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0.27. 강원도 영월여행

蘭皐 김병연 관련 자료 (김삿갓) 영월 이씨 鼎臣字聖隣號花史

아베베1 2011. 10. 30. 19:54

梣溪先生遺稿卷之六
 行狀
工曹判書李公行狀 a_306_161c


公姓李氏諱鼎臣字聖隣號花史。系出宣祖別子寧城君孝景公諱㻑。生諱倫檜原君謚貞簡。繼子諱泓咸平君謚孝簡。本生考監役贈左贊成諱時煌。廣平大君之後。以孝㫌閭。寔公高祖也。曾祖海興君貞孝公諱橿。屢奉使入燕。中國名士咸推爲賢公306_161d子。祖諱命杰以海興第四弟海淸君諱桱之子。入後海興。蔭仕星州牧使。以季子肅烈公貴贈議政府左參贊。行修於家。治效於官。人皆稱長德君子。考諱堯憲。兵曹判書謚肅烈。力辭元勳。世服其廉讓。妣貞夫人潘南朴氏。贈領議政忠獻公準源之女也。公以正宗壬子七月三日生。天資穎悟。幼有至性。纔八歲母夫人嬰疾。肅烈公時居外任。公侍側不暫離。邀毉合藥。飮膳必躬進。見者驚異之。母夫人綏嬪姊也。公十餘歲。入侍純廟。常在禁中。周旋應對。謹愼明敏。未甞少有差失。歸家絶不言宮省事。其夙就306_162a如此。庚午中進士試。上特賜樂以寵之。辛未冬十二月。關西賊洪景來等陷數郡。肅烈公請自往討。拜兩西廵撫使命出征。公以弱冠具櫜鞬將從行。旣而賊入據定州城。廟堂以爲不足動大衆。先遣副將領一枝兵勦之。廵撫使開府於京營。遙授節制。公曰詣幕府省覲。部曲將佐。咸與交歡。具知其材品。文檄簿書。旁午委積。密贊方畧。無不中窾。至明年四月而賊平。肅烈公自此倚重之。凡公務家事。無小大而一聽於公。乙亥四月。肅烈公捐館舍。戊寅二月。上追念肅烈公舊。特令初仕調用。除敦寧府參奉。己卯306_162b夏。王世子嘉禮。差監造官。遷典牲署副奉事。冬都監賞典。陞六品拜掌樂主簿。庚辰春。除刑曹佐郞。夏除牙山縣監。當日命換永柔縣令。辛巳秋。沴氣大行。死者相續。公多爲藥物以救之。所全活甚衆。壬午移海州判官。海劇邑也。以愛民爲本。而綜理明察。吏不敢欺。甲申命與水原判官相換。乙酉歲饑。殫心賙卹。境內無捐瘠。丙戌幸行。令準職除授。陞載寧郡守。治如海州時。丁亥拜忠州牧使。未及赴。擢增廣試文丙科第十三人。以科前準職。直超通政。唱名日。拜承政院右副承旨。遞拜兵曹參議參知。遷306_162c刑曹參議,侍講院輔德。己丑進饌。以禮房承旨。陞嘉善拜行右承旨。連除漢城府右尹,禮曹參判。歷都揔府副摠管,同知經筵,春秋舘,義禁府事。庚寅拜司諫院大司諫。辛卯除開城府留守。壬辰特授吏曹參判兼典牲署提調。癸巳拜刑曹參判。冬京畿暗行御史李是遠以公任開城時。有灣人武擧市井鄕解及蔘商行貨等事。捃摭論列。公對吏聽勘。命査於本府守臣鄭祖榮。啓言盤問吏校。一辭發明。細探物情。實無形跡。又命收議大臣。左議政李相璜以爲試榜商賄。兩皆無是。不可以此爲罪。右議政沈306_162d象奎對亦同。事乃得白。王府以徵逋捧耗。不能察吏奸。處以奪告身之律。退居郊墅。不復有意於榮途。甲午三月。叙拜同經筵。旋除刑曹參判。公惶蹙不敢膺命。上連下敎趣令上來。至數四而終不出。下王府推考。卽令分揀。嚴飭肅命。公不得已詣闕外陳䟽。言遭罹罔極。不可進身於朝。上答曰往事不必索言。况伊時査案。昭洗無餘者乎。仍荐降嚴旨。怵於分義。黽俛出謝。拜行左承旨。丙申拜同知敦寧府事。丁酉春。除工曹參判。七月丁母夫人憂。庚子拜戶曹參判,同知成均舘事。辛丑拜兵曹參判。癸306_163a卯拜同知中樞府事。乙巳拜行都承旨。十餘年間屢經承旨,諸曹亞堂,左右尹,諫長,揔管。而玆不疊書焉。丙午冬。出爲京畿觀察使。黜陟公而施措得宜。一省頌其惠。戊申七月。大臣有綏陵奉審之行時。潦水大漲。以船不預待論罷之。未幾叙拜都承旨。公引義陳章。上優批不允。九月上幸行綏陵。見四山植木欝然。敎曰此監蕫道臣之勞也。前京畿監司李鼎臣刑曹判書除授。進階資憲。知經筵。己酉除工曹判書兼知春秋舘,義禁府事。憲宗大喪。差山陵都監提調。自開基至復土。敦匠蕫役。竭盡誠力。306_163b以勞陞正憲。庚戌除都揔管。九月除慶尙道觀察使。辛亥二月五日。卒于大邱觀察營。享年六十。訃聞上震悼。令沿路護喪。弔祭如禮。四月▣日。葬于坡州紫谷乾坐之原。從先兆也。配貞夫人海平尹氏。諭善得孚子趾東之女。育二女無嗣。取仲弟承旨鼎民子斗永爲子。前宗親府典簿。女長適參判洪祐喆。次適承旨金炳淵。晩有側室男曰台永。二女曰武科金炳春進士朴齊衡妻。斗永長男秀萬。次幼。二女婿宋舜哲金龍植。洪祐喆有三男承▣,承榦,承億今承旨。公姿容秀麗。風儀動人。慈諒祥吉。和氣溢於外。呵306_163c叱不及於僕隸。與人交。汎愛而好善。素淸羸多疾。攝養甚謹。飮食起居凡可以傷生者。勿敢近殆三十。乃充完康健。善於辭令。精切明鬯。粲然有條理。人皆樂聞焉。肅烈公寫眞。艸本未就。居憂專精覃思。指授畵師。及其成。七分惟肖。事母夫人怡愉洞屬。務爲承順。前後喪。哀毁踰禮。友兩弟篤至。有妹早孀。迎歸同居。以至終身。撫其嗣子。爲之娶婦而資其生。賑救貧族。不以無爲辭。自立朝從宦。感激恩遇。志在圖報。當官盡職。擧有成蹟。中歲以後。多居江榭。吟嘯自娛。泊然若與世相忘。而憂國一念。發於宵寐。有花史詩306_163d藁若干卷藏于家。余外氏三舅從母之子十有一人。唯公長余一歲。童幼嬉戱。情好如同胞。到白首相信愈深。公去余先歸已十五載矣。斗永屬爲之狀。羣從凋喪。無知公事者。又無著錄可徵。只就所甞記憶而述之。老耋多遺忘。泚筆欲書。感淚先逬。固不免脫漏踈畧。然公平生品行。卽此而猶可得其髣髴云爾。


철종 9년 무오(1858,함풍 8)
 2월3일 (기유)
서계하여 길주 목사 이관연 등을 탄핵한 함경도 암행 어사 홍승유를 불러 보다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홍승유(洪承裕)를 소견(召見)하였으니,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관연(李觀淵), 전전(前前) 목사(牧使) 심의풍(沈宜豐), 전(前) 안변 부사(安邊府使) 심돈영(沈敦永), 전 경원 부사(慶源府使) 백낙찬(白樂贊), 전 후주 부사(厚州府使) 조용하(趙用夏), 전전 문천 군수(文川郡守) 윤만선(尹萬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규용(李圭容), 갑산 부사(甲山府使) 조문현(趙文顯), 전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희영(李熙永), 전 덕원 부사(德源府使) 오택선(吳宅善), 전 무산 부사(茂山府使) 원계(元减),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석(李鉐), 전 홍원 현감(洪原縣監) 구열(具冽) 등을 죄주고, 함흥 판관(咸興判官) 김병연(金炳淵)을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원전】 48 집 625 면
【분류】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철종 12년 신유(1861,함풍 11)
 1월7일 (병신)
김병연을 이조 참의로 삼다

김병연(金炳淵)을 이조 참의로 삼았으니, 중비(中批)에 의한 것이었다.
【원전】 48 집 642 면
【분류】 *인사(人事)


철종 12년 신유(1861,함풍 11)
 2월19일 (정축)
김병연·신석희를 성균관 대사성·예조 판서로 삼다

김병연(金炳淵)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신석희(申錫禧)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원전】 48 집 642 면
【분류】 *인사(人事)


이름을 고치기 위해 고장을 올린 호조 좌랑 윤병덕에게 체지를 발급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목
○ 이조 계목에,
“호조 좌랑 윤병덕(尹秉德)은 이름을 병관(秉寬)으로 고치고, 승문원 부정자 김병연(金炳淵)은 이름을 갑교(甲敎)로 고치고, 출신 김두성(金斗星)은 이름을 성균(星均)으로 고치고, 이용준(李容浚)은 이름을 용설(容卨)로 고치는 일로 모두 각자 고장(告狀)을 올렸습니다. 규례대로 예문관으로 하여금 체지를 발급하도록

영조 12년 병진(1736,건륭 1)
 6월1일 (갑자)
영월의 유학 박현제가 김시습·남효온 등 8인의 사우에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하다

강춘도(江春道) 영월(寧越)의 유학(幼學) 박현제(朴賢齊) 등이 상소하기를,
“고(故)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은 미친 체하면서 중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돌아오지 않았고, 처사 남효온(南孝溫)은 상서(上書)하여 소릉(昭陵)을 복위하도록 청하였으나 회보를 하지 아니하자 죽을 때까지 과거에 나아가지 않아서 뒤에 연산군(燕山君)이 부관 참시(否棺斬屍)하였고,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는 문을 닫고 방문객을 사절하고, 앉을 때는 반드시 노릉(魯陵)을 향하였으며, 교리(校理) 권절(權節)은 미친 체하고 벼슬하지 않다가 죽었고, 처사 조여(趙旅)는 일찍이 태학(太學)에 유학(游學)하다가 여러 유생들에게 읍(揖)을 하고 돌아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으며, 정언(正言) 이맹전(李孟專)은 두 눈이 사물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대고 30년간 문 밖을 나오지 않은 채 죽었고, 처사 정보(鄭保)는 육신(六臣)이 죽은 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가 권신(權臣)들의 무함(誣陷)으로 거의 주륙(誅戮)당하게 되었었는데 세조(世祖)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임을 듣고 특별히 사형을 감(減)하도록 하였으며, 처사 성담수(成聃壽)는 관직에 제수하여도 배사(拜謝)하지 않고 낚시질하며 은둔하였는데, 뒤에 선왕(先王)께서 이 팔현(八賢)의 절개를 추가(追嘉)하여 혹은 관직을 추증(追贈)하기도 하고 혹은 시호(諡號)를 내리기도 하여, 정려(旌閭)하고 현포(顯褒)하는 도리가 실로 육신과 간격이 없었으나, 유독 침원(寢園) 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은전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들이 이미 두어 칸의 집을 지어 8인의 신위(神位)를 차례로 모셨습니다. 바라건대, 두 자(字)의 은액(恩額)을 내려 주소서.”
하니, 임금이 하순(下詢)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원전】 42 집 50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주D-001]소릉(昭陵) : 현덕 왕후(縣德王后)의 전 능.
[주D-002]노릉(魯陵) : 단종(端宗)의 능. 장릉(莊陵).
[주D-003]은액(恩額) : 은혜로 내리는 편액(扁額).
정조 15년 신해(1791,건륭 56)
 4월29일 (계유)
《장릉지》를 수정하도록 명하다

《장릉지(莊陵誌)》를 수정하도록 명하였다. 《장릉지》는 전에 고 장령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것이 있는데, 상이 이 책이 상당히 소략하다고 하여 옥당 이의봉(李義鳳)·박규순(朴奎淳)·윤광보(尹光普)에게 수정 윤색하게 하고,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후손인 정후조(鄭厚祚)가 전고에 익숙하다 하여 함께 참여하도록 하였다. 의봉은 편년체로 하는 것이 옳다하고 광보는 지체(志體)를 주장하여, 각기 책을 이루어 바쳤다. 전 승지 이서구(李書九)에게 명하여 두 책의 장점을 취해 한 책으로 만들라고 하였으나, 책이 끝내 완성되지 못하였다. 상이 일찍이 책을 편찬하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보고 전교하기를,
“이 책을 편집하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으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광묘(光廟)가 예종(睿宗)께 이르기를 ‘나는 어려운 때를 만났지만 너는 태평한 때를 만났다.’ 하였고 또 ‘오늘의 난신이요 후일의 충신이다.’ 한 분부도 있었으니, 여기에서 대성인의 거룩한 덕과 지극한 뜻을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뜻을 우러러 받드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광묘에게 미덕을 돌려야 할 것이다. 또 이미 관각의 신하에게 찬집하도록 하였으니, 그 체제는 초야에서 하는 말과는 크게 달라야 하고 《노릉지(魯陵誌)》대로만 따라서 하면 안된다. 아무쪼록 신중하게 말을 구사하되 이모저모로 자세히 함으로써 자세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소루하지 않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6 집 218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출판(出版)


 

김병연(金炳淵)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E40BCD1C5F0B1807X0
난고(蘭皐)
생졸년 1807 (순조 7) - 1863 (철종 14)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안동(安東)
활동분야 문학 > 시·시조인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병연(金炳淵)에 대하여
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양주 출생.
선천(宣川)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는데,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 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畵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양반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 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야유·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978년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으며, 1987년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綠此集(黃五)    海藏集   大東奇聞          金笠詩集(李應洙編, 有吉書店, 1939)
金笠의 詩와 諷刺精神(金容浩, 漢陽 3권 7호, 1964)  金笠硏究(尹銀根,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79)

[이미지]

 

김병연(金炳淵)

[문과] 철종(哲宗) 10년(1859) 기미(己未)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6위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E40BCD1C5F0B1816X0
생년 병자(丙子) 1816년
합격연령 44세
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경(京)

[이력사항]

[가족사항]

 
[부]
성명 : 김민근(金民根)
[생부]
성명 : 김호근(金浩根)
[조부]
성명 : 김근순(金近淳)
[증조부]
성명 : 김리계(金履銈)
[외조부]
성명 : 윤경열(尹經烈)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奎貴11655])

(乙亥八月)初四日


初四日政[주:長銓閔圭鎬]

兵曹叅判金炳淵成李炳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