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요람(歷代要覽)/주역에 대한 변증설

주역에 대한 변증설

아베베1 2011. 12. 23. 23:15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露積峰의 모습  (2011.9. 삼각산 산행시 담은 사진임)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
 역경(易經)

《주역(周易)》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 본 권34)


오경(五經) 가운데 오직《주역(周易)》이 가장 오랜 것으로서 다시 예와 이제의 다름이 있는데, 선천도(先天圖) 더 오래되어 실로 만물을 개발하고 인문(人文)을 열어 주었다.
괘획(卦畫)으로부터 괘사(卦辭)가 생겼으니, 괘획이 더 오랜 것이고 괘사는 뒤에 되었으며, 경(經)으로부터 전(傳)이 생겼으니, 경이 오랜 것이고 전은 뒤의 것이다. 비 직(費直)에 이르러서 예전《주역》이 변하여 아랫것이 되었고, 정 현(鄭玄)과 왕 필(王弼)에 이르러서 지금의《주역》 그대로 다시 복고(復古)되지 못하였다. 이것이《역경(易經)》 연혁의 개요이니 자세한 것은 하문(下文)에 나타났다.
공자(孔子)가, “포희씨(包羲氏)가 비로소 8괘(卦)를 그었다.”하였고《주역》을 지었다고는 말하지 않으면서, “《주역》의 생긴 것이 그 중고인저!”하였으며, 또 “《주역》의 생긴 것이 그 은(殷) 나라의 말세와 주(周) 나라의 성시인저! 문왕(文王)과 주왕(紂王)의 일에 해당될진저”라고 하였으니, 문왕이 지은 괘사에 의하여 처음《주역》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주관(周官) 태복(太卜 점복(占卜)을 맡은 관직)이 세 가지 역법(易法)을 맡았으니, 첫째는《연산(連山)》, 둘째는《귀장(歸藏)》, 셋째가《주역》이다.《연산》과《귀장》은《주역》이 아닌데 세 가지 역법이라고 한 것은 뒷사람이《주역》의 말을 인습하여 이름한 것이니, 마치 묵자(墨子 춘추 시대 사람. 이름은 적(翟))의 글에, “주(周)의《춘추》(春秋), 연(燕)의《춘추》, 송(宋)의 《춘추》, 제(齊)의 《춘추》”라고 한 것과 같다. 주ㆍ연ㆍ제ㆍ송의 역사는 다《춘추》가 아닌데 《춘추》라고 한 것은 노(魯)의 사기를 《춘추》라고 한 것을 그대로 이름한 것이다.
《주역》 여러 책본(冊本)의 다르고 같은 데에 대해서는,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갈 줄은 모르며, 보존될 줄만 알고 망할 줄은 모르며,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을 모르는 것은 오직 어리석은 사람인저![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 其惟愚人平]”라고 한 것은 왕숙(王肅 후한 때 사람 자는 자웅(慈雍))의 책본이고, “혹 가죽 띠를 주었는데 하루아침에 세 번 당긴다.[拖 타(拕)와 같음. 당기다. 끌다.]”라고 한 것은 정현 본이며, “그 소가 뿔을 곤두세우며, 그 사람이 머리를 깎고 또 코를 베었다.[其牛觢 其人夭且劓]”라고 한 것은《설문(說文)》에 허 신(許愼)의 기록이고, “그 패에 풍한지라, 한낮에 작은 별을 보도다.[豊其沛日中見沬]”한 것은《자하열전(子夏列傳)》에 기록된 예이다.
또 당 나라 곽 경(郭京)이 왕 보사(王輔嗣)와 한 강백(韓康伯)의 수사 고본(手寫古本)을 얻어《주역거정(周易擧正)》 3권을 지었는데, 금문(今文)에 비하여 보면 경문(經文)을 주석으로 만들기도 하고 주석으로 경문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소상(小象)의 아래 글귀가 도리어 그 위에 있기도 하고 효사(爻辭) 뒤의 주석을 그 앞에다 열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자까지도 탈락되고 착오되었는데, 이는 다 문왕(文王)이 지었다고 하다가 마 융(馬融)ㆍ육 적(陸績)ㆍ왕 숙(王肅)ㆍ요신(姚信)이 비로소 주공(周公)이 효사를 지었다는 설을 내놓으므로, 《정의(正義)》에서 이를 좇았다.
대체로, 효사에는 문왕 이후의 일을 말한 것이 많으니, 승괘(升卦) 육사효(六四爻)에, “왕이 기산(岐山)에 제향한다.”함은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이긴 뒤에 비로소 문왕을 추존하여 왕이라 한 것이다. 만일 효사가 문왕의 작이라면 “왕이 기산에 제향한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孔子)가 단사(彖辭)ㆍ상사(象辭)ㆍ계사(繫辭)ㆍ문언(文言)ㆍ서괘(序卦)ㆍ설괘(說卦)ㆍ잡괘(雜卦)를 지으니, 이것을《십익(十翼)》이라 한다. 진(秦) 나라가 글을 불사를 적에《주역》은 특히 점치는 글이라 하여 보존되었고 오직 설괘 3권을 잃었는데, 한 선제(漢宣帝 서기전 73~40) 때 하내(河內) 여자가 옛집을 헐다가 얻었다고 한다.
한(漢) 나라 초기에《역(易)》을 말한 전하(田何)라는 이가 있어 괘(卦)ㆍ상(象)ㆍ효(爻)ㆍ단(彖)과 문언ㆍ설괘 등을 12편으로 갈라 놓음으로 인해 말하는 자들이 스스로 장구(章句)를 나누게 되었으니, 이것이《주역》의 본경(本經)이다. 또 초 당(焦?)의《역》이 있는데, 다만 음양 재변(陰陽災變)의 말만 서술하여 성인의 경과 유사하지 않다. 또 민간에 비 직의《역》이 있는데, 모두 단(彖)ㆍ상(象)ㆍ문언(文言)으로 상ㆍ하경(上下經)을 해석하였다.
전씨(田氏)의《역》이 가장 성행하였고, 비씨(費氏)의 것은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후한(後漢) 시대 진 원(陳元)과 정중(鄭衆)이 모두 비씨의《역》을 배웠고, 마 융이 또 그 전(傳)을 만들어 정 현에게 전하였고, 정 현은《역주(易注)》를 지었으며, 순 상(荀爽)이 또《역전(易傳)》을 지었고, 위(魏) 나라 때에 왕 숙(王肅)ㆍ왕 필(王弼)이 아울러 주해(注解)를 하였다. 이로부터 비씨의《역》이 크게 성행하여 전 하의 것은 드디어 뜸하게 되었다. 진(晉) 나라 이후로는 왕 필의 역학이 홀로 전하여졌고, 당(唐)나라 공 영달(孔穎達) 등에게 이르러서 또《정의(正義)》를 지었으니, 옛 12편의 역본(易本 전씨(田氏)의《역》을 이름)은 드디어 없어졌다.
단과 상을 괘 끝에 붙인 것은 비씨로부터 시작되었고, 정 현과 왕 필은 또 단과 상을 괘와 효 아래 나누어 붙이고 건ㆍ곤(乾坤)괘의 문언을 더 첨부하여 비로소 ‘단왈(彖曰)’ㆍ‘상왈(象曰)’ㆍ‘문언왈(文言曰)’ 등을 붙여 경(經)을 구별하고, 계사(繫辭) 이후는 예전대로 두었다. 이것으로 여러 세대에 인습하였으니, 곧 금역(今易)으로서 정 이천(程伊川)이 이를 위주하여 전을 지은 것이다.
숭산(崇山) 조 열지(晁說之)가 비로소 옛 경을 고증하여 8권을 만들었으니, 괘효(卦爻) 1, 단사(彖辭) 2, 상사(象辭) 3, 문언(文言) 4, 계사(繫辭) 5, 설괘(說卦) 6, 서괘(序卦) 7, 잡괘(雜卦) 8 인데, 주자(朱子)가 고문(古文)에 다 맞지 않았다 하였고, 여 조겸(呂祖謙)이 이에 경 2권과 전 10권으로 만드니 이것이 옛 주역이며, 주자《본의(本義)》에서도 상경(上經) 1, 하경(下經) 2, 단 상전(彖上傳)ㆍ단 하전(彖下傳) 2, 상 상전(象上傳) 3, 상 하전(象下傳) 4, 계사상전(繫辭上傳) 5, 계사 하전(繫辭下傳) 6, 문언전(文言傳) 7, 설괘전(設卦傳) 8, 서괘전(序卦傳) 9, 잡괘전(雜卦傳) 10 으로 되었다.
그러나《정전(程傳)》과《본의(本의(義))》가 다 병행하면서도 제가(諸家)의 정본(定本)이 각기 같지 않더니 영락(永樂) 연간에 호 광(胡廣) 등이 대전(大全)을 모아《정전》의 원본에 따르기로 정하고, 주자의《본의》는 그에 맞추어 편입하였으며,《계사》이하는《정전》이 없으므로《본의》에서 정한 장(章)의 차서대로 하였다.
《역》의 전수는 노(魯)의 상구(商瞿 상구는 성. 이름은 자목(子木).)로부터이다. 자목은《역》을 공자에게 받아서 노의 교 자용 비(橋子庸庇 교는 성. 이름은 비. 자는 자용.)에게 전수하였고, 자용은 강동(江東) 사람 한 자궁 비(韓子弓臂 한은 성. 이름은 비. 자궁은 자.)에게 전수하였고, 자궁은 연(燕)의 주취 자가(周醜子家)에게 전수하였고, 자가는 동무(東武) 사람 손 우 자승(孫虞子乘)에게 전수하였고, 자승은 제(齊)의 전 자장 하(田子莊何)에게 전수하였다.
한(漢)의 초기에《역》을 전수한 이는 전 하로부터이다. 전 하는 정 관(丁寬)에게, 관은 전 왕손(田王孫)에게, 왕손은 패(沛) 땅 사람 시 수(施讐)와 동해(東海) 사람 맹 희(孟喜)와 낭야(瑯?) 사람 양구 하(梁丘賀)에게 전수함으로써 전 하에게는 시씨ㆍ맹씨ㆍ양구씨의 학(學)이 있게 되었고, 또 동군(東郡) 사람 경방(京房)이 스스로 “역을 양(梁)의 초연수(焦延壽) 당(?)의 이름.《동관여론(東觀餘論)》에는 당이 자라고 했음.)에게 받았다.”고 하면서, 따로 경씨(京氏)의 학을 만들었다가 그후에 바로 흐지부지하였지만, 후한 때 시ㆍ맹ㆍ양구ㆍ경 4가(家)가 병립하여 서로 전수한 바가 많았다.
한(漢)의 초기에 또 동래(東萊) 사람 비 직이《역》을 전수하였는데, 그 책본이 모두 고자(古字)였으므로 고문(古文)이라 이름하였다. 그 역은 낭야 땅 왕 황(王璜)에게, 황은 패 땅 사람 고 상(高相)에게, 상은 그 아들 강(康)과 난릉(蘭陵) 사람 무장 영(毋將永)에게 전수하였다.
그러므로 비씨의 학이 세상에 유행하면서 학관(學官)으로 세워지지는 못했지만, 진원ㆍ정 중ㆍ마 융ㆍ정 현ㆍ순 상ㆍ왕 숙ㆍ왕 필이 모두 그 학을 전수함으로써, 비씨의 학이 자못 성행하다가 고씨가 이어 쇠약해졌으며, 양구씨와 시씨의 것은 서진(西晉) 때 없어지고 맹씨와 경씨(京氏)의 것은 글은 있으나 사전(師傳)이 없었다.
그후로《역》이 셋으로 나눠졌다. 전 하의《역》은 자하(子夏)로부터 시작되었고, 초당의《역》은 맹희에게서 받았고, 맹 희는 전 왕손에게서 배운 것이다.
스스로 자랑하고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역》을 얻은 사람들의 풍조이다.《음양재변서(陰陽災變書)》에, “전 왕손이 죽을 때에 맹 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역》을 독전(獨傳)했다.”는 거짓말을 하였고,《사기(史記)》에는, “초 연수가 어느 은사(隱士)에게 홀로 얻은 설을 맹희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초 연수는 평소에, “나의 도(道)를 얻어서 망신(亡身)할 사람은 경생(京生 경 방(京房)을 이름.)이다.”고 하였다.
정 현의 주에는, “《역》은 서 준명(徐遵明)이 노 경유(盧景裕)와 청하(淸河) 사람 최근(崔瑾)에게 전하였고, 경유는 권 회(權會)와 곽 무(郭茂)에게 전했는데, 권 회는 일찍부터 업도(鄴都)로 들어가 살았고, 곽 무는 늘 집에 있으면서 후배들을 가르쳤으므로 역법(易法)이 곽 무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였으며, 하남(河南)과 청(靑)ㆍ제(齊) 지방에서는 유생들이 왕 보사(王輔嗣)의 주석을 많이 강론했는데, 그 사훈(師訓)은 모자랐던 것 같다.《진서(晉書)》 속석전(束晳傳)에, “태강(太康 진 무제 연호. 280~289)2년에 급군(汲郡) 사람 부 준(不準)이 위 양왕(魏襄王 혹은 안희왕(安釐王)이라 함)의 무덤을 도굴하여 6서(書) 수십 수레를 얻은바, 그 중에는《역경(易經)》 2편이 있었는데,《주역》의 상ㆍ하경이 공손 단(公孫段)ㆍ소 척(邵陟)의 역론과 같았으니, 이는 선진(先秦)의 고역이다.
세 가지《역》중에,《귀장(歸藏)》은 이미 한(漢) 나라 초기에 없어졌는데, 진(晉) 나라 시대의 경(經)들을 상고해 보면 남아 있다. 그러나 복서(卜筮)에 대한 것만 기재되어 성인의 경 같지가 않았고 당(唐) 나라 개원(開元 명황(明皇) 연호. 713~741) 연간에는 세 가지《역》이 갖춰져 있었으며 송(宋) 나라에 이르러서는 오직《귀장》만이 약간 있었을 뿐 전해지지는 않았다.
명(明) 나라 양 신(楊愼)은, “《연산(連山)》은 난대(蘭臺 한 대(漢代) 제실(帝室)의 문고(文庫))에,《귀장》은 태복(太卜 나라의 복서(卜筮)를 맡은 기관.)에 간직되었다.”고 했는데, 이 말이《환담신론(桓譚新論)》에 나타났으니, 후한 시대에《연산》과《귀장》이 아직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록이 예문지(藝文志)에 열거되지 않았다 하여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수(隋) 나라 때에 이르러 나온《연산》과《귀장》은 위작(僞作)으로서 관(官)에 진상하여 상(賞)이나 타려는 자의 소행에 불과하다.
옛《귀장》은 지금에 없고 다만 64괘(卦)의 이름이 있는데, 그 중에는 4괘가 빠졌고 또《주역》의 것과 같지도 않았다. 수(需)는 수(隋)로, 소축(小畜)은 독축(毒畜)으로, 대축(大畜)은 대독축(大畜)으로, 간(艮)은 한(狠)으로, 진(震)은 이(釐)로, 승(升)은 칭(稱)으로, 박(剝)은 복(僕)으로, 손(損)은 원(員)으로, 함(咸)은 함(諴)으로, 감(坎)은 낙(犖)으로, 겸(謙)은 겸(兼)으로, 돈(遯)은 축(逐)으로, 고(蠱)는 촉(蜀)으로, 해(解)는 여(荔)로, 무망(无妄)은 무망(毋妄)으로, 가인(家人)은 산가인(散家人)으로, 환(渙)은 환(奐)으로 되었다.
또한 구 규야 흠(瞿規夜欽)은 5괘(卦)씩으로 분류하였고 잠흔(岑)ㆍ임우언(林禑焉)의 무리는 세 가지로 겹쳐서 괘의 이름을 지었으니,《주역》의 어느 괘로 간주해야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송 나라 요관(姚寬)의《서계총어(西溪叢語)》에는, “하(夏) 나라 때《귀장》에, ‘선비가 2년간의 먹을 것이 없이 흉년을 만나면 처자(妻子)가 자기의 처자가 되지 않고, 대부(大夫)가 2년간의 먹을 것이 없이 흉년과 난리를 만나면 신첩(臣妾)이 자기의 것이 되지 않고 나라가 2년간의 먹을 것이 없이 흉년을 만나면 백성들이 자기의 것이 되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상고(上古) 때의 글이 어찌 이처럼 얕고 유치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에는 삼성(三成)과 삼천(三天)의 논이 있다. 청 나라 서하(西河) 모기령(毛奇齡)의《사서등언(四書謄言)》에, “육석암(陸石菴 청 나라 육명오(陸鳴鼇)의 호.)의《회어지언(會語支言)》에, ‘《주역》에, 「팔괘(八卦)에 소성(小成)한다」 하였고《맹자》(孟子)에, 「공자를 집대성(集大成)했다」’고 하였으나 중성(中成)이란 말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아마 복희의《역》을 소성, 신농(神農)의《역》을 중성, 황제(黃帝)의《역》을 대성이라 하고, 또 복희의《역》을 선천, 문왕의《역》을 후천, 부자(夫子 공자를 존칭한 말.)의《역》을 중천(中天)이라 하는 것 같다.
괘변(卦變)은 청 나라 임정(林亭) 고염무(顧炎武)가, “괘변에 대한 설은 공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주공(周公)이 이은[繫] 손괘(損卦) 육삼효(六三爻)에 대해 이미 언급된 것이다. 즉, ‘세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은 손(損)을 보고 한 사람이 가면 그 벗을 얻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육삼효의 변(變)도 모두 건ㆍ곤(乾坤) 괘에서 나온 것이다. 소위 ‘복(復)ㆍ구(姤)ㆍ임(臨)ㆍ돈(遯)으로부터 왔다.’라는 것 등이다.”고 말하였다.
호괘(互卦)는, 고염무가, “모든 괘에 있어 2효로부터 4효까지와 3효로부터 5효까지 두 개의 체(體)가 서로 교호(交互)하여 각기 하나의 괘를 이루므로 선유(先儒)들이 호체(互體)라 하였는데, 그 설이 이미《좌전》 장공(莊公) 22년 조에 나타났다. 즉, 진후(陳侯)가 점을 쳐서 관(觀)의 비괘(否卦)가 나온 바, ‘풍이 토 위에서 천이 되었으니 산이다.[風爲天於土上山也]’하였고, 그 주에, 「2효로부터 4효까지 간(艮)의 상(象)이 있다. 4효가 변(變)했기 때문에 간이 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일찍이 언급하지 않았는데 후세 사람들이, ‘물(物)을 잡(雜)함과 덕(德)을 찬(撰)한다.’라는 말을 내세워 해당시켰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른바, 2와 4나 3과 5가 공(功)은 같으나 자리는 다르다는 것은, 특별히 이 두 개의 효(爻)를 가져 서로 비교해서 말했을 뿐, 애당초에 어찌 호체(互體)의 설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호체란 것은 우번(虞翻)과 최경(崔憬)의 무리가 비로소 내세웠으니, 대개 역의 본지(本旨)는 버리고 상(象)에만 집착한 소치이다.
청 나라 방중리(方中履)는, “구양수(歐陽脩)가 홀로 문언(文言)을 믿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원래 그 네 가지 말[四語]에 대해서는 맨 먼저《좌전》 목강(穆姜)에게서 나타났다 하여, 문언을 공자의 소작이 아니라고 하지만,《좌전》은 후세 사람의 글이며 목강이 인용한 말은 좌씨(左氏)가 부회(附會)하여 채워넣었음을 알지 못한다. 한낱 노부(老婦 목강을 이름)가 어찌 능히 그런 은미(隱微)한 말을 하였겠는가? 후세에 이르러 몰래 주워넣은 것으로 말미암아 성인의 말까지 의심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육상산(陸象山)ㆍ양자호(楊慈湖)도 계사(繫辭)를 의심하였으며, 금세에 이르러 학초망(郝楚望)ㆍ하현자(何玄子) 제공(諸公)도 후천도(後天圖)는 믿으면서 선천도(先天圖)는 믿지 않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청 나라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가, “선천도에 대하여 소씨(邵氏 소옹(邵雍)을 이름)가 다시 만들어 놓은 그 공로는 복희의 처음으로 8괘를 그어 놓은 것과 서로 대등한데, 양귀산(楊龜山)ㆍ육상산 등은 모두 의심하였고, 임율(林栗)ㆍ원추(袁樞) 등은 선천도를 뜯어 고치기에 급급하였으니, 그 당시에 선천도를 높이고 믿어 표장(表章)한 이는 오직 주자(朱子) 한 사람뿐이었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청 나라의 성조(聖祖)가 이광지에게 명하여《주역절충서(周易折衷書)》를 편찬하였으니, 대개 옛《역》을 복구시켜 지은 것이다.
목당(穆堂) 이불(李紱)은, “본조(本朝) 강희(康熙 청 성조의 연호. 1662~1722) 연간에《주역절충서》를 어찬(御纂)함으로써 비로소 정론(定論)이 되었다. 그러나 4상(象)에 대한 해석은《본의(本義)》의 두 획(畫)으로 태음(太陰)ㆍ태양(太陽)과 소음(少陰)ㆍ소양(少陽)을 나눈다는 설은 물론, 강절(康節)의 음ㆍ양ㆍ강(剛)ㆍ유(柔)의 설을 아울러 취하였고, 또 서씨 우한(徐氏右漢)의 감(坎)ㆍ이(离)에 대한 설까지 취했으니, 비록 하나로써 절충한다 하였지만 일찍이 여러 사람의 논을 겸존(兼存)한 것이다. 이른바, ‘역은 변동하여, 한 군데에만 있지 않는다.’라는 것이니, 어찌 일대 전요(典要)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혹자는《역》을 전혀 점치는 글로만 간주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꼭 노격(盧格)의 말을 가지고 증거하려는 바이다.
주죽타(朱竹坨 이름은 이준(彝尊))의《정지거시화(靜志居時話 정지거는 주이준(朱彝尊)의 실명(室名))》에, “노격의 자는 정부(正夫)이며, 동양(東陽) 사람으로 성화(成化 명 헌종의 연호. 1465~1487) 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강서도(江西道)의 어사(御史)로 있었다.”고 하였다. 그의 독역(讀易) 시에
복희ㆍ문왕ㆍ주공이 만일 점치는 것만 숭상했다면,/三聖若專尊卜筮
공자가 어찌 가죽책을 세 번씩이나 절단냈겠는가?/宣尼何用絶韋編
라고 하였고, 또,
세상의 선비들이 나에게 묻는다면,/世儒問我
오경이 원래 육획보다 먼저라고 대답하되,/五經原居六畫先
만일 복희ㆍ문왕이 점치는 것만 위주했다 말한다면,/若說羲文專卜筮
길거리의 점치는 소경들도 다 그 진전을 얻었으리./街頭盲瞽盡眞傳
라 했으니, 이 어찌 분명한 변론이 아닌가? 나는 감히 이의를 내세울 수 없다.


 

[주C-001]《주역(周易)》에 대한 변증설 : 《주역》은 선천도(先天圖)가 가장 오랜 것으로서, 만물과 인문을 개발했다는 설로 시작하여 주역이 이루어진 과정 즉, 괘획(卦畫)에서 괘사(卦辭), 경(經)에서 전(傳)이 생겼다는 것을 말했고, 이어 이 글이 비직(費直)ㆍ왕필(王弼)ㆍ정현(鄭玄) 등에 의해 번복되었던 일 등 연혁을 들었다.
[주D-001]선천도(先天圖) : 복희(伏羲) 선천의 8괘 방위는 건남(乾南)ㆍ곤북(坤北)ㆍ이동(离東)ㆍ감서(坎西)ㆍ태동남(兌東南)ㆍ진동북(震東北)ㆍ손서남(巽西南)ㆍ간서북(艮西北)으로 되었다. 《易 說卦》
[주D-002]포희씨(包羲氏)가 …… 그었다 : 계사 하(繫辭下) 제2장에 나온다.
[주D-003]《주역》의 …… 중고인저 : 계사 하 제7장에 나온다.
[주D-004]《주역》의 …… 해당될진저 : 계사 하 제11장에 나온다.
[주D-005]어리석은 : 어리석다의 우(愚) 자는 금역(今易)에 성인이라는 성(聖) 자로 되었다.
[주D-006]당긴다 : 당긴다는 타(拖) 자는 금역(今易)에 빼앗는다는 치(褫) 자로 되었다.
[주D-007]곤두세우며 : 곤두세운다는 서(觢) 자는 금역(今易)에 끌어당긴다는 철(掣) 자로 되었다.
[주D-008]그 패에 …… 보도다.[豊其沛日中見沬] : 금역(今易)에 패(沛)는 폐(旆)로, 매(沬)는 매(昧)로 되었다.
[주D-009]소상(小象)의 …… 하였다 : 효사(爻辭)의 공자전(孔子傳)을 이른다.
[주D-010]《정의(正義)》 : 당(唐) 나라 공영달(孔穎達)ㆍ왕덕소(王德韶) 등이 당 태종(唐太宗)의 명을 받들어 5경 주소를 찬한 것이다. 《四庫提要 經類》
[주D-011]전하(田何) : 전한(前漢) 사람. 자는 자장(子莊). 동무(東武) 손우(孫虞)에게 《주역》을 배워 동무 사람 왕동(王同), 낙양 주왕손(周王孫)ㆍ정관(丁寬) 등에게 전했다. 후세에 《주역》을 하는 자가 거의 전씨의 《역》을 종(宗)으로 삼았다.
[주D-012]「팔괘(八卦)에 소성(小成)한다」 : 《주역》계사 상에 보인다.
[주D-013]「공자를 집대성(集大成)했다」 :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보인다.
[주D-014]세 사람이 …… 얻는다. : 손괘 육삼효의 주자 본의(本義)를 참조.
[주D-015]복(復) …… 라는 것 : 순양(純陽)괘 건과 순음(純陰)괘 곤은 괘변(卦變)이 없지만 모든 괘가 건ㆍ곤 두 괘를 기준으로 하여 변화가 생김. 《주역》범례(凡例)의 괘변도(卦變圖) 참조.
[주D-016]간이 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변괘(變卦)인 비(否)에 제2효로부터 제4효까지 간(艮)이 되고, 또 간은 산(山)에 해당되는 때문이다.
[주D-017]물(物)을 …… 찬(撰)한다 : 계사 하에, “若非雜物 撰德 辨是與非 則非其中爻 不備”라고 보인다.
[주D-018]공(功)은 같으나 자리는 다르다 : 계사 하에 보인다.
[주D-019]네 가지 말[四語] : 목강이 원ㆍ형ㆍ이ㆍ정(元亨利貞)의 4덕(德)에 대하여 말하였다. 양공 9년 조 참조.
[주D-020]역은 …… 하였다 : 계사 하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