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25. 일행과 함께 삼각산 영봉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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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
삼각산(三角山) |
삼각산은 일명 화산(華山)이라 하며 또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산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을 물색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다. 백운대(白雲臺), 국망봉(國望峯), 인수봉(仁壽峯)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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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 ||||
구루정기(傴僂亭記) |
누대(樓臺)와 정사(亭榭)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막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한 것을 좋아하며, 기둥을 높게 세우고 보기에 화려하게 하여, 멀리는 강호(江湖)의 나루터 가에 세우고, 밖으로는 교외의 논밭 사이에 세운다. 그러나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관아에서 일을 보느라 한번 올라가 볼 겨를이 없어서 도리어 인근 사람이나 지나가는 객이 그 위에 올라가서 한가롭게 소요하는 것만도 못하니, 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혹은 대문을 걸어잠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찌 크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거하고 있는 집의 뒤편에 세 칸짜리 집을 세울 만한 작은 언덕이 있었다. 이에 드디어 띠풀을 엮어서 초가집을 세우고는, 안쪽에 있는 당(堂)을 공극당(拱極堂)이라 이름하고 그 바깥쪽에 있는 정자를 구루정(傴僂亭)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지붕이 낮아서 머리가 부딪히므로 반드시 허리를 구부린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그 정자의 크기는 비록 작지만, 위치해 있는 곳은 높고도 기이하며, 바라다 보이는 곳은 넓고도 멀다. 바위는 우뚝하고 소나무는 푸르러서 마치 조각한 것 같기도 하고 꽂아 놓은 것도 같아 창 밖에 우뚝하니 서 있는 것은 목멱산(木覓山)의 잠두봉(蠶頭峯)이고, 용처럼 꿈틀대고 호랑이처럼 쭈그리고 있어서 달려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여 서로 마주 대하여 돌아보고 있는 것은 백악산(白岳山)과 낙산(駱山)이다. 난새가 멈춘 듯 아름답고 고니가 서 있는 듯 우뚝하여 마치 날아가려다가 날아오르지 않은 듯한 것은 필운산(弼雲山)이고, 붓을 꽂은 듯 뾰족하고 홀을 세운 듯 우뚝하여 나아가려고 하다가 서 있는 듯한 것은 도봉산(道峯山)이다.
수락산(水落山)은 노원(蘆原)의 뒤편에서 마치 불곡산(佛谷山)을 전송하는 것 같고, 무악산(毋岳山)은 안현(鞍峴)의 위에 있으면서 마치 부아봉(負兒峯)을 좇는 듯하여, 기괴한 형상과 이상한 모양새가 여기저기 겹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백운봉(白雲峯)과 인수봉(仁壽峯) 등 여러 봉우리가 저 멀리 구름 하늘 밖 아득한 곳에 삐쭉하니 솟아 있는 모습이 더더욱 경외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안개와 구름이 변화함에 따라 혹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합해지기도 하고 혹 떨어지기도 한다. 그 누가 성시(城市)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저 강호의 경치와 교외의 흥취가 즐겁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머물러서 살 수는 없으니, 한번 가고 두 번가는 사이에 해가 이미 짧다. 그러니 어찌 이곳에서 잠자고 거처하며 이곳에서 먹고 숨쉬면서 천변만화를 보며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고 사시 팔절(四時八節)에 항상 창가에서 마주 대하는 것만 같겠는가.
나는 팔도(八道)를 두루 유람하였지만 경치를 감상할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7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명승지를 얻어서 정자를 지었으니, 돌 틈 사이의 물은 갓끈을 빨 만하고 바위 사이의 물은 양치질을 할 만하며, 대나무를 쪼개 만든 수로(水路)로 물을 대어 연못에는 연꽃을 심을 수가 있고, 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만물을 친구로 삼을 수가 있다. 종일토록 적료하여 시장통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평소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곳이다.
비록 그러하나 큰길을 한번 바라다보면 여염집들은 땅에 나지막하게 있고, 두 대궐 쪽을 바라다보면 대궐 용마루가 하늘에 접해 있다. 이에 도성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오가며 보는 자가 많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서 높게 짓는 것이 혐의스럽다. 이 때문에 처마와 서까래를 낮게 하고 담장을 낮게 한 다음 소나무와 대나무로 뒤편에 울타리를 쳐서 검소함을 밝게 드러내 보였다.
높은 데 있으면서는 위태로움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되고, 방에 들어와서는 내려다보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찌 감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만 좋아하여 처사(處士)처럼 창가에 기대어 공상 속에 잠겨서야 되겠는가. 옛 솥의 명(銘)에 이르기를, “일명(一命)의 관원은 허리를 낮게 굽히고, 재명(再命)의 관원은 허리를 굽히고, 삼명(三命)의 관원은 머리를 수그린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어 머리를 수그리고서 나의 정자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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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 ||||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육모정 고개에서 영봉가는 길목에서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구와 노원구 중랑구가 한눈에
오봉과 도봉의 모습이 한눈에
안수봉과 백운대 만경대사 조금씩
인수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仁壽峰)
숨은벽능선의 일부와 영장봉
도봉의 모습이 닭벼슬 모양과 같이 보인다
오봉 우이암 배꼽바위 선인 만장 자운봉이 아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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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한잡록(遣閑雜錄) |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 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하였다.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 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 중묘조(中廟朝)에 원묘(原廟)의 신주 하나를 잃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하인배들이 전관(殿官)을 모함하기 위하여 한 짓인가 의심하여, 참봉 및 수복(守僕) 등을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마침내 단서를 얻지 못했다. 정광필(鄭光弼)이 추관(推官)이 되어, ‘이것은 의옥(疑獄)이니, 만약 꼭 실제 범인을 찾아내려면 엄한 고문 아래 억울하게 형벌을 받을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하고, 아뢰어 완화시켜 억울히 죽은 자가 없었다.
뒤에 형조에서 우연히 도적을 잡아서 전후에 지은 죄를 물으니,
○ 김안로는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면서 문필의 재주까지 지녀 낮은 벼슬에 있을 적부터 사람들이 벌써 소인이 될 것을 알았다. 그의 아들 김희(金禧)가 공주(公主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첫째 딸)에게 장가들자, 갑자기 발탁 승진되어 갑신년(1524, 중종 19)에 이조 판서가 되어 권력을 독차지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다가 외방으로 쫓겨났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올 꾀를 내어 스스로 말하기를,
이언적(李彦迪)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반대하기를,
김안로가 이미 권세를 잡자 김구(金絿)ㆍ박훈(朴薰) 등 두어 사람만 풀어 돌아오게 하여 전일의 말을 실천하는 체하고는 기묘년 때의 남은 사람을 폐고(廢錮)시킴이 전일보다 심하니, 사람들이 그제야 더욱 김안로의 간사함을 알았다.
또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서 왕실의 지친 및 공경대부 중 주벌을 당하고 귀양 간 이가 서로 잇달았고, 국모(國母)를 폐위하려 한다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다. 중종이 근심하고 걱정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외척 중에 몰래 주상의 뜻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데 대사헌 양연(梁淵), 대사간 황헌(黃憲) 등이 함께 김안로를 탄핵하기를 의론하되, 오히려 성사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채무택의 당숙 채낙(蔡洛)이 당시 사간으로 있었더니, 중학 일회(中學一會)하는 날에 특지(特旨)로 동부승지에 제수하니, 양연등이 그제야 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 번 아뢰자 곧 귀양 보내기를 명령하고, 진위(振威)ㆍ갈원(葛院)에 당도하자 사사(賜死)하고, 그의 무리 허항(許沆)ㆍ채무택도 아울러 사사하였다.
그때에 삼정승 윤은보(尹殷輔)ㆍ유보(柳溥)ㆍ홍언필(洪彦弼) 등이 국사가 위태롭다가 김안로 등이 죄로 죽음을 받아 다시 편안해졌다 하여, 청하여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고, 양연 등 이하는 상(賞)을 논하여 품계를 올렸다.
○ 김안로가 공주의 세력을 빙자하여 호관(壺串)의 목장을 떼어 받아서 자기의 농토를 삼으려 하였는데, 정광필이 이때에 사복시 제조로 있으면서 굳이 들어주지 않으며,
그때에 희릉(禧陵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을 옮기기로 의론하였는데, 김안로가 광필이 앞서 희릉 국장(國葬) 때에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선후(先后)를 불길한 땅에 장사지냈다고 모함하여 중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사형에서 감하여 김해(金海)로 귀양 보내었다.
정광필이 이보다 먼저 파면되어 회덕(懷德) 시골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뜻밖에 금부 도사가 달려와 집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놀래고 두려워하여 울었으나, 정광필은 손님과 장기를 두면서 장(將)이야 하고 끝내지 않았다. 조금 뒤에 알아보니 사형에서 감하여 귀양보내는 것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문강공(文剛公)이 이사균(李思鈞)은 곧고 뻣뻣하여 시속에 맞추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기묘년의 사류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전주 부윤으로 나갔었다.
조광조ㆍ김정(金淨) 등이 죄를 입자,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당시의 정권을 잡은 무리들의 생각으로는, 이사균이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 감정을 품었을 것이라고 여겨 불러 승진시킨 것이었다. 들어오자 사직하며 아뢰기를,
이사균은 다만 남곤(南袞) 등의 의론에 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힘껏 조광조 등을 구하니, 정언 조침(趙琛)이 탄핵하여 관직을 떠났다. 뒤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또 김안로에게 거슬려서 경상 감사로 나가는데, 김안로가 당시 정승으로 있으면서 흥인문 밖에 나가 전송하려 하였다. 이사균이 듣고는 숭례문으로 나갔다. 그 꼿꼿함이 이와 같았다.
○ 이항(李沆)이란 자는 이세인(李世仁)의 아들이다. 중종이 반정한 초기에 이세인이 대사간이 되어 직언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항은 조행이 없으므로 사류(士類)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경상 우도 감사로 있으면서 좌도 감사 문근(文瑾)과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났는데, 마침 그날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하여 와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근은 슬픈 기색으로 병을 핑계대고 방에 들어갔으나, 이항은 의기양양하여 밤새도록 잔치하고 즐겼다.
얼마 안 되어 불리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정광필이 말하기를,
그가 부름을 받고 올라올 적에 함양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이러하다.
○ 찬성 이계맹(李繼孟)이 기개가 있고 큰 절조가 있으니, 정광필이 그를 정승의 재주가 있다고 자주 칭찬하였다.
후에 기묘년의 선비들이 일을 처리함이 중도에 지나치므로 이계맹이 매우 억제하였더니, 드디어 탄핵을 당하여 물러나 김제(金堤)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조광조 등이 패하게 되자 조정에서 불러 찬성에 제수되었다. 이계맹은 조금도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매양 착한 선비들이 쫓겨나고 뭇 소인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탄식하여, 선비들을 구하려 하다가 남곤 등에게 크게 거슬려 중추부의 직무가 없는 관직에 머물다가 죽었다.
○ 남곤이 처음에 심정(沈貞)ㆍ홍경주(洪景舟) 등으로 더불어 사림을 모해하려고 의론을 이미 정한 뒤에 거사할 때에 병조 판서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이장곤(李長坤)이 병조 판서로서 의금부를 겸직하고 있었다. 남곤이 그가 집에 있지 않은 틈을 엿보아 세 번이나 가서 명함을 보내 그 마음을 의심나게 하고는 그날 저녁에 잘 걷는 하인을 시켜 작은 편지를 가지고 부르기를,
마침내 남곤 등에게 배척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장곤은 그릇과 국량이 뛰어나고 문무의 재간이 있었다. 중종이 다시 쓰려고 생각하여 직첩을 도로 주었으나 뭇 소인들이 방해하여 마침내 벼슬길이 막혀 죽었다
○ 성수종(成守琮)이 그의 형 성수침(成守琛)과 더불어 재주와 행실로써 사림에 중한 명성이 있었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 14) 가을에 성수종이 과거에 올랐는데 그때에 남곤ㆍ김구ㆍ김식 및 조정암이 시관이 되었다. 사화가 일어나자 이항 등이 주장하기를,
○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 27)에 중종이 의정부에 전교하기를,
조원기가 벼슬에 있을 때에 청렴하고 깨끗하여 추직(騶直) 및 당봉(堂封)의 남은 것은 반드시 먼저 자매에게 도와주고 불쌍한 친척까지 돌보고 자기의 생활은 심히 박하게 하면서 태연하였다. 그가 가선대부ㆍ자헌대부의 품계에 오른 것도 모두 청백함으로써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 동시에 판부(判府) 송흠(宋欽)도 청백하고 검소하며 이익에 뜻이 없어 편안히 벼슬을 물러남으로써 조원기와 명성이 같아서 여러 번 품계를 뛰어 올라 1품에 이르렀다.
○ 영상 홍언필(洪彦弼)이 몸가짐이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생일날 자제들이 노래와 풍악으로써 술을 권하고자 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 사문 김천령(金千齡)이 사마시 및 전시에 장원이 되고, 아들 만균(萬鈞)과 손자 경원(慶元)이 모두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으니, 삼대 장원은 과거가 설치된 이래에 없던 일이다. 김경원의 아우 김명원(金命元)이 또한 갑과(甲科)에 올라 뒤에 정승이 되었다.
○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언필(洪彦弼)의 부인은 정승 송질(宋軼)의 딸인데, 홍언필과 송질이 모두 수상이 되고, 아들 홍섬(洪暹)도 수상이 되었다. 부인이 나이 90을 넘겼는데, 홍섬이 80이 가까운 나이에 삼년상을 마쳤으니 부인 같이 오래 살고 복을 누리는 경우는 일찍이 있지 않았다.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홍섬의 사궤장(賜几杖) 잔치에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 가정 기해년(1539, 중종 34)에 흥성 장태후(興聖蔣太后)거 돌아갔으니, 바로 세종황제(世宗皇帝)의 생모였다. 호광(湖廣)에 장사지내는데 황제가 따라 행행(行幸)하였다. 상이 흠문사(欽問使)를 보내려 하니, 조정 의론이 혹은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이청(李淸)을 사신으로 보내었더니, 그가 돌아올 때에 칙서를 내려 칭찬하고, 또 용의(龍衣)를 주었다. 상이 모화관까지 나가서 마중하고, 백관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별과(別科)를 보여 인재를 뽑았다.
○ 가정 경자년(1540, 중종 35) 3월에 상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거둥하여 무예연습을 관람하고, 입시한 종재(宗宰)ㆍ시신(侍臣)으로 하여금 율시를 짓게 하고 영상ㆍ좌상이 등급을 매기게 하여 상(賞)을 주고서 임금은 대내에 들어가고, 종재(宗宰)들로 하여금 함께 후원을 관람하고 꽃구경을 하게 할 적에 중관(中官)이 앞에 인도하고 궁중의 술을 주니 모두 취하여 나왔다. 이튿날 전문(箋文)을 지어 올려 사은하였다.
○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에 마유량(馬惟良)의 아내 조씨(趙氏)가 나이 1백 12세인데, 빠졌던 이가 다시 나서 크기가 쌀알만큼 하고, 이마 위에 검은 털이 다시 나서 길이가 한 치쯤 되고, 귀는 전연 듣지 못하고, 눈은 겨우 물건을 살피나 때로는 혹 구별하지 못하였다. 34세에 낳은 아들의 이름은 행곤(行坤)인데 이때에 나이가 80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감사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 가정 연간(嘉靖年間)에 사은사 정유길(鄭惟吉)이 북경에 도착하니 일본 사신도 거처하는 관사에 함께 머물렀다. 우리 나라 사신과 반열의 순서를 다투려 하기에 조회 알현을 같은 날에 하지 않았다.
○ 연산군이 한창 음탕한 짓을 할 때에 문ㆍ무관 및 유생ㆍ삼색(三色)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마를 매는 하인에 충당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간도 거기에 충당시킬 것인가를 물었더니, 연산군이 이르기를,
조정암(趙靜庵)이 일찍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 정덕 기묘년(1519, 중종 14) 겨울이 따뜻하여 10월에 전라도 각 고을에서 장미ㆍ야당(野棠)ㆍ복사ㆍ오얏이 다 꽃이 피어 초여름과 같았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0월 초7일 밤에 검고 누르고 흰 기운이 문창성(文昌星)에서 나오고, 꼬리가 왕량성(王良星)을 가리키며 한 필 베만큼이나 되고, 형체는 용과 같았는데 한참 만에 없어졌고, 흐르는 별과 나는 별이 사면에서 비 오는 것 같았다.
병신년 9월 30일에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와서 우림성(羽林星)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용성(龍星)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장(丈)이나 되며 붉은 색이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정덕(正德) 경진년 2월 20일 밤에 큰 별이 달과 서로 범하여 혹 올랐다가 혹 내렸다 하여 형세가 서로 싸우는 것 같았다.
가정 기해년 4월에 혜성(彗星)이 삼태성(三台星) 상태(上台)의 아래 꼬리에 나타났다.
경자년 4월 초8일에 동대문 밖 안암동(安岩洞)에 돌이 소리가 나서 가는 천둥과 같더니, 곧 스스로 터졌다.
○ 연산(燕山)이 온갖 악함이 다 갖추어져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을 당하였는데, 궁중의 행실이 더욱 추하여 근친(近親) 여자들에게 더러운 행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외명부(外命婦)에게 잔치를 베푼다고 대궐 안에 청하여 얼굴이 예쁜 자가 있으면 문득 끌어 들여 음행을 자행하였다. 부끄럼이 없는 여인은 혹 궁중에 머물기를 원하고, 총해하는 여인을 자주 불러 들여 유숙(留宿)하고 내보내고는 그 남편의 관직을 승진시키니, 당시의 사람들이 왕팔채(王八債)라고 조롱하였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성종(成宗)의 형이다. 그 재취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冠服)을 특별히 높이고, 은(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妃嬪)의 계급으로 대우하기까지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무인년(1518, 중종 13)에 문정왕후를 책봉할 때에, 동성(同姓)의 부녀들 중 전에 연산군에게 더럽힘을 당한 자가 있었는데, 대간이 음란하고 더러운 사람이 혹 대례(大禮)에 들어와 참여할 염려가 있다고 탄핵하여 밖에 내쳐 성 안에 있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동성의 부녀는 판서 윤순(尹詢)의 아내이고, 대간은 조정암(趙靜庵)이 정언으로 있을 때이다.
이현보(李賢輔)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감사는 직책이 풍헌(風憲)을 겸하였는데, 본도(本道)는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곳이니, 사사로이 통하는 문을 한 번 열면 정법(政法)이 무너지게 된다고 하여, 한계를 엄하게 하여 자제와 친척이라도 감히 공관(公館)에 출입하는 자가 없었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시를 짓는데 어려운 운을 쓰기에 능하였다.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서 일본 사신 붕중(弸中)을 국경에 가서 영접하였는데, 붕중이 역시 시를 알아서 주고받은 시가 심히 많았다.
붕중이 한 번은 ‘주역을 읽음[讀易]’으로 시제를 삼고, 어려운 운(韻)을 불렀다. 김안국이 곧 짓기를,
○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이 교리로 있을 때에 중종이 한 번은 야대(夜對)에 나왔다. 아뢰는 자가
뒤에 사화가 일어나게 되자 남곤ㆍ이빈(李蘋) 등이 귀양 보낼 사람의 성명을 적어서 보고하는데, 이연경의 이름이 첫머리에 있었다. 상이 붓으로 지우며 전교하기를,
○ 〈기묘현량과방목(己卯賢良科榜目)〉에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이 발문을 짓기를,
○ 판서 임호신(任虎臣)이 병이 중할 때에 그의 벗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문병하러 가서 병이 위독한 것을 보고 눈물이 절로 나왔다. 임호신이 《당음(唐音)》한 질(帙)을 뽑아서 주면서,
아문 근수(衙門跟隨)의 대신 세우는 자에게는 그 본인에게 가포(價布)를 징수함이 너무 과하였더니, 조정에서 의론하여 해조로 하여금 값을 거두어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임호신이 아뢰기를,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전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구언(求言)하는 데에 응하여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강(綱)이 하나이니, 임금의 마음이요, 목(目)이 열이니 가정(家政)을 엄하게 할 것,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기를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사람 쓰고 버림을 삼갈 것, 천도(天道)에 순종할 것, 인심을 받을 것, 언론의 길을 넓힐 것, 사치로운 욕심을 경계할 것, 군정(軍政)을 닦을 것, 기미(幾微)를 살필 것으로서, 극히 충성되고 착하고 곧은 말이었다. 중종이 깊이 탄복하고 장려하기를,
뒤에 인종이 즉위하자, 발탁하여 우찬성을 제수하였는데, 이언적이 재차 사양하니, 전교를 내리기를,
○ 가정(嘉靖) 갑진년에 북방 오랑캐가 명 나라에 크게 침범하여 황성(皇城)을 포위하자, 중국에서 우리 나라의 원병을 청할 뜻이 있으니, 우리 나라의 의론하는 자들이 요양(遼陽) 동쪽이 안전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마구 넘어 들어오면 난처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는 이가 있었다. 상이 서쪽 국경을 걱정하여 유관(柳灌)이 찬성으로부터 평안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에 바야흐로 대윤(大尹)ㆍ소윤(小尹)의 설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유관을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밖은 중하고 안이 가벼워진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상이 분부하기를,
인종 초년에 들어와 우상이 되었다.
○ 참봉 김봉상(金鳳祥)이 그의 아우 귀상(龜祥)ㆍ난상(鸞祥)과 더불어 우애가 돈독하였다. 일찍이 모친에게 고하기를,
○ 가정 을미년에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허항(許沆)ㆍ채무택(蔡無擇) 등이 바야흐로 김안로와 결탁하여 세력을 부렸는데 김안로의 아들 김기(金祺)를 전랑(銓郞)에 추천하여 달라고 극력으로 도모하였으나 홍섬이 듣지 않고, 말이 허항에게 저촉되었다. 그래서 허항이 죄를 얽어 모함하여 옥사를 만들어 대궐 뜰에서 국문하여 곤장을 쳐서 거의 죽게 되어 흥양(興陽)으로 오래 귀양보냈다. 금부 나졸이 압송하는 길에 공주 금강에 이르렀는데, 매를 맞은 상처가 심하여 붉은 피가 옷에 많이 묻었으므로 보는 사람이 피하였다.
이때에 과거(科擧)가 있어 남도의 선비들이 빽빽하게 서울로 올라오다가 나룻가에서 서로 만났다. 나이 가장 젊고 용모가 당당한 어떤 선비가 여러 사람 중에 크게 소리치기를,
홍섬이 들것에 실려 앓던 중에 이 말을 듣고 절로 정신이 상쾌해졌다. 천천히 그 성명을 물으니, 임형수(林亨秀)였다.
○ 창산 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의 살던 집이 남산 아래 있는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었다. 가정 신축년에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세를 얻어 살았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방문하매, 규암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더니, 일시의 문인들이 많이 차운하여 큰 책이 되었다.
여기서 그 기억나는 것을 적어 본다. 규암의 시에,
을사년 (1545, 인종 1)에 사화가 일어나자 규암공(圭庵公)이 탄핵을 당하여 청주(淸州)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퇴계(退溪) 선생이 시를 지어 부치기를,
정미년에 죽음을 내리는 명령이 있어 금부도사가 이르니, 공이 꿇어앉아 전지를 듣고 목욕한 뒤에 사약을 마셨다.
그의 종제(從弟) 기수(麒壽)에게 글을 부쳐 영결하기를,
수양을 알 수가 있다. 당시에 나이 49세였다. 금상 초년에 벼슬을 복직시켰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증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정렴(鄭磏)은 정순붕(鄭順朋)의 아들인데, 호는 북창(北窓)이다. 태어날 적부터 자질이 맑고 빼어났으며, 장성해서는 통달하지 못함이 없어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산수ㆍ중국어에 모두 배우지 않아도 능통하였다.
일찍이 그 아버지가 북경에 사신으로 갈 적에 따라가서 중국 사람과 말을 통하니, 모두들 놀래고 기이하게 여겼다. 6품의 관직으로 차례를 뛰어 등용하여 의학ㆍ산학ㆍ천문 세 학과의 교수를 겸하고, 포천 현감을 지내었다.
그 아버지가 을사년에 고변을 올릴 적에 극력 말렸으나, 듣지 않고 인하여 크게 거슬려서 집에 용납되지 못하고 과천 청계산(淸溪山), 양주(楊州) 괘라리(掛蘿里)에 많이 있었다. 항상 종을 시켜 약을 짓게 하여 새벽에 달여 먹고서 비로소 말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으니, 나이 40 남짓하였다.
그가 산에 있을 적에 산 아래 사람들의 하는 일을 알아서, 아무 집에서 방금 아무 일을 한다고 말한 것이 뒤에 알아보면 과연 맞았다. 그 학문이 선가(禪家) 진단(陳摶)의 유파에서 나온 듯하다.
○ 연산군이 마음대로 음탕과 포학을 자행할 때에 어떤 사람이 언문(諺文)으로 연산군의 죄악을 거리에 방을 붙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니, 연산군이 그것은 당시에 죄를 입은 자의 친당들의 소행이라고 지목하여 귀양간 사람들을 다 체포하여 고문이 혹독하였고 또 서울과 시골에 언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금지하였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권력을 독차지하여 독기를 부릴 때에 종루(鐘樓) 기둥에 글을 붙여서, 김안로와 허항 및 채무택의 죄악을 말한 자가 있었다. 그때에 심정(沈貞)이 죄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의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심정의 아들 사순(思順)이 한 짓이라고 지목하여 고문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명종 정미년에 정언각(鄭彦慤)이 고하기를,
○ 삼척(三陟)은 예전 실직국(悉直國)이었다. 신라 때에는 실직주(悉直州)라 칭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고쳐서 삼척이라 칭하였다. 우리 태조가 목조(穆祖)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부(府)로 삼고, 또 부사에게 붉은 서각 띠를 주었다. 고로(故老)들이 말하기를,
○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서울에서 자라났다. 소년시절에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혀서 날램과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 사람들이 대적하지 못하였다. 나이 30이 넘어서 비로소 깨달아 학문을 하여, 《대학》을 읽고 물러가 태인(泰仁)에 살았다. 스스로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다른 책을 널리 보면 정력이 분산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대학만 가지고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서 미묘한 것을 깊이 통달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송규암(宋圭菴 송인수의 호)이 전라 감사로 갔을 때에 그의 집에까지 가서 찾아갔더니, 이로 말미암아 유명해졌다.
명종 말년에 6품으로 뛰어 등용되어 역마를 태워 조정으로 불러 올려 치도(治道)를 묻고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제수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갔다. 금상(今上)이 교서를 내려 불러서 장령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이항의 학문이 글을 널리 배우지 아니하고 먼저 간요(簡要)한 것부터 취하였기 때문에 의리에는 혹 투명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사람들이 이를 결점으로 여기는 자가 있었다.
동시대에 성운(成運)이 보은(報恩)에 숨어 살았는데, 명종이 역마로 불러 올려 접견하고 정치하는 도리를 묻고는 관직을 주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금상(今上)이 장령ㆍ집의에 제수하였으나, 다 나오지 않다가 죽었다.
○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가 일찍이 관동(關東)에 유람하여 기행(紀行)한 글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이 그 끝에 발문을 지어 주었었다.
치재가 죽은 지 10여 년 뒤에 퇴계가 치재의 유산(遊山)할 때에 동행하였던 중을 만나서 글을 지어 주기를,
○ 찬성 허자(許磁)가 풍채가 준수하고 단정하여 동료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청탁을 받지 않고 인재를 너무 구별하다가 모가 나서 마침내 이기(李芑)의 모함을 받아 홍원(洪原)에 귀양가서 죽었다.
평생에 의리를 좋아하여 매양 봉록을 받으면 자기의 쓸 것을 헤아려 놓고 남는 것은 따로 저장하였다가 친척이나 벗에게 상사(喪事)가 있으면 구휼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었다. 그가 죽던 날에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 세종 때에 내시 별감 김원효(金元孝)가 순왕곡(舜王穀) 30이삭을 바치니 각궁(角弓) 하나를 주었다. 김원효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종자를 얻어 배양하여 바친 것인데, 줄기는 수수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고, 열매는 조와 같았다. 상이 내농소(內農所)와 동적전(東籍田)ㆍ서적전에 심어 배양하게 하였다.
○ 문종(文宗) 때에 강원도 춘천부 백성 윤치(尹致)가 효도로 어머니를 섬기었다. 어머니의 나이 90인데 항상 옆에서 모시고 눕고 일어날 적에 반드시 부축하고 음식을 마련하여 어머니가 먹고자 하는 대로 드렸다. 날마다 어머니가 밥 먹어야 밥 먹고, 어머니가 잠자야 잠을 잤다. 또 봄과 가을에는 한 마을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같은 부(府)에 사는 백성 유육생(劉育生)도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여 어머니가 나이 거의 90인데 항상 변기를 시중들되 조금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으며, 또 추위 더위를 가리지 않고 몸소 고기잡고 사냥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반드시 어머니에게 드리고 사계절마다 마을 사람과 친족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 가정 갑진년(중종 39, 1544, 인종 즉위년)에 상이 승하하니, 묘호(廟號)를 중종으로 올렸다. 인종이 전교하기를,
○ 영상 윤은보(尹殷輔)가 병으로 죽으니, 인종이 전교하기를,
유관(柳灌)ㆍ이기(李芑)가 추천에 참여하였는데, 이기를 낙점하였더니, 양사가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조금 있다가 유관이 대신하였다.
○ 인종 을사년에 삼정승 윤인경ㆍ유관ㆍ성세창(成世昌) 등이 아뢰기를,
명종 초년에 이기 등이 아뢰어 다시 그대로 썼다.
○ 윤임(尹任)은 인종의 외숙인데, 무인으로 중종조에 숭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인데, 사람됨이 간악하였다. 급제하여 비록 좋은 벼슬을 지냈으나, 청의(淸議)에 버림을 당하여 전랑ㆍ중서(中書)의 천거에 참여되지 못하였으므로 선비들을 분히 여기고 미워하였다. 당시 벼슬에 조급히 덤비는 무리들이 또 각각 편드는 당파가 있어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여 드디어 대윤(大尹)ㆍ소윤(小尹)이란 설이 있어서 유언비어가 점점 유포되었다.
무술년(1538, 중종 33)에 중종이 갑자기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는 명을 내리자, 중외(中外)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인종이 울면서 굳게 사양하여 중지되었다.
기해년에 동궁에 화재가 났는데, 사람이 지른 불이라고 말하였다. 대사간 이임(李霖)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곧 윤원형을 공조 참판으로 발탁하였으니, 대개 대비의 마음을 위안한 것이었다.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이 달이 넘도록 계속 탄핵하여 마침내 가선대부의 품계를 빼앗았다. 당시에 깊은 생각 있는 이들이 혹 무심한 것을 걱정하여 논의를 중지하기를 바랐다. 송인수의 종제 송기수(宋麒壽)가 송인수에게 외부의 의론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하여도 듣지 않았다.
송인수의 매부 성제원(成悌元)은 행실이 맑고 옛 학문을 좋아하는 이였으므로 인수가 마음으로 중하게 여겨 말만 하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제원이 하루는 송인수와 같이 자면서 윤원형의 일에 너무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조용히 말하였으나 끝내 생각을 돌리지 아니하고, 되풀이하여 거듭 말하니 자는 척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송인수가 평일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는데, 이 일에 있어서만은 이와 같이 고집하였다. 윤원형이 세력을 얻으매, 이임과 송인수가 모두 화를 당하였다.
○ 인종이 상주가 되어 상주 노릇을 예법대로 다하였으며, 대비를 지극한 효도로 받들었다. 여러 신하들이 애통을 억제하여 몸을 보전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날로 병이 들었다. 을사년 6월 27일에 경회루(慶會樓) 기둥에 벼락이 쳐서 기둥을 싼 쇠가 또한 부서지고 찢어졌다. 인종이 방금 병이 위독한 중에 묻기를,
인종이 훌륭한 성상의 자질을 타고나서 동궁에서 덕을 기른 지 30년이 되었으므로, 즉위하자 중외(中外)에서 태평의 정치를 볼 수 있겠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승하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자기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애통하여, 먼 지방의 유생들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싸가지고 달려와 대궐 앞에 곡하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1년도 못 되는 동안에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킨 덕택이 이와 같았다.
인종이 병이 위독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윤원로ㆍ윤원형 형제 등이 양궁(兩宮) 사이에 참소하고 이간질하여 반드시 화란을 만들려하다가 중종이 승하하니, 날마다 유언비어를 자전에게 들려서 인종을 불안하게 하였는데 윤원로가 더욱 간사하고 독하므로 사람들이 다 이를 갈았다.
명종이 즉위하매 성복한 다음날에 삼정승과 육조의 참의 이상이 윤원로의 죄악을 논열하여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양사와 옥당이 또한 여러 날 동안 아뢰니, 이에 외방에 부처하도록 명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유관 등이 죄를 입자, 윤원로는 불려 돌아왔다. 처음에 윤원로를 죄주려고 의론할 때에 참판 이준경(李浚慶)이 말하기를,
을사년 8월에 비밀전지를 예조 참의 윤원형에게 내렸으니, 그것은 윤임(尹任)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에게 죄를 주라는 일이었다. 윤원형이 대사헌 민제인(閔齊仁)ㆍ대사간 김광준(金光準)에게 그것을 전하였다. 이에 양사가 중학(中學)에 모였는데, 민제인과 김광준이 발의하여 윤임ㆍ유관 등을 죄주고자 하니, 집의 송희규(宋希奎), 장령 정희발(鄭希發)과 이언침(李彦忱), 지평 김저(金䃴)와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좌(朴光佐), 헌납 백인걸(白仁傑), 정언 김난상(金鸞祥)과 유희춘(柳希春) 등이 말하기를,
다음 날 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ㆍ이기(李芑)ㆍ허자(許磁) 등이 대궐에 들어가 아뢰기를,
대사헌 허자(許磁), 대사간 나세찬(羅世纘) 등이 합사하여,
정순붕이 또 소를 올려, 윤임ㆍ유관ㆍ유인숙 등의 죄악을 열거하니, 대비가 전교를 내려 칭찬하고, 윤임ㆍ유관ㆍ유인숙에게 죽음을 내렸다. 정순붕 이하를 녹훈(錄勳)하여, 처음에는 보사공신(保社功臣)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고쳤다.
○ 같은 날 정순붕 등이 면대하여 윤임 등을 죄준 뒤에 헌납 백인걸이 독계하기를,
○ 유관ㆍ유인숙ㆍ윤임 등이 귀양가게 되자 권벌이 대궐에 들어가 아뢰기를,
처음에 권벌이 아뢸 글의 초안을 가지고 승정원에 와서 원상(院相) 이언적에게 보이는데 매우 기휘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다. 이언적이 말하기를,
○ 경기 감사 김명윤(金明胤)이 승정원에 나아가 아뢰기를,
이유(李瑠)가 도망가자 팔도에 글을 내려 크게 수색하였다. 토산 현감 이감남(李坎男)이 이유의 종을 잡아서 앞세우고 찾아가니 안변 지방 황룡산(黃龍山) 속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토실(土室)을 지어 살고 있었다. 잡아다가 국문하니, 처음에는 불복하였다.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가하니 말하기를,
김명윤이 유생으로 있을 때에 헛명성을 얻어 현량과에 참여하여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파과(罷科)되자, 곧 다시 벼슬을 시작하여 익위사 시직이 되었고, 얼마 안 되어 다시 과거를 보아 합격하였다. 얼굴을 바꾸어 가며 시세에 아부하여 이익을 탐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공론이 그를 침 뱉고 더럽게 여겼다. 금상 조정에서 벼슬을 삭탈하고 문밖으로 쫓겨나 죽었다.
○ 진사 안세우(安世遇)가 윤임의 여종 모린(毛麟)이란 자를 잡아 바치면서,
이보다 먼저 언문 편지가 든 명주 주머니를 대궐 궁중 뜰에서 주은 자가 있었는데, 편지의 대략에,
그래서 윤임의 첩과 노비 및 사위 이덕응(李德應)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옥사를 이루고, 유관ㆍ윤임ㆍ유인숙 등은 죽은 뒤에 역적의 형벌을 행하고, 안세우는 공신에 기록되었다.
안세우는 소시적부터 간악하고 사특하였다. 집이 장의동(藏義洞)에 있는데 친구 박응립(朴應立)이 일찍이 그 집에 갔다가 안세우를 보고 말하기를,
하였다. 안세우가 안색을 변하며,
○ 가정 을사년 10월에 우상 이기(李芑)가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 윤원로와 윤원형이 이미 권세를 잡으니, 형제가 권세를 다투어 서로 알력이 생기고 또 윤원로가 공신에 참여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병조 좌랑 윤춘년(尹春年)이 상소하여 윤원로의 죄악을 논하기를,
상이 대신을 불러 그 상소를 보이고 윤원로를 파직시켰다. 그때 돈녕도정이었다.양사가 잇달아 논하니, 명하여 멀리 귀양 보냈다가 얼마 안 되어 사사(賜死)하였다.
○ 병오년 4월에 의정부와 예조가 함께 의론하여 청백(淸白)한 자와 효행이 있는 자를 뽑아서 아뢰었다. 청백에는, 행 상호군 박수량(朴守良), 대사간 조사수(趙士秀), 공조 정랑 김순(金洵)이요, 효행에는 이조 좌랑 홍담(洪曇), 유학 박민헌(朴民獻), 참봉 변훈남(卞勳男)등인데, 가자(加資)하고 혹은 승차(陞差)하였다.
○ 풍덕인(豊德人) 정흥종(鄭興宗)이 사주를 보고 점치는 법을 아는데 첩책(帖冊) 속에다 사대부들의 오주(五柱)를 적어 두고, 또 자전과 대전의 오주를 적어 두고 선분(先分)이 어떠니 후분(後分)이 어떠니 하는 설이 있었다. 진복창(陣復昌)은 정흥종과 한 고을에 살아 서로 그 일을 알았다가 고발하여 삼성(三省)이 번갈아 국문하여 의성위(宜城尉)의 아들 남기(南沂) 등이 연루되어 아울러 극형을 받았다.
○ 찬성 허자(許磁)가 소시에 김모재(金慕齋)의 문하에 배워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처음에 비록 정순붕 등으로 더불어 일을 같이 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 역적이란 이름을 씌워 사류(士類)를 모두 다 죽이기까지 한 것은 그 본심이 아니었으므로 유관 등을 죄줄 때에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음모하였다는 것은 죄명이 과중하다고 논하였고, 그 뒤에 매양 사림을 옹호하는 말이 있었다. 항상 스스로 탄식하기를,
진복창이 사간에 제수되자 허자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논하기를,
○ 허자가 을사년의 변고에 사류를 구하다가 이기(李芑)에게 거슬렸더니, 녹훈(錄勳)하는 날에 위에서 공신들의 자손까지 아울러 기록하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허자는 굳이 사양하여 일곱 번 만에 윤허를 얻었으므로, 다른 공신의 자제도 다 녹훈하지 못하고 오직 정순붕의 아들 정현(鄭礥)만이 참여하였다. 이기가 낯빛을 변하며,
이로 말미암아 이기가 더욱 허자에게 불쾌하였다. 뒤에 허자가 이조 판서가 되어 전의 제조를 겸직하였을 때에 이기가 그의 친한 의관 배천령(裵千齡)으로 오랫동안 전의(典醫)를 맡게 하기 위하여 그가 데리고 다니는 녹사(錄事)로 하여금 정청(政廳)에 와서 청하게 하였다. 허자가 노하여 그 녹사를 뜰 아래 끌어내려 꾸짖기를,
그때에 민제인도 사림을 구제하다가 죄를 입어 공주(公州)에 귀양가 있었는데, 의식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허자가 그것을 듣고 민제인의 아우 제영(齊英)을 당진 현감에 제수하였으니, 그것은 민제인이 의탁할 데가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간당들이 미움을 품고 있었다. 마침 허자가 친한 최여주(崔汝舟)에게 말하기를,
진복창은 항상 허자가 상소하여 자기를 논핵한 것으로서 원망하고 이무강도 허자에게 용납을 받지 못한 것으로서 혐의를 품고 있었고 동시에 다 이기의 심복이었다. 세 사람이 서로 더불어 죄를 얽어 모함하여 역적을 두둔한 일 및 민제영을 당진 현감에 제수한 일 등으로 논핵하였다. 처음에 황해도 연안부에 부처하였다가 당일에 강원도 간성(杆城)으로 정배하였으며, 당일에 전라도 낙안군(樂安郡)으로 이배(移配)하고 이튿날 또 함경도 홍원현(洪原縣)으로 이배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기가 그에게 죄를 더 주어 사사하기를 청하려고 계초(啓草)를 만들어 가지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미처 아뢰기 전에 대궐 안에서 갑자기 죽었으므로 허자가 면하게 되었다.
홍원에 있은 지해를 넘어서 병들어 죽었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그가 죄 없이 모함을 당한 실정을 극력 말하니, 상이 또한 후회하고 깨달아서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작첩을 도로 주고 예(禮)로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때는 가정 신해년(1551, 중종 36)이었다.
○ 이기가 중종조에 장리(贓吏)의 사위이므로 현관(顯官)이 될 수 없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이기는 재주가 있으니 파격으로 허통(許通)할 만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언적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허통해야 한다는 의론을 더욱 주장하여 이기가 드디어 좋은 관직을 지냈다.
뒤에 이언적이 이기의 심술이 부정한 것을 알아내고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사 이천계(李天啓)에게 말하기를,
이기가 다시 정승이 되어 한 번은 경연에서 아뢰기를,
양사가 따라서 탄핵하여 이언적이 훈적(勳籍)과 벼슬을 삭탈당하고 얼마 안 되어 멀리 귀양가고 이천계도 또한 귀양갔다.
○ 삼정승 윤인경ㆍ기ㆍ정순붕이 아뢰기를,
○ 황해도 백령(白翎)ㆍ대청(大靑) 등의 섬에 수상한 사람들이 올라와서 집을 짓고 대장간을 설치하고 배를 만들고 있었다. 감사 정대년(鄭大年)이 군사를 풀어 40여 명을 잡아서 나누어 가두고 아뢴 다음 사실을 조사해 보니 모두 중국 사람으로 역(役)을 피하여 몰래 온 자들이었다. 중국으로 돌려 압송하는데, 주회인(走回人)과는 다르므로 다만 식량을 주고 의복은 주지 않았다.
○ 인종(仁宗)을 장차 부묘하게 되니, 세조가 체천해야 하겠기에 동ㆍ서반의 2품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불러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금상조(今上朝 선조)에 명종을 문소전(文昭殿)에 부(祔)할 때에 정승 이준경(李浚慶) 등의 의계에 의하여 인종을 문소전에 옮겨 모시었는데, 만약 오실(五室)의 제도를 지킨다면 예종이 옮겨져야 되기에 인종ㆍ명종 2대를 일실(一室)로 하였다.
○ 정미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노(李櫓)가 한 봉서(封書)로 입계하기를,
정언각이 또 독계하기를,
양윤온(梁允溫)이 윤임에게 연루되어 해남에 귀양가 있었는데, 정언각이 전라 감사로 있을 적에, 양윤온 이 관사(官舍)에 출입한다고 장계하므로 잡아 와서 매를 맞다가 죽었다. 정언각이 뒤에 경기감사로 있을 적에 말에서 떨어졌는데 한쪽 다리가 안장의 등자(鐙子)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고 말이 달아나며 차서 두뇌와 골절이 부서져 죽었다. 사람들이 다 통쾌히 여겨, ‘하늘이 아시어 정언각이 죄의 보복을 받았다.’ 하였다.
○ 임형수가 제주 목사로 있다가 파면되어 나주의 본집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받았으므로, 금부 도사가 달려가 나주에 이르렀다. 전례에 그 고을 수령이 금부 도사와 같이 가서 죽는 것을 지켜보는데, 그때에 마침 나주 목사와 판관이 다 연고가 있어 사문(斯文) 양희(梁喜)가 마침 나주 교수로 있었는데, 임형수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하여 갔다. 임형수가 나와 꿇어 앉아 전지를 듣고는 그 부모에게 들어가 하직하기를 청하자 애처롭게 여겨 허락하고, 이미 들여보낸 뒤에는 결별하기 어려워 시간이 지체될까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보게 하였더니 임형수가 안방에 들어가지 않고 다만 뜰 아래에서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그의 아들이 나이 10세가 못되었는데 불러서 훈계하기를,
임형수가 젊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문장에 능하고 활을 잘 쏘고 풍채가 아름답고 기개가 높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국기(國器)라고 하였다. 수찬으로 있다가 나가서 회령 판관(會寧判官)이 되었을 때에 혹 날을 걸러 음식을 먹기도 하고, 혹 한꺼번에 몇 사람의 몫을 겸하여 먹으면서 말하기를,
변방의 오랑캐를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후일에 지사(知事) 강섬(姜暹)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물(貢物)을 바치러 가는 호인(胡人)을 만났는데, 우리나라에 가까이 거주하는 자였다. 통사(通事)에게 묻기를,
○ 정미년(1547, 명종 2) 12월 2일에 햇빛이 없고 위 아래에 해와 같은 둥근 형상이 있고, 또 붉은 색이 있었다. 상이 삼정승 윤인경ㆍ기ㆍ정순붕 등을 불러서 재변을 만나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전교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재변을 만났을 때에 위에서 대신을 불러 반성하여 정치를 닦을 도리를 물었는데, 도리어 아첨하는 말을 올렸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 기유년 정월에 임금이 즉위한 이후의 경연관 등에게 대궐 뜰에서 잔치를 차려 주되 1등의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혹은 가자(加資)를 시켜 주고, 혹은 물품을 등급 있게 주고, 또 각각 납촉(蠟燭) 한 자루씩을 주고 밤이 깊도록 천천히 놀다가 파하게 하였다. 즉위한 이후의 경연관이 모두 62인인데 잔치에 참여한 자가 49인이었다. 이튿날 이기(李芑)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임금 및 대비에게 감사하였다.
윤임(尹任)ㆍ유관(柳灌) 등이 죄를 당한 뒤에 전후의 추안 및 계사들을 모아 서술하여 ‘을사정란기(乙巳定難記)’라고 이름하여 서국(書局)으로 하여금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조 낭관들이 사사로이 가질 책을 인쇄하려 하자, 정랑 유감(柳堪)이 말하기를,
명종 말년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 가정 정미년에 의주 목사가 명 나라 황후 방씨(方氏)가 붕서(崩逝)하였다고 급히 아뢰었다. 전일 태황태후가 붕서 할 때의 규례에 의하여 조회와 시장을 3일 동안 정지하고 애통의 의식은 하지 않았다. 기유년에 황태자가 홍서하였을 때에 조회와 시장을 3일 동안 정지하고 애통하는 의식은 없고 사신을 보내어 위문하고 겸하여 향을 올렸다.
○ 이약빙(李若氷)이 정언각(鄭彦慤)이 바친 양재역 벽서로 인하여 죽음을 받고, 아들 이홍남(李洪男)도 연루되어 영월로 귀양갔다. 이홍남의 아우 홍윤(洪胤)은 윤임의 사위인데, 충주에 살고 있었다.
기유년 4월에 이홍남이 귀양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사인(舍人) 정유길(鄭惟吉)과 교리 원호변(元虎變 정유길은 그의 동서이며, 원호변은 그의 처남이다)에게 글을 보내었는데, 대략에,
진사 강유선(康惟善)이 지조와 기절이 있어 유림에 명망이 중하였다. 사문 박민헌(朴民獻)과 친한 벗이었는데, 일찍이 병오년(1546, 명종 1) 봄 과장(科場)에 함께 들어갔더니, 표문(表文)의 제목 ‘원종공신을 도태하기를 청함[請汰原從功臣]’이라 하였다. 강유선이 박민헌에게 말하기를,
이홍남은 귀양살이에서 풀려와 벼슬을 받았고, 정유길과 원호변도 상(賞)을 받았다. 금상(今上) 초년에 당시 연루되어 귀양가고 적몰된 사람은 모두 신원하여 석방되고, 이홍남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죽었다.
○ 정미년(1547, 명종 2) 9월에 인종의 상(喪)을 마치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전(勤政殿) 뜰 위에 나와 성렬 왕대비(聖烈王大妃)의 존호를 인명(仁明)으로 더 올리고, 왕대비의 존호를 공의(恭懿)라고 하니, 백관이 하례를 행하였다. 또 권정례(權停禮)로 중전의 책봉례를 행하였다. 윤 9월에 알성(謁聖)하여 작헌례를 행하고, 인하여 인재를 뽑았다. 대사성 조사수(趙士秀)가 칠잠(七箴)을 지어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큰 사슴 가죽을 하사하였다.
○ 정덕(正德) 신사년(1521, 중종 16) 별과(別科)에 남곤(南袞)이 독권관이 되었더니, 어느 시권을 하관(下官)은 취하지 않고자 하는데, 남곤이 극력 고집하여 글에 능한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여 드디어 취하였다. 성명을 봉한 것을 떼어 보니, 황헌(黃憲)인데, 시골의 이름 없는 선비였다. 남곤이 부끄러워하였다. 황헌을 자기 집으로 불러 보니, 황헌이 나이가 젊고 살빛이 희어 용모가 좋았다. 남곤이 전일에 자기 지감(知鑑)이 밝았던 것을 실증시키기 위하여 극력 끌어 올려서 홍문관 정자로 발탁시켜 빨리 빛나고 중요한 관직에 올라서 명종 초년에 정승으로 들어갔으니, 나이 50이 채 못 되었다. 천성이 험하고 간사하였다. 을사 연간에는 상중에 있어 공신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가 이때에 정승이 되자, 과거 정유년(1537, 중종 32)에 자기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김안로를 탄핵하여 죄주었던 공을 스스로 자랑하여 갖은 방법으로 활동하여 공신에 추록되었다.
한 번은 빈청에서 회의하여 당인(黨人)에게 죄를 더 줄 때에 극죄(極罪)의 이름을 쓴 것이 매우 많았는데, 이언적, 권벌 같은 이가 다 죽어야 할 명부에 들어 있었다. 대비가 그것은 너무 중하다고 하여 듣지 않으니 황헌이 굳게 청하여 밤이 깊도록 물러나지 않았고, 또 좌리공신을 새로 기록하자는 말을 내어 많은 사람을 기록하여 남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하니, 이로 말미암아 공을 탐하고 남을 해치는 무리들이 다투어 옥사를 만들어 사람을 죽여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였다.
윤원형이 황헌을 미워하여 부제학 진복창(陳復昌)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진복창이 드디어 상소하여 황헌의 죄를 논하는데 이홍윤(李洪胤)의 옥사를 다스리기를 가볍게 하였다고 말을 만드니, 곧 명하여 정승을 갈고 얼마 안 되어 공훈과 관직을 빼앗고 고향으로 추방하였다.
진복창이 처음에 승정원에 상소문을 바치고 옥당에 물러나와 동료에게 말하기를,
윤원형이 황헌을 죄주자는 뜻을 이미 대비에게 아뢰었고 진복창은 그 지시에 따라 한 것이므로 반드시 죄를 얻을 염려가 없는데도 거짓으로 곧은 말을 하는 척하였으니, 어찌 옆에서 보는 자가 그의 내심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줄을 알랴.
○ 홍문관 박사 안명세(安名世)가 일찍이 사관(史官)이 되어 을사 연간의 일기를 편찬할 때에 회피하지 않고 사실대로 썼다. 후일에 사국(史局)에 들어간 자가 보고 이를 이기(李芑)에게 말하니, 안명세를 역적을 옹호하여 사초를 사실대로 쓰지 않았다고 지목하여 대궐 뜰에서 국문하였다. 안명세가 자기의 옷 폭을 찢어 소(疏)를 써서 예로부터 사관을 죽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논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진복창이 국문에 참여하였다가 그 소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안명세가 드디어 참형을 당하게 되어 수레에 실려 나오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때에 수찬 윤결(尹潔)이 능원위(綾原尉) 구사안(具思顔)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취중에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말을 하였더니, 구사안의 고발로 또한 하옥되어 장형(杖刑)을 받아 죽었다. 금상조에 안명세를 복직하였다. 옥당에 차자를 올려 그 원통하게 죽었음을 호소하고 증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무신년 5월에 좌상 이기(李芑)가 갈리고 홍언필(洪彦弼)이 후임이 되었다. 영상 윤인경이 아뢰기를,
○ 기유년 9월에 공신들에게 대궐 뜰에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영상 이기에게 전교하기를,
외척을 너무 높이고 키우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닌데, 지난 해에 자헌대부의 계자에 올리기를 청하고, 이제 또 1품에 올리기를 청하니, 소인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태도가 추하다.
○ 서얼 정상(鄭瑺)이 신사년(1521, 중종 16)에 송사련(宋祀連)과 같이 고변하여 상과 벼슬을 받았는데, 뒤에 민간에 세력을 부려 방자하고 의복과 거처가 참람 되고 사치스러워 사헌부에 잡아 가두고 죄를 주려 하였더니, 정상이 옥관에게 말하기를,
정원에서 정상이 자기 죄를 면하기 위하여 국가의 큰일이 있다고 무고하여 임금을 속이고 대간(臺諫)을 동요시킨다고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의금부로 옮겨 가두어 추국하여 전 가족을 경원(慶源)으로 이주시켰다.
○ 기유년에 명하여 옛날 정업원(淨業院) 터에 새 인수궁(仁壽宮)을 지었다. 신해년에 다시 양종(兩宗 교종과 선종)을 세우고 선과(禪科)를 설치하고 중이 되려는 자에게 도첩(度牒)을 주어 허락하였다.
이때에 대비가 한창 불사(佛事)를 숭상하는데 요망한 중 보우(普雨)가 방자하게 떠벌려서 불교가 너무 성하므로, 옥당과 양사가 해가 넘도록 논쟁하였으나 되지 않았으며, 대신들도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에서 논의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윤원형은 시종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대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을축년에 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이 대간(臺諫)의 말을 따라 양종(兩宗) 및 선과를 혁파하였다.
○ 함경도 어사 왕희걸(王希傑)이 장계하기를,
승정원에서 법관에게 부쳐서 심문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양사 및 대신이 추문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조 판서 송세형(宋世珩)이 독계하여, ‘보우가 교만하고 독하여 일국 사람들이 떠받들고 따르기를 임금과 같이 하여도 한 사람도 그것을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불측한 화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극력 아뢰어 보우가 행한 패악한 일을 많은 말로 낱낱이 들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가정(嘉靖) 임자년(1552, 중종 31)에 팔도에 명령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니, 성수침(成守琛)ㆍ이희안(李希顔)ㆍ조식(曺植)ㆍ성제원(成悌元)ㆍ조욱(趙昱)이었다. 지조와 행실이 특이하다고 하여 6품의 계자에 뛰어 올려 현감으로 제수하였는데, 조식은 취임하지 않았다.
○ 가정 신해년 3월 1일에 흙비가 왔다.
임자년 6월 30일 유시(酉時)에 동방에 누른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여 그 빛이 땅에 비쳤다.
을묘년 5월에 진주(晉州)에 사는 사비(私婢) 윤덕(允德)이 임신한 지 4개월 만에 생산하였는데, 온 몸에 흰 털이 있어 학(鶴)의 새끼와 같았다.
○ 진복창(陣復昌)이 을미년 송경친시(松京親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가문이 낮았는데 그 아버지 의손(義孫)이 녹사(錄事)로 있다가 나가서 현감이 되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복창의 어머니가 여러 번 남자를 거친 뒤에 의손에게 갔다.’ 하여 사람들이 더욱 친하게 여겼다. 진복창이 문장에 능하고 활쏘기를 잘하고, 또 꾀가 많고 간사하여 잘난 척하므로 구수담(具壽聃)의 무리와 같은 이도 속임을 당하여 그를 남들에게 칭찬하고 추천하였다.
윤원형이 국권을 마음대로 결정하여 선비들을 모두 죽일 적에 진복창이 드디어 그에게 붙어서 사냥개가 되었다. 윤원형이 해치려고 생각하는 자가 있으면 진복창이 곧 배격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당대의 명사들이 죽고 귀양간 자가 극히 많았으므로 그를 독사라고 지목하여 모두 흘겨보았다. 구수담도 또한 마침내 그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었다.
그 뒤에 윤원형도 그를 싫어하여 진복창을 삼수(三水)로 귀양보내고 또 귀양살이 하는 중에 폐단을 일으킨다고 하여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었다.
같은 때에 이무강(李無彊)이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음험하고 간사하여 진복창과 결탁하여 악한 짓을 협조하였다. 진복창이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마침 홍문록(弘文錄)을 하는데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이무강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북도에 갔을 때에 지방관이 을사년에 귀양온 사람을 도와 준 이가 있었는데 그를 적발하여 죄를 주었다. 뒤에 진복창이 패하여 귀양가자, 이무강도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니, 수령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준경(李浚慶)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이무강이 탄핵하여, 문의 재주를 겸하였으니, 병권을 맡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뒤에 준경이 순변사가 되어 경원에 도착하였을 때에 역졸이 성중에 있는 오막살이집을 가리키며,
○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나이 여섯 살 적에, 어릴 때에 교양을 시키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조정 신하 중에서 학문과 조행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보양관이라 칭하여 때때로 들어가 뵙도록 하였는데, 안현(安玹)ㆍ이준경ㆍ조사수(趙士秀)ㆍ임호신(任虎臣)이 그 선택에 참여 되었다.
순회세자의 가례를 행할 시기가 되었는데, 윤원형이 그의 사위 안덕대(安德大)의 가까운 친척인 황대임(黃大任)의 딸을 사주쟁이와 짜고 오주(五柱)를 음양서(陰陽書)의 법에 맞도록 고쳐서 가장 길하다고 하여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혼인할 기일이 겨우 열흘쯤 남았는데, 황대임의 딸이 문득 뱃병을 앓아 매우 중하였다. 위에서 병이 있는 사람이 동궁(東宮)의 배필이 될 수 없다고 하고, 또 다른 데로 시집가기는 어려우므로, 강등하여 양제(良娣 세자의 후궁)로 삼았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다.
다시 윤옥(尹玉)의 딸을 뽑아서 가례를 행하였더니 이듬해에 순회세자가 일찍 죽었다. 윤빈(尹嬪)은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 25)에 죽었다. 장사하기 전에 왜적이 경성에 들어왔으므로 드디어 그 시체를 잃고 지금까지 장례를 지내지 못하였다.
○ 병진년(1556, 명종 11)에 무장(茂長)에 사는 유학 안서순(安瑞順)이 조정에서 구언(求言)하는 명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극력 말하고, 그 끝부분에 또 유관(柳灌) 등 3인의 원통히 죽은 것을 논하면서,
전라 감사가 그 상소문을 바치고 안서순(安瑞順)을 가두어 놓고 기다렸더니, 명하여 잡아 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하고 난언죄(亂言罪)로서 참형에 처하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 대사성 민기(閔箕)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때문에 관직이 갈리자, 대신이 당하관 중에 글에 능하고 재주와 조행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임명하기를 계청하여 이에 부응교 이황(李滉)으로 제수하였더니 이황이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좌상 상진(尙震)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 명종(明宗)이 즉위한 초기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하여 함께 정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수렴(垂簾)의 의식을 의정(議定)할 때에 명종도 발 안에 앉기로 되었더니, 대사헌 홍섬(洪暹) 등이 논쟁하기를,
○ 기유년(1549, 명종 4)에 이홍남(李洪男)이 고변한 뒤에 충주(忠州)에 귀양살이 하는 백성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있었는데, 기회를 타서 술책을 부려 죄를 면하고 상(賞)을 받으려고 품관들의 향회(鄕會)의 문서를 훔쳐서 장차 고변하려고 하는 것을 어느 사람이 알고 잡아서 관청에 고하였다. 고을 원이 이치(李致)가 감사 이해(李瀣)에게 보고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이해가 보고에 의하여 형추하니, 최하손이 형벌에 죽었다.
이홍남이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관청에 드나들면서 귀찮게 청탁을 하기에 이해가 비웃고 경멸하였다. 이홍남이 이해에게 감정을 품었고, 사간 이무강(李無彊)도 이해에게 원혐(怨嫌)이 있었기 때문에 이홍남이 이무강과 그의 처족인 대사간 원계검(元繼儉)을 사주하여 이해와 이치(李致)를 무고하되 최하손을 죽여 고변을 못하도록 입을 없애어 역적을 옹호하였다고 하니, 잡아다 국문하여 이치는 형장 아래에 죽고 이해는 형장을 맞고 죽음에서 감등하여 갑산(甲山)으로 귀양살이 하러 가다가 양주(楊州)에 이르러 죽었다.
이해는 당시 명망이 있었다. 이기(李芑)가 정승이 될 때에 이해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탄핵하여 갈았으니 이 옥사가 혹독한 것은 이기가 실로 주장한 것인데 인심이 통분하고 애석히 여겼다. 금상 초년에 이해와 이치에게 모두 직첩을 도로 주었다.
○ 영상 심연원(沈連源)이 병이 위독하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명종(明宗) 때에 일찍이 친정에 가서 상을 내렸더니, 임권(任權)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 민기문(閔起文)은 을사년의 명사로서 지평으로 있다가 죄를 입어 귀양갔더니, 금상의 조정에서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 이양(李樑)은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처남이다. 위인이 어리석고 기력이 많으니 곁에 있는 동료들이 다 비웃었다. 명종이 갑자기 발탁해 등용하여 작은 관직으로부터 수년도 못 되어 판서에 올랐다. 대개 그때에 윤원형이 권력을 마음대로 결정하니, 명종이 속으로 두려워하여 이양의 세력을 심어 윤원형과 겨루게 하려 한 것이다.
이양이 총애를 믿고서 교만하고 방자하여 기세가 불꽃 같으니, 일시의 이익을 즐기는 무리들이 휩쓸려 따라붙어 이감(李戡)ㆍ권신(權信)ㆍ고맹영(高孟英)ㆍ김백균(金百鈞)ㆍ이영(李翎) 등은 그의 심복이 되고, 김명윤(金明胤)ㆍ정사룡(鄭士龍)ㆍ원계검(元繼儉) 등이 계자(階資)가 높이 오른 사람들로서 그에게 아첨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신사헌(愼思獻)은 본시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으로서 정사룡에게 뇌물을 바치고 시제(試題)를 사서 과거에 올랐다가 공론으로 인하여 과거를 삭탈당하였다가 이양에게 빌어서 복과(復科)되었으므로, 종이 상전 섬기 듯하였다. 윤백원(尹百源)은 윤원형의 조카이다. 그의 아비 윤원로(尹元老)가 윤원형 때문에 죽은 것을 원망하여 또한 이양에게 붙었다.
이양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이 어리석고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계해년(1563, 명종 18)알성 친시(謁聖親試)에 장원으로 뽑혀 중외(中外)에서 쑥덕거려 모두 말하기를, ‘이정빈의 장원은 술책을 써서 된 것이다.’ 하였다. 달이 넘지도 아니하여 전랑에 추천되었다. 조금 있다가 이양이 이조 판서가 되자 이정빈이 상피(相避) 때문에 갈리게 되자 동료에게 부탁하여 유영길(柳永吉)을 후임으로 추천하니, 그의 절친한 벗이었다. 그때에 정랑 박소립(朴素立)과 좌랑 윤두수(尹斗壽)는 매우 맑은 의론을 가진 사람이므로 그 말을 듣지 않으니, 이정빈이 감정을 품었고, 또 이문형(李文馨)ㆍ허엽(許曄) 같은 이가 이양에게 붙지 않고 기대승(奇大升)ㆍ윤근수(尹根壽)가 후진(後進)으로서 선비들의 추앙을 받으므로 이양의 무리들이 꺼렸다.
이에 이감(李戡)이 대사헌으로서 그들을 탄핵하기를,
심의겸(沈義謙)은 바로 이양의 생질로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왔는데, 선비들과 사귀어서 이양이 하는 일을 반대하려 하였다.
이때에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으로 있었으니, 또한 이양의 당파였다. 이양이 이문형ㆍ허엽 등을 내쫓으니 공론이 크게 놀래었다. 심의겸이 이양을 제거하려고 기대항에게 왕래하면서 모의하니 기대항은 심강(沈鋼)의 친척이었다. 심강이 이미 왕비에게 통하여 승낙을 받고서 이에 옥당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서 이양의 죄악을 탄핵하고 또 양사가 입을 닫고 말하지 않은 죄를 논하여 아울러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 그리고 이문형 등을 도로 불러 등용하였다.
얼마 안 되어 죄를 더 주어 이양ㆍ이감ㆍ권신ㆍ신사헌ㆍ이영ㆍ윤백원 등은 멀리 귀양 보내고, 고맹영ㆍ김백균은 중도부처하고, 정사룡ㆍ원계점ㆍ이정빈ㆍ이언충ㆍ이중경ㆍ황삼성(黃三省)ㆍ조덕원(趙德源)ㆍ고경명(高敬命)ㆍ이성헌(李成憲)ㆍ강극성(姜克誠)ㆍ윤인함(尹仁涵) 등은 혹 삭출하거나 혹은 파직하되 차등이 있었다. 이양이 처음에는 왕비의 외숙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세력이 커지게 되어서는 내시들과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을 엿보게 하여 알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비루한 자들이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여 못할 짓이 없음이 이처럼 두려운 것이다.
○ 계해년(1563, 명종 18)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죽어 후사가 없었다. 을축년에 명종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니 중외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영의정 이준경이 약방제조 심통원(沈通源)과 상의하여 약방으로부터 왕비에게 아뢰어, 왕위 계승자를 미리 정하여 인심이 의지할 데가 있도록 하기를 청하였더니, 왕비가 덕흥군(德興君) 셋째 아들 아무개라고 써서 내리니, 곧 금상(今上 선조)이었다 얼마 안 되어 명종의 병이 낫자, 그 일을 고하고 세자의 명호(名號)를 일찍 정할 것을 청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매우 듣기 싫어하였다.
이준경이 일찍이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정국본(定國本)에 관한 대목을 가지고 어전에 들어가서 후사를 미리 정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으로 말하고 또 상소하여 논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이준경이 이로 말미암아 임금에게 거슬렸다.
정묘년에 상의 병이 위독할 때에 대신이 후사를 물으니,
그날 상이 승하하자 금상(今上 선조 즉 하성군)을 잠저(潛邸)에서 맞아 와서 즉위하여 중외(中外)가 안정된 것은 이준경의 힘이었다.
○ 금상이 들어와 대통을 이을 때에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 선조의 생모)의 상(喪)을 당하여 장례를 지내기 전이었다. 병조 판서 원혼(元混)ㆍ도승지 이양원(李陽元)이 잠저(潛邸)로 가서 모시고 나와서 견여(肩輿)를 타고 광화문 동쪽 협문(夾門)을 거쳐 들어가서 대행(大行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앞에 곡림하고 드디어 즉위하였다. 백관이 하례할 때에 잠저의 하인 및 기타 무식한 무리들이 을사년과 같은 녹공(錄功)의 혜택을 바래고 다투어 이름을 써서 들이고, 조정 벼슬아치도 대궐에 곡하러 가지는 아니하고 먼저 그곳으로 간 사람까지 있었다. 그 이름을 기록한 큰 책을 승지가 승정원으로 가져갔다가 곧 불태워버렸다.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이 을축년(1565, 명종 20)에 새 임금이 서는 데에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여 여러 번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심통원이 외척의 인연으로 정승의 자리에 외람되이 앉아 재물을 탐하기 끝이 없었으므로 공론으로 인하여 벼슬이 깎이고 시골로 추방되어 마침내 죽었다.
○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만 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물으니, 말하기를,
○ 명종이 태학을 시찰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좌정하여 친필로 글을 써서 여러 유생에게 유시하기를,
○ 명종이 일찍이 후원(後苑)에 거둥하여 입시한 신하에게 모두 술을 주었다. 정승 상진(尙震)이 본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므로 이날 취하여 길 옆에 쓰러져 있었다. 명종이 환궁할 때에 이를 보고 좌우에게 물어서 상진인 줄 알고는 분부하기를,
○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가 영월군에 있는데, 노산군이 죽은 뒤에 군수가 갑자기 죽는 이가 많으니, 세상에서 흉한 고을이라고 하였다.
판서 박충원(朴忠元)은 벼슬길이 막혔다가 다시 나와 영월 군수에 제수되었다. 부임하자,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어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올렸다. 그 축문에 이르기를,
○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젊어서부터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다. 명종 때에 벼슬하다가 물러나 고향인 예안(禮安)에 살면서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성현의 경서(經書)에 정밀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 주자의 글에 힘을 썼다. 벼슬하거나 그만두는 것을 오로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다. 명종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 판서에까지 발탁되어 임금이 친필의 글을 내려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하고 나가지 않기도 하였다.
금상이 즉위하자, 찬성으로 승진시켜 두 번이나 교서로 불렀다. 무진년(1586, 선조 1)에는 부름을 받고 와서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니, 봉사(封事) 수천 자(字)를 올렸는데, 모두 시국에 적절한 내용이었다.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니 상이 매우 성의로 대우하였다. 얼마 안 되어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잇달아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만류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인견하고 물품을 하사하며, 역마로 호송하게 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주게 하였다.
이듬해 경오년에 나이 70이 넘은 것으로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죽으니,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예안ㆍ안동ㆍ영천(榮川)에서 모두 서원을 세워 제사지냈다. 저술한 시(詩)ㆍ문(文) 및 서(書)ㆍ소(疏) 30여 권이 세상에 행한다.
○ 유희춘(柳希春)은 자는 인중(仁仲)이요, 호는 미암(眉巖)이다. 을사사화 때에 정언으로서 제주로 귀양 갔다가, 그곳은 본집인 해남에 가깝다고 하여 종성(鐘城)으로 옮겼다. 널리 보고 잘 기억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명종 말년에 은진(恩津)으로 양이(量移)하였으며, 금상의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거쳐 품계가 자헌대부에 올랐다. 전례에 자헌대부의 품계로 부제학이 된 자가 없었다. 상이 말하기를,
그가 죽으니, 정2품의 실직을 거치지 못한 자는 법에 증직과 시호를 내리지 못하는 것인데, 이때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찬성(贊成)을 증직하였다.
○ 금상이 즉위하자 명하여 을사년(1545, 인종 1)에 귀양 간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자를 다 풀어 주었는데, 노수신(盧守愼)ㆍ김난상(金鸞祥)ㆍ유희춘 같은 이들은 품계에 불차탁용(不次擢用 차서를 밟지 않고 벼슬을 뛰어 올려 씀)하고, 유관(柳灌)ㆍ윤임(尹任) 이하 형을 받은 자를 다 벼슬과 가산을 도로 주고, 이기ㆍ정순붕ㆍ임백령ㆍ정언각 등은 모두 벼슬을 빼앗았다. 삼사가 그 위훈(僞勳)까지 아울러 삭탈하기를 청하니, 상이 어렵게 여겼다. 대신 및 낭관ㆍ여러 관원이 조정에서 논하여 해가 넘도록 혹 그쳤다가 혹 논하였다가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와서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종의 비(妃))가 병이 위독하자 상이 인성왕후에게 공론에 의하여 위사훈(衛社勳)을 삭탈하겠다는 뜻으로 아뢰고, 드디어 삭탈하기를 명령하고 종묘에 제사드려 고하고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훈(勳)으로 관직이 올랐던 자는 대신 이외에는 살았거나 죽었거나를 논하지 않고 품계를 깎고 관직을 강등하였다.
○ 상이 즉위한 지 2년째인 기사년에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여 덕흥대원군이라 칭호하고, 부인 정씨(鄭氏)는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이라 칭호하고, 자손이 직(職)을 세습하는 것은 대군의 전례에 의거하고, 4대 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돈녕부 도정을 세습하고 사철의 제사에 쓰는 짐승을 관청에서 주기로 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 9)에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치고 임금이 생가의 사묘(私廟)에 거둥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예법에 부당한 점이 있음을 논하고, 고례(古禮)를 널리 고증한 뒤에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생가 형인 하원군(河原君)ㆍ하릉군(河陵君)은 모두 정1품의 품계에 올리고, 안황(安滉)은 6품의 관직으로 등용하고, 또 쌀과 포목을 주었다.
○ 《대명회전(大明會典)》 및 조훈(祖訓)에 우리 태조의 세계(世系)를 기재하면서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혈통이라고 하였으며, 또 네 임금을 잇달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운운하였으니, 네 임금이란 우(禑)ㆍ창(昌)ㆍ요(瑤 공양왕)ㆍ석(奭)을 가리킨 것이다. 석은 바로 공양왕의 세자이다.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 때에 비로소 잘못 기록된 것을 들어서 알고 곧 사신 이빈(李彬)을 보내어 개정하여 주기를 청하였더니, 성조(成祖)가 칙서를 내려 윤허하였다. 그 뒤에 선왕들이 계속하여 사신을 보내어 개정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기도 하거나 허락하지 않기도 하였다.
금상에 이르러 마침 《대명회전》을 고쳐 편찬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 17)에 사신 황정욱(黃廷彧)이 예부(禮部)의 복제(覆題)로 새 《회전(會典)》에 기재된 우리 나라 사실을 베껴내어 칙서 가운데 갖추어 기록하여 준 것을 얻어 왔는데, 그 거짓된 내용을 삭제하고 무함을 변명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상이 크게 기뻐하여 종묘에 제사지내어 고하였다. 다음에 유홍(兪泓)이 인쇄된 책을 얻어 왔고, 윤근수(尹根壽)가 또 전질(全帙)을 얻어 왔으므로 명하여 녹훈(錄勳)하는데, 황정욱ㆍ윤근수를 수공(首功)으로 삼고, 이 일에 공이 있는 전후의 사신을 아울러 등급을 나누어 훈권(勳券)을 주고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상에게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니, 상이 겸양하여 윤허하지 아니하다가 오랜 뒤에야 윤허하였다 존호를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고 올렸다.
○ 기묘년(1519, 중종 14)의 사화에 남곤(南袞)이 주모자가 되어 선비들을 많이 죽이고 귀양보내었는데도 형벌을 받지 않고 집에서 늙어 죽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인심이 더욱 통분히 여겼다.
금상 초년에 백인걸이 경연에서 아뢰고 계속하여 옥당이 글을 올려 그 죄상을 폭로시켰다. 상이 대신에게 물어서 추후로 그 벼슬을 삭탈하였다. 그리고 정암(靜庵)선생에게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현인을 높이고 악한 자를 토죄하는 전법(典法)이
50년 뒤에 시행되니 선비들의 공론이 쾌하게 여겼다.
○ 명종이 한 번은 야대(夜對)에 납시었을 때에 승지 허엽(許曄), 경연관 이인(李遴)ㆍ윤근수(尹根壽)가 입시하였다. 허엽이 아뢰기를,
이튿날 양사가 허엽이 의론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시비를 현란시킨다고 탄핵하여 관직을 갈았다. 이때에 이양(李樑)ㆍ이감(李戡) 등이 이때에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이인이 그날 곁에서 듣고 곧 이양에게 누설한 것이다. 윤근수도 쫓겨나서 과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5세에 글을 짓고 필법(筆法)이 또한 기특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경자년(1540, 중종 53)에 급제하여 곧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상소하여 돌아가 어버이 봉양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허락하여 수찬에서 옥과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종ㆍ인종이 잇달아 승하(昇遐)하매, 병이 있다 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오지 아니하였다. 명종이 한 번은 교리로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유희춘이 북도로 귀양 갈 때에 가서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이 못났으며 또 나이가 그의 딸과 서로 맞지 않는데도 마침내 사위로 삼았다.
일찍이 〈이소경(離騷經)〉을 읽다가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또 문인을 가르칠 적에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인 일에 이르러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기를,
○ 명종 말년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이항(李恒)ㆍ성운(成運)ㆍ임훈(林薰)ㆍ김범(金範)ㆍ한수(韓修)ㆍ남언경(南彦經) 등이 참여되었다. 글을 내려 부르고 그 중에 병들어 못 오는 자에게 의원을 보내어 약을 내려주고 돈유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온 사람은 곧 인견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물은 뒤에 모두 6품의 직을 제수하였다. 이항(李恒)은 백의(白衣)로서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조식(曺植)도 부름을 받아 입대하자 전첨(典籤)에 제수하니, 받지 않고 물러갔다. 그가 죽으니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금상 초년에 이탁(李鐸)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이 건의하기를,
○ 금상조(今上朝)에 인재를 발탁하여 썼는데 조목(趙穆)ㆍ이지함(李之菡)ㆍ성혼ㆍ최영경ㆍ정인홍ㆍ정구(鄭逑)ㆍ김천일ㆍ홍가신ㆍ유몽정ㆍ유몽학ㆍ김면(金沔) 등과 같은 이가 학문과 조행으로서 서로 잇달아 뛰어 올라 6품의 관직에 등용되었다.
○ 지중추 이현보(李賢輔)가 71세에 외간상(外艱喪 아버지의 상사)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하고 온천에 목욕하겠다고 향리인 예안(禮安)으로 돌아가니, 은퇴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조관(朝官)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나와 전송하였다. 중종이 그 욕심 없고 사양함을 가상히 여겨 지중추에 제수하였고, 인종과 명종이 모두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품계가 여러 번 올라 숭정대부에 이르렀다. 나이 89세에 죽었다 그 때에 아들 중량(仲樑)은 안동 부사, 희량(希樑)은 의흥 현감(義興縣監), 계량(季梁)은 봉화 현감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복과 장수를 잘 누렸다고 일컬었다.
○ 명종 신유년에 유생에게 낙점하여 전강(殿講)을 시키니 김규(金戣)ㆍ홍성민(洪聖民)ㆍ심화(沈鏵)ㆍ허사흠(許思欽)ㆍ이윤희(李胤禧) 등 5인이 입격되고, 또 제술을 시키니 홍성민이 장원이 되고 심화와 김규가 입격되었으므로 명하여 급제를 주게 하니 대간(臺諫)이 그것이 불가하다고 논하였다. 그것은 뽑힌 세 사람 중에 심화와 김규는 모두 외척(外戚)인데, 그들에게 낙점하여 시험을 보여 뽑았으니, 사람들의 오해를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이 대간의 말에 윤허하지 않았다. 그런데 창방(唱榜)하는 날이 되어 상이 장차 친히 임하려고 의장(儀仗)이 다 준비되었는데, 그날 새벽에 큰 비가 오고 벼락이 대둑(大纛)을 때렸으므로 상이 곧 명하여 파방(罷榜)하였다.
○ 유생이 과시(課試)와 전강(殿講)에 입격한 자는 문과 회시를 바로 보게 하기도 하고 초시의 급분(給分)을 차등 있게 주기도 하였다. 소위 급분(給分)이란 것은 삼장(三場)에 제술한 것이 입격되지 못하더라도 그 얻은 분(分)을 계산하여 입격한 자와 더불어 다소를 비교하여 참방(參榜)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초시에 급분하는 것인 만큼 그것을 회시에 옮겨 쓸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가정 갑자년(1564, 명종 19)의 문과 복시에 심화(沈鏵)가 강경(講經)에 입격하였는데 분수(分數)가 적었다. 그가 초시에 합격한 뒤에 또 은사(恩賜)로 분수를 얻었는데, 심화가 그것을 회시에 옮겨 쓰려고 소(疏)를 승정원에 바쳤다. 이때에 심화의 아버지 심통원(沈通源)이 바야흐로 정승이 되어 있고 또 외척이므로 세력이 불길과 같았다. 그래서 승지들이 그 소(疏)의 뜻이 외람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마는 모두 그 소를 입계하였으되 홀로 안방경(安方慶)이 극력으로 막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분의 강직한 점은 취할 만하다
○ 금상(선조조(宣祖朝)) 을유년 가을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는데 당일 진설할 후직씨(后稷氏)의 위패가 이미 없어져 곧장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 창졸간에 빈 자리만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사 지낸 뒤에 크게 수색하여 곧 사직단 담안 나무 아래에서 찾아내었다. 의심될 만한 사람을 국문하였더니, 곧 수복(守僕) 주홍(朱洪)이 사직서의 관원을 모함하기 위하여 훔쳐서 묻은 것이었다. 주홍은 대역죄로 처단되고, 그 처자도 아울러 법에 의하여 연좌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 23) 봄에 태묘 제삼실(第三室) 묘문에 밤에 불이 났는데 수직하던 군사 유성회(柳成會)가 보고 곧 박멸하였다. 각 실의 책보(冊寶)를 살펴보았더니,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은 반이나 없어졌다. 그것은 수복이 훔쳐낸 뒤에 발각될까 겁이 나서 불을 질러서 그 흔적을 없애려 하였던 것이었다. 그 관련자들을 국문하여 죽은 자가 많았다.
정범(正犯) 이산(利山)은 황치경(黃致敬)의 종이었으므로 그 주인까지 가두었더니, 얼마만에 잡혀서 처형되었다. 유성회는 정병(正兵)으로서 절충(折衝)에 승진되었다.
○ 중종 반정 이후의 삼정승을 우선 아는 대로 기록하면, 유순(柳洵)ㆍ김수동(金壽童) 두 사람은 연산군 때에 이미 정승이 되었고,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송일(宋軼)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ㆍ김응기(金應箕)ㆍ안당(安瑭)ㆍ김전(金詮)ㆍ남곤(南袞)ㆍ이유청(李惟淸)ㆍ권균(權鈞)ㆍ심정(沈貞)ㆍ이행(李荇)ㆍ장순손(張順孫)ㆍ한효원(韓效元)ㆍ김근사(金謹思)ㆍ김안로(金安老)ㆍ윤은보(尹殷輔)ㆍ유보(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김극성(金克成)ㆍ윤인경(尹仁鏡)ㆍ유관(柳灌)ㆍ성세창(成世昌)ㆍ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ㆍ황헌(黃憲)ㆍ심연원(沈連源)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안현(安玹)ㆍ윤원형(尹元衡)ㆍ이준경(李浚慶)ㆍ심통원(沈通源)ㆍ이명(李蓂)ㆍ권철(權轍)ㆍ민기(閔箕)ㆍ홍섬(洪暹)ㆍ이탁(李鐸)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강사상(姜士尙)ㆍ김귀영(金貴榮)ㆍ정지연(鄭芝衍)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琠)ㆍ이산해(李山海)ㆍ정언신(鄭彦信)ㆍ정철(鄭澈)ㆍ심수경(沈守慶)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ㆍ유홍(兪泓)ㆍ김응남(金應南)ㆍ정탁(鄭琢)ㆍ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ㆍ이헌국(李憲國)ㆍ윤승훈(尹承勳)ㆍ김명원(金命元)이었다.
○ 국초이래로 문형(文衡)을 맡은 자는 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안지(安止)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이황(李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金貴榮)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ㆍ홍성민(洪聖民)ㆍ이항복(李恒福)ㆍ심희수(沈喜壽)였다.
○ 이문순(李文純 이황의 시호)이 물러가기를 청할 적에 상이 인견하고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고, 또 아뢰기를,
○ 퇴계가 병이 위독하니 문생들을 불러 영결하려고 하므로 자제들이 말리니, 선생이 말하기를,
○ 퇴계가 본시 은퇴할 뜻이 있었으니, 비록 여러 대의 조정의 은혜를 입어서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으나 그 본의가 아니었다. 일찍이 아들 준(寯)에게 부탁하되, 무덤 앞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 퇴계가 자기의 묘명(墓銘)을 스스로 지었는데 이러하다.
이제신이 죄를 받은 것은 군사가 패한 때문만이 아니다.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김수등의 처형에 입회하러 갔는데 마침 김수가 적을 추격하여 죽인 공이 있었기 때문에 급히 그 사실을 아뢰었다. 이제신은 조정에서 김수의 공과 죄를 비교하여 감형이 될 것이라고 여겨 율문(律文)에 ‘사형 받을 죄인을 복심(覆審)할 때에는 3일이 경과한 후에 처형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전관을 3일 동안 정지시키고 새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더니, 마침내 이르지 않기 때문에 그제야 형을 집행하였다. 양사가 이제신이 임금의 명령을 제 마음대로 정지시켰다고 논하여 사형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죽음을 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밖의 의론은 실정과 처벌이 서로 맞지 않다고 하였다. 이때에 온성 부사 신립(申砬)이 용맹을 떨쳐 적을 죽여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병사로 삼고,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로 삼아서 유진(留鎭)하여 경략(經略)하게 하면서 난리를 주창한 괴수 몇 사람을 죽이니, 육진(六鎭)이 다시 평정되었다.
○ 계미년 여름에 양사와 옥당이 병조 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가 또 영의정 박순(朴淳)이 이이(李珥)와 더불어 편당을 지었다고 탄핵하였으나, 또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이 육조판서 이상을 인견하고 이이와 박순을 탄핵한 사람을 죄줄 것을 의론하여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을 원찬(遠竄)하고, 대사헌 이기(李曁)는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부제학 권덕여(權德與)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대사간 박승임(朴承任)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집의 홍여순(洪汝諄)은 창평 현령(昌平縣令)으로, 응교 홍진(洪進)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교리 김첨(金瞻)은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동부승지 김응남(金應南)은 제주 목사로, 수찬 홍적(洪迪)은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사인 김성일(金誠一)은 나주 목사로, 김우굉(金宇宏)은 광주 목사로 보내었다. 이이는 이조 판서로, 성혼(成渾)은 이조 참판으로, 이우직(李友直)은 대사헌으로, 홍성민(洪聖民)은 부제학으로, 이해수(李海壽)는 대사간으로, 정철(鄭澈)은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바야흐로 삼사가 이이ㆍ박순을 공격할 때에 유학 신잡(申磼)이 상소하여, 김첨(金瞻)ㆍ김수(金睟)ㆍ홍진(洪進)ㆍ정희적(鄭熙績) 등이 서로 결탁하여 선류(善類)를 모함하는 죄상을 극력으로 논하였다. 왕자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이 상소하여 또한 이이와 박순을 옹호하므로 정원에서는 상소문으로 편당을 하였다고 아뢰었더니, 상이 곧 의계한 승지들을 파면시켰다. 태학생 유공신(柳拱辰) 등이 상소하여 삼사가 이이를 모함하였다고 반박하고, 수일이 못되어 또 생원 이정우(李庭友) 등이 또 상소하여, ‘전일 유공신 등의 상소문은 바로 그 스승을 위하여 억울하다고 호소한 것이요, 성균관의 공론이 아니다.’고 논하니, 상이 모두 좋게 답하였다.
성균박사 한인(韓戭)이 전일 소를 올린 유생들이 석전제 치재(致齋)하는 날에 상소한다고 흩어져 가서 입재(入齋)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그 이름을 적어서 인갑(印匣)에 간직하여 두고 유벌(儒罰)을 시행하려 하였다. 호남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인(金戭)이 간신(奸臣) 송응개의 생질로서 보복하려고 유생을 협박한다고 지적하였다. 위에서 명하여 김인을 의금부에 내려 엄중히 국문하여 죽음을 감하여 경흥으로 귀양보내었다.
○ 만력 정축년(1577, 선조 10) 가을에 혜성이 서북방에 나타났다. 뿌리 자루는 구부러졌고 끝이 점점 크다. 대략 길이가 30~40길이 되고 빛이 하늘에 환하였다. 석 달을 지내서 없어졌다.
무자년 가을에 한강 물이 붉기가 피와 같았는데 엿새 만에 본래 색깔로 되었다.
기축년 정월 초하룻날에 일식이 있었고, 15일에 월식이 있었다. 3월에는 사옹원(司饔院)의 밥 짓는 놋쇠 시루가 절로 울어 소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경인년 5월에는 전라도 금산(錦山) 등 다섯 고을에 서리가 내렸고, 11월 6일에는 서울에 큰 비가 와서 한강이 넘쳤고 12월 17일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집이 흔들렸다.
신묘년에는 3월 25일에 눈이 내려서 관악산 등지에는 한겨울 눈처럼 수북이 쌓여 한동안 지낸 뒤에 녹아졌다. 4월에는 경기도 인천 및 경성 서부의 인가에 개미들이 편을 갈라 서로 싸우는 형상을 하였는데, 죽은 놈은 다 머리가 끊어졌다. 강원도 양양ㆍ삼척ㆍ울진 등지에서는 개미가 바다를 뒤엎고 나와서 해안에 가득찼는데, 생기가 있는 놈은 문득 날아갔다.
임진년 4월에는 괴이한 새가 금원(禁苑)에 날아 와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울부짖다가 동틀 녘에 그쳤는데, 이런 행위를 무릇 10여 일이나 하다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는 전날 저녁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왜적이 부산에 무지개 같은 흰 기운이 바로 침전을 꿰었다.
을미년 여름에는 충주로부터 경강(京江)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목이 부어서 죽은 자라가 물가에 서로 잇따랐다. 임진년 통진(通津)에서는 넘어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을미년 5월에 황해도 장연(長連) 바닷가에서는 큰 돌과 작은 돌 각각 한 개씩이 문득 절로 빠져나와 50여 척을 이동한 뒤에 그쳤다.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에 홍주(洪州)에서는 큰 돌이 저절로 일어나서 옮겨 섰고 12월에 서산(瑞山)에서는 개구리가 떼를 지어 모여 전쟁하는 것같이 하더니 머리가 베어지고 배가 쪼개져 개울에 쌓이고, 경성 동대문 밖에 저절로 죽은 개구리가 두어 섬 남짓 되었다. 계묘년에 곳곳에 돌이 이전되었다. 팔도에서 장계가 서로 잇달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 기축년(1589, 선조 22) 10월에 황해 감사 한준(韓準)이 치계(馳啓)하기를,
○ 기축년에 일본국왕 평수길(平秀吉)이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우리 나라의 통신사를 청하기 때문에 황윤길(黃允吉)을 상사(上使)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삼고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보냈다.
임진년 4월에 왜적이 크게 침입하였는데, 의지(義智)ㆍ행장(行長)ㆍ청정(淸正) 등이 선봉이 되었다. 동래와 부산이 함락되고, 순변사 이일(李鎰)ㆍ신립(申砬) 등이 잇달아 패하니, 상이 서쪽으로 평양으로 파천하였다가 의주(義州)로 가고, 적은 연달아 삼경(三京 경성ㆍ개성ㆍ평양)을 함락하였다
그래서 명 나라에 급한 사정을 고하니 군사를 내어 와서 구(救)하여 다음해 계사년 정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니, 왜장 행장 등이 빠져 도망하고, 개성과 경성을 잇달아 수복되었다. 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이르렀는데, 적이 해상에 둔을 치며 웅거하여 철퇴하지 않자 이여송 등이 군사를 돌렸다. 10월에 임금이 해주(海州)로부터 경성으로 돌아왔다.
왜적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에 중국 조정에서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왜군에게 심부름을 보내었다. 심유경이 아비가 일찍이 왜인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심유경이 또한 어려서부터 아비를 따라 오래 왜국에 있어 그들의 실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우리가 한 번 이긴 뒤에 각도에 나누어 둔을 쳤던 왜적이 경성에 모여서 갈 뜻이 없었다. 심유경이 다시 왜적 속에 들어가서 강화할 뜻으로 타이르니 적이 곧 철퇴하였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사절(使節)로 삼아 보내었더니,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그들을 심히 소홀히 대우하고, 다만 포로되었던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돌려 보내었다. 오랜 뒤에 적장 행장 등이 소리치기를,
이종성 등이 부산 왜적의 진영에 체류된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어떤 이가 비밀리에 왜적이 호의가 없어 사신을 구류하려 한다고 하니, 이종성이 몰래 도망하여 급히 달려 경성에 도착하였다. 온 나라가 놀래어 왜적이 이종성을 추격하여 덤빌까 의심하였더니, 적이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다만 양방형을 엄중히 감시할 뿐이었다. 양방형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아뢰니, 이에 이종성을 잡아 가고 양방형을 상사(上使)에 승진시키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서 그 일을 완성하도록 하였다. 수길의 거처하는 곳에 도착하자 수길이 극히 무례하게 대접하고 말하기를,
당초에 강화에 관한 일은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이적(夷狄)을 금수처럼 대우하여 길들일 수는 없고 고삐로 얽어매어 발악이나 하지 않게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전연 그른 것은 아니지만 왜적의 교활한 꾀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심유경의 간사한 말을 믿고 매양 왜적의 신의를 보증할 수 있다고 하여 구차스럽게 결과를 맺으려다가 마침내 보잘것없는 왜적들에게 욕을 당하게 된 것은 석성의 죄였다. 석성과 심유경이 함께 하옥되어 죽었다.
정유년(1597, 선조 36)에 명 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와서 구원하였는데, 대장 양원(楊元)은 남원을 지키고,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켰다. 왜적이 크게 덤벼 남원을 함락시키자, 병사 이복남(李福男), 부사 임현(任鉉),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등이 모두 죽고,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전주 부윤 박경신(朴慶新)이 남원 함락의 소식을 듣고 명 나라 장수에게 전주성을 버리고 나가기를 청하니 듣지 않았다. 전주 사람들이 성문을 지키는 명 나라 군사를 죽이기까지 하고 박경신이 성문을 박차고 도망하였다. 이에 적이 하삼도(下三道)의 고을들을 짓밟고 계속 진격하여 직산(稷山)까지 이르니 경성이 물 끓는 듯하였다. 동궁(東宮 광해군)이 종묘사직의 위패 및 중전을 모시고 동대문으로 나가 관서(關西)로 향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평양에 있다가 적병이 깊이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 행군을 배(倍)로 재촉하여 들어와서 경성에 머물면서 날랜 기병(騎兵)을 보내 직산에서 맞아 싸워 패배시키니, 인심이 차츰 안정되고 적이 또 물러갔다. 어떤 이는 말하되, 적이 충청도에까지 이르렀다가 그친 것은 수길의 명령이었다고 한다. 병부 상서 형개(刑玠)가 잇달아 들어와서 경성에 유진(留鎭)하였다. 양호(楊鎬)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청정(淸正)을 울산의 경계인 도산책(道山柵)에서 포위하니, 적이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마침 큰 눈이 와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고, 양식 운반도 부족하기에 군사를 돌렸다.
이때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였는데, 도독 마귀(麻貴)는 양호를 따라 청정을 치고, 도독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에 둔친 적을 치고, 도독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에 둔친 적을 치고 진인(陳璘)은 수군을 거느려 해로를 경유하여 협공하여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는데도 여러 장수들이 서로 통제되지 아니하고 각기 성공을 요행으로 바래고 가볍게 전진하다가 동일원(蕫一元)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고, 다른 길의 군사도 모두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형개(邢玠)의 군문(軍門)에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란 자가 양호의 30가지 죄를 탄핵하여 관직을 갈게 하니, 만세덕(萬世德)이 양호를 대신하여 왔다. 그러나 양호가 아랫사람을 통솔하는데 기강이 있어 호령에 바람이 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칭송하였었다. 얼마 안 되어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병들어 죽자, 적이 차차 철퇴하는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한 복판에서 막아 치다가 총탄에 맞아 죽으니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 임진년(1592, 선조 25) 왜적이 깊이 들어왔을 적에, 태평시대를 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각 고을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서 한 사람도 화살 한 개라도 쏘아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나의 중씨(仲氏 이정암(李廷馣))가 의병을 일으켜 연안(延安)에 들어가 지킨 지 겨우 4일 만에 적의 포위를 당하였는데 장수와 군사들을 독려하여 굳게 지키니, 적이 힘을 다하여 4일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때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를 지켰는데 적의 포위를 당하여 또한 물리쳐서 성은 완전하였으나 김시민은 총탄에 맞아 죽었다.
○ 서원은 송(宋) 나라 시대에 시작하여 원(元) 나라 말년에 성하였으나 우리 나라에는 없었다. 가정(嘉靖) 연간에 사문(斯文)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에 군내 백운동(白雲洞)에 안유(安裕)가 살던 옛 터에 서원을 창립하여 선비들이 수양하고 글 읽을 처소로 삼고 이어서 사당을 세워 안유(安裕)를 제사지냈다. 조정에 알려지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내렸다. 그 뒤에 잇달아 설립되니, 영천(永川)에는 임고(臨皐)서원, 함양에는 남계(藍溪) 서원, 송도에는 숭양(崧陽) 서원, 성주에는 천곡(川谷) 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 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峰) 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 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 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 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 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 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岩) 서원인데, 혹은 유선(儒先)이 거처하던 곳으로 혹은 왕래하던 땅으로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이밖에도 또한 많이 있는데, 다 기록하지 못한다.
○ 좌윤(左尹) 이찬(李燦)이 만년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물러나 있어 봉록을 받지 못하였다. 정승 심연원(沈連源)ㆍ상진(尙震) 등이 위에 아뢰어 봉조하로 삼아서 녹을 받아 평생을 살게 하였다. 그 뒤에 부윤 이언경(李彦憬)이 나이 80이 넘었는데 봉조하를 삼으려 하자, 이조에서 전례가 없다고 거행하지 아니하였으니, 고사(故事)를 너무도 모른 것이다.
○ 우리 나라 사대부의 상례가 선왕조로부터 부모의 삼년상에는 모두 시묘살이를 하고, 기년복(朞年服) 이하는 다만 건(巾)을 쓰고 띠만 띠는데, 혹 채복(綵服) 위에 그것을 하고, 그 날짜는 《가례(家禮)》의 가령격(假令格)에 의하여 차례대로 감하여 그 날짜만 마치면 곧 상복을 벗었다. 비록 장사 치르기 이전일지라도 태연히 음악을 듣고 연회하고 술을 마시니 사람들도 역시 괴이 여기는 자가 없었다.
금상이 즉위한 초년에 학자들이 유선(儒先)의 문하에서 배워서 점차 상례를 강구하여 기년(朞年)ㆍ대공(大功) 이하도 다 예법에 의거하여 관복을 만들어 입고 그 월수(月數)가 다 되도록 연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는 속론(俗論)을 주장하는 자가 괴이 여겨 반대하였으나 간혹 예법을 좋아하는 선비가 비웃음을 무릅쓰고 행하더니 지금은 거의 풍속이 되어 그렇게 하지 않는 자를 가리켜 비루하고 예법을 모른다고 한다.
또 기제(忌祭)에 있어서도 전에는 순전히 소찬(素饌)만을 쓰고 혹 《가례》대로 어육을 쓰면 괴이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궁벽한 마을의 부인과 어린애라도 모두 제수는 당연히 어육을 써야 할 줄 알아서 어육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이 여기니, 참으로 풍속을 변동시키는 것은 군자의 덕에 있는 것이므로, 어려운 일이 아니며, 선생 장자(長者)가 학자를 가르쳐 인도한 공이 큰 줄을 알겠도다.
○ 참판 이거(李蘧)의 어머니 채씨(蔡氏)가 연산군 갑자년(1564, 연산군 10)에 태어나서 나이가 백 살을 넘었으므로 상이 기특히 여겨서 이거를 가선대부의 품계로 뛰어 올렸다. 이때에 이거의 나이 73이고, 두 누이가 있는데, 나이 모두 80이었으며, 막내아들 이원(李薳)이 나이 60이니, 인간에 드문 일이었다.
○ 최영경(崔永慶)은 자는 효원(孝元)이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다. 천거로 뛰어서 6품에 등용하여 여러 번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다 취임하지 않고 과격한 언론을 좋아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 역옥에 호남 사람 양천경(梁千頃)ㆍ강해(姜海) 등이 최영경이 정적(鄭賊 정여립)과 공모하였다고 모함하여 의금부의 옥에 갇혔다가 상이 그 원통함을 알고 석방하였다. 대간이 또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병이 되어 죽었다. 얼마 안 되어 상이 그 모함한 사실을 알고 명하여 양천경 등을 국문하여 귀양보냈는데 길에서 죽었다. 당시의 위관(委官) 정철(鄭澈)과 최영경을 잡아 오자고 논계한 대관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최영경을 대사헌에 추종하고 제사를 내리고 그 처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 태종조에 사육하는 코끼리가 있었는데 명하여 순천(順天) 장도(獐島)에 놓아 주었다.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기를,
금상 경인년(1590, 선조 23)에 일본국 평수길(平秀吉)이 공작새 한 쌍을 바쳤는데 상이 받았다가 조금 뒤에 남양(南陽) 대부도(大部島)에 놓아 주게 하였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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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한잡록(遣閑雜錄) |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 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하였다.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 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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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선원보록 2 |
○ 중묘조(中廟朝)에 원묘(原廟)의 신주 하나를 잃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하인배들이 전관(殿官)을 모함하기 위하여 한 짓인가 의심하여, 참봉 및 수복(守僕) 등을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마침내 단서를 얻지 못했다. 정광필(鄭光弼)이 추관(推官)이 되어, ‘이것은 의옥(疑獄)이니, 만약 꼭 실제 범인을 찾아내려면 엄한 고문 아래 억울하게 형벌을 받을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하고, 아뢰어 완화시켜 억울히 죽은 자가 없었다.
뒤에 형조에서 우연히 도적을 잡아서 전후에 지은 죄를 물으니,
“신주를 훔쳐서 아무 고을 산 바위 밑에 감추어 두었다.”
라고 자복하였다. 그 말대로 신주를 찾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정광필의 신통한 식견에 감복하였다.○ 김안로는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면서 문필의 재주까지 지녀 낮은 벼슬에 있을 적부터 사람들이 벌써 소인이 될 것을 알았다. 그의 아들 김희(金禧)가 공주(公主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첫째 딸)에게 장가들자, 갑자기 발탁 승진되어 갑신년(1524, 중종 19)에 이조 판서가 되어 권력을 독차지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다가 외방으로 쫓겨났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올 꾀를 내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만약 조정에 돌아가면 기묘년의 사류(士類)를 거두어 쓰겠노라.”
하니, 조관(朝官) 가운데 혹 참으로 그러할 줄을 믿고 끌어들이려는 자가 있었다. 또 그 처족(妻族) 채무택(蔡無擇)으로 하여금 주창하여 말하게 하기를,“동궁이 외로우니, 반드시 김안로를 써서 우익을 삼아야 하겠다.”
하였다. 그때에 문정왕후가 왕비로 있었는데, 두 사이에 이미 유언비어가 있었다.이언적(李彦迪)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반대하기를,
“김안로의 마음가짐과 행사를 보니, 참으로 소인이다. 지금 만약 다시 등용된다면 나라를 반드시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 등이 말하기를,“이언적이 조정에 있으면 김안로가 들어올 수 없다.”
하여, 곧 이언적을 탄핵하여 파면시켰다.김안로가 이미 권세를 잡자 김구(金絿)ㆍ박훈(朴薰) 등 두어 사람만 풀어 돌아오게 하여 전일의 말을 실천하는 체하고는 기묘년 때의 남은 사람을 폐고(廢錮)시킴이 전일보다 심하니, 사람들이 그제야 더욱 김안로의 간사함을 알았다.
또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서 왕실의 지친 및 공경대부 중 주벌을 당하고 귀양 간 이가 서로 잇달았고, 국모(國母)를 폐위하려 한다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다. 중종이 근심하고 걱정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외척 중에 몰래 주상의 뜻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데 대사헌 양연(梁淵), 대사간 황헌(黃憲) 등이 함께 김안로를 탄핵하기를 의론하되, 오히려 성사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채무택의 당숙 채낙(蔡洛)이 당시 사간으로 있었더니, 중학 일회(中學一會)하는 날에 특지(特旨)로 동부승지에 제수하니, 양연등이 그제야 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 번 아뢰자 곧 귀양 보내기를 명령하고, 진위(振威)ㆍ갈원(葛院)에 당도하자 사사(賜死)하고, 그의 무리 허항(許沆)ㆍ채무택도 아울러 사사하였다.
그때에 삼정승 윤은보(尹殷輔)ㆍ유보(柳溥)ㆍ홍언필(洪彦弼) 등이 국사가 위태롭다가 김안로 등이 죄로 죽음을 받아 다시 편안해졌다 하여, 청하여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고, 양연 등 이하는 상(賞)을 논하여 품계를 올렸다.
○ 김안로가 공주의 세력을 빙자하여 호관(壺串)의 목장을 떼어 받아서 자기의 농토를 삼으려 하였는데, 정광필이 이때에 사복시 제조로 있으면서 굳이 들어주지 않으며,
“국가의 말먹이는 땅을 결코 세력 있는 집에 떼어 줄 수 없으니 늙은 내가 죽은 뒤를 기다려서 하라.”
말하니, 김안로가 깊이 원한을 품었다.그때에 희릉(禧陵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을 옮기기로 의론하였는데, 김안로가 광필이 앞서 희릉 국장(國葬) 때에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선후(先后)를 불길한 땅에 장사지냈다고 모함하여 중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사형에서 감하여 김해(金海)로 귀양 보내었다.
정광필이 이보다 먼저 파면되어 회덕(懷德) 시골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뜻밖에 금부 도사가 달려와 집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놀래고 두려워하여 울었으나, 정광필은 손님과 장기를 두면서 장(將)이야 하고 끝내지 않았다. 조금 뒤에 알아보니 사형에서 감하여 귀양보내는 것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주상의 은혜가 지극하십니다.”
하였다. 밤이 되어 잠을 자는데 코고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튿날 아침에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면서 털끝만큼도 기색에 나타내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김안로가 패하자 불려 돌아왔다. 김안로가 마침내 목장을 떼어 받았는데, 죄를 받자 도로 거두어 들였다.○ 문강공(文剛公)이 이사균(李思鈞)은 곧고 뻣뻣하여 시속에 맞추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기묘년의 사류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전주 부윤으로 나갔었다.
조광조ㆍ김정(金淨) 등이 죄를 입자,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당시의 정권을 잡은 무리들의 생각으로는, 이사균이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 감정을 품었을 것이라고 여겨 불러 승진시킨 것이었다. 들어오자 사직하며 아뢰기를,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하여 신은 자세히 모르오나, 반드시 일을 하려 하는데 중도에 지나친 점이 없지 못하여 미워하는 자가 많아서 그리 된 것입니다. 또 조광조 등에게 내리신 전교를 보고 삼가 생각건대, 위에서 만약 이 사람들이 다만 국사를 위하고 다른 생각이 없는 줄을 아셨다면, 그 죄를 감면해야 할 것인데도 감면하지 아니하시니, 아마도 전하의 마음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상벌은 비록 보통 사람에게 대하여서도 만약 남용되면 임금의 덕에 크게 누가 됩니다. 옛 사람은 한 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치게 한 자가 있었지만, 보잘것없는 신과 같은 자가 어찌 전하의 마음을 돌릴 힘이 있겠습니까? 사직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이사균은 다만 남곤(南袞) 등의 의론에 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힘껏 조광조 등을 구하니, 정언 조침(趙琛)이 탄핵하여 관직을 떠났다. 뒤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또 김안로에게 거슬려서 경상 감사로 나가는데, 김안로가 당시 정승으로 있으면서 흥인문 밖에 나가 전송하려 하였다. 이사균이 듣고는 숭례문으로 나갔다. 그 꼿꼿함이 이와 같았다.
○ 이항(李沆)이란 자는 이세인(李世仁)의 아들이다. 중종이 반정한 초기에 이세인이 대사간이 되어 직언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항은 조행이 없으므로 사류(士類)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경상 우도 감사로 있으면서 좌도 감사 문근(文瑾)과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났는데, 마침 그날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하여 와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근은 슬픈 기색으로 병을 핑계대고 방에 들어갔으나, 이항은 의기양양하여 밤새도록 잔치하고 즐겼다.
얼마 안 되어 불리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정광필이 말하기를,
“나는 이항의 아버지의 벗인데, 이항이 어찌 내 말을 듣지 않겠는가? 착한 사류(士類)를 구할 수 있겠구나.”
하였다. 그러나 이항이 사류를 온갖 힘을 다하여 모함하고 해쳐 정광필의 말을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광필을 탄핵하였으니, 그 사특하고 독함이 이와 같았다.그가 부름을 받고 올라올 적에 함양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이러하다.
영감 이번 걸음은 신선되어 오름과 같으니 / 明公此去似登仙
반근착절은 응당 예리한 기구로 깎아야 하리 / 盤錯應須利器剸
사냥한 뒤에라고 어찌 세굴의 토끼가 없으랴 / 畋後豈無三窟兎
마침 솔개 한 마리 가을 하늘에 오름을 보리 / 會看一鶚上秋天
이항이 그 시를 기뻐하며 받으니, 사림들이 두려워하였다.반근착절은 응당 예리한 기구로 깎아야 하리 / 盤錯應須利器剸
사냥한 뒤에라고 어찌 세굴의 토끼가 없으랴 / 畋後豈無三窟兎
마침 솔개 한 마리 가을 하늘에 오름을 보리 / 會看一鶚上秋天
○ 찬성 이계맹(李繼孟)이 기개가 있고 큰 절조가 있으니, 정광필이 그를 정승의 재주가 있다고 자주 칭찬하였다.
후에 기묘년의 선비들이 일을 처리함이 중도에 지나치므로 이계맹이 매우 억제하였더니, 드디어 탄핵을 당하여 물러나 김제(金堤)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조광조 등이 패하게 되자 조정에서 불러 찬성에 제수되었다. 이계맹은 조금도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매양 착한 선비들이 쫓겨나고 뭇 소인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탄식하여, 선비들을 구하려 하다가 남곤 등에게 크게 거슬려 중추부의 직무가 없는 관직에 머물다가 죽었다.
○ 남곤이 처음에 심정(沈貞)ㆍ홍경주(洪景舟) 등으로 더불어 사림을 모해하려고 의론을 이미 정한 뒤에 거사할 때에 병조 판서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이장곤(李長坤)이 병조 판서로서 의금부를 겸직하고 있었다. 남곤이 그가 집에 있지 않은 틈을 엿보아 세 번이나 가서 명함을 보내 그 마음을 의심나게 하고는 그날 저녁에 잘 걷는 하인을 시켜 작은 편지를 가지고 부르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곧 들어오시오.”
하였다. 이장곤의 집은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말과 하인들이 이미 흩어져 간 뒤였다. 바쁘게 친구에게서 말을 빌려 타고 홍경주 등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러서도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또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서야 비로소 조광조 등을 박살내려는 의논임을 알고 탑전에서 입대하여 극력 간언하기를,“어두운 밤중에 사람들에게 중죄를 주는 것은 마치 도둑질을 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옳지 못한 일이니, 수상 정광필을 불러 의론하소서.”
하였다. 홍경주가 주상에게 속히 결정하기를 권하고자 하여 일어날 기색을 하는데, 이장곤이 매양 팔을 당겨 말렸으니, 그날에 옥사가 늦추어진 것은 이장곤의 힘이 많았다.마침내 남곤 등에게 배척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장곤은 그릇과 국량이 뛰어나고 문무의 재간이 있었다. 중종이 다시 쓰려고 생각하여 직첩을 도로 주었으나 뭇 소인들이 방해하여 마침내 벼슬길이 막혀 죽었다
○ 성수종(成守琮)이 그의 형 성수침(成守琛)과 더불어 재주와 행실로써 사림에 중한 명성이 있었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 14) 가을에 성수종이 과거에 올랐는데 그때에 남곤ㆍ김구ㆍ김식 및 조정암이 시관이 되었다. 사화가 일어나자 이항 등이 주장하기를,
“성수종의 대책은 문리(文理)도 되지 않는데 조광조ㆍ김구 등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뽑았기 때문에 남곤이 손을 댈 수 없었고, 또 과거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그들의 문하에 다닌 자들이다.”
하며, 양사가 번갈아 글을 올려 파방(罷榜)하기를 청하였다. 주상이 어렵게 여겨 남곤에게 물어서 다만 성수종의 이름만 지워버렸다. 뒤에 다시 과거를 보아 여러 번 초시(初試)에는 우등으로 합격되었으나 마침내 급제는 하지 못하고 죽었다. 금상 초년에 그의 아들 성이(成耳)가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명하여 복과(復科)시켜 주었다.○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 27)에 중종이 의정부에 전교하기를,
“조정 신하 중에 맑은 절조가 본시 드러나서 늙어도 변치 않아 여러 사람이 믿고 복종하는 자가 있으면 아뢰라.”
하니, 참찬 조원기(趙元紀)를 아뢰니, 명하여 차례를 넘어 숭정대부의 품계를 주었다.조원기가 벼슬에 있을 때에 청렴하고 깨끗하여 추직(騶直) 및 당봉(堂封)의 남은 것은 반드시 먼저 자매에게 도와주고 불쌍한 친척까지 돌보고 자기의 생활은 심히 박하게 하면서 태연하였다. 그가 가선대부ㆍ자헌대부의 품계에 오른 것도 모두 청백함으로써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 동시에 판부(判府) 송흠(宋欽)도 청백하고 검소하며 이익에 뜻이 없어 편안히 벼슬을 물러남으로써 조원기와 명성이 같아서 여러 번 품계를 뛰어 올라 1품에 이르렀다.
○ 영상 홍언필(洪彦弼)이 몸가짐이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생일날 자제들이 노래와 풍악으로써 술을 권하고자 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게 높은 벼슬에 올라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감히 기생과 음악의 즐거움을 받겠느냐.”
하고,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의복 또한 물리치고 쓰지 않았다. 아들과 사위가 벼슬이 이미 높았어도 문 앞에 들어갈 적에 벽제(辟除)를 모두 물리쳤다.○ 사문 김천령(金千齡)이 사마시 및 전시에 장원이 되고, 아들 만균(萬鈞)과 손자 경원(慶元)이 모두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으니, 삼대 장원은 과거가 설치된 이래에 없던 일이다. 김경원의 아우 김명원(金命元)이 또한 갑과(甲科)에 올라 뒤에 정승이 되었다.
○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언필(洪彦弼)의 부인은 정승 송질(宋軼)의 딸인데, 홍언필과 송질이 모두 수상이 되고, 아들 홍섬(洪暹)도 수상이 되었다. 부인이 나이 90을 넘겼는데, 홍섬이 80이 가까운 나이에 삼년상을 마쳤으니 부인 같이 오래 살고 복을 누리는 경우는 일찍이 있지 않았다.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홍섬의 사궤장(賜几杖) 잔치에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 가정 기해년(1539, 중종 34)에 흥성 장태후(興聖蔣太后)거 돌아갔으니, 바로 세종황제(世宗皇帝)의 생모였다. 호광(湖廣)에 장사지내는데 황제가 따라 행행(行幸)하였다. 상이 흠문사(欽問使)를 보내려 하니, 조정 의론이 혹은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이청(李淸)을 사신으로 보내었더니, 그가 돌아올 때에 칙서를 내려 칭찬하고, 또 용의(龍衣)를 주었다. 상이 모화관까지 나가서 마중하고, 백관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별과(別科)를 보여 인재를 뽑았다.
○ 가정 경자년(1540, 중종 35) 3월에 상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거둥하여 무예연습을 관람하고, 입시한 종재(宗宰)ㆍ시신(侍臣)으로 하여금 율시를 짓게 하고 영상ㆍ좌상이 등급을 매기게 하여 상(賞)을 주고서 임금은 대내에 들어가고, 종재(宗宰)들로 하여금 함께 후원을 관람하고 꽃구경을 하게 할 적에 중관(中官)이 앞에 인도하고 궁중의 술을 주니 모두 취하여 나왔다. 이튿날 전문(箋文)을 지어 올려 사은하였다.
○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에 마유량(馬惟良)의 아내 조씨(趙氏)가 나이 1백 12세인데, 빠졌던 이가 다시 나서 크기가 쌀알만큼 하고, 이마 위에 검은 털이 다시 나서 길이가 한 치쯤 되고, 귀는 전연 듣지 못하고, 눈은 겨우 물건을 살피나 때로는 혹 구별하지 못하였다. 34세에 낳은 아들의 이름은 행곤(行坤)인데 이때에 나이가 80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감사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상고시대에 요순(堯舜)의 나이도 이보다 못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듣지 못한 일이다.”
하고, 본도에 명하여 의식을 주게 하였다.○ 가정 연간(嘉靖年間)에 사은사 정유길(鄭惟吉)이 북경에 도착하니 일본 사신도 거처하는 관사에 함께 머물렀다. 우리 나라 사신과 반열의 순서를 다투려 하기에 조회 알현을 같은 날에 하지 않았다.
○ 연산군이 한창 음탕한 짓을 할 때에 문ㆍ무관 및 유생ㆍ삼색(三色)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마를 매는 하인에 충당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간도 거기에 충당시킬 것인가를 물었더니, 연산군이 이르기를,
“대간도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무릇 놀러 다니는 곳에는 가마를 매고 다니게 하고, 때로는 글짓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의관을 차려 입는 선비의 욕됨이 지극하였다.조정암(趙靜庵)이 일찍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연산군이 유생들로 하여금 가마를 매게 하여도 선비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붓과 벼루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상급(賞給)을 받기를 바라기까지 하여 선비의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마땅히 선비의 풍습을 변하여 추향을 바르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덕 기묘년(1519, 중종 14) 겨울이 따뜻하여 10월에 전라도 각 고을에서 장미ㆍ야당(野棠)ㆍ복사ㆍ오얏이 다 꽃이 피어 초여름과 같았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0월 초7일 밤에 검고 누르고 흰 기운이 문창성(文昌星)에서 나오고, 꼬리가 왕량성(王良星)을 가리키며 한 필 베만큼이나 되고, 형체는 용과 같았는데 한참 만에 없어졌고, 흐르는 별과 나는 별이 사면에서 비 오는 것 같았다.
병신년 9월 30일에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와서 우림성(羽林星)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용성(龍星)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장(丈)이나 되며 붉은 색이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정덕(正德) 경진년 2월 20일 밤에 큰 별이 달과 서로 범하여 혹 올랐다가 혹 내렸다 하여 형세가 서로 싸우는 것 같았다.
가정 기해년 4월에 혜성(彗星)이 삼태성(三台星) 상태(上台)의 아래 꼬리에 나타났다.
경자년 4월 초8일에 동대문 밖 안암동(安岩洞)에 돌이 소리가 나서 가는 천둥과 같더니, 곧 스스로 터졌다.
○ 연산(燕山)이 온갖 악함이 다 갖추어져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을 당하였는데, 궁중의 행실이 더욱 추하여 근친(近親) 여자들에게 더러운 행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외명부(外命婦)에게 잔치를 베푼다고 대궐 안에 청하여 얼굴이 예쁜 자가 있으면 문득 끌어 들여 음행을 자행하였다. 부끄럼이 없는 여인은 혹 궁중에 머물기를 원하고, 총해하는 여인을 자주 불러 들여 유숙(留宿)하고 내보내고는 그 남편의 관직을 승진시키니, 당시의 사람들이 왕팔채(王八債)라고 조롱하였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성종(成宗)의 형이다. 그 재취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冠服)을 특별히 높이고, 은(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妃嬪)의 계급으로 대우하기까지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무인년(1518, 중종 13)에 문정왕후를 책봉할 때에, 동성(同姓)의 부녀들 중 전에 연산군에게 더럽힘을 당한 자가 있었는데, 대간이 음란하고 더러운 사람이 혹 대례(大禮)에 들어와 참여할 염려가 있다고 탄핵하여 밖에 내쳐 성 안에 있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동성의 부녀는 판서 윤순(尹詢)의 아내이고, 대간은 조정암(趙靜庵)이 정언으로 있을 때이다.
이현보(李賢輔)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감사는 직책이 풍헌(風憲)을 겸하였는데, 본도(本道)는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곳이니, 사사로이 통하는 문을 한 번 열면 정법(政法)이 무너지게 된다고 하여, 한계를 엄하게 하여 자제와 친척이라도 감히 공관(公館)에 출입하는 자가 없었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시를 짓는데 어려운 운을 쓰기에 능하였다.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서 일본 사신 붕중(弸中)을 국경에 가서 영접하였는데, 붕중이 역시 시를 알아서 주고받은 시가 심히 많았다.
붕중이 한 번은 ‘주역을 읽음[讀易]’으로 시제를 삼고, 어려운 운(韻)을 불렀다. 김안국이 곧 짓기를,
대갱은 원래 매실과 소금으로 조미하지 않고 / 大羹元不和梅鹽
지극히 묘한 이치는 뾰족한 붓과 혀로는 형용하기 어렵네 / 至妙難形筆舌尖
고요한 가운데 잠자코 소장하는 이치를 관찰하니 / 靜裏黙觀消長理
달이 거울처럼 둥글다가 또 낫처럼 굽기도 하네 / 月圓如鏡又如鎌
하니, 붕중이 손으로 무릎을 치며 탄복하였다. 뒤에 그에게 수업하는 제자가 앞에 와서,지극히 묘한 이치는 뾰족한 붓과 혀로는 형용하기 어렵네 / 至妙難形筆舌尖
고요한 가운데 잠자코 소장하는 이치를 관찰하니 / 靜裏黙觀消長理
달이 거울처럼 둥글다가 또 낫처럼 굽기도 하네 / 月圓如鏡又如鎌
“‘반월(半月)’로 시제를 삼겠습니다.”
하고, 곧 어(魚), 저(蛆), 여(輿), 세 글자로써 운(韻)을 불렀다. 김안국이 짓기를,신령스런 구슬이 부서지자 용과 물고기가 싸우니 / 神珠缺碎鬪龍魚
은 두꺼비를 쪼개 죽여 반이나 벌레가 먹었네 / 剮殺銀蟾半蝕蛆
망서(望舒)가 거꾸러져 수레를 잘못 몰아 / 顚倒望舒仍失馭
수레틀이 망가지고 바퀴가 부러져 수레 구실 못하네 / 軸亡輪拆不成輿
하였다. 뒤에 어떤 사람이 차운하기를,은 두꺼비를 쪼개 죽여 반이나 벌레가 먹었네 / 剮殺銀蟾半蝕蛆
망서(望舒)가 거꾸러져 수레를 잘못 몰아 / 顚倒望舒仍失馭
수레틀이 망가지고 바퀴가 부러져 수레 구실 못하네 / 軸亡輪拆不成輿
반벽에 의연히 해어가 나오니 / 半壁依然出海魚
광채가 빛나서 뜬 구더기에 비치네 / 薄將光彩照浮蛆
계수나무 가에 토끼 자는 땅이 넓지 못하니 / 桂邊宿兎無多地
은근히 약방아를 찧어도 수레에 차지 않네 / 搗藥殷勤未滿輿
하였다.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모르나 또한 모재(慕齋)의 다음은 될 만하다.광채가 빛나서 뜬 구더기에 비치네 / 薄將光彩照浮蛆
계수나무 가에 토끼 자는 땅이 넓지 못하니 / 桂邊宿兎無多地
은근히 약방아를 찧어도 수레에 차지 않네 / 搗藥殷勤未滿輿
○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이 교리로 있을 때에 중종이 한 번은 야대(夜對)에 나왔다. 아뢰는 자가
“지금 태평을 이룩하려면 모름지기 당대에 제일가는 사람을 발탁하여 정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말하니, 이연경이 앞으로 오며,“이는 조광조를 가리킨 것입니다. 조광조는 진실로 훌륭합니다만, 지금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는 경력이 많고 인망(人望)이 흡족하기를 기다린 뒤라야 큰 책임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그 소문을 듣고 달려가 이연경을 보고 울면서 감사하였다.뒤에 사화가 일어나게 되자 남곤ㆍ이빈(李蘋) 등이 귀양 보낼 사람의 성명을 적어서 보고하는데, 이연경의 이름이 첫머리에 있었다. 상이 붓으로 지우며 전교하기를,
“이연경은 내가 그 사람됨을 아니, 귀양 보내지 말라.”
하였다.○ 〈기묘현량과방목(己卯賢良科榜目)〉에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이 발문을 짓기를,
“아! 현량과를 삭과(削科)한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었다. 옛적에 우리 중종대왕 때에 나라를 다스리자면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렸지만, 인재가 출세하는 길이 반드시 사장(詞章)과 훈고(訓詁)에 근본하여 혹 한 가지만 하고, 혹 겸하기도 하나 역시 이 길만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비록 어질고 재능이 있어도 제한에 구속을 받아 실제로 사용할 자리가 없었다.
이에 한(漢) 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대아문(大衙門) 및 팔도로 하여금 각각 학문과 조행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게 하여, 1백 20명을 얻어서 대궐 뜰에서 책문(策問)으로 시험보아 그 숫자가 열수(列宿)에 응하게 되니, 모두 당시의 쟁쟁한 명사들이었다. 위에서 기뻐하는 말씀이 계시니 선비들이 조정에서 기운이 떨치고, 백성들이 들에서 눈을 닦고 바라보더니, 얼마 안 되어 비바람이 북쪽에서 세차게 일어나서 하늘에 가득하고 해를 가리어서 그 법제가 혁파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다. 오래된 뒤에 주상의 뜻이 스스로 풀어져 점점 회복할 길을 틔웠다.
인종(仁宗)께서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여 이를 밝히려고 생각하였으나 5월에 마지막 유언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명종(明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시자 권력을 잡는 자가 다시 바뀌었는데 늦게야 크게 깨달았으나, 갑자기 승하하였으니, 어찌 거듭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닌가.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주 성왕(周成王), 한 소제(漢昭帝)보다도 뛰어나시어 자전의 밝은 분부를 받들어 차례로 시행하여 찬란히 볼 만하니, 선대를 빛내어 뒤를 잇는 효도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랴. 아! 현량과의 파과(罷科)와 복과(復科)가 국가에 경중이 없는 것 같지마는 오히려 이것으로써 세상의 변함을 관찰하고, 선비의 추향을 증험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 복과가 어찌 사문(斯文)에 큰 기회가 아니겠는가. 네 분 성군의 뜻이 또한 이미 드러났다. 어찌 그다지도 아름다운가.
내가 일찍이 김군양(金君讓)에게 말하기를, ‘과거마다 방목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건마는 우리 현량과만이 없다. 상의 은총을 잊고 선인(先人)의 사적을 매몰시키지 말라.’하였다. 조금 뒤에 들으니, 안군노(安君璐)가 그 일을 주장하여 심군(沈君) 희수(喜壽), 김군(金君) 영남(穎男)과 더불어 의론이 합하여 외손에게서 찾아내어 돈을 모아 판각하기를 도모하되 모두 전례에 의거하고, 다시 당시 전지 등의 말씀을 찾아서 책머리에 싣고, 선인의 성휘(姓諱) 밑에 천목(薦目), 관직의 이력, 자손의 이름을 쓰게 하고는 또 나에게 발문을 짓기를 요청하였다. 아! 어찌 이다지도 기이한가, 모두 기이하다면 발문을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이에 답하기를, ‘주갑(周甲)이 된 60년 만에 이 방목이 이루어졌으니, 역시 한 가지 기이한 일이로다’ 하였다. 나는 바로 탄수의 사위이니 슬픔과 기쁨이 더욱 심하도다.”
하였다.○ 판서 임호신(任虎臣)이 병이 중할 때에 그의 벗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문병하러 가서 병이 위독한 것을 보고 눈물이 절로 나왔다. 임호신이 《당음(唐音)》한 질(帙)을 뽑아서 주면서,
“나를 위하여 한 편을 쾌히 읊어 주게.”
하였다. 그가 사생에 달관함이 이와 같았다.아문 근수(衙門跟隨)의 대신 세우는 자에게는 그 본인에게 가포(價布)를 징수함이 너무 과하였더니, 조정에서 의론하여 해조로 하여금 값을 거두어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임호신이 아뢰기를,
“이것은 청렴을 기르는 것이 아니니, 사대부를 대우함이 너무 박하지 아니합니까?”
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전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구언(求言)하는 데에 응하여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강(綱)이 하나이니, 임금의 마음이요, 목(目)이 열이니 가정(家政)을 엄하게 할 것,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기를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사람 쓰고 버림을 삼갈 것, 천도(天道)에 순종할 것, 인심을 받을 것, 언론의 길을 넓힐 것, 사치로운 욕심을 경계할 것, 군정(軍政)을 닦을 것, 기미(幾微)를 살필 것으로서, 극히 충성되고 착하고 곧은 말이었다. 중종이 깊이 탄복하고 장려하기를,
“옛적 진덕수(眞德秀)도 이보다 뛰어날 수 없다.”
하여, 동궁에게 전해 보였다.뒤에 인종이 즉위하자, 발탁하여 우찬성을 제수하였는데, 이언적이 재차 사양하니, 전교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경의 상소문을 선왕이 내려 주셔서 보고는 이미 탄복하였으며 또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듣고서 경에게 마음을 둔 지 오래였는데 어찌 찬성의 직책에 합당하지 않겠소.”
하니, 이에 직책에 나아갔다.○ 가정(嘉靖) 갑진년에 북방 오랑캐가 명 나라에 크게 침범하여 황성(皇城)을 포위하자, 중국에서 우리 나라의 원병을 청할 뜻이 있으니, 우리 나라의 의론하는 자들이 요양(遼陽) 동쪽이 안전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마구 넘어 들어오면 난처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는 이가 있었다. 상이 서쪽 국경을 걱정하여 유관(柳灌)이 찬성으로부터 평안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에 바야흐로 대윤(大尹)ㆍ소윤(小尹)의 설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유관을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밖은 중하고 안이 가벼워진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상이 분부하기를,
“서쪽 국경의 근심을 덜기 위하여 중신(重臣)을 내보내어 진정시키는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특별히 숭록대부의 품계로 올려서 보냈다.인종 초년에 들어와 우상이 되었다.
○ 참봉 김봉상(金鳳祥)이 그의 아우 귀상(龜祥)ㆍ난상(鸞祥)과 더불어 우애가 돈독하였다. 일찍이 모친에게 고하기를,
“우리 집에 자매는 없고 형제 세 사람이 참으로 마음이 서로 맞으니, 동거(同居)하기에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모친 김씨가 기뻐하여 허락하였다. 이에 한 집에서 한 솥 밥을 해먹기로 서로 약속하여 모든 살림살이를 균일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집안 사람이 감히 한 물건도 사사로이 제 것으로 가지지 아니하였다.○ 가정 을미년에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허항(許沆)ㆍ채무택(蔡無擇) 등이 바야흐로 김안로와 결탁하여 세력을 부렸는데 김안로의 아들 김기(金祺)를 전랑(銓郞)에 추천하여 달라고 극력으로 도모하였으나 홍섬이 듣지 않고, 말이 허항에게 저촉되었다. 그래서 허항이 죄를 얽어 모함하여 옥사를 만들어 대궐 뜰에서 국문하여 곤장을 쳐서 거의 죽게 되어 흥양(興陽)으로 오래 귀양보냈다. 금부 나졸이 압송하는 길에 공주 금강에 이르렀는데, 매를 맞은 상처가 심하여 붉은 피가 옷에 많이 묻었으므로 보는 사람이 피하였다.
이때에 과거(科擧)가 있어 남도의 선비들이 빽빽하게 서울로 올라오다가 나룻가에서 서로 만났다. 나이 가장 젊고 용모가 당당한 어떤 선비가 여러 사람 중에 크게 소리치기를,
“내가 들으니 홍섬은 사류(士類)라고 하는데, 지금 죄도 없이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니, 반드시 소인이 나라를 차지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때에 과거는 보아서 무엇 하겠소. 여기서 발길을 돌립시다.”
하였다.홍섬이 들것에 실려 앓던 중에 이 말을 듣고 절로 정신이 상쾌해졌다. 천천히 그 성명을 물으니, 임형수(林亨秀)였다.
○ 창산 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의 살던 집이 남산 아래 있는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었다. 가정 신축년에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세를 얻어 살았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방문하매, 규암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더니, 일시의 문인들이 많이 차운하여 큰 책이 되었다.
여기서 그 기억나는 것을 적어 본다. 규암의 시에,
옥 같은 사람이 달 아래 그윽한 거처 찾아와 / 玉人乘月訪幽居
사립문을 밀치니 나무 그림자가 성글도다 / 柴戶推來樹影踈
집에 빚은 천일주를 잠깐 독을 열었고 / 山釀暫開千日酒
쟁반의 안주는 우연히 팔초어를 얻었네 / 盤肴偶得八梢魚
미친 시는 해져 세속을 놀랠 것 없지만 / 狂詩不用傳驚俗
맑은 이야기가 글 읽는 것보다 나은 줄 이제 알겠네 / 淸話方知勝讀書
내일 그대를 산밑 길에서 전송하고 나면 / 明日送君山下路
작은 당 적적하여 텅빈 곳에 사는 것 같으리 / 小堂寥落似逃虛
하였다. 임당의 시에는,사립문을 밀치니 나무 그림자가 성글도다 / 柴戶推來樹影踈
집에 빚은 천일주를 잠깐 독을 열었고 / 山釀暫開千日酒
쟁반의 안주는 우연히 팔초어를 얻었네 / 盤肴偶得八梢魚
미친 시는 해져 세속을 놀랠 것 없지만 / 狂詩不用傳驚俗
맑은 이야기가 글 읽는 것보다 나은 줄 이제 알겠네 / 淸話方知勝讀書
내일 그대를 산밑 길에서 전송하고 나면 / 明日送君山下路
작은 당 적적하여 텅빈 곳에 사는 것 같으리 / 小堂寥落似逃虛
공무를 파하고 돌아와 홀로 있는 것 좋아하니 / 衙罷歸來喜索居
뜰에 가득한 숲에 달빛이 어른어른 / 一庭林月正扶疎
남산에 이미 봉황새 와서 우는 줄 알겠고 / 朝陽已覺鳴祥鳳
큰 내에는 큰 고기 놓아 주어야 하리 / 大壑還須縱巨魚
소나무는 일산처럼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 松蓋當門能迓客
대나무 창문에 눈이 남으니 글 보기 좋구나 / 竹窓留雪好看書
산음에서 친구 찾아온 흥취 아직 남았으니 / 孤舟不盡山陰興
절벽 구름 사닥다리에 공중으로 솟고파 / 絶磴雲梯擬跨虛
하였고,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의 시에는,뜰에 가득한 숲에 달빛이 어른어른 / 一庭林月正扶疎
남산에 이미 봉황새 와서 우는 줄 알겠고 / 朝陽已覺鳴祥鳳
큰 내에는 큰 고기 놓아 주어야 하리 / 大壑還須縱巨魚
소나무는 일산처럼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 松蓋當門能迓客
대나무 창문에 눈이 남으니 글 보기 좋구나 / 竹窓留雪好看書
산음에서 친구 찾아온 흥취 아직 남았으니 / 孤舟不盡山陰興
절벽 구름 사닥다리에 공중으로 솟고파 / 絶磴雲梯擬跨虛
대사헌이 옛 정승의 집에 와서 빌어사니 / 都憲來僑故相居
풍류와 명성이 한세상에 생소하지 않구나 / 風聲一世未全疎
문하에 다니니 화려한 수레 모였던 일 생각나고 / 登門却憶攢華轂
술을 차렸으니 허리에 찼던 금어(金魚) 전당잡힌 것 이제도 보겠네 / 置酒今逢換佩魚
운치는 서청보다 좋으니 걸작이 모였고 / 韻勝西淸聯傑作
벼슬은 동관에 있어 기이한 책을 빌리네 / 籍通東觀借奇書
다행히 버림 받지 않고 문장을 의론하니 / 猥蒙不鄙論文事
그림의 떡으로 주린 배 채우듯 실할 듯해도 역시 허깨비네 / 畫餠充飢實亦虛
하였고, 신기재(申企齋 신광한(申光漢)의 호)의 시에는,풍류와 명성이 한세상에 생소하지 않구나 / 風聲一世未全疎
문하에 다니니 화려한 수레 모였던 일 생각나고 / 登門却憶攢華轂
술을 차렸으니 허리에 찼던 금어(金魚) 전당잡힌 것 이제도 보겠네 / 置酒今逢換佩魚
운치는 서청보다 좋으니 걸작이 모였고 / 韻勝西淸聯傑作
벼슬은 동관에 있어 기이한 책을 빌리네 / 籍通東觀借奇書
다행히 버림 받지 않고 문장을 의론하니 / 猥蒙不鄙論文事
그림의 떡으로 주린 배 채우듯 실할 듯해도 역시 허깨비네 / 畫餠充飢實亦虛
성남의 외진 땅은 내 사는 곳과 비슷하니 / 城南地僻類吾居
벼슬살이에 서툰 줄 역시 알겠네 / 亦識朱門生事疎
술을 사랑하니 자주 달에게 물을 뿐이요 / 愛酒祗宜頻問月
산을 사랑하나 어찌 은어까지 불사를필요 있으리 / 耽山何用更焚魚
조정에 들어가서는 몇 번이나 새 정사를 들었는고 / 歸朝幾度聞新政
방에 들어와서는 오직 묵은 책을 뒤적거리네 / 入室惟應檢舊書
피차에 취미가 같음을 논하려 한다면 / 彼此欲論同氣味
작은 당 맑은 밤에 자리를 비어 두소 / 小堂淸夜坐須虛
하였고, 영천(靈川) 신잠(申潛)의 시에는,벼슬살이에 서툰 줄 역시 알겠네 / 亦識朱門生事疎
술을 사랑하니 자주 달에게 물을 뿐이요 / 愛酒祗宜頻問月
산을 사랑하나 어찌 은어까지 불사를필요 있으리 / 耽山何用更焚魚
조정에 들어가서는 몇 번이나 새 정사를 들었는고 / 歸朝幾度聞新政
방에 들어와서는 오직 묵은 책을 뒤적거리네 / 入室惟應檢舊書
피차에 취미가 같음을 논하려 한다면 / 彼此欲論同氣味
작은 당 맑은 밤에 자리를 비어 두소 / 小堂淸夜坐須虛
땅이 궁벽하여 도리어 아담한 은거지 같으니 / 地僻還如小隱居
앉아 보매 마음이 절로 한가롭네 / 坐來心事自蕭疎
뜰 앞에 소나무 늙었으니 응당 학이 깃들 것이요 / 庭前松老應棲鶴
난간 밖에 못이 맑으니 물고기 기르기에 적합하네 / 檻外池淸合養魚
공무에서 물러와서는 몇 번이나 글로써 벗을 모았던고 / 退食幾回文會友
향을 태우고서 다시 밤에 책보는 것이 기쁘네 / 焚香更喜夜觀書
그대의 고요한 가운데서 터득한 공부를 보니 / 看君靜裏功夫得
마음에 티끌 없어 수면에 비친 달처럼 비어있네 / 方寸無塵水月虛
하였고, 김인후(金麟厚)의 시에는,앉아 보매 마음이 절로 한가롭네 / 坐來心事自蕭疎
뜰 앞에 소나무 늙었으니 응당 학이 깃들 것이요 / 庭前松老應棲鶴
난간 밖에 못이 맑으니 물고기 기르기에 적합하네 / 檻外池淸合養魚
공무에서 물러와서는 몇 번이나 글로써 벗을 모았던고 / 退食幾回文會友
향을 태우고서 다시 밤에 책보는 것이 기쁘네 / 焚香更喜夜觀書
그대의 고요한 가운데서 터득한 공부를 보니 / 看君靜裏功夫得
마음에 티끌 없어 수면에 비친 달처럼 비어있네 / 方寸無塵水月虛
조회에서 돌아오매 한 방에 엄연히 한가롭게 거처하니 / 朝廻一室儼閒居
여흥은 때때로 소방한 것 무방하네 / 餘事無妨時放疎
글을 지으매 삼협의 물이 거꾸로 쏟는 듯 / 筆下倒傾三峽水
묵지에는 북명의 고가가 날아 나오네 / 墨池飛出北溟魚
사람이 저문 길에 돌아가매 달이 자리를 엿보고 / 人歸暮逕月窺榻
문은 낙화속에 닫겼는데 바람이 책장을 걷네 / 門掩落花風捲書
이 속에 뉘 처음 터를 잡았는고 / 誰向此間初卜築
지금은 경계가 청허함만 깨닫겠네 / 祗今偏覺境淸虛
하였고, 임형수(林亨秀)의 시에는,여흥은 때때로 소방한 것 무방하네 / 餘事無妨時放疎
글을 지으매 삼협의 물이 거꾸로 쏟는 듯 / 筆下倒傾三峽水
묵지에는 북명의 고가가 날아 나오네 / 墨池飛出北溟魚
사람이 저문 길에 돌아가매 달이 자리를 엿보고 / 人歸暮逕月窺榻
문은 낙화속에 닫겼는데 바람이 책장을 걷네 / 門掩落花風捲書
이 속에 뉘 처음 터를 잡았는고 / 誰向此間初卜築
지금은 경계가 청허함만 깨닫겠네 / 祗今偏覺境淸虛
벼슬살이하면서 또한 고요히 거처하니 / 身綰金章且索居
맹호연이 병이 많아 찾는 친구 드무네 / 故人多病孟生疎
오늘날 뭇 닭 속에 학처럼 머물고 / 鷄群此日還留鶴
당년에 굴원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았네 / 澤畔當年未葬魚
잠을 깨우는 골짜기 새는 창문을 엿보고 / 喚睡谷禽窺戶牖
주렴에 들어온 산의 푸름은 거문고와 책을 적시네 / 入簾山翠潤琴書
공무에서 돌아와 날마다 향을 태우고 앉았으니 / 朝廻日日燒香坐
소나무에 걸린 달이 창에 다다라 밤 장막이 비었네 / 松月臨窓夜幌虛
하였고, 임억령(林億齡)의 시에는,맹호연이 병이 많아 찾는 친구 드무네 / 故人多病孟生疎
오늘날 뭇 닭 속에 학처럼 머물고 / 鷄群此日還留鶴
당년에 굴원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았네 / 澤畔當年未葬魚
잠을 깨우는 골짜기 새는 창문을 엿보고 / 喚睡谷禽窺戶牖
주렴에 들어온 산의 푸름은 거문고와 책을 적시네 / 入簾山翠潤琴書
공무에서 돌아와 날마다 향을 태우고 앉았으니 / 朝廻日日燒香坐
소나무에 걸린 달이 창에 다다라 밤 장막이 비었네 / 松月臨窓夜幌虛
서재가 적적하여 중의 거처와 같으니 / 寒齋寂寂比僧居
땅이 궁벽하여 문전에 말발굽이 드무네 / 地僻門前馬跡疎
뜻이 부귀를 싫어하여 증점을 따르겠고 / 志地不公侯吾與點
꿈에 강해에 노니 물고기 즐거움을 아네 / 夢遊江海我知魚
천하에 둘도 없는 선비가 되려면 / 欲爲天下無雙士
어찌 성인의 말이 아닌 글을 읽으랴 / 肯讀人間非聖書
술 한 병을 가지고 세상일을 서로 논하려고 / 思把一樽論世事
먼 길이라 빠른 바람에 허공을 타고 왔네 / 遠來風疾正乘虛
하였고, 박충원(朴忠元)의 시에는,땅이 궁벽하여 문전에 말발굽이 드무네 / 地僻門前馬跡疎
뜻이 부귀를 싫어하여 증점을 따르겠고 / 志地不公侯吾與點
꿈에 강해에 노니 물고기 즐거움을 아네 / 夢遊江海我知魚
천하에 둘도 없는 선비가 되려면 / 欲爲天下無雙士
어찌 성인의 말이 아닌 글을 읽으랴 / 肯讀人間非聖書
술 한 병을 가지고 세상일을 서로 논하려고 / 思把一樽論世事
먼 길이라 빠른 바람에 허공을 타고 왔네 / 遠來風疾正乘虛
산수를 혼자 차지하기 위해 거처를 옮겼으니 / 欲專丘壑爲移居
남산을 길이 대하며 푸른 빛으로 감쌌네 / 長對終南捲碧疎
바쁜 가운데 조회하느라 인끈과 사모를 갖추고 / 忙裏朝參齋紱冕
한가로운 가운데 사업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살피네 / 閒中事業察鳶魚
몸이 건강하니 주머니에 약이 없고 / 將身博健囊無藥
순박한 세상을 만들려고 뱃속에 글이 있네 / 挽世歸淳腹有書
시편을 화답하여 그리움을 표시하니 / 屬和篇章描景仰
비로소 이름 있는 선비 헛되지 않음을 알겠네 / 始知名下士非虛
하였다.남산을 길이 대하며 푸른 빛으로 감쌌네 / 長對終南捲碧疎
바쁜 가운데 조회하느라 인끈과 사모를 갖추고 / 忙裏朝參齋紱冕
한가로운 가운데 사업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살피네 / 閒中事業察鳶魚
몸이 건강하니 주머니에 약이 없고 / 將身博健囊無藥
순박한 세상을 만들려고 뱃속에 글이 있네 / 挽世歸淳腹有書
시편을 화답하여 그리움을 표시하니 / 屬和篇章描景仰
비로소 이름 있는 선비 헛되지 않음을 알겠네 / 始知名下士非虛
을사년 (1545, 인종 1)에 사화가 일어나자 규암공(圭庵公)이 탄핵을 당하여 청주(淸州)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퇴계(退溪) 선생이 시를 지어 부치기를,
규암이 전일에 풍진 속에 있을 때에도 / 圭庵昔在風塵中
맑고 깨끗하여 풍진의 모습이 아니었네 / 瀟洒不作風塵容
지금 청주로 돌아가 농사짓기 배우니 / 今歸淸州學耕稼
청성 곡식이 풍년들어 고야산과 같네 / 淸城穀熟如姑射
어찌 세상의 영광과 욕됨을 마음에 두랴 / 肯將榮辱入靈臺
곤궁한 생좔 감수한 안회를 스승으로 삼네 / 一簞一瓢師顔回
나는 들으니, 천지간의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데 / 吾聞天下有至樂
그것은 일반 악기의 음악이 아니라네 / 非金非石非絲竹
뜻을 같이한 사람이 나와 멀어지니 / 同志之人與我違
찌든 책만 안고서 시비를 구분 못하네 / 獨抱塵編荒是非
하였다.맑고 깨끗하여 풍진의 모습이 아니었네 / 瀟洒不作風塵容
지금 청주로 돌아가 농사짓기 배우니 / 今歸淸州學耕稼
청성 곡식이 풍년들어 고야산과 같네 / 淸城穀熟如姑射
어찌 세상의 영광과 욕됨을 마음에 두랴 / 肯將榮辱入靈臺
곤궁한 생좔 감수한 안회를 스승으로 삼네 / 一簞一瓢師顔回
나는 들으니, 천지간의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데 / 吾聞天下有至樂
그것은 일반 악기의 음악이 아니라네 / 非金非石非絲竹
뜻을 같이한 사람이 나와 멀어지니 / 同志之人與我違
찌든 책만 안고서 시비를 구분 못하네 / 獨抱塵編荒是非
정미년에 죽음을 내리는 명령이 있어 금부도사가 이르니, 공이 꿇어앉아 전지를 듣고 목욕한 뒤에 사약을 마셨다.
그의 종제(從弟) 기수(麒壽)에게 글을 부쳐 영결하기를,
“하늘과 땅이 실로 이 마음을 알 것이다. 자식 하나 있는 것은 그대에게 부탁하니, 내가 무슨 걱정인가.”
하였다. 그의 아들에게 경계하는 글의 대략에,“내가 화를 당하였다고 하여 기운을 잃지 말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주색(酒色)을 경계하라. 상사(喪事)는 검소하게 하고 예법에 어긋나지 말게 하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살기보다는 부끄럼 없이 죽는 것만 못하느니라.”
하였는데, 필법이 날아 움직여서 늠름하게 살아 있는 듯하니, 그 평소의수양을 알 수가 있다. 당시에 나이 49세였다. 금상 초년에 벼슬을 복직시켰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증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정렴(鄭磏)은 정순붕(鄭順朋)의 아들인데, 호는 북창(北窓)이다. 태어날 적부터 자질이 맑고 빼어났으며, 장성해서는 통달하지 못함이 없어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산수ㆍ중국어에 모두 배우지 않아도 능통하였다.
일찍이 그 아버지가 북경에 사신으로 갈 적에 따라가서 중국 사람과 말을 통하니, 모두들 놀래고 기이하게 여겼다. 6품의 관직으로 차례를 뛰어 등용하여 의학ㆍ산학ㆍ천문 세 학과의 교수를 겸하고, 포천 현감을 지내었다.
그 아버지가 을사년에 고변을 올릴 적에 극력 말렸으나, 듣지 않고 인하여 크게 거슬려서 집에 용납되지 못하고 과천 청계산(淸溪山), 양주(楊州) 괘라리(掛蘿里)에 많이 있었다. 항상 종을 시켜 약을 짓게 하여 새벽에 달여 먹고서 비로소 말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으니, 나이 40 남짓하였다.
그가 산에 있을 적에 산 아래 사람들의 하는 일을 알아서, 아무 집에서 방금 아무 일을 한다고 말한 것이 뒤에 알아보면 과연 맞았다. 그 학문이 선가(禪家) 진단(陳摶)의 유파에서 나온 듯하다.
○ 연산군이 마음대로 음탕과 포학을 자행할 때에 어떤 사람이 언문(諺文)으로 연산군의 죄악을 거리에 방을 붙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니, 연산군이 그것은 당시에 죄를 입은 자의 친당들의 소행이라고 지목하여 귀양간 사람들을 다 체포하여 고문이 혹독하였고 또 서울과 시골에 언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금지하였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권력을 독차지하여 독기를 부릴 때에 종루(鐘樓) 기둥에 글을 붙여서, 김안로와 허항 및 채무택의 죄악을 말한 자가 있었다. 그때에 심정(沈貞)이 죄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의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심정의 아들 사순(思順)이 한 짓이라고 지목하여 고문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명종 정미년에 정언각(鄭彦慤)이 고하기를,
“양재역 벽에 글이 붙었는데,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악한 신하 이기(李芑)가 밑에서 권세를 희롱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삼정승 윤인경(尹仁鏡)ㆍ기ㆍ정순붕 등이 을사년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죄를 더 주기를 청하여 죽이기도 하고 귀양 보내기도 하였다.○ 삼척(三陟)은 예전 실직국(悉直國)이었다. 신라 때에는 실직주(悉直州)라 칭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고쳐서 삼척이라 칭하였다. 우리 태조가 목조(穆祖)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부(府)로 삼고, 또 부사에게 붉은 서각 띠를 주었다. 고로(故老)들이 말하기를,
“목조의 아버지의 능은 노지동(蘆池洞)에 있고 어머니의 능은 동산리(東山里)에 있다. 홍치(弘治) 기유년(1489, 성종 20)에 예조의 공사(公事)로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군인을 징발하여 두 능의 무너지고 꺼진 곳을 수리하고 쌓게 하여 일을 시작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다만 초목의 벌채만 금하고 능을 쌓는 것은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였다. 그것은 연대가 오래 되었고 또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으므로 정지시킨 것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서울에서 자라났다. 소년시절에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혀서 날램과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 사람들이 대적하지 못하였다. 나이 30이 넘어서 비로소 깨달아 학문을 하여, 《대학》을 읽고 물러가 태인(泰仁)에 살았다. 스스로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다른 책을 널리 보면 정력이 분산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대학만 가지고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서 미묘한 것을 깊이 통달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송규암(宋圭菴 송인수의 호)이 전라 감사로 갔을 때에 그의 집에까지 가서 찾아갔더니, 이로 말미암아 유명해졌다.
명종 말년에 6품으로 뛰어 등용되어 역마를 태워 조정으로 불러 올려 치도(治道)를 묻고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제수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갔다. 금상(今上)이 교서를 내려 불러서 장령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이항의 학문이 글을 널리 배우지 아니하고 먼저 간요(簡要)한 것부터 취하였기 때문에 의리에는 혹 투명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사람들이 이를 결점으로 여기는 자가 있었다.
동시대에 성운(成運)이 보은(報恩)에 숨어 살았는데, 명종이 역마로 불러 올려 접견하고 정치하는 도리를 묻고는 관직을 주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금상(今上)이 장령ㆍ집의에 제수하였으나, 다 나오지 않다가 죽었다.
○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가 일찍이 관동(關東)에 유람하여 기행(紀行)한 글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이 그 끝에 발문을 지어 주었었다.
치재가 죽은 지 10여 년 뒤에 퇴계가 치재의 유산(遊山)할 때에 동행하였던 중을 만나서 글을 지어 주기를,
“나의 벗 진사 홍응길(洪應吉)이 도학(道學)에 심히 간절하게 힘쓰더니, 불행히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생명을 잃었기에 애통하도다. 홍응길이 일찍이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을 나에게 보이기에, 내가 글을 써 주었는데, 지금은 다시 기억할 수 없다. 서울에서 동으로 돌아오다가 배 위에서 한 중을 만나니, 바로 홍군이 유산할 때에 길을 인도했던 자로서, 당일의 탐승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한참 동안 느껴 눈물을 흘리다가 애오라지 한 편의 시(詩)로서 정을 표시한다.”
시에,풍악은 천하의 절승이라 들은 지 오래이고 / 楓岳久聞天下勝
홍군은 후배의 훌륭한 분이라 애석하네 / 洪君可惜後來賢
풍악을 유람하여 쓴 기행문 본 것이 기쁘더니 / 盪胸曾喜憑遊錄
저승으로 갔는데 당시의 동반했던 중을 만나 슬프네 / 隔世今嗟遇伴禪
서로 친하여 같이 도학을 배웠기 때문이지 / 只爲相從同學道
그대 산에 가서 신선을 구한 것을 부러워함이 아니었네 / 非緣長往獨求仙
찬 비바람 부는 여강 위에서 / 冷煙風雨驪江上
평소의 친분을 생각하니 뜻이 아득하구나 / 回首平生思惘然
하였다.홍군은 후배의 훌륭한 분이라 애석하네 / 洪君可惜後來賢
풍악을 유람하여 쓴 기행문 본 것이 기쁘더니 / 盪胸曾喜憑遊錄
저승으로 갔는데 당시의 동반했던 중을 만나 슬프네 / 隔世今嗟遇伴禪
서로 친하여 같이 도학을 배웠기 때문이지 / 只爲相從同學道
그대 산에 가서 신선을 구한 것을 부러워함이 아니었네 / 非緣長往獨求仙
찬 비바람 부는 여강 위에서 / 冷煙風雨驪江上
평소의 친분을 생각하니 뜻이 아득하구나 / 回首平生思惘然
○ 찬성 허자(許磁)가 풍채가 준수하고 단정하여 동료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청탁을 받지 않고 인재를 너무 구별하다가 모가 나서 마침내 이기(李芑)의 모함을 받아 홍원(洪原)에 귀양가서 죽었다.
평생에 의리를 좋아하여 매양 봉록을 받으면 자기의 쓸 것을 헤아려 놓고 남는 것은 따로 저장하였다가 친척이나 벗에게 상사(喪事)가 있으면 구휼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었다. 그가 죽던 날에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 세종 때에 내시 별감 김원효(金元孝)가 순왕곡(舜王穀) 30이삭을 바치니 각궁(角弓) 하나를 주었다. 김원효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종자를 얻어 배양하여 바친 것인데, 줄기는 수수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고, 열매는 조와 같았다. 상이 내농소(內農所)와 동적전(東籍田)ㆍ서적전에 심어 배양하게 하였다.
○ 문종(文宗) 때에 강원도 춘천부 백성 윤치(尹致)가 효도로 어머니를 섬기었다. 어머니의 나이 90인데 항상 옆에서 모시고 눕고 일어날 적에 반드시 부축하고 음식을 마련하여 어머니가 먹고자 하는 대로 드렸다. 날마다 어머니가 밥 먹어야 밥 먹고, 어머니가 잠자야 잠을 잤다. 또 봄과 가을에는 한 마을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같은 부(府)에 사는 백성 유육생(劉育生)도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여 어머니가 나이 거의 90인데 항상 변기를 시중들되 조금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으며, 또 추위 더위를 가리지 않고 몸소 고기잡고 사냥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반드시 어머니에게 드리고 사계절마다 마을 사람과 친족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 가정 갑진년(중종 39, 1544, 인종 즉위년)에 상이 승하하니, 묘호(廟號)를 중종으로 올렸다. 인종이 전교하기를,
“부왕(父王)께서 연산조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난리를 다스리고 바른 데로 돌려서 종묘를 편안히 하여 중흥한 공이 있었으므로 조(祖)로 칭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매, 회계하기를,“옛적에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론할 때에 혹 조(祖)로 칭하려 하였더니, 우무(尤袤)가 말하기를,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장사정왕(長沙定王)의 후손으로 들어가 대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조(祖)라 칭한 것입니다. 고종(高宗)은 중흥은 하였지만 휘종(徽宗)의 아들로서 흠종(欽宗)을 바로 이은 것이니, 조(祖)로 칭함은 부당하다…….’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조정에서 세조를 조(祖)라 칭한 것은 중흥하여 아우로서 형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행왕(大行王)은 비록 중흥은 하였으나 성종의 계통을 바로 이었으니, 조(祖)라 칭함이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의론하라고 명하니, 대신들이,“시호를 의논하는 것은 큰일이니, 조정에서 의론해 정한 것을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상 윤은보(尹殷輔)가 병으로 죽으니, 인종이 전교하기를,
“정승의 직책은 모든 책임이 모인 곳이기에, 합당한 정승을 얻으면 다스려지고 편안하며, 그렇지 못하면 난리가 일어나고 망함이 따른다. 그러므로 옛날 밝은 임금은 모두 정승 뽑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반드시 학식 많은 선비와 훌륭한 덕이 있는 사람을 널리 선택하여 맡겨서, 판축(版築)하는 천한 사람 중에서 발탁해 온 이도 있었다. 지금 수상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장사를 지낼 시기가 이미 닥쳤는데 두 정승이 차례로 승진되었으니, 마땅히 그 후임을 지명해야 한다. 우리 선조(先朝)에서 인재를 배양한 것이 성대하다 할 수 있으니 발탁하여 재수할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덕망이 있는 자를 삼가 선택하여 그 자리에 앉게 하라.” 내가 덕 없는 사람으로서 큰 변고를 당하여 정신이 아득하여 살필 수 없고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중한 일을 다 대신만 믿으니, 만약 어진 정승을 얻는다면 나라의 복이다.”
하였다.유관(柳灌)ㆍ이기(李芑)가 추천에 참여하였는데, 이기를 낙점하였더니, 양사가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조금 있다가 유관이 대신하였다.
○ 인종 을사년에 삼정승 윤인경ㆍ유관ㆍ성세창(成世昌) 등이 아뢰기를,
“사문(赦文)안에 국가에 관계되는 말은 성종 때에 어떤 일로 인하여 비로소 쓰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겠는데, 폐조(廢朝)에서 그대로 답습해 쓴 것이요, 이것은 조종(祖宗)의 법이 아니며, 또 예로부터 임금이 내리는 사문(赦文)에 실려 있는 것도 아니므로 물의가 그것을 타당치 않게 여겨서 개정하고자 한 지 오래이나, 사면문을 발표할 때에는 으레 반드시 바쁘기 때문에 미쳐 아뢸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즉위하신 처음에 폐법(幣法)을 그대로 답습할 수 없으니, 개정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국가에 관계되는 말은 아뢴 바와 같이 제거함이 옳소.”
하였다.명종 초년에 이기 등이 아뢰어 다시 그대로 썼다.
○ 윤임(尹任)은 인종의 외숙인데, 무인으로 중종조에 숭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인데, 사람됨이 간악하였다. 급제하여 비록 좋은 벼슬을 지냈으나, 청의(淸議)에 버림을 당하여 전랑ㆍ중서(中書)의 천거에 참여되지 못하였으므로 선비들을 분히 여기고 미워하였다. 당시 벼슬에 조급히 덤비는 무리들이 또 각각 편드는 당파가 있어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여 드디어 대윤(大尹)ㆍ소윤(小尹)이란 설이 있어서 유언비어가 점점 유포되었다.
무술년(1538, 중종 33)에 중종이 갑자기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는 명을 내리자, 중외(中外)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인종이 울면서 굳게 사양하여 중지되었다.
기해년에 동궁에 화재가 났는데, 사람이 지른 불이라고 말하였다. 대사간 이임(李霖)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여자를 너무 가까이 하고 사랑하면 무례한 데에 이르기 쉽고, 시기하는 화란이 마침내 재앙의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있어, 말이 너무 노골적이기에 식자들이 걱정하였다.인종이 즉위하자 곧 윤원형을 공조 참판으로 발탁하였으니, 대개 대비의 마음을 위안한 것이었다.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이 달이 넘도록 계속 탄핵하여 마침내 가선대부의 품계를 빼앗았다. 당시에 깊은 생각 있는 이들이 혹 무심한 것을 걱정하여 논의를 중지하기를 바랐다. 송인수의 종제 송기수(宋麒壽)가 송인수에게 외부의 의론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하여도 듣지 않았다.
송인수의 매부 성제원(成悌元)은 행실이 맑고 옛 학문을 좋아하는 이였으므로 인수가 마음으로 중하게 여겨 말만 하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제원이 하루는 송인수와 같이 자면서 윤원형의 일에 너무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조용히 말하였으나 끝내 생각을 돌리지 아니하고, 되풀이하여 거듭 말하니 자는 척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송인수가 평일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는데, 이 일에 있어서만은 이와 같이 고집하였다. 윤원형이 세력을 얻으매, 이임과 송인수가 모두 화를 당하였다.
○ 인종이 상주가 되어 상주 노릇을 예법대로 다하였으며, 대비를 지극한 효도로 받들었다. 여러 신하들이 애통을 억제하여 몸을 보전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날로 병이 들었다. 을사년 6월 27일에 경회루(慶會樓) 기둥에 벼락이 쳐서 기둥을 싼 쇠가 또한 부서지고 찢어졌다. 인종이 방금 병이 위독한 중에 묻기를,
“벼락이 어디에 떨어졌는가? 대비께서 놀라셨을까 염려되는구나.”
하고, 내관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7월 1일에 승하하였다.인종이 훌륭한 성상의 자질을 타고나서 동궁에서 덕을 기른 지 30년이 되었으므로, 즉위하자 중외(中外)에서 태평의 정치를 볼 수 있겠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승하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자기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애통하여, 먼 지방의 유생들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싸가지고 달려와 대궐 앞에 곡하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1년도 못 되는 동안에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킨 덕택이 이와 같았다.
인종이 병이 위독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나의 병이 장차 일어나지 못할 듯하다. 나는 아들이 없고, 선부왕(先父王)의 적자로는 오직 나와 경원대군(慶原大君) 두 사람 뿐이요, 모(某 명종을 가리킴)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총명하고 숙성하여 뒷일을 맡길 만하니, 경(卿)들이 한결같이 보좌하라.”
하였다. 명종이 그때 나이 12세였다. 영상 윤인경ㆍ좌상 유관 등이 아뢰기를,“직접 뵙고 전교를 받고자 합니다.”
하니, 드디어 침실 안으로 불러 들여 전위단자(傳位單子)에 계자(啓字)를 찍어서 내보내고, 또 경연관 등을 불러 보고는 병이 이와 같아 효도를 마치지 못하고, 또 경들로 더불어 다시 서로 보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하니, 모두 땅에 엎드려 울먹이며 나왔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윤원로ㆍ윤원형 형제 등이 양궁(兩宮) 사이에 참소하고 이간질하여 반드시 화란을 만들려하다가 중종이 승하하니, 날마다 유언비어를 자전에게 들려서 인종을 불안하게 하였는데 윤원로가 더욱 간사하고 독하므로 사람들이 다 이를 갈았다.
명종이 즉위하매 성복한 다음날에 삼정승과 육조의 참의 이상이 윤원로의 죄악을 논열하여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양사와 옥당이 또한 여러 날 동안 아뢰니, 이에 외방에 부처하도록 명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유관 등이 죄를 입자, 윤원로는 불려 돌아왔다. 처음에 윤원로를 죄주려고 의론할 때에 참판 이준경(李浚慶)이 말하기를,
“어린 임금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모후의 지친(至親)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듣지 않았다. 이때에 명종이 어리기 때문에 작은 공사(公事)를 대비가 임시로 같이 참여하여 결정하였다.을사년 8월에 비밀전지를 예조 참의 윤원형에게 내렸으니, 그것은 윤임(尹任)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에게 죄를 주라는 일이었다. 윤원형이 대사헌 민제인(閔齊仁)ㆍ대사간 김광준(金光準)에게 그것을 전하였다. 이에 양사가 중학(中學)에 모였는데, 민제인과 김광준이 발의하여 윤임ㆍ유관 등을 죄주고자 하니, 집의 송희규(宋希奎), 장령 정희발(鄭希發)과 이언침(李彦忱), 지평 김저(金䃴)와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좌(朴光佐), 헌납 백인걸(白仁傑), 정언 김난상(金鸞祥)과 유희춘(柳希春) 등이 말하기를,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불안한 때에 간사한 소인의 무리가 허황된 말을 서로 선동한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대신을 탄핵할 수 없다.”
하여, 의론이 일치하지 아니하여 헤어졌다.다음 날 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ㆍ이기(李芑)ㆍ허자(許磁) 등이 대궐에 들어가 아뢰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면대(面對)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과 대비가 충순당(忠順堂)에 나와 좌정하고, 영부사 홍언필(洪彦弼),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찬성 이언적(李彦迪), 병조 판서 권벌(權橃), 좌참찬 정옥형(丁玉亨), 우참찬 신광한(申光漢), 예조 판서 윤개(尹漑), 판윤 윤사익(尹思翼) 및 양사의 장관 등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정순붕 등이 나아와 아뢰기를,“윤임ㆍ유관ㆍ유인숙의 죄를 민제인ㆍ김광준이 탄핵하고자 하나, 하관(下官)이 말려서 논계하지 못하니, 청컨대, 경중에 따라 죄를 주소서.”
하였다. 좌우에서 혹은 죄주어야 한다고 하고, 혹은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언적이 아뢰기를,“일을 반드시 광명정대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림에게 화(禍)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대비가 전교하기를,“사림에게 화가 생기는 것은 혐의할 것이 아니오.”
하였다. 명하여 윤임은 귀양보내고, 유관은 좌상에서 파면시키고, 유인숙은 이조 판서에서 파면시켰다. 조금 있다가 정순붕의 말로 인하여, 유관과 유인숙이 윤임에게 붙어서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음모하였다고 하여 윤임은 절도안치(絶島安置)하고, 유관과 유인숙은 중조부처 하였다.대사헌 허자(許磁), 대사간 나세찬(羅世纘) 등이 합사하여,
“유관 등에게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는 음모를 하였다는 것으로 죄주는 것은 죄명이 과중하다.”
고 논하고, 윤인경 및 이기 등도 그 죄명이 너무 중하다고 아뢰었다.정순붕이 또 소를 올려, 윤임ㆍ유관ㆍ유인숙 등의 죄악을 열거하니, 대비가 전교를 내려 칭찬하고, 윤임ㆍ유관ㆍ유인숙에게 죽음을 내렸다. 정순붕 이하를 녹훈(錄勳)하여, 처음에는 보사공신(保社功臣)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고쳤다.
○ 같은 날 정순붕 등이 면대하여 윤임 등을 죄준 뒤에 헌납 백인걸이 독계하기를,
“위에서 하는 정사(政事)는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마땅히 광명정대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윤임의 일은 원상(院相)에게 의론하여 처리해야 하는데, 안에서 밀지를 윤원형에게 내려 몇 명의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곧장 아뢰게 하여 그들의 죄를 정하였으니, 죄를 정한 것은 옳다고 하더라도 죄를 정한 방법이 크게 사체(事體)를 잃었으므로 뒷날 간사한 소인의 무리가 반드시 이런 꼬투리로 인하여 제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죄주는 데는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하여 죄를 정한 뒤에라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아무 사람이 아무 일로 인하여 어떤 죄를 입었다.’ 할 것인데, 윤임 등 3인의 죄는 다만 먼 곳에 귀양 보낸다느니 파직시킨다느니, 체직시킨다느니 하고, 전지의 사연이 없으니 역시 국가 법전의 정상이 아닙니다. 윤원형은 밀지를 받은 당초에 마땅히 ‘이와 같은 비밀스러운 일은 다른 사람을 시켜 처리하게 하여도 뒷날의 폐단이 있을 염려가 있는데, 하물며 지친(至親)으로서 이 밀지를 받아 거행하면 그 폐단이 장차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방계(防啓)하였더라면, 위에서는 처사의 잘못이 없고, 아래로는 폐단을 남길 걱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윤원형은 그렇지 못하고 문득 재상에게 서로 통하여 국가의 일이 광명정대하게 행해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추고하소서.
민제인과 김광준이, 윤임을 논계할 일로 신들에게 의론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나라에 대신과 육경(六卿)이 있는데, 이 일이 그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밀지에서 나왔으니, 바르지 못함이 심하다.’ 하였더니, 민제인 등이 또한 그렇다고 하여 드디어 논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옳았으나, 윤원형의 잘못한 것을 면대할 때에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역시 그른 것입니다. 하물며 민제인은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밀지가 내렸다는 것을 듣고 재상들의 집에 분주히 돌아다니기를 마치 전령(傳令)하는 군졸과 같았으니, 이것은 비록 주상을 위하여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나, 대간의 체면은 쓸어낸 듯합니다. 집의 송희규(宋希奎), 사간 박광우(朴光祐)는 신의 아뢰는 바와 뜻이 같으면서 곧 결정하여 아뢰지 아니하고 다만 번거롭게 사피(辭避)만 하니 회피한 형적을 면할 수 없어 언론의 직책을 다한 자가 아닙니다. 민제인 이하는 아울러 관직을 갈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밀지에 관한 일은 종묘사직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다. 아뢴 뜻은 조정과 더불어 의론해 처리하겠다.”
하고, 곧 명하여 육경(六卿) 이상을 불러 전교하기를,“백인걸이 바른 의론을 한다고 핑계하고 역적을 두둔하여 나라 일을 깊이 걱정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먼저 파면시키고 의금부에 가두어 추문하고, 송희규 이하는 아울러 파면시킨다.”
하매,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대간이 언론으로 죄를 입으면 선비의 기풍이 꺾여지니, 청컨대 그 어리석고 망령됨을 용서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백인걸의 원정(元情)을 입계한 뒤에 양사의 아룀으로 인하여 문초하지 말고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유관ㆍ유인숙ㆍ윤임 등이 귀양가게 되자 권벌이 대궐에 들어가 아뢰기를,
“선조(先朝)부터 7년 동안 흉년이 들었고, 금년에 가을비가 그치지 아니하여 민생이 가련한데, 어제부터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잇달아 와서 늘 침침합니다. 소신(小臣)의 생각으로는 대신을 귀양보내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그 죄가 또한 분명치 못하니 아마도 하늘의 뜻에 유감이 있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요즘의 회의는 사람들이 그 단서를 알지 못하는데, 지금 만약 그들에게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음모하였다고 죄를 준다면 그것은 신하로서의 지극한 죄이니, 죄명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어리신 임금이 즉위하신 지 한 달이 넘지 못하여 갑자기 선왕의 유명을 받은 대신을 귀양보내시니, 사람들이 반드시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며, 또 간언하는 신하를 가두었으니,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겁내어 감히 논계하는 일이 있지 못할 것입니다.
윤임은 비록 중한 죄를 받을지라도 애석할 것이 없지만, 삼가 염려되는 것은 왕대비(王大妃)께서 이 일로 인하여 걱정이 되어 수라(水刺)를 들지 않고 병이 난다면 어찌 뒤를 이은 임금의 허물이 아니겠습니까. 뒤를 이은 임금은 왕대비에게는 어머니로 섬겨야 할 도리가 있으니, 더욱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유언비어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옛적 밝은 임금은 이것으로서 사람을 죄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유관이 본시 뱃병이 있어 아침에 덜하면 저녁에 중하므로 조당(朝堂)에 와서는 항상 병풍이나 벽에 기대어 앉았고, 또 자식도 없으면서 감히 사직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붙들고 억지로 공무를 보는 것은 나라를 두려워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유인숙 역시 상기증(上氣症)이 있으니, 이런 늙고 병든 선비가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는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비록 반역할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죄를 정하여야 인심을 진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만약 멀리 귀양 가다가 중도에서 병을 얻어 죽게 된다면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나라에서 죽였다.’할 것입니다. 평정한 마음으로 살피셔서 그들의 실정과 벌이 서로 맞게 한다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안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이 일은 누가 알지 못 하겠소 그리고 재변을 핑계하여 도리어 그들에게 죄준 것을 그르다고 하니, 매우 한심하다. 재변이 만약 그들을 죄준 뒤에 났다면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재변이 일어난 지가 오래이니, 아마 간사한 사람이 있어 그런 것 같다. 세종조에 소헌후(昭憲后)의 아버지도 또한 중죄를 입었으니, 만약 죄가 있으면 지친(至親)이라 하여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조정이 이와 같아서 나라 일이 더욱 그릇되어가니 한심하오.”
하였다.처음에 권벌이 아뢸 글의 초안을 가지고 승정원에 와서 원상(院相) 이언적에게 보이는데 매우 기휘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다. 이언적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도리어 격동시켜 화를 재촉할 것이다.”
하여, 그 가운데 더욱 심한 문구를 삭제하라고 권하여, 이미 지우고 나니 무릎을 안고 권벌이 탄식하기를,“이와 같이 지워버릴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
하였다. 권벌이 충순당(忠順堂)에 입대하였기 때문에 으레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참여되었으나 곧 공신녹권을 빼앗기고 벼슬도 삭탈당하고 또 죄를 입어서 삭주(朔州)로 부처되었다가 죽었다. 금상조(今上朝)에 경상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그의 충의대절을 표창하기를 청하니, 명하여 좌의정으로 증직하였다. 권벌은 안동인(安東人)인데 기묘년(1519, 중종 14)의 화에 연루되어 오래 폐하였다가 다시 등용되었다. 허심탄회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넓게 용납하였다. 송인수(宋麟壽)가 일찍이 칭찬하기를,“권공은 참으로 재상 중에 재상이다.”
하였다.○ 경기 감사 김명윤(金明胤)이 승정원에 나아가 아뢰기를,
“계림군(桂林君) 유(瑠)는 윤임의 삼촌 조카인데, 윤임이 그를 믿고 흉한 음모를 하였으니, 이유가 반드시 그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또 봉성군(鳳城君) 완(岏)은 신의 죽은 친구 처의 가까운 친척입니다. 나이가 아직 어리니 반드시 꾀가 없을 것이나, 무지한 사람들이 그가 여러 왕자 중에 조금 낫다고 하여 혹 칭찬하는 이가 있으니, 국가가 안정되지 못한 때를 당하여 공명을 탐하고 화란이 일어나기를 좋아 하는 무리들이 그를 빙자하여 난을 일으킬 거리를 삼을 자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속히 잘 대처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나라를 위하여 생각하는 참다운 충신이로다.”
하였다.이유(李瑠)가 도망가자 팔도에 글을 내려 크게 수색하였다. 토산 현감 이감남(李坎男)이 이유의 종을 잡아서 앞세우고 찾아가니 안변 지방 황룡산(黃龍山) 속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토실(土室)을 지어 살고 있었다. 잡아다가 국문하니, 처음에는 불복하였다.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가하니 말하기를,
“윤임이 신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눈병이 있으니, 어떻게 정무를 보겠는가. 봉성군(鳳城君) 및 너, 두 사람 중에서 당연히 되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그 음모의 절차는 유관ㆍ유인숙이 다 권력을 가진 재상이니, 조정에 의론하여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유를 찢어 죽이고, 김명윤은 공신에 기록되고 이감남은 세 자급을 뛰어 당상에 승진하였다.김명윤이 유생으로 있을 때에 헛명성을 얻어 현량과에 참여하여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파과(罷科)되자, 곧 다시 벼슬을 시작하여 익위사 시직이 되었고, 얼마 안 되어 다시 과거를 보아 합격하였다. 얼굴을 바꾸어 가며 시세에 아부하여 이익을 탐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공론이 그를 침 뱉고 더럽게 여겼다. 금상 조정에서 벼슬을 삭탈하고 문밖으로 쫓겨나 죽었다.
○ 진사 안세우(安世遇)가 윤임의 여종 모린(毛麟)이란 자를 잡아 바치면서,
“이 여인이 항상 대궐에 출입하며 언문 편지를 전한 자이니, 국문하소서.”
하였다.이보다 먼저 언문 편지가 든 명주 주머니를 대궐 궁중 뜰에서 주은 자가 있었는데, 편지의 대략에,
“근일에 국사가 점점 이상한 지경에 이르니, 어디서 죽을지 몰라 밤낮으로 울고 있습니다. 공우처(公友處 계림군의 자(字))에게 왕위를 옮기고자 하여 정승에게 이미 통지하였습니다. 어제 전교를 내리신 일은 사세가 하기 어려우니, 전일에 아뢴 말씀대로 속히 하소서…….”
하였다. 이것은 윤임이 공의전(恭懿殿)에게 통하는 편지로서 중간에 유실된 것처럼 한 것이다. 간악한 귀신같은 무리들이 유관ㆍ윤임 등이 반역의 음모를 하였다고 무함하기 위하여 그런 편지를 조작하여 일부러 궁중 뜰에 빠뜨렸다가 주워서 바친 것이다.그래서 윤임의 첩과 노비 및 사위 이덕응(李德應)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옥사를 이루고, 유관ㆍ윤임ㆍ유인숙 등은 죽은 뒤에 역적의 형벌을 행하고, 안세우는 공신에 기록되었다.
안세우는 소시적부터 간악하고 사특하였다. 집이 장의동(藏義洞)에 있는데 친구 박응립(朴應立)이 일찍이 그 집에 갔다가 안세우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오늘 연추문(延秋門)을 지나다가 말이 놀래어 뛰기 때문에 말에서 내리
지 못하고 지나왔으니, 마음에 미안하다.”하였다. 안세우가 안색을 변하며,
“너는 그러면 국법을 범하였으니, 내가 가서 고발하겠다.”
하고, 곧 그 여종을 불러서,“내 단령(團領)을 가져오라.”
하고, 또 박응립을 방 속에 감금하고 집안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고는 드디어 정원에 나아가 박응립의 죄를 고하니, 승지들이 모두 그의 요망함을 비웃자 안세우가 물러왔다. 평소의 심술이 이와 같았다.○ 가정 을사년 10월에 우상 이기(李芑)가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근자에 죄를 정할 때에 주상께서 큰 소리도 없이 각각 적당하게 정하였으므로 인심이 모두 복종합니다. 그때 윤임ㆍ유관ㆍ유인숙ㆍ이휘(李煇)ㆍ이덕응은 극형을 당하였고, 박광우(朴光佑)ㆍ곽순(郭珣)ㆍ정희등(鄭希登) 등은 곤장에 맞아 죽었고, 이림(李霖)ㆍ나숙(羅淑)은 멀리 귀양갔고, 정원(鄭源)ㆍ이약빙(李若氷)ㆍ이약해(李若海)ㆍ김저(金䃴)ㆍ노수신(盧守愼)ㆍ이중열(李中悅)은 삭탈관직되고, 성세창(成世昌)ㆍ권벌ㆍ송인수ㆍ한숙(韓淑)ㆍ이진(李震)ㆍ김진종(金振宗)ㆍ심영ㆍ이염은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림ㆍ나숙ㆍ정원ㆍ이약해ㆍ김저ㆍ이중열은 모두 사약을 받았다. 조정 신하들이 비록 파직된 자가 많았으나 또한 미진한 것이 있으니, 이는 대관이 반드시 미쳐 듣고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천계(李天啓)ㆍ이황(李滉)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은 김저의 무리와 다를 것이 없으며, 정황(丁熿)도 또한 다만 체직되고 파직은 되지 않았으니, 저들과 더불어 같이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지난 기묘사화 때의 사람들이 한갓 자기의 아는 사람만을 현량이라 하여 취하였는데, 그 중에 글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그만이지만 글을 이루기만 하여 바친 자는 빠짐없이 다 합격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지극히 공정한 과거 시험입니까. 중종이 명하여 그 과거를 혁파하였더니, 인종이 위독한 때에 명하여 복과(復科)시켰습니다. 인종이 바야흐로 병환이 위독할 때에 윤임의 삼부자가 입시하여 처음에는 봉성군(鳳城君)으로서 임금을 삼으려다가 사세가 할 수 없이 된 뒤에 주상에게 전위하였으니, 이 일도 어찌 윤임의 농간이 아니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청컨대, 도로 현량과를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이천계 이하 5인에게 모두 관직을 삭탈하였다. 10여 일을 지낸 뒤에 이기가 다시 아뢰기를,“다시 들으니, 이황은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그것은 이기의 조카 원록(元祿)이 이황은 물러가는 것을 편안히 여겨 시속의 의론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극력 말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다시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윤원로와 윤원형이 이미 권세를 잡으니, 형제가 권세를 다투어 서로 알력이 생기고 또 윤원로가 공신에 참여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병조 좌랑 윤춘년(尹春年)이 상소하여 윤원로의 죄악을 논하기를,
“자전(慈殿 대비)을 지적하여 여희(麗姬)에게 견주고, 인종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하고 심지어 일찍 돌아가기를 축원하고 한창 병환이 위독할 때에 주부 이건양(李健陽)과 더불어 그 길흉을 점쳐서 불길한 점괘가 나옴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또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오늘날의 공신들이 오래도록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기는 나이 이미 70남짓하고 허자ㆍ정순붕은 다 병들었으니, 세상에 오래 살겠는가? 대왕대비는 정축년(1517, 중종 12)에 책봉되었는데, 지금 30년이다. 사대부가 과거에 급제하여 30년 조정에 있는 자가 또한 적은데, 대비가 어찌 오래 가겠는가? 대비의 만세후(萬歲後 죽음)에 주상의 마음을 또한 어찌 알겠는가?’ 하고, 이어서 옛날에 패망한 공신들을 낱낱이 세어가면서 말하기를, ‘아무는 이러하였고 아무는 이러하였다…….’ 하니,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원훈(元勳) 정순붕 등도 윤원로의 참소함을 입어 무삼사(武三思)처럼 될까 두려워합니다.”
하고, 또 윤원로의 탐학하고 방자한 죄상을 말하였다.상이 대신을 불러 그 상소를 보이고 윤원로를 파직시켰다. 그때 돈녕도정이었다.양사가 잇달아 논하니, 명하여 멀리 귀양 보냈다가 얼마 안 되어 사사(賜死)하였다.
○ 병오년 4월에 의정부와 예조가 함께 의론하여 청백(淸白)한 자와 효행이 있는 자를 뽑아서 아뢰었다. 청백에는, 행 상호군 박수량(朴守良), 대사간 조사수(趙士秀), 공조 정랑 김순(金洵)이요, 효행에는 이조 좌랑 홍담(洪曇), 유학 박민헌(朴民獻), 참봉 변훈남(卞勳男)등인데, 가자(加資)하고 혹은 승차(陞差)하였다.
○ 풍덕인(豊德人) 정흥종(鄭興宗)이 사주를 보고 점치는 법을 아는데 첩책(帖冊) 속에다 사대부들의 오주(五柱)를 적어 두고, 또 자전과 대전의 오주를 적어 두고 선분(先分)이 어떠니 후분(後分)이 어떠니 하는 설이 있었다. 진복창(陣復昌)은 정흥종과 한 고을에 살아 서로 그 일을 알았다가 고발하여 삼성(三省)이 번갈아 국문하여 의성위(宜城尉)의 아들 남기(南沂) 등이 연루되어 아울러 극형을 받았다.
○ 찬성 허자(許磁)가 소시에 김모재(金慕齋)의 문하에 배워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처음에 비록 정순붕 등으로 더불어 일을 같이 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 역적이란 이름을 씌워 사류(士類)를 모두 다 죽이기까지 한 것은 그 본심이 아니었으므로 유관 등을 죄줄 때에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음모하였다는 것은 죄명이 과중하다고 논하였고, 그 뒤에 매양 사림을 옹호하는 말이 있었다. 항상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소인이 되겠구나.”
하고, 흔히 병을 핑계하고 일을 피하였다.진복창이 사간에 제수되자 허자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논하기를,
“진복창은 출생이 미천하고 타고난 성질은 간특합니다. 사간은 중요한 직책인데, 국가에서 벼슬을 주는 것이 뒤바뀌어 공론이 분격합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진복창이 대사헌이 되자, 허자가 나라를 걱정한다는 핑계로 몰래 흉한 무리를 옹호하여 나라 위하는 사람을 배척하여 시비가 뒤바뀌게 하였다고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뒤에 죄를 더하여 멀리 귀양갔다가 죽었다.○ 허자가 을사년의 변고에 사류를 구하다가 이기(李芑)에게 거슬렸더니, 녹훈(錄勳)하는 날에 위에서 공신들의 자손까지 아울러 기록하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허자는 굳이 사양하여 일곱 번 만에 윤허를 얻었으므로, 다른 공신의 자제도 다 녹훈하지 못하고 오직 정순붕의 아들 정현(鄭礥)만이 참여하였다. 이기가 낯빛을 변하며,
“공신은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여야 하는 것인데, 이번 자제까지 아울러 녹훈하라는 전교에 공은 어찌 혼자 굳이 사양하시오.”
하였다.이로 말미암아 이기가 더욱 허자에게 불쾌하였다. 뒤에 허자가 이조 판서가 되어 전의 제조를 겸직하였을 때에 이기가 그의 친한 의관 배천령(裵千齡)으로 오랫동안 전의(典醫)를 맡게 하기 위하여 그가 데리고 다니는 녹사(錄事)로 하여금 정청(政廳)에 와서 청하게 하였다. 허자가 노하여 그 녹사를 뜰 아래 끌어내려 꾸짖기를,
“내가 정청에 붓을 잡는 하리가 아닌데, 네가 어찌 감히 이러한 일로 와서 말하느냐?”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아니하니, 이기의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그때에 민제인도 사림을 구제하다가 죄를 입어 공주(公州)에 귀양가 있었는데, 의식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허자가 그것을 듣고 민제인의 아우 제영(齊英)을 당진 현감에 제수하였으니, 그것은 민제인이 의탁할 데가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간당들이 미움을 품고 있었다. 마침 허자가 친한 최여주(崔汝舟)에게 말하기를,
“을사년의 일에 마침내 녹훈까지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마음에 항상 한이 된다.”
하였다. 최여주가 그 말을 매우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허자가 이기와 틈이 있는 것을 모르고 이기에게 이야기하였다. 이기가 바야흐로 허자를 모함하려하여도 핑계거리가 없다가 최여주의 말을 듣고는 드디어 대사헌 진복창과 사간 이무강(李無彊) 등을 사주하여 허자를 탄핵하게 하였다.진복창은 항상 허자가 상소하여 자기를 논핵한 것으로서 원망하고 이무강도 허자에게 용납을 받지 못한 것으로서 혐의를 품고 있었고 동시에 다 이기의 심복이었다. 세 사람이 서로 더불어 죄를 얽어 모함하여 역적을 두둔한 일 및 민제영을 당진 현감에 제수한 일 등으로 논핵하였다. 처음에 황해도 연안부에 부처하였다가 당일에 강원도 간성(杆城)으로 정배하였으며, 당일에 전라도 낙안군(樂安郡)으로 이배(移配)하고 이튿날 또 함경도 홍원현(洪原縣)으로 이배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기가 그에게 죄를 더 주어 사사하기를 청하려고 계초(啓草)를 만들어 가지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미처 아뢰기 전에 대궐 안에서 갑자기 죽었으므로 허자가 면하게 되었다.
홍원에 있은 지해를 넘어서 병들어 죽었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그가 죄 없이 모함을 당한 실정을 극력 말하니, 상이 또한 후회하고 깨달아서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작첩을 도로 주고 예(禮)로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때는 가정 신해년(1551, 중종 36)이었다.
○ 이기가 중종조에 장리(贓吏)의 사위이므로 현관(顯官)이 될 수 없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이기는 재주가 있으니 파격으로 허통(許通)할 만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언적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허통해야 한다는 의론을 더욱 주장하여 이기가 드디어 좋은 관직을 지냈다.
뒤에 이언적이 이기의 심술이 부정한 것을 알아내고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사 이천계(李天啓)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조정 의론을 보니 이기가 반드시 정승이 되겠는데, 이기의 사람됨이 흉험하니, 반드시 사림에 화를 줄 것이다.”
하였다. 이천계가 조금 뒤에 지평이 되었는데, 이기가 정승이 되자 이천계가 탄핵하여 체직시키니, 이로 말미암아 이기가 이언적 및 이천계에게 원한을 품었다.이기가 다시 정승이 되어 한 번은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언적은 학문이 있어 인망(人望)이 중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합니다. 전주 부윤으로 있을 때에 상소하여 동궁을 보양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동궁이 절로 안정되었는데, 또 무슨 보양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동궁에 화재가 났을 때에 이언적이 화재의 출처를 추궁하고자 하였으니, 그 의론이 바르지 못합니다. 주상께서 즉위한 처음에 이언적이 10여 조의 경계를 만들어 안에서 내린 밀지는 신하가 그것을 봉하여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여, 임금의 손발을 묶어 두려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다 이언적이 유관으로 더불어 함께 한 일입니다. 또 밀지를 부정하다고 말하고서도 오히려 공신의 명부에 이름이 기록되어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신이 이언적의 힘을 입어 허통이 되었으니, 신에게는 진실로 큰 덕이 있습니다마는, 신이 대의로서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양사가 따라서 탄핵하여 이언적이 훈적(勳籍)과 벼슬을 삭탈당하고 얼마 안 되어 멀리 귀양가고 이천계도 또한 귀양갔다.
○ 삼정승 윤인경ㆍ기ㆍ정순붕이 아뢰기를,
“조종조에는 원훈이 낮은 계자(階資)에 있은 적이 없었습니다. 윤원형은 맨 먼저 건의한 자인데 오래도록 종2품에 그대로 있으니, 지극히 타당치 못합니다. 속히 승진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이번에 위태로울 뻔한 종묘사직을 다시 안정시킨 것이 그 공로가 어찌 우연이겠는가마는 윤원형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므로 천천히하려고 하였더니, 이와 같이 아뢰니, 알았다.”
하고, 이튿날 자헌대부에 승진시켰다.○ 황해도 백령(白翎)ㆍ대청(大靑) 등의 섬에 수상한 사람들이 올라와서 집을 짓고 대장간을 설치하고 배를 만들고 있었다. 감사 정대년(鄭大年)이 군사를 풀어 40여 명을 잡아서 나누어 가두고 아뢴 다음 사실을 조사해 보니 모두 중국 사람으로 역(役)을 피하여 몰래 온 자들이었다. 중국으로 돌려 압송하는데, 주회인(走回人)과는 다르므로 다만 식량을 주고 의복은 주지 않았다.
○ 인종(仁宗)을 장차 부묘하게 되니, 세조가 체천해야 하겠기에 동ㆍ서반의 2품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불러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인묘(仁廟)가 부묘되니 세조는 당연히 체천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그 의론에 비답하기를,“세조는 당대 사친(四親)의 신주이며 공이 또한 막대하니, 옮기기가 미안하므로 인묘는 연은전(延恩殿)에 따로 부(祔)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영부사 홍언필(洪彦弼) 등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논하여 네 번까지 아뢰니, 비로소 윤허하였다. 수일이 지나 다시 대신 등을 불러서 ‘세조는 옮길 수 없으니, 인묘를 연은전에 부(祔)하여야 하겠다.’는 뜻으로 하유하니, 윤인경(尹仁鏡) 등이 곧 회계하기를,“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대사헌 안현(安玹), 대사간 이명(李蓂), 부제학 주세붕(周世鵬) 등이 복합(伏閤)하여 ‘인묘를 문소전에 부(祔)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논하여, 어떤 이는 계(啓)로, 어떤 이는 차자로 하고, 태학생 정거(鄭琚) 등이 또한 상소문을 올려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금상조(今上朝 선조)에 명종을 문소전(文昭殿)에 부(祔)할 때에 정승 이준경(李浚慶) 등의 의계에 의하여 인종을 문소전에 옮겨 모시었는데, 만약 오실(五室)의 제도를 지킨다면 예종이 옮겨져야 되기에 인종ㆍ명종 2대를 일실(一室)로 하였다.
○ 정미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노(李櫓)가 한 봉서(封書)로 입계하기를,
“신 정언각의 딸자식이 제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가기 때문에 데리고 양재역까지 갔더니, 양재역 벽에 글이 붙었는데 국가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그대로 베껴 와서 봉하여 바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이것은 불평을 품고 임금을 원망하는 무리들의 한 짓이다.”
하여, 삼정승 윤인경(尹仁鏡)ㆍ이기(李芑)ㆍ정순붕 및 허자(許磁)ㆍ민제인(閔齊仁)ㆍ윤원형ㆍ김광준(金光準) 등을 불러서 정언각의 바친 글을 내려 주었는데, 그 글은 붉은 글씨로,“계집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하는 것을 곧 볼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
하니 전교하기를,“근래에 재변이 극히 많고,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별다른 사변이 생길까 염려된다.”
하였다. 윤인경ㆍ기 등이 회계하기를,“이 글을 보니 무식한 자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근래에 부정한 의론이 들끓으니, 이 글을 비록 실지로 볼 것은 아니나 부정한 의논이 들끓는다는 것은 헛말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죄를 주어야 할 사람을 경중에 따라 성명을 기록하여 아뢰고, 또 말하기를,“지금 서계한 것은 이 벽서를 보고 비로소 작성한 것이 아니라, 당초에 죄를 정할 때에 가볍게 처리하여 법대로 하지 아니한 때문에 사특한 의론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것은 화근이 아직 있는 까닭입니다. 또 이번에 죄를 정한 뜻을 교서를 지어 중외(中外)에 유시함이 어떻겠습니까?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ㆍ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일죄(一罪 사형)를 주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滋)는 극변안치하고, 임형수(林亨秀)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ㆍ유희춘(柳希春)ㆍ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하고 권응정(權應挺)ㆍ권응창(權應昌)ㆍ정유침(鄭惟伔)ㆍ이천계(李天啓)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ㆍ한주(韓澍)ㆍ안경우(安景祐)는 원방부처하고, 권벌ㆍ송희규(宋希奎)ㆍ백인걸(白仁傑)ㆍ이언침(李彦忱)ㆍ민기문(閔起文)ㆍ황박(黃博)ㆍ이진(李震)ㆍ이홍남(李洪男)ㆍ김진종(金振宗)ㆍ윤강원(尹剛元)ㆍ조박(趙璞)ㆍ안세형(安世亨)ㆍ윤충원(尹忠元)ㆍ안함(安馠)은 부처하소서. 생원 이충길(李忠吉)이 관중(館中)에서 말하기를, ‘이덕응(李德應)이 매를 견디지 못하여 자복하였을 뿐이니, 이는 허위다. 어찌 사실 이겠는가.’ 하였으니, 잡아다 심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이완(李岏)은 지금 먼 곳에서 다만 명맥만 있으니, 죄를 더 주어서는 안 되오.”
하였다. 대사헌 안현(安玹)ㆍ집의 정유길(鄭惟吉)ㆍ장령 윤부(尹釜)와 홍담(洪曇)ㆍ지평 유담(柳湛)과 윤옥(尹玉)ㆍ대사간 이명(李蓂)ㆍ사간 윤인서(尹仁恕)ㆍ헌납 어계선(魚季瑄)ㆍ정언 안축(安舳)과 심수경(沈守慶)ㆍ부제학 정언각(鄭彦慤)ㆍ직제학 원계검(元繼儉)ㆍ전한 민전(閔荃)ㆍ부응교 심봉원(沈逢源)ㆍ교리 성세장(成世章)과 남궁침(南宮忱)ㆍ수찬 유경심(柳景深)과 윤결(尹潔)ㆍ정자 안명세(安名世) 등이 모두 복합(伏閤)하여 이완(李岏)의 죄를 논열하여 죽이기를 청하여 대간이 사직하기에 이르므로 그대로 따랐다. 이충길(李忠吉)은 삼성(三省)에서 번갈아 국문하여 여섯 차례나 형신하여도 불복하였다.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이 사람은 김희년(金禧年)과 마찬가지로 괴상하고 과격한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먼 곳으로 귀양 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희년도 역시 태학관 유생으로서 선비들의 풍습을 바꾼다고 핑계하고 시비를 현란시킨다는 죄명을 쓰고 멀리 귀양간 자였다.정언각이 또 독계하기를,
“임형수가 윤임과 한 동네에 살며 심복이 되어 매양 말하기를, ‘윤원형을 죽여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크게 말하였으니, 윤임과 마음을 같이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귀양만 보내는 것은 가벼운 것 같습니다.”
하니, 대비가 칭찬하기를,“양재역의 벽서(壁書)는 지나는 사람으로 본 자가 하나가 아닐 터인데, 네가 홀로 와서 아뢰니, 신하의 직분에 지당하다. 임형수는 죽음을 받은 다른 죄인과 죄는 같은데도 형벌이 다르므로 내가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
하고, 임형수에게 죽음을 내렸다.양윤온(梁允溫)이 윤임에게 연루되어 해남에 귀양가 있었는데, 정언각이 전라 감사로 있을 적에, 양윤온 이 관사(官舍)에 출입한다고 장계하므로 잡아 와서 매를 맞다가 죽었다. 정언각이 뒤에 경기감사로 있을 적에 말에서 떨어졌는데 한쪽 다리가 안장의 등자(鐙子)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고 말이 달아나며 차서 두뇌와 골절이 부서져 죽었다. 사람들이 다 통쾌히 여겨, ‘하늘이 아시어 정언각이 죄의 보복을 받았다.’ 하였다.
○ 임형수가 제주 목사로 있다가 파면되어 나주의 본집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받았으므로, 금부 도사가 달려가 나주에 이르렀다. 전례에 그 고을 수령이 금부 도사와 같이 가서 죽는 것을 지켜보는데, 그때에 마침 나주 목사와 판관이 다 연고가 있어 사문(斯文) 양희(梁喜)가 마침 나주 교수로 있었는데, 임형수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하여 갔다. 임형수가 나와 꿇어 앉아 전지를 듣고는 그 부모에게 들어가 하직하기를 청하자 애처롭게 여겨 허락하고, 이미 들여보낸 뒤에는 결별하기 어려워 시간이 지체될까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보게 하였더니 임형수가 안방에 들어가지 않고 다만 뜰 아래에서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그의 아들이 나이 10세가 못되었는데 불러서 훈계하기를,
“글을 배우지 말라.”
하였다가, 떠난 뒤에, 다시 불러 말하기를,“만약 글을 배우지 아니하면 무식한 사람이 될 것이니, 글은 배우더라도 과거는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고, 마침내 죽었다.임형수가 젊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문장에 능하고 활을 잘 쏘고 풍채가 아름답고 기개가 높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국기(國器)라고 하였다. 수찬으로 있다가 나가서 회령 판관(會寧判官)이 되었을 때에 혹 날을 걸러 음식을 먹기도 하고, 혹 한꺼번에 몇 사람의 몫을 겸하여 먹으면서 말하기를,
“장수 노릇하는 자는 이와 같이 습성을 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변방의 오랑캐를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후일에 지사(知事) 강섬(姜暹)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물(貢物)을 바치러 가는 호인(胡人)을 만났는데, 우리나라에 가까이 거주하는 자였다. 통사(通事)에게 묻기를,
“임형수가 어디 있는가?”
하였다. 이쪽에서 미처 대답하기 전에 호인(胡人)이 말하기를,“임형수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너희 나라에서 죽였다고 하니, 그런가?”
하니, 통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1547, 명종 2) 12월 2일에 햇빛이 없고 위 아래에 해와 같은 둥근 형상이 있고, 또 붉은 색이 있었다. 상이 삼정승 윤인경ㆍ기ㆍ정순붕 등을 불러서 재변을 만나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전교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이것은 해 위에 이고 있는 것이 있는 듯하니, 재변이 아니라 도리어 상서로운 것입니다. 전하를 위하여 풍정연(豊呈宴)을 올릴 일을 폐하고 거행하지 않았으니,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재변을 만났을 때에 위에서 대신을 불러 반성하여 정치를 닦을 도리를 물었는데, 도리어 아첨하는 말을 올렸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 기유년 정월에 임금이 즉위한 이후의 경연관 등에게 대궐 뜰에서 잔치를 차려 주되 1등의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혹은 가자(加資)를 시켜 주고, 혹은 물품을 등급 있게 주고, 또 각각 납촉(蠟燭) 한 자루씩을 주고 밤이 깊도록 천천히 놀다가 파하게 하였다. 즉위한 이후의 경연관이 모두 62인인데 잔치에 참여한 자가 49인이었다. 이튿날 이기(李芑)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임금 및 대비에게 감사하였다.
윤임(尹任)ㆍ유관(柳灌) 등이 죄를 당한 뒤에 전후의 추안 및 계사들을 모아 서술하여 ‘을사정란기(乙巳定難記)’라고 이름하여 서국(書局)으로 하여금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조 낭관들이 사사로이 가질 책을 인쇄하려 하자, 정랑 유감(柳堪)이 말하기를,
“이조에 종이가 넉넉하지 못한데, 어찌 반드시 이 책을 인쇄할 것인가?”
하였더니, 좌랑 한지원(韓智源)이 이기에게 말하기를,“유감이 이 책을 볼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또 이기의 조카 병조 정랑 이원록이 이기가 사류를 죽이고 해치는 것을 걱정하여 몰래 말하기를,“숙부의 행위를 보니 후일 집안의 재앙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는데, 이 말이 사람들에게 누설되었다. 양사가 유감ㆍ이원록을 탄핵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대비가 전교하기를,“유감과 이원록의 말한 것을 보니,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
하고, 잡아 가두어 결장(決杖) 1백 도를 때려서 극변안치하였다.명종 말년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 가정 정미년에 의주 목사가 명 나라 황후 방씨(方氏)가 붕서(崩逝)하였다고 급히 아뢰었다. 전일 태황태후가 붕서 할 때의 규례에 의하여 조회와 시장을 3일 동안 정지하고 애통의 의식은 하지 않았다. 기유년에 황태자가 홍서하였을 때에 조회와 시장을 3일 동안 정지하고 애통하는 의식은 없고 사신을 보내어 위문하고 겸하여 향을 올렸다.
○ 이약빙(李若氷)이 정언각(鄭彦慤)이 바친 양재역 벽서로 인하여 죽음을 받고, 아들 이홍남(李洪男)도 연루되어 영월로 귀양갔다. 이홍남의 아우 홍윤(洪胤)은 윤임의 사위인데, 충주에 살고 있었다.
기유년 4월에 이홍남이 귀양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사인(舍人) 정유길(鄭惟吉)과 교리 원호변(元虎變 정유길은 그의 동서이며, 원호변은 그의 처남이다)에게 글을 보내었는데, 대략에,
“내 아우 이홍윤은 성질이 본래 고집이 세고 비뚤어져서 제 뜻대로만 하여 왔는데, 함창(咸昌)에 사는 술사(術士) 배광의(裵光義)와 더불어 왕래하여 서로 만나 조정의 벼슬아치들의 운수를 점쳐서 낱낱이 길흉을 말하고, 그의 말에 ‘폐조(廢朝)에서 사람 죽인 것이 갑자ㆍ을축년(1504, 연산군 10)에 극도에 달하더니, 마침내 병인년의 화가 있었는데, 금상(今上 명종)도 또한 어찌 오래 왕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기타 원망하고 비방하는 말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내가 직접 그 까닭을 힐문하려고 하였으나 와보지도 아니하고, 또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네,아우가 본시 교만하여 지방에 사는 품관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으니, 만약 고변하는 자가 있으면 집안의 재앙이 반드시 불측한 지경에 이를 터이네. 어떻게 처리해야 이치에 합당할지 모르겠네. 들은 바를 직접 조정에 아뢰고자 하나 임금 계신 곳이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 격식을 모르네. 이밖에 자취도 없게 잘 처리할 계책이 있겠는가. 붓끝으로 다 형용할 수 없고 종이를 대하여 다만 스스로 통곡할 뿐일세.”
하였다. 정유길과 원호변이 정원에 나아가 이홍남의 글을 바치며 말하기를,“이런 흉하고 참혹한 말을 듣고 차마 그대로 있을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이홍윤(李洪胤)과 연루된 사람들을 잡아다 국문하니 형장을 10여 번을 때리자 자복하기를,“모모(某某)로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일을 일으키려 하였소.”
하였다. 그의 서제(庶弟) 후정(後丁)이 나이 16인데, 공모하였다는 사람이 더욱 많아 모두 형벌을 받아 죽었다. 더러는 평생에 이홍윤과 후정의 얼굴을 모르는데도 연루되어 죽은 자가 있어 충주(忠州) 한 지방이 거의 비었다 한다.진사 강유선(康惟善)이 지조와 기절이 있어 유림에 명망이 중하였다. 사문 박민헌(朴民獻)과 친한 벗이었는데, 일찍이 병오년(1546, 명종 1) 봄 과장(科場)에 함께 들어갔더니, 표문(表文)의 제목 ‘원종공신을 도태하기를 청함[請汰原從功臣]’이라 하였다. 강유선이 박민헌에게 말하기를,
“이 제목의 글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짓지 않고 나왔다. 이때에 또한 이홍윤의 공초에 그의 이름이 나와 곤장을 맞아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통석하게 여겼다.이홍남은 귀양살이에서 풀려와 벼슬을 받았고, 정유길과 원호변도 상(賞)을 받았다. 금상(今上) 초년에 당시 연루되어 귀양가고 적몰된 사람은 모두 신원하여 석방되고, 이홍남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죽었다.
○ 정미년(1547, 명종 2) 9월에 인종의 상(喪)을 마치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전(勤政殿) 뜰 위에 나와 성렬 왕대비(聖烈王大妃)의 존호를 인명(仁明)으로 더 올리고, 왕대비의 존호를 공의(恭懿)라고 하니, 백관이 하례를 행하였다. 또 권정례(權停禮)로 중전의 책봉례를 행하였다. 윤 9월에 알성(謁聖)하여 작헌례를 행하고, 인하여 인재를 뽑았다. 대사성 조사수(趙士秀)가 칠잠(七箴)을 지어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큰 사슴 가죽을 하사하였다.
○ 정덕(正德) 신사년(1521, 중종 16) 별과(別科)에 남곤(南袞)이 독권관이 되었더니, 어느 시권을 하관(下官)은 취하지 않고자 하는데, 남곤이 극력 고집하여 글에 능한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여 드디어 취하였다. 성명을 봉한 것을 떼어 보니, 황헌(黃憲)인데, 시골의 이름 없는 선비였다. 남곤이 부끄러워하였다. 황헌을 자기 집으로 불러 보니, 황헌이 나이가 젊고 살빛이 희어 용모가 좋았다. 남곤이 전일에 자기 지감(知鑑)이 밝았던 것을 실증시키기 위하여 극력 끌어 올려서 홍문관 정자로 발탁시켜 빨리 빛나고 중요한 관직에 올라서 명종 초년에 정승으로 들어갔으니, 나이 50이 채 못 되었다. 천성이 험하고 간사하였다. 을사 연간에는 상중에 있어 공신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가 이때에 정승이 되자, 과거 정유년(1537, 중종 32)에 자기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김안로를 탄핵하여 죄주었던 공을 스스로 자랑하여 갖은 방법으로 활동하여 공신에 추록되었다.
한 번은 빈청에서 회의하여 당인(黨人)에게 죄를 더 줄 때에 극죄(極罪)의 이름을 쓴 것이 매우 많았는데, 이언적, 권벌 같은 이가 다 죽어야 할 명부에 들어 있었다. 대비가 그것은 너무 중하다고 하여 듣지 않으니 황헌이 굳게 청하여 밤이 깊도록 물러나지 않았고, 또 좌리공신을 새로 기록하자는 말을 내어 많은 사람을 기록하여 남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하니, 이로 말미암아 공을 탐하고 남을 해치는 무리들이 다투어 옥사를 만들어 사람을 죽여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였다.
윤원형이 황헌을 미워하여 부제학 진복창(陳復昌)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진복창이 드디어 상소하여 황헌의 죄를 논하는데 이홍윤(李洪胤)의 옥사를 다스리기를 가볍게 하였다고 말을 만드니, 곧 명하여 정승을 갈고 얼마 안 되어 공훈과 관직을 빼앗고 고향으로 추방하였다.
진복창이 처음에 승정원에 상소문을 바치고 옥당에 물러나와 동료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권신을 탄핵하였으니, 반드시 중한 죄를 받을 것이므로 다시 동료들과 서로 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조금 뒤에 임금이 친필 편지로 표창하기를,“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충성은 고금에 드문 바로서 주운(朱雲)ㆍ급암(汲黯)의 충성보다도 나으니, 가상히 여겨 감탄함을 금치 못하겠노라. 이에 중묘(中廟)의 의대(衣襨)와 술잔을 내려 주어 약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는 뜻을 표시하노니 강개한 충성을 끝까지 변치 말라.”
하였다.윤원형이 황헌을 죄주자는 뜻을 이미 대비에게 아뢰었고 진복창은 그 지시에 따라 한 것이므로 반드시 죄를 얻을 염려가 없는데도 거짓으로 곧은 말을 하는 척하였으니, 어찌 옆에서 보는 자가 그의 내심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줄을 알랴.
○ 홍문관 박사 안명세(安名世)가 일찍이 사관(史官)이 되어 을사 연간의 일기를 편찬할 때에 회피하지 않고 사실대로 썼다. 후일에 사국(史局)에 들어간 자가 보고 이를 이기(李芑)에게 말하니, 안명세를 역적을 옹호하여 사초를 사실대로 쓰지 않았다고 지목하여 대궐 뜰에서 국문하였다. 안명세가 자기의 옷 폭을 찢어 소(疏)를 써서 예로부터 사관을 죽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논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진복창이 국문에 참여하였다가 그 소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안명세가 드디어 참형을 당하게 되어 수레에 실려 나오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때에 수찬 윤결(尹潔)이 능원위(綾原尉) 구사안(具思顔)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취중에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말을 하였더니, 구사안의 고발로 또한 하옥되어 장형(杖刑)을 받아 죽었다. 금상조에 안명세를 복직하였다. 옥당에 차자를 올려 그 원통하게 죽었음을 호소하고 증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무신년 5월에 좌상 이기(李芑)가 갈리고 홍언필(洪彦弼)이 후임이 되었다. 영상 윤인경이 아뢰기를,
“묘당의 선생안(先生案)을 보니 한명회(韓明澮)가 영상으로 있다가 갈린 지 9년 뒤에 도로 좌상이 되었으며, 심회(沈澮)와 정광필(鄭光弼)이 영상으로 있다가 갈린 지 10년 뒤에 다시 좌상이 되었으니, 그때의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홍언필의 좌목(座目)이 본디 신의 위에 있었으니, 청컨대 홍언필을 영상으로 올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영상의 자리를 사양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홍언필이 아뢰기를,“무릇 조정의 공회(公會)에는 반드시 죄목대로 따르는 것인데, 지금 신이 정부에 들어와 좌차(座次)의 전후가 다르니, 청컨대 좌목의 차례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영상을 주소서. 직책이 백관의 장관인데, 만약 인혐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사직하지 말라.”
하였으나, 윤인경이 오히려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대사헌 구수담(具壽聃)이 좌목의 오르내림이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경연에서 아뢰었다. 그래서 명하여 육조의 판서 이상 및 양사 장관을 불러 의론하게 하니 모두 당연히 좌목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또 전례를 상고하여 보니, 또한 모두 좌목대로 따랐으므로, 윤인경이 좌상으로 강등되었다.○ 기유년 9월에 공신들에게 대궐 뜰에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영상 이기에게 전교하기를,
“윤원형이 막대한 공이 있지만 달리 보답할 만한 일이 없으니, 그 양첩(良妾)에게서 낳은 자녀를 적자녀(嫡子女)로 만들어 허통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기 등이 회계하기를,“조종조에서 큰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첩이 낳은 자녀를 허통시켜 준 전례가 있으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큰 공이 있는데도 1품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온당하지 못합니다. 1품으로 승자(陞資)하소서.”
하여, 세 번이나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외척을 너무 높이고 키우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닌데, 지난 해에 자헌대부의 계자에 올리기를 청하고, 이제 또 1품에 올리기를 청하니, 소인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태도가 추하다.
○ 서얼 정상(鄭瑺)이 신사년(1521, 중종 16)에 송사련(宋祀連)과 같이 고변하여 상과 벼슬을 받았는데, 뒤에 민간에 세력을 부려 방자하고 의복과 거처가 참람 되고 사치스러워 사헌부에 잡아 가두고 죄를 주려 하였더니, 정상이 옥관에게 말하기를,
“나라에 관계되는 큰일이 있으니, 위에 아뢰고자 합니다.”
하므로, 옥관이 달려가 승정원에 고하였다. 명하여 정상을 불러 물으니, 답하기를,“지평 한지원(韓智源)이 안처겸(安處謙)의 아들 안율(安瑮)과 절친하므로 신을 모함하여 원수를 갚으려 합니다. 근년에 윤임이 명사(名士)들과 결탁하여 신사년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을 죄가 없다고 하여 새로 등용하려 하다가 실패하였는데, 지금 신에게 죄를 주려는 자는 역시 을사년의 명사들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정원에서 정상이 자기 죄를 면하기 위하여 국가의 큰일이 있다고 무고하여 임금을 속이고 대간(臺諫)을 동요시킨다고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의금부로 옮겨 가두어 추국하여 전 가족을 경원(慶源)으로 이주시켰다.
○ 기유년에 명하여 옛날 정업원(淨業院) 터에 새 인수궁(仁壽宮)을 지었다. 신해년에 다시 양종(兩宗 교종과 선종)을 세우고 선과(禪科)를 설치하고 중이 되려는 자에게 도첩(度牒)을 주어 허락하였다.
이때에 대비가 한창 불사(佛事)를 숭상하는데 요망한 중 보우(普雨)가 방자하게 떠벌려서 불교가 너무 성하므로, 옥당과 양사가 해가 넘도록 논쟁하였으나 되지 않았으며, 대신들도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에서 논의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윤원형은 시종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대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을축년에 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이 대간(臺諫)의 말을 따라 양종(兩宗) 및 선과를 혁파하였다.
○ 함경도 어사 왕희걸(王希傑)이 장계하기를,
“북방 사람의 말을 들으니, 중 보우(普雨)가 이유(李瑠 계림군(桂林君))의 종으로 중이 된 자와 안변(安邊) 황룡사(黃龍寺) 초암(草庵)에 동거하였습니다. 이유가 망명하여 그곳으로 오니 그로 하여금 움막을 파고 숨어 있게 하였다가 조정에서 사방으로 크게 수색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저에게 미칠까 두려워 석왕사(釋王寺)에 옮겨 있었는데, 이유의 종 무응송(無應松)이 작은 종이쪽지를 가지고 와서 보우에게 주었습니다. 보우가 보고는 ‘가까이는 길일(吉日)이 없으니, 너는 물러가라.’ 말하고 수일 있다가 동거하는 중에게 쌀을 꾸어서 깊은 산골에서 불공을 올린 것이 한 번만이 아닙니다. 쌀을 꾸어 준 중이 아직도 석왕사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승정원에서 법관에게 부쳐서 심문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보우를 해치려는 자가 말을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 심문하지 말라.”
하였다.양사 및 대신이 추문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조 판서 송세형(宋世珩)이 독계하여, ‘보우가 교만하고 독하여 일국 사람들이 떠받들고 따르기를 임금과 같이 하여도 한 사람도 그것을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불측한 화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극력 아뢰어 보우가 행한 패악한 일을 많은 말로 낱낱이 들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가정(嘉靖) 임자년(1552, 중종 31)에 팔도에 명령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니, 성수침(成守琛)ㆍ이희안(李希顔)ㆍ조식(曺植)ㆍ성제원(成悌元)ㆍ조욱(趙昱)이었다. 지조와 행실이 특이하다고 하여 6품의 계자에 뛰어 올려 현감으로 제수하였는데, 조식은 취임하지 않았다.
○ 가정 신해년 3월 1일에 흙비가 왔다.
임자년 6월 30일 유시(酉時)에 동방에 누른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여 그 빛이 땅에 비쳤다.
을묘년 5월에 진주(晉州)에 사는 사비(私婢) 윤덕(允德)이 임신한 지 4개월 만에 생산하였는데, 온 몸에 흰 털이 있어 학(鶴)의 새끼와 같았다.
○ 진복창(陣復昌)이 을미년 송경친시(松京親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가문이 낮았는데 그 아버지 의손(義孫)이 녹사(錄事)로 있다가 나가서 현감이 되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복창의 어머니가 여러 번 남자를 거친 뒤에 의손에게 갔다.’ 하여 사람들이 더욱 친하게 여겼다. 진복창이 문장에 능하고 활쏘기를 잘하고, 또 꾀가 많고 간사하여 잘난 척하므로 구수담(具壽聃)의 무리와 같은 이도 속임을 당하여 그를 남들에게 칭찬하고 추천하였다.
윤원형이 국권을 마음대로 결정하여 선비들을 모두 죽일 적에 진복창이 드디어 그에게 붙어서 사냥개가 되었다. 윤원형이 해치려고 생각하는 자가 있으면 진복창이 곧 배격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당대의 명사들이 죽고 귀양간 자가 극히 많았으므로 그를 독사라고 지목하여 모두 흘겨보았다. 구수담도 또한 마침내 그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었다.
그 뒤에 윤원형도 그를 싫어하여 진복창을 삼수(三水)로 귀양보내고 또 귀양살이 하는 중에 폐단을 일으킨다고 하여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었다.
같은 때에 이무강(李無彊)이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음험하고 간사하여 진복창과 결탁하여 악한 짓을 협조하였다. 진복창이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마침 홍문록(弘文錄)을 하는데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이번에는 경휴(景休)가 당연히 제일 먼저 천거될 것이다.”
하였다. 경휴란 바로 이무강의 자(字)이다. 좌우의 사람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지만 권점(圈點)을 하고 보니 이무강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짓하며, ‘누가 권점을 하지 않았나.’하며, 네가 그랬느니 내가 안 그랬느니 서로 책임을 미루었기 때문에 듣는 이가 웃었다.이무강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북도에 갔을 때에 지방관이 을사년에 귀양온 사람을 도와 준 이가 있었는데 그를 적발하여 죄를 주었다. 뒤에 진복창이 패하여 귀양가자, 이무강도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니, 수령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전일에 수령이 귀양온 사람을 구제해 주었다고 적발하여 죄준 자이다.”
하고, 돌보아 주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제가 남에게 한 일을 제 자신이 그대로 보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이준경(李浚慶)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이무강이 탄핵하여, 문의 재주를 겸하였으니, 병권을 맡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뒤에 준경이 순변사가 되어 경원에 도착하였을 때에 역졸이 성중에 있는 오막살이집을 가리키며,
“이무강의 거처하는 곳입니다.”
하니, 이준경이 먹을 것을 후히 보내주었다. 어떤 이가 그를 원혐(怨嫌)이 있는 자에게 은혜로써 갚는다고 비웃으니, 이준경이 말하기를,“은혜를 베풀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곤궁한 것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나이 여섯 살 적에, 어릴 때에 교양을 시키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조정 신하 중에서 학문과 조행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보양관이라 칭하여 때때로 들어가 뵙도록 하였는데, 안현(安玹)ㆍ이준경ㆍ조사수(趙士秀)ㆍ임호신(任虎臣)이 그 선택에 참여 되었다.
순회세자의 가례를 행할 시기가 되었는데, 윤원형이 그의 사위 안덕대(安德大)의 가까운 친척인 황대임(黃大任)의 딸을 사주쟁이와 짜고 오주(五柱)를 음양서(陰陽書)의 법에 맞도록 고쳐서 가장 길하다고 하여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혼인할 기일이 겨우 열흘쯤 남았는데, 황대임의 딸이 문득 뱃병을 앓아 매우 중하였다. 위에서 병이 있는 사람이 동궁(東宮)의 배필이 될 수 없다고 하고, 또 다른 데로 시집가기는 어려우므로, 강등하여 양제(良娣 세자의 후궁)로 삼았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다.
다시 윤옥(尹玉)의 딸을 뽑아서 가례를 행하였더니 이듬해에 순회세자가 일찍 죽었다. 윤빈(尹嬪)은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 25)에 죽었다. 장사하기 전에 왜적이 경성에 들어왔으므로 드디어 그 시체를 잃고 지금까지 장례를 지내지 못하였다.
○ 병진년(1556, 명종 11)에 무장(茂長)에 사는 유학 안서순(安瑞順)이 조정에서 구언(求言)하는 명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극력 말하고, 그 끝부분에 또 유관(柳灌) 등 3인의 원통히 죽은 것을 논하면서,
“대비가 정권을 잡아 여우처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자 저 대여섯 대신이 참소하고 음해할 꾀를 만들어 내어 임금을 속여서 갑자기 좋은 관직을 얻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있고 송인수(宋麟壽)ㆍ임형수(林亨秀) 등이 다 아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고 가산을 적몰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이 만약 지각이 있다면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경사가 있고 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내리는 법이니, 근래의 천재는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대사면령을 내리소서…….”
하였다.전라 감사가 그 상소문을 바치고 안서순(安瑞順)을 가두어 놓고 기다렸더니, 명하여 잡아 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하고 난언죄(亂言罪)로서 참형에 처하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 대사성 민기(閔箕)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때문에 관직이 갈리자, 대신이 당하관 중에 글에 능하고 재주와 조행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임명하기를 계청하여 이에 부응교 이황(李滉)으로 제수하였더니 이황이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좌상 상진(尙震)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황은 몸가짐이 맑고 간소하여 서울에 있을 때에도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니 마땅히 불러 와야 합니다.”
하고, 지경연사(知經筵事) 조사수(趙士秀)가 아뢰기를,“이황의 사람됨이 퇴폐해가는 풍속을 돌이킬 만하니, 조정에서 오랫동안 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분부하기를,“이황과 같은 맑고 간소한 사람이 병으로 물러갔기에 위에서도 유념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하고, 이어서 친필 글을 내려 이르기를,“너는 탁월하며 맑고 간소하고 세상에 드문 문장으로 공명을 탐하지 아니하고, 시골에 한가로이 거처하니 욕심 없고 사양하는 지조를 가상히 여겨 항상 서울에 돌아올 날을 바랐으나, 현인(賢人)을 구하는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조정에 나와 벼슬하지 아니하여, 내 마음이 섭섭하여 생각에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비록 주 문왕(周文王)의 덕이 없으나 네가 어찌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사는 것을 좋아하겠느냐. 속히 올라와서 간절히 바라는 뜻에 맞추어 주오.”
하였다.○ 명종(明宗)이 즉위한 초기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하여 함께 정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수렴(垂簾)의 의식을 의정(議定)할 때에 명종도 발 안에 앉기로 되었더니, 대사헌 홍섬(洪暹) 등이 논쟁하기를,
“임금은 마땅히 남쪽으로 향한 자리에 바로 앉아서 모든 사람의 눈이 다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발 밖에 나와 앉아 여러 신하에게 임하셔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기유년(1549, 명종 4)에 이홍남(李洪男)이 고변한 뒤에 충주(忠州)에 귀양살이 하는 백성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있었는데, 기회를 타서 술책을 부려 죄를 면하고 상(賞)을 받으려고 품관들의 향회(鄕會)의 문서를 훔쳐서 장차 고변하려고 하는 것을 어느 사람이 알고 잡아서 관청에 고하였다. 고을 원이 이치(李致)가 감사 이해(李瀣)에게 보고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이해가 보고에 의하여 형추하니, 최하손이 형벌에 죽었다.
이홍남이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관청에 드나들면서 귀찮게 청탁을 하기에 이해가 비웃고 경멸하였다. 이홍남이 이해에게 감정을 품었고, 사간 이무강(李無彊)도 이해에게 원혐(怨嫌)이 있었기 때문에 이홍남이 이무강과 그의 처족인 대사간 원계검(元繼儉)을 사주하여 이해와 이치(李致)를 무고하되 최하손을 죽여 고변을 못하도록 입을 없애어 역적을 옹호하였다고 하니, 잡아다 국문하여 이치는 형장 아래에 죽고 이해는 형장을 맞고 죽음에서 감등하여 갑산(甲山)으로 귀양살이 하러 가다가 양주(楊州)에 이르러 죽었다.
이해는 당시 명망이 있었다. 이기(李芑)가 정승이 될 때에 이해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탄핵하여 갈았으니 이 옥사가 혹독한 것은 이기가 실로 주장한 것인데 인심이 통분하고 애석히 여겼다. 금상 초년에 이해와 이치에게 모두 직첩을 도로 주었다.
○ 영상 심연원(沈連源)이 병이 위독하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보았더니, 대신이 병이 위독할 때에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물으면 다만 두 손을 모으고 사은할 뿐이요, 다시 정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이를 내 마음에 부족하게 여겼다. 이제 내 정신이 혼란하기 전에 소회를 써 올리겠다.”
하고, 곧 상소문으로써 여섯 가지 조목을 진술하니, 근학(勤學)ㆍ종간(從諫)ㆍ친현(親賢)ㆍ 원영(遠侫)ㆍ휼민(恤民)ㆍ신상(愼賞)이었다.○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명종(明宗) 때에 일찍이 친정에 가서 상을 내렸더니, 임권(任權)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모(國母)는 궁궐 밖에 나가서는 안 되고 친정 집안에서도 유식한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불가한 줄 알지 못한 것도 아닐 터인데, 그 은택을 받는 것을 바라고서 말리지 않았으니, 지극히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이것은 그 조부 심연원(沈連源)을 가리킨 것이었다. 심연원이 같이 경연에 입시하였다가 송구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민기문(閔起文)은 을사년의 명사로서 지평으로 있다가 죄를 입어 귀양갔더니, 금상의 조정에서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을사년에 밀지가 내렸을 때에 양사가 중학(中學)에 모였다가 파하고 나올 때에 사간 박광우(朴光佑)ㆍ장령 정희등(鄭希登)이 한 명은 소격서동(昭格署洞)으로 향하고, 한 명은 장의동(藏義洞)으로 향하였으니, 그곳은 바로 유관(柳灌)과 윤임(尹任)이 사는 동리였다. 그때에 윤원형의 눈과 귀 노릇을 하는 자들이 거리에 벌여 있었기 때문에 박광우ㆍ정희등이 유관과 윤임의 집에 그 말을 알려주러 간 것이라고 지목되어 매맞아 죽었고, 그 나머지 자기 집으로 바로 돌아온 자는 모두 귀양만 가고 말았다. 박광우와 정희등은 실로 유관과 윤임을 가서 본 것은 아니었는데, 윤원형의 정탐꾼들이 그들의 말머리가 향하는 곳을 보고 모함하여 죄를 만들었던 것이니, 혹은 죽고 혹은 사는 것이 사람의 생각 밖에 무슨 운명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양(李樑)은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처남이다. 위인이 어리석고 기력이 많으니 곁에 있는 동료들이 다 비웃었다. 명종이 갑자기 발탁해 등용하여 작은 관직으로부터 수년도 못 되어 판서에 올랐다. 대개 그때에 윤원형이 권력을 마음대로 결정하니, 명종이 속으로 두려워하여 이양의 세력을 심어 윤원형과 겨루게 하려 한 것이다.
이양이 총애를 믿고서 교만하고 방자하여 기세가 불꽃 같으니, 일시의 이익을 즐기는 무리들이 휩쓸려 따라붙어 이감(李戡)ㆍ권신(權信)ㆍ고맹영(高孟英)ㆍ김백균(金百鈞)ㆍ이영(李翎) 등은 그의 심복이 되고, 김명윤(金明胤)ㆍ정사룡(鄭士龍)ㆍ원계검(元繼儉) 등이 계자(階資)가 높이 오른 사람들로서 그에게 아첨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신사헌(愼思獻)은 본시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으로서 정사룡에게 뇌물을 바치고 시제(試題)를 사서 과거에 올랐다가 공론으로 인하여 과거를 삭탈당하였다가 이양에게 빌어서 복과(復科)되었으므로, 종이 상전 섬기 듯하였다. 윤백원(尹百源)은 윤원형의 조카이다. 그의 아비 윤원로(尹元老)가 윤원형 때문에 죽은 것을 원망하여 또한 이양에게 붙었다.
이양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이 어리석고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계해년(1563, 명종 18)알성 친시(謁聖親試)에 장원으로 뽑혀 중외(中外)에서 쑥덕거려 모두 말하기를, ‘이정빈의 장원은 술책을 써서 된 것이다.’ 하였다. 달이 넘지도 아니하여 전랑에 추천되었다. 조금 있다가 이양이 이조 판서가 되자 이정빈이 상피(相避) 때문에 갈리게 되자 동료에게 부탁하여 유영길(柳永吉)을 후임으로 추천하니, 그의 절친한 벗이었다. 그때에 정랑 박소립(朴素立)과 좌랑 윤두수(尹斗壽)는 매우 맑은 의론을 가진 사람이므로 그 말을 듣지 않으니, 이정빈이 감정을 품었고, 또 이문형(李文馨)ㆍ허엽(許曄) 같은 이가 이양에게 붙지 않고 기대승(奇大升)ㆍ윤근수(尹根壽)가 후진(後進)으로서 선비들의 추앙을 받으므로 이양의 무리들이 꺼렸다.
이에 이감(李戡)이 대사헌으로서 그들을 탄핵하기를,
“이문형ㆍ허엽ㆍ백소립ㆍ윤두수ㆍ유근수ㆍ기대승 등이 경박하게 서로 부채질합니다.”
하여,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내쫓았다.심의겸(沈義謙)은 바로 이양의 생질로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왔는데, 선비들과 사귀어서 이양이 하는 일을 반대하려 하였다.
이때에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으로 있었으니, 또한 이양의 당파였다. 이양이 이문형ㆍ허엽 등을 내쫓으니 공론이 크게 놀래었다. 심의겸이 이양을 제거하려고 기대항에게 왕래하면서 모의하니 기대항은 심강(沈鋼)의 친척이었다. 심강이 이미 왕비에게 통하여 승낙을 받고서 이에 옥당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서 이양의 죄악을 탄핵하고 또 양사가 입을 닫고 말하지 않은 죄를 논하여 아울러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 그리고 이문형 등을 도로 불러 등용하였다.
얼마 안 되어 죄를 더 주어 이양ㆍ이감ㆍ권신ㆍ신사헌ㆍ이영ㆍ윤백원 등은 멀리 귀양 보내고, 고맹영ㆍ김백균은 중도부처하고, 정사룡ㆍ원계점ㆍ이정빈ㆍ이언충ㆍ이중경ㆍ황삼성(黃三省)ㆍ조덕원(趙德源)ㆍ고경명(高敬命)ㆍ이성헌(李成憲)ㆍ강극성(姜克誠)ㆍ윤인함(尹仁涵) 등은 혹 삭출하거나 혹은 파직하되 차등이 있었다. 이양이 처음에는 왕비의 외숙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세력이 커지게 되어서는 내시들과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을 엿보게 하여 알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비루한 자들이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여 못할 짓이 없음이 이처럼 두려운 것이다.
○ 계해년(1563, 명종 18)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죽어 후사가 없었다. 을축년에 명종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니 중외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영의정 이준경이 약방제조 심통원(沈通源)과 상의하여 약방으로부터 왕비에게 아뢰어, 왕위 계승자를 미리 정하여 인심이 의지할 데가 있도록 하기를 청하였더니, 왕비가 덕흥군(德興君) 셋째 아들 아무개라고 써서 내리니, 곧 금상(今上 선조)이었다 얼마 안 되어 명종의 병이 낫자, 그 일을 고하고 세자의 명호(名號)를 일찍 정할 것을 청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매우 듣기 싫어하였다.
이준경이 일찍이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정국본(定國本)에 관한 대목을 가지고 어전에 들어가서 후사를 미리 정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으로 말하고 또 상소하여 논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이준경이 이로 말미암아 임금에게 거슬렸다.
정묘년에 상의 병이 위독할 때에 대신이 후사를 물으니,
“전일에 이미 정한 사람이 있다.”
분부하였다. 이준경은 오히려 이것은 너무나 큰일이니, 성상의 하교를 직접 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침전에 입대하기를 청하고 들어가서 이준경이 큰 소리로 유언을 청하니, 상이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준경이 주서(注書)를 시켜 금상의 봉호 하성군(河城君)이라고 써서 청하니 임금이 턱을 끄덕였다. 이준경이 드디어 물러 나왔다.그날 상이 승하하자 금상(今上 선조 즉 하성군)을 잠저(潛邸)에서 맞아 와서 즉위하여 중외(中外)가 안정된 것은 이준경의 힘이었다.
○ 금상이 들어와 대통을 이을 때에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 선조의 생모)의 상(喪)을 당하여 장례를 지내기 전이었다. 병조 판서 원혼(元混)ㆍ도승지 이양원(李陽元)이 잠저(潛邸)로 가서 모시고 나와서 견여(肩輿)를 타고 광화문 동쪽 협문(夾門)을 거쳐 들어가서 대행(大行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앞에 곡림하고 드디어 즉위하였다. 백관이 하례할 때에 잠저의 하인 및 기타 무식한 무리들이 을사년과 같은 녹공(錄功)의 혜택을 바래고 다투어 이름을 써서 들이고, 조정 벼슬아치도 대궐에 곡하러 가지는 아니하고 먼저 그곳으로 간 사람까지 있었다. 그 이름을 기록한 큰 책을 승지가 승정원으로 가져갔다가 곧 불태워버렸다.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이 을축년(1565, 명종 20)에 새 임금이 서는 데에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여 여러 번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오늘날 주상께서 대통을 계승하게 된 데는 우리들이 어찌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하여, 현저히 자기의 공을 내세우려는 기색이 있었다가 이준경이 정색하고 답하지 아니하니, 심통원이 드디어 풀이 죽었다.심통원이 외척의 인연으로 정승의 자리에 외람되이 앉아 재물을 탐하기 끝이 없었으므로 공론으로 인하여 벼슬이 깎이고 시골로 추방되어 마침내 죽었다.
○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만 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대대로 녹을 먹은 집안이니,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으나, 병이 있어 벼슬하지 못한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다.”
하였다. 최후에 명종이 특명으로 사지(司紙)에 제수하자, 영상 상진(尙震)이 편지를 보내어 극력으로 나오기를 권하니, 성수침이 답하기를,“옛적에 문립(文立)이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은 것은 성격이 겸양하고 나이 늙어서 다시 세상에 쓰일 뜻이 없음을 안 까닭이었는데 공은 나를 제대로 아는 분이 아닙니다.”
하고, 마침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가 죽자, 간원(諫院)이 아뢰기를,“성수침이 유일(遺逸)로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어도 매양 병으로 사양하고 숨어 있어 지조를 닦아서 옛 도(道)를 힘써 행하여 궁하게 살다가 몸을 마쳤으니, 실로 일국의 착한 선비요, 당대의 일민(逸民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장례식에 은전을 내리셔서 성스러운 조정에서 절의를 높이고 중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또 사헌부 집의로 증직하였다.○ 명종이 태학을 시찰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좌정하여 친필로 글을 써서 여러 유생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덕이 박한 사람으로 외람되게 신민(臣民)의 위에 있어 비록 인재를 양성한 주 문왕(周文王)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찌 유학을 숭상한 당 태종(唐太宗)의 뜻이야 없겠는가. 학교에 마음을 써서 인재를 배출하게 하려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가도 지금까지 효과를 보지 못하니 나의 양성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학문이란 근본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항상 이 당(堂)의 이름을 돌이켜 생각하여 충효를 근본으로 삼아서 모두 장래에 군자유(君子儒)가 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명종이 일찍이 후원(後苑)에 거둥하여 입시한 신하에게 모두 술을 주었다. 정승 상진(尙震)이 본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므로 이날 취하여 길 옆에 쓰러져 있었다. 명종이 환궁할 때에 이를 보고 좌우에게 물어서 상진인 줄 알고는 분부하기를,
“대신이 길 옆에 있는데 지나가기가 미안하다.”
하고, 장막으로 둘러 가린 뒤에야 연(輦)이 지나갔다.○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가 영월군에 있는데, 노산군이 죽은 뒤에 군수가 갑자기 죽는 이가 많으니, 세상에서 흉한 고을이라고 하였다.
판서 박충원(朴忠元)은 벼슬길이 막혔다가 다시 나와 영월 군수에 제수되었다. 부임하자,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어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올렸다. 그 축문에 이르기를,
왕실의 주손이요 / 王室之冑
어리신 임금이네 / 幼冲之辟
마침 비운을 만나 / 適丁否運
외진 고을에 피하셨네 / 遜于僻邑
한 조각 청산에 / 一片靑山
만고의 고혼이로다 / 萬古孤魂
바라옵건대 강림하시어 / 庶幾降臨
제사를 받으소서 / 式歆苾芬
하였다. 지금까지 사시(四時)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축문을 쓰고 있다.어리신 임금이네 / 幼冲之辟
마침 비운을 만나 / 適丁否運
외진 고을에 피하셨네 / 遜于僻邑
한 조각 청산에 / 一片靑山
만고의 고혼이로다 / 萬古孤魂
바라옵건대 강림하시어 / 庶幾降臨
제사를 받으소서 / 式歆苾芬
○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젊어서부터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다. 명종 때에 벼슬하다가 물러나 고향인 예안(禮安)에 살면서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성현의 경서(經書)에 정밀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 주자의 글에 힘을 썼다. 벼슬하거나 그만두는 것을 오로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다. 명종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 판서에까지 발탁되어 임금이 친필의 글을 내려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하고 나가지 않기도 하였다.
금상이 즉위하자, 찬성으로 승진시켜 두 번이나 교서로 불렀다. 무진년(1586, 선조 1)에는 부름을 받고 와서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니, 봉사(封事) 수천 자(字)를 올렸는데, 모두 시국에 적절한 내용이었다.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니 상이 매우 성의로 대우하였다. 얼마 안 되어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잇달아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만류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인견하고 물품을 하사하며, 역마로 호송하게 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주게 하였다.
이듬해 경오년에 나이 70이 넘은 것으로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죽으니,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예안ㆍ안동ㆍ영천(榮川)에서 모두 서원을 세워 제사지냈다. 저술한 시(詩)ㆍ문(文) 및 서(書)ㆍ소(疏) 30여 권이 세상에 행한다.
○ 유희춘(柳希春)은 자는 인중(仁仲)이요, 호는 미암(眉巖)이다. 을사사화 때에 정언으로서 제주로 귀양 갔다가, 그곳은 본집인 해남에 가깝다고 하여 종성(鐘城)으로 옮겼다. 널리 보고 잘 기억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명종 말년에 은진(恩津)으로 양이(量移)하였으며, 금상의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거쳐 품계가 자헌대부에 올랐다. 전례에 자헌대부의 품계로 부제학이 된 자가 없었다. 상이 말하기를,
“유희춘이 부제학에 합당하니,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제수하라.”
하여, 뒤에 드디어 전례가 되었다. 임금이 일찍이 분부하기를,“나의 학문의 진보된 것이 유희춘에게 힘입은 것이 많았다.”
하였다.그가 죽으니, 정2품의 실직을 거치지 못한 자는 법에 증직과 시호를 내리지 못하는 것인데, 이때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찬성(贊成)을 증직하였다.
○ 금상이 즉위하자 명하여 을사년(1545, 인종 1)에 귀양 간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자를 다 풀어 주었는데, 노수신(盧守愼)ㆍ김난상(金鸞祥)ㆍ유희춘 같은 이들은 품계에 불차탁용(不次擢用 차서를 밟지 않고 벼슬을 뛰어 올려 씀)하고, 유관(柳灌)ㆍ윤임(尹任) 이하 형을 받은 자를 다 벼슬과 가산을 도로 주고, 이기ㆍ정순붕ㆍ임백령ㆍ정언각 등은 모두 벼슬을 빼앗았다. 삼사가 그 위훈(僞勳)까지 아울러 삭탈하기를 청하니, 상이 어렵게 여겼다. 대신 및 낭관ㆍ여러 관원이 조정에서 논하여 해가 넘도록 혹 그쳤다가 혹 논하였다가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와서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종의 비(妃))가 병이 위독하자 상이 인성왕후에게 공론에 의하여 위사훈(衛社勳)을 삭탈하겠다는 뜻으로 아뢰고, 드디어 삭탈하기를 명령하고 종묘에 제사드려 고하고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훈(勳)으로 관직이 올랐던 자는 대신 이외에는 살았거나 죽었거나를 논하지 않고 품계를 깎고 관직을 강등하였다.
○ 상이 즉위한 지 2년째인 기사년에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여 덕흥대원군이라 칭호하고, 부인 정씨(鄭氏)는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이라 칭호하고, 자손이 직(職)을 세습하는 것은 대군의 전례에 의거하고, 4대 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돈녕부 도정을 세습하고 사철의 제사에 쓰는 짐승을 관청에서 주기로 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 9)에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치고 임금이 생가의 사묘(私廟)에 거둥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예법에 부당한 점이 있음을 논하고, 고례(古禮)를 널리 고증한 뒤에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생가 형인 하원군(河原君)ㆍ하릉군(河陵君)은 모두 정1품의 품계에 올리고, 안황(安滉)은 6품의 관직으로 등용하고, 또 쌀과 포목을 주었다.
○ 《대명회전(大明會典)》 및 조훈(祖訓)에 우리 태조의 세계(世系)를 기재하면서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혈통이라고 하였으며, 또 네 임금을 잇달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운운하였으니, 네 임금이란 우(禑)ㆍ창(昌)ㆍ요(瑤 공양왕)ㆍ석(奭)을 가리킨 것이다. 석은 바로 공양왕의 세자이다.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 때에 비로소 잘못 기록된 것을 들어서 알고 곧 사신 이빈(李彬)을 보내어 개정하여 주기를 청하였더니, 성조(成祖)가 칙서를 내려 윤허하였다. 그 뒤에 선왕들이 계속하여 사신을 보내어 개정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기도 하거나 허락하지 않기도 하였다.
금상에 이르러 마침 《대명회전》을 고쳐 편찬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 17)에 사신 황정욱(黃廷彧)이 예부(禮部)의 복제(覆題)로 새 《회전(會典)》에 기재된 우리 나라 사실을 베껴내어 칙서 가운데 갖추어 기록하여 준 것을 얻어 왔는데, 그 거짓된 내용을 삭제하고 무함을 변명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상이 크게 기뻐하여 종묘에 제사지내어 고하였다. 다음에 유홍(兪泓)이 인쇄된 책을 얻어 왔고, 윤근수(尹根壽)가 또 전질(全帙)을 얻어 왔으므로 명하여 녹훈(錄勳)하는데, 황정욱ㆍ윤근수를 수공(首功)으로 삼고, 이 일에 공이 있는 전후의 사신을 아울러 등급을 나누어 훈권(勳券)을 주고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상에게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니, 상이 겸양하여 윤허하지 아니하다가 오랜 뒤에야 윤허하였다 존호를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고 올렸다.
○ 기묘년(1519, 중종 14)의 사화에 남곤(南袞)이 주모자가 되어 선비들을 많이 죽이고 귀양보내었는데도 형벌을 받지 않고 집에서 늙어 죽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인심이 더욱 통분히 여겼다.
금상 초년에 백인걸이 경연에서 아뢰고 계속하여 옥당이 글을 올려 그 죄상을 폭로시켰다. 상이 대신에게 물어서 추후로 그 벼슬을 삭탈하였다. 그리고 정암(靜庵)선생에게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현인을 높이고 악한 자를 토죄하는 전법(典法)이
50년 뒤에 시행되니 선비들의 공론이 쾌하게 여겼다.
○ 명종이 한 번은 야대(夜對)에 납시었을 때에 승지 허엽(許曄), 경연관 이인(李遴)ㆍ윤근수(尹根壽)가 입시하였다. 허엽이 아뢰기를,
“조광조가 바른 선비로서 소인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그때 거리를 지나갈 때에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하여 인심을 얻었다는 것을 가지고 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옛적에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으로부터 조정에 들어온 때에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었으니, 이것은 모두 그의 덕을 공경하고 우러러서 그러한 것인데, 어찌 그것으로써 의심을 해서 되겠습니까? 위에서 마땅히 죄가 없는 것을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또 구수담(具壽聃)이 본시 곧다는 이름이 있었고, 위에서도 또한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말씀을 경연에서 여러 번 하셨는데, 갑자기 일시의 말한 것으로 인하여 중한 죄를 입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불쌍합니다.”
하고, 윤근수가 또 허엽의 말과 같이 아뢰었으나, 상이 다 답하지 않았다.이튿날 양사가 허엽이 의론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시비를 현란시킨다고 탄핵하여 관직을 갈았다. 이때에 이양(李樑)ㆍ이감(李戡) 등이 이때에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이인이 그날 곁에서 듣고 곧 이양에게 누설한 것이다. 윤근수도 쫓겨나서 과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5세에 글을 짓고 필법(筆法)이 또한 기특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경자년(1540, 중종 53)에 급제하여 곧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상소하여 돌아가 어버이 봉양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허락하여 수찬에서 옥과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종ㆍ인종이 잇달아 승하(昇遐)하매, 병이 있다 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오지 아니하였다. 명종이 한 번은 교리로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유희춘이 북도로 귀양 갈 때에 가서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멀리 귀양 가고 처자가 의탁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어린 아들을 내가 마땅히 사위로 삼겠다. 염려하지 말게.”
하였다.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이 못났으며 또 나이가 그의 딸과 서로 맞지 않는데도 마침내 사위로 삼았다.
일찍이 〈이소경(離騷經)〉을 읽다가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푸른 나무 강 위에 부르지 못한 혼이여 / 靑楓江上未招魂
밝은 해가 어느 때에 원통함을 비춰주리 / 白日何時得照寃
수신(水神)이 타는 수레가 소식이 끊어졌으니 / 荷蓋水車消息斷
석양에 눈물을 천지에 뿌리도다 / 夕陽揮淚灑乾坤
하였다.밝은 해가 어느 때에 원통함을 비춰주리 / 白日何時得照寃
수신(水神)이 타는 수레가 소식이 끊어졌으니 / 荷蓋水車消息斷
석양에 눈물을 천지에 뿌리도다 / 夕陽揮淚灑乾坤
또 문인을 가르칠 적에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인 일에 이르러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기를,
전년에 초사 읽다가 슬픔이 마음에 일어나더니 / 楚辭前歲喟憑心
오늘 아침 송사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 宋史今朝淚滿襟
다른 시대의 충신과 소인이 어찌 나에게 관계되랴만 / 異代忠邪那繫我
자연히 서로 느껴 부질없이 슬피 읊조리네 / 自然相感慢悲吟
하고, 드디어 술을 실컷 마시고 말았다. 때는 정미년과 무신년(1547~1548, 명종 2~3) 무렵이었다.오늘 아침 송사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 宋史今朝淚滿襟
다른 시대의 충신과 소인이 어찌 나에게 관계되랴만 / 異代忠邪那繫我
자연히 서로 느껴 부질없이 슬피 읊조리네 / 自然相感慢悲吟
○ 명종 말년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이항(李恒)ㆍ성운(成運)ㆍ임훈(林薰)ㆍ김범(金範)ㆍ한수(韓修)ㆍ남언경(南彦經) 등이 참여되었다. 글을 내려 부르고 그 중에 병들어 못 오는 자에게 의원을 보내어 약을 내려주고 돈유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온 사람은 곧 인견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물은 뒤에 모두 6품의 직을 제수하였다. 이항(李恒)은 백의(白衣)로서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조식(曺植)도 부름을 받아 입대하자 전첨(典籤)에 제수하니, 받지 않고 물러갔다. 그가 죽으니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금상 초년에 이탁(李鐸)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이 건의하기를,
“조종조에서 사헌부의 벼슬은 비록 문관이 아닐지라도 제수하였는데, 지금도 출신(出身)이 아니면서도 사헌부에 합당한 사람이 있으니 청컨대 의차(擬差)하소서.”
하니, 상이 옳다고 하여, 성운ㆍ임훈ㆍ한수ㆍ남언경ㆍ성혼(成渾)ㆍ최영경(崔永慶)ㆍ정인홍(鄭仁弘)ㆍ홍가신(洪可臣)ㆍ김천일(金千鎰)ㆍ유몽정(柳夢井)ㆍ유몽학(柳夢鶴)ㆍ宋大立(송대립) 등이 전후에 제수되었더니, 얼마 안 되어 새로 만든 일이라고 하여 하교하여 중지시켰다.○ 금상조(今上朝)에 인재를 발탁하여 썼는데 조목(趙穆)ㆍ이지함(李之菡)ㆍ성혼ㆍ최영경ㆍ정인홍ㆍ정구(鄭逑)ㆍ김천일ㆍ홍가신ㆍ유몽정ㆍ유몽학ㆍ김면(金沔) 등과 같은 이가 학문과 조행으로서 서로 잇달아 뛰어 올라 6품의 관직에 등용되었다.
○ 지중추 이현보(李賢輔)가 71세에 외간상(外艱喪 아버지의 상사)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하고 온천에 목욕하겠다고 향리인 예안(禮安)으로 돌아가니, 은퇴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조관(朝官)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나와 전송하였다. 중종이 그 욕심 없고 사양함을 가상히 여겨 지중추에 제수하였고, 인종과 명종이 모두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품계가 여러 번 올라 숭정대부에 이르렀다. 나이 89세에 죽었다 그 때에 아들 중량(仲樑)은 안동 부사, 희량(希樑)은 의흥 현감(義興縣監), 계량(季梁)은 봉화 현감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복과 장수를 잘 누렸다고 일컬었다.
○ 명종 신유년에 유생에게 낙점하여 전강(殿講)을 시키니 김규(金戣)ㆍ홍성민(洪聖民)ㆍ심화(沈鏵)ㆍ허사흠(許思欽)ㆍ이윤희(李胤禧) 등 5인이 입격되고, 또 제술을 시키니 홍성민이 장원이 되고 심화와 김규가 입격되었으므로 명하여 급제를 주게 하니 대간(臺諫)이 그것이 불가하다고 논하였다. 그것은 뽑힌 세 사람 중에 심화와 김규는 모두 외척(外戚)인데, 그들에게 낙점하여 시험을 보여 뽑았으니, 사람들의 오해를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이 대간의 말에 윤허하지 않았다. 그런데 창방(唱榜)하는 날이 되어 상이 장차 친히 임하려고 의장(儀仗)이 다 준비되었는데, 그날 새벽에 큰 비가 오고 벼락이 대둑(大纛)을 때렸으므로 상이 곧 명하여 파방(罷榜)하였다.
○ 유생이 과시(課試)와 전강(殿講)에 입격한 자는 문과 회시를 바로 보게 하기도 하고 초시의 급분(給分)을 차등 있게 주기도 하였다. 소위 급분(給分)이란 것은 삼장(三場)에 제술한 것이 입격되지 못하더라도 그 얻은 분(分)을 계산하여 입격한 자와 더불어 다소를 비교하여 참방(參榜)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초시에 급분하는 것인 만큼 그것을 회시에 옮겨 쓸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가정 갑자년(1564, 명종 19)의 문과 복시에 심화(沈鏵)가 강경(講經)에 입격하였는데 분수(分數)가 적었다. 그가 초시에 합격한 뒤에 또 은사(恩賜)로 분수를 얻었는데, 심화가 그것을 회시에 옮겨 쓰려고 소(疏)를 승정원에 바쳤다. 이때에 심화의 아버지 심통원(沈通源)이 바야흐로 정승이 되어 있고 또 외척이므로 세력이 불길과 같았다. 그래서 승지들이 그 소(疏)의 뜻이 외람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마는 모두 그 소를 입계하였으되 홀로 안방경(安方慶)이 극력으로 막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분의 강직한 점은 취할 만하다
○ 금상(선조조(宣祖朝)) 을유년 가을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는데 당일 진설할 후직씨(后稷氏)의 위패가 이미 없어져 곧장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 창졸간에 빈 자리만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사 지낸 뒤에 크게 수색하여 곧 사직단 담안 나무 아래에서 찾아내었다. 의심될 만한 사람을 국문하였더니, 곧 수복(守僕) 주홍(朱洪)이 사직서의 관원을 모함하기 위하여 훔쳐서 묻은 것이었다. 주홍은 대역죄로 처단되고, 그 처자도 아울러 법에 의하여 연좌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 23) 봄에 태묘 제삼실(第三室) 묘문에 밤에 불이 났는데 수직하던 군사 유성회(柳成會)가 보고 곧 박멸하였다. 각 실의 책보(冊寶)를 살펴보았더니,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은 반이나 없어졌다. 그것은 수복이 훔쳐낸 뒤에 발각될까 겁이 나서 불을 질러서 그 흔적을 없애려 하였던 것이었다. 그 관련자들을 국문하여 죽은 자가 많았다.
정범(正犯) 이산(利山)은 황치경(黃致敬)의 종이었으므로 그 주인까지 가두었더니, 얼마만에 잡혀서 처형되었다. 유성회는 정병(正兵)으로서 절충(折衝)에 승진되었다.
○ 중종 반정 이후의 삼정승을 우선 아는 대로 기록하면, 유순(柳洵)ㆍ김수동(金壽童) 두 사람은 연산군 때에 이미 정승이 되었고,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송일(宋軼)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ㆍ김응기(金應箕)ㆍ안당(安瑭)ㆍ김전(金詮)ㆍ남곤(南袞)ㆍ이유청(李惟淸)ㆍ권균(權鈞)ㆍ심정(沈貞)ㆍ이행(李荇)ㆍ장순손(張順孫)ㆍ한효원(韓效元)ㆍ김근사(金謹思)ㆍ김안로(金安老)ㆍ윤은보(尹殷輔)ㆍ유보(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김극성(金克成)ㆍ윤인경(尹仁鏡)ㆍ유관(柳灌)ㆍ성세창(成世昌)ㆍ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ㆍ황헌(黃憲)ㆍ심연원(沈連源)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안현(安玹)ㆍ윤원형(尹元衡)ㆍ이준경(李浚慶)ㆍ심통원(沈通源)ㆍ이명(李蓂)ㆍ권철(權轍)ㆍ민기(閔箕)ㆍ홍섬(洪暹)ㆍ이탁(李鐸)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강사상(姜士尙)ㆍ김귀영(金貴榮)ㆍ정지연(鄭芝衍)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琠)ㆍ이산해(李山海)ㆍ정언신(鄭彦信)ㆍ정철(鄭澈)ㆍ심수경(沈守慶)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ㆍ유홍(兪泓)ㆍ김응남(金應南)ㆍ정탁(鄭琢)ㆍ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ㆍ이헌국(李憲國)ㆍ윤승훈(尹承勳)ㆍ김명원(金命元)이었다.
○ 국초이래로 문형(文衡)을 맡은 자는 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안지(安止)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이황(李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金貴榮)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ㆍ홍성민(洪聖民)ㆍ이항복(李恒福)ㆍ심희수(沈喜壽)였다.
○ 이문순(李文純 이황의 시호)이 물러가기를 청할 적에 상이 인견하고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옛 사람이 태평스런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롭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므로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루어 여러 아랫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요, 태평스런 세상에는 방비할 만한 걱정이 없으므로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반드시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두려운 것입니다.
전하의 자질이 고명(高明)하시어 경연에서 글 뜻에 능통하여 여러 신하의 재주가 전하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논의하고 일 처리하는 데에 있어 혼자의 지혜로 세상을 다루려는 징조가 없지 않습니다. 신이 전일에 아뢴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씀을 항상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대저 태평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난리가 생길 징조가 있는 것인데, 지금이 곧 그러합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조종의 깊고 두터운 은택으로 쌓은 공덕이 거룩합니다. 다만 중엽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으니, 폐조(廢朝 연산조)의 무오사화ㆍ갑자사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종조 기묘년의 사화에 현인군자가 모두 큰 죄를 입어 그때부터 사정(邪正)이 서로 섞여 간악한 사람이 득세하여 원혐을 보복할 때에는 반드시 기묘사화의 남은 풍습이라고 하여 사림의 화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명종께서 어리니, 간악한 자가 득세하여 사화가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지나간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장래의 큰 경계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들이 첫 정사는 맑고 밝아서 바른 사람이 쓰여져서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간언하기에 임금이 반드시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뜻이 생깁니다. 이때에 간사한 자들이 틈을 타서 비위를 맞추는 것입니다.
지금 새 정사의 처음에 무릇 간쟁하는 말을 다 뜻을 굽혀 따르시어 큰 허물이 없으나, 오래 되어 전하의 마음이 혹 변해지면 어찌 오늘날과 같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사정(邪正)이 장차 두 갈래의 세력이 되어 간사한 자들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이 개원(開元) 연간에는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가 천보(天寶) 연간에는 크게 난리가 일어나 한 임금의 몸으로서 그 행한 일이 두 사람의 일과 같은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합하였고 마지막에는 소인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이것을 거울로 삼아 경계하시어 선류(善類)를 보호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모함하지 못하게 하시면 이것이 종묘사직과 생민(生民)의 복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조신 가운데 경(卿)이 천거할 만한 자가 없소?”
하자, 대답하기를,“오늘날 대신의 자리에 있는 이가 모두 맑고 삼가고, 육경(六卿)에 사특한 사람이 없습니다. 수상 이준경(李浚慶)으로 말하면 위태롭고 불안한 시기에 큰 소리 없이 국가를 태산처럼 튼튼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신하입니다. 믿어 중히 여길 분은 이 사람보다 앞설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학문하는 사람을 물으니, 대답하기를,“그것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자(程子)의 문인에 유작(游酢)ㆍ양시(楊時)ㆍ사양좌(謝良佐)ㆍ장역(張繹)ㆍ이유(李籲)ㆍ윤돈(尹焞) 등 모든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정자가 감히 그들을 학문에 얻은 바가 있다고 가벼이 허여하지 않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위로 전하를 속여서 아무 사람은 학문에 얻은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는 여러 책을 널리 보았고, 성리학에 견해가 또한 뛰어났으나 다만 수렴의 공부가 부족합니다.”
하였다.○ 퇴계가 병이 위독하니 문생들을 불러 영결하려고 하므로 자제들이 말리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즈음에 보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명하여 상의를 몸 위에 입히게 하고 여러 문생에게 말하기를,“평일에 나의 하찮은 견해를 가지고 제군들과 강론한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죽던 날 아침에 시자(侍者)를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에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게 하고선 조용히 숨졌다. 융경(隆慶) 경오년 12월 8일이었다.○ 퇴계가 본시 은퇴할 뜻이 있었으니, 비록 여러 대의 조정의 은혜를 입어서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으나 그 본의가 아니었다. 일찍이 아들 준(寯)에게 부탁하되, 무덤 앞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퇴계는 이 칭호에 마땅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
하였다.○ 퇴계가 자기의 묘명(墓銘)을 스스로 지었는데 이러하다.
나서부터 매우 어리석고 / 生而大癡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즐겼으며 / 中何嗜學
만년에는 어찌 관직을 외람되이 얻었는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막연하고 / 學求猶邈
벼슬은 사퇴할수록 더욱 걸려 들었네 / 爵辭猶嬰
나가다가 자빠지고 / 進行之路
물러나 감추기를 굳게 하였네 / 退藏之貞
임금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慚國恩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했네 / 亶畏聖言
산은 높디 높고 / 有山嶷嶷
물은 줄줄 흐르네 / 有水源源
벼슬 버리고 돌아와 소요하여 / 婆娑初服
여러 사람의 비방을 벗어 났네 / 脫略衆訕
나의 회포는 막혔는데 / 我懷伊阻
나의 패물을 누가 구경 하리 / 我佩誰玩
내 옛사람 생각하니 / 我思古人
참으로 내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네 / 實獲我心
어찌 알리 후세의 사람들이 / 寧知來世
오늘의 내 마음 모를 줄을 / 不獲今兮
근심하는 중에 즐거움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중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 구하리 / 復何求兮
○ 고봉(高峯) 기명언(奇明彦 기대승의 자(字))이 퇴계의 묘지를 지었으니, 이러하다.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즐겼으며 / 中何嗜學
만년에는 어찌 관직을 외람되이 얻었는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막연하고 / 學求猶邈
벼슬은 사퇴할수록 더욱 걸려 들었네 / 爵辭猶嬰
나가다가 자빠지고 / 進行之路
물러나 감추기를 굳게 하였네 / 退藏之貞
임금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慚國恩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했네 / 亶畏聖言
산은 높디 높고 / 有山嶷嶷
물은 줄줄 흐르네 / 有水源源
벼슬 버리고 돌아와 소요하여 / 婆娑初服
여러 사람의 비방을 벗어 났네 / 脫略衆訕
나의 회포는 막혔는데 / 我懷伊阻
나의 패물을 누가 구경 하리 / 我佩誰玩
내 옛사람 생각하니 / 我思古人
참으로 내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네 / 實獲我心
어찌 알리 후세의 사람들이 / 寧知來世
오늘의 내 마음 모를 줄을 / 不獲今兮
근심하는 중에 즐거움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중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 구하리 / 復何求兮
“선생의 휘는 황(滉)이요, 자는 경호(景浩)다. 예안(禮安)에 살았고 선대는 진보(眞寶)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70에 한가로이 은거하였다. 아! 선생은 벼슬이 높았으나 스스로 구한 것 아니요, 학문에 힘썼으나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머리 숙여 부지런히 하여 거의 허물이 없었다. 옛적 선현과 비교하니 누구와 낫고 못한가. 산이 평지 되고, 돌이 썩는다 하더라도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함께 오래 갈 것을 나는 아노라. 선생의 옷과 신발이 이 언덕에 묻혀 있으니, 천추만세에 혹시라도 짓밟음이 없을지어다.”
○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 봄에 육진(六鎭)의 변경지역 오랑캐가 경원(慶源)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창고에 있는 물건을 다 싣고 인민을 죽이고 약탈해 갔으므로 부사 김수(金燧), 판관 양사의(梁士毅)를 성을 지키지 못한 죄로 참형에 처하고 병사 이제신(李濟臣)을 잡아와 국문하여 귀양보냈다.이제신이 죄를 받은 것은 군사가 패한 때문만이 아니다.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김수등의 처형에 입회하러 갔는데 마침 김수가 적을 추격하여 죽인 공이 있었기 때문에 급히 그 사실을 아뢰었다. 이제신은 조정에서 김수의 공과 죄를 비교하여 감형이 될 것이라고 여겨 율문(律文)에 ‘사형 받을 죄인을 복심(覆審)할 때에는 3일이 경과한 후에 처형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전관을 3일 동안 정지시키고 새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더니, 마침내 이르지 않기 때문에 그제야 형을 집행하였다. 양사가 이제신이 임금의 명령을 제 마음대로 정지시켰다고 논하여 사형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죽음을 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밖의 의론은 실정과 처벌이 서로 맞지 않다고 하였다. 이때에 온성 부사 신립(申砬)이 용맹을 떨쳐 적을 죽여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병사로 삼고,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로 삼아서 유진(留鎭)하여 경략(經略)하게 하면서 난리를 주창한 괴수 몇 사람을 죽이니, 육진(六鎭)이 다시 평정되었다.
○ 계미년 여름에 양사와 옥당이 병조 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가 또 영의정 박순(朴淳)이 이이(李珥)와 더불어 편당을 지었다고 탄핵하였으나, 또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이 육조판서 이상을 인견하고 이이와 박순을 탄핵한 사람을 죄줄 것을 의론하여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을 원찬(遠竄)하고, 대사헌 이기(李曁)는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부제학 권덕여(權德與)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대사간 박승임(朴承任)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집의 홍여순(洪汝諄)은 창평 현령(昌平縣令)으로, 응교 홍진(洪進)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교리 김첨(金瞻)은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동부승지 김응남(金應南)은 제주 목사로, 수찬 홍적(洪迪)은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사인 김성일(金誠一)은 나주 목사로, 김우굉(金宇宏)은 광주 목사로 보내었다. 이이는 이조 판서로, 성혼(成渾)은 이조 참판으로, 이우직(李友直)은 대사헌으로, 홍성민(洪聖民)은 부제학으로, 이해수(李海壽)는 대사간으로, 정철(鄭澈)은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바야흐로 삼사가 이이ㆍ박순을 공격할 때에 유학 신잡(申磼)이 상소하여, 김첨(金瞻)ㆍ김수(金睟)ㆍ홍진(洪進)ㆍ정희적(鄭熙績) 등이 서로 결탁하여 선류(善類)를 모함하는 죄상을 극력으로 논하였다. 왕자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이 상소하여 또한 이이와 박순을 옹호하므로 정원에서는 상소문으로 편당을 하였다고 아뢰었더니, 상이 곧 의계한 승지들을 파면시켰다. 태학생 유공신(柳拱辰) 등이 상소하여 삼사가 이이를 모함하였다고 반박하고, 수일이 못되어 또 생원 이정우(李庭友) 등이 또 상소하여, ‘전일 유공신 등의 상소문은 바로 그 스승을 위하여 억울하다고 호소한 것이요, 성균관의 공론이 아니다.’고 논하니, 상이 모두 좋게 답하였다.
성균박사 한인(韓戭)이 전일 소를 올린 유생들이 석전제 치재(致齋)하는 날에 상소한다고 흩어져 가서 입재(入齋)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그 이름을 적어서 인갑(印匣)에 간직하여 두고 유벌(儒罰)을 시행하려 하였다. 호남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인(金戭)이 간신(奸臣) 송응개의 생질로서 보복하려고 유생을 협박한다고 지적하였다. 위에서 명하여 김인을 의금부에 내려 엄중히 국문하여 죽음을 감하여 경흥으로 귀양보내었다.
○ 만력 정축년(1577, 선조 10) 가을에 혜성이 서북방에 나타났다. 뿌리 자루는 구부러졌고 끝이 점점 크다. 대략 길이가 30~40길이 되고 빛이 하늘에 환하였다. 석 달을 지내서 없어졌다.
무자년 가을에 한강 물이 붉기가 피와 같았는데 엿새 만에 본래 색깔로 되었다.
기축년 정월 초하룻날에 일식이 있었고, 15일에 월식이 있었다. 3월에는 사옹원(司饔院)의 밥 짓는 놋쇠 시루가 절로 울어 소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경인년 5월에는 전라도 금산(錦山) 등 다섯 고을에 서리가 내렸고, 11월 6일에는 서울에 큰 비가 와서 한강이 넘쳤고 12월 17일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집이 흔들렸다.
신묘년에는 3월 25일에 눈이 내려서 관악산 등지에는 한겨울 눈처럼 수북이 쌓여 한동안 지낸 뒤에 녹아졌다. 4월에는 경기도 인천 및 경성 서부의 인가에 개미들이 편을 갈라 서로 싸우는 형상을 하였는데, 죽은 놈은 다 머리가 끊어졌다. 강원도 양양ㆍ삼척ㆍ울진 등지에서는 개미가 바다를 뒤엎고 나와서 해안에 가득찼는데, 생기가 있는 놈은 문득 날아갔다.
임진년 4월에는 괴이한 새가 금원(禁苑)에 날아 와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울부짖다가 동틀 녘에 그쳤는데, 이런 행위를 무릇 10여 일이나 하다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는 전날 저녁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왜적이 부산에 무지개 같은 흰 기운이 바로 침전을 꿰었다.
을미년 여름에는 충주로부터 경강(京江)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목이 부어서 죽은 자라가 물가에 서로 잇따랐다. 임진년 통진(通津)에서는 넘어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을미년 5월에 황해도 장연(長連) 바닷가에서는 큰 돌과 작은 돌 각각 한 개씩이 문득 절로 빠져나와 50여 척을 이동한 뒤에 그쳤다.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에 홍주(洪州)에서는 큰 돌이 저절로 일어나서 옮겨 섰고 12월에 서산(瑞山)에서는 개구리가 떼를 지어 모여 전쟁하는 것같이 하더니 머리가 베어지고 배가 쪼개져 개울에 쌓이고, 경성 동대문 밖에 저절로 죽은 개구리가 두어 섬 남짓 되었다. 계묘년에 곳곳에 돌이 이전되었다. 팔도에서 장계가 서로 잇달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 기축년(1589, 선조 22) 10월에 황해 감사 한준(韓準)이 치계(馳啓)하기를,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ㆍ안악 군수 이축(李軸)ㆍ신천 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 등의 비밀 보고에 의거하건대, 전주에 사는 정여립(鄭汝立)이 재령 등지에 사는 이광수(李光守)ㆍ기(李箕) 등 및 기타 아무아무 등과 반역을 도모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곧 선전관과 금부 낭청을 보내어 체포하게 하였더니, 정여립이 도망하였다. 팔도에 크게 수색하니 정여립이 진안(鎭安)에 이르러 갈 곳이 없어 그의 도당 변사(邊涘)와 더불어 제 목을 칼로 찌르고, 또 아들 옥남(玉男)을 찔렀는데,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송장을 싣고 경성으로 와서 백관이 벌여 서서 군기시 앞에서 형벌을 집행하였다. 이발(李潑)ㆍ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ㆍ유덕수(柳德粹)ㆍ조대중(曺大中)ㆍ정개청(鄭介淸)은 어떤 이는 초사(招辭)에 연루되고 어떤 이는 상소문으로 지적당한 자로 모두 곤장 아래에서 죽었고, 홍종록(洪宗祿)ㆍ김우옹(金宇顒)ㆍ정언지(鄭彦智)ㆍ정언신(鄭彦信) 등은 멀리 귀양보냈다. 박충간 등 및 추관은 모두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기축년에 일본국왕 평수길(平秀吉)이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우리 나라의 통신사를 청하기 때문에 황윤길(黃允吉)을 상사(上使)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삼고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보냈다.
임진년 4월에 왜적이 크게 침입하였는데, 의지(義智)ㆍ행장(行長)ㆍ청정(淸正) 등이 선봉이 되었다. 동래와 부산이 함락되고, 순변사 이일(李鎰)ㆍ신립(申砬) 등이 잇달아 패하니, 상이 서쪽으로 평양으로 파천하였다가 의주(義州)로 가고, 적은 연달아 삼경(三京 경성ㆍ개성ㆍ평양)을 함락하였다
그래서 명 나라에 급한 사정을 고하니 군사를 내어 와서 구(救)하여 다음해 계사년 정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니, 왜장 행장 등이 빠져 도망하고, 개성과 경성을 잇달아 수복되었다. 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이르렀는데, 적이 해상에 둔을 치며 웅거하여 철퇴하지 않자 이여송 등이 군사를 돌렸다. 10월에 임금이 해주(海州)로부터 경성으로 돌아왔다.
왜적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에 중국 조정에서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왜군에게 심부름을 보내었다. 심유경이 아비가 일찍이 왜인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심유경이 또한 어려서부터 아비를 따라 오래 왜국에 있어 그들의 실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우리가 한 번 이긴 뒤에 각도에 나누어 둔을 쳤던 왜적이 경성에 모여서 갈 뜻이 없었다. 심유경이 다시 왜적 속에 들어가서 강화할 뜻으로 타이르니 적이 곧 철퇴하였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사절(使節)로 삼아 보내었더니,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그들을 심히 소홀히 대우하고, 다만 포로되었던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돌려 보내었다. 오랜 뒤에 적장 행장 등이 소리치기를,
“명 나라에서 만약 강화를 허락하여 책봉하는 조사(詔使)를 보낸다면 우리는 군사를 철퇴시키겠다.”
하였다. 심유경이 또 왕래하여 명 나라에 그 말을 전하니, 명 나라에서 임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誠)을 상사(上使)로 삼고, 총병 양방형(楊方亨)을 부사로 삼아서 보내었다. 그들이 부산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자 수길(秀吉)이 영접하는 사자를 보내지 아니하고, 또 돌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이종성 등이 부산 왜적의 진영에 체류된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어떤 이가 비밀리에 왜적이 호의가 없어 사신을 구류하려 한다고 하니, 이종성이 몰래 도망하여 급히 달려 경성에 도착하였다. 온 나라가 놀래어 왜적이 이종성을 추격하여 덤빌까 의심하였더니, 적이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다만 양방형을 엄중히 감시할 뿐이었다. 양방형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아뢰니, 이에 이종성을 잡아 가고 양방형을 상사(上使)에 승진시키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서 그 일을 완성하도록 하였다. 수길의 거처하는 곳에 도착하자 수길이 극히 무례하게 대접하고 말하기를,
“만약 황녀(皇女)를 일본으로 시집보내기를 허락한다면 강화가 될 수 있다.”
하였다. 명 나라 병부(兵部)에서 우리 나라에 대하여서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기에, 이에 황신(黃愼)을 상사로 삼고, 무관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삼아 양방형 등을 따라가게 하였다. 수길이 더욱 멸시하여 국서(國書)에 답하지 않았는데, 황신은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아왔다.당초에 강화에 관한 일은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이적(夷狄)을 금수처럼 대우하여 길들일 수는 없고 고삐로 얽어매어 발악이나 하지 않게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전연 그른 것은 아니지만 왜적의 교활한 꾀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심유경의 간사한 말을 믿고 매양 왜적의 신의를 보증할 수 있다고 하여 구차스럽게 결과를 맺으려다가 마침내 보잘것없는 왜적들에게 욕을 당하게 된 것은 석성의 죄였다. 석성과 심유경이 함께 하옥되어 죽었다.
정유년(1597, 선조 36)에 명 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와서 구원하였는데, 대장 양원(楊元)은 남원을 지키고,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켰다. 왜적이 크게 덤벼 남원을 함락시키자, 병사 이복남(李福男), 부사 임현(任鉉),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등이 모두 죽고,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전주 부윤 박경신(朴慶新)이 남원 함락의 소식을 듣고 명 나라 장수에게 전주성을 버리고 나가기를 청하니 듣지 않았다. 전주 사람들이 성문을 지키는 명 나라 군사를 죽이기까지 하고 박경신이 성문을 박차고 도망하였다. 이에 적이 하삼도(下三道)의 고을들을 짓밟고 계속 진격하여 직산(稷山)까지 이르니 경성이 물 끓는 듯하였다. 동궁(東宮 광해군)이 종묘사직의 위패 및 중전을 모시고 동대문으로 나가 관서(關西)로 향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평양에 있다가 적병이 깊이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 행군을 배(倍)로 재촉하여 들어와서 경성에 머물면서 날랜 기병(騎兵)을 보내 직산에서 맞아 싸워 패배시키니, 인심이 차츰 안정되고 적이 또 물러갔다. 어떤 이는 말하되, 적이 충청도에까지 이르렀다가 그친 것은 수길의 명령이었다고 한다. 병부 상서 형개(刑玠)가 잇달아 들어와서 경성에 유진(留鎭)하였다. 양호(楊鎬)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청정(淸正)을 울산의 경계인 도산책(道山柵)에서 포위하니, 적이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마침 큰 눈이 와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고, 양식 운반도 부족하기에 군사를 돌렸다.
이때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였는데, 도독 마귀(麻貴)는 양호를 따라 청정을 치고, 도독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에 둔친 적을 치고, 도독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에 둔친 적을 치고 진인(陳璘)은 수군을 거느려 해로를 경유하여 협공하여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는데도 여러 장수들이 서로 통제되지 아니하고 각기 성공을 요행으로 바래고 가볍게 전진하다가 동일원(蕫一元)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고, 다른 길의 군사도 모두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형개(邢玠)의 군문(軍門)에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란 자가 양호의 30가지 죄를 탄핵하여 관직을 갈게 하니, 만세덕(萬世德)이 양호를 대신하여 왔다. 그러나 양호가 아랫사람을 통솔하는데 기강이 있어 호령에 바람이 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칭송하였었다. 얼마 안 되어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병들어 죽자, 적이 차차 철퇴하는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한 복판에서 막아 치다가 총탄에 맞아 죽으니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 임진년(1592, 선조 25) 왜적이 깊이 들어왔을 적에, 태평시대를 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각 고을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서 한 사람도 화살 한 개라도 쏘아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나의 중씨(仲氏 이정암(李廷馣))가 의병을 일으켜 연안(延安)에 들어가 지킨 지 겨우 4일 만에 적의 포위를 당하였는데 장수와 군사들을 독려하여 굳게 지키니, 적이 힘을 다하여 4일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때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를 지켰는데 적의 포위를 당하여 또한 물리쳐서 성은 완전하였으나 김시민은 총탄에 맞아 죽었다.
○ 서원은 송(宋) 나라 시대에 시작하여 원(元) 나라 말년에 성하였으나 우리 나라에는 없었다. 가정(嘉靖) 연간에 사문(斯文)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에 군내 백운동(白雲洞)에 안유(安裕)가 살던 옛 터에 서원을 창립하여 선비들이 수양하고 글 읽을 처소로 삼고 이어서 사당을 세워 안유(安裕)를 제사지냈다. 조정에 알려지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내렸다. 그 뒤에 잇달아 설립되니, 영천(永川)에는 임고(臨皐)서원, 함양에는 남계(藍溪) 서원, 송도에는 숭양(崧陽) 서원, 성주에는 천곡(川谷) 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 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峰) 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 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 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 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 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 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岩) 서원인데, 혹은 유선(儒先)이 거처하던 곳으로 혹은 왕래하던 땅으로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이밖에도 또한 많이 있는데, 다 기록하지 못한다.
○ 좌윤(左尹) 이찬(李燦)이 만년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물러나 있어 봉록을 받지 못하였다. 정승 심연원(沈連源)ㆍ상진(尙震) 등이 위에 아뢰어 봉조하로 삼아서 녹을 받아 평생을 살게 하였다. 그 뒤에 부윤 이언경(李彦憬)이 나이 80이 넘었는데 봉조하를 삼으려 하자, 이조에서 전례가 없다고 거행하지 아니하였으니, 고사(故事)를 너무도 모른 것이다.
○ 우리 나라 사대부의 상례가 선왕조로부터 부모의 삼년상에는 모두 시묘살이를 하고, 기년복(朞年服) 이하는 다만 건(巾)을 쓰고 띠만 띠는데, 혹 채복(綵服) 위에 그것을 하고, 그 날짜는 《가례(家禮)》의 가령격(假令格)에 의하여 차례대로 감하여 그 날짜만 마치면 곧 상복을 벗었다. 비록 장사 치르기 이전일지라도 태연히 음악을 듣고 연회하고 술을 마시니 사람들도 역시 괴이 여기는 자가 없었다.
금상이 즉위한 초년에 학자들이 유선(儒先)의 문하에서 배워서 점차 상례를 강구하여 기년(朞年)ㆍ대공(大功) 이하도 다 예법에 의거하여 관복을 만들어 입고 그 월수(月數)가 다 되도록 연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는 속론(俗論)을 주장하는 자가 괴이 여겨 반대하였으나 간혹 예법을 좋아하는 선비가 비웃음을 무릅쓰고 행하더니 지금은 거의 풍속이 되어 그렇게 하지 않는 자를 가리켜 비루하고 예법을 모른다고 한다.
또 기제(忌祭)에 있어서도 전에는 순전히 소찬(素饌)만을 쓰고 혹 《가례》대로 어육을 쓰면 괴이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궁벽한 마을의 부인과 어린애라도 모두 제수는 당연히 어육을 써야 할 줄 알아서 어육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이 여기니, 참으로 풍속을 변동시키는 것은 군자의 덕에 있는 것이므로, 어려운 일이 아니며, 선생 장자(長者)가 학자를 가르쳐 인도한 공이 큰 줄을 알겠도다.
○ “만력(萬曆) 21년 세차 계사 9월 임자삭 10일 임술에 감독남북제군 병독조선병마 경략 병부참모군사 무거지휘사(監督南北諸軍 幷督朝鮮兵馬 經略 兵部參謀軍事 武擧指揮使) 오종도(吳宗道)는 삼가 유모(柔毛)와 강렵(剛鬣)의 제물로 조선국 창의사(倡義使) 김장군(金將軍)의 영구 앞에 제사를 올리나이다.
무릇 사람이 천지간에 있어서 죽을수록 더욱 살아 있는 자가 있고 살아 있을수록 더욱 죽은 자가 있으니, 살아 있을수록 더욱 죽은 자는 물결이 휩쓸 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고, 죽을수록 더욱 살아 있는 자는 나는 창의사(倡義使) 김장군에게 느낌이 있습니다. 장군은 바다 도적이 미친듯이 덤벼 임금이 풀밭에 있고, 일국 팔도에 견고한 성이라곤 거의 없는데, 오직 장군이 막대기를 들어 깃대를 삼고 나무를 베어 칼날을 삼아 팔을 뽑아 한 번 외치니 호걸들이 메아리처럼 응하여 의사(義士) 1천여 명을 얻어서 한강 가에 둔을 지키며 왜적과 같이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래서 장군의 명성이 중외(中外)에 빛났습니다.
내가 왕사(王事)의 여가에 장군에게 읍(揖)하고 만나서 한 번 안면을 바라보는 영광을 가지자 곧 친절하게 옛 친구와 같았습니다.
그때에 왜노가 바야흐로 강화를 청하는데 장군이 문득 팔을 뽐내며 불평하여 매양 ‘이놈들 멸한 뒤에 조반을 먹겠다.’ 하더니 그 뜻과 그 공이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 장군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떨쳤습니다. 그러므로 왜적이 매양 송나라 일로써 지금 일에 견주어 말하기를, 무목(武穆)이 죽지 않으면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요, 장군이 죽지 않으면 강화가 맺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여, 왜적이 밤낮으로 계획하는 것이 오직 장군 죽이는 것으로 일삼았습니다. 장군이 죽고 남은 군사로써 진주성을 지키며, 마침 최군(崔君) 경회(慶會)도 또한 있었습니다. 최군은 더욱 왜노가 평소에 꺼리고 두려워하던 인물입니다. 이러므로 왜놈이 대병으로서 눌러서 몇 겹이나 포위하여 나는 새도 지나 갈 수 없이 하여 반드시 두 분을 잡은 뒤에야 중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내가 천자의 명을 받고 전라도를 지키러 오다가 도중에 장마비로 인하여 죽산(竹山)에 유숙하였습니다. 창졸간에 큰 바람이 불고 뇌성 번개가 치고 모래를 날리고 나무가 뽑혀 나의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비를 무릅쓰고 전진하여 이틀 만에 남원(南原)에 도착하여 진주에 급히 알렸더니, 화살이 동이 나고 먹을 것이 다하여 성이 함락된 지 며칠이었는데, 장군의 부자(父子) 및 최군이 다 적을 욕보이고 죽었다고 하니 그제야 비로소 죽산 에서의 장마비는 곧 장군 부자의 눈물이며, 큰 바람과 뇌성 벼락이 치던 것은 장군의 불평한 기운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 장군이시여 ! 어이 눈물을 흘리리까. 장군의 이름이 천추에 썩지 않을 터이니, 장군은 죽지 않았습니다. 나라 일을 잘못하여 임금이 파천하도록 만들었거나 군사를 가지고도 구원하지 아니하여 다른 성이 잿더미가 되도록 하고서도 낯가죽 두껍게 의관을 하고 있는 자를 볼 때에 그들은 비록 살았으나 어찌 장군의 죽음만 하리오. 슬프도다. 하늘이 도우지 아니함이여! 부자가 죽어갔네. 절의가 쌍으로 이룸이여! 우리의 강상을 붙들었도다. 유명(幽明)이 나누어짐이여! 자나 깨나 보는 듯 하도다. 좋은 벗을 영원히 이별함이여! 나의 한 잔 술을 흠향하소서.”
○ 만력 계사년 겨울에 임금이 해주로부터 경성에 돌아왔는데, 황제가 행인사 좌사부(行人司左司副) 사헌(司憲)을 보내어 칙서를 내리기를,“전번 왕이 대병으로써 적을 몰아 국경 밖에 내보내고 옛 도읍으로 돌아가 표문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치려 와서 감사의 뜻을 표하니 짐의 마음에 깊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는 바이다. 생각하니, 이러한 나라를 회복하는 중대한 일에 보통 때의 보고와 같이 볼 수 없으므로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유시하고 이어서 왕에게 대홍망의(大紅蟒衣) 두 벌과 채필(彩匹) 네 표리(表裏)를 주어서 짐이 간절히 왕을 위하여 멀리 위로하는 뜻을 표시하오. 짐이 또 생각하니 왕의 나라가 비록 산과 바다 사이에 있으나 나라가 전해온 지 가장 오래되었다. 옛적에 중국의 교화가 미치지 않았을 때에도 오히려 땅을 개척하고 험한 지역을 지켜서 모든 이웃 나라를 내려다보았는데, 지금은 우리 조정에 춘추(春秋)로 조공(朝貢)하는 나라가 되어 대대로 위엄과 덕에 의탁하여 재물과 힘을 길렀으므로 마땅히 더욱 부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왜놈이 한 번 들어오자 왕성(王城)이 지켜지지 못하여 들판에 해골이 널려있고 종묘사직이 빈 터가 되었으니, 패망한 원인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 어찌 다 우연히 그렇게 된 운수이겠소. 어떤 사람은 왕이 안일과 오락을 좋아하며 뭇 소인에게 미혹 되여, 백성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비(軍備)에 유념하지 아니하여 바다 도적이 업신여기도록 만든 것이 벌써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데도, 신하가 일찍이 말한 자가 없었다고 하니, 앞 수레의 전복된 일이 뒤 수레의 경계할 바가 어찌 아니겠는가.
그대의 조상의 신령에게 복을 받고 나의 군사의 이긴 위엄으로 왕의 군신(君臣) 부자(父子)로 하여금 서로 보존하게 된다면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왕이 파천한 뒤에 새로 돌아와서 풀이 우거진 옛 궁궐과 불타고 남은 분묘(墳墓) 및 소복으로 교외에서 맞이하는 선비와 백성들을 볼 때에 뉘우쳐 봐도 돌이킬 수 없어 머리를 찌푸리게 될 마음을 어떻게 바로잡으며, 정치를 고쳐 새로 할 계책을 어떻게 세우려는지 모르겠구려.
짐(朕)이 왕에 대해 비록 속국(屬國)이라고 대우하나, 조공하는 예절 외에는 원래 왕의 한 군사나 한 부역도 번거롭게 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의 일은 다만 대의로 분노를 발하여 파천할 왕을 가엽게 여긴 것이요, 본디 왕이 짐에게 책임지울 일이 아니었다. 대병이 장차 철군할 터이니, 왕은 지금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구려. 조금의 땅도 짐은 상관하지 않겠소. 어찌 다시 국경을 넘어 구원하는 것이 항상 있는 일로 삼아서 그대의 나라로 하여금 믿고서 방비를 하지 않게 해서야 되겠소. 그렇게 되면 불타는 집에 제비가 둥우리에서 노닥거리다가 장차 재앙이 미칠 것이니, 창졸간에 다른 변고가 있으면 짐은 왕을 위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소. 이러므로 미리 거듭 고하고 경계하여 옛 사람의 와신상담하던 뜻으로서 권면하는 것이오.
지금 외적의 난리에 잠깐 어깨를 쉬고 나라의 모양을 다시 정돈하는 시기를 당하여 부상당한 자를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한 자를 불러 모으며, 척후병을 멀리 배치하고 성을 수리하며, 갑옷과 칼날을 굳고 날래게 하고 창고를 채우며, 주색에 미혹되지 말고 유흥에 빠지지 말며, 한쪽 사람을 치우치게 믿거나 혼자에게 맡겨서 아래 사람의 마음을 막히게 하지 말고, 형벌을 혹독하게 하거나 부역을 고되게 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지 말며, 분함과 수치를 당한 후에 매우 걱정하고 애쓴다면 선대의 왕업을 중흥시킬 수 있고 큰 원수를 씻을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은 이제부터는 존망치란의 갈림길이 왕에게 있고, 짐에게 있지 아니하니, 경계하고 조심하기 바라오. 이러므로 유시하는 바이오.”
하였다.○ 참판 이거(李蘧)의 어머니 채씨(蔡氏)가 연산군 갑자년(1564, 연산군 10)에 태어나서 나이가 백 살을 넘었으므로 상이 기특히 여겨서 이거를 가선대부의 품계로 뛰어 올렸다. 이때에 이거의 나이 73이고, 두 누이가 있는데, 나이 모두 80이었으며, 막내아들 이원(李薳)이 나이 60이니, 인간에 드문 일이었다.
○ 최영경(崔永慶)은 자는 효원(孝元)이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다. 천거로 뛰어서 6품에 등용하여 여러 번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다 취임하지 않고 과격한 언론을 좋아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 역옥에 호남 사람 양천경(梁千頃)ㆍ강해(姜海) 등이 최영경이 정적(鄭賊 정여립)과 공모하였다고 모함하여 의금부의 옥에 갇혔다가 상이 그 원통함을 알고 석방하였다. 대간이 또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병이 되어 죽었다. 얼마 안 되어 상이 그 모함한 사실을 알고 명하여 양천경 등을 국문하여 귀양보냈는데 길에서 죽었다. 당시의 위관(委官) 정철(鄭澈)과 최영경을 잡아 오자고 논계한 대관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최영경을 대사헌에 추종하고 제사를 내리고 그 처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 태종조에 사육하는 코끼리가 있었는데 명하여 순천(順天) 장도(獐島)에 놓아 주었다.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기를,
“코끼리가 물도 풀도 먹지 않고 사람만 만나면 눈물을 흘리고 또 울음소리를 냅니다.”
하자, 상이 불쌍히 여겨서 감사를 시켜 데려다가 기르니, 꼴과 콩을 전과 같이 먹었다.금상 경인년(1590, 선조 23)에 일본국 평수길(平秀吉)이 공작새 한 쌍을 바쳤는데 상이 받았다가 조금 뒤에 남양(南陽) 대부도(大部島)에 놓아 주게 하였다.
[주D-001]의옥(疑獄) : 유죄인지 무죄인지 의심나는 옥사.
[주D-002]중학 일회(中學一會) : 대간이 중대한 의론이 있을 때에는 중학(中學)에서 일제히 모인다.
[주D-003]반근착절 : 구불구불 구부러진 나무뿌리와 얽히고 설킨 부위. 사물이 번잡하여 처리하기 곤란한 것을 비유한 말. 《후한서》에 “반근착절(盤根錯節)을 만나지 않으면 날카로운 기구임을 어떻게 구별하랴?” 하였다.
[주D-004]세굴의 토끼 : 교활한 토끼가 제 몸의 안전을 위하여 굴을 셋을 뚫어 둔다고 한다.
[주D-005]삼종(三從) : 옛날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의 예의 도덕. 어렸을 때는 어버이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것. 곧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을 말함.
[주D-006]왕팔채(王八債) : 속담에 ‘제 계집을 매음(賣淫)시키고 받는 돈’이란 뜻이다.
[주D-007]망서(望舒) : 달의 어자(御者).
[주D-008]열수(列宿) : 28수(宿)에 응한 28명이란 말이다.
[주D-009]산음(山陰)에서 친구 찾아온 흥취 :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설월(雪月)의 밤에 홀연히 흥취가 나서 섬계(剡溪)에 있는 친구 대안도(戴安道)를 생각하고 곧 배를 타고 밤새도록 찾아갔다가 흥이 깨자 그냥 되돌아간 일이 있었다.
[주D-010]허리에 찼던 금어(金魚) : 당(唐) 나라 하지장(賀知章)이 이태백(李太白)을 처음 만나 술집에 가서 찼던 금귀(金龜 : 金魚)를 잡히고 술을 사서 대접하였다.
[주D-011]동관(東觀) : 한(漢) 나라 궁중에 책을 보관하던 장소인데, 박사(博士)들이 그 안에서 책을 교정하였다.
[주D-012]은어(銀魚)까지 불사를 필요 : 두보(杜甫)의 시에 “벽산 학사가 은어(銀魚)를 불태웠다[碧山學士焚銀魚].”란 글귀가 있는데, 은어는 당 나라 때에 5품 이상의 관원이 차는 것이다. 그것을 불태운다는 것은 벼슬을 버리고 왔다는 말이다.
[주D-013]묵지(墨地)에는 …… 날아 나오네 : 이태백의 글귀인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칭찬한 시다. 묵지(墨池)는 왕희지(王羲之)가 글씨를 배울 때에 연못에 붓을 씻어 물이 검었다 한다.
[주D-014]판축(版築)하는 …… 발탁해 온 이 :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판축(版築 성 쌓는 것)하는 인부 중에서 발탁하여 정승을 삼았다.
[주D-015]여희(麗姬) : 진 헌공(晉獻公)의 후처로서, 전처 아들을 죽이고 쫓은 여인.
[주D-016]무삼사(武三思) : 당 나라 무후(武后)의 조카로서, 간악한 소인이다. 절민태자(節敏太子)를 폐하려다가 태자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주D-017]풍정연(豊呈宴) : 임금이나 대비에게 올리는 큰 잔치.
[주D-018]병인년의 화 : 병인년에 중종이 반정하고 연산군이 쫓겨났다.
[주D-019]부춘산(富春山)에 숨어사는 것 : 동한(東漢) 때에 엄자릉(嚴子陵)이 간의대부의 벼슬을 마다하고 부춘산에 숨었다.
[주D-020]항룡유회(亢龍有悔) : 《주역》건괘(乾卦) 상구(上九)에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할 일이 있으리라” 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극에 달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주D-021]유모(柔毛)와 강염(剛鬣) : 유모는 양(羊)이요, 강렵은 돼지다.
[주D-022]무목(武穆) : 송나라 악비(岳飛)의 시호이다. 그때에 정승 진회(秦檜)가 금(金) 나라와 강화를 주장하는데 악비는 명장으로 금 나라를 치고 있었다. 마침내 진희가 악비를 죽였다.
[주D-002]중학 일회(中學一會) : 대간이 중대한 의론이 있을 때에는 중학(中學)에서 일제히 모인다.
[주D-003]반근착절 : 구불구불 구부러진 나무뿌리와 얽히고 설킨 부위. 사물이 번잡하여 처리하기 곤란한 것을 비유한 말. 《후한서》에 “반근착절(盤根錯節)을 만나지 않으면 날카로운 기구임을 어떻게 구별하랴?” 하였다.
[주D-004]세굴의 토끼 : 교활한 토끼가 제 몸의 안전을 위하여 굴을 셋을 뚫어 둔다고 한다.
[주D-005]삼종(三從) : 옛날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의 예의 도덕. 어렸을 때는 어버이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것. 곧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을 말함.
[주D-006]왕팔채(王八債) : 속담에 ‘제 계집을 매음(賣淫)시키고 받는 돈’이란 뜻이다.
[주D-007]망서(望舒) : 달의 어자(御者).
[주D-008]열수(列宿) : 28수(宿)에 응한 28명이란 말이다.
[주D-009]산음(山陰)에서 친구 찾아온 흥취 :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설월(雪月)의 밤에 홀연히 흥취가 나서 섬계(剡溪)에 있는 친구 대안도(戴安道)를 생각하고 곧 배를 타고 밤새도록 찾아갔다가 흥이 깨자 그냥 되돌아간 일이 있었다.
[주D-010]허리에 찼던 금어(金魚) : 당(唐) 나라 하지장(賀知章)이 이태백(李太白)을 처음 만나 술집에 가서 찼던 금귀(金龜 : 金魚)를 잡히고 술을 사서 대접하였다.
[주D-011]동관(東觀) : 한(漢) 나라 궁중에 책을 보관하던 장소인데, 박사(博士)들이 그 안에서 책을 교정하였다.
[주D-012]은어(銀魚)까지 불사를 필요 : 두보(杜甫)의 시에 “벽산 학사가 은어(銀魚)를 불태웠다[碧山學士焚銀魚].”란 글귀가 있는데, 은어는 당 나라 때에 5품 이상의 관원이 차는 것이다. 그것을 불태운다는 것은 벼슬을 버리고 왔다는 말이다.
[주D-013]묵지(墨地)에는 …… 날아 나오네 : 이태백의 글귀인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칭찬한 시다. 묵지(墨池)는 왕희지(王羲之)가 글씨를 배울 때에 연못에 붓을 씻어 물이 검었다 한다.
[주D-014]판축(版築)하는 …… 발탁해 온 이 :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판축(版築 성 쌓는 것)하는 인부 중에서 발탁하여 정승을 삼았다.
[주D-015]여희(麗姬) : 진 헌공(晉獻公)의 후처로서, 전처 아들을 죽이고 쫓은 여인.
[주D-016]무삼사(武三思) : 당 나라 무후(武后)의 조카로서, 간악한 소인이다. 절민태자(節敏太子)를 폐하려다가 태자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주D-017]풍정연(豊呈宴) : 임금이나 대비에게 올리는 큰 잔치.
[주D-018]병인년의 화 : 병인년에 중종이 반정하고 연산군이 쫓겨났다.
[주D-019]부춘산(富春山)에 숨어사는 것 : 동한(東漢) 때에 엄자릉(嚴子陵)이 간의대부의 벼슬을 마다하고 부춘산에 숨었다.
[주D-020]항룡유회(亢龍有悔) : 《주역》건괘(乾卦) 상구(上九)에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할 일이 있으리라” 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극에 달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주D-021]유모(柔毛)와 강염(剛鬣) : 유모는 양(羊)이요, 강렵은 돼지다.
[주D-022]무목(武穆) : 송나라 악비(岳飛)의 시호이다. 그때에 정승 진회(秦檜)가 금(金) 나라와 강화를 주장하는데 악비는 명장으로 금 나라를 치고 있었다. 마침내 진희가 악비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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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고시(七言古詩) | ||||
16일에 배가 노자암을 지나는데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우로가 심하여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 하기로, 드디어 신륵사 아래 배를 대고 절의 남쪽 별실에서 잤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미나루에 이르러 뇌우를 만났더니, 바로 개어서 달밤에 독포를 지나갔다. 드디어 하룻동안의 걱정과 즐거움을 기록하여 대충 시를 이루었다[十六日舟過鸕鷀巖暴風雨疾雷舟人皆懼遂泊神勒寺下宿于寺之南別室曉起主僧智牛設飯相別登舟薄晩到渡迷津遇雷雨旋晴乘月過禿浦遂記一日之憂樂率然成詩] 주숭 지우(智牛)의 나이는 81세이다.[牛年人十一] |
김종직(金宗直)
절간 맑은 새벽에 노승을 작별하니 / 招提淸曉別老宿
배가 아득하게 찬 달을 쪼갠다 / 桂棹微茫劈寒月
만경 유리에 물새들을 짝하니 / 玻瓈萬頃伴鳧鷖
어제는 뇌우를 조심, 지금은 어찌나 즐거운가 / 昨愁雷雨今何樂
황리(여주) 사군이 청심루에 의지하여 / 黃驪使君倚淸心
어찌 이 배 안의 옥당의 벼슬하던 사람임을 알소냐 / 焉識舟中金馬客
돌아보니 술천현이 이미 간 곳 없고 / 回頭已失述川縣
얼른얼른 용문산도 눈깜짝할 사이 / 苒苒龍門眞一瞥
사공이 멀리 상원 길을 가리키니 / 篙師遙指上院導
어보가 당년에 험한 돌길 밟으신 곳 / 玉趾當年凌犖确
백의관음 이상한 빛 만 사람이 떠들더니 / 白衣光怪萬人譁
나는 그때 괜히 혀만 깨물었네 / 恨我其時空咋舌
앞 여울 열 몇 중에 제일 궃은 한 여울 / 前灘十數大灘惡
인자옹머리에 물결이 눈을 뒤집는 듯 / 人鮓甕頭波蹙雪
험한 바위 지나자 문득 상쾌한 기분 / 才經狼石心忽怡
때마침 남풍이 돛대에 가득해 / 更有南風飽帆腹
10리 월계의 잔잔한 물결 / 月溪十里玩漣漪
양안 청산에 시가 눈에 가득하네 / 兩岸靑山詩滿目
우뚝우뚝 높이 솟은 수종봉이 / 屼硉高撑水鍾峯
굼틀굼틀 멀리 향하네, 용진 나루로 / 蜿蜒遠赴龍津瀆
조금 있다 서로 돌아 도미에 들어가니 / 須臾西迤入波迷
북풍이 휘몰아치고 구름이 뭉게뭉게 / 北來風駃雲蓬勃
뇌성이 와르릉 땅땅 / 百面雷鼓驅雷毋
장하구나, 빗방울이 차축 만하네 / 壯哉雨點如車軸
배 안에 엎드려서 두 눈을 감으니 / 蓬窓龜伏閉雙眼
흰 땀이 철철 흘러 행장이 다 젖네 / 白汗翻漿漿載濕
촌진척퇴로 나갈 수가 없으니 / 寸進尺退不能前
도로 양근으로 대개 되지 않을까 / 却疑還向楊根泊
동쪽에 무지개가 문득 천 길 / 東邊虹蜺忽千丈
서쪽의 비와 안개 모두 걷히네 / 西邊霪霧俱解駁
노 울리며 천천히 협구를 나니 / 鳴榔緩緩出峽口
멀리 삼각산이 하늘 끝에 꽂혔네 / 鳥外三峯揷天未
강심에 만 떨기 기둥이 거꾸로 비치고 / 江心倒蘸萬叢柱
햇무리가 금을 녹인 듯 울룩불룩 / 日暈鎔金正磅礴
평생에 못 보던 기절한 경치 / 眼中奇絶平生無
조그만 객수야 말한 것 없네 / 羈恨些些不須說
황혼 저녁답에 독포에 오니 / 黃昏煙火到禿浦
촌녀가 모래텁에서 빨래하는 노래 부르네 / 村女砧謳殷沙磧
기슭에 배를 대고 다시 중과 작별 / 艤岸復與胡僧別
직지사(直指寺) 중 신문(信文)이 같이 타고 왔다가 예까지 와서 하륙하여 회암사(檜岩寺)로 향하였다
맑은 달이 영에 오르자 강이 산뜻 / 淸月出嶺江如刮
뱃전 치며 휘파람 불고 다시 노래 부르니 / 叩舷長嘯更吳歌
하룻동안 근심과 기쁨이 분분히 모였었네 / 一日憂喜紛相集
미피의 시야 초절하여 화답키 어렵지만 / 渼陂之吟敻難和
아, 나의 뜻을 뉘라서 측량하리 / 嗚呼吾意誰能測
[주D-001]인자옹(人鮓甕) : 양자강의 상류에 물살이 험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면 파선이 잘 되므로 그곳을 ‘사람 젓 담그는 독’이라 하였다.
[주D-002]미피(渼陂) :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의 형제가 미피(渼陂)에서 배를 타고 흥겨웁게 놀았으므로 두보(杜甫)가 미피행(渼陂行)이란 시를 지었다.
[주D-002]미피(渼陂) :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의 형제가 미피(渼陂)에서 배를 타고 흥겨웁게 놀았으므로 두보(杜甫)가 미피행(渼陂行)이란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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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
삼각산(三角山) 위의 구름을 바라보다. |
삼각산 꼭대기에 날아가는 흰 구름아 / 華山絶頂白雲飛
무심함을 자부하며 그 어디로 가느냐 / 自負無心何處歸
내가 어찌 바위 밑에 잘 줄을 모르랴만 / 我豈不知巖下宿
배움 끊은 도인이 드문 걸 꺼려서란다 / 只嫌絶學道人稀
내 생의 가고 머묾은 여유가 작작하기에 / 我生行止儘悠悠
성쇠 변화 따위는 전혀 걱정치 않는다오 / 消息盈虛摠不憂
또 묻노라 무심한 걸 배울 수만 있다면 / 且問無心如可學
상산사호인들 어찌 찾기가 어려울쏜가 / 商山四皓豈難求
구름과 묻고 대답한 게 다 진정이고말고 / 問雲雲答語皆眞
내 또한 당시에 세속 초월한 사람이거니 / 我亦當時洒落人
내 맘속에 티끌 있다고 이르지 말거라 / 莫道心中有査滓
요즘 그 어딘들 풍진 피할 곳이 있더냐 / 邇來無處避風塵
[주D-001]배움 끊은 도인 : 당(唐)나라 선승(禪僧) 영가 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에 “그대는 못 보았나 배움 끊고 하는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안 없애고 진도 구하지 않는다네. 이름 없는 실성이 그게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이 몸이 바로 법신이라네.[君不見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상산사호(商山四皓) :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戰亂)을 피하여 상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4인의 백발 노인인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
[주D-002]상산사호(商山四皓) :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戰亂)을 피하여 상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4인의 백발 노인인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