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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言律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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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聞道開天勝。溪山似畫圖。朋交招共往。情義協相孚。鳥語偏依寺。鍾聲半入湖。十年勞卜地。剛喜得名區。
又
洞䆳如三峽。山高似九疑。茅菴僧獨在。煙木鳥猶稀。愛靜還思睡。耽幽不願歸。溪傍苔路窄。空翠襲荷衣。
又
地僻林逾靜。亭高夏更涼。日移靑嶂影。風散綠荷香。遁世孤蹤遠。思家客夢長。臨流笑溪水。何事亦奔忙。
동국영지승람의 자료내용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범굴사(梵窟寺) 아울러 기슭에 있다.
기언 별집 제15권
기행(記行)
갑인 기행(甲寅記行)
15년(1674, 현종15) 중하(仲夏 음력 5월을 말함) 임진일(29일). 도성 문을 나가 은관(銀關) 동북 석록소동(石麓小洞)에 있는 대흥불우(大興佛宇)에서 묵었는데, 상의 숙부(叔父) 인평대군(獜坪大君) 조계별업(曹溪別業)이다. 대흥불우는 석계(石溪)를 굽어보고 있으며, 계당(溪堂)이 있고 당(堂) 앞에는 포개 놓은 돌다리가 있는데, 그중에 최고인 것은 비홍지교(飛虹之橋)라 한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석정(石亭)이 아득히 있어 더욱 아름답다. 다리 위에 폭포가 아주 멀리 있는데, 바라보면 물이 구천(九天)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고 새겼다.
폭포 옆에 송계별업(松溪別業)이라 새겨져 있고, 돌다리 아래위에 또 창벽(蒼壁), 한담(寒潭)이라고 크게 둘을 새겨 놓은 것이 있다.
산 밖을 바라보면, 넓은 들판과 질펀한 냇물이 절경(絶景)을 이룬다.
손님으로 상종하는 사람이 몇 사람인데, 완산(完山) 이운태 대래(李云泰大來), 한양(漢陽) 조함 국보(趙瑊國寶), 광릉(廣陵) 이담명 이로(李聃命耳老)였고, 또 나를 따르는 자는 조카 허고(許䎁)인데, 자(字)는 자여(子如)이다.
80세 노인 미수(眉叟)는 제(題)한다.
4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50여 일이나 되어 냇물의 근원은 마르고, 못자리도 말랐다. 조계(曹溪)를 나와 30리를 가면 회룡사(回龍寺)인데, 지난밤에 비로소 비가 왔다. 냇가 돌 사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빗속에서 그윽한 새는 서로 부르며, 시내 폭포 아래 물은 맑고 돌은 희어 놀 만하였다.
그 위 회룡사(回龍寺)는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절로, 절은 오래되어 불전(佛殿) 정문 옆에 석조(石槽)가 있는데, ‘홍치(弘治) 14년(1501, 연산군7)’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계(曹溪)를 나오니, 이 학록(李學錄 학록은 벼슬 이름으로 이담명을 말함)이 먼저 돌아가므로, 조군(趙君 조함(趙瑊)을 말함)을 회룡까지 와서 전송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6월 1일(갑오). 한산(寒山)에서 묵었는데, 아침에 비가 왔다. 마차 협구(磨嵯峽口)를 지나, 대래(大來)는 나의 남계(楠溪) 초려(草廬)에 묵고, 다음날 빗속을 뚫고 집에 돌아가 대장구행(大葬匶行) 수백 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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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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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五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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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五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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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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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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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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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삼가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시열(時烈) 께서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신 운에 차하다. 계축년 |
텅 빈 산에 엄숙한 사당문이 열렸는데 / 空山肅肅廟門開
푸른 바위 맑은 개울 좌우에 감아돈다 / 碧石淸泉左右迴
애석할손 그 당시 님이 지닌 구학의 뜻 / 可惜當年丘壑志
여기 와서 지킴을 임금 아니 허여했지 / 君王不放此間來
송시열의 원운(原韻)은 “
푸른 절벽 드높은 곳 동문이 열렸는데, 도랑물은 졸졸졸 몇 굽이를 돌아왔나, 요순 군민 우리 님 거룩하신 뜻이건만, 사당 앞에 뒷사람 속절없이 찾아오네.
[蒼崖削立洞門開 澗水潺湲幾曲廻 堯舜君民當世志 廟前空有後人來]”이다. 《宋子大全 卷2 題道峯書院, 卷134 癸丑日記》
[주D-001]애석할손 …… 허여했지 : 구학(丘壑)은 일구일학(一丘一壑)의 준말로, 산수의 한적하고 청아한 정취에 마음을 부친다는 뜻이다. 곧 조광조가 평소에 그러한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임금이 허여하지 않고 등용하였으므로 세상에 나가 파란 많은 인생을 보냈는데 그것이 안쓰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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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칠언 절구(七言絶句) | ||||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쓰다. |
푸른 절벽 깎아 세운 듯 동구 열렸으니 / 蒼崖削立洞門開
도랑물 잔잔히 몇 굽이 돌아왔나 / 澗水潺湲幾曲廻
요순 군민 만들려는 당시의 뜻을 / 堯舜君民當世志
후인들 사당 앞에 와서 기리네 / 廟前空有後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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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가을에 딱섬[楮島]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배에 오르니 배 안에 늙은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홍천(洪川) 진사 남궁원(南宮垣)이었다. 일찍이 임술년 가을에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그해에 나는 문과에 급제하고 그 친구만 혼자 낙방했는데, 이제 또 제생(諸生)을 따라 상경한 것이었다. 즉흥으로 절구 한 수를 지어 그에게 주다. |
맑은 강 우연히 효렴선 배에 올라 / 淸江偶上孝廉船
백발 되어 서로 보니 옛 모습이 아니로세 / 華髮相看異昔年
지난날 글 읽던 저 광산을 돌아보니 / 回首匡山舊讀處
푸른 구름 가을빛 변함없이 그대롤세 / 碧雲秋色故依然
[주D-002]광산(匡山) : 광산은 중국 성도부(成都府) 창명현(彰明縣) 북쪽에 있는 대광산(大匡山)으로, 당나라 이백(李白)이 젊었을 때 글을 읽었던 곳이다. 두보(杜甫)가 성도에 가서 이백을 그리며 지은 〈불견(不見)〉 시에, “글 읽었던 이곳 광산에, 이제 늙은 그대여 돌아오구려.[匡山讀書處 頭白好歸來]” 하였는데, 흔히 소년 시절에 글을 읽었던 곳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작자가 소년 시절에 글을 읽었던 도봉산(道峯山)을 가리킨다
【사원】 도봉서원(道峯書院) 선조 계유년에 건축하여 같은 해에 사액을 내렸다. 영종 을미년에 어필로 액을 달았다. 조광조(趙光祖)ㆍ송시열(宋時烈) 모두 경도(京都) 문묘(文廟)에 보인다. 석실서원(石室書院) 효종 병신년에 건축하여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용(金尙容) 강화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경도 종묘에 보인다. 김수항(金壽恒) 자는 구지(久之)이고 호는 문곡(文谷)이니 상헌(尙憲)의 손자이다. 숙종 기사년에 화를 당했는데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정중(閔鼎重)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니, 숙종 임신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좌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단상(李端相)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요 연안(延安) 사람이다. 벼슬은 부제학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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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비록 4(淸脾錄四) | ||||
이학(理學)을 하는 여러 선생의 시 |
우연히 여러 선생의 절구(絶句) 가운데 독송할 만한 것을 생각하였다.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 선생의 ‘유두류산(遊頭流山)’ 시에,
조각배 몸 싣고 큰 강물로 내려오네 / 孤舟又下大江流
손으로 금모래 희롱하노라니 석양이 되었네 / 手弄金沙到夕陽
천 년 아랑의 자취 찾을 곳 없고 / 千載阿郞無處覓
신기루 사라지니 바다가 넓구나 / 蜃樓消盡海天長
시비 많은 세상에 뭣하러 나가리 / 是非何事到人間
작은 집에 봄바람 끝없이 불어 오니 / 小堂無限春風地
웃는 꽃 자는 버들 한가롭기만 하네 / 花笑柳眠閒又閒
시냇물 졸졸 흘러 몇 구비를 돌았는가 / 澗水潺湲幾曲回
요순 시대 이루는 일 당세의 뜻이었는데 / 堯舜君民當世志
텅 빈 묘당 문에 후인들만 찾아오네 / 廟門空有後人來
뱃지붕에 가을 바람 밤새도록 불어 오네 / 篷屋秋風一夜生
배에 누워 푸른 강 삼십 리를 거슬러 오르니 / 臥遡淸江三十里
달은 밝은데 노젓는 소리 꿈결인 듯하네 / 月明柔櫓夢中聲
들 물 출렁이니 백로 한 쌍 분명쿠나 / 野水翻翻雙鷺明
봄날 저녁 지팡이 짚고 시냇가 거니니 / 扶杖溪西春日夕
두어 마을 뽕나무 밭에 저녁 연기 어렸네 / 數村桑柘看煙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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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祭文) 4 | ||||
도봉서원(道峯書院) 치제문 |
이해 임자년(1792, 정조16) 중양절 다음 날 아침에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갈 때 길이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는 서원의 사당 앞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양현(兩賢)에게 다음의 글로 제사를 드리게 하노라.
절벽이 선 듯한 봉우리여 / 壁立之峯
마치 정암(靜菴)과 우암(尤菴)을 보는 듯하네 / 如覿靜尤
뜻은 요순에 있었고 / 志在堯舜
의는 춘추(春秋)에 밝았네 / 義炳陽秋
땅이 사람과 더불어 만나니 / 地與人遭
양현을 한 서원에 제향하네 / 兩賢一院
광세의 감회가 있어 / 曠世之想
안주와 술을 이에 바치네 / 殽觴是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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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묵으면서 세 절구를 읊다. |
도봉산 단풍빛은 찬 숲에 은은한데 / 道峯霜色隱寒林
깊은 계곡 메아리는 얇은 그늘에서 나누나 / 深磵響空生薄陰
돌은 늙고 이끼 거칠며 사람 멀리 떠났으니 / 石老苔荒人去遠
줄 끊긴 거문고로 아양곡을 누가 화답하리오 / 峩洋誰和絶絃琴
조정에선 헛된 명성을 쓰려고 하지 않는데 / 朝廷未肯用虛名
야외엔 나란히 밭갈 만한 토지도 없어라 / 野外無田可耦耕
나가나 물러가나 발붙이기가 어려우니 / 進退卽今難着脚
서원에 머무는 늙은 서생이나 되길 바라네 / 乞爲留院老書生
산중에선 하룻밤 웃음소리가 화락한데 / 山中一夜笑聲和
산 밖엔 분분하게 꾸짖는 말이 많도다 / 山外紛紛誶語多
오늘날 우리 무리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어 / 今日吾儕幸無事
침류당 안에서 한 번 길이 노래를 하누나 / 枕流堂裏一長歌
성휘(聖徽)와 함께 자는데, 밤중에 그의 아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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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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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言絶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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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樑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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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國洞林莊圖題詠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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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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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遺蹟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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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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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二
積氣晶熒萬古靑。中峰虗籟逈淸聽。一丘顯晦分夷夏。二老行藏操正經。風埃路入蒼梧野。雲氣春生古栢庭。薶骨白雲雖已矣。高山流水且沉冥。
其三
昭曠亭邊萬木靑。風湍幽咽舊時聽。故人子穆有孤抱。淸夏山門與再經。尙記桃花迷遠壑。可堪秋葉下空庭。天時反復存衰眼。留待輕雷破沍冥。
其四
廟門荊棘剗還靑。風雨雞鳴和淚聽。南渡諸公堪忍痛。東林君子廢窮經。靈芝不秀空循壁。枯檜含華宛在庭。看取苦心終不滅。夜深月照水花冥。
其五
古栢寒杉倚悄靑。中皋鳴鶴九霄聽。光風轉水吹月上。寒壁擎天有雲經。銅狄易磨仙洞日。玉虬難訴太儀庭。瑤琴欲奏招隱士。桂樹花飛雨冥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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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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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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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미록(焦尾錄) | ||||
차운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도봉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寺刹)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榮辱新規與舊基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道峯終覺設名奇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巖巖秀色當空聳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活活寒流不蹔衰
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揭妥前賢森陟降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藏脩後學謹微危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幔亭異迹輸精舍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今見吾東一武夷
[주D-001]미위(微危)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십륙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2]만정(幔亭)의 …… 낫고말고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의 산신인 무이군(武夷君)이 진 시황(秦始皇) 2년에 마을 사람들을 산꼭대기로 초청하여 만정(幔亭)의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무이만정(武夷幔亭)’의 고사를 말한다. 《雲笈七籤 卷96》 정사(精舍)는 주희(朱熹)가 한탁주(韓侂冑)를 피하여 무이산으로 들어가서 문인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각각 절간과 서원의 비유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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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도봉산에 들어가며 |
푸른 산 만 길 높이 솟아 있는 곳 / 靑峯萬丈出
그 아래 정암 사우 자리 잡았지 / 遠識靜菴祠
초겨울 날씨라서 쌀쌀도 한데 / 蕭瑟初冬候
몇 사람 그곳에서 모이자 했네 / 蒼茫數子期
차가운 물 말 몰아 건너가는데 / 寒流渡馬淺
시든 국화 날 향해 고개 떨구네 / 老菊向人垂
막대 짚고 기우제단 서성이자니 / 倚杖雩壇久
이곳에서 즐겼던 지난봄 추억 / 春游憶在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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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여수례(旅酬禮)를 행하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는데 나는 ‘공(空)’ 자를 얻었다. |
봉우리 높이 솟은 도봉산이여 / 峨峨道峯山
숲 나무 울창하다 서울 동쪽에 / 鬱鬱神京東
그 아래 일백 굽이 흐르는 시내 / 下有百折溪
수석 서로 어울려 영롱하다오 / 水石相玲瓏
삼나무며 소나무 흰 구름 닿고 / 杉松矯白雲
줄사철이 청풍나무 타고 오르네 / 薜荔裊靑楓
옛 현인 은거하여 소요하던 곳 / 昔賢所盤桓
사당 안에 놓인 제기 엄정하여라 / 俎豆儼明宮
선현의 곧은 절개 되새겨보니 / 曠世挹遺烈
진한 감동 나약함을 떨쳐 세우네 / 感慨激懦衷
삼월이라 늦봄에 이곳 찾으니 / 我來三月暮
초목은 그새 벌써 녹음 짙은데 / 草樹已葱蘢
여러 명의 푸른 옷 우리 유생들 / 侁侁靑衿子
무우단 부는 바람 함께 쏘일 제 / 共追舞雩風
조용한 뜰 늙은 괴목 그늘이 지고 / 閒庭老槐陰
해묵은 제단에는 붉은 꽃 날려 / 古壇飛花紅
사흘 동안 머무는 즐거움이란 / 留連三日歡
취한 밤과 맑은 대낮 가릴 것 없네 / 夜飮淸晝同
주나라 예법 따라 예를 행하며 / 揖讓用周禮
두 말들이 술동이 비지 않으니 / 朋樽殊不空
거문고를 탈 것이 무어 있으랴 / 點瑟何用鼓
샘 소리가 다름 아닌 거문고 가락 / 鳴泉自絲桐
세속의 얽매임을 떨쳐버리자 / 物累良已遣
깊고도 조화로운 도심이로세 / 道心穆以融
한번 웃고 세상 속 되돌아보니 / 一笑顧世間
봄날의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 野馬春濛濛
도봉산 봉우리만 구름 위 솟아 / 獨有雲表峯
풍진 속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네 / 不墮塵中
벗들이여 여러분께 당부하거니 / 歎息謂諸子
영원히 이끗 명예 멀리했으면 / 永謝利名叢
[주C-002]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 : 소식(蘇軾)의 《동파전집(東坡全集)》 권98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의 끝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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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ㆍ묘지(墓誌) | ||||
고(故)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의 비명(碑銘) 봉선술(奉宣述) |
대저 도(道)란 본래 자연한 것인데 누가 누르거나 올리거나 하겠는가. 이것은 세상과 사람을 요할 뿐이다. 대개 사람이 능히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천백 년 만에 혹 만나게 되기도 하니, 곧 세상과 사람이 둘이 서로 만난 뒤에야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도의 최상인 선(禪)임에랴. 선이란 문구(文句)에 얽매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가진 한 신령한 마음을 곧바로 깨닫는 그것일 뿐이다.
말세에 와서는 망령된 법에 집착 고수하여, 불(佛)이 바로 나의 물(物)이란 것은 모르므로 팽개치고 밖에 가서 도적을 자식으로 인식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도(道)란 끝내 비색하지 않는 것이니, 세상이 장차 옛날로 회복되리라. 그래서 진인(眞人)이 나와 도(道)와 꼭 합하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얻어 생령(生靈)을 도주(陶鑄)하니, 이는 바로 우리 국사(國師)인 것이다.
국사는 성이 전씨(田氏), 휘(諱)가 지겸(志謙), 자가 양지(讓之)인데, 세계(世系)는 영광군(靈光郡)의 태조 공신(太祖功臣)인 운기장군(雲騎將軍) 종회(宗會)에서 나왔고, 광묘조(光廟朝)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6대손이다. 증조부 휘 개(漑)는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요, 조부 덕보(德普)는 대창서 영(大倉署令)이요, 부친 의(毅)는 검교 태자첨사요, 모친은 남궁씨(南宮氏)인데 양온 영(良醞令) 영(榮)의 딸이다.
모친의 꿈에 중이 집에 와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그길로 임신하여 낳으니 골상(骨相)이 준상(峻爽)하고 기신(機神)이 영매(英邁)하여 어릴 때에도 희롱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처럼 하였다. 홀연히 비범한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이 말하기를,
국사는 천품이 영특하였고, 외전(外典 불전 이외의 서적)에 널리 통하여 이것으로 윤색(潤色)을 하였다. 그런 때문에 무릇 문대사변(問對詞辨)에 있어서 민첩하고 빠르기가 마치 기아(機牙)가 화살을 발사시키듯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공경(公卿)ㆍ명유(名儒)ㆍ운사(韻士)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교제하기를 원하였으니, 젊을 때부터 이처럼 명망이 있었다.
명묘(明廟) 원년에 비로소 승과(僧科)를 거행하였다. 이때 내시 정중호(鄭仲壺)가 고선(考選)을 관장하였는데,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국사의 예전 휘(諱)는 학돈(學敦)이었다. 이해 삼각산(三角山)에 노닐다가 도봉사(道峯寺)에서 자는데, 꿈에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대정(大定) 기유년(1189, 명종 19)에 비로소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으며, 명창(明昌) 4년(1193, 명종 23)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 되었고, 7년에는 선사(禪師)로 승진되었으며, 태화(泰和) 4년(1204, 신종 7)에는 또 대선사(大禪師)로 승전되었다.
국사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알려지자, 무릇 중앙과 지방에서 선회(禪會)를 열 때에는 곧 국사를 청해다가 주관하게 하였고, 국사도 또한 종승(宗乘)을 부담하고 법을 전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승안(承安) 4년(1199, 신종 2)에 욱금사(郁錦寺)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진례군(進禮郡)에서 선회를 베풀고 주관할 사람을 청하니, 임금이 국사에게 명하여 가게 하였다. 이 선회가 있을 때 현령(縣令) 이중민(李中敏)의 꿈에 천인(天人)이 말하기를,
국사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무릇 시주를 얻을 때 기이한 음식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내고 나서 자신이 먹었다. 하루는 모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석(帝釋)에게 빌기를,
태안(泰安) 신미년에 국청사(國淸寺)로 이주하였다. 숭경(崇慶) 2년에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 석문(釋門)의 중망자(重望者)를 얻어서 스승을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진강공(晉康公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맡고 있어, 임금을 위하여 스승을 간택하게 되었다. 무릇 양종(兩宗) 오교(五敎)를 통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구하니, 국사보다 나은 이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국사를 추천하였다. 임금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제자의 예를 행하기를 처하니, 국사는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삼 돈유(敦諭)하니, 국사는 부득이 그 청을 수락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上將軍) 노원숭(盧元崇) 등 두 사자를 보내어 국사가 우거한 보제사(普濟寺)에 가서 예를 갖추어 높이 책봉하였더니, 국사는 책봉을 받고 나서 드디어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친히 사례(師禮)를 받았다.
임금이 광명사(廣明寺)가 궁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머물기를 청하고 따라서 거돈사(居頓寺)를 본사(本寺)로 삼아 향화(香火)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가을 8월에 임금이 편찮고 국사도 등창이 났다. 문인들이 기도하기를 청하자, 국사는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정우(貞祐) 5년에 갑자기 문인에게 말하기를,
절에 내려온 지 13년인 기축년 6월 15일에 우레가 사납게 일고 큰 돌이 무너져 떨어졌다. 이날 국사가 병이 났다. 국사가 7월 2일 새벽에 일어나 관세(盥洗)하고 문인 현원(玄遠)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즉 국왕 및 지금의 상국 진양공(晉陽公 최우(崔瑀))과 고승(高僧) 송광사 주(松廣社主)에게 영원히 떠난다는 것을 고하는 내용이었다. 쓰는 일을 마치자 한참 후에 국사는 말하기를,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국사는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이 천성대로 이치대로 할 뿐이었다. 비록 큰 절의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였으나, 매양 재식(齋食)할 때에는 여러 사람보다 먼저 나아가서 손수 바리때를 들고 서서 기다렸으며, 변변치 않은 밥과 멀건 국으로 여러 중들과 똑같이 먹고 별도로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불사(佛事)에 지성을 다하였다. 비록 몹시 추운 겨울이나 매우 더운 여름이더라도 조금도 몸을 기울이거나 게을리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란 늙은이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능히 행하였으니, 아! 참으로 보살의 화신(化身)이로다. 그 감응의 영이(靈異)한 일들은 비록 많으나 모두 도(道)의 경지에 있어서는 미세한 것이요, 또 후인들이 괴탄히 여길까 염려하여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문인 대선사(大禪師) 확운(廓雲)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달마(達摩)의 마음을 전하여 영광(靈光)이 동방에 빛나는데, 후학들은 거꾸로 보니 마치 거울을 등지고 비치기를 구한 격이다. 밝고 밝은 국사이시여. 태양처럼 걸으시니, 한 번 연기를 틔우매 몽매함이 모두 사라졌다. 법왕(法王)이 세상에 나오시니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고, 깨닫는 길이 남쪽을 맡으니 배우는 자 돌아갈 곳을 알리라. 제자들이 수풀처럼 많은데 친히 젖을 먹이고, 또 날개로 새끼를 덮어 주고 내놓아 날개 해 주었네. 복을 심음이 오래니 윤택을 흘려 보냄이 끝이 없고, 천자가 높음을 굽히어 북면하고 배움을 청하였다. 살아서는 임금의 사범이 되고 죽어서는 나라의 스승이 되었는데 귀감이 이제 없어졌으니 어디에서 법칙을 취할 것인가.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사적을 전하기로 기약하시매, 신은 절하고 비명을 새겨 산과 함께 짝을 짓노라. 오가는 자들이여, 말 타고 가거든 말에서 내릴지어다. 차라리 부처에게는 절하지 않을지언정 오직 이 비에만은 절할진저.
[주D-002]구족계(具足戒) :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가 지켜야 할 일체의 계(戒)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은 자에게 준다.
[주D-003]양종(兩宗) 오교(五敎) : 양종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오교는 화엄종(華嚴宗)ㆍ남산율종(南山律宗)ㆍ열반종(涅槃宗)ㆍ법상종(法相宗)ㆍ신인종(神印宗).
[주D-004]정광(定光)은……나타난다 : 공안(公案)으로 한 말인 듯한데, 뜻은 미상(未詳)이다.
[주D-005]첨례(瞻禮) : 우러러 보며 예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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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 ||||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寺造成記) |
권근(權近)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일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바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씨에서 출발하는 것이요,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으로서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어진 왕과 밝은 군왕의 도리는, 조상을 높이고 종친을 공경하여서 그 효도를 넓히며, 널리 베풀고 뭇 사람을 구제하여서 그 인(仁)을 넓히니 여기에 의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일이 넓다고 하겠다. 불씨(佛氏)의 설(說)에는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지은 선악에 따라 윤회하여 태어나는데,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어,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물에 빠져 들어감을 건져 주시니, 산 사람이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복리로 인도한다면 죽은 귀신이 주리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윤회의 응보를 면하고, 산 사람도 역시 부유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효자와 자손(慈孫)에서 우매한 부부까지 모두 휩쓸려 다투어 불도(佛道)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믿지 못할까 걱정하여 온 세상이 거침없이 이를 높이고 이를 받드는데 수륙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더욱 그 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 정월 을묘일에, 상이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 신하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아서는 안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국사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옛 절에도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齊會)를 개설하여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은 가서 합당한 곳을 찾아보게 하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의 신하 상충(尙忠)ㆍ양달(陽達)ㆍ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장소를 찾아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峰山)까지 둘러보고 복명하여 말하기를, “여러 절 중에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고 하니, 여기서 상이 명령하여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 등을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진행하게 하였는데 내신(內臣)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썼다. 그 달 경진일에 역사를 시작하였으며 2월 신묘일에 상이 친히 와서 구경하고, 3단(壇)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도 거둥하여 구경하였다. 가을 9월에 이르러서 공사가 끝났다. 3단이 집이 되었는데 모두 3칸이며 중ㆍ하의 두 단은 좌우쪽에 각각 욕실(浴室) 3칸이 있고, 하단 좌우쪽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곡간이 갖추어지고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59칸인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
이 달 24일 계유에 상이 또 친히 구경하시고 명하여 신(臣)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적어 후세에 보이라.”고 하였다. 신 권근이 삼가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도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군왕의 덕도 역시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조종 제사의 예법과 존하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성인의 마음으로는 아직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 제사드리고 황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모시는 데까지 이르니 그 존숭하는 것이 극진하다고 할 것이다. 공손히 생각하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바탕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에 빛나고 은택은 온갖 물건에 끼쳤는데 선조를 받드는 생각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에 배향하는 제사를 이미 극진히 하고 부처에 귀의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친히 부처의 복을 받고, 묘한 인과(因果)를 증험할 수 있게 하며 주인 없는 귀신까지도 모두 그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에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고 극진하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만물에 미치되 친한 데에서 먼 곳으로, 어둔 곳에서 밝은 곳으로 하여 금일부터 무궁토록 전한다면 그 공덕의 큼과 혜택의 원대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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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 ||||
고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 비명 봉선술(故華藏寺住持定師正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奉宣述) 고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를 정각국사로 추봉하는 비명, 왕명을 받들어 기술한다 |
이규보(李奎報)
무릇 도(道)란 본래부터 언제나 같은 그대로인 것이다. 무엇이 도를 억제하고 선양(宣揚)하는 것일까. 요약하면 세상 형편과 사람이 그렇게 할 뿐이다. 대체로 사람이 도를 널리 펴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널리 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몇 천백 세만에 어쩌다가 한 번 만나게 된다. 즉 세상과 사람이 두 가지가 서로 기다린 뒤에라야 비로소 도(道)는 행하여 지는 것이다. 더구나 도중에서도 최선한 것을 선(禪)이라고 하니 문구(文句)에 얽매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한 영감(靈感)을 직관하는 것이다. 말세에 이르러 망집(妄執 허망한 법에 집착함)이 겸고(鉗固)하여 불이라는 것이 곧 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것을 바깥에 내버린 채 도적을 제 아들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자가 많았다. 그러나 도가 끝까지 비색하지는 않아서 세상은 옛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기에 진인(眞人)이 나타나서 도와 더불어 바로 합치자,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마음의 묘덕(妙德)을 나타냄)을 얻어 생령을 도야한 자가 있으니, 우리 정각국사(靜覺國師)가 그 사람이다.
국사의 성은 전씨(田氏), 휘는 지겸(志謙), 자는 양지(讓之)이다. 그의 세계(世系)는 영광군(靈光郡)의 태조 공신(太祖功臣) 운기장군(雲騎將軍) 휘(諱) 종회(宗會)에서부터 나왔다. 광종조(光宗朝)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추밀원사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6대손이다. 그의 증조인 휘 개(漑)는 검교 태자첨사요, 조고(祖考)의 휘는 덕보(德普)로서, 대창서 령(大倉署令)이요, 고(考)의 휘는 의(毅)로서 검교 태자첨사이고, 비(妣)는 남궁씨(南宮氏)이니, 양온령(良醞令) 영(榮)의 딸이다.
어머니의 꿈에 중이 집에 와서 기숙하기를 청하더니, 이어 임신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니 골상이 준수하고 깨끗하며, 기근(機根)과 정신이 영명(英明)하고 고매(高邁)하여 어릴 때에도 희롱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홀연히 비범한 고승(高僧)을 만나니 그 중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티끌 세상에서는 정착할 곳이 없다.” 하였다. 국사는 이 때부터 마늘 냄새 나는 것과 비린내 나는 음식물을 끊고 겨우 아홉 살에 출가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였다. 열한 살 때에 선사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금산사(金山寺)의 계단(戒壇)에 나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께서는 천품의 자질이 슬기롭고 영리한 데다가 널리 외전(外典 불교 이외의 서적)에 능통하여 이것으로써 불교의 교리를 더욱 윤색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문답(問答)에서 말하고 변증하는 것이 민첩하고 빠르기가 기계에서 발사한 화살 같아서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한 세상의 고관들과 이름난 선비와 운치 있는 문사(文士)들이 그의 풍채를 우러러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젊어서부터 이미 명망 있음이 이와 같았다.
명종(明宗) 즉위 원년에, 처음으로 선승(禪僧)의 과거를 거행하였다. 그 때에 내시(內侍) 정중호(鄭仲壺)가 고선(考選)을 관장하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이르기를, “내일 왕자의 스승을 얻을 것이다.” 하더니, 이 날 국사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국사의 예전 휘는 학돈(學敦)이었다. 이 해 삼각산에서 노닐다가 도봉사(道峰寺)에서 자는데, 꿈에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 이름을 쓰는가.” 하므로, 드디어 지겸으로 고쳤다.
대정(大定) 기유년에, 처음으로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으며, 명창(明昌) 4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되었고, 7년에는 선사(禪師)로 승진되었으며, 태화(泰和) 4년에는 또 대선사(大禪師)로 승진되었다. 국사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알려지니, 모든 중앙과 지방에서 선회(禪會)를 열 때에는 곧 국사를 청하여 주관하게 하였고, 국사께서도 또한 선종(禪宗)의 종승(宗乘)을 부담하고 법을 전하여 사람들을 제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승안(承安) 4년에 욱금사(郁錦寺)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진례군(進禮郡)에서 선회를 개설하고 지도할 사람을 청하니, 임금이 국사에게 명령하여 가게 하였다. 이 선회에 현령 이중민(李中敏)이 꿈을 꾸니, 하늘 사람이 이르기를, “깨끗한 부처의 국토에 어째서 감옥이 비지[空] 않는가.” 하였다. 깨어 보니 온 몸에 땀이 흘렀다. 몸소 감옥의 문에 가서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놓아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화 무진년에, 한재(旱災)가 극심하여 임금이 국사를 맞아 들여 궁궐 내의 도량에서 설법하게 하였다. 5일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아니 하니, 국사가 분노하여 곧 부처에게 빌기를, “불법은 제 스스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나라 임금의 힘에 의지하는 것인데, 이제 만약 비가 오지 않는다면 신령한 감응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다. 얼마 안 되서 단 비가 쏟아졌다. 그 때 세상에는 화상(和尙)의 비라고 불렀다.
국사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무릇 공양으로 얻은 것 중에 조금이라도 색다른 반찬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낸 뒤에라야 비로소 자신도 먹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내 제석(帝釋)에게 빌기를, “만약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 되었다면, 원하건대, 이 아들의 목숨으로써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집의 하인이 달려와서, “마님께서 이미 일어나셨습니다.”고 보고하였다. 그 때 세상에서는 국사의 효성이 감응한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태안(泰安) 신미년에 국청사(國淸寺)로 이주하였다. 숭경(崇慶) 2년에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 불가의 명망이 높은 스님을 얻어서 임금의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때 진강공(晋康公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임금을 위하여 임금의 스승을 인선(人選)하였는데, 무릇 양종(兩宗) 오교(五敎)를 통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찾으니, 사(師)보다 나은 사람이 없어서 결국 국사로 추천하니, 임금이 사에게 중신(重臣)을 보내서 스승으로 섬길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다. 사가 표(表)를 올리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돈독히 유시함을 두세 번 거듭하였다. 국사가 부득이 그 청을 수락하니,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上將軍) 노원숭(盧元崇) 등 2명의 사신을 보내어, 국사가 우거하고 있는 보제사(普濟寺)에 가서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책봉을 받는 일이 끝나자 드디어 대내(大內)에 들어가서 친히 스승으로서 예를 받았다.
임금이 광명사(廣明寺)가 궁에서 가깝다하여 국사가 거기에 머물기를 청하고, 거듭 거돈사(居頓寺)를 본사(本寺 자기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절)로 하여 향화(香火)의 경비를 충족하게 하였다. 8월에, 임금이 병이 들고 국사도 또한 등에 종기가 났다. 문인들이 기도하기를 청하니, 국사가 성낸 빛을 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의 몸이 편안하지 아니하신데, 내가 다행이 병이 들었으므로 임금의 병을 내 몸에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너는 나를 나으라고 빌겠단 말이냐.” 하였다. 임금이 승하하고 지금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여서는 아버지의 스승으로 편안하게 한다고 하여 다시 스승의 예로 높이니, 은총과 지우가 더욱 아름다웠다. 진강공도 또한 사랑하는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서 머리를 깎고 불도에 들어가 그의 문인이 되게 하였으며, 그밖의 사대부들도 또한 그렇게 하니 문하에 제자의 성대함이 근고에 없는 일이었다.
정우(貞祐) 5년에, 갑자기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미한 집안에서 나서 왕자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분에 만족한다. 어찌 은총을 탐내 오래도록 임금의 측근에 있어야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퇴임하기를 매우 간곡하게 비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화장사(花藏寺)가 환경과 지형이 깨끗하고 경치가 좋으며 땔나무와 물이 풍족하다고 하여, 내려가 이 곳에서 편안히 지내기를 청하였다. 떠나려고 하니, 진강공이 맞아다가 전별의 연회를 열었는데, 공이 나와 절하고 친히 국사를 곁에서 부축하여 섬돌을 올라갔다. 떠나는 길에 오르니, 좋은 말을 기증하고 또 문객 등을 보내어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국사가 비록 천리 밖에 있으나 그를 돌봐 주는 임금의 마음은 그침이 없었다. 자주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며 먹을 것을 내리는 일도 또한 없는 달이 없었다. 절에 내려온 지 13년인 기축년 6월 15일에, 우뢰가 사납게 진동하고 큰 돌이 무너져 떨어지더니, 이 날 국사께서 미미한 병 증세를 보였다. 7월 2일 새벽에 일어나 손발을 씻고 문인 현원(玄源)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임금과 지금의 정승 진양공(晋陽公)과 고승(高僧)인 송광사주(松廣社主)에게 영원히 떠나간다는 것을 보고하라는 부탁이었다. 편지 쓰기를 마치고 한참만에 말하기를, “오늘 가는 것은 아직 편치 않으니, 뒷날 작별하기로 하자.” 하고, 드디어 잠들었다. 8일에 급히 일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광은 적적하고 / 定光寂寂
혜일(부처의 지혜를 햇빛에 비유한 것)은 밝고 밝다 / 慧日明明
법계와 진환(속세)이 / 法界塵寰
배꼽 둘레에 갑자기 나타난다 / 臍輪頓現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뒷날 밤에 달이 처음 밝을 때 / 後夜月初明
내 장차 홀로 스스로 가리라 / 吾將獨自行
하였는데, 어디가 스님의 홀로 갈 곳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푸른 바다는 광활하고 / 蒼海濶
흰구름은 한가롭다 / 白雲閑
터럭하나라도 가져다가 그 사이에 붙이지 말라 / 莫將毫髮着其間
하였다. 말을 마치자, 두 손을 깍지끼고 마주잡아 가슴에 대고 소연(翛然 빠른 모양)히 앉아서 가시니, 얼굴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 빛은 붉고 윤택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급히 달려가 쳐다보며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부고를 듣고 매우 슬퍼하며 측근의 신하인 장작소감(將作少監) 조광취(趙光就)와 일관(日官) 등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드디어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주어서 등선산(登禪山)의 기슭에 장사하였다. 이어 제서(制書)를 내려 정각국사(靜覺國師)라고 시호를 추증하였다. 향년 85세이며 중으로서의 생활은 75년이었다.
국사의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고, 성질대로 이치에 따를 뿐이었다. 비록 차례차례로 큰 절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나, 매양 식사할 때가 되면 여러 사람들보다 먼저 나가서 손수 바리때(중의 밥그릇)를 받들고 서서 기다렸으며, 변변치 않은 밥과 멀건 국으로 여러 중들과 맛을 같이 하고 일찍이 반찬과 음식을 따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불사(佛事)에 정성을 다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와 혹독하게 더운 때에도 조금도 몸을 기울이거나 게을리 하는 빛이 없었다. 이런 일은 늙은이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능히 실행하였다. 아, 참으로 화신(化身)한 보살이었다. 그의 감응과 영이한 일은 비록 많으나 그 도의 경지에서 보면 모두 미세한 것이요, 또 나머지 혹 후인들이 괴이하고 허황되게 여길 것이 두려우므로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문인인 대선사 곽운(廓雲) 등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사가 몰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신 등은 깊이 한되게 여기고 있습니다. 글 잘하는 자에게 청하여 돌에 새겨서 그 전(傳)함을 영구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이어 액(額)을 내려 아무개의 비라고 하였다. 신이 감히 사절하지 못하여 삼가 두 번 절하고 명(銘)을 짓기를,
보제달마(중국 선종의 초조)가 마음을 전하여 / 達磨傳心兮
신령한 빛이 동방에서 빛났는데 / 靈光東曜
후학들이 거꾸로 보아 / 後學倒見兮
거울을 등지고 비치기를 구하였다 / 背鏡求照
밝고 밝게 빛나는 국사이시여 / 焯焯國師兮
태양을 들고 걸으시니 / 揭日以行
한 번 연기 기운이 훤하게 열리자 / 一廓煙氛兮
어둡고 몽매함이 다 사라졌네 / 昏矇皆
법왕이 세상 나오심이여 / 法王出世兮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도다 / 祖月重暉
깨달음의 길이 남쪽을 맡으니 / 覺路司南兮
배우는 자 돌아갈 데를 알리라 / 學者知歸
문인과 제자들이 수풀처럼 많음이여 / 門弟林林兮
친히 젖을 먹이고 / 親哺以乳
또 날개로써 그 새끼를 덮어 주며 / 又翼其鷇兮
내놓아서 날게 하여 주셨네 / 放之使飛
복을 심음이 많고도 오래이니 / 種福滋久兮
윤택함을 흘러보냄이 끝이 없어라 / 流潤罔極
천자가 존귀함을 굽히어 / 天子屈尊兮
북면하고 유익함을 청하였네 / 北面請益
살아서는 제왕의 사범이 되고 / 生爲帝範兮
죽어서는 나라의 스승이 되었네 / 卒作國師
귀감이 이에 없어졌으니 / 龜鑑斯亡兮
어디에서 법칙을 받을 것인가 / 安所取則
임금께서 소신에게 명령하여 / 上命小臣兮
국사의 사적이 어둠에 묻히지 않기를 기약하시자 / 期以不晦
신이 절하고 비명을 새겨 / 臣拜刻銘兮
산과 더불어 길이 짝을 짓노니 / 與山作配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아 / 來者去者兮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릴지어다 / 騎行卽下
차라리 부처에게는 절하지 않을지언정 / 寧不拜佛兮
오직 이 비에만은 절할진저 / 惟碑是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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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가을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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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가을날에 도봉산(道峯山)에서 노닐다. |
길은 외로운 뗏목이 막힌 데서 기울고 / 逕側孤槎擁
시내는 작은 골짝 음지로 돌아 흐르네 / 溪廻小洞陰
단풍이 짙으니 산 기운이 풍부하고 / 楓酣山氣富
등덩굴 침침하니 물 소리가 깊구나 / 藤暗水聲深
뜻을 얻으면 때로 말하길 잊고 / 得意時忘語
사람을 생각하면 읊는 것도 폐하네 / 懷人亦廢吟
맑은 물에 고기 구경하기 즐거우니 / 淸流玩魚樂
지극한 이치는 무심한 데 있다오 / 至理在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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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 ||||
도봉(道峯) |
서른여섯 봉우리의 숭산은 낮은 붓걸이에 불과하고 / 六六嵩岑低筆格
아홉 봉우리의 여산은 작은 병풍에 지나지 않네 / 三三廬阜小屛風
구름과 안개 밖에 들쭉날쭉 첩첩이 / 參差重疊雲霞外
푸른 옥빛 부용이 하늘 가득 치솟았네 / 碧玉芙蓉揷滿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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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 ||||
도봉산(道峯山). 운로의 시에 차운하다. |
승경이 명류를 만나기란 고래로 드물거니와 / 勝境名流古罕逢
어딘들 유종들 다 모인 이곳만 하랴 / 誰如此地萃儒宗
시의 근원은 천길 폭포와 함께 빼어나고 / 詞源共拔千尋瀑
기상의 높음은 만장 봉우리를 능가하네 / 氣岸爭陵萬丈峯
누각에 기대노라니 이내의 빛이 점점이 오고 / 倚閣嵐光來片片
개울 건너노라니 솔 그림자 겹겹이 잠겼구나 / 步溪松影倒重重
석루의 노장들 풍류가 건재하니 / 石樓諸老風流在
오늘 같은 모임이 자주 있어야 좋겠네 / 好事如今合比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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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 ||||
도봉산(道峯山)을 바라보며 짓다 |
조화옹의 기교에 마음 몹시 놀라니 / 奇巧心偏怪化翁
수많은 손놀림이 신묘 막측하구나 / 幾般摶弄妙難窮
온갖 형상이 땅 아래에 조밀한데 / 萬形掩翳黃塵下
한 바위 봉우리가 창공을 찌르네 / 一骨嵯峨碧落中
달을 보매 세상의 어둠 아랑곳없고 / 看月不妨人界黑
꽃을 흩날리매 내내 하늘이 붉어라 / 散花長得佛天紅
벼랑 중턱 노송에 걸린 높다란 둥지 / 半崖松老危巢倒
몇 조각 구름이 학의 뒤를 따르네 / 數片雲隨鶴背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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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書) | ||||
이동보(李同甫)에게 답함 - 무진년(1688) 6월 5일 |
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가운데 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이 몸이 죽을 날이 매우 가까이 왔는데, 어찌 오늘 천리 밖 고인(故人)의 편지를 받아 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너무도 놀랍고 반가운 나머지 묵묵히 아무 말도 못하였네.
서문(序文) 2첨(籤)은 잘 보았네. 상첨(上籤)은 비록 겸허한 편이나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 너무 직절(直截)한 듯하기에 삼가 하첨(下籤)을 취하겠네. 다만 영본(嶺本)이 이미 전포(傳布)되었다 하니, 일이 이미 끝난 뒤라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구황(救荒)에 대한 조례(條例)는 회옹(晦翁)의 유법(遺法)을 사용했으리라 생각되네. 그러니 회옹의 덕택이 이곳 해우(海隅)의 창생(蒼生)에게까지 미쳤다 하겠네.
회옹은 당시에 자신이 지나간 강산(江山)을 미처 구경할 겨를이 없었는데, 동보(同甫)는 빠짐없이 탐방하고 있으니, 혹 오늘날의 형편이 순희(淳煕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때와 달라서인지, 아니면 백성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는 마음이 회옹에게 미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한번 웃음직한 일일세. 다만 상상하건대, 활달한 기분으로 산에 올랐다가, 낭랑하게 읊조리며 날아서 내려오는 일은 의상(意象)에 있어서는 비록 넓고 좁으며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그 엄격히 묵계(默契)되는 의취(意趣)야말로 속사(俗士)가 엿볼 바가 아닌데, 그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유감일세. 그러나 자네가 구경한 데가 구룡연(九龍淵) 최하의 한 폭포에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스스로 내가 약간 낫다고 여기네. 그 폭포는 박연(朴淵)에 비하여 높이가 갑절이나 되고 그 기세의 웅장함이 천하에 둘도 없을 듯하네. 내뿜는 물줄기가 마치 쏟는 듯하여 도저히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네.
일찍이 도봉(道峯) 산길에 남긴 나의 필적(筆跡)이 제현(諸賢)들의 배려에 의하여 새겨졌으나, 뒤에 윤휴와 허적의 무리가 나를 미워하여 이를 파 버렸다 하는데, 이번에 만폭동(萬瀑洞)에 새겨진 주자의 시(詩)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니, 혹 오늘날 군자(君子)의 지론(持論)이 전날보다 약간 완화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 횡거(橫渠 송 나라 장재(張載))의 동명(東銘)을 늘 외워 왔건만, 실없는 농담이 가끔 나오곤 하니, 혹 구습(舊習)이 없어지지 못한 때문이 아닌지, 우스운 일일세.
오미자(五味子)는 일찍이 가제(家弟)를 위하여 부탁한 것인데, 참으로 기쁘기 이를 데 없네. 이 밖의 세 가지 약재(藥材)에 대해서도 아울러 감사드리네.
별지
일전에 왕복(往復)한 서신이 누설되어, 혹 무슨 곡절이 생겼을까 염려일세. 그때 내시(來示)를 보고 나서 나의 뜻이 시원하던 참에, 평소 자네를 의심해 오던 절친한 사람을 만났기에 내가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 의혹을 풀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그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서신을 보자고 매우 간절히 청하므로 잠시 꺼내 보였다네. 혹 이것으로 인하여 전파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이외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자네가 구설(口舌)의 시끄러움을 면하고 싶은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찌 그럴 리야 있겠는가마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경원(慶元) 당화(黨禍) 때의 일을 잘 간파하지 못한 듯하네.
또 새로운 비방이 적지 않다고 하니, 이 또한 우스운 일일세. 들으니 자네가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아무[某 송시열을 가리킴]는 진정 주자에 미칠 수 없다. 요즈음 대윤의 연보(年譜)를 보았지만, 주자가 만약 이를 보았다면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아무는 진정 주자에 미칠 수 없다.’고 하므로, 저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장차 나의 뒤를 이어 자네를 탄핵하려 한다고 하기에 내가 듣고 웃으며, 이는 저들의 탄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온 사류(士類)가 탄핵을 가해야 옳을 일이라고 하였네. 왜냐하면, 주 선생(朱先生)의 각하(脚下)에 어찌 감히 급불급(及不及)이란 어휘를 쓸 수 있느냐는 말일세.
그러나 주자가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느냐는 말은 진실로 확론일세. 왜 주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과 임율(林栗)을 배척한 일을 보지 못하였던가. 임율은 다만 역서명(易西銘)을 논하다가 그 본의를 상실하고 거기에 미혹되어 돌아서지 못하였을 뿐인데, 주자의 박정(駁正)이 극히 준엄하여, 탄핵까지 받기에 이르렀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지금 만약 대윤의 반복 휼광(反覆譎誑)하여 음사(淫辭)를 방조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 배척이 어찌 무부무군(無父無君)과 솔수식인(率獸食人) 정도로만 그치겠는가. 지금 그 유독(流毒)은 이미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옛날에 왕 상서(汪尙書 송 나라 왕응신(汪應辰))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소씨(蘇氏)의 시를 쓴 선비 두 사람을 선발하자, 주자의 배척이 엄절(嚴切)하였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 대윤의 무리가 지공거가 되어 장주(莊周)가 성인을 업신여기는 말을 글제로 내어 선비를 선발하였으니, 세도(世道)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는 윤휴의 작용(作俑 좋지 않은 일의 발단을 만드는 것)과 대윤의 당조(黨助)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두려운 일일세.
저들이 나더러 우옹(牛翁 성혼을 말함)을 비방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가리킨 말인지 알 수 없네.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당황스럽게 하네. 그러나 주자가 일찍이 선배를 경시(輕視)하는 일을 들어 배우는 이들을 경계하는 한편, 선배를 너무 존외(尊畏)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고 좌우로 눈치를 살피며 뜻을 굽혀 주선(周旋)할 뿐, 의리(義理)의 시비와 문의(文意)의 당부(當否)를 알지 못하는 것을 그르다 하였는데, 저들이 만약 내가 망녕되이 의리와 문의를 논하는 것을 들어 우옹을 비방했다고 한다면, 이는 주자의 대훈(大訓)을 알지 못한 탓일세. 대저 주자의 이 전후(前後) 두 말씀에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분별을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이는 이를 반드시 알아야 하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번 서신에, 탄사(灘祠) 운운한 말은 과연 저쪽의 서당(書堂)을 가리킨 것일세. 전일 용담(龍潭) 홍석(洪錫)이 지명(地名)으로 인하여 협곡(峽谷) 중에 정(程)ㆍ주(朱)의 사우(祠宇)를 건립하려 하기에 내가 적극 만류하기를, 어찌 이 다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았네. 그 뒤에 수호(守護)하는 사람이 없는가 하면, 후임자(後任者)가 이를 그르다고 배척하여 수직(守直)하는 전복(典僕)까지 빼앗고 마을 사람들이 마구 더럽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제야 그가 개탄하기를, 송모(宋某)는 참으로 성인이라고 하였네. 이는 부유(婦孺)라도 다 짐작할 바인데, 그 사람만이 알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의 망발을 깨닫지 못하고 몹시 후회하게 되었던 것일세. 또 저번에 철원재(鐵原宰)가 사계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려 하기에 내가 역시 적극 만류하여 그만두었으니, 오늘날 저쪽에서 사우(祠宇) 건립을 중단한 것은 잘한 일일세.
작은 사우에 고청(孤靑 서기(徐起))을 모시겠다는 계획은 조금은 경우가 다르네. 고청이 천한 신분으로서 굴기(崛起)하여 훌륭히 다사(多士)의 사장(師長)이 되었으니, 그 조예의 여하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죄과(罪過)가 있는 사람은 아니네. 그러나 지금 그런 분을 봉사(奉祀)하는 일은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네.
이상 외람된 말은 모두 가르침을 청하고 미혹을 깨우치자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 다음 인편에 회시(回示)해 주기 바라네.
[주D-002]만폭동(萬瀑洞)에 …… 시(詩) : 현종 3년(1662) 3월에 송시열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만폭동 반석(盤石)에 주희(朱熹)의 ‘맑은 시내 흰 돌과 취향을 함께하고, 갠 달 맑은 바람 특별히 전하리[淸溪白石要同趣 霽月光風更別傳]’라는 시를 친필로 써서 새겨둔 것을 말한다. 《宋子大全附錄 卷4 年譜》 《宋子大全隨箚 卷9》
[주D-003]경원(慶元) 당화(黨禍) : 경원은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주희가 당시의 권신(權臣) 한탁주(韓侂胄)를 탄핵하자, 그 원한을 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배척하여 주희의 관작(官爵)을 삭탈함과 동시에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축출하고 도학자의 등용을 금한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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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잡록(記述雜錄) | ||||
권상하(權尙夏) |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를 높인 말)ㆍ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높인 말)ㆍ장자(張子 장재(張載)를 높인 말)의 뒤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折衷)하여 경전(經傳)을 발휘(發揮)해서 만세의 보전(寶典)으로 만들었으니, 이른바 여러 현인(賢人)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회옹 부자가 죽고 나서는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서 괴이한 논설(論說)들이 시끄럽게 나와 사도(斯道 성인의 도)가 묻혀 버리고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참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되어 유학의 문을 열어젖히고 성리(性理)의 호리(毫釐)를 분석하였으니, 그 이학(理學)을 밝힌 공이야말로 저 염락(濂洛)이 융성했던 시대보다 신속하고도 훌륭했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우암 선생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밝혀 놓은 이학을 더욱 확대시키고 천명(闡明)하여, 멀리는 고정(考亭 주희가 살던 지명으로, 곧 주희를 가리킴)의 정통(正統)을 연접하고 가깝게는 제유(諸儒)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거룩하게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니, 그의 공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회옹은 공자(孔子) 이후의 일인자(一人者)요, 우암은 회옹 이후의 일인자이다.
선생은 훌륭한 덕과 크나큰 업적으로 백세의 종사가 되었으니, 그의 한마디 말과 문자(文字) 하나하나가 모두 무궁토록 후세에 전할 만하다.
선생의 문집(文集) 가운데는 어떤 글을 막론하고 취할 것은 그 전문(全文)을 다 취해서 넣어야지, 산삭(刪削)하는 일은 큰 안목(眼目)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경의(經義)와 예의(禮疑)는 모두 본집(本集) 가운데 편입시켜야 하며, 시집(詩集)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예(例)에 따라 차례대로 편입시키는 것이 매우 온당하나, 다만 연월(年月)의 선후를 상고하기가 용이치 못한 점이 있다.
도봉산(道峯山) 무우대(舞雩臺)의 남쪽에 푸른 절벽이 높다랗게 깎아질렀는데, 그 아래는 큰 바위가 시내를 가로질러 있다. 이 바위에다 선생이 친히 써 놓은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새겨 놓았는데,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힘차서 만 길이나 되는 산봉우리와 서로 겨룰 만하였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릴 때부터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풍도(風度)를 익히 들었던 터라,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숭앙하기를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다음으로 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비문(碑文)ㆍ행장(行狀) 등의 문자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선생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특별히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위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임 장군에 대한 표장(表奬)이 곡진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말세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올린 소(疏) 가운데, 대비(大妃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역모(逆謀)에 가담했다는 등의 말이 있고 이어서 그러나 결코 대비를 폐출(廢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 사실이 있는데, 춘당(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정한강의 이 소(疏)를 보고서 하루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에게,
이(尼 윤증(尹拯)이 이산(尼山)에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킴)는 탄곡(炭谷 권시(權諰))이 장인(丈人)이고 권유(權惟)ㆍ권기(權愭)가 처남(妻男)이었으므로, 젊었을 때부터 다년간 한방에서 지냈고, 그의 아우(윤증의 아우인 윤추(尹推)를 말함)는 이유(李)가 장인이고 이삼달(李三達)이 처남이었으므로 정분(情分)이 천륜(天倫)에 가까운 사이이니, 서로 돈독히 믿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남인(南人)들은 ‘허견(許堅)과 이남(李枏 왕족(王族)인 복선군(福宣君))이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역적(逆賊)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역적이란 군상(君上)을 모해(謀害)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허견과 이남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랐으니,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하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봉호)이 강압적으로 옥사(獄事)를 일으켜 대신(大臣)들을 마구 살해하였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크나큰 화(禍)였다.’ 하였다.
윤증은 마음속으로, 선생이 거제(巨濟)에서 유배(流配) 생활이 풀려 돌아오면 훈척(勳戚)들을 내쫓고 윤휴(尹鑴)ㆍ허적(許積) 등의 무리에게 신원을 해 주어야만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선생의 뜻은 왕실(王室)을 반석(盤石)처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을 쌓는 일이요 죄를 짓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윤증이 크게 경악하여 권이정(權以鋌 권시(權諰)의 손자요, 송시열의 외손자며, 윤증의 처질(妻姪)이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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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시(五言詩) | ||||
도봉산(道峯山)의 맑은 날 구름 |
구름은 빈 곳에서 일어나고 / 雲從虛處生
봉우리는 공중에 비끼었나니 / 峯向空中橫
이 둘이 만나 고운 자태 짓고 / 邂逅作媚娬
아침 해는 맑게 갠 하늘 비춘다 / 朝日弄新晴
고요히 앉아 이 광경 구경하는 / 宴坐自娛翫
주인 또한 속세의 정을 잊노라 / 主人亦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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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 ||||
소광정기(昭曠亭記) |
도봉(道峯)은 옛날 영국사(寧國寺) 유지(遺址)가 있던 곳이다. 봉만(峯巒)이 빼어나고 수석(水石)이 깨끗하여 본디부터 기내(畿內) 제일의 명구(名區)로 일컬어졌다. 만력(萬曆 명 신종) 계유년에 사옥(祀屋)이 창건되어 마침내 서울 동교(東郊)의 대유원(大儒院)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체와 규모가 성균관에 다음가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쪽으로 백 보를 다 못 가서 시내 위에 조그마한 대(臺)를 지어 무우(舞雩)라 이름하고, 대의 동쪽으로 문(門)을 내어 이를 영귀(詠歸)라 이름하였으니, 대체로 증점(曾點)이 무우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다.
대의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는 동춘 선생(同春先生)이 쓴 여덟 대자(大字)가 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 뻗치어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 선생(尤齋先生)이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한데 써서 모아 놓은 것이 있는바 그 필세(筆勢)가 매우 힘차서 만장봉(萬丈峯)과 기세가 서로 등등하다. 그런데 계사년 여름에 큰비가 와서 홍수가 산을 삼켜버림으로 인하여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 떠내려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었고 두 선생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되었으니, 참으로 고금에 없던 변고였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대(大)가 물러가고 소(小)가 옴으로써 소인들의 중상(中傷)이 두 선생의 묘향(廟享)에까지 미칠 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의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먼저 그 조짐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친구 파평(坡平) 윤봉구 서응(尹鳳九瑞膺)이 바야흐로 원사(院事)를 주관하여 이에 침류당(枕流堂)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의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편편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지었다. 이는 대체로 구기(舊基)가 이미 파여서 못 쓰게 됨으로써 부득불 겁수(劫水)에도 안전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짓게 되었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겠는가.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5, 60인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와 영귀의 뜻이 본래 기수에 목욕한다는[浴沂]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필적의 진본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중신(重新)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 좌우에는 그 위를 그늘지어 줄 소나무나 노송나무가 없으므로, 이곳에 오르는 이들이 이를 흠으로 여겼다. 그러자 서응(瑞膺)이 등나무와 풀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 남쪽 비탈의 층암(層巖)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 하나를 찾아내어 이곳의 잡초 등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니, 사방의 넓이가 기둥 4개를 세울 만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면 저 돌아드는 물과 깔려 있는 암석은 바로 눈 밑에 있고, 무우대와 두 석각(石刻)과 튼튼한 장옥(墻屋)과 우뚝우뚝 솟은 봉만(峯巒)들이 모두 조망(眺望) 가운데 죽 배열되었으니, 그 누가 이렇게 그윽한 속에 이토록 밝게 탁 트인 지경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혹 조화옹(造化翁)이 짐짓 이곳을 비장(秘藏)해 두었다가 호사자(好事者)를 기다려서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에 모정(茅亭) 한 칸을 지어 소나무와 노송나무의 그늘을 대신하니, 그 제도가 정밀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아서 산중의 한 가지 진기한 완상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응의 성근한 뜻이 아니면 그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서응이 하루는 나에게 와서 이 모정의 이름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지에 이르면 고인(古人)이 이를 일러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경유하고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서로 같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소광정(昭曠亭)이란 세 글자로 제명(題名)하고 아울러 그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여 문지방 사이에 걸도록 하노니, 후일 이 원(院)에 노닐고 이 정자에 오르는 이들은 이 명칭을 돌아보아서 더욱 힘쓰기 바라는 바이다.
[주D-002]대(大)가 …… 옴으로써 : 대는 양(陽)으로서 군자의 도를 뜻하고, 소(小)는 음(陰)으로서 소인의 도를 뜻한다. 《周易 否卦》
[주D-003]겁수(劫水) : 불가(佛家)의 말로, 세계가 괴멸(壞滅)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수재(水災)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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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
○ 본관은 한양으로 자는 효직(孝直)이요, 호는 정암(靜菴)이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으며, 과거(科擧)의 학문을 즐겨하지 않았다.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서 배워서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다. 을해년(중종(中宗) 10년)에 효도하고 청렴함으로써 천거되어 사지(司紙) 벼슬을 임명 받았고, 이 해 가을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4년 간에 특진하여 대사헌(大司憲)을 배명 받았다. 사문(斯文 유학)을 일으키고,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신무문(神武門)의 변이 일어나자, 성균관과 사학의 학생들이 대궐을 지키고 호곡(號哭)한 자 천백(千百)에 달했으나, 결국은 능성(綾城 능주)으로 귀양을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특히 영의정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 선생은 《소학(小學)》을 독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숭하면서 모든 경전(經傳)에서 그 정신을 발휘하였다. 〈행장(行狀)〉
○ 선생은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묘(盧墓)살이를 했는데 항상 반드시 묘를 대하여 앉았으며, 전곡(奠哭 음식을 차리고 곡하는 것)의 여가에는, 묘의 주위를 두루 살펴서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도 오히려 애절한 슬픔을 품고서 이에 묘 옆에다 터를 잡아 초당 두어 칸을 지어서 영구히 사모하기 위한 장소로 하고, 또 그 옆에 시냇물을 당겨들여 못을 만들고 섬돌을 구축하여, 연(蓮)과 잣나무를 심어놓고 항상 여기에 와서 놀았으니, 이는 평소 고아함을 즐기는 회포였다.
○ 조광조는 난(鸞)새가 앉아 있는 듯, 봉황새가 버티어 선 듯, 옥(玉)처럼 윤택하며, 금(金)처럼 정간하며, 아름다운 난초가 향기를 뿌리는 듯, 밝은 달이 빛을 내는 듯하였다.
○ 일찍이 천마산(天磨山)과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글을 읽고 익히는 여가에 오뚝히 앉아 해가 다하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지신명을 대하듯 경건히 하여 수양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사람들의 미치지 못할 바였다.
○ 조정에 나아가면 하루 세 번씩 임금이 접견하고, 물러나오면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존경하여 우러러보니 이것은 가위 상하(上下)가 어울려 기뻐하기 천재일우의 기회라 하겠다.
○ 선생은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꿇어앉고, 손은 반드시 팔꿈치를 맞잡았으므로 입은 옷은 꼭 팔꿈치와 무릎 부분이 먼저 떨어졌다.
○ 첫째 불행은 급제(及第)하여 너무 빠르게 벼슬이 진급한 것이요, 둘째 불행은 벼슬을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셋째 불행은 귀양간 땅에서 최후를 마친 것이다.
○ 매양 임금과 대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정제하고, 생각을 숙연히 하여, 신명(神明)을 대한 것 같이 하며,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하는 말은 충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 빗질하고 우러러 생각하여 반드시 몸소 체득함을 기하였으며, 한 번도 체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한계(限界) 지은 적은 없었다.
○ 선생이 능성(綾城)에 귀양가 있을 때, 사약을 내리는 왕명이 이르자, 목욕하고 관대하여, 안색을 변치 아니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고 조금도 원망하고 허물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임금을 사랑함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고, 나라를 근심함은 내 집을 근심함과 같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백일(白日)이 하토(下土)에 임하리니, 밝고 밝게 나의 붉은 마음을 비추리라.”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왕명을 받아 〈계심잠(戒心箴)〉을 지어 바쳤으니, 이르기를, “하늘의 이치가 흐리고 어두우면, 기운도 또한 막히고, 사람의 도리가 무너지며 만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계심잠〉
○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사대부의 집에서 검약하게 하여 스스로 견지한다면 그 자손은 오래도록 패(敗)하지 않으나, 연락(宴樂)하며 스스로 방자하면, 집은 곧 기울고 가산은 탕멸하나니, 폐조(廢朝 연산군 시대) 말년에 사대부가 오락에 탐닉하고 사치에 쏠리게 되어 국가가 거의 위태하였는데, 지금의 유식한 자들도 역시 습속(習俗)을 따라서 검약한 것을 가리켜 쓸쓸하다고 하고, 놀고 잔치하는 것으로써 큰 기상이 있다고 하니, ‘한 말로 나라를 망친다.’는 말은, 바로 이를 이름입니다.” 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선생이 말하기를, “세간에는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화초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거위와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나, 만일 마음이 외물로 내달리게 되면, 반드시 집착하기에 이르러 끝내 도(道)의 지경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물건을 완성하다가 뜻까지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다.” 하였다.
○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師事)를 하였고, 장성함에 이르러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매 그 한때의 사람으로 그를 헐뜯고 비방하는 자가 퍽 많아서, 혹자는 화근(禍根)거리라고까지 하고, 친구들이 모두 관계를 끊고 사귀지 않았으나 선생의 입지(立志)는 심히 독실하여 조금도 흔들려 굴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의 학문으로 후진을 창도하니, 깨닫고 분발한 자가 많았다.
○ 선생이 지은 춘부(春賦 봄을 읊은 글)에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이르기를, “봄이란 것은, 천리의 으뜸이다. 사시(四時)는 봄으로부터 시작되며, 사단(四端)은 인(仁)으로부터 발현되나니, 봄이 없으면 시절의 차례가 성립되지 못하고, 인(仁)이 없으면, 선심(善心)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이 행하여 사시가 이루어지고, 사람은 욕심이 있어 인(仁)을 상실하여 선심의 실마리를 확충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슬퍼져서 부(賦)를 짓는다.” 하였다. 동상(同上)
○ 선생이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에 올라 한적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걸으며 가만히 읊조리니, 소연(蕭然)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듯한 감상이 있었다. 〈비서(碑序)〉
○ 급히 등용되어서 융화되어 통할 수 없었고, 일찍이 생을 마쳤으니 말을 세울 수 없었으나, 가르침을 베풀고 인도할 때에는 재질과 천품을 따라서 품평하여 알아보았으며, 그 기량과 식견을 취하였다.
○ 일찍이 천마산(天磨山)의 절에 우거할 때, 우뚝히 있는 모양은 소상(塑像) 같았으며, 괴로움을 겪고 담식(淡食)하기를 중들과 같이하였다.
○ 기묘년(중종(中宗) 14년)에 사화가 일어나서 선생과 제공(諸公)들이 금부(禁府)에 하옥되었고, 선생은 능성으로 귀양갔었는데, 담장[墻]을 짚고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는 연연한 정을 폈었다.
○ 매양 진강(進講 임금께 나아가 강독하는 것) 전날 저녁에는 단정하게 앉아서 익히 읽기를 임금의 곁에 있는 것같이 하고, 새벽이 되면 나아가서, 숙연(肅然)히 대해 모시어서 반드시 감동하시기를 바랐었다.
○ 선생은 일찍이 치도(治道)에 대하여 개진(開陳)하였다. 성(性)과 정(情)ㆍ선(善)과 악(惡)ㆍ의(義)와 이(利)의 분변에서부터 천(天)과 인(人)ㆍ왕(王)과 패(覇)ㆍ옳음과 사특함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기울여 내어 벌려놓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날이 저물어도 권태를 몰랐다.
○ 몸을 살피며 사욕을 극복함을 우선으로 삼고, 경(敬)을 잡아지키며 정(靜)을 주로함을 힘쓸 것으로 삼아, 침잠하고 각고하며,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다.
○ 선생이 대사헌이 되어, 입대할 때마다 예(例)를 이끌어 의리(義理)를 깨우쳤는데 종횡으로 드나들어 한 가지 언사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하여 비록 극히 추운 날이나 몹시 더운 여름이라도 해가 한낮이 될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말한 것은 허락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같이 모시고 있는 자는, 이것을 괴롭게 여겨서 모두 싫어하는 빛을 가졌었다. 《척언(摭言)》
“□□바치는 물건이 과다하므로 백성은 날로 곤핍하게 되나니, 경비 쓰는 것을 적당히 감한 후에라야 거의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경연진설(經筵陳說)》
○ “옛일을 몸소 체득하여 어떤 일은 배울만하고, 어떤 일은 배우지 못할 것이라 하여 공력(功力)을 누적해감으로써 탐구하신다면 비록 한 번에 한 장을 강(講)한다 하여도 얻은 바가 많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한번에 10장을 강한다 해도 다만 헛된 형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아들이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임금이 신하를 잘 알지 못한다면,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인금과 신하는 대개 아버지와 아들과 한가지인 것이다.
○ 뜻이 큰 사람은 비록 경륜의 대업(大業)을 못할지라도 큰일에 임하여 능히 그 지조를 잃지 않나니, 산을 오름에 비유한다면, 정상에 가기를 목표한 자는 비록 정상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여도 산 중턱까지는 오르게 되나, 산 중턱까지만 오르려 한 자는 산 밑을 떠나지 못해서 반드시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 임금된 이는 마땅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려내야 하는데, 소인을 가려내기란 지극히 어렵고, 군자를 가려내기란 쉬운 것 같으니, 먼저 그 알기 쉬운 것을 가려 쓰면 비록 소인이 있더라도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옵니다.
○ 이원(利源 이익이 생기는 근원)이 한 번 열리면 그 해가 대단히 큽니다. 선비된 자 평시에는 그 지론이 비록 정직한 것 같으나, 일단 일이 있으면 손발이 황당하고 어지럽사오니, 이원은 곧 국가의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끊은 후에라야 오래도록 그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 임금께 몸을 맡겨서 신하가 되었다면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야 하며, 한 몸의 근심과 재앙은 헤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자는 항상 적고 착하지 못한 자는 항상 많으므로, 재앙과 근심을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어, 만약 일단 일이 있으면 놀라고 의심하고 위축하지 않음이 없어서 임금 앞에 낯을 들고 극간(極諫)하는 자가 드물게 되는 것입니다.
○ 중인(中人 자질이 중급 정도인 사람) 이하는 선한 일을 하건 악한 일을 하건 간에 시대의 숭상하는 것을 따르나니, 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권려(勸勵)하는 도(道)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비의 습성이 부정한 것을 밑에 있는 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 폐조(廢朝 연산군) 때에는 환관들이 선동하여 소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대신(大臣)들이 부정하고 음험하여 왕의 뜻만을 엿보고,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마음대로 갚았으니, 성종조(成宗朝) 초년부터 양성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고 하나도 남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상(同上)
○ 가정(嘉靖) 임오년(중종 17년)에 몹시 가물었다. 강령현(康翎縣)에서 세 사람이 같이 김을 매다가, 한 사람이 말하기를, “가뭄이 이같이 심하니, 틀림없이 흉년이 들 것이다. 듣자니, 재상(宰相) 조광조(趙光祖)는 청백하고 간결하여 각 도(道)ㆍ주(州)ㆍ군(郡)에는 절간(折簡 호출장)이 일체 없어져 이에 따라 마을에는 소리 치는 아전들이 없었는데 지금 들으니 귀양가서 죽었다 하니, 천재(天災)가 이로써 연유한 것 같다.”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에 와서 고해 바치자, 말한 농부를 곧 잡아다 고문하여 결국 극형을 받았고, 한 사람은 같이 김을 매었으면서도 고해 바치지 않았다는 죄(罪)를 입었고, 고해 바친 자는 상을 받았다. 《 수언(粹言)》
○ 기묘년에 조정암(趙靜菴)과 여러 관원들이 귀양을 갔다. 황계옥(黃季沃)이란 자는 먼저 구제를 위한 소(疏)를 짓고는, 또 윤세정(尹世貞)과 이래(李來) 들과 연명하여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정암은 마침내 이것으로써 화를 입게 되었다. 황계옥은 조정암을 구하는 소와 죄를 청하는 두 가지 소를 지어서 흉악한 짓을 행하였으니, 그 간특하고 사휼한 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패관잡기》
○ 기묘년 가을에 남곤(南袞)이 조광조와 같이 시관(試官)으로 있을 때, 성수종(成守琮)의 시권(試券)을 보고, 정암이 말하기를, “성수종 아니면 이와 같은 문사(文辭)를 능히 짓지 못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합격하였다. 화가 일어나자, 그 허물을 정암에게 돌려서 문리(文理)가 연결되지 않는 데 사정을 두어 시험에 뽑았다 하며 이름을 방목(榜目 합격한자 명부)에서 삭제하였다.
○ 기묘년 10월에 좌상(左相) 신용개(申用漑)가 죽었다. 왕이 예(禮)에 의하여 애도를 표하려 하니, 대신(大臣)들이 의논하여 난처하다고 하므로 거행하지 못하였다. 후에 조광조가 입대하여서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는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 세종의 곡(哭)소리는 바깥까지 들렸다 하여 지금까지도 그 말을 듣는 이가 송동(竦動)하지 않는 이 없습니다. 전일에 하교하신 뜻이 심히 아름다웠으나, 대신들이 별전(別殿)에서나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으니, 그 능히 임금의 좋은 점을 그대로 받들어 시행하지 못함이 심하였습니다. 세종(世宗) 때에 유관(柳寬)과 유정현(柳廷顯)의 죽음에 금천교(禁川橋) 밖에다 악차(幄次 천막)를 설치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하나이다.” 하였다. 《잡기(雜記)》
○ 기묘년 10월에 대사헌 조광조 등이 합사(合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을 3사(司)라 하는데, 합사(合司)란 어떤 문제를 두고 이들이 합동하여 청함을 말함)하여 합문밖에 엎드려 병인반정(丙寅反正) 때에 공이 없으면서 외람되게 녹공(錄功)된 자가 많음을 논하고 외람된 자를 삭제하도록 청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등도 합사하여 차자를 올리고, 대신과 6경(卿)이 또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으므로 양사(兩司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매우 어렵다는 뜻으로써 타일렀으나, 조광조가 극력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말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2, 3 등의 잘못 녹공된 자는 뽑아서 삭제하고, 4등은 모두 삭제하였다. 광조 등이 패하게 되자 전대로 환원되어 버렸다. 동상(同上)
○ 태학생(太學生) 박근원(朴謹元)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학술의 정대함과 선왕(先王)이 여러 소인에게 속은 것을 극론하고,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 선비들의 나갈 길을 바르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인종도 매우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였고, 조정 신하 중에도 역시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신중을 기하려고 급하게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기다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6월 말에 인종이 위독하게 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광조(光祖) 등의 복직과 현량과(賢良科 조광조 등이 주장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인데 광조가 죽게 되어서 삭제해 버렸다.)를 회복하는 일은 선왕 때의 일이므로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이러하니 조광조 등의 직첩 및 현량과를 복구시키시오.” 하였다. 동상(同上)
○ 조광조는 처음에 능성(綾城)으로 귀양가 있다가 얼마 안 가서 사사(賜死)되었다. 고례(故例)에 무릇 재상(宰相)에게 사사할 때에는 임금의 옥새가 찍힌 문서가 있지 않고, 다만 왕지(王旨)를 받들어서 시행하였으므로 금오랑(金吾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 조광조가 귀양살이하는 곳에 이르러 왕의 교지를 전달하니, 공(公)은, “국가에서 대신(大臣)을 대접함이 이와 같이 허술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이 폐단은 장차 간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미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한 마디 상소하려 했으나 결국 하지 못하고,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뜰로 나와 무릎을 꿇고 왕의 옥체 안녕을 묻고, 다음에 3공 6경(三公六卿)의 성명을 물으니, 도사(都事) 유흡(柳潝)이 핍박하여 재촉하므로 공이 흐느껴 탄식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조서(詔書)를 부둥켜 안고, 여관에 엎드려 통곡한 자도 있었다는데(후한 영제(靈帝) 때 범방(范滂)을 처형할 때 고사) 어찌 그리도 다른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했으니 하늘에 있는 해가 나의 붉은 충성을 비춰 주리라.”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불을 쓰고 있었으나 죽지 않자 목졸라 죽였다. 《해동야언(海東野言)》
○ 선생은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年號)) 임인년(성종(成宗) 13년)에 출생하였다. 천품이 매우 특이하고, 어려서부터 강개(慷慨)히 큰 뜻이 있어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 29세에 진사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되었다. 중종 을해년에 이조 판서 안당(安瑭)이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는 경서에 밝고 행동이 의로우니 마땅히 발탁하여 쓰되 만약 자격이 구애된다면 예(例)로 참봉(參奉)에 조용(調用)할 것이온 바 그러면 사림(士林)을 권장함에 부족하오니, 청컨대, 6품(六品)의 관직을 제수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곧 사지(司紙 조지서(造紙署)이 한 관원)를 제수하였다. 이해 가을에 알성별시(謁聖別試 대성전(大成殿) 공자(孔子) 묘(廟)에 임금이 참배하고 보이는 과거)에서 을과(乙科 제2등급) 제일(第一)로 합격하였다. 정언(正言)을 배명하게 되자 대간(臺諫 양사(兩司)의 총칭) 권민수(權敏手)와 이행(李荇) 등이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는 실수를 탄핵하였고, 정축년에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을 제배하니 사양하여 아뢰기를, “소신은 학문에 뜻을 두었사오나 그 힘을 실용하지 못하겠사오니, 바라건대, 궁벽한 고을이라도 허락하여 주신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틈을 타서 학술에 힘을 쓰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학문을 다스리는 일이 둘 다 온전하게 될까 합니다. 소신은 완성되지 못한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사오니 어찌 가히 그 지위에 처하겠나이까.”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인년 정월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고 다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기었다. 우승지(右丞旨) 김정(金淨)이 아뢰기를, “조광조는 경연에 있어 보익(補益)함이 크고 많을 것입니다. 승지는 임금의 목과 혀의 지위인지라 진실로 마땅히 가려서 임명할 것이오며, 또한 입시하여 논난하기는 하오나 그 임무를 전담시킴만 같지 못할까 합니다.” 하니, 수일 후에 도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매양 입대하여 어떤 날은 저물 때까지 이르렀으나, 임금은 다 허심탄회하게 경청하였다. 동상
○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으므로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비밀리 장계를 올렸다. 임금이 명하여 세 정승과 해당되는 조(曹)를 불러 이것을 의논하고 먼저 본도(本道)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를 보내고, 이지방(李之芳)을 명하여 특별히 어의(御衣)와 활과 화살을 주며 그날로 떠나게 하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전송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입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곧 도적이 기미를 노려 속임수를 쓰는 모의와 같습니다. 당당한 대 조정으로써 한 일개 조그만 추한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모의를 행한다는 것을 신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할 것을 철회해버렸다. 공이 3품의 관원으로서 능히 짧은 말로써 왕의 뜻을 움직여 조정대의(朝廷大議)를 바로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동상
○ 정덕(正德 명(明) 나라 무종(武宗) 연호(年號)) 무인년(중종(中宗) 13년)에 대간(臺諫)에서 소격서(昭格署 하늘과 땅과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道敎)를 맡은 관서(官署))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고, 홍문관(弘文館) 역시 날마다 논하여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하루는 공이 손수 차자를 지어 동료에게 말하기를, “오늘 윤허를 얻지 못하면 가히 물러가지 못하오.” 하더니, 날이 저물자 대간(臺諫)은 다 물러나고,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만이 그대로 아뢰어 새벽 닭이 울기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그때 승지들은 책상에 기대어 깊이 졸고 있었으며, 모두 괴로워하고 싫어하는 빛이었다.
○ 기묘년(중종(中宗) 14년) 5월에 공이 다시 대사헌이 되어 아뢰기를, “국가에서 폐했던 것을 다시 닦아 행하는 일은 선조(先朝)에서 다 결론하지 못한 바이오니, 다른 날 소인들이 만약 계승해서 하여야 한다는 말을 내세우고 중상한다면 선하 자가 위태롭습니다. 요사이 노산(魯山 단종(端宗))을 제사하고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구한 것은 모두 뜻있는 선비들이 행하고자 하되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성세(聖世 중종 재위 당시를 가리킴)에 이르러 건의하여 행하게 되었고, 또 신씨(愼氏)를 왕후로 복위시키자는 의논에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 등이 상소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정론(正論)이었는데 그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대죄로 다스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소인의 구실인 것이며 선비들의 화근이옵니다. 사람들이 사귀고 왕래하는 것은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며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를 강론하기 위한 것이옵니다. 자고로 정직한 무리들이 세상에 성행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벗들 간에 종유하며 학문을 강론함에 어찌 그 사람이 없겠습니까. 항간에서는 큰 화가 반드시 조석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이는 전날에 겪은 바가 깊어서입니다.” 하였다. 동상(同上)
○ 일찍이 주강(晝講 낮 시간에 하는 강)하는 자리에서 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하여 도학에 잠심하였사온데, 시속 사람들은 헐뜯어서 비방하며 혹자는 미쳤다 하고 혹자는 화근이라 하여 벗들이 절교를 하였습니다마는, 반정(反正) 초에 비로소 그 학문을 가지고 후생을 창도하였으니, 신(臣)과 같은 것이 개발됨도 다 이 사람에게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였다. 동상
○ 대간이 정국공신(靖國功臣)의 남록(濫錄)된 자를 삭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조정의 의논을 모아 보라고 명하였다. 남곤은 예조 판서로서 그 의논을 피하고자 배릉 헌관(拜陵獻官)을 요구하여 되었다. 그 후에 공(公)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근자에 숭품 6경(崇品六卿 숭록(崇祿)ㆍ숭정(崇政)의 품계로 판서 지위에 있는 자)이 능헌관(陵獻官)이 되었으니, 그 사람은 반드시 일을 피하기를 꾀한 것입니다. 신하된 자로 이같이 자기 몸을 아낀다면 다른 것은 더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남곤도 함께 입시했다가 부끄럽고 황공하여 이내 물러갔다. 동상
○ 남곤과 심정(沈貞)이 청류(淸流) 선비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자 공(公)이 지우(知遇)를 받고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음을 이용하여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공을 얽어 잡으려고 홍경주(洪景舟)로 하여금 비빈(妃嬪 홍 희빈(洪姬嬪)을 말함)을 통해, 인심이 모두 조씨(조광조를 말함)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게 하고, 또 상도에 어긋나는 참문(讖文 길흉화복을 예고(豫告)하는 글)으로써 거짓으로 비원 꽃 나무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넉 자를 써서, 이것으로 왕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여 공을 죄의 두목이 되게 하였다. 다행히 재상 정광필(鄭光弼)이 울면서 옷깃을 잡은 데 힘입어 임금의 엄엄한 위엄이 조금 가시게 되었으나, 하옥되기에 이르러서는 향도(香徒)들이 궁성을 둘러 지키고,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선비들이 대궐 뜰에 엎드려 통곡하니 이로 말미아마 임금의 의혹이 더욱 심하였다. 공술(供述)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믿는 바는 임금의 마음일 뿐이요, 조금도 딴 생각은 없다.” 하였다. 처음에는 사율(死律)에 처하려 하였으나, 이내 장형(杖刑)을 하여 능성(綾城)으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안 있어 적소에서 사사(賜死)하니, 곧 12월 20일로 나이는 38세였다. 이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 각 두 겹, 남북으로 각 한 겹이었고, 남북에 둘러진 무지개 밖에 각각 두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큰 띠를 늘어뜨린 것같이 하늘에 뻗쳐 있었다. 또 서남쪽에 별도로 한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길이가 한 길[丈]이 넘었는데 모두 때가 지나서야 없어졌다. 이듬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의 묘역(墓域)에 장사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아들 정(定)은 나이 5세, 용(容)은 2세였는데 정은 일찍 죽고 용은 벼슬하여 문천(文川) 군수에 이르렀으나, 아들이 없어 종질(從姪)인 순남(舜男)으로 뒤를 이었다. 능성 사람들이 서원을 짓고 제사하니 죽수서원(竹樹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또 서적(書籍)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또 도봉산(道峯山) 밑에 서원을 지었고, 고향 사람이 또 용인(龍仁) 묘 밑에 서원을 지었다. 선조(宣祖) 2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 공자묘(孔子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서로 이어 계청하고, 옥당(玉堂)에서도 차자를 올려 대관(大官)과 좋은 시호(諡號)를 주자고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 시호하도록 명했다.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신해년(광해군(光海君) 3년)에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기묘록》
○ 조 부자(趙夫子 조정암(趙靜菴)의 존칭)는 집에 있으면서 몸가짐이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학문을 독실히 하였고 꿇어 앉음이 오랜 습관이 되었으며,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여 아침부터 해저물 때까지와 땅거미가 질 때부터 삼경(三更)까지 오뚝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곤 했는데, 비록 밤이 짧은 한여름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 학문을 추상해 보건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또한 멀지는 않았었다. 다만 베풀어 실행한 것이 갑작스럽게 불행한 데 이르렀으니, 그 당시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홍치재일록(洪恥齋日錄)》
[주D-002]신씨(愼氏) : 신씨는 중종의 첫번 아내였다. 그 신씨가 연산군 때의 정승으로 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는데 반정할 때에 신수근을 죽였으므로 반정을 주장한 사람들이 후일에 무슨 화가 있을까 겁내어 왕에게 억지로 청하여서 내어보냈었다.
[주D-003]‘주초위왕(走肖爲王)’ : 주초(走肖)는 조(趙)라는 글자를 나눈 것이니, 이 주초위왕 넉 자를 비원 나뭇잎에다 꿀로 써 놓아서 벌레가 꿀을 먹느라고 잎새를 긁어 놓게 하고 그 잎새를 따서 임금에게 바쳐서 조광조를 겁내게 한 것이다. 조광조는 이것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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