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비봉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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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일편(旬一編) | ||||
승가사(僧伽寺)의 비석에 대한 고찰 |
북한산(北漢山) 남쪽에 승가사가 있다. 그 위가 비봉(碑峯)인데, 기둥 하나가 사람처럼 우뚝 서 있다. 시속에서는 고려 승 도선(道詵)의 비인데 지금은 글자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운석(雲石) 조공(趙公 조인영(趙寅永))이 추사(秋史)와 함께 답사하여 비석에 남아 있는 글자를 찾아보니 진흥왕비(眞興王碑)였다. 그래서 마침내 공인(工人)에게 탑본하게 하여 자세히 글자를 살펴보니, 완전히 닳아 없어져 억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자획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글자가 모두 92자였다. ‘진흥왕’이라는 세 자, ‘순수(巡狩)’라는 두 자, ‘남천(南川)’이라는 두 자 같은 것은 모두 실제 사실로 증명되며 사서(史書)의 내용으로 고증을 해 본 것이다. 상고하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진흥왕 16년(555)에 왕이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넓혀 정하였고, 29년(568)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두었다고 하였다. 이 비는 바로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비문에 ‘진흥’이라는 두 자가 있는데, 지증왕본기(智證王本紀)에 근거하면 신라의 시법(諡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지증왕 뒤로 법흥왕(法興王)을 거쳐 진흥왕에 이르렀다. 진흥왕 때 미리 시호를 일컫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흥왕 사후에 세운 듯하다. 진평왕(眞平王) 26년(604) 기록에 의거하면 이때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는데, 비문에 ‘남천’이라는 두 자가 있으니 또한 남천주를 폐하기 전인 듯하다. 진흥왕 원년(540)은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6년이고, 진평왕 원년(579)은 진 선제(陳宣帝) 태건(太建) 11년이니, 따져 보면 양(梁)ㆍ진(陳) 사이에 새긴 것이다. 또 상고하건대, 함흥부(咸興府)의 초방령(草芳嶺)에 진흥왕 북순비(北巡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탑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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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 ||||
한성부(漢城府) |
【건치연혁】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취하여 성을 쌓고,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성을 나가 달아나다가 해를 당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설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韓山州) 군주(軍主)를 임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 2보(輔)를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여 양광도(楊廣島)에 예속시켰다. 문종(文宗) 때에 승격시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아, 유수 1명ㆍ부유수 1명ㆍ판관(判官) 1명을 두고 이웃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의하여,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도성(都城)을 건립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고, 일자(日者 천문관)ㆍ문상(文象)이 따라서 주장하니, 임금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경도(京都)의 구장(口帳 호구장부)ㆍ시전(市廛)ㆍ가사(家舍)ㆍ전토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투구(鬪毆 쟁투와 구타 상해)ㆍ주순(晝巡)ㆍ검시(檢屍)ㆍ거량고실(車輛故失)ㆍ우마낙계(牛馬烙契) 등의 일을 맡게 하여, 판부사(判府事)ㆍ윤ㆍ소윤(小尹)ㆍ판관ㆍ참사(參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예종조(睿宗朝)에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이라 하고 소윤을 서윤(庶尹)이라고 하였다. 영종 조(英宗朝)에 참군을 고쳐 주부(主簿)로 하였는데 그 밑에 5부(部)가 있었다.
【관원】 판윤 1인, 정2품. 좌윤ㆍ우윤 각 1인, 모두 종2품. 서윤 1인, 종4품. 판관 1인, 종 5품. 주1부 2인, 종6품.
【이속】 서리(書吏) 52인. 서사(書寫) 1명. 서원(書員) 11인. 사령(使令) 30인.
【속사오부】 중부(中部) 정사가 예전에는 본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후에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5부를 설치하여 관내 방리(坊里) 거주인들의 불법(不法) 및 교량ㆍ도로ㆍ반화(頒火)ㆍ금화(禁火)ㆍ이문경수(里門警守)ㆍ집터 측량[家址打量]ㆍ인시 검험(人屍檢驗)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 영(令) 종5품 1인ㆍ도사(都事) 종9품 1인과 이속으로 서원 4인ㆍ사령 8인ㆍ대청직(大廳直) 1인ㆍ군사 2인을 두었다. 관장(管掌)하는 일 및 관원은 다른 부도 같으며 관할하는 구역은 8방(坊)인데, 부방조(部坊條)에 자세하다.
동부(東部) 본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남부(南部) 예전에는 본부의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는데, 후에 그 본부 훈도방(薰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서부(西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여경방(餘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8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북부(北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본부의 관광방(觀光坊)으로 옮겼으며, 또 그 본부의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0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관부】중부 징청방은 이조(吏曹) 아래 남쪽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세웠다.
【강역】동쪽으로 양주목(楊州牧)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으로 양주목 경계까지 10리이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부방】무릇 경외(京外)에는 5호(戶)로 1통(統)을 삼아서 통마다 통주(統主)가 있으며, 외방에는 5통마다 이정(里正)이 있고,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이 있는데, 같은 한 구역이라도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면 적당히 증가한다. 서울에는 방리(坊里)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 내계(吏曹內契)ㆍ한성부 내계ㆍ한성부 후동계(後洞契)ㆍ호조 내계ㆍ호조 후문계(後門契)ㆍ고례조계(古禮曹契)ㆍ판정동계(板井洞契)ㆍ전함사계(典艦司契)ㆍ변종견계(卞宗堅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비변사계(備邊司契) ○ 이상은 훈국 우영(訓局右營)에 속한다. 수진방(壽進坊) 수진궁 내계(壽進宮內契)ㆍ수진궁 행랑계(行廊契)ㆍ간동계(磵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제용감 하계(濟用監下契)ㆍ사복시 전계(司僕寺前契)ㆍ사복시 천변계(川邊契)ㆍ개정동계(蓋井洞契)ㆍ상사동계(相思洞契)ㆍ청성군계(淸城君契)ㆍ종현병문계(鍾縣屛門契)ㆍ상어물전계(上魚物廛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상미전계(上米廛契). ○ 훈국 후영(後營)에 속한다.
견평방(堅平坊) 의금부 내계ㆍ의금부 후동계(後洞契)ㆍ전의감 동계(典醫監洞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중어물전 일패계(中魚物廛一牌契)ㆍ중어물전 이패계. ○ 이상은 어영청중영(御營廳中營)에 속한다.
장통방(長通坊) 수표교 동변계(水標橋東邊契)ㆍ비파동계(琵琶洞契)ㆍ함평 주인계(咸平主人契)ㆍ광주(廣州) 주인계ㆍ석정동계(石井洞契)ㆍ조세홍계(曹世弘契)ㆍ박계손계(朴戒孫契)ㆍ방종계(方宗契)ㆍ입전계(笠廛契)ㆍ창전계(昌廛契)ㆍ창전 행랑계ㆍ중로계(中路契)ㆍ의성정계(義城正契)ㆍ분전(粉廛) 중로계ㆍ하순원계(河順元契)ㆍ내종계(乃宗契)ㆍ이전계(履廛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禁衛營前營)에 속한다. ○ 백립전계(百笠廛契)ㆍ정만석계(丁萬石契)ㆍ지전계(紙廛契)ㆍ장만호계(張萬戶契)ㆍ장구담계(張九淡契)ㆍ청주 주인계(淸州主人契)ㆍ서천수계(徐千守契)ㆍ염전계(鹽廛契)ㆍ신형손계(辛亨孫契)ㆍ박기수계(朴己守契)ㆍ관자동계(貫子洞契)ㆍ유사익계(兪士益契)ㆍ원주 주인계(原州主人契)ㆍ흑립전계(黑笠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서린방(瑞麟坊) 포도청계(捕盜廳契)ㆍ일영대계(日影臺契)ㆍ고색정계(古索井契)ㆍ계아전계(鷄兒廛契)ㆍ사기전계(砂器廛契)ㆍ박정계(朴井契)ㆍ전옥내계(典獄內契)ㆍ전옥후동계(典獄後同契)ㆍ종루서변계(鐘樓西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관인방(寬仁坊) 대사동 일패계(大寺洞一牌契)ㆍ대사동 이패계ㆍ대사동 삼패계ㆍ대사동 사패계ㆍ충훈부(忠勳府) 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경행방(慶幸坊) 시전계(市廛契)ㆍ한원서변계(漢源西邊契)ㆍ한원동변계ㆍ궁내계(宮內契)ㆍ오순덕계(吳順德契)ㆍ사거리계(四巨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정선방(貞善坊) 비로전계(非老廛契)ㆍ임기손계(林己孫契)ㆍ김만년계(金萬年契)ㆍ수문동계(水門洞契)ㆍ고병조계(古兵曹契)ㆍ돈녕부 상계(敦寧府上契)ㆍ돈녕부 하계ㆍ파자전계(把子廛契)ㆍ하미전계(下米廛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대묘동계(大廟洞契)ㆍ의전일계(衣廛一契)ㆍ의전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하는데,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는 소의 먹이 쌀겨[糟糠] 18석을 거두게 하였다. 숙종조(肅宗朝)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고, 돈으로 대신내면 4냥 2전 7푼이 되는데, 매 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 성균관계(成均館契)ㆍ숭교 일계(崇敎一契).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현관(賢關)을 우대하기 때문에, 순라졸과 금부 이속이 감히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연화방(蓮花坊) 연화동계ㆍ북 이계(北二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종묘동계(宗廟洞契)ㆍ연 일계(連一契)ㆍ연 삼계ㆍ금중계(金衆契)ㆍ중로계(中路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천변계(川邊契)ㆍ분륙계(分六契)ㆍ연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건덕방(建德坊) 어의동계(於義洞契)ㆍ건덕방계.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창선방(彰善坊) 창선방계ㆍ동학동계(東學洞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창선 이리계(彰善二里契)ㆍ동학내계(東學內契)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방내(坊內)에 오사인동(五舍人洞)이 있으니, 곧 유자빈(柳自濱)이 살던 곳이다. 자빈의 아우 자한(自漢)ㆍ자분(自汾)과 그 손아래 매부 김겸광(金謙光)ㆍ신중거(辛仲琚)가 모두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었기 때문에 인하여 동명(洞名)이 된 것이다.
숭신방(崇信坊) 숭신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이하는 성 밖에 속한다.
인창방(仁昌坊) 인창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제기리계(祭基里契)ㆍ전농리계(典農里契)ㆍ벌리계(伐里契)ㆍ중량동계(中梁洞契)ㆍ능동계(陵洞契)ㆍ가오리계(加五里契)ㆍ장위리계(長位里契)ㆍ안암동계(安岩洞契)ㆍ우이계(牛耳契)ㆍ미아리계(彌阿里契)ㆍ청량리계(淸涼里契)ㆍ수유촌계(水踰村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왕십리역계(往十里驛契). ○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신설계(新設契)ㆍ답십리계(踏十里契)ㆍ마장리계(馬場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왕십리 사계(私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예전 사축서(司畜署)에서 기르던 고양(羔羊)의 먹이 쌀겨[糟糠] 값 6냥을 거둔다.
남부(南部)
낙선방(樂善坊) 금위영창계(禁衛營倉契). ○ 금위영 전영(前營)에 속한다. ○ 와유두리계(瓦有豆里契). ○ 어영청 우영(右營)에 속한다. 진소리계(眞梳里契)ㆍ왜관동계(倭館洞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성명방(誠明坊) 석교 상계(石橋上契)ㆍ석교 하계.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연성위계(蓮城尉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훈도방(薰陶坊) 주자동계(鑄字洞契)ㆍ정승계(政丞契)ㆍ박정계(朴井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죽전동계(竹廛洞契)ㆍ혜민서계(惠民署契)ㆍ하돌지방계(下乭之坊契)ㆍ묵정동계(墨井洞契)ㆍ이현계(泥峴契)ㆍ저전동계(苧廛洞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태평방(太平坊) 한수견계(韓守堅契)ㆍ보십내계(甫十內契)ㆍ보십외계ㆍ구리현계(仇里峴契)ㆍ선산계(善山契)ㆍ하홍문계(下紅門契)ㆍ수하동 허허병문계(水下洞虛虛屛門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광통방(廣通坊) 동행랑계(東行廊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군기시 월변계(軍器寺越邊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모전계(毛廛契)ㆍ손복동계(孫福洞契)ㆍ대다방 북변계(大多坊北邊契)ㆍ소다방 남변계(小多坊南邊契)ㆍ소다방 북변계ㆍ옹대리문계(瓮垈里門契)ㆍ성천계(成川契)ㆍ서행랑 상계(西行廊上契)ㆍ서행랑 하계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방 안에 보은단동(報恩緞洞)이 있으니 곧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순언은 호협(豪俠)하고 의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명(明) 나라 서울에 가서 일세의 미인을 보고자 하여 수백 냥의 은을 가지고 기생촌[花房]으로 가서 제일가는 명기(名妓)를 찾았는데, 한 여자가 있어 생김생김이 절세가인인데 소복(素服)을 입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원래 사천(四川) 사람이며 아버지가 서울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는데 객중(客中)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고, 또 한 형 마저 잃어서 세 상사를 지금 권장(權葬 임시 매장)하여 두었는데, 고향으로 모셔다 장사를 치를 길이 없어서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사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순언이 묻기를,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순언이 가엾게 여겨서 곧 가지고 갔던 은 천 냥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깨끗이 가지고 돌아가 장사를 지낸 다음 사족(士族) 가문으로 잘 시집가거라. 내가 만일 네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것을 준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결의(結義)하여 누이동생을 삼고 돌아오니, 그 여인이 은혜에 감명하여 뼛속 깊이 새기며 순언의 성명을 물어서 알고 인하여 은을 팔아서 반구(返柩)하여 장사지냈다.
그 후 시집가서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자신이 누에치고 손수 비단을 짰는데, 비단 첫 머리에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하고 우리나라 사신이 갈 때마다 반드시 순언이 오는가를 탐문하였다. 순언이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따라 명 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을 때, 석 상서가 그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는데 곧 그가 맡아하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일을 다하였다. 하루는 석 상서가 순언을 초청하여 집으로 가서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대접하였는데, 한 성장(盛粧)한 부인이 뜰 아래에 나와서 배례하고 이어 당 위로 올라와서 잔을 드리는 것이었다. 순언이 깜짝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리며 잔을 받게 하고 이어 자세하게 사실의 전말을 말하여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강을 건너려 하는데 사람이 와서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禮單)ㆍ보은단 수십 필 및 기타 진귀한 물품을 수없이 받들어 드리며, 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두고서 가니 순언이 부득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일을 성공한 공으로 광국훈공(光國勳功)에 책정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知中樞) 벼슬을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로 인하여 순언이 살던 마을을 이름해서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에는 석성이 병부상서[本兵]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후 주청(奏請)하는 병기와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극진히 돌보아주어서 우리나라의 재조(再造)의 공적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인의 내조(內助)의 공에 힘입은 바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잘못 전하여 미장동(美墻洞)이라 한다.
명례방(明禮坊) 장악원 내계(掌樂院內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명례동계ㆍ부계(部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남산동(南山洞)에는 훈국(訓局) 마병(馬兵)이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호현방(好賢坊) 호현동계ㆍ장흥동계(長興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의산위계(宜山尉契)ㆍ본궁내계(本宮內契)ㆍ소공동계(小公洞契)ㆍ부월변계(部越邊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서소문 월변계.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이간병문계(二間屛門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명철방(明哲坊) 수구문내계(水口門內契)ㆍ어영창계(御營倉契).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남소문동계(南小門洞契)ㆍ쌍이문계(雙里門契)ㆍ청녕위계(靑寧尉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둔지방(屯之坊) 서빙고 일계ㆍ서빙고 이계ㆍ지어둔계(之於屯契)ㆍ미서계(尾署契)ㆍ이태원계(梨泰院契)ㆍ동파계(東坡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전생서 내계(典牲署內契)ㆍ전생서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두모방(豆毛坊) 중촌리계(中村里契)ㆍ신당리계(新堂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전관(箭串) 일계 ㆍ전관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수철리계(水鐵里契) ㆍ두모포계(豆毛浦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한강방(漢江坊) 몽뢰정계(夢賚亭契)ㆍ한강계ㆍ주성리계(鑄成里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전생서(典牲署)의 쌀겨 25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 ○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장생동계(長生洞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선공감 내계(繕工監內契)ㆍ해풍군계(海豐君契)ㆍ동령동계(東嶺洞契)ㆍ서학동계(西學洞契)ㆍ서학 내계ㆍ모전계(毛廛契)ㆍ도자동계(刀子洞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ㆍ당피동계(唐皮洞契)ㆍ필전계(筆廛契)ㆍ공조후동계(工曹後洞契)ㆍ사역원계(司譯院契)ㆍ율학청계(律學廳契)ㆍ도렴동계(都染洞契)ㆍ사헌부 내계(司憲府內契)ㆍ병조 내계(兵曹內契)ㆍ형조 내계(刑曹內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수성궁월변계(壽城宮越邊契)ㆍ사온동계(司醞洞契)ㆍ중추부 내계(中樞府內契)ㆍ예조 내계(禮曹內契)ㆍ종각계(鐘閣契)ㆍ십자각계(十字閣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인달방(仁達坊) 분선공감 내계(分繕工監內契)ㆍ사직동계(社稷洞契)ㆍ내수사계(內需司契)ㆍ내행랑계(內行廊契)ㆍ내섬시 내계(內贍寺內契)ㆍ봉상시계(奉常寺契). ○ 이상은 훈국(訓局) 전영(前營)에 속한다. ○ 수성궁 내계(壽城宮內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태평의 군왕이 그 방에서 나리라.” 하더니, 선조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부터 들어가 대통(大統 왕실의 종통)을 계승(繼承)하였다.
양생방(養生坊) 창동계(倉洞契)ㆍ송현계(松峴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태평관계(太平館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황화방(皇華坊) 서소문 내계(西小門內契)ㆍ취현동계(聚賢洞契)ㆍ소정동계(小貞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처음에는 황화방 북쪽 언덕에 있었다. ○ 태종 9년에 양주(楊州)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한다.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ㆍ경영고계(京營庫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조판부사계(曹判府事契)ㆍ수근전계(水芹田契)ㆍ노첨정계(盧僉正契)ㆍ권정승계(權政丞契)ㆍ청성군계(靑城君契 ).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 ○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인장리계(茵匠里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차자리계(車子里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반석방(盤石坊) 사거리계(四巨里契)ㆍ도저동계(桃楮洞契)ㆍ석교리계(石橋里契)ㆍ조전계(租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연지계(蓮池契)ㆍ약전계(藥田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고순청계(古巡廳契)ㆍ서소문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미전 상계(米廛上契)ㆍ미전 하계ㆍ성삭주계(成朔州契)ㆍ유판부사계(兪判府事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정암(李廷馣)ㆍ정향(廷馨)ㆍ정유(廷)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을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한림동이라 한다.
용산방(龍山坊) 마포계(麻浦契). ○ 훈국 우영에 속한다. ○ 공덕리계(孔德里契)ㆍ토정리계(土亭里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옹리 상계(瓮里上契)ㆍ옹리 하계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사촌리계(沙村里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청파 일계(靑坡一契)ㆍ청파 이계ㆍ청파 삼계ㆍ청파 사계ㆍ청파 오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만리창계(萬里倉契)ㆍ동문외계(東門外契)ㆍ어영청창계(御營廳倉契)ㆍ진휼청계(賑恤廳契)ㆍ신창계(新倉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탄항계(灘項契)ㆍ곽계(槨契)ㆍ도화동계(桃花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윤민신(尹民新)의 집이 청파 작작동(灼灼洞)에 있었는데, 다섯 아들을 공부시켜서 5년 만에 모두 대과 급제(大科及第)하였으므로, 지금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로 부른다. ○ 곽계는 귀후서(歸厚署)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지금도 신당(神堂)이 있으며, 지금 훈국의 별영(別營)이 역시 곽계 안에 있다. ○ 정종(正宗)이 읍청루(挹淸樓)에 나아가 마을 이름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산 사람이 사는데, 어찌 관곽(棺槨)으로 이름을 하겠느냐.” 하면서, 도화동 외계로 고쳤다.
서강방(西江坊) 흑석리계(黑石里契)ㆍ율도계(栗島契).ㆍ신정리계(新井里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ㆍ구수철리계ㆍ창전리계(倉前里契)ㆍ하중리계(下中里契)ㆍ수일리계(水溢里契)ㆍ당인리계(唐人里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서 전생서 쌀겨 56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3두로 하고 돈으로 수봉(收捧)한다.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 ○ 훈국 좌영에 속한다.
의통방(義通坊) 옥정리계(玉井里契)ㆍ후동계(後洞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영추문계(迎秋門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준수방(俊秀坊) 준수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관광방(觀光坊) 관광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중학 내계(中學內契)ㆍ의정부 내계(議政府內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진장방(鎭長坊) 진장방계. ○ 훈국 우영에 속한다.
광화방(廣化坊) 광화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양덕방(陽德坊) 양덕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가회방(嘉會坊) 가회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안국방(安國坊) 안국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합정리계(合井里契)ㆍ망원정 일계(望遠亭一契)ㆍ망원정 이계ㆍ여의도계(汝矣島契)ㆍ세교리계(細橋里契). ○ 이상은 훈국(訓局) 우영(右營)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ㆍ연희궁계(延禧宮契)ㆍ성산리계(城山里契)ㆍ가좌동계(加佐洞契)ㆍ견산리계(甄山里契)ㆍ신사동계(新寺洞契)ㆍ갈고개계(葛古介契)ㆍ역계(驛契)ㆍ사계(私契)ㆍ불광리계(佛光里契)ㆍ수암리계(水巖里契)ㆍ수생리계(水生里契)ㆍ지서계(紙署契)ㆍ경리청계(經理廳契)ㆍ선혜청계(宣惠廳契)ㆍ양철리계(梁哲里契)ㆍ구리계(舊里契)ㆍ말흘산계(末訖山契)ㆍ홍제원계(弘濟院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가좌동에 훈국 장막이 있으니 군사들의 무예 시험하던 곳이다. ○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이 수생리에 살았는데, 서재를 넓히고 학문을 강의하였다. 드디어 마을이름을 고쳐서, 물이촌(勿移村)이라 하고, 기문을 지어서 생각하는 바를 표시하였다. ○ 삼남약환계(三南藥丸契)ㆍ해서총약계(海西銃藥契)ㆍ폭백계(曝白契)ㆍ훈조계(燻造契)는 총융청(摠戎廳) 군영 밑으로 옮겨 설치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의지하여 사는 바탕을 삼게 하였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의 쌀겨 값이 3냥 3전 3푼이다.
【성씨】 본부 한(韓) 시조는 고려조 고종(高宗) 때의 검교 태자첨사(檢校 太子詹事) 원서(元諝)이다. ○ 또 한 파는 고려조 고종 때의 판사복사(判司僕事) 균(均)이다. ○ 조(趙) 시조는 첨의중서(僉議中書) 지수(之壽)이다. ○ 또 한 파는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원경(元卿)이다. 민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무릇 다른 주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에 그 본적만을 주로 적어둔다. 이(李)ㆍ김(金)ㆍ윤(尹)ㆍ권(權)ㆍ오(吳)ㆍ강(姜)ㆍ허(許)ㆍ장(張)ㆍ임(任)ㆍ서(徐)ㆍ유(兪)ㆍ원(元)ㆍ황(黃)ㆍ조(曹)ㆍ임(林)ㆍ우(禹)ㆍ노(盧)ㆍ정(丁)ㆍ배(裵)ㆍ맹(孟)ㆍ변(卞)ㆍ백(白)ㆍ전(全)ㆍ엄(嚴)ㆍ전(田)ㆍ문(文)ㆍ진(陳)ㆍ길(吉)ㆍ주(周)ㆍ염(廉)ㆍ유(劉)ㆍ양(楊)ㆍ차(車)ㆍ명(明)ㆍ석(石)ㆍ기(起)ㆍ천(千)ㆍ영(靈) 속성(續姓)이다.
【호구】세종(世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천 9백 21호에, 인구가 10만 3천 3백 28명이고, 관령(管領)이 46명이며, 성 밑 10리 둘레의 호수는 1천 6백 1호에, 인구가 6천 44명이고, 관령이 15명이었다. 선조(宣祖) 39년에는 5부의 원래 호수가 1만 2천 9백 65호였다, 인조 26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6호에 인구는 9만 5천 5백 69명이었다. 효종(孝宗) 8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5천 7백 60호에 인구가 8만 5백 72명이었다. 현종(顯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3천 8백 99호에 인구가 19만 4천 30명이었다. 숙종(肅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2천 7백 40호에 인구가 16만 7천 4백 6명이었다. ○ 43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8천 3백 56호에, 인구가 18만 5천 8백 72명이었다. 경종(景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5천 8백 44호에 인구가 14만 7천 7백 72명이었다. 영종(英宗) 2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2천 7백 47호에, 인구가 18만 8천 5백 97명이었다. ○ 29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4천 9백 53호에 인구가 17만 4천 2백 3명이었다. ○ 44년에는 경성ㆍ외방의 도합 호수가 1백 67만 9천 8백 65호에 인구가 7백만 6천 2백 48명이었다. 정종(正宗) 원년에 5부의 호수가 3만 8천 5백 93호에 인구가 19만 7천 9백 57명이었다. ○ 10년에 5부의 호부가 4만 2천 7백 86호에 인구가 19만 9천 1백 27명이었다. ○ 태종조(太宗朝)에 연호법(煙戶法 호별 등급)을 정하였는데, 서울 안 현재 관직의 1ㆍ2품이 상호(上戶)가 되고, 3ㆍ4품이 중호가 되고 5ㆍ6품이 하호가 되며, 그 아래의 참외(參外 6품 이하)가 하하호가 되고, 서민 및 전직 각 품의 사람들은 각각 그 품계에 따라 차별하였다. 외방은 남녀 15명 이상의 집이 상호가 되고, 10명 이상이 중호가 되고, 5명 이상이 하호가 되며, 1ㆍ2명의 식구로 호(戶)를 이루지 못한 자는 3호를 합하여 1호를 삼았다. ○ 경성 외방에 모두 5호로 1통(統)을 삼고, 통마다 통수(統首)가 있어서 통내의 일을 맡아보며, 방(坊)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 호적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 마다 정한 해에 고쳐 정리하여 한성부에 보관한다. ○ 남자 장정은 16세 이상이면 호패(號牌)를 차는데, 동ㆍ서반의 관원 및 내간(內官 궁중관원)의 2품 이상은 아패(牙牌)를 차고, 3품관 이하 및 삼의사(三醫司)와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은 각패(角牌)를 차고, 생원ㆍ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유품잡직(流品雜職)과 사서인(士庶人)ㆍ서리(書吏)ㆍ향리(鄕吏)는 소목방패(小木方牌)를 차고, 공사천인가리(公私賤人假吏)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차고, 군사들은 그대로 요패(腰牌)를 찬다.
【풍속】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涵虛子)》. 천성이 유순(柔順)하다 《후한서(後漢書)》.
【관제】 내명부 빈(內命婦嬪) 정1품. 교명(敎命)이 있는 자는 품계가 없다.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상궁(尙宮)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상의(尙儀) 모두 정5품. 상복(尙服)ㆍ상식(尙食) 종5품. 상침(尙寢)ㆍ상공(尙功) 정 6품. 상정(尙正)ㆍ상기(尙記) 종6품. 전빈(典賓)ㆍ전의(典儀)ㆍ전선(典膳) 정7품. 전설(典設)ㆍ전제(典製)ㆍ전언(典言) 종7품. 전찬(典贊)ㆍ전식(典飾)ㆍ전약(典藥) 정8품. 전등(典燈)ㆍ전채(典彩)ㆍ전정(典正) 종8품. 주궁(奏宮)ㆍ주상(奏商)ㆍ주각(奏角) 정9품. 주변치(奏變徵)ㆍ주우(奏羽)ㆍ주치(奏徵)ㆍ주변궁(奏變宮) 종9품. ○ 세자궁의 양제(良娣) 종2품. 양원(良媛) 종3품. 승휘(承徽) 종4품. 소훈(昭訓) 종5품. 수규(守閨)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수칙(守則) 모두 종6품. 장찬(掌饌)ㆍ장정(掌正) 종7품. 장서(掌書)ㆍ장봉(掌縫) 종8품. 장장(掌藏)ㆍ장식(掌食)ㆍ장의(掌醫) 종9품. ○ 외명부(外命婦)ㆍ공주(公主) 왕녀 중 적실(嫡室) 소생. 옹주(翁主) 왕녀 중 서생(庶生). 부부인(府夫人) 왕비의 어머니, 정1품. 봉보부인(奉保夫人) 대전(大殿)의 유모, 종1품. 군주(郡主) 세자의 딸, 적실 소생. 정2품. 현주(縣主) 세자의 딸, 서생. 정3품. ○ 종친 처(宗親妻)ㆍ부부인(府夫人) 정1품, 대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정1품, 왕자 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종1품의 아내. 현부인(縣夫人) 정ㆍ종2품의 아내. 신부인(愼夫人) 당상관 정3품의 아내. 신인(愼人) 정ㆍ종3품의 아내. 혜인(惠人) 정ㆍ종4품의 아내. 온인(溫人) 정ㆍ종5품의 아내. 순인(順人) 정6품의 아내. ○ 문무 관원 명부(命婦)의 예에 따라 작(爵)을 봉한다. ○ 문무관 처(文武官妻)ㆍ정경부인(貞敬夫人) 정ㆍ종1품. 정부인(貞夫人) 정ㆍ종2품. 숙부인(淑夫人) 당상관 정3품. 숙인(淑人) 정ㆍ종3품. 영인(令人) 정ㆍ종4품. 공인(恭人) 정ㆍ종5품. 의인(宜人) 정ㆍ종6품. 안인(安人) 정ㆍ종7품. 단인(端人) 정ㆍ종8품. 유인(嬬人) 정ㆍ종9품.
【동서반관계】무릇 직함(職啣)은, 먼저 품계요 다음이 관청이요 다음이 직위이다. 품계가 높고 직위가 낮으면 행(行)이라 하고, 품계가 낮고 직위가 높으면 수(守)라고 하는데, 행ㆍ수라는 글자는 관청 이름 위에 놓는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議政).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국구(國舅)ㆍ종친(宗親)ㆍ의빈(儀賓). ○ 종친은 현록대부(顯祿大夫)ㆍ흥록대부(興祿大夫)요, 의빈은 유록대부(綏祿大夫)ㆍ성록대부(成祿大夫)이다. 보국숭록대부 종1품 숭록대부ㆍ숭정(崇政)대부 종친은 의덕(宜德)ㆍ가덕(嘉德)이요, 의빈은 정덕(靖德)ㆍ명덕(明德)이다. 정2품 정헌(正憲)대부ㆍ자헌(資憲)대부 종친은 숭헌(崇憲)ㆍ승헌(承憲)이요. 의빈은 봉헌(奉憲)ㆍ통헌(通憲)이다. 종2품 가의(嘉義)대부ㆍ가선(嘉善)대부 종친은 중의(中義)ㆍ소의(昭義)요, 의빈은 자의(資義)ㆍ순의(順義)이다. 당상 정3품 통정(通政) 대부 동반(東班). 절충장군(折衝將軍) 서반(西班). 종친은 명선(明善)이요, 의빈은 봉순(奉順)이다.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동반(東班). 어모장군(禦侮將軍) 서반. 종친은 창선(彰善)이요, 의빈은 정순(正順)이다. 종3품 중직(中直)대부ㆍ중훈(中訓) 대부 동반. 건공장군(建功將軍)ㆍ보공장군(保功將軍) 서반. 종친은 보신(保信)ㆍ자신(資信)이요, 의빈은 명신(明信)ㆍ돈신(敦信)이다. 정4품 봉정(奉正)대부ㆍ봉렬(奉列)대부 동반. 진위(振威)장군ㆍ소위(昭威)장군 서반. 종친은 선휘(宣徽)ㆍ광휘(廣徽)이다. 종4품 조산(朝散)대부ㆍ조봉(朝奉)대부 동반. 정략(定略)장군ㆍ선략(宣略)장군 서반. 종친은 봉성(奉成)ㆍ광성(光成)이다. 정5품 통덕랑(通德郞)ㆍ통선랑(通善郞) 동반. 과의교위(果毅校尉)ㆍ충의교위(忠毅校尉) 서반. 종친은 통직랑(通直郞)ㆍ병직랑(秉直郞)이다. 종5품 봉직랑(奉直郞)ㆍ봉훈랑(奉訓郞) 동반. 현신교위(顯信校尉)ㆍ창선교위(彰善校尉) 서반. 종친은 근절랑(謹節郞)ㆍ신절랑(愼節郞)이다. 정6품 승의랑(承議郞)ㆍ승훈랑(承訓郞) 동반. 돈용교위(敦勇校尉)ㆍ진용교위(進勇校尉) 서반. 종친은 집순랑(執順郞)ㆍ종순랑(從順郞)이다. 종6품 선교랑(宣敎郞)ㆍ선무랑(宣務郞) 동반. 여절교위(勵節校尉)ㆍ병절교위(秉節校尉) 서반. 정7품 무공랑(務功郞) 동반. 적순부위(迪順副尉) 서반. 종7품 계공랑(啓功郞) 동반. 분순부위(奮順副尉) 서반. 정8품 통사랑(通仕郞) 동반. 승의부위(承義副尉) 서반. 종8품 승사랑(承仕郞) 동반. 수의부위(修義副尉) 서반. 정9품 종사랑(從仕郞) 동반. 효력부위(効力副尉) 서반. 종9품 장사랑(將仕郞) 동반. 전력부위(展力副尉) 서반. ○ 종2품 이상은 동ㆍ서반의 품계가 같다. ○ 지금 임금 2년에 종친ㆍ의빈은 모두 동반의 품계를 따르게 하였다.
【잡직계】 정6품 공직랑(供職郞)ㆍ여직랑(勵職郞). 종7품 근임랑(謹任郞)ㆍ효임랑(効任郞). 정7품 봉무랑(奉務郞). 종7품 승무랑(承務郞). 정8품 면공랑(勉功郞). 종8품 부공랑(赴功郞). 정9품 복근랑(服勤郞). 종9품 전근랑(展勤郞).
【사관계】 정5품 통의랑 도무(通議郞都務). 종5품 봉의랑 장부(奉議郞掌簿). 정6품 선직랑 교부(宣職郞校簿). 종6품 봉직랑 감부(奉職郞勘簿). 정7품 희공랑 전사(熙功郞典事). 종7품 주공랑 장사(注功郞掌事). 정8품 공무랑 관사(供務郞管事). 종8품 직무랑 급사(直務郞給事). 정9품 계랑 참사(啓郞參事). 종9품 시사랑 섭사(試仕郞攝事). ○ 붙임. 녹과(祿科) 매달 요미[散料]를 전달에 나누어 준다. 제1과(科) 정1품. ○ 쌀 2석 8두, 콩 1석 5두. ○ 대군(大君)은 봄 석 달에 한 섬씩을 더 준다. 제2과 종1품. ○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3과 정2품.○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4과 종2품 . 쌀 1석 11두, 콩 1석 5두. 제5과 당상관 정3품. ○ 쌀ㆍ콩 1석 5두. ○ 이상은 25일에 나누어 준다. 제5과 당하관 정3품. ○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6과 종3품.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7과 정ㆍ종4품. ○ 쌀 1석 2두, 콩 13두. 제8과 정ㆍ종5품. ○ 쌀 1석 1두, 콩 10두. ○ 이상은 26일에 나누어 준다. 제9과 정ㆍ종6품. 쌀 1석 1두, 콩10두. 제10과 정ㆍ종7품. ○ 쌀 13두, 콩 6두. ○ 이상은 27일에 나누어 준다. 제11과 정ㆍ종8품. ○ 쌀12두, 콩 5두. ○ 28일에 나누어 준다. 제12과 정9품. ○ 쌀 10두, 콩 5두. 제13과 종9품. ○ 쌀 10두, 콩 5두. ○ 이상은 29일에 녹을 나누어준다.
【과제】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보는데, 전해 가을에 초시(初試)를 보고 이듬해 첫봄에 복시(覆試)를 본다. 전시(殿試)ㆍ문과(文科)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가 보며 무과도 같다.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은 통덕랑(通德郞) 이하가 보게 하고, 6품 이상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 영물서용(永勿敍用 종신토록 벼슬하지 못함)의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도, 탐관오리[臟吏]의 아들이나, 재가하고 행실 부정한 여자의 아들 및 손자, 서얼(庶孼)의 자손은 문과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며, 본도에 거주하지 않는 자나 조정 관원으로서 현재 직위에 있는 자는 향시(鄕試)를 보지 못하는데, 지방에 파견되었거나 휴가를 얻은 자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으며 무과도 같다. 시험 장소는 한두 곳을 설치하여, 시험 보는 이가 시관(試官)과 서로 피하여야 할 경우는 다른 곳에서 보며, 아버지가 복시에 응시한 경우에는 아들이 피하는데 무과도 같다. ○ 음양과(陰陽科) 천문학 시험은 그 학교의 생도 외에는 보지 못한다. ○ 문과는 10년에 한 번씩 중시(重試 급제자의 재시험)가 있는데 당하관이 보며, 인원수 및 시험 방법은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정한다. 무과도 같다.
식년(式年) 3년에 한 번씩 시험보는 것이 대비지과(大比之科 대과)가 되는데, 지금은 자ㆍ오ㆍ묘ㆍ유년에 시행하니, 이것을 식년이라 한다.
문과 초시(初試) 인원수는 성균관 시험이 50명인데 두 곳으로 나누어 소속시키며, 한성부 시험이 40명이요, 경기(京圻) 시험의 20명은 한성부 시험에 나누어 보게 한다.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경상도 30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15명, 황해도 10명, 함경도 13명이다. 제술(製述) 시험은 초장(初場)에 사서의(四書疑) 1편, 논문 1편이요, 중장에는 부(賦) 1편, 표(表)ㆍ전(箋) 중 1편이며, 종장에는 대책문(對策文) 1편이다. 지은 것은 모두 바꾸어서 썼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명경(明經) 시험은 삼경 사서(三經四書) 중에서 조(粗)ㆍ약(略 강독하는 시험 성적의 등급인데, 조의 위, 순(純)의 다음이다.) 이상을 뽑는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33명인데 칠서(七書)로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읽는 것)하고 그 성적의 통(通)ㆍ약(略)을 계산하여 14분 반이면 뽑는다. ○ 두 시험 장소에서 16명씩 뽑는다.
생획(栍劃) 명경과의 시험 성적 14분 이하의 사람에게 보게 하여 1명씩 뽑는데, 모두 33명을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並赴)를 합하여 정한 수효가 없으며,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생원초시(生員初試) 인원수는 한성부 2백 명인데, 경기 60명이 나누어 한성부 시험을 보며, 충청도ㆍ전라도 각 90명, 경상도 1백 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45명, 황해도ㆍ평안도 각 35명이다. 제술 시험은 사경의(四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이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1백 명인데, 제술 과목은 초시와 같다.
진사 초시(進士初試) 인원수는 생원 시험과 같은데, 부 1편ㆍ시 1편을 제술한다.
복시 인원수는 생원 시험 복시의 인원수와 같으며, 제술은 초시와 같다.
증광(增廣)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혹은 여러 경사가 겹치면 특별히 증광 시험을 설치하되, 경사가 겹친 것이 제일 많은 경우에는 대증광(大增廣)이라고 이름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식년 시험과 같으며, 제술 3장(場)도 같은데 강경(講經) 시험은 없다.
복시 인원수는 33명이며 강경은 삼경(三經) 중에서 원하는 한 경으로 하며 조(粗) 이상을 뽑는다. 제술은 초시 시험의 중(中)ㆍ종장(終場)과 같다.
전시 식년 시험과 같다.
생원시ㆍ진사시 초시ㆍ복시의 인원수 및 제술은 식년 시험과 같다.
별시(別試) 중시(重試)의 준례에 의하여 거행하는데, 병년(丙年) 및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한다. 정시(庭試)도 같다.
문과초시 인원수는 병년 별과면 3백 명이요, 기타는 혹 천 명에도 이르는데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시행한다. 제술 시험 초장(初場)은 논(論) 1편, 표ㆍ전 중의 1편, 부 1편인데 번갈아 가며 두 제목을 낸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이요, 강경은 삼경(三經) 중 원하는 한 경으로 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회시 겸 전시(會試兼殿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하며 제술은 증광전시(增廣殿試)와 같다.
광시(廣試) 국가 경사로 인하여 시행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한다. 제술(製述)은 부 1편, 표ㆍ전 중 1편이다.
회시 겸 전기(會試兼殿試)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알성시(謁聖試)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거행하고, 이어 선비를 시험하는 것인데, 초시가 없고 그 날로 발표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殿試)와 같다.
중시(重試) 문ㆍ무과가 함께 10년에 한 번씩 보이는데, 당하관이 나가 보며 병년(丙年)마다 시행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製述)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절일제(節日製) 성균관 서재에 거처하는 유생(儒生)들이 원점(圓點 출석 여부를 표시하는 점)을 찍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두 번 식사한 것을 1점으로 잡아서, 유생들간의 제술[泮製]에는 50점, 성균관 시험에는 3백 점에 이르는 사람을 나가 시험보게 한다. ○ 정월 7일 곧 인일(人日)과, 3월 3일, 7월 7일, 9월 9일의 제술을 황감제(黃柑製)라고 하는데, 인원수는 원래 정해 있지 않으며,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거나 바로 회시에 나가게 하되, 2분(分) 또는 1분의 점수를 주며, 서책ㆍ필묵(筆墨) 등도 상으로 나누어 준다.
도기(到記) 관학(館學 성균관에 설치한 학당)의 유생이나 생원ㆍ진사들이 나가 보며 제술은 절일제의 시험과 같고 강경(講經)은 3경 중 통(通)에 낙점된 이하 중에서 시험하여 뽑는다. 제술에 수석한 사람 및 강경에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며 봄ㆍ가을로 시행한다.
통독(通讀) 매해 대사성(大司成)이 경향의 유생들을 시험보여 뽑는데, 제술ㆍ강서(講書)를 각 11차로 하며 통한 것을 계산하여, 식년 문과 복시(覆試)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0명이다. 제술은 부 1편과 표ㆍ전ㆍ논 중의 1편을 보며, 강경은 7서 중에서 자원하는 것으로, 1서를 배송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 무릇 모든 강경은 모두 배송(背誦)한다.
승보(陞補) 매해 대사성이 사학(四學) 및 지방 유생들을 공부시키고, 시험보는 것을 합하여 12차례 한다. 세초(歲抄 6월ㆍ12월)에 계산하여 식년 생원ㆍ진사 복시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2명이며, 제술은 부 1편, 시 1편이다.
사학합제(四學合製) 제술은 승보와 같으며 인원수는 16명인데 그 중 사서(四書)에서 4명, 《소학(小學)》에서 4명이다.
무과 식년ㆍ증광ㆍ초시 시험 장소는 훈련원(訓練院)의 한 곳과 모화관(慕華館)의 두 곳이다. 시험보여 뽑는 인원수는 70명인데, 경상도 30명,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각 10명이다. 목전(木箭)ㆍ철전(鐵箭)ㆍ기추(騎蒭)ㆍ관혁(貫革)ㆍ기창(騎槍)ㆍ격구(擊毬)ㆍ유엽전(柳葉箭)ㆍ조총(鳥銃)ㆍ편추(鞭芻)ㆍ강서(講書)의 기예(技藝)를 죽 써 놓고 점찍어서 그 중 몇 기예를 시험보여 뽑는다.
복시 인원수는 28명이며 시험보는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幷赴) 합하여 정한 수가 없으며,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제과(諸科) 시험보여 뽑는 여러 규정이 대략 같다.
잡과 식년 증광ㆍ역과(譯科) 초시 한학(漢學 중국어 통역) 23명, 몽학(蒙學)ㆍ청학(淸學)ㆍ왜학(倭學) 각 4명이다.
복시 한학 13명, 몽학ㆍ왜학 각 2명이다.
의과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음양과(陰陽科) 초시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命課學 운명 길흉 화복을 판단 하는 학문) 8명이다.
복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4명이다.
율과(律科)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의장】 조참(朝參)ㆍ상참(常參)ㆍ조계(朝啓) 모두 흑의(黑衣)를 입는다 종1품 이상 및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은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종2품 이상은 초헌(軺軒)을 타며, 당상관은 호상(胡床 걸상) 안롱(鞍籠)을 가진 자가 앞에서 인도하고, 정3품 당하관은 안롱만을 가지게 한다.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은 갓에 옥정자(玉頂子)로 장식하고, 감찰(監察)은 수정 정자를 장식하며, 한산직(閑散職)의 당상관은 공석 회합이면 사모(紗帽)를 쓴다. 사헌부의 서리(書吏)나 통례원(通禮院)의 서원(書員)이 감찰 및 조하(朝賀 조정 하례) 할 때에는 공복(公服)을 입는다. ○ 무릇 어가(御駕)를 시종하고 조하하는 여러 신하들의 복색은 상복(上服)을 따르며, 임금이 나가 행차할 때에는 모두 공복을 입는다. ○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ㆍ장신(將臣)이 융복(戎服)과 군복을 입을 때에는 갓에 옥로(玉鷺)를 장식한다.
관(冠) 1품관의 조복(朝服)은 오량목잠(五梁木箴)인데 제복도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평상복에는 사모를 쓴다. 관자(貫子)ㆍ갓끈은 금ㆍ옥을 쓰고, 갓의 장식은 은으로 하는데 대군(大君)도 같으며, 이엄(耳掩)은 주단 초피(貂皮)를 사용한다. 2품관의 조복은 4량(粱)이요, 대사헌(大司憲)은 해태[獬豸] 모양을 붙이고, 집의(執義) 이하는 모두 목잠을 사용한다. 이하도 위와 같음. 당상 3품관은 3량이며, 종친은 6품관에 이르기까지는 생초 초피 이엄(耳掩)을 사용한다. 당하관 정3품 이하로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생초 서피(鼠皮) 이엄을 사용하며, 4품에서 6품까지는 2량이요, 7품에서 9품까지는 1량인데, 모두 목잠이다. 제복도 같고 공복엔 복두, 평상복엔 사모이다. 녹사(錄事)는 뿔 있는 평정건(平頂巾)이요, 여러 학당의 생도들은 검은 베 건(巾)을 쓰며, 서리(書吏)는 뿔 없는 평정건, 별감(別監)은 자색 건, 세자궁(世子宮) 하인은 푸른 건을 쓰며, 평상복엔 주황 초립(朱黃草笠)을 쓴다. 궁궐 안의 각 차비(差備 하인)는 푸른 모자, 길 인도하는 자는 자색 건, 나장(羅將)과 조예(皂隸)는 검은 건을 쓴다. ○ 당상관 3품 이상은 오사모(烏紗帽 검은 사모)에 문사각(紋紗角 무늬 있는 사각)이며, 융복(戎服)엔 자립(紫笠)이었는데, 칠사립(漆紗笠)으로 고쳤다. 당하관 3품 이하는 오사모이며, 융복에는 흑립(黑笠)에 수정 갓끈이다. 녹사는 오사모, 수복(守僕)은 검은 건이다.
복(服) 1품관은 붉은 생초의 의상(衣裳)과 폐슬(蔽膝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가슴에 늘이는 헝겊)이며, 백사(白紗) 중단(中單 웃옷 속에 있는 소매 넓은 두루마기)에 구름과 학을 수놓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雲鶴金環綬)를 사용한다. 제복(祭服)은 푸른 생초 옷에 붉은 생초 하의와 폐슬이고, 중단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金環綬] 위와 같음 이며 방심 곡령(方心曲領)이고, 공복은 홍포(紅袍)요, 평상복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으로 한다. 흉배(胸背)는 대군은 기린(麒麟)이고, 왕자군(王子君)은 자연 광택 있는 문채의 공작(孔雀)이며, 무관은 호표(虎豹) 모양이다. 2품관의 조복ㆍ제복(祭服)ㆍ공복ㆍ상복(常服)은 위와 같은데 흉배는 운안(雲雁)을 수놓았고 대사헌은 해태이며, 무관은 위와 같다. 3품관의 폐슬 이상은 위와 같고, 중단은 수리가 앉아 있는 것을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盤雕銀環綬]이며, 제복은 의상 폐슬이 1품과 같고, 중단은 위와 같으며 백초(白綃)의 방심 곡령은 위의 1품관과 같다. 공복은 정3품은 홍포(紅袍)요, 종3품은 청포(靑袍)이며, 상복(常服)은 당상관은 위와 같다. 흉배는 백한(白鷳)을 수놓았는데 무관은 웅비(熊羆)이다. 4품관의 조복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를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鍊鵲銀環綬]이다. 제복도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령(白綃方心領)이요, 공복은 청포이다. 5ㆍ6품은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練鵲銅環綬]요, 제복(祭服)은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청포이다. 7품에서 9품까지는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접동새를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鸂鶆銅環綬]이고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녹포(綠袍)이다. 녹사는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이고 여러 학당의 생도도 단령이고 유학(儒學)은 청금(靑衿)이고 서리는 단령이며, 별감은 푸른 단령인데 평상복은 직령(直領)이다. 궁궐 안의 각 차비는 직령이며 인로(引路)는 푸른 단령, 나장은 푸른 반비의(半臂衣)이다. 형조와 사헌부의 전옥(典獄)은 검은 단령이며 사간원의 사(士)는 누런 단령이며, 조예(皂隸)는 푸른 단령이다. 공주와 옹주(翁主)의 시종은 초록색을 사용한다. ○ 당상관 이상은 담홍포(淡紅袍)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玄綠色) 사단(紗緞)이며 흉배는 운학(雲鶴)을 수놓았는데 무관도 위와 같고, 융복엔 남색 첩리(帖裏)를 입는다. 당하관 3품 이하는 홍포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 저견(紵絹)이고 흉배는 백한이다. 무관도 위와 같은데 융복에는 청현색(靑玄色) 첨리를 입는다. 녹사의 홍단령은 지금 폐지되고 청현색 단령이며, 별감은 홍직령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녹색 직령을 입는다. 수복(守僕)은 홍직령이다. ○ 문ㆍ무사ㆍ서인이 모두 푸른 색을 숭상하게 하는데, 대소 인원은 문ㆍ무 직위를 물론하고 표의(表衣)가 앞은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며 뒤는 땅 위에서 2촌 떨어지게 한다. 소매는 길이가 손을 지나고 다시 돌아서 팔목에 이르며 소매통은 넓이가 1척이고 소맷 부리는 7촌이다. 서민(庶民)은 표의가 앞에는 땅 위에서 4촌 떨어지게 하며 뒤에는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고, 소매 길이는 손을 지나며 소매통 넓이는 8촌, 소맷부리는 5촌이다.
대(帶) 1품관의 조복에는 서대(犀帶)요, 제복ㆍ공복ㆍ상복(常服)에도 같으며, 사복엔 붉은실 띠(紅條兒)이다. 정2품관의 조복에는 정삽금(正鈒金)이며 종2품은 소금(素金)인데 제복ㆍ상복도 같다. 공복엔 여지금(荔枝金)이며 사복엔 붉은실 띠이다. 3품관의 조복에는 정삽은(正鈒銀). 종3품은 소은(素銀)이며, 제복과 평상복도 같고, 정3품의 공복에는 여지금, 종3품은 흑각(黑角)이고, 사복에는 붉은실 띠이다. 4품관의 조복에는 소은이며, 평상복도 같고, 공복엔 흑각이다. 5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에는 흑각이며, 제복ㆍ공복ㆍ평상복도 같다. 녹사와 여러 학당의 생도들과 서리(書吏)는 실 띠이며 별감과 궁궐 안 각 차비도 실 띠이고, 인로(引路)는 자색 난삼[紫襴]이요, 나장ㆍ조예(皂隸)도 실 띠이다. ○ 왕자가 데리고 다니는 자는 자색 난삼에 놋쇠 패[豆錫牌]를 차고, 의정부(議政府)와 승정원(承政院)의 경연(經筵)에서는 납패(鑞牌)이며, 내각의 인로는 금패(金牌)이다.
홀(笏) 1품에서 4품까지는 조복에 아홀(牙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고, 5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목홀(木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다.
패옥(佩玉) 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반청옥(燔靑玉)이며 제복에도 같고, 4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반백옥(燔白玉)이며 제복에도 같다.
말(襪) 1품에서 9품까지 조복에 백포(白布)인데 제복에도 같다.
화혜(靴鞋)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흑피혜(黑皮鞋)이며 제복에도 같고 공복엔 흑피화(黑皮靴)이다. 당상관은 평상복에는 금화(金靴)를 신는다. 4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과 제복에는 위와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흑피화를 신는다.
안구(鞍具) 1품에서 9품까지는 대랑피변안(大浪皮邊鞍)에 녹색 언치[䩞]와 단첨보로(段韂甫老)이며 골추륵 삼조수아(骨鞦勒三條垂兒)를 장식한다. 3품관 당상관은 대랑피변안에 녹색 언치이며 종친(宗親)의 3품 이하는 유청색(柳靑色)을 사용하여 골추륵 삼조수아를 장식하고, 기타의 3ㆍ4품은 백록각변안(白鹿角邊鞍)에 이조수아이며, 5ㆍ6품은 백록각 변안에 일조수아이고, 7ㆍ8ㆍ9품은 백록각변안이다. 사족의 의복은 첨리(帖裏) 및 치마[裳]가 13폭을 지나는 일이 없으며, 서인(庶人)의 의복은 9승(升) 포목에 첨리와 치마가 12폭이다. 사족의 초립(草笠)은 50죽(竹)이며, 또 마미립(馬尾笠)에 죽립(竹笠)을 붙인다. 서인은 초립이 30죽이며, 또 죽직립(竹織笠)과 승결립(繩結笠)이 있다.
【공헌】전부고(田賦考) 공제조(貢制條) 끝에 보인다. ○ 경기ㆍ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는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데, 무릇 서울 관청에 모든 공물(貢物)이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고, 5도(道)에 나누어 배정된 것은, 5도 각 영읍(營邑)의 준비가 백성의 노력에서 나는 것으로 모두 쌀로 만들며,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공물 값인 쌀은 호조에서 주관하여 내어주고, 북도(北道)의 공물 값인 마포(麻布)는 각 해당 관청에서 내어준다. ○ 해서(海西 황해도)에서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니 대동법의 규정을 의방(依倣)한 것이다. ○ 종친과 동반(東班)의 6품, 서반의 4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자는 포목이 각각 백저포(白苧布) 3필이며, 동반의 7품 이하와 서반의 6품 이상은 각각 흑마포(黑麻布) 1필씩이다. 서울 안의 무녀(巫女)는 상등은 백저포ㆍ흑저포 각 3필, 중등은 각 2필, 하등은 각 1필이며, 서울 안에 사는 부유한 사람은 각기 백저포ㆍ흑마포 1필씩이다. ○ 석자(席子)ㆍ인삼ㆍ초피(貂皮)ㆍ수달피(水獺皮) 등의 공물이 있다. ○ 무릇 세납이나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건은 이듬해 6월까지 상납(上納)하며 제향(祭享)에 진상하는 것 및 제철에 나는 산물(産物)은 모두 그때에 미쳐야 한다. ○ 여러 도의 공물을 지금은 쌀이나 포목으로 상납(上納)하며, 평안도의 공물은 지금 상납이 없는데, 그 값을 호조(戶曹)에서 쌀과 돈과 포목으로 공인(貢人 공물 바치는 계(契)의 계원)에 내어 주어서 방내 백성 중에서 정하여 주인을 삼고, 그 값을 넉넉히 정하여 주어서 예비하였다가 바치게 하며, 원 물건으로 상납하는 것은 제때에 미쳐야 한다. ○ 북도에서 바치는 인삼은 도합 수량이 1백 10근인데 5승(升) 생포(生布)로 대납(代納)한다. ○ 진상하는 포목은 15승에서 10승까지의 물품으로 하는데, 그 중 백저포ㆍ흑마포ㆍ저마교직포(苧麻交織布)는 12승에서 9승까지이며, 면포(綿布)ㆍ백면포(白綿布)는 15승에서 13승까지이다. ○ 별마(別馬)는 상ㆍ중ㆍ하등으로 나누며, 종마(種馬)는 웅마(雄馬)와 자마(雌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왜(倭)와 야인(野人)의 진상하는 것은 대마(大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중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누며, 하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눈다. ○ 제주(濟州)의 자제들은 웅마의 상ㆍ중ㆍ하와 자마의 상ㆍ중ㆍ하를 진상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선상(選上) 여기(女妓) 1백 50명, 연화대(蓮花臺 나라 잔치 때 추는 춤의 한 가지) 10명, 의녀(醫女)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 여종 중에서 연소한 자로 뽑아 올리며, 진연(進宴 국가 경사 때에 궁중에서 열던 잔치)이 있을 때에도 52명을 뽑아 올린다. 의녀는 공부를 마친 후에는 본읍으로 돌려 보내는데 서울 안 각 관청의 여종들 중에서도 뽑는다.
【금제】분경(奔競)하는 자를 금하니, 도목 정사(都目政事 매 해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하여 승직과 강등을 결정하는 일) 시행하는 날을 정한 후에,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당상관의 집과 도목 정사 후 서경(署經 관리의 임명이 있은 다음 대간(臺諫)이 다시 인정 서명하는 일)이 있기 전에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 관원의 집에는 동성(同姓) 6촌이나 이성 4촌 및 혼가(婚家)가 아닌데 출입하는 자를 금단(禁斷)하며, 이조ㆍ병조의 여러 장수나 당상 관리(堂上官吏)ㆍ병방 승지(兵房承旨)ㆍ사헌부ㆍ사간원의 판결사(判決事)의 집에는 동성 8촌이나 이성 처가 친척 6촌과 이웃 마을의 사람이 아닌데 출입하는 자는 장(杖) 80을 쳐서 3천 리 밖으로 유배 보낸다. 잡문서를 가지고 다니는 자는 장 1백을 치며, 판매를 금지하는 물건인 활세포(濶細布)ㆍ채문석(彩紋席)ㆍ후지(厚紙)ㆍ초피(貂皮)ㆍ토초피(土貂皮)ㆍ해달피(海懶皮) 등을 몰래 파는 자는 장 1백을 치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하며, 귀중한 철물(鐵物)ㆍ우마(牛馬)ㆍ금은ㆍ주옥ㆍ보석ㆍ염초(焰硝)ㆍ군기(軍器)를 파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 과장(科場)에서 과거 보는 이가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모두 장 1백을 치고 도형 3년에 처한다. 일설에는 과거보는 이가 과장에서 책을 가지거나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2회의 과거를 못 보게 한다고도 한다. 유생과 부녀자로서 절간에 올라가는 자나 여중이 되는 것도 같다. 조정 관원으로서 내어보낸 궁녀나 수사(水賜 무수리)에게 장가드는 자와 문서를 뜯어서 다시 종이를 만드는 자나 도성 안에서 야제(野祭)를 거행하는 자와 사족(士族)의 부녀자로서 산 속의 물가에서 잔치를 벌여 놀거나 친히 야제(野祭)ㆍ산천ㆍ성황사(城隍祠)ㆍ묘제(廟祭)를 거행하는 자와 과장의 이전(吏典)ㆍ복예(僕隸)로서 사실을 누설하고 연락[交通]하는 자나 이런 일을 보고서도 짐짓 단속[檢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장 50대를 친다. 대소 인원(人員)으로서 홍ㆍ회ㆍ백색의 표의(表衣)와 흰 갓이나 붉은 언치를 사용하는 자거나 술그릇 외에 금은 청화 백자기(金銀靑畫白磁器)를 쓰는 자는 금하며 서인(庶人)의 남녀는 홍자의(紅紫衣)ㆍ자대(紫帶)ㆍ금은 청화 주기(金銀靑畫酒器)ㆍ비단실로 섞어 짠 옷감[交綺]ㆍ옥 마노[瑪瑙]ㆍ호박(琥珀)ㆍ명박(明珀)ㆍ청금의(靑金衣) 및 황동(黃銅)의 말안장 장식(粧飾)ㆍ삽등자(鈒鐙子)ㆍ사피(斜皮)도 함께 금한다. 그러나 수건ㆍ수파(手帕)ㆍ비뉴(轡紐) 같은 종류의 자잘한 물건들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금하지 않으며, 혜사피(鞋絲皮)의 종류나 자잘한 장식물 같은 것은 금하지 않는다. 심염회색(深染灰色)의 옷이나 양구(兩具) 백색의 옷이거나 사족의 부녀자ㆍ아동과 서울 기생의 잡종 장식인 금은 주옥이나 정병(正兵)ㆍ서인의 백색 옷은 금하지 않는다. ○ 종친 집의 아내와 딸이나 당상관 집의 어머니ㆍ아내ㆍ딸ㆍ며느리와 음관(蔭官) 집 신부 외에, 방처럼 된 교자를 타는 자거나 사찰(寺刹) 외에 진채(眞彩)를 사용하는 자나 화석(花席)을 사용하는 자와, 주렴 칠기(朱染漆器)를 사용하는 자나 사화봉(絲花鳳) 금은노포화(金銀露布花)를 사용하는 자거나 염초를 사용하는 자와 관사(官舍) 및 당하관 이하 집에서 혼인하는 사람으로서 사라(紗羅)ㆍ능단(綾緞)ㆍ계담(罽毯)을 사용하는 자와 사족의 부녀ㆍ아동이나 서울 기생은 금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사채(私債)를 받는 자는 모두 장 60을 친다. ○ 선비로서 윤리를 문란하게[敗喪]하거나 탐장죄(貪贓罪)를 범한 자나, 사족집 부녀로서 실행(失行)한 자와 다시 세 번 시집간 자는 함께 녹안(錄案)을 만들어서 이조ㆍ병조 및 사헌부와 사간원으로 공문을 보내도록 한다. ○ 경성 안에 무격(巫覡)이 거주하는 자와 여염집에 승니(僧尼)가 유숙하는 자는 논죄(論罪)한다. ○ 이미 혼서(婚書)를 받고서 두 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여 성혼(成婚)한 자는, 그 주혼자(主婚者)를 논죄하여 따로 살게 한다. ○ 경성 10리 안에 동쪽은 대보동(大菩洞)ㆍ수유현(水踰峴)ㆍ우이천(牛耳川)ㆍ상하벌리(上下伐里)ㆍ장위송계교(長位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으며, 남쪽은 중량포 전관교(箭串橋)ㆍ신촌(新村)ㆍ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으며, 북쪽은 대보동ㆍ보현봉(普賢峯)ㆍ저서현(猪噬峴)ㆍ아미현(峨嵋峴)ㆍ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ㆍ대조리(大棗里)에서 석관현(石串峴) 서남쪽 물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 등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석관현ㆍ시위동(時威洞)ㆍ사천도관(沙川渡串)ㆍ성산(城山)ㆍ망원정(望遠亭)에서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아서 그 안에 입장(入葬)하는 자는 원릉(園陵)의 수목을 도벌(盜伐)한 형률과 같이 논죄하며, 강제로 시일을 정하여 파 옮기고 능침(陵寢)의 화소(火巢 불의 연소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불을 놓아 경계를 삼게 한 곳)나 외안 금표(外案禁標) 안에 투장(偸葬)한 자는 사형을 감하여 정배한다. ○ 빈 대궐의 소나무를 몰래 찍은 자는 연한 없이 변방 먼 곳에 정배한다. ○ 경성 10리 안에 소나무를 찍는 죄를 범한 자는 형률에 의하여 죄를 정하며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서 나무 뿌리나 잔디 뿌리를 채취한 자나 토석(土石)을 채취한 자는 모두 산 소나무를 벤 준례에 의하여 논죄하며, 함부로 밭갈이한 자는 궁(宮)이나 민가의 언덕을 강제로 차지한 자와 같이 논죄한다. 신무문(神武門) 밖과 면악(面岳) 아래의 흙 파는 곳을 조사[擲奸]하여 엄금한다. ○ 마소의 밀도살 죄를 범하는 자나 경성 안에서 서민이 말을 타는 자는 금하되, 삼의사(三醫司)나 역관(譯官)ㆍ일관(日官)ㆍ사자관(寫字官)ㆍ산원(算員)ㆍ화원(畫員) 등 잡과 출신의 사람 및 아전(衙前)은 금하지 않으며, 녹사와 금군도 금하지 않는다. 성 안에서 구치(驅馳 거마를 빨리 몰고 다니는 일)하는 자는 병조(兵曹)로 잡아다가 곤장을 친다. 잡귀신에 제사지내는 자와 경성 내외의 대소 음사(淫祀)나, 성 밖 10리에서 모여 술마시는 자거나 3인 이상이 안주와 술을 준비하여 가지고 모여 마시는 자는, 맡아 차린 자만을 치죄(治罪)하되, 금군(禁軍)인 경우에는 금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술주정하는 사람이나 승니(僧尼)로서 함부로 도성 안에 들어오는 자나 처녀[童女]로서 여중이 되는 자는 치죄(治罪)하여 환속(還俗)하게 하되, 모두 금단(禁斷)한다. ○ 위로 궁궐 안에서부터 아래로 여염집에 이르기까지 장복(章服 관대를 갖춘 의복)이나 융복(戎服 군복) 외에는 토산(土産 국산)이 아니면 입지 못하는데, 금군이나 호위군관(扈衛軍官)이나 의녀(醫女)와 침선비(針線婢)는 지나친 의복을 금하지 않으며. 사족집 부녀들의 의복은 모두 그 남편의 작품(爵品)에 따라서 하게 한다. 겉에 대단금(大緞錦)을 사용하거나, 수봉차(繡鳳釵)ㆍ금옥차(金玉釵)ㆍ주전가환(珠鈿假鬟)을 사용하는 자는 신부에 한하여서만 금하지 않으며, 사단(紗緞)ㆍ능주(綾紬)는 물론하고 무엇이나 무늬 있는 것은 일체 엄금하는데, 범한 자는 시민(市民)도 모두 같은 형률로 시행한다. 역관이나 장사치는 의주[灣府]에서부터 먼저 목베어 매단 후에 장계하여 알리며, 물건은 목책(木柵) 밖에서 불태운다. ○ 당하관의 말안장에 은실로 새겨 장식한 자나 당하관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남기률(濫騎律)로 처벌하며, 중관(中官 내시부의 관원들)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그 관품의 당상ㆍ당하를 막론하고 당하승교(堂下乘轎)의 준례에 의하여 처벌한다. 국상(國喪) 때 풍악치고 기생 데리고 노는 자나 국기정일(國忌正日) 및 치재일(致齋日)에 풍악을 울리는 자를 모두 엄금하고 죄를 다스린다. ○ 시중 가격을 농간질하여 올리는 자와 두승(斗升)을 정한 규격대로 만들지 않는 자나 나무공이로 찧은 나쁜 쌀을 외상(外上)이라고 하며, 억지로 전(廛)보는 사람들에게 파는 자는 평시서(平市署)에서 주관하되, 시정이나 마을의 범금인(犯禁人)을 본서에서 물건을 거두어 놓아주지 말고 형조에 보고하여 죄를 주게 하며, 도고 계방(都庫契房 도매 가게)인 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한다. 전안(廛案 시전 명부)에 매어 있지 않고 난전(亂廛 노점)을 보는 자는 경조(京兆)에서 주관한다. ○ 여러 군문(軍門)에 속한 군병들의 제조 물품은 난전에 관한 처벌로 시행하지 않는다. ○ 호위청(扈衛廳)에 소속된 난전은 법사(法司 형조와 한성부)에서 바로 처벌을 시행한다. ○ 점포를 잠그고 철시(撤市)하는 자는 그 주모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하고 모두 금단(禁斷)한다. ○ 삼법사(三法司)인 형조ㆍ사헌부ㆍ한성부에서는 관원이 집에서 금단하지 못하며, 또 어두운 밤에 금단하지 못하며 경성 금표(禁標) 밖에 대하여 금단하지 못하며 난전과 같은 금지 조례 외에는 다른 금지 조례를 지어 내지 못한다. 시각을 생각해서 정하여 넘는 일이 없게 하며 먼저 금지 조례로 거듭 엄중히 당부하여 알려 준 후에 금단하는데 매달 6차례씩 한다. 사시 명절에는 모두 금령중 장 1백을 치는 것은 늦추어준다. 법사의 목패(木牌) 외에 추가로 지패(紙牌)를 내는 일은 일체 엄금하며 감찰이 출패하는 일도 일체 금단한다. ○ 여염집을 빼앗아 드는 자는 도형(徒刑)으로 3년 정배한다. ○ 자기가 제 몸을 판 자도 아내를 판 형률과 같이하며 산 자도 같은 죄로 본다. ○ 화랑 유녀(花郞遊女) 및 무녀(巫女)로서 경성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적발하여 논죄(論罪)한다. ○ 여자 복색으로 변장하고 남의 집에 출입하는 자는 장(杖) 1백을 쳐서 섬에 정배한다. ○ 집을 헐어버리고 시골로 가는 자를 일체 엄단한다. ○ 각 관청의 관원 및 하인들이 면신(免新)ㆍ벌례(罰禮)ㆍ허참(許參) 등의 일로 재물을 거두는 자는 관리가 재물을 받았으되, 법률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받은 재물을 계산하여 논죄하며, 여러 군문의 장교 및 군교(軍校)가 면신례(免新禮)라 하며 거두어들이는 자는 중한 죄목에 의하여 곤장을 친다. ○ 능원(陵園) 묘소의 나무를 찍었는데도 적발하지 못하면 범인이나 능관(陵官)을 경중을 구분하여 논죄한다.
금화(禁火) 병조ㆍ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와 5부(部)의 당직 숙직하는 관원들이 순행하면서 금화한다. 궁궐 안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치든가 대신 호각[螺]을 부는데 궁궐에 있는 자는 뛰어가서 구원하되, 장병[將卒]은 당직 장소를 떠나지 않으며, 번에 나간 장병들은 각기 본위(本衛)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은 각각 그 조방(朝房)에 모이며 여러 관청의 인원과 공장(工匠)들과 5부 방리의 사람들과 번에 나간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들은 모두 궐문 밖으로 가서 대령한다. ○ 여러 관청을 모두 5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구화패(救火牌)를 주는데, 그 부 안에서 불이 나면,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의금부ㆍ금화사의 관원들이 부속(部屬)의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한다. ○ 의금부에서는 망화인 나장(望火人羅將)을 정하며, 사복시(司僕寺)ㆍ군기시(軍器寺)의 종은 항상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이궁(離宮)이나 관청에서 불이 나면 종을 치며 사가(私家)가 연소(延燒)되어도 종을 친다. ○ 바람이 어지럽게 불면 금화사에서 방리(坊里) 각 호에 목탁을 흔들면서 순찰 경계한다. ○ 금화하는 공사 각처에는 모두 저수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방목토가(防木土架)와 구화기계(救火器械)를 준비하여 둔다. ○ 궁성과 궁장(宮墻)에서 사면으로 백 자 안에는 인가를 짓지 못하게 하며 창고는 30자로 한정한다. ○ 모든 조문의 금령은 경조ㆍ한성부 이외의 제읍(諸邑)에도 방을 붙여서 널리 알린다.
【요역좌경】종사 묘궁(宗社廟宮) 등 중요한 여러 곳 및 궁방(宮房)이나 전곡(錢穀) 있는 곳과 관청[衙門]이나 큰 거리 복처(伏處 순라군이 지키는 곳)에 좌경군(坐更軍 밤에 파수 서는 군사)이 두 명씩 있는데, 하나는 인가에서 나와 지키며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대군ㆍ왕자ㆍ공주ㆍ옹주ㆍ대신ㆍ국구(國舅) 및 맹인(盲人)ㆍ독녀로서 장정 없는 자 외에는, 종실 신하의 정1품이라 하더라도 경재(卿宰 재상)의 보국(輔國)ㆍ판서 이하는 모두 부역으로 나온다. 중부에 15처, 동부에 7처, 서부에 26처, 남부에 36처, 북부에 17처이다. 조강가(糟糠價) 중부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거두는 전생서(典牲署) 가축[牲口]의 먹는 조강이 18석인데, 숙종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4냥(兩) 2전(錢) 7푼[分]이니 매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 양과 염소가 먹는 조강은 돈으로 6냥이다. 남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25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56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8석 1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9냥 3전 2푼이다. 북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의 조강은 돈으로 대납하면 3냥 3전 3푼이다.
【영선】궁궐은 전연사(典涓司)에서, 공해(公廨 관청 청사)는 각각 그 관청 관원들이 나누어 맡아 간수(看守)하는데, 비가 새거나 헐린 곳이 있으면 공조(工曹)에 보고하여 수리하며, 매해 봄과 가을에 공조에서 순찰하여 그 상황을 위에 아뢴다.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은 공조의 당하관 각 2명이 나누어 맡아 검찰(檢察)하며 건물ㆍ잡물 등에 대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한다. ○ 대궐 안 건물로 관청이 된 곳은 그 관청의 관리가 군사들의 입직(入直)하는 곳과 체번(遞番)하는 날을 간수하며, 전연사(典涓司)의 관원과 그 부장(部將)이 간심(看審)하며, 만일 파손 훼상하였다든가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공문을 형조로 보내어 심문 조사해서 징수하게 한다. ○ 도성 각 문과 각처 군영(軍營) 경수소(警守所)는 소재지 부(部)의 관리가 인근 거주민들의 간수(看守)를 정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하는데, 파손ㆍ훼상 또는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숙직(宿直)한 군사들에게 나누어 받아내며, 간수인은 군사들이 체번하는 날에 번갈아 서로 간심하여 주고받게 한다.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이 궐내ㆍ궐외 각처의 수리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 한다 시어소(時御所)와 각 전(殿)과 각 당(堂) 안의 각 관청 청사의 수보(修補)와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기구의 제조와 내빙고(內氷庫)의 공상(供上)을 맡아 한다. ○ 9영선은 지금 5소장(所掌)으로 되었다. 1소장은 종묘ㆍ육상궁(毓祥宮)ㆍ연우궁(延祐宮)ㆍ장생전(長生殿)ㆍ독소(纛所)ㆍ종친부(宗親府)ㆍ중학ㆍ돈녕부 조방(敦寧府朝房)ㆍ의빈부(儀賓府)ㆍ홍문관 조방(弘文館朝房)ㆍ정업원(淨業院)ㆍ선잠단(先蠶壇)ㆍ첨성대(瞻星臺)ㆍ목멱당(木覓堂)ㆍ마조단(馬祖壇)ㆍ하순청(下巡廳)이며, 2소장은 사직ㆍ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ㆍ광명전 시어소ㆍ요령막(搖鈴幕)ㆍ경복궁ㆍ기로소(耆老所)ㆍ의정부 조방ㆍ돈녕부(敦寧府)ㆍ이조ㆍ동학ㆍ유하정(流霞亭)ㆍ종각ㆍ선농단(先農壇)ㆍ양정재(養正齋)ㆍ하함춘원(下含春苑)ㆍ좌순청(左巡廳)이며, 3소장은 영희전(永禧殿)ㆍ저경궁(儲慶宮)ㆍ선원록청(璿源錄廳)ㆍ대빈궁(大嬪宮)ㆍ남별궁ㆍ봉상시(奉常寺)ㆍ신당(神堂)ㆍ북단(北壇)ㆍ여단(厲壇)ㆍ내자시(內資寺)ㆍ권초각(捲草閣)ㆍ상함춘원(上含春苑)ㆍ중추부(中樞府)ㆍ예조ㆍ서학ㆍ내섬시(內贍寺)ㆍ우모가가(牛毛假家)ㆍ상하당직(上下當直)이며, 4소장은 경모궁(景慕宮)ㆍ경우궁(景祐宮)ㆍ동관왕묘ㆍ경희궁ㆍ12별당ㆍ어의본궁(於義本宮)ㆍ의금부ㆍ의정부 반열조방(議政府班列朝房)ㆍ사간원 조방ㆍ모화관(慕華館)ㆍ남학ㆍ상림원(上林苑)ㆍ승문원(承文院)ㆍ우사단(雩祀壇)ㆍ한강단(漢江壇)이며, 5소장은 성균관ㆍ창의궁(彰義宮)ㆍ융례전(隆禮殿)ㆍ문희묘(文禧廟)ㆍ남관왕묘ㆍ전계대원군궁(全溪大院君宮)ㆍ선무사(宣武祠)ㆍ연서비각(延曙碑閣)ㆍ차동비각(車洞碑閣)ㆍ남단(南壇)ㆍ사한단(司寒壇)ㆍ의정부 중추부 조방ㆍ사헌부ㆍ내각 조방(內閣朝房)ㆍ방마원(放馬苑)ㆍ전생서(典牲署)이다. ○ 무릇 영선하는 곳은 맡은 관원이 본사(本司)의 관원과 함께 나가 검거(檢擧)한다. ○ 궁장(宮墻)은 도성의 준례에 따라 3군문에 나뉘어 속하여 허물어진 곳을 돌로 쌓는다.
【형세】 삼각산이 진산(鎭山)이 되었는데 낙산(駱山)이 왼쪽에 높이 솟고, 모악(母岳)이 오른쪽에 자리잡았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 읍하고 한강[漢水]이 그 앞에 흐른다. ○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동쪽은 동해[桑暾]에 접하였다. 천지(天池)가 남호(南戶)에 미쳤고 말갈(靺鞨)이 북문이 되었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있다. ○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여 자리잡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탄하고 넓으며 백성이 많고 부유하여 번화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산천】한성부의 낭관이 사산(四山)을 나누어 맡아 긴관 금기처(緊關禁忌處)를 검거(檢擧)하며, 성 안의 전수 및 성 밖의 현무(玄武 북방) 주산(主山)에 표(標)를 세운다. 동지긴관(東指緊關)의 외청룡(外靑龍)인 석가호(釋迦岵) 안 사을한(沙乙閑) 남쪽 가에서부터 적유현(狄踰峴)을 지나 광평대군(廣平大君) 집 북호(北岵) 선잠제단(先蠶祭壇)에 이르기까지 선제원(善濟院) 서쪽 건너편 가에서 안암동(安岩洞)ㆍ저방동(猪房洞)ㆍ동대문에 이르기까지에는 모두 산 등 안팎에, 서지긴관(西指緊關)의 외백호(外白虎)인 모화관(慕華館) 뒤에서 사현(沙峴) 사축서호(司畜署岵)를 지나 청파(靑坡) 뒤에 이르기까지에는 산 등 내면(內面)에, 주작(朱雀 남방) 안산(案山)인 남산의 외면과 남대문 성 밖에서부터 전생서(典牲署) 뒤를 지나 벌아현(伐兒峴)에 이르고, 동쪽으로 두모포(豆毛浦) 후산(後山)ㆍ왕십리(往十里) 후산으로 나가고 돌아서 수구(水口)에 이르기까지는 산 등 내외면에 모두 표를 세운다.
삼각산(三角山) 도성 북쪽 30리 양주(楊州) 땅에 있는데 일명은 화산(華山)이요,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연이어진 봉우리와 첩첩한 묏부리가 잇따라 뻗어와서 서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서남쪽에서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북산(北山)이 되니, 사실 경성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니 곧 이 북산이다. 백운(白雲)ㆍ만경(萬景)을 국망(國望)이라고도 하고, 인수(仁壽)의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할 때에, 세조 및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다른 유신(儒臣)들을 시켜서 이 산의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의 출입하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고 그 아래가 한량없이 깊으니 안평대군 이하는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걸어가기를 나는 듯이 하며,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절찬 탄복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釋迦)ㆍ보현ㆍ문수(文殊)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었는데, 보현봉의 갈라진 산기슭이 곧 도성의 주맥(主脈)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補築)하였다.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蹲峯)ㆍ백악산(白岳山)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七星峯)이 되고,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져서 나한(羅漢)ㆍ증봉(甑峯)ㆍ혈망(穴望)ㆍ의상(義相)의 여러 봉이 되어 중흥 수구(重興水口)에 이르며,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서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 향림사(佛巖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되며, 서쪽으로 돌아서는 영취(靈鷲)ㆍ원효(元曉)의 두 봉이 되어 중흥 수구에 와서 멈춘다. ○ 우리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에 올라 시를 짓기를, “손 내밀어 덩굴 붙들며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한 암자 높게도 백운 중에 누워 있네, 눈앞의 보이는 곳 다 우리 땅이라면, 오월(吳越) 강남(江南)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리.” 하니, 그 넓은 마음 큰 도량을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이 있다. ○ 고려 정종(靖宗) 원년에 적석정(積石頂)에 운석(隕石)이 있었다. 예종(睿宗) 원년에 이 산의 부아봉(負兒峯)이 무너졌으며 2년에도 무너졌다. 희종(熙宗) 6년에 산의 중봉(中峯)이 무너졌으며, 공민왕(恭愍王) 23년에도 중봉이 무너졌다. 신우(辛禑) 원년 6월에 크게 비가 와서 국망봉이 무너졌으며, 우리 조정 선조 30년에 산중에서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 기우제(祈雨祭)에는 초차(初次)에 당상 3품관이, 6차에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에는 근시관이 드린다.
백악(白嶽) 경복궁성 북쪽에 있는데 도성(都城)이 그 위로 지난다.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한다.
응봉(鷹峯) 백악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봉 아래 후원주맥(後苑主脈) 보토처(補土處)에는 매해 봄가을로 병조ㆍ공조ㆍ한성부의 당랑관(堂郞官)이 어영대장과 더불어 간심(看審)한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니 명(明) 나라 사신이 고쳐 이름지은 것이다. ○ 영천(靈泉)이 산허리 바위 아래에서 나는데 돌 짬에서 솟아나며 맛이 달고 맵지 않고 또 매우 차지도 않다. ○ 현종(顯宗) 임자년에 성매죽(成梅竹 삼문)의 신주를 인왕산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얻었는데, 분칠한 쪽에는 성삼문 신주(成三問神主) 다섯 자만을 썼으며 움푹한 곳에는 무술생 외손 박호(戊戌生外孫朴壕) 일곱 자가 쓰여져 있었다. 봄에 홍주(洪州)에 있는 공의 구기(舊基)로 보내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타락산(酡酪山) 도성(都城) 안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응봉(鷹峯) 동쪽에서 뻗어 돌아 이 산이 되었는데 동쪽으로 안암(安巖)ㆍ고암(鼓巖)에 이른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이며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大小)ㆍ설마(雪馬)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ㆍ동현(東峴)에 이른다. ○ 본조 개국 초기에 동요(童謠)가 있어 이르기를, “저 남산(南山)에 가서 돌을 떼내는데 정(釘) 남은 것 없다.” 하더니, 얼마 안가서 남은(南誾)ㆍ정도전(鄭道傳)이 사변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다. 남(南)은 남은을 말함이요, 정(釘)은 정(鄭)과 음이 같으니 도전(道傳)을 말한 것이며, 여(餘) 자의 해석이 남은의 음과 서로 같으니 남(南)ㆍ정(鄭)이 모두 없어진다는 말인 것이다. ○ 기우제(祈雨祭)의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선암(禪巖)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한양 도성(漢陽都城)을 쌓을 때에 바위가 중이 장삼 입은 모양 같은 것이 인왕산 모퉁이에 서있어 선암(禪巖)이라 불렀다.” 한다. 무학(無學)은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고 정도전은 성 밖으로 내 보내려 하였는데, 태조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도전이 아뢰기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불교(佛敎)가 성하고 성 밖으로 내보내면 유교가 흥합니다.” 하니, 명하여 도전의 말을 좇게 하였는데, 무학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따르게 되었다.” 하였다.
비봉(碑峯) 《택리지(擇里志)》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도읍터를 정할 때에 무학이 백운대(白雲臺)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萬景臺)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러 보니, 한 비석에 크게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라는 여섯 글자가 있으니, 이것은 곧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다.” 하였다.
모악(母嶽) 도성 서쪽에 있는데, 안현(鞍峴)이라 하기도 하고 기봉(岐峯)이라 하기도 한다. ○ 인왕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追慕峴)이 되고,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남쪽으로 나가 약현(藥峴)ㆍ만리현(萬里峴)이 되고, 용산(龍山)에 이르러, 한 기슭이 서남쪽에서 계당치(鷄堂峙)가 되고, 와우산(臥牛山)에 이르러 잠두봉(蠶豆峯)이 된다. ○ 지봉(芝峯 이수광)이 말하기를, “민간에서들 이르기를, ‘부아암(負兒巖)이 집을 나가는[出世]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 산을 모악(母岳)이라 이름하였으며, 남쪽을 벌아령(伐兒嶺)이라 하니 대개 막으려 하다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아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서쪽을 병시현(餠市峴)이라고 하니 이것은 나가려는 아이를 떡을 주어 달래어 멈추려 한 것이다. 옛날 이름지은 것이 모두 깊은 뜻이 있다.” 하였다. ○ 인조 갑자년 2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도성을 차지하였는데, 도원수 장만(張晩)과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방어사 정충신(鄭忠信) 등이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 힘써 싸워 적을 물리쳤다.
추모현(追慕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는데 본래 이름은 사현(沙峴)이다. 영종(英宗) 45년에 명릉(明陵)에 역사가 있으니 왕이 친히 이 고개에 와서 바라보고,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녹반현(綠礬峴)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많이 캐어다 사용한다. ○ 당 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일만 사람이 이기지 못할 곳이다.” 하였다.
동망봉(東望峯)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영종 47년에 어필로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 불우(佛宇) 정업원조(淨業院條)에 자세하다.
계당치(鷄堂峙) 서부(西部)의 기봉(岐峯) 서쪽 기슭에 있다.
와우산(臥牛山) 도성 밖 서쪽 13리에 있는데, 산 남쪽에 광흥창(廣興倉)이 있다.
용산(龍山) 도성 밖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군자감(軍資監)과 훈국(訓局)의 별영(別營)이 있다. ○ 위의 두 산은 모두 한강 가에 있다.
잠두봉(蠶頭峯) 도성 밖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민간에서 가을두(加乙頭)라고 부르며, 또 용두봉(龍頭峯)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 강희맹(姜希孟)이 서술한 기문이 있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는 것을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동쪽에 있는 것을 소설마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부어현(夫於峴)이라고 부른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水]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서 지기(地氣)를 기르는 것이다. 영종 경진년에 버들을 양쪽 언덕에 심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는데, 지금은 식목소(植木所)라고 하며 어영청(御營廳)이 관할한다. 경모궁(景慕宮) 안산(案山) 및 관현(館峴)과 흥인산(興仁山) 내외의 3곳에 각각 장졸을 배정하여 수호 금양(守護禁養)하는데, 경모궁 패장(牌將)으로 오래 벼슬한 사람이 전임(轉任)한다.
개천(開川) 제소남(齊召南 청(淸) 나라 사람)의 《수도제강(水道提綱 천하의 수도를 총론하였음)》에 이르기를, “왕경(王京) 한양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는데, 동(東) 12도 6분에 극(極) 37도 5분이며, 서쪽으로 강화도(江華道)에 이르는데, 동 9도에 극 37도 4분이다.” 하였다. ○ 백악(白岳)ㆍ인왕ㆍ목멱(木覓)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도성(都城) 안을 가로 질러서 3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수원(水源)이 인왕산 백운동(白雲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자수궁교(慈壽宮橋)를 지나서 옥류동(玉流洞) 누각동수(樓閣洞水) 수원이 인왕산 동쪽에서 나와 모여 남쪽으로 흘러 창의궁(彰義宮) 서쪽에 있는 금청교(禁淸橋)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종침교(琮琛橋)를 지난다. 오른쪽으로 큰 물이 지나 작은 물과 합하는 것을 ‘과(過)’라 하며, 후에도 이와 같다. 수원이 사직 남쪽 경희궁(慶熙宮) 북쪽에서 나오는 승전색교(承傳色橋)를 지나 적선방(積善坊)에 있는 송기교(松杞橋)에 이르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대은암(大隱巖)에서 나와서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가 경령지(慶令池)의 물을 합하고, 금청교(禁淸橋) 동남쪽을 지나고, 남금교(南禁僑)를 경유하는 북어수교(北御水橋)를 지나서 꺾여 삼청동(三淸洞) 물 수원이 사동(寺洞)ㆍ수침동(水砧洞) 두 곳에서 나와서 백련봉(白蓮峯) 남쪽에 이르러 합류하며, 장원서(掌苑署) 앞 장생전(長生殿) 다리와 관광방(觀光坊)에 있는 십자각(十字閣) 앞 다리를 지나서 경복궁성 안 동쪽 가의 물과 합하여 중학 앞에 있는 중학교(中學橋)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혜정교(惠政橋)를 지나는데, 민간에서 말하기를, “관으로 재물 많이 탐한 자를 이 다리 위에서 삶는다.” 한다. 운종가 남교(雲從街南橋)는 민간에서 모전교(毛廛橋)라고 하는데 서린방(瑞麟坊)에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곡교(曲橋)의 물을 지난다. 하나는 목멱산(木覓山) 아래 북창동(北倉洞)에서 나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는 수각교(水閣橋)ㆍ황화방(皇華坊)에 있는 전도감교(錢都監橋)ㆍ미장동 동교(美墻洞東橋)를 지나서 동쪽으로 흐른다. 하나는 정릉동(貞陵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군기시(軍器寺) 다리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수각교 물과 합하여 소광통교(小廣通橋)가 되어 온다. 하나는 회현동(會賢洞)에서 나와서 동현동(銅峴洞)을 지나 소광통교의 물과 합하여, 태평방(太平坊)에 있는 곡교(曲橋)가 된다. 하나는 명례동(明禮洞)에서 나와서 곡교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장통교(長通橋)가 되니, 송기교(松杞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7백 68척, 넓이가 10여 보(步)이며, 훈련도감(訓鍊都監) 관내가 된다. 왼쪽으로 수원이 대소안국동(大小安國洞)에서 나오는 통운교(通雲橋)를 지나고, 수표교(水標橋)ㆍ하량교(河良橋)를 지나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木覓山) 북쪽에서 나와서 주자동(鑄字洞)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초전동(草廛洞)을 지나고, 또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중부동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중부동(中部洞)을 지나서 영풍교(永豐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왼쪽으로 이교(二橋) 물을 지난다. 하나는 응봉(鷹峯) 동쪽에서 나와서 북영(北營) 요금문(曜金門) 곁의 수구(水口)를 경유하여 창덕궁 금청교(禁淸橋)로 들어갔다가, 단봉문(丹鳳門) 곁의 수구로 나와서 창경궁 후원으로 들어가며, 금청교의 선인문(宣仁門) 밖 수구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황참의교(黃參議橋)를 경유하여 와서 단봉문 수구의 물과 합한다.
하나는 회동(灰洞)ㆍ제생동(濟生洞)에서 나와서 향교동(鄕校洞)을 경유하여 돈화문(敦化門) 밖 병문(屛門)에 있는 기자교(杞子橋)가 되고, 대묘동(大廟洞)에 이르러 단봉문(丹鳳門) 수구물과 합하여 함께 이교(二橋)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청녕교(靑寧橋) 물의 근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南別營)을 경유하여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무침(無沈)ㆍ청녕(靑寧)의 두 다리를 지나와서 태평교(太平橋)가 되는데,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하며 영종조에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장통교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81보, 넓이가 20여 보이며, 금위영 관내이다. 다시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쌍리문동(雙里門洞)을 경유하는 청교(靑橋)를 지나서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어청교(於靑橋)를 지나며, 또 동쪽으로 흐르는 초교(初橋) 물은 수원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나오는데, 동반수(東泮水)는 성균관 앞 다리와 식당교(食堂橋)와 비각교(碑閣橋)를 경유하고, 서반수(西泮水)는 집춘문(集春門) 앞 다리를 경유하여 대성전(大成殿) 남문 밖에서 합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관기교(觀旗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충락교(忠樂橋)가 되며, 광례교(廣禮橋)에 이르러 흥덕동(興德洞) 물과 합하고, 또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 응란교(凝鸞橋) 물을 지나서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 장경교(長慶橋)가 되고,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 앞을 지나고 신교(新橋)를 지나와서 오칸 수문(五間水門)으로 들어간다. 성 밖에 나가서는 수원이 남소문동(南小門洞) 남쪽 가에서 나오는 이칸 수문(二間水門) 물을 지나서 영도교(永渡橋)를 거치는데, 태평교(太平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73보, 넓이가 30여 보이고, 장경교(長慶橋)에서 큰 개천 골목에 이르기까지는 길이가 1천 4백 7보, 넓이가 10여 보이며, 모두 어영청(御營廳) 관내에 속한다. 차현(車峴) 동쪽에서 수원이 양주(楊州) 불곡산(佛谷山) 및 벽석현(碧石峴)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녹양역(綠楊驛)ㆍ송계교(松溪橋)로 흘러서 남쪽으로 와서 모이는 중량포(中梁浦)와 모이며, 남쪽으로 흘러 전관교(箭串橋)를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 영종 경진년에 오래도록 쳐내지 않았으므로 개천 길이 막혀서 모래가 덮이고 다리가 묻혀, 장마 때가 되기만 하면 그만 넘쳐흐르게 되니 백성을 모집하여 개천을 쳐내게 하였다. 그리고 완공된 다음에는 준천사(濬川司)를 수표교 북쪽 냇가에 설치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고 얽어매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계사년에는 고쳐서 돌로 쌓았다.
한강(漢江)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목멱산 남쪽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로 적혀 있으며,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 우통(五臺山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廣州)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 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豆毛浦 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며, 시흥현(始興縣)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陽川縣)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交河郡)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부(通津府)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別將)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字內]는 광주의 압구정(押鷗亭)과 두모포, 독도(纛島 뚝섬)의 몽뢰정(夢賚亭), 한강의 서빙고(西氷庫)이다. ○ 속한 선박은 훈국(訓局)의 배 10척이 있는데 관방조(關防條)에도 보인다. ○ 명(明) 나라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의 기문(記文)이 있다. ○ 선조 21년에 강물이 5ㆍ6일간 핏빛 같았다. ○ 기우제에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는데 호두(虎頭)를 물 속에 넣으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노량(露梁 노들)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 처음에는 도승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과천(果川)의 신촌리(新村里)ㆍ사촌리(沙村里)ㆍ곽계(槨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마포강(麻浦江)이다. ○ 속한 선박은 금위영(禁衛營)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 강 북쪽 모래사장에 용호영(龍虎營) 및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습진(習陣)하는 곳이 있다. ○ 선조 36년에 큰 돌이 물 속에서 언덕 가의 다른 돌 위에 일어섰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고양군(高陽郡) 부원현(富原縣) 땅이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서강(西江)의 한 갈래가 바로 시흥현(始興縣)에서부터 방학동(放鶴洞)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것이 용산포(龍山浦)이다. ○ 예전에는 10리 장호(長湖)가 되었는데 서쪽으로 염창(鹽倉)이 막히고 모래 언덕이 새지 않으며, 연이 그 가운데에 나서 이름을 용산(蓉山)이라고 하였다. ○ 기우제(祈雨祭)에 재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삼전도(三田渡) 광주 지경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으며 속한 관청은 어영청(御營廳)이요, 녹안(錄案)에는 관선(官船)이 3척이다. ○ 삼전도와 신포(新浦) 사이에 상전(桑田)이 있다.
마포(麻浦) 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용산강 하류이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마포에서 여기까지를 통틀어 서호(西湖)라고 한다.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토정리(土亭里)ㆍ옹리 상하계(甕里上下契)ㆍ현석리(玄石里)ㆍ율도(栗島)ㆍ다인리(多人里)ㆍ하중리(下中里)ㆍ합정리(合井里)ㆍ수파리(水波里)ㆍ망원정 일이계(望遠亭一二契)ㆍ시흥 신정리(始興新井里)이다. ○ 호조(戶曹)의 점검청(點檢廳)이 있다. ○ 선조 24년에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고, 인조 14년에 또 물이 얕아져서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속한 선박은 어영청(御營廳)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독도(纛島) 혹은 독백(禿白)이라고 하는데 두모포의 상류이다. ○ 강변에 예전에는 호조(戶曹)의 수세소(收稅所)가 있었다. 효종 병신년에 설치하였는데 무릇 각종 목물(木物)이 물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10분의 1의 세를 받았다.
저자도(楮子島)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다.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여기에 별장을 두었는데, 우리 조정의 세종(世宗)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의 아들 안빈(安貧) 이후로 대대로 전하여 소유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이 있다. ○ 기우제에 초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호(東湖)라고 한다. 명종(明宗) 을축년에 두모포 어부가 한 마리 흰 고기를 얻으니 그 크기가 배[船]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고기가 바다에서 멀리 와서 강에 이르러 죽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의 형(衡)자가 행(行) 자와 어(魚) 자로 되었으므로 고기가 죽은 것은 곧 원형이 죽을 징조였다.” 하였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 상류에 있다.
신포(新浦) 광주 지경에 있으며, 도성에서 거리가 27리이다. 한강 물이 넘쳐서 기류(岐流)가 되었는데, 그 정파(正派)가 기류로 옮겨져서 신포(新浦)라고 한다. 가물면 그대로 건너고, 물이 넘치면 두 강이 되며, 저자도(楮子島) 아래에 이르러서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
중종조(中宗朝)에 그 물 형세가 바로 선릉(宣陵)에 부딪히므로, 군사들을 출동시켜 돌을 운반하여 언덕이 무너져 들어간 곳을 막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도요연(桃夭淵) 전관교(箭串橋)에 있다.
만초천(蔓草川) 수원이 경성 서쪽 모악(母岳)에서 나와서 성을 돌며 남쪽으로 흐르는데,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혁교(革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 경영교(京營橋), 소의문(昭義門) 밖에 있는 신교(新橋)ㆍ비교(圮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염초청(焰硝廳),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 주교(舟橋)를 지나 만초천(蔓草川)이 되고,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龍山江)에 들어간다.
창천(倉川) 도성 서쪽 10리 되는 광흥창(廣興倉) 근처에 있다. 동남쪽으로 흘러서 서강으로 들어간다.
사천(沙川) 수원이 문수봉(文殊峯)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탕춘대(蕩春臺)ㆍ홍제원(弘濟院)을 지나며, 모악을 돌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중량포(中梁浦) 일명 속계(涑溪)라고도 하는데, 도성 동쪽 13리 지점에 있으며, 양주(楊州) 독두천(獨豆川)의 하류이다.
율주(栗洲) 일명 율도(栗島)라고도 하고, 일명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길이가 7리인데, 경성의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마포(麻浦) 남쪽이다. ○ 상림(桑林)이 있는데 곧 공상(公桑)이며, 약전(藥田)은 지금 내의원(內醫院)에 속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고도 한다. 모래 섬 중에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고려의 김주(金澍)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정지】 종묘서(宗廟署)의 우물 하나는 서(署) 안에 있고, 하나는 서 밖에 있다.
성제정(星祭井) 소격서(昭格署) 곁에 있는데, 물이 돌 사이에서 나오며 맛이 매우 맑고 차다. 옛날 초제(醮祭 별에 제사 드리는 것) 드릴 때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제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의성위정(宜城尉井) 타락산(駝駱山) 아래 어의동(於義洞)에 있다. 성종조(成宗朝)에 그 우물을 봉(封)하고 길어다가 임금께 진상하였으므로 어정(御井)이라고 하였으며, 후에 의성위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사정(賜井)이라는 두 글자를 우물 돌 위에 새겼다.
미정(尾井)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매우 좋다.
통정(桶井) 훈련원(訓鍊院) 서남쪽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가장 좋아서 성 안에 제일이다. 맛이 매우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차다. 가뭄과 장마에 늘고 줄지 않으며 조정에서 봉하여 어정으로 삼았다.
초정(椒井)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목욕하면 병이 나았다. 효종조(孝宗朝)ㆍ현종조(顯宗朝)에 모두 여기에 행차하였다.
잠룡지(潛龍池) 이문(里門) 안에 인조의 잠저(潛邸)가 있었는데, 당(堂) 안에 영종(英宗)의 어필 사액(賜額)을 걸어 잠룡지(潛龍池)라고 하였다.
동지(東池)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하나는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으며, 연지(蓮池)라고 한다. 민간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집터라고 말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큰 가뭄에 비를 빌면 영험이 있으며 연꽃을 심었다. ○ 못 가에 옛날에는 반송(盤松)이 있어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임금이 일찍이 남경(南京 서울)에 행차하였다가 여기서 비를 피하였다. 본조(本朝) 초기에도 그 소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반송지(盤松池)라고 하였다. 태종(太宗) 8년에 모화관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려다가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니, 사헌부에서 제조관(提調官) 박자청(朴子靑)을 탄핵하였다. ○ 못 서쪽 언덕 위에 경기도 중군영이 있다. 천연정(天然亭)을 지었으며 또 원관정(遠觀亭)이 있다.
와암천(臥巖泉) 모화관(慕華館) 곁에 있는데 맛이 매우 상쾌하고 차다.
휴암천(鵂巖泉) 목멱산(木覓山) 아래 삼아동(三丫洞) 위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달고 차다. 양어소(養魚所) 훈국(訓局)의 양어소는 보제원(普濟院)에 있는데, 착어군(捉魚軍)이 보살펴 기른다. 금위영(禁衛營)의 양어소는 왕십리에 있는데, 군병(軍兵)을 정하여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어영청(御營廳)의 양어소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종목소(種木所) 가산(假山) 주(註)에 보인다.
【명승】중흥동(重興洞) 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는데 위에 중흥사(重興寺)가 있고 천석(泉石)이 유수(幽邃)ㆍ청절(淸絶)하여 도성 사람들이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된다. 또 산영루(山映樓)가 있다.
조계동(漕溪洞) 북한산성(北漢山城) 동문 밖에 있는데 7층 폭포가 있다.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렸다.
탕춘대(蕩春臺)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三角)ㆍ백운(白雲) 두 산 사이에 있어, 수석(水石)의 좋은 경치가 있으며 장의사(藏義寺) 옛 터가 있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놀며 잔치하였다. 또 돌 구유를 만들고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였다. 그 후에 이궁은 헐리고 조지소(造紙所)를 개천 동쪽에 설치하였다.
북저동(北渚洞)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있다. ○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안암동(安岩洞) 혜화문 밖에 있는데, 훈국(訓局)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연미정동(燕尾亭洞) 흥인문 밖에 있는데, 훈국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 영풍정(映楓亭)이 있다.
세마평(洗馬坪) 노량(露梁) 북쪽에 있는데 훈국 보군(步軍)이 중순(中旬)마다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되었다.
산단(山壇) 바깥 남산에 있는데 곧 남단 곁이요, 녹사장(綠莎場) 동쪽이다. 민간에서 단오절마다 나이 젊고 건장한 이들이 편을 나누어, 이곳에서 씨름을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삼청동(三淸洞) 인왕산 기슭에 있다. (주ㆍ오기(誤記)임) 냇물이 석벽으로 흐르고, 석벽 위에는 삼청동문(三淸洞門) 네 글자를 새겼는데, 감사 이상겸(李尙謙)의 글씨이다. ○ 동문 곁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의 옛 집이 있으며 동(洞) 가운데 또 팔판동(八判洞)이 있으니, 옛날 8판서(判書)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청(山淸)ㆍ수청(水淸)ㆍ인청(人淸)하기 때문에 삼청(三淸)이라 하였다.” 한다.
필운대(弼雲臺)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하였으므로 인하여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이다. 대 곁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
육각현(六角峴) 필운대 곁에 있는데 대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 인가가 있는데 담장 둘레가 매우 길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리장성(萬里長城) 집이라고 한다.
옥류동(玉流洞)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수석의 좋은 경치가 있다. 계겹란(鸂鵊瀾)ㆍ청휘각(淸暉閣)이 있는데, 모두 사암(思巖) 김창협(金昌協)이 이름지은 것이다. 물이 석벽 사이에서 나오며 석벽 위에는 옥류동(玉流洞)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
전대(殿臺) 삼청동에 있는데, 훈국(訓局)에서 큰 기치(旗幟)를 새로 만들 때 제사드리는 곳이다.
세심대(洗心臺) 인왕산 아래 육상궁(毓祥宮) 뒤에 있는데, 석벽에 세심대(洗心臺)란 세 글자를 새겼다. 꽃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구경하기에 적당하다. 영종 을묘년에 장헌세자가 탄생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웃으며 동대(東臺)에 올라가니, 오얏꽃 희고 복사꽃 붉게 일만 나무 피었네. 이런 풍광 이런 즐거움에, 해마다 태평 술잔에 크게 취한다네.” 하였다. ○ 정종(正宗)이 일찍이 임어(臨御 임금이 행차함)하였는데, 그 후에 순조(純祖)ㆍ익종(翼宗) 열성조(列聖朝)도 많이 거둥하였다. 사정(射亭)이 있다.
청풍계(淸楓溪)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동부(洞府)가 그윽하고 깊으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조용하여[窈窕] 놀며 구경할 만하다.
도화동(桃花洞) 북악(北岳) 아래에 있는데 복사꽃이 많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회맹단(會盟壇)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있다.
화개동(花開洞)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지역이 치우쳐서 술마시며 시 읊기에 적합하다. 이 동리에 옛날 토기도감(土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변하여 화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포곡(浦谷) 성균관(成均館) 북쪽 산기슭 아래에 있다.
쌍회정(雙檜亭) 창동 앞에 있는데, 석간수(石澗水)를 내려다보고, 단풍나무와 측백나무가 많아서, 가을에 놀며 구경하기에 적합하다.
칠송정(七松亭) 남산 기슭에 있는데, 정자는 없지만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기에 적합하다.
【관방】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 서쪽 수구(水口)에 있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평창(平倉)을 방비ㆍ수호함이 있어야 하겠다.” 하면서 처음으로 한북문(漢北門) [한(漢)은 한(捍)으로도 씀]을 설치하고, 좌우익(左右翼)의 성을 쌓았다. 주위가 1천 1백 10보이며 높이는 10척인데, 좌상 이유(李濡)가 감독하여 쌓았다. 그 안에 총융청(摠戎廳)의 군창(軍倉)과 혜청(惠廳)의 별창(別倉)이 있다. ○ 수문부장(守門部將)은 춘방(春坊)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의 자손이 전교에 의하여 정해 두고 임명된다.
북한산성(北漢山城) 경성 북쪽 30리 삼각산의 온조왕(溫祚王) 옛 터에 있다. 숙종 37년에 성을 쌓았는데, 행궁(行宮)을 짓고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유사시에 보장(保障)하는 장소로 삼았다. 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7천 6백 20보, 여첩(女堞)이 2천 7백 97, 성곽이 1백 21에, 장대 3, 못 26, 우물 99개 소이다. 대문 4, 암문(暗門 누가 없는 성문) 10이며, 안에는 군창(軍倉)과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창고가 있다. ○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곳이 있으며, 관성장(管城將)을 배치하고, 숯 1천 1백 석은 동문 안에 묻고, 1천 20석은 용암사(龍巖寺) 앞에 묻어 두었다. 영종 경진년에 대성문(大城門) 길이 도성 주맥(主脈)에 방해된다고 하여 폐쇄하고, 또 3곳의 대남문(大南門)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중흥동 중성(重興洞中城) 중흥사(重興寺) 북쪽 옛 성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척이며, 내성ㆍ외성ㆍ석문(石門)ㆍ석비(石扉)가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백제 중엽에 여기에 도읍하였는데, 석문이 곧 그때 궁문이었다.”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중에 산이 있는데,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노적 같으므로 민간에서 노적봉(露積峯)이라고 한다. ○ 산성의 수구(水口)가 낮고 넓으므로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척이다.
성북둔(城北屯) 혜화문 밖에 있다. 영종 을유년에 창건하였으며 둔감(屯監)이 있고, 또 환곡미(還穀米) 4백 섬과 돈 2천 냥 가량, 둔의 소 33쌍이 있다.
한강진(漢江鎭) 영종 계유년에 설치하여 훈국(訓局)의 진(鎭)으로 삼았다.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순조(純祖) 2년에 다시 훈국에 소속시켰다. 별장이 있는데 본영(本營)의 지구관(知彀官)과 기패관(旗牌官)을 돌아가며 30삭(朔)씩 교대 임명한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에 본진의 것이 8척이요, 동작진(銅雀津)의 것이 1척 이요, 서빙고(西氷庫)의 것이 6척인데, 산천조(山川條)에 보인다.
노량진(露梁津) 숙종 계미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숙종조에는 금위영(禁衛營) 소속이었으며,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 주교소(舟橋所)에 이속하고, 주교소에서 별아별장(別牙別將)을 겸하였는데, 파영(罷營)한 후에는 금영(禁營)으로 환속(還屬)하였다. 별장이 있고 초관(哨官) 2명, 기패관(旗牌官) 1명, 명원(名員) 8명이 있다. 아병(牙兵) 1백 24명은 매삭(每朔)마다 10명씩 돌아가며 당직하고, 취고수(吹鼓手) 30명ㆍ기수(旗手) 8명ㆍ취고수(吹鼓手) 10명인데, 환곡미 2천 석과 돈 5천 냥이 있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 본진의 것이 9척이요, 동작진의 것이 6척이다. 또 급수선(汲水船) 2척, 향축배행선(香祝陪行船) 1척이 있는데, 산천조에 보인다.
양화진(楊花鎭) 영종 갑술년에 설치하였는데 어영청(御營廳)에 속하였다. 별장이 있고 아병(牙兵)이 1백 명이며, 환곡미가 2천 석, 전세전(田稅錢)이 8백 20냥, 돈이 3천 냥, 둔우(屯牛)가 33짝인데, 산천조에 있다.
【도로】 도성 안 대로(大路)는 넓이 46척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며,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이며, 양쪽의 도랑은 넓이 2척인데, 만일 침범하여 차지하고 파낸다든가, 혹 더러운 물건을 버려두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 본부의 관리 및 관령(管領)이 천(川)ㆍ지(池)ㆍ성(城)ㆍ장(場)을 그 근처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장부를 만들어 두어 간수(看守)하게 한다. ○ 8도의 도로는 명(明) 나라 준례에 의하여,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측량하는데, 자 여섯 치가 한 보(步)가 되고, 3백 60보가 한 리(里)가 되며, 30리가 한 참[息]이 된다. 무릇 제향(祭香)이나 수향(受香)이 있을 때는, 한성부의 관원이 미리 길을 청소한다. ○ 서로(西路)에 기발(騎撥)을 두니 의주(義州)까지 45참(站)이요, 남북로(南北路)에 보발(步撥)을 두니 동래(東萊)까지 35참, 경성(鏡城)까지 59참이다. ○ 서울에서 개성부(開城府)ㆍ죽산(竹山)ㆍ직산(稷山)ㆍ포천(抱川)까지 대로인데, 한 참에 5호(戶) 씩을 배정하며, 서울에서 양근(楊根)까지, 죽산에서 상주(尙州)까지,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까지, 직산에서 전주(全州)까지, 개성부에서 중화(中和)까지, 포천에서 회양(淮陽)까지가 중로인데, 3호씩을 배정하고, 기타 소로에는 2호씩을 배정하는데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한다.
서북으로 의주(義州)에 가는 것이 제1로가 된다 홍제원(弘濟院)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慶興府西水羅鎭)에 가는 것이 제2로가 된다 흥인문(興仁門)과 수유치(水諭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ㆍ부산진(釜山鎭)에 가는 것이 제4로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統制使營)에 가는 것이 제5ㆍ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5로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6로가 된다. 남으로 제주(濟州)에 가는 것이 제7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峴)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에 가는 것이 제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江華府)에 가는 것이 제9로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행행진로(幸行津路)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ㆍ건릉(健陵)ㆍ현륭원(顯隆園)은 모두 노량진을 경유하며,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ㆍ인릉(仁陵)은 모두 광진(廣津 광나루)을 경유한다.
【교량】구거 교량(溝渠橋梁)은 공조와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하고 수리ㆍ정리하였는데, 지금은 준천사(濬川司)에 속하였다. 송기교(松杞橋)에서 장통교(長通橋)에 이르기까지는 훈련도감에서, 장통교에서 태평교(太平橋)에 이르기까지는 금위영에서, 태평교에서 영도교(永渡橋)에 이르기까지는 어영청에서, 사산(四山)의 참군(參軍)과 함께 나누어 맡아서 순시(巡視)하며, 모래가 뭉치고 돌이 무너진 곳은 해당 관청에 보고하여 수축하게 한다.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편에 앙부일영대(仰釜日影臺)가 있다. 《원사(元史)》에 기록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하여 만들었는데, 안에 시각을 새겼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여다보고 시간을 알게 하려한 것이다. 둘이 있는데, 세종 14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하나는 여기 두고 하나는 종묘 앞 거리에 두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 종루(鐘樓) 남쪽에 있는데 돌난간이 있다.
소광통교 대광통교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민간에서들 철물전(鐵物廛) 다리라고 하는데, 종루 동쪽 대사동(大寺洞) 어귀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연근동(蓮根洞)에 있다. 또 통운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이교(二橋)라고 한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초교(初橋)라고 한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장통교(長通橋) 중부 장통방에 있는데 곧 광제교 동쪽이다. ○ 민간에서는 장창교(長倉橋)라고 한다.
수표교(水標橋) 중부 장통방(長通坊),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고, 또 척촌(尺寸)의 수효를 새겨서 빗물의 얕고 깊음을 알게 하였는데, 높이가 10척이다.
하량교(河良橋) 옛날에는 신교(新橋)라고 하였는데 영표교 동쪽 장통방에 있다. 민간에서들 하량교(河梁橋)라고 하니, 옛날 하남위(河南尉)의 집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영풍교(永豐橋) 하량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효경교(孝經橋)라고 한다.
태평교(太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한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는데, 곧 서부의 적선방(積善坊)이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盤橋) 전관(箭串)에 있는데, 다리가 3백여 보 이상에 걸쳐있다. 두 다리는 모두 중종(中宗)이 어필로 글씨를 써서 정한 것이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 밖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주교(舟橋 배다리)라고 한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임금이 능에 거둥할 때에는 도성 안팎의 교량을 호조(戶曹)에서 수리 개선하는데, 동쪽은 안암천(安巖川)을 한계로 하고 서쪽은 홍제원을 한계로 하고 남쪽은 노량강 가를 한계로 한다.
【전야】 동적전(東籍田) 동교 10리 전농리(典農里)에 있는데, 곧 선농단(先農壇) 곁이다. 왕이 친히 밭 가는 땅이 있고 친경대(親耕臺)가 있다. 또 분필각(芬苾閣)이 있고, 또 창고가 있다. ○ 수전(水田 논)과 한전(旱田 밭)을 총합하여 37결(結) 59부(負) 6속(束)인데, 친경전(親耕田)은 8일 갈이이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친히 밭 가는 예절을 많이 거행하였으며, 영묘(英廟)에도 행차하여 추수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곡식을 심어서, 별제(別祭)의 자성(粢盛) 및 천신(薦新)하는 6종의 곡물로 바친다.
친경대(親耕臺) 선농단(先農壇) 곁에 있다.
성경대(省耕臺) 숭례문 밖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데, 관가대(觀稼臺)라고도 한다. ○ 영종조에 해마다 친히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권장하였으며, 가을 성숙기에도 행차하여 보았다. 43년에는, 임금이 왕세손(王世孫 뒷날의 정조)과 함께 거둥하였는데, 정종 정사년에 단을 쌓아 그 일을 기념하고 성경대(省耕臺)라고 이름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의 기문이 있다.
고암전(鼓巖田) 태종이 하루는 미행(微行)으로, 박은(朴訔)의 집에 갔다. 그때 은의 지위는 높고 이름났지만 가세는 매우 가난하였다. 마침 조밥을 먹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맞이하여 절하지 못하고, 문 밖에 조금 오래 서 있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였다. 은이 황공하여 사실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재상인데 조밥을 먹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들어가 보게 하였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특별히 청문(靑門 동대문) 밖 고암전의 땅을 약간 하사하였다.
홍덕전(弘德田) 나인(內人 궁중의 여관) 홍덕(弘德)이 병자란(丙子亂)에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 봉천(奉川))에 들어갔는데, 김치를 잘 담가서 때때로 효종(孝宗)이 인질로 있는 집에 드렸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홍덕도 이어서 돌아왔는데,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통하여 드렸다. 임금이 맛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출처를 물으니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곧 홍덕을 불러 들여서 후하게 상을 주려고 하니, 홍덕이 굳이 사양하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에 명하여 낙산(駱山) 아래 밭 몇 경(頃)을 하사하여 그 수고를 갚아 주었다. 지금도 그 밭을 홍덕전(弘德田)이라고 한다.
왕십리평(往十里坪)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류를 심어 생활한다.
동잠실(東蠶室) 구잠실(舊蠶室)은 성 동쪽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있고, 신잠실(新蠶室)은 한강 원단동(圓壇洞)에 있는데, 모두 환관(宦官)들이 주관한다.
서잠실(西蠶室) 성에서 10리 서쪽 연희궁(延禧宮)에 있는데, 상의원(尙衣院)에 속하였다. 서잠실에서는 2년씩 간격으로 뽕나무를 심었는데, 훈국(訓局)에서 적간(摘奸)한다.
내농포(內農圃) 돈화문(敦化門) 밖 동쪽 가에 있다. 포전(圃田)이 있는데 내관(內官)이 주관하고, 채소를 세납으로 받아서 임금의 찬거리에 충당한다.
약전(藥田) 율주(栗洲)에 있는데, 지금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
고초전(苦草田) 서쪽 연희궁 앞 들에 있다.
남전(藍田) □□□에 있다.
상전(桑田) 삼전도(三田渡)에 있다.
상림(桑林) 율주(栗洲)에 있는데 공상(公桑)이다.
【목장】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의 동교(東郊)인데, 그 지역이 평탄하고 넓으며 수초(水草)가 매우 풍요하다. 둘러서 우리를 만들고 국마(國馬)를 기르는데 넓이가 34리나 된다. 처음에는 목책을 만들었다가 해마다 개수(改修)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다.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서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상진(尙震)이 정부에 건의ㆍ요청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삭(鐵索)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나의주(羅衣洲) 또 잉화도(仍火島)라고도 하며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곧 서강 남쪽이다. 율주와 서로 잇닿았는데, 장마로 인하여 끊어져 둘이 되었다. ○ 옛날에는 축목장(畜牧場)이 있어, 사축서(司蓄署)ㆍ전생서(典牲署)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 기르는 것을 감독하게 했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지금은 옛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마리만을 놓아 기른다. 위토전(位土田) 경중(京中)에 92일 갈이가 있어, 1년의 세금이 2백 22냥이다.
【봉수】평시에는 한 홰[炬]요, 적이 보이면 두 홰, 지경에 가까이 오면 세 홰, 지경을 침범하면 네 홰, 접전하면 다섯 홰이다. 수직하는 금군(禁軍)이 5명이며, 병조(兵曹)의 봉수장(烽燧將)에게 보고한다. 충순위(忠順衛)를 혁파(革罷)한 후에는, 금군 중에서 녹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번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 봉대(烽臺)에는 표(標)를 설치하고 경계를 정하는데, 위봉(僞烽)ㆍ방화(放火) 등의 일을 막론하고, 백 보(步) 안에 있는 것은 병조에서 맡아 처리하고, 백보 외의 것은 금위영에서 맡는다. ○ 봉대 근처에는 음사(淫祀) 기도를 금한다.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제1봉(烽)은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함경ㆍ강원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烽火)요, 제2는 광주(廣州) 천천령(穿川嶺 천림산(天臨山)이라고도 함)에 응하는데 이것은 경상ㆍ충청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요, 제3은 무악(毋岳) 동봉(東烽)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육로로 오는 봉화요, 제4는 무악 서봉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요, 제5는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전라ㆍ충청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이다. 제1봉화는 직봉(直烽)이 1백 20곳, 간봉(間烽)이 60곳이며, 제2봉화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백 23곳이며, 제3봉화는 직봉이 78곳, 간봉이 22곳이며, 제4봉화는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며, 제5봉화는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다. ○ 매일 초저녁에는 반드시 다섯 자루를 든다. 그런데 동쪽 제1봉화는 혹 때로 들지 않으니, 북도의 봉화가 구름이 끼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초저녁에 봉수군(烽燧軍) 1명이 단봉문(丹鳳門) 밖에 나가서 본산의 봉화 다섯 자루를 드는데, 혹 한 자루를 들지 못하게 되면 부장(部長)이 남소(南所)에 보고하며, 남소의 부장은 그 길로 병조에 보고하고, 이튿날 아침에 들어가서 아뢴다. ○ 봉수ㆍ연대(煙臺)의 봉군(烽軍) 등은 정한 다른 부역이 없고, 오로지 후망(候望)만을 한다. ○ 혹 구름이 어둡고 바람이 어지러워서 연화(煙火)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 보고한다. ○ 목멱ㆍ무악 두 산 봉수군의 호(戶)는 30씩인데, 매호에 보솔(保率) 3명을 둔다. 각 1백 20명이 나누어 24번을 만들고, 매번 5명이 6일마다 교체한다.
무악봉수(毋岳烽燧) 동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염포(鹽浦)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3봉화에 보고하며, 서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 고봉(高烽)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4봉화에 보고한다.
붙임 척후(斥候) 백악척후(白岳斥候)ㆍ목멱산 척후ㆍ무악 척후.
【행순】 궐내(闕內)는 위장(衛將)이나 부장(部長)이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시간을 나누어 다니면서 순찰한 후에, 무사한지의 여부를 바로 아뢴다. 도성(都城) 내외의 행순(行巡)을 병조에서 당직한다 충의(忠義)ㆍ충찬(忠贊)ㆍ충순(忠順)ㆍ족친(族親)ㆍ내금위(內禁衛)ㆍ외오위(外五衛)의 각 1부를 2소(所)로 나누어 행순을 배정하며, 또 점고(點考) 받는 순장(巡將)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첨지(僉知)에 이르기까지는 망(望)에 올려 정하는데, 부족하면 당직 당상관을 망에 올려 정한다. 및 감군(監軍) 선전관과 병조, 도총부(都摠府)의 당하관 중에서 망에 올려 정한다. 각 운영관(運領官)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大護軍)ㆍ호군(護軍)으로 정하되, 부족하면 그 다음의 별시위(別侍衛)로 정한다. 출입번(出入番)의 장수는 대궐에 나가 숙배(肅拜)하고, 대내(大內)에서 납패수패(納牌受牌)한다. 각 부대의 영관이 받는 패(牌)는 순장(巡將)이 모두 받아서 나누어준다. 병조(兵曹)에서 사무를 맡기는데, 궁성(宮城) 4문 밖의 숙직은 각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ㆍ호군 중 1명과, 정병(正兵) 5명이며, 도성 안팎 여러 경수소(警守所)에는 보병(步兵) 2명이 부근 동리 사람 5명을 거느리고 하는데, 소(所)에 따라서는 활ㆍ검ㆍ지팡이 등을 가지고 경첨(更籤)을 받아 가지고서 숙직한다 신표[籤]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아무 경수소 신표라고 썼다. 광화문(光化門) 호군은 초저녁에 요령[鐸]을 병조에서 받는데 군호도 함께 받는다. 민간에서는 언적(言的)이라고 한다. 인정(人定) 후에는 정병(正兵) 2명이 요령을 흔들면서 궁성을 순찰하는데, 4면 경수소(警守所) 및 각 문을 차례로 전하고 받으면서, 돌기를 말지 않으며, 파루(罷漏) 때가 되어서야 그친다. 운영관(運領官)은 매 시간마다 궁성을 돌고, 4면 경수소 및 각 문에 가서 경첨(更籤)을 거두며, 밝으면 병조에 바친다. 여러 경수소에는 순장이나 순관(巡官)이 불시에 가서 신표를 거두어 병조에 바친다. 2경(更) 후, 5경 전에는 대소 인원이 나다니지 못하는데, 불을 낸 자가 있으면 순관이 쫓아가서 도둑을 살핀다. ○ 병조ㆍ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守城禁火司) 5부의 숙직하는 관원은 표신(標信) 몸체가 둥근데 1면에는 통행(通行)이라 쓰고 1면에는 전자로 통행이란 화인을 찍었다. 밤에 다닐 때 및 군중(軍中)에서 사용한다. 을 정원(政院)에서 받는다. 이튿날 아침에 환납(還納)한다. 군호(軍號)를 병조에서 받고 각각 그 관청의 아전(衙前)ㆍ사령을 통솔하는데 행순은 없다. 형조 이하의 여러 관청은 5부 외에는 지금 폐지되었다. ○ 군호는 병조에 입직(入直)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는데, 매일 신시(申時)가 되면 낭관(郎官)이 직접 가서 정원에 드리게 한다.
○ 두 포청(捕廳)에서는 각기 패장(牌將) 8명, 군사 64명을 정하여, 도성 안팎을 밤새워 행순 하며,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군문에서는 날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다. 도감은 첫날인데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일이고, 금영(禁營)은 중간 날인데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일이며, 어청(御廳)은 마지막 날인데 인(寅)ㆍ술(戌)ㆍ축(丑)ㆍ미(未)일이다. 각기 패장(牌將) 9명을 정한다. 군사는 도감이 83명, 금영이 84명, 어청이 67명이다. 도성 안팎을 야순(夜巡)하며, 또 각 군문에서는 그 외영(外營)에서 입직한 장교 1명으로 입직한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 밖을 시간을 정하여 야순한다 도감은 초경ㆍ3경, 금위영은 2경, 어영청은 5경이다. 또 3군영에서는 각기 장교 1명을 정하여, 입직한 군사 5명을 거느리고 궁장(宮墻) 밖을 밤새워 순행한다. 모두 땅거미질 때[日晡時]부터, 날이 밝기까지 하되, 별순라패(別巡邏牌)를 만들어 준다. ○ 금령을 범하고 밤에 다니는 사람은 잡아서 인근 경수소(警守所)에 보내며, 이튿날 각기 그 군영에서 곤장(棍杖)을 쳐서 처벌한다 초경(初更)에 다닌 사람은 곤장 10도를 때리고, 2경은 20도, 3경은 30도, 4경은 25도, 5경은 10도이다. 무릇 행순(行巡)하는 사람은 모두 군호(軍號)를 받는데, 대궐 안의 사람이나 담장 밖의 사람이 다른 군인과 신지(信地)를 만나면, 그때 그때 문득 서로 응하면서 돌아서 멈추지 않고 파루(罷漏) 때 가서야 그친다. ○ 외삼영(外三營) 북영(北營)ㆍ신영(新營)ㆍ동영(東營)이다. 입직 중에는 원 순라(巡邏) 외의 장관(將官)을 매일 밤 파루 후에 내보내어, 날이 밝기까지 각 해당 영관 내의 궁성(宮城)을 살펴본다.
붙임 파수(把守) 궁성 문은 병조에서 정병(正兵)ㆍ갑사(甲士)를 정하여 나누어 여러 소(所)에 소속시켜 파수하게 하며, 또 대졸(隊卒) 10명을 정하여 광화문(光化門)을 지키며, 종묘문(宗廟門)ㆍ도성문은 출직(出直)한 보병으로 파수하고, 흥화(興化)ㆍ숭례(崇禮)ㆍ돈의(敦義)ㆍ혜화문(惠化門)은 호군(護軍)으로 정하며, 그 밖의 문은 5명씩을 정한다. 사직(司直) 이하로 칭호되는 사람이 통솔하게 한다. 각 대문에 30명이며 그 좌우 협문(夾門)도 같다. 중문은 20명인데 그 좌우 협문도 같으며, 소문(小門)은 20명이고 종묘문은 4명이다.
○ 궁성문은 초혼(初昏)에 닫고, 명평(明平)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연다. 궁성문은 주서(注書)가 총부(摠部)의 낭관(郎官)과 선전관으로 더불어 자물쇠를 맡아서 열고 닫고 하는데,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받으며, 도성문은 호군(護軍) 5명이 열고 닫고 하는데 교대할 때에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제때[及期]에 아뢸 일이 생기면, 호군 5명이 문틈에서 받아 가지고 급히 대궐문으로 가서 아뢴다. 정한 시간 외에 도성문을 열게 되면 대내(大內)에서 개문좌부(開門左符)를 내린다. 몸체가 둥근데 한 쪽에는 전자로 신부(信符)라 쓰고, 한쪽에는 전자로 신부라 쓴 것을 찍었으며, 가운데가 나누어졌다. 호군 5명이 좌부(左符)를 받으며 교대할 때에는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궁성문은 표신(標信)을 사용하여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표신은 몸체가 모가 났는데, 한 쪽에는 개문(開門)이라 쓰고 한 쪽에는 어압(御押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있다. 폐문(閉門) 표신도 같은데, 한 쪽에 폐문이라 썼다. 긴급한 때는 도성문에도 통용한다. ○ 개국 초기부터 파루(罷漏)가 되면 궁성문 및 외성(外城)문을 모두 열었는데, 예종조(睿宗朝)부터는 평명에야 궁문을 열게 하였다.
【복처】 1패(牌)의 복처(伏處 순라군이 잠복 근무하던 요긴한 곳). 회현동(會賢洞) 동구에 있는데, 구역 안은 숭례문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이다. 상(上) 2패의 복처. 남산동(南山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永禧殿) 서쪽까지이다. 하(下) 2패의 복처. 필동교(筆洞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주자동(鑄字洞)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이다. 3패의 복처. 청량교(淸梁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이다. 4패의 복처. 어의동(於義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把子橋) 동쪽에서 동대문 북쪽까지이다. 5패의 복처. 재동(齋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 서쪽에서 전의감동(典醫監洞) 동쪽에 이르기까지이다. 6패의 복처. 수표교(水標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종루(鐘樓)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이르기까지이다. 7패의 복처. 동대문 밖에 있는데, 구역 안은 동대문 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이다. 좌변 포도청(左邊捕盜廳)에 속한다.
【궁실】 북한행궁(北漢行宮) 산성 안 상원봉(上元峯) 아래 있다. 숙종(肅宗) 37년에 내정전(內正殿) 28칸, 외정전 28칸과 그 외의 행각(行閣)ㆍ월랑(月廊) 등 73칸을 지으니, 합하여 1백 29칸이다.
종루(鐘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권근(權近)이 명(銘)을 지었는데, 각(閣)을 큰 거리[通衢]에 짓고 종을 달아서 새벽과 어두울 때 치게 하였다. 세조조에 고쳐 층루(層樓)로 지으니, 동서의 넓이가 5칸, 남북이 4칸인데, 십자가(十字街)를 만들고 종을 누 위에 달고, 인마(人馬)는 누 아래로 통행하게 하였다. 세조 13년에 명하여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아서 새벽과 밤을 알리게 하였는데, 1경(更) 3점(點)에 비로소 징과 북을 치니, 북으로 경(更)을 알리고 징으로 점을 알리는 것이며, 큰 종을 28번 치니, 이것을 인정(人定)이라 하며, 5경 3점에는 징과 북을 치우고, 큰 종 33번을 치니,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한다. 선조 임진년 병란 때에 광화문의 종과 함께 모두 녹아버렸으며, 환도한 후인 갑오년 가을에 숭례문의 종을 옮겨다가 달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니, 도성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 경리(經理)가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로 옮겨 달았다. ○ 《추관지(秋官志)》를 보면 간고(諫鼓)를 남현(南峴)에 달고, 방목(謗木)을 서교(西橋)에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지금도 종현(鍾峴), 방목교(謗木橋)라고 부르니, 국조(國朝)에서 옛날 삼대(三代 옛날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를 모방하던 성대한 의사를 알 수 있는 일이다. ○ 또 살펴보면,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흥천사(興天寺)의 종을 흥인문(興仁門)에, 원각사(圓覺寺)의 종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 놓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려 하였는데 미처 달지 못하고 안로가 실패하여, 그만 풀숲 속에 버려둔 지 오래였다. 선조 갑오년에 명하여 숭례문의 종을 종루로 옮겨 달게 하였다.
종각(鐘閣) 세조 2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신숙주(申叔舟)가 명을 지었으며, 사정전(思政殿) 앞 행랑에 두었는데, 지금은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종각을 지었다.
태평관(太平館) 숭례문 안 양생방(養生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관 뒤에 누(樓)가 있는데 명 나라 사신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이 모두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지금은 칙사(勅使)를 영접할 때에 나례(儺禮 가면극(假面劇))를 준비하여 거행하는 곳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칙사를 접대하는 규정은 없다. ○ 상고해 보면 문정왕후(文定王后)ㆍ인목왕후(仁穆王后)의 가례(嘉禮)를 모두 이 관에서 거행하였다.
남별궁(南別宮)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명설루(明雪樓)가 있다. ○ 상고해 보건대, 조사(詔使)가 오면 반드시 태평관에 거처하였는데, 선조 임진년 병란에 태평관이 불탔으며, 계사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경성을 수복하고 여기에 거처하여 그대로 조사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으며, 그 후로 남별궁이라 하였다. ○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조대림(趙大臨)의 집이라 하는데 상고하여 경험할 데가 없으니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의안군(義安君)의 새 궁이라고도 한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 12년에 관(館)으로 고쳐서, 무과(武科) 시험장으로 삼고 무이소관(武二所館)이라 하였다. 앞 길 위에 옛날에는 홍전문(紅箭門)이 있고, 중종 30년에 사신[王人]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곳인데, 사체에 온당하지 못하다 하여 김안로의 건의로 고쳐서 두 기둥의 한 칸 집을 짓고, 푸른 기와로 덮은 다음 영조(迎詔)라는 현판을 걸었다. 33년에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은 조(詔)ㆍ칙(勅)ㆍ뇌(賚) 등이 있는데, ‘조’라고만 이름하는 것은 치우친 것 같다.” 하면서, 고쳐 현판을 써서 영은(迎恩)이라고 걸었다. 후에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고쳐 현판 글씨를 썼다. 영종 갑신년 가을에 명릉(明陵)에 전알(展謁)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정종이 세손(世孫)으로서 영은문 밖에 나와 맞이하니, 임금이 친히 장막에 들어가서 사언시(四言詩) 4구를 써서 기쁜 뜻을 표시하였으며, 세손이 화답하여 지어 올렸다. ○ 관 동쪽 건너 산기슭에 연향대(燕享臺)가 있으며, 대의 동북쪽에 양호(楊鎬) 경리(經理)의 공덕비(功德碑)가 있다. ○ 못이 있으며 못 가에서 석척동자(蜥蜴童子)로 기우제 9차를 드리는데, 무관 종2품관이 연 3일간 거행하고 그친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설치하였으며, 일본 등 제국(諸國)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데, 임진년 병란에 불타고 그만 폐지되었다. 지금은 그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한다. 선조 24년에 왜사(倭使)가 관에 와서 머물며 벽 위에 시를 써서 이르기를, “매미 시끄럽게 우느라 당랑이 잡을 줄 모르고, 고기 노닒은 해오라기 졺을 기뻐함일세. 이곳이 어느 곳이냐, 다른 해에 다시 잔치 벌여 보세나.” 하였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야인(野人 여진)으로 와서 조회하는 자들을 접대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독서당(讀書堂) 옛날에 용산에 폐지한 절간이 강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고쳐 짓고 당(堂)을 만들어서 홍문관(弘文館)의 연소한 학자들의 글 읽는 곳을 만들었다. 연산군 때에 혁파하고 당은 궁인(宮人)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10년에 다시 독서당을 옛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는데, 여염집 사이여서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여 다시 좋은 자리를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 월송암(月松庵) 서쪽 산기슭을 선택하여 창건하였으며, 호당(湖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다시 임진년의 병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는데, 광해군 무신년에 고쳐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소로 삼았다. 옛날에 절간[僧舍]이 남문 밖 귀후서(歸厚署) 뒷산 기슭에 있었는데, 세상에서들 말하기를, “16나한(羅漢)이 영험(靈驗)이 있다.”고 해서, 불공[香火]이 끊기지 않았다. 중 상운(尙雲)이 그 집에 살면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낳으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중을 처벌해서 속인이 되게 하고, 불상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드디어 그 집을 홍문관에 주어서 번갈아 가서 글을 읽게 하고, 이름을 독서당이라고 하였다. ○ 조위(曹僞)의 〈용산독서당기(龍山讀書堂記)〉와 이식(李植)의 〈독서당기〉가 있고, 또 호당고사(湖堂故事)를 지었으며,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가 있다.
【누정】 황화정(黃華亭) 두모포 북쪽 산기슭에 있는데, 연산군이 짓고서 나와 노는 곳으로 삼았다. 중종조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유하정(流霞亭) 두모포에 있다. 원래는 제안대군의 정자이며 수진궁(壽進宮)에 속한 공청이었는데, 정종(正宗) 5년에 명하여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에게 하사하여, 여러 각신(閣臣)들의 승경지를 가려 놀며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 혹은 말하기를, 본래 제안대군의 집으로 효종의 잠저(潛邸) 때 정자가 되었다고 한다.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풍경이 매우 좋으며, 중국 사신들의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되었다. 성종이 일찍이 행차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한강 도승(漢江渡丞)이 검찰하고 간수(看守)한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 하류의 백사정(白沙亭)이다. 세조가 여러 번 행차하여 무예(武藝)를 사열하고, 인하여 이름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읍청루(挹淸樓) 용산 별영 앞에 있는데, 긴 강류에 임하여 풍경이 매우 좋다.
영복정(榮福亭) 강 서북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고, 인하여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이라는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풀이하였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정자는 본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이었는데, 세종이 행차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현판을 걸었다. 성종이 매년 농사를 살피거나 세납선(稅納船)을 집합시켜 수전(水戰)을 연습할 때 언제나 이 정자에 행차하였으며,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대군이 졸한 후에는 다시 행차하지 않았다. ○ 변계량의 〈희우정기(喜雨亭記)〉가 있으며, 신장(申檣)이 현판을 썼다.
낙천정(樂天亭) 전관(箭串)에 있다. 태종이 선위(禪位)한 후에 이궁(離宮)을 동교대산(東郊臺山)에 창건하여, 정자를 그 위에 짓고 박은(朴訔)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이 있다.
화양정(華陽亭) 낙천정 북쪽 언덕에 있다. 본래 태복시(太僕寺)의 목장이었는데, 세종 14년에 그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이 있다.
세검정(洗劍亭)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앞에 있는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 원고 정리)하였다. ○ 정자가 돌 위에 있는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매년 장마 때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
산영루(山映樓) 북한산 성 안에 있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소나무가 구불구불 우뚝 서있음으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서지조(西池條)에 자세하다.
천연정(天然亭) 서지 가에 있다. 본래 이해중(李海重)의 서재였는데, 지금은 경기 중영(京圻中營)이 되었다. ○ 여름철 연꽃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데, 서지조에 자세하다.
풍월정(風月亭)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집 서쪽 동산에 행차하여, 풍월(風月)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게 하고, 시 6수를 짓고 문신들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몽답정(夢踏亭) 훈국북영(訓局北營) 안에 있는데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이 있다. 숙종이 일찍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또 사정(射亭)이 있는데 괘궁정(掛弓亭)이라 하며, 연꽃 구경하는 정자를 군자정(君子亭)이라 한다.
쌍회정(雙檜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칠송정(七松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천우각(泉雨閣)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있는데, 시내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 석벽에 아계(丫溪) 두 글자를 새겼다.
협간정(夾澗亭)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다. 앞으로 시내와 폭포에 임하여 있어 동촌(東村) 사람들의 놀고 구경하는 장소가 되었다.
백림정(柏林亭) 타락산 아래에 있는데 박은의 옛 집이다. 이 정자 이름으로 하여 동리를 백동(柏洞)이라고 한다.
【제택】《조가지(造家志)》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사람들의 청원에 의하여 공지(空地)로서 만 2년간 비워두고 짓지 않은 땅을 나누어주어 공대(空垈) 및 포전(圃田 채마밭)을 물론하고 백성들에게 집짓는 것을 허가하되, 본 주인이 이것을 막고 방해하는 경우에는 제서유위(制書有違)의 법률로 논죄한다. 무릇 가대(家垈)가 산을 의지한 곳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산기슭과 산등성이가 도성ㆍ궁궐에 임압 금기(臨壓禁忌)되는 곳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서 나누어주지 말게 하며, 함부로 받아서 집을 짓는 자는 죄주고 철거한다. ○ 집터의 면적은 대군ㆍ공주는 30부(負), 왕자ㆍ군ㆍ옹주(翁主)는 25부, 1ㆍ2품관은 15부, 3ㆍ4품관은 10부, 5ㆍ6품관은 8부, 7품관 이하 및 음관(蔭官)의 자손은 4부, 서인은 2부인데, 3등 전척(田尺)을 사용하여 측량한다. 집의 규모는 대군은 60칸, 왕자ㆍ군ㆍ공주는 50칸, 옹주 및 종친(宗親), 문ㆍ무관의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으로 하되, 숙석(熟石 다듬은 돌)ㆍ화공(花供)ㆍ초공(草供)은 사용하지 못한다.
중부(中部)
구수영(具壽永)의 집 견평방(堅平坊) 이문(里門) 안에 있다. 태화정(太華亭)ㆍ부용당(芙蓉堂)이 있고, 당 앞에 잠룡지(潛龍池)가 있으니 인묘가 예전에 공부하던 곳이다. ○ 문학(文學) 이정(李挺)이 기문을 지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집 경행방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예전 한양현(漢陽縣) 향교가 이 동리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동명(洞名)을 한 것이다.
동부(東部)
이석형(李石亨)의 집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지금 자손들이 그 근방에 사는데, 동촌 이씨라고 한다.
이정귀(李廷龜)의 집 연화방에 있다. 사당 앞에 단엽 홍매(單葉紅梅)가 있는데, 곧 중국인이 공에게 선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홍매화가 단엽인 것은 이 한 그루뿐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집 건덕방(建德坊)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는데, 용흥궁(龍興宮)과 동ㆍ서쪽으로 마주 서 있다. 석양루(夕陽樓)가 있는데 기와 벽돌에 모두 그림을 새겼으며, 규모의 넓고 화려하기가 여러 제택(第宅) 중에 제일이다. ○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집 타락산 아래 있는데, 세상에서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라고 한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다.
송시열(宋時烈)의 집 성균관(成均館)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암(尤菴)이 예전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동명(洞名)을 송동(宋洞)이라고 한다. 동리의 골이 깊으며 석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는데, 우암의 글씨이다. 동리 가운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놀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남부(南部)
조말생(趙末生)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중 무학(無學)이 터를 잡은 곳으로 낙양(洛陽)의 명원(名園)이라고들 한다. 남산의 바른 줄기가 바로 낙동(駱洞)에 닿았기 때문에 복귀형(伏龜形)이라 일컫는다. 서쪽이 조말생의 집이고, 동쪽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집이 되어 좌우의 거북 눈을 이루었다. 그 꼬리가 공북헌(拱北軒)이 되니, 곧 지금 박제헌(朴齊憲)의 집이다.
권람(權擥)의 집 목멱산(木覓山) 산기슭의 비서감(祕書監) 동쪽에 있으니, 곧 무학이 정한 암석(巖石)으로 된 터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였으며, 그 서쪽 언덕에 석천(石泉)이 있는데 이름하여 어정(御井)이라 한다. 그 위에 소조당(素凋堂) 옛 터가 있는데,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하였다. 지금은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는데, 박영원(朴永元)이 차지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의 집 낙선방(樂善坊) 생민동(生民洞)에 있다. 반송(盤松)이 있어 육신송(六臣松)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말라 죽었다.
상진(尙震)의 집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예전 전례에 대가(大駕)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액례(掖隷)들이 동명(洞名)을 불러 고하면 임금이 반드시 수레 위에서 허리를 굽혔으며, 그 동리를 이름하여 상정승동(尙政丞洞)이라 하였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은행나무[鴨脚樹]가 있는데, 신인(神人)이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관이 띠던 띠) 열두 개를 이 나무에 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동리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회현동(會賢洞)이라고 부른다. 정씨들은 또 남문 밖에도 산다.
이안눌(李安訥)의 집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있는데, 비파정(琵琶亭) 위에 시단(詩壇)이 있다. ○ 위에 훈국(訓局)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정숙옹주(貞淑翁主)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장악원(掌樂院)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뜰이 좁고 이웃집이 곁에 붙어 있어 말소리가 서로 들리며, 처마가 낮고 짧아 막히고 가리운 데가 없었다. 옹주가 조용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땅을 사서 넓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하교하여 이르기를, “소리가 낮으면 들리지 않고, 처마를 가리면 보이지 않을 것이니, 뜰을 어찌 반드시 넓게 하겠는가.” 하며, 발 두 부(部)를 하사하면서, “이것으로 가려라.” 하였다. 그 후로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발을 내려 보냈다. ○ 지금은 윤치의(尹致義)의 집이 되었다.
한준겸(韓俊謙)의 집 □□방에 있다. 같은 종문의 여러 한씨 집이 많이 동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이 자주 난정 수계회(蘭亭修禊會)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동명을 난정동(蘭亭洞)이라 하였다.
박승종(朴承宗)의 집 낙선방에 있다. 별원(別園)은 후조당(後凋堂) 동편 산기슭에 있다.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있었는데, 서궁은 성 서쪽 백악산(白岳山) 아래 있다. 그러므로 당(堂)을 짓고 백악을 바라보며 읍백(挹白)이라 현판하였으니, 대개 서궁에 공읍(拱挹)한다는 의미이다.
조형(趙珩)의 집 명철방(明哲坊)에 있는데, 일감정(一鑑亭)이 있다. 후손들이 근방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청녕교 조씨(淸寧橋趙氏)라고 부른다 한다.
윤선도(尹善道)의 집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다. 지금도 주춧돌에 먹으로 쓴 여산부동(如山不動)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다. 혹은 허목(許穆)의 글씨라고도 하며 집터는 연소형(燕巢形)이라고 한다.
김석주(金錫冑)의 집 회현방(會賢坊) 회현동 남산 기슭에 있는데, 청성군(淸城君) 김석주가 지은 것이다. 청성이 어렸을 때 얼굴의 생김새가 범 같았는데, 범은 의당 산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거처하는 누대를 재산(在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담장 밖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곧 손수 심은 소나무이다. 19번 꺾어진 폭포가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는데, 맛이 매우 향기롭고 차다. 우물이 푸른 석벽 위에 있는데, 창벽(蒼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문명(趙文命)의 집 낙선방(樂善坊) 묵사동(墨寺洞)에 있다. 귀록정(歸鹿亭)이 있는데, 일찍이 푸른 실로 사슴을 정자 아래에 매어 두었다.
심강(沈鋼)의 집 회현방 분호조(分戶曹) 앞에 있는데, 지금도 심본금(沈本衿)이라고 한다. 선묘조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후에 궁궐과 종묘가 새로 병화[兵燹]를 겪었으므로 부득이 종묘 신주를 이 집에 봉안하였다.
홍현주(洪顯周)의 집 □□방 이전동(履廛洞)에 있는데, 외당(外堂)에 금옥당(金玉堂)이라고 전자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 ○ 순조의 어필로 원정(園亭)이라 썼으며, 시림정(市林亭)은 익종(翼宗)의 어필이다.
서부(西部)
이숙번(李叔蕃)의 집 □□방에 있다. 숙번이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크게 전장과 집을 만들었는데, 인마(人馬)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싫어하여 문(門)을 막고 사람들이 통행을 금하였다.
신개(申槪)의 집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중 무학이 터를 잡은 곳이다. 양체당(養棣堂)이 있다.
이황(李滉)의 집 □□방 학교(鶴橋)에 있다. 선생이 이 동리에 살았으므로, 승지(勝地)라고 한다. 뜰에 노송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다. 병란 후에 도성 안의 교목(喬木)이 모두 없어졌지만 이 나무만이 그대로 푸르러서 하늘에 닿았다. 신해년 봄에 홀연히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고 의아(疑訝)하게 여겼더니, 그 해 여름에 인홍(仁弘)이 박여량(朴汝樑)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하여 퇴계(退溪)를 훼방하기를 못할 일이 없이 하니 나무 부러진 변고가 여기서 과연 징험이 되었다.
최규서(崔奎瑞)의 집 황화방 소정동(小貞洞)에 있다. 영종 4년에 역적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공이 봉조하(奉朝賀)로 물러나 용인(龍仁)에 거주하다가 기미를 알고 달려와 고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공훈의 명칭을 치사(致仕)한 원로에게 더하는 것은 경례(敬禮)하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손수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각(閣)을 지어서 그 집에 간직하게 하니 이름을 어서각(御書閣)이라 한다.
신수근(愼守勤)의 집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는데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북부(北部)
허종(許琮)의 집 인달방(仁達坊)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다. ○ 종(琮)이 일찍이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사직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종의 집에 들러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당시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감격하고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종이 그때 아우 침(琛)과 함께 살았으므로 그 집 앞의 다리를 종침교(琮琛橋)라고 부른다.
성수침(成守琛)의 집 백악산(白岳山) 아래 유란동(幽蘭洞)에 있다. 소나무 숲 속에 서당 몇 칸을 지어서, 청송당(聽松堂)이라고 편액하였다. ○ □□가 그때의 일이 크게 그릇되었음을 보고 고향에 돌아가려 할 때, 수침과 작별하려고 청송당에 이르렀더니, 수침이 없었다. 이에 벽에 한 수 절구(絶句)를 적었는데, 그 첫 구에 이르기를, “은근하게 잘 있구나 두 그루 소나무, 저무는 해 풍상에도 그 모습 바꾸지 않았네.” 하였다. 대개 소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수침에게 비유한 것이다. ○ 동산 중턱에 금오(金吾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들이 기예를 익히는 곳이 있다.
이기설(李基卨)의 집 삼청동(三淸洞)의 평지가 다한 끝 바로 북악(北岳)이 내려와서 밑에서 뭉친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있다. ○ 석벽(石壁)에 영월암(影月巖)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 인왕산(仁王山)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조희신(趙希臣)의 집 순화방에 있다. 아우 희철(希哲)과 더불어 모두 그 효행이 정표(旌表 사람의 선행을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함)된 까닭에 지금 쌍효자(雙孝子) 거리라고 일컫는다.
성삼문(成三問)의 집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바로 장원서(掌苑署) 뜰 앞이다. 예전에 손수 심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베어서 거문고를 만드는 재목으로 삼았다.
유관(柳灌)의 집 진장방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 하의(荷衣 별호) 홍적(洪迪)의 〈유정승의 옛집 잣나무를 보고 느낌이 있어〉 라는 시에 이르기를, “옛 잣나무 푸르고 푸르러 그림 처마 덮었으니, 겹겹한 그 그늘에 석양 햇빛 얼마나 더했던가. 서리 내린 뿌리에 궂은 비 다시 뿌리니, 지나는 나그네 무정하지만 눈물 저절로 적시네.” 라고 하였다.
이염의(李念義)의 집 인왕산 기슭 백운동(白雲洞)에 있다.
소세양(蘇世讓)의 집 인왕산 아래 인왕동에 있다. 청심당(淸心堂)ㆍ풍천각(風泉閣)ㆍ수운헌(水雲軒)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헐어졌다.
김상용(金尙容)의 집 순화방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에 있다. 태고정(太古亭)ㆍ늠연당(凜然堂)이 있고 선원(仙源 김상용의 별호)의 화상을 봉안했다. 후손들이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창의동 김씨라고 일컫는다. 시내 위의 돌에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百世淸風)’이라는 8자를 새겼다. ○ 순조(純祖)와 익종(翼宗)이 일찍이 봄날에 들린 일이 있다.
김수항(金壽恒)의 집 백악산 아래에 있는데, 육상궁(毓祥宮)과 담이 붙었다. 무속헌(無俗軒)이 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비 민씨)가 왕후 자리에서 물러나서 살던 사제(私第)가 있던 곳이다. 감고당(感古堂)이 있다. ○ 또 아래에 보인다.
김주신(金柱臣)의 집 순화방 대은암동(大隱巖洞) 연우궁(延祐宮) 곁에 있다. ○ 양정재(養正齋)가 있는데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계비(繼妃) 김씨)가 난 곳이다.
연령군(延齡君)의 집 북부 안국방에 있는데, 바로 영안군(永安君) 홍주원(洪柱元)의 옛집이다. 인목왕후(仁穆王后 선조의 계비 김씨)가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지어 주었는데, 궁실과 정원이 매우 넓고 뛰어나서 성 안에서 제일가는 집이다. 지금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철종의 생부)의 사당이 되었다.
이완(李浣)의 집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에 있다. 이완이 죽은 지 20년 뒤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살았다. 뜰에 상공이 손수 심은 배나무가 있는데, 민가가 들어가 사니 열매를 맺지 않더니, 갑술년 뒤에 이정승의 서손(庶孫)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되찾아 들어가니 뜰의 배가 다시 열매를 맺었다.
박명원(朴明源)의 집 □□방 제생동(濟生洞)에 있다. 정종(正宗)이 일찍이 여기 거둥하여 편액을 하사하여 만보정(晩葆亭)이라고 했다.
동문(東門) 밖 유관(柳寬)의 집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집 몇 칸에 울타리가 없었는데,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그 집에 가서 대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알리지 않게 했다. ○ 일찍이 장마비가 달이 지나도록 내려서 집이 마치 삼대 같이 새는데, 공이 우산을 들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까.”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은 반드시 대비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었다.
영순군(永順君) 부(溥)의 집 안암동(安巖洞)에 있다. 성종 14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비 윤씨)가 온천에 갔다가 행궁(行宮)에서 돌아가시어 찬궁(欑宮)으로 봉환할 때 이 집에 임시로 봉안했다. 후손들이 지금까지 전하여 지킨다.
서남문(西南門) 밖 이정보(李廷俌)의 집 □□방 만리현(萬里峴)에 있다. 한양에 서울을 정할 때에 무학(無學)의 말에 따라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뒤에 6세손 정암(廷馣)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이 되어 드디어 한림동이라 부르게 됐다.
홍윤성(洪允成)의 집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
강희맹(姜希盟)의 집 숭례문 밖에 있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일찍이 잠시 그곳에 머물러 우거하였다. 매양 그 동산 안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뒤에 즉위하게 되자, 그 소나무에 관작을 내리고 금띠를 두르게 하고, 또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했다.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다.
윤두수(尹斗壽)의 집 하나는 청파리(靑坡里)에 있었는데, 선지당(先志堂)이 있고, 또 애산당(愛山堂)이 있어, 최립(崔岦)이 기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하나는 반송방 동자동에 있었는데, 공이 죽은 뒤에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나와서 공의 큰 아들 방(昉)을 찾아와 말하기를, “선공(先公)의 충효가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내가 마땅히 편액을 써서 늘 마음에 두고 사모하던 뜻을 붙이겠습니다.” 하고, 충효당(忠孝堂)이란 세 글자를 벽 위에 특별히 쓰고 돌아갔다.
기건(奇虔)의 집 만리현에 있다. 건이 일찍이 걸어서 반궁(泮宮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과 《대학》을 외웠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숭례문 밖 전생서(典牲署) 앞에 있다. 수풀이 빽빽해서 단오에 서울 사람들이 그네 타는 곳이 되었다. 또 남부에도 있다.
이지남(李至男)의 집 숭례문 밖 자연암(紫煙巖)에 있다. 지남이 효행으로 정표 받고, 아내 정(鄭)씨가 정렬(貞烈)로 정표 받고, 큰아들 기직(基稷)ㆍ둘째 아들 기설(基卨)ㆍ딸 처녀가 모두 효행으로 정표 받고,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가 충성으로 정표 받고, 돈오의 아내 김씨가 정절(貞節)로 정표 받고, 돈서(惇敍)가 충성으로 정표 받았으니, 한 가문에서 8정표를 받은 것이 된다. 영종 21년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능행(陵幸 임금이 능에 참배하는 것)하는 길에 이지남의 3대가 충ㆍ효ㆍ열 정려(旌閭)로 삼강(三綱)이 모두 한 집안에 빛난 것을 보았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칭찬하는 법전을 시행하여야겠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제사 받드는 자손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였다.
정연(鄭淵)의 집 반송방 미정동(尾井洞)에 있는데, 지금껏 대대로 전하여 오는 집이다.
서성(徐渻)의 집 숭례문 밖 약현(藥峴)에 있다. 공의 어머니인 이씨는 두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일에 익숙해서, 일찍이 집을 짓는데 공장들을 감독하여 거짓을 부리지 못하게 했다. 목수가 원한을 품고 일을 함부로 해서 손해를 끼치려고 대청의 첫 기둥을 거꾸로 세웠는데, 부인이 나뭇결을 만져보고 목수를 불러서 꾸짖었더니, 목수가 놀라고 감복해서 감히 다시는 속이지 못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반송방의 고거자동(古車子洞)에 있다. 인현왕후가 탄생한 옛집으로서 영종 37년에 누각을 세우게 하고 임금이 손수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고, 그 동리를 추모동(追慕洞)이라고 명명했다.
무슨 동리인지 알 수 없는 것.
이득분(李得芬)의 집 태조 5년에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비 강씨)가 옮겨 살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안기지(安耆之)의 집 세조 5년에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의 비 한씨)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기지】 연서별서(延曙別墅) 북부 연서역촌에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며, 숙종 을해년에 임금이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추흥정(秋興亭) 용산강에 있으며,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이 있다.
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쌍계재(雙溪齋) 성균관(成均館)의 반수(泮水) 동쪽에 있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의 부(賦)가 있다.
침류당(枕流堂) 한강에 있었는데, 경력(經歷 관직명)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무풍정(茂豐正)의 별서 양화도(楊花渡)에 있었다.
성현(成俔)의 집 약전현(藥田峴)에 있었는데, 언덕을 뒤에 두고 집을 지었다. 개국 초에 중 무학이 터를 잡아서 성씨에게 주었다. ○ 허백당(虛白堂 성현의 별호)이 밤 경치를 감상하며 홀로 뒷동산에 올라 시를 낭송하는데, 때마침 밤 닭이 울려하고 달빛은 희미하게 밝았다. 손이 와서 자고있다가 잠을 깨서 창문 틈으로 엿보고는, 신선이 내려왔다고 여겨 황망히 일어나 뒤쫓아갔는데, 서로 보고서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성씨가 서로 전한 지 또 2백여 년이었고, 그 뒤로는 더 지키지 못하였다. 뒤에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의 집이 되었다.
남재(南在)의 집 남부 명철방(明哲坊) 제이리(第二里)에 있었는데, 바로 나라에서 내려준 집이다. 집 근처에 한 바위가 있어서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으므로 드디어 귀정(龜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남소동(南小洞) 안에 구유바위[槽巖]가 있는데 귀정의 옛 터라고 한다. 아마도 구유바위의 말소리가 바뀌어 귀정이 된 것 같다.
남이(南怡)의 집 동부 □방에 있었는데, 사람이 감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없어져서 채소밭이 되었다. ○ 뜰에 반송(盤松)이 있는데 비길 데 없이 커서, 32 개의 기둥으로 떠 받쳤다. 애송(愛松)이라 부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영종 정해년에 부사(府使) 조진세(趙鎭世)가 심은 것이라 한다.
손순효(孫舜孝)의 집 남부 명례방(明禮坊) 상층(上層)에 있었다. 성종이 어느 날 저물녘에 두세 명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올라 남산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몇 사람이 숲이 드문 곳에 둘러 앉아 있었다. 성종이 그것이 순효인줄 알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가 두 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에는 오이뿐이었다. 임금이 술과 안주를 하사하니 순효가 손들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이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이행(李荇)의 서옥(書屋 서재) 목멱산(木覓山) 기슭의 청학동(靑鶴洞)에 있었다. 집 뒤에 병풍 바위[屛巖]와 반석이 있어서 그윽하고 고요하기가 사랑할 만하였다.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 길 양쪽에 소나무ㆍ노송나무ㆍ복숭아나무ㆍ버드나무를 심었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서 여기에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며 늙음을 마쳤다.
정여창(鄭汝昌)의 집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었다. 그래서 일두(一蠹 정여창의 호)의 후손이 해마다 그곳에 사는 민가에서 텃세를 거둔다.
윤관(尹寬)의 정사 쌍계동(雙溪洞)에 있었다. 윤이 동리 안에 삼휴정사(三休精舍 삼휴는 별호)를 짓고 공부하면서 늙음을 마쳤다.
수진동(壽進洞)에 정도전(鄭道傳)의 집터가 있었다. 제용감ㆍ사복시ㆍ중학이 모두 그 옛터라 한다. ○ 송현(松峴)에 있는 달성위(達城尉 이름은 서경주(徐景霌)의 집은 바로 옛날 판서 유자신(柳自新)이 살던 곳이다. ○ 대정동(大貞洞)에 하징(夏徵)의 집터가 있다. ○ 누국동(漏局洞)에 김사계(金沙溪 이름은 장생(長生))의 옛집이 있는데, 지금까지 서로 전해 온다. ○ 태평관(太平館)에 박사암(朴思庵 순(淳))과 이아계(李鵝溪 산해(山海))의 옛집이 있다. ○ 창동(倉洞)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옛집이 있다. ○ 회현동에 선복교(善復橋)가 있다. ○ 장흥동(長興洞)에 박읍취헌(朴挹翠軒 은(誾))과 심일송(沈一松 희수(喜壽))의 옛집이 있다. ○ 낙동(駱洞)에 정고옥(鄭古玉 작(碏))의 옛집이 있다. ○ 나석좌(羅碩佐)가 살던 곳은 나대장동(羅大將洞)이라고 일컫는다. ○ 교서관동(校書館洞)에 임경업(林慶業)과 채호주(蔡湖洲 유후(裕後))의 옛집이 있고, 예관 부군당(藝館府君堂)에 임 장군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지낸다. ○ 필동(筆洞)에 윤미촌(尹美村 선거(宣擧))의 옛집이 있다. ○ 옛날 묵사(墨寺)가 있던 곳에 송송정(宋松亭)이 있으니, 곧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송정이다. ○ 쌍리문동(雙里門洞)은 이첨(爾瞻 성은 이)이 살던 곳인데, 광해군 폐위시에 권세가와 귀족들이 많이 살았고, 윤희굉(尹希宏)도 살았다. ○ 묵사동(墨寺洞)에 찬신정동(纘新井洞)이 있고 남소동(南小洞)에 이동고(李東皐 준경(浚慶))의 옛집이 있다. ○ 허적(許積)이 현종조에 동현(銅峴)에 체찰부(體察府)를 설치했으므로 체부청동(體府廳洞)이 동현에 있다. ○ 대은암(大隱巖) 바위 곁에 옥랑(屋廊 제(第)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송귀봉(宋龜峯 익필(翼弼))이 태어난 곳이며, 낭옥은 지금도 있다. ○ 삼청동문 곁에 민로봉(閔老峯 정중(鼎重))의 옛 집이 있다. ○ 만리탄(萬里灘)은 곧 백악산 기슭 남곤(南袞)의 집 뒤에 있는데, 박읍취헌이 이름지어졌다. ○ 청석동(靑石洞)은 대사동 서쪽에서 전의감동으로 통하는 작은 동리인데, 청성(淸城 부원군 김석주(金錫冑))이 옛적 살던 곳인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살던 대사동 집은 바로 정승 신만(申晩)의 집이라 한다. ○ 계생동(桂生洞)은 바로 제생원(濟生院)이다. 이동고의 옛집과 연암(燕庵) 박지원(朴趾源)의 중국식 집이 있다. ○ 맹감사현(孟監司峴)은 감사 맹만택(孟萬澤)이 살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 누각동(樓閣洞)은 인왕산 아래에 있다.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 그 거리에는 아전으로 늙어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꽃과 과실나무를 많이 심어서 생업으로 한다. ○ 장동(壯洞)에는 정송강(鄭松江 철(澈))의 옛집이 있다. ○ 독암(獨庵) 조종경(趙宗敬)의 집은 남문 밖의 염초청(焰硝廳) 곁에 있다. 담 안에 이른 감 두 그루가 있어 잘 열었는데, 길가는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올 감이 저렇게 만발했는데 팔아서 돈을 거둔다면 그 이익이 얼마나 될까.” 하니, 부인 이씨는 헌납(獻納 관직명) 잠(箴)의 딸인데,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겨 말하기를, “양반 집에서 과일 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본다는 이름이 나면 그 어찌 세상에서 떳떳하겠느냐.” 하고, 곧 그 나무를 베어 없애고 집을 팔아 이사했다.
【사묘】 백악신사(白岳神祠) 백악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거행한다. 중악(中岳)인 삼각산(三角山)을 이곳에서 제사지낸다. 삼각산 신위는 북쪽에 있고 백악산 신위는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를 거행한다. 지금은 없어지고 사당만 있다.
한강단(漢江壇) 한강의 북쪽 언덕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제사지낸다.
부군사(符君祠) 각사(各司) 아전의 청방 곁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에 제사지낸다. 세상에서 혹 말하기를, 고려의 시중(侍中 고려 관제의 수상직) 최영(崔瑩)이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아서, 이름이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존숭한다고 한다. 각 고을에도 모두 있다.
통명청(通明廳) 맹인청(盲人廳)이라고도 한다. 영희전(永禧殿) 동쪽 담 밖에 있는데, 김자점(金自點)의 집 옛터라 한다. 국복(國卜 나랏일을 점치는 점쟁이) 한 사람에게 지중추(知中樞)의 직함을 주어 주관하게 한다.
이색(李穡)의 영당(影堂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 중부 수진방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후손이 제사지낸다.
지덕사(至德祠)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는데, 곧 양녕대군의 사당이며, 숙종이 이름을 내렸고 정종이 편액을 내렸다.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신수근(愼守勤)의 사당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다. 영종 기미년에 공에게 영의정 익창부원군(領議政益昌府院君)을 증직(贈職)하고, 임금이 손수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네 글자의 큰 글씨를 써서 내리고, 호조에 명하여 사당 옆에 각(閣)을 지어서 간직하게 했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사당 흥인문(興仁門) 밖 안암동의 옛 집터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사당기가 있다.
심희수(沈喜壽)의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을 때에 제사지내는 사당) 반촌(泮村 반궁 곧 성균관 근처 마을)에 있다. 선조 병오년에 투서한 자가 있어서 명하여 체포하니, 학관원(學官員)이 법을 잘못 집행하여 반례(泮隷 성균관 하인)에 미쳤는데, 공이 장관으로서 밝히기 어려움을 힘써 아뢰어 송사를 종결지을 수 있었다. 공이 죽은 뒤에는 반촌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지낸다.
윤집(尹集)의 사당 서부 반송방 옛집에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윤성준(尹星駿)의 생사당 반촌에 있다. 옛 규례로는 재실 유생들의 식당에서 여종이 상을 나르는데, 급식이 끝난 다음에 규례를 어기고 야비한 짓을 하는 일이 심해졌으므로, 숙종 기축년에 윤성준이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장관)으로서 상소하여 이 규례를 폐지하니, 반촌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생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낸다.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사당 서부 적선방에 있다. 옹주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상을 당하자, 음식을 끊고 죽었는데, 영종이 손수, “정성이 부족해서 돌이키지 못했구나, 네가 정절을 따랐음을 가상히 여긴다[誠淺莫回嘉隨貞].”라는 8자를 써서 내려 사당 안에 받들어 걸게 하고, 뒤에 정렬을 정표하게 했다.
【역원】 노원역(蘆原驛) 흥인문 밖 4리 떨어진 곳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 밖 3리에 있다. ○ 위의 두 역은 병조에 직속되어 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어 상원(上元 음력 1월 15일)과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에 기로소의 재상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한다. ○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홍제원(洪濟院) 홍(洪)은 홍(弘)으로도 쓴다.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는데, 고려 성종 을유년에 중 정현(鼎賢)이 창설한 것이다. 누각이 있어 중국 사신의 옷 갈아입는 곳인데, 뒤에 폐지했다. 인조 26년에 태평관(太平館)과 인경궁(仁慶宮)의 자재를 거두어 관우(館宇)를 옮겨 지어 중국 사신이 유숙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 남쪽에 있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란 뒤에 왜인의 귀순한 자를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룬 까닭에 이타인(異他人)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동리 이름이 되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쳤다.
전관원(箭串院) 전관교(箭串橋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서가(鐘樓西街)인데 속칭 생선전이라 한다. 영종 경진년에 다시 개국초의 옛 이름을 회복하여 운종가로 고쳤다.
【장시】행상이 모여서 물건을 바꾸고 헤어지는 것을 장(場)이라고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신무문(神武門) 밖 북쪽에 예전에 시장이 있었으니, 곧 주례(周禮 주(周) 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 또 그 제도를 뜻함) 후시(後市)의 뜻이라고 하는데,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모두 네 곳이 있다. 종루가상(鐘樓街上)ㆍ이현(梨峴)ㆍ칠패(七牌)ㆍ소의문외(昭義門外)이다.
【시전】 정종(定宗) 원년에 비로소 시전을 설치하니, 좌우 행랑(行廊) 8백여 칸이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 입구까지 이르렀다.
유분각전(有分各廛) 각 전 가운데서 형편이 괜찮은 자로, 분수를 헤아려 정해서 국역(國役나라의 일)에 응하게 하고, 유분각전이라고 부르며, 10분에서 1분까지 모두 37전인데, 국역을 당할 때마다 10분전은 10분의 일에 응하고 1분전은 1분의 일에 응하여, 대궐 안팎 여러 상사(上司)의 각처 수리와 도배, 재봉하는 사람도 이에 준해서 나가 일한다.
선전(縇廛) 전의감 동구의 동ㆍ서쪽 곧 종루로(鐘樓路) 북쪽에 있다. 모두 42방(房)인데, 중국산 필로 된 단(緞 겨울 비단)ㆍ초(綃 여름 비단)ㆍ견(絹 봄ㆍ가을 비단) 같은 것을 판다. ○ 저자가 서는 처음에, 먼저 선전을 세웠다. 속칭 입전(立廛)이라 하며, 국역 10분에 응한다.
면포전(綿布廛) 종루로 서쪽에 있는데, 은붙이도 겸하여 팔기 때문에 은목전(銀木廛) 또는 백목전(白木廛)이라고도 부르며, 국역 9분에 응한다.
면주전(綿紬廛) 면포전 뒤, 전옥서 앞에 있는데, 국산 면포와 명주를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내어물전(內魚物廛) 이문(里門) 동ㆍ서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건어물을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외어물전(外魚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국역 4분에 응하며, 내전과 합쳐서 9분역이다.
지전(紙廛) 동전(東廛)은 포전 남쪽에 있고, 서전은 면포전 남쪽에 있는데, 9분역에 응한다.
저포전(苧布廛) 진사전 동쪽에 있는데, 모시와 황모시를 팔며, 국역 6분에 응한다.
포전(布廛) 면포전 건너편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하고, 저포전과 합쳐서 11분역이다. ○ 선전으로부터 여기까지 6전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는데, 속칭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며, 각 전 중에서 가장 큰 전이다. ○ 예전에는 선전ㆍ면포전ㆍ면주전ㆍ지전ㆍ저포전 및 내외어물전ㆍ청포전을 합쳐서 육의전으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고쳐서 선전ㆍ면주전ㆍ면포전ㆍ내외어물전ㆍ내전을 합쳐 구분하고, 지전ㆍ저포전ㆍ포전의 저ㆍ포를 합쳐 구분해서 육의전으로 하며, 육의전 외에는 난전(亂廛)을 금하지 않는다.
청포전(靑布廛) 종루 동쪽에 있는데, 중국산 삼승포(三升布)와 양털, 모자를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연초전(煙草廛) 도가(都家)가 하량교(河良橋) 남쪽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한다.
상전(床廛) 물건들을 상 위에 늘어 놓은 까닭에 속칭 상자리전(箱貲利廛)이라 한다. 말총ㆍ가죽ㆍ초[燭]ㆍ실ㆍ책ㆍ휴지 같은 잡물(雜物)을 파는데, 모두 13곳이다. 망문(望門) 상전은 의금부 앞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하고, 신(新) 상전은 안국동에 있으며, 묘(廟) 상전과 국역 2분씩에 응하고, 동(東) 상전은 종루 남쪽에 있으며, 수진(壽進) 상전과 국역 1분씩에 응하고, 포(布) 상전ㆍ철(鐵) 상전ㆍ필(筆) 상전ㆍ남문(南門) 상전ㆍ염(鹽) 상전은 이전(履廛 신전) 동쪽에 있다. 정릉동(貞陵洞) 상전ㆍ동현(銅峴) 상전ㆍ지(紙 종이) 상전은 모두 국역 분수가 없다.
생선전(生鮮廛) 병문(屛門) 동남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생선을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미전(米廛) 여러 가지 곡식을 팔며, 모두 다섯 곳인데, 상ㆍ하 미전은 상전(上廛)이 의금부 서쪽에 있고 하전이 이현에 있어, 국역 3분씩에 응하며, 문외(門外) 미전은 소의문 밖에 있어 국역 2분에 응하며, 서강(西江) 미전과 마포(麻布) 미전은 모두 분수가 없다.
잡곡전(雜穀廛) 철물교(鐵物橋)의 서쪽 가 남ㆍ북쪽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한다. ○ 남문안 미전 도가는 수각교(水閣橋) 서쪽에 있어 한달에 40냥을 잡곡전에 납세한다.
유기전(鍮器廛) 바리전이라고도 한다. 내어물전의 서쪽 행랑 뒤에 있는데, 여러 가지 놋그릇을 판다.
은면전(銀麪廛) 전의감 동구 동쪽 가에 있다.
의전(衣廛) 잡곡전 서쪽에 있는데, 남녀가 입는 옷을 판다.
면자전(綿子廛) 광통교 북쪽 가 동ㆍ서쪽에 있는데, 면화전(綿花廛)이라고도 하며, 씨를 뺀 솜을 판다.
이전(履廛) 청포전 동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가죽신을 판다. 이상 5전은 국역 5분에 응한다. ○ 신전은 여러 곳에 있으나 종루전(鐘樓廛)만이 유정혜(油釘鞋 기름 바르고 징을 박은 신)를 판다.
화피전(樺皮廛) 동상전 동쪽에 있다. 여러 가지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데, 물건을 벗나무 껍질로 쌌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부른다.
인석전(茵席廛) 수진동 동구 서쪽에 있으며, 용수석(龍鬚席 용수풀로 만든 자리)ㆍ책상ㆍ걸상 같은 물건을 판다.
진사전(眞絲廛) 의금부 문 밖 동쪽에 있고 여러 가지 당사실ㆍ과실ㆍ갓끈ㆍ띠ㆍ실을 엮어서 만든 끈 같은 물건을 판다.
청밀전(淸蜜廛)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
경염전(京鹽廛) 숭례문 밖에 있으며, 서해에서 구운 소금을 판다.
체계전(髢髻廛) 칠목기전 남쪽에 있는데, 속칭 다리전이라 하며, 부인네의 머리 장식하는 다리를 판다.
내장목전(內長木廛) 여러 곳에 있는데 집을 짓는 재목을 판다.
철물전(鐵物廛) 여러 곳에 있으며, 여러 가지 철물을 판다.
연죽전(煙竹廛)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군기시 앞에 있고 하나는 약현에 있으며, 여러 가지 물들인 담뱃대, 담배통을 판다. 위의 9전은 모두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시저전(匙箸廛) 모두 내ㆍ외 2전인데 내전은 염탄전(鹽炭廛) 동쪽에 있고 외전은 소의문 밖에 있으며,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우전(牛廛)ㆍ마전(馬廛) 양전이 모두 태평교(太平橋)의 남쪽 언덕에 있으며, 1분씩에 응한다. 이상의 41전 가운데서 10전은 분수가 없고, 나머지 31전과 위에 나온 6주비전을 아울러 37전이 된다. 무분각전(無分各廛)ㆍ외장목전(外長木廛) 성 밖에 있다.
채소전(菜蔬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이현에 있다.
모전(毛廛) 속칭 우전[隅廛]이라 하는데, 처음에 길모퉁이에 설치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으며 토산(土産 그 지방 고유의 산물)의 과실을 판다. 모두 여섯 곳인데 송현(松峴) 모전ㆍ정릉동(貞陵洞) 모전ㆍ상 모전ㆍ하 모전ㆍ전의감동 모전이다.
혜정교잡전(惠政橋雜廛) 우산ㆍ갈대발ㆍ용지(龍脂)ㆍ중간치 횃불[炬] 같은 것을 판다. 세물전(貰物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혜정교 남쪽에 있으며, 혼례ㆍ상례에 쓰는 제구를 세준다.
양대전(涼臺廛) 돈의문 밖에 있다.
잡철전(雜鐵廛) 여러 곳에 있다.
염전(鹽廛) 숭례문 밖에 있고, 마포에도 있다.
백당전(白糖廛) 여러 곳에 있다.
좌반전(佐飯廛) 곧 반찬전인데, 절인 생선ㆍ젓갈 따위를 판다. 모두 네 곳인데, 생선 좌반전ㆍ상미(上米) 좌반전ㆍ내어물(內魚物) 좌반전ㆍ외어물 좌반전이다.
계전(鷄廛) 광통교에 있다.
생치전(生雉廛) 생선전 병문에 있으며, 꿩을 판다.
계란전(鷄卵廛) 생치전 곁에 있다.
저전(豬廛) 각처에 있다. ○ 큰 상사[喪]에는 준례로서 저전 사람이 방상시(方相氏 장례 행렬 맨 앞에서 탈을 쓰고 귀신을 쫓으며 가는 사람)가 된다.
복마제구전(卜馬諸具廛) 종루에 있는데, 나무안장ㆍ말가슴걸이ㆍ고삐ㆍ채찍 같은 것을 판다.
세기전(貰器廛) 잔치에 쓰이는 것을 세주는데, 사기 그릇과 홍칠반(紅漆盤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그릇)은 숙수도가(熟手都家 숙수는 요리사 숙수가 모여 있는 곳)에 있다.
승혜전(繩鞵廛) 생마혜(生麻鞋)와 숙마혜(熟麻鞋 삼으로 만든 신. 숙마혜는 익힌 삼으로, 생마혜는 익히지 않는 삼으로 만든 것)를 파는데, 여러 곳에 있으며 도가는 의금부 문밖의 동쪽에 있다.
상ㆍ하목기전(上下木器廛) 상전은 육조 앞에 있고, 하전은 이현에 있는데, 모판ㆍ싸리농[杻籠]ㆍ성긴 싸리농ㆍ키ㆍ궤짝 같은 것을 판다.
칠목기전(漆木器廛) 여러 가지 나무 그릇과 장(欌)을 팔기 때문에 장전이라고도 부르며, 무늬 있는 나무장ㆍ종이장ㆍ방장(房欌) 따위를 판다. 여러 곳에 있는데, 효경교(孝經橋)에 지금 가장 많다.
등전(鐙廛) 곧 마상전(馬床廛)인데, 광통교 곁에 있으며, 지상전(紙上廛)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는 지전 앞에 있는데 말안장을 판다.
백립전(白笠廛 국상이 있으면 사용하는 흰말총으로 만든 갓)ㆍ흑립전(黑笠廛) 양전의 도가는 어의동 병문에 있다.
초립전(草笠廛) 청포전 서쪽에 있다.
자기전(磁器廛) 종루와 숭례문 밖에 있는데, 토산 자기와 중국 자기를 판다.
침자전(針子廛) 은침(銀針)과 크고 작은 보통 바늘을 판다.
분전(粉廛) 모두 넷인데, 하나는 영희전 동쪽 안팎에 둘씩 있다. 또 여러 곳에 있는데, 분ㆍ연지ㆍ색실을 팔며, 방물전(方物廛)이라 부른다. 여자 장사가 다니며 팔거나, 앉아서 팔기도 한다.
족두리전(簇頭里廛) 종루에 있는데, 부인네의 머리 장식품을 판다.
망건전(網巾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소의문 밖에 있다.
내전립전(內氈笠廛) 마전교에 있다.
외전립전(外氈笠廛) 돈의문 밖에 있다.
파립전(破笠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어의동에 있다.
고초전(蒿草廛) 숭례문 밖과 흥인문 밖에 있는데, 지붕을 잇는 짚과 울타리 대싸리를 판다.
초물전(草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생삼[生麻], 삶은 삼ㆍ칡[葛]ㆍ노끈ㆍ왕골ㆍ기령풀 따위를 판다.
죽물전(竹物廛) 숭례문 밖에 있는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대로 만든 물건들을 판다.
이저전(履底廛) 창전(昌廛)이라고도 한다. 입전동(笠廛洞)에 있는데, 소가죽신 창을 판다. 시목전(柴木廛) 용산 강변에 있다.
파자전(笆子廛) 성 밖에 있다.
합회전(蛤灰廛 조개껍질을 구워서 만든 회) 하나는 이현 아래에 있고, 하나는 육조 앞에 있다.
전족전(箭鏃廛 화살과 촉) 이교남천(二橋南川) 가에 있다.
도자전(刀子廛) 종루 거리 위에 있는데 거리에 앉아서 장도ㆍ은비녀ㆍ부인네의 패물ㆍ금 은 가락지ㆍ담배통을 판다.
염수전(鹽水廛)ㆍ종자전(種子廛) 여러 곳에 있으며, 채소ㆍ쪽ㆍ연지풀의 씨앗을 판다.
교자전(轎子廛) 회현방 동구에 있으며, 여러 가지 가마를 판다.
형파전(荊把廛) 성 밖에 있으며, 나무꾼이 쓰는 갈퀴를 파는데, 갈퀴라는 것이 즉 형파(荊把)이다. 이 밖에 소소한 여러 전은 종류가 번다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전에 없거나 드문 물건은 평시서(平市署)에서 나누어 정해주어서 육의전에 무역해 들인다. 붙임 감고(監考) 일이소(一二所)가 있는데 각 전 사람 중에서 착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뽑아서, 일이소의 감고로 정하고, 해마다 중국으로 사신이 갈 때 세폐(歲幣)로 가져갈 생상목(生上木 상등면포)을 일이소 감고처에서 2통 40자씩 값을 받고 올린다. 뒤에 금계(金契)의 공인(貢人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람)과 더불어 요역(徭役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것)하여 삯을 받고, 세폐 1백 25바리를 평산부(平山府)에 운반해 놓는다.
【포사】 서적포(書籍舖) 정도전의 서문이 있다. ○ 상고해 보건대, 개국 초에 가게를 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만둔 것 같다.
책사(冊肆) 정릉동 병문에도 있고, 육조 앞에도 있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百家 여러 학자 또는 그 학파)의 여러 가지 책을 판다.
서화사(書畫肆) 대광통교(大廣通橋) 서남쪽 개울 가에 있는데,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을 판다.
금교세가(金轎貰家) 여러 곳에 있는 종친ㆍ옹주ㆍ공주의 옛집에서 세주는 것인데, 혼인하는 신부의 집에서 쓴다.
약국(藥局) 동현의 좌ㆍ우 거리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산재하는데, 대신의 관청이나 여러 군영에는 다 약방이 있다.
현방(懸房) 소를 잡아 고기를 파는 곳이다. 반인(泮人 성균관에 딸려 있으며 대대로 쇠고기를 팔던 사람. 관인이라고도 한다.)이 그 파는 일을 맡았는데, 고기를 걸어 놓고 파는 까닭에 현방이라 부른다. 중부 다섯 곳인데, 하량교ㆍ이전(履廛)ㆍ승내동(承內洞)ㆍ향교동(鄕校洞)ㆍ수표교이고, 동부 세 곳인데 광례교(廣禮橋)ㆍ이교(二橋)ㆍ왕십리이고, 남부 네 곳인데, 광통교ㆍ저동ㆍ호현동(好賢洞)ㆍ의금부이고, 서부 일곱 곳인데, 태평관ㆍ소의문 밖ㆍ정릉동ㆍ허병문(許屛門)ㆍ야주현(冶鑄峴)ㆍ육조 앞ㆍ마포이고, 북부 세 곳인데, 의정부ㆍ수진방ㆍ안국방으로 합쳐서 스물 세 곳이다.
붙임 향도(香徒 상여꾼) 는 소광통교(小廣通橋) 남쪽에 있고, 수표교의 남쪽 개울 가의 동쪽에도 있으며, 또 여러 곳에 산재한다.
【장방】 금방(金房) 여러 곳에 있으며, 또 금박(金箔 금을 엷게 입히는 것)하는 집이 있다. 은방(銀房)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백목전 도가(白木廛都家) 남쪽에 있고, 하나는 내어물전 북쪽의 향도정동(香徒井洞)에 있다.
옥방(玉房) 여러 곳에 있는데, 비녀ㆍ가락지 따위를 판다.
두석방(豆錫房 두석은 주석) 도가는 다래전 남쪽에 있다.
능라방(綾羅房) □산루(□山樓)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주피방(周皮房) 안장 따위를 만들며, 도가는 장악원 건너편에 있다.
궁방(弓房) 내방(內房)은 도총부 북쪽에 있고, 외방은 마전교에 있다.
시방(矢房) 역시 내ㆍ외방이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사모방(紗帽房) 여러 곳에 있다.
각대방(角帶房) 여러 곳에 있다.
도자방(刀子房) 여러 곳에 있다.
안경반(眼鏡房) 여러 곳에 있다.
석경방(石鏡房 예전의 구리 거울 등에 대하여 지금의 유리 거울을 말함) 여러 곳에 있다. 모의방(毛衣房) 여러 곳에 있다.
필방(筆房) 여러 곳에 있다.
입방(笠房) 여러 곳에 있다.
연죽방(煙竹房) 여러 곳에 있다.
【공장】서울의 여러 중앙 관서의 장인(匠人 기술자)은 그 관계 서류를 작성하여 공조와 소속 관서에 비치하며, 가장 긴요한 장인이 궐원이 있을 때에는 군인ㆍ보솔(保率)ㆍ관속(官屬 관청의 최하급 관원)ㆍ공천(公賤 관청 소속의 하인)을 막론하고 합당한 사람으로 차출하여 정한다. ○ 옹기점 장인은 군병이거나 공천ㆍ사천을 물론하고 그릇 굽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를 공조에서 세를 거두어 채용하며, 무쇠 장인의 인원수가 모자라는 것은 모자라는 대로 곧 보충한다. ○ 사옹원(司饔院)의 사기그릇[沙器] 장인은 그 자손이 다른 일에 충당되지 않고 대를 잇는다. ○ 공조에는 초립장(草笠匠) 8명, 사모장(紗帽匠) 2명, 도다익(都多益) 2명, 다회(多繪) 2명, 망건장(網巾匠) 2명, 모자장(帽子匠) 2명, 옹장(瓮匠) 13명, 화장(和匠) 4명, 은장(銀匠) 8명, 금박장(金箔匠) 2명, 과피장(裹皮匠) 2명, 화혜(靴鞋) 6명, 숙피장(熟皮匠) 10명, 화아(花兒)10명, 사피장(斜皮匠) 4명, 전장(氈匠) 4명, 입사장(入絲匠) 2명, 칠장(漆匠) 10명, 두석장(豆錫匠) 4명, 주장(鑄匠) 20명, 나전장(螺鈿匠) 2명, 유장(鍮匠) 8명, 배첩장(褙貼匠) 2명, 침장(針匠) 2명, 경장(鏡匠) 2명, 조각장(雕刻匠) □명, 동장(銅匠) 4명, 주피장(周皮匠) 6명, 한치장(汗致匠) 2명, 안롱장(鞍籠匠) 2명, 간다개(看多介) 2명, 필장(筆匠) 8명, 죽장(竹匠) 2명, 추골장(鞦骨匠) 2명, 인장(印匠) 2명, 수철장(水鐵匠) 30호(戶), 대ㆍ중ㆍ소야장(大中小冶匠) 각 10명, 야장(冶匠) 4명, 주장(珠匠) 2명, 점보로(䩞甫老) 2명, 매즙(每緝) 2명, 안자장(鞍子匠) 10명, 어적(於赤) 4명, 점장(䩞匠) 2명, 목소장(木梳匠) 2명, 소성장(梳省匠) 2명, 통개장(筒介匠) 2명, 첩선장(貼扇匠) 4명, 표통장(表筒匠) 2명, 칭자장(稱子匠) 2명, 원선장(圓扇匠) 2명, 죽소장(竹梳匠) 10명, 침선장(針線匠) 6명, 초염장(草染匠) 6명, 목영장(木纓匠) 4명이다. ○ 봉상시에는 옹(瓮) 10, 화(花) 6, 변두(邊荳) 4이다. ○ 내의원에는 분(粉) 2, 향(香) 2이다. ○ 상의원에는 능라(綾羅) 1백 5, 장립(章笠) 6, 유립(襦笠) 2, 사모 4, 양태(涼太) 2, 도다익 2, 다회(多繪) 4, 망건 4, 모자 2, 도련(擣鍊) 2, 잠(箴) 10, 옥(玉) 10, 옹(瓮) 10, 화(和) 8, 은 8, 금박 4, 과피 4, 화(靴) 10, 피혜(鞁鞋) 8, 숙피 8, 화아(花兒) 4, 침피(針皮) 4, 모의 8, 전 8, 입사(入絲) 4, 모관(毛冠) 2, 사금(絲金) 4, 칠 8, 두석 4, 마조(磨造) 4, 궁현(弓絃) 4, 유칠(油漆) 2, 주(鑄) 4, 나전 2, 하엽사(荷葉絲) 2, 생피(生皮) 2, 유(鍮) 2, 배첩(褙貼) 4, 침 2, 경(鏡) 2, 풍물(風物) 8, 조각 4, 묵(墨) 4, 동(銅) 4, 궁인(弓人) 18, 시인(矢人) 21, 도자(刀子) 6, 야(冶) 8, 연(鍊) 10, 매즙 4, 목소(木梳) 2, 재금(裁金) 2, 도목개(都目介) 2, 도결아(都結兒) 2, 웅피(熊皮) 2, 전피(猠皮) 2, 화빈(火鑌) 2, 죽소(竹梳) 2, 환도(環刀) 12, 침선 40, 합사(合絲) 10, 청염(淸染) 10, 홍염(紅染) 10, 세답(洗踏) 8, 도침(擣砧) 14, 연사(鍊絲) 75, 방직(紡織) 20, 초염(草染) 4이다. ○ 군기시에는 칠 12, 마조(磨造) 12, 궁현(弓絃) 6, 유칠 2, 주 20, 생피 4, 갑(甲) 35, 궁인(弓人) 90, 시인(矢人) 1백 50, 쟁(錚) 11, 아교(阿膠) 2, 고(鼓) 4, 연사(鍊絲) 2이다. ○ 교서관에는 야 6, 균자(均字) 40, 인출(印出) 20, 각자(刻字) 14, 주 8, 조각 8, 목(木) 2, 지(紙) 4이다. ○ 사옹원에는 사기 3백 80이다. ○ 내자시에는 옹 8, 화(花) 20, 방직 30, 잠(箴) 2이다. ○ 내섬시에는 옹 8, 방직 30, 잠 2이다. ○ 사도시(司導寺)에는 옹 8이다. ○ 예빈시에는 옹 8, 화 6이다 ○ 사섬시(司贍寺)에는 인출 2, 저폐(楮幣) 2 이다. ○ 선공감에는 마조 8, 조각 10, 죽 20, 목 60, 석(石) 40, 개(蓋) 20, 이(泥) 20, 도분(塗粉) 20, 돌(堗) 8, 거(車) 10, 우산(雨傘) □, 단(簞) 10, 염(簾) 14, 파자(把子)10, 상화롱(牀花籠) 4, 석회(石灰) 6, 마미사(馬尾篩) 4, 통(桶) 10, 아교 2 이다. ○ 제용감에는 숙피 2, 모관(毛冠) 2, 화엽사(花葉絲) 2, 분 2, 황단(黃丹) 2, 절죽(截竹) 2, 홍염(紅染) 10, 도침(擣砧) 6, 세답(洗踏) 4, 침선 24, 방직 30, 잠 2, 청염(靑染) 20이다. ○ 장악원에는 풍물 4, 황엽(簧葉) 2이다. ○ 관상감에는 자격(自擊) 10이다. ○ 전설사(典設司)에는 침 2, 다회(多繪) 6이다. ○ 전함사에는 선(船) 10이다. ○ 내수사(內需司)에는 옹 7, 야 2, 도 10, 유 5, 수철(水鐵) 6호(戶), 대중소야 각2, 사기 6, 목 2이다. ○ 소격서에는 옹 4이다. ○ 사온서는 옹 4이다. ○ 의영고는 옹 4, 촉(燭) 4이다. ○ 장흥고는 균(菌) 8, 도배(塗褙) 8이다. ○ 장원서에는 옹 8이다. ○ 사포서는 옹 10이다. ○ 양현고는 옹 □이다. ○ 조지서는 목 2, 염(簾) 8, 지 81이다. ○ 도화서는 배첩 2이다. ○ 와서는 와(瓦) 40, 잡상(雜象) 4이다. ○ 귀후서는 목 4, 야 2, 칠 2이다. (봉상시 이하는 장(匠) 자를 쓰지 않았다.) ○ 이상의 여러 관서 중에서 사섬시ㆍ전함사ㆍ소격서ㆍ사온서ㆍ귀후서는 지금 모두 폐지되고, 내자시ㆍ내섬시ㆍ사도시ㆍ예빈시ㆍ제용감, 전설사ㆍ장악원ㆍ사포서ㆍ양현고ㆍ도화서는 지금 공장(工匠)이 없으며, 그 밖의 여러 관서는 명색이 새로운 것과 예전대로 있는 것이 서로 차이가 있고, 인원수의 더하고 덜한 것이 일정하지 않은데, 적(籍)을 만들어서 공조에 두는 규례를 폐지하여 행하지 않고 속전(續典 속대전)을 만들 때에도 거론되지 않은 까닭에 지금도 모두 예전 그대로 하고 고치지 않았다. 금장ㆍ은장ㆍ옥장ㆍ두석장(豆錫匠)ㆍ목수ㆍ석수ㆍ소목장(小木匠)ㆍ대정(大丁) 쇠를 부어 칼이나 잡물을 만드는 사람을 속칭 대정이라 한다. ㆍ조주장(造主匠 신주 만드는 공장)ㆍ관곽장(棺槨匠)ㆍ모의장(毛衣匠)ㆍ안장장(鞍粧匠)ㆍ주자장(鑄字匠)ㆍ숙수장(熟手匠)ㆍ각수장(刻手匠)ㆍ장책장(粧冊匠)ㆍ칠장은 모두 지금 세상에서 통용하는 장색(匠色 색은 종류라는 뜻)이다.
【원묘】 의소묘(懿昭墓) 북부 아현(阿峴)의 서쪽, 연희궁(延禧宮)의 동쪽에 있다.
효창묘(孝昌墓) 서부 청파(靑坡) 서쪽에 있다.
선희묘(宣禧墓) 연희궁(延禧宮) 대야동(大野洞)에 있다. 의빈성씨 묘(宜嬪成氏墓) 효창묘의 왼쪽 언덕에 있다.
【불우】대체로 절은 새로 창건하지 못하며, 다만 옛터를 중수하는 자는 양종(兩宗 교종ㆍ선종의 두 종)에 고하고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啓聞 임금에게 알리는 것)하며, 능침(陵寢)에 가까운 곳에 사찰을 새로 세우는 것은 엄금한다. 서울의 여러 관서나 궁방(宮房)의 원당(願堂 부처에게 원하는 집)은 일체 혁파했다. ○ 승과시험을 보아 승(僧)이 된 자는 3개월 안으로 선종(禪宗)에 고하고, 혹 교종(敎宗)은 경의 암송을 시험보는데,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하고 정전정포(丁錢正布 부역이나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에 바치는 포목) 30필을 걷고 도첩(度牒)을 내어 준다.
흥천사(興天寺) 서부 황화방의 정릉 동쪽에 있는데, 본래 고려의 옛절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 태조의 연호) 정축년에 중건하여 선종이 되었다. 권근의 기문이 있으며, 사리각(舍利閣)이 있어 우뚝한 높이가 5층이고 서울 안에 높이 섰으며, 보물과 불경을 그 안에 간직하였다. 능을 옮긴 뒤에 절은 예전대로 두었다. 연산군 때에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로 삼았고, 중종 반정 뒤에 계속 관청을 삼았다. 절은 이미 무너졌고 사리각만 남았는데, 경오년 3월에 이르러 중학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타서 부수고 불살라서 불길이 공중에 치솟고, 불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굴 속의 조그만 것까지도 다 들어내어 불태웠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걸었고,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이 있었는데 지금은 흥인문 안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각을 세웠는데 뒤에 무너졌으며 지금은 광화문 루에 걸려 있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으니, 바로 정종(定宗)의 잠저 동쪽이다. 연못이 있다. 교종(敎宗)이 됐고 지금은 없어졌다. ○ 변계량(卞季良)이 늘 이 절에 거처하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지었다. 권근의 〈덕안전기(德安殿記)〉가 있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인데, 개국 초에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社)가 되었다가 뒤에 폐지되어 관청이 되었다. 세조 10년에 고쳐 창건하여 원각으로 삼았으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고 또한 큰 종이 있는데, 바로 지금의 종루의 종이다. 연산군 때 흥청(興淸)ㆍ운평(運平) 등을 두고서 연방원(聯芳院)이라 부르고 이 절에 국(局)을 설치하였다. 중종 7년에 양종(兩宗)과 원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내려주었다. 이름난 탑 13층에 12회상(會相)을 새겼는데, 새긴 불상이 매우 정밀하고 기교하며, 또 처마 밑에 각각 해서로 쓴 작은 액자 다보회(多寶會)ㆍ영산회(靈山會) 등 글씨가 있고, 탑 기둥 사면에는 모두 용의 모양을 새겼다. 위 3층은 임진년에 왜적들이 무너뜨렸다. ○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르기를, “원각사는 옛 큰 절의 터이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ㆍ서의 선당(禪堂)뿐이었는데, 관습도감(慣習都監)을 대전의 서선당에 붙이고, 예장도감(禮葬都監)을 동선당에 붙이고, 대전의 북쪽은 중학의 유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세조가 일찍이 철거하여 다시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게 하고 이름하여 원각이라 하였으며, 임금이 여러 번 행행하였고,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가 되어 내리고, 사리가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중부청사가 가각고(架閣庫) 자리에 옮겼고, 예장도감을 송현행랑(松峴行廊)에 붙여서 귀후서에 속하고, 관습도감을 봉상시의 악학(樂學)에 합쳐서 이름하여 악학도감이라 했다가 얼마 안 되어 장악원으로 고쳤다.” 하였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륜사(金輪寺) 성 안에 있는데, 이 절 안에 사국(史局 춘추관)을 개설하였다. 유관(柳寬)이 일찍이 영수사(領修史)로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갔었다는데, 바로 흥덕사인 듯하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었으며 세조조에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 밖에 있다. 신라가 백제 군사와 황산벌에서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싸움터에서 죽었으므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이 절을 집현전의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했으며, 성종조에 나이 적은 문관 채수(蔡壽) 등을 뽑아서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니,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했다. 뒤에 없어졌다. 연산군 병인년에 장의문(藏義門) 밖에 수각(水閣)을 세웠는데, 지금은 탕춘대(蕩春臺)가 되었다.
연굴(演窟) 소격서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현종 경술년의 사변(거란의 2차 침입), 무오년의 난(거란의 3차 침입) 때에 태조의 재궁(梓宮 임금의 관)을 이 절에 옮겨 모셨다.
적석사(積石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청평산(淸平山)으로부터 불려와서 머물렀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상서(尙書) 이오(李䫨)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옛날 신라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 어령대사(飫聆大師)의 성적(聖跡)이다. 삼각산 남쪽에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를 깨고 굴을 만들며, 돌을 깎아 대사의 도용(道容 도통한 이의 성스러운 모습)을 본따 새겼다. 나라에 재난과 이변이 있으면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쳤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한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 서쪽에 있다. 태조가 수륙도량(水陸道場)의 상ㆍ중ㆍ하 3 단(壇)을 만들게 하고 여러 번 행행하였으며,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가 있다. 세종 조에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도성암(道成庵)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 어느 사람을 위해서 기도 드려 주는 절)이다.
자수원(慈壽院) 바로 개국 초의 북학이 있던 자리이다.
인수원(仁壽院) 현종 2년에 자수, 인수 양원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축하여, 중과 여승들은 환속(還俗 중이 도로 세상에 나와 보통 사람이 됨)하게 하며, 북학을 다시 세웠다. 북학조에 상세하다.
정업원(淨業院)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성 안에 있다고도 한다. 정순왕후(定順王后 단종의 비 송씨)를 부인으로 강봉(降封)할 때 세조가 흥인문 안의 연미정동에 집을 내려주었는데, 주인이 따로 초가를 짓고 자칭 정업원 주지(住持)라 했다. 앞에 돌산 봉우리가 있는데, 주인이 때때로 올라가서 영월(寧越)을 바라보았으므로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른다. 영종 계묘년에 어필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5자를 써서 동망봉 아래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장릉지(莊陵志)》의 〈해평가전(海平家傳)〉에 이르기를,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 세조 찬위 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 송씨가 살아 있을 때 성 안에 있으려 하지 않고 동쪽 교외에 살면서 노릉(노산군의 능 곧 장릉)을 바라보기를 원하므로 조정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짓고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불렀는데, 부인이 따로 초가 몇 칸을 짓고 살면서 소의소식(素衣素食 흰옷을 입고 채소 음식을 먹음)으로 일생을 지냈다. 성종조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불상을 만들어서 이 원에 보냈는데, 유생 이벽(李鼊) 등이 빼앗아서 불태웠다. 선조 계유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철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 이상의 3원은 모두 여승이 사는 곳이다. ○ 성현의《용재총화》에, “성 안에 여승의 절간이 이미 철거되고 정업원만이 남았으며 여승들은 모두 다 흥인문 밖으로 쫓겨나 안암동 등지에 서너 집이 있었다. 숭례문 밖 종약산(種藥山) 남쪽에 예전에 한 집이 있었는데, 그 후에 그 곁에 작은 집들을 지어서 지금은 10여 집이 있다.” 하였다.
중흥사(重興寺) 북한 삼각산 등안봉(登岸峯) 아래에 있다. ○ 고려의 중 보우(普愚)가 늘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살았으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했다. ○ 목은 이색이 지은 원증국사 보월(圓證國師寶月)의 〈승공탑명(昇空塔銘)〉이 있다. ○ 총섭(摠攝 승병(僧兵)의 사령관)이 여기에 군영을 개설했다. ○ 1백 49칸이다.
태고사(太古寺) 북한 등안봉(登岸峯) 태고대(太古臺)아래에 있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옛 당 나라의 당시(唐詩) 등의 판을 저장했다. ○ 1백 36칸이다.
보국사(輔國寺) 금창(禁倉) 아래에 있다. ○ 67칸이다.
진국사(鎭國寺) 노적봉(露積峯)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 1백 4칸이다.
부왕사(扶旺寺)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 1백 11칸이다.
국영사(國寧寺)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 70칸이다.
보광사(普光寺)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 75칸이다.
원각사(圓覺寺) 증봉(甑峯) 아래에 있다. ○ 81칸이다.
용암사(龍巖寺) 일출봉(日出峯) 아래에 있다. ○ 88칸이다.
상운사(祥雲寺) 영취봉(靈鷲峯) 아래에 있다. ○ 89칸이다.
서암사(西巖寺) 수구문(水口門) 안의 민지암(閔漬巖)의 옛 집터에 있다. ○ 1백 7칸이다. ○ 위의 11절에는 승장(僧將)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씩을 두었다.
봉성암(奉聖菴)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 25칸이다.
원효암(元曉菴) 원효봉(元曉峯) 아래에 있다. ○ 10칸이다.
문수암(文殊菴) 문수봉 아래에 있다. ○ 이상의 여러 절은 모두 북한성 안에 있다.
【고적】남평양성(南平壤城)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서울을 옮겼으며, 진사왕(辰斯王) 7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땅을 파서 산을 만들고 기이한 풀을 심으며 기이한 새를 길렀다. 개로왕(蓋鹵王)이 궁실을 크게 세우고 도성 안의 사람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쪄서 토성을 쌓았다. 누각(樓閣 누나 각이나 비슷하나 누에는 다락이 있음)ㆍ대사(臺榭 높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같고 사에는 집이 있다고 한다)가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나라가 피폐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죽게까지 되었다. ○ 진사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을 세웠다.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쪽에 있다. 신라 때에 중요한 진(鎭)을 두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점거한 것을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서 회복하고 장한성가를 지어서 그 공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당 고종의 연호) 원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서 진군하여 북한산성을 에워싸서 성 안이 위태로웠는데,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우레치고 비오며 벼락치니, 적들이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현종이 머리 깎고 이 절에 거처하였다.
면악(面嶽) 고려 숙종이 최사추(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시켜 남경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더니, 사추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노원역ㆍ해촌(海村)ㆍ용산 등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니 도읍을 세우기에 합당치 않은데, 삼각산 면악의 남쪽 만은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됩니다. 원줄기의 중심이 임좌병향(壬坐丙向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함)이니 형세에 따라 도읍을 세우소서.” 하였다. 여기서 형세를 따라서 동쪽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쪽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쪽으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쪽으로는 면악까지를 경계로 하여 남경을 세우며,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를 택해서 윤(尹 서울 지방의 장관)으로 삼고, 임금이 또한 한 해에 한 번씩 순행하며 용봉장(龍鳳帳 임금의 포장)을 묻어, 지기(地氣)를 진압하였다. ○ 지금 상고해보면 면악은 바로 백악인 듯하다.
【제영】 8영(八詠) 기전(圻甸 임금 직할의 지역 곧 경기)의 산하, 도성의 궁원, 여러 관서가 별처럼 모여 있음, 여러 동리가 바둑처럼 펼쳐 있음, 동대문의 교련장, 서강의 조선(漕船)이 머무름, 남쪽 나루터의 길손, 북쪽 교외의 기르는 말. 10영 목멱산의 꽃구경, 마포의 배 띄우기, 제천정의 달 구경, 양화도의 눈밟기, 반송정의 손님 배웅, 장의사의 중 찾기, 흥덕사의 연꽃 구경, 입석포의 낚시질, 전관교의 꽃찾기, 종가의 등불 구경하기. 남산 8영 북쪽 대궐에 비낀 구름, 남쪽 강에 가득한 물, 바위 아래의 그윽한 꽃, 고개 위의 긴 소나무, 봄철 3월의 푸른 풀 밟기,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오름, 산봉우리에 올라가 등불 구경하기, 시내 따라가며 갓끈 빨기. 국도(國都) 8영 필운대의 꽃과 버들, 압구정의 배 띄우기, 삼청동의 녹음, 자각의 관등, 청계의 단풍놀이, 반지의 연꽃 구경, 세검정의 시원한 폭포, 광통교의 맑은 달.
【명환】 고려의 강감찬(姜邯贊) 현종 때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았다. 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에 있는 산골짜기에 반드시 두 중이 있을 것이니, 갖다 주어라.” 하였다. 아전이 그 말대로 하니, 과연 두 중이 있어 아전을 따라와서 배알하였는데, 감찬이 꾸짖기를,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한성유수(漢城留守)가 그 말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감찬이 또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곧 옷을 벗고 두 범으로 바뀌어서 크게 울부짖었다. 감찬이 말하기를, “빨리 가라.” 하니, 범은 곧 뛰어서 사라졌는데 이후로 호환(虎患)이 드디어 없어졌다.
[주D-002]옥로(玉鷺) : 옥으로 조그마하게 백로 형상으로 만든 것인데, 그것을 모자 꼭대기에 단다. 그것은 생쇄권(生殺權)이 있다는 표지이다.
[주D-003]기린(麒麟) : 예전 관복의 가슴과 등에 수놓은 것. 약 20cm의 사각형을 대는데, 그것을 흉배(胸背)라고 한다. 그것이 관직의 고하에 따라 다른 것은 여기의 본문과 같다.
[주D-004]화혜(靴鞋) : 화(靴)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긴 신이요, 혜(鞋)는 보통 발등까지도 안 올라오는 신이다.
[주D-005]북독(北瀆) : 독은 물이란 말인데, 나라에서 큰 강물에 제사할 때 그 강물을 말한다.
[주D-006]하징(夏徵) : 예전에 역적은 성(姓)을 떼고 이름만 쓰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므로 여기 이하징(李夏徵)이라는 사람도 성을 떼고 이름만 쓴 것이다. 아래에도 그런 곳이 여러 곳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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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攷) | ||||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 |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지금 탁본을 가지고 보건대, 밖은 난격(欄格)으로 되어 있어 하단(下段) 제2행의 짐(朕) 자와 제3행의 응(應) 자 밑은 바로 난격과 접(接)하였고, 응(應) 자는 제5행 맨 밑의 口와 서로 마주하였으며, 상단(上段)은 망결(亡缺)되었다. 현존한 글자로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제5행의 미(未) 자이다.
그리고 지금 위로 미(未) 자에서부터 아래로 口에 이르기까지를 한(漢) 나라 건초척(建初尺)으로 재본 결과 길이가 4척 4촌 5푼이다. 넓이로 말하면, 제1행에 난격이 있고 제12행의 하단 밖에도 난격이 있어 이를 건초척으로 재본 결과 넓이가 1척 8촌이다. 그러나 난격 밖의 길이와 넓이 및 두께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
비문이 모두 12행임은 난격으로 정할 수 있고 그 하단 글자의 끝도 또한 난격으로 정할 수 있으나, 다만 상단은 망실되어 그 끝까지가 몇 자인지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가장 높이 위치한 제5행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서술하는 바이다.
제1행은 20자가 완전하다. 가장 위에 위치한 팔(八)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넉 자가 모자란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야(也) 자는 제5행의 제24자에 해당한 口자와 서로 마주하였고 아래는 그대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줄은 기왕 제수(題首)이고 보면 이 야(也) 자가 바로 그 끝이요, 망결된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다. ―모두 29자임― 가장 위의 세(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짐(朕)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3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두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소(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응(應)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4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사(四)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화(化)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5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1자임― 가장 위의 미(未) 자는 이 비문 가운데서 가장 높이 위치한 글자이다. 아래 맨 끝의 口자는 제4행의 화(化) 자와 끝이 같다.
제6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깎인 것이 여덟 자이며 빈칸이 하나이다. ―모두 28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口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7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며 깎인 것이 한 자이고 빈 칸이 둘이다. ―모두 23자임― 가장 위의 氺자가 제5행에 비하면 일곱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冫+七)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8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21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여덟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9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석 자이다. ―모두 19자임― 가장 위의 阝자는 제5행에 비하면 아홉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冖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0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4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16자임― 가장 위의 乀자는 제5행에 비하면 13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1행은 13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전(典)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5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사(舍)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 자가 모자란다.
제12행은 12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훼(喙)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6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윤(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자가 모자란다.
이상 모두 12행에서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이며 깎인 것이 17자이고 빈칸이 셋으로 총 2백 72자이다.
비석의 상단이 이미 망실되었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액(篆額)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북한산(北漢山)의 비 또한 이 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인데 규수를 만들지 않았으니, 이 비도 북한산의 비와 같은 예일 듯하다.
비문(碑文)에 이르기를 “8월 21일 계미(癸未)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차(歲次) 무자(戊子) 추팔월(秋八月)이라” 하였으니, 상고하건대 신라 진흥왕 29년이 무자년으로 그 해가 바로 대창(大昌)으로 개원(改元)한 해이다. 이 해가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10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15년에 해당하고, 중국(中國)에서는 진 폐제(陳廢帝) 백종(伯宗)의 광대(光大) 2년, 북제 후주(北齊後主) 위(緯)의 천통(天統) 4년, 후주 무제(後周武帝) 옹(邕)의 천화(天和) 3년, 후량 세종(後梁世宗) 귀(巋)의 천보(天保) 7년에 해당한다.
《북사(北史)》 제후주본기(齊後主本紀)에 의거하면 “천통 4년 6월 초하루(갑자)에 큰 비가 내렸고 갑신일에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였고, 또 주무제본기(周武帝本紀)에는 “천화 3년 6월 갑술일에 패성(孛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남사(南史)》 진폐제본기(陳廢帝本紀)에는 “광대 2년 6월 정해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해 6월 초하루가 갑자일이고 24일이 정해일인 것이다. 주무제본기에는 “7월 인일에 양충(楊忠)이 죽었다.”고 하였고, 진폐제본기에는 “7월 무신일에 신라국(新羅國)에서 사신을 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임술일에 영양왕(永陽王)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갑자에서 임술까지가 모두 59일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작은 달이 있었을 것이고 보면 7월 그믐날이 의당 임술일이고 8월 초하루가 의당 계해일이 된다. 또 주무제본기에는 “8월 을축일에 한원라(韓元羅)가 죽었다. 계유일에 제(帝)가 대덕전(大德殿)에 임어했다.” 하였으니, 을축일이란 곧 8월 3일이고 계유일이란 곧 11일인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8월 21일이 의당 계미일이 되니 이 비문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이 된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것이 16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三國史)》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으니, 신라의 시법(諡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였다. 이로부터는 왕이 훙한 뒤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도 37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도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 칭하였고, 북한산의 비문에도 진흥이란 두 글자가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법흥(法興)이니 진흥이니 하는 칭호는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가 아니요, 바로 생존시에 부른 칭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의 조서(詔書)에는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使持節 東夷校尉)로 삼는다.” 하였고 《수서(隋書)》 개황(開皇) 14년조에는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와서 하례하였다.” 하였으며, 《당서(唐書)》 정관(貞觀) 6년조에는 “진평(眞平)이 졸하고 그의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등의 칭호는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시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서》의 기록에서 김무열(金武烈)이라 칭하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칭하였으니,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칭한 것도 역시 생존시에 호칭한 것이다.
지금의 함흥부(咸興府)는 옛날 동옥저(東沃沮)의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여기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고, 후한(後漢) 초기에는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高句麗)에 소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예전(濊傳)에 의거하면 “불내예(不耐濊)가 한말(漢末)에 다시 고구려에 소속되었다.” 하였고, 또 동옥저전(東沃沮傳)에는 “나라가 작아서 대국(大國)의 사이에서 핍박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 말한 동옥저와 불내가 곧 지금의 함흥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국조왕(國祖王)조에 의하면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創海)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중원(中元) 원년에 해당한다.
함흥의 땅은 분명히 후한 때부터 이미 고구려에 소속되었는데, 이 비문에서 “관할 지경을 순수한다.[巡狩管境]”고 하였고 보면, 진흥왕 때에는 함흥이 또 신라의 소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비문에는 또 “사방으로 지경을 열어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서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진흥왕 때 이 땅을 새로 얻은 것이고, 그 이웃 나라라는 것은 바로 고구려이다.
《삼국사》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7년에 비렬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다가 29년에는 비렬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비렬홀은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달홀은 지금의 고성군(高城郡)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비렬홀은 또한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했다’고 칭한 것이다. 이 비석 또한 진흥왕 29년(무자)에 세워졌을 것인데, 그 순수(巡狩)의 일은 필시 사서(史書)에서 빠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이 세워진 자리는 바로 고구려와의 정계(政界)인 것이다.
지금 안변에서 북쪽으로 함흥까지가 3백 리이고, 함흥에서 북쪽으로 황초령(黃草嶺)까지가 1백 리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군현(郡縣)이 있었을 터이련만, 《삼국사》 지지(地志)에 의하면 신라의 자취가 겨우 비렬홀에 미쳤으니, 사서에서 빠뜨린 것인지, 혹은 함흥이 당시에 비렬홀에 속했었는지 모르겠다.
《동국지지(東國地志)》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高原)을 정천군(井泉郡)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端川)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로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나온다.― 하였다. 그러나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德源)이요 고원(高原)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신라본기 법흥왕(法興王)조에 의하면 “23년에 비로소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하였고, 진흥왕조에는 “12년에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29년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대체로 천자(天子)의 제도를 썼기 때문에 비문에서 짐(朕)이라 칭하였고, 또 제왕이 연호를 세운다[帝王建號]는 말도 있으니, 이 해에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기 때문이었다.
진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佛敎)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호하여 여생을 마치었다.” 하였고, 또 직관지(職官志)에는 이르기를 “국통(國統)이 1인이니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는데, 진흥왕 12년에 혜량법사(惠亮法師)를 사주로 삼았고, 대도유나(大都唯那)가 1인인데 진흥왕이 비로소 보량법사(寶良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으며, 대서성(大書省)이 1인인데 진흥왕이 안장법사(安藏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다.” 하였으니, 이 비문에 기록된 사문도인(沙門道人)이라는 것도 혜량ㆍ안장의 유일 것이다. 비문의 법장(法藏)ㆍ혜인(慧忍)이라는 것은 두 중의 이름인데, 대신(大臣)의 위에 기록한 것은 그들을 높인 때문인가 보다.
대등(大等)이란 신라의 관명(官名)이다. 《삼국사》 법흥왕본기에 “18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으니, 상대등이란 관직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그 지위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하였고, 아래로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선덕왕(善德王) 때에는 처음에 수품(水品)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는데, 그 관직에서 죽거나 계승하는 일을 사서에서는 반드시 기록하였다.
또 직관지에 이르기를 “상대등은 혹은 상신(上臣)이라고도 한다.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대등(大等)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 색복지(色服志)에는 “진골(眞骨)의 대등은 복두(幞頭)를 임의로 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비문에도 대등이 있으니, 여기에 의거한다면 당시 상대등ㆍ사대등 두 대등 외에 또 그냥 대등이라고만 칭한 관직도 있었던가?
제7행의 거(居) 자 아래에 이지러지고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冫+七)자는 이것이 혹 칠(柒) 자인가 싶다. 상고하건대, 진흥왕 때에 거칠부(居柒夫)가 있었으니 여기에 기록된 것이 혹 사람인가 싶다. 《삼국사》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6년에 대아찬(大阿飡)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서 국사(國史)를 찬수하게 했다.” 하였고,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진흥대왕 6년(을축)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국사를 찬수하고 진찬(珍飡) 벼슬이 더해졌다.”고 하였으니, 그의 벼슬이 대아찬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한 것이다. 또 진흥왕본기에 “12년에 거칠부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게 해서 승승장구하여 10개 군(郡)을 탈취했다.” 하였는데, 이때는 사관(史官)이 그의 관직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진지왕본기(眞智王本紀)에는 “원년에 이찬(伊飡)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그가 이찬 벼슬을 한 것은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대등이라고 칭하였는데, 그가 대등 벼슬을 한 것도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직관지에 이르기를,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25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직위는 급찬(級飡)에서 파진찬(波珍飡)까지로 했다.”고 하였는데, 이 비석은 29년에 세웠으니 즉 사대등을 설치한 뒤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官制)에 급찬이 파진찬의 밑에 있으니, 거칠부가 6년에 이미 파진찬이 되었다면 응당 다시 급찬으로 강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칠부의 벼슬이 처음에 대아찬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한 것은 6년에 있었던 일이고, 그 다음 파진찬에서 사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5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그 다음 사대등에서 이찬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9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고, 맨 마지막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바로 진지왕 원년에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을 세운 것이 그가 사대등으로 있을 때에 해당하니,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틀림없이 거칠부인 것이다.
수가(隨駕)의 조목에 훼부(喙部)라 칭한 것이 여섯이고 사훼부(沙喙部)라 칭한 것이 셋이니, 서로 뒤섞어 칭한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하건대, 신라의 육부(六部) 가운데 양부(梁部)ㆍ사량부(沙梁部)가 있으니, 아마 이것이 훼부ㆍ사훼부의 변칭(變稱)인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인(燕人)이 피난간 곳이기 때문에 ‘㴍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읍리(邑里)를 ‘沙㴍’ ‘漸㴍’라 칭한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르기를 “신라 사람의 방언에 ‘㴍’의 음을 ‘道’로 읽기 때문에 지금 혹 ‘沙梁’의 ‘梁’ 또한 ‘道’로 칭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㴍’자는 자서(字書)에도 보이지 않고, 연(燕) 지방에 탁수(涿水)가 있었으니 ‘㴍’은 아마 ‘涿’의 와전인 듯하다. 또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곳 풍속은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호칭하고, 그 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여 마치 중국에서 군현(群縣)을 말하듯이 한다. 그 나라에는 여섯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록이 있다.” 하였으니, 곧 여섯 탁평이 아마 육부일 듯한데 그것은 평(評) 자와 부(部) 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탁평(啄評)을 훼평(喙評)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체로 ‘喙’자와 ‘啄’자가 서로 비슷하고, ‘啄’자와 ‘涿’자가 서로 비슷하고 ‘涿’자와 ‘㴍’자가 서로 비슷하며, ‘㴍’은 또 ‘梁’으로 변하여 방언이 서로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로 와오(訛誤)된 것이니, 훼부(喙部)가 바로 양부(梁部)라는 것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만일 훼부와 사훼부가 계품(階品)이었다면 응당 저렇게 뒤섞어 써서 존비(尊卑)가 구별이 없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각 거주하는 곳을 기록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삼국사》 직관지에 의하면 신라의 관호(官號)가 17등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벌찬(伊伐飡)으로 혹은 이벌간(伊罰干), 또는 각간(角干)이라고도 하며, 둘째는 이척찬(伊尺飡)으로 혹은 이찬(伊飡)이라고도 하며, 셋째는 잡찬(迊飡)으로 혹은 잡판(迊判) 또는 소판(蘇判)이라고도 하며, 넷째는 파진찬(波珍飡)으로 혹은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하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으로 혹은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하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으로 혹은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하며, 여덟째는 사찬(沙飡)으로 혹은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하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으로 혹은 급벌간(及伐干)이라고도 하며, 열두번째는 대사(大舍), 열세번째는 사지(舍知)로 혹은 소사(小舍)라고도 하며, 열네번째는 길사(吉士)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찬(飡)과 간(干)이 서로 혼용되었다. 또 색복지(色服志)에 이르기를 “이찬(伊飡)과 잡찬(匝飡)은 금관(錦冠)을 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잡(迊)과 잡(匝)은 서로 같은 것이다. 또 귀산전(貴山傳)에 이르기를 “부친 무은(武殷)은 아간(阿干)이었다.” 하였으니, 아찬(阿飡)이 바로 아간인 것이다. 또 이르기를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에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ㆍ무리굴(武梨屈)ㆍ이리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무은(武殷)ㆍ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막게 하였다.” 하였으니, 급벌간(及伐干)이 바로 이 급간(級干)인 것이다. 또 직관지에 “길사(吉士)는 혹은 계지(稽知), 또는 길차(吉次)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당서》에서 길주(吉主)라고 칭한 것이다. 이 비문에는 소사(小舍) 아래에 길지(吉之)가 있는데, 지(之)와 지(知)는 음이 서로 비슷하니 이는 아마 제14등관인 길사(吉士)인 듯하다.
그렇다면 비문에 있는 잡간(迊干)은 바로 제3등관이고, 그 다음 대아간(大阿干)은 바로 제5등관이고, 그 다음 급간(及干)은 바로 제9등관이고, 그 다음 대사(大舍)는 바로 제12등관이고, 그 다음 소사(小舍)는 바로 제13등관이고, 그 다음 길지(吉之)는 바로 제14등관이니 기록한 것이 모두 차서가 있어 문란함이 없이 가지런하다.
복동지(服冬知)ㆍ비지부지(比知夫知) 등은 모두 인명(人名)이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가 있었고, 법흥왕 때에는 내마(奈麻) 법지(法知)가 있었으며, 진평왕 때에는 이찬 노지(弩知)가 있었으니, 그 때의 인명은 많이 방언(方言)으로 했던 것이다.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이르기를 “진흥대왕 12년에 왕이 대각찬(大角飡) 거칠부와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태(比台), 잡찬(迊飡)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將軍)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비차부가 곧 이 비문의 비지부지인 듯하다. 관명(官名)에서 계지(稽知)와 길차(吉次)가 이미 서로 통하고 보면 인명(人名)에서 비지(比知)와 비차(比次)가 어찌 서로 다를 것이 있겠는가.
진흥왕 12년에 비차부의 벼슬이 이미 대아간이었는데, 29년 순수(巡狩)할 당시에도 아직 그 벼슬로 어가(御駕)를 따라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제9행의 가장 윗글자는 우방(右傍) 阝만 남았는데 이는 부(部) 자인 듯하다. 셋째번에 있는 것은 혜(兮) 자인데 이는 인명의 하단(下段)이다. 신라 벌휴왕(伐休王) 때에 을길찬(乙吉飡) 구수혜(仇須兮)와 조비왕(助賁王)의 비(妃) 아이혜(阿爾兮)가 있었고, 진평왕 때에는 상사인(上舍人) 실혜(實兮)가 있었으니, 신라 사람은 혜(兮) 자로 이름을 지은 경우가 또한 많다. 그렇다면 기록된 것은 반드시 두 자로 된 이름이다.
또 제11행의 가장 위의 전(典) 자는 바로 관명(官名)이다. 신라의 관직은 전(典) 자로 호칭된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회궁전(會宮典)ㆍ빙고전(氷庫典)ㆍ금전(錦典)ㆍ약전(藥典)ㆍ율령전(律令典) 등의 유가 바로 그것이다.
종인(從人)은 대사(大舍)의 종인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세택(洗宅)은 종사지(從舍知) 2인이 있고, 숭문대(崇文臺)ㆍ악전(嶽典)ㆍ감전(監典) 등의 관서에도 모두 종사지 2인씩이 있는데, 사지(舍知)는 곧 소사(小舍)이다. 소사에게 이미 종인이 있고 보면 대사에게 또한 어찌 종인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사간조인(沙干助人)이란 곧 사찬(沙飡)의 조인(助人)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예궁전(穢宮典)에 조사지(助舍知) 4인이 있고, 회궁전(會宮典)에 조사지 4인이 있다. 사지(舍知)에게 이미 조인이 있고 보면 다른 관(官)에도 반드시 조인이 있을 것이니, 사간에게 조인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간은 바로 제팔등관(第八等官)이니, 응당 길사(吉士)의 밑에 기록하지 않겠지만, 사간의 조인은 낮은 것이기 때문에 끝에다 기록한 것이다. 길사의 밑에 또 소사(小舍)만 있고 그 이름은 이지러진 것은 이 또한 소사의 조인인 것이다.
제9행의 ‘(䒑/衆)內’와 제11행의 ‘(䒑/衆)公’에서 두 ‘(䒑/衆)’ 자가 서로 같은데 혹은 회(懷) 자 같기도 하고 혹은 애(哀) 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거하면, 법흥왕과 진흥왕을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비문 또한 애공이니, 두 ‘(䒑/衆)’ 자는 분명히 애(哀) 자인 것이다.
또 제10행의 가장 위의 ‘一’은 아마 사(舍) 자인 듯하다. 제9행에는 대사애내(大舍哀內)가 있고, 제10행에는 또 대사약사(大舍藥師)가 있으니, 그 사이에 기록된 것은 반드시 다 대사일 것이고, 여난(與難) 또한 의당 벼슬이 대사였던 것이다.
제1행 태왕(太王)의 태(太)는 바로 대(大)와 같은 것이요, 명기(銘記) 밑에 야(也) 자가 있는 것은 특별한 예(例)이다. 제2행의 ‘●’은 역(亦) 자에서 위의 점이 빠진 것이고, ‘(日/丁)’은 시(是) 자에서 아래 파(波 파임을 이름)가 빠진 것이다. 제3행의 ‘(그/尸)’은 위(違) 자이다. 제4행의 ‘寸耎’은 봉연(封堧) 두 자의 왼쪽이 이지러진 듯하다. 제5행의 ‘十’은 래(來) 자이고, ‘口’은 여(如) 자이다. 제7행의 ‘咅’는 부(部) 자이고, ‘(冫+七)’은 칠(柒) 자인 듯하다. 제9행의 ‘阝’은 ‘부(部)’ 자이고, 10행의 맨 위의 ‘乀’은 사(舍) 자이며, 맨 밑의 ‘’ 또한 사(舍) 자이다. 그 나머지 불완전한 글자들은 모두 알 수가 없다.
대등훼부거칠(大等喙居咅) ―대등은 관명(官名)이고 훼부는 지명(地名)이며, 거칠은 인명(人名)의 상단(上段)이다.― 지(知) ―인명의하단이다.― 잡간훼부복부지(迊干喙部服不知) ―잡간은 관명이고, 복부지는 인명이다.― 대아간비지미지(大阿干比知未知) ―대아간은 관명이고 비지미지는 인명이다.― 급간미지(及干未知) ― 급간은 관명이고 미지는 인명의 상단이다.― 혜((䒑/亅)) ―인명의 하단이다.― 대사사훼부영지(大舍沙喙部另知) ― 대사는 관명이고 영지는 인명이다.― 대사애내(大舍(䒑/衆)內) ―애내는 인명이다.― 종인훼부(從人喙部) ―종인은 대사(大舍)의 종인이고 인명은 이지러지고 없다.― 훼부여난(喙部與難) ―여난은 인명이고 그의 벼슬은 또한 의당 대사(大舍)인 것이다.― 대사약사(大舍藥師) ―약사는 인명이다.― 사훼부□형(沙喙部(䒑/馬)兄) ―’(䒑/亅)兄’ 인명이고 그 벼슬은 역시 의당 대사이다.― 소사(小人) ―관명만 있고 인명은 이지러졌다.― 전훼부분지(典喙部分知) ―전(典)은 관명의 하단이고 분지는 인명이다.― 길지애공흔평(吉之(䒑/衆)公欣平) ―길지는 관명이고 애공흔평은 인명이다.― 소사(小舍) ―관명만 있다.― 훼부비지(喙部非知) ―관명은 이지러졌고, 비지는 인명이다.― 사간조인사훼부윤(沙干助人沙喙部尹) ―사간조인은 관(官)이고 윤은 인명의 상단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진흥왕 순수 정계비(眞興王巡狩定界碑)가 함흥부의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어 왕통을 계승하여 몸가짐을 스스로 삼간다.[朕紹太祖之基 纂承王統 兢身自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방으로 지경을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맹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四方托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자년 가을 8월에 관할 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채방한다.[歲次戊子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상고하건대, 초방원은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초황령(草黃嶺) 아래에 있는데, 방(坊)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황(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곧 방과 황의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황초령(黃草嶺)이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1백 10리쯤에 있고 그 영(嶺) 밑에는 원(院)이 있는데, 고금에 걸쳐 이를 기록하는 이들이 혹은 초방(草坊)으로, 혹은 초방(草方)으로, 혹은 초황(草黃)으로, 혹은 황초(黃草)로도 기록을 해왔으나 그 실상은 한가지이다.
근세의 유 문익공 척기(兪文翼公拓基)의 집에 소장된 《금석록(金石錄)》 ―곧 비목(碑目)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에 의하면 ‘삼수 초방원의 진흥왕순수비[三水草坊院眞興王巡狩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삼수군에 초평원(草坪院)이 있어 이를 혹은 초방(草坊)이라고도 일컫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혹은 삼수에서 이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문 제2행의 맨 밑에 짐(朕) 자가 있고, 제3행의 맨 위에 소(紹) 자가 있으나, 상단(上段)이 이미 이지러져서 소(紹) 자의 위로 몇 자가 더 있었는지를 지금 알 수 없는 일인데, 《문헌비고》에서는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었다.[朕紹太祖之基]”고 새기어, 소(紹) 자를 곧바로 짐(朕) 자에 승접시킨 것은 잘못이다. 또 왕위(王位)를 왕통(王統)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다.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에 이르기를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씩이어서 전 비문은 4백 20자인데, 이지러져서 분변할 수가 없고 분변할 만한 것은 겨우 2백 78자이다.”고 하였다. ―《문헌비고》에서 나온 말이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12행에 행마다 35자인 경우, 전 비문에 빈칸이 하나도 없어야만 4백 20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현존한 탁본(拓本)을 가지고 본다면 이미 제1행의 하단에 빈칸이 일곱 자나 있고 제6행에는 빈칸이 한 자가 있으며 제7행에도 빈칸이 두 자나 있어 4백 20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설(說)이 엉성하다. 또 탁본 가운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인데, 지금 여기에는 “분변할 만한 것이 겨우 2백 78자이다.” 하고, 또 “행마다 35자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때에 본 것도 아마 지금의 탁본에 불과했을 터인데, 사견으로 억측하여 근거 없이 말을 한 것이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본기를 상고하건대, 진흥왕 16년인 무자년 겨울 10월에 북한산(北漢山)에 순수하여 봉강(封疆)을 개척해서 정하고, 12월에 북한산으로부터 오면서 경유하는 주군(州郡)에 모두 1년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니, 무자년은 과연 진흥왕이 함흥에 순수한 해이다. 그리하여 8월에 봉강을 정하고 10월에 북한산을 왔다가 12월에 환도(還都)한 것인데, 8월의 일만 유독 사서에 빠진 것일 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해 있을 때에 신라의 땅은 비렬홀(比列忽)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비렬홀은 바로 지금의 안변부이다. 그리고 삼국이 통합된 이후에도 천정(泉井)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천정은 곧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함흥은 안변의 북쪽으로 2백여 리쯤에 있고, 단천(端川)은 함흥의 북쪽으로 3백 60리쯤에 있는데, 이 순수비를 가지고 본다면 단천 이남이 일찍이 신라 영토로 꺾여 들어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모두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유독 먼 변방의 편석(片石) 하나가 남아서 천고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하였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진흥왕 원년이 경신년이고 16년이 을해년이고 29년이 무자년이니, 여기에서 16년을 무자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진흥왕이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함흥에 봉강을 정한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사서에서 빠뜨린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렇게 여러 말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이것도 잘못이다. 지금 안변에서 함흥까지가 3백 10리이고 함흥에서 단천까지가 3백 80리이니, 도리(道里)를 논한 것도 잘못되었다. 그리고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이상의 것은 곧 구탁본비(舊拓本碑)의 하단이다. 이 탁본은 또한 빗돌이 꺾어져서 두 조각이 된 것이다. 그 흔적은 제1행의 순수(巡狩) 두 글자 사이로부터 시작하여 제2행의 시이(是以) 두 글자 사이를 통과해서 죽 연하여 왼쪽으로 내려갔다. 또 제3행의 위(違) 자 아래, 우(又) 자 위와 제4행의 부(府) 자 아래, ‘寸’자 위와 제5행의 노(勞) 자 아래, 유(有) 자 위와 제5행의 충(忠) 자와 상대가 되는 제6행의 제14번째 빈칸을 통과하여 제7행의 훼(喙) 자 아래, 거(居) 자 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연결된 흔적이 있으니, 이는 빗돌이 꺾여서 생긴 틈이다.
또 제6행의 고(顧) 자 아래와 7행의 인(忍) 자 아래의 맨 끝까지와 제11, 12행의 맨 꼭대기와 애(哀) 자 아래와 조(助) 자 아래의 이지러진 것은 모두 종이가 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함흥에 있는 순수비의 상단(上段)이다.〉
전 비문 가운데 분별한 것이 70자인데, 이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제1행의 가장 높이 위치한 진(眞) 자로부터 제8행 아래 맨 끝의 사(沙) 자까지를 기준하여 모두 21자이다. 그중에 분변할 만한 것은 제1행에 12자, 제2행에 3자, 제3행에 4자, 제4행에 3자, 제5행에 7자, 제6행에 4자, 제7행에 3자, 제8행에 11자, 제9행에 11자, 제10행에 8자, 제11행에 4자이고, 제12행은 모호하여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북한산(北漢山)은 한 무제(漢武帝)의 강역(疆域)이었는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 본기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획정(劃定)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으니, 이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다. 또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는데, 남천주는 지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 진평왕 2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략하였고, 26년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니, 이 비석은 곧 경계를 정한 것이었다.
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남천주를 설치한 때가 비렬홀주(比列忽州)를 폐한 때와 서로 같은 해인데, 황초령의 비가 비렬홀주를 폐하던 해에 세워졌고 보면 이 비도 의당 같이 남천주를 설치하던 때에 세워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있으니, 반드시 남천주를 설치한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또 진흥왕의 재위(在位) 기간이 37년이고 보면, 그것이 세워진 때는 29년에서 37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비문 제1행의 태왕(太王)이란 글자와 제5행의 충신정성(忠信精誠)이란 글자와 제7행의 도인(道人)이란 글자는 모두가 황초령의 비문과 같다. 또 부지(夫智)는 곧 황초령비문의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이니, 지(智)는 지(知)와 같은 것이다. 급간(及干) 미지(未智) 또한 황초령비문에 있는 것이니, 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인가 싶다.
제8행의 급간내대지(及干內大智)는 급간은 곧 관명이고 내대지는 곧 인명이다. 간남천군주사(干南川軍主沙)란 것으로 말하면, 간(干)은 바로 관명의 하단이니 아간(阿干)ㆍ잡간(迊干) 등과 같은 것이다. 지금 탁본을 보건대, 간(干) 자의 윗자는 마치 잡(迊) 자인 듯하나 감히 단정할 수는 없다. 군주(軍主)는 곧 도독(都督)이다. 《삼국사》 직관지에 “도독은 9인이다.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 군주(悉直州軍主)로 삼았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이를 총관(總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도독으로 일컬었다. 관등(官登)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로 했다.” 하였으니, 외관(外官)으로 중대한 관직이다. 사(沙)는 바로 거주하는 부명(部名)의 상단이거나 혹은 인명의 상단일 것이다. 제9행의 대내□지(大奈□智)에서 대내□(大奈□)는 관명이다. 직관지에 대내마(大奈麻)ㆍ내마(奈麻) 두 명칭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것은 바로 대내마인 것이다. 지(智)는 곧 인명의 상단이다. 차내(次奈)에서 차(次)는 곧 인명의 하단이요, 내(奈)는 바로 관명의 상단이니 반드시 내마(奈麻)일 것이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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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攷) | ||||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 |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지금 탁본을 가지고 보건대, 밖은 난격(欄格)으로 되어 있어 하단(下段) 제2행의 짐(朕) 자와 제3행의 응(應) 자 밑은 바로 난격과 접(接)하였고, 응(應) 자는 제5행 맨 밑의 口와 서로 마주하였으며, 상단(上段)은 망결(亡缺)되었다. 현존한 글자로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제5행의 미(未) 자이다.
그리고 지금 위로 미(未) 자에서부터 아래로 口에 이르기까지를 한(漢) 나라 건초척(建初尺)으로 재본 결과 길이가 4척 4촌 5푼이다. 넓이로 말하면, 제1행에 난격이 있고 제12행의 하단 밖에도 난격이 있어 이를 건초척으로 재본 결과 넓이가 1척 8촌이다. 그러나 난격 밖의 길이와 넓이 및 두께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
비문이 모두 12행임은 난격으로 정할 수 있고 그 하단 글자의 끝도 또한 난격으로 정할 수 있으나, 다만 상단은 망실되어 그 끝까지가 몇 자인지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가장 높이 위치한 제5행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서술하는 바이다.
제1행은 20자가 완전하다. 가장 위에 위치한 팔(八)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넉 자가 모자란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야(也) 자는 제5행의 제24자에 해당한 口자와 서로 마주하였고 아래는 그대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줄은 기왕 제수(題首)이고 보면 이 야(也) 자가 바로 그 끝이요, 망결된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다. ―모두 29자임― 가장 위의 세(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짐(朕)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3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두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소(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응(應)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4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사(四)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화(化)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5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1자임― 가장 위의 미(未) 자는 이 비문 가운데서 가장 높이 위치한 글자이다. 아래 맨 끝의 口자는 제4행의 화(化) 자와 끝이 같다.
제6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깎인 것이 여덟 자이며 빈칸이 하나이다. ―모두 28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口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7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며 깎인 것이 한 자이고 빈 칸이 둘이다. ―모두 23자임― 가장 위의 氺자가 제5행에 비하면 일곱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冫+七)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8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21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여덟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9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석 자이다. ―모두 19자임― 가장 위의 阝자는 제5행에 비하면 아홉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冖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0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4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16자임― 가장 위의 乀자는 제5행에 비하면 13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1행은 13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전(典)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5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사(舍)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 자가 모자란다.
제12행은 12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훼(喙)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6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윤(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자가 모자란다.
이상 모두 12행에서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이며 깎인 것이 17자이고 빈칸이 셋으로 총 2백 72자이다.
비석의 상단이 이미 망실되었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액(篆額)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북한산(北漢山)의 비 또한 이 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인데 규수를 만들지 않았으니, 이 비도 북한산의 비와 같은 예일 듯하다.
비문(碑文)에 이르기를 “8월 21일 계미(癸未)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차(歲次) 무자(戊子) 추팔월(秋八月)이라” 하였으니, 상고하건대 신라 진흥왕 29년이 무자년으로 그 해가 바로 대창(大昌)으로 개원(改元)한 해이다. 이 해가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10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15년에 해당하고, 중국(中國)에서는 진 폐제(陳廢帝) 백종(伯宗)의 광대(光大) 2년, 북제 후주(北齊後主) 위(緯)의 천통(天統) 4년, 후주 무제(後周武帝) 옹(邕)의 천화(天和) 3년, 후량 세종(後梁世宗) 귀(巋)의 천보(天保) 7년에 해당한다.
《북사(北史)》 제후주본기(齊後主本紀)에 의거하면 “천통 4년 6월 초하루(갑자)에 큰 비가 내렸고 갑신일에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였고, 또 주무제본기(周武帝本紀)에는 “천화 3년 6월 갑술일에 패성(孛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남사(南史)》 진폐제본기(陳廢帝本紀)에는 “광대 2년 6월 정해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해 6월 초하루가 갑자일이고 24일이 정해일인 것이다. 주무제본기에는 “7월 인일에 양충(楊忠)이 죽었다.”고 하였고, 진폐제본기에는 “7월 무신일에 신라국(新羅國)에서 사신을 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임술일에 영양왕(永陽王)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갑자에서 임술까지가 모두 59일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작은 달이 있었을 것이고 보면 7월 그믐날이 의당 임술일이고 8월 초하루가 의당 계해일이 된다. 또 주무제본기에는 “8월 을축일에 한원라(韓元羅)가 죽었다. 계유일에 제(帝)가 대덕전(大德殿)에 임어했다.” 하였으니, 을축일이란 곧 8월 3일이고 계유일이란 곧 11일인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8월 21일이 의당 계미일이 되니 이 비문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이 된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것이 16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三國史)》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으니, 신라의 시법(諡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였다. 이로부터는 왕이 훙한 뒤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도 37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도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 칭하였고, 북한산의 비문에도 진흥이란 두 글자가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법흥(法興)이니 진흥이니 하는 칭호는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가 아니요, 바로 생존시에 부른 칭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의 조서(詔書)에는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使持節 東夷校尉)로 삼는다.” 하였고 《수서(隋書)》 개황(開皇) 14년조에는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와서 하례하였다.” 하였으며, 《당서(唐書)》 정관(貞觀) 6년조에는 “진평(眞平)이 졸하고 그의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등의 칭호는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시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서》의 기록에서 김무열(金武烈)이라 칭하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칭하였으니,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칭한 것도 역시 생존시에 호칭한 것이다.
지금의 함흥부(咸興府)는 옛날 동옥저(東沃沮)의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여기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고, 후한(後漢) 초기에는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高句麗)에 소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예전(濊傳)에 의거하면 “불내예(不耐濊)가 한말(漢末)에 다시 고구려에 소속되었다.” 하였고, 또 동옥저전(東沃沮傳)에는 “나라가 작아서 대국(大國)의 사이에서 핍박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 말한 동옥저와 불내가 곧 지금의 함흥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국조왕(國祖王)조에 의하면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創海)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중원(中元) 원년에 해당한다.
함흥의 땅은 분명히 후한 때부터 이미 고구려에 소속되었는데, 이 비문에서 “관할 지경을 순수한다.[巡狩管境]”고 하였고 보면, 진흥왕 때에는 함흥이 또 신라의 소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비문에는 또 “사방으로 지경을 열어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서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진흥왕 때 이 땅을 새로 얻은 것이고, 그 이웃 나라라는 것은 바로 고구려이다.
《삼국사》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7년에 비렬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다가 29년에는 비렬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비렬홀은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달홀은 지금의 고성군(高城郡)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비렬홀은 또한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했다’고 칭한 것이다. 이 비석 또한 진흥왕 29년(무자)에 세워졌을 것인데, 그 순수(巡狩)의 일은 필시 사서(史書)에서 빠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이 세워진 자리는 바로 고구려와의 정계(政界)인 것이다.
지금 안변에서 북쪽으로 함흥까지가 3백 리이고, 함흥에서 북쪽으로 황초령(黃草嶺)까지가 1백 리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군현(郡縣)이 있었을 터이련만, 《삼국사》 지지(地志)에 의하면 신라의 자취가 겨우 비렬홀에 미쳤으니, 사서에서 빠뜨린 것인지, 혹은 함흥이 당시에 비렬홀에 속했었는지 모르겠다.
《동국지지(東國地志)》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高原)을 정천군(井泉郡)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端川)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로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나온다.― 하였다. 그러나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德源)이요 고원(高原)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신라본기 법흥왕(法興王)조에 의하면 “23년에 비로소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하였고, 진흥왕조에는 “12년에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29년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대체로 천자(天子)의 제도를 썼기 때문에 비문에서 짐(朕)이라 칭하였고, 또 제왕이 연호를 세운다[帝王建號]는 말도 있으니, 이 해에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기 때문이었다.
진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佛敎)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호하여 여생을 마치었다.” 하였고, 또 직관지(職官志)에는 이르기를 “국통(國統)이 1인이니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는데, 진흥왕 12년에 혜량법사(惠亮法師)를 사주로 삼았고, 대도유나(大都唯那)가 1인인데 진흥왕이 비로소 보량법사(寶良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으며, 대서성(大書省)이 1인인데 진흥왕이 안장법사(安藏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다.” 하였으니, 이 비문에 기록된 사문도인(沙門道人)이라는 것도 혜량ㆍ안장의 유일 것이다. 비문의 법장(法藏)ㆍ혜인(慧忍)이라는 것은 두 중의 이름인데, 대신(大臣)의 위에 기록한 것은 그들을 높인 때문인가 보다.
대등(大等)이란 신라의 관명(官名)이다. 《삼국사》 법흥왕본기에 “18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으니, 상대등이란 관직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그 지위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하였고, 아래로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선덕왕(善德王) 때에는 처음에 수품(水品)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는데, 그 관직에서 죽거나 계승하는 일을 사서에서는 반드시 기록하였다.
또 직관지에 이르기를 “상대등은 혹은 상신(上臣)이라고도 한다.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대등(大等)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 색복지(色服志)에는 “진골(眞骨)의 대등은 복두(幞頭)를 임의로 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비문에도 대등이 있으니, 여기에 의거한다면 당시 상대등ㆍ사대등 두 대등 외에 또 그냥 대등이라고만 칭한 관직도 있었던가?
제7행의 거(居) 자 아래에 이지러지고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冫+七)자는 이것이 혹 칠(柒) 자인가 싶다. 상고하건대, 진흥왕 때에 거칠부(居柒夫)가 있었으니 여기에 기록된 것이 혹 사람인가 싶다. 《삼국사》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6년에 대아찬(大阿飡)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서 국사(國史)를 찬수하게 했다.” 하였고,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진흥대왕 6년(을축)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국사를 찬수하고 진찬(珍飡) 벼슬이 더해졌다.”고 하였으니, 그의 벼슬이 대아찬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한 것이다. 또 진흥왕본기에 “12년에 거칠부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게 해서 승승장구하여 10개 군(郡)을 탈취했다.” 하였는데, 이때는 사관(史官)이 그의 관직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진지왕본기(眞智王本紀)에는 “원년에 이찬(伊飡)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그가 이찬 벼슬을 한 것은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대등이라고 칭하였는데, 그가 대등 벼슬을 한 것도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직관지에 이르기를,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25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직위는 급찬(級飡)에서 파진찬(波珍飡)까지로 했다.”고 하였는데, 이 비석은 29년에 세웠으니 즉 사대등을 설치한 뒤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官制)에 급찬이 파진찬의 밑에 있으니, 거칠부가 6년에 이미 파진찬이 되었다면 응당 다시 급찬으로 강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칠부의 벼슬이 처음에 대아찬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한 것은 6년에 있었던 일이고, 그 다음 파진찬에서 사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5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그 다음 사대등에서 이찬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9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고, 맨 마지막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바로 진지왕 원년에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을 세운 것이 그가 사대등으로 있을 때에 해당하니,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틀림없이 거칠부인 것이다.
수가(隨駕)의 조목에 훼부(喙部)라 칭한 것이 여섯이고 사훼부(沙喙部)라 칭한 것이 셋이니, 서로 뒤섞어 칭한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하건대, 신라의 육부(六部) 가운데 양부(梁部)ㆍ사량부(沙梁部)가 있으니, 아마 이것이 훼부ㆍ사훼부의 변칭(變稱)인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인(燕人)이 피난간 곳이기 때문에 ‘㴍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읍리(邑里)를 ‘沙㴍’ ‘漸㴍’라 칭한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르기를 “신라 사람의 방언에 ‘㴍’의 음을 ‘道’로 읽기 때문에 지금 혹 ‘沙梁’의 ‘梁’ 또한 ‘道’로 칭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㴍’자는 자서(字書)에도 보이지 않고, 연(燕) 지방에 탁수(涿水)가 있었으니 ‘㴍’은 아마 ‘涿’의 와전인 듯하다. 또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곳 풍속은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호칭하고, 그 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여 마치 중국에서 군현(群縣)을 말하듯이 한다. 그 나라에는 여섯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록이 있다.” 하였으니, 곧 여섯 탁평이 아마 육부일 듯한데 그것은 평(評) 자와 부(部) 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탁평(啄評)을 훼평(喙評)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체로 ‘喙’자와 ‘啄’자가 서로 비슷하고, ‘啄’자와 ‘涿’자가 서로 비슷하고 ‘涿’자와 ‘㴍’자가 서로 비슷하며, ‘㴍’은 또 ‘梁’으로 변하여 방언이 서로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로 와오(訛誤)된 것이니, 훼부(喙部)가 바로 양부(梁部)라는 것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만일 훼부와 사훼부가 계품(階品)이었다면 응당 저렇게 뒤섞어 써서 존비(尊卑)가 구별이 없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각 거주하는 곳을 기록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삼국사》 직관지에 의하면 신라의 관호(官號)가 17등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벌찬(伊伐飡)으로 혹은 이벌간(伊罰干), 또는 각간(角干)이라고도 하며, 둘째는 이척찬(伊尺飡)으로 혹은 이찬(伊飡)이라고도 하며, 셋째는 잡찬(迊飡)으로 혹은 잡판(迊判) 또는 소판(蘇判)이라고도 하며, 넷째는 파진찬(波珍飡)으로 혹은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하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으로 혹은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하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으로 혹은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하며, 여덟째는 사찬(沙飡)으로 혹은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하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으로 혹은 급벌간(及伐干)이라고도 하며, 열두번째는 대사(大舍), 열세번째는 사지(舍知)로 혹은 소사(小舍)라고도 하며, 열네번째는 길사(吉士)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찬(飡)과 간(干)이 서로 혼용되었다. 또 색복지(色服志)에 이르기를 “이찬(伊飡)과 잡찬(匝飡)은 금관(錦冠)을 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잡(迊)과 잡(匝)은 서로 같은 것이다. 또 귀산전(貴山傳)에 이르기를 “부친 무은(武殷)은 아간(阿干)이었다.” 하였으니, 아찬(阿飡)이 바로 아간인 것이다. 또 이르기를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에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ㆍ무리굴(武梨屈)ㆍ이리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무은(武殷)ㆍ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막게 하였다.” 하였으니, 급벌간(及伐干)이 바로 이 급간(級干)인 것이다. 또 직관지에 “길사(吉士)는 혹은 계지(稽知), 또는 길차(吉次)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당서》에서 길주(吉主)라고 칭한 것이다. 이 비문에는 소사(小舍) 아래에 길지(吉之)가 있는데, 지(之)와 지(知)는 음이 서로 비슷하니 이는 아마 제14등관인 길사(吉士)인 듯하다.
그렇다면 비문에 있는 잡간(迊干)은 바로 제3등관이고, 그 다음 대아간(大阿干)은 바로 제5등관이고, 그 다음 급간(及干)은 바로 제9등관이고, 그 다음 대사(大舍)는 바로 제12등관이고, 그 다음 소사(小舍)는 바로 제13등관이고, 그 다음 길지(吉之)는 바로 제14등관이니 기록한 것이 모두 차서가 있어 문란함이 없이 가지런하다.
복동지(服冬知)ㆍ비지부지(比知夫知) 등은 모두 인명(人名)이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가 있었고, 법흥왕 때에는 내마(奈麻) 법지(法知)가 있었으며, 진평왕 때에는 이찬 노지(弩知)가 있었으니, 그 때의 인명은 많이 방언(方言)으로 했던 것이다.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이르기를 “진흥대왕 12년에 왕이 대각찬(大角飡) 거칠부와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태(比台), 잡찬(迊飡)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將軍)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비차부가 곧 이 비문의 비지부지인 듯하다. 관명(官名)에서 계지(稽知)와 길차(吉次)가 이미 서로 통하고 보면 인명(人名)에서 비지(比知)와 비차(比次)가 어찌 서로 다를 것이 있겠는가.
진흥왕 12년에 비차부의 벼슬이 이미 대아간이었는데, 29년 순수(巡狩)할 당시에도 아직 그 벼슬로 어가(御駕)를 따라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제9행의 가장 윗글자는 우방(右傍) 阝만 남았는데 이는 부(部) 자인 듯하다. 셋째번에 있는 것은 혜(兮) 자인데 이는 인명의 하단(下段)이다. 신라 벌휴왕(伐休王) 때에 을길찬(乙吉飡) 구수혜(仇須兮)와 조비왕(助賁王)의 비(妃) 아이혜(阿爾兮)가 있었고, 진평왕 때에는 상사인(上舍人) 실혜(實兮)가 있었으니, 신라 사람은 혜(兮) 자로 이름을 지은 경우가 또한 많다. 그렇다면 기록된 것은 반드시 두 자로 된 이름이다.
또 제11행의 가장 위의 전(典) 자는 바로 관명(官名)이다. 신라의 관직은 전(典) 자로 호칭된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회궁전(會宮典)ㆍ빙고전(氷庫典)ㆍ금전(錦典)ㆍ약전(藥典)ㆍ율령전(律令典) 등의 유가 바로 그것이다.
종인(從人)은 대사(大舍)의 종인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세택(洗宅)은 종사지(從舍知) 2인이 있고, 숭문대(崇文臺)ㆍ악전(嶽典)ㆍ감전(監典) 등의 관서에도 모두 종사지 2인씩이 있는데, 사지(舍知)는 곧 소사(小舍)이다. 소사에게 이미 종인이 있고 보면 대사에게 또한 어찌 종인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사간조인(沙干助人)이란 곧 사찬(沙飡)의 조인(助人)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예궁전(穢宮典)에 조사지(助舍知) 4인이 있고, 회궁전(會宮典)에 조사지 4인이 있다. 사지(舍知)에게 이미 조인이 있고 보면 다른 관(官)에도 반드시 조인이 있을 것이니, 사간에게 조인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간은 바로 제팔등관(第八等官)이니, 응당 길사(吉士)의 밑에 기록하지 않겠지만, 사간의 조인은 낮은 것이기 때문에 끝에다 기록한 것이다. 길사의 밑에 또 소사(小舍)만 있고 그 이름은 이지러진 것은 이 또한 소사의 조인인 것이다.
제9행의 ‘(䒑/衆)內’와 제11행의 ‘(䒑/衆)公’에서 두 ‘(䒑/衆)’ 자가 서로 같은데 혹은 회(懷) 자 같기도 하고 혹은 애(哀) 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거하면, 법흥왕과 진흥왕을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비문 또한 애공이니, 두 ‘(䒑/衆)’ 자는 분명히 애(哀) 자인 것이다.
또 제10행의 가장 위의 ‘一’은 아마 사(舍) 자인 듯하다. 제9행에는 대사애내(大舍哀內)가 있고, 제10행에는 또 대사약사(大舍藥師)가 있으니, 그 사이에 기록된 것은 반드시 다 대사일 것이고, 여난(與難) 또한 의당 벼슬이 대사였던 것이다.
제1행 태왕(太王)의 태(太)는 바로 대(大)와 같은 것이요, 명기(銘記) 밑에 야(也) 자가 있는 것은 특별한 예(例)이다. 제2행의 ‘●’은 역(亦) 자에서 위의 점이 빠진 것이고, ‘(日/丁)’은 시(是) 자에서 아래 파(波 파임을 이름)가 빠진 것이다. 제3행의 ‘(그/尸)’은 위(違) 자이다. 제4행의 ‘寸耎’은 봉연(封堧) 두 자의 왼쪽이 이지러진 듯하다. 제5행의 ‘十’은 래(來) 자이고, ‘口’은 여(如) 자이다. 제7행의 ‘咅’는 부(部) 자이고, ‘(冫+七)’은 칠(柒) 자인 듯하다. 제9행의 ‘阝’은 ‘부(部)’ 자이고, 10행의 맨 위의 ‘乀’은 사(舍) 자이며, 맨 밑의 ‘’ 또한 사(舍) 자이다. 그 나머지 불완전한 글자들은 모두 알 수가 없다.
대등훼부거칠(大等喙居咅) ―대등은 관명(官名)이고 훼부는 지명(地名)이며, 거칠은 인명(人名)의 상단(上段)이다.― 지(知) ―인명의하단이다.― 잡간훼부복부지(迊干喙部服不知) ―잡간은 관명이고, 복부지는 인명이다.― 대아간비지미지(大阿干比知未知) ―대아간은 관명이고 비지미지는 인명이다.― 급간미지(及干未知) ― 급간은 관명이고 미지는 인명의 상단이다.― 혜((䒑/亅)) ―인명의 하단이다.― 대사사훼부영지(大舍沙喙部另知) ― 대사는 관명이고 영지는 인명이다.― 대사애내(大舍(䒑/衆)內) ―애내는 인명이다.― 종인훼부(從人喙部) ―종인은 대사(大舍)의 종인이고 인명은 이지러지고 없다.― 훼부여난(喙部與難) ―여난은 인명이고 그의 벼슬은 또한 의당 대사(大舍)인 것이다.― 대사약사(大舍藥師) ―약사는 인명이다.― 사훼부□형(沙喙部(䒑/馬)兄) ―’(䒑/亅)兄’ 인명이고 그 벼슬은 역시 의당 대사이다.― 소사(小人) ―관명만 있고 인명은 이지러졌다.― 전훼부분지(典喙部分知) ―전(典)은 관명의 하단이고 분지는 인명이다.― 길지애공흔평(吉之(䒑/衆)公欣平) ―길지는 관명이고 애공흔평은 인명이다.― 소사(小舍) ―관명만 있다.― 훼부비지(喙部非知) ―관명은 이지러졌고, 비지는 인명이다.― 사간조인사훼부윤(沙干助人沙喙部尹) ―사간조인은 관(官)이고 윤은 인명의 상단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진흥왕 순수 정계비(眞興王巡狩定界碑)가 함흥부의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어 왕통을 계승하여 몸가짐을 스스로 삼간다.[朕紹太祖之基 纂承王統 兢身自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방으로 지경을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맹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四方托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자년 가을 8월에 관할 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채방한다.[歲次戊子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상고하건대, 초방원은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초황령(草黃嶺) 아래에 있는데, 방(坊)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황(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곧 방과 황의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황초령(黃草嶺)이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1백 10리쯤에 있고 그 영(嶺) 밑에는 원(院)이 있는데, 고금에 걸쳐 이를 기록하는 이들이 혹은 초방(草坊)으로, 혹은 초방(草方)으로, 혹은 초황(草黃)으로, 혹은 황초(黃草)로도 기록을 해왔으나 그 실상은 한가지이다.
근세의 유 문익공 척기(兪文翼公拓基)의 집에 소장된 《금석록(金石錄)》 ―곧 비목(碑目)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에 의하면 ‘삼수 초방원의 진흥왕순수비[三水草坊院眞興王巡狩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삼수군에 초평원(草坪院)이 있어 이를 혹은 초방(草坊)이라고도 일컫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혹은 삼수에서 이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문 제2행의 맨 밑에 짐(朕) 자가 있고, 제3행의 맨 위에 소(紹) 자가 있으나, 상단(上段)이 이미 이지러져서 소(紹) 자의 위로 몇 자가 더 있었는지를 지금 알 수 없는 일인데, 《문헌비고》에서는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었다.[朕紹太祖之基]”고 새기어, 소(紹) 자를 곧바로 짐(朕) 자에 승접시킨 것은 잘못이다. 또 왕위(王位)를 왕통(王統)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다.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에 이르기를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씩이어서 전 비문은 4백 20자인데, 이지러져서 분변할 수가 없고 분변할 만한 것은 겨우 2백 78자이다.”고 하였다. ―《문헌비고》에서 나온 말이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12행에 행마다 35자인 경우, 전 비문에 빈칸이 하나도 없어야만 4백 20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현존한 탁본(拓本)을 가지고 본다면 이미 제1행의 하단에 빈칸이 일곱 자나 있고 제6행에는 빈칸이 한 자가 있으며 제7행에도 빈칸이 두 자나 있어 4백 20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설(說)이 엉성하다. 또 탁본 가운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인데, 지금 여기에는 “분변할 만한 것이 겨우 2백 78자이다.” 하고, 또 “행마다 35자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때에 본 것도 아마 지금의 탁본에 불과했을 터인데, 사견으로 억측하여 근거 없이 말을 한 것이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본기를 상고하건대, 진흥왕 16년인 무자년 겨울 10월에 북한산(北漢山)에 순수하여 봉강(封疆)을 개척해서 정하고, 12월에 북한산으로부터 오면서 경유하는 주군(州郡)에 모두 1년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니, 무자년은 과연 진흥왕이 함흥에 순수한 해이다. 그리하여 8월에 봉강을 정하고 10월에 북한산을 왔다가 12월에 환도(還都)한 것인데, 8월의 일만 유독 사서에 빠진 것일 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해 있을 때에 신라의 땅은 비렬홀(比列忽)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비렬홀은 바로 지금의 안변부이다. 그리고 삼국이 통합된 이후에도 천정(泉井)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천정은 곧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함흥은 안변의 북쪽으로 2백여 리쯤에 있고, 단천(端川)은 함흥의 북쪽으로 3백 60리쯤에 있는데, 이 순수비를 가지고 본다면 단천 이남이 일찍이 신라 영토로 꺾여 들어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모두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유독 먼 변방의 편석(片石) 하나가 남아서 천고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하였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진흥왕 원년이 경신년이고 16년이 을해년이고 29년이 무자년이니, 여기에서 16년을 무자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진흥왕이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함흥에 봉강을 정한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사서에서 빠뜨린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렇게 여러 말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이것도 잘못이다. 지금 안변에서 함흥까지가 3백 10리이고 함흥에서 단천까지가 3백 80리이니, 도리(道里)를 논한 것도 잘못되었다. 그리고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이상의 것은 곧 구탁본비(舊拓本碑)의 하단이다. 이 탁본은 또한 빗돌이 꺾어져서 두 조각이 된 것이다. 그 흔적은 제1행의 순수(巡狩) 두 글자 사이로부터 시작하여 제2행의 시이(是以) 두 글자 사이를 통과해서 죽 연하여 왼쪽으로 내려갔다. 또 제3행의 위(違) 자 아래, 우(又) 자 위와 제4행의 부(府) 자 아래, ‘寸’자 위와 제5행의 노(勞) 자 아래, 유(有) 자 위와 제5행의 충(忠) 자와 상대가 되는 제6행의 제14번째 빈칸을 통과하여 제7행의 훼(喙) 자 아래, 거(居) 자 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연결된 흔적이 있으니, 이는 빗돌이 꺾여서 생긴 틈이다.
또 제6행의 고(顧) 자 아래와 7행의 인(忍) 자 아래의 맨 끝까지와 제11, 12행의 맨 꼭대기와 애(哀) 자 아래와 조(助) 자 아래의 이지러진 것은 모두 종이가 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함흥에 있는 순수비의 상단(上段)이다.〉
전 비문 가운데 분별한 것이 70자인데, 이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제1행의 가장 높이 위치한 진(眞) 자로부터 제8행 아래 맨 끝의 사(沙) 자까지를 기준하여 모두 21자이다. 그중에 분변할 만한 것은 제1행에 12자, 제2행에 3자, 제3행에 4자, 제4행에 3자, 제5행에 7자, 제6행에 4자, 제7행에 3자, 제8행에 11자, 제9행에 11자, 제10행에 8자, 제11행에 4자이고, 제12행은 모호하여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북한산(北漢山)은 한 무제(漢武帝)의 강역(疆域)이었는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 본기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획정(劃定)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으니, 이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다. 또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는데, 남천주는 지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 진평왕 2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략하였고, 26년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니, 이 비석은 곧 경계를 정한 것이었다.
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남천주를 설치한 때가 비렬홀주(比列忽州)를 폐한 때와 서로 같은 해인데, 황초령의 비가 비렬홀주를 폐하던 해에 세워졌고 보면 이 비도 의당 같이 남천주를 설치하던 때에 세워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있으니, 반드시 남천주를 설치한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또 진흥왕의 재위(在位) 기간이 37년이고 보면, 그것이 세워진 때는 29년에서 37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비문 제1행의 태왕(太王)이란 글자와 제5행의 충신정성(忠信精誠)이란 글자와 제7행의 도인(道人)이란 글자는 모두가 황초령의 비문과 같다. 또 부지(夫智)는 곧 황초령비문의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이니, 지(智)는 지(知)와 같은 것이다. 급간(及干) 미지(未智) 또한 황초령비문에 있는 것이니, 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인가 싶다.
제8행의 급간내대지(及干內大智)는 급간은 곧 관명이고 내대지는 곧 인명이다. 간남천군주사(干南川軍主沙)란 것으로 말하면, 간(干)은 바로 관명의 하단이니 아간(阿干)ㆍ잡간(迊干) 등과 같은 것이다. 지금 탁본을 보건대, 간(干) 자의 윗자는 마치 잡(迊) 자인 듯하나 감히 단정할 수는 없다. 군주(軍主)는 곧 도독(都督)이다. 《삼국사》 직관지에 “도독은 9인이다.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 군주(悉直州軍主)로 삼았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이를 총관(總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도독으로 일컬었다. 관등(官登)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로 했다.” 하였으니, 외관(外官)으로 중대한 관직이다. 사(沙)는 바로 거주하는 부명(部名)의 상단이거나 혹은 인명의 상단일 것이다. 제9행의 대내□지(大奈□智)에서 대내□(大奈□)는 관명이다. 직관지에 대내마(大奈麻)ㆍ내마(奈麻) 두 명칭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것은 바로 대내마인 것이다. 지(智)는 곧 인명의 상단이다. 차내(次奈)에서 차(次)는 곧 인명의 하단이요, 내(奈)는 바로 관명의 상단이니 반드시 내마(奈麻)일 것이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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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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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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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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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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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分界。
四郡二督府
三國肇基
新羅疆域
高勾麗疆域。
百濟疆域。
高麗統合
我國疆域。
京都。
漢城府 北漢山城蕩春臺洞附。
北漢山城。
蕩春臺洞。
開城府。大興山城靑石洞白峙鎭附。
大興山城。
靑石洞
白峙鎭
江華府 文殊山城白馬山城附。
文殊山城
白馬山城
京畿道 從北至南分作二圖
南漢山城
龍津
洪福山
臨津
喬桐 注文島附
永宗花梁鎭 以下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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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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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巖
鬼斧破雲關。中分靑泥丸。陰陽煉萬古。雷雨磨半團。玲瓏玉鏡開。泛㶑瑤光寒。魑魅畏情狀。猨鳥窺肺肝。摩挲惜輕輕。觸爪聲珊珊。槃陀金屈膝。古色蒼琅玕。危哉望欲墜。賴玆承跗安。造物費神巧。劇處無少慳。昔我在城居。朝朝倚窓看。一朶碧芙蓉。秀色但可餐。
碑峯
眞興北狩碑。龜趺檐鳥革。詵公有前識。學師見後得。相去五百歲。符心乃不忒。蒼茫風水說。浩蕩山河色。微雨度海門。夕陽滿京國。煙火十萬屋。瓦背魚鱗黑。羅麗克丕變。冠裳崇文德。人事或地靈。天命非佛力。讖文載人口。石字荒苔蝕。此意孰能辨。滾滾日登陟。
佛巖
巨人石上坐。衣冠亦偉甚。遠望欲與語。卽之始詳審。不知作者誰。要非近鄭沈。想見畵成時。刺心和墨瀋。冥觀六六相。自身屢興寢。正大而慈惠。筆開天人禀。巧匠磨刀釘。石骨靑凜凜。能事畢二家。神光超諸品。隳屋惜不葺。古蘚衣成錦。歸來遇彷彿。明月生夜枕。
觀音窟
窈窕觀音窟。一線天光寫。中有白衣坐。下有淸泉瀉。縣題宛斲痕。知是古蘭若。太平四年字。刻劃頗瘦雅。尙傳唐宋間。道人來華夏。前朝上西敎。長吏課虔捨。浮屠居國半。寶書購天下。往往高僧傳。有稱東土者。禪房今在下。其徒極椎野。不掃石床塵。日須松風洒。
長壽殿
夫物具佛性。惟玉材美全。有氣虛而白。爲德溫且堅。追琢成妙相。變身觀億千。丈六約七寸。須眉皆炯然。髹龕鏤香檀。寶座開金蓮。名曰長壽佛。至自大邦燕。恭惟文孝宮。册儲在其年。錫賚寓祈永。滋事洵曠前。至今三十載。臺殿明山巓。嗚呼先大王。事大誠畏天。
筧槽
陷石承刳木。泠泠雲深處。木長百武計。石大十牛御。窠臼到頭入。曲折尋源去。脩虵出林走。老虎負隅踞。古物誰破碎。新者鬱盤據。雖無江海量。足爲缾盎助。那知上山高。得此飮水飫。玲瓏塔院夕。淅瀝禪窓曙。宿渴喜全蘇。煩暑亦已除。下方一月旱。均沾念衆庶。
蜥蜴
龍也固大物。溟海乃可着。鼓頷霹靂出。噓氣雲雨作。有時小其身。能容一杯勺。石池深不肩。是何潛且躍。守宮焉蝘蜓。蜥蜴名類博。逐鯈掉短尾。如黽翻四脚。嚶嚶腹中雷。見蠅輒噴薄。長者儼儀度。兒嬉偸糟粕。神變誠難測。或玆有所托。時旱將禱雨。侲童來相索。
東臺
東臺如棋累。鬱鬱磨穹辰。獨立宇宙間。扶持應有神。梯級亦天成。石筍靑嶙峋。登臨轉恐慄。愧余非達人。高鳥起躡屨。曉日生側身。遙山似擲米。聚散從海濱。蒼然各已極。白者長無垠。俯瞰畿東樹。雨罷秋色新。人烟散渺渺。郊原開畇畇。飛騰笑我輩。樂哉邱中民。
雙槐
寺前雙槐樹。高高高於山。不下數百歲。對立當禪關。有如兩閽人。屹然雄身顔。長枝相糾結。老根相連環。千人蔭其下。百笏距其間。炎蒸六七月。綠葉何斒斕。赫日苦不透。淸風時自還。遙知種樹者。生年猶及攀。我來歎銅狄。摩挲閱人寰。所嗟在空山。材大如等閒。
西堂
避暑林木間。遂爲西堂主。千峯滿一窓。臥聽十日雨。長廊晝無人。蒼苔霽色古。碧天生微凉。火雲斂餘怒。捲幔當飛泉。曝書對小圃。瑟瑟山蟬響。離離草花吐。時光改轉眄。幽思觸所覩。寤寐山水想。夙齡營一塢。此地雖信美。已矣歸佛宇。願借結夏緣。聊爾任仰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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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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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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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尙以易相漢。能上陰陽之奏而不能防宦戚之萌。不知繫于金柅之戒也。匡衡以詩相漢。能陳關雎之義而不能止奄寺之惡。不知昏椓靡共之戒也。經術雖明。奚益焉。
迂齋謂伏羲未作易之前。天下之人心無非易。伏羲旣作易之後。天下之萬事無非易。
六誓可以觀義。五誥可以觀仁。甫刑可以觀誠。洪範可以觀度。禹貢可以觀事。臯陶謨可以觀治。堯典可以觀美。
風俗世道之元氣也。觀葛生之詩。堯之遺風。變爲北方之強矣。觀駟鐵小戎之詩。文武好善之民。變爲山西之勇猛矣。晉秦以是強於諸侯。然晉之分爲三。秦之二世而亡。風俗使然也。是以先王之爲治。威強不足而德義有餘。
古未有筆。以書刀刻字於方策。謂之削。魯爲詩書之國。故考工記。以魯之削爲良。
周無射之鍾。至隋乃毁。唐顯隆之輅。至宋猶存。物之壽。亦有數耶。
君之於民。亦曰忠。季梁云上思利民忠也。子之於親。亦曰慈。禮云慈以旨甘。聖賢言忠。不顓於事君。爲人謀必忠。於朋友必忠告。事親必忠養。以善敎人。以利及民。無適非忠也。
河圖曰。崑山出五色流水。其白水入中國。名爲河。故晉文公投璧于河曰。有如白水。
劉炫謂國語非丘明作。葉少蘊云古有左氏,左丘氏。太史公稱左丘失明。厥有國語。今春秋傳作左氏。而國語爲左丘氏。則不得爲一家。文軆亦不同。其非一家書明甚。左氏葢左史之後以官氏者。朱文公謂左氏。左史倚相之後。故其書說楚事爲詳。司馬氏謂左氏欲傳春秋。先作國語。國語之文。不及傳之精也。
漢武尊公羊家。而蘓氏謂何休公羊之罪人。晁氏謂休負公羊之學。五始二科九旨七等六輔二類七缺。皆出於何氏。其墨守。不攻而破矣。
劉盛不好讀。唯讀孝經論語曰。誦此能行足矣。安用多誦而不行乎。蘓綽戒子威云讀孝經一卷。足以立身治國。何用多爲。愚謂梁元帝之萬卷。不如盛,綽之一言。學不知要。猶不學。
范太史曰。能事親則能事神。王梅溪見人禮塔。呼而告之曰。汝有在家佛。何不供養。葢人能奉親。卽是奉佛也。
徐景安樂書。宮爲上平。商爲下平。角爲入。徵爲上。羽爲去。則唐時平聲。已分上下矣。
文子者。老子弟子也。其書稱平王問道。其言曰。玉在山而草木潤。珠生淵而岸不枯。荀子取之。譬若積薪燎。後者處上。汲黯取之。再實之木。其根必傷。明德后取之。用兵有五。有義兵。有應兵。有忿兵。有貪兵。有驕兵。義兵王。應兵勝。忿兵敗。貪兵死。驕兵滅。魏相取之。孔子無黔突。墨子無暖席。班,杜,韓諸儒取之。心欲小志欲大。智欲圓行欲方。孫思邈取之。德均則衆者勝寡。力敵則智者制愚。陸抗取之。欲治之主不世出。王吉取之。寸而度之。至丈必差。銖而解之。至石必過。石稱丈量。徑而寡失。枚乘取之。山有猛獸。林木爲之不斬。園有螫虫。葵藿爲之不採。國有賢士。折衝千里。鄭昌取之。文之所加者深。則權之所服者大。德之所施者博。則威之所制者廣。班固刑法志取之。人之將疾。必先厭魚肉之味。國之將亡。必先惡忠臣之語。越絶劉子取之。乳犬之噬虎。伏鷄之搏貍。何休註公羊取之。又曰。士有一定之論。女有不易之行。同言而信。信在言前。同令而行。誠在令外。狡兎得而獵犬烹。高鳥盡而良弓藏。皆見此書。其見於列莊淮南子者。不可摟數。
郭象注諸子曰。聖人之在天下。煖然若陽春之自和。故蒙澤者不謝。凄乎若秋霜之自降。故凋落者不㤪。李太白云草不謝榮於春風。木不怨落於秋天。其語本此。注又曰。世有假寐而夢經百里者。則無以明今之百年。非假寐之夢者也。邯鄲枕南柯守之說。皆原此意。幽求子曰。當其夢時。覩山念木。或志在舟楫。因舟念水。因水念魚。東坡夢齋銘。意出於此。
易姓而王。封於泰山。禪於梁父者。七十有二代。其有形兆。垠堮勒石。凡千八百餘處。
韓子曰。商君敎秦孝公燔詩書而明法令。愚按史記商君傳。不言燔詩書。葢詩書之道廢。與李斯之焚之無異也。
諸侯棄兵甲之讐。爲盟會之禮。乃於登壇之後。奮匕首劫國君。賊天下之禮者非沫乎。君臣之義。有死無隕。專諸感公子光之豢養。而親剚刃於王僚。賊天下之義者非諸乎。父母全以生之。子全而歸之。政纔終父母之年。遂殺身以爲仲子。賊天下之仁者非政乎。樊將軍以困窮歸燕丹。荊說取其首以濟入秦之詐。賊天下之信者非荊乎。以賊禮賊義賊仁賊信之人。並列於傳。又從而嗟嘆其志。不亦繆哉。豫子以不忘舊君。殺身而不悔。抗節致忠。行出乎烈士。乃引而寘諸四字之間。不亦薰蕕之共器乎。
三國鼎峙。司馬公通鑑。以魏爲正統。朱子綱目。以蜀漢爲正統。然稽於天文則熒惑守心。魏文帝殂而吳蜀無他。此黃權對魏明帝之言也。若可以魏爲正矣。月犯心大星。王者惡之。漢昭烈殂而魏吳無他。權將何辭以對。
君子其潛如龍。非迅雷烈風不起。其翔如鳳。非醴泉甘露不食。司馬德操,諸葛孔明。俱隱於耕稼而仕止殊。魏玄成,徐洪客。俱隱於黃冠而出處異。如用之易地則皆然。
號萬石者五家。漢石奮及四子皆二千石。號萬石君。馮揚爲弘農太守。八子皆爲二千石。亦號萬石君。嚴延年兄弟五人至大官。母號萬石嚴嫗。秦龔爲穎川太守。羣從同時爲二千石者五人。號萬石秦氏。唐張文瓘爲侍中。四子皆至三品。號萬石張家。
執笏始于宇文周保定四年。紫緋綠袍始于隋大業六年。
佩魚始於唐永徽二年。以李爲鯉也。武后天授元年。改佩龜。以玄武爲龜也。
漢黨錮以節義。羣而不黨之君子也。唐朋黨以權利。比而不周之小人也。漢之君子受黨之名。故其俗淸。唐之小人行黨之實。故其俗弊。
呂氏童蒙訓云前輩有編類國朝名臣行狀墓誌。取其行事之善者。別錄出之以自警戒。亦樂取諸人以爲善之義。籍溪胡先生敎諸生。於功課餘暇。以片紙書古人懿行。或詩文銘贊之有補於人者。粘置壁間。俾往來誦之。咸令精熟。此二事可以爲法。
柳下惠見飴曰可以養老。盜跖見飴曰可以黏牡。見物同而用之異。
董仲舒三年不窺園。法眞歷年不窺園。趙昱歷年潛思。不窺園門。桓榮十五年不窺家園。何休不窺園者十七年。
漢丞相再入二人。周勃,孔光。御史大夫再入三人。孔光,何武,王崇。後漢太尉再入二人。劉矩,馬碑。三入一人胡廣。司徒再入二人。魯恭,胡廣。司空三入一人牟融。唐宰相再入五十七人。長孫無忌至裴樞。三入十二人。武承嗣至鄭畋。四入三人。韋巨源,姚元之,韋安石。五入三人。蕭瑀,裴度,崔胤。
舊史德宗紀。貞元六年。岐州無憂王寺。有佛指骨寸餘。先是取來禁中供養。二月乙亥。詔送還本寺。此迎佛骨之始也。韓愈傳云鳳翔法門寺。有護國眞身塔。內有釋迦文佛指骨一節。貞元,元和,咸通。迎佛骨者三。
常衮與禮官議禮。爲君斬衰三年。漢文帝權制三十六日。宋太宗遺詔。亦三十六日。羣臣不忍旣葬而除。略盡四月。高宗如漢故事。玄宗以來。始變天子喪爲二十七日。世多以短喪議漢文。而不知二十七日之制自玄宗始也。
止齋謂宋朝名節自范文正公。議論文章自歐陽子。道學自周子。三君子皆萃於東南。殆有天意。
陳倉石皷文已訛。按陳倉在唐爲鳳翔寶鷄縣。石皷在天興縣南。乃雍縣也。魏太武自東平趣鄒山。見始皇石刻。使人排而仆之。嶧山之碑野火焚。葢此時。
羅昭諫詠松曰。陵遷谷變須高節。莫向人間作大夫。其志亦可悲矣。唐六臣彼何人哉。昭諫說錢鏐擧兵討梁。見通鑑。其忠義可見。眎奴事朱溫之杜荀鶴。猶糞土也。
朱新仲詠顔魯公云。千五百年如烈日。二十四州唯一人。又詠昭君云。當時夫死若求歸。凜然義動單于府。不知出此肯隨俗。顔色如花心糞土。
鄭亞會昌一品集叙云周勃,霍光。雖有勳伐而不知儒術。枚臯嚴忌。善爲文章而不至巖廊。歐陽公曰。劉柳無稱於事業。姚宋不見於文章。其言簡而明。非唐人所及也。
荊公爲外祖母墓表云女婦居不識廳屛。笑言不聞隣里。是職然也。唐岐陽公主不識刺史廳屛。見杜牧之文。薛巽妻崔氏言笑不聞於隣。見柳子厚文。荊公爲文。字字不苟如此。讀者不知其用事。
東都之季。淸議扶之而有餘。強秦之末。壯士守之而不足。前輩作風俗萬世之基。末韻。 亶聡明而有作。無作聦明。由仁義以安行。非行仁義。舜由仁義行。
王渙之曰。乘車常以顚墜處之。乘舟常以覆溺處之。仕官常以不遇處之。無事矣。此言近於達者也。
廟堂二字。見漢徐樂傳。修之廟堂之上而銷未形之患。注云人君爲政擧事。必告宗廟。議於明堂。
道家云眞人之心。若珠在淵。衆人之心。若瓢在水。眞文忠云此心當如明鏡止水。不可如枯木死灰。
方正學孝孺曰。古之仕者及物。今之仕者適己。及物而仕樂也。適己而棄民恥也。與其貴而恥。孰若賤而樂。故君子難仕。
吳康齋與弼。雨中被簑笠負耒耟。與諸生並耕。談乾坤艮离坎震兌巽於所耕之耒耟。可見先生樂道安貧。曠然自足。眞如鳳凰翔於千仞之上。下視塵世。曾不足過而覽焉。食後坐東窓。四軆舒泰。神氣淸朗。讀書愈有進益。心平氣和。與物皆春。甞讀孟子。湛然虗明。綠陰淸晝。薰風徐來。山林閴寂。天地自濶。日月自長。邵子所謂心靜方能知白日。眼明始會識靑天。於斯可驗。
胡敬齋居仁曰。釋氏見道。只如漢武帝見李夫人。非眞見也。只想像這道理。故勞而無功。儒者便卽事物上窮究。
魏莊渠校曰。大丈夫凍死則凍死。餓死則餓死。方能堂堂立天地間。若開口告人貧。要人憐我。以小惠呴沫我。得無爲賤丈夫乎。
夏東巖尙朴曰。仁是心之德。如桃仁杏仁一般。
張東所詡柳塘記曰。沿塘植柳偃仰披拂於朝烟暮雨之間。千態萬狀。可數十本。塘之水微波巨浪。隨風力強弱而變化。可數十丈。鸎燕之歌吟。魚鰕之潛躍。雲霞之出沒。不可具狀。境與心凝。塊然莫知其樂之所以。後誦昔人柳塘春水。漫及楊柳風來面上吹之句。則心與句得。茫然不知妙之所寓。理與心會。精與神融。不必詩之出口。所謂至樂與至妙者。皆不暇外求而得矣。
薛敬軒瑄曰。理如日光。氣如飛鳥。理乘氣機而動。如日光載鳥背而飛。鳥飛而日光雖不離其背。實未甞與之俱往而有間斷之處。亦猶氣動而理雖未甞與之暫離。實未甞與之俱盡而有滅息之時。氣有聚散。理無聚散。於此可見。
王凝齋鴻儒云罍尊陽也在阼。犧尊陰也在西。堂上以陽爲主也。縣皷陽也在西。應皷陰也在東。堂下以陰爲主也。
呂涇野柟語錄曰。長江之上。大海之濱。風波之險。可畏也。至於風恬浪息。漁人出沒其間。鷗鷺飛鳴其中。若相狎而玩者何也。水忘機也。漁人鷗鷺亦忘機也。若乃吾人之宅心。宜若平且易焉已矣。反有不可測者。則其爲風波之險莫大焉。此莊生所謂險於山川者也。是故機心忘而後。可以進德矣。
王陽明守仁語錄曰。吾輩通患。正如池面浮萍。隨開隨蔽。未論江海。但在活水浮萍。卽不能蔽何者。活水有其源。池水無其源。有其源者由己。無其源者從物。故凡不息者有其源。作輟者皆無源故耳。
程松溪文德論學書曰。天下事過則有害。雨澤非不善也。過多則澇。其爲害也與旱同。今有意爲善。而任心自是者。皆雨之澇也。
徐魯源用檢曰。與友人坐夜分。羣動旣息。天籟自鳴。鳴非外也。聽非內也。天人一也。一此不已也。通乎晝夜之道而知此。其庶幾乎。
聶雙江豹論學書曰。寂然不動。中涵太虗。先天也。千變萬化。皆由此出。可以合德合明。合序合吉㐫。故曰天不違。觸之而動。感而後應。後天也。何思何慮。遂通而順應之。故曰奉天時。言人力一毫不與也。
劉三五陽洞語曰。水之激。失水之眞矣。情之激。失情之眞矣。君子之情不激也。故不激其言。
徐存齋階論學書曰。人未飮酒時。事事淸楚。到醉後事事昏忘。及酒醒後。照舊淸楚。乃知昏忘是酒淸楚是心之本然。人苟不以利欲迷其本心。則於事斷無昏忘之患。克己二字。此醒酒方也。
蔡虛齋淸論文曰。不爲世態酣濡。不受古人繩束。卷舒出沒。如朝霏暮雲。始筆下有自然風味。葢其在萬山中。玩心高明。是以其言論。槪以六經爲吾心註脚。每有引而不發之意。軒然霄漢之上。俯視萬有。無一足嬰其懷者。其省身法云風光月霽其心胸。海濶天高其器宇。鳳獜趾其威儀。玉振金聲。
顧涇陽憲成曰。無聲無臭。吾儒之所謂空也。無善無惡。二氏之所謂空也。名似而實遠矣。是故諱言空者。以似廢眞。混言空者。以似亂眞。
高景逸攀龍曰。政事本於人才。舍人才而言政者必無政。財用本於政事。舍政事而言財者必無財。
呂心吾坤別錄曰。泰山喬嶽之身。海濶天空之腹。和風甘雨之色。日照月臨之目。旋乾轉坤之手。盤石砥柱之足。臨深履薄之心。玉潔氷淸之骨。此男兒八景也。
李退溪飮酒之際。不得聞言語匙著之聲。諸生進前受學。和氣薰然。誨諭諄諄。從頭至尾。洞然無疑晦。
李栗谷曰。非夜眠及疾病。不可偃卧跛欹。晝有睡思。當喚醒此心。十分猛省。眼皮重起。而周步使惺惺。
成牛溪曰。學先收拾身心。保惜精神。專一凝志。使志氣常淸而義理昭著。此孔孟以來第一門。
退溪自少時書字必楷正。雖傳鈔科文雜書。鮮有胡寫。甞與其孫安道書曰。凡事當謹愼。今見汝寄金而精書。大字亂草。愼勿爲麁狂之態。
退溪語及八陣圖曰。此亦格致一端。讀書之暇。可以宄觀。
靜庵曰。學者先務。莫切於義利之辨。私欲之萌。皆出於利。從念頭拔去根本然後。可安於學矣。甞聞許相稠對案兀坐。夜半偸兒入室。公不寐冥然。若泥塑人。盜去。家人覺之恨焉。公曰。賊之有甚於此者。來戰於心。何暇警止外賊乎。先輩克己如此。
古人省文之法。非但從簡。省一字而文反有力則省之。或曰古人語多急。不爾也。古人語質。故有似聲急耳。詩不顯亦世。又亦不夷懌。書雖悔可追。又我生不有命在天。孟子雖褐寬博吾不惴焉。並省一豈字。
坦齋朴公甞論古文之法曰。近日文軆大變。藻繪雕琢。頓無純正之格。非但文力不及。主於粧拙。險詞僻語。恠字異句。刻意搜集。使人開口不得。古文章法。何甞如是也。且氣狀不好處。一切避之。全以頌禱之辭。薈萃成篇。安有波瀾之可觀乎。老泉,柳州文近左氏。文從字順則一也。戰國策,國語諸子文。或蒼健或奇偉。當時必曰時軆。而馬漢史最得文路之正。上下千載。無處不當也。公之此言。深有得於文法。余於親炙時所承聆者也。
正廟朝命曺允亨,黃雲祖。書進獜經如綱目例。梓本行于世。余見成靑城集。曰正廟丁巳。臣緯,臣鍾永。俱以布衣。與臣大中。猥叨春秋援綱目例。大書經文。小書左氏傳文之命。閱月編摩。士林榮之。此三本未見付梓。
古者䟽本。只言其事。因而成章矣。皇明以來。王錫爵,葉向高諸人。最稱精篤。後風習漸變。擧以蔓衍之詞。專事餙讓。其告君之辭。不當如是也。我東則䟽槩之規。亦失古意。昔則數行爲之。不見原本而知爲某事。挽近大槩過爲草率。未知以何事治其䟽。惟大臣箚槩。自前簡要也。至於苫凷之䟽。古則堂上官亦爲之。正廟以無防限。定以二品。近日遵行也。
唐制。臣下奏事。非表非狀。謂之牓子。亦稱錄子。今謂之箚子。我國䟽箚。卽古之表狀也。草記古之牓子,錄子也。皇明有揭。淸國有奏記。而一名摺子也。
唐韋陟作花押。謂之五雲朶。或稱押縫。或稱押尾。
歐陽子曰。司馬之法。本之禮讓。後世莫行焉。惟孫武之書。法術大詳。考今之列。非特四種。所謂四種。卽權謀形勢陰陽技巧。析而爲四。由是兵家之文。旣載列矣。是乃廬陵習兵之論也。以余所見。武經七書尙矣。古有百將傳。每篇記各人戰勝之策與事。而畧具斷語也。宣廟朝命李公時發較正之。令訓局鋟於梓。此書最爲兵家妙諦。而惜其所傳無多。至於坐作進退屯兵行陣之法。戚氏紀効書。起於禦倭略而爲兵學指南。憲廟最爲精通。有非諸將所可及。此天縱之聖也。
六鞱文武龍豹虎犬。三畧上中下。宋元豊中。合孫子十三篇,吳子六篇,尉繚子二十四篇,司馬兵法,李衛公問對。名爲武經七書。
世祖朝。梁誠之奏言。高麗肅宗始藏經籍。其所印圖書之文二。其一曰高麗國十四葉御藏書。其一曰高麗國御藏書。至今三百六十三年。印文如昨。今內藏萬卷書。多其時所藏。乞令今藏書後面圖書。稱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以眞字書之。前面圖書。稱朝鮮國御藏書。以篆字書之。按高麗屢經兵亂。能存近萬卷書。我世祖以後開刊之書。亦復不小。而見存者小。此何故焉。蓄書之家小。毁書之人多故也。宜自朝家設禁。無敢以冊紙爲閑雜之用可也。
我國文獻。非不具備。而擧經灰燼。餘存無多。然惟政院日記。自天啓以後至于今者。合爲三千六百卷。而中間篇次。亦多經燼。故抄出各司謄錄以充之。是乃英廟朝事也。此外有藥院日記三百餘卷。自仁祖朝以下悉具之。至於備局謄錄。年前經火後。更不繼修。無可觀者。太常有前後諡狀屢百度。又謄書冊子爲四五十卷。而尙今不至間斷。是亦一代文獻之不可泐者也。
聚奎樓上。分貯經史子集。緫合經部一百十二種。史部一百六十六種。子部二百四種。集部三百二十四種。樓下奉御製御筆一百二十帙。璿牒璿譜七十六帙。御定諸書一百三十八帙。及經部一百三種,史部二百八十六種,子部一百五十六種,集部五百四十七種。宙合樓貯七書十四種。隆文樓所貯羣書三百五十一種。隆武樓七百六十七種。東二樓奉御製御筆一百九十三帙。璿牒璿譜五十二帙。御定諸書八十七帙。及唐板經部十五種,史部四十四種,子部三十五種,集部五十七種。常板經部四十一種,史部一百十四種,子部六十六種,集部一百五十二種。其中最多卷者。圖書集成一帙。爲五千二十二卷也。
康煕皇帝命善書朝紳。分寫九經。鏤板傳爲鴻寶。趙心庵使名譯李尙迪購來。李譯廣搜市肆及朝士家無有。臨歸。一人願賣券不帙。而呼價七百銀。李譯以不能携告。心庵嗟歎之曰。七百銀常有。而此書不常有。文人之愛書如此。余於年前。得九經一帙。宣紙漆板。裝潢極鮮。必是中州古家物也。
西堂李公製人墓文屢百度。經山公甞曰。其祀孫玄五爲原判也。我爲道伯。取見其文。乃布帛菽粟之文。而便不新新。束之高閣。及爲文任。做人墓道。復爲卷舒。則凡用筆處。加一分不得。减一分不得。始知其文章之高一等也。余暮景。尤覺公言之得其蔗境也。
墓道之文。過詡則曰誣也。其重如此。經山鄭公凡於文字之役。善於虛受。立改病處。荷居李公成一墓文。請改不許。其規模雖殊。立論處。鄭公亦不許。重其誣而相愛之深也。李公其太。鄭公行乎其所當行。止乎其所不當。
養硯老人。辛卯夏晝寢。夢遊仙扃得句云。綠陰如水鶯聲滑。芳草和煙燕影消。覺來足成一詩。書贈余。尙在篋中。其詩曰。人生何處不無聊。最是難憑夢境遙。仙子過頭靑玉杖。拉余携手畫欄橋。綠陰如水鶯聲滑。芳艸和煙燕影消。短句分明猶在記。香初茶半雨瀟瀟。
李奎報白雲小說。崔致遠入唐登第。有破荒之功。故東方學者皆以爲宗。其詩有崑崙東走五山碧。星宿北流一水黃之句。同年顧雲曰。此句卽一輿地誌。學士朴仁範,參政朴寅亮。亦以詩鳴海內。東方文獻之通中國。自三子始爲。朴參政詩曰。門前客棹洪波急。竹下僧棊白日閒。頗佳。
李益齋爲忠宣器重。從王居上國最久。故得與元四學士遊處。視易聽新。磨礪變化。固已極其正大高明之學。而又奉使川蜀。從王吳會往返萬餘里。閎博絶特之觀。包括無餘。踈蕩其奇氣。斂而東歸。問學之士。仰之如泰山。去其靡陋。稍返爾雅。皆先生之化也。
鄭圃隱先生。非徒理學節義冠一世。文章亦豪放奇雋。梅窓春色早。板屋雨聲多。卽先生一臠也。
一二言詩。孔穎達曰。詩以申志。一字則言蹇而意不會。故詩之見句。少不减二。卽祈父,肇禮之類也。三言金玉詩話。謂起於高貴鄕公。然漢郊祀歌之。練時日,太乙貺,天馬徠等章。已創其軆。四言起於舜典喜起之歌。五言斷以古詩十九首及蘓,李贈答爲始。十九首或稱枚乘所作。六言任昉云始於谷永。然劉勰云六言七言雜出詩騷。又漢孔融所著詩頌碑文,六言策文表檄。其曰六言者。葢卽六言詩也。七言金玉詩話云起於柏梁。八言漢書東方朔傳。有八言七言上下篇。九言摯虞以洞酌篇爲九言。而懷麓堂詩話。又謂起於高貴鄕公。十言十一言。李白杜甫詩皆有之。五七律排。雖創於初唐沈,宋諸人。然六朝已開其端。五言絶句。唐初變六朝子夜軆也。七言絶句。中唐漸甚。然梁簡文夜望單鴈一首。已是七絶云。三五七言。起於李白。秋風淸。秋月明。落葉聚還散。寒鴉棲復驚。相思相見知何日。此日此時難爲情。此其濫觴也。長短詩。如山有榛,隰有苓一章。眞絶調也。至漢而益多。如安世房中歌之類。六句律詩。李白送羽林陶將軍。有六句律。便成一首。拗軆七律。杜少陵集最多。如鄭縣亭子澗之濱。獨立縹緲之飛樓之類。律詩不屬對。唐人律詩。有第三四句有不屬對者。如李白牛渚西江夜。崔灝黃鶴樓詩之類。律詩兼用兩韻。如東坡題南康寺重湖軒詩曰。八月渡重湖。蕭條萬象踈。秋風片帆急。暮靄一山孤。許國心猶在。康時術已虛。岷峨千萬里。投老得歸無之類。廻文詩。世皆以爲始於蘓蕙。然劉勰謂道原爲始。道原不知何時人。疊字詩。如河水洋洋北流活活等句。連用六疊。此爲創軆。聯句自退之斬新開闢。禁軆始於歐陽公。東國但製其軆而不識其源者多。故博考錄之。
集之名。起於東漢。然古所謂集。乃後人聚前人所作而名之。非作者之自稱爲集。葢集與輯同。今人之自成其集非也。所以先輩聚其所作。變其編名。或稱未定稿。良以是也。
昔韓洌上鎭書輯東史。東蹟之見於中州史者。鈔出者也。卷二十。乃外史也。徐楓石授余一帙。甚珍玩。後見警修堂集。此書竟入於中國。是海東繹史也。
拾紙得斗室詩跋語。曰先蒙寵寄瑰章。感情思之繾綣。歎音調之鏗鏘。輒強缶和。切希斤正。詩云千丈閒愁一寸詩。今人心事古人知。林亭獨卧聞蕉夜。郡閣高吟寫竹時。我道妙存無限意。君看能作幾何悲。擬從酒茗消餘日。亦厭徵䲭復乞犧。斗室。
歸鹿相公贈老妓詩曰。功名文武前身事。歌舞繁華一夢間。大笑相看頭似雪。空山斜日水流閒。恰似潯陽江上琵琶詩。門前泠落鞍馬稀。老大嫁作商人婦。吾輩事亦如是。
景蕙女史。善琴棋工詩話。卽故權西漁尙書常愼寵姬也。自哭西漁。流落人間。復爲一武弁所收。然非其志也。近有人誦傳其詩數篇。皆自悼之作。而壺間貯月心俱白。席上停雲眼欲靑一句最佳。余少時遊聽流堂。權宅壁上。題景蕙詠燕子詩。寒便辭人暖便歸。笑他燕子計全非。綠陰如此不留宿。却傍人家門戶飛。此後屢易其門。果詩出於性情也。景蕙本良家女。其父敎之以藝。其畫余得兩幀。用筆設彩。非東人手法也。
灣商金欽之奴。能傳李陶庵竹枝詞全本。江南擧人姓康者。讚歎詞理之工。傷奴之不遇。遂出秘藏董文敏山水以償之。竹枝詞之誦傳天下可知也。原圖倩姜彜五斫拂鉤染之。
劉禮部尙詩曰。虛空無處所。髣髴似琉璃。詩境何人到。禪心又過詩。放翁取詩境字名其室。竹坡詩話。有明上人者。作詩甚艱。求捷法于東坡。東坡作兩偈以與之。其一云字字覔奇險。節節累枝葉。咬嚼三十年。轉相無更涉。其二云衝口出常言。法度法前軌。人言非妙處。妙處在于是。始知詩境非力所可致。在於澹漠虛室處耳。三十年前。見詩境圖。但一儒一釋相對像而已。
余讀沈亞之屈原外傳。喜其逸事之幽恠也。辭致之冷韻也。寄托之哀艶也。依其叙次。追而韻之。若其女嬃搗衣石。非原之事也。
隋鄭譯拜爵沛國公。位上柱國。高熲爲制。戲曰筆乾。答曰出典方岳。杖策言歸。不得一文。何以潤筆。此潤筆二字所由昉也。歷代盛行此事。東國牧隱李公製文得厚資。建一僧庵於龍門山巓。爲願堂。名曰潤筆菴。余往年作彌智之行。見菴子尙存。
古人謂金石文字曰吉金貞石。貞珉字見翁覃溪集中。湘山野錄。江南徐騎省善小篆。映日視之。畫之中心有一縷。葉志詵見余隷曰。一筆揮洒。無半點塗鴉者。此固勝人處。
秋史在禁直。自蒲節覆校復初齋集。至荷花生日畢。只選七律百首。紫霞各軆俱選。屢易乃止。二本行于世。
西堂李公儲書甚多。至十二間。比李氏萬卷樓倍之。公沒後。一夜間火。只燒書樓而已。平明乃覺。其造化固難測。而人謂佛經積置於三間。所以此爲魔祟云。此等書之多藏。可以爲戒。公所得書。皆從禮幣中出也。
書帙每以十餘卷。付木板於四隅。緊緊紐結。投之水中。年久不濡。牛溪先生宅書籍。以是免亂於壬丙之間。往往見首尾水痕者古蹟也。
元陵輓辭。閭閻遺子女。城闕若平生。李參奉代人作也。傳爲名句。余見東溟集。詠張玉城舊宅詩云。英雄已塵土。門舘若平生。兩詩無優劣。不可曰靑出於藍耳。
包鳴甫云淳化帖蒼頡字。尙帶卦軆。此言得字之本。然書法皆源於五行。五行皆演於八卦。何莫非卦軆。而特以生畫。如八卦之始畫也。
書斷云秦下邽人程邈字元岑。爲縣吏。以罪下雲陽獄。精思十年。益小篆方圓而得隷書三千字奏之。始皇善之。用爲御史。時以篆字難成。乃用隷字。以爲隷人佐書。務趨便捷。故曰隷書。是以古來皆以隷書爲邈所作。然封氏聞見記。謂酈道元注水經云臨淄人。發古冢得銅棺。前和外隱起爲隷字。言齊太公六代孫胡公之棺。惟三字是故篆。餘同今書。則知隷書非始於秦也。封氏又謂此書在春秋之前已有之。但諸國或用或不用。程邈觀其省易。有便於時。故修改而獻。非創造也。然則隷書非起於邈矣。又按許氏說文。有序云秦李斯省改史籀大篆。作小篆。又有隷書以趨約易云云。似隷書亦李斯所作。其下文又謂新莾改定六書。一古文。二奇字。其三曰篆書卽小篆。秦始皇使下邽人程邈所作也。四佐書。卽秦隷書云云。是許氏於隷書。不言程邈所作。而反以小篆爲邈作。書軆之變。自古不一。東國尤無考据之學。以程邈知之。惟尹五耘詳辨之。
蘭亭帖有二本。定武肥本。潁井瘦本。秋史肥本跋。有抱殘守關之語。肥瘦二本。轉覺瘦勝於肥耳。按蘭亭首稱定武本。宋刻亦自分早晩。前有亭列幽盛遊古不羣殊九字而剜。後有湍帶右流天五字而損。書家考證。亦云難矣。千百本無一損。湍天師菴本再出土。是亦定武之榻。栞是石出自天師菴土中。明初徐中山取置國學。不知何時復委諸土中。萬曆復出。今在國學。故又稱國學本也。國學本傳爲薛刻。而所之旣倦之之字。終期於盡之盡字。死生亦大之亦字。妄作之作字。凡此四處皆改易。必非薛道祖所刻。百年前已不肥。况今瘦弱如一髮乎。薛刻壓在快雪堂。戲鴻堂帖。或云昇山落木本。或云王姬下嫁奩。余曾得二本。校正於古東尙書庋。恨不得較看於唐詩姚察徐僧之搨也。考證言暢叙之叙。又邊是隷畫。
南唐後主李煜書評曰。善法者各得右軍之一軆。若虞世南得其美韻而失其俊邁。歐陽詢得其力而失其溫秀。褚遂良得其意而失其變化。薛稷得其淸而失於拗窘。顔眞卿得其筋而失於粗魯。柳公權得其骨而失於生擴。徐浩得其肉而失於俗。李邕得其氣而失於軆。張旭得其法而失於狂。獻之俱得之而失於騖急。無蘊藉態度。此皆通論也。余有諸人帖。持評較看。一無差誤。
近有一種風氣論書。以昌黎詩義之俗書超姿媚一句。藉爲口實。毁右軍父子。而自虞褚以至米趙文董。一切歸之俗書。惟一歐率更推以爲漢隷金石刻之嫡傳。葢書家有南北之異。此其北派之論也。吾未知其爲公耳。
淳化帖有兩本。月半黃甘二帖。一是王著摹。一是肅藩本也。舊在海居。肅本則線來絲去。饒有活機。王著摹凍蠅痴蚓。都無血氣。卽此可以審正優劣。况贗王著。曷若眞肅藩耶。
趙文敏小楷赤壁賦字。僅如蠅頭。系以長公小像。右顴有痣。與公詩集中所傳摸松雪本又異也。舊吳彭年言兩見文敏作東坡像。一書定惠院海棠詩於上云。則此又在赤壁本之外矣。尾有甲子十二月十九日蘓齋題。嵩陽帖後時。有幻脫蘓齋拜像詩七字。則公之眞像。不在顴痣之有無也。是日拜眞像詩。又有昔也蘭嵎生今之朱野雲之句。則蘓齋拜像之本。乃是野雲之筆。而亦出於趙本也。可以審矣。覃溪摸東坡笠屐圖。臘十九東坡生朝。以恠石供紫霞。又移摸在余書樓。原本流落東國。余一見於洪芍玉書齋。今不知下落。而上有翁詩語。絶寶也。石刻本亦在余庋。東坡自贊曰。心是已灰之木。身如不繫之舟。問我平生功業。黃州儋州惠州。董其昌書也。
宣和間。禁蘓氏文字。學者私記其書曰。毗陵先生中州好東國者。目謂之學朝鮮。什物書畫。皆東人作。翁氏稱師於蘓氏。而紫霞秋史稱以蘓齋弟子。凡學唐者。若中州之學朝鮮。毗陵之學。遠曁東方也。
新羅文武王墓在鷄林雩壇之傍。初王困於倭。臨薨詔曰。葬我於海中。當化爲龍以距倭。海中有大石如小島。葬於石間未幾。風雷大作。有黃龍見於石上。名其臺曰利見。遂以爲禱雨所。事在三國史。後耕田得古碑。卽王之碑。而大舍臣韓訥儒所書也。其文剝落無序。而有曰赤烏呈災。黃熊表異。俄隨風燭。貴道賤身。葬以積薪。碎骨鯨津等句。明是火化水葬之語。不可謂國史之誣也。
羅太宗陵無象設。前有碑龜趺高丈餘。失其身。上安龍頭夭矯蟠拏。刻鏤精巧。面有方篆陽文曰太宗武烈大王之碑。王於三韓。有萬歲之功。樹木不敢剪伐。况石乎。必是蠻人竊去也。關東靈鳳山。有高麗太祖御製集唐文皇書碑。壬癸之亂。蠻人載之以東。在道中折。遂舁其半而去。尙留原州。夫距萊海千里尙然。况鷄林數百里之近乎。昌林寺碑金生書。趙子昂盛稱雖唐人名刻。無以過之。名於中國者。安知不爲蠻人所竊乎。
眞興王北巡碑。過鐵嶺至沃沮定界也。穆陵朝。申將軍砬印來傳世。洪耳溪每托北去者覔之。庚戌。兪通判漢敦書云咸甲之間。有黃草嶺。其上有顚仆古碑。上下皆折。乃眞興王古迹也。印送一本。尹梣溪移置咸營庫中。
麟角寺碑在義興。洪耳溪窮尋佛殿樓底。斷石十數塊。其文微有麟角二字。集右軍書者也。按碑高麗默軒閔漬撰僧普覺碑銘。其法如唐僧懷仁之集三藏序也。
鍪藏寺碑。云是金生書。古之藏兵處也。洪耳溪見磨豆磑脉理異凡石。竪起視其腹。乃古碑折其半者也。命工搨來。果是鍪碑。而考其文。卽新羅翰林金陸珍書。見其姓誤稱也。兪文翼聞之喜曰。老夫平生聚金石錄數百卷。獨未得是碑也。
金角干庾信墓碑。在慶州西十里。洪耳溪祭其墓。覓碑不得。後二十年。李公書九。視金石帖中。有金角干碑數幅。卞之無疑。而蓋於島夷之亂。碑失所在。是本卽亂前舊搨也。似率更之法。東方古蹟。莫先於此。如在中國。當爲岣嶁石皷之亞也。
白月碑。新羅朗空國師棲雲寺塔銘也。侍郞崔仁滚편001撰。端目禪師集金生字。以周世宗元年甲寅立。石在奉化縣太子山。山深寺廢。失其所在。尙古子金光遂守鄰縣。搜得於田間。運置官廨。印行于世。後洪耳溪如榮川訪之。棄在廢園中。亟使舁致。托主人作木匣。俾防風雨。而明初詔使有求拓者坌集。一武倅不堪其苦。以爲馬棧而辱之。今所行殘字皆馬迹。按舊說。初在奉化。今在榮川。似自奉而至榮也。余有舊拓本。申宛丘深得其法。近日鄭美堂倣而行之。
平濟塔在白馬江上。唐高宗顯慶五年。遣蘓定方領舟師。與新羅將金庾信破百濟。虜其王義慈。革其國。置熊州都督府。刻石紀功。撰者陵州長史賀遂亮。書者洛州河南權懷素。筆法蒼勁。在顔,柳之前。而可稱東方古蹟之首矣。
東坡詩話云有道士自稱回山人。過沈東老飮酒。用石榴皮。寫絶句壁上曰。西隣已富憂不足。東老雖貧樂有餘。白酒釀來緣好客。黃金散盡爲收書。書訖。出門渡橋。遂不知所之。或曰此呂洞賓也。夫神仙之說。本荒唐矣。彼純陽眞仙去耶。胡爲來人間留筆蹟也。是誠未可信。然坡翁旣言親聞其事。則又不可謂誣也。觀其字畫。飄搖如斷雲空花。若出神化。决非烟火中物也。近日此本盛行于世。公子王孫之別墅。不刻揭此書則恥之。不知出自洪耳溪得於古紙涴弊處也。
癸卯春。洪耳溪自燕歸。歷孤竹城。謁二子像於灤河。遇秀才李美字純之者。與語孤竹古蹟。純之曰。此中有夷齊讀書之墟。水石甚奇。洪公呀然笑曰。夷齊之世邈矣。今何以徵焉。純之曰。距此百餘里。有山曰書院山。有寺曰雲居寺。昌黎韓公斸崖石大書曰夷齊讀書處。夫豈無稽而韓公書之乎。洪公猶未之信。翌年。純之搨送夷齊讀書處五大字及嘉靖刻古蹟碑一本。下附其遊山記。筆力雄邁。字形奇古。不似宋以後筆。殆非凡衆人跡。昌黎旣孤竹故境。而碑言唐太和年建寺。正當韓公之世。則其稱韓書。亦不爲無據矣。
東方之文。眉叟最古。往往類秦碑漢鼎。筆則效周太史而自創新軆。杈枒詰屈。如千歲枯藤。叟甞爲三陟守。東臨滄海。立石於日毋之衝。手書四言詩以誓水。文險而字奇。若出神林鬼窟。世人傳寶之。一日樊巖蔡公。示耳溪以橫軸一帖曰。此眉叟手書人墓表草稿也。洪公曰。此文中有數行失格。豈眉翁未定本耶。樊巖愕然哂曰。眉翁一字一法。况墓石之刻乎。公言未必然矣。已而樊巖取其軸盡卷。忽有小紙揷其尾。熟視良久。拍案叫曰。何其神耶。葢手書數行於一紙。云自某至某當改之。一如洪公所指。洪公可謂眞知眉翁者矣。今觀東海碑。其辭浩淼如洪濤。其聲鏜鎝如老浪。若有海恠波靈。恍惚於筆端。洪公之題是碑。固有得矣。
尹三山師國書。深得率更軆。眞鐵畫也。竹石徐公時任文衡。而書人金石。請定於三山。則受置篋中。及其來覔也。公投之曰。不堪書戶牌之手。有何碑碣之可論哉。竹石慚而歸。宣言於朝曰。尹某以若筆法。尙未書公家碑版。大爲欠事。吾今撰遅遅峴碑文。書寫官殊以尹某差下好矣。朝廷從其言。竹石笑曰。三山雖斥吾書法。猶爲吾之寫手。先輩之於文筆。其務勝如是也。
尹三山刻先山碑。誤落一字。不得已前面陷之。若風字硯㨾中刻大字。甚有雅致。後人爭相仿之。全石變其制。老鐫工朴枝春言於余如是。
金竹泉鎭圭篆隷。多見於樓觀。松京南大門懸板三大篆。無非遒健。非今人之所作。而甞過恩津。江鏡倉三字。最爲古雅。似是此筆也。
金秋史求見余所寫隷書曰。是乃靈光殿甓。五鳳年字法也。人皆習見後漢隷法。得西京軆者甚罕。惟魯恭王甓字。與靈光甓字相爲表裡。而所傳者只此。恨不發秘。使橘山盡見也。後得恭王甓。其軆稍方而別無差等也。
趙子昂甞言唐人之書。自歐陽率更。始作間架。尙筋骨。至顔,柳而嚴緊勁悍。一變永和風韻。惟李北海不失晉人之軌。當爲書家正宗。按娑羅樹碑。遒逸踈宕。極有太令之風。始信子昂之論爲不易。而吳興書門路之正。葢有所自矣。杜工部哀北海詩云風流散金石。追琢山岳銳。其文章筆翰。見重於當世如此。東人筆得北海法者。惟洪耳溪。華士戴衢亨之言也。洪公書遍在八路名勝。成都降仙樓題海東第一樓觀六字。最豪健也。
北漢南有僧伽寺。其上峯曰碑峰。一柱兀然如人立。俗傳麗僧道詵碑。今沒字云。歲丙子。雲石趙公。與秋史共尋。碑有殘字。實眞興王碑也。遂命工搨之。細加審定。除全缺。不可強解。點畫可辨。確然無疑者。凡九十有二字。如眞興王三字,巡狩二字,南川二字。皆實事可證。而與史文經緯者也。
天際烏雲帖云僕在錢塘。一日謁陳述古。邀余飮堂前小閤中。壁上小書一絶。君謨眞迹也。約綽新嬌生眼底。侵尋舊事上眉尖。問君別後愁多少。得似春潮夜夜添。又有人和云長垂玉筋殘粧臉。肯與金釵露指尖。萬斛閒愁何日晝。一分眞態更難添。二詩皆可觀。後詩不知誰作也。査初白蘓詩補註以爲過濰州驛。見蔡君謨題詩壁上云。余曾見唐人筆記。抄而錄之。
牛溪先生記鄭學官希繩言曰。五月三日。鄭君訪我永柔西谷山家。言我家臧獲在谷山西面頤寧坊鳥音洞。夙聞深山絶境。可以避世。亂生之初。自京城奉慈親與兄弟妻拏往赴之。至則奴迎拜。掃正堂以居之。凡留三箇月。供奉無倦色。觀其地在深山長谷絶遠之域。但有奴家三五舍。覆以板子。四山高峻。穹林蔽日。石泉甘冽。蔬菜甚饒。焚山種粟。豆菽富足。閱月經時。外人不至。世間音信聲響斷絶。眞所謂人間無路訪安危者也。倭賊所至。四面皆至數百里外。雖擧國鼎沸。兵燹滔天。閉戶安眠。不知有何事也。然地高而寒。洞僻而深。君子居之。亦近於同羣鳥獸。正宜今日避亂之所。而商嶺王官不厭其深者也。谷山郡西三十里。有村曰明媚。山川灑落。洞府寬閒。大溪橫流其中。土沃而人稀。有民亦七家。當卜居其地。有兵火則入鳥音避之。可以全身遠害於斯世也。余聞其言。不覺慨然。書于此而時閱之。以寓遐思焉。鄭君名象武。字希繩。能文善書。貌偉而志大。决非俗流之趨利者。余深喜之。而不能欵晤以扣其學也。癸巳五月十三日。書于遂安之民舍。渾志此帖。少時曾一寓目於養硯山房。
翁文達石墨書樓。有名於中州。昔覃溪老人有歐陽率更化度寺邕禪師塔銘。卽洛陽范氏書樓中石本。此爲歐書之天下第一烜爀迹也。因以石墨爲書樓之名。而繪范氏書樓圖。圖成又五年。始得保安寺街小樓三楹而居之。又刻一印。此爲石墨書樓印之本末也。
養硯老人語余曰。吾入銀臺。自視黃面老子。不堪作顧影少年態。猶幸與秋史內翰興會日繁。秋史每有名茶新瀹。命侍童挈一甌至。一日送茶。少焉。秋史亦來袖示漱金小箋。上有詩。吾曰。君詩思敏妙。在一煎茶頃。秋史笑曰。果在扇罏間得爾。又從秋史見近刻劉松嵐詩集卷首有覃序者。仍與商略詩。求杜法之旨。間携致敝藏快雪堂帖,覃書對子一聯,孤雲處士王振鵬苕溪高隱圖一軸。右三種書畫。對榻審定。以證金門墨緣。秋史又爲吾出佳紙丈餘。濃堆墨作碧蘆舫隷扁。傑然可畏。院中老吏見吾兩人職務旁午中翰墨商訂。瞠乎以爲初見。後余直秘閣。因公上銀臺。李石農鍾愚藉五色泠金紙。揮灑楷行。余健步玩之。斗想老人之言也。
北海書李元秀碑。舊拓殘額。一橫一圓。礎四。又半礎一。凡五石三百四十七字。嘉慶乙丑夏。北乎翁方綱手摸。毗陵胡遜校勒此本。又北海書大照禪師碑。康煕乙亥。懋勤殿摹勒上石。古東尙書所藏。
趙文敏書太湖石贊洗馬圖詩。董玄宰跋曰。此趙文敏學顔公。送蔡明遠叙。兼米海岳用筆。可寶也。於七觀帖。表文淸稱倣枚生七發。作七觀。王眉菴行儉漢詔眞蹟帖跋云子昂小楷。尤入妙品。初師姜夔。次學褚登善,鍾紹京。卒入二王之室。白兎鶻賦字軆。與公他書逈異。具眼者當辨之。公賦序云白兎鶻翎翮皓潔。白雪同皎。凡三籠而毛羽變赤。光彩豔奕。勇鷙加於疇昔。虞伯生云公書赤壁賦時。年三十八。泰不華云白鶴賦。是公晩年筆中最上乘。又書千字文。紫霞題其後曰第一。公書烜爀蹟。無如赤壁與千文。赤壁工摹猶可及。千文渾脫化。春雲諸帖。余皆寓目。而敝庋有赤壁賦一帖。千字文未及購。甚恨。
樂志論,天馬賦帖。趙仲光奕書也。帖尾有王文成守仁跋云。趙文敏以宋宗室王孫。屈身異姓。雖書法浸淫魏晉。而氣骨不無少减。仲光志趣高尙。終于隱遯。有古逸民之風焉。宜其書別具瀟灑出塵之槪。觀者但因爲淵源文敏。似非定評。余有慨乎文成之因一書跋。軒輕人父子之太刻深也。况可發之於其子書跋耶。兩帖皆在余庋。而天馬帖尤不俗。
魏國管夫人帖。有竹環居不暫懨。長年吟弄似傷廉。可憐萬片鸞翎濕。向晩瀟瀟雨一簾。開枝當路色蒼茫。新竹過於舊竹長。更待春風錦綳脫。雙雙幺鳳舞朝陽。萬卷詩書壓象牀。不知身與世相忘。更憐家有千竿竹。正可開軒納晩凉。道昇。有趙管二字。安家書。和南拜覆本師中峯大和尙。女弟子魏國夫人管氏道昇謹封。道昇和南拜覆本師中峰大和尙法座前。承賜書。如見頂相。且知道軆安穩。不勝慰喜。又蒙頒賜香珠領次。尤增感佩。戊午十月十一日。女弟道昇和南拜覆。鈐以魏國夫人趙管六字印。
趙文敏手蹟帖自跋云道士祝丹陽。示余天冠山圖。求賦詩。將刻石山中。爲作世廿八首。延祐二年十月廿四日。松雪道人陜刻本跋云余作遊天冠山。見佳境興發。偶咏鄙句。付主院者。越四年。楚成巨冊。索重書。故爾走筆。子昂。
紫霞手選七律彀。始以杜文貞,白文公,李義山,蘓文忠,陸釰南,元遺山,虞文靖,錢虞山,王文簡,翁北乎十家。質之於秋史。秋史曰。虞山則濫矣。杜樊川,黃文節,朱竹坨。皆不可闕。公於詩道。篤信秋史。故再以十二家釐正。
古東李公翊會所藏絳帖十二卷。淳化五年歲在甲午春王正月。潘師朝奉聖旨。摸勒上石其最者。曰秦巫咸詛楚文。曰漢議郞蔡邕隷。其文有定策帷幙有安社稷之勳十字。曰晉右將軍蘭亭二本頭眩方帖。曰黃庭經後見趙文敏黃素黃庭字。無淡古虛和之味。曰王獻之洛初賦。較看長白卞氏式古堂殘本。洛初賦有董跋。此本頗覺肥失眞。曰大令擘窠行書。桓山碑殘字跋云桓山頌獻之銘六字。右王大令殘碑六字。梁天福元年。雒陽修城。得之土中。考其事。或是永和十二年秋。桓溫破姚襄事。此碑碎裂不全。止存此六字耳。而大令之名。巋然獨完。以故人始寶之。不爾。亦同瓦礫矣。噫。非神物護持。曷至是耶。余恐其久而失傳。因壽之於石。以公諸同好者。駙馬都尉潘師朝記。曰唐長史張旭草書。曰率更令歐陽詢筆訣。按副車帖最多傳僞。軒帖考引曺士冕語。二十卷訛作十二。遂致爲作絳帖者。稱十二卷。此帖卷卷。有頂墨林印。余少時蔡隷十字。以竹片摹刻。流入大內。今不知下落。古東稱余隷爲正道。每受去典重文字。
嵩陽帖蔡君謨眞蹟。在陳述古杭州官舍。後人呼爲守居官閣。養硯老人手臨之。題重摹紙閣十六扇。又一淸風五百間。世謂坡書。學李北海,徐季海諸法。皆源於此。臨本今不知在何處。
隨淸娛帖。褚登善書汝南公主墓誌云公主隴西狄道人。鄭夾漈通志金石略曰。虞世南所書狄道人墓誌。隨淸娛。漢司馬遷之妾也。
覃溪見安平大君絹本眞蹟曰。此能以松雪手腕。運聖敎序筆意者。眞確論也。
淸平山古檆下廢池邊。掘得一碑。乃益齋李先生所撰施藏經碑也。此碑與文殊院碑。均爲山中之文獻。主僧松坡長老移置寺簷下。以庇風雨。石斷裂。大小凡五段。碑文曰爲皇太子皇子祈福。各取其誕辰。飯僧閱經歲以爲凡。麗史云每於誕辰飯僧。歲以爲常。第二行。推誠亮節功臣重大匡金海君臣李。此以下泐損。按先生始封金海君。後改封鷄林府院君。按所謂僉議政承臣怡等。卽匡定公金怡也。本集與圖經。皆作臣恰。考之麗史。更無以恰爲名而官政承者。此碑臣怡之爲匡定無疑也。又按匡定以僉議中贊。卒於泰定四年五月。則立碑時尙無恙而居位也。匡定少時宿華藏寺。夢王御殿唱一句云靑雲紫氣知仙閣。匡定賡云綠髮淸談是貴人。以是卜其貴顯。
覃溪復初齋集。有曰江秋史得趙文敏墨迹云。靑衫白髮老參軍。旋糶黃粱買酒尊。但得有錢留客醉。也勝騎馬傍人門。余最愛此詩。頻頻書之。以自適意耳。子昂。凡四十四字。半爲損壞。不復成字。余爲審擇存廿五字。題曰完璧帖而歸之。因題其後曰。完璧歸于趙。生花夢自江。千秋吟買酒。幾夕剔寒缸。曲折圖移繡。橫斜搨就窓。似聞苕霅上。搖膝韻吳艭。前此姜豹庵尙書影搨趙墨一本。卽此帖也。無余最愛以下十四字。存只三十字。摹自聽松先生鑒藏本也。庚午。紫霞得此本。贈金秋史進士。据此知趙文敏頻書此詩。留在人間。不止數本。覃溪本。比聽松本。但多十四字。不知孰爲眞迹也。完璧帖存只廿五字。則又不及聽松本之完矣。此書之一歸江秋史。一歸金秋史。洵一段奇事也。金秋史和紫霞曰。紅葉樓中偈。心心月印江。朱門誰繫馬。綠酒自斟缸。淸聽松鳴屋。留陰竹補窓。天官徵玉尺。共漽鷗波艭。註。紅葉樓豹翁居也。竹窓用蘓齋移竹故實也。
龍山挹淸樓。有松下翁第一江山扁。又有控海門牓。門牓尤軒翥可喜。第一江山。本吳雲壑書。刻在金山。今練光亭扁。卽翻摹爾。世人不知。誤以朱書稱之。江字白下書。按東國文獻草創。事無記傳處。只從口吻相道。安得不以訛傳訛乎。余初認以朱書。始考得吳書。然未可定價。願就質焉。
眉叟許公古篆入神。羅大將洞最高舍。有雲岡二字刻石。在於塢上。乃許公篆畫法。無烟火氣。此舍名拱北軒。白下舊宅而題之者也。余王考少時居此。世傳其房堗。借白下神手。于今百年。無一石嵌陷。薪貴易溫。
華人贈余一帖。文衡山遺墨。而蠅頭細字。盡是奏御文字日錄者也。似是草藁之潢冊。復粧爲帖。下有圖章數十諸人之名。而最大者成親王也。諸相公會時。以此視之。皆艶羡之。
洪文獻一夕夢。訪圓嶠居士。皓髮癯容。如畫中僊。瞪目而視曰。君將欲掩我名耶。公曰。夫名者公器。奪不可得。讓亦不可得。惟視其實之如何。吾何敢掩公名耶。居士笑曰誠然。君之書有古意而法不足。吾書則法有餘而少風韻。仍出示數帖。果渾成無生割之病。又示古法帖。多韋仲將筆。見座右有文石如石鍾。遍刻篆籕文。奇古異常。因謂曰。吾甞欲作石鼎。書刻昌黎詩未果。君可爲之否。遂揖而別。後琢玉作鼎。以曺稚行隷字。書石鼎聯句。此鼎尙在冠巖尙書宅中。
自庵金先生名練。道學節行。爲己卯士類所尊。文章翰墨。乃其餘事。而筆法尤高。所書朝遊北海暮蒼梧一絶大草。雄偉奇崫。有大令筆力。先生流竄嶺海。年壽不永。故書跡傳于世甚少。金公思祐宰連山。獲一盜胠其槖。有一書帖。卽自庵書也。寫其詩三十餘篇。鋒穎遒勁。韻致蕭散。不規規於古人之法。如山陰脩竹。解苞出土。挺然有干雲之勢。不滅於兵燹。而又不毁於盜賦。殆鬼神之默護也。尹白下甞見而慕之。欲仿其法。把筆良久。憮然而罷。
古之尺牘。必稱蘓黃。而東國尹白下集大成。近古金秋史語。片片揀金。愈出愈新。世謂筆與畫皆不及尺牘之奇也。趙心庵善於短札。俚語混用。無斧痕。其辭節節踈雅。非庸才可跂也。
古今書畫。水火之厄同也。江州蘓州書畫之蓄。甲於天下。丙丁之間。洪秀泉亂。大江以南。成瓦礫之塲。蘓則火。江則水。二州之厄。史牒所無。而書畫之種滅矣。萬里外人。想像痛惜。甚可笑。而念虹月之晦。天涯亦比隣也。往年。葉笙林以余隷一擔。分庋江南諸人。笙林蘓州人也。多藏秦漢古蹟於八萬卷樓。未免此日之禍。奚暇論一粟之於滄海也。
姜紹書韻。石齋筆談。有石文太極之說。陳定九荔枝譜。荔枝産泉郡者曰太極圖。形圖而扁半紅半綠。如太極圖狀。余見氷文成圖。命曰氷太極圖。
顧寧人日知錄。書毛延壽事。引西京雜記以證之。據此則漢法。畫工圖後宮以進。君王案圖而召幸之。圖昭君。非匈奴求美人之時也。當時畫工有毛延壽,劉白,龔寬,陳敞,樊育,陽望等人。則奚但指毛延壽一人。而且受賂得罪。不獨昭君以也。詩人謂受賂在匈奴求美人時。失之太甚。而顧氏幽剔西京逸史。彰其圖形之誤。已在匈奴之前。二說並行。
董帖洛神賦。錦波大師舊藏本也。周越跋云頭尾外得一十三行。趙跋云先得九行。復得四行。則自前未有十三行定名也。宣和書譜。亦僅稱洛神賦不完本耳。香光豈得臨足本乎。抑以自意第錄其全文也。余少時。有人賣洛神圖,九歌圖。皆李龍眠作也。九歌帖尙在余。洛神圖未及收。而被人先着去。可恨。
王文成壽畫,讀書十三則。命題布置。另出機杼。所謂士氣作家俱備者。意其門人之筆。而姓名則忘之。此爲鎭州李氏萬卷樓揷架中物。不可再見也。余今年六十。髣想此畫。倩手寫之而自壽焉。其起居坐卧行住眠食拱立跪倚踞爲目。卽余所自刱而備述居家雜儀。無一言虛設也。後之鑒者。尙知余暮年閒適之趣也。
李命基,金弘道,金健鍾,浿人李八龍。以余所見。其法最竗。而燕人汪載靑畫覃溪像。用東國衣冠。而其貌仿彿。制度不嫺。昔劉石齡題漁洋禪悅圖詩。自註云聞諸錢亮工說。曾見東坡像極相似。果古人勝於今人也。
寧遠伯祀孫居江華。甲午。黃山金公逌根奉來其畫像。諸公瞻拜。更爲移摸。還奉本家。服色眞紅袍白玉帶烏帽。如新恩所着。幞頭近宋制。厥相白晢媚嫵。非凡相也。
英宗癸丑暮春。曺松下俱白谷尙書而下四十三人。咸集南營水閣。爲詠觴會。有修稧帖。哲宗癸亥。余與諸公修續稧。作屛藏于雙檜亭。
壺山掛一幅書。龍蛇流動。其書曰義之妙筆在鵝羣。欵爲周萬淸也。余謁朴公。先爲偸目。公笑曰。不見人。先見書可乎。我有此書二本。藏之久矣。一則爲秋史所奪。其一歸之於君。荷漪任公。詑以曾繼志畫蓮。一紙寫二莖可丈餘。神韻逼眞。題曰千觔筆力。十丈蓮花。爲君寫照。蓮耶仙耶。二閤所愛書與畫。作兩扇屛。供余嗜疴之癖也。
金陵八子。有高岑,龔賢,樊圻,鄒喆,吳宏,葉欣,胡造,謝蓀。此圖高岑作也。曾見內府收藏。捴多高子嵒標題。半是啓禎年。孔東塘贈樊圻者也。高岑字蔚生。未見其跡。有子蔭字嘉樹世業。名江淮間。圖三潭月印。
余舊蓄趙脩祿駉馬圖。趙宋崇寧人也。此圖經山公借余改粧。往來珍玩。後入大內。更不知所從。題曰駉駉牡馬馬斯臧。魯野春深萬物康。楊柳桃花皆可畫。畫圖不得頌聲洋。
衡山自題曰。推琴一笑四山空。百道飛泉萬壑風。何用氷絃薦神調。宮聲遙在水聲中。徵明二印。曰徵仲父印。曰衡山印。此帖坦齋朴公得於燕京。余亦屢見。今未知何在。
益齋先生奉使入蜀。歷覽江南也。圖寫諸勝。天下絶寶也。草坪李氏家。傳來五百年。不知所終。近見一族人家。塗之以壁。余言其來歷。始知爲寶。又出三幅。一垈山圖。一嵩山圖。一金陵圖。在壁上者霉不可辨。囑改裝分庋。牢不可回。可惜神物堙沒於煙煤中也。本八幅。秋史曾一移摹。未知尙在其書樓也。
張茶農題五州煙雨圖後云五州爲南徐鎭山。故米海岳父子多愛寫之。本朝王石谷,査梅壑,▼(竹/亘)江上三賢。曾合作一本。題曰五州烟雨。葢倣米也。茶農蒼雪子張深。余見此圖全用米點。大小霞善於其法。一本尙在余林下壁上。
甞以爲寫生難於山水。卽工染脂粉。尙患笨伯。况可議率爾命筆。肖奪天工耶。文字離於筆墨。而又到筆墨所未到之地。毛詩尙矣。爾雅之分門別類。離騷之標擧寄托。直與造物者爭工。吟釋之頃。芬芳溢簡。形色湧紙。自後古今名雋七言五字。往往有生香活色。猝然遇之。如見其眞。惟在人情思熟參。文工繪事。了非二義。我東畫學。但求之於畫。故去畫日遠。且士大夫不知詩書畫髓。同一法乳。繪素一事。委之院人而恥言之。卽此文字鹵莾。可以反隅。山水名家。或有家以稱說者。至於寫生。寂然無聞。卽有之。若出於院軆工細。必入於水墨。劻勷四百年間。惟一姜豹菴尙書超超玄著。余童子時。靑藍授受。但在竹石一派。至今懊恨。去年秋。余由少司冦。解官閑居。明窓凈几。握管從事。特愛豹翁。臨十竹齋。拒霜烟梅二頁。試一擬之。十脂拂拂。如有小悟。遂及於翁所未及臨者。凡得雜花菓蘭竹石二十四頁。頗宄寫生之法。首重在筆。次用墨。丹黃其末也。若其渲染秘妙。又全在於約畧淡遠間。至墨備五色。超脫象外。非具文心慧業者。未易告以金針矣。兒子準衍幼好弄翰。時窺一斑。爲書此數語卷尾以付之。奚止寫生指南。可作詩文津逮。小子知之。癸未春正月晦日。碧蘆舫書。
金剛經塔。七層俱有簷。欄檻瓦當。皆以經字寫成。此塔相傳是文殊大士所製。梵僧自天竺携來。在宋始勒于石。今得孫蓮隱所弆。明萬曆間。陸宮保樹聲,陳徵君繼儒等施刻。董香光其昌所書本。重摸刊施願。共一切見聞隨喜。普證菩提同到彼岸云。此圖辛未。望月寺居士性月重刊者也。余於中州天寧寺。見寶塔以鐵鑄成。又有塔圖長可十餘間。刻華嚴經。與金經圖同製也。
道光丙申四月。魯之段店嶺黃茂才元秀數畒田。生瑞麥雙岐至五岐。史冊所罕見也。魯山令鄭鑾爲之圖。余得其刻本。
人好瓦當文。取其氷泐也。古人於剝落處。尋得心畫。補以綴之。今之書者得剝落處。饞噎詭奇。惟恐不及。斷折破脫。因形塗鴉。如是而焉可窺純精精一之域哉。正如騎驢覔驢。
王漁洋云湖州專用羊毫。柔輭無骨。取貂鼠毛爲之。輔以兎毫。謂鍾,王所用鼠鬚必此也。然稍肥擧落運用。不如人意。余深感是言。在灣州。多得貂毛。以燕士所贈湖州羊毫已束者。解而補之。其製稍瘦不肥。擧落果中法。
中州贈余二錠古墨。有隃糜二字。按唐時高麗貢松煙墨。和糜鹿膠造墨。名隃糜。見地理志。隃糜漢縣名。地出石墨。或取其遠方之産而名之歟。復有此名而同行之歟。實未可辨也。
我東之墨。最稱海州。以其材料之善也。余躬自監造。春秋所製者每佳。惟印板之時。必須速乾。不爲腐傷然後合於品也。俗人乃言一墨之軆。上劣下優者。兩料付成之故。是誠見也。灌油亂擣。付板印出。何能間其優劣。渾合成一。有如泥土之易粘者乎。又謂烟煤之取也。遠者淸而近者濁。其說亦陋矣。葢以油品之好否。定墨材之高下。則何論遠近也。其爲劣品。多用魚油而然。十聞不如一見也。
東國産楮。甲於海內。湖南爲最。完山其品樸而滑。淳昌其品精而懦。南平其品梗而闇。南原其品色白如雪。滑如凝脂。此爲天下第一奇品。因水性而然也。嶺南麁重色駁。只合墐戶。近見西洋紙。比南原不可同日而語。此以東紙渾唐紙而成之。堅取於東。姸取於唐。其弊潛賣東楮故也。余見中州貴紙若金。無片楮之遺地。而東人則用之如糞土。其産之博。可知也。
史謂晉人喜嗇。王文康公甞戒子弟云吾平生。不以全幅紙作封皮。是則非嗇也。不欲暴殄而然矣。余學文康者。曾在湖南。習知其貴故也。歐陽公之說曰。學書者費紙。猶勝於飮酒費錢。誠哉言乎。
先王考甞歎侈風曰。文房之具。亦異於前。今之所謂周紙。出於英廟朝後。古則白紙截爲三四折。置之案頭。隨手任用。所以古簡帖上。有小㨾折紙之付者是也。此後則又將何如。到今見之。毋論某紙。擧皆聯用。至於色紙唐紙。靡有不及。書簡封皮。亦有贈遺。皆古之所無也。
康煕御銘松花石硯。其銘曰。壽古而質潤。色綠而聲淸。起墨益毫。故其實也十八字楷書。小璽文曰康煕宸翰。此硯曾見於翠雲樓中。終歸于養硏山房。
姜豹庵尙書童子時。於宅邊掘地得甆碑一。回靑字李白桃李園序。不知誰書也。至今子孫秘寶。
開元硯製葫蘆樣。回環刻蘭亭全文。跋曰大唐開元十三年春三月。奉聖旨臣馮承素恭摸。字小於蚕頭。洵奇物也。硯背又有乾隆壬辰御製詩一絶曰。米記韓馮惜未見。今看承素硯存眞。雖欣無翼聯珍羽。艱致却慙似褚人。此題恰今壬申爲百一年也。
東方古器。曰百濟瓦硯。有秋史瓦千年硯天然六字銘。曰高麗秘色尊。安宅物。曰高麗烏泥携甁。考古圖。以爲吏部蘓尙書子容使虜中。於帳中常見之。曰䧿川石硯。藥泉南相公鎭川頭陀山紫石硯詩云。聞昔韓生得鎭石。一拳携入紫宸中。重瞳鑑別親題品。聲價居然冠海東。韓生葢指石峯也。曰紗羅子石。曰葫蘆。曰馬面如意松癭也。曰倭剔紅創金山水杯。曰赤間關御硯司四海硯。曰西藏硯山。
百濟官瓦。得於金秋史。倩姜若山製爲舃硯。遂命名䲶鴦舃。銘曰䲶鴦瓦化爲舃兮。落花巖遺一隻兮。凌波兮彳亍。故國兮如昨。後千年兮烟月夕。詩人憑吊兮漁人綱得。辛未刻之。貞碧携贈星原。但留拓本。
尹梣溪舊蓄唐製小鵞硯。其㨾精竗。色微紫。磨墨不及端方。余曾一見之後。叩之復得一賞於鍾山廬。可比右軍顧渚鵞也。後又得宋製鸚鵡硯。詑之。
金石經者。樓閣洞居人。出於秋史門。善鐵筆。一時士大夫圖章。皆出其手。余亦使刻印者多。而比石墨書樓法。卑下無奇法。後有吳小山圭一。深得石墨法。往來彜齋,秋史之間。其法益神。大內諸刻。擧皆任之吳手。初則純正可珍。漸入佳境。則隨以索隱。其文不可辨。行之未十年。眼廢。中州周少白。以其手刻贈余。余以是踏於彜齋所求隷書。彜齋大驚曰。近世佳手。托余刻其印方。又使小山刻少白印。付之槎便。少白盡印其所刻全幅以歸之。此本在彜齋海棠樓。余前後所得周刻數十方。皆名刻也。年前以御書賜橘山嘉梧室八字。乞刻於少白。以眼昏不能副。倩丁學敎刻之。其法近周,吳餘派也。
犀之上品。必稱福州。葢眞軆堅如玉而文彩異常。大勝於華産。博物志云別有通天犀種。側見則如截束髮。而入水能照恠。又有辟塵辟寒等種而未之見也。皇明孝宗時。南邊士人治福犀。得一奇文。卽南極壽星像也。鶴髮鳩筇儀形宛然。愛而粧帶。不敢私儲。獻之于天子。東國不知犀品。只以好者稱爲福州産。可笑。
犀角之文不一。角初長時。見山則山形。見水則水形。萬曆上高縣得一乕。文皆鳥獸。抑山水豹之類。而與犀文同耶。
漢武帝始用白鹿皮爲幣。唐憲宗有飛錢。宋太祖有便錢。眞宗置交子務。高宗設東南會子。金元承之爲寶鈔。明初亦用之。余見淸國紙幣。卽公文也。有戶部印花字。得一紙則十年後可以覔錢。其法甚縝密。東國舊用布帛。此其制也。隨其長短交易。近無而惟深北行之。自錢貨之流入。此亦不行。
伏羲始制棘幣。黃帝范金爲貨。虞夏商金幣三品。至周太公立九府圜法。錢制始定。後景王更鑄大錢。秦曰半兩。漢高鑄楡英錢。呂后改八銖。文帝改四銖。武帝爲五銖。輕重適宜。蜀之直百。吳之當千。晉之比輪。陳之六銖。梁之兩柱。皆失之太重。魏之水浮,風飄,鵝眼。宋之綖環,菜子,荇葉。晉之四分。隋之裁皮,糊紙。皆失之太輕。唐高祖鑄開通元寶。肅宗以一當十。又以一當五十。宋初鑄宋元通寶。太宗始用紀元鑄錢。曰太平通寶。嘉祐行折二之令。崇寧行當三之法。皇明鑄大明通寶。與歷代錢兼用。又鑄洪武通寶當十,當五,當三,折二。東國肅宗朝始行錢。當宁丙寅。鑄當百錢。行之數年而止。今用當五。
王阮亭引姚露旅書謂烟草本名淡巴菰。出呂宋國。能辟瘴氣。始於漳州莆田等地種之。近則處處皆有。唐詩云相思若烟草。似唐時已有服之者。王肱枕蚓菴瑣語云烟葉出閩中。而邊人寒痰。非此難治。故至以一馬易一觔。崇禎中禁之不得也。我東則仁祖初。始爲盛行。純祖初。斗室沈公爲箕伯。擇好品葉。量束一兩。名之曰兩草。近日又有日草名色。卽監司日供之謂而味爲上也。葢此物始自他國轉來。而到今我東之品。甲於天下。然以其害者言之。良田美土費於種草之址。寶玉珍金糜於吸烟之具。而其所爲用不過衆人消閒之供。物之無益。莫此爲甚。而俗習成痼。卒難療祛也。余亦好之者。故方吸而言之。
春花落瓣。秋花落朶。落瓣者有實。落朶者無實。有實者種生。無實者根生。葉厚者冬靑。冬柏之類。葉大者早凋。梧桐之類。樹大者葉小。槐之類。蔓生者實大。瓠爪之類。花美者無實。牧丹之類。花細者實美。棗李之類。易長者先萎。晩翠者得壽。余種樹林園。驗之則果然。
甞見草木攷。卉者草木之総名。木謂之華。草謂之榮。不榮而實者謂之秀。榮而不實者謂之英。爾雅。荄根也。木有直根有蔓根。直根曰根。蔓根曰柢。韓子。凡生草而初達謂之䓲。方言草盛曰菶。木茂曰葆。風俗通。木簇生爲灌。詩之集于灌木者也。無枝爲檄。木下曲曰樛。上竦曰喬。槐棘曰喬。爾雅云小枝上繞爲喬。漫錄之。以備一覽。
晉書元康二年。巴西界。竹生花紫色。結實如麥。宋乾道間。亦有之。東國嶺南。産竹實。晉州尤多。果如麥。作米如粳糯。味馨香。
植物之中。非草非木。不剛不柔。生十五日。成棟樑者曰竹。澄州之甘竹方竹。成都之三稜竹。道州之丹竹。飛魚口之紅竹。島岑之白竹黃竹。占城國之黑竹。瀟湘江之斑竹。熊耳山之丹靑竹。華陽國之二色竹。此皆竹之恠者。而我東之金絲烏竹。尤奇也。
草有無根而生者。菟絲也。木有無花而實者。卽無花果。余曾於燕市購來。果結於葉上。味甘。
我東火砲。始于麗末。判事崔茂宣。學其法於元國焰焇匠云。鳥銃本出於西域。用以捕鳥雀。故名鳥銃。倭奴得其制於呂宋國。以爲兵器。壬辰之變。我國人始見而駭之。佛浪機者。本西洋紅毛番種。萬曆中。襲殺呂宋國王而據其地。其人好用大砲。故仍爲火器之名。
按明史兵志火箭條內。永樂征交趾。得神機槍礟法。特置神機營習之。大者用車。次及小者。用架用樁用托。所謂用車者。卽今之大砲也。用架用樁者。葢卽今之鳥機也。其用托者。葢卽今之鳥槍也。是鳥槍之制。永樂中已有之。然不傳於外。永樂二十年。雖從張輔請。置砲於大同等關以禦敵。然利器不示人。朝廷每愼惜之。宣德中。又敕宣府総兵譚廣。謂神銃國家所重以壯軍威。勿輕給。正統六年。邊將黃眞立神銃局於宣府。帝猶以火器外造。恐傳習漏泄。特敕止之。是正統以前。鳥槍未甞傳習於外。直至嘉靖以後。始用之於營伍耳。
凡扈從及出使。皆服短褂缺襟袍及戰裙。短褂亦曰馬褂。馬上所服也。疑卽古半臂之制。說文。無袂衣謂之䙃。旣曰半臂。則其袖必及臂之半。正如今之馬褂。其無袖者。乃謂之背子也。曾三異同話錄云近歲衣制有一種。長不過腰。兩袖僅掩肘。以帛爲之。仍用夾裡。名曰貉袖。起於御馬院圉人。短前後襟者。坐鞍上不妨脫着。以其便於控馭。此又宋人短褂之制。隋文帝征遼。詔武官服缺胯襖子。三品以上皆紫。唐書高祖武德元年。詔諸衛將軍每至十月一日。皆服缺胯襖子。是缺襟之制。亦起於隋唐時。至戰裙之始。按國語鄢之戰。郤至於靺韋之跗注。三逐楚平王。註。跗注者兵服。自鞍以下注於跗。則今之戰裙。盖本此也。邲之戰。屈蕩逐趙旃。得其甲裳。又裙之有甲者耳。東人所着快子禙子之屬。猶馬褂子。牽夫所着短同衣。猶缺襟袍。至於戰裙。今新頒軍捴所着膝甲是也。按江淅人兩行着釘鞵。明史百官入朝遇雨。皆躡釘鞾。聲徹殿陞。東國油鞋油靴。卽其制也。
假面葢起於周禮方相氏。黃金四目以逐鬼。後漢書禮儀志。有大儺之儀。以木面獸爲儺。其濫觴也。高齊蘭陵王長恭着假面。與周師戰於金塘。齊人壯之。爲蘭陵舞。宋狄靑每戰。帶鐵面具。以鐵爲之者。軍旅所用也。東國有山棚戲橦絙戲。皆以木楦。三南多有之。古者迎勅時。列於路左。又有衣臼像婦人之儀於門前。今皆無。
井邑內藏寺。産柹小如栗。食之無味。惟乾而浸水極佳。豊基恩豊面乾柿。品甲於國中。彼人云糖屬之所無。以此推之。雖謂之甲於天下可也。咸從皮赤栗。小如橡實。春而叢生。秋而結實。乾之善解甲。名曰妓栗。智異山有山栗。秋來自落。塡流于溪。民爭取之爲粮。不知所由於何處。山深不得到故也。中州柿有六稜不甜。栗與咸從近。風土有同有不同。
申紫霞園中。種紅荳有兩大叢。覃家所贈也。羣芳譜所載。梅雨時開花。結實枝頭如珊瑚。豆紅嫣可愛。此與王右丞詩紅荳生南國之紅荳不同也。李濤叟仁默得一枚於翁星原視余。大於白扁豆。鮮紅可愛。謂之紅荳相思子也。風土記。八月雨曰荳花雨。
月沙李公。自中州移來單葉紅梅。種之廟前。此種遍滿國中。廟樹已枯。人見單葉紅梅。輒曰月沙梅。
梧陰尺牘曰。三尺童子携魚而來。巨口細鱗。松江之鱸耶。鱠縷如雪飄飄。氣欲仙也。仙桃四枝並蒂者。非爲報也。聊以表意。
我國之稱蘭草者。皆以爲馬蘭。第以花譜考之。非馬蘭。卽箬蘭也。馬蘭。本草云一名紫菊。其葉似蘭而大。其花似菊而紫。箬蘭。花譜云花紫。形似蘭而無香。四月間。産海島陰谷中。此豈非我國所謂蘭草者乎。
羣芳譜。秋牡丹草木葉。似牡丹差小。花似菊黃心。秋色寂寥。植數枝。足壯秋容。卽俗所謂唐菊也。
靖陵齋室庭松檜叢靑之中。有梅花樹玉英粲然。卽西山大師休靜所手植也。丁丑春。人皆見之。未知五十年間榮枯也。
靑海牡丹。傳以爲艮岳遺種。出自五國城。節度園池環種。無慮數百本。皆盈握之老幹也。花品亦佳。昔白沙先生於三樂齋。節度使送菊花種之。靑海之多花種。自古然矣。曾見齋前。亦有牡丹。想是艮岳之種。
康津普林寺竹田茶。丁冽水若鏞得之。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其品不下普洱茶。而穀雨前所採尤貴。謂之以雨前茶可也。海南等地。有栍橽實。取油凝而鑄燭。不下燭。治婦女乳腫。亦丁冽水法也。濟州産水仙花。秋史始知之。取長如法。不下江南種。而本土有五色花。渡海色變。又取黃茶。遜於燕種。而頗爲近可。
廣州南門外細村面金光里金氏田産煙草。稱爲國中殊品。面內所産。統稱爲金光草。今則一境所産。皆借其名。湖南之上官草。與金光名等。上官面所出。皆謂之眞品。本面在全州任實之間山峽五十里。可藏兵馬。故名曰萬馬洞。洞中之田。俱是種草爲業。鎭安亦産草。卽其餘派也。嶺南稱新寧草。有似上官而有毒。水原之紅草。似金光而不及之。六抵西勝於南。成川草田亘連江東,三登之境。謂之成川草。皆資於江,登而細剉出色。成川其尤也。
菸鄕之佳者稱靑,定。卽靑陽,定山也。膩燭則出錦城淸州者。靑心最上。舊稱葵花燭。燭一枝可達冬之永夜。猶有餘跋。
三餘帖。女星散爲配玄。配玄卽今水仙花也。甁史。水仙神骨淸絶。織女之梁玉淸也。一種千葉謂眞水仙。單葉名水仙。千瓣乃玉玲瓏。余癖此花。顔所居曰種水仙三百本舫。取出門一笑大江橫之意也。李荷居帶醫提。與妓接話。一世驚恠。雲石聞之。見李公曰。公七十。始知愛妓。當以花賀之。送水仙一盆。水仙之爲女精。果有以也。水仙産於江南。在昔壬申。紫霞使燕。冬回携來之。此爲東來之始也。于今六十年。東來不絶。甲午後燕貨禁條。花亦入其中。數年不出。後漸弛其禁。咸豊時南匪之役。皇城又絶種。尙今買賣不敷矣。
甘藷在果蓏中最後出。可以賙饑。可以延年。又可以禦蝗而弭旱。始自閩,廣。殆遍天下。獨我東近始購種於日本。沿海若而邑。僅得傳殖。而峽野之民。不識藷爲何物。純祖甲午。徐楓石廵按湖南。亟訪藷種。頒諸列邑。且取皇明徐玄扈甘藷䟽,我人姜金二氏之譜。彙類編纂。擺印廣布。以諗其種藝之法焉。余得食徐公之煮爲餻甚佳。取其法。
元次山丐論云古人鄕無君子則與山水爲友。東坡詩。風泉兩部樂。松竹三益友。余所居鄕里。無好山水。無好松竹。又無好琴酒。其安所從君子友乎。
醫家本草。歷代所增。各自爲書。今合而爲一。非古本也。原書始於後漢。別錄者魏晉以來。吳普,華唐之所記。于志寧,李勣等。修本草並圖。合五十四篇。謂宏景以神農經及諸家別錄注之。江南徧方。不能周知藥石。其謬誤至四百餘種。遂考正之。又增後世所用百餘物。陳藏器所著則又名本草拾遺。明李時珍又著本草綱目。益詳備矣。按時珍傳。醫家本草。自神農所傳。止三百六十五種。陶宏景所增亦如之。唐蘓恭增一百一十四種。宋劉翰增一百二十種。至掌禹錫,唐愼微輩先後增補。合一千五百五十八種。至時珍。又增三百七十四種。本草之普濟蒼生。其功無量。
梅亦寒花也。氣像極瀟洒。多貯害子宮之說。古已有之。人或以沈斗室證之。以余所見。南圭齋築梅花室。藏奇品屢百本。名動一世。不數年。圭齋歸道山。其室作人醋塩供億之處。前人之垂戒。不無所見也。
梅宜藏寒屋。杏宜藏粧坮。梨花宜春雨。荷花宜曉風。海棠桃李宜歌舞席。牧丹芍藥宜棨戟門。芳桂幽蘭宜贈隱士。
閩有紅茉莉。蜀有紫綉毬。楚有紅梨花。燕有黃石榴。天台有黃海棠,白海棠,白紫碧桂花,白玫瑰。洛陽有黃芍藥。昌州有香海棠。吾園有輭紅綉毬黃石榴,白海棠。
長湍人發古塚。得甆器,崇寧錢,銅鏡。錢隨手卽壞。鏡作徐卯翁畊輔所庋。圓徑三寸有奇。背鑄盤龍。面微凸。正古所稱衜家聚形鏡耳。綠斑透出膚理。望見可知爲入土千年物。可懸此爲鑒定古銅之玉尺也。
金尙古堂孫魯鍾。葬兄泰仁君萬鍾於長湍山中。治壙得古人殉物宋錢數百枚。皆元豊通寶。卽所謂靑苗錢也。八角鏡一面銘曰。湖州眞正石。念二叔照子。鑒人面淸如明。奇物也。古人多以如字作而用。
星原舊有古井。淘得宋窯酒杯。柳貞碧得於石墨書樓。甚愛之。時刻不離手。携至瀋陽。失手見破。養硏老人以詩嘲之曰。蛾眉宛轉一聲嗟。千古凄凉是馬坡。竹葉於吾眞不分。救君不得奈君何。器破者余曾見之。鐵絲補綴尤奇絶。勝太眞一襪也。
七佛偈。山谷書。薦其母夫人冥福也。霞翁得之象山村家袱梁上。山谷又書石鏡溪三字。在瞻雲寺讀書臺。寺在廬山中。拓本藏蘓齋。
柳惠風冷齋書種曰。方寸玉一片。羊脂色雙螭首。一面刻山水平橋漁舟遠塔。微微可辨。一面刻詩云。綠莎白石滿河洲。渺渺平沙帶淺流。紅樹靑山無路入。行春橋畔覔漁舟。小印文曰子剛。成川府民。耕田拾得。獻于府使。府使之子。戀詩妓一枝紅。與之佩。後歸邑子某。府使某以重價取之。詩情畫意。俱極縹緲。刻法又神。必是中國物。但未知子剛之爲何代人。以待後査。按成都民。墾荒塚間。得此玉獻之官。遂歸於一枝紅。紅又情贈富民某甲。後鄭府使取爲寵姬之餙。姬居燕子樓者且十年。售玉以資衣食窘。此玉又歸於侯門之絶艶。玉自出土來。凡三易主而三噪於世。葢尤物也。有一嗜古者。購求於艶。艶竟刓敝不出手云。子剛姓陸氏。徐文長水仙花詩云。畧有風情陳妙常。絶無烟花杜蘭香。昆吾鋒盡終難似。愁殺蘓州陸子剛。自注云陸子剛蘓人。碾玉妙手也。据此則子剛爲文長同時之人。而此玉爲明嘉隆間之古物。無疑也。
許文正穆少時。往其外祖林白湖家。見一塊石在庭中。請持歸之。林公曰。此石我得之田間。而不意爾之見也。遂破之。中有一小玉。白湖曰。意謂其大。及見小矣。使作玉鷺。許公卽其席手刻之。傳爲至寶。韓公致應爲兵判。借用之。一日忽心動。使之還本主曰。古家神物。不必久留。是夕火。其家舍什物書籍。皆不能保而玉鷺得全。
斗室宅。舊蓄高麗秘色瓷尊。爲安文成公宅遺墟所得。可寶也。養硏老人。借用八年而還。安文成甞掛晦菴像。遂號晦軒。甘露寺詩曰。日暖庭花藏淺綠。夜凉山月送微明。憂民未得湔塗炭。欲向蒲團寄半生。史稱憂國傷民之意溢於辭也。此尊卽先生舊物。而繪翥鶴六朶雲十八。皆用粉靑。余蓄瓷器。以粉靑靑畫靁文。麗俗之用采。皆以粉靑可知也。正字通。今俗以尊作尊卑。以尊酒器之尊。別作樽非也。樽林木茂盛也。說文。又作罇。古者酒一壺稱一經。人有以五經遺者。聞其來。束帶出迎。乃酒五壺。非五經博士也。尊說之下。漫錄古人語。
高江村天祿識餘。謂今之摺疊扇。初名聚頭扇。元時。高麗始以充貢。明永樂間。稍效爲之。今則流傳寖廣。團扇廢矣。至於揮洒翰墨則始於成化間云。張東海以爲貢於東夷。永樂間。盛行於中國。然南宋以來。詠摺扇者頗多。東坡謂高麗白松扇。展之廣尺餘。合之止兩指。卽此也。南方婦女猶用團扇。惟妓女用撒扇。近年良家婦亦用之云。
編竹爲筒。空其中而竅其外。暑時置牀席間。可以憇手足。取其輕凉也。俗謂之竹夫人。按陸龜蒙有竹夾膝詩。卽此器也。湯婆子用銅錫器盛湯。置衾中煖脚。按此名雖不經見。然東坡有致楊君素札云送煖脚銅缶一枚。每夜熱湯注滿。塞其口。仍以布單裏之。可以達旦不冷。范石湖有脚婆詩。則是時幷有脚婆之稱也。東國有兩品竹夫人。一如此制。湯婆子事不稱器。老人或以匜器盛湯水。以煖手足。亦此制也。
賣暑。唐宋人賣痴獃。此與賣暑同其流俗。踏橋。麗俗以禳脚病。諺所云一夜踏十二橋。消十二月之灾。壬辰後此風漸衰。望月之厚薄。以徵豊儉。其來久。而陳穀穗,嚼癰果,拔河戱。皆羅麗舊俗。而佳節遊衍之一事也。
歐陽公云唐人宴聚。盛傳葉子格。袁文謂此唐之讖也。葉子二字折其字。上半乃廿世字。餘木字湊下子字作李。乃是廿世李。正合有唐二十帝之數。南唐書。李後主妃周氏。又編金葉子格。卽今之紙牌也。東國投牋謂之紙牌。與中州制同而異。余所曾見者也。
㙜城之圍。梁武帝以紙鳶告急於城外。而援師莫有進者。金守汴日。爲紙鳶。置文書其上。至北營則斷之。以誘被俘者。識者謂宰相以此退敵難矣。然唐張伾守臨洺。爲田悅所攻。馬燧等救兵未進。伾急以紙鳶放過悅營。悅射之不及。乃落燧營。言三日不救。洺人且爲食。燧等遂進解圍。是紙鳶亦有時濟用。東國以紙鳶爲戱。元日始。上元止。
高麗闕庭曰毬庭。形似毬也。近世馬習步曰。毬庭其步圓。似戱毬也。
楓石作龍尾車記曰。泰西水法爲車者三。筩焉提焉下上焉而激水。謂之玉衡。筩焉柱焉升降焉而趵水。謂之恒升。墻焉圍焉環轉焉絜水。謂之龍尾。而龍尾於河宜。玉衡恒升於井宜。故功用之博。龍尾爲最。三者皆西法。而明太保徐文定之所傳也。叙工精切。駸駸乎考工之亞。炯菴曰。余讀奇器圖說。回互或難解。未若此記之歷歷如覩掌紋也。
木綿布行於宋末元初。古者凡布。皆以麻爲之。木綿作布。邱文莊謂元時始入中國。南史林邑傳。水綿吉貝樹也。花係木本而非草本。其色正紅。及落時則白如鵝毳。但其花秪可絮茵褥而不可織布。唐書南蠻傳云吉貝草。緝花作布。名曰白㲲。又名古貝。夏之織貝。卽今草綿布是也。東邦之出。文忠宣益漸始也。其孫曰萊。造機抽絲。呼其機曰文萊。
羲皇始造布。然其用何物爲布。及升數精粗。莫得以考焉。想亦不越於絺綌也。三代以上之布。必以二尺二寸爲廣。以及升數多寡。皆以爵秩爲之等威。故禮深衣。言袖曰廣終幅。又曰布帛精粗不中數。幅尺廣狹不中量。不鬻于市。後世則不能然爾。
漢時金銀。皆以斤計。如高祖賜陳平金四萬斤之類是也。侯景圍城。羊侃率兵禦之。詔送金五千兩,銀一萬兩。以兩計起於梁時。東國銅鐵以斤計之。金銀以兩計之。有貴賤故也。
髹漆器用。蚌蛤殼鑲嵌。象人物花草。謂之螺塡。方勺泊宅編謂本出倭國。而藍衍訛爲羅殿。而附會之誤矣。又當作螺鈿。我國皇太后,皇后前進獻禮物。卽螺鈿小盒一坐。而余於使行見之。不過是貝盒樸制也。以此作爲年貢方物。殆儉也。
俗以鳳仙花染指。自宋已然。癸辛雜識。鳳仙花紅者搗碎。入明礬少許。染指甲。用片帛纏定過夜。如此三四次則其色深紅。洗滌不去。直至退甲。方漸失之。回回婦人多喜此云。今俗則不持回回婦人也。
禮。婦人吉拜。雖君賜肅拜者。周禮太祝九拜之一。鄭註謂俯下手。如今之撎。按推手曰揖。引手曰撎。肅拜如撎。正今俗婦人攏兩手向下之禮也。惟婦人之拜。跪與不跪。諸家之說紛紛。洪容齋等謂古禮婦人之拜。本不跪。東國婦人之拜。伸腰而拜。兩手據地。顙不至席。此與古法脗合。以其首餙甚多。不得俯伏。與介冑之士同也。
正廟己亥。有禁髢製冠之議。上曰。花冠之屬。雖云簡便。末世侈風。轉相務勝。名雖花冠。而加以珠玉金貝之屬。盛加造餙。則其費之鉅。反有過於髢髮之具。此所謂以弊捄弊。亦豈非可悶乎。近俗如遵古。則必以花冠用於婚禮。禮家無珠貝之繁。宜以冠制分等品可矣。
舊聞崔杜機承旨成大。與申靑泉維翰。爲前生伉儷。靑泉是夫。杜機是妻。杜機詩集中酸蔣歌。悽婉可愛。卽有感於斯而作也。其塚在壽春。南秋月秘書玉之塚。亦在是土。崔稿幷在。南氏家人指謂二詩塚。崔之孫琴有詩曰。殘杏數株還斫盡。明年何以答春風。極有大致。
純祖乙酉十月十四日。鶴山行臺自耽羅返命。至崸嶝前洋。所騎船遇風漂流。十五日汐水。還泊濟州別島浦。先以兼道科試官而行。收券亦得完。綠袍之爲文科主文。罕例也。先是鶴山言三十年前。夢見坡仙冠危冠。衣黃紬袍。據天然几。几上空諸所有。只有一小帖子。少頃。坡起身出戶。顧語鶴山曰。君且坐閱是帖。對曰是公詞翰否。曰是。展視之。第一幅。紅箋上有塡詞一首。當時頗了然。覺來惟記首句。曰月痕西墮。衆江東流。又記中腔。曰綠楊陰中紅叱撥。末尾曰須寄書扇榦兒來。不省榦兒是何語。後閱公集及志林。王朝雲生子曰榦兒。未朞而夭。然則夢中所遇。殆眞是坡仙。恨不能記其全曲也。
香取其遠。酒取其臭。石取其枯。琴取其初。茶取其色。竹取其影。月取其空。棋取其寂。杖取其近。水取其積。雪取其颯。釰取其畏。蒲團取其弊。美人取其猜。僧取其閑。花取其暗。金石鼎彜取其老。
客過林廬。叩余幽事。拈古人詩句以應之。問是何感慨而甘棲遯。曰大都心足身還足。只恐身閑心未閑。問是何工課而能遣日。曰惜花春早起。愛月夜無眠。問是何利養而獲終老。曰子種孫耕無歉歲。筆花墨雨有豊年。問是何往還而破寂寥。曰陽坡草軟厚如織。仍與麋鹿相對眠。問是何所有。曰嶺上多白雲。問是茅棟成。曰居然我泉石。問是何所聞。曰蟪不知春秋。蛙不爲公私。流水猶聾耳。鳴蟬重我欺。又曰長對靑山無問答。秪看時曆有春秋。此余之句也。
自古人臣之奉宸翰。以爲榮耀者不一。而未有如賤臣之受賜也。戊辰秋。聖上書下橘山嘉梧室五字。橘山卽臣之賤號。而嘉梧室者。是所居巷名也。未知聖聦何以記存而垂此分外之異數也。於是建閣而奉之。諸長老以文賀之。此畫見魏野居也。
爲官避瘴氣。不知仕亦有瘴也。急催暴斂。剝下奉上。租賦之瘴。深文以逞。良惡不白。刑獄之瘴。侵牟民利。以實私儲。貨財之瘴。攻金攻木。崇餙車服。工役之瘴。盛揀妾姬。以娛聲色。帷薄之瘴。
陳眉公有多少箴。其語不俗。今有一本。不知何人作。其詞云少嗜慾。多聞見。多素心。少靦面。少附貴。多右賤。多獨立。少拘戀。少京闉。多鄕甸。多穅秕。少珍膳。少語言。多兢戰。多自守。少耽羡。我有旨酒。以敖式讌。
山居有八德。心兮虛。軆兮舒。欲兮鋤。禮兮䟽。翁兮漁。兒兮書。仕兮躇。刺兮祛。舍此則飯先生等耳。
酒史作人逸其名。其槩云松下對坐。談屑娓娓。不覺前山斜陽灧㶑。霞氣氤氳客欲起。不可不一飮也。雨裡旅舘。聞隣家漉酒聲。不可不一飮也。浴罷淸流。高卧絶壁。聽黃鸝兩三聲。不可不一飮也。老菊殘楓。秋懷寥廓。徘徊庭除。有知心者至。不可不一飮也。秋深山屋。挑燈讀遊俠傳。至風蕭蕭兮易水寒之句。不可不一飮也。明日將討敵。整頓旗皷。撫長劒待天明。瞥見紅旭滿地。不可不一飮也。學公孫舞劒。掃太守千畒。不可不一飮也。讀諸葛亮出師表。不可不一飮也。和陶淵明自挽歌。不可不一飮也。訂唐詩。至李靑蓮廬山瀑布詩。不可不一飮也。山窓雪霽。曉月晶明。宇宙無一點塵埃氣。不可不一飮也。皷琴至尾煞。忽聞秋風怒號。精神悚懔。不可不一飮也。篁陰滿簾。林園瀟洒。窓外聞落子聲。酒思先動。也見落花。不可不飮也。贈好酒器。不可不飮也。有憂者終宵輾轉。痛飮二三盃。呴呴而睡。亦快事也。
東坡投荒時。答程大侔云。此間食無肉。病無藥。居無室。出無友。冬無炭。夏無寒泉。大率皆無耳。余鄕公所無者盡有之。但無肉與藥。
東坡曰。種樹大者不能活。小者老夫又不能待。惟擇中材而多帶土碪者爲佳。余每取公言。
心閒身逸則看書。心豪手健則寫字。心游眼明則作畫。心淸指輕則皷琴。心身俱懶則病。心手俱冗則卧。心眼俱暗則睡。心指俱發則歌。
巖上石虎抱兒眠。禪門悟道語也。雲在靑天水在甁。僧家見性偈也。凡詩文書畫。先得虛靈氣然後自入竗境。秋史曰畫無書氣近院格。紫霞曰書無篆隷氣俗。楓石曰詩文當有書畫氣。反是者飯儈牛店販馬驛。何暇做遊閑公子峩冠博帶。高視濶步。周旋於大雅之塲哉。
洞庭張山人云山頂泉輕而淸。山下泉淸而重。石中泉淸而甘。沙中泉淸而冽。土中泉淸而厚。流動者良于安靜。負陰者勝于向陽。山削者泉寡。山秀者有神。眞源無味。眞水無香。余於天摩頂飮輕。退士潭飮重。雙檜亭飮甘。壽谷竗井飮冽。靑海東井飮厚。其安靜向陽。寡神味香。皆可足言。
養生家忌魁罡神責。其實責其懶也。余嗜卧。氣之懶也。善坐睡。神之懶也。不好讀書。高之懶也。不好博奕。癖之懶也。不飮酒。韻之懶也。不遊山。耽之懶也。落花不掃。春之懶。庭草不除。夏之懶。好居鄕山。懶於世。
人皆言明哲保身好矣。余謂立節死義易。明哲保身難也。留心於立節而不及。則不陷於不義之科。保身之策。自在其中。專以保身爲心。則不免爲小人鄙夫之態。
余少時見鑄字役於閣中。有一人年可二十。爲人伶俐。聦明絶人。有問則無事不對。屢日見之。甚奇之。問其姓名與居住。漫漶不對。使人探察。終不知其來歷。于今三十年。益恨失人才之歎。
太常造脯。饗天地岳瀆廟社之需也。滿庭布肉。烏鵲不敢近。羣鳥又不得飛其上。所以無禁止之具。五百年如一日。收藏之時。不見鼠嚙。亦異矣。余管是寺。每聞如此。抑神靈之護也。
余甞聞之。作詩與文。有六病。荒也姸也濁也輕也澁也固也。荒則有不工之歎。姸則有浮儇之嫌。濁失於富而畜。輕失於貧而素。澁之不能容旋。固之不能通變。是皆病也。人之言也。雖馬,韓,李,杜之高。不得辭其責矣。
牴二獸名。秉心忠直。皇明承天門內華表頂上者。是余曾見於燕宮橋邊。又於衛輝府前石有之云。此亦龍九子之類同。
明儒論尹吉甫曰。雖有崧高,烝民,韓奕,江漢四詩。然惑後妻。其子伯奇衣苔帶藻。作履霜之操。比晉獻驪姬。非名臣也。此亦達論。而公私有異。以伐玁狁。其惟曰萬邦爲憲。則豈不足爲名臣乎。
中州鳳山縣有薑。名三寶薑。相傳明初。三寶太監所植。可療百病。我國産薑處。惟全州之鳳翔面。或引三寶薑而名歟。亦可紀也。
漁洋山人。使蜀過劍州。見南門外修小廟。曰鄧艾廟也。歎曰。不祀姜伯約。反祀鄧艾乎。欲毁之。後見唐人唐彦謙詩曰。昭烈遺黎死尙羞。揮刀斫石恨譙周。如何千載留遺廟。血食巴山伴武侯。已先我而言之矣。余以爲此說。可附出師表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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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尙以易相漢。能上陰陽之奏而不能防宦戚之萌。不知繫于金柅之戒也。匡衡以詩相漢。能陳關雎之義而不能止奄寺之惡。不知昏椓靡共之戒也。經術雖明。奚益焉。
迂齋謂伏羲未作易之前。天下之人心無非易。伏羲旣作易之後。天下之萬事無非易。
六誓可以觀義。五誥可以觀仁。甫刑可以觀誠。洪範可以觀度。禹貢可以觀事。臯陶謨可以觀治。堯典可以觀美。
風俗世道之元氣也。觀葛生之詩。堯之遺風。變爲北方之強矣。觀駟鐵小戎之詩。文武好善之民。變爲山西之勇猛矣。晉秦以是強於諸侯。然晉之分爲三。秦之二世而亡。風俗使然也。是以先王之爲治。威強不足而德義有餘。
古未有筆。以書刀刻字於方策。謂之削。魯爲詩書之國。故考工記。以魯之削爲良。
周無射之鍾。至隋乃毁。唐顯隆之輅。至宋猶存。物之壽。亦有數耶。
君之於民。亦曰忠。季梁云上思利民忠也。子之於親。亦曰慈。禮云慈以旨甘。聖賢言忠。不顓於事君。爲人謀必忠。於朋友必忠告。事親必忠養。以善敎人。以利及民。無適非忠也。
河圖曰。崑山出五色流水。其白水入中國。名爲河。故晉文公投璧于河曰。有如白水。
劉炫謂國語非丘明作。葉少蘊云古有左氏,左丘氏。太史公稱左丘失明。厥有國語。今春秋傳作左氏。而國語爲左丘氏。則不得爲一家。文軆亦不同。其非一家書明甚。左氏葢左史之後以官氏者。朱文公謂左氏。左史倚相之後。故其書說楚事爲詳。司馬氏謂左氏欲傳春秋。先作國語。國語之文。不及傳之精也。
漢武尊公羊家。而蘓氏謂何休公羊之罪人。晁氏謂休負公羊之學。五始二科九旨七等六輔二類七缺。皆出於何氏。其墨守。不攻而破矣。
劉盛不好讀。唯讀孝經論語曰。誦此能行足矣。安用多誦而不行乎。蘓綽戒子威云讀孝經一卷。足以立身治國。何用多爲。愚謂梁元帝之萬卷。不如盛,綽之一言。學不知要。猶不學。
范太史曰。能事親則能事神。王梅溪見人禮塔。呼而告之曰。汝有在家佛。何不供養。葢人能奉親。卽是奉佛也。
徐景安樂書。宮爲上平。商爲下平。角爲入。徵爲上。羽爲去。則唐時平聲。已分上下矣。
文子者。老子弟子也。其書稱平王問道。其言曰。玉在山而草木潤。珠生淵而岸不枯。荀子取之。譬若積薪燎。後者處上。汲黯取之。再實之木。其根必傷。明德后取之。用兵有五。有義兵。有應兵。有忿兵。有貪兵。有驕兵。義兵王。應兵勝。忿兵敗。貪兵死。驕兵滅。魏相取之。孔子無黔突。墨子無暖席。班,杜,韓諸儒取之。心欲小志欲大。智欲圓行欲方。孫思邈取之。德均則衆者勝寡。力敵則智者制愚。陸抗取之。欲治之主不世出。王吉取之。寸而度之。至丈必差。銖而解之。至石必過。石稱丈量。徑而寡失。枚乘取之。山有猛獸。林木爲之不斬。園有螫虫。葵藿爲之不採。國有賢士。折衝千里。鄭昌取之。文之所加者深。則權之所服者大。德之所施者博。則威之所制者廣。班固刑法志取之。人之將疾。必先厭魚肉之味。國之將亡。必先惡忠臣之語。越絶劉子取之。乳犬之噬虎。伏鷄之搏貍。何休註公羊取之。又曰。士有一定之論。女有不易之行。同言而信。信在言前。同令而行。誠在令外。狡兎得而獵犬烹。高鳥盡而良弓藏。皆見此書。其見於列莊淮南子者。不可摟數。
郭象注諸子曰。聖人之在天下。煖然若陽春之自和。故蒙澤者不謝。凄乎若秋霜之自降。故凋落者不㤪。李太白云草不謝榮於春風。木不怨落於秋天。其語本此。注又曰。世有假寐而夢經百里者。則無以明今之百年。非假寐之夢者也。邯鄲枕南柯守之說。皆原此意。幽求子曰。當其夢時。覩山念木。或志在舟楫。因舟念水。因水念魚。東坡夢齋銘。意出於此。
易姓而王。封於泰山。禪於梁父者。七十有二代。其有形兆。垠堮勒石。凡千八百餘處。
韓子曰。商君敎秦孝公燔詩書而明法令。愚按史記商君傳。不言燔詩書。葢詩書之道廢。與李斯之焚之無異也。
諸侯棄兵甲之讐。爲盟會之禮。乃於登壇之後。奮匕首劫國君。賊天下之禮者非沫乎。君臣之義。有死無隕。專諸感公子光之豢養。而親剚刃於王僚。賊天下之義者非諸乎。父母全以生之。子全而歸之。政纔終父母之年。遂殺身以爲仲子。賊天下之仁者非政乎。樊將軍以困窮歸燕丹。荊說取其首以濟入秦之詐。賊天下之信者非荊乎。以賊禮賊義賊仁賊信之人。並列於傳。又從而嗟嘆其志。不亦繆哉。豫子以不忘舊君。殺身而不悔。抗節致忠。行出乎烈士。乃引而寘諸四字之間。不亦薰蕕之共器乎。
三國鼎峙。司馬公通鑑。以魏爲正統。朱子綱目。以蜀漢爲正統。然稽於天文則熒惑守心。魏文帝殂而吳蜀無他。此黃權對魏明帝之言也。若可以魏爲正矣。月犯心大星。王者惡之。漢昭烈殂而魏吳無他。權將何辭以對。
君子其潛如龍。非迅雷烈風不起。其翔如鳳。非醴泉甘露不食。司馬德操,諸葛孔明。俱隱於耕稼而仕止殊。魏玄成,徐洪客。俱隱於黃冠而出處異。如用之易地則皆然。
號萬石者五家。漢石奮及四子皆二千石。號萬石君。馮揚爲弘農太守。八子皆爲二千石。亦號萬石君。嚴延年兄弟五人至大官。母號萬石嚴嫗。秦龔爲穎川太守。羣從同時爲二千石者五人。號萬石秦氏。唐張文瓘爲侍中。四子皆至三品。號萬石張家。
執笏始于宇文周保定四年。紫緋綠袍始于隋大業六年。
佩魚始於唐永徽二年。以李爲鯉也。武后天授元年。改佩龜。以玄武爲龜也。
漢黨錮以節義。羣而不黨之君子也。唐朋黨以權利。比而不周之小人也。漢之君子受黨之名。故其俗淸。唐之小人行黨之實。故其俗弊。
呂氏童蒙訓云前輩有編類國朝名臣行狀墓誌。取其行事之善者。別錄出之以自警戒。亦樂取諸人以爲善之義。籍溪胡先生敎諸生。於功課餘暇。以片紙書古人懿行。或詩文銘贊之有補於人者。粘置壁間。俾往來誦之。咸令精熟。此二事可以爲法。
柳下惠見飴曰可以養老。盜跖見飴曰可以黏牡。見物同而用之異。
董仲舒三年不窺園。法眞歷年不窺園。趙昱歷年潛思。不窺園門。桓榮十五年不窺家園。何休不窺園者十七年。
漢丞相再入二人。周勃,孔光。御史大夫再入三人。孔光,何武,王崇。後漢太尉再入二人。劉矩,馬碑。三入一人胡廣。司徒再入二人。魯恭,胡廣。司空三入一人牟融。唐宰相再入五十七人。長孫無忌至裴樞。三入十二人。武承嗣至鄭畋。四入三人。韋巨源,姚元之,韋安石。五入三人。蕭瑀,裴度,崔胤。
舊史德宗紀。貞元六年。岐州無憂王寺。有佛指骨寸餘。先是取來禁中供養。二月乙亥。詔送還本寺。此迎佛骨之始也。韓愈傳云鳳翔法門寺。有護國眞身塔。內有釋迦文佛指骨一節。貞元,元和,咸通。迎佛骨者三。
常衮與禮官議禮。爲君斬衰三年。漢文帝權制三十六日。宋太宗遺詔。亦三十六日。羣臣不忍旣葬而除。略盡四月。高宗如漢故事。玄宗以來。始變天子喪爲二十七日。世多以短喪議漢文。而不知二十七日之制自玄宗始也。
止齋謂宋朝名節自范文正公。議論文章自歐陽子。道學自周子。三君子皆萃於東南。殆有天意。
陳倉石皷文已訛。按陳倉在唐爲鳳翔寶鷄縣。石皷在天興縣南。乃雍縣也。魏太武自東平趣鄒山。見始皇石刻。使人排而仆之。嶧山之碑野火焚。葢此時。
羅昭諫詠松曰。陵遷谷變須高節。莫向人間作大夫。其志亦可悲矣。唐六臣彼何人哉。昭諫說錢鏐擧兵討梁。見通鑑。其忠義可見。眎奴事朱溫之杜荀鶴。猶糞土也。
朱新仲詠顔魯公云。千五百年如烈日。二十四州唯一人。又詠昭君云。當時夫死若求歸。凜然義動單于府。不知出此肯隨俗。顔色如花心糞土。
鄭亞會昌一品集叙云周勃,霍光。雖有勳伐而不知儒術。枚臯嚴忌。善爲文章而不至巖廊。歐陽公曰。劉柳無稱於事業。姚宋不見於文章。其言簡而明。非唐人所及也。
荊公爲外祖母墓表云女婦居不識廳屛。笑言不聞隣里。是職然也。唐岐陽公主不識刺史廳屛。見杜牧之文。薛巽妻崔氏言笑不聞於隣。見柳子厚文。荊公爲文。字字不苟如此。讀者不知其用事。
東都之季。淸議扶之而有餘。強秦之末。壯士守之而不足。前輩作風俗萬世之基。末韻。 亶聡明而有作。無作聦明。由仁義以安行。非行仁義。舜由仁義行。
王渙之曰。乘車常以顚墜處之。乘舟常以覆溺處之。仕官常以不遇處之。無事矣。此言近於達者也。
廟堂二字。見漢徐樂傳。修之廟堂之上而銷未形之患。注云人君爲政擧事。必告宗廟。議於明堂。
道家云眞人之心。若珠在淵。衆人之心。若瓢在水。眞文忠云此心當如明鏡止水。不可如枯木死灰。
方正學孝孺曰。古之仕者及物。今之仕者適己。及物而仕樂也。適己而棄民恥也。與其貴而恥。孰若賤而樂。故君子難仕。
吳康齋與弼。雨中被簑笠負耒耟。與諸生並耕。談乾坤艮离坎震兌巽於所耕之耒耟。可見先生樂道安貧。曠然自足。眞如鳳凰翔於千仞之上。下視塵世。曾不足過而覽焉。食後坐東窓。四軆舒泰。神氣淸朗。讀書愈有進益。心平氣和。與物皆春。甞讀孟子。湛然虗明。綠陰淸晝。薰風徐來。山林閴寂。天地自濶。日月自長。邵子所謂心靜方能知白日。眼明始會識靑天。於斯可驗。
胡敬齋居仁曰。釋氏見道。只如漢武帝見李夫人。非眞見也。只想像這道理。故勞而無功。儒者便卽事物上窮究。
魏莊渠校曰。大丈夫凍死則凍死。餓死則餓死。方能堂堂立天地間。若開口告人貧。要人憐我。以小惠呴沫我。得無爲賤丈夫乎。
夏東巖尙朴曰。仁是心之德。如桃仁杏仁一般。
張東所詡柳塘記曰。沿塘植柳偃仰披拂於朝烟暮雨之間。千態萬狀。可數十本。塘之水微波巨浪。隨風力強弱而變化。可數十丈。鸎燕之歌吟。魚鰕之潛躍。雲霞之出沒。不可具狀。境與心凝。塊然莫知其樂之所以。後誦昔人柳塘春水。漫及楊柳風來面上吹之句。則心與句得。茫然不知妙之所寓。理與心會。精與神融。不必詩之出口。所謂至樂與至妙者。皆不暇外求而得矣。
薛敬軒瑄曰。理如日光。氣如飛鳥。理乘氣機而動。如日光載鳥背而飛。鳥飛而日光雖不離其背。實未甞與之俱往而有間斷之處。亦猶氣動而理雖未甞與之暫離。實未甞與之俱盡而有滅息之時。氣有聚散。理無聚散。於此可見。
王凝齋鴻儒云罍尊陽也在阼。犧尊陰也在西。堂上以陽爲主也。縣皷陽也在西。應皷陰也在東。堂下以陰爲主也。
呂涇野柟語錄曰。長江之上。大海之濱。風波之險。可畏也。至於風恬浪息。漁人出沒其間。鷗鷺飛鳴其中。若相狎而玩者何也。水忘機也。漁人鷗鷺亦忘機也。若乃吾人之宅心。宜若平且易焉已矣。反有不可測者。則其爲風波之險莫大焉。此莊生所謂險於山川者也。是故機心忘而後。可以進德矣。
王陽明守仁語錄曰。吾輩通患。正如池面浮萍。隨開隨蔽。未論江海。但在活水浮萍。卽不能蔽何者。活水有其源。池水無其源。有其源者由己。無其源者從物。故凡不息者有其源。作輟者皆無源故耳。
程松溪文德論學書曰。天下事過則有害。雨澤非不善也。過多則澇。其爲害也與旱同。今有意爲善。而任心自是者。皆雨之澇也。
徐魯源用檢曰。與友人坐夜分。羣動旣息。天籟自鳴。鳴非外也。聽非內也。天人一也。一此不已也。通乎晝夜之道而知此。其庶幾乎。
聶雙江豹論學書曰。寂然不動。中涵太虗。先天也。千變萬化。皆由此出。可以合德合明。合序合吉㐫。故曰天不違。觸之而動。感而後應。後天也。何思何慮。遂通而順應之。故曰奉天時。言人力一毫不與也。
劉三五陽洞語曰。水之激。失水之眞矣。情之激。失情之眞矣。君子之情不激也。故不激其言。
徐存齋階論學書曰。人未飮酒時。事事淸楚。到醉後事事昏忘。及酒醒後。照舊淸楚。乃知昏忘是酒淸楚是心之本然。人苟不以利欲迷其本心。則於事斷無昏忘之患。克己二字。此醒酒方也。
蔡虛齋淸論文曰。不爲世態酣濡。不受古人繩束。卷舒出沒。如朝霏暮雲。始筆下有自然風味。葢其在萬山中。玩心高明。是以其言論。槪以六經爲吾心註脚。每有引而不發之意。軒然霄漢之上。俯視萬有。無一足嬰其懷者。其省身法云風光月霽其心胸。海濶天高其器宇。鳳獜趾其威儀。玉振金聲。
顧涇陽憲成曰。無聲無臭。吾儒之所謂空也。無善無惡。二氏之所謂空也。名似而實遠矣。是故諱言空者。以似廢眞。混言空者。以似亂眞。
高景逸攀龍曰。政事本於人才。舍人才而言政者必無政。財用本於政事。舍政事而言財者必無財。
呂心吾坤別錄曰。泰山喬嶽之身。海濶天空之腹。和風甘雨之色。日照月臨之目。旋乾轉坤之手。盤石砥柱之足。臨深履薄之心。玉潔氷淸之骨。此男兒八景也。
李退溪飮酒之際。不得聞言語匙著之聲。諸生進前受學。和氣薰然。誨諭諄諄。從頭至尾。洞然無疑晦。
李栗谷曰。非夜眠及疾病。不可偃卧跛欹。晝有睡思。當喚醒此心。十分猛省。眼皮重起。而周步使惺惺。
成牛溪曰。學先收拾身心。保惜精神。專一凝志。使志氣常淸而義理昭著。此孔孟以來第一門。
退溪自少時書字必楷正。雖傳鈔科文雜書。鮮有胡寫。甞與其孫安道書曰。凡事當謹愼。今見汝寄金而精書。大字亂草。愼勿爲麁狂之態。
退溪語及八陣圖曰。此亦格致一端。讀書之暇。可以宄觀。
靜庵曰。學者先務。莫切於義利之辨。私欲之萌。皆出於利。從念頭拔去根本然後。可安於學矣。甞聞許相稠對案兀坐。夜半偸兒入室。公不寐冥然。若泥塑人。盜去。家人覺之恨焉。公曰。賊之有甚於此者。來戰於心。何暇警止外賊乎。先輩克己如此。
古人省文之法。非但從簡。省一字而文反有力則省之。或曰古人語多急。不爾也。古人語質。故有似聲急耳。詩不顯亦世。又亦不夷懌。書雖悔可追。又我生不有命在天。孟子雖褐寬博吾不惴焉。並省一豈字。
坦齋朴公甞論古文之法曰。近日文軆大變。藻繪雕琢。頓無純正之格。非但文力不及。主於粧拙。險詞僻語。恠字異句。刻意搜集。使人開口不得。古文章法。何甞如是也。且氣狀不好處。一切避之。全以頌禱之辭。薈萃成篇。安有波瀾之可觀乎。老泉,柳州文近左氏。文從字順則一也。戰國策,國語諸子文。或蒼健或奇偉。當時必曰時軆。而馬漢史最得文路之正。上下千載。無處不當也。公之此言。深有得於文法。余於親炙時所承聆者也。
正廟朝命曺允亨,黃雲祖。書進獜經如綱目例。梓本行于世。余見成靑城集。曰正廟丁巳。臣緯,臣鍾永。俱以布衣。與臣大中。猥叨春秋援綱目例。大書經文。小書左氏傳文之命。閱月編摩。士林榮之。此三本未見付梓。
古者䟽本。只言其事。因而成章矣。皇明以來。王錫爵,葉向高諸人。最稱精篤。後風習漸變。擧以蔓衍之詞。專事餙讓。其告君之辭。不當如是也。我東則䟽槩之規。亦失古意。昔則數行爲之。不見原本而知爲某事。挽近大槩過爲草率。未知以何事治其䟽。惟大臣箚槩。自前簡要也。至於苫凷之䟽。古則堂上官亦爲之。正廟以無防限。定以二品。近日遵行也。
唐制。臣下奏事。非表非狀。謂之牓子。亦稱錄子。今謂之箚子。我國䟽箚。卽古之表狀也。草記古之牓子,錄子也。皇明有揭。淸國有奏記。而一名摺子也。
唐韋陟作花押。謂之五雲朶。或稱押縫。或稱押尾。
歐陽子曰。司馬之法。本之禮讓。後世莫行焉。惟孫武之書。法術大詳。考今之列。非特四種。所謂四種。卽權謀形勢陰陽技巧。析而爲四。由是兵家之文。旣載列矣。是乃廬陵習兵之論也。以余所見。武經七書尙矣。古有百將傳。每篇記各人戰勝之策與事。而畧具斷語也。宣廟朝命李公時發較正之。令訓局鋟於梓。此書最爲兵家妙諦。而惜其所傳無多。至於坐作進退屯兵行陣之法。戚氏紀効書。起於禦倭略而爲兵學指南。憲廟最爲精通。有非諸將所可及。此天縱之聖也。
六鞱文武龍豹虎犬。三畧上中下。宋元豊中。合孫子十三篇,吳子六篇,尉繚子二十四篇,司馬兵法,李衛公問對。名爲武經七書。
世祖朝。梁誠之奏言。高麗肅宗始藏經籍。其所印圖書之文二。其一曰高麗國十四葉御藏書。其一曰高麗國御藏書。至今三百六十三年。印文如昨。今內藏萬卷書。多其時所藏。乞令今藏書後面圖書。稱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以眞字書之。前面圖書。稱朝鮮國御藏書。以篆字書之。按高麗屢經兵亂。能存近萬卷書。我世祖以後開刊之書。亦復不小。而見存者小。此何故焉。蓄書之家小。毁書之人多故也。宜自朝家設禁。無敢以冊紙爲閑雜之用可也。
我國文獻。非不具備。而擧經灰燼。餘存無多。然惟政院日記。自天啓以後至于今者。合爲三千六百卷。而中間篇次。亦多經燼。故抄出各司謄錄以充之。是乃英廟朝事也。此外有藥院日記三百餘卷。自仁祖朝以下悉具之。至於備局謄錄。年前經火後。更不繼修。無可觀者。太常有前後諡狀屢百度。又謄書冊子爲四五十卷。而尙今不至間斷。是亦一代文獻之不可泐者也。
聚奎樓上。分貯經史子集。緫合經部一百十二種。史部一百六十六種。子部二百四種。集部三百二十四種。樓下奉御製御筆一百二十帙。璿牒璿譜七十六帙。御定諸書一百三十八帙。及經部一百三種,史部二百八十六種,子部一百五十六種,集部五百四十七種。宙合樓貯七書十四種。隆文樓所貯羣書三百五十一種。隆武樓七百六十七種。東二樓奉御製御筆一百九十三帙。璿牒璿譜五十二帙。御定諸書八十七帙。及唐板經部十五種,史部四十四種,子部三十五種,集部五十七種。常板經部四十一種,史部一百十四種,子部六十六種,集部一百五十二種。其中最多卷者。圖書集成一帙。爲五千二十二卷也。
康煕皇帝命善書朝紳。分寫九經。鏤板傳爲鴻寶。趙心庵使名譯李尙迪購來。李譯廣搜市肆及朝士家無有。臨歸。一人願賣券不帙。而呼價七百銀。李譯以不能携告。心庵嗟歎之曰。七百銀常有。而此書不常有。文人之愛書如此。余於年前。得九經一帙。宣紙漆板。裝潢極鮮。必是中州古家物也。
西堂李公製人墓文屢百度。經山公甞曰。其祀孫玄五爲原判也。我爲道伯。取見其文。乃布帛菽粟之文。而便不新新。束之高閣。及爲文任。做人墓道。復爲卷舒。則凡用筆處。加一分不得。减一分不得。始知其文章之高一等也。余暮景。尤覺公言之得其蔗境也。
墓道之文。過詡則曰誣也。其重如此。經山鄭公凡於文字之役。善於虛受。立改病處。荷居李公成一墓文。請改不許。其規模雖殊。立論處。鄭公亦不許。重其誣而相愛之深也。李公其太。鄭公行乎其所當行。止乎其所不當。
養硯老人。辛卯夏晝寢。夢遊仙扃得句云。綠陰如水鶯聲滑。芳草和煙燕影消。覺來足成一詩。書贈余。尙在篋中。其詩曰。人生何處不無聊。最是難憑夢境遙。仙子過頭靑玉杖。拉余携手畫欄橋。綠陰如水鶯聲滑。芳艸和煙燕影消。短句分明猶在記。香初茶半雨瀟瀟。
李奎報白雲小說。崔致遠入唐登第。有破荒之功。故東方學者皆以爲宗。其詩有崑崙東走五山碧。星宿北流一水黃之句。同年顧雲曰。此句卽一輿地誌。學士朴仁範,參政朴寅亮。亦以詩鳴海內。東方文獻之通中國。自三子始爲。朴參政詩曰。門前客棹洪波急。竹下僧棊白日閒。頗佳。
李益齋爲忠宣器重。從王居上國最久。故得與元四學士遊處。視易聽新。磨礪變化。固已極其正大高明之學。而又奉使川蜀。從王吳會往返萬餘里。閎博絶特之觀。包括無餘。踈蕩其奇氣。斂而東歸。問學之士。仰之如泰山。去其靡陋。稍返爾雅。皆先生之化也。
鄭圃隱先生。非徒理學節義冠一世。文章亦豪放奇雋。梅窓春色早。板屋雨聲多。卽先生一臠也。
一二言詩。孔穎達曰。詩以申志。一字則言蹇而意不會。故詩之見句。少不减二。卽祈父,肇禮之類也。三言金玉詩話。謂起於高貴鄕公。然漢郊祀歌之。練時日,太乙貺,天馬徠等章。已創其軆。四言起於舜典喜起之歌。五言斷以古詩十九首及蘓,李贈答爲始。十九首或稱枚乘所作。六言任昉云始於谷永。然劉勰云六言七言雜出詩騷。又漢孔融所著詩頌碑文,六言策文表檄。其曰六言者。葢卽六言詩也。七言金玉詩話云起於柏梁。八言漢書東方朔傳。有八言七言上下篇。九言摯虞以洞酌篇爲九言。而懷麓堂詩話。又謂起於高貴鄕公。十言十一言。李白杜甫詩皆有之。五七律排。雖創於初唐沈,宋諸人。然六朝已開其端。五言絶句。唐初變六朝子夜軆也。七言絶句。中唐漸甚。然梁簡文夜望單鴈一首。已是七絶云。三五七言。起於李白。秋風淸。秋月明。落葉聚還散。寒鴉棲復驚。相思相見知何日。此日此時難爲情。此其濫觴也。長短詩。如山有榛,隰有苓一章。眞絶調也。至漢而益多。如安世房中歌之類。六句律詩。李白送羽林陶將軍。有六句律。便成一首。拗軆七律。杜少陵集最多。如鄭縣亭子澗之濱。獨立縹緲之飛樓之類。律詩不屬對。唐人律詩。有第三四句有不屬對者。如李白牛渚西江夜。崔灝黃鶴樓詩之類。律詩兼用兩韻。如東坡題南康寺重湖軒詩曰。八月渡重湖。蕭條萬象踈。秋風片帆急。暮靄一山孤。許國心猶在。康時術已虛。岷峨千萬里。投老得歸無之類。廻文詩。世皆以爲始於蘓蕙。然劉勰謂道原爲始。道原不知何時人。疊字詩。如河水洋洋北流活活等句。連用六疊。此爲創軆。聯句自退之斬新開闢。禁軆始於歐陽公。東國但製其軆而不識其源者多。故博考錄之。
集之名。起於東漢。然古所謂集。乃後人聚前人所作而名之。非作者之自稱爲集。葢集與輯同。今人之自成其集非也。所以先輩聚其所作。變其編名。或稱未定稿。良以是也。
昔韓洌上鎭書輯東史。東蹟之見於中州史者。鈔出者也。卷二十。乃外史也。徐楓石授余一帙。甚珍玩。後見警修堂集。此書竟入於中國。是海東繹史也。
拾紙得斗室詩跋語。曰先蒙寵寄瑰章。感情思之繾綣。歎音調之鏗鏘。輒強缶和。切希斤正。詩云千丈閒愁一寸詩。今人心事古人知。林亭獨卧聞蕉夜。郡閣高吟寫竹時。我道妙存無限意。君看能作幾何悲。擬從酒茗消餘日。亦厭徵䲭復乞犧。斗室。
歸鹿相公贈老妓詩曰。功名文武前身事。歌舞繁華一夢間。大笑相看頭似雪。空山斜日水流閒。恰似潯陽江上琵琶詩。門前泠落鞍馬稀。老大嫁作商人婦。吾輩事亦如是。
景蕙女史。善琴棋工詩話。卽故權西漁尙書常愼寵姬也。自哭西漁。流落人間。復爲一武弁所收。然非其志也。近有人誦傳其詩數篇。皆自悼之作。而壺間貯月心俱白。席上停雲眼欲靑一句最佳。余少時遊聽流堂。權宅壁上。題景蕙詠燕子詩。寒便辭人暖便歸。笑他燕子計全非。綠陰如此不留宿。却傍人家門戶飛。此後屢易其門。果詩出於性情也。景蕙本良家女。其父敎之以藝。其畫余得兩幀。用筆設彩。非東人手法也。
灣商金欽之奴。能傳李陶庵竹枝詞全本。江南擧人姓康者。讚歎詞理之工。傷奴之不遇。遂出秘藏董文敏山水以償之。竹枝詞之誦傳天下可知也。原圖倩姜彜五斫拂鉤染之。
劉禮部尙詩曰。虛空無處所。髣髴似琉璃。詩境何人到。禪心又過詩。放翁取詩境字名其室。竹坡詩話。有明上人者。作詩甚艱。求捷法于東坡。東坡作兩偈以與之。其一云字字覔奇險。節節累枝葉。咬嚼三十年。轉相無更涉。其二云衝口出常言。法度法前軌。人言非妙處。妙處在于是。始知詩境非力所可致。在於澹漠虛室處耳。三十年前。見詩境圖。但一儒一釋相對像而已。
余讀沈亞之屈原外傳。喜其逸事之幽恠也。辭致之冷韻也。寄托之哀艶也。依其叙次。追而韻之。若其女嬃搗衣石。非原之事也。
隋鄭譯拜爵沛國公。位上柱國。高熲爲制。戲曰筆乾。答曰出典方岳。杖策言歸。不得一文。何以潤筆。此潤筆二字所由昉也。歷代盛行此事。東國牧隱李公製文得厚資。建一僧庵於龍門山巓。爲願堂。名曰潤筆菴。余往年作彌智之行。見菴子尙存。
古人謂金石文字曰吉金貞石。貞珉字見翁覃溪集中。湘山野錄。江南徐騎省善小篆。映日視之。畫之中心有一縷。葉志詵見余隷曰。一筆揮洒。無半點塗鴉者。此固勝人處。
秋史在禁直。自蒲節覆校復初齋集。至荷花生日畢。只選七律百首。紫霞各軆俱選。屢易乃止。二本行于世。
西堂李公儲書甚多。至十二間。比李氏萬卷樓倍之。公沒後。一夜間火。只燒書樓而已。平明乃覺。其造化固難測。而人謂佛經積置於三間。所以此爲魔祟云。此等書之多藏。可以爲戒。公所得書。皆從禮幣中出也。
書帙每以十餘卷。付木板於四隅。緊緊紐結。投之水中。年久不濡。牛溪先生宅書籍。以是免亂於壬丙之間。往往見首尾水痕者古蹟也。
元陵輓辭。閭閻遺子女。城闕若平生。李參奉代人作也。傳爲名句。余見東溟集。詠張玉城舊宅詩云。英雄已塵土。門舘若平生。兩詩無優劣。不可曰靑出於藍耳。
包鳴甫云淳化帖蒼頡字。尙帶卦軆。此言得字之本。然書法皆源於五行。五行皆演於八卦。何莫非卦軆。而特以生畫。如八卦之始畫也。
書斷云秦下邽人程邈字元岑。爲縣吏。以罪下雲陽獄。精思十年。益小篆方圓而得隷書三千字奏之。始皇善之。用爲御史。時以篆字難成。乃用隷字。以爲隷人佐書。務趨便捷。故曰隷書。是以古來皆以隷書爲邈所作。然封氏聞見記。謂酈道元注水經云臨淄人。發古冢得銅棺。前和外隱起爲隷字。言齊太公六代孫胡公之棺。惟三字是故篆。餘同今書。則知隷書非始於秦也。封氏又謂此書在春秋之前已有之。但諸國或用或不用。程邈觀其省易。有便於時。故修改而獻。非創造也。然則隷書非起於邈矣。又按許氏說文。有序云秦李斯省改史籀大篆。作小篆。又有隷書以趨約易云云。似隷書亦李斯所作。其下文又謂新莾改定六書。一古文。二奇字。其三曰篆書卽小篆。秦始皇使下邽人程邈所作也。四佐書。卽秦隷書云云。是許氏於隷書。不言程邈所作。而反以小篆爲邈作。書軆之變。自古不一。東國尤無考据之學。以程邈知之。惟尹五耘詳辨之。
蘭亭帖有二本。定武肥本。潁井瘦本。秋史肥本跋。有抱殘守關之語。肥瘦二本。轉覺瘦勝於肥耳。按蘭亭首稱定武本。宋刻亦自分早晩。前有亭列幽盛遊古不羣殊九字而剜。後有湍帶右流天五字而損。書家考證。亦云難矣。千百本無一損。湍天師菴本再出土。是亦定武之榻。栞是石出自天師菴土中。明初徐中山取置國學。不知何時復委諸土中。萬曆復出。今在國學。故又稱國學本也。國學本傳爲薛刻。而所之旣倦之之字。終期於盡之盡字。死生亦大之亦字。妄作之作字。凡此四處皆改易。必非薛道祖所刻。百年前已不肥。况今瘦弱如一髮乎。薛刻壓在快雪堂。戲鴻堂帖。或云昇山落木本。或云王姬下嫁奩。余曾得二本。校正於古東尙書庋。恨不得較看於唐詩姚察徐僧之搨也。考證言暢叙之叙。又邊是隷畫。
南唐後主李煜書評曰。善法者各得右軍之一軆。若虞世南得其美韻而失其俊邁。歐陽詢得其力而失其溫秀。褚遂良得其意而失其變化。薛稷得其淸而失於拗窘。顔眞卿得其筋而失於粗魯。柳公權得其骨而失於生擴。徐浩得其肉而失於俗。李邕得其氣而失於軆。張旭得其法而失於狂。獻之俱得之而失於騖急。無蘊藉態度。此皆通論也。余有諸人帖。持評較看。一無差誤。
近有一種風氣論書。以昌黎詩義之俗書超姿媚一句。藉爲口實。毁右軍父子。而自虞褚以至米趙文董。一切歸之俗書。惟一歐率更推以爲漢隷金石刻之嫡傳。葢書家有南北之異。此其北派之論也。吾未知其爲公耳。
淳化帖有兩本。月半黃甘二帖。一是王著摹。一是肅藩本也。舊在海居。肅本則線來絲去。饒有活機。王著摹凍蠅痴蚓。都無血氣。卽此可以審正優劣。况贗王著。曷若眞肅藩耶。
趙文敏小楷赤壁賦字。僅如蠅頭。系以長公小像。右顴有痣。與公詩集中所傳摸松雪本又異也。舊吳彭年言兩見文敏作東坡像。一書定惠院海棠詩於上云。則此又在赤壁本之外矣。尾有甲子十二月十九日蘓齋題。嵩陽帖後時。有幻脫蘓齋拜像詩七字。則公之眞像。不在顴痣之有無也。是日拜眞像詩。又有昔也蘭嵎生今之朱野雲之句。則蘓齋拜像之本。乃是野雲之筆。而亦出於趙本也。可以審矣。覃溪摸東坡笠屐圖。臘十九東坡生朝。以恠石供紫霞。又移摸在余書樓。原本流落東國。余一見於洪芍玉書齋。今不知下落。而上有翁詩語。絶寶也。石刻本亦在余庋。東坡自贊曰。心是已灰之木。身如不繫之舟。問我平生功業。黃州儋州惠州。董其昌書也。
宣和間。禁蘓氏文字。學者私記其書曰。毗陵先生中州好東國者。目謂之學朝鮮。什物書畫。皆東人作。翁氏稱師於蘓氏。而紫霞秋史稱以蘓齋弟子。凡學唐者。若中州之學朝鮮。毗陵之學。遠曁東方也。
新羅文武王墓在鷄林雩壇之傍。初王困於倭。臨薨詔曰。葬我於海中。當化爲龍以距倭。海中有大石如小島。葬於石間未幾。風雷大作。有黃龍見於石上。名其臺曰利見。遂以爲禱雨所。事在三國史。後耕田得古碑。卽王之碑。而大舍臣韓訥儒所書也。其文剝落無序。而有曰赤烏呈災。黃熊表異。俄隨風燭。貴道賤身。葬以積薪。碎骨鯨津等句。明是火化水葬之語。不可謂國史之誣也。
羅太宗陵無象設。前有碑龜趺高丈餘。失其身。上安龍頭夭矯蟠拏。刻鏤精巧。面有方篆陽文曰太宗武烈大王之碑。王於三韓。有萬歲之功。樹木不敢剪伐。况石乎。必是蠻人竊去也。關東靈鳳山。有高麗太祖御製集唐文皇書碑。壬癸之亂。蠻人載之以東。在道中折。遂舁其半而去。尙留原州。夫距萊海千里尙然。况鷄林數百里之近乎。昌林寺碑金生書。趙子昂盛稱雖唐人名刻。無以過之。名於中國者。安知不爲蠻人所竊乎。
眞興王北巡碑。過鐵嶺至沃沮定界也。穆陵朝。申將軍砬印來傳世。洪耳溪每托北去者覔之。庚戌。兪通判漢敦書云咸甲之間。有黃草嶺。其上有顚仆古碑。上下皆折。乃眞興王古迹也。印送一本。尹梣溪移置咸營庫中。
麟角寺碑在義興。洪耳溪窮尋佛殿樓底。斷石十數塊。其文微有麟角二字。集右軍書者也。按碑高麗默軒閔漬撰僧普覺碑銘。其法如唐僧懷仁之集三藏序也。
鍪藏寺碑。云是金生書。古之藏兵處也。洪耳溪見磨豆磑脉理異凡石。竪起視其腹。乃古碑折其半者也。命工搨來。果是鍪碑。而考其文。卽新羅翰林金陸珍書。見其姓誤稱也。兪文翼聞之喜曰。老夫平生聚金石錄數百卷。獨未得是碑也。
金角干庾信墓碑。在慶州西十里。洪耳溪祭其墓。覓碑不得。後二十年。李公書九。視金石帖中。有金角干碑數幅。卞之無疑。而蓋於島夷之亂。碑失所在。是本卽亂前舊搨也。似率更之法。東方古蹟。莫先於此。如在中國。當爲岣嶁石皷之亞也。
白月碑。新羅朗空國師棲雲寺塔銘也。侍郞崔仁滚편001撰。端目禪師集金生字。以周世宗元年甲寅立。石在奉化縣太子山。山深寺廢。失其所在。尙古子金光遂守鄰縣。搜得於田間。運置官廨。印行于世。後洪耳溪如榮川訪之。棄在廢園中。亟使舁致。托主人作木匣。俾防風雨。而明初詔使有求拓者坌集。一武倅不堪其苦。以爲馬棧而辱之。今所行殘字皆馬迹。按舊說。初在奉化。今在榮川。似自奉而至榮也。余有舊拓本。申宛丘深得其法。近日鄭美堂倣而行之。
平濟塔在白馬江上。唐高宗顯慶五年。遣蘓定方領舟師。與新羅將金庾信破百濟。虜其王義慈。革其國。置熊州都督府。刻石紀功。撰者陵州長史賀遂亮。書者洛州河南權懷素。筆法蒼勁。在顔,柳之前。而可稱東方古蹟之首矣。
東坡詩話云有道士自稱回山人。過沈東老飮酒。用石榴皮。寫絶句壁上曰。西隣已富憂不足。東老雖貧樂有餘。白酒釀來緣好客。黃金散盡爲收書。書訖。出門渡橋。遂不知所之。或曰此呂洞賓也。夫神仙之說。本荒唐矣。彼純陽眞仙去耶。胡爲來人間留筆蹟也。是誠未可信。然坡翁旣言親聞其事。則又不可謂誣也。觀其字畫。飄搖如斷雲空花。若出神化。决非烟火中物也。近日此本盛行于世。公子王孫之別墅。不刻揭此書則恥之。不知出自洪耳溪得於古紙涴弊處也。
癸卯春。洪耳溪自燕歸。歷孤竹城。謁二子像於灤河。遇秀才李美字純之者。與語孤竹古蹟。純之曰。此中有夷齊讀書之墟。水石甚奇。洪公呀然笑曰。夷齊之世邈矣。今何以徵焉。純之曰。距此百餘里。有山曰書院山。有寺曰雲居寺。昌黎韓公斸崖石大書曰夷齊讀書處。夫豈無稽而韓公書之乎。洪公猶未之信。翌年。純之搨送夷齊讀書處五大字及嘉靖刻古蹟碑一本。下附其遊山記。筆力雄邁。字形奇古。不似宋以後筆。殆非凡衆人跡。昌黎旣孤竹故境。而碑言唐太和年建寺。正當韓公之世。則其稱韓書。亦不爲無據矣。
東方之文。眉叟最古。往往類秦碑漢鼎。筆則效周太史而自創新軆。杈枒詰屈。如千歲枯藤。叟甞爲三陟守。東臨滄海。立石於日毋之衝。手書四言詩以誓水。文險而字奇。若出神林鬼窟。世人傳寶之。一日樊巖蔡公。示耳溪以橫軸一帖曰。此眉叟手書人墓表草稿也。洪公曰。此文中有數行失格。豈眉翁未定本耶。樊巖愕然哂曰。眉翁一字一法。况墓石之刻乎。公言未必然矣。已而樊巖取其軸盡卷。忽有小紙揷其尾。熟視良久。拍案叫曰。何其神耶。葢手書數行於一紙。云自某至某當改之。一如洪公所指。洪公可謂眞知眉翁者矣。今觀東海碑。其辭浩淼如洪濤。其聲鏜鎝如老浪。若有海恠波靈。恍惚於筆端。洪公之題是碑。固有得矣。
尹三山師國書。深得率更軆。眞鐵畫也。竹石徐公時任文衡。而書人金石。請定於三山。則受置篋中。及其來覔也。公投之曰。不堪書戶牌之手。有何碑碣之可論哉。竹石慚而歸。宣言於朝曰。尹某以若筆法。尙未書公家碑版。大爲欠事。吾今撰遅遅峴碑文。書寫官殊以尹某差下好矣。朝廷從其言。竹石笑曰。三山雖斥吾書法。猶爲吾之寫手。先輩之於文筆。其務勝如是也。
尹三山刻先山碑。誤落一字。不得已前面陷之。若風字硯㨾中刻大字。甚有雅致。後人爭相仿之。全石變其制。老鐫工朴枝春言於余如是。
金竹泉鎭圭篆隷。多見於樓觀。松京南大門懸板三大篆。無非遒健。非今人之所作。而甞過恩津。江鏡倉三字。最爲古雅。似是此筆也。
金秋史求見余所寫隷書曰。是乃靈光殿甓。五鳳年字法也。人皆習見後漢隷法。得西京軆者甚罕。惟魯恭王甓字。與靈光甓字相爲表裡。而所傳者只此。恨不發秘。使橘山盡見也。後得恭王甓。其軆稍方而別無差等也。
趙子昂甞言唐人之書。自歐陽率更。始作間架。尙筋骨。至顔,柳而嚴緊勁悍。一變永和風韻。惟李北海不失晉人之軌。當爲書家正宗。按娑羅樹碑。遒逸踈宕。極有太令之風。始信子昂之論爲不易。而吳興書門路之正。葢有所自矣。杜工部哀北海詩云風流散金石。追琢山岳銳。其文章筆翰。見重於當世如此。東人筆得北海法者。惟洪耳溪。華士戴衢亨之言也。洪公書遍在八路名勝。成都降仙樓題海東第一樓觀六字。最豪健也。
北漢南有僧伽寺。其上峯曰碑峰。一柱兀然如人立。俗傳麗僧道詵碑。今沒字云。歲丙子。雲石趙公。與秋史共尋。碑有殘字。實眞興王碑也。遂命工搨之。細加審定。除全缺。不可強解。點畫可辨。確然無疑者。凡九十有二字。如眞興王三字,巡狩二字,南川二字。皆實事可證。而與史文經緯者也。
天際烏雲帖云僕在錢塘。一日謁陳述古。邀余飮堂前小閤中。壁上小書一絶。君謨眞迹也。約綽新嬌生眼底。侵尋舊事上眉尖。問君別後愁多少。得似春潮夜夜添。又有人和云長垂玉筋殘粧臉。肯與金釵露指尖。萬斛閒愁何日晝。一分眞態更難添。二詩皆可觀。後詩不知誰作也。査初白蘓詩補註以爲過濰州驛。見蔡君謨題詩壁上云。余曾見唐人筆記。抄而錄之。
牛溪先生記鄭學官希繩言曰。五月三日。鄭君訪我永柔西谷山家。言我家臧獲在谷山西面頤寧坊鳥音洞。夙聞深山絶境。可以避世。亂生之初。自京城奉慈親與兄弟妻拏往赴之。至則奴迎拜。掃正堂以居之。凡留三箇月。供奉無倦色。觀其地在深山長谷絶遠之域。但有奴家三五舍。覆以板子。四山高峻。穹林蔽日。石泉甘冽。蔬菜甚饒。焚山種粟。豆菽富足。閱月經時。外人不至。世間音信聲響斷絶。眞所謂人間無路訪安危者也。倭賊所至。四面皆至數百里外。雖擧國鼎沸。兵燹滔天。閉戶安眠。不知有何事也。然地高而寒。洞僻而深。君子居之。亦近於同羣鳥獸。正宜今日避亂之所。而商嶺王官不厭其深者也。谷山郡西三十里。有村曰明媚。山川灑落。洞府寬閒。大溪橫流其中。土沃而人稀。有民亦七家。當卜居其地。有兵火則入鳥音避之。可以全身遠害於斯世也。余聞其言。不覺慨然。書于此而時閱之。以寓遐思焉。鄭君名象武。字希繩。能文善書。貌偉而志大。决非俗流之趨利者。余深喜之。而不能欵晤以扣其學也。癸巳五月十三日。書于遂安之民舍。渾志此帖。少時曾一寓目於養硯山房。
翁文達石墨書樓。有名於中州。昔覃溪老人有歐陽率更化度寺邕禪師塔銘。卽洛陽范氏書樓中石本。此爲歐書之天下第一烜爀迹也。因以石墨爲書樓之名。而繪范氏書樓圖。圖成又五年。始得保安寺街小樓三楹而居之。又刻一印。此爲石墨書樓印之本末也。
養硯老人語余曰。吾入銀臺。自視黃面老子。不堪作顧影少年態。猶幸與秋史內翰興會日繁。秋史每有名茶新瀹。命侍童挈一甌至。一日送茶。少焉。秋史亦來袖示漱金小箋。上有詩。吾曰。君詩思敏妙。在一煎茶頃。秋史笑曰。果在扇罏間得爾。又從秋史見近刻劉松嵐詩集卷首有覃序者。仍與商略詩。求杜法之旨。間携致敝藏快雪堂帖,覃書對子一聯,孤雲處士王振鵬苕溪高隱圖一軸。右三種書畫。對榻審定。以證金門墨緣。秋史又爲吾出佳紙丈餘。濃堆墨作碧蘆舫隷扁。傑然可畏。院中老吏見吾兩人職務旁午中翰墨商訂。瞠乎以爲初見。後余直秘閣。因公上銀臺。李石農鍾愚藉五色泠金紙。揮灑楷行。余健步玩之。斗想老人之言也。
北海書李元秀碑。舊拓殘額。一橫一圓。礎四。又半礎一。凡五石三百四十七字。嘉慶乙丑夏。北乎翁方綱手摸。毗陵胡遜校勒此本。又北海書大照禪師碑。康煕乙亥。懋勤殿摹勒上石。古東尙書所藏。
趙文敏書太湖石贊洗馬圖詩。董玄宰跋曰。此趙文敏學顔公。送蔡明遠叙。兼米海岳用筆。可寶也。於七觀帖。表文淸稱倣枚生七發。作七觀。王眉菴行儉漢詔眞蹟帖跋云子昂小楷。尤入妙品。初師姜夔。次學褚登善,鍾紹京。卒入二王之室。白兎鶻賦字軆。與公他書逈異。具眼者當辨之。公賦序云白兎鶻翎翮皓潔。白雪同皎。凡三籠而毛羽變赤。光彩豔奕。勇鷙加於疇昔。虞伯生云公書赤壁賦時。年三十八。泰不華云白鶴賦。是公晩年筆中最上乘。又書千字文。紫霞題其後曰第一。公書烜爀蹟。無如赤壁與千文。赤壁工摹猶可及。千文渾脫化。春雲諸帖。余皆寓目。而敝庋有赤壁賦一帖。千字文未及購。甚恨。
樂志論,天馬賦帖。趙仲光奕書也。帖尾有王文成守仁跋云。趙文敏以宋宗室王孫。屈身異姓。雖書法浸淫魏晉。而氣骨不無少减。仲光志趣高尙。終于隱遯。有古逸民之風焉。宜其書別具瀟灑出塵之槪。觀者但因爲淵源文敏。似非定評。余有慨乎文成之因一書跋。軒輕人父子之太刻深也。况可發之於其子書跋耶。兩帖皆在余庋。而天馬帖尤不俗。
魏國管夫人帖。有竹環居不暫懨。長年吟弄似傷廉。可憐萬片鸞翎濕。向晩瀟瀟雨一簾。開枝當路色蒼茫。新竹過於舊竹長。更待春風錦綳脫。雙雙幺鳳舞朝陽。萬卷詩書壓象牀。不知身與世相忘。更憐家有千竿竹。正可開軒納晩凉。道昇。有趙管二字。安家書。和南拜覆本師中峯大和尙。女弟子魏國夫人管氏道昇謹封。道昇和南拜覆本師中峰大和尙法座前。承賜書。如見頂相。且知道軆安穩。不勝慰喜。又蒙頒賜香珠領次。尤增感佩。戊午十月十一日。女弟道昇和南拜覆。鈐以魏國夫人趙管六字印。
趙文敏手蹟帖自跋云道士祝丹陽。示余天冠山圖。求賦詩。將刻石山中。爲作世廿八首。延祐二年十月廿四日。松雪道人陜刻本跋云余作遊天冠山。見佳境興發。偶咏鄙句。付主院者。越四年。楚成巨冊。索重書。故爾走筆。子昂。
紫霞手選七律彀。始以杜文貞,白文公,李義山,蘓文忠,陸釰南,元遺山,虞文靖,錢虞山,王文簡,翁北乎十家。質之於秋史。秋史曰。虞山則濫矣。杜樊川,黃文節,朱竹坨。皆不可闕。公於詩道。篤信秋史。故再以十二家釐正。
古東李公翊會所藏絳帖十二卷。淳化五年歲在甲午春王正月。潘師朝奉聖旨。摸勒上石其最者。曰秦巫咸詛楚文。曰漢議郞蔡邕隷。其文有定策帷幙有安社稷之勳十字。曰晉右將軍蘭亭二本頭眩方帖。曰黃庭經後見趙文敏黃素黃庭字。無淡古虛和之味。曰王獻之洛初賦。較看長白卞氏式古堂殘本。洛初賦有董跋。此本頗覺肥失眞。曰大令擘窠行書。桓山碑殘字跋云桓山頌獻之銘六字。右王大令殘碑六字。梁天福元年。雒陽修城。得之土中。考其事。或是永和十二年秋。桓溫破姚襄事。此碑碎裂不全。止存此六字耳。而大令之名。巋然獨完。以故人始寶之。不爾。亦同瓦礫矣。噫。非神物護持。曷至是耶。余恐其久而失傳。因壽之於石。以公諸同好者。駙馬都尉潘師朝記。曰唐長史張旭草書。曰率更令歐陽詢筆訣。按副車帖最多傳僞。軒帖考引曺士冕語。二十卷訛作十二。遂致爲作絳帖者。稱十二卷。此帖卷卷。有頂墨林印。余少時蔡隷十字。以竹片摹刻。流入大內。今不知下落。古東稱余隷爲正道。每受去典重文字。
嵩陽帖蔡君謨眞蹟。在陳述古杭州官舍。後人呼爲守居官閣。養硯老人手臨之。題重摹紙閣十六扇。又一淸風五百間。世謂坡書。學李北海,徐季海諸法。皆源於此。臨本今不知在何處。
隨淸娛帖。褚登善書汝南公主墓誌云公主隴西狄道人。鄭夾漈通志金石略曰。虞世南所書狄道人墓誌。隨淸娛。漢司馬遷之妾也。
覃溪見安平大君絹本眞蹟曰。此能以松雪手腕。運聖敎序筆意者。眞確論也。
淸平山古檆下廢池邊。掘得一碑。乃益齋李先生所撰施藏經碑也。此碑與文殊院碑。均爲山中之文獻。主僧松坡長老移置寺簷下。以庇風雨。石斷裂。大小凡五段。碑文曰爲皇太子皇子祈福。各取其誕辰。飯僧閱經歲以爲凡。麗史云每於誕辰飯僧。歲以爲常。第二行。推誠亮節功臣重大匡金海君臣李。此以下泐損。按先生始封金海君。後改封鷄林府院君。按所謂僉議政承臣怡等。卽匡定公金怡也。本集與圖經。皆作臣恰。考之麗史。更無以恰爲名而官政承者。此碑臣怡之爲匡定無疑也。又按匡定以僉議中贊。卒於泰定四年五月。則立碑時尙無恙而居位也。匡定少時宿華藏寺。夢王御殿唱一句云靑雲紫氣知仙閣。匡定賡云綠髮淸談是貴人。以是卜其貴顯。
覃溪復初齋集。有曰江秋史得趙文敏墨迹云。靑衫白髮老參軍。旋糶黃粱買酒尊。但得有錢留客醉。也勝騎馬傍人門。余最愛此詩。頻頻書之。以自適意耳。子昂。凡四十四字。半爲損壞。不復成字。余爲審擇存廿五字。題曰完璧帖而歸之。因題其後曰。完璧歸于趙。生花夢自江。千秋吟買酒。幾夕剔寒缸。曲折圖移繡。橫斜搨就窓。似聞苕霅上。搖膝韻吳艭。前此姜豹庵尙書影搨趙墨一本。卽此帖也。無余最愛以下十四字。存只三十字。摹自聽松先生鑒藏本也。庚午。紫霞得此本。贈金秋史進士。据此知趙文敏頻書此詩。留在人間。不止數本。覃溪本。比聽松本。但多十四字。不知孰爲眞迹也。完璧帖存只廿五字。則又不及聽松本之完矣。此書之一歸江秋史。一歸金秋史。洵一段奇事也。金秋史和紫霞曰。紅葉樓中偈。心心月印江。朱門誰繫馬。綠酒自斟缸。淸聽松鳴屋。留陰竹補窓。天官徵玉尺。共漽鷗波艭。註。紅葉樓豹翁居也。竹窓用蘓齋移竹故實也。
龍山挹淸樓。有松下翁第一江山扁。又有控海門牓。門牓尤軒翥可喜。第一江山。本吳雲壑書。刻在金山。今練光亭扁。卽翻摹爾。世人不知。誤以朱書稱之。江字白下書。按東國文獻草創。事無記傳處。只從口吻相道。安得不以訛傳訛乎。余初認以朱書。始考得吳書。然未可定價。願就質焉。
眉叟許公古篆入神。羅大將洞最高舍。有雲岡二字刻石。在於塢上。乃許公篆畫法。無烟火氣。此舍名拱北軒。白下舊宅而題之者也。余王考少時居此。世傳其房堗。借白下神手。于今百年。無一石嵌陷。薪貴易溫。
華人贈余一帖。文衡山遺墨。而蠅頭細字。盡是奏御文字日錄者也。似是草藁之潢冊。復粧爲帖。下有圖章數十諸人之名。而最大者成親王也。諸相公會時。以此視之。皆艶羡之。
洪文獻一夕夢。訪圓嶠居士。皓髮癯容。如畫中僊。瞪目而視曰。君將欲掩我名耶。公曰。夫名者公器。奪不可得。讓亦不可得。惟視其實之如何。吾何敢掩公名耶。居士笑曰誠然。君之書有古意而法不足。吾書則法有餘而少風韻。仍出示數帖。果渾成無生割之病。又示古法帖。多韋仲將筆。見座右有文石如石鍾。遍刻篆籕文。奇古異常。因謂曰。吾甞欲作石鼎。書刻昌黎詩未果。君可爲之否。遂揖而別。後琢玉作鼎。以曺稚行隷字。書石鼎聯句。此鼎尙在冠巖尙書宅中。
自庵金先生名練。道學節行。爲己卯士類所尊。文章翰墨。乃其餘事。而筆法尤高。所書朝遊北海暮蒼梧一絶大草。雄偉奇崫。有大令筆力。先生流竄嶺海。年壽不永。故書跡傳于世甚少。金公思祐宰連山。獲一盜胠其槖。有一書帖。卽自庵書也。寫其詩三十餘篇。鋒穎遒勁。韻致蕭散。不規規於古人之法。如山陰脩竹。解苞出土。挺然有干雲之勢。不滅於兵燹。而又不毁於盜賦。殆鬼神之默護也。尹白下甞見而慕之。欲仿其法。把筆良久。憮然而罷。
古之尺牘。必稱蘓黃。而東國尹白下集大成。近古金秋史語。片片揀金。愈出愈新。世謂筆與畫皆不及尺牘之奇也。趙心庵善於短札。俚語混用。無斧痕。其辭節節踈雅。非庸才可跂也。
古今書畫。水火之厄同也。江州蘓州書畫之蓄。甲於天下。丙丁之間。洪秀泉亂。大江以南。成瓦礫之塲。蘓則火。江則水。二州之厄。史牒所無。而書畫之種滅矣。萬里外人。想像痛惜。甚可笑。而念虹月之晦。天涯亦比隣也。往年。葉笙林以余隷一擔。分庋江南諸人。笙林蘓州人也。多藏秦漢古蹟於八萬卷樓。未免此日之禍。奚暇論一粟之於滄海也。
姜紹書韻。石齋筆談。有石文太極之說。陳定九荔枝譜。荔枝産泉郡者曰太極圖。形圖而扁半紅半綠。如太極圖狀。余見氷文成圖。命曰氷太極圖。
顧寧人日知錄。書毛延壽事。引西京雜記以證之。據此則漢法。畫工圖後宮以進。君王案圖而召幸之。圖昭君。非匈奴求美人之時也。當時畫工有毛延壽,劉白,龔寬,陳敞,樊育,陽望等人。則奚但指毛延壽一人。而且受賂得罪。不獨昭君以也。詩人謂受賂在匈奴求美人時。失之太甚。而顧氏幽剔西京逸史。彰其圖形之誤。已在匈奴之前。二說並行。
董帖洛神賦。錦波大師舊藏本也。周越跋云頭尾外得一十三行。趙跋云先得九行。復得四行。則自前未有十三行定名也。宣和書譜。亦僅稱洛神賦不完本耳。香光豈得臨足本乎。抑以自意第錄其全文也。余少時。有人賣洛神圖,九歌圖。皆李龍眠作也。九歌帖尙在余。洛神圖未及收。而被人先着去。可恨。
王文成壽畫,讀書十三則。命題布置。另出機杼。所謂士氣作家俱備者。意其門人之筆。而姓名則忘之。此爲鎭州李氏萬卷樓揷架中物。不可再見也。余今年六十。髣想此畫。倩手寫之而自壽焉。其起居坐卧行住眠食拱立跪倚踞爲目。卽余所自刱而備述居家雜儀。無一言虛設也。後之鑒者。尙知余暮年閒適之趣也。
李命基,金弘道,金健鍾,浿人李八龍。以余所見。其法最竗。而燕人汪載靑畫覃溪像。用東國衣冠。而其貌仿彿。制度不嫺。昔劉石齡題漁洋禪悅圖詩。自註云聞諸錢亮工說。曾見東坡像極相似。果古人勝於今人也。
寧遠伯祀孫居江華。甲午。黃山金公逌根奉來其畫像。諸公瞻拜。更爲移摸。還奉本家。服色眞紅袍白玉帶烏帽。如新恩所着。幞頭近宋制。厥相白晢媚嫵。非凡相也。
英宗癸丑暮春。曺松下俱白谷尙書而下四十三人。咸集南營水閣。爲詠觴會。有修稧帖。哲宗癸亥。余與諸公修續稧。作屛藏于雙檜亭。
壺山掛一幅書。龍蛇流動。其書曰義之妙筆在鵝羣。欵爲周萬淸也。余謁朴公。先爲偸目。公笑曰。不見人。先見書可乎。我有此書二本。藏之久矣。一則爲秋史所奪。其一歸之於君。荷漪任公。詑以曾繼志畫蓮。一紙寫二莖可丈餘。神韻逼眞。題曰千觔筆力。十丈蓮花。爲君寫照。蓮耶仙耶。二閤所愛書與畫。作兩扇屛。供余嗜疴之癖也。
金陵八子。有高岑,龔賢,樊圻,鄒喆,吳宏,葉欣,胡造,謝蓀。此圖高岑作也。曾見內府收藏。捴多高子嵒標題。半是啓禎年。孔東塘贈樊圻者也。高岑字蔚生。未見其跡。有子蔭字嘉樹世業。名江淮間。圖三潭月印。
余舊蓄趙脩祿駉馬圖。趙宋崇寧人也。此圖經山公借余改粧。往來珍玩。後入大內。更不知所從。題曰駉駉牡馬馬斯臧。魯野春深萬物康。楊柳桃花皆可畫。畫圖不得頌聲洋。
衡山自題曰。推琴一笑四山空。百道飛泉萬壑風。何用氷絃薦神調。宮聲遙在水聲中。徵明二印。曰徵仲父印。曰衡山印。此帖坦齋朴公得於燕京。余亦屢見。今未知何在。
益齋先生奉使入蜀。歷覽江南也。圖寫諸勝。天下絶寶也。草坪李氏家。傳來五百年。不知所終。近見一族人家。塗之以壁。余言其來歷。始知爲寶。又出三幅。一垈山圖。一嵩山圖。一金陵圖。在壁上者霉不可辨。囑改裝分庋。牢不可回。可惜神物堙沒於煙煤中也。本八幅。秋史曾一移摹。未知尙在其書樓也。
張茶農題五州煙雨圖後云五州爲南徐鎭山。故米海岳父子多愛寫之。本朝王石谷,査梅壑,▼(竹/亘)江上三賢。曾合作一本。題曰五州烟雨。葢倣米也。茶農蒼雪子張深。余見此圖全用米點。大小霞善於其法。一本尙在余林下壁上。
甞以爲寫生難於山水。卽工染脂粉。尙患笨伯。况可議率爾命筆。肖奪天工耶。文字離於筆墨。而又到筆墨所未到之地。毛詩尙矣。爾雅之分門別類。離騷之標擧寄托。直與造物者爭工。吟釋之頃。芬芳溢簡。形色湧紙。自後古今名雋七言五字。往往有生香活色。猝然遇之。如見其眞。惟在人情思熟參。文工繪事。了非二義。我東畫學。但求之於畫。故去畫日遠。且士大夫不知詩書畫髓。同一法乳。繪素一事。委之院人而恥言之。卽此文字鹵莾。可以反隅。山水名家。或有家以稱說者。至於寫生。寂然無聞。卽有之。若出於院軆工細。必入於水墨。劻勷四百年間。惟一姜豹菴尙書超超玄著。余童子時。靑藍授受。但在竹石一派。至今懊恨。去年秋。余由少司冦。解官閑居。明窓凈几。握管從事。特愛豹翁。臨十竹齋。拒霜烟梅二頁。試一擬之。十脂拂拂。如有小悟。遂及於翁所未及臨者。凡得雜花菓蘭竹石二十四頁。頗宄寫生之法。首重在筆。次用墨。丹黃其末也。若其渲染秘妙。又全在於約畧淡遠間。至墨備五色。超脫象外。非具文心慧業者。未易告以金針矣。兒子準衍幼好弄翰。時窺一斑。爲書此數語卷尾以付之。奚止寫生指南。可作詩文津逮。小子知之。癸未春正月晦日。碧蘆舫書。
金剛經塔。七層俱有簷。欄檻瓦當。皆以經字寫成。此塔相傳是文殊大士所製。梵僧自天竺携來。在宋始勒于石。今得孫蓮隱所弆。明萬曆間。陸宮保樹聲,陳徵君繼儒等施刻。董香光其昌所書本。重摸刊施願。共一切見聞隨喜。普證菩提同到彼岸云。此圖辛未。望月寺居士性月重刊者也。余於中州天寧寺。見寶塔以鐵鑄成。又有塔圖長可十餘間。刻華嚴經。與金經圖同製也。
道光丙申四月。魯之段店嶺黃茂才元秀數畒田。生瑞麥雙岐至五岐。史冊所罕見也。魯山令鄭鑾爲之圖。余得其刻本。
人好瓦當文。取其氷泐也。古人於剝落處。尋得心畫。補以綴之。今之書者得剝落處。饞噎詭奇。惟恐不及。斷折破脫。因形塗鴉。如是而焉可窺純精精一之域哉。正如騎驢覔驢。
王漁洋云湖州專用羊毫。柔輭無骨。取貂鼠毛爲之。輔以兎毫。謂鍾,王所用鼠鬚必此也。然稍肥擧落運用。不如人意。余深感是言。在灣州。多得貂毛。以燕士所贈湖州羊毫已束者。解而補之。其製稍瘦不肥。擧落果中法。
中州贈余二錠古墨。有隃糜二字。按唐時高麗貢松煙墨。和糜鹿膠造墨。名隃糜。見地理志。隃糜漢縣名。地出石墨。或取其遠方之産而名之歟。復有此名而同行之歟。實未可辨也。
我東之墨。最稱海州。以其材料之善也。余躬自監造。春秋所製者每佳。惟印板之時。必須速乾。不爲腐傷然後合於品也。俗人乃言一墨之軆。上劣下優者。兩料付成之故。是誠見也。灌油亂擣。付板印出。何能間其優劣。渾合成一。有如泥土之易粘者乎。又謂烟煤之取也。遠者淸而近者濁。其說亦陋矣。葢以油品之好否。定墨材之高下。則何論遠近也。其爲劣品。多用魚油而然。十聞不如一見也。
東國産楮。甲於海內。湖南爲最。完山其品樸而滑。淳昌其品精而懦。南平其品梗而闇。南原其品色白如雪。滑如凝脂。此爲天下第一奇品。因水性而然也。嶺南麁重色駁。只合墐戶。近見西洋紙。比南原不可同日而語。此以東紙渾唐紙而成之。堅取於東。姸取於唐。其弊潛賣東楮故也。余見中州貴紙若金。無片楮之遺地。而東人則用之如糞土。其産之博。可知也。
史謂晉人喜嗇。王文康公甞戒子弟云吾平生。不以全幅紙作封皮。是則非嗇也。不欲暴殄而然矣。余學文康者。曾在湖南。習知其貴故也。歐陽公之說曰。學書者費紙。猶勝於飮酒費錢。誠哉言乎。
先王考甞歎侈風曰。文房之具。亦異於前。今之所謂周紙。出於英廟朝後。古則白紙截爲三四折。置之案頭。隨手任用。所以古簡帖上。有小㨾折紙之付者是也。此後則又將何如。到今見之。毋論某紙。擧皆聯用。至於色紙唐紙。靡有不及。書簡封皮。亦有贈遺。皆古之所無也。
康煕御銘松花石硯。其銘曰。壽古而質潤。色綠而聲淸。起墨益毫。故其實也十八字楷書。小璽文曰康煕宸翰。此硯曾見於翠雲樓中。終歸于養硏山房。
姜豹庵尙書童子時。於宅邊掘地得甆碑一。回靑字李白桃李園序。不知誰書也。至今子孫秘寶。
開元硯製葫蘆樣。回環刻蘭亭全文。跋曰大唐開元十三年春三月。奉聖旨臣馮承素恭摸。字小於蚕頭。洵奇物也。硯背又有乾隆壬辰御製詩一絶曰。米記韓馮惜未見。今看承素硯存眞。雖欣無翼聯珍羽。艱致却慙似褚人。此題恰今壬申爲百一年也。
東方古器。曰百濟瓦硯。有秋史瓦千年硯天然六字銘。曰高麗秘色尊。安宅物。曰高麗烏泥携甁。考古圖。以爲吏部蘓尙書子容使虜中。於帳中常見之。曰䧿川石硯。藥泉南相公鎭川頭陀山紫石硯詩云。聞昔韓生得鎭石。一拳携入紫宸中。重瞳鑑別親題品。聲價居然冠海東。韓生葢指石峯也。曰紗羅子石。曰葫蘆。曰馬面如意松癭也。曰倭剔紅創金山水杯。曰赤間關御硯司四海硯。曰西藏硯山。
百濟官瓦。得於金秋史。倩姜若山製爲舃硯。遂命名䲶鴦舃。銘曰䲶鴦瓦化爲舃兮。落花巖遺一隻兮。凌波兮彳亍。故國兮如昨。後千年兮烟月夕。詩人憑吊兮漁人綱得。辛未刻之。貞碧携贈星原。但留拓本。
尹梣溪舊蓄唐製小鵞硯。其㨾精竗。色微紫。磨墨不及端方。余曾一見之後。叩之復得一賞於鍾山廬。可比右軍顧渚鵞也。後又得宋製鸚鵡硯。詑之。
金石經者。樓閣洞居人。出於秋史門。善鐵筆。一時士大夫圖章。皆出其手。余亦使刻印者多。而比石墨書樓法。卑下無奇法。後有吳小山圭一。深得石墨法。往來彜齋,秋史之間。其法益神。大內諸刻。擧皆任之吳手。初則純正可珍。漸入佳境。則隨以索隱。其文不可辨。行之未十年。眼廢。中州周少白。以其手刻贈余。余以是踏於彜齋所求隷書。彜齋大驚曰。近世佳手。托余刻其印方。又使小山刻少白印。付之槎便。少白盡印其所刻全幅以歸之。此本在彜齋海棠樓。余前後所得周刻數十方。皆名刻也。年前以御書賜橘山嘉梧室八字。乞刻於少白。以眼昏不能副。倩丁學敎刻之。其法近周,吳餘派也。
犀之上品。必稱福州。葢眞軆堅如玉而文彩異常。大勝於華産。博物志云別有通天犀種。側見則如截束髮。而入水能照恠。又有辟塵辟寒等種而未之見也。皇明孝宗時。南邊士人治福犀。得一奇文。卽南極壽星像也。鶴髮鳩筇儀形宛然。愛而粧帶。不敢私儲。獻之于天子。東國不知犀品。只以好者稱爲福州産。可笑。
犀角之文不一。角初長時。見山則山形。見水則水形。萬曆上高縣得一乕。文皆鳥獸。抑山水豹之類。而與犀文同耶。
漢武帝始用白鹿皮爲幣。唐憲宗有飛錢。宋太祖有便錢。眞宗置交子務。高宗設東南會子。金元承之爲寶鈔。明初亦用之。余見淸國紙幣。卽公文也。有戶部印花字。得一紙則十年後可以覔錢。其法甚縝密。東國舊用布帛。此其制也。隨其長短交易。近無而惟深北行之。自錢貨之流入。此亦不行。
伏羲始制棘幣。黃帝范金爲貨。虞夏商金幣三品。至周太公立九府圜法。錢制始定。後景王更鑄大錢。秦曰半兩。漢高鑄楡英錢。呂后改八銖。文帝改四銖。武帝爲五銖。輕重適宜。蜀之直百。吳之當千。晉之比輪。陳之六銖。梁之兩柱。皆失之太重。魏之水浮,風飄,鵝眼。宋之綖環,菜子,荇葉。晉之四分。隋之裁皮,糊紙。皆失之太輕。唐高祖鑄開通元寶。肅宗以一當十。又以一當五十。宋初鑄宋元通寶。太宗始用紀元鑄錢。曰太平通寶。嘉祐行折二之令。崇寧行當三之法。皇明鑄大明通寶。與歷代錢兼用。又鑄洪武通寶當十,當五,當三,折二。東國肅宗朝始行錢。當宁丙寅。鑄當百錢。行之數年而止。今用當五。
王阮亭引姚露旅書謂烟草本名淡巴菰。出呂宋國。能辟瘴氣。始於漳州莆田等地種之。近則處處皆有。唐詩云相思若烟草。似唐時已有服之者。王肱枕蚓菴瑣語云烟葉出閩中。而邊人寒痰。非此難治。故至以一馬易一觔。崇禎中禁之不得也。我東則仁祖初。始爲盛行。純祖初。斗室沈公爲箕伯。擇好品葉。量束一兩。名之曰兩草。近日又有日草名色。卽監司日供之謂而味爲上也。葢此物始自他國轉來。而到今我東之品。甲於天下。然以其害者言之。良田美土費於種草之址。寶玉珍金糜於吸烟之具。而其所爲用不過衆人消閒之供。物之無益。莫此爲甚。而俗習成痼。卒難療祛也。余亦好之者。故方吸而言之。
春花落瓣。秋花落朶。落瓣者有實。落朶者無實。有實者種生。無實者根生。葉厚者冬靑。冬柏之類。葉大者早凋。梧桐之類。樹大者葉小。槐之類。蔓生者實大。瓠爪之類。花美者無實。牧丹之類。花細者實美。棗李之類。易長者先萎。晩翠者得壽。余種樹林園。驗之則果然。
甞見草木攷。卉者草木之総名。木謂之華。草謂之榮。不榮而實者謂之秀。榮而不實者謂之英。爾雅。荄根也。木有直根有蔓根。直根曰根。蔓根曰柢。韓子。凡生草而初達謂之䓲。方言草盛曰菶。木茂曰葆。風俗通。木簇生爲灌。詩之集于灌木者也。無枝爲檄。木下曲曰樛。上竦曰喬。槐棘曰喬。爾雅云小枝上繞爲喬。漫錄之。以備一覽。
晉書元康二年。巴西界。竹生花紫色。結實如麥。宋乾道間。亦有之。東國嶺南。産竹實。晉州尤多。果如麥。作米如粳糯。味馨香。
植物之中。非草非木。不剛不柔。生十五日。成棟樑者曰竹。澄州之甘竹方竹。成都之三稜竹。道州之丹竹。飛魚口之紅竹。島岑之白竹黃竹。占城國之黑竹。瀟湘江之斑竹。熊耳山之丹靑竹。華陽國之二色竹。此皆竹之恠者。而我東之金絲烏竹。尤奇也。
草有無根而生者。菟絲也。木有無花而實者。卽無花果。余曾於燕市購來。果結於葉上。味甘。
我東火砲。始于麗末。判事崔茂宣。學其法於元國焰焇匠云。鳥銃本出於西域。用以捕鳥雀。故名鳥銃。倭奴得其制於呂宋國。以爲兵器。壬辰之變。我國人始見而駭之。佛浪機者。本西洋紅毛番種。萬曆中。襲殺呂宋國王而據其地。其人好用大砲。故仍爲火器之名。
按明史兵志火箭條內。永樂征交趾。得神機槍礟法。特置神機營習之。大者用車。次及小者。用架用樁用托。所謂用車者。卽今之大砲也。用架用樁者。葢卽今之鳥機也。其用托者。葢卽今之鳥槍也。是鳥槍之制。永樂中已有之。然不傳於外。永樂二十年。雖從張輔請。置砲於大同等關以禦敵。然利器不示人。朝廷每愼惜之。宣德中。又敕宣府総兵譚廣。謂神銃國家所重以壯軍威。勿輕給。正統六年。邊將黃眞立神銃局於宣府。帝猶以火器外造。恐傳習漏泄。特敕止之。是正統以前。鳥槍未甞傳習於外。直至嘉靖以後。始用之於營伍耳。
凡扈從及出使。皆服短褂缺襟袍及戰裙。短褂亦曰馬褂。馬上所服也。疑卽古半臂之制。說文。無袂衣謂之䙃。旣曰半臂。則其袖必及臂之半。正如今之馬褂。其無袖者。乃謂之背子也。曾三異同話錄云近歲衣制有一種。長不過腰。兩袖僅掩肘。以帛爲之。仍用夾裡。名曰貉袖。起於御馬院圉人。短前後襟者。坐鞍上不妨脫着。以其便於控馭。此又宋人短褂之制。隋文帝征遼。詔武官服缺胯襖子。三品以上皆紫。唐書高祖武德元年。詔諸衛將軍每至十月一日。皆服缺胯襖子。是缺襟之制。亦起於隋唐時。至戰裙之始。按國語鄢之戰。郤至於靺韋之跗注。三逐楚平王。註。跗注者兵服。自鞍以下注於跗。則今之戰裙。盖本此也。邲之戰。屈蕩逐趙旃。得其甲裳。又裙之有甲者耳。東人所着快子禙子之屬。猶馬褂子。牽夫所着短同衣。猶缺襟袍。至於戰裙。今新頒軍捴所着膝甲是也。按江淅人兩行着釘鞵。明史百官入朝遇雨。皆躡釘鞾。聲徹殿陞。東國油鞋油靴。卽其制也。
假面葢起於周禮方相氏。黃金四目以逐鬼。後漢書禮儀志。有大儺之儀。以木面獸爲儺。其濫觴也。高齊蘭陵王長恭着假面。與周師戰於金塘。齊人壯之。爲蘭陵舞。宋狄靑每戰。帶鐵面具。以鐵爲之者。軍旅所用也。東國有山棚戲橦絙戲。皆以木楦。三南多有之。古者迎勅時。列於路左。又有衣臼像婦人之儀於門前。今皆無。
井邑內藏寺。産柹小如栗。食之無味。惟乾而浸水極佳。豊基恩豊面乾柿。品甲於國中。彼人云糖屬之所無。以此推之。雖謂之甲於天下可也。咸從皮赤栗。小如橡實。春而叢生。秋而結實。乾之善解甲。名曰妓栗。智異山有山栗。秋來自落。塡流于溪。民爭取之爲粮。不知所由於何處。山深不得到故也。中州柿有六稜不甜。栗與咸從近。風土有同有不同。
申紫霞園中。種紅荳有兩大叢。覃家所贈也。羣芳譜所載。梅雨時開花。結實枝頭如珊瑚。豆紅嫣可愛。此與王右丞詩紅荳生南國之紅荳不同也。李濤叟仁默得一枚於翁星原視余。大於白扁豆。鮮紅可愛。謂之紅荳相思子也。風土記。八月雨曰荳花雨。
月沙李公。自中州移來單葉紅梅。種之廟前。此種遍滿國中。廟樹已枯。人見單葉紅梅。輒曰月沙梅。
梧陰尺牘曰。三尺童子携魚而來。巨口細鱗。松江之鱸耶。鱠縷如雪飄飄。氣欲仙也。仙桃四枝並蒂者。非爲報也。聊以表意。
我國之稱蘭草者。皆以爲馬蘭。第以花譜考之。非馬蘭。卽箬蘭也。馬蘭。本草云一名紫菊。其葉似蘭而大。其花似菊而紫。箬蘭。花譜云花紫。形似蘭而無香。四月間。産海島陰谷中。此豈非我國所謂蘭草者乎。
羣芳譜。秋牡丹草木葉。似牡丹差小。花似菊黃心。秋色寂寥。植數枝。足壯秋容。卽俗所謂唐菊也。
靖陵齋室庭松檜叢靑之中。有梅花樹玉英粲然。卽西山大師休靜所手植也。丁丑春。人皆見之。未知五十年間榮枯也。
靑海牡丹。傳以爲艮岳遺種。出自五國城。節度園池環種。無慮數百本。皆盈握之老幹也。花品亦佳。昔白沙先生於三樂齋。節度使送菊花種之。靑海之多花種。自古然矣。曾見齋前。亦有牡丹。想是艮岳之種。
康津普林寺竹田茶。丁冽水若鏞得之。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其品不下普洱茶。而穀雨前所採尤貴。謂之以雨前茶可也。海南等地。有栍橽實。取油凝而鑄燭。不下燭。治婦女乳腫。亦丁冽水法也。濟州産水仙花。秋史始知之。取長如法。不下江南種。而本土有五色花。渡海色變。又取黃茶。遜於燕種。而頗爲近可。
廣州南門外細村面金光里金氏田産煙草。稱爲國中殊品。面內所産。統稱爲金光草。今則一境所産。皆借其名。湖南之上官草。與金光名等。上官面所出。皆謂之眞品。本面在全州任實之間山峽五十里。可藏兵馬。故名曰萬馬洞。洞中之田。俱是種草爲業。鎭安亦産草。卽其餘派也。嶺南稱新寧草。有似上官而有毒。水原之紅草。似金光而不及之。六抵西勝於南。成川草田亘連江東,三登之境。謂之成川草。皆資於江,登而細剉出色。成川其尤也。
菸鄕之佳者稱靑,定。卽靑陽,定山也。膩燭則出錦城淸州者。靑心最上。舊稱葵花燭。燭一枝可達冬之永夜。猶有餘跋。
三餘帖。女星散爲配玄。配玄卽今水仙花也。甁史。水仙神骨淸絶。織女之梁玉淸也。一種千葉謂眞水仙。單葉名水仙。千瓣乃玉玲瓏。余癖此花。顔所居曰種水仙三百本舫。取出門一笑大江橫之意也。李荷居帶醫提。與妓接話。一世驚恠。雲石聞之。見李公曰。公七十。始知愛妓。當以花賀之。送水仙一盆。水仙之爲女精。果有以也。水仙産於江南。在昔壬申。紫霞使燕。冬回携來之。此爲東來之始也。于今六十年。東來不絶。甲午後燕貨禁條。花亦入其中。數年不出。後漸弛其禁。咸豊時南匪之役。皇城又絶種。尙今買賣不敷矣。
甘藷在果蓏中最後出。可以賙饑。可以延年。又可以禦蝗而弭旱。始自閩,廣。殆遍天下。獨我東近始購種於日本。沿海若而邑。僅得傳殖。而峽野之民。不識藷爲何物。純祖甲午。徐楓石廵按湖南。亟訪藷種。頒諸列邑。且取皇明徐玄扈甘藷䟽,我人姜金二氏之譜。彙類編纂。擺印廣布。以諗其種藝之法焉。余得食徐公之煮爲餻甚佳。取其法。
元次山丐論云古人鄕無君子則與山水爲友。東坡詩。風泉兩部樂。松竹三益友。余所居鄕里。無好山水。無好松竹。又無好琴酒。其安所從君子友乎。
醫家本草。歷代所增。各自爲書。今合而爲一。非古本也。原書始於後漢。別錄者魏晉以來。吳普,華唐之所記。于志寧,李勣等。修本草並圖。合五十四篇。謂宏景以神農經及諸家別錄注之。江南徧方。不能周知藥石。其謬誤至四百餘種。遂考正之。又增後世所用百餘物。陳藏器所著則又名本草拾遺。明李時珍又著本草綱目。益詳備矣。按時珍傳。醫家本草。自神農所傳。止三百六十五種。陶宏景所增亦如之。唐蘓恭增一百一十四種。宋劉翰增一百二十種。至掌禹錫,唐愼微輩先後增補。合一千五百五十八種。至時珍。又增三百七十四種。本草之普濟蒼生。其功無量。
梅亦寒花也。氣像極瀟洒。多貯害子宮之說。古已有之。人或以沈斗室證之。以余所見。南圭齋築梅花室。藏奇品屢百本。名動一世。不數年。圭齋歸道山。其室作人醋塩供億之處。前人之垂戒。不無所見也。
梅宜藏寒屋。杏宜藏粧坮。梨花宜春雨。荷花宜曉風。海棠桃李宜歌舞席。牧丹芍藥宜棨戟門。芳桂幽蘭宜贈隱士。
閩有紅茉莉。蜀有紫綉毬。楚有紅梨花。燕有黃石榴。天台有黃海棠,白海棠,白紫碧桂花,白玫瑰。洛陽有黃芍藥。昌州有香海棠。吾園有輭紅綉毬黃石榴,白海棠。
長湍人發古塚。得甆器,崇寧錢,銅鏡。錢隨手卽壞。鏡作徐卯翁畊輔所庋。圓徑三寸有奇。背鑄盤龍。面微凸。正古所稱衜家聚形鏡耳。綠斑透出膚理。望見可知爲入土千年物。可懸此爲鑒定古銅之玉尺也。
金尙古堂孫魯鍾。葬兄泰仁君萬鍾於長湍山中。治壙得古人殉物宋錢數百枚。皆元豊通寶。卽所謂靑苗錢也。八角鏡一面銘曰。湖州眞正石。念二叔照子。鑒人面淸如明。奇物也。古人多以如字作而用。
星原舊有古井。淘得宋窯酒杯。柳貞碧得於石墨書樓。甚愛之。時刻不離手。携至瀋陽。失手見破。養硏老人以詩嘲之曰。蛾眉宛轉一聲嗟。千古凄凉是馬坡。竹葉於吾眞不分。救君不得奈君何。器破者余曾見之。鐵絲補綴尤奇絶。勝太眞一襪也。
七佛偈。山谷書。薦其母夫人冥福也。霞翁得之象山村家袱梁上。山谷又書石鏡溪三字。在瞻雲寺讀書臺。寺在廬山中。拓本藏蘓齋。
柳惠風冷齋書種曰。方寸玉一片。羊脂色雙螭首。一面刻山水平橋漁舟遠塔。微微可辨。一面刻詩云。綠莎白石滿河洲。渺渺平沙帶淺流。紅樹靑山無路入。行春橋畔覔漁舟。小印文曰子剛。成川府民。耕田拾得。獻于府使。府使之子。戀詩妓一枝紅。與之佩。後歸邑子某。府使某以重價取之。詩情畫意。俱極縹緲。刻法又神。必是中國物。但未知子剛之爲何代人。以待後査。按成都民。墾荒塚間。得此玉獻之官。遂歸於一枝紅。紅又情贈富民某甲。後鄭府使取爲寵姬之餙。姬居燕子樓者且十年。售玉以資衣食窘。此玉又歸於侯門之絶艶。玉自出土來。凡三易主而三噪於世。葢尤物也。有一嗜古者。購求於艶。艶竟刓敝不出手云。子剛姓陸氏。徐文長水仙花詩云。畧有風情陳妙常。絶無烟花杜蘭香。昆吾鋒盡終難似。愁殺蘓州陸子剛。自注云陸子剛蘓人。碾玉妙手也。据此則子剛爲文長同時之人。而此玉爲明嘉隆間之古物。無疑也。
許文正穆少時。往其外祖林白湖家。見一塊石在庭中。請持歸之。林公曰。此石我得之田間。而不意爾之見也。遂破之。中有一小玉。白湖曰。意謂其大。及見小矣。使作玉鷺。許公卽其席手刻之。傳爲至寶。韓公致應爲兵判。借用之。一日忽心動。使之還本主曰。古家神物。不必久留。是夕火。其家舍什物書籍。皆不能保而玉鷺得全。
斗室宅。舊蓄高麗秘色瓷尊。爲安文成公宅遺墟所得。可寶也。養硏老人。借用八年而還。安文成甞掛晦菴像。遂號晦軒。甘露寺詩曰。日暖庭花藏淺綠。夜凉山月送微明。憂民未得湔塗炭。欲向蒲團寄半生。史稱憂國傷民之意溢於辭也。此尊卽先生舊物。而繪翥鶴六朶雲十八。皆用粉靑。余蓄瓷器。以粉靑靑畫靁文。麗俗之用采。皆以粉靑可知也。正字通。今俗以尊作尊卑。以尊酒器之尊。別作樽非也。樽林木茂盛也。說文。又作罇。古者酒一壺稱一經。人有以五經遺者。聞其來。束帶出迎。乃酒五壺。非五經博士也。尊說之下。漫錄古人語。
高江村天祿識餘。謂今之摺疊扇。初名聚頭扇。元時。高麗始以充貢。明永樂間。稍效爲之。今則流傳寖廣。團扇廢矣。至於揮洒翰墨則始於成化間云。張東海以爲貢於東夷。永樂間。盛行於中國。然南宋以來。詠摺扇者頗多。東坡謂高麗白松扇。展之廣尺餘。合之止兩指。卽此也。南方婦女猶用團扇。惟妓女用撒扇。近年良家婦亦用之云。
編竹爲筒。空其中而竅其外。暑時置牀席間。可以憇手足。取其輕凉也。俗謂之竹夫人。按陸龜蒙有竹夾膝詩。卽此器也。湯婆子用銅錫器盛湯。置衾中煖脚。按此名雖不經見。然東坡有致楊君素札云送煖脚銅缶一枚。每夜熱湯注滿。塞其口。仍以布單裏之。可以達旦不冷。范石湖有脚婆詩。則是時幷有脚婆之稱也。東國有兩品竹夫人。一如此制。湯婆子事不稱器。老人或以匜器盛湯水。以煖手足。亦此制也。
賣暑。唐宋人賣痴獃。此與賣暑同其流俗。踏橋。麗俗以禳脚病。諺所云一夜踏十二橋。消十二月之灾。壬辰後此風漸衰。望月之厚薄。以徵豊儉。其來久。而陳穀穗,嚼癰果,拔河戱。皆羅麗舊俗。而佳節遊衍之一事也。
歐陽公云唐人宴聚。盛傳葉子格。袁文謂此唐之讖也。葉子二字折其字。上半乃廿世字。餘木字湊下子字作李。乃是廿世李。正合有唐二十帝之數。南唐書。李後主妃周氏。又編金葉子格。卽今之紙牌也。東國投牋謂之紙牌。與中州制同而異。余所曾見者也。
㙜城之圍。梁武帝以紙鳶告急於城外。而援師莫有進者。金守汴日。爲紙鳶。置文書其上。至北營則斷之。以誘被俘者。識者謂宰相以此退敵難矣。然唐張伾守臨洺。爲田悅所攻。馬燧等救兵未進。伾急以紙鳶放過悅營。悅射之不及。乃落燧營。言三日不救。洺人且爲食。燧等遂進解圍。是紙鳶亦有時濟用。東國以紙鳶爲戱。元日始。上元止。
高麗闕庭曰毬庭。形似毬也。近世馬習步曰。毬庭其步圓。似戱毬也。
楓石作龍尾車記曰。泰西水法爲車者三。筩焉提焉下上焉而激水。謂之玉衡。筩焉柱焉升降焉而趵水。謂之恒升。墻焉圍焉環轉焉絜水。謂之龍尾。而龍尾於河宜。玉衡恒升於井宜。故功用之博。龍尾爲最。三者皆西法。而明太保徐文定之所傳也。叙工精切。駸駸乎考工之亞。炯菴曰。余讀奇器圖說。回互或難解。未若此記之歷歷如覩掌紋也。
木綿布行於宋末元初。古者凡布。皆以麻爲之。木綿作布。邱文莊謂元時始入中國。南史林邑傳。水綿吉貝樹也。花係木本而非草本。其色正紅。及落時則白如鵝毳。但其花秪可絮茵褥而不可織布。唐書南蠻傳云吉貝草。緝花作布。名曰白㲲。又名古貝。夏之織貝。卽今草綿布是也。東邦之出。文忠宣益漸始也。其孫曰萊。造機抽絲。呼其機曰文萊。
羲皇始造布。然其用何物爲布。及升數精粗。莫得以考焉。想亦不越於絺綌也。三代以上之布。必以二尺二寸爲廣。以及升數多寡。皆以爵秩爲之等威。故禮深衣。言袖曰廣終幅。又曰布帛精粗不中數。幅尺廣狹不中量。不鬻于市。後世則不能然爾。
漢時金銀。皆以斤計。如高祖賜陳平金四萬斤之類是也。侯景圍城。羊侃率兵禦之。詔送金五千兩,銀一萬兩。以兩計起於梁時。東國銅鐵以斤計之。金銀以兩計之。有貴賤故也。
髹漆器用。蚌蛤殼鑲嵌。象人物花草。謂之螺塡。方勺泊宅編謂本出倭國。而藍衍訛爲羅殿。而附會之誤矣。又當作螺鈿。我國皇太后,皇后前進獻禮物。卽螺鈿小盒一坐。而余於使行見之。不過是貝盒樸制也。以此作爲年貢方物。殆儉也。
俗以鳳仙花染指。自宋已然。癸辛雜識。鳳仙花紅者搗碎。入明礬少許。染指甲。用片帛纏定過夜。如此三四次則其色深紅。洗滌不去。直至退甲。方漸失之。回回婦人多喜此云。今俗則不持回回婦人也。
禮。婦人吉拜。雖君賜肅拜者。周禮太祝九拜之一。鄭註謂俯下手。如今之撎。按推手曰揖。引手曰撎。肅拜如撎。正今俗婦人攏兩手向下之禮也。惟婦人之拜。跪與不跪。諸家之說紛紛。洪容齋等謂古禮婦人之拜。本不跪。東國婦人之拜。伸腰而拜。兩手據地。顙不至席。此與古法脗合。以其首餙甚多。不得俯伏。與介冑之士同也。
正廟己亥。有禁髢製冠之議。上曰。花冠之屬。雖云簡便。末世侈風。轉相務勝。名雖花冠。而加以珠玉金貝之屬。盛加造餙。則其費之鉅。反有過於髢髮之具。此所謂以弊捄弊。亦豈非可悶乎。近俗如遵古。則必以花冠用於婚禮。禮家無珠貝之繁。宜以冠制分等品可矣。
舊聞崔杜機承旨成大。與申靑泉維翰。爲前生伉儷。靑泉是夫。杜機是妻。杜機詩集中酸蔣歌。悽婉可愛。卽有感於斯而作也。其塚在壽春。南秋月秘書玉之塚。亦在是土。崔稿幷在。南氏家人指謂二詩塚。崔之孫琴有詩曰。殘杏數株還斫盡。明年何以答春風。極有大致。
純祖乙酉十月十四日。鶴山行臺自耽羅返命。至崸嶝前洋。所騎船遇風漂流。十五日汐水。還泊濟州別島浦。先以兼道科試官而行。收券亦得完。綠袍之爲文科主文。罕例也。先是鶴山言三十年前。夢見坡仙冠危冠。衣黃紬袍。據天然几。几上空諸所有。只有一小帖子。少頃。坡起身出戶。顧語鶴山曰。君且坐閱是帖。對曰是公詞翰否。曰是。展視之。第一幅。紅箋上有塡詞一首。當時頗了然。覺來惟記首句。曰月痕西墮。衆江東流。又記中腔。曰綠楊陰中紅叱撥。末尾曰須寄書扇榦兒來。不省榦兒是何語。後閱公集及志林。王朝雲生子曰榦兒。未朞而夭。然則夢中所遇。殆眞是坡仙。恨不能記其全曲也。
香取其遠。酒取其臭。石取其枯。琴取其初。茶取其色。竹取其影。月取其空。棋取其寂。杖取其近。水取其積。雪取其颯。釰取其畏。蒲團取其弊。美人取其猜。僧取其閑。花取其暗。金石鼎彜取其老。
客過林廬。叩余幽事。拈古人詩句以應之。問是何感慨而甘棲遯。曰大都心足身還足。只恐身閑心未閑。問是何工課而能遣日。曰惜花春早起。愛月夜無眠。問是何利養而獲終老。曰子種孫耕無歉歲。筆花墨雨有豊年。問是何往還而破寂寥。曰陽坡草軟厚如織。仍與麋鹿相對眠。問是何所有。曰嶺上多白雲。問是茅棟成。曰居然我泉石。問是何所聞。曰蟪不知春秋。蛙不爲公私。流水猶聾耳。鳴蟬重我欺。又曰長對靑山無問答。秪看時曆有春秋。此余之句也。
自古人臣之奉宸翰。以爲榮耀者不一。而未有如賤臣之受賜也。戊辰秋。聖上書下橘山嘉梧室五字。橘山卽臣之賤號。而嘉梧室者。是所居巷名也。未知聖聦何以記存而垂此分外之異數也。於是建閣而奉之。諸長老以文賀之。此畫見魏野居也。
爲官避瘴氣。不知仕亦有瘴也。急催暴斂。剝下奉上。租賦之瘴。深文以逞。良惡不白。刑獄之瘴。侵牟民利。以實私儲。貨財之瘴。攻金攻木。崇餙車服。工役之瘴。盛揀妾姬。以娛聲色。帷薄之瘴。
陳眉公有多少箴。其語不俗。今有一本。不知何人作。其詞云少嗜慾。多聞見。多素心。少靦面。少附貴。多右賤。多獨立。少拘戀。少京闉。多鄕甸。多穅秕。少珍膳。少語言。多兢戰。多自守。少耽羡。我有旨酒。以敖式讌。
山居有八德。心兮虛。軆兮舒。欲兮鋤。禮兮䟽。翁兮漁。兒兮書。仕兮躇。刺兮祛。舍此則飯先生等耳。
酒史作人逸其名。其槩云松下對坐。談屑娓娓。不覺前山斜陽灧㶑。霞氣氤氳客欲起。不可不一飮也。雨裡旅舘。聞隣家漉酒聲。不可不一飮也。浴罷淸流。高卧絶壁。聽黃鸝兩三聲。不可不一飮也。老菊殘楓。秋懷寥廓。徘徊庭除。有知心者至。不可不一飮也。秋深山屋。挑燈讀遊俠傳。至風蕭蕭兮易水寒之句。不可不一飮也。明日將討敵。整頓旗皷。撫長劒待天明。瞥見紅旭滿地。不可不一飮也。學公孫舞劒。掃太守千畒。不可不一飮也。讀諸葛亮出師表。不可不一飮也。和陶淵明自挽歌。不可不一飮也。訂唐詩。至李靑蓮廬山瀑布詩。不可不一飮也。山窓雪霽。曉月晶明。宇宙無一點塵埃氣。不可不一飮也。皷琴至尾煞。忽聞秋風怒號。精神悚懔。不可不一飮也。篁陰滿簾。林園瀟洒。窓外聞落子聲。酒思先動。也見落花。不可不飮也。贈好酒器。不可不飮也。有憂者終宵輾轉。痛飮二三盃。呴呴而睡。亦快事也。
東坡投荒時。答程大侔云。此間食無肉。病無藥。居無室。出無友。冬無炭。夏無寒泉。大率皆無耳。余鄕公所無者盡有之。但無肉與藥。
東坡曰。種樹大者不能活。小者老夫又不能待。惟擇中材而多帶土碪者爲佳。余每取公言。
心閒身逸則看書。心豪手健則寫字。心游眼明則作畫。心淸指輕則皷琴。心身俱懶則病。心手俱冗則卧。心眼俱暗則睡。心指俱發則歌。
巖上石虎抱兒眠。禪門悟道語也。雲在靑天水在甁。僧家見性偈也。凡詩文書畫。先得虛靈氣然後自入竗境。秋史曰畫無書氣近院格。紫霞曰書無篆隷氣俗。楓石曰詩文當有書畫氣。反是者飯儈牛店販馬驛。何暇做遊閑公子峩冠博帶。高視濶步。周旋於大雅之塲哉。
洞庭張山人云山頂泉輕而淸。山下泉淸而重。石中泉淸而甘。沙中泉淸而冽。土中泉淸而厚。流動者良于安靜。負陰者勝于向陽。山削者泉寡。山秀者有神。眞源無味。眞水無香。余於天摩頂飮輕。退士潭飮重。雙檜亭飮甘。壽谷竗井飮冽。靑海東井飮厚。其安靜向陽。寡神味香。皆可足言。
養生家忌魁罡神責。其實責其懶也。余嗜卧。氣之懶也。善坐睡。神之懶也。不好讀書。高之懶也。不好博奕。癖之懶也。不飮酒。韻之懶也。不遊山。耽之懶也。落花不掃。春之懶。庭草不除。夏之懶。好居鄕山。懶於世。
人皆言明哲保身好矣。余謂立節死義易。明哲保身難也。留心於立節而不及。則不陷於不義之科。保身之策。自在其中。專以保身爲心。則不免爲小人鄙夫之態。
余少時見鑄字役於閣中。有一人年可二十。爲人伶俐。聦明絶人。有問則無事不對。屢日見之。甚奇之。問其姓名與居住。漫漶不對。使人探察。終不知其來歷。于今三十年。益恨失人才之歎。
太常造脯。饗天地岳瀆廟社之需也。滿庭布肉。烏鵲不敢近。羣鳥又不得飛其上。所以無禁止之具。五百年如一日。收藏之時。不見鼠嚙。亦異矣。余管是寺。每聞如此。抑神靈之護也。
余甞聞之。作詩與文。有六病。荒也姸也濁也輕也澁也固也。荒則有不工之歎。姸則有浮儇之嫌。濁失於富而畜。輕失於貧而素。澁之不能容旋。固之不能通變。是皆病也。人之言也。雖馬,韓,李,杜之高。不得辭其責矣。
牴二獸名。秉心忠直。皇明承天門內華表頂上者。是余曾見於燕宮橋邊。又於衛輝府前石有之云。此亦龍九子之類同。
明儒論尹吉甫曰。雖有崧高,烝民,韓奕,江漢四詩。然惑後妻。其子伯奇衣苔帶藻。作履霜之操。比晉獻驪姬。非名臣也。此亦達論。而公私有異。以伐玁狁。其惟曰萬邦爲憲。則豈不足爲名臣乎。
中州鳳山縣有薑。名三寶薑。相傳明初。三寶太監所植。可療百病。我國産薑處。惟全州之鳳翔面。或引三寶薑而名歟。亦可紀也。
漁洋山人。使蜀過劍州。見南門外修小廟。曰鄧艾廟也。歎曰。不祀姜伯約。反祀鄧艾乎。欲毁之。後見唐人唐彦謙詩曰。昭烈遺黎死尙羞。揮刀斫石恨譙周。如何千載留遺廟。血食巴山伴武侯。已先我而言之矣。余以爲此說。可附出師表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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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七言四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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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尙以易相漢。能上陰陽之奏而不能防宦戚之萌。不知繫于金柅之戒也。匡衡以詩相漢。能陳關雎之義而不能止奄寺之惡。不知昏椓靡共之戒也。經術雖明。奚益焉。
迂齋謂伏羲未作易之前。天下之人心無非易。伏羲旣作易之後。天下之萬事無非易。
六誓可以觀義。五誥可以觀仁。甫刑可以觀誠。洪範可以觀度。禹貢可以觀事。臯陶謨可以觀治。堯典可以觀美。
風俗世道之元氣也。觀葛生之詩。堯之遺風。變爲北方之強矣。觀駟鐵小戎之詩。文武好善之民。變爲山西之勇猛矣。晉秦以是強於諸侯。然晉之分爲三。秦之二世而亡。風俗使然也。是以先王之爲治。威強不足而德義有餘。
古未有筆。以書刀刻字於方策。謂之削。魯爲詩書之國。故考工記。以魯之削爲良。
周無射之鍾。至隋乃毁。唐顯隆之輅。至宋猶存。物之壽。亦有數耶。
君之於民。亦曰忠。季梁云上思利民忠也。子之於親。亦曰慈。禮云慈以旨甘。聖賢言忠。不顓於事君。爲人謀必忠。於朋友必忠告。事親必忠養。以善敎人。以利及民。無適非忠也。
河圖曰。崑山出五色流水。其白水入中國。名爲河。故晉文公投璧于河曰。有如白水。
劉炫謂國語非丘明作。葉少蘊云古有左氏,左丘氏。太史公稱左丘失明。厥有國語。今春秋傳作左氏。而國語爲左丘氏。則不得爲一家。文軆亦不同。其非一家書明甚。左氏葢左史之後以官氏者。朱文公謂左氏。左史倚相之後。故其書說楚事爲詳。司馬氏謂左氏欲傳春秋。先作國語。國語之文。不及傳之精也。
漢武尊公羊家。而蘓氏謂何休公羊之罪人。晁氏謂休負公羊之學。五始二科九旨七等六輔二類七缺。皆出於何氏。其墨守。不攻而破矣。
劉盛不好讀。唯讀孝經論語曰。誦此能行足矣。安用多誦而不行乎。蘓綽戒子威云讀孝經一卷。足以立身治國。何用多爲。愚謂梁元帝之萬卷。不如盛,綽之一言。學不知要。猶不學。
范太史曰。能事親則能事神。王梅溪見人禮塔。呼而告之曰。汝有在家佛。何不供養。葢人能奉親。卽是奉佛也。
徐景安樂書。宮爲上平。商爲下平。角爲入。徵爲上。羽爲去。則唐時平聲。已分上下矣。
文子者。老子弟子也。其書稱平王問道。其言曰。玉在山而草木潤。珠生淵而岸不枯。荀子取之。譬若積薪燎。後者處上。汲黯取之。再實之木。其根必傷。明德后取之。用兵有五。有義兵。有應兵。有忿兵。有貪兵。有驕兵。義兵王。應兵勝。忿兵敗。貪兵死。驕兵滅。魏相取之。孔子無黔突。墨子無暖席。班,杜,韓諸儒取之。心欲小志欲大。智欲圓行欲方。孫思邈取之。德均則衆者勝寡。力敵則智者制愚。陸抗取之。欲治之主不世出。王吉取之。寸而度之。至丈必差。銖而解之。至石必過。石稱丈量。徑而寡失。枚乘取之。山有猛獸。林木爲之不斬。園有螫虫。葵藿爲之不採。國有賢士。折衝千里。鄭昌取之。文之所加者深。則權之所服者大。德之所施者博。則威之所制者廣。班固刑法志取之。人之將疾。必先厭魚肉之味。國之將亡。必先惡忠臣之語。越絶劉子取之。乳犬之噬虎。伏鷄之搏貍。何休註公羊取之。又曰。士有一定之論。女有不易之行。同言而信。信在言前。同令而行。誠在令外。狡兎得而獵犬烹。高鳥盡而良弓藏。皆見此書。其見於列莊淮南子者。不可摟數。
郭象注諸子曰。聖人之在天下。煖然若陽春之自和。故蒙澤者不謝。凄乎若秋霜之自降。故凋落者不㤪。李太白云草不謝榮於春風。木不怨落於秋天。其語本此。注又曰。世有假寐而夢經百里者。則無以明今之百年。非假寐之夢者也。邯鄲枕南柯守之說。皆原此意。幽求子曰。當其夢時。覩山念木。或志在舟楫。因舟念水。因水念魚。東坡夢齋銘。意出於此。
易姓而王。封於泰山。禪於梁父者。七十有二代。其有形兆。垠堮勒石。凡千八百餘處。
韓子曰。商君敎秦孝公燔詩書而明法令。愚按史記商君傳。不言燔詩書。葢詩書之道廢。與李斯之焚之無異也。
諸侯棄兵甲之讐。爲盟會之禮。乃於登壇之後。奮匕首劫國君。賊天下之禮者非沫乎。君臣之義。有死無隕。專諸感公子光之豢養。而親剚刃於王僚。賊天下之義者非諸乎。父母全以生之。子全而歸之。政纔終父母之年。遂殺身以爲仲子。賊天下之仁者非政乎。樊將軍以困窮歸燕丹。荊說取其首以濟入秦之詐。賊天下之信者非荊乎。以賊禮賊義賊仁賊信之人。並列於傳。又從而嗟嘆其志。不亦繆哉。豫子以不忘舊君。殺身而不悔。抗節致忠。行出乎烈士。乃引而寘諸四字之間。不亦薰蕕之共器乎。
三國鼎峙。司馬公通鑑。以魏爲正統。朱子綱目。以蜀漢爲正統。然稽於天文則熒惑守心。魏文帝殂而吳蜀無他。此黃權對魏明帝之言也。若可以魏爲正矣。月犯心大星。王者惡之。漢昭烈殂而魏吳無他。權將何辭以對。
君子其潛如龍。非迅雷烈風不起。其翔如鳳。非醴泉甘露不食。司馬德操,諸葛孔明。俱隱於耕稼而仕止殊。魏玄成,徐洪客。俱隱於黃冠而出處異。如用之易地則皆然。
號萬石者五家。漢石奮及四子皆二千石。號萬石君。馮揚爲弘農太守。八子皆爲二千石。亦號萬石君。嚴延年兄弟五人至大官。母號萬石嚴嫗。秦龔爲穎川太守。羣從同時爲二千石者五人。號萬石秦氏。唐張文瓘爲侍中。四子皆至三品。號萬石張家。
執笏始于宇文周保定四年。紫緋綠袍始于隋大業六年。
佩魚始於唐永徽二年。以李爲鯉也。武后天授元年。改佩龜。以玄武爲龜也。
漢黨錮以節義。羣而不黨之君子也。唐朋黨以權利。比而不周之小人也。漢之君子受黨之名。故其俗淸。唐之小人行黨之實。故其俗弊。
呂氏童蒙訓云前輩有編類國朝名臣行狀墓誌。取其行事之善者。別錄出之以自警戒。亦樂取諸人以爲善之義。籍溪胡先生敎諸生。於功課餘暇。以片紙書古人懿行。或詩文銘贊之有補於人者。粘置壁間。俾往來誦之。咸令精熟。此二事可以爲法。
柳下惠見飴曰可以養老。盜跖見飴曰可以黏牡。見物同而用之異。
董仲舒三年不窺園。法眞歷年不窺園。趙昱歷年潛思。不窺園門。桓榮十五年不窺家園。何休不窺園者十七年。
漢丞相再入二人。周勃,孔光。御史大夫再入三人。孔光,何武,王崇。後漢太尉再入二人。劉矩,馬碑。三入一人胡廣。司徒再入二人。魯恭,胡廣。司空三入一人牟融。唐宰相再入五十七人。長孫無忌至裴樞。三入十二人。武承嗣至鄭畋。四入三人。韋巨源,姚元之,韋安石。五入三人。蕭瑀,裴度,崔胤。
舊史德宗紀。貞元六年。岐州無憂王寺。有佛指骨寸餘。先是取來禁中供養。二月乙亥。詔送還本寺。此迎佛骨之始也。韓愈傳云鳳翔法門寺。有護國眞身塔。內有釋迦文佛指骨一節。貞元,元和,咸通。迎佛骨者三。
常衮與禮官議禮。爲君斬衰三年。漢文帝權制三十六日。宋太宗遺詔。亦三十六日。羣臣不忍旣葬而除。略盡四月。高宗如漢故事。玄宗以來。始變天子喪爲二十七日。世多以短喪議漢文。而不知二十七日之制自玄宗始也。
止齋謂宋朝名節自范文正公。議論文章自歐陽子。道學自周子。三君子皆萃於東南。殆有天意。
陳倉石皷文已訛。按陳倉在唐爲鳳翔寶鷄縣。石皷在天興縣南。乃雍縣也。魏太武自東平趣鄒山。見始皇石刻。使人排而仆之。嶧山之碑野火焚。葢此時。
羅昭諫詠松曰。陵遷谷變須高節。莫向人間作大夫。其志亦可悲矣。唐六臣彼何人哉。昭諫說錢鏐擧兵討梁。見通鑑。其忠義可見。眎奴事朱溫之杜荀鶴。猶糞土也。
朱新仲詠顔魯公云。千五百年如烈日。二十四州唯一人。又詠昭君云。當時夫死若求歸。凜然義動單于府。不知出此肯隨俗。顔色如花心糞土。
鄭亞會昌一品集叙云周勃,霍光。雖有勳伐而不知儒術。枚臯嚴忌。善爲文章而不至巖廊。歐陽公曰。劉柳無稱於事業。姚宋不見於文章。其言簡而明。非唐人所及也。
荊公爲外祖母墓表云女婦居不識廳屛。笑言不聞隣里。是職然也。唐岐陽公主不識刺史廳屛。見杜牧之文。薛巽妻崔氏言笑不聞於隣。見柳子厚文。荊公爲文。字字不苟如此。讀者不知其用事。
東都之季。淸議扶之而有餘。強秦之末。壯士守之而不足。前輩作風俗萬世之基。末韻。 亶聡明而有作。無作聦明。由仁義以安行。非行仁義。舜由仁義行。
王渙之曰。乘車常以顚墜處之。乘舟常以覆溺處之。仕官常以不遇處之。無事矣。此言近於達者也。
廟堂二字。見漢徐樂傳。修之廟堂之上而銷未形之患。注云人君爲政擧事。必告宗廟。議於明堂。
道家云眞人之心。若珠在淵。衆人之心。若瓢在水。眞文忠云此心當如明鏡止水。不可如枯木死灰。
方正學孝孺曰。古之仕者及物。今之仕者適己。及物而仕樂也。適己而棄民恥也。與其貴而恥。孰若賤而樂。故君子難仕。
吳康齋與弼。雨中被簑笠負耒耟。與諸生並耕。談乾坤艮离坎震兌巽於所耕之耒耟。可見先生樂道安貧。曠然自足。眞如鳳凰翔於千仞之上。下視塵世。曾不足過而覽焉。食後坐東窓。四軆舒泰。神氣淸朗。讀書愈有進益。心平氣和。與物皆春。甞讀孟子。湛然虗明。綠陰淸晝。薰風徐來。山林閴寂。天地自濶。日月自長。邵子所謂心靜方能知白日。眼明始會識靑天。於斯可驗。
胡敬齋居仁曰。釋氏見道。只如漢武帝見李夫人。非眞見也。只想像這道理。故勞而無功。儒者便卽事物上窮究。
魏莊渠校曰。大丈夫凍死則凍死。餓死則餓死。方能堂堂立天地間。若開口告人貧。要人憐我。以小惠呴沫我。得無爲賤丈夫乎。
夏東巖尙朴曰。仁是心之德。如桃仁杏仁一般。
張東所詡柳塘記曰。沿塘植柳偃仰披拂於朝烟暮雨之間。千態萬狀。可數十本。塘之水微波巨浪。隨風力強弱而變化。可數十丈。鸎燕之歌吟。魚鰕之潛躍。雲霞之出沒。不可具狀。境與心凝。塊然莫知其樂之所以。後誦昔人柳塘春水。漫及楊柳風來面上吹之句。則心與句得。茫然不知妙之所寓。理與心會。精與神融。不必詩之出口。所謂至樂與至妙者。皆不暇外求而得矣。
薛敬軒瑄曰。理如日光。氣如飛鳥。理乘氣機而動。如日光載鳥背而飛。鳥飛而日光雖不離其背。實未甞與之俱往而有間斷之處。亦猶氣動而理雖未甞與之暫離。實未甞與之俱盡而有滅息之時。氣有聚散。理無聚散。於此可見。
王凝齋鴻儒云罍尊陽也在阼。犧尊陰也在西。堂上以陽爲主也。縣皷陽也在西。應皷陰也在東。堂下以陰爲主也。
呂涇野柟語錄曰。長江之上。大海之濱。風波之險。可畏也。至於風恬浪息。漁人出沒其間。鷗鷺飛鳴其中。若相狎而玩者何也。水忘機也。漁人鷗鷺亦忘機也。若乃吾人之宅心。宜若平且易焉已矣。反有不可測者。則其爲風波之險莫大焉。此莊生所謂險於山川者也。是故機心忘而後。可以進德矣。
王陽明守仁語錄曰。吾輩通患。正如池面浮萍。隨開隨蔽。未論江海。但在活水浮萍。卽不能蔽何者。活水有其源。池水無其源。有其源者由己。無其源者從物。故凡不息者有其源。作輟者皆無源故耳。
程松溪文德論學書曰。天下事過則有害。雨澤非不善也。過多則澇。其爲害也與旱同。今有意爲善。而任心自是者。皆雨之澇也。
徐魯源用檢曰。與友人坐夜分。羣動旣息。天籟自鳴。鳴非外也。聽非內也。天人一也。一此不已也。通乎晝夜之道而知此。其庶幾乎。
聶雙江豹論學書曰。寂然不動。中涵太虗。先天也。千變萬化。皆由此出。可以合德合明。合序合吉㐫。故曰天不違。觸之而動。感而後應。後天也。何思何慮。遂通而順應之。故曰奉天時。言人力一毫不與也。
劉三五陽洞語曰。水之激。失水之眞矣。情之激。失情之眞矣。君子之情不激也。故不激其言。
徐存齋階論學書曰。人未飮酒時。事事淸楚。到醉後事事昏忘。及酒醒後。照舊淸楚。乃知昏忘是酒淸楚是心之本然。人苟不以利欲迷其本心。則於事斷無昏忘之患。克己二字。此醒酒方也。
蔡虛齋淸論文曰。不爲世態酣濡。不受古人繩束。卷舒出沒。如朝霏暮雲。始筆下有自然風味。葢其在萬山中。玩心高明。是以其言論。槪以六經爲吾心註脚。每有引而不發之意。軒然霄漢之上。俯視萬有。無一足嬰其懷者。其省身法云風光月霽其心胸。海濶天高其器宇。鳳獜趾其威儀。玉振金聲。
顧涇陽憲成曰。無聲無臭。吾儒之所謂空也。無善無惡。二氏之所謂空也。名似而實遠矣。是故諱言空者。以似廢眞。混言空者。以似亂眞。
高景逸攀龍曰。政事本於人才。舍人才而言政者必無政。財用本於政事。舍政事而言財者必無財。
呂心吾坤別錄曰。泰山喬嶽之身。海濶天空之腹。和風甘雨之色。日照月臨之目。旋乾轉坤之手。盤石砥柱之足。臨深履薄之心。玉潔氷淸之骨。此男兒八景也。
李退溪飮酒之際。不得聞言語匙著之聲。諸生進前受學。和氣薰然。誨諭諄諄。從頭至尾。洞然無疑晦。
李栗谷曰。非夜眠及疾病。不可偃卧跛欹。晝有睡思。當喚醒此心。十分猛省。眼皮重起。而周步使惺惺。
成牛溪曰。學先收拾身心。保惜精神。專一凝志。使志氣常淸而義理昭著。此孔孟以來第一門。
退溪自少時書字必楷正。雖傳鈔科文雜書。鮮有胡寫。甞與其孫安道書曰。凡事當謹愼。今見汝寄金而精書。大字亂草。愼勿爲麁狂之態。
退溪語及八陣圖曰。此亦格致一端。讀書之暇。可以宄觀。
靜庵曰。學者先務。莫切於義利之辨。私欲之萌。皆出於利。從念頭拔去根本然後。可安於學矣。甞聞許相稠對案兀坐。夜半偸兒入室。公不寐冥然。若泥塑人。盜去。家人覺之恨焉。公曰。賊之有甚於此者。來戰於心。何暇警止外賊乎。先輩克己如此。
古人省文之法。非但從簡。省一字而文反有力則省之。或曰古人語多急。不爾也。古人語質。故有似聲急耳。詩不顯亦世。又亦不夷懌。書雖悔可追。又我生不有命在天。孟子雖褐寬博吾不惴焉。並省一豈字。
坦齋朴公甞論古文之法曰。近日文軆大變。藻繪雕琢。頓無純正之格。非但文力不及。主於粧拙。險詞僻語。恠字異句。刻意搜集。使人開口不得。古文章法。何甞如是也。且氣狀不好處。一切避之。全以頌禱之辭。薈萃成篇。安有波瀾之可觀乎。老泉,柳州文近左氏。文從字順則一也。戰國策,國語諸子文。或蒼健或奇偉。當時必曰時軆。而馬漢史最得文路之正。上下千載。無處不當也。公之此言。深有得於文法。余於親炙時所承聆者也。
正廟朝命曺允亨,黃雲祖。書進獜經如綱目例。梓本行于世。余見成靑城集。曰正廟丁巳。臣緯,臣鍾永。俱以布衣。與臣大中。猥叨春秋援綱目例。大書經文。小書左氏傳文之命。閱月編摩。士林榮之。此三本未見付梓。
古者䟽本。只言其事。因而成章矣。皇明以來。王錫爵,葉向高諸人。最稱精篤。後風習漸變。擧以蔓衍之詞。專事餙讓。其告君之辭。不當如是也。我東則䟽槩之規。亦失古意。昔則數行爲之。不見原本而知爲某事。挽近大槩過爲草率。未知以何事治其䟽。惟大臣箚槩。自前簡要也。至於苫凷之䟽。古則堂上官亦爲之。正廟以無防限。定以二品。近日遵行也。
唐制。臣下奏事。非表非狀。謂之牓子。亦稱錄子。今謂之箚子。我國䟽箚。卽古之表狀也。草記古之牓子,錄子也。皇明有揭。淸國有奏記。而一名摺子也。
唐韋陟作花押。謂之五雲朶。或稱押縫。或稱押尾。
歐陽子曰。司馬之法。本之禮讓。後世莫行焉。惟孫武之書。法術大詳。考今之列。非特四種。所謂四種。卽權謀形勢陰陽技巧。析而爲四。由是兵家之文。旣載列矣。是乃廬陵習兵之論也。以余所見。武經七書尙矣。古有百將傳。每篇記各人戰勝之策與事。而畧具斷語也。宣廟朝命李公時發較正之。令訓局鋟於梓。此書最爲兵家妙諦。而惜其所傳無多。至於坐作進退屯兵行陣之法。戚氏紀効書。起於禦倭略而爲兵學指南。憲廟最爲精通。有非諸將所可及。此天縱之聖也。
六鞱文武龍豹虎犬。三畧上中下。宋元豊中。合孫子十三篇,吳子六篇,尉繚子二十四篇,司馬兵法,李衛公問對。名爲武經七書。
世祖朝。梁誠之奏言。高麗肅宗始藏經籍。其所印圖書之文二。其一曰高麗國十四葉御藏書。其一曰高麗國御藏書。至今三百六十三年。印文如昨。今內藏萬卷書。多其時所藏。乞令今藏書後面圖書。稱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以眞字書之。前面圖書。稱朝鮮國御藏書。以篆字書之。按高麗屢經兵亂。能存近萬卷書。我世祖以後開刊之書。亦復不小。而見存者小。此何故焉。蓄書之家小。毁書之人多故也。宜自朝家設禁。無敢以冊紙爲閑雜之用可也。
我國文獻。非不具備。而擧經灰燼。餘存無多。然惟政院日記。自天啓以後至于今者。合爲三千六百卷。而中間篇次。亦多經燼。故抄出各司謄錄以充之。是乃英廟朝事也。此外有藥院日記三百餘卷。自仁祖朝以下悉具之。至於備局謄錄。年前經火後。更不繼修。無可觀者。太常有前後諡狀屢百度。又謄書冊子爲四五十卷。而尙今不至間斷。是亦一代文獻之不可泐者也。
聚奎樓上。分貯經史子集。緫合經部一百十二種。史部一百六十六種。子部二百四種。集部三百二十四種。樓下奉御製御筆一百二十帙。璿牒璿譜七十六帙。御定諸書一百三十八帙。及經部一百三種,史部二百八十六種,子部一百五十六種,集部五百四十七種。宙合樓貯七書十四種。隆文樓所貯羣書三百五十一種。隆武樓七百六十七種。東二樓奉御製御筆一百九十三帙。璿牒璿譜五十二帙。御定諸書八十七帙。及唐板經部十五種,史部四十四種,子部三十五種,集部五十七種。常板經部四十一種,史部一百十四種,子部六十六種,集部一百五十二種。其中最多卷者。圖書集成一帙。爲五千二十二卷也。
康煕皇帝命善書朝紳。分寫九經。鏤板傳爲鴻寶。趙心庵使名譯李尙迪購來。李譯廣搜市肆及朝士家無有。臨歸。一人願賣券不帙。而呼價七百銀。李譯以不能携告。心庵嗟歎之曰。七百銀常有。而此書不常有。文人之愛書如此。余於年前。得九經一帙。宣紙漆板。裝潢極鮮。必是中州古家物也。
西堂李公製人墓文屢百度。經山公甞曰。其祀孫玄五爲原判也。我爲道伯。取見其文。乃布帛菽粟之文。而便不新新。束之高閣。及爲文任。做人墓道。復爲卷舒。則凡用筆處。加一分不得。减一分不得。始知其文章之高一等也。余暮景。尤覺公言之得其蔗境也。
墓道之文。過詡則曰誣也。其重如此。經山鄭公凡於文字之役。善於虛受。立改病處。荷居李公成一墓文。請改不許。其規模雖殊。立論處。鄭公亦不許。重其誣而相愛之深也。李公其太。鄭公行乎其所當行。止乎其所不當。
養硯老人。辛卯夏晝寢。夢遊仙扃得句云。綠陰如水鶯聲滑。芳草和煙燕影消。覺來足成一詩。書贈余。尙在篋中。其詩曰。人生何處不無聊。最是難憑夢境遙。仙子過頭靑玉杖。拉余携手畫欄橋。綠陰如水鶯聲滑。芳艸和煙燕影消。短句分明猶在記。香初茶半雨瀟瀟。
李奎報白雲小說。崔致遠入唐登第。有破荒之功。故東方學者皆以爲宗。其詩有崑崙東走五山碧。星宿北流一水黃之句。同年顧雲曰。此句卽一輿地誌。學士朴仁範,參政朴寅亮。亦以詩鳴海內。東方文獻之通中國。自三子始爲。朴參政詩曰。門前客棹洪波急。竹下僧棊白日閒。頗佳。
李益齋爲忠宣器重。從王居上國最久。故得與元四學士遊處。視易聽新。磨礪變化。固已極其正大高明之學。而又奉使川蜀。從王吳會往返萬餘里。閎博絶特之觀。包括無餘。踈蕩其奇氣。斂而東歸。問學之士。仰之如泰山。去其靡陋。稍返爾雅。皆先生之化也。
鄭圃隱先生。非徒理學節義冠一世。文章亦豪放奇雋。梅窓春色早。板屋雨聲多。卽先生一臠也。
一二言詩。孔穎達曰。詩以申志。一字則言蹇而意不會。故詩之見句。少不减二。卽祈父,肇禮之類也。三言金玉詩話。謂起於高貴鄕公。然漢郊祀歌之。練時日,太乙貺,天馬徠等章。已創其軆。四言起於舜典喜起之歌。五言斷以古詩十九首及蘓,李贈答爲始。十九首或稱枚乘所作。六言任昉云始於谷永。然劉勰云六言七言雜出詩騷。又漢孔融所著詩頌碑文,六言策文表檄。其曰六言者。葢卽六言詩也。七言金玉詩話云起於柏梁。八言漢書東方朔傳。有八言七言上下篇。九言摯虞以洞酌篇爲九言。而懷麓堂詩話。又謂起於高貴鄕公。十言十一言。李白杜甫詩皆有之。五七律排。雖創於初唐沈,宋諸人。然六朝已開其端。五言絶句。唐初變六朝子夜軆也。七言絶句。中唐漸甚。然梁簡文夜望單鴈一首。已是七絶云。三五七言。起於李白。秋風淸。秋月明。落葉聚還散。寒鴉棲復驚。相思相見知何日。此日此時難爲情。此其濫觴也。長短詩。如山有榛,隰有苓一章。眞絶調也。至漢而益多。如安世房中歌之類。六句律詩。李白送羽林陶將軍。有六句律。便成一首。拗軆七律。杜少陵集最多。如鄭縣亭子澗之濱。獨立縹緲之飛樓之類。律詩不屬對。唐人律詩。有第三四句有不屬對者。如李白牛渚西江夜。崔灝黃鶴樓詩之類。律詩兼用兩韻。如東坡題南康寺重湖軒詩曰。八月渡重湖。蕭條萬象踈。秋風片帆急。暮靄一山孤。許國心猶在。康時術已虛。岷峨千萬里。投老得歸無之類。廻文詩。世皆以爲始於蘓蕙。然劉勰謂道原爲始。道原不知何時人。疊字詩。如河水洋洋北流活活等句。連用六疊。此爲創軆。聯句自退之斬新開闢。禁軆始於歐陽公。東國但製其軆而不識其源者多。故博考錄之。
集之名。起於東漢。然古所謂集。乃後人聚前人所作而名之。非作者之自稱爲集。葢集與輯同。今人之自成其集非也。所以先輩聚其所作。變其編名。或稱未定稿。良以是也。
昔韓洌上鎭書輯東史。東蹟之見於中州史者。鈔出者也。卷二十。乃外史也。徐楓石授余一帙。甚珍玩。後見警修堂集。此書竟入於中國。是海東繹史也。
拾紙得斗室詩跋語。曰先蒙寵寄瑰章。感情思之繾綣。歎音調之鏗鏘。輒強缶和。切希斤正。詩云千丈閒愁一寸詩。今人心事古人知。林亭獨卧聞蕉夜。郡閣高吟寫竹時。我道妙存無限意。君看能作幾何悲。擬從酒茗消餘日。亦厭徵䲭復乞犧。斗室。
歸鹿相公贈老妓詩曰。功名文武前身事。歌舞繁華一夢間。大笑相看頭似雪。空山斜日水流閒。恰似潯陽江上琵琶詩。門前泠落鞍馬稀。老大嫁作商人婦。吾輩事亦如是。
景蕙女史。善琴棋工詩話。卽故權西漁尙書常愼寵姬也。自哭西漁。流落人間。復爲一武弁所收。然非其志也。近有人誦傳其詩數篇。皆自悼之作。而壺間貯月心俱白。席上停雲眼欲靑一句最佳。余少時遊聽流堂。權宅壁上。題景蕙詠燕子詩。寒便辭人暖便歸。笑他燕子計全非。綠陰如此不留宿。却傍人家門戶飛。此後屢易其門。果詩出於性情也。景蕙本良家女。其父敎之以藝。其畫余得兩幀。用筆設彩。非東人手法也。
灣商金欽之奴。能傳李陶庵竹枝詞全本。江南擧人姓康者。讚歎詞理之工。傷奴之不遇。遂出秘藏董文敏山水以償之。竹枝詞之誦傳天下可知也。原圖倩姜彜五斫拂鉤染之。
劉禮部尙詩曰。虛空無處所。髣髴似琉璃。詩境何人到。禪心又過詩。放翁取詩境字名其室。竹坡詩話。有明上人者。作詩甚艱。求捷法于東坡。東坡作兩偈以與之。其一云字字覔奇險。節節累枝葉。咬嚼三十年。轉相無更涉。其二云衝口出常言。法度法前軌。人言非妙處。妙處在于是。始知詩境非力所可致。在於澹漠虛室處耳。三十年前。見詩境圖。但一儒一釋相對像而已。
余讀沈亞之屈原外傳。喜其逸事之幽恠也。辭致之冷韻也。寄托之哀艶也。依其叙次。追而韻之。若其女嬃搗衣石。非原之事也。
隋鄭譯拜爵沛國公。位上柱國。高熲爲制。戲曰筆乾。答曰出典方岳。杖策言歸。不得一文。何以潤筆。此潤筆二字所由昉也。歷代盛行此事。東國牧隱李公製文得厚資。建一僧庵於龍門山巓。爲願堂。名曰潤筆菴。余往年作彌智之行。見菴子尙存。
古人謂金石文字曰吉金貞石。貞珉字見翁覃溪集中。湘山野錄。江南徐騎省善小篆。映日視之。畫之中心有一縷。葉志詵見余隷曰。一筆揮洒。無半點塗鴉者。此固勝人處。
秋史在禁直。自蒲節覆校復初齋集。至荷花生日畢。只選七律百首。紫霞各軆俱選。屢易乃止。二本行于世。
西堂李公儲書甚多。至十二間。比李氏萬卷樓倍之。公沒後。一夜間火。只燒書樓而已。平明乃覺。其造化固難測。而人謂佛經積置於三間。所以此爲魔祟云。此等書之多藏。可以爲戒。公所得書。皆從禮幣中出也。
書帙每以十餘卷。付木板於四隅。緊緊紐結。投之水中。年久不濡。牛溪先生宅書籍。以是免亂於壬丙之間。往往見首尾水痕者古蹟也。
元陵輓辭。閭閻遺子女。城闕若平生。李參奉代人作也。傳爲名句。余見東溟集。詠張玉城舊宅詩云。英雄已塵土。門舘若平生。兩詩無優劣。不可曰靑出於藍耳。
包鳴甫云淳化帖蒼頡字。尙帶卦軆。此言得字之本。然書法皆源於五行。五行皆演於八卦。何莫非卦軆。而特以生畫。如八卦之始畫也。
書斷云秦下邽人程邈字元岑。爲縣吏。以罪下雲陽獄。精思十年。益小篆方圓而得隷書三千字奏之。始皇善之。用爲御史。時以篆字難成。乃用隷字。以爲隷人佐書。務趨便捷。故曰隷書。是以古來皆以隷書爲邈所作。然封氏聞見記。謂酈道元注水經云臨淄人。發古冢得銅棺。前和外隱起爲隷字。言齊太公六代孫胡公之棺。惟三字是故篆。餘同今書。則知隷書非始於秦也。封氏又謂此書在春秋之前已有之。但諸國或用或不用。程邈觀其省易。有便於時。故修改而獻。非創造也。然則隷書非起於邈矣。又按許氏說文。有序云秦李斯省改史籀大篆。作小篆。又有隷書以趨約易云云。似隷書亦李斯所作。其下文又謂新莾改定六書。一古文。二奇字。其三曰篆書卽小篆。秦始皇使下邽人程邈所作也。四佐書。卽秦隷書云云。是許氏於隷書。不言程邈所作。而反以小篆爲邈作。書軆之變。自古不一。東國尤無考据之學。以程邈知之。惟尹五耘詳辨之。
蘭亭帖有二本。定武肥本。潁井瘦本。秋史肥本跋。有抱殘守關之語。肥瘦二本。轉覺瘦勝於肥耳。按蘭亭首稱定武本。宋刻亦自分早晩。前有亭列幽盛遊古不羣殊九字而剜。後有湍帶右流天五字而損。書家考證。亦云難矣。千百本無一損。湍天師菴本再出土。是亦定武之榻。栞是石出自天師菴土中。明初徐中山取置國學。不知何時復委諸土中。萬曆復出。今在國學。故又稱國學本也。國學本傳爲薛刻。而所之旣倦之之字。終期於盡之盡字。死生亦大之亦字。妄作之作字。凡此四處皆改易。必非薛道祖所刻。百年前已不肥。况今瘦弱如一髮乎。薛刻壓在快雪堂。戲鴻堂帖。或云昇山落木本。或云王姬下嫁奩。余曾得二本。校正於古東尙書庋。恨不得較看於唐詩姚察徐僧之搨也。考證言暢叙之叙。又邊是隷畫。
南唐後主李煜書評曰。善法者各得右軍之一軆。若虞世南得其美韻而失其俊邁。歐陽詢得其力而失其溫秀。褚遂良得其意而失其變化。薛稷得其淸而失於拗窘。顔眞卿得其筋而失於粗魯。柳公權得其骨而失於生擴。徐浩得其肉而失於俗。李邕得其氣而失於軆。張旭得其法而失於狂。獻之俱得之而失於騖急。無蘊藉態度。此皆通論也。余有諸人帖。持評較看。一無差誤。
近有一種風氣論書。以昌黎詩義之俗書超姿媚一句。藉爲口實。毁右軍父子。而自虞褚以至米趙文董。一切歸之俗書。惟一歐率更推以爲漢隷金石刻之嫡傳。葢書家有南北之異。此其北派之論也。吾未知其爲公耳。
淳化帖有兩本。月半黃甘二帖。一是王著摹。一是肅藩本也。舊在海居。肅本則線來絲去。饒有活機。王著摹凍蠅痴蚓。都無血氣。卽此可以審正優劣。况贗王著。曷若眞肅藩耶。
趙文敏小楷赤壁賦字。僅如蠅頭。系以長公小像。右顴有痣。與公詩集中所傳摸松雪本又異也。舊吳彭年言兩見文敏作東坡像。一書定惠院海棠詩於上云。則此又在赤壁本之外矣。尾有甲子十二月十九日蘓齋題。嵩陽帖後時。有幻脫蘓齋拜像詩七字。則公之眞像。不在顴痣之有無也。是日拜眞像詩。又有昔也蘭嵎生今之朱野雲之句。則蘓齋拜像之本。乃是野雲之筆。而亦出於趙本也。可以審矣。覃溪摸東坡笠屐圖。臘十九東坡生朝。以恠石供紫霞。又移摸在余書樓。原本流落東國。余一見於洪芍玉書齋。今不知下落。而上有翁詩語。絶寶也。石刻本亦在余庋。東坡自贊曰。心是已灰之木。身如不繫之舟。問我平生功業。黃州儋州惠州。董其昌書也。
宣和間。禁蘓氏文字。學者私記其書曰。毗陵先生中州好東國者。目謂之學朝鮮。什物書畫。皆東人作。翁氏稱師於蘓氏。而紫霞秋史稱以蘓齋弟子。凡學唐者。若中州之學朝鮮。毗陵之學。遠曁東方也。
新羅文武王墓在鷄林雩壇之傍。初王困於倭。臨薨詔曰。葬我於海中。當化爲龍以距倭。海中有大石如小島。葬於石間未幾。風雷大作。有黃龍見於石上。名其臺曰利見。遂以爲禱雨所。事在三國史。後耕田得古碑。卽王之碑。而大舍臣韓訥儒所書也。其文剝落無序。而有曰赤烏呈災。黃熊表異。俄隨風燭。貴道賤身。葬以積薪。碎骨鯨津等句。明是火化水葬之語。不可謂國史之誣也。
羅太宗陵無象設。前有碑龜趺高丈餘。失其身。上安龍頭夭矯蟠拏。刻鏤精巧。面有方篆陽文曰太宗武烈大王之碑。王於三韓。有萬歲之功。樹木不敢剪伐。况石乎。必是蠻人竊去也。關東靈鳳山。有高麗太祖御製集唐文皇書碑。壬癸之亂。蠻人載之以東。在道中折。遂舁其半而去。尙留原州。夫距萊海千里尙然。况鷄林數百里之近乎。昌林寺碑金生書。趙子昂盛稱雖唐人名刻。無以過之。名於中國者。安知不爲蠻人所竊乎。
眞興王北巡碑。過鐵嶺至沃沮定界也。穆陵朝。申將軍砬印來傳世。洪耳溪每托北去者覔之。庚戌。兪通判漢敦書云咸甲之間。有黃草嶺。其上有顚仆古碑。上下皆折。乃眞興王古迹也。印送一本。尹梣溪移置咸營庫中。
麟角寺碑在義興。洪耳溪窮尋佛殿樓底。斷石十數塊。其文微有麟角二字。集右軍書者也。按碑高麗默軒閔漬撰僧普覺碑銘。其法如唐僧懷仁之集三藏序也。
鍪藏寺碑。云是金生書。古之藏兵處也。洪耳溪見磨豆磑脉理異凡石。竪起視其腹。乃古碑折其半者也。命工搨來。果是鍪碑。而考其文。卽新羅翰林金陸珍書。見其姓誤稱也。兪文翼聞之喜曰。老夫平生聚金石錄數百卷。獨未得是碑也。
金角干庾信墓碑。在慶州西十里。洪耳溪祭其墓。覓碑不得。後二十年。李公書九。視金石帖中。有金角干碑數幅。卞之無疑。而蓋於島夷之亂。碑失所在。是本卽亂前舊搨也。似率更之法。東方古蹟。莫先於此。如在中國。當爲岣嶁石皷之亞也。
白月碑。新羅朗空國師棲雲寺塔銘也。侍郞崔仁滚편001撰。端目禪師集金生字。以周世宗元年甲寅立。石在奉化縣太子山。山深寺廢。失其所在。尙古子金光遂守鄰縣。搜得於田間。運置官廨。印行于世。後洪耳溪如榮川訪之。棄在廢園中。亟使舁致。托主人作木匣。俾防風雨。而明初詔使有求拓者坌集。一武倅不堪其苦。以爲馬棧而辱之。今所行殘字皆馬迹。按舊說。初在奉化。今在榮川。似自奉而至榮也。余有舊拓本。申宛丘深得其法。近日鄭美堂倣而行之。
平濟塔在白馬江上。唐高宗顯慶五年。遣蘓定方領舟師。與新羅將金庾信破百濟。虜其王義慈。革其國。置熊州都督府。刻石紀功。撰者陵州長史賀遂亮。書者洛州河南權懷素。筆法蒼勁。在顔,柳之前。而可稱東方古蹟之首矣。
東坡詩話云有道士自稱回山人。過沈東老飮酒。用石榴皮。寫絶句壁上曰。西隣已富憂不足。東老雖貧樂有餘。白酒釀來緣好客。黃金散盡爲收書。書訖。出門渡橋。遂不知所之。或曰此呂洞賓也。夫神仙之說。本荒唐矣。彼純陽眞仙去耶。胡爲來人間留筆蹟也。是誠未可信。然坡翁旣言親聞其事。則又不可謂誣也。觀其字畫。飄搖如斷雲空花。若出神化。决非烟火中物也。近日此本盛行于世。公子王孫之別墅。不刻揭此書則恥之。不知出自洪耳溪得於古紙涴弊處也。
癸卯春。洪耳溪自燕歸。歷孤竹城。謁二子像於灤河。遇秀才李美字純之者。與語孤竹古蹟。純之曰。此中有夷齊讀書之墟。水石甚奇。洪公呀然笑曰。夷齊之世邈矣。今何以徵焉。純之曰。距此百餘里。有山曰書院山。有寺曰雲居寺。昌黎韓公斸崖石大書曰夷齊讀書處。夫豈無稽而韓公書之乎。洪公猶未之信。翌年。純之搨送夷齊讀書處五大字及嘉靖刻古蹟碑一本。下附其遊山記。筆力雄邁。字形奇古。不似宋以後筆。殆非凡衆人跡。昌黎旣孤竹故境。而碑言唐太和年建寺。正當韓公之世。則其稱韓書。亦不爲無據矣。
東方之文。眉叟最古。往往類秦碑漢鼎。筆則效周太史而自創新軆。杈枒詰屈。如千歲枯藤。叟甞爲三陟守。東臨滄海。立石於日毋之衝。手書四言詩以誓水。文險而字奇。若出神林鬼窟。世人傳寶之。一日樊巖蔡公。示耳溪以橫軸一帖曰。此眉叟手書人墓表草稿也。洪公曰。此文中有數行失格。豈眉翁未定本耶。樊巖愕然哂曰。眉翁一字一法。况墓石之刻乎。公言未必然矣。已而樊巖取其軸盡卷。忽有小紙揷其尾。熟視良久。拍案叫曰。何其神耶。葢手書數行於一紙。云自某至某當改之。一如洪公所指。洪公可謂眞知眉翁者矣。今觀東海碑。其辭浩淼如洪濤。其聲鏜鎝如老浪。若有海恠波靈。恍惚於筆端。洪公之題是碑。固有得矣。
尹三山師國書。深得率更軆。眞鐵畫也。竹石徐公時任文衡。而書人金石。請定於三山。則受置篋中。及其來覔也。公投之曰。不堪書戶牌之手。有何碑碣之可論哉。竹石慚而歸。宣言於朝曰。尹某以若筆法。尙未書公家碑版。大爲欠事。吾今撰遅遅峴碑文。書寫官殊以尹某差下好矣。朝廷從其言。竹石笑曰。三山雖斥吾書法。猶爲吾之寫手。先輩之於文筆。其務勝如是也。
尹三山刻先山碑。誤落一字。不得已前面陷之。若風字硯㨾中刻大字。甚有雅致。後人爭相仿之。全石變其制。老鐫工朴枝春言於余如是。
金竹泉鎭圭篆隷。多見於樓觀。松京南大門懸板三大篆。無非遒健。非今人之所作。而甞過恩津。江鏡倉三字。最爲古雅。似是此筆也。
金秋史求見余所寫隷書曰。是乃靈光殿甓。五鳳年字法也。人皆習見後漢隷法。得西京軆者甚罕。惟魯恭王甓字。與靈光甓字相爲表裡。而所傳者只此。恨不發秘。使橘山盡見也。後得恭王甓。其軆稍方而別無差等也。
趙子昂甞言唐人之書。自歐陽率更。始作間架。尙筋骨。至顔,柳而嚴緊勁悍。一變永和風韻。惟李北海不失晉人之軌。當爲書家正宗。按娑羅樹碑。遒逸踈宕。極有太令之風。始信子昂之論爲不易。而吳興書門路之正。葢有所自矣。杜工部哀北海詩云風流散金石。追琢山岳銳。其文章筆翰。見重於當世如此。東人筆得北海法者。惟洪耳溪。華士戴衢亨之言也。洪公書遍在八路名勝。成都降仙樓題海東第一樓觀六字。最豪健也。
北漢南有僧伽寺。其上峯曰碑峰。一柱兀然如人立。俗傳麗僧道詵碑。今沒字云。歲丙子。雲石趙公。與秋史共尋。碑有殘字。實眞興王碑也。遂命工搨之。細加審定。除全缺。不可強解。點畫可辨。確然無疑者。凡九十有二字。如眞興王三字,巡狩二字,南川二字。皆實事可證。而與史文經緯者也。
天際烏雲帖云僕在錢塘。一日謁陳述古。邀余飮堂前小閤中。壁上小書一絶。君謨眞迹也。約綽新嬌生眼底。侵尋舊事上眉尖。問君別後愁多少。得似春潮夜夜添。又有人和云長垂玉筋殘粧臉。肯與金釵露指尖。萬斛閒愁何日晝。一分眞態更難添。二詩皆可觀。後詩不知誰作也。査初白蘓詩補註以爲過濰州驛。見蔡君謨題詩壁上云。余曾見唐人筆記。抄而錄之。
牛溪先生記鄭學官希繩言曰。五月三日。鄭君訪我永柔西谷山家。言我家臧獲在谷山西面頤寧坊鳥音洞。夙聞深山絶境。可以避世。亂生之初。自京城奉慈親與兄弟妻拏往赴之。至則奴迎拜。掃正堂以居之。凡留三箇月。供奉無倦色。觀其地在深山長谷絶遠之域。但有奴家三五舍。覆以板子。四山高峻。穹林蔽日。石泉甘冽。蔬菜甚饒。焚山種粟。豆菽富足。閱月經時。外人不至。世間音信聲響斷絶。眞所謂人間無路訪安危者也。倭賊所至。四面皆至數百里外。雖擧國鼎沸。兵燹滔天。閉戶安眠。不知有何事也。然地高而寒。洞僻而深。君子居之。亦近於同羣鳥獸。正宜今日避亂之所。而商嶺王官不厭其深者也。谷山郡西三十里。有村曰明媚。山川灑落。洞府寬閒。大溪橫流其中。土沃而人稀。有民亦七家。當卜居其地。有兵火則入鳥音避之。可以全身遠害於斯世也。余聞其言。不覺慨然。書于此而時閱之。以寓遐思焉。鄭君名象武。字希繩。能文善書。貌偉而志大。决非俗流之趨利者。余深喜之。而不能欵晤以扣其學也。癸巳五月十三日。書于遂安之民舍。渾志此帖。少時曾一寓目於養硯山房。
翁文達石墨書樓。有名於中州。昔覃溪老人有歐陽率更化度寺邕禪師塔銘。卽洛陽范氏書樓中石本。此爲歐書之天下第一烜爀迹也。因以石墨爲書樓之名。而繪范氏書樓圖。圖成又五年。始得保安寺街小樓三楹而居之。又刻一印。此爲石墨書樓印之本末也。
養硯老人語余曰。吾入銀臺。自視黃面老子。不堪作顧影少年態。猶幸與秋史內翰興會日繁。秋史每有名茶新瀹。命侍童挈一甌至。一日送茶。少焉。秋史亦來袖示漱金小箋。上有詩。吾曰。君詩思敏妙。在一煎茶頃。秋史笑曰。果在扇罏間得爾。又從秋史見近刻劉松嵐詩集卷首有覃序者。仍與商略詩。求杜法之旨。間携致敝藏快雪堂帖,覃書對子一聯,孤雲處士王振鵬苕溪高隱圖一軸。右三種書畫。對榻審定。以證金門墨緣。秋史又爲吾出佳紙丈餘。濃堆墨作碧蘆舫隷扁。傑然可畏。院中老吏見吾兩人職務旁午中翰墨商訂。瞠乎以爲初見。後余直秘閣。因公上銀臺。李石農鍾愚藉五色泠金紙。揮灑楷行。余健步玩之。斗想老人之言也。
北海書李元秀碑。舊拓殘額。一橫一圓。礎四。又半礎一。凡五石三百四十七字。嘉慶乙丑夏。北乎翁方綱手摸。毗陵胡遜校勒此本。又北海書大照禪師碑。康煕乙亥。懋勤殿摹勒上石。古東尙書所藏。
趙文敏書太湖石贊洗馬圖詩。董玄宰跋曰。此趙文敏學顔公。送蔡明遠叙。兼米海岳用筆。可寶也。於七觀帖。表文淸稱倣枚生七發。作七觀。王眉菴行儉漢詔眞蹟帖跋云子昂小楷。尤入妙品。初師姜夔。次學褚登善,鍾紹京。卒入二王之室。白兎鶻賦字軆。與公他書逈異。具眼者當辨之。公賦序云白兎鶻翎翮皓潔。白雪同皎。凡三籠而毛羽變赤。光彩豔奕。勇鷙加於疇昔。虞伯生云公書赤壁賦時。年三十八。泰不華云白鶴賦。是公晩年筆中最上乘。又書千字文。紫霞題其後曰第一。公書烜爀蹟。無如赤壁與千文。赤壁工摹猶可及。千文渾脫化。春雲諸帖。余皆寓目。而敝庋有赤壁賦一帖。千字文未及購。甚恨。
樂志論,天馬賦帖。趙仲光奕書也。帖尾有王文成守仁跋云。趙文敏以宋宗室王孫。屈身異姓。雖書法浸淫魏晉。而氣骨不無少减。仲光志趣高尙。終于隱遯。有古逸民之風焉。宜其書別具瀟灑出塵之槪。觀者但因爲淵源文敏。似非定評。余有慨乎文成之因一書跋。軒輕人父子之太刻深也。况可發之於其子書跋耶。兩帖皆在余庋。而天馬帖尤不俗。
魏國管夫人帖。有竹環居不暫懨。長年吟弄似傷廉。可憐萬片鸞翎濕。向晩瀟瀟雨一簾。開枝當路色蒼茫。新竹過於舊竹長。更待春風錦綳脫。雙雙幺鳳舞朝陽。萬卷詩書壓象牀。不知身與世相忘。更憐家有千竿竹。正可開軒納晩凉。道昇。有趙管二字。安家書。和南拜覆本師中峯大和尙。女弟子魏國夫人管氏道昇謹封。道昇和南拜覆本師中峰大和尙法座前。承賜書。如見頂相。且知道軆安穩。不勝慰喜。又蒙頒賜香珠領次。尤增感佩。戊午十月十一日。女弟道昇和南拜覆。鈐以魏國夫人趙管六字印。
趙文敏手蹟帖自跋云道士祝丹陽。示余天冠山圖。求賦詩。將刻石山中。爲作世廿八首。延祐二年十月廿四日。松雪道人陜刻本跋云余作遊天冠山。見佳境興發。偶咏鄙句。付主院者。越四年。楚成巨冊。索重書。故爾走筆。子昂。
紫霞手選七律彀。始以杜文貞,白文公,李義山,蘓文忠,陸釰南,元遺山,虞文靖,錢虞山,王文簡,翁北乎十家。質之於秋史。秋史曰。虞山則濫矣。杜樊川,黃文節,朱竹坨。皆不可闕。公於詩道。篤信秋史。故再以十二家釐正。
古東李公翊會所藏絳帖十二卷。淳化五年歲在甲午春王正月。潘師朝奉聖旨。摸勒上石其最者。曰秦巫咸詛楚文。曰漢議郞蔡邕隷。其文有定策帷幙有安社稷之勳十字。曰晉右將軍蘭亭二本頭眩方帖。曰黃庭經後見趙文敏黃素黃庭字。無淡古虛和之味。曰王獻之洛初賦。較看長白卞氏式古堂殘本。洛初賦有董跋。此本頗覺肥失眞。曰大令擘窠行書。桓山碑殘字跋云桓山頌獻之銘六字。右王大令殘碑六字。梁天福元年。雒陽修城。得之土中。考其事。或是永和十二年秋。桓溫破姚襄事。此碑碎裂不全。止存此六字耳。而大令之名。巋然獨完。以故人始寶之。不爾。亦同瓦礫矣。噫。非神物護持。曷至是耶。余恐其久而失傳。因壽之於石。以公諸同好者。駙馬都尉潘師朝記。曰唐長史張旭草書。曰率更令歐陽詢筆訣。按副車帖最多傳僞。軒帖考引曺士冕語。二十卷訛作十二。遂致爲作絳帖者。稱十二卷。此帖卷卷。有頂墨林印。余少時蔡隷十字。以竹片摹刻。流入大內。今不知下落。古東稱余隷爲正道。每受去典重文字。
嵩陽帖蔡君謨眞蹟。在陳述古杭州官舍。後人呼爲守居官閣。養硯老人手臨之。題重摹紙閣十六扇。又一淸風五百間。世謂坡書。學李北海,徐季海諸法。皆源於此。臨本今不知在何處。
隨淸娛帖。褚登善書汝南公主墓誌云公主隴西狄道人。鄭夾漈通志金石略曰。虞世南所書狄道人墓誌。隨淸娛。漢司馬遷之妾也。
覃溪見安平大君絹本眞蹟曰。此能以松雪手腕。運聖敎序筆意者。眞確論也。
淸平山古檆下廢池邊。掘得一碑。乃益齋李先生所撰施藏經碑也。此碑與文殊院碑。均爲山中之文獻。主僧松坡長老移置寺簷下。以庇風雨。石斷裂。大小凡五段。碑文曰爲皇太子皇子祈福。各取其誕辰。飯僧閱經歲以爲凡。麗史云每於誕辰飯僧。歲以爲常。第二行。推誠亮節功臣重大匡金海君臣李。此以下泐損。按先生始封金海君。後改封鷄林府院君。按所謂僉議政承臣怡等。卽匡定公金怡也。本集與圖經。皆作臣恰。考之麗史。更無以恰爲名而官政承者。此碑臣怡之爲匡定無疑也。又按匡定以僉議中贊。卒於泰定四年五月。則立碑時尙無恙而居位也。匡定少時宿華藏寺。夢王御殿唱一句云靑雲紫氣知仙閣。匡定賡云綠髮淸談是貴人。以是卜其貴顯。
覃溪復初齋集。有曰江秋史得趙文敏墨迹云。靑衫白髮老參軍。旋糶黃粱買酒尊。但得有錢留客醉。也勝騎馬傍人門。余最愛此詩。頻頻書之。以自適意耳。子昂。凡四十四字。半爲損壞。不復成字。余爲審擇存廿五字。題曰完璧帖而歸之。因題其後曰。完璧歸于趙。生花夢自江。千秋吟買酒。幾夕剔寒缸。曲折圖移繡。橫斜搨就窓。似聞苕霅上。搖膝韻吳艭。前此姜豹庵尙書影搨趙墨一本。卽此帖也。無余最愛以下十四字。存只三十字。摹自聽松先生鑒藏本也。庚午。紫霞得此本。贈金秋史進士。据此知趙文敏頻書此詩。留在人間。不止數本。覃溪本。比聽松本。但多十四字。不知孰爲眞迹也。完璧帖存只廿五字。則又不及聽松本之完矣。此書之一歸江秋史。一歸金秋史。洵一段奇事也。金秋史和紫霞曰。紅葉樓中偈。心心月印江。朱門誰繫馬。綠酒自斟缸。淸聽松鳴屋。留陰竹補窓。天官徵玉尺。共漽鷗波艭。註。紅葉樓豹翁居也。竹窓用蘓齋移竹故實也。
龍山挹淸樓。有松下翁第一江山扁。又有控海門牓。門牓尤軒翥可喜。第一江山。本吳雲壑書。刻在金山。今練光亭扁。卽翻摹爾。世人不知。誤以朱書稱之。江字白下書。按東國文獻草創。事無記傳處。只從口吻相道。安得不以訛傳訛乎。余初認以朱書。始考得吳書。然未可定價。願就質焉。
眉叟許公古篆入神。羅大將洞最高舍。有雲岡二字刻石。在於塢上。乃許公篆畫法。無烟火氣。此舍名拱北軒。白下舊宅而題之者也。余王考少時居此。世傳其房堗。借白下神手。于今百年。無一石嵌陷。薪貴易溫。
華人贈余一帖。文衡山遺墨。而蠅頭細字。盡是奏御文字日錄者也。似是草藁之潢冊。復粧爲帖。下有圖章數十諸人之名。而最大者成親王也。諸相公會時。以此視之。皆艶羡之。
洪文獻一夕夢。訪圓嶠居士。皓髮癯容。如畫中僊。瞪目而視曰。君將欲掩我名耶。公曰。夫名者公器。奪不可得。讓亦不可得。惟視其實之如何。吾何敢掩公名耶。居士笑曰誠然。君之書有古意而法不足。吾書則法有餘而少風韻。仍出示數帖。果渾成無生割之病。又示古法帖。多韋仲將筆。見座右有文石如石鍾。遍刻篆籕文。奇古異常。因謂曰。吾甞欲作石鼎。書刻昌黎詩未果。君可爲之否。遂揖而別。後琢玉作鼎。以曺稚行隷字。書石鼎聯句。此鼎尙在冠巖尙書宅中。
自庵金先生名練。道學節行。爲己卯士類所尊。文章翰墨。乃其餘事。而筆法尤高。所書朝遊北海暮蒼梧一絶大草。雄偉奇崫。有大令筆力。先生流竄嶺海。年壽不永。故書跡傳于世甚少。金公思祐宰連山。獲一盜胠其槖。有一書帖。卽自庵書也。寫其詩三十餘篇。鋒穎遒勁。韻致蕭散。不規規於古人之法。如山陰脩竹。解苞出土。挺然有干雲之勢。不滅於兵燹。而又不毁於盜賦。殆鬼神之默護也。尹白下甞見而慕之。欲仿其法。把筆良久。憮然而罷。
古之尺牘。必稱蘓黃。而東國尹白下集大成。近古金秋史語。片片揀金。愈出愈新。世謂筆與畫皆不及尺牘之奇也。趙心庵善於短札。俚語混用。無斧痕。其辭節節踈雅。非庸才可跂也。
古今書畫。水火之厄同也。江州蘓州書畫之蓄。甲於天下。丙丁之間。洪秀泉亂。大江以南。成瓦礫之塲。蘓則火。江則水。二州之厄。史牒所無。而書畫之種滅矣。萬里外人。想像痛惜。甚可笑。而念虹月之晦。天涯亦比隣也。往年。葉笙林以余隷一擔。分庋江南諸人。笙林蘓州人也。多藏秦漢古蹟於八萬卷樓。未免此日之禍。奚暇論一粟之於滄海也。
姜紹書韻。石齋筆談。有石文太極之說。陳定九荔枝譜。荔枝産泉郡者曰太極圖。形圖而扁半紅半綠。如太極圖狀。余見氷文成圖。命曰氷太極圖。
顧寧人日知錄。書毛延壽事。引西京雜記以證之。據此則漢法。畫工圖後宮以進。君王案圖而召幸之。圖昭君。非匈奴求美人之時也。當時畫工有毛延壽,劉白,龔寬,陳敞,樊育,陽望等人。則奚但指毛延壽一人。而且受賂得罪。不獨昭君以也。詩人謂受賂在匈奴求美人時。失之太甚。而顧氏幽剔西京逸史。彰其圖形之誤。已在匈奴之前。二說並行。
董帖洛神賦。錦波大師舊藏本也。周越跋云頭尾外得一十三行。趙跋云先得九行。復得四行。則自前未有十三行定名也。宣和書譜。亦僅稱洛神賦不完本耳。香光豈得臨足本乎。抑以自意第錄其全文也。余少時。有人賣洛神圖,九歌圖。皆李龍眠作也。九歌帖尙在余。洛神圖未及收。而被人先着去。可恨。
王文成壽畫,讀書十三則。命題布置。另出機杼。所謂士氣作家俱備者。意其門人之筆。而姓名則忘之。此爲鎭州李氏萬卷樓揷架中物。不可再見也。余今年六十。髣想此畫。倩手寫之而自壽焉。其起居坐卧行住眠食拱立跪倚踞爲目。卽余所自刱而備述居家雜儀。無一言虛設也。後之鑒者。尙知余暮年閒適之趣也。
李命基,金弘道,金健鍾,浿人李八龍。以余所見。其法最竗。而燕人汪載靑畫覃溪像。用東國衣冠。而其貌仿彿。制度不嫺。昔劉石齡題漁洋禪悅圖詩。自註云聞諸錢亮工說。曾見東坡像極相似。果古人勝於今人也。
寧遠伯祀孫居江華。甲午。黃山金公逌根奉來其畫像。諸公瞻拜。更爲移摸。還奉本家。服色眞紅袍白玉帶烏帽。如新恩所着。幞頭近宋制。厥相白晢媚嫵。非凡相也。
英宗癸丑暮春。曺松下俱白谷尙書而下四十三人。咸集南營水閣。爲詠觴會。有修稧帖。哲宗癸亥。余與諸公修續稧。作屛藏于雙檜亭。
壺山掛一幅書。龍蛇流動。其書曰義之妙筆在鵝羣。欵爲周萬淸也。余謁朴公。先爲偸目。公笑曰。不見人。先見書可乎。我有此書二本。藏之久矣。一則爲秋史所奪。其一歸之於君。荷漪任公。詑以曾繼志畫蓮。一紙寫二莖可丈餘。神韻逼眞。題曰千觔筆力。十丈蓮花。爲君寫照。蓮耶仙耶。二閤所愛書與畫。作兩扇屛。供余嗜疴之癖也。
金陵八子。有高岑,龔賢,樊圻,鄒喆,吳宏,葉欣,胡造,謝蓀。此圖高岑作也。曾見內府收藏。捴多高子嵒標題。半是啓禎年。孔東塘贈樊圻者也。高岑字蔚生。未見其跡。有子蔭字嘉樹世業。名江淮間。圖三潭月印。
余舊蓄趙脩祿駉馬圖。趙宋崇寧人也。此圖經山公借余改粧。往來珍玩。後入大內。更不知所從。題曰駉駉牡馬馬斯臧。魯野春深萬物康。楊柳桃花皆可畫。畫圖不得頌聲洋。
衡山自題曰。推琴一笑四山空。百道飛泉萬壑風。何用氷絃薦神調。宮聲遙在水聲中。徵明二印。曰徵仲父印。曰衡山印。此帖坦齋朴公得於燕京。余亦屢見。今未知何在。
益齋先生奉使入蜀。歷覽江南也。圖寫諸勝。天下絶寶也。草坪李氏家。傳來五百年。不知所終。近見一族人家。塗之以壁。余言其來歷。始知爲寶。又出三幅。一垈山圖。一嵩山圖。一金陵圖。在壁上者霉不可辨。囑改裝分庋。牢不可回。可惜神物堙沒於煙煤中也。本八幅。秋史曾一移摹。未知尙在其書樓也。
張茶農題五州煙雨圖後云五州爲南徐鎭山。故米海岳父子多愛寫之。本朝王石谷,査梅壑,▼(竹/亘)江上三賢。曾合作一本。題曰五州烟雨。葢倣米也。茶農蒼雪子張深。余見此圖全用米點。大小霞善於其法。一本尙在余林下壁上。
甞以爲寫生難於山水。卽工染脂粉。尙患笨伯。况可議率爾命筆。肖奪天工耶。文字離於筆墨。而又到筆墨所未到之地。毛詩尙矣。爾雅之分門別類。離騷之標擧寄托。直與造物者爭工。吟釋之頃。芬芳溢簡。形色湧紙。自後古今名雋七言五字。往往有生香活色。猝然遇之。如見其眞。惟在人情思熟參。文工繪事。了非二義。我東畫學。但求之於畫。故去畫日遠。且士大夫不知詩書畫髓。同一法乳。繪素一事。委之院人而恥言之。卽此文字鹵莾。可以反隅。山水名家。或有家以稱說者。至於寫生。寂然無聞。卽有之。若出於院軆工細。必入於水墨。劻勷四百年間。惟一姜豹菴尙書超超玄著。余童子時。靑藍授受。但在竹石一派。至今懊恨。去年秋。余由少司冦。解官閑居。明窓凈几。握管從事。特愛豹翁。臨十竹齋。拒霜烟梅二頁。試一擬之。十脂拂拂。如有小悟。遂及於翁所未及臨者。凡得雜花菓蘭竹石二十四頁。頗宄寫生之法。首重在筆。次用墨。丹黃其末也。若其渲染秘妙。又全在於約畧淡遠間。至墨備五色。超脫象外。非具文心慧業者。未易告以金針矣。兒子準衍幼好弄翰。時窺一斑。爲書此數語卷尾以付之。奚止寫生指南。可作詩文津逮。小子知之。癸未春正月晦日。碧蘆舫書。
金剛經塔。七層俱有簷。欄檻瓦當。皆以經字寫成。此塔相傳是文殊大士所製。梵僧自天竺携來。在宋始勒于石。今得孫蓮隱所弆。明萬曆間。陸宮保樹聲,陳徵君繼儒等施刻。董香光其昌所書本。重摸刊施願。共一切見聞隨喜。普證菩提同到彼岸云。此圖辛未。望月寺居士性月重刊者也。余於中州天寧寺。見寶塔以鐵鑄成。又有塔圖長可十餘間。刻華嚴經。與金經圖同製也。
道光丙申四月。魯之段店嶺黃茂才元秀數畒田。生瑞麥雙岐至五岐。史冊所罕見也。魯山令鄭鑾爲之圖。余得其刻本。
人好瓦當文。取其氷泐也。古人於剝落處。尋得心畫。補以綴之。今之書者得剝落處。饞噎詭奇。惟恐不及。斷折破脫。因形塗鴉。如是而焉可窺純精精一之域哉。正如騎驢覔驢。
王漁洋云湖州專用羊毫。柔輭無骨。取貂鼠毛爲之。輔以兎毫。謂鍾,王所用鼠鬚必此也。然稍肥擧落運用。不如人意。余深感是言。在灣州。多得貂毛。以燕士所贈湖州羊毫已束者。解而補之。其製稍瘦不肥。擧落果中法。
中州贈余二錠古墨。有隃糜二字。按唐時高麗貢松煙墨。和糜鹿膠造墨。名隃糜。見地理志。隃糜漢縣名。地出石墨。或取其遠方之産而名之歟。復有此名而同行之歟。實未可辨也。
我東之墨。最稱海州。以其材料之善也。余躬自監造。春秋所製者每佳。惟印板之時。必須速乾。不爲腐傷然後合於品也。俗人乃言一墨之軆。上劣下優者。兩料付成之故。是誠見也。灌油亂擣。付板印出。何能間其優劣。渾合成一。有如泥土之易粘者乎。又謂烟煤之取也。遠者淸而近者濁。其說亦陋矣。葢以油品之好否。定墨材之高下。則何論遠近也。其爲劣品。多用魚油而然。十聞不如一見也。
東國産楮。甲於海內。湖南爲最。完山其品樸而滑。淳昌其品精而懦。南平其品梗而闇。南原其品色白如雪。滑如凝脂。此爲天下第一奇品。因水性而然也。嶺南麁重色駁。只合墐戶。近見西洋紙。比南原不可同日而語。此以東紙渾唐紙而成之。堅取於東。姸取於唐。其弊潛賣東楮故也。余見中州貴紙若金。無片楮之遺地。而東人則用之如糞土。其産之博。可知也。
史謂晉人喜嗇。王文康公甞戒子弟云吾平生。不以全幅紙作封皮。是則非嗇也。不欲暴殄而然矣。余學文康者。曾在湖南。習知其貴故也。歐陽公之說曰。學書者費紙。猶勝於飮酒費錢。誠哉言乎。
先王考甞歎侈風曰。文房之具。亦異於前。今之所謂周紙。出於英廟朝後。古則白紙截爲三四折。置之案頭。隨手任用。所以古簡帖上。有小㨾折紙之付者是也。此後則又將何如。到今見之。毋論某紙。擧皆聯用。至於色紙唐紙。靡有不及。書簡封皮。亦有贈遺。皆古之所無也。
康煕御銘松花石硯。其銘曰。壽古而質潤。色綠而聲淸。起墨益毫。故其實也十八字楷書。小璽文曰康煕宸翰。此硯曾見於翠雲樓中。終歸于養硏山房。
姜豹庵尙書童子時。於宅邊掘地得甆碑一。回靑字李白桃李園序。不知誰書也。至今子孫秘寶。
開元硯製葫蘆樣。回環刻蘭亭全文。跋曰大唐開元十三年春三月。奉聖旨臣馮承素恭摸。字小於蚕頭。洵奇物也。硯背又有乾隆壬辰御製詩一絶曰。米記韓馮惜未見。今看承素硯存眞。雖欣無翼聯珍羽。艱致却慙似褚人。此題恰今壬申爲百一年也。
東方古器。曰百濟瓦硯。有秋史瓦千年硯天然六字銘。曰高麗秘色尊。安宅物。曰高麗烏泥携甁。考古圖。以爲吏部蘓尙書子容使虜中。於帳中常見之。曰䧿川石硯。藥泉南相公鎭川頭陀山紫石硯詩云。聞昔韓生得鎭石。一拳携入紫宸中。重瞳鑑別親題品。聲價居然冠海東。韓生葢指石峯也。曰紗羅子石。曰葫蘆。曰馬面如意松癭也。曰倭剔紅創金山水杯。曰赤間關御硯司四海硯。曰西藏硯山。
百濟官瓦。得於金秋史。倩姜若山製爲舃硯。遂命名䲶鴦舃。銘曰䲶鴦瓦化爲舃兮。落花巖遺一隻兮。凌波兮彳亍。故國兮如昨。後千年兮烟月夕。詩人憑吊兮漁人綱得。辛未刻之。貞碧携贈星原。但留拓本。
尹梣溪舊蓄唐製小鵞硯。其㨾精竗。色微紫。磨墨不及端方。余曾一見之後。叩之復得一賞於鍾山廬。可比右軍顧渚鵞也。後又得宋製鸚鵡硯。詑之。
金石經者。樓閣洞居人。出於秋史門。善鐵筆。一時士大夫圖章。皆出其手。余亦使刻印者多。而比石墨書樓法。卑下無奇法。後有吳小山圭一。深得石墨法。往來彜齋,秋史之間。其法益神。大內諸刻。擧皆任之吳手。初則純正可珍。漸入佳境。則隨以索隱。其文不可辨。行之未十年。眼廢。中州周少白。以其手刻贈余。余以是踏於彜齋所求隷書。彜齋大驚曰。近世佳手。托余刻其印方。又使小山刻少白印。付之槎便。少白盡印其所刻全幅以歸之。此本在彜齋海棠樓。余前後所得周刻數十方。皆名刻也。年前以御書賜橘山嘉梧室八字。乞刻於少白。以眼昏不能副。倩丁學敎刻之。其法近周,吳餘派也。
犀之上品。必稱福州。葢眞軆堅如玉而文彩異常。大勝於華産。博物志云別有通天犀種。側見則如截束髮。而入水能照恠。又有辟塵辟寒等種而未之見也。皇明孝宗時。南邊士人治福犀。得一奇文。卽南極壽星像也。鶴髮鳩筇儀形宛然。愛而粧帶。不敢私儲。獻之于天子。東國不知犀品。只以好者稱爲福州産。可笑。
犀角之文不一。角初長時。見山則山形。見水則水形。萬曆上高縣得一乕。文皆鳥獸。抑山水豹之類。而與犀文同耶。
漢武帝始用白鹿皮爲幣。唐憲宗有飛錢。宋太祖有便錢。眞宗置交子務。高宗設東南會子。金元承之爲寶鈔。明初亦用之。余見淸國紙幣。卽公文也。有戶部印花字。得一紙則十年後可以覔錢。其法甚縝密。東國舊用布帛。此其制也。隨其長短交易。近無而惟深北行之。自錢貨之流入。此亦不行。
伏羲始制棘幣。黃帝范金爲貨。虞夏商金幣三品。至周太公立九府圜法。錢制始定。後景王更鑄大錢。秦曰半兩。漢高鑄楡英錢。呂后改八銖。文帝改四銖。武帝爲五銖。輕重適宜。蜀之直百。吳之當千。晉之比輪。陳之六銖。梁之兩柱。皆失之太重。魏之水浮,風飄,鵝眼。宋之綖環,菜子,荇葉。晉之四分。隋之裁皮,糊紙。皆失之太輕。唐高祖鑄開通元寶。肅宗以一當十。又以一當五十。宋初鑄宋元通寶。太宗始用紀元鑄錢。曰太平通寶。嘉祐行折二之令。崇寧行當三之法。皇明鑄大明通寶。與歷代錢兼用。又鑄洪武通寶當十,當五,當三,折二。東國肅宗朝始行錢。當宁丙寅。鑄當百錢。行之數年而止。今用當五。
王阮亭引姚露旅書謂烟草本名淡巴菰。出呂宋國。能辟瘴氣。始於漳州莆田等地種之。近則處處皆有。唐詩云相思若烟草。似唐時已有服之者。王肱枕蚓菴瑣語云烟葉出閩中。而邊人寒痰。非此難治。故至以一馬易一觔。崇禎中禁之不得也。我東則仁祖初。始爲盛行。純祖初。斗室沈公爲箕伯。擇好品葉。量束一兩。名之曰兩草。近日又有日草名色。卽監司日供之謂而味爲上也。葢此物始自他國轉來。而到今我東之品。甲於天下。然以其害者言之。良田美土費於種草之址。寶玉珍金糜於吸烟之具。而其所爲用不過衆人消閒之供。物之無益。莫此爲甚。而俗習成痼。卒難療祛也。余亦好之者。故方吸而言之。
春花落瓣。秋花落朶。落瓣者有實。落朶者無實。有實者種生。無實者根生。葉厚者冬靑。冬柏之類。葉大者早凋。梧桐之類。樹大者葉小。槐之類。蔓生者實大。瓠爪之類。花美者無實。牧丹之類。花細者實美。棗李之類。易長者先萎。晩翠者得壽。余種樹林園。驗之則果然。
甞見草木攷。卉者草木之総名。木謂之華。草謂之榮。不榮而實者謂之秀。榮而不實者謂之英。爾雅。荄根也。木有直根有蔓根。直根曰根。蔓根曰柢。韓子。凡生草而初達謂之䓲。方言草盛曰菶。木茂曰葆。風俗通。木簇生爲灌。詩之集于灌木者也。無枝爲檄。木下曲曰樛。上竦曰喬。槐棘曰喬。爾雅云小枝上繞爲喬。漫錄之。以備一覽。
晉書元康二年。巴西界。竹生花紫色。結實如麥。宋乾道間。亦有之。東國嶺南。産竹實。晉州尤多。果如麥。作米如粳糯。味馨香。
植物之中。非草非木。不剛不柔。生十五日。成棟樑者曰竹。澄州之甘竹方竹。成都之三稜竹。道州之丹竹。飛魚口之紅竹。島岑之白竹黃竹。占城國之黑竹。瀟湘江之斑竹。熊耳山之丹靑竹。華陽國之二色竹。此皆竹之恠者。而我東之金絲烏竹。尤奇也。
草有無根而生者。菟絲也。木有無花而實者。卽無花果。余曾於燕市購來。果結於葉上。味甘。
我東火砲。始于麗末。判事崔茂宣。學其法於元國焰焇匠云。鳥銃本出於西域。用以捕鳥雀。故名鳥銃。倭奴得其制於呂宋國。以爲兵器。壬辰之變。我國人始見而駭之。佛浪機者。本西洋紅毛番種。萬曆中。襲殺呂宋國王而據其地。其人好用大砲。故仍爲火器之名。
按明史兵志火箭條內。永樂征交趾。得神機槍礟法。特置神機營習之。大者用車。次及小者。用架用樁用托。所謂用車者。卽今之大砲也。用架用樁者。葢卽今之鳥機也。其用托者。葢卽今之鳥槍也。是鳥槍之制。永樂中已有之。然不傳於外。永樂二十年。雖從張輔請。置砲於大同等關以禦敵。然利器不示人。朝廷每愼惜之。宣德中。又敕宣府総兵譚廣。謂神銃國家所重以壯軍威。勿輕給。正統六年。邊將黃眞立神銃局於宣府。帝猶以火器外造。恐傳習漏泄。特敕止之。是正統以前。鳥槍未甞傳習於外。直至嘉靖以後。始用之於營伍耳。
凡扈從及出使。皆服短褂缺襟袍及戰裙。短褂亦曰馬褂。馬上所服也。疑卽古半臂之制。說文。無袂衣謂之䙃。旣曰半臂。則其袖必及臂之半。正如今之馬褂。其無袖者。乃謂之背子也。曾三異同話錄云近歲衣制有一種。長不過腰。兩袖僅掩肘。以帛爲之。仍用夾裡。名曰貉袖。起於御馬院圉人。短前後襟者。坐鞍上不妨脫着。以其便於控馭。此又宋人短褂之制。隋文帝征遼。詔武官服缺胯襖子。三品以上皆紫。唐書高祖武德元年。詔諸衛將軍每至十月一日。皆服缺胯襖子。是缺襟之制。亦起於隋唐時。至戰裙之始。按國語鄢之戰。郤至於靺韋之跗注。三逐楚平王。註。跗注者兵服。自鞍以下注於跗。則今之戰裙。盖本此也。邲之戰。屈蕩逐趙旃。得其甲裳。又裙之有甲者耳。東人所着快子禙子之屬。猶馬褂子。牽夫所着短同衣。猶缺襟袍。至於戰裙。今新頒軍捴所着膝甲是也。按江淅人兩行着釘鞵。明史百官入朝遇雨。皆躡釘鞾。聲徹殿陞。東國油鞋油靴。卽其制也。
假面葢起於周禮方相氏。黃金四目以逐鬼。後漢書禮儀志。有大儺之儀。以木面獸爲儺。其濫觴也。高齊蘭陵王長恭着假面。與周師戰於金塘。齊人壯之。爲蘭陵舞。宋狄靑每戰。帶鐵面具。以鐵爲之者。軍旅所用也。東國有山棚戲橦絙戲。皆以木楦。三南多有之。古者迎勅時。列於路左。又有衣臼像婦人之儀於門前。今皆無。
井邑內藏寺。産柹小如栗。食之無味。惟乾而浸水極佳。豊基恩豊面乾柿。品甲於國中。彼人云糖屬之所無。以此推之。雖謂之甲於天下可也。咸從皮赤栗。小如橡實。春而叢生。秋而結實。乾之善解甲。名曰妓栗。智異山有山栗。秋來自落。塡流于溪。民爭取之爲粮。不知所由於何處。山深不得到故也。中州柿有六稜不甜。栗與咸從近。風土有同有不同。
申紫霞園中。種紅荳有兩大叢。覃家所贈也。羣芳譜所載。梅雨時開花。結實枝頭如珊瑚。豆紅嫣可愛。此與王右丞詩紅荳生南國之紅荳不同也。李濤叟仁默得一枚於翁星原視余。大於白扁豆。鮮紅可愛。謂之紅荳相思子也。風土記。八月雨曰荳花雨。
月沙李公。自中州移來單葉紅梅。種之廟前。此種遍滿國中。廟樹已枯。人見單葉紅梅。輒曰月沙梅。
梧陰尺牘曰。三尺童子携魚而來。巨口細鱗。松江之鱸耶。鱠縷如雪飄飄。氣欲仙也。仙桃四枝並蒂者。非爲報也。聊以表意。
我國之稱蘭草者。皆以爲馬蘭。第以花譜考之。非馬蘭。卽箬蘭也。馬蘭。本草云一名紫菊。其葉似蘭而大。其花似菊而紫。箬蘭。花譜云花紫。形似蘭而無香。四月間。産海島陰谷中。此豈非我國所謂蘭草者乎。
羣芳譜。秋牡丹草木葉。似牡丹差小。花似菊黃心。秋色寂寥。植數枝。足壯秋容。卽俗所謂唐菊也。
靖陵齋室庭松檜叢靑之中。有梅花樹玉英粲然。卽西山大師休靜所手植也。丁丑春。人皆見之。未知五十年間榮枯也。
靑海牡丹。傳以爲艮岳遺種。出自五國城。節度園池環種。無慮數百本。皆盈握之老幹也。花品亦佳。昔白沙先生於三樂齋。節度使送菊花種之。靑海之多花種。自古然矣。曾見齋前。亦有牡丹。想是艮岳之種。
康津普林寺竹田茶。丁冽水若鏞得之。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其品不下普洱茶。而穀雨前所採尤貴。謂之以雨前茶可也。海南等地。有栍橽實。取油凝而鑄燭。不下燭。治婦女乳腫。亦丁冽水法也。濟州産水仙花。秋史始知之。取長如法。不下江南種。而本土有五色花。渡海色變。又取黃茶。遜於燕種。而頗爲近可。
廣州南門外細村面金光里金氏田産煙草。稱爲國中殊品。面內所産。統稱爲金光草。今則一境所産。皆借其名。湖南之上官草。與金光名等。上官面所出。皆謂之眞品。本面在全州任實之間山峽五十里。可藏兵馬。故名曰萬馬洞。洞中之田。俱是種草爲業。鎭安亦産草。卽其餘派也。嶺南稱新寧草。有似上官而有毒。水原之紅草。似金光而不及之。六抵西勝於南。成川草田亘連江東,三登之境。謂之成川草。皆資於江,登而細剉出色。成川其尤也。
菸鄕之佳者稱靑,定。卽靑陽,定山也。膩燭則出錦城淸州者。靑心最上。舊稱葵花燭。燭一枝可達冬之永夜。猶有餘跋。
三餘帖。女星散爲配玄。配玄卽今水仙花也。甁史。水仙神骨淸絶。織女之梁玉淸也。一種千葉謂眞水仙。單葉名水仙。千瓣乃玉玲瓏。余癖此花。顔所居曰種水仙三百本舫。取出門一笑大江橫之意也。李荷居帶醫提。與妓接話。一世驚恠。雲石聞之。見李公曰。公七十。始知愛妓。當以花賀之。送水仙一盆。水仙之爲女精。果有以也。水仙産於江南。在昔壬申。紫霞使燕。冬回携來之。此爲東來之始也。于今六十年。東來不絶。甲午後燕貨禁條。花亦入其中。數年不出。後漸弛其禁。咸豊時南匪之役。皇城又絶種。尙今買賣不敷矣。
甘藷在果蓏中最後出。可以賙饑。可以延年。又可以禦蝗而弭旱。始自閩,廣。殆遍天下。獨我東近始購種於日本。沿海若而邑。僅得傳殖。而峽野之民。不識藷爲何物。純祖甲午。徐楓石廵按湖南。亟訪藷種。頒諸列邑。且取皇明徐玄扈甘藷䟽,我人姜金二氏之譜。彙類編纂。擺印廣布。以諗其種藝之法焉。余得食徐公之煮爲餻甚佳。取其法。
元次山丐論云古人鄕無君子則與山水爲友。東坡詩。風泉兩部樂。松竹三益友。余所居鄕里。無好山水。無好松竹。又無好琴酒。其安所從君子友乎。
醫家本草。歷代所增。各自爲書。今合而爲一。非古本也。原書始於後漢。別錄者魏晉以來。吳普,華唐之所記。于志寧,李勣等。修本草並圖。合五十四篇。謂宏景以神農經及諸家別錄注之。江南徧方。不能周知藥石。其謬誤至四百餘種。遂考正之。又增後世所用百餘物。陳藏器所著則又名本草拾遺。明李時珍又著本草綱目。益詳備矣。按時珍傳。醫家本草。自神農所傳。止三百六十五種。陶宏景所增亦如之。唐蘓恭增一百一十四種。宋劉翰增一百二十種。至掌禹錫,唐愼微輩先後增補。合一千五百五十八種。至時珍。又增三百七十四種。本草之普濟蒼生。其功無量。
梅亦寒花也。氣像極瀟洒。多貯害子宮之說。古已有之。人或以沈斗室證之。以余所見。南圭齋築梅花室。藏奇品屢百本。名動一世。不數年。圭齋歸道山。其室作人醋塩供億之處。前人之垂戒。不無所見也。
梅宜藏寒屋。杏宜藏粧坮。梨花宜春雨。荷花宜曉風。海棠桃李宜歌舞席。牧丹芍藥宜棨戟門。芳桂幽蘭宜贈隱士。
閩有紅茉莉。蜀有紫綉毬。楚有紅梨花。燕有黃石榴。天台有黃海棠,白海棠,白紫碧桂花,白玫瑰。洛陽有黃芍藥。昌州有香海棠。吾園有輭紅綉毬黃石榴,白海棠。
長湍人發古塚。得甆器,崇寧錢,銅鏡。錢隨手卽壞。鏡作徐卯翁畊輔所庋。圓徑三寸有奇。背鑄盤龍。面微凸。正古所稱衜家聚形鏡耳。綠斑透出膚理。望見可知爲入土千年物。可懸此爲鑒定古銅之玉尺也。
金尙古堂孫魯鍾。葬兄泰仁君萬鍾於長湍山中。治壙得古人殉物宋錢數百枚。皆元豊通寶。卽所謂靑苗錢也。八角鏡一面銘曰。湖州眞正石。念二叔照子。鑒人面淸如明。奇物也。古人多以如字作而用。
星原舊有古井。淘得宋窯酒杯。柳貞碧得於石墨書樓。甚愛之。時刻不離手。携至瀋陽。失手見破。養硏老人以詩嘲之曰。蛾眉宛轉一聲嗟。千古凄凉是馬坡。竹葉於吾眞不分。救君不得奈君何。器破者余曾見之。鐵絲補綴尤奇絶。勝太眞一襪也。
七佛偈。山谷書。薦其母夫人冥福也。霞翁得之象山村家袱梁上。山谷又書石鏡溪三字。在瞻雲寺讀書臺。寺在廬山中。拓本藏蘓齋。
柳惠風冷齋書種曰。方寸玉一片。羊脂色雙螭首。一面刻山水平橋漁舟遠塔。微微可辨。一面刻詩云。綠莎白石滿河洲。渺渺平沙帶淺流。紅樹靑山無路入。行春橋畔覔漁舟。小印文曰子剛。成川府民。耕田拾得。獻于府使。府使之子。戀詩妓一枝紅。與之佩。後歸邑子某。府使某以重價取之。詩情畫意。俱極縹緲。刻法又神。必是中國物。但未知子剛之爲何代人。以待後査。按成都民。墾荒塚間。得此玉獻之官。遂歸於一枝紅。紅又情贈富民某甲。後鄭府使取爲寵姬之餙。姬居燕子樓者且十年。售玉以資衣食窘。此玉又歸於侯門之絶艶。玉自出土來。凡三易主而三噪於世。葢尤物也。有一嗜古者。購求於艶。艶竟刓敝不出手云。子剛姓陸氏。徐文長水仙花詩云。畧有風情陳妙常。絶無烟花杜蘭香。昆吾鋒盡終難似。愁殺蘓州陸子剛。自注云陸子剛蘓人。碾玉妙手也。据此則子剛爲文長同時之人。而此玉爲明嘉隆間之古物。無疑也。
許文正穆少時。往其外祖林白湖家。見一塊石在庭中。請持歸之。林公曰。此石我得之田間。而不意爾之見也。遂破之。中有一小玉。白湖曰。意謂其大。及見小矣。使作玉鷺。許公卽其席手刻之。傳爲至寶。韓公致應爲兵判。借用之。一日忽心動。使之還本主曰。古家神物。不必久留。是夕火。其家舍什物書籍。皆不能保而玉鷺得全。
斗室宅。舊蓄高麗秘色瓷尊。爲安文成公宅遺墟所得。可寶也。養硏老人。借用八年而還。安文成甞掛晦菴像。遂號晦軒。甘露寺詩曰。日暖庭花藏淺綠。夜凉山月送微明。憂民未得湔塗炭。欲向蒲團寄半生。史稱憂國傷民之意溢於辭也。此尊卽先生舊物。而繪翥鶴六朶雲十八。皆用粉靑。余蓄瓷器。以粉靑靑畫靁文。麗俗之用采。皆以粉靑可知也。正字通。今俗以尊作尊卑。以尊酒器之尊。別作樽非也。樽林木茂盛也。說文。又作罇。古者酒一壺稱一經。人有以五經遺者。聞其來。束帶出迎。乃酒五壺。非五經博士也。尊說之下。漫錄古人語。
高江村天祿識餘。謂今之摺疊扇。初名聚頭扇。元時。高麗始以充貢。明永樂間。稍效爲之。今則流傳寖廣。團扇廢矣。至於揮洒翰墨則始於成化間云。張東海以爲貢於東夷。永樂間。盛行於中國。然南宋以來。詠摺扇者頗多。東坡謂高麗白松扇。展之廣尺餘。合之止兩指。卽此也。南方婦女猶用團扇。惟妓女用撒扇。近年良家婦亦用之云。
編竹爲筒。空其中而竅其外。暑時置牀席間。可以憇手足。取其輕凉也。俗謂之竹夫人。按陸龜蒙有竹夾膝詩。卽此器也。湯婆子用銅錫器盛湯。置衾中煖脚。按此名雖不經見。然東坡有致楊君素札云送煖脚銅缶一枚。每夜熱湯注滿。塞其口。仍以布單裏之。可以達旦不冷。范石湖有脚婆詩。則是時幷有脚婆之稱也。東國有兩品竹夫人。一如此制。湯婆子事不稱器。老人或以匜器盛湯水。以煖手足。亦此制也。
賣暑。唐宋人賣痴獃。此與賣暑同其流俗。踏橋。麗俗以禳脚病。諺所云一夜踏十二橋。消十二月之灾。壬辰後此風漸衰。望月之厚薄。以徵豊儉。其來久。而陳穀穗,嚼癰果,拔河戱。皆羅麗舊俗。而佳節遊衍之一事也。
歐陽公云唐人宴聚。盛傳葉子格。袁文謂此唐之讖也。葉子二字折其字。上半乃廿世字。餘木字湊下子字作李。乃是廿世李。正合有唐二十帝之數。南唐書。李後主妃周氏。又編金葉子格。卽今之紙牌也。東國投牋謂之紙牌。與中州制同而異。余所曾見者也。
㙜城之圍。梁武帝以紙鳶告急於城外。而援師莫有進者。金守汴日。爲紙鳶。置文書其上。至北營則斷之。以誘被俘者。識者謂宰相以此退敵難矣。然唐張伾守臨洺。爲田悅所攻。馬燧等救兵未進。伾急以紙鳶放過悅營。悅射之不及。乃落燧營。言三日不救。洺人且爲食。燧等遂進解圍。是紙鳶亦有時濟用。東國以紙鳶爲戱。元日始。上元止。
高麗闕庭曰毬庭。形似毬也。近世馬習步曰。毬庭其步圓。似戱毬也。
楓石作龍尾車記曰。泰西水法爲車者三。筩焉提焉下上焉而激水。謂之玉衡。筩焉柱焉升降焉而趵水。謂之恒升。墻焉圍焉環轉焉絜水。謂之龍尾。而龍尾於河宜。玉衡恒升於井宜。故功用之博。龍尾爲最。三者皆西法。而明太保徐文定之所傳也。叙工精切。駸駸乎考工之亞。炯菴曰。余讀奇器圖說。回互或難解。未若此記之歷歷如覩掌紋也。
木綿布行於宋末元初。古者凡布。皆以麻爲之。木綿作布。邱文莊謂元時始入中國。南史林邑傳。水綿吉貝樹也。花係木本而非草本。其色正紅。及落時則白如鵝毳。但其花秪可絮茵褥而不可織布。唐書南蠻傳云吉貝草。緝花作布。名曰白㲲。又名古貝。夏之織貝。卽今草綿布是也。東邦之出。文忠宣益漸始也。其孫曰萊。造機抽絲。呼其機曰文萊。
羲皇始造布。然其用何物爲布。及升數精粗。莫得以考焉。想亦不越於絺綌也。三代以上之布。必以二尺二寸爲廣。以及升數多寡。皆以爵秩爲之等威。故禮深衣。言袖曰廣終幅。又曰布帛精粗不中數。幅尺廣狹不中量。不鬻于市。後世則不能然爾。
漢時金銀。皆以斤計。如高祖賜陳平金四萬斤之類是也。侯景圍城。羊侃率兵禦之。詔送金五千兩,銀一萬兩。以兩計起於梁時。東國銅鐵以斤計之。金銀以兩計之。有貴賤故也。
髹漆器用。蚌蛤殼鑲嵌。象人物花草。謂之螺塡。方勺泊宅編謂本出倭國。而藍衍訛爲羅殿。而附會之誤矣。又當作螺鈿。我國皇太后,皇后前進獻禮物。卽螺鈿小盒一坐。而余於使行見之。不過是貝盒樸制也。以此作爲年貢方物。殆儉也。
俗以鳳仙花染指。自宋已然。癸辛雜識。鳳仙花紅者搗碎。入明礬少許。染指甲。用片帛纏定過夜。如此三四次則其色深紅。洗滌不去。直至退甲。方漸失之。回回婦人多喜此云。今俗則不持回回婦人也。
禮。婦人吉拜。雖君賜肅拜者。周禮太祝九拜之一。鄭註謂俯下手。如今之撎。按推手曰揖。引手曰撎。肅拜如撎。正今俗婦人攏兩手向下之禮也。惟婦人之拜。跪與不跪。諸家之說紛紛。洪容齋等謂古禮婦人之拜。本不跪。東國婦人之拜。伸腰而拜。兩手據地。顙不至席。此與古法脗合。以其首餙甚多。不得俯伏。與介冑之士同也。
正廟己亥。有禁髢製冠之議。上曰。花冠之屬。雖云簡便。末世侈風。轉相務勝。名雖花冠。而加以珠玉金貝之屬。盛加造餙。則其費之鉅。反有過於髢髮之具。此所謂以弊捄弊。亦豈非可悶乎。近俗如遵古。則必以花冠用於婚禮。禮家無珠貝之繁。宜以冠制分等品可矣。
舊聞崔杜機承旨成大。與申靑泉維翰。爲前生伉儷。靑泉是夫。杜機是妻。杜機詩集中酸蔣歌。悽婉可愛。卽有感於斯而作也。其塚在壽春。南秋月秘書玉之塚。亦在是土。崔稿幷在。南氏家人指謂二詩塚。崔之孫琴有詩曰。殘杏數株還斫盡。明年何以答春風。極有大致。
純祖乙酉十月十四日。鶴山行臺自耽羅返命。至崸嶝前洋。所騎船遇風漂流。十五日汐水。還泊濟州別島浦。先以兼道科試官而行。收券亦得完。綠袍之爲文科主文。罕例也。先是鶴山言三十年前。夢見坡仙冠危冠。衣黃紬袍。據天然几。几上空諸所有。只有一小帖子。少頃。坡起身出戶。顧語鶴山曰。君且坐閱是帖。對曰是公詞翰否。曰是。展視之。第一幅。紅箋上有塡詞一首。當時頗了然。覺來惟記首句。曰月痕西墮。衆江東流。又記中腔。曰綠楊陰中紅叱撥。末尾曰須寄書扇榦兒來。不省榦兒是何語。後閱公集及志林。王朝雲生子曰榦兒。未朞而夭。然則夢中所遇。殆眞是坡仙。恨不能記其全曲也。
香取其遠。酒取其臭。石取其枯。琴取其初。茶取其色。竹取其影。月取其空。棋取其寂。杖取其近。水取其積。雪取其颯。釰取其畏。蒲團取其弊。美人取其猜。僧取其閑。花取其暗。金石鼎彜取其老。
客過林廬。叩余幽事。拈古人詩句以應之。問是何感慨而甘棲遯。曰大都心足身還足。只恐身閑心未閑。問是何工課而能遣日。曰惜花春早起。愛月夜無眠。問是何利養而獲終老。曰子種孫耕無歉歲。筆花墨雨有豊年。問是何往還而破寂寥。曰陽坡草軟厚如織。仍與麋鹿相對眠。問是何所有。曰嶺上多白雲。問是茅棟成。曰居然我泉石。問是何所聞。曰蟪不知春秋。蛙不爲公私。流水猶聾耳。鳴蟬重我欺。又曰長對靑山無問答。秪看時曆有春秋。此余之句也。
自古人臣之奉宸翰。以爲榮耀者不一。而未有如賤臣之受賜也。戊辰秋。聖上書下橘山嘉梧室五字。橘山卽臣之賤號。而嘉梧室者。是所居巷名也。未知聖聦何以記存而垂此分外之異數也。於是建閣而奉之。諸長老以文賀之。此畫見魏野居也。
爲官避瘴氣。不知仕亦有瘴也。急催暴斂。剝下奉上。租賦之瘴。深文以逞。良惡不白。刑獄之瘴。侵牟民利。以實私儲。貨財之瘴。攻金攻木。崇餙車服。工役之瘴。盛揀妾姬。以娛聲色。帷薄之瘴。
陳眉公有多少箴。其語不俗。今有一本。不知何人作。其詞云少嗜慾。多聞見。多素心。少靦面。少附貴。多右賤。多獨立。少拘戀。少京闉。多鄕甸。多穅秕。少珍膳。少語言。多兢戰。多自守。少耽羡。我有旨酒。以敖式讌。
山居有八德。心兮虛。軆兮舒。欲兮鋤。禮兮䟽。翁兮漁。兒兮書。仕兮躇。刺兮祛。舍此則飯先生等耳。
酒史作人逸其名。其槩云松下對坐。談屑娓娓。不覺前山斜陽灧㶑。霞氣氤氳客欲起。不可不一飮也。雨裡旅舘。聞隣家漉酒聲。不可不一飮也。浴罷淸流。高卧絶壁。聽黃鸝兩三聲。不可不一飮也。老菊殘楓。秋懷寥廓。徘徊庭除。有知心者至。不可不一飮也。秋深山屋。挑燈讀遊俠傳。至風蕭蕭兮易水寒之句。不可不一飮也。明日將討敵。整頓旗皷。撫長劒待天明。瞥見紅旭滿地。不可不一飮也。學公孫舞劒。掃太守千畒。不可不一飮也。讀諸葛亮出師表。不可不一飮也。和陶淵明自挽歌。不可不一飮也。訂唐詩。至李靑蓮廬山瀑布詩。不可不一飮也。山窓雪霽。曉月晶明。宇宙無一點塵埃氣。不可不一飮也。皷琴至尾煞。忽聞秋風怒號。精神悚懔。不可不一飮也。篁陰滿簾。林園瀟洒。窓外聞落子聲。酒思先動。也見落花。不可不飮也。贈好酒器。不可不飮也。有憂者終宵輾轉。痛飮二三盃。呴呴而睡。亦快事也。
東坡投荒時。答程大侔云。此間食無肉。病無藥。居無室。出無友。冬無炭。夏無寒泉。大率皆無耳。余鄕公所無者盡有之。但無肉與藥。
東坡曰。種樹大者不能活。小者老夫又不能待。惟擇中材而多帶土碪者爲佳。余每取公言。
心閒身逸則看書。心豪手健則寫字。心游眼明則作畫。心淸指輕則皷琴。心身俱懶則病。心手俱冗則卧。心眼俱暗則睡。心指俱發則歌。
巖上石虎抱兒眠。禪門悟道語也。雲在靑天水在甁。僧家見性偈也。凡詩文書畫。先得虛靈氣然後自入竗境。秋史曰畫無書氣近院格。紫霞曰書無篆隷氣俗。楓石曰詩文當有書畫氣。反是者飯儈牛店販馬驛。何暇做遊閑公子峩冠博帶。高視濶步。周旋於大雅之塲哉。
洞庭張山人云山頂泉輕而淸。山下泉淸而重。石中泉淸而甘。沙中泉淸而冽。土中泉淸而厚。流動者良于安靜。負陰者勝于向陽。山削者泉寡。山秀者有神。眞源無味。眞水無香。余於天摩頂飮輕。退士潭飮重。雙檜亭飮甘。壽谷竗井飮冽。靑海東井飮厚。其安靜向陽。寡神味香。皆可足言。
養生家忌魁罡神責。其實責其懶也。余嗜卧。氣之懶也。善坐睡。神之懶也。不好讀書。高之懶也。不好博奕。癖之懶也。不飮酒。韻之懶也。不遊山。耽之懶也。落花不掃。春之懶。庭草不除。夏之懶。好居鄕山。懶於世。
人皆言明哲保身好矣。余謂立節死義易。明哲保身難也。留心於立節而不及。則不陷於不義之科。保身之策。自在其中。專以保身爲心。則不免爲小人鄙夫之態。
余少時見鑄字役於閣中。有一人年可二十。爲人伶俐。聦明絶人。有問則無事不對。屢日見之。甚奇之。問其姓名與居住。漫漶不對。使人探察。終不知其來歷。于今三十年。益恨失人才之歎。
太常造脯。饗天地岳瀆廟社之需也。滿庭布肉。烏鵲不敢近。羣鳥又不得飛其上。所以無禁止之具。五百年如一日。收藏之時。不見鼠嚙。亦異矣。余管是寺。每聞如此。抑神靈之護也。
余甞聞之。作詩與文。有六病。荒也姸也濁也輕也澁也固也。荒則有不工之歎。姸則有浮儇之嫌。濁失於富而畜。輕失於貧而素。澁之不能容旋。固之不能通變。是皆病也。人之言也。雖馬,韓,李,杜之高。不得辭其責矣。
牴二獸名。秉心忠直。皇明承天門內華表頂上者。是余曾見於燕宮橋邊。又於衛輝府前石有之云。此亦龍九子之類同。
明儒論尹吉甫曰。雖有崧高,烝民,韓奕,江漢四詩。然惑後妻。其子伯奇衣苔帶藻。作履霜之操。比晉獻驪姬。非名臣也。此亦達論。而公私有異。以伐玁狁。其惟曰萬邦爲憲。則豈不足爲名臣乎。
中州鳳山縣有薑。名三寶薑。相傳明初。三寶太監所植。可療百病。我國産薑處。惟全州之鳳翔面。或引三寶薑而名歟。亦可紀也。
漁洋山人。使蜀過劍州。見南門外修小廟。曰鄧艾廟也。歎曰。不祀姜伯約。反祀鄧艾乎。欲毁之。後見唐人唐彦謙詩曰。昭烈遺黎死尙羞。揮刀斫石恨譙周。如何千載留遺廟。血食巴山伴武侯。已先我而言之矣。余以爲此說。可附出師表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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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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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날 삼각산에 산행을 하였네
소근소근 이야기하며 정답게 오솔길을 걸어서
쪽두리봉에 올라 원경을 보며 멋진 포즈로 아움다움을 담고
소나무 아래에서 준비해간 음식으로 오찬을 즐기고
향로봉을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회원님의 숨소리는 더욱 힘들어지고 등줄기에는 땀이흘르고
전망대에서의 바라보는 원경 삼각(부아악 화산 연화)의
최고봉(인수봉 백운봉 만경봉 노적봉)이 눈앞에 아른거리네
신라 천년의 역사가 숨쉬는 碑峰은 오늘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산나그네를 반겨주고 추사 선생님의 노력으로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후손에게 전해주고 ..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승가사는 오늘도 중생들을 위해 축원하고
계곡의 단풍은 형형색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석양빛에 아른거리는 구나
하산하여 나눈 술잔에 즐거움과 행복함이 더하고
산행의 하루를 마무리 하고 각자의 집으로 가는 구나 ..
산행하여 즐겁고 건강하여 좋고 좋은 분과의 시간이
즐거우니 인생에서 한때의 즐거움이 아닌가 생각되네
좋은길 안내해주신 인테리어 대장님,
비단길 총무님 같이하신 모든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11월도 즐거운 만추의 산행 되시고
삼각에서의 하루를 주저리 주저리 ....
신묘년 10월 三角山 산행을 마치고
소인이라 잘 적지는 못하지만 몆자 적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