 거칠고 방탕해졌다. 이로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여 나보고 어리석다 하고, 혹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우마(牛馬)와 같이 대하나, 나는 모두 그에 응해 준다. 이제 성성(聖上)이 등극(登極)하여 어진이를 등용하고 충간(忠諫)을 잘 들으시므로 벼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10여 년 전후에 육적(六籍 여섯 가지 경서)을 익숙하게 연구하여 점차 정밀하여졌지만, 여러 번 내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둥근 도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 같고, 옛 친구는 모두 죽고 새 사람은 낯이 익지 아니하니, 누가 나의 본뜻을 알아주리오. 그러므로, 다시 산수간에 방탕하였노라. 이것이 모두 사실이니, 공만은 알아주시오. ”하였다. 《패관잡기》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평소의 그 심회(心懷)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다. 그의 시집을 보면, 미궐(薇蕨) 두 자를 잘 사용하였는데, 그 본뜻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내(김정국)가 늙은 중을 만나니 많은 현묘한 이치를 들은지라 그가 배운 스승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젊을 때 사미(沙彌)로 있으면서 오세(五歲 김시습의 별칭)를 모시고 섬기었는데, 오세의 저술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겨우 백에 하나나 둘이 될까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중이 말하기를, “노승이 중흥사(中興寺)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는데, 매양 비온 뒤에 산물이 불으면, 백여 장의 종이를 끊어 가지고는 나에게 필연(筆硯)을 들리고 뒤따르게 하여 물결을 따라 내려가 반드시 급류를 찾아 앉아서는, 절구ㆍ율시 또는 오언 고풍(五言古風)을 침음(沈吟)하여 시를 짓되, 조각 종이에 쓰고 물에 흘려 멀리 보내고 나서는, 또다시 써서 흘려 보내고 하기를 밤새도록 하여 조각 종이가 다 없어져야 집에 돌아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백여 수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본뜻을 엿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재척언》
○ 동봉(東峯)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세상 법규를 털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서는, 그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고쳤다. 남추강(남효혼)과 더불어 세상 밖에 놀면서 미친 듯이 읊조리며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도, 그 계율(戒律)을 지키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시가(市街)에 지나가면서 어느 때는 한 곳만을 눈여겨보고는 돌아가기를 잊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가로(街路)에서 똥오줌을 누어서 여러 사람이 보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며, 또 뭇 아이들이 욕하고 웃으며 다투어 기와 쪽을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기도 하였다. 그가 소유한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남들이 가져가고 도둑질하는 대로 맡겨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는지라 설잠은 관청에 고발하여 면대하여 공술하고, 싸우기를 시끄럽게 하고 시정(市井)에서 싸우듯이 하며, 마침내 승소하고 증서를 받아 품 안에 품고 관문을 나오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웃곤, 급히 증서를 내어 찢어서 개천물에 던졌으니, 그가 사람을 조롱하고 세상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일찍이 법회(法會)를 내전에서 베풀면서, 설잠도 간선되어 그 회에 참여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도망쳐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몰라 사람을 시켜 찾아 보았더니, 가로상에 있는 똥독 속에 빠져 있고, 겨우 얼굴만 보일 정도였다. 한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쟁쟁(錚錚)한 소리를 내면서 낭랑히 길게 읊으면, 그 소리가 창공에 울리어 처량한 여감(餘感)이 있으므로, 달빛 환한 밤을 만날 때마다 깊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을 한 차례 읊게 하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젖게 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취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한 심정을 풀지 못하였다. 여러 비구(叱丘)들은 항시 신사(神師)로 추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리더니, 어느 날은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저희 제자들은 대사(大師)님을 모신 지 오래오나, 아직까지 일교(一敎)를 해 주시기를 꺼리오니, 대사님은 그 청정한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생들이 나아갈 방향을 헤매고 있으니 저희들의 소원은 금비(金篦)로 긁어내시는 것입니다.” 하고,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설잠이, ‘그래라.’ 하고, 크게 법연(法筵)을 열어서 설잠이 몸에 가사와 법의를 갖추고 가부좌를 하니, 중들이 모여들어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벌여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고 한지라, 설잠이 말하기를, “소를 한 마리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앞에 매어 두었다. 설잠이 또다시 꼴 한 뭇을 소 뒤에 두라고 하는지라, 그대로 행하니 설잠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을 듣는다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하니, 소란 축류(畜類) 가운데 가장 우둔한 것이니 사람의 미명(迷冥)하고 무식한 자를 시속에서 소 뒤에 꼴을 둔 것이라고 한다. 중들은 낯빛을 붉히며 물러갔다. 근대의 시승(詩僧)을 말하면 설잠이 그 영수(領袖)인데, 그 시가 법도에 맞고 중후하여 중의 티가 없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서 저서(금오신화)를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 글은 대개 괴이한 것을 기술하여 우의(寓意)한 것인데, 전등신화(傳燈新話) 등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용천담적기》
○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齊)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 한다. 태종의 현손이며 나(김정국)와 동년생으로 달과 날이 나보다 뒤졌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과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갓과 띠를 두르고 손에는 책을 놓기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주계부정(朱溪副正)의 행직을 받았다. 나이 25세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 치도(治道)를 상소하였는데, 어느 때는 윤허(允許)를 얻고 어느 때는 얻지 못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 마음이 있음을 논박한 일로 그의 조부에게 미움받아 장단(長湍)으로 귀양가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었다. 병든 부모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이 간곡하고 지극한지라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는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당하여 제1인으로 발탁되니 풍악과 술 그리고 2품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전에 그의 조부에게 불순히 한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주계정(朱溪正) 심원은 다만 성리학에만 능숙할 뿐 아니라, 또한 시를 잘 지었다. 비온 뒤 저녁 때 바라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 보지락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 一犁春雨杏花殘
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하고, 또 운계사(雲溪寺)에 가서 읊기를,
나무 그늘 얼룩지고 돌은 서려 있는데 / 樹陰濃淡石盤陀
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주계군 심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성묘조 때에 자기 고모부 되는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알고 상소하여 힘껏 사리를 밝히어 마침내 임사홍을 멀리 귀양보내었다. 연산조 말년 임사홍이 세도를 부릴 적에 드러내어 죽였는데, 중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기어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니, 대개 심원의 의향은, “내가 종친으로서 마땅히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것이요, 어찌 한 사가(私家)의 고모부를 두둔하겠는가.” 한 것이었다. 상소를 읽으면 늠름한 생기가 떠오른다. 《패관잡기》
○ 정은(貞恩)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풍곡(風谷) 또는 설창(雪牕)이라고 한다. 수천부정(秀泉副正)을 제수되었는데,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강개히 슬픈 곡조를 타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됨이 독후(篤厚)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으며 총명하였다. 학문을 할 때에는 먼저 이(理)를 밝히고 난 후에 문(文)을 하므로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으며,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격(楁)에 맞추고 난 후에 문사를 꾸미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아니한다. 또 덕(德)을 닦을 때에는 먼저 내심을 가다듬고, 후에 외형을 바르게 하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것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아니하여 가장 가난한 선비 같았다. 《사우명행록》
○ 종실인 수천부정 정은은 날마다 시주(詩酒)와 금파(琴琶)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시문과 음률이 백원(百源 이창)과 이름이 같았다. 김대유(金大猷)의 책망을 듣고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俗態)를 꾸미고 두문불출하고 과감히 친구와 왕래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金紐)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格)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그가 지은 입춘첩시(立春帖詩)에 이르기를,
가늘게 홍전을 오려 소춘에 걸었다 / 細剪紅箋架小春
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고 하였으니, 그의 시 짓는 솜씨가 대개 이와 같았다. 《사우언행록》
○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박연(朴堧) 후에 사족(士族)으로는 칭할 만한 자가 없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임흥(任興) 가 처음 드러나고 이어 정중(正中 이정은)과 백원(百源 이창), 그리고 국문(國聞) 정자지이 한때에 같이 일어나서 구습(舊習)을 일소하였고, 향방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말한 4명이 으뜸이었다. 나(남효온)는 음률을 알지 못하나, 날마다 사자(四子)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광대들의 논평을 들으면 대개 다음과 같으니, “유추(有秋)는 마음씨는 평화하면서 그 가락이 저하하고, 국문은 가락은 절묘한데 마음씨가 혹(酷)한 편이다. 또 백원은 웅혼(雄渾)하기는 하나 솜씨가 좀 잡되고, 정중은 곡조는 고상하나 기(氣)가 편벽된다.” 하였다. 내가 정중과 같이 송도(松都)에서 놀 때에 그가 거문고를 타면,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날에 말에 오르기를 머뭇거리니 행인들도 서서 보았다. 백아(伯牙)가 죽은지 천 년 후인 오늘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기(氣)가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백원과 유추는 언제나 악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연습하나, 정중은 집 안에 풍물(風物)이 없어 여기저기 가는 곳에서 우연히 다른 악기를 가지고도 그의 음률은 순수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 수예(手藝)가 매우 고상함에 감복한다. 그러나 음률을 아는 자는 간혹 조롱하여 말하기를, “정중의 거문고는 백아(伯牙)와 같으나, 때로는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제세경략(濟世經略)의 재주가 쌓여서 적은 기술에 돌아갔으므로 나오는 것이 편벽된 것이 아니랴.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아 뜻을 펴지 못함이여. 《추강냉화》
○ 현손(賢孫)의 자는 세창(世昌)이요, 신요(神堯 태조 이성계)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까지 이르렀다. 예에 맞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독실히 하였으므로, 김대유(金大猷) 다음으로 꼽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다. 그 모친의 상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사우언행록》
○ 종실(宗室) 명양부정은 성품이 조촐하여 속세에서 벗어났고,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의 견의시(遣意詩)에 이르기를,
병은 품은 채 세상 일을 멀리하고 / 懷疴謝塵事
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였다. 가을 시에는,
하얀 이슬이 내린 뒤라 숲이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또,
빈 소반에는 마치채(馬齒菜)가 남아 있고 / 空盤推馬齒
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하였다. 항시 수척한 병이 있더니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보면, 가히 수하지 못할 징조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광음은 번개같이 잠깐인데 / 光陰如電瞥
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하였다. 《소문쇄록》
○ 안응세(安應世)의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ㆍ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 또는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 한다. 사람됨이 청담쇄락(淸淡洒落)하고 안빈희분(安貧喜分)하여, 공명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선불(仙佛)을 배우지 아니하며, 박혁(博奕)을 즐기지 않았다. 또 시에 능하며 특히 악부(樂府)를 잘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집을 돕는 데 그칠 뿐이요, 불의의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 그칠 뿐이니, 더욱 참견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주색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9월에 죽으니, 나이 26세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통탄해 마지아니않았다. 《사우언행록》이하 동
○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으뜸이었으며, 그의 부친상에는 일체를 《주자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점필재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얼마 뒤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그때부터 점필재와 뜻이 달라졌다. 일찍이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회시(會試)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사관(四館 사학(四學))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 많은 시골 선비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니, 시숙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죄 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며 들어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절조가 가히 동한(東漢)에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 유종선(柳從善)은 진주인(晉州人)이며, 자는 여등(如登)인데,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친구나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 보기 드물었다.
○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보(德父)요, 호는 풍애(楓崖)이며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신축년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그 여막에서 뵈니, 선생은 기뻐하여, “자를 자용(子容)이라 하라.” 하였다.
○ 최하림(崔河臨)의 자는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여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이해 여름에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제자 설의(雪儀)로 하여금 가만히 불상을 돌려 놓게 하고서, 세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스스로 걷는다.’고 하니, 곡식과 비단ㆍ베를 가지고 오는 자가 날로 천의 숫자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여 다섯 차례나 요승을 죽이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소문은 대개 최진국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병오년 7월에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장(斂葬)할 수 없었으므로 벗들이 치전(致奠)하여 장사지냈다. 그가 지은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 고순(高淳)의 자는 희지(熙之)요, 또 진진(眞眞) 또는 태진(太眞)이라고 하며 제주인(濟州人)이다. 귓병이 있어 땅에 글자를 써서 서로 뜻을 통했다. 무술년에 조서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 상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망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알리자, 고희지(高熙之)는 듣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스스로 호를 망희지(妄熙之)라 하였다. 여러 선비들 사이 중에서 신덕우(辛德優)와 초면 인사를 하였는데, 선비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고희지가 종이에 한 절구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소각에 봄바람이 고요하니 / 小閣春風靜
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하고, 이후부터 지심(知心)의 벗이 되었다.
○ 고희지(高熙之)는 일찍이 귓병이 있었으나, 성품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시를 읊고 취침하였는데, 그의 돌아간 아버지 중추(中樞)-고수종(高守宗)-가 꿈에 나타나, 시를 주며 말하기를,
화발은 창창하여 예보다 줄었는데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남효온)가 그 시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대략에, “천지간의 한 기운은 이르면 펴지고 흩어지면 돌아가나니, 기실은 하나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기(氣)가 여러 자손들의 신상에 흩어져 있다가, 자손이 동하면 그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은 곧고 초연하여 마치 다시 부모의 척강(陟降)하는 거동을 항시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이 함을 보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오직 맑은 자라[淸者]고 할 것이다.” 하였다. 《추강냉화》이하 동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캐의 춤을 본받아서 머리를 내두르고 눈을 까며, 어깨를 솟구고 팔을 구부리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부리고 활을 쏘는 형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개가 네 발을 헤매고 다니는 모양을 하기도 한다. 또 곰처럼 구부리고 새처럼 펴기도 하며, 혹은 물러가서 바람 소리를 낸다.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인(士庶人)이며 창기나 배우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이해하고 몸이 성한 자는 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 이름을 호무(胡舞)라고 하는데, 여기에 관현(管絃)을 같이 하면서 즐겼다. 의정부 우찬성인 어유소(魚有沼)는 더욱 잘하여서, 나도 또한 풍류로 해본 일이 있는데, 망우(亡友) 안자정(安子挺)이 그 잘못을 극언하여 비난하기를, “미인(媚人)의 행동과 유만(柔嫚)의 태도는 사람으로 할 바 아니거늘,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와도 같은데 어찌 내 몸으로 금수 같은 일을 하겠는가.” 하므로, 나는 듣고 퍽 그렇지 않게 여겼는데, 그 후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의 효단장경 목후사(效檀長卿沐猴辭)를 읽고 난 연후에야 안자정의 말이 정론(正論)임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현(前賢)이나 후현의 법규가 서로 같음을 알았다.
○ 경징(慶徵) 군의 휘는 연(延)이요, 자는 대유(大有)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겨울에 그의 부친이 병이 나서 어회(魚膾)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얼음을 뚫고 그물을 쳐도 고기를 얻지 못하자, 군이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니, 성감(誠感)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고, 버선을 벗고 얼음 구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에 검은 잉어를 얻어서 공양했다. 또 시금치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밭에 있는 채근(菜根)을 보고 울부짖으니, 문득 시금치가 나와 그 부친을 봉양하였고, 이어 부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부친이 죽자, 3년을 시묘 살면서 죽ㆍ채소ㆍ과일 먹는 것까지 《가례》에 의하였으며, 그의 모친을 섬기기를,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였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친이 죽자 그 부친의 초상 때와 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가, 주상(성종) 9년,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불려서 내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묻기를, “경은 집에 있을 때 얼음을 깨니 고기가 뛰었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군이 답하기를, “겨울은 고기가 없는 때라 부친은 잡지 못하리라 하였사온데, 그물을 치고서 애써 구하다가, 다행히 잡았습니다. 부친은 기뻐서 너의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하며, 고을 사람들은 깊은 연유도 살피지 아니하고,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신은 실로 그와는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묻기를, “경은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와 《이경》을 읽었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사서와 이경 중에서 어느 말이 제일 옳던가.” 하니, “사서 이경 중 《서전》에 순(舜)의 대효를 말하였사온데, 이는 신이 하고자 하는 바이오나 능하지 못하옵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말하였사온데, 신이 하고자 하오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살면서 소행이 어질지 못하더니, 경징(慶徵) 군이 그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감화하여, 그 나쁜 버릇을 버리고서 온화하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행하며, 또 혼정신성하였다. 부모의 초상 때에는 한 모금 물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또 3년을 시묘살이 하면서 술과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3형제가 같이 살면서 우애하는 환심이 극진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가 좋지 않는 행실을 하여서, 경 생원(경징군)이 그를 들으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였다.
○ 생원 유원(兪垣)은 면천인(沔川人)이다. 무신년간에 책을 끼고 궐문에 나가 배운 것 중에서 수천 가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조정의 병폐를 간절히 집어 내었다. 그런데, 사림들은 모여서 그저 웃곤 하였다. 유원은 자기가 거처하는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하고, 또 그 벗인 박생(朴生)은 그 재(齋)를 명월재(明月齋)라 편액하였는데, 진신(縉紳)들 사이에서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청풍ㆍ박명월 같다고 조롱하였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일찍 벼슬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하었다.
○ 임인년에 개령현(開寧縣) 송방리(松坊里)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 석불을 얻었는데, 이목구비가 모두 없어졌기로 그저 밭 언덕에 두었는데, 우연히 천식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였더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은지라 드디어 영험이 있다 하며, 어느 사람은 무슨 빛이 비친다고 하므로, 이웃 여러 고을에서 오랜 병으로 시달리던 자며, 아들이 없는 사람과 아직 장가들지 못한 사람, 노비를 잃은 사람들, 무릇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문득 징험이 있다고 하여, 남녀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미포(米布)와 지전(紙錢)이며, 향촉(香燭)ㆍ화과(花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향불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시주하는 자가 있어서,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절을 지으려 하니, 사족(士族) 부녀(婦女)들이 모두 친히 와서 기도 드리고,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금산(金山) 고을 훈도(訓導) 같은 이들도 와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빌었고, 혹은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에 금산 군수 이인형(李仁亨)은 이 말을 듣고, 유생과 아전 포졸을 보내어, 그 중을 잡아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이때 마침 김 문간공(文簡公 점필재)이 응교(應敎)의 명을 사퇴하고 금산에 있었는데, 이인형에게 하시(賀詩)를 주어 이르기를,
채전에 버려두어 몇 봄인지 모르던 것 / 抛擲菜田不記春
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하였더니,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어서, “성조(聖朝)에 영웅 있는 줄 이제야 알겠노라.”는 글귀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제 개령의 석불은 요호보다도 더욱 괴상한데도, 누가 감히 쳐서 고혹된 것을 없애지 못하였는데, 명부(明府)가 다른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아전들을 보내어 요수(妖首)를 쫓아 잡아오고, 시주하는 지전(紙錢)을 태워서 우민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소문쇄록》
○ 응교(應敎) 최보(崔溥)는 나주인(羅州人)이며, 정자(正字) 송흠(宋欽)은 영광인(靈光人)이다. 동시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들 본집의 거리가 겨우 15리쯤 되었는데, 하루는 송 정자가 최 응교의 집을 찾아가서 말마디 하다가, 최 응교가 묻기를,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하니, 송 정자가 답하기를, “역마를 타고 왔습니다.”고 하니, 최 응교가 다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준 역마를 자네 집에 매어둔 것과, 자네 집에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사사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하며, 최 응교가 조정에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파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송 정자가 응교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자, 최 응교는, “자네 같은 연소한 사람들은 앞으로 마땅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일렀으니, 조종조(祖宗朝 성종) 때에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며, 벗들 사이에 선(善)으로 권려하고, 의(義)로써 심복시킴이 이 같았으니, 가히 모든 일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언왕행록》
○ 성종이 승하하던 날에 성중에 있는 사대부며 거족으로서 혼인하는 집이 여러 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을 타서 가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가 되어서 가며,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갔었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이들 모두 벌받게 되었다. 그런데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때 하루 전날 밤에 아들의 초례를 지내게 되어서 손님과 동료들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상왕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박지번이 이에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병이 위독하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혼례(婚禮)를 사사로이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과 동료들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어느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오히려 무신보다 못하니, 한탄할 일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주D-001]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 : 당 나라의 무종(武宗) 때에 한림학사를 지극하게 대접하여 밤 늦도록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숙직실로 돌아갈 때에 황제 방에 있던 금련 촛대를 내시에게 들려서 앞길을 밝혀 주게 한 고사.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

 

해동역사 제48권
 예문지(藝文志) 7
우리나라 시(詩) 2 본조(本朝) 상(上)



○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에 오명제(吳明濟)가 사마공(司馬公)이 조선을 구원할 때 따라 나갔다가 여러 동방 명사(名士)들의 문집을 구해 보았는데, 모두 200여 편이었으며, 허씨(許氏) 형제 세 사람이 동국의 시 수백 편을 외우고 있었고, 또 그의 여동생이 지은 시 200편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기해년(1599, 선조32)에 다시 조선으로 가서 여러 명사들의 시 몇 편을 더 구하였는데, 이들을 종류별로 모아서 기록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고려의 시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겨우 회계(會稽) 사람 오명제가 지은 《조선시선(朝鮮詩選)》이 있을 뿐이다. 《명시종(明詩綜)》
○ 강희(康煕) 17년(1678, 숙종4)에 손치미(孫致彌)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의 시를 채집하여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을 찬하였는데, 모두 근체시(近體詩)였다. 이제 그 가운데서 읊을 만한 것을 가려 뽑아 여기에 대충 실었는데, 임제(林悌)의 시 1수, 백광훈(白光勳)의 시 2수, 오시봉(吳時鳳)ㆍ김굉필(金宏弼)ㆍ조욱(趙昱)ㆍ정작(鄭碏)ㆍ성운(成運)ㆍ백광면(白光勉)의 시 각 1수, 김종직(金宗直)의 시 2수, 기매(奇邁)ㆍ정도전(鄭道傳)ㆍ어무적(魚無迹)ㆍ권응인(權應仁)의 시 각 1수, 조희일(趙希逸)의 시 2수, 김류(金瑬)ㆍ이달(李達)ㆍ정사룡(鄭士龍)ㆍ정지승(鄭之升)의 시 각 1수, 최경창(崔慶昌)의 시 2수, 유영길(柳永吉)ㆍ김질충(金質忠)ㆍ임억령(林億齡)ㆍ최수성(崔壽峸)ㆍ김정(金淨)ㆍ정지상(鄭知常)ㆍ설손(偰遜)ㆍ이식(李植)ㆍ권우(權遇)ㆍ허균(許筠)의 시 각 1수, 박미(朴瀰)의 시 6수 가 그것이다. 《지북우담(池北偶談)》
○ 강희 기미년(1679, 숙종5)에 손개사(孫愷似)가 조선[高麗]에 가서 풍속을 채집하면서 시집 1책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대부분이 절구(絶句)로, 외울 만한 것이 있었다. 이에 내가 우연히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지게 하였는데, 강극성(姜克誠)의 시 1수, 성간(成侃)의 시 2수, 임제(林悌)ㆍ설손(偰遜)ㆍ최해(崔瀣)ㆍ정지승(鄭之升)ㆍ최숙생(崔叔生)ㆍ강혼(姜渾)ㆍ신종호(申從濩)ㆍ정지상(鄭知常)ㆍ김정(金淨)ㆍ이인로(李仁老)의 시 각 1수 가 그것이다. 《간재잡설(艮齋雜說)》
○ 《조선시집》의 하권에는 임제에서부터 이인로의 시까지가 실려 있는데, 살펴보건대, 임제, 백광훈, 최수성, 조희일, 임억령, 기매, 김류, 신흠(申欽), 권필(權鞸), 조욱, 이효측(李孝則), 유영길, 정작, 박문창(朴文昌), 이달, 이식, 박미, 강극성, 정지승, 강혼, 김정, 정지상, 이인로의 시가 각 1수이다. 《조선채풍록》을 보니 그들의 관작과 세차(世次)가 상세하지 않으므로 우선 여기에 기록한다. 《명시종》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본조의 시 가운데 중국의 시집에 실려 있는 것은 전우산(錢虞山)의 《열조시집(列朝詩集)》, 주죽타(朱竹坨)의 《명시종(明詩綜)》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데, 두 책에 실려 있는 것이 합하여 50여 인으로, 이것은 오명제의 《조선시선》에서 뽑아서 인용하여 기록한 것이다. 《명시종》 가운데 조선시 하편 및 왕어양(王漁洋)의 《지북우담(池北偶談)》과 우서당(尤西堂)의 《간재잡설(艮齋雜說)》에 기록된 여러 시들은 손치미의 《조선채풍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 《감구집(感舊集)》,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의 책에 기록된 것이 몇 편 있다. 지금 여러 문집 가운데 실려 있는 것들을 한데 아울러서 세대별로 순서를 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관작과 향리는 이미 인물고에 모두 실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중첩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중구일(重九日) [정도전(鄭道傳)]
고향 땅에 가는 길 아득하여 끝없으니 / 故園歸路渺無窮
물 돌고 산 돌아서 다시 또 몇 겹인가 / 水繞山圍第幾重
먼 데를 바라보면 시름 더욱 깊어지니 / 望欲遠時愁更遠
높은 데 올라가도 최고봉엔 가지 마소 / 登高莫上最高峯
《열조시집 및 명시종》

오호도(嗚呼島)에서 전횡(田橫)을 조문하다 [정도전]
새벽 해가 바다에서 솟아올라서 / 曉日出海
외로운 섬을 곧장 내리 비추네 / 直孤島中
당신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 夫子一片心
틀림없이 저 해와 같을 것이리 / 正與此日同
시대야 천년 멀리 떨어졌어도 / 相去曠千載
오호라 마음속에 느껴지누나 / 嗚呼感予衷
머리카락 대와 같이 곤두서나니 / 毛髮竪如竹
늠름하게 영풍이 불어오누나 / 凜凜吹英風
《지북우담》

오령묘(五靈廟) 《명시종》에 이르기를, “조서가 일찍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어 가던 중 오령묘를 지나면서 제시(題詩)하였다.” 하였다. [조서(曺庶)]
마을의 남쪽 북쪽 서글프게 비 오는데 / 村南村北雨凄凄
옛 묘에 바람 불어 버들은 나직하네 / 古廟靈風楊柳低
십 리의 강산에 졸면서 지나갈 제 / 十里江山和睡過
-《명시종》에는 ‘和睡過’가 ‘看枕上’으로 되어 있다.
깊숙한 대숲에서 낮닭이 우는구나 / 竹林深處午鷄啼
《열조시집 및 명시종》

회포가 있어서[有懷] 《명시종》에 이르기를, “정희량의 관작과 향리는 미상이다.” 하였다. [정희량(鄭希良)]
내가 권씨 아들들을 좋아하여서 / 我愛權氏子
어려서부터 서로 종유하였네 / 相從自結髮
큰형님은 의기를 품고 있었고 / 伯也負意氣
둘째 형은 기골이 호협하였지 / 仲也俠奇骨
나는 항상 그 사이에 의지하고서 / 吾常倚其間
세 발 달린 솥같이 우뚝 섰었지 / 屹立而鼎足
지난날에 서로 간에 호기 다투며 / 宿昔互爭霸
시와 술 자랑하며 서로 맞섰지 / 詩酒作勍敵
뜻 온전히 지키기가 어려웁기에 / 決志恐難全
칼날 갈며 서로 굳게 지키었었지 / 斂刃各堅壁
지금에는 셋이 각자 떨어져 있어 / 今也吳蜀魏
긴 강물이 우리 사이 갈라놓았네 / 長江限南北
형체 모습 이미 모두 적막해져서 / 形影已寂寞
꿈속서도 서로 멀어 아득만 하네 / 魂夢亦緬邈
그리우나 그 모습을 볼 수 없기에 / 思之不可見
홀로 서서 벌목편을 노래 부르네 / 獨立歌伐木
《열조시집》

만가(輓歌) [정희량]
뜬 인생은 한 차례의 헛된 꿈인데 / 浮生一虛夢
온 세상 사람 모두 그걸 모르네 / 擧世皆未覺
허공 중에 흩날리는 저 버들개지 / 靡靡空中絮
이리저리 따로따로 흩어지누나 / 東西互飄泊
마치 산에 깔리는 저 구름 같아 / 譬如歸山雲
늦고 빠름 분분하여 서로 틀리나 / 徐疾紛相錯
해 저물면 깨끗하여 자취가 없고 / 日暮澹無踨
새들 모두 돌아가면 하늘 텅 비네 / 鳥沒天寥廓
내 알겠네 몽매한 자 맘 슬퍼하고 / 乃知昧者悲
지인은 속박 굴레 벗어나는 걸 / 至人脫羈縛
솔숲 사이 잣나무들 무성도 하니 / 深松間茂柏
지하에서 틀림없이 서로 즐기리 / 地下正相樂
버려둔 채 다시는 말하지 말라 / 捐棄勿復道
하늘과 땅도 끝낸 녹는 거라네 / 天地會銷鑠
《상동》

밤비[夜雨] [정희량]
구의산 아득하고 초 땅 구름 푸르른데 / 九嶷嵯峨楚雲碧
빗속에서 새가 우는 상강의 저녁이네 / 鷓鴣啼雨湘江夕
우수수수 찬 소리는 어쩜 저리 처량한가 / 寒聲浙瀝何凄凄
대나무 숲 사이엔 슬픈 눈물 맺혀 있네 / 竹間哀淚懸餘滴
초사 노래 불러서 제자의 혼 부르니 / 楚些爲招帝子魂
달과 바람 한스러워 하늘 역시 우누나 / 月恨風愁天亦泣
돌아가지 못한 채 외론 배서 보내는 밤 / 孤帆一夜滯未歸
먼 곳서 온 나그네 흰 머리털 자라나네 / 遠客蕭蕭生白髮
《상동》

가을날에 바라보다[秋望] 2수(二首) [정희량]
비 내리다 날 개이자 가을빛 짙은데 / 秋光濃淡雨復晴
짙푸른 바다에는 파도조차 일지 않네 / 海波不動含深綠
모래밭은 평평한데 구름은 높고 낮고 / 平沙若剪雲嵯峨
기러기 등 비친 석양 끊어졌다 이어지네 / 鴈背斜光斷復續
서풍 불어 기러기들 물가 돌에 내리자 / 西風吹影落魚磯
묵지에서 글자가 새로이 생겨나네 / 字字新出臨池墨
벼와 기장 익은 곳에 새그물이 많은 탓에 / 稻粱離離網弋多
갈대꽃 향해 가서 깊숙한 곳 깃드누나 / 急向蘆花深處宿

나루 머리 단풍나무 서리 처음 내리더니 / 渡頭楓樹霜初結
바닷바람 불어와서 붉은 피가 맺히었네 / 海風吹滴猩猩血
가을빛은 아래위에 거울처럼 평평하고 / 秋光上下鏡面平
푸른 광채 한 조각 유리알처럼 맑네 / 淸光一片琉璃徹
모래밭서 졸던 새는 홀연 놀라 날아가고 / 沙頭眠鷗忽驚起
돛단배는 빨리 가 흰 물결이 빤짝이네 / 客帆飛去波明滅
안개와 물 창망한데 목동들은 돌아가고 / 煙水蒼茫野牧歸
몇 가닥 피리 소리 달 뜰 무렵에 울려오네 / 數聲短笛吹新月
《상동》

강마을[江村] [정희량]
푸른 산 텅 비고 물가 바위 차가운데 / 靑山影空釣石寒
바다 어귀 가을빛 움킬 만큼 짙푸르네 / 海門秋色濃可掬
도롱이 걸친 어부 누운 채 안 놀라니 / 漁人帶簑臥不驚
모래밭 새 날려다간 되레 서로 뒤쫓누나 / 沙鳥欲起還相逐
뱃노래 부르면서 저녁 나절 돌아와 / 一聲欸乃及暮歸
마을에서 술 청하니 술이 막 익을 때네 / 南隣喚酒酒初熟
보슬보슬 가을비에 급히 그물 거둘 제 / 絲絲細雨急收網
한줄기 석양빛이 고목나무 걸려 있네 / 一抹斜陽掛枯木
《상동》

우연히 제하다 [정희량]
십 년 동안 칼 갈아서 되놈 평정하였건만 / 十年磨劍遠平戎
-《명시종》에는 ‘磨劍’이 ‘一劍’으로 되어 있다.
공훈 업적 쓸쓸하여 유랑 신세 탄식누나 / 勳業蕭條歎轉蓬
나쁜 기운 공중 쌓여 먹과 같이 구름 검고 / 瘴氣橫空雲似墨
-《명시종》에는 ‘橫空’이 ‘曉來’로 되어 있다.
깎아지른 듯한 산엔 눈이 쌓여 하얗구나 / 湖山如削雪爲峯
-《명시종》에는 ‘湖山如削’이 ‘山容霽後’로 되어 있다.
땅은 용혈 맞닿아서 비가 자주 내리고 / 地連龍穴天多雨
문은 바다 마주해 한낮에도 바람 부네 / 門對鯨波晝亦風
몇 번이나 친구들이 계수음을 읊었던가 / 幾被故人吟桂樹
객창에서 쓸쓸하게 돌아가는 기럭 보네 / 客牕落莫傲歸鴻
《열조시집 및 명시종》

변경에서 [정희량]
객창이라 유독히도 가는 세월 아깝나니 / 客牕偏惜歲華殘
갈대꽃 쓸쓸하고 산에는 눈 가득하네 / 蘆荻蕭蕭雪滿山
변방 밖엔 바람 거세 새매 깃은 굳건하고 / 塞外風高鷹翮健
진영 앞엔 구름 일어 피리 소리 차가웁네 / 陣前雲起角聲寒
《열조시집》

부질없이 쓰다[漫書] [정희량]
압록강은 띠와 같아 유유히 흐르는데 / 鴨江如帶去悠悠
세월은 소리 없이 강물 따라 흘러가네 / 歲月無聲暗逐流
변방 하늘 아득하여 보루에선 구름 일고 / 萬里胡天雲出塞
젓대 소리 한 소리에 나그네 누 오르네 / 一聲羌笛客登樓
긴 바람 불어오자 연산에는 비 내리고 / 長風吹送燕山雨
외론 기럭 돌아오자 들판에는 가을 드네 / 斷鴈歸來鶴野秋
술잔 놓고 낯설은 타향 땅을 노래하다 / 對酒却歌鄕國異
외로운 성 지는 해에 홀로 머리 긁적이네 / 孤城落日獨搔頭
《상동》

한강루에 올라서[登漢江樓]. 장 황문(張黃門)의 운을 차운하다. 2수(二首) [박원형(朴元亨)]
먼 산은 눈썹처럼 가로누웠고 / 遠岫橫如黛
들판은 푸르른 풀 평평하구나 / 芳郊綠漸平
돌아가는 까마귀는 석양빛 받고 / 歸鴉飜夕照
우는 새는 맑은 봄날 조잘대누나 / 啼鳥哢春晴
잠시 동안 사귀는 게 즐거웁건만 / 暫得新知樂
도리어 이별의 한 생기게 하네 / 還敎別恨生
관산 멀어 만리 길을 가야 하나니 / 關山逾萬里
어디에서 연경 쪽을 바라보려나 / 何處望燕京

봄빛은 이제 한창 흐드러진데 / 春光方浩蕩
푸른 기운 도는 산엔 부슬비 오네 / 嵐翠轉霏微
하얀 물결 부채에 어른거리고 / 雪浪搖歌扇
물가 난초 향내음 옷에 스미네 / 汀蘭襲舞衣
물고기는 때때로 뛰어오르고 / 素鱗時潑潑
날랜 제비 여기저기 날아다니네 / 輕燕已飛飛
경치 물색 보면은 이와 같으니 / 景物看如此
되도록 천천히 돌아가소서 / 從敎緩緩歸
《열조시집 및 명시종》

대동강을 건너면서[渡大同江]. 차운하여 짓다. [박원형]
황제 조서 전하고서 가는 길 재촉타가 / 遠傳丹詔促行裝
잠시 동안 사신 행차 대동강 가 머물렀네 / 暫星槎浿水陽
강 포구엔 눈 녹아서 봄기운이 동하는데 / 江浦雪消春意動
역참에는 해 따뜻해 나그네 회포 기네 / 郵亭日暖客懷長
한 잔 술로 좋은 시절 보낼 수가 있으니 / 一杯且可酬佳節
만리 길에 고향 생각 애써서 하지 마소 / 萬里無憶故鄕
들 넓어 하늘 낮고 산은 그림 같아서 / 野闊天低山似畫
시상 잠겨 저절로 아득한 데 빠져드네 / 不禁詩思入蒼茫
《상동》

양덕역(陽德驛) [신숙주(申叔舟)]
머나먼 북새에서 돌아오느라 / 北塞歸遠途
천리 길에 언덕과 골짝 건넜네 / 千里度陵谷
날 저물어 양덕역에 투숙해 보니 / 日暮投陽德
역의 집들 반쯤은 초가집이네 / 館宇半茅屋
살랑바람 마른 나무 가지에 불고 / 輕風吹枯枝
짤막한 담 산기슭을 의지해 있네 / 短垣依斷麓
비 그치자 나직하게 구름 깔리고 / 雨歇行雲低
산 깊어서 노루 우는 소리 들리네 / 山深聽鳴鹿
오랫동안 앉았자니 맘 쓸쓸한데 / 坐久正蕭然
시내에는 차가운 옥 달려가누나 / 淸溪走寒玉
멀리 온 나그네라 잠 못 이루고 / 遠客自無寐
종놈 불러 꺼져 가는 촛불 돋우네 / 呼童剪殘燭
《열조시집 및 명시종》

권 정경(權正卿)에게 부치다 [신숙주]
동쪽 끝 천리 멀리 와 있는 사이 / 東極來千里
변방 성에 달이 두 번 둥그러졌네 / 邊城月再盈
강 건너엔 모두 되놈 부락들이고 / 隔江皆虜聚
땅 물으니 오랑캐의 이름 반이네 / 問地半胡名
북소리에 연이어진 산이 울리고 / 鼙鼓連山動
모래 바람 얼굴을 스치며 부네 / 風沙拂面生
오랑캐를 달랠 계책 글러졌는데 / 和戎謀已拙
귀밑머리 희어져서 눈꽃이 폈네 / 兩鬢雪花明
《열조시집》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시를 차운하다. [신숙주]
잔치 열린 누 오르자 멀리 보이고 / 綺席登樓迥
봄 강에는 푸르른 물 흘러가누나 / 春江碧玉流
이른 매화 물굽이서 향기 풍기고 / 早梅香澗曲
꽃다운 풀 물가에 가득 자랐네 / 芳草滿汀洲
손님과 주인 모두 즐거웁기에 / 賓主歡情洽
강과 산에 기쁜 기운 떠오르누나 / 江山喜氣浮
좋은 봄날 모름지기 술에 취하고 / 良辰須酩酊
다시 지체하는 것을 애석해 마소 / 莫惜更遲留
《명시종》

한강루에 오르다 2수(二首) [권남(權擥)]
남쪽 누각 올라 멀리 바라보다가 / 南樓初縱目
난간 아래 긴 강물을 바라보누나 / 檻外俯長流
매화꽃 진 언덕에는 눈 다 녹았고 / 雪盡落梅塢
봄풀 자란 물가에는 봄이 깊구나 / 春深芳草洲
호수 빛은 맑아서 일렁거리고 / 湖光晴灎灎
산기운은 따스해서 피어오르네 / 山氣暖浮浮
사신 따라 올라와서 바라다보니 / 使節陪登眺
석양빛이 다시금 나를 붙잡네 / 斜陽更挽留

성 남쪽서 한 동이 술을 마시고 / 城南一樽酒
마주 보니 저녁 산이 푸르르구나 / 相對暮山靑
작은 배는 앞 나루에 비끼어 있고 / 小艇橫前渡
외론 돛배 먼 물가에 멀어져 가네 / 孤帆落遠汀
강과 구름 끊어졌다 또 이어지고 / 江雲連復斷
주인과 손 취하였다 다시 술 깨네 / 主客醉還醒
붓 들자 용과 뱀이 꿈틀거리고 / 落筆龍蛇動
높은 흥취 아득한 데 빠져드누나 / 高懷入
《상동》

양화도(楊花渡). 진 급사(陳給事)의 운을 차운하다. [권남]
산정에다 술상 놓자 강가가 가까운데 / 山亭置酒近江湄
흥이 올라 옥 술잔을 자꾸만 기울이네 / 興至頻傾白玉巵
만리 길 돌아가는 나그네 한 많은데 / 萬里歸來多客恨
한때에 올라 보니 마음이 펴지누나 / 一時登眺得神怡
높은 이름 얼음 같은 지조인 줄 알았고 / 高標已覺氷霜操
새 곡조는 도리어 백설사를 듣누나 / 新調還聞白雪詞
떠나간 뒤 이 뒷날에 이곳 기억 떠오르면 / 北去他年如記憶
꿈속에서 응당히 먼 이곳 변방 날아오리 / 也應飛夢到遐陲
《상동》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차운하여 짓다. 3수(三首) ○ 《명시종》에 이르기를, “윤자운의 관직은 도승지이다.” 하였다. [윤자운(尹子雲)]
고헌께서 잠시 동안 머물러서는 / 高軒時暫駐
좋은 경치 함께 와서 보라고 하네 / 勝地許相招
시 가락은 읊조리는 사이 바뀌고 / 詩律吟邊改
시름 생각 술 취한 뒤 사라지누나 / 愁懷醉後銷
물가 핀 꽃 비 지나자 생기가 돌고 / 汀花經雨動
언덕 버들 바람 맞아 흔들리누나 / 岸柳受風搖
홀연히 중류에서 흥취가 일어 / 忽起中流興
봄 마음을 짧은 노에 부치었어라 / 春心付短橈

어느 곳서 먼 눈길이 다 끝나려나 / 何處窮遐矚
구름 속 산 백층이나 아득히 높네 / 丹梯近百層
양지쪽 언덕에는 봄풀 돋았고 / 陽陂先有草
음지쪽 골짝에도 얼음 녹았네 / 陰壑已無
좋은 경치 때때로 서로 이끄니 / 美景時相引
시 회포는 저녁 돼도 그대로이네 / 風懷晩向仍
손님 주인 좋은 우호 이루려면은 / 欲成賓主好
술 마시고 시 읊어야 그렇게 되리 / 觴詠正堪憑

보이는 곳 어디에고 풍광 좋은데 / 風光觸處好
봄기운은 바라보는 속에 흐리네 / 春氣望中微
산 깨끗해 그림같이 색깔 진하고 / 山淨濃如畫
강 깊어서 푸르름이 옷에 물드네 / 江深綠染衣
꿈길은 나비 따라 어지러웁고 / 夢隨蝴蝶亂
마음은 구름 따라 날아가누나 / 心逐野雲飛
인간 세상일 말하기 어려웁거니 / 人世難開口
술에 흠뻑 취하여서 돌아가리라 / 惟須倒載歸
《상동》

종릉(鍾陵) -《명시종》에는 ‘종령(鍾靈)’으로 되어 있다.- 의 산거시(山居詩)에 화답하다 2수(二首) ○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조선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2권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르는데, 시가 몹시 천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이다. [김시습(金時習)]
인간들의 변하는 꼴 비단보다 얇거니 / 人間變態薄於紗
돌아와서 푸른 놀 속 눕는 것이 맞도다 / 端合歸來臥□□
병든 매미처럼 늙어 이파리 속 숨어들고 / □□病蟬藏翳葉
가을 나비 인생이라 뜬 배에 몸 부치네 / 人生秋蝶寄浮槎
바람 앞엔 후두둑 솔방울 떨어지고 / 風前細細飛松子
구름 밖엔 우수수 계수 꽃이 지누나 / 雲外毶毶落柳花
도인은 이슬 먹고 산다고 말을 마라 / □□道人嚥沆瀣
봄비 오자 바위 곁에 참깨를 심는다네 / 巖邊春雨種胡麻
《열조시집》

호랑나비 쌍쌍이 약초밭 위 나르고 / 蛺蝶雙雙飛藥畦
-《명시종》에는 ‘飛’가 ‘舞’로 되어 있다.
산새들은 대 울타리 서쪽에서 지저귀네 / 山禽饒語竹籬西
-《명시종》에는 ‘薔薇架架采登梯’로 되어 있다.
한 떨기 구기자는 이제 막 꽃 활짝 피고 / 一叢枸杞花初遍
다섯 잎새 인삼은 이제 막 잎 벌어졌네 / 五椏人參葉初齊
푸르른 대숲 속선 사슴이 졸고 있고 / 翠竹林中香麝睡
가시나무 가지 위선 두루미 울고 있네 / 紫荊枝上畫眉啼
천 산에 지난밤에 소리없이 비 오더니 / 千峯昨夜疏疏雨
남쪽 시내 범람하고 작은 시내 물 불었네 / 泛濫南溪漲小溪
-《명시종》에는 ‘不分南溪漲入溪’로 되어 있다.
《상동 및 명시종》

회소곡(會蘇曲)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7월 보름에 신라의 유리왕(儒理王)이 왕녀(王女)들에게 각자 6부(部)의 아녀자들을 거느리고 너른 뜰에서 길쌈을 하게 하고는, 8월 보름에 짠 것을 조사해서 진 편이 술상을 차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더불어서 가무(歌舞)를 즐기고 백희(百戱)를 베풀었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의 여자들이 일어나 춤을 추면서 ‘회소(會蘇)’라고 노래 불렀다. 그 뒤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하여 노래를 지었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
회소회소 하면서 회소곡을 부르니 / 會蘇曲會蘇曲
서녘 바람 널따란 마당으로 불어오고 / 西風吹廣庭
밝은 달은 화려한 집에 가득 비치네 / 明月滿華屋
왕녀가 윗자리에 앉아 물레 돌리자 / 王姬壓坐理繅車
여섯 마을 아녀자들 많이도 모이었네 / 六部女兒多如簇
네 광주린 찼는데 내 광주린 비었다고 / 爾筐旣盈我筐空
술 거르고 야유하며 서로 웃고 즐기누나 / 釃酒椰楡歌相逐
한 여자가 탄식하매 일천 집이 기쁘거니 / 一婦歎千室歡
사방 사람 부지런히 길쌈을 하게 하네 / 坐令四方勤杼軸
《열조시집》

황창랑(黃昌郞)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황창랑은 바로 비청랑(非淸郞)이다. 8세 때 신라의 왕이 백제 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백제로 가서 시장에서 칼춤을 추자, 이를 보기 위하여 시장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쌌다. 백제 왕이 그 말을 듣고는 기이하게 여겨 궁중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칼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를 인하여 백제 왕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러자 후대 사람들이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 춤을 형상하였는데, 이 사실을 사전(史傳)에서 상고해 보면 그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지금 그 춤을 추는 것을 보면 빙빙 돌면서 힐끗힐끗 노려보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 늠름하다.” 하였다. [김종직]
이 어떤 사람인가 이제 나이 칠팔세라 / 若有人兮方離齠
키는 석 자 못 되는데 어쩜 그리 웅걸찬가 / 身不三尺一何驍
평생토록 왕기를 스승으로 삼아서는 / 平生汪錡我所師
나라 위해 수치 씻어 마음 여한 없었다네 / 爲國雪恥心無憀
칼날이 목 겨누어도 다리를 떨지 않고 / 劍鐔向頸股不栗
칼날 심장 겨누어도 눈도 깜짝 안 하여 / 劍鐔指心目不搖
아아 임금 보기를 초개처럼 보았다네 / 嗟爾千乘如蓬蒿
《상동》

성모사(聖母祠)에서 비를 빌다 [김종직]
앞봉우리 사라지고 뒷봉우리 푸르르니 / 前峯已失後峯靑
병예가 비 바라는 백성 감동시키누나 / 屛翳掠人不解晴
그 누가 그리었나 오두가 삿갓 쓰고 / 誰畫遨頭一簑笠
비 가득한 마을에서 움트는 싹 보는 것을 / 滿村風雨看苗生
《상동》

화산기(華山畿) [김종직]
무덤가에 연리지 푸르고 푸르른데 / 塚上靑靑連理枝
행인들은 앞 다투어 화산기를 노래하네 / 行人爭唱華山畿
팥배나무 꽃이 피는 한식날이 왔는데 / 野棠花發當寒食
봄 혼은 몇 차례나 나비 되어 날아갔나 / 幾度春魂化蝶飛
《상동》

진산 상공(晉山相公)에게 답하다 [김종직]
마을 남쪽 북쪽에서 풍년 들기 비는데 / 村南村北祝㹠蹄
우거진 버들 숲엔 새들이 지저귀네 / 楡柳陰陰烏雀啼
태평성대 만나서 생활이 풍족하매 / 身遇太平生事足
석양녘에 단교에서 술 취한 이 부축하네 / 日斜扶醉斷橋西
《상동》

이 절도사(李節度使)가 진(鎭)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김종직]
큰 바닷가 누대에 올라 한번 굽어보니 / 鰲背樓臺一俯憑
만리 먼 바다 파도 푸르르고 맑구나 / 海波萬里碧千澄
태평스런 시절이라 용도책을 못 펼치고 / 太平未試龍韜策
가끔씩 꿩 쏘면서 죽원의 중 찾아가네 / 射雉還過竹院僧
《상동》

불국사(佛國寺) [김종직]
절집의 경내로 찾아와 보니 / 爲訪招提境
솔숲 사이 산빛이 무거웁구나 / 松間紫翠重
푸르른 산 한쪽에는 비 내리는데 / 靑山半邊雨
저물녘에 산사에선 종이 울리네 / 落日上方鍾
산승과의 이야기는 부드러웁고 / 語共居僧軟
나그네의 정취 따라 술잔 진하네 / 杯隨客意濃

술에 취해 대마루 위 쓰러진 채로 / 頹然一榻上
마주 보니 머리털이 듬성하구려 / 相對鬢髼鬆
《명시종 및 지북우담》

선사사(仙槎寺) [김종직]
내 우연히 선사사에 찾아 들르니 / 偶到仙槎寺
돌은 쓸쓸 나무들은 가을빛인데 / 巖空松桂秋
두루미는 신라 때의 일산을 펴고 / 鸜飜羅代蓋
용은 부처 하늘의 공 발로 차누나 / 龍蹴佛天幽
보슬비 속에 중은 장삼을 깁고 / 細雨僧縫衲
찬 강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 寒江客艤舟
외로운 구름 서대초에 걸리어 있고 / 孤雲書帶草
바람 소리 못 머리에 가득도 하네 / 獵獵滿地頭
《지북우담》

기생에게 주다 [강혼(姜渾)]
구름 같은 머리 빗고 높은 누각 기대어 / 雲鬟梳罷倚高樓
쇠젓대를 비껴 들고 부는 손 가녀리네 / 鐵笛橫吹玉指柔
만리의 관산에 둥그런 달 떠오르자 / 萬里關山一
맑은 눈물 떨구면서 이주령을 부누나 / 數行淸淚落伊
《명시종 및 간재잡설》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차운하여 짓다. [이극감(李克堪)]
더딘 해 날 맑아서 한창 좋은데 / 遲日晴方好
따스한 봄바람은 살랑거리네 / 和風暖更微
산음의 계사를 쫓아서 하고 / 山陰追禊事
기수 가서 봄옷으로 갈아입누나 / 沂上換春衣
금 술잔에 가득 찬 술 맘껏 마시며 / 劇飮金巵滿
옥가루를 흩날리며 담소 나눌 제 / 淸譚玉屑飛
날랜 제비 뱃머리서 춤추며 날아 / 檣頭輕燕舞
고향으로 가고픈 맘 나게 하누나 / 有意惱人歸
《명시종》

고의(古意) [서거정(徐居正)]
바다 밑의 산호는 높이가 몇 길인가 / 海底珊瑚高幾丈
천년 동안 시험 삼아 천 길 그물 만들어서 / 千年試作千尋網
만 마리의 소에 매어 바다 속서 끌어 오니 / 萬牛挽出滄溟深
교룡들은 노호하고 천둥 벼락 내리치네 / 蛟龍怒號霹靂響
부상에는 해 잠겨서 큰 파도가 들끓고 / 扶桑日沈洪濤熱
광채 빛나 황금 대궐 찬란하게 비치누나 / 光華照耀黃金闕
계륜이야 본디가 거치른 사내여서 / 季倫本是麤男兒
금 철퇴로 내리치자 가루되어 눈과 같네 / 金椎一擊紛如雪
《열조시집》

춘일(春日) [서거정]
수양버들 움 돋고 매화꽃은 지는데 / 金入垂楊玉謝梅
작은 연못 봄물은 이끼보다 더 푸르네 / 小池新水碧
봄 시름과 봄 흥취 중 어느 것이 더 깊은가 / 春愁春興誰深淺
제비도 아니 오고 꽃도 피지 아니하네 / 燕子不來花未開
《상동》

즉사(卽事) [서거정]
작은 연못 동이 같아 물은 얕고 맑은데 / 小沼如盤水淺淸
부들풀은 자라나고 갈대는 싹 돋았네 / 菰蒲新荻芽生
물통을 이어 대어 냇물 끌어오는 거는 / 連筒引却前溪水
파초 길러 비 오는 소리 듣기 위해서네 / 養得芭蕉聽雨聲
《상동 및 명시종》

봄날을 상심하다 [신종호(申從濩)]
차 한 잔 마시자 졸음이 깨었는데 / 茶甌飮罷睡初
담 너머서 누가 부는 피리 소리 들려오네 / 隔屋聞吹紫玉笙
제비는 오지 않고 꾀꼬리도 떠나는데 / 燕子不來鸎又去
온 뜰 가득 붉은 꽃이 소리 없이 지누나 / 滿庭紅雨落無聲
《명시종 및 간재잡설》

부벽루에 오르다.[登浮碧樓] 차운하여 짓다. [허종(許琮)]
물가 풀은 깎은 듯이 평평도 하고 / 渚草平如剪
강 구름은 축축해서 날지도 않네 / 江雲濕不飛
저녁 노을 자리 위로 비치어 오고 / 餘霞飄綺席
새 물결은 이끼가 낀 바위 부딪네 / 新浪濺苔磯
옛 절에는 담쟁이가 벽에 붙었고 / 古寺蘿垂壁
어부 집은 사립문이 물가 가깝네 / 漁家水浸扉
눈앞에 펼쳐지는 몇몇 경치에 / 眼前多少景
마음 슬퍼 나그네는 떠나려 하네 / 惆悵客將歸
《명시종》

왕 황문(王黃門)의 ‘안흥으로 가는 도중에[安興道中]’ 시를 차운하다 [허종]
봄 경치 술과 같아 사람 정신 흐리는데 / 韶光如酒著人迷
부질없이 붓대 잡고 시를 지어 볼 제에 / 謾把霜毫取次題
산 남쪽과 산 북쪽에 봄비 잠시 그치니 / 山北山南春雨歇
숲 너머에 해 붉은데 산비둘기 우누나 / 隔林紅日鵓鳩啼
《상동》

봉산루에 오르다.[登鳳山樓] 차운하여 짓다. [허종]
홀로 난간 기대이자 쓴 모자 삐뚜른데 / 獨倚彫欄帽影斜
객중에 귀밑머리 이미 쇠해 하얘졌네 / 客中衰鬢已非鴉
두견새 울음소리 소리마다 애닯나니 / 不禁杜宇聲聲苦
동풍 속에 먼저 핀 꽃 다 지도록 울어 대네 / 啼盡東風第一花
《상동》

송림(松林)의 만조(晩照). 차운하여 짓다. [허종]
뽕나무 속 한 마을에 석양빛 희미한데 / 一村桑柘夕陽微
봄풀은 자라났고 버들개지 흩날리네 / 芳草叢生柳絮飛
난정에서 수계할 때 이미 지난 뒤인데도 / 已過蘭亭修禊後
바람 차서 봄옷으로 갈아입지 못하였네 / 風寒猶未着春衣
《상동》

소곶관(所串館)으로 가는 도중에 즉사(卽事)로 읊다. 차운하여 짓다. 2수(二首) [허종]
몇 그루 버드나무 다리 곁에 서 있어서 / 數株官柳野橋傍
날리는 버들개지 말발굽을 스치누나 / 飛絮紛紛撲馬香
강에 비 내리려 해 구름은 어둑한데 / 江雨欲來龍氣黑
강바람 불어와서 서늘하기 그지없네 / 水風吹作十分涼

강남 땅 대숲 속에 내 집이 있건마는 / 家在江南水竹村
새 울고 꽃 지는데 사립문 닫혀 있네 / 鳥啼花落掩柴門
해마다 이쪽저쪽 분주하게 떠도나니 / 年年奔走東西路
어찌하면 잠시나마 한곳에 머물려나 / 坐席何由得暫溫
《상동》

시구[句] [허종]
나는 새 저 너머로 봄은 져가고 / 春歸飛鳥外
멀어지는 돛배 안에 하늘은 넓네 / 天闊落帆中

보슬비에 나무는 온통 젖는데 / 細雨全沈樹
외론 성에 연기가 반쯤 걸렸네 / 孤城半帶煙

동풍 불자 과만수 불어오르고 / 東風瓜蔓水
석양 속에 죽지가의 노래 들리네 / 斜日竹枝歌

바람 급해 양의 뿔을 후려 때리고 / 風急搏羊角
물결 쳐서 기러기 떼 놀라 나누나 / 波飜起鴈群

다리에는 날 맑아서 그물 말리고 / 官橋晴曬網
나루터엔 날 저물어 배 매여 있네 / 野渡晩維舟
《이상 모두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의고(擬古) [성현(成俔)]
오늘 벌인 이 좋은 잔치 모임에 / 今日良宴會
훌륭한 손님 모여 대청이 찼네 / 嘉賓滿高堂
맛난 안주 자개상 위에 넘치고 / 綺肴溢彫俎
좋은 술은 금 술잔에 철철 넘치네 / 美酒盈金觴
좌우에 늘어선 예쁜 기생들 / 左右燕趙姬
아리따운 눈썹에다 맑은 눈이네 / 眉目婉淸揚
붉은 현줄 흰 팔뚝에 비치이는데 / 朱絃映皓腕
줄지어 앉아서는 곡을 타누나 / 列坐彈宮商
수레바퀴 돌듯 세월 흘러가면은 / 流年雙轉轂
어느덧 머리카락 희어지리니 / 倏忽鬢已霜
서로 간에 만났으니 즐기면 그만 / 相逢且爲樂
비분강개할 필요가 뭐가 있으리 / 何用苦慨慷
김씨 장씨 마침내 어떻게 됐나 / 金張竟何許
꾸역꾸역 북망산에 가지 않던가 / 纍纍歸北邙
《열조시집 및 명시종》

목면사(木綿詞) [성현]
강남 땅의 목화라서 빛깔 더욱 하얀 탓에 / 江南木綿色逾白
자리 위에 펼쳐 놓자 눈처럼 눈부시네 / 晴雪紛紛鋪簟席
삐걱삐걱 소리 내며 씨아를 돌린 다음 / 小機搖作鴉櫓聲
활로 곱게 타내니 가을 구름 쌓이네 / 軟弧彈罷秋雲積
아리따운 새악시 밤에 앉아 매만지니 / 殷勤小婦坐夜闌
바람에 날리는 솜 머리 위에 내려앉네 / 風吹紛絮縈烏鬟
뻣뻣한 실 물 축이며 길쌈질 재촉할 제 / 絲僵水澁機杼促
찰칵찰칵 북 보내는 손가락 시려오네 / 軋軋輕梭玉指寒
애간장이 끊어져서 수심 금키 어려운데 / 肝腸欲絶愁難絶
외로운 등 깜빡대며 가물가물 조는구나 / 孤燈閃閃光明滅
반은 잘라 애기 옷을 만들어서 입히고 / 半將裁剪小兒衣
반은 잘라 금미에 간 낭군에게 부치리 / 半將裁剪寄金微
새벽 밝아 오건마는 잠을 못 이루는데 / 銅壺催曉眠不得
시간은 점점 흘러 비단 장막 밝아 오네 / 淚水點點明羅幃
《열조시집》

옛곡[古曲] 《명시종》에 이르기를, “성간의 관작과 향리는 미상이다.” 하였다. [성간(成侃)]
용문의 백 년 묵은 저 오동나무 / 龍門百年桐
몇 날이나 뇌성벽력 깔보았던가 / 幾日凌霹靂
이를 켜서 거문고를 하나 만들어 / 裁爲膝上琴
끌어앉고 함지곡을 내 뜯어보리 / 宛抱咸池曲
큰소리로 노래하며 한번 튕기자 / 高歌試一彈
한밤중에 산 귀신이 눈물 흘리네 / 中夜山鬼泣
군자의 행실 역시 이와 같나니 / 君子亦如此
관 덮으면 그제야 일 끝나는 거네 / 蓋棺事
《상동》

전부행(田父行) [성간]
꿩은 짝을 지어 날고 풀은 몹시 푸르른데 / 隴雉雙飛草深碧
언덕 위에 앉은 노인 길게 탄식 내뱉누나 / 隴上老人長歎息
나의 나이 금년이면 얼추 일흔 되는데 / 我生今年七十餘
손과 발엔 못박히고 얼굴에는 주름졌네 / 手脚腁胝面黧黑
아들딸 시집 장가 어느 때나 보내려나 / 男婚女嫁知幾時
짧은 옷 해진 적삼 무릎 겨우 가리우네 / 短衣襤衫纔掩膝
지난날에 징집되어 변방 지역 떠돌다가 / 昔年召募度流沙
만리에서 돌아오니 살쩍 쇠해 눈과 같네 / 萬里歸來鬢如雪
창을 잡던 손으로 농사 다시 지으려니 / 殷勤荷戟還荷鋤
자갈밭 자갈돌에 소발굽 다 빠졌다네 / 石田磽确牛蹄脫
소발굽 다 빠져서 괜히 땀만 흘려대니 / 牛蹄脫兮空汗流
홀로 앉아 망연자실 이내 가슴 미어지네 / 獨坐茫然心斷絶
《상동》

나홍곡(囉嗊曲) [성간]
낭군이여 낭군이여 내 낭군이여 / 爲報郞君道
금년에는 오시려나 안 오시려나 / 今年歸未歸
강가에 봄풀 자라 푸르러갈 때 / 江頭春草綠
이 소첩의 애간장은 다 녹는다오 / 是妾斷腸時
《명시종 및 간재잡설》

어부(漁父) [성간]
몇 겹의 푸른 산에 몇 골짜기 안개인가 / 數疊靑山數谷煙
흰 갈매기 나는 물가 티끌조차 닿지 않네 / 紅塵不到白鷗邊
고기 잡는 늙은이는 무심한 이 아니어서 / 漁翁不是無心者
온 배 안에 서강 달을 그득하니 담고 있네 / 管領西江月一船
《간재잡설》

가을밤[秋夜] [백원항(白元恒)]
맑은 밤 초당에 비 이제 막 개었는데 / 草堂淸夜雨初收
반딧불은 부슬비에 젖어 날지 않누나 / 小雨寒螢濕不流
책상머리 홀로 누워 지난 일 생각는데 / 獨臥床頭思往事
풀벌레들 울어 대어 발 가득 가을이네 / 砌蟲啼一簾秋
《열조시집》

경주(慶州) 벽상(壁上)에 있는 시를 차운하다 [최응현(崔應賢)]
풍진 세상 돌아보니 몇 번이나 봄이었나 / 風塵回首幾番春
공문서 쌓인 앞에 백발이 새롭구나 / 案牘堆前白髮新
밤마다 숲 속 사는 꿈 자주 꾸건마는 / 夜半慣成林下夢
아침이면 또 그대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 明朝依舊未歸人
《상동》

대마도(對馬島)로 가는 배 안에서 밤중에 짓다 [김흔(金訢)]
외론 배에 홀로 눕자 자리 편치 않은데 / 獨泛孤篷臥未安
서녘 바람 불어 대어 저녁 조수 차가웁네 / 西風一夕晩潮寒
하늘에는 가을빛을 찾아봐도 아니 뵈고 / 海天秋色尋無處
도리어 반랑의 살쩍 위에 보이누나 / 却向潘郞鬢上看
《상동》

서강(西江)의 한식(寒食) [남효온(南孝溫)]
하늘 흐려 울 밖에는 저녁 한기 생기는데 / 天陰籬外夕寒生
한식철 샛바람에 들 물이 빛나누나 / 寒食東風野水明
배 안의 장사꾼들 끝없는 얘기 소린 / 無限滿船商客語
버들꽃의 시절이니 고향의 정일 거리 / 柳花時節故鄕情
《상동》

봉산루(鳳山樓). 동 내한(董內翰)의 시를 차운하다. [노공필(盧公弼)]
누각 올라 바라보자 모자 차양 삐뚤고 / 畫樓登眺帽簷斜
이끼 낀 벽 시 쓰자 군데군데 점 생기네 / 苔壁詩成字點鴉
그윽한 흥 막 이는데 하늘은 저물어서 / 幽興未闌天欲暮
드린 발에 비 뿌리고 오동꽃은 지누나 / 一簾疎雨落桐花
《명시종》

개성(開城) 태평관(太平館). 애 병부(艾兵部)의 시를 차운하다. [노공필]
석양질 때 말을 몰아 외로운 성 지나면서 / 斜陽策馬過孤城
그 당시에 화려했던 개경을 생각누나 / 想像當年玉作京
나라야 망했지만 산하는 그대론데 / 國破山河渾似舊
태평 와서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누나 / 時平民物不知兵
봄 깊은 옛 객관엔 기장이 자라나고 / 春深古館生禾黍
물 마른 연못에는 밭벼가 자라 있네 / 水涸荒池揷稻秔
지난 일들 유유하니 어디에다 물어보리 / 往事悠悠何處問
학 돌아간 화표에는 달빛만이 밝구나 / 鶴歸華表月空明
《상동》

개성관(開城館). 동규봉(董圭峯)의 시를 차운하다. [이행(李荇)]
끝없이 이어진 길 가고 또 갈 제 / 行行綿道路
날마다 바람 불어 곤혹스럽네 / 日日困風沙
골짝 뜨자 흐르는 물 마음 슬프고 / 壑悲流水
숲에 들자 저녁 새가 부러웁구나 / 投林羨暮鴉
겨울 다 가 봄날 오길 재촉하여서 / 窮冬催暖律
묵은 풀에 새싹이 막 돋으려 하네 / 宿草欲新芽
다시금 생각노니 내 고향 집에 / 更憶吾廬好
찬 매화꽃 몇 가지나 피었으려나 / 寒梅幾樹花
《상동》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다 [이행]
임진에서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 臨津催早發
나루터를 물어 맑은 강으로 가네 / 問渡卽淸江
강 복판선 배의 노를 느리게 젓고 / 緩擊中流
올라갈 땐 배 천천히 끌고서 가네 / 徐牽上水艭
강물 차서 물속 고기 바위 틈 숨고 / 寒魚依石竇
아침 해가 뱃전을 내리 비출 제 / 曉日照篷窓
나그네가 기심 잊고 앉아 있음에 / 有客忘機坐
흰 물새들 짝을 지어 날아오누나 / 飛來白鳥雙
《상동》

녹봉 급사(鹿峯給事)에게 답하다 [이행]
총총히 돌아가는 옷소매 못 당기고 / 歸袂悤悤不可攀
이별하는 사이에 이내 혼만 녹누나 / 銷魂祗是黯然間
녹봉은 천 개의 산 저 너머 거기 있고 / 鹿峯正在千山外
사신 행차 반나절도 한가한 틈이 없네 / 鳳節全無半日閑
오늘 지금 시를 지어 이별하게 되었으니 / 今日預將詩作別
이 뒷날에 어찌 차마 달과 함께 돌아가나 / 他宵何忍月同還
이내 생에 다시금 모시기가 어렵거니 / 此生難復陪淸賞
하늘 속의 옥순 반열 창망히 바라보리 / 悵望雲霄玉筍班
《상동》

총수산(蔥秀山). 당 선생(唐先生)의 시를 차운하다. [이희보(李希輔)]
나그네 길 섣달에 떠나노라니 / 客行値殘臘
긴 길을 짧은 해가 재촉하누나 / 長程催短景
날 추워서 턱수염은 쉽게도 얼고 / 天寒鬚易氷
잎 떨어져 나무에는 그림자 없네 / 葉脫木無影
채찍 치며 안성역을 출발할 적에 / 揮鞭發安城
이슬 젖어 옷소매가 차가웁구나 / 露濕衣袖冷
구불구불 구름 시내 건너고 나니 / 迤邐度雲漢
높다란 고갯마루 만나게 됐네 / 邂逅逢峻嶺
생각노니 동 학사 그분께서는 / 緬懷董學士
전에 예서 조용하게 쉬었었다네 / 曾此憩敻靜
오뚝하니 서 있는 몇 자의 비석 / 突兀數尺碑
그 글 참말 아름답고 환히 빛나네 / 其文信蔚炳
지난 일들 부질없긴 뜬구름이니 / 往事浮雲空
몇 년 동안 이 경치를 버려두었나 / 幾年孤此境
이내 생은 참으로 다행스러워 / 此生眞自幸
사신의 행차가 또 오게 되었네 / 四牡又來騁
전현들의 뒤를 이어 시를 남기니 / 留詩繼前賢
신선과 속세 먼 걸 깨닫겠구나 / 頓覺仙凡迥
이내 재주 노둔한 게 괴로웁거니 / 而我苦駑緩
옛 훈계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네 / 古訓蒙不省
다행히도 시의 근원 접하여서는 / 何幸接詩源
사나운 물살 빨리 건너느라고 / 飛渡激奔猛
물가조차 엿보지를 못하였는데 / 涯涘不能窺
하물며 그 요령을 얻었으리오 / 況復得要領
무심히 양춘곡에 화답노라니 / 無心和陽春
마음만 한갓 절로 경경하구나 / 有懷徒耿耿
원컨대 남은 빛을 빌려 주어서 / 願言借餘光
내 마음의 어둑함을 깨뜨려 주소 / 破我心昏瞑
《상동》

당 수찬(唐修撰)의 ‘태평관에서 묵다가 술에 취해 밤에 일어나다.[夜宿太平館醉起]’ 시를 차운하다. [이희보]
시 웅대해 바다에는 파도가 일고 / 雄辭海生波
먹 술 취해 벽 위에는 까마귀 나네 / 醉墨鴉飜壁
우리 공 돌아가지 못하게 해서 / 無使我公歸
이 곳에서 좋은 손님 되게 하소서 / 於焉作佳客
《상동》

기자조(箕子操) [소세양(蘇世讓)]
하늘 몹시 포악하여 우리나라 돕지 않아 / 天疾威兮不祚我商
나의 두 눈 침침해져 햇빛을 볼 수 없네 / 目窅窅兮未見日光
왕께서는 착한데도 나는 좋은 재주 없어 / 王聖善兮我無良
나의 두 눈 감고파라 선왕께 부끄럽네 / 欲瞑我目兮羞我先王
아아 내 차라리 노예가 될지언정 / 吁嗟兮我寧爲奴兮
어찌 차마 거짓으로 미친 척이야 하겠나 / 寧忍發出狂
《상동》

동방오장(東方五章). 설 급사(薛給事)에게 답하다. [소세양]
아아 우리나라 동방 나라는 / 維我東方
산 있어서 푸르고 푸르른 데다 / 有山蒼蒼
물 있어서 드넓고도 깊기도 하네 / 有水泱泱
군자께서 이곳에 이르러 오니 / 君子戾止
빛나는 문장을 지니셨도다 / 維其有章

우리에게 좋은 손님 오시었으니 / 我有嘉賓
나의 마음 기쁘고도 즐거운 터에 / 我心則愉
나에게 옥으로 된 패를 주시네 / 我以佩琚

우리에게 좋은 손님 오시었음에 / 我有嘉賓
이미 공경하는 데다 오래 머물며 / 旣敬且久
나에게 옥으로 된 패를 주시네 / 我以佩玖

무엇으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나 / 何以報之
산초와 난초로다 보답하리라 / 報之以椒蘭
덕 있어서 향내음을 폴폴 풍기매 / 有德斯馨
오로지 길게 길게 영탄하누나 / 唯以永嘆

무엇으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나 / 何以報之
마름풀과 연잎으로 보답하리라 / 報之以芰荷
옷 만들어 입음에 싫지 않으니 / 服之無斁
그 즐거움 참으로 어떠하리오 / 其樂如何
《이상 모두 상동》

총수산(蔥秀山). 당 선생(唐先生)의 시를 차운하다 [소세양]
내 나란히 푸른 산 향해 가노니 / 我竝靑山行
산길 갈 제 좋은 경치 참으로 많네 / 山行信多景
계곡 연못 맑아서 밑 다 보이고 / 淵潭淸見底
숲 나무들 푸르른 빛 교차하누나 / 杉檜翠交影
더구나 강 위에는 하늘 흐려서 / 況當江陰天
바람과 해 쓸쓸하고 싸늘한 데랴 / 風日凄以冷
쓸쓸하니 저녁 나절 비가 걷히자 / 蕭蕭晩雨霽
높다란 이 고개가 보이는구나 / 突兀見斯嶺
바위와 산 서로 끼고 합해져 있고 / 巖巒互迴合
산골짜긴 텅 비어서 고요만 하네 / 洞壑極沖靜
마치도 그림 병풍 편 것 같으니 / 有如畫圖開
단청 칠해 환하게 할 필요 없으리 / 不用丹靑炳
지난날에 동 학사 그분께서는 / 曩時董學士
좋은 경치 유람하며 진경 보았네 / 探情得眞境
이 곳 경치 보고서는 마음 즐거워 / 眷玆心賞諧
줄줄이 시구 지어 읊어대었네 / 更將文字騁
지금에도 맑은 풍채 늠름하여서 / 至今凜淸風
세월 오래 지난 것을 못 깨닫겠네 / 不覺歲月迥
그분 마음 아는 사람 마침 있어서 / 賞音會有人
두 분 사신 다시 와서 유람하시네 / 二妙復來省
양춘곡을 뒤 이어서 화답을 하니 / 陽春一繼和
필력이 굳세고도 웅걸차다네 / 筆力肆豪猛
못난 내가 그 뒤에 끼이게 되어 / 小子忝後塵
성대한 일 맘속으로 이미 알았네 / 盛事心已領
지난 일을 생각하면 느꺼웁나니 / 攬舊又感今
마음속의 회포 더욱 경경해지네 / 中懷益耿耿
읊조리며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 沈吟久佇立
앞 봉우리 어둑어둑해지려 하네 / 前峯欲含瞑
《상동》

한강(漢江)에서 사신을 모시고서 잔치하다 [소세양]
끊어진 길 강언덕을 끼고 돌았고 / 斷徑連崖轉
높은 누각 강물 향해 세워져 있네 / 高樓面水開
술과 안주 잔치 위해 차려져 있고 / 杯盤供宴賞
풍악 소리에 맑은 하늘 우레 울리네 / 歌鼓隱晴雷
강가 멀어 안개 낀 숲 아득도 한데 / 沙遠迷煙樹
조수 올라 물가 바위 파묻히었네 / 潮廻沒釣臺
강산 경치 이와 같이 빼어나기에 / 江山如許勝
사신께서 응당 여기 온 것이리라 / 應爲使星來
《상동》

녹봉 급사(鹿峯給事)에게 답하다 [소세양]
진중한 용문에 어찌 쉽게 오르리오 / 珍重龍門豈易攀
담소하는 사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네 / 屢承淸誨笑談間
이 뒷날에 다시 만날 길 없음을 알겠고 / 極知後會終無地
가시는 길 한가롭지 않으리니 어쩔거나 / 其奈前程苦未閒
좋은 경치 바쁜 속에 지나쳐 버리고는 / 佳境摠爲忙裏過
좋은 시구 시낭 속에 담아서 돌아가리 / 好詩空貯槖中還
내일 아침 바라보면 구름과 산 멀어서 / 明朝悵望雲山遠
아득해진 신선 자취 노반에 있으리라 / 杳杳仙蹤隔鷺班
《상동》

양책관으로 가는 도중에[良策道中]. 차운하여 짓다. [소세양]
봄 구름 비 머금어 서늘해지려 하니 / 春陰釀欲凄迷
먼 길에 진흙 길을 갈 일이 걱정되네 / 長路愁衝滑滑泥
닫는 안개 좇는 바람 먼 산으로 돌아가고 / 奔霧追風歸遠岫
흐르는 물 들판 지나 앞 시내로 내닫누나 / 亂流經野赴前溪
작은 포구 드는 조수 평시처럼 올라오고 / 潮從小浦平時上
들판 나는 제비들 곳곳마다 낮게 나네 / 燕掠平蕪盡處低
발을 높이 거두고 산기운 바라보니 / 高捲緗簾望山氣
석양빛은 아직도 서쪽 산에 남아 있네 / 夕陽猶在短峯西
《상동》

태평관(太平館). 차운하여 짓다. [소세양]
눈길은 산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고 / 望眼山連北
마음은 달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누나 / 歸心月向西
나그네 혼에다가 이별의 한 있음에 / 覊魂與別恨
닭이 우는 오경에는 더욱더 수심 깊네 / 愁殺五更鷄
《상동》

처음 진달래꽃을 보고. 운강 수찬(雲崗修撰)의 시를 차운하다. [소세양]
새벽녘 바닷가에 노을 붉게 타는데 / 際曉紅蒸海上霞
모래 언덕 돌 절벽은 제멋대로 기울었네 / 石崖沙岸任欹斜
진달래꽃 봄소식을 전하고 싶은 맘에 / 杜鵑也報春消息
봄바람 속에 먼저 한 나무 꽃 피웠네 / 先放東風一樹花
《상동》

채지(採芝)에게 주다 [최숙생(崔淑生)]
푸른 산만 보이고 마을은 안 보이니 / 只見靑山不見村
어부가 무릉도원 찾을 길이 없구나 / 漁郞無路覓桃源
동풍에게 내 정녕히 부탁하여 말하노니 / 丁寧爲報東風道
날리는 꽃 따라서 동구문 밖 가지 마소 / 莫逐飛花出洞門
《간재잡설》

눈을 만나다[逢雪] [어무적(魚無跡)]
말 위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니 / 馬逢新雪
외로운 성 문 닫으려 하는 때이네 / 孤城欲閉時
차츰차츰 술기운이 사라져 가서 / 漸能銷酒力
시 읊는 나의 수염 얼려고 하네 / 渾欲凍吟髭
지는 해는 석양빛을 못 남기었고 / 落日無留景
깃든 새는 편안하게 가지 못 앉네 / 棲禽不定枝
파교에서 나귀 타고 가는 흥취를 / 灞橋驢背興
내 응당 옛사람과 기약하리라 / 與故人期
《명시종 및 지북우담》

조령(鳥嶺) [이효칙(李孝則)]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 秋風黃葉落紛紛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 / 主屹山高半沒雲
이십사교 다리 아래 오열하는 물소리를 / 二十四橋嗚咽水
일 년 새에 세 차례나 객중에서 듣누나 / 一年三度客中聞
《명시종》

긴 무지개 [정사룡(鄭士龍)]
둥그런 무지개가 맑은 물 위 걸렸는데 / 垂虹屈曲跨淸波
물풀의 향기 속을 도란대며 지나가니 / 藻荇香中笑語過
흡사하긴 삼백 척 길고 긴 송강에서 / 恰似松江三百尺
배를 대고 채릉가를 듣는 것 같네 / 檥船聞唱採菱歌
《상동》

답답함을 풀다 [정사룡]
뜻 내키어 책을 편 채 앉아 있다가 / 隨意攤書坐
외로이 읊조리며 석양빛 보네 / 孤吟對晩暉
강바람에 배 돛은 잔뜩 부풀고 / 岸風帆腹飽
강가 비에 갈대 싹은 오동통하네 / 洲雨荻芽肥
울 뚫어져 강 풍경 훤히 보이고 / 籬缺通江色
발 내려져 제비 날 때 걸리적대네 / 簾垂礙燕飛
누가 알리 봄나물 뜯는 계절에 / 誰知采蘭節
병중에 봄옷으로 갈아입는 걸 / 和病試春衣
《지북우담》

시구[句] [정사룡]
즐기는 곳이라고 말하지 말라 / 不謂交
뒤바뀌어 송별하는 정자 되리라 / 飜成送別亭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망원정(望遠亭). 차운하여 짓다. [김안로(金安老)]
그윽한 흥 사람 정신 끌리게 하니 / 幽興牽人惱
유람 길 먼 걸 어찌 애석해하리 / 遊蹄豈惜遙
옅은 구름 포구에 걸리어 있고 / 殘雲橫浦口
백로는 산허리를 비껴 나누나 / 飛鷺割山腰
강 잔잔해 배 닻줄은 풀어져 있고 / 江穩開輕纜
조수 올라 끊긴 다리 파묻혔는데 / 潮生沒斷橋
이국 땅서 돌아갈 생각 간절해 / 異鄕歸思促
마음은 대궐 향해 달리어 가네 / 心趁紫宸朝
《명시종》

한강에서 사신을 모시고 잔치하다.[漢江陪宴] 차운하여 짓다. [김안로]
인간 세상 단구 있다 믿지를 않았다가 / 人間不信有丹邱
한강에서 배를 타고 십주로 나아가네 / 漢水仙舟卽十洲
저녁 해 물에 잠겨 붉은 기운 출렁대고 / 夕日蘸波紅漾漾
강 안개 나무 닿아 푸른 기운 서리누나 / 江煙連樹翠浮浮
맑은 내에 시 떠올라 벽에다가 시를 쓰고 / 晴川有句還題壁
긴 피리는 누가 부나 다시 누에 기대네 / 長笛何人更倚樓
내일 아침 천상에서 먼 곳을 바라보면 / 天上明朝遙悵望
먼 변방 땅 이곳 유람 다시금 기억나리 / 遐陬能復記玆遊
《상동》

태평관(太平館). 차운하여 짓다. [윤인경(尹仁鏡)]
붉은 꽃잎 강언덕에 표표히 날리우고 / 紅惜花飄岸
푸른 버들 다리 위를 쓸면서 스치는데 / 靑憐柳拂橋
강바람은 삽상하게 멀리서 불어오고 / 江風吹颯颯
내리는 비 선창을 쓸쓸하게 때리누나 / 篷雨打蕭蕭
주렴 걷힌 누대에선 젓대 소리 들려오고 / 簾捲樓橫笛
산은 비어 골짝에선 나무하는 소리나네 / 山空谷響樵
사신이 이곳 경치 버려두고 떠나간 뒤 / 雙旌賞去
고개 돌려 바라보니 바다 하늘 아득하네 / 回首海天遙
《상동》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차운하여 짓다. [윤인경]
성 밖의 맑은 강 그 강가의 누대에 / 郭外澄江江上臺
올라보니 티끌 기운 벗어난 걸 알겠는데 / 登臨頓覺隔氛埃
먼 산에 구름 걷혀 비는 막 개이었고 / 遙山雲斂雨初霽
먼 포구 잔잔하여 조숫물 또 올라오네 / 極浦波平潮又來
밝은 달 사신들을 마중하는 듯하고 / 明月似迎星槎出
가벼운 돛 저녁 바람 맞으면서 내달리네 / 輕帆須趁晩風開
시절 좋고 경개 좋고 손님마저 훌륭하매 / 佳辰佳景兼佳客
흥취 타고 숲 정자서 술잔을 기울이네 / 乘興林亭倒手盃
《상동》

차운하여 오 부사(吳副使)와 작별하다 [김인손(金麟孫)]
이별할 제 모두 취해 오사모는 삐딱하고 / 臨分盡醉側烏紗
긴 길은 구불구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長路高低日已斜
봄비는 정이 많아 가는 길 질게 하고 / 好雨多情知滑道
봄바람은 이별 슬퍼 꽃잎을 흐트리네 / 輕風惜別解飛花
가는 봄 가는 손님 멈추게 하려 하나 / 留春縱欲兼留客
대궐과 집 그립다니 어쩌면 좋으리오 / 戀闕其如又戀家
한번 가면 중국 땅 멀어서 아득하니 / 一去茫茫遼薊遠
은하수 어느 곳서 신선 뗏목 물어보나 / 銀河何處問仙槎
《상동》

태평관(太平館). 차운하여 짓다. [심언광(沈彦光)]
봄새는 꽃가에서 지저귀구요 / 春鳥花邊啼
까마귀는 나무 끝서 밤을 묵는데 / 暮鴉樹頭宿
무슨 일로 멀리 와서 노니는 사람 / 何事遊遠人
이 좋은 밤 촛불 잡고 즐기지 않나 / 不秉良宵燭
《상동》

망원정시(望遠亭詩) [심언광]
흰 물새는 찬 물가에 기대어 있고 / 白雁依寒渚
푸른 나귀 작은 다리 건너가누나 / 靑驢度小橋
《정지거시화》

한강에서 사신을 모시고 잔치하다.[漢江陪宴] 차운하여 짓다. [허흡(許洽)]
푸르른 강 그 근원은 오대산 거기인데 / 綠水靈源自五臺
봄비가 강물 더해 티끌 기운 없어졌네 / 新添好雨絶塵埃
봄풀 자란 긴 강가로 배를 타고 다가가니 / 長洲芳草移船近
먼 물가의 갈매기들 노를 피해 날아오네 / 遠渚輕鷗避棹來
이 경치들 오늘의 흥 돋우기 위한 거니 / 景物盡供今日興
모름지기 회포를 이 속에서 펴소서 / 襟懷須向此中開
외람되이 끼는 거는 내 분수가 아니거니 / 猥參勝引非吾分
바위 앞 향해 가서 옥 술잔을 기우리리 -그 나라에 주암(酒巖)이 있는데, 그 아래에서 술이 흘러나온다. / 擬向巖前倒玉杯
《명시종》

시구[句] [허흡]
어촌 객점 해 기울자 먼 데서 피리 울고 / 漁店日斜遙笛起
바다 어귀 바람 급해 새벽 돛 펼쳐졌네 / 海門風急曉帆開
《정지거시화》

오 부사(吳副使)와 작별하면서. 차운하여 짓다. [김근사(金謹思)]
방공에는 해마다 얇은 비단 축나는데 / 方空歲歲蹙輕紗
책상 맡엔 향연이 한줄기 피어나네 / 半榻香煙一穗斜
만리 먼 길 오고 가는 나비의 꿈이고 / 萬里往來蝴蝶夢
온 봄 내내 피고 지는 진달래꽃이네 / 三春開落杜鵑花
먼 곳에서 피리 불 때 누가 고향 그리는가 / 吹殘遠笛誰懷土
좋은 시절 다 가는데 고향 집을 떠나 있네 / 過盡良辰不在家
해 저문 관산에는 구름이 격했는데 / 日暮關山雲樹隔
은하수 어느 곳에 신선이 탄 뗏목 대나 / 天津何處泊靈査
《명시종》

한강에서 놀다.[游漢江] 차운하여 짓다. [윤은보(尹殷輔)]
강가는 저절로 백 척 누대 이루었고 / 江上天然百尺臺
맑은 물결 맑아서 티끌 없는 거울이네 / 澄波無綠鏡無埃
아득히 먼 포구에는 배들이 오고 가고 / 茫茫極浦舟南北
까마득한 하늘에는 새들이 오고 가네 / 渺渺長空鳥去來
강가 풀은 정이 있어 읊는 밖에 푸르르고 / 汀草有情吟外碧
강언덕 꽃 뜻에 따라 바라보는 속에 폈네 / 岸花隨望中開
모시고서 잔치함은 내 분수에 넘친 거니 / 叨陪高會誠
흥을 타고 일백 잔의 술이나 마시려네 / 乘興還須倒百杯
《상동》

개성(開城) [황기(黃琦)]
흰 망아지 묶어 두기 어려운 탓에 / 白駒難自縶
푸른 눈이 다시금 자리 떠나네 / 靑眼更離筵
강과 바다 서로 간에 잊고 사는 곳 / 江海相忘處
연기와 물결 속에 해가 저무네 / 煙波欲暮天
지는 꽃잎 취한 소매 끝에 날리고 / 落花飄醉袖
꽃다운 풀 읊조리는 채찍에 드네 / 芳草入吟鞭
시 짓는 거야 참말 여사인 거고 / 翰墨眞餘事
공명이야 젊었을 때 바라는 거네 / 功名正妙年
《상동》

개성의 태평관. 차운하여 짓다. [김안국(金安國)]
온혜릉 황폐한데 우물물만 괜히 맑고 / 溫鞵陵廢井空
종제전 황량한데 이름만 남아 있네 / 種穄田荒但記名
옛 자취는 시대 따라 없어지지 아니하니 / 舊跡不隨時代滅
지는 해에 말 멈추고 마음 상해 하누나 / 停驂落日傷情
《상동》

중국 사신 장승헌(張承憲)의 ‘한강에서 놀다.[游漢江]’ 시를 차운하다. [신광한(申光漢)]
하늘 위 은하 근원 오대산에 떨어짐에 / 天上河源落五臺
누 앞의 맑은 모습 티끌 세상 격해 있네 / 樓前澄影隔塵埃
봄 다 지난 양화도엔 멀리서 배 돌아오고 / 楊花春盡帆歸遠
안개 걷힌 저도에는 물새들 날아오네 / 楮島煙消鴈影來
물색은 나그네를 따라 가지 않았는데 / 物色不隨遊子去
향기론 술 그대 위해 지금 막 열었노라 / 芳樽今爲使君開
삼한 땅의 좋은 경치 그 모두가 방장이니 / 三韓勝地皆方丈
다시금 선풍 빌려 술 한 잔 기울이네 / 更借仙風傾一杯
《열조시집》

계사년 삼월에 모동(茅洞)과 서산(瑞山)에게 부치다 2수(二首) [신광한]
지난해 봄 삼월달 초삼일 삼짇날에 / 去年三月初三日
제비 이미 돌아오고 꽃은 벌써 피었었지 / 燕已歸巢花已開
인사와 천시는 변하는 게 많거니와 / 人事天時多異態
이별 정과 봄 생각이 서로서로 재촉하네 / 別情春思重相催
앞마을과 뒷마을 다 별고가 없을 건데 / 前村後谷應無恙
함께 놀자 약속하고 어째서 아니 오나 / 舊約同游不來
모동의 풍류를 이을 수가 있을 거로 / 茅洞風流還可繼
선산이야 떠났지만 서산이 돌아오네 / 善山雖去瑞山回

삼짇날과 중구일은 해마다 오건마는 / 三三九九年年會
옛 약속은 남았는데 일은 홀로 글러졌네 / 舊約猶存事獨
꽃다운 풀 답청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데 / 芳草踏靑今日是
맑은 동이 흰 술을 옛 친구가 저버렸네 / 淸罇浮白故人
바람 앞의 제비 소리 가녀리게 들리고 / 風前燕語聞初嫩
비 내린 뒤 꽃가지 또한 보기 어렵네 / 雨後花枝看亦稀
모동의 장인이야 속되지가 않거니와 / 茅洞丈人多不俗
봄옷을 전당잡힐 뜻이 능히 없겠는가 / 可能無意典春衣
《상동》

직산(稷山)의 수령 민군(閔君)에게 부치다 [신광한]
찾아가서 고을 서쪽 언덕에서 마주하니 / 招尋相對縣西陵
하얀 해 영롱한데 얼음을 들이누나 / 白日玲瓏看納氷
술에 취해 돌아오니 모두가 꿈 같은데 / 被酒夜歸渾似夢
촌 마을에 때때로 베 짜는 불 켜지네 / 小村時點績麻燈
《상동》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다가 느낌이 있어서 짓다 [신광한]
외로운 배 올라타고 광릉 나루 떠나니 / 孤舟一出廣陵津
열다섯 해 동안이나 죽지 못한 몸이라오 / 十五年來未死身
나는야 정이 있어 청산 얼굴 알 듯하나 / 我自有情如識面
청산이야 그 어찌 예전 사람 기억하리 / 靑山寧憶舊遊人
《상동》

서사(書事) [신광한]
돌아갈 마음 들어 꿈은 절로 아득한데 / 歸思無端夢自迷
선생께선 지금 마을 서쪽에서 늙어 가네 / 先生今老小村西
집 둘러 핀 살구꽃 활짝 펴서 눈 같은데 / 杏花繞屋繁如雪
부슬부슬 봄비 속에 산새가 우짖누나 / 春雨霏霏山鳥啼
《상동》

저물녘의 풍경[暮景] [신광한]
숲나무는 빽빽하여 짙게 푸르고 / 樹密深濃翠
외론 연기 담박하여 구름 되누나 / 孤煙淡作雲
앞마을선 개 짖는 소리 들리고 / 前村聞犬吠
어둔 길은 풀밭을 갈라놓았네 / 暗路草中分
《상동 및 명시종》

한강에서 놀다.[游漢江] 차운하여 짓다. [임백령(林百齡)]
왕실은 천년토록 울타리가 되었거니 / 王室千年作翰藩
기쁘게도 사신 와서 칭송하는 소리 듣네 / 欣聞使節頌聲喧
누 오르자 모시고서 즐기도록 허락하고 / 登樓未捲陪歡賞
배를 타자 마음대로 떠들도록 버려두네 / 汎水還容接笑言
그물 걷는 어부는 욕심 많기 수달이고 / 擧網漁人貪似獺
배를 모는 어린놈은 재빠르기 원숭인데 / 操舟穉子捷於猿
머물러서 창주의 정취 느껴 보다가는 / 夷猶領得滄洲趣
되레 춘풍 맞으면서 고향쪽을 바라보네 / 還向春風望故園
《명시종》

한강(漢江). 차운하여 짓다. [이윤경(李潤慶)]
한강의 형승이야 동쪽 나라 으뜸인데 / 漢江形勝表東藩
사신이 누 오르자 풍악 소리 시끄럽네 / 使節登臨鼓吹喧
경치 대해 번번이 시 지어서 흥 부치고 / 對景每憑詩遣興
맘 통함엔 도리어 통역관 말 빌리누나 / 通情猶借傳言
기심 생각 잊으면 물가 노는 새인 거고 / 忘機自幸參沙鳥
세상 부침 따르면 울에 갇힌 원숭이네 / 隨世何殊束檻猿
고개 돌려 저 멀리 풍광을 바라보니 / 回首風光堪遠矚
봄비 와서 신록이 온 들판에 펼쳐졌네 / 雨催新綠遍郊園
《상동》

임진강(臨津江)에 배를 띄우다 [이찬(李澯)]
임진 나루 좋은 일이 전해 오거니 / 臨津傳勝事
멈춘 부절 신선 배와 비슷하구나 / 駐節似仙舟
연기는 모래밭 가 나무 가렸고 / 煙羃沙邊樹
바람은 물 위 나는 갈매기 도네 / 風廻水面鷗
담소하는 그 가운데 정 깊어지고 / 笑談情不淺
시와 술에 흥 거두기 어려웁나니 / 詩酒興難收
이역 땅서 어쩌다가 만났지마는 / 絶域萍蓬會
오늘의 이 유람을 잊지 마소서 / 無忘此日遊
《상동》

정몽주(鄭夢周)가 사절(死節)한 데 대한 시 2수(二首) [남곤(南袞)]
고려 말기 쇠하여서 태운이 성하자 / 麗季衰微泰運升
뭇 현인들 거기 붙어 모두 날아올랐네 / 群賢攀附總飛騰
오천자 그분께선 조용히 죽음 임해 / 從容就死烏川子
우리 조선 절의가 흥성해지게 했네 / 啓我朝鮮節義興

충성 의리 본디부터 민멸할 수 없는 건데 / 忠義由來不可湮
평상시에 이를 힘써 갈고 닦는 사람 없네 / 平時砥礪且無人
질풍 속에 꼿꼿한 풀 보기 더욱 어렵나니 / 疾風勁草尤難見
고려조의 충신 한 분 알아야만 하는 거네 / 須識高麗一介臣
《열조시집》

산속에 살다 [서경덕(徐敬德)]
화담 연못 가에 있는 초가집 한 채 / 花潭一草廬
깨끗해서 마치 신선 사는 데 같아 / 蕭洒類仙居
산빛은 마루 바짝 펼쳐져 있고 / 山色開軒近
냇물 소리 침상맡에 들려 온다네 / 泉聲到枕虛
동 그윽해 바람은 조용히 불고 / 洞幽風澹蕩
땅 궁벽져 나무들은 우거졌는데 / 境僻樹扶疎
그 가운데 소요하는 사람 있어서 / 中有逍遙子
첫새벽에 글을 읽는 소리 들리네 / 晨朝聞讀書
《명시종》

영통사(靈通寺)에서. 벽에 제한 시를 차운하다. [서경덕]
송계의 외길은 푸른 숲 속 뻗어 있고 / 松溪一路入靑林
구름 아래 절간은 한낮에도 어둑하네 / 陰下禪居晝亦陰
돌 부딪친 시냇물은 삼면을 감돌고 / 觸石泉流三面轉
하늘 기댄 산빛은 만 겹이나 깊숙하네 / 倚天山色萬重深
맑은 기쁨 아침부터 밤중까지 하고 싶고 / 淸歡眞欲朝連夜
좋은 시는 뒷날에 다시 잇기 어려우리 / 勝引應難後繼今
몇 판의 바둑 두며 담소하는 그 가운데 / 數局枯碁談笑裏
구름과 해 이미 서쪽 넘어간 줄 몰랐어라 / 不知雲日已西沈
《상동》

구 대행(歐大行)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신응시(辛應時)]
압록강 강가에서 떠나는 배 보내나니 / 鴨綠江頭送棹聲
동풍 속에 눈물 나는 이 정을 어찌하나 / 東風吹淚若爲情
인간 세상 이별 정에 오늘은 맘 상하거니 / 人間離別傷今日
천상의 그 모습은 이생에선 아득하리 / 天上音容隔此生
기럭 떠난 형포에서 먼 꿈은 놀라 깨고 / 衡浦鴈驚遠夢
봄 다 지난 동정에서 돌아갈 길 아득하네 / 洞庭春盡渺歸程
내 알겠네 먼 곳에서 서로 간에 그릴 적에 / 遙知萬里相思處
남두성은 기울고 조각달 밝을 것을 / 南斗橫斜片月明
《상동》

태평관. 구공(歐公)의 시를 차운하다. [박순(朴淳)]
만리 먼 곳 와서 노니 혼은 응당 끊어지고 / 來遊萬里魂應斷
홀로 푸른 하늘 보니 생각은 멀어지네 / 獨寄靑冥思更賖
하늘 넓어 초향으로 나그네 꿈 날아가고 / 天闊楚鄕飛客夢
길 다하여 봉해에다 신선 배를 머물렀네 / 路窮蓬海駐仙査
산에 닿은 성첩에는 구름 짙어 어둑하고 / 山連睥睨雲長瞑
봄 한창인 연못에는 꽃들이 피려 하네 / 春半池塘草欲花
발 밖의 석양빛 점점 사라져 가는데 / 簾外夕陽看漸沒
수심을 삭이려고 술 마시어 취하누나 / 消愁惟有醉流霞
《상동》

편수관(編修官) 황공(黃公)연도(沿道)에서 지은 시를 보여 주기에 시를 지어 바치다 [이이(李珥)]
한창 때의 사행 길을 내 일찍이 기억커니 / 丁年行役記吾曾
요동 계주 길고 긴 길 나그네가 되었었지 / 遼薊修客念憑
지나는 길가 있는 외론 객점 달 밝았고 / 歷歷道邊孤店月
흐릿한 하늘가서 이른 아침 등불 켰지 / 依依天上早朝燈
좁은 구석 처했으니 무슨 수로 벗어나나 / 身回蝸殼何由轉
아미 반열 다시는 들어갈 수가 없네 / 班入蛾眉不再能
옥서의 새 시에는 물색이 나눠짐에 / 玉署新詩分物色
먼 누대를 한 층 한 층 손으로 가리키네 / 遙臺指點一層層
《상동》

황공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이이]
긴 시내의 눈과 얼음 찬 모래 덮고 있는 / 長川氷雪覆寒沙
이런 날 수심 속에 변방 피리 소리 듣네 / 此日愁聞入塞笳
구름과 진흙 양쪽 이 자리서 나눠지니 / 兩地雲泥分席上
한 강의 남쪽 북쪽 거긴 바로 하늘가네 / 一江南北卽天涯
밤새도록 꾸었던 신선 꿈은 부질없어 / 徒勞永夜游仙夢
은하수의 관월사는 점점 더 멀어지네 / 漸遠明河貫月槎
보배로운 시편 지어 보내 주신 분에게 / 珍重詩篇兼贈處
부끄럽게 연석으로 좋은 시에 보답하네 / 媿將燕石報瓊華
《상동》

정사(正使) 황공(黃公)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김첨(金瞻)]
달 지는 변방 성에 뿔피리 울리는데 / 月落關城鼓角鳴
사신 수레 새벽에 북경 향해 달려가네 / 星軺夙駕向神京
긴 강물은 예로부터 남과 북 나눴으니 / 長江自昔分南北
양쪽 땅에 지금까지 삶과 죽음 격했다네 / 兩地從今隔死生
변방 땅의 구름 얼어 가는 길 흐릿하고 / 接塞凍雲迷別路
겹겹 산에 쌓인 눈 가는 깃발 비추네 / 亂山晴雪照行旌
어떻게 견디려나 용만 객관 홀로 자며 / 那堪獨夜龍灣館
시름 속에 등불 대해 잠 못 드는 그런 밤을 / 愁對寒燈夢不成
《상동》

정사 황공과 이별하다 [고경명(高敬命)]
좋은 소식 서쪽으로 부쳐보낼 길 없는데 / 好音無路托西歸
마음은 신선 탄 배 뒤쫓아서 날아가네 / 心仙槎自奮飛
압록강 찬 물은 이별 눈물 보태지고 / 鴨水寒波添別淚
골악에 내리는 눈 옷 위에 점을 찍네 / 鶻岑晴雪點征衣
부질없이 부채를 소매 속에 간직하니 / 謾將便面藏懷袖
무슨 수로 모시면서 말고삐를 잡으리오 / 何計承顔御靮鞿
바닷가 못 벗어난 채 몸은 벌써 늙었으니 / 匏繫海濱身已老
한 백년의 외로운 몸 그 누구를 의지하나 / 百年形影欲誰依
《상동》

회포를 적다 [김굉필(金宏弼)]
한가로이 홀로 살며 오고 감을 끊은 채 / 處獨居閑絶往還
명월 불러 내 청빈함 비치게 할 뿐이네 / 只呼明月照淸寒
부탁노니 그대는 생애의 일 말을 말라 / 憑君莫話生涯事
만 이랑 흰 물결에 몇 겹의 산이로다 / 萬頃煙波數疊山
《지북우담》

연잎에 내리는 비 [최해(崔瀣)]
팔백 섬의 후추를 쌓아 둔 것을 / 胡椒八百斛
천고토록 어리석다 비웃는데도 / 千古笑其愚
어찌하여 녹옥으로 됫박 만들어 / 如何綠玉斗
종일토록 명주알을 헤아리는가 / 竟日量明珠
《간재잡설》

호당(湖堂)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다 [강극성(姜克誠)]
강에 해는 늦도록 뜨지를 않고 / 江日晩末生
아득하니 십리에 안개 깔렸네 / 蒼茫十里霧
노를 젓는 소리만이 들리어 올 뿐 / 但聞柔櫓聲
가는 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 / 不見舟行處
《상동 및 명시종》 ○ 《명시별재(明詩別裁)》에 이르기를, “심덕잠(沈德潛)이 말하기를, ‘당나라 무명씨(無名氏)의 「안개 짙어 사람은 아니 보이고, 은은하게 노젓는 소리 들리네.[煙昏不見人 隱隱數聲櫓]」라는 시구가 있는데, 새벽 풍경을 표현한 것이 모두 그림으로는 능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였다.” 하였다.

옛 절에서 꽃을 보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이르기를, “《조선시선(朝鮮詩選)》에는 정(婷)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이는 조선의 여자이다.” 하였고,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이르기를, “정의 시 한 수가 오자어(吳子魚)의 《조선시선》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 전수지(錢受之)가 말하기를, ‘이는 응당 조선의 여자이다.’ 하였다. 그러나 《조선채풍집(朝鮮采風集)》에도 정의 시를 수집해 기록하면서 정이란 이름 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라고 썼는데, 이는 동국(東國)의 존칭이니, 아마도 민간의 여자는 아닌 듯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월산대군은 덕종대왕(德宗大王)의 왕자(王子)이다. 그런데도 목재(牧齋)와 죽타(竹坨)가 모두 조선의 여자로 의심한 것은 그의 이름이 여자 이름 같아서이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봄 깊은 옛 절에 제비들은 훨훨 날고 / 春深古寺燕飛飛
깊숙한 집 겹대문에 찾아오는 사람 적네 / 深院重門客到稀
내가 꽃을 보러 갈 땐 꽃이 한창 지는 때라 / 我正尋花花正落
꽃을 보러 갔다 되레 꽃 애석해 돌아오네 / 尋花還爲惜花歸
-《명시종》에는 ‘還’이 ‘飜’으로 되어 있다.
《열조시집 및 명시종》

소설당(小雪堂) [오시봉(吳時鳳)]
땅은 바로 경치 좋은 황강 땅이고 / 地卽黃崗勝
관직은 옥국처럼 한가한 데네 / 官如玉局閑
어언간에 소설날이 돌아왔기에 / 居然小雪日
소설 자로 편액을 내어 걸었네 / 喚作此堂顔
《지북우담》

정씨(鄭氏)의 연못 정자에서 놀다 [김정(金淨)]
주인께서 하늘 비밀 드러내어서 / 主人發天祕
창랑수 가에다가 마을 이뤘네 / 籬落成滄浪
외론 정자 물오리나 갈매기 같아 / 孤亭如鳧鷖
나를 싣고 물 가운데 떠서 있구나 / 載我浮中央
맑은 바람 모자 위에 불어서 오고 / 淸飆扇巾幘
푸르른 산 술잔에 비치이는데 / 山翠滴壺觴
물고기들 처마 그늘 아래 모이고 / 游魚聚簷影
버들개지 해당화 가지 걸리네 / 飛絮骨海棠
애오라지 느긋하게 노는 나그네 / 聊將倦遊客
한번 웃어 가는 세월 떠나보낼 제 / 一笑酬年光
우거진 만 줄기의 대나무들이 / 森森萬竿竹
으스스 상양을 몰고 오누나 / 颯畓驅商羊
물 위에는 어지러이 물거품 뜨고 / 鏡面亂浮沫
마름과 연 서로서로 기대어 있네 / 藻荇相扶將
조용하게 잔 물결은 찰랑거리고 / 須臾動漣漪
초목들은 석양 받아 빛을 내누나 / 草木耿斜陽
《열조시집》

용담(龍潭)에서 기도하다 [김정]
원숭이는 울고 새는 지저귀는데 / 猿號鳥復噪
사방 산에 어느새 날 저물었네 / 四山忽已暮
물가로 돌아와서 풀들을 보니 / 回汀搴杜若
잎새마다 차가운 이슬 맺혔네 / 葉葉霑涼露
그럭저럭 호숫가서 눈 붙이자니 / 聊就菰蒲眠
가을 소리 높은 나무 거기에 있네 / 秋聲在高樹
《상동》

시골집 [김정]
물이 많은 고을 이름 풍덕군인데 / 水鄕豐德郡
쓸쓸한 절 멀리 연기 속에 떠 있네 / 蕭寺遠浮煙
땅 평평해 마을 등불 가깝게 있고 / 地□村燈近
하늘은 물기운과 잇닿아 있네 / 天垂水氣連
《상동》

규중의 가을날[秋閨] [김정]
천산에는 낙엽지고 강물은 아득한데 / 木落千山江杳杳
기럭 나는 가을 하늘 구름은 아스랗네 / 秋空一鴈秦雲渺
빈 뜨락엔 달 밝아서 귀뚜리 소리 길고 / 空堦月皎蛩音長
풀은 이슬 젖어서 반딧불 빛이 적네 / 蔓草露滴螢光小
한밤중이 지나서 등불은 가물대고 / 耿耿殘燈夜半過
붉은 누각 서쪽으로 은하수 기우는데 / 紅樓西畔落星河
변방 보낼 옷 다 짓고 추워 잠 못 이룰 제 / 邊衣剪罷寒不寐
쌀쌀한 서풍 불어 시든 연잎 우누나 / 颯颯西風鳴敗荷
《상동》

나그네의 회포[旅懷] 《간재잡설(艮齋雜說)》에는 ‘강남(江南)’으로 되어 있고,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강남춘사(江南春思)’로 되어 있다. [김정]
강남의 남은 꿈에 한낮에도 시름하니 / 江南殘夢晝懨懨
수심은 세월 따라 날로 날로 더해지네 / 愁逐年華日日添
제비들은 아니 오고 봄은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去
-《지북우담》에는 ‘雙燕來時春欲暮’로 되어 있다.
가랑비에 살구꽃은 아래로 축 처졌네 / 杏花微雨下重簾
《상동 및 명시종, 간재잡설, 지북우담》

여강(驪江) [최수성(崔壽城)]
해 저무는 푸르른 강물 위에는 / 日暮滄江上
날씨 차서 물결이 절로 이누나 / 天寒水自波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어야 하리 / 孤舟宜早泊
밤이 오면 풍랑 응당 높아지리라 / 風浪夜應多
《명시종》

그림에 제하다 [최수성]
늙어 빠진 원숭이가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저물녘에 마른 나무 등걸 올라가 / 落日古槎上
우두커니 앉아서는 꼼짝 안 하니 / 兀坐首不回
일천 산의 메아리를 듣는 것이라 / 想聽千山響
《지북우담》

이별하면서 남기다 [정지승(鄭之升)]
풀 가늘고 꽃 한가한 물가의 정자인데 / 細草閑花水上亭
-《명시별재》에는 ‘悵望溪亭夕照明’으로 되어 있다.
푸른 버들 그림 같아 봄 성을 가리웠네 / 綠楊如畫掩春城
나를 위해 양관곡을 부르는 이 하나 없고 / 無人爲唱陽關曲
오로지 푸른 산만 떠나는 걸 전송하네 / 惟有靑山送我行
《명시종 및 지북우담, 간재잡설》 ○ 《명시별재》에 이르기를, “심덕잠(沈德潛)이 말하기를, ‘정취가 어리어서 당나라 시인들의 작품과는 다른 맛이 있어 구별된다.’ 하였다.” 하였다.

젓대 소리를 듣다 [정작(鄭碏)]
멀리 있는 모래밭 가 사람을 보고 / 遠遠沙上人
-《명시종》에는 ‘遠遠’이 ‘迢迢’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백로인 줄만 알았네 / 初疑雙白鷺
바람을 맞으면서 젓대 불 적에 / 臨風忽橫笛
쓸쓸하니 맑은 강에 날이 저무네 / 廖亮江天暮
《지북우담 및 명시종》

벗이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임억령(林億齡)]
적막한 시골에 소미가 숨었는데 / 寂寞荒村隱少微
쓸쓸한 돌길이 사립문에 닿아 있네 / 蕭條石逕接柴扉
몸은 유수 같아서 세상에 나갔건만 / 身同流水世間出
꿈속에선 백구 되어 강가를 나네 / 夢作白鷗江上飛
산은 창문 에워싸고 구름은 스며들며 / 山擁客牕雲入座
비는 책상 들이치고 나뭇잎은 휘장 치네 / 雨侵書榻葉投幃
표연히 또 관직에서 물러날 계획하나 / 飄然又作簪計
진토가 무슨 수로 흰옷으로 변할까 / 塵土何由化素衣
《지북우담》 ○ 또 《명시종》에도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일부를 잘라 내고 절구(絶句)로 만들었다.

만력(萬曆) 병오년 5월에 태사(太史) 주난우(朱蘭嵎)가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유근(柳根)]
사신 행차 동쪽 와서 조서를 반포할 제 / 玉節東來鳳詔頒
저문 봄날 강가에서 잠시 얼굴 뵈었네 / 暮春江乍承顔
높은 흉금 형해 밖에 홀로 빼어나고 / 高懷獨出形骸外
고상한 감상 길이 수석 사이 남으리라 / 雅賞長存水石間
눈길 끊겨 혼 꿈이 먼 걸 감당 못하고 / 目斷未堪魂夢遠
형체 남아 희끗한 귀밑머리만 보이네 / 形留只得鬚毛班
이별한 뒤 그리는 맘 밝은 달과 같을 거나 / 相思別後如明月
만리 멀어 맑은 풍채 잡을 길이 없을 거리 / 萬里淸光不可攀
《명시종》

교외 역원(驛院)의 이별하는 자리에서 [이호민(李好閔)]
서쪽 교외 연못에 푸른 연 가득하매 / 西郊菡萏綠盈池
이별하는 정표로 그 연꽃 꺾어 주네 / 折得芳華贈別離
금대로 떠나가도 정만은 안 끊어져 / 此去金臺情不斷
이내 마음 진정코 연뿌리 속 실 같으리 / 寸心眞似藕中絲
《상동》

규중(閨中)의 원망 [임제(林悌)]
열다섯 살 시냇가의 저 아가씨는 / 十五越溪女
남부끄러 말 못하고 헤어지고선 / 羞人無語別
돌아와서 겹대문을 닫아건 뒤에 / 歸來掩重門
배꽃 비친 달 보면서 눈물 흘리네 / 泣向梨花月
《간재잡설》 ○ 《명시별재》에 이르기를, “심덕잠이 말하기를, ‘마치 최국보(崔國輔)의 소시(小詩)를 읽는 것 같다.’ 하였다.” 하였다.

중화(中和)로 가는 도중에 [임제]
파리한 말 나른한 객 등에 태우고 / 羸驂駄倦客
해 저무는 황주 땅을 떠나는구나 / 日暮發黃州
애석할사 답청절 이 좋은 날에 / 可惜踏靑節
부벽루에 올라 보지 못하는구나 / 未登浮碧樓
미인들은 금루곡을 노래 부르고 / 佳人金縷曲
강 위에는 목란주가 떠 있을 건데 / 江水木蘭舟
적적한 여기 이곳 생양관에는 / 寂寂生陽館
밤 되자 등 외로워 가을과 같네 / 孤燈夜似秋
《명시종 및 지북우담》

무너진 홍경사(弘景寺)에서 [백광훈(白光勳)]
가을풀 황량한 고려 때의 절 / 秋草前朝寺
깨진 비엔 학사의 글 남아 있구나 / 殘碑學士文
천년토록 물은 절로 흘러가는데 / 千年自流水
해질녘에 외로이 뜬 구름을 보네 / 落日見孤雲

《지북우담》

봉은사(奉恩寺) [백광훈]
우연히도 말미 받아 절간에 찾아드니 / 偶因休浣到沙門
술 마시고 시 지을 옛 절이 남아 있네 / 把酒題詩古寺存
붉은 연꽃 한 연못에 바람은 절 안 가득하고 / 紅藕一池風滿院
많은 나무 매미 울고 비는 마을 잇닿았네 / 亂蟬千樹雨連村
흰머리로 벼슬에 매인 것이 부끄럽고 / 深慚皓首從羈宦
푸른 산이 옛 고향과 비슷한 게 기쁘구나 / 猶喜靑山似故園
듣건대 금호의 안개 경치 기이타니 / 聞說錦湖煙景異
어느 때나 돌아가서 참 근원을 물어보나 / 何時歸棹問眞源
《상동》

현진(縣津)에 저녁 나절 배를 대다 《명시종(明詩綜)》에는 백광훈(白光勳)의 시로 되어 있다. [백광면(白光勉)]
객선을 촌마을에 대던 그날은 / 旅泊依村
늘그막에 다시 유람하는 때였네 / 重遊屬暮年
강 건너 절에서는 종소리 울고 / 鍾聲隔岸寺
물 건너는 배 안에선 사람 떠드네 / 人語渡湖船
달 오르자 갈대밭은 아득히 멀고 / 月上蒹葭遠
연기 끼어 섬들은 이어져 있네 / 煙橫島嶼連
밤 깊자 바람 다시 급해지거니 / 夜深風更急
기러기 떼 내려오고 잠은 안 오네 / 落鴈不成
《지북우담 및 명시종》

유배 가는 도중에 [조희일(趙希逸)]
가고픈 맘은 항상 관동으로 향하는데 / 歸心日夜關以東
돌아갈 계획 이젠 헛것 되고 말았네 / 歸計卽今還墮空
한 해 봄은 만리 밖서 동하기 시작했고 / 一年春動萬里外
외로운 산 숲 속에는 둥근달 떠오르네 / 孤山月出千林中
수심 속에 이내 몸 멀다는 것 깨닫겠고 / 愁來但覺此身遠
취한 뒤에 나의 길 궁하단 걸 모르겠네 / 醉後不知吾道窮
-삼가 살펴보건대, 《사조시선(四朝詩選)》에는 ‘吾’가 ‘我’로 되어 있다.
경주와 뇌주는 그 어떠한 곳이며 / 瓊州雷州何許地
옛사람과 지금 사람 같은가 다른가 / 古人今人同不同
《명시종》 ○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이르기를, “장한첨(張漢瞻)이 말하기를, ‘뜻과 정취가 시원시원하다.’ 하였다.” 하였다.

‘연서도우(延曙都郵)’ 시를 차운하다 [조희일]
봄추위 싸늘해서 술 조금 깨이는데 / 春寒料峭酒
해 이은 벼슬살이 마음이 한스럽네 / 羈宦連年恨不平
등 어두운 창 밖에 말은 여물 먹고 있고 / 燈暗小牕聞馬齕
꿈 깨인 외론 베개 새벽닭 울음 잦네 / 夢回孤枕數鷄
나의 벗과 더불어서 사귀는 도 논할 뿐 / 祗憑吾友論交道
누굴 향해 세속 정을 말하려고 하는가 / 欲向何人說世情
나라에 몸 바치기로 이미 마음 먹었으니 / 已判此身同許國
그대와 종시토록 이내 마음 밝으리라 / 與君終始寸心明
《지북우담》

용만(龍灣)에서 우연히 짓다 [조희일]
압록강 서쪽은 바로 중국 땅이거니 / 鴨水西邊是漢關
하늘과 땅이 잠가 물굽이로 갈라놨네 / 天扃地鐍限重灣
연기 끼고 모래 쌓인 인주성의 보루이고 / 荒煙野磧麟州戍
지는 해에 외론 구름 마이산 그곳이네 / 落日孤雲馬耳山
바람 자는 빈 강에는 잔잔하게 물결 일고 / 風定空江波瀲瀲
눈 녹는 봄 성곽엔 물방울 방울지네 / 雪消春郭溜潺潺
고향 집이 그리우나 소식 들을 길 없어서 / 思家未得平安字
돌아갈 생각 오직 꿈에서나 오고가네 / 歸思惟應夢往還
《상동》

강호주인(江湖主人)에게 주다 [조욱(趙昱)]
십년 동안 고향 집 삽작 닫아걸었으니 / 十年長掩故山扉
진토의 동화문을 몇 번이나 갔었겠나 / 塵土東華幾染衣
생각건대 감호에 봄 달이 뜨는 밤엔 / 想得鑑湖春月夜
자규 응당 처절하게 불여귀라 울리라 / 子規應喚不如歸
《명시종 및 지북우담》

죽서루(竹西樓) [성운(成運)]
강물은 봄 누각을 스쳐 흐르고 / 江觸春樓走
하늘은 눈 덮인 고개 감쌌네 / 天和雪嶺圍
구름은 붓을 따라 물들어 가고 / 雲從詩筆染
새들은 술자리를 스치고 나네 / 鳥拂酒筵飛
바다에 뜬 지금이 옳은 것이고 / 浮海知今是
명리 쫓던 지난날이 잘못인 거네 / 趨名悟昨非
저녁 되자 솔바람 살살 일더니 / 松風當夕起
소슬하게 하의에 불어 오누나 / 蕭颯動荷衣
《지북우담》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회포를 읊다 [기매(奇邁)]
남산에는 솔과 잣 울창도 하고 / 南山松柏幽
북산에는 연기 안개 짙게 끼었네 / 北山煙霧深
나그네는 다 저물어 어디로 가나 / 遊子暮何之
뜰 나무엔 가을 구름 피어오르네 / 庭樹生秋陰
구름은 먼 봉우리 향해서 가고 / 歸雲向遙岑
저녁 새는 앞 숲에 깃들일 적에 / 宿鳥棲前林
깊은 회포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 幽懷杳不極
맑은 바람 내 옷깃에 불어오누나 / 淸風吹我襟
《명시종 및 지북우담》 ○ 손개사(孫愷似)가 이르기를, “위유(韋柳) 의 시체(詩體)를 본떴다.” 하였다.

종군행(從軍行) [안수(安璲)]
변방 구름 막막하고 관문에 눈 쌓였는데 / 關雲漠漠關雪堆
북녘 바람 사나워서 산 위 나무 꺾여지네 / 北風慘慘山木
긴 강물 얼어붙어 말은 자주 넘어지고 / 長河氷合馬蹄滑
변경에 해 넘어가자 되놈 피리 슬피 우네 / 沙塞日落胡笳悲
한스런 건 나이 어려 군적에 오른 거고 / 自恨少小係軍籍
수심 속에 창을 베고 누워도 잠 아니 오니 / 愁枕金戈眠不得
추운 것과 배고픈 걸 어찌 감히 다 말하리 / 苦寒苦饑不敢言
그 누가 장군 군율 겁내지 않으리오 / 誰人不畏將軍律
중천(中天)에는 수심 섞인 소리가 분분한데 / 中霄愁嘆何紛紜
백성 고혈 실어다가 장군에게 바치누나 / 猶將膏血輸將軍
장군은 흑초피로 만든 옷 즐겨 입어 / 將軍好服黑貂服
열 벌의 초피 값이 금으로 열 근이고 / 十貂皮當十斤
장군은 유난히도 태뢰의 맛 좋아해서 / 將軍獨嗜太牢味
군중에서 하루에 아홉 마리 소가 죽네 / 一日軍中九牛斃
산에는 담비 없고 들판에는 소 없는데 / 山無餘貂野無牛
가렴주구 끝없어서 매질로 닥달하네 / 誅斂無窮箠楚至
솥 안에 있는 쌀과 베틀에 걸린 베를 / 鼎中粒機中布
날마다 장군의 창고로 실어가네 / 日日輸入將軍庫
장군 날로 부자 되고 군사들은 마르는데 / 將軍日富士日瘠
하소연을 하고프나 화를 낼까 겁이 나네 / 欲往訴之逢彼怒
임금께선 군사들이 추울까 걱정하여 / 君王每憂軍士寒
털옷에다 베옷을 세모에 보내지만 / 毛衣布衲輸歲闌
장군이 골고루 나눠 주지 않는 탓에 / 將軍分給苦不遍
살갗은 터지고 손가락은 곱아드네 / 肌膚凍裂手拘攣
충해에다 가뭄이 해마다 들건마는 / 蝗蠱歲旱無歲無
진휼한단 말은 없고 조세만 독촉하네 / 不聞賑恤聞催租
아비와 아들 각각 처자식들 버려두고 / 阿翁棄姑兒棄婦
되놈들의 땅으로 도망쳐서 들어가네 / 過半相携逃入胡
되놈 땅서 겪는 고생 이루 말로 못하건만 / 胡中艱辛不可說
장군에게 고혈을 빨리는 것보단 낫네 / 猶勝將軍浚膏血
장군이여 장군이여 어째서 가지 않나 / 將軍將軍胡不去
떠나가서 공경 돼도 온 군사들 기뻐하리 / 去作公卿一軍悅
대궐은 아득하여 아홉 대문 엄중하고 / 天門杳杳嚴九關
어사들 자주 오나 입을 굳게 다무네 / 御史紛紛深閉舌
염파와 이목이 다시 나지 않음에 / 廉頗李牧不復生
슬픈 노래 격렬하여 내장이 다 타누나 / 激烈悲歌腸內熱
《열조시집》

이소부사(李少婦詞)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철원 이씨(鐵原李氏) 숙경(淑卿)이 양 문학(梁文學)에게 시집갔는데, 얼마 안 되어 양 문학이 한성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다가 급제하고,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어 돌아오지 않자, 숙경이 그를 그리워하다가 가슴이 막혀 죽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애도하여 노래를 지어 그의 한결같은 정절을 기렸다고 한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열조시집》을 보면 ‘선계곡제월아첩(仙桂曲題月娥帖)’ 시에 최고죽(崔孤竹)이라고 칭하고서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고죽은 최경창의 호이므로 아래에다 붙였다. [최경창(崔慶昌)]
상공의 후손인 철원 이씨 숙경은 / 相公之孫鐵城李
규중에서 자라나 자질이 뛰어났네 / 養得幽閨天質美
십칠 년간 규방에서 벗어나지 않다가 / 幽閨不出十七年
어느 날 양씨 집의 아들에게 시집갔네 / 一朝嫁與梁家子
양씨 집의 아들은 난새 봉새 새끼라서 / 梁家之子鸞鳳雛
자질 몹시 뛰어난 훌륭한 인재였네 / 珊瑚玉樹交枝株
연못의 원앙새는 본디 서로 짝 이루고 / 池上鴛鴦本成匹
화단의 나비들은 외로운 적 없는데 / 園中蛺蝶何曾孤
대장부의 장한 뜻에 멀리 가서 벼슬하니 / 丈夫壯志仕遠方
산과 시내 가로막혀 가는 길 멀었네 / 山川阻絶道路長
아녀자는 정 머금고 차마 이별 못하다가 / 兒女含情不忍別
이별한 뒤 못 견디고 애간장이 끊어지네 / 一別那堪腸斷絶
오동나무 잎새 지고 국화꽃 향 풍길 때 / 高梧葉落黃花香
중양절이 오늘인 줄 알고 홀연 놀랐네 / 忽驚今日重陽節
좋은 날은 그대론데 내 님은 곁에 없어 / 佳辰依舊復誰在
뜰 가득한 수유를 따지도 못하였네 / 滿苑茱萸不堪採
높다란 누에 올라 먼 하늘을 바라보니 / 更上高樓望遠天
하늘 끝 눈 닿는 곳 구름 안개 끼어 있네 / 天涯極目空雲煙
곁에 사람 향하여서 속마음 말 안 하고 / 不向旁人道心事
고개 돌려 눈물만 줄줄이 흘리었네 / 回頭滴淚空潸潸
소 떼들 다 돌아가고 산엔 날이 저무는데 / 牛羊歸盡山欲夕
문밖에는 끝끝내 찾아오는 사람 없네 / 門外終無北來客
이내 몸 황천으로 돌아가길 원하노니 / 此身願得歸泉土
죽은 뒤에 그 어찌 이별 고통 있으리오 / 死後那知離別苦
봄꽃 쉬이 떨어지고 난초 일찍 부러지니 / 春花易落蘭早摧
봉대의 휘장에는 거미줄이 드리웠네 / 鳳臺翠帷垂蛛絲
꽃다운 혼 무창의 돌 되지 않았고 / 芳魂不作武昌石
상강의 반죽에다 부쳐서 메말랐네 / 定寄湘江斑竹枯
반죽의 가지 끝에 두견새 피 토하니 / 斑竹枝頭杜鵑血
토한 피와 흘린 눈물 흔적이 안 없어졌네 / 血點淚痕俱不滅
푸른 산의 푸른 풀은 밤이라서 망망한데 / 靑山碧草夜茫茫
천고토록 꽃다운 혼 무덤 위로 달이 뜨네 / 千古芳魂墳上月
《상동》

무릉계(武陵溪) [최경창]
험한 돌 얽힌 새로 한 가닥 길 통해 있고 / 危石纔一徑通
흰구름은 천고토록 신선 자취 감추었네 / 白雲千古祕仙踨
다리 남쪽 다리 북쪽 물어볼 사람 없고 / 橋南橋北無人問
낙엽지고 물이 차긴 만 골짝 다 똑같네 / 落木寒流萬壑同
《지북우담》

채련곡(采蓮曲) [최경창]
강 언덕 길고 긴데 능수버들 늘어졌고 / 水岸依依楊柳多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들려오네 / 小船遙聽采蓮歌
붉던 꽃 다 져서 서녘 바람 차가운데 / 紅衣落盡秋風起
해 저문 물가에는 흰 물결만 이누나 / 日暮芳洲生白波
《상동》

선계곡제월아첩(仙桂曲題月娥帖). 손곡(蓀谷)의 시에 화답하다. [최경창]
푸른 하늘 아득하고 난로는 길고 긴데 / 碧落迢迢鸞路長
바람은 계수나무 꽃 향기를 불어오네 / 天風吹送桂花香
옥퉁소를 불면서 요단 위로 돌아갈 제 / 玉簫歸去瑤壇上
비단 버선 신은 발 서리 속에 차가웁네 / 羅襪寒深一寸霜
《열조시집》

병들어서 호당(湖堂)을 나가다 [김질충(金質忠)]
수심 깊어 하루에 장 아홉 번 꼬이는데 / 常苦愁腸日九廻
우는 새 봄 알림에 홀연히 맘 놀랐네 / 忽驚啼鳥報春來
삼 년 동안 약 먹어도 사람은 병 그대론데 / 三年藥物人猶病
하룻밤 빗소리에 꽃들은 모두 폈네 / 一夜雨聲花盡開
세상일 분분하여 끝날 날이 없는데 / 世事紛紛難自了
하늘 기틀 잘도 돌아 서로 재촉하는구나 / 天機滾滾遙相催
평생에 오래도록 능운 기개 저버린 채 / 平生久負凌雲氣
슬프게도 지금 와선 이미 절반 꺾여졌네 / 怊悵如今半已摧
《지북우담》

복천사(福泉寺) [유영길(柳永吉)]
낙엽 뜨락 구르고 밤비는 내리는데 / 落葉鳴廊夜雨懸
절 등불 깜빡이고 나그네는 잠 못 드네 / 佛燈明滅客無眠
신선 산 한번 오자 지는 봄에 맘 상하니 / 仙山一到傷春暮
-《지북우담》에는 ‘到’가 ‘躡’으로 되어 있고, ‘春’이 ‘遲’로 되어 있다.
오사모가 날 속인 게 이십 년이로구나 / 烏帽欺人二十年
《명시종 및 지북우담》

중의 시축(詩軸)에 제하다 [이영(李嶸)]
구름 끼인 산 어귀엔 풀들이 무성한데 / 流雲山口草凄凄
한밤중에 향연 좇아 물가에 다다랐네 / 夜逐香煙到水西
술 취한 뒤 큰 노래로 밝은 달에 화답하니 / 醉後高歌答明月
강가의 꽃은 지고 두견새는 슬피 우네 / 江花落盡子規啼
《명시종》

제비를 읊다 [이승소(李承召)]
깊숙한 누각 지붕 나직한 처마 아래 / 畫閣深深簾額低
짝을 지어 날다 울다 쌍쌍이 깃들었네 / 雙飛雙語復雙棲
버들 푸른 골목에 봄은 이미 저물었고 / 綠楊門巷春風晩
풀 푸른 못가에 부슬부슬 봄비 오네 / 靑草池塘細雨迷
나비 쫓아 때때로 대숲 속 들어가고 / 趁蝶有時穿竹塢
집 짓느라 종일토록 진흙을 물어 오네 / 壘巢終日啄芹泥
알맞은 곳 집 지으니 그 누가 멸시하리 / 托身得所誰相侮
해마다 새끼 길러 나란히 날아가네 / 養子年年羽翼齊
《상동》


 

[주D-001]第幾重 : 《삼봉집(三峯集)》 권2에는 ‘復幾遠’으로 되어 있다.
[주D-002]전횡(田橫) :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동생으로, 한(漢)나라 때 한신(韓信)이 제왕을 쳐부수자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가, 한나라가 항우(項羽)를 쳐 없애자, 자기를 따르는 무리 500명을 거느리고 오호도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한나라 고조가 사람을 시켜 부르자 낙양(洛陽)으로 가다가 자살하였는데, 그를 따르던 무리 500명도 모두 자살하였다.《史記 卷94 田儋列傳》
[주D-003] : 《동문선(東文選)》 권5 및 《삼봉집》 권1에는 ‘赤’으로 되어 있다.
[주D-004] : 《동문선》에는 ‘昭’로 되어 있다.
[주D-005]금치국(金齒國) :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오랑캐 나라의 이름이다.
[주D-006]古廟靈風楊柳低 : 《동문선》 권22에는 ‘五靈廟宮楊柳低’로 되어 있다.
[주D-007]회포가 있어서[有懷] : ‘我愛’에서 ‘伐木’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虛庵遺集)》 권1에는 ‘我愛權氏子 相從自結髮 伯也負異氣 仲也俠奇骨 吾常倚其間 屹立分鼎足 憶昔同爭覇 詩酒作勍敵 決鬪恐難全 斂刃各堅壁 如今吳蜀魏 長江限南北 影響已寂寞 夢魂亦緬邈 思之不可見 獨坐歌伐木’으로 되어 있다.
[주D-008]벌목편(伐木篇) :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친구들과 모여 잔치를 하면서 깊은 정과 우의를 나누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그 시에, “나무 찍는 소리 정정하거늘, 새 울음소리 앵앵하도다.[伐木丁丁 鳥鳴嚶嚶]” 하였다.
[주D-009]밤비[夜雨] : ‘九嶷’에서 ‘白髮’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九疑嵯峨雲似黑 鷓鴣啼雨湘江夕 寒聲浙瀝助凄切 竹間餘淚哀欲滴 楚些爲招帝子魂 月恨雲愁天亦泣 孤舟一夜滯未歸 遠客蕭條生白髮’로 되어 있다.
[주D-010]구의산(九嶷山) :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서로 비슷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D-011]초사(楚些) : 초 지방에서 유행하는 혼을 부르는 내용의 노래로, 흔히 초혼가(招魂歌)를 가리킨다.
[주D-012]가을날에 바라보다[秋望] 2수(二首) : 첫째 수인 ‘秋光’에서 ‘處宿’까지의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秋容濃淡雨還晴 海波不動含淨綠 沙平若剪雪嵯峨 鴈背寒光斜欲滴 西風吹影落漁磯 字字新出臨池墨 何處稻粱驚網弋 急向蘆花深處宿’으로 되어 있고, 둘째 수인 ‘渡頭’에서 ‘新月’까지의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渡頭楓林霜半破 海風吹滴猩猩血 秋光上下鏡面平 一片鑄出琉璃碧 隔岸眠鷗忽驚起 客帆飛來隨鳥沒 落日蒼茫何處宿 短笛數聲山水綠’으로 되어 있다.
[주D-013]묵지(墨池)에서 …… 생겨나네 : 기러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묵지는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연못으로,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영가현 수(永嘉縣守)로 있으면서 항상 이 연못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 물에 붓을 씻었으므로 연못 물이 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주D-014]강마을[江村] : ‘靑山’에서 ‘枯木’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靑山影空釣磯寒 海門秋色濃可掬 漁翁臥簑睡不驚 鷗鳥欲散還相逐 織柳穿魚及暮歸 南隣喚酒東隣答 疎疎晩雨急取綱 一抹斜陽掛枯木’으로 되어 있다.
[주D-015]용혈(龍穴) : 전설 속에 나오는, 용이 산다고 하는 굴을 말한다.
[주D-016]계수음(桂樹吟) : 한나라 때 회남소산(淮南小山)의 무리들이 강물에 빠져 죽은 굴원(屈原)을 슬퍼하여 부른 노래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뜻의 노래이다.
[주D-017]변경에서 : ‘客牕’에서 ‘聲寒’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客牕偏惜歲將殘 蘆荻蕭疎雪滿山 塞外風高鷹翅健 陣前雲起箭聲寒 不妨夜月相乘興 何事詩人獨閉關 擁褐煎茶淸味永 況論盃酒作春顔’으로 되어 있다.
[주D-018]부질없이 쓰다[漫書] : ‘鴨江’에서 ‘搔頭’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鴨江如帶去悠悠 歲月無情共逐流 萬里胡天雲出塞 一聲羌笛客登樓 長風吹送燕山雨 斷鴈含來鶴野秋 覽物懷鄕偏有感 孤城落日獨搔頭’로 되어 있다.
[주D-019]장 황문(張黃門) : 세조 6년(1460)에 사신으로 나온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장영(張寧)을 가리킨다.
[주D-020]박원형(朴元亨) : 원문에는 ‘朴原亨’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박원형은 장영이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접반사(接伴使)의 임무를 맡았다.
[주D-021] : 《명시종》 권94에는 ‘駐’로 되어 있다.
[주D-022] : 《명시종》에는 ‘勞’로 되어 있다.
[주D-023]行雲低 : 《명시종》 권94에는 ‘低行雲’으로 되어 있다.
[주D-024]권 정경(權正卿)에게 부치다 : ‘東極’에서 ‘花明’까지의 이 부분은 《보한재집(保閑齋集)》 권8에는 ‘東極來千里 邊城月再盈 隔江皆虜聚 問地半胡名 氈羯薰人苦 風沙拍面輕 和戎才正拙 兩鬢雪花明’으로 되어 있다.
[주D-025] : 《명시종》 권94에는 ‘窈’로 되어 있다.
[주D-026]진 급사(陳給事) : 세조 5년(1459)에 사신으로 나온 형과 급사중(刑科給事中) 진가유(陳嘉猷)를 가리킨다.
[주D-027]백설사(白雪詞) : 양춘백설(陽春白雪)의 곡(曲)으로, 전국 시대 때 초(楚)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의 이름인데, 뛰어난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주D-028]고헌(高軒) : 존귀한 자가 타는 높은 수레로, 존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9] : 원문에는 ‘水’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30]종릉(鍾陵) …… 화답하다 2수(二首) : 첫째 수인 ‘人間’에서 ‘胡麻’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續東文選)》 권7과 《매월당집(梅月堂集)》 권13에는 ‘人間變態薄於紗 端合歸來臥碧霞 老境病蟬藏翳葉 人生秋蠛寄浮槎 風前細細飛松子 雲外毶毶落桂花 莫道道人嚥沆瀣 巖邊春雨種胡麻’로 되어 있는데, 번역하면서는 《속동문선》을 따랐다. 둘째 수인 ‘蛺蝶’에서 ‘小溪’까지의 이 부분은 《매월당집》 권13에는 ‘蛺蝶雙雙飛藥畦 山禽饒語竹籬西 一叢枸杞花初遍 五椏人蔘葉已齊 翠竹林中香麝睡 紫荊枝上畵眉啼 千峯昨夜疎疎雨 泛濫南池漲小溪’로 되어 있으며, 《속동문선》에는 이 시 대신 ‘四美年年到處無 溪光山色映蓬簾 藥園鹿戱何曾慍 多竃菌生亦不嫵 萬事省來貧是樂 一身閑了老非厭 笑看塵世悠悠者 無太麤踈便太纖’이란 시가 들어 있다.
[주D-031]회소곡(會蘇曲) : ‘會蘇’에서 ‘杼軸’까지의 이 부분은 《점필재집(佔畢齋集)》 권3에는 ‘會蘇曲會蘇曲 西風吹廣庭明月滿華屋 王姬壓坐理繅車 六部女兒多如簇 爾筥旣盈我筐空 釃酒椰揄笑相謔 一婦嘆千室勤 坐令四方勤杼軸 嘉俳縱失閨中儀 猶勝拔河爭嗃嗃’로 되어 있다. 원문에 없는 마지막 두 구의 번역은 “가배놀이 그게 비록 규중 예의 아니지만, 서로 다퉈 소리치는 발하보단 되레 낫네.”이다. 발하(拔河)는 당나라 때 유행하였던 궁녀들이 하는 놀이로, 줄다리기와 비슷한 놀이이다.
[주D-032]황창랑(黃昌郞) : ‘若有’에서 ‘蓬蒿’까지의 이 부분은 《점필재집》 권3에는 ‘若有人兮纔離齠 身未三尺何雄驍 平生汪錡我所師 爲國雪恥心無憀 劍鐔擬頸股不戰 劍鍔指心目不搖 功成脫然罷舞去 挾山北海猶可超’로 되어 있다. 원문에 없는 두 구의 번역은 “공 이루자 훌쩍하니 춤 파하고 떠나가니, 겨드랑에 태산 끼고 북해도 뛰넘겠네.”이다.
[주D-033]왕기(汪錡) : 춘추 시대 때 노(魯)나라의 어린아이로, 제(齊)나라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죽었는데, 나라에서 성년(成年)의 예로 장사 지내 주었다. 어린 나이로 나라를 구한 사람의 전형(典型)으로 쓰인다.《春秋左氏傳 哀公11年》
[주D-034]병예(屛翳) : 전설 속에 나오는 신의 이름으로, 풍신(風神), 뇌신(雷神), 우신(雨神)의 총칭이다.
[주D-035]오두(遨頭) : 고을 수령을 가리킨다. 송(宋)나라 때 성도(成都)에서는 4월 19일을 완화(浣花)라고 하면서 두자미(杜子美)의 초당(草堂)에 있는 창랑정(滄浪亭)에서 태수(太守)가 잔치를 벌였는데, 이때 온 고을 사람들이 나와 보면서 태수를 오두라고 하였다.
[주D-036]화산기(華山畿) : 중국 오(吳) 지방의 악부(樂府) 이름으로, 어떤 선비가 여인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는데, 상여가 그 여인의 집 앞을 지날 때 움직이지 않자, 그 여인이 단장을 하고 나와서 부른 노래이다. 그 여인이 이 노래를 부르고는 관 속으로 들어가 죽자, 사람들이 합장(合葬)한 다음 신녀총(神女冢)이라고 했다 한다.
[주D-037]연리지(連理枝) : 줄기가 다른 두 나무가 가지결이 서로 이어진 것으로, 애정이 깊은 부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38]용도책(龍韜策) : 태공망(太公望)의 병법 가운데 하나로, 대개 병법이나 전략(戰略)의 의미로 쓰인다.
[주D-039]산승과의 …… 진하네 : 이 부분의 원문이 《점필재집》 권3에는 ‘語與居僧軟 杯隨古意濃’으로 되어 있다.
[주D-040]선사사(仙槎寺) : ‘偶到에서 ‘地頭’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6에는 ‘偶到仙槎寺 巖空松桂秋 鶴翻羅代蓋 龍蹴佛天毬 細雨僧縫衲 寒江客棹舟 孤雲書帶草 獵獵滿池頭’로 되어 있다. 번역은 《속동문선》을 따랐다.
[주D-041]서대초(書帶草) : 줄기가 질긴 풀이름으로, 한나라 때 정현(鄭玄)의 문하생들이 이 풀을 가지고 책을 묶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주D-042] : 《목계일고(木溪逸稿)》 권1에는 ‘片’으로 되어 있다.
[주D-043]이주령(伊州令) : 악곡 이름으로, 당나라 때 어떤 여인이 멀리 벼슬살이를 떠나간 뒤 소식조차 없는 님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주D-044] : 원문에는 ‘川’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목계일고》에는 ‘州’로 되어 있다.
[주D-045]산음(山陰)의 계사(禊事) :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회계산(會稽山)의 산음에서 계사를 한 고사를 가리킨다. 산음은 산의 북쪽이란 뜻이다.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永和) 9년 계축 늦은 봄 초승에 회계산의 산음에 모였다.” 하였다.
[주D-046]기수(沂水) …… 갈아입누나 : 소요하면서 노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묻자, 증점(曾點)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미 만들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 6명과 어린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論語 先進》
[주D-047]고의(古意) : ‘海底’에서 ‘如雪’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4에는 ‘海底珊瑚高幾丈 千年試作千尋網 萬牛挽出滄溟深 蛟龍贔奰霹靂響 扶桑日沈洪濤熱 光芒照耀黃金闕 平生季倫麤男兒 一擊破碎紛如雪 紛紛似雪不足惜 從此至寶無顔色’으로 되어 있다. 원문에 없는 두 구의 번역은 “부서져서 눈 된 거야 아까울 것 없다마는, 이로부터 좋은 보배 모양 없게 되었구나.”이다.
[주D-048]계륜(季倫) : 진(晉)나라 때 부호(富豪)로 이름난 석숭(石崇)의 자이다. 석숭은 위위(衛尉)로 있으면서 남을 시켜 바다에서 무역을 해서 거부가 되어 왕개(王愷), 양수(羊琇)와 함께 호사를 다투었다.
[주D-049] : 《속동문선》 권9에는 ‘於’로 되어 있다.
[주D-050] : 《속동문선》 권9에는 ‘長’으로 되어 있다.
[주D-051]連筒引却前溪水 : 《속동문선》에는 ‘呼兒爲引連筒去’로 되어 있다.
[주D-052] :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부록 1에는 ‘醒’으로 되어 있다.
[주D-053]왕 황문(王黃門) : 성종 19년(1488)에 사신으로 나온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가리킨다.
[주D-054]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할 때 : 늦은 봄을 말한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永和) 9년 계축 늦은 봄 초승에 회계산의 산음에 모였다.” 하였다.
[주D-055]과만수(瓜蔓水) : 음력 5월에 불어나는 황하의 물을 말한다.
[주D-056]죽지가(竹枝歌) : 악부(樂府) 가운데 하나로, 본디는 사천(泗川) 일대의 민가(民歌)인데,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새 가사로 개작하였다. 주로 삼협(三峽)의 풍광과 남녀 간의 연정(戀情)을 읊었다.
[주D-057]의고(擬古) : ‘今日’에서 ‘北邙’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3에는 ‘今日良宴會 嘉賓滿高堂 綺肴映彫俎 綠酒盈金觴 左右燕趙姬 眉目婉淸揚 徐徐攘皓腕 操瑟理宮商 流年雙轉轂 倏忽兩鬢霜 相逢且爲樂 何用苦慨慷 金章竟何許 畢竟歸北邙’으로 되어 있으며,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에는 ‘今日良宴會 嘉賓滿高堂 綺肴映彫俎 綠酒盈金觴 左右燕趙妓 眉目婉淸揚 徐徐攘皓腕 操瑟理宮商 流年雙轉轂 倏忽兩鬢霜 相逢且爲樂 何用苦慨慷 金章滿朝貴 畢竟歸北邙’으로 되어 있다.
[주D-058]김씨 장씨 : 한(漢)나라 때의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를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에 현달하였으며, 7대의 후손들까지 현달하였으므로, 흔히 현달한 관원의 대명사로 쓰인다.
[주D-059]목면사(木綿詞) : ‘江南’에서 ‘羅幃’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5와 《허백당집》 권1에는 ‘江南木綿色逾白 晴雪紛紛鋪簟席 小機搖作鴉櫓聲 軟弧彈罷秋雲薄 東隣有婦坐夜闌 風回紛絮縈烏鬟 織成新布機杼促 扎扎輕梭玉指寒 半擬新袴與小兒 半作寒衣寄邊陲 心酸意苦眠不得 孤燈閃閃明維幃’로 되어 있다.
[주D-060]금미(金微) : 중국 변경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인데,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경기(耿夔)가 대장군이 되어 개척한 곳이다. 여기서는 변경 지역을 뜻한다.
[주D-061]함지곡(咸池曲) : 황제(黃帝)가 지었다고 하는 성대한 음악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북문성(北門成)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함지의 음악을 동정(洞庭)의 뜰에서 연주하자, 저는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꼈고, 다시 듣고서는 권태로움을 느꼈고, 마지막으로 듣고서는 미혹되어 버렸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62] : 《진일유고(眞逸遺稿)》 권1에는 ‘乃’로 되어 있다.
[주D-063]전부행(田父行) : ‘隴雉’에서 ‘斷絶’까지의 이 부분은 《진일유고》 권2에는 ‘隴草萋萋雉雙飛 隴邊老人長歎息 自道余生年七十 手脚凍皴面深黑 男婚女嫁知幾時 短衣襤衫纔過膝 前年召募度黃沙 萬死歸來鬢如雪 今年把鋤事耕耨 石田䂽确牛蹄脫 牛蹄脫兮可奈何 獨坐茫然心斷絶’로 되어 있다.
[주D-064]나홍곡(囉嗊曲) : 가곡(歌曲)의 이름으로, 진(陳)나라 유채춘(劉采春)이 읊은 망부가(望夫歌)이다. 《진일유고》 권2에는 ‘羅嗔曲’으로 되어 있다. ‘爲報’에서 ‘腸時’까지의 원문이 《진일유고》에는 ‘爲報郞君道 今年歸不歸 江汀春草綠 是妾斷腸時’로 되어 있다.
[주D-065]雨初收 : 《동문선》 권20에는 ‘暑情收’로 되어 있다.
[주D-066] : 《동문선》에는 ‘獻’으로 되어 있다.
[주D-067]경주(慶州) …… 차운하다 : ‘風塵’에서 ‘歸人’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9에는 ‘塵間榮辱幾番春 案牘堆邊白髮新 夜半慣成林下計 明朝又作未歸人’으로 되어 있다.
[주D-068]獨泛孤篷臥未安 : 《속동문선》 권9와 《안락당집(安樂堂集)》 권1에는 ‘獨揭孤篷枕不安’으로 되어 있다.
[주D-069]반랑(潘郞)의 살쩍 : 근심이 많아 중년의 나이에 살쩍이 희끗희끗해진 것을 말한다. 반랑은 진(晉)나라 반악(潘岳)으로, 그는 젊어서는 용모가 아주 준수하였는데, 서른두 살의 나이에 살쩍이 하얗게 세자 느낀 바가 있어서 추흥부(秋興賦)를 읊었다.
[주D-070]동 내한(董內翰) : 성종 19년(1488)에 사신으로 나온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 동월(董越)을 가리킨다.
[주D-071]애 병부(艾兵部) : 성종 23년(1492)에 사신으로 나온 애박(艾璞)을 가리킨다. 이때 노공필이 원접사였다.
[주D-072]화표(華表) : 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搜神後記》
[주D-073]동규봉(董圭峯) : 규봉은 성종 19년에 사신으로 나온 동월(董越)의 호이다.
[주D-074] : 《용재집(容齋集)》 권8에는 ‘出’로 되어 있다.
[주D-075] : 《명시종》 권94에는 ‘節’로 되어 있다.
[주D-076]녹봉 급사(鹿峯給事) : 중종 17년(1522)에 한림 수찬(翰林修撰) 당고(唐皐)와 함께 사신으로 나온 병과 급사중 사도(史道)를 가리킨다. 이때 이행이 원접사로 있었다.
[주D-077]옥순(玉筍) 반열 : 뛰어난 영재들이 많이 있는 조정의 반열이란 뜻으로,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주D-078]안성역(安城驛) : 황주(黃州) 경내에 있는 역참으로, 사신들이 오갈 때 들르는 곳이다.
[주D-079]양춘곡(陽春曲) : 옛 가곡의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고상하고 아취 있는 곡조를 말한다.
[주D-080]설 급사(薛給事) : 원문에는 ‘陳給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설 급사는 중종 34년(1539)에 한림원 시독 화찰(華察)과 함께 사신으로 나온 공과 좌급사중 설정총(薛廷寵)을 가리킨다. 이때 소세양이 원접사로 있었다.
[주D-081] : 원문에는 ‘怡’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82] : 원문에는 ‘怡’로 되어 있는데,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83]노반(鷺班) : 백로가 날 때 줄지어 나는 것처럼 줄지어 서 있는 조정의 반열을 말한다. 여기서는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주D-084] : 원문에는 ‘酒’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85]최숙생(崔淑生) : 원문에는 ‘崔叔生’으로 되어 있는데, ‘崔淑生’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86] : 원문에는 ‘山’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속동문선》 권6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참고로 이 시는 사고전서본 《명시종》에는 들어 있지 않다.
[주D-087]파교(灞橋)에서 …… 흥취 : 눈을 맞으면서 시를 짓는 흥취를 말한다. 파교는 장안(長安)의 동쪽에 있는 다리이다. 《시본사(詩本事)》에, “맹호연(孟浩然)의 시사(詩思)는 파교에 풍설이 부는 가운데 나귀의 등 위에 있다.” 하였다.
[주D-088] : 《속동문선》 권6에는 ‘吾’로 되어 있다.
[주D-089]이십사교(二十四橋) :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강도현(江都縣) 서쪽에 있는 다리로,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에, “이십사교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옥인은 어느 곳서 퉁소를 부나.[二十四橋明月夜 玉人何處敎吹簫]” 하였다. 여기서는 주흘산 아래에 있는 다리를 형용하는 말로 쓰였다.
[주D-090]垂虹 : 《호음잡고(湖陰雜稿)》 권6에는 ‘秋霓’로 되어 있다.
[주D-091]채릉가(採菱歌) :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이다.
[주D-092]답답함을 풀다 : ‘隨意’에서 ‘春衣’까지의 이 부분은 《호음잡고》 권1에는 ‘隨意攤書坐 孤吟對晩暉 岸風帆腹飽 沙雨荻芽肥 籬缺通江色 簾垂礙蝶飛 誰知浴沂節 和病試春衣’로 되어 있다.
[주D-093] : 원문에는 ‘觀’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94]단구(丹邱) :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에도 낮처럼 환하다고 한다.
[주D-095]십주(十洲) : 도가(道家)에서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열 개의 산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선경(仙境)을 가리킨다.
[주D-096]오 부사(吳副使) : 중종 32년(1537)에 한림원 수찬 공용경(龔用卿)과 함께 사신으로 나온 오희맹(吳希孟)을 가리킨다.
[주D-097]신선 뗏목[仙槎] : 은하수를 오가는 뗏목으로, 사신이 타고 가는 배를 가리킨다. 옛날에 은하수와 바다가 서로 통해 있어서 해마다 8월이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뗏목을 타고 올라갔는데, 어떤 사람이 10여 일을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한 성(城)에 이르러서 어떤 장부(丈夫)가 물가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보았다. 이에 여기가 어딘지를 물으니, 그 장부가 답하기를, “그대가 촉군(蜀郡)에 가서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어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촉군에 가서 엄군평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수(牽牛宿)를 범하였다.” 하였는데,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은하수에 도착한 때였다고 한다.《博物志 卷10》
[주D-098]심언광(沈彦光) : 원문에는 ‘沈産光’으로 되어 있는데, ‘沈彦光’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99]鴉樹 : 《어촌집(漁村集)》 권7에는 ‘鶴枝’로 되어 있다.
[주D-100]망원정시(望遠亭詩) : ‘白雁’에서 ‘小橋’까지의 이 부분은 《어촌집》 권7에는 ‘亭控長江遠 天啣濶岸遙 玻瓈開水面 桃李匜山腰 白雁依寒渚 靑驢渡小橋 肝腸托樽酒 雲樹隔明朝’로 되어 있다.
[주D-101] : 원문에는 ‘竟’으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02] : 원문에는 ‘諭’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03]흰 망아지[白駒] : 숨어 사는 어진 이를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깨끗하고 깨끗한 흰 망아지, 저 빈 골짜기 안에 있도다.[皎皎白駒 在彼空谷]” 하였다.
[주D-104]푸른 눈[靑眼] : 마음이 통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말한다.
[주D-105]온혜릉(溫鞵陵) : 개성 광명사(廣明寺) 북쪽에 있는 능으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당나라로 들어가다가 바다에서 용녀(龍女)를 만나 그와 부부가 되었는데, 그 뒤에 용녀가 서해 바다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용녀가 남겨 두고 간 신발만으로 장사 지내고는 그 무덤을 온혜릉이라 했다 한다.
[주D-106] : 《모재집(慕齋集)》 권8에는 ‘淸’으로 되어 있다.
[주D-107]종제전(種穄田) : 기장을 심은 밭이라는 뜻으로, 신라 시대의 승려 도선(道詵)이 고려 태조 왕건이 살고 있던 터를 가리켜 이른 말이다. 당시에 기장의 속음(俗音)이 ‘니금(尼今)’으로, 임금을 가리키는 말인 ‘니금(尼今)’과 음이 같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星湖僿說 萬物門 種穄》
[주D-108] : 《모재집》에는 ‘爲’로 되어 있다.
[주D-109]중국 사신 …… 차운하다 : 장승헌(張承憲)이 인종 1년(1545)에 사신으로 왔는데, 이때 신광한이 원접사였다. 이 시의 원문이 《기재집(企齋集)》 권8에는 ‘天上河源落五臺 樓前澄景絶纖埃 楊花春盡帆歸遠 楮島煙消鴈影來 物色不隨騷客去 芳罇今爲使華開 三韓勝地皆方丈 更借仙風進一杯’로 되어 있다.
[주D-110]방장(方丈) : 발해(渤海)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주D-111] : 《기재집》 별집(別集) 권4에는 ‘抵’로 되어 있다.
[주D-112]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는 ‘違’로 되어 있다.
[주D-113] : 《성소부부고》에는 ‘非’로 되어 있다.
[주D-114]모동(茅洞)의 장인(丈人) : 《기재집》 별집 권5의 이 시 제목에 ‘삼월 삼일에 모동의 박 대구 덕장(朴大丘德璋)에게 부치다’라고 하였다.
[주D-115]靑山寧憶舊遊人 : 《성소부부고》 권25와 《기재집》 별집 권4에는 ‘靑山能記舊時人’으로 되어 있다.
[주D-116]저물녘의 풍경[暮景] : ‘樹密’에서 ‘中分’까지의 이 부분은 《기재집》 권5에는 ‘密樹深濃翠 孤煙淡作雲 厖應誤吠主 暗路草中分’으로 되어 있다.
[주D-117] : 원문에는 ‘驛’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118]오천자(烏川子) : 오천은 연일(延日)의 고호(古號)로, 연일 정씨인 정몽주를 가리킨다.
[주D-119]산속에 살다 : ‘花潭’에서 ‘讀書’까지의 이 부분은 《화담집(花潭集)》 권1에는 ‘花潭一草廬 瀟灑類僊居 山簇開軒面 泉絃咽枕虛 洞幽風淡蕩 境僻樹扶疎 中有逍遙子 淸朝聞讀書’로 되어 있다.
[주D-120]영통사(靈通寺)에서 …… 차운하다 : ‘松溪’에서 ‘西沈’까지의 이 부분은 《화담집》 권1에는 ‘沿溪一路入靑林 林下禪居晝亦陰 觸石泉絃千曲咽 倚天山簇萬重深 淸歡直欲朝連夜 勝會應難後繼今 數局閒棋談笑裏 不知雲日已西沈’으로 되어 있다.
[주D-121]구 대행(歐大行) : 선조 1년(1568)에 사신으로 나온 행인사 행인 구희직(歐希稷)을 가리킨다.
[주D-122] :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는 ‘廻’로 되어 있다.
[주D-123]태평관 …… 차운하다 : 구공(歐公)은 구희직(歐希稷)을 가리킨다. 이때 박순이 원접사였다. 이 시의 원문이 《사암집(思菴集)》 권3에는 ‘來遊萬里魂堪斷 獨倚靑冥思更賖 天闊楚鄕飛客夢 路窮蓬海駐仙査 山連睥睨雲常暝 春半池臺草欲華 簾外夕陽看漸沒 消愁惟有酒如霞’로 되어 있다.
[주D-124]황공(黃公) : 선조 15년(1582)에 사신으로 나온 한림원 편수 황홍헌(黃洪憲)을 가리킨다. 이때 이이가 원접사였다.
[주D-125]연도(沿道) : 원문에는 ‘沾塗’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26]한창 때의 사행 길 : 이이가 33세 때 사신으로 갔던 일을 가리킨다. 이이는 선조 1년(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었다.
[주D-127] : 원문에는 ‘道’로 되어 있는데,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28]아미(蛾眉) 반열 : 중국 조정의 반열을 말한다. 당(唐)나라의 제도에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어사대(御史臺)의 관원들이 황제를 조현(朝見)할 때에 좌우로 나뉘어 서서 조현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미(蛾眉)와 같으므로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주D-129]옥서(玉署)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한림원 편수로 있는 황홍헌을 가리킨다.
[주D-130]황공이 …… 전송하다 : ‘長川’에서 ‘瓊華’까지의 이 부분은 《율곡전서(栗谷全書)》 권2에는 ‘長川氷雪覆寒沙 此日愁聞出塞笳 兩地雲泥分席上 一江南北卽天涯 情勞永夜應飛夢 路絶何時更依麻 珍重曾言歸橐富 愧將燕石報瓊華’로 되어 있다.
[주D-131]구름과 진흙 :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과 땅 아래에 있는 진흙이라는 말로, 둘 사이의 차이가 아주 큰 것을 뜻한다.
[주D-132]관월사(貫月槎) : 요 임금 때 서해 바다에 떠 있었다고 하는 빛을 내는 나무 등걸로, 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습유기(拾遺記)》 당요(唐堯)에, “요 임금이 황제 자리에 오른 지 30년 되는 해에 큰 나무 등걸이 서해 바다에 떠 있었는데, 등걸 위에서 빛이 발하여 낮에는 밝다가 밤에는 사라졌다. 그 등걸은 항상 사해(四海)를 떠돌아다녔는데,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하였다.
[주D-133]연석(燕石) : 연산(燕山)에서 나는 돌로, 옥 같으나 옥이 아닌 돌인데, 전하여 보잘것없는 물품을 뜻한다. 여기서는 자신의 시를 뜻한다.
[주D-134] : 원문에는 ‘追’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35]便 : 원문에는 ‘使’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36]팔백 …… 둔 것 : 당나라 때 원재(元載)가 매우 탐학스러워 뇌물을 받아 축재하였는데, 그를 처형할 때 그의 재산을 몰수하니 후추가 팔백 섬이나 나왔다고 한다.《新唐書 卷145 元載列傳》
[주D-137]오자어(吳子魚) : 선조 30년(1597)에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나왔다가 우리나라의 시를 모아 《조선시선》을 편집한 오명제(吳明濟)를 가리킨다.
[주D-138]옥국(玉局) :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도관(道觀)의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이노군(李老君)이 이곳에서 장도릉(張道陵)에게 《남북두경(南北斗經)》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주D-139]상양(商羊) : 전설 속에 나오는 새 이름으로, 이 새는 배가 오기 전에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서 일어나 춤을 춘다고 한다.
[주D-140]시골집 : ‘水鄕’에서 ‘氣連’까지의 이 부분은 《충암집(冲庵集)》 권1에는 ‘水鄕豐德郡 蕭寺古興天 地盡村燈近 天垂海氣連’으로 되어 있다.
[주D-141]규중의 가을날[秋閨] : ‘木落’에서 ‘敗荷’까지의 이 부분은 《충암집》 권1에는 ‘木落千山江杳杳 秋天一鴈秦雲曉 空階月皎蛩音長 蔓草露溥螢影小 耿耿蘭燈夜半過 紅樓西面落星河 邊衣剪罷涼無睡 一夜雨聲鳴敗荷’로 되어 있다.
[주D-142]나그네의 회포[旅懷] : ‘江南’에서 ‘重簾’까지의 이 부분은 《충암집》 권2에는 ‘江南殘夢晝厭厭 愁逐年芳日日添 雙燕來時春欲暮 杏花微雨下重簾’으로 되어 있다.
[주D-143]양관곡(陽關曲) : 악부(樂府)의 곡 이름으로, 옛날에 이별하면서 부르던 노래이다. 위성곡(渭城曲)이라고도 한다.
[주D-144]소미(少微) : 성좌(星座)의 이름인데, 일명 처사성(處士星)이라고도 하여 처사(處士)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진서(晉書)》 은일열전(隱逸列傳) 사부(謝敷)에, “달이 소미성을 침범하였다. 소미성은 일명 처사성이라고도 하여 점치는 사람들이 은사(隱士)를 거기에 해당시킨다.” 하였다.
[주D-145] : 《석천시집(石川詩集)》 권6에는 ‘投’로 되어 있다.
[주D-146]塵土何由化素衣 : 《석천시집》에는 ‘塵土無由染素衣’로 되어 있다.
[주D-147]만력(萬曆) …… 전송하다 : 이 부분의 원문이 《서경집(西坰集)》 권4에는 ‘玉節東來鳳詔頒 暮春江上始承顔 每稱四海皆兄弟 況此長程共往還 浮碧樓前俯羅島 三淸閣上對香山 高懷獨出形骸外 雅賞常存水石間 玉溜爲池增地勝 銀鉤鑱壁發天慳 雲泥此日分霄漢 雨露千秋滿海寰 目斷未勘魂夢遠 形留只得鬚毛斑 相思別後如明月 萬里淸光不可攀’으로 되어 있다. 주난우(朱蘭嵎)는 선조 39년(1606)에 사신으로 나온 한림원 수찬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이때 유근이 원접사였다.
[주D-148] : 원문에는 ‘山’으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49]금대(金臺) :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주D-150]연뿌리 속 실[藕中絲] : 연뿌리를 절단하여도 그 가운데에 있는 실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서로 간의 관계는 끊어졌으나, 서로 간에 그리는 마음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151]최국보(崔國輔) :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주D-152]중화(中和)로 가는 도중에 : ‘羸驂’에서 ‘似秋’까지의 이 부분은 《임백호집(林白湖集)》 권1에는 ‘羸驂載倦客 日晩發黃州 堪恨踏淸節 未登浮碧樓 佳人金縷曲 江水木蘭舟 寂寂生陽館 相思夜似秋’로 되어 있다.
[주D-153]금루곡(金縷曲) : 악곡의 이름으로, 하신랑(賀新郞), 유연비(乳燕飛)라고도 한다.
[주D-154]목란주(木蘭舟) : 심양강(潯陽江)의 목란주(木蘭洲)에서 자라는 목란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배인데, 일반적으로 배의 미칭(美稱)으로 쓰인다.
[주D-155]천년토록…… 보네 : ‘千年’에서 ‘孤雲’까지의 이 부분은 《성소부부고》 부록 1에는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으로 되어 있다. ‘千年自流水’의 ‘自’는 《옥봉집(玉峯集)》 상권(上卷)에는 ‘有’로 되어 있다.
[주D-156]봉은사(奉恩寺) : ‘偶因’에서 ‘眞源’까지의 이 부분은 《옥봉집》 중권(中卷)에는 ‘偶因休浣到雲門 把酒題詩勝事存 紅藕一池風滿院 晩蟬千樹雨歸村 深慚皓首從覊宦 猶喜靑山似故園 聞說錦湖煙景異 會客孤棹問眞源’으로 되어 있다.
[주D-157]백광면(白光勉) : 이 시가 백광훈의 《옥봉집》 중권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광훈의 잘못인 듯하다.
[주D-158] : 《옥봉집》 중권에는 ‘口’로 되어 있다.
[주D-159] : 《옥봉집》에는 ‘聯’으로 되어 있다.
[주D-160]孤山月出千林中 : 《죽음집(竹陰集)》 권6에는 ‘孤城月出千山中’으로 되어 있다.
[주D-161]경주(瓊州)와 뇌주(雷州) : 지금의 중국 해남도(海南島)와 뇌주반도(雷州半島)로, 송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蘇軾)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안석의 뜻을 거슬러서 유배되었던 곳이다.
[주D-162] : 《죽음집》 권6에는 ‘未’로 되어 있다.
[주D-163] : 《죽음집》에는 ‘聲’으로 되어 있다.
[주D-164]용만(龍灣)에서 우연히 짓다 : ‘鴨水’에서 ‘往還’까지의 이 부분은 《죽음집》 권6에는 ‘鴨水西邊是漢關 天扃地鐍限重灣 荒原亂磧麟州戍 落日孤雲馬耳山 風定空江波瀲瀲 雲消春郭溜潺潺 思家未得平安報 歸思唯憑夢往還’으로 되어 있다.
[주D-165]동화문(東華門) : 궁성(宮城)의 동쪽 문 이름으로, 이곳에 중앙 관서가 모여 있다. 전하여 조정을 말한다.
[주D-166]月夜 : 《용문집(龍門集)》 권4에는 ‘夜月’로 되어 있다.
[주D-167]자규(子規) …… 울리라 : 자규는 두견새의 별칭이다. 전설에 의하면 촉(蜀)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혼백이 화하여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로 몹시 처절하게 운다고 한다.
[주D-168]하의(荷衣) :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신선이나 도사, 은자가 입는 옷을 가리킨다.
[주D-169]위유(韋柳) : 당나라 시인인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킨다.
[주D-170]종군행(從軍行) : ‘關雲’에서 ‘內熱’까지의 이 부분이 어떤 데에는 ‘關雲漠漠關雪堆 北風慘慘山木摧 長河氷合馬蹄滑 沙塞日夜胡笳哀 此時疲軍長歎息 愁枕干戈眠不得 兜鍪零落鐵衣寒 擊柝中宵十指直 枵腸不得一飽飯 垢面常帶三年土 自言少小繫軍籍 傷心幾度關山苦 關山之苦豈徒云 苦將膏血輸將軍 將軍好擁黑貂裘 一貂皮當金十斤 將軍好食太牢味 一日軍中九牛死 山無餘貂野無牛 誅斂無窮捶楚至 鼎中粒機中布 一一輸入將軍庫 將軍日富士日瘠 欲往訴之逢彼怒 至尊每憂軍士凍 毛衣衲衣年年送 將軍分給亦不均 煖者無多寒者衆 蟲蝗水旱無歲無 不聞賑恤聞催租 一家丁壯十餘口 過半相携逃入胡 胡中艱苦不可說 猶勝將軍浚膏血 將軍將軍胡不去 去爲公卿軍則悅 君門杳杳但回首 御史紛紛猶閉舌 廉頗李牧難再見 激烈中宵腸內熱’로 되어 있다.
[주D-171] : 원문에는 ‘催’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172] : 원문에는 ‘今’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173]태뢰(太牢) : 일반적으로 제사를 지낼 때 소, 양, 돼지의 세 가지 희생을 모두 갖추는 것을 가리키는데, 쇠고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쇠고기를 가리킨다.
[주D-174]염파(廉頗)와 이목(李牧) :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들로, 사졸을 몹시 사랑하였다.
[주D-175]이소부사(李少婦詞) : ‘相公’에서 ‘上月’까지의 이 부분은 《고죽유고(孤竹遺稿)》에는 ‘相公之孫鐵城李 養得幽閨天質美 幽閨不出十七年 一朝嫁與梁氏子 梁氏之子鳳鸞雛 珊瑚玉樹交枝株 池上鴛鴦本作雙 園中蛺蝶何曾孤 梁家嚴君仕遠方 千里將行拜高堂 出門恩愛從此辭 山川阻絶道路長 不是征戍向邊州 不是歌舞宿娼樓 心知此去唯爲親 好着斑衣膝下遊 兒女私情不忍別 別來幾時腸斷絶 秋梧葉落黃菊香 忽驚今朝是九日 佳辰依舊人不在 滿園茱萸誰共採 獨上高樓望北天 天涯極目空雲海 不向旁人道心事 回身暗裏潸下淚 牛羊歸盡山日夕 門外終無北來使 此身願得歸泉土 死後那知別離苦 一聲長吁掩玉顔 芳魂已逐郞行處 當時未生在腹兒 母兒同死最堪悲 芳魂不作武昌石 定化湘江斑竹枝 斑竹枝頭杜鵑血 血點淚痕俱不滅 千秋萬古何終極 一片靑山墳上月’로 되어 있다.
[주D-176]수유(茱萸) : 9월 9일 중양절에 이 수유나무 열매를 머리에 꽂으면 삿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주D-177]봉대(鳳臺) : 진(秦)나라 목공(穆公) 때 소사(蕭史)라는 사람이 있어서 퉁소를 잘 불었는데, 목공이 그의 딸 농옥(弄玉)을 그에게 시집보낸 다음 봉대를 짓고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주D-178]무창(武昌)의 돌 : 무창의 북쪽 산 위에 있는 망부석(望夫石)을 말한다. 옛날에 어떤 정절이 높은 부인이 멀리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을 전송한 다음, 이 산 꼭대기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몸이 굳어져 돌이 되었다고 한다.
[주D-179]상강(湘江)의 반죽(斑竹) : 요(堯) 임금의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 임금에게 시집가 비(妃)가 되었는데, 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창오(蒼梧)의 들에 묻혔다. 그러자 두 비가 순 임금을 그리워하여 통곡하면서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졌는데, 대나무에 반점이 생겼다고 한다. 두 비가 그 뒤에 상강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칭하였다.《列女傳》
[주D-180] : 《고죽유고》에는 ‘敎’로 되어 있다.
[주D-181]채련곡(采蓮曲) : ‘水岸’에서 ‘白波’까지의 이 부분은 《고죽유고》에는 ‘水岸悠悠楊柳多 小舡遙唱采蓮歌 紅衣落盡秋風起 日暮芳洲生白波’로 되어 있다.
[주D-182]依依 : 《성소부부고》 권25에는 ‘悠悠’로 되어 있다.
[주D-183]난로(鸞路) : 난로(鸞輅)로, 천자나 왕후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주D-184]요단(瑤壇) : 아름다운 옥을 깎아서 만든 누대로, 신선들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주D-185]능운(凌雲) 기개 : 높이 세상 밖으로 초탈하려는 뜻을 말한다.
[주D-186]오사모(烏紗帽) : 사모(紗帽)로, 벼슬아치들이 평상시에 쓰는 모자인데, 여기서는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한다.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시습(金時習)



○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다. 조금 자라자 말을 더듬어 가이 말은 잘하지 못하였으나, 붓과 먹을 주면 그 생각을 모두 글로 썼다. 세조 때에 세상을 달갑잖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불렀다. 스스로 그의 호(號)를 동봉(東峯)이라 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환속(還俗)하여 죽었는데, 《매월당 역대년기(每月堂歷代年紀)》와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 열경(悅卿)은 난 지 여덟 달 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민첩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였어도 뜻은 모두 통하였다. 본전(本傳)
○ 동봉(東峯)이 세 살에 어눌하여 아직 말은 잘 못하였으나, 그의 외조부가 글귀를 뽑아 가르치기를,
꽃이 난간 앞에서 웃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花笑檻前聲未聽
하니, 곧 병풍에 그린 꽃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또 가르치기를,
새가 수풀에서 우나 눈물은 보기 어렵도다 / 鳥啼林下淚難看
하니, 또한 병풍에 그린 새를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이는 말로는 못하나 뜻은 능히 통하는 것이다.
○ 세 살에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또렷이 읊기를,
비는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메서 울리는고 / 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 세 살 때에 그 할아버지에게 묻기를, “시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니, 할아버지가, “일곱 글자를 이어 놓은 것을 시라고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렇다면 일곱 자를 엮을 테니 첫 글자를 불러 보시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봄 춘(春) 자를 부르자, 곧 응하기를,
봄비가 세 휘장 밖으로 내리니 기운이 열리도다 / 春雨新幕氣運開
하여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다. 세종이 그 말을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임금의 뜻을 전하고 사실인지 아닌지 묻는데, 안아 무릎 위에 놓고 임금이 이름을 불러 이르기를, “네가 능히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곧 응하기를,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 / 來時襁湺金時習
하였다. 또 벽 위의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짓겠느냐?” 하니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 小亨舟宅何人在
하였다. 그가 지은 시와 글이 적지 않다. 곧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 하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고 제가 가지고 가라고 하였더니, 드디어 그 끝을 이어 가지고 끌고 나가므로 사람들이 또한 기특하게 여겼다.
○ 청한자(淸寒子)가 손을 만나 소식을 물을 제, 마구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기쁜 빛이 돌았고, 만약 거짓 미친 체하여 실상을 감추고 있는 바가 있다고 하면 눈썹을 찌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 어떤 때는 벼[禾]를 심어 잘 자라서 이삭이 볼 만하게 되면 술취하여 낫을 휘둘러 모조리 땅에 쓰러뜨리고서는 목놓아 울었다. 상동
○ 시를 지을 때에는 종이가 떨어져야 그만두었고, 시가 다 되면 그것을 곧 불살라 버렸다. 상동
○ 거짓 미친 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 그에게 도를 물으려 하는 사람이 백 천이나 되었지만 겉으로 미처 날뛰는 꼴을 하여 혹은 나무나 돌로 때리려 하고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그 사람의 뜻을 떠보았다. 상동
○ 산에 들어가서 서 있는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시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써 놓고 한참 읊조리다가는 문득 울면서 깎아 버리곤 하였다. 상동
○ 총명이 뛰어나 사서 육경(四書六經)은 어려서 스승에게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 같은 것은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모조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 외우면 잊지 않았으므로 평소에 일찍이 글을 읽은 적이 없으며 또한 책궤를 지고 따라다니며 배우지 않았으나 고금의 문헌을 빠짐없이 통달하였다. 상동
○ 다섯 살 때,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그의 이름을 듣고 그 집으로 찾아가 곧 불러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 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더니, 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 꽃이 피니 속은 늙지 않았도다 / 老木開花心不老
하였다. 문경공이 무릎을 치고 감탄하면서, “이것이 이른바 기동(奇童)이다.” 하였다. 본집(本集)
○ 난 지 여덟 달 만에 저절로 글을 알았고, 세 살 때에 능히 글을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여덟 달에 남의 말을 알아듣고 / 八朔解他語
세 돌에 능히 글을 지었다 / 三朞能綴文
하였다. 상동
〈구일유수유(九日有茱萸 9월 9일에 산에 올라 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는 풍습〉 시에 이르기를,
다시 수유를 쥐고 자세히 보니 / 更把茱萸仔細看
올해도 어이하면 지난해 같이 즐길꼬 / 今年何似去年歡
가을 바람 능히 사람의 터럭을 흩날리기는 하나 / 秋風能解人間鬢
약간 묻은 서리를 지워 말리지 못하네 / 纔着霜花抹未乾
하였다. 상동
○ 동봉(東峯)이 육경(六經)과 사서(史書)를 싣고 관동의 산수를 두루 다니며, 기장 심을 땅을 얻어 농사짓고 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박주를 가지고 그의 손을 잡고 슬퍼하다가 시를 지어 천리에 서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을 하였다. 상동
○ 매소(梅蘇 매요신(梅堯臣)과 소순흠(蘇舜欽))의 옛일을 본떠 오금언(五禽言)을 지었다. 포곡(布穀)은 지금의 산비둘기이고. 탈폐고(脫敝袴)는 발고(鵓鴣 집비둘기)와 같고, 기첩부(欺妾婦)이며, 아욕사(我欲死)이며, 불여귀(不如歸)며, 소연(巢燕)이며, 추앵(秋鶯 가을 꾀꼬리)을 말한 것이다.
○ 대언(大言)ㆍ소언(小言 한시(漢詩)에 있어서 율시(律詩)를 말함) 두 편을 지었는데, 대언은 큰 것을 극언(極言)하고, 소언은 작은 것을 극언하여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 길가는 도중에서 난초가 풀 속에 시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 벼루[硯]를 씻은 뒤에 스스로를 비웃어 희롱하여 지은 시에,
어찌 도경 고개 위의 구름을 얻어 / 安得陶景嶺上雲
끌어다가 옥전의 금화를 삼고 [종이] / 攤爲玉牋之金花
송섬(宋纖)의 천길 깎아지른 언덕을 / 宋纖千丈磨崖
단계(좋은 벼룻돌이 나는 곳)의 금경(거울)으로 삼고 / 爲端溪之金烱
두꺼비 뱃속에 동정호를 간직하고[먹물] / 蟾蜍腹裏藏洞庭
중산의 천 마리 붓을 다 달토록 [붓] / 禿盡中山千首穎
휘두르면 바람이 휩쓸고 구름이 모여드는 듯하고 / 其揮也風掃雲聚
당기면 북두가 줄고 은하가 도는 듯할꼬 / 其曳也斗轉河廻
하였다.
○ 산중에 있을 때, 산나물을 노구솥에 끓이면서 시로 적었는데,
동정에는 눈이 아직 안 녹았는데 / 洞庭雪未消
눈 속에서 산나물이 돋아났구나 / 雪底山蔬秀
캐어다가 노구솥에 끓이니 / 採之煮小鐺
보글보글 지렁이 우는 소리 같네 / 細細蚯蚓鳴
족히 내 주림을 채우며 / 足以充吾飢
가히 여생을 보전할 만하도다 / 可以保餘生
우습다 부귀한이여 / 可笑鐘鼎人
명리에 구차스럽구나 / 區區利與名
어찌 노구솥 안 나물의 / 何似鐺中蔬
한결같이 화평한 맛과 같으리오 / 一味和且平
하였다.
○ 약재(藥材)의 이름을 이용하여 진퇴체(進退體 시를 짓는 데 운을 쓰는 한 가지 격식) 한 편을 지었는데,
사나이 먼 뜻[애기풀]이 있으니 / 丈夫有遠志
해가 저물면 마땅히 돌아오리[승검초의 뿌리] / 歲暮行當歸
솔이 늙으니 복령[솔뿌리에 생기는 균류] 자라고 / 松老伏苓長
가을이 깊으니 마[산우]는 살찌도다 / 秋深山芉肥
벼슬살이는 강계처럼 맵고 / 宦情薑桂辣
세상길은 홍연(수은과 단사의 화합물)과 다르도다 / 世路汞鉛違
가난한 선비는 괴로움을 일찍 겪었으니 / 措大苦曾歷
일찍 쉬어 시비를 잊어버리라 / 早休忘是非
하였다.
○ 산중에 네 가지 새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일깨워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사금언(四禽言)을 지어 그것으로 세상을 경계하기를, “누구를 위하여 잇속을 따르느냐[爲誰趨利]. 역시 허공을 잡으려 말라[亦莫把空]. 돌아감만 같지 못하리[不如歸]. 슬프고 슬프다[悲悲].” 하였다.
○ 산중에 내 죽고자 하는 새[我欲死鳥]가 있다 하여 시를 지었는데,
내 죽어 산허리에 묻히려 하니 / 我欲死埋山岡
4월의 청매가 귀걸이 같도다 / 四月靑梅如耳鐺
깊은 숲 속에 먹을 만한 것이 없으니 / 深林無物可以食
마른 가지로 날아가 헛되이 애를 끊는구나 / 飛向枯枝空斷腸
새여 새여 네 어이하리 / 禽兮禽兮奈爾何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것을 생각지 않느냐 / 不思夷齊飢首陽
하였다.
○ 세상의 부유한 사람이 자봉(自奉)하기를 오히려 아끼니, 하물며 남을 구제할 수 있으리오. 돈꿰미와 곡식을 썩히고, 후세 자손이 교만하고 사치하고 호협하게 하여 누(累)가 친척에게까지 미침을 탄식하여서 간귀(慳鬼)를 읊어 경계하였다.
○ 집을 짓되 움과 같이 하여 뒤쪽은 담이고 앞쪽은 벽인데, 책과 벼루를 곁에 늘어놓고 ‘지명환도(知命環堵)라 이름하고 명(銘)을 지어 벽에 붙이니 벽이 창이 되어 빛을 가리어 사랑스러웠다. 겉은 비록 꾸밈없이 질박하나 안은 단정하고 탁 트이었다.
○ 꽃동산 가꾸기 게을러[懶治花塢]의 시에,
돌을 쌓아 벽돌 삼아 꽃동산을 만들어 / 積石爲甃築花塢
해마다 호미질하고 깨끗이 쓸었네 / 年年鋤治又淨掃
오늘까지 더할 나위 없이 부지런히 공들였더니 / 邇來無復事勤劬
새 가지는 우거지고 묵은 가지는 마른다 / 新枝盤鬱舊枝槁
이제는 다시 무성함을 다스리지 않게 되니 / 從玆不復理繁蕪
일을 좋아함이 일 없음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도다 / 好事不如無事好
하였다.
○ 일찍이 말하기를, “처신하기가 몹시 힘드니, 인간 세상에는 살 수가 없다. 다섯 가지 불가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려면 옷차림에 정신을 써야 하는데, 빨래하고 옷 지을 사람이 없으니 첫째의 불가다. 아내나 첩을 얻으면 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생계에 얽매어 빈부에 자재로울 수 없으니 둘째의 불가요, 또 어찌 도연명(陶淵明)의 적씨(翟氏)나 양홍(梁鴻)의 맹광(孟光)과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셋째의 불가이다. 옛 친구가 가엾이 여겨 벼슬자리에 천거하더라도 지위가 보잘것없고 녹이 박하여 체면을 유지할 수 없고, 성품 또한 어리석고 정직하기만 하여 소인(小人)의 무리들에게 용납될 수 없으니 이것은 넷째의 불가요, 깊은 골짜기에 살아 다만 산수 좋은 것만 좋아하고 밭갈고 김매는 일 같은 것은 개의(介意)하는 바 아니고, 골짜기를 나와 살길을 구하면 남들은 곧 여전히 몹시 곤궁하다 할 것이다. 입신하기가 이러하니 이것이 다섯째 불가이다.” 하였다.
○ 산중에 열 가지 경취(景趣)가 있으니, “하나는 향을 피우고 높이 누워 있음이요, 둘은 약을 먹고 도인(導引)함이요, 셋은 동산에 물주고 남새에 호미질함이요, 넷은 몸소 밭갈이하여 국록(國祿)에 대신함이요, 다섯은 섶을 꺾고 땔나무를 줍는 일이요, 여섯은 바구니를 들고 나물 캐기요, 일곱은 맑은 못에 낚시 드리우기요, 여덟은 깊은 골짜기에서 약초 캐기요, 아홉은 평상(平床)을 옮기어 글 읽기요, 열은 언행에 구속받지 않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음이다.” 하였다.
○ 산에 들어가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매양 밤중에 홀로 앉아 〈이소경(離騷經)〉을 외우고는 통곡하고 돌아왔다.
○ 〈밤이 얼마쯤 되었나[夜如何]〉 2편을 지었는데,
밤이 얼마쯤 되었는가 밤이 아직 반도 못 깊었는데 / 夜如何其夜未央
총총한 별은 찬란하게 빛을 뿜네 …… / 繁星燦爛生光芒
하고, 그 끝 편에,
밤이 얼마나 되었는가 밤이 새려는데 / 夜如何其夜向晨
뭇 별이 광망을 거두고 북극성만 남아 있네 …… / 衆星收芒餘北辰
하였다.
○ 세상살이에 서툴러 성(城) 동쪽에 몇 이랑 밭을 빌려 콩과 조를 심어 거두었다. 그것을 읊은 시에,
내 성 동쪽에 밭을 빌려 / 我乞城東畝
힘써 일하여 봉록을 대신하려 했더니 / 作力代學干
절반은 참새와 쥐[탐관오리를 가리킨다]가 경작하였으나 / 雖半雀鼠耕
깨끗한 신하의 얼굴을 열 만하도다 / 足啓淸臣顔
……
아첨하고 교만하지 않음에 만족하노니 / 甘處不諂驕
길이 탄식할 것 없도다 / 足以無永嘆
하였다.
○ 〈고기 낚는 늙은이를 비웃는 글[嘲釣叟]〉 2편이 있으니, “하나는 태공(太公)이 주(周) 나라 왕실을 도와 그 임금을 베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를 온전히 하지 못한 비웃음이요, 하나는 엄자릉(嚴子陵)이 하찮은 절개를 지키노라 한조(漢祖)의 중흥을 돕지 못한 비웃음이다.” 하였다.
○ 동봉이 담장 밑에 남새밭을 만들어 7,8종의 풀을 심고, 여덟 수의 시를 지어서 적었는데, 목숙(苜蓿 거여목)ㆍ산약(山藥 마의 뿌리)ㆍ산계(山薊 삽주)ㆍ황정(黃精 죽대 뿌리)ㆍ당귀(當歸 승검초 뿌리)ㆍ자강(子薑)ㆍ훤초(萱草 원추리)ㆍ홍료(紅蓼 여귀)가 곧 그것이다. 조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이 〈청한자를 제사하는 글[祭淸寒子文]〉에,
환술을 나타내어 기적을 세우니 / 現幻術而立奇
참으로 공이 불을 미워함이로다 / 誠我公之惡斯
하였다.
○ 동봉이 금오산(金鰲山)에 살 적에 눈 내리는 밤에 화로를 끼고 있노라면,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하고 바람 불어 대 소리만 솨솨 하는데, 산동(山童)과 함께 재를 긁으면서 글자를 쓰고 옛사람의 글귀를 모아 산거(山居) 백 수를 이루었다.
○ 하늘은 이마라, 높아서 위가 없고 맑기가 가히 없다. 기운이 있어 빙빙 돌아 운행이 쉬지 않는다. 해와 달, 별들이 광명하게 매달려 있고 바람과 비, 서리와 이슬은 그 기운이 화(化)하여 떨어지는 것이다.
○ 악장(樂章)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꿩이 군자를 힘쓰다[有雉勗君子]〉요, 또 하나는 〈갈대가 현인을 생각한다[蒹葭思賢]〉였다.
○ 동봉이 충신을 열거하고 돌이켜 슬퍼하면서 찬(贊)을 지었는데, 용방(龍逄)ㆍ비간(比干)ㆍ기자(箕子)ㆍ이제[伯夷叔齊]ㆍ난성(欒成)영유(甯兪)왕촉(王蠋)신포서(申包胥)굴원(屈原)장량(張良)소무(蘇武)공승(龔勝)이업(李業)무후(武侯)악비(岳飛)문천상(文天祥)이다.
○ 청한자(淸寒子)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산림에 거처하매 봉우리를 마시고, 시냇물을 쪼으면서[飮峯啄澗] 반드시 법도를 정제(整齊)하였으므로 나아가서 당대의 스승이 되었다.” 하니, 음봉탁간(飮峯啄澗)은 돌로 양치질 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한다[漱石枕流]는 뜻이다.
○ 전주(全州) 종이를 금강전(錦江牋)이라고 부르는데, 매월당(梅月堂)의 시에,
금강 봄 물 매끄러운 종이에 / 錦江春水膩魚牋
한가로이 새 시를 지어 두어 편 쓴다 / 閑製新詩寫數篇
큰 붓 한 번 휘두르니 천둥치고 비 내리는 듯 / 鉅筆一揮電雨動
흰구름 쌓인 속에 그린 용이 꿈틀거리는 듯 / 白雲堆裏畵龍飜
하였다.
○ 관서(關西)에 졸 제, 평양 서쪽에 들어가 석벽(石壁)에 꽂은 시가 있었는데,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평양성 서쪽 푸른 바닷가 / 君不見平壤城西滄海潯
포구의 석벽이 비녀처럼 깎아지른 것을 / 浦口石堧如削簪
큰 물결 굉음을 울리며 파도에 휩쓸리니 / 巨灇鳴瀧入海濤
흡사 패옥과 생황소리 같다네 / 怡似環珮笙鏞音
또 보지 못하였는가. 바닷가 부들 우거진 마을에 / 又不見海堧菰蒲鄕
봄 모종 잘 자라고 가을 벼 향기로운 것을 / 春苗芃芃秋稻香
8월 9월 벼 익을 때에 / 八月九月稻熟時
옥을 일고 구름으로 밥 지어 수저로 떠서 맛보네 / 淅玉炊雲翻匙嘗
하였다.
○ 산중에서 읊은 〈지초시(地椒詩)〉가 있는데,
지초가 봉우리 높이에 났으니 / 地椒生峯危
매운 향기 몽정보다 더하네 / 香辣勝蒙頂
달빛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씻고 / 浥之淸澗月
푸른 돌솥에 달여 / 煎此靑石鼎
단정히 절방에 앉았노라 / 端坐上方窓
내 코를 찔러 봄잠을 깨우네 / 激我春睡醒
하였다.
○ 도연명(陶淵明)에 화답한 시가 60여 편 있는데 〈화도(和陶)〉라고 이름하였다.
○ 〈하시(荷詩)〉에,
이른 봄 연한 줄기는 삶아 먹을 만하고 / 春前莖嫩堪爲茹
늦가을에 뿌리 살쪄 김치 담글 만하도다 / 秋後根肥可作菹
하였는데, 지금 시골 남새밭에 많이 심으니, 맛이 향기로워서 먹을 만하다.
○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양육을 받았는데, 외로운 외손자라 하여 아들처럼 사랑하여 길렀다.
○ 〈삼나무를 심다[種杉]〉라는 시에,
동풍이 너의 겨울 가지를 길렀는데 / 東風長汝歲寒枝
비와 이슬을 한 자 되는 몸에 담뿍 받았구나 / 兩露偏承一尺姿
내 정원에 심어 북돋우니 / 種我公庭伋培土
뭇 꽃이 업신여긴다 탓하지 말라 / 煩君莫說衆芳欺
하였다.
○ 〈죽순을 보호함[護筍]〉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봄바람이 어린 죽순을 불러 일으키니 / 春風喚起籜龍兒
비단 같은 이끼 뚫어 낱낱이 올망졸망하구나 / 抽錦穿苔介介癡
가시를 꽂아 울타리 둘러 짐승을 막으니 / 挿棘編籬防獸觸
내일 아침이면 파릇파릇 순을 보리라 / 明朝應見碧參差
하였다.
○ 변산(邊山)에서 개 한 마리가 바위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가 한 해가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동봉이 일찍이 호남에 놀면서 시를 지었는데,
으르렁거리는 산개 바위틈에 엎드렸는데 / 狺狺山犬伏岩霔
구름은 솔숲으로 돌아 가고 해는 기울었도다 / 雲返松關日已斜
개도 생각 있어 세상 물정 잊었는데 / 狗亦有心忘物外
세상 사람 어이하여 분요함을 피하지 않느뇨 / 世人何不避喧嘩
하였다.
○ 〈부앙(俯仰)〉시에,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아득히 가이 없는데 / 俯仰杳無垠
그 가운데 이 몸이 있구나 / 其中有此身
삼재(천ㆍ지ㆍ인)에 참여하여 함께 섰으니 / 三才叅幷立
한 가지 이치가 저절로 분명하구나 / 一理自分明
욕심에 끌리면 미물이 되고 / 形役爲徵物
몸을 닦으면 곧 큰 군자 되리라 / 躬行卽大君
하였다.
○ 〈푸른 전나무[綠檜]〉라는 시가 있는데,
뜰 앞의 푸른 전나무 하늘까지 자랐는데 / 庭前綠檜叅天長
뼈마디 크고 굳세어 굽힐 줄 모르네 / 骨節老大剛不僂
몸뚱이 송백 같아 세속을 따르지 않고 / 體備松栢不隨俗
기품은 지출을 머금어 맑은 향기 풍기도다 / 氣含芝朮淸香馥
하였다. 또 소나무와 전나무로 이엉하고 오두막을 지어, 그것을 글제로 삼아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낙엽으로 방석을 삼고 / 落葉以爲氈
마른 등걸로 두공을 삼네 / 枯査以爲櫨
구름과 아지랑이로 장막을 삼고 / 雲霞爲帳幕
푸른 산으로 병풍을 삼는도다 / 碧山爲屛風
하였다.
○ 동봉이 도롱이를 사 입고 홍수를 구경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는데,
백 전으로 새로 도롱이를 사 입고 / 百錢新買綠蓑衣
다리에서 큰 물을 구경하고 늦게 돌아오도다 / 觀漲溪橋帶晩歸
가는 비에 바람은 그치지 않는데 / 細雨斜風吹不斷
어깨를 솟구치고 사립으로 들어오네 / 一肩高聳入蓬扉
하였다.
○ 친구의 방문을 기뻐하여 지은 시에,
나그네 살이에 찾아오는 사람 없어 / 客裏無人弔
사립문 종일토록 닫혀 있네 / 柴扉盡日關
무심히 세상일을 보고 / 無心看世事
눈물 속에 구름 낀 산을 생각하네 / 有淚憶雲山
옛 친구는 사이가 멀어지고 / 故舊星踈濶
친한 벗은 전혀 오가지 않네 / 親朋絶往還
반갑다, 그대 반날을 머무르니 / 喜君留半日
마주 보고 얼굴 한 번 펴네 / 相對一開顔
하였다.
○ 〈동풍악(東風惡)〉 한 편을 노래하였는데,
동풍이 나쁘도다, 동풍이 나쁘도다 / 東風惡東風惡
쌀쌀한 봄바람 그칠 새 없구나 / 料峭無時休
……
만약에 동풍을 인심에 비할 양이면 / 若將東風比人心
동풍이 질 낮음을 부끄러워하리라 / 東風忸怩爲下風
하였다.
○ 일찍이 호남에서 놀았는데, 전날 놀던 고장 이름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기를,
먼 데 바라보니 산이 무등인데 / 望遠山無等
가는 길 골짜기에 꾀꼬리가 있도다 / 程途谷有鶯
향기로운 밭 벼는 옥구에 풍년인데 / 香秔豐沃溝
서리맞은 귤은 장성에 비치는구나 / 霜橘映長城
하였으니, 유앵(有鶯)은 골짜기 이름, 무등은 산 이름, 옥구와 장성은 모두 고을 이름이다.
○ 〈추한 꽃[醜花]〉ㆍ〈아리따움[美艶]〉 두 편이 있는데, 〈추한 꽃〉은 하나〈얼굴이 □[面 □]〉, 둘 〈오목 눈[凹眼]〉, 셋 〈코가 큼[鼻大]〉, 넷 〈입술이 두꺼움[唇厚]〉, 다섯 〈쑥대머리[蓬頭]〉, 여섯 〈이지러진 귀[窳耳]〉요, 〈아리따움〉은 하나 〈붉은 입술[絳唇]〉, 둘 〈복사빛 뺨 [桃腮]〉, 셋 〈버들 눈썹[柳眉]〉, 넷 〈높게 틀어올린 머리[雲髻]〉, 다섯 〈금비녀[金釵]〉, 여섯 〈우유빛 살결[酥乳]〉이라 하였다.
○ 〈산중 초목 7영(山中草木七詠)〉이 있는데, 하나 〈오래 묵은 잣나무[古栢]〉, 둘 〈산에 저절로 난 대나무[山竹]〉, 셋 〈후추나무[地椒]〉, 넷 〈골짜기에 난 난초[谷蘭]〉, 다섯 〈인삼(人蔘)〉, 여섯 〈만년송(萬年松)〉, 일곱 〈삼수지(三秀芝 1년에 세 번 솟는 지초)〉이다.
○ 금오산(金鰲山)에 살면서부터 멀리 노닐기를 기뻐하지 않고, 다만 매인 데 없이 한가히 노닐며 매화와 대를 찾아 읊고 취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 성질이 편벽되어 가난하여도 빌지 않았고 주어도 받지 아니하였다. 〈동서명(東西銘)〉을 본떠서 〈남북명〉을 지어 남쪽과 북쪽 벽에 붙여 놓았다.
○ 하늘은 위에 있어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밝히며, 별들은 총총하다. 추위와 더위의 교체와 어둠과 밝음이 갈마드는 것은 질서 있는 움직임이요, 땅은 아래에 있어 하늘에 순종하고 산천초목은 흐르고 솟고 우거지고 마르고 하는 것이 모두 역시 질서 있는 움직임이다. 〈동봉서〉
○ 형적(形迹)이 있는 위험은 막을 수 있으나 형적이 없는 위험은 누르기 어렵다. 토목의 역사(役事)를 일으켜 궁실(宮室)을 수축하고, 창고가 넘쳐 씀씀이가 사치하고, 풍속이 부박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담론만 맑고 높으며, 정령(政令)을 아침에 내고 저녁에 고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위험한 형적이니, 곧 형적 없는 위험이다. 상동
○ 산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물에 임하면 그 맑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며, 돌에 앉으면 그 굳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솔을 보면 그 절개 곧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달을 마주하면 그 밝음을 배울 것을 생각한다. 상동
○ 덕(德)은 재주의 근본이요, 재주는 덕의 남은 것이니, 옛날부터 재주가 넉넉하면서 덕이 모자라는 사람은 먼저 곧으나 뒤가 흐린 흠을 면하지 못한다. 상동
○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마르는 버섯[朝菌]은 해를 보면 마르고, 대춘(大椿)은 8천 년을 춘추로 삼으며, 하루살이는 아침에 났다 저녁에 죽고, 상서로운 새는 천 년을 한 평생으로 삼는다. 그러니 조균(朝菌)이 대춘(大椿)이 되고, 하루살이가 상서로운 새가 되려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늙고, 늙으면 죽는 것은 정해 놓은 이치인데, 요행히 장수를 누리는 자는 또한 괴상한 물건이다 하였다.
○ 성인(聖人)의 말은 글은 간략하나 뜻은 풍부하고, 부처[浮屠]의 말은 글은 번거로우나 뜻은 비어 있다 하였다.
○ 같은 짐승이지마는 고라니나 사슴이 마당에 오면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기며, 개나 양이 산에 살면 사람들이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사는 곳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 천길 높은 곳에 사는 봉황은 가시나무에 살지 아니한다. 가시나무에 살면 매미나 꾀꼬리가 희롱하여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돌 쌓인 아름다운 대나무 숲에 높이 날아야 가히 그 상서로움을 나타낼 것이요, 깊은 못의 용은 말 발자국 속에 고인 물에는 놀지 않는다. 말 발자국 속에 고인 물에서 놀면 거머리나 지렁이가 붙들고 기롱할 것이니, 반드시 용문(龍門)의 뛰는 물결에 헤엄치고 놀아야 가히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 백이 숙제의 뜻이 비록 그때 사람들과 다르기는 하였으나 후세의 신하된 사람들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는 다르지 않다. 수레를 모는 데 비유하면, 수레를 밀고 끄는 것이 팔을 쓰는 방법은 비록 다르나 모두 뜻은 수레를 모는 데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깊은 골짜기와 넓은 들에 사는 짐승은 추워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더워도 서늘하게 할 수가 없다. 먹는 것은 누린내 나는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의 순이지마는 앓지 않고 일찍 죽지 않는 까닭은 몸을 보호함에 마음을 쓰지 않는 까닭이다.
○ 거미가 모이면 손님이 오고, 까막까치가 지저귀면 좋은 일 궂은 일이 있다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천지의 기운을 고루 타고나서 일원(一元)의 묘리에 함께 자라났기 때문에 비록 기품(氣稟)에는 차이가 있으나 알고 깨닫는 성정(性情)에는 일찍이 다름이 없으므로 사람의 일이 은연히 동하면 다른 물류(物類)가 먼저 응하여 알리는 것이다.
○ 도(道)를 싣고 있는 것이 역(易)이요, 그것을 발휘(發揮)한 것이 점(占)이다. 앞서기로는 천백 세(世) 전의 일과 이후로는 천백 년 후의 일이며, 천하 안에 있는 온갖 물건의 드러난 형상이 제각기 다름에 대하여 문밖에 나오지 않고서도 그 흥폐(興廢)와 길흉을 아는 것은, 역의 이치는 도(道)를 갖추고 있으며, 도의 본체(本體)는 나에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 위의(威儀)를 삼가고 조심함은 덕(德)의 짝이다. 그것이 정(情)에 있으면 희로애락이 되고, 몸에 있으면 언어 행동이 된다. 그것이 몸가짐에 있으면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리고, 관대(冠帶)에 있으면 보불(黼黻)을 수놓고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첨시(瞻視)를 높여 엄연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다.
○ 임금의 몸은 천지(天地)와 같아 크게 포용하여 밖이 없고, 해ㆍ달과 같이 항상 밝아서 잘 비추며, 산악과 같아 두텁고 무거워서 옮기기 어려우며, 강과 같아 깊고 넓게 적셔주면서도 마르지 않는다.
○ 유능한 군주는 반드시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아, 화근이 우물쭈물하는 데서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화근이란 무엇이냐? 청담고론(淸談高論)은 화의 근원이요, 궁실이나 원유(園囿)는 화의 터전이다. 무익한 것을 함부로 숭상하는 것은 화의 번짐이요, 사랑 받는 여인이 은밀히 들어가 임금을 뵙는 것은 화의 근원이다. 간사한 무리가 아첨하고 참소하는 것은 화의 매개요, 주연을 베풀고 흥청거리는 것은 화의 날개요, 사냥하고 유람하는 것은 화의 형틀을 지고 정수리를 마멸시키는 것이다.
○ 태평한 세상의 정치는 간소하면서도 무게가 있고, 어지러운 세상의 정치는 번거로우면서도 가볍다.
○ 옛사람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찍이 잠깐 동안도 마음에서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명절에는 배례하고 성묘하며, 제삿날이면 추천(追薦)한다. 산소(山所)에서는 잡목을 금하고, 소나무나 가래나무를 심는 것이 모두 추모의 정을 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동봉서(東峯書)〉
○ 송진으로 단술을 만들면 술을 대용할 수 있는데, 먹기가 좀 쓰기는 하지마는 술은 독이 있으나, 이것은 독이 없으니 오장(五臟)을 편안케 할 것이다. 〈추강(秋江)에 답한 편지〉
○ 수(數)에는 대기(大期)가 있고 소기(小期)가 있으니, 대기는 음양이 한번 닫혔다가 열림이요, 소기에는 한 시간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하루에 다 하는 것이 있고, 한 달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한 해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한 대(代)에 다하는 것이 있다. 시간에 다하는 것은 기후(氣候)요, 날로 다하는 것은 낮과 밤이요, 달로 다하는 것은 초하루 그믐이요. 해로 다하는 것은 더위와 추위요, 대로 다하는 것은 인간 세상과 인물(人物)이 함께 죽는 것이다. 〈동봉서〉
○ 요즘 과거볼 때에 쓰는 문장을 보면 아름다운 듯하나 따지고 보면 뜻이 없다. 그 말이 비록 입에 흐르는 듯하나 새벽 이슬이나 봄 서리와 같다.
○ 곡식을 심는다는 것이 보리에서 조에 이르기까지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밤이 여물어 거두어들이는 것이 수십 섬이나 될 것인데 며칠 안 가서 산쥐가 모조리 없애 버리어 남은 이삭이라고는 없어진다. 만일 모자라서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포철(鋪餟 하는 일 없이 관록을 타 먹음)을 구한다면 선비의 지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
○ 산림에 사는 선비는 삼베옷이 남루하여 겨우 무릎을 감추고 갈건(葛巾)이 드러나 머리털을 가리지 못한다. 〈산림서〉
○ 북극성은 하늘의 중추(中樞)로서 늘 그 자리에 있어 움직이지 않아 기(氣)의 주인이 되고, 하늘의 중심에 있어서 수레바퀴의 굴대와 같고 맷돌의 배꼽 같아서 움직이려 하여도 움직일 수 없다. 〈동봉서〉
○ 수(壽)를 연장하는 방법은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며, 탐욕을 줄이고 잠을 가벼이하며, 희로(喜怒)를 알맞게 하는 것이다. 대개 언어에 절도가 없으면 허물과 걱정이 생기고 음식에 절제를 잃으면 몸이 허약해진다. 탐욕하면 위란(危亂)이 일어나고, 잠이 지나치면 게으름이 생기며, 희로가 알맞음을 잃으면 그 성명(性命)을 보전하지 못한다.
○ 우(虞 염려)는 생각의 즈음이요, 복(福)은 경사의 기본이요, 연(宴)은 편안함의 때요, 화는 독의 싹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업은 우려(憂慮)로써 흥하고 일예(逸豫 편하게 즐김)로써 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잘 다스리는 사람은 다스리기를 원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순응하는 것이다. 다스리고자 하면서 몸소 실천하지 아니하면 백성이 배반하는데, 백성이 배반한다고 하여 형벌을 가하면 위태한 길이다.
○ 뜻이란 마음이 가는 것이니, 뜻이 이르는 곳에는 아무리 굳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고 높아서 이르지 못할 것이 없으니, 그 나아가는 방향에 사(邪)와 정(正)의 구분만이 있다.
○ 지금 속인들은 무식하여 위세(位勢)가 있으면 하루살이나 개미가 태양에 향하는 것과 같고, 위세를 얻으면 꼽추가 굽히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다.
○ 여러 봉우리 청산과 한 조각 흰구름은 불청객(不請客)이 되고, 말 없는 짝이 된다.
○ 만년에는 유독 거리의 개구쟁이나 미치광이와 함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 늘 바보짓을 하고 항상 웃으며 출입이 무상하니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우명행록》
○ 세조가 섭정한다는 말을 듣고 수락산 정사(水落山精舍)로 들어가 살면서 유생(儒生)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수련(修練)하는 일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상동
○ 성시(城市)에 노닐면 빈 배가 물결을 타듯하고, 산림에 숨어서는 외로운 구름이 쓸쓸히 흩어지는 것 같다. 〈동봉서〉
○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였으며, 섬기기를 지성껏 하였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은 방법에 어두우니 금비(金篦 금으로 만든 살촉 같은 것으로 안질에 쓰는 도구인데, 여기서는 깨우친다는 말이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하니, 동봉이 말하기를, “좋다. 법연(法筵)을 크게 열라.” 하고, 가부좌(跏趺坐)로 앉았다. 중들이 모여서 꿇어앉아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동봉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 매었다. 또 말하기를, “꼴 다발을 가져오라.” 하여 소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어(法語)를 듣고자 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소는 가축 중에서 가장 우둔한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리에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인(俗人)들은 ‘소 뒤에 꼴 놓기’라고 한다.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추강(秋江)과 더불어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 되어,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도(佛徒)가 되었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아니하였으며, 늘 거리를 지나가다가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어버리고 한참 동안 박은 듯이 서 있기도 하고, 혹은 문득 거리 길을 돌아서 가면 여러 아이들이 기와조각을 던져 쫓았으므로 세상 사람이 미치광이 중으로 지목하였다. 상동
○ 금오산에 들어가 글을 지어 석실(石室)에 간직하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들을 기술한 것으로 우의(寓意)가 있다.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서 지은 것인데 곧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상동
○ 세로[竪]로 말하면, 해와 달의 왕래, 별들의 운행, 추위와 더위의 갈마들음, 음양의 교대, 차고 비고 성하고 쇠함이 모두 기(氣)요, 가로[橫]로 말하면, 산천과 악독(岳瀆)의 융결(融結), 비바람과 서리와 이슬들의 시행(施行), 초목의 자라고 마름, 인물의 움직이고 쉼, 성현(聖賢)의 어리석은 무리와의 구별, 청탁과 순수와 잡박(雜駁)의 가지런하지 않음은 모두 기가 천지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이다. 〈복기편(服氣篇)〉
○ 복기(服氣)란 오신(五神)을 지키고 사정(四正)을 따르는 것이다. 5신은 심장ㆍ간장ㆍ허파ㆍ지라ㆍ콩팥이요, 4정은 말ㆍ행동ㆍ앉기ㆍ서기를 바르게 함이다. 상동
○ 잘 다스리는 임금은 군자를 대접하기를 지초와 난초같이 하고, 소인을 피하기를 범이나 뱀과 같이 한다. 〈군자와 소인의 변(辨)〉
○ 만약, 좋은 날을 만나면 맑은 물과 향불을 갖추어 옛 선현에게 예배하고, 혹은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명월(明月)을 맞이하면 눈물을 뿌리면서 돌아오기를 잊어버리곤 하였다. 〈집서(集序)〉
○ 청한자의 시구(詩句)의 용어(用語)는 성률(聲律)에 구애 받지 않으나 전장(典章)이 문란하지 아니하고, 사화(詞華)를 꾸미지 아니하나 큰 옥덩어리처럼 더욱 아름답다. 〈집서〉
○ 성질이 간이(簡易)하고 꾸밈이 적으며, 성품이 또 세상 물정에 어두운 데가 많았다. 그러므로, 담론이 맹랑하며 세속을 희롱하였다. 〈집서〉
○ 성품이 매인 데가 없고 호탕하여 세상 형편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세할 수가 없어, 드디어 때로는 중에게 때로는 속인에게 형적을 의탁하여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가슴속에 쌓인 많은 불만을 발산시켰다. 〈집서〉
○ 모여든 중생의 승업(勝業)을 위하여 한 절에 들어가 그 중들에게 화전(火田)을 갈기를 권하여 거두어들인 것이 조금 푸짐했다. 곧 나무를 깎아서 통을 만들어 산골짜기에 늘어놓고 그 안에다가 술을 빚어 두고 표주박으로 퍼먹기를 몇 달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그가 세상을 비분(悲墳)함이 이와 비슷한 것이 많았다. 〈집서〉
○ 의사란 진실로 반치(反置 약을 짓는 데나 병을 고치는 데 있어서 두고 안 둘 것을 잘 가림)를 알맞게 할 수 있다면 이끼나 쇠똥과 말똥 따위로도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은 모두 양의(良醫)다. 〈인재설(人才說)〉
○ 목수가 진실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할 줄 알면 큰 것은 대들보가 되고, 가는 것은 서까래가 될 것이며, 부소(扶蘇)의 줄기나 나무 조각 하나가 모두 아름다운 재목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상동
○ 인생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명리(名利)에 급급하고 생업에 골몰함이 마치 뱁새가 능초[苕]에 연연하고 박[瓠]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유관서록(遊關西錄)》
○ 일찍이 어느 깊은 산에서 표주박 한 개를 가지고 암자 뒤의 폭포를 받아 손에 받들고 꿇어 앉아 인시(寅時 밤 4시)로부터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만약 물이 쏟아지면 다시 부어서 유시에서 인시까지 여전히 받들고 꿇어 앉아 있었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잘 드는 칼 같은 어금니가 있어, 또 제 수레바퀴의 고임 나무를 물어서 내가 가지 못하게 하였고 또 다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 한다. 상동
○ 동봉이 종이나 밭과 집을 남이 빼앗아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일찍이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가 다시 그 사람을 따라가 돌려달라 하고, 몸소 관가에 가서 맞대고 싸우며 떠들어대기를 거리의 장사치들의 다툼질 하듯 하였다. 마침내 시비가 가려져 관의 문서[官卷]가 이루어지매 소매 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도랑 속에 던졌다. 그가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수언(粹言)》
○ 관동을 유람하고 난 뒤 호남에 이르니, 주민들이 부유하고 물산이 넉넉하기가 관동에 4ㆍ5배나 되었다. 백제가 이것에 의지하여 강했으며 교만하여 망한 것이다. 《유호남록(遊湖南錄)》
○ 만 길 낭떠러지 쳐다보기도 힘드는데 / 蒼崖萬丈仰難企
뇌우가 이 돌 위의 버섯을 길렀구나 / 雷雨長此石上耳
안은 터실터실하나 겉은 매끈한데 / 內面髼鬆外面滑
따다가 매만지니 맑기가 종이 같도다 / 摘來煩摑淸似紙
〈석이버섯을 읊음〉
○ 아름다운 돌이 가시 얽힌 산꼭대기에 있고 / 美石在荊顚
밝은 달이 깊은 못에 잠겼도다 / 明月沈重淵
양공의 쪼음을 만나지 못하니 / 不遇良工琢
누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인 줄을 알리 / 誰知無價珍
동봉의 시
○ 옷과 관과 신은 백성의 가죽[皮]이요, 술과 밥 따위의 음식물은 백성의 기름이다. 〈애민의(愛民義)〉
○ 기린은 우리[牢] 안에 매였고 개 돼지가 날뛰는구나 / 麒麟縶牢兮犬豕跳梁
봉황은 조롱 안에 갇혔고 닭오리가 훨훨 나는구나 / 鳳凰鎖籠兮雞鴨翶翔
〈의조상루(擬弔湘纍)〉
○ 한 어린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서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꼬리를 끌어 처량한 느낌이 있었다. 매양 달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어린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낭송하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심장의 신(神)은 눈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눈이 빛을 탐하게 되어 오래 보면 피를 상하고, 콩팥의 정(精)은 귀로 나타나는 것이니 귀가 소리를 탐하게 되어 오래 들으면 콩팥을 상하고, 지라의 넋[脾魄]은 코로 나타나는 것이니 코가 냄새를 탐하여 냄새를 오래 맡으면 지라를 상하게 된다. 〈수진편(修眞篇)〉
○ 말을 많이 하면 담(膽)을 상하고, 오래 누워 있으면 기(氣)를 상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살[肉]을 상하고, 오래 서 있으면 콩팥을 상하고, 오래 걸으면 간을 상한다. 상동
○ 만약, 보지 않고 듣지 않아 눈을 감고 입을 막음이 극에 달하면, 사람도 진화(進化)하지 못한 명령(螟蛉)이나 진흙 속에 도사린 소라와 같을 것이다. 상동
○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일찍이 길에서 어떤 노파가 두부를 주자 곧 시를 읊었는데,
품질이 맷돌 속에서 나왔는데 / 稟質由來兩石中
원광이 해가 동쪽에서 솟는 것과 같도다 / 圓光正似日生東
삶은 용, 구운 봉황에는 미치지 못하나 / 烹龍炮鳳雖莫及
머리털이 없고 이 빠진 늙은이에게 가장 적합하구나 / 最合頭童齒豁翁
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온 나라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지목하여 ‘다섯 살’이라고만 불렀고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였다. 〈행장(行狀)〉
○ 어버이가 죽자 그 무덤자리를 가려 편안히 장사지내는 데 풍수에 구애되지 않았다. 대개 그 편안한 곳을 가리되, 첫째는 흙의 두께를 가리고, 둘째는 물의 깊이를 가리고, 셋째로는 소나무나 가래나무가 자랄 만한가, 넷째는 세상이 바뀌어도 갈아서 밭을 만들 수 없고, 다섯째는 가까워서 시제(時祭)를 지내기에 편리한가. 이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 장사 지내는 것이 군자의 행할 바이다. 비록 시체라도 구천(九泉)에 편안히 거처하게 함은, 역시 인자하고 사랑하는 깊은 뜻을 잊어버리지 못해서다. 〈상장서(喪葬書)〉
○ 경태(景泰 명(明)의 대종(代宗)의 연호) 을해년(1455)에 삼각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세조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문을 닫고 나가지 않기를 사흘, 하루 저녁은 갑자기 통곡하더니 그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거짓 미친 체하여 뒷간으로 빠져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스스로 설잠(雪岑)이라고 불렀다. 행적(行迹)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만나 갈기를 흔들면서 길게 울고,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를 만나 재주를 다하여 거문고를 탔다. 〈동잠서(東岑書)〉
○ 성인(聖人)은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말 없이 도를 행한다. 성인은 시키지 않아도 믿는다. 〈천지편(天地篇)〉
○ 잘 다스리는 임금은 형벌은 있고 놓아줌[赦]은 없으며, 매우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정치에 있어 변경함이 없다. 〈형정의(刑政義)〉
○ 덕(德)은 행(行)의 실속이요, 행은 덕의 나타남이다, 덕이 넉넉하면 행은 저절로 나타나고, 행함에 허물이 없으면 덕이 저절로 빛난다. 〈덕행의(德行義)〉
○ 옛날의 성왕(聖王)은 그 궁실을 낮추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하려고 하며, 의복을 아무렇게나 하고 백성을 두껍게 입혀 따뜻하게 하려고 하며, 음식을 변변치 않게 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며, 스스로 만족하여 위대한 척하지 않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자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백성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게 하고자 하였다. 〈인군의(人君義)〉
○ 임금이 궁실에 있으면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고, 수레나 가마를 탔을 때에는 백성의 화평을 생각하여, 예사로이 바치는 물건도 대견히 여기고 어여삐 여겨야 하니 어떻게 망령되이 무익한 짓을 하여 백성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애민설(愛民說)〉
○ 어진 정치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여 이 업을 힘쓰는 데 있을 뿐이다. 그것을 권하는 방법은 번거롭고 시끄럽게 명령을 내려 아침에 깨우치고 저녁에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거둬들이기를 적게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여 그때를 빼앗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매월당설(梅月堂說)〉
○ 한 말을 가지고 평생을 행할 것은 ‘충서(忠恕)’다. 충서로 처하면 변고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좋은 말이 네 거리를 달리는 것 같아서 비록 천하를 멋대로 달려도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상변설(常變說)〉
○ 강직하게 그릇됨을 고치게 하는 것은 쓴 듯하나 실은 달고, 온갖 행동으로 아첨하는 것은 평안한 듯하나 마침내는 위태한 것이다. 군자를 가까이하면 갈수록 가경이요, 소인을 접하는 것은 혜서(鼷鼠)라 몸을 죽이는 독약이다. 〈군자와 소인의 변(辨)〉
○ 지금의 평양 남쪽에 정전(井田)이 있어 길을 경계하여 여덟 집이 정전을 같이 하고 있다. 허물어진 담과 집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매월당(梅月堂)
○ 〈동이음(同異吟)〉이 있는데 이르기를,
같고 다르고 다르고 같고 같고 다르고 다르니 / 同異異同同異異
다르고 같고 같고 다르고 다르고 같고 같도다 / 異同同異異同同
같고 다른 참소식을 알려거든 / 欲知同異眞消息
높고 높은 최상봉에서 보고 알라 / 看取高高最上峯
하였다. 상동
○ 날마다 거문고를 타면서 〈백설(白雪 노래 이름)〉을 노래하니,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뜻을 아는 자가 부르지도 않는데 와서 당하(堂下)에서 듣는 것은 반드시 뜻밖의 일이라고 놀랄 것은 없다. 상동
○ 청한자는 유교를 행하면서 불교의 형적(形跡)이요, 성리(性理)에 밝고 불교에 대하여도 널리 알았다. 상동
○ 사람이 나면 팔자가 각기 다르고 수요(壽夭)도 또한 각각 차이가 있으나 같은 배에 탄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함께 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고, 한 싸움터의 군졸이 동시에 싸움에 지면 간(肝)과 뇌(腦)가 땅에 흩어지는 것은 이것이 대개 천지 만물의 운수가 그런 것이다. 상동
○ 청한자가 하루는 과격히 큰소리로 말하기를, “불교의 이치는 자못 깊다. 그러나 유학은 본래 단계가 있어 건강한 자가 사다리를 올라감과 같아서 가까스로 한 발을 들면 겨우 한 칸에 도달하니, 한 순간에 깨닫는 통괘한 즐거움은 없으나 우유 함영(優遊涵詠 한가롭고 침착하게 학문의 진리를 음미함)의 맛이 있다.” 하였다. 〈매월당서(梅月堂序)〉
○ 하늘과 땅의 호흡(呼吸)은 동지(冬至) 뒤는 ‘호(呼)’가 되고, 하지(夏至)뒤는 ‘흡(吸)’이 되는데 그것은 1년의 호흡이요, 자시(子時) 이후는 ‘호’가 되고 오시(午時) 이후는 ‘흡’이 되는데 이것은 하루의 호흡이다. 상동
○ 수락산(水落山)에 우거(寓居)하고 있을 적에 비 내린 뒤에 산골 물이 불을 때면 종이를 찢어서 종이 조각 1백여 장을 만들어 가지고 반드시 여울이 빠른 곳을 골라 거기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시를 짓는데 혹은 절구(絶句), 혹은 율시(律詩), 혹은 고풍(古風)을 종이에 써서 흐르는 물에 띄워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또 쓰고 또 흘러 보내고,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 하여 종이가 다 떨어져서야 돌아왔다. 척언(摭言)
○ 너는 양 밖의 양이요 / 如是羊外羊
나 역시 사람 밖의 사람이로다 / 我亦人外人
똑같이 물건 밖의 물건이니 / 同是物外物
각기 몸 밖의 몸을 보전하자 / 各保身外身
하였다. 매월당〈영양(羚羊)〉
○ 일찍이 금오산에서 지내면서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 《금오신화(金鰲新話)》몇 권을 지었는데, 시를 지어 그 책 끝에 쓰기를,
오막살이 푸른 담요 따뜻도 한데 / 矮屋靑氈喓有餘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한 달밝은 밤이로다 / 滿窓梅影月明初
등잔 돋우고 밤새 향 피우고 앉았으니 / 挑燈永夜焚香坐
사람이 보지 못한 책을 볼까 두렵구나 / 恐看人間未兒書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풍기(風氣)는 무심한 것이어서 풍토가 맞지 않으면 저절로 산천의 독기(毒氣)가 되는 것이니,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몸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에 닿아서 자연히 병이 되고, 범하면 혹 죽기도 한다. 〈귀신론(鬼神論)〉
○ 매양 옛 도읍(都邑)에 노닐 때마다 반드시 배회하고 머뭇거리면서 비분강개하여 슬피 노래부르며, 몇 달 동안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본집(本集)
○ 평양에 설지(舌池)가 있는데 전하기를 한 노파가 혀를 씻은 곳이라고 한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하찮은 이를 탐내다가 큰 은혜를 잊었으니 / 小利貧來忘大恩
한 마디의 말이 만년의 원한이 되었도다 / 一言便作萬年寃
지금 못물이 피로 흐려졌으니 / 至今池水渾成血
사람이 말하기를 미친 할미 혀 씻은 흔적이라네 / 人道癡嫗洗舌痕
하였다. 상동
○ 〈산사(山畬 산전)〉시에
돌밭 험하여 돌투성인데 / 石田多犖确
그나마 절반은 덩굴투성이 / 高下半藤蘿
깊은 산골에 있으니 / 縱是山深處
해마다 구실[科 각종 조세] 면함직하네 / 年年可免科
하였다. 상동
○ 〈나는 그만 못하네[我不如行]〉 두 편을 지어 스스로 탄식하였는데, 하나는,
나는 장자방이 / 我不如張子房
한 권의 소서로 한왕을 도움만 못하다 / 一部素書佐漢王
하였고, 둘째는,
나는 제갈공명이 / 我不如諸葛孔明
두 편의 표를 올려 충성을 다함만 못하다 / 兩章上表輸忠誠
하였다. 상동
○ 동봉의 한 평생 품고 있던 마음을 세상 사람은 엿보지 못하였다. 시를 지을 제 고비 미(薇), 고사리 궐(蕨) 자를 즐겨 쓴 것도 그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척언
○ 속은 어둔하고 겉은 약은 것이 소인의 성질이요, 속으로 야무지고 겉은 트인 것이 군자의 길(吉)함이다. 〈환도명(環堵銘)〉
○ 즐거움이란 쾌적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와 쾌적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잘 조화되고 쾌적하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그 즐거움을 같이하는 것이다. 〈천지편(天地篇)〉
○ 생(生)을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에 젖어들고, 인(仁)을 베푸는 혜택이 사방에 흐르면 비바람이 때를 맞추고 음양이 질서 있어, 세상이 태평하여 기린을 매어 둘 수 있고, 까치가 둥지를 틀 것이다. 매월당편(梅月堂篇)


 

[주D-001]어찌 …… 얻어 : 도홍경(陶弘景)은 양(梁) 나라 때에 산중에 있는 도인(道人)인데, 그의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는고, 영(嶺) 위에 흰구름이 많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는 글귀가 있다.
[주D-002]송섬(宋纖)의 …… 언덕을 : 남조 시대의 은사(隱士)인데 태수(太守) 마급(馬岌)이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탄식하며 글을 지은 것에. “붉은 벼랑 천 길[丹崖千丈]”이란 글귀가 있다.
[주D-003]벼슬살이는 …… 맵고 : 새앙과 육계(肉桂)는 오래될수록 매워진다. 그러므로 늙을수록 기력이 정정하고 강직한 사람을 가리켜 강계지성(薑桂之性)이라 한다. 《송사(宋史)》에, “새앙과 육계는 늙어서 더욱 맵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4]적씨(翟氏) : 도연명(陶淵明)의 처인데, 연명의 뜻을 받아 숨어 사는 가난한 생활을 편안히 하였다.
[주D-005]맹광(孟光) : 후한(後漢)시대 양홍(梁鴻)의 처인데 남편의 높은 뜻을 받아 숨어 살았다.
[주D-006]도인(導引) : 신선한 공기를 체내(體內)로 이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이다.
[주D-007]〈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간신의 모함으로 임금에게 쫓겨나 애국지성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離騷)라는 장편의 서정시를 지었다. 이(離)는 조(遭), 소(騷)는 우(憂)의 뜻으로 근심을 만났다는 뜻이다.
[주D-008]고기 …… 글 : 신숙주(申叔舟)가 강태공(姜太公)과 엄자릉(嚴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고 한다.
[주D-009]태공(太公)이 …… 비웃음이요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위수(渭水) 가에서 처음 만나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호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뒤에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나라 왕 주(紂)를 쳐서 주(周) 나라를 세웠다.
[주D-010]엄자릉(嚴子陵) …… 비웃음이다 : 엄자릉(嚴子陵)이 한(漢) 나라 광무제에게 불려갔다가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 아래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주D-011]용방(龍逄) : 하(夏) 나라 걸왕(桀王)의 신하 관용방(關龍逄)인데, 걸왕의 무도함을 간하다가 피살되었다. 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로서 주왕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은 비간(比干)과 나란히 불리우는 충신이다.
[주D-012]난성(欒成) : 난성자(欒成子)인데 춘추시대 진(晉) 나라 대부로 무공(武公)이 진 나라 애공(哀公)을 쳐서 죽이고 난성자에게 상경(上卿)의 높은 벼슬로 불렀는데 난성자가 싸우다 죽었다.
[주D-013]영유(甯兪) : 공자가 칭찬한 영무자(甯武子)이고 위(衛) 나라 대부인데,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드러난 공적이 없는 것 같다가, 나라가 위태하매 충성을 다하여 타국에 잡혀가 죽게 된 임금을 구하여 왔다. 《論語》
[주D-014]왕촉(王蠋) :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齊) 나라를 쳐서 멸하고 획읍(劃邑)이란 시골에 사는 어진 사람 왕촉을 불렀더니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면서 목매어 죽었다.
[주D-015]신포서(申包胥) :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와 형이 죄없이 죽으매 오자서가 초(楚) 나라에서 망명하여 달아나다가 친구 신포서를 보고, “내가 장차 초 나라를 망치리라.” 하니, 신포서는, “자네가 망친다면 나는 회복시키리라.”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초 나라를 망치매 임금은 국외로 달아났다. 신포서가 진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할 적에 일곱 날 일곱 밤을 뜰에 서서 울자 진왕이 감동되어 군사를 빌려 주어 신포서가 초 나라를 다시 회복하였다.
[주D-016]굴원(屈原) :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 충간(忠諫)이 용납되지 않아 멱라수(汩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울분에 넘친 많은 서정적인 시를 썼다.
[주D-017]장량(張良) : 한(漢)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충신으로, 자는 자방(子房)이다. 소하(蕭何)ㆍ 한신(韓信)과 함께 한 나라의 삼걸(三傑)이라 일컫는다.
[주D-018]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잡히어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절개를 굳게 지킨 공으로 전속국(典屬國)을 받았다.
[주D-019]공승(龔勝) :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의 충신으로,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단식하여 죽었다.
[주D-020]이업(李業) : 전한(前漢) 말기의 고사(高士)로 왕망(王莽)의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산중에 숨었더니 뒤에 공손술(公孫述)이 촉(蜀)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업을 부르기를, “오면 공후(公侯)의 높은 벼슬로 대접할 것이요, 오지 않으려면 이 약을 먹으라.” 하고, 독주(毒酒)를 보내니 업은 마시고 죽었다. 공손술이 크게 놀래 부의로 비단 백 필을 보내자 업의 아들은 도망하고 받지 않았다.
[주D-021]무후(武侯) :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운 제갈량(諸葛亮).
[주D-022]악비(岳飛) : 남송(南宋)의 무장이며 충신으로서, 여러 차례 금인(金人)의 침입을 격퇴하여 용명을 떨쳤다.
[주D-023]문천상(文天祥) :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된 후 임금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元) 나라 군사에 대항하였으나 실패, 사로잡혀 유폐(幽閉) 생활 3년에 참형을 당하였다. 그의 〈정기가(正氣歌)〉는 옥중에서 지은 것으로 후세의 충신과 의사(義士)들을 고무하였다.
[주D-024]대춘(大椿) : 전설상의 큰 나무 이름으로 인간의 3만 2천 년을 1년으로 한다고 하며, 장수(長壽)함을 대춘지수(大椿之壽)라고 한다.
[주D-025]보불(黼黻) : 옛날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에 놓은 수인데, 보(黼)는 검은빛과 흰빛으로 도끼의 모양을 수놓은 것이요, 불(黻)은 검정과 파랑으로 아(亞)자 모양을 수놓은 것이다.
[주D-026]천리마가 …… 울고 : 백락은 말이 좋고 나쁨을 잘 감별하였다고 한다.
[주D-027]백아(伯牙)가 …… 탔다 : 백아는 춘추시대의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종자기는 같은 시대의 초(楚) 나라의 음악가인데,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곡조를 잘 알아들었고 그 마음도 깨달았다고 한다.
[주D-028]혜서(鼷鼠) : 쥐의 일종인데 주둥이에 독이 있어 사람을 물면 죽는다. 그러나 그 주둥이에 사람이 물려도 아픔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유쾌한 기운을 느끼므로 죽어도 모른다.
[주D-029]정전(井田) : 중국 삼대(三代) 때의 농지 분배의 제도인데, 1리 사방의 농지를 상(井)자형으로 9구역을 만들어 가운데 1구역을 공전(公田), 다른 8구역을 사전(私田)이라 하여 백성의 8집에 나누어 각각 농사를 지어 차지하고, 공전은 8집이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주D-030]《전등신화(剪燈新話)》 : 명(眀) 나라의 구우(瞿佑)가 지은 괴담(怪談) 소설집으로 21편이 실려 있다.
[주D-031]금오신화(金鰲新話) :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산에 살면서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서 단편 소설집이다. 중국의 《전등신화》를 본떠서 지은 것인데 현재에는 다음의 5편만이 남아 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南炎浮州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주D-032]소서(素書) : 진(秦) 나라의 황석공(黃石公)이 짓고. 송(宋) 나라 장상영(張尙英)이 주석을 붙인 책인데, 도(道)ㆍ 덕(德)ㆍ 인(仁)ㆍ 의(義)ㆍ 예(禮)의 다섯을 일체로 삼아 부드러움으로써 강함을 누르고 물러감으로써 나아감을 꾀한다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昆侖集卷之十五
 祭文
贈執義金時習東峰祠宇賜祭文 己卯 a_183_273b



虞仲臝飾。逖處荊閩。伯夷餓死。恥臣西隣。先聖序列。183_273c 首之逸民。或稱中淸。或與得仁。孰繼高風。端廟有臣。心惟避粟。迹類文身。百世仰止。巍若峩岷。寔天生材。星嶽降神。楊晏之竗。國器儒珍。聖祖咨嗟。恩奬諄諄。勖爾成德。期爾經綸。屬時禪遜。邦命維新。羣龍滿朝。接翼奮鱗。廢然自放。絶意昌辰。形同蟬蛻。裂冕毁紳。身若雲游。窮厓絶垠。豈縛禪寂。名假心眞。穢而愈皭。堅則不磷。誦騷山中。投詩水瀕。倐啼忽笑。怒罵狂嗔。孰知我悲。時命之屯。告先之文。誼篤天親。譏孟之論。驚動俗人。鴻翔鳳擧。網弋難馴。貞逾雪栢。潔比霜旻。誦義欽風。縫掖莘莘。祠于故址。剗闢荒榛。凜乎183_273d 遺像。怳接光塵。予擧曠典。聿修宗禋。念爾樹立。實關彝倫。旣命褒贈。成朴與均。又錫華扁。觴俎並陳。東峰嶻嵲。梅月千春。時有遭際。道有屈伸。興言悼想。耿如隔晨。靈其顧享。仿佛來臻。


梅月堂詩集卷之四
 詩○風雲
江山白雲 a_013_153d



白雲曉羃秋江斂。江上孤峯螺一點。毿毿霜蕊粘葦花。湛湛江楓猩血染。晚來白雲渡江去。渺渺江滸征冉冉。白雲不是無心者。往來舒卷長自在。寄語白雲須訪我。過我松關吾且待。旣與汝曹俱得意。朝暮相從終莫改。君不見通明只可自怡悅。魯直看汝時拄笏。古人曾與爾爲歡。我亦與爾盟已寒。只恨往來了無迹。相對須臾難盡歡。俄然風起掃長空。但看萬里峯巑岏。


문집명 매월당집 (梅月堂集)(15-16c)
간략서지 經古 819.51-G425m梅月堂 金時習의 문집. 시집 15권‚ 문집 6권‚ 부록 2권‚ 합 23권 6책.   
간략해제 本集은 李耔·朴祥·尹春年이 각각 自筆本과 詩文을 수집하여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1582년 宣祖의 命에 의하여 李珥가 傳을 짓고 李山海가 序를 지어 1583년 校書館에서 改鑄甲寅字로 간행하였다. 그 뒤 1927년 후손인 金鳳基가 詩文을 補遺하여 시집 15권과 문집 6권으로 분류하고 부록 2권을 첨가하여 간행한 新活字本이 이 책이다. 이외에도 규장각에는 改鑄甲寅字本의 筆寫本 ≪梅月堂集≫ <奎 7062>(연대미상)과 1927년에 중간된 신활자본 ≪梅月堂集≫ <古 3428-825>이 있다. 이 가운데 필사본은 권 10·11·12·13의 4권이 빠져 있으며‚ 신활자본은 <經古本>의 신활자본과 같은 판본이지만 부록 2권 1책이 빠져 있다. 여기서는 <經古本>을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하였다. 한편 규장각에는 김시습의 시만을 묶어 간행한 ≪梅月堂詩四遊錄≫이 소장되어 있는데‚ <一蓑古 811.03-G425m>·<古 3447-83>·<古 3447-95> 3종으로‚ 모두 梅月堂集에 실려 있기 때문에 별도로 해제하지 않았다. 신활자본은 필사본에 실린 詩文을 거의 다 싣고 있으나 李耔의 序와 尹春年의 傳이 빠져 있고‚ 李珥의 傳은 부록에 실려 있으며‚ 그 밖의 시문은 분류 방식과 편집 순서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집 1권 卷首의 목차에는 <重刊序> 항목이 있으나 본문에는 없으며‚ 부록 2권의 板次 <14>가 <18>로‚ <73>이 <70>으로 誤記되어 있다.
편저자 김시습 (金時習)
저자개요 1435-1493 (세종7-성종24)字: 悅卿‚ 號: 梅月堂·淸寒子·東峯·碧山淸隱‚ 僧名: 雪岑‚ 諡號: 淸簡‚ 本貫: 江陵‚ 父: 日省‚ 母: 仙槎 張氏
저자내용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방랑생활을 하였다. 2세 때 외조부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李季甸·金泮·尹祥에게 四書三經과 諸史를 배우고 諸子百家는 독학하였다. 端宗遜位 이후에 隱居放浪생활을 하였는데‚ 단종의 祭日에는 曹尙治·李蓄·鄭之産·宋侃·趙旅·成熺 등과 함께 계룡산 東鶴寺에서 御衣를 진열하여 통곡하고 三相(黃甫仁·金宗瑞·鄭苯)과 死六臣에게도 致祭하였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한 이도 김시습이라 한다. 그의 사상은 儒佛道的인 요소가 섞여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李珥는 心儒迹佛이라 하여 바탕은 어디까지나 儒者였음을 강조하였고‚ 李耔는 “行儒而迹佛 明理而該釋”이라 하여 유학과 불교에 두루 통하였음을 말하였다. 그는 특히 奇行과 詩人으로 유명한데‚ 李山海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不平한 심정이 詩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고 평하였다. 金紬·金守溫·徐居正·洪裕孫·南孝溫 등과 교류하였으며‚ 제자로는 道義·學梅·善行 등이 있다. 저술은 詩集이 대부분으로 <遊關西錄>·<遊關東錄>·<遊湖南錄>·<遊金鰲錄> 등이 있는데‚ <유금오록>에 수록되어 있는 <金鰲新話>는 여기에는 빠져 있다.
내용제목 梅月堂集 내용개요 청구기호 經古 819.51-G425m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1521. 李耔(1480-1533)가 쓴 서문. 신활자본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필사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매월당집의 첫 서문으로서 自筆遺篇 3권과 詩文 약간을 수집하여 편집하게 된 경위와 詩의 호탕함을 언급하고‚ 성격과 奇行에 대한 부정적인 世評에 대하여 그를 변론하고 있다.
舊序 (序1) 1583. 李山海(1538-1609)가 쓴 서문. 宣祖의 命으로 校書館에서 간행하게 된 경위와 그의 高風·才氣·奇行에 대하여 서술하고‚ 특히 시에 대하여 시대적 상황에 대한 不平한 심정이 그대로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世系圖 始祖 金閼智로부터 金時習과 金德良에 이르기까지의 세계도.
寫眞 自畵像을 다시 찍은 것
畵像跋 1672. 宋時烈(1607-1689)이 쓴 발문. 김시습의 자화상을 安東 金壽增이 모사한 것을 보고 감회를 적은 글
遺筆 후손 金演采의 書帖에서 뽑은 김시습의 필적.
書淸寒子筆蹟後 1673. 宋時烈이 지은 글. 盧守愼(1515-1590)이 오대산에 있는 절에서 구한 김시습의 유필을 보고‚ 글씨와 德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말함.
권제 권제목:詩集 卷一
詩: 古風 古風十九首
詩: 紀行 鴨峯路花‚ 蘆原草色‚ 金溪魚躍‚ 立石麥浪‚ 鼓巖泥滑‚ 祭壇綠蕪‚ 枉心烟墟‚ 普濟餞飮‚ 宿山村‚ 早行‚ 祈石嶺‚ 抱川縣‚ 陶店‚ 途中‚ 狄城嶺‚ 槽嶺村‚ 水草岾‚ 淸平山‚ 牛頭原‚ 昭陽江‚ 母津‚ 水波嶺‚ 加平縣‚ 椵峴‚ 甘泉‚ 古呑‚ 蠶室‚ 槌嶺‚ 向江東‚ 宿价川客館‚ 栽松原‚ 踰岊嶺‚ 渡昇天浦‚ 宿水村‚ 甲串‚ 無題‚ 渡浿水‚ 宿德川別室‚ 興義舘同野人宿‚ 宿村家‚ 旅情‚ 旅宿
詩: 述懷 壯歲‚ 感懷‚ 寓歎‚ 窮愁‚ 自笑‚ 書感‚ 飽食‚ 一室‚ 排悶‚ 排譴‚ 漫成‚ 寓意‚ 初寒‚ 潭上有感‚ 悶極‚ 蹭蹬‚ 毁譽‚ 自悔‚ 書感‚ 漫成‚ 一身‚ 自貽‚ 達朝不寐向曉偶作‚ 放言-十四首‚ 自貽‚ 偶吟‚ 謾成‚ 喞喞‚ 夜雨記事‚ 世故‚ 悠悠‚ 壯志‚ 獨坐逢人啜茶賦詩‚ 偶吟‚ 秋思‚ 感興二首‚ 怪事‚ 有懷‚ 漫成二首‚ 觀物‚ 大言‚ 小言‚ 開窓寓言三首‚ 感懷‚ 感興‚ 怱怱‚ 一日‚ 獨坐書懷‚ 旭日‚ 幽居‚ 百年‚ 偶題‚ 縱筆四首‚ 自勉‚ 不覺‚ 夜坐記事‚ 偶吟‚ 謔浪笑‚ 書懷‚ 謾成‚ 翳翳‚ 十年‚ 偶書‚ 戱甚走題‚ 燈下-二首‚ 病中言志-二首‚ 寓意‚ 漫遊‚ 感時‚ 屋漏歎‚ 觀史有感-二首‚ 看史傷心-三首‚ 自嘆-四首‚ 有喜-二首‚ 有感二首‚ 東窓二首‚ 破悶‚ 感懷-五首∕屈平‚ 感懷-五首∕賈誼‚ 感懷-五首∕揚雄‚ 感懷-五首∕宋玉‚ 感懷-五首∕自叙‚ 述古十首‚ 無題-五首
詩: 詠史 嘲二釣叟∕呂望‚ 嘲二釣叟∕嚴光‚ 魯仲連‚ 詠三諫臣∕比干‚ 詠三諫臣∕屈原‚ 詠三諫臣∕伍員‚ 讀唐史‚ 王莽-三首‚ 漢宣帝‚ 讀光武紀‚ 精忠旗-三首‚ 夷齊三首‚ 哀班師‚ 哀文山三首‚ 四皓翁‚ 臥龍三首‚ 墜橋履‚ 留侯引‚ 哀蘇武二首‚ 看史謾題
詩: 詠東國故事 金侍中騎騾訪江西慧臺上人‚ 鄭中丞謫居東萊對月撫琴‚ 郭翰林冒雨賞三池蓮花‚ 金居士雪中騎牛遊皺巖‚ 題江陵獄壁
詩: 懷舊 憶舊遊‚ 憶故山‚ 紀地名念昔遊也∕關西‚ 紀地名念昔遊也∕關東名山‚ 紀地名念昔遊也∕湖南‚ 紀地名念昔遊也∕嶺南‚ 懷東都‚ 與四佳亭阻隔已久探箱得詩二首遙憶彌多因和其韻‚ 望雲思人代人作-三首‚ 偶題‚ 挑燈話舊
詩: 時事 有人逢施愛之叛於永安逃竄山谷生還因其語以紀之‚ 旱甚‚ 野人‚ 怕旱‚ 頌歲稔紀故老語
詩: 宮殿 宮詞三絶
詩: 陵廟 讀健元陵碑‚ 健元陵‚ 顯陵‚ 武侯廟-二首‚ 岳王廟-三首
詩: 題人居室 題正叔書廳‚ 戱題元部將家壁
詩: 居室 葺松檜以爲廬‚ 山村‚ 吾廬‚ 濂溪室-三首
詩: 閑適 掃葉‚ 窓日‚ 耽睡‚ 閑興‚ 閑意‚ 坐臥‚ 笑浮生兼慶岑寂‚ 偶成‚ 醉鄕‚ 閑適‚ 閑意‚ 高眠‚ 午寢‚ 排㽅‚ 據梧‚ 山中‚ 坐茂樹以終日‚ 濯淸泉以自潔‚ 睡起‚ 不出
詩: 卽事 卽事‚ 蘆原卽事‚ 卽事三首‚ 卽景‚ 途中卽事‚ 喜晴‚ 淸晨‚ 晩晴‚ 曉起‚ 卽事‚ 晴景‚ 卽事‚ 曉起‚ 卽景‚ 曉望‚ 明窓曉望‚ 朝日‚ 晴景‚ 卽事‚ 曉意‚ 朝日‚ 晝意‚ 卽景‚ 記卽事‚ 薄暮-二首‚ 曉霽-三首‚ 曉色‚ 曉霽-二首‚ 日暮-二首‚ 開窓卽事-二首
詩: 堂宇 樂眞堂-五首
詩: 城郭 市街
詩: 田圃 遊圃‚ 田家卽事-三首‚ 農家‚ 草盛豆苗稀‚ 耘苗‚ 山畬
詩: 仙道 訪友於三淸宮適醮立冬‚ 登三淸宮‚ 夜宿祭署感懷‚ 遊仙宮贈柳別提‚ 贈道士‚ 贈三淸監點‚ 別道人‚ 凌虛詞-五首
詩: 釋老 贈峻上人二十首‚ 贈善行題詩軸‚ 待梅公不至‚ 贈敏上人三首‚ 敏上人同諸伴來問道‚ 與南方僧期雲門山‚ 嘲僧鼾‚ 送人感別三首‚ 夜坐看經‚ 題昇曦道人詩卷-三首‚ 和敏師惠襪韻以謝-二首‚ 示學梅二首‚ 贈梅師‚ 逢梅又別四首‚ 問珠和尙‚ 喜恩入選見訪贈‚ 送牛上人遊方‚ 有僧自寶蓋山來有作‚ 誠之來學人天眼目‚ 和四佳先生韻示微上人‚ 得丸和尙執明帚坐花間擬去蜘蛛網以嬉以和尙之意戱作‚ 贈靈光僧‚ 與僧話舊‚ 送尋隱上人歸故山詩卷五首‚ 送僧還鄕‚ 次淸隱韻‚ 送悅上人遊五臺山五首‚ 醉次四佳韻贈山上人‚ 洛山寺贈禪上人三首‚ 洛山丈室座下五首‚ 書佛祖軸‚ 贈仁上人-二首‚ 送仁師還鄕二首‚ 贈正上人六首‚ 贈道安字高世‚ 贈僧‚ 題熙上人詩軸
詩: 隱逸 幽居‚ 山居‚ 訪隱者二首‚ 幽居四首‚ 尋隱-香山‚ 與修禪者同隱‚ 瑩道舊來訪論道‚ 巖竇‚ 習之山居四首
詩: 寺觀 題梅公房‚ 山房卽事‚ 題壁‚ 題少林菴‚ 春遊山寺‚ 題知止師房二首‚ 遊神護寺‚ 遊仁王寺‚ 遊樂岸寺‚ 古寺‚ 白石寺‚ 開天寺‚ 鳳尾寺‚ 遊懸燈寺‚ 宿寶禪寺‚ 宿開慶寺‚ 題淸平山細香院南窓二首‚ 古寺‚ 龍泉寺‚ 遊遠迹精舍
詩: 節序 中秋無月二首‚ 紅葉‚ 新霜‚ 九日‚ 悲秋‚ 七夕後一日有感‚ 中元‚ 秋夜‚ 七夕三首‚ 七夕‚ 秋懷‚ 秋日‚ 秋晴‚ 九月九日夜聞雨聲至曉天氣稍寒晨起則晴而益勁‚ 秋意-三首‚ 夏意‚ 秋晴卽事‚ 秋興‚ 秋日卽事‚ 十月初吉見殘菊寒蜂有感‚ 秋興‚ 元日立春‚ 春寒‚ 初夏池上‚ 春咏二首‚ 立春‚ 春耕‚ 端午‚ 夏日二首‚ 歲寒吟‚ 四節回文∕春‚ 四節回文∕夏‚ 四節回文∕秋‚ 四節回文∕冬‚ 歲除‚ 早春‚ 偶題二首‚ 秋日卽事‚ 和惜春詩三首
詩: 晝夜 夢中作‚ 靜夜‚ 夜深‚ 寓夜‚ 月夜獨步庭中‚ 晝靜‚ 晝景‚ 晝意
詩: 月 缺月上東山‚ 月色‚ 倚欄待月月上喜題‚ 月夜偶題‚ 山中秋夜月色如海照我床簾可喜也‚ 中秋夜新月二首‚ 月夜‚ 中秋與好古翫月‚ 海月‚ 四月十四日夜月‚ 笑太白
詩: 雨雪 雨後‚ 喜晴‚ 虹銷雨霽‚ 風雨‚ 久雨‚ 秋雨書懷‚ 秋雨‚ 九月二十日雪‚ 晴後復雨‚ 霽後‚ 雨中悶極‚ 疎雨‚ 雨中示善行‚ 梅雨‚ 小雨‚ 雨晴‚ 雪夜‚ 雪覆蘆花‚ 雪裏騎牛探梅‚ 乍晴乍雨‚ 雨中書懷‚ 風雨示善行‚ 雪曉三首‚ 風雨交作俄而開霽二首‚ 雪霽口占數聯‚ 夜雪‚ 春雪戱題三首‚ 風雨三首‚ 秋雨‚ 風雨連朝‚ 殘雪‚ 山雨‚ 喜雨‚ 雨晴‚ 陰晴
詩: 風雲 朝雲‚ 東風惡‚ 嶺雲-二首‚ 朝霧‚ 西風‚ 江山白雲‚ 風緊
詩: 山岳 山之陰層巓白雪山之陽盤石蒼苔亦一段佳景也‚ 靑山如許好‚ 宿峯頂‚ 暮山‚ 紀山名‚ 竪假山‚ 佳殊窟‚ 登童津山‚ 還山‚ 登摩尼山-江華‚ 淸凉山一首‚ 五臺山六首‚ 五臺山六首∕東臺‚ 五臺山六首∕中臺‚ 五臺山六首∕北臺‚ 五臺山六首∕西臺‚ 五臺山六首∕南臺‚ 五臺山
詩: 江河 溪漲‚ 買蓑觀漲而還
詩: 泉石 溫泉-白川‚ 竹筧‚ 遊冷泉洞‚ 貂溪洞‚ 憩絶澗中盤石‚ 月夜宴坐盤石‚ 坐溪邊石‚ 新漲‚ 開渠
詩: 樓閣 題院樓二首‚ 夜宿江樓‚ 運籌樓‚ 重登百祥樓‚ 登大同樓‚ 登碧瀾渡樓
詩: 亭榭 秋亭‚ 修山亭三首‚ 松亭‚ 山亭
詩: 園林 遊園戱作‚ 鉏徑‚ 歲晩居城東瀑布之頂靑松白石甚愜余意和靖節歸園田詩五首‚
詩: 晝畵 畵梅花‚ 畵杏花‚ 淨几讀書‚ 降龍解虎圖‚ 讀左氏春秋‚ 題幽篁古木圖‚ 讀春秋詩
詩: 文章 戱爲‚ 學詩二首‚ 題剪燈新話後‚ 洗硯後戱題自嘲
詩: 婦女 蠶婦
詩: 器用 紙帳‚ 呈秋扇於四佳亭-三首‚ 地爐‚ 村燈
詩: 食物 甜葫蘆‚ 供廚何所有‚ 食粥‚ 盤飧-三首
詩: 酒 佯酒歡甚‚ 無酒‚ 醉酒
詩: 茶 雀舌‚ 煮茶二首
詩: 燕飮 將軍宴‚ 觀使華宴
詩: 菜 煮芹‚ 野人烹岷芋有感‚ 采薇曲‚ 菘菜肥二首‚ 煮菌蔬於小鐺‚ 甜菜‚ 灌蔬‚ 種蔬‚ 嘉蔬
詩: 菌蕈 松蕈‚ 松菌‚ 石耳
詩: 菓實 園中瓜五詠∕靑瓜‚ 園中瓜五詠∕甜瓜‚ 園中瓜五詠∕西瓜‚ 園中瓜五詠∕紫瓜‚ 園中瓜五詠∕白瓜‚ 丹橘‚ 黃橙‚ 紅柿‚ 胡桃‚ 得橘戱題
詩: 禽 啄木‚ 野鳥‚ 聞布穀‚ 月夜聞子規二首‚ 慈烏啼‚ 子規‚ 鳲鳩‚ 禽鳥向榮木以隨鳴‚ 聞杜宇‚ 聞子規‚ 開慶寺谷深樹密雖無絶險之岡而且有雲林之狀百鳥和鳴晝夜無時可以遣悶故倣梅蘇故事作五禽言∕布穀‚ 開慶寺谷深樹密雖無絶險之岡而且有雲林之狀百鳥和鳴晝夜無時可以遣悶故倣梅蘇故事作五禽言∕脫敞袴‚ 開慶寺谷深樹密雖無絶險之岡而且有雲林之狀百鳥和鳴晝夜無時可以遣悶故倣梅蘇故事作五禽言∕欺妾婦‚ 開慶寺谷深樹密雖無絶險之岡而且有雲林之狀百鳥和鳴晝夜無時可以遣悶故倣梅蘇故事作五禽言∕我欲死‚ 開慶寺谷深樹密雖無絶險之岡而且有雲林之狀百鳥和鳴晝夜無時可以遣悶故倣梅蘇故事作五禽言∕不如歸‚ 巢燕‚ 秋鶯‚ 聞靑鳥聲有感‚ 聞鵲‚ 燕燕‚ 月中聞鴈‚ 孤鴈‚ 歸鴈‚ 怪鳥
詩: 獸 羚羊逐晴崖以曝日‚ 虎‚ 碩鼠‚ 猫兒
詩: 虫 寒蠅二首‚ 促織‚ 蜂鑽紙‚ 聞蟬且警‚ 螢火‚ 嘲蜂二首‚ 美蜂二首
詩: 魚 盆池魚
詩: 竹 盆竹‚ 竹笋‚ 山中竹‚ 看竹四首‚ 種竹九首
詩: 木 葉落‚ 松聲‚ 松濤‚ 蔓徑‚ 松絡‚ 緣檜‚ 長亭柳-代人‚ 葡萄架爲風雨所敗‚ 嶺上老松‚ 落葉二十韻‚ 題盆中松竹
詩: 花草 看花‚ 四季一朶始開‚ 花狼籍‚ 敗蓼花‚ 嘲菊二首‚ 美菊二首‚ 紫芝‚ 芭焦‚ 庭草‚ 萱草‚ 瀑布書院賞海棠‚ 芍藥‚ 雨打棠花‚ 月花‚ 萱花‚ 靑蓮‚ 海棠‚ 芍藥‚ 木蓮‚ 瑞香花‚ 菜花‚ 白菊-二首‚ 紅蓼‚ 東墻下作小圃種草七八叢八首‚ 高中樞初種園花不知所以養‚ 白菊‚ 深黃菊‚ 淺紅菊‚ 折葦‚ 梅花‚ 牧丹‚ 芭蕉‚ 海棠花‚ 榴花‚ 麗春花‚ 金錢花二首‚ 蓮房‚ 野草‚ 懶治花塢
詩: 投贈 贈安生員‚ 上四佳亭二首‚ 贈高同知‚ 上具節制-致寬‚ 上具節制宣召赴京-文信‚ 贈肅川府使‚ 逢全盡忠‚ 贈祥原守‚ 書懷上四佳亭‚ 有感觸事書呈明府三首‚ 山中悶甚示柳公薈-六首∕三首戱贈‚ 山中悶甚示柳公薈-六首∕憶乃翁‚ 山中悶甚示柳公薈-六首∕憶金頤叟‚ 山中悶甚示柳公薈-六首∕叙問‚ 贈江陵朴處士‚ 戱贈主人
詩: 簡寄 寄長湍閔處士二首‚ 寄永安節度使魚相國-有沼-十三首‚ 京洛僑居記事寄四佳亭‚ 寄友二首‚ 寄友二首
詩: 尋訪 訪舊友朴靖孫‚ 喜正叔見訪‚ 南山訪七休‚ 答李生欲訪-瓚‚ 喜友見訪‚ 有道者自山訪我告別
詩: 酬答 和箕叟韻十五首‚ 次趙大丘退休詩卷韻二首‚ 次遣興韻‚ 和四佳先生韻‚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孤竹淸風‚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碣石晴照‚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龜谷藏春‚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蓮塘避暑‚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灤江大渡‚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江亭文會‚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南山石虎‚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都山積雪‚ 和秋江四首
詩: 惠貺 謝東村老惠新粳
詩: 送別 送人之餘航五首‚ 送友人之枕江亭二首‚ 送客二首‚ 送權幽士之頭流山‚ 送李生之鄕三首‚ 重送‚ 惜別三首‚ 送人如京‚ 別秋江‚ 送人
詩: 遊賞 晩望‚ 日暮開窓遠眺二首‚ 登山頂西望長安仍念昔遊三首‚ 晩出城門‚ 望懸燈山‚ 望白雲山‚ 登龍泉寺絶頂‚ 與朴公登安市城-良‚ 登圠鈌嶺北望‚ 登金城‚ 登圠鈌嶺南望
詩: 題詠 題少年家二首‚ 題洞山驛村野‚ 題金鰲新話二首‚ 平沙落鴈‚ 遠浦歸帆‚ 瀟湘夜雨‚ 煙寺暮鍾‚ 洞庭秋月‚ 江天暮雪‚ 山市晴嵐‚ 漁村落照‚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醉遊春城‚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返棹昭陽‚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采藥仙洞‚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尋僧花岳‚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釣魚新淵‚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喚渡孤山‚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送客江亭‚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吟過石橋‚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秣馬松院‚ 有客自春川來言其鄕中十景因題以贈∕伐兎楸林‚ 山中十景∕焚香高臥‚ 山中十景∕服氣導引‚ 山中十景∕灌園鋤蔬‚ 山中十景∕躬耕代祿‚ 山中十景∕析薪拾樵‚ 山中十景∕淸溪垂釣‚ 山中十景∕携籃采菜‚ 山中十景∕采藥深洞‚ 山中十景∕移床讀書‚ 山中十景∕放曠狂疎‚ 題壁
詩: 疾病 病中‚ 病劇不能赴程還山‚ 病後‚ 山居病中‚ 疾病‚ 病劇‚ 譴病‚ 無量寺臥病
詩: 醫藥 枸杞‚ 學餌黃精
詩: 傷悼 悼海超‚ 哭正菴‚ 題成氏墓倚廬壁-參判成順祖‚ 有人七十得兒情鍾甚篤齡才四夏學語知人而今亡矣其翁悼之不勝嗚咽余亦感之作近體以弔‚ 哀高觀察妻金氏亡以高公之意悼之
詩: 輓詞 輓丁薇庵‚ 山居集句-百首(1468)
詩: 調詞 山中看月-念奴嬌‚ 春興-滿江紅‚ 燈下-天仙子‚ 如夢令-秋思‚ 浣溪-有感‚ 菩薩蠻-秋江‚ 憶王孫‚ 更漏子-燈下‚ 隔浦蓮
詩: 樂章 有雉‚ 蒹葭
詩: 歌 和薤露歌‚ 嗚呼歌
詩: 詞 子規詞‚ 竹枝詞-三首
詩: 行 猛虎行‚ 將軍行
詩: 吟 和梁父吟‚ 自然吟三首‚ 無極吟‚ 自然吟‚ 安分吟‚ 從容吟
詩: 和陶 和淵明飮酒詩二十首‚ 和靖節停雲‚ 和靖節時運‚ 和靖節勸農‚ 和靖節答龐-參軍‚ 和靖節形影神三首∕形贈影‚ 和靖節形影神三首∕影答形‚ 和靖節形影神三首∕神釋‚ 和淵明遊斜川‚ 和示周祖謝三郞‚ 和淵明乞食‚ 和怨詩楚調‚ 和答龐參軍‚ 和五月朝作和戴主簿‚ 和連雨獨飮‚ 和移居二首‚ 和還江陵夜行途中‚ 和春懷古田舍二首‚ 和爲建威參軍使都經錢溪‚ 和還舊居‚ 和於西田穫早稻‚ 和於下潠田舍穫‚ 和淵明和柴桑詩‚ 和淵明酬柴桑‚ 和淵明和郭主簿二首
詩: 雜賦 拒來學‚ 戱爲‚ 秋風淸六首‚ 秋月明‚ 落葉聚還散‚ 寒鴉栖復驚‚ 相思相見知何日‚ 此時此夜難爲情‚ 老境‚ 偶題‚ 雙六‚ 戱爲‚ 勸退休-藥名‚ 無題二首‚ 山中雜吟六首‚ 與詩人打話四首‚ 雜吟九首‚ 退慳鬼‚ 閑中足晉陸機詩四首‚ 記農夫語‚ 咏峴山花叢二十首‚ 詠妓四首‚ 美美艶-六首∕絳唇‚ 美美艶-六首∕桃腮‚ 美美艶-六首∕柳眉‚ 美美艶-六首∕雲髻‚ 美美艶-六首∕金@‚ 美美艶-六首∕酥乳‚ 詠花-五首‚ 咏醜花-六首∕面黧‚ 咏醜花-六首∕凹眼‚ 咏醜花-六首∕鼻大‚ 咏醜花-六首∕厚唇‚ 咏醜花-六首∕蓬髮‚ 咏醜花-六首∕寙耳
詩: 遊關西錄(1458) 渡洛河‚ 壺串‚ 松都‚ 扶蘇山-卽松嶽‚ 古宮‚ 花園‚ 故市‚ 故城登眺‚ 穆淸殿‚ 遊紫霞洞‚ 遊安和寺‚ 遊王輪寺‚ 登演福寺塔‚ 祭星壇‚ 遊廣明寺‚ 題佛恩寺‚ 與閔居士話-澹‚ 又贈李居士-蒙哥‚ 遊古國學‚ 謁留守‚ 遊華藏寺‚ 登聖居山‚ 遊金神菴‚ 雷劒泉‚ 遊天磨山‚ 瓢淵‚ 遊五冠山洞‚ 遊靈通寺‚ 禮洛山大士‚ 福寧寺羅漢‚ 興義館‚ 途中‚ 安城館‚ 龍泉館‚ 岊嶺‚ 洞仙驛‚ 敬天驛‚ 生陽館‚ 栽松途中‚ 浿江曲‚ 畵舫足古韻-四首‚ 鳳凰臺作招鳳歌‚ 擬楚辭九歌四首∕檀君‚ 擬楚辭九歌四首∕箕子‚ 擬楚辭九歌四首∕后土‚ 擬楚辭九歌四首∕墳衍‚ 平壤堂‚ 舌池‚ 箕子廟‚ 檀君廟‚ 素王宮‚ 箕子陵‚ 永崇殿‚ 風月樓戱題‚ 麻屯津‚ 車門小樓登眺‚ 故城懷古‚ 漁父‚ 入揷石堧贈人‚ 出長慶門外煮茗‚ 朝天石‚ 星望庵‚ 浮碧樓‚ 麒麟窟‚ 永明寺夜半書懷‚ 綾羅島‚ 迎賓館戱贈從軍者‚ 大洞江岸紀商婦語‚ 和宋少尹處儉韻‚ 上金府尹-連枝‚ 平壤紀事-三首‚ 上宋少尹‚ 登西普通門樓‚ 贈順安守‚ 守任公新學校勸余作落成記題後記事以贈‚ 贈敎官舊友‚ 贈永柔守‚ 與縣守登茅亭‚ 贈敎官舊友‚ 入安市城‚ 登百祥樓‚ 七翁仲-人傳云七佛‚ 登萬景樓‚ 薩水‚ 速古里站‚ 魚川站‚ 渡魚川‚ 峽中人家‚ 入山洞‚ 普賢寺‚ 偶寂菴夜坐‚ 與祥首座話舊‚ 登九峯頂‚ 望八萬四千峯‚ 峩眉峯‚ 上院瀑布‚ 上院‚ 望長白山‚ 遠望‚ 望狄踰嶺‚ 東觀音寺洞‚ 觀音寺‚ 與根師話‚ 咏山中草木七首‚ 高迪臺‚ 山北‚ 山家‚ 寓普賢寺書懷贈人‚ 月夜遊庭聞杜鵑‚ 簷蔔‚ 陰雨‚ 月夜‚ 晩意‚ 感懷‚ 絶俗‚ 行脚‚ 渡開平津‚ 熙川與守坐茅亭‚ 山家‚ 挑包出山‚ 重渡魚川‚ 途中‚ 安市城秋望‚ 江樓晩眺‚ 百祥樓與京洛舊友同登因送別寄遠‚ 望蓼原‚ 望獨山‚ 肅川府使問山中勝景以詩答之-延庇‚ 得古文眞寶‚ 得性理群書-二首‚ 安戎縣‚ 海戍‚ 贈蔡水使-明陽‚ 望海‚ 和金文良韻-守溫-二首‚ 遊寶菴-肅川‚ 遊東林寺-同上‚ 題白石寺-同上‚ 上元府尹-孝然‚ 上金相國赴京-連枝‚ 別任-子濬-金-順叟-以朝元祿赴京-元濬壽寧‚ 別金書狀赴京-琯‚ 贈老翁李君-平壤‚ 老翁授我道德經一部‚ 得註心經一部‚ 平壤少尹金-永濡-判官朴-哲孫-特來慰我廣法寺以詩謝而留之‚ 浮碧樓‚ 江樓晩眺-平壤
宕遊關西錄後志 내용 없음.
詩: 遊關東錄(1460) 故城‚ 禮指空像有感‚ 禪燈‚ 梵筴‚ 月夜遊中庭‚ 閑意‚ 坐禪‚ 松林寺-松都‚ 渡臨津‚ 登臨津岸亭‚ 盆浦僧舍-漢京‚ 漁村‚ 歸帆‚ 宿抱川人家‚ 暮投永平縣‚ 金化路傍樓上小憩‚ 長安寺‚ 表訓寺夜吟‚ 正陽寺‚ 看壁畵‚ 眞歇臺‚ 百川洞‚ 萬瀑洞‚ 圓通菴‚ 眞佛菴‚ 寶德窟-二首‚ 帨巖‚ 望高臺‚ 萬景臺‚ 圓寂菴‚ 國望峯‚ 開心瀑‚ 萬回菴‚ 松蘿巖‚ 無盡燈‚ 施物碑‚ 香茅‚ 巢鶴‚ 聞鶴‚ 咏四禽言∕爲誰趨利‚ 咏四禽言∕亦莫把空‚ 咏四禽言∕不如歸‚ 咏四禽言∕悲悲‚ 聞靑鼠聲‚ 復登斷髮嶺‚ 渡菩提津‚ 寶蓋山‚ 石臺菴‚ 深源寺‚ 渡大灘‚ 大田途中‚ 行宮址‚ 逍遙寺‚ 門前飛瀑‚ 紺岳晴雲‚ 道峯尖岫‚ 三角祥烟‚ 水落殘照‚ 檜巖寺‚ 題東別室‚ 指空衣鉢‚ 懶翁衣鉢‚ 看圓覺經‚ 謝海師講經以水晶數珠爲答‚ 枉心驛‚ 渡迷峽‚ 渡龍津‚ 月溪峽‚ 龍門山‚ 上院寺‚ 竹長菴‚ 龍門寺‚ 神勒寺‚ 驪江贈漁父‚ 宿桐花寺-原州‚ 原州途中‚ 雉岳山‚ 宿覺林寺‚ 芳林驛‚ 大和驛‚ 珍阜驛‚ 省原‚ 月精寺‚ 金光淵‚ 上院寺‚ 中臺‚ 西臺‚ 南臺‚ 東臺‚ 北臺‚ 大嶺‚ 丘山驛‚ 弘濟院樓登眺-江陵‚ 江陵‚ 啖竹筍‚ 文殊堂‚ 白沙汀‚ 寒松亭‚ 鏡浦臺‚ 靑鳥‚ 鯨戱‚ 日出‚ 尾閭‚ 鮫室‚ 蜃樓‚ 天琛‚ 水怪‚ 歎桑田‚ 嘲精衛‚ 聽天鷄‚ 懷蟠桃‚ 嘲徐市‚ 哀秦皇‚ 望三山‚ 遊仙歌-六首‚ 淸夜遊五臺‚ 懶翁裝包二首∕香槃‚ 懶翁裝包二首∕繩牀‚ 咏狐‚ 初構小堂‚ 摘蔬‚ 山中有淳老年高知法對話數日‚ 山中有如老住山已久尋訪相話‚ 山中有田禪老言旌善亦有碧波山最好可以棲隱‚ 渡白楊津-平昌‚ 宿平昌館‚ 渡馬蹄津‚ 高山寺‚ 客中望中秋月‚ 遊山家‚ 泛舟‚ 鷹巖窟‚ 循岸徐步‚ 遊寧越郡‚ 登酒泉縣樓‚ 逢人話別‚ 問程前村‚ 途中
宕遊關東錄志後 내용 없음.
詩: 遊湖南錄(1463) 過淸州‚ 暮投開泰寺‚ 謁灌燭大像‚ 恩津縣客舍遇廬文學因次其韻-思愼‚ 恩津縣客舍遇廬文學因次其韻-思愼∕附原韻‚ 宿參禮驛‚ 有仕宦於京者怱怱還鄕因以贈之‚ 鶯谷驛‚ 金溝縣‚ 宿金山寺‚ 途中見蘭委棄於草莽哀之而作‚ 歸信寺墟‚ 遊內藏山洞‚ 靈隱寺‚ 宿龍窟‚ 井邑縣‚ 踰蘆峴日暮‚ 過彌勒院‚ 與金直講話舊‚ 長城縣‚ 丹巖驛‚ 咏百濟故事‚ 甄氏起於完山‚ 三子囚父於金山‚ 甄萱來奔於高麗‚ 麗祖聲罪於黃山城‚ 珍原鎭山有老僧信行欲築精舍以印月名之‚ 栽松‚ 有惠斑箬鞋者謝之‚ 佳城寺羅漢堂與僧話-珍原‚ 遊羅州牧謁太守‚ 錦城祠‚ 海市‚ 靈光郡‚ 登楞伽山‚ 四聖顚‚ 不思議房‚ 來蘇寺‚ 山犬暮吠‚ 丫峯獨居‚ 尋揷槍洞禪老‚ 靑林寺‚ 海堧‚ 望島‚ 龍溪寺‚ 川原驛樓‚ 居山驛‚ 登古阜城‚ 扶安城樓‚ 寓居山驛看杏花‚ 病中‚ 元監司遣醫問病-孝然‚ 與高經歷留川原館-台弼‚ 崔安撫使來訪居山寓舍因贈-景禮‚ 贈鄭奭先輩-泰仁‚ 全州‚ 萬景臺‚ 東亭勝會‚ 天王寺‚ 錦江牋-卽全州紙‚ 花巖寺垂絲檜‚ 題淸州慶生員家壁-延-二首‚ 讀元史-二首‚ 與趙進士困戱相謔-籬-三首‚ 放鶴‚ 放彩鴨‚ 獵圍‚ 討蓴‚ 菩薩寺‚ 寺庭看楙花‚ 遊山城-淸州‚ 登無等山-光州‚ 圭峯蘭若‚ 松廣寺‚ 松逕‚ 眞樂臺‚ 虎臺‚ 曹溪樓‚ 十二影堂‚ 南原廣寒樓上聞笛‚ 安愼院‚ 八螺峴‚ 雲峯縣‚ 望智異山‚ 咸陽‚ 見巖寺‚ 海印寺‚ 流觴曲水舊址
宕遊湖南錄後志 내용 없음.
詩: 遊金鰲錄(1465-1471) 禪房寺‚ 興輪寺址-二首‚ 戱黃龍大像‚ 戱宴坐石‚ 登靈廟寺浮圖‚ 月城懷古‚ 鮑石亭‚ 五陵‚ 敬順王廟‚ 雞林-卽始林也‚ 天柱寺看花‚ 安夏池舊址‚ 集慶殿‚ 問瞻星臺‚ 代瞻星臺答‚ 探梅-十四首‚ 栢栗寺樓登眺‚ 夫子廟‚ 庾信墓-新羅將‚ 賓賢樓‚ 故城址‚ 蚊川‚ 無諍碑‚ 東亭翫月對友‚ 芬皇寺石塔‚ 東川寺看四季花‚ 南亭‚ 奉德寺鍾‚ 佛國寺-二首‚ 金氏陵-卽閼智大王陵‚ 車公墓‚ 善德王陵‚ 月城堂‚ 天王寺址-今爲人家‚ 北川金周元公址‚ 天龍寺感舊‚ 大櫓院懷古-卽南郊‚ 謁舍那大像‚ 登東山嶺望海‚ 居葺長寺經室有懷‚ 種梅‚ 黃龍洞‚ 種薔薇‚ 種栢‚ 種杉‚ 護笋‚ 洗竹‚ 白花蛇‚ 贈金進士-振文‚ 讀楚辭‚ 寄朱上庠-繼楨‚ 雪竹‚ 養茶‚ 摘松簟‚ 上崔府尹-善福‚ 贈栢栗契‚ 栢栗寺參玉版師‚ 月夜聞玉笛-新羅舊物‚ 塔寺壞圮城中以石像爲橋者頗有之‚ 餠奉寺看梅-三首‚ 蘘荷‚ 看雪‚ 把茱萸-九日‚ 北椧寺看牧丹-五首‚ 庭中紅柿‚ 摘野果‚ 海堧‚ 島夷居‚ 與日東僧俊長老話‚ 太和樓-蔚山‚ 乞還山呈孝寧大君‚ 憶故山‚ 所嚫貲財盡買圖書還故山‚ 得孟子‚ 得性理大全‚ 得通鑒‚ 得老子‚ 半途復命召固辭陳情詩‚ 望九峯巓‚ 宿中牟縣‚ 渡鈌津‚ 題津樓‚ 過善山‚ 望公山‚ 阿火驛早行望參星有感‚ 草堂病臥書懷‚ 病臥彌旬至秋深乃起感今思古作感興詩十一首‚ 古寺竹‚ 老梅‚ 宿原城西舘‚ 遊平海越松亭‚ 登望洋亭看月‚ 宿神光縣法廣寺‚ 冒雨踰君山‚ 過竹嶺‚ 渡洛東江‚ 踰鳥嶺宿村家‚ 宿漁村‚ 宿蔚珍聖留窟‚ 望羽陵島‚ 海岸有石峯高聳而頂平上有白沙萬年松纏繞峯腰石罅異草敷榮海棠爛開亦一佳境也賞翫久之因宿其上‚ 過蔚珍‚ 望太白山‚ 旌善途中‚ 慶尙淸河縣初見杏花至江原三陟山村寒梢蕭索到旌善復見杏花初發‚ 咏山家苦-八首
遊金鰲錄後志 내용 없음.
詩: 關東日錄(1483무렵) 昭陽引‚ 春愁‚ 春思‚ 有感‚ 書懷‚ 山齋‚ 自歎‚ 寓意‚ 書感‚ 患眼‚ 書懷‚ 自貽‚ 身世‚ 何爲‚ 俯仰‚ 實理‚ 一氣‚ 至誠‚ 主敬‚ 存心‚ 養性‚ 窮理‚ 正心‚ 誠意‚ 修己‚ 治人‚ 敎兒‚ 心術‚ 威儀‚ 衣服‚ 飮食‚ 言語‚ 進退‚ 誦讀‚ 舞蹈‚ 過棧道‚ 登昭陽亭‚ 江頭‚ 宿牛頭寺‚ 渡新淵‚ 渡陂上‚ 赭木塘‚ 淸平寺‚ 仙洞‚ 息菴練若‚ 崖上丹楓‚ 飛瀑‚ 獨木橋‚ 疎影齋守歲‚ 病中‚ 孤山‚ 釣魚‚ 江邊旅宿‚ 陂上‚ 水村‚ 鄕飮-二首‚ 杏亭鄕射‚ 山路看花‚ 因興謾成-十首‚ 病後‚ 棲燕‚ 鑿池‚ 東鄰櫟亭‚ 松亭‚ 屋山‚ 草舍‚ 柳磯‚ 客遊‚ 感懷-十首‚ 憶舊-七首‚ 途中‚ 古柳‚ 登昭陽亭-三首‚ 吾道‚ 有客‚ 夙昔‚ 有花‚ 春歸‚ 社鼠‚ 墉狐‚ 述古-十首‚ 寒溪‚ 客路‚ 暮歸‚ 曉行‚ 入洞‚ 登樓‚ 憫旱-二首‚ 聚雨‚ 山路‚ 我生‚ 旅夜‚ 嘲人‚ 自解‚ 釋憤‚ 遣悶‚ 寄南秀才‚ 與僧夜坐‚ 贈僧‚ 山居贈山中道人-七首‚ 山室‚ 天籟‚ 悲秋-二首‚ 石州慢-寒松亭‚ 洞仙歌-鏡浦‚ 滿庭芳-華表柱‚ 八聲甘州-白沙汀‚ 江城子-洞山舘‚ 樂眞村居四景‚ 題上元寺‚ 自警‚ 歸襄陽別朴安東‚ 登汰憊院樓‚ 七夕‚ 自然‚ 大丈夫-三首‚ 感慨‚ 渤海三章章五句‚ 和鍾陵山居詩二十四首
詩: 溟州日錄 東峯六歌‚ 我不如行‚ 東風起‚ 夜如何-二首‚ 冬至二首‚ 立春‚ 客中守歲‚ 誰家子五首‚ 擬天問-三首‚ 記事-二首‚ 前有水‚ 書事-二首‚ 莫匪‚ 燈花‚ 人日‚ 板屋‚ 復題人日‚ 太平調玉燭五首志喜也‚ 月-二首‚ 役役‚ 書笑二首‚ 記見‚ 喜聞鳥聲而感‚ 與善行鬪摴蒱戱題‚ 析薪‚ 夜吟四首‚ 髮白‚ 耳重‚ 目羞‚ 牙蚛‚ 小歌三首‚ 感懷六首‚ 戱爲五絶‚ 正月十日‚ 獨坐‚ 有蓬‚ 禿筆‚ 近峯‚ 遠峯‚ 閑意-二首‚ 燈下看蛾‚ 丙午春‚ 東寺濟老-二首‚ 日出‚ 偶然縱筆成二十五韻‚ 答上元丈室‚ 山中上元‚ 咄嗟‚ 鞫鼠‚ 上元占月記鄕談憫時也-二首‚ 有人‚ 地僻-二首‚ 莞爾‚ 春雪‚ 排悶十三韻‚ 杉枝雪壓恰似蓬島瓊花‚ 雪夜‚ 中夜‚ 晴日戱題-二首‚ 正月十七日翫月‚ 雪月‚ 夜吟‚ 叙悶六首‚ 十八日夜翫月‚ 失笑‚ 自語‚ 歎息‚ 望長庚‚ 暗室‚ 椵炭行‚ 莫休鉗歌‚ 歎暮‚ 送善行入深峯‚ 暮靄‚ 蠛蠓‚ 喜人送燈油‚ 耳鳴‚ 安分‚ 枯木‚ 望凌躋岾‚ 快意行四首‚ 登山‚ 殘陽‚ 靑絡‚ 蒼杉‚ 朝靄‚ 下弦‚ 入夜‚ 忽忽行三首哀世不遇也‚ 大觀三首‚ 我生‚ 東風行‚ 山中人‚ 遊北峯‚ 卽景‚ 山中憶友‚ 戱作俳諧體‚ 夜雨‚ 新月‚ 謝人送胡椒茶具-三首‚ 聞啼鳥聲有感‚ 聞歸鶴‚ 咏物-首‚ 有客‚ 和少陵詩三首∕一室‚ 和少陵詩三首∕老病‚ 和少陵詩三首∕愁‚ 二月十三日看月‚ 立春‚ 念舊遊‚ 懶意‚ 送人‚ 題碁局贈主人之舍
梅月堂詩四遊錄後序 내용 없음.
擬離騷 (1) 자신의 처지를 굴원에 비유하여 시대를 잘못 만남을 한탄하고‚ 절개를 지켜 구차이 세속에 동화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글로 屈原의 ≪離騷經≫을 본떠 지은 賦.
擬弔湘纍 (1) 죄없이 죽은 굴원을 弔喪하고‚ 세상사 다 잊고 은거하여 신선처럼 노닐 것을 읊은 글로 <弔湘纍>를 본떠 지은 賦.
汨羅淵賦 (2) 굴원이 투신 자살한 멱라수를 생각하며 지은 賦. 굳은 절개를 칭송하고 세상을 잘못 만난 것을 슬퍼함.
斬衣賦 (3) 預讓의 절개를 기리는 賦. 智伯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다 붙잡혀 원수의 옷을 베고 자결한 忠義를 칭송함.
胥山賦 (3) 伍子胥의 사당에 祭를 올리고 읊은 賦. 오자서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의 울분과 원한을 달램. 말미에 오자서와 예양에 대한 自評을 덧붙임.
南陽廬賦 (4) 諸葛亮의 충의를 기리는 賦. 남양에서의 은거생활과 유비에게 등용되어 오장원에서 病死하기까지의 일생을 읊고‚ 大業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을 슬퍼함.
哀賈生賦 (5) 賈誼의 忠諫을 기리는 賦. 漢文帝에게 등용되어 고금의 治亂을 논하고 급진개혁을 주장하다 참언으로 좌천된 것을 슬퍼함.
哀箕子操-三首 (6) 國運이 기움을 근심하고 왕의 마음이 改悛하기를 바라는 기자의 마음을 노래하여‚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함.
祭閣招魂辭-補遺 (7) 招魂閣에서 端宗에게 祭를 올리며 초혼하는 글.
析薪辭-八首 (7) 땔나무를 베면서‚ 산 속에서 道를 따르고 天命을 즐거이 따르며 살 것을 읊음.
懷沙賦正義 (8) 굴원의 ≪楚辭≫ 九章 중 제 五章 <懷沙>에 주석을 붙인 글.
無思 (1) 客과 問答형식으로 道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論함. 禪字에 생각하며 닦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출가한 사람은 비록 세상과 인연을 끊었지만 하루라도 생각하고 배우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함. 이하 10항목에 대해 <雜著第一 凡十章>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山林 (1) 問答형식으로 法度와 威儀에 대하여 논함. 道를 독실히 지키면 위의가 나타나고 뜻을 확고히 세우면 법도가 찬연하여‚ 山林에 처하여도 일대의 스승‚ 만세의 법칙이 됨을 말함.
三請 (3) 問答형식으로 高僧과 賢士의 去就의 차이점을 논함.
松桂 (4) 問答형식으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유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편히 하는 기능을 수행함을 논함.
扶世 (5) 問答형식으로 부처의 權道에 대하여 논함. 부처의 出家는 綱常에는 어긋났으나 지극한 도를 구하여 중생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舜과 같이 功이 허물을 덮음을 논함.
梁武 (6) 問答형식으로 佛道를 실천하는데 형식과 방편에 치우치면 근본 의미를 상실하게 됨을 梁武帝의 예를 들어 논함.
人主 (7) 問答형식으로 帝王이 佛道를 실천하는 법을 논하여‚ 佛事는 仁愛로써 백성을 편히 하고‚ 求法은 지혜를 배워 사물의 기틀을 살피는 것을 근본으로 해야 함을 말함.
魏主 (8) 問答형식으로 부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명분·겉치레 등 방편에 빠지면 왕위를 잃게 될 것을 魏의 大役事를 예로 들어 논함.
隋文 (9) 問答형식으로 隋文帝를 삼대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善을 좋아한 군주로 극찬하고‚ 시주(檀)의 세 종류(捨心·捨身·捨財)에 대하여 논함.
仁愛 (10) 問答형식으로 佛道는 慈悲와 仁愛로 儒道와 상통하지만 居하는 곳이 다름을 논함. 승려가 환속하여 등용되는 것을 비판함.
天形 (12) 客과 問答형식으로 天形·天氣·天地·日月星辰에 대해 논하고‚ 存心養性하는 것이 곧 敬天임을 설명함. 이하 10항목에 대해 <雜著第二 凡十章>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北辰 (14) 或者와 問答형식으로 북두칠성이 천체운행의 중심임을 설명하고‚ 옛성인이 이를 본받아 표준(極)을 세움에 후세의 왕은 위에서 안일하지 않고 백성은 아래에서 생업에 종사하여 모든 백성들이 화락하였는데‚ 周가 쇠미해진 이후에는 大道가 무너지고 기강이 문란해져서 諂祭淫祀가 성행하게 됨을 논함.
性理 (18) 問答형식으로 老莊의 道德論을 비판하고‚ 性理와 道德에 대한 견해를 밝힘.
上古 (19) 上古에는 無事하였다는 或者의 질문에 대한 답변. 상고에는 백성들의 곤궁함과 필요에 따라 大經大法을 마련하여 백성을 살리는데 주력하였음을 설명함.
修眞 (20) 老子의 “修眞之術”에 대한 或者의 질문에 대한 답변. 老子의 養性法과 聖人의 存心養性의 차이를 지적하고‚ 老子의 神仙은 제몸만 보존할 뿐 세상에는 이익이 없음을 주장함.
服氣 (22) 問答형식으로 神仙의 服氣와 聖人의 養氣의 차이를 지적하고‚ 養氣法에 대하여 설명함.
龍虎 (23) 問答형식으로 老莊의 成丹之法을 ≪周易≫의 卦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壽夭長短은 天命에 매인 것으로 생명을 훔쳐 편안해 질 수는 없다고 함.
鬼神 (25) 問答형식으로 鬼神과 祭祀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고‚ 淫祀를 배척하고 禮로써 제사지낼 것을 주장함.
弭災 (26) 問答형식으로 君子는 祈禱에만 매달리지 말고 德業을 닦아 災禍를 면해야 함을 지적하여‚ 命은 運數에 달렸음을 언급하고 神仙의 不夭衛生之方·卜命之術을 비판함.
喪葬 (28) 問答형식으로 擇地는 편히 처할 곳을 택한다는 의미임을 설명하고‚ 근래의 택지가 風水의 術數에 구애됨을 비판하며‚ 喪事 가운데 禮가 아닌 몇가지를 지적함.
釋性理經義與異端 (1) 天性에 대해 설명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유교의 聖人의 말과 비교하며 비판함.
學 (3) 小學‚ 窮理‚ 修己에 대하여 설명함.
敬 (3) 敬이란 하나를 주로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는 것이란 말에 대하여 설명함.
工夫 (4) 공부의 즐거움에 대하여 설명하고‚ 俯仰詩·實理詩·一氣詩·至誠詩를 덧붙임. 잡설은 김시습의 手筆이 아니므로 闕誤가 많음을 편자가 지적함.
古今帝王國家興亡論 (1) 국가의 창업과 멸망을 漢唐과 秦隋를 예로 들어 논함. 帝王의 功業은 근심걱정하는 가운데 일어나게 되고‚ 편안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가운데 망하게 됨을 경계함.
古今君子隱顯論 (3) 성현의 進退隱顯은 오직 義에 적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시대가 알맞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렸음을 논함.
古今忠臣義士摠論 (3) 良臣·直臣·忠臣에 대하여 논함. 군자는 충신보다는 미리 신하가 되지 않는 절개와 기미를 보아 먼저 물러나는 先見之智가 있어야 함을 말함.
爲治必法三代論 (4) 통치자는 마땅히 삼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함을 논함. 삼대라고 해서 모조리 본받을 필요는 없고 取捨選擇해야 함을 松栢·鳳凰을 예로 들어 논함.
夏關龍逢贊 (5) 夏桀王에게 諫하다 죽음을 당한 關龍逢을 기리는 글.
商王子比干贊 (5) 殷紂王에게 諫하다 죽음을 당한 比干을 기리는 글.
箕子贊 (5) 紂王에게 諫하다 투옥되고 미친 척 숨어 지낸 箕子를 기리는 글. 말미에 唐 柳宗元의 碑銘과 贊하게 된 심정을 덧붙임.
伯夷叔齊贊 (6) 周武王에게 殷에 대한 정벌을 중지할 것을 諫하고‚ 수양산에서 餓死한 백이숙제를 기리는 글. 말미에 贊하게 된 심정을 덧붙임.
欒成贊-諡曰共 (7) 武侯의 부름을 거절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죽은 晋哀侯의 忠臣 欒成을 기리는 글.
寗兪贊-諡曰武 (7) 衛成公을 晋에서 구해 낸 寗武子의 功烈을 기리는 글.
齊王蠋贊 (7) 燕將 樂毅의 부름을 거절하고 죽음으로 守節한 齊 王蠋을 기리는 글.
楚申包胥贊 (8) 秦에 원병을 청해 吳의 침입을 물리친 楚 申包胥의 功烈을 기리는 글.
楚屈原贊 (8) 楚 忠臣 屈原을 기리는 글로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을 슬퍼함.
張良贊 (8) 沛公‚ 즉 劉備를 도와 漢을 건국하고 은퇴하여 말년을 신선처럼 즐긴 張良의 有終之美를 기리는 글.
蘇武贊 (8) 匈奴에 사신가 19년간의 억류생활 동안 漢에 대한 절개를 지킨 蘇武를 기리는 글.
龔勝贊 (9) 王莽의 부름을 거절하고 죽음으로 漢에 대한 절개를 지킨 공승을 기리는 글.
李業贊 (9) 王莽·公孫述의 부름을 거절하고 漢에 대한 절개를 지킨 이업을 기리는 글.
武侯贊 (9) 諸葛孔明을 기리는 글.
岳飛贊 (9) 金의 포로가 된 황제를 구하려다 모함으로 옥사한 宋將 岳飛를 기리는 글.
文天祥贊 (10) 元의 포로가 되어 죽음으로 宋에 대한 절개를 지킨 문천상을 기리는 글.
濂溪先生贊 (10) 宋의 周濂溪를 기리는 글.
體元贊 (10) 帝王이 周易의 四德 중에서 元德을 잘 체득하여 仁으로 세상을 교화하는 것을 贊한 글.
調元贊 (11) 元德을 잘 조화하면 만물이 化育하니‚ 신하가 이를 본받아 왕을 보좌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찬한 글.
育萬物贊 (11) 上帝를 도와 천지간의 만물을 조화롭게 기르는 사명을 지닌 君子가 浩然之氣를 길러 正大하면 만물이 화평하게 盛하고‚ 도리에 어긋나면 만물이 죽게 됨을 찬한 글.
禮儀三百威儀三千贊 (11) 禮儀 三百章과 威儀 三千가지를 배워 힘써 행할 것을 찬한 글.
八音極諧贊 (12) 음악의 조화로움은 음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治世인가 亂世인가에 달려 있음을 찬한 글.
爲政以德贊 (12) 帝王은 德으로 백성을 보살펴야 함을 찬한 글.
富貴贊 (12) 부귀는 天命에 매여 있음을 찬한 글.
虞舜贊 (13) 虞의 舜임금을 기리는 글.
閔子騫贊 (13) 閔子騫의 孝를 기리는 글.
自寫眞贊 (13) 자신을 唐의 천재시인 李賀에 빗대어 보잘것없음을 찬한 글.
柱杖贊 (13) 자신의 지팡이를 기리는 글.
烏巾贊 (13) 자신의 巾을 기리는 글.
鶉衣贊 (13) 자신의 헤진 옷을 기리는 글.
草屩贊 (13) 자신의 짚신을 기리는 글.
預讓傳 (14) 晋人 預讓의 傳記. 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趙襄子를 여러 차례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못 이루고 붙잡혀 자살함.
伍員傳 (14) 楚人 伍子胥의 傳記. 吳의 夫差를 섬겨 越句踐을 칠 것을 누차 諫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吳에 惡談을 하여 죽은 후에 욕을 당함.
諸葛亮傳 (15) 蜀人 諸葛孔明의 傳記. 劉備에게 등용되어 後主까지 2대를 충성으로 섬기고‚ 魏를 치다 五丈原에서 병사함.
周敦頤傳 (15) 宋人 주돈이의 傳記. <太極圖說>을 지어 天理의 근원을 밝히고 孔孟學의 本源을 체득함.
邵雍傳 (15) 宋人 소옹의 전기. 李之才에게 易을 배워 天地自然의 변화에 통달함.
張載傳 (17) 宋人 장재의 전기. 젊어서 兵書를 즐기고 불교와 노자에 경도되었다가 范仲淹과 程顥·程頤 형제의 영향으로 유학에 심취하고‚ 呂公著의 추천으로 神宗에게 등용되었으나 王安石과의 불화로 물러나 남산 밑에서 講學함. 학문은 易으로 宗主‚ 中庸으로 體‚ 孔孟으로 法을 삼음.
程顥傳 (17) 宋人 정호의 전기. 주돈이의 문인. 經濟에 관심이 많아 呂公著의 천거로 등용되었으나 왕안석의 新法에 반대하여 물러남.
程頤傳 (18) 宋人 정이의 전기. 학문은 誠에 근본하여 四書로 主旨를 삼고 六經에 나아감. 벼슬을 즐기지 않고 강학에 열심하여 문하에 학자를 많이 배출함.
岳飛傳 (19) 宋將 악비의 전기. 金에 붙들려 간 徽宗·欽宗을 구하러 금 정벌에 출정하였다가 秦檜·張俊의 모함으로 옥사함.
文天祥傳 (19) 宋人 문천상의 전기. 元將 張弘範의 포로가 되어 宋에 대한 절개를 지키고 元에서 옥사함.
人才說 (1) 인재는 국가의 柱石임을 논한 글. 王者가 인재 얻기도 힘들지만 인재가 盛世 만나기는 더욱 어려움을 논하고‚ 治國에는 인재 얻기를 근본으로 삼아야 함을 논함.
生財說 (2) 帝王의 生財法에 대해 논한 글. 군주가 仁으로 재물을 늘리고 義로 비용을 절제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없어지고 國用이 넉넉해질 것이며‚ 이루고 패하는 근본은 義와 利‚ 公과 私의 사이에 있음을 강조.
名分說 (3) 명분은 禮로써 절도해야 함을 논한 글. 명분이 바로 서면 上下本末이 서로 도와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저절로 다스려짐을 강조.
常變說 (3) 常道와 變道에 대해 논한 글. 常은 만세에 변치 않는 大法이고 變은 한때의 權道로서‚ 常變은 사람에 달려 있는 것으로 君子만이 變에 처하여도 常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으며‚ 忠恕에 처하면 常變에 거리낌이 없음을 논함.
神鬼說 (4) 神鬼에 대해 논한 글. 天地 사이에 하나의 氣가 순환왕복하여 나오면 神‚ 돌아가면 鬼가 되니‚ 귀신은 天道이며 人道는 정성을 다하는 것임을 밝힘.
生死說 (4) 천지가 만물을 生生하는 道理를 논하여‚ 氣가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어 天地로 복귀함을 설명함. 뒷부분이 빠짐.
易說 (5) 역에 대해 논한 글. 역은 變易으로 變을 보고 時宜를 살피는 것으로서‚ 군자가 처세하는 떳떳한 도리임을 강조하고 卦의 次序에 대하여 설명함.
太極說 (5) 태극과 음양에 대하여 설명하고‚ 人道는 일관되게 忠恕일 뿐임을 강조함.
契仁說 (6) 1480. 仁과 契에 대한 설명. 仁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契는 合하는 것으로‚ 仁을 행하는 자는 먼저 사욕을 끊는 克己를 하여야 함을 강조함.
不義富貴如浮雲辨 (7) 不義한 부귀로 성대히 奉養하는 것은 뜬구름처럼 가볍게 여겨야 함을 논변함.
君子小人辨 (7) 군자와 소인은 義와 利‚ 公과 私의 차이임을 논변하여‚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고 匹夫가 사람을 사귈 때는 이를 잘 살피고 삼갈 것을 경계함.
異端辨 (8) 이단에 대한 논변. 春秋筆法에서는 中國 사람일지라도 夷狄의 행위를 하면 이적으로 간주함을 강조하고‚ 특히 불교를 배척함.
人君義 (9) 왕이 지켜야 할 준칙에 대한 글로서‚ 왕은 만민이 우러러보고 본받는 존재이므로‚ 왕이 위에서 皇極으로 中을 세우면 만민이 아래에서 表影함을 말하고‚ 三代 이후로는 황극을 세운 이가 드문 것을 한탄하고 후세의 왕을 경계함.
人臣義 (9) 신하가 지켜야 할 준칙에 대한 글로서‚ 君臣의 위치는 天命으로 용과 구름‚ 물고기와 물의 관계이기 때문에 군신이 서로 도운 후에야 국가가 보존될 수 있음에도‚ 후세에는 서로 草芥와 원수처럼 여김을 한탄하고 경계함.
愛民義 (10) 백성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논함.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기 때문에 인군은 仁政으로 백성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함.
愛物義 (11) 만물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논함. 만물의 生하고자 하는 天性을 이루게 하여 化育함이 곧 만물을 사랑하는 법임을 강조함.
禮樂義 (11) 예악에 대해 논함. 禮는 嫌疑를 분별하고 尊卑를 정하고‚ 樂은 性情을 바르게 하고 聲氣를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군자가 예로 恭敬하고 악으로 조화롭게 되면 형식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도 밖으로 위의가 나타나고 안으로 덕행이 쌓이게 됨을 말함.
威儀義 (12) 위의는 덕과 짝하는 것으로서‚ 모든 행위 동작에 위의가 있어야 함을 논함.
德行義 (13) 덕행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논함. 德은 행위의 본체‚ 行은 덕의 顯現으로 표리관계이니‚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爵祿‚ 富貴‚ 種族을 보존하는 근본임을 강조.
刑政義 (13) 刑政을 실시하는 방법에 대해 논함. 다스림에는 德禮가 근본이고 刑政은 權道임을 강조하고‚ 周가 쇠미해진 이후로는 덕이 박해지고 형벌이 남용됨을 한탄함.
環堵銘 (1) 집 한칸을 지어 “知命環堵”라 이름하고 담벽에 지어 붙여 自戒하는 글. 虛名을 지양하고 옛것이나 익히며 지낼 것을 다짐함.
几銘 (1) 安席에 새긴 명으로 仁德에 의지할 것을 스스로 다짐함.
榻銘 (1) 책상에 새긴 명으로 항상 恭敬에 처할 것을 다짐함.
圖書銘 (1) 籤卷 數秩에 쓴 명. 性理에 관한 글만을 읽고 분석하는 것이 군자가 책을 사랑하는 참뜻임을 강조함.
筆硯銘 (1) 붓과 벼루에 새긴 명. 곁에서 자신의 정신을 돕기를 바람.
南銘 (2) 남쪽벽에 붙인 명. 부귀에 급급하지 말고 伊尹과 顔淵을 거울삼을 것을 다짐함.
北銘 (2) 북쪽벽에 붙인 명. 世評에 구애되지 말고 義와 道를 즐길 것을 다짐함.
德量銘 (2) 五代 때 四姓十君을 歷事한 馮道를 덕량이 있다고 한 世評을 반박하여 自戒하는 글. 군자의 덕은 자신의 몸에 근본을 두어 모든 일에 저절로 미치는 것으로‚ 세상의 기분에 맞추는 것은 지식인의 수치임을 강조함.
靜室銘-補遺 (2) 방에 붙인 명. 방이 좁고 누추하지만 성실하고 여유롭게 공부를 즐길 것을 다짐함.
窮居箴 (3) 세속을 버리고 盤谷에서 궁벽하게 사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글. 顔淵‚ 曾參을 본받아 유유자적할 것을 다짐함.
養性箴 (3) 하늘이 부여한 本性을 기르는 법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으니‚ 평생 이에 의지할 것을 다짐함.
邦本箴 (3) 나라의 근본은 백성으로‚ 군주는 仁政을 펴서 백성을 편안히 해야 다스림을 보존할 수 있음을 당부하는 글.
帝誥 (4) 天帝가 誥하는 형식을 빌어 自戒하는 글. 방일하지 말고 항상 노력하고 반성하고 삼가면 功을 보게 됨을 말함.
天地篇-十章 (4) 천지의 道量과 천지를 대신하여 만물을 기르는 聖人에 대하여 설명한 글. 1편은 誠과 僞‚ 2편은 道와 易의 관계‚ 3편은 至治와 無爲‚ 4편은 萬世不變之法‚ 5편은 禮와 樂‚ 6편은 上下關係‚ 7편은 治世와 亂世의 政事‚ 8편은 有形之危와 無形之危‚ 9편은 人主와 有司의 직분‚ 10편은 음악과 군자의 適宜에 대하여 설명함.
明道程先生序 (6) 程顥에 대한 序. 異端을 분별하고 邪說을 물리쳐 孟子 이후로 끊긴 聖人의 학문을 다시 일으켰음을 칭송함.
感懷三篇後序-補遺 (6) 屈原의 忠은 왕에게 무익하고 지나쳤다는 어떤 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 굴원의 행위가 中庸을 벗어났다고 하는 기존의 평가를 인정하면서도‚ 변화하는 世態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려고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다간 절개를 太史公 司馬遷의 평가 등을 인용하여 변호함.
答秋江書-三度 (6) 南孝溫(1454-1492)이 술 때문에 실수한 뒤‚ 술을 완전히 끊겠다고 한 것에 대한 답장으로 3통이다. 옛 사람이 酒禮·酒道를 만들어 술을 절제한 뜻을 살피지 않는 것은 中庸의 도를 잃어 군자의 도리가 아님을 말하고‚ 慈堂에 대한 孝를 생각해서 술을 끊기보다는 절제할 것을 권함.
上柳自漢書-六度 (9) 柳自漢에게 보내는 다섯 통의 편지. ‘六度’는 ‘五度’의 誤字인 듯함. 첫번째는 殽酒와 쌀을 보낸 것에 대한 답례‚ 두번째는 上疏文 작성의 몇가지 요령을 언급한 답장이고‚ 나머지는 世上에 나와 벼슬하라는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는 글임.
上柳襄陽自漢陳情書 (11) 유자한에게 보내는 편지. 上國의 記를 顧接받게 된 것을 자신의 허명으로 여기고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先代世系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일생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세상에 나와 살기를 권한 것에 대해 다섯가지 불가함을 들어 완곡히 거절함. 말미에서 내용 가운데 遠祖로 제시된 淵‚ 台鉉과 三角詩의 眞僞에 대하여 후손인 金鳳起가 문제를 제기함.
禿山院記 (14) 1485. 오대산 독산원을 지나다 남긴 記. 珍富嶺과 大關嶺 사이의 길이 험하여 길가는 사람들이 괴로워하자 오대산 僧 道安이 독산원을 지어 1484년(성종 15)에 완공하게 된 경위를 기술.
祭祖父文-補遺 (14) 조부 金謙侃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제문. 異端에 빠져 불효했던 과거를 뉘우치며‚ 앞으로 聖經에 힘쓸 것을 조부에게 약속함.
兵曹判書朴公行狀-補遺 (15) 1475이후. 朴季孫(1415-1475)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행장.
圓覺寺落成會-追附 (15) 1465. 효녕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 낙성회에서 세조에게 讚詩를 바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찬시 1聯을 수록하며‚ 2聯은 유실되었음을 밝힘.
受契券-御製 (15) 1465. 세조에게서 계권을 하사받고 지은 시.
乞還山呈孝寧大君 (15) 1465. 원각사에 머물라는 세조의 명을 사양하고 金鰲山으로 다시 내려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辭退詩 1수를 수록함. 시 제목의 출처는 <遊金鰲錄>임.
半途復命召固辭陳情詩引 (16) 1465. 금오산으로 내려오는 도중 거듭되는 세조의 부름을 간절하게 사양하며 올린 陳情書와 詩. 말미에는 纂者가 詩4首를 卷末에 추가로 싣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음.
遺蹟搜補 (1) 김시습의 출생‚ 유년기의 일화‚ 端宗遜位에서 연유한 방랑생활‚ 奇行‚ 異行‚ 幻術 등에 관한 기록을 ≪朝野會通≫‚ ≪師友名行錄≫‚ ≪名臣錄談寂記≫‚ ≪東京誌≫등과 여러 문집에서 수습하여 정리한 글. 이 중에는 徐居正‚ 申叔舟‚ 金守溫‚ 南孝溫‚ 韓明澮‚ 僧 祖雨‚ 僧 學祖 등과의 일화가 보인다.
諸家雜詠 (6) 김시습에 관련된 8首의 詩를 모아놓은 글. 詩題와 作家는 다음과 같다. 雪岑爲山上人索山中四時景大醉走書四十字以贈(徐居正)‚ 別淸寒子(宋慶元)‚ 同秋江送東峯歸雪岳-辛亥(金馹孫)‚ 訪梅月堂(李恒福)‚ 水落洞懷梅月翁‚ 五歲庵(申在植)‚ 訪梅月祠于金鰲山(洪直弼)‚ 淸節祠(洪直弼)
諸家雜記 (7) 김시습에 관련된 글을 여러 문집과 서책에서 모아놓은 글. 총 20편. 1) ≪遯壑實記≫에 실린 宋侃과 宋慶元 사이의 편지‚ 2) ≪觀瀾碣銘≫‚ 3) 許慥가 金文起에게 보낸 편지‚ 4) 許篈과 李滉의 문답‚ 5) 李山海의 序‚ 6) 宋甲祚가 宋時烈에게 보인 詩‚ 7) 尹舜擧가 지은 莊陵誌跋‚ 8) ≪尤庵語錄≫‚ 9) 崔愼과 宋時烈의 문답‚ 10) ≪明齋手錄≫‚ 11) 尹拯이 李彦緯에게 보낸 答書‚ 12) 尹拯이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13) 趙光亨이 송시열에게 보낸 답서‚ 14) 李縡가 撰한 柳自湄碣‚ 15) ≪芝峯類說≫에 실린 김시습의 詩‚ 16) 김시습 影堂에 茶禮 올린 것을 기록한 글‚ 17) 김시습 畵像을 招魂閣에 봉안한 것을 기록한 글‚ 18) 朱秉純이 찬한 孤山書院講堂重修記跋‚ 19) ≪東京誌≫‚ 20) ≪於于野譚≫에 실린 崔演과의 일화
本傳 (1) 1582. 李珥(1536-1584)가 宣祖의 命으로 쓴 傳記. 사실적인 기록과 自評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 앞부분에는 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시절 世宗과 관련된 일화‚ 세조의 왕위찬탈에서 비롯된 방랑생활‚ 奇行‚ 말년의 환속과 환산‚ 無量寺에서 맞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年代順으로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金守溫·徐居正·南孝溫·鄭昌孫·柳自漢과 관련된 일화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음. 뒷부분에서는 김시습을 평하되 “心儒迹佛”이라 하여 바탕은 어디까지나 儒者였음을 강조하고‚ “才溢器外 不能自持”라 하여 그의 재주를 아까워함.
靖義諸臣列傳 (3) 세조의 왕위찬탈과 관련하여 단종에게 節義를 지킨 인물들의 열전. 禿同條에서 禿同을 “本宮奴”라 한 점으로 보아‚ 어떤 宮에서 정리해 놓은 것을 옮겨 기록한 것으로 보임. 모두 40명으로 다음과 같다. 金時習‚ 南孝溫‚ 李孟專‚ 趙旅‚ 元昊‚ 成熺‚ 成聃壽‚ 鄭保‚ 權節‚ 曹尙治‚ 權山海‚ 柳自湄‚ 具仁文‚ 權策‚ 奇虔‚ 宋侃‚ 李秀亨‚ 徐翰廷‚ 鄭之産‚ 尹譓‚ 李蓄‚ 洪演‚ 金係錦‚ 李堅基‚ 金自仁‚ 金漢啓‚ 沈遜‚ 金佑生‚ 申末舟‚ 文天鳳‚ 閔審言‚ 沈璿‚ 李岸‚ 安桑雞‚ 柳潤‚ 孫汶‚ 禿同‚ 尹生‚ 春月‚ 蟲介
列傳補遺 (13) 靖義諸臣列傳을 보충한 글. 金時習‚ 南孝溫‚ 李孟專‚ 趙旅‚ 元昊‚ 成聃壽‚ 權山海‚ 柳自湄‚ 李秀亨‚ 權策‚ 金係錦‚ 徐翰廷‚ 金漢啓‚ 沈璿 등 14명은 거듭 수록하고 있으며‚ 모두 87명으로 다음과 같다. 安平大君瑢‚ 錦城大君瑜‚ 和義君瓔‚ 漢南君@‚ 永豊君瑔‚ 權自愼‚ 鄭悰‚ 宋玹壽‚ 權完‚ 黃甫仁‚ 金宗瑞‚ 鄭苯‚ 閔伸‚ 金文起‚ 成勝‚ 朴崝‚ 朴仲林‚ 成三問‚ 朴彭年‚ 李塏‚ 河緯地‚ 柳誠源‚ 兪應孚‚ 許詡‚ 許慥‚ 李甫欽‚ 嚴興道‚ 趙遂良‚ 安完慶‚ 李耕㽥‚ 李賢老‚ 尹處恭‚ 李命敏‚ 黃義軒‚ 鄭孝康‚ 奉汝諧‚ 池淨‚ 朴夏‚ 李石貞‚ 趙完珪‚ 權署‚ 權箸‚ 庾龜山‚ 庾鰲山‚ 沈希括‚ 李澄玉‚ 金時習‚ 南孝溫‚ 李孟專‚ 趙旅‚ 元昊‚ 成聃壽‚ 權山海‚ 柳自湄‚ 李秀亨‚ 權策‚ 金係錦‚ 徐翰廷‚ 李種‚ 金漢啓‚ 沈璿‚ 安貴行‚ 朴審問‚ 李繼陽‚ 崔始昌‚ 崔沔‚ 柳義孫‚ 玄得元‚ 沈遜‚ 崔德之‚ 南須‚ 權自文‚ 金仁錫‚ 曹繼祖‚ 全希哲‚ 趙衷孫‚ 尹堭‚ 安淹慶‚ 孫叙倫‚ 尹匡殷‚ 郭都‚ 孫肇瑞‚ 崔尙柔‚ 權軾‚ 河潔‚ 河哲‚ 李智浩. 이 부분의 板次 <14>가 <18>로 誤記되어 있다.
備忘記 (34) 단종遜位와 관련된 인물들의 復官‚ 贈職‚ 贈諡‚ 建祠致祭‚ 配享 등의 문제에 대하여 조정에서 의논한 기사를 실록에서 뽑아 연대순으로 정리한 글. 기간은 肅宗과 正祖 兩代에 걸친 1691(숙종 17년)-1797(정조 21년)간이다. 1) 肅宗代: 死六臣 復官致祭 (17년)‚ 死六臣 贈諡 (20년)‚ 莊陵의 位號復舊·死六臣祠宇 移建문제 논의 (24년)‚ 元昊 旌閭·김시습 賜祭贈職 (25년)‚ 趙旅 旌褒·元天錫을 元昊의 祭에 參列·成三問의 고향祠宇에 賜額 (29년)‚ 生六臣 祠享·성삼문 外孫奉祀·成勝의 復官을 請함 (30년)‚ 生六臣祠宇에 賜額 (39년) 2) 正祖代: 河緯地 旌閭 (丁酉 元年)‚ 閔伸 贈職賜諡·李孟專 賜諡·趙旅 贈諡 (辛丑 5년)‚ 元昊·金時習·南孝溫·成聃壽 贈諡 (壬寅 6년)‚ 성승 復官贈職·朴仲林 贈諡 (甲辰 8년)‚ 鄭苯을 忠烈祠에 配享·金宗瑞의 不祧를 許함 (丙午 10년)‚ 성삼문의 祠宇를 건립하고 神主移建을 청함·金文起를 康翎鄕祠에 竝享·黃甫仁을 臨皐書院에 躋配 (丁未 11년)‚ 徐翰廷 褒獎·황보인의 아들 錫과 歆을 復官·嚴興道의 致祭를 祠版 소재지에서 거행하도록 청한 것을 허락하지 않고 賜祭所에서 행하도록 함·황보인의 不祧 논의 (戊申 12년)‚ 權山海의 復官 논의 (己酉 13년)‚ 永豊君墓의 修築致祭 논의·安平大君과 錦城大君의 合奉一祠 논의·權專 부부의 祠宇建立 (庚戌 14년)‚ 申奎 贈職·奎章閣과 弘文館에서 生死六臣 등의 祠宇致祭 원칙을 청함·成勝 贈諡·莊陵에 배향할 사람을 결정·장릉제사와 忠臣壇別壇의 致祭 보고 (辛亥 15년)‚ 왕이 친히 祭文을 지어 死六臣祠와 鷺江書院에 致祭를 명함(丁巳 21년)
東峰祠記 (50) 宋時烈(1607-1689)이 東峰 金時習의 眞影을 봉안한 사당에 부치는 記. 그를 儒家의 법도로 제사지내기에 충분함을 중국의 泰伯과 漳浦에 견주어 말함.
東峰書院事蹟記 (51) 1908. 金光洙가 지은 記. 東峰書院이 이백여년의 세월 속에 폐허가 되고‚ 東峰의 글들을 후세에 전할 수 없음을 슬퍼함.
淸風閣記 (52) 尹拯(1629-1714)이 김시습의 畵像을 봉안한 淸風閣에 대해 지은 記. 각의 유래와 변천을 설명하고‚ 화상이 중의 모습이므로 절에 봉안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하여 李珥의 “心儒迹佛”이라는 평가를 인용하여 비판함.
有知堂記 (53) 金昌協(1651-1708)이 제갈량과 김시습의 화상을 봉안한 有知堂에 대해 지은 記. 金壽增(1624-1701)이 谷雲에 유지당을 건립한 과정을 설명하고‚ 제갈량과 김시습은 出處와 隱顯은 서로 달랐지만 군신간의 의리는 상통함을 말함.
招魂閣東西廡創建記 (54) 1884. 鄭奭鉉이 招魂閣의 東廡와 西廡의 創建에 대해 지은 記. 鷄龍山 東鶴寺 옆에 端宗夫妻를 제향하는 초혼각을 건립하게 된 과정과 변천을 설명하고‚ 閣 앞에 동서로 두 행랑을 짓고 三隱‚ 三相‚ 六臣을 제향하게 된 경위를 설명함.
招魂閣重修記 (55) 1864. 蔡東陽이 초혼각의 補修에 대해 지은 記. 초혼각의 창건과 보수를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함. 김시습이 端宗의 祭日에 동학사에서 단종과 三相六臣에게 致祭하는 것을 보고‚ 세조가 그 자리에 招魂閣을 세워 致祭하게 함.
孤山書院事蹟記 (56) 尹思進이 고산서원의 내력에 관하여 쓴 글. 萬休子 任有後(1601-1673)가 龜巖書院을 창건하여 김시습을 제향하고 西坡 吳道一(1645-1703)이 김시습을 찬양하여‚ 이 세 사람을 고산서원에 함께 제향하게 됨. 말미에 張應彩의 요청으로 사적기를 쓰게 된 경위를 설명함.
遊水落山記 (57) 洪直弼(1776-1852)이 수락산의 淸節祠를 방문하고 지은 記. 김시습의 절개를 칭송하고 수락산의 勝景을 즐김.
望越臺遺墟碑陰記 (58) 田愚(1841-1922)가 지은 碑의 陰記. 宋柱憲과 李啓翼이 단종대의 망월대 옛 터에 비를 세우고 記를 청한 경위를 설명하고‚ 단종 신하들의 절개를 칭송함.
三賢祠庭碑 (59) 癸亥. 閔丙承이 지어 金堤 북쪽 삼현사 뜰에 세운 碑에 새긴 명. 삼현사에 모신 姜昇‚ 金時習‚ 南孝溫의 행적을 설명하고 절의를 칭송.
肅慕殿庭碑銘 (59) 1904-5(金福漢이 大司成이었던 시기). 金福漢(1860-?)이 숙모전 뜰에 세운 비에 지은 명. 초혼각 창건과 1904년 숙모전으로 개칭하게 된 전말을 설명하고‚ 東西廡에 祭享된 諸臣을 열거함. 말미에 宋哲憲이 추후에 모시게 된 이들을 열거.
賜祭淸節祠畵像文 (61) 1699. 朴壽淳이 지은 글로서‚ 숙종이 청절사에 봉안된 김시습 화상에 제사를 내리는 글.
賜祭西山書院宣額文 (62) 正祖癸巳(?)(正祖代에는 계사년이 없음). 鄭惟漸이 지은 글로서‚ 임금이 생육신을 모신 西山書院에 제사와 편액을 내리는 글.
追配彰節祠祭文 (62) 1791(김시습을 추배한 해). 여러 신하가 함께 지은 글로서‚ 김시습과 남효온을 창절사에 추배하는 제문. 祭主는 영월부사 李東郁임.
祭先生文 (63) 洪裕孫(1431-1529)이 지은 김시습을 제사지내는 글.
奉安位版祭文 (63) 1662. 尹拯(1629-1714)이 지은 글로서‚ 김시습 眞影을 無量寺에서 향교 옆으로 모셔 東峰書院을 지어 位版을 봉안하며 제를 올리는 글.
東峰祠春秋享祝文 (64) 1662. 윤증이 지은 동봉사 봄가을 제사의 축문.
彰節祠春秋享祝文 (64) 창절사 봄가을 제사의 축문.
影堂-在江陵-享祀祝文 (64) 강릉에 있는 影堂의 제사 축문.
孤山書院奉安文 (64) 尹思進이 지은 글로서‚ 고산서원에 모신 任有後‚ 吳道一‚ 金時習의 位次를 바르게 정하여 봉안하는 글.
常享祝文 (64) 제사 축문.
孤山書院重修時移安告由文 (65) 朱秉純이 지은 글로서‚ 고산서원 보수공사에 즈음하여 位版를 옮겨 봉안하는 것을 告하는 글.
還安告由文 (65) 位版을 도로 제자리에 옮겨 봉안하는 것을 고하는 글.
常享祝文 (65) 田種德이 지은 제사 축문.
八先生追享奉安文 (65) 계룡산 東鶴書院에 金時習‚ 朴彭年‚ 曹尙治 등 8인을 봉안하는 글.
淸逸祠-在鴻山-壇享祝文 (65) 乙未. 청일사 遺址에 祭壇을 설치하고 김시습을 祭享하는 축문.
追配淸逸祠祝文 (66) 김시습을 祭享하는 청일사 遺址의 祭壇에 金孝宗을 추배하며 올리는 축문.
三賢祠設壇文 (66) 삼현사에 祭壇을 설치하고 三賢에게 제를 올리는 축문.
三賢祠春秋享祝文 (66) 삼현사 봄가을 제사의 축문.
影堂勸緣文 (66) 朴世堂(1629-1703)이 지은 글로서‚ 影堂 創建을 위한 出捐 권유문. 김시습을 伯夷의 마음으로 虞仲의 행적을 밟았다고 극찬하고‚ 無量寺 서쪽에 그의 畵像을 봉안하기 위한 영당을 짓기 위하여 有志들의 도움을 청함.
九隱祠-在金化-上樑文 (68) 李止淵(1777-1841)이 지은 구은사의 상량문. 端宗遜位를 당하여 초야에 묻힌 김시습을 포함한 9인의 행적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들의 충절을 칭송. 말미에 香火와 書院圖書를 정결히 간수할 것을 당부함.
上王服喪錄-莊陵史補 (70) 東鶴寺에서의 단종致祭에 관한 기록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됨. 첫 부분은 치제에 참여한 인물을 열거하고‚ 둘째 부분은 단종이 賜死되는 모습을 설명하고‚ 마지막 부분은 초혼각의 설립과 舊臣들의 치제를 僧 坦禪이 기록하였음을 설명함.
祭閣招魂辭 (71) 文集 卷一에 나와 있음.
祝文 (71) 1467. 曹尙治가 지은 글로서‚ 초혼각에서 단종에게 祭를 올리는 축문. 말미에 祭享謄錄을 법당 들보에 감춘다는 사실을 僧 雲波가 기록함.
褒贈始末 (72) 김시습을 포증하는 경위를 실록에서 간추려 기록한 글. 1699년(숙종 25) 崔錫鼎(1646-1715)의 건의로 贈職賜祭하고‚ 1784년(정조 8) 吏曹判書에 추증하고 淸簡公에 賜諡하고‚ 1791년(정조 15) 彰節祠에 附享함.
敎旨 (73) 1784. 김시습을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청간공을 賜諡하는 교지. 版次가 <70>으로 誤記됨.
書院錄 (73) 김시습이 제향되어 있는 서원의 명칭과 배향 인물들을 열거한 글. 肅慕殿‚ 淸逸書院‚ 梅月祠‚ 彰節書院‚ 孤山書院‚ 西山書院‚ 龍溪書院‚ 九隱祠‚ 三賢祠‚ 硏經書院 등 모두 10곳이 수록됨.
彰節書院陳設圖 (75) 창절서원의 祭床 차림표.
彰節祠致祭文-追補 (75) 1876. 趙忠熙가 지은 글로서. 高宗이 신하를 보내 창절사에 제를 올리는 글.
重刊跋 1927. ≪매월당집≫ 重刊本 간행시 金鳳起가 지은 발문. 매월당의 덕행을 칭송하고‚ 여러 선생의 別錄을 첨부하여 중간하게 된 경위를 설명함.
任事錄 ≪매월당집≫ 重刊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박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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