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1.10. 도봉산 둘레길

2011.11.10. 도봉산 둘레길(우이동 -연산-정의공주- 포도밭길 -전망대 -무수골 -도봉사 -매표소)

아베베1 2011. 11. 10. 20:53

 

 

 

 

 

 

 

 

 

 

 

 

 

 

 

 

 

 

 

 

 

 

 

 

 

 

 

 

 

 

 서계집 제13권
 갈명(碣銘) 13수(十三首)
호조 좌랑 안군(安君) 묘갈명


부군(府君)은 휘는 정욱(廷煜), 자는 명숙(明叔), 성은 안씨(安氏)이고, 죽산(竹山)이 그의 관향이다. 그의 선조는 양량(襄良), 희정(禧靖), 문정(文貞)이 연달아 삼대에 걸쳐 모두 고려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숙로(叔老)에 이르러 비로소 본조에서 벼슬하였다. 두 대를 지나 맹담(孟聃)에 이르러서는 연창위(延昌尉)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니, 이분은 실로 세종(世宗)의 따님으로 세칭 ‘팔대군 일공주(八大君一公主)’의 일원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한 분이다. 공주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돈녕부 도정 상계(桑雞)이다. 세종께선 공주의 자식들을 사랑하시어 모두 친히 이름을 지어주셨다. 도정이 태어나 공주가 해산했다고 아뢰었는데 그때 마침 닭이 뽕나무에서 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또 두 대를 지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종탄(從坦)에 이르러서는 부군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충무위(忠武衛) 부사직 휘 언추(彦錘)이고, 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휘 경렴(景濂)이다. 부친은 통천 군수(通川郡守) 증 이조 판서 휘 대남(大楠)이고, 모친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도승지 희(憘)의 따님이다.
부군은 선조(宣祖) 38년인 을사년(1605) 3월 갑진일에 태어났다. 14, 5세 때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하며 몸소 탕제(湯劑)를 달여 드렸는데 시종일관 해이해지지 않았다.
인조(仁祖) 원년인 계해년(1623)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예법대로 장례와 제례를 치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서쪽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올 당시 부군은 고양(高陽)의 별업(別業)에 거처하고 있었고 권 부인(權夫人)은 서울에 있었다. 부군은 식구들에게 영동(嶺東)으로 피난하도록 당부하고는 자신은 대부인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성 남문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다투어 문을 나서려고 가득 메운 인마가 서로 밟아대는 지경이었다. 부군은 말을 버리고는 맨 몸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당도해 보니 대부인은 이미 떠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길에서 울며 찾아 헤매다 성 동쪽에서 만나 함께 섬으로 들어가 마침내 안전할 수 있었고, 부군의 지시를 받아 영동으로 피난했던 가족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난이 진정된 뒤 다시 서교(西郊)에 거처하였다. 부군은 성품이 남들과 거스름이 없어 향리에서 왕래할 적에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반드시 정중하게 성의를 다하였고 담소하며 친밀하게 대해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계미년(1643) 봄에 이조 판서 이공 경증(李公景曾)이 천거하여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보임되었다. 부군은 직임을 수행함에 있어 지나치고 쓸데없는 것들을 줄여 나가고 좀먹는 행위를 척결하였으며, 중국의 사신(使臣)이 이르면 그가 원하는 것을 살펴 조처하여 빈틈없이 접응하였다. 이공이 빈(儐)이 되어 그가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조에 있으면서 인재를 얻는 것이 다 이와 같다면 책무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공 태화(鄭公太和)와 김공 남중(金公南重)이 전후로 빈이 된 것도 모두 부군이 감역으로 재직할 때였는데, 그들도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병술년(1646)에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자리를 옮겼다.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으로 이배(移拜)되어서는 적체된 옥사를 처결하고 하리(下吏)들의 간사한 행위를 적발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니, 하리들이 두려워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에 호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 호조는 육관(六官) 중에서 가장 일이 많은 곳이어서 조도(調度)가 번다하고 자잘하며 회계가 복잡다단하였는데, 계산과 출납을 담당하여 그 일을 직접 챙기는 것은 모두 낭관의 직임이었다. 부군은 간국(幹局)이 있는 데다 출납하는 수효를 명확히 살펴 조금도 틀리는 바가 없었다. 판서 원공 두표(元公斗杓)가 이르기를, “재간이 온갖 사무를 맡길 만하다.” 하였으니, 맡고 있는 직임 외에도 늘 대여섯 가지 일을 겸직하였다.
무자년(1648) 봄에 대흥 현감(大興縣監)에 제수되었다. 현을 다스리는 6년 동안 엄격하고 분명하게 옥송을 잘 판결하여 부근 고을의 송사가 대부분 부군에게 몰려들었다. 학교를 수축하고 부고(府庫)를 채웠으며, 호강(豪强)을 제어하고 무격(巫覡)을 금하니, 전후로 사자(使者)가 포상할 것을 아뢰었다. 그런데 마침 이웃 도(道)로 출두한 어사가 간교한 백성의 비방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흠을 잡아냈다. 이 때문에 법리(法吏)에게 회부되어 조사받았지만 곧바로 풀려나왔다. 대흥현의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으니, 이해는 효종(孝宗) 4년인 계사년(1653)이었다.
이듬해인 갑오년(1654, 효종5)에 서용되어 신계 현령(新溪縣令)에 제수되었다. 현령으로 재직한 5년 동안 사자가 치적을 아뢰었지만 다시 미미한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 백성들이 또 그를 위해 거사비를 세웠다.
기해년(1659) 봄에 교하 현감(交河縣監)에 제수되었다. 이해 겨울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신축년(1661, 현종2) 봄에 서용되어 장례원 사평에 제배되었고, 여름에 직산 현감(稷山縣監)에 제수되었다. 관직을 맡아서는 고식책을 쓰지 않고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일은 기필코 가닥을 잡아 나가 대소 업무가 모두 빈틈이 없었다.
을사년(1665) 5월에 병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앓았던 풍질(風疾)이 이때에 이르러 다시 심해져 누차 사직하여 비로소 해면된 것이다. 부군은 효성스럽게 모친을 섬겨 전후로 네 차례 고을살이할 때 모두 권 부인을 모시고 가서는 무릇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다 극진하게 하였다. 병으로 해면되어 돌아와서는 이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인과 다른 집에서 살았는데, 맛난 음식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사람을 보내 모친의 처소에 올리게 하였고, 식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손짓으로 가리켜 음식을 보낸 것을 알고 나서야 드셨다. 6월 그믐에 권 부인의 병이 갑자기 위중해졌지만, 식구들이 부군의 병을 염려하여 그 사실을 숨겼다. 부군이 아침에 시봉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제 꿈이 이러하니, 내가 한번 가서 모친께 문안을 드려야겠다.” 하였다. 비록 말이 어눌해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개 꿈이 불길하다는 내용이었는데, 식구들이 거짓말을 하여 마음을 달래드렸다. 급기야 권 부인의 병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식구들이 모여 상사(喪事)를 알려야 할지의 여부를 논의하였다. 부군은 일체 아무것도 모른 채 뒤척이다 밤늦게야 잠든 것 같더니 잠시 뒤 갑자기 놀라 일어났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하였다. 구슬프게 통곡을 하며 다급히 의대(衣帶)를 찾으면서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려 하였다. 부사군(府使君)이 황망히 만류하여 붙잡고는 찬찬히 연유를 여쭙자, 두 뺨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부인을 연달아 불러 마지않으며 손으로 모습을 그려 옆 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절망스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고 그 우러나오는 감정은 달래지 못할 지경이었다. 식구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 재촉하여 가마를 마련하고는 길을 나서려 했는데, 그때는 이미 밤이 사경(四更)이 지나 있었고 마침 대부인의 부고가 문에 당도하였다. 부군은 상구(喪具) 곁에서 중풍으로 원기가 다 빠진 몸으로 뒹굴고 통곡하여 보는 이들이 눈물을 뿌렸으니, 그의 효성은 하늘에 뿌리박은 것이어서 병이 위중한 상태였어도 마음에서 잠시라도 모친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환이 나시면 꿈에 보였고 그 병이 위독해졌을 때도 꿈에 보였던 것이다. 아, 지성이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정미년(1667, 현종8) 4월 3일에 부군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향년 63세였다. 이달은 윤달이 들어 5월 계유일에 양주(楊州) 송랑곡(松浪谷) 선영 서쪽에 안장하였다. 금상(今上 숙종) 10년인 갑자년(1684) 11월 무진일에 이전 묘소와 몇 리 안 떨어진 사제동(沙堤洞) 유좌(酉坐) 언덕에 개장하였다.
부군은 온후하고 화락하며 친속들에게 돈독하고 남들을 도와주었다.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관직 생활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하는 태도를 지녔다. 백형(伯兄)을 섬기는 것이 더욱 엄격하여, 매양 “내가 관직 생활을 하면서 혹시라도 삼가지 않는다면 필시 우리 부모님과 형님에게 누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오직 여기에 있었다.
홍주(洪州)에 큰 택지(澤地)가 있었는데, 공주가(公主家)에서 그 안의 전지(田地)를 점유하려고 하였다. 부군이 대흥 현감으로 있으면서 문서를 접수하여 검토해 보니, 택지 부근에 민전(民田)이 많았는데도 내사인(內司人)이 주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여 표내(標內)에 혼입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부군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생업을 빼앗으면 원망이 상께로 돌아간다.” 하며 들어주지 않아, 공주가가 결국 그 땅에 전지를 소유하지 못하였다. 뒤에 신계 현령으로 있을 때 이 공주가에서 또 관내의 전지를 점유하려고 하였는데, 민전을 자기 소유로 편입시킨 것이 홍주에서보다도 많았다. 부군이 전과 같이 거부하여 전지를 점유하는 것이 결국 성사되지 않았으니, 공이 귀척(貴戚)의 세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부인 숙인(淑人)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학생 정열(廷說)의 따님으로, 을사년(1605, 선조38) 12월 8일 무신일에 태어나 을축년(1685, 숙종11) 10월 28일 을묘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81세였다. 이해 12월 10일 병신일에 부군의 묘 왼편에 묘혈을 파서 합장하였다. 숙인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시어머니 권 부인을 20여 년간 모시면서 잘못하거나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의복이나 음식 등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적절하게 하여 부양하였다. 시어머니 곁에 자제나 친속들이 늘 여러 명 있었는데도 음식을 정결하게 마련하면서 말투나 안색에 곤궁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군을 섬길 때도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누차 고을살이를 따라다니면서도 뇌물 문제로 누를 끼치지 않았다. 군읍(郡邑)에 소속된 하례(下隷)들의 고락(苦樂)은 대부분 부인이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는데, 숙인은 매우 인자하고 잘 보살펴주며 공사(公私)를 동일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관(官)에 딸린 노비나 사령들이 애모하고 추대해 마지않아 떠난 지 오랜 뒤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딸 하나를 낳았지만 요절하였고, 백형(伯兄)의 여섯째 아들 집(䌖)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집은 태어난 지 겨우 8일 만에 숙인이 거두었다. 어려서는 기욕(嗜慾)을 절제하여 구차한 바가 없게 하였고 모든 사물을 이용해 가르침을 보여주었으며, 장성하여 관직을 맡게 되어서는 일의 시비를 분변하며 깨우쳐 주었다. 집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이르렀는데, 숙인이 그때마다 가서 부양을 받았다. 집은 군수 김홍석(金弘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 역시 아들이 없어 중형(仲兄) 참판 진(縝)의 다섯째 아들 상영(相英)을 후사로 삼아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부사군이 와서 부군의 묘명(墓銘)을 세당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친구 중 선군의 시말을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그대만 한 이가 없으니 사양하지 말게나.” 하였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해 글을 쓰고 명을 단다. 명은 다음과 같다.

눈 속에서 죽순 얻고 얼음 속에서 잉어 잡으니 / 雪筍氷鯉
이는 하느님이 감동하신 것이고 / 精感者神
손가락 베고 허벅지 살 베어 / 割指刲股
정성을 다하는 건 사람의 일이네 / 誠殫在人
부모가 하늘 같은 존재임은 / 父母其天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고 / 靡古靡今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은 / 靡古靡今
효자의 마음도 마찬가지라네 / 孝子之心
그대의 효성 다함이 없으니 / 爾孝不匱
어찌 몸이 늙는다고 변하겠는가 / 曷隨形敝
마음속에 맺혀 있어 / 結乎方寸
꿈으로 나타나네 / 動乎夢寐
아 효자들아 / 嗟惟曰孝
이분의 효성을 본받으라 / 孝思惟則
비석에 명을 새겨 / 鑱石揭銘
천년만년 보이노라 / 用示千億


 

[주D-001]팔대군 일공주(八大君一公主) : 세종(世宗)과 왕후 심씨(沈氏) 사이의 8남 2녀, 즉 문종(文宗), 수양대군(首陽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흥대군(永興大君), 정소공주(貞昭公主), 정의공주(貞懿公主) 중 정소공주가 요절하였기에 그 나머지 대군과 공주를 가리킨다.
[주D-002]눈……잡으니 : 맹종(孟宗)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하며,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니, 모두 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五倫行實圖 孝子》

 

 저자도(楮子島)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하여 차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


동은 충청도 충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요, 강원도 원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요, 남은 음죽현(陰竹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요, 서는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요, 북은 지평현(砥平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양근군(楊根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 황리(黃利)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원주에 붙이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때 영의(永義)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 31년에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의 고향이므로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시켰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에 신우(辛禑)를 이 군에 옮기고, 황려부로 승격시켰다가 공양왕 원년에 다시 내려 군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원경왕후의 고향이므로 다시 승격시켜 부(府)로 하고, 음죽현 북쪽 어서이촌(於西伊村)을 합하여 충청도로부터 본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고쳐 도호부(都護府)로 했다.
예종(睿宗) 원년에 영릉(英陵)을 부의 북성산(北城山)에 옮기고, 천녕현(川寧縣)을 혁파하여 이 부에 소속시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시켜 목(牧)으로 하였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燕山) 7년에 본주(本州)가 쇠잔하였으므로 판관을 혁파하였다.
【군명】 골내근(骨乃斤) ㆍ황효(黃驍)ㆍ영의(永義)ㆍ황려(黃驪)ㆍ여강(驪江)ㆍ여흥(驪興)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민(閔)ㆍ안(安)ㆍ필(畢)ㆍ윤(尹)ㆍ김(金)ㆍ한(韓)ㆍ음(陰). 천녕(川寧) 견(堅)ㆍ현(玄)ㆍ최(崔)ㆍ유(兪)ㆍ방(房)ㆍ장(張). 등신(登神) 유(兪).
【형승】 국도 상유(上游)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보은사(報恩寺) 기문에 있다. 한수마암(捍水馬巖) 이색(李穡)의 시에,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馬巖石)이 높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龍門山)이 크구나.” 하였다.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다[野平山遠] 전인(前人)의 여강시(驪江詩)이다. 산수가 맑고 기이하다 권근의 여강시이다. 긴 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첩첩한 영(嶺)이 북에서 왔다 설문우(薛文遇)의 시에, “긴 강이 서쪽으로 흘러 창해(滄海)에 들어가고, 첩첩한 영(嶺)이 북으로 와서 얕은 산을 둘렀네.” 하였다.
【산천】 북성산(北城山) 주 서쪽 7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옛 성터가 있다. 오압산(烏鴨山) 주 남쪽 10리에 있다. 강금산(岡金山) 주 남쪽 25리에 있다. 장연산(長淵山) 주 북쪽 7리에 있다. 유우산(流牛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환희산(歡喜山) 주 서쪽 25리에 있다. 봉미산(鳳尾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혜목산(慧目山) 주 북쪽 25리에 있다. 상두산(象頭山) 천령현 서쪽에 있다. 승산(勝山) 주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청산에 들불이 침범하여, 소나무와 삼(杉)나무가 다 타버리고 다시 마음이 상하누나. 지난해 철죽꽃이 피던 곳, 울창하게 도리어 잡목 숲을 이뤘네.” 하였다.
입암(笠巖) 주 서쪽 5리 강구(江口)에 있다. 팔대수(八大藪) 주 북쪽 3리에있다. 옛날에는 패다수(貝多藪)라 일컬었는데, 주위가 5ㆍ6리 된다. 여강(驪江)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 객관(客館)을 강을 베개하여 지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계수나무 노와 모란(木蘭) 배로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니, 붉은 단장이 물 가운데의 하늘에 아름답게 비치네. 소반에 담은 것은 배꼽 둥근 게[蟹]만 보겠고, 그물을 거니 도리어 목 움츠린 편[縮項鯿]을 보겠네. 10리의 연화(煙花)는 참으로 그림 같은데, 한강에 풍월은 돈을 논하지 아니하네. 모래에 앉은 갈매기야, 고기잡이 노래소리를 익숙하게 들었을 터이니, 날아와 여울 앞에 이르러 배를 피하지 말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연집서(宴集序)에,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지 3년 신미 11월에,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牧隱) 선생께서 나라의 은명(恩命)을 받아 서울로 조공(朝貢)하러 들어가는 길에 여강(驪江) 별장에 이르렀는데, 도관찰사(都觀察使) 안공(安公)이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어 하늘이 밝고 달은 맑은지라, 배를 타고 중류(中流)에서 흥대로 놀다가 파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는 강에 얼음이 얼어 배가 통하기 어려웠다. 다음 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공문이 이르렀는데, 좌대언(左代言) 신(臣)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를, ‘한산군(韓山君) 색(穡)이 충주ㆍ여주 사이에 있을 때 도관찰사는 음식을 차려서 예(禮)로써 후대하여 보내라 하셨다.’ 하였다. 안공이 공경히 명령을 받들고, 또 가서 술 자리를 베풀었다. 이 날 구름이 음산하고 눈이 조금씩 내리면서 강의 얼음이 스스로 풀렸다. 선생이 또 안공과 배를 같이 타고 물 흐름을 따라서 내려갔다. 이때에 모시고 앉았던 사람은 첨서(簽書) 종학(種學)이니 선생의 아들이고, 여흥(驪興) 군수 권총(權總)은 생질이요, 근(近)과 도사(都事) 이우(李愚)는 모두 문인(門人)이다. 잔을 올리고 수작하여 예(禮)를 차리고 서로 더불어 흡족하게 즐기는데, 구름 속 달은 희미하게 밝아 하늘과 물은 아득하여 끝이 없었다. 물살은 잔잔하여 풍랑(風浪)이 없고 눈이 때때로 날리며 떨어지니 또한 배 가운데의 좋은 경치였다. 또 다음 날 도재(陶齋) 이학사(李學士)가 수문(修文)의 명을 받고, 역마를 달려 이르러 또 같이 배에 올라 놀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도재는 당세의 문장대가로 선생이 시험보인 신해년 향시에 장원한 사람이다. 안공(安公)은 쌍청상공(雙淸相公)의 아들인데, 쌍청선생은 선생의 동년(同年)이므로 세교(世交)가 매우 두터웠다. 공이 일찍이 문학과 청렴과 근신함으로써 높은 벼슬을 지냈고, 이제 또 중한 선택으로 한 지방을 맡았으매, 민생을 안정시켜 임금의 덕택을 펼 것을 생각했는데, 더욱 선생께서 부르심을 받아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어찌 성의를 극진히 하여 성상께서 후한 예(禮)로서 불러들이시는 뜻에 맞추고자 아니하겠는가. 이것은 정성된 마음이 감동되어 얼음이 스스로 풀리어 오늘 배 가운데 즐거움을 이루어 준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여강(驪江)의 산수가 좋음은 자고로 일러 오지만, 사람의 일은 많이 뜻과 어긋나고, 좋은 벗도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데, 우리들이 서로 떠돌아 다니던 끝에 이 회합을 만났으니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다. 안공은 도관찰사의 위엄과 공무에 번다한 몸으로서 쉽사리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또 하물며 중동(仲冬) 추운 때에 배를 띄우고 오늘과 같이 즐겁게 노는 것이 그 몇 번이나 있겠는가. 한 자리의 손의 명망이 높음이 한산(韓山) 같고, 위엄의 무거움이 안공(安公) 같고, 문아(文雅)함이 도재(陶齋) 같고, 현달한 명사들이 제공(諸公)과 같은 이들이 서로 같이 한 배를 타고 노는 것도 또한 몇 번이나 있었는지. 이 강이 있은 이래로 이제 겨우 있는 일이다. 근(近)이 재주 없는 몸으로 이 모임에 참여함을 얻게 되니 진실로 다행한 일이라, 이것을 기록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여강의 형승(形勝)은 천하에 드문데, 사시(四時)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누나. 내가 처음 와 놀 때는 마침 여름철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네. 백 척 높은 군루(郡樓)에 두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어 부슬부슬한데 연기가 걷히네. 흐르는 강에 임해 높은 흥을 알 이가 적으니, 유선(兪仙)이 자부(自負)하던 것 진실로 기롱하기 어렵네. 봄 꽃이 산에 만발하니 물결 밑이 붉고, 가을 달은 구슬을 잠그네. 하늘엔 바람조차 없는데, 내 그 좋은 시절에 모두 미쳐 오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이같은 얼음 얼고 눈 오는 엄동(嚴冬)이랴. 바야흐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스스로 기뻐 날뛰니, 바로 야학(野鶴)이 갇혀 있던 장을 떠나는 듯하구나. 쌍청(雙淸)의 맏자제 관찰사로 있고, 성산(星山 도은(陶隱))과 양촌(陽村 권근)도 뜻밖에 한 자리에 모였네. 태수(太守 목사(牧使)) 성심으로 아름다운 손을 즐겁게 하니, 권하고 수작하며 예(禮)를 다하여 화기(和氣)가 무르익었네. 얼음이 스스로 녹고 눈이 또 오고, 밝은 달이 나오려 하자 구름 또한 열리네. 하늘도 우리가 오래 떨어져 다님을 가엾게 여기어 이것을 위로하고자 황금 술잔을 함께 들게 하네. 뭇 양[衆陽]이 함께 나아감[彙征]이 이제로부터 시작하나니, 노래와 춤 한 곡조로 춘대(春臺)에 오르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사상(使相 도관찰사)은 위명(威名)이 크고, 선생(목은(牧隱))은 덕업(德業)이 높으시네. 하늘가에 수년 이별했다가, 강 위에서 한 잔 술을 같이하네. 들이 넓으니 산이 그림 같고, 물결은 고요한데 해는 정히 내리쪼이누나. 휘정(彙征)이 이로부터 시작되나니, 부르고 화답하매 흥이 다함 없구나.”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황려(黃驪)의 산수가 스스로 맑고 기이하여, 높은 관개(冠蓋)가 서로 만나매 기약이 있는 듯하네. 별당의 거문고와 노래 소리는 자리가 질서 있고, 긴 강의 운월(雲月)은 밤이 더디네. 배를 띄우니 아득하게 은하수와 통하는 듯, 날리는 눈은 부슬부슬 술잔에 떨어지네. 다행히 여러분 모시고 성한 모임 여니, 풍류와 문채가 당시에 제일일세.”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강산 설월(雪月)에 손이 누에 올라, 잔을 잡고 시를 읊는 좋은 놀음 열었네. 물이 줄어져 공선(貢船)은 밀어도 내려가지 않으매, 여러 인부들 파서 통하니 사군(使君 관찰목사)의 근심일세.” 하였다.
대교천(大橋川) 주 서쪽 27리에 있다. 근원은 음죽현(陰竹縣) 흑석동(黑石洞)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포진(梨浦津)으로 들어간다. 천민천(天民川) 주 남쪽 45리에 있다. 죽산현 조에 자세하다. 우만포(禹萬浦) 주 동쪽 25리 여강 상류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주 서쪽 43리 여강 하류에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저문 산은 천층(千層)으로 붉은데, 가을 강은 한 띠[帶]인 듯 푸르구나. 출세하고 숨는 것은 짧은 나무토막을 따르고, 신세는 부평초[浮萍]에 붙였네. 허술한 촌 백성의 가게[店]요, 쓸슬한 역리(驛吏)의 정(亭)이로세. 멀리 바람에 날려 오는 소리는 어느 곳 피리인가. 슬프고 원망스러워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하였다.
진강도(鎭江渡) 천녕현에 있다. 금당천(金堂川) 주 동쪽 10리 원주(原州) 경계에 있다. 두두리천(豆豆里川) 천녕현 동쪽 5리에 있는데, 곧 대교천(大橋川) 하류이다. 순지(蓴池) 주 남쪽 1리에 있다.
『신증』 점암(簟巖) 동쪽 5리에 있다.
【토산】 실[絲] ㆍ 쏘가리[錦鱗魚] ㆍ 누치[訥魚].『신증』 녹반(綠礬) 서쪽 왕암(王巖)에서 난다.
【누관】 청심루(淸心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임원준(任元濬)의 승목기(陞牧記)에, “여주는 삼국 때에는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이었는데, 뒤에 신라에게 병합되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황효(黃驍)라 내려 기천(沂川)에 소속시켰다. 전조 충렬왕(忠烈王) 31년에 경순왕후(敬順王后) 김씨의 고향이므로 여흥군으로 승격하였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이 고을에 물러나 있었으므로 이로 하여 승격하여 황려부가 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에 다시 강등하여 군이 되었다. 우리 세종대왕이 어머니 원경황후(元敬王后)의 고향이므로 특히 승격하여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성화(成化) 5년 무자(戊子) 겨울에 일관(日官)이 풍수설을 가지고 영릉(英陵)을 옮기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예종대왕이 대신에게 명하여 경기 지방에 나누어 다니면서 자리를 보도록 하였다. 바로 주 북쪽의 5리 지점에서 자리를 얻어서 점을 쳐보니, 만억년을 누릴 수 있다 하므로 드디어 다음해 기축 3월 경인에 능을 여기에 옮겼다. 이에 이 부(府)에 선왕의 능(陵)이 있으므로 승격시켜 주로 하고, 목사와 통판(通判)을 두고, 또 지역이 좁으므로 천녕현을 합하여 넓히니, 인물의 번화함이 비로소 다른 고을의 번성함과 견줄 만하게 되었다. 주의 형승으로는 강물이 중원(中原 충주(忠州))의 월악(月岳)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원도의 오대산(五臺山)의 물과 합하여 몇 백 리를 흘러서 주 북쪽에 이르러 깊고 맑게 고여서 못이 되었고, 우뚝하게 뾰족뾰족 푸르러 동북쪽을 누른 것으로는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높고 푸르러 날으는 듯 춤추는 듯하여 추녀와 기둥에 엿보는 듯 솟은 것은 치악산(雉岳山)이 벽사(甓寺) 그림자를 강속에 거꾸로 비춤이요, 마암(馬巖)은 강을 금후(襟喉 서울 가까운 요지)에서 막는다.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밤낮 이틀의 노정(路程)이요, 남으로는 세 도(道)를 통하는 길이 읍(邑) 밑에서 나누어진다. 진실로 국가의 상유(上游)를 눌렀고, 경기(京畿)의 깊숙한 구역이다. 주가 승격하여 목이 되매, 조정 의논이 반드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가리어 목사와 판관을 삼는데, 안공(安公) 극사(克思)와, 김공(金公) 승경(承慶)이 맨 먼저 그 선임(選任)에 응하였다. 안후(安侯)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제 부가 주로 되었으니 이것은 주의 큰 시초이다. 어찌 기(記)를 지어 두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넓은 땅에서 여주와 대등한 것으로 주로 된 것이 그 몇인지 모르겠지마는, 상서와 복을 저장하여 국가 근본의 땅이 된 것인즉 아직 여주의 성함만 같은 것이 없다. 주의 이름난 성(姓)으로는 어은(漁隱) 민시중(閔侍中)이 성후(聖后)를 낳아 우리 태종에게 짝함으로부터 성조신종(聖祖神宗)이 계계 승승하여 자손에게 규모를 전해주어 만세에 편안을 내려 주셨다. 지금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의 부인도 이 주의 민씨로서 우리 중궁(中宮)을 낳아 우리 전하의 짝이 되어 큰 운수에 응하시고, 힘써 대업(大業)을 밝히시어, 태평시대를 거듭하여 여러 만물이 기(氣)를 토하니, 사직(社稷)의 장구한 억만년 한이 없는 복조가 진실로 오늘에서 기초가 될 것이다. 하물며 이제 영릉(英陵)을 옮겨 놓아 만세에 국맥(國脉)을 배양하는 땅이 되었다. 옛날에는 군에서 부로 승격하고, 오늘은 부에서 주가 되니, 어찌 황려 산천의 쌓이고 모인 기운의 발함으로써 아름다운 상서와 복과 경사의 성대광명(盛大光明)함이 천만세에 내려가 다함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였다.” 했다.
○ 고려 주열(朱悅)의 시에, “한 조각 밝은 달이 구름 끝에 솟으니, 거울 속에 전에 알던 안면을 만난 것 같네. 쌍쌍으로 선 나무는 보개(寶蓋)의 그림자가 기울어진 듯, 사면에 둘린 산은 긴 눈썹이 푸르구나. 잉어는 푸른 물 저쪽에서 척소(尺素)를 전하고, 용은 여의주(如意珠)를 암흑한 속에서 품고 있네. 시 읊으며 오경(五更)이 이르매 시가 더욱 기절(奇絶)하니, 풍경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한가하게 마소.”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만일 이 경치를 붓 끝에 넣으려 한다면, 글은 소동파(蘇東坡)ㆍ황산곡(黃山谷)이어야 하고, 글씨는 안진경(顔眞卿)이어야 하겠네. 방금 백성을 위하매 부역을 걱정하는데, 어찌 지나는 손의 강산 구경을 용납하랴. 흰 물결 푸른 뫼는 여염(閭閻) 속이요, 적안(赤岸)과 은하수는 백중(伯仲)의 사일세. 하룻밤 누 가운데 잤어도 오히려 부족하니, 다른 날 긴 여가를 만들어 조각배를 타리라.”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병 앓은 후에 여강을 몇 번 왕복하였는가. 높은 시를 화답하려 하매 내 얼굴이 부끄럽네. 배 띄워 놀기엔 반삿대쯤 물이 가장 좋나니, 천 겹 산은 다 보기 여렵고, 밝은 달 맑은 바람은 좌우에서 오는데, 흰 수염과 붉은 뺨으로 중간에 앉았네. 초연하게 스스로 신선의 지경이라, 목옹(牧翁)이 한가한가 않은가를 물어보게.” 하였다.
○ 한수(韓脩)의 시에, “이름 자가 절의 한 조각 돌 끝에 걸려 있으니, 10리에 배 타고 산기슭을 살펴보네. 강가에서 웃으며 나잔자(懶殘子)를 이별하고, 군(郡)안에 들어와 원차산(元次山)을 보네. 어찌 감히 오랫동안 손의 자리 상편에 오래 머물러 있으리요. 오히려 작은 폐단이나마 민간에 미칠까 근심하노라. 글 재주 없으매 하늘이 아끼던 좋은 경치를 묘사하기 어려우니, 누 앞 풍경 한가하게 버려두네.” 하였다.
○ 고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랑비가 아득하여 온 강에 찼는데, 누 가운데 자는 손이 밤에 창을 여누나. 내일 아침 말에 올라 진흙 밟고 갈 적에, 돌아 보면 창파(蒼波)에 흰 갈매기 쌍쌍이리.”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누각이 강 가에 다달았으니, 휘어잡아 오르매 세속 정이 멀어지네. 물결이 빛나는 것은 아침 해가 오름이요, 나무가 빽빽하니 더운 바람이 맑구나. 일찍부터 강산(江山)을 즐겨 하여 벼슬의 영화로움을 뜬구름처럼 보았네. 어찌하여 낚싯대 잡던 손으로 말에 채찍질하며 서울로 향할꼬.” 하였다.
○ 고려 이구(李玖)의 시에, “일찍이 여강 강 위 누에 올라, 바로 쇠한 귀밑털 가지고 맑은 흐름에 비쳤네. 오늘 와서 진토(塵土)는 지나간 꿈 되었으니, 이슬은 고기잡이 도롱이에 가득하고 달은 배에 가득하네.”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밤에 황려현에 드니, 뱃사공이 자려할 때로세. 물가로 가니 바람은 사나운데, 누에서 자니 달은 기약이나 있는 듯. 하늘이 넓은데 긴 강은 움직이고, 모래는 밝은데 잡나무[雜樹]도 기이하구나. 삼경(三更)에 맑은 휘파람을 부니, 문득 물귀신도 춤을 추는 듯.” 하였다.
○ 정자후(鄭子厚)의 시에, “북원(北原 원주) 서쪽이요, 한강 남쪽 끝이로세. 내 일찍이 다락에 올라 한 번 얼굴을 폈었네. 발 밑에는 넓고 아득한 강이 성곽을 둘렀는데, 눈 앞은 평평하고 먼 들산에 이었네. 흰 구름 신선 생각은 삼청(三淸) 밖이요, 밝은 달 시정(詩情)은 팔영(八泳) 사이네, 20년이래 진토 밑에 다녔으니, 지금도 생각하는 꿈이 일찍이 한가롭지 못하네.” 하였다.
○ 설문우(薛文遇)의 시에, “온갖 경치가 가리키는 손 가락 끝에 벌여있는데, 누에 오르니 저도 모르게 자주 얼굴을 돌리네. 긴 강은 서로 흘러 창해로 들어가는데, 겹겹이 두른 영(嶺)은 북쪽에서 와 얕은 산을 둘렀네. 그물을 뚫은 고기는 찬 비 속에서 뛰고, 기심 잊은[忘機] 해오리는 어두운 연기 사이에 서 있네. 일생에 공명(功名)의 누(累)를 벗어 버리며, 푸른 부들 삿갓 쓴 어옹(漁翁) 역시 스스로 한가하리.” 하였다.
○ 도원흥(都元興)의 시에, “10년만에 돌아와 이 난간 끝에 기대니, 미인이 응당 젊은 얼굴 변한 것을 웃으리라. 서너 발 남은 낙일(落日)은 외로운 탑에 밝은데, 한 줄기 긴 강은 뭇 산을 안았네. 들 매[野鶻]는 멀리 단풍든 나무 밖을 도는데, 가는 기러기는 푸른 하늘 공중으로 사라지네. 선배들 뱃놀이 하던 일을 실컷 들었더니 이제는 여울 머리에 놀이배 한가함을 보겠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다락은 백 길이나 높아 구름 끝에 솟았는데, 호기 있는 원룡(元龍)은 옛 얼굴과 같네. 배를 옮겨 갈매기를 놀라게 하지 말라. 홀(笏)로 턱을 괴고 청산이나 보리다. 학은 밝은 달을 따라 하늘 위로 돌아 갔고, 용은 빛나는 구슬을 안고 물속에서 조네. 임금이 이 감호(鑑湖)를 주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산을 사서 마침내 여기에 한가히 살고자 하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그림 누각 치레가 곱고도 단정한데, 다시 풍월을 가지고 수심 띈 얼굴을 씻네. 동쪽 언덕의 절은 높이 물에 임하였는데, 서쪽 기슭 민가(民家)는 고요히 산을 지고 있네. 굽어보고 쳐다보니 건곤(乾坤)이 모두 세속 밖이요, 누에 올라 강을 내려다 보니 신세(身世)가 별인간이네. 다른 해 내 벼슬 버리고, 티끌 옷깃 털어 죽기까지 한가하리라.” 하였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그대는 옛날 취옹(醉翁)이 서호에서 잔치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은촛불[銀燭] 켜고 놀다가 이 밤 늦어서야 파하니, 금잔 옥잔이 흩어져도 거두지 않았다네. 또 하감(賀監) 방랑하여 회계에서 논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가벼운 노 짧은 배로 연기 낀 물가를 따라, 비낀 바람 가는 비에 꽃다운 섬을 찾아 갔다네. 중원(中原) 목백(牧伯)이 자취를 이어, 놀이배에 북을 치며 금강(錦江) 가을에 즐겁게 노는구나. 칠택(七澤)은 흰 갈매기 밖에 아득하고 먼데, 삼산(三山)은 금오(金鼇)의 머리에 숨으락 비치락하네. 잠(簪)을 빼 밤에 동선(洞仙) 문을 두드리니, 푸른 눈썹 붉은 뺨이 중루를 둘렀네. 중루의 노래와 저[吹]는 반공중에서 떨어지는데, 달이 뜨니 황혼이 하늘 빛이 그윽하구나. 별빛이 희미해지고 해가 떠오르매, 오마(五馬)가 총총히 떠나가니, 창려(昌黎)의 월녀(越女) 한 번 웃음에 삼 년을 머물렀다는 시(詩)가 우습구나.” 하였다.
『신증』 이색(李穡)의 시에, “관개(冠蓋)로 별처럼 달려 콧등에 땀이 맺히는데, 한 번 이 정자에 오르매 얼굴을 펴네. 서늘함이 궤안(几案)에서 나는 것은 바람이 나무에 스몄기 때문이요, 푸른 빛이 이 술상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비가 산을 걷어서이네. 긴 소매 가벼운 치마는 자리 위에 나부끼는데, 잦은 거문고와 급한 피리는 기둥 사이에 벌어졌네. 누가 임금 은혜 중함을 느끼지 않으랴마는, 사명(使命) 받고 나온 몸이 도리어 한가한 놀이를 겸했네.” 하였다.
○ 또, “누기(樓記)가 추녀 머리에 써 있지 아니함을 한하노니, 이름을 누가 청심이라 하였는가. 현판(懸板) 걸 것을 빠뜨렸네. 물 막는 공이 높은 것은 마암석(馬巖石)이요, 하늘에 떠서 형세 큰 것은 용문산(龍門山)일세. 방에 있을 때 눈은 처마와 창 밖에 떨어지고, 여름에 서늘하게 누웠을 땐 바람이 베개와 삿자리 사이에 오네. 더욱 봄 바람과 가을 달을 보게 되면, 완상(玩賞)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경치가 더욱 너그럽고 한가하리.” 하였다.
○ “또 지쳐서 나는 외로운 새도 이미 돌아올 줄을 아는데, 만년(晩年)의 맑은 놀음에 얼굴을 활짝 펴네. 천명(天命)을 어찌 의심하랴. 곧 팽택(彭澤)이요, 세상 인연은 마침내 적으니 향산(香山)과 같구나. 강호의 흥미는 삼생(三生)의 밖인데, 종정(鐘鼎) 공명(功名)은 한바탕 꿈 사일세. 태평을 읊조리는 것이 나의 사업이니, 이제부터 스스로 호(號)하기를 이한한(李閑閑)이라 하리라.” 하였다.
○ 이육(李陸)의 시에, “잠이 깨니 동정(銅鉦)은 나무 끝에 걸렸는데, 물 빛과 서로 더불어 쇠한 낯을 비치네. 강에는 벽 절[甓寺] 구층 탑 그림자가 잠겼는데, 누는 용문 천길 산을 대했네. 넓으니 극히 우내(宇內 세상) 없는 줄 알겠고, 서늘하니 오히려 인간 아님을 의심하겠네. 괴롭게도 또 홍진(紅塵)으로 향하니 물결 위에 흰 새 한가함을 속절없이 부러워 하네.” 하였다.
○ 신석조(辛碩祖)의 시에, “세상사 분분(紛紛)하여 하루에 몇 가지인가. 누에 오른 오늘 저녁에야 우연히 얼굴을 펴겠네. 강가에 늙은 나무는 나이를 알지 못하겠는데, 하늘 끝 먼 봉우리는 어느 곳 산인지. 신선 지경을 어찌 삼도(三島 삼신산) 밖에 찾으랴. 풍류는 도리어 오호(五湖) 사이보다 나으리. 총총히 왕명 받은 사신(使臣)이라 분주하게 달려 잠깐도 한가하지 못함을 어이하리.”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배를 초가집 가시 울타리 끝에 매니, 물고기와 새가 어찌 일찍이 내 얼굴을 알겠는가. 병(病)에도 오히려 능히 행보할 수 있는데, 조정에서 쫓겨 나서야 겨우 강산 구경을 할 수 있네. 10년 동안 세상 일을 외로이 읊조리니, 8월 가을 경치는 어지러운 나무 사이로세. 잠깐동안 난간에 의지하여 북쪽을 바라보는데, 뱃사공 타기를 재촉하여 한가롭지 못하네.”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강 연기 뉘엿뉘엿 붓 끝에 끌리는데, 강물은 맑고 맑아 파리한 얼굴 비치네. 작은 배 삐걱거리는 가엔 오직 흰 갈매기. 푸른 숲이 비낀 밖엔 또 푸른 산이 팔면이네. 창에 좋은 경치는 두 눈 안이요, 찬 비 소리는 일만 낙수물받이 사이로세. 벼슬 자리에서 오랫동안 앉은뱅이 노릇한 것을 스스로 웃나니, 저 고기잡이 늙은이에게 청한(淸閑)함을 도맡게 하였네.” 하였다.
○ 일본승(日本僧) 범령(梵齡)의 시에, “긴 강은 흰 비단을 펼쳐 처마 끝에 접했는데, 게으른 나그네 티끌 묻은 얼굴을 씻을 만하네. 맑은 경쇠 소리에 달이 높으니 먼 절임을 알겠고, 평평한 숲에 구름이 다하니 먼 산을 분별하겠네. 붉은 추녀와 푸른 기와는 물 속에 비치는데, 모래ㆍ새[鳥]ㆍ바람ㆍ돛은 좌석 사이에 가깝네. 세 번 삼한(三韓)에 와서 국명(國命)을 전하니, 도리어 한마음 한가함을 저버린 것이 부끄럽네.” 하였다.
○ 김조(金稠)의 시에, “맑은 강이 하늘 끝에서 내리쏟는데, 누에 올라 내려다 보매 얼굴을 비칠 만하네. 통쾌하게 마시니 이태백(李太白)을 맞이할 만하고, 시에 능한 이로는 일찍이 한산(韓山 이색)을 얻었네. 어석버석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외로운 돛 밖이요, 흐느끼는 여울 소리는 두 언덕 사이로세. 걸음을 옮겨 붉은 난간에 의지하여 한 번 웃노니, 어떤 것이 바쁘고 어떤 것이 한가한가.” 하였다.
별관(別館) 청심루 동쪽에 있다. 부사 노회신(盧懷愼)이 창건한 것으로 오래되어 퇴락하였더니, 목사 권중개(權仲愷)가 중수하였다. 『신증』 영빈관(迎賓館) 객관 동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빈선(賓仙)이라 이름하였다. 금상(今上) 23년에 영릉(英陵)에 참배할 때, 이 관에 들러 오늘의 이름으로 고쳤다.
【학교】 향교(鄕校) 주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신진역(新津驛) 주 동쪽 5리에 있다. 안평역(安平驛) 주 남쪽 30리에 있다. 양화역(楊花驛) 주 서쪽 15리에 있다. 초계원(草溪院) 주 남쪽 5리에 있다. 가로개원(加老介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파장원(破場院) 주 남쪽 25리에 있다. 신원(新院) 주 북쪽 45리에 있다. 복천원(福川院)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보통원(寶通院) 주 북쪽 25리에 있다. 자천원(子川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주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보은사(報恩寺) 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다. 옛 신륵사인데, 벽돌 탑이 있으므로 속칭 벽절이라 한다. 우리 예종(睿宗) 때에 영릉을 절 서쪽 10리에 옮기고, 드디어 고쳐서 큰 절을 짓고, 인하여 지금의 액(額)을 내렸다.
○ 절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고려의 명승 나옹이 죽은 뒤에 그 제자들이 석종(石鍾)에 사리를 간직하고 진당(眞堂)을 세웠는데, 이색이 기(記)를 지었으며, 또 대장각(大藏閣)이 있는데, 이숭인(李崇仁)이 기를 지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에, “여주(驪州)는 국도의 상류 지역에 있으며, 산이 밝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고 칭하여 오는데, 신륵사가 바로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 옛날 현릉(玄陵)의 왕사(王師) 나옹과 한산 목은 선생과 이공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와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 다음 해 성화(成化) 9년에 대왕대비전하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다시 고쳐 짓고, 액(額)을 내려 보은(報恩)이라 하고, 선왕 능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처음 세조 대왕이 꿈에 세종대왕을 뵙고 친근히 말씀을 받들어 즐거움이 생시와 같았다. 세조께서 추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여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하여 영릉 옆에 절을 세워 명복(冥福)을 비는 장소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나무를 찍어 떼를 만들어 띄워서 강 언덕에 쌓았는데, 하루 저녁에 큰 비로 홍수가 나서 미친 물결이 휩쓸어 갔다. 명년에 세조께서 돌아가시고 국가에 사고가 많아 영릉 옆의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다. 때마침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영릉 좌국(坐局)의 풍수(風水)가 옛법에 맞지 아니함이 있사오니, 마땅히 능을 다시 세워서 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예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 의논을 내렸더니 모두 아뢰기를, ‘이장(移葬)하는 법이 예로부터 있습니다. 장사할 때에 빠진 것이 있어도 오히려 개장(改葬)하옵는데, 하물며 이제 풍수(風水)를 맡은 관원의 말이 있음은 반드시 상고한 것이 있을 것이니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예종께서 재신(宰臣)을 나누어 파견하여 그 땅을 선택하게 하였더니 군신이 아뢰기를, ‘여흥의 북쪽에 한 큰 골짜기가 있는데, 산이 형세를 벌려서 주(主)와 대(對)가 분명한데 풍수법에 말한,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져서 자손이 천억이 된다고 한 그대로입니다. 신등이 본 바로서는 능을 모실 곳이 이보다 나은 곳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예종이 전지(傳旨)를 조정에 내려 좋다하여, 성화(成化) 5년 기축에 세종의 재궁(梓宮)을 여주에 옮겨 농사 지내는 일이 끝나자 대왕대비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선왕께서 부왕을 꿈에 보시고 장차 영릉 밑에 절을 세우려 하시었으나, 급히 승하(昇遐)하시어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셨으므로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더니, 이제 선왕이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들이 빨리 유지(遺旨)를 거행하지 아니하면, 어찌 장차 선왕을 지하에서 뵈올 것인가.’ 하였다. 곧 상당부원군 신 한명회, 서평군(西平君) 신 한계희(韓繼禧) 등에게 명하여 능에서 멀지 않게 절을 세울 곳을 택하게 하니, 신 명회 등이 아뢰기를, ‘능의 국내(局內)에는 절을 세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로 옛 현인들이 놀던 자취가 완연하옵고, 또 선왕의 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고(鐘鼓)의 소리가 들릴 만하옵니다. 만일 이것을 수리하면 옛것을 인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인데, 일은 반이라도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오니, 이보다 편리함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진 2월에 대왕대비께서 분부를 내리기를, ‘이제 능(陵)을 겨우 끝마쳤는데 또 일반 백성을 부리는 것은 불가하다. 이제 간경도감(刊經都監)은 이미 파하였고, 쓰던 전곡(錢谷)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그것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장(專掌)하여 출납하여 노는 사람에게 보수를 주어 역사하게 하고, 혹시라도 폐가 없도록 하라.’ 하고, 신 한명회ㆍ한계희를 명하여 제조(提調)를 삼고, 여주목사 신 이신효(李愼孝), 원주목사 신 김춘경(金春卿), 내시부상선(內侍府尙膳) 신 이효지(李孝智)를 감역관(監役官)으로 삼아 그 해 2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10월에 끝마쳤다. 그전 것을 수리한 것이 몇 칸이고, 새로 지은 것이 몇 간이니, 합쳐서 2백여 칸이 되었다. 종과 북 같은 도구(道具)와 일용집기(日用什器)도 모두 새로 만들었다. 신이 생각건대 사찰의 흥폐(興廢)는 진실로 그 때를 기다림이 있는 것이요, 또 운수가 그 사이에 관계됨이 있는 것이다. 신륵사 풍경의 아름다움은 우리 나라에 소문난 것으로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바람에 돛을 달고 왕래하여 배들이 서로 연달았으나, 아직 한 사람도 그 절을 일으키고 창설하지 않았었다. 다행히 이제 황려대부(黃驪大府)는 천백 년 산천의 모인 기운이 가만히 간직되어 있다가, 오늘날 성명(聖明)의 시대에 발하여 선왕의 능을 이 고을에 경영하여 큰 일이 이미 정하여 큰 경사가 시작되었으니, 우리 국가는 억만 년의 끝없는 기업(基業)을 열었다. 이에 부가 승격되어 주가 되고, 절 또한 일신되니, 이것은 바로 때를 기다린 것이요, 운수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때에 고금이 있고 땅에 피차가 있음을 탓하지 아니하시고, 선왕의 끼치신 뜻을 생각하시어, 능을 이미 옮기고 빨리 절을 세우셨으니, 그 잘 계승하여 크게 나타낸 아름다움이 여러 선왕에 빛이 되고 전고에 뛰어났다. 신이 비록 늙고 어두우나 감히 머리 조아려 절하며 삼가 글로 써서 후세에 밝게 보이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먼산은 긴 강 밖이요,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세. 절은 복된 땅에 열렸고 보제(普濟)는 진당(眞堂)이 열렸네. 현령은 자주 허리에 홀(笏)을 꽂고 예배하는데, 산 중[僧]은 홀로 벽을 향하고 있네. 어쩌면 들 배를 불러서 맑은 휘파람으로 넓고 아득한 물에 띄울꼬.” 하였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나무 돛대는 갈대 여울을 돌고, 소나무 배를 돌다리에 매었구나.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밝은 달은 긴 강에 찼네. 설법하니 용도 응당 들을 것이요, 참선하니 호랑이도 스스로 엎드리네. 오가며 그윽한 흥이 있으니, 이끼 길이 배창에 접했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내 와서 이 좋은 강산을 사랑하여 종일토록 배를 타고 또 난간에 의지하네. 물 밑에는 찬란하게 절이 열렸는데, 숲속에는 은은히 선단(仙壇)이 보이네. 마음을 가리키는 돈교(頓敎)는 멀리 혜가(慧可)에게서 전했고, 일을 기록하는 웅문(雄文)은 한퇴지(韓退之)와 흡사하네. 진중한 늙은 중은 부지런히 종이를 주는데, 글을 지어 남겨 두면 뒷 사람이 볼까 부끄럽네.” 하였다.
○ 최수(崔脩)의 시에, “벽절 종소리 한밤에 울리니, 광릉(廣陵)에서 돌아오는 손의 꿈이 처음 깨네. 만일 장계(張繼)로 하여금 일찍이 여기를 지나게 하였다면, 꼭 한산(寒山)만이 홀로 이름을 얻지 못했으리.” 하였다.

정천사(井泉寺) 환희산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우리 스님 물건 취하는 것은 청렴하나, 유독 강산에 대하여는 탐(貪)함을 꺼리지 않네. 한 누를 만들어 내어 높이 우뚝하매, 일만 경치를 몰아 모두 포함하였구나. 밭가는 모습에 가랑비 내리니 촌 멋이 즐겁고, 나무꾼 피리에 햇빛이 쇠잔하니 들 흥취가 거나하네. 아침 저녁 새 소리는 문밖 나무에서요, 예와 이제 사람의 그림자는 길가 연못이로다. 구름에 붙어 돌아가는 기러기는 차례 있게 앞뒤요, 물에 나온 뜬 갈매기는 갑자기 둘셋이로세. 토질은 모름지기 기름진 것을 볼 것이요, 절 이름은 도무지 우물물의 맑고 깊음에 있네. 달은 깊은 방에 한가한 중이 자는 것을 엿보고 골짜기는 빈 마루에 앉은 손의 말소리에 메아리치네. 더위를 쫓는 서늘한 난간을 어찌 꼭 북쪽을 택하랴. 바람을 부르는 높은 집은 남향이 가장 마땅하리. 개인 하늘에 놀[霞]빛은 불보다 붉은데, 새벽 주점 연기 빛은 푸르기 남빛 같네. 일찍이 맑고 그윽함을 차지하여 그대 스스로 유쾌한데, 늦게야 아름다운 명승을 만나니 내 바야흐로 부끄럽네. 마음을 씻고 수도하는 결사(結社)에 들어 같이 숨을 수 있다면 늙은 근력이라도 물을 길어 차를 끓임은 오히려 감당할 만하네. 혹시 재미나는 화두(話頭) 있거든 때로 늙은 방거사(龐居士) 불러 참구(參究)함도 무방하리.” 하였다.
하북사(下北寺) 환희산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아득하고 먼 연기낀 멧부리는 만점이나 푸른데, 바라보이는 곳 어디쯤이 바로 신경(神京)인가. 한가한 구름은 잠깐 사이에 천 가지 형상을 이루는데, 흐르는 물은 늘 한결같은 소리로세. 장사(長沙)에 가의(賈誼)가 귀양 옴은, 이미 정한 것이나, 장포(漳浦)에 유정(劉楨)이 누은 것을 어찌 견디랴. 아무도 망우물(忘憂物 술)을 반겨 주는 이 없으며, 조정에서 쫓겨나온 손이 봄을 만나매 더욱 불평하네.” 하였다.
신통사(神通寺)ㆍ철갑사(鐵甲寺) 모두 환희산에 있다. 장흥사(長興寺) 상두산(象頭山)에 있다. 취암사(鷲巖寺)ㆍ상원사(上院寺)ㆍ고달사(高達寺) 모두 혜목산(慧目山)에 있다. 고려 한림(翰林)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지은 중 혜진(慧眞)의 탑비(塔碑)가 있다.
○ 한수(韓修)의 시에, “20년 전이 꿈같구나, 젊었을 때의 친구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네. 이제 고달(高達) 옛절에 옴은, 원통(圓通) 큰 복전[大福田]이 있기 때문이네. 사면의 산 병풍은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과 이야기 하루 저녁에 돌아갈 길을 잊었으니, 당시 묘련(妙蓮)에 있던 것 같으이.”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주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능묘】 영릉(英陵) 우리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능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합장했다. 능은 본래 광주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 원년 기축에 주 북성산의 양지편에 이장하였다.
○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비명(碑銘)에, “요(堯)가 단주(丹朱)를 버리고 순(舜)에게 선위하였는데, 순은 중화(重華)의 덕이 있으매 요의 인(仁)이 더욱 오래갔고, 문왕(文王)은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세우매 무왕이 비승(丕承)한 공이 있어, 주(周) 나라의 업이 더욱 창성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당우(唐虞 요ㆍ순)는 어진 신하에게 선위(禪位)하고, 하(夏) ㆍ 은(殷)ㆍ 주(周)는 자손이 이었는데 그 뜻은 한 가지이다.’ 함은 사심이 없음을 말함이다.
우리 태종이 선위하심은 그 요와 문왕의 마음이시며, 우리 세종의 선위를 받으심은 순(舜) 임금과 무왕의 덕이 있으심이다. 태종이 재위(在位)하였을 때 일찍 원자 지(禔)를 세워 세자로 삼고, 어진 사우(師友)를 가려서 교양의 방법을 극진히 하였으나 세자는 자라서도 어린 마음이 있어 학문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덕이 진보되지 아니하매 태종이 매우 근심스럽게 여겼다. 영락(永樂) 무술년 6월에 세자가 덕을 잃음이 매우 심하게 되자 태종께서 맏 손자를 세워서 후사[嗣]로 삼고자 하였더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를 교양하옴에 모든 방법을 다 하였건마는 오히려 이와 같이 되었사오니,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날에 그가 현명하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나이까. 하물며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심은 의리에 있어서 어떠하올는지요. 어진이를 가려 사(嗣)로 삼음만 같지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세종은 세자의 동모제(同母弟)로서 서열이 제3에 있어, 일찍이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했었다. 태종이 이르기를, ‘충녕이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지니 충녕을 세자로 세움이 옳겠다.’ 하고, 세자로 삼으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절하여 하례하고, 중외(中外)가 만족히 여겨 칭송하였다. 드디어 천자에게 상주(上奏)하니 천자가 칙서(勅書)를 보내 이르기를, ‘적(嫡)을 세우는데 맏아들로써 세우는 것은 고금에 바꿀 수 없는 상도(常道)이다. 그러나 사자(嗣子)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나라의 성쇠존망이 매인 것이다. 왕은 국가의 장구한 생각을 하고, 성쇠존망의 기미를 밝게 보아 어진이를 세워 사(嗣)를 삼고자 하니 왕의 선택함을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해 8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명 나라에 신신을 보내어 책명(冊命)을 청했다. 11월에 세종이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종에게,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다음 해 기해년 봄 정월에 천자가 홍로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을 보내 세종을 봉하여 왕을 삼았다.
6월에 천자가 태종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이번에 왕이 제삼자(第三子)가 효제(孝悌)하고 학문에 힘써 종사를 이을 만하다 하고, 또 스스로 연로(年老)하므로 전위할 것을 청하니, 짐이 왕의 식견이 명달(明達)함을 생각하여 특히 소청을 허락한다. 대체로 세계를 잇는 데는 후사(後嗣)가 있어야 하고, 위(位)를 전하는 사람을 얻음에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은 어진 이를 가리고 덕 있는 이를 명하여 종사(宗社)로 하여금 의탁할 데가 있게 하여 나라 사람의 소망에 맞게 하니, 진실로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여 왕에게 연향(宴享)을 내리는 것이니, 왕 한 집의 경사뿐만이 아니라 왕의 나라 경사인 것이다.’ 하고 또 세종에게 칙서를 내려 충효의 도로써 권면(勸勉)하고 연향(宴享)을 내려 주었다. 8월에 사신이 나라에 이르러, 두 임금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잔치를 받으니 예악의 성대함이 온 나라를 용동(聳動)시켰다. 일찍이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홍무(洪武) 정축년 4월 10일 임진에 세종을 한양의 잠저(潛邸)에서 낳으셨는데, 네 살되던 때 왕후(王后)의 꿈에 태종께서 세종을 안고 해 가운데 앉아 계셨다. 얼마 안 되어 태종께서 왕위에 오르게 되고, 세종께서 또 대통을 이었다. 하늘이 덕 있는 이에게 운명을 주심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세종께서 궁중에 계실 적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침묵하고 말이 적어 깊고 먼 모습이 있었으며 대위(大位)에 오름에 미쳐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은 서물(庶物)에 우두머리로 성인이시고, 관유(寬裕)하고 온유(溫柔)함은 백성을 용납하고 대종을 기르는 덕이요, 물건을 제작함에는 홀로 지혜를 내시며 발강강의(發强剛毅)한 잡음[執]이 있으시고, 위의(威儀)는 두려워할 만하고 법받을 만하여 제장중정(齊莊中正)의 공경함이 있으시고, 정미한 뜻은 신(神)에 들어 문리밀찰(文理密察)하는 분별이 있으셨다. 날마다 새벽에 북이 네 번째 울리면 옷을 찾으시고, 아침 일찍 조회를 받으신, 다음에 일을 보시고, 다음에 윤대(輪對)하시고, 경연(經筵)에 납시었다가 안으로 드셔서도 오히려 글을 보시며 조금이라도 게으름이 없으시니, 정사가 행해지지 아니함이 없고, 일이 다스려지지 아니함이 없었다. 태종께서 이미 왕위를 전하시매 스스로 나라를 부탁할 사람을 얻었다 생각하시고, 산수의 취미를 즐겨 자주 교외(郊外)에 나가 놀이함으로써 스스로 유쾌히 하셨다. 가끔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밝은 임금을 얻어 국정을 맡겼으니 근심 없는 이는 천하에 나와 같은 이 없을 것이다. 어찌 천하에 나와 같은 이가 없을 뿐이겠는가. 고금에 또한 나와 같은 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그 근심함이 깊었던 까닭으로 그 기뻐함이 이와 같았다. 겨울 10월에 중외 사찰(寺刹)의 노비를 혁파하여 다 관(官)에 돌리고, 얼마 안 되어 오교(五敎)를 파하고 다만 선(禪)ㆍ교(敎) 두 종만을 남겨 두었다. 이에 이단(異端)의 교를 물리쳐 시원스럽게 하였다. 경자년 봄에 비로소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의 선비를 뽑아 모아 고문(顧問)에 대비하였다. 이해 여름에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병이 들어 밖으로 피기(避忌)하였는데 왕후의 연(輦)을 부축하여 걷고 노숙(露宿)도 하며 약을 받들어 항상 곁을 떠나지 아니 하였다. 7월에 왕후께서 돌아가시니, 미음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다가 태종께서 억지로 권하니 조금 들었다.
신축년 8월에 천자(天子)가 북정(北征)을 하는 데 말 만필을 바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고, 은폐(銀幣)를 내렸다. 9월에 태종에게 태상왕의 호를 올리고 임인년 5월에 태종이 돌아가시니,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정무를 보았으며, 정하여 영세(永世)의 법으로 삼았다. 갑진년 가을에 명나라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돌아가고, 인종 소황제(仁宗昭皇帝)가 등극하매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위로하고, 등극을 하례함에 예절을 다하였다. 천자가 기뻐하여 충성이 지극하다고 포장하고 채색 폐백을 내려 주었다. 을사년에 인종이 돌아가시고,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가 등극하시자 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하례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 봄에 천자가 지성을 칭찬하여 폐백을 내리었는데 왕비에까지 미쳤다. 이해 겨울에 또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성리대전(性理大全)》ㆍ《통감강목(通鑑綱目)》등 서적을 내려 주었다. 이로부터 상(賞)으로 보내는 것이 어느 해나 이르지 않는 해가 없었다. 나중에는 황제가 차고 있던 보옥으로 만든 띠ㆍ고리와 도검(刀劍)까지도 풀어서 보내 주었다. 기유년 여름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시어 선성(先聖)을 뵙고 선비를 뽑았다. 나라 사람들이 항상 금ㆍ은은 우리 나라 산물이 아닌데 명 나라 조정에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것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근심하므로 이에 친아우 함녕군(諴寧君) 인(裀)을 보내 연유를 갖추어 진술했더니, 천자가 특히 허락하여 바치는 것을 면해 주고, 대신 토산물로써 정성을 바치도록 하고, 인(裀)에게 상사품(賞賜品)을 매우 후하게 주었다. 이해 겨울에 천자가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왕은 다만 예로써 대접할 뿐 물건을 선사하지 말라. 왕의 부자는 조정을 공경히 섬김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두터움을 짐이 깊이 아는 바이니, 좌우 근신들의 이간질할 것이 못 된다.’ 하고, 또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왕은 가위 탁월한 어진 왕이로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파저강(婆猪江) 등처의 야인(野人)이 다른 부락과 서로 연결하매 그들의 노략질을 당한 요동(遼東) 개원(開原) 등 변방의 군민(軍民)으로 우리나라에 도망하여온 사람이 5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모두 북경으로 보냈더니 야인들이 분을 품어 우리 북변을 범했다. 계축년 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 등에게 명하여 가서 치게 하니, 그 괴수 이만주(李滿住) 등이 새같이 도망하고 짐승같이 달아났으므로 그들의 근거지를 헐어버리고 돌아왔다. 갑인년 봄에 또 선성(先聖)을 뵙고 선비를 뽑았다.
3월 병오년에 헌릉(獻陵)을 배알하니 감로(甘露)가 송백(松柏)에 내리고 또 경복궁 후원 소나무에도 내렸다. 백관이 하레 올리기를 청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함길도 북문(北門)의 연강주군(沿江州郡)은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요, 우리 조종(祖宗)이 왕업을 일으킨 땅이다. 그런데 야인의 점령한 바 되었더니, 비로소 회령(會寧)ㆍ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등 제진(諸鎭)을 설치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을묘년 봄에 명나라 선종(宣宗)이 돌아가고 지금 상황제가 즉위하매 표문을 받들어 위로하니, 천자가 사신을 보내 비단을 주었다. 정통 무오년 8월에 또 원유 관복(遠遊冠服)을 주었다. 임술년 5월에 달달(達達)이 사람을 시켜 글을 가지고 북문에 이르렀으므로 초유(招諭)하였다. 변장이 말하기를, ‘하늘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겐 두 왕이 없다. 이제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너희들이 어찌 무도한 말을 하는가.’ 하고 끝내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아니하였다. 세종께서 북경에 사신을 달려 상주하니 천자가 기뻐하여 상사(賞賜)하였다. 갑자년 봄에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지시한 바 변방 일을 모두 잘 따르고 받들어 어기거나 게으름이 없으니 왕은 어질도다.” 하고 특히 곤룡포(袞龍袍)를 주어 은총(恩寵)을 표시하였다. 대마(對馬) 일기(壹岐) 등 섬의 왜적(倭賊)들이 명 나라 연해(沿海)의 땅을 침범하고, 또 우리 제주의 지경도 범하였는데 변장(邊將)이 다 잡지 못하고 본도(本島)로 도망친 자가 있으므로 세종이 사람을 보내 도주(島主)를 타일러 잡아 보내게 하니, 도주가 명을 받들고 모두 수색하여 잡아 보냈으므로 드디어 북경으로 압송하여 처단을 받게 하였으니, 전후의 인원이 대략 60여 명이었다. 천자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왕은 능히 너의 선왕이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던 마음을 본받아 공순하고 정성스러움이 오랠수록 더욱 두터우므로 조정의 돌봄과 대우가 더욱 융숭하니, 가위 군신(君臣)이 한 마음이요, 종시(終始) 변함이 없다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변방을 침범한 왜적을 묶어보내니, 족히 왕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뜻을 보겠고, 또 변방을 지키는 데 사람을 잘 써서 횡포를 막은 공이 있음을 보겠도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조정에서 착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어짊을 중히 여겨 예로 대우하기를 융숭하게 하노니, 덕이 후한 이는 사랑과 영화를 받는다는 옛말은 왕에게 해당된다.’ 하였다. 동량북(東良北)에 사는 오랑캐 낭포야온두(浪浦也穩豆)는 일찍이 아비를 죽인 자인데, 이해에 우리나라에 와서 조공하였다. 세종께서 생각하시되, ‘대역(大逆)한 사람은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요, 왕법(王法)에 용서하지 못할 것인데, 동량북은 우리 국경에 바짝 가깝고, 오래 왕화(王化)에 젖었으니 베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국경 위에서 찢어 죽이고 하교(下敎)하여 야인에게 타일렀더니 야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을축년에 근심과 과로로 병을 얻으시자 금상 전하에게 명하시어 정무를 참결(參決)하게 하였다. 병인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음운(音韻)의 변화를 기록할 수 있게 하니 오랑캐와 중국의 여러 소리를 번역하여 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 제작이 정미함이 가히 고금에 뛰어났다 할 만하다. 무진년에 원손(元孫) 홍위(弘暐)를 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다. 기사년 가을에 지금 상황제가 즉위하매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고 또 말[馬]을 보내어 변방의 경비를 도왔다. 황제가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 형과 급사중(刑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을 보내어 폐백을 내려주었다. 우리 나라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로부터 구장면복(九章冕服)을 내려 주었고, 품질(品秩)은 친왕(親王)에 비하였다. 오직 왕세자께서 아직 면복(冕服)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 부족하게 생각하였더니 세종께서 칠장(七章) 면복을 청하여 마침내 허락함을 받았다. 세종께서는 지극한 효도를 하시어 날마다 수강궁(壽康宮)에 문안드릴 제 화한 낯빛과 부드러운 얼굴이며, 옥을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드는 듯 조심함은 전세의 제왕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요, 상사와 제사를 당하여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모두 법도에 맞았다. 비빈(妃嬪) 이하를 은혜로 대접함이 각각 그 분수를 다하니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아들을 의방(義方)으로써 하여, 적서(嫡庶)ㆍ존비(尊卑)의 등급이 분명하였다. 모두 학문을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여 마침내 교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하고 경박한 습관이 없었다. 아침 저녁마다 정성(定省)할 제 주옥(珠玉)이 서로 연하듯 하고 기러기 줄처럼 차례로 들어가니, 나라 사람들이 다 그 종사(螽斯)인지(麟趾)의 경사 있음을 감탄하였다. 처음 태종께서 지(禔)를 밖으로 내쳤으나 세종께서는 때없이 불러 보셨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오게 하시고 친애하여 혐의 없으시니, 여러 신하들이 굳이 간하여 불가하다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셨다. 두 형을 섬기고 여러 아우를 대접함에 우애의 정을 다 하시고 종실의 여러 친족에게도 자주 회견하고 술을 내려 즐기시고, 유복(有服)의 친척은 모두 재능에 따라 직을 주시고, 촌수 멀고 먼 곳에 사는 사람이라도 역시 부역을 면제하여 생각해 주셨다. 외척에 이르기까지도 대우함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었다. 또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태조의 자손으로 종적(宗籍)에 속해 있는 자는 다 글을 배우게 하니, 교양의 방법이 지극하였다. 여러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시고 착한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능하지 못한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중한 형벌을 받은 자가 없었다. 환관의 무리에게는 엄숙하게 임하여 일의 권한을 맡기지 아니하였다. 사대(事大)의 예는 지성에서 나와 무릇 바치는 문서와 토산물은 몸소 스스로 살피지 아니함이 없었으므로 여러 황제가 사랑하고 돌보아 물품을 하사한 것이 융숭하고, 가상히 여겨 포장하는 말이 전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국이 보배를 바치고 야인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 남으로부터 오고 북으로부터 와 꼬리를 물어 끊어지지 아니하여, 높이고 친하고 감격하여 추대함이 마음속으로 감복한 데서 나왔다. 전주(銓注 인물을 전형하여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것)ㆍ출척(黜陟)의 법을 세웠으되 지극히 자세하고 지극히 구비되니, 요행으로 자리를 얻는 것은 자취를 감추고, 현량(賢良)이 나아와 쓰이게 되었다. 수령(守令)이 하직할 적에는 인견하시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를 하도록 타이르시니 사람마다 스스로 힘썼다. 농상(農桑)에 유의하여 책을 만들어 권유하고, 밭 가는 것을 살피고 거두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농사짓기를 즐겨 하였다. 손실(損實 감하고 채움)의 폐단을 개혁하여 공법(貢法 세 바치는 법)을 정하고, 농토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농사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서 그 세(稅)를 올리고 내리게 하여 삼대(三代) 즉 하(夏)ㆍ은(殷)ㆍ주(周)의 공(貢)철(徹)의 법을 복구하였다. 유사에게 명하여 종(鐘)과 경쇠를 만들게 하여 율관(律管)을 불어 음성을 조화하게 하니 아악이 일신되었다. 회례(會禮)에 쓰던 여악(女樂)을 처음으로 철폐하였다. 또 조종(祖宗)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ㆍ여민락(與民樂) 등의 악장(樂章)을 지으시니 소리와 의식(儀式)의 아름다움이 지극하였다. 《당속악보(唐俗樂譜)》를 만들어 느리고 빠른 음조를 고르게 하여서, 사람마다 악보만 있으면 악사에게 번거롭게 배우지 않아도, 모든 음악이 각각 바름을 얻게 되었으니 또한 옛날에 없던 일이다. 고금의 예설(禮說)을 참작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정하니 정(情)과 문(文 의식(儀式))의 갖춤을 극진히 하였다.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의 예를 설정하여 남자면 친히 임석하시고, 여자면 왕비가 친히 대접하고, 주군(州郡)에 있는 노인은 수령이 친히 대접하도록 하였다. 백 세 이상의 노인은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고, 80이상의 늙은이에게는 1작(爵)을 주되 차등이 있게 하니, 이에 은혜가 미치지 아니함이 없었다. 재변을 만나매 하늘을 두려워하고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을 가엾이 여기는 데 진심진력하였으니, 모두가 실지를 일삼고 겉치레를 하지 않은 것이다.《칠정내외편(七政內外篇)》을 편찬하고 여러 의상(儀象 천문 관측기)과 규표(圭表 해시계) 및 흠경(欽敬)ㆍ보루(報漏) 등의 각(閣)을 지었다. 혼상(渾象)ㆍ성구정시의(星咎定時儀)ㆍ앙부의(仰釜儀)ㆍ한양일출입분(漢陽日出入分)은 다 스스로 창제한 것이니, 이에 천문 역수(曆數)가 비로소 틀림이 없게 되었다.《삼강행실(三綱行實)》을 편찬하여 풍속을 격려함이며,《명황계감(明皇戒鑑)》을 지은 것은 안일하고 향락(享樂)에 빠짐을 막음이요,《통감훈의(通鑑訓義)》와《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한 것은 역대의 흥망을 보게 한 것이요,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한 것은 평화한 때에도 싸움을 잊지 않게 한 것이요 의약(醫藥) 제서(諸書)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교정하여 새 것처럼 하였다. 주자(鑄字)와 기리고(記里鼓)의 유에도 매우 유의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진설(陣說)을 지어 진법 일으키는 것을 사열하고, 전함(戰艦)을 더욱 수리하고 화통(火筩)을 더 제조하고, 성곽을 수리하고, 갑병(甲兵)을 훈련하니 무비(武備)가 엄하여졌다. 법률이 밝고 옥사를 다스림이 공평하매 형벌이 맑아졌고, 술을 경계하고 형벌을 가엾이 여기어 모두 교서를 내려 관리를 단속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백공 기예(百工技藝)라 하여도 다 그 능력을 정밀하게 하였다. 상림원관(上林園官) 갖추기를 청하였더니 하교(下敎)하기를, ‘내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유사(有司)는 마땅히 실지에 힘쓸지어다. 뽕나무ㆍ닥나무ㆍ과일나무는 모두 일상 생활에 요긴한 것이니, 너희들은 지금 이후로는 이것으로써 직책을 삼음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옛날의 역사를 보니 태평한 세상에도 오히려 임금의 옷 자락을 잡아당기며 간절히 간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비록 조금 편안하다 하나 아직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데 곧은 말하는 사람 있음을 보지 못하겠음은 어쩐 일인가.’ 하고 항상 마음을 열고 간함을 구하며 신하들로 하여금 할 말을 다하게 하였는데, 힘써서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주지 아니하고, 큰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반드시 대신과 의논한 뒤에 행하신 까닭으로 잘못된 처사는 없었다. 경태(景泰) 원년 경오 봄 2월에 병이 드시매, 의원은 그 기술을 다하였고, 신에게 두루 빌었으나 끝내 효험 없어 17일 임진에 별궁(別宮)에서 돌아가시니 춘추(春秋)가 54세요, 왕위에 계시기 33년이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은택을 흐뭇하게 입어 모두,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하심을 얻어 길이 만년을 누릴 것이다.’ 하였더니 문득 만백성을 버리시니, 아, 슬프다.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하인 종에 이르기까지도 실성 통곡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 전하께서 유명을 받들어 재궁(梓宮) 앞에서 즉위하시고 거상(居喪)에 예를 다 하시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여름 6월 12일 갑신(甲申)에 영릉의 서실(西室)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이었다. 명나라에 부고를 전하매 천자가 매우 슬퍼하고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내렸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장헌(莊憲)이라 시호를 주고, 우리 전하에게 부의를 특히 후히 주고 왕위를 이에 책봉하고 곤면구장(袞冕九章)을 주고 왕비에게는 관복(冠服)을 주었다. 우리 전하에게 주신 고명에 대략 이르기를, ‘고(故) 조선국왕 이모(李某)는 자애하고 은혜스럽고 겸손하며, 공순하고 총명하고 특달(特達)하여, 선을 즐기고 이치를 따라 터럭같이 작은 일이라도 조심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상국(上國)을 섬기기를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했으므로, 인후(仁厚)한 덕이 나라 사람에게 믿어지고 공이 변경에 나타났다. 조선이 나라가 생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너 이모(李某)는 바로 그 세자(世子)로 충효에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조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니 순서로나 덕으로나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 받아야 한다. 충성하고 효도하여 길이 아버지의 행실을 따를지어다.’ 하였다. 대체로 우리 세종의 거룩한 덕이 사해(四海)에 빛나고, 천조(天朝)에 들린 까닭으로 종시 애영(哀榮)의 은전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왕후의 성은 심씨로 청송(靑松)의 이름난 집이다. 증조 휘 용(龍)은 고려 문하시중 청화부원군(門下侍中淸華府院君)에 증작되고, 할아버지 휘 덕부(德符)는 고려 공민왕을 섬기어 두 번 문하시중이 되고, 우리 공정왕(恭靖王) 조에 이르러 문하좌정승이 되어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였고, 아버지 휘 온(溫)은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領議政府事靑川府院君)에 봉하였다. 어머니 안씨(安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였는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천보(天保)의 따님이다. 후께서는 나면서부터 착하고 아름다웠다. 태종께서 잘 골라 뽑아와 빈(嬪)이 되어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하였는데. 양궁(兩宮)을 공경히 섬기어 은총을 두텁게 받았다. 세종께서 왕세자로 봉해지자 후는 경빈(敬嬪)으로 봉하였고, 세종이 즉위하자 후는 봉하여 공비(恭妃)가 되었다. 선덕(宣德) 임자년에 예관(禮官)의 말을 좇아 공(恭)이란 미칭(美稱)을 버리고 왕비라고 고쳐 봉하였다. 후는 정숙한 덕이 있어 세종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왕후가 나고 드는 때에 반드시 일어서서 깊이 경례를 하였다. 중궁(中宮)이 되매 여러 번 천조의 상사(賞賜)를 받았다. 왕후는 빈과 첩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아래로 시녀에 이르기까지도 다 은혜를 베풀었으며, 서출자(庶出子)도 다 자기가 낳은 아들과 같이 여기어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적에는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펴보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경계를 드리는[進戒]도움이 있고 사사로 청하는 일은 없었다. 궁중이 바르니 덕화가 나라에 흘러 멀리 태사씨(太似氏 주 나라 문왕의 비)의 풍을 따르셨다. 정통(正統) 병인년 봄에 병을 얻으니 세종께서 밤낮 친히 돌보고 우리 전하께서는 곁에 모시어 탕약을 받들었으나 3월 24일 신묘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2세였다. 시호를 소헌(昭憲)이라 하고 7월 19일 을유에 영릉 동실에 장사지냈다. 왕후는 8남 2녀를 낳으시니 큰아들은 바로 금상 전하이고, 다음은 세조 유(瑈)이니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하고, 다음은 용(瑢)이니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요, 다음은 규(璆)이니 임영대군(臨瀛大君)이요, 다음은 여(璵)이니 광평대군(廣平大君)으로 먼저 죽고, 다음은 유(瑜)이니 금성대군(錦城大君)이요, 다음은 임(琳)이니 평원대군(平原大君)인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은 염(琰)이니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장녀는 비녀를 꽂지 못하고 죽었는데, 정소공주(貞昭公主)라 증(贈)하고, 다음은 정의공주(貞懿公主)로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신빈(愼嬪) 김씨가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증(贈) 계양군(桂陽君)이요, 다음은 침(琛)으로 밀성군(密城君)이요, 다음은 운(璭)으로 익현군(翼峴君)이요, 다음은 장(璋)으로 영해군(寧海君)이요, 다음은 거()로 담양군(潭陽君)인데, 복중(服中)에 죽었다. 혜빈양씨(惠嬪楊氏)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오()로 한남군(漢南君)에 봉하고 다음은 현(玹)이니 수춘군(壽春君)이요, 다음은 천(瑔)이니 영풍군(永豐君)에 봉하였다. 숙원(淑媛) 이씨는 1녀를 낳았는데, 정안옹주(貞安翁主)로 아직 비녀를 꽂지 못하였다. 상침(尙寢) 송씨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현옹주(貞顯翁主)로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하가했고, 궁인 강씨가 1남을 낳았으니, 영(瓔)으로 화의군(和義君)이다. 우리 전하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贈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고 돌아갔다. 아들 홍위(弘暐)는 지금 왕세자에 봉하였고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로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하가하였다. 사칙(司則) 양씨(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수양(首陽)은 증 좌의정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덕종인데 도원군(桃源君)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側室) 박씨가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안평(安平)은 증 좌의정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 우직(友直)은 의춘군(宜春君)이요, 차남 우량(友諒)은 덕양군(德陽君)이다. 임영(臨瀛)은 증 우의정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주(澍)는 오산군(烏山君)이요, 나머지는 다 어리다. 광평(廣平)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니, 보(溥)로 영순군(永順君)이고, 금성(錦城)은 증 좌의정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평원은 증 좌의정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영응(永膺)은 증 좌의정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화의(和義)는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박중손(朴仲孫)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측실 김씨가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계양(桂陽)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한확(韓確)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의창(義昌)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김수(金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한남(漢南)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권격(權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밀성(密城)은 인순부 소윤(仁順府少尹) 민승서(閔承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고, 수춘(壽春)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정자제(鄭自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고, 익현(翼峴)은 예빈소윤(禮賓少尹) 조철산(趙鐵山)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영풍(永豐)은 사헌집의(司憲執義) 박팽년(朴彭年)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영해(寧海)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신윤동(申允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공주(貞懿公主)가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정현옹주(貞顯翁主)가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의춘(宜春)은 우의정 남지(南智)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건대 조화(造化)의 묘함은 물(物)에 나타나고, 성인(聖人)의 마음은 정신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세종께서는 생지(生知 나면서부터 아는 것)의 성인으로 중을 세우고[建中] 극을 세워[建極] 인륜의 지극함[人倫之至]이 되시어 선왕을 잘 계승하여 제왕의 효도를 드러내었습니다. 구족(九族)이 이미 화목하매 만백성이 다 화하고, 모든 일이 다 화함에 명성이 넘쳐 흐르셨습니다. 천자가 그 충성되고 어짐을 포장하여 내려 주심이 실로 많았고, 이웃나라는 그 정성스럽고 미더움에 감복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서로 연달아 왔습니다. 신은 시종(侍從)하기 10년이옵고,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출입하기 20여 년 맑은 빛[淸光]을 가깝게 모시었사온데, 참으로 지극히 광대(廣大)하시어 정미(精微)함을 다하였고, 고명(高明)을 극도로 하며 중용(中庸)으로 말미암았으니 실로 동방의 요순이옵니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곤후(坤厚)의 덕으로서 건강(乾剛)의 성인에 짝하시어 어머니로서의 모범을 한 나라에 보이시고 덕화가 사방에 미치었으며, 또 다남(多男)의 경사가 있어 우리 전하를 낳으시매 성덕(聖德)이 있으시어 대통(大統)을 이었습니다. 또 어관(魚貫)의 사랑을 이루시고 종우(螽羽)와 같이 자손이 많으셨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내신 배합이요, 주나라의 태사(太姒)와 짝할 만합니다. 신은 필력이 거칠고 옹졸하여 성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 없사오니, 천지의 큼을, 그리고 일월의 밝음을 칭찬하는 데 충분하지 아니하옵니다. 그러나 명을 받자옵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옵고 명(銘)을 드리나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을 이어, 거듭 빛내고 진실로 요의 덕에 맞았네. 무왕은 문왕을 이어, 왕업을 창성하게 하였네. 덕이 성한 이는 제(帝)가 되고, 공이 높은 이는 왕(王)이 되네. 빛나는 문채가 있어, 곧 밝은 빛을 주셨도다. 어진이에게 주고 아들에게 줌은 하늘이 진실로 명함이요, 혹 선위(禪位)하고 혹 계승함은 오직 공(公)이요 사(私)가 아니네. 생각건대 우리 세종은 하늘이 내신 생지(生知)이시고, 효제(孝悌)의 성품이요 충신(忠信)의 자질이시네. 학문을 좋아하시어 게으르지 아니하시니, 주공(周公)의 뜻이며, 공자(孔子)의 생각이로다. 밝고 밝은 태종은 오직 미묘하고 깊으셨네. 어두운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를 명하시니, 요 임금과 문왕의 마음이로다. 천자의 조정에 아뢰니 황제의 허락이 내리셨네. 부지런하다가 지치시어 이에 왕위를 물려 주셨네. 천자가 책명(冊命)을 내리어 사신이 드디어 이르렀고, 천자가 연회를 내려 주시어 주행(周行 대도(大道))을 보이셨도다. 도가 그 몸에 쌓이어 총명하고 슬기롭네. 밤에 일어나고 늦게 잡수시며, 정성을 쏟아 다스림을 도모하시어 받은 책임을 능히 하시니 부왕께서 기뻐하셨도다. 양궁(兩宮)을 즐겁게 받드시며 기쁜 안색이요, 화한 얼굴이었네. 용루(龍樓)에서 문안드리매 더욱 정성되고 더욱 공손하셨도다. 상사에는 슬픔을 다 하시고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셨네. 하늘이 감로(甘露) 내려 그 신령함을 밝히셨네. 궁중에선 화합하여 은혜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가법이 바르매 사람이 이간할 수 없었도다. 백형이 밖에 있으매 와 보기를 자주 하게 하고 얼마 후에 서울로 불러와서 우애함이 더욱 도타우셨도다. 효도를 미루어 우애하매 이에 형제가 화락하고, 화악(華萼)이 서로 즐기는 것은 서로 빛났고, 구족(九族)에 미치기까지 은택을 베풀었도다. 진진(振振 떼지어 나는 모양)한 자손은 선선(詵詵 많은 모양)한 메뚜기로다. 의방(義方)으로 가르치니 서(書)를 읽고 시를 외우네. 등급이 분명하였고, 적서(嫡庶)가 분수 따라 뭇 신하를 예우하여 형벌을 가하지 아니하였도다. 지성껏 대국을 섬기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셨도다. 무엇을 주셨는가. 조환(絛環)과 보도(寶刀)로다. 또 무엇을 주셨는가. 곤룡포(袞龍袍)로다. 예로써 이웃을 사귀매 이웃나라가 친하고 화하도다. 산을 넘고 바다 건너 예물을 가지고 오니 만 리가 한 집이로다. 백성이 이미 잘 살고 번성하매 인의(仁義)로 점점 교화시켰네. 인에 그치고 효에 그치고 공경에 그치고 믿음에 그치셨도다. 중을 세우고 화(和)를 극도로 하니 인륜(人倫)이 요순(堯舜)이로다. 임관(任官)하는 법이 정하고 자세하매 요행을 바라는 자가 자취를 감추었도다. 어진이에게 직책을 맡기고 능한 사람을 부리니 각각 그 직책에 알맞았네. 전제(田制)를 이미 정하니 교활한 아전이 손을 움츠리고, 걸(桀)도 아니며 맥(貊)도 아니매 세 받음이 어김없었네. 처음으로 의상(儀象 관측기)을 만드시고 다음으로 율력(律曆)을 정하시어 오례(五禮)를 손익(損益)하시니 정(情)과 문(文)이 극진하였도다. 음악의 소리와 의식을 새로이 하시어 조종의 공덕을 칭송하였네. 모임에 아악(雅樂)을 쓰고 비로소 여악(女樂)을 물리치고, 양로연(養老宴)에 친히 임하시어 매년 가을로서 정식을 삼으셨네. 서사(書史)를 편찬하여 정치의 득실을 거울삼고,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누속(陋俗)을 씻으셨도다. 공물(貢物)에 토산만을 하기로 천자의 칙서를 받았고 천자가 세자에게 칠장면복(七章冕服)을 내리니 온 나라에 빛이 났도다. 모든 시설하신 것이 자손에게 전할 만한 것 아님이 없었네. 진(鎭)을 북방에 설치하니 옛 강토 회복되었도다. 위엄과 덕이 멀리 덮으니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군사가 북을 가리키매 적의 괴수 주둥이로 숨 쉬었네[喙息]. 바로 소굴(巢窟)을 치니 저 스스로 전복되었고, 글월 한 장을 남으로 보내니 왜놈들이 항복하였네. 명 나라 서울로 보내어 처단받게 하였도다.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시고,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아니하셨네. 성과 보루(堡壘)는 험한 데 의거하였고, 창과 칼을 준비하였네. 전함(戰艦)을 새로 만드니 견고함이 철석같아 화통(火筒)이 틀에서 발하매, 빠르기 벽력같아서 군자(軍資)와 기계가 전보다 훨신 충실하였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더욱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시니, 형벌이 공평하여 사람들이 억울함이 없었네. 백공기예(百工技藝)도 모두 법칙에 맞았네. 완호(玩好)를 좋아하지 아니하시고, 질실(質實)함을 위주하셨네. 더욱 겸손하여 바른말 구하기를 목마른 것같이 하셨으니, 높으신 덕이요 빛나는 문채로다. 이름할 수 없는 거룩함이요, 막대(莫大)한 공(功)이로다. 우(虞) 나라 주(周) 나라와 더불어 짝하겠고, 한 나라와 당 나라에서도 듣지 못하던 것이었네. 33년간 부모 되고 임금 되시었네.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시니, 멀고 가까운 데에서 슬픔에 얽혀, 애모(哀慕)하기 어버이같이 하네. 우리 임금이 위(位)를 이으시매 지극한 효도가 천성에서 나오시니, 밝음으로 밝음을 이으시고 성인으로 성인을 이으셨도다. 장사의 상제(喪制)는 모두 유명(遺命)에 따르셨네. 천자가 조상을 하며 제(祭)를 내리고 뇌사(誄詞) 지으셨네. 절혜(節惠 시호)로 이름을 정하여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셨네. 후한 부의(賻儀)가 또한 이르러 은전을 베푸셨네. 왕작(王爵)을 잇게 하고 면복(冕服)을 주시었네. 내리심이 왕비에까지 미치어 구슬관과 유적(褕翟 꿩의 깃으로 꾸민 왕비의 옷)이로다. 천자의 은혜가 실로 두텁네. 공손히 생각건대, 왕후는 하늘의 아가씨에 비하겠네. 왕가에 시집오시어 궁중의 정위(正位)에 앉으시니 태사(太姒)의 덕으로, 문왕의 짝이로세. 성주(聖主)를 낳으시니 나라 운수 더욱 성하도다. 곧 많은 아들 두어서 인지(麟趾)를 읊었도다. 실로 우리 동방에 억년의 경사였네. 아, 선왕의 거울 잃음을 탄식하시더니 다섯 돌이 못 되어 세종이 문득 돌아 가셨도다. 능을 만들어 같은 궁(宮)에 실(室)은 다르네. 우러러 일각(日角)을 생각하오니 오장이 아프고 찢어지네. 오직 이 거룩한 덕이 만대에 한결같으리. 삼가 대략을 기록하여 절하옵고 명사(銘詞)를 드리나이다. 하늘처럼 길이 가고 땅처럼 오래 가도록 한없이 빛나오리.’” 하였다.
이인손(李仁孫) 묘(墓) 주 서쪽 15리에 있다. 이계전(李季甸) 묘(墓) 주 서쪽 25리에 있다.
【고적】 천녕폐현(川寧廢縣) 본래 고구려 술천군(述川郡)인데 일명 성지매(省知買)이다. 신라 때 기천(沂川)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조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했다. 예종조에 이것을 폐하고, 주에 병합하여 직촌(直村)이 되니 주 서쪽 25리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주 북쪽 53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는 3만 8천 8백 25척이다. 마암(馬巖)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을 이름하여 황려라 하였다.” 한다. 바위가 마암으로 이름을 얻음도 이때문이라 한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웅건하고 기특한 쌍마(雙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라 하였네.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 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 알리.” 하였다.
사우당(四友堂)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任元濬)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여강(驪江) 물은 월악(月岳)에서 근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금탄(金灘)이 되고, 앙암(仰巖)을 거쳐 섬수(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驪江)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 강 서쪽에 마암이 있는데 크고 넓고 높고 험하며 기이하고 뛰어났다. 물은 맑아서 황려 일주(一州)가 크게 힘입었다. 이 바위의 이름은 이로 해서 났다. 좌우로 두른 장림(長林)ㆍ대야(大野)와 양전(良田)ㆍ옥양(沃壤)이 멀리 수백 리에 가득하며,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 적당하고, 사냥과 물고기 잡기에 적당하여, 모든 것이 자족(自足)하다. 멀리 바라보면 치악산ㆍ용문산 여러 산이 푸르게 뾰족히 솟아 연운(煙雲)의 아득한 사이에 출몰(出沒)하여 기상이 여러 가지로 변하니, 참으로 이른바 명구승지(名區勝地)인데, 서하(西河) 임 선생(任先生)의 별장이 있다. 선생이 일찍이 한 당(堂)을 짓고 사우(四友)라 편액(扁額)을 달았는데, 경(耕)ㆍ목(牧)ㆍ어(漁)ㆍ초(樵) 네 벗이란 뜻에서 취한 것이다. 요즈음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생각건대, 들에서 밭 갈고, 들에서 소 먹이고, 숲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는 것은, 모두 산림(山林)에 고상하게 숨어 사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인데, 선생은 공명부귀의 성(盛)함으로서 헌면(軒冕 귀인이 타는 수레와 쓰는 갓)ㆍ규조(圭組 홀과 인끈)의 영화를 누려 성심(聖心)의 돌보심이 쏠리는 바 되고, 세상 의논이 중히 여겨 의지한 바로서, 이 네 가지 벗이 될 수 없는데, 이제 다시 이것을 취함은 무슨 까닭인가. 산림이거나 들이거나 처해 있는 곳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취미를 붙인 것은 같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조정에 있어서는 강호(江湖)를 생각하고, 번화를 싫어하며, 한적(閒適)을 즐겨함은, 달인(達人) 군자의 취미가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 선생이 비록 공훈이 높고 명망이 중하나 겸손하고 지족(止足)의 경계를 거울삼아 용퇴(勇退)하고자 마음을 가진 지가 하루가 아니었다. 더욱 여주의 별장은 바로 선생의 청전(靑氈 세업(世業))으로 선산이 있는 곳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겨우 이틀의 길 밖에 되지 않는다. 선생께서 공무의 틈을 얻어 아름다운 때와 절일이면, 오가며 성묘(省墓)하여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고, 물러와서는 고향의 부로(父老)들과 조용하게 웃고 이야기하며 밭가는 이에게는 심고 거두는 방법을 묻고, 목자에게는 사육(飼育)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나무하는 사람에게는 벌목편(伐木篇)을 노래하고, 고기잡이하는 이에게는 호량(濠梁)의 취미를 논하고 기뻐하여, 담박(淡泊)한 것으로 더불어 사귀고 적막한 것으로 더불어 벗한 것같다. 벗할 것이 부족하여 그 당(堂)을 이름하고, 그 당을 이름하고는 기문을 저술하였다. 그 벗함은 안면으로 함이 아니라 마음으로 함이다. 대체로 벗이란 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으로서 그 벗을 취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옛 사람을 벗하는 사람도 있고, 한 세대의 어진 사람을 벗하는 사람도 있고, 한 고을의 선비를 벗하는 사람도 있다. 옛을 벗하고 한 세대의 어진이를 벗하는 것은 일찍기 그런 사람이 있음을 들었거니와, 능히 높은 선비, 경목초어(耕牧樵漁) 같은 이를 벗하여 유익한 도움이 되어 오랠수록 공경함은 선생에게서 보았다. 아, 선현이 말씀하기를, ‘친족을 친한 뒤에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뒤에 물건을 사랑하라.’ 하고, 또 말씀하기를, ‘백성은 우리 동포요, 물건은 나와 한편이다.’ (장자(張子)의 말) 하였은즉, 군자의 벗을 취함이 의당 먼저 사람에게 하고, 뒤에 물건에 하는 것이다. 두루 고금의 고상한 사람과 운치있는 선비들을 보건대,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벗하고, 왕자유(王子猷)는 대를 벗하고, 윤화정(尹和靖)은 매화를 벗하고, 주염계(周濂溪)는 연꽃을 벗하여, 혹은 그 향기로운 덕을 취하고, 혹은 그 맑은 절개를 취하였으니, 마음으로 벗하여 물건과 나를 간격(間隔)이 없게 한 것이다. 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ㆍ월(月)ㆍ풍(風)ㆍ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ㆍ산(山)을 더하여 육우(六友)로 하였다. 그 벗함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숭상하는 것이 다 선생이 벗한 바가 인륜 일용(人倫日用)의 떳떳한 데 있고, 형색(形色)이 완호(玩好)한 데 있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벗을 취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하였다. 거정(居正) 또한 사가(四佳)로써 정자에 이름하였는데, 사가는 춘하추동을 이름이니,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에 군자의 사덕(四德)이 갖추어 있다. 거정이 사덕 군자의 뒤를 따라 위로 옛 사람을 벗[尙友]하고자 한 것이 그 넷을 벗한 까닭이니, 마땅히 선생에게 사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선생도 또한 취함이 있으실런지. 만일 취함이 있을 것같으면 선생과 다시 이것을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침류정(沈流亭) 천녕(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염동정(廉東亭 이름은 흥방(興邦))이 귀양살이 할 때, 안으로 천녕현(川寧縣)에 옮기어 물에 걸쳐 정자를 짓고, 그 위에서 노닐며 쉬었다. 인하여 수석침류(漱石枕流)의 말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더니, 이미 풀려서 돌아오매 나에게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동정(東亭)은 선왕에게 알아줌을 만나 검은 머리로 젊었을 때 재상이 되었으니, 금상(今上)에게 갚음을 도모할 바를 다시 더 말하여 무엇하랴. 말함은 혐의됨을 피하지 못하고, 일은 어려운 것을 사양하지 아니하여, 더럽고 탁한 것을 용납하고 흔들리고 격동하는 것을 진정하여, 굳센 기운은 금석보다 더하고, 충성은 귀신을 움직였으니, 확고하여 흔들 수 없다고 이를 만하다. 비록 밖에 쫓겨 나왔으나 몸을 보존하고 생명을 온전히 하여 산수의 즐거움이 평일의 소원을 갚았고, 임금께서 보전하게 하여주니, 은혜가 하늘과 같다. 밥먹고 숨쉬는 동안에도 감히 강호의 먼 데 처해 있는 까닭으로 해서 임금을 근심함을 잊지 못할 터인데, 어찌하여 정자에 이름한 것은 이와 반대되는가. 앞으로 시냇물에 귀를 씻어 세상 일을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려 함인가. 앞으로 그 몸만을 깨끗이 하여 세상의 누(累)가 미치지 않게 하려 함인가.’ 하니, 동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대체로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라, 그 기운이 사람에게 닿으면 뼈에 사무치게 찬 것입니다. 마음의 혼탁함이 이에 맑고 밝아지고, 마음의 흔들림이 이에 고요하여 안정하고, 상제(上帝)를 섬길 수 있고, 사령(四靈)을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러므로 천일생수(天一生水)하며 오행(五行)의 장이 되었다. 만물이 번식하는 소이는 다 물의 공인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남의 집에 문을 두들겨 물과 불을 구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없으면 사람이 그 생명을 보전할 수 없으니 공이 큰 것이다. 흐름을 베개한다[枕之]는 것은 물과 친할 뿐이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물에 취하는 소이이다. 다행히 자네는 나의 말을 다 풀이하여 주게.’ 하였다. 내 일찍이 들으니, 천지 사이에 물이 큰 것이 된 까닭으로 땅은 물 위에 있어 물에 실려 있는 것이 되는데, 대체로 형색(形色)을 가지고 천지 사이에 나서 모인 것은 다 물을 베개하니, 홀로 사람에게 뿐이랴. 이제 저 산이 높이 솟고 커, 위로 하늘에 닿았고, 금수초목이 산을 의지하여 산다. 비록 비와 이슬의 적셔줌이 있다 하나 진실로 물기가 그 사이에 통하지 아니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그 생(生)을 이룰 것인가. 더욱 평원(平原)ㆍ거야(鉅野 대야(大野))ㆍ단록(斷麓)ㆍ평림(平林)에 물이 나옴은 필연이다. 그래서 사람이 거처하는 데 물이 없는 땅이 없고, 사람이 먹 는데 물이 없으면 물건이 없을 것이니, 물과 사람이 잠깐 동안이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동정(東亭)이 거이 양이(居移養移)하여 식견이 일세에 높아 부귀(富貴)했으며 환란에 처했으니, 대체로 환란에 행하여 자득(自得)한 것이 깊다. 나는 구름이 흩어지면 달이 나오고, 물이 흐르면 바람이 일어 나는 줄 안다. 동정(東亭)은 초연(超然)이 독립하였으니 더욱 어찌 부귀와 환란이 그 마음을 움직이랴. 그래서 이 정자야말로 하늘이 동정에게 더욱 후하게 한 것이다. 동정이 다시 조정에 올라 사방에 고루 베풀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번열(煩熱)을 씻고 정신을 통하여 임금의 덕에 기뻐 뛰게 함인즉,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기를 삼는다.” 하였다.
○ 고려 염흥방(廉興邦)의 시에, “시와 술로 즐거이 놀음이 백년 가까운데, 옛 사람 남기신 자취 임천(林泉)에 있구나. 홍진(紅塵) 10년에 은대(銀臺)의 영광이여, 이암(伊菴)에 한 번 취하여 자는 것과 어찌 같으리.” 하였다.
○ 금사거사(金沙居士)의 침류정에는, “버들 그늘이 짙으매 더운 기운이 가시네. 귀를 씻으니 속세의 일이 들리지 아니하는데, 졸졸 흐르는 것은 단지 작은 시내 소리뿐이네.” 하였다.
○ 또, “보리 언덕은 높고 낮고 물은 못에 가득한데, 쓸쓸한 마을이 적적하게 강가에 있네. 속세에서 남으로 북으로 다니던 시끄러운 일을, 모래 가 흰 새에게 말하여 알리노라.” 하였다.
○ “여강은 넓고 아득하여 용문산을 둘렀는데, 언덕 맞은편에 고기잡이 등불에 먼 마을 있음을 알겠네. 농사꾼이 밤에 돌아오매 잔소리 없고, 다만 곡식이 들에 가득하길 빌 뿐이네.” 하였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菴)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 또, “못을 파고 버들을 심고 초가 정자를 지었으니, 푸르름이 축축하여 개이려 하지 않네. 문득 은대(銀臺)에 놀던 화월(花月)의 꿈을 깨니 녹음에서 가끔가다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하였다.
○ 또, “꿈은 아직도 봉황지(鳳凰池)를 싸고 도는데, 집을 구하고 밭을 구하여 푸른 물가를 찾았네. 구차스럽게 성자(姓字) 감출 것 없으니, 금어초목(金魚草木)이 이미 알고 있네.” 하였다.
○ 또, “조각배 짧은 노로 가시사립 두들기니, 비오는 밤에 도리어 물 위 마을이 아득하구나. 묻노니 금사가 어느 곳이뇨. 등불이 숲을 격한 언덕에 깜박거리네.” 하였다.
육우당(六友堂) 천녕현에 있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에 귀양와서 당(堂)을 짓고 육우(六友)라 이름하였다. 이색(李穡)의 기에,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가 그 당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대체로 강절선생(康節先生 송대의 철학자 소옹(邵雍))의 설월풍화(雪月風花)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 되었다. 그가 여흥(驪興)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조석으로 위로하는 것이, 홀로 눈ㆍ달ㆍ바람ㆍ꽃만이 아닌 까닭으로, 여기에 강산을 더하여 육우(六友)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였다. 내 말하기를, ‘내가 쇠하여 병든 지 오래였다. 위로 천시(天時)가 이변하여도 내 모르고, 아래로 지리(地理)가 허물어져도 내 모를 뿐이다. 강절(康節)의 학문은 수리(數理)에 깊은 것인데, 이제 비록 강산 두 자로써 그 위에 더 써서 강절과 같지 아니함을 보인다. 그러나《역(易)》의 육룡(六龍)ㆍ육허(六虛)는 강절의 학문이 나온 것이니, 이 육(六)을 또한 강절에게 돌릴 뿐이다. 비록 그러나 이미 강절의 학문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찌 말이 없겠는가. 말하자면 산은 우리 인자(仁者)가 즐기는 것이니 산을 보면 내 인(仁)을 가지고, 물은 우리 지자(智者)가 즐기는 것으로 강을 보면 지(智)가 있는 것이다. 눈이 겨울의 따뜻함을 누르는 것은, 나의 기운을 가운데 보전시키고, 달이 밤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나의 몸의 편안함을 보존함이다. 바람은 팔방이 있어 각각 철따라 나의 망녕되게 움직임이 없는 것이요, 꽃은 사시가 있어 각각 유(類)로써 모이니, 내가 차례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또 더욱 경지씨는 마음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고, 또 사는 곳이 산이 밝고 물이 푸르르니, 밝은 거울과 비단병풍이라 일러도 욕됨이 없을 것이다. 눈은 고주사립(孤舟簑笠)에서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은 다락 술자리에서 더욱 아름답고, 바람은 낚싯줄에 있어서 그 맑은 것이 더욱 맑고, 꽃은 서탑(書榻)에서 그 그윽함이 더욱 그윽하여지는 것으로, 네 철의 좋은 경개가 각각 그 극치를 다하여, 강산의 사이에 경위(經緯 가로 세로)하였다. 경지는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서 배를 타고 짚신 신고 산에 올라 낙화(落花)를 세고, 청풍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을 찾고, 달을 대하여 손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극치를 다함이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동지(同志)를 벗함에 있어서도 위로 옛 사람을 벗으로하니, 옛 사람을 하나 둘로 헤일 수 없는 것이요, 벗을 현금에 구하면 우리같은 이로 어찌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경지씨의 취한 것이 이와 같으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하는 분이다. 비록 그러나 천지는 부모요, 물(物)은 나와 한편이니, 어디에 가서 벗하지 못하겠소. 더욱 대축(大畜)의 산과 습감(習坎)의 물은 강습하여 많이 아는 것이랴.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다.’ 하고 이에 육우당기를 짓는다.” 하였다.
○ 정추(鄭樞)의 부(賦)에,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당(堂)이 있어 장려하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 만한 것이 아니네. 고인(高人)이 더불어 평소에 그들과 서로 알게 됨이여, 흉금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네. 아, 아름답구나. 저 양양하게 먼 흐름이여, 흐름이 근원이 있어 쉬지 않는도다. 저 높고 아래가 두터움이여, 높으나 위태롭지 아니하여 편안한 집일세. 저 꽃다운 꽃봉우리의 찬란함이여, 속에 아름다움을 품었다가 때가 되면 피는구나. 저 달이 고움이여, 골고루 멀리 비치는구나. 손이(巽二)가 맑은 바람을 명하고, 등륙(騰六)은 곧 나쁜 것을 가리어 숨겨 주누나. 서ㆍ동과 남ㆍ북이 모두 그 어진 덕을 자랑하고 빛내누나. 손과 주인의 서로 대함이여, 어찌 웃음 소리도 하하 하는고. 주고 받는 이야기 우레 같음이여, 혹 낮을 다하고 저녁에 늦도록 하는구나. 만일 그 거처를 말하자면 태극(太極)을 집으로 하였고, 그 족속을 상고하면 육막(六幕 천지 사방을 말한다)에 두루했네. 천지가 이미 개벽됨으로부터 형상이 나타나 법도대로로다. 세속은 어두워서 늘 함께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구나. 아, 나의 혼미함이여, 저 장님과 무엇이 다르랴. 아름답다, 상락(上洛)의 원손(元孫)이여, 일찍이 주역에 연구가가 있었도다. 훌륭한 벗을 알아서 굳게 맺음이여, 진심으로 얻었음이로다. 이에 육일노인(六一老人)이 있어서 그 행함이 빨라 자취 없구나. 이미 팔구(八區)를 두루 보고는 고향에 들려서 수일 동안 묵었구나. 드디어 당에 올라 손에게 읍하고,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어질구나, 그대가 육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여 세속에서 벗어났구나. 그러나 그 득실(得失)에 어찌 말이 없겠는가. 바야흐로 그 기둥에 의지하니 물결이 밝고, 발을 걷으니 산이 푸르구나. 봄동산에 흩어진 것은 홍록(紅綠)이요, 가을 하늘에 걸린 것은 희고 깨끗한 달일세. 바야흐로 무더울 때는 맑게 물결이 부딪치네. 겨울의 따뜻함을 누름이여, 흰 것을 뿌리누나. 이때에 혹 술을 대하며 쟁(箏)을 타고, 혹 난간에 기대어 피리소리를 듣누나. 정신이 화열하고 뜻이 맞으니 이 즐거움이 어찌 다하랴. 물에 가까이 함을 즐기면 옷이 젖고, 자주 위험한 산을 타면 나막신이 꺾어진다. 색을 너무 사랑하면 천성을 해치는 것이요, 밝음을 구경하는 것이 심하면 눈을 상하고, 시원한 것을 먹기를 좋아하면 병이 나고, 찬 것을 항상 범하면 동상(凍傷)을 입는다. 내 일찍이 공자의 말씀을 들으니, ‘친구도 충고를 자주하면 소원해진다.’ 하셨네. 그 함괘(咸卦) 동동(憧憧)함이여, 성인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 아니네. 일반 사람의 정이 서로 좋아함이여, 마음이 험하여 헤아릴 수 없구나. 처음 사귀매 아교[膠漆]같이 붙었다가, 문득 노하여 눈을 흘기네. 이제 그 원인을 찾아보니, 물(物)과 내가 적이 된 까닭이네. 비록 여섯 벗이 맑다 하나 적이 되니 일반이라. 덕을 한결같이 한 대인이 있음이여, 천지를 초월하여 독립했구나. 그 등을 등지니 그 몸을 보지 못하거든, 하물며 와서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으랴. 어찌 그대의 여섯 벗을 버리고, 대인을 따라서 배우지 않는가. 주인이 이에 들판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고 말하기를, ‘그대의 하는 말은, 내 들은 것과 다르네. 저 방(方)과 물(物)이 유(類)로 모이고, 무리로 나뉘어져서 법칙 없음이 없는 것일세. 대체로 대인의 학문은 반드시 비고 고요한데, 저 벗의 좋고 좋지 아니함은 내 자신으로부터 손익(損益)할 것이네. 그 물(物)이 없는 미묘한 진리에 돌아가 숨는 것보다, 차라리 손과 더불어 즐김이 나을 것일세.’ 하고, 이어 노래하기를, ‘달이 비침이여, 산 언덕이로다. 바람이 슬슬 불어 옴이여, 강이 스스로 물결치누나. 꽃은 말을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눈 물[雪水]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이에 서로 크게 웃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인지 알수 없네.’ 하였다.” 했다.
방근곡처(防斤谷處) 주 남쪽 30리에 있다. 신제처(新堤處) 주 서쪽 15리에 있다. 신잉이소(新仍伊所) 주 서쪽 15리에 있다. 등신장(登神莊) 천녕현 동쪽 20리에 있다.
○ 이제 살펴 보건대, 신라에서 주군(州郡)을 건치(建置)할 때, 그 전정(田丁) 호구(戶口)가 현이 되지 못할 것은, 혹 향(鄕)을 두거나 혹 부곡(部曲)을 두어 소재(所在)의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ㆍ은소(銀所)ㆍ동소(銅所)ㆍ철소(鐵所)ㆍ사소(絲所)ㆍ주소(紬所)ㆍ지소(紙所)ㆍ와소(瓦所)ㆍ탄소(炭所)ㆍ염소(鹽所)ㆍ묵소(墨所)ㆍ곽소(藿所)ㆍ자기소(瓷器所)ㆍ어량소(魚梁所)ㆍ강소(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건을 공급하였다. 또 처(處)로 칭하는 것이 있었고, 또 장(莊)으로 칭하는 것도 있어, 각 궁전(宮殿)ㆍ사원(寺院) 및 내장댁(內莊宅)에 분속되어 그 세를 바쳤다. 위 여러 소(所)에는 다 토성(土姓)의 아전과 백성이 있었다.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 지리지는 다시 여기에 쓸 것 없고, 정인지(鄭麟趾)가 편찬한 《고려사》에도 또한 《삼국사》를 그대로 기록하였다. 이제 저명한 성씨(姓氏)는 그 성씨의 근본되는 땅을 싣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의거하여 증거대었는데, 지금 상고할 만한 것은 겨우 열에 하나 둘이며, 모두 읍마다 고적(古跡)의 밑에 달아두었다.

『신증』 【명환】 본조 정성근(鄭誠謹)ㆍ최숙정(崔淑精)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민영모(閔令謨) 어려서 글을 좋아했고 인종(仁宗) 조에 과거에 합격했다. 명종이 잠저에 있을 때, 꿈에 한 재상이 광화문으로 나오는데 추종(騶從)이 매우 성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당신의 재상입니다.” 하였다. 즉위하자 영모(令謨)가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방(榜)을 발표할 때에 임금이 보니 꿈에 보던 사람과 같았다. 비로소 크게 쓰려는 뜻을 두어 순서를 밟지 않고 뽑아올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민식(閔湜) 영모(令謨)의 아들로 천성이 활달하였다. 비록 귀하고 현달하나, 친구를 대접함에 귀천이 없이 한결같이 전일과 같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어질게 여겼다. 명종의 서자 중 소군(小君)이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 들이니, 조정의 선비들이 다투어 붙었으나 홀로 식(湜)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그 아우가 말하기를, “형님은 어찌하여 안 가시오.” 하니, 식이 말하기를, “무지개[虹沙彌]의 무리가 나라를 망칠 것이다.” 하니, 아우가 놀래어 땀을 흘렸다. 무지개는 한 끝은 땅에 닿고 한 끝은 하늘에 붙은 것인데, 소군(小君)이 왕자로서 어미가 천함을 비유함이다. 식의 언행이 구속을 받지 아니함이 이와 같았다. 벼슬은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이윤유(李允綏) 벼슬이 호부 시랑(戶部侍郞)에 이르렀다. 이규보(李奎報) 윤유의 아들로 9세에 글을 잘 지어 당시 기동(奇童)이라고 불렀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불교ㆍ노자의 서적을 한 번 보면 곧 기억했다. 명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 때에 여러 벼슬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가 되었다. 이때에 몽고 군인이 우리 지경을 누르고 자주 힐난하였다. 이규보는 오래 양제(兩制)를 맡아서 진정서표(陳情書表)를 지어 바쳤더니, 황제가 감동되어 깨닫고 철병하였으므로,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특히 추밀부사(樞密府事)를 주었다. 문하시랑으로서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성격이 활달하여 집안 살림을 경영하지 아니하였고, 마음대로 술을 마시고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였다. 시문(詩文)이 양양(洋洋) 하여 한때의 중대한 문자가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유행된다. 이함(李涵) 규보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지홍주사(知洪州事)가 되었다. 민지(閔漬)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 나라에 갔었는데, 세조가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교지(交趾)를 칠 것을 의논하게 하면서 조서를 내려, 민지와 정가신(鄭可臣)에게 같이 의논하게 하였는데 세조의 뜻에 맞아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를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수정승(守政丞)에 이르고, 시호를 문인(文仁)이라 하였다. 민상정(閔祥正) 민지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민선(閔璿) 상정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민인균(閔仁鈞) 민영모(閔令謨)의 손자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판삼사사 한림학사(判三司事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재주와 학식이 넉넉하여, 비록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도 외고 익히는 것을 철폐하지 아니하고 학생들의 공부하는 것과 같게 하였다. 평시에 태만한 거동이 없었고, 속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움직일 때마다 예법을 따랐다. 문생(門生)이나 옛 관속이나 신학(新學) 후진(後進)이 나아가 뵈오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띠를 띠고 대하기를 손님같이 하여, 경서를 이야기하고 도를 논할 뿐이었다. 민종유(閔宗儒) 인균의 손자로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천품이 장중(莊重)한 데다 풍도가 아름답고 전고(典故)를 밝게 알아, 관리로서의 능력과 재간이 뛰어났었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민적(閔頔) 종유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고, 세력없는 후진을 대함에 더욱 정(情)과 예의를 다하였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민사평(閔思平) 민적의 아들이다. 젊어서 기국(氣局)이 있었다. 정승 김윤(金倫)이 사람을 잘 알아 보기로 유명하였는데 딸을 주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관에서 처사함에 있어 특별히 모난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항상 시서(詩書)로써 스스로 즐겼다. 저술한 《급암집(及菴集)》이 세상에 전하며,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민변(閔抃) 사평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충혜왕 때에 여러 번 옮겨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고, 뒤에 여흥군(驪興君)에 봉하고, 시호를 문도(文度)라 하였다.
본조 민제(閔霽) 변의 아들이요 적의 손자이다. 온화 인자하고 청백하고 간소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자리를 갖추 지냈다. 예(禮)를 아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승 여흥부원군(左政丞驪興府院君)에 이르렀다.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낳았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이행(李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문장으로서 저명하여 세상에서 일컬어졌으며, 시호는 문절(文節), 호는 기우자(騎牛子)이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신증』 민휘(閔暉)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청간(淸簡)하였다. 민수천(閔壽千) 휘(暉)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다. 【우거】 고려 김구용(金九容) 민사평(閔思平)의 외손이다.
【제영】 촌시어아미(村市魚兒美) 이숭인의 시에, “시골 저자에 물고기 아름답고, 강 들판에 벼가 기름지네.” 하였다. 연침강자파(煙沈江自波) 임규(任奎)의 시에, “달이 침침한데 까마귀 물가에 날고, 연기가 잠겼는데 강이 스스로 물결치네. 고기잡이 배 어디에서 자느냐. 멀고 아득한 한 마디 노래로세.” 하였다. 반사단청반사시(半似丹靑半似詩) 이색의 시에, “천지는 가이 없으나 인생은 가이 있다. 호연(浩然)히 돌아갈 뜻은 어디로 가려는가. 여강 한 구비에 산이 그림같으니,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같으이.” 하였다. 격안소종임하사(隔岸疏鐘林下寺)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언덕을 격하여 성긴 종소리 들리니, 숲 아래 절이요, 난간에 둘린 기이한 그림은 비 가운데 산일세.” 하였다. 해객사통운한상(海客査通雲漢上) 고려 허옹(許邕)의 시에, “바다 손의 떼는 은하수에 통하고, 선인(仙人)의 피리는 자소(紫霄) 사이에서 내려오네.” 하였다. 금사(金沙) 팔영(八詠) 이색의 시. 서산채미(西山採薇) “봄비는 바람을 따라가는데, 봄 산은 가는 곳마다 깊었구나. 어떤 사람이 능히 고사리를 캐는고. 백이(伯夷)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네.” 하였다. 동강조어(東江釣魚) “일찌기 생선 맛이 좋다고 들었더니, 모두가 가는 비늘[細鱗]살찐 것을 말하네. 가을 바람이 일어남을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장한(張翰)을 따라 돌아가기를 원하네.” 하였다. 용문착약(龍門斲藥) “땅이 신령하니 약물(藥物)이 많고, 산이 그윽하니 티끌이 적네. 다시 묻노니 외와 같은 대추를 안기생(安期生)이 어디에 있는가.” 호곡경전(虎谷耕田) “평야는 다 호부한 집에 점령되고, 거친 밭 한 조각이 남았네. 스스로 밭갈아 조석을 지내니, 도리어 공명(孔明)의 초가집 같으이.” 하였다. 한포농월(漢浦弄月) “해 떨어지니 모래 더욱 희고, 구름이 옮기니 물이 더욱 맑구나. 높은 사람이 밝은 달을 희롱하는데, 다만 자란생(紫鸞笙)이 없구나.” 하였다. 파성망우(婆城望雨) 하늘 뜻은 응당 만물을 살리고 농사 일은 때 미처 함에 있네. 푸른 못에 용이 누운 지 오래인데, 한 번 일어남이 어찌하여 더딘가.” 하였다. 장흥습율(長興拾栗) “가을 바람이 처음 우수수하니, 밤톨이 주렁주렁. 홀로 찾아감을 내 일찍 기억하니, 금탄환(밤알)이 땅에 떨어질 때로세.” 하였다. 주읍심매(注邑尋梅) “이것들을 읊은 것은 그대로 묘삼함이 적은데, 재배(栽培)함은 세속을 떠난 것이 많네. 가장 어여쁜 것은 황벽한 곳에, 적막하게 항아(姮娥)를 짝하네.” 하였다. 팔영 여강(驪江) 최숙정의 시에, “강 비 잠깐 개니 강물이 갑자기 가득하네. 바람이 돌매 물결 단무늬 길고, 해 나니 고기 비늘이 흩어지네. 누를 비록 씻지 못하나, 티끌 묻은 갓끈을 애오라지 씻을 만하네. 흰 갈매기는 본래 일이 없어 떼지어 날며, 맑고 따뜻함을 희롱하네. 어찌 구속을 벗어나 호탕(浩蕩)하게 너와 짝하리.”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인생 백년 동안에 백년도 또한 차지 못하네. 더욱 티끌 속에 얽혔으니, 어찌 청한(淸閑)하게 살 수 있으랴. 저 여강 물을 바라보니, 물이 맑아 갓끈을 씻을 만하네. 내 세속에 적합한 취미 없어, 시세의 차고 더움을 따르지 못하네. 늙었도다, 벼슬을 버리고 가서 적송자(赤松子)와 짝하리라.” 하였다.
도주(渡舟) 최숙정의 시에, “둥둥 떠 있는 작은 조각배, 여러 해를 나루터에 비껴 있구나. 남쪽으로 맞이하고 또 북으로 보내니, 사람을 건너 주느라고 조금도 쉼이 없네. 파도는 산악처럼 일어나는데, 가랑비 물가에 아득하네. 매지도 않고 닻도 내리지 않았는데, 한가히 봄 가을에 떠 있네. 부열(傅說)이 돛대를 잡으면 은하수의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겠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어리고 젊어서 여주에 놀았더니, 40여 년 만에 이제 머리 돌렸네. 누에 올라 긴 강을 굽어보니, 아, 한시라도 쉼이 없구나. 황학(黃鶴)은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무성하구나. 시를 쓸 제 최후(崔侯)를 생각하니, 걸구(傑句)가 천추에 전하누나. 그대 이제 가풍(家風)을 이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물과 같이 길이 흐르네.” 하였다.
팔대수(八大藪) 최숙정의 시에, “평림(平林)은 바라보아도 다함이 없어, 강가에 잇달았네. 울밀(鬱密)한 건 백 년된 등(藤)이요, 우거진 것은 천년 된 나무일레. 족제비와 다람쥐는 집을 짓고, 여우와 토끼는 성(城)을 쌓았네. 기색은 멀리 아득한데 천택(川澤)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이곳에 깊이 숨을 만하니, 혹시 옛날의 소부(巢父) 있을지.”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패다(貝多)는 예부터 이름난 숲이라, 강가에 울창하게 얽혔네. 옛날 돛을 날리며 지날 제, 닻줄을 묵은 회나무에 매었도다. 위에는 신선의 집이 있고, 아래에는 교룡(蛟龍)의 굴이 있네. 멀리 운몽수(雲夢藪)를 생각하니, 그와 백중(伯仲)하여 자랑할 만하이. 내 초(楚) 나라의 깬[醒] 사람 아니며 홀로 어부를 보지 못했네.” 하였다.
벽사(甓寺) 최숙정의 시에, “강 언덕 저 건너 절이 있는데, 단청이 숲 끝에 비치는구나. 제천(諸天)은 하계(下界)에 벌려 있는데, 세존(世尊)은 중간에 안치되었네. 속객의 내왕이 적으니, 고승(高僧)이 길이 스스로 한가하네. 아침저녁 향 피우고 비는 것은, 성수(聖壽) 남산과 같음일세. 문앞에 흙으로 구운 부도(浮屠 부처)는, 세월이 오래매 이끼 껴 얼룩졌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긴 강은 하얗게 바랜 비단을 쏟는데, 한 길은 강가를 연해서 있네. 내 옛날 벽절을 찾았는데, 지경이 깨끗하여 인간 같지 않더라. 보제(普濟)의 영정(影幀)에 향을 피우니, 오랜 세월에 구름은 항상 한가하네. 백련사(白蓮社)를 맺지도 않고, 먼저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렀네. 이목은(李牧隱) 생각함이여, 옛 비석에 이끼가 얼룩졌구나.” 하였다.
마암(馬巖) 최숙정의 시에, “마암석(馬巖石)이 서려 또한 기괴하구나. 강 흐름은 그 뿌리를 씹는 데도, 만고에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네. 노한 물결은 바야흐로 울렁거리다가, 여기서 나뉘어 수세(水勢) 점점 쇠하네. 외로운 성이 이 바위에 힘 입어서 완전하니, 공을 논할진대 빚을 갚기 어렵네. 남은 하나의 무지한 돌에, 나는 홀로 그 견고하여 굽히지 않음을 취하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바위를 말[馬]로 써 이름지었는데, 기기하고 괴괴하구나. 날뛰는 듯 스스로 힘차고, 견고하여 또 무너지지 아니하네. 바다 귀신은 이미 혼이 두근거리는데, 놀란 파도는 여기서 무너지누나. 내 채찍질하여 다리를 만들고자 하노니, 지주(砥柱)의 공을 잊으랴. 종당 다듬어 하늘을 기울이니, 높은 이름이 강 가를 독차지했네.
영릉(英陵)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능(陵)이 정히 서로 접했는데, 오색 구름은 빈 전각(殿閣) 둘렀네. 금어(禁籞)는 산을 싸서 긴데, 송백(松柏)은 강을 연하여 둘렀네. 일백 신령이 암곡(巖谷)을 옹호하고, 상서로운 바람이 일산과 부채에서 나오네. 사관(祠官)은 벼슬을 조심하여 청소하고, 고을원은 깨끗이 재계하고 제사드리네. 두 성인(세종 부부(世宗夫婦)) 가만히 도움을 내리시어, 풍년의 즐거움이 고을에 차게 하소서.”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교산(橋山 황제의 무덤이 있는 곳)에 상설(象設)이 엄한데, 의관(衣冠)은 침전(寢殿)에 간직하였고 높고 높은 금속(金粟)은 뫼에 자욱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두루 뻗쳤네. 팔준마는 울면서 앞으로 향하는 듯, 의장(儀仗)은 산선(傘扇)이 삼엄하네. 성주(聖主) 능을 중히 여기시는데, 사관은 엄숙하게 제사드리네. 정호(鼎湖)에 구름이 멀고 아득한데, 황려현(黃驪縣)에 머리 들어 바라보네.” 하였다.
청심루(淸心樓) 최숙정의 시에, “작은 누 또한 깨끗한데, 아래로 긴 강물을 당기었네. 강물은 넘실넘실 흘러가는데, 먼 산은 겹겹이 높았더라. 삼면이 모두 비고 넓어, 한 번 바라보매 아득하게 천리로세. 악양루(岳陽樓)도 부끄러워 할 만하고, 황학루(黃鶴樓)도 부끄러워 할 만하네. 좋은 문장들이 벽 사이에 찬란한데, 올라보니 이 세상 더러움이 깨끗해지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누각은 높고 내 마음은 맑은데, 그 아래엔 흐르는 물이 있네. 푸르고 맑아서 침도 뱉을 수 없으니, 마음의 누(累)를 씻을 만하네. 산천은 울창하게 서로 엉키어 천리 또 만리일세. 망치로 황학루를 두드려 부수었다는 말을, 내 일찍이 부끄러워하여 호기(豪氣) 있는 늙은 원룡(元龍)은 드높아서 티끌 세속을 벗어났네.” 하였다.
연촌(煙村) 최숙정의 시에, “인가(人家)가 어지러이 땅에 가득하니, 울타리가 서로 바짝 붙어있네. 뽕과 삼을 심는 것은 한 봄날이요, 웃어가며 말하는 동네의 저녁이네. 언덕을 격하여 나무꾼의 노래를 듣고, 물가에 임하니 고기잡이 피리 소리를 보내오누나. 풍년이 드니 굶주림이 없고, 시절이 태평하니 부역이 드무네. 희희(熙熙)하고 호호(皥皥)하여, 한가지로 태평한 즐거움을 누리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사군(使君 사또)이 아직 오지 않았을 적엔, 농민들이 토착(土着)하지 못했더니, 사군이 이미 수레에 내리매 풍년들어 밥짓는 연기 나오네. 왼쪽엔 밥이요, 오른편에는 죽, 시골 노래는 농악과 섞여서 들려오네. 지난 달에는 관의 세금을 감했는데, 이 달엔 병역(兵役)을 면했네.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구준(衢樽)을 마시니, 인자한 백성의 즐기는 바일세.”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정종조(正宗朝)에 광주진(廣州鎭)을 부(府)로 옮겼다. 여섯 읍을 관할하였다. 인조조(仁祖朝)에 후영(後營)을 두었다가 뒤에 죽산(竹山)으로 옮겼다. 숙종(肅宗) 7년에 광주전영(廣州前營)을 이곳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광주로 옮겼다.
【영아】 수어좌부(守禦左部) 별장(別將)은 본목사가 겸한다.
○ 군병(軍兵) 속읍(屬邑)은 여주(驪州)ㆍ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포천(抱川)ㆍ양지(陽智)ㆍ영평(永平)ㆍ양근(楊根)ㆍ이천(利川)이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즉어(鯽魚)ㆍ잉어[鯉魚]
【성지】 고성(古城) 서북쪽으로 7리 칭성산(稱城山)으로 들어가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있다. 파사성(婆娑城) 서북쪽 40리에 있는데 작은 산이 있고 강에 접해 있다. 선조(宣祖) 25년에 승장(僧將) 의엄(義嚴)이 고성(古城)을 수축(修築)했는데, 그 둘레가 1천 1백 보(步)이다.
【누정】 청심정(淸心亭) 읍내에 있는데 임장강(臨長江)을 굽어보며, 남쪽 건너편에는 치악(雉岳)의 광야(廣野)가 동룡문(東龍門)에 아득히 넓고, 북쪽으로는 석벽(石壁)이 높이 솟아 있으며, 벽사(甓寺)의 그림자가 거꾸로 강 가운데 비친다.
【방면】 주내(州內) 끝이 10리이다. 근동(近東) 동남쪽으로 처음 이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근남(近南)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점량(占梁) 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소개곡(召開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마지막이 40리이다. 가서곡(加西谷) 서쪽으로 끝이 30리이다. 개군산(介軍山) 북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수계(首界) 서쪽으로 끝이 25리이다. 대송(大松) 북쪽으로 끝이 40 리이다. 길천(吉川) 서북쪽으로 끝이 15리이다. 등신(登神) 북쪽으로 끝이 25리이다.
【진도】 주내진(州內津) 읍의 동쪽에 있다. 양화진(楊花津)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구미포진(龜尾浦津) 주(州)의 남쪽에 있다. 단암진(丹巖津)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앙암진(仰巖津) 동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사원】 기천서원(沂川書院) 선조(宣祖) 경진년에 건축하여 인조(仁祖)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 자세한 것은 모두 경도(京都) 묘정(廟庭) 편에 보라. 홍인우(洪仁祐)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恥齋)인데 당성인(唐城人)이다. 벼슬은 증 영의정 당양부원군(贈領議政唐陽府院君)이다. 정엽(鄭曄) 광주(廣州) 편에 보라. 이원익(李元翼) 경도(京都)의 묘정 편을 보라. 이식(李植) 자는 여원(汝園), 호는 택당(澤堂)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영의정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고산서원(孤山書院) 숙종 병인년에 세우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은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이었는데, 대사성(大司成)을 추증하였다. 조한영(曺漢英)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대로사(大老祠) 정자(正字) 을축년에 세우고 그 해에 사액하였다. 송시열(宋時烈) 경도(京都)의 묘정편을 보라.
○ 현암서원(玄巖書院) 순조(純祖) 갑오년에 세우고 사액하였다. 김조순(金祖純) 경도의 묘정편을 보라.
【능침】 영릉(寧陵)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홍제동주(弘濟洞州)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효종대왕(孝宗大王) 능으로 기신(忌辰)은 5월 4일이다. 능이 처음에는 건원릉(健元陵)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현종(顯宗) 14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신은 2월 24일이다.
○ 영(令)과 참봉이 각 1인.


 

[주D-001]목 움츠린 편[縮項鯿] : 축항편(縮項鯿)은 물고기의 이름인데 당 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시에 나오기 때문에 두보(杜甫)가 맹호연을 생각하는 시에도 인용하였다.
[주D-002]좌주(座主) : 자기를 과거에 뽑아준 시관(試官)이다.
[주D-003]수문(修文) : 송 나라에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라는 벼슬이 있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등속이다.
[주D-004]풍경으로……마소 : “이백(李白)이 죽고 나니 강남의 풍월이 오랫동안 한가하다.”는 송 나라 사람의 시가 있는데, 여기서는 시를 자꾸 지으라는 뜻이다.
[주D-005]나잔자(懶殘子) : 당 나라 이필(李泌)이 산중 절에서 글을 읽을 때에 나잔(懶殘)이란 이승(異僧)을 만난 일이 있다.
[주D-006]삼청(三淸) : 태청(太淸)ㆍ상청(上淸)ㆍ옥청(玉淸)을 삼청(三淸)이라 하는데, 도교(道敎)의 천상(天上) 이상경(理想境)을 말한 것이다.
[주D-007]임금이……주는 것 : 당 나라 하지장(賀知章)이 고향인 회계(會稽)로 은퇴하는데, 임금이 감호(鑑湖)한 구비를 주었다.
[주D-008]산을 사서 : 동진(東晉)의 명승(名僧) 지공(支公)이 중 심공(深公)에게 은거할 만한 산을 사겠다고 부탁한 일이 있다.
[주D-009]취옹(醉翁) : 취옹은 송 나라 구양수(歐陽修)의 호이며, 동선(洞仙)은 동부(洞府)에 사는 신선이다. 명산(名山)에는 신선이 거처하는 동부가 따로 있다고 한다.
[주D-010]창려(昌黎)의……시(詩) : 한유(韓愈)가 유사명(劉師命)에게 지어준 시에, “월 나라 계집이 한 번 웃으매 3년 동안 머물렀다.[越女一笑三年留]”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월(越)의 지방에서 여자에게 빠져서 3년간 지체하였던 때문이라 한다.
[주D-011]팽택(彭澤) :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으므로 그를 팽택이라 불렀는데, 그의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끝에, “천명을 즐기는데 다시 어찌 의심하랴.[樂夫天命復奚疑]”란 구절이 있다.
[주D-012]삼생(三生) : 전생(前生)ㆍ금생(今生)ㆍ후생(後生)이다.
[주D-013]동정(銅鉦)은……걸렸는데 :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나무 끝에 처음 해는 구리쇠 징이 걸렸다.[樹頭初日掛銅鉦]” 한 구절이 있다.
[주D-014]풍류는……오호(五湖) : 중국 남방에 오호(五湖)가 있는데 경치 좋은 곳으로 높은 선비들이 많이 놀았다.
[주D-015]원찰(願刹) : 불교 신자들이 죽은 조상을 위하여 그 무덤 옆에 절을 짓고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가기를 원하는 일이 있는데 그 절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주D-016]종과……도구(道具) : 불도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구.
[주D-017]보제(普濟) :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나옹(懶翁)의 시호가 보제존자(普濟尊者)이다.
[주D-018]중[僧]은……있네 : 고승(高僧) 달마(達摩)가 소림사(少林寺)에 9년 동안 벽을 향하여[面壁] 앉아 있었다.
[주D-019]돈교(頓敎) : 불교에 점교(漸敎)와 돈교(頓敎)가 있는데 점교는 점차로 도를 닦는 것이요, 돈교는 한꺼번에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주D-020]혜가(慧可) : 달마의 제자이다.
[주D-021]한산(寒山)만이……못했으리 : 당 나라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시를 잘하는 중이다.
[주D-022]화두(話頭) : 참선(參禪)하는 중들에게 화두(話頭)라는 것이 있는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 마삼근(麻三斤)이니 하는 문구(文句)들을 명상(冥想)으로 참구(參究)하여 깨달아 내는 것이다.
[주D-023]방거사(龐居士) : 당 나라 때 방거사(龐居士)의 이름은 온(薀)인데 마조대사(馬祖大師)에게 화두(話頭)를 듣고 깨달았다.
[주D-024]가의(賈誼) : 한(漢) 나라 가의(賈誼)는 소년재사(少年才士)로서 여러 대신들의 시기함을 받아서 장사(長沙)로 귀양갔다.
[주D-025]유정(劉楨) : 후한(後漢) 말기의 문인(文人) 유정(劉楨)이 장수(漳水)가에서 병들어 누워서 지은 시가 있다.
[주D-026]큰 복전[大福田] : 복전(福田)은 불교의 말인데 불교를 믿으면 그것이 복이 나오는 밭이라는 뜻이다.
[주D-027]묘련(妙蓮) :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說)하였다.
[주D-028]순은 중화(重華) : 요(堯)의 덕을 순(舜)이 거듭 빛내었다는 말이다.
[주D-029]참결(參決) : 직접 임금이 된 것이 아니라 임금의 결재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주D-030]구장면복(九章冕服) : 천자 옷의 아홉 가지 무늬.
[주D-031]수강궁(壽康宮) : 아버지 상왕(上王)이 계신 궁이다.
[주D-032]종사(螽斯) : 메뚜기가 한 번에 새끼 구십 마리를 낳으므로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함. 《시경》의 편 이름.
[주D-033]인지(麟趾) : 기린은 산들을 밟지 않음으로 덕 있는 짐승이라 함. 《시경》에서 문왕의 여러 아들이 덕 있음을 여기에 비유함.
[주D-034]공(貢) : 하(夏) 나라의 전제(田制)ㆍ50묘(畝) 중에서 5묘의 생산을 세(稅)로 한다.
[주D-035]철(徹) : 9백 묘 중 백 묘를 공전(公田)으로 하여 세로 바친다.
[주D-036]오례의(五禮儀) : 길례(吉禮 祭祀)ㆍ흉례(凶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가례(嘉禮 冠昏) 등 다섯 가지 의식을 정한 책이다.
[주D-037]상림원관(上林園官) : 비원(祕園)을 관리하는 관직이다.
[주D-038]애영(哀榮) : 덕이 있고 복이 있는 이는 살아서는 영광스럽고 죽으면 애통하다는 것이다.
[주D-039]인륜의 지극함[人倫之至] : 《맹자》에, “성인(聖人)은 인륜(人倫)의 지극한 이이다.” 하였다.
[주D-040]곤후(坤厚)의……성인 : 《주역》에 “건괘(乾卦)는 강(剛)하고 곤괘(坤卦)는 후(厚)하고 유(柔)하다.” 하였는데, 건강(乾剛)은 임금의 덕을 말한 것이요, 곤괘(坤卦)는 왕비의 덕을 말한 것이다.
[주D-041]어관(魚貫) : 임금이 처첩(妻妾)을 많이 거느리는데, 서로 질투 없이 물고기가 꿰미에 차례로 꿰여져 있듯, 순서대로 임금의 잠자리를 모신다는 것이다.
[주D-042]주행(周行)……보이셨도다 : 《시경(詩經)》에, 제후가 천자의 연회를 받고 읊은 시에, “나에게 큰 길을 보여 주셨다.[示我周行]” 한 귀절이 있다.
[주D-043]용루(龍樓) : 세자(世子)의 거처하는 곳이다.
[주D-044]화악(華萼)이……빛났고 : 꽃받침[花萼]이 서로 다닥다닥 붙은 것을 형제에게 비유하므로, 당 명황(唐明皇)이 형제에 우애하여 화악루(花萼樓)를 지었다.
[주D-045]중을……하니 : 《중용(中庸)》에, “중화(中和)를 극도로 하면 만물이 발육(發育)된다.” 하였다.
[주D-046]걸(桀)도……맥(貊) : 《맹자》에 나온 말인데, “나라에서 농민에게 10분의 1 이상을 받으면 걸(桀 暴君)이요, 이하로 받으면 맥(貊 문화(文化) 없는 미개인)이다.” 하였다.
[주D-047]거울……탄식하시더니 :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이 죽은 뒤에 구리쇠 거울로 의관을 바로하고 위징을 대하면 잘하고 잘못함을 아는데 위징이 죽고 나니, “나는 사람의 거울 하나를 잃었다.” 하였다.
[주D-048]능을 만들어 : 한 문제(漢文帝)가 유언(遺言)하기를, “나의 장사는 검소하여 산(山) 그대로 능을 만들어 따로 인력을 낭비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산(因山)이라 한다.
[주D-049]일각(日角) : 상법(相法)에, “얼굴에 일각(日角)이 있으면 임금 될 상이다.” 하였다.
[주D-050]지족(止足) : 《노자(老子)》에, “그칠 줄 알고 족한 줄 알라.[知止知足]” 한 말이 있다.
[주D-051]오랠수록 공경함은 : 공자는, “안자(晏子)는 사람 사귀기를 잘하여 오랠수록 존경한다.” 하였다.
[주D-052]상제(上帝)를……있고 : 《맹자》에, “비록 추악하게 생긴 사람이라도 목욕재계하면 상제를 섬길 수 있다.” 하였다.
[주D-053]남의 집에……구함 : 남의 집에 물이나 불을 빌려 달라 하여 거절하지 않음은 그것이 흔하기 때문이란 뜻이다.
[주D-054]앵무주(鸚鵡洲) : 지금 호북성 무한시(武漢市) 무창(武昌) 서남쪽 가운데 있는 섬. 최호(崔灝)의 〈황학루〉시에 나온다.
[주D-055]초(楚)나라의 깬[醒] 사람 :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취하였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京畿)
죽산현(竹山縣)


동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3리이고, 북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서울까지 1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고쳐 개산(介山)으로 일컬었다. 고려 초년에 죽주(竹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이 폐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으로 만들었다. 무릇 군(郡)과 현(縣)의 이름이 주(州) 자(字)를 가진 것은, 도호부 이하는 모두 산(山)과 천(川)의 글자로 대신하여 부(府)ㆍ목(牧)과 구별하였다. 뒤의 것은 이것과 같다. 세종 16년에 충청도로부터 옮겨 경기(京畿)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차산(皆次山)ㆍ개산(介山)ㆍ음평(陰平)ㆍ연창(延昌)ㆍ죽주(竹州).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안(安)ㆍ양(梁)ㆍ이(李)ㆍ유(庾)ㆍ민(閔)ㆍ김(金)ㆍ박(朴)ㆍ음(陰).
【산천】 건지산(巾之山)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배산(鼎陪山)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돌 구멍에 흰 뱀이 있어 매년 큰 물이 질 때를 타서, 천민천(天民川)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우환이 되었다. 칠현산(七賢山)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현 서쪽 22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북쪽 4리 되는 곳에 있다. 생현(栍峴) 현 동쪽 15리 지점이며,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있다. 천민천(天民川)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근원이 건지(巾之)ㆍ정배(鼎培) 두 산에서 나와, 여주(驪州) 여강(驪江)으로 들어간다. 대사천(大寺川)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칠현(七賢)ㆍ구봉(九峯) 두 산에서 나와 천민천(天民川)과 합한다. 월라정지(月羅井池)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자기(磁器)ㆍ도기(陶器).
【봉수】 건지산(巾之山) 봉수(烽燧) 동쪽으로 충청도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응하고, 서쪽은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한다.
【누정】 봉서루(鳳棲樓) 각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역원】 분행역(分行驛)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 고려 김황원(金黃元)이 대간(大諫)이 되어서 여러 번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성산(星山) 원으로 나가는데, 길이 이 역말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이재(李載)가 남방으로부터 돌아오자, 이에 시를 지어 주기를, “나뉘어 가는 길 위에서인들 어찌 시가 없을쏜가. 머물러 사신에게 주어서 생각하는 것을 부치노라. 갈대 잎은 쓸쓸하니 가을 물 나라요, 강산(江山)은 아득하고 머니 석양 때로다. 옛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이제 부질없이 탄식하네. 지난 일을 좇기가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슬퍼하노라. 참으로 그렇구나. 죄를 당하여 장사(長沙)로 귀양가는 손이, 관직은 낮고 나이는 늙어 귀밑털이 세었도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누른 진흙 벽(壁) 뒤에 옛날의 시(詩)를 남겼더니, 뭉개어서 자취가 없어서 기억할 수 없네. 수양버들은 아직도 일찍이 가던 길에 늘어져 있고, 강산은 오히려 옛날 놀던 때와 같구나. 젊은 미인은 어디 있는가. 부질없이 추억하네. 흰 머리로 두 번 오니 못내 슬프기만 하구나. 부절(符節)을 가지고 다른 해에 비록 이른다 하더라도, 누(樓)에 오를 만한 근력이 먼저 쇠할까 두렵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청사로 가려 놓은 한 수(首) 시를 읽어 파하고, 인간만사를 시험삼아 곰곰이 생각하네. 만일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을 따르는 것을 잊는다면, 모름지기 지금 때를 가지고 옛 때를 배우라. 관직이 승진되지 못하는 것을 어찌 족히 탄식하랴. 귀밑털이 쓸쓸한 것도 슬퍼할 것이 없네. 평생에 다만 하늘이 장차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초(楚) 나라 손이 미친 듯이 봉(鳳)의 덕이 쇠한 것을 노래하였네.” 하였다.
○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저물녘에 영곡봉(靈鵠峯) 앞 길을 지나서, 아침에는 분행루(分行樓) 위에 이르러 읊조리네. 꽃은 벌의 수염을 접하여 붉은 것을 반쯤 토하고, 버들은 꾀꼬리 나래를 감추어 푸른 것이 처음으로 깊도다. 한 툇마루의 봄빛은 무궁한 흥이요, 천리의 사신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머리를 중원(中原)으로 돌이키매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흰 구름은 땅에 나직하고 나무는 찝찝하도다.” 하였다.
좌찬역(佐贊驛) 현 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성을 나온 것을 알괘라 몇 날인고, 길에 오르니 서늘한 하늘이 기쁘도다. 곤곤(袞袞)하게 세월이 빠르고 쓸쓸하게 풍우가 연하였도다. 공명(功名)은 말 등 위에서 수고로웠고, 돌아갈 뜻은 갈매기 옆에 떨어지네. 이미 부귀도 구할 수 없으니, 억지로 채찍을 잡는 것 말하지 말라.” 하였다.
태평원(太平院) 현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통리원(通梨院)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장항원(獐項院)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원(梨院) 현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칠장사(七長寺) 칠현산(七賢山)에 있다.
○ 신우(辛禑) 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內地)로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감추어 둔 사적(史籍)을 여기에다 옮기었다.
○ 권근(權近)이 수찬(修撰) 배중원(裵仲員)을 보내어 사적을 포쇄(曝晒)하는 서(序)에, “본조가 바다 동쪽을 차지한 지 수백 년에, 처음에는 국사(國史)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감추었는데, 대개 후세에 난리를 만나서 잃어버릴까 염려함이다. 가야산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멀고 험하며,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어서는 가장 궁벽하고 깊이 막혔기 때문에, 국가에 비록 변이 있어도 난이 일찍이 미치지 않았으니, 조종(祖宗)의 염려가 심원(深遠)하였다. 근래에는 왜적을 제어함에 기율(紀律)을 잃어서, 깊이 들어와 주와 현을 도둑질하므로 가야가 거의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그 사적을 선산(善山)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고, 신유년 가을에 조령(鳥嶺)을 넘어 북쪽으로 와서, 충주(忠州)의 개천사(開天寺)에 수운하였으며, 이번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의 옆 고을에 침입하자, 7월에 또 개천사로부터 죽주(竹州)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기었으니, 땅의 험하고 먼 것도 믿을 수 없다. 적이 감히 깊이 들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아, 이것으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비족사(飛足寺)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장광사(長光寺)ㆍ지통사(智通寺) 모두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응석사(凝石寺) 생현(栍峴) 서쪽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소향사(燒香使)로 이 절에 이르렀다. 절 중의 꿈에 태조(太祖)가 명종(明宗)에게 아홀(芽笏) 하나를 주고, 아울러 시를 주기를, “네게 한 아흘을 주노니, 법사(法師)가 모시어 떠나지 않으리라. 거년(居年)은 구구구(九九九)요, 향위(享位)는 칠칠이(七七二)이다.” 하였는데, 명종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왕위에 올라 재위(在位)한 지 28년에 최충헌(崔忠獻)이 폐하게 되었으니, 그 응험(應驗)이 틀리지 않았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총묘】 박원형(朴元亨)의 묘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안규(安珪)의 묘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죽주고성(竹州古城) 현 동쪽 5리 되는 태평원(太平院) 북쪽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3천 8백 74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고종(高宗) 13년에 송문주(宋文冑)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몽고가 다시 포(砲)로 성의 사변을 공격하자 성문이 곧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또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죽은 몽고군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문주(文冑)가 구주(龜州)에 있을 때에는, 몽고의 성에 공격하는 술책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그 계획을 먼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문득 군사들에게 고하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기계를 준비하여 응해야 한다.” 하였다. 적이 이르러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성중에서 모두 귀신이라고 일렀다.
만선사(萬善寺)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절은 푸른 풀에 싸이어 침침하고, 길은 푸른 덩굴 속에 들어가 깊숙하다. 골이 좁으니 한가한 구름이 모이고, 정원이 거칠으니 모진 불길이 침노한다. 새벽 바람에 목탁 소리 잦고, 저녁 달은 못 가운데 잠겼도다. 푸른 산아 잘 있거라, 벼슬을 그만두면 다시 찾아오련다.” 하였다. 연창관(延昌館)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내가 편평하니 들이 넓은 것을 알겠고, 꽃이 떨어지니 봄이 깊은 것을 깨닫도다. 손의 길 연창관 소나무 바람이 내 꿈을 맑혀 준다.” 하였다. 봉업사(奉業寺)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있다. 고려 때에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12년 2월에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를 떠나서, 이 절에 들러 진전(眞殿)에 참알(參謁)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
【명환】 고려 서원(徐遠) 정치한 공적이 있어 지금까지 칭송하고 사모한다. 송문주(宋文冑) 고성(古城)의 주(註)에 보라.
【인물】 고려 박인량(朴寅亮) 문종(文宗) 때에 과거에 올랐다. 요(遼) 나라가 일찍이 압록강(鴨綠江)을 지나 경계를 범하려 하자, 문종이 사신을 보내어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짓기를, “넓은 하늘 밑이 임금의 땅 임금의 신하 아님이 없는데, 한 자 남짓한 땅을 무얼 반드시 내 영토니 내 다스림이니 하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양(汶陽)의 옛 밭을 돌려주었으니, 피폐(疲弊)한 고을을 어루만져 편안히 한 것이요,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리어서 융성한 때에 뛰고 춤추었다.” 하였는데, 요 나라 임금이 이 글을 보고 그 일을 중지하였다. 숙종(肅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박경인(朴景仁) 인량(寅亮)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힘써 배워서 과거에 올랐고, 여러 번 옮겨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는데, 언론이 강하고 곧아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일이 없으니, 당시의 의논이 중하게 여기었다.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박경백(朴景伯) 경인(景仁)의 아우이다. 선종(宣宗)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히어,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박경산(朴景山) 경백(景伯)의 아우이다. 예종(睿宗) 때에 과거 제이명(第二名)으로 뽑히어 벼슬이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박서(朴犀) 고종(高宗) 때 사람인데 구주성(龜州城)을 지켜 공이 있었다.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구성(龜城) 편에 자세하다. 박효수(朴孝修) 본래 맑은 절조(節操)가 있었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윤신걸(尹莘傑)을 대신하여 선비를 뽑았는데, 임금이 그 청백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쌀 백 석을 하사하고, 학사연(學士宴)을 베풀게 하니, 효수(孝修)의 맑은 절조가 더욱 나타났다. 뒤에 연창군(延昌君)을 봉하였다. 박전지(朴全之) 나이 20살이 못 되어 과거에 올랐다.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명사들과 교유하여, 고금ㆍ산천ㆍ풍토를 상론(商論)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같이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를 제수하였는데, 돌아온 뒤에 충선왕(忠宣王)이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전지와 더불어 정사를 꾀하고 의논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치어 정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박원(朴遠) 전지(全之)의 아들이다. 숙종(肅宗)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박정유(朴挺蕤) 성품이 너그럽고 넓었다. 숙종(肅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고 시호는 충질(忠質)이다. 안전(安戩) 젊어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경상(慶尙)ㆍ충청(忠淸)ㆍ서북(西北) 삼도(三道)의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냈다. 안한평(安漢平) 벼슬이 문하찬성사 연흥부원군(門下贊成事延興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양량(襄良)이다. 안극인(安克仁) 한평(漢平)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 우문관 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공민왕(恭愍王) 정비(定妃)의 아버지이다. 본조 안숙로(安淑老) 극인(克仁)의 아들이다. 벼슬이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에 이르렀다. 안등(安騰) 극인(克仁)의 손자이다. 벼슬이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안망지(安望之) 숙로(淑老)의 아들이다. 벼슬이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안맹담(安孟聃) 망지(望之)의 아들인데,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어 연창위(延昌尉)로 봉하였으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박원형(朴元亨) 과거에 오르고 좌익익대(左翼翊戴) 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 연성부원군(議政府領議政延城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예종(睿宗)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안초(安超)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叅判)에 이르렀다.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었으므로 마음껏 진휼하고 공급하여, 한 지방이 그 덕으로 온전히 살아났다. 『신증』 박안성(朴安性) 원형(元亨)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제영】 상마세월심(桑麻歲月深)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산과 물은 구름과 연기가 늙었고, 뽕나무와 삼은 세월이 깊도다. 봄 노래와 나무하는 피리 모두가 태평한 마음이네.” 하였다. 계류안안심(溪流岸岸深) 최사로(崔士老)의 시에, “단비는 촌마다 족하고, 시내 흐름은 언덕마다 깊도다. 나는 것, 잠겨 있는 것, 움직이는 것, 심어져 있는 것 모두가 한결같이 봄 마음이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중종(中宗) 3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고, 선조(宣祖) 17년에 현(縣)으로 내렸다가 29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읍호 음평(陰平) 고려 성종(成宗)때에 정했다. 연창(延昌).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여주진 관병마 동첨절제사(驪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ㆍ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ㆍ토포사(討捕使)를 겸한다.
【영아】 수어후영(守禦後營) 인조(仁祖) 조에 후영(後營)을 여주에 세웠다가 후에 이 곳으로 옮겼다. 후에는 영장(營將)이 본부사(本府使)를 겸하였다. 군병(軍兵) 속읍(屬邑)은 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음죽(陰竹)ㆍ안성(安城)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이다.
【방면】 부내일(府內一) 끝이 5리이다. 부내이(府內二) 끝이 1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서이도(西二道)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서삼도(西三道)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원일도(遠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원삼도(遠三道)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근일도(近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삼도(近三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천남일도(川南一道)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남이도(川南二道)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천북일도(川北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북이도(川北二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산동(山東) 동쪽으로 22리이다. 산서 서쪽으로 25리이다. 산내(山內) 남쪽으로 20리이다. 산외 서쪽으로 20리이다.


[주D-001]장사(長沙)로……손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라는 사람은 나이 젊어서 장사로 귀양갔었다.
[주D-002]하늘이……무너뜨릴까 : 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망치려면 뒤에 죽는 사람이 사문에 참여할 수 없지만, 하늘이 사문을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광인(匡人)이 내게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주D-003]봉(鳳)의……노래하였네 : 초 나라 광객(狂客) 접여(接輿)가 공자 앞을 지나가며 노래하기를, “봉(鳳)이여, 봉이여, 덕이 어찌 그리 쇠하였는가.” 하였다.
[주D-004]부귀도……말라 : 공자가 말하기를, “부귀를 구할 수 있다면 말구종꾼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구할 수 없다면 나 좋은 대로 하겠다.” 하였다.
[주D-005]문양(汶陽)의……돌려주었으니 : 춘추 시대에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가 문(汶)이라는 내[川]를 격하여 국경을 이루었는데, 제 나라에서 항상 침략하여 문천(汶川)의 북쪽 토지를 많이 빼앗아 갔다. 그것을 제 환공(齊桓公)이 노 나라로 돌려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京畿)
죽산현(竹山縣)


동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3리이고, 북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서울까지 1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고쳐 개산(介山)으로 일컬었다. 고려 초년에 죽주(竹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이 폐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으로 만들었다. 무릇 군(郡)과 현(縣)의 이름이 주(州) 자(字)를 가진 것은, 도호부 이하는 모두 산(山)과 천(川)의 글자로 대신하여 부(府)ㆍ목(牧)과 구별하였다. 뒤의 것은 이것과 같다. 세종 16년에 충청도로부터 옮겨 경기(京畿)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차산(皆次山)ㆍ개산(介山)ㆍ음평(陰平)ㆍ연창(延昌)ㆍ죽주(竹州).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안(安)ㆍ양(梁)ㆍ이(李)ㆍ유(庾)ㆍ민(閔)ㆍ김(金)ㆍ박(朴)ㆍ음(陰).
【산천】 건지산(巾之山)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배산(鼎陪山)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돌 구멍에 흰 뱀이 있어 매년 큰 물이 질 때를 타서, 천민천(天民川)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우환이 되었다. 칠현산(七賢山)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현 서쪽 22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북쪽 4리 되는 곳에 있다. 생현(栍峴) 현 동쪽 15리 지점이며,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있다. 천민천(天民川)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근원이 건지(巾之)ㆍ정배(鼎培) 두 산에서 나와, 여주(驪州) 여강(驪江)으로 들어간다. 대사천(大寺川)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칠현(七賢)ㆍ구봉(九峯) 두 산에서 나와 천민천(天民川)과 합한다. 월라정지(月羅井池)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자기(磁器)ㆍ도기(陶器).
【봉수】 건지산(巾之山) 봉수(烽燧) 동쪽으로 충청도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응하고, 서쪽은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한다.
【누정】 봉서루(鳳棲樓) 각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역원】 분행역(分行驛)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 고려 김황원(金黃元)이 대간(大諫)이 되어서 여러 번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성산(星山) 원으로 나가는데, 길이 이 역말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이재(李載)가 남방으로부터 돌아오자, 이에 시를 지어 주기를, “나뉘어 가는 길 위에서인들 어찌 시가 없을쏜가. 머물러 사신에게 주어서 생각하는 것을 부치노라. 갈대 잎은 쓸쓸하니 가을 물 나라요, 강산(江山)은 아득하고 머니 석양 때로다. 옛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이제 부질없이 탄식하네. 지난 일을 좇기가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슬퍼하노라. 참으로 그렇구나. 죄를 당하여 장사(長沙)로 귀양가는 손이, 관직은 낮고 나이는 늙어 귀밑털이 세었도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누른 진흙 벽(壁) 뒤에 옛날의 시(詩)를 남겼더니, 뭉개어서 자취가 없어서 기억할 수 없네. 수양버들은 아직도 일찍이 가던 길에 늘어져 있고, 강산은 오히려 옛날 놀던 때와 같구나. 젊은 미인은 어디 있는가. 부질없이 추억하네. 흰 머리로 두 번 오니 못내 슬프기만 하구나. 부절(符節)을 가지고 다른 해에 비록 이른다 하더라도, 누(樓)에 오를 만한 근력이 먼저 쇠할까 두렵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청사로 가려 놓은 한 수(首) 시를 읽어 파하고, 인간만사를 시험삼아 곰곰이 생각하네. 만일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을 따르는 것을 잊는다면, 모름지기 지금 때를 가지고 옛 때를 배우라. 관직이 승진되지 못하는 것을 어찌 족히 탄식하랴. 귀밑털이 쓸쓸한 것도 슬퍼할 것이 없네. 평생에 다만 하늘이 장차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초(楚) 나라 손이 미친 듯이 봉(鳳)의 덕이 쇠한 것을 노래하였네.” 하였다.
○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저물녘에 영곡봉(靈鵠峯) 앞 길을 지나서, 아침에는 분행루(分行樓) 위에 이르러 읊조리네. 꽃은 벌의 수염을 접하여 붉은 것을 반쯤 토하고, 버들은 꾀꼬리 나래를 감추어 푸른 것이 처음으로 깊도다. 한 툇마루의 봄빛은 무궁한 흥이요, 천리의 사신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머리를 중원(中原)으로 돌이키매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흰 구름은 땅에 나직하고 나무는 찝찝하도다.” 하였다.
좌찬역(佐贊驛) 현 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성을 나온 것을 알괘라 몇 날인고, 길에 오르니 서늘한 하늘이 기쁘도다. 곤곤(袞袞)하게 세월이 빠르고 쓸쓸하게 풍우가 연하였도다. 공명(功名)은 말 등 위에서 수고로웠고, 돌아갈 뜻은 갈매기 옆에 떨어지네. 이미 부귀도 구할 수 없으니, 억지로 채찍을 잡는 것 말하지 말라.” 하였다.
태평원(太平院) 현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통리원(通梨院)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장항원(獐項院)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원(梨院) 현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칠장사(七長寺) 칠현산(七賢山)에 있다.
○ 신우(辛禑) 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內地)로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감추어 둔 사적(史籍)을 여기에다 옮기었다.
○ 권근(權近)이 수찬(修撰) 배중원(裵仲員)을 보내어 사적을 포쇄(曝晒)하는 서(序)에, “본조가 바다 동쪽을 차지한 지 수백 년에, 처음에는 국사(國史)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감추었는데, 대개 후세에 난리를 만나서 잃어버릴까 염려함이다. 가야산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멀고 험하며,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어서는 가장 궁벽하고 깊이 막혔기 때문에, 국가에 비록 변이 있어도 난이 일찍이 미치지 않았으니, 조종(祖宗)의 염려가 심원(深遠)하였다. 근래에는 왜적을 제어함에 기율(紀律)을 잃어서, 깊이 들어와 주와 현을 도둑질하므로 가야가 거의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그 사적을 선산(善山)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고, 신유년 가을에 조령(鳥嶺)을 넘어 북쪽으로 와서, 충주(忠州)의 개천사(開天寺)에 수운하였으며, 이번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의 옆 고을에 침입하자, 7월에 또 개천사로부터 죽주(竹州)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기었으니, 땅의 험하고 먼 것도 믿을 수 없다. 적이 감히 깊이 들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아, 이것으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비족사(飛足寺)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장광사(長光寺)ㆍ지통사(智通寺) 모두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응석사(凝石寺) 생현(栍峴) 서쪽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소향사(燒香使)로 이 절에 이르렀다. 절 중의 꿈에 태조(太祖)가 명종(明宗)에게 아홀(芽笏) 하나를 주고, 아울러 시를 주기를, “네게 한 아흘을 주노니, 법사(法師)가 모시어 떠나지 않으리라. 거년(居年)은 구구구(九九九)요, 향위(享位)는 칠칠이(七七二)이다.” 하였는데, 명종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왕위에 올라 재위(在位)한 지 28년에 최충헌(崔忠獻)이 폐하게 되었으니, 그 응험(應驗)이 틀리지 않았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총묘】 박원형(朴元亨)의 묘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안규(安珪)의 묘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죽주고성(竹州古城) 현 동쪽 5리 되는 태평원(太平院) 북쪽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3천 8백 74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고종(高宗) 13년에 송문주(宋文冑)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몽고가 다시 포(砲)로 성의 사변을 공격하자 성문이 곧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또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죽은 몽고군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문주(文冑)가 구주(龜州)에 있을 때에는, 몽고의 성에 공격하는 술책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그 계획을 먼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문득 군사들에게 고하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기계를 준비하여 응해야 한다.” 하였다. 적이 이르러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성중에서 모두 귀신이라고 일렀다.
만선사(萬善寺)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절은 푸른 풀에 싸이어 침침하고, 길은 푸른 덩굴 속에 들어가 깊숙하다. 골이 좁으니 한가한 구름이 모이고, 정원이 거칠으니 모진 불길이 침노한다. 새벽 바람에 목탁 소리 잦고, 저녁 달은 못 가운데 잠겼도다. 푸른 산아 잘 있거라, 벼슬을 그만두면 다시 찾아오련다.” 하였다. 연창관(延昌館)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내가 편평하니 들이 넓은 것을 알겠고, 꽃이 떨어지니 봄이 깊은 것을 깨닫도다. 손의 길 연창관 소나무 바람이 내 꿈을 맑혀 준다.” 하였다. 봉업사(奉業寺)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있다. 고려 때에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12년 2월에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를 떠나서, 이 절에 들러 진전(眞殿)에 참알(參謁)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
【명환】 고려 서원(徐遠) 정치한 공적이 있어 지금까지 칭송하고 사모한다. 송문주(宋文冑) 고성(古城)의 주(註)에 보라.
【인물】 고려 박인량(朴寅亮) 문종(文宗) 때에 과거에 올랐다. 요(遼) 나라가 일찍이 압록강(鴨綠江)을 지나 경계를 범하려 하자, 문종이 사신을 보내어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짓기를, “넓은 하늘 밑이 임금의 땅 임금의 신하 아님이 없는데, 한 자 남짓한 땅을 무얼 반드시 내 영토니 내 다스림이니 하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양(汶陽)의 옛 밭을 돌려주었으니, 피폐(疲弊)한 고을을 어루만져 편안히 한 것이요,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리어서 융성한 때에 뛰고 춤추었다.” 하였는데, 요 나라 임금이 이 글을 보고 그 일을 중지하였다. 숙종(肅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박경인(朴景仁) 인량(寅亮)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힘써 배워서 과거에 올랐고, 여러 번 옮겨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는데, 언론이 강하고 곧아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일이 없으니, 당시의 의논이 중하게 여기었다.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박경백(朴景伯) 경인(景仁)의 아우이다. 선종(宣宗)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히어,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박경산(朴景山) 경백(景伯)의 아우이다. 예종(睿宗) 때에 과거 제이명(第二名)으로 뽑히어 벼슬이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박서(朴犀) 고종(高宗) 때 사람인데 구주성(龜州城)을 지켜 공이 있었다.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구성(龜城) 편에 자세하다. 박효수(朴孝修) 본래 맑은 절조(節操)가 있었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윤신걸(尹莘傑)을 대신하여 선비를 뽑았는데, 임금이 그 청백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쌀 백 석을 하사하고, 학사연(學士宴)을 베풀게 하니, 효수(孝修)의 맑은 절조가 더욱 나타났다. 뒤에 연창군(延昌君)을 봉하였다. 박전지(朴全之) 나이 20살이 못 되어 과거에 올랐다.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명사들과 교유하여, 고금ㆍ산천ㆍ풍토를 상론(商論)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같이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를 제수하였는데, 돌아온 뒤에 충선왕(忠宣王)이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전지와 더불어 정사를 꾀하고 의논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치어 정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박원(朴遠) 전지(全之)의 아들이다. 숙종(肅宗)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박정유(朴挺蕤) 성품이 너그럽고 넓었다. 숙종(肅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고 시호는 충질(忠質)이다. 안전(安戩) 젊어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경상(慶尙)ㆍ충청(忠淸)ㆍ서북(西北) 삼도(三道)의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냈다. 안한평(安漢平) 벼슬이 문하찬성사 연흥부원군(門下贊成事延興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양량(襄良)이다. 안극인(安克仁) 한평(漢平)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 우문관 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공민왕(恭愍王) 정비(定妃)의 아버지이다. 본조 안숙로(安淑老) 극인(克仁)의 아들이다. 벼슬이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에 이르렀다. 안등(安騰) 극인(克仁)의 손자이다. 벼슬이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안망지(安望之) 숙로(淑老)의 아들이다. 벼슬이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안맹담(安孟聃) 망지(望之)의 아들인데,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어 연창위(延昌尉)로 봉하였으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박원형(朴元亨) 과거에 오르고 좌익익대(左翼翊戴) 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 연성부원군(議政府領議政延城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예종(睿宗)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안초(安超)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叅判)에 이르렀다.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었으므로 마음껏 진휼하고 공급하여, 한 지방이 그 덕으로 온전히 살아났다. 『신증』 박안성(朴安性) 원형(元亨)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제영】 상마세월심(桑麻歲月深)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산과 물은 구름과 연기가 늙었고, 뽕나무와 삼은 세월이 깊도다. 봄 노래와 나무하는 피리 모두가 태평한 마음이네.” 하였다. 계류안안심(溪流岸岸深) 최사로(崔士老)의 시에, “단비는 촌마다 족하고, 시내 흐름은 언덕마다 깊도다. 나는 것, 잠겨 있는 것, 움직이는 것, 심어져 있는 것 모두가 한결같이 봄 마음이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중종(中宗) 3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고, 선조(宣祖) 17년에 현(縣)으로 내렸다가 29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읍호 음평(陰平) 고려 성종(成宗)때에 정했다. 연창(延昌).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여주진 관병마 동첨절제사(驪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ㆍ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ㆍ토포사(討捕使)를 겸한다.
【영아】 수어후영(守禦後營) 인조(仁祖) 조에 후영(後營)을 여주에 세웠다가 후에 이 곳으로 옮겼다. 후에는 영장(營將)이 본부사(本府使)를 겸하였다. 군병(軍兵) 속읍(屬邑)은 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음죽(陰竹)ㆍ안성(安城)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이다.
【방면】 부내일(府內一) 끝이 5리이다. 부내이(府內二) 끝이 1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서이도(西二道)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서삼도(西三道)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원일도(遠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원삼도(遠三道)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근일도(近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삼도(近三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천남일도(川南一道)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남이도(川南二道)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천북일도(川北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북이도(川北二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산동(山東) 동쪽으로 22리이다. 산서 서쪽으로 25리이다. 산내(山內) 남쪽으로 20리이다. 산외 서쪽으로 20리이다.


[주D-001]장사(長沙)로……손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라는 사람은 나이 젊어서 장사로 귀양갔었다.
[주D-002]하늘이……무너뜨릴까 : 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망치려면 뒤에 죽는 사람이 사문에 참여할 수 없지만, 하늘이 사문을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광인(匡人)이 내게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주D-003]봉(鳳)의……노래하였네 : 초 나라 광객(狂客) 접여(接輿)가 공자 앞을 지나가며 노래하기를, “봉(鳳)이여, 봉이여, 덕이 어찌 그리 쇠하였는가.” 하였다.
[주D-004]부귀도……말라 : 공자가 말하기를, “부귀를 구할 수 있다면 말구종꾼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구할 수 없다면 나 좋은 대로 하겠다.” 하였다.
[주D-005]문양(汶陽)의……돌려주었으니 : 춘추 시대에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가 문(汶)이라는 내[川]를 격하여 국경을 이루었는데, 제 나라에서 항상 침략하여 문천(汶川)의 북쪽 토지를 많이 빼앗아 갔다. 그것을 제 환공(齊桓公)이 노 나라로 돌려주었다.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13일 (을축)
정의 공주를 죽성군 안맹담에게 시집보내다

정의 공주(貞懿公主)를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에게 시집보내었다. 맹담은 관찰사(觀察使)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원전】 3 집 115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拭疣集卷之二
 記類
見性菴靈應記 a_009_101a


廣平大君。迺世宗第五子。而我主上殿下同母弟也。年旣冠。不幸早世。夫人永嘉申氏。哀悼罔極。及旣葬則益無所依歸。就塋域之側。大建伽藍。歲寓僧三四百指。晨夕薦廣平君之靈。以願生於淨土。此見性菴之所由作也。天順八年甲申夏四月十四日乙卯。夫人爲世宗大王,昭憲王后。超昇極樂。先母夫人王氏,廣平大君。皆得涅槃之願。邀苾蒭五十員爲上堂。請圓通智大師爲講主。設009_101b法華道場於是寺。于時大檀越。則有若貞懿公主。有若臨瀛大君及夫人。有若永膺大君及夫人。各以輿衛僕從而來詣。其信善四衆。又無慮千有餘人。先是天旱。及開筵作法之夕。雷雨大至。四郊澤洽。祥飆襲人。和氣普暢。至于修會之日。或晴或雨。氣象變遷。皆以爲夫人誠意之感。佛天歆格之應也。是日午。供養。梵唄旣作。四衆翹誠頭而敬禮。忽於佛前卓上輝光。燦爛四射於外。大衆輟行道。就視之。則舍利已分身五十八粒。香水灌洒。拾而盛之于盤上。玲瓏透徹。光明皎潔。照燭於人。無有其比。在會之人。奔走驚駭。嘆未曾有。懽呼祝釐之聲。振動山谷。或有焚頂燃指。以懺旣往之愆。或有捐009_101c衣解佩。以結當來之果。流聞京師。男女老少。來者往者。絡繹於道。數日未已。及旣罷會。仍坐三七員結夏。且禪且誦。至七月十五日俗號百終。是十方菩薩遊行散處。求訪大德。咨決心疑之約也。大開盂欄盆齋。又於佛卓前舍利又分身干有餘粒。夫人手自封緘。俱迹其異以啓。於分上。上加欣慶。供養於含元殿。還遣本寺安邀。按舍利。或云寶利羅。或云設利羅。皆其梵語。而唐澤之則曰靈骨。又曰靈身。卽佛如來所遺骨分之謂也。如來嘗曰。我有眞心空寂靈知者。是我有眞身廣大圓滿者。是夫法身之體。等於虛空。旣無生滅之相。安有去來之迹哉。比之於月。水淸則月現。月有不明。非月之過。009_101d衆生之水濁也。方之於鍾。扣之則鳴。鍾有不鳴。非鍾之咎。衆生之莛小也。今申夫人所以祝釐於兩聖及與追慕於先王先后及與廣平君先母夫人王氏之者。誠之至。故感之深。感之深。故格之易。是蓋不疾而自速。不期而自至。亦佛神通妙用不可思議之道。欲知夫人之誠敬。當觀靈異之降。欲知諸佛之變化。當觀設利之妙。豈至誠之德。足以通天地。而如來空寂之體。充於法界者乎。是不可以無記。創寺始終。與夫前時作法之盛。我主上殿下潛邸時。親幸是寺。敷爲一章奎璧之彩。皎皎然照耀於殿楣之間。又實玆寺千百年無窮之慶也。蒼龍旃蒙噩作律中無射之月。謹記。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12일 (갑자)
왕녀를 책봉하여 정의 공주로 삼고 안맹담을 죽성군으로 삼다

왕녀(王女)를 책봉하여 정의 공주(貞懿公主)로 삼고, 안맹담(安孟聃)을 죽성군(竹城君)으로 삼았다.
【원전】 3 집 114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인사-관리(管理)


 

세종 25년 계해(1443,정통 8)
 9월23일 (갑술)
전 경창부 윤 유한의 처 박씨의 졸기

전 경창부 윤(慶昌府尹) 유한(柳漢)의 처(妻) 박씨(朴氏)가 죽었으므로 부의(賻儀)로 쌀·콩 30석과 관곽(棺槨) 및 종이를 하사하였으니, 임금의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양모(養母)이었다. 임금이 공주에게 명하여 상복을 입지 말고 다만 심상(心喪)만을 행하게 하였다.
【원전】 4 집 511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세종 28년 병인(1446,정통 11)
 3월27일 (갑오)
예조에서 왕비의 상제에 대해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비의 상제(喪制)에 세자는 재최 기년(齊衰期年)인데,【11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월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고, 15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낸다.】 의상(衣裳),【《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재최(齊衰)의 제도는 다음 등급의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하되, 그 옆과 아래 부분을 꿰맨다.】 관(冠),【생포(生布)를 사용하여 관(冠)의 둘레[武]와 끈[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생마(生麻)를 사용하는데, 수질(首絰)은 베[布]로써 끈[纓]을 만든다.】 대(對),【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오동나무 지팡이[桐杖],【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가 지게 한다.】 소구(疏屨)【흰 면포(綿布)로써 만든다. 졸곡(卒哭) 전에 진현(進見)할 때는 백직령의(白直領衣)·흑초립(黑草笠)·흑도아(黑絛兒)·백화(白靴)를 사용한다.】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화(白靴)를 사용하고,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할 때는 최복(衰服)을 입으며, 연제(練祭)에는 연포(練布)로써 관(冠)을 만들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복(衰服)을 제거하며, 대상(大祥)에서 담제까지는 진하게 물들인 회색의(灰色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사용하고,【휘덕전(輝德殿)에서 제사지낼 때와 진현(進見)할 때와 사신을 접견할 때에 사용한다.】 심상 삼년(心喪三年)【담제(禫祭) 후의 아일(衙日)에는 그전대로 조참(朝參)을 받되, 악(樂)은 진열하여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는다.】하며, 승휘(承徽)는 재최 기년(齊衰期年)인데, 배자(背子),【곧 본국(本國)의 몽두의(蒙頭衣)인데, 다음 등급의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장군(長裙),【곧 상(裳)인데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개두(蓋頭),【곧 본국(本國)의 여자 갓[女笠]인데, 생포(生布)로써 덮는다.】 포두수(布頭),【시속 명칭은 결개(結介)인데,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죽차과시(竹釵裹腮),【백저포를 사용한다.】 수의(手衣),【백저포를 사용한다.】 대(帶),【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소리(疏履)【백면포(白綿布)로써 만든다.】를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상(白衣裳)·흑개두(黑蓋頭)·흑대(黑帶)·백피혜(白皮鞋)를 사용하고, 대상(大祥) 후에는 아황(鵝黃)·청벽(靑碧)·조백(皂白)으로 옷과 신을 만들고, 금·은·주옥(珠玉)은 사용하지 아니하며, 심상 삼년(心喪三年)하며, 시녀(侍女)는 배자(背子)·개두(蓋頭)·대(帶)·【모두 생포(生布)를 사용한다.】백피혜(白皮鞋)를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상(白衣裳)·흑대(黑帶)·흑개두(黑蓋頭)를 사용하고 기년(期年)을 마치며, 평창 군주(平昌郡主)【동궁(東宮)의 친딸.】는 기년(期年)인데, 상복(喪服)은 승휘(承徽)와 같으며, 내시(內侍)·사약(司鑰)·반감(飯監)·서방색(書房色)은 모두 재최(齊衰)인데, 원령(圓領)·생포과사모(生布裹紗帽)·생마포대(生麻布帶)·백화(白靴)를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를 사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고, 대상(大祥) 후에는 회색의(灰色衣)·오각대(烏角帶)를 사용하고, 담제(禫祭) 후에는 흑의(黑衣)와 담토황의(淡土黃衣)·오각대(烏角帶)를 두루 입으며, 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는 생포의(生布衣)·생포두건(生布頭巾)·생마대(生麻帶)를 사용하고,【동궁(東宮)을 진현(進見)할 때나 임금을 시종(侍從)할 때는 백의(白衣)와 흑두건(黑頭巾)을 착용한다.】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흑두건(黑頭巾)·흑대(黑帶)를 사용하고, 대상(大祥) 후에는 회색의(灰色衣)·흑두건(黑頭巾)을 사용하고, 담제(禫祭) 후에는 흑의(黑衣)·흑두건(黑頭巾)을 사용하며, 각 차비인(差備人)은 생포두건(生布頭巾)·생포의(生布衣)·생마대(生麻帶)·백승혜(白繩鞋)를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흑두건(黑頭巾)·흑대(黑帶)를 사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며, 우내시(右內侍) 이하는 졸곡 후에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할 때는 최복(衰服)을 도루 입으며, 견마배(牽馬陪)·정궐달배(正闕達陪)·보마배(寶馬陪)·의대배(衣帶陪)의 여러 관원 등은 백포직령의(白布直領衣)·백운혜(白雲鞋)·백행전(白行纏)·백립(白笠)·숙마대(熟麻帶)를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목면 협주음의(白木緜頰注音衣)·흑초립(黑草笠)·흑운혜(黑雲鞋)·백전대(白全帶)·백행전(白行纏)을 사용하고, 대상(大祥) 후에는 회색목면 협주음의(灰色木緜頰注音衣)를 사용하고, 담제(禫祭) 후에는 흑협주음(黑頰注音)을 사용하며,【저포(紵布)든지 목면(木緜)이든지 절후에 따라 착용한다.】 개배(蓋陪)·교자배(轎子陪)는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숙마대(熟麻帶)·백운혜(白雲鞋)·백행전(白行纏)을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흑두건(黑頭巾)·백전대(白全帶)·흑운혜(黑雲鞋)를 사용하고, 담제 후에는 견마배(牽馬陪)와 같이 하고, 홍초 백류표기(紅綃白旒標旗)는 백초기(白綃旗)로써 대신 사용하고, 기년(期年) 후에는 흑초기(黑綃旗)·백류(白旒)·백금(白衿)을 사용하고, 오장(烏杖)은 백칠장(白漆杖)으로써 대신 사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게 하고, 양산(陽繖)은 백저포(白紵布)를 사용하고, 기년(期年) 후에는 청초(靑綃)를 사용하되, 자루는 검은 칠을 하고, 말안장·고삐·교자(轎子)는 모두 백면포(白緜布)로 싸고, 기년(期年) 후에는 연(輦)·안자(鞍子)와 모든 가장자리 안에 붉은 칠을 한 물건들은 검은 칠로 고쳐 사용하고, 금과 주옥의 장식물은 흑면포(黑緜布)로써 싸게 하며, 후궁(後宮)의 두 귀인(貴人), 두 동실(東室), 두 별실(別室)은 모두 재최 기년(齊衰期年)이니, 상복(喪服)은 승휘(承徽)와 같으며, 숙용(淑容) 홍씨(洪氏), 상식(尙食) 황씨(黃氏), 전찬(典贊) 박씨(朴氏)도 모두 재최 기년(齊衰期年)이니, 상복은 승휘(承徽)와 같으며, 시녀(侍女)는 배자(背子)·개두(蓋頭)·대(帶)·【모두 생포(生布)를 사용한다.】백피혜(白皮鞋)를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상(白衣裳)·흑개두(黑蓋頭)·흑대(黑帶)를 사용하며, 상항(上項)의 귀인(貴人) 이하는 때때로 대궐 안에 모시든지, 진현(進見)할 때는 백의상(白衣裳)·흑대(黑帶)를 착용하고, 30일 후에는 대궐 안에서는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진현(進見)할 때에는 길복(吉服)을 입고, 밖에 나갈 때는 상복을 입으며, 졸곡 후에 때때로 대궐안에 모실 때는 길복을 입고, 밖에 나갈 때에는 최복(衰服)을 입으며, 졸곡 후에는 대궐 안에서는 길복(吉服)을 입고, 밖에 나갈 때에는 백의상(伯衣裳)을 입고 기년(期年)을 마치며, 내시(內侍)·사약(司鑰)·반감(飯監)·각 차비인(差備人)·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는 모두 기년(期年)이니, 상복은 동궁(東宮)의 내시(內侍) 이하의 상복과 같으며, 수양 대군(首陽大君) 이하의 대군(大君)과 계양군(桂陽君) 이하의 군(君)은 모두 재최 기년(齊衰期年)과 심상 삼년(心喪三年)이니, 동궁의 상복과 같으며, 정의 공주(貞懿公主)·정현 공주(貞顯公主)와 여러 부인(夫人)은 모두 재최 기년(齊衰期年)과 심상 삼년(心喪三年)이니, 상복은 승휘와 같으며, 대전(大殿)은 백목면단령(白木緜團領)·생포대(生布帶)·백화(白靴)를 착용하고 30일을 마치며, 시위하는 궁인(宮人)은 성복(成服) 후에는 백의상(白衣裳)·흑개두(黑蓋頭)·흑대(黑帶)를 착용하다가 30일만에 벗으며, 내시(內侍)·사약(司鑰)·사알(司謁)·서방색(書房色)·행수(行首)·반감(飯監)·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는 모두 기년(期年)이니, 상복은 동궁(東宮) 내시(內侍) 이하와 같으며, 때때로 대궐 안에 모시든지, 진현(進見)할 때에는 백의(白衣)와 흑대(黑帶)를 착용하고, 밖에 나갈 때에는 상복을 입으며, 30일 후에는 때때로 대궐 안에 모실 때는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진현(進見)할 때는 길복(吉服)을 입고, 밖에 나갈 때는 백의(白衣)와 흑대(黑帶)를 착용하되,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할 때는 상복을 도로 입으며, 각 차비인(差備人)은 백의(白衣)·생마대(生麻帶)·백두건(白頭巾)을 사용하고, 졸곡 후에는 때때로 대궐 안에 모실 때는 길복을 입고 밖에 나갈 때는 백의(白衣)를 착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며, 시위 근장(侍衛近仗)은 상제(喪制)가 다하기 전에는 백의(白衣)·흑두건(黑頭巾)·백학장(白鶴掌)·백전대(白全帶)·흑운혜(黑雲鞋)를 착용하며, 견마배(牽馬陪)는 흑립(黑笠)·의대(衣帶)·운혜(雲鞋)를 착용하여 근장(近仗)과 같으며, 상제(喪制)가 다한 후에는 모두 길복을 입으며, 덕수궁(德壽宮)은 소공(小功)이니,【조금 가는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대수(大袖)·【곧 본국의 장삼(長衫)이다.】장군(長裙)·개두(蓋頭)·포두(布頭)·수대(帶)·죽차과시(竹釵裹腮)·수의(手衣)·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하다가 15일만에 벗고, 궁주(宮主)·옹주(翁主)는 소공이니, 상복은 위와 같으며, 시녀(侍女)는 배자(背子)·개두(蓋頭)·대(帶)·【모두 조금 가는 숙포를 사용한다.】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하며, 내시(內侍)·사약(司鑰)·반감(飯監)은 모두 재최(齊衰)이니, 원령(圓領)·포과사모(布裹紗帽)·백화(白靴)를 착용하며, 별감(別監)·각 차비인(差備人)은 백의(白衣)·포대(布帶)·백포두건(白布頭巾)을 착용하다가 모두 15일만에 벗으며, 인덕궁 옹주(仁德宮翁主) 시녀(侍女)의 상복은 덕수궁 옹주(德壽宮翁主) 시녀(侍女)의 상복과 같고, 내시(內侍)의 상복은 덕수궁 내시(內侍)의 상복과 같으며, 수강궁(壽康宮)의 명빈(明嬪)·의빈(懿嬪)과 소혜 궁주(昭惠宮主)·의정 궁주(義貞宮主)·신소 궁주(愼昭宮主)·옹주(翁主)는 모두 기년(期年)이니, 배자(背子)·【다음 등급의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장군(長裙)·개두(蓋頭)·포두(布頭)·수대(帶)·죽차과시(竹釵裹腮)·수의(手衣)·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하다가 30일만에 벗으며, 시녀(侍女)·내시(內侍)·반감(飯監)·별감(別監)의 상복은 덕수궁(德壽宮) 시녀(侍女) 이하의 상복과 같으며, 왕후의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은 모두 상복을 입으며, 수릉관(守陵官)은 재최(齊衰)이니, 상복이 여러 군(君)과 같으며, 시릉관(侍陵官)은 재최(齊衰)이니, 상복이 여러 군(君)과 같으며, 능직(陵直)·반감(飯監)의 상복은 백관(百官)과 같으며, 각 차비인(差備人)은 상복이 동궁(東宮)의 각 차비인(差備人)과 같으며, 연제(練祭)에 이르러 수릉관(守陵官)과 내시(內侍)는 연포(練布)로써 관(冠)을 만들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복(衰服)을 제거하고, 능직(陵直)과 반감(飯監)은 연포(練布)로써 사모(紗帽)를 싸고 그대로 띠를 드리우고, 각 차비인(差備人)은 연포(練布)로써 두건(頭巾)을 만들며, 소상(小祥)에서 재기(再期)에 이르기까지 천담복(淺淡服)을 입으며,【각기 제사때에 모두 같다.】 종친(宗親)·부마(駙馬)·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은 모두 재최(齊衰)이니, 원령(圓領)·【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포과사모(布裹紗帽)·【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하고, 또 각(角)을 만들어 앞에 매고 뒤에 드리운다.】대(帶)·【생마(生麻)를 사용한다.】백화(白靴)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며,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할 때는 최복(衰服)을 입고 기년(期年)을 마치며, 연제(練祭)에 이르러서는 연포(練布)로써 사모(紗帽)를 싸고 띠(帶)를 그대로 드리우며, 대상(大祥)에서 담제(禫祭)에 이르기까지는 진하게 물들인 회색의(灰色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며, 각도(各道)의 대소 사신(大小使臣)과 수령(守令)은 상복이 백관(百官)들과 같으며,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 각품(前銜各品)과 성중관(成衆官)은 백의(白衣)·백포(白布)로 싼 사모(紗帽)·생마대(生麻帶)·백화(白靴)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여 기년을 마치며, 군관(軍官) 5품 이하는 백의(白衣)·백포(白布)로 싼 사모(紗帽)·【만약 갓[笠]을 쓴 군사라면 일반적으로 백립(白笠)과 백포(白布)로 싼 갓을 쓴다.】생마대(生麻帶)·백화(白靴)를 착용하고, 13일 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여【만약 갓을 쓴 사람은 흑립(黑笠)과 흑대(黑帶)를 사용한다.】 기년(期年)을 마치며, 의정부 녹사(錄事)·지인(知印)과 육조(六曹)·중추원(中樞院)의 녹사(錄事)와 각사(各司)의 이전(吏典)들은 백의(白衣)·백포(白布)로 싼 두건(頭巾)·생마대(生麻帶)·백화(白靴)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흑두건(黑頭巾)·흑대(黑帶)를 착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게 하며, 전함(前銜) 당상관(堂上官)은 백의(白衣)·백포(白布)로 싼 사모(紗帽)·생마대(生麻帶)·백화(白靴)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게 하며, 충의위(忠義衛) 5품 이하는 본위(本衛)의 상청(上請)으로 인하여 백의(白衣)·백포(白布)로 싼 사모·생마대(生麻帶)를 착용하다가 졸곡에 이르러 벗게 하며, 서울과 지방의 대소 품관(大小品官)과 생원(生員)·생도(生徒)는 백의(白衣)·백립(白笠)·【생원·생도는 학교 안에서는 백두건(白頭巾)을 쓴다.】백대(白帶)·백화(白靴)를 착용하고,【일반적으로 백화(白靴)를 신는다.】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흑립(黑笠)·흑대(黑帶)를 착용하여 기년(期年)을 마치게 하며, 조례(皂隷)·소유(所由)·갈도(喝道)·장수(杖首)·초라장(抄螺匠)은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흑대(黑帶)·흑두건(黑頭巾)을 착용하여 기년을 마치게 하며, 양반(兩班)의 부녀(婦女)는 백장삼(白長衫)·흑모립(黑帽笠)을 착용하다가 졸곡 후에 벗게 하며, 서인(庶人)의 남녀와 승도(僧徒)는 백의·백립(白笠)·대(帶)를 착용하다가 13일만에 벗게 한다. 무릇 졸곡 전에는 홍색·자주색과 금·옥의 장식을 사용하기를 금하게 한다. 휘덕전(輝德殿)에 입직(入直)한 종친(宗親)·부마(駙馬)와 내시(內侍)·내직 다방(內直茶房)·전직(殿直) 등은 기년(期年) 안에 입번(入番)할 때는 최복(衰服)을 입고, 대상(大祥)과 담제(禫祭)의 복색(服色)은 백관(百官)과 같게 한다. 무릇 제사와 서계(誓戒)에는 공복(公服)을 사용하고, 치재(致齋)에는 길복(吉服)을 사용하고, 산재(散齋)에는 천담복(淺淡服)·오사모(烏紗帽)·각대(角帶)를 착용한다. 종묘서(宗廟署)의 관원과 문소전(文昭殿)·직월령(直月令)·별감(別監)·내관(內官)과 별감(別監)의 각 차비인(差備人) 등이 전내(殿內)에서는 시복(時服)을 입고, 밖에 나갈 때는 백의(白衣)를 입으며, 때대로 대궐 안에 모시고 입직 시위(入直侍衛)하는 대소 인원(人員)과 군사(軍士) 등은, 졸곡 전에는 모두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고 갓을 쓰며, 군사 등은 흑립(黑笠)·흑대(黑帶)를 착용하되, 출번(出番)할 때는 다른 예(例)에 의거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최복(衰服)을 착용하고, 만약 시어소(時御所)와 대궐 안에 나아가고 진현(進見)할 때는 백의(白衣)를 착용하고, 30일 후에는, 근신(近臣)은 대궐 안에서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고, 진현(進見)할 때는 길복(吉服)을 착용하고, 밖에 나갈 때는 최복(衰服)을 착용하며, 졸곡 후에는, 진현(進見)할 때는 길복(吉服)을 착용하고, 밖에 나갈 때는 백의(白衣)를 착용하며, 무릇 사은(謝恩)·하직(下直)·복명(復命)·개함(改銜)할 때는, 기년(期年) 전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고, 탄일(誕日)·정조(正朝)·동지(冬至)·조하(朝賀)와 배표(拜表)·망궐(望闕)·하례(賀禮)할 때는 조복(朝服)을 입고, 외방(外方)의 대소(大小) 별상(別常)의 수령(守令)이 배전(拜箋)하고 조하(朝賀)할 때에도 또한 조복(朝服)을 입게 한다.”
하였다.
【원전】 4 집 6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주D-001]대전(大殿) : 임금.
[주D-002]소유(所由) : 사헌부의 졸도(卒徒).
[주D-003]장수(杖首) : 형조(刑曹)의 졸도(卒徒).
[주D-004]초라장(抄螺匠) : 의금부의 졸도(卒徒).
  세종 28년 병인(1446,정통 11)
 4월13일 (경술)
정의 공주가 빈전에 진향하다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빈전(殯殿)에 진향(進香)하였다.
【원전】 4 집 66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세종 28년 병인(1446,정통 11)
 6월6일 (임인)
예조 판서 정인지가 영릉 지문을 지어 바치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영릉(英陵) 지문(誌文)을 지어 바쳤다. 그 글에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왕후(王后)의 성은 심씨(沈氏)이니, 청송(靑松) 세가(世家)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이용(李龍)이니 고려(高麗) 증 문하 시중 청화 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이고, 황조(皇祖)의 휘(諱)는 덕부(德符)인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두 번 시중(侍中)이 되었고, 우리 공정왕(恭靖王) 때에 이르러 의정부(議政府)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청성백(靑城伯)을 봉(封)하였고, 황고(皇考)의 휘(諱)는 온(溫)이고, 황비(皇妣) 안씨(安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시호(諡號) 소의공(昭懿公) 천보(天保)의 딸이다.
홍무(洪武) 을해 9월 기미(己未)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왕비를 낳았다. 왕후가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婉娩)하여 오직 덕(德)을 행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출합(出閤)하실 때에,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훌륭한 문족(門族)에서 뽑아 배필을 구하는데, 영락(永樂) 무자년에 왕후(王后)가 장차 계(筓)하게 되자, 덕행(德行)으로 용의(容儀)로 와서 빈(嬪)이 되어, 경숙 옹주(敬淑翁主)를 봉하였고, 공경하여 양궁(兩宮)을 섬기어 두텁게 사랑을 받았다. 가실(家室)의 마땅한 날 내전(內殿)에 정위(正位)하였다. 인자하고 검소하여 엄숙하고 옹화(雍和)한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 가을 9월에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고쳐 봉하였다. 무술년 여름에 문무 백관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궁(儲宮)이 덕스럽지 못하니, 청컨대 어진이를 가리어 세자를 세우소서.’ 하였다. 태종 대왕께서 그대로 좇으시어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 갖추 아뢰어서 전하를 책립(冊立)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고, 왕후를 봉하여 경빈(敬嬪)을 삼았다. 이해 가을 9월에 전하가 태종(太宗)의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고, 12월에 왕후를 봉하여 공비(恭妃)를 삼았다. 신축년 가을 9월에 태종 문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특별히 단견(段絹)을 내리고, 이로부터 홍희(洪熙) 선덕(宣德) 사이에 금단(錦段)·사라(紗羅)의 하사(下賜)가 여러 번 이르렀다. 임자년 정월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중궁(中宮)에서 아름다운 칭호가 있는 것은 예전 법이 아니라.’ 하여, 5월에 왕비로 고쳐 봉하였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는데,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嬪媵)을 예(禮)로 접대하고, 아래로 궁인(宮人)이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후궁(後宮)이 나아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용납하는 것을 가하며, 만일 상감께서 총애하신 자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주어, 지극한 정[至情]이 사이가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이 또한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길러서 자기 소생보다 낫게 하였으며, 또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이 또한 지성껏 받들어 순(順)히 하여 감히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빈(嬪)·잉(媵)이하가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부모 대접하듯이 하였다. 서출(庶出)의 자식 보기를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어선(御膳)이 나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보아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국모(國母)로 있은 지 29년 동안에 경계(儆戒)의 도움이 있고, 연안(宴安)의 사사(私事)가 없었으며,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절대로 바깥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록 궁중에서 날마다 쓰는 자디잔 일이라도 반드시 위로 들리어 감히 임의로 하는 일이 없었다. 곤의(壼儀)가 심히 발라서 덕화(德化)가 밖에 흘렀으며, 여러 아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여 인지(麟趾)·종사(螽斯)의 경사가 있었다. 대개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매, 반드시 어진 배필을 지어서 지극한 다스림[至治]을 이루나니, 주(周) 나라의 태사(太姒)는 풍아(風雅)에 파영(播詠)되어 천고(千古)에 빛났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이미 지극한 덕과 지극한 다스림으로 문왕(文王)의 뒤를 따랐는데, 왕후께서 또 이와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 되어서,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예전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정통(正統) 병인 3월 초10일에 왕후께서 병환이 드시매, 전하(殿下)께서 낮과 밤으로 임(臨)하여 보시고, 동궁(東宮) 이하가 옆에서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의료(醫療)와 기도(祈禱)에 극진한 정성을 드리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이달 24일 신묘에 별궁(別宮)에서 승하하시니, 춘추(春秋)가 52세이다. 안으로는 궁첩(宮妾)과 밖으로는 대소 신료(臣僚)에서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하늘이 어찌하여 아름다운 덕은 후하게 주시고, 오직 수고(壽考)는 주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아, 슬프다. 전하께서 어진 보좌를 일찍 잃으심을 슬퍼하시어 애도(哀悼)를 이기지 못하여, 백의(白衣)와 소선(素膳)으로 30일을 마치시고, 책(冊)과 시호(諡號)를 내리시어 소헌 왕후(昭憲王后)라 하고,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강(西崗)에 다스리어, 궁(宮)은 같이 하고 실(室)은 달리 하여 동쪽 실(室)에 편안히 모시었으니, 이것은 예(禮)이다.
왕후께서 8남(男) 2녀(女)를 낳으셨는데, 맏아들은 아무【문종(文宗)의 어휘(御諱).】이니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고, 다음은 아무【세조(世祖)의 어휘(御諱).】이니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용(李瑢)이니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구(李璆)이니 임영 대군(臨瀛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여(李璵)이니 광평 대군(廣平大君)을 봉하였는데 2년 먼저 졸(卒)하였고, 다음은 이유(李瑜)이니 금성 대군(錦城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임(李琳)이니 평원 대군(平原大君)을 봉하였는데 1년 먼저 졸(卒)하였고, 다음은 염(琰)이니 영흥 대군(永興大君)을 봉하였고, 맏딸은 정소 공주(貞昭公主)인데 일찍 졸(卒)하였고, 다음은 정의 공주(貞懿公主)인데, 광덕 대부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왕세자빈 권씨(權氏)는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딸인데, 원손(元孫)과 평창 군주(平昌郡主)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宮人) 장씨(張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鄭氏)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수양(首陽)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崇)이니 도원군(桃源君)을 봉하고, 딸은 모두 어리다. 안평(安平)은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을 낳았는데, 맏은 우직(友直)이니 의춘군(宜春君)을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영(臨瀛)은 증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左議政)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은 주(澍)이니 오산군(烏山君)을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광평(廣平)은 중군 호군(中軍護軍)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금성(錦城)은 증 의정부 좌의정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 들었고, 평원(平原)은 증 의정부 좌의정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고, 영흥(永興)은 사재 부정(司宰副正) 송복원(宋復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 공주(貞懿公主)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하였다. 처음에 인지(麟趾)가 초(草)를 갖추어 올리니, 임금이 보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지문(誌文)은 후세에 함께 보는 것인데, 지금 왕비가 간청하고 알현하는 사사(私事)가 없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있어,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이 뜻으로 인지(麟趾)에게 일러 아울러 싣게 하라.”
하였다.
【원전】 4 집 677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 *재정-진상(進上)


[주D-001]출합(出閤) : 대군이나 왕자가 장성하여 사궁(私宮)을 짓고 삶.
[주D-002]계(筓) : 비녀를 꽂음.
[주D-003]연안(宴安) : 편안히 지냄.

 

문종 2년 임신(1452,경태 3)
 2월2일 (병인)
《세종실록》을 감수하는 사람이 모두 세종조의 신하로 이를 집현전에 상고하여 아뢰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명하기를,
“유신(儒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하는 사람이 모두 세종조(世宗朝)의 대신(大臣)들이니 사관(史官)이 혹시 기휘(忌諱)하여 피하고 사실을 매몰(埋沒)시킨 듯합니다.’ 하니, 이 말이 근사(近似)하다.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집현전에서 아뢰기를,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공부 시랑(工部侍郞) 전약수(錢若水)에게 명령하여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수찬(修撰)하도록 하니, 전약수가 관원을 천거하여 함께 수찬(修撰)했는데, 기거 사인(起居舍人) 이종악(李宗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진종(眞宗)이 말하기를,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 이후는 모두 이방(李昉)이 중서성(中書省)에 있으면서 날마다 사책(史策)에 종사(從事)했으며 본디는 직필(直筆)을 빙고(憑考)했으니, 만약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긴다면 나머지 무엇으로 후대(後代)에 신실하게 전하겠는가? 이종악만은 옳지 않으니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허가한다.’ 하였습니다. 범조우(范祖禹)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역사(歷史)에 선악(善惡)을 쓰기 때문에 군주(君主)와 재상(宰相)은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세(後世)에 와서는 군주가 역사를 볼수가 있고 재상(宰相)이 감수(監修)를 하니, 그것이 직필(直筆)을 하고 싶어도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군주가 신하에게 직책으로써 맡기고 재상이 역사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사실의 선악(善惡)은 거의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의논을 보고 남지(南智)·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허후(許詡) 등을 불러 강맹경(姜孟卿)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기를,
“사기(史記)는 군주의 과실을 기록한 까닭으로 군주가 역사를 두려워해서 감히 뜻대로 하지 못하는 법인데, 만약 방종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군주이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역사를 보려고 하니, 저수량(褚遂良)이 말하기를, ‘볼 수가 없습니다.’고 하므로 이를 그쳤으니, 역사의 중요함이 지극한 것이다. 의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실록(實錄)은 시일을 미루어서 수찬(修撰)하지 않으면 불가하지마는,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감수(監修)하게 한다면 역사는 직필(直筆)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공독(公牘)을 취하여 보감(寶鑑)을 수찬(修撰)하고 잠정적으로 사초(史草)를 간수해 두었다가 수십 년을 기다려 계속해 수찬하는 것도 오히려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마지못해서 속히 수찬한다면 품계(品階)가 낮은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찬집(撰集)하도록 하소서.’ 하니, 어떻겠는가?”
하였다. 모두가 아뢰기를,
“옛날의 역사를 두루 보건대, 선왕(先王)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한 것은 모두 천조(踐祚)한 초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세종(世宗) 30여 년의 가언 선정(嘉言善政)을 마땅히 빨리 편찬하여 비밀히 간수하여야 할 것이니, 만약 대신(大臣)을 의심하여 다만 공독(公牘)만 수찬(修撰)하고 사초(史草)는 묶어 간수한다면 벌레가 먹고 쥐가 손상(損傷)시켜 문자(文字)가 잔결(殘缺)되어 장차는 탈루(脫漏)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또 국가에서 혹시 상고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사필(史筆)을 상고할 것이므로,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만약 그 조부(祖父)의 과실과 나쁜 점을 본다면 반드시 감추어 버려서 장차는 사적(事跡)을 잃게 될 것이니, 마땅히 빨리 편수(編修)하여 사고(史庫)에 간수한다면 거의 대의(大義)에 합당할 것입니다. 만약 품계(品階)가 낮은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역사를 편수(編修)하게 해야 된다는 의논은, 역대(歷代)의 여러 역사를 보건대 모두 대신(大臣)이 감수(監修)했으므로, 또한 선왕(先王)의 실록(實錄)을 품계가 낮은 사람으로 하여금 편수(編修)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김종서(金宗瑞)는 아뢰기를,
“신(臣)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있어서 감수(監修)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지금 비록 신(臣)에게 명하여 의논에 참여함을 혐의(嫌疑)하지 말라고 하지마는, 그러나 의논하는 사람이 대신(大臣)은 역사를 편수(編修)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신은 마땅히 혐의(嫌疑)를 피해야만 합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감수하게 함이 가하다고 청하지만,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니 또한 미천한 신하로 하여금 수찬하게 하도록 청할 수는 없습니다. 후일에 성상을 뵈올 적에 마땅히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진술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군주는 마땅히 근로(勤勞)해야만 하고 안일(安逸)해서는 안 된다. 옛날의 군주로서 안으로는 여색(女色)에 빠지고 밖으로는 사냥을 즐기며,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며, 집을 높이 짓고 담을 아로새기는 일에 반드시 한결같이 마음을 두는 이가 있었으니, 이것은 군주의 공통적인 걱정이다. 의논하는 사람은 내가 개성(開城)에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는 혹은 생각하기를, 내가 즉위(卽位)한 초기에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여 그렇게 한다고 여기며, 또 장차 혹시 궁병독무(窮兵黷武)에 젖어 들어감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내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나는 기질이 이런 일에는 가까이 하지 않으니, 비록 이를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개성은 옛날의 도읍(都邑)이고 성터[城基]를 정하는 것은 큰 일이기 때문에 가서 보려고 한 것뿐이다. 낙읍(洛邑)을 정할 적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친히 가서 보았으니, 지금의 개성은 태조(太祖)께서 이미 정한 터이므로, 낙읍과 같지는 않는 것인데, 혹시 세상 사람의 평판이 옳지 않게 여긴다면 내가 억지로 가지는 않겠다.”
하였다. 모두가 아뢰기를.
“신 등이 이를 헤아려 보건대, 4월 11일에 부묘(祔廟)한 후에, 제릉(齊陵)을 배알(拜謁)하고 개성(開城)에 거둥한다면 꼭 농사철에 당할 것이니 옳지 못할 듯합니다. 접대에 필요한 물품은 비록 모두 수로(水路)로 운반하여 민폐(民弊)를 없앤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부득이해서 육로(陸路)로 수송하는 곳에 농우(農牛)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찌 그 폐해가 없겠습니까? 또 시위(侍衛)하는 인마(人馬)가 적더라도 수천(數千)이하는 아닐 것인데, 이때를 당하여 민간의 곡초(穀草)가 이미 모자라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9월을 기다려 개성에 거둥하여 제릉(齊陵)을 배알(拜謁)하고 성터[城基]를 정하고 이내 강무(講武)를 한다면 거의 다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올 가을에 비로소 성(城)을 쌓게 된 까닭으로 마음속으로 가서 보려고 했는데, 경(卿) 등의 말과 같다면 9월에 가서 살펴본 연후에 어찌 시기에 미치리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 등은 마초(馬草)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 내가 다시 헤아려 보겠다. 내지 개성부(開城府)에서 돌을 떠내는[伐石] 것은 내가 혼자서 결단한 것도 아니고 또한 영의정(領議政)의 혼자 소견(所見)도 아니며, 그 당시 대신(大臣)의 의논이 합해진 까닭으로 비로소 이 역사(役事)를 일으킨 것인데, 하물며 공역(工役)하는 백성이 모두 개성 부근에 거주하는 백성이므로, 10일 동안에 서로 교체(交遞)한다면 큰 고통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금년에 실농(失農)하더라도 민간에서 그다지 굶주리지는 않을 것이고, 역사(役事)도 기한이 있으니 모든 일을 그만두면 그만이겠지마는, 부득이해서 이를 한다면 시일을 오래 끌 수는 없겠다. 지난번에 영의정이 이 일을 의논할 적엔 모두 합의(合議)를 하고 가부(可否)가 없었는데, 지금 함길도(咸吉道)에 가고 난 후에 이 역사(役事)를 정지하기로 의논하게 되니, 옳지 못한 일이 없겠는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개성(開城)에서 돌을 떠내는 일에 지금 부역(赴役)하게 한 것은 이미 영의정(領議政)의 포치(布置)에 의거한 것이니, 영의정이 함길도(咸吉道)에 갔다는 이유를 가지고 정지하기를 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지난 겨울에는 날씨가 매우 따뜻했는데 이번 봄에는 날씨가 대단히 추우니 그 기후를 살펴본다면 음양(陰陽)이 어그러졌으니, 마땅히 인사(人事)를 미리 잘 처리하여 원망이 없도록 하여 민심(民心)의 화합(和合)을 극진하게 하도록 감히 이 말로써 아뢸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담제(禫祭)를 지내고 부묘(祔廟)한 후에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치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폐지할 수는 없다. 하전(賀箋)은 비록 두 번을 올리더라도 해로울 것은 없지마는, 방물(方物)은 한 번을 없애려고 하는데, 그 방물을 바치는 것은 마땅히 담제(禫祭) 후에 있어야 하겠는가, 부묘(祔廟)한 후에 있어야 하겠는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담제(禫祭) 후에는, 성상께서 군신(群臣)들의 하례(賀禮)를 받지 않고, 서울의 백관(百官)들은 안마(鞍馬)표리(表裏)를 바치고 외방에서는 다만 하전(賀箋)만 올리게 되니, 부묘(祔廟)한 후에 마땅히 정전(正殿)에 납시어 군신들의 하례를 받고,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의 내조(來朝)하는 사람도 또한 하례하는 반열(班列)에 참여하고, 서울과 외방에서도 전문(箋文)을 바치고 방물(方物)을 바쳐서 뜰에 충만하게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의리에 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경 등의 의논에 따르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정의 공주(貞懿公主) 집 노비 문안(奴婢文案)의 경술년의 문서를 살펴보니, 그 자획(字畫)이 모두 공주(公主) 집 서제(書題) 김효지(金孝止)의 글씨와 매우 같았으니, 김효지의 글씨가 확실하다. 다만 유한(柳漢)이 이 사람을 시켜 쓰게 하였는지 의심스럽지만, 그러나 김효지가 이미 죽었으니 물을 수도 없겠다. 환자(宦者) 최언(崔彦)에게 물으니, 최언이 말하기를, ‘제가 유한에게서 받았습니다.’고 하나, 그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 공주가 일찍이 예궐(詣闕)하여 나인(內人)에게 이르기를, ‘그 노비의 일은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데, 서제(書題) 등의 소송을 지금 의금부(義禁府)에 내려서 마침내 큰 일을 만들었다.’고 하므로,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이 일로써 미루어본다면 유한의 노비 문안은 공주가 반드시 알지도 못할 것이며, 하물며 연창위(延昌尉)는 본시부터 병인(病人)이므로 집안 일은 다스리지 않았으니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서제(書題) 등이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진소(陳訴)한 것이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금 이 노비의 일은 조금 애매하니 한결같이 의금부의 아뢴 바에 따라서 관청에서 재주(財主)를 만들어 평균하게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유한(柳漢)의 노비(奴婢)는 당초에 신 등은 공주 집에서 나온 문서이므로 믿지 않을 수 없어 경술년의 문서를 따르려고 했는데, 지금 성상의 교지(敎旨)를 받아 보니 매우 의리에 합당합니다. 유한은 당연히 부모의 노비를 가져야 하는 까닭으로 그 수효가 1천 1백여 명에 이르게 되는데, 만약 《육전(六典)》에 의거하여 나누어 준다면 유수경(柳守敬)의 차지하는 바가 3백 50여 명에 안들지 않을 것이니, 어찌 천첩(賤妾)의 아들에게 노비가 3백여 명이나 되는데도 본종(本宗)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한 명도 사역하지 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승중(承重)한 장자(長子)에게는 1백 명을 주고, 차자(次子)에게는 70명을 주고, 그 나머지 사람에게도 마땅히 본종(本宗)에서 고루 나누어 주는 것을 허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헤아려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다시 진사(進士) 뽑는 법을 제정하려 하는데, 내가 이미 경 등이 옳지 않게 여기는 뜻을 알고 있지마는, 그러나 유자(儒者)로서 의견을 아뢰는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내가 다시 제정하려 하니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니, 남지(南智)와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신 등이 전자에 그 폐단을 모두 진술했는데도, 지금 성상께서 다시 세우려고 하여 다시 의논하기를 명하시니, 신 등은 황공(惶恐)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이해(利害)에 크게 관계됨이 있지 않으니 그전 규정에 따라 시험해 뽑는 것이 편리 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분(鄭苯)과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신 등이 전자에 각기 소견(所見)을 가지고 다시 제정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아뢰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결단하지 않았으니 시기에 다달아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연창위(延昌尉)는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니, 이름은 안맹담(安孟聃)인데, 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부귀(富貴)롭게 생장하여 학술(學術)은 없으며, 불법(佛法)을 몹시 좋아하여 밥먹이는 중이 항상 10여 명이나 되었다. 중의 옷을 입고 중의 아랫자리에 앉아서 불경(佛經)을 읽고는 밥을 먹으며, 살생(殺生)을 싫어하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다.
【원전】 6 집 459 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군사-관방(關防)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신분-천인(賤人) / *사법(司法) / *재정(財政)


[주D-001]전약수(錢若水) :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명신.
[주D-002]태평흥국(太平興國) : 송(宋)나라 태종(太宗) 때 연호.
[주D-003]이방(李昉) : 이종악(李宗諤)의 아버지.
[주D-004]범조우(范祖禹) : 송나라 진종(眞宗) 때의 명신(名臣).
[주D-005]저수량(褚遂良) :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명신.
[주D-006]공독(公牘) : 관청의 문서.
[주D-007]천조(踐祚) : 등극(登極).
[주D-008]궁병독무(窮兵黷武) : 병력(兵力)을 남용(濫用)함.
[주D-009]낙읍(洛邑) : 낙양(洛陽).
[주D-010]담제(禫祭) : 상제(祥祭) 뒤 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초상(初喪)으로부터 27개월이 되는 달에 길일(吉日)을 골라서 지내는 제사임.
[주D-011]안마(鞍馬) : 안장 얹은 말.
[주D-012]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찝.
[주D-013]경술년 : 1430 세종 12년.
[주D-014]서제(書題) : 서리(書吏).
[주D-015]연창위(延昌尉) : 안맹담(安孟聃).
[주D-016]경술년 : 1430 세종 12년.
[주D-017]승중(承重) : 조상(祖上)의 제사를 이어 받드는 것. 또는 그 지위.

 

 

문종 2년 임신(1452,경태 3)
 2월13일 (정축)
유한이 적은 서명과 노비 문안을 들여보내기를 명하다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박종우(朴從愚)·한확(韓確)·이사철(李思哲) 등이 아뢰기를,
“정의 공주(貞懿公主) 집에서 나온, 경술년의 유한(柳漢)의 편간(片簡)에 적은 서명(署名)이 대체로 모두 유한(柳漢)이 적은 것과 같았으나, 그 편지에 쓴 모양이 시원스럽지 않으므로 진필(眞筆)과 같지 않은 듯합니다. 또 유수경(柳守敬) 등이 도관사(都官司)에게 말하기를, ‘이 편지는 아버지가 이름을 적은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주(公主) 집에서 나온 글은 우리같이 미천하고 용렬한 사람이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는데, 신(臣) 등은 모두 이것은 공주가 아는 일이 아닐 것이고, 중간에 김효지(金孝止) 같은 무리가 꾀를 써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의심이 납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박종우(朴從愚) 등을 인견(引見)하고 유한(柳漢)이 적은 서명(署名)과 노비 문안(奴婢文案)을 들여보내기를 명하였다.
【원전】 6 집 465 면
【분류】 *신분(身分)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가족(家族)


[주D-001]경술년 : 1430 세종 12년.
[주D-002]편간(片簡) : 짤막한 편지.
[주D-003]도관사(都官司)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형조(刑曹)에 속한 낭청(郞廳)의 하나. 노비(奴婢)의 부적(簿籍)과 소송(訴訟)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음.

 

문종 2년 임신(1452,경태 3)
 2월13일 (정축)
유한이 적은 서명과 노비 문안을 들여보내기를 명하다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박종우(朴從愚)·한확(韓確)·이사철(李思哲) 등이 아뢰기를,
“정의 공주(貞懿公主) 집에서 나온, 경술년의 유한(柳漢)의 편간(片簡)에 적은 서명(署名)이 대체로 모두 유한(柳漢)이 적은 것과 같았으나, 그 편지에 쓴 모양이 시원스럽지 않으므로 진필(眞筆)과 같지 않은 듯합니다. 또 유수경(柳守敬) 등이 도관사(都官司)에게 말하기를, ‘이 편지는 아버지가 이름을 적은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주(公主) 집에서 나온 글은 우리같이 미천하고 용렬한 사람이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는데, 신(臣) 등은 모두 이것은 공주가 아는 일이 아닐 것이고, 중간에 김효지(金孝止) 같은 무리가 꾀를 써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의심이 납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박종우(朴從愚) 등을 인견(引見)하고 유한(柳漢)이 적은 서명(署名)과 노비 문안(奴婢文案)을 들여보내기를 명하였다.
【원전】 6 집 465 면
【분류】 *신분(身分)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가족(家族)


[주D-001]경술년 : 1430 세종 12년.
[주D-002]편간(片簡) : 짤막한 편지.
[주D-003]도관사(都官司)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형조(刑曹)에 속한 낭청(郞廳)의 하나. 노비(奴婢)의 부적(簿籍)과 소송(訴訟)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음.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10월14일 (정유)
세조가 정인지·한확·이사철 등과 더불어 간당의 죄를 의논하여 아뢰다

세조가 좌의정(左議政) 정인지(鄭麟趾)·좌찬성(左贊成) 한확(韓確)·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도승지(都承旨)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 빈청(賓廳)에 모여 간당(姦黨)의 죄를 의논하여 아뢰니, 곧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지화(池和)를 베이고, 김정(金晶)·김말생(金末生)을 각각 장(杖) 1백을 때리고 영구히 변방 고을 관노(官奴)에 붙이며, 김산(金山)·정대평(鄭大平)·박효충(朴孝忠)·김효산(金孝山)·홍은봉(洪銀峯)·안막동(安莫同)·양옥(梁玉)·고계로(高季老)·심견(沈堅)·최로(崔老)·귀봉(貴鳳)·남해(南海)·강통(絳筒)·우명로(禹明魯)·중을(衆乙)·지명(之命)·구지(仇知)·불련(佛連)·망실(罔實)·말생(末生)·영기(永奇)·석동(石同)·박금(朴金)·몽동(蒙同)·군생(軍生)·거을(巨乙)·우미(亐未)·을봉(乙奉)·천로(天老)·춘길(春吉)·막동(莫同)·승통(承通)은 또한 아울러 영구히 변군의 관노에 붙이라.”
하고, 또 전지하기를,
“간당(姦黨) 및 족친(族親) 등을 오늘 4월 14일 이전에 구처(區處)한 외에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여 전전 반측(輾轉反側)하는 자를 안심하게 하라. 너 의금부(義禁府)는 중외에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지화(池和)는 점치는 소경이다. 젊어서부터 길흉(吉凶)을 잘 점치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태종(太宗) 때부터 궁중에 출입하여 꽤 위복(威福)을 떠벌이니 조사(朝士)들이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여, 이로부터 이름이 무거워졌다. 매양 의심 나는 것의 물음을 당하면 대개는 자기 뜻으로 망령되게 화복을 말하여 사람의 마음을 두려워하게도 하고 기뻐하게도 하였다. 이보다 먼저 지화(池和)가 말하기를,
“이용(李瑢)이 임금이 될 운명이 있다.”
하여, 흠동(歆動)시키니, 용과 용의 문객이 난을 꾀하는 뜻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므로, 아울러 베었다. 세조가 일찍이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집에 가는데, 길에서 지화를 만났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물으니,
“공주의 집에서 옵니다.”
하였다. 공주의 안부(安否)를 물으니, 지화가 대답하기를,
“오늘은 더욱 사람을 꺼립니다.”
하였다. 또 공주의 길흉을 물으니, 지화가 말하기를,
“금년 7월에 액이 있다고 내가 이미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달려가니, 공주의 병은 이미 덜하고 지화는 일찍이 오지도 않았었다. 세조가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하여보니, 실상은 용(瑢)의 집에서 온 것이었다.
【원전】 6 집 627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재판(裁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주D-001]위복(威福) : 위엄을 부리고 복덕(福德)을 베품.
[주D-002]흠동(歆動) : 으쓱하게 함.

 

 

 

 

 

단종 3년 을해(1455,경태 6)
 1월24일 (경오)
혜빈·신빈·숙빈 등에게 난신의 노비를 나누어 주다

혜빈(惠嬪)에게 노비(奴婢)를 아울러 1백 구, 신빈(愼嬪)·숙빈(肅嬪)·숙의(淑儀)·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노비를 아울러 각각 20구, 경혜 공주(敬惠公主)에게 노비를 아울러 5구, 경숙 옹주(敬淑翁主)에게 노비를 아울러 30구, 봉보 부인(奉保夫人)·상궁(尙宮) 박씨(朴氏)에게 노비를 아울러 각각 5구,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윤기(尹奇)에게 노비를 아울러 5구, 행 내시부 좌승직(行內侍府左承直) 복회(卜禬)에게 노비를 아울러 4구를 주었는데, 모두 여러 도(道)에 사는 난신(亂臣)의 노비로 주었다.
【원전】 7 집 11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변란(變亂) / *신분(身分)


[주D-001]난신(亂臣) :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희생된 사람을 말함.


 

 

  세조 1년 을해(1455,경태 6)
 8월26일 (기사)
환자 최습의 양주 전토를 정의 공주에게 하사하다

환자(宦者) 최습(崔濕)의 양주(楊州) 전토 1결(結)을 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다.
【원전】 7 집 83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세조 2년 병자(1456,경태 7)
 2월2일 (신축)
강원도 고성 온정에 목욕가는 정의 공주에게 교자와 담부를 주도록 명하다

병조에 전지(傳旨)하기를,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강원도 고성 온정(高城溫井)으로 목욕하러 가니, 교자(轎子)와 담부(擔夫)를 주도록 하라. ”
하였다.
【원전】 7 집 113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과학-지학(地學)


  세조 2년 병자(1456,경태 7)
 4월17일 (병진)
광평 대군 이여의 집에 거둥하여 정의 공주을 영위하다

임금이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집에 거둥하여, 정의 공주(貞懿公主)를 영위(迎慰)하였다.
【원전】 7 집 127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세조 4년 무인(1458,천순 2)
 7월21일 (병오)
사정전에 나아가 유가노 등을 인견하고 술·옷·흑마포를 내리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중국인 유가노(劉家奴)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영천 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연창위(延昌尉)·안맹담(安孟聃)·영순군(永順君) 이부(李簿)·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순(金淳)·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심결(沈決)과 승지(承旨)와 함길도 도진무(咸吉道都鎭撫) 조계종(趙繼宗)이 입시(入侍)하였다. 술자리를 베풀고, 유가노(劉家奴) 등에게 술을 내려 주고, 이어서 옷 각각 1령(領)씩, 흑마포(黑麻布) 각각 2필(匹)씩을 내려 주었다.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이 사로 잡혀서 고생하다가 이제야 우리 나라에 올 수 있었으니, 내가 심히 가엾게 여긴다. 너희들은 황제(皇帝)의 백성이고, 우리 나라와 중국은 같은 한 집안이니, 너는 이 뜻을 알라.”
하고, 드디어 유가노 등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순지(李純之)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배천 온정(白川溫井)에 목욕하러 가니, 감영(監營)의 쌀 10석(石)과 황두(黃豆) 5석(石)을 주라.”
하였다.
【원전】 7 집 286 면
【분류】 *외교-명(明) / *과학-지학(地學)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재정-국용(國用)

세조 4년 무인(1458,천순 2)
 7월25일 (경술)
중궁과 함께 정의 공주의 집에 거둥하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집에 거둥하였다. 마침내 야인(野人) 범찰(凡察)의 아들 보하토(甫下土) 등 7인을 인견(引見)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입시(立侍)하였다. 보하토(甫下土)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특별히 채단의(綵段衣) 1령(領)과 도자(刀子)·채낭(綵囊)을 내려 주었다.
【원전】 7 집 286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 *무역(貿易)

세조 4년 무인(1458,천순 2)
 8월8일 (계해)
황해도 관찰사에게 목욕하러 가는 정의 공주를 위해 잔치를 베풀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배천 온정(白川溫井)으로 목욕하러 갔으니, 경(卿)이 거기에 친히 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라.”
하였다.
【원전】 7 집 289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보건(保健) / *과학-지학(地學)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윤 11월9일 (신해)
임영 대군 이구·영응 대군 이염·정의 공주에게 외방 노비를 1구씩 하사케 하다

형조(刑曹)에 명하여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외방의 노비(奴婢) 각각 1구(口)씩을 내려 주게 하였다.
【원전】 7 집 435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신분-천인(賤人)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12월5일 (정축)
정의 공주를 문병하다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병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 집에 거둥하여 문병(問病)하고, 환궁(還宮)하여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관사(觀射)하였다. 어떤 사람이 인왕산(仁王山)에 표범이 있다고 아뢰니, 전지(傳旨)하기를,
“만일 병조(兵曹)로 하여금 〈표범을〉 잡을 꾀를 의논하게 한다면 비록 2, 3일이 되어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곧 도진무(都鎭撫) 양정(楊汀)·하한(河漢)을 불러 승지(承旨) 등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고, 교태전(交泰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양정을 대장(大將)으로 삼았다.
【원전】 7 집 43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과학-생물(生物)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12월5일 (정축)
정의 공주를 문병하다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병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 집에 거둥하여 문병(問病)하고, 환궁(還宮)하여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관사(觀射)하였다. 어떤 사람이 인왕산(仁王山)에 표범이 있다고 아뢰니, 전지(傳旨)하기를,
“만일 병조(兵曹)로 하여금 〈표범을〉 잡을 꾀를 의논하게 한다면 비록 2, 3일이 되어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곧 도진무(都鎭撫) 양정(楊汀)·하한(河漢)을 불러 승지(承旨) 등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고, 교태전(交泰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양정을 대장(大將)으로 삼았다.
【원전】 7 집 43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과학-생물(生物)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12월5일 (정축)
정의 공주를 문병하다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병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 집에 거둥하여 문병(問病)하고, 환궁(還宮)하여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관사(觀射)하였다. 어떤 사람이 인왕산(仁王山)에 표범이 있다고 아뢰니, 전지(傳旨)하기를,
“만일 병조(兵曹)로 하여금 〈표범을〉 잡을 꾀를 의논하게 한다면 비록 2, 3일이 되어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곧 도진무(都鎭撫) 양정(楊汀)·하한(河漢)을 불러 승지(承旨) 등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고, 교태전(交泰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양정을 대장(大將)으로 삼았다.
【원전】 7 집 43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과학-생물(生物)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12월11일 (계미)
정의 공주를 문병하다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병이 심하니,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그 집에 거둥하여 문병(問病)하였다.
【원전】 7 집 43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세조 7년 신사(1461,천순 5)
 1월3일 (갑진)
중궁과 더불어 정의 공주의 집에 거둥하고 질병을 문안하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집에 거둥하여 질병을 문안하였다.
【원전】 7 집 441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세조 8년 임오(1462,천순 6)
 1월16일 (신해)
임영 대군·영응 대군·정의 공주에게 쌀과 콩을 내리다

임영 대군 이구(李璆)·영응 대군 이염(李琰)·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쌀과 콩을 각각 50석(石)씩 내려 주었다.
【원전】 7 집 50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세조 8년 임오(1462,천순 6)
 12월25일 (을유)
연창위 안맹담이 죽자 2일간 철조하고 시호를 양효(良孝)라 하다. 그의 졸기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이 졸(卒)하니, 이틀을 철조(輟朝)하고 쌀·콩 아울러 90석, 정포(正布) 70필, 종이 2백 권을 부의(傅儀)하였다. 시호(諡號)는 양효(良孝)라 하였으니, 온량(溫良)하고 즐기기를 좋아한 것을 양(良)이라 하고 자혜(慈惠)하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긴 것을 효(孝)라 한다. 안맹담은 세종(世宗)의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어 죽성군(竹城君)으로 봉하였고 뒤에 연창군(延昌君)으로 고쳤다. 술을 좋아하여 병이 되어 조알(朝謁)을 끊었다. 세종조(世宗朝)에 일찍이 음객(飮客)을 불러서, ‘연창군이 누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기를 숭상하느냐?’ 하고 물으니, 음객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 가지 아니하였다.
【원전】 7 집 560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세조 10년 갑신(1464,천순 8)
 10월23일 (계묘)
정의 공주·임영 대군· 영응 대군에게 매년 쌀 50석씩을 주게 하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매년 정의 공주(貞懿公主)·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에게 각각 쌀 50석(石)을 내려 주라.”
하였다.
【원전】 7 집 65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재정-국용(國用)

세조 12년 병술(1466,성화 2)
 윤 3월26일 (정유)
정의 공주의 집에 거둥하여 문병하다

임금이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집에 거둥하여 문병하였다.
【원전】 8 집 1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세조 13년 정해(1467,성화 3)
 3월1일 (병인)
황치신·이윤·손성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황치신(黃致身)·이윤손(李允孫)을 행 중추부 지사(行中樞府知事)로, 성임(成任)을 겸 의금부 지사(兼義禁府知事)로, 이서(李墅)를 행 한성부 좌윤(行漢城府左尹)으로, 이예(李芮)·김상진(金尙珍)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안빈세(安貧世)를 공조 참판으로, 이염의(李念義)를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이봉(李封)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신정(申瀞)을 예문관 직제학으로 삼았다. 안빈세는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아들인데, 이때에 공주가 병이 있었고 승지의 임무가 매우 바빴기 때문에 특별히 그 직(職)을 올린 것이다. 임금이 승지를 제수하려고 하는데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워서 이봉과 행 호군(行護軍) 한치의(韓致義)를 불러서 현부(賢否)를 살펴보려 하였는데, 이봉이 먼저 도착하니, 신숙주(申叔舟)가 이봉을 천거하며 나이가 젊고 재주가 많다고 하여 임금이 곧 승지에 제수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이봉에게 이르기를,
“나와 너의 아비는 의리(義理)로는 비록 군신(君臣)이지마는 은혜는 형제(兄弟)와 같다. 내가 너를 보기를 아들과 같이 할 터이니, 너도 또한 나를 보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라.”
하였으니, 이봉은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다. 신정이 예문관 직제학으로 초천(超遷)된 것은 그 형 신면(申㴐)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전주(銓注)의 출납(出納)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원전】 8 집 6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성종 8년 정유(1477,성화 13)
 2월11일 (경진)
정의 공주의 졸기

정의 공주(貞懿公主)가 졸(卒)하였다. 공주는 세종(世宗)의 딸인데,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이 이와 결혼하였다.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서, 세종이 사랑하였다.
【원전】 9 집 421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물(人物)
중종 38년 계묘(1543,가정 22)
 7월6일 (기유)
사헌부·예조 등에서 건의한 일들을 대신들과 의논하다

영의정 윤은보(尹殷輔)가 의논드리기를,
“이계명 등의 옥사(獄事)는 사간(事干)들이 이미 승복한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강상에 관계되므로 실정을 알아 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대관이 의옥이라고 아뢰어 조옥(詔獄)에서 추국하기를 청하였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아뢴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란하여 꺼릴 말에 있어서는 추관(推官)이 적당히 글을 바꾸어 써서 아뢰는 것이 또한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의논드리기를,
“법관(法官)이 이인형의 옥사를 다시 추문하기를 청한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이제 다른 추고관(推考官)을 보내어 상세히 추국하여 실정을 알아 내어 아뢰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윤인경(尹仁鏡)은 의논드리기를,
“이계명·이인형의 옥사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분명히 가리지 않으면 억울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조옥을 시켜 양편의 어그러진 꼬투리를 집어 내어 끝까지 따지게 하면 죄인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윤은보와 윤인경이 의논드리기를,
“윤금손(尹金孫)은 출신한 지 가장 오래어 성종(成宗)부터 섬기어 왔고 성조(聖朝)에 이르러 훈적(勳籍)에도 참록(參錄)되었으며, 외직(外職)으로 나가 네 도(道)를 안찰(按察)하고 경직(京職)으로 들어와 여러 조(曹)의 장관이 되었으며, 자급(資級)은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이르기까지 이제 거의 40년이 되었으니, 조정에 있는 기구(耆舊)로서는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습니다. 송흠(宋欽)은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성질을 타고나서 평생에 무릇 이익을 꾀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 여러해 동안 경외(京外)의 벼슬을 두루 지냈으나 가사(家事)가 궁핍하여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으므로, 맑은 덕(德)이 위에 알려져 발탁되어 정2품에 올랐습니다. 이제 물러가서 전리(田里)에서 늙기는 하나 오히려 소재지에 명하여 때때로 먹을 것을 보내니 세상이 다 영예로 알고, 탐오한 자가 염치를 떨쳐 일으킵니다. 오직 이 두 사람에게 특별히 은명(恩命)을 내리는 것은 한편으로 기구를 존중하고 한편으로 염치를 장려하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왕정(王政)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조윤손(曺閏孫)은 계모(繼母)의 상(喪)을 삼가지 않았으므로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다만, 사람의 나이가 70이상이 되면 이미 매우 쇠약하여 고기 음식이 없으면 반드시 버티어 갈 기력이 없으니, 예문(禮文)에 이른바 최마(衰麻)만 입고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조윤손은 스스로 나이가 늙고 기력이 쇠약하다고 생각하고, 고기를 먹는다는 글이 예문에 있는 것은 알았으나 고기를 먹는 것이 마지못하는 경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손을 마주하여서도 그렇게 하되 꺼리는 빛이 없는 듯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물의가 있어서 오래 폐기하고 서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이것은 세심히 생각하지 않았던 잘못일 뿐입니다. 조윤손은 양계(兩界)에서 늙어서 변방의 일을 잘 알고 한 번 변방의 장수를 지냈고 재차 서방 군사를 맡았으므로 또한 숙장(宿將)이라 하겠으니, 특별히 명하여 거두어 서용하여 변방의 일을 문의하시겠다는 위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고, 홍언필은 의논드리기를,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것은 예전의 선정(善政)입니다. 윤금손·송흠은 역대의 조정에서 벼슬을 지내서 지금의 기구(耆舊)로서는 이 사람들보다 앞선 사람이 없으므로 숭질(崇秩)에 올려서 늙은이의 남은 세월을 위로하려는 데에 성의(聖意)가 있으니, 조야(朝野)에서 이를 듣고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조윤손은 여러번 변방의 장수를 지내어 변방의 일을 오래 익혔으니, 전에 사람들의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나 어찌 숙장을 오래 폐기하겠습니까. 이제 거두어 써서 때때로 변방의 일을 하문하여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곧 예전에 이른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주도면밀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윤은보와 좌찬성 유관(柳灌), 우찬성 이기(李芑)가 의논드리기를,
“종성(宗姓)의 기공(期功)인 친척에 대하여 철조(輟朝)하는 법은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는데 그것을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이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친척을 친근히 하는 도리는 구경(九經)의 하나이니, 친척의 상(喪)에 있어서 어찌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서 슬픈 감정의 깊이가 다르겠습니까. 종성이라 하면 공주(公主)·옹주(翁主)도 그 가운데에 있으니, 신들의 의논으로는 《대전(大典)》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정의(情意)와 예의에 매우 합당하겠습니다. 다만 《대전》의 ‘치부(致賻)하고 조제(弔祭)한다.’는 글의 주(註)에 ‘종친(宗親)은 단문(袒免) 이상, 이성(異姓)은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과 그 아내’라 하였으나, 정조(停朝)는 종성의 기공만을 말하고 아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기공인 친척의 아내가 종성의 예(例)에 들지 않은 것이니, 철조할 수 없겠습니다.”
하고, 홍언필은 의논드리기를,
“우리 나라의 법전에 실린 철조의 제도는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에 있어서는 한홍(韓弘)·왕중서(王仲舒)의 상에 파조(罷朝)하였다고 쓰고 철조하였다고도 썼으며, 송(宋)나라 때의 부필(富弼)·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이름있는 재상(宰相)의 상에는 다 ‘시조를 철폐하였다.’고 하였으며, 고려에 있어서는 문관(文官)·무관(武官)의 1품·2품에 대하여 다 철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법을 제정할 때에도 반드시 이에 따라서 기친(期親)을 넣었겠으나, 예부터 철조라 한 것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정사를 보지 않았을 뿐이고 아랫사람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것을 어떻게 밝힐 수 있겠습니까? 송 태종(宋太宗)이 전숙(錢俶)·조보(趙普)에 대하여 철조한 것이 다 5일에 이르렀으나 애상(哀傷)하는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천하의 많은 기무(機務)를 닷새나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로 조(朝)를 칭했는데, 시(市)를 언급한 것은 고려 문종(文宗) 때에 요(遼)나라에 애사(哀使)가 옴에 따라서 비로소 ‘조시를 철폐하였다.[輟朝市]’고 하였고, 그 밖에는 시(市)에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조시를 멈추는[停朝市]’ 제도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느 때에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반드시 의거한 바가 있을 것이니, 다시 의논할 수 없겠습니다. 다만 철(輟)·정(停) 두 자의 뜻은 다를 것이 없을 듯합니다. 《대전》에 적힌 바에는 시(市) 자가 없으니, 억수(億壽)처럼 벼슬이 낮은 자의 상에 《대전》에 따라서 사흘 동안 정사를 보지 않는 것도 너무 많은데, 온갖 관사(官司)의 모든 일을 정지하고 저자의 교역을 폐지하기까지 하여 큰 애례(哀禮)를 쓰는 것은 정의로나 예의로나 매우 합당하지 못합니다.
공주·옹주는 골육 지친이니, 성정(聖情)의 사랑이 어찌 출가하기 전과 출가한 후가 다르겠습니까. 다만 상제(喪制)의 철조하는 일수를 조정에서 시행하는 데에는 높이고 낮추고 같게 하고 줄이는 구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조종 때에는 어떻게 처치하였는지 그 예(禮)를 반드시 살피고 삼가서 힘써 떳떳한 의리에 맞도록 하여야 뒷날의 비평이 없을 것입니다. 부회(附會)하여 억설(臆說)하는 것은 믿고 쓸 수 없으니, 전례와 일기(日記)를 널리 살피고 뭇사람의 생각을 모아서 정규(定規)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찍이 《예기(禮記)》를 살피니, 통상(通喪) 외에 사(士)의 상례(喪禮)를 많이 말하였으나 임금에 대하여서는 기상(期喪)을 상세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른바 기(期)의 상은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정의(情意)에 말미암아 예의를 일으켜 역대(歷代)에 각각 한때의 법이 있거니와, 이제 우리 나라의 성헌(成憲)에 퍼져 있는 것을 준수해야 마땅하니, 그 밖에는 의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왕자(王子)의 아내는 공족(公族)의 붙이가 아니고, 그 딸도 장차 남에게 출가하여 아버지의 집에서 나갈 자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은 존귀하기 짝이 없으므로 예(禮)도 아랫사람과 달라야 마땅하니, 이제 새로운 제도를 다시 세울 것 없겠습니다.”
하고, 윤인경(尹仁鏡)은 의논드리기를,
“조종 때에는 벼슬이 낮은 기친(期親)에 대하여 철조(輟朝)를 거행하지 않았는데, 어느 예(禮)에 의거하여 그렇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접때 법조(法條)를 바로잡을 때에 이 예를 논의하였었는데, ‘경전(經典)에 있는 것이니 쉽사리 폐지할 수 없다.’고도 하고 ‘근고(近古)에 없던 것이니 쉽사리 거행할 수 없다.’고도 하여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으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살피게 되어서는 철조하는 예가 또한 있었으므로 영안정(永安正) 때의 의논을 삭제하고 적지 않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일인데 전일 하의(下議)하셨을 때에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예(禮)는 인정에 말미암거니와, 정의와 예의를 참작하면 영안정과 영선군(永善君)은 같은 기친인데 거행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하였습니다. 벼슬에는 높낮이의 나뉨이 있을지라도 정의에 어찌 높낮이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한결같이 《대전》에 따라 시행하여 정의와 예의를 어기지 않아야 하니, 공주·옹주도 그 가운데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또 철조하는 예는 종성(宗姓)만을 위한 것이니, 기공(期功)인 친척의 아내까지 의논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좌참찬 권벌(權橃), 예조 판서 성세창(成世昌), 참의 심광언(沈光彦)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예문(禮文)을 살피건대, 기(期)로부터 아래로 제후(諸侯)는 끊고 대부(大夫)는 낮추었으며, 《대전(大典)》의 오복조(五服條)에는 ‘왕세자는 기친(期親) 이하에 대하여 복(服)이 없다.’ 하였으니, 기(期)의 복(服)을 왕세자도 오히려 거행할 수 없는데, 더구나 웃사람이 거행하겠습니까? 기복(期服)을 거행하지 않는다면, 기친이라 하여 조시(朝市)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친왕(親王)에 대하여서는 사흘 동안 철조하고 군왕(郡王)에 대하여서는 이틀 동안 철조한다.’ 하였고, 그 밖에 기공인 친척에 대한 철조의 예는 없습니다. 역대의 비문(碑文)이나 묘지(墓誌)를 보면, 다 대신(大臣)을 존중하여 그가 죽었을 때에 차마 시조(視朝)하지 못하여 철폐하였으나, 기공인 친척에 대하여 철조하였다는 글은 없습니다.
집안에서 친척을 친근히 하고 조정에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친척을 친근히 하는 정의는 귀천에 따라서 높이거나 낮출 수 없으나,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등급은 본디 조정에서 어지럽게 할 수 없으니, 친척을 친근히 하는 은혜로 조정의 높은 벼슬이 없는데도 사흘 동안 철조하는 것은 매우 정의와 예의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대전》의 법조(法條)는 《경제육전속집(經濟六典續集)》에 말미암은 것인데 선왕 때부터의 등록(謄錄)을 두루 살펴보아도 혹 의논을 거둔 때가 있기는 하나 거행한 적은 없고, 그 거행하지 않은 까닭은 등록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이제도 반드시 거행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조종 때에 거행하지 않던 예를 하루아침에 항식(恒式)의 예로 정하는 것은 마음에 매우 꺼림직합니다. 선왕 때의 실록(實錄)을 살피면 의논을 거둔 사연이 있을 것이니, 그 의논한 뜻을 안 뒤에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공주·옹주에 있어서는 등록에 ‘성종 때에 정의 공주(貞懿公主)·정현 옹주(貞顯翁主)가 죽었을 적에 위에서 분부를 내려 각각 하루 동안 조시(朝市)를 멈추었다.’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공주·옹주가 죽었을 때에도 사흘 동안 조시를 멈추는 예(禮)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공인 친척의 아내는 종성인 친척이 아니니, 철조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의득 단자(議得單子)를 정원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철조하는 일은 윤은보·유관·이기 등의 의논을 따르고, 윤금손·송흠·조윤손의 일은 윤은보·윤인경의 의논을 따른다.”
하고, 전교하였다.
“조시를 멈추는 일은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지는 않으나, 《대전》의 법은 조종의 구법(舊法)이니, 한결같이 《대전》에 따라서 하자는 의논이 당연하다. 거행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한 것은 유사(有司)가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니, 한결같이 《대전》을 따르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원전】 19 집 2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상업-시장(市場) / *역사(歷史) / *윤리(倫理)


[주D-001]사간(事干) : 사건에 관련된 사람.
[주D-002]조옥(詔獄) : 의금부의 별칭.
[주D-003]추관(推官) : 옥사의 신문을 맡은 관원.
[주D-004]포의(布衣) : 베옷. 벼슬 없는 사람이 입는 옷.
[주D-005]최마(衰麻) : 거친 베로 만든 상복.
[주D-006]숙장(宿將) : 경험이 많은 장수.
[주D-007]숭질(崇秩) : 높은 벼슬.
[주D-008]기공(期功) : 기년(期年:상복을 입는 기간이 만1년)·대공(大功:9개월)·소공(小功:5개월)의 합칭.
[주D-009]구경(九經) :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도리. 곧 자신을 닦고[修身], 어진이를 존중하고,[尊賢] 친족을 친근히 하고,[親親] 대신을 공경하고,[敬大臣] 뭇 신하를 돌보고,[體群臣] 뭇 백성을 사랑하고,[子庶民] 온갖 공장이를 오게 하고,[來百工]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고,[柔遠人] 제후를 어루만지는 것.[懷諸侯] 《중용(中庸)》 제20장.
[주D-010]《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약칭.
[주D-011]단문(袒免) : 단은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 문은 관(冠)을 벗고 머리를 모아 묶는다는 뜻. 단문이란 상복은 입지 않되 단문하여 슬픔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마(緦麻:상복을 입는 기간이 가장 짧아 3개월이며 상복은 비교적 고운 베로 만듦)에 버금하는 친족을 단문친(袒免親:줄여서 단문)이라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상장(喪葬)에는 종성(宗姓)의 단문을 고조의 형제와 증조의 사촌 형제와 조부의 육촌 형제와 아버지의 팔촌 형제와 자기의 십촌 형제라 하였다.
[주D-012]군왕(郡王) : 친왕에 버금하는 작위.
[주D-013]시조(視朝) :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봄.
拭疣集卷之二
 記類
道成庵記 a_009_087d


覆鼎山東有大洞。名曰牛耳。巨石當道。人不易行。而溪流暴激潺湲而下。延昌尉安公孟耼外家許氏之田莊。在其下。天順己卯。安公丁許氏憂。步陟洞南谷口岡巒起伏。風氣不凡。徘徊顧瞻。欲構精舍。間以是咨於貞懿公主。曰。吾亦惟之。駙馬言之是也。乃命相地卜龜。乃闢址得古壁一雙。面有聖殿二字。公與公主尤奇喜。卽定寺基。輸材購工。以009_088a其年十月肇役。公主懼其不給。命撤別室爲用。未踰年而告訖。無慮卅間。公憾其狹小。將欲增廣未果。而歲壬午。公仙去。公主益悲哽。及葬。安厝于許氏塋域之傍。從治命也。歲甲申春。公主因其舊制更長大。其材木間閣之墊隘者。闢而宏之。房舍之奧塞者。通而合幷之。礎砌之差退。門戶之低壓。皆爲擴新。僧寮之不足者。又添造之。摠九十餘間。別起大藏殿。親啓新編藏經。庋安其內。飾以丹雘。輝以金碧。非惟視公舊制而倍光。雖以三山諸刹而比之。皆莫能及。其金銀鑄成佛像及金字銀字寫經。又皆公主爲駙馬及駙馬先世祖考兼曁已身超生淨界永離三途之願也。及丁酉春二009_088b月。公主殂逝。嗣子僉樞安君桑鷄。哭泣盡哀。喪葬一循古禮。以寺爲先父母所刱。尤切感慕。以先考妣平昔所玩屛簇珍寶之類。亦不敢自私而盡納於寺。益邀僧或二七或三七。服內三年。未嘗輟法會。追福於公主及安公。益敬益誠。安君求寺記於余。余以老昧。不事文墨巳久。夫以一寺之始末。駙馬發意於其初者。欲爲願堂以種先祖考之善根也。公主踵成於其後者。承駙馬之意。因以薦駙馬生善地也。至於僉樞哀痛之誠。惻怛之懷。則又以歸依三寶。爲先父母心。可以超生淨域。一志不分。不知其他。是亦孝子之道也。世或以公侯富貴之家。徒以誇多鬪美。侈無用之佛氏。至以毀民彝滅009_088c天理。今安氏一門。爲婦則盡順於其夫。爲子則盡孝於其親。綱常倫紀。粲然明盛。其可以壞彝倫譏哉。其可謂不知言矣。若其繼自今居是寺者。晨昏作法。上以祝聖壽於無彊。下以推利澤於群生。則公主安公之意也。亦僉樞之意也。



 

 




 

 


 

 

三灘先生集卷之十四
 墓誌
世宗莊憲大王遷陵誌石文 a_011_510b


恭惟我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太宗恭定大王第三子也。元敬王后閔氏。以大明洪武三十年丁丑四月初十日壬辰。誕于漢陽邸。自幼聰明絶倫。兩宮奇愛之。長封忠寧大君。性好學。雖在疾病。猶不釋卷。世子禔多失德。永樂十六年戊戌夏。群臣請廢立。太宗以王有潛德。具奏于太宗文皇帝。冊爲世子。秋八月。太宗倦勤。禪位于王。遣使請命。明年己亥春正月。帝遣使錫命爲王。繼遣使賜宴。又賜太宗宴。敕曰。王能簡賢命德。俾宗祀011_510c有托。不唯王一家之慶。且爲王一國之人慶也。歲庚子。元敬王后不豫。避忌于外第。王步行扶輦。至有露宿之時。及薨。哀毀踰禮。是年。設集賢殿。博選儒雅。置二十員以備顧問。壬寅夏五月。太宗薨。致喪三年。宣德元年丙午。宣宗皇帝賜綵幣書籍。自是寵賚頻繁。史不絶書。丁未秋。始置宗學。悉令宗室子弟受學。其諸子未就外傅者。亦敎以義方。嫡庶之間。禮嚴恩篤。人無間言。戊申冬。制朝會樂。始於大會。不用女樂。我國歲貢金銀。然非土宜。常患不給。乃遣親弟表請。朝議難之。帝曰。朝鮮王必不欺。豈可強人所無哉。許免貢。婆猪江野人數犯邊。癸丑四月。命將討之。斥地置慶興等鎭。自麗季。咸吉道沿邊之地。爲011_510d野人所據。至是盡復舊疆。甲子。對馬一歧島倭入寇上國。又侵軼我濟州之境。王使人諭島主。主承命。執送賊倭六十二人。於是械獻京師。帝賜綵幣嘉獎。夫以倭奴之頑悍。屈於折札。野人之桀驁。熸於偏師。非恩信素孚而威靈遠讋。則何以得此哉。初世子禔避謗在外二十年。召還京。群臣切諫皆不納。事二兄友諸弟。極其敬愛。以至九族之親。亦皆敦睦。王英睿冠古。輔以聖學。自卽位以來。宵旰求治。禮樂刑政。制度文爲凡先世所未遑者。皆擧而力行。酌古今文質之中。修五禮儀注。述祖宗功德之盛。作定大業等樂。創制訓民正音。以二十八字。盡通天下言語。文字紐切之妙。人所叵測。損益累朝憲章。以成經濟011_511a六典。規模宏遠。條貫詳密。可爲萬世法程。尤洞曉天文律曆。修七政算內外篇。作諸儀象。所以授人時也。取資治通鑑諸家註釋。讎校纂輯。名曰訓義。又撰三綱行實,治平要覽等諸書。所以隆文敎厚人倫也。哀矜庶獄。則有恤刑之敎。慮民淫僻。則作戒酒之書。虛懷受諫。尊賢禮士。終王之世。大臣無有遭刑戮者。尤重親民之職。朝臣未經守令者。不敢陞授顯秩。三十年間。吏稱其職。民安其業。朝庭淸明。四方晏如。號爲東方堯舜云。妃昭憲王后沈氏。靑松世家。皇曾祖諱龍。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祖諱德符。相高麗恭愍王。再爲門下侍中。逮我恭靖王朝。爲議政府左政丞。封靑城伯。皇考諱溫。某官。皇妣安氏。領011_511b敦寧府事諡昭懿公天保之女。封三韓國大夫人。以洪武乙亥九月己未。生王后于楊州私第。少有聰慧貞淑之德。永樂戊子歲。后將笄。以選嬪于王。封敬淑翁主。敬事兩宮。篤承眷愛。后之進退。王必起立。其見敬禮如此。丁酉秋九月。改封三韓國大夫人。王之封世子也。進封敬嬪。及卽位。封恭妃。壬子正月。有司言中宮有美稱非古也。改封王妃。后正位中宮之後。益自謙謹。禮接嬪媵。甚得歡心。後宮有進御者。必加慰納。所生諸子。養之宮中。盡心撫育。同於己出。御膳進則必躬自省視。宮中之事。無敢專制。大小皆稟於上。亦未嘗爲親戚子弟求官與婚。儉以律身。慈以逮下。雞鳴進戒。述宣陰敎。011_511c配德並明。母儀一國。於戲。世宗有文王之聖。王后石有大姒之賢。故以能致關睢之化。螽斯之慶。本支百世。祚流無極。正統十一年丙寅春三月二十四日辛卯。以疾薨于外第。春秋五十二。王悼失良佐。以白衣素膳終三十日。夏六月。降冊諡昭憲王后。越五年庚午春二月十七日壬辰。王亦以疾薨于別宮。春秋五十四。在位三十三年。文宗率群臣上諡曰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廟號世宗。又表請易名。帝遣使致祭。賜諡莊憲。初。合葬于獻陵之西岡。以今上殿下卽位之元年己丑春三月初六日庚寅。移葬于呂興府治之北城山南向之原。實成化五年也。后誕八男二女。長文宗恭順大王。景泰三年011_511d壬申五月十四日薨。次世祖惠莊大王。成化四年九月初八日薨。次瑢。歲癸酉。謀不軌賜死。次璆。臨瀛大君。先遷陵二月卒。次璵。廣平大君。次瑜。亦謀不軌賜死。次琳。平原大君。與璵皆先卒。次琰。永膺大君。先遷陵二年卒。女長未䈂而卒。贈貞昭公主。次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耼。愼嬪金氏生六男。長璔。桂陽君。次玒。義昌君。次琛。密城君。次璭。翼峴君。次璋。寧海君。次璖。潭陽君。遷陵之年。唯密城在。餘皆先卒。惠嬪楊氏生三男。長。次玹。壽春君。早卒。次瑔。與以瑢黨貶死于外。淑婉李氏生一女。貞安翁主。適儀賓沈安義。尙寢宋氏生一女。貞顯翁主。適鈴川尉尹師路。宮人姜氏生一男瓔。亦以瑢黨貶死于外。文011_512a宗顯德王后權氏。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誕一男一女。男卽魯山君。女敬惠公主。下嫁鄭悰。司則楊氏生一女。敬淑翁主。適儀賓姜子順。世祖慈聖王妣尹氏。贈議政府左議政璠之女。誕二男一女。男長懿敬世子。早卒。次卽今上殿下。女懿淑公主。下嫁儀賓鄭顯祖。某官朴氏生二男。長曙。德原君。次晟。昌原君。瑢娶贈左議政鄭淵之女。生二男。長友直。次友諒。皆連坐死。臨瀛娶右議政崔承寧之女。生五男二女。男長澍。烏山君。次浚。龜城君。次淳。定陽君。次淨。八溪君。次澄。懽城君。女長中牟縣主。適兵曺參判居昌君愼承善。次淸河縣主。適司䆃正安友騫。側室生四男六女。男長涵。英陽副正。次潾。丹溪副正。次濯。輪山副011_512b正。次沃。玉川副正。女皆幼。廣平娶某官申自守之女。生一男。漙。永順君。瑜娶贈左議政崔士康之女。生一男。平原娶贈左議政洪利用之女。無子。永膺娶某官宋福元之女。生一女。側室生一男一女。皆幼。瓔娶密山君朴仲孫之女。無子。側室生一男。桂陽娶左議政韓確之女。生七男三女。男長澧。寧原君。次瀜。江陽君。次湜。富林都正。餘幼。女長適某官安繼편001。餘幼。側室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鄭從善。義昌娶某官金脩之女。生一男二女。男灝。蛇山君。女長適參奉辛禹鼎。次幼。娶戶曹正郞權格之女。無子。密城娶軍器副正閔承寧之女。生四男二女。男長誡。雲山君。次譡。春城君。次。遂安都正。次䛿。石陽都正。女長適某官011_512c某。次幼。壽春娶全州府尹鄭自濟之女。生一女。適某官沈順老。翼峴娶某官趙鐵山之女。生一男一女。男漬。槐山君。女幼。瑔娶朴彭年之女。寧海娶某官申允童之女。生一男一女。皆幼。貞懿公主生四男二女。男長安如獺。僉知事。次溫泉。副正。次桑雞。典籤。次貧世。參判。貞顯翁主生二男。長尹磻。僉知事。次磷。護軍。貞安翁主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崔孟思。

[편-001]宋 :
 希樂堂文稿卷之七
 碑銘
資憲大夫知中樞府事安公墓碑銘 幷序 a_021_415c


021_415d安出竹山。世爲官族。自文貞公諱克仁佐高麗。輸忠保節功臣。封竹城君。其門益昌。入本朝。公曾祖。西北面都巡問使諱淑老。祖。咸吉道觀察使諱望之。皆能述家業。人謂文貞有子孫。父良孝公諱孟聃。尙貞懿公。爲延昌尉。正統乙丑。公生。英廟外孫也。生而聰悟。稍長。已志學。澹然外紛華。居常左右圖籍。唯以文墨自娛。若詩若書於藝無不能。楮島有別業。自號楮島漁隱。嘯詠江山。蕭然如寒士。殊不知爲天潢之外派也。公諱貧世。字樂道。其021_416a庶幾不負名字之義者歟。成童始宦。補宣傳官。世祖知公警敏。任禁中傳命。出入敷白頗詳。隷超五階。擢拜同副承旨。齒尙弱冠有踰。未幾。進嘉善。秩參判工曹。移同知中樞。由漢城左尹。轉陞知中樞。階資憲。公持公主喪。哀毀疾作而卒。實成化戊戌冬十月也。享年纔三十四。上聞訃輟朝。賜賻祭有加。諡夷平。是年十二月丁酉。窆衿川三聖山北麓狼谷洞子坐午向之原。貞夫人李氏。星山顯系。領議政府事諱稷。是曾祖。中樞府事諱師元。是021_416b祖。守少尹諱繼賢。寔生夫人。夫人歿於正德庚辰。後公凡四十三年而爲壽七十有五。卜公塋右。公無適嗣。側出四男。曰胤誠,克誠,處誠,自誠。銘曰。
素貴而材。獨莫年。其嫠而耋。天難全。狼谷原子是宮。今其從永融融。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五
 第二十卷書
答黃仲擧 a_031_366b


031_366b蝟縮(韻會)蝟似豪猪。物少犯近則縮。
牧之詩中語卽與客攜壺上翠微之句。
呂上舍名世潤。字國華。(錦溪集)呂上舍回自溪堂。備傳起居。此亦慷慨有志。尋師千里。不易得也。
寧越寄畫寧越屬江原嶺西。郡名。柰城。○案仲擧贈鄭寧越天章詩。有彩筆寫烏絲之句。蓋能畫者也。卽此人。
楮子島在漢城府三田渡西。世祖以島賜貞懿公主
031_366c解由案東制。有解由之法。遞任者不出解由文書。則不許更授官。
續貂(晉史)趙王倫簒位。奴卒亦加爵位。每朝。貂蟬盈座。語曰。貂不足。狗尾續。
淵源錄卽伊洛淵源錄。朱子編次。
楊月湖所論疑淵源錄新增中所論。
致堂名寅。字明仲。胡文定子。五峯兄。見二十二卷答李剛而書小註。
邢和叔名恕。久從程子學。小人排斥程子。恕欲免其禍。一日於進講曰。程某斬作千叚。臣無恨焉。○(言行錄)崔見叔問。邢恕得罪於師門。而猶列於弟子。何也。先生曰。所以警後世學者也。
今所編錄理學通錄。
龜翁海鹽之除案周彦倫隱北山。後爲海鹽令。時而盛新除黃澗故云。
金大觀名圻
黃澗屬忠淸左道。郡名。黃溪。
난001○史傳文烈公史傳。
算本算學書名。
○惠詶(韻會)詶音售。以言答之曰詶。
岳翁案泰山有丈人峯。因號妻父爲岳丈。
溪源得地卽錦溪精舍。
拍浮酒船中(晉史)畢卓謂人曰。左手持蟹螯。右手持酒杯。拍031_366d 浮酒船中。足樂一生矣。
○昂鶴避雞羣(韓)張生學古談。軒鶴避雞羣。
閒散(韓)投閒置散。乃分之宜。
○四印索文卽迎鳳書院記。
郢正猶斥正。
臂珠事見十二卷答盧仁甫書。

[난-001] : 庚申

 

 

忍齋先生文集卷之三
 碑誌
有明朝鮮國通訓大夫宗親府典籤安公墓碣銘 幷序 a_032_360a


安氏出畿之竹山縣。有諱漢平。顯于麗季。官至贊成事。贊成生門下侍中諱社卿。侍中生文貞公諱克仁。032_360b文貞生察理使諱淑老。察理生咸吉道觀察黜陟使諱望之。觀察生孟聃。尙世宗大王女貞懿公主。爲延昌尉。延昌生敦寧都正桑鷄。都正生監察邦炯。監察娶文化大姓吏曹正郞柳麟童之女。生公。寔弘治癸丑八月二十四日丙戌也。公名從㙉。字而厚。生而秀偉。不類凡兒。正郞公無子。鍾愛公。托以後事。嘉靖乙酉。中司馬試。戊子。用門蔭。始授健元陵參奉。旋因事罷。癸巳。復拜世子翊衛司侍直。丙申。遷義盈庫直長。戊戌。陞主簿。選拜掌隷院司評。操守旣確。文以學問。裁決詞訟。無不當理。出爲井邑縣監。遭辛丑032_360c旱乾。民無以灌漑。公試鑿一池。有泉忽湧。民賴其利。老農相賀。因號爲靈泉。癸卯。秩滿。入爲北部主簿。升授禮賓寺判官。移漢城府判官。甲辰。復入掌隷院爲司議。是年冬。出爲臨陂縣令。乙巳。歲飢。湖南尤甚。公賑恤甚誠。至於隣邑飢氓。流入縣界。就食者相望。全活不可勝計。及公遞還。縣民將欲鐫碑頌德。公禁不止。竟遣家僮撞碎。而後乃已。其不欲近名。公之素性然也。己酉。入拜司饔院判官。庚戌。陞司導寺僉正。夏。出守醴泉郡。時朝廷分遣御史。往糾守令之救荒無狀者。御史擧劾失實。幾罷公。觀察使惜之。以公032_360d治狀聞。上卽降褒命。俾仍其任。適有兩岐麥生於郡。人以謂善政之應。壬子。上欲激揚時習。命選中外廉謹吏。廷議以公名聞。乃賜表裏以奬之。名足以副其實。公焉得終掩之乎。癸丑。移守錦山郡。又遭歲荒。賑恤之多。如治臨陂時。乙卯。入拜司宰監僉正。丙辰。又移宗親府典籤。丁巳五月而病。竟不起。卒於是月二十一日癸酉。享年六十有五。以是年八月十一日辛卯。葬于楊州東古州內城隍山午坐子向之原。公天性孝友。氣度豁如。忠厚內植。遇物以信。好善有誠。疾惡如仇。和於妻子而使自嚴畏。慈於婢僕而032_361a威不可狎。不事產業。於物無長。而栽花種竹。以寓淸遠之趣。睦於親戚。又喜賙急。如有孤子女無人收恤者。必資送以嫁娶之。貧不能自活者。必分俸祿以賑救之。此亦人所難也。奉公之勤。不遺細務。子愛平民而嚴於猾吏。欺誣屛息而民安其業。苟有事之害於民者。公輒欲更張。以便於民。人或言其不可。公奮曰。諉諸舊條而不敢變。拘以歲入而不肯減。則民隱無時可祛。而將焉用夫字牧者。然而居家薄於自奉。而在官能節調度。出宰四邑。庾廩輒盈。豈非古之所謂循吏者乎。中年多病。深味先聖愼疾之訓。專精醫藥。032_361b惡煩喜靜。絶迹干謁。不惟自守之高如此。聲蹟上徹。褒命屢及。而官不貴顯。其施不博。豈非命也歟。公娶申參贊公濟之女。生三男二女。長曰彥鈞。迪順副尉。次彥鎔。進士。次彥鏛。女長適弘文館典翰李友閔。爲一時名學士。次適生員姜惟慶。先卒。彥鈞娶牧使柳栽女。生二男一女。男曰景海。餘幼。彥鎔娶金錫良女。生一女。彥鏛娶宣敎郞成彥博女。生一男。典翰生一女。彥鎔兄弟力學好脩。期以名顯于世。天將昌公之後。而爲善者果無報乎。彥鎔杖而哭。徵銘於暹曰。欲以此掩諸幽。嗚呼。暹於公。親且舊。不可以不文辭。032_361c銘曰。
人欲貴顯。欲展厥蘊。與其未諧。寧專一郡。少試康濟。古人襟韻。莫榮於名。公不欲近。碑猶必碎。曰我職分。棲遲疾病。擬迹小隱。人競我退。窒而不慍。旣豐稟賦。何施之靳。眷彼隍麓。螭首。于後考德。盍來拭抆。
宋子大全卷二百十一
 行狀
司宰監僉正安公行狀 a_115_116b


公諱廷燮。字和叔。姓安氏。竹山人。高麗宣威秉義翊戴補祚功臣。三重大匡。門下贊成事,判戶曹事,延興府院君。諡襄良公漢平是其上祖。仍子與孫三世皆至大官。本朝淑老。官西北面都巡問察理使。其子望之。官咸吉道都觀察使。其子孟聃。世宗朝尙貞懿公主。封延昌尉。於公爲七世祖。高祖諱從坦。慶尙道水使。曾祖諱彥錘。司直。祖諱景濂。僉知中樞府事。考諱大楠。通川郡守。郡守才望卓殊。數奇不第。以從勳及二子追恩。累贈至吏曹判書。妣淸州韓氏。右議115_116c 政諡忠靖公應寅女也。公以萬曆辛卯五月二十二日生。生有異稟。甫晬遭倭亂。阿者抱走。與父母相失。屢危而獲全。家衆異之。韓夫人嘗疾篤。公方弄雛。亟取脫放。以祈冥應。仍露祝曰。願使母病速已。見者驚歎。韓夫人竟卒。忠靖公與其夫人李氏。哀而鞠之。十一歲。判書公繼室權夫人主梱。公親媚之。不以異顏有間。權夫人亦慈愛如己出。稍長。受業於守夢鄭公曄。鄭公奇重之。每事咨焉。不以後輩待之。弱冠。成進士。游國庠。士友推詡焉。未幾。光海政亂。幽廢母后。公遂抛擧業。結茅於交河漢麓山下。晦迹農圃。時115_116d 賊臣爾瞻方煽。其子大燁。托親黨義致款。除公參奉職。以試公去就。判書公慮禍。勉以暫屈。公對曰。彼將探我欲用之。其辱甚矣。今若出謝則非但失吾本心。他日門戶之禍。安知不甚於今日也。洪鶴谷瑞鳳。爲判書公慰賀曰。有子如此。他復何憂。自是洪公見公。必加敬歎。時中外大小。皆附廢母之議。其稍異者。輒目以扶護之流。公名亦在其中。人皆爲公危之。癸亥仁祖反正。母后復位。前時廢斥之士。一皆甄拔。諸公始欲除公六品官。不果。則遂拜慶安道察訪。未幾。丁判書公憂。丙寅。拜義禁府都事。値丁卯虜變。115_117a 從難于江都。以命拿帥臣于西路。時虜兵充斥。公間關賊藪。出入陳椽。卒以畢使。已而以事罷。敍爲水運判官。時畿輔新刳。漕卒尤殘。公盡心撫摩。使得甦安。漕卒立石頌之。以典牲主簿出監居昌縣。未久棄歸。居三年。以參上官復拜義禁府都事。尋罷。丙子大駕避寇于南漢城。除公戶曹正郞。公專掌糧料。大小皆服其稱職。亂定。經費無從可出。公承命馳往諸倉。收拾燼餘。稍備支兌。又收零碎。以哺道路之餓者。陞司僕寺僉正。判度支李公景稷。才公之爲。啓仍原職。未幾。拜高城郡守。己卯自免。旣敍復以戶曹正115_117b 郞。移儀賓都事。復還戶曹。而以眚被彈。諸公惜其橫罹。卽處以訓局郞。癸未。守醴泉郡。旋以土豪之誣就對。上察其冤。特原之。朝議欲令公仍赴郡。以治姦猾。銓曹旋已出代。故其議竟寢。而復以訓局郞見處。時有上逆變者。事甚危迫。公當夜挺身赴衛宸嚴。事定。錄勩以先入陣中終始扈衛八字。褒敍焉。尋以前任高城時負租。徒配楊州綠楊驛。乙酉蒙宥。丙戌。난001拜翊衛司翊衛。歷訓局郞,司宰監僉正。爲通川郡守。辛卯。以差員赴闕。時寧考新卽位。勵精圖治。公蒙賜對。上親問前後履歷及郡戶增減。田結多寡。115_117c 公進對纖悉。上善之。敎曰。益懋乃職。陛辭道病辭遞。未一歲。出守瑞山郡。乙未。病遞還家。丙申七月十三日卒。用從勳恩贈左承旨。其十月十日。溝合夫人柳氏墓于楊州松浪谷負巳之原。公始就韓忠靖學。忠靖課以小學。敎之以事親敬長之道。旣又以守夢爲師。則習聞前輩長者之雅致。幼失所恃。旣移孝以事權夫人。又推之以事權氏族黨。甚有意義。丙申。知病之不可爲。時權夫人就季氏任所。輒戀慕不自克曰。吾不得省覲久矣。仍涕泣不已焉。姻睦宗姻。不以戚疏而間焉。與凡人處。必接以和厚之色。其居官115_117d 也。淸愼嚴明。威制豪右。聞有孝行者。則必禮敬而嘉賞之。其已旌表者。則修其棹楔。不使頹倒。其守瑞山也。已踰六袠矣。其勤勵之操。愈不衰也。凡宰五邑炊無欲凊澹。若布素時。可去卽去。未嘗苟待瓜熟。性好山水。每以去官之暇。必縛椽淸勝之境。日與園翁溪友。漁釣忘機。間或索句逍遙而已。少與姜相國碩期,羅同知萬甲友善。及姜相國。爲王世子外舅。欲與公連婚。羅同知曰。安某必不肯矣。公之志操見信於名流者如此。蓋公以美好之資。從事儒賢。尤知小學之書切於日用。其敎子弟及其鄕學。必以爲先。有所115_118a 過失。必開此書。躬讀一過而警責之。至敎以善遇奴僕。則亦拈出陶彭澤之語。持身接物。其得於此書者爲多。嘗有人見公待人。雖少者必危坐致敬。謂公。曰無乃過恭乎。公曰。外翁韓忠靖公。位極台鼎。而益加謙恭。未嘗不危坐。我自少目擩。故不敢不如是也。蓋其始終云爲。不爲無本末者也。柳夫人自在室。淑行已著。旣行爲婦爲妻。皆思盡道。故尊章不見其慍色。毫末不累於君子。仁恩雖洽於手指。而警飭常切於子女。故姊妹娣姒。以至親表隣並。無有不敬愛者。籍晉州。高麗壁上功臣車達之後。議政府參贊澗之女。115_118b 生以萬曆壬辰七月二十一日。歿以崇禎辛未七月十八日。公有六男二女。長男紞。次縝。登文科。今爲東萊府使。次絢。次緝武科縣監。次績。次䌖生員。女長夭。次適崔汸。側室子綮。二女壻。權萬年,李商徵也。縝五男。相億,相萬,相眞,相泰,相英。後紞而爲公嫡孫者相億也。二女皆幼。緝一女。績二男。相益,相奭。相奭後絢者也。一女幼。崔汸三男二女。綮一男一女。權萬年一男三女。李商徵一男。內外孫曾並三十餘人。余自少習於韓忠靖嗣子淸寧君德及。淸寧嘗謂曰。君不見吾甥安某乎。眞佳士也。余固心存而不及見矣。115_118c 頃歲獲與東萊父子遊。益想公之典刑矣。今東萊以家乘一通。寄來請狀。義不能辭也。噫公之言行。可書者固多矣。最其中斅於家庭者有曰。我家貧親老。雖未免於祿仕。然自丁丑至今幾年。而未嘗屈膝於虜使之前。是則幸也。嗚呼。今世則不復聞此言矣。其不以相率而拜爲榮。而惟恐首之不下。尻之不高則幸矣。聖人尙以史闕文馬借人之及見今無。爲歎。今見公遺事。竊不勝慨然敬歎之心。謹據家乘。第錄如右。崇禎乙巳九月十八日。恩津宋時烈謹狀。

[난-001]略 : 略恐敍

 

西溪先生集卷之十三
 碣銘 十三首
戶曹佐郞安君墓碣銘 a_134_258a


府君諱廷煜。字明叔。姓安氏。竹山其望。其先自襄良,禧靖,文貞。比三世皆貴顯于高麗。至西北面都巡問察理使叔老。始仕本朝。再世而至孟耼。封延昌尉。諡良孝。實尙世宗女貞懿公主。世所稱八大君一公主者也。公主四子。仲曰敦寧都正桑鷄。世宗鍾憐公主諸子。皆親錫名。都正之生。公主以免聞而有鷄適鳴于桑故名。又再傳而至慶尙右道水軍節度134_258b使從坦。於府君爲高祖。曾祖忠武衛副司直諱彥錘。祖僉知中樞府事諱景濂。父通川郡守贈吏曹判書諱大楠。母貞夫人安東權氏。都承旨憘女。府君生以宣祖三十八年乙巳三月甲辰。年十四五時。侍親疾。躬執湯劑。終始不懈。仁祖元年癸亥。遭外艱。葬祭如禮。丙子。西寇猝至。府君時居高陽別業。而權夫人在京。府君屬家人避兵嶺東。身赴大夫人所。至城南門。避難者爭門。人馬塡塞相躪踐。府君棄馬脫衣。投身以入。至則大夫人已出而不知行所往。號泣道路以求之。遇于城東。從入海島。竟獲安全。家人之受君134_258c指避寇嶺東者。亦皆免。亂定後。復居西郊。性與人無迕。鄕里過從。不問老少貴賤。所遇必鄭重致意。談笑款洽。皆得其歡心。癸未春。李公景曾長銓。擧補繕工監役。其治職也。裁損浮宂。抉剔蟊蠹。西客之至。則視其嗜求而先後之。接應無缺。李公爲儐。善其能辦曰。吾之在銓。使得人皆如此。亦可謂不負責矣。鄭公太和。金公南重。前後爲儐。俱當府君在監時。亦皆嗟嘆不已。丙戌。遷歸厚署別提。移拜掌隷阮司評。決滯訟發吏。奸。致之法。群吏悚怵。丁亥。轉戶曹佐郞。曹於六官。爲最劇。調度繁委。會計棼錯。掌籌鑰而親其事者。134_258d皆在郞曹。府君旣負器幹。加以明察出入之數。銖兩無所失。判書元公斗杓以爲才委以衆務。所部之外。常兼五六事。戊子春。除大興縣監。治縣六年。嚴明善剖決。旁邑訟多歸之。修學校實府庫。制豪強禁巫覡。前後使者褒聞。適會御史出隣道者。受奸民之訐。反摘疵。用是就吏對。旋得釋。縣民追思立碑。是歲孝宗四年癸巳明年甲午。敍爲新溪縣令。在縣五年。使者以治狀上聞。而復以微事罷歸。民又爲之立碑。己亥春。除交河縣監。是年冬罷歸。辛丑春。敍拜掌隷院司評。夏。除稷山縣監。當官不爲姑息。不憚勞勩。事期134_259a就緖。大小之務。皆無闕。乙巳五月。以病歸。舊患風疾。至是再劇。屢辭始得解。府君事親孝。前後四爲邑。皆奉權夫人往。凡以爲悅養者。無所不致其極。及病歸。已不能言。而所居與大夫人異宅。每遇美味。必令送獻親所。家人不能喩。則指之以手。知其已送而後乃食。至六月晦。權夫人病猝殆。家人憂府君疾。諱焉。府君朝語侍者曰。昨夢如是。吾欲一往省吾親。雖語錯不可了。亦槩其所夢者不祥也。家人游辭以解。及至權夫人疾不可爲。則聚謀告喪當否。府君一皆不之知也。乃轉側夜深如睡者。少頃。忽驚起。流汗徧體。悲134_259b號哀泣。急求衣帶。欲奮身出門。府使君蒼黃擁扶。徐問所以。則涕淚交頤。連呼大夫人不已。因手畫形狀。以示傍人。其摧隕其痛迫。旣不忍見其容。又不可抑其情。家人計無如之何。促治駕將行。則夜已四鼓。而大夫人凶問到門矣。旣在喪側。癱瘓枯脫之中。叫號宛轉。見者揮泣。蓋其孝根於天。雖病已困劇。心未嘗斯須忘親。故其疾作則夢。其疾殆亦夢。嗚呼非夫。至性之感。詎能然乎。丁未四月三日。竟不起。享年六十三。是月有閏。以五月癸酉。葬于楊州松浪谷先兆之西。今上十年甲子十一月戊辰。改葬于沙堤洞負134_259c酉之原。去舊阡數里。府君和厚樂易。敦親急人。居家孝友。在官廉愼。其事伯兄尤嚴。每曰吾爲官。或不恪。必將累吾親與吾兄。凜凜者唯在是。洪州有大澤。貴主家欲占田其中。府君之在大興。受牒檢量。澤旁多民田內司人讕言無主。欲混入標內。府君曰。奪民業。怨歸上。不聽。主家竟不田其地。後在新溪。此主家又欲於界內占田。其割入民田。多於洪州。府君拒之如前。占田又竟不成。其不怵貴勢如此。配淑人平壤趙氏。學生廷說之女。生于乙巳十二月初八日戊申。卒于乙丑十月二十八日乙卯。享年八十有一。以是年134_259d十二月十日丙申。穿府君墓左。合祔焉。淑人柔和婉順。侍姑權夫人二十餘歲。無矢迕。寒燠飢飽。起居能節適而扶導之。子弟親屬在姑側者。日常數人。必潔其廚饌。不以匱乏形於言色。事府君。事無自專。屢從縣邑。不以苞苴累。郡邑屬隷苦樂。多係內治。淑人尤仁慈恤物。公私一視。故官下婢使。愛戴無已。去久而慕愈深。生一女夭。取伯兄第六子䌖爲嗣。䌖生才八日而淑人收之。其幼也。節其嗜而無所苟。因諸物而示之訓。其長而當官也。爲之辨事是非而喩詔之。䌖歷官至仁川府使。淑人皆就養焉。䌖娶郡守金弘錫134_260a女。亦無子。以其仲兄參判縝第五子相英後。生二男一女並幼。府使君來以府君墓銘屬世堂曰。與䌖舊。能詳先君終始。世未有如子。其無辭。敬據狀而序次之。系以銘曰。
雪筍氷鯉。精感者神。割指刲股。誠殫在人。父母其天。靡古靡今。靡古靡今。孝子之心。爾孝不匱。曷隨形敝。結乎方寸。動乎夢寐。嗟惟曰孝。孝思惟則。鑱石揭銘。用示千億。

 芝湖集卷之十三
 
英陵六大君傳 戊辰六月 a_143_573a


惟我世宗大王昭憲王后。凡有八嗣一女。一嗣文宗大王。二嗣世祖大王。而安平大君第三。臨瀛,廣平大君居其次。錦城,平原,永膺大君又居其次。女貞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聃云。蓋顯陵姿極賢聖。爲東方守文之良主。光廟天縱英武。著化家爲國之盛烈。若安平曁廣平,錦城。皆有間世才德。而廣平弱冠早歿。安平終罹禍綱。錦城又自扞王法。皆不143_573b得令終。誠可惜哉。
安平諱瑢。字淸之。號琅玕居士。以永樂戊戌生。天資俊邁。儀表英偉。博洽經史。兼通內典。文章夙成。筆法與子昂並肩。加有飛動意。其餘篆籕八法。無不精妙。又善畫圖琴瑟之技。嘗承命與諸學士。裒集唐宋八家詩以進。又手抄白樂天三體詩,梅聖兪宛陵集。以行於世。世宗聞公所居無堂名。乃賜以匪懈公。遂倩一時文人。歌詠其事。作武夷精舍於北郊。又臨西湖。起淡淡亭。藏書萬卷。往來遊賞。其文華風流。輝映當世。文人名士。無不樂與之遊。景泰元年庚午。143_573c華使倪謙司馬恂之在館也。偶見公戲書泛翁策三字。大驚異。更請筆蹟。公一夜揮灑累百紙以與之。兩使極加歎賞曰。當今天下善書者。陳學士某爲最。而若比此則其不及遠矣。仍作詩以謝。上命公曰。此詩誠可傳。不宜泯沒也。公將求和章於搢紳間而未及。無何。上賓天。是年秋。太監尹奉詔而來。爲言兩使旣還朝。獻以公書。帝亦覽而奇之。卽命入石傳布。又自以縑素受書而去。於是。公之藝能。聞於海內矣。金節齋,朴平陽,申高靈作詩文以侈之。二年壬申。文宗昇遐。魯山嗣位。當是時。王室孤弱。大臣皇甫143_573d仁金宗瑞等。受遺敎輔政。方燕居深念。欲遏禍亂。明年十月。世祖首誅左相金宗瑞。詣闕上急變。卽命招大臣宰臣。椎殺領議政皇甫仁,兵曹判書趙克寬,贊成李穰。又遣人殺尹處恭。斬吏曹判書閔伸。遣禁府都事愼先庚。押大君。送于江華。敎曰。奸臣皇甫仁金宗瑞等。交結安平大君瑢。廣植親黨。分據中外。陰養死士。潛輸邊郡兵器。以圖不軌。今奸黨皆已伏辜。瑢至親不忍加法。其安置于外。又誅兵郞李賢老。竄右相鄭苯于樂安。平安監司趙遂良于固城。忠淸監司安完慶于梁山。參贊許詡于巨濟。池淨于靈巖。李143_574a石貞于延日。旣已皆坐死籍沒。兩司又啓曰。瑢首惡不可共戴一天。請按法誅之。魯山初不從。翌日。左相鄭麟趾等。率百官更請。乃遣禁府鎭撫李伯淳賜死。而以陰有異志。築武夷精舍。欲與宗瑞等相從。多處淡淡亭爲罪。又添以帷薄不忍言之罪。語在國乘。公得年僅三十六。夫人延日鄭氏。兵曹判書贈左議政淵之女。有二子。長友直。宜春君。娶右議政南智女。癸酉竄珍島以死。次友諒。德陽正。娶沈氏女。亦坐死。俱無后。公所書英陵碑極其致力。而被禍後朝家磨去。故不傳於世。獨安孝公沈溫墓額八法在焉。外143_574b方樓觀寺刹尙多所書扁額。而其親蹟至今流傳。寸楮尺幅。無不爲寶。墨本之傳世者亦不一。而惟月精寺水陸文最活動。詩文尤散落不存。宗室朗善君俁。收拾若干篇。藏于家。錦城諱瑜。字某。其生年不能知。而我廣平大君。以洪煕乙巳生。正統丙辰年十二歲。與公一時入學。仍就宗學。以此推之。公年亦不過差少一二歲。公德器淸高。辭氣灑然。無一點塵累。娶右贊成全州崔士康女。爲夫人。承命出爲昭悼公芳碩之后。嘗築室於瑞雲坊華山下。鑿池種蓮。亭于其上。以承恩扁其額。而文孝公河演爲之記。安平死143_574c後越二年乙亥春。大臣六卿政院。以和義君瓔與崔承孫金玉謙。讌射于錦城第。又通平原大君妾楚腰纖啓流于外。仍收大君告身。又安置。內官嚴自治於濟州道死。時世宗後宮惠嬪楊氏。以保護魯山出入禁中。重被譴責。和義乃惠嬪之出。而又與大君及自治陰護魯山。故皆被罪至此。是年六月。世祖受禪。尊魯山。爲恭懿溫文太上王。夫人宋氏。爲懿德王大妃。時上王往往開昌德宮北牆。往來大君舊第。人疑韓明澮等欲置上王於隘地。而令力士圖之。以故。魯山舊臣。尤悲憤。密爲之謀。丙子六143_574d月。終有成三問等六臣之獄。死者甚衆。丁丑正月。以宗親政府之請。上命修理大君第。出置上王。嚴其防禁。又安置大君於順興府。六月。貞熹王后之娚。前藝文提學尹士昫。以百姓金永水言。告判敦寧宋玹壽與敦寧判官權完等謀逆。於是下玹壽,完于獄。廷臣言上王得罪宗社。不宜居京師。乃降封爲魯山君。出置寧越。大妃降封爲夫人。又追廢。顯德王后改葬。以庶人之禮。秋。大君陰與本邑府使李甫欽約。率邑人以復上王位。及事覺。以十月二十日。賜死甫欽伏法。玹壽等處絞。順興一邑之人。擧被143_575a誅戮。而和義之同母弟漢南君,永豐君瑔曁寧陽尉鄭悰。皆安置於外。瑔又朴彭年之女壻。悰乃文宗朝駙馬。玹壽夫人宋氏之父完。顯德王后之幾寸親也。悰後加罪以死。而魯山終亦不保。大臣鄭麟趾宗室讓寧大君禔等。前後皆請之也。大君有一子。曰孟漢。咸從君。妾子曰銅。噫。諸大君中平原。又早歿。惟臨瀛,永膺。以純謹無他。被光廟眷遇。得以天年終。平原諱琳。字某。娶南陽洪氏。府使利用女。無后。以齊安大君琄爲后。臨瀛諱璆。字獻之。庚子生。壽五十。諡貞簡。娶宜寧南氏。右議政智女。無后。又娶全州143_575b崔氏。奉禮承寧女。生五子二女。子曰澍。烏山君。浚。龜城君。領議政。淳。定陽君。淨。八溪君。澄。歡城君。女適領議政愼承善,參判安友騫。側出。又有四子三女。永膺諱琰。字明之。甲寅生。壽三十四。諡敬孝。初娶宋玹壽女。再娶海州鄭氏。參判忠敬女。皆無后。三娶礪山宋氏。同樞復元女。生一女。適綾川君具壽永。側出又有二子二女。廣平諱璵。字煥之。號明誠堂。諡章懿。性度寬洪。容姿豐美。聰明孝悌。善屬文。書法亦妙。挽強射遠。又能擊毬,音律。算數亦極精妙。此非子孫之言。蓋史家之評如是。其詳在卞季良,李季甸等所撰行狀143_575c誌文云。娶平山申氏。同樞自守女。生一子。曰溥。永順君。再登文科。兩策勳籍。卒諡恭昭。與龜城君浚並名一時。光廟嘗稱之曰。文永武龜。永順。乃余七代祖也。

 陶菴先生集卷三十三
 墓碣[三]
同敦寧安公墓碣 a_195_185c


余生乎衰季。幸而得古之人焉。如同知敦寧安公是195_185d已。公諱絿字子柔。竹山人。上祖曰高麗少府監濬。自後赫世勳庸。入本朝有延昌尉孟耼。尙英廟女懿公主。其子桑雞。英廟錫名。敦寧都正於公爲七代祖。曾祖諱應河訓鍊院副正。祖諱大梓贈左承旨。考諱廷燦贈吏曹參判。妣全州李氏。公以崇禎辛卯生。肅廟壬戌進士。癸巳除明陵參奉。調宗廟署奉事,繕工監直長。遷尙衣院別提,司憲府監察,刑曹佐郞。今上乙巳。除造紙署別提。遷儀賓府都事。丙午前參議兪拓基等上疏。言臣等村塾之師安某。訓誨蒙學。成就者衆。及第五人。生進八人。請依195_186a例褒賞。遂陞通政。卽日除五衛將僉知中樞府事。夏仲子相徽爲持平。以侍從親年七十。陞嘉善。旋除同知中樞府事。尋移同知敦寧府事。以敦寧已盡。上疏卽褫。庚戌以八十陞嘉義。甲寅六月十八日卒。此其履歷始終也。公年六歲。以母命受學於里中長者。一日長者有事。使公闕學。公曰奈母氏呵責何。長者曰以吾出辭可免。公曰母亦可欺乎。長者大驚服。嘗命賦菊。公卽對曰萬物皆蕭索。菊花獨開香。人目以安奇童。及就學于趙敎官逢源。同學多英儁。而趙最奇愛。公客有問。輒先擧以對。早孤廬于墓下。服闋。母以195_186b鄕居僻陋。挈還京第。公奉承慈訓。篤志爲學。晝夜勤苦。淹貫經史。文名藉甚。家在藏義洞。洞中多名卿鉅儒。而無不折節交游。嘗與數三同志。游大小白二山。以太白可避兵。聚穀措置。以備不虞。與近山數郡人士結社。名曰洛山契。平時則山人來洛者。洛之人濟接。亂則洛人將以山之人爲依歸。其設施經遠多類此。己巳聖母遜位。公約京外章甫叫閽。時吳陽谷諸公上疏極諫。被庭訊。人皆惴慄。無敢爲疏首者。進士成揆憲忼慨自當。或短之。公惡其沮敗。據義峻責。俄有一朝士來言無益而添禍也。公奮然大罵曰。吾195_186c輩本不避雷霆之威。此何等大義。而幺麽一朝士敢沮之耶。勿復言速出。一座變色。丙子丁內艱。哀毁踰制。鬚髮爲之盡白。家甚貧窶。殆有人不堪其苦者。而公獨怡然。一毫未嘗苟取於人。惟以書籍自娛。里中羣蒙多就學。公以爲敎育英才。亦一樂也。隨人惠訓。一以誠心。雖蔽厚魯甚者。必反復曉諭。至日昗而不知飢渴之在己。未幾多將就之材焉。庚寅有海警。上求言。廣之多士推公爲疏頭。公詣闕。首論保障之策。兼附平日所嘗憂者。疏凡數千言。上賜批嘉奬。始除明陵參奉也。不以衰老而自懈。事無巨細。必195_186d盡分而後乃已。余以禮曹參議詣陵。看審蠭峴路開塞。公着草履步隨。說便否甚悉。刑曹佐郞時。供劇勤於少年。剖决無滯。曹中推剛明。吾仲父歸樂公爲長官。訟有疑晦。輒歸之公。雖關勢家。不爲之拘。一斷以法。延昌尉嗣孫屢絶。終於爲庶。公建議擇同宗中一人以主宗祀。遠祖文貞公墓在平山。幾盡陵夷。公倡諸宗改築之。公又嘗痛副正公之節行未得旌表。又懼其湮滅不稱。詔其子曰此墓表未立之前。父母墓表亦不可爲。吾無餘年。汝其圖之。卒如其願。其爲先盡心。類如是者。相徽守榮川。奉公之官。公遊小白195_187a山。往往捨輿而徒。杖履輕快。三日不以爲疲。時年八十。人咸歎異焉。辛亥公還京。榮之八九耋老人各率其子弟。遮車相守。又輪守官門殆十餘日。公患之。乘曉跨馬獨行。及聞公喪。榮之官隷亦相率望哭。仁心所推。自然入人深者。此亦可見矣。公早以經世事功自任。常慨然有普濟天下之志。旣落拓不遇。則每以揣摩時措者。語當路。冀其裨補萬一。而議論平實。要之可用於今。遇會心人。輒開襟說天下事成敗。與夫歷代興亡。損益得失。若指諸掌。纚纚不窮。聽者忘疲。愛君憂國。出於至誠。聞國家政令一有不便。爲之終195_187b夕不怡。嗚呼。使公早見用則其忠猷博識。氣節文章。必能爲一代之名臣。下而受百里之寄。其發政施化。必有可觀。而顧乃固窮六十而始得一命。終不得少試負抱。豈非命也哉。夫人晉州柳氏。先公一年生。七十四卒。從公贈貞夫人。安貧好德。宜於君子。有二男一女。長相徵早歿。女適金岱壽。相徽文科司諫。縡素服公德懿。今於墓隧之文。不敢辭。銘曰。
窮當益堅。老當益壯。昔聞斯語。今見安丈。必行古道。不拘今俗。爲之在我。但當盡力。推此義理。何適不然。德鉅位細。不我者天。銘以昭之。有來億年。


 黎湖先生文集卷之二十九
 行狀
副正安公行狀 a_197_093c


公諱應河。字淸仲。安氏系出竹山。高麗時少府少監濬。其遠祖也。乃若門下贊成事延興府院君襄良公漢平。門下侍中竹山府院君禧靖公社卿。贊化功臣竹成君重大匡右文舘大提學文貞公克仁。西北面197_093d都廵問察理使淑老。世著勳德。史不絶書。至諱望之。入我朝。爲咸吉道觀察黜陟使。諱孟聃。尙世宗貞懿公主。封延昌尉。謚良孝。其第三子諱桑鷄。官敦寧都正。是爲公高祖。曾祖諱邦烈。北部參奉。祖諱伯增。豊儲倉主簿。皆早世。考諱士欽。中司馬。豊德郡守。娶唐津韓氏。大司憲淑之女。生公於隆慶己巳二月二十日甲午。公生而俊拔異凡輩。寬弘有度量。筆法造極。安氏故以能書聞。而公尤妙絶。其所倣松雪赤壁賦。賞鑑家以爲逼眞。公少績文。爲士人本業。而恃其長身赳赳。氣貌䧺勇。克有干城之風。甞隨豊德197_094a公之官盈德。兵使之廵到者與公邂逅而大奇之。謂曰此子材器眞無雙。他日必爲國虎臣。豈容但區區爲章句儒而止也。仍治送武具甚備。書勸又申申。公遂奉親旨而從事於韎韋跗注。一日。豊德公坐於縣樓。試令公馳馬。馬忽蹶而倒。公按馬首使不得動。定身而後復引起。馳驟之自如。豊德公問知其爲。莞爾曰。果多力也。初就辛卯式年科。以違格不中。壬辰倭亂。朝家以式年錄名。使之從軍。公隷於東道帥幕下。至原州。聞李鎰,申砬之敗。乃罷兵。公還訪庭闈於安峽避兵處。屬李鎰由安峽路。將赴行在。行收壯197_094b士以自從。公遂應募而西入見鎰。與語方略。鎰大悅。鎰所糾合壯士至五十餘人。雖喪師間行而軍法嚴明。逢倭輒殲。至一處見零倭之刈麥者。督勦之。公與五十人者馳赴之。斬獲方酣。而倭之大隊奄至。四面合圍。公苦戰得脫。相與追及鎰。鎰怒以失律。將盡斬之。臨刑。公獨仰天笑。鎰問曰。何笑也。公曰。公間關收召。遠赴行在。將有爲也。奈何以一失而遽誅五十餘人乎。鎰乃赦之。達于龍灣。鎰雖敗歸。以其宿將有重名。故行在人心倚以稍定。公每從鎰討賊。所到力戰。以軍功補守門將。尋登永柔別科。癸巳。爲宣傳197_094c官,備邊郞。不次擢用。旋陞六品。爲訓鍊主簿。仍帶備邊郞。甲午。出爲喬桐縣監。丁酉。入爲都揔都事。尋復爲會寧判官。時降倭分處列邑多作亂。所在官受密旨捕勦。而因不密。往往被害。倭之在會寧者厥數亦過二十。公設計爲宴享以娛之。酒酣樂作。伏發俱殲焉。有一倭覺之。拔釖直犯公。公於座席下。先已置釖拔之而起。對立數步許。倭飛釖向公。公應手以釖。迎而擿之。兩刃相薄。倭之釖砉然而落地。遂就而斬倭。一府之人。皆嘖嘖歎服。秩滿。還爲武兼宣傳官,備邊郞。庚子除洪州判官。翌年。還都捴都事。遷經歷。癸197_094d卯二月。除平海郡守。未赴而連丁內外艱。三年廬墓。鬚髮盡白。服闋。復自都捴經歷。轉訓鍊副正。時際宣廟末年。宣廟甞於行殿望見公。指問曰。彼乘駿馬美而長者爲誰。洪學士宗祿進對曰。臣之姪婿安某也。宣廟甚偉之。將大用。凡有擬望。必受點焉。未幾。宣廟昇遐。仍値昏朝。遂坎軻終身。公有沈香纓子絶好者。一名官見而欲之。要以除倅。公笑曰。我非納賂求官者。其人大憾之。觸處脩郄。公雖以弓馬出身而簡亢不附權貴。未甞爲卑屈態。而被忤當路。且爲儕友所憚。有妨於進取者如此云。章陵乃洪197_095a同知熹友婿。而洪又爲公內子之同氣也。以故甞於洪家得一侍食。章陵指磁椀之盛飯者曰。古有彈指而碎此者。今人亦能之乎。公笑曰。不須指彈。只手握亦可碎也。章陵固請之。公辭不獲。試握之。隨手碎如卵殼焉。章陵壯其爲人。亟稱之曰。當今多力者莫如安某也。至癸亥反正。仁廟素聞公名。欲必致之。南陽君洪振道,南昌君洪振文。卽洪同知之子也於仁廟爲姨親昆季。迭來侍公。乘間欲有告而公如不知也者。語及必搖手止之。故終不敢發口。及擧義日夕。洪同知帶釖而來。語公曰。兩兒以今夜從197_095b綾陽君。出去彰義門外。公亦速往。吾則往守本宮矣。公正色曰。此大事也。何言之晩也。日旣暮且無騎。吾不得往矣。惟公等勉之。公家在松峴。擧義軍過其前。具宏字公而。呼之出。公亦不應。以是仁廟大不悅。不復除職。甲子适變。大駕卒南廵。促裝追及。難平從還。丁卯之亂。自長湍墓下往。扈大駕於江都。還宮後復歸長湍。謝絶世故。日與野老。杯酒徵逐。懽然爭席。而一念惟以西邊爲憂。酒中每慷慨長吁。丙子亂起。一日夕。虜騎入長湍。擄府使以去。擧邑崩奔。公在村廬。忽聞其報大驚。欲往扈鑾。而道途旣梗。197_095c且未知大駕所向。不得已挈置家屬於朔寧山中。身則還湍。擬得行在聲息以爲去住計。會府使逃歸。馳見公問策。公曰。明府歸自陷賊。號令不行。屬邑兵無一至者。且無城池可固。若急卛邑兵之見在者。據險保守。諭集散亡。招募義旅。待西路勤王之師。與之合勢並進。破敗虜兵。脫吾君之重圍。則前日見擒之耻。有不足言。而臣子職分盡矣。公若辦此。老夫亦願從之。府使曰。謹奉敎。仍以明日送騎相報爲約。翌早有二虜騎馳來者。奴僕奔告請急避。公錯認爲府使所送。第戒以無㥘。公婿姜元祿適因事來。出197_095d見而曰。果虜也。請速去速去。公曰。爾可去矣。吾則不可苟避。姜強之不得。走去之。奴僕亦皆走藏。公獨張釖待虜。虜忽及門。已下馬推扉。公捨弓而持釖急出。時年六十八。皤然白髮翁也。虜見之。初無相害意。以手指駿馬之在廐者而欲解之。公奮釖斬之。又斫其後入者斷其臂。俄又有數胡猝至。見二虜之仆。從馬上亂射。公揷釖於扉。取弓相射。遂中箭而終。時丙子十二月二十六日也。奴僕之走藏者說其事頗詳。以其從林藪間覘視得之也。馬則掠去。釖留扉上而刃有缺折。盖其斫虜時値骨節而然也。明年春。卜葬於197_096a長湍江大位面沓洞豊德公墓後越一洞西邊山麓巽向之原。其後一鄕人士列公之節行。呈文于本府及本道。請上聞㫌閭。而有不悅公者沮格之。事寢不行。後以曾孫絿貴。贈訓鍊院正。公善事父母。雖在干戈戰闘之中。而甘旨之供。未甞乏絶。誠孝之篤。有足感人。夫惟敦於百行之源也。故氣䧺萬夫而斂然爲徐緩愼嘿。居家不大聲色。莅官一務寬簡。所至有聲績。甞檢烽西塞而措畫便否。點馬耽羅而著稱淸白。旣不以武夫自居而人亦不敢以武夫待之。最其大處卓立。義槩凜然。中心一定之後。雖利害交於197_096b前而不少趍避。始公歷官。皆在宣廟朝。而自昏朝來。廢蟄田野。引分自屛。苟使公有一毫怨誹之心。則其聞反正之擧。是必投袂而起。樂與靖社諸臣。同享富貴。而乃反逡廵退避。遜若不膺。以之晉塗不闢。沒世沈淪而無悔色。雖其不炳幾先。迷於天人去就之際者若可憾焉。而迹公所爲。其事甚高。亦自不害爲守經。後之君子於此必有能識之者。竊甞考觀國家敗亂。卛由於用人之失。盖當仁廟之時。達虜猖獗。西邊被兵必至之憂。迫在目前。誠使如公者得專閫外方面之寄。便宜行事。則必能敵王所愾。堵遏197_096c虜衝。國其賴之矣。而顧廢棄不齒。泯泯伏民伍中。未展長城之大材。徒然肝腦塗地。同之於匹夫溝瀆之經而人莫之知。嗚呼。可勝慨哉。可勝慨哉。盖公無官守民社之責。全身遠避無不可者。而惟其以一死自分。不惟斷之於心。家庭間所勉戒於子弟。亦不過如是也。故臨難效忠。不以社止爲間。一心報國。必死後已。其所成就。若是其卓卓。而彼不悅者猶且曲爲辭說。力沮公議。㫌表之典。亦不及於身後。不樂成人之美。何至是極耶。夫以杲卿廵遠之大節也而當時猶不能無異議。非眞卿之䟽。李翰之傳。則幾泯沒不197_096d白於世。噫。自古而然矣。於公亦何足深憾也哉。配淑人洪氏。南陽大姓。高祖諱泂。副提學贈領議政。曾祖諱彥輔。贈判書。祖諱曇。吏曹判書。考諱宗福。贈判書。妣杞溪兪氏。進士綸之女也。少公一歲。婦德甚備。事舅姑奉祭祀。俱可爲法。後公十一年而沒。葬于公墓東四里許良馬洞西向之原。盖以公墓將遷而不成祔。仍各窆焉。生一男一女。男大榟。贈左承旨。學於九畹李春元。有文而不第。丙子禍後。沈慟早世。女適敎官姜元祿。大榟三男。廷燧,廷燦,贈吏參,廷烠。廷燧三子四女。絖,紡,綍。金益爕,韓益明,鄭堥,李197_097a栻。其婿也。側室子素。廷燦三男。絿同知中樞府事。繪禮曹生貟。綽廷烠二男一女。維,綰。李枝蕃其婿也。絖子相衍,相衛,相行。紡子相德,相得,相。女朴祚新。綍子相律,相復。絿子相徵夭。相徽文科前持平。女金垈壽。綽子相衡。女辛準東。維子相後。綰子相徯。姜元祿一男二女。男聖擧。女韓相翊,李泰來。姜聖擧三男。命佑,命瑞進士,命琦。五女韓橚,柳佾,尹孝敎進士,李聖基,全陽守。樸韓相翊女金載華。李泰來繼子賓朝。其餘煩不能盡記。嗚呼。以若公義烈。旣不幸不上聞於朝。而沒且百年。墓道文字。亦尙寥寥無述。公之不197_097b遇。至此極矣。豈不重可悲歟。今同樞公以是啣痛。每恤恤乎若不能以終。日以其得於傳聞者。參諸家籍。裒成行錄一通。畀余爲狀德之文。余固不肖。不足相斯役。而顧與同樞公深有事契之舊。義不忍終辭以傷其孝心。且於公節行。實有景慕之至而不能自已者。玆敢就同樞公所爲文而略加櫽括之。以復於同樞公如右云。

悔軒集卷之十七
 墓碣銘
慶尙水使安公墓碣銘 幷序 a_211_508b


昔我肅考。御世用人有法。如武選閫寄。亦多俊特之人。故慶尙水使安公諱績。字煕叔。乃其一也。歿旣四十餘年。墓道無紀述。公之少胤府使相五。謁銘于余。不可辭。按其狀。竹山之系。始自高麗少府少監諱濬。歷三世。有諱漢平。補祚功臣三重大匡門下贊成事。延興府院君。謚襄良。其後世有大官。入我朝。諱211_508c叔老。西北面都廵問使贈判書。諱孟聃。延昌尉。尙世宗女貞懿公主。謚良孝。於公爲八代祖也。高祖諱士欽。豐德郡守。曾祖諱應洪。遊栗谷,牛溪兩賢門。以行誼見稱。祖諱大楫。贈執義。考諱廷煒。贈承旨。妣贈淑夫人全州李氏。宗室德源君厚生之後。經歷晫之女。公以孝廟甲午十一月二十七日生。自幼聰俊異凡兒。早孤。事太夫人孝。於伯氏則愛而恭。人稱其穉年至行。旣長。爲親屈志投筆。丙辰中武科。甲子。拜宣傳官。未幾。遭艱。公持制如禮。以祿不及養。爲終身之痛。丁卯。復拜前職。己巳。遷訓鍊主簿。庚211_508d午。遷都摠都事經歷。辛未。陞訓鍊副正。癸酉。除肅川府使。未赴。遞旋復舊踐。俄陞全州營將。丙子。除寶城郡守。未久。病遞。丁丑。除忠州營將。己卯。爲五衛將。庚辰。除博川郡守。壬午。爲內乘。癸未。除金城縣令辭遞。甲申。拜內禁衛將。因博川時微眚。被徒配。乙酉。復拜內將。丙戌。除鐵原府使。丁亥。遷所江僉使不赴。戊子。除宣川府使。庚寅。陞慶尙水使。未受符。以閏七月二十一日。卒于京第。享年五十七。九月。葬于溫陽天德山下。庚申。移窆于局內癸坐之原。配贈貞夫人全州李氏。學生日新之女。生於某年某月某日。歿於某211_509a年某月某日。與公同岡而異穴。繼配貞夫人南原梁氏。通德郞益壽之女。生於某年某月某日。歿於某年某月某日。墓在水原淸溪洞巽坐之岡。李夫人有三女。女長適李鳳祥武將參判。出補湖閫。殉節於戊申之亂。次適士人李夏寅。次適士人柳昶。梁夫人繼子相漢武科府使。晩育一男相五。武科今府使。以二品階。推恩贈公兵曹參判。側室有二男一女。男相禹,相稷嘉善。女適金道澈。相漢一男一女。男允福郡守。女婿府使柳世復。相五一男允奭及第。相禹一男允亨。相稷一男允壽。允福二男二女。男宗奎,宗翼。女婿211_509b進士洪彥岳,閔光運,柳世復。繼子䌖宣傳官。女婿府使李潤德。宗奎一男。宗翼一男二女。皆幼。閔光運一男孝大。餘不記。公姿貌豐而秀。器宇整而恢。以孝兒三釜之願。爲兵家六韜之學。妙年發身。望屬建牙。平時矢心。義在裹革。治邑民則癃殘蘇。御禁旅則驕悍慴。此可以槩公實蹟。而至若飭身於紛競之場。律己於華腴之地。尤爲公可觀之美節。惟我先君子。嘗許公以幕府之勝流。入銓必先汲引。余於昔日。亦嘗覿公之儀。時余弱冠。何足以知公所有。而其爲武望中傑然人。盖可想已。噫。以余述公之碣。有似乎白少傅211_509c之銘。吳饒州叙其所知而已。若其感念疇昔。實有倍於古人者矣。銘曰。
竹山之閥自勝國。勳業文章世爀奕。有孫負氣彎五石。迹則介冑志縫掖。未必孝經內行篤。儻來之物耻苟得。五邑兩鎭亦云薄。民卒皆頌多茂績。環堵蕭然謹而約。畀閫何晩疾俄革。用未究才公議惜。兒能紹先恩贈渥。嘗稱曰賢吾翁客。用是爲銘載隧石。
211_509d悔軒集卷之十七

江漢集卷之十六
 墓誌銘
通訓大夫淸州牧使,淸州鎭節制使安公墓誌銘 幷序 a_224_339a


故世子侍講院文學李公。嘗謂景源曰。瑋有友三人。其一金君山。其一申正甫。其一卽安朝卿也。君山224_339b正甫。先我死。獨朝卿與余往還。余朝暮又將死矣。將托孤於朝卿。朝卿必不負余矣。李公旣卒。景源復從安公游。聞室中有讀書聲。問之。乃李公之孤也。安公泣曰。余敎李公之子。能有立。則歸見李公可無愧也。景源於是知李公之能有友也。安公諱宗海。朝卿其字也。曾祖諱縝。禮曹參判。祖諱相億。游文正公宋先生浚吉之門。以儒學。徵爲世子翊衛司副率。父諱允廸。贈承政院左承旨。公幼。侍副率之側。尺寸不敢有所違。副率喜曰。眞順孫也。肅廟四十一年。擧進士。今上二年。補光陵參奉。中貴人嘗求檀木。224_339c公以爲陵樹嚴重。豈爲宦者擅伐之邪。遂格不許。中貴人恚而上聞。上曰。陵官擧職。勿問也。遷濟用監副奉事。由尙瑞院副直長。陞司䆃寺主簿。改刑曹佐郞。未一月。司僕寺辟爲判官。會有言者。論其驟。公卽棄去。久之。拜漢城府判官。丁大夫人憂。服除。薦監公山縣。公於湖左最難治。歲又大饑。閭里蕭然。無人煙。公歔欷曰。民將盡矣。乃爲饘粥。集饑民。躬自饋之。時大疫。死者相續。而公出入癘氣中。視賑自若。自冬至夏。所濟活。凡九千餘口。賑旣畢。悉出粟米贏餘者。以予饑民。或曰。羡餘留縣中。別備兵荒可也。公曰。224_339d別備以干時譽。是余羞也。居一年。坐漕後期。下獄。免。尋授工曹正郞。是時。國中連三歲大饑。朝廷爲置賑民所。命朴文秀主其事。又選郞僚之可以任事者。公在選中。以勞進監錦城縣。與統禦使有親嫌。未赴而免。已而。出守沃川郡。居未幾。正言洪啓裕以前事劾公。上問筵臣。遂無實乃寢。自沃川歸。旣三年。以義禁府都事。入刑曹。爲正郞。陞司䆃寺僉正。坐事罷。明年。起拜司憲府監察。辭不就。已而。出守沔川郡。郡有豪黨。武斷州閭。公曰。此民之蠧也。乃以法痛繩之。豪黨切齒。公在沔川凡三年。陞淸州牧。爲獻納權224_340a賢所劾。及旣歸。御史尹得載。過沔川。聞豪黨言。啓論之。公遂繫獄。命觀察使按其事。卒不得。以微罪。配龍田驛。五月。釋還。自是屛居。不復仕。以甲戌八月二日。卒于家。享年七十四。始公疾革。謂其子曰。吾聞死生有命。何以醫爲。遂却藥。三日而終。十月某日。葬于楊州海村之原。公爲人夷曠疏亮。有遠慮。容貌闇如也。其事父母以孝稱。與弟同居。弟已死。爲鞠其孤。甚有恩。樂易愛人。未嘗爲深刻之言。然賊臣柳鳳輝弟爲公友婿。公嘗言鳳輝逆節最著。豈可以友婿之兄。不請討乎。乃與太學生鄭楺等。上疏論鳳輝之罪。人224_340b以爲難。安氏之先。竹山人。良孝公諱孟聃。尙莊憲王女貞懿公主。封延昌尉。公其後也。公配曰淑人坡平尹氏。杆城郡守夏敎之女。生子二人。長曰栻。生員。次曰杓。弘文館修撰。女四人。長適府使金述魯。次適佐郞黃公。卽景源叔父諱瓛。次適趙浚慶。次適進士南公輔。內外孫曾若干人。景源少時。嘗從公登飛來峰。公甚樂。已而。酒酣誦李公飛來峰詩。泫然泣下曰。吾游於此。而李公已亡矣。今誦其詩。如見其爲人也。因爲景源道李公風流甚詳。嗚呼。朋友道喪久矣。又安能恤其遺孤。至死而不忘哉。李公旣死。公悲之如224_340c喪兄弟。豈其心篤於人倫者邪。銘曰。
義能存朋友之孤。惠能振㷀獨之饑。剛能絶姻婭之親。莊能斥宦寺之私。而蜚語乃反中傷。庶百世考玆銘詩。

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紀年兒覽[下]
【修】本朝世年紀 附故實。功臣。配享。相臣。 a_257_450a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諱旦。字君晉。初諱成桂。字仲潔。號松軒。溫良好古曰康。聡明睿智曰獻。太宗庚辰上號啓運神武。肅宗癸亥。加上謚正義光德。乙亥 元順帝至元元年。高麗忠肅王後四年。十月十一日己未。誕降于永興黑石里。仕高麗。官至門下侍中。壬申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登寶位于松京壽昌宮。戊寅九月。傳位于定宗。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난001在位七年。在上王位十年。春秋七十四。有晬容三本。一本奉安于京城永禧殿。一本奉安于全州慶基殿。一本奉安于永興璿源殿。八男五女。健元陵난002在楊州儉巖山。神道碑誌257_450b文。幷權近撰。碑陰記。卞季良撰。
承仁順聖神懿王后韓氏。籍安邊。密直副使贈門下府事安川府院君卿女。大祖卽位初謚節妃。丁丑 元順帝至元三年。高麗忠肅王後六年。誕降。高麗時封元信宅主。辛未 皇明太祖洪武二十四年。高麗恭讓王三年。九月二十三日。昇遐于潛邸。春秋五十五。太祖壬申。追尊。誕 六男二女。齊陵。在豊德栗村。神道碑權近撰。
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난003籍谷山。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允成女。太祖卽位初。冊封顯妃。顯宗己酉上謚祔廟。丙子 皇明太祖洪武二十九年。我太祖五年。八月十三日。昇遐于移御所。判內侍府事李得芬家。二男一女。貞陵。丁丑初葬西部皇華坊。太宗己丑。移葬楊州沙河里。有表石。
257_450c嗣定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二。
嗣太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五。
一男鎭安大君芳雨。太祖潛邸時卒。追封大君。謚靖懿。○娶忠州池氏。贊成事奫女。生二男一女。
三男益安大君芳毅。錄開國定社功臣。階大匡。贈爲韓公。謚安襄。配享定宗廟庭。娶鐵原崔氏。知杆城郡事贈贊成仁㺶女。生一男二女。
四男懷安大君芳幹。庚辰朴苞之亂。安寘卒。○娶驪興閔氏。判書贈贊成璿女。再娶密陽黃氏。判書亨女。三娶金浦琴氏。正郞仁排女。生四男一女。
六男元尹芳衍。登高麗文科。拜成均博士。○太祖潛邸時卒。贈元尹。○以上。神懿王后誕生。
257_450d七男撫安大君芳蕃。戊寅鄭道傳之亂。被禍。○初封君。贈楸成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恭順。改謚章憲。○娶開城王氏。高麗宗室歸義君瑀女。有繼子。
八男宜安大君芳碩。初封世子。戊寅鄭道傳之亂。被禍。贈邱原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昭悼。○娶富有沈氏。大提學孝生女。有繼子。以上。神德王后誕生。
一女慶愼宮主。駙馬上黨府院君李薆。錄定社佐命功臣。景肅公。生一男。○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善公主。駙馬靑原君沈琮。生一女。○靑松人。父左政丞定安公德符。○以上。神懿王后誕生。
三女慶順公主。駙馬興安君李濟。戊寅罪死。錄開國功臣。景武公。配享太祖廟庭。有繼子。○星州人。父同知密直仁立。○神德王后誕生。
257_451a一女宜寧翁主。駙馬啓川尉李䔲。生四男三女。○開城人。父判司水監事開。
二女淑愼翁主。駙馬唐城尉洪海。生三男一女。○南陽人。父判中樞彦修。
故實 壬申開國。
甲戌定都漢陽。建宗廟。入耆社。仍命文臣正二品。年七十。皆參入。
丙子。築都城。有八門。周九千九百七十五步。征對馬島。遣金士衡南在等。征之。
丁丑。招安女眞。遣李之蘭按撫。皆爲編戶。
戊寅。建文廟。鄭道傳之亂。道傳與南誾。挾芳碩爲亂。伏誅。北狩咸興。翌年。始回鑾松京。
錄勳 錄開國功臣。壬申。以奮義開國。錄益安大君芳毅等五十六人。○十七人。後罪削。
257_451b配享 領議政趙浚。文忠公。 義安大君和。襄昭公。太祖庶弟。 領議政南在。忠景公追配。 興安君李濟。景武公。罪死追配。 靑海君李之蘭。襄烈公。 判中樞南誾。剛武公。在弟罪死追配。 吏曹判書趙仁沃。忠靖公。
相臣 裴克廉。壬申。以前朝侍中。仍拜左侍中。 趙浚。前朝文科壬申。拜右侍中。至領議政。 金士衡。壬申。拜右侍中。至左議政。 鄭道傳。前朝文科。甲戌管都評議。戊寅罪死。 權仲和。前朝文科。甲戌。判都評議。至領議政致仕。 沈德符。丁丑。以前朝侍中判都評議。至左政丞。 柳曼殊。戊寅。判都評議。同年罪死。
皇明惠宗建文元年己卯。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諱曔。字光遠。初諱芳果。敬事供上曰恭。寬樂令終曰靖。○肅宗辛酉。追上廟號。加上謚懿文莊武。丁酉 元順帝至正十257_451c七年。高麗恭愍王六年。七月朔日。誕降于咸興歸州洞。仕高麗。
官至將相。太祖壬申。封永安君。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八月。冊封王世子。九月受禪。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 十一月。傳位于太宗。난004己亥 皇明成祖永樂十七年。我世宗元年。九月二十六日戊辰。昇遐난005。在位二年。在上王位十九年。春秋六十三。有 十五男八女。厚陵난006在豊德興敎洞。誌文卞季良撰。有行狀及表石。
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金氏。籍慶州。○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天瑞女。○定宗卽位。初封德妃。太宗卽位。尊號順德。○肅宗辛丑。追謚溫明莊懿。乙未 元順帝至正十五年。高麗恭愍王四年。誕降난007。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冊封德嬪。尋進封王妃。壬辰 皇明成祖永樂十年。我太宗十二年。六月二十257_451d五日。昇遐난008。春秋五十八。無嗣。厚陵난009與大王陵。同原
一男義平君元生。池氏出。○娶鐵原崔氏。監務致崇女。生五男三女。
二男順平君群生。奇氏出。謚忠簡。○娶淳昌薛氏。判司宰監事存女。生二男二女。
三男元尹義生。娶南陽洪氏。司直宿女。無后。
四男宣城君茂生。池氏出。○娶迎日鄭氏。參議宗誠女。生一女。後娶安康金氏。上護軍仲約女。生一男。
案文氏出。五男從義君貴生。贈君。○娶楊口柳氏。正贈贊成守濱女。後娶海豊張氏。主簿均女。有繼子。
六男鎭南君終生。李氏出。謚夷簡。○娶宜寧南氏。上護軍深女。生四男一女。
案淑儀尹氏出。七男守道正德生。娶礪山宋氏。府使繼性女。生三男一女。
257_452a案尹氏出。八男林堰正祿生。娶高靈朴氏。少尹溥女。生一男二女。
九男石保正福生。娶原州金氏。判中樞戴敬公連枝난010。生三男五女。
案池氏出。十男德泉君厚生。謚積德。○娶長水李氏。長川府院君良厚公從茂女。生四男五女。
案池氏出。十一男任城君好生。贈君。○娶平昌李氏。郡守繼童女。有繼子。
案池氏出。十二男桃平君末生。娶龍川李氏。府使守綱女。後娶全州崔氏。司直洙女。生一男一女。
案尹氏出。十三男長川都正普生。娶和順崔氏。郡事自海女。生四男一女。
案淑儀奇氏出。十四男貞石都正隆生。娶忠州權氏。直長敦女。生三女。
案淑儀奇氏出。十五男茂林君善生。奇氏出。謚昭夷。○娶南陽洪氏。司正興善女。生二男四女。
按璿系作池氏出。一女咸陽郡主。奇氏出。○駙馬知敦寧朴賡。生一男。○密陽人。父少尹得中。
257_452b按淑儀奇氏出。二女淑愼翁主。駙馬判敦寧良平公金世敏。生四男四女。○慶州人。父都觀察使謙。
三女德川郡主。駙馬行江陵府使邊尙服。生三男二女。○原州人。父都捴制頤。
四女高城郡主。駙馬知中樞金澣。生三男三女。○安山人。父蓮城君威靖公定卿。
五女祥原郡主。駙馬司直趙孝山。生一男一女。○平壤人。父義方。
六女▣▣郡主。駙馬司直李希宗。生三男一女。
七女仁川郡主。駙馬行府使李寬植。生五男三女。○全義人。父少尹成幹。
八女咸安郡主。駙馬知敦寧李恒信。生一男。
故實 己卯。還都松京。
庚辰。朴苞之亂。苞誘懷安大君芳幹。擧兵作亂。苞伏誅。芳幹安寘。
錄勳 錄定社功臣。戊寅。以平鄭道傳南誾之亂。錄義安大君和等二十九人。○十一人。後罪削。
257_452c配享 益安大君芳毅。安襄公。太祖朝大君。
相臣 成石璘。前朝文科。己卯。拜右政丞至領議政。 李舒。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再致仕。再還卜。 閔霽。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左政丞。 河崙。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致仕。
皇明惠宗建文三年辛巳。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諱芳遠。字遺德。敬事供上曰恭。純行不爽曰定。世宗卽位。上號聖德神功。肅宗辛酉。追上謚난011睿哲成烈。丁未 元順帝至正二十七年。高麗恭愍王十六年。五月十六日辛卯。誕降于咸興歸州洞。壬戌 皇明太祖洪武十五年。高麗辛禑七年。擢高麗進士試。翌年癸亥。登文科。官至密直司代言。太祖壬申。封靖安君。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二月。冊封王世257_452d子。十一月。受禪于松京壽昌宮。戊戌 皇明成祖永樂十六年。八月。傳位于世宗。壬寅 我世宗四年。五月十日丙寅。昇遐난012。在位十八年。在上王位四年。春秋五十六。有 十二男十七女。 獻陵난013在廣州大母山。神道碑卞季良撰。有行狀及碑陰記。燕山丙辰。定世室。
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난014籍驪興。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霽女。太宗卽位。初封靜妃。乙巳。元順帝至正二十五年。高麗恭愍王十四年。誕降난015。壬申。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我太祖元年。封靖寧翁主。庚辰。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冊封貞嬪난016。辛巳 我太宗元年。正月。追封王妃。庚子 皇明成祖永樂十八年。我世宗二年。七月十日。昇遐난017。春秋五十六。誕 四男四女。獻陵난018與大王陵同原。誌文卞季良撰。
按成宗朝始建昌慶宮此昌慶宮則新刊璿譜恐誤
257_453a嗣世宗大王。元敬王后誕生。序居第三。
一男讓寧大君禔。初封世子。戊戌。以敗德降封大君。謚剛靖。○娶光州金氏。光山君贈左議政漢老女。生三男四女。
二男孝寧大君初名祜。謚靖孝。●娶海州鄭氏。贊成贈左議政貞度公易女。生六男一女。
四男誠寧大君階大匡贈卞韓公。謚昭頃。○娶昌寧成氏。判院事贈左議政僖靖公抑女。有繼子。
一女貞順公主。駙馬淸平府院君李伯剛。生一女。○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貞公主。駙馬平壤府院君趙大臨康安公。生一男四女。○平壤人。父領議政文忠公浚。
257_453b三女慶安公主。駙馬吉昌君權跬齊簡公。生二男。○安東人。父贊成文忠公近。
四女貞善公主。駙馬宜山君南暉昭簡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捴郞景文。
一男敬寧君金氏出。謚齊簡。○娶淸風金氏。參議贈贊成灌女。生四男。
二男諴寧君䄄。信寧宮主辛氏出。初封恭寧君。○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一女。
按信寧宮主辛氏出。三男溫寧君䄇。謚良惠。○娶順天朴氏。副正贈贊成安命女。有繼子。
按貞嬪高氏出。四男謹寧君禯。謚僖懿。○娶河陽許氏。觀察使贈贊成之惠女。生二男六女。
按安氏出。五男惠寧君祉。娶茂松尹氏。司直贈贊成汴女。生一男二女。
按淑儀崔氏出。六男煕寧君謚夷靖。○娶淳昌申氏。僉知贈贊成淑女。生一女。後娶平山申氏。士廉女。生三男。
257_453c按崔氏出。七男厚寧君謚僖悼。○娶平山申氏。令贈贊成敬宗女。生一女。
八男益寧君淑善翁主安氏出。謚昭剛。○娶雲峰朴氏。節制使贈贊成從智女。生一女。
一女貞惠翁主。懿嬪權氏出。○駙馬雲城府院君朴從愚。錄貞難功臣成烈公。無后。○雲峯人。父贊成惠甫公信。
二女貞信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鈴平君尹季童。生一男一女。○坡平人父兵判向。
三女貞靜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漢原君趙璿昭懷公。生一男一女。○楊州人。父領中樞文剛公末生。
四女淑貞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日成君鄭孝全行判書。生二男四女。●延日人。父工判鎭。
257_453d五女昭善翁主。駙馬柔川尉邊孝順。生一男一女。○原州人。父監察尙周。
六女淑惠翁主。昭惠宮主盧氏出。○駙馬星原尉李正寧章節公。生三男一女。○星州人。父左尹師厚。
按信寧宮主辛氏出。七女淑寧翁主。駙馬坡城君尹愚。生一男一女。○坡平人。父司諫須彌。
按安氏出。八女昭淑翁主。駙馬海平君尹延命。生四男二女。○海平人。父縣監達誠。
按信寧宮主辛氏出。九女淑慶翁主。駙馬坡平君尹巖錄佐翼功臣齊度公。生六男一女。○坡平人。父生員太山。
按安氏出。十女敬愼翁主。駙馬全城君李梡。生六男一女。○全義人。父判事恭全。
按金氏出。十一女淑安翁主。駙馬懷川尉黃裕良悼公。生五男。○懷德人。父判書子厚。
按信寧宮主辛氏出。十二女淑謹翁主。駙馬花川君權恭錄佐翼功臣襄孝公。生一男。○安東人。父都節制復。
按李氏出。十三女淑順翁主。駙馬坡原尉尹泙。生二男一女。○坡平人。父參議敞。
257_454a故實 乙酉。復都漢陽。
己丑。李茂獄。相臣李茂與驪興君閔无咎等。以壞亂朝廷。幷賜死。自是遂罷外戚封君。
辛卯。始設四學。
乙未。禁錮庶孽。因右代言徐選言。禁錮庶孽淸顯。
錄勳 錄佐命功臣。庚辰。太宗冊封世子。尋受禪。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난019
配享 領議政河崙。文忠公。 右議政趙英茂。忠武公。 右議政鄭擢。翼景公。 完山府院君李天祐。襄度公。 鷄城君李來。景節公。
相臣 李居易。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 李茂。辛巳。拜右議政。己丑。罪死。 李稷。前朝文科。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 趙英茂난020。乙酉。拜右議政。 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난021257_454b 柳廷顯。丙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曼殊從弟。 朴訔。前朝文科。丙申。拜右議政。至左議政。 姜筮。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 沈溫。前朝文科。戊戌。拜領議政。同年。賜死。德符子。
皇明成祖永樂十七年己亥。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諱祹。字元正。嚴敬臨民曰莊。行善可紀曰憲。丁丑 皇明太祖洪武三十年。我太祖六年。四月十日壬辰。誕降난022。戊子。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封忠寧君。壬辰。進封大君。戊戌六月。冊封王世子。八月。受禪난023。庚午 皇明代宗永泰九年。二月十七日壬辰。昇遐于別宮。永膺大君琰第。在位三十二年。春秋五十四。有 十八男四女。英陵。257_454c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난024。行狀尹淮撰進。遷陵誌文。李承召撰。又有表石。神道碑。鄭獜趾撰。遷陵時埋碑不用。定世室。
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籍靑松。領議政靑川府院君安孝公溫女。乙亥난025皇明太祖洪武二十八年。我太祖四年。誕降于楊州私第。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行嘉禮。初封敬淑翁主。丁酉。封三韓國大夫人。戊戌六月。冊封敬嬪。十一月。進封恭妃。壬子。皇明宣宗宣德七年。我世宗十四年。改封王妃。丙寅 皇明英宗正統十一年。三月二十四日。昇遐于別宮。世祖潛邸。春秋五十二。誕 八男二女。英陵。난026 廣州與大王陵同原。誌文鄭獜趾撰。驪州亦同原。
嗣文宗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一。
嗣世祖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二。
257_454d三男安平大君瑢。癸酉。被禍。後伸雪。謚章昭。○娶延日鄭氏。判書贈左議政淵女。生二男。
四男臨瀛大君璆。謚貞簡。○娶宜寧南氏。左議政忠簡公智女。無後。後娶全州崔氏。奉禮贈右議政承寧女。生五男二女。
五男廣平大君璵。謚章懿。娶平山申氏。同中樞贈左議政自守女。生一男。
六男錦城大君瑜。丁丑。被禍。後伸雪。謚貞愍。○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
七男平原大君琳。娶南陽洪氏。府使贈左議政利用女。有繼子。
八男永膺大君琰。謚敬孝。○娶海州鄭氏。參判贈左議政忠敬女。無後。後娶礪山宋氏。同中樞贈左議政復元女。生一女。
一女貞孝난027公主。早卒贈公主。
257_455a二女貞懿公主駙馬延昌尉安孟聃良孝公。生四男二女。○竹山人。父觀察使望之。
一男和義君瓔。令嬪姜氏出。癸酉。謫卒謚忠景。○娶密陽朴氏。參贊贈贊成仲孫女。無後。
二男桂陽君璔。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昭。○娶淸州韓氏。左議政襄節公確女。生三男三女。
三男義昌君玒。愼嬪金氏出。謚剛悼。○娶延安金氏。都觀察使贈贊成脩女。生一男二女。
四男漢南君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悼。○娶安東權氏。正郞贈知敦寧格女。生一男一女。
五男密城君琛。愼嬪金氏出。錄翊戴佐理功臣。謚章孝。○娶驪興閔氏。判尹贈贊成承序女。生四男二女。
六男壽春君玹。惠嬪楊氏出。○娶延日鄭氏。府尹贈贊成自濟女。生一女有繼子。
257_455b七男翼峴君璭。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成。○娶平壤趙氏。少尹贈贊成鐵山女。生一男一女。
八男永豊君瑔。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烈。○娶順天朴氏。參判贈判書忠正公彭年女。生一女。
九男寧海君瑭。愼嬪金氏出。謚安悼。○娶平山申氏。漢城尹贈贊成九童女。生二男一女。
十男潭陽君璖。愼嬪金氏出。早卒。謚夷襄。○有繼子。
一女貞顯翁主。尙寢宋氏出。○駙馬鈴川府院君尹師路。錄佐翼功臣。贊成忠景公。生二男。坡平人。父牧使垠。
二女貞安翁主。淑媛李氏出。○駙馬靑城尉沈安義。生一男一女。○靑松人。父觀察使璿。
故實 戊戌。始開經筵。
257_455c己亥。征對馬島。遣李從茂等。往征。大捷而歸。
庚子。設集賢殿。選文學之士二十員充之。專任文學。朝夕論思。以備顧問。卽今之玉堂。
辛丑。建永寧殿。奉安祧主。世子入學。八歲入學。遂爲定制。
丙午。始設輪對法。賜暇湖堂。選年少文臣。賜暇讀書。後稱湖堂。
戊申。纂五禮儀。許稠等纂定。
癸丑。始定雅樂。朴堧贊成之。征野人。遣崔潤德等。征婆豬江野人。大捷而還。
甲寅。纂三綱行實。圖畵事行。又命詞臣。係以詩讚。印布中外。
丁巳。設六鎭。遣金宗瑞。開拓六鎭。設寘城邑。
癸亥。定年分法。田分六等。年分九等。
乙丑。纂龍飛御天歌。命鄭獜趾等。纂穆祖以來肇基之跡。凡百二十五章。
257_455d丙寅。製訓民正音。命成三問申叔舟等。製諺文。
配享 領議政黃喜。翼成公。 左議政崔潤德。貞烈公。 左議政許稠。文敬公。 左議政申槩。文僖公。 吏曹判書李隨。文靖公。潛邸時師傅。
相臣 李原。前朝文科。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己酉。謫卒。 鄭擢。前朝文科。辛丑。拜右議政。 柳觀。改名寬。前朝文科。甲辰。拜右議政致仕。 趙涓。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 黃喜。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九十卒。 孟思誠。前朝文魁。丁未。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權軫。前朝文科。辛亥。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崔潤德。武科。癸丑。拜右議政。至左議政。 盧閈。乙卯。拜右議政。 許稠。前朝文科。戊午。拜右議政。至左議政。申槩。文科。己未。拜右議政。至左議政。 李貴齡。乙丑。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九十257_456a四卒。 河演。文科。乙丑。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皇甫仁。文科。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癸酉。被禍。 南智。己巳。拜右議政。至左議政。○在孫。
皇明代宗景泰二年辛未。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諱珦。字輝之。敬順事上曰恭。慈仁和民曰順。甲午 皇明成祖永樂十二年。我太宗十四年。十月三日癸丑。誕降난028。辛丑。我世宗三年。冊封王世子。入學。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二月。卽位于別宮。永膺大君琰第。壬申五月十四日丙午。昇遐난029。在位二年。春秋三十九。有 一男二女。顯陵。在楊州健元陵東岡。行狀申叔舟撰。有誌文及表石。
仁孝順惠난030顯德王后權氏。籍安東。判漢城府事贈領議政花山府院君景惠公專女。文宗卽位。追封王妃。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31于洪州257_456b合德縣私第辛亥。皇明宣宗宣德六年。我世宗十三年。選入東宮。封承徽。尋封良媛。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冊封世子嬪。辛酉七月二十四日。昇遐난032。春秋二十四。誕 一男一女。顯陵。初葬安山瓦里山。號昭陵。有誌文。○世祖丁丑。遷陵。○至中宗癸酉。改葬于大王陵左岡난033。誌文金國撰。
嗣端宗大王。顯德王后誕生。
一女敬惠公主。駙馬寧陽尉鄭悰。丁丑。謫卒。贈領議政。生一男。○海州人。父參判忠敬。
一女敬肅翁主。司則楊氏出。○駙馬班城尉姜子順。無後。○晉州人。父觀察使徽。
故實 辛未。寘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寘衛將。部將統將。建崇義殿。在麻田郡。祀高麗四王。以名臣十六人配享。
配享 領議政河演。文孝公。
257_456c相臣 金宗瑞。文科辛未。拜右議政。至左議政。癸酉。被禍。
皇明代宗景泰四年癸酉 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敬順敦孝大王。諱弘暐。乙亥。禪位。後上號恭懿溫文。肅宗戊寅。復位上謚。辛酉 皇明英宗正統六年。我世宗二十三年。七月二十三日丁巳。誕降난034。戊辰。冊封王世孫。庚午。皇明代宗景泰元年。我文宗卽位初。進封王世子。壬申五月난035。卽位。乙亥閏六月。禪位于世祖。七月。尊爲太上王。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六月。遜于外。降封魯山君。十月二十四日庚戌난036。昇遐于寧越。在位二年。在上王位三年。春秋十七。無嗣。肅宗辛酉。追封大君。戊寅。復位。莊陵。在寧越冬乙旨。有表石。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籍礪山。○判敦寧勵良君贈領敦寧勵良府院257_456d君玹壽女。○乙亥大妃時。上號懿德。○肅宗戊寅。復位上謚。庚申。皇明英宗正統五年。我世宗二十二年。誕降。甲戌。皇明代宗景泰五年。我端宗二年。冊封王妃。乙亥。我世祖元年。尊爲王大妃。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六月。降爲夫人。辛巳 皇明武宗正德十六年。我中宗十六年。六月四日。昇遐난037。春秋八十二。肅宗戊寅。復位。思陵。在楊州羣場里。
故實 癸酉。安平大君獄。以相臣金宗瑞等。謀推戴安平大君瑢。皆被禍。
錄勳 錄靖難功臣。癸酉。皇甫仁金宗瑞等。以推戴安平大君瑢。皆罪死。錄鄭獜趾等四十二人。四人。後罪削。
相臣 鄭莾。文科。壬申。拜右議政。癸酉。被禍。
○○○○。癸酉。以首陽大君난038。拜領議政。吏兵曹判書。內外兵馬都統使。 鄭獜趾。257_457a文魁。癸酉。拜左議政。至領議政。 韓確。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代宗景泰六年乙亥。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諱瑈。字粹之。柔質慈仁曰惠。嚴敬臨民曰莊。丁丑。上號承天軆道烈文英武。丁酉 皇明成祖永樂十五年。我太宗十七年。九月二十九日丙子난039誕降난040。戊申。皇明宣祖宣德三年。我世宗十年。初封晉平大君。後改咸平。又改晉陽。又改首陽。乙亥 皇明代宗景泰六年。我端宗三年。閏六月十一日。受禪난041。戊子 皇明憲宗成化四年。九月七日。傳位于睿宗。八日甲子。昇遐난042。在位十四年。春秋五十二。有晬容二本。奉安于永禧殿。四男一女。 光陵난043在楊州注葉山直洞。行狀徐居正撰。有誌文及表石。○明宗丁未。定世室。
257_457b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난044籍坡平。判中樞院事贈領議政坡平府院君貞靖公璠女。○丁丑。上號慈聖。○睿宗己丑。加上惠懿。○成宗辛卯加上神憲 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45洪州난046公衙。戊申。皇明宣宗宣德三年。我世宗十年。行嘉禮。初封樂浪府大夫人。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妃。癸卯 皇明憲宗成化十九年。我成宗十四年。三月三十日。昇遐于溫陽行宮。春秋六十六。誕 二男一女。光陵난047在大王陵左岡有誌文。
嗣德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一。
嗣睿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懿淑公主。駙馬河城府院君鄭顯祖。錄翊戴佐理功臣褊玎公。登文科。無後。○河東257_457c人。父領議政文成公獜趾。
一男德源君曙。謹嬪朴氏出。錄翊戴功臣謚昭簡。○娶慶州金氏。贈贊成從直女。再娶鳳山尹氏。三娶陽城楊氏。幷無後。
二男昌源君晟。謹嬪朴氏出。○娶交河盧氏。正贈贊成好愼女。後娶光州鄭氏。有繼子。
故實 丙子。六臣獄。成三問等六人。謀復上王。事覺。皆死之。
丁丑。錦城大君獄。順興府使李甫欽。與錦城大君瑜。謀復上王。皆死。
庚辰。西狩平壤。設科取士。
乙酉난048。南狩溫陽。設科取士。○戊子又幸設科如初。
丙戌。東狩江陵。設科取士。
丁亥。李施愛之亂。擧兵于吉州。殺監司兵使。遣將討平之。討建州。以皇命遣257_457d魚有沼等。往征。大捷而還。
錄勳 錄佐翼功臣。丙子。六臣等。謀復上王。金礩上變。獄편001。錄桂陽君璔等。四十四人。○三人後罪削。 錄敵愾功臣。丁亥。吉州賊李施愛叛난049北道。遣將討平之。錄曺錫文等四十五人。○四人後罪削。
配享 左議政權擥。翼平公。 左議政韓確。襄節公。 領議政韓明澮。忠成公追配。
相臣 李思哲。文科。乙亥。拜右議政。至左議政。 鄭昌孫。文科。丙子。拜右議政。至領議政。 姜孟卿。文科。丁丑。拜右議政。至領議政。 申叔舟。文科。戊寅。拜右議政。至領議政。 李仁孫。文科。己卯。拜右議政。致仕。 權擥。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韓明澮。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尙敬從孫。 具致寬。文科。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 257_458a黃守身。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喜子。 沈澮。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溫子。朴元亨。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 崔恒。文魁。丁亥。拜右議政。至領議政。 曺錫文。文科。丁亥。拜右議政。至領議政。 洪達孫。武蔭。丁亥。拜右議政。 龜城君浚。戊子。拜領議政。時年二十八。己亥。賜死。○世宗朝王孫。 康純。戊子。拜右議政。至領議政。同年。罪死。 金礩。文科。戊子。拜右議政。至左議政。○士衡曾孫。 洪允成。文科。戊子。拜右議政。至領議政。
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諱暲。字原明。初諱崇。慈仁短折曰懷。平易不訾曰簡。○在東宮昇遐。謚敬懿世子。戊午 皇明英宗正統三年。我世宗二十年。九月十五日丙申。誕降난050。乙丑。初封桃源君。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世子。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257_458b月二日癸亥。昇遐于東宮。春秋二十。成宗辛卯。追崇。有 二男一女。敬陵난051在高陽蜂峴誌文。李承召撰有表石。
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韓氏。籍淸州。○明朝宣授光祿少卿。本朝左議政西原府院君襄節公確女。○成宗辛卯。進冊王大妃。上號仁粹。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我世宗十九年。誕降난052。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粹嬪。辛卯。皇明憲宗成化七年。我成宗二年。尊冊爲王大妃。甲子 皇明孝宗弘治十七年。我燕山十年。四月二十七日。昇遐난053。春秋六十八。誕 二男一女。敬陵난054在大王陵右岡。
嗣成宗大王。昭惠王后誕生。序居第二。
一男月山大君婷。初封君錄佐理功臣。謚孝文。○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257_458c公仲善女。無後。
一女明淑公主。駙馬唐陽君洪常昭夷公。生一男。○南陽人。父左議政忠肅公應。
皇明憲宗成化五年己丑。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諱晄。字明照。初字平甫。因事有功曰襄。未中早夭曰悼。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我世宗二十二年。正月朔日丁丑。誕降난055。初封海陽大君。丁丑。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冊封王世子。丙戌。皇明憲宗成化二年。入學。戊子九月。受禪。己丑十一月二十八日戊申。昇遐난056。在位一年。春秋二十。有 二男一女。昌陵난057在高陽敬陵北岡。有行狀。又有誌文及表石。
徽仁昭德章順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乙丑。皇明英宗正統十年。我世宗二十七年。誕降난058。庚辰。皇明英宗天順四年。我世祖六年。257_458d封世子嬪。辛巳十二月五日。昇遐于私第。錄事安耆之家。春秋十七。成宗壬辰。追尊爲王妃。誕 一男。恭陵난059在坡州普施洞有誌文。
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난060籍淸州。○右議政淸川府院君襄惠公伯倫女。成宗辛卯上號仁惠。選入東宮。初封昭訓。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冊封王妃。戊午 皇明孝宗弘治十一年。我燕山四年。十二月二十三日。昇遐。誕一男一女。昌陵난061在大王陵左岡。
一男仁城大君。 早卒。贈君後加贈大君謚孝昭。○章順王后誕生。
二男齊安大君琄。謚靈孝。○娶尙州金氏。正贈左議政守末女。承安順王后旨。去之。改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公仲善女。其後。又以后命與金氏。復合。幷無後。
257_459a一女顯肅公主。駙馬豊川尉任光載無後。○豊川人。父判書士洪。○以上安順王后誕生。
故實 戊子南怡獄。柳子光誣告南怡謀逆。與領相康純。幷被禍。
錄勳 錄翊戴功臣。己丑。南怡等獄成。錄申叔舟等三十九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朴元亨。文憲公。
相臣 尹子雲。文科。己丑。拜右議政至領議政。 金國光。文科。己丑。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憲宗成化六年庚寅。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諱娎。溫良好樂曰康。寬樂令終曰靖。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七月三十日辛卯。誕降난062。辛巳。初封者山君。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改封乽山君。己丑十一月。奉貞熹王后命。卽位난063。甲寅 皇明孝宗弘治七年。十二月二十四日己卯。昇遐난064。在位二十五年。春秋三十八。有 十六257_459b男十二女。宣陵난065在廣州學堂洞。有行狀誌文及表石。○仁祖癸酉난066定世室。
以上屬成宗朝
徽懿愼肅恭惠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丙子。皇明代宗景泰七年。我世祖二年。誕降난067。丁亥。皇明憲宗成化三年。行嘉禮。己丑。冊封王妃。甲午 我成宗五年。四月十五日。昇遐난068。春秋十九。無嗣。順陵난069在坡州恭陵南岡。有誌文。
以上屬恭惠王后
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尹氏。籍坡平。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壕女。○燕山丁巳上號慈順。甲子。加上和惠。壬午。皇明英宗天順六年。我世祖八年。誕降난070于新昌公衙。癸巳。皇明憲成化九年。我成宗四年。選入大內。初封淑儀。庚子。冊封王妃。庚寅 皇明世宗嘉靖九年。我中宗二十五年。八月二十二日。昇遐난071。春秋六十九。誕 一男一女。宣陵난072在大王陵左岡誌文李257_459c荇撰。
嗣中宗大王。貞顯王后誕生。
一女愼淑公主。貞顯王后誕生。早卒。
一男燕山君㦕。母廢妃尹氏。初封世子。嗣位十二年廢。生二男一女。
二男柱城君恂。淑儀河氏出。○娶原州元氏。僉正贈贊成菑女。有繼子。
三男安陽君㤚。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謚恭懷。○娶綾城具氏。綾川君贈贊成壽永女。生一女。
四男完原君淑儀洪氏出。謚昭悼。○娶全州崔氏。生員贈贊成河臨女。無後。後娶楊川許氏。別坐贈贊成磧女。生二男二女。
五男檜山君恬。淑儀洪氏出。○娶竹山安氏。贊儀贈贊成邦彦女。有繼子。
257_459d六男鳳安君㦀。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娶平壤趙氏。判官贈贊成紀女。生一男。
七男甄城君惇。淑儀洪氏出。○娶平山申氏。奉事贈贊成友灝女。生二男一女。
八男益陽君懷。淑儀洪氏出。謚順平。○娶延日鄭氏。僉知贈贊成文昌女。生四男三女。
九男利城君慣。淑容沈氏出。謚章平。○娶南平文氏。引儀贈贊成簡女。生三男。後娶安東權氏。郡守贈贊成守中女。無後。
十男景明君忱。淑儀洪氏出。○娶坡平尹氏。僉正贈贊成堞女。生二男二女。
十一男全城君忭。貴人權氏出。○娶安東權氏。知中樞贈贊成忠敏公健女。有繼子。
十二男茂山君悰。淑儀金氏出。○娶平山申氏。別坐贈贊成銖女。生六男二女。
十三男寧山君恮。淑容沈氏出。癸酉被禍謚忠信。○娶靑松沈氏。郡守贈贊成順路女。生二女。後娶慶州鄭氏。別坐贈贊成弘光女。生一女。
257_460a十四男雲川君淑儀洪氏出。○娶安東權氏。參議贈贊成仁孫女。生四女有繼子。
十五男楊原君憘。淑儀洪氏出。○娶平壤趙氏。忠義衛贈贊成經女。無後後娶文化柳氏。正贈贊成從孫女。生一男。
一女惠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高原尉申沆文孝公。有繼子。○高靈人。父參判從濩。
二女徽肅翁主。淑儀金氏出。○駙馬豊原尉任崇載。生三女。○豊川人。父判書士洪。
三女恭愼翁主。貴人嚴氏出。○駙馬淸寧尉韓景琛。無後。○淸州人。父琅城君襄胡公堡。
四女慶順翁主。淑容沈氏出。○駙馬宜城尉南致元榮僖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府使燝。
五女敬淑翁主。淑儀金氏出。○駙馬驪川尉閔子芳。生一男○驪興人。父縣令宗元。
六女靜順翁主。淑儀洪氏出。○駙馬奉城尉鄭元俊。生一男。○奉化人。父主簿鉉。
257_460b七女淑惠翁主。淑容沈氏出。○駙馬漢川尉趙無疆。生一男。●楊州人。父參奉光世。
八女慶徽翁主。淑容權氏出。○駙馬鈴原尉尹鼐。生一男。○坡平人。父府使承世。
九女徽靜翁主。淑儀金氏出。○駙馬宜川尉南燮元。生一女。○宜寧人。父承旨忻。
十女靜惠翁主。貴人鄭氏出。○駙馬淸平尉韓紀無後。○淸州人。父判書亨允。
十一女靜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鈴平尉尹燮有繼子。○坡平人。父正承柳。
故實 庚寅。設弘文館。選文學之士十七員。充之。以備顧問。
辛卯。德宗追崇。始用經國大典。世祖朝命纂至是始成。
乙未。親耕籍田。丙申。又築觀耕壇於先農壇南。 王妃親蠶。親行釋菜。建尊經閣。建閣太學藏書籍。
丁酉王妃親蠶。築採桑壇於景福宮後苑。親行釋菜。仍行大射禮。
257_460c戊戌行養老禮。養老乞言于太學。纂輿地勝覽。纂東文選。
己亥。廢妃尹氏。以妬忌。貞熹王妃命廢之。因賜死。征建州。以皇明。遣尹弼商等。往征。大捷而還。
庚子親行釋菜。壬寅。又親行。
乙巳。錮改嫁女子孫。纂東國通鑑。
辛亥征野人。遣許琮等。往征。大捷而還。
壬子大酺師生。重修學宮。親臨大饗。
癸丑親耕籍田。王妃親蠶。
錄勳 錄佐理功臣。辛卯。以國家昇平。錄申叔舟等七十七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申叔舟。文忠公。 領議政鄭昌孫。忠貞公。 左議257_460d政洪應。忠貞公。
相臣 尹士昐。庚寅拜右議政。坐贓死獄中。 韓伯倫。庚寅。拜右議政。 成奉祖。辛卯。拜右議政。○石璘從孫。 尹士昕。乙未。拜右議政。○士昐弟。 尹弼商。文科。戊戌。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 洪應。文魁。己亥。拜右議政。至左議政。 李克培。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仁孫子。 盧思愼。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閈孫。許琮。文科。壬子拜右議政。 尹壕난073文科。甲寅。拜右議政。●弼商從叔。 愼承善。文魁。甲寅。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孝宗弘治八年乙卯。○附 燕山君㦕。母廢妃尹氏。判奉常寺事起畒女。○成宗丙申生。癸卯。冊封王世子。丁未。入學。甲寅。嗣位淫虐日甚。宗社將危。中宗反正。廢。封燕山君。放于喬桐。同年十二月卒。在位十一年。壽三十一。○夫人居昌愼氏。領議政章成公承善女。生二男一女。○墓在楊州海等村。
257_461a故實 戊午士禍。柳子光誣告金宗直吊義帝文。宗直戮死。其門徒。或誅竄。或廢錮。
甲子士禍。以廢妃尹氏賜死事。追罪廷臣。肆行誅戮。至有碎骨飄風之刑。追崇私親。追崇廢妃尹氏。改號懷陵。反正後廢。築內都城。撤都城百步內人家。寘運平樂。取各道娼妓。寘運平樂工。○宮女則有興靑,天科,地科之號。
乙丑築瑞葱臺。卽今春塘臺。改官制。革司諫院。罷經筵。减翰林員。增司僕寺掌樂院官。設獵藪。廢陵寢祭享。掇津渡舟楫。移畿內六邑于遠外。
相臣 鄭佸。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昌孫子。魚世謙。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鄭文烱。文科丙辰。拜右議政。改正。○道傳曾孫。 韓致亨。丙辰。拜右議政。至領議政。○確侄。 成俊。文科。戊午。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奉祖侄。 李克均。文科。庚申。拜右議政。至左議政。甲子。被禍。○克培弟。 柳洵。文科。癸亥。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後還257_461b卜。○曼殊玄孫。許琛。文科。甲子。拜右議政。至左議政。○琮弟。朴崇質。文科。甲子。拜右議政。至左議政。●訔孫。 姜龜孫。文科。乙丑拜右議政。●孟卿從侄。 愼守勤。丙寅。拜右議政。至左議政。反正日被誅。○承善子。 金壽童。文科。丙寅。起復。拜右議政。至領議政。○礩侄。
皇明武宗正德元年丙寅。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諱懌。字樂天。敬順事上曰恭。小心恭愼曰僖。戊申 皇明孝宗弘治元年。我成宗十九年。三月五日己巳。誕降。初封晉城大君。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九月二日。卽位。甲辰 皇明世宗嘉靖二十三年。十一月十四日。傳位于仁宗。十五日庚戌。昇遐난074。在位三十九年。春秋五十七。有 九男十一女。靖陵난075初葬高陽。號僖陵。○明宗壬戌。移葬于廣州宣陵東岡。誌文。洪春卿撰。有表石。
以上屬中宗朝
257_461c恭昭順烈端敬王后愼氏。籍居昌。○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守勤女。丁未。皇明憲宗成化二十三年。我成宗十八年。誕降난076。己未。皇明孝宗弘治十二年。我燕山五年。行嘉禮。封府夫人。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九月二日。正位中壼。九日。遜位于私第。丁巳 皇明世宗嘉靖三十六年我明宗十二年。十二月七日。昇遐。春秋七十一。無嗣。英宗己未。追復位。上謚溫陵。在楊州西山長興面水回洞。
宣昭懿淑章敬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原府院君汝弼女。辛亥。皇明孝宗弘治四年我。○成宗二十二年。誕降난077。丙寅。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選入大內。初封淑儀。丁卯八月。進冊王妃。乙亥三月二日。昇遐난078。春秋二十五。誕 一男一女。禧陵난079初葬廣州獻陵右岡。○中宗丁酉。移葬于257_461d高陽元堂里。誌文金安老撰。有表石。
聖烈仁明文定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山府院君靖平公之任女。明宗丁未。上號聖烈仁明。辛酉。皇明孝宗弘治十四年。我燕山七年。誕降난080。丁丑。皇明武宗正德十二年。我中宗十二年。冊封王妃。乙丑 皇明世宗嘉靖四十四年。我明宗二十年。四月七日。昇遐난081。春秋六十五。誕 一男四女。泰陵。在楊州蘆原西行錄明宗御製有表石。
嗣仁宗大王。章敬王后誕生。序居第一。
嗣明宗大王。文定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孝惠公主。駙馬延城尉金禧生一女。○延安人。父左議政安老章敬王后誕生。
二女懿惠公主。駙馬淸原尉韓景祿。生三男。○淸州人。父僉知承權。
257_462a三女孝順公主。駙馬綾原尉具思顔。有繼子。○綾城人。父縣監淳。
四女敬顯公主。駙馬靈川尉申檥。生一男。○高靈人。父牧使秀涇。
五女仁順公主。早卒。○以上文定王后誕生。
一男福城君嵋。敬嬪朴氏出。壬辰被禍。後伸雪。○娶坡平尹氏。縣監贈贊成仁範女。生一女。初宣祖爲繼。及入承大統。後命信城君翊。奉其祀。
二男海安君㟓。淑儀洪氏出。○娶晉州柳氏。晉山君贈贊成泓女。無後。後娶居昌愼氏。參奉贈贊成弘猷女。生一女。
三男錦原君岭。煕嬪洪氏出。○娶海州鄭氏。都事贈贊成承休女。生一女。有繼子。
四男永陽君岠。昌嬪安氏出。謚成悼。○娶順興安氏。司圃贈贊成世亨女。有繼子。
五男德陽君岐。淑儀李氏出。謚靖僖。○娶安편002權氏。判書贈贊成纘女。生一男。
257_462b六男鳳城君岏。煕嬪洪氏出。乙巳난082被禍。謚懿愍。○娶東萊鄭氏。正贈領議政惟仁女。生一女。有繼子。
七男德興大院君岹。昌嬪安氏誕生。庚寅生。己未卒。壽三十。●宣廟入承大統。後追尊爲大院君。○配河東府夫人鄭氏。判中樞贈領議政孝簡公世虎女。誕三男一女。
一女惠順翁主。敬嬪朴氏出。○駙馬光川尉金仁慶。有繼子。○光州人。父參議憲胤。
二女惠靜翁主。敬嬪朴氏出。○駙馬唐城尉洪礪。壬辰被禍。後伸雪。生一女。○南陽人。父觀察使叙疇。
三女貞順翁主。淑媛李氏出。○駙馬礪城尉宋寅文端公。生一男。○礪山人。父僉知之翰。
四女孝靜翁主。淑媛李氏出。○駙馬淳原尉趙義貞。生一男。○淳昌人。父府尹琛。
五女淑靜翁主。淑媛金氏出。○駙馬綾昌尉具澣。生三男三女。○綾城人。父副正信璟。
257_462c六女靜愼翁主。昌嬪安氏出。○駙馬淸川尉韓景祐。生一男三女。○淸州人。父縣監慈。
故實 丙寅反正。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奉主上反正。
丁卯。李顆獄。盧永孫告李顆等謀逆。幷被殺。
庚午。三浦倭亂。遣柳聃年黃衡等。討平之。
癸酉。復昭陵。卽顯德王后陵。○世祖丁丑。遷陵。失所在。至是。三司百官。上章請復。改葬于顯陵左岡。鄭莫介告密。公賤鄭莫介。告功臣朴永文辛允武等謀逆。幷正法削勳。親耕籍田。王妃親蠶。
乙亥。金凈,朴祥獄。是年。章敬王后上賓。金凈朴祥上䟽請復愼妃。幷拿鞠徒配。
丁丑。鄭文忠公從祀。以前朝儒賢鄭夢周。從祀文廟。
己卯。設賢良科。命京外各薦人才。庭策治道。取金湜等二十八人。罷昭格署。257_462d三司庭爭。罷之。乙酉。復建。壬辰亂後永廢。士禍。南衮,沈貞等。從北門誣告。趙光祖等諸人。皆被大禍。
辛卯。安瑭獄。宋祀連誣告。搆殺安瑭一門。
己丑。王妃親蠶。
庚寅。增修輿地勝覽。
壬辰。福城君獄。宮中巫蠱。敬嬪朴氏及其子女福城君嵋,唐城尉洪礪。幷被慘禍。後幷伸。
甲午。親行大射禮。
乙未。幸松京。設科取士。
丁酉。金安老獄。發卒圍捕。遠竄。未到配。賜死于葛院。
錄勳 錄靖國功臣。丙寅。燕山荒亂。宗社將危。朴元宗等。擧義反正。錄元宗等百十八人。○十一人。後罪削。錄定難功臣。丁卯。盧永孫告李顆等謀逆。獄成。錄永孫等二十二人。○後因臺啓257_463a單。錄永孫餘皆削功。
配享 領議政朴元宗。武烈公。 領議政成希顔。忠定公。 領議政柳順汀。文成公난083 領議政鄭光弼。文翼公。
相臣 朴元宗。武科。丙寅。拜右議政。至領議政。 柳順汀。文魁。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 成希顔。文科。己巳。拜右議政。至領議政。 宋軼。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 鄭光弼。文科。癸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應箕。文科。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申用漑。文科。丙子。拜右議政。至左議政。○叔舟孫。 安瑭。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辛巳被禍。金銓。文魁。己卯。拜右議政。至領議政。 南衮。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後追奪。 李惟淸。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權鈞。文科。癸未。拜右議政。 沈貞。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辛卯。罪死。 李沆。文科。丁亥。拜右議政。改正。 李荇。257_463b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甲午。謫卒。 張順孫。文科。庚寅。拜右議政。至領議政。 韓效元。文科。辛卯。拜右議政。至領議政。 金謹思。文科。癸巳。拜右議政。至領議政。丁酉。謫卒。金安老。文魁。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丁酉。罪死。○詮侄。 尹殷輔。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柳溥。文科。丁酉。拜右議政。至左議政。○順汀侄。 洪彦弼。文科。丁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克成。文科。丁酉。拜右議政。 尹仁鏡。文科。庚子。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世宗嘉靖二十四年乙巳。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諱峼。寵祿光大曰榮。寬樂令終曰靖。乙亥 皇明武宗正德十年。我中宗十年。二月二十五日癸丑。誕降난084。庚辰。冊封王世子。壬午。皇明世宗嘉靖元난085行冠禮入學。甲辰十一月受禪。乙巳七月朔日辛酉。昇遐난086。在位八月。春秋257_463c三十一。無嗣。孝陵난087在高陽禧陵西岡。行狀李彦廸撰。誌文申光漢撰。有表石。
以上屬仁宗朝
孝順恭懿仁聖王后朴氏。籍羅州。○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錦城府院君墉女。甲戌。皇明武宗正德九年。我中宗九年。誕降난088。甲申。皇明世宗嘉靖三年。冊封世子嬪。甲辰。進封王妃。丁丑 皇明神宗萬曆五年。我宣祖十年。十一月二十九日。昇遐난089。春秋六十四。孝陵난090與大王陵同原。
配享 領議政洪彦弼。文僖公。 左贊成金安國。文敬公。
相臣 李芑。乙巳。拜右議政。改正。同年復拜。 柳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同年。被禍。亮玄孫。 成世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戊申。謫卒。⊙奉祖曾孫난091
皇明世宗嘉靖二十五年丙午。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諱峘。字對陽。敬順事上曰恭。行善可紀曰憲。甲午 皇明世宗嘉靖十三年。我中宗二十九年。五月二十二日257_463d戊子誕降。初封慶原大君。乙巳七月。以仁宗遺命。卽位난092。丁卯 皇明穆宗隆慶元年。六月二十八日辛亥。昇遐난093。在位二十二年。春秋三十四。有 一男。康陵난094在楊州。泰陵東岡。行狀李滉撰。有表石。
宣烈懿聖仁順王后沈氏。籍靑松。●領敦寧靑陵府院君贈領議政翼孝公鋼女。壬辰。皇明世宗嘉靖十一年。我中宗二十七年。誕降。乙巳。冊封王妃。乙亥 皇明神宗萬曆三年。我宣祖八年。正月二日。昇遐난095。春秋四十四。誕 一男。康陵난096與大王陵同原。
嗣宣祖大王。
一男順懷世子諱暊。仁順王后誕生。明宗辛亥。誕降。丁巳。冊封王世子。庚子入學난097
此間必有闕文。而原本見漏。故不能續繕。
257_464a配享 領議政金昌集。忠獻公。 領議政崔奎瑞。文忠난098公。 左議政閔鎭遠。文忠公。 左議政趙文命。文忠公。 領議政金在魯。忠靖公。
相臣 柳鳳輝。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丁未謫死。乙亥。追施逆律。○尙運子。 趙泰億。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今上난099。丙申。追奪。○師錫侄。 鄭澔。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澈玄孫。閔鎭遠。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鼎重侄。 李觀命난100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健命兄。 洪致中。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重普孫。趙道彬。文科。丙午。拜右議政。○泰采侄。 李宜顯。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世白子。 沈壽賢。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連源八世孫。 吳命恒。文科。戊申。拜右議政。○允謙玄孫。 李台佐。文科。戊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恒福玄257_464b孫。 李㙫。文科。己酉。拜右議政。至左議政。○芑六世孫。 趙文命。文科。庚戌。拜右議政。至左議政。○相愚從孫。徐命均。文科。壬子。拜右議政。至左議政。○宗泰子。 金興慶。文科。壬子。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金在魯。文科。乙卯。拜左議政。至領議政。致仕。○構子。宋寅明。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 兪拓基。文科。己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趙顯命 文科。庚申。拜右議政。至領議政。○文命弟。 鄭錫五。文科。丙寅。拜右議政。至左議政。○致和曾孫。 閔應洙。文科。丙寅。拜右議政。○鎭遠從侄。 金若魯。文科。己巳。拜右議政。至左議政。○在魯從弟。 鄭羽良。文科。己巳。拜右議政。 李宗城。文科。壬申。拜左議政。至領議政。○台佐子。 李天輔。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廷龜五世孫。 金尙魯。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今上。丙申。追施大逆律。○若魯弟。 趙載浩。文科。甲戌。拜右議政。壬午。罪死。乙未伸。○文命子。 申晩。文科。丙子。257_464c拜右議政。至領議政。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時白五世孫。 閔百祥。文科。己卯。拜右議政。○鎭遠孫。 洪鳳漢。文科。辛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鄭翬良。文科。辛巳。拜右議政。至左議政。○羽良弟。 尹東度。文科。辛巳。拜右議政。至領議政。 金相福。文科。癸未。拜右議政。至領議政。○國光十一世孫。 金致仁。文魁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在魯子。 徐志修。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命均子。 金陽澤。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國光十世孫。 韓翼謩。文科。丙戌。拜左議政。至領議政。○應寅六世孫。 金尙喆。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 李昌誼。文科。戊子。拜右議政。至左議政。 申晦。文科。壬辰。拜左議政。至領議政。丙申。謫。○晩弟。 李溵난101文科。壬辰。拜右議政。○㙫孫。 李思觀。文科。壬辰。拜右議政。至左議政。 元仁孫。文科。壬辰。拜右議政。斗杓五世孫。 洪麟漢。文科。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丙申。以逆誅。○鳳漢弟。
257_464d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諱緈。字聖敬。己亥 肅宗四十五年。 二月十五日戊午。誕降난102。甲辰。初封敬義君。乙巳。英宗元年。 冊封王世子。丁未。入學。行冠禮。戊申十一月十六日壬戌。昇遐난103。春秋十。甲申난104。以今上난105特命爲嗣。丙申。賜號承統世子。八月十二日。追尊爲王。上謚溫良睿明哲文孝章。無嗣。永陵。在坡州順陵左岡。初墓。號孝章。後進號永陵。行錄及誌文。英宗御製。有表石。
徽貞賢淑孝純王后趙氏。籍豊壤。○左議政豊陵府院君贈領議政文忠公文命女。乙未。肅宗四十一年。誕降난106。丁未。英宗三年。冊封世子嬪。行嘉禮。乙卯。賜號賢嬪。辛未十一月十四日丁丑。昇遐난107。春秋三257_465a十七。壬申。賜謚孝純賢嬪。丙申。賜號承統。八月十二日。追尊爲王妃。上謚徽貞賢淑孝純。無嗣。永陵난108與大王陵同原。
嗣主上殿下。惠慶宮惠嬪洪氏誕生。
主上殿下。諱祘。字亨運。壬申 英宗二十八年。九月二十二日己卯。誕降于昌慶宮之景春殿。己卯。冊封王世孫。辛巳。入學行冠禮。甲申。特命嗣眞宗大王。丙申。受御筆孝孫銀印。同年三月十日辛巳。卽位于慶煕宮之崇政門。
妃殿下金氏。籍淸風。行參贊贈領議政淸風府院君靖翼公時默女。癸酉 英宗二十九年。257_465b十二月癸巳。誕降난109。壬午。冊封世孫嬪。行嘉禮。丙申。進封王妃。


[난-001]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 : 案英宗乙亥。卽上王時所御豊壤舊基。建閣竪碑。
[난-002]健元陵 : 案戊子九月九日。葬。
[난-003]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 : 案璿系闕年而只書六月十三日。誕降。
[난-004]傳位于太宗。 : 案璿系。庚辰十二月。上尊號。仁文恭孝。
[난-005]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6]厚陵 : 案庚子正月三日。葬。
[난-007]誕降 : 案乙未正月九日。誕降。
[난-008]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9]厚陵 : 案壬辰八月八日。葬。
[난-010]生 :
[난-011]追上謚 : 一本癸亥追上謚
[난-012]昇遐 : 按昇遐于泉達坊之新宮。
[난-013]獻陵 : 按壬寅九月六日。葬。
[난-014]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 : 世宗甲辰追上尊號彰德昭烈。
[난-015]誕降 : 按乙巳七月十一日。誕降于松京鐵洞。
[난-016]冊封貞嬪 : 按璿系。封貞嬪下有尋追封靜妃。
[난-017]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別殿今昌慶宮。
[난-018]獻陵 : 按庚子九月十七日。葬。
[난-019]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 : 一本。錄李薆等四十八人。而十人罪削。
[난-020]趙英茂 : 一本。趙英茂下。有義安大君和。太祖庶弟。丁亥。拜領相。
[난-021]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 一本。南在,柳亮。壬辰。拜相。韓尙敬。丙申。拜相。
[난-022]誕降 : 按誕降于漢陽潛邸。
[난-023]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24]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 : 按庚午六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英陵。
[난-025]乙亥 : 按璿系。乙亥下。有九月無日。
[난-026]英陵 : 按丙寅七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
[난-027]貞孝 : 按璿系。貞孝。作貞昭。
[난-028]誕降 : 按誕降于漢陽私第。
[난-02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千秋殿。按壬申九月朔日。葬。
[난-030]仁孝順惠 : 端宗甲戌。追上尊號仁孝順惠。
[난-031]誕降 : 按戊戌三月十二日。誕降。
[난-032]昇遐 : 按昇遐于東宮之資善堂。
[난-033]改葬于大王陵左岡 : 按辛酉九月。初葬昭陵。癸酉四月二十一日。改葬。
[난-034]誕降 : 按誕降于東宮之資善堂。
[난-035]五月 : 五月一作正月
[난-036]庚戌 : 庚戌一作甲寅
[난-037]昇遐 : 按英宗辛卯。御筆書凈業院舊基。竪碑于燕尾貞洞。
[난-038]首陽大君 : 世祖潛邸封號。
[난-039]丙子 : 一本丙子作辛巳
[난-040]誕降 : 按誕降于本宮。
[난-041]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42]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正殿。
[난-043]光陵 : 按戊子十一月二十八日。葬。
[난-044]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 : 按璿系睿宗己丑。加上自欽仁至忠懿十四字。
[난-045]誕降 : 按戊戌十一月十一日。誕降。
[난-046]洪州 : 一本洪州。作洪川。
[난-047]光陵 : 按癸卯六月十二日。葬。
[난-048]乙酉 : 一本乙酉作甲申
[편-001]戌 :
[난-049]遽 :
[난-050]誕降 : 按誕降于禁中。
[난-051]敬陵 : 按丁丑十一月二十三日。葬。
[난-052]誕降 : 按九月八日。誕降。
[난-05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景春殿。
[난-054]敬陵 : 按甲子五月。葬。
[난-055]誕降 : 按誕降于私第。
[난-05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紫薇堂。
[난-057]昌陵 : 按庚寅三月五日。葬。
[난-058]誕降 : 按正月十六日。誕降。
[난-059]恭陵 : 按壬午二月二十五日。葬。
[난-060]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 : 按璿系闕年只書三月十二日。誕降。
[난-061]昌陵 : 按己未二月十四日。葬。
[난-062]誕降 : 按誕降于東宮。
[난-063]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64]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大造殿。
[난-065]宣陵 : 按乙卯四月六日。葬。
[난-066]癸酉 : 一本癸酉作乙亥
[난-067]誕降 : 按十月十一日。誕降于蓮花坊私第。
[난-068]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求賢殿。
[난-069]順陵 : 按甲午六月七日。葬。
[난-070]誕降 : 按六月二十六日。誕降。
[난-071]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72]宣陵 : 按庚寅九月二十日。葬。
[난-073]尹壕 : 一本尹壕下。有居平君復。定宗朝王孫。拜右相改正。
[난-074]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歡慶堂。
[난-075]靖陵 : 按乙巳二月。初葬僖陵。壬戌九月四日。移葬。
[난-076]誕降 : 按正月十四日。誕降。
[난-077]誕降 : 按七月六日。誕降于會賢坊私第。
[난-078]昇遐 : 按昇遐于景福宮別殿。
[난-079]禧陵 : 按乙酉閏四月。初葬廣州。
[난-080]誕降 : 按十月二十二日。誕降。
[난-081]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昭德堂。
[편-002]束 :
[난-082]乙巳 : 一本乙巳。作丁未。
[난-083]文成公 : 一本。文成公。作烈成公。
[난-084]誕降 : 按誕降于景福宮。
[난-085]宗 :
[난-08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淸燕樓下小寢。
[난-087]孝陵 : 按乙巳十月十五日。葬。
[난-088]誕降 : 按十月朔日。誕降。
[난-08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90]孝陵 : 按戊寅二月十五日。葬。
[난-091]奉祖曾孫 : 一作奉祖從孫。
[난-092]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93]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養心堂。
[난-094]康陵 : 按丁卯九月二十二日。葬。
[난-095]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通明殿。
[난-096]康陵 : 按乙亥四月二十八日。葬。
[난-097]庚子入學 : 一作庚申入學。
[난-098]文忠 : 一本文忠作忠正。
[난-099]今上 : 正宗朝
[난-100]李觀命 : 一本李觀命。拜至左議政。
[난-101]李溵 : 一本李溵。拜左議政。
[난-102]誕降 : 按誕降于順化坊彰義宮。
[난-10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進修堂。
[난-104]甲申 : 英宗朝甲申也
[난-105]今上 : 今上卽正宗
[난-106]誕降 : 按十二月十四日。誕降于崇敎坊私第。
[난-107]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建極堂宜春軒。
[난-108]永陵 : 按壬申正月十一日。葬。
[난-109]誕降 : 按誕降于嘉會坊私第。

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紀年兒覽[下]
【修】本朝世年紀 附故實。功臣。配享。相臣。 a_257_450a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諱旦。字君晉。初諱成桂。字仲潔。號松軒。溫良好古曰康。聡明睿智曰獻。太宗庚辰上號啓運神武。肅宗癸亥。加上謚正義光德。乙亥 元順帝至元元年。高麗忠肅王後四年。十月十一日己未。誕降于永興黑石里。仕高麗。官至門下侍中。壬申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登寶位于松京壽昌宮。戊寅九月。傳位于定宗。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난001在位七年。在上王位十年。春秋七十四。有晬容三本。一本奉安于京城永禧殿。一本奉安于全州慶基殿。一本奉安于永興璿源殿。八男五女。健元陵난002在楊州儉巖山。神道碑誌257_450b文。幷權近撰。碑陰記。卞季良撰。
承仁順聖神懿王后韓氏。籍安邊。密直副使贈門下府事安川府院君卿女。大祖卽位初謚節妃。丁丑 元順帝至元三年。高麗忠肅王後六年。誕降。高麗時封元信宅主。辛未 皇明太祖洪武二十四年。高麗恭讓王三年。九月二十三日。昇遐于潛邸。春秋五十五。太祖壬申。追尊。誕 六男二女。齊陵。在豊德栗村。神道碑權近撰。
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난003籍谷山。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允成女。太祖卽位初。冊封顯妃。顯宗己酉上謚祔廟。丙子 皇明太祖洪武二十九年。我太祖五年。八月十三日。昇遐于移御所。判內侍府事李得芬家。二男一女。貞陵。丁丑初葬西部皇華坊。太宗己丑。移葬楊州沙河里。有表石。
257_450c嗣定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二。
嗣太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五。
一男鎭安大君芳雨。太祖潛邸時卒。追封大君。謚靖懿。○娶忠州池氏。贊成事奫女。生二男一女。
三男益安大君芳毅。錄開國定社功臣。階大匡。贈爲韓公。謚安襄。配享定宗廟庭。娶鐵原崔氏。知杆城郡事贈贊成仁㺶女。生一男二女。
四男懷安大君芳幹。庚辰朴苞之亂。安寘卒。○娶驪興閔氏。判書贈贊成璿女。再娶密陽黃氏。判書亨女。三娶金浦琴氏。正郞仁排女。生四男一女。
六男元尹芳衍。登高麗文科。拜成均博士。○太祖潛邸時卒。贈元尹。○以上。神懿王后誕生。
257_450d七男撫安大君芳蕃。戊寅鄭道傳之亂。被禍。○初封君。贈楸成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恭順。改謚章憲。○娶開城王氏。高麗宗室歸義君瑀女。有繼子。
八男宜安大君芳碩。初封世子。戊寅鄭道傳之亂。被禍。贈邱原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昭悼。○娶富有沈氏。大提學孝生女。有繼子。以上。神德王后誕生。
一女慶愼宮主。駙馬上黨府院君李薆。錄定社佐命功臣。景肅公。生一男。○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善公主。駙馬靑原君沈琮。生一女。○靑松人。父左政丞定安公德符。○以上。神懿王后誕生。
三女慶順公主。駙馬興安君李濟。戊寅罪死。錄開國功臣。景武公。配享太祖廟庭。有繼子。○星州人。父同知密直仁立。○神德王后誕生。
257_451a一女宜寧翁主。駙馬啓川尉李䔲。生四男三女。○開城人。父判司水監事開。
二女淑愼翁主。駙馬唐城尉洪海。生三男一女。○南陽人。父判中樞彦修。
故實 壬申開國。
甲戌定都漢陽。建宗廟。入耆社。仍命文臣正二品。年七十。皆參入。
丙子。築都城。有八門。周九千九百七十五步。征對馬島。遣金士衡南在等。征之。
丁丑。招安女眞。遣李之蘭按撫。皆爲編戶。
戊寅。建文廟。鄭道傳之亂。道傳與南誾。挾芳碩爲亂。伏誅。北狩咸興。翌年。始回鑾松京。
錄勳 錄開國功臣。壬申。以奮義開國。錄益安大君芳毅等五十六人。○十七人。後罪削。
257_451b配享 領議政趙浚。文忠公。 義安大君和。襄昭公。太祖庶弟。 領議政南在。忠景公追配。 興安君李濟。景武公。罪死追配。 靑海君李之蘭。襄烈公。 判中樞南誾。剛武公。在弟罪死追配。 吏曹判書趙仁沃。忠靖公。
相臣 裴克廉。壬申。以前朝侍中。仍拜左侍中。 趙浚。前朝文科壬申。拜右侍中。至領議政。 金士衡。壬申。拜右侍中。至左議政。 鄭道傳。前朝文科。甲戌管都評議。戊寅罪死。 權仲和。前朝文科。甲戌。判都評議。至領議政致仕。 沈德符。丁丑。以前朝侍中判都評議。至左政丞。 柳曼殊。戊寅。判都評議。同年罪死。
皇明惠宗建文元年己卯。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諱曔。字光遠。初諱芳果。敬事供上曰恭。寬樂令終曰靖。○肅宗辛酉。追上廟號。加上謚懿文莊武。丁酉 元順帝至正十257_451c七年。高麗恭愍王六年。七月朔日。誕降于咸興歸州洞。仕高麗。
官至將相。太祖壬申。封永安君。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八月。冊封王世子。九月受禪。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 十一月。傳位于太宗。난004己亥 皇明成祖永樂十七年。我世宗元年。九月二十六日戊辰。昇遐난005。在位二年。在上王位十九年。春秋六十三。有 十五男八女。厚陵난006在豊德興敎洞。誌文卞季良撰。有行狀及表石。
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金氏。籍慶州。○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天瑞女。○定宗卽位。初封德妃。太宗卽位。尊號順德。○肅宗辛丑。追謚溫明莊懿。乙未 元順帝至正十五年。高麗恭愍王四年。誕降난007。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冊封德嬪。尋進封王妃。壬辰 皇明成祖永樂十年。我太宗十二年。六月二十257_451d五日。昇遐난008。春秋五十八。無嗣。厚陵난009與大王陵。同原
一男義平君元生。池氏出。○娶鐵原崔氏。監務致崇女。生五男三女。
二男順平君群生。奇氏出。謚忠簡。○娶淳昌薛氏。判司宰監事存女。生二男二女。
三男元尹義生。娶南陽洪氏。司直宿女。無后。
四男宣城君茂生。池氏出。○娶迎日鄭氏。參議宗誠女。生一女。後娶安康金氏。上護軍仲約女。生一男。
案文氏出。五男從義君貴生。贈君。○娶楊口柳氏。正贈贊成守濱女。後娶海豊張氏。主簿均女。有繼子。
六男鎭南君終生。李氏出。謚夷簡。○娶宜寧南氏。上護軍深女。生四男一女。
案淑儀尹氏出。七男守道正德生。娶礪山宋氏。府使繼性女。生三男一女。
257_452a案尹氏出。八男林堰正祿生。娶高靈朴氏。少尹溥女。生一男二女。
九男石保正福生。娶原州金氏。判中樞戴敬公連枝난010。生三男五女。
案池氏出。十男德泉君厚生。謚積德。○娶長水李氏。長川府院君良厚公從茂女。生四男五女。
案池氏出。十一男任城君好生。贈君。○娶平昌李氏。郡守繼童女。有繼子。
案池氏出。十二男桃平君末生。娶龍川李氏。府使守綱女。後娶全州崔氏。司直洙女。生一男一女。
案尹氏出。十三男長川都正普生。娶和順崔氏。郡事自海女。生四男一女。
案淑儀奇氏出。十四男貞石都正隆生。娶忠州權氏。直長敦女。生三女。
案淑儀奇氏出。十五男茂林君善生。奇氏出。謚昭夷。○娶南陽洪氏。司正興善女。生二男四女。
按璿系作池氏出。一女咸陽郡主。奇氏出。○駙馬知敦寧朴賡。生一男。○密陽人。父少尹得中。
257_452b按淑儀奇氏出。二女淑愼翁主。駙馬判敦寧良平公金世敏。生四男四女。○慶州人。父都觀察使謙。
三女德川郡主。駙馬行江陵府使邊尙服。生三男二女。○原州人。父都捴制頤。
四女高城郡主。駙馬知中樞金澣。生三男三女。○安山人。父蓮城君威靖公定卿。
五女祥原郡主。駙馬司直趙孝山。生一男一女。○平壤人。父義方。
六女▣▣郡主。駙馬司直李希宗。生三男一女。
七女仁川郡主。駙馬行府使李寬植。生五男三女。○全義人。父少尹成幹。
八女咸安郡主。駙馬知敦寧李恒信。生一男。
故實 己卯。還都松京。
庚辰。朴苞之亂。苞誘懷安大君芳幹。擧兵作亂。苞伏誅。芳幹安寘。
錄勳 錄定社功臣。戊寅。以平鄭道傳南誾之亂。錄義安大君和等二十九人。○十一人。後罪削。
257_452c配享 益安大君芳毅。安襄公。太祖朝大君。
相臣 成石璘。前朝文科。己卯。拜右政丞至領議政。 李舒。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再致仕。再還卜。 閔霽。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左政丞。 河崙。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致仕。
皇明惠宗建文三年辛巳。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諱芳遠。字遺德。敬事供上曰恭。純行不爽曰定。世宗卽位。上號聖德神功。肅宗辛酉。追上謚난011睿哲成烈。丁未 元順帝至正二十七年。高麗恭愍王十六年。五月十六日辛卯。誕降于咸興歸州洞。壬戌 皇明太祖洪武十五年。高麗辛禑七年。擢高麗進士試。翌年癸亥。登文科。官至密直司代言。太祖壬申。封靖安君。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二月。冊封王世257_452d子。十一月。受禪于松京壽昌宮。戊戌 皇明成祖永樂十六年。八月。傳位于世宗。壬寅 我世宗四年。五月十日丙寅。昇遐난012。在位十八年。在上王位四年。春秋五十六。有 十二男十七女。 獻陵난013在廣州大母山。神道碑卞季良撰。有行狀及碑陰記。燕山丙辰。定世室。
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난014籍驪興。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霽女。太宗卽位。初封靜妃。乙巳。元順帝至正二十五年。高麗恭愍王十四年。誕降난015。壬申。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我太祖元年。封靖寧翁主。庚辰。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冊封貞嬪난016。辛巳 我太宗元年。正月。追封王妃。庚子 皇明成祖永樂十八年。我世宗二年。七月十日。昇遐난017。春秋五十六。誕 四男四女。獻陵난018與大王陵同原。誌文卞季良撰。
按成宗朝始建昌慶宮此昌慶宮則新刊璿譜恐誤
257_453a嗣世宗大王。元敬王后誕生。序居第三。
一男讓寧大君禔。初封世子。戊戌。以敗德降封大君。謚剛靖。○娶光州金氏。光山君贈左議政漢老女。生三男四女。
二男孝寧大君初名祜。謚靖孝。●娶海州鄭氏。贊成贈左議政貞度公易女。生六男一女。
四男誠寧大君階大匡贈卞韓公。謚昭頃。○娶昌寧成氏。判院事贈左議政僖靖公抑女。有繼子。
一女貞順公主。駙馬淸平府院君李伯剛。生一女。○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貞公主。駙馬平壤府院君趙大臨康安公。生一男四女。○平壤人。父領議政文忠公浚。
257_453b三女慶安公主。駙馬吉昌君權跬齊簡公。生二男。○安東人。父贊成文忠公近。
四女貞善公主。駙馬宜山君南暉昭簡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捴郞景文。
一男敬寧君金氏出。謚齊簡。○娶淸風金氏。參議贈贊成灌女。生四男。
二男諴寧君䄄。信寧宮主辛氏出。初封恭寧君。○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一女。
按信寧宮主辛氏出。三男溫寧君䄇。謚良惠。○娶順天朴氏。副正贈贊成安命女。有繼子。
按貞嬪高氏出。四男謹寧君禯。謚僖懿。○娶河陽許氏。觀察使贈贊成之惠女。生二男六女。
按安氏出。五男惠寧君祉。娶茂松尹氏。司直贈贊成汴女。生一男二女。
按淑儀崔氏出。六男煕寧君謚夷靖。○娶淳昌申氏。僉知贈贊成淑女。生一女。後娶平山申氏。士廉女。生三男。
257_453c按崔氏出。七男厚寧君謚僖悼。○娶平山申氏。令贈贊成敬宗女。生一女。
八男益寧君淑善翁主安氏出。謚昭剛。○娶雲峰朴氏。節制使贈贊成從智女。生一女。
一女貞惠翁主。懿嬪權氏出。○駙馬雲城府院君朴從愚。錄貞難功臣成烈公。無后。○雲峯人。父贊成惠甫公信。
二女貞信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鈴平君尹季童。生一男一女。○坡平人父兵判向。
三女貞靜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漢原君趙璿昭懷公。生一男一女。○楊州人。父領中樞文剛公末生。
四女淑貞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日成君鄭孝全行判書。生二男四女。●延日人。父工判鎭。
257_453d五女昭善翁主。駙馬柔川尉邊孝順。生一男一女。○原州人。父監察尙周。
六女淑惠翁主。昭惠宮主盧氏出。○駙馬星原尉李正寧章節公。生三男一女。○星州人。父左尹師厚。
按信寧宮主辛氏出。七女淑寧翁主。駙馬坡城君尹愚。生一男一女。○坡平人。父司諫須彌。
按安氏出。八女昭淑翁主。駙馬海平君尹延命。生四男二女。○海平人。父縣監達誠。
按信寧宮主辛氏出。九女淑慶翁主。駙馬坡平君尹巖錄佐翼功臣齊度公。生六男一女。○坡平人。父生員太山。
按安氏出。十女敬愼翁主。駙馬全城君李梡。生六男一女。○全義人。父判事恭全。
按金氏出。十一女淑安翁主。駙馬懷川尉黃裕良悼公。生五男。○懷德人。父判書子厚。
按信寧宮主辛氏出。十二女淑謹翁主。駙馬花川君權恭錄佐翼功臣襄孝公。生一男。○安東人。父都節制復。
按李氏出。十三女淑順翁主。駙馬坡原尉尹泙。生二男一女。○坡平人。父參議敞。
257_454a故實 乙酉。復都漢陽。
己丑。李茂獄。相臣李茂與驪興君閔无咎等。以壞亂朝廷。幷賜死。自是遂罷外戚封君。
辛卯。始設四學。
乙未。禁錮庶孽。因右代言徐選言。禁錮庶孽淸顯。
錄勳 錄佐命功臣。庚辰。太宗冊封世子。尋受禪。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난019
配享 領議政河崙。文忠公。 右議政趙英茂。忠武公。 右議政鄭擢。翼景公。 完山府院君李天祐。襄度公。 鷄城君李來。景節公。
相臣 李居易。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 李茂。辛巳。拜右議政。己丑。罪死。 李稷。前朝文科。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 趙英茂난020。乙酉。拜右議政。 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난021257_454b 柳廷顯。丙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曼殊從弟。 朴訔。前朝文科。丙申。拜右議政。至左議政。 姜筮。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 沈溫。前朝文科。戊戌。拜領議政。同年。賜死。德符子。
皇明成祖永樂十七年己亥。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諱祹。字元正。嚴敬臨民曰莊。行善可紀曰憲。丁丑 皇明太祖洪武三十年。我太祖六年。四月十日壬辰。誕降난022。戊子。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封忠寧君。壬辰。進封大君。戊戌六月。冊封王世子。八月。受禪난023。庚午 皇明代宗永泰九年。二月十七日壬辰。昇遐于別宮。永膺大君琰第。在位三十二年。春秋五十四。有 十八男四女。英陵。257_454c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난024。行狀尹淮撰進。遷陵誌文。李承召撰。又有表石。神道碑。鄭獜趾撰。遷陵時埋碑不用。定世室。
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籍靑松。領議政靑川府院君安孝公溫女。乙亥난025皇明太祖洪武二十八年。我太祖四年。誕降于楊州私第。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行嘉禮。初封敬淑翁主。丁酉。封三韓國大夫人。戊戌六月。冊封敬嬪。十一月。進封恭妃。壬子。皇明宣宗宣德七年。我世宗十四年。改封王妃。丙寅 皇明英宗正統十一年。三月二十四日。昇遐于別宮。世祖潛邸。春秋五十二。誕 八男二女。英陵。난026 廣州與大王陵同原。誌文鄭獜趾撰。驪州亦同原。
嗣文宗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一。
嗣世祖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二。
257_454d三男安平大君瑢。癸酉。被禍。後伸雪。謚章昭。○娶延日鄭氏。判書贈左議政淵女。生二男。
四男臨瀛大君璆。謚貞簡。○娶宜寧南氏。左議政忠簡公智女。無後。後娶全州崔氏。奉禮贈右議政承寧女。生五男二女。
五男廣平大君璵。謚章懿。娶平山申氏。同中樞贈左議政自守女。生一男。
六男錦城大君瑜。丁丑。被禍。後伸雪。謚貞愍。○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
七男平原大君琳。娶南陽洪氏。府使贈左議政利用女。有繼子。
八男永膺大君琰。謚敬孝。○娶海州鄭氏。參判贈左議政忠敬女。無後。後娶礪山宋氏。同中樞贈左議政復元女。生一女。
一女貞孝난027公主。早卒贈公主。
257_455a二女貞懿公主駙馬延昌尉安孟聃良孝公。生四男二女。○竹山人。父觀察使望之。
一男和義君瓔。令嬪姜氏出。癸酉。謫卒謚忠景。○娶密陽朴氏。參贊贈贊成仲孫女。無後。
二男桂陽君璔。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昭。○娶淸州韓氏。左議政襄節公確女。生三男三女。
三男義昌君玒。愼嬪金氏出。謚剛悼。○娶延安金氏。都觀察使贈贊成脩女。生一男二女。
四男漢南君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悼。○娶安東權氏。正郞贈知敦寧格女。生一男一女。
五男密城君琛。愼嬪金氏出。錄翊戴佐理功臣。謚章孝。○娶驪興閔氏。判尹贈贊成承序女。生四男二女。
六男壽春君玹。惠嬪楊氏出。○娶延日鄭氏。府尹贈贊成自濟女。生一女有繼子。
257_455b七男翼峴君璭。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成。○娶平壤趙氏。少尹贈贊成鐵山女。生一男一女。
八男永豊君瑔。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烈。○娶順天朴氏。參判贈判書忠正公彭年女。生一女。
九男寧海君瑭。愼嬪金氏出。謚安悼。○娶平山申氏。漢城尹贈贊成九童女。生二男一女。
十男潭陽君璖。愼嬪金氏出。早卒。謚夷襄。○有繼子。
一女貞顯翁主。尙寢宋氏出。○駙馬鈴川府院君尹師路。錄佐翼功臣。贊成忠景公。生二男。坡平人。父牧使垠。
二女貞安翁主。淑媛李氏出。○駙馬靑城尉沈安義。生一男一女。○靑松人。父觀察使璿。
故實 戊戌。始開經筵。
257_455c己亥。征對馬島。遣李從茂等。往征。大捷而歸。
庚子。設集賢殿。選文學之士二十員充之。專任文學。朝夕論思。以備顧問。卽今之玉堂。
辛丑。建永寧殿。奉安祧主。世子入學。八歲入學。遂爲定制。
丙午。始設輪對法。賜暇湖堂。選年少文臣。賜暇讀書。後稱湖堂。
戊申。纂五禮儀。許稠等纂定。
癸丑。始定雅樂。朴堧贊成之。征野人。遣崔潤德等。征婆豬江野人。大捷而還。
甲寅。纂三綱行實。圖畵事行。又命詞臣。係以詩讚。印布中外。
丁巳。設六鎭。遣金宗瑞。開拓六鎭。設寘城邑。
癸亥。定年分法。田分六等。年分九等。
乙丑。纂龍飛御天歌。命鄭獜趾等。纂穆祖以來肇基之跡。凡百二十五章。
257_455d丙寅。製訓民正音。命成三問申叔舟等。製諺文。
配享 領議政黃喜。翼成公。 左議政崔潤德。貞烈公。 左議政許稠。文敬公。 左議政申槩。文僖公。 吏曹判書李隨。文靖公。潛邸時師傅。
相臣 李原。前朝文科。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己酉。謫卒。 鄭擢。前朝文科。辛丑。拜右議政。 柳觀。改名寬。前朝文科。甲辰。拜右議政致仕。 趙涓。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 黃喜。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九十卒。 孟思誠。前朝文魁。丁未。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權軫。前朝文科。辛亥。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崔潤德。武科。癸丑。拜右議政。至左議政。 盧閈。乙卯。拜右議政。 許稠。前朝文科。戊午。拜右議政。至左議政。申槩。文科。己未。拜右議政。至左議政。 李貴齡。乙丑。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九十257_456a四卒。 河演。文科。乙丑。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皇甫仁。文科。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癸酉。被禍。 南智。己巳。拜右議政。至左議政。○在孫。
皇明代宗景泰二年辛未。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諱珦。字輝之。敬順事上曰恭。慈仁和民曰順。甲午 皇明成祖永樂十二年。我太宗十四年。十月三日癸丑。誕降난028。辛丑。我世宗三年。冊封王世子。入學。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二月。卽位于別宮。永膺大君琰第。壬申五月十四日丙午。昇遐난029。在位二年。春秋三十九。有 一男二女。顯陵。在楊州健元陵東岡。行狀申叔舟撰。有誌文及表石。
仁孝順惠난030顯德王后權氏。籍安東。判漢城府事贈領議政花山府院君景惠公專女。文宗卽位。追封王妃。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31于洪州257_456b合德縣私第辛亥。皇明宣宗宣德六年。我世宗十三年。選入東宮。封承徽。尋封良媛。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冊封世子嬪。辛酉七月二十四日。昇遐난032。春秋二十四。誕 一男一女。顯陵。初葬安山瓦里山。號昭陵。有誌文。○世祖丁丑。遷陵。○至中宗癸酉。改葬于大王陵左岡난033。誌文金國撰。
嗣端宗大王。顯德王后誕生。
一女敬惠公主。駙馬寧陽尉鄭悰。丁丑。謫卒。贈領議政。生一男。○海州人。父參判忠敬。
一女敬肅翁主。司則楊氏出。○駙馬班城尉姜子順。無後。○晉州人。父觀察使徽。
故實 辛未。寘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寘衛將。部將統將。建崇義殿。在麻田郡。祀高麗四王。以名臣十六人配享。
配享 領議政河演。文孝公。
257_456c相臣 金宗瑞。文科辛未。拜右議政。至左議政。癸酉。被禍。
皇明代宗景泰四年癸酉 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敬順敦孝大王。諱弘暐。乙亥。禪位。後上號恭懿溫文。肅宗戊寅。復位上謚。辛酉 皇明英宗正統六年。我世宗二十三年。七月二十三日丁巳。誕降난034。戊辰。冊封王世孫。庚午。皇明代宗景泰元年。我文宗卽位初。進封王世子。壬申五月난035。卽位。乙亥閏六月。禪位于世祖。七月。尊爲太上王。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六月。遜于外。降封魯山君。十月二十四日庚戌난036。昇遐于寧越。在位二年。在上王位三年。春秋十七。無嗣。肅宗辛酉。追封大君。戊寅。復位。莊陵。在寧越冬乙旨。有表石。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籍礪山。○判敦寧勵良君贈領敦寧勵良府院257_456d君玹壽女。○乙亥大妃時。上號懿德。○肅宗戊寅。復位上謚。庚申。皇明英宗正統五年。我世宗二十二年。誕降。甲戌。皇明代宗景泰五年。我端宗二年。冊封王妃。乙亥。我世祖元年。尊爲王大妃。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六月。降爲夫人。辛巳 皇明武宗正德十六年。我中宗十六年。六月四日。昇遐난037。春秋八十二。肅宗戊寅。復位。思陵。在楊州羣場里。
故實 癸酉。安平大君獄。以相臣金宗瑞等。謀推戴安平大君瑢。皆被禍。
錄勳 錄靖難功臣。癸酉。皇甫仁金宗瑞等。以推戴安平大君瑢。皆罪死。錄鄭獜趾等四十二人。四人。後罪削。
相臣 鄭莾。文科。壬申。拜右議政。癸酉。被禍。
○○○○。癸酉。以首陽大君난038。拜領議政。吏兵曹判書。內外兵馬都統使。 鄭獜趾。257_457a文魁。癸酉。拜左議政。至領議政。 韓確。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代宗景泰六年乙亥。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諱瑈。字粹之。柔質慈仁曰惠。嚴敬臨民曰莊。丁丑。上號承天軆道烈文英武。丁酉 皇明成祖永樂十五年。我太宗十七年。九月二十九日丙子난039誕降난040。戊申。皇明宣祖宣德三年。我世宗十年。初封晉平大君。後改咸平。又改晉陽。又改首陽。乙亥 皇明代宗景泰六年。我端宗三年。閏六月十一日。受禪난041。戊子 皇明憲宗成化四年。九月七日。傳位于睿宗。八日甲子。昇遐난042。在位十四年。春秋五十二。有晬容二本。奉安于永禧殿。四男一女。 光陵난043在楊州注葉山直洞。行狀徐居正撰。有誌文及表石。○明宗丁未。定世室。
257_457b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난044籍坡平。判中樞院事贈領議政坡平府院君貞靖公璠女。○丁丑。上號慈聖。○睿宗己丑。加上惠懿。○成宗辛卯加上神憲 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45洪州난046公衙。戊申。皇明宣宗宣德三年。我世宗十年。行嘉禮。初封樂浪府大夫人。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妃。癸卯 皇明憲宗成化十九年。我成宗十四年。三月三十日。昇遐于溫陽行宮。春秋六十六。誕 二男一女。光陵난047在大王陵左岡有誌文。
嗣德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一。
嗣睿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懿淑公主。駙馬河城府院君鄭顯祖。錄翊戴佐理功臣褊玎公。登文科。無後。○河東257_457c人。父領議政文成公獜趾。
一男德源君曙。謹嬪朴氏出。錄翊戴功臣謚昭簡。○娶慶州金氏。贈贊成從直女。再娶鳳山尹氏。三娶陽城楊氏。幷無後。
二男昌源君晟。謹嬪朴氏出。○娶交河盧氏。正贈贊成好愼女。後娶光州鄭氏。有繼子。
故實 丙子。六臣獄。成三問等六人。謀復上王。事覺。皆死之。
丁丑。錦城大君獄。順興府使李甫欽。與錦城大君瑜。謀復上王。皆死。
庚辰。西狩平壤。設科取士。
乙酉난048。南狩溫陽。設科取士。○戊子又幸設科如初。
丙戌。東狩江陵。設科取士。
丁亥。李施愛之亂。擧兵于吉州。殺監司兵使。遣將討平之。討建州。以皇命遣257_457d魚有沼等。往征。大捷而還。
錄勳 錄佐翼功臣。丙子。六臣等。謀復上王。金礩上變。獄편001。錄桂陽君璔等。四十四人。○三人後罪削。 錄敵愾功臣。丁亥。吉州賊李施愛叛난049北道。遣將討平之。錄曺錫文等四十五人。○四人後罪削。
配享 左議政權擥。翼平公。 左議政韓確。襄節公。 領議政韓明澮。忠成公追配。
相臣 李思哲。文科。乙亥。拜右議政。至左議政。 鄭昌孫。文科。丙子。拜右議政。至領議政。 姜孟卿。文科。丁丑。拜右議政。至領議政。 申叔舟。文科。戊寅。拜右議政。至領議政。 李仁孫。文科。己卯。拜右議政。致仕。 權擥。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韓明澮。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尙敬從孫。 具致寬。文科。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 257_458a黃守身。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喜子。 沈澮。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溫子。朴元亨。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 崔恒。文魁。丁亥。拜右議政。至領議政。 曺錫文。文科。丁亥。拜右議政。至領議政。 洪達孫。武蔭。丁亥。拜右議政。 龜城君浚。戊子。拜領議政。時年二十八。己亥。賜死。○世宗朝王孫。 康純。戊子。拜右議政。至領議政。同年。罪死。 金礩。文科。戊子。拜右議政。至左議政。○士衡曾孫。 洪允成。文科。戊子。拜右議政。至領議政。
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諱暲。字原明。初諱崇。慈仁短折曰懷。平易不訾曰簡。○在東宮昇遐。謚敬懿世子。戊午 皇明英宗正統三年。我世宗二十年。九月十五日丙申。誕降난050。乙丑。初封桃源君。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世子。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257_458b月二日癸亥。昇遐于東宮。春秋二十。成宗辛卯。追崇。有 二男一女。敬陵난051在高陽蜂峴誌文。李承召撰有表石。
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韓氏。籍淸州。○明朝宣授光祿少卿。本朝左議政西原府院君襄節公確女。○成宗辛卯。進冊王大妃。上號仁粹。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我世宗十九年。誕降난052。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粹嬪。辛卯。皇明憲宗成化七年。我成宗二年。尊冊爲王大妃。甲子 皇明孝宗弘治十七年。我燕山十年。四月二十七日。昇遐난053。春秋六十八。誕 二男一女。敬陵난054在大王陵右岡。
嗣成宗大王。昭惠王后誕生。序居第二。
一男月山大君婷。初封君錄佐理功臣。謚孝文。○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257_458c公仲善女。無後。
一女明淑公主。駙馬唐陽君洪常昭夷公。生一男。○南陽人。父左議政忠肅公應。
皇明憲宗成化五年己丑。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諱晄。字明照。初字平甫。因事有功曰襄。未中早夭曰悼。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我世宗二十二年。正月朔日丁丑。誕降난055。初封海陽大君。丁丑。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冊封王世子。丙戌。皇明憲宗成化二年。入學。戊子九月。受禪。己丑十一月二十八日戊申。昇遐난056。在位一年。春秋二十。有 二男一女。昌陵난057在高陽敬陵北岡。有行狀。又有誌文及表石。
徽仁昭德章順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乙丑。皇明英宗正統十年。我世宗二十七年。誕降난058。庚辰。皇明英宗天順四年。我世祖六年。257_458d封世子嬪。辛巳十二月五日。昇遐于私第。錄事安耆之家。春秋十七。成宗壬辰。追尊爲王妃。誕 一男。恭陵난059在坡州普施洞有誌文。
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난060籍淸州。○右議政淸川府院君襄惠公伯倫女。成宗辛卯上號仁惠。選入東宮。初封昭訓。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冊封王妃。戊午 皇明孝宗弘治十一年。我燕山四年。十二月二十三日。昇遐。誕一男一女。昌陵난061在大王陵左岡。
一男仁城大君。 早卒。贈君後加贈大君謚孝昭。○章順王后誕生。
二男齊安大君琄。謚靈孝。○娶尙州金氏。正贈左議政守末女。承安順王后旨。去之。改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公仲善女。其後。又以后命與金氏。復合。幷無後。
257_459a一女顯肅公主。駙馬豊川尉任光載無後。○豊川人。父判書士洪。○以上安順王后誕生。
故實 戊子南怡獄。柳子光誣告南怡謀逆。與領相康純。幷被禍。
錄勳 錄翊戴功臣。己丑。南怡等獄成。錄申叔舟等三十九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朴元亨。文憲公。
相臣 尹子雲。文科。己丑。拜右議政至領議政。 金國光。文科。己丑。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憲宗成化六年庚寅。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諱娎。溫良好樂曰康。寬樂令終曰靖。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七月三十日辛卯。誕降난062。辛巳。初封者山君。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改封乽山君。己丑十一月。奉貞熹王后命。卽位난063。甲寅 皇明孝宗弘治七年。十二月二十四日己卯。昇遐난064。在位二十五年。春秋三十八。有 十六257_459b男十二女。宣陵난065在廣州學堂洞。有行狀誌文及表石。○仁祖癸酉난066定世室。
以上屬成宗朝
徽懿愼肅恭惠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丙子。皇明代宗景泰七年。我世祖二年。誕降난067。丁亥。皇明憲宗成化三年。行嘉禮。己丑。冊封王妃。甲午 我成宗五年。四月十五日。昇遐난068。春秋十九。無嗣。順陵난069在坡州恭陵南岡。有誌文。
以上屬恭惠王后
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尹氏。籍坡平。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壕女。○燕山丁巳上號慈順。甲子。加上和惠。壬午。皇明英宗天順六年。我世祖八年。誕降난070于新昌公衙。癸巳。皇明憲成化九年。我成宗四年。選入大內。初封淑儀。庚子。冊封王妃。庚寅 皇明世宗嘉靖九年。我中宗二十五年。八月二十二日。昇遐난071。春秋六十九。誕 一男一女。宣陵난072在大王陵左岡誌文李257_459c荇撰。
嗣中宗大王。貞顯王后誕生。
一女愼淑公主。貞顯王后誕生。早卒。
一男燕山君㦕。母廢妃尹氏。初封世子。嗣位十二年廢。生二男一女。
二男柱城君恂。淑儀河氏出。○娶原州元氏。僉正贈贊成菑女。有繼子。
三男安陽君㤚。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謚恭懷。○娶綾城具氏。綾川君贈贊成壽永女。生一女。
四男完原君淑儀洪氏出。謚昭悼。○娶全州崔氏。生員贈贊成河臨女。無後。後娶楊川許氏。別坐贈贊成磧女。生二男二女。
五男檜山君恬。淑儀洪氏出。○娶竹山安氏。贊儀贈贊成邦彦女。有繼子。
257_459d六男鳳安君㦀。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娶平壤趙氏。判官贈贊成紀女。生一男。
七男甄城君惇。淑儀洪氏出。○娶平山申氏。奉事贈贊成友灝女。生二男一女。
八男益陽君懷。淑儀洪氏出。謚順平。○娶延日鄭氏。僉知贈贊成文昌女。生四男三女。
九男利城君慣。淑容沈氏出。謚章平。○娶南平文氏。引儀贈贊成簡女。生三男。後娶安東權氏。郡守贈贊成守中女。無後。
十男景明君忱。淑儀洪氏出。○娶坡平尹氏。僉正贈贊成堞女。生二男二女。
十一男全城君忭。貴人權氏出。○娶安東權氏。知中樞贈贊成忠敏公健女。有繼子。
十二男茂山君悰。淑儀金氏出。○娶平山申氏。別坐贈贊成銖女。生六男二女。
十三男寧山君恮。淑容沈氏出。癸酉被禍謚忠信。○娶靑松沈氏。郡守贈贊成順路女。生二女。後娶慶州鄭氏。別坐贈贊成弘光女。生一女。
257_460a十四男雲川君淑儀洪氏出。○娶安東權氏。參議贈贊成仁孫女。生四女有繼子。
十五男楊原君憘。淑儀洪氏出。○娶平壤趙氏。忠義衛贈贊成經女。無後後娶文化柳氏。正贈贊成從孫女。生一男。
一女惠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高原尉申沆文孝公。有繼子。○高靈人。父參判從濩。
二女徽肅翁主。淑儀金氏出。○駙馬豊原尉任崇載。生三女。○豊川人。父判書士洪。
三女恭愼翁主。貴人嚴氏出。○駙馬淸寧尉韓景琛。無後。○淸州人。父琅城君襄胡公堡。
四女慶順翁主。淑容沈氏出。○駙馬宜城尉南致元榮僖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府使燝。
五女敬淑翁主。淑儀金氏出。○駙馬驪川尉閔子芳。生一男○驪興人。父縣令宗元。
六女靜順翁主。淑儀洪氏出。○駙馬奉城尉鄭元俊。生一男。○奉化人。父主簿鉉。
257_460b七女淑惠翁主。淑容沈氏出。○駙馬漢川尉趙無疆。生一男。●楊州人。父參奉光世。
八女慶徽翁主。淑容權氏出。○駙馬鈴原尉尹鼐。生一男。○坡平人。父府使承世。
九女徽靜翁主。淑儀金氏出。○駙馬宜川尉南燮元。生一女。○宜寧人。父承旨忻。
十女靜惠翁主。貴人鄭氏出。○駙馬淸平尉韓紀無後。○淸州人。父判書亨允。
十一女靜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鈴平尉尹燮有繼子。○坡平人。父正承柳。
故實 庚寅。設弘文館。選文學之士十七員。充之。以備顧問。
辛卯。德宗追崇。始用經國大典。世祖朝命纂至是始成。
乙未。親耕籍田。丙申。又築觀耕壇於先農壇南。 王妃親蠶。親行釋菜。建尊經閣。建閣太學藏書籍。
丁酉王妃親蠶。築採桑壇於景福宮後苑。親行釋菜。仍行大射禮。
257_460c戊戌行養老禮。養老乞言于太學。纂輿地勝覽。纂東文選。
己亥。廢妃尹氏。以妬忌。貞熹王妃命廢之。因賜死。征建州。以皇明。遣尹弼商等。往征。大捷而還。
庚子親行釋菜。壬寅。又親行。
乙巳。錮改嫁女子孫。纂東國通鑑。
辛亥征野人。遣許琮等。往征。大捷而還。
壬子大酺師生。重修學宮。親臨大饗。
癸丑親耕籍田。王妃親蠶。
錄勳 錄佐理功臣。辛卯。以國家昇平。錄申叔舟等七十七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申叔舟。文忠公。 領議政鄭昌孫。忠貞公。 左議257_460d政洪應。忠貞公。
相臣 尹士昐。庚寅拜右議政。坐贓死獄中。 韓伯倫。庚寅。拜右議政。 成奉祖。辛卯。拜右議政。○石璘從孫。 尹士昕。乙未。拜右議政。○士昐弟。 尹弼商。文科。戊戌。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 洪應。文魁。己亥。拜右議政。至左議政。 李克培。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仁孫子。 盧思愼。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閈孫。許琮。文科。壬子拜右議政。 尹壕난073文科。甲寅。拜右議政。●弼商從叔。 愼承善。文魁。甲寅。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孝宗弘治八年乙卯。○附 燕山君㦕。母廢妃尹氏。判奉常寺事起畒女。○成宗丙申生。癸卯。冊封王世子。丁未。入學。甲寅。嗣位淫虐日甚。宗社將危。中宗反正。廢。封燕山君。放于喬桐。同年十二月卒。在位十一年。壽三十一。○夫人居昌愼氏。領議政章成公承善女。生二男一女。○墓在楊州海等村。
257_461a故實 戊午士禍。柳子光誣告金宗直吊義帝文。宗直戮死。其門徒。或誅竄。或廢錮。
甲子士禍。以廢妃尹氏賜死事。追罪廷臣。肆行誅戮。至有碎骨飄風之刑。追崇私親。追崇廢妃尹氏。改號懷陵。反正後廢。築內都城。撤都城百步內人家。寘運平樂。取各道娼妓。寘運平樂工。○宮女則有興靑,天科,地科之號。
乙丑築瑞葱臺。卽今春塘臺。改官制。革司諫院。罷經筵。减翰林員。增司僕寺掌樂院官。設獵藪。廢陵寢祭享。掇津渡舟楫。移畿內六邑于遠外。
相臣 鄭佸。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昌孫子。魚世謙。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鄭文烱。文科丙辰。拜右議政。改正。○道傳曾孫。 韓致亨。丙辰。拜右議政。至領議政。○確侄。 成俊。文科。戊午。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奉祖侄。 李克均。文科。庚申。拜右議政。至左議政。甲子。被禍。○克培弟。 柳洵。文科。癸亥。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後還257_461b卜。○曼殊玄孫。許琛。文科。甲子。拜右議政。至左議政。○琮弟。朴崇質。文科。甲子。拜右議政。至左議政。●訔孫。 姜龜孫。文科。乙丑拜右議政。●孟卿從侄。 愼守勤。丙寅。拜右議政。至左議政。反正日被誅。○承善子。 金壽童。文科。丙寅。起復。拜右議政。至領議政。○礩侄。
皇明武宗正德元年丙寅。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諱懌。字樂天。敬順事上曰恭。小心恭愼曰僖。戊申 皇明孝宗弘治元年。我成宗十九年。三月五日己巳。誕降。初封晉城大君。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九月二日。卽位。甲辰 皇明世宗嘉靖二十三年。十一月十四日。傳位于仁宗。十五日庚戌。昇遐난074。在位三十九年。春秋五十七。有 九男十一女。靖陵난075初葬高陽。號僖陵。○明宗壬戌。移葬于廣州宣陵東岡。誌文。洪春卿撰。有表石。
以上屬中宗朝
257_461c恭昭順烈端敬王后愼氏。籍居昌。○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守勤女。丁未。皇明憲宗成化二十三年。我成宗十八年。誕降난076。己未。皇明孝宗弘治十二年。我燕山五年。行嘉禮。封府夫人。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九月二日。正位中壼。九日。遜位于私第。丁巳 皇明世宗嘉靖三十六年我明宗十二年。十二月七日。昇遐。春秋七十一。無嗣。英宗己未。追復位。上謚溫陵。在楊州西山長興面水回洞。
宣昭懿淑章敬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原府院君汝弼女。辛亥。皇明孝宗弘治四年我。○成宗二十二年。誕降난077。丙寅。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選入大內。初封淑儀。丁卯八月。進冊王妃。乙亥三月二日。昇遐난078。春秋二十五。誕 一男一女。禧陵난079初葬廣州獻陵右岡。○中宗丁酉。移葬于257_461d高陽元堂里。誌文金安老撰。有表石。
聖烈仁明文定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山府院君靖平公之任女。明宗丁未。上號聖烈仁明。辛酉。皇明孝宗弘治十四年。我燕山七年。誕降난080。丁丑。皇明武宗正德十二年。我中宗十二年。冊封王妃。乙丑 皇明世宗嘉靖四十四年。我明宗二十年。四月七日。昇遐난081。春秋六十五。誕 一男四女。泰陵。在楊州蘆原西行錄明宗御製有表石。
嗣仁宗大王。章敬王后誕生。序居第一。
嗣明宗大王。文定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孝惠公主。駙馬延城尉金禧生一女。○延安人。父左議政安老章敬王后誕生。
二女懿惠公主。駙馬淸原尉韓景祿。生三男。○淸州人。父僉知承權。
257_462a三女孝順公主。駙馬綾原尉具思顔。有繼子。○綾城人。父縣監淳。
四女敬顯公主。駙馬靈川尉申檥。生一男。○高靈人。父牧使秀涇。
五女仁順公主。早卒。○以上文定王后誕生。
一男福城君嵋。敬嬪朴氏出。壬辰被禍。後伸雪。○娶坡平尹氏。縣監贈贊成仁範女。生一女。初宣祖爲繼。及入承大統。後命信城君翊。奉其祀。
二男海安君㟓。淑儀洪氏出。○娶晉州柳氏。晉山君贈贊成泓女。無後。後娶居昌愼氏。參奉贈贊成弘猷女。生一女。
三男錦原君岭。煕嬪洪氏出。○娶海州鄭氏。都事贈贊成承休女。生一女。有繼子。
四男永陽君岠。昌嬪安氏出。謚成悼。○娶順興安氏。司圃贈贊成世亨女。有繼子。
五男德陽君岐。淑儀李氏出。謚靖僖。○娶安편002權氏。判書贈贊成纘女。生一男。
257_462b六男鳳城君岏。煕嬪洪氏出。乙巳난082被禍。謚懿愍。○娶東萊鄭氏。正贈領議政惟仁女。生一女。有繼子。
七男德興大院君岹。昌嬪安氏誕生。庚寅生。己未卒。壽三十。●宣廟入承大統。後追尊爲大院君。○配河東府夫人鄭氏。判中樞贈領議政孝簡公世虎女。誕三男一女。
一女惠順翁主。敬嬪朴氏出。○駙馬光川尉金仁慶。有繼子。○光州人。父參議憲胤。
二女惠靜翁主。敬嬪朴氏出。○駙馬唐城尉洪礪。壬辰被禍。後伸雪。生一女。○南陽人。父觀察使叙疇。
三女貞順翁主。淑媛李氏出。○駙馬礪城尉宋寅文端公。生一男。○礪山人。父僉知之翰。
四女孝靜翁主。淑媛李氏出。○駙馬淳原尉趙義貞。生一男。○淳昌人。父府尹琛。
五女淑靜翁主。淑媛金氏出。○駙馬綾昌尉具澣。生三男三女。○綾城人。父副正信璟。
257_462c六女靜愼翁主。昌嬪安氏出。○駙馬淸川尉韓景祐。生一男三女。○淸州人。父縣監慈。
故實 丙寅反正。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奉主上反正。
丁卯。李顆獄。盧永孫告李顆等謀逆。幷被殺。
庚午。三浦倭亂。遣柳聃年黃衡等。討平之。
癸酉。復昭陵。卽顯德王后陵。○世祖丁丑。遷陵。失所在。至是。三司百官。上章請復。改葬于顯陵左岡。鄭莫介告密。公賤鄭莫介。告功臣朴永文辛允武等謀逆。幷正法削勳。親耕籍田。王妃親蠶。
乙亥。金凈,朴祥獄。是年。章敬王后上賓。金凈朴祥上䟽請復愼妃。幷拿鞠徒配。
丁丑。鄭文忠公從祀。以前朝儒賢鄭夢周。從祀文廟。
己卯。設賢良科。命京外各薦人才。庭策治道。取金湜等二十八人。罷昭格署。257_462d三司庭爭。罷之。乙酉。復建。壬辰亂後永廢。士禍。南衮,沈貞等。從北門誣告。趙光祖等諸人。皆被大禍。
辛卯。安瑭獄。宋祀連誣告。搆殺安瑭一門。
己丑。王妃親蠶。
庚寅。增修輿地勝覽。
壬辰。福城君獄。宮中巫蠱。敬嬪朴氏及其子女福城君嵋,唐城尉洪礪。幷被慘禍。後幷伸。
甲午。親行大射禮。
乙未。幸松京。設科取士。
丁酉。金安老獄。發卒圍捕。遠竄。未到配。賜死于葛院。
錄勳 錄靖國功臣。丙寅。燕山荒亂。宗社將危。朴元宗等。擧義反正。錄元宗等百十八人。○十一人。後罪削。錄定難功臣。丁卯。盧永孫告李顆等謀逆。獄成。錄永孫等二十二人。○後因臺啓257_463a單。錄永孫餘皆削功。
配享 領議政朴元宗。武烈公。 領議政成希顔。忠定公。 領議政柳順汀。文成公난083 領議政鄭光弼。文翼公。
相臣 朴元宗。武科。丙寅。拜右議政。至領議政。 柳順汀。文魁。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 成希顔。文科。己巳。拜右議政。至領議政。 宋軼。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 鄭光弼。文科。癸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應箕。文科。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申用漑。文科。丙子。拜右議政。至左議政。○叔舟孫。 安瑭。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辛巳被禍。金銓。文魁。己卯。拜右議政。至領議政。 南衮。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後追奪。 李惟淸。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權鈞。文科。癸未。拜右議政。 沈貞。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辛卯。罪死。 李沆。文科。丁亥。拜右議政。改正。 李荇。257_463b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甲午。謫卒。 張順孫。文科。庚寅。拜右議政。至領議政。 韓效元。文科。辛卯。拜右議政。至領議政。 金謹思。文科。癸巳。拜右議政。至領議政。丁酉。謫卒。金安老。文魁。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丁酉。罪死。○詮侄。 尹殷輔。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柳溥。文科。丁酉。拜右議政。至左議政。○順汀侄。 洪彦弼。文科。丁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克成。文科。丁酉。拜右議政。 尹仁鏡。文科。庚子。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世宗嘉靖二十四年乙巳。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諱峼。寵祿光大曰榮。寬樂令終曰靖。乙亥 皇明武宗正德十年。我中宗十年。二月二十五日癸丑。誕降난084。庚辰。冊封王世子。壬午。皇明世宗嘉靖元난085行冠禮入學。甲辰十一月受禪。乙巳七月朔日辛酉。昇遐난086。在位八月。春秋257_463c三十一。無嗣。孝陵난087在高陽禧陵西岡。行狀李彦廸撰。誌文申光漢撰。有表石。
以上屬仁宗朝
孝順恭懿仁聖王后朴氏。籍羅州。○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錦城府院君墉女。甲戌。皇明武宗正德九年。我中宗九年。誕降난088。甲申。皇明世宗嘉靖三年。冊封世子嬪。甲辰。進封王妃。丁丑 皇明神宗萬曆五年。我宣祖十年。十一月二十九日。昇遐난089。春秋六十四。孝陵난090與大王陵同原。
配享 領議政洪彦弼。文僖公。 左贊成金安國。文敬公。
相臣 李芑。乙巳。拜右議政。改正。同年復拜。 柳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同年。被禍。亮玄孫。 成世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戊申。謫卒。⊙奉祖曾孫난091
皇明世宗嘉靖二十五年丙午。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諱峘。字對陽。敬順事上曰恭。行善可紀曰憲。甲午 皇明世宗嘉靖十三年。我中宗二十九年。五月二十二日257_463d戊子誕降。初封慶原大君。乙巳七月。以仁宗遺命。卽位난092。丁卯 皇明穆宗隆慶元年。六月二十八日辛亥。昇遐난093。在位二十二年。春秋三十四。有 一男。康陵난094在楊州。泰陵東岡。行狀李滉撰。有表石。
宣烈懿聖仁順王后沈氏。籍靑松。●領敦寧靑陵府院君贈領議政翼孝公鋼女。壬辰。皇明世宗嘉靖十一年。我中宗二十七年。誕降。乙巳。冊封王妃。乙亥 皇明神宗萬曆三年。我宣祖八年。正月二日。昇遐난095。春秋四十四。誕 一男。康陵난096與大王陵同原。
嗣宣祖大王。
一男順懷世子諱暊。仁順王后誕生。明宗辛亥。誕降。丁巳。冊封王世子。庚子入學난097
此間必有闕文。而原本見漏。故不能續繕。
257_464a配享 領議政金昌集。忠獻公。 領議政崔奎瑞。文忠난098公。 左議政閔鎭遠。文忠公。 左議政趙文命。文忠公。 領議政金在魯。忠靖公。
相臣 柳鳳輝。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丁未謫死。乙亥。追施逆律。○尙運子。 趙泰億。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今上난099。丙申。追奪。○師錫侄。 鄭澔。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澈玄孫。閔鎭遠。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鼎重侄。 李觀命난100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健命兄。 洪致中。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重普孫。趙道彬。文科。丙午。拜右議政。○泰采侄。 李宜顯。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世白子。 沈壽賢。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連源八世孫。 吳命恒。文科。戊申。拜右議政。○允謙玄孫。 李台佐。文科。戊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恒福玄257_464b孫。 李㙫。文科。己酉。拜右議政。至左議政。○芑六世孫。 趙文命。文科。庚戌。拜右議政。至左議政。○相愚從孫。徐命均。文科。壬子。拜右議政。至左議政。○宗泰子。 金興慶。文科。壬子。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金在魯。文科。乙卯。拜左議政。至領議政。致仕。○構子。宋寅明。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 兪拓基。文科。己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趙顯命 文科。庚申。拜右議政。至領議政。○文命弟。 鄭錫五。文科。丙寅。拜右議政。至左議政。○致和曾孫。 閔應洙。文科。丙寅。拜右議政。○鎭遠從侄。 金若魯。文科。己巳。拜右議政。至左議政。○在魯從弟。 鄭羽良。文科。己巳。拜右議政。 李宗城。文科。壬申。拜左議政。至領議政。○台佐子。 李天輔。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廷龜五世孫。 金尙魯。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今上。丙申。追施大逆律。○若魯弟。 趙載浩。文科。甲戌。拜右議政。壬午。罪死。乙未伸。○文命子。 申晩。文科。丙子。257_464c拜右議政。至領議政。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時白五世孫。 閔百祥。文科。己卯。拜右議政。○鎭遠孫。 洪鳳漢。文科。辛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鄭翬良。文科。辛巳。拜右議政。至左議政。○羽良弟。 尹東度。文科。辛巳。拜右議政。至領議政。 金相福。文科。癸未。拜右議政。至領議政。○國光十一世孫。 金致仁。文魁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在魯子。 徐志修。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命均子。 金陽澤。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國光十世孫。 韓翼謩。文科。丙戌。拜左議政。至領議政。○應寅六世孫。 金尙喆。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 李昌誼。文科。戊子。拜右議政。至左議政。 申晦。文科。壬辰。拜左議政。至領議政。丙申。謫。○晩弟。 李溵난101文科。壬辰。拜右議政。○㙫孫。 李思觀。文科。壬辰。拜右議政。至左議政。 元仁孫。文科。壬辰。拜右議政。斗杓五世孫。 洪麟漢。文科。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丙申。以逆誅。○鳳漢弟。
257_464d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諱緈。字聖敬。己亥 肅宗四十五年。 二月十五日戊午。誕降난102。甲辰。初封敬義君。乙巳。英宗元年。 冊封王世子。丁未。入學。行冠禮。戊申十一月十六日壬戌。昇遐난103。春秋十。甲申난104。以今上난105特命爲嗣。丙申。賜號承統世子。八月十二日。追尊爲王。上謚溫良睿明哲文孝章。無嗣。永陵。在坡州順陵左岡。初墓。號孝章。後進號永陵。行錄及誌文。英宗御製。有表石。
徽貞賢淑孝純王后趙氏。籍豊壤。○左議政豊陵府院君贈領議政文忠公文命女。乙未。肅宗四十一年。誕降난106。丁未。英宗三年。冊封世子嬪。行嘉禮。乙卯。賜號賢嬪。辛未十一月十四日丁丑。昇遐난107。春秋三257_465a十七。壬申。賜謚孝純賢嬪。丙申。賜號承統。八月十二日。追尊爲王妃。上謚徽貞賢淑孝純。無嗣。永陵난108與大王陵同原。
嗣主上殿下。惠慶宮惠嬪洪氏誕生。
主上殿下。諱祘。字亨運。壬申 英宗二十八年。九月二十二日己卯。誕降于昌慶宮之景春殿。己卯。冊封王世孫。辛巳。入學行冠禮。甲申。特命嗣眞宗大王。丙申。受御筆孝孫銀印。同年三月十日辛巳。卽位于慶煕宮之崇政門。
妃殿下金氏。籍淸風。行參贊贈領議政淸風府院君靖翼公時默女。癸酉 英宗二十九年。257_465b十二月癸巳。誕降난109。壬午。冊封世孫嬪。行嘉禮。丙申。進封王妃。


[난-001]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 : 案英宗乙亥。卽上王時所御豊壤舊基。建閣竪碑。
[난-002]健元陵 : 案戊子九月九日。葬。
[난-003]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 : 案璿系闕年而只書六月十三日。誕降。
[난-004]傳位于太宗。 : 案璿系。庚辰十二月。上尊號。仁文恭孝。
[난-005]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6]厚陵 : 案庚子正月三日。葬。
[난-007]誕降 : 案乙未正月九日。誕降。
[난-008]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9]厚陵 : 案壬辰八月八日。葬。
[난-010]生 :
[난-011]追上謚 : 一本癸亥追上謚
[난-012]昇遐 : 按昇遐于泉達坊之新宮。
[난-013]獻陵 : 按壬寅九月六日。葬。
[난-014]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 : 世宗甲辰追上尊號彰德昭烈。
[난-015]誕降 : 按乙巳七月十一日。誕降于松京鐵洞。
[난-016]冊封貞嬪 : 按璿系。封貞嬪下有尋追封靜妃。
[난-017]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別殿今昌慶宮。
[난-018]獻陵 : 按庚子九月十七日。葬。
[난-019]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 : 一本。錄李薆等四十八人。而十人罪削。
[난-020]趙英茂 : 一本。趙英茂下。有義安大君和。太祖庶弟。丁亥。拜領相。
[난-021]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 一本。南在,柳亮。壬辰。拜相。韓尙敬。丙申。拜相。
[난-022]誕降 : 按誕降于漢陽潛邸。
[난-023]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24]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 : 按庚午六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英陵。
[난-025]乙亥 : 按璿系。乙亥下。有九月無日。
[난-026]英陵 : 按丙寅七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
[난-027]貞孝 : 按璿系。貞孝。作貞昭。
[난-028]誕降 : 按誕降于漢陽私第。
[난-02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千秋殿。按壬申九月朔日。葬。
[난-030]仁孝順惠 : 端宗甲戌。追上尊號仁孝順惠。
[난-031]誕降 : 按戊戌三月十二日。誕降。
[난-032]昇遐 : 按昇遐于東宮之資善堂。
[난-033]改葬于大王陵左岡 : 按辛酉九月。初葬昭陵。癸酉四月二十一日。改葬。
[난-034]誕降 : 按誕降于東宮之資善堂。
[난-035]五月 : 五月一作正月
[난-036]庚戌 : 庚戌一作甲寅
[난-037]昇遐 : 按英宗辛卯。御筆書凈業院舊基。竪碑于燕尾貞洞。
[난-038]首陽大君 : 世祖潛邸封號。
[난-039]丙子 : 一本丙子作辛巳
[난-040]誕降 : 按誕降于本宮。
[난-041]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42]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正殿。
[난-043]光陵 : 按戊子十一月二十八日。葬。
[난-044]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 : 按璿系睿宗己丑。加上自欽仁至忠懿十四字。
[난-045]誕降 : 按戊戌十一月十一日。誕降。
[난-046]洪州 : 一本洪州。作洪川。
[난-047]光陵 : 按癸卯六月十二日。葬。
[난-048]乙酉 : 一本乙酉作甲申
[편-001]戌 :
[난-049]遽 :
[난-050]誕降 : 按誕降于禁中。
[난-051]敬陵 : 按丁丑十一月二十三日。葬。
[난-052]誕降 : 按九月八日。誕降。
[난-05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景春殿。
[난-054]敬陵 : 按甲子五月。葬。
[난-055]誕降 : 按誕降于私第。
[난-05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紫薇堂。
[난-057]昌陵 : 按庚寅三月五日。葬。
[난-058]誕降 : 按正月十六日。誕降。
[난-059]恭陵 : 按壬午二月二十五日。葬。
[난-060]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 : 按璿系闕年只書三月十二日。誕降。
[난-061]昌陵 : 按己未二月十四日。葬。
[난-062]誕降 : 按誕降于東宮。
[난-063]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64]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大造殿。
[난-065]宣陵 : 按乙卯四月六日。葬。
[난-066]癸酉 : 一本癸酉作乙亥
[난-067]誕降 : 按十月十一日。誕降于蓮花坊私第。
[난-068]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求賢殿。
[난-069]順陵 : 按甲午六月七日。葬。
[난-070]誕降 : 按六月二十六日。誕降。
[난-071]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72]宣陵 : 按庚寅九月二十日。葬。
[난-073]尹壕 : 一本尹壕下。有居平君復。定宗朝王孫。拜右相改正。
[난-074]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歡慶堂。
[난-075]靖陵 : 按乙巳二月。初葬僖陵。壬戌九月四日。移葬。
[난-076]誕降 : 按正月十四日。誕降。
[난-077]誕降 : 按七月六日。誕降于會賢坊私第。
[난-078]昇遐 : 按昇遐于景福宮別殿。
[난-079]禧陵 : 按乙酉閏四月。初葬廣州。
[난-080]誕降 : 按十月二十二日。誕降。
[난-081]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昭德堂。
[편-002]束 :
[난-082]乙巳 : 一本乙巳。作丁未。
[난-083]文成公 : 一本。文成公。作烈成公。
[난-084]誕降 : 按誕降于景福宮。
[난-085]宗 :
[난-08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淸燕樓下小寢。
[난-087]孝陵 : 按乙巳十月十五日。葬。
[난-088]誕降 : 按十月朔日。誕降。
[난-08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90]孝陵 : 按戊寅二月十五日。葬。
[난-091]奉祖曾孫 : 一作奉祖從孫。
[난-092]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93]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養心堂。
[난-094]康陵 : 按丁卯九月二十二日。葬。
[난-095]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通明殿。
[난-096]康陵 : 按乙亥四月二十八日。葬。
[난-097]庚子入學 : 一作庚申入學。
[난-098]文忠 : 一本文忠作忠正。
[난-099]今上 : 正宗朝
[난-100]李觀命 : 一本李觀命。拜至左議政。
[난-101]李溵 : 一本李溵。拜左議政。
[난-102]誕降 : 按誕降于順化坊彰義宮。
[난-10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進修堂。
[난-104]甲申 : 英宗朝甲申也
[난-105]今上 : 今上卽正宗
[난-106]誕降 : 按十二月十四日。誕降于崇敎坊私第。
[난-107]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建極堂宜春軒。
[난-108]永陵 : 按壬申正月十一日。葬。
[난-109]誕降 : 按誕降于嘉會坊私第。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13일 (을축)
정의 공주를 죽성군 안맹담에게 시집보내다

정의 공주(貞懿公主)를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에게 시집보내었다. 맹담은 관찰사(觀察使)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원전】 3 집 115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30일 (임오)
죽성군 안맹담의 선세 삼대를 추증하게 하다

이조에 명하여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의 선세(先世) 삼대(三代)를 추증(追贈)하게 하였다.
【원전】 3 집 1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가족-가산(家産)


三灘先生集卷之十四
 墓誌
河東府院君鄭文成公墓誌銘 a_011_516b


有朝鮮名臣河東府院君諡文成公。享年八十有三。以疾卒于第。寔成化十四年戊戌十有一月二十五日也。訃聞。上震悼如失左右手。輟朝三日。賻贈有加。越明年春三月己未。葬于忠州佛頂村寅坐申向之原。公諱麟趾。字伯睢。河東鄭氏。高麗忠宣王朝。有諱芝衍者。仕至重大匡僉議贊成事。贊成生興威衛大護軍諱翊。護軍生宗簿令諱乙貴。令生石城縣監諱興仁。於公爲考。以公勳。贈大護軍正憲兵曺判書。贈宗簿令崇祿議政府左贊成。贈縣監純忠積德秉011_516c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河城府院君。妣興德陳氏。親御軍郞將千義之女。贈貞敬夫人。以洪武二十九年丙子十有二月戊戌。生公。甚穎異。縣監奇愛之。親授四書。過目輒成誦。善屬文。年十六。中生員試。由是肆力問學。於書無所不讀。遂成大儒。有識者咸以公輔期之。永樂甲午。擢文科第一人。授禮賓主簿。累遷至兵曺佐郞。俄陞爲正郞。歷吏禮曺。轉集賢應敎。階加朝奉。拜直殿兼藝文應敎。凡應奉文詞。皆出其手。蓋重選也。宣德丁未。登制科第一人。授集賢直提學。秋丁母憂。翌年冬。上以經幄侍從之臣無如公者。特起爲集賢副提學,經筵侍講官。自是雖拜他官。常兼集賢殿。進階嘉善。授同知摠011_516d制。轉藝文提學,仁壽府尹,吏曺參判。時縣監居于扶餘年老。公乞歸養。上不許。乃授忠淸道觀察使。俾遂榮養。乙卯秋。丁父憂。服闋。拜刑曺參判。未幾。陞判書。庚申。以知中樞院事。如京師賀正。拜藝文大提學。轉議政府右參贊。兼判兵曺事。歷吏禮工曺判書。兼成均大司成。蓋典文衡也。自摠制以後。皆兼集賢殿,春秋館,世子賓客。景泰庚午。文宗踐祚。拜公爲議政府左參贊。壬申。陞崇政兵曺判書。大臣忌公亢直。移判中樞院事。兼判禮曺。癸酉冬。世祖平內難。以公有贊策功。超拜大匡輔國崇祿議政府左議政。賜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號。封河東府院君。乙亥夏。世祖。卽位。陞授領議政府事。加賜同德佐翼功011_517a臣號。成化戊子秋。睿宗嗣位。武臣南怡謀逆伏誅。上疇庸賜定難翊戴功臣號。己丑冬。今上入承大統。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公先配趙氏。同知敦寧侯之女。先卒無子。後配李氏。檢校判漢城府事携之女。封貞敬夫人。生五男二女。男長曰光祖。行大護軍。先公二十二年沒。次曰顯祖。輸忠保社定難翊載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儀賓府儀賓。河城府院君。登第。次曰崇祖。純誠佐理功臣河南君。次曰敬祖。行護軍。中生員試。次曰尙祖。行副護軍。女長適行司勇權金成。次適行軍器寺判官金由岳。光祖娶延昌尉安孟耼之女。生一女。適展力副尉權自均。生二男一女。皆幼。顯祖尙懿淑公主。卽世祖之女。無011_517b子。崇祖初娶內贍寺判官朴堠之女。生一女。適會原君崢。後娶稷山縣監趙忠老之女。生四男一女。男長曰承忠。行司正。娶德原君曙之女。次曰承孝。司猛。餘皆幼。敬祖初娶桂陽君璔之女。生二子皆幼。後娶京畿觀察使李繼孫之女。尙祖娶濟用副正安溫泉之女。生一女幼。權金成生二女。皆幼。金由岳生一女。適蓮城君。公以不世出之才。力行以培其德。博學以益其智。積之厚而施諸用。故其文章足以賁餙大平。其事業足以經綸大造。然猶讀書不輟。尤邃於易。自號曰學易齋。久秉文柄。凡撰書修史。公皆總裁。屢掌試圍。名公卿才大夫多出其門。太宗以宰相之才。囑之世宗。世宗稱爲不器君子。眷注異於群臣。知011_517c遇世祖。光啓中興之業。輔導今上。克就重華之德。制度文爲。必待公纂定。大政大議。必就公咨決。歷事六朝。位極人臣。備享五福。師表一世。朝家信之如筮龜。士林仰之如山斗。生民視公出處。以爲休戚。自吾東方有國以來一人而已。銘曰。蘂城之南。載卜吉鄕。山川秀麗。繄公之藏。畜靈發祥。永世彌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