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1.20. 태안트래킹

2011.11.20. 충남 태안군 이원면 솔향기길 트레킹 (산마루)

아베베1 2011. 11. 21. 00:44

 태안 솔향기길 트레킹 코스

 

 만대항  시작-  약수터 - 삼형제바위 -큰구매수등 -붉은앙땡 -새막금쉼터 -근육골해변 -칼바위 -

 가마봉전망대 -악넘아 약수터 -여섬 - 중막골 -폔선단지-용난굴- 별쌍굴약수터 작은어리골 -

 샛별수산 -큰어리골 -경기대학교 수련원- 꾸지나무해수욕장     

 

풍회도서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落照) 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니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포(浦)를 판 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산에서 온 한 줄기 끊겼다가 다시 연했구나. 뉘 능히 나에게 조운(漕運)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통 앞에서 취하여 망연(惘然)히 잊고만 싶다.” 하였다.   (충남 태안의 제영)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


동쪽으로는 서산군(瑞山郡) 경계까지 12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군 경계까지 65리이고, 서쪽으로는 소근포(所斤浦)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는 서산군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소태(蘇泰)로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본군 사람 환자(宦者) 이대순(李大順)이 원 나라에 총애를 받았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한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성대혜(省大兮)ㆍ소태(蘇泰) 혹은 소주(蘇州)라고도 한다. 순성(蓴城).
【성씨】 본군 실(實)ㆍ이(李)ㆍ방(方)ㆍ염(廉)이 있으며, 황(黃)ㆍ고(高)ㆍ명(明)ㆍ박(朴) 모두 촌성(村姓)이다. 가(賈)ㆍ장(張)ㆍ김(金)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해적[海寇]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남수문(南秀文)의 객관기(客館記)에 있다. 비옥한 지대로 호칭한다 신숙주(申叔舟)의 객관기에 있다.
【산천】 백화산(白華山) 군 북쪽 3리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다. 군 북쪽 13리에 또 백화산이 있는데, 역시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어 두 산이 서로 유사하다. 내산(柰山) 군 서쪽 23리에 있다. 금굴산(金堀山) 군 북쪽 13리에 있다. 물금산(勿金山) 군 동쪽 10리에 있다. 안흥량(安興梁) 군 서쪽 34리에 있다. 옛날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러왔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누차 치패(致敗)를 보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령산곶(知靈山串) 군 서쪽 25리에 있다. 대소산곶(大小山串) 군 서쪽 25리에 있다. 이산곶(梨山串) 군 북쪽 42리에 있다. 신곶(薪串) 군 북쪽 29리에 있다. ○ 이상 네 개의 곶(串)에는 모두 목장이 있다. 바다 본군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방이라도(方伊羅島) 군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형도(兄島)ㆍ갈도(葛島)ㆍ죽도(竹島)ㆍ말응개도(末應介島)ㆍ가외도(加外島)ㆍ토도(兎島)ㆍ상산도(上山島)ㆍ굴굴조도(屈屈鳥島)ㆍ하초도(下草島)ㆍ옹부도(瓮浮島)ㆍ적점도(積岾島)ㆍ거아도(居兒島)ㆍ한음산도(閒音山島)ㆍ나치도(羅治島)ㆍ군북파도(郡北波島) 이상의 여러 섬들은 모두 서해 가운데에 있다. 하산도(下山島) 군 남쪽에 있다. 굴포(堀浦) 군 동쪽 13리에 있다. ○ 고려 인종(仁宗)이, 안흥정(安興亭)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또 암석 때문에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蘇泰縣)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鄭襲明)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뒤에 종실(宗室) 왕강(王康)이 건의하기를, “예전에 파던 도랑은 깊이 판 곳은 10여 리나 되고, 파지 않은 곳이 불과 7리인데, 만약 마저 다 파서 바닷물로 하여금 유통하게 한다면 매년 조운(漕運)할 때에 안흥량 4백여 리의 위험한 물길을 경유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인부를 징발하여 다시 파니, 돌이 물 밑에 깔려 있었고, 또 조수가 왕래하여 파는 대로 이를 메워버리므로, 끝내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본조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安哲孫)을 보내어 시험하였던 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았다. 부포(釜浦) 군 서쪽 30리에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에 부포의 물이 피로 변하였다 한 것은 바로 이 땅이다.

 

【토산】
대[竹]ㆍ죽전(竹箭) 죽도(竹島)와 탄항(炭項)에서 난다. 철(鐵) 다수산곶(多修山串)에서 난다. 백옥(白玉) 안흥량 해변에서 난다. 김[海衣]ㆍ황각(黃角)ㆍ참가사리[細毛]ㆍ전어(錢魚)ㆍ전복[鰒]ㆍ숭어[秀魚]ㆍ농어[鱸魚]ㆍ청어(靑魚)ㆍ갈치[刀魚]ㆍ모래무지[鯊魚]ㆍ조기[石首魚]ㆍ부레[魚鰾]ㆍ오징어[烏賊魚]ㆍ굴[石花]ㆍ새우[蝦]ㆍ조개[蛤]ㆍ맛조개[竹蛤]ㆍ삼치[麻魚]ㆍ해삼(海參)ㆍ소라(小螺)ㆍ꼬막[江瑤柱].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5백 61척에 높이는 12척이며, 그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소근포진(所斤浦鎭) 일명 우근이포(杇斤伊浦)라고도 하며, 군 서쪽 33리에 있는데, 좌도 수군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고, 그 소관은 당진포(唐津浦)와 파지도(波知島)이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갑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천 1백 65척에 높이는 11척이며, 그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안흥량수(安興梁戍) 소근포 첨절제사(所斤浦僉節制使)가 군병을 나누어서 지킨다.
【봉수】 백화산 봉수(白華山烽燧) 동쪽으로는 서산군의 북산(北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같은 군의 도비산(都飛山)과 호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蘇泰縣)이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寇賊)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이다. 고려 말기에 무비(武備)가 허술하고 왜적이 강성하여, 홍무(洪武) 계축년에 군에서 입은 화란이란 몹씨 참혹한 것이어서 수령이 겨우 한두 명의 아전을 인솔하고, 임시로 서산군(瑞山郡)에 붙이고 있더니, 계해년에는 다시 예산현(禮山縣)으로 옮겼었다. 경오년에 이르러 도적들의 흉악한 노략질이 차츰 줄어들자 다시 서산에 성보[堡]를 쌓고 순제(蓴堤)라 이름하고는 일면 해적의 방어에 대비하며 겸하여 군의 행정을 맡아 다스렸다. 그러나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백성들이 빨리 돌아오지 않으므로 온 경내가 가시덤불 속에 황무(荒蕪)한 채 짐승의 소굴로 화하여 버려 두었고, 국가에서는 여기에 강무장(講武場)을 설치하였다. 영락(永樂) 병신년에 우리 태종께서 춘렵(春獵 봄철에 행하는 수렵)에 임행하셨다가 그 일대의 황폐한 것을 애석히 여기시고, 이에 본군의 옛 군을 복구하라 명하셨고, 다음해에는 또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인민을 불러 모아서 안집(安集)시키는 데 급급하고 관해(官廨)를 구축할 겨를이 없어 대충 별실(別室) 4칸을 얽어 사객(使客)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낮고 협소하여 바람과 이슬을 가리기에 바빴으나 그대로 수축하지 않고 지난 것이 20여 년이었다. 정통(正統) 기미년 2월에 나의 동년(同年 한 해에 함께 급제한 사람)인 김혼지(金俒之) 후(侯)가 무재(武才) 있고 또 백성 다스리는 데 능하다는 것으로 선발되어 이 고을의 군수가 되니, 군사를 쓰는 기요(機要)와 백성을 다스리는 선무(先務)를 여유작작하게 조처하고, 개연히 다시 폐허한 것을 부흥하려는 뜻을 두고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고 새 공관(公館)을 지으니, 읍 사람 이회(李懷)ㆍ이지(李地) 등 약간 명이 모집에 응하고 경비를 보조하여, 재목도 견고하고 기와도 좋았으며, 노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드디어 대청(大廳) 5가(架)를 세우니 무릇 3영(楹)이며, 좌우의 중방(中房)은 5가에 각각 5영이며, 남녘 청[南廳]은 5가에 3영이며, 동서의 마루[軒]는 5가에 각각 4영이며, 좌우의 중방은 5가에 각각 3영이며, 주방(廚房)ㆍ곳간ㆍ욕실 등이 모두 그 자리를 갖추니 영으로 헤아려서 83개가 되는 셈이다. 기미년 겨울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신유년 가을 8월에 일을 마쳤는데, 규모와 제도가 정대하고, 단청 또한 선명하여 울연히 한 고을의 장관(狀觀)을 이루었다. 김후가 나에게 글을 보내어 그 일의 시말을 기술해 달라고 청해 왔다. 내 지금 사관(史官)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흥작(興作)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기록해 두는 것은 나의 직책이다. 하물며, 그 세도(世道)와 관계 있는 것이랴. 이 고을이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던 끝에 드디어 태평한 성대(聖代)를 만나고 어진 수령을 얻어서 가시밭을 다듬고 성곽과 군 모습을 복구하였으며, 조잡하고 협착한 것을 헐어버리고 높고 화려한 집을 지어 인습해 오던 누습(陋習)을 깨끗이 씻고 장엄한 담장을 꾸몄으니, 어찌 세도를 위하여 기뻐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기록할 만한 것이다. 증남풍(曾南豐 증공(曾鞏))의 말에, ‘무릇 고을에선 수령을 잘 만나기가 어렵고, 다행히 수령을 잘 만났다 하더라도 일을 일으켜 이루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며, 다행히 일을 일으켜 이루어 놓았다 하더라도 뒷사람을 잘 얻어서 황폐에 이르지 않기란 또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지금 이 고을에서 다행히도 그 얻기 어려운 것을 얻었으나, 다만 뒷사람이 제대로 김후의 뜻을 잘 이어나갈 것인지는 알지 못할 일이다. 이 또한 이 말을 기록하여 뒤에 오는 자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태안군이 충청도에 있어 해변의 요충지가 되어 국가에서 순성진(蓴城鎭)을 설치하고 지군사(知郡事)로 하여금 이를 지휘 관할하게 하고 있다. 군내의 토지가 비옥하여 화마(禾麻)가 풍부하고,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어 옥구(沃區)로 일컬어 왔다. 전조(前朝) 말엽에 여러 차례 병란을 겪어서 모두 가시덩굴의 숲이 되어 호토(狐兎)와 시호(豺虎)의 터로 변했었는데, 우리 국가가 일어남으로부터 인정(仁政)과 위엄이 먼 변방까지 미쳐서 바다 도적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런 뒤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군민들이 모두 돌아오고, 다른 고을의 백성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도 또한 즐겨 이곳으로 모여 왔다. 무진년에 조정에선 각 도에 영을 내려 지난날 유리하여 없어진 민호를 조사하여 본적지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리하여 군민으로서 그 본 고장으로 돌아가야 할 자가 1백 4호나 되었는데, 그 업에 안착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옮기기 어려운 것이 새로 이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지금의 지군사 동첨절제사(知郡事同僉節制使) 죽산후(竹山侯) 박홍문(朴弘文)이 이 땅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가 마침 4년이었다. 개연히 탄식하고 말하기를, ‘이 고을에 사는 백성이 겨우 3백호인데, 부세(賦稅)를 내고 기약을 받들어 행하는 자의 거의 반수가 유리하여 들어와 우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처음 올 때에는 그곳에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이미 이곳에서 의식을 해결하고 남혼여가(男婚女嫁)하여 아들을 키우고 손자를 길러 사람마다 영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어찌 다시 소란하게 하랴. 하물며 군이란 백성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므로 백성이 없으면 군이 될 수 없고, 진(鎭)을 설치한 것은 도적을 막자는 것인데, 백성이 없으면 그 누구와 더불어 지키잔 말인가. 이는 조정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곧 고을 사람 전(前) 부사정(副司正) 이숙(李熟)과 호장(戶長) 가택(賈宅) 등을 보낼 제 친히 할 말을 지시하여 도당(都堂)에 아뢰어서 온 군내가 모두 옮기지 않고 전과 같이 편히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어린아이들과 백발의 노인들까지 모두 환호성을 올리고 감격한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하기를, ‘내가 추위에 떨 때 원님이 덥게 해주었고, 내가 뼈만 남았을 때, 원님이 살[肉]을 붙였으며, 내가 유리 분산하였을 때 원님이 완취(完聚)하게 해주었고, 내가 위태하였을 때 원님이 편안하게 해주었으니, 원님의 덕을 갚으려 할진대 나의 부모와 무엇이 다르랴. 아름다운 덕 가려내어 영원히 전파하리로다.’ 하고, 드디어 서로 박후에게로 나아가서 박후의 공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 보이도록 할 것을 요구하니, 박후는 이를 사절하고 돌려보냈다. 박후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도 알지만, 여러 사람들의 뜻도 또한 마침내 억누를 수 없음을 알고는 서울로 달려와서 나를 집현전(集賢殿)으로 찾아와 보고, 그 사실의 전말(顚末)을 써서 영구히 전하게 할 것을 청하는데, 그들의 심정과 언사가 모두 간곡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는 못하나 사국(史局)의 한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선악(善惡)을 기록하는 것은 나의 직책이기도 한 것이다. 더욱이 일찍이 박후와는 잘 아는 사이인데다가 그 사적의 쓸 만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 있음이랴. 박후는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한 사람이다. 무예가 뛰어나고, 목민지재(牧民之才)도 겸하여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일찍이 백성도 다스렸고, 또 군사(軍事)도 다스렸는데, 청렴하고 공평하며 위엄 있고 은혜로운 정사를 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백성도 있고 군사도 있어 문ㆍ무의 정사가 그 한 몸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라. 의연(毅然)히 안집(安集)과 부강(富强)에 뜻을 두어, 조정에서 유리해 도망한 백성을 조사하여 돌려 보내라고, 기한을 정하고 엄중히 독책하는 데 즈음하여 주군의 수령들이 그 견책을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명령을 받들어 행하기에 여념이 없었는 데도, 박후는 실정을 건의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서 군(郡)은 이로 말미암아 실하게 되고, 진(鎭)도 이로 말미암아 강하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편하게 살게 되었으니, 박후 같은 사람은 국가에서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며, 백성의 부모로서의 도리도 또한 거의 다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일찍이 상고해보건대, 옛날에 백성에게 덕을 베푼 자는 그 백성들이 반드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였고, 혹은 생사당(生祠堂)까지도 세웠으니, 이는 그 덕을 사모하여 마지않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그 군민의 청이 이와 같이 간곡한데,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마침내는 이를 써서 돌려보내는 바이다. 그 판에 새겨 벽에 걸어 군민으로 하여금 대대로 박후의 덕을 알게 하여 길이 잊지 않게 할 것은 그대들의 일이며, 이에 이르면 박후도 또한 거절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신증』
【정사】 경이정(憬夷亭) 군 남문(南門) 밖에 있다.
【학교】 향교 군 동쪽 1리에 있으며, 어세겸(魚世謙)의 기문이 있다.
【역원】 하천역(下川驛) 군 동쪽 12리에 있다. 흥인원(興仁院) 군 동쪽 12리에 있다.
【교량】 흥인교(興仁橋) 굴포(堀浦)에 있다.
【불우】 안파사(安波寺) 지령산(知靈山)에 있다. 고려 때에 수로가 험악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여러 차례 난파되어 이 절을 세운 것인데, 중간에 왜적의 침입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고, 본조 세조 때에 중건하였다. 흥주사(興住寺) 백화산에 있다.

 

【사묘】
태일전(太一殿) 백화산 고성(古城) 안에 있다. 성종(成宗) 10년 기해에,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봉안(奉安)하였다.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서북쪽 1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고태안성(古泰安城) 굴포에 있다. 순성진(蓴城鎭) 군 동쪽 14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주위가 1천 3백 53척이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오산소(吳山所) 군 남쪽 25리에 있다. 양골소(梁骨所) 군 남쪽 13리에 있다. 복평향(福平鄕) 군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서산군에 속해 있었는데, 우리 세종 27년에 이곳에 붙였다. 백화산성(白華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42척에 높이는 1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
풍회도서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落照) 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니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포(浦)를 판 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산에서 온 한 줄기 끊겼다가 다시 연했구나. 뉘 능히 나에게 조운(漕運)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통 앞에서 취하여 망연(惘然)히 잊고만 싶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내(郡內) 처음은 5리, 끝은 20리. 동일도(東一導)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동이도(東二導) 동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20리. 남면(南面) 처음은 20리, 끝은 60리. 근서(近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원일도(遠一導)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원이도(遠二導)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북일도(北一導) 끝이 70리. 북이도(北二導) 끝이 40리.
【진보】 소근포진(所斤浦鎭) 후근이포(朽斤伊浦)라고도 하며 서쪽 30리에 있다. 중종 9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2천 1백 65척이고, 우물은 하나다.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1인이 있다. 안흥진(安興鎭) 서쪽으로 40리에 있는데, 본래는 안흥량(安興梁)의 수자리하는 곳으로 근포첨사(斤浦僉使)의 분병이 수자리하는 곳이다. 효종 4년에 화정도(花亭島)에 옮겨 세웠다가 6년에 사인(士人) 김석견(金石堅)이 세우기를 청하여 진성(鎭城)을 세웠는데 둘레가 3천 6백 21척이다. ○ 수군첨절제사 1인이 있다.
【토산】 소금[鹽]ㆍ감[枾].

 

 

   서해안 고속도로  햄담 휴게소

  만대항에서 산행 시작전 단체사진

   행담휴게소에서 예산 안내도

  행담휴게소에서 풍차모습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  

  만대항의 한적한 모습 과 유래

  만대항은 조선시대 한스님이 하산해 태안땅에 발을 들였다 인기가 없는 곳을 찾아서 한참을 걷는데 멀리 파란물이 넘실대는 것이었다

  아까는 분명히 땅이었는데 라고 하여 가다가 말았다 한다  그곳이 바로 충남 태안군 이원면 반도의 땅끝 만대항이다.

  홍보유인물을 보고 작성 하였다

  트레킹 코스는 1코스 ,2코스, 3코스 ,4코스가 있다    

  산행시작전 준비 하는 모습  건너편이 솔섬이다

  만대항 건너편 의모습   솔섬의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회원분의 안전을 책임지는 관광차  

 태안의 절경 천삼백리  솔향기길 안내도

  들머리의 모습

  건너편이 서산시 의 모습

  만대항 들머리 바라본 갈길을 미리담아보았다  

  입구 산행을 마치고 오시는 분이 보인다

  안내도

  건너편 장봉도의 모습이 보이고 사선시의 모습  

 

   천삼백리 솔향기길 리본

  쉼터 의자도 특이하게 제작 배치

  산수골 약수터의 모습  물을 먹어보앗는데 물맛을 별로 ..

 

 

  장봉도의 모습이

 

   약수터를 지나서 가는 도붕에 기거하는 집이고 조용한집

  어구가 늘려져 있는  해변을  지나서  보이는 산으로 진입

 

   지나온 만대항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산행을 하시는 회원님의 뒷모습

  서해안 치고 맑은 물이

  맑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의 모습

  건너편 바위가 삼행제 바위

 

 

만대항에서 0.7킬로 지점의 안내편

 

 

 

 

 

  파도가 넘실거린다 해변의 모습이 아름답다  

 

 

 

  지나온 바닷가 해변  

 익살스러운  모습

  아래로 바라본 바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