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2.1. 도봉산 왕족 묘지 오산군

2011.12.1. 자전거 역사 탐방 (왕실 묘역)

아베베1 2011. 12. 2. 01:30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행  통훈대부 장수현감 전주이공 이태 지묘

                          배 정부인 한안조씨  부좌

                          증 가선대부는 증직 이다      행 통훈대부는 종3품  배 정부인 (관직을 가졌던 부인에게 주는 작호이다)     

                            

                           전주이씨 임영대군파 오산군 종회 (최근에 근립)

  이상하게도 망주석이 우측이 사라졌다

  뒤에서 바라본 조망

  오산군의  묘소의  조망 모습이다

 오산군묘역 전경 현록대부는 종 1품의 관직이며 부인은 정경부인

 

 

 

                          가선대부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공 惠疇 지묘 ( 증) 정부인 여흥민씨 (현 경기도 여주) 부좌  정부인 안동김씨 부右

                          부인이 두분을 두셨다   혜주(疇) 밭두둑 주  병마절도사는 종2품 관직이다

                           임영대군의 6대손 세종대왕의 7대손이 되시는 분이다 .

 

 

 

 

 

 숭정기원후 86년 계사년 8월 일 立

  정의 공주의 묘역 (정의공주 죽산안씨 양효공 안맹담 묘역 )

 

 

 

  죽산안씨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사가정 사거정이 글을 짓고   양효공의 4남이신 안빈세가 글을 쓰다

 

 

 

 

서계집 제13권
 갈명(碣銘) 13수(十三首)
호조 좌랑 안군(安君) 묘갈명


부군(府君)은 휘는 정욱(廷煜), 자는 명숙(明叔), 성은 안씨(安氏)이고, 죽산(竹山)이 그의 관향이다. 그의 선조는 양량(襄良), 희정(禧靖), 문정(文貞)이 연달아 삼대에 걸쳐 모두 고려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숙로(叔老)에 이르러 비로소 본조에서 벼슬하였다. 두 대를 지나 맹담(孟聃)에 이르러서는 연창위(延昌尉)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니, 이분은 실로 세종(世宗)의 따님으로 세칭 ‘팔대군 일공주(八大君一公主)’의 일원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한 분이다. 공주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돈녕부 도정 상계(桑雞)이다. 세종께선 공주의 자식들을 사랑하시어 모두 친히 이름을 지어주셨다. 도정이 태어나 공주가 해산했다고 아뢰었는데 그때 마침 닭이 뽕나무에서 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또 두 대를 지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종탄(從坦)에 이르러서는 부군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충무위(忠武衛) 부사직 휘 언추(彦錘)이고, 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휘 경렴(景濂)이다. 부친은 통천 군수(通川郡守) 증 이조 판서 휘 대남(大楠)이고, 모친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도승지 희(憘)의 따님이다.
부군은 선조(宣祖) 38년인 을사년(1605) 3월 갑진일에 태어났다. 14, 5세 때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하며 몸소 탕제(湯劑)를 달여 드렸는데 시종일관 해이해지지 않았다.
인조(仁祖) 원년인 계해년(1623)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예법대로 장례와 제례를 치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서쪽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올 당시 부군은 고양(高陽)의 별업(別業)에 거처하고 있었고 권 부인(權夫人)은 서울에 있었다. 부군은 식구들에게 영동(嶺東)으로 피난하도록 당부하고는 자신은 대부인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성 남문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다투어 문을 나서려고 가득 메운 인마가 서로 밟아대는 지경이었다. 부군은 말을 버리고는 맨 몸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당도해 보니 대부인은 이미 떠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길에서 울며 찾아 헤매다 성 동쪽에서 만나 함께 섬으로 들어가 마침내 안전할 수 있었고, 부군의 지시를 받아 영동으로 피난했던 가족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난이 진정된 뒤 다시 서교(西郊)에 거처하였다. 부군은 성품이 남들과 거스름이 없어 향리에서 왕래할 적에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반드시 정중하게 성의를 다하였고 담소하며 친밀하게 대해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계미년(1643) 봄에 이조 판서 이공 경증(李公景曾)이 천거하여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보임되었다. 부군은 직임을 수행함에 있어 지나치고 쓸데없는 것들을 줄여 나가고 좀먹는 행위를 척결하였으며, 중국의 사신(使臣)이 이르면 그가 원하는 것을 살펴 조처하여 빈틈없이 접응하였다. 이공이 빈(儐)이 되어 그가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조에 있으면서 인재를 얻는 것이 다 이와 같다면 책무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공 태화(鄭公太和)와 김공 남중(金公南重)이 전후로 빈이 된 것도 모두 부군이 감역으로 재직할 때였는데, 그들도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병술년(1646)에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자리를 옮겼다.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으로 이배(移拜)되어서는 적체된 옥사를 처결하고 하리(下吏)들의 간사한 행위를 적발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니, 하리들이 두려워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에 호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 호조는 육관(六官) 중에서 가장 일이 많은 곳이어서 조도(調度)가 번다하고 자잘하며 회계가 복잡다단하였는데, 계산과 출납을 담당하여 그 일을 직접 챙기는 것은 모두 낭관의 직임이었다. 부군은 간국(幹局)이 있는 데다 출납하는 수효를 명확히 살펴 조금도 틀리는 바가 없었다. 판서 원공 두표(元公斗杓)가 이르기를, “재간이 온갖 사무를 맡길 만하다.” 하였으니, 맡고 있는 직임 외에도 늘 대여섯 가지 일을 겸직하였다.
무자년(1648) 봄에 대흥 현감(大興縣監)에 제수되었다. 현을 다스리는 6년 동안 엄격하고 분명하게 옥송을 잘 판결하여 부근 고을의 송사가 대부분 부군에게 몰려들었다. 학교를 수축하고 부고(府庫)를 채웠으며, 호강(豪强)을 제어하고 무격(巫覡)을 금하니, 전후로 사자(使者)가 포상할 것을 아뢰었다. 그런데 마침 이웃 도(道)로 출두한 어사가 간교한 백성의 비방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흠을 잡아냈다. 이 때문에 법리(法吏)에게 회부되어 조사받았지만 곧바로 풀려나왔다. 대흥현의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으니, 이해는 효종(孝宗) 4년인 계사년(1653)이었다.
이듬해인 갑오년(1654, 효종5)에 서용되어 신계 현령(新溪縣令)에 제수되었다. 현령으로 재직한 5년 동안 사자가 치적을 아뢰었지만 다시 미미한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 백성들이 또 그를 위해 거사비를 세웠다.
기해년(1659) 봄에 교하 현감(交河縣監)에 제수되었다. 이해 겨울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신축년(1661, 현종2) 봄에 서용되어 장례원 사평에 제배되었고, 여름에 직산 현감(稷山縣監)에 제수되었다. 관직을 맡아서는 고식책을 쓰지 않고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일은 기필코 가닥을 잡아 나가 대소 업무가 모두 빈틈이 없었다.
을사년(1665) 5월에 병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앓았던 풍질(風疾)이 이때에 이르러 다시 심해져 누차 사직하여 비로소 해면된 것이다. 부군은 효성스럽게 모친을 섬겨 전후로 네 차례 고을살이할 때 모두 권 부인을 모시고 가서는 무릇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다 극진하게 하였다. 병으로 해면되어 돌아와서는 이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인과 다른 집에서 살았는데, 맛난 음식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사람을 보내 모친의 처소에 올리게 하였고, 식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손짓으로 가리켜 음식을 보낸 것을 알고 나서야 드셨다. 6월 그믐에 권 부인의 병이 갑자기 위중해졌지만, 식구들이 부군의 병을 염려하여 그 사실을 숨겼다. 부군이 아침에 시봉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제 꿈이 이러하니, 내가 한번 가서 모친께 문안을 드려야겠다.” 하였다. 비록 말이 어눌해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개 꿈이 불길하다는 내용이었는데, 식구들이 거짓말을 하여 마음을 달래드렸다. 급기야 권 부인의 병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식구들이 모여 상사(喪事)를 알려야 할지의 여부를 논의하였다. 부군은 일체 아무것도 모른 채 뒤척이다 밤늦게야 잠든 것 같더니 잠시 뒤 갑자기 놀라 일어났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하였다. 구슬프게 통곡을 하며 다급히 의대(衣帶)를 찾으면서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려 하였다. 부사군(府使君)이 황망히 만류하여 붙잡고는 찬찬히 연유를 여쭙자, 두 뺨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부인을 연달아 불러 마지않으며 손으로 모습을 그려 옆 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절망스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고 그 우러나오는 감정은 달래지 못할 지경이었다. 식구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 재촉하여 가마를 마련하고는 길을 나서려 했는데, 그때는 이미 밤이 사경(四更)이 지나 있었고 마침 대부인의 부고가 문에 당도하였다. 부군은 상구(喪具) 곁에서 중풍으로 원기가 다 빠진 몸으로 뒹굴고 통곡하여 보는 이들이 눈물을 뿌렸으니, 그의 효성은 하늘에 뿌리박은 것이어서 병이 위중한 상태였어도 마음에서 잠시라도 모친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환이 나시면 꿈에 보였고 그 병이 위독해졌을 때도 꿈에 보였던 것이다. 아, 지성이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정미년(1667, 현종8) 4월 3일에 부군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향년 63세였다. 이달은 윤달이 들어 5월 계유일에 양주(楊州) 송랑곡(松浪谷) 선영 서쪽에 안장하였다. 금상(今上 숙종) 10년인 갑자년(1684) 11월 무진일에 이전 묘소와 몇 리 안 떨어진 사제동(沙堤洞) 유좌(酉坐) 언덕에 개장하였다.
부군은 온후하고 화락하며 친속들에게 돈독하고 남들을 도와주었다.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관직 생활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하는 태도를 지녔다. 백형(伯兄)을 섬기는 것이 더욱 엄격하여, 매양 “내가 관직 생활을 하면서 혹시라도 삼가지 않는다면 필시 우리 부모님과 형님에게 누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오직 여기에 있었다.
홍주(洪州)에 큰 택지(澤地)가 있었는데, 공주가(公主家)에서 그 안의 전지(田地)를 점유하려고 하였다. 부군이 대흥 현감으로 있으면서 문서를 접수하여 검토해 보니, 택지 부근에 민전(民田)이 많았는데도 내사인(內司人)이 주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여 표내(標內)에 혼입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부군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생업을 빼앗으면 원망이 상께로 돌아간다.” 하며 들어주지 않아, 공주가가 결국 그 땅에 전지를 소유하지 못하였다. 뒤에 신계 현령으로 있을 때 이 공주가에서 또 관내의 전지를 점유하려고 하였는데, 민전을 자기 소유로 편입시킨 것이 홍주에서보다도 많았다. 부군이 전과 같이 거부하여 전지를 점유하는 것이 결국 성사되지 않았으니, 공이 귀척(貴戚)의 세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부인 숙인(淑人)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학생 정열(廷說)의 따님으로, 을사년(1605, 선조38) 12월 8일 무신일에 태어나 을축년(1685, 숙종11) 10월 28일 을묘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81세였다. 이해 12월 10일 병신일에 부군의 묘 왼편에 묘혈을 파서 합장하였다. 숙인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시어머니 권 부인을 20여 년간 모시면서 잘못하거나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의복이나 음식 등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적절하게 하여 부양하였다. 시어머니 곁에 자제나 친속들이 늘 여러 명 있었는데도 음식을 정결하게 마련하면서 말투나 안색에 곤궁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군을 섬길 때도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누차 고을살이를 따라다니면서도 뇌물 문제로 누를 끼치지 않았다. 군읍(郡邑)에 소속된 하례(下隷)들의 고락(苦樂)은 대부분 부인이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는데, 숙인은 매우 인자하고 잘 보살펴주며 공사(公私)를 동일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관(官)에 딸린 노비나 사령들이 애모하고 추대해 마지않아 떠난 지 오랜 뒤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딸 하나를 낳았지만 요절하였고, 백형(伯兄)의 여섯째 아들 집(䌖)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집은 태어난 지 겨우 8일 만에 숙인이 거두었다. 어려서는 기욕(嗜慾)을 절제하여 구차한 바가 없게 하였고 모든 사물을 이용해 가르침을 보여주었으며, 장성하여 관직을 맡게 되어서는 일의 시비를 분변하며 깨우쳐 주었다. 집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이르렀는데, 숙인이 그때마다 가서 부양을 받았다. 집은 군수 김홍석(金弘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 역시 아들이 없어 중형(仲兄) 참판 진(縝)의 다섯째 아들 상영(相英)을 후사로 삼아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부사군이 와서 부군의 묘명(墓銘)을 세당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친구 중 선군의 시말을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그대만 한 이가 없으니 사양하지 말게나.” 하였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해 글을 쓰고 명을 단다. 명은 다음과 같다.

눈 속에서 죽순 얻고 얼음 속에서 잉어 잡으니 / 雪筍氷鯉
이는 하느님이 감동하신 것이고 / 精感者神
손가락 베고 허벅지 살 베어 / 割指刲股
정성을 다하는 건 사람의 일이네 / 誠殫在人
부모가 하늘 같은 존재임은 / 父母其天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고 / 靡古靡今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은 / 靡古靡今
효자의 마음도 마찬가지라네 / 孝子之心
그대의 효성 다함이 없으니 / 爾孝不匱
어찌 몸이 늙는다고 변하겠는가 / 曷隨形敝
마음속에 맺혀 있어 / 結乎方寸
꿈으로 나타나네 / 動乎夢寐
아 효자들아 / 嗟惟曰孝
이분의 효성을 본받으라 / 孝思惟則
비석에 명을 새겨 / 鑱石揭銘
천년만년 보이노라 / 用示千億


 

[주D-001]팔대군 일공주(八大君一公主) : 세종(世宗)과 왕후 심씨(沈氏) 사이의 8남 2녀, 즉 문종(文宗), 수양대군(首陽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흥대군(永興大君), 정소공주(貞昭公主), 정의공주(貞懿公主) 중 정소공주가 요절하였기에 그 나머지 대군과 공주를 가리킨다.
[주D-002]눈……잡으니 : 맹종(孟宗)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하며,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니, 모두 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五倫行實圖 孝子》

 

 

 

 

 성종의 왕사이신 회산군의 산소아래

 시간이 촉박하다 어두움이 양위의 모습이다

 

 

 

 

 

 

 

 

인물 사전

안맹담(安孟聃)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548B9F9B2F4B1415X0
덕수(德壽)
시호 양효(良孝)
생몰년 1415(태종 15) ~ 1462(세조 8)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죽산(竹山)
활동분야 사인
안망지(安望之)
조부 안숙로(安淑老)
정의공주(貞懿公主)
외조부 허지신(虛之信)
묘소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해촌동(海村洞)
공신호 원종공신(原從功臣)

[상세내용]

안맹담(安孟聃)에 대하여
1415년(태종 15)∼1462년(세조 8). 조선 전기의 사인.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

조부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里使)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낸 봉익대부(奉翊大夫) 안숙로(安淑老)이고, 아버지는 함길도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使)함흥부윤(咸興府尹)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안망지(安望之)이다. 어머니는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허지신(虛之信)의 딸이다.

1428년(세종 10)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432년(세종 14)에는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444년(세종 26) 다시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성록대부(成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1457년(세조 3) 수록대부(綬祿大夫)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8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부친 안망지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의 봉호를 받았다.

초서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였다. 약물(藥物)에도 해박하였고, 불법(佛法)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듬해 2월 25일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집필자]

고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