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망우당 곽재우 장군 신도비 2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의병장 곽재우)

아베베1 2011. 11. 7. 22:52

 

 

 

 

기언 별집 제16권
 구묘문(丘墓文)
忘憂先生文集世系年譜
 世系
忘憂先生世系 a_058_497a


十二世祖。金吾衛校尉諱子儀。
十一世祖。檢校將軍諱赫孫。
十世祖。丞同正諱冏。王氏駙馬。
九世祖。有備倉丞諱璉玉。
八世祖。奉翊大夫工曹典書諱允賢。以上高麗。
七世祖。通訓大夫判司宰監事諱瓊。
六世祖。義盈庫使諱得宗。
五世祖。奉列大夫益山郡事諱安邦。
世祖朝靖難功臣。所歷郡縣。淸白著名。事載輿地勝覽。
夫人金海宋氏。判宗簿寺事褒之女。
058_497b高祖成均進士諱承華。
與寒暄先生同遊佔齋之門。以金,郭兩秀才稱之。寒暄師友錄云。以淸介爲士友所推知。有士林之禍。遂沈冥鄕曲間。不自表異於凡人。
配善山金氏。贈參議磾之女。
曾祖朝散大夫禮安縣監諱瑋。字㓜溫。
夫人平山申氏。生員承濬之女。
祖通訓大夫成均司成贈承旨諱之藩。字翰仲。
正德庚辰登第。歷事中宗仁宗明宗。
夫人陽川許氏。同知磷之女。
考通政大夫黃海監司贈禮曹判書諱越。字時靜。號定庵。
058_497c嘉靖丙辰登第。歷事明宗宣祖。
夫人晉州姜氏。贈牧使應斗之女。

 

 

忘憂先生文集世系年譜
 世系
忘憂先生世系 a_058_497a


十二世祖。金吾衛校尉諱子儀。
十一世祖。檢校將軍諱赫孫。
十世祖。丞同正諱冏。王氏駙馬。
九世祖。有備倉丞諱璉玉。
八世祖。奉翊大夫工曹典書諱允賢。以上高麗。
七世祖。通訓大夫判司宰監事諱瓊。
六世祖。義盈庫使諱得宗。
五世祖。奉列大夫益山郡事諱安邦。
世祖朝靖難功臣。所歷郡縣。淸白著名。事載輿地勝覽。
夫人金海宋氏。判宗簿寺事褒之女。
058_497b高祖成均進士諱承華。
與寒暄先生同遊佔齋之門。以金,郭兩秀才稱之。寒暄師友錄云。以淸介爲士友所推知。有士林之禍。遂沈冥鄕曲間。不自表異於凡人。
配善山金氏。贈參議磾之女。
曾祖朝散大夫禮安縣監諱瑋。字㓜溫。
夫人平山申氏。生員承濬之女。
祖通訓大夫成均司成贈承旨諱之藩。字翰仲。
正德庚辰登第。歷事中宗仁宗明宗。
夫人陽川許氏。同知磷之女。
考通政大夫黃海監司贈禮曹判書諱越。字時靜。號定庵。
058_497c嘉靖丙辰登第。歷事明宗宣祖。
夫人晉州姜氏。贈牧使應斗之女。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의 휘는 재우(再祐)이고, 자는 계유(季綏)이다. 성은 곽씨(郭氏)이며, 관향은 현풍(玄風)이다. 성균관 사성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인데, 가정(嘉靖) 31년(1552, 명종7) 8월 21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은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27세에 부친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왔는데, 관상 보는 사람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 문과 을과(文科乙科)에 발탁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전부 파방(罷榜)되었다. 다음해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는 과거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임진년의 난리에 왜적이 모든 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그 기세를 몰아 한 달만에 서울을 침범하니, 상은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공은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하고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하였다. 우선 신번(新繁 경상북도 의령 동북)의 곡식을 점거하여 요해처를 지켜 연전 연승하였고, 참괵(斬䤋 전쟁에서 적의 귀나 머리를 벰)하는 것으로 공을 삼지 않았다.
공이 처음 기병할 때 병사가 적고 적은 강하므로 기병(奇兵)을 두고 용사 몇 사람을 얻어 그들과 함께 강의(絳衣 진홍색으로 장군이 입었던 옷)를 입고 백마를 타고서 적이 아군을 쫓도록 유도하고 산기슭에 숨은 뒤에, 사람마다 각각 산위에서 출몰(出沒)하게 하여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여, 적을 의혹(疑惑)케 하고는 꾸며서 말하기를,
“하늘에서 강의 장군을 내려 주셨다.”
하며, 복병으로 하여금 활을 마구 쏘아대게 하니, 적이 크게 놀라 비장군(飛將軍)이라 하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공이 거느리는 병사는 모두가 향병(鄕兵)과 오합지졸(烏合之卒 까마귀 떼가 모인 것처럼 규칙도 없고 통일성도 없는 병졸)로 병사(兵事)를 익히지 못하여 싸움에 겁을 먹고 있으므로, 공은 싸울 때마다 반드시 사졸에 앞서 모든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군졸들은 모두가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기 때문에 열 번 싸워 열 번 이겼으며, 원근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당시 순찰사의 군사가 항상 후퇴하여 지기만 하므로 공은 크게 불쾌하게 여겼는데, 양호(兩湖)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장수와 근왕병(勤王兵 임금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이 흩어져 다시 병사를 소집하자, 모든 군과 현이 소란하고 인심은 더욱 불쾌하고 의병은 흩어지려 하였다. 공이 분개하여 꾸짖기를,
수(睟)를 베어야 한다.”
하고 그의 여덟 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군사를 옮겨 먼저 치려 하니, 순찰사가 병졸을 엄중히 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한편으로 ‘반역한다’고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초유 아문(招諭衙門)에 이첩(移牒)하여 체포하여 상에게 아뢰고자 하였다. 그러자 김성일(金誠一 당시에 초유사였음)이 답하기를,
“모(某)가 과연 반역을 꾀했다면 그가 현재 병졸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의 힘으로 잡을 수 없는 일이요, 만일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편지 한 장으로 충분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오.”
하고, 편지를 보내 공을 책망하고 반역과 순종의 의의를 깨우쳐 주었다. 의병장 김면(金沔)도 간곡한 비유로 깨우쳐 주니, 공은 글을 보내어 사과하기를,
“공은 상께서 보내신 분이니, 공의 말씀은 곧 상의 말씀입니다. 감히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초유 아문(招諭衙門)에서 곧 상에게 이뢰기를,
“모(某)는 나라를 위한 것뿐이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고 이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진상을 진술하니, 상이 추궁하지 않고 교서를 내려 충의(忠義)를 포상하였다.
양군(兩軍)의 대립이 해소되자 공은 눈물을 뿌리고 병졸을 격려하여 날로 적을 공격하니 병세가 더욱 불어났다. 이에 현풍(玄風), 고령(高靈), 창녕(昌寧)에 주둔한 적이 창고의 양곡을 모두 태우고 도망갔으나, 강(江) 오른쪽의 농상(農桑)은 무사하였다. 상이 영남 지방 사민(士民)들에게 유서(諭書)를 내리고 공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공으로 처음으로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으로 상을 주고, 뒤에 형조 정랑으로 직책을 바꾸었다. 얼마 뒤에 절충장군에 승급되고, 연이어 성주(星州), 진주(晉州)의 목사(牧使)로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했으며, 다시 방어사로 승급하여 모든 의병을 공의 휘하에 예속시켰다. 그 당시 적은 해상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체상(體相) 이원익(李元翼)이 산악을 다스려 석문(石門)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군졸을 이끌어 한바탕 싸우려고 양원(楊元)의 군사에게 위세를 떨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오늘의 형세는 성과 해자를 정비하고 비축하는 데에 힘쓰다가 그들의 동향을 기다려 움직여야 합니다. 맹호(猛虎)가 산에 있으면 위세를 떨치고 들에 있으면 겁을 먹는 것이니, 천병(天兵 명 나라 군대)이 호로(湖路)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맹호가 산에 있는 형세입니다.”
하였다. 그해 가을에 적이 크게 밀어닥쳤는데 석문이 미처 구축되지 못하여 화왕산(火旺山)으로 옮겨 지키고 모든 장사에게 명령하기를,
“삼가서 싸우려 하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라.”
하였다. 적이 싸울 수 없게 되자, 하룻밤 하루낮을 서로 대치하며 지키다가 마침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무찌르고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들이 모두 무너졌다. 체상(體相) 이원익이 병졸이 적어 성을 지키기 위태로움을 염려하여, 군사를 철수할 것을 명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고 더욱 굳게 성을 지켰다. 얼마 뒤에 모친의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 상중에 상이 여러 차례 출사(出仕)하도록 불렀으나 끝내 나서지 않았다.
다음해 적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죽자 모든 적병이 철수하여 돌아갔다. 공은 동계(東界)의 울진으로 피난하여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부자(父子)가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상을 마치자 다시 불러들여 찰리사(察理使)로 삼아 남쪽 지방을 안찰(按察)하게 하였고, 이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계(啓)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리할 것을 간청하고 성의 수비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자, 공은 상소하여 시국(時局)을 말하고 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대사헌 홍여순(洪汝諄 자는 사신(士信))이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에 부처(付處 관원을 형벌할 때 어떤 땅을 지정하여 머물게 함)되었는데, 1년 만에 상이 석방하였다.
공은 드디어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도인(導引 호흡 및 운동에 의해 전신의 관절을 조정하는 법)하는 사람으로부터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다. 상이 다시 불러들여 찰리사(察理使)를 삼고, 천생성(天生城)을 축성케 하고, 이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삼았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으며,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임명하였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에 승급되었으며, 뒤에 다시 찰리사에서 동중추부사로 바꾸고 우윤(右尹)에 옮겼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영남 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가 되었으며, 다음해(1610, 광해군2)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계속 소명이 있어서 여름에 서울에 가서 부총관에서 좌윤으로 옮기고 곧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때 이 상국(李相國 오리(梧里) 이원익)이 병을 핑계 대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자, 공은 곧 상국을 찾아가서,
“장수와 재상이 화목하면 내외(內外)가 모두 일체가 되는 것인데 이제 상국께서 두문불출하시니 저 또한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세 번 소를 올리고 드디어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광해군이 재차 선유(宣諭)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 4년(1612)에 호남 절도사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선조의 아들. 어머니는 인목왕후. 유일한 정비(正妃) 소생임)을 살해하자, 공은 상소하기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그 뒤 5년이 지나 만력(萬曆) 45년(1617) 4월 10일에 공이 별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광해군이 부의(賻儀)를 보냈으며 의식대로 조상(吊喪)하고 제사 지내고 전기(傳記)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해 8월 모일(某日)에 현풍현(玄風縣) 남쪽 구지산(仇知山) 곽씨 족장 터에 장사하였다. 다음해(1618, 광해군10)에 향인(鄕人)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다.
정부인(貞夫人)은 상산 김씨(商山金氏)인데, 조남명(曺南冥 남명은 조식(曺植)의 호. 자는 건중(楗仲)) 선생의 외손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곽형(郭瀅)과 곽활(郭活)이고 사위는 신응(辛膺)과 성이도(成以道)이다.
곽형(郭瀅)은 곽여로(郭汝櫓)와 곽여집(郭汝楫)을 낳았으며, 곽활은 곽여식(郭汝植), 곽여재(郭汝梓), 곽여추(郭汝樞), 곽여송(郭汝松)을 낳고, 신응은 신동망(辛東望), 신시망(辛時望)을 낳았으며, 성이도는 성만강(成萬江), 성만하(成萬河)를 낳았다.
또한 측실자(側室子) 두 사람이 있는데, 곽탄(郭灘)과 곽목(郭沐)이다.
공은 평생에 신(信)이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으며, 의(義)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큰 난을 만나자 솔선하여 의병을 격려하고 적을 토벌할 것을 마음속 깊이 맹세하였으니, 그의 충의가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난이 평정되고 나서는 공명을 자처하지 않고 세상을 버리고 물러가 살았으니, 성대한 명성에서 오는 우환과 해(害)가 미치지 않았다. 공이 살던 곳은 취산(鷲山), 창암(倉碞)이고, 그곳에 망우정(忘憂亭)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명분은 지키기 어렵고 / 處名難居
공은 이룩하기 더욱 힘들다 / 成功尤難
기미를 앎이여 / 知微知幾
철인은 멀리 떠나 은거하는 것이니 / 哲人高蹈
확고하고 안일하도다 / 確而安


 

[주D-001]수(睟) :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수(金睟)를 말한다. 서로 전략상 의견이 맞지 않았다.
[주D-002]김면(金沔) :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그는 당시에 금산(金山)ㆍ거창(居昌)ㆍ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ㆍ개령(開寧) 간에 주둔한 적병과 싸워 승전하였다.
[주D-003]양원(楊元) : 명 나라 장군이다. 이여송(李汝松)의 휘하에서 좌협(左協) 대원으로 참전했다.
[주D-004]부자(父子)가 …… 생활하였다 : 전기(傳記)에 의하면, 자질(子姪)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았으며, 사람들이 여소(廬所)를 방어점(防禦店)이라 하였다고 한다.

망우집 ( 忘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忘憂先生文集
판심제  忘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29年頃刊
권책  世系, 年譜, 傳, 原集 2권, 龍蛇別錄 합 1책
행자  12행 24자
규격  23.2×18.7(㎝)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364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8
 저자
성명  곽재우(郭再祐)
생년  1552년(명종 7)
몰년  1617년(광해군 9)
 季綏
 忘憂
본관  玄風
시호  忠翼
특기사항  曺植의 門人이자 外孫壻. 李德馨과 從遊
 가계도
 郭之藩
 司成
 郭越
 黃海 監司
 晉州姜氏
 姜應斗의女
 郭再禧
 
 郭再祿
 
 郭再祐
 
 尙州金氏
 曺植의 外孫
 郭瀅
 
 郭活
 
 女
 
 辛膺
 
 女
 
 成以道
 生員
 側室
 李魯의 庶女
 郭灘
 
 郭溟
 
 郭沐
 
 女
 
 朴
 
 女
 
 許彥深
 
 金海許氏
 許瓊의 女
 郭再祉
 
 郭再祺
 
 女
 
 成天祚
 

기사전거 : 世系, 年譜, 神道碑銘(許穆 撰), 郭越神道碑銘(金世濂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1 8월 28일, 宜寧 世干里 외가에서 태어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3 1월, 모친상을 당하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14 「春秋」를 공부하다.
명종 22 1567 정묘 隆慶 1 16 尙州金氏와 혼인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18 宜寧 世干里에 집을 짓고 살다. 학문하는 여가에 射御書數를 익히고 兵家書를 통독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23 義州 府使로 가는 부친을 따라가 2년간 머물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27 가을, 冬至使로 북경에 가는 부친을 따라가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34 〈唐太宗敎射殿庭論〉으로 庭試에 합격하였으나 語意의 문제로 罷榜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35 8월, 부친상을 당하다. 新堂洞에서 여묘살이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38 복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宜寧의 歧江 遯地에 정자를 짓고 일생을 보내려 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41 4월, 왜적이 침입하자 義兵을 일으켜 ‘天降紅衣將軍’이라고 揭號하다. ○ 감사 金晬가 勤王을 핑계로 달아나자 斬해야 한다는 격문을 돌리고 行朝에 상소하다. ○ 상이 특별히 유시를 내려 褒獎하고, 幽谷察訪 兼 刑曹正郞에 제수하다. ○ 10월, 折衝將軍에 올라 助防將이 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42 4월, 星州 牧使가 되다. ○ 5월, 중국 총병 劉綎이 성주의 八莒縣에 주둔하자 肄習領將으로 왕래하다. ○ 6월, 부인 김씨의 상을 당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43 성주 목사로서 조방장을 겸하다. 山城의 수축에 전념하다. ○ 忠勇將軍 金德齡이 협력을 원하여 호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宜寧으로 와서 모이다. ○ 12월, 晉州 牧使가 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44 가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45 玄風 嘉泰里에서 지내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46 防禦使로서 玄風의 石門山城을 새로 쌓다. ○ 8월, 昌寧의 火旺山城으로 옮겨 지키다. 적장 淸正이 왔다가 물러나다. ○ 8월, 繼母 許氏가 성 안에서 졸하자 성을 나가 玄風 嘉泰里 琵瑟山麓에 장사 지내고, 강원도 蔚珍縣으로 避地하다. ○ 상이 특명으로 起復을 명하였으나 상소하고 응하지 않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48 10월, 경상 좌병사가 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49 2월, 島山城의 수축을 계청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靈巖郡에 付處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51 석방되어 琵瑟山으로 들어가 솔잎만 먹고 살다. ○ 靈山 滄巖에 가서 江亭을 짓고 ‘忘憂’라 편액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53 2월, 察理使가 되어, 仁同의 天生山城을 수축하다. ○ 5월, 善山 府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병으로 察理使를 사직하다. ○ 11월, 龍驤衛 上護軍이 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54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3월, 察理使로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곧 한성부 우윤이 되다.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고 滄巖 江亭으로 돌아오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55 5월, 전라 병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56 1월, 鄭逑와 張顯光이 내방하다. ○ 5월, 道流를 창도한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57 7월, 경상 좌병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상소하여 臨海君의 죄를 바루도록 청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58 3월, 경상 우수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59 윤3월, 召命에 나아가지 않고 〈中興三策疏〉를 올리다. ○ 6월,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 7월, 부총관이 되고, 이어 한성부 좌윤, 함경 감사가 되다. ○ 9월, 江亭으로 내려가다. 선전관이 忠州, 伽倻山 海印寺까지 내려왔으나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다. 해인사 百鍊菴에 몇 달 머물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61 11월, 鄭仁弘이 등용을 건의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62 4월, 전라 병사가 되다. 이때 조정 신하들이 永昌大君을 죽이도록 청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그 부당성을 말하다. 이 일로 사직하게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65 10월, 掌隷院 判決事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66 4월 10일, 졸하다. 玄風 嘉泰里에 返殯하다. 광해군이 致祭하고 傳을 짓도록 명하다. ○ 8월, 玄風 仇知山 新堂洞 선영에 장사 지내다. ○ 가을, 知製敎 裵大維가 傳을 지어 史院으로 보내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 고을 사람들이 祠宇를 세워 ‘忠賢祠’라 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 從子 郭瀏, 郭瀜 등이 문집을 초간하다. (郭瀏의 跋)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 玄風 縣監 柳千之가 書院을 세우다. 3년 후 ‘禮淵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忠翼’의 시호를 받다.
영조 27 1751 신미 乾隆 16 - 禮淵書院 앞에 神道碑를 세우다. (權愈 撰)
영조 47 1771 신묘 乾隆 36 - 후손 郭鎭南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金思渾의 跋)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을 처음 정리한 것은 사위 成以道였다. 그는 유문을 수집, 편차하여 2권으로 만들었는데, 소략하고 착오가 많았다. 이것을 문제로 여겨 從子 郭瀏와 郭瀜 등이 유문을 增補하고 권수에 傳을, 권말에 祭文과 挽詞를 붙여 1629년에 2권 1책으로 편차를 마쳤다. 이는 중간본에 붙어 있는 郭瀏의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에 간행에 관한 언급은 없어 이때 실제 간행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전하는 2권 1책의 판본이 이 정고본을 판각, 쇄출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1364), 국립중앙도서관(한44-가146)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636년경 저자의 외손 辛時望이 연보를 새로 만들고 趙任道의 考訂을 받았으며, 1751년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대제학 權愈가 신도비명을 썼다.
1771년에는 후손 郭鎭南 등이 초간본에 누락된 저자의 시문을 후손의 家藏, 古家의 藏書 등에서 널리 찾아 補輯하고, 朝野史나 名臣錄, 여러 文集 등에서 저자의 행적을 뽑아 舊譜와 辛時望이 만든 年譜를 참작하여 새로 연보를 만들어서 권수에 두고, 조정의 褒崇 문자와 諸賢의 詞章을 권말에 편차하여 5권 3책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저자와 가까웠던 金命元의 후손 金思渾이 宜寧 縣監으로 나오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 일이고, 결국 중간본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중간본》 현재 규장각(古3428-755), 장서각(4-5976), 성암고서박물관(4-632)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5권 4책의 중간본이 있는데, 이것은 중간본에 倡義錄 1책이 합본된 것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29년경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許穆 撰), 跋(郭瀏, 金思渾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世系, 年譜, 傳, 原集 2권, 龍蛇別錄 합 1책으로 되어 있다.
맨 앞에 세계와 연보가 실리고, 그 뒤에 왕명으로 裵大維가 지은 傳이 실려 있다.
권1은 임진년에 義兵을 일으킨 이후 1604년 察理使 재임 시까지 지은 疏, 上書, 啓辭 등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비변사의 關文, 金德齡의 書, 有旨 등이 부기되어 있다. 〈倡義時自明疏〉나 招諭使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는 경상 감사 金晬가 勤王을 이유로 도망간 일과 관련하여 지은 글들이고, 〈答金將軍書〉는 金德齡이 연합을 제의한 데 대한 것이다. 그 외에 起復을 사양하는 疏, 島山城의 수축을 청하는 啓草, 兵使 때 사직하는 소, 察理使로서 仁同의 天生山城 수축과 관련하여 올린 狀啓 등이 실렸다.
권2는 1605년 이후 지은 疏, 論, 書, 詩이다. 1608년(무신)과 1610년(경술)에 내린 召命과 이를 사양하는 疏, 1613년 永昌大君의 죽음과 관련하여 올린 소가 실려 있다. 또 〈張浚論〉은 남송 때 金人의 침략을 물리쳐 공을 세웠던 장준에 관해 논한 글이다. 그 외에 사위 成以道를 권면하는 편지와 滄巖의 江亭을 李道純에게 물려주면서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詩는 〈歸江亭〉, 〈咏懷〉 등 대부분 江亭 생활을 읊은 것으로,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율시이다.
부록으로 李埈, 金永暉, 李德馨 등의 投贈詩 8題, 書簡 2편, 賜祭文 1편, 申之悌, 郭永禧, 安瓙 등이 지은 祭文 7편, 河惺, 成以道, 裵弘祐 등이 지은 挽詞 12편, 建祠時呈書, 都事金鑑移關이 실려 있다.
龍蛇別錄은 저자의 왜란 때 의병 활동과 일화, 왜란의 추이 등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1592년 4월과 7월, 1593년 4월과 6월, 1594년, 1597년의 기록이다.

필자 : 金圻彬

 

忘憂先生文集傳
 
忘憂先生傳[裵大維] a_058_501a


郭先生再祐。字季綏。玄風人。黃海監司越之子。監司風度俊偉。文辭雄渾。有五子。曰再禧,曰再祿,次公,次再祉,再祺也。病革。以堂上章服屬公。南冥曹先生孫壻也。天性孝友。器宇宏遠。識周庶務。勇奪三軍。居常處閑。恂恂然直柔耳。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其不可拔。先大夫嘗牧義州。公在側三年。一不近色。時公年二十餘。人服其操焉。後陪先大夫入中朝。相者異之。以爲後必爲大人。名滿天下云。嘗從事文學。兼通武藝。累捷鄕解。又副庭試。以唐太宗敎射殿庭論。中第二。語有觸忤。卽命罷榜。下帷明經。人莫之先。丁父憂。喪祭盡誠。有愛妾病革。請一見而死。公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其執禮之嚴如是。服闋。遂棄擧子業。構亭歧江上。篛笠芒鞋。漁釣自娱。爲終老計。壬辰之變。杖劍首起。以報058_501b國討賊告家廟。屛妻孥托其友。傾家財募壯士。據新反之粟。宜寧屬縣倉 取草溪之兵。軍器 逋將 公將起兵時。路遇頂玉一丈夫。乃加德僉使田應獜也。公駐馬而呼曰。편001汝行色。必是奔北之將。負國偸生。罪不可赦。彎弓欲射之。田盛氣而應曰。我之奔北。於汝何與。抗而不屈。彎弓相向。公卽以義責之曰。汝旣敗軍。吾方倡義。從我義也。抗我悖也。田舍然愧謝曰。誠若公言。敢不僇力同事。遂爲偏裨。從公討賊。竟死於戰陣。潰卒。俱收並用。設施號令。雷厲焱飛。當是時也。人心淆亂。變將中起。公繩之以律。且諭以義。群情帖然。遠邇響從。賊將安國司聲言向全羅。直抵鼎津。公乃置壘要害。多伏强弩。萆山設疑兵。賊不濟而退。由是陸路諸賊。並趨左道矣。揭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賊。士未習戰。怯於赴敵。公着紅衣。以從先大夫赴京時。帝所賜紅錦爲之。挺身先之。賊炮雖齊發。而終不能爲害。又有良馬自至。公取騎臨戰。馳驟如飛。衆以爲神助。益恃以無恐。公選驍健者數人。衣紅衣乘白馬。一如公。分遣數處曰。若等見賊來。更出迭没。以惑亂之。公臨戰。輒先出以誘之。賊悉衆而追。行數里許。公鞭馬疾馳。倏沒於山谷間。賊058_501c方驚疑。忽又見紅衣白馬者。鼓噪而閃出於數里外高峯之上。賊瞻前忽後。目眩心奪。謂公爲飛將軍。畏不敢近。連戰皆捷。勦殺甚多。而亦不斬馘焉。咸安郡守柳崇仁以戰功陞兵使。或言公軍所殺之賊浮江而下。爲崇仁軍所斬者居多云。後因軍情論報將士之功。而必鈞得其宲。未嘗冒錄焉。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盡其情。及用法。雖親貴。不少貸焉。賞罰嚴明。血誠動人。故能得其死力。都事金穎男聽公䂓畫。事方就緒。而金巡察睟稱勤王。到龍仁奔還。公諗于衆曰。方伯築怨已稔。民怒極矣。性執而苛。掣肘必矣。與其僨事於後。曷若祛患於始。將在軍中。苟利於國。可以專之。列罪傳檄。疏聞行朝。方伯怒之。以叛逆論啓。令軍官金景訥等移書。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睟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人皆傳誦。謂其辭嚴義正。當與紹興詔草跋。相甲乙矣。招諭使金誠一。初到居昌。見檄文。錯愕疑058_501d訝。問於朴學諭思齊曰。再祐何如人也。方伯命使。安敢乃爾。答曰。生與再祐。自少同處。乃是忠孝底人。平日讀史。至世亂時危。必慷慨憤歎。或至哽塞。每言我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身以之。今日之事。雖未聞知。然想其素意。只知有國事。不爲身計。監司大失人心。出境已久。今忽還來。衆情解體。事不可爲。故必有此擧也。招諭使色變。作而言曰。朝廷處置。未可知也。吾當救此危命。遂反覆馳啓。上嘉之。命賞賫疏人。特賜溫諭。李好閔付詩曰。聞道紅衣將。逐倭如逐獐。爲言終戮力。而似郭汾陽。公雪涕厲士。遮截水陸。兵勢益張。屢勝之後。賊望風而走。江右湖南。頼以得完。爲恢復根基焉。始授幽谷察訪刑曹正郞。以領兵不赴。厥後歷典星州,晉州。政淸如水。明似神君。匹馬布衣。去來飄然。未嘗久於其任也。體察使李元翼使公治嶽堅 三嘉大坪山城 築石門。在玄風。公之新十山城也。058_502a議欲悉衆一戰。以决勝敗。將使楊揔兵移駐嶺南。楊元時駐南原 公言今日之計。姑爲羈縻。修山城。繕器械。畜資粮。在我之勢。可以戰守。然後待時而動。此虛虛宲實之法也。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虎出於野。童竪逐之。龍出於陸。獱㺚笑之。天兵之在湖路。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岀於野。龍岀於陸。亡乃不可乎。天兵單弱。在湖南則可爲聲援。移駐近地則賊必窺覘。反生吞噬之心故云。君相造命。願勿自沮。以圖全勝。以壯國勢。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下床屈膝。有將如此。何憂之有。丁酉秋。賊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火旺。昌寧縣山城。築石門未畢。賊已至。故移守於此。人人皆喜。以爲得大將。密陽,靈山,昌寧,玄風四邑入守。公纔入城。賊遊騎已到。一指揮之間。士氣百倍。斬犯禁違令者。以勵衆心。公弟再祉有單奴。犯門禁斬之。以己之奴與之。蘖族尹生三兄弟有違令。並斬之。積薪於舍館。以示死守。家孥所寓處積薪曰。或有不幸。當焚之。使不汚賊手。設內城。058_502b嚴部伍。勑諸將。一軍股慄。視公如雷電鬼神。賊旣薄城。從容談笑。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果不戰。渡江而西。屠黃石。安陰山城也。縣監郭䞭與前郡守趙宗道皆死之。䞭二子一女亦死之。䞭號存齋。於公爲再從叔而同里閈。知己交也。陷南原。城大兵少。天兵盡爲所殺。楊元僅以身免。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公事親孝。繼母許氏養於公。至是隨之入城。以病卒。軍民慷慨失望。議者以爲是擧也。賊雖交鋒。必爲公所挫。且以孤城。晏然談笑。抗方張之賊而全四邑生靈。非公忠勇。孰能之。公遂避地蔚珍。僻處杜門。不以流離。而持服惟謹。謂草土之中。不可向人有求。與子姪共造蔽陽子。貿以取資。邑人號公廬爲防禦店云。累命起復。終不應。後以察理使按南邊。又秉節蔚州。貪官驕將。皆屛息革心焉。欲繕島058_502c山城。以作必守地。朝廷不許。公謂不得其職則去。抗章棄歸。臺官洪汝諄等以瀆慢劾之。遂被謫靈岩。未幾賜環。入琵瑟山。餐松辟糓。蕭然若一道人也。聖上嗣位。暫起從仕。君臣之義。不欲廢也。上注意委任。特拜觀察閫帥。皆不至。就鷲山滄岩。爲捿息地。扁以忘憂。有筆床藥臼。一琴一船。永謝烟火。淨掃苔磯。忘機魚釣。萬事籧篨。然於時政。有懷必達。至聞邊鄙可虞。輒愀然曰。設有警急。吾當赴難。此其憂世之念。固未嘗少弛。而亭之有扁。志不忘也。卒之日。雷雨驟作。紫氣冲霄。雖深山窮谷。莫不驚悼。如失長城焉。上深加痛惜。亟命給需致賻。遣禮官祭於其廬。
贊曰。惟公。豈不誠大丈夫哉。臨亂效忠。義也。知止勇退。智也。赤松之遊。一絲之風。洒落光明。特立宇宙。意者天以全節畀公。扶058_502d我九鼎歟。誠使處之廊廟。必且身佩安危。爲社稷臣。可謂文武全才。命世鴻儒。如有尙論者。槩見倡義之迹。只認爲將。則何足以知公哉。或言南冥先生於公。擇以贅之。又訓迪之。噫。同明相照。同氣相求。得公於先生之門。不亦宜乎。
萬曆四十五年秋。侍講院輔德知製敎裵大維。撰送史院。


[편-001]皃 :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龍蛇別錄]
壬辰 a_058_537a



四月
十三日。倭寇下陸。東萊先陷。列鎭瓦解。公以二十二日。率家僮十餘人。首起兵於宜寧。自號天降紅衣將軍。於是盡散家貨。開庫任取。募得勇士健丁數百人。擊鼓吹角。揮旗大呼。追逐岐江上來賊三十餘艘。以捍蔽江右。自謂家世世受國恩。宜以死報。以討賊復讐爲己任。
時草溪郡守李惟儉。自金海城中掊鎖先逃。不還于郡。郡無主吏。民亂取糧械。公新起兵。無軍器。卽馳往載軍器以來。宜寧官廩。已經焚蕩。惟新反縣倉獨全。公以爲不可空棄賊手。開封搬運。以充軍餉。臚傳飢民任其取去。又取晉州漕運稅米一船。軍勢漸振。人皆樂赴。
駐兵于砥山。列陣于沿江上下數十里。以遏江右之寇。寇不得058_537b渡江而西。賊將安國司聲言取湖南。日引兵西。前鋒已到鼎津。鼎津距公軍亡數十里。津有淖不可行。賊先使導者。擇高燥設木旗之。將以朝日渡。公詗知之。用夜半率戱下壯士。馳至其所。拔其木易置之淖中。因伏以俟。賊果至。至則陷淖中莫能脫。伏遂發。幾覆之。未幾賊大至。公度兵少非計難卒破。不破無以保鼎津。乃擇驍壯者十數以從。自衣紅衣乘白馬。從者皆如公服。騎亦如之。鼓譟出。直薄賊壘。左右馳以誘之。賊貎其爲將。空壘而追。行十餘里入山谷。失公所在。賊方驚疑。忽見前崖。又有紅衣白馬者鼓而噪。賊又大驚追之。俄傾又失之。但聞鼓角殷山。旗幟萆阿。賊愈益驚。咸以爲神且眩。不識衆寡。不敢逼。公伏强弩。徼之於弇中。從樹木叢密。射之輒殪。追覆之江岸。其設機制敵。少擊衆多類此。
058_537c招諭使金誠一至咸陽聞之。大奇之。卽貽書招之。公以赴戰冠服。往見于丹城。與語益奇之。遂相許以死。宜寧一境之人。皆屬公聽其指揮。更無所句當。咸安郡守柳崇仁匿山中。涉鼎湖潛過宜界。公知之逆出。數以棄城逃歸之罪。崇仁愧屈。仍留公陣下。後陞兵使。
於是。諸義兵爭起。本道則如金沔諸公是也。他道則高敬命起於潭陽。金千鎰起於錦城。趙憲起於公山。屢摧勍敵。名顯當世。然卒皆敗死。業不竟。獨公提孤軍。大小數十餘戰。未嘗一敗。
招諭使以前奉事尹鐸爲三嘉代將。領軍赴公。公遂領二縣兵。設大陣于鼎湖世干兩處。交馳互駐。一以拒昌原,熊川出沒咸安之賊。一以捍靈山,昌寧充斥洛江之寇。三嘉則以學諭朴思齊爲都摠。而許子大造軍器。鄭晊調軍糧。盧錞主運饋。宜寧則058_537d李雲長爲收兵將。沈大承,裵孟伸爲先鋒將。權鸞爲突擊將。鄭演爲督後將。許彦深典軍餉。姜彦龍治兵械。鄕之饒户富室。爭擊牛出米。輪日以餉軍。
尹鐸率三嘉軍駐于龍淵。沈大承率宜寧軍駐于長峴。沈紀一守鼎湖之船。譏察過涉。安起宗設伏于柳谷。李雲長管候于洛西。權鸞遮截于玉川臺。吳牧使澐收兵于白嶺。前後所得二千餘人。公軍于世干。居中而統制之。左洛江右鼎湖。沿遡上下六十里之間。偵軍森立。應報輒馳。或擊或逐。賊不得肆其衝突。餘民賴以作農。
公自初禁斬曰。人當爲國討賊。獻首要功。於義不可。貪功喜斬。必多遇害。勅諸軍毋得斬馘。李魯謂公曰。公之本意甚善。諸人從公力戰者。其孰無功名之心乎。其終必怠。其後砥山之捷。射058_538a殺無慮。始許斬首。士爭赴水。所斬七十餘級。皆不自與焉。軍官曹士男先登上船。揮劍亂斫。而終爲佯死倭所刺。公大慟曰。吾之禁斬。正爲此也。
時江左倭賊。屯據沿路官府。四出摽掠。恣行殺戮。或懸首或串屍。夾路左右。羅列十里。孑遺餘民。竄身無所。於是公自宜寧領軍來。耀兵于玄風率禮之鸛山上。使突騎直至邑底以誘之。賊設柵自衛。畏縮不出。公夜令人上琵瑟山。逶迤十餘里。人持兩炬。炬皆三頭。鼓角齊發。一時擧火。或遠或近。若將掩襲。忽焉火滅。寂若無人。俄頃之間。又復如之。賊大驚疑。過二夜。焚官倉遁去。昌寧賊望風亦遁。
公抽率精銳。銜枚疾馳。乘曉襲靈山屯賊。適會玄風兵聞之。亦來赴闘。未及申令。妄叫城外。賊覺之。空壘迎擊。放丸如雨。士卒058_538b扶公上山。爭以身蔽之。中丸斃踣於前者十二人。褊將周夢龍曰事急矣。乃揮劍躍馬。冒入賊鋒。衝突再三。賊挫銳退却。公之能得人死力如此。未幾賊遁去。
巡察使金睟協二湖兵勤王。到龍仁敗還。至山陰。移關列邑。分軍諸將。使義兵潰裂。不得有所處分。民心益拂。衆怒齊發。公乃移檄金睟。數以八罪。欲移兵討之。金景謹夜走睟營告變曰。郭某將爲不軌。欲害令公。領大軍來。宜速避之。睟駭怖罔措。欲爲自盡之計。爲軍校所止。因天未曉。退遁咸陽。牢閉城門以待之。睟自咸陽還至居昌。以叛逆論啓。招諭使貽書公及睟兩止之。遂反覆馳啓以申救之。公亦上疏行朝以自明。自上嘉之。授公刑曹正郞。
睟軍官金景訥之徒。指公爲逆賊。傳檄于陣中。且移書于列陣。058_538c三嘉進士尹彦禮,學諭朴思齊等。通文于右道各邑。其略曰。頃見巡察軍官輩送郭義士書。一則曰檄郭某黨與。一則曰檄逆賊郭某。郭某果是逆賊而有黨與者乎。郭義士當列郡奔潰之時。奮百死不顧之計。忠義激切。名正言順。蔽遮江淮。賊不敢西。人有耳目。豈待贅說。噫。忠如郭義如郭。果亦未免逆賊之名歟。義士頃者之檄。信有輕動者。而亦不過忠義憤激之過擧。彼軍官之輩。徒知有迎倭之巡察。而不知有討賊之義士。傳檄構捏。欲逞其私憾。指忠義爲逆賊。欲將此意。上達宸聽。北天遼邈。籲呼莫及。伏願諸處義兵。各出通文。使義士明白之心。不爲讒構者所陷。不勝幸甚。嗚呼。秉彝良性。人皆有之。逆順是非。自有公論。而敢將大惡不道之名。欲加忠臣義士之身。寧非可痛歟。惟僉君熟察之。
058_538d招諭使久駐居昌。賊覘知晉陽無將。昌原賊與鎭海賊相應。由固城漫澶於泗川。大擧侵晉。招諭使聞晉州急。星馳至丹城。悉起咸陽,山陰,丹城兵以赴之。督金時敏使不敢動。又勅昆陽郡守李光岳爲右翼以救之。公不待命而先走入城。軍勢頗張。賊至矗石樓下。只隔一水而不敢逼。招諭使亦繼至督戰。於是諸將益用命。合勢追擊。賊狼狽而遁。所殺傷無慮。由是晉陽獲完矣。


七月
朝廷以招諭使爲左監司。宣傳官來傳前後有旨。始知箕城失守。大駕移幸龍灣。招諭使遂撫膺大慟曰。白髮孤臣。奉命南來。不能掃蕩寇賊。坐使鑾輿播遷。俯仰天地。跼蹐無歸。哽咽不成聲。左右皆泣。招諭使以爲我旣爲左監司。右道事今不句當。而自初主管義兵。若委以常規。目擊可虞之機。058_539a而不爲啓達。則實非人臣之義。乃申啓條陳。有曰。宜寧縣監吳應昌棄官遁走。倭寇焚蕩。萬無保全之勢。郭再祐首先起兵。宜寧一縣爲一道保障。賊不敢窺覦江西。再祐之功。實道內之所共知。新縣監金忠敏曾爲本邑築城監董官。毒痛一邑。民視之如豺虎毒藥。忽聞來爲縣監。大小人民。皆懷潰散之心。當此危難之日。順民心爲便。且係義兵之成敗。敢此越職言事。惶恐待罪。
草溪儒生李大期等三十餘人。上招諭使挽轅書。其略曰。郭義士某提劍倡義。忠憤凜凜。而第以狅簡不裁。觸忤方伯。所恃者惟我閤下。而閤下一去。勢將難爲。無郭某則無宜寧。無宜寧則三嘉以西將次第失守矣。以此觀之。閤下去留。豈不爲義兵聚散之所關。國家存亡之攸係也哉。惟閤下熟察之。
058_539b江右諸邑儒生。上請留招諭疏。陜川,草溪,三嘉,晉州,丹城則以進士朴而文爲疏頭。其略曰。郭再祐誓心白日。期洒國恥。奮起鄕曲。倡率同志。遮截遡洛之寇。自江以西六七邑。免被兵燹。爲今日之卽墨。恢復根基。因此可立。而睟負重罪。見擯物議。慚自己無可貰之效。忌他人有垂成之功。欲植私黨。以壞義旅。罔上行私。無所不至。一豺狼當途。而衆狐狸隨之。一魅魑瞰室。而百奸鬼附之。媢疾義士。百計陰中。指嗾鷹犬。務行胸臆。於是金景訥金忠敏輩爭望風旨。讐斥義兵。殆無餘力。雄唱雌和。列郡滔滔。則興衰撥亂。恐無日矣。匡復之基。在於嶺南。而重恢之責。在於誠一。誠一若奉綸命渡江而東。則邪黨張眶。義旅摧沮。今日之事。豈止於痛哭流涕而已哉。
居昌,安陰,咸陽。則以進士鄭惟明爲疏頭。其略曰。今日義兵之058_539c終始成就者。無非誠一之功也。誠一移拜左監司。恢復之功。不能無礙於垂成。用舍之道。不無緩急於左右。何以言之。郭再祐傾財破産。募兵討賊。未免爲奸人所沮。誠一與書以奬之。馳啓以救之。由是益自感激。身任江淮之保障。功爲南道之第一。誠一去則郭再祐之事慮有掣肘之患。而區區數邑。亦難保也。中興之功。不復望矣。未幾朝廷復以誠一還授右道。
湖南義兵將前府使崔慶會。領軍千餘。來見招諭于山陰。使駐于晉州之薩川倉。金海賊連釜山會昌原。其衆數萬餘。不得橫渡鼎津。合勢長驅。直擣晉陽。圍之十匝。晝夜攻之凡七日。公使先鋒將沈大承夜到州北山。列炬鼓譟。大呼曰。紅衣將軍與全羅義兵。明日當來。合軍勦滅。汝賊其知之。適湖南兵自丹城向薩川縣境。賊望見之。與公言合。卽驚駭。是日焚其屯幕。燒其積058_539d屍。顚沛而去。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龍蛇別錄]
癸巳 a_058_539d



四月
二十日。京城復。招諭使遘厲疾。以晦日卒於晉州。惟朴正郎惺,李典籍魯終始診其病。治其喪。爲來問疾。會哭者公及吳澐,李光岳,李瀞,郭䞭矣。


六月
朝廷聞賊南下。連下旨督諸將追賊。關白平秀吉閱晉州城圖。憤年前之再敗。遣人責行長,淸正等曰。不破晉州。毋得渡海。於是賊大擧圍晉州。都元帥金命元,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皆聚於宜寧。慄狃於幸州之捷。欲渡岐江。前進逆擊。公及高彦伯曰。賊勢方盛。我軍多烏合。堪戰者少。不可輕進。他人依違而已。巡邊使李薲,從事成好善騃不曉事。責諸將逗留。與慄議合。遂過江進至咸安。諜報賊從金海大至。俄聞賊砲。人人洶懼。還渡鼎津。望見賊兵蔽野塞川。諸將各自散去。權慄,金命058_540a元,李薲皆向全羅。惟倡義使金千鎰,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全羅義兵復讐將高從厚等入晉州。賊圍城百重。連亘百餘里。時劉摠兵綎在八莒。吳游擊惟忠在鳳溪。環視莫敢救。八日而城竟陷。軍民死者六萬餘人。得脫者纔若干。自有倭變以來。人死未有如此之甚者。公前此再救晉州之急。至是不往焉。其審勢料敵如此云。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龍蛇別錄]
甲午 a_058_540a


公以星州牧使兼助防將。治三嘉之岳堅城。是秋棄星州。以義兵大將駐兵于宜寧之嘉力。時倭兵盡撤。退屯沿海。金德齡,洪季男,李時言,諸勇將皆在公陣下。公以李光岳爲副將。以金德齡,洪季男爲左右營。舟下沿海。直抵東萊。德齡素號飛將軍。季男驍勇亦亞之。兩將齊躍駿馬。並揮長劍。較藝售技。閃忽馳突。馬若龍驤。劍如電燁。賊望見目奪膽落。且德齡所將皆湖058_540b南勇士。奇材優人。以錦衣彩服。或於平地飜身而超。或於馬上倒首而立。豎旗鳴鼓。累次挑戰。賊閉門自固。不敢出頭。公以舟師薄賊壘之下。則唯於城上齊放鐵丸。或放火砲而已。公與李光岳對坐行酒。火砲過前。大如鵝卵。穿船兩舷。落於水中。鳴沸逾時。談笑自若。神色不變。賊終始不出。不得交鋒。又糧資器械不可久留。乃整軍而還。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龍蛇別錄]
丁酉 a_058_540b


秋。賊有再動之勢。公以防禦使。新築玄風之石門山城。乃馳啓曰。因山爲城。城不築而自高。因江爲池。池不鑿而斯深。欲爲固守計。城未及完。賊大擧入寇。公領密靈昌玄四邑兵。移守昌寧之火旺山城。公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皆得盡其情。用法雖親不貸。嘗戒諸弟曰。勿以親弟。妄有所恃。由是諸子弟皆斂迹不敢出。賊將淸正引大兵至城下。劍㦸耀日。旌旗蔽野。058_540c瀰漫連亘。極目無涯。將士咸惴惴無人色。公靜以鎭之。賊望見形勢斗絶。戎陣整齊。纔經一晝夜。不犯而去。公遣兵尾擊。俘斬亦多。權應銖欲爲外援。領精銳馳到城北。耀兵於高佐巖之山上。賊方引去。竟不回鋒交戰。
宣武錄功也。逾年磨勘。蹊逕甚多。微勞小功。亦皆冒錄。公不得元勳。人以李廣不侯比之


忘憂先生文集世系年譜
 世系
忘憂先生世系 a_058_497a


十二世祖。金吾衛校尉諱子儀。
十一世祖。檢校將軍諱赫孫。
十世祖。丞同正諱冏。王氏駙馬。
九世祖。有備倉丞諱璉玉。
八世祖。奉翊大夫工曹典書諱允賢。以上高麗。
七世祖。通訓大夫判司宰監事諱瓊。
六世祖。義盈庫使諱得宗。
五世祖。奉列大夫益山郡事諱安邦。
世祖朝靖難功臣。所歷郡縣。淸白著名。事載輿地勝覽。
夫人金海宋氏。判宗簿寺事褒之女。
058_497b高祖成均進士諱承華。
與寒暄先生同遊佔齋之門。以金,郭兩秀才稱之。寒暄師友錄云。以淸介爲士友所推知。有士林之禍。遂沈冥鄕曲間。不自表異於凡人。
配善山金氏。贈參議磾之女。
曾祖朝散大夫禮安縣監諱瑋。字㓜溫。
夫人平山申氏。生員承濬之女。
祖通訓大夫成均司成贈承旨諱之藩。字翰仲。
正德庚辰登第。歷事中宗仁宗明宗。
夫人陽川許氏。同知磷之女。
考通政大夫黃海監司贈禮曹判書諱越。字時靜。號定庵。
058_497c嘉靖丙辰登第。歷事明宗宣祖。
夫人晉州姜氏。贈牧使應斗之女。


 忘憂先生文集傳
 
忘憂先生傳[裵大維] a_058_501a


郭先生再祐。字季綏。玄風人。黃海監司越之子。監司風度俊偉。文辭雄渾。有五子。曰再禧,曰再祿,次公,次再祉,再祺也。病革。以堂上章服屬公。南冥曹先生孫壻也。天性孝友。器宇宏遠。識周庶務。勇奪三軍。居常處閑。恂恂然直柔耳。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其不可拔。先大夫嘗牧義州。公在側三年。一不近色。時公年二十餘。人服其操焉。後陪先大夫入中朝。相者異之。以爲後必爲大人。名滿天下云。嘗從事文學。兼通武藝。累捷鄕解。又副庭試。以唐太宗敎射殿庭論。中第二。語有觸忤。卽命罷榜。下帷明經。人莫之先。丁父憂。喪祭盡誠。有愛妾病革。請一見而死。公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其執禮之嚴如是。服闋。遂棄擧子業。構亭歧江上。篛笠芒鞋。漁釣自娱。爲終老計。壬辰之變。杖劍首起。以報058_501b國討賊告家廟。屛妻孥托其友。傾家財募壯士。據新反之粟。宜寧屬縣倉 取草溪之兵。軍器 逋將 公將起兵時。路遇頂玉一丈夫。乃加德僉使田應獜也。公駐馬而呼曰。편001汝行色。必是奔北之將。負國偸生。罪不可赦。彎弓欲射之。田盛氣而應曰。我之奔北。於汝何與。抗而不屈。彎弓相向。公卽以義責之曰。汝旣敗軍。吾方倡義。從我義也。抗我悖也。田舍然愧謝曰。誠若公言。敢不僇力同事。遂爲偏裨。從公討賊。竟死於戰陣。潰卒。俱收並用。設施號令。雷厲焱飛。當是時也。人心淆亂。變將中起。公繩之以律。且諭以義。群情帖然。遠邇響從。賊將安國司聲言向全羅。直抵鼎津。公乃置壘要害。多伏强弩。萆山設疑兵。賊不濟而退。由是陸路諸賊。並趨左道矣。揭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賊。士未習戰。怯於赴敵。公着紅衣。以從先大夫赴京時。帝所賜紅錦爲之。挺身先之。賊炮雖齊發。而終不能爲害。又有良馬自至。公取騎臨戰。馳驟如飛。衆以爲神助。益恃以無恐。公選驍健者數人。衣紅衣乘白馬。一如公。分遣數處曰。若等見賊來。更出迭没。以惑亂之。公臨戰。輒先出以誘之。賊悉衆而追。行數里許。公鞭馬疾馳。倏沒於山谷間。賊058_501c方驚疑。忽又見紅衣白馬者。鼓噪而閃出於數里外高峯之上。賊瞻前忽後。目眩心奪。謂公爲飛將軍。畏不敢近。連戰皆捷。勦殺甚多。而亦不斬馘焉。咸安郡守柳崇仁以戰功陞兵使。或言公軍所殺之賊浮江而下。爲崇仁軍所斬者居多云。後因軍情論報將士之功。而必鈞得其宲。未嘗冒錄焉。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盡其情。及用法。雖親貴。不少貸焉。賞罰嚴明。血誠動人。故能得其死力。都事金穎男聽公䂓畫。事方就緒。而金巡察睟稱勤王。到龍仁奔還。公諗于衆曰。方伯築怨已稔。民怒極矣。性執而苛。掣肘必矣。與其僨事於後。曷若祛患於始。將在軍中。苟利於國。可以專之。列罪傳檄。疏聞行朝。方伯怒之。以叛逆論啓。令軍官金景訥等移書。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睟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人皆傳誦。謂其辭嚴義正。當與紹興詔草跋。相甲乙矣。招諭使金誠一。初到居昌。見檄文。錯愕疑058_501d訝。問於朴學諭思齊曰。再祐何如人也。方伯命使。安敢乃爾。答曰。生與再祐。自少同處。乃是忠孝底人。平日讀史。至世亂時危。必慷慨憤歎。或至哽塞。每言我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身以之。今日之事。雖未聞知。然想其素意。只知有國事。不爲身計。監司大失人心。出境已久。今忽還來。衆情解體。事不可爲。故必有此擧也。招諭使色變。作而言曰。朝廷處置。未可知也。吾當救此危命。遂反覆馳啓。上嘉之。命賞賫疏人。特賜溫諭。李好閔付詩曰。聞道紅衣將。逐倭如逐獐。爲言終戮力。而似郭汾陽。公雪涕厲士。遮截水陸。兵勢益張。屢勝之後。賊望風而走。江右湖南。頼以得完。爲恢復根基焉。始授幽谷察訪刑曹正郞。以領兵不赴。厥後歷典星州,晉州。政淸如水。明似神君。匹馬布衣。去來飄然。未嘗久於其任也。體察使李元翼使公治嶽堅 三嘉大坪山城 築石門。在玄風。公之新十山城也。058_502a議欲悉衆一戰。以决勝敗。將使楊揔兵移駐嶺南。楊元時駐南原 公言今日之計。姑爲羈縻。修山城。繕器械。畜資粮。在我之勢。可以戰守。然後待時而動。此虛虛宲實之法也。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虎出於野。童竪逐之。龍出於陸。獱㺚笑之。天兵之在湖路。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岀於野。龍岀於陸。亡乃不可乎。天兵單弱。在湖南則可爲聲援。移駐近地則賊必窺覘。反生吞噬之心故云。君相造命。願勿自沮。以圖全勝。以壯國勢。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下床屈膝。有將如此。何憂之有。丁酉秋。賊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火旺。昌寧縣山城。築石門未畢。賊已至。故移守於此。人人皆喜。以爲得大將。密陽,靈山,昌寧,玄風四邑入守。公纔入城。賊遊騎已到。一指揮之間。士氣百倍。斬犯禁違令者。以勵衆心。公弟再祉有單奴。犯門禁斬之。以己之奴與之。蘖族尹生三兄弟有違令。並斬之。積薪於舍館。以示死守。家孥所寓處積薪曰。或有不幸。當焚之。使不汚賊手。設內城。058_502b嚴部伍。勑諸將。一軍股慄。視公如雷電鬼神。賊旣薄城。從容談笑。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果不戰。渡江而西。屠黃石。安陰山城也。縣監郭䞭與前郡守趙宗道皆死之。䞭二子一女亦死之。䞭號存齋。於公爲再從叔而同里閈。知己交也。陷南原。城大兵少。天兵盡爲所殺。楊元僅以身免。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公事親孝。繼母許氏養於公。至是隨之入城。以病卒。軍民慷慨失望。議者以爲是擧也。賊雖交鋒。必爲公所挫。且以孤城。晏然談笑。抗方張之賊而全四邑生靈。非公忠勇。孰能之。公遂避地蔚珍。僻處杜門。不以流離。而持服惟謹。謂草土之中。不可向人有求。與子姪共造蔽陽子。貿以取資。邑人號公廬爲防禦店云。累命起復。終不應。後以察理使按南邊。又秉節蔚州。貪官驕將。皆屛息革心焉。欲繕島058_502c山城。以作必守地。朝廷不許。公謂不得其職則去。抗章棄歸。臺官洪汝諄等以瀆慢劾之。遂被謫靈岩。未幾賜環。入琵瑟山。餐松辟糓。蕭然若一道人也。聖上嗣位。暫起從仕。君臣之義。不欲廢也。上注意委任。特拜觀察閫帥。皆不至。就鷲山滄岩。爲捿息地。扁以忘憂。有筆床藥臼。一琴一船。永謝烟火。淨掃苔磯。忘機魚釣。萬事籧篨。然於時政。有懷必達。至聞邊鄙可虞。輒愀然曰。設有警急。吾當赴難。此其憂世之念。固未嘗少弛。而亭之有扁。志不忘也。卒之日。雷雨驟作。紫氣冲霄。雖深山窮谷。莫不驚悼。如失長城焉。上深加痛惜。亟命給需致賻。遣禮官祭於其廬。
贊曰。惟公。豈不誠大丈夫哉。臨亂效忠。義也。知止勇退。智也。赤松之遊。一絲之風。洒落光明。特立宇宙。意者天以全節畀公。扶058_502d我九鼎歟。誠使處之廊廟。必且身佩安危。爲社稷臣。可謂文武全才。命世鴻儒。如有尙論者。槩見倡義之迹。只認爲將。則何足以知公哉。或言南冥先生於公。擇以贅之。又訓迪之。噫。同明相照。同氣相求。得公於先生之門。不亦宜乎。
萬曆四十五年秋。侍講院輔德知製敎裵大維。撰送史院。


[편-001]皃 :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九
 諡狀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a_128_370b


公諱再祐。字季綏。嘗自號忘憂堂。玄風人。其上世有諱子儀仕高麗。爲金吾衛校尉。自是代有偉人。曾祖諱瑋。禮安縣監。祖諱之藩。成均館司成。贈承政院左承旨。考諱越。海西觀察使。贈禮曹判書。娶晉州128_370c 姜氏。以嘉靖壬子八月戊寅生公。自幼倜儻有奇氣。及長。孝友篤至。操守堅確。居常處閒。恂恂有退讓君子之風。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有不可拔者。嘗從判書公聘上國。有相者奇其狀貌。謂曰。此人後必貴。當名滿天下云。後生時好讀書。兼通武藝。累捷鄕解。及廷對語。觸時諱報罷。萬曆丙戌。丁判書公憂。廬墓三年。終喪不入私室。服闋。遂廢擧子業。作亭岐江上。漁釣自娛。爲終老計。壬辰夏。日本兵作。公慨然投袂而起。傾家資募壯士。據新反倉粟。取草溪軍器。逋將散卒。招收並用。號令風揮。忠義動人。遠邇聞之。莫不128_370d 響應。時賊將安國司聲言將向湖南。直抵鼎津。公樹栅要害處。設疑兵伏強弩以待之。賊憚其威聲。不敢濟。遂從陸路掠洛水東諸郡。公乃自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上賊多捷。時士未習兵。怯於進戰。公輒挺身先之。賊砲丸齊發而竟不能害。連日交兵。殺賊無算。亦不斬馘以獻功。撫視士卒如家人。至犯軍律當死。用法不少貸。賞罰嚴明。誠信素著。故能得人死力。初巡察使金睟見賊勢盛。不敢爲城守討賊計。託以勤王。行到龍仁。遇賊大敗而還。公告于衆曰。睟爲一路方伯。不死守封疆。欲出境偸生。喪師奔還。其罪128_371a 可斬也。因疏陳行在。檄數其罪。睟大怒。以反逆論啓。幕下金景訥等移書列邑。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時金文忠公誠一受招諭之命。行到居昌。初見檄文。錯愕驚疑。問於前學諭朴思齊曰。再祐何如人也。巡察是王人。安敢乃爾。思齊答曰。再祐故監司郭越之子也。爲人慷慨有大節。每讀史至忠臣義士盡節處。未嘗不感憤流涕。常曰。吾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軀以報之。其素意如此。今日之事。雖未知其由。然巡察遇賊出境。顚沛奔還。軍情解體。事128_371b 不可爲。故有此擧也。豈有他意哉。文忠大悟。卽致書于公。反復曉告。又馳啓行在。暴其忠義奮激狂疏戇直之狀。伸救甚力。上特下溫諭。勉以討賊。始授公幽谷道察訪。俄遷刑曹佐郞。公於是感泣拜受。誓以死報。激厲將士。屢戰皆捷。保障江右。爲恢復嶺南之基。時洛水以東屯據之賊。四出摽掠。恣行殺戮。民無所歸命。奔逬竄匿。將無孑遺。公自宜寧引兵來。住玄風之境。使突騎直至邑底以誘之。賊畏縮不敢出。公益爲疑兵。夜令人人持兩炬。炬皆三頭可爇火。迤邐數十里。鼓角齊鳴。一時擧火。若將掩襲之狀。忽又128_371c 火滅鼓止。寂若無人。俄頃復如前。賊大驚疑。撤屯宵遁。他邑留屯之賊。望風亦潰。七月。上諭嶺南士民書曰。郭再祐布置異常。殺賊尤多。而不以功自達云。予尤奇之。恨予聞名之晩也。冬。陞折衝爲助防將。公擇驍勇壯健者數十騎以自隨。公衣紅衣騎白馬。從者亦如之。凡遇賊。鼓譟左右。躡以誘之。賊或空壘以逐之。追至山谷間。失公所在。賊方驚惑。忽見前崖有紅衣白馬者鼓譟而出。賊大驚追之。又失所往。但聞鼓角殷山。旗幟萆阿。賊不敢逼。公乃令軍士從樹木叢密中游弩迭射。殺傷甚多。賊輒敗走。其出奇制勝。128_371d 以少擊衆。類如此。時完平李相公元翼以體察使開府于星州。使公築三嘉,玄風兩邑山城。將欲使楊總兵移駐嶺南。公言于體府曰。爲今日之計。當修山城。繕器械蓄資糧。先爲不可勝之勢。待時而動。此虛虛實實之論也。夫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若虎出於野。龍出於陸。童豎逐之。獱獺侮之。天兵之在湖南。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在野而龍出陸。亡乃不可乎。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屈膝。癸巳夏。拜星州牧使。甲午秋。棄歸。乙未春。拜晉州牧使。秋又棄歸。所至政淸如水。治稱神君。丁128_372a 酉秋。賊復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昌寧之火旺山城。群情胥悅。公纔入城。賊將淸正游騎已到城下。公指揮諸軍。號令明肅。兵威益張。士氣益勵。於是積薪所館。以示必死無生意。一軍皆感憤思致死。賊旣薄城。公從容談笑。但令各堅所守曰。賊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賊果斂兵不戰。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賊鋒所指。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致書體府曰。齊城七十。卽墨獨全。安市孤城。能抗唐兵。列鎭雖潰。餘城未拔者。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 時公有繼母喪也。軍民莫不悼128_372b 歎失望。公遂避地關東之蔚珍縣。衰絰居廬。持喪惟謹。不以顚沛流離。有所忽略。累命起復。終不應。戊戌。日兵撤歸。己亥冬。爲嶺南東道兵馬使。庚子。以島山城繕完事。再度啓請而朝廷不許。公以爲有官守者不得其職則去。上疏棄官歸。遂被臺劾。責靈巖。壬寅。賜環而歸。遂入琵瑟山。餐松辟穀。又就靈山滄巖築江亭。扁以忘憂。永謝煙火。蕭然若一道人也。甲辰春。拜南路察理使。巡審道內山城之必可修築者。夏。除善山府使。不赴。秋。拜安東府使。亦不赴。冬。陞嘉善。乙巳春。又以察理使被召。拜同知中樞府事。128_372c 俄遷漢城右尹。秋。除仁同縣監。蓋以曾修天生山城故也。又不赴。戊申。宣廟上仙。光海卽位。又拜本道兵馬使。不赴。己酉春。被召不就。拜三道統制使。又不赴。庚戌春。被召不至。上中興三策疏。夏。承召入京。拜副摠管。尋遷漢城左尹。上疏極言時弊。聞者莫不悚歎。拜咸鏡道觀察使。上疏論譯官遠接使無君之罪。不報。公以言不見用。浩然南歸。光海卽遣宣傳官追到忠州。宣旨敦諭。公留忠州數日。上疏歸家。光海又遣注書諭旨益懇。公謝病不起。留陜川之海印寺。答友人書曰。靑松巖畔。飢則餐葉。白雲堆裏。渴則飮泉。128_372d 一時人皆傳誦。公之在京也。完平,漢陰諸公日與之遊。賢士大夫莫不爭趨交謁。座不能容。癸丑夏。拜湖南兵馬使。有旨勉起。終不赴。時廷臣請殺永昌大君。公獨上疏言。八歲之兒。焉知逆謀。且大君見誅。慈殿必不能忍。如或有意外之變。則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不報。自是不復有意當世。常在江亭。杜門服食。有遺世獨立之意。丁巳春。疾病危篤。不許鍼藥曰。死生命矣。何用鍼藥爲。以四月十日啓手足。是日雷雨驟至。紫氣沖霄。春秋六十有六。深山窮谷。莫不驚歎。光海深加痛悼。亟命致賻賜祭。八月某日。128_373a 葬于玄風縣南仇知山神堂之原。從先兆也。今上甲寅。士林爲之立祠。與存齋郭公並享。越三年丁巳。因大提學閔點建請。特爲宣額。公夫人商山金氏。萬戶諱行之女。南冥曹植之外孫女也。生二子。曰瀅,曰活。無外家者又三人。曰灘,曰溟,曰沐。瀅有二子。曰汝櫓,汝楫。餘子又二人。曰汝梯,汝梲。活有四子。曰汝桓,汝榟,汝樞,汝松。灘有一子曰汝棹。溟有一子曰汝檀。沐有三子。汝相,汝棱,汝柱。曾孫男嫡庶凡十六人。玄孫男凡六人。玄逸竊惟國家昇平百年。優禮臣下。士大夫食君衣君。荷國寵榮者。不爲不厚。一朝變生。不128_373b 虞寇盜充斥。使君父蒙塵。越在草莽。不免震蕩暴露之苦。而一時方伯連帥之臣。奔北竄伏。偸生苟免者。前後相續也。公以草野書生。平生未嘗沾一命之官。顧獨奮然出萬死。不顧一生之計。糾合鄕兵。激以忠義。提數千烏合之卒。抗方張不測之寇。出奇制變。捷應機會。其所摧敗。旣足以暴當世而垂後來。卒能遊兵迭出。蔽遮沮遏。使賊不得逞。其分道荐食之策。爲國家中興根本。其忠其烈。斯已奇矣。晩復超然遠引。辟穀鍊氣。將與古之形解尸化者。相期紘垓之外。似若無意於當世者。而一聞朝論之愆違君德之128_373c 爽失。則輒復封章極言。只知有國而不知有其身。其惓惓忠愛之篤。又如此。若公者豈所謂間世奇氣英毅忠壯烈丈夫者非耶。玄逸晩生遐陬。雖未能及公之世。得接儀刑。親承音旨。聞其風而讀其書。景仰忻慕之日久矣。癸酉歲。從宦在京師。一日公之曾孫昕將請易名之典。詣玄逸而言曰。願子之爲之狀也。玄逸辭不獲。遂就家牒中稍加檃括。第錄如右。以備太史之採擇。太常之議諡焉。謹狀


訥隱先生文集卷之十一
 碑銘 碑識附
滄巖碑 a_187_323a


忘憂堂郭先生當龍蛇之亂。身任江淮堡障。卒收中興之績。論當時之烈。無與居先生右者。而先生不有其功。寇賊纔退。卽入山飡松。與張子房出處略同。盖先生之道。本諸忠孝。而其發於事爲者。奇偉不常。方其把釣岐江。則其跡似乎果。亂未至而鍤夷先壠。則其迹似乎恠。以匹夫而欲斬方伯。則人疑於狂。其投戈辟穀。則人疑於誕。及其義旗一奮。而人始知先生非果於忘世。寇賊所過。丘墓無不發掘。而人始服先生之先見。忠勇之士與先生同事者。多不187_323b 保其終。而先生超然名利之外。昔之我欲斬者。爲我而荷劍。夫而後人乃知先生之明哲過人。而忠義之服人心如此。然先生之奇。未盡見於世也。紅衣白馬。出沒若神。而狡虜不能測其所爲。牙纛山冠。往來倐忽。而威武不能奪其所守。忠謨讜論。無所顧忌。骨鯁之臣。相顧吐舌。而主上不怒其過。其出而從事。雷轟風驅。軒輊寰宇。而及歸而謝迹。則蕭然江上之一漁夫。觀其平日所服履者。又確乎純儒之操也。世孰得而相之哉。夫子稱老氏猶龍。若先生殆其然乎。靈之滄巖。先生晩年之所寓也。所謂忘憂亭尙在巖上。江流汹湧其下。其左崖壁立萬仞。先生臨終。以亭屬李公道純曰。唐虞以天下與人。大小雖異。其心一也。亭屢易187_323c 主。今爲先生外裔辛氏之居。靈之人士。欲立祠其上。祀先生。旣不得則又相與謀伐石。載先生事。以其役屬之光庭。光庭騃。不足以知先生。而亦喜載名其下。遂不敢辭。先生諱再祐。字季綏。玄風人。肅廟朝。贈大司馬。諡曰忠翼。故刻曰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云。系之以詩曰。
粤在宣朝。國運中圮。帝哀東土。錫我卿士。迺捍迺拯。迺薦膚公。其人謂誰。忠孝郭公。襲訓家庭。問學雷龍。蔚有神略。初笑于庸。襡其長袖。釣于江上。迨壬辰歲。海寇狂驤。守臣懾竄。列郡糜潰。公奮斗膽。義旗先揭。收召散亡。作其罷寡。朱衣白馬。若從天下。神機倐翕。電掣雷奔。賊奪心魄。喘若驚麏。半血于江。餘望風遁。相顧脅息。震疊挫頓。旣解晉187_323d 圍。旋收玄昌。蔽遮江右。以及湖疆。禾麻奮張。民妥于盤。爲國根本。卒濟時艱。疇勳定次。孰與公先。公不自有。推與裨褊。士樂忘死。民勇於鬪。帥臣列將。須我指授。丁酉再跳。火旺事急。我義益壯。强不敢逼。遂全孤城。賊亦尋退。投去兜鍪。托迹方外。上眷孤忠。曰予干城。委以閫面。間牧罷氓。松朮之場。敎書頻繁。大纛龍幡。布衣山冠。往來翩翩。誰泥誰挽。有屹滄巖。洛水之岸。擢出穹壁。走回層瀾。我亭其間。魚鳥與羣。一片江月。鳴琴洄沿。仁義良朋。胥來盤旋。惟進退憂。熲不可紓。以揭以號。其欲忘諸。帝懷匀天。下詔巫陽。時其大訌。憂不可忘。迺作雷師。紫氣以迎。公去巖空。江鳥悲鳴。六十六年。瓌偉磊落。文武儒仙。燀赫其迹。泰山毫芒。187_324a 雷皷雲中。聲曁華夷。士尙餘風。有矗其樹。有卓其烈。有來過者。宜豎其髮。


大山先生文集卷之九
 
答崔汝浩 a_226_198b


前書宜復久矣。以有多少往復擬議而未能。後書繼至。拜讀感悚。靡所容措。向後歲且盡。不審慈闈患候何如。老兄年衰善病。羸憊已甚。而躳執湯餌。夙宵憂煎。與在交遊。未嘗不服其誠孝之至。而又未嘗不憂其氣力之難支。今承有善飢之患。此中氣虛損之候。千萬良食自愛。侍湯之暇。留意攝養之方。以慰友朋之望。象靖兄憂226_198c妻患。入冬層苦。數月憂遑。近才幸安。身亦少有安日。少年輩或有肯過者。不免隨分點掇。然亦只是章句應課而已。無甚損費氣力。乃蒙垂戒。實出相愛之意。然老兄不自憂而反憂人。區區所處。視老兄用力之苦。則不啻十之一二。幸望以憂人者反以自憂。深以聖人謹疾孝子衛身之道加意焉。下交亦與有幸矣。只說要地緊切。看渠思索體認。此固敎人之要法。然少年朋友來有先後。或質有敏鈍。或識有淺深。不免隨其高下而告語之。畢竟講說辨論之意多而體認226_198d玩索之工少。殊覺未有進步處。深懼因己而壞人。今迫歲皆散去矣。三壯士事。當初不知有兩段議論。率爾做一文字。後見金友柱國。始知其委折。而渠主張以爲忘憂堂貽書下鄕士友。然細考前輩文字。終是可疑。與金友私有往復。渠後頗改見。深悔前言之輕發。今又得大笑軒譜狀。分明說其一卽李正言某云云。且有一二證左。渠遂翻然更書於郭門。以率爾妄發自咎。今此事當稍定矣。象靖不欲入是非林中。袖手以待歸宿之何居。猶不免時上人脣吻。深悔初頭226_199a不知而輕犯。然悔之亦無及矣。


 

망우집 ( 忘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忘憂先生文集
판심제  忘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29年頃刊
권책  世系, 年譜, 傳, 原集 2권, 龍蛇別錄 합 1책
행자  12행 24자
규격  23.2×18.7(㎝)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364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8
 저자
성명  곽재우(郭再祐)
생년  1552년(명종 7)
몰년  1617년(광해군 9)
 季綏
 忘憂
본관  玄風
시호  忠翼
특기사항  曺植의 門人이자 外孫壻. 李德馨과 從遊
 가계도
 郭之藩
 司成
 郭越
 黃海 監司
 晉州姜氏
 姜應斗의女
 郭再禧
 
 郭再祿
 
 郭再祐
 
 尙州金氏
 曺植의 外孫
 郭瀅
 
 郭活
 
 女
 
 辛膺
 
 女
 
 成以道
 生員
 側室
 李魯의 庶女
 郭灘
 
 郭溟
 
 郭沐
 
 女
 
 朴
 
 女
 
 許彥深
 
 金海許氏
 許瓊의 女
 郭再祉
 
 郭再祺
 
 女
 
 成天祚
 

기사전거 : 世系, 年譜, 神道碑銘(許穆 撰), 郭越神道碑銘(金世濂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1 8월 28일, 宜寧 世干里 외가에서 태어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3 1월, 모친상을 당하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14 「春秋」를 공부하다.
명종 22 1567 정묘 隆慶 1 16 尙州金氏와 혼인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18 宜寧 世干里에 집을 짓고 살다. 학문하는 여가에 射御書數를 익히고 兵家書를 통독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23 義州 府使로 가는 부친을 따라가 2년간 머물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27 가을, 冬至使로 북경에 가는 부친을 따라가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34 〈唐太宗敎射殿庭論〉으로 庭試에 합격하였으나 語意의 문제로 罷榜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35 8월, 부친상을 당하다. 新堂洞에서 여묘살이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38 복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宜寧의 歧江 遯地에 정자를 짓고 일생을 보내려 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41 4월, 왜적이 침입하자 義兵을 일으켜 ‘天降紅衣將軍’이라고 揭號하다. ○ 감사 金晬가 勤王을 핑계로 달아나자 斬해야 한다는 격문을 돌리고 行朝에 상소하다. ○ 상이 특별히 유시를 내려 褒獎하고, 幽谷察訪 兼 刑曹正郞에 제수하다. ○ 10월, 折衝將軍에 올라 助防將이 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42 4월, 星州 牧使가 되다. ○ 5월, 중국 총병 劉綎이 성주의 八莒縣에 주둔하자 肄習領將으로 왕래하다. ○ 6월, 부인 김씨의 상을 당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43 성주 목사로서 조방장을 겸하다. 山城의 수축에 전념하다. ○ 忠勇將軍 金德齡이 협력을 원하여 호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宜寧으로 와서 모이다. ○ 12월, 晉州 牧使가 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44 가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45 玄風 嘉泰里에서 지내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46 防禦使로서 玄風의 石門山城을 새로 쌓다. ○ 8월, 昌寧의 火旺山城으로 옮겨 지키다. 적장 淸正이 왔다가 물러나다. ○ 8월, 繼母 許氏가 성 안에서 졸하자 성을 나가 玄風 嘉泰里 琵瑟山麓에 장사 지내고, 강원도 蔚珍縣으로 避地하다. ○ 상이 특명으로 起復을 명하였으나 상소하고 응하지 않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48 10월, 경상 좌병사가 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49 2월, 島山城의 수축을 계청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靈巖郡에 付處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51 석방되어 琵瑟山으로 들어가 솔잎만 먹고 살다. ○ 靈山 滄巖에 가서 江亭을 짓고 ‘忘憂’라 편액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53 2월, 察理使가 되어, 仁同의 天生山城을 수축하다. ○ 5월, 善山 府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병으로 察理使를 사직하다. ○ 11월, 龍驤衛 上護軍이 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54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3월, 察理使로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곧 한성부 우윤이 되다.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고 滄巖 江亭으로 돌아오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55 5월, 전라 병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56 1월, 鄭逑와 張顯光이 내방하다. ○ 5월, 道流를 창도한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57 7월, 경상 좌병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상소하여 臨海君의 죄를 바루도록 청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58 3월, 경상 우수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59 윤3월, 召命에 나아가지 않고 〈中興三策疏〉를 올리다. ○ 6월,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 7월, 부총관이 되고, 이어 한성부 좌윤, 함경 감사가 되다. ○ 9월, 江亭으로 내려가다. 선전관이 忠州, 伽倻山 海印寺까지 내려왔으나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다. 해인사 百鍊菴에 몇 달 머물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61 11월, 鄭仁弘이 등용을 건의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62 4월, 전라 병사가 되다. 이때 조정 신하들이 永昌大君을 죽이도록 청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그 부당성을 말하다. 이 일로 사직하게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65 10월, 掌隷院 判決事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66 4월 10일, 졸하다. 玄風 嘉泰里에 返殯하다. 광해군이 致祭하고 傳을 짓도록 명하다. ○ 8월, 玄風 仇知山 新堂洞 선영에 장사 지내다. ○ 가을, 知製敎 裵大維가 傳을 지어 史院으로 보내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 고을 사람들이 祠宇를 세워 ‘忠賢祠’라 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 從子 郭瀏, 郭瀜 등이 문집을 초간하다. (郭瀏의 跋)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 玄風 縣監 柳千之가 書院을 세우다. 3년 후 ‘禮淵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忠翼’의 시호를 받다.
영조 27 1751 신미 乾隆 16 - 禮淵書院 앞에 神道碑를 세우다. (權愈 撰)
영조 47 1771 신묘 乾隆 36 - 후손 郭鎭南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金思渾의 跋)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을 처음 정리한 것은 사위 成以道였다. 그는 유문을 수집, 편차하여 2권으로 만들었는데, 소략하고 착오가 많았다. 이것을 문제로 여겨 從子 郭瀏와 郭瀜 등이 유문을 增補하고 권수에 傳을, 권말에 祭文과 挽詞를 붙여 1629년에 2권 1책으로 편차를 마쳤다. 이는 중간본에 붙어 있는 郭瀏의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에 간행에 관한 언급은 없어 이때 실제 간행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전하는 2권 1책의 판본이 이 정고본을 판각, 쇄출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1364), 국립중앙도서관(한44-가146)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636년경 저자의 외손 辛時望이 연보를 새로 만들고 趙任道의 考訂을 받았으며, 1751년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대제학 權愈가 신도비명을 썼다.
1771년에는 후손 郭鎭南 등이 초간본에 누락된 저자의 시문을 후손의 家藏, 古家의 藏書 등에서 널리 찾아 補輯하고, 朝野史나 名臣錄, 여러 文集 등에서 저자의 행적을 뽑아 舊譜와 辛時望이 만든 年譜를 참작하여 새로 연보를 만들어서 권수에 두고, 조정의 褒崇 문자와 諸賢의 詞章을 권말에 편차하여 5권 3책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저자와 가까웠던 金命元의 후손 金思渾이 宜寧 縣監으로 나오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 일이고, 결국 중간본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중간본》 현재 규장각(古3428-755), 장서각(4-5976), 성암고서박물관(4-632)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5권 4책의 중간본이 있는데, 이것은 중간본에 倡義錄 1책이 합본된 것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29년경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許穆 撰), 跋(郭瀏, 金思渾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世系, 年譜, 傳, 原集 2권, 龍蛇別錄 합 1책으로 되어 있다.
맨 앞에 세계와 연보가 실리고, 그 뒤에 왕명으로 裵大維가 지은 傳이 실려 있다.
권1은 임진년에 義兵을 일으킨 이후 1604년 察理使 재임 시까지 지은 疏, 上書, 啓辭 등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비변사의 關文, 金德齡의 書, 有旨 등이 부기되어 있다. 〈倡義時自明疏〉나 招諭使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는 경상 감사 金晬가 勤王을 이유로 도망간 일과 관련하여 지은 글들이고, 〈答金將軍書〉는 金德齡이 연합을 제의한 데 대한 것이다. 그 외에 起復을 사양하는 疏, 島山城의 수축을 청하는 啓草, 兵使 때 사직하는 소, 察理使로서 仁同의 天生山城 수축과 관련하여 올린 狀啓 등이 실렸다.
권2는 1605년 이후 지은 疏, 論, 書, 詩이다. 1608년(무신)과 1610년(경술)에 내린 召命과 이를 사양하는 疏, 1613년 永昌大君의 죽음과 관련하여 올린 소가 실려 있다. 또 〈張浚論〉은 남송 때 金人의 침략을 물리쳐 공을 세웠던 장준에 관해 논한 글이다. 그 외에 사위 成以道를 권면하는 편지와 滄巖의 江亭을 李道純에게 물려주면서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詩는 〈歸江亭〉, 〈咏懷〉 등 대부분 江亭 생활을 읊은 것으로,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율시이다.
부록으로 李埈, 金永暉, 李德馨 등의 投贈詩 8題, 書簡 2편, 賜祭文 1편, 申之悌, 郭永禧, 安瓙 등이 지은 祭文 7편, 河惺, 成以道, 裵弘祐 등이 지은 挽詞 12편, 建祠時呈書, 都事金鑑移關이 실려 있다.
龍蛇別錄은 저자의 왜란 때 의병 활동과 일화, 왜란의 추이 등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1592년 4월과 7월, 1593년 4월과 6월, 1594년, 1597년의 기록이다.

필자 : 金圻彬

 

 

 

 

 忘憂先生文集世系年譜
 年譜
忘憂先生年譜 a_058_497c


皇明世宗皇帝嘉靖三十一年壬子本朝明宗大王七年八月二十八日戊寅癸亥時。先生生于宜寧世干里之私第。卽先生外家也。
嘉靖三十二年癸丑
嘉靖三十三年甲寅正月二十二日。先夫人見背。
嘉靖三十四年乙卯
嘉靖三十五年丙辰
嘉靖三十六年丁巳
嘉靖三十七年戊午
058_497d嘉靖三十八年己未
嘉靖三十九年庚申
嘉靖四十年辛酉
嘉靖四十一年壬戌
嘉靖四十二年癸亥
嘉靖四十三年甲子
嘉靖四十四年乙丑。是歲先生年十四。以春秋請質於季父參議公赳。公曰。汝自能看透。豈待吾啓發。先生遂潛心硏究。先生之學。蓋本於春秋。
嘉靖四十五年丙寅
穆宗皇帝隆慶元年丁卯。是歲先生年十六。聘于昌原居萬戶金行之家。萬戶公乃商山世家。而南冥曹先生女壻也。有二058_498a女。長適金東岡宇顒。次配先生。皆南冥先生所自選擇也。
隆慶二年戊辰。本朝宣祖大王元年。
隆慶三年己巳。先生旣生長于外家。是歲作室于世干。因居焉。
隆慶四年庚午
隆慶五年辛未。先生氣宇豪邁。學文之暇。習射御書數之藝。兵家書亦皆泛濫。
隆慶六年壬申
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宣祖大王六年。
萬曆二年甲戌。是歲先大夫牧義州。先生陪往。時先生年二十三。
萬曆三年乙亥在義州
萬曆四年丙子。先大夫遞還。先生在義州三年。一不近色。人服058_498b其操。是歲女子子生。長適靈山居牧使辛崙之孫膺。生子東望,時望。
萬曆五年丁丑九月。子瀅生。生子汝櫓,汝楫。
萬曆六年戊寅秋。先大夫以冬至使赴京。先生陪行入中朝。相者異之。以爲當名滿天下云。及壬辰倭亂。倡起義兵。名顯華夷。相者之言果驗矣。朝天之使有言皇朝發策取士。以先生爲問。通信使金世濂迴言日本國史亦載先生事蹟云。
萬曆七年己卯春。陪先大夫還自京師。
萬曆八年庚辰八月。子活生。生子汝桓,汝梓,汝樞,汝松。
萬曆九年辛巳
萬曆十年壬午。女子子生。長適昌寧居縣監成天裕之子生員以道。生子萬江,萬河。
058_498c萬曆十一年癸未
萬曆十二年甲申。是年以前。先生東堂入格者三。而年月皆不可攷。
萬曆十三年乙酉。是歲先生年三十四。中庭試第二。乃唐太宗敎射殿庭論也。語意有觸忤。命罷其榜。
萬曆十四年丙戌八月初六日。丁判書公憂。以先夫人姜氏袝。居廬于神堂三年。
萬曆十五年丁亥
萬曆十六年戊子。是歲夏。先生側室在陜川病革。願一見而死。先生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其執喪之嚴如此。
萬曆十七年己丑。服闋後遂廢擧子業。作亭于宜寧歧江上。坊名遯地。漁釣自娛。若將終身。
058_498d萬曆十八年庚寅。在遯地江亭。
萬曆十九年辛卯。在江亭。
萬曆二十年壬辰。是歲先生年四十一。夏四月。倭寇猝發。列郡瓦解。先生首起義兵於宜寧。揭號天降紅衣將軍。戰無不捷。四方響應。義旅繼起。時監司金睟托以勤王。踰嶺而走。久乃旋歸。先生奮然曰。睟以道主。一不禦賊。出境逃還。罪可斬也。遂列罪傳檄于睟。又疏聞于行朝。睟大怒。以叛逆論啓。且令其軍官金景訥等移書。目之以賊。先生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睟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招諭使金誠一聞之。卽抵書于先生。譬喻多方而力止之。又反覆馳啓而伸救之。自上特賜溫諭。勉以討賊之義。備邊司亦移關而褒奬058_499a之。始授幽谷察訪兼刑曹正郞。先生於是雪涕勵士。兵勢益張。日擊江賊。保障江右。以爲恢復根基焉。時左道諸賊。分道入京。沿路各邑。皆有屯賊。四出摽掠。先生親率精銳。出奇設疑。攻刦多方。玄,昌,靈三邑屯賊。焚燒官倉。相繼遁去。火餘米糓。民多頼之。秋七月。自上敎諭于本道士民書有曰。聞郭再祐布置異常。殺賊尤多。而不以功自達云。予尤奇之。恨予聞名之晩也。冬十月。陞折衝將軍爲助防將。是歲副室子灘生。
萬曆二十一年癸巳夏五月。天將劉揔兵綎來駐於星州之八莒縣。先生以肄習領將。往來於唐陣。夏六月。夫人金氏卒。冬十二月。除星州牧使。
萬曆二十二年甲午。以星州牧使兼助防將。時朝議以修築058_499b山城爲急。令先生專主築城備禦之務焉。忠勇將軍金德齡聞先生名聲。先以書通。願與之協力討賊。自湖南領兵來會於宜寧。是秋棄星州牧使。副室子溟生。
萬曆二十三年乙未春。除晉州牧使。夏五月。觀察使徐渻聞先生有棄官之意。以書勸留之。是秋棄歸。
萬曆二十四年丙申。在玄風嘉泰。
萬曆二十五年丁酉。以防禦使。新築玄風之石門山城。未及完畢。賊有再動之勢。秋八月。移守昌寧之火旺山城。未幾。賊將淸正引兵大至。先生嚴部伍勅諸將。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賊經一晝夜。果不戰而退。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體察使李元翼以城危兵少難之。先生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058_499c而不從。是月二十九日。繼母許氏病卒于城中。奉喪柩出城。權厝於玄風嘉泰里琵瑟山麓。遂避地于江原道蔚珍縣。自上特命起復者三。而皆上疏陳情不起。
萬曆二十六年戊戌。在蔚珍寓所。是歲倭賊撤歸。
萬曆二十七年己亥。在嘉泰。冬十月。爲本道左兵使。追贈三代。焚黃于家廟。
萬曆二十八年庚子。以島山城修築事。再度啓請。而朝廷不省。先生以爲有官守者不得其職則去。因上疏以見其志。棄官而歸。遂被㙜劾。靈岩郡付處。是歲副室子沐生。
萬曆二十九年辛丑。在靈岩謫所。
萬曆三十年壬寅。賜環入琵瑟山。餐松辟糓。又就靈山滄岩。新築江亭。扁以忘憂。永謝烟火。蕭然若一道人也。
058_499d萬曆三十一年癸卯。在滄岩江亭。
萬曆三十二年甲辰春。拜察理使。委以南路保障之任。先生奉命巡審道內山城形勢。修築仁同之天生山城。夏五月。除善山府使。不赴。因以病馳啓。辭察理使。秋八月。拜安東府使。不赴。冬十一月。陞授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時先生年五十三。
萬曆三十三年乙巳春正月。以察理使有召命。二月。拜同知中樞府事。三月。又以察理使承召命上京。俄遷漢城右尹。夏四月。加贈先大夫禮曹判書。未幾。呈病南還。秋八月。除仁同縣監。蓋以曾修天生山城也。不赴。
萬曆三十四年丙午。在江亭。
萬曆三十五年丁未。在江亭。春正月二十七日。寒岡鄭先生,旅058_500a軒張先生乘舟來訪。翊日同泛龍華山下。
萬曆三十六年戊申。在江亭。春二月。宣廟昇遐。光海卽位。秋七月。拜本道左兵使。不赴。八月。被召。上疏不赴。九月又召。特令本道監司給衣馬護送。上疏乞寢召命。乃擧春秋討逆之義。請正臨海之罪。十一月又被召。上疏極斥全恩讓位之說。不赴。
萬曆三十七年己酉。在江亭。春正月。被召不赴。三月。拜三道統制使。不就。
萬曆三十八年庚戌。在江亭。閏三月。被召不赴。上中興三策疏。夏六月。承召上京。秋七月。拜副捴管。時金睟爲都捴管。謂先生曰。令公絶粒多年。何以堪荷雲劍。每自荷之。少無宿憾意。待先生甚欵。秋八月。拜漢城左尹。上疏直言。至以爲殿下之058_500b國。必亡於銀。聞者莫不悚歎。又拜咸鏡監司。上疏極論譯官遠接使等無君之罪。朝廷不能擧劾。先生慨然連上封章。備邊司入啓以爲郭再祐之疏。言言痛切。正中時病。願加體念。九月。先生以言不見用。浩然南歸。光海卽遣宣傳官。追到忠州。宣旨敦諭。先生留忠州數日。上疏而來。又特遣注書元鐸追到伽倻之海印寺。諭旨益懇。先生謝病不起。因留於海印之百鍊菴數月。答人書有曰。靑松岩畔。飢則餐葉。白雲堆裡。渇則飮泉。一時傳誦。先生之在京也。完平,漢陰諸公日相從遊。賢士大夫莫不爭趨交謁。座不能容。或爲詩文以歎美之。所至兒童走卒。亦皆奔走聚觀。塡溢街巷。
萬曆三十九年辛亥。在江亭。
萬曆四十年壬子。在江亭。正朝。先生祭先塋于神堂。大會親戚058_500c于率禮。留連五六日。極懽而罷。
萬曆四十一年癸丑。在琵瑟山照菴。數月而來。夏四月。拜全羅兵使。五月。有旨勉起。終不赴。時廷臣請殺永昌大君。人莫敢言。先生獨冒死上疏。以爲八歲之兒。必不知逆謀之爲何事。且大君之誅。慈殿必不能忍。不能忍而如或自决。則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臣恐群臣將使殿下陷於大不義也。
萬曆四十二年甲寅。在江亭。
萬曆四十三年乙卯。在江亭。時南冥先生副室子次石爲宜寧縣監。朝廷贈爵賜諡于南冥。遣禮官祭于宜寧。先生往觀焉。
萬曆四十四年丙辰。在江亭。冬十月。除掌隷院判決事。不赴。十一月。往哭許氏姊於宜寧。
058_500d萬曆四十五年丁巳。是歲春三月。先生患脹。不許鍼藥曰。死生有命矣。夏四月十日。終于江舍。是日之午。雷雨驟作。紫氣沖霄。天光下燭。俄然乘化。享年六十六。返殯於玄風嘉泰里。雖深山窮谷。莫不驚悼。以爲郭公亡矣。郭公亡矣。光海深加痛惜。亟命致賻賜祭立傳。秋八月。葬于縣南仇知山神堂之原。卽先生曾祖以下同原之岡也。明年戊午。鄕人爲之立祠。時郭㠎爲山長。盡心營建。


 忘憂先生文集傳
 
忘憂先生傳[裵大維] a_058_501a


郭先生再祐。字季綏。玄風人。黃海監司越之子。監司風度俊偉。文辭雄渾。有五子。曰再禧,曰再祿,次公,次再祉,再祺也。病革。以堂上章服屬公。南冥曹先生孫壻也。天性孝友。器宇宏遠。識周庶務。勇奪三軍。居常處閑。恂恂然直柔耳。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其不可拔。先大夫嘗牧義州。公在側三年。一不近色。時公年二十餘。人服其操焉。後陪先大夫入中朝。相者異之。以爲後必爲大人。名滿天下云。嘗從事文學。兼通武藝。累捷鄕解。又副庭試。以唐太宗敎射殿庭論。中第二。語有觸忤。卽命罷榜。下帷明經。人莫之先。丁父憂。喪祭盡誠。有愛妾病革。請一見而死。公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其執禮之嚴如是。服闋。遂棄擧子業。構亭歧江上。篛笠芒鞋。漁釣自娱。爲終老計。壬辰之變。杖劍首起。以報058_501b國討賊告家廟。屛妻孥托其友。傾家財募壯士。據新反之粟。宜寧屬縣倉 取草溪之兵。軍器 逋將 公將起兵時。路遇頂玉一丈夫。乃加德僉使田應獜也。公駐馬而呼曰。편001汝行色。必是奔北之將。負國偸生。罪不可赦。彎弓欲射之。田盛氣而應曰。我之奔北。於汝何與。抗而不屈。彎弓相向。公卽以義責之曰。汝旣敗軍。吾方倡義。從我義也。抗我悖也。田舍然愧謝曰。誠若公言。敢不僇力同事。遂爲偏裨。從公討賊。竟死於戰陣。潰卒。俱收並用。設施號令。雷厲焱飛。當是時也。人心淆亂。變將中起。公繩之以律。且諭以義。群情帖然。遠邇響從。賊將安國司聲言向全羅。直抵鼎津。公乃置壘要害。多伏强弩。萆山設疑兵。賊不濟而退。由是陸路諸賊。並趨左道矣。揭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賊。士未習戰。怯於赴敵。公着紅衣。以從先大夫赴京時。帝所賜紅錦爲之。挺身先之。賊炮雖齊發。而終不能爲害。又有良馬自至。公取騎臨戰。馳驟如飛。衆以爲神助。益恃以無恐。公選驍健者數人。衣紅衣乘白馬。一如公。分遣數處曰。若等見賊來。更出迭没。以惑亂之。公臨戰。輒先出以誘之。賊悉衆而追。行數里許。公鞭馬疾馳。倏沒於山谷間。賊058_501c方驚疑。忽又見紅衣白馬者。鼓噪而閃出於數里外高峯之上。賊瞻前忽後。目眩心奪。謂公爲飛將軍。畏不敢近。連戰皆捷。勦殺甚多。而亦不斬馘焉。咸安郡守柳崇仁以戰功陞兵使。或言公軍所殺之賊浮江而下。爲崇仁軍所斬者居多云。後因軍情論報將士之功。而必鈞得其宲。未嘗冒錄焉。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盡其情。及用法。雖親貴。不少貸焉。賞罰嚴明。血誠動人。故能得其死力。都事金穎男聽公䂓畫。事方就緒。而金巡察睟稱勤王。到龍仁奔還。公諗于衆曰。方伯築怨已稔。民怒極矣。性執而苛。掣肘必矣。與其僨事於後。曷若祛患於始。將在軍中。苟利於國。可以專之。列罪傳檄。疏聞行朝。方伯怒之。以叛逆論啓。令軍官金景訥等移書。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睟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人皆傳誦。謂其辭嚴義正。當與紹興詔草跋。相甲乙矣。招諭使金誠一。初到居昌。見檄文。錯愕疑058_501d訝。問於朴學諭思齊曰。再祐何如人也。方伯命使。安敢乃爾。答曰。生與再祐。自少同處。乃是忠孝底人。平日讀史。至世亂時危。必慷慨憤歎。或至哽塞。每言我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身以之。今日之事。雖未聞知。然想其素意。只知有國事。不爲身計。監司大失人心。出境已久。今忽還來。衆情解體。事不可爲。故必有此擧也。招諭使色變。作而言曰。朝廷處置。未可知也。吾當救此危命。遂反覆馳啓。上嘉之。命賞賫疏人。特賜溫諭。李好閔付詩曰。聞道紅衣將。逐倭如逐獐。爲言終戮力。而似郭汾陽。公雪涕厲士。遮截水陸。兵勢益張。屢勝之後。賊望風而走。江右湖南。頼以得完。爲恢復根基焉。始授幽谷察訪刑曹正郞。以領兵不赴。厥後歷典星州,晉州。政淸如水。明似神君。匹馬布衣。去來飄然。未嘗久於其任也。體察使李元翼使公治嶽堅 三嘉大坪山城 築石門。在玄風。公之新十山城也。058_502a議欲悉衆一戰。以决勝敗。將使楊揔兵移駐嶺南。楊元時駐南原 公言今日之計。姑爲羈縻。修山城。繕器械。畜資粮。在我之勢。可以戰守。然後待時而動。此虛虛宲實之法也。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虎出於野。童竪逐之。龍出於陸。獱㺚笑之。天兵之在湖路。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岀於野。龍岀於陸。亡乃不可乎。天兵單弱。在湖南則可爲聲援。移駐近地則賊必窺覘。反生吞噬之心故云。君相造命。願勿自沮。以圖全勝。以壯國勢。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下床屈膝。有將如此。何憂之有。丁酉秋。賊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火旺。昌寧縣山城。築石門未畢。賊已至。故移守於此。人人皆喜。以爲得大將。密陽,靈山,昌寧,玄風四邑入守。公纔入城。賊遊騎已到。一指揮之間。士氣百倍。斬犯禁違令者。以勵衆心。公弟再祉有單奴。犯門禁斬之。以己之奴與之。蘖族尹生三兄弟有違令。並斬之。積薪於舍館。以示死守。家孥所寓處積薪曰。或有不幸。當焚之。使不汚賊手。設內城。058_502b嚴部伍。勑諸將。一軍股慄。視公如雷電鬼神。賊旣薄城。從容談笑。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果不戰。渡江而西。屠黃石。安陰山城也。縣監郭䞭與前郡守趙宗道皆死之。䞭二子一女亦死之。䞭號存齋。於公爲再從叔而同里閈。知己交也。陷南原。城大兵少。天兵盡爲所殺。楊元僅以身免。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公事親孝。繼母許氏養於公。至是隨之入城。以病卒。軍民慷慨失望。議者以爲是擧也。賊雖交鋒。必爲公所挫。且以孤城。晏然談笑。抗方張之賊而全四邑生靈。非公忠勇。孰能之。公遂避地蔚珍。僻處杜門。不以流離。而持服惟謹。謂草土之中。不可向人有求。與子姪共造蔽陽子。貿以取資。邑人號公廬爲防禦店云。累命起復。終不應。後以察理使按南邊。又秉節蔚州。貪官驕將。皆屛息革心焉。欲繕島058_502c山城。以作必守地。朝廷不許。公謂不得其職則去。抗章棄歸。臺官洪汝諄等以瀆慢劾之。遂被謫靈岩。未幾賜環。入琵瑟山。餐松辟糓。蕭然若一道人也。聖上嗣位。暫起從仕。君臣之義。不欲廢也。上注意委任。特拜觀察閫帥。皆不至。就鷲山滄岩。爲捿息地。扁以忘憂。有筆床藥臼。一琴一船。永謝烟火。淨掃苔磯。忘機魚釣。萬事籧篨。然於時政。有懷必達。至聞邊鄙可虞。輒愀然曰。設有警急。吾當赴難。此其憂世之念。固未嘗少弛。而亭之有扁。志不忘也。卒之日。雷雨驟作。紫氣冲霄。雖深山窮谷。莫不驚悼。如失長城焉。上深加痛惜。亟命給需致賻。遣禮官祭於其廬。
贊曰。惟公。豈不誠大丈夫哉。臨亂效忠。義也。知止勇退。智也。赤松之遊。一絲之風。洒落光明。特立宇宙。意者天以全節畀公。扶058_502d我九鼎歟。誠使處之廊廟。必且身佩安危。爲社稷臣。可謂文武全才。命世鴻儒。如有尙論者。槩見倡義之迹。只認爲將。則何足以知公哉。或言南冥先生於公。擇以贅之。又訓迪之。噫。同明相照。同氣相求。得公於先生之門。不亦宜乎。
萬曆四十五年秋。侍講院輔德知製敎裵大維。撰送史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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