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관련 고려사 /노강서원

2011.12.16. 수락산 鷺江書院

아베베1 2011. 12. 17. 10:30

 노강서원 (鷺江書原)

 의정부시 장암동 산146-1 번지 수락산 입구에 있다

 

  반남인 정재 박태보선생의 유업을 기리기위하여 노량진에 있던 사당이 6.25 사변으로 이곳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으로   현재의 건물을  1969년 에 지은것이고 이곳의 자리는 서계 선생이  동봉 열경 청한자  김시습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창절사의 자리에  옮겨 지었다는 것이다 .   

 

박태보

1654~1689. 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산인(定齋散人),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킬 때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항변하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 가던 도중 노량진에서 젊은 나이로 죽었다.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 鷺江書院  정조임금시  辛亥年  賜額  편액

 

홍재전서 제24권
 제문(祭文) 6
노강서원(鷺江書院) 치제문



새벽녘에 길게 이어진 행차가 / 曉駕逶迤
강물이 굽이도는 곳에 이르니 / 江水之隈
봉우리 감싸 안고 길이 도는 곳에 / 峯廻路轉
우뚝한 사당이 있네 / 有廟其崔
누구를 제향하였던가 / 侯誰饗之
아,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이니 / 猗朴文烈
가동의 재능이고 / 賈董之才
여윤의 절의였네 / 余尹之節
신하로서 죽음을 아끼지 않아 / 臣不愛死
주머니에 한 통의 소(疏)를 바쳤으니 / 囊有一疏
상소 한 통의 힘이 / 一疏之力
구정(九鼎) 대려(大呂)보다 무거웠네 / 重於鼎呂
누가 감히 두마음을 품을 것인가 / 誰敢貳者
두마음을 품는다면 인륜이 없다네 / 貳則無倫
수립한 바가 우뚝하니 / 卓爾所立
곧은 말을 하는 왕실의 신하였네 / 謇謇王臣
바람과 물이 서로 부딪치면 / 風水相激
돌을 만나 울리나니 / 遇石而鳴
훌륭하도다 시편이여 / 哿矣詩篇
완연히 경의 평생을 보는 듯하네 / 宛卿平生
강가의 여러 봉우리가 / 江上數峯
성하게 눈에 가득 차는데 / 藹然盈矚
맑은 영령이 오히려 존재하니 / 英爽猶存
가을 색을 따라서 바치네 / 酌以秋色


 

[주D-001]가동(賈董) :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가의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문신인데, 낙양(洛陽)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어 문제의 총애를 받았고, 동중서는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로서 학사(學士)들의 존중을 받았다.
[주D-002]여윤(余尹) : 여씨(余氏)와 윤씨(尹氏) 성을 가진 두 사람인 듯하나, 누구인지는 미상이다.

 

   ▶ 鷺江書院 의 외삼문

 ▶ 鷺江書院 본당의 모습 문있는 곳에서 담은 것이다

   ▶ 鷺江書院 의 안내표지판 

   ▶ 鷺江書院 등 이곳에서는 서계선생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 기개와 절경의 상징 정재 박태보 홍보물

  ▶ 시개의 지정 서계 박세당 홍보물

 

   ▶ 경기도 기념물 41호 표석

   ▶ 鷺江書院 정조임금 편액

  ▶ 청풍정 유지

 

  궤산정 석천동(石泉洞) 

      서계유거 (西溪幽居) 수락산 서쪽계곡에 그윽한 집이란..  


   西溪朴先生畵像記     

             
朴西溪先生遺像。奉於石泉舊廬。曺將軍世傑所摹寫也。使後學曰夕瞻謁。以蒸黍香芹。爲時節之薦。其禮也簡而潔。微而精。百世可師也。裕元素慕先生恬退淸高之節。忠信精確之德。通籍初。祗謁先生像於石泉舍。幅巾玄端。坐古巖上。淸流在其下。德容道氣。如高山大嶽。有不可拔之勢。藥泉南公曰。雖謂之古今天下惟一人。亦可也。西堂李公曰。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求之千載。有誰能髣髴乎斯言者哉。先生之學。自得於心。如小學解,思辨錄。發前人所未發。而不求奇奧。務在平易。有以見先生志學之正也。築簣山亭于溪上。敎授不倦。必先探究其義理。不專意記誦。學子之受先生業者。擧皆爲國之黼黻。家之珙璧。鳴於一世也。歲乙丑。余復謁先生像。先生祀孫昇壽。托述先生畵像記。噫。人能寫人之形。不能寫己之形。余曾使人寫我形。以野人之服。坐巖石上。此慕先生之德而仰先生之像也。先生庚申。承恩諭之曠絶。嚾嚾自戢。而跡不到城闉之中。顧余陋矣。低徊棧豆。殆三十年。始有江湖之想。先寫其形。終愧其影。不其近乎。夫君子所以異於人者。以其存心也。先生立心於不惑之年。大耋光陰。醇潔不渝。使後之學者。能模楷一節。於戱盛矣。曩之曺君。只畵先生之形。今余之言。非丹靑所施。而其敢曰盡得乎先生之成德爲行也。


 

 

명재유고 제4권
 시(詩)
3수



수려하고 맑은 자태 달빛 속에 간직하지 / 好藏淸艶月明中
무엇 하러 드러내어 풍설과 맞섰던가
/ 何事將來鬪雪風
백 년 뒤에 다시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 更有何人百載後
유묵에 의거하여 진공을 탄식할까 / 却憑遺墨歎陳公

양 잃은 뒤 외양간을 고쳐도 늦지 않고 / 亡羊補苙未爲遲
산에 있는 돌이라도 옥 가는 데 쓸 수 있지 / 山石猶爲琢玉資
지금은 탄식해도 이미 소용없으니 / 今日嗟嗟已無及
평생 나를 알아준 이 저버린 게 부끄럽네 / 此生長愧負心知

우리 인생 참으로 하루살이 같으니 / 浮生眞箇似蜉蝣
시인이 원유를 읊은 것도 우습다네 / 堪笑騷人賦遠遊
부자와 형제 함께 영원히 돌아간 곳 / 父子弟兄歸復處
천 년토록 늠름한 정기 볼 수 있으리라 / 唯看正氣凜千秋

명재유고 제23권
 서(書)
이세덕 백소에게 답함 계미년(1703, 숙종29) 5월 28일



서계(西溪)의 일은 전혀 뜻밖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의 액운에 관계된 일이니, 어찌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편지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저를 경책해 주신 뜻이니 매우 감사드립니다. 매번 제가 당한 일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는 것이 이와 같으시니 더욱 감탄스럽습니다. 김씨(金氏)의 편지에서 비난한 것은 대체로 그 근원이 있습니다. 지난 신미년(1691, 숙종17)에 제 누이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를 동안 서계의 집 뒤에 있는 소사(蕭寺)에서 20일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설을 보았으나 슬픔으로 마음이 심란하고 병으로 몸이 쇠약한 상태라서 다 보지 못하였고, 본 것도 대충 훑어보고 지나갔습니다. 그 후로 빌려와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눈이 어두워 책을 볼 수 없었으므로 빌려다 볼 계획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반소(泮疏)에서 지적한 중용설(中庸說) 운운한 것은 그런 것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그 말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끄러운 때에 저를 위해 따지려고 한다면 저에게 수치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쪼록 일체 내버려 두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근래에는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과거(科擧)란 외물(外物)이라서 합격하고 합격하지 못하는 것이 운수에 달려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일에 골몰하여 힘 있고 건장한 시절을 헛되이 보낸다면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확고하게 뜻을 정립한다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쓰시기 바랍니다.


 

[주D-001]서계(西溪)의 일 : 박세당(朴世堂)의 저서인 《사변록(思辨錄)》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사변록》은 주희(朱熹)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이 때문에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지목되어 유배하라는 명이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권상유(權尙游)와 이관명(李觀命)에게 그 책을 변파(辨破)하라는 명을 내리고,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임수간(任守幹)의 상소 덕분에 그 명령이 철회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은 《사변록》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박세당이 지은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직접적으로 배척한 일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연명 상소를 올리고, 조정의 노론 신료들이 이에 편승하여 사건이 확대되어 결국 박세당이 옥과(玉果)로 귀양 가게 되었다. 《肅宗實錄 29年 4月 17日, 9月 4日


[주D-001]수려하고 …… 맞섰던가 : 박세당이 《사변록》을 지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즉 박세당이 높고도 깊은 학문의 경지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간직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엇 하러 《사변록》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는 세상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느냐고 탄식한 말이다.
[주D-002]유묵(遺墨)에 …… 탄식할까 : 진공(陳公)은 당(唐)나라 진자앙(陳子昻)을 가리킨다. 진자앙이 지은 감우시(感遇詩) 28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백거이(白居易)는 강루야음(江樓夜吟) 시에서 “매번 진 부자를 탄식하였고, 항상 이 적선을 찬탄했다오.〔每歎陳夫子 常嗟李謫仙〕”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누가 뒷날에 박세당의 유고(遺稿)를 보고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줄까 하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003]양 …… 않고 : 역시 《사변록》과 관련된 구절이다. 처음에 명재가 사변록》을 접하고 대체(大體)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고, 내용을 세부적으로 검토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사변록》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飛火)하자 편지로 충고 했던 듯하다. 즉 자신이 《사변록》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도록 미리 충고하지 않고 나중에야 충고한 것이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친 듯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明齋遺稿 卷34 祭西溪文》
[주D-004]산에 …… 있지 : 다른 산의 하찮은 돌을 가져다 자신의 옥을 가는 데 쓴다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고사처럼 하찮은 자신의 말이라도 서계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는 뜻이다.
[주D-005]시인이 …… 우습다네 :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슬프게도 시속이 핍박함이여, 훌훌 털어 버리고 멀리 노닐기를 바라노라.〔悲時俗之迫阨兮 願輕擧而遠遊〕”고 하여 세속을 멀리 탈피하고자 하는 뜻을 읊은 바 있다. 여기에서 명재는, 불우한 세상을 만나 원유의 뜻을 읊은 굴원과 같은 사람도 있지만 어차피 하루살이 같은 우리네 인생으로 볼 때 그 또한 우습다고 말한 것이다.
[주D-006]부자와 …… 곳 : 박세당의 큰아들 박태유(朴泰維)와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가 박세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들 부자와 형제가 묻힌 묘소를 두고 한 말이다.

 

명재유고 제4권
 시(詩)
약천(藥泉) 남 상국(南相國) 구만(九萬) 에 대한 만사



서계의 풀 묵은 지 몇 년이나 지났던가 / 西溪宿草幾回春
공이 또 바람처럼 저승으로 떠났구려 / 公又飄然去返眞
동갑내기 늙은 몸은 아직도 죽지 않고 / 雌甲殘生猶未死
부러워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본다오 / 不堪長羨望蒼旻


 

[주C-001]남 상국(南相國) : 남구만(南九萬 : 1629 〜 1711)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 또는 미재(美齋)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소론(少論)의 영수로 숙종 대에 환국(換局) 정국에서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펼쳤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D-001]서계(西溪)의 …… 지났던가 : 서계의 풀은 박세당(朴世堂) 무덤의 풀을 가리킨다. 박세당이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가 지내면서 자호를 서계초수(西溪醮叟)로 삼은 바 있다. 박세당은 1703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재유고 제20권
 서(書)
박태보 사원에게 보냄 4월 27일



동봉영당(東峰影堂)은 내 생각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를 유자(儒者)라고 주장하자니 명분은 바른데 사적이 뒷받침하기 어렵고, 승려라고 주장하자니 승려들이 그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그 허탄한 말을 빙자할 따름일 것이니 절의(節義)와 풍교(風敎)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참으로 옳지만은 않은 내 견해로 남의 다 된 일을 기필코 막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건물을 절반 이상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조만간 한번 찾아갈 것이니, 한가히 지내는 중에 좋은 감상거리가 하나 더해질 것입니다.
내가 당한 구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찍 장자(長者)에게 말하지 않고서 사적으로 공의(公議)를 등진 일을 논했다고 하여 그것을 죄로 삼고 있습니다. 전날 장문의 편지를 제때에 보내지 않은 일을 염려했던 그대의 견해 또한 명견(明見)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의리를 정밀히 분석한 공부에 대해 부끄럽고 탄복하였습니다. 기왕의 일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앞으로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두렵습니다.


 

[주D-001]동봉영당(東峰影堂) :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명재유고 제41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조 판서 박공(朴公) 신도비명



공의 휘는 태상(泰尙), 자는 사행(士行), 성은 박씨이다. 그 선조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다. 고려 말에 휘(諱) 상충(尙衷)이란 분이 있었는데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으로 문덕(文德)과 충절(忠節)이 있어 세간에서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고 일컬었으며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증조 휘 동선(東善)은 의정부 좌참찬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조부 휘 정(炡)은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고 이조 참판으로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지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고(考) 휘 세견(世堅)은 승정원 우승지로서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판관 곤(滾)의 따님이고 대사헌 유원(有源)의 손녀이다.
공은 숭정 9년 병자년(1636, 인조14) 1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 병이 많아 10세가 되어서야 책을 읽었는데, 이해하고 깨우침이 남보다 월등하여 스승을 번거롭게 할 것도 없이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갑오년(1654, 효종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5)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를 극진히 하여 상을 치러 향당(鄕黨)의 칭찬을 받았다. 기유년(166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보임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신해년(1671)에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뽑혔는데 이름을 열어 보고는 시험을 주관한 여러 공들이 인재를 얻은 것을 서로 축하하였다.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이틀 뒤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아직 창방(唱榜)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제수된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공은 갑자기 승진된 것을 혐의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임자년(1672, 현종13) 여름에 다시 전적, 병조 좌랑을 거쳐 정언으로 옮겨졌다. 가을에 호서 지방에 고시(考試)하러 갔는데, 과장을 여는 날에 화약고(火藥庫)에 불이 났다고 급히 외치는 자가 있었다. 뜰에 가득한 사람들이 놀라 술렁거리고 함께 자리하고 있던 자들도 일어나 살피고자 하니, 공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는 과장을 어지럽히려고 일을 벌인 것뿐이다.” 하였다. 이윽고 제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문을 열어 불을 피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불이 염초(焰硝)에 붙었다면 사람들이 이미 불길 속에 있을 것인데 피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생들이 서로 돌아보며 거짓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후 천천히 와언(訛言)을 퍼뜨린 자를 찾아내어 죄를 주었다.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궁궐 안의 사람 중에 도사(禱祀)를 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법대로 잡아 다스리니 부중(府中)이 엄숙해졌다.
계축년(1673) 봄에 다시 병조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한번은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 때에 말이 몹시 강직하였으므로 현묘(顯廟)가 매우 노하였는데, 공은 오히려 강하게 간쟁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근래 대신들은 한 번 온당치 않다는 하교를 받들면 대번에 인피하고 굳게 간쟁하지 못하는데 오늘 박태상은 참으로 간신(諫臣)의 체모를 얻었으니 의당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의 노여움이 마침내 풀렸다. 정 상공이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거듭 진노하셨는데도 사기(辭氣)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으니 박 정언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자이다.” 하였다.
체직되어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지평으로 옮겼다. 재이(災異)로 인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렸는데 일곱 가지 일로 진계(陳戒)하였다. 가을에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이 되고 교리에 올랐다. 이어 북평사(北評事)로 나갔는데, 군사와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변방 고을의 고질적인 폐습을 방백에게 보고하여 개정하였다.
갑인년(1674) 가을에 조정에 들어가 이조 좌랑에 제수되고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을묘년(1675, 숙종1) 봄에 호남 암행 어사가 되었다가 돌아와 수찬이 되었다. 여름에 다시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득실을 논하였는데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가을에 사예(司藝)에 오르고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진년(1676, 숙종2) 여름에 또 암행 어사로서 관북(關北)을 염찰(廉察)하였다. 가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제수되어 정치를 평이하게 하고 백성들을 가까이하여 민심을 소통시키기에 힘썼다. 예전부터 바닷가의 주현(州縣)에서는 경계 내에서 세선(稅船)이 전복될 경우 으레 그 쌀을 건져 내어 민가에 나누어 주고 가을에 상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관원들이 소홀히 하고 태만하여 제때에 일을 시행하지 않아서 쌀이 물에 빠진 지 며칠이 지난 뒤에 건져 내는 바람에 부패하여 먹을 수 없게 만드니, 백성들이 억울함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공이 고을에 부임한 다음 해에 익산(益山)의 세선이 고을 경계에서 전복되었다. 공은 보고를 듣고 즉시 100여 리를 달려가 해안에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저문 뒤였다. 달빛에 의지하여 돛을 올리고 바닷길로 또 20여 리를 가서 배가 전복된 곳에 다다랐다. 수부(水夫)에게 명하여 뱃머리를 여러 방향으로 나누고 밧줄을 묶어 등에 지게 하여 침몰된 배를 끌어냈다. 배를 끌어내고 보니 쌀가마가 다 온전하였다. 이를 옮겨 실어 해안에 가져다가 볕에 말리니 쌀이 그리 많이 손상되지 않았다. 마침 흉년 든 해였으므로 백성들이 오직 뒤늦을까 염려하며 앞다투어 가져갔으니, 이로 인해 소생한 자들이 또한 매우 많았다.
정사년(1677) 가을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무오년(1678)에 군자감 정에 제수되고, 기미년(1679)에 종부시 정으로 옮겼다가 성균관 사예, 예빈시 정, 사복시 정에 전보되었다. 겨울에 중시(重試)에 뽑혀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전보되어 좌승지에 이르렀다.
경신년(1680) 봄에 상이 시정(時政)을 개기(改紀)할 때 이원정(李元禎)이 이조 판서로서 제일 먼저 죄를 입었는데, 비망기(備忘記)에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었다.”라는 말이 있었다. 정원의 동료가 삭제하여 고치기를 청하려고 하자 공이 허락하여 연명으로 아뢰었다. 상이 전에 김상 수항(金相壽恒)을 무함했던 대신(臺臣)을 나국(拿鞫)하고자 하니,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저들이 참으로 그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만, 당시 성상의 하교가 준엄하신지라 저들이 오직 상의 뜻에 영합함으로써 사적인 뜻을 이루고자 한 것뿐이니, 지금 다시 탐문할 단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신을 나국하는 것은 결국에 후일의 폐단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임금도 한때의 희로(喜怒)에 좌우되어 당장의 기분만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그러고 물러났는데 다른 한편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이원정을 위해 복역(覆逆)하는 계사를 올리는 데에 참여한 것이 부당하였고 상공 김수항을 무함한 무리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여름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당시 정상 재숭(鄭相載嵩)이 전장(銓長)이었는데 하루는 묻기를, “우리들이 정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때에 물정을 잘 몰라서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다만 공평한 마음으로 공정하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잘하지 못한다고 하면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그 나머지 요령을 요하는 일은 본래 아는 자가 있어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어찌 꼭 하지 못하는 바를 억지로 하여 다른 사람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겠습니까.” 하자, 정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뜻도 그와 같다.” 하였다. 이로부터 훈척의 집안에서 모두 공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가을에 체직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병조 참지와 병조 참의로 전보되었다. 겨울에 인경왕비(仁敬王妃)가 훙(薨)하였는데, 춘조(春曹 예조)에 참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영상 김수항이 공에게 임시로 춘조의 일을 맡게 하였다. 당시 상은 창경궁에 있었고 빈전(殯殿)은 경덕궁(慶德宮)에 있었다. 상이 아직 두창(痘瘡)을 치르지 않았는데 상사(喪事)가 난 빌미가 두창이었으므로 두 궁이 서로 소통할 수 없었다. 이에 예제를 변통할 것이 많았는데, 공이 합당하게 조처하여 정리와 형식에 부족한 점이 없었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상 김수항이 더욱 공경하고 감복하여 말하기를, “평소 박 영공(朴令公)이 문아(文雅)에 우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재주와 식견이 이 정도인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윽고 예조 참의에 제수되고 곧이어 대사간으로 옮겼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예조로 돌아왔다.
신유년(1681, 숙종7) 봄에 다시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전형(銓衡)의 자리가 달갑지 않아서 다섯 번 사직 상소를 올리고 두 번 소패(召牌)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마지못해 직임에 나아가서는 조급히 승진하려는 풍조를 힘써 억제하여 사로(仕路)를 맑게 하였다. 공이 처음 전조에 들어올 때 당시 권세 있는 자가 공보다 먼저 인척을 끌어다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논할 때 또 인척의 자제를 추천하여 먼저 전랑(銓郞)에 의망하니, 공이 이를 막았다. 그 사람이 당시 언관의 자리에 있었는데 마침내 경신년(1680)에 있었던 정원의 일을 거론하여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는 내용으로 공을 탄핵하였다. 상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간파하여 윤허하지 않았고 또 공이 사직 상소를 올린 데 대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안심시켰다. 공은 강력히 사직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경신년 사건이 일어난 초기에는, 가령 눈치를 살피는 자가 그러한 상황을 만났다면 바로 기회를 틈타 사세에 투합할 적기였는데, 공이 진달한 바는 사리를 곧이곧대로 진달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위로 임금의 덕을 바로잡기를 명백하고 화평하게 하였으며 당론이 쟁탈하는 사이에서 편중된 바가 없었으니, 공처럼 성품이 단아하고 바르면서 지식과 도량이 있지 않다면 이처럼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사심을 가지고 헐뜯고 비방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니 공의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은 다만 말하기를, “당시 성상의 진노가 지엄해서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고 상 앞에 있는 기주관(記注官)도 누락함을 면치 못하여 전하는 소문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렇게 논박하는 의논이 나온 것도 괴이쩍을 것 없다.” 하면서 태연하여 개의치 않았다. 여름에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다. 겨울에 인천 부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친병(親病)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았다.
임술년(1682, 숙종8)에 예조 참의, 판결사(判決事), 대사성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다. 겨울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체차되었다. 계해년(1683) 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축년(1685)에 삼년상을 마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병조로 전보되었다. 상이 국자감의 장관은 많은 선비들의 모범이므로 그 선발을 신중히 하고자 하여 대신에게 선택하여 의망하도록 특명을 내리자 대신이 공을 선택하여 올렸다. 이에 대사성에 다시 제수되었다.
여름에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하직 인사를 하는 날에 상이 인견하여 이르기를, “경이 오래도록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경의 마음가짐이 공평함을 잘 알고 있으니, 힘쓰라.” 하였다. 대개 공이 3년 사이에 열 번 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이치에 근거하고 법을 지켜 치밀하고 간절하게 아뢰었고, 강연(講筵)에 출입하여 크게 보익한 것이 많았다. 이에 상이 그 현명함을 알았으므로 이와 같이 특별히 하교하신 것이었다. 관서 지방은 중국을 왕래하는 길이므로 으레 금을 내어 상인에게 빌려 주고 이문을 취하여 그것을 공용(公用)에 충당하였다. 관리가 날마다 문서를 끼고 계산하는 것이 이득과 재물이 불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공이 항상 이마를 찡그리며 말하기를, “어찌 사대부로서 이런 거간꾼 노릇이나 하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북사(北使)가 와서 변방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에 대해 힐문하였으므로 조정이 부신(符信)도 없이 공을 불러 조사하여 처벌하고자 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번신(藩臣)을 종이쪽지 하나로 부르니, 만약 변고가 있다면 어찌 낭패될 염려가 없겠는가.” 하고 즉시 경계에 나아가 주둔하고서 감히 가볍게 관차(官次)를 떠날 수 없다는 뜻으로 치계하였다. 이에 조정이 비로소 선전관을 보내 부신을 가지고 가서 불러오게 하였다. 부신을 맞추어 보고 나서 공이 차고 있는 것을 거두고자 하니 공이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혹 나를 체포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스스로 번신의 자격으로 부름에 나아가야 하는데, 이 부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부신을 가진 자가 주저하며 물러났다. 그가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감영을 떠나는 날에 사인(士人)과 부녀자들이 달려 나와 수레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우리 부모를 잃었다.” 하였고, 심지어 성곽에 올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우는 이들도 있었다. 공이 부임한 지 겨우 5개월인데 은혜와 사랑으로 인심을 감복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북사가 돌아가자 즉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인년(1686, 숙종12)과 정묘년(1687) 두 해에 걸쳐 대사성 겸 비변사유사당상, 동지경연사, 이조 참판, 호조 참판, 대사헌, 도승지 겸 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공조 참판, 예조 참판, 병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리는 자가 있어 함경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북쪽 지방이 몇 해 동안 흉황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생업을 잃었는데, 공이 부임하여 부세를 감면해 주고 이로운 것은 늘리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곤궁에 빠진 자들을 구휼하는 혜택이 잘 시행되었다.
무진년(1688) 가을에 또 흉년이 들자 공은 백성들이 장차 크게 곤궁해질 것을 알고 미리 주군에 경계를 내려 물자를 아끼고 곡식을 저축하도록 하였다. 또 열읍의 창고에 저축된 곡식 및 백성들의 호수(戶數)를 계산한 다음 인구(人口)를 세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식량을 비축해 두되, 그 부족한 부분은 영남 근방의 해안과 관서 근방의 산촌 고을의 창고 곡식을 옮겨 주기를 청하여 3만여 석을 얻어 제때 고르게 배급하여 먹여 주니 사람들이 흉년을 잊고 지냈다.
기사년(1689, 숙종15) 여름에 임기를 채우고 들어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가을에 호조에 전보되었다. 겨울에 조위사(弔慰使)에 충원되어 연경에 갔는데, 행장이 초라하자 상서(象胥 역관(譯官)) 무리들이 서로 말하기를, “재상의 마음을 우리들이 모두 아는데 공처럼 청렴하고 검약한 분은 본 적이 없다.” 하였다.
경오년(1690) 봄에 복명하고 재차 예조 참판이 되었다. 공은 기사년(1689)에 조정에 돌아온 뒤로 벼슬살이하는 것이 즐겁지 않아 매양 제수될 때마다 번번이 병을 핑계로 사면하였다. 가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전에 이 관부를 맡은 자들이 대부분 한가롭게 지내면서 정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적체된 송사가 혹 수십 년이 된 것도 있었는데, 공이 부지런히 판결하여 문서가 비게 되었다. 경내에는 세도 있는 호족들의 전장(田莊)이 많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는데 공이 모조리 정리하여 다스리니 간사하고 포악한 자가 자취를 감추고 힘없고 약한 자들이 살 곳을 얻게 되어 고을 전체가 잘 다스려졌다. 한가한 날에는 매화를 키우고 대나무를 옮겨 심고는 그 안에서 시를 읊으며 세상을 잊은 듯이 유유자적하였다. 3년 만에 돌아가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돌아온 뒤에 다시 도성에 들어가지 않고 선조의 묘 아래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 계부(季父)인 서계공(西溪公 박세당(朴世堂))과 조석으로 배회하며 서로 종유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계유년(1693)에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94) 여름에 상이 또 권세 부리는 자를 다 내치고 옛 신하를 불러들이면서 공에게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당시 옛 신하는 대부분 지방에 있었고 조정에는 거의 없었다. 상이, 공이 왔는지를 하루에 서너 번 하문하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도성에 들어와 숙배하였다.
얼마 안 되어 승진하여 형조판서 겸 동지경연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자우빈객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에 천망, 제수되어 중궁 복위 옥책문(中宮復位玉冊文)을 지어 올렸다. 중궁을 복위하려던 처음에 상신(相臣)은 지방에 있었고 예조에 장관이 없었는데 갑자기 명이 내렸으므로 예의(禮儀)가 많이 허술해질 상황이었다. 이에 병조 판서 서공 문중(徐公文重)이 대신 및 종백(宗伯 예조 판서)이 조정에 들어온 다음 의절(儀節)을 강정(講定)해서 대례(大禮)를 중히 하기를 청하고자 하여 공을 만나 그 일을 의논하였는데, 정원에서 이미 먼저 이 뜻을 아뢰었다. 이때 수상인 남공 구만(南公九萬)과 서공을 무함하고자 하는 자가 있어 유생 박상경(朴尙絅)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대관 정호(鄭澔)와 더불어 서로 연달아 두 상공이 성명(成命)을 막고자 했다고 논척하였다. 이어 공까지 아울러 논박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참혹하였다. 공이 도성을 나와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용서해 주고 이어 예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책례할 기일이 임박하였으므로 돈유하여 돌아오기를 재촉하니 공이 어쩔 수 없이 직임을 수행하였다.
가을에 우참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좌참찬,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전보되었다. 을해년(1695, 숙종21) 봄에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가 있었는데 공이 대제학으로서 참여하였으니 이는 옛날 박사(博士)의 직임에 해당되었다. 세자가 또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공은 종백으로서 찬관(贊冠)이 되었다. 또 존명(尊名)을 정하여 올렸으며, 성대한 예식을 주선하니 진실로 여망(輿望)을 흡족하게 하고 관리들의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여름에 대사헌을 거쳐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당시 죄인 명부에 올라 있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대신(大臣)이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하고 죄를 풀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대신(臺臣)이 따르지 않고 모두 인피하였으므로 의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사명(李師命)과 이상(李翔)을 복관(復官)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제학(副提學) 오도일(吳道一)이 이사명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수찬 민진형(閔震炯)이 이상을 신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여, 모두 대간의 반대에 부딪쳤다. 공이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를 올리기를,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의 논의가 분산되어 있으니 조속히 조처를 내리시어 생각과 뜻이 서로 믿음을 주고 가부간에 서로 이해하여 조화롭게 진정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인심을 감복시키소서. 이사명과 이상의 일은 애당초 명백하게 분변할 단서가 없었는데 지레 먼저 복관시켰으니 어찌 시비의 의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명백한 하교를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상벌이 얼마나 큰 권한인데 스스로 총람하지 않으시고 다만 관습만 따라 행하십니까. 이러고서도 어찌 무너진 기강을 떨쳐 세우고 세인(世人)들이 권려(勸勵)할 바를 알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는데, 장황한 하교 가운데, “스스로 총람하지 않고 다만 관습만 따라 행한다는 말은 실로 나의 병통에 적중하였다.”라고 하고, 두 사람을 복관시키라는 명령을 모두 환수하였다.
가을에 예조 판서로 옮겼고 상의 약시중을 든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공조 판서를 거쳐 또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병자년(1696, 숙종22) 봄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서는 선발하고 주의(注擬)하는 일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여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해에 크게 기근이 들어 서울에 모여든 유민(流民)들이 무려 수만 명이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도성의 동쪽과 서쪽 밖에 진휼하는 장소를 마련하여 나누어 거처하게 하되 재신을 택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공이 도성 동쪽을 주관하게 되었다. 공은 날마다 그곳에 가서 직접 나누어 구휼하는 것을 점검하였는데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굶주린 백성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면 모두 앞을 둘러싸고 손을 들어 말하기를, “공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심이 이와 같으니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계해년(1683)에 부친상을 당하고부터 이미 병을 얻었고 뒤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멀리 나가 복역하면서 또 손상을 입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게 고생하여 심신이 몹시 지치게 되었다. 집안 식구가 걱정하여 조금이라도 몸을 조섭할 생각을 하기를 권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병이 위태로운 것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다만 나라가 불행하여 누차 변고를 만났는데 오늘날 조정 신하들은 물러나 보신할 것만 생각한다. 내가 금년에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힘이 다 빠지도록 직무를 수행하다가 죽어도 오히려 이것이 내 분수일 뿐이다.” 하였다. 갑자기 감기 기운이 있다가 갈수록 피곤하고 기운이 없어졌다.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전조(銓曹)의 직임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병중에도 소를 올려 진정(賑政)을 논하였으니, 꿈속 말처럼 은근히 말하는 것이 모두 나라를 우려하고 시대를 근심하는 것이었다.
상이 궁궐 안의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하고 수라간의 귀한 음식을 내렸다. 대신이 입대(入對)하여 전조의 업무가 비게 되었다는 이유로 공의 직임을 우선 해임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사람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는데 조석을 버티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금 제법 여러 날이 지났으니 차도가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이미 위독하다고 아뢰자 상이 근심스럽게 여겼으니,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여기에 이르렀다. 체직되어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또 체직되어 부호군에 붙여졌다.
마침내 5월 7일에 건덕방(建德坊) 집의 정침(正寢)에서 임종하였으니, 연세가 61세였다. 부고가 올라오자 이틀간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와 부의(賻儀)를 모두 의례대로 하였다. 유사를 각별히 신칙하여 상장(喪葬)을 돕되 특별히 넉넉하고 후하게 하도록 하며 이르기를, “그렇게 해서 몹시 애도하며 진심으로 보살피는 나의 뜻을 표하라.”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관(棺) 1구(具)를 택하여 내렸다. 위로 관원에서 아래로 서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해 7월 6일에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위인이 단정하고 순수하며 차분하고 조용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웠다. 용의(容儀)는 단아하고 엄정하였으며 말에 거칠고 속된 기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더욱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승지공이 만년에 풍질(風疾)을 앓아 침상에 누워 지낸 것이 10년이었는데, 공은 근무하러 출사할 때 이외에는 곁을 떠난 적이 없이 간호하며 응대하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으며, 병이 조금이라도 도지면 하룻밤 사이에 안색이 금방 까맣게 변했다. 자(字)가 사수(士受)인 아우 좌랑공 태소(泰素)와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화락하게 매우 잘 지냈는데 그가 죽게 되자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내 몸 반쪽이 떠났으니 내가 어떻게 살꼬.” 하였다. 그의 자식을 친자식같이 돌보며 만날 때마다 눈물을 머금었다.
외가가 역병을 만나 상사(喪事)가 겹쳐 일어나니 친척이나 친구도 감히 돌아보는 이가 없었는데, 공은 치료해 주고 장사 치르는 일까지 마음을 다해 구호하였다. 겨우 동복(僮僕) 몇 사람과 함께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다섯 번의 상사를 치러 내니 사람들이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기고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본성이 준엄하고 결백하였으며 진취하는 데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의 악덕 중에 조급증만 한 것이 없다. 온갖 죄와 허물이 모두 이로부터 나온다.” 하여 앞다투어 달려 나가는 습성이 있는 사람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며 피할 뿐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교유가 매우 단출하였다.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소제하고 조용히 앉아 오직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다. 질박하고 평담하다고 기롱하는 자가 있었는데 혹자가 이르기를, “질박하고 평담한 것도 저절로 되기 어렵다.” 하였다. 집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벼슬하기 전에는 향촌에 살면서 몸소 비천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보통 사람들은 감내하지 못할 일인데 태연하게 처신하였으며 경재(卿宰)의 귀한 신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졸할 때에는 독에 남은 곡식이 없었고 농에 여벌 옷이 없었다. 염하고 장사 지내는 데에 필요한 물품도 부의(賻儀)가 들어온 뒤에 마련하였으니, 조문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청요직(淸要職)과 화현직(華顯職)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뭇사람들의 중망이 쏠렸지만 공은 번번이 공손하게 물러나 사양하여 득실(得失)이나 총욕(寵辱)을 마음에 담아 둔 적이 없었다. 수십 년 이래 당론(黨論)이 갈수록 심해지고 서로 배척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공은 분의를 생각하고 정도를 지켜 굽히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매양 일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임금의 덕을 규계하고 간언함으로써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하니 당시의 청의(淸議)가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공은 기국과 도량이 바르고 단정하였으며 말하고 웃는 것도 절도가 있었는데 마음속은 화락하고 평이하여 경계를 두지 않았다.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기를 좋아하여 매양 고인의 언행으로써 정성껏 지도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사리가 통창하고 말은 간결하게 하였으며 허언과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감식력이 더욱 뛰어나 당시의 신진 학자들이 다투어 공부한 것을 가지고 나와 질정하고 그 품평을 얻고는 저마다 놀라고 탄복하였다. 시험을 관장하여 문사(文士)를 뽑을 때는 오로지 통달하고 전아(典雅)한 것을 구하고 화려하고 기교가 있는 것은 물리쳤다. 근세에 고관(考官)의 직임을 잘 수행하여 공정하고 사심이 없었던 자를 말할 때에는 오직 공을 최고로 친다.
공은 비록 과거 시험으로 출세하였지만 어려서부터 경훈(經訓)을 정밀히 연구하였으므로 조예가 깊었다. 창강(滄江) 조공 속(趙公涑)은 공의 장인으로, 그가 인정하는 사람이 적었는데 유독 공만은 애중(愛重)하였다. 공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관을 고쳐 정제하고 만나 보면서 말하기를, “이는 대유(大儒)이다. 연소하다고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상 석주(金相錫冑)가 일찍이 찾아가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사람들이 예를 아는 선비를 꼽을 때는 반드시 산림(山林)을 일컫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학문이 넓고 예가 깊은 분으로는 박공을 넘을 자가 없다.” 하였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성실함이 없으면 만사를 이룰 수 없다.” 하였다. 이 때문에 ‘존성(存誠)’으로 재호(齋號)를 삼았고 또 호를 ‘만휴자(晩休子)’라고 하였다.
정부인(貞夫人) 풍양 조씨(豐壤趙氏)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필순(弼純)은 참봉이고 차남은 필건(弼健)이다. 장녀는 부사 신확(申瓁)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시직(侍直) 이수함(李壽涵)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사인(士人) 이병철(李秉哲)에게 시집갔다.
필순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사임(師任)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필건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신확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석하(錫夏), 익하(翊夏)이며 사위는 조해수(趙海壽), 이헌장(李獻章), 이진순(李眞淳)이다. 이수함은 1녀를 두었는데 윤지온(尹志溫)에게 시집갔다. 이병철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공이 우리 집안과 인척이 되는데, 공이 약관일 때에 내 선친이 한 번 보고는 깊이 칭찬하면서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지목하였다. 나 또한 어려서부터 공의 부자 형제들과 함께 노닐었으므로 사소한 일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마음으로 친밀하게 허여하여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이 늙도록 변함이 없었다. 사수(士受)는 일찍 세상을 떴고 공 또한 이어 서거하니, 훌륭한 사람을 잃는 아픔은 매양 가슴에 절실하다.
필순의 형제가 공의 사업과 행실을 적은 기록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구하였다. 내가 문장에 서툰 줄 알면서도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내가 공을 잘 안다고 여겨서이니, 인정과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그 기록을 요약하고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 喬木世家
보옥 같은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다 / 璵璠令質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였으며 / 孝友實行
행실은 깨끗하고 절개는 아름다웠다 / 淸修姱節
문학으로 조정에 올라 / 文學登朝
단아하고 바름을 스스로 지켰다 / 雅正自守
내외직을 역임하였는데 / 歷試內外
한 벼슬도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 一官不苟
세상길은 여러 갈래라 / 世路多岐
평지도 있고 언덕도 있는데 / 互有平陂
조용히 진정(眞情)에 맡기고 / 從容任眞
치우치지도 붙좇지도 않았다 / 不比不隨
지위가 총재에 이르러도 / 位至冢宰
몸가짐은 빈한한 선비 같았다 / 身如寒士
안팎이 똑같고 / 表裏若一
시종이 다르지 않았으니 / 始終無貳
내가 공의 덕을 흠모함이 / 我欽公德
진실로 하나의 성에 있다 / 亶在一誠
이것으로 자호를 삼았으니 / 于以自號
일평생이 증험이 될 만하다 / 可驗平生
당처럼 높다란 봉묘에 / 有崇若堂
의관이 보관되어 있다네 / 衣冠所閟
이렇게 공에 대해 명을 지으니 / 以玆銘公
아마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 庶幾無愧


 

[주D-001]상소하여 …… 면직되었다 : 박태상(朴泰常)이 당시 조정 신하들의 불화를 지목하면서 탄핵을 받아 유배되거나 파직당한 송시열(宋時烈), 남구만(南九萬), 이익상(李翊相)을 구호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당론만 일삼는다고 질책하는 비답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재차 정사(呈辭)하여 체차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년 5월 16일》 《承政院日記 肅宗 1年 5月 26日》
[주D-002]개기(改紀) :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말한다. 남인의 영수(領袖)인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인평대군의 세 아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고변으로 인해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어 서인 주도의 정권으로 바뀌게 된 일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주D-003]태아(太阿)를 거꾸로 쥐었다 : 태아는 보검의 이름이다. 《한서(漢書)》 권67 〈매복전(梅福傳)〉에 “태아를 거꾸로 쥐고 자루는 초(楚)에 주었다.” 하였는데, 남에게 큰 권한을 주고는 스스로 권한을 잃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D-004]복역(覆逆) : 왕이 내린 비답, 전교 등에 대해 왕명을 받들 수 없다고 반려하는 것, 또는 그 뜻으로 아뢰는 것을 말한다.
[주D-005]그 사람 : 지평 김진귀(金鎭龜)를 말한다. 《국역 숙종실록 7년 3월 26일》
[주D-006]혹 나를 …… 있었는가 : 대본은 ‘寧有旨追我乎’인데, 한국문집총간 154집에 수록된 《명곡집(明谷集)》 권33 〈이조 판서 만휴 박공 시장(吏曹判書晩休朴公諡狀)〉에 의거하여 ‘追’ 다음에 ‘逮’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명곡공은 전주최문 영의정 최석정을 뜻한다

 

 

정재 박태보 선생은  서계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백부인 박세후에게 양자를 갔으나 비명에 사망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누님의 일주기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 임신년(1692, 숙종18)



아아, / 嗚呼
세월이 화살처럼 빨리 흘러서 / 日月如駟
어느덧 일주기가 다가왔구나 / 初朞奄屆
그 음성 그 모습 아련해지니 / 音容日邈
어디에서 다시금 볼 수 있으랴 / 何處復覿
아아, 훌륭했던 우리 누님은 / 嗚呼姊氏
옛날로 말하자면 여선비였지 / 古之女士
총명하고 어진 데다 효성스럽고 / 聰明仁孝
유순하고 정숙하고 반듯하였지 / 柔順貞正
근검하며 말 삼가고 민첩한 데다 / 勤儉愼敏
식견 높고 행실도 고상했다네 / 達識高行
덕은 어찌 그리도 정숙했으며 / 德一何淑
명은 어찌 그리도 박복하였나 / 命一何薄
아아, 이 세상에 사람이 날 때 / 嗟人生世
운명에 흥망성쇠 있는 법이지 / 氣數乘除
실로 복만 온전히 받기 어렵고 / 福固難全
또 화만 주는 일 드문 법인데 / 禍亦罕俱
유독 우리 무슨 죄 그렇게 지어 / 獨我何辜
가지가지 재앙을 모두 받는가 / 偏逢百罹
그 슬픔과 원망이 아득하여서 / 哀怨茫茫
하늘에 호소해도 끝이 없어라 / 籲天無涯
어린 시절 겪었던 그때 그 일을 / 幼時所遭
어찌 차마 다시금 말을 하겠나 / 寧忍更說
한평생 계속되던 그때 그 고통 / 百年此痛
피눈물만 한없이 흘러내렸지 / 唯有淚血
나이 열다섯에 혼처 택하여 / 及笄相攸
우리 누님 군자에게 시집갔다네 / 于歸君子
그 신랑 참으로 훌륭한 군자 / 允矣君子
걸출하게 뛰어난 재주 지녔지 / 偉然拔萃
아름다운 두 사람 합해졌으니 / 兩美之合
온갖 상서 이르는 게 당연했는데 / 百祥可幾
혼인한 뒤 십 년도 아니 되어서 / 曾未十載
뛰어났던 그 인재 쓰러졌다네 / 玉樹奄摧
선인에게 반드시 복을 주시는 / 天乎天乎
아아, 하늘이여, 하늘이시여 / 善必福之
북돋워 재목으로 키울 듯하다 / 若將培之
어찌하여 다시금 엎어 버렸나 / 曷又覆之
부모 마음 서러워 무너졌었고 / 親心衋傷
미망인은 끝없는 슬픔 안았네 / 悼亡哀存
우리 누님 홀로 서 있을 때마다 / 獨立之時
아, 나는 통곡 소리 항상 들었네 / 噫痛常聞
빼어난 아들이 생기고부터 / 洎有令子
비로소 행복하고 즐거워했지 / 乃幸乃喜
초반 횡액 만년에 형통해지니 / 早厄晩亨
그건 실로 하늘의 선물이었네 / 實天所賜
효도하고 재주 있는 그런 아들을 / 子孝而才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 何處得來
약관의 나이에 과거 급제해 / 弱冠雋翔
고당에 광영이 넘쳐흘렀지 / 榮溢高堂
사람들 누님에게 덕담하기를 / 人謂姊氏
새댁이 덕 있어도 박복하더니 / 有德無命
바로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는 / 而今而後
천복을 받으리라 말들 했었지 / 受天之慶
뒤이어 두 손자가 태어났는데 / 從以兩孫
천리마의 새끼요 봉추였다네 / 驥子鳳雛
영특한 손자들이 누님 곁에서 / 英英膝下
끝없는 즐거움을 안겨 주다가 / 爾供我娛
너무나 뜻밖에도 여러 해 전에 / 不意頃歲
두 보옥이 떨어져 부서졌었지
/ 雙璧逬碎
스스로 박복함에 통곡했으나 / 自痛薄祜
그 재앙 아직도 아니 끝났네 / 災猶未艾
아들이 수령으로 가게 됐을 때 / 奉檄專城
그 행차 참으로 빛이 났으나 / 軒駟有煒
누님은 과분하다 생각하고서 / 恒懷逾分
그런 영광 도리어 두려워했지 / 以榮爲畏
경연에서 봉양 위해 외직 청했고 / 經帷乞養
또다시 큰 고을을 맡게 되었네 / 又牧大州
그곳에서 술잔 올려 헌수했는데 / 稱觴獻壽
그게 바로 누님의 회갑연이지 / 初度一周
이렇게 훌륭한 아들 둔 것을 / 弟賀姊氏
이 동생 누님에게 경하드리며 / 有子如此
평안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 庶幾寧康
길이 복을 누리길 바랐었는데 / 永享祿祉
그 누가 알았으랴 기이한 화가 / 誰知奇禍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줄을 / 遽起冥冥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을 때에 / 國有變故
신하가 어찌 감히 목숨 아끼랴 / 臣敢惜生
임금 옷깃 당기기 쉽지 않았고 / 義難牽裾
그 정성 귀신에게 아니 통했네 / 誠未感神
밤마다 애절하게 통곡하였고 / 哀哀夜哭
애간장 참담하게 끊어졌었지 / 慘慘斷猿
손수 쓰신 편지를 보내왔는데 / 手書之來
내 차마 목이 메어 읽지 못했네 / 咽不忍讀
남편 잃은 미망인 말년 이르러 / 未亡殘年
이러한 참혹한 일 보게 됐구나 / 眼見此酷
삼종지도 이제 다 끊어졌기에 / 道絶三從
오장육부 전부 칼로 베인 듯했네 / 刀割五內
오직 누님 바람은 속히 죽어서 / 唯望速化
이 고통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 免此苦惱
너무나 혹독했던 누님의 슬픔 / 悲哀焦爍
한계도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 靡有限極
하루아침 갑자기 떠나셨으니 / 一朝歸盡
실로 그 소원대로 이루어졌네 / 諒愜至願
아아, 애달파라 우리 누님은 / 嗚呼姊氏
평생을 슬픔 속에 살아가셨고 / 銜恤平生
육십여 년 살아온 모든 인생이 / 六十餘齡
시종일관 재앙으로 점철되었지 / 以禍始終
사람은 다 누구나 선한 법인데 / 民莫不穀
어찌하여 우리만 재앙 많은가 / 我獨何殃
아아, 하늘이여, 하늘이시여 / 蒼天蒼天
어쩌면 그렇게도 궁하단 말가 / 曷其有窮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부모 잃고 근근이 살던 이 목숨 / 孤露餘喘
그래도 누님 믿고 의지했는데 / 姊氏是恃
이제는 그마저도 끝이 났으니 / 今焉已矣
더 이상 오래 산들 무엇 하겠나 / 久生何爲
아아, 자상했던 우리 누님은 / 嗚呼姊氏
형제 우애 남달리 지극하였네 / 友愛天至
우리 여러 동생들 보살피기를 / 視我諸弟
어미가 자식에게 하듯 했었지 / 猶母於子
옛날에 동생 추가 짝 잃었을 때 / 昔推喪耦
다행히 두 아들이 남아 있었네
/ 幸有兩兒
큰애는 그때 마악 세 살이었고 / 大者三歲
둘째는 그때 겨우 돌쟁이였지 / 小者纔朞
누님은 그 아이들 받아 안고는 / 姊氏受之
가여워서 정성껏 돌봐 주었네 / 勤斯閔斯
아이들이 약해서 병에 잘 걸려 / 兒兮善病
번갈아서 위기를 겪을 때에도 / 迭入於危
밤낮으로 애들 안고 어루만지며 / 晝夜撫抱
피곤함도 다 잊고 간호했었지 / 忘其勞悴
그렇게 아이들 다 성장한 뒤에 / 以至成長
한 번도 키운 내색 하지 않았네 / 不自爲惠
내 여러 해 집안에 칩거해 있어 / 年來蟄伏
한 해에 한 번 정도 찾아뵙는데 / 累歲一拜
항상 매번 누님을 만날 때마다 / 每於相逢
슬픔과 기쁨으로 눈물 흘렸지 / 悲喜出涕
내 주리고 추운지 살피신 뒤에 / 軫我飢寒
우리 애들 안부를 챙겨 주셨지 / 念及子女
너무나 지성스런 누님의 마음 / 至意眷眷
계속해서 끝없이 이어졌다네 / 無有已已
골고루 큰 은혜 베푸셨으나 / 恩均顧復
조금도 보답을 못해 드려서 / 報蔑毫縷
한평생 부끄럽고 애통하리니 / 慙痛終天
내 마음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 我懷誰訴
지난해 산에다 무덤을 쓸 때 / 昨歲棲山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어 / 不能久滯
복토하는 일 겨우 끝나자마자 / 復土纔畢
서둘러 돌아간다 말씀드렸지 / 辭歸遽爾
무덤 풀이 어느덧 묵어 갈 동안 / 墓草旣宿
단 한 번도 왕래를 하지 못했네 / 汔未往來
한 달에 한 차례씩 곡을 했지만 / 一朔一哭
어떻게 이 슬픔을 풀 수 있으리 / 詎洩此哀
김포로 이장해서 합장하는 일 / 金陵遷祔
올봄에 하기로 정했었는데 / 卜在今春
선산에서 옮겨 가기 쉽지 않음은 / 舊山難動
정리상 당연히 그럴 수 있네
/ 情理則然
그때 마침 다른 일도 생기고 하여 / 適有他故
가을로 이장 날짜 미뤄졌다네 / 未免遷延
유명 간에 이런 일 생기었으니 / 幽明之間
슬픔과 답답함을 어찌 말하랴 / 悲鬱何言
동생은 노쇠함이 날로 심해져 / 弟衰日憊
이러한 근력으론 거동 어렵네 / 筋力難強
가을에 이장할 때 가게 되리니 / 秋當及壙
지금 이 소상에는 갈 수 없구나 / 今未赴祥
기년복의 상제도 이제 끝나니 / 禮服且闋
침통함이 가슴에 맺혀 괴롭네 / 沈痛嬰腸
앉아서 그 옛날 회상해 보면 / 坐想平昔
참담한 마음만이 더해지누나 / 但增愴怳
소상제에 아이들 모두 보내어 / 兒輩並進
내 대신 술 한 잔 올리게 했네 / 替侑一酌
끝없는 눈물 섞인 이 제문 안에 / 和淚緘辭
어떻게 내 마음을 모두 담으랴 / 曷盡心曲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주D-001]어린 …… 일 :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어머니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02]우리 …… 시집갔다네 : 명재의 누님이 박정(朴炡)의 아들 박세후(朴世垕)와 혼인하였다.
[주D-003]뛰어났던 …… 쓰러졌다네 : 박세후는 1650년(효종1) 12월에 24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이듬해 2월에 김포(金浦) 선영에다 장사 지냈다. 《明齋遺稿 卷37 姊氏墓誌》
[주D-004]빼어난 아들이 생기고부터 :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를 양자로 들인 것을 말한다.
[주D-005]약관의 …… 급제해 : 박태보는 22세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24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6]너무나 …… 부서졌었지 : 박태보가 이후원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7]아들이 …… 때 : 박태보가 외직을 청해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5년간 나가 있었던 것을 말한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8]경연에서 …… 청했고 : 1680년(숙종6) 12월에 부수찬으로 있던 박태보가 상소하여 어머니가 병든 상황을 말하고 수령으로 나가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경연의 신하를 가볍게 외직에 나가게 할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고 대신에 의복과 음식물을 내려 주라고 전교하였다. 《肅宗實錄 6年 12月 21日》
[주D-009]또다시 …… 되었네 : 1688년에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간 것을 말한다.
[주D-010]나라에 …… 때에 : 인현왕후가 폐위된 사건을 말한다.
[주D-011]임금 …… 않았고 :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신비(辛毗)가 10만 호(戶)를 하남(河南)으로 옮기려는 문제(文帝)의 계획에 반대하여 강력히 간쟁하였는데, 문제가 대답 없이 내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비가 뒤쫓아가서 문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제가 그것을 뿌리치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그의 충언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로 임금의 잘못을 끝까지 간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三國志 卷25 魏書 辛毗傳》 여기서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에 대해 박태보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주D-012]그 정성 …… 통했네 : 박태보가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는 간언을 하다가 오히려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온갖 국문을 당한 뒤에 유배 가다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13]동생 …… 있었네 : 윤추(尹推)의 부인은 풍양 조씨(豐壤趙氏)로,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손녀이고 조진양(趙進陽)의 딸인데, 아들 둘을 낳고 일찍 죽었다. 첫째 아들은 윤자교(尹自敎)이고 둘째 아들은 윤가교(尹可敎)이다. 뒤에 다시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으나 요절하였다. 《明齋遺稿 卷35 子恕墓表》
[주D-014]김포로 …… 일 : 남편 박세후의 무덤에 합장하는 일을 말한다.
[주D-015]선산에서 …… 있네 : 김포에 있는 박세후의 무덤이 산운(山運)으로 볼 때 좋지 않다 하여 이장하기로 정했으나 선산에서 옮겨 간다는 것이 인정상 그렇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주D-016]기년복의 …… 끝나니 : 《국역 명재유고》 12 〈명재연보〉에 보면, 명재가 63세이던 1691년(숙종17) 3월에 누이의 상을 당하였는데, 누이가 과부이고 양자로 삼은 아들 박태보도 비명에 죽은 데다 그에게 아들마저 없었기 때문에, 고모나 자매에게 남편과 아들이 없을 때 기년복을 입어 주는 예에 따라 본복(本服)을 입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명제 선생은 윤증 선생을 말한다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사원(士元)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유세차 숭정 기사년(1689, 숙종15), 초하루가 병인일인 6월 10일 을해일에 유봉(酉峰)에 병들어 칩거해 있는 이 사람은 사원이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도 가서 영결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동생 윤졸(尹拙)을 대신 보내어 영전에 술 한 잔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고하는 바이다.
아아,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는 탄식은 삼대(三代) 때부터 있어 왔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말세에 더욱이 어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와 같은 재주를 옛사람에게 비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세에서 찾아본다면 그 걸출함에 짝할 사람이 없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대는 총명함이 매우 뛰어나고 사리에 대한 고찰이 철저하므로 그 역량을 확충해 가면 선현(先賢)의 학문을 충분히 계승할 수 있으며, 식견과 사려가 매우 깊은 데다 견지한 뜻이 강하고 바르므로 그 뜻을 행해 간다면 세도(世道)의 중임(重任)을 충분히 맡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비루함으로는 그대를 따라갈 수 없지만 내 심지 확고부동하여 실로 평생 뜻을 같이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름으로써 세인들이 일컬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대가 단지 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이 이룬 정도를 행하였고 성대한 조정에 간언(諫言)한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끼치게 한 정도로만 인식되게 하였는가. 아아, 하늘이여. 도대체 이 세상에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그대에게 재능을 부여해 준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그 당시에 뇌성벽력이 쳐서 하룻밤 사이에 원통한 피가 조정의 뜰에 뿌려졌는데, 그때 그대의 일편단심은 귀신이 옆에 있었어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비록 사람들이 대신 죽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서도 구차하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고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속이지 않았으니, 그때 몸은 비록 죽어 갔지만 견지한 뜻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그때 그대의 철석같이 단단한 심장과 충의로 뭉쳐진 간담은 밝은 태양과 빛을 겨룰 만큼 열렬한 것이었으니, 이와 같은 신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후일 성상께서 비록 후회하였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아아, 그때 그 뜰 안에 가득 모여 있던 자들치고 그 누군들 사람의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임금의 잘못을 익숙하게 보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저 비루한 사람들을 어찌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 조정의 인후(仁厚)한 기풍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병들게 되었다는 탄식이 어찌 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재앙이나 복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르러 오는 경우는 모두 천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군자는 원칙대로 행하면서 그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르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곧으면서도 남의 단점을 들추는 일이 없이 논의는 항상 대체(大體)를 따르고 각박한 것을 중시하지 않으며 기개와 절조는 충후한 데에 바탕을 두어 일찍이 편벽된 적이 없는 그대로서는, 의당 형벌의 화를 당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듣건대 그대가 국문장에 나아갔을 때 또 그 태도가 차분하고 언사가 분명하여 듣는 사람들을 절실하게 만들고 뭔가를 느끼게 하는 논리만 있었고 저촉이 되거나 반발을 부르는 기운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그대의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 기이한 화를 당한 행적을 보면 그대의 선조(先祖)인 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과 거의 같다. 문장(文章)이나 지행(志行)도 모두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만한데, 문정공의 경우에는 자손들이 번성하여 지금까지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가문이 되었다. 이를 보면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는 법인데, 어찌하여 그대에게 있어서만은 유독 한 점의 혈육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인가. 그 재앙은 같은데 받은 복이 같지 않으니, 공의 경우에는 명이 거듭 불행한 것이 또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너무나 불쌍한 우리 누님이 일찍 남편의 상을 당하고 그대를 얻어서 아들로 삼았는데, 그대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일가가 모두 칭송하고 부러워하였다. 게다가 그대는 또 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누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것으로 봉양하였으니, 이는 우리 백고모(伯姑母)에게 이혜중(李惠仲)이 있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작년에 그대가 파주(坡州)의 관아에 있을 때 누님의 면전에서 만년의 복을 경하드렸는데, 그때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우리 누님이 노년에 또 이런 혹독한 고통으로 애간장이 녹아도 호소할 곳이 없게 될 줄을. 아아,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나로서는 그대에게 기대한 것이 실로 많았다. 우리 선친이 남긴 글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데, 내가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탓으로 선친께 욕을 끼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그 문집을 일찍 세상에 내놓아서 취모멱자(吹毛覓疵)의 빌미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차 세상의 분란이 다소 진정되기를 기다려 그대에게 그 문집의 편정(編訂)을 맡겨 간행함으로써 영구히 후세에 남길 작정이었다. 그리고 또 나는 항상 사람들이 참소를 당하는 재앙이 실로 후세에까지 유전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예컨대 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이나 우계(牛溪)가 선비를 죽였다는 무함 같은 것이 그것으로, 이는 단지 당시의 혼란 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종의 사악한 설이 지금까지 전습되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선친께서 당하신 일도 어찌 양현(兩賢)보다 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 줄기 정기(正氣)를 지닌 채 거센 물결 속의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서서 명실의 구분을 매우 분명히 하고 공사(公私)를 확실히 분변함으로써 사류(士類)의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고 세상의 교화를 돕는 것을 내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려고 했었는데, 이러한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문(斯文)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부류들이 은밀히 좋아하고 있으니, 우리 도(道)에 있어서의 재앙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내 조카 가교(可敎)를 잃었는데 지금 다시 그대를 잃고 말았으니, 노쇠함과 병으로 인해 죽을 날이 가까운 나로서는 이 실낱같은 목숨을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 도와주는 사람 없는 맹인처럼 또한 죽기 전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나는 처음에 그대가 고문을 당하던 당일에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늘이 실로 그대를 살리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였고, 또 피와 살이 터지고 문드러진 뒤에도 평소와 같이 정신이 의연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 ‘마음이 가는 곳에 기운도 반드시 따라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결국 끝내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대가 남쪽으로 오면 큰길에서 만나 악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날 소식이 없다가 부음이 갑자기 이르러 오니,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끝났으니, 너무나 슬프고 애통할 뿐이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죄를 더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다가 그 봉양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또 평소에 지니고 있던 포부가 이제는 한결같이 모두 수포가 되고 말았으니, 그대 스스로 불행을 애도해 보건대 그대 또한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대의 대인(大人)께서 그대를 장차 거처하고 있는 곳의 옆 산기슭에 묻으려 하고 있는데, 인간 세상 부자간의 정리에서 오는 그 애통함을 어찌 차마 다시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재주가 없는 아들이 병사하였더라도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대처럼 상리(常理)에서 크게 벗어난 죽음을 당한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병든 몸으로 칩거하고 있는 중이라 사람 간의 도리를 거의 못하고 있기에, 달려가서 마주하고 한 번 통곡한 뒤에 그대의 관이 땅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홀로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울고만 있을 뿐이니, 나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아아, 그대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한 달이 지나도록 진정할 수가 없다. 오래 이 세상에 남아서 끝없는 세상의 변화를 눈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다. 곧 있으면 나도 저승으로 그대를 따라가지 않겠는가. 글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고 통곡으로도 내 슬픔을 다 풀 길이 없다. 밝고 밝은 영령은 부디 이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다.


 

[주C-001]사원(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자이다. 호는 정재(定齋)이다.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인데, 숙부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에 노량진에서 죽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D-001]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 : 공원로는 송나라 인종 때의 신하인 공도보(孔道輔, 1086~1139)로, 원로는 그의 자인데, 1033년에 곽 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를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추지완은 송나라 철종(哲宗) 때의 신하인 추호(鄒浩, 1060~1111)로, 지완은 그의 자인데,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 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 鄒浩》
[주D-002]하룻밤 …… 뿌려졌는데 : 숙종조에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박태보가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궁궐 뜰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그 당시 박태보는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말투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3]후일 …… 후회하였지만 : 박태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숙종이 크게 후회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그 뒤 1694년(숙종20)에 중궁을 복위시키고 박태보에게 정경(正卿)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를 하도록 조처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4]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 : 곽임종은 후한(後漢) 때의 명현(名賢)인 곽태(郭太, 128~169)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168)에 태부(太傅)인 진번(陳蕃)과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모살(謀殺)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벌어진다. 그 일로 오히려 진번과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이어 700여 명이 유배당하거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곽태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들에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현인이 이제 사라졌으니 나라가 병들게 되었다는 시가 있는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 漢室亡矣]”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005]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당시 친명파(親明派)의 한 사람으로 친원파(親元派)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6]그대에게 …… 말인가 : 박태보는 이후원(李厚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그래서 형 박태유(朴泰維)의 작은아들인 박필모(朴弼謨)를 후사로 삼았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7]누님이 …… 삼았는데 : 박태보의 아버지는 박세당(朴世堂)이다. 박세당은 형 박세후(朴世垕)가 일찍 죽자 박태보를 그의 후사(後嗣)로 보냈는데, 이 박세후의 부인이자 박태보의 양어머니가 바로 명재의 누나이다.
[주D-008]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 박태보는 1675년(숙종1)에 2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677년 24세 때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9]백고모(伯姑母)에게 …… 있다 : 이혜중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으로, 혜중은 그의 자이다.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 작은아버지 이정여(李正輿)에게 입양되었는데, 이정여의 부인이 바로 명재의 고모이다. 여기서는 명재의 고모가 이민적을 헌신적으로 키웠고 이민적도 효성이 지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태보도 명재의 누나에게 지극한 효자였다는 말이다.
[주D-010]작년에 …… 경하드렸는데 : 1688년(숙종14)에 박태보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가게 되고, 그해에 명재의 누나 환갑연을 파주 관아에서 치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11]노년에 …… 줄을 : 기사환국 때 박태보가 고문을 받고 유배 가다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12]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 : 율곡 이이(李珥)가 젊은 시절에 잠시 금강산(金剛山)에 입산하여 선(禪)에 뜻을 둔 것을 두고 명재 당시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라는 설이 유포된 것을 말한다.
[주D-013]우계(牛溪)가 …… 무함 :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우계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도록 했다는 경상도 유생들의 상소로 성혼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기도 한 것을 말한다.
[주D-014]오늘날 …… 일 :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의 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가서 병든 부친을 뵙고 죽겠다고 하고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빠져나온 것을 두고 노론(老論)으로부터 공격받은 일을 말한다.
[주D-015]그대의 대인(大人) : 박세당을 말한다.
[주D-016]그대를 …… 있는데 : 박태보는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매장되었다.

 

명재유고 제17권
 서(書)
최여화에게 답함 3월



별지에서 한 말을 보고 상국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당초에 아무런 내실도 없이 정승들 사이에 이름이 끼어든 것이 편치 않아서 일찍이 명촌(明村)에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 말을 혹시나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때라면 마땅히 내실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해야 마땅하지만, 오늘날 닥쳐온 수사율(收司律)은 또한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왕년에 있었던 서계(西溪)의 경우와 꼭 같게 되었으니, 정말로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입니다. 강석붕(姜錫朋)이 편지를 보내 질문을 해 왔기에 단지 “너무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 현석(玄石)이 만약 관여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외부에서 말을 한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러한 때에 이 문제로 시끄럽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답하였습니다. 현석의 문하에서 상소를 올려 변명하려는 뜻까지 있다고 하니, 그렇게 된다면 또한 한탄할 노릇입니다. 다만, 이 사태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저들이 비록 그 속내가 이 책을 비판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대를 공격하는 데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자신의 잘못을 인책하고 그들과 다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가 한 일 가운데 잘못한 것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는데 어찌 스스로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신(大臣)은, 사람들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말하면 마땅히 자신의 잘못을 인책해야 한다. 그러나 편집한 서책에 있어서는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랏일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잘못을 인책할 필요가 있겠는가. 단지 웃는 얼굴로 말하면 그만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 후에 듣기로, 그대가 잘못을 인책하고 소장(疏章)에서 변명의 말을 길게 하였다고 하니, 나는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그대의 편지를 받음으로 인하여 대략이나마 이렇게 내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미 늦은 일이긴 하지만 스스로 잘못을 인책한 일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저들 또한 말의 꼬투리를 잡고서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허용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국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나의 경솔함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두렵기만 합니다. 부디 이 편지를 눈앞에 두지 말고 논쟁할 자료로만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D-001]정승들 …… 것 : 1709년 1월에 명재가 우의정에 임명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2]명촌(明村) : 나양좌(羅良佐)의 호이다.
[주D-003]수사율(收司律) : 연좌법(連坐法)을 뜻한다. 수사는 진(秦)나라 상앙(商鞅)이 만든 법으로, 백성을 열 집 단위로 조직하여 그중에 한 집이 죄가 있을 경우에 아홉 집이 관아에 고발하게 하는 법이다. 만약 고발하지 않은 경우 나머지 아홉 집도 모두 연좌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최석정의 《예기유편》이 주자의 학설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노론 측의 비판을 받음에 따라, 이 책의 편집에 관여한 것으로 되어 있는 자신도 이에 함께 연루됨을 말한 것이다. 《明齋年譜》
[주D-004]서계(西溪)의 경우 : 서계는 박세당(朴世堂)의 호이다. 박세당은 자신이 지은 《사변록(思辨錄)》이 주자의 학설을 무시했다 하여 노론 측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는 1703년에 대간(臺諫)의 계사로 옥과(玉果)로 유배하라는 왕명을 받기까지 하였다. 최석정도 그가 지은 《예기유편》으로 인해 1709년에 승지 이관명(李觀命)의 탄핵을 받았고, 마침내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주D-005]강석붕(姜錫朋) :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예기유편》이 문제가 되자, 1709년 6월에 상소를 올려 이 책이 스승인 박세채와 의논을 거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 인물이다. 1709년 2월 13일에 명재가 그에게 보낸 편지가 《명재유고》 권23에 〈답강석붕숙중(答姜錫朋叔重)〉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취승대기(聚勝臺記)

정사(精舍) 남쪽의 시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그 냇가에 네 개의 대(臺)가 시내를 끼고 각각 동서남북을 차지한 채 우뚝 솟아 있으니, 거리와 높이가 대략 서로 비슷하다. 이 대를 통틀어 ‘취승대(聚勝臺)’라 이름하고 ‘음대(吟臺)’라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시냇가 바위가 자연스럽게 불쑥 솟아 있는 곳으로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사람이 힘들여 쌓지 않았다. 동대와 남대는 시내 남쪽에 있고 서대와 북대는 시내 북쪽에 있는데, 남대와 북대가 중간에서 마주 보고 있으며, 동대가 남대의 왼쪽에 있고 서대가 북대의 오른쪽에 있으니, 그 면세(面勢)가 서로 정면으로 마주 보아서 그 위치가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위가 물을 막아 물살을 물리치기 때문에 시내가 바위를 피해 굽이돌아 흐르고 있다.
주인이 방건(方巾)과 야복(野服) 차림으로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끌며 거닐다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씻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즐긴다. 동대에 노닐지 않으면 서대에 노닐며 남대에 오르지 않으면 북대에 오르니, 이 사대(四臺)는 아침저녁으로 즐거움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사철 제각각의 즐거움까지 있다. 봄에는 동대에서 꽃을 감상하고 여름에는 남대에서 바람을 쐬며, 가을에는 서대에서 달을 맞이하고 겨울에는 북대에서 눈을 완상한다. 농염한 꽃잎이 눈에 보일 땐 그 예쁨을 즐기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땐 그 맑음을 기뻐하며, 달이 떠서 만물이 다 드러날 땐 그 밝음을 사랑하고 눈이 내려 티끌조차 붙지 않을 땐 그 깨끗함을 좋아한다. 꽃이 예쁘고 바람이 맑으며 달이 밝고 눈이 깨끗한 저 사철의 빼어난 경치를 사대가 하나씩 갖추고 있는데, 내가 이를 모아 소유하였기 때문에 ‘취승대’라 이름한 것이고, 이를 소유한 데다가 또 좋아하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즐기는 것을 늘 시(詩)로 읊기 때문에 ‘음대’라고도 이름한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어찌 동대라 해서 달이 없고 서대라 해서 꽃이 없겠으며, 남대라 해서 눈이 없고 북대라 해서 바람이 없겠는가. 내가 이를 쓴 것은 방소(方所)를 따랐을 뿐이다. 경치는 사람이 쓰는 데 달려 있으므로 사람이 이를 쓸 때에는 기준이 없을 수 없으니, 사대를 사철에 배속시킨 것은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일 뿐이다. 따라서 아침저녁에 지팡이와 짚신이 미치는 곳으로 말하면 동서를 가리지 않고 남북을 따지지 않으니, 심목(心目)에 들어오는 것이나 입으로 읊조리는 것이 또한 한 대에서 사철의 즐거움을 다 누리고 한 철에 사대의 경치를 다 볼 수 있다. 그렇고 보면 요컨대 명실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겠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림암기(石林庵記)

수락산(水落山) 석림암(石林庵)은 승려 석현(錫賢)과 그 문도 치흠(致欽)이 세운 암자로, 이름은 내가 지었다. 수락산은 경성(京城)에서 30리 동쪽에 자리하여 삼각산(三角山), 도봉산(道峯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솟아 있다. 비록 깎아지른 형세는 두 산보다 조금 못하지만 수석(水石)의 경치는 수락산이 으뜸이니, 이 산의 명칭은 이 때문에 얻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름이 도리어 두 산에 가려져 세상에서 이 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또한 이 산에 유람하러 오지 않는다.
수락산 동쪽에는 예전에 매월당(梅月堂)과 흥국사(興國寺), 은선암(隱仙庵) 등 몇 개의 절이 있었다. 매월당은 곧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이 거처하던 곳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미 없어졌다. 열경은 이 산을 매우 좋아하여 ‘동봉(東峯)’이라 자호(自號)하였을 정도이다. 흥국사가 아주 컸으나 지금은 역시 없어지고, 단지 ‘성전(聖殿)’이란 곳만 무너지지 아니하여 승려 두셋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은선암은 후대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온전하여 지금 16, 7명의 승려가 살고 있다. 그러나 산 서쪽에는 유독 하나의 절도 없다. 서북쪽 봉우리 아래에 절터가 남아 있기는 하나 또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며 지금은 절이 없다.
내가 석천(石泉)에 거처를 잡고 보니, 산 서쪽에 해당된다. 바위와 골짝이 그윽하고 시내와 폭포가 기이하여 경성으로부터 3, 4십 리 사이 삼각산과 도봉산 안팎에 있으면서, 세상에 명성을 독차지하여 사람들이 사모하고 구경하는 여러 샘과 골짝도 이곳에는 견줄 수 없으니, 이는 수락산만의 가장 빼어난 경치가 될 뿐만이 아니다. 내가 홀로 이곳의 경치가 몹시 빼어나다고 여겨 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산을 빛내는 이름나고 아름다운 가람이 없다. 그리하여 일찍이 은선암에 이르러 노승(老僧)들과 얘기를 나누며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때 마침 석현이 곁에 있다가 묵묵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이미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듯하다.
오래 뒤에 그 문도 치흠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 선생의 말씀에서 석현 스님도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병이 많아 몸소 할 수 없어서 저로 하여금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단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몇 달 뒤 치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절터를 찾았습니다. 채운봉(彩雲峯) 서남쪽 산속으로, 직소봉(直小峯)과 향로봉(香爐峯)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명년에 재목(材木)을 모아 일을 시작할 터이니, 선생께서는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해 가을 내가 통진 현감(通津縣監)을 사직하고 떠날 때 남은 녹봉으로 그 비용을 조금 보태 주었는데, 한 해 뒤에 돌아오니 암자가 완성되었다. 두세 칸 띳집이 바위를 등지고 골짝을 향해 있어 한적하게 진속(塵俗)을 벗어난 정취를 자아내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하여 즉시 이름하기를 ‘석림암’이라 하였다.
아, 이 산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니, 그 승경이 애당초 옛날이라 해서 더 낫고 지금이라 해서 더 못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이 산을 좋아한 자는 오직 열경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열경이 죽은 지가 또 300년이나 되니 열경을 이어 다시 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암자를 지은 것이 열경과 비교하여 그 뜻이 어떠한가. 석현과 치흠은 혹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또 옛날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 때, 종유(從遊)한 이가 도연명(陶淵明)이었다. 혜원이 결사(結社)할 때 연명이 그 모임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혜원이 계율을 지키느라 객을 만날 적에 술상을 차린 적이 없었으나 유독 연명을 위해서만은 술상을 차렸으며, 전송할 적에 자신도 모르게 함께 호계(虎溪)를 넘었으니, 그 행적이 또한 몹시 기이하다 하겠다. 형해(形骸)의 굴레를 벗어나 서로 교유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러할 수 있었겠는가. 석현의 청담(淸談)과 운치(韻致)는 비록 혜원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진실무위하여 속진에 물들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비루한 나로 말하면 어찌 감히 망녕되이 고인(古人)에 견주겠는가. 다만 석현과 서로 기약하는 것이 또한 연명과 혜원 사이의 교유와 같기를 바랄 뿐이다.

[주D-001]혜원법사(惠遠法師)가 …… 넘었으니 : 혜원법사는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虎溪)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ㆍ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서계집 제1권
 시(詩)○동행습낭(東行拾囊) 무자년(1648, 인조26) 가을부터 기축년(1649) 봄까지. ○ 흡곡(歙谷)의 수령으로 있던 중씨(仲氏) 승지공(承旨公)에게 선생이 문안하러 갔을 때 지은 것이다.
달빛 아래 객지에서



달은 여전히 이울고 차건만 사람은 못 돌아가네 / 幾度虧盈人未還
옥바퀴 달 결 같더니 또다시 환 같구나 / 玉輪如玦復如環
누가 가련해하랴 계수나무 하늘거리는 그림자 / 誰憐仙桂婆娑影
적막한 항아 얼굴 시름겹게 마주한 것을 / 愁對嫦娥寂寞顏
고향 그리는 나그네 심사 머리가 허옇게 센 채 / 歸思旅情成白首
초가삼간 지어 두고 청산에 살고 있네 / 草堂茅屋寄靑山
하염없는 갈림길 눈물 주체할 길 없으니 / 那堪岐路長垂泣
차라리 첩첩산중 늙어감이 응당하리 / 應老千峯萬壑間


[주D-001]옥바퀴 …… 같구나 : 옥바퀴는 달을 의미하며, 결(玦)은 한쪽이 터진 고리 모양의 옥이고 환(環)은 둥근 고리 모양의 옥이다. 즉 달이 이지러졌다가 차는 것을 말한다.
[주D-002]항아(嫦娥) : 달 속에 있다고 하는 선녀의 이름이다. 《淮南子 覽冥訓》
[주D-003]갈림길 눈물 : 《회남자》 〈설림훈(說林訓)〉에 “양자(楊子)가 갈림길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니, 남으로도 갈 수 있고 북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서계집 제1권
 시(詩)○잠고(潛稿) 선생이 소싯적에 잠수(潛叟)라 자호(自號)하고 시고를 잠고라 하였다.
둥지 트는 제비를 읊다 연구(聯句)



온천 행궁의 직소에 둥지를 트는 제비에 대해, 교리 이계주(李季周) 단하(端夏) 와 대교 최주경(崔周卿) 후상(後尙) 과 연구를 지었다.

멀리 오의국 떠나 / 遠別烏衣國
새로이 백옥당에 둥지를 트네 - 계긍(季肯) - / 新巢白玉堂
쌍쌍이 삼짇날에 날아와 / 雙雙趁社日
속속 궁장으로 다가드네 - 주경(周卿) - / 故故近宮墻
무시로 날아 오르내리며 / 下上飛無定
지지배배 뜻 모르게 재잘대네 - 계주(季周) - / 呢喃語未詳
처마는 비었어라 장막 그림자 번득이고 / 簷虛飜幕影
진흙은 따스해라 미나리 내음 풍기네 - 계긍 - / 泥暖帶芹香
머물러 쉴 때 다 되어 가매 / 棲息時將晩
둥지 짓는 뜻 정녕 바빠라 - 주경 - / 經營意政忙
익히 아는 듯 사람을 따르고 / 依人如款識
땅을 잘 골라 영광을 입었네 - 계주 - / 擇地有榮光
무너진 보루 궁벽한 마을 / 廢壘村郊僻
돌아오는 길은 바다 건너 월나라 먼 길 - 계긍 - / 歸程海越長
낮게 돌아 자주 안상을 스치고 / 低回頻拂几
줄지어 대들보 사이 교묘히 지나네 - 주경 - / 追逐巧穿樑
물을 차곤 이내 돌아왔다가 / 掠水仍回去
바람 타고 더 멀리 날아가네 - 계주 - / 隨風更遠翔
노씨 집은 그리워하지 말게나 / 盧家休眷戀
사씨 집은 이미 황량해졌다네 - 계긍 - / 謝宅已荒涼
길이 난파 곁에 의탁하여 / 永託鑾坡側
장전 곁을 그리워하게 - 주경 - / 常懷帳殿傍
미물이 먼저 기미를 감지하니 / 微禽先得氣
장차 언덕에서 봉황이 우는 것을 보리라 - 계주 - / 行見鳳鳴岡


 

[주D-001]최주경(崔周卿) : 주경은 최후상(崔後尙, 1631~1680)의 자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아들로,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주D-002]오의국(烏衣國) : 오의는 제비의 이칭이다. 진(晉)나라 때 귀족인 왕씨(王氏)와 사씨(謝氏)들이 살던 동네에 제비가 많다 하여 오의항(烏衣巷)이라 하였다. 유우석(劉禹錫)의 시 〈오의항〉에 “옛날 왕씨 사씨 집 앞의 제비, 심상한 백성 집에 날아드네.[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하였다. 오의국은 오의항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주D-003]백옥당(白玉堂) : 한림원의 별칭이다.
[주D-004]노씨(盧氏) 집 : 당나라 심전기(沈佺期)의 시 〈고의(古意)〉에 “노씨 집의 어린 며느리 금당에서 울적해하고, 바다제비는 화려한 들보에 쌍으로 깃드네.[盧家少婦鬱金堂 海燕雙棲玳瑁梁]” 하였으며, 서발(徐)의 〈옥주행(玉主行)〉에서는 “무산의 베갯머리 구름이 되고 싶고, 노씨 집 들보 위 제비가 되고 싶어라.[願作巫山枕畔雲 願作盧家梁上燕]” 하였으니, 노씨 집은 제비가 호사하게 지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주D-005]사씨(謝氏) 집 : 제비가 호사하게 지냈던 곳이다. 진(晉)나라 때 귀족인 왕씨(王氏)와 사씨(謝氏)들이 살던 동네에 제비가 많다 하여 오의항(烏衣巷)이라 하였다. 유우석(劉禹錫)의 시 〈오의항〉에 “옛날 왕씨 사씨 집 앞의 제비, 심상한 백성 집에 날아드네.[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하였다.
[주D-006]난파(鑾坡) : 금란파(金鑾坡)의 약칭으로, 한림원의 이칭이다. 당나라 때 한림원이 금란전(金鑾殿)에 있었다.
[주D-007]장전(帳殿) : 임시로 장막을 치고 지내는 임금의 거처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산가(山家)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마음의 근심

마음의 근심 충충하건만 / 心憂兮忡忡
나의 근심 알아주는 이 없고 / 人莫我測知
노래의 괴로움 오오하건만 / 歌苦兮嗚嗚
나의 괴로움 애처롭게 여겨주는 이 없어라 / 人莫我憐悲
그만이로다 / 已矣乎
오오함은 괴롭지 않음을 스스로 괴로워함이니 / 嗚嗚者自苦不苦
저가 또한 어찌 애처롭게 여기겠으며 / 彼亦奚悲
충충함은 근심스럽지 않음을 스스로 근심함이니 / 忡忡者自憂不憂
저가 또 어찌 알아주겠는가 / 彼又曷知


푸른 소나무 뿌리 아래엔 작은 못 맑고 / 蒼松根下小潭空
푸른 이내 낀 봉우리 앞엔 오솔길 나 있네 / 翠靄峯前細逕通
이 산가와 비슷한 곳을 알려 할진댄 / 要識山家相似處
응당 그림 속에서나 찾아야 하리라 / 應須覓向畵圖中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속담 풀이 4수

까마귀 검고 백로가 희다고 / 烏黑鷺羽白
백로가 날아와 까마귀 비웃네 / 鷺來笑烏黑
백로야 웃지 마라 / 烏謝謂鷺言
나는 부럽지 않다 / 汝白吾不伏
내 깃털 검다지만 / 吾雖毛羽黑
속은 본디 하얗고 / 肉膚本潔白
네 깃털 희다지만 / 汝縱毛羽白
속은 외려 검어라 / 肉膚反陋黑
겉 다르고 속 다를 바에야 / 表裏各不同
속이 흰 것만 하겠느냐 / 寧如內潔白

가마 밑도 검고 솥 밑도 검어 / 釜底黑鼎底黑
솥 밑이 검다지만 가마도 희진 않으니 / 鼎底雖黑釜未白
가마 밑아 솥 밑 검다 웃지 마라 / 釜底莫笑鼎底黑
시꺼먼 검댕을 본디 누가 취했나 / 由來此醜誰所取
모두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않은 격일세 / 摠爲將軍不負腹

말 가는 데 소도 가니 / 馬亦行牛亦行
소가 느리고 말이 빠르다 한들 / 牛行雖遲馬行速
말이 가는 백리 길을 소도 간다네 / 馬行百里牛亦得
내 천천히 감세 그대 먼저 가게 / 牛言我後君且先
저녁에 여관 문 앞에서 만나세나 / 日暮期君店門前

비둘기야 센 척하지 마라 / 斑鳩子爾莫强
육격을 채 못다 길렀으니 / 養來六翮猶未齊
어찌 능히 앞산 등성 넘어가나 / 那能便越前山岡
인생살이 모름지기 분수를 알아야지 / 人生分量須自知
어려운 일 닥치면 후회해도 늦는 걸 / 事到難時悔已遲

[주D-001]장군이 …… 격 : 송(宋)나라 태위(太尉)인 당진(黨進)은 장군으로서 평소 지략이 부족했다. 하루는 당진이 배불리 먹고 배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이에 어떤 가기(家妓)가 말하기를 “장군은 이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이 배는 장군을 저버렸으니, 조금도 지략을 낸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夜航船》 여기서는 가마나 솥 모두 배만 불룩할 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시꺼멓다는 비난은 모두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D-002]육격(六翮) : 튼튼한 날개를 뜻하는 말이다. 공중에 높이 나는 새는 여섯 개의 강한 깃털을 지니고 있다 한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태보(泰輔)에게 보이다

한 걸음 갈 적에 한 걸음 천천히 감을 잊지 마라 / 一步無忘一步遲
더디 감은 안온하고 빨리 감은 위태로운 법 / 遲行安穩疾行危
일찍이 머뭇거리며 사람들의 뒤에 처져서 갔으니 / 逡巡曾落人叢後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니라 / 范氏之兒是汝師

[주C-001]태보(泰輔) : 서계의 둘째 아들인 박태보(朴泰輔, 1654~1689)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가던 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저서에 《정재집》 등이 있다.
[주D-001]범씨(范氏)의 아들 : 미상(未詳)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낙엽. 기암(畸庵)의 시에 차운하다.



높은 가지에서 잎새 하나 톡 떨어지더니 / 琤然一片隕高林
땅 가득 우수수 낙엽이 흩날리는구나 / 滿地紛紛已不禁
연못 속엔 겹겹의 그림자 텅 비었고 / 潭裏隨空重疊影
섬돌 가엔 짙은 그늘 사라졌어라 / 砌邊俄失淡濃陰
갈림길에서 이별하자니 정을 어이 견딜까 / 臨歧握手情何耐
시냇가에서 시를 적으니 한이 유독 깊어라 / 緣澗題詩恨獨深
다만 밤을 이어 다 날려 떨어질까 두려우니 / 只恐連宵飄落盡
위현이 다시 상음을 연주하지 말기를 / 危絃休更奏商音
제3연이 어떤 본에는 ‘가을 매미 이슬 삼키매 때가 속절없이 늦었고, 여인이 도랑 가에 서니 홀로 한이 깊어라.[玄蟬咽露時空晩 紅袖臨溝恨獨深]’로 되어 있다.


 

[주C-001]기암(畸庵) :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의 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용(子容), 또 다른 호는 삼치(三癡),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정철(鄭澈)이며, 송익필(宋翼弼)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부제학,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매우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고문(古文)에도 밝았으나,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았다. 저서에 《기암집》, 《기옹만필(畸翁漫筆)》이 있다.
[주D-001]위현(危絃) : 팽팽한 현(絃)으로, 바짝 쪼여서 높은 소리가 나는 현악기의 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소리를 뜻한다.
[주D-002]상음(商音) : 오음(五音)의 하나로, 상조(商調)를 위주로 한 슬프고 애절한 음악의 가락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고신선곡(古神仙曲) 4수



영서를 쪼개어 시험 삼아 한 번 태우니 / 劈破靈犀試一燃
온갖 괴물들의 실체가 환히 드러났네
/ 紛紛百怪失重淵
옥황상제가 높이 통명전에 납시어 / 玉皇高御通明殿
예전대로 조화의 권세를 되찾았네 / 依舊收還造化權

홍란과 취봉이 날마다 울며 나니 / 紅鸞翠鳳日飛鳴
현포에서 동쪽으로 보매 바로 적성이로다 / 玄圃東看是赤城
귤 속의 대국을 탐닉하지 말지어다 / 莫要橘中耽對局
맑은 상계의 풍운을 길이 얻을 것이니 / 風雲長得上界淸

지초 밭에서 사슴이 노는 것도 터무니없는데 / 芝田戲鹿亦無端
공작이 푸른 여울물을 마심은 막아야 하리 / 孔雀須防飮碧湍
이는 선가의 좋은 닭이나 개와 같으니 / 同是仙家好鷄犬
그릇된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갈까 근심스럽네 / 更愁非意輒相干

곤륜산에 부신 날리고 봉영에 편지 보내 / 飛符崑閬牒蓬瀛
크게 금단을 조제하여 온갖 정기를 모았네 / 大劑金丹聚百精
서둘러 화로에 넣어 구전금단을 이루니 / 急就爐中成九轉
도규로 떠내어 아래로 억만창생 구원하네 / 刀圭下救萬蒼生


[주D-001]영서(靈犀)를 …… 드러났네 : 영서는 영묘(靈妙)한 서각(犀角)으로, 이를 태우면 밝은 빛을 낸다고 한다. 진(晉)나라의 온교(溫嶠)가 여행을 하다가 무창(武昌)의 우저기(牛渚磯)에 당도하였는데, 사람들이 물속에 괴물이 산다고 하였다. 이에 온교가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서 물속을 비추자 물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괴물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晉書 卷67 溫嶠列傳》 여기서는 임금이 지혜가 밝아 역적의 간사한 실상을 환히 알았음을 뜻한다.
[주D-002]통명전(通明殿) : 옥황상제의 궁전을 이른다.
[주D-003]홍란(紅鸞)과 …… 나니 : 홍란은 전설 속의 붉은색의 선조(仙鳥)이고, 취봉(翠鳳)은 천자가 타는 푸른 깃으로 장식한 봉황 모양의 수레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인물들이 조정에 나와 임금과 함께 정사를 살피는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4]현포(玄圃)에서 …… 적성(赤城) : 현포와 적성은 모두 전설에 신선이 산다는 산을 가리킨다.
[주D-005]귤 속의 대국 : 옛날에 파공(巴邛) 사람이 자기 귤원(橘園)에 대단히 큰 귤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쪼개어 보니, 그 귤 속에 수미(鬚眉)가 하얀 두 노인이 서로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귤 속의 즐거움은 상산(商山)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뿌리가 깊지 못하고 꼭지가 튼튼하지 못한 탓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따서 내리게 되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공작이 …… 하리 : 두보(杜甫)의 〈적소행(赤霄行)〉에 “공작은 소에 뿔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목말라 샘물 마시다 소뿔에 받히누나. 푸른 하늘과 선경을 왕래해야 하니, 푸른 꼬리 황금 무늬로 욕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네.[孔雀未知牛有角 渴飮寒泉逢觝觸 赤霄玄圃須往來 翠尾金花不辭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4》
[주D-007]선가의 …… 개 : 《신선전(神仙傳)》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임종할 때 먹고 남은 단약(丹藥) 그릇을 뜰에 놓아두었더니, 닭과 개가 핥아 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 하였다.
[주D-008]도규(刀圭) : 약(藥)을 뜨는 숟가락을 말하는데, 전하여 선약(仙藥)을 의미한다.
[주D-009]急이 …… 있다 : 대본에는 ‘急作徐’로 되어 있는데, 《서계집》에서는 이 경우 ‘急一作徐’의 형태로 표기하였다. 대본에 ‘一’ 자가 빠진 듯하므로 ‘一’ 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