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서산 (휴정)대사시

禪詩(선시) -西山大師 休靜 -

아베베1 2012. 1. 5. 21:54

 

 

  ☞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문사동폭포의 설경이다 (2012.1.4. 도봉산 산행시 담았다) 

 

 

오늘과 같은날 한시 한구절이 생각나서 옮겨 보았습니다

  禪詩(선시) -西山大師  休靜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눈 덮인 들판 걸을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오늘의 내 발자취 후세 사람들의

이정표 되나니

 

  약 3년전에 선시를 찾아서 00가폐에 올린글  오늘에서야 

   저의방으로 ... 

간이집 제8권
환조록(還朝錄)
삼응(三應)의 시권에 차운하다. 그는 휴정(休靜)의 사미(沙彌)인데, 지금 계속해서 유정(惟政)을 섬기고 있다.


오늘날의 오조(五祖)와 육조(六祖)가 바로 / 今之五六祖
우리 스님의 과거와 현재 스승들이시라나 / 卽尒故新師
세상 구하러 세상 벼슬 교대해 받은 터에 / 捄世遞恩印
서울에 와서 기대는 곳은 여전히 절간이군 / 依京猶道祠
선종(禪宗)의 가풍이 스님의 몸에 엄존(儼存)하거니 / 家風玆乃在
의발(衣鉢)을 전한 법이 어디에 또 옮겨 가랴 / 衣法也非移
하지만 나는 머리에다 관을 씌워 주고픈데 / 顧我冠顚志
과연 어느 쪽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일는지 / 孰成而孰虧
휴정과 유정이 서로 계속해서 승직(僧職)을 주고받았고, 유정이 현재 삼청(三淸)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1]오조(五祖)와 육조(六祖) : 중국 선종(禪宗)의 오조(五祖)인 홍인(弘忍)과 그의 제자인 육조대사 혜능(慧能)을 말하는데,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하지만 …… 주고픈데 : 삼응(三應)을 유가(儒家)로 인도하여 환속시키고 싶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유(韓愈)가 승려를 전송한 시 가운데 “지금 그대를 우리의 도로 끌어들여, 삭발한 머리에 유자(儒者)의 관을 씌워 주고 싶구려.[方將斂之道 且欲冠其顚]”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送靈師》

 

다산시문집 제17권
비명(碑銘)
화악 선사(華嶽禪師)의 비명(碑銘)


사문(沙門) 혜장(惠藏)이 보은(寶恩)의 산원(山院)에 있는 나에게 들러, 그의 법조(法祖) 화악(華嶽)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에게 묘비에 쓸 글을 청했다. 나는 그가 호매(豪邁)하되 불우(不遇)했던 것이 슬퍼서 이를 허락했다. 혜장의 말은 다음과 같다.
화악 선사는 색금현(塞琴縣 지금의 해남임)의 화산방(花山坊)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대둔사(大芚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얼뜨기 같아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가래[鏵臿]ㆍ괭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 배를 채웠으므로 비록 짚신을 삼아 파는 자일지라도 그를 천하게 여겼다.
하루는 매우 고달파서 상원루(上院樓) 아래에서 진 짐을 벗어놓고 쉬고 있었다. 그때 취여삼우 선사(醉如三愚禪師)가 대중을 모아 놓고 화엄종지(華嚴宗旨)를 강론하고 있었다. 선사는 누판(樓板) 아래에서 남몰래 그것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깨달아, 지고 있던 농기구[田器]를 모두 동료에게 주고 귀의했다. 위로 올라가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굳이 가르침을 청하니, 이날 온 와중이 크게 놀랐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대둔사에는 토목 공사가 있었는데, 선사는 낮에는 도끼질과 벽 바르는 일을 도와 주고, 저녁에는 돌아와 솔방울[松子]을 주워 부엌에 불을 넣고 밤을 새워가며 불서(佛書)를 읽었다. 3년이 지나자, 그와 같은 서열에 있던 자들은 모두 뒤로 처졌다.
그는 사방을 구름처럼 떠돌며 참오(參伍)하여 인증(印證)을 받았는데, 마침내 취여삼우(醉如三愚)의 방에서 점향(拈香)하게 되었다. 이때 사미(沙彌)들이 몰려들어서 대둔사의 모임에는 배우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때 북방의 월저 선사(月渚禪師)가 소문을 듣고 와서 뵙고 그와 더불어 선지(禪旨)를 논하였다. 선사는 그 영도하던 대중을 모두 월저 선사에게 사양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크게 놀라 소란을 피웠다. 선사는 그들을 달래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고는, 인솔하여 월저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방 한 칸을 쓸고는 두문 불출 하며 면벽(面壁)하였다. 월저는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쪽에 가서 육신(肉身)의 보살을 만났다.”
만년에는 술에 빠져 매일 밤 곤드레가 되어 커다란 절구공이를 들고 절의 주위를 몇십 번 혹은 몇백 번씩 돌았다. 그때 그는 절구공이로 집모퉁이 축대와 뜰의 낙숫물받이를 다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야릇하고 시끄럽게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배우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방문을 나오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까닭을 물었으나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시적(示寂 승려의 죽음)하려 할 때에는 두륜산(頭輪山)에 천둥이 치더니, 다비(茶毗 화장(火葬)을 말함)한 뒤에는 사리(舍利) 두 알을 얻었다.
선사의 성은 김씨이고 법명(法名)은 문신(文信)인데,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연간의 사람이다. 그의 전등(傳燈)의 연원은 위로 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炷)를 이었고 아래로는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에 이르렀으니, 선사는 그 가운데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땅파는 가래 있으니 / 有趙
가래 호미 사라고 외쳤다네 / 買䤥
이에 그 짐을 풀고 / 迺釋其㓺
눈물 콧물 가로세로 흘렸다네 / 涕洟衡從
굶어도 밥을 못 얻으니 / 飢不値餼
쉰밥 찬밥 어찌 가리리 / 害餲害饛
무지개가 밤에 떠서 / 蝃蝀夜隮
하늘에 높이 솟았네 / 碧落穹窿
조창이 고요한데 / 槽廠闃廖
술 취한 절구공이 콩콩 울린다 / 醉杵銎銎
너를 아는 자 적어 / 知爾者寡
귀머거리마냥 웃기만 하네/褎如其聾
만 골짜기에 바람 일어 / 不若大驚
크게 놀라게 함만 같지 못하다 / 萬壑生風
백년 뒤에는 / 百年而逅
밝기가 발몽(發矇)한 것과 같으리 / 昭若發矇


 

[주D-001]취여삼우 선사(醉如三愚禪師) : 취여(醉如)는 조선의 스님인 삼우(三愚)의 별호. 얼굴이 붉다 해서 그의 전법사(傳法師)인 해운(海運)이 지어준 별호.
[주D-002]전등(傳燈) : 등은 어두운 데를 비쳐주는 것이므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교법(敎法)에 비유하는데, 이 교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하여 가는 것을 말한다. 법맥(法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는 것을 등불이 꺼지지 않는 데에 비유한 것.
[주D-003]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烓) ……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 :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겐 네 명의 수제자가 있었으니 사점주란 그 네 명의 마음의 심지에 서산이 도(道)의 불을 붙여 주었다는 것을 말함. 그 네 명 중 소요 태능(消遙太能)의 계통이 화악 문신(華嶽文信)이고, 화악 문신의 재전 제자가 연파 혜장(蓮波惠藏)이다. 혜장은 네 명의 스승에게 배워 깊은 이치를 터득하였으니 사견발은 그것을 말함. 그 네 명의 스승은 아암 장공의 탑명에 나오는 춘계 천묵(春溪天黙)ㆍ연담 유일(蓮潭有一)ㆍ운담 정일(雲潭鼎馹)ㆍ정암 즉원(晶巖卽圓)임.
[주D-004]귀머거리마냥 …… 하네 : 유여(褎如)는 유여 충이(褎如充耳)의 준말. 유여 충이는 옷을 잘 입고 귀막이를 하였다는 뜻으로, 곧 외모는 훌륭하나 간언(諫言)이나 충언(忠言)을 듣지 않음을 비유.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文部) 10 ○ 제발(題跋)
풍간상첩(豐干像帖) 뒤에 쓰다


옛날 향산(香山)에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풍간(豐干)의 상(像)이 있어 승가(僧家)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그것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얻지 못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다. 가 죽을 임시에 그의 제자 원준(元俊)에게 말하기를,
“교산(蛟山 허균의 호)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하였지만 내가 숨겼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므로 아무에게나 간직하게 할 수는 없다. 옹(翁)은 본시 선기(禪機 불교의 진리)를 아는 분이니 가져다 주도록 하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원준이 한 중을 시켜 보내왔기에 보니, 소폭화(小幅畫)로, 노승(老僧)은 호랑이를 타고 앉았고, 한 산동(山童)은 보따리를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비록 빛깔도 어둡고 그림도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곤 하였지만 필치는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것이니 참으로 오래된 보물이다.
내가 생각건대, 오도현(吳道玄)은 개원(開元 당 현종(玄宗)의 연호) 이전의 인물이고 풍간도 그와 동시 사람이다. 이름은 비록 ‘같은 시대의 화가가 같은 시대의 인물을 그렸다.’고 드러나 있지만 그것은 무리인 것 같다. 만일 풍간의 상이라고 한다면 오도현의 그림이 아닐 것이며, 만일 오도현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풍간의 상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작가가 당(唐) 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니 보물로 여길 만하다.
이정(李楨)은 이 그림을 구경하고 삼주야(三晝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징(李澄)은 보고서 고화(古畫) 10여 점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자고 애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유능한 화가들이므로 반드시 그 진가를 알았을 것이다. 다만 배접을 해서 간직하였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산문(山門)으로 돌려줄 생각이다.


 

[주D-001]풍간(豐干) : 당(唐) 나라 때 명승(名僧)의 이름. 이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이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묘향산(妙香山)의 늙은 중 휴정(休靜)은, 호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이고 또 청허선사(淸虛禪師)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一國都大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堦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원수(元帥)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권율(權慄) 막하에 갔다.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曜仙) 천길 노송나무[檜]인데 / 舜日曜仙千丈檜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隔林□□一聲灘

하는 것이 있었다. 기축년의 정여립 옥사에 명승(名僧)으로 잡혀 갇혔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석방되고, 어제시(御製詩)와 의복을 하사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임진왜란)에 임금은 그를 불러서 중들을 거느리고 힘을 모아 적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유정은,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송운(松雲)이고 또 사명산인(泗溟山人)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임(任)씨이다. 용모가 헌걸스럽고 수염은 깎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 불경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는데, 적군이 절에 들어오니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동요하지 않았다.적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혹은 합장하여 지극히 공경을 표하고 물러갔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교서와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니,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펼쳐 놓고 모든 중들을 불러놓고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중에 있는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글을 사방에 띄워서 각각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평양에 도착할 때에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성 동쪽에 주둔하면서 접전하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니 모든 도(道)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청정(淸正)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니, 적군은 몇 리나 벌여 섰고 창검은 묶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유정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청정을 보고 조용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니,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너의 머리를 천근의 금과 만호가 되는 고을을 주겠다고 현상하였으니, 네가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답하니, 청정이 크게 웃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왜병의 방비가 매우 성하여 유정이 겨우 한 번 보고 물러나왔으니, 필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10년 뒤에 강화 사건으로 일본에 갔는데 왜놈들은 그를 후히 대접하고 보냈다. 《지봉유설》 ○ 유정은 벼슬이 지중추(知中樞)고 사시(私諡)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홍재전서 제53권
명(銘)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병서(幷序) ○ 갑인년(1794)


석가(釋家)를 통칭 사미(沙彌)라고 하는데, 사미란 식자(息慈)이니 자비의 땅에서 안식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수다라(修多羅)가 으뜸이며, 불교에 십회향(十回向)이 있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으뜸이다. 대체로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자비를 구승(究乘)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법계(法界)의 공덕도 여기에 있고, 항사(恒沙)의 복전(福田)도 여기에 있으니, 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자비의 가르침이여. 후세의 사미는 그렇지 않아서 운천(雲天)과 수병(水甁)의 실상(實相)의 밖에서 마음을 유람하고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정이 없는 물체에 몸을 비교하니, 마침내 우리 유학에서 고목(枯木)과 사회(死灰)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유학에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사미가 스스로 비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같은 이의 사미됨은 아마 자비에서 안식하는 뜻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석장(錫杖)을 지니고 여러 곳에 두루 참례하여 법당(法幢)을 세움으로써 인천안목(人天眼目)이 되어 운장(雲章)과 보묵(寶墨)의 하사품이 특별히 융성하였으니, 지금까지 정관(貞觀)이나 영락(永樂)의 서문과 도솔란야(兜率蘭若)에서 영광을 다툴 지경이다. 중간에는 종풍(宗風)을 발현하여 국난을 크게 구제하고 의병을 창설하여 군왕을 구제한 원훈(元勳)이 되어 요사스럽고 성전(腥羶)한 기운이 손을 따라 맑아졌으니, 지금까지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한 공적은 염부제(閻浮提)ㆍ무량겁(無量劫)에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인연을 따라 현신(現身)하고 업보를 따라 섭신(攝身)하여 인과(因果)를 찾아 상승(上乘)의 교주가 되어 매화가 익고 연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한 초상이 남아 있어 서북과 남도의 영당에서 정례(頂禮)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삼천 대천(三千大千)을 구제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몇 알의 염주로 면벽(面壁)하거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따위를 자비라고 할 수 있겠으며, 탑묘(塔廟)를 많이 건축하고 경률(經律)이나 많이 쓰는 것으로 자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영당(影堂)의 편액을 요청하는 서남 도신의 청에 따라 남도는 표충당(表忠堂)이라고 하사하고, 서도는 수충당(酬忠堂)이라고 하사하는 한편, 관리에게 명하여 제수(祭需)를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금년이 갑인년(1794, 정조18)이므로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선세선사(善世禪師)에게 시를 하사한 고사를 추억하여 서설과 명문을 지어 영당에 걸게 하노라. 내 비록 불가의 진체(眞諦)를 익히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법화경》의 의해(義解)를 들은 일이 있는데, 게(偈)의 의미가 유학의 서문(序文) 다음에 오는 명문(銘文)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유학의 명문은 진실로 범어의 게송이다. 명문은 이러하다.

불일이 처음 비추니 / 佛日初照
자비의 구름 법이 되도다 / 慈雲爲經
호겁에 외길로 전수되니 / 浩劫單傳
부탁함도 정녕하다 / 囑付丁寧
그 맹서하여 발원한 것을 묻는다면 / 問其誓願
누구인들 보시(普施) 아니라 할쏘냐만 / 孰非施舍
의리의 바다 망망하니 / 義海茫茫
건너는 이 적었는데 / 津逮者寡
복된 나라 도움 많아 / 福國多祐
높은 스님 시기에 맞추었네 / 高僧應期
석장 세우고 한 소리 외치니 / 卓錫一喝
마귀의 군졸 흩어졌고 / 魔軍離披
하늘 맑고 달 밝은데 / 天晶月朗
파도는 잠들고 물결도 조용하여라 / 波恬浪平
우담바라의 꽃이 / 優曇鉢華
동해에서 피어났네 / 涌現東瀛
경사는 적현으로 돌려주고 / 歸慶赤縣
진으로 돌아간 곳 청련이어라 / 返眞靑蓮
엄숙하고 아늑하다 쇠북과 목어(木魚)여 / 肅穆鐘魚
선방의 등불 하나 호젓하구나 / 禪燈孤懸
이름은 죽간에 전해지고 / 名流竹簡
도는 패엽에 남겼도다 / 道存貝葉
적막한 시골 주발만 한 절간에 / 寂鄕鉢寺
모습 전하여 빛나도다 / 交暎眉睫
보답하는 제사 어떻게 하나 / 報祀伊何
채소 음식은 관청에서 보내리라 / 蒲饌自官
신령스러운 복 내린다면 / 儻布靈貺
길이 시주를 보우하리 / 長蔭旃檀
상마(桑麻)와 도량(稻粱) 대나무와 갈대가 / 麻稻竹葦
온 나라에 두루 무성하여 / 匝域蓊若
주 나라의 부유하고 많음을 짝하고 / 匹周富庶
당 나라의 농경에 비견하리라 / 媲唐耕鑿
팔만 사천 세를 / 八萬四千
자자손손이 함께 즐기리 / 子孫同樂
내 즉위한 지 십팔 년 / 予卽阼之十有八年
갑인 사월 초파일에 / 甲寅四月初八日
표충사와 수충사에 봉안하노라 / 安于表忠酬忠之祠中


 

[주D-001]인천안목(人天眼目) : 불가(佛家)의 용어로, 인간과 천상의 일을 환히 꿰뚫어 보는 지혜나 그러한 지혜를 갖춘 사람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