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2.25. 성탄일 삼각산 (수도)

2011.12.25. 성탄절 삼각산 영봉 산행 ( 수도)

아베베1 2011. 12. 26. 16:16

  2011012.25. 일행과 함께 삼각산 영봉산행   

 

임하필기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삼각산(三角山)


삼각산은 일명 화산(華山)이라 하며 또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산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을 물색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다. 백운대(白雲臺), 국망봉(國望峯), 인수봉(仁壽峯)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고 한다.

잠곡유고 제9권
서(序)
구루정기(傴僂亭記)


누대(樓臺)와 정사(亭榭)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막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한 것을 좋아하며, 기둥을 높게 세우고 보기에 화려하게 하여, 멀리는 강호(江湖)의 나루터 가에 세우고, 밖으로는 교외의 논밭 사이에 세운다. 그러나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관아에서 일을 보느라 한번 올라가 볼 겨를이 없어서 도리어 인근 사람이나 지나가는 객이 그 위에 올라가서 한가롭게 소요하는 것만도 못하니, 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혹은 대문을 걸어잠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찌 크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거하고 있는 집의 뒤편에 세 칸짜리 집을 세울 만한 작은 언덕이 있었다. 이에 드디어 띠풀을 엮어서 초가집을 세우고는, 안쪽에 있는 당(堂)을 공극당(拱極堂)이라 이름하고 그 바깥쪽에 있는 정자를 구루정(傴僂亭)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지붕이 낮아서 머리가 부딪히므로 반드시 허리를 구부린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그 정자의 크기는 비록 작지만, 위치해 있는 곳은 높고도 기이하며, 바라다 보이는 곳은 넓고도 멀다. 바위는 우뚝하고 소나무는 푸르러서 마치 조각한 것 같기도 하고 꽂아 놓은 것도 같아 창 밖에 우뚝하니 서 있는 것은 목멱산(木覓山)의 잠두봉(蠶頭峯)이고, 용처럼 꿈틀대고 호랑이처럼 쭈그리고 있어서 달려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여 서로 마주 대하여 돌아보고 있는 것은 백악산(白岳山)과 낙산(駱山)이다. 난새가 멈춘 듯 아름답고 고니가 서 있는 듯 우뚝하여 마치 날아가려다가 날아오르지 않은 듯한 것은 필운산(弼雲山)이고, 붓을 꽂은 듯 뾰족하고 홀을 세운 듯 우뚝하여 나아가려고 하다가 서 있는 듯한 것은 도봉산(道峯山)이다.
수락산(水落山)은 노원(蘆原)의 뒤편에서 마치 불곡산(佛谷山)을 전송하는 것 같고, 무악산(毋岳山)은 안현(鞍峴)의 위에 있으면서 마치 부아봉(負兒峯)을 좇는 듯하여, 기괴한 형상과 이상한 모양새가 여기저기 겹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백운봉(白雲峯)과 인수봉(仁壽峯) 등 여러 봉우리가 저 멀리 구름 하늘 밖 아득한 곳에 삐쭉하니 솟아 있는 모습이 더더욱 경외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안개와 구름이 변화함에 따라 혹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합해지기도 하고 혹 떨어지기도 한다. 그 누가 성시(城市)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저 강호의 경치와 교외의 흥취가 즐겁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머물러서 살 수는 없으니, 한번 가고 두 번가는 사이에 해가 이미 짧다. 그러니 어찌 이곳에서 잠자고 거처하며 이곳에서 먹고 숨쉬면서 천변만화를 보며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고 사시 팔절(四時八節)에 항상 창가에서 마주 대하는 것만 같겠는가.
나는 팔도(八道)를 두루 유람하였지만 경치를 감상할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7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명승지를 얻어서 정자를 지었으니, 돌 틈 사이의 물은 갓끈을 빨 만하고 바위 사이의 물은 양치질을 할 만하며, 대나무를 쪼개 만든 수로(水路)로 물을 대어 연못에는 연꽃을 심을 수가 있고, 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만물을 친구로 삼을 수가 있다. 종일토록 적료하여 시장통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평소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곳이다.
비록 그러하나 큰길을 한번 바라다보면 여염집들은 땅에 나지막하게 있고, 두 대궐 쪽을 바라다보면 대궐 용마루가 하늘에 접해 있다. 이에 도성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오가며 보는 자가 많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서 높게 짓는 것이 혐의스럽다. 이 때문에 처마와 서까래를 낮게 하고 담장을 낮게 한 다음 소나무와 대나무로 뒤편에 울타리를 쳐서 검소함을 밝게 드러내 보였다.
높은 데 있으면서는 위태로움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되고, 방에 들어와서는 내려다보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찌 감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만 좋아하여 처사(處士)처럼 창가에 기대어 공상 속에 잠겨서야 되겠는가. 옛 솥의 명(銘)에 이르기를, “일명(一命)의 관원은 허리를 낮게 굽히고, 재명(再命)의 관원은 허리를 굽히고, 삼명(三命)의 관원은 머리를 수그린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어 머리를 수그리고서 나의 정자 이름을 지었다.


[주D-001]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 옛날에 관원들이 묘시에 출사하여 유시에 퇴근하였다.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육모정 고개에서 영봉가는 길목에서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구와 노원구 중랑구가 한눈에

  오봉과 도봉의 모습이 한눈에

 

 

 안수봉과 백운대 만경대사 조금씩

 

 

 

 

 인수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仁壽峰)

 

 

 

 

 

숨은벽능선의 일부와 영장봉

 

 

 

 

 도봉의 모습이 닭벼슬 모양과  같이 보인다

 

 

 

 

 오봉 우이암 배꼽바위 선인 만장 자운봉이 아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