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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법(諡法)의 시말(始末)에 대한 변증설

아베베1 2011. 12. 23. 22:53

 

시법(諡法)의 시말(始末)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55)


《백호통(白虎通)》에,
“죽은 이에게 시호(諡號)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존비(尊卑)를 구별하고 덕(德)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시(諡)자는 인(引) 자의 뜻으로, 생시(生時)의 행적을 열거하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成德)에 정진하여 예절을 힘쓰도록 하자는 것이다. 천자(天子)가 죽으면 대신이 남쪽 교외에 나아가 천명(天命)을 일컬어 시호를 올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신하된 도리에 있어 누구나 다 그 임금을 찬양하여 악(惡)을 가리고 선(善)을 드러내려는 의의이다. 그러므로 남쪽 교외에 나아가는 것은 하늘을 속이지 않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시호에 있어 혹은 한 글자로, 혹은 두 글자로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문(文)을 위주한 이는 한 글자로, 질(質)을 위주한 이는 두 글자로 시를 정한다. 그러므로 탕(湯) 임금이 죽은 뒤에 그를 ‘성탕(成湯)’이라 칭한 것은 두 글자로써 정함이다.”
하였다. 이 설(說)과 같다면, 시호 제도는 은(殷) 나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에,
“누구에게나 사후(死後)에 시호를 주는 것은 금세(今世)의 변칙이다. 옛날에는 생전에 작(爵 대부(大夫) 이상을 말함)이 없으면 사후에 시호도 없었다.”
하였고, 그 주(注)에,
“옛날이란 은(殷) 나라 이전을 말한다.”
하였다. 그런데 안사고(顔師古)는 우(禹)나 탕(湯)을 다 자(字)로 단언하였으니, 이 주는 잘못된 것이다.
《예기》단궁(檀弓)에,
“사람이 난 지 8개월에 이름을, 나이 약관(弱冠 20세)에 자(字)를 사용하다가 50세가 되면 백중(伯仲 즉 첫째, 둘째)으로써 구별하고 사후에는 시호를 사용하는 것은 주대(周代)의 제도이다.”
하였고 그 주에,
“ …… 이는 다 주대의 제도이다 …… 은대(殷代) 이상에는 생시에 사용했던 별호(別號)를 사후에까지 불렀고 시호가 따로 없었으니,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과 같은 유이다. 그런데 주대에 와서는 사후에 시호를 따로 정했다.”
하였다. 이 설(說)과 같다면, 교특생의 주는 저절로 잘못된 것이다.
《예기》표기(表記)에 공자가,
“선왕(先王)이 시호로 그 명예를 높이되, 그 중에 큰 혜(惠)만을 절취(節取)해서 시를 정하는 것은, 그 명예가 사실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러이 여겨서이다.”
하였고, 그 주에,
“혜는 선(善) 자의 뜻이다. 즉 선행(善行)이 아무리 많아서 열거하기 어렵더라도 그 큰 선행만을 절취하여 그 선행을 온전히 한다.”
하였으며,《시법(諡法)》에 보면,
“생시의 행(行)으로써 사후의 시호를 정하는 것이 마치 성(姓)을 받는 자가 길덕(吉德)이 있으면 길성(吉姓)을, 흉덕(凶德)이 있으면 흉성(凶姓)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엄정(嚴正)하여 일호의 사(私)도 있을 수 없다.”
하였다.
《주례(周禮)》춘관 하(春官下)에,
“태사(大師)가 대상(大喪 국상(國喪))을 만나면 고몽(瞽矇 악가(樂歌)를 맡은 관명(官名))을 거느려 왕(王)의 행적을 흠(廞)한 뒤에 널[匶] 앞에서 시호를 짓는다.”
하였고, 그 주에,
“흠(廞)은 흥(興)자의 뜻으로 죽은 왕(王)의 행적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왕의 공로를 읊은 시(詩)를 노래하고 생시(生時)의 행적을 열거하여 시호를 짓는 것을 말한다.”
하였으며,《주례》춘관 하에,
“소상(小喪)을 만나면 태사(太史)가 시호를 전한다.”
하였고 그 주에,
“소상(小喪)은 경대부(卿大夫)의 상(喪)을 말한다. 경대부의 시호는 임금이 손수 제정, 태사(太史)를 보내어 전하게 하는데, 그날이 되면 소사(小史)가 따라가서 읽어준다.”
하였으니, 시호를 주는 제도는 사실 주대(周代)에서 시작된 것이다.
《노사(路史)》에,
“진수(秦秀)가 말하기를 ‘옛날에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이계(二季 하(夏)ㆍ은(殷) 두 나라를 말함)가 쇠퇴하고 대도(大道)가 행해지지 않았음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시호법을 제정하여 그 사후(死後)를 기록하게 한 것이지, 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였고, 곡량적(穀梁赤)이 말하기를 ‘주 무왕(周武王)이 죽은 뒤에 주공(周公)이 시호법을 제정한바, 대행(大行)이 있는 이는 대명(大名 명은 시호를 말함)을, 소행(小行)이 있는 이는 소명(小名)을 받게 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유행되고 있는 시호법에는 으레 요ㆍ순ㆍ우ㆍ탕ㆍ걸(桀)ㆍ주(紂)까지 시호로 혼입(混入)시켜 놓았으니 이는 아마 백호관(白虎觀) 제유(諸儒)의 손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장 허황되다.”
하였다. 이는《노사(路史)》서소순시법후(書蘇洵諡法後)와《정자통(正字通)》에 보이니, 일차 상고하여 전칙(典則)을 삼을 만하다.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에,
“주공 단(周公旦)과 태공 망(太公望)이 무왕(武王)을 도와 왕업(王業)을 이룩하고 목야(牧野 지명(地名))에서 싸워 대공(大功)을 세웠으며, 무왕을 장사(葬事)지낼 때에 시호법을 제정, 드디어 시법해(諡法解)를 서술하였는데, 시(諡)는 행(行)의 자취[迹], 호(號)는 공(功)의 표시[表], 거복(車服 옛날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내리던 물건)은 위(位)의 문채이다. 그러므로 대행(大行)에는 대명(大名)이, 세행(細行)에는 세명(細名)이 받아지게 되는데, 행(行)은 자신에게서 나오고 명(名 시호를 말함)은 남에게서 이루어진다.”
하고는, 시호법을 열거해 놓았다.
또 정초(鄭樵)의《통지략(通志略)》시략서론(諡略序論)에,
“ …… 주공(周公)의 시호법과《춘추(春秋)》의 시호법이 있고,《광시(廣諡)》ㆍ《금문상서(今文尙書)》ㆍ《대대례기(大戴禮記)》ㆍ《세본(世本)》ㆍ《독단(獨斷)》의 것이 있고, 유희(劉熙)ㆍ내오(來奧)ㆍ심약(沈約)ㆍ하침(賀琛)ㆍ왕언위(王彦威)ㆍ소면(蘇冕)ㆍ호몽(扈蒙)ㆍ소순(蘇洵) 등의 글이 있는데, 실은 모두 한(漢)ㆍ위(魏) 이래 유생(儒生)들이 고인(古人)의 시호를 채취, 자기의 말로 풀이하여 하나의 전칙(典則)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씨(蘇氏)의 말에 ‘주공의 법에 도리어 하침(賀琛)의 신법(新法)을 채취 기입하였으니, 세상에 유행되는 시호법으로서 그 명칭이 옛것일수록 더욱 고법(古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지금 주공의 법을 상고해보면 과연 후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너무 많아서 별로 취할 바가 없습니다.
오직 심약(沈約)의 글만이 고금의 것이 널리 채택되고 조사(措辭)에 차례가 있으나 역시 분명한 바가 없었다가 소씨(蘇氏)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육가(六家)의 시호법을 편정(編定), 즉 주공ㆍ《춘추》ㆍ《광시》의 것과 심약ㆍ하침ㆍ호몽의 글을 가져 단호히 거취(去取)한 바가 있습니다 …… 황(皇)ㆍ제(帝)ㆍ왕(王)ㆍ공(公)ㆍ후(侯)ㆍ군(君)ㆍ사(師)ㆍ장(長)ㆍ서(胥)는 사실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칭호인데, 생시에 작위(爵位)가 있으면 사후에 시호를 받게 된다 하여, 황ㆍ제ㆍ왕ㆍ공ㆍ등의 글자를 시호로 삼는다는 것은 감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ㆍ왕 등의 글자를 시호로 삼을 수 있다면 …… 부(父)ㆍ형(兄) 등의 글자로도 시호를 삼을 수 있다는 셈이 됩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는데, 몇백 년이 지난 뒤에야 소씨가 이를 배격한 것입니다.
또한 요(堯) 자는 흙이 쌓인 모양을, 순(舜) 자는 꽃이 짙은 모양을, 우(禹) 자는 짐승의 모양을, 탕(湯) 자는 물의 모양을, 걸(桀) 자는 높다란 나무의 모양을, 주(紂) 자는 연결된 실[絲]의 모양을 따서 명명(命名)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대로 고칠 바가 아니라 반드시 부형이 명명한 바인데, 생시에 작위가 있으면 사후에 시호를 받게 된다 하여 요ㆍ순 등의 글자를 시호로 삼는다는 것도 감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씨가 미처 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바를 신(臣)이 감히 덧붙일 수 없으므로, 삼가 사용할 만한 시호법 2백 10자를 열거하여 상ㆍ중ㆍ하 3시(諡)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
하였으니, 이것이 시호법 연혁(沿革)의 대충이다.
대저 시호법은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소관으로서, 나같은 초야(草野)의 한사(寒士)가 거론할 바 아니므로 이만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고금(古今)의 색달랐던 것만을 골라 기록하려 한다. 송(宋) 나라 유창(劉敞)이 시호법 50자를 정리해 놓고는, 이다음 덕(德) 있는 군자(君子)의 질정을 기다린다 하였다. 아무튼 시호란 사망한 이를 위해서 마련된 것인데, 춘추 시대에 생시에 시호를 준 예가 있었으니, 한 가지 이상한 일이다. 이백사(李白沙 백사는 이 항복(李恒福)의 호)의《노사영언(魯史零言)》에,
“노 소공(魯昭公) 20년 윤8월 무진에 선강(宣姜 위 영공(衛靈公)의 적모(嫡母))을 죽였다. 공자 조(公子朝)와 더불어 간통 모반(謀叛)한 때문이다. 이어 위후(衛侯)가 북궁희(北宮喜)에게 정자(貞子)라는 시호를, 제표(齊豹) : 위(衛)의 사구(司寇))를 멸망시킨 때문이다. 석주서(析朱鉏)에게 성자(成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밤중에 위후(衛侯)를 호종한 때문이다. 제표(齊豹)의 묘전(墓田)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들은 다 죽기 이전에 시호와 묘전을 받은 것이다.
또한 시호법에는《춘추》의 포폄(褒貶)하는 권한이 매어 있으므로 의당 엄정(嚴正)히 시행되어야 한다. 후주(後周) 우문태(宇文泰 문제(文帝)) 시대에도 시호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이준(朱彝尊)의《폭서정집(曝書亭集)》에 보이는 후주두로은비발(後周豆盧恩碑跋)에,
“우문씨가 건국(建國)한 뒤에 소작(蘇綽)ㆍ노변(盧辯)의 무리를 등용, 의례(儀禮)를 논의하고 시호법을 경솔히 사용하지 아니하여, 아무리 종자 번왕(宗子藩王)이라도 그 악덕(惡德)을 숨기지 않았다. 즉 진공(晉公) 호(護)에게 탕(蕩), 제왕(齊王) 헌(憲)에게 양(煬), 위왕(衛王) 직(直)ㆍ필왕(畢王) 현(賢)에게 자(刺), 조왕(趙王) 초(招)에게 참(僭), 진왕(陳王) 순(純)에게 혹(惑), 월왕(越王) 성(盛)에게 야(野), 대왕(代王) 달(達)에게 혁(奰), 기왕(紀王) 강(康)에게 여(厲)라는 시호가 주어졌는데, 두로은(豆盧恩) 형제(兄弟)에게는 시호를 소(昭)로, 또는 경(敬)으로 고쳐 주었으니, 참으로 두터운 은총이었다.”
하였다. 본조(本朝) 초기에도 시호법이 엄격하였다. 그러므로 태조 때 봉상시(奉常寺)에서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의 시호에 대해 안양(安煬)ㆍ안황(安荒)ㆍ안혹(安惑) 세 가지로 의진(擬進)하므로 임금이 해당 관원을 불러들여 시호를 결정하려 하였는데, 봉상시 박사(博士) 최견(崔蠲)이,
“원훈(元勳) 정희계의 시호를 내리는 데 그의 과오만 논하고 공로를 논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 따지고, 해당 관원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 국문하게 하므로 시호를 다시 양경(良景)으로 고치게 되었다. 서거정(徐居正)의《필원잡기(筆苑雜記)》에,
“중추(中樞) 이숭지(李崇之)의 시호는 태상시(太常寺)에서 맥려(麥厲)로 정하였는데, 시호법에 맥(麥)자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과(夸)자의 착오이다. 이같은 유가 하도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하였다.
성종(成宗) 15년(1484)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이계손(李繼孫)의 시호에 대해 장경(長敬)ㆍ정헌(玎憲) 두 가지로 의진(擬進)하였는데, 시호법에 “그 의의(意義)를 진술하지 못하는 것을 정(玎)이라 한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경헌(敬憲)으로 결정하였다. 김수동(金壽童)이 말하기를,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는 편정공(褊玎公), 여산군(礪山君) 송익손(宋益孫)은 양묵공(襄墨公), 고려 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황무공(荒繆公)이다.”
하였고, 옛날에도 정(玎) 자 시호가 있었다. 즉《설문(說文)》에,
“제 태공(齊太公)의 아들 급(伋)의 시호는 정공(玎公)이다.”
하였다.
본조(本朝) 선현(先賢) 중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ㆍ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ㆍ박공 상충(朴公尙衷)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ㆍ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시호는 다 문정(文正)이고, 송당(松堂) 박영(朴英)은 무제(武宰) 출신으로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무과(武科) 출신에게 문(文) 자 시호가 주어진 것은 다 폄시(貶諡)이다. 후암(厚菴) 이만운(李萬運)의《시호고(諡號考)》에 보면,
“조손(祖孫)이 다같이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허백(許伯)과 전리판서(典理判書) 허금(許錦)이고, 부자(父子)가 다같이 문안(文安)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정목(鄭穆)과 지추밀사(知樞密事) 정항(鄭沆)이고, 문경(文敬)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석(安碩)과 정당문학 안보(安輔)이고, 문영(文英)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제양백(濟陽伯) 고경(高慶)과 간의동지(諫議同知) 고용현(高用賢)이고, 문도(文度)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여흥군(驪興君) 민변(閔忭)과 본조(本朝) 좌의정(左議政) 민제(閔霽)이고, 형제(兄弟)가 다같이 안도(安悼) 시호를 받은 이는 본조 수춘군(壽春君) 현(玹)과 형해군(寧海君) 당(瑭)이고, 이안(夷安) 시호를 받은 이는 본조 서원군(瑞原君) 친(亲)과 낙안군(樂安君) 영(寧)이고, 정희(靖僖) 시호를 받은 이는 본조 해안군(海安君) 희(㟓)와 덕양군(德陽君) 기(岐)이고, 호이(胡夷) 시호를 받은 이는 판윤(判尹) 신균(辛均) 형제이다.”
하였는데,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에,
“고인(古人)의 시호에는 2~3자를 사용하였고, 후인들도 이를 서로 인습해 왔다. 그런데 1자만을 들어 일컬어진 이는 위 예성무공(衛叡聖武公)이 무공(武公)으로, 정혜문자(貞惠文子)가 공숙문자(公叔文子)로, 진 조헌문자(晉趙獻文子)가 문자(文子)로, 위 혜성왕(魏惠成王)이 혜왕(惠王)으로 된 유이다.”
는 등 13명이나 열거되어 있는데, 너무 번거로워 다 기록할 수 없다. 두우(杜佑)《통전(通典)》의 황후시급부인시의(皇后諡及夫人諡議) 조와 태자무시의(太子無諡議) 조와 제후경대부시의(諸侯卿大夫諡議) 조도 상고할 만하다. 진수(秦秀)의《문선(文選)》에 보이는 진태재하증시의(晉太宰何曾諡議)에,
“ …… 하증은 비록 세족(世族)으로 태어났으나 젊어서 고량(高亮)한 풍절(風節)과 엄격한 조행(操行)으로 왕조(王朝)에 올랐습니다 …… 할 터인데도 교사(驕奢)가 과도하고, 명성이 구주(九州)에 알려졌는데도 …… 보상(輔相)의 도리를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 인륜(人倫)의 가르침을 무너뜨렸습니다 …… 재상 대신(宰相大臣)은 만인(萬人)의 의표(儀表)인데, 만약 생전에 욕심을 다하고 사후에 폄책(貶責)이 없다면, 이는 제실(帝室)에 정법(正法)이 없어지게 됩니다 …… 삼가 시호법을 상고해보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무(繆), 혼란한 기회를 이용하여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추(醜)이다.’ 하였으니, 당연히 무추(繆醜)로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
하였고, 또 진가충시의(晉賈充諡議)에,
“가충(賈充)은 아들 여민(黎民)이 요절(夭折)한 뒤에 종족(宗族)을 제쳐 놓고 외손(外孫) 한 밀(韓謐)을 여민의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이는 예법을 위배하고 사정(私情)에만 치우친 처사입니다. 옛날 증(鄫 나라 이름)에서 외손 거 공자(莒公子 거(莒) 나라의 공자)를 길러 후사로 삼았는데,《춘추》에서 ‘거(莒) 사람이 증을 멸망시켰다.’고 썼습니다 …… 시호법에 의하면 ‘법도를 혼란시키는 것을 황(荒)이다.’ 하였으니, 황으로 시호를 정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사시(私諡)에 대하여는 명(明) 나라 송경렴(宋景濂 경렴은 송염(宋濂)의 자)의 연영오선생사시의(淵穎吳先生私諡議)에,
“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만물(萬物)이 생겨난 뒤에야 상(象 귀(龜)는 사람에게 상(象)으로써 보임)이 있고 상이 있은 뒤에야 성장(成長)이 있고 성장이 있은 뒤에야 수(數 서(筮)는 사람에게 수로써 알림)가 있다.’ 하였는데, 수가 있은 뒤에야 문(文)이 있게 마련이다. 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도(道)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문을 기재해 놓은 것이 바로 이 경(經)이니, 성인을 배우는 이는 반드시 경을 본받아 문을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사관(史官)이 없어진 뒤로부터 훈고학(訓詁學)을 유림(儒林)에 끼워 넣고 사장학(詞章學)을 문원(文苑)에 써 넣어 고의(古義)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장향 서원(長薌書院) 산장(山長 서원의 장(長)) 오공 선생(吳公先生 원(元)의 오내(吳萊))은 고명한 풍치(風致)와 원만한 재성(才性)으로,《시경(詩經)》ㆍ《서경(書經)》에는 맥락(脈絡)을 분류하여 요긴한 것을 표지하고,《춘추경(春秋經)》에는 삼전(三傳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요약하여 심오(深奧)한 것을 발휘하고, 제자서(諸子書)에는 진위(眞僞)를 색출하여 정명(精明)을 다하고, 삼사(三史《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에는 의례(義例)를 분석하여 논평이 엄격하다. 그 조회(藻繪 채색(彩色)과 회화(繪畫))가 미치는 곳에 모두가 다 화려해졌으므로, 문생 학자(門生學子)가 저마다 ‘경의(經義)에 깊었으니 연(淵)이 아니고 무엇이며, 문사(文辭)에 능했으니 영(穎)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사시(私諡)를 연영으로 정하는 바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휘(諱)는 원종(原宗))이 양 무제(梁武帝) 천감(天監) 13년(514)에 즉위, 원년에 비로소 시호법을 제정하였고 백제 성왕(聖王 휘는 농(襛))이 양 무제 보통(普通) 4년(523)에 즉위, 곧 신라 법흥왕 10년. 원년에 비로소 시호법을 제정하였다. 행주 기씨(幸州奇氏)와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보첩(譜牒)을 보면, 기자(箕子)를 태조 문성왕(太祖文聖王)이라 칭하여 41대 애왕(哀王) 준(準)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호가 기재되어 있으니, 그 시대에 이미 시호를 올리는 제도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시호법이 주공(周公)에 의해 비로소 제정되었으므로 기자(箕子)의 후대 사왕(嗣王)이 주(周) 나라의 시호 올리는 제도를 본받았기 때문에 대대로 시호가 기재되어 있음인지, 아니면 혹 후인(後人)들의 장난인지도 모를 일이다. 명 나라 손능부(孫能傅)가《시법찬(諡法纂)》을 지었다.


 

[주D-001]백호관(白虎觀) : 한 장제(漢章帝) 때 박사(博士)ㆍ의랑(議郞)ㆍ낭관(郞官)과 모든 유생(儒生)이 모여서 오경(五經)의 동이점(同異點)을 강론하여 백호의주(白虎議奏 : 《백호통의(白虎通義)》)를 지었던 곳.
[주D-002]문경(文敬) …… 안석(安碩)과 : 이 부분은 오류로 보여진다. 《근재집(謹齋集)》 卷4 〈묘지명(墓誌銘)〉에 “아버지 안석은 급제하였으나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考碩 及第 遂隱不仕]”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