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2.12. 불암산 모습

2011.12.12. 사무실에서 바라본 불암산 모습

아베베1 2011. 12. 13. 20:01

 

속동문선 제1권
 사(辭)
산중인사(山中人辭)


김종직(金宗直)

극기(克己)가 도영창(都永昌)ㆍ한인효(韓仁孝) 및 생질 강백진(康伯珍) 등과 더불어 안국사(安國寺)에 가 목욕하였는데, 그 절은 고승(高僧) 행호(行乎)가 머무는 곳이었다.

산중에 사람들이 문득 서넛 / 山中人兮忽三四
손을 잡고 조용히 노니는구나 / 謇携手兮其虛徐
난초로 물끓이고 부들로 자리 삼으니 / 蘭爲湯兮蒻爲薦芳
향기롭고 화락할손 산중의 이 집 / 誾誾兮屋廬
날마다 목욕하고 앉고 누우니 / 日澡浴兮或坐臥
정기가 뭉치고 때 벗겨지네 / 精氣摶兮麤穢除
아침에 마시는 건 돌에 고인 물 / 朝而噏兮石溜
저녁에 씹는 건 깨끗한 나물 / 暮咀嚼兮氷蔬
신선이 비록 멀리 격하여서도 / 雖神仙兮遼以隔
어즈버 사귀어 동무 삼을 듯 / 羌彷彿兮爲曹
대사를 불러서 주미를 휘두르고 / 招乎師兮揮塵
서왕모를 맞아서 복숭아 나누네 / 邀王母兮分桃
우스울사 공문은 환이 하 많아 / 哂空門兮多幻
음란 투성이라 세상을 싫어하네 / 嫌下土兮淫遨
고요히 거처하며 드높이 보니 / 密靚處兮高觀
알겠도다, 의가 이기어 몸이 살찜을 / 知義勝兮身肥
구름 나무에 자고새 지저귄다 / 鉤輈聒兮雲木
대숲이 어둑어둑 이끼 낀 사립 / 澁勒暗兮苔扉
뿔없는 외발 소는 괴물이요 / 夔一足兮畜怪
여우랑 살쾡이 족속들 모였네 / 又狐狸兮聚族
구름이 캄캄하고 달이 검은데 / 雲冥冥兮月黑
다투어 날치며 강둥거리리 / 競恣睢兮蹢躅
생각하니 기인이라 나는 속세에 얽혀 / 念畸人兮縛塵纓
그대들 생각에 맘 괴롭네 / 隱思子兮勞心曲
복숭아꽃 눈부신 낮, 오얏꽃 하얀 밤 / 桃眩晝兮李縞夜
봄빛이 분분히 눈을 즐겨주나니 / 韶華繽紛兮悅目
이 동산 가운데도 즐길 만하데 / 湛中園兮可樂
그대들 어이 빈 골짝에 머무느뇨 / 君胡爲兮空谷

 

 사가시집 제1권
 사류(辭類)
불암사(佛巖辭). 전 상인(專上人)을 위하여 짓다.


불암산은 깊고도 멀리 뻗었음이여 / 佛之山深且逶迤兮
불암산 물은 맑고도 잔물결 일렁이도다 / 佛之水淸且漣漪
구름은 한가롭고 돌은 뾰족뾰족함이여 / 雲幽幽兮石鑿鑿
백구와 맹약을 하고 황학을 불러오도다 / 盟有白鷗兮招有黃鶴
나는 속세의 일에 얽매였음이여 / 我嬰塵網兮
나는 날로 돌아가길 생각했더니 / 我日思歸
내 이미 벼슬의 얽매임 없어졌음이여 / 我旣無簪紱之累兮
또한 어찌 망설일 것이 있으리요 / 亦何事於依違也
산에 오를 수레가 있음이여 / 登山有車兮
물을 건널 배 또한 있거니 / 涉水有航
내 장차 백련사의 남긴 법칙 따르리라 / 我將從白蓮之遺則兮
어찌 실망하여 마음 아파할쏜가 / 奚怊悵而悲傷


 

[주D-001]내 …… 따르리라 : 백련사(白蓮社)는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당대의 명유(名儒)들을 초청하여 승속(僧俗)이 함께 염불 수행(念佛修行)을 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또한 백련사와 같이 승속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불암산(佛巖山)


불암산 아래에 띳집 한 채가 있으니 / 佛巖山下有茅廬
문 앞에 당한 봉우리는 그림보다 좋고말고 / 當戶峯巒畫不如
오늘은 사공의 나막신을 상상하거니와 / 今日追思謝公屐
당년에 반랑의 나귀는 몇 번이나 거꾸로 탔던고 / 當年幾倒潘閬驢
지는 꽃 흐르는 물은 예가 바로 신선 집이요 / 落花流水仙家是
고목 사이 굽은 절벽은 보찰의 나머지로다 / 古木回巖寶刹餘
원숭이 학이 해마다 응당 서글피 바라보겠지 / 猿鶴年年應悵望
소매 속에는 이미 사직소를 초해 놓았노라 / 袖中已草乞骸書


 

[주D-001]사공의 나막신[謝公屐] : 사공(謝公)은 남조(南朝) 때의 문인으로 풍류가 뛰어났던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깊고 험준한 명산을 오르기 좋아하여 매양 ‘밀을 칠한 나막신[蠟屐]’을 신고 등산을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당년에 …… 탔던고 : 반랑(潘閬)은 송대의 시인으로, 그가 화산(華山)을 바라보며 읊은 〈망화산(望華山)〉 시에 “하늘에 치솟은 삼봉이 사랑스럽기도 해라, 나귀 거꾸로 타고 머리 쳐들어 읊으며 바라보네. 옆 사람은 깔깔 웃지만 그야 웃거나 말거나, 나는 끝내 집 옮겨서 저 위에 올라가 살련다.[高愛三峯揷太虛 昻頭吟望倒騎驢 傍人大笑從他笑 終擬移家向上居]”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동시대의 시인 위야(魏野)가 반랑의 이 시를 보고 그에게 준 시에 “이제부터는 저 화산의 그림 위에, 다시 반랑의 나귀 거꾸로 탄 모습이 더해지겠네.[從此華山圖籍上 更添潘閬倒騎驢]”라고 했다 한다. 소식(蘇軾)의 〈이기시승견화전편부용원운답지(李杞寺丞見和前篇復用元韻答之)〉 시에는 “도잠은 스스로 오류전을 지었거니와, 반랑의 그림은 삼봉도에 들어갔었지.[陶潛自作五柳傳 潘閬畫入三峯圖]”라고 하였다.
[주D-003]고목(古木) …… 나머지로다 : 두목(杜牧)의 〈염석유(念昔遊)〉 시에 “이백이 시를 제한 수서사에는, 고목나무 굽은 절벽에 누각 바람이로다.[李白題詩水西寺 古木回巖樓閣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원숭이 …… 바라보겠지 :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몹시 책망하는 뜻을 서술했던바, 그 대략에 “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그러자 남산은 조롱을 보내오고, 북산은 소리 높이 비웃는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於是 南嶽獻嘲 北隴騰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청음집 제38권
 기(記) 5수(五首)
유서산기(遊西山記)


한양(漢陽)의 산이 복정(覆鼎)에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이 된 것을 공극(拱極)이라고 일컫는다. 이 공극에서 갈려 나와 산등성이가 불쑥 솟아나 꾸불꾸불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을 끼고 돌면서 남쪽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을 필운(弼雲)이라고 한다. 나의 집은 이 두 산의 아래에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일찍이 산을 가까이에서 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산 역시 다투어 내 집의 창과 실내로 들어오려 하여 친근함을 더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항상 자리에 누운 채로 바라보고 즐겼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산속의 바위며 골짜기 사이에는 오간 적이 없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에 어머님께서 눈병이 나셨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서산(西山)에 신통한 샘이 솟아나는데 병든 사람이 머리를 감으면 이따금 효험을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날을 잡아 산에 올랐는데, 큰형님과 나와 광찬(光燦)과 광소(光熽)가 함께 따라갔다.
인왕동(仁王洞)에 들어가서 고(故) 양곡(陽谷) 소 이상(蘇貳相)이 살던 옛집을 지났는데, 이른바 청심당(淸心堂), 풍천각(風泉閣), 수운헌(水雲軒)으로 불리던 것들이 지도리는 썩고 주춧돌은 무너져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양곡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이미 귀하게 된 데다가 부유하였으며, 또한 심장(心匠)이라고 칭해졌으니, 집을 지으면서 교묘함과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유하였던 선비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이 읊었던 것 중에는 필시 기록되어 전해질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채 백 년도 못 되어서 이미 한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선비가 믿고서 후세에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니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어 곳곳이 다 볼만하였다. 다시 여기를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자 돌길이 아주 험하였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쉰 다음 샘이 있는 곳에 이르니, 지세가 공극산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높이 솟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바위 가장자리가 파여 있는 것이 처마와 같아 비나 눈이 올 때 예닐곱 명 정도는 들어가 피할 만했다. 샘은 바위 밑 조그만 틈새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샘 줄기가 아주 가늘었다. 한 식경쯤 앉아서 기다리자 그제야 겨우 샘 구덩이에 삼분의 일쯤 채워졌는데, 구덩이의 둘레는 겨우 맷돌 하나 크기 정도이고 깊이도 무릎에 못 미칠 정도여서 한 자 남짓 되었다. 샘물의 맛은 달짝지근했으나 톡 쏘지는 않았고 몹시 차갑지도 않았다. 샘 근처의 나무에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지전(紙錢)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많은 노파들이 와서 영험을 빌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仁王寺)의 옛 절터인 듯하였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자취가 다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국초(國初)에 도읍을 정할 때 서산의 석벽에서 단서(丹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전체가 바위 하나로 몸체가 되어 산마루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우뚝 선 뼈대처럼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고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겹쳐진 절벽이 똑바로 서고 옆으로 늘어서 있어 우러러보매 마치 병기를 모아 놓고 갑옷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 그 기묘한 장관을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산줄기가 이어지면서 산등성이를 이루고 여러 산등성이가 나뉘어 골짜기가 되었다. 골짜기에는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매 수많은 옥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는바, 수석(水石)의 경치가 실로 서울에서 으뜸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금령(禁令)이 해이해져 산 전체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소나무나 전나무 그늘이 있고 단풍나무나 녹나무가 언덕을 둘러싸고 있어 솔솔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바람 맑고 달빛 밝은 저녁에 느릿느릿 서성인다면 봉호(蓬壺)나 곤랑(崑閬)도 어찌 부러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등 뒤로는 구부러진 성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하인을 보내어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는데, 길이 험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광찬과 광소가 빠른 걸음으로 갔다가 오더니 자기들이 본 것을 잘 말해 주었는데, 사현(沙峴)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으며 삼강(三江)의 돛단배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헤아릴 수가 있다고 하였다. 내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기력이 너무 쇠하여 가까운 거리임에도 오히려 더 걷지를 못하고 험한 길을 당하여 멈춰 서고 만 데 대해 스스로 탄식하였다. 그러니 이런 기력으로 어찌 벼슬자리에 나아가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면서 내가 젊어서 배운 것을 펼쳐 도를 행하여 남에게 미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형님과 더불어 남쪽 봉우리에 오르니, 산봉우리 아래에 술 곳간이 있었다. 두 채를 서로 마주 보게 지어 놓았는데 십여 칸 정도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술 냄새가 퍼져 나가 새들조차 모여 들지 않으니, 모르겠다만 얼마나 많은 광약(狂藥)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취하게 하였던가.
앞쪽으로는 목멱산(木覓山)이 보이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남쪽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어찌 용같이 훌륭한 인물이 누워 있겠는가. 지금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래로 수많은 여염집의 기와지붕이 땅에 깔려 있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과 같았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를 치른 뒤 23년이 지나 백성들의 수가 날로 불어나 집들이 많기가 이와 같이 성대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남자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순(堯舜)을 도와 당우(唐虞)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한갓 나라의 힘은 더욱 약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초췌해지고 변방의 방비는 더욱 위태롭게 돼 지금과 같이 쇠퇴해지는 데 이르게 하였다. 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은 인재를 내려 주는 것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이 인재를 내려 주긴 했는데 쓸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어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운명 탓이 아니겠는가.
경복궁의 동산은 텅 비었고 성은 허물어지고 나무는 부러졌으며 용루(龍樓)와 봉각(鳳閣)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단지 경회루 연못에 있는 연잎이 바람에 뒤집히면서 저녁 햇살에 번쩍이는 것만 보였다. 앞에서는 어진 인물을 막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여 전쟁을 불러들이고 온갖 고난을 겪게 하였으며, 뒤에서는 부추기고 이간질하면서 임금께 아첨을 하여 간사한 말이 행해지고 법궁(法宮)을 황폐해지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동궐(東闕)이 쌍으로 우뚝 솟아 있고 화려한 집들이 늘어서 있으며, 금원(禁苑)의 숲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한 가운데, 호분(虎賁)과 용양(龍驤)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고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王者)의 거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본디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임금다운 임금이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흥인문(興仁門)의 빼어난 모습이 동쪽을 향하여 우뚝 서 있고 종로(鍾路)의 큰길이 한 줄기로 뻥 뚫려 있었다. 길 좌우에 늘어선 상점은 많은 별이 별자리에 따라 나뉘어 있는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차례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수레와 말이 오갔으며, 달리는 사람과 뛰는 사람들이 허둥지둥 분주하게 오갔는데, 그들은 모두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른바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도 모른다.〔相逢不知老〕”라고 한 것은 진실로 뛰어난 구절이다.
불암산(佛巖山)은 푸른빛으로 서 있는데 바라보니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바위 봉우리가 빼어나게 솟은 것이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만약 왕실을 가까이에서 보익하여 동쪽의 진산(鎭山)이 되어 서쪽과 남쪽과 북쪽의 세 산과 더불어 함께 우뚝 솟아 있었다면, 실로 도성의 형세를 장엄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서울을 수십 리 벗어난 곳에 있어 마치 거친 들판으로 달아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바, 조물주가 사물을 만든 뜻이 참으로 애석하였다.
아, 조석으로 생활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접하던 산을 태어난 지 45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한 번 올라 보았다. 천지는 잠시 머물러 가는 주막인 거려(蘧廬)이고, 희서(羲舒)는 비탈길에 굴러 가는 구슬과 같은바, 부생(浮生)의 백년 세월은 이 우주에 잠시 몸을 의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바람 속의 물거품과 같아 멀리 떠가거나 가까이 있거나 흩어지거나 모이거나 하는 것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여생이 몇 년이나 더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아들과 조카를 따르게 하여 다시 이 산에 놀러와 여기에 머물러 먼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즐기는 것을 어찌 또다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그것을 쓰고 때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주D-001]복정(覆鼎) : 북한산(北漢山)의 옛 이름으로, 산의 모양이 마치 솥을 엎어 놓은 듯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은 이 이외에도 삼각산(三角山), 북악(北嶽), 부아악(負兒嶽) 등으로도 칭해진다.
[주D-002]공극(拱極) : 경복궁(景福宮)의 주산인 백악(白嶽)을 가리키는데, 중종 때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백악을 공극산, 인왕산(仁旺山)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개명하였다.
[주D-003]소 이상(蘇貳相) : 좌찬성과 우찬성을 지낸 소세양(蘇世讓)을 가리킨다. 소세양은 뛰어난 시재(詩才)를 가지고 있어 한때의 문풍(文風)을 주도하였다.
[주D-004]심장(心匠) : 독특한 구상이나 설계를 말한다.
[주D-005]단서(丹書) : 중요한 내용을 붉은 글씨로 써서 깊이 간직해 숨겨 둔 것을 말한다.
[주D-006]봉호(蓬壺)나 곤랑(崑閬) : 봉호는 바다 속에 있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상의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습유기(拾遺記)》〈고신(高辛)〉에, “삼호(三壺)는 바로 바다 속에 있는 세 산으로, 첫 번째는 방호(方壺)인데 이는 방장산(方丈山)이고, 두 번째는 봉호인데 이는 봉래산이고, 세 번째는 영호(瀛壺)인데 이는 영주산(瀛洲山)으로, 모양이 술병과 같이 생겼다.” 하였다. 곤랑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낭풍원(閬風苑)으로, 역시 신선이 산다고 하는 곳이다.
[주D-007]삼강(三江) : 지금의 용산(龍山), 마포(麻浦), 양화(楊花) 일대의 강을 말한다.
[주D-008]동궐(東闕) : 창덕궁의 이칭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이궁(離宮)으로 세운 궁전으로, 임진왜란 때 경복궁ㆍ창경궁과 함께 불에 탔으나 1609년(광해군1)에 가장 먼저 중건하여 오랫동안 법궁(法宮)으로 사용되었다.
[주D-009]호분(虎賁)과 용양(龍驤) : 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소속된 군사 조직으로, 임금의 호위를 주 임무로 하였다.
[주D-010]서로……모른다 : 맹교(孟郊)의 시 〈송유순(送柳淳)〉에 나오는 구절로, 명예와 이익을 좇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분주히 만나고 다니느라 자신이 늙어 가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다.
[주D-011]희서(羲舒) : 해를 몬다고 하는 신인 희화(羲和)와 달을 몬다고 하는 신인 망서(望舒)로, 전하여 세월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12]현옹(玄翁)의……있다 :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고, 백사(白沙)는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3년이 지난 해는 1615년(광해군7)으로, 이때 신흠은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해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지목되어 파직된 후 김포(金浦) 근처에 있었고, 이항복은 같은 해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북인(北人)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불암산 아래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한수재선생문집 제32권
 묘표(墓表)
증(贈) 승지(承旨) 이공(李公) 연(堜) 묘표


이 사문 세환(李斯文世瑍)이 선친의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의 사행(事行)을 적어 가지고 내게 와 울면서 청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는 남다른 바탕이 있으신 분으로 당대에 부응할 만한 충분한 재주와 행실을 갖추었으며 그 이름 또한 후세에 전하기에 넉넉한데,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뜨신 지 지금 70년이 되도록 아직 묘비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후손으로서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를 얻어 지하의 영령을 빛나게 했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그것을 받아 읽어 보았다. 아, 하늘이 이미 그러한 인물을 낸 것은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였을 것인데 이어서 다시 막아 버렸으니, 그 또한 불행한 일이 아닌가. 내가 비록 지식이 얕고 인품이 용렬하여 감히 입언(立言)을 한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마는 그 아름다운 행실이 영원히 묻혀 버리고 전해지지 못할까 적이 마음이 저리고 또 효자의 지극한 간청에 감동이 되어 마침내 사양을 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연(堜)이고 자는 교옹(郊翁)이며 관향은 벽진(碧珍)이다. 아버지는 참지(參知)로 판서에 추증된 휘 상급(尙伋)인데 병자년 난리에 삼학사(三學士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의 논의를 주장하여 한때 명망이 높았고, 할아버지 휘 희선(喜善)은 교관(敎官)으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 휘 석명(碩明)은 군수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청렴한 지조로 대대로 가문을 지켜 사람들이 맑은 물에 비유하였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첨지중추부사 주(胄)의 딸이었으며, 첨지중추는 또 음애(陰崖 이자(李耔)) 이 문경공(李文敬公)의 미생(彌甥 자매의 손자)이었다.
공은 만력(萬曆) 정미년 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였으며 성품도 효성스럽고 조심스러워 부모의 뜻에 순응하고 어김이 없었고 얼굴 모습 또한 화기가 넘쳐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자라서도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겸손과 공순함으로 스스로를 길렀으며 말도 골라서 하였다. 친척과 친구에게 후하고 사람을 다정하게 대하여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부정한 일은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하지 않았으며 남이 하는 경우 옳은 길로 가도록 타이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판서공이 일찍이 외읍(外邑)을 맡고 있었는데, 그때 공은 뜻을 간결하게 가져 문방(文房) 도구 같은 것까지도 청정(淸政)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고, 무릇 자제(子弟)로서의 허물을 한 번도 저지른 일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을 제어하였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고 전일했으며 늘그막까지 외곬으로 마음을 써 거의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는데 어쩌다 못 다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좌우에서 들려와도 못 들은 체 할 만큼 입지(立志)가 확고하였다. 일찍이 별시(別試)를 통과하고 전시(殿試)를 보기 전에 정부인 상을 당하여 절도에 넘게 몸이 야위도록 상을 치르다가 점점 병이 고질화되어 드디어 죽기에 이르렀는데, 그때가 바로 숭정(崇禎) 을해년 2월 24일로서 공의 나이 겨우 29세 되던 때였다. 충주(忠州) 서쪽의 황금곡(黃金谷) 해좌(亥坐) 둔덕에 장사 지냈는데 이는 그곳이 선영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막내아들의 공훈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씨(李氏)는 대대로 알려진 인물들이 많다. 신라(新羅) 말기에 총언(悤言)이라는 이가 벽진 태수(碧珍太守)로서 여조(麗朝)의 통일 시기를 당하여 공을 세워 장군(將軍)의 호를 받았는데, 그가 이씨의 시종이다. 공의 6세(世) 조부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에 이르러 청백으로 이름이 나 세상에서 그를 노촌 선생(老村先生)이라 불렀고, 공의 중부(仲父)인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은 의로운 절개로 나라 위해 몸을 바쳤는데 공이 또 효도로 마지막을 장식했으니,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풍성(風聲)을 지닌 가문으로서 대대로 주고받았다고 할 것이다.
공의 초취(初娶)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죽음공(竹陰公) 희일(希逸)의 딸로서 자태가 단정하고 성품이 총명하여 매우 시부모의 뜻에 들었는데 자식이 없이 공보다 13년 먼저 죽어 양주(楊州)의 불암산(佛巖山) 선영에 술좌(戌坐)로 장사 지냈다. 재취(再娶)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도사(都事) 구준(耈俊)의 딸로서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이 그의 할아버지가 되며,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화기가 넘치고 상냥하여 매우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녔다. 미망인이 되자 외롭고 연약한 두 아들이 잘 성취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는 데 있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고, 집안이 몰락할 지경이 되어도 그 사실을 모르게 숨기고 오직 날마다 스승을 찾아 학업에만 힘쓰게 하였다. 그래서 외형(外兄)인 동회(東淮 신익성(申翼聖)) 신공(申公)이 언젠가 감탄을 하면서 이씨매(李氏妹)는 참으로 여사(女士)라고 하기도 하였다. 숭정(崇禎) 후 정미년에 세상을 마쳤는데, 묘는 공의 묘 뒤에 있다.
아들이 둘이다. 맏은 지웅(志雄)으로 두 사마시(司馬試)에 모두 합격하고 한성 서윤(漢城庶尹)이 되었으며, 차남 지걸(志傑)은 사마시를 통과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가 되었다. 서윤은 4남을 두었는데 목사(牧使) 세황(世璜)과 세구(世球)ㆍ세관(世瓘)ㆍ세환(世瑍)이며, 두 딸은 참봉 윤규(尹揆)ㆍ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첨추(僉樞)는 아들이 둘인데 세근(世瑾)은 교리(校理)이고 세진(世璡)은 별제(別提)이며, 딸 다섯은 유중영(柳重榮), 진사 어사하(魚史夏), 정만준(鄭萬準), 부사(府使) 조세망(趙世望), 유창진(柳昌晉)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황은 아들 정상(挺相)이 진사이고, 세관은 자식이 없어 아우의 아들 정박(挺樸)을 후사로 삼았으며, 세환은 아들 정욱(挺郁)과 정박 둘 모두 진사이다. 세근은 3남을 두었는데 정주(挺柱)가 진사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세진도 3남인데 정즙(挺楫)과 어린아이들이다. 그리고 안팎으로 증손과 현손이 모두 50여 명이나 된다.
아, 공은 비록 일찍 죽어 자기가 할 바를 다 못하였지만 후사들이 번창하여 현재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그의 복록(福祿)이 끝난 것이 아니다. 공과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하늘이 그 못다 발휘한 축적을 모아 두고두고 후세에 복을 주는 그런 경우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청수한 인물 오래 못 사는데 / 淸粹者難久
기품 때문에 그런 것인가 / 氣稟之然耶
후손들 경사 누리고 있으니 / 餘慶方來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이런가 / 可必者天耶
오늘날 착한 일 하는 이들이여 / 凡今爲善之人
날아오르는 저 난곡을 보시게나 그려 / 盍觀鸞鵠之騰騫


四佳詩集卷之五十二○第二十五
 詩類
佛巖山 a_011_127b


佛巖山下有茅廬。當戶峯巒畫不如。今日追思謝公屐。當年幾倒潘閬驢。落花流水仙家是。古木回巖寶刹餘。猿鶴年年應悵望。袖中已草乞骸書

 

 鶴谷集卷之八
 墓碣銘 七首
贈左贊成李公墓碣銘 幷序 a_079_536c


星州之李。爲國大姓。有諱悤言。在羅季爲碧珍太守。歸麗祖。贊成統壹功。厥後子孫。世濟其美。與麗相終始。金紫光祿大夫諱實。銀靑光祿大夫諱雍。特其盛位而尤章者也。入我朝。有諡平靖公諱約東。官至知中樞府事。文武大才。廉名治行。載在志紀。平靖生諱紹元。文科。刑曹佐郞。佐郞生諱有蕃。典獄署奉事。贈通禮院左通禮。通禮生諱碩明。德川郡守。贈承政院左承旨。於公寔爲皇考。承旨公娶晉州河氏。健元陵參奉繼雲之女。文孝公演之後。以嘉靖庚079_536d寅三月。生公。公諱喜善。字伯純。少承庭訓。沈潛經傳。因而博洽群書。於詩文最專攻者。中辛酉進士。至丙戌。拜童蒙敎官。時朝議重蒙學之訓迪。必欲得其人。執政以公應副焉。壬辰。避倭寇于關東金化縣。竟罹凶禍。時年六十三。甲午。返葬於楊州佛巖山西麓。粤十六年己酉。因夫人之喪。改卜窆穴而祔焉。公性至孝。晨昏之奉。瀡滫之具。必以養志爲先。淚其執喪。哀毀踰制。孺慕之誠。終身不衰。秉心寬和。接人謙恭。雖橫逆之來。不校而恬如。嘗有同學故人。位至台衡。而絶不跡其門。一日。語及公曰。某乃無恙在世耶。其淸079_537a靜自守如此。夫人昌原丁氏。慶尙道都事煥之女。婦儀母道。俱臻懿則。男四人。長尙哲。登文科。卒官平安道兵馬評事。次尙吉。禮曹參判。耆德淸名。爲朝紳之所推重。公之累贈贊成與夫人之貞敬。以參判貴也。次尙迪。亦死於壬辰兵。次尙伋。司憲府執義。尙哲一男二女。男㙉。女適節度使成夏宗。次適鄭以恒。尙吉一男坰。侍講院弼善。尙伋二男一女。堜,。女適尹溟擧。銘曰。
潛德不耀將壽康。天昭施祐迺其常。云胡反而斯罹殃。不在厥身于後昌。蟬聯善慶无時亡。


寒水齋先生文集卷之三十二
 墓表
贈承旨李公 墓表 a_151_101a


李斯文世瑍甫以先大夫遺命。錄其王府君事行。泣請於余曰先王考有異質。其行其才。足以需當時。其名足以傳後世。而不幸短命。今七十年而尙闕墓文。此後孫之至痛也。願得子一言。以爲地下重。余受而讀之曰。嗚呼。天旣生若人。若將有爲。而又從而閼之。其亦不幸矣夫。顧余淺劣。雖不敢以立言自居。竊傷151_101b其懿行湮沒而無傳。又感孝子之至懇。遂不能辭。謹按公諱堜字郊翁。碧珍人。其考參知贈判書諱尙伋。丙子之難。主三學士之論。名重一時。王考諱喜善。敎官贈贊成。曾王考諱碩明。郡守贈參判。廉操世家。人比淸水。妣贈貞夫人密陽朴氏。僉樞胄之女。僉樞。陰崖李文敬公之彌甥也。公以萬曆丁未正月廿日生。幼而警悟。性孝謹。有順無違。容色愉婉。爲父母所鍾愛。長不喜芬靡之習。謙恭自牧。擇言而發。厚於戚故。與人款曲。爲儕流所愛慕。至於不正之事。雖小不爲。見人之爲。亦不忘偲切。判書公嘗典外151_101c邑。而公飭志簡潔。雖至文房之具。亦不欲以浼淸政。凡所謂子弟過者。一未嘗有焉。其制行有如此者。早好讀書。思慮精專。兀兀窮年。殆忘寢食。苟不卒業。雖鬧聒之言左右至。若無聞也。其立志有如此者。嘗擧別試解額。未赴殿試而遭貞夫人憂。致毀過節。輾轉沈痼。遂至滅性。是崇禎乙亥二月廿四日。得年纔二十九。葬于忠州西黃金谷負亥原。從先兆也。後以季子從勳贈左承旨。李氏世多聞人。羅末有曰悤言。以碧珍太守。當麗祖統一。以功受將軍號。爲李氏鼻祖。至六世祖平靖公約東。以淸白顯。世稱老村先151_101d生。仲父忠肅公尙吉。以義節殉國。而公又以孝終。可謂故家風聲。有授而有受矣。公初娶林川趙氏。竹陰公希逸女。姿性端明。甚得舅姑意。先公十三年卒。無子。葬在楊州佛巖山先塋戌坐之兆。次娶全義李氏都事耇俊女。淸江公濟臣其祖也。莊肅和婉。婦德甚盛。旣稱未亡。以兩兒孤弱。恐不克成立。義方之敎。靡不用極。雖家事旁落。不使知之。唯日勉其就師問業。外兄東淮申公嘗歎曰李氏妹眞女士也。以崇禎後丁未卒。墓在公墓後。有二子。長志雄。中司馬兩試。漢城庶尹。次志傑。司馬僉知中樞。庶尹四男。世璜牧151_102a使。世球,世瓘,世瑍。二女適參奉尹揆,尹熀。僉樞二男。世瑾校理,世璡別提。五女適柳重榮進士,魚史夏,鄭萬準府使,趙世望,柳昌晉。世璜男挺相進士。世瓘無子。取弟子挺樸爲後。世瑍二男。挺都,挺樸拜進士。世瑾三男。挺柱進士。次幼。世璡三男。挺揖。次幼。內外曾玄摠五十餘人。噫。公雖早世。未究厥施。後嗣繁昌。方將發揚於世。福祿蓋未艾也。若公者所謂天鍾未發之蓄。錫衍於無窮者歟。銘曰。
淸粹者難久。氣稟之然耶。餘慶方來。可必者天耶。凡今爲善之人。盍觀鸞鵠之騰鶱


[주D-001]주미(麈尾) : 사슴의 꼬리로 만든 불자(拂子)인데, 담론(談論)할 때에 그것을 휘두르며 하기도 한다.
[주D-002]서왕모(西王母)를 …… 나누네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천도(天桃)를 가져다 바친 일이 있다 한다.
[주D-003]의(義)가 …… 살찜을 :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와서 배우는데, 처음에는 몸이 자꾸 파리하여지더니 얼마를 지난 뒤에는 살이 쪘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처음에는 부자(夫子)의 앞에 오면 인의(仁義)가 즐겁다가, 나가 보면 부귀(富貴)가 부러워서 두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서 싸우느라고 괴로워서 파리하였었는데, 이제는 의(義)가 이겨서 부귀보기를 흙덩이같이 보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여 살이 쪘습니다.” 하였다.
[주D-004]기인(畸人) : 《장자(莊子)》에, “기인(畸人)이란 것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고 천(天 자연(自然))과 짝이 되는 사람이라.” 하였다

 

艮齋集卷之十一
 墓表
致仕奉朝賀藥泉南公墓表  a_161_209a


辛卯三月十七日丙午。致仕奉朝賀南相公。易簀于 161_209b 廣州之寓舍。五月庚寅。葬于楊州佛巖山花蝶洞坐丁之原。寔開國元勳忠景公諱在賜葬之右岡。遠近門子弟俱會。其孤泣言。始先人小築於龍仁之琶潭。葬先妣於居東。爲日後地。不幸宮家訟民田。薄業數畝混入。因離次。以及大故。遺命事未決母歸葬。故權安于此。他日完襄。當有牲石墟誌。顧不肖死在朝暮。願及今畧識表陰。皆曰然。以屬奎瑞。玆敢掇履歷始終進退大節。爲之敍曰。先生諱九萬。字雲路。以崇禎己巳生。辛卯司馬。丙申乙科。踐兩司。盡言不諱。入春坊。與贊善宋公浚吉,權進善諰同周旋。二公每稱 161_209c 眞講官。由吏曹弘文錄。歷舍人。擬典翰。甲辰。擢承旨。轉大成,大諫,吏議,承文院,釐正廳等副提調。爲養牧淸州。有遺愛閣。辛亥。按北關。仍四年。民鑄鐵頌德。歸亞銓。薦文衡。兼籌司賑堂。疏斥宗戚。干宮禁忤。廢四五年。特除刑參。遇時惎嫉論遞。召以左尹。指論相積悖子驕橫。尹鑴伐禁松營第。宰相淫騙等事。竄巨濟。移南海。逮庚申。奸黨伏法。踐知申轉副學。進大提學。母喪。特賜米布擔夫。纔闋。陞兵判。甲子。拜右相。再使燕轉左進領。諫嬖宗杭。除格外職。上震怒。圍籬慶興。數月復西樞。仍値己巳之際。謫江陵。一朞 161_209d 放還。甲戌仁顯后復位。特拜領台當國。請誅韓重爀邪誑。嚴曲逕交通之漸。貸希載死罪不竟獄。意欲以保安國本。不悅者嗾人交攻之。上輒以爲宗社深長慮。解之。仍力辭。再遞職。上遣六卿慰諭者三。賜手札御詩者五。至親執手勉留。及七十。請休致。不許。遂歸琶潭。遣承旨史官令偕來。不應。至辛巳鞫獄。居臺閣者復持前事不已。壬午。謫牙山數月。特放。丁亥。以予欲面諭促入。許致仕。仍勉留不已。逡巡揖退。己丑。入起居。上强疾引見。命宦侍扶掖。諭若不許留。不可罷對。蓋丁亥。亦有此敎 161_210a 云。退陳情歸潭上。又命稍進江外。自此往來近郊。朝家有問。必悉心以對。自屛退。月賜廩肉酒。辛酉。又賜粟帛。未幾感疾。疊遣御醫掖庭人致珍味。及卒。賜棺材禮葬。給祿三年。宜寧之南。自勝國爲巨族。忠景之孫諱智。亦官左議政。寔公八代祖。而承旨諱彥純。行護軍贈判書諱柁。縣監贈贊成諱烒。是爲高曾及祖。考諱一星。金城縣令贈領議政。妣安東權氏。文科壯元江陵府使諱女。夫人東萊鄭氏。父持平脩。高曾曰右議政彥信。大司憲協。先公八年卒。女適禮賓正趙泰相子鶴鳴。薦擢六品職。病 161_210b 不仕。孫克寬生員。處寬,五寬。側出鶴英,鶴淸,鶴貞。女適李岱坤。先生歷事三朝。近六十年。望實無出右。及入相。난001國安危二十八年。古所未有。嘗被睿奬。雖當威譴之日。猶許以剛方正直。由是少合多乖。名益高跡益畸。不能展布萬一。識者所歎惜。而一生苦節謙愼。及末年。不能保有閒居。嗚呼慟矣。嘗師事同春宋文正公。學有淵源。一以躬行心得爲務。又推其餘。誨人不倦。門下至公卿臺閣爲方面循吏者各十餘人。旣多先沒。而及喪持服者。猶近三十。北民七千餘人。會哭咸興。雅愛泉石。中年有草堂於峩嵳山 161_210c 藥水巖畔。學者稱藥泉先生。嗚呼。後之觀先生者。事業謨猷。有國乘。文章見識。有遺集。平居言行。又將有立言者記載。今故略存其槩云。


[난-001]係 : 係當以繫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