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

조선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 관련기사

아베베1 2011. 11. 9. 20:52

 

안희제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출생한 백산은 부산 최초의 무역회사 였던 백산상 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상인, 기업가가 아니라 민족자본의 육성자였고, 민족교육의 선구자였으며, 민족사상의 고취자로서 항일독립투사였다. 1905년 보성전문에 입 학하였다가, 1906년 양정의숙에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다.

1911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하여 최병찬과 『독립순보』를 간행 하였다. 1913년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1917년 구포의 윤현태와 자본금 100만원으로 백산무역주식 회사로 개창하였다. 백산은 국내지주들이 기부, 기탁한 자금의 어음을 경남은행 본점에서 할인하여 상해로 송금하는 책임을 도맡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리기관인 것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해외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과 그 자금공급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운동의 국내후원기관이었다.

1927년 경영난과 일제의 탄압 및 방해로 해산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자금조달과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 등 국내에서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백산상회를 중심 으로 1919년 11월경 부산부에 거주한 한국자본가들이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고 한국청년들 중 수재를 선발하여 일본 기타 외국에 유학시켜 학비 등 장학금을 지급했다.

1927년경 그 는 백산상회가 해산된 후 서울에서 『중외일보』를 경영했으며, 1933년에는 만주 동경성 에서 튼튼한 독립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제의 토지 강탈로 농토를 잃고 아사지경을 헤매고 있던 국내의 실농민을 이주시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발해농장을 경영했다.

아울러 농민들이 거주할 주택을 건설하며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발 해학교를 설립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많은 활동을 하던중 1942년 10월 일제가 대종교 본부를 습격하여 윤세복 등 간부 20여명을 검거한 대종 교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3년 7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동년 8월 3일 59세를 일기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아울러 부산시에서는 그의 독립정신을 그리기 위하여 원래 백산상회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선생의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여러 학술활동도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