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남계 박세체

해동18현 반남인 남계 박세체관련 자료

아베베1 2012. 1. 6. 14:19

 

  이미지사진은 같은 집안인 박태보 선생의 사당인 노강서원의 모습이다 (2011.12.14. 수락산 산행시 담았다)

 

반남인 남계 박세처 선생은 해동 18현이시고  저의 집안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분으로 집안의 문집들에 서문을 쓰신분이다

서계선생님과 집안간으로 저가 자료를  수집하였다

   

    (24)題烟村遺蹟後 (24)

 

 

 

崔德之의 ≪烟村遺蹟≫ 뒤에 題한 글. 최덕지가 문종 때 미리 물러나 存養樓를 지어 재난을 면했고 程朱의 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때에 ‘存養’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을 闡揚하는 내용.

 

저의 19대조 연촌선생의 유적서를 쓰신분

 

문집명 연촌유사 (烟村遺事)(15-16c)
간략서지 古 4650-20烟村 崔德之의 문집. 1책.
간략해제 1805(순조 5) 崔世榮이 편찬하였다. 표지에는 문집명이 ≪烟村集≫으로 되어 있고‚ 序·目錄·판심 등에는 모두 ≪烟村遺事≫로 되어 있다. 또 목록과 <先生出處事蹟>의 卷頭에는 ≪연촌유사≫로 제목을 달고 번호를 매기고‚ <論貢法踏驗便否疏>의 권두에는 ≪烟村遺稿≫로 제목을 달고 번호를 매기고 있다. 이상의 경우처럼 문집명이 일관성이 없지만 서문과 발문을 보면 문집 제작 당시 ≪연촌유사≫를 만들려고 했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어 본문집의 제목을 ≪烟村遺事≫로 통일한다. 본 문집에서 소 1편과 시 3수만이 최덕지의 저술이고‚ 대부분은 최덕지의 관직 사퇴를 연유로 쓴 전별시와 그가 학문을 연마한 존양루의 제영시로 되어 있다. 또 부록으로 <叅議公遺事>는 최덕지 부친의 2수의 시를 말하고 <少尹公墓碣>은 호조참의를 지낸 그의 셋째 형 최득지를 가리킨다.
편저자 최덕지 (崔德之)
저자개요 1384-1455 (우왕10-세조1)字: 可久‚ 號: 烟村·存養·迂叟‚ 本貫: 全州‚ 父: 霮‚ 母: 全州 朴氏
저자내용 1405(태종 5) 식년문과에 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三司의 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 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 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해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西山祠·남원의 舟巖書院·영암의 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용제목 烟村遺事 내용개요 청구기호 古 4650-20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1805. 宋煥箕(1728-1807)가 ≪연촌유사≫의 중간에 즈음하여 최덕지의 후손 爀과 趾欽의 부탁으로 서문을 짓게 되었다. 송환기는 자신의 선조인 송시열이 최덕지의 ≪연촌유사≫에 발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연촌유사≫를 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다 이번을 기회로 보게 되었다고 술회함. 전란으로 최덕지의 시문집이 전란으로 소실되어 본 문집에는 一疏‚ 二詩 밖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당대 제현들의 제영을 보면 그의 덕망을 알 수 있다고 함. 또 여러 서와 발 중에서 澤堂 李植이 최덕지를 淳德·高節·正學으로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최덕지의 ≪연촌유사≫를 편집하면서 동시에 그의 손자인 崔忠成(1458-1491)의 ≪산당집≫을 편집했는데 송환기 본인이 두 사람 문집의 서문을 쓰면서 문집을 검토해 보니 최씨 가문의 世德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先生出處事蹟 (1)  최덕지의 가계·관직·절의 등을 기록하고 있다. 남원부사를 끝으로 나이를 들어 사직한 뒤 영암의 영보촌에서 존양루를 짓고 존심양성의 연구에 몰입했다. 영암은 벽촌으로 문교의 영향을 받지 못하다가 최덕지의 노력으로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또 영조대에 와서 향인들이 사우를 건립하여 그의 학덕을 추모하려고 한 일을 적고 있다.
烟村遺稿∕論貢法踏驗便否疏 (1)  이 소는 조세의 단위와 면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토지의 등급을 정해 조세를 징수하게 되면 토질의 다양함과 작황의 불규칙함이 조세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특정 경작지를 몇 등급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실제 경작지가 규정된 등급에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토지의 등급 단위보다는 경작지 소출을 단위로 조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작자의 태만‚ 소출량에 대한 민과 관의 조작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제도의 운용의 문제이지 제도 존폐와 관련이 없다고 반란을 제기한다. 손실답험법은 자연재해나 병충해로 손실된 작황을 경작지에서 실측하여 조세의 면제 정도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관리와 민이 이 제도를 악용할 소지가 있지만 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실보다는 득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題存養樓(二首)
貢院唱和詩: 序(朴彭年)‚ 原韻-幷小序(河演)‚ 次韻(李思哲‚ 名氏失傳‚ 申叔舟‚ 成三問‚ 辛碩祖‚ 河緯地‚ 徐居正‚ 崔德之‚ 李石亨‚ 姜希孟‚ 柳誠源) 退休時送別詩序(李芮): 有美辭送崔先生-東文選載錄(柳誠源‚ 成三問‚ 李塏‚ 河緯地‚ 鄭麟趾‚ 申叔舟‚ 辛碩祖‚ 徐居正‚ 金淡‚ 尹子雲‚ 徐岡‚ 李孝長‚ 崔善復‚ 李承召‚ 韓瑞鳳‚ 尹起畝‚ 朴元貞‚ 沈愼‚ 金潤福‚ 金之慶‚ 金孝寧‚ 金禮蒙‚ 辛永孫‚ 洪若治‚ 金勇‚ 金鉤‚ 崔恒‚ 崔興孝)‚ 跋(朴彭年)追詠(金宗瑞‚ 安止‚ 金銚‚ 金先齊‚ 鄭麟趾‚ 河演‚ 安崇信‚ 權孟孫‚ 鄭鄰‚ 李石亨‚ 失其姓名‚ 李淑瑊‚ 成任)
제목 없음. 存養樓記 (20) 
제목 없음. 1446. 최덕지 본인의 부탁으로 그와 동년인 紆山 宋乙開가 지었다. 먼저 존양루의 위치와 조경을 설명하는데 특히 주위 풍광의 아름다움을 봄날 꽃을 보면 그림 속에 있는 듯하고 가을날 달을 마주 대하고 있노라면 학을 타고 노는 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존양루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신발을 거꾸로 끌며 반갑게 맞이하고 루에 올라 <伐木>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그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주위에서 그의 마음은 선수의 즐거움에만 얽매여 있으니 병통이 아닌가‚ 또 어느 겨를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루각의 이름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잡으려는 게 아닌가(捕風繫影) 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송을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군자의 마음은 진실로 포착하기 어렵다. 일례로 범중암은 악양루에 올랐지만 루의 장관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고 세상에 앞서 근심했고 세상보다 뒤에 즐거워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최덕지도 일찍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도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포부가 조정에서 반영되지 않자 관직에 물러났다. 루각의 명명은 물에 나아가 이치를 터득하여 자신을 수양하려는 것(卽物觀理)으로 보아야 한다. 일례를 든다면 강산의 험준함을 보고서 명예가 사람을 압도함이 태행산이 수레를 엎어버림보다 심각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題存養樓(李石亨‚ 愼幾‚ 尹自堅)‚ 次韻(崔孝孫‚ 崔興孝‚ 高等宗‚ 奇虔‚ 金國光‚ 辛永孫‚ 金晐‚ 閔孝悅‚ 李徽‚ 朴居明‚ 元自直‚ 金連枝‚ 安德孫)‚ 追詠(愼喜男‚ 閔德鳳‚ 崔鳴吉‚ 李景奭‚ 崔應亨‚ 崔珽)‚ 題存養書院-幷序(金壽恒)
題烟村先生畵像 (26)  金鎭商(1684-1755)이 최덕지의 관직에서 조기 사직한 일과 유상에 나타난 얼굴에 가득찬 소탈하며 질박한 기상을 읊고 있다.
書院請額疏 (27)  金昌協(1651-1708)이 제진했고 신유(1681) 생원 柳章玉 등 85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최덕지가 관직을 조기 사직하고 존양사를 지어 정학 연구에 진력한 점을 들어 사원의 사액을 요청하는 글. 관직에 한 번 그만둘 줄 모른 채 봉록에 연연하고 군주의 총애를 탐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산림에 은둔하는 사류 중에는 자신의 고결함을 기치로 내걸고 優游放曠하며 현실의 문제를 무시한다. 후자는 부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낫지만 올바른 처신이라고 할 수 없다. 최덕지의 경우 治化가 융성했던 세종과 문종 대에 벼슬살이하면서 일찍 사퇴하고 맹자의 존심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존양사를 짓고 정학 연구에 매진했다.
畵像贊 (29)  사태 전환의 미묘한 전기를 포착하여 위험한 상황에 생활하면서 더욱 편안함을 누렸던 최덕지의 학덕을 칭송함. 愼天翊(1592-1661)이 지었다.
畵像改粧贊 (29)  제목 밑 소기를 보면 1610년 4월에 龍山에서 개장하고 1635년 2월에 德津橋에 봉안했다고 한다. 최적지의 명철보신을 칭송함.
亂後文稿收錄誌 (29)  1621. 먼저 구양수의 三不朽로 글을 시작한다. 세 가지는 몸 수양이라는 도덕의 측면‚ 사업의 실시라는 공업의 측면‚ 언어적 표현이라는 문장의 측면이다. 세 가지 중 가치면에서 보면 문장이 가장 뒤쳐지지만 문장이 남아 있지 않으면 덕과 공업을 알 수 없게 되니‚ 문집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의 문집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일실되었다. 그 와중에 자손들에게 문집의 일부 남아 있었지만 탈오가 많았다. 정유왜란이 발생하자 앞의 유문과 화상을 창졸 중에 羅州 細花里에 묻어 두었다. 왜적이 물러가고 난 뒤 1년만에 파보니 다행히 보관상태가 양호했다. 후손 珽이 지었다.
烟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31)  1630. 정유재란으로 존양루가 소실되고 얼마 안 남은 문집이 산일되었다가 향인들이 최덕지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게 되자‚ 그의 7대손 정이 남아 있는 시문과 제현들의 시 90여수를 묶어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최덕지의 학덕에 대해 순실한 행실이 군주의 고유문에 나타나 있음으로 淳德함을 알 수 있고‚ 관직을 조기 사직하고 산과 바다로 자신의 형적을 숨겼으니 高節이고‚ 존심양성을 표방하고 루락의 편액을 쓰고 경계로 삼았으니 正學임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또 최덕지가 관직을 조기에 사퇴함으로써 단종과 세종의 왕위 분쟁에 연루되지 않은 점을 두고 명철보신으로 보는 시각을 반대한다. 정치적 사건은 천수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명지하더라도 예상할 수 없다. 李植(1584-1647)이 지었다.
烟村先生遺事跋 (32)  최덕지의 8대손 榮夢과 邦彦이 구본의 탈오를 교정하여 문집을 중간하려고 할 때 宋時烈(1607-1689)이 쓴 발문. 송은 최덕지의 ‘손실답험’이 ≪주자대전≫에도 자주 보일 뿐만 아니라 주희가 열성적으로 실현하려고 했고‚ ‘業去稅存’ 4자의 경우 주희가 당시 현실에 통탄하며 개혁을 하려다 吳禹圭의 중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실을 500여년이 지난 뒤 최덕지의 글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니 이식의 평가 중 정학이라는 말이 실제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말 중 업거는 주자의 주장과 조금 차이가 있고‚ 많은 서발문 중에 이식의 글이 가장 자세하고 인용의 전거도 풍부하지만 知幾 부분은 조금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題烟村崔先生遺事後 (33)   최덕지의 후손 방언의 부탁으로 朴世采(1631-1695)가 쓴 글. 최덕지는 완전한 덕성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도 그의 현능의 사실은 알지만 왜 현능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른다고 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烟村崔先生家錄後跋 (34)  송시열의 발문 중에 이식의 글을 일부 회의하는 귀절이 있었는데‚ 최덕지의 후손이 이 점의 해명을 위해 李端夏(1625-1689)에게 부탁하여 쓰게 된 글.
附元直學碣銘畧 (36)  생육신의 한 사람인 元昊의 묘갈명에서 최덕지 관련 사항을 전재한 글. 최덕지는 관직을 조기 사직한 연유로 단종과 세조의 왕위 계승 분쟁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덕지의 출처를 성삼문의 절의와 異塗同歸로 보고 “김시습은 오늘날의 伯夷이고 사육신은 오늘날의 方練이고 烟村霧巷도 사육신과 견주더라도 뒤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대해 무항은 원호가 거처하던 장소이고 연촌은 최적지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최덕지를 높이는 이유로 그의 見幾勇退를 들고 있다.

 

박세채(朴世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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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숙(和叔)
현석(玄石)
남계(南溪)
시호 문순(文純)
생몰년 1631(인조 9) ~ 1695(숙종 21)
시대 조선 중기
본관 반남(潘南)
활동분야 학자 > 유학자
 
박의(朴猗)
조부 박동량(朴東亮)
증조부 박응복(朴應福)
외조부 신흠(申欽)
저서 《범학전편 範學全編》  
저서 《시경요의 詩經要義》
저서 《춘추보편》
저서 《남계독서기》
저서 《대학보유변 大學補遺辨》
저서 《심경요해 心經要解》
저서 《학법총설 學法總說》
저서 《양명학변》
저서 《남계수필록 南溪隨筆錄》
저서 《심학지결》
저서 《신수자경편》
저서 《육례의집》
저서 《삼례의 三禮儀》
저서 《사례변절 四禮變節》
저서 《가례요해 家禮要解》
저서 《가례외편 家禮外編》
저서 《남계예설 南溪禮說》
저서 《남계시무만언봉사 南溪時務萬言封事》
저서 《남계연중강계 南溪筵中講啓》
저서 《남계기문 南溪記聞》
저서 《동유사우록》
저서 《주자대전습유 朱子大全拾遺》
 

[상세내용]

박세채(朴世采)에 대하여
1631년(인조 9)∼1695년(숙종 2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1. 가계와 수학
홍문관교리박의(朴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박응복(朴應福)대사헌, 할아버지 박동량(朴東亮)형조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원래 이이(李珥)《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2. 이이의 문묘배향 주장
그 무렵 이이·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하여 과시(科試)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박호(朴濠), 종부 박미(朴瀰)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하여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3. 관직과 유배생활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다.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서인측의 이론가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지은 《복제사의(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윤휴를 경책(警責)한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4. 재등용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던 1680년까지 6년간은 도리어 학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을 저술로 남겼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집권층의 변화에 따라 그는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이(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중에 윤증·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이른바 소론계의 학자들과 서신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저술 경향을 보인다. 《양명학변(陽明學辨)》·《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죽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는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한 바 있다.

박세채는 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중화적(中華的) 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역천패리(逆天悖理)의 위기의식이 만연된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구생활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긴밀한 연관 속에 이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5. 학문과 저술
그의 학문은 이러한 17세기의 국내외의 상황과 관련하여 네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이며,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서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외정치면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존주대의라는 정책과제를 제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라고 우려하여 그 나름의 탕평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존주대의의 정책과제는 김상헌과 관련할 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관계성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도통수호의식은 그가 이미 《이학통록보집》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을 써서 동방의 도학연원을 밝혔던 것이다. 그의 공적은 수제자 김간(金幹)의 평과 같이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라고 자랑할만한 업적이다.

또한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고본대학(古本大學)》·《대학문(大學問)》·《치양지(致良知)》·《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 등 양명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 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擬古訣南溪書)》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고, 그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스승으로서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 예학사상과 저술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학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예학의 구현이라는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학적 과제가 된다.

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家禮)》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국조의례》 등의 간행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원리로서 예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비의 복(服)에 대하여 기년복·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大功)·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禮訟)은 파당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으나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차원이 이해된다.

그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변례질문(變禮質問)》 등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의 견해는 역시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東方禮說)》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설은 위의 학적 계통의 선상에서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저술로는 《범학전편(範學全編)》·《시경요의(詩經要義)》·《춘추보편》·《남계독서기》·《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심경요해(心經要解)》·《학법총설(學法總說)》·《양명학변》·《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심학지결》·《신수자경편》·《육례의집》·《삼례의(三禮儀)》·《사례변절(四禮變節)》·《가례요해(家禮要解)》·《가례외편(家禮外編)》·《남계예설(南溪禮說)》·《남계시무만언봉사(南溪時務萬言封事)》·《남계연중강계(南溪筵中講啓)》·《남계기문(南溪記聞)》·《동유사우록》·《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등이 있는데, 단행본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古鮮册譜     朝鮮儒學史(玄相允, 1949)   資料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1959)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집필자]  김용걸(金容傑)

 

성씨와 본관

반남박씨(潘南朴氏)

[요약정보]

본관명 반남(潘南)
성씨명 박씨(朴氏)
본관소재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
본관이칭
시조명 박응주(朴應珠)

[상세내용]

본관 연혁

반남(潘南)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 일명 半那夫里縣)이라 불렸고, 대방주(帶方州: 羅州)의 관할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반남군(潘南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야로(野老)와 곤미(昆湄: 珍島로 추정)를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에 현으로 강등되어 1018년(현종 9)에 나주에 속하였다. 1995년에 나주군과 통합된 나주시의 반남면(潘南面)이 되었다.

성씨의 역사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고려조에서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역임했으며 6세손 박은(朴訔)이 조선 태종(太宗) 때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진 이후로 오랫동안 세거하게 되어 그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반남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분적종 및 분파

《姓氏의 고향》에서는 6세손 박은(朴訔)이 추충공신(推忠公臣)에 책록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판공규파(參判公葵派), 세양공강파(世襄公薑派), 부윤공훤파(府尹公萱派), 지후공인파(祗候公仁派), 교위공귀근파(校尉公貴謹派), 학생공영창파(學生公永昌派), 도사공진창파(都事公震昌派), 정자공충파(正字公冲派), 감찰공현수파(監察公玄修派), 학생공초생파(學生公初生派), 직장공송생파(直長公松生派)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2동
전라북도 완주시 봉동읍 구미리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어양리
황해도 은율군 장연군 명암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반남박씨는 43,300가구 총 139,43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디지털한국학(http://koreandb.kdaq.empas.com/)
반남박씨종친회(http://www.bannampark.org)

[집필자]  장규언

 

 성씨와 본관

반남박씨(潘南朴氏)

[요약정보]

본관명 반남(潘南)
성씨명 박씨(朴氏)
본관소재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
본관이칭
시조명 박응주(朴應珠)

[상세내용]

본관 연혁

반남(潘南)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 일명 半那夫里縣)이라 불렸고, 대방주(帶方州: 羅州)의 관할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반남군(潘南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야로(野老)와 곤미(昆湄: 珍島로 추정)를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에 현으로 강등되어 1018년(현종 9)에 나주에 속하였다. 1995년에 나주군과 통합된 나주시의 반남면(潘南面)이 되었다.

성씨의 역사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고려조에서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역임했으며 6세손 박은(朴訔)이 조선 태종(太宗) 때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진 이후로 오랫동안 세거하게 되어 그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반남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분적종 및 분파

《姓氏의 고향》에서는 6세손 박은(朴訔)이 추충공신(推忠公臣)에 책록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판공규파(參判公葵派), 세양공강파(世襄公薑派), 부윤공훤파(府尹公萱派), 지후공인파(祗候公仁派), 교위공귀근파(校尉公貴謹派), 학생공영창파(學生公永昌派), 도사공진창파(都事公震昌派), 정자공충파(正字公冲派), 감찰공현수파(監察公玄修派), 학생공초생파(學生公初生派), 직장공송생파(直長公松生派)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2동
전라북도 완주시 봉동읍 구미리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어양리
황해도 은율군 장연군 명암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반남박씨는 43,300가구 총 139,43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디지털한국학(http://koreandb.kdaq.empas.com/)
반남박씨종친회(http://www.bannampark.org)

[집필자]

장규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인물들]

박강(朴薑) 박규(朴葵) 박규수(朴珪壽) 박규양(朴奎陽) 박기수(朴綺壽){1}
박기수(朴岐壽){2} 박기양(朴箕陽) 박난수(朴蘭壽) 박노수(朴潞壽) 박대하(朴大夏)
박돈수(朴惇壽) 박돈양(朴暾陽) 박동량(朴東亮) 박동로(朴東老) 박동망(朴東望)
박동서(朴東緖) 박동선(朴東善) 박동언(朴東彦) 박동열(朴東說) 박동현(朴東賢)
박두망(朴斗望) 박두양(朴斗陽) 박록(朴漉) 박만서(朴晩緖) 박맹지(朴孟智)
박면중(朴冕中) 박명원(朴明源) 박명회(朴明會) 박문빈(朴文彬) 박미(朴瀰){2}
박병(朴炳) 박부양(朴富陽) 박사(朴㴲) 박사덕(朴師德) 박사백(朴師伯)
박사석(朴師錫) 박사수(朴師洙) 박사익(朴師益) 박사정(朴師正) 박사창(朴師昌)
박사해(朴師海) 박사형(朴師亨) 박상덕(朴相德) 박상래(朴相來) 박상로(朴相老)
박상면(朴相冕) 박상집(朴相集) 박상철(朴相喆) 박상충(朴尙衷) 박서양(朴敍陽)
박서원(朴瑞源) 박선수(朴瑄壽) 박성양(朴聖陽) 박성양(朴性陽){2} 박성원(朴盛源){2}
박세견(朴世堅) 박세교(朴世橋) 박세당(朴世堂) 박세량(朴世樑) 박세모(朴世模)
박세상(朴世相) 박세성(朴世城) 박세장(朴世樟) 박세집(朴世集) 박세채(朴世采)
박세현(朴世鉉){1} 박세후(朴世后) 박소(朴紹){2} 박숭질(朴崇質) 박승간(朴承侃)
박승무(朴勝武) 박승봉(朴勝鳳) 박승산(朴勝山) 박승욱(朴承郁) 박승임(朴承任)
박승진(朴勝振) 박시원(朴時源) 박억년(朴億年) 박엽(朴燁)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박완서(朴婉緖) 박용(朴墉) 박용수(朴容壽) 박용원(朴用元)
박운수(朴雲壽) 박원도(朴元度){2} 박원양(朴元陽) 박유(朴瀏) 박유굉(朴裕宏)
박윤수(朴崙壽) 박윤원(朴胤源) 박은(朴訔){1}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응순(朴應順) 박응인(朴應寅) 박응천(朴應川) 박의(朴漪){2} 박이양(朴彝陽)
박익지(朴益智) 박인정(朴仁亭) 박일원(朴一源){1} 박재원(朴在源) 박정(朴炡){1}
박정서(朴禎緖) 박정양(朴定陽) 박정원(朴井源) 박제경(朴齊璟){1} 박제경(朴齊絅){2}
박제관(朴齊寬) 박제교(朴齊敎) 박제근(朴齊近) 박제대(朴齊大) 박제명(朴齊明)
박제문(朴齊聞) 박제빈(朴齊斌) 박제성(朴齊晟) 박제소(朴齊韶) 박제순(朴齊純)
박제인(朴齊寅){2} 박제일(朴齊一) 박제헌(朴齊憲) 박제환(朴齊瓛) 박종갑(朴宗甲)
박종겸(朴宗謙) 박종경(朴宗慶) 박종길(朴宗吉) 박종덕(朴宗德) 박종보(朴宗輔)
박종신(朴宗臣) 박종악(朴宗岳) 박종여(朴宗輿) 박종열(朴宗說) 박종황(朴宗璜)
박종훈(朴宗薰) 박종휴(朴宗休) 박종희(朴宗喜) 박종희(朴宗禧) 박주(朴洲)
박주양(朴周陽) 박준양(朴俊陽) 박준원(朴準源) 박지영(朴之英) 박지원(朴趾源){1}
박찬(朴璨){1} 박찬범(朴贊汎) 박창수(朴昌壽) 박취원(朴取源) 박치륭(朴致隆)
박태두(朴泰斗) 박태만(朴泰萬) 박태보(朴泰輔) 박태삼(朴泰三) 박태상(朴泰尙)
박태서(朴泰緖) 박태손(朴泰遜) 박태순(朴泰淳) 박태원(朴泰遠){1} 박태유(朴泰維)
박태은(朴泰殷) 박태장(朴泰長) 박태정(朴泰定) 박태징(朴泰徵) 박태창(朴泰昌)
박태초(朴泰初) 박태항(朴泰恒) 박태회(朴泰晦) 박필간(朴弼幹) 박필건(朴弼健)
박필규(朴弼逵) 박필균(朴弼均) 박필기(朴弼基) 박필기(朴弼夔) 박필기(朴弼琦)
박필리(朴弼理) 박필명(朴弼明) 박필몽(朴弼夢) 박필부(朴弼傅) 박필성(朴弼成)
박필순(朴弼淳) 박필시(朴弼時) 박필영(朴弼英) 박필재(朴弼載) 박필주(朴弼周)
박필창(朴弻昌) 박필현(朴弼顯) 박호수(朴鎬壽) 박호양(朴鎬陽) 박호양(朴顥陽)
박홍수(朴弘壽) 박홍양(朴弘陽) 박홍준(朴弘儁) 박환(朴煥) 박황(朴潢){2}
박회무(朴檜茂) 박회수(朴晦壽) 박희양(朴熙陽) 유빈박씨(綏嬪朴氏) 의인왕후(懿仁王后)
인성왕후(仁聖王后) 죽서박씨(竹西朴氏)

[반남박씨(潘南朴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박상충(朴尙衷) 박은(朴訔) 박의(朴宜)
고려사마
박은(朴訔)
무과
박명순(朴命珣) 박봉기(朴鳳起) 박봉장(朴鳳章) 박사검(朴師儉) 박사유(朴師維)
박성지(朴性之) 박승혼(朴承湣) 박정세(朴挺世) 박제갑(朴濟甲) 박제긍(朴齊兢)
박종간(朴宗衎) 박필록(朴弼祿) 박필화(朴弼華) 박형엽(朴亨曄) 박형좌(朴亨佐)
박홍원(朴弘遠) 박홍좌(朴弘佐) 박흥좌(朴興佐)
무관
박선양(朴善陽) 박원양(朴元陽) 박제성(朴齊聲) 박제항(朴齊恒) 박종철(朴宗喆)
박지수(朴芝壽)
문과
박거인(朴居仁) 박경양(朴慶陽) 박광원(朴廣源) 박규수(朴奎壽) 박규수(朴珪壽)
박규양(朴揆陽) 박규현(朴奎賢) 박기수(朴岐壽) 박기수(朴綺壽) 박기양(朴基陽)
박기양(朴箕陽) 박길원(朴吉源) 박난수(朴蘭壽) 박노수(朴潞壽) 박능원(朴能源)
박대겸(朴大謙) 박도원(朴道源) 박돈수(朴惇壽) 박돈양(朴暾陽) 박동량(朴東亮)
박동로(朴東老) 박동망(朴東望) 박동선(朴東善) 박동열(朴東說) 박동현(朴東賢)
박두양(朴斗陽) 박렴(朴簾) 박맹지(朴孟智) 박명세(朴命世) 박명수(朴明壽)
박민고(朴敏古) 박민수(朴民壽) 박사눌(朴師訥) 박사륜(朴師崙) 박사성(朴師聖)
박사수(朴師洙) 박사유(朴師游) 박사익(朴師益) 박사일(朴思一) 박사제(朴師悌)
박사진(朴師晋) 박사창(朴師昌) 박사해(朴師海) 박상갑(朴相甲) 박상덕(朴相德)
박상래(朴相來) 박상로(朴相老) 박상면(朴相冕) 박상수(朴商壽) 박상악(朴相岳)
박상진(朴祥震) 박상철(朴相喆) 박서원(朴瑞源) 박선수(朴瑄壽) 박성원(朴盛源)
박세견(朴世堅) 박세당(朴世堂) 박세등(朴世登) 박세모(朴世模) 박세성(朴世城)
박세장(朴世樟) 박세준(朴世㷪) 박소(朴紹) 박수수(朴綏壽) 박순남(朴順男)
박숭고(朴崇古) 박숭질(朴崇質) 박승간(朴承侃) 박승길(朴勝吉) 박승덕(朴勝悳)
박승려(朴勝驪) 박승목(朴勝穆) 박승수(朴昇壽) 박승억(朴勝億) 박승원(朴升源)
박승임(朴承任) 박승항(朴勝恒) 박시수(朴蓍壽) 박시원(朴時源) 박신(朴愼)
박심수(朴心壽) 박안도(朴安道) 박양(朴讓) 박억년(朴億年) 박엽(朴燁)
박영(朴詠) 박영교(朴泳敎) 박영동(朴榮東) 박영수(朴永壽) 박영훈(朴泳薰)
박영훈(朴泳薰) 박예양(朴澧陽) 박용수(朴容壽) 박용천(朴龍天) 박우원(朴祐源)
박원(朴垣) 박원도(朴元度) 박윤수(朴崙壽) 박율(朴慄)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의(朴漪) 박이양(朴彛陽) 박익양(朴益陽) 박인기(朴仁基)
박인수(朴寅壽) 박재시(朴載時) 박재원(朴在源) 박정(朴炡) 박정(朴炡)
박정수(朴鼎壽) 박정양(朴定陽) 박정원(朴正源) 박제경(朴齊璟) 박제관(朴齊寬)
박제교(朴齊敎) 박제명(朴齊明) 박제문(朴齊聞) 박제빈(朴齊斌) 박제선(朴齊璿)
박제성(朴齊晟) 박제성(朴齊聖) 박제소(朴齊韶) 박제순(朴齊純) 박제승(朴齊承)
박제연(朴齊淵) 박제영(朴齊永) 박제용(朴齊用) 박제인(朴齊寅) 박제일(朴齊一)
박제창(朴齊昌) 박제헌(朴齊憲) 박제황(朴齊璜) 박제휘(朴齊輝) 박조년(朴兆年)
박종겸(朴宗謙) 박종경(朴宗京) 박종경(朴宗慶) 박종기(朴宗琦) 박종길(朴宗吉)
박종범(朴宗範) 박종신(朴宗臣) 박종심(朴宗心) 박종정(朴宗正) 박종학(朴宗學)
박종형(朴宗珩) 박종황(朴宗璜) 박종훈(朴宗薰) 박종휴(朴宗休) 박주수(朴周壽)
박주양(朴周陽) 박준원(朴浚源) 박지원(朴志源) 박지희(朴志喜) 박창서(朴昌緖)
박창수(朴昌壽) 박창원(朴昌源) 박취원(朴取源) 박치륭(朴致隆) 박태만(朴泰萬)
박태보(朴泰輔) 박태삼(朴泰三) 박태상(朴泰尙) 박태상(朴泰尙) 박태소(朴泰素)
박태손(朴泰遜) 박태수(朴台壽) 박태순(朴泰淳) 박태유(朴泰維) 박태창(朴泰昌)
박태항(朴泰恒) 박태흥(朴泰興) 박필간(朴弼幹) 박필기(朴弼夔) 박필기(朴弼琦)
박필리(朴弼理) 박필명(朴弼明) 박필몽(朴弼夢) 박필수(朴弼燧) 박필순(朴弼淳)
박필원(朴弼遠) 박필위(朴弼渭) 박필재(朴弼載) 박필철(朴弼哲) 박필현(朴弼賢)
박호수(朴皓壽) 박호양(朴顥陽) 박호원(朴鎬源) 박혼원(朴混源) 박홍수(朴弘壽)
박홍양(朴弘陽) 박홍준(朴弘儁) 박황(朴潢) 박회수(朴晦壽) 박효삼(朴孝參)
박휘등(朴彙登) 박휘등(朴彙登) 박희보(朴熙輔) 박희양(朴憙陽) 박희진(朴熙晋)
생원시
박경룡(朴慶龍) 박계순(朴桂筍) 박교양(朴敎陽) 박구수(朴龜壽) 박구원(朴龜源)
박근원(朴根源) 박긍수(朴兢壽) 박기수(朴岐壽) 박기수(朴祺壽) 박기양(朴岐陽)
박길원(朴吉源) 박내수(朴徠壽) 박노(朴銠) 박노수(朴魯壽) 박능원(朴能源)
박도양(朴道陽) 박동로(朴東老) 박만원(朴晩源) 박만원(朴萬源) 박면원(朴沔源)
박문진(朴文鉁) 박민고(朴敏古) 박민수(朴民壽) 박봉양(朴鳳陽) 박사건(朴師建)
박사경(朴師經) 박사덕(朴師德) 박사만(朴師萬) 박사백(朴師伯) 박사수(朴師洙)
박사집(朴師緝) 박사철(朴師轍) 박사후(朴師厚) 박상구(朴象耉) 박상렬(朴相烈)
박상복(朴相復) 박상옥(朴相玉) 박상정(朴相定) 박상진(朴象眞) 박상하(朴相夏)
박선등(朴選登) 박성원(朴成源) 박세당(朴世堂) 박세성(朴世城) 박세항(朴世恒)
박소(朴紹) 박수수(朴綏壽) 박수원(朴洙源) 박순양(朴順陽) 박승우(朴勝愚)
박승철(朴勝喆) 박시인(朴時寅) 박시행(朴諟行) 박안검(朴安儉) 박영달(朴泳達)
박영수(朴泳壽) 박영진(朴泳振) 박용첨(朴龍瞻) 박우원(朴祐源) 박원양(朴元陽)
박인수(朴仁壽) 박일원(朴一源) 박정렬(朴鼎烈) 박정수(朴定壽) 박정수(朴廷壽)
박정양(朴定陽) 박정원(朴定源) 박제갑(朴齊甲) 박제경(朴齊敬) 박제근(朴齊近)
박제면(朴齊冕) 박제문(朴齊文) 박제빈(朴齊賓) 박제선(朴齊善) 박제성(朴齊性)
박제성(朴齊聖) 박제순(朴齊恂) 박제영(朴齊暎) 박제완(朴齊完) 박제완(朴齊琬)
박제원(朴齊元) 박제인(朴齊寅) 박제칠(朴濟七) 박제헌(朴齊憲) 박제형(朴齊衡)
박제홍(朴齊弘) 박조년(朴兆年) 박조원(朴祚源) 박종간(朴宗幹) 박종길(朴宗吉)
박종대(朴宗大) 박종문(朴宗聞) 박종민(朴宗民) 박종보(朴宗輔) 박종우(朴宗羽)
박종학(朴宗鶴) 박종항(朴宗恒) 박종형(朴宗珩) 박종호(朴宗浩) 박종호(朴宗虎)
박종홍(朴宗洪) 박종후(朴宗厚) 박좌양(朴左陽) 박주양(朴周陽) 박주원(朴周源)
박준양(朴濬陽) 박준원(朴準源) 박지수(朴芝壽) 박진양(朴晋陽) 박천구(朴天龜)
박천원(朴天源) 박취경(朴就卿) 박태래(朴泰來) 박태순(朴泰淳) 박태장(朴泰章)
박팽수(朴彭壽) 박필규(朴弼揆) 박필민(朴弼敏) 박필순(朴弼淳) 박필우(朴弼禹)
박필재(朴弼載) 박필현(朴弼顯) 박하양(朴夏陽) 박헌수(朴憲壽) 박헌양(朴獻陽)
박현수(朴賢壽) 박형동(朴亨東) 박형원(朴瀅源) 박형원(朴衡源) 박홍원(朴弘源)
박홍준(朴弘儁) 박화수(朴華壽) 박효양(朴孝陽) 박흥수(朴興壽) 박희수(朴喜壽)
박희수(朴希壽)
음관
박경수(朴京壽) 박경수(朴京壽) 박경수(朴慶壽) 박계양(朴啓陽) 박계양(朴啓陽)
박규수(朴珪壽) 박규원(朴奎源) 박규원(朴奎源) 박규현(朴奎賢) 박긍원(朴肯源)
박기양(朴基陽) 박난수(朴蘭壽) 박남원(朴南源) 박내수(朴萊壽) 박내수(朴萊壽)
박노수(朴魯壽) 박대수(朴大壽) 박대수(朴大壽) 박대수(朴岱壽) 박대수(朴岱壽)
박돈수(朴惇壽) 박두양(朴斗陽) 박만수(朴晩壽) 박민수(朴民壽) 박봉양(朴鳳陽)
박봉양(朴鳳陽) 박상수(朴商壽) 박선수(朴瑄壽) 박선수(朴瑄壽) 박성수(朴星壽)
박성수(朴星壽) 박순수(朴醇壽) 박순수(朴醇壽) 박순양(朴順陽) 박순양(朴順陽)
박승수(朴升壽) 박승수(朴升壽) 박승수(朴昇壽) 박승원(朴升源) 박영수(朴永壽)
박영훈(朴泳薰) 박용천(朴龍天) 박운수(朴雲壽) 박운수(朴雲壽) 박원양(朴元陽)
박유수(朴有壽) 박유수(朴有壽) 박응수(朴膺壽) 박익양(朴益陽) 박인수(朴麟壽)
박인수(朴麟壽) 박인수(朴寅壽) 박정양(朴定陽) 박제갑(朴齊甲) 박제갑(朴齊甲)
박제관(朴齊寬) 박제관(朴齊筦) 박제관(朴齊寛) 박제교(朴齊敎) 박제근(朴齊近)
박제근(朴齊近) 박제만(朴齊萬) 박제만(朴齊萬) 박제문(朴齊文) 박제문(朴齊文)
박제범(朴齊範) 박제빈(朴齊斌) 박제빈(朴齊賓) 박제빈(朴齊賓) 박제상(朴齊尙)
박제상(朴齊尙) 박제상(朴齊相) 박제선(朴齊璿) 박제성(朴齊性) 박제성(朴齊聲)
박제성(朴齊晠) 박제소(朴齊韶) 박제소(朴齊韶) 박제승(朴齊承) 박제승(朴齊承)
박제신(朴齊臣) 박제신(朴齊臣) 박제안(朴齊顔) 박제안(朴齊顔) 박제억(朴齊億)
박제연(朴齊淵) 박제영(朴齊瑛) 박제영(朴齊瑛) 박제영(朴齊韺) 박제영(朴齊韺)
박제완(朴齊琬) 박제완(朴齊琬) 박제용(朴齊用) 박제인(朴齊寅) 박제인(朴齊寅)
박제평(朴齊平) 박제항(朴齊恒) 박제헌(朴齊憲) 박제형(朴齊珩) 박제형(朴齊珩)
박제홍(朴齊弘) 박제홍(朴齊弘) 박제홍(朴齊鴻) 박제홍(朴齊鴻) 박제휘(朴齊輝)
박조수(朴祖壽) 박종경(朴宗敬) 박종구(朴宗球) 박종길(朴宗吉) 박종대(朴宗大)
박종대(朴宗大) 박종대(朴宗岱) 박종대(朴宗岱) 박종돈(朴宗敦) 박종돈(朴宗敦)
박종렴(朴宗濂) 박종문(朴宗聞) 박종문(朴宗聞) 박종민(朴宗民) 박종범(朴宗範)
박종복(朴宗復) 박종숙(朴宗塾) 박종숙(朴宗塾) 박종완(朴宗琬) 박종완(朴宗琬)
박종유(朴宗有) 박종유(朴宗有) 박종채(朴宗采) 박종항(朴宗恒) 박종호(朴宗浩)
박종휴(朴宗休) 박종희(朴宗喜) 박종희(朴宗喜) 박주양(朴周陽) 박준양(朴峻陽)
박준양(朴峻陽) 박증수(朴曾壽) 박증수(朴曾壽) 박지수(朴志壽) 박지수(朴志壽)
박진수(朴晉壽) 박진수(朴晋壽) 박창수(朴昌壽) 박초수(朴初壽) 박초수(朴初壽)
박초수(朴楚壽) 박초수(朴楚壽) 박최수(朴最壽) 박최수(朴最壽) 박춘수(朴春壽)
박춘수(朴春壽) 박헌수(朴巘壽) 박헌수(朴巘壽) 박헌양(朴憲陽) 박헌양(朴憲陽)
박헌양(朴獻陽) 박헌양(朴獻陽) 박현양(朴顯陽) 박현양(朴顯陽) 박형원(朴馨源)
박호수(朴鎬壽) 박호수(朴鎬壽) 박호양(朴顥陽) 박호양(朴顥陽) 박호원(朴鎬源)
박홍수(朴弘壽) 박홍양(朴弘陽) 박화원(朴和源) 박회수(朴晦壽) 박회수(朴會壽)
박흥수(朴興壽) 박흥수(朴興壽) 박희수(朴喜壽) 박희수(朴喜壽) 박희양(朴憙陽)
박희양(朴憙陽)
의과
박윤열(朴允說)
진사시
박간(朴暕) 박경수(朴京壽) 박경수(朴慶壽) 박경신(朴敬身) 박경양(朴敬陽)
박경양(朴景陽) 박관수(朴觀壽) 박관양(朴寬陽) 박규원(朴奎源) 박기수(朴岐壽)
박기양(朴箕陽) 박기원(朴淇源) 박남수(朴南壽) 박노수(朴潞壽) 박담수(朴聃壽)
박대수(朴岱壽) 박대양(朴大陽) 박돈양(朴敦陽) 박동양(朴東陽) 박명수(朴蓂壽)
박사동(朴師東) 박사량(朴師亮) 박사석(朴師錫) 박사소(朴師邵) 박사옥(朴師沃)
박사유(朴師游) 박사인(朴師寅) 박사적(朴師迪) 박사정(朴師鼎) 박사집(朴師緝)
박사집(朴師集) 박사창(朴師昌) 박사철(朴師喆) 박사휴(朴師休) 박상래(朴相來)
박상록(朴相祿) 박상악(朴相岳) 박선수(朴善壽) 박선수(朴瑄壽) 박선양(朴宣陽)
박성수(朴性壽) 박성원(朴成源) 박세견(朴世堅) 박세모(朴世模) 박세장(朴世樟)
박수원(朴綏源) 박승구(朴勝九) 박승만(朴勝萬) 박승봉(朴勝鳳) 박승수(朴升壽)
박승수(朴昇壽) 박승영(朴勝泳) 박승일(朴勝一) 박승준(朴勝駿) 박승직(朴勝稷)
박승학(朴勝學) 박시수(朴蓍壽) 박시영(朴時英) 박여수(朴呂壽) 박영서(朴英緖)
박영원(朴盈源) 박영학(朴泳學) 박영훈(朴泳薰) 박예규(朴禮奎) 박예원(朴禮源)
박용수(朴龍壽) 박용후(朴用厚) 박우양(朴宇陽) 박원서(朴元緖) 박원양(朴元陽)
박유원(朴有源) 박응수(朴膺壽) 박의수(朴義壽) 박의양(朴毅陽) 박인수(朴麟壽)
박인양(朴寅陽) 박인원(朴麟源) 박인원(朴寅源) 박재설(朴載卨) 박정(朴炡)
박정엄(朴廷淹) 박정원(朴晸源) 박정원(朴鼎源) 박제경(朴齊璟) 박제관(朴齊觀)
박제대(朴齊大) 박제덕(朴濟德) 박제돈(朴齊暾) 박제만(朴齊萬) 박제보(朴齊普)
박제봉(朴濟鳳) 박제봉(朴齊鳳) 박제봉(朴齊鳳) 박제상(朴齊相) 박제성(朴齊晟)
박제소(朴齊韶) 박제순(朴齊淳) 박제승(朴齊承) 박제억(朴齊億) 박제영(朴齊永)
박제영(朴齊韺) 박제운(朴齊運) 박제익(朴齊翼) 박제인(朴齊寅) 박제정(朴齊政)
박제형(朴濟衡) 박제훈(朴齊薰) 박조수(朴肇壽) 박종경(朴宗慶) 박종교(朴宗喬)
박종구(朴宗球) 박종규(朴宗圭) 박종렴(朴宗濂) 박종묵(朴宗默) 박종복(朴宗復)
박종성(朴宗性) 박종숙(朴宗塾) 박종영(朴宗永) 박종오(朴宗五) 박종완(朴宗琬)
박종우(朴宗雨) 박종유(朴宗儒) 박종유(朴宗有) 박종현(朴宗鉉) 박종훈(朴宗薰)
박종흠(朴宗欽) 박준양(朴準陽) 박중원(朴重源) 박진수(朴晋壽) 박진원(朴晋源)
박창수(朴昌壽) 박천수(朴天壽) 박천주(朴天柱) 박철원(朴澈源) 박초수(朴初壽)
박치수(朴致壽) 박태수(朴台壽) 박태수(朴泰壽) 박태순(朴泰淳) 박태원(朴台源)
박태원(朴泰遠) 박풍서(朴豊緖) 박필대(朴弼大) 박필동(朴弼東) 박필시(朴弼時)
박필욱(朴弼彧) 박필증(朴弼曾) 박필채(朴弼采) 박필함(朴弼咸) 박필해(朴弼諧)
박필현(朴弼顯) 박필협(朴弼恊) 박필형(朴弼衡) 박헌양(朴憲陽) 박헌양(朴軒陽)
박현수(朴鉉壽) 박호양(朴鎬陽) 박호원(朴好源) 박홍양(朴弘陽) 박화원(朴華源)
박회무(朴檜茂) 박회수(朴晦壽) 박회수(朴會壽) 박횡수(朴紭壽) 박훈(朴鑂)
박훈양(朴薰陽) 박희양(朴熙陽) 박희양(朴羲陽) 박희천(朴希天

 

 

 

문집명 남계집 (南溪集)(17c)
간략서지 奎 6267南溪 朴世采의 시문집. 正集 87권‚ 續集 22권‚ 外集 16권 合 125권 56책.
간략해제 간행 경위 등을 기록한 刊記가 없어 문집이 이루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저자의 手稿로 이루어졌다는 正集과 外集‚ 續集은 이루어진 시기가 다른 듯하다. 저자의 수고본을 바탕으로 筵臣 李重協의 건의와 景宗의 간행 지시에 따라 후손 朴弼傅가 編次를 정하고 門人 李世瑍이 교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으로 입장을 정한 제자들이 연보를 교정한 데 이어 문집 간행까지 주도하려고 하였으나 손자인 朴弼傅가 끝까지 원고를 내놓지 않아 좌절되었다. 영조 즉위 후 蕩平을 闡揚하면서 탕평에 동조하던 宋寅明 등에 의해 간행이 적극 추진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趙顯命이 1731년경 대구감영에서 간행하였다. 규장각에는 < 6267> 외에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는 ≪南溪文續集≫ 9책(< 4937>)‚ ≪南溪文外集≫ 8책(<奎 4911>)‚ ≪南溪文正集≫ 39책(<奎 4915>) 등도 소장되어 있다.
편저자 박세채 (朴世采)
저자개요 1631-1695 (인조 9-숙종 21)字: 和叔‚ 號: 南溪·玄石‚ 本貫: 潘南‚ 父: 朴漪‚ 母: 平山 申氏(欽의 女)
저자내용 조선후기의 정치가‚ 학자. 遺敎七臣으로 불리던 선조의 舊臣 朴東亮의 손자이며‚ 申欽의 외손으로 11세에 조부인 박동량으로부터 ≪擊蒙要訣≫을 배웠다. 숙부 朴濰에게 출계하여 숙모 趙氏에 의해 양육되었으나 14세에 부친이 사망한 뒤 죽은 형 대신 다시 돌아와 가계를 이었다. 1648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 성균관 유생들이 李珥와 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남의 柳㮨 등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捲堂을 주도하다가 효종의 배척을 받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58년 추천을 받아 이듬해 翊衛司 洗馬에 除拜되는 등 顯宗 때까지 여러 차례 山林職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효종의 산릉으로 수원이 결정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洪命夏에게 알리고 服制 문제에 宋時烈 등의 의견에 동조하여 尹鑴에게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다. 또 1667년 표류한 林寅觀 등을 청나라에 압송하자 李端相 등에게 반대 의견을 알렸다. 현종 말년에 정신병에 걸린 閔世益을 대신하여 아들 閔愼이 할아버지의 상에 代服하게 한 사건으로 숙종 즉위 뒤 南人의 배척을 받아 削去仕版되었다. 尹宣擧 墓碣文 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尹拯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680년 庚申換局 이후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3년 宋時烈의 권유로 조정에 나왔으나 金益勳 사건 등으로 大臣과 臺閣이 맞서고 송시열이 비판받을 때 臺閣의 편에 서면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少論으로 분류되었다. 물러났다가 1688년 少論이 힘을 얻어갈 무렵 다시 나왔으나 1689년 己巳換局으로 다시 물러나 은거하였는데 송시열의 죽음에 3개월간 素帶하였다. 1694년 甲戌換局 후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李珥와 成渾을 文廟에 다시 봉사하고 왕의 명에 따라 붕당의 폐해를 경고하는 교서를 지어 반포하게 하면서 蕩平論을 제기하였다. 또한 자신의 개혁안을 담은 12개조의 萬言疏와 箚子를 다시 올리고 黃海道에 大同法을 시행하기를 청하는 등 개혁안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영의정 南九萬 등과 장희빈 사건에 연루된 張希載 등의 처리에 이견을 보이고 왕도 개혁안 채택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물러나 이듬해 사망했다. 대체로 李珥의 학문을 사숙하며 李滉의 문집을 통해 이를 절충하려는 입장을 지녔으며 性理學과 尊周大義의 의리에 철저하고 제자인 鄭齊斗 등의 陽明學을 변척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문집 외에도 예학과 경학에 관련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내용제목 南溪集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6267
권제 권제목:正集 卷二
제목 없음. 過楊經理鎬去思碑(1646)‚ 丁亥立春有感(1647)‚ 三月十一日曉夢得一句日雨過春草見遺香覺而足之(1648)‚ 廣陵拜外王父申文貞公墓‚ 聞韶蓮亭偶吟‚ 病中懷尹希仲鑴‚ 感物‚ 請栗牛二先生從祀時作‚ 除夕志懷呈閔子昻丈(2수)‚ 聞白江-李敬輿-相國南歸(1650)‚ 六臣墓‚ 有感(7수)‚ 西湖過王父梧窓公舊居有感‚ 感物有作(3수)‚ 得京報(3수)‚ 讀孟子(2수)‚ 志感(2수)‚ 秋日感懷‚ 悼馬行‚ 病起望春感物有作呈洪兄大而-命夏-因事不果 (1652)‚ 哭淸陰-金尙憲-先生(2수)‚ 讀文山集有感時纔聞淸老訃‚ 癸巳立春日偶書呈子昻丈(1653)‚ 次退溪先生憶陶山梅韻(2수)‚ 雨後登西園次晦菴夫子春日偶成韻‚ 次李彛仲-敏敘-寄示韻‚ 曉過南漢城下有感‚ 春日感懷(1654)‚ 坡山道中‚ 臨溪‚ 城南漫興(5수)‚ 偶吟(2수)‚ 次申子晉-碩亨-丈韻‚ 次子晉丈遣懷韻(2수)‚ 詠菊‚ 次子晉丈前寄韻(5수)‚ 次子晉丈後寄韻(5수)‚ 熟復顔子希舜之語感而有賦‚ 乙未春帖(1655)‚ 二月晦始雨志喜‚ 哭樂靜-趙錫胤-令丈(3수)‚ 懷南陽叔父-渟-旅櫬(1656)‚ 過金化戰場‚ 病中苦懷(3수)‚ 入永平白雲山阻雪信宿聖俊上人禪房‚ 偶感靖節事題新曆‚ 送金延之-壽增-赴石城(2수)‚ 1657)‚ 春望‚ 題高城鑑湖堂‚ 鑑湖訪先公舊居有感‚ 聞尹吉甫-宣擧-丈承召入城兩日風雨不得相訪苦吟志懷 (1658)‚ 病吟(2수)‚ 七月十五夜翫月偶吟‚ 臘月十六夜‚ 尹希仲曾索晦菴文集未報適得仁山前編聊敢幷呈幽憂之中因此竊有所感偶成長律仰浼高案尙無以見僣而蘄敎之也(1659)‚ 春日風雪異常‚ 寒食日有感‚ 到鳳城舊庄作‚ 道中‚ 孝宗練日哭班作(1660)‚ 宣武祠將行春祭有感(1661)‚ 病中聞元君始-萬春-將陪大閤原平相國-斗杓-赴燕書贈(1662)‚ 江樓夜坐懷李養而-之濂‚ 偶吟之懷(2수)‚ 懷尹子仁-拯‚ 始到西湖作‚ 二哀詩-幷引‚ 夜臥偶吟‚ 晩晴有作(3수)‚ 詠月‚ 對菊(2수)‚ 冬夜偶吟‚ 記夢‚ 李兄士常-恒-以長律二十韻要和其中蓼莪之感尤足起余竊欲效顰兼述鄙懷久而病澁未果玆於立春日閑坐試筆仍用呈覽‚ 去年行(1663)‚ 西門外玄谷-趙纘韓-先生宅松壇感舊(2수)‚ 玄谷村訪王父舊墟(2수)‚ 江上偶吟‚ 五月四日卽孝廟諱辰値雨有感‚ 移居玄石村作‚ 雨中苦懷‚ 次權兄禮卿-讓-韻‚ 挽羅海州于天-星斗-(2수)‚ 送趙高敞-億-之任‚ 甲辰立春書懷‚ 懷東溟-鄭斗卿-丈‚ 懷楊湖-閔嶪-丈‚ 過白沙遺祠‚ 過鄭松江墓‚ 春雨‚ 次鄭上庠-廣徵-韻‚ 次養而閱明季遺聞韻(2수)‚ 登仙遊峯作‚ 追次尹子仁游楓嶽用栗谷先生韻見寄之作‚ 西門秋夜聽草蟲有感(2수)‚ 秋夜偶吟‚ 王山渡口敬望寧陵‚ 將入谷雲阻雨‚ 谷雲示金堪輿‚ 謁紫雲書院‚ 高嶺寺‚ 病中志懷‚ 將歸.
詩 (1) 避厲入城作(1665)‚ 聞鄭杆城-瀁-丈遷其先松江相國墓挐舟東歸‚ 次養而寄示韻‚ 端居卽事(2수)‚ 余得足疾今五年矣鍼藥無效方自爲撓偶讀晦菴先生贈程道人之作聊感攀和‚ 七月一日‚ 初秋夜吟‚ 夜臥偶吟寄養而‚ 秋雨滯西城‚ 與養而訪楊湖丈新居仍登望遠亭次冲菴用天使韻之作(2수)‚ 重陽前日訪東溟丈暮歸有作錄呈‚ 讀魯陵志寄童土-尹舜擧-丈‚ 西城月夜示趙士威-得重‚ 重過楊經理碑下‚ 行經松都有作‚ 次養而松都懷古韻‚ 送族兄仲八-世柱-先歸洛中‚ 次許使君仲玉-珽-韻留贈‚ 古金郊館‚ 過崧陽書院‚ 崇義祠用東溟韻與愼仲任-景尹-共賦‚ 過思菴遺祠‚ 次士常兄寄示韻‚ 曉起‚ 丙午元日在坡山作‚ 將入白雲山與李兄幼能-端相-同行歷拜其先君白洲-李明漢-墓感而有作(2수)‚ 送楊湖丈游楓岳‚ 過高陽癸巳戰場‚ 過聽松牛溪兩先生墓有感‚ 登花石亭舊墟‚ 客舍曉起‚ 崔漢卿-後亮-次前日溫泉韻以示奉酬‚ 浴後洪秀才-聖叙-與再從弟仲瞻-世標-觀魚川邊余輩病不從遂次其韻‚ 伏聞孝廟於亂後西行時經過湯泉感而有賦‚ 次洪秀才雨後翫月韻‚ 謁花谷書院‚ 訪馬巖太學有感‚ 路見餓莩者慘然有作‚ 雨中端居‚ 前宵月色甚佳偶得二律敬呈白軒相國閤下不敢避僣也‚ 訪楊湖丈不遇登喜雨亭‚ 奉寄尤齋-宋時烈-靑川精舍(2수)‚ 雪(1667)‚ 高王父祠廟奉往林郡預到江頭久坐口號贈族姪錦昌副尉-泰定‚ 李生子望-東耈-百里徒步從我于玄江留講數旬於其辭歸不勝戀歎書此爲贈(3수)‚ 桂陽閔丈-昕-相遇於稠人中已且十年近以兩絶來問厚意不可負也玆故續貂浼呈幸博一粲(2수)‚ 郊行偶作‚ 寒食日有感‚ 抱寒疾(2수)‚ 獨獜齋遺稿‚ 次幼能兄過石室偶吟韻‚ 南門外奉僉樞族父-煥-從叔父-濠-二公會話歸家夜適無寐謹步篷字韻以呈‚ 曉吟‚ 至後月夜偶吟‚ 訪楊湖丈歸路作‚ 詠雪‚ 戊申立春感懷‚ 偶書(3수)‚ 月夜有感‚ 上元(2수)‚ 聞沂川-洪命夏-相之喪明將發引病不能往掩淹涕以書(3수)‚ 鳳村大父舊居有作‚ 三月旣望夜‚ 詠當歸草‚ 白采叔-以受-汝三-以復-諸生辭歸精舍闃然偶成‚ 讀重峯集‚ 挽郭掌令-聖龜-丈‚ 七夕‚ 酬桂陽閔丈‚ 是月十五日與士威及宋子文-斗章-諸君泛舟西湖‚ 哭鄭正-瀁-丈‚ 漢卿水部在津所寄示諸作聊次津字一韻以報‚ 送養而歸湖中‚ 追次族兄季肯-世堂-簑字韻贈別燕山之行‚ 梁生季通-處濟-寄一絶有乾惕無咎之語遂次其韻時余承召未赴‚ 小至夕偶作‚ 冬至日‚ 雨中志懷‚ 夜起偶吟‚ 病中作(2수‚ 1669)‚ 記夢-幷引‚ 挽尹正-舜擧-丈‚ 曉起感懷(2수)‚ 三月十五日在淨土寺是日三宮幸溫泉‚ 步出溪上次晦菴武夷精舍韻‚ 病後閑眺次明道郊行卽事韻‚ 卽事‚ 挽宋扶餘伯興-奎禎‚ 沈生-世綸-來訪偶吟一絶以贈之‚ 雨中不寐作‚ 挽魯西-尹宣擧-先生(3수)‚ 酬養而留贈(2수)‚ 偶尋珠尼洞寺贈元上人‚ 曉覺‚ 燕山懷古贈愼行臺仲任(2수)‚ 次栗谷牛溪二先生題僧軸韻(2수)-幷引‚ 過惠陰嶺馬上口號‚ 送靜齋發引于東關廟雪涕有作‚ 李重賚-啓晩-遠來相訪一宵旋返不勝悵然‚ 酬養而次晦菴雪中懷人韻‚ 夜吟‚ 家奴取薪有一老査襍於其間從弟世集持歸以爲木假山置於案側仍賦五言律來示戱次其韻‚除夕上墓河梁氷薄移就銅雀船路‚ 過白休菴遺墟(1670)‚ 交河道中望海‚ 寒泉感懷‚ 自露梁乘舟歸西湖作‚ 與養而子文及高汝根-晦-訪衿陽紫霞洞歇馬溪上次養而韻‚ 宿三幕寺別養而‚ 伏聞今日春宮行冠禮不勝畎畝之祝有作‚ 過牙山高湧山次王父九日登高韻‚ 歷拜李忠武舜臣墓‚ 到華陽洞作‚ 葩串(2수)‚ 仙游洞‚ 次宋秀才-疇錫-韻‚ 溪上謾吟(3수)‚ 過慶徵君-延-閭‚ 新昌蓮堂偶吟(1672)‚ 偶吟示沈士磬-俔-任大年-元耈-二生-幷引‚ 雪夜詠懷(5수)‚ 癸丑立春書懷‚ 挽石湖-尹文擧-令丈‚ 移 偶栗 浦値 寒食 日作 ‚ 哭同 春堂 -宋 浚吉 -先 生( 2수)‚ 哭 楊湖 丈靈 几‚ 馬 場舊 寓偶 吟( 2수 )‚ 卽事(2수)‚ 次沈明仲-世熙-寄示韻‚ 紫雲書院次朱子濂溪書堂韻‚ 登熊潭臺上作‚ 謁坡山書院‚ 甘露寺次晦軒先生韻‚ 挽東溟先生(3수)‚ 延安平遠堂次梧陰諸公韻‚ 望首陽山作‚ 過海州主治有感-幷引‚ 謁隱屛書院‚ 謝沈君-瓘-携酒遠訪‚ 重陽登金谷江岸‚ 十五夜登壓海樓示同遊諸君‚ 寧陵靈駕今將進發於黃驪而臣適待罪秋曺不克往哭於陵前路次雪涕有作以寓無窮之痛‚ 除夕在秋曺後洞作(2수)‚ 觀桃源圖(2수‚ 1674).
送養而入堤峽(1675)‚ 過東淮-申晩-靑白堂‚謁石室遺祠‚ 宿祠宇村舍夜夢尤齋丈遺以詩札寫在綿布云北方無紙故如此感而有賦(2수)‚ 楊山途中有感(6수)‚ 歷拜申兄用晦-炅-季良-最-墓有感(4수)‚ 奉次尤齋道中韻‚ 次李君-光周-留贈韻‚ 曉起偶吟(2수)‚ 謁沂川書院‚ 敬過長陵有感‚ 坡山道中聞皇朝吳將軍三桂使蒙古兵襲取瀋陽將會圍北京雖未辨虛實不覺喜躍仍有所述(5수)‚ 雨後散步(2수)‚ 山谷有歸來兮逍遙西江波浪何時平之語晦翁見之以爲可以泣鬼神率意命筆寄懷南海(12수)‚ 楊寓茅茨成已久矣七月初吉始引井爲塘夕坐偶吟時方大旱(2수)‚ 次蔡伯瑞-龜章-韻‚ 渡龍津‚ 平丘過金大成忠簡二公墓(2수)‚ 東坡驛有感‚ 哭任榮川-濬-丈‚ 戱贈南仲輝-二星‚ 次兪顯叔-晦一-寄示用朱文公自警韻(2수)‚ 金久之-壽恒-相久謫朗州思欲以句語寄懷偶閱先王父在謫時贈仙源淸陰二先生之作怵然興感步韻却寄(2수)‚ 酬羅生仲輔-碩佐-留贈‚ 臘月十一日雨雪舟渡錢浦‚ 携家到砥平玄淵作(2수)‚ 去歲初李養而入堤峽有詩相贈久未酬謝今適意到次韻寄之‚ 將作湖西行出次澤堂-李植-墳菴‚ 敬過英寧二陵(2수)‚ 過稷山丁酉戰場有感‚ 牙州懷古(2수)‚ 訪外先祖尙成安公林川遺基‚ 扶餘白馬江懷古‚ 到定山彌勒堂尹子仁子恕-推-兄弟來會別後有作‚ 成歡驛樓新成頗壯麗‚ 過弘慶寺碑次鄭松江韻‚ 雨後水原道中望冠岳山有感‚ 敬過孝陵‚ 次海伯趙弟公擧-師錫-寄仲輝韻‚ 挽李叅判-俊耈-令丈‚ 次李季周-端夏-寄示韻‚ 過婆娑城‚ 過中良浦有感-幷引‚ 拜義谷曾叔祖退菴公墓(2수)‚ 次族姪泰徵寄示韻‚ 蓮城山下有懷參奉家叔-淲-兼示仲瞻弟(2수)‚ 曉發忘憂里回望京闕有感‚ 八月十七日過王山灘聞閔尙書大受-鼎重-持叔-維重-仲季來會崇陵次前孝廟練日韻却寄翌日是國祥‚ 夜坐偶吟(2수)‚ 洪川泛波亭次林塘諸公韻‚ 訪壽泰寺歸時由詠歸坪作‚ 洪陽感古‚ 雪後過東湖讀書堂懷靜齋兄有感‚ 寄別柳弟悠久-尙運-赴江界‚ 玄巖偶吟示士磬諸君‚ 出驪江路中作‚ 季春卄六與君始諸友重尋泰安洞歸路逶迤訪東溪而上洞壑奇邃實近地所罕翌朝有作示李載叔-堉‚ 次林德涵-泳-留贈韻却寄(2수)‚ 偶吟寄尤齋籬中‚ 聞寅伯-申晸-兄來省先墓於忠原往訪一宿歸路有作却寄兼示公擧弟‚ 記夢-幷引‚ 贈羅顯道-良佐-奉親還洛中(2수)‚ 北原新寓喜雪(2수)‚ 中原道中有感‚ 可興村感舊(2수)‚ 寄題申玉爾-汝栻-斗月亭‚ 過水落山有感‚ 助浦憶金元會-澄‚ 渡迷半程有小洞峯巒奇秀石澗琮琤可愛賦而記之‚ 驪州路上拜從舅申承旨-翊亮-墓有作‚ 過衿陽樂靜丈舊居‚ 旱旣太甚不耐畎畝之憂偶記先王父己未七月十五日詩謹步其韻以志之時戊午六月三日夜也‚携李生仁甫-時春-諸人泛舟蟾江翠屛下‚ 訪龍頭亭‚ 寄冲鳳寺讀書二生時仁甫與趙君-頊-共讀小學(2수)‚ 謝韓山李使君仲周-紳夏-歷訪仍充別語‚ 過孤山‚ 次文谷-金壽恒-韻寄李姪同甫-喜朝-幷引(2수)‚ 次金起之-壽興-相退憂堂追步朴思菴空字韻以塞記銘之請‚ 楊江滯雨錄示權致道-尙夏(2수)‚ 雨中書懷(2수)‚ 夜過寧陵‚ 睡覺不寐詠太極圖‚ 挽李樂甫-藼(1680)‚ 四月一日大雨近歲所未有喜賦‚ 次金士直-楺-韻-幷引‚ 五月二十五日大雨志喜旋聞尤齋諸人皆蒙恩霈(2수)‚ 次外王父送淸陰韻贈申兄寅伯赴燕山盖皆以六月登程也‚ 聞同甫病蘇賦此却寄‚ 蒙朴大叔-鐔-自石室院舍來訪適坐病故不克就謝詩以代之(2수)‚ 風雨孤坐偶閱先王父墓下呈仲氏之作不勝愴感謹步其韻‚ 挽趙正-泰相(2수)‚ 挽趙江西復亨-根(2수)‚ 挽崔校理周卿-後尙(1681)‚ 挽成知事-稷-丈‚ 谷雲金延之取崔孤雲流水籠山語以名溪亭仍次韻求和於諸公玆敢續貂‚ 新齋正對南漢山城有感‚ 六月卄四日生朝有感書以志之‚ 送德涵試士湖南(3수)‚ 謝申叔弼-翼相-屢訪山齋‚ 族兄仲固-世堅-沈疾不得相見者已將十年矣不堪悵菀賦此奉寄‚ 與季肯兄泰徵姪約宿佛巖寺翌日歸家徵姪獨滯却寄‚ 挽曹兄判官-敬彬‚ 次李弼卿-翊相-寄示韻以謝‚ 送南仲輝赴燕山‚ 挽姜鍾城叔夏-碩昌‚ 贈申公獻-琓-北行(3수)‚ 挽龍溪李處士-榮元-遷葬‚ 大雪後翫月偶吟.
壬戌立春日感懷(1682)‚ 正月卄九日朝廷遣官宣諡於先祖潘南先生墓次翌日致祭感歎之懷‚ 文會書院東西祠成已踰年矣余始來謁有作示閔春卿-震元-諸君‚ 拜東陽雲峯祠有感‚ 助浦訪愼仲任書室‚ 挽慶寧郡主‚ 江西寺壓海樓感舊次壁上諸人韻‚ 湖西僧惠忍進一絶因示尤翁所贈西林達觀四大字‚ 送尹叔麟-趾完-奉使日本(2수)‚ 雨後復登壓海樓有感‚ 次沈丈-宗迪-孔潭書室膺召命自是不敢歸省安山先壟今年九月乃克詣闕陳情而退又以事故遷就十二月初旬始得遂志感韻‚ 沈丈聞余明齋-尹拯-會于甘露寺有詩相寄次韻以酬‚ 送玉爾赴高城‚ 送養而赴靑山‚ 庚申五月猥而有賦‚ 過三田渡‚ 恭聞聖上草哀痛敎頒示于八方不覺感涕以書(1683)‚ 靜然亭有作‚ 三月十三日在闕庭感作‚ 寄贈李留守彛仲‚ 八月五日壽母生朝次晦翁先生韻‚ 與沈丈及諸學子會宿孔潭書室時中秋翌日也‚ 登東湖梨花亭有作‚ 挽兪玉果-瑾‚ 伏聞聖候已得安復喜極有作是日適冬至‚ 明聖王大妃挽詞(3수‚ 1684)‚ 雨後松亭作‚ 寄淮陽張使君叔涵-善冲‚ 次載叔韻‚ 挽草廬-李惟泰-丈‚ 送南右相雲路-九萬-使燕山(2수)‚ 次仲任追寄韻兼奉沈丈‚ 恭書摹刻毅宗皇帝非禮勿動四字後‚ 次韻張叔涵四聖御筆歌(1685)‚ 二月卄七日是五冠書院賜額寒食來路謹叅祭列有賦‚ 次任大年示院中諸益韻‚ 族孫錦平-弼成-北行日迂路來見於助浦書贈(2수)‚ 雨中過廣津‚ 送權君敬-持-赴錦山(3수)‚ 禿浦哭淸城金相-錫冑-歸櫬‚ 挽趙副學光甫-持謙(2수)‚ 送同甫姪赴鎭川(3수)‚ 挽貞明公主‚ 至月十日夜‚ 寄藍浦鄭使君眞卿-尙樸(2수)‚ 送任大年赴寧海‚ 聞崔汝和-錫鼎-略退燕行之期無路拚別偶吟三絶以寄之(1686)‚ 挽崔叅判逸之-逸‚ 挽族姪察訪泰維(3수)‚ 過東津有感寄南雲路相時有燕山再行‚ 敬題端午賜扇後(2수)‚ 送任汝諧-元聖-赴大同督郵‚ 挽李掌令-三錫(2수)‚ 寓石室院齋偶吟志懷(2수)‚ 訪養而溪堂路中作‚ 將移家坡山登舟於平丘江上‚ 次許夏昌--詠新居韻兼奉地主申玉爾‚ 次 權兄 說卿 -說 -寄 贈韻‚ 偶浪洞感古有作‚ 挽 驢陽 府院 君閔 公- 維重 (2수) ‚ 挽韓執義魯詹-泰東‚ 挽朴秀才師賢-希古‚ 送李子文-東郁-赴鍾城(3수)‚ 戊辰元日志感‚ 留棲天神山文殊庵偶吟‚ 挽李判書彛仲(3수)‚ 挽鄭判樞-知和‚ 挽李右相仲羽-䎘‚ 七月入朝蒙恩遆職後出舍玄石江上感而有賦寄示汝和‚到高嶺寺偶吟‚ 待命之餘不敢歸家轉寓棠山小庵適値慈親生辰有作‚ 送族姪主牧泰輔棄官歸時李成二先生有黜享事也‚ 雨後望春有作(2수)‚ 挽白汝三‚ 次滄海-許格-丈寄意之作‚ 七月十八朝聞尤齋於是日歸葬隋城雪涕有作‚ 挽尹正言公度-世喜‚ 庚午元日偶書(1690)‚ 承李君實-世華-來別栗谷店舍賦此以謝‚ 宿花石亭偶閱文谷一絶感涕追步‚ 過牧丹山懷牧隱先生‚ 鵲川新基示同行崔士溫-瑞吉-諸君‚ 溫泉留別兪顯叔(2수)‚ 次晦庵夫子日用自警韻示精舍諸生‚ 滄海丈寄示所次白生重晦-海明-戊辰歎要和余坐病昏不克續貂謹以長律申謝‚ 挽許滄海丈(2수)‚ 夏日病苦偶書‚ 松都金生國卿-士珎-來讀書堂得疾徑歸余適感痛不克面別詩以替意‚ 中秋前夕病吟‚ 翫菊(2수)‚ 偶飜呂與叔詩語示金生宇卿-普‚ 挽李領樞-尙鎭‚ 聞淸兵大敗於韃子勢甚危急慨然有作(2수)‚ 挽兪留守伯圭-瑒(2수)‚ 助浦留別追送諸君(崔瀜·尹殷聘·申世雄·李綖)‚ 挽朴承旨仲憲-元度‚ 耳聾‚ 寄豐壤李進士-后晟-丈‚ 錦城崔生平仲-衡-留學數月而歸臨別書贈(2수)‚ 今年寒食是上巳前一日爲淸明次少陵小寒食韻時在花谷‚ 挽恥菴-李濂(3수)‚ 東陽書院偶吟志感‚ 挽尹副學養一-敬敎‚ 挽趙同樞-逢源-丈(2수)‚ 挽兪顯叔‚ 五月三日夕小泛前溪(2수)‚ 書堂月夜偶吟‚ 次李秀夫-萬挺-寄示韻‚ 五哀詩-幷引‚死別已矣生別惻惻溪齋關雨黙坐馳想懷不自裁書用識哉時六月流頭後二日也(7수)‚周甲生朝雪涕志感‚ 挽李尙州大而-恢(2수)‚ 過香洞約會尤翁處有感‚ 楊江獨渡‚ 趙相公擧之行病不能送貧不能贐老懷益惡書此爲贈‚ 挽金星州夏卿-禹錫‚ 次李生-潗-留贈韻‚ 挽李都事-徵龜-弟(2수)‚ 挽李判書弼卿‚ 冬至後大雪書堂偶吟‚ 聞淸國大敗假道將入于白山朝廷議欲準許憂憤有賦‚ 寄知禮徐使君士和-文淑.
辭侍講院進善疏一 (1) 1668. 시강원 진선에 제수된 뒤 이를 사양하는 상소문. 죄를 입어 물러나 있은 지 20여 년에 추천을 받았으나 이제 나아가면 스스로 欺罔하는 것을 무겁게 할뿐이니 물러나 평소의 뜻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
辭侍講院進善疏二 (2) 柳㮨에 대한 처리 문제로 成均館 儒生들과 捲堂했던 일로 스스로 屛廢하였던 점을 들어 시강원 진선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侍講院進善疏三 (3) 시강원 진선에 제수된 뒤 前 朝에 사은하지 못했던 일과 자신의 능력 및 신병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再除侍講院進善疏 (6) 시강원 진선에 다시 제수된 뒤 지난달에 이미 체직되었는데 다시 소명이 내려 經筵에 들라는 것은 조정의 名器를 욕되게 할뿐이라며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申召及再除侍講院進善疏一 (9) 1669. 시강원 진선에 다시 제수된 뒤 신병을 들어 經筵의 강학을 비울 수 없으니 급히 올라오라는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申召及再除侍講院進善疏二 (11) 시강원 진선에 다시 제수된 뒤 거듭된 召命을 신병을 들어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因閔愼査事首罪疏 (13) 1673. 閔愼이 아버지 閔世益 대신 할아버지 閔嶪의 服을 대신하게 한 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자신이 首罪라며 죄를 청한 상소문.
擬上申請罪名疏 (20) 1674. 閔愼의 일로 刑曹에서 명을 기다린 지 11朔이나 되었는데 아직 죄가 정해지지 않았다며 罪名을 정해주기를 청하는 상소문. 閔愼은 자신을 믿고 따랐을 뿐이니 자신의 죄를 다스려 달라는 내용.
辭召命及成均館司業疏一 (21) 1680. 閔愼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의논에는 모순이 있지만 자신에게 지적된 죄목이 모두 인륜과 法義에 중대한 것이라서 편안히 직책을 맡을 수 없다며 소명 및 성균관 사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及成均館司業疏二 (24) 자신의 죄가 君臣父子에 관계되는 중한 것이며 山林儒士를 구하여 勸講하는 직책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들어 소명 및 성균관 사업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司憲府執義疏 (27) 물러나 형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형편과 신병을 들어 召命 및 司憲府 執義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及再除司憲府執義疏一 (29) 자신의 志氣와 經術이 모두 미치지 못하여 經席과 臺閣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며 召命 및 司憲府 執義에 다시 제수된 것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再除司憲府執義疏二 (31) 병이 심해졌다며 召命 및 司憲府 執義에 다시 제수된 것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疏一 (1) 1681. 나아가 謝恩만 하는 것은 自守하는 것만 못한데 자신은 소명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
辭召命疏二 (3) 소명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 서울에 올라왔는데 大行王妃의 因山을 당하여 여관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돌아가는 중에 병을 얻어 村舍에 머물러 있다는 내용.
辭召命疏三 (5) 旱災로 인하여 다시 부른 소명에 신병을 들어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因災訪問疏 (6) 旱災와 地震으로 인하여 사람을 보내 묻자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있는 분수로 보아 자문에 응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疏 (9) 山林 元老를 불러들이는 중에 자신이 虛名때문에 끼어있을 뿐 召命에도 응하지 않고 재해에도 고하지 않고 禮를 물었을 때도 답하지 않았었다며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及再除成均館司業疏 (11) 召命과 성균관 사업의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문. 朱子가 南康에 있을 때의 封事와 災異에 대한 箚子를 인용하여 警戒에 힘쓸 것을 진달하는 내용.
辭召命疏 (13) 1682. 召命에 사양하는 상소문. 질병 등을 이유로 소명을 사양하고 아울러 宋時烈의 보고에 따라 이루어진 ≪心經釋疑≫를 校正하라는 명을 사양하는 내용.
辭司憲府執義疏 (15) 寒食 성묘 중의 설사 등 신병을 들어 사헌부 집의의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承政院同副承旨疏 (16) 出納하는 임무에 맞지 않고 병이 있다며 승정원 동부승지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吏曹參議疏一 (18) 낮은 벼슬을 사양하고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없고 왕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데다 병이 깊다는 것을 들어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
辭吏曹參議疏二 (20) 계속된 諭音에 사례하고 두통과 설사 등 자신의 병세를 진술하며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
辭吏曹參議疏三 (22)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 뜻을 아뢰고 사양하려고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며 띠고 있는 직책을 먼저 갈아주면 병세를 보아 나아가겠다는 내용.
詣闕陳情疏 (23) 자신이 어리석어 내려진 虛禮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며 宮闕에 이르러 사정을 아뢰는 상소문.
辭出入筵席之命兼辭食物疏 (28) 학문도 없고 신병이 있어 감당할 수 없는데다가 사직한 뒤 待罪하는 중이라며 筵席에 들어오라는 명과 먹을 것을 내려 준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상소문.
引對後申辭告歸仍進經筵故事疏 (31) 引見한 뒤 다시 사직하고 돌아가겠다고 아뢰고 자신이 편집한 程子와 朱子의 經筵故事를 올리는 상소문.
經筵故事 (1) 程頤가 경연에 참여했던 시절의 故事와 정이가 올린 글을 모아 올린 상소문. 續綱目과 年譜에 보이는 程頤의 인물됨과 徵召 과정을 소개하고 이 글이 宋 哲宗 때 程頤가 崇政殿 說書로 징소되어 上奏한 經筵 3事와 이후 經筵에서 奏對한 것을 모은 것이라는 내용.
論經筵箚子 (2) 經筵을 논한 程頤의 箚子에 자신의 의견을 부연한 글. 송나라 哲宗이 즉위한 뒤 經筵의 임무‚ 傅保의 직책‚ 寅畏의 道 등 經筵에 관한 3가지 일을 논한 내용. 勸講과 輔導의 임무에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내용.
乞六參日上殿箚子 (8) 程頤가 올린 차자. 勸講하는 관원이 경전의 뜻을 밝히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니 더위로 경연을 파한 동안에도 며칠에 한 번씩은 儒臣을 대하라는 내용.
三學看詳文 (8) 內舍와 上舍 등 학교에서 시취하는 옛 제도의 의의를 말한 程頤의 箚子에 덧붙여 최근의 학교가 功利와 詞章을 위주로 하고 어진 이를 가려 선비를 가르치도록 하는 본의를 잃었다고 경계하는 내용.
上太皇太后書 (10) 程頤가 皇太后에게 4월말에서 中秋까지 더위로 講을 파하게 되는 시기에도 內殿이나 시원한 곳으로 講官을 불러 강학할 것을 권하고 어린 황제를 輔導할 방도를 아뢴 글을 인용하여 肅宗에게 藥石으로 삼을 것을 권함.
語錄-附 (16) 禁中 후원에 坊을 만들면서 金으로 水桶을 만드는 것을 막은 일 등 程頤의 행적을 語錄에서 뽑아 놓은 글.
年譜-附 (19) 程頤가 황제 앞에서 왕으로서의 도리 대신 ‘顔子가 그 樂을 고치지 않았다’는 구절을 講한 이유를 門人들에게 해명한 일 등 經筵講義에 관한 것 중 文集에 빠진 내용을 연보에서 뽑아 놓은 글.
論冬至稱賀箚子 (21) 居喪의 禮를 들어 冬至 賀禮 대신 위로의 예를 행하고 勸講할 것을 청한 程頤의 箚子.
又上太皇太后疏 (22) 程頤가 太皇太后에게 垂簾聽政 뒤에는 當日에 講官을 불러 講하자고 청한 내용.
乞就寬凉處講讀奏狀 (22) 程頤가 여름으로 더워지니 시원한 곳으로 옮겨 강독하기를 청한 내용.
又上太皇太后疏 (23) 程頤가 太皇太后에게 여름 더위를 피해 延和殿 등에서 강할 것을 청하였는데 給事中이 이를 반대하자 宋이 건국된 뒤에도 행해졌던 것을 들어 殿上에서 강설하는 전례가 있다는 것을 말한 程頤의 상소문에 講學이란 正心을 요체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인 내용.
論開樂御宴奏狀 (28) 喪禮 중에 황제가 음악과 함께 연회를 여는 것이 예의 본의를 잃고 人情을 해친다며 이를 파할 것을 청하는 程頤의 奏狀에 너무 엄하다고 비판한 蘇軾의 잘못을 지적하며 程子의 師道에 유념하기를 청한 내용.
經筵故事 (1) 朱熹가 경연에 참여했던 시절의 故事와 경연과 관련하여 올린 상소문 등을 모은 글. 宋 나라 寧宗이 즉위한 뒤 煥章閣 待制 兼 侍講으로 46일 동안 7차례 進講한 내용.
甲寅行宮便殿奏箚一 (2) 朱熹가 宋나라 孝宗 사후 칭병하며 나오지 않은 光宗 대신 즉위한 寧宗에게 올린 奏箚에 부연한 글. 人倫의 變을 만나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먼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다한 뒤에야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는 내용.
二 (5) 宋나라 寧宗이 즉위한 뒤 朱熹가 올린 두 번째 奏箚에 부연한 글. 우선 儒臣을 불러 經藝를 토론하고 詞章이 아니라 居敬에서 출발하여 讀書를 통하여 窮理하여야 하며‚ 明나라의 도움으로 守成할 수 있었으니 居敬을 근본으로 삼고 어진 이를 구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병사를 양성하여 복수를 기약하자는 내용.
山陵議狀 (12) 송나라 孝宗의 산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趙彦逾이 땅이 얕고 물이 있어 적당하지 않다고 지적하여 의논이 분분할 때 朱熹가 올린 議狀. 術家의 말이긴 하지만 幽明이 머물 곳이니 땅을 잘 가려 길지를 얻어야 할 것이며 여러 곳을 얻은 뒤 地理를 잘 아는 관원을 보내 서로 비교하라는 내용.
十月辛丑始講自經首止第三節 (14) ≪大學≫의 첫 머리부터 3절에 대한 朱熹의 경연 강의. ≪大學≫ 공부의 의의‚ 明德과 新民의 뜻‚ 明德과 新民에서 止於至善에 이르는 것에 대한 설명과 사물의 本末과 始終의 先後를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는 내용.
年譜-附 (22) 朱熹의 강의가 성의를 다하고 명백해서 왕이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연보의 내용.
乙巳晩講自第四節止第六節 (22) ≪大學≫ 4절부터 6절에 대한 朱熹의 경연 강의. 格物에서부터 修身까지를 明德으로‚ 齊家부터 平天下까지를 新民으로 나누어 物格에서 天下平까지의 뜻을 설명하고 修身이 근본이 됨을 설명함.
乞進德箚子 (26) 덕에 나아갈 것을 청한 朱熹의 箚子와 이를 周易 乾元의 道에 비긴 해설. 元后는 백성의 부모로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 하며 농사와 가난을 모르니 경전과 역사를 가까이 하고 대신을 자주 불러 백성의 休戚을 구하여야 함. 또한 학문에 뜻을 두어 氣質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내용.
乞不以假故逐日進講箚子 (31) 까닭을 꾸며대지 말고 날마다 진강할 것을 청하는 朱熹의 箚子와 당시 왕이 처음에는 嘉納하였으나 소인들의 방해로 끝을 보지 못해 혼란한 군주가 되었다는 해설.
乞差官看詳封事箚子 (32) 雷雨로 인한 求言에 封事한 것을 자세히 살핀 뒤 차차 시행할 것을 청한 朱熹의 箚子. 잘못된 것을 아뢰는 대신 신료의 말을 잘 살피라고 한 이유에 대한 해설.
乞瑞慶節不受賀箚子 (34) 황제의 梓宮이 아직 殯殿에 있으니 瑞慶節의 하례를 받지 말라고 청한 朱熹의 차자.
經筵故事∕庚戌講傳首章 (1) ≪大學≫ 首章에 대한 朱熹의 經筵 講議. 康誥의 ‘文王이 능히 明德을 밝혔다’라는 것에서 ‘밝음이 體라는 것을 알아 어둡고 협소한 데 빠지지 않아 至善에 이르러야 한다’는 克明峻德에 이르기까지의 강의와 이에 대한 해설.
經筵留身面陳四事箚子 (3) 近習에 따라 東宮 3백여 간을 修葺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자간의 윤리로 上皇帝에게 문안하는 예를 폐하지 말아야 한다. 관리의 진퇴를 멋대로 하지 말고 조정의 기강을 엄하게 하여야 한다. 山陵을 잘 가려 새로 조성하여 壽皇의 유체를 편히 하여야 한다는 4가지 일에 대해 의견을 아뢴 朱熹의 차자와 이에 대한 해설.
閏十月戊午朔晩講傳二章 (11) ≪大學≫의 傳 2章에 있는 湯 盤銘의 ‘日新’‚ 康誥의 ‘新民’‚ ≪詩經≫의 ‘維新’ 등에 대하여 경연에서 강한 내용과 이에 대한 해설.
附-年譜 (16) 朱熹가 日新 등을 강한 것은 人主에게 더욱 부지런하기를 경계한 글이라는 내용.
庚申早講傳三章 (16) 朱熹가 경연에서 ‘止於至善’을 해석한 ≪大學≫ 傳 3장의 ‘畿內 천리는 백성들이 사는 곳’이라는 구절 이하 文王의 德을 칭한 구절 등에 대해 강한 내용.
論災異箚子 (20) 朱熹가 경연에서 까만 안개가 사방을 막아 도성에서는 사람을 지척에서 분간할 수 없고 얼굴에 모래흙이 달라붙는 재이를 당해 황제의 恐懼修德을 청한 차자와 이에 대해 부연한 내용.
乞令看詳官面奏箚 (22) 관원들이 臣庶들의 封事를 자세히 살펴 올린 책자가 완비되었으니 經幄에서 面奏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箚子.
辛酉晩講傳四章止五章 (22) 孔子가 백성들이 송사를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 뜻을 풀이한 ≪大學≫ 傳 4章에서 物格知至의 뜻을 풀이한 傳 5章까지에 대한 경연 강의와 이에 대한 설명.
乞討論喪服箚子 (29) 朱熹가 올린 箚子. 한나라 文帝 이후 시작된 短喪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통을 이은 송나라 寧宗에게 孝宗의 嫡孫으로서 대신 執喪하며 斬衰 3년복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권하는 내용.
面奏祧廟箚子 (31) 송나라 태조의 高祖였던 僖祖 등의 사당 훼철을 반대하고 祧廟할 것을 주장한 箚子와 이에 대한 설명.
丙戌晩講傳六章 (34) ≪大學≫ 傳 6章 誠意와 愼獨에 관하여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과 주자의 大學講義가 여기서 끝났다는 설명.
乞修三禮箚子 (39) ≪예기≫를 존중한 王安石이후 ≪儀禮≫가 파하여지고 제생들도 虛文만 외우고 있어 자신이 의례에 注疏를 달던 중이라며 한가한 곳에 사람을 모아 편찬을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한 朱熹의 箚子. 뒤에 주희가 경연에서 올린 주차의 의의와 年譜 등에서 뽑은 기록을 덧붙임.
史官傳諭後辭召命疏 (1) 1682. 사관이 와서 筵席에 출입하라고 傳諭한 뒤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疏 (3) 우레와 무지개의 재앙을 당하여 민심의 소재가 곧 天心이라는 것을 알고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의견을 아뢰며 召命을 사양한 상소문.
辭召命疏 (5) 1683. 재이로 인하여 경계할 말 등을 청한 傳諭에 대해 신병과 부족한 재질을 들어 사양한 상소문.
史官傳諭後辭召命疏 (6) 사관을 보내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제수의 순서가 尹拯보다 앞서고 또한 大臣의 예로 부른 것은 예의가 倒置되었다는 것과 身病을 들어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赴召到中路辭召命疏 (8) 소명을 받고 올라오는 길에 신병과 자신의 진퇴에 국가의 안위가 걸려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들어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到城外辭召命疏一 (11) 성밖에 도착한 뒤 內醫와 약물을 보내 看病해준 것에 사례하고 經筵의 책임은 감당할 수 없어 이미 그만두었다며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到城外辭召命疏二 (13) 성밖에 도착하여 소명을 사양하며 올린 두 번째 상소문. 곧바로 경연에 나오라는 傳諭는 隱逸이나 儒術이 있는 선비를 招筵하는 예이니 관직 없이 경연에 나아갈 수 없으며 宋時烈도 부르니 올라왔는데 오만하게 군다는 말도 있다지만 이미 정승에 올랐던 송시열과는 처지가 다르니 自處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내용.
入城後乞賜進退疏 (15) 入城한 뒤 병이 더 심해졌다며 進退를 분명히 내려 달라는 내용의 상소문.
辭賜食物且命闕內入直疏 (15) 먹을 것을 내리고 궐내에 入直하도록 한 것은 大老를 우대하는 예로 자신은 이를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한 상소문.
辭吏曹參議並申前請疏 (17) 淸選을 주관하는 이조참의 직을 이미 사양하여 체직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 뜻을 아뢰었으며 자신은 大老와 여러 선비를 초청하여 경연을 열고 국정을 도모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며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吏曹參議疏 (18) 재이로 인하여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상소문. 修省을 더하여 私慾을 이기고 殷나라 太戊처럼 改過遷善하여 삼가고 공경하며‚ 高宗처럼 나라를 편안하게 하기를 청한 내용.
三辭吏曹參議兼請還寢家舍之命疏 (20) 불초하다며 이조참의 직을 세 번째 사양하고 湖西에서 올라온 宋時烈과 사정이 달라 성내에 머물 곳이 있다며 금령을 어기고 내려 준 집을 돌려주겠다고 청한 상소문.
辭賜貂帽疏 (21) 경연에서 옥 장식을 받았는데 다시 貂帽를 하사받는 것이 송구하다며 사양한 상소문.
四辭吏曹參議兼陳筵講未盡之義疏 (22) 이조참의 직을 사양하며 경연에서 미쳐 陳達하지 못한 敬과 義의 뜻을 거듭 아뢴 상소문.
詣闕辭賓廳會議疏 (25) 벼슬이 宰臣의 반열에 끼어 있지 않고 言責 論事할 관직에 있지 않다며 宋時烈의 청에 따라 三司와 宰臣이 함께 하는 賓廳 회의에 참여하도록 한 것을 사양한 상소문.
五辭吏曹參議疏 (26) 이조참의는 초야에 있던 자신이 차지할 관직이 아니고 병으로 한 번도 政事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체직되지 않고 강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과 宋時烈의 소 중에 거론된 것 등을 들어 이조참의 직을 사양한 다섯 번째 상소문.
六辭吏曹參議疏 (27) 신병으로 3월 5일 주강에 나아가지 못했던 것 등을 들어 이조참의 직을 사양한 여섯 번째 상소문.
七辭吏曹參議兼請勉留致仕臣宋時烈疏 (28) 신병과 淸望을 가리는 임무에 맞지 않음을 들어 이조참의 직을 일곱 번째 사양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바꾸어 줄 사람은 宋時烈 밖에 없으니 致仕하려는 것을 힘써 만류하여야 한다고 청한 상소문.
辭兼帶成均館祭酒疏一 (30) 성균관 대사성 趙持謙이 이미 잘 살피고 있다며 成均館 祭酒 직을 兼帶하라는 명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兼帶成均館祭酒疏二 (32) 경연에서 輔導할 책임과 이조참의 직책도 감당할 수 없고 병도 있다며 겸하고 있는 成均館 祭酒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因違牌八辭吏曹參議疏 (33) 경연에서도 실수가 많았고 병으로 3월 17일 開政할 때 牌招에 응하지 못했다며 이조참의 직을 사양하는 여덟 번째 상소문.
因臺論徑歸留上告歸疏 (34) 대간의 의논이 일자 상소를 남기고 돌아가겠다고 고하는 상소문. 조정의 의논이 어긋나는 것을 염려하여 송시열과 함께 사헌부의 의논을 참작하여 처리했는데도 臺閣이 論啓를 정지하지 않는 것은 (金益勳의 처벌에 대하여) 함부로 말한 탓이요 擬望에 대해서도 대간의 평을 초래하였다고 自引하는 내용.
再遣承旨傳諭後乞賜明旨進退疏 (37) 승지를 보내 누차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재주와 역량‚ 大官과 小官의 양 쪽 의견을 보합하지 못한 잘못을 들어 자신의 進退에 관한 明旨를 내려 주기를 청하는 상소문. 왕이 奏對하는 말에 의견을 고치지 않는 잘못을 지적함.
請依前定進講心經綱目疏 (1) 1683. 전에 정한대로 ≪心經≫과 ≪綱目≫을 進講할 것과 돌아 온 宋時烈과 李翔이 돌아가는 것을 만류할 것을 청한 상소문.
因廟議筵說請賜罷退疏 (4) 諡號 追上 문제에 대한 廟堂에서의 의논과 경연 석상에서 金重夏의 일을 대신에게 물으라고 청한 것이 체통에 어긋난 일이었다는 의논이 있음을 들어 退斥해줄 것을 청한 상소문.
辭命賜月廩疏 (5) 進講하는데 큰 도움이 없었다며 月廩을 내려주라는 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進心學至訣疏 (7) ≪心學至訣≫을 올리는 상소문. 公私와 義利를 분별하는 공부의 근본은 居敬 하나에 있어 전에 아뢴 敬義에 대한 말과 경전 속의 敬字를 모두 거두어 넣은 것이 ≪心學至訣≫이라는 내용.
辭再除吏曹參議兼進冊子疏本疏 (10) 政事로 인해 臺論을 입고서 다시 경연에 참여하는 것은 조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라며 이조참의에 다시 제수된 것을 사양하고 鄭逑의 ≪心經發揮≫와 趙翼의 <持敬圖說>을 참작하여 만들었으니 ≪心經≫을 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상소문.
申辭再除吏曹參議疏 (11) 이조판서 李䎘이 臺評을 만나 辭免한 데는 자신도 책임이 있고 貢法의 편부를 논한 일 등으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며 이조참의에 다시 제수된 것을 거듭 사양하는 상소문.
請修德立政以爲致賢之道因乞命有司禱雨疏 (12) 돌아가려던 전 참의 尹拯을 부른 것처럼 어진 이를 부를 것을 청하고 3월이래 旱災가 혹심하다며 有司를 보내 비를 빌 것을 청한 상소문.
陳餓死人事因請疏決勿輕放宥疏 (13) 長湍府의 굶어 죽은 백성을 감사가 방문하여 상세히 구휼하고 冤獄을 審理하되 신중히 하여 간사한 사람이 가벼이 은혜를 받는 폐단을 답습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상소문.
請預議賑恤畿民之策因乞召還致仕臣宋時烈疏 (15) 보리 싹이 마를 정도로 심한 旱災는 경기 역시 마찬가지이니 진휼할 대책을 의논할 것과 致仕한 宋時烈에게 休致를 허락한 명을 거두고 소환할 것을 청한 상소문.
請太廟位版改正太字疏 (19) 태조에게 追諡하는 일을 결정하면서 위판은 改題하지 않기로 하였다는데 전에 恭靖大王의 位版을 개제한 일이 있으니 太廟의 위판도 太字로 改正하여야 할 것이라는 상소문.
辭工曹參判及兼帶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 (21) 公道를 회복하라는 기대와 성균관 章甫들의 講習을 주선하라는 명을 감당할 수 없고 신병이 있다며 공조참판 직과 겸하고 있는 成均館 祭酒 및 비변사 당상을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工曹參判及兼陳前日請召致仕臣宋時烈曲折疏 (23) 조정에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공조참판을 다시 사양하고 이전에 致仕한 宋時烈을 소환하기를 청한 곡절에 대해 아뢴 상소문. 趙持謙이 말한 것처럼 休致를 收還하라고 청한 것으로 송시열이 의심하고 있다는 데 사실은 휴치를 召還하자는 뜻이었다는 내용.
三辭工曹參判兼請收還遆罷臺臣之命疏 (25) 공조참판을 다시 사양하고 大臣과 臺臣의 다툼은 金益勳의 일이 단서인데 경연에서 화약 등의 말이 나오자 대각이 중대한 국론으로 생각한 것이고 大臣이 이를 꺼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니 臺臣을 체직 혹은 파면한 명을 환수하여야 할 것이라고 청한 상소문.
出謝登對後四辭工曹參判兼請許歸疏 (29) 臺閣이 金益勳을 탄핵한 일로 大臣과 대각이 다루고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들어 공조참판을 네 번째로 사양하며 돌아가겠다고 청한 상소문. 대각이 大臣이나 宋時烈을 직접 배척하지 않았는데도 벌을 받는 것은 잘못이며 대간에게 邪毒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었다는 내용.
五辭工曹參判並請收還前後資級職名仍告歸疏 (33) 소명을 받은 지 4년‚ 경연에 출입한지 반년에 한가지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공조참판을 사양하고 전후에 내려진 資級과 직책도 환수할 것을 청한 상소문.
陳時務萬言疏 (1) 1683. 현종 연간에 기초하고 1683년에 올렸다가 뒤에 다시 올려 논의된 12개조 時務 상소문. 1조는 큰 뜻을 분발해야 하니 王道를 살피고 大義를 밝게 하라. 2조는 聖學을 힘써야 하니 經筵에 부지런하고 大本을 바르게 하며 君子를 가까이 하고 小人을 멀리 하라. 3조는 內治를 바르게 함이니 宮圍를 엄히 하고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라. 이때 궁위를 엄격히 하려면 內需司를 폐지하고 宦侍를 경계하며 戚屬을 가르쳐야 한다. 4조는 規模를 세워야 하니 忠厚함을 숭상하고 엄격하게 하라. 5조는 기강을 진작함이니 상벌을 공정하게 하고 賢邪를 분변하며 朋黨을 타파하고 요행을 억제하라. 붕당을 타파하기 위해 二賢을 포양하고 嶺南을 수합하며 敎誡를 엄하게 하여야 한다. 6조는 賢才를 구함이니 論薦하고 通用하라. 7조는 言路를 열어야 함이니 求言하고 納諫해라. 求言을 위해 왕이 스스로 책하고 看詳官을 두어야 한다. 8조는 法을 제정함이니 政事를 부지런히 듣고 의정부의 옛 제도를 회복하며 삼공·육경·삼사의 장관·감사를 가려 임명하며‚ 長吏를 선택하여 久任하고‚ 超遷과 黜陟을 잘 하라. 잘 가려 임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郞僚를 불러 쓰고 치적이 있는 이를 長吏로 불러 쓰되 내외직을 교대로 임명하고‚ 출척을 위해서 御史를 파견하여야 한다. 9조는 先祖의 법전을 찬술함이니 經濟司를 설치하고 經濟六典을 참고하며‚ 續錄을 수정하며 先正의 疏章을 채택하여 옛 폐단을 개혁하고 새 법제를 반포하라. 10조는 선왕을 본받음이니 鄕黨·經界·학교 문제이다. 향당을 위해서 士民을 명백히 분변하고‚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農桑·水利·社倉을‚ 학교를 위해서는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선발하는 법을 정비하고 貢擧와 鄕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11조는 軍政을 정돈함이니‚ 내정과 군제를 정하고 將材를 뽑고 訓鍊을 밝게 하라. 군제에서 5위를 회복하여 親兵을 정선하고 장재를 뽑기 위해 兵法을 강론하며‚ 훈련을 밝게 하려면 器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며 戰馬를 준비하여야 한다. 12조는 守禦에 전심함이니 산성을 수리하고 行營을 설치하며 바닷가와 변방에 큰 鎭을 설치하라. 산성을 수리하기 위해 험한 곳에 의거하고‚ 들판에 적이 이용할 것을 없애며 큰 진을 설치하기 위해 土兵을 모집하여 屯田을 설치하고‚ 여러 섬을 개발하여 水戰을 익히고 전함을 준비하여야 한다. 마지막은 군주의 心學의 요령을 논함.
史官三度傳諭後申請收還職名兼辭召命疏 (1) 1683. 사관이 세 차례 傳諭한 뒤 직책을 거두어 줄 것을 거듭 청하고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문. 전에 나아간 것은 宋時烈이 성안에 있어 함께 국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송시열이 나오지 않고 조정에 있을 때 말했던 것은 시행되지 않았으니 올라오라는 명을 따를 수 없다는 내용.
三請收還職名兼辭月廩疏 (5) 직책을 환수하기를 세 번째 청하며 月廩을 사양하는 상소문. 경연에 나가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仍申辭月廩疏 (7) 나아갔을 때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들어 사헌부 대사헌을 사양하고 宋浚吉이나 宋時烈도 還鄕하며 돌려보냈던 것을 들어 月廩을 다시 한 번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司憲府大司憲仍乞亟賜罪黜疏 (9)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면서 송시열의 휴치를 召還하기를 청한 상소문의 경과를 해명하고 죄를 청한 상소문.
因右議政金錫冑箚斥請罪疏 (14) 우의정 金錫冑가 자신이 세 조정에 출사하며 관료들과 결탁하고 있다고 배척하는 차자를 올린 것에 대해 세 조정에 출사한 적도 없고 조정에 있으면서 오히려 붕당을 깨뜨리려고 노력하였다고 변명하는 상소문.
到白川三辭司憲府大司憲疏 (16) 縉臣이 의혹하고 물정이 비등하여 自靖해야 할 상황이라며 白川에 도착하여 사헌부 대사헌 직을 세 번째 사양한 상소문.
歸自城外陳情辭戶曹參判仍請加護聖躬疏 (17) 성밖에서 돌아가겠다는 뜻을 아뢰면서 호조참판 직을 사양하고 聖躬을 더욱 보호하기를 청한 상소문.
請治妖巫之罪並再辭戶曹參判疏 (21) 妖巫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고 호조참판 직을 다시 사양하는 상소문.
嚴批後待罪並三辭戶曹參判疏 (23) 1684. 엄한 비답을 받고 함부로 망언하여 慈聖의 덕에 누를 끼친 죄를 들어 待罪하면서 세 번째로 호조참판을 사양한 상소문.
辭召命疏 (24) 견식이 어둡고 時議에 죄를 얻어 顚沛되기에 이르렀고 수족이 마비되는 증상이 있다며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25) 자신이 직책에 맞지 않고 山陵의 일이 다가오면 자리를 띤 채 물러나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이조참판을 사양한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27) 직책을 받은 지 3개월에 자신은 병이 있고 이조참판 자리는 비워둘 수 없는 자리라며 사양한 두 번째 상소문.
復請追還職名兼請罪黜疏 (1) 1684. 尹拯이 宋時烈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를 비판한 崔愼의 상소를 비판하고 윤증을 변무한 상소문. 윤증의 편지가 師生의 체통을 손상할 듯하여 이를 만류한 적이 있지만 윤증의 본의가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다. 윤증을 만나서 사과하게 하려 했고 송시열도 알려진 말을 듣고 자제에게 말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최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攻斥하기에 급급하여 尹宣擧를 함께 모욕하여 師生 사이를 끊을 뿐 아니라 윤증을 억울하게 顚沛하게 한 것이다. 송시열과 윤증이 서로 막힐 조짐을 알고 조화시켜 사생의 사이를 보전하고자 하였는데 뜻하지도 않은 일로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이제 자신도 윤증과 서로 譏議하여 송시열을 무함하고 욕한다는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죄를 청한다는 내용.
因因災訪問辭召命疏 (5) 재해로 인하여 찾아와 묻는 것에 대하여 하늘을 대신해 만물과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인군의 도리와 재앙의 관계를 논하며 관리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조목을 돌아보고 근원을 바르게 하여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올리면서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一 (9) 전에 조정에 들어갔을 때 실패했고 지금도 物論과 합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二 (10) 왕을 보필하고 신하들을 卞正하고 풍속을 바로잡아야 할 憲職을 감당할 수 없고 몸에 마비가 일어나서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11) 왕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해야 하고 先大妃의 練祭도 다가오고 있는 즈음이지만 상소를 올려 사양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다며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12) 이미 人事에 간여하여 物議를 입고서도 홀로 벼슬에 남아 있는 사실과 병을 들어 이조 참판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13) 1685. 전에 立朝하여 이미 실패한 적이 있고 古義를 지키겠다며 朝旨를 어기고 있으니 처벌해달라며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15) 병이 있고 이조참판 직을 오랫동안 비워두게 했다며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因因災訪問辭召命疏 (16) 1685. 지난번에 入朝하였다가 조정에서 善人과 惡人을 등용하고 처벌하는 것과 조정의 의논이 서로 맞지 않게 한 죄가 있다며 소명을 사양함. 재이를 만나 求言하고 減膳하는 것 외에 戒懼 謹獨하여 백성을 보전하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疏 (19) 張善沖이 재기가 老成하고 言議가 공평하며 바른 인물이라고 신구하며 銓曹에 있을 때 그를 천거한 허물이 있었음을 들어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내용.
辭吏曹參判疏 (21) 조정에서 실질적인 정사를 행하여 실효를 책임질 인물도 아니고 臺論을 무시하고 張善沖을 위하여 分疏한 잘못이 있다며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吏曹參判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一 (22) 1686. 재주가 시의에 맞지 않고 物議에 협동하지 못하여 물러났고 求言에 응하지 못했다며 이조참판 및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二 (26) 지난번에 나아갔다가 실패한 잘못을 되풀이하여 조정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이조참판 및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사양한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疏 (27) 반년 가까이 經幄에 있으면서 크게 도움을 준 것이 없고 새로 강하는 易經에 대해서도 모른다며 筵席에 참여하라는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再辭召命因進朱子大全拾遺疏 (28) ≪朱子大全拾遺≫를 올리고 재차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朱子大全拾遺≫는 熊氏의 翰墨大全 등에서 朱子가 族人 등에게 남긴 글들을 모아 宋時烈 등과 함께 語類 등을 참작하여 二程遺文의 예에 따라 편집한 책이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疏 (30) 조리하고 올라오라는 왕명에 여름에 더위를 무릅쓰고 돌아오다가 병이 더쳤음을 아뢰면서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疏 (31) 1687. 災異에 보필할 재주가 없음이 이미 드러났다며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修己를 정사의 근본으로 삼아 기질의 치우침 등을 살피고 皇極을 위주로 誠에 나아가 조처의 번거로움 등을 반성할 것을 청한 내용.
復請追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一 (34) 겸임하고 있는 직책을 환수해주지 않아 오랫동안 빈자리로 있다며 직명 및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추가로 환수해 줄 것을 다시 청하는 첫 번째 상소문.
復請追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二 (36) 관직에 물러나고서 좨주와 비국의 직책을 몇 년간 띠고 있던 일이 전례에 없다며 직명과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환수해 줄 것을 청한 두 번째 상소문.
復請收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三 (38) 田野에 물러나 있어 변방의 급한 일들을 알 수 없다며 직명과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추가로 환수해 줄 것을 다시 청한 세 번째 상소문.
辭召赴長陵疏 (40) 長陵의 遷奉 여부가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천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幸行 중에 부른 데 대해 평소의 분수를 지킬 수 있게 해달라며 사양한 상소문.
辭命陪從入城疏 (41) 과거의 허물이 지금의 일에도 단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자책하고 병을 들어 陪從하여 성에 들어오라는 명을 사양한 상소문.
辭召命疏 (1) 1687. 長陵에 幸行했을 때 능과 災異에 관한 일을 아뢰고‚ 조정에 나갔을 때 협동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붕당의 근원으로 지목받은 情迹과 신병을 들어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一 (3) 이전에 실패한 일로 自靖해야 하고 상황이 당시와 다를 바가 없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二 (5) 자신이 이미 실패하였으며 신병이 있다는 것을 들어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三 (7) 병이 깊어 3개월이나 일어나지 못해 벼슬에 나갈 기약이 없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8) 1688. 亞銓이나 憲長에 제수된 뒤 몇 달간 자리가 비어 있게 한 것은 宣祖 이래 선비를 대우한 것을 고질적인 폐단으로 만들 것이라며 이조참판 직을 체직하여 줄 것을 청한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10) 선비를 대우하는 폐단을 거론하고서 다시 나아가기 어렵다며 신병과 재능 부족을 들어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吏曹參判疏 (11) 선비를 대우하는 일에 恩禮인 文과 어진 선비를 얻고자 하는 實이 있는데 자신은 實이 없으니 자신에 대한 예우는 文만 승하게 할 것이라며 소명 및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申辭吏曹參判兼陳諸路饑荒疏 (13) 신병을 들어 이조참판 직을 다시 사양하면서 각 도의 기근에 대해 아뢰는 상소문. 平山 사족들의 餓死 등 황해도에서 들은 것을 아뢰고 황해도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湖嶺과 서북 변방 사이에 끼어 진휼에 소홀하였다며 廟堂에 명하여 별도로 區劃하여 줄 것을 청하는 내용.
辭吏曹判書疏 (15) 조정에 나왔다가 廟堂과 臺閣의 논의가 어그러진 것을 잘못 조처하여 黨比로 지목된 일과 人才와 물정에 밝지 못함을 들어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吏曹判書疏 (17) 오랜 黨習으로 서로 다투어 견해가 다른 자를 배척하여 쫓아내는 상황에서 서로 협동하게 할 책임이 있는 銓衡‚ 즉 이조판서 직에 적당하지 않고 신병이 있다는 것을 들어 재차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三辭吏曹判書疏 (19) 전에 패했던 일에 開釋받지 못하였고 신병이 있음을 들어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褒貶과 都目 등은 기한을 어길 수 없는 일이며 헛된 거조에 구애되어 실무를 폐하지 말아야 하니 빨리 체직하여 달라는 내용.
四辭吏曹判書疏 (21) 나라에 누를 끼친 것이 이미 많다며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네 번째 상소문.
五辭吏曹判書兼進癸亥陳時務疏疏 (22) 다섯 번째 이조판서를 사양하면서 1683년에 올리려던 時務疏를 올리는 상소문.
六辭吏曹判書疏 (24) 慈殿의 건강이 좋지 않고 大政을 지연해서는 안될 것인데 자신에게는 신병이 있다며 이조판서 직을 사양한 여섯 번째 상소문.
七辭吏曹判書疏 (26) 나아가기 어려운 정세와 신병을 들어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일곱 번째 상소문.
到高陽八辭吏曹判書疏 (28) 병을 조리하며 고양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뢰고 아뢸 것은 이미 며칠 전 책자로 만들어 올렸으니 그 말을 들어주고 이조판서 직은 면해 달라고 청하는 여덟 번째 상소문.
到城外九辭吏曹判書疏 (29) 성밖에 도착하였음을 아뢰고 새로 제수된 명을 거두고 東朝가 쾌차하여 회복되는 날에 잠시 召對를 내려 줄 것을 청하는 아홉 번째 상소문.
還授後辭吏曹判書疏一 (30) 다시 제수된 뒤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아뢰었던 말로 인해 상하가 서로 버틴 지 수개월이라며 進言한 것이 밝게 분별하지 못하여 누를 끼친 죄를 다스려 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
還授後辭吏曹判書疏二 (31) 이조판서에 도로 제수된 뒤 두 번째 올린 상소문. 開釋하여 준 것에 사례하고 범한 것이 國體에 관계되고 銓衡을 비운 지 거의 반년이 되어 都目大政이 체모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명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疏一 (34) 전에 실패한 흠과 뒤의 狂妄했던 허물로 체직된 뒤 겸하고 있던 것도 체직해주기를 청하려다가 先后의 장례가 임박하여 감히 하지 못하고 있던 중이라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二 (35) 병과 情迹으로 보아 사헌부 대사헌 직을 수행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右參贊疏 (36) 1689. 병과 직무로 보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며 의정부 우참찬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復請追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仍自劾疏 (38) 직명 및 겸임하고 있던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을 거두어 주기를 다시 청하면서 自劾하는 상소문. 자신이 늘 黨比를 경계하였으나 죄를 얻은 신하들을 논하는 가운데 당비가 있다는 혐의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점‚ 李珥와 成渾의 遺文과 事蹟을 印刊하기를 청한 적이 있었는데 어제 館學에서 文廟에서 내치기를 청하고 이를 들어주어 (10년도 안되어) 출향되었는데 道理로 왕을 설득할 수도 없으니 포양하기를 청한 자신을 벌해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
壬戌熙政堂啓箚 (1) 1682. 立志를 근본으로 삼아 군자와 가까이하고 소인은 멀리할 것과 또 扁鵲 같은 무리를 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할 것을 아뢴 箚子.
癸亥熙政堂啓箚 (3) 1683.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 趙光祖가 靖國功臣에 외람되게 참여한 이들을 削除하도록 청한 일을 들어 勳籍을 追錄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
啓箚二 (5)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 朋黨을 깨뜨리는 길을 논한 것으로 역적의 獄事나 奸黨에 관련되지 아니한 자들은 마땅히 參用해야 된다는 내용.
啓箚三 (8)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 程子와 朱子의 논의를 들어 明에 대한 의리를 되새기고 청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을 의리를 논하는 내용.
戊辰熙政堂啓箚 (12) 1688.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첫 번째 조목. 군신이 서로 막혀 宮府가 서로 다르고 朋比의 습속이 있으니 中庸의 誠實을 君德의 요체로 삼으라는 내용.
啓箚二 (15)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두 번째 조목. 훈척이 성하던 때에 金壽恒이 대간과 모순되어 언로를 막히게 했음. 李端夏는 經術 등에는 능하지만 번거로운 것을 결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왕의 擧措가 마땅해야 함을 논한 내용.
啓箚三 (18)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세 번째 조목. 喜怒가 마땅해야 하니 金萬重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내용.
啓箚四 (19)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네 번째 조목. 齊家의 도리를 논한 것으로 宮禁에 대해 지적한 李徵明과 韓聖佑 등을 청요직에 낙점하지 않는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啓箚五 (22)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다섯 번째 조목. 친족을 사랑하는 도리를 논함. 東平君 李杭의 일로 臺諫과 맞선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惠民署 提調의 직을 파직하고 다른 종친들과 균등하게 대할 것을 청한 내용.
壬戌九月二十一日熙政堂引見 (1) 1682. 熙政堂에서 있었던 引見 기록. 實德을 닦고 적절한 조처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것 등을 아뢴 내용.
癸亥二月四日熙政堂引見 (4) 1683. 熙政堂에서 있었던 引見 기록. 元老가 등대하던 때에 함께 국사를 도모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여서 차자를 올렸다는 것과 왕과 慈殿이 內帑을 내어 진휼하는 마음을 늘 잃지 않아 始終이 하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아뢰었다는 내용.
二月十四日熙政堂召對 (7) 희정당에서 있었던 召對 기록. ≪心經≫을 강하면서 분노가 발동할 때 이를 경계하면 政令이 마땅할 것이라고 아룀. ≪大學≫과 ≪聖學輯要≫에 뜻을 두기를 청함. 전에 올린 차자의 뜻을 낱낱이 아룀. 소대를 마치면서 玉圈 한 쌍과 貂帽를 받았다는 내용.
二月二十六日熙政堂晝講 (12) 희정당에서 ≪詩傳≫<桑柔章>을 강했던 晝講 기록. 朱子의 封事와 程顥의 疏章을 경연 외에 다시 살펴볼 것을 청함. 宋나라 仁宗이 韓琦 등에게 筆札을 주어서 陳達하게 한 것을 본받기를 권유함. 인재를 널리 찾는 방도에 대해서도 토론했다는 내용.
三月三日晝講 (16) ≪詩傳≫<崇高> 8장을 강한 晝講 기록. ≪心經≫의 敬義 공부를 학문의 요체로 삼을 것‚ 군신이 서로 도울 것을 아룀. 內需司와 宮家의 훈척 및 좌우의 近習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 政官이 인물을 등용하는 일이 청탁에 좌우되어 공의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함. 대사성을 가려 뽑아 교육에 전념할 것‚ 金益勳의 일에 대해 臺閣과 廟堂 사이의 갈등에 공정하게 처치할 것‚ 尹拯을 성의를 다해 불러 올 것‚ 宋時烈의 휴치를 허락하지 말 것 등을 아뢴 내용.
三月八日熙政堂晝講 (23) 熙政堂에서 ≪詩傳≫<江漢> 6장과 <常武> 6장을 강한 晝講 기록. 周 宣王 때의 일과 宋時烈의 致仕 문제에 대해 의논한 내용.
三月十六日熙政堂召對 (26) 熙政堂에서 ≪心經≫<不遠復章>을 강했던 召對 기록. 君臣간의 分義와 학문의 근본을 논함. 程子와 朱子의 封事를 정밀히 抄하여 왕이 보는데 대비하기를 청한 내용.
三月二十日熙政堂晝講 (29) 熙政堂에서 ≪詩傳≫<我將> 1장에서 <思文> 1장까지를 강한 晝講 기록. 인조 반정 60주년의 감회‚ 朱子의 시와 인조 반정 이후의 명에 대한 태도를 들어 淸나라에 대한 복수를 논함. 경연에서 문답을 통하여 논란할 것을 청하는 내용.
四月二日熙政堂引見 (33) 熙政堂에서의 引見 기록. 무지개의 변고에 대하여 陳戒하며 愼獨의 공부를 청함. 어영대장 尹趾完이 여러 曹에 한 번도 의망되지 못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풍년을 기다려 貢案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한 내용.
四月四日宣政殿晝講 (37) 宣政殿에서 ≪詩傳≫<良耟> 1장을 강한 晝講 기록. 농사짓는 민간의 疾苦를 알기를 청함. 金重夏의 일에 대하여 삼사에서 청한 대로 죄상을 엄히 국문하여 다스릴 것을 청한 내용.
四月八日熙政堂朝講 (41) ≪詩傳≫<泮水> 8장을 강한 熙政堂에서의 朝講 기록. 경전의 내용을 논하고 金重夏와 金渙을 誣告罪로 다스려야 한다고 아뢴 내용.
同日宣政殿夕講 (43) ≪詩傳≫<閟宮> 9장을 강한 宣政殿에서의 夕講 기록. <程朱封事>와 ≪朱子大全≫의 주해를 베껴 올리는 문제와 여인들이 差備門을 마음대로 출입하는 일로 인해 宮禁을 더욱 엄히 할 것에 대해 아뢴 내용.
四月十日宣政殿晝講 (46) ≪詩傳≫<商頌>의 <那> 1장에서 <玄鳥> 1장까지 강한 宣政殿에서의 晝講 기록. 송시열이 청했던 威化島回軍의 일로 태조에게 尊號와 諡號를 올리는 문제를 여러 대신과 함께 논의할 것을 청함. 金重夏의 일‚ 서북 변방의 수비와 軍政을 닦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癸亥四月二十一日熙政堂晝講 (1) 1683. ≪心經≫<顔子問仁章>의 ‘洪爐點雪’을 강한 熙政堂에서의 晝講 기록. 月廩 외에 먹을 것을 賜給해 준 것은 宣祖 때의 成渾‚ 孝宗 때의 宋時烈과 宋浚吉 외에는 예가 없는 일이라며 사양함. 태조의 諡號에 威化島回軍의 일을 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다시 물어 처치할 것을 아뢴 상소이지 改題를 동시에 하자는 뜻이 아님을 해명함. 송시열이 金化로 갈 때 궁가 경영을 지적한 臺閣의 뜻을 왕이 용납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지적했음을 전하는 내용.
四月二十二日晝講 (5) ≪心經≫<仲弓問仁章>을 강한 晝講 기록. 李滉의 主敬 공부와 ≪心經≫의 중요성에 대해 아룀. 태조의 諡號를 가상하되 改題하지 말자는 金錫冑의 견해나 시호를 가하고 改題해야 된다는 설을 절충할 것이 아니라 威化島回軍에 대한 追諡 자체를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한 내용.
四月二十八日宣政殿晝講 (8) ≪心經≫<天命之謂性章>을 강한 宣政殿에서의 晝講 기록. 戒懼愼獨의 뜻‚ 宋時烈의 복귀‚ 尹拯에 대한 권면‚ 貢案 개정‚ 사치를 금하는 일‚ 貢物主人의 폐단‚ 大同法 시행 등에 대한 내용.
四月二十九日晝講 (15) ≪心經≫<潛雖伏矣章>을 강한 晝講 기록. 謹獨 공부와 李滉의 ≪心經懸吐≫를 수정하여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아뢴 내용.
五月一日晝講 (17) ≪心經≫<誠意章>을 강한 晝講 기록. 愼獨 및 誠敬의 의의와 孝宗과 顯宗 시절의 강학‚ 臺閣의 언론 문제 등에 대한 내용.
五月十日熙政堂引見 (23) 熙政堂에서 請對했을 때의 引見 기록. 한재가 혹심하니 대신을 따로 보내 기도할 것‚ 팔도의 가뭄으로 인해 貢稅 등을 실어오는 배가 없어지면서 쌀값이 급등한 경기 지역에 대한 진휼책을 마련할 것‚ 求言과 審理로 하늘을 감응시켜 재앙을 그치게 할 것‚ 성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다하고 사심을 버릴 것‚ 宋時烈과 尹拯을 지극한 정성으로 불러 올 것‚ 李端夏의 經學과 李敏敍의 절조를 알아주고 은거하는 선비인 朴世堂과 柳譚厚 등을 조정에 초치할 것 등을 청한 내용.
六月五日熙政堂晝講 (32) ≪心經≫<誠意章>을 강한 熙政堂에서의 晝講 기록. 종묘에서 친히 비를 빌 것. 臺閣이 진언한 것은 金益勳 사건으로 인한 것이지 宋時烈을 바로 배척한 것이 아니며 송시열의 논의가 지당한 것도 아닌데 대간을 邪毒이라는 말로 너무 엄하게 대한 것은 잘못이니 대각에 대한 명을 환수할 것. 金渙·全翊戴·金重夏를 국문해야 한다는 내용.
丁卯十月十一日長陵行幸時引見 (44) 1687. 長陵에 行幸한 왕을 崔錫鼎의 주선으로 引見했을 때의 기록. 遷陵 문제의 타당성 여부를 논함. 능의 화재가 속출하는 등 재이가 계속되고 있는 중에 왕이 喜怒에 마땅함을 잃어버릴까 경계하며 더욱 힘쓰기를 청한 내용.
戊辰七月十三日熙政堂引見 (46) 1688. 熙政堂에서 인견했을 때의 기록. 올린 책자 중에 왕이 喜怒에 바름을 잃고 擧措에 마땅함을 잃었던 것을 지적했던 것을 상기시키고 지난 상소에 아뢴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에 힘쓸 것을 아뢰는 내용.
仁敬王后練祭設行當否議 (1) 1681. 仁敬王后 練祭 설행 여부에 대한 收議에 의견을 밝힌 글. 여항의 匹夫의 상에도 자세히 자문하지 못하여 일세의 웃음이 되었으니(閔愼 집안 喪禮) 감히 의견을 아뢸 수 없다는 내용.
恭靖大王廟號議 (1) 仁敬王后의 練祭에 대한 收議에도 감히 아뢰지 못했으며 더구나 恭靖大王의 廟號 문제는 宗廟에 관계된 것이니 신하로서 가벼이 대답할 수 없다는 내용.
恭靖大王位版改題及永昭殿上食哭等議 (2) 恭靖大王의 位版을 改題하는 일과 永昭殿과 翼陵에 祥祭후 上食하고 哭하는 일에 대한 收議에 가벼이 답할 수 없다는 내용.
永昭殿禫後五享大祭用樂議 (2) 永昭殿에 禫祭를 지낸 뒤 五享大祭에 음악을 쓸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의견을 밝힌 收議. 담제 후 山陵에서 哭泣하거나 魂殿에서 上食하는 것은 한때의 임시 편의에서 나온 것으로 이른바 禮에도 없는 예이고 다른 大祭에 음악을 쓰는 것은 五禮儀에 갖추어져 있으니 폐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
文廟廟制及馬融等八儒黜廟議 (3) 우리 나라의 文廟에만 동서 두 문을 만든 것은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을 것이며 제사지내는 전례에 올리거나 물리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논의인데‚ 다른 變通도 없이 단지 馬融 등을 삭제하여 내쫓기만 하는 것은 합당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文廟程朱陞配及中朝我國諸儒從祀議 (4) 1682. 陞拜 및 從祀하는 일로 지척하는 것은 외람되어 감히 아뢸 수 없다는 내용.
何蕃等三人立廟當否議 (4) 1683. 당나라와 송나라의 신하인 何蕃 등 3명의 立廟에 대해 감히 아뢸 수 없다는 내용.
孝宗大王世室議 (5) 孝宗을 世室로 올리자는 宋時烈의 의견에 대한 가부를 묻는 收議에 답한 글. 효종이 大義를 실천하고 中華와 夷狄에 없었던 功烈을 세웠으니 世室로 삼는 것이 옳지만 정성과 신중함을 다하여야 하니 역대에서 이미 행한 禮制와 先儒의 의견들을 널리 상고하고 대신들에게 다시 물은 뒤 왕이 친히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
仁祖大王世室同告宗廟當否議 (6) 仁祖를 孝宗과 함께 世室로 하여 宗廟에 고하는 것이 타당한 지를 묻는 收議에 답한 글. 인조가 난을 평정하고 중흥을 이룩하여 不遷之廟로 삼는 것이 마땅하고 漢나라의 太祖와 太宗을 함께 추존한 사례도 있으니 함께 올릴 근거가 있다는 내용.
擬上太祖大王追加尊號議 (7) 太祖에게 尊號를 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글. 尊號를 올리는 일이 古禮가 아니라 唐에서 시작된 것이며 朱熹 등도 존호를 올리자고 청한 일이 없지만 신하로서 감히 논할 것은 아니니 널리 묻고 깊이 생각하라는 내용.
各陵祭享素饌當否議 (7) 1684. 능의 제향에 素饌만 쓰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를 묻는 收議에 답한 글. 산릉 제사가 宗廟와 饌品이 다른 점은 있지만 ≪禮經≫에 근거가 없으니 古禮에 따라 제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제사하려면 수백년간 준행한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
拜陵時新舊兩陵祭禮服色議 (8) 拜陵할 때 崇陵의 신구 兩陵에서의 祭禮 服色에 대해 獻議한 글. 조정에서 稟議한 것을 왕이 재결하라는 내용.
心經講訖繼講春秋大學衍義孰當議 (9) 1685. ≪心經≫의 강을 마치고 ≪春秋≫와 ≪大學衍義≫ 중 어느 것을 계속하여 강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묻는데 獻議한 글. ≪大學≫은 성인의 淵源으로서 百王의 규범인데 이미 ≪大學章句≫와 ≪大學或問≫이 있고 ≪大學衍義正補≫와 ≪聖學輯要≫가 있으니 이것을 羽翼을 삼고 ≪大學衍義≫를 주로 講해야 한다는 내용.
永昭殿五享用牲用樂議 (10) 永昭殿 五享에 음악과 희생을 쓰는 일에 대해 獻議한 글. 경전에 명문이 없으면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해야 하지만 나라가 喪期 중에 있고 왕이 主喪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因歲饑宗廟祭享變通當否議 (10) 1686. 기근으로 인한 宗廟 祭享의 변통 문제에 대해 獻議한 글. 우의정 李端夏가 아뢴 것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지만 변통한 뒤 조정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의 名實이 조금 미진하게 되지 않을지 우려된다는 내용.
黃俊良書院黜享議 (11) 1687. 趙光祖 등의 신원을 청한 사람을 배척했던 黃俊良을 서원에서 黜享해야 할지를 묻는 일에 獻議한 글. 李滉이 황준량을 애석히 여기는 글을 남겼던 것을 참고하여 이미 배향된 이를 쫓아내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永寧殿祝辭氂正議 (12) 永寧殿 祝辭의 釐正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는 收議에 답한 글. ≪通典≫과 ≪文獻通考≫ 등의 서적을 모두 찾아 어그러진 것이 확인된 뒤에야 예에 따라 개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留疏批答史官傳諭後書啓 (1) 1682. 남겨둔 소에 대한 批答을 사관이 전유한 뒤 올린 書啓로 다시 움직이고자 하나 할 수 없어 석고대죄한다는 내용.
再度傳諭後書啓 (1) 재차 전유한 뒤 올린 書啓로 증세가 악화되어 기동할 수 없어 나가서 만날 수도 없을 정도이니 다시 아뢸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回還時書啓 (2) 1683. 史官이 상소의 批答을 傳諭하고 돌아갈 때 올린 書啓로 차차 병세를 보아 부축받으며 길을 떠나 엄명에 응하겠다는 내용.
太祖大王追上尊號不對書啓 (3) 太祖大王의 尊號를 추상하는 것을 묻는 데 대답하지 않은 일로 올린 書啓. 臺諫에게 注擬가 마땅함을 잃었다고 논박을 받은 상황에서 宗廟에 관한 일에 답할 수는 없었다는 내용.
再度書啓 (3) 太祖大王의 尊號를 추상하는 것을 묻는 데 대답하지 않은 일로 다시 올린 書啓로 宗廟의 일이 중하고 君父의 명이 엄하니 다시 묻는다고 답할 수는 없다는 내용.
因事徑歸承旨傳諭後狀啓 (4) 일로 인해 먼저 돌아가다가 승지가 傳諭하자 올린 狀啓로 일에 대해 뜻을 굽힐 수 없을 때는 머물러 하는 일이 없는 것보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나으니 허락해달라는 내용.
再遣承旨傳諭後狀啓 (5) 재차 승지를 보내 傳諭한 뒤 올린 狀啓로 온갖 병이 생겨 명을 받들기 어려우니 며칠 더 조리하겠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6) 史官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병이 나아지면 올라가겠다는 내용.
上疏告歸史官傳諭備忘後書啓 (6)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아뢴 것에 대해 史官이 備忘記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명일 다시 상소를 올린 뒤 進退의 명을 기다리겠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狀啓 (6) 史官이 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나아가서 한 가지도 補益한 일이 없고 새로 부임한 뒤 병으로 아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다시 나아가기 어렵겠다는 내용.
史官再度傳諭後狀啓 (7) 史官이 재차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이 조금 안정된 뒤 다시 아뢰겠으니 旱災가 심한 때에 고을에서 近侍(왕명을 받들어온 史官)를 供饋하는 폐단을 생각하여 使命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
史官三度傳諭後狀啓 (8) 史官이 세 번째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세가 심해져 상소하는 글자를 쓰기도 어려워 席藁하며 刑章을 기다릴 뿐이라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狀啓 (8) 史官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田野에 돌아와 自靖하려는 마음이며 병을 수습할 수 없어 집에서 席藁하고 있다는 내용.
長陵回駕落後史官傳諭後書啓 (9) 1687. 長陵에서 回駕할 때 뒤에 떨어진 뒤 史官의 傳諭를 받고나서 올린 書啓로 回駕할 즈음 갑작스런 寒疾로 부득이 낙후했다며 정세나 병으로 보아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10) 史官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두통과 현기증이 함께 일어나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내용.
四辭冢宰史官傳諭疏批後書啓 (10) 1688. 이조판서 직을 네 번 째 사양한 상소에 대해 史官이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近侍를 보내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조금 있다가 상소를 올려 아뢰겠다는 내용.
八辭冢宰史官傳諭疏批後書啓 (11) 이조판서 직을 여덟 번째 사양하고 사관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왕이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집을 떠나 다시 상소를 올리겠다는 내용.
到城外史官傳諭後書啓 (11) 성밖에 이르러 史官이 傳諭한 뒤 올린 書啓로 더위로 며칠 조치하여 성밖에 도착하였는데 며칠 더 있어야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12) 사관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사관과 함께 오라고 하는데 두통 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내용.
史官傳諭後書啓 (12) 史官이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감히 仰對할 수 없어 상소로 아뢰겠다는 내용.
與李惺菴-壽仁 (1) 1658. 李壽仁에게 보낸 편지. 尹善道가 疏를 올려 先正(宋時烈)을 무고하여 도하가 흉흉한 상황을 전하는 내용.
答李彛仲 (1) 1659. 李敏敍에게 答한 편지. 제수된 관직에 출사하지 않고 過限이 지나도록 肅拜하지 않은 자를 遞改하기를 기다리겠다는 내용.
答金和順-克亨 (2) 金克亨에게 답한 편지. 喪服의 개정‚ 冢宰 체직 등 현안과 山陵으로 정해진 水原에 대해 적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한 내용.
與洪判書-命夏 (2) 洪命夏에게 보낸 편지. 孝宗의 山陵을 水原府治에 정한 것에 대해 地法·移鎭·五患 세 가지 폐단을 지적하고‚ 黃驪의 弘濟洞이 풍수도 좋고 백성의 田舍를 빼앗지 않아도 되며 의리로 보아 世宗과 짝할 수 있어 좋은데 왕이 南海(尹善道)에 惑해 있으니 摠護使로써 이를 적극 막아달라는 내용.
與尹魯西 (8) 1660. 尹宣擧에게 보낸 편지. 예론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의견이 서로 분리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與洪相國-命夏 (9) 1664. 洪命夏에게 보낸 편지. 雲南과 貴州에서도 南明이 청나라에 졌다는 凶報가 청의 국서에 있지만 사신으로 갈 때 허실을 잘 살펴야 할 것이고 패하였더라도 20여 년간 남명의 사적은 남아있을 것이니 잘 살펴 오라는 내용.
答李學士彛仲 (10) 1665.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뜻하지 않게 관직에 추천을 받았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洪相國 (10) 洪命夏에게 답한 편지. 정중한 답장에 사례하고 사퇴한 이유에 대해 알리는 내용.
答洪相國 (11) 1667. 洪命夏가 言路문제로 죄를 引咎하고 성을 나섰다는 말을 듣고 답한 편지.
答李幼能 (12)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明나라는 우리에게 君臣의 의리와 父子의 은혜가 있는데 표류하여 온 漢人들을 청나라에 보내려는 조정의 처치는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
答李幼能 (14)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명나라가 아직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丞相이 時議에 흔들리면 箚子를 올리거나 面對해서라도 (한인을 청나라로 소환하지 않는 것을) 관철시켜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幼能 (15)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표류한 사람들을 북쪽으로 보낸 조정의 조처는 잘못된 것이며 그들을 鄭成功 管下라고 하는 말은 그들을 永曆帝의 사람이 아니라고 핑계하여 죽이려는 것일 뿐이라는 내용.
答李幼能 (16) 1668.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草莽臣이라 자칭한 것‚ 空館했던 일 등 상소문의 구절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申寅伯兄 (17) 申晸에게 답한 편지. 소를 올려 사면하려 했는데 왕의 온천 幸行으로 行公하지도 사면을 받지도 못한 것에 대해 의논한 내용.
與趙復亨 (19) 趙根에게 보낸 편지. 사양하는 상소에 대해 引咎하며 屛廢하는 고질이 있다는 등으로 宋浚吉이 아뢰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虛名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해달라는 내용.
答李養而 (20)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筵席에 입시하라는 명을 듣고 상소를 올렸는데 批答이 내리지 않은 일로 인해 출처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別紙 (2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內修外攘에 의한 復讎雪恥와 이를 위한 出處의 의리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閔楊湖 (26) 1669. 閔嶪에게 답한 편지. 계속되는 소명에 어찌해야 하는지 의논하는 내용.
答李判書錫爾-慶億 (27) 李慶億에게 안부를 전하고 자신의 行止에 대해 답한 편지.
答李養而 (2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국가경비로 들어올 화폐와 곡물을 감하고 內帑까지 모두 헤아려 1년간 쓸 비용을 제한 나머지를 가지고 貿易하여 구제하게 할 것 등 전국의 큰 기근을 구제할 방안에 대한 내용.
與李養而 (31) 李之濂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고조부 朴紹와 같이 화를 입었던 사람들은 모두 시호를 받았는데 박소에게는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다며 사우들이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 내용.
與宋尤齋 (33) 1673.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閔愼의 일에 대해서 왕이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신하들이 제대로 아뢰지 않고 있어 자신이 아뢸 것이라며 상소문의 문자를 보아달라고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34) 尹拯에 답한 편지. 閔愼의 일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데 宋時烈에게 내린 批答이 嚴峻하고 뜬소문까지 돌아 동지라던 이들도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내용.
答南觀察雲路 (3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承重하는 복에 대해 朱子의 설 등을 근거로 대답한 일로 인해 몇 달째 대죄하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
答宋尤齋 (36) 167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閔愼의 일로 대죄하고 있는 상황과 거취를 전하고 새 능을 만들고 옛 무덤을 여는 일‚ 栗谷年譜 문제 등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趙復亨 (38) 趙根에게 복제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國制에 근거하여 衆婦의 복으로 大功을 입어야 할 것이며 지난 번 복제에 3년을 주장하는 자들이 受重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예경에 근거가 없고 제왕의 높음은 복제 때문이 아니라는 내용.
答南雲路 (39)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중원에 큰 난이 있었다는데 나라는 허약하고 백성은 빈궁하여 무엇으로 도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與李養而 (3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閔愼의 일로 올린 상소가 환급되어 성밖에서 대죄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는 내용.
與宋尤齋 (41)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새로 어린 왕이 등장하고 중원에서는 난이 일어나 이제 중국을 회복할 기미가 보이는 상황에서 거취 문제를 의논하는 내용.
答宋尤齋 (4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大功의 주장을 주도하였다는 말이 퍼져 있다는 것‚ 吳三桂 등이 毅宗의 제2자를 옹립하였다는 소식 등에 대한 내용.
答閔判書持叔 (45) 閔維重에게 時論이 변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근심을 전하는 편지.
答張判書靜之-善澂 (1) 1675. 張善澂에게 답한 편지. 削籍 당한 뒤에 상황이 여러 번 바뀌어 위태로운 지경에 놓인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林德涵 (1) 1680. 林泳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서 進講할 사람으로 장차 추천할 것이라며 헤아려 처리할 것을 당부하고 국면을 勳戚이 주도하여 장차 分岐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내용.
答李養而 (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상소하여 사양하고 있는 상황 등을 전하고 栗谷集과 語錄에 대하여 어떤 의논이 오갔는지를 묻는 내용.
答崔學士汝和 (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거취에 대하여 상의하는 내용.
答宋尤齋 (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5) 林泳에게 답한 편지. 사헌부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凶逆을 주관하는 자들이 蓄謀했다고 하는 설‚ 朝廷과 民生에 처할 원칙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宮府나 時俗과 어긋나서 받을 비방에 잘 헤아려 대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金相國久之 (6)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世臣의 의리를 생각하라는 충고에 대해 오활하여 時俗에 굽힐 수 없다고 답함. 그 외에 元老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 金麟厚 행장 찬술 등에 대한 내용.
答金判樞起之 (7)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다시 나올 수 있게 된 것을 世道와 斯文을 위해 축하함. 자신의 거취 문제‚ 吳三桂 亂의 虛實과 本末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8) 林泳에게 답한 편지. 許衡에 대한 의논들이 각기 다른데 丘瓊山의 설이 옳은 듯 하다는 의견을 밝히고 출처 문제에 대해 논한 내용.
答林德涵 (9) 林泳에게 답한 편지. 중전의 상에 士民의 哭班에 참여하고 成服이 지나면 소장을 올려 사양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9)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去就 문제‚ 저술의 편집‚ 啓運宮 복제에 대한 金長生과 張維의 설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金直卿-榦 (11) 金榦에게 답한 편지. 지금의 조정이 更化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려움을 만날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위험한 激浪 속에서 자신을 가벼이 시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자신의 거취와 출처의 의리에 대하여 논한 내용.
與尹子仁 (13) 1681. 尹拯에 보낸 편지. 箚子로 孝宗의 뜻을 밝히고 朴尙衷의 일을 청하여 가납을 받았다는 것‚ 자신의 출처‚ 金集家 등에 있는 善本을 취하여 李珥의 글과 日記를 편집하는 일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邊美卿-烋 (14) 邊烋에게 國恤服制에서 하루를 달로 바꾼 것은 ≪大明會典≫을‚ 13일에 탈상하고 30일에 길복을 회복한 것은 ≪國朝五禮儀≫의 조목을 하나씩 섞어서 준용한 것이라고 답한 편지.
答尹子仁別紙 (15)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국휼시의 제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族姪이 貴戚을 탄핵한 뒤 윤증과 자신을 중심으로 宋時烈과 맞서 分黨하려한다는 소문과 송시열을 배척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는 내용.
答林德涵 (16) 林泳에게 답한 편지. 지난 여름 朱熹의 재이를 없애는 방도에 대해 올렸다가 時論을 만났었는데 이번에 別諭에 상소하여 답하여야 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18) 168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상소에 거취문제를 언급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18) 林泳에게 답한 편지. 대궐에 이르러 청하고 물러나는 일을 尹拯하고 상의했는데 체직되지 않은 채 어제 다시 소명을 받았다며 어찌해야 할지 의견을 구하는 내용.
答林德涵 (19) 林泳에게 답한 편지. 편지로 보내온 상소문을 읽으니 민심을 얻고 군정을 닦을 것‚ 戚里와 黨比의 고질적인 폐단을 언급한 것 등이 앞뒤가 잘 갖추어져 있고 觸犯한 것도 빠진 것도 없다는 의견을 전하고‚ 力行과 致知의 순서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兪參判伯圭 (20) 兪瑒에게 답한 편지. 국가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거나 內修外攘을 통해 천하를 회복하는 사업을 쉽게 여겨 나아가면 패할 뿐이겠지만 군신의 의리로 보아 편안할 수 없어 도성에 이르러 아뢴 뒤 돌아가겠다는 내용.
與尹子仁 (21) 尹拯에 보낸 편지. 소장을 올려 사양하고 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牛溪續集≫에 ‘변괴에 처해서는 權道로 행한다’는 宋翼弼의 주장에 成渾이 깊이 승복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들어 출처를 논하는 내용.
與林德涵 (22) 林泳에게 보낸 편지. 관직을 받지 않고서 登對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왕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과 사위가 宋時烈의 편지를 가지고 온 것 등에 대한 내용.
與李判書彛仲 (23) 李敏敍에게 登對했다가 급히 돌아오게 된 것을 밝힌 편지.
答金士直 (23) 金楺에게 답한 편지. 宗國이 망하고 이적이 멋대로 횡행한지 오래되어 힘을 다해도 어려운 시절임을 들어 출처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宋觀察道深-光淵 (25) 宋光淵에게 보낸 편지. 황해도의 士風이 무너지고 습속이 비루해졌으며 부역이 번거로움을 알려주고 ≪小學≫·≪家禮≫·≪擊蒙要訣≫ 등으로 교육할 것을 권장하는 내용.
答林德涵 (26) 1683. 林泳에게 답한 편지. 臺諫의 언론이 國論에 가까운데도 사림을 부양하고 淸議를 펴야 할 大臣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염려하고 자신과 尹拯 등의 거취에 대해 논한 내용.
答金相國 (27)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世祿休戚’이라는 표현은 喬木世臣이라는 의미라고 해명하면서 손을 놓고 있으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물러나서는 안될 것이라고 충고하는 내용.
答宋尤齋 (28) 宋時烈에게 지난해 가을 江郊에서 만나 春秋大義를 위주로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고 동의하였던 것을 상기시키고 마땅히 나아가 일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라고 권하는 편지.
答宋尤齋 (29)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평생 大義를 밝히기 위해 애쓴 노력은 본받아야 하지만 지금은 상하가 지혜를 합해야 할 상황으로 公正和平한 바탕 위에 작고 세세한 것에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명하는 내용.
與尹子仁 (31) 尹拯에 보낸 편지. 宋時烈에게 윤증의 입장을 설명하니 조금의 의심스런 장애도 없다며 윤증을 부르는 것도 쾌히 응락했다는 소식과 入城하여 報復雪恥의 뜻을 아뢰고 청나라의 年號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것 등 자신과 윤증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李判書季周 (32)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입성한 뒤의 자신의 안부와 거취를 알리고 宋時烈에게 賓客은 많지만 충성스럽게 인도하는 이가 드무니 이단하 같은 사람이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33) 尹拯에 답한 편지. 왕의 기대가 虛禮가 아니라는 것‚ 李珥가 成渾에게 출사를 권했던 것‚ 국사가 危亡한 것 등을 들어 출사를 권하고 당시의 정세와 宋時烈의 근황을 알리는 내용.
與閔驪陽-維重 (35) 閔維重에게 보낸 편지. 각 도의 기근에 도성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江都의 쌀을 활용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大憲叔弼 (36) 申翼相에게 답한 편지. 조정의 擧措‚ 尹拯의 출사‚ 孝宗을 世室에 추가하기로 한 일‚ 신익상의 아버지 묘표 찬술 등에 대한 내용.
與宋尤齋別紙 (36)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別紙. 世室에 들어가는 것을 告廟하는 것이 뒷날 사당에 들어갈 때 頒告하는 것과 중첩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
答金判樞 (37)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大臣과 臺閣의 갈등에 대해 전일에 진정시킬 계책이 막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미 通議가 있으니 자신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어렵다는 내용.
與閔相國大受 (37)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의 致仕 문제와 西方에서 일어난 급한 일을 처리할 대책이 필요하다는 내용.
答南判書雲路 (38)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인재를 정선하기 위한 절목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손자를 통해 온 편지를 받고 송시열이 말한 것을 한가지 예로 논단하기는 어렵다고 답한 내용.
答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逆獄과 奸黨‚ 本色의 黨名만 지키는 자‚ 시비를 알고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자 등을 輕重에 따라 구분한 뒤 본색의 당명을 견지한 자는 일단 써보고 출척을 결정해야지 가리지 않고 모두를 逆心과 私黨이라고 몰아붙인다면 갈등이 수습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宋尤齋 (39)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위로는 왕에게 아래로는 宋時烈에게 죄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 편안할 수 없어 상소를 남겨두고 돌아왔다는 내용.
與閔驪陽 (40) 閔維重에게 보낸 편지. 시골에 있을 때 듣기로는 도성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하니 貢物을 裁省하는 일은 인심에 따라 裁省廳이 마감한 문서를 그대로 두었다가 풍년이 들면 貢案을 바로잡은 뒤 금번 문서를 참고하며 전에 지급한 米布는 舊例에 따라 처리하자는 내용.
與閔驪陽 (40) 閔維重에게 보낸 편지. 裁省廳의 일을 변통하는 문제에 대해 廟堂과 상의하여 다시 아뢸 것을 청하고 성균관 주변에 사는 泮人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申觀察叔弼 (41) 申翼相에게 보낸 편지. 廟堂에서 의논한 西路의 일을 전하며 王法을 밝히고 인심을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요‚ 城池를 수리하고 器械를 수선하고 군량을 마련하는 것은 그 다음이니 인재를 가려 변방의 득실을 강구하고 군율을 명백히 관장하라는 내용.
答李士亨-泰壽 (4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偏黨과 大臣과 臺諫이 角立하던 상황에서 사리와 물정을 살펴 선처할 것을 권하고 사리상 대간이 옳다는 입장을 밝힌 내용.
與李養而 (4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다시 나와보니 정세가 더 어려워져 私意가 행해지고 의논이 무너져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대소관원 사이에 처하여 양쪽에 모두 죄를 얻었다는 내용.
答崔汝和 (4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言路가 宰相 뿐 아니라 宋時烈을 옳지 않다 하는 상황이라 調劑하지 않고 한 편의 주장에 서게 되면 국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後進의 言路는 扶植하는 것이 옳지만 서로 공정한 곳에 들어가려 힘써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43) 尹拯에 답한 편지.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예우가 전에 비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전하며 출사를 바란다는 내용.
答宋尤齋 (1) 168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毗盧峯에 올라 동해를 바라본 감회와 경연에서 ≪心經≫과 ≪綱目≫을 강하기로 한 것‚ 李翔의 還鄕과 尹拯이 도성에 도착하여 사양한 일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休致를 허락하면서도 머물라고 한 것은 국가대사를 논하고 宗社를 보존하려는 것이니 국가의 大義를 생각하고 떠도는 말에 구애되지 말라는 내용.
答李仲羽 (3) 李䎘에게 답한 편지. 돌아가고자 하나 아직 체직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薦目의 곡절을 別紙를 통해 밝히겠다는 내용.
別紙 (3) 李䎘에게 답한 편지 別紙. 새로 천거한 사람이 너무 많지만 東北西의 4도는 너무 적고‚ 銓曹에서 중외의 추천으로 묘당에서 정한 이를 注擬할 때 公的이라 하면서 사사로이 구제해주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추천이 잘못되었다는 비방이 있다는 내용.
與金相國 (4)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李喜朝가 박세채의 상소에 대하여 金壽興의 집에서 오간 논의를 전한 데 대해 자신의 상소 내용을 해명한 글. 物情을 順協하여 조정의 거조가 和平公正하면 臺閣의 연소한 무리도 믿게 되어 공론이 행해질 것이라는 내용.
答鄭士仰-齊斗 (5)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전일 아뢴 상소가 마땅히 떠날 의리를 밝힌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三峯集≫은 玉堂에 보냈다고 알리는 내용.
答林德涵 (6) 林泳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편지를 통해 힘을 합쳐 일하기로 하고 도성에 들어온 뒤 반년 동안의 정세와 자신의 거취를 전하고 金益勳의 削黜 문제로 인한 大官과 小官의 분열‚ 尊號와 諡號문제‚ 貢物 裁省‚ 休致한 송시열의 召還을 청한 일 등으로 송시열과 의견이 벌어진 경위 등을 밝힌 내용.
與尹子仁 (8) 尹拯에 보낸 편지. 조정에 나온 뒤 경연에 드나들며 송시열의 뒤를 이어 왕의 마음을 바로잡고 붕당을 타파하며 內修外攘을 청하여 대신의 자문을 받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사단이 일어 廟堂과 臺閣이 싸움터처럼 되었음을 전하고 薦擧科와 朝官을 久任하라는 주장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留守彛仲 (10)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다스리는 곳에 대해 수령들이 내놓은 대책들이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안정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하니 고식적인 것을 버리라는 내용.
答宋尤齋 (1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묘당과 의견이 맞지 않아 자신이 아뢴 일은 시행되지 않고 여러 대간이 죄를 얻어 감히 뜻을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송시열에 대한 休致의 還收를 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 등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申大諫公獻 (13) 申琓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조정에 있고 여러 번 부르기에 나오면서 일대 기회라 생각했는데 이제 廟堂은 儒士를 싫어하고 대소가 서로 협력하지 않고 함정을 만들며 당을 수립하는 기치를 세우고 병통을 상소하면 죄를 얻으니 국가의 일이 근심스럽다는 내용.
答任汝諧 (14) 任元聖에게 답한 편지. 進上品을 실어보내는 일‚ 復戶하고 馬政을 정비하는 일 등 驛의 폐단을 釐正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沈德升-梯 (15) 沈梯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의견이 다른 것은 威化島回軍 문제 등 몇 가지뿐이며 또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데‚ 명백한 의논도 없이 송시열과 다른 의견을 세워 그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훈척의 일로 大臣과 臺閣이 대립하던 중 대각이 체직되는 것을 그냥 볼 수만 없어 진언했다가 채택되지 않아 물러났다는 내용.
答趙光甫-持謙 (17) 趙持謙에게 답한 편지. 당시의 사세가 헤아리지도 않고 파면하며 배척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라며 마음 쓰지 말고 經學 등 선대의 학업을 계속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成汝中-至善 (18) 成至善에게 선비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도에 대해 답한 편지.
與鄭士仰 (18) 鄭齊斗에게 출처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전한 편지.
答金都事-始徽 (18) 金始徽에게 답한 편지. 선비를 가르칠 때의 원칙과 요령에 대한 내용.
別紙 (19) 金始徽에게 답한 편지 別紙. 선비들을 교육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목.
答李士亨 (2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왕의 患痘症에 매일 나아간 것을 侍藥廳을 설치한 것 같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내용.
與申叔開-啓華 (22) 申啓華에게 보낸 편지. 妖巫의 죄를 거론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妖巫의 죄를 거론하는 일‚ 조정을 調和하기 위하여 宋時烈을 만나고 尹拯에게도 편지를 보낸 일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別紙 (23) 尹拯에게 李端夏와 함께 宋時烈을 만났을 때 오간 얘기를 전하는 편지 別紙. 御營大將 金益勳 문제와 許璽·許瑛의 옥사문제에 대한 견해차를 확인하고 諡號와 裁省廳의 문제 및 대간의 입장을 옹호한 일 등에 대해서는 사제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의견 차이일 뿐임을 송시열도 동의하고 조정에서 훈척의 위치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내용.
與尹子仁 (29) 1684. 尹拯에게 보낸 편지. 윤증의 말이 완급을 벗어남이 있다고 지적하며 壬辰倭亂 때의 扈駕 문제‚ 족보에서 成渾의 扈駕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楊時의 일을 인용한 문제에 대하여 입장을 밝힌 내용.
答沈德升 (29) 沈梯에게 답한 편지. 更化 후 罰이 공명정대하지 못했으며 色目 때문에 어진 이를 쓰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 인조 때 두 당이 병용되다 서인이 오로지 쓰이면서 틈이 어그러진 것이니 이편저편을 논하지 말고 어질고 재주있는 이를 등용하여 보합하여야 한다는 내용.
答羅顯道 (32)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墓碣 사건 이후의 경과를 밝히고 상소에서 崔愼을 분명하게 배척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해명함. 宋時烈에게 병통이 있지만 尹拯이 ‘義利雙行 王伯幷用’이라 한 것이나 宋浚吉·李惟泰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내용.
答宋尤齋 (3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文 사건 이후의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송시열에게 平心으로 선처할 것을 부탁하는 내용.
別紙 (3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宋時烈 집안에서 香洞問答을 기록한 것이 한쪽 편에 의해 왜곡되어 전파되고 있는 것을 염려하고 世道의 책임‚ 臺諫의 得失‚ 追號 문제에 대한 곡절 등 당시 현안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힌 내용.
答申觀察公獻 (39) 申琓에게 답한 편지. 가을에 量田을 수정할 때 세금과 民弊 중 민폐를‚ 豪强과 빈약한 사람 중에서는 빈약한 자를 우선하여 선처해야 한다는 점‚ 선비를 가르치는 절목은 옛 법과 현재 조정의 제도 사이에서 잘 참작하여 행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李同甫 (39)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조상의 산소에 대한 일‚ 懷尼(송시열과 윤증) 간에 왕복한 편지의 득실과 사건의 향방‚ 성균관의 논의에 대한 염려‚ 師友錄의 편찬 등에 대한 내용.
答羅顯道 (40)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산골짜기 잔약한 읍이라 선비도 책도 없어 詩書禮樂을 가르치기 어렵겠지만 훈장을 세워 독려하며 ≪警民編≫·≪擊蒙要訣≫·≪小學≫·≪家禮≫ 등을 가르치고 문리가 좀 나아진 뒤 四書 등을 차례로 가르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李君輔-世弼 (41) 168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賑政에 임하는 자세와 糴穀과 內帑을 청하거나 京司에서 돈을 빌려 진휼에 쓰는 것 등의 조처에 대해 논의함. 宋時烈과 尹拯의 일로 통문이 도는 것을 염려하고 사우들이 강학하며 이치를 밝혀 大道에 함께 나아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泰尙姪 (42)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다스리고 있는 지역이 王化로부터 소외된 것에 대한 조처와 管餉의 문제에 대한 내용.
答泰尙姪 (43)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이익을 좋아하고 사치를 숭상하는 폐단을 變通하고 나서 그 뒤에 風敎를 시행하라는 내용.
與柳判書悠久別紙 (1) 1685.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別紙. 戶曹判書가 된 것을 축하하고 호조판서로서 명망높았던 朴東亮·黃愼 등의 자취를 살펴 사치의 폐단을 마음에 새기고 절검에 힘쓰라는 내용.
答柳悠久 (3)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經費를 주관하는 이는 나라 편에‚ 진휼을 주장하는 이는 백성 편에 서게 된다는 말은 있지만 君民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 직분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鄭眞卿 (3) 鄭尙樸에게 답한 편지. 都約正이라 개명한 것의 名實과 立約 끝에 관리에 관한 내용은 향약의 條貫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힌 글.
答林德涵 (4) 1686. 林泳에게 답한 편지. 변방의 신하가 越境하는 것을 엄금하지 못하여 임금이 벌금을 내게 한 죄를 논한 臺諫을 삭직한 것은 잘못된 조치이며 崔錫鼎 등이 文學있는 이를 천거하라고 하는데 적절한 인물이 많지 않다는 내용.
答閔彦暉-以升 (6) 閔以升에게 太極說과 去就의 의리 등에 대해 답한 편지.
答尹觀察叔麟 (7) 1687.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關北의 문교가 이미 행해졌는데 또 교정하려 한다는데 변방을 설치한 의의는 따로 있으니 弓馬를 변하여 絃誦하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라는 내용.
答金領樞 (7)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집이 陵幸길 곁에 있어 부득불 나아가 뵙고 나서 이미 실패했던 것을 들어 배종하기를 사양하였는데 왕명이 계속 이르니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崔汝和 (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養士節目을 변통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9)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정승에 임명되었다니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과 宮府의 체모를 융화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黨比에 의지하여 言路를 막고 국사를 잘못 이끌지 않도록 勉學에 힘쓰고 공평한 사람을 구하여 서로 의논하라고 권유하는 내용.
答吳貫之-道一 (10) 1688.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현재 상황은 元氣가 이미 사라진 사람과 같아서 誠心과 公道로 鎭靜해야 할 상황이니 공평한 의논을 해치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는 내용.
答金觀察士肯-構 (11) 金構에게 답한 편지. 진휼에 마음을 다할 것‚ 李珥 이후 海西에서 立朝한 사람이 없어 다른 도보다 세금이 더욱 무거우니 父老에게 물은 뒤 蠲減할 것‚ 大同法 등을 시행하여 혜택을 입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12)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天心을 돌리고 世道를 구해 國脈을 이어주고 민생을 구제하는 것을 의연히 담당할 기상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13)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陪衛하여 환도하면서 車駕가 지나는 곳에 致祭는 하면서도 小民을 돌보는 일은 없었다고 아쉬워하고 海甸에 흉년이 심하여 백성들이 다 없어질 지경이니 진휼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公獻 (14) 申琓에게 답한 편지. 다른 곳에 혐의가 있다하여 時事 문제에 너무 너그럽게 하지 말 것과 林泳이 錦城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하여 염려를 전하는 내용.
與李大諫文瑞-奎齡-別紙 (14) 李奎齡에게 보낸 편지. 門人 중에서 閔以升이 博學하고 맑은 절조가 있고‚ 金榦은 아는 것이 정밀하고 변치 않는 행실이 있고‚ 朴泰初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학문에 힘쓰고 있어 臺省에 추천할만하다는 내용.
答申公獻 (15) 申琓에게 답한 편지. 追錄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거취 문제에 관해 해명하는 내용.
答兪學士寧叔-得一 (16)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君輔 (17)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조정의 의논이 무너진 상황이라 나아가는 것은 불가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儒者의 도는 부르면 나아가고 쓰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어서 낭패할 위험성이 있다해도 단정하기는 어려우니 손익을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1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예전에 실패했던 일로 引罪하고 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출처 문제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林德涵 (19) 林泳에게 답한 편지. 금일의 世道가 위태로운 기미가 없지 않지만 왕이 宮庄의 법을 정하는 등 기회가 없지 않을 듯하여 함께 다스리기를 도모할 수 있을까하고 기다리던 중 대비의 병이 깊어져 어렵게 되었다는 내용.
別紙 (19)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萬言疏를 올리면서 그것이 채용되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정했는데 批旨에 소를 다시 올리라는 것이 없더라며 當局하는 이들이 오라고 간청해 놓고 들어오니 함께 일하려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
答吳貫之 (20)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재능이 부족하고 전에 실패했는데도 왕을 도와 치리를 도모하려고 나와 萬言疏를 올렸는데 왕의 뜻을 보니 근본적인 것을 하려는 뜻이 없어 곧 辭狀을 올리고 떠나려 한다는 내용.
答兪寧叔 (21)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왕에게 나아가 머물렀다는 것은 왕이 侍藥하는데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요 선배도 그런 일이 있었고 자신이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것과 6번의 상소 끝에 나온 자신의 출처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사관의 傳諭 뒤 封事를 다시 올리고 처분을 기다리다 다시 글을 올려 체직을 청했는데 그 사이에 憲府의 차자와 유생들의 상소가 서로 견제되어 험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내용.
答李同甫 (22)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7번째의 상소 후 사관이 돌아간 뒤 집을 떠나면서 다시 사양하는 계를 올려놓고 高陽에서 상황을 보아 처신할 것이라며 나아가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염려하는 내용.
與林德涵 (23) 林泳에게 보낸 편지.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니 글자마다 실질적이어서 사양할 만한 의리가 없어 古人이 소명을 받고 나아와 사직하는 예를 따라 성에 도착하여 한 번 상소할 것이라 말하고 미리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한 번 찾아오라는 내용.
與參奉叔 (23) 숙부에게 보낸 편지. 친척과 친구들이 세도가 변하면서 여러 儒者들이 낭패했던 것을 들어 나아가지 말라고 하지만‚ 儒者의 도에 따라 나간 뒤 대비의 건강과 왕의 비답을 본 뒤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5)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諭에 下敎한 것이 모두 箚子에서 논한 것들이어서 명을 받아들여 성에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5) 林泳에게 답한 편지. 왕의 마음을 開悟하여 조정의 의론을 和協할 각오를 전하는 내용.
與崔汝和 (26)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차자를 올린 경위와 延曙의 村舍에 머물다가 廟堂에서 두 정승에게 물으려 한다고 하니 그 회답을 기다려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與趙相國公擧 (27) 趙師錫에게 보낸 편지. 정승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국사가 어그러져 있으니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돌리고 아래로는 조정의 의논을 진정시켜 달라는 내용.
與南相國 (2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상소를 올린 것은 한 선비의 진퇴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忠毅에서 나온 것이라며 왕이 자신이 이떤 이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與任大年 (28)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泮疏가 궤산된 뒤 門人들이 상소하려는 것에 대해 자신의 본래의 죄에 문인에게 왕명을 거역하도록 가르친 죄를 더하는 것이 되며 宋時烈이 화를 당할 때에도 程朱의 예를 들어 의가 아니라고 했었다며 더구나 지금은 소인들이 참소한 것이 아니고 왕이 일시적으로 배척한 것이니 引咎하고 죄를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
答李夏卿-熙夏 (28) 李熙夏에게 답한 편지. 萬言封事와 5조목의 啓箚를 올린 뒤 왕이 東平君 등에 대한 일을 들어주고 別諭를 내렸는데‚ 楨·柟의 일과 儲嗣 문제가 거론되면서 왕이 진노하여 대신은 栫棘되고 자신도 직책에서 물러나 성밖에 머물고 있으며 사세를 보아 진퇴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雲卿-志逵 (29)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이번에 출사한 것은 사세를 헤아리지 않고 하고자 하려다가 패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출사하지 않아야 하는데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내용.
答林德涵 (30) 林泳에게 답한 편지. 못다한 직분을 다 할 수 있기에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左相의 차자 뒤에도 요사한 사람들만 계속 세를 얻고 있다는 내용.
答季肯兄 (31)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 시세가 변할 것을 미리 참작하지 못했으니 자신은 오활한 儒者라 할 만하다고 자탄하는 내용.
答吳貫之 (31)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吳允謙이 奏本한 일은 일시의 변괴에 대처하여 나라를 존속시키려는 의리일 뿐 만세에 통하는 常道는 아니었으니 금일 卞正할 것은 本意를 다시 밝힐 뿐 가벼이 움직여 누를 끼치지 말고 공평하고 관대함으로 왕의 마음을 돌리고 떠도는 논의를 진정시켜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柳悠久 (32)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대비의 상에 削版된 사람 등이 입어야 할 상복‚ 擧哀 절차 등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내용.
答宋尤齋 (3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지난 해 왕복한 편지의 말이 엄준하여 뒤에 계속 말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장려하는 편지를 받아 송구하다며 국사를 어그러뜨린 것을 자책하는 내용.
答崔汝和 (3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草莽에서 일어난 뒤의 출처는 군신의 의리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중대한 책무를 맡고 世道가 더 해진 상황에서 나온 것은 잘못이 아니며 箚子가 嘉納되려던 중 갑자기 時事가 잘못된 것은 時運이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35) 尹拯에 답한 편지. 호남의 상소문으로 오히려 윤증이 낭패하게 되고 世道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염려‚ 송시열이 성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하니 후손인 成至善 형제 등에게 成渾을 신변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권하라는 내용.
答姜叔重-錫朋 (36)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自守의 의리를 강조한 편지에 답한 것으로 儒者를 자처하는 사람의 출처관에서 볼 때 왕의 은혜를 입고서도 끝내 나아가지 않을 수는 없다는 내용.
答趙相國 (37) 1689.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時事가 점점 어려워져 뜻은 머물고자 하지만 머물래야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는 내용.
答金相國起之 (38)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몇 개월 죄를 기다리다 너그러운 은혜를 입었다며 물러날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나니 나라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고 염려하는 내용.
答李沃溝-克亨 (38) 李克亨에게 답한 편지. 軍保 훈련을 수령이 별도로 하기는 어렵다는 것‚ 量田을 조정의 명 없이 고칠 수 없으니 陳田과 起耕 여부를 실제로 踏驗하여 획급할 것‚ 敎養할 때 의리와 行檢을 알게 하고 時文만 외우는 폐단을 막을 것 등 고을의 병폐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 (39) 林泳에게 답한 편지. 유생들의 상소에 따른 갑작스러운 黜享 뒤에 宋時烈을 머물게 할 것을 청했던 일‚ 두 현인을 襃揚했던 것 등을 들어 自劾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던 상황과 심경‚ 제자들의 학문과 안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夏卿-禹錫 (40) 金禹錫에게 답한 편지. 黜享 등 時事에 대한 염려를 전하고‚ 왕의 마음은 돌리지 못하고 국가에 누만 끼치게 될 뿐이며 이런 문제로 縉紳들이 모여 상소한 예가 없으니 상소 여부는 잘 상의하여 선처하라는 내용.
與兪寧叔 (41) 兪得一에게 보낸 편지. 관직에 있을 때 抑强扶弱하고 仁恕寬弘의 도로 근본을 삼아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忠厚함이 적은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林德涵 (42) 林泳에게 답한 편지. 臣民이 모두 조정의 일을 근심하고 있는 상황이라 자신이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내용.
答李君輔 (42)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南九萬이 유배되었는데 자신도 죄를 기다리는 상황이라 감히 極論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과 서원 黜享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君獻-世璞 (43) 李世璞에게 답한 편지. 黜享에 대한 일은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
答任大年 (44) 1691.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詞章과 科擧에 대한 일은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장졸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방어할 대책을 준비하여야 하는데 北漢山城을 쌓는 일 등이 아직 정해지지 않는 등 착수하는 일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上淸陰金先生 (1) 1650. 金尙憲에게 올린 편지. 조부 朴東亮‚ 외조부인 申欽과의 관계를 들고‚ 자신이 禮로써 선생께 나아가겠다고 청한 내용.
答元留守-斗杓 (2) 1652. 元斗杓에게 답한 편지. 開城留守가 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
答申東江-翊全-舅氏 (3) 1658. 외숙인 申翊全에게 답한 편지. 仁義禮智를 橫列로 해야 할 것이라는 등 20章圖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내용.
與李惺菴 (3) 1653. 李壽仁에게 보낸 편지. 영화를 버리고 벼슬의 자취도 끊고 성현의 책을 읽고 있다는 그를 격려하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
答閔楊湖 (4) 閔嶪에게 답한 편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私親을 위하여 1등급을 내려서 服制를 행하라는 구절에 대해 견해를 밝힌 내용.
與閔楊湖 (6) 閔嶪에게 보낸 편지. 大祥 때 變服하는 절차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與閔楊湖別紙 (7) 1667. 閔嶪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季母가 돌아가서 成服하고 장례 치르기 전인데 季父가 돌아가셨을 때의 几筵 설치 문제 등 상례 절차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元聘君 (8) 1658. 元萬里에게 답한 편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는 태도‚ 출처와 학문의 도리 등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宋時烈이 召命에 응하여 나온 뒤의 결과에 대해 관심과 염려를 표하는 내용.
與金和順-克亨 (11) 金克亨에게 보낸 편지. 尹鑴에게 잘못을 지적한 편지를 보냈으나 듣지 않으니 윤휴에게 가르침을 주어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해주라는 내용.
答金和順 (12) 1662. 金克亨에게 답한 편지. 尹鑴가 재주와 식견이 높지만 학문에 병통이 있고 처세가 선하지 못함을 근심하였다며 절교하게 된 과정을 밝힌 내용.
答申敎官-碩亨 (13) 申碩亨에게 답한 편지. 시절이나 자리가 맞지 않는데도 나아가는 것은 잘못이라며 금일의 상황이 나아가 벼슬할 시점이 아니라고 충고하는 내용.
與宋同春堂 (14) 1664. 宋浚吉에게 보낸 편지. 아직 뵙고 문하에 들지 못해 아쉽다며 조만간 뵙고 싶다는 내용.
答宋尤齋 (15) 166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操養救治의 요체를 묻고 李珥의 연보 자료를 채록하고 수집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近思釋義≫의 校讎작업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16) 166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高祖를 잇는 宗子가 先世에 행하던 것과 俗禮를 따르겠다며 朱子家禮를 따라 행하려 하지 않는 경우의 대처 방법‚ 時祭에서 大宗과 小宗의 순서‚ 보름날 제사의 진설‚ ≪朱子家禮≫와 ≪疑禮問解≫에 나오는 祭饌의 차이‚ 외할아버지에 대한 奉祀‚ 婦人의 상복 제도‚ 居喪할 때의 제사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別紙 (19) 166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부친의 여러 형제들에 대한 칭호‚ 사당 제사나 상례에 薦獻할 품목‚ 服이 다했지만 정이 도타운 친척에 행할 禮‚ 外族의 喪에 대한 변통‚ 大功의 喪에 폐할 일과 할 일‚ 伯魚에 대한 孔子의 상례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宋尤齋 (22) 1668.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선조의 묘에 쓸 文字는 碑碣에 敍事를 위주로‚ 表記에 議論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둘 다 할 수 없어서 碣銘을 청한 것인데 序文이 墓表에 가깝게 되어 있다며 서문 일부를 줄여달라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2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物格과 格物의 개념에 대한 李滉과 李珥의 설을 고증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
與宋尤齋別紙 (25)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別紙. 朱熹가 喪服을 토론하기를 청한 箚子와 ≪通典≫ 및 ≪儀禮≫ 喪服圖式 등을 근거로 嫡孫으로 承重한 자의 代服 규정이 천자의 예에 한정된 주장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승중한 사람의 服制·主喪·主祭·遞遷 등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宋尤齋別紙 (3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紫雲書院 移建 문제에 대한 의견과 자운서원에 白仁傑을 雙廟의 西位로 병향하는 것이 불가한 세 가지 이유를 밝힌 내용.
答宋尤齋別紙 (34) 167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尹宣擧의 狀文에서 贈職으로 칭한 이유‚ 尹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尹鑴에게 윤선거가 취했던 입장‚ 尹鑴와의 관계에 대한 서술 부분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宋尤齋 (36)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狀文을 수정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송시열의 견해에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懷川書院에 宋浚吉을 배향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君父의 大喪을 만나서 哭班에 나아갔다가 다시 나와 東城에 머물고 단지 두 번의 殮과 成服할 때에만 왕복하여 哀臨하는 거취가 정당한 것인지 묻는 내용.
與宋尤齋 (3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大葬이 있기 전날 저녁에 능 아래 도착하여 待罪할 것이라는 소식에 대해 근래 일이 소망 없는 상황에서 틈을 타서 함부로 나아가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니 山陵에 나아가는 것을 재고하라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4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로 鄭夢周 비문의 문장과 내용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글.
答宋尤齋別紙 (4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朴尙衷을 포장하기 위하여 올리는 諡狀 초고에 대한 의견과 李彦迪·宋麟壽의 연보 등에서 冶川 朴紹가 조정에 있을 때의 행적을 고증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한 내용.
答宋尤齋 (4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冶川 朴紹의 행장을 써 준 것에 감사하고 陳荀과 元成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宋尤齋 (4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임진왜란 중 罪籍에 있어 自靖하겠다며 扈駕하지 않았던 成渾의 出處에 대한 입장‚ 金壽恒에게 易을 읽도록 권한 일‚ 尹宣擧의 묘갈문 수정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1) 167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흉흉한 소문에 대한 위로와 聖學의 연원을 강구하여 책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지난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있었던 일은 너무 엄하게 처리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2) 167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부친이 돌아가신 뒤 3년 이내에 모친상을 당했을 경우의 禮‚ 喪禮 중 婚禮와 冠禮를 행할 수 있는 服制의 범위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5) 168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서울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을 축하함. 朴尙衷의 포증을 도와준 것을 사례하고 박상충이 元나라를 배척한 일과 太祖의 回軍이 모두 華夷의 大防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내용.
答宋尤齋別紙 (6)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親喪 중 國恤을 당했을 때의 복제와 제사 문제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9) 168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孟子의 好辯에 대해 養氣와 知言을 위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異端을 배척하는 문제는 성현이 天理를 잡고 天討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배척하기 좋아하는 것이 될 뿐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宋尤齋 (10) 168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拯의 편지들이 분수를 범하고 말에 실수한 것은 있지만 먼저 윤증에게 유감의 뜻을 보일 것을 권함. 尹宣擧의 江都일을 거론하여 평생 붕우의 의리를 어긋나게 하고 아들(윤증)의 망극한 정을 상하게 하며 국론을 분열시킨 것은 세도에 해가 될 뿐이니 공평하게 행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宋尤齋 (12)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尹拯 문제에 대한 자신의 편지 내용을 해명함. 伯父 碑文의 찬술‚ 栗谷別集에서 入山과 관련된 구절의 처리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宋尤齋 (1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학문‚ 윤선거 부자가 尹鑴를 애석하게 여겨 구호한 일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송시열이 죽은 뒤 尹拯이 윤휴의 학문을 높일 것이라고 했다는데 윤증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는 내용.
與尹魯西 (15) 1658. 尹宣擧에게 안부를 전하고 서울에 올라오면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
答尹魯西 (16) 윤선거가 사양하고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與尹魯西別紙 (16) 1662. 尹宣擧에게 보낸 편지 別紙. 淸州에서 있었던 宋時烈과의 문답 내용 중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다시 질문함. 母子간의 명분을 위주로 한 송시열의 견해에 대한 의문‚ 養父母에 대한 喪服‚ 양부모 신주의 호칭과 제사 등에 대한 내용.
答尹魯西 (20) 1667.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出處 문제‚ 成渾에 의해 이루어진 李珥의 문집 및 이이와 성혼의 年譜를 수정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尹魯西 (21) 1668.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파주에 있는 坡山書院의 位次를 雙廟로 分享하는 문제‚ 妻喪 중에 祖母상을 당했을 때의 상례 등에 대한 내용.
答尹魯西別紙 (22)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別紙. ≪牛溪續集≫에 分註하는 일 등 文集 刪定에 대해 의견을 밝힘. 坡山書院과 紫雲書院에 成守琛과 白仁傑을 위해 雙廟를 두는 일‚ 자운서원을 移建하는 일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草廬 (25) 李惟泰에게 보낸 편지. 만나본 감회를 전함. 時事의 변동으로 群賢들과 이유태가 모두 유배되는데 자신은 아직 죄가 정해지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는 내용.
答尹進士-忠甲 (26) 1688. 尹忠甲에게 답한 편지. 젊어서 외숙인 申翊全에게 명성을 들었으나 찾아보지 못하다가 金泳 등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감회를 전하고 책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는 내용.
答趙高陽-逢源 (27) 1675. 趙逢源에게 답한 편지. 時論의 배척으로 인해 加律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유배되어 있는 스승 宋時烈을 위한 上章은 잘 헤아려 善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趙僉樞 (28) 1682. 趙逢源에게 답한 편지. 權近이 卒하기 전에 登第하여 敎授官이 되었던 일‚ 金時習이 13세 때 배웠던 사실 등을 들어 金泮이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崔而栗-寬 (28) 1674. 崔寬에게 답한 편지. 侍養之親에 대한 3년간 心喪 여부와 題主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變禮에 대한 내용.
答權說卿 (29) 1664. 權說에게 답한 편지. ‘春王正月’이라는 말 등 경전에 나오는 正月에 대한 해석을 고증하고 64卦의 卦變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希仲 (31) 1660. 尹鑴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평만 하고 있다는 것을 尹宣擧의 편지를 통해 알고 있다. 別紙를 통해 의견을 다시 밝히니 허물을 고치기를 바란다는 내용.
別紙 (31) 尹鑴에게 답한 편지 別紙. 獻議에 응하여 異論을 처음 제기한 것‚ 斬衰服을 입어야 한다는 설로 宗統의 문제를 일으켜 許穆의 의논을 도운 것‚ 尹善道가 상소한 뒤 인심이 汲汲해지고 중외가 해괴해 하는 상황에서 조정에 잘못된 의논을 일으켜 儒賢을 흔들고 權勢에 아부하여 實學을 방해한 것 등이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내용.
答李雲擧-翔 (40) 1684. 李翔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행장 문제 등 尹拯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崔道卿-碩儒-巨卿-碩英-兄 (41) 1656. 金集의 사후 崔碩儒와 崔碩英 형제에게 스승에 대한 服制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李翔의 의견을 들어 深衣에 조금 성긴 포를 쓰고 帶는 細布나 혹은 모시를 써서 夾縫하고 絰은 원래의 제도로써 하라는 내용.
答崔漢卿 (42) 1672. 崔後亮에게 맏아들의 立後가 결정되기 전 服喪을 누가 주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입후가 확정되기 전에는 父子라 칭할 수 없으니 發靷 등을 둘째 아들이 주관하도록 하고 입후가 확정된 다음 다시 처리하라는 내용.
答崔漢卿 (43) 입후가 확정되지 않아 次子가 題主가 되었을 때의 祝辭 호칭에 대해 崔後亮에게 답한 편지. 예조에 喪家의 예로 입후를 청하되 허락을 받지 못하면 次子가 題主일 때 祝辭에 ‘孝’字를 쓰지 못하도록 한 李滉의 설에 따르라는 내용.
答愼仲任 (43) 1663. 愼景尹에게 답한 편지. 母親喪 중에 부친의 무덤을 改葬하여 合葬할 때 几筵을 합하지 말고 斬衰의 喪禮를 원용하라는 내용.
與金元會 (1) 1657. 金澄에게 보낸 편지. 금일에 화를 당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지만 허물은 자신에게도 있다고 했던 말 등 그와 만났을 때의 일을 추억하고 안부를 전하는 내용.
答金元會 (1) 金澄에게 답한 편지. 몸을 檢束하는 데 태만하거나 견고한 기풍이 없을까 조심하고 日用動靜에서 시작하여 점차 實地에 나아가도록 하라는 내용.
答金元會 (2) 1671. 金澄에게 답한 편지. 代服의 근거는 朱子의 奏箚에 근거하였고 題主와 遞遷의 문제는 一室을 비워 둘 수 없는 것이라며 閔愼의 대복 문제에 대한 입장을 설명한 내용.
答金元會 (3) 1673. 金澄에게 답한 편지. 荊川의 承重論은 할아버지를 위한 복이 부친을 대신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趙昱의 일은 乙卯倭變이라는 비상시의 일로 기록이 모순이 있을 수 있으니 大旨를 보존하여 훗날의 考訂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洪國寶-錫龜 (4) 1672. 洪錫龜에게 답한 편지. 상을 당한 후의 改題‚ 告祝에 대한 변통‚ 生員과 進士의 妻에 걸맞은 呼稱 등 상례의 격식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글.
與李大而-恢-別紙 (4) 李恢에게 보낸 편지 別紙. 동생의 장자를 형에게 立後하여 후사를 삼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答李佐郞-恒-兄 (6) 1671. 李恒에게 답한 편지. 禫服을 하고 祥祭할 수는 없을 것이며 더구나 祥祭를 폐하고서 禫祭를 행할 근거는 없으니 창황 중에 제사하지 못한 연유를 几筵에 고한 뒤에 날짜를 가려 제사를 행하라는 내용.
與具百朋-錫 (7) 1683. 具錫에게 보낸 편지. 인조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오가던 곳에 새로 집을 짓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與尹泰升-堦 (7) 1673. 尹堦가 海西에 가는 것을 위로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
答李汝輝-之翼-別紙 (7) 1673. 李之翼에게 답한 편지 別紙. 부의에 사례하고 보내온 것이 분에 넘치는 것이어서 4가지 중 1가지만 받고 나머지는 풀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다는 내용.
與金夏卿別紙 (8) 1681. 金禹錫에게 보낸 편지 別紙. 白川 文會書院에 이미 賜額이 있어 함부로 배향하기 어려운데도 院儒들이 추가로 배향할 것을 의논해오자 이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元仲擧-萬里 (10) 1666. 元萬里에게 禫祭의 儀節에 대해 답한 편지.
與元君始 (10) 1682. 元萬春에게 보낸 편지. 糴政으로 비방이 일어 곤란에 처한 것을 위로하고 軍務를 다스림에 너그러움과 엄함을 병용하여 분수로 제어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라는 내용.
答南仲輝 (11) 1659. 東銘의 뜻에 대한 南二星의 질문에 답한 편지.
與金延之 (11) 1683. 金壽增에게 보낸 편지. 武夷櫂歌의 大意에 대한 李滉과 奇大升의 설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金起之 (12) 1674.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20살이 못되어 죽은 이의 상례는 古禮에는 없고 開元禮와 程子에 비로소 장사지내고 返虞하고 신주를 세우는 예가 생겼으니 卒哭과 祔祭는 행하지 말되 虞祭는 3차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起之 (12) 1685.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왕의 侍藥에 노고가 많았음을 위로하고 나아가지 않아 혐의를 피하고 분수를 지키겠다는 뜻을 피력하는 내용.
答金久之 (13) 1676.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海西로 옮겨 ≪周易≫ 등을 읽고 있는 근황을 알리고 四書·≪小學≫·≪近思錄≫은 聖學의 연원이고 ≪大學衍義≫·≪聖學輯要≫ 등도 볼만하다며 성리학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金久之 (14) 1677.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김수항의 아버지 金光燦에 대한 글을 부탁받은 뒤 일의 경과에 대해 알리는 내용.
與閔大受 (15) 1671.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문집이 분류에 법도가 없고 詩 등 차례가 도치되어 있으며 異本이 많이 있어 이를 다시 모으고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사실과 宋時烈과 善寫하여 간행하기로 합의하여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내용.
答閔大受 (16) 1676.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李蕃에게서 민정중을 西班에 붙인다는 명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며 위로함. 宋時烈에게 학문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며 講席에 참여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
與閔大受 (17) 1681.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栗谷先生續集 간행건과 松都 儒生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조를 祠宇에 모시는 일을 품해 준 것에 사례하고 世系는 別幅에 기록하여 보내겠다는 내용.
與閔大受 (18) 1690.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병으로 귀양길을 마중하지 못했다며 안부를 묻는 내용.
答閔持叔 (18) 1667. 閔維重에게 답한 편지. 宋浚吉의 상소로 인하여 물의가 비등한 것을 염려함. 金尙憲이나 趙錫胤 등이 龍鱗을 건드리는 언론을 피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풍조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며 出處와 言行이 사우들의 바램에 부합하기를 부탁한다는 내용.
答閔持叔 (19) 1682. 閔維重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가 出繼한 뒤 돌아가셨을 때 本生의 할아버지에게는 아버지를 따라 1등급을 내려 大功服을 입고 從祖라 칭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季周別紙 (20) 1676.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朱子가 戒謹恐懼를 持敬의 근본이라 본 것은 명확하지만 宋時烈이 誠을 戒愼恐懼의 근본으로 삼아 마친다고 한 것은 誠을 持敬의 근본이라고 할 수 없으니 잘못이라며 持敬에 대하여 논변한 내용.
答李季周 (21)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誠身存心과 致知 등에 대한 내용.
答李季周 (22) 1677.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聞見錄과 劉元承 手編에 달리 기록되어 있는 生薑樹頭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季周 (23) 1680.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辭謝하겠다는 말에 國史를 改修하는 막대한 거사를 피하지 말라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季周別紙 (24) 1681.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尹宣擧의 강화도에서의 행동에 대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밝히고 그의 처만 먼저 죽게 하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는 비방에 대해 그 부인이 婦德이 높고 ≪小學≫과 烈女傳에 능한 인물로 自決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해명하는 내용.
與李季周 (25) 1685. 李端夏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後事문제에 대해 宋時烈의 주장으로 죽은 李繼를 대신하여 李綖을 찰방의 次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함. 차자를 후사로 정한 데다가 이연이 이계보다 오히려 나이가 많다는 주장도 있으니 형제의 倫序로 보아 잘못이고 이계의 처가 입후하여 남편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一宗이 둘로 분기하게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용.
與李幼能 (27) 1664.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先稿의 狀草 교정‚ 永寧殿 문제‚ 편집한 禮書를 살펴보는 일‚ 李滉 遺文의 편집‚ 出處와 去就 등에 대한 내용.
與李幼能 (28)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崔君의 集覽은 李滉의 편지와 李珥의 <補遺後議> 등을 수록하지 않고 補解의 설명이 선인들이 정한 것과 어그러진 것이 많아 변파했다는 점. 崔君이 易에 밝다 하여 함께 강학하려 했는데 병통이 있어 애석하니 구습을 버리고 正見에 힘쓰도록 도와주라는 내용.
答李幼能別紙 (30)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別紙. 太極은 易에 있어서 그 綱領과 意思를 발하는 것일 뿐 洪範과 서로 體用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
與李幼能 (32)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세도가 쇠미해져 학문하려는 자가 적고 뜻이 있는 자도 은둔하거나 文章과 經術에 국한되어 정정당당하고 치우치지 않는 이가 적은 것을 염려함. 尹鑴에게 보냈던 服制私議를 개정했던 喪服正義는 說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보내지 못하였으니 뒷날을 기다려 得失을 아뢰겠다는 내용.
答李幼能 (33)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次第를 논하고‚ 학문의 폐단은 聖學에 전심하지 않는데서 나오는데 科場에 드나들었으나 知命에 이르러 朱子를 스승으로 삼아 주자를 이은 적통이 되었던 이황과 달리 자신은 가정에서 보며 자란 詞章의 습속을 일찍이 버리고서도 本源의 경계에 애매하고 編著하느라 大業을 日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외에 喪服正義와 師友錄을 편저하는 일에 대해 상의함.
答李養而 (35) 165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편지를 보내 격려하고 충고해 준 것에 사례하는 내용.
答李養而 (36) 1660.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知와 識의 의미‚ 道와 文이 둘이 아니라는 설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別紙 (3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儀禮≫ 納徵에 나오는 폐백의 양에 대한 고증‚ 사대부가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同姓간의 혼인 문제에 대해 고증하고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 (39) 1663.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喪服傳 疏에 ‘長子를 위해서는 모두 斬으로 한다’는 문장이 있다는 申啓澄의 말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別紙 (40)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復讎는 5세에 그치고 원수 갚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친다’라는 설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與李養而 (42) 李之濂에게 보낸 편지. 강하며 토론하다가 헤어질 때 다투는 듯이 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객기로 사람들과 논쟁하여 소인으로 귀결될 것을 일일이 책하여 준 것에 감사하고 洪錫箕와 함께 禮經을 講할 것을 권하는 내용.
答李養而 (43) 1666.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夷狄을 물리치고 中華를 높일 수 있으면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돌아와야 할 것이라며 출처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李養而 (44)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孔子·孟子·朱子에 대한 제후의 예우와 出處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養而 (45)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春秋에 諸侯가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초빙해주기를 청한 일은 있지만 자신의 왕조에서 스스로 나아간 예는 없다는 것‚ 孟子와 朱子의 출처 의리를 설명하고 소명을 받았을 때는 예우를 기다리고 바뀌지 않았을 때에는 나아가기 전에 의견을 고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養而 (1) 166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朱書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을 사례하고 奏箚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養而 (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持敬에 대해 ‘居敬은 整齊嚴肅을 위주로 하는 것이고 存心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持敬은 存心과 整齊嚴肅 양면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程子가 말한 主一을 위주로 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 (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출처와 持敬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養而 (9) 1669. 李之濂에게 보낸 편지. 소략한 李珥의 狀碑를 수개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묻는 내용.
答李養而 (10) 167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李珥 문집의 일로 번거롭게 한 것을 사례하고 문집을 고치는 경위를 밝히고 비록 成渾과 李珥가 감당한 것이지만 顚倒되고 빠진 것이 많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임을 밝히는 내용.
答李養而 (11)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李珥 문집 글귀를 바로잡는 일‚ 저술한 次序와 大全의 式例를 따라 편집하고 舊本과 다른 것은 분류하여 첨가하는 문제‚ 舊本에 별도로 考異 1권을 넣어 次序와 門類가 전도되어 있는 잘못을 논하고 뒤에 나오는 것을 續集으로 만드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李養而 (13) 167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朋友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朴東亮의 事狀이 완성되었으면 전후 두 본을 모두 보여달라고 청하는 내용.
答李養而 (13) 1678.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옛 친구와 교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잘 헤아린 뒤 때에 따라 의리에 처하여 바름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養而 (14) 168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이지렴 아들 편에 보낸 편지를 받은 뒤 1682년 이래 입장이 달랐고 시세에 구애되어 다 답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들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내용.
答尹子仁 (15) 1662. 張栻의 ≪南軒先生文集≫을 빌려 본 감회를 尹拯에게 밝힌 편지. 主敬窮理하는데 도달하여 朱熹와 왕복하여 의논한 것이 모두 탄복할 만 하다는 내용.
與尹子仁 (15) 1664. 尹拯에게 보낸 편지. ≪易經≫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모여 강론하고 있음을 전하는 내용.
別紙 (16)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로 五世復讎 설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18) 尹拯에 답한 편지 別紙. ≪朱子語類≫의 백세의 원수를 논한 것‚ 9세의 원수를 논한 것‚ 魯나라 莊公의 일‚ 송나라 孝宗의 일 등을 고증하여 복수는 5세에 그친다는 설에 대하여 밝힌 글.
答尹子仁 (22) 尹拯에 답한 편지. 복수는 5세에 그친다는 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재론하는 내용.
答尹子仁 (24) 1666. 尹拯에 답한 편지. 영남 선비들이 文廟 배향문제를 거론한 일‚ 師友의 篇目을 초록하여 책을 만드는 일‚ <箕子實記>를 별도로 싣는 일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別紙 (25) 1668. 尹拯에 보낸 편지 別紙. 父母의 상을 함께 당했을 때의 의절과 복색‚ 朝祖의 禮‚ 前室과 后室에 대한 葬法‚ 棺槨과 遺衣의 제도 등에 대한 의견을 보내니 살펴보고 아버지와 스승에게 보여 가르침을 받아 의견을 보내 줄 것을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28) 尹拯에 답한 편지. 宋時烈에게서 부탁받은 年譜의 교정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9) 尹拯에 답한 편지. 成守琛의 출처 문제 등 出處의 義理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내용.
別紙 (31)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윤증 집안의 <昏禮笏記> 중 혼인 당사자나 主婚이 朞年服 이상의 상을 입었을 경우의 의절‚ 見舅姑禮‚ 혼례 복색 등 의심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尹子仁 (33) 1673. 尹拯에 답한 편지. 이이의 문집 刪定과 연보의 추가기록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 (34) 尹拯에게 보낸 편지. ≪栗谷詩集≫과 ≪別集≫ 附錄의 편집‚ 紫雲書院의 還安‚ 자운서원 移建 논의‚ 白仁傑의 신주 처리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
答尹子仁 (35) 尹拯에 답한 편지. 李珥의 문집‚ 閔氏의 疑禮 문제‚ 紫雲書院의 새 비석 건립 등에 대한 宋時烈과의 논쟁 경과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6) 1674. 尹拯에 답한 편지. 李之濂과 예에 관해 토론한 뒤 이지렴의 학문과 인품 등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 (38) 尹拯에게 답한 편지. 國恤 중의 제사 문제‚ 北方의 일에 대한 준비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8) 1675. 尹拯에 답한 편지. 尹宣擧 墓碣文의 수정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9) 尹拯에 답한 편지. 時事 변화 중의 거취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9) 1680. 尹拯에 답한 편지. ≪心學至訣≫과 ≪朱子家禮≫의 冠婚禮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別紙 (41) 尹拯에 답한 편지 別紙. 士의 冠婚禮에 관련된 문제‚ 喪禮 중의 관혼례‚ 祠堂 제도와 상제례의 의절과 복색‚ 殿牌에 대한 예‚ 署押과 花押의 근거 등에 대한 내용.
再答尹子仁 (1) 1681. 尹拯에 다시 답한 편지. 師友錄에서 李滉과 曹植 門人들의 순서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2) 1682. 尹拯에 답한 편지 別紙. 宋時烈과 윤증 간에 墓碣文字 이전에 두 집안이 서로 크게 저해될 만한 것은 없었으므로 묘갈문자 사건 이후 학술과 언행의 문제점을 공격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며 송시열을 攻斥할수록 尹宣擧에게도 해가 될 뿐이라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3) 1683.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朴尙衷의 상소에 대하여 宋時烈이 建請한 데 대한 朴世堂 부자의 이의제기로 일어난 일의 곡절을 알리는 내용.
答尹子仁 (4) 1684. 尹拯에 답한 편지. 甘露寺에서 보여준 편지와 權生을 통해 전해진 편지의 내용이 다른데다가 편지가 전파되면서 宋時烈이 더욱 분노하여 수습할 길이 없게 만든 것과 師生의 의리가 있는데 질문조차 않고 비난한 것 등을 책하는 내용.
與尹子仁 (6) 尹拯에게 보낸 편지. 師生의 의리를 폐해서는 안되며 스승을 배척한 말을 한 잘못을 지적하고 善處하여 사림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내용.
答尹子仁 (9) 尹拯에 답한 편지. 伸辯한 상소 뒤 廟堂에서 논의된 師生의 의리 문제에 관한 의논을 전하고 木川에서의 일과 송시열의 편지에 대한 윤증의 처신에 대하여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14) 1686. 尹拯에 답한 편지. 師生의 의리와 윤증의 처신을 논하고 묘갈문에 대해서는 宋時烈이 실수한 것이지만 그 뒤의 행동은 윤증이 지나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로 인해 黨議가 성해진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17) 1687. 尹拯에 답한 편지. 羅良佐·韓聖輔의 상소로 피차 竝立하는 상황 속에서 보합하려는 노력이 실패하고 宋時烈의 분노와 사림의 비방을 받게 되었다며 이제 邪正을 명백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니 함부로 재결하여 偏私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
答尹子仁 (18) 1689. 尹拯에 답한 편지. 宋時烈을 죄 주려는 이들이 자신들을 도울 사람을 찾으려 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윤증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政目에 올랐으니 벼슬을 주어도 사양해야 할 것과 靈光에 있는 사당의 일‚ 趙翼의 遺書에 있는 註釋의 내용에 대한 염려를 전하는 내용.
與尹子仁 (19) 尹拯에게 보낸 편지. 朴泰輔가 명목도 애매하게 화를 당한 일을 애통해하고 상소하여 신변하는 것도 어려울 형세여서 죄만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
答尹子仁 (19) 1690. 尹拯에 답한 편지. 宋時烈과 윤증 사이 갈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달라졌다는 소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송시열이 화를 당한 뒤에 지켜야 할 의리‚ 朴泰輔의 죽음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1) 尹拯에 답한 편지. 서울에서 전해오는 소식에 두 집안(윤증-박세채)에 대해 의논이 분분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던 중 이에 관한 윤증의 편지를 받았었다며 그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別紙 (22) 1691. 尹拯에게 답한 편지. 伯夷와 叔齊 사당의 위판·獻爵·籩豆·拜禮·祭享月日‚ 사당 건립 전에 疏를 올려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내용.
答趙平叔-持衡 (24) 1658. 趙持衡에게 답한 편지. ≪春秋公羊傳≫의 註에 나오는 ‘未及弑’라는 구절의 해석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李重賚 (24) 1663. 李啓晩에게 답한 편지. 出繼한 사람이 本生의 부모를 위해 입어야 할 복제와 變除 절목에 대한 내용.
答南雲路 (25) 1676.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남구만이 洛閩(二程子‚ 朱子)의 책을 읽고 있다는 것과 아들에게 학문에 종사하도록 권했다는 金壽恒의 편지에 기뻐하는 내용.
答南雲路 (26) 168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箕子의 사적을 뽑아 ≪範學全編≫을 만드는 중 우리 문헌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어 한스러웠다며 남구만이 완성하였다는 史藁 중 箕子 이전의 일에 대해 받아 보았으면 싶다고 청한 내용.
答李彛仲 (26) 1677.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
答李彛仲 (27) 1682.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낭패한 뒤의 심정을 전하고 끝내 견제되어 한번도 의리를 펴지 못할까 두렵다는 내용.
與李擇之-選 (27) 1672. 李選에게 보낸 편지. 宋浚吉의 죽음을 애도하고‚ 金麟厚 후손들의 청에 따라 狀本을 맡게 되었음을 알리며 그간의 의혹은 아들 朴泰殷을 통해 직접 묻겠다는 내용.
答李擇之 (28) 1676. 李選에게 답한 편지. ≪武侯全書≫를 얻어 볼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내용.
答李擇之 (28) 1681. 李選에게 답한 편지. 李箕疇·徐文淑과 함께 趙光祖의 ≪靜菴先生遺稿≫를 완성하여 멀지않아 帶方에서 간행될 것이라는 사실과 李穡의 事蹟에 대한 내용.
與李擇之 (29) 1689. 李選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이 유배에서 돌아오던 길에서 화를 당한 것을 슬퍼함.
答趙公擧 (30) 1667.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兒名 대신 攝主로 고할 때와 兒名을 主喪으로 할 때의 호칭 문제에 대한 내용.
與趙公擧 (30) 1687. 趙師錫에게 보낸 편지. 정승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고 정승으로서 일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
答金斯百-錫冑 (30) 1663. 金錫冑에게 답한 편지. 申最·申儀華 등의 연이은 죽음을 슬퍼하고 瞿公을 배향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金斯百 (31) 1668. 練祭와 祥祭를 變除하는 날짜를 계산하는 기준과 禫祭의 의절 등에 대해 金錫冑에게 답한 편지.
答尹叔獜 (32) 1682. 定性論에 대한 尹趾完의 질문에 답한 편지.
答尹叔獜 (33) 1685.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조처하여 시행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영남 사람을 위해 깊이 축하한다고 격려하고 인재를 찾는 일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叔弼-翼相 (33) 1678. 申翼相에 답한 편지. 柳尙運과 마음을 합해 서북 변방을 專管하는 일을 잘 도모해주기를 기대한다는 내용.
答申叔弼 (33) 1681. 申翼相에 답한 편지. 李珥 문집 편집 진행을 알리고 ≪警民編≫을 반포하여 風敎를 장려한 뒤 나은 자를 조정에 추천하도록 하라는 내용.
答柳悠久 (34) 1685. 왕이 喪中에 음악을 듣는 것‚ 근래 간행된 책을 玉堂에 보내는 문제에 대하여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答柳悠久 (35)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關西에 ≪儀禮通解續≫이 없을 것이므로 베껴 올려보낸다는 내용.
答申聖時-啓澄 (36) 1666. 申啓澄에 답한 편지. 嫡庶正體說의 적용 범위‚ 承重의 의리와 승중할 때의 복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聖時 (39) 申啓澄에 답한 편지. 適子에서 適子로 이어가는 承重의 의리와 승중할 때의 복제 등에 대해 재론한 내용.
答申聖時 (43) 1673. 申啓澄에게 답한 편지. 閔愼 집안의 變禮 문제로 인해 같은 士友들에게조차 공격받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 내용.
別紙 (44) 申啓澄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閔愼이 廢疾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복을 입는 근거를 밝히고 아들이 攝主하는 문제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李廈卿-橝 (1) 1667. 李橝에 답한 편지. ≪大學箚記≫를 고증하고 정리하였으니 보아달라고 청함. 院祠에 사액을 청하는 일은 중첩된 사액을 금하는 명이 있어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
答李廈卿 (2) 李橝에 답한 편지. ≪大戴記≫와 ≪小戴記≫의 출처‚ 현재의 ≪大戴禮≫와 ≪禮記≫로 이루어진 경위 등에 대한 내용.
答崔美伯-邦彦 (2) 1685. 崔邦彦에게 답한 편지. 개인적인 복상 중 守陵官으로 임명된 경우의 출처 의리와 부탁한 ≪山堂集≫ 발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좀더 기다리라고 하는 내용.
答具濟伯-時經 (3) 1681.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論語標釋≫에 대한 논의‚ 사액받은 文會書院 외에 白川에 다른 院祠를 세우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高汝根 (4) 高晦에게 답한 편지. 性情의 구분을 지칭하는 體用과 動靜을 말하는 終始의 관계에 대한 宋時烈의 견해에 의문을 표한 내용.
答高汝根 (4) 1669. 高晦에게 답한 편지. 朱熹가 각각의 저술을 刪述한 순서와 경위‚ 露粱의 사육신 사당에 관한 論議 등에 대한 내용.
答高汝根 (6) 1671. 高晦에게 답한 편지. 종가의 사당에 朝祖하는 예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高汝根 (7) 1682. 高晦에게 답한 편지. ≪大學≫ 傳7장의 正心을 體用의 측면에서 볼 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答高汝根 (7) 1690. 高晦에게 답한 편지. 師友에 대한 服制의 기간과 복색 등에 대한 내용.
與宋子文 (8) 1658. 宋斗章에게 보낸 편지. 典樂六藝에 대한 여러 경전의 註에 대한 내용.
與宋子文 (8) 1664. 宋斗章에게 보낸 편지. ≪小學≫과 四書 등을 熟讀하고 통하지 않는 것은 작은 표를 붙이거나 別紙에 기록하여 다시 생각해보고 친구와 만났을 때 商量하면 좋을 것이라는 내용.
答宋子文別紙 (9) 宋斗章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宋時烈이 조급하고 고집이 심하여 成文濬과 申應榘의 일 등을 잘 고쳐 주지 않았으니 함께 도모하기 어렵다는 것‚ 尹拯이 행장은 쓰겠다고 했으니 家狀 대신 遺事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趙士威 (10) 1671. 趙得重에게 답한 편지. 시아버지의 죽음이 며느리 殯所를 만든 뒤에 있었을 때 며느리에게 肉饍을 올리는 일과 장례 순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趙士威 (11) 1677. 趙得重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狀文을 改撰하는 일 등에 대하여 해명하는 내용.
答羅顯道 (12) 1667. 宗子를 뵙는 예‚ 見舅姑禮의 절차‚ 폐백 유무 등 婚禮節目에 대해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答羅顯道 (13)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見舅姑禮에서의 폐백 여부와 婚禮와 冠禮에서의 見舅姑禮의 차이 등에 대해 재론함.
答羅顯道 (14) 1672.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서 독서와 講學의 의의‚ 宋浚吉의 상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答羅顯道 (15) 1681.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를 遷葬할 때의 복색‚ 槨의 교체‚ 忌祭 등 緬禮 절목에 대해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答羅顯道 (16) 1687.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일시의 物議에 격동하지 말고 상소 여부를 신중히 헤아려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羅仲輔碩佐 (17) 1688. 羅碩佐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정도를 밝힌다면서 名實이 모순되어 조야를 紛紛하게 한 것도 흑백을 단정한 데서 말미암았다고 비판하고‚ 시비와 흑백은 일시에 정해질 것이 아니니 급급하게 애쓰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는 내용.
答金景能-萬增 (18) 1659. 金萬增에게 답한 편지. 장례할 날짜를 점치는 일의 便否를 밝힘.
答金景能 (19) 1661. ≪論語疑義≫의 차례‚ 朱子와 程子의 ‘主一無適’과 ‘至淺’의 의미 등에 대하여 金萬增에게 답한 편지.
答李平叔-后平 (19) 1668. 李后平에게 답한 안부 편지.
答沈德升 (20) 1677. 沈梯에게 답한 편지. ≪小學≫의 수정 보충 작업‚ 偏黨의 폐단을 염려하고 교제·임용·혼인에 각각 의리를 참작하여 善處하라는 내용.
答成汝中-至善 (21) 1672.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자가 用工하는 방도 중에 成渾이 韓瑩仲 등에게 답한 편지만큼 절실한 것이 없다며 이를 더욱 확충하면 될 것이라는 내용.
答成汝中 (21) 1673.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성품이나 현재의 불안한 위치로 보아 서원에 관한 책임을 맡을 수 없다며 사양하는 내용.
答成汝中 (22) 1676.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皇明諸儒事蹟≫의 釐正 補錄‚ ≪師友錄≫ 중 坡山一脈에 대한 수정‚ <書室記>와 <心經跋>을 쓰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成汝中 (23) 1680.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謝恩 여부는 자세히 살펴 처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成汝中 (23) 1682.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經書를 읽는 법‚ 성지선의 할아버지 成㮨에 대한 文字와 言行錄의 일에 대해 알리는 내용.
與成汝中 (24) 1691. 成至善에게 보낸 편지. 講習의 중요성과 나이 차이가 10년도 못되니 벗으로 대하자고 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는데 知舊로 대하자는 내용.
答成子章-文憲 (25) 1664. 成文憲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 있어서 科擧의 폐단과 관통하여 깨닫지 못하며 얽매어 나아가지 못하는 병통을 지적하고 함께 토론하며 자세히 살피자고 당부하는 내용.
答成子章 (26) 成文憲에게 답한 편지. <禮運> 本文에는 七情에 惧가 있었는데 程頤가 <好學論>에서 懼 대신 樂을 넣은 이유에 대해 李滉·朱熹의 견해를 인용하여 고증함.
答成子章 (27) 成文憲에게 답한 편지. 四端의 分屬과 理發氣隨 등의 설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李汝九-箕洪 (27) 1665.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主一無適하여 存養省察하면 학문의 功이 이를 것이니 이에 힘쓰라는 내용.
答李汝九 (28)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과거를 그만 두려는 것을 격려하고 학문을 위해서는 외모를 嚴肅整齊하는 것보다는 程子가 말한 敬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汝九 (29) 1670.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孟子疑義≫를 보내며 그 성과를 논하고 宋時烈과의 문답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알려주겠다는 내용.
答李汝九 (30) 1676.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편지에서 논한 省察의 의의 등 工夫 문제에 대해 靜坐와 是非 등에 대한 송시열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내용.
答李汝九 (32) 1684.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몰래 비방하는 의논을 일으켰다는 말‚ 거짓으로 받았다는 말 등 자신과 尹拯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해명하고 시세에 매이지 않고 편당하지 않은 뒤에야 공정한 논의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내용.
答李子望 (33) 1668.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독서하여 窮理하고 의심나는 곳은 자세히 기록하여 두었다가 만났을 때 토론하면 師友를 자주 만나지 않아도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답한 내용.
答李子望 (33) 1669.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科場에 나간 뒤 학문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고 물러서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고 격려하는 내용.
答李子望 (33)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관직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없다는 탄식에 대해 鄭汝昌·趙憲 등이 監官을 하고 있을 때의 예를 들어 격려하고 결혼한 姉妹의 服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子望 (34)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先儒들에게서 이미 體用終始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따라 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고 立心用功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子望 (34) 1670.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日用과 학문하는 데 있어서의 병통을 지적하고 敬을 위주로 하여 涵養 공부를 꾸준히 할 것을 부탁하는 내용.
答梁季通 (35) 1669.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독서는 誦習을 위주로 하되 의리를 潛心玩味하여야 하며 詞章하는 습관을 멀리하고 실지공부에 힘쓰라는 내용.
答梁季通 (36)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禮書의 편집 문제와 근래 학자들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實功에 힘쓰지 않고 겉모습만 스스로 높이려는 풍조를 염려하는 내용.
答梁季通 (36)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禮로 인한 비방에 대해 朱熹의 箚子가 定論이 될 만하다며 嫡孫代喪의 설이 士庶와는 관련이 없는 설이라는 말을 반박하는 내용.
答權致道 (39) 1689. 權尙夏에 답한 편지. 世道가 변해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에 대해 위로하고 자신도 죄에 걸려들어야 마땅한데 자신은 죄망에서 빠졌다며 世道를 염려하는 내용.
答宋道深 (39) 1686. 宋光淵에게 답한 편지. 朝命 없이 사사로이 개설하는 것이니 ≪五禮儀≫를 따를 수는 없고 鄕飮酒儀 등을 본뜰 것 등 養老宴의 절목에 대한 내용.
答趙光甫 (40) 1684. 趙持謙에게 답한 편지. 왕후의 因山에 참여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與吳貫之 (40) 1683.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公議를 회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自尊하여 自守하는 데 소홀하고 사람을 논하고 일에 대처할 때 愛憎과 好惡가 많으며 술 때문에 실수하여 가까운 사람에게 배척받는다는 말을 들었다며 몸과 마음을 잘 단속하라는 내용.
答吳貫之 (41) 1684.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오도일이 정사에 省約하여 백성들이 편히 여기고 선비를 가르쳐 풍속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실을 평가하고 罷榜하는 일에 편중된 것이 있었다며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화합하고 협동할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龍卿-壽亮 (42) 1666.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근래에는 과거에만 힘쓰고 師友들을 인도할 이가 없어 立志가 견고하지 못함을 염려하는 내용.
答沈龍卿 (43)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喪중에도 독서에 힘쓰는 것을 치하하고 3가지의 책을 한꺼번에 보지 말고 우선 그대로 두었다가 ≪近思錄≫을 마치고 ≪節要≫를 읽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沈龍卿 (43) 1669.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 나아가려는 성의를 격려하고 ≪楸灘遺稿≫를 얻어보고 싶다는 뜻을 밝힌 내용.
答沈龍卿 (44) 1677.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겠다는 결심에 기쁨을 표시하고 서울의 선비들이 과거에 매달리거나 山水나 遊戱에 빠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龍卿 (45) 1690.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歲暮를 맞는 감회와 안부를 전하고 自强하기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沈龍卿 (45) 1691. 沈壽亮에게 平山에 遷葬하는 일이 마무리된 사실을 전하는 편지.
答崔汝和 (1) 1681. 관직이 있는 자가 국휼 장례 전에 禫祭를 행하는 문제‚ 돌아올 때 올린 상소가 口舌에 오른 일 등에 대해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答崔汝和 (1) 168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禫祭를 행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呂祖謙의 문집을 조만간 얻어 보고 싶다고 청함.
答崔汝和 (2) 松江 鄭澈의 시호가 정해진 경위‚ 文會書院의 일을 敷奏하는 문제 등에 대해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與崔汝和別紙 (3) 1686.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 別紙.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集成 등 우리 나라에 없는 책을 書肆에서 찾아 볼 것을 청하는 내용.
答崔汝和 (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崔鳴吉의 일을 顯刻하는 것을 부탁받았지만 1623년 朴東亮에 대한 臺諫의 논의에 참여하여 本末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미 박동량에 대한 논의에 관련된 인물의 幽誌를 거절했던 전례를 들어 답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설명하는 내용.
答崔汝和 (5) 1690.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鄭尙樸과 함께 ≪中庸讀記≫를 읽었다는 것‚ 鄭相詹에 대한 추천‚ 平遠堂의 記文을 보내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別紙 (6) 1691.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別紙. 鄭齊斗가 陽明學을 하는 것이 염려스러운데 최석정 마저 閔以升에게 朱熹와 다른 주장을 했다며 염려하는 내용.
答申公獻 (7) 1686. 申琓에게 답한 편지. 養士節目에 대하여 답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士習과 世道를 염려하면서 儒生들의 捲堂 수습 방법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公獻 (7) 申琓에게 답한 편지. 거취 문제에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公獻 (8) 1690. 申琓에게 답한 편지. 居喪 중 ≪大學≫·≪小學≫의 讀書記 등을 읽으며 經學을 하고자 한다는 신완을 격려하고 거상 중에 誌文을 스스로 쓰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趙伯靜-仁壽 (9) 1678. 趙仁壽에게 답한 편지. ≪近思錄≫에 대한 저술인 集解·釋義·備考와 朱熹의 주석을 비교하고 ≪近思錄≫을 공부하는 자세를 알려주고 科擧 소식에 흔들리지 말 것을 부탁하는 내용.
與沈明仲-世熙 (10) 1667. 沈世熙에게 아름다운 자질과 청명한 지조로 文辭·글씨·그림에 능하면서도 자취를 끊고 산에서 爲己之學하는 것을 칭찬하고 앞으로도 時俗에 옮겨가지 말기를 당부하는 편지.
答沈明仲 (1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坡州에 집짓는 일을 葬事로 인해 명년 봄으로 미루었다고 전하고 陰陽과 太極의 體用‚ 음양과 道와의 관계 등에 대해 설명한 내용.
答沈明仲 (11) 1668. 沈世熙에게 ≪論語≫에 나오는 ‘仕而優’라는 말의 의미와 출처의 도리에 대해 답한 편지.
答沈明仲 (11) 沈世熙에게 ≪論語≫를 마쳤으면 ≪孟子≫로 넘어가되 訓釋에 너무 매이지 말고 義利·養氣·性善을 논하는데 요점을 두어 體驗을 확충하고 涵養하는 공부에 힘쓰라는 내용의 편지.
答沈明仲 (12)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높고 비천함을 분별하는 기준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 (13) 167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안부를 묻고 ‘思慮’의 뜻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沈明仲 (13)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氣質의 생성과 운행‚ 陰陽·動靜과 기질의 관계‚ 기질의 淸濁粹駁‚ 음양과 五行의 分屬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明仲 (14) 1672.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부모를 위하여 과거에 나아가는 문제에 대해 聲名과 利祿을 歸趣로 삼을까 염려된다며 출처의 의리를 잘 헤아려 결정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沈明仲別紙 (16) 1678.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精粗와 本末의 설에 대한 질문에 대해 釋義에 보이는 견해에 대해 설명하고 五行·陰陽·太極의 관계 및 李珥와 朱熹의 입장과 이에 대한 宋時烈의 반응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明仲 (19) 168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妾子가 있는 長子의 立後 문제‚ ≪大學≫ 正心章에서 體用·動靜·工夫의 관계‚ ≪心學至訣≫을 수정하지 못한 채 먼저 올리게 된 경위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 (20) 1682.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講學이 폐하고 명성과 이해만 좇는 세간의 습속을 염려하고 氣質說과 形生神發說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明仲 (21) 1684. 沈世熙에게 國恤 전후의 禫祭 시행 여부와 國恤葬祭에 대하여 답한 편지.
答鄭眞卿 (22) 1691. 鄭尙樸에게 답한 편지. ≪要解疑輯≫을 산삭하고 고정하는 일과 高益謙 등 다른 사우의 안부를 묻는 내용.
答鄭眞卿高益之 (22) 鄭尙樸과 高益謙에게 답한 편지. 山房에서의 講習을 격려하고 ≪小學≫과 ≪大學≫ 공부의 중요성‚ 白鹿洞規의 의미를 강조함. 정상박이 陸九淵의 학문에 빠져드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李士重-鼎新 (23) 1679. 上食 여부‚ 卒哭 뒤 朔日의 제사‚ 위차를 정하는 법‚ 虞祭 등 改葬節目에 대해 李鼎新에게 답한 편지.
答白采叔 (24) 1669. 白以受에게 답한 편지. 길례에 개인 집에서 빛깔있는 床을 사용하는 문제‚ 아버지가 자식을 제사할 때의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白汝三 (25) 1668. 白以復에게 답한 편지. 늘 우러르고 어느 때 어느 장소이든 잊지 말고 반복해서 없어지지 않는 지경이 되도록 공부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縉雲-軒佐 (25) 1673. 李軒佐에게 답한 편지. 讀書에 대한 의논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장과 도의 관계‚ 時文의 可否에 대한 질문은 갈등만 많고 비루한 것이라서 답할 수 없고 경전의 뜻이나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서 물으면 답해 주겠다는 내용.
與李縉雲 (25) 1675. 李軒佐에게 보낸 편지. 과거 응시의 득실‚ 병이 있을 때에도 공부에 완급은 있을 수 있지만 미루어 둘 수는 없다는 내용.
答林德涵 (26) 1668. 林泳에게 답한 편지. ≪소학≫ 공부가 종신토록 계속 되어야 할 것을 金宏弼·金麟厚의 예를 들어 권하고 미처 發明하지 못한 것은 우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6) 1669. 林泳에게 답한 편지. 讀書에 대한 자세와 ≪小學疑義≫를 저술한 의의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8) 林泳에게 답한 편지. 表兄 李端相의 죽음을 추모하고 이단상이 임영에 대해 크게 기대했었다고 회고하는 내용.
答林德涵 (28) 1672. 林泳에게 답한 편지. 과거에 나아간 뒤의 出處 문제‚ 實心과 實功이 없는 병통에 대해 경계하는 내용.
答林德涵 (29) 1673. 林泳에게 답한 편지. 沈潛發揮하여 도덕을 이룬 사람으로는 李滉이 있을 뿐 자신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며 조만간 이루어질 講學에서 ≪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大學≫을 도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고 主敬으로 두 가지를 관통하는데 힘쓸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31) 林泳에게 답한 편지. 학문의 道는 독서와 긴절한 공부‚ 潛心體認에 있고 성현의 말은 ‘爲己’로 귀결되며 그 요체를 朱子의 <便殿奏箚>와 魏應仲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니 깊이 玩味하라는 내용.
答林德涵 (32) 1677. 林泳에게 답한 편지. 自得의 공이 있어야만 학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독단적인 견해를 자득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文辭를 알지 못하고 의리에 통할 수는 없을 것이니 절충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34) 1678. 林泳에게 답한 편지. 문장의 의리를 구하는 것보다 이치를 얻어야 할 것이라는 말‚ 自得의 설‚ 熟讀精思한다는 말 등 학문의 태도‚ 師生간의 호칭과 의리에 대해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내용.
別紙 (40) 林泳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송시열의 견해를 받아들인 金幹과 金栽 형제의 견해 등 心性과 明德의 관계를 논한 여러 가지 설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林德涵別紙 (43)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見識이 자세하지 못하거나 禍福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경계하라는 내용.
答林德涵 (43) 1683. 林泳에게 답한 편지. 懷尼간의 일에 대한 상소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상소를 올린 뒤 尹拯의 거조가 자신이 상소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아쉬움을 밝힌 내용.
別紙 (44)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尹宣擧의 행장과 墓碣文의 일에서부터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일어난 일의 경과를 설명하고 자신이 양가 사이에서 선처하지 못하여 조정의 일로 번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송시열과 윤증의 장단점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 (1) 1685. 林泳에게 답한 편지. 懷尼是非의 師道에 대해 士論에 논란이 생기자 李滉과 奇大升의 예를 들어 宋時烈과 尹拯 사이의 의리에 대해 논한 내용.
答林德涵 (3) 1686. 林泳에게 답한 편지. ≪小學讀記≫·≪心學至訣≫의 修改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朱熹나 李滉과 달리 李珥·成渾은 경전에 대한 토론이 부족하여 아쉬웠는데 자신도 경전을 토론할 만한 이가 없어 아쉽다는 내용.
答林德涵 (4) 1687. 林泳에게 답한 편지. 心喪에 5등급이 있다는 설에 대한 고증‚ ≪聖賢遺模≫ 7책에 대한 소감 등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5) 林泳에게 답한 편지. ≪聖賢遺模≫·≪疑禮類輯≫ 등의 편저‚ 스승에 대한 服制 문제를 둘러싼 사우들과의 토론 결과를 알리고 서당을 지어 강습할 계획‚ 南九萬이 주도하고 있는 조정에 들어가야 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6) 1688. 준엄한 유지를 받고 난 뒤의 거취 등에 대하여 林泳에게 답한 편지.
答林德涵 (6) 1689. 자신의 거취와 안부‚ 귀향한 뒤의 講學에 대하여 林泳에게 답한 편지.
答林德涵 (7) 1690. 林泳에게 답한 편지. 痘疫을 파한 뒤의 귀향 여부‚ 남쪽의 가뭄 소식‚ 눈병 속에서의 공부‚ 梁處濟 등 다른 제자들의 학문과 안부에 대해 염려와 격려를 전하는 내용.
別紙 (8)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宋時烈의 사후에 素帶 3월을 행한 일로 인한 윤증과의 토론 경위‚ 자신이 素帶한 뒤 老少 양편의 입장이 갈리고 다툼이 벌어진 경과를 설명한 내용.
答林德涵 (10) 1691. 林泳에게 답한 편지. 윤증의 일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에 대해 유념할 것이라고 전하고‚ 자신의 글을 모아 편집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林德涵 (11) 林泳에게 답한 편지. 緬禮를 치른 일‚ 李世龜·鄭齊斗와 格物의 뜻 및 陽明의 학문에 대해 변호한 일‚ 李珥의 ≪栗谷別集≫의 정돈‚ 서울 선비들의 상황‚ 尹拯의 일 이후 金昌協이 자취를 끊은 것 등을 전하는 내용.
答林德涵 (12) 林泳에게 답한 편지. ‘居敬致知 體仁精義’라는 말의 병통을 지적하고 <白鹿洞規>과 <敬齋箴>의 중요성을 강조함. 湖南의 선비를 수습하여 고무시키는 일‚ 金載海와 토론한 일‚ 사우들의 學問에 대한 염려‚ 懷尼간의 일 이후의 서울 주변 선비들의 동향‚ ≪自警編≫·≪六禮疑輯≫ 편저의 진행 등을 전하는 내용.
答鄭士仰 (15) 1667.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高祖를 祧遷하기 미안하다면 別室에 봉안해서 處變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내용.
答鄭士仰 (16) 1677. 鄭齊斗에게 조정과 향리에 있을 때의 거취 등에 대하여 답한 편지.
答鄭士仰 (16) 1685.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士友간에 틈이 생겨 수습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며 학문이 이단에 흐르지만 않는다면 피차간의 시비를 멈추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鄭士仰 (17) 1686.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陽明學에 출입한다는 의심이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鄭士仰 (18) 1687.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晦菴이 둘째이고 陽明이 첫째라고 했다는 말이 양명이 낫다는 것인지 묻고 이황의 양명학 비판 등을 들어 致良知와 親民의 설의 문제점을 지적함. 佛家의 맥락과 통한다는 것‚ 朴世堂 등이 老莊에 註하고 ≪大學≫과 ≪論語≫의 集註를 지적하다 죄를 입은 것‚ 道家에 빠져있는 金子益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 등을 들어 왜 이단을 창설하여 사우를 潰裂시키는가 묻고 正學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는 내용.
答鄭士仰 (21) 1688.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閔以升 등과 모여 王學의 시비를 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柳成龍이 陸九淵의 글은 佛書에 그 중심이 있는 것을 보고 象山의 학문을 버렸다는 것을 들며 자신이 만든 양명을 비판하는 책을 보기를 권하는 내용.
答鄭士仰 (22) 1690.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王陽明에게 미혹되어 程朱의 正脈을 버린 지 10년이 지났는데 언제 正學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며 왕양명의 高弟들 중 잘못을 깨닫고 정학에 돌아온 자들이 있었다는 기대를 전함.
與鄭士仰 (23)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아들 朴泰殷의 일에 대한 염려를 전하고 閔以升이 정제두의 뜻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양명학의 잘못에서 벗어났는지 묻는 내용.
答鄭士仰 (24) 1691.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傳習錄≫에 보이는 ≪대학≫에 대한 해석과 致良知에 대한 개념을 비판하고 양명학이 實이 없는 空言으로 사람마다 달라져 禪家의 話頭와 같아 惑世誣民할 뿐이라고 지적하는 내용.
與鄭士仰 (25)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이전의 의견을 버리고 바른 학문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라며 이 달 내에 찾아와 함께 강할 것을 권하고 李世弼 형제에게 格物의 訓義에 대해 답하면서 보니 程朱의 설 만한 것이 없었다는 내용.
答李伯祥-徵明 (26) 1667. 祥祭 뒤에 祔祭‚ 告祔 등의 순서와 절차 등의 문제에 대해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答李伯祥 (27) 1669. 金長生이 아버지 金繼輝의 喪에 李珥를 위하여 奔哭하고 大功의 복을 하였다는 것 등을 들어 스승을 위한 服制 문제와 弔服의 제도 등에 대하여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答李伯祥 (27) 1680. 國恤 중에 虞祭와 卒哭祭와 같은 殷祭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答李伯祥 (28)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나라에 상이 있을 때의 喪祭禮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伯祥 (29) 1689.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綱目≫과 ≪朱子大全≫ 공부는 수년간 玩味하지 않으면 효과를 보기 어려우니 喪 중에는 ≪論語≫와 ≪心經≫ 등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
答沈士磬別紙 (29) 1669. 沈俔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居喪 중의 일을 격려하고 멀리 있어 함께 강학하지 못하는 아쉬움‚ 坡山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라는 안부를 전함.
答沈士磬 (30) 1673. 沈俔에게 답한 편지. 병으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四書를 거듭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利祿을 구하면 유익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沈士磬 (30) 1674. 沈俔에게 답한 편지. 閔愼의 代服 사건으로 처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전하고 國恤 중의 祥祭와 昏禮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士磬 (30) 沈俔에게 답한 편지. 四書를 다시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뜻을 분별하는 데 두어야지 利祿 등을 구하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沈士磬 (31) 1678. 沈俔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과거에 나아가도록 허용한 이유를 설명하고 任元耈가 과거에 나아갔다가 과거가 罷場과 復科를 반복하는 상황 속에 놓인 것을 안타까워함.
答沈士磬 (32) 1681. 沈俔에게 답한 편지. 정세가 어지럽지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부모 봉양과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沈士磬 (32) 1683. 沈俔에게 답한 편지. 세도가 어그러지고 논의가 궤멸되어 東西分黨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며 黨習을 타파하려고 했으나 스스로도 배치됨이 심하였다고 자책하는 내용.
答李載叔 (33) 1675. 李堉에게 답한 편지. 여러 차례 臺章이 올라가 조만간 유배될지도 모른다며 이러한 시절에는 자취를 감추고 自修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는 내용.
答李載叔 (33) 1676. 李堉에게 답한 편지.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논하고 莊敬으로 持養하는 법이 조만간 유익할 것이라 격려하고 ≪大學≫과 ≪論語≫에 대한 공부의 진도를 묻는 내용.
答李載叔 (34) 1678. 李堉에게 답한 편지. 겨울철에 ≪小學讀記≫를 勘定하고 요새는 ≪大學≫을 공부하고 있다는 안부‚ 할아버지가 계실 때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제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 (35) 李堉에게 답한 편지. ≪大學≫을 整頓하는 작업의 진행‚ 할아버지가 계실 때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제에 대한 再論‚ 氣質에 대한 논란 등에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載叔 (36) 1680. 李堉에게 답한 편지. 학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책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尹拯·尹宣擧와는 門人에게 가르칠 것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는 내용.
答李載叔 (37) 1681. 李堉에게 답한 편지. 子路가 잘못을 고치는 것을 좋아하였다는 말의 의미‚ 齊衰服과 朞年服이 다한 뒤 傍親重服者들이 朔望祭에 곡하는 문제의 변통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 (38) 1687. 李堉에게 답한 편지. 易에 대한 問目에 답하고 ≪心學至訣≫에서 마음 다스리는 방도를 참고할 것‚ 제자들이 講學을 위해 精舍를 짓는다는 소식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同甫別紙 (39) 1680.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別紙. ≪近思錄≫ 각 편의 의의와 分註 목록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同甫別紙 (40) 1681.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 別紙. 胡元을 등지고 大明에 귀의하려던 박상충의 의리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李同甫 (42) 1681.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孟子≫ 浩然章과 ≪中庸疑義≫의 내용을 둘러싼 문답 경위에 대해 밝힌 내용.
答李同甫別紙 (43) 1687.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尹宣擧의 거취와 尹拯의 행동에 대한 입장과 宋時烈과 윤증의 일에 대해 邪正으로 논할 수 없고 이미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니 각자 자신의 견해를 지키되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라며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李同甫 (45) 1688.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成渾·尹宣擧에 대한 일은 스승을 위한 변명이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마땅한 것도 아니며 本意와 배치된 것이 심하니 세상의 허다한 의논과 시비를 가슴에 담아두지 말라고 권하는 내용.
答李同甫 (46) 1690.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세도가 어지러워져 惡言이 그치지 않고 斯文의 長老를 배척하는 것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을 한탄하고 이런 때일수록 서로 勉學하여 明德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任大年 (1) 1672.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 나아가는 태도와 工程에 대해 勸勉하고 大志를 잃지 않으면 과거 공부를 겸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내용.
答任大年金士直 (1) 任元耈과 金楺에게 답한 편지. 李滉의 體認功夫에 대한 설‚ ‘한 곳에 着心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
答任大年 (2) 1678.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과장에 나갔다가 세 번 罷榜하고 세 번 復科한 상황 속에서의 출처와 거취 문제를 논함.
答任大年 (4) 1684.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沈世熙의 죽음을 추모하고 居憂하여 弔哭하는 일에 대해 답한 내용.
答任大年 (4)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筵几 아래에서 서로 다툰 일을 경계하고‚ 재상이 되어도 해이해지지 않았던 吳允謙과 鄭曄 등을 본받으라는 내용.
與任大年 (5) 1686.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전에 孔子의 <十翼>을 모아 둔 것에 呂氏의 ≪周易古經≫을 별도로 베끼어 本義로 註를 달아 놓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 일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任大年 (6) 1690.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喪에 素帶한 일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내용.
答任大年 (7)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別幅으로 지적한 말이 각박하게 된 것에 대해 해명하고 더욱 讀書 窮理한 뒤 절충하기를 청하라는 내용.
與任大年 (8) 1691.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東儒師友錄≫의 작업 진행상황을 묻고 師友의 義理가 중한 것을 보려는 것이니 더욱 경계하여 살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
別紙 (8)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儒者들이 자신의 글을 수습하는 것의 정당성과 자신이 저술을 하는 이유 등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任大年 (9) 任元耈에게 ≪淵源錄≫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편지.
答閔春卿 (10) 1681.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書院에 제향하는 인물에서 趙錫胤이 배제된 이유를 해명하고‚ 書院과 祠宇는 道學과 鄕賢 여부 등을 명확히 구분하여 폐단을 막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閔春卿 (11) 1687.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出處와 時議에 대한 의견‚ 先儒들의 성씨와 행적을 살필 자료와 그 자료의 취사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閔春卿 (12)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경서를 읽는 차례‚ ≪小學≫이 集說을 위주로 한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 (12) 1673. 金榦에게 답한 편지. 攝行할 경우 攝主하는 이의 妻를 우선 主婦로 하라는 내용.
答金直卿仲固-栽 (12) 1674. 金榦과 金栽에게 답한 편지. 衰絰의 正服을 입은 것이 아니라면 君喪을 당해 복을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
答金直卿仲固 (13) 1675. 金榦과 金栽에게 답한 편지. 閔愼이 유배된 상황에서 어떤 결과에 이를지 모르겠고 자신도 편안히 있기 어렵다는 처지를 전하는 내용.
答金直卿 (13) 1681. 金榦에게 답한 편지. 四書諺解의 修正‚ 禫祭할 날을 가리는 문제‚ 國恤時 출입할 때의 복색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金直卿 (14) 1682. 金榦에게 답한 편지. 형제 모두 가정의 바램에 따라 과거에 마음을 두어야 할 상황에서 編禮 등을 도와 준 것에 사례하고 凡例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金直卿 (15) 1684. 金榦에게 답한 편지. 과거 응시의 득실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仲固 (16) 1686. 金榦과 金栽에게 답한 편지. 스승에 대한 服制의 淵源과 근거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金仲固 (16) 1674. 金栽에게 답한 편지. 鄭汝昌의 학문에 대한 평가‚ 출처의 의리에 대해 밝히고‚ 金榦이 涵養에 독실한 나머지 강학하고 토론하는 일을 폐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
答金仲固 (17) 金栽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태도를 논하고 스승의 일로 상소하는 것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18) 1672. 金楺에게 性과 太極의 관계‚ 中和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편지.
答金士直 (18) 1673. 金楺에게 답한 편지. ≪小學≫의 중요성‚ 학문과 수양의 태도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19) 1674. 金楺에게 답한 편지. 예설이 명백하고 엄정하지만 文義와 논설에 치우치지 말고 居敬持志의 實質에 마음을 둘 것을 권하는 내용.
答金士直 (20) 金楺에게 답한 편지. 變禮를 논해 국가에는 근심을‚ 山林에게는 수모를 끼치게 한 것을 반성함. ≪近思錄≫의 의심스런 조목과 江左에 있는 선비들의 소식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 (21) 1676. 金楺에게 답한 편지. 几筵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하는 이유‚ 成服할 때에 朝哭과 朝奠하는 일‚ 靈床을 거두는 일 등 상례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金士直 (21) 金楺에게 보낸 편지. 金榦 형제와 講學하는 즐거움과 기대를 전하고 일상생활에서 操存涵養에 더욱 힘써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金士直 (22) 1681. 金楺에게 답한 편지. 과거 응시 여부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속된 무리를 본받아 喪次에서 급급하게 응시하지는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
與金士直 (22) 1682. 金楺에게 보낸 편지. 門人들에게 어지러운 때를 당해 독서를 통해 각자를 잘 단속하여 爲己之學에 힘쓰고 國事에 대해 물으면 가벼이 답하지 말라고 단속하는 내용.
答金士直 (23) 金楺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日記 중 白仁傑이 撰한 것에 대한 처리‚ ≪孟子≫에 나오는 出處의 도리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 (24) 1684. 金楺에게 답한 편지. 沈俔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감회와 회고‚ 禫祭의 시행 여부‚ 서울 주변의 時勢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金士直 (24) 金楺에게 보낸 편지. 正學을 하다가 時文과 詞章에 들어가는 것은 喬木이 산 속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金士直 (25) 1685. 金楺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처신에 관한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金士直 (28) 金楺에게 답한 편지. 과거 응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金士直 (29) 金楺에게 답한 편지. 銀臺(승정원)에 다시 들어가게 된 일‚ 孝宗 시절의 일 등 자신의 거취 문제를 해명하고 趙光祖의 ≪靜菴集≫ 교정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30) 1689. 金楺에게 답한 편지. 더욱 몸을 살피고 덕을 닦기를 바란다는 내용.
與金士直 (30) 1690. 金楺에게 보낸 편지. 讀書記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科擧에 대해 어떻게 조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敎法要旨>를 보낸다는 내용.
答金士直 (32) 金楺에게 답한 편지. 立志를 절실하게 할 것을 강조하고 근래 詞章과 科擧와 仕宦 등의 일로 처음 세운 뜻이 없어질까 우려되니 내실을 돈독히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또한 朴知誡의 ≪潛冶遺藁≫ 교정 상황을 물음.
答金士直 (34) 1691. 金楺에게 답한 편지. 韓聖輔와 관련된 變禮 문제에 대해 別幅으로 의견을 보내니 자세히 살피라고 부탁하는 내용.
答金士直 (34) 金楺에게 답한 편지. 김유의 외할아버지 李義吉의 墓道文字를 찬하는 일로 章陵의 典禮에 대한 金長生과 朴知誡 사이의 논란을 해명함. 김유에게 ≪東儒師友錄≫ 교정을 부탁함.
答金士直 (35) 金楺에게 답한 편지. 김유의 외할아버지인 李義吉의 墓道文字를 찬하는 일로 李珥와 成渾을 推尊했다는 구절 및 이의길이 관여한 전례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與李猶龍-之老 (36) 1672. 李之老에게 보낸 편지. 義理之學에 종사하는 태도를 논하고 의리의 權衡을 갖출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吳子順-遂昌 (37) 1675.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西韃의 시끄러운 소식을 염려하고 요새 무슨 책을 읽는지 묻는 내용.
答吳子順 (37)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家禮의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한 문목에 답한 것을 보내었다고 전하고 더욱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吳子順 (37) 1678.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海西의 학자들이 科擧에만 매달리는 것에 대한 염려 등을 전하는 내용.
答吳子順 (38) 1686.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科擧에 집착하지 않음을 칭찬하고 병이 좀 나았을 때 舊業을 수습하여 5書 및 ≪心經≫·≪近思錄≫을 玩味하라고 권하는 내용.
與崔士溫 (38) 1678. 崔瑞吉에게 보낸 편지. ≪心經≫을 標錄하는 일을 끝냈다는 소식을 전하고 海西에 있는 이들이 科業에 구애되거나 가난과 병으로 스스로 분발하는 기세가 없는데 이 근심을 면하게 할 사람이라며 격려하고 李行泰가 내려갈 것이니 서로 만나보라는 내용.
答崔士溫 (39) 1680. 崔瑞吉에게 답한 편지. 朝命을 받고 아직 거취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과 李時春과 ≪心經≫ 標題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묻는 내용.
與崔士溫 (40) 1691. 崔瑞吉에게 보낸 편지. 조용한 때를 택해 공부하러 찾아오기를 권하는 내용.
答朴一和-尙淳 (40) 1675.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저술을 纂輯하는데 善寫해서 도와 줄 이가 없다는 소식을 전하고 거상 중에도 학문 탐구에 더욱 뜻을 두기를 권함. ≪小學≫과 喪禮를 수정한 것을 보내며 의논할 곳이 있으면 다시 반복하여 살피자는 내용.
答朴一和 (41) 1677.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姜錫朋과 함께 ≪家禮≫를 講했다는 소식에 자세하게 할 것을 권하고 ≪近思錄≫을 독실히 볼 것과 標題 수정한 것으로 강하면서 본대로 평해 주기를 청한 내용.
答姜叔重 (41)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딸이 23세이면 시집가야 한다는 ≪儀禮≫의 疏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학문의 進步와 학문에서 사우들의 역할에 대해 답한 내용.
答姜叔重 (42) 1678.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近思錄≫ 공부를 위한 방법을 권하고 李滉의 ≪心經口訣釋義≫에 標題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청하는 내용.
答姜叔重 (43) 1691.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病 중의 공부에 대해 의견을 전하고 師友의 도가 무너져 서울의 後生들이 서로 비판하는 병통을 염려하는 내용.
答鄭慶由-纘輝 (43) 1676. 鄭纘輝에게 답한 편지. 先先生 碑文 내용 중의 出處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宋質夫 (44) 1677.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大學≫과 ≪大學或問≫ 공부에 대한 내용.
答宋質夫 (45) 1681.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사액을 받은 北祠에 배향된 인물을 보고없이 멋대로 교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전하고 金宇顒 등의 인물됨‚ 書院과 祠에 배향될 조건의 차이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宋質夫 (46) 1691.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史論에 대한 편집의 진행을 묻고 ≪東萊博議≫에 대한 평가‚ 胡傳과 ≪唐鑑≫의 기록 여부 등 편집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내용.
答金叔涵-載海 (46) 1677.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朱熹가 말한 바 학문하는 이들이 讀書하여 存養한 뒤 바른 곳에 나아가 是非를 증명하는 것도 하나의 道인데‚ 沈世熙나 金榦의 형제들이 여기에 뜻을 두고 있다는 내용.
答李雲卿 (1) 1687.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뜻이 너무 큰 데 있는 것 같으니 朱子가 말한 ‘병통이 무엇인지 알면 그 약을 쓸 것’이라는 말에 따라 공부에 힘쓰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李雲卿 (1)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전하는 말에 상례 치르는 동안 童蒙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專一할 수도 없고 기운이 약해 병을 부를 수도 있고 讀書에 방해될 것이니 경계하라는 내용.
答李雲卿 (2) 1688.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鄭齊斗가 陽明學에 빠져 그 병통을 고치기 어려운데 자신의 견해를 알렸으니 그 잘못을 고칠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
答朴大叔 (2) 1677. 朴鐔에게 답한 편지. 蓬山에서 講學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를 격려하는 내용.
答朴大叔 (3) 朴鐔에게 답한 편지. 근래 학문하는 자의 名實이 문란해진 것을 우려하는 내용.
答朴大叔 (5) 1680. 朴鐔에게 답한 편지. 師友의 도가 폐해져 깨우쳐 경계하여 주는 이가 없는 때에 깨우쳐 준 것에 감사하고 ≪小學≫과 ≪大學≫에 더욱 힘쓰기를 권하는 내용.
答朴大叔 (6) 朴鐔에게 情에 지나치게 되는 병통과 博文廣知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하여 답한 편지.
答朴大叔 (7) 1681. 朴鐔에게 답한 편지. 송시열이 있는 자리에서 의논을 발해 세속의 시비에 말려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숨기고 겸손한 공부에 뜻을 두라고 충고하는 내용.
答朴大叔 (7) 朴鐔에게 답한 편지. 명승 속에 드나들면서도 時事에 간여하는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것은 위태로운 기상이니 안정하며 공부하라고 충고하는 내용.
答朴大叔 (8) 1690. 朴鐔에게 답한 편지. 國喪 때의 제사 의절과 饌品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權季文-尙游 (8) 1678.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李侗의 看中의 설에 대해 불교의 觀心과 비교한 李滉 등의 설을 들어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
答權季文 (9)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程顥와 程頤 형제의 甥女의 歸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權季文 (10)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太極 全體의 설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仁甫 (11) 1680. 토지신에 대한 제사의 복색과 절차‚ 明器의 사용 여부‚ 臘日祭 등의 문제에 대해 李時春에게 답한 편지.
與李仁甫 (12) 1682. 李時春에게 상을 치르는 중에도 몸을 잘 보존하기를 권하는 편지.
答李仁甫 (12) 1686. 李時春에게 답한 편지. ≪小學≫과 四書·≪家禮≫·≪心經≫·≪近思錄≫ 등을 깊이 읽고 그것을 체득하여 誠을 주로 삼아 敬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
與李君輔 (13) 167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억울함을 發明하겠다는 의견을 낸 것이 어그러진 것에 안타까움을 전하고 ≪近思錄≫ 등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격려하는 내용.
答李君輔 (14) 1678.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罷榜 등으로 인해 儒士들이 失脚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수년간 近畿의 집에 머물며 안정하여 학문할 것을 권하는 내용.
答李君輔 (16) 1680. 부모의 상과 왕의 상이 겹쳤을 때의 복제와 제사에 대하여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16) 1681. 금일의 時勢에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서 출사하여 벼슬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16) 1682.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여자의 상에 남편 쪽 사람만이 主喪할 수 있다는 것 외에 題主‚ 제사 때의 순서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 (17) 1685. 수령으로 나가 백성을 다스리느라고 강습할 틈이 없다고 한 말을 경계하고 수령으로서 진휼에 임할 자세 등에 대해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18) 1690.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상에 素帶하고 加麻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李世龜의 병‚ 鄭齊斗의 陽明學‚ 閔以升 등의 학문 태도에 대한 염려 등을 전하는 내용.
答李君輔 (19)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小學≫을 근본으로 삼아 居敬을 위주로 하여 먼저 큰 것을 세울 것을 당부함. 李珥가 동방에 格致하려는 선비가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자신이나 친구들이 모두 實이 부족했다고 한탄하고 李世龜가 大學格物說을 논한 卷軸을 보았으면 한다는 내용.
答李君輔 (21) 1691.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鄭齊斗가 王陽明의 학문에 빠져들어 왕양명의 학문을 崇禮門에‚ 주자를 敦義門에 비견하고 있다는 것 등을 염려함. 그에게 보였던 <陽明學辨> 1통을 보내니 나머지 무리에게도 너그러이 대하지 말고 꾸짖어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李壽翁-世龜 (22) 1675. 李恒福의 후손인 李世龜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비에 새길 草藁의 일을 의논하고 文辭를 업으로 삼고 功名을 취하려는 풍조를 경계하는 내용.
答李壽翁 (23) 1679.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練祭 뒤 새벽에 哭하는 문제 및 학문의 至訣과 要道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 (24) 1680.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母后와 坤殿의 卒哭 전의 사대부가의 제사 문제에 대해 여러 설을 들어 고증한 내용.
答李壽翁 (25) 1682.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婦人의 칭호는 남편의 實職을 따라야 한다는 설‚ 新舊의 葬禮에 각각 제사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壽翁 (26) 1686.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이세구의 아버지 墓表의 일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알리고 과거 응시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壽翁 (27) 1687.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文士의 弊習을 경계하는 내용.
答李壽翁 (27) 1688.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國恤 卒哭 후에 昏禮와 冠禮를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 (27) 1691.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通典≫<禮部>와 ≪五先生禮說≫을 합하여 편찬한 ≪六禮疑輯≫ 교정작업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전하고 格物說에 대한 입장을 밝힌 글을 보낼 것이라는 내용.
答兪顯叔 (28) 1678.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小學≫을 따라 공부할 것을 권유함.
答兪顯叔 (28) 1682.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典祀의 升黜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李世弼의 상소가 나오자 자신을 의논의 근원으로 지목하고 있다며‚ 許衡의 출처에 대한 李滉의 의논과 이에 대한 宋時烈의 비판 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내용.
答兪顯叔 (29) 1684.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哭泣이 부당하다는 설‚ 正筋의 의미‚ 祭禮에서 進茶 후 밥을 섞는 의절의 적용 여부‚ 廬墓 제도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한 의견.
答兪顯叔 (29) 1685.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祥祭 뒤에 쓰는 網巾의 제도‚ 懷尼 是非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그 경과에 대한 내용.
答兪顯叔 (30) 1686.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文詞를 숭상하는 것은 道를 해치는 것으로‚ 讀書하여 의리를 깊이 체득하여 행할 것을 권유함.
答李士亨 (31) 1681. 선비들이 학문하면서 기질의 치우침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答尹惠甫-志和 (32) 1686. 尹志和에게 답한 편지. 보여준 <絜矩章圖>의 그림이 자세하다는 칭찬과 함께 일부 글자와 내용의 분절 등에 대해 교정하여 주는 내용.
答尹惠甫仲深-志源 (32) 尹志和와 尹志源에게 답한 편지. 祖父母의 服制 중 과거에 응시하는 문제에 대해 부형에게 물어서 하되 중점은 조부모의 상에 두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季晦 (33) 1681. 申曄에게 답한 편지. 왕에게 올렸던 ≪心經釋義≫를 돌려 받아 增刪하는 일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부제학에게 전해달라는 내용.
答宋德普-淳錫 (34) 1691. 宋淳錫에게 답한 편지. 전쟁에 임해서 처하는 도리에 대한 의견.
答金仲和-昌協 (35) 1682.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金壽增이 어린 자식의 상을 당한 것을 위로하고 開元禮 등을 근거로 요절한 사람의 상례 절목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南子聞-鶴鳴 (35) 1676. 南鶴鳴에게 답한 편지. 朱熹 학문이 文義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면서 吳氏를 근거로 들었는데‚ 王安石 계열인 오씨의 학문은 陸九淵을 위주로 하여 왕안석보다 폐해가 더 큰 인물이었다고 비판하는 내용.
答兪寧叔 (37) 1683.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상소를 올린 일로 慈聖에게 누를 끼칠까 근심하고 있으며‚ 또 분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忌墓와 練祥 등의 절차에 대한 의견내기를 사양하고 別幅으로 올린다고 밝힘.
答金子懷-洪福 (37) 1691. 金洪福에게 답한 편지. 定州에서 인편을 통해 편지와 물건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고 변방의 외임은 解免할 길이 없으니 일단 나아가라는 내용.
答柳集仲-成運 (38) 1685. 柳成運에게 답한 편지. 國恤時에 개인의 상제례를 물려 행하는 일과 <忠正堂記>를 아직 쓰지 못했다는 내용.
答李子文 (38) 1691. 李東郁에 답한 편지. 외직에 나가서 닥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위로하고 잘 대처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別紙 (39) 李珥의 <箕子實記> 외에 기록이 소략한 箕子의 사적을 모아 安州牧에 부탁하여 ≪範學全編≫을 펴내게 된 경위와 기자의 치적 등에 대해 기술한 내용.
答閔彦暉-以升 (40) 1682.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선비들이 과거 공부와 벼슬에만 뜻을 두는 것을 염려하며 石室에 거처하며 공부하는 것을 격려하는 내용.
答閔彦暉 (41) 1687.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鄭齊斗의 陽明學 경도에 대한 비판.
答閔彦暉 (42) 1690.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衿陽의 講學 소식을 들었다며 기쁨을 전하고 許晦仲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전하는 내용.
答閔彦暉 (42)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許晦仲이 산 속에 들어간 것이 老莊의 放曠하는 풍조에 흐를까 염려하는 내용.
答權質甫-益文 (43) 1682. 權益文에게 답한 편지. 居敬窮理 공부를 강조하고 이를 요령있게 설명한 成渾의 ≪爲學之方≫이란 책이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함.
答權質甫 (44) 1686. 權益文에게 답한 편지로 마음 수양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崔漢臣-是翁 (45) 1690. 崔是翁에게 답한 편지. 독서가 실제의 공부로 이어지지 못하면 多讀할지라도 책은 책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일 것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李玉汝-惟材 (1) 1682. 李惟材에게 답한 편지. 시어머니 服喪 기간에 見姑하는 예‚ 시집가고 장가가는 나이에 차이를 둔 이유 등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
答李季成-世勉 (1) 1686. 李世勉에게 답한 편지. 初忌日과 初喪이 겹쳤을 때에 초상의 날짜를 물리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季成 (2) 1688. 李世勉에게 답한 편지. 慕華峴 북쪽 길 곁에 엎어져 있던 楊經理의 去思碑를 다시 세우는 일은 청나라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라 피해야 할 것이니 가까운 곳에 별도로 세워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士粹-彦純 (2) 1691. 李彦純에게 답한 편지. 遺命이 중하기는 하지만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하니 사당에 유명을 따르지 않은 사유를 고하고 立後하도록 하라는 내용.
答李士粹 (3) 李彦純에게 답한 편지. 먼저 큰 뜻을 세우고 存心에 힘쓰는 것을 공부의 근본으로 삼고 난 뒤 讀書하여 窮理할 것과‚ ≪擊蒙要訣≫에 이은 ≪小學≫ 및 ≪大學≫의 공부와 ≪近思錄≫을 공부할 것 등에 대한 내용.
答李常卿-尙恒 (4) 1690. 李尙恒에게 답한 편지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논한 내용.
答羅仁卿-斗甲 (5) 1687.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학문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데 대해 朋黨의 폐가 고질이 되고 師友의 도가 무너져 학문을 하는 이를 비웃는 상황임을 말하고‚ 처음의 뜻을 돈독히 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성내지 않게 된 뒤에 다시 물어오면 답해 주겠다는 내용.
答羅仁卿 (6)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黨比하는 습속이 강학에도 방해가 될 것임‚ 動靜사이의 공부에 대한 내용.
答羅仁卿 (6) 1689.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독서와 궁리를 먼저 한 뒤에 致知가 밝아지고 행하는 것이 더욱 독실해질 것이니‚ 朱熹가 先後에서는 知를 먼저 하되 輕重에서는 行을 중하게 본 것은 바로 이같은 뜻이었다는 내용.
答柳道卿-貴三 (7) 1687.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心經≫은 放心을 모으고 德性을 높이는 요령으로 存性의 방도일 뿐인데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 어렵다는 내용.
答柳道卿 (8) 神主‚ 喪服의 制度를 잃었을 경우‚ 어린아이의 杖‚ 葬禮에 地灰를 쓰지 않는다는 설 등에 대해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答柳道卿 (8) 1688. ≪中庸≫과 ≪大學≫을 마치면 먼저 ≪論語≫와 ≪孟子≫의 大註를 通讀할 것을 권하고 吉祭를 행할 시기 등에 대해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答柳道卿 (9) 1689.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景賢錄과 退溪에 대한 기록을 梁君 등과 講習하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
答柳道卿 (9) 1690.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朱子의 서신에 대한 공부에 진력하고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는 내용.
答黃擧卿-翊良 (10) 1688. 黃翊良에게 봄이 지난 뒤 틈을 내어 서당에 올 것을 권하는 내용의 편지.
答高益之 (10) 1687. 高益謙에게 답한 편지. 서원에서 무슨 책을 강습하고 있는지 묻고 汝良과 잘 사귀며 서로 힘쓰도록 격려하라는 내용.
答金希敬-道元 (10) 1688. 金道元에게 답한 편지. 서책을 공부하더라도 沈潛하여 玩味하고 의리를 涵養하는 공부를 할 것을 말하고 崔柱河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黃汝器-埴 (11) 1689. 黃埴에게 답한 편지. 학문은 평생의 사업이니 우선 ≪擊蒙要訣≫을 더 玩味하고 居敬·窮理·力行을 학문의 宗旨로 삼아 體驗하고 수양하라는 내용.
答李秀夫 (12) 1687. 李萬挺에게 답한 편지. 학문한다는 것은 병통을 살펴 바로 잡는 것이며 이에는 主一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권하고‚ 성인이라 할지라도 精一한 공부가 있는 뒤에야 道心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격려하는 내용.
答李秀夫 (12) 1690. 李萬挺에게 답한 편지. 心卽理說은 陽明이나 禪家에서 宗旨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경계하고‚ ≪周易≫을 읽을 때 初學하는 사람이 本義의 占치는 것에 빠지면 현혹될 것이라며 鄭逑가 宣祖에게 했던 말을 들어 경계하는 내용.
答李秀夫 (13) 1691. 李萬挺에게 답한 편지. 敬字의 뜻에 대해 설명하고‚ 독서의 차례로 우선 ≪小學≫과 ≪大學≫을 읽고 ≪論語≫·≪孟子≫·≪詩經≫·≪書經≫을 읽은 다음 ≪周易≫과 ≪春秋≫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함.
答兪濟卿-楫 (15) 1691. 兪楫에게 답한 편지. 成南平의 喪에 孫의 복제로 小功도 이미 잘못이니 易月이나 8세 이하에 服이 없다는 것 등은 아예 논할 것이 못된다는 내용.
答崔平甫 (15) 1691. 崔衡에게 답한 편지. ≪小學≫을 마친 뒤 ≪心經≫과 ≪家禮≫ 등의 책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스스로 힘쓸 것‚ 講目에 대한 저술을 소개하고‚ 宋時烈과 尹宣擧 사이의 일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 내용.
答崔平甫 (16) 崔衡에게 답한 편지. 집안에 슬픈 일을 당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 학문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金宇卿-普 (17) 1689. 金普에게 보낸 편지. 松都에 儒老가 없어 함께 공부할 만한 이가 없다고 하더니 학문과 과거를 둘 다 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격려하는 내용.
答黃季和-燮 (18) 1691. 黃燮에게 답한 편지. 海西에 있을 때 홀로 학문하겠다고 왔던 것을 격려하고‚ 主一無適의 공부를 더하면 병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권하는 내용.
答崔汝會-瀜 (18) 1690. 崔瀜에게 답한 편지. 要訣에서 가르치는 것은 持身을 독실히 하고 讀書를 부지런히 한 뒤에야 是非와 의혹을 가릴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生-南烈 (19) 1691. 金南烈에게 답한 편지. 학문은 ≪擊蒙要訣≫로 시작하고 소학과 대학을 종신토록 힘써 居敬工夫로 始終이 통하고 動靜이 합당한 이후에 다른 경전에 힘써야 함. 平壤의 黃翊良이나 定州의 金希敬과 왕래할 것을 권함.
答沈生- (20) 沈에게 답한 편지. 성중에서 師生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꺼리는 상황에 이른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李士安-熙靖 (20) 1690. 李熙靖에게 보낸 편지. 詩文이나 佛經 공부에 빠지지 말고 ≪小學≫·四書·≪心經≫·≪近思錄≫ 등 性理書를 공부하라고 권함.
答康道卿-世鳴 (21) 1684. 康世鳴에게 답한 편지. 스승의 상을 당한 것을 위로하고 加麻하는 제도의 環絰白巾의 복색과 기한‚ 長子를 위한 3년복의 범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
答尹君弼-遇成 (22) 1672. 尹遇成에게 답한 편지. ≪家禮≫는 자세히 살펴 익숙하지는 않으나 큰 방도는 알고 있는 듯하니 ≪心經附註≫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心經≫ 공부 방법에 대해 밝힌 내용.
答李叔玉-世瓘 (23) 1672. 李世瓘에게 답한 편지. 학문이란 자신의 立志와 用工이 관건이지 반드시 스승이나 다른 사람을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
答李季通-潗 (23) 1691. 李潗에게 답한 편지. 科擧에 매달려 詞章에 힘쓰는 풍조를 비판하는 내용.
答李樂甫-賀朝 (24) 1689. 부모상 중에 죽은 자식의 복제 문제에 대해 李賀朝에게 답한 편지.
與任群玉-璟 (25) 1690. 任璟에게 보낸 편지. 안부를 묻고 자신의 진퇴 문제 등에 대한 생각을 전하는 내용.
答金生亨祉 (26) 1672. 金亨祉에게 답한 편지. 先祖의 유고를 보고 年譜 등의 일부 구절과 宋時烈 운운한 것에 이견을 표시하면서‚ 李滉과 李珥의 長處를 밝힌 내용.
答李存吾-紳 (26) 1675. 李紳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栗谷先生續集≫ 4책과 ≪外集≫ 3책의 편집경위를 밝힌 내용.
答李存吾 (27) 1687. 李紳에게 답한 편지. 중국에도 伯夷와 叔齊의 서원이 없으니 중국의 淸節祠의 예에 따라 사당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存吾安卞玉--兩君 (27) 1691. 李紳과 安에게 답한 편지. 海州의 伯夷와 叔齊의 사당에 대해 사당의 版題‚ 獻爵과 籩豆와 拜禮‚ 날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趙汝常-持恒 (28) 1688. 趙持恒에게 답한 편지. 趙翼의 행장은 일부 고쳤다는 소식을 전하고 다만 遺書에서 朱熹의 ≪四書集註章句≫를 고친 것은 儒家의 宗法에서 금기사항이기 때문에 中外에 널리 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그 서문을 쓸 수 없다고 거절하는 내용.
答趙汝常 (29) 1690. 趙持恒에게 답한 편지. 행장의 문자를 고치는 일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遺書의 跋文은 윤증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며 거절하는 내용.
答閔定甫-光益 (30) 1671. 代服의 문제에 대해 주자의 견해 등을 들어 閔光益에게 답한 편지.
答閔定甫 (31) 1673. 代服의 문제에서 논란이 된 題主와 祧遷에 대한 의견과 宋時烈과 의견을 조율한 경위를 閔光益에게 답한 편지.
答李善鳴-鳳朝 (32) 1677. 李鳳朝에게 답한 편지. 李恒 서원 중에 문하생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를 묻는 내용.
答李子益-萬謙 (32) 1673. 李萬謙에게 답한 편지. 奠禮의 절목 중 無官이라 한 것은 儒士를 가리킨 것이니 黑布巾 아닌 素巾을 쓰게 한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
答趙聖登-泰東 (33) 1673. 趙泰東에게 답한 편지. 追服할 때의 절차‚ 祥練의 예를 행하는 날짜‚ 几筵과 上食 문제 등 상례에 관해 답한 내용.
答趙聖登 (34) 1682. 趙泰東에게 답한 편지. 뒤에 후사가 된 사람이 추복할 때의 복제에 대한 내용.
答趙聖登 (34) 1690. 趙泰東에게 답한 편지. 尹拯과의 관계‚ 의논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비판 등에 대해 해명한 글.
答李儀卿-羽成-別紙 (35) 1685. 李羽成에게 답한 편지 別紙. 중국과 우리의 친족 범위와 通婚의 범위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石潭院儒 (36) 1687. 石潭書院 유생들에게 金長生을 追享하는 일에 대하여 이견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 주선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한 편지.
答六臣祠宇諸生 (37) 1682. 死六臣 祠宇의 諸生들에게 답한 편지. 사육신 사우의 位次와 稱號‚ 鄕貫 등에 대한 내용.
答靈光鄕祠諸生 (38) 1684. 靈光 鄕祠의 諸生들에게 답한 편지. 고을의 유생들이 尹宣擧의 서원 건립 및 尹煌의 合享‚ 尹宣擧의 追享 문제로 이견이 있다는데 뒷날 서로 싸우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내용.
答平壤諸生 (39) 鄕案과 鄕憲에 대해 의견을 구한 平壤의 유생들에게 답한 편지. 鄕憲 만으로 오랫동안 서로 싸우던 감정이 풀어질 수는 없으니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해서 忠信과 禮讓을 확충해나가라는 내용.
答洪生時萬 (40) 1685. 洪時萬에게 답한 편지. 仁賢書院의 懸板으로 程子의 <四勿箴>과 朱子의 <敬齋箴>과 <白鹿洞規>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崔生昪 (41) 1684. 崔昪에게 답한 편지. 서원을 세우려다 禁令으로 인하여 鄕祠를 세울 것인지‚ 옛 사당에 合享할 것인지 논의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或人 (41) 1658. 環絰 등 啓殯할 때의 복색 등 喪禮에 관해 의견을 밝힌 편지.
答或人 (42) 1689. 道問學을 지름길이라 하는 말의 의미‚ 知行의 竝進과 敬義를 夾持하는 공부‚ 實功에 힘쓸 것 등 학문하는 태도에 관해 의견을 밝힌 편지.
答或人 (43) 1691. 病을 잘 조섭하기를 부탁하고 병중의 공부에 대해 답한 편지.
與朴進士-之相 (1) 1669. 族譜의 增修 등에 대하여 朴之相에게 보낸 편지.
答朴稷山 (1) 朴稷山에게 답한 편지. 次子를 편애하여 동생에게 형의 뒤를 잇게 하려고 장자의 立後를 반대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니‚ 次子의 아들을 長子에게 立後하도록 설득하라는 내용.
與參奉叔兼示諸姪 (2) 숙부와 여러 조카들에게 보낸 편지. 朴尙衷 이래 선조의 업적을 추모하고 조카들에게 학문하는 태도 등에 대해서 권면하는 내용.
與經歷-世基-宗兄 (6) 1665. 朴世基에게 보낸 편지. 제사 때에 職銜과 旁題를 고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與林川宗兄 (6) 1670. 종형에게 보낸 편지. 5대조 신위의 祧遷 문제‚ 제례 의절에 관한 도설 등에 대한 내용.
與仲固兄 (8) 1672. 朴世堅에게 보낸 편지. 맏조카의 과거 합격을 축하하며 여러 조카들이 朴尙衷과 朴紹 이래 선조들을 계승하여 近習에 물들지 않고 있음을 기뻐하는 내용.
答季肯兄 (9) 1666. 祝辭 등에 대해 상의해 온 朴世堂에게 祧할 때 신주를 묻는 것이 옛 사람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답한 편지.
與季肯兄 (9) 1668. 朴世堂에게 보낸 편지. 중국에 가는 길에 ≪朱子家禮≫의 원류로 우리 나라에는 없는 책인 ≪溫公書儀≫를 구해 올 것을 부탁하는 내용.
答季肯兄 (10)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 外祖의 服을 입는 문제 등에 대해 별지에 의견을 밝히겠다는 내용.
別紙 (10)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立後하라는 명이 내려져 사당에 고했어도 本親의 복을 그대로 행하여야 하며 繼後한 외할아버지의 복제를 추후에 입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내용.
與季肯兄 (11) 1681. 朴世堂에게 보낸 편지. 선조 朴尙衷 대한 비문을 宋時烈에게 부탁하자는 내용.
答季肯兄 (12)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 선조 朴尙衷이 고려에 온 원나라의 사신을 물리치자고 한 것은 대명 사대 의리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송시열이 대명의리를 천명한 것이라고 비문에 쓴 것은 잘못이므로 고쳐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이 두 가지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
答晦元-世煜-弟 (15) 1664. 朴世煜에게 답한 편지. 아이가 어려 상례를 섭행할 때의 祝辭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晦仲弟 (16) 1663. 長子가 立後하고 난 뒤 次子로서 承重한 아들을 위하여 斬衰 3년복을 입는 것은 古禮에 맞지 않는다고 답한 편지.
與景時-世集-弟 (17) 1673. 朴世集에게 보낸 편지. 학문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科業만 일삼으며 流俗과 時文에 휩쓸리는 것을 경계한 내용.
答景時弟 (18) 1687. 慘傷을 당한 李僉樞家의 복제와 제사에 대하여 朴世集에게 의견을 밝힌 편지.
與城中諸宗姪及兩錦都尉 (18) 1676. 성중에 있는 여러 조카들 및 都尉들에게 보낸 편지. 사당의 관리와 제사‚ 제사에 참여하는 일 등의 규례를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내용.
答泰徵姪 (20) 1672. 朴泰徵에게 답한 편지. 安陰에 있는 선조의 무덤 관리하는 일‚ 고조부의 행장을 宋時烈에게 부탁하고 시호를 청하는 일‚ 族譜 문제 등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泰徵姪 (21) 1678. 朴泰徵에게 답한 편지. 근래 서울의 士風이 무너지고 동지들은 흩어졌는데 李世弼·兪晦一 등이 공부에 뜻을 두어 ≪心經釋義≫ 등을 함께 공부하고 있음을 전하는 내용.
答泰尙姪 (21) 1681.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見舅禮에서 폐백이 있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尙姪 (22)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선조의 諡狀 및 立碑 문제를 논하는 내용.
答泰尙姪 (23) 1684.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선영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염려하고‚ 족보를 만드는 일을 비방하는 의견에 대해 반론하는 내용.
答泰斗姪 (24) 朴泰斗에 답한 편지. 伯父에게 出後하여 증조의 종계를 이었을 때 생부의 神主를 처리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泰斗姪 (24) 朴泰斗에 답한 편지. 閔氏 5世 祖考妣와 작은 承旨公 묘와 한 岡에 있는 沈氏祖考妣를 祔廟할 때의 墓祭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斗姪 (26) 1680. 朴泰斗에 답한 편지. 妻의 기년복을 입은 자가 墓祭에서 三獻을 드린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與泰遜泰輔姪別紙 (26) 1681. 朴泰遜과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先祖 顯彰이 贈諡와 旌閭만 논의되고 있다는 말에 분묘 소재 고을에 사당을 세우게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淳姪 (28) 1678. ≪禮記≫ 등에 관해 朴泰淳에게 답한 편지. 서울 주변 인사들이 과거를 본업으로 삼아 경전을 자세하게 공부하지 않는 폐단 등에 대한 내용.
與泰輔姪 (28)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벌을 받게 된 것은 오히려 할 일을 행한 탓이라 격려하며 이 기회에 더욱 공부에 힘쓸 것을 권한다는 내용.
答泰輔姪 (29) 1681.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 朴尙衷이 올렸던 상소에 북원의 사신을 명백히 물리치자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과 宋時烈이 올린 글에 혐의를 두는 것을 반박하는 내용.
與泰輔姪 (30) 1682.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祀典에 대한 상소가 너무 과격하여 붕당의 피해가 가문에 미칠까 경계하는 내용.
答泰輔姪 (33)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 원나라와 명나라의 연호 사용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이미 이단을 숭상한다는 소문이 조야에 무성한 상황에서 비문에 옛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좋은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며 경계하는 내용.
答泰輔姪 (36) 1683.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 개성 사람의 일은 別幅에 자세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
別紙 (36)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潘南 박씨라고 주장하는 朴而厚 등을 族譜에 別錄하는 문제‚ 松都의 祠宇의 설립에 따른 物力‚ 墓祭를 위한 제도의 정비‚ 潘南 박씨의 연원 등에 관한 내용.
答泰初姪 (39) 1685.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讀書箚記를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칭찬과 懷尼是非에 관한 입장이 師友의 도를 해치는데 이르지 않도록 태도를 신중히 하라는 내용.
與泰初姪 (40)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錦城의 祠宇에 高祖를 배향하게 된 것을 기뻐함. 讀書箚記를 본 소감 등을 토로한 내용.
答泰初姪 (41) 1687.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時事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錦城의 사당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묻는 내용.
與泰初姪 (41) 1689.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유배가 계속 되는 時事에 대한 감회‚ 士友의 消息과 동향에 대한 내용.
答泰初姪 (42)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世事에 대한 염려와 제자들의 동향을 알리고 文辭 위주의 학문 경향에 대한 염려 등에 대한 내용.
答泰初姪 (43) 1691.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大學後問>을 받아 보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小學≫·≪大學≫·≪中庸≫·≪近思錄≫의 讀書記와 ≪心經≫·≪家禮≫의 要解를 빌려 보되 정돈되지 않은 것이니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
與弼成族孫 (44) 1674. 族孫 弼成에게 보낸 편지. 楊山 小碑의 일에 대해 잊지 않고 있음을 알리는 글.
答弼成族孫 (44) 1680. 族孫 弼成에게 답한 편지. 君服이 있을 때의 私祭 여부에 대한 옛 도리와 현실의 차이에 대해 밝힌 내용.
答弼純族孫 (45) 1690. 族孫 弼純에게 답한 편지. 王父의 3년상 내에 손자의 喪이 생겼을 때 王父의 祔祭 여부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글.
答閔楊湖問-喪禮 (1) 練服의 제도 등에 대한 閔嶪의 질문에 대해 견해를 밝힌 내용.
答宋尤齋問-學 (2) 1681. 明史에서 太祖가 ≪尙書≫ 蔡傳의 天文에 착오가 있다고 한 구절에 대한 이해‚ 春王正月에 대한 王陽明의 설명 등에 대한 宋時烈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權說卿問-春秋 (4) 1667. 公羊 三世의 의미‚ 曹伯이 世子로 하여금 조회하게 하였다는 기사에 대한 해석 등 春秋의 기사에 대한 權說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李進士-后晟-問-祭禮 (6) 1689. 支子가 宗家와 다른 곳에 살고 있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을 때의 忌祭 祭禮에 대한 李后晟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金元會問 (7) 1651. 학문의 의미와 敬의 의미에 대한 金澄과의 문답. 敬이란 本體는 虛明하여 비어 있지만 眞實하게 되면 중심에 주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元會問-學 (7) 金澄과의 문답. 人心을 제어하고 道心을 확충한다는 말의 의미‚ 過不及이 惡으로 흘러간다면서 道心에 過不及이 있다고 한 말의 타당성 여부‚ 人心 및 道心과 七情의 관계‚ 中을 구하기 위한 공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元會問-學 (14) 金澄과의 문답. 過不及이 惡으로 흐를 수 있다는 말은 程顥와 朱子에게서 나왔으니 분명한 말이지만 過不及을 人心에만 소속시키는 것‚ 惡으로 흐른다는 것은 過에만 해당되고 不及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등은 정자나 주자의 본의는 아니라는 내용.
答南仲輝問學-喪禮 (15) 喪禮에 대한 南二星과의 문답. 奔喪을 계산하는 기준 및 小祥을 행하는 기준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의절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答金起之相問-學 (18) 1680. 金壽興과의 문답. 浩然之氣와 血氣‚ 道心과 人心‚ 性命과 形氣의 바름과 사사로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외에 주자가 말한 知言의 뜻‚ ≪孟子要略≫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지의 여부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季周問 (22) 1675. 李端夏와의 문답. 仁宣王后 小祥에 罷散된 이들과 土人들이 客舍 중문 밖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 외에 白帽 착용의 타당성 여부‚ 昏禮의 <設饌圖>에 나오는 것들의 구체적인 내용‚ <昏禮圖>의 소재처‚ 昏禮할 때 지낼 제사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季周問-浩然章 (23) 1677. 道義와 氣의 관계 등 ≪孟子≫ 浩然章에 대한 李端夏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養而問-禮 (24) 1663. 李之濂의 질문에 답한 글. 閏月의 의미‚ 전실과 후실을 제사에 배향할 때의 위치‚ 스승의 喪에 입을 복제‚ 從母의 남편과 舅의 妻의 복제‚ 成笙歌하는 날짜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問-國恤禮 (25) 1683. 國恤禮에 대해 尹拯에 답한 글. 國恤에서의 冠‚ 국휼 뒤의 혼인‚ 國葬이전의 私喪의 장례‚ 왕의 상중에 부모상을 당했을 때의 복제‚ 國葬 이전의 제사‚ 외방에서 임금의 상을 당했을 때 哭禮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問-國恤禮 (32) 1688. 國恤禮에 대해 尹拯에 답한 글. 李珥의 설과 金集의 설을 각각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設奠과 脫服 등에 대한 宋翼弼의 설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당의 俗節과 朔望奠을 행할 것인가? 奔喪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을 재론함.
答洪道長-受泰-問-禮 (35) 1674. 攝主한 뒤의 練祭와 祥祭 및 改題의 절목 등에 대한 洪受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洪邦叔-受濟-問-禮 (36) 1691. 洪受濟의 질문에 답한 글. 側室의 아들이 있는데 先庭에 죄를 지었다고 하여 조카나 從孫을 키워 奉祀하게 하거나 외손이 봉사하도록 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柳悠久問-禮 (37) 1685. ‘부친에게 복이 있을 때’라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한 柳尙運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美伯問-鄕飮酒禮 (1) 1680. 賓主를 맞이하여 서로 절하고 술을 따르는 일‚ 揖讓하고 俎豆를 물리는 일 등 鄕飮酒禮의 절차에 대한 崔邦彦의 질문에 답한 글.
答具濟伯問-喪禮 (4) 1682.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맏아들이 자신의 妻를 위한 제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具時經의 질문에 답한 글.
答趙士威問-喪禮 (6) 1665. 主祭할 嫡長姪이 承重服을 입고 있을 경우의 祔祭에 대한 趙得重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元-萬春-問-祭禮 (6) 1670. 祭禮에 대한 李萬春의 질문에 답한 글. ≪家禮≫와 ≪擊蒙要訣≫의 견해가 다른 忌祭의 齋戒 문제‚ 모친상에 아버지 대신 아들이 축문을 읽는 문제‚ 제사에 사용하는 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文憲-問 (7) 1660.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大功服 장례 전의 과거 응시 문제‚ 服喪 중의 복색‚ 外方에 있는 喪人의 형제가 치러야 할 禮‚ 奉祀할 범위 등 예에 관한 문제와 命과 分의 의미‚ 과거 응시의 義理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近思錄 (9) 1661. ≪近思錄≫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近思錄≫에서 ≪中庸≫이 ≪詩經≫과 ≪書經≫ 뒤에 있는 이유를 비롯하여 大畜 卦‚ 錙銖‚ 分限‚ 思慮‚ 四百四病‚ 存養‚ 簡編‚ 失節 등의 의미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近思錄 (11) ≪近思錄≫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禮樂刑政이 미치지 않는다’ ‘解額窄處’ ‘立春에 선조에 제사하다’ ‘機事’라는 구절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祭禮 (13) 1664. 성인이 되어 죽은 長子의 立後 문제와 先世의 제사를 반드시 장자에게 입후한 이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家禮 (14) 1669. ≪家禮≫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昭穆‚ ‘節祀를 正宗으로 줄인다’는 말 등의 뜻과 笄禮를 宗婦가 아닌 모친이 주관하는 이유‚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는 말에서 부인이 지칭하는 것‚ 상제례의 복색과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心經 (21) 1665. ≪心經≫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知와 仁守를 精一에 分析하는 의의‚ 克己復禮에 대한 程子의 해석‚ 天理人欲에 대한 胡五峯의 설명‚ 孟子의 楊墨 배척에 대한 朱子의 견해‚ 索性이라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中庸 (26) 1667. ≪中庸≫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修道에서 修字의 의미‚ 和而不流한 君子를 덕을 이룬 군자라 할 수 있는가‚ 공자가 ‘九夷에게 가서 거하고자 한다’고 한 말의 의미‚ 鬼神의 情狀과 德‚ 祧遷과 昭穆의 제도‚ 誠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喪禮 (36) 1668. 喪禮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목욕한 뒤 復衣를 벗기는 절차‚ 繼母의 장례 전 生母를 改葬할 때의 儀節‚ 개장할 때 虞祭와 옛 무덤에서 柩를 꺼내는 의절‚ 喪人 출입시의 服制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汝九問-論語 (1) ≪論語≫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孝悌’ ‘巧言令色’ ‘學則不固’ ‘色莊’ ‘忠恕’‚ ‘述而不作’ 등의 의미와 ‘學稼(농사일을 배우는 것)’가 이단인가‚ 王安石에 대한 평가‚ 四敎의 범주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子望問-喪禮 (28) 1682. 復과 哭의 순서‚ 小殮 전의 弔服‚ 장자의 상을 당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하여 成服하는 시기‚ 殮의 절차‚ 조문할 때 주인과 客의 예 등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望問-喪禮 (29) 1683. 反哭한 뒤 묘에 곡할 때의 복색‚ 虞祭와 時祭의 절차‚ 부모의 상 중 이웃의 상에 대한 조문 여부 등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季通問-昏禮 (30) 1669. 昏禮 때 사당을 뵙는 절차‚ 시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시어머니만 계실 때의 見舅姑禮‚ 신부가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사당에서 뵐 때 고할 호칭‚ 신부가 사당을 뵙는 시기와 폐백 여부 등 昏禮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季通問-喪禮 (32) 1688. 모친의 練祭 전에 모친상에 主喪을 하던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에 題主와 축문의 호칭 변경‚ 練祭와 祥祭의 택일‚ 前喪의 祔祭를 행하는 순서‚ 모친과 부친의 合葬 절차 등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季通問 (34) 1691. 服喪 중 사망한 아버지 대신 아들이 代喪할 때의 절차‚ 부모가 같은 날 죽었을 때의 제사‚ 아들이 아버지와 신분이 달라졌을 때 제사‚ 蓋頭·七星板·沐浴·殮襲 등 상례 절차와 복색‚ 灰隔과 明器 등의 제도‚ 각종 상제례의 祭奠 등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權致道問-學 (1) 1681. 四端七情에 관한 李珥와 朱熹의 설에 대한 이해 기준‚ ≪大學≫의 正心에 대한 體用 위주의 경전과 心의 用 위주의 章句에 대한 이해 기준을 물은 權尙夏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近思錄 (1) 1666. ≪近思錄≫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太極而無極’ 註의 ‘上天之載’의 해석‚ 陰陽의 동정을 通·善·復·性으로 설명하는 문제‚ 陰陽과 五行을 병칭하는 이유‚ 仁義·陰陽·剛柔의 體用 구분‚ 善惡과 陰陽의 분별 등에 대한 내용.
答沈龍卿問-喪禮 (8) 1666. 喪 중의 忌祭와 墓祭‚ 묘에서의 壓尊‚ 생신에 지내는 제사 등 喪禮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近思錄 (8) 1666. ‘元은 善의 長이다’‚ ‘舜이 천하를 가졌으나 간여하지 않았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虛實은 動靜의 機요 陰陽은 剛柔의 시작이다’‚ ‘귀신은 二氣의 良能이다’는 구절등 ≪近思錄≫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 (15) 1680. ≪範學全編≫ 첫 머리에서 河圖를 뺀 이유‚ ≪春秋補說≫ 서문에서 程子를 程氏라고 쓴 이유 등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家禮 (17) 1682. 사당에 신주를 봉안하는 의절‚ ≪家禮≫<祭饌後說>에 나오는 俗節 및 속절 제사의 素饌 사용 여부‚ 冠禮의 복색과 의절 등 家禮에 대한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喪禮 (22) 1683. 喪禮에 대한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복상 중 왕의 喪을 당했을 때 상복을 벗는 시기‚ ≪春秋公羊傳≫과 ≪書傳≫에 나오는 殷祭의 의미‚ ‘오랫동안 장사하지 않았다’는 구절의 의미‚ 適子와 支子가 지내는 제사의 차이‚ 흉년시 犧牲을 줄이는 것의 타당성 등에 대한 내용.
答崔文叔-奎瑞問-喪禮 (1) 1682. 喪禮에 대한 崔奎瑞의 물음에 답한 글. ≪家禮≫에서 갓끈에 대해 규정하지 않은 이유 및 練服‚ 斬衰의 絞帶‚ 葛絰의 大小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崔文叔問-喪禮 (1) 1683. 왕에 대한 服喪 제도 붕괴의 원인이 漢 文帝의 短喪이었다는 것 등 喪禮에 대한 崔奎瑞의 물음에 답한 글. 관직 有無와 왕에 대한 복제 문제‚ 君母의 상 중 형제에 대한 服喪 문제‚ 國恤 중의 국가 祀典 및 혼인에 대한 내용.
答李景源-河-問 (4) 1667. 李河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曲禮>의 ‘立必正方’과 ≪禮記≫<將適>의 ‘思對命’의 의미‚ ‘부족한 것은 말할 때가 아니라 그 말이다’는 구절의 의미‚ 家禮에서 아버지 神主에 자색을 쓰는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李景源-河-問-喪禮 (6) 1668. 喪禮에 대한 李河의 질문에 답한 글. 할머니에 이어 부모가 연이어 돌아가셨는데‚ 練祭 후 承重한 장손 마저 죽고 장손의 아들은 아직 어릴 때의 복제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論語 (8) 1667. ‘事物所以當然之故’라고 하고 ‘事物所以當然之理’라 하지 않은 까닭‚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의 뜻 등 ≪論語≫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沈明仲問-論語 (13) 1667. ≪論語≫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片段을 이루어 成章했다고 할만한 공자의 제자가 누구인가를 비롯하여 褻慢한 紅紫色을 朝服으로 삼은 이유‚ 공자의 나이 고증‚ 臧文仲에게 ‘文’이란 시호를 내린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孟子 (18) 1669.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孟子가 스스로 지었다면서 ‘孟子曰’이라 쓴 이유‚ 顔子의 ‘말하지 않아도 교화됨’과 맹자의 ‘큰 敎化’의 차이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孟子 (22) 1670.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楊朱에 대한 程子 註의 의미‚ ‘放淫辭’의 뜻‚ ‘自得居安’에 대한 ≪孟子≫와 ≪大學≫의 의미 차이‚ ‘博文約禮’의 約이 지칭하는 것 등에 대한 의견과 ≪孟子≫ 내의 誤脫字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小學 (25) ‘古者小學’의 古를 ≪小學集說≫에서 夏商이라 했는데 ≪小學集註≫에서는 빼버린 이유‚ ‘親友之道’에서 ‘道’字와 ‘化與心成’의 ‘化’字의 뜻‚ 大學發揮와 ≪小學≫ 편집의 先後 등 ≪小學≫의 해석‚ 내용상의 혼란‚ 刊本 사이의 正誤 문제 등에 대한 沈世熙의 물음에 답한 내용
答沈明仲問-小學 (32) ‘漿醋水’의 醋가 지칭하는 것‚ ‘情이 動한 것을 欲이라 한다’ 등의 의미‚ 五行·人事·天道와 陰陽動靜의 관계 등 ≪小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大學 (36) 1675. 心과 明德을 나누어 말한 이유‚ 五行·五常·五臟의 분속‚ 正心과 動靜의 관계‚ 衆人의 의미‚ 平天下章에서 誠正 만을 말한 이유 등 ≪大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近思錄 (39) 1675. ‘無極而太極’에서의 ‘極’‚ 善惡貴賤과 陰陽動靜의 先後와 體用‚ 태극과 음양의 동정‚ ‘人物에 품수된 이후에 性이라는 이름이 있다’에서 理 대신 性이라고 한 까닭‚ 主靜說 등 ≪近思錄≫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 (1) 1682. 沈世熙에게 답한 글. ≪中庸≫의 首章과 2章의 對說‚ 章句序의 分節‚ 사람의 형성에서 理와 氣‚ ‘天命率性則道心’에서 道心과 道의 관계 등 ≪中庸≫에 관한 질문과 ≪心學至訣≫의 편차 등에 대한 의견에 다시 답한 내용.
答沈明仲-昏禮 (8) 1689. 婿婦服의 변화‚ 納采와 納幣의 차이‚ 納吉이라는 용어의 부적절함‚ 여자의 꾸밈과 親迎할 때의 饌品 등 昏禮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祭儀 (9) 1691. 祭儀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敍立한다는 말의 의미‚ 龕의 구체적인 제도‚ 축문의 호칭‚ 焚香‚ 술잔 따르는 절차‚ 進饌‚ 土神祭의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白采叔問-喪禮 (13) 1668. 外孫奉祀 문제‚ 諱할 때의 남녀 구분‚ 承重孫의 妻를 위한 祖父母의 服制‚ ‘庶子의 妻를 위하여 主喪을 하지 않는다’는 규정의 의미 등 喪禮에 대한 白以受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士仰問 (14) 1680. ≪孟子≫가 食色을 중히 여겼다는 것에 대한 朱熹의 해석에 나타난 출처와 存亡의 의리‚ ≪孟子≫와 ≪中庸≫에서의 ‘性’의 의미 차이‚ 私親典禮에서의 小宗과 大宗 문제에 대한 의견 등 ≪孟子≫와 典禮에 대한 鄭齊斗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士仰問-喪禮 (18)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從姪의 喪을 섭행할 때의 題主‚ 虞祭와 祔祭의 주관자‚ 祔祭의 祝辭‚ 遷廳의 의미 등 喪禮에 대한 鄭齊斗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士仰再問 (21) 題主의 호칭‚ 祔祭 섭행시의 호칭‚ 부인의 섭행 여부‚ 卒哭 당시의 호칭을 바꾸어야 할 때의 祔祭 축문 등 喪禮에 대한 鄭齊斗의 재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喪禮 (23) 1669. 아버지가 계실 때 모친의 祥祭 뒤 上食·几筵·祔廟 문제 등 喪禮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喪禮 (27) 深衣 대신 中單衣를 사용하는 잘못‚ 居廬의 의미‚ 士의 望奠 여부‚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의 상에 대한 의절‚ 上食의 근거 등 喪禮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近思錄 (30) 1672. ≪近思錄≫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太極 流行의 묘함과 無窮함‚ 公·恕·愛의 순서가 있는데 葉氏가 恕愛를 公보다 먼저 풀이한 이유‚ 程顥가 ‘학문을 할 때 먼저 標準을 세운다’고 한 이유‚ ≪近思錄≫의 次序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問-孟子 (32) 1684. ≪孟子≫에 대한 李堉의 질문에 답한 글. 仁愛와 體用‚ 군자에게 있어서 仁民愛物의 難易‚ 梁 惠王과 齊 宣王의 동일한 질문에 孟子의 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問-易 (34) 1687. ≪易≫에 대한 李堉의 질문에 답한 글. 八卦 명칭을 만든 사람‚ 象의 의미‚ 90餘萬里 80里 13‚600餘息 등의 근거‚ 사람과 사물의 用舍‚ 閑邪의 뜻‚ 39板의 ‘進修惕厲’의 의미‚ 鬼神과 天地의 分別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同甫問-學 (40) 1681. 不動心과 養氣의 뜻 및 관계‚ 心의 개념 등에 대한 李喜朝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 (1) 1672. 張載 등 宋代 학자들의 主一工夫‚ 讀書와 靜坐 등을 통해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近思錄 (2) 1676. 五行과 陰陽의 관계와 動靜‚ 鬼神‚ ‘理와 氣가 합하여 氣質을 이룬다’는 말에 대한 李珥의 비판‚ 涵養·致知·力行의 순서‚ 博學의 의미‚ 無欲과 寡欲의 의미 등 ≪近思錄≫에 대한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大學 (17) 1676. 明德의 의미‚ ‘虛靈不昧’와 心‚ 格物과 物格에 대한 李珥 등의 說‚ ‘新民’ ‘進德’의 뜻 등 ≪大學≫의 해석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喪禮 (28) 1680. 小祥 때 練服 및 練冠‚ 腰絰의 제도‚ 卒哭 뒤 喪服의 變除‚ 絞帶의 제도 등 喪禮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 (32) ≪小學≫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면 23살에 혼인한다’는 말의 뜻‚ 張觀과 李若谷에 대한 기록의 고증 문제 등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 (33)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생애 고증‚ ≪大學≫ 本末章 大畏民志와 格致章에서 각각 知本이라는 말을 한 이유‚ 致知誠意와 知行의 관계‚ 誠意正心修身과 工夫의 功效‚ ≪小學≫<內則>의 ‘男鞶革’에서 ‘鞶’과 ‘博學不敎 內而不出’에서 ‘內而不出’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問-孟子 (1) 1681. 孟子가 子思의 門人인가에 대한 고증‚ ‘5畝의 집에 뽕나무를 심어 50이 된 자는 비단옷을 입게 한다’와 ‘仁者無敵’의 의미‚ 맹자가 齊나 梁에 간 까닭‚ 雪宮에서 齊 宣王을 만났을 때 나온 樂의 의미 등 ≪孟子≫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中庸 (6) 1683. 性情과 德行의 관계 및 ‘期月’‚ ‘治人’에서 ‘治’‚ ‘鬼神의 情狀’이라 할 때의 ‘情狀‚ ‘三恪’‚ ‘達孝’ 등의 의미 등 ≪中庸≫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中庸 (11) 九經의 效‚ ‘兩盡’ ‘不息則久’의 ‘久’字‚ ‘永終譽’와 ‘蚤有譽’의 ‘譽’의 의미 등 ≪中庸≫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浩然章 (13) 1685. 不動心의 의미‚ 大勇의 의미 등 ≪孟子≫ <浩然章>의 내용과 해석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喪禮 (22) 1691. 부인이 本生의 舅姑를 위해 입어야 할 복색‚ 孫婦가 남편을 위하여 本生의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를 위해 입어야 할 복색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仲固問-喪禮 (23) 1684. 할머니의 承重服 복상 중 조부모 및 부모의 무덤을 옮길 때의 복색‚ 遷葬과 할머니의 小祥이 겹칠 때의 기일‚ 연로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遷葬을 섭행할 수 있는지 등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仲固問-喪禮 (24) 1691.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상례에 소용되는 각종 복색의 제도‚ 喪禮의 각종 奠의 근거와 의절‚ 예에 부합하지 않는 祭儀를 돌아가신 지 3년 내에라도 고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近思錄 (30) 1676. ≪近思錄≫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乾이란 天이요 乾하다는 것은 하늘의 性情이다’ 라는 말에서 性情의 구분‚ 忠信의 의미‚ ‘生하는 것을 性이라 이른다’ 라는 말에서 性의 의미‚ 程顥 好學論 중 ‘中이 동하여 七情이 나온다’는 말과 程頤 定性書 중 ‘사람의 情에는 각기 가리운 바가 있다’는 말의 뜻‚ 군자와 소인의 구분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大學 (1) 1676. ≪大學≫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王公이하 서인의 자제가 소학에 들어가 배운다고 할 때의 王公의 의미‚ ≪管子≫ 弟子職의 의미‚ 明德·親民·至善과 知行의 관계‚ 絜矩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中庸 (3) 1680. ≪中庸≫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不偏이 中이다’ 할 때의 不偏과 動靜의 관계‚ ‘一陰一陽이 道이다’라는 말에서 道의 의미 및 道와 性의 관계‚ 三山 潘氏가 말한 發의 의미‚ 戒愼恐惧와 動靜의 관계‚ ‘活潑潑’ ‘責己’ ‘費隱’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孟子 (11) 1680. 利에 대한 慶源 輔氏의 풀이‚ 造端托始의 뜻‚ ‘觳觫한 모습으로 죄도 없이 死地에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는 구절의 뜻‚ 志와 氣의 動과의 관계‚ ‘義襲’의 의미‚ 性情의 體用 및 明明德의 관계 등 ≪孟子≫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喪禮 (15) 1690. 할아버지 상에 입을 承重服의 절목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사람이 本生의 여러 친족에 입어야 할 복색 등 喪禮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喪禮 (16) 1691. 尹世休 장례 전에 長子 尹夏明도 죽어 하명의 아들 得莘이 承重하였는데‚ 다시 세휴의 아내가 세휴와 하명의 小祥 전에 죽었을 때 세휴의 아내를 위한 득신의 복제 기간과 상례의 의절 등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猶龍問-喪禮 (19) 1672. 喪禮에 대한 李之老의 질문에 답한 글.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모친을 祔葬했을 때 墓祭의 服飾‚ 卒哭 뒤 先世에 행하지 못한 제도의 사용 여부‚ 각종 상제례의 구체적인 의절과 복색의 제도 등에 대한 내용.
答吳子順問-家禮 (27) 1675. ≪家禮≫에 대한 吳遂昌의 질문에 답한 글. 寢廟의 기능‚ 樻의 용도‚ 冠婚禮를 행하지 못하는 경우‚ 관례의 의절과 位次‚ 挿衣와 飯含에 소용되는 물건‚ 緇冠을 쓰지 않는 이유‚ 袒·辟領·腰紩·大帶의 제도‚ 시집간 어머니 등에 대한 복제‚ 翣에 그린 亞字 및 雲氣의 의미‚ 제사에서 여자의 獻爵 등에 대한 내용.
答崔士溫問-家禮 (34) 1686. ≪家禮≫에 대한 崔瑞吉의 질문에 답한 글. ≪要訣≫에서 3대를 제사하자는 근거‚ 상례와 제사의 각종 의절‚ 喪禮에 참작할 禮書‚ 상례 각 절차의 쓰이는 복색의 제도와 근거‚ 부친 생존시 어머니를 위한 朞年服 등 각종 복제의 근거‚ 石人·望柱의 근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士章-綖-問-喪禮 (1) 살아 있을 때 肉饌을 쓴 亡母의 喪 중 素饌의 사용 여부‚ 朝夕奠의 魂魄 개폐 여부‚ 喪人의 盥洗‚ 어린아이의 服制‚ 槨 사용 여부 등 당시 흔히 행해지던 예들의 정당성에 대한 李綖과의 문답.
答朴一和問-小學 (5) 1675. 20세에 裘帛을 갖춘다는 구절‚ 30세에 아내를 둔다는 구절 등 ≪小學≫에 실린 내용의 구체적 적용 여부나 ≪小學≫의 字句 중 의심나는 부분에 대한 朴尙淳과의 문답.
答朴一和問-喪禮 (15) 啓殯時 絰의 추가 사용 여부‚ 中單·衰·新婦三月奠菜說의 타당성‚ 元妣와 繼室에 대한 祠版과 葬法‚ 喪中의 祀 등 喪禮에 관해 朴尙淳에게 답한 글.
答姜叔重問-詩 (16) ≪詩經≫<周南>의 <關雎>와 <漢廣> <秣其馬>의 해석‚ <召南> <何彼農矣>를 <周南>이 아닌 <召南>에 넣은 이유‚ 叶韻의 의미‚ 大序와 小序의 의의 등 ≪詩經≫의 감상과 해석에 대한 姜碩昌과의 문답.
答姜叔重問-改葬 (35) 姜碩昌과의 문답. 墓를 연 뒤 奠을 행할 때 靈座의 설치 여부‚ 考妣를 동시에 遷葬할 때의 奠과 上食‚ 虞祭 실시 시기‚ 改葬時 복색 등 改葬할 때의 禮에 대한 질문에 답한 내용.
答鄭慶由問-大學 (1) 1675. ≪大學≫ 讀法을 9단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 대학 傳文 通讀時 從頭와 前頭의 개념‚ 大學·小學·王宮·國都가 지칭하는 것 등 ≪大學≫에 대한 鄭繼輝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慶由再問 (6) 1676. ≪大學≫ 序文에 소학에 대한 언급이 소략한 이유‚ 心을 오행에 배속하는 문제‚ 虛靈의 의미 및 理氣와의 관계‚ ≪大學≫을 前章과 後章 및 工夫와 功效로 나누는 문제‚ 傳7章 ‘正其心’의 의미‚ 傳10장의 내용 분절 방법 등에 대한 鄭繼輝의 질문에 답한 글.
答宋質夫問-理學通錄 (18) 1676. 吳伯豊書의 ‘學究’‚ 菩提心·棒喝禪宗·三魂七魄 등 ≪理學通錄≫에 나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개념에 대한 宋徵殷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伯瑞問-朱書節要 (22) 1678. ≪朱書節要≫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家廟와 宗廟의 제도‚ 物의 개념‚ ‘中’의 의의‚ 靜과 動의 의미‚ 공부에서 敬과 致知의 관계‚ 心과 性情의 관계‚ 가묘에서 庶母의 위치‚ 心性의 發과 意·情의 관계 등에 대한 내용.
答蔡伯瑞問-近思錄 (31) ≪近思錄≫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太極陰陽과 體用의 관계‚ 사람의 기품과 理의 善惡에 대한 程顥의 주장‚ 天地와 聖人의 體用 관계‚ 顔子에 대한 程頤의 평‚ 꿈속에서 일어난 일과 靜中動의 연관성‚ 程子가 曾子와 子思의 기상을 논하지 않은 이유‚ 孔明의 기상‚ 程頤·程顥의 行狀 중의 구절 등에 대한 내용.
答金叔涵問-中庸 (1) 1686. ≪中庸≫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中庸 序의 庶幾라는 말의 뜻‚ ‘二者雜於方寸之間’에서 雜의 의미‚ ‘莫見乎隱’ 註에 나오는 獨의 의미‚ 朱熹가 中和를 位育에 分屬한 것에 대한 의견‚ ‘體物而不可遺’의 뜻 등에 대한 내용.
答金叔涵問-太極圖 (5) 1688. 陰靜陽動圖의 모양‚ 五行圖의 순서‚ 陰陽·太極·無極의 개념‚ 태극과 음양의 動靜‚ 오행의 생성과 변화‚ 五行과 太極의 관계‚ 男女·人物의 생성과 氣化·形化‚ 中正仁義의 五行 分屬‚ 主靜의 의미 등 太極圖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叔涵問-大學 (20) 1690. 新民과 止至善에 대한 해석‚ 格致와 知行‚ ‘物有本末’에서 本末의 뜻‚ 讀書記의 君臣과 父子의 순서‚ 修身章에서 孝·弟·慈를 말하지 않은 이유‚ 修身의 근본에 대한 權近의 해석 등 ≪大學≫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雲卿問-喪禮 (25) 1686. 모친을 부친 묘에 祔葬한 뒤의 묘제‚ 三虞와 卒哭을 뒤에 행하게 될 때의 返魂 절차‚ 設饌‚ 제사에서 물을 올릴 때의 습속과 進茶의 관계 등 喪禮에 대한 李志逵의 질문에 답한 글.
答朴大叔問-喪禮 (28) 明器·豊碑·松脂의 사용‚ 居憂할 장소‚ 居憂할 때의 講學‚ 降神 중 哭을 그치는 이유‚ 喪祭 중의 讀書 여부‚ 玄纁의 제도‚ 제사할 때의 자리 등 喪禮에 대한 朴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權季文問-近思錄 (33) 1678. ≪近思錄≫ 제4권 제1단의 ‘靜虛動直’에서 動字의 뜻‚ 兩儀와 四象의 관계 등 ≪近思錄≫에 대한 權尙游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泰而-行泰-問-禮 (45) 1686. 禮에 대한 李行泰의 물음에 답한 글. 冠禮의 구체적인 의절과 喪禮의 각종 복색과 의절의 근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泰而問 (50) 1689. 李行泰의 물음에 답한 글. 舅姑의 부모에 대한 신부의 奠幣‚ 三殤의 喪에 대한 神主와 靈座‚ 婦人에 대한 題主式 등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李仁甫問-祭禮 (1) 1679. 李時春과의 문답. 伯叔父의 妻에 대한 服制‚ 복제 기간이 장례 이전에 지났을 때 장례 때 입을 복색‚ 祖考妣의 忌日에 상을 당할 경우의 擧哀 여부‚ 아이를 낳는 날의 제사 여부 등 각종 제례의 의절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仁甫問-國恤禮 (4) 1680. 國恤禮에 대해 李時春에게 답한 글. 私人의 장례 전에 國哀를 당했을 때의 복제 문제로 民庶의 方喪 3년 시행 여부‚ 병으로 관부에 들어갈 수 없을 때 擧哀하는 의절‚ 朔望에 모여 곡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 (8) 李時春에게 답한 글. 고조의 신주를 長旁에 봉안한 뒤 사당이 없는 支子의 冠婚禮 主人‚ 宗子보다 혼인하는 자가 어른일 때 昏書의 措語‚ 舅姑가 이미 돌아가셨을 때 신부가 뵙는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改葬禮 (9) 1682. ≪疑禮問解≫에 나오는 부친상 중 어머니를 改葬할 때의 服色과 의절‚ 伯母의 小祥과 격해 아버지의 상을 만났을 경우의 의절 등 改葬할 때의 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答李仁甫問-國恤禮 (11) 1684. 관직의 유무에 따른 國恤禮 服色과 冠‚ 祥祭 기간이 지난 뒤 衰服을 입고 있는 경우의 几筵과 上食‚ 처를 위한 杖朞服 중의 제사 등 國恤禮에 대한 李時春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君輔問 (13) 1680. 며느리 喪의 儀節‚ ≪喪禮備要≫의 喪主에 대한 규정‚ ≪大學≫의 ‘密察此心之存否’라는 구절에서 ‘密察’의 의미 등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君輔問-大學 (15) 1681. 正心의 의미‚ ‘所發遂明’의 ‘發’字와 ‘明’字의 의미‚ 李珥의 明明德에 대한 설과 發·明의 관계‚ 心의 動靜과 體用‚ 敬直과 正心의 관계 등 ≪大學≫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君輔問 (21) 1688.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性命의 뜻‚ 氣가 用事한다고 할 때 ‘用事’의 의미‚ 李珥가 人心과 七情을 一例로 보는 것에 대한 이해‚ 欲·虛靈·動靜의 의미‚ 正心章에 대한 體用의 관점에서의 이해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問-大學 (35) 1690. 李珥의 格物物格說에 대한 李世弼의 비판적 질문에 대해 李珥의 입장을 옹호한 글.
答李壽翁問 (1) 1680. 喪禮와 ≪大學≫ 등에 대한 李世龜와의 문답. 玄纁의 위치‚ 外棺의 두께‚ 表石을 세우는 위치 등 喪禮 및 格物에 대한 諺解‚ 正心 1장의 뜻 등 ≪大學≫에 대한 질문에 답함. 그 외에 李珥가 刪定한 ≪小學集註≫ 중 의심스러운 것을 변석하여 讀書記를 만들었다는 내용.
答李壽翁問 (4) 1682. 合葬時의 禮에 대한 李世龜와의 문답. 先塋에 옮겨 합장하기 전에 길일에 임시로 開土할 때의 禮‚ 합장을 위해 열어 놓은 묘의 慰安祭‚ 죽은 시점이 다른 합장 묘에 대한 服色‚ 告廟 및 居喪 중에 詩經을 공부해도 좋은지 여부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士亨問-喪禮 (6) 1691. 喪禮에 대한 李泰壽와의 문답. 상복을 입고 있는 기간 중의 제사‚ 사위로 立後에 의해 생질관계가 된 경우의 복제 등 喪禮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宋希文-晦錫-問-孟子浩然章 (8) 1680. ≪孟子≫ 浩然章에 대한 宋晦錫과의 문답. ≪孟子≫ 浩然章이 不動心을 위주로 한다면서 養氣를 말하는데 치중한 이유‚ 浩然之氣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그 근본을 어디에서 체험할 수 있는가 등 浩然章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閔秀卿-采萬-問-家禮 (15) 1682. ≪家禮≫에 대한 閔采萬과의 문답. 朝夕의 奠과 上食의 관계‚ 奠을 올릴 때 남녀의 위치‚ 虞祥 등에서의 杖의 사용 여부‚ 李珥가 말한 俗祭의 喪服의 의미‚ 선조의 생신에 사당에서 제사하는 것의 타당성‚ 제사할 때의 設饌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權君敬問-學 (19) 1683. 文王 八卦 등에 대한 權持와의 문답. 文王 八卦의 進退에 대한 이해와 邵雍의 形體郛郭之說에 의한 心性情意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仲深-涬-問-喪禮 (23) 1671. 喪禮에 대한 李涬과의 문답. 士虞禮에서의 輯杖‚ 虞와 卒哭 때 부인에 지팡이를 써야 하는지의 여부‚ 吉凶이 섞여 있을 때의 복색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鄭仲淳-澔-問-喪禮 (24) 1679. 喪禮에 대한 鄭澔의 질문에 답한 글. 練祥禫祭를 행하기 전에 먼저 變除하는 것‚ 祥 전에 遷祔하여야 할 경우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鄭仲淳問-喪禮 (24) 1680. 喪禮에 대한 鄭澔의 질문에 답한 글. 禫祭 때 먼저 服制를 除하고 제사를 설행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善長-元浚-問-學 (25) 1691. 沈元浚과의 문답. 의리를 확충하는데도 불구하고 利慾의 유혹이 있는 까닭‚ 학문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讀書 방법 등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 답한 내용.
答沈善長問-學 (28) 1691. 沈元浚과의 문답. ≪大學≫ 三綱領에서 논하는 학문의 工程‚ 학문의 차례‚ 聖學에 대한 점진적인 用功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閔彦暉問-手錄 (30) 1690. 閔以升에게 답한 글. 성현의 出處‚ 經傳 要目의 기원‚ 光武帝와 王亮·魏徵에 대한 朱子의 논의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崔漢臣問-禮 (32) 1688. 崔是翁에게 답한 글. 國恤이 있을 때 관리와 士人의 喪祭禮‚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이의 遷轉‚ 功臣의 별묘 설립 문제‚ 承重者의 복제‚ 부친 상 중 할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崔漢臣問 (33) 1689. 崔是翁과의 문답. 承重한 사람이 어머니와 처에 대해 입을 服制‚ 國恤 중의 除喪 의절‚ 稅服 등 喪禮에 관한 문제와 七情과 四端의 分屬‚ ≪心經≫ 程說에 대해 李珥가 宋翼弼에 답한 편지가 문집에 실리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崔漢臣問 (40) 1690. 崔是翁과의 문답. 師不立服의 근거에 대한 고증‚ 除服할 月數 계산의 기준 시점‚ 부친상 중에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 陰陽造化의 說에 대한 견해‚ 하늘과 땅이 서로 어떻게 의지하고 있는가‚ ≪性理大全≫과 ≪心經≫에서의 學의 개념 차이‚ ≪栗谷集≫<性情圖>와 ≪心經≫에서 誠의 분배가 다른 이유‚ 宋時烈 喪 때 素帶 3개월을 한 일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羅仁卿問 (1) 1685. 羅斗甲과의 문답. 家禮의 深衣 제도‚ 幞頭의 착용 여부‚ 盥盆帨巾의 설치 장소‚ 자식이 없는 후실에 대한 제사‚ 멀리 시집 가 친정 어버이 상에 참석하지 못했던 딸의 禮‚ 부친 생존시 모친상에 대한 복제 등에 관한 내용.
答羅仁卿問 (3) 1690. 羅斗甲과의 문답. ≪大學≫의 止至善과 平天下章 및 ≪中庸≫의 中和의 개념‚ 誠의 개념‚ ≪孟子≫ 仁人心章에 보이는 仁과 心의 분별 등에 관해 문답한 내용.
答柳道卿問-心經 (9) ≪心經≫에 대한 柳貴三과의 문답. ≪心經≫ 人心道心章의 同行異情 등 ≪심경≫ 각 구절의 해석에 대해 짧게 답한 내용.
答柳道卿問-家禮 (10) 1690. ≪家禮≫에 대한 柳貴三과의 문답. 家廟圖‚·深衣圖·冠禮圖·昏禮圖·韜藉式·嫂則別處後其子私祭·宗國에서 爲候祭 등까지 ≪家禮≫의 용어와 의미‚ 해석에 대해 짧게 답한 내용.
答黃擧卿問-家禮 (20) 1685. ≪家禮≫에 대한 黃翊良의 질문에 답한 글. 緇冠註·祭儀·魂帛의 의의와 용어에 대해 설명한 내용.
答黃擧卿問 (21) 1687. 黃翊良의 질문에 답한 글. ≪心經≫의 正心章呂氏小註‚ 大註打酒有灰‚ 鷄鳴而起章大註‚ 養心章大註와 <要訣圖>의 <要訣爲學圖>에 대한 내용.
答高益之問-禮 (22) 1687. 高益謙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시집간 祖母의 服制에 대한 의견을 밝힘.
答高益之問-小學 (23) 1690. ≪小學≫에 대한 高益謙과의 문답. 朱子가 말한 ‘這須是自見得’에서 ‘這’의 의미‚ 13세와 15세(成童) 때 배우는 것의 차이 등에 대한 내용.
答金汝精-克成-問-學 (35) 1688. 金克成에게 太極의 全體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 道德性命의 의미를 밝힌 내용.
答金汝精問-禮 (36) 1689. 金克成과의 문답. 神主를 추가로 봉안할 때의 儀節‚ 스승의 어버이와 처에 대해 상복을 입지 않는 까닭 등에 대해 밝힌 내용.
答兪濟卿問-喪禮 (37) 1690. 喪禮에 대한 兪楫과의 문답. 유즙이 祭服이라 본 것은 실은 喪服임. 그 외 ‘3년내에는 아들이 几筵에 있으므로 參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의 뜻‚ 墨衰의 사용 여부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兪濟卿問-喪祭禮 (37) 喪祭禮에 대한 兪楫과의 문답.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모친에게 입을 복제‚ 생부에 대한 복제‚ 장자가 외방에 있고 衆子가 집에 있을 때의 成服 절차‚ 支子 立後와 外孫 奉祀의 타당성 여부‚ 親盡 뒤 신주를 別室에 모시는 일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士粹-彦純-問-禮記 (41) 1688. ≪禮記≫에 대한 李彦純과의 문답. ‘禮는 마땅함을 따르고 使臣은 時俗을 좇아야 한다’는 구절의 의미 등 ≪禮記≫의 해석 등에 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敬先-華相-問-喪禮 (1) 1691. 李華相에게 本生親의 상례 때의 服色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南幼安-磐-問-改葬 (2) 1686. 家廟에 龕室이 없을 때 遷葬을 고하는 법 등 改葬 儀節에 대해 南磐에게 답한 글.
答沈淨如-澂-問-祭禮 (2) 1690. 祭禮에 대한 沈澂의 질문에 제사의 世數가 다한 사대부의 신위를 그대로 둘 수 없고 祧한 뒤 別宗의 후손들이 돌아가며 제사하는 것도 二宗을 만들 혐의가 있다고 답한 글.
答元生-夢翼-問-喪禮 (3) 1687. 童子도 絰과 杖을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 同宮을 朝祖할 경우의 문제 등 喪禮에 대한 元夢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生-時泰-問-祭禮 (4) 1687. 從兄 李時春의 집에 1세의 젖먹이만 있어 攝主하여야 하는데 祝辭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李時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朴生-浩遠-問-禮 (5) 小祥이 지난 뒤 立後한 사람이 追服하는 節目과 추복 기간 및 題主 문제‚ 계후한 아버지의 신주를 改題할 시점 등에 대한 朴浩遠의 질문에 답한 글.
答閔生-濚-問-禮 (8) 1669. 낳아 준 어머니에 대한 服‚ 입후한 어머니에 대한 제사‚ 시아버지가 며느리 상에 主喪을 할 수 없을 경우의 禮‚ 招魂한 장례의 의절 등에 대한 閔濚의 질문에 답한 글.
答閔生-濚-問-禮 (9) 1670. 心喪의 變除 절차에 대해 閔濚에게 답한 글.
答鄭直長-涖-問-喪禮 (10) 1682. 妻喪에 別室을 두어 신주를 둔다는 설‚ 아버지가 계실 때의 어머니의 복제 등에 관해 鄭涖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東陽院儒問-院規 (10) 1691. 東陽書院 院生들이 院規에서 의심되는 것이나 이해되지 않는 점을 질문한 것에 답한 글. 院規 중 학문에 있어서의 鄕校와 書院의 역할 차이를 고려하여 ‘鄕校의 완전하고자 함’과 ‘書院의 자세함’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 掌議 등의 연한‚ 동서의 분별‚ 南草 흡연에 대한 규정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或人問-祭禮 (13) 1660. 점치는 도구인 环珓의 제도‚ 제사할 날을 점치는 것에 대한 先儒들의 설에 대해 답한 글.
答或人問-禮 (13) 1691. 長孫의 폐질로 承重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을 때 장손의 아들의 위치‚ 國恤時 私人의 복제를 마칠 시기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仲巨-世陞-兄問-祭禮 (13) 1660. 할아버지의 신위가 설치되지 않았을 때 모친상에 祔祭하는 일‚ 상주가 宗子가 아닐 경우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과 祝辭의 호칭 등에 대해 朴世陞에게 답한 글
答泰徵姪問-喪禮 (14) 1682. 아들이 없는 사람의 상례에 대한 朴泰徵의 질문에 답한 글. 부인을 主喪 삼기보다는 조카가 主喪이 되어 顯叔父라 칭하고 旁題없이 기년복을 입은 뒤 立後가 결정된 뒤에 告祝하여 改題하면 될 것이라고 답한 글.
答泰初姪問-大學 (15) 1685. ≪大學≫에 대한 朴泰初의 질문에 답한 글. 集註 아래의 小註를 명나라 儒臣이 찬한 것인지의 여부‚ 經1章의 明明德의 앞 明字에 대한 章句의 해석 등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答泰初姪問-大學 (28) 1691. ≪大學≫에 대한 朴泰初의 질문에 답한 글. 明明德에 대해 章句에서는 ‘발한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아진다’라고 하고 經文에서는 致知誠意를 위주로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차이점을 설명함.
答泰夏姪問-喪禮 (33) 1687. 練祭 때의 복식에 대한 朴泰夏의 질문에 답한 글.
答泰昌姪問-喪禮 (34) 喪禮에 대해 朴泰昌에 답한 글. 卒哭 뒤 祔祭를 행하지 못한 경우의 禮‚ 喪中의 墓祭‚ 대낮 제사에서 촛불 사용 여부‚ 제사 중 方笠의 착용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泰昌姪問-祭禮 (36) 1687. 祭禮에 대해 朴泰昌에게 답한 글. 時俗을 家禮로 바꿀 때의 예‚ 齋戒 등은 古禮보다는 ≪家禮≫를 따를 것‚ 아이에게 痘患이 있는 경우의 제사 문제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淳姪問-易 (37) 1677. ≪周易≫에 대해 朴泰淳에게 답한 글. <洪範>에서 雨·霽·蒙·驛·克을 점의 조짐이라고 한 이유‚ <繫辭>의 ‘形而上者는 道이다’라는 말에서 喜怒哀樂의 未發을 형이상이라 할 수 있는지의 여부‚ 陰陽의 위치와 길흉의 관계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淳姪問-禮記 (38) 1678. ≪禮記≫에 대한 朴泰淳의 질문에 답한 글. <曲禮> 및 <檀弓> 曾子易簀章과 孔子蚤作章 등 각 章에 의미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淳姪問-喪禮 (39) 1684. 喪禮에 대한 朴泰淳의 질문에 답한 글. 子婦가 죽어 장례를 치른 뒤 그 남편이 음식을 供饋하지 않는 이유‚ 子婦의 복이 끝난 뒤 几筵을 그대로 두지 않는 이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輔姪問-喪禮 (40) 1679. 喪禮에 대한 朴泰輔의 질문에 답한 글. 朱熹가 居喪 중 黑衰로 家廟에 공궤했던 禮를 우리 나라에서 시행하지 않고 있는 이유‚ 本生 부모와 養父母에 대한 喪禮 등을 설명하는 내용.
聖學知行路脈之圖 (1) 성현의 학문 大要를 執中·爲人·思誠·居敬으로 보고 精一 아래 博文-約禮‚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博學·審問·愼思·明辯-薦行‚ 盡心·知性·知天-存心·養性‚ 窮理-反躬을 知-行으로 병렬시킨 뒤 각 단계마다 그것을 전수한 핵심적 인물과 저술을 연결시켜 그림으로 설명한 내용.
聖賢出處之圖 (3) 1668. 성현의 出處를 나아가 벼슬을 구한 사람‚ 處하여 自守한 인물‚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處한 사람들로 구분하여 圖說하고 각각의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놓은 글.
道統前後相承之圖 (4) 伏羲에서 朱熹까지 道統이 이어지는 것을 ≪周易≫·≪孟子≫·≪近思錄≫·≪中庸序≫·≪晦菴行狀≫ 등을 근거로 하여 圖說한 내용.
中庸總圖 (4) 朱熹의 ≪中庸章句≫ 목록을 바탕으로 ≪中庸≫ 전체를 中和·費隱·誠明·尙絅 4章을 4支로 삼은 뒤 각 장절의 핵심적인 개념‚ 말한 사람 등으로 나누어 간단히 圖說한 내용.
刊定林隱程氏心學圖 (6) 1686. 中國 元代 理學者인 程復心의 <心學圖>에 대한 李滉과 李珥 학설의 미비점을 보완 정리하여 圖表로 나타낸 것.
要訣爲學圖 (7) 1686. 학문을 하는 要訣을 李珥의 ≪擊蒙要訣≫ 등을 참고하여 窮理와 居敬‚ 力行으로 나누어 圖說한 내용.
經傳要目 (9) 1677. ≪小學≫과 四書·≪近思錄≫·≪續近思錄≫·三經·三禮·≪樂經≫·≪春秋≫ 등의 경전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재와 참고 서목 및 경전의 기본적인 의의와 ≪小學≫ - ≪近思錄≫ - ≪大學≫ - ≪論語≫ - ≪孟子≫ - ≪中庸≫ - ≪詩經≫ - ≪書經≫ - ≪禮經≫ - ≪易經≫ - ≪春秋≫ 등으로 이어지는 독서의 순서 등에 대해 설명한 내용.
改訂小學總論 (17) 1686. 朱熹의 ≪小學≫과 ≪大學≫에 대한 통론과 소학·대학의 순서와 관계에 대한 程子 등의 말‚ 소학 편찬‚ 소학의 讀法 등에 대한 말을 조목별로 모아 놓은 글.
隨筆錄 (1) 1667년 이후 기록하기 시작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모은 隨筆. 각 경전에 대한 견해나 경전 해석을 둘러싼 논의‚ 李滉과 李珥의 涵養 및 存養에 대한 개념 정의‚ 이황의 天命圖에서 비롯되는 四端七情과 理發·氣發의 견해차에 대한 입장 등 철학적 개념에 대한 견해‚ 역대의 학문 전통과 許衡과 吳澄·薛瑄 등 중국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 鄭夢周 등 우리 나라의 인물들에 대한 評 등이 있다. 그 중에 李珥의 變通論에 대한 높은 평가 등이 주목된다. 그 외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山城의 역할 등 한국과 중국의 역대 典故‚ 經書 口訣과 釋義‚ 중국과 우리의 聲音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 등에 대한 내용.
矯病說 (1) 학문을 닦는 방법은 병폐를 알고 이에 맞는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
中庸費隱說 (1) ≪中庸≫의 費隱에 대해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글.
主一說 (3) 1656. 敬에 대한 여러 설 중 程子가 논한 主一無適의 설이 안팎을 합한 것이기 때문에 밖을 위주로 한 整齊로 설명하는 朱熹의 설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내용.
滿腔子惻隱之心說 (5) 1658.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 모두 본심을 얻어 사람마다 측은지심이 있고 천지만물이 모두 渾然하여 一體가 된다는 내용.
葬法昭穆說 (5) 1667. 장사지낼 때 墓의 순서와 昭穆의 차례를 朱子와 程子의 설을 인용하여 고증한 글.
酌定祭饌圖說 (7) 1670. 제사 상의 자리 배치를 儀節과 五禮儀 士大夫의 時享 제도에 근거하여 그린 것으로 尹拯을 위하여 짓고 朴泰徵에게 보여주었던 내용.
後說 (9) 제사 상위에 차릴 음식의 수와 자리에 대해 도설하고 설명한 글. 時享과 墓祭 등의 祭品을 바로잡았음을 밝히고 제사의 의의와 절차 등에 대해 논하는 내용.
文廟配從說 (15) 1673. 중국에서 송과 명을 거쳐 文廟 및 啓聖墓 제도가 성립되고 位次가 결정되는 과정을 논하는 내용.
爲學之方圖說 (17) 1676. 李珥의 문집 ≪續集≫에 있는 <爲學之方圖>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四端理發七情氣發說 (21) 1683. ≪朱子語類≫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설에 대해 李滉·奇大升·李珥의 논변을 설명함.
敎士說贈成汝中 (23) 1683. 湖南 南平縣에 나가 있던 成至善의 요청에 따라 선비를 가르치는 데 필요한 규범에 대해서 설명한 글.
國恤卒哭前葬祭說 (24) 1683. 國恤 卒哭 전에 개인의 상제례와 각종 제사는 관직유무 등에 따라 어떻게 조처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고증한 글.
主櫝說 (26) 1684. 신주와 櫝의 규격 등 신주와 독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글.
讀書淺說 (28) 1690. 李尙恒을 위하여 讀書에 관한 여러 책의 말을 수집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글.
喪祭値疫痘說 (33) 1690. 喪祭 중에 痘疫을 만났을 때의 조처에 대해 朱熹와 李滉·鄭逑·金長生의 글을 인용하여 논증한 글.
格物訓義說 (37) 1691. ≪二程全書≫에서의 格物에 대한 訓義와 朱熹가 ≪大學≫에서 이 개념을 채용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 고증한 내용.
良知天理說 (41) 王陽明의 ‘내 마음의 良知가 곧 天理’라는 말에 대해 羅欽順의 ≪困知記≫와 程頤·朱熹의 말을 들어 비판한 글.
服制私議-幷圖 (1) 1660. 尹鑴가 繼統의 설에 입각하여 제기한 斬衰 3년설에 대해 朞年服이 옳다는 것을 고증한 글.
父死爲祖爲母異服議 (20) 1667. 부친이 돌아가셔서 아직 成殯하지 않았을 때와 성빈한 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服制‚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 이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 3년 이후에 돌아가셨을 때의 服制가 다른 이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 글.
爲師弔服加麻議 (20) 1669. 스승의 상에 입을 복식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集平日偶記 (1) 1667. 평소 들었던 이야기를 기록해놓은 글. ≪易≫<繫辭> 範圍의 ‘圍’字와 匡郭의 의미‚ 人心과 道心의 의미‚ 人後된 자가 부모를 위해 입는 복제‚ 心喪의 제도와 服色‚ 張載의 ‘天體物而不遺’라는 말의 뜻‚ 孝悌에 대한 李珥와 宋翼弼의 논의‚ 金長生과 朴知誡의 論禮‚ 國忌 때의 素食 여부 등에 대한 내용.
記少時所聞 (11) 젊은 시절 들었던 인물들의 일화들을 기록한 글. 金長生이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에 갔을 때 아버지의 숫가락질 수까지 헤아렸다는 효행‚ 해학을 즐기던 아버지마저 그가 들어오면 해학을 그쳤다는 金尙憲의 곧고 바른 성품‚ 김상헌을 찾아뵈었을 때 나눈 대화‚ 卜術에 능했던 姜緖의 고사‚ 東人이었던 姜絪이 徐敬德의 사당에 서인 朴淳이 배향되었다고 절하지 않았던 일‚ 李滉에 대한 존숭을 둘러싸고 睦長欽과 나눈 이야기‚ 金安國·徐敬德·閔箕의 고사‚ 李潤雨에게 들은 李珥에 관한 고사‚ 이이와 기녀 柳枝의 일‚ 이황과 鄭逑의 고사‚ 宋翼弼이 당대 명필이던 李山海 대신 이이에게 題主를 부탁한 일‚ 좁쌀로 제사를 올려야 했던 趙憲‚ 李恒福과 李德馨의 우정‚ 이항복의 광해군 때 행적‚ 김장생과 鄭經世에 대한 申欽의 평‚ 權韠의 고사‚ 金集의 부인 兪氏와 李珥의 庶女인 小室의 일‚ 金瑬·張維·李時白 등의 고사‚ 붕당의 대략적인 경과‚ 宣祖의 죽음과 관련된 고사 등에 대한 내용.
記孝宗初時事 (1) 1649. 5월 8일 중전이 궐에 도착한 뒤 仁祖가 승하한 날부터 6월에 金弘郁 등이 金自點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까지 효종 즉위를 전후하여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글.
記己丑泮事 (2) 1650. 1649년 가을 성균관 유생들이 李珥와 成渾의 從祀를 청하려고 회의할 때 효종이 즉위한 직후라 급급하게 논하지 말자고 주장하였고 金集이나 宋時烈·兪棨도 모두 時宜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자신이 병으로 물러난 사이에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되어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뜻은 이루지 못하고 李象震과 柳㮨 등에 의해 두 선생이 무고만 당했다는 내용.
記庚寅泮事 (3) 1650. 5월 李伯獜이 柳㮨을 儒籍에서 삭제하고 성균관 유생 李弘相이 柳㮨을 付黃하고 睦來善 등이 이에 반발하여 떠난 일에서부터 鄭維城과 睦謙善의 대립‚ 申命圭 등의 捲堂‚ 嶺南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유직에 대한 付黃 제거‚ 이에 대한 金壽恒 등의 반발‚ 朴世采 등의 상소와 空館‚ 8월 趙錫胤의 옹호 상소가 있기까지를 월별로 나누어 기록한 내용.
記楊湖閔丈事 (6) 1673. 閔嶪의 사후 있었던 閔愼의 代服에 관여한 계기와 사건의 전말‚ 자신의 주장의 근거 등을 기록해 놓은 글.
記王父梧窓公癸亥被罪始末 (9) 할아버지인 朴東亮이 인조반정 뒤에 죄를 얻게 된 시말에 대해 기록한 글.
記論著大旨 (22) 자신의 저술의 大旨를 밝혀 놓은 글. 첫 번째 箕子의 언행이 민멸되는 것이 아쉬워 저술했다는 ≪範學全編≫을 비롯하여 ≪先聖手筆≫·≪讀詩要義≫·≪春秋補編≫·≪惡經遺編≫·≪家語外編≫·≪聖賢遺模≫·≪讀書記≫‚ ≪心經≫과 ≪家禮≫에 대한 저술인 ≪二書要解≫‚ ≪白鹿洞規解≫·≪心學至訣≫·≪敎法要旨≫‚ ≪三先生遺書≫·≪六禮疑輯≫·≪稽治錄≫·≪新定自警編≫·≪中興遺蹟≫·≪明季殉節錄≫‚ ≪耘谷詩史≫·≪增刪風雅≫·≪古今文宗≫‚ ≪淵源續錄≫·≪理學通錄補≫·≪東儒師友錄≫·≪朱子大全拾遺≫·≪靜菴集≫·≪四書諺解≫·≪退溪語錄≫‚ ≪栗谷續集≫ 및 ≪外集≫·≪別集≫‚ ≪崇孝錄≫·≪二先生遺稿≫·≪鳳村集≫·≪寄齋雜記≫·≪汾西集≫·≪先稿≫‚ ≪變禮質問≫ 등 자신이 기술하였거나 편집한 책의 목록과 저술한 이유와 大旨 등에 대해 기록한 내용.
記潘南先生褒贈記事 (28) 1691. 선조인 朴尙衷에 대한 褒贈과 관련된 일을 기록한 글.
記先世葬法 (32) 각 지역의 선조들의 묘에 조상을 장사지내는 위치와 장사지내는 방법의 변화 등에 대해 짧게 기록한 내용.
潘南先生不署呈北元書辨 (1) 선조인 朴尙衷이 李仁任 등이 北元에 글을 보내려하자 鄭道傳 등과 함께 恭愍王이 이미 明나라를 섬기기로 하였던 것을 들어 署名하지 않은 것을 失君하였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논변하는 글.
崔氏大學補解辨 (2) 1664. 崔氏의 ≪大學補解≫에 대하여 논변한 글. 최씨가 格致傳을 改正하여 고증한 것에 대해 대학의 經傳 본문‚ 최씨의 해설‚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순서로 논변함.
好名辨 (9) 1673. 근래에 流俗으로 道學을 비난할 때 好名을 구실로 삼는 풍조가 있다며 孔子 이래의 好名에 대한 설을 고증한 글.
尹氏禮說辨 (12) 1674. 尹鑴의 禮說을 辭官說 등 각 조목별로 인용하고 朱子의 설과 다른 것‚ 주자의 본래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을 들어 논변한 글.
太極圖勉齋五行說辨 (22) 1676. <太極圖>와 黃幹의 五行說에 대한 논변. 먼저 태극도에 대한 해설 6조목을 인용한 뒤 태극과 陰陽의 관계‚ 五行의 流行 등에 대해 논변한 글.
石表辨 (27) 1680. 4품 이상의 관원은 龜趺와 螭首를 갖춘 9尺 높이의 神道碑‚ 5품이하는 圭首와 方趺에 4尺 높이의 墓碣‚ 관직 유무에 상관없이 가능한 墓表 등의 제도에 대해 고증한 내용.
王陽明學辨 (29) 1691. 王陽明의 학술에 대해 논변한 글. 古本 ≪大學≫을 程子 등이 개정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고본에 빠진 것이나 잘못이 없다는 왕양명의 설을 비판함. 新民을 親民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 格物良知의 설 등이 실린 ≪傳習錄≫의 續編 머리의 <大學問>에 대해 李滉과 羅欽順의 ≪困知記≫ 등을 근거로 논변함. ≪大學≫의 致知와 ≪孟子≫의 良知를 섞어 만든 致良知라는 개념을 비판함. 心卽理說이 禪學에 유사한 곳에 흐를 수 있음을 비판함. 그 외 朱子晩年定論說에 대한 비판 등 각 항목별로 왕양명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 병통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
退溪四書質疑疑義一 (1) 1677. 李德弘이 기록했던 李滉의 <四書質疑> 내용에서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宋時烈·尹拯의 의견을 기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論語≫<序說>에 나오는 家世를 家傳과 같다고 한 것에 대한 의견‚ ≪論語≫<憲問>篇에 나오는 夷狄의 범위와 下學上達의 개념‚ ≪論語≫<陽貨>篇의 六言·六蔽·五美·四惡에 대한 文體가 서로 다른 것을 통해 본 ≪論語≫의 판본에 대한 이해‚ <子張>篇의 形而上과 形而下에 대한 이해 등의 개념과 우리말로 音釋할 때의 구체적인 번역의 오류 등에 대해 일일이 의견을 밝힌 내용.
退溪四書質疑疑義二 (29) 李滉의 <四書質疑> 내용에서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宋時烈·尹拯의 의견과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孟子≫의 四端七情 및 人心道心의 관계에 대한 입장‚ 知를 擴充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입장‚ ≪中庸≫<序說>의 ‘虛靈知覺’에 대한 의견‚ ≪中庸≫ 首章의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에 대한 이해‚ ≪中庸≫ 2章에 나오는 庸의 개념‚ ≪中庸≫ 12章의 ‘潑潑’의 개념‚ ≪大學≫의 經1章 ‘知止而後有定’의 뜻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退溪四書質疑疑義三 (46) 1681. 李滉의 <四書質疑> 내용 중 의심스러운 것을 宋時烈·尹拯과 토론한 뒤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李滉의 서신에서 말한 ‘妙한 도리와 정밀한 의리는 頭緖에 端緖가 많이 있다’는 말의 뜻‚ ‘천명을 듣고 心悅誠服한다’는 말의 의미‚ ≪論語≫<序說>에 나오는 子貢이 공자 사후 홀로 3년을 居喪했다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 德에 근본이 있다는 말의 의미‚ ≪大學≫의 物格에 대한 이해‚ ≪退溪集≫<昏儀>에 나오는 婦婿 사이의 절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朱子大全記疑疑義上 (1) 1680. ≪朱子大全≫의 11권 1板의 ‘封事’라는 말이 漢나라에서 諫院이 章奏할 때 皂囊으로 封進한데서 오는 말이었다고 고증한 것을 비롯하여 ≪朱子大全≫의 각 권 판별로 개념‚ 역사적 사실‚ 인물 등에 관해 간단히 해설 및 고증한 글.
朱子大全記疑疑義下 (41) ≪朱子大全≫ 14권의 ‘奏箚一’에서 ‘一’字가 잘못인 듯 하다는 것 등을 비롯하여 ≪朱子大全≫의 각 권 각판 별로 개념과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간단히 설명 혹은 고증한 글.
儀禮喪服父爲長子釋義 (1) 1666. ≪儀禮≫ 喪服條에 나오는 아버지가 長子를 위하여 입는 복에 대하여 논증한 것으로 원래 <喪服正義>라는 제목을 가진 글. 뒤에는 <長子承重斬齊異服之圖>가 실려있다.
朱子乞討論喪服箚釋義 (14) 1672. 朱熹가 천자도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혹은 嫡孫이 承重한 할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3년상을 행해야 한다며 短喪에 반대하고 喪服에 대해서 토론하여 정할 것을 청한 箚子를 細註와 함께 인용하고 그 뜻을 풀이한 글. 주희의 차자는 천자와 제후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承重한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며 代服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
書院考證一 (1) 朱熹와 李滉 및 李珥와 成渾의 문집 중에 실린 書院에 관한 말을 모아 고증한 글. 서원의 기원에 대한 4개 조목‚ 道學과 鄕賢의 從祀에 관한 3개 조목‚ 서원은 온전히 道學을 위하여 세웠다는 것을 논한 2개 조목‚ 서원의 설립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을 논한 2개 조목 등으로 서원의 본뜻을 알아 뒷날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
書院攷證二 (6) 1675. 서원에 從祀하는 원칙을 유형별로 고증하여 놓은 글. 부자가 같은 서원에서 아버지가 주향으로 아들이 배향으로 있는 文定書院‚ 사제간에 주향과 배향으로 함께 있는 서원‚ 부자나 사제간에 竝享된 서원‚ 오로지 道德을 위주로 배향한 서원‚ 時世를 위주로 한 서원‚ 한 宮 안에 3廟를 나눈 것‚ 한 廟 안에 3室을 둔 것을 각각 구분하고 예를 들어 고증한 내용.
論祖亡父有廢疾不當代服祧遷者考證 (8) 1673.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廢疾이 있어 代服하고 祧遷하는 것이 不當하다는 논의에 대한 고증. 攝主‚ 아버지가 아직 빈소를 만들지 못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服祖周攝主‚ 아버지 계실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등에는 代服祧遷할 수 없음을 논함.
論祖亡父有廢疾當代服祧遷者攷證 (11) 1673.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에게 廢疾이 있을 때 代服하고 祧遷해야 되는 경우를 모아 宋時烈에게 보낸 것으로‚ 閔愼이 할아버지를 위해 代服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제시한 내용.
師友考證 (1) 1686. 스승과 친구 사이의 의리와 예에 대하여 고증한 글. 스승을 구하는 道‚ 스승을 섬기는 의리‚ 처음 뵐 때의 예‚ 섬기는 예‚ 스승과 제자의 호칭‚ 스승의 상에 처할 의리‚ 心喪의 의리와 복제‚ 朋友의 상에 처할 도리 등에 관해 각각의 전고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내용.
章陵稱號尊崇考證 (20) 1691. 章陵의 호칭이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나온 신하들의 章疏를 뽑아 요약하고 근거를 고증한 글. 1623년 반정 후 私廟의 호칭에 대한 前例를 찾아 아뢴 鄭經世의 啓‚ 別廟論을 주장한 崔鳴吉의 상소‚ 각각의 주장을 호칭·服喪·廟享·근거에 따라 나누어 요약해놓은 도표‚ 이러한 논의의 근거를 人後의 의미‚ 大宗小宗‚ 祖廟禰廟‚ 宣帝와 光武帝가 私親을 높인 의의로 나누어 싣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피력해 놓은 經史參攷 등의 내용.
近思錄釋疑考正凡例 (1) 1660. ≪近思錄釋疑≫를 考正할 때의 범례. 처음에 落字만 채워 넣으려다가 잘못된 곳이 많아서 인용된 본문과 釋疑를 서로 참고하여 李珥가 말한 ‘刪節하되 감히 한 글자도 첨가하지는 말라’는 원칙에 따라 고정했다는 내용.
栗谷先生四書諺解修正凡例 (3) 李珥의 ≪四書諺解≫를 수정할 때의 원칙과 기준을 적어 놓은 범례. ≪孟子≫<萬章下>篇부터 口訣이 완성되어 있지 않아 책의 순서를 ≪大學≫-≪論語≫-≪中庸≫-≪孟子≫로 하였고‚ 해석은 간편한 것을 위주로 하여 ‘子曰’의 글자 사이나 也字 아래 訓이 없는 것 등을 감히 고치지 않았다는 것 등의 내용.
增修潘南世譜 (4) 1669. 潘南 朴氏의 族譜를 增修할 때의 凡例. 舊譜의 羅州라는 명칭을 나주의 여러 박씨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潘南으로 바꾸었다는 것‚ 繼後한 이는 本生 아래에는 出繼라고만 적어 다른 사람의 후손이 된 것을 중히 하였다는 것‚ 庶出은 항렬의 끝에 附書하고 사위는 前室인지 後室인지를 반드시 써서 所出을 분별할 것 등의 내용.
文會書院院規 (6) 1673. 白川 文會書院의 院規. 성현을 스승으로 ‘居敬窮理 明體適用’을 요체로 삼을 것‚ 道學과 性理에 관한 저술을 읽어 외우되 正學이 아니면 서원에서는 읽지 말 것 등을 비롯하여 선비의 선발‚ 掌議의 선출‚ 朔望 등의 의절‚ 청소와 복색 등의 생활 준칙‚ 서원 일 외에는 일체 수령을 만나지 말 것‚ 과거 준비자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 등에 대한 내용.
南溪書堂學規 (10) 1689. 서당에 들어올 선비의 자격‚ 행동 준칙과 자세 등 서당에서의 구체적인 생활 규칙을 정한 南溪書堂의 學規.
抄朱字語類四段示諸子姪 (12) ≪朱子語類≫ 중 4가지 항목을 가려 뽑아 아들과 조카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모아놓은 글. 과거와 문장에 대한 태도‚ 독서에 임하는 태도 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
抄高王父冶川先生碑文示兒輩 (15) 1671. 고조부인 朴紹의 비문 내용을 抄하여 아들에게 보여주고 조상을 본받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글.
增修世譜告諸宗文 (20) 1669. 1642년 만들어졌던 族譜를 증수하게된 경위와 족보 편찬의 원칙을 여러 宗人들에게 알리는 글.
文會書院講議 (23) 1682. 白川 文會書院에서의 강의 내용을 기록한 글. 任元聖‚ 閔震元 등과 함께 가서 ≪敎法要旨≫ 등 여러 책을 강하면서 과거의 폐해‚ 陸九淵 학문의 잘못 등을 지적했다는 내용.
花谷丙舍講義 (24) 花谷丙舍에서의 강의 내용을 沈俔이 기록한 글. 劉鎭邦·睦天純 등과 함께 가서 ≪中庸或問≫과 中仁誠敬의 義理에 대하여 강론한 내용.
居家要義 (26) 1685. 일상생활이나 가정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밝힌 글.
王叔文 (1) 王叔文에 대한 史論. 그는 명성만을 취했을 뿐 진실로 忠眷하려는 뜻이 없었으며‚ 결국 貞元의 화를 불러왔을 뿐이니‚ 옳은 인물이 아니라고 비판함.
漢光武 (1) 1665. 한나라의 光武帝에 대한 史論. 伯升을 죽이도록 권한 朱鮪와 여러 능을 발굴한 樊崇에게 관직을 주고 토지를 내린 것은 천리를 어기고 인륜을 무너뜨리게 하는 잘못이었다는 내용.
送金久之赴燕山序 (3) 1653. 燕京에 사신으로 가는 金壽恒을 전송하는 서문. 淸에 대해 복수하려면 春秋의 大義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崇孝錄序 (4) 1661. 先祖인 朴尙衷과 朴紹의 事蹟을 모아 <崇孝錄>을 편찬하였다는 내용의 서문.
李重賚字序 (6) 1662. 친구인 李啓晩의 요청에 따라 重期라는 字를 ≪尙書≫<說命>篇의 啓沃의 의리에 근거하여 重賚로 바꾸어 주고 그 의미를 밝힌 글.
送尹吉甫丈游楓嶽序 (7) 1664. 宋時烈과 尹拯에 이어 尹宣擧가 金剛山에 놀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전송하며 감회를 밝힌 서문.
潘陽二先生遺藁目錄序 (10) 1669. ≪東文選≫ 등에 실려 있는 朴尙衷의 시문과 疑義·對策·絶句 등 朴紹의 유고를 모으고 자신이 이를 교정하여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의 서문.
魯史零言序 (11) 李恒福이 ≪春秋左傳≫을 토대로 만든 ≪魯史零言≫에 박세채가 붙인 서문. 전란 중에 초고만 남아 있던 것을 후손 李時淵과 李世龜 부자가 정돈한 뒤 자신의 訂正을 거쳐 간행하였다는 내용.
一齋先生集序 (13) 1674. 李恒의 시문집인 ≪一齋集≫ 서문. 후손 李星益의 요청과 이항이 朴紹와 同門이었던 인연으로 자신이 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增刪濂洛風雅序 (15) ≪增刪濂洛風雅≫의 서문. ≪濂洛風雅≫는 원래 宋末 金履祥이 선배 성리학자들의 箴訓·諷詠을 뽑아 만든 책인데 기록된 것이 너무 많고 訓詠 중에는 빠진 것이 있어 여러 성리서와 ≪大全≫ 등을 참고하여 增刪하였다는 내용.
長吟亭集序 (17) 1678. 羅湜의 시문집인 ≪長吟亭集≫ 서문. 나식은 趙光祖의 제자로 金安國·朴英의 칭송을 받고 모두 우러러보았는데 형제가 함께 李煇의 일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화를 당해 흩어지고 詩賦 80여 편만 남아있는데 高遠한 뜻‚ 충성과 효성이 잘 나타난 것들이라는 내용.
春秋補編序 (19) 1678. ≪春秋補編≫의 서문. ≪春秋≫는 朱熹의 정본이 없고 읽는 자들이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어 程子와 朱熹의 ≪全書≫ 등에 나오는 ≪春秋≫에 대한 내용을 찾고 분류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는 내용.
忠定公章疏序 (21) 1681. 李貴의 章疏를 모은 ≪忠定公章疏≫의 서문. 이귀는 李珥의 經濟之學을 계승한 인물로 軍國의 큰 계획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이에 후손과 함께 그가 남긴 상소를 정돈하여 간행하게 되었다는 내용.
家語外編序 (24) 1681. ≪家語外編≫의 서문. 孔子의 언행이 諸子에 섞여 玉石을 분별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워 魯論의 뒤를 이어 성인의 말을 모아 모순되는 것을 考訂하고 異端의 어그러진 말은 刪定하여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靜觀齋集序 (25) 1682. 李端相의 문집인 ≪靜觀齋集≫의 서문. 이단상은 名家의 자제로 효종 때 巖穴에서 나온 현인들과 經義와 世道를 논했으나 세도가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알고 은거하며 程朱의 遺訓을 玩味하여 中外의 학자들이 따랐던 인물이었다. 맏아들 李喜朝가 유고를 수습하여 편집하고 尹趾善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게 되었다는 경위를 밝힌 내용.
範學全編序 (27) 1684. <洛書>·<洪範>·<皇極> 등을 모아놓은 ≪範學全編≫의 서문. <易圖>에 실린 <洛書>와 ≪尙書≫의 <洪範>으로 皇極에 대해 미루어 추론하다가 王褘의 <洛書辨>‚ 章潢의 <洛書洪範>‚ 채씨의 <洪範皇極論> 등을 보았는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몰랐다. 결국 洪範九疇는 洛書를 해석하여 經緯를 삼고 皇極의 수를 支流로 참고하면 미혹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 흩어져 있는 箕子의 행적을 찾아 싣고 <洛書>·<洪範>·<皇極> 등을 합하여 책을 만들었다는 내용.
重刊慕齋先生集序 (29) 1687. 金安國의 문집인 ≪慕齋先生集≫을 重刊할 때 박세채가 붙인 서문. 金構가 김안국·金正國을 모신 서원이 있는 龍岡 고을 수령이 된 뒤 서원 유생들과 함께 문집을 중간하였다는 내용.
白川郡文會書院記 (1) 1673. 白川 文會書院의 記文. 趙光宗 등이 서당을 짓고 상소하여 선조에게서 文會라고 사액을 받았으나 비워져 있다가 趙光庭 등이 중수하고 朱之蕃의 필적을 받아 걸었다. 이제 南康의 白鹿書院을 모범으로 삼아 과거를 위한 학문이 아닌 伊尹의 뜻과 顔淵의 학문에 힘써야 할 것이라는 내용.
坡州花石亭記 (4) 1677. 臨津江 栗谷 북쪽에 있는 정자인 花石亭의 記文. 이이가 물러나 거처하던 곳이며 사신들도 오가며 題詠을 남겼고 西南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왜의 침입 후 빈터로 남겨진지 백여 년에 후손들이 옛 터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부탁해왔다. 후손들이 이이의 유업을 지켜 변하지 않고 또한 학문에도 힘쓰기를 바란다는 내용.
玄石滄浪亭記 (6) 1684. 漢江 玄石의 창랑정은 한강 서남쪽 승경 속에 있으며 원래 鄭氏의 옛 정자가 있던 곳이다. 그 곳 북쪽에서 10여 년 살았는데 뒤에 재종질 朴弼成이 정자를 다시 지었다. 황해도에 가 있다가 10여 년만에 주인과 함께 와서 머물며 ‘淸濁을 자신이 취한다’는 뜻에서 나온 滄浪의 의미를 끌어 그 감회를 기록한 내용.
平山九峯書堂記 (8) 1685. 平山 九峯書堂의 기문. 1683년 황해도 東陽 綿谷에 유생 李廷碩의 요청으로 서당을 설치하게 된 의의‚ 건물을 완성한 감회‚ 성인의 덕을 상징하는 九를 들어 당명을 지은 의의‚ 서당의 제생들이 갖추어야 할 학문 태도 등에 대해 기록한 내용.
春川府鄕校重修記 (10) 1686. 春川鄕校의 重修記. 향교의 교육이 무너진 것을 안타까와하고 李滉의 도학과 申崇謙의 忠義의 자취가 있는 춘천에 關防이 설치되면서 향교가 더욱 퇴폐했다가‚ 宋光淵이 부임하여 교육을 진흥시키면서 향교를 重修하였다는 경위를 밝히고 선비를 기르는데 기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
平山府東陽書院記 (13) 1687. 平山에 있는 東陽書院의 기문. 申崇謙과 李穡을 모시는 서원을 세운지 40년만에 지탱할 수 없게 되었는데 1685년 선비들의 건의로 신숭겸의 후손인 수령 申曄 등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게 되었다는 경위와 신숭겸과 이색의 업적과 학문에 대해 기리는 내용.
延安府平遠堂重修記 (15) 延安에 있는 平遠堂의 重修記. 선조 때 尹斗壽가 객관 남쪽에 堂宇를 짓고 李珥가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제 100여 년만에 무너져 가는 것을 崔錫鼎이 중수하였다는 경위와 堂號인 平과 遠의 의미를 들어 축원하는 내용.
書小學題辭後 (1) <小學題辭> 뒤에 붙인 글. 朱熹가 經史에서 수집하여 ≪小學≫을 편찬한 경위를 설명함.
書己丑所擬上疏十二條後 (2) 七月入朝蒙恩遆職後出舍玄石江上感而有賦寄示汝和‚到高嶺寺偶吟‚1656. 1649년에 상소하려던 十二條의 상소 조목 일부를 개정하면서 그 경위를 밝힌 글.
題邵康節觀物詩後 (4) 邵雍의 <觀物詩> 뒤에 題한 글. 밤에 서쪽 정원을 거닐다가 은하수를 보거나 봄에 초목을 보고 自得하는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性理大全≫에 있는 邵雍의 시를 보고 깨닫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자 기록한다는 내용.
跋先王父寄齋雜記 (5) 1658. 朴東亮의 ≪寄齋雜記≫ 발문. ≪기재잡기≫는 박동량이 사관의 직책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목격한 時事를 기록한 것으로 체례가 각기 다르고 通紀도 없지만 시사를 목격한 것이 크고 시비와 賢否를 가릴 기준이 될만하여 박세채 자신이 바로잡아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書明史修明曆法卷後 (6) 1662. ≪明史≫의 <修明曆法卷> 뒤에 붙인 글. 曆象은 그 요령을 얻기 어려운데 1647년 明의 大統曆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아 毅宗 때 徐光啓와 서양 사람들에게 책력을 수정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을 申炅에게 들었으나 당시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孝宗 때 일식과 월식에 차이가 생기자 신경이 명나라에서 수정했던 역서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못하고 집안 일로 嶺海에 떠돌다 죽어 그 법이 전하지 못했다. ≪明史≫를 읽다가 신경에게 들었던 것과 부합된 것을 발견하고 그 감회를 적은 내용.
題六書總目 (8) ≪六書總目≫에 題한 글. 뜻을 잘 살피지 못하고 입으로만 외울까 염려하여 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 總目을 만들었다는 내용.
跋神訣 (8) 1664. ≪神訣≫의 발문. 아버지가 항상 좌우에 두고 보던 것으로 養生家의 말과 道佛이 섞여 있어 때로 괴이한 곳으로 흐르기는 하지만‚ 淸心寡慾과 謹言省事를 주로 삼아 병으로 혼미할 때 바로잡는 약이 되었다고 밝히고‚ 1659년 화재 이후 스스로 여러 책에서 補緝하였다는 내용.
跋活塘公所讀大學 (9) 1665. 朴東賢이 읽었던 ≪大學≫에 붙인 발문. 박동현은 朴紹의 맥을 이어 온 사람으로 학문에 힘쓰고 조정에서도 바른 언론을 보인 사람인데 遺文과 서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증손 朴泰定이 그 책을 가지고 배우러 온 것을 기뻐한다는 내용.
跋一髮千鈞 (10) ≪一髮千鈞≫의 발문. 主一無適을 위주로 한 持敬 공부에 대한 朱熹와 李滉의 의논에 趙光祖·李珥·成渾의 설을 합해 ‘늠름한 데 이르라’는 뜻으로 ≪一髮千鈞≫이라 이름하였다는 내용.
書敎法要旨後 (11) 1668. 朱熹가 白鹿洞에 게시한 것 외에 각 책에 산재하고 있던 것을 抄錄하여 만든 ≪敎法要旨≫ 뒤에 그 책이 이루어진 경위 등을 기록한 글.
跋宗英忠肅公遺稿 (12) 李晬의 시문집인 ≪宗英忠肅公遺稿≫ 발문. 이수는 光海君 때 여러 종실과 함께 大妃를 폐하려는 李爾瞻의 잘못을 상소하였다가 뒤에 유배되었던 인물로 후손 李箕疇가 遺文과 譜狀을 보여주며 요청해와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跋四書讀法 (13) 1668. ≪四書讀法≫의 발문. 원래 주자가 ≪中庸≫과 ≪大學≫에는 <序說>을‚ ≪論語≫와 ≪孟子≫에는 <서설>과 <讀書法>을 썼는데 명나라 때 ≪大全≫을 만들면서 ≪중용≫과 ≪대학≫의 讀法을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는 ≪논어≫와 ≪맹자≫에는 <서설> 뿐 <독서법>이 없어 四書의 讀法을 모아 편집하였다는 내용.
跋閔龍巖傳 (14) 1670. ≪閔龍巖傳≫의 발문. ≪민용암전≫을 成至善에 의해 본 적이 있는데 趙世煥이 판각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려 한다하여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경위를 밝히고 민용암이 匹士로서 절개를 세웠고 깨끗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던 인물이라는 내용.
跋朱子大全拾遺 (15) 1672. ≪朱子大全拾遺≫의 刪定 경위를 밝히고 續考의 편집을 다짐하는 발문. 문헌이 많은 중국에서라면 아마 배는 더 되었을 것이라며 程敏政이 말한 後集 등을 끝내 얻어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내용.
書心經後論後 (16) 李滉의 <心經後論> 뒤에 붙인 글. 程敏政은 朱熹의 고향에서 태어나 정밀한 ≪心經附註≫를 편찬하였고 문장도 典雅하지만 道一編의 설로 주희가 만년에 陸九淵과 합하였다 주장하여 陽明學의 폐단을 열어 놓았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
跋書院事蹟 (19) 1673. ≪書院事蹟≫의 발문. 당시 서원의 폐단을 지적하며 황해도에 서원을 설치하여 선비를 가르치면서 문집에서 서원에 관계된 것을 뽑아 모범을 삼고 원류를 찾으려고 尹拯의 도움을 받아 ≪書院事蹟≫을 완성하였다는 내용.
跋寒岡先生甲申手帖 (20) 李珥가 사망한 3일 뒤 이이의 편지에 답한 鄭逑의 편지인 <寒岡先生甲申手帖> 발문. 이이가 죽고 成渾과 정구도 고립된 것이 아쉽다는 내용.
跋理學通錄補集 (23) 李滉의 ≪理學通錄≫에 추보한 ≪理學通錄補集≫의 발문. 李滉의 ≪理學通錄≫은 성리학의 중요 저술이지만 간행되지 못한 채 추보할 것이 있어 1673년 禮說로 인해 刑曹에서 명을 기다리던 중 ≪文獻通考≫·≪吾學編≫·≪皇明通紀≫·≪一統志≫ 등과 성혼이 손수 批點하여 標註한 것을 참조하여 ≪朱書節要≫의 예를 모방하여 책을 이루었다며 주서절요와 표리가 될만할 것이라고 경위와 의의를 밝힌 내용.
書外王父手書經世編年晉事後 (24) ≪經世編年≫<晉事>에 申欽이 손수 써놓은 것을 신흠이 돌아간지 50여 년만에 보게 된 감회를 밝힌 글. 신흠이 邵雍의 ≪經世書≫를 좋아하여 春川에 유배되었을 때 연경에서 사다가 읽고 ≪先天窺管≫ 중에 自得한 것을 보여 주었다. 또 아들 申翊相과 손자 申最도 이 책에 능통하여 업적을 남겼고 자신도 申最와 함께 토론한 적이 있다는 내용.
跋伊洛淵源續錄 (25) ≪伊洛淵源續錄≫의 발문. 중국의 謝學士가 펴낸 것으로 朱子 이후 인물 108인에 대한 것을 彙集하였다는 내용.
跋栗谷先生續集 (26) 1675. 李珥의 ≪栗谷先生續集≫ 발문. 白川에 내려갔을 때 從玄孫 李紳에게 石潭에 草藁 9권이 있다는 것을 듣고 얻어 읽었다. 그 뒤 옛 친구들이 소장한 것들을 참조하여 8권으로 만들어 續集을 삼고 나머지는 外集으로 하였다는 내용.
跋履素齋心性情圖 (28) 李仲虎의 <心性情圖> 발문. 金榦을 통해서 보게 된 경위를 밝히고 上中末圖로 구성된 도설의 내용에는 金木水火土를 五性에 배속하지 않고 四端을 七情에 예속시키지 않는 등 애석한 점이 있지만 人性의 근본을 밝히고 성학의 모범을 세우고자하여 그 공이 적지 않다는 내용.
再跋寄齋雜記 (29) 1676. 朴東亮의 ≪寄齋雜記≫에 재차 쓴 발문. 기재잡기는 임진왜란에 사관들이 모두 도망한 상황에서 박동량이 6部의 通郞으로 春秋를 兼管하여 쓴 것으로 병자호란 뒤 李植이 ≪선조실록≫을 다시 만들 때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내용.
跋聽松先生心經 (30) 1677. 成守琛이 소장했던 ≪心經≫ 跋文. ≪心經≫은 중국에서는 중히 여기지 않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趙光祖 이후 李彦迪·李滉·曹植·成渾 등이 ≪近思錄≫과 짝을 이뤄 전수하였다. 당시 성수침이 손수 보았던 책을 200년이 지나서 5대손 成至善이 가지고 와 부탁하길래 발문을 써 준다는 내용.
跋從大父鳳村集 (31) 1677. 朴東說의 시문집인 ≪鳳村集≫ 발문. 金尙憲의 권유에 따라 아들인 朴濠가 박세채에게 부탁하여 朴東亮의 시문들과 함께 모으고 박동열은 鳳村으로‚ 박동량은 鳳洲라 칭하던 것을 따라 ≪봉촌집≫으로 이름하게 되었다는 내용.
書耘谷詩史後 (1) 1677. 元天錫의 詩史 뒤에 붙인 글. 申欽의 ≪晴窓軟談≫에서 元天錫의 節義를 알 게 된 뒤 다른 사람에게서 할아버지 朴東亮이 편찬한 선생의 詩史를 얻어 보았다. 10여 년 뒤 原州에 살면서 이 책을 얻어 ≪청창연담≫에 실린 시와 신흠의 의논‚ 조선왕조 開國과 관련된 내용을 모아 함께 엮었다는 내용.
題武侯心書後 (1) 諸葛亮이 지었다는 ≪武侯心書≫ 뒤에 題한 글. 諸葛亮의 저술 목록을 전하는 ≪文獻通考≫이나 다른 기록에도 관련된 기록이 없어 진위를 알 수 없음을 애석해 하는 내용.
跋心學至訣 (2) 1678. ≪心學至訣≫ 발문. 성리학의 요체인 居敬에 대해 鄭逑가 ≪心經≫을 發揮하여 敬에 대해 논한 말들을 모았다. 그러나 本源이나 條理에 빠진 것이나 번거로운 것이 많아 이를 蒐輯 整頓하고 趙翼의 <持敬圖說>을 참고하여 이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書喪禮通載後 (3) 1679. 申儀慶의 ≪喪禮通載≫ 뒤에 쓴 글. 1674년 禮 문제로 待罪할 무렵 成至善을 통해 받아보았는데 ≪喪禮備要≫와 여러 설을 모아 고증하였고 뒤에 자신의 의논을 붙인 것은 ≪家禮輯覽≫과 같으니 ≪비요≫와 ≪집람≫이 이 책 초고본과 거의 같다는 내용.
跋童蒙須知 (5) 朱熹의 ≪童蒙須知≫를 다시 편집하여 간행하면서 쓴 발문. 우리 나라에서는 表章하지 않다가 金安國이 영남에서 간행하고 盧守愼이 註解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전쟁 때문에 인멸된 것을 안타까이 여겨 노수신의 문집에서 뽑고 字訓과 <夙興夜寐箴解>를 붙여 보기에 편하도록 하였다는 내용.
書擊蒙要訣後 (6) 李珥의 ≪擊蒙要訣≫ 뒤에 쓴 글. 12세에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배운 이래 여러 번 읽었는데 體用이 구비되어 유자들의 準繩이요 학문을 시작할 때의 頂門一針이라 할만하다. 祭儀 등 생전에 미처 수정하지 못한 것이 있지만 큰 병통은 아니다. 제의를 뺀 뒤 李滉의 ≪聖學十圖≫‚ 成渾의 ≪爲學之方≫과 함께 하나로 합하였으니 요결로 규모를 정하고 위학지방으로 나아간 뒤 성학십도로 극진하게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
跋退溪先生語錄 (7) 1676. 朴世采가 재편집한 ≪退溪先生語錄≫ 발문. 林泳이 보여준 ≪退溪先生語錄≫은 잘못된 것이 있어 善本을 구해 교정하고 ≪晦菴語錄≫을 모방하여 분류한 뒤 李德弘의 <溪山記>를 참고하여 완성하였는데 학문에 들어가는 데에 절실한 것이라는 내용.
書外王父甲子收議後 (8) 1680. 鄭澈의 신원 문제에 대한 申欽의 甲子收議 뒤에 쓴 글. 鄭澈의 인물됨과 행적을 밝히고 모두 비판이 두려워 신원에 적극 나서지 못했는데 申欽이 정철이 공정한 사람인 것을 알아 伸雪하자는 의견을 내었다며 문집에도 남아있지 않은 그 글을 본 감회를 기록한 내용.
書稽治錄後 (11) 1681. <稽治錄> 뒤에 쓴 글. 顯宗대에 世子侍講院에 제수되자 六官의 時務를 조목별로 제시하고 程顥·程頤 두 선생의 <稽古爲治之規>를 덧붙인 것으로‚ 14년 지난 뒤에 梁處濟가 베껴놓은 것을 본 감회를 기록한 내용.
跋遯庵全書 (12) 鮮于浹의 ≪遯庵全書≫ 발문. 金世寬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히고 經訓의 大義를 깊이 알아 자득한 것이 넉넉하다고 칭송하였다. 선우협은 箕子의 후예이며 豪傑한 선비로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陶山書院과 張顯光 등을 섭렵한 뒤 龍岳山 廢寺에서 제자를 키워 서북 학자들이 존경하여 따른 인물이었다는 내용.
跋秋泉遺文 (13) 李直彦의 문집인 ≪秋泉遺文≫ 발문. 이직언이 임진왜란에 화의를 반대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고‚ 정묘호란에 오랑캐와의 맹약을 반대하는 등 3번의 환난에 3번의 큰 절개를 세운 인물이었다는 것과 손자 李震華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경위를 밝힌 내용.
跋栗谷先生外集 (14) 李珥의 문집인 ≪栗谷先生外集≫의 간행 경위를 밝힌 발문. 石潭書院에 소장된 3책의 초고본 <經筵日記>와 李瑀가 가지고 있던 서간첩‚ 李景臨이 찬한 연보‚ 安邦俊의 遺事를 모아 字劃의 진위를 고증하고 여러 판본을 참고하여 이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跋栗谷先生別集 (15) 李珥의 문집인 ≪栗谷先生別集≫의 발문. 이이가 손수 기록한 <太極問答>과 다른 사람의 기록 등을 수습하여 ≪二程全書≫의 체제를 모방하여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跋栗谷年譜 (15) 李珥의 ≪年譜≫ 발문. 尹宣擧의 뜻에 따라 이전 연보 교정에 참여하여 <年譜攷證>을 이루고 宋時烈과 尹拯의 刪定을 거쳐 별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별본은 朱子 연보의 예에 따라 중첩시키지 않고 大旨를 취하여 편하고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였다는 내용.
跋栗谷四書諺解 (16) 李珥의 ≪栗谷四書諺解≫의 간행 경위를 밝힌 발문. 成渾의 ≪續集≫을 읽다가 이이의 ≪孟子音解≫가 좋다는 말을 보고 金長生家에 소장된 것을 얻어 보았는데 간행된 것과 다르고 근래 口訣의 병폐를 고칠 수 있는 것이라 경학의 指南을 삼을 만 하다는 내용.
跋靜菴先生文集 (17) 1681. 靜菴 趙光祖의 문집 간행 경위를 설명한 발문. 李箕疇가 文蹟을 수록해 놓은 것을 바탕으로 年譜를 완성하고 후손에게 초본을 얻고 李選의 고정 등을 거쳐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는 내용.
跋滄浪集 (19) 1682. 成文濬의 ≪滄浪集≫ 발문. 成至善이 申翼相을 도움을 받아 간행하면서 발문을 요청해왔다. 성문준은 아버지 成渾의 사후 배척받다가 반정 후 등용되었으나 외직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문집에 실린 <太極辨>과 <洪範說>은 전대에 밝히지 못했던 것이니 후학이 講學할 만하다는 내용.
書東儒師友錄後 (20) 1683. ≪東儒師友錄≫을 쓴 이유와 경위를 밝힌 글. 道學의 淵源을 상고할 길이 없어 弱冠이래 신라시대부터 仁祖때까지 성명과 자취를 수집하여 20권으로 編次하였고 李珥 이후의 일은 대략 모으기는 했지만 좀더 보충한 뒤에야 편집하여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題李處士詩卷 (21) 處士 李居周는 仁祖 초에 해주로 이사하여 정묘호란에도 가족을 온전하게 보존했던 인물로 經史百家를 섭렵하고 시도 沈鬱하고 典雅하였으며 훗날 다시 유학에 뜻을 두고 후진을 가르쳤다. 그의 손자에게 詩卷을 받아보고 그 감회를 시권 뒤에 題한다는 내용.
跋龍溪遺稿 (21) 李華相의 증조부 龍溪公의 시문집 ≪龍溪遺稿≫ 발문. 시에 능하여 權韠 등과 함께 즐기며 宋翼弼과 金長生에게 배워 반정 뒤 크게 쓰일 인물이었지만 먼저 죽어 아쉬웠는데 그 시를 얻어 볼 수 있어 감격스럽다는 내용.
跋樂全歸田錄 (22) 申翊相의 시를 모은 ≪樂全歸田錄≫의 발문. 樂全稿에 남한산성에서 올린 상소와 물가에 은둔하던 시절의 시가 많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중 歸全錄을 간행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외숙 신익상이 風流와 行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병자호란에 격문을 불사르며 사수하기를 청하고 항복한 뒤에는 寒士와 같이 살며 瀋陽에 가서도 뜻을 변치 않았다는 내용.
跋汾西集 (23) 朴瀰의 시문집인 ≪汾西集≫ 발문. 박미는 張維에게 큰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사람으로 평생 저술한 시와 잡문을 박세채 자신이 편집하였는데 아직 간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손자 朴泰斗에게 주어 조만간 간행하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
題烟村遺蹟後 (24) 崔德之의 ≪烟村遺蹟≫ 뒤에 題한 글. 최덕지가 문종 때 미리 물러나 存養樓를 지어 재난을 면했고 程朱의 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때에 ‘存養’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을 闡揚하는 내용.
題二書要解後 (25) ≪心經≫과 ≪家禮≫를 뽑아 편집하고 풀이한 ≪二書要解≫ 뒤에 題한 글. 시골에서라도 ≪心經≫과 ≪家禮≫를 읽으면 스스로 미루어 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심경≫과 ≪가례≫의 의의를 밝힌 내용.
跋吳林溪達濟手帖 (26) 1684. 吳達濟의 필적을 모은 手帖의 발문. 三學士가 淸에 대해 抗言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추모하고 손자 吳遂一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글.
跋晩退軒遺稿 (27) 申翼相의 할아버지인 申應榘의 시문집 ≪晩退軒遺稿≫의 발문. 신응구는 평생 성리서들을 읽어 見識이 투철하였던 인물로 기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손자 신익상이 家藏하고 있던 유고를 보니 몇 편 안되지만 發明한 것이 많아 간행을 권유하였다는 내용.
跋新定自警編 (27) ≪新定自警編≫의 발문. ≪自警編≫의 門類가 자세하지 않고 뜻이 잡다해서 增刪하고 朱熹의 <名臣錄>의 뜻을 붙였다는 내용.
跋紀年通攷 (28) 1685. 星江 趙見素의 ≪紀年通攷≫ 발문. 野史에는 잡스럽고 잘못된 말이 많고 믿을 만한 것이 드문데 조현소가 典故에 힘써 ≪皇明通記≫와 ≪撮要寶鑑≫‚ 碑狀 문자 등을 참고하여 중국과 조선의 治亂과 離合을 정돈하여 놓았다는 내용.
跋程朱二先生箴規 (29) 1685. 程子와 朱子의 箴規 발문. 程子와 朱子의 <四勿敬齋箴>과 <白鹿洞規>에는 공부의 절목이 자세히 갖추어져 있어 平壤 仁賢書院의 院儒들이 와서 規束을 청하길래 두 선생의 箴規를 걸어 놓기를 권했다는 내용.
書退牛栗三先生遺書後 (29) 李滉의 ≪聖學十圖≫‚ 成渾의 ≪爲學之方≫‚ 李珥의 ≪擊蒙要訣≫을 모아 판각한 ≪退牛栗三先生遺書≫ 뒤에 쓴 글. 沈壽亮의 요청으로 3가지 책을 합하여 1책으로 만들게 된 경위를 밝히는 내용.
跋河西集 (30) 1685. 金麟厚의 시문집인 ≪河西集≫의 발문. 김인후가 仁宗에게 侍講하며 君臣交修의 道를 가졌으나 어려운 時運을 만났다고 아쉬워하고 문집이 인멸될 지경이 되어 金壽恒의 주선으로 후손 金時瑞의 부탁을 받아 자신이 편집하여 다시 간행하게 되었다는 경위를 기록한 내용.
跋道學正脈後 (31) 權韠의 ≪道學正脈≫ 뒤에 쓴 발문. 시에만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권필이 正學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朴知誡와 宋淵을 통해서 들었는데‚ 이제 沈廷熙에게서 권필이 淵源과 理學을 손수 초록하고 圈點하여 玩誦한 자취가 있는 ≪道學正脈≫을 얻어 보게 되어 그 감회를 기록한다는 내용.
跋山堂集 (32) 山堂書客 崔忠成의 시문집인 ≪山堂集≫의 발문. 최충성은 독서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金宏弼 門人으로 이단을 배격하였으며 유명한 산을 섭렵하였던 인물인데 崔邦彦을 통해 시문을 얻어 보고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題楊湖詩稿後 (33) 閔嶪의 시집 뒤에 題한 글. 민업은 玄谷 趙緯韓의 門人으로 글씨에 俗氣가 없고 시는 고결하며 문장은 간략하면서도 훌륭헀는데 학문에 대한 것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는 내용.
題申哨官夢憲哀詩叙後 (33) 申夢憲의 同宗 申復一이 쓴 신몽헌 哀詩 서문 뒤에 題한 글. 金應河와 함께 원정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申夢憲의 일을 기록한 申復一의 서문에 신몽헌의 손자의 청에 따라 題하게 된 경위를 밝힌 내용.
跋先公中峯集 (35) 아버지 朴漪의 시문집인 ≪中峯集≫의 발문. 朴漪가 병자호란 이후 바닷가에 살다가 서울에 돌아와 지은 시를 5권으로 모으고‚ 요절한 숙부 朴濰의 글을 함께 모았다는 내용.
跋石峯遺稿 (36) 1687. 韓脩의 문집인 ≪石峯遺稿≫의 발문. 韓脩는 자질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명종 때 曺植·李恒 등과 함께 추천을 받았으며 당론이 성해지자 자취를 감추고 自守하였는데‚ 시 등에서 그 뜻을 볼 수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
題全縣監應星事實後 (37) 全應星의 손자 全聖翊이 朴泰初에게 부탁하여 全應星이 倡義한 병사와 함께 栗峙에서 큰 적을 만나 죽은 일을 기술한 글에 題한 내용.
獅子硯銘-幷引 (1) 목각으로 사자를 새기고 벼루와 筆墨을 둔 獅子硯에 새긴 명. 楊萬世가 趙緯韓에게 주었는데 병란에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져 왔다는 내용.
釰銘-幷引 (1) 1677. 집안에 전해 오던 검을 改粧한 뒤에 새긴 銘.
一所銘-幷引 (1) 1680. 一所라 自號한 뒤 자신을 경계하는 銘. 敬을 萬善의 근본으로 삼아 종신토록 종사할 것이라는 내용.
四十箴 (2) 1670. 40세에 뜻을 구하는데 힘쓰고 학문에 힘써 나아가겠다며 자신을 경계하는 箴.
六十箴-幷引 (3) 1690. 60세에 40에 箴을 세운 이후의 공부를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箴.
趙氏聘幣書 (4) 1668. 아들 朴泰殷의 처가 될 趙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尹氏聘幣書 (4) 둘째 아들 朴泰輿의 처가 될 尹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李氏聘幣書 (5) 1670. 셋째 아들 朴泰正의 처가 될 李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回宋氏書 (5) 1673. 장녀가 시집 갈 집안인 宋時烈家에서 폐백을 받고 혼인을 허락하는 글.
申氏聘幣書 (5) 1674. 넷째 아들 朴泰晦의 처가 될 申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回申氏書 (6) 1681. 둘째 딸이 시집 갈 집안인 申氏家에서 폐백을 받고 혼인을 허락하는 글.
回李氏書 (6) 1689. 셋째 딸이 시집 갈 집안인 李氏家에서 폐백을 받고 혼인을 허락하는 글.
魯岡書院上樑文 (6) 1673. 魯岡書院의 상량문. 尹煌의 의리‚ 成守琛 이래의 가학과 金長生의 학맥을 잇는 尹宣擧의 사당을 짓게 된 의의를 서술하는 내용.
晩醒亭新居上樑文 (8) 1687. 晩醒亭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의 새로운 거처의 상량문. 주인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가 늙어서는 세상에 은둔하려고 새로 어버이를 모실 곳과 강학한 장소를 짓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는 내용.
告高祖僉正公還安文 (10) 1659. 朴炳을 대신하여 지은 글로 朴炳의 고조부인 朴兆年의 신주를 長房에 祧遷하였다가 옛 사당 서쪽 방으로 還安함을 고하는 글.
出寓西湖時告家廟文 (10) 1662. 西江 村舍에 나가 몸을 조리하겠다고 家廟에 고하는 글.
超授宗簿寺主簿告家廟文 (11) 1665. 宗簿寺 主簿에 제수되었음을 家廟에 고하는 글.
謁先祖潘南先生墓文 (11) 1665. 선조인 朴尙衷의 묘를 찾아보고서 올리는 글.
自坡山歸告家廟文 (13) 1669.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계속 내려 坡山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체되고 있음을 家廟에 고하는 글.
立碑時告曾祖考墓文 (13) 1674. 돌아 가신지 70여 년만에 비를 다시 세우면서 증조할아버지인 朴應福의 墓에 고하는 글.
到延安喪次告亡子文 (14) 1679. 죽은 아들의 喪次에 이르러 고하는 제문.
拜司業時因歲事告廟文 (16) 1680. 성균관 司業에 제수된 뒤 사당에 고하는 글.
奉安朴思菴畵像文 (17) 朴淳의 畵像을 봉안하면서 올리는 글.
白川文會書院奉安二先生祠並配重峯趙公祭文 (17) 1681. 白川의 文會書院에 李珥와 成渾 두 선생을 並享하고 趙憲을 配享하면서 올린 제문.
春秋享祀祝文 (18) 白川의 文會書院의 李珥와 成渾에 대한 享祀의 축문.
奉安四賢祠文 (18) 白川의 文會書院에 安瑭·辛應時·吳億齡·金德咸을 봉안하는 글.
春秋享祀祝文 (19) 安瑭·辛應時·吳億齡·金德咸에 대한 享祀의 축문.
拜承旨後因歲事告家廟文 (19) 1682. 승지에 제수된 뒤 家廟에 고하는 글.
尼山魯岡祠春秋享祭文 (20) 1683. 尼山의 魯岡祠에 제향된 尹煌·尹文擧·尹宣擧의 봄가을 제향의 祭文.
詣闕陳情後告家廟文 (20) 災異로 인해 이조참의에 제수되어 궐에 이르러 진정한 뒤 가묘에 고하는 글.
魯湖祠春秋享祀祝文 (20) 1683. 魯湖祠에 배향된 死六臣 6인에 대한 봄가을 享祀의 祝文.
乞退後因歲事告家廟文 (21) 1683. 이조참의와 공조참판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한 뒤 가묘에 고하는 글.
吳林溪遺服埋安祝文 (21) 1684. 할아버지의 옷을 할머니 무덤 뒤에 묻는 吳達濟의 손자를 대신해 써준 축문.
平山雲峯祠移安祝文 (22) 平山 雲峯祠의 개수를 위하여 신위를 移安할 때의 祝文.
還安祝文 (22) 平山 雲峯祠의 개수를 마치고 신위를 還安할 때의 祝文.
遷居坡山告土地文 (22) 1687. 坡山으로 이사하면서 토지신에게 고하는 글.
新居成報祀土地文 (22) 1687. 새 거주지를 이루고 토지신에게 報祀하는 글.
高陽文山書院奉安四先生祠祭文 (22) 1688. 高陽의 文山書院에 閔純·南孝溫·金正國·奇遵을 奉安하면서 올린 祭文.
擢授吏曹判書因忌事告家廟文 (24) 이조판서에 제수된 뒤 가묘에 고하는 글.
忤旨遞職後告家廟文 (24) 熙政堂에 들어가 소매 속에 있던 5조목의 차자를 올린 뒤 宗班을 공격한 일로 대죄하다가 돌아와 가묘에 올리는 글.
蒙仍授職名後告家廟文 (24)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본래의 직책과 겸대하고 있던 직명을 그대로 두라는 명이 내린 뒤 가묘에 고하는 글.
改立石表時告七代祖僉樞公文 (25) 7대조인 朴林宗과 陽川 許氏의 石表를 고쳐 세우면서 고하는 글. 병으로 누운 宗孫 朴之相을 攝行하는 朴世集을 대신하여 써준 글.
海州二子廟奉安祭文 (25) 1691. 해주에 孤竹國 출신의 충신 伯夷와 叔齊의 사당을 세워 봉안할 때의 제문.
春秋享祀祝文 (26) 伯夷와 叔齊에게 봄가을 享祀할 때의 축문.
平山遷葬時告考妣文 (27) 1691. 아버지 朴漪와 어머니 평산 신씨의 묘를 평산으로 천장할 것을 고하는 글.
祭淸陰金先生文 (1) 金尙憲의 장례 7일 전에 올린 제문.
祭從叔父南陽公文 (3) 1656. 從叔父인 朴渟에 대한 제문.
祭內兄春沼申公文 (4) 內兄인 申最에 대한 祭文.
祭叔舅東江申公文 (4) 1662. 外叔 申翊全에 대한 祭文.
祭族父林川公-炳-文 (6) 1663. 族父인 朴炳에 대한 祭文.
祭外舅廣州府尹元公文 (6) 장인 元斗樞에 대한 제문.
祭金和順文 (8) 1664. 金克亨에 대한 祭文.
祭原平元相國文 (9) 妻의 백부인 元斗杓에 대한 祭文.
祭表兄判書李公-一相-文 (11) 1666. 表兄인 李一相에 대한 祭文.
祭再從兄參判公-世模-文 (12) 1668. 재종형 朴世模에 대한 제문.
祭沂川洪相國文 (13) 아들 朴泰殷을 보내 올린 沂川 洪命夏에 대한 祭文.
祭李星州-斗陽-文 (15) 李斗陽에 대한 祭文.
祭內兄申晉夫-暹-文 (15) 內兄 申暹에 대한 祭文.
祭魯西尹先生文 (15) 1669. 魯西 尹宣擧에 대한 祭文.
祭表兄靜齋李公文 (17) 表兄인 靜觀齋 李端相에 대한 제문.
祭從母夫判書趙公-啓遠-墓文 (19) 1670. 從母夫인 趙啓遠에 대한 祭文.
祭宋子文文 (20) 1673. 宋斗章에 대한 제문.
祭族兄承旨公-世城-文 (21) 朴世城에 대한 祭文.
祭楊湖閔先生文 (22) 閔嶪에 대한 제문.
祭白軒李相國文 (24) 白軒 李景奭에 대한 제문.
祭外祖考文貞公象村申先生遷葬文 (24) 1675. 외할아버지인 象村 申欽의 墓를 48년 만에 廣陵으로 遷葬할 때에 올린 제문.
祭同春堂宋先生遷葬文 (26) 宋浚吉의 墓를 遷葬할 때에 올린 제문.
祭昇平都正-潤-墓文 (26) 朴潤의 묘에 제사하는 제문.
祭亡姉文 (27) 1679. 누이에 대한 제문.
祭族兄金浦公-世相-文 (28) 1680. 朴世相에 대한 제문.
祭判書張公-善澂-墓文 (28) 張善澂의 墓에 제사하는 제문.
祭仲姑文 (30) 1680. 고모인 나주 박씨에게 아들 朴泰殷을 보내 제사하는 제문.
祭沈士磬文 (31) 1684. 門人 沈俔에 대한 제문.
祭伯舅樂全申公遷葬文 (32) 1685. 외숙인 申翊聖의 묘를 遷葬할 때 올린 제문.
祭南判書仲輝文 (32) 南二星에 대한 제문.
祭沈全州-榥-夫人文 (33) 1687. 沈榥의 夫人에 대한 제문.
祭朴生-文壁-文 (33) 朴文壁에 대한 제문
祭崔卓叔-柱河-文 (34) 崔柱河에 대한 제문.
祭從姪校理-泰萬-文 (35) 1689. 朴泰萬에 대한 제문.
祭李仁甫文 (36) 李時春에 대한 제문.
祭族姪坡州-泰輔-文 (37) 1689. 朴泰輔에 대한 제문.
祭李判書彛仲文 (38) 1690. 李敏敍에 대한 제문.
祭李載叔文 (39) 李堉에 대한 제문.
祭尤齋宋先生文 (40) 1691. 尤菴 宋時烈에 대한 제문.
先祖潘南先生褒贈紀事碑 (1) 1682. 朴尙衷의 褒贈이 이루어진 경위와 李仁任 세력에 맞서 北元에 사신을 보내려는 일 등을 막았던 일 등 박상충의 행적에 대해 기록한 글.
知中樞府事諡靖惠成公神道碑銘 (3) 成渾의 손자이며 成文濬의 아들인 成㮨의 신도비명.
禮曹判書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 (7) 1685. 朴東說의 門人이며 李德馨의 손녀사위인 浩庵 李基祚의 신도비명.
濟用監正贈吏曹判書申公神道碑銘 (13) 申應榘의 아들이며 申翼相의 아버지로 趙守倫의 門人인 申湸의 신도비명.
黃海道兵馬節度使鶴城君贈兵曹判書金公神道碑銘 (16) 1687. 鶴城君 金完의 신도비명.
禮曹參判贈領議政申公神道碑銘 (21) 申欽의 아들인 외숙 申翊全의 신도비명.
禮曹參判思齋金公神道碑銘 (27) 1691. 思齋 金正國의 신도비명.
先祖議政府左議政錦川府院君諡平度公墓碑銘 (33) 朴尙衷의 아들이며 李穀의 외손인 先祖 釣隱 朴訔의 묘비명.
曾祖司憲府大司憲贈領議政潘川府院君朴公碑陰記 (39) 1670. 증조부 朴應福의 碑陰記로 후손 이름과 관직‚ 묘비가 50여년 만에 다시 세워진 경위‚ 인품 등에 대한 내용.
黃海道觀察使贈吏曹參判朴公碑陰記 (41) 1676. 朴東說의 碑陰記로 遷葬하면서 음기를 기록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朴東說이 成渾에게 배우고 洪聖民 등 여러 인물에게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었다는 내용.
孝子慶州鄭君墓碣銘 (1) 鄭勳의 묘갈명.
吉州牧使朴公墓碣銘 (3) 1673. 柳祖訒의 門人 朴東望의 묘갈명.
處士贈執義金公墓碣銘 (6) 許曄의 門人 처사 金繼의 묘갈명.
淮陽府使贈禮曹參判金公墓碣銘 (8) 松巖 金鍊光의 묘갈명.
南原府使柳公墓碣銘 (11) 崔沂의 외손 柳時定의 묘갈명.
處士瀟洒翁梁公墓碣銘 (13) 趙光祖의 門人인 梁山甫의 묘갈명.
慶州府尹贈左贊成元公墓碣銘 (16) 1684. 朴知誡의 門人으로 元斗杓의 아우이며 박세채의 장인인 元斗樞의 묘갈명.
處士楊湖閔公墓碣銘 (21) 趙緯韓·金長生·張顯光의 門人인 閔嶪의 묘갈명.
通川郡守趙公墓碣銘 (25) 1685. 趙緯韓의 아들인 趙億의 묘갈명.
工曹正郞贈戶曹參判金公墓碣銘 (27) 金構와 金楺의 할아버지이며 朴知誡의 門人인 金克亨의 묘갈명.
昭格署參奉介菴姜公墓碣銘 (1) 1685. 介菴 姜翼의 묘갈명.
順天郡守贈領議政李公墓碣銘 (3) 李珥의 再從弟 李通의 묘갈명.
刑曹正郞贈左贊成李公墓碣銘 (8) 1686. 李碩基의 묘갈명.
鍾城府使金公墓碣銘 (10) 金元立의 묘갈명.
掌樂院僉正贈左承旨朴公墓碣銘 (13) 朴世喬의 묘갈명.
司饔院參奉金公墓碣銘 (16) 金詠의 묘갈명.
健元陵參奉李公墓碣銘 (18) 李鳳男의 묘갈명.
贈司憲府持平李公墓碣銘 (19) 李鵬壽의 묘갈명.
禮曹參判李公墓碣銘 (22) 1690. 李俊耈의 묘갈명.
承政院左承旨趙公墓碣銘 (26) 趙纘韓의 묘갈명.
龍宮縣監趙公墓碣銘 (30) 趙纘韓의 아들 趙休의 묘갈명.
弘文館校理贈吏曹參判趙公墓碣銘 (33) 宋英耈와 任叔英 門人 趙重呂의 묘갈명.
敬陵參奉李公墓碣銘 (36) 1691. 朴知誡 門人 李義吉의 묘갈명.
同知中樞府事朴公墓碣銘 (41) 金長生과 金玄成 門人 守愚 朴煥의 묘갈명.
工曹佐郞具公墓碣後記 (45) 1684. 墓碣의 後記. 具公은 시로 유명하였고 일세의 명사와 사귀며 반정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이라는 내용.
戶曹判書延城君贈領議政諡忠靖李公墓表 (1) 1664. 李貴의 아들인 李時昉의 묘표.
議政府右參贊尹公墓表 (3) 1669. 菊磵 尹鉉의 묘표.
海州牧使羅公墓表 (5) 1675. 羅萬甲의 아들이며 鄭曄의 외손으로 張維·鄭弘溟의 門人이었던 安定 羅星斗의 묘표.
成均生員朴君墓表 (7) 1677. 생원 朴世彙의 묘표.
公州牧使李公墓表 (9) 李恒福의 손자 李時顯의 묘표.
工曹參議贈吏曹參判牛山安公墓表 (10) 朴光前·成渾 門人인 牛山 安邦俊의 묘표.
承政院左副承旨晩退申公墓表 (13) 申用漑의 현손으로 成渾·李珥의 門人인 晩退 申應榘의 묘표.
宗室平城令墓表 (16) 종실인 平城令 李의 묘표.
司憲府大司憲贈吏曹判書諡忠貞金公墓表 (17) 1684. 醒翁 金德諴의 묘표.
處士沈公墓表 (22) 1685. 鄭逑·張顯光 門人인 처사 沈之澤의 묘표.
六世祖僉知中樞府事府君墓表 (24) 1686. 6세조인 朴林宗의 묘표.
議政府左議政鄭公墓表 (25) 1689. 좌의정 鄭知和의 묘표.
錦昌副尉朴君墓表 (31) 1689. 박세채의 族姪이며 門人으로 昭顯世子의 사위인 朴泰定의 묘표.
北部參奉馬公墓表 (34) 1690. 馬羲慶의 묘표.
敦寧府都正朴公墓誌銘 (1) 1657. 朴紹의 아들로 朴緝에게 입후했으며 柳祖訒에게 배웠던 朴應仁의 墓誌銘.
吏曹參判錦洲君朴公墓誌銘 (3) 1662. 朴東善의 아들인 朴炡의 묘지명.
承政院左承旨宋公墓誌銘 (8) 1674. 宋時喆의 묘지명.
社稷署參奉贈戶曹參判李公墓誌銘 (11) 沈世熙의 외조부인 弦齋 李瑑의 묘지명.
珍山郡守宋公墓誌銘 (13) 宋時烈의 형 宋時黙의 묘지명.
翊衛司翊衛柳公墓誌銘 (16) 鄭弘翼의 門人인 柳忠傑의 묘지명.
都摠府都事贈兵曹參判吳公墓誌銘 (19) 吳應鼎의 아들인 吳稷의 묘지명.
孺人趙氏墓誌銘 (21) 趙翼의 손녀이며 李時白의 외손녀로 朴泰斗의 妻인 孺人 趙氏의 묘지명.
黃海道觀察使李公墓誌銘 (23) 1676. 夢灘 李萬雄의 묘지명.
順天府使贈漢城府左尹吳公墓誌銘 (26) 吳應鼎의 묘지명.
同知中樞府事贈吏曹判書李公墓誌銘 (29) 李行健의 묘지명.
議政府左議政原平府院君元公墓誌銘 (1) 1676. 朴知誡의 門人인 元斗杓의 묘지명.
吏曹參判朴公墓誌銘 (9) 朴世模의 墓誌銘.
崔君雲卿墓誌銘 (13) 崔曇의 묘지명.
榮川郡守任公墓誌銘 (15) 任濬의 묘지명.
南陽府使朴公墓誌銘 (18) 1677. 朴渟의 묘지명.
僉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朴公墓誌銘 (20) 申欽의 사위인 朴濠의 묘지명.
同知中樞府事贈領議政金公墓誌銘 (23) 1677. 金尙憲의 아들인 金光燦의 묘지명.
沈君式汝墓誌銘 (26) 1678. 尹文擧의 사위로 尹宣擧에게 배웠으나 요절했던 沈楷의 묘지명.
全羅道觀察使金公墓誌銘 (27) 金構와 金楺의 아버지로 宋浚吉 門人이었던 金澄의 묘지명.
敦寧府僉正贈吏曹參判姜公墓誌銘 (33) 1681. 姜秀崑의 묘지명.
尙衣院正鄭公墓誌銘 (35) 鄭澈의 손자인 抱翁 鄭瀁의 묘지명.
弘文館校理朴公墓誌銘 (38) 朴宗阜의 묘지명.
刑曹佐郞贈戶曹參判柳公墓誌銘 (41) 柳誠吾의 묘지명.
司憲府大司憲贈左議政鄭公墓誌銘 (1) 1681. 鄭澈의 아들인 畸菴 鄭弘溟의 묘지명.
開城府留守李公墓誌銘 (5) 1682. 李後山의 묘지명.
議政府領議政洪公墓誌銘 (8) 沂川 洪命夏의 묘지명.
宗室蓬山君墓誌銘 (17) 1683. 李炯信의 묘지명.
處士朴公墓誌銘 (20) 처사 朴璘의 묘지명.
趙君平叔墓誌銘 (22) 1685. 趙翼의 손자이며 趙持謙의 형인 趙持衡의 묘지명.
廣興倉守朴公墓誌銘 (24) 朴世相의 묘지명.
刑曹判書贈領議政諡忠靖趙公墓誌銘 (28) 1686. 趙啓遠의 묘지명.
高祖考司諫院司諫贈領議政冶川先生墓誌銘 (1) 朴英의 門人인 高祖父 冶川 朴紹의 묘지명.
全羅道觀察使趙公墓誌銘 (9) 1687. 藏六堂 趙龜錫의 묘지명.
皇明鄕學生朝鮮國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田君墓誌銘 (12) 1687. 田好謙의 묘지명.
翊衛司翊衛崔公墓誌銘 (14) 1689. 崔徽之의 묘지명.
季父學生朴公墓誌銘 (18) 1689. 季父인 朴澬의 묘지명.
司憲府掌令贈吏曹參議冶谷趙公墓誌銘 (19) 1690. 李命俊·朴知誡·趙翼 門人인 冶谷 趙克善의 墓誌銘.
議政府領議政沈公墓誌銘 (26) 1691. 晩沙 沈之源의 墓誌銘.
先考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府君墓記 (35) 1690. 朴東亮의 아들로 申欽의 門人이며 사위였던 아버지 朴漪의 墓記.
伯父錦陽君朴公墓誌後記 (37) 朴瀰가 自撰 墓誌를 기록한 뒤에 일어난 일‚ 부마로 선발될 때의 일화‚ 元宗 추숭을 반대한 일 등을 기록한 後記.
先考司憲府掌令府君行狀 (1) 박세채의 아버지인 朴漪의 행장.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退菴朴公行狀 (13) 柳祖訒·成悌元의 門人인 退菴 朴應男의 행장.
伯父錦陽君朴公行狀 (27) 貞安翁主의 남편으로 宣祖의 부마이며 李恒福과 申欽 門人이었던 박세채의 백부 汾西 朴瀰의 행장.
司諫院司諫贈弘文館副提學朴公行狀 (35) 1664. 活塘 朴東賢의 행장.
弘文館副提學靜齋李公行狀 (41) 靜觀齋 李端相의 행장.
弘文館副修撰贈吏曹判書諡文靖河西先生金公行狀 (1) 河西 金麟厚의 행장.
成均生員贈吏曹參議魯西先生尹公行狀 (10) 魯西 尹宣擧의 행장.
議政府右議政鄭公行狀 (34) 陶村 鄭維城의 행장.
議政府領議政平城府院君諡忠翼申公行狀 (1) 申砬의 아들인 申景禛의 행장.
弘文館典翰惺菴李公行狀 (11) 惺菴 李壽仁의 행장.
成均生員趙公行狀 (24) 趙光庭의 행장.
議政府左議政諡文孝浦渚先生趙公行狀 (28) 浦渚 趙翼의 행장.
廣興倉守贈左承旨李公行狀 (49) 1689. 李惇五의 행장.
柳先生祖訒傳 (1) 1667. 李仲虎 門人으로 예학에 밝았으며 鄭芝衍·朴應男 등과 교분을 나누었던 泛愛 柳祖訒에 대한 약전.
西湖三高士傳 (4) 西湖 주변에 있던 李之涵의 土亭의 자취를 더듬고 그 뒤에 일어난 인물들인 蓮峯 李基卨‚ 石田 成輅‚ 石洲 權韠 등에 대한 略傳을 기록한 글.
處士海狂宋公傳 (7) 처사 海狂 宋齊民의 전기. 李之涵 門人으로 生民에 뜻을 두고 醫局을 두어 치료하였다. 魚鹽을 이용해 비용을 만들고 神祠 뒤의 소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왜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金德齡을 구원했고 기근에는 배로 곡식을 날라다 구휼하였다. 왜와의 화친에 반대하며 복수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돌아다니며 제자를 가르쳤던 인물이라는 내용.
高麗太師壯節申公別傳 (19) ≪高麗史≫와 ≪輿地勝覽≫ 등에 기록이 실려 있는 申崇謙에 관한 기록을 모으고 뒤에 贊을 붙여 놓은 전기.
靜庵趙先生年譜 (1) 靜庵 趙光祖(1482-1519)의 年譜.
栗谷李先生年譜上 (1) 李珥의 年譜로 출생에서부터 1575년(40세) 12월에 朴淳에게 편지한 일과 병으로 면직되고 護軍에 제수될 때까지의 기록.
栗谷李先生年譜下 (1) 李珥의 年譜로 1576년(41세) 栗谷에 돌아간 일부터 1687년 文廟에 종사되고 문집의 續集‚ 外集‚ 別集이 완성되기까지의 기록.
搜訪人才事目 (1) 1683. 인재를 등용할 때 지켜야 할 절차 등을 밝힌 事目. 인재를 구하여 어질고 능력있는 인물을 등용하기 위해 중종 때 趙光祖가 요청한 薦擧科의 법과 程子가 논한 選士法을 참고하여 정하였음. 천거할 관원의 범위‚ 천거할 숫자‚ 薦目에 구애되지 말 것‚ 잘못 추천했을 때 連坐하는 법을 엄히 할 것‚ 천거할 만한 재주가 있는데도 죄에 빠질까 두려워하여 천거하지 않는 자에 대해 문책할 것 등 11조목의 내용.
吏曹因搜訪人才八道文 (6) 이조에서 인재를 찾는 일로 각도 관찰사에게 통보한 글. 搜訪人才節目을 알리고 監司가 아뢸 때 3등으로 구분하여 추천한 사람‚ 人品 등을 別單으로 보고할 것 등을 지시하는 내용.
上已次少陵曲江韻‚ 送申兄寅伯-晸-歸覲光山‚ 寄李彛仲‚ 寄金兄一正-佐明-安邊謫所‚ 南城晩眺寄靜之-善澂(1648)‚ 送李兄咸卿-一相-出守錦城‚ 懷李兄幼能-端相‚ 敬次先君韻寄均上人-幷引‚ 己丑立春日雪二首(1649)‚ 風雨曉聞鷄‚ 太華春雪歌‚ 送再從兄汝道-世模-下第南歸‚ 露梁送從兄與乘-世橋-上忠原‚ 懷申寅伯兄李弼卿-翊相-時棲道峯(1650)‚ 別柳弟悠久-尙運‚ 別李兄汝端-元龜‚ 將歸‚ 辛卯寒食日雪(1651)‚ 贈申兄季良-最-還往川任所‚ 新院‚ 城南漫興(1654)‚ 贈朴眞卿-安期-赴瓮津‚ 次申子晉-碩亨-丈遣懷韻‚ 挽崔安山-振海-戚丈(1655)‚ 僑居得寒疾偶吟(1656)‚ 挽權處士-師吉‚ 客夜用圃隱先生韻‚ 曉發抱川‚ 巴陵渡(1657)‚ 歸思‚ 阻雪公山示金堪輿-兌厚-二首‚ 七月十五夜翫月偶吟(1658)‚ 人有寄示遊覽自然海上之作者次韻以報二首(1659)‚ 僑居漫詠‚ 朝日‚ 初秋旣望夜(1662)‚ 江上偶吟(1663)‚ 挽韓生-世五‚ 夏間業族父丹陽公-煥-命以醫字一絶和進纔得二句旋遭喪慘不敢遂今始續貂‚ 西門石橋月夜步歸‚ 宿山谷村‚ 到從兄蓮城丙舍作‚ 待幼能兄於明月亭感作三絶‚ 楊山道中‚ 重陽月夜‚ 將歸‚ 挽宋進士-國蓍(1665)‚ 楊山感舊二首‚ 吹笛橋‚ 次李養而-之濂-詠溫泉韻‚ 抱城分路贈沈上庠-宗迪‚ 滯雨楊蓬萊山下‚ 寒食日聞李尙書-一相-兄入地雪涕有作‚ 重經松都‚ 次李星州-斗陽-丈寄示韻‚ 雨夜偶吟‚ 四月八日次崔漢卿-後亮-憶觀燈韻‚ 族父永春公-垓-經歷松都時創小閣蓮塘上名曰淸香先伯父汾西公有詩記之今行偶到此歇馬有感敬次其韻‚ 霽夕偶吟二首‚ 西城夜坐‚ 登蠶頭峯作‚ 彛仲中書見訪不遇留題一絶而去戱次其韻(1667)‚ 江樓風雨偶吟‚ 有聞‚ 挽成上舍-震昌‚ 送汝瑞兄赴慶山(1668)‚ 雨中卽景‚ 晴後外軒口號‚ 酬寄崔水部漢卿‚ 宿楊山夕夢見趙兄禹瑞翌朝馳省其墓感作一絶‚ 送鑑湖堂主人崔丈-琢-東歸(1669)‚ 曉起感懷‚ 夜作‚ 謾吟‚ 次權兄說卿-說-寄示韻(1670)‚ 金而精就礪退陶門人也聞其世居蓮城仕至諸寺正歿而從葬先塋第身後只有一庶子今亦已絶矣余適路出其墓又無表識遂感歎有作‚ 西亭晩步二首‚ 新昌客館次聽松先生手書杜律韻‚ 寄寅伯兄時以接倭官在萊山‚ 留贈主倅再從兄廈卿-世樑(1672)‚ 松厓次南郭大父韻(1673)‚ 挽李執義世卿-有相‚ 鳳頭亭別李樂甫-藼(1675)‚ 驪陽歸路‚ 臨津憶趙通川-億‚ 與洪生聖則-有龜-訪上院寺翌日歸路作‚ 重陽前夕散步‚ 重陽病吟‚ 過山壇追次白沙-李恒福-先生韻‚ 助浦悼姜粹卿-文粹‚ 寄愼仲任-景尹-三首‚ 雪後發松都‚ 渡迷津二首‚ 松都懷洪少尹國寶-錫龜-兼示其季聖則‚ 驪江道中‚ 阻雨竹山店舍‚ 過牙山王父謫寓攬涕以書二首‚ 過李相國白江-李敬輿-舊居‚ 過禿城‚ 過基谷‚ 哭金元會-澄-靈筵歸路志感二首‚ 九月旣望偶步西園次少陵登高韻是夕風雨‚ 睡覺詠懷‚ 到坡山病臥寄趙高陽-逢源-丈‚ 曉發德淵村‚ 神勒寺月夜贈李兄士常-恒-南歸‚ 挽李上庠-師命-內二首‚ 贈羅顯道-良佐-奉親還洛中‚ 中原‚ 冒雨過月溪峽‚ 具濟伯-時經-吳子順-壽昌-自首陽來訪仍與同宿金谷村閔春卿-震元-亦自龜巖至翌日敍別歸路有作却寄‚ 牛場途中‚ 安山哭朴僉知-瞰-二首‚ 到泰安洞草深不得深東北兩源悵然而歸‚ 楊江滯雨錄示權致道-尙夏‚ 挽金上舍-道凝‚ 挽孟右尹元徵-冑瑞(1679)‚ 挽洪國寶二首(1680)‚ 次兪伯圭-瑒-令公寄示韻‚ 聞李同甫-喜朝-病蘇賦此却寄‚ 挽南雲路-九萬-大夫人‚ 挽趙正-泰相‚ 挽領相女李氏婦八韻(1681)‚ 月夜偶吟‚ 懷寅伯兄二首‚ 寄趙士達-逢源-丈‚ 寄題申夷簡公祠下-幷引‚ 贈士磬二學徒-成冑昌·康世鳴(1682)‚ 沈丈-宗迪-次人字韻以示謹步申謝‚ 挽李沃溝-廷麟‚ 寄申公獻-琓-代言時遊楓岳未還‚ 挽林德涵-泳-母夫人‚ 挽李弼卿女尹氏婦(1683)‚ 謝淸風崔使君漢卿寄酒‚ 挽兪參判-瑒-夫人(1684)‚ 道中贈愼仲任‚ 題沈丈次栗谷外集卷尾‚ 送李姪久而-益壽-赴忠淸亞幕(1685)‚ 暮春訪孔潭書室贈沈丈‚ 崔以遠來訪東陽關雨少留及其辭歸書此以謝‚ 羅顯道-良佐-使君壽親縣齋諸客有詩遠徵拙句步寄‚ 挽尹忠州汝休-嘉績‚ 挽永安尉洪公-柱元-遷葬‚ 挽朴判書-長遠-夫人(1686)‚ 挽朴察訪-成阜‚ 偶到禿浦次參奉叔寄示韻(1687)‚ 挽延陽府院君李公-時白-夫人‚ 蔡進士-時鏡-寄示一絶未報遽聞其凶訃今始次韻爲挽二首‚ 過蘿菴寺懷申留守寅伯兄歸櫬‚ 挽柳兄奉事-燦然-二首(1688)‚ 翌日風雨大作‚ 白川洪使君-萬熙-歷訪溪居索別語甚勤率爾口店以贈之‚ 挽李右相仲羽-䎘‚ 挽宋生希文-晦錫-二首(1689)‚ 挽李判官夢卿-廷龍-二首‚ 挽曹上舍--二首‚ 挽兪上舍-卨言-二首(1690)‚ 次兪寧叔-得一-歸江舍寄示韻‚ 挽申坡州玉爾-汝拭-二首‚ 挽成進士-虎錫‚ 次顯導寄示菊秋壽席韻‚ 歸路與鄭眞卿-尙樸-謁五冠書院將尋紫霞洞適値眞卿疾作不遂有賦(1691)‚ 挽李僉正文翁-星齡‚ 偶作‚ 雨中見釣者‚ 挽李參奉-基-二首‚ 寄題大興楓巖書堂爲李生啇泰作‚ 挽李判書弼卿‚ 安東權生-命大-遠來相訪玆以一絶申謝‚ 挽趙都事-錫命‚ 寄李文若-觀周-二首‚ 挽楊掌令-顯望.
行到高陽辭再除司憲府掌令疏 (37) 1669. 遞職되어 돌아가다가 高陽에 이르렀는데 風憲의 직임으로 다시 부르자 신병을 들어 체직하여 줄 것을 청한 상소문.
辭承政院同副承旨疏 (38) 1682. 承宣은 비워 둘 수 없는 자리라며 신병과 모친의 병환을 들어 체직을 청한 상소문.
因犯馬之失申辭疏 (40) 1683. 親黨의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辟除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같은 품계인 줄 알고 피하지 않아 王子의 행차에 犯馬하였다며 체직을 청한 상소문.
答元聘君-斗樞 (1) 1658. 元斗樞에게 보낸 편지. 흉년을 맞아 荒政에 힘쓰기를 권하고 9월 1일 왕이 贊善 二宋(宋時烈·宋浚吉)을 召見하였다는 소식에 기대를 가진다는 내용.
答金修撰-萬均 (1) 1659. 金萬均에게 보낸 편지. 顯宗 즉위 뒤의 의절에 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幼能兄 (2) 1666.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湖西의 유생들이 李珥와 成渾의 신원을 위한 상소를 올리겠다는 논의에 대해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汝九-箕洪 (3)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自靖하겠다는 뜻을 표하고 鞏仲의 일 등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尹子仁-拯 (3) 1667. 尹拯에게 답한 편지. 庶子의 說에 대해 자신의 견해가 잘못임을 승복하고 服制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 (4)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李端相에게 領議政이 이유도 밝히지 않고 할 수 없다고만 한다는데 事勢가 어떠한지 묻고‚ 직명을 쓰지 않은 辭狀을 吏曹로 보냈다는 내용.
與李幼能 (5)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晦菴全書≫를 공부하고 있다며 漂人을 송환하는 잘못‚ 旱害에 대한 救荒 문제 등을 염려하는 내용.
答李幼能 (6)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표류한 사람들의 송환 문제를 염려하고 金尙憲 年譜를 보기를 청하는 내용.
答宋尤齋-時烈 (7) 宋時烈에게 표류한 사람들의 일과 ≪栗谷年譜≫를 교정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편지.
答李養而 (8) 1668. 宋時烈 등에게 조정에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지만 지금 상황은 나아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편지.
答李養而 (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時勢를 거론하며 나아가기를 주장한 것에 대해 孝宗 때 나아갔던 것과는 다르다며 宋時烈이 지금 나아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내용.
答李幼能 (10)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이조에서 憲官에 제수하기를 청하였다는 소식에 사양하기 위한 상소의 초고를 보내니 刪定하여 달라는 내용.
答宋尤齋 (1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벼슬에 추천되어 소장을 올려 사양하려던 중 왕이 온천에 행행하게 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구하는 내용.
與宋相國-時烈 (12)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상소에서 自處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
答李學士擇之-選 (12) 李選에게 보낸 편지. ≪栗谷年譜≫의 진행 상황 등에 대해 알리는 내용.
答尹子仁 (13) 尹拯에게 답한 편지. 왕이 온천에 行幸하는 바람에 올리지 못한 辭狀을 다시 올리기 위해 소장 등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
答南觀察使雲路 (14) 1673.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鄭斗卿의 遺藁를 간행할 규례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李同甫 (14) 167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太后服은 본래 不杖朞로 군주의 복제와 같지 않다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 (15) 尹拯에게 답한 편지.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할 수 없다는 설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
答李養而 (16) 閔愼의 代服 사건 뒤의 곡절 등에 대해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答具濟伯 (18) 1675.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物議가 다시 격해지고 있어 代服이나 개인적으로 服制를 논한 것으로 죄를 입게 될지도 몰라 여러 벗을 위하여 章牘을 抄定하고 있다는 내용.
答金士直-楺 (19) 1680. 金楺에게 답한 편지. 庚申換局 이후 변화하고 있는 정국에서의 자신의 처신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閔春卿 (19)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辭免을 청하고 있음을 밝히고 과거 공부를 하더라도 俗人들의 습속에 빠지지 말 것을 권유하는 내용.
答林學士德涵 (20) 林泳에게 답한 편지. 벼슬에 나아갔을 때의 자세와 勸講의 요체를 말함. 사우들 중 朴鐔· 鄭齊斗의 直諒함‚ 李箕洪·沈世熙의 講磨하는 힘 등을 알아 도움을 받으라는 것과 자신과 尹拯의 出處 문제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1) 宋時烈의 登對를 전후한 상황‚ 자신의 출처 등에 대해 林泳에게 답한 편지.
答林德涵 (23) 林泳에게 답한 편지. 山陵 기일이 임박한 상황에서 성밖에 도착하여 상소하고 있는 자신의 안부와 宋時烈의 동향에 대해 전하는 내용.
答泰孫姪 (23) 朴泰遜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保合하여 시절을 구하는 것과 물러나 스스로 편안해지는 것 사이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24)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朱熹가 災異에 올린 상소를 근거로 해서 올린 상소가 朝議와 맞지 않아 狼狽하게 된 것을 전하고 사직 상소의 문구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내용.
與林德涵李君輔-世弼 (25) 1682. 林泳과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안부를 전하고 朴泰輔의 소로 인해 자급이 올려질 것이라는 소식에 자신의 거취문제를 상의하는 내용.
答李君輔 (27)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로 출처 문제에 대한 내용.
答金判樞-壽興 (28)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성안에 들어가 사직을 아뢰면서 뜻을 아뢰려고 하나 병세로 보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宋尤齋 (2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尊兄 혹은 老兄이라는 칭호‚ 再拜 운운하는 말은 감당하기 어렵다며 사양하고 출처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29) 林泳에게 답한 편지로 史官이 다시 내려온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30) 林泳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여러 동지들이 힘을 합해야 하는데 潰裂이 심해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
答宋尤齋 (3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도성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아무도 저해하고 거꾸러뜨리려 할 리 없지만 인심이 무너지고 士習이 더럽혀져 시세를 잘 알고 대처하지 않으면 만회하여 바로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신은 한 번 나와서 움직여 보았으나 모두에게 무익하여 돌아왔으니 다시 나아가기 어렵다는 내용.
答尹子仁 (31) 尹拯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廣津에서 만난 일을 전함. 尹拯에게 거취를 자신과 함께 하자고 청함. 四書諺解의 補完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與宋尤齋 (32) 1683.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休致를 청했으나 만류하여 머물게 될 듯하다는 소식을 들었음을 전하고 자신도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
答金士肯-構-士直 (33) 金構와 金楺 형제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들어간다는 것을 전하는 내용.
與尹子仁 (34) 尹拯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崇陵村에 머물고 있으며 명일 忘憂里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宋時烈이 休致를 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내용.
與宋尤齋 (34)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경연에서 미진했던 것을 초본으로 올리며 의견을 구하는 내용.
答李參判弼卿 (35) 李翊相에게 답한 편지. 효종과 현종 때 權奸과 싸워 등용된 李翔이 조정에 나와서 하는 일을 보니 생각과 다르다며 그에 대한 공의가 어떤지 묻는 내용.
答李君輔 (3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休致를 還收하라고 청하는 문제에 대하여 송시열과 이야기한 것을 전하는 내용.
答金仲和-昌協 (36)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薦目 등 천거와 관련된 일을 의논하고‚ 宋時烈의 休致를 還收하는 것은 名義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다고 밝힌 내용.
與宋尤齋 (36)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이조판서의 回啓의 내용과 ≪心經釋義≫를 가져왔는데 원래 李喜朝가 문하에서 찾아 올린 것이라 하니 찾아서 보여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
與尹判書泰升-堦 (36) 尹堦에게 보낸 편지. 성균관의 泮人들이 도살하는 가게를 하면서 魚市들과 서로 다투고 있다하니 善處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宋尤齋 (3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廷議의 향배가 어찌 흘러갈지 알 수 없다며 자신은 參贊의 望 때문에 臺評을 받고 있다고 전함.
與宋尤齋 (37)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臺評이 있는데도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전함.
答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왕에게 물러가겠다고 고하고 自劾하였다는 것을 전하고‚ 袖箚의 내용은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도에 대한 것이라는 내용.
答申判書寅伯 (38) 申晸에게 답한 편지. 憲府에서 推勘하라는 엄준하고 격발된 논의가 일어나서 自劾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왕이 감당할 수 없는 禮를 더해주니 부득불 다시 사양하는 말을 아뢰어야 하겠다는 내용.
與宋尤齋 (3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묘당에서 송시열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의리를 밝힘.
答宋尤齋 (4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묘당에서 의논한 일에 대한 곡절과 李翔이 추천한 人事로 인해 일어난 문제‚ 進講할 책자의 결정 과정에 대해 해명.
與尹子仁 (40) 尹拯에게 보낸 편지. 近侍의 발자취가 계속 이어지면서 한 번 움직일 기미가 보인다는데‚ 일에는 때에 따른 의리도 있을 수 있으니 나오는 것을 잘 헤아려보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宋尤齋 (4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송시열이 還都하여 裁度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旱魃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
答金相國 (42)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나오기를 기다려 조금의 效用이라도 되기를 바란 것인데 점점 잘못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앞으로 善類를 보호하는 데 힘써 달라는 내용.
答崔汝和-錫鼎 (42)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이룬 것 없이 비방만 일고 調齊寅協하는 도리가 부족하다는 내용.
答李同甫 (43)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箚本을 읽어보니 정성스럽고 성실하여 聖學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데 비답의 말이 뜻에 차지 못하게 된 것은 金昌協 등 여러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내용.
與吳知申元徵-斗寅 (43) 吳斗寅에게 보낸 편지. 조정에서 할 만한 것이 없어 돌아왔는데 月廩이 내렸다며 월름은 宋時烈과 宋浚吉에게나 내렸던 것으로 지위나 分限으로 보아 함부로 받을 수 없다는 내용.
答吳貫之-道一 (44)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時勢와 利害에 견제되어 공정하고 화평한 도를 행하지 못한다면 물러나 自靖하는 것이 구차히 미봉하다가 바른 이치를 잃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공정하고 화평한 도리로 善處하라는 내용.
答李同甫 (4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을 침척했다하여 朴泰維가 죄를 입고 다시 4명의 학사가 송시열의 일과는 무관한데도 죄를 입었으니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 염려하고 서울 士人들의 공론에 대해 묻는 내용.
與泰維姪 (45) 朴泰維에게 보낸 편지. 유배된 곳에서 讀書하고 몸을 더욱 검칙하여 조상의 뜻을 어기지 않도록 하라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내용.
答李君輔 (4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趙持謙 등이 죄를 입은 뒤 전일 조정의 의논과 상관이 있으면서 애매하게 있을 수 없어 상소하였는데 비답이 더욱 황공하여 일이 어디까지 이를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宋尤齋 (4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상소의 글을 문제삼아 송시열과 다른 문호를 세우려한다는 비판에 대해 시호 추상‚ 裁省의 일을 해명하고‚ 자신이 물러나는 날 영의정이 장차 臺閣이 송시열을 침척하려 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분명하지 않다는 내용.
答具濟伯 (46)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있으면서 同流로서 합하면 일이 없었겠지만 臺閣이 大臣의 상소로 인하여 견책을 받는 것이 너무 무거워 부득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
答李君輔 (47)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趙持謙에 대한 말이 무엇을 위주로 한 것인지 묻고‚ 근래 方外와 門生의 소들의 분분함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며‚ 분별하기도 어려운 일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수치스럽다는 내용.
答趙大憲公擧-師錫 (47)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왕의 건강이 회복되어가는 것을 기뻐하고 東城에서 侍藥하는 소식을 들으면서 分義를 펴고 있다고 전하는 내용.
答崔漢卿 (48) 崔後亮에게 답한 편지로 자신의 거취가 편안하지 않음을 말하고‚ 왕이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도 이르지 않았으니 宋時烈과 만나는 것은 어렵겠다는 내용.
答李同甫 (48)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만나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고 서로 異見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송시열도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내용.
答李士亨-泰壽 (48)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상소에서 인용했던 왕과 大妃의 병환에 李珥가 취했던 행동에 대해 고증하고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서 해명한 내용.
與鄭士仰-齊斗 (49)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국상 뒤의 자신의 거취에 대해 밝힌 내용.
與宋尤齋 (4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慈聖에 대한 哭班이 파한 뒤의 거취를 전하고‚ 妖巫의 일은 아뢸 수 밖에 없었던 것‚ 국휼시의 哭禮 의절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柳悠久 (50)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國恤 卒哭 前에 관직에 있는 사람이 三獻의 盛祭를 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전하는 내용.
答宋尤齋 (5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거취에 대해 묻고 國恤時에 처할 예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與申叔弼-翼相 (51) 申翼相에게 보낸 편지. 城役이 완성되었다면 민력을 해치지 않도록 하면서 兵甲과 粮餉을 준비할 것을 권하고 ≪範學全編≫ 등의 교정 및 간행에 대해 알리는 내용.
與宋質夫-徵殷-別紙 (52) 1684. 宋徵殷에게 보낸 편지. ≪香洞問答≫이라 하여 전파되고 있는 것에 대해 연유를 묻고‚ 만남 당시의 경위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다시 한 번 밝힌 내용.
答李同甫 (53)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맏아들의 병환 등 안부를 전하고 체직되도록 힘써 준 것에 사례하고‚ 경연에서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해 모른다는 내용.
答李養而 (1) 1684.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낭패한 뒤의 감회를 말하고‚ 여러 사람을 調和하겠다는 설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이라고 염려하는 내용.
答金相國-壽恒 (1)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출처의 의리에 대해 말하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金益勳에 대해 경연에서 아뢴 내용과 尹拯이 成文濬 집안이 보존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에 대해 해명함. 연소배들의 지나친 의혹은 의리로써 깨우쳐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朴進士文開 (3) 朴文開에게 답한 편지. 다스림을 돕기 위한 3가지 대책에 대한 의견과 靑蘿公의 詩稿·行蹟·誌文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 (3)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상소의 ‘陰相譏議’한다는 표현에 대해 해명하고 득실과 是非에 공정한 마음과 밝은 이치로 시세에 구애되지 않고 편당하지 않은 뒤에야 자신도 다른 사람도 믿을 것인데 근래 그런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내용.
答宋質夫 (4) 1685.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태학의 상소를 진정하는데 힘쓰고 浮議에 움직이지 말라는 내용.
答鄭眞卿 (5) 1686. 鄭尙璞에게 답한 편지. 鄕約의 約正·都契長·都約正의 명칭에 대한 의견‚ 坐次 문제‚ 社倉 설치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힘.
答林德涵 (6) 林泳에게 從遊하던 사람도 자취를 끊고 혹은 호칭을 덜어내는 상황이라는 것 등을 전하는 편지.
答南相國雲路 (6)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청나라의 重罰을 오히려 왕이 홀로 당하게 된 상황을 개탄하고 잘 도모하여 왕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도록 노력해달라는 내용.
答南相國 (7)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陵廟의 일에 자신이 감히 獻議하지 못하는 事理를 설명하고 십분 참작하여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梁季通-處濟 (7) 梁處濟에게 鎭校에서 配位를 훼철하여 先聖을 배척하여 모욕하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밝힌 편지.
答金士直 (8) 金楺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서 있었던 山陵을 옮기는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힘.
答吳貫之 (9) 1688.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조정에 나아가서 취할 도리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申公獻 (9) 申琓에게 답한 편지. 吳道一과 兪得一에게 편지를 보여 자신의 뜻을 미리 알리라는 내용.
答吳貫之 (9)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李同甫 (10)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士友들의 의견을 전하며 상의함. 懷尼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崔副學汝和 (11)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超授된 뒤 자신이 감당할 재능이 없고 여러 위기가 있어 행하기 쉽지 않다는 내용.
答崔汝久-錫恒 (12) 崔錫恒에게 답한 편지. 士友들이 출사하지 말라고 하는데 최석항 형제만 나오기를 권하고 있다며‚ 出處에 어려움이 있으니 반복하여 헤아린 뒤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12)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宮庄 문제와 전일의 상소에서 宋時烈을 위하여 아뢴 말이 너무 重하여 조정이 시끄러워지게 한 것은 애석하다는 내용.
答申公獻 (13) 申琓에게 답한 편지. 쓰려는 것인지 단순히 예우한 것인지도 정해지지 않고 批旨에도 별다른 말이 없는 상황에서의 출처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 (13)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自靖하라는 의견을 이해하지만 나아가면 한 번 시험하여 쓸 뜻이 있을까 하여 상소한 것인데 왕의 뜻을 모르니 가벼이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徐君望-宗泰 (14) 徐宗泰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에 成渾에 대한 追論이 있어 편지로 그것에 대해 물었다는 내용.
答兪寧叔 (14)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거취에 대해 전하는 내용.
與徐君望 (14) 徐宗泰에게 보낸 편지. 批旨를 받고 萬言疏를 올리고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
答申公獻 (15) 申琓에게 답한 편지. 萬言疏와 새로운 상소문을 올린 뒤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申公獻 (15) 申琓에게 답한 편지. 東朝의 증세로 侍藥廳이 설치된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兪顯叔-晦一 (16)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從祀에 대한 상소도 듣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을 위한 太學 유생들의 상소가 끝내 올려졌다는 소식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
答金叔涵-載海 (17)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去就에 대한 의견에 대해 楊時 등의 出處의 예를 들어 자신의 뜻을 밝힌 내용.
答兪顯叔 (17) 兪晦一에게 諸賢의 예를 들어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與申公獻 (18) 申琓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올린 萬言疏를 베끼겠다는 청을 거절하는 내용.
答崔汝和 (1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출처와 거취에 대한 내용.
答宋德普-淳錫 (19) 宋淳錫에게 답한 편지. 慈殿의 건강도 좋지 않은 상황이라 부득불 행하고 있다는 내용.
答鄭士仰 (19)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왕이 侍藥하는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0) 林泳에게 답한 편지. 7-8차의 상소에도 체직을 허락하지 않아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士直 (20) 金楺에게 답한 편지. 7번째 상소 이후 왕의 지극한 대우와 왕의 侍藥을 들어 성에 일단 들어가 다시 사양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2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왕을 성내게 하였으니 자기 한 사람만 죄를 얻는데 그치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나라를 위해 自愛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李文瑞-奎齡 (21) 李奎齡에게 답한 편지. 宗室 문제로 인해 왕이 노하였다며 大臣과 玉堂이 請對한 뒤를 기다려 거취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1) 林泳에게 답한 편지. 이조참의 직을 師生의 의리를 들어 거절하여 반드시 해가 있을 것이라는데‚ 올린 상소가 마땅한 것이었는지 잘 헤아려 處할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
答洪內翰-重夏 (22) 洪重夏에게 답한 편지. 올린 책자와 啓箚를 史局에 보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일이 조금 안정된 뒤에 보내겠다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책임을 지고 사직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처리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비변사에서 다시 청한 뒤의 일과 太學의 상소가 올라간 뒤의 일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與崔汝和 (2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북쪽 변방에서의 행색에 대한 감회와 거취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泰初姪 (23)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여름에 拜命하여 상소한 뒤 왕의 노여움을 사서 南九萬 등은 栫棘되고 자신은 서쪽 교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
與趙相國公擧 (23)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상소로 인해 두 정승이 栫棘된 일로 인한 감회와 염려를 전하고 최선의 길을 잘 생각하여 物論을 수용할 것을 청함.
答申公獻 (24) 申琓에게 답한 편지. 아직 두 정승에 대한 일에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太學의 상소가 왕을 더욱 격하게 할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吳貫之 (25)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두 정승이 出場하기를 기다려 머물고 있는데 廟堂의 請對와 臺閣의 伏閤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외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物議가 있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내용.
與成汝中 (25) 成至善에게 보낸 편지. 李喜朝가 尹宣擧에게 妄言한 허물이 많다고 말한 것을 괴이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내용.
答林德涵 (26) 林泳에게 답한 편지. 趙師錫이 伸救하는 箚子를 올렸다는 소식에 왕의 批答을 궁금해하고 거취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兪寧叔 (26)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堂僚들이 서로 마음을 함께 하여 國事를 다스리려한다는 소식의 사실 여부를 묻는 내용.
答柳悠久 (27)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여러 사람이 힘써 왕의 분노를 돌이키고 士論을 회복할 기미가 있다는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
答趙相國 (28)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國事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지 모르겠다고 염려하고 왕의 마음을 돌리고 조정의 의논을 진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泰徵姪 (28) 朴泰徵에게 답한 편지. 선현의 규모를 회복해보고자 나아가 상소를 올렸던 것인데 대신을 栫棘시키고 패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
答尹子仁 (28) 尹拯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출처로 인한 결과‚ 史局에서 萬言疏를 보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은 일‚ 李喜朝와 懷川의 問答‚ 從享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吳貫之 (29)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왕이 開釋해주고 두 정승도 용서하기로 한 것과 崔錫鼎과 오도일이 잇달아 자리를 얻었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내용.
與尹堯佐-景勳-別紙 (30) 1689. 尹景勳에게 보낸 편지. 洪重夏가 史筆에 대비하고자 하여 1683년의 상소문 및 登對했을 때의 箚子를 청하여 나중에 올리겠다고 하였는데 홍중하가 복상 중이고 자신의 자취도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어 쉽게 올릴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
與泰輔姪 (30)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옥에서 나왔지만 楚毒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니 안심하고 몸을 잘 보전하라는 내용.
與李惺菴-壽仁 (30) 李壽仁에게 보낸 편지. 이수인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지어 보내면서 그 경위를 밝힌 내용.
答閔楊湖-嶪 (31) 行止의 義理에 대해 閔嶪에게 답한 편지.
答閔楊湖 (31) 閔嶪에게 답한 편지. 庶子의 長子를 위한 복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閔楊湖 (32) 閔嶪에게 답한 편지. 卒哭에 띠는 絰의 재료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閔楊湖 (33) 閔嶪에게 답한 편지. 상중에 傳重하는 것을 重하게 여겨 불가불 禫祭를 행할 수밖에 없다는 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
與申敎官-碩亨 (34) 申碩亨에게 보낸 편지. 李珥 등을 공격하던 이들의 계책은 대간과 筵席에서 좌절시켰지만 발언한 사람에게는 녹을 받아 봉양하려는 뜻이 꺾인 것을 위로하는 내용.
答申敎官 (34) 1655. 申碩亨에게 답한 편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公議로써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후 더욱 신중하고 절도있게 행동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敎官 (37) 1659. 申碩亨에게 답한 편지. 왕이 山林에게 위임하고 인재를 수습하는 즈음의 출처의리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與宋尤齋 (38) 1676. 宋時烈에게 李先生 原圖 등에 대한 의견을 보낸 편지.
答宋尤齋別紙 (39) 1677.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別紙로 物에 本末이 있다는 말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宋尤齋別紙 (40) 167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倪士毅가 편한 ≪四書集成≫‚ 鰲峯 熊氏의 ≪九疇解≫‚ 栗谷의 <太極問答>‚ <四書圈點>‚ <讀書口訣釋義>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
答宋尤齋 (42) 168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문집을 편집하는 일에 관한 내용.
答宋尤齋 (4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先祖의 褒贈이 어그러진 것‚ ≪範學全編≫과 ≪東儒師友錄≫ 등의 저술‚ 李珥의 ≪石潭野史≫에 대한 호칭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45) 168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문집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온 두 종류의 <太極問答> 처리 문제와 ≪心經釋義≫를 올리는 문제에 대한 내용.
與宋尤齋 (46) 1683.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송시열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致仕를 청하고도 賓客을 전처럼 引接하는 것은 輕重이 도치된 것이라며 致仕의 의리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宋尤齋 (47) 168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尼城의 선영에서 행해질 尹拯家의 장례에 가면 사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사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라고 권유하는 내용.
答宋尤齋 (48) 1686.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栗谷集≫을 편집하는 일‚ 朱熹의 遺文을 刪定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宋尤齋 (49) 1687.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두 집안이 어긋나고 격해진 상황과 物議가 자신을 亂의 본원이라고 배척하는 것을 개탄하는 내용.
與宋尤齋 (50) 168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哭班에 교묘하게 어겼다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德遠에서 長鬐로 移配되었을 때 위로하는 내용.
與愼仲任-別紙 (1) 1690. 愼景尹에게 보낸 편지로 교제할 때 面簽에 쓰는 용어와 교제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 師友의 도를 논하는 내용.
答金元會 (3) 金澄에게 답한 편지. 東西의 朋黨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분변‚ 趙憲이 상소하여 변척한 일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한 내용.
答李原州-晸 (3) 1675. 李晸에게 답한 편지. 먹을 것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고 일부만 받고 돌려보내게 된 연유 등을 밝히는 내용.
與尹泰升 (4) 1673. 尹堦에게 보낸 편지. 國事와 벗에 대한 처분 등에 대한 우울한 감회를 밝히는 내용.
答金起之別紙 (4) 1685. 金壽興에게 보낸 편지 別紙. 李珥에 立後할 사람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閔大受-鼎重 (7)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여흥민씨족보≫에 병자년에 죽은 閔仁伯의 아들 閔龍巖 일가 13명이 죽은 義烈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
答閔大受別紙 (7) 1673.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別紙. 李珥의 서원을 묘에서 옮기는 일의 편부에 대한 내용.
答閔大受 (8) 1678.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파주에 있는 李珥의 비문을 다시 撰하여 세우는 일‚ 서원을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의 경과와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내용.
答閔大受 (9)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碑文을 고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고쳐야 할 문구는 別幅으로 보내니 왕복하여 바로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
別紙 (10)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因厭棄不復就’라는 구절 등 李珥의 碑文 중 고쳐야 할 문구에 대한 의견과 그 근거를 밝힌 내용.
與李季周-端夏 (11) 1678. 李端夏에게 보낸 편지. 沈貞 등이 몰래 臺諫을 사주한 것을 師友錄에 기록하였다고 알리고 敬字의 뜻을 모은 책자를 만들어 올리니 보아달라고 청하는 내용.
與李幼能 (12) 1667.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부모의 상이 겹쳐 있을 때 虞祭와 祔祭를 치르는 순서 등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내용.
答李養而 (12) 1676.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尹拯과 만난 일 등을 전하는 내용.
答李養而 (14) 1678.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할아버지 朴東亮에 대해 100년 동안 밝히지 못했던 心事를 開釋하여 준 것을 사례하는 내용.
與尹子仁別紙 (14) 尹拯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집안의 禮를 宋時烈 등에게 물어 상의하는 문제‚ 成渾의 연보에 대한 고증‚ 鄭曄의 ≪近思錄釋疑≫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15) 1665. 尹拯에게 답한 편지. 復讎의 설에 대해 일단 의견을 수용하겠지만 뒷날 재론할지도 모르겠다는 내용.
答尹子仁 (16)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鑴의 논저에 대한 반론을 말하고 成渾과 李珥의 연보를 교정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내용.
答尹子仁 (17) 尹拯에게 답한 편지. 禮에 대한 申啓澄의 질문에 대해 의견을 묻고 ≪東儒師友錄≫의 凡例와 目錄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別紙 (19)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適子에서 適의 뜻‚ 適에서 適으로 서로 이어가야 한다는 뜻‚ 罪로서 廢한다는 것‚ 庶子가 무엇을 지칭하는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1) 尹拯에게 답한 편지. ≪家禮≫에 대해 의문을 품하는 문제‚ ≪大學≫에 대한 講學‚ 林鄕의 院議에 대한 견해‚ 李珥의 年譜 문제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 (22) 1668. 尹拯에게 보낸 편지. 아들의 冠婚禮를 위해 宋時烈이 정한 節目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고 冠服과 饌品‚ 喪祭의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내용.
與尹子仁別紙 (23) 1670. 尹拯에게 보낸 편지 別紙. 醋醬·魚肉·酒果·脯醢의 사용 여부 등 제사의 饌品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4) 尹拯에게 답한 편지. ≪師友錄≫의 편찬‚ 李珥 年譜의 改修‚ 스승을 위한 服制‚ 祭饌의 密果‚ 祠宇 등의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5) 1670. 尹拯에게 답한 편지. 養父母를 위한 복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別紙 (26) 1671.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李珥의 年譜를 교정하는 작업과 文集을 改編하여 고쳐 베끼는 작업의 진행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7) 1672.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에 대한 狀本‚ 李珥의 문집을 改編하는 일의 진행 상황을 알리고 예에 대해 再論하는 내용.
答尹子仁 (29) 尹拯에게 답한 편지. 栗谷 年譜을 對勘하고 續集과 外集 등으로 편차하는 문제에 대해 師門에 품하여 줄 것을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29) 尹拯에게 답한 편지. 李珥에 대한 文字‚ 語錄 拾遺를 연보에 붙이는 문제‚ 紫雲書院에 並享하는 문제‚ 成渾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與尹子仁 (30) 尹拯에게 보낸 편지. 狀藁의 득실에 대한 송시열과 문답한 편지 초본을 올리니 본 뒤에 마땅하게 고쳐 보냄이 어떠한가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31) 1674.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立宗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2)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 문제로 인해 講磨한 정의를 바꿀 수는 없으니 公議를 기다려 서로 힘쓰고 화평해지길 기다리라고 권유함. 그 외에 家禮標題‚ ≪魯史零言≫의 訂正‚ 國恤卒哭 이전의 제사 문제‚ 書院事迹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3)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文의 일에 대해 同志가 죽은 친구를 평하는 일과 後學이 先輩를 높이는 일이 같을 수는 없으니 華陽에 돌아가 있는 宋時烈에게 大意로 고쳐 주기를 다시 품하고 송시열이 修改해 주어 다시 紛紜한 근심이 없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
別紙 (34)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國恤 중에 사대부의 殷祭 여부‚ 宋時烈이 잘못이라는 의견과 尹宣擧에 대한 의심으로 서로 다투면 斯文의 재앙이 될 것이고 조용히 품하면 희망이 없지 않을 것이니 잘 헤아리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尹子仁 (35) 1675.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을 수정하는 일‚ ≪師友錄≫·≪理學≫ 등에 대한 편찬 작업‚ ≪心經≫에 標題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別紙 (37)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尹宣擧 墓碣에 대한 의견‚ 師友錄의 진행 상태‚ ≪朱文拾遺≫ 및 李珥의 四書·≪小學≫·≪近思錄≫ 口訣 및 四書圈點‚ 書院의 事蹟과 式例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8) 1677. 尹拯에게 답한 편지. 윤선거의 墓文 수정‚ 東鶴寺와 鐵瓮에서의 만남을 전후한 시기의 의리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 (39) 尹拯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와 스승에 대한 의리 문제와 東鶴寺에서의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윤증이 학문하여 바른 것을 지켜 先德을 떨쳐야 하지 引咎하여 자취를 끊어 自靖할 일은 아니라는 내용.
答尹子仁 (41) 尹拯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四書標記≫·≪近思錄口訣≫ 등에 대한 수습을 위해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42) 尹拯에게 답한 편지. 출처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書院의 祝辭를 보아주기를 청하고‚ 흉년의 조짐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尹子仁 (43) 1683. 尹拯에게 답한 편지. 李惟泰의 일을 거론하는 것에 반대함. 別集의 교정‚ ≪四書諺解≫의 완료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別紙 (1) 1683.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栗谷集≫ 別集에 대한 윤증의 질의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 되돌려 준 글.
答尹子仁 (2) 1683. 尹拯에게 답한 편지. 사직상소의 어구에 대해 상의하고 潘南의 祠宇를 봉안하는 제문을 부탁하는 내용.
與尹子仁 (3) 尹拯에게 보낸 편지. 妖巫의 일로 上章한 일‚ 10월 高陽에서 宋時烈을 만나 臺閣의 得失 등을 논하다가 말이 엄해져서 수습할 길이 점점 어그러졌다는 것 등을 전하는 내용.
答尹子仁 (4) 1684. 尹拯에게 답한 편지. 지난해 이후 忠原으로 이주하려던 계획을 李志逵의 叔姪과 함께 田土를 얻어 다시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
答尹子仁 (5) 尹拯에게 답한 편지. 師生의 의리에 비추어 보면 尹拯에게도 세밀하지 못한 허물이 있었으며 편지 사건은 자신에게도 不敏하게 행동한 죄가 있다는 내용.
與尹子仁 (6) 1685. 尹拯에게 보낸 편지. 狀을 지은 뒤 십여 년간 일을 彌縫하여 保合하려고 애썼으나 실패하고 師友간에 의혹을 풀기를 바랐는데 실패했다고 자책하는 내용.
與尹子仁 (7) 尹拯에게 보낸 편지. 1683년이래 붕당을 타파하려다 도리어 붕당을 만들고 師友를 보전하려다 오히려 어그러지게 하였다며 자책함. 宋時烈도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고 했다는 것에 기대하고 있다며 후회한다면 善處해보라고 부탁하는 내용.
別紙 (9) 尹拯에게 보낸 편지 別紙. 박세채가 尹拯을 해하려 한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인해 師生의 설이 퍼진 곡절과 ≪香洞問答≫의 曲折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與尹子仁 (10) 尹拯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에 대한 윤증의 태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내용.
答尹子仁 (13) 1690. 尹拯에게 답한 편지. 윤증의 편지에서 말한 일에 대해서는 다른 말들을 불러올 염려가 있어 말하지 않겠다고 밝힘. 그 외 重服의 疑禮‚ ≪六禮疑輯≫의 편찬 등에 대한 내용.
答李重賚-啓晩 (14) 1665. 李啓晩에게 답한 편지. 모친이 먼저 사망했을 때의 祔廟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彛仲 (14) 1653.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비가 갠 뒤 小園에서 놀다가 만물이 생기는 뜻을 생각하여 滿腔子의 惻隱之心을 빌어 설명한 내용.
答尹叔獜-趾完 (16) 1681.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出場 여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깊이 생각하라는 내용.
答李雲峯-翔 (16) 1684. 李翔에게 답한 편지. 윤증과의 관계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申叔弼別紙 (17) 1682. 申翼相에게 답한 편지의 별지. 李珥의 문집 續集 간행과 관련된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士安-熙靖 (18) 1690. 李熙靖에게 보낸 편지. 다른 것을 좇지 않으면 명예를 더럽히지는 않게 될 것이라며 행동할 때 이것을 미루어 생각하라는 내용.
答申聖時-啓徵 (18) 1676. 申啓徵에게 답한 편지. 李恒 門人의 행적‚ 李之濂이 보여준 禮說의 내용‚ 李惟泰의 甲寅禮說 중 의심스러운 부분‚ 柳希春의 저술이 아직 남아 있는지 등에 대해 묻는 내용.
答羅顯道 (19) 1683.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墓祭를 어디에서 지내고 合墓에서 獻爵하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羅顯道別紙 (20) 1685.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別紙. 面마다 교육시킬 사람이 없는 경우 향교에 모여 교육시키는 문제‚ 俗吏의 폐단‚ 客舍 앞에서 下馬하는 규정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成子章-文憲 (20) 1669. 成文憲에게 답하는 편지. 머물고 있는 곳에 책이 갖추어지지 않아 질문에 자세히 답할 수 없다고 전하고 文義보다 實功에 나아가도록 힘쓰라는 내용.
答李汝九 (21)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논란이 된 敬圖는 병중에 보려고 베껴 두었던 것인데 갑자기 宋時烈을 거쳐 전전하면서 이로 인해 배척을 받게 된 것이라며 허물하지 말아달라는 내용.
答李汝九 (22) 1669.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경책하는 말이 도움이 되었다고 전하고‚ 와서 지켜보면 다소 이해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며 그렇게 할 것을 권하는 내용.
與李汝九 (22) 李箕洪에게 보낸 편지. 成渾의 ≪爲學之方≫의 근거를 확인한 뒤 약간 수정하여 ≪爲學圖說≫을 만들어 別幅에 베껴 보낸다는 내용.
答李汝九 (23) 1678.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動靜을 分作하였다는 것‚ 規程을 스스로 세웠다는 설 등으로 자신을 비판한 것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李汝九 (25) 1682.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爲學之方續集≫을 ≪節要≫ 본문과 對勘하되 간략하게 하여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할 것과 趙光祖의 ≪靜菴集≫과 ≪年譜≫ 등의 일에 대한 내용.
答梁季通 (25)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예설이 횡행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口舌로 서로 다투게 될 수 있다며 高晦와 왕복하여 논쟁한 것을 경계한 내용.
答趙光甫-持謙 (26) 1684. 趙持謙에게 답한 편지. 韓泰東이 굽히지 않아 宿怨을 야기하면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내용.
答沈龍卿-壽亮 (26)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상중의 조문은 형제가 아니라면 이웃에도 가지 않는 것이라고 禮에 밝혀져 있다는 내용.
答沈龍卿 (26) 1668.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 문하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말고 허실과 경중을 잘 헤아려 종사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崔汝和 (27) 168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趙光祖의 ≪靜菴集≫ 및 ≪年譜≫의 體例를 정하는 문제‚ 명나라 초에 濮公이 고려를 정복한 절개로 樂浪侯로 봉해졌다는 기사에 대한 고증 등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 (2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朱子의 觀心法과 불교의 觀心法을 비교하고‚ ≪東儒師友錄≫을 보내니 살펴 바로잡아 달라고 청함.
答趙伯靜-仁壽 (28) 1685. 趙仁壽에게 답한 편지. 거취 문제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世熙 (29)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한번 와서 회포를 풀고 토론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與沈明仲 (29) 沈世熙에게 보낸 편지. 海州에서 근래 강학이 성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격려하고 ≪近思錄≫을 강할 때 함께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明仲 (3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妻의 喪에 누구의 이름으로 고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아들의 이름으로 고하는 것은 바른 예가 아니라는 의견을 밝힘.
答沈明仲 (30) 1675.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한 두 집의 사사로운 일로 사림의 큰 근심과 국가의 염려를 만들었다고 自省하고 심세희가 부탁한 誌文에 대해 상의.
答林德涵 (31) 1682. 林泳에게 답한 편지. 林泳의 출처에 의견을 밝히고 ≪心經≫과 ≪近思錄≫에 대한 공부를 강조.
答林德涵 (31) 1684. 林泳에게 답한 편지. 四學에서 尹拯이 李珥를 攻斥하였다하여 팔도에 通文을 돌렸다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林德涵別紙 (32) 1686.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와 스승을 위한 心喪의 복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林德涵 (33) 林泳에게 보낸 편지. 門人과 門下·門生·學生 등 호칭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 등에 대하여 의견을 밝힘.
答鄭士仰 (34) 1680.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國恤時의 제사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李伯祥-徵明 (35) 1669.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白布로 된 直領 등이 현재 행해지는 복제이니 옛 冠과 深衣를 회복하기 어렵다면 요즘 행해지는 복제를 따르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라는 내용.
答李同甫 (35) 1673.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活物이라고 표현한 구절‚ 1664년에 올린 상소의 시말 등 李端相의 碑碣을 追改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李同甫 (36) 1675.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을 위해 門生들이 訟寃하려는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힘.
與李同甫別紙 (37) 1679.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중국본 四書의 凡例‚ 宋과 元의 여러 유자들의 책‚ ≪家語≫‚ ≪洪範解≫‚ ≪南軒集≫ 文公序에 나오는 章奏가 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고증‚ 朱熹의 편지를 초록한 ≪續近思錄≫과 ≪翰墨大全≫‚ ≪栗谷年譜≫에 나오는 ≪四書小註≫ 등의 작업 진행에 대한 내용.
答任大年-元耈 (39) 1672.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張載의 설에 귀착되어 伊洛을 下位로 간주하게 될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내용.
答任大年 (40) 1678.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韓愈의 문장에 익숙하고 慈堂의 뜻을 어길 수 없어 과거 응시를 폐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任大年別紙 (41) 1690.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民風과 習俗이 다른 북쪽에서 사람들과 웃고 해학하는 태만함이 보인다며 학문에 힘쓰고‚ 政事에 유념할 것을 충고하는 내용.
與閔春卿別紙 (41) 1683. 閔震元에게 보낸 편지. 李滉의 ≪退溪先生語錄≫의 편찬 여부‚ 門人錄의 존재 여부‚ 예안과 안동일대에 <洪範>이 소장되어 있는지 등을 알아봐 줄 것을 청하는 내용.
答金士肯士直 (43) 1680. 金構와 金楺에게 답한 편지. 紫雲書院의 비문을 閔鼎重 등과 상의하는 문제‚ 文集을 고치는 일에 대한 내용.
別紙 (43) 金構와 金楺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紫雲書院의 비문 중 入山 사실 등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46) 1683. 金楺에게 男主가 없는 뒤에야 女主를 세우는 것이고 아버지의 형제와 조카가 모두 男主가 될 수 있으니 우선 伯氏로 題主를 삼으라고 답한 편지.
答金士直 (47) 金楺에게 ≪朱子語類≫에 濮王에 대한 의론이 있지만 補論을 더해 삼가는 도로 삼고자 한다고 답한 편지.
答朴一和-尙淳 (47) 1677.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국가의 禁制를 무릅쓰고 直論하겠다는 것에 대해 門人과는 다르니 분수를 지켜 독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朴一和 (47) 1691.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나이 60이 넘어 기운이 쇠해 다른 집안의 문자를 지어주기 어렵다고 거절하는 내용.
答宋質夫 (1) 1690.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自警編≫을 정돈하는 것과 歷代의 史論을 商確하는 것을 도와줄 것을 청하고 尹拯의 상소 중 尹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朴大叔 (1) 1690. 朴鐔에게 보낸 편지. 鄭齊斗에게 陽明의 병통이 있으니 程朱의 학문으로 조용히 깨우치라는 내용.
答權季文-尙游 (2) 1678. 태극의 全體가 각기 一物 속에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해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3) 1680.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여자의 상에 主喪하는 일은 禮經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適庶와 同宮이냐 異宮을 논하지 말고 아버지에게 주상을 하도록 하라는 내용.
答李君輔 (3) 1683.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承重한 사람의 처의 복제에 대한 의견과 宋時烈이 소명을 받아 나오는 것을 이세필이 홀로 근심하는 것에 대한 의견.
答李壽翁 (4) 1680. 돌아가며 행하고 主祭를 내지 않는 일의 타당성 여부와 承重服 중의 時祀 등의 祭禮에 대해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答李士亨 (4) 1688. 國恤이 있을 때의 忌祭 여부‚ ≪二書要解≫ 등의 校讎‚ 독서와 독서 후의 토론 방법 등에 대해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答李士亨 (5) 1690.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禮經≫에서는 大宗 및 大夫외에는 立後하지 않는데 요새는 支子와 遠族도 반드시 繼後함은 개탄스럽지만 정자와 주자 역시 막지 않았고 오늘날에는 5服 안에 들어 있는 이가 없어도 모두 立後하고 있으니 홀로 옛 뜻을 따라 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
答李士亨 (5)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立後 문제의 근거에 대해 고증하고 입후할 이를 정하는 문제는 ≪大典≫을 위주로 하되 동종이 없으면 遠宗에서 입후한 예도 있으니 상의하여 정하라는 내용.
答李士亨 (6) 169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大學≫의 格致와 ≪小學≫이 학문의 근본임을 모르는 폐단을 지적하고 ≪擊蒙要訣≫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긴절한 공부부터 하여 忠信篤敬한 뒤에 경전을 읽고 의리를 구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宋叙九別紙 (7) 1681. 宋疇錫에게 답한 편지 別紙. ≪栗谷續集≫과 ≪外集≫ 등의 간행에 대한 내용.
答金仲和 (8) 1682.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主를 세우지 않고 사당에 들어가면 先塋에 告한다’는 것의 실행 여부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金仲和 (8) 1684.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國恤 初喪에는 詩를 짓지 않았던 전례를 들어 김창협 동생에 대한 挽辭를 거절하는 내용.
與李子文-東郁 (8) 1683. 李東郁에게 보낸 편지. 국경으로 나가게 된 것 등에 대해 안부를 전하는 내용.
答閔彦暉 (9) 1685.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續錄≫이나 ≪晦菴本錄≫의 첨입‚ ≪疑禮類輯≫을 大體로 하고 ≪通典≫·≪五先生禮說≫·≪東儒禮書答問≫을 합해 책을 만든 일‚ 재해로 인한 求言에 誠字로 답한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權質甫-益文 (10) 1681. 아내가 남편을 제사하는 것과 제사할 때 顯辟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 등에 대해 權益文에게 답한 편지.
答羅仁卿-斗甲 (10) 1690.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林泳의 편지 등을 통해 들은 사우 門人들의 학문과 안부를 전하고 문장에만 힘쓰는 폐단 등을 염려하는 내용.
答羅仁卿 (11)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士友들의 안부와 讀書窮理 공부의 부족‚ 湖路의 기근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李進伯-漸 (11) 1687. 朔祭 등 유배지에서의 居喪 문제 등에 대해 李漸에게 답한 편지.
答沈生 (12) 1691. 沈에게 답한 편지로 슬픔 중에 공부하는 것을 위로하고 ≪大學或問≫ 등을 공부할 것을 권하는 내용.
答鄭君啓-世沃 (12) 1690. 主喪할 남자가 없는 喪에서 題主의 호칭 등에 대해 鄭世沃에게 답한 편지.
答泰尙姪 (12) 1684. 족보 문제로 인한 비방에 대해 조카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答泰初姪 (13) 1689. 조카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士元의 무덤을 지날 때 슬퍼서 눈물이 나왔다는 내용.
答泰吉姪 (13) 1680. 조카 朴泰吉에게 답한 편지. 더운 날씨 중의 服喪을 위로하고 支子에 대한 제사를 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답한 내용.
答具濟伯問-朱書節要 (13) 1664. ≪朱書節要≫의 <曹晉叔書>에 ‘論劉共父到闕’이란 구절이 산삭된 일 등 ≪朱書節要≫에 대한 具時經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景能-萬增-問 (14) 1662. <太極圖>에서 ‘無極而太極’에 대한 諺解‚ ‘各一其性’이란 말의 뜻‚ 陰陽과 事物의 始終 등과 ≪家禮≫의 祔祭 註에 대한 해석 등에 대한 金萬增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元-萬春-問-祭祀 (15) 1670. 主婦가 亞獻하는 경우 四拜‚ 祭酒 獻酌 여부 등 祭祀에 관한 李萬春의 질문에 답한 글.
答成子章問 (16) 1660. 조부모의 喪에 袒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男女의 嫁娶의 절목 등에 대하여 成文憲에게 답한 글.
答成子章問-近思錄 (16) 1661. ≪近思錄≫의 ‘無斁’ ‘長貳’ ‘近貴에게 예를 더한다’는 말의 뜻 등에 대하여 成文憲에게 답한 글.
答成子章問-家禮 (16) 1669. 旁親에 후사가 없을 때의 班祔‚ 親姻에서 姻의 범위‚ 負笈이라는 말의 뜻 등 ≪家禮≫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汝九問-學 (18)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邵雍의 ‘心은 性의 郛郭이요 太極이다’는 말의 뜻‚ 朱熹의 ‘心은 사람의 神明’ ‘심은 음양이요 性은 太極’이라는 말의 뜻‚ ≪大學≫ 明明德에서 明字와 物格에서 格字의 뜻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孟子 (19) 1670. <梁惠王> 首章 魏侯의 이름자의 音을 묻는 것을 비롯한 ≪孟子≫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汝九問-論語 (1) 武王의 德에 대한 평가‚ <鄕黨>에 보이는 성인의 氣象과 行事‚ 子夏가 말한 ‘仕優學優’ 설의 의미 등 ≪論語≫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望-東耈-問-喪禮 (3) 1682.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冠을 벗어야 하는 근거‚ 襲‚ 靈座‚ 제사할 때 윤달의 처리‚ 柩衣‚ 소생이 없는 죽은 妻의 부모상에 대한 복제 등에 대한 내용.
答梁季通問 (4) ≪喪禮備要≫의 祠堂제도‚ 明衣‚ 旁親의 服‚ 庶子로 후사가 된 사람의 외조부에 대한 복‚ 계모의 부모 등을 위한 복‚ 明器의 便房‚ 辭神‚ 신주를 받들고 돌아왔을 때의 절차 등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小學 (7) 1664. ‘知思’ 두 글자의 聲音 등 ≪小學≫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小學 (10) 忠君을 말하지 않은 이유‚ 道가 하나라는 말과 元亨利貞의 관계‚ 仁義禮智의 四德‚ 四端과 七情‚ ‘仁義禮智의 性을 기른다’는 말의 의미 등 ≪小學≫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近思錄 (14) 1666. 形而上에서 ‘形’字의 의미‚ ‘하늘이 水火木金土를 낳는다’는 말‚ ‘五行이 각각 그 性이 하나씩 있다’는 말 등 ≪近思錄≫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文叔-奎瑞-問-喪禮 (15) ‘正服이 불변하다’는 설의 의미 등 喪禮에 대한 崔奎瑞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文叔問 (15) 私喪의 再期가 지난 뒤 君喪의 복이 남아 있을 때 복색‚ 집안에 庶母와 妻가 있을 때의 복을 마치는 순서‚ 國恤 卒哭 전에 忌祭와 墓祭 등을 행할 것인가의 여부 등에 관한 崔奎瑞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孟子 (17) 1669. ‘석 달간 왕이 없으면 조문한다’ 할 때 굳이 3개월인 이유 등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孟子 (17) 1670. 去와 徙의 뜻‚ 舜이 섭정한 시기의 나이에 대한 고증 등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小學 (18) 士相見禮의 註에 대한 해석‚ 아버지가 부를 때의 행동 등 ≪小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小學 (19) 習과 性이 이루어진다는 말의 의미 등 ≪小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大學 (20) 1675. 序에 나오는 ‘天降生民’의 뜻‚ 책을 만들 때 ‘采而輯之’한다는 말의 의미 등 ≪大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中庸 (21) 1682. ≪中庸≫의 番陽李氏‚ 蒙齋袁氏‚ 仁壽李氏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祭儀 (22) 1691. 凡拜와 俠拜의 의미 등 祭儀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彦章-鉦-問-大學 (22) 1673. 大人이 지칭하는 것‚ 明德이 性情을 통섭하는지 여부 등 ≪大學≫에 대한 鄭鉦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俔問-近思錄 (24) 1672. ‘釋迦가 恍惚한 사이에 心性의 그림자를 보았지만 그 속은 도무지 보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 등 ≪近思錄≫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小學 (24) 1676. ‘德崇業廣’의 의미‚ ‘女事를 배워 衣服을 바친다’는 말의 뜻 등 ≪小學≫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小學 (28) 1673. ≪小學集註≫의 明父子之親과 明君臣之義‚ 明夫婦有別‚ 明朋友之交‚ 明長幼之序 등의 내용 및 分節‚ 句讀 등 ≪小學≫에 대한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近思錄 (35) 1676. ≪近思錄≫ 言箴의 註에 나오는 ‘發’字의 뜻을 묻는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仲固裁問-小學 (35) 1676. ≪小學≫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 本註 대신 栗谷先生本으로 소학을 읽는 것이 좋은지를 비롯하여 소학에 대한 내용.
答金仲固問-喪禮 (41) 1684.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3개월 뒤 除服할 때의 儀節에 대해 4개월째 되는 朔에 자리를 베풀고 곡한 뒤 벗으라고 답한 내용.
答金仲固問-喪禮 (41) 1691. 麻腰絰과 葛絰을 양쪽 정강이 사이에서 서로 교차하게 하는 이유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大學 (41) ≪小學≫에 대해 序文이나 或問에 자세히 설명한 이유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孟子 (41) 1680. ≪孟子≫의 ‘曰文王何可當也’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猶龍-之老-問-喪禮 (42) 1672. 追贈받은 선조에게 焚黃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題主를 고치기 위해 고하는 말에 대한 李之老의 질문에 답한 글.
答吳子順問-家禮 (42) 1675. ≪家禮≫에 대한 吳遂昌의 질문에 답한 글. 劉氏孩孫과 劉氏璋이 누구인지‚ ‘角黍’는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朴一和問-小學 (43) 1675. 三不去할 것이 있는 사람이 七去之惡이 있을 경우의 처치 등과 ≪小學≫에 대한 朴尙淳의 질문에 답한 글.
答姜叔重-錫朋-問-詩 (1) ≪詩經≫<大雅><生民>의 旣醉의 集傳의 註에 대한 의문 등 ≪詩經≫에 대한 姜錫朋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慶由-纘輝-再問-大學 (1) 1676. ≪大學≫ 序에 대한 小註의 禮에 대한 설명‚ 氣質의 淸濁과 粹駁 등의 문제에 대한 鄭纘輝의 질문에 답한 글.
答宋質夫問-理學通錄 (2) 1676. 陳膚仲書의 ‘招拳惹踢’의 讀音과 字解 등 ≪理學通錄≫에 대한 宋徵殷의 질문에 답한 글.
答宋質夫問-國恤禮 (4) 1688. 國恤 卒哭 전의 練祥 의절 등 國恤禮에 대한 宋徵殷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伯瑞-龜章-問 (4) 1675. ≪大學≫의 明德을 心德으로 볼 수 있는지‚ 知止章의 知의 뜻‚ 物格章의 意 등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伯瑞問-近思錄 (6) 程頤의 ‘밝지 않으면 움직여 갈 곳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면 밝은 것이 쓸 데가 없다’는 말에서 明이 지칭하는 것 등 ≪近思錄≫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叔涵問-喪禮 (6) 1681. 出喪한 뒤에 嫡子가 다른 곳에 있다가 하루 뒤에 비로소 부고를 들었을 때 小祥과 變除할 때의 기일 산정 원칙 등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雲卿-志逵-問-喪禮 (7) 1689. 喪禮에 대한 李志逵의 질문에 답한 글. 几를 撤하기 전에 遷葬할 때의 의절‚ 宗子와 함께 살지 않는 支子의 妻가 죽었을 때의 의절‚ 支子가 妻를 위해 祭廳을 만드는 것‚ 제사에서 辭神의 절차‚ 前后室을 부친의 神主에 배향하는 일‚ 喪을 당한 뒤의 後娶‚ 아버지 계실 때 모친상 禫祭 후 복색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獻-世璞-問-昏禮 (10) 1683. 昏禮에 대한 李世璞의 질문에 답한 글. 宗子가 有故일 때의 昏主‚ 宗子가 다른 곳에 살 때의 祖禰의 사당 告辭‚ 사위가 부인의 부모 및 친족들을 뵐 때 사당에 고하는 절차‚ 바로 親迎하기 어려운데 사위가 부인의 부모와 相見하는 것도 괜찮은가 하는 등의 내용.
答李君獻問-喪禮 (12) 1688. 喪禮에 대한 李世璞의 질문에 답한 글. 成服을 하지 못했을 때 練祥의 月數를 계산하는 법‚ 부고를 듣는 즉시 성복한다는 구절과 4일 만에 성복하는 구절이 모순되는가‚ 忌日 지난 뒤 祥祭 전의 朝夕 上食의 시행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李泰而-行泰-問-冠禮 (13) 1686. 冠禮에서 巾을 받는다는 글이 없이 贊者가 건을 가지고 꿇어앉아 나아간다고 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 그때 冠弁도 함께 가지고 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李行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泰而問-小學 (13) 1688. ≪小學≫에 대한 李行泰의 질문에 답한 글. ‘遊居有常’에서 ‘居’의 의미‚ 첫닭울음 뒤의 행동 순서‚ 沃盥의 예‚ 潄潄口를 潄口라고 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李泰而問-擊蒙要訣 (14) 1691. ≪擊蒙要訣≫과 ≪家禮≫의 墓祭와 朔望祭 의절 차이‚ 朔望의 진설‚ 時祭를 사당에서 행하는 문제‚ 寒食이 俗節에 들어 있지 않은 이유‚ 제사에 初獻만 행하라고 한 이유‚ 祭饌에서 醋菜의 菜가 지칭한 것‚ 望哭할 때의 設位‚ 望柱石의 의미‚ 본생부모의 상에 대한 慰狀의 표현 등 李行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仁甫-時春-問-國恤禮 (16) 1680. 國恤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服喪 중 國恤을 당하여 成服할 때의 복색‚ 成服 뒤 朝夕上食을 회복했을 때 祭饌‚ 집에 있을 때는 私服을‚ 밖에 나와서는 君服을 입는 것은 어떠한가 등의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17) 1680.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國恤 때 개인의 喪祭禮‚ ≪五禮儀≫의 大中小祀가 지칭하는 것‚ 土神에 대한 제사 복색과 절차‚ 柩衣제도‚ 反哭할 때 말과 교자를 사용하는 근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0) 1680.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靈床을 철한 뒤 復衣의 위치‚ 시집간 딸이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조문받는 의절‚ 딸이 시집에 돌아간 뒤의 의복과 음식‚ 先塋에 祔葬할 때 祖先에 고하는 절차‚ 朝祖의 祖의 뜻‚ 反哭의 의절‚ 茅莎의 禮‚ 玄酒로 설하고 不斟하는 이유‚ 사당을 세울 신주의 祔祭 여부‚ 계모에 대한 출가한 딸의 복제‚ 遷移한 長房의 神主를 처리하는 방법‚ 合葬의 葬法‚ 庶孫의 所生母에 대한 복제 등의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4) 1681.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출계한 형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의 喪主‚ 權葬의 의리‚ 朝祖의 禮‚ 伯父가 禰廟일 때 伯母의 祔廟‚ 어머니의 조카인 伯母를 一家에 几筵을 설할 때 祭奠의 선후‚ 衰絰로 出入하는 문제‚ 상중에 친구의 죽음을 당했을 때의 의절‚ 친척과 친구를 길에서 만났을 때의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7)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練祭에 負版辟領衰를 없앤다는 의미‚ 練祭 때 婦人의 복색‚ 가난하여 옷을 바꿀 수 없을 때의 조처‚ 남편의 變除 절목‚ 練祭의 祝辭‚ 虞祭와 祥祭 때의 參神 절차에 있어서 아들과 남편의 차이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9)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어머니의 心喪 중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의 복색‚ 어머니를 할아버지 사당에 祔廟하는 문제‚ 출계한 뒤 후손이 없는 형의 묘를 고치는 일‚ 시어머니 상 중 남편을 改葬할 때의 복색‚ 重服의 복색‚ ‘重服 중 새로운 죽음이 있으면 成服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31) 1683.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婦人의 首絰‚ 腰絰‚ 醋楪과 醋菜‚ 三鼎과 五鼎‚ 부모상 중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의 의절‚ 親知의 상에 편지로 위로하는 문제‚ 廬次의 진설‚ 시어머니 상과 本親의 상이 겹칠 때의 의절 등의 내용.
答李仁甫問 (32) 1684. 李時春의 질문에 답한 글. 3년 내 忌祭에 1獻만 한다는 말의 뜻‚ 祥祭를 略行하려는 경우의 讀祝 여부‚ 祥祭 뒤 禫祭 전의 조문에 대한 대처 방법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 (34) 1684. 李時春의 질문에 답한 글. 國恤禮時 개인 제사‚ 節祀의 의리와 儀節‚ 大祥 때의 복색‚ 大祥과 禫祭의 祝文式‚ 사당을 새로 세울 支子를 임시로 할아버지 사당에 祔祭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士秀-挺英-問-禮 (36) 1679. 禮에 대한 李挺英의 질문에 답한 글. 여자의 상복을 정하는 의리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士秀問-喪禮 (38) 1688. 喪禮에 대한 李挺英의 질문에 답한 글. 國恤時의 三虞祭·卒哭祭·祔祭‚ 죽은 동생의 상에 아버지가 主祭할 때의 題主 호칭‚ 국휼 때 사대부가의 返魂儀物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問-大學 (39) 1687. ≪大學≫에서 仁과 愛의 관계‚ 慮와 思의 의미 등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壽翁問-喪禮 (41) 1680. 喪禮에 대한 李世龜의 질문에 답한 글. 朝夕上食과 朔望奠을 동시에 거행하는 문제‚ 靈座 交倚를 비워 둘 것인지 여부‚ 할머니의 忌祭를 支子가 돌아가며 행할 때의 獻爵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問 (42) 1682. 李世龜의 질문에 답한 글. 喪中의 山神祭 의절‚ ≪魯史零言≫의 해석‚ 家禮의 晨謁과 祭禰에 대한 규정이 刪定된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李武叔-彦緯-問-喪禮 (44) 1681. 喪禮에 대한 李彦緯의 질문에 답한 글. 齊衰의 練衣와 朞服한 사람의 복색‚ 출가한 여자의 除服 의절‚ 祔祭를 大祥 뒤로 옮기는 문제‚ 主祭 부재중의 練祭 祝文‚ 心喪 중인 사람의 墓次에서의 哭拜 여부‚ 상례 중 친척을 相見할 때의 의절‚ 모친을 위한 心喪 중 禫祭의 복색‚ 뵙지 못한 조부모 기일의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李季章-世瑍-問-喪禮 (45) 1691. 喪禮에 대한 李世瑍의 질문에 답한 글. 두 형의 상이 이어졌을 때 먼저 죽은 형 묘 옆에 맏형을 장사지낼 때도 先墓에 고하는 절차를 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고할 때의 題主‚ 祝辭에 대한 내용.
答閔秀卿-采萬-問-家禮 (1) 1682. 喪중의 朝夕哭 의절‚ 几筵에서의 儀節‚ 어머니를 장사지내면서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에 합장할 때의 題主 등 家禮에 대한 閔采萬의 질문에 답한 글.
答兪寧叔問-國恤禮 (2) 1683. 國恤禮에 대한 兪得一의 질문에 답한 글. 국휼 중의 墓祭와 忌祭‚ 朔望奠과 薦新의 의절‚ 3개월 된 親喪의 장례를 國葬 뒤로 미루어야 하는지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子懷-弘福-問-喪禮 (4) 1691. 喪禮에 대한 金弘福의 질문에 답한 글. 次子가 出繼하여 죽은 형의 후사가 되었을 때의 복제와 호칭‚ 제사시의 祝文 및 題主‚ 朝祖 여부‚ 別居하는 경우 장사 전의 家廟 제사 여부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權質甫-益文-問 (6) 1685. ≪論語≫<八佾>篇의 ‘成事不說 遂事不諫’이라는 구절의 의미와 諺解‚ <大學序>의 分節 등에 대한 權益文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漢臣-是翁-問-禮 (7) 1688. ≪栗谷先生集≫ 말단의 <宋龜峯答書>의 辨說 내용에 대한 崔是翁의 질문에 답한 글.
答柳道卿-貴三-問-小學 (8) 1688. ≪小學≫에 대한 柳貴三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이 지칭하는 것‚ 六德의 순서‚ 六樂·五射·五御가 지칭하는 것‚ 鬌가 무엇인가‚ 객과 主人이 각각 먼저 절하는 경우‚ <實明倫>에서 朋友간의 믿음을 말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柳道卿問-家禮 (12) 1690. 喪服啚旁註에 대한 金長生의 해설의 정당성 여부‚ 外畢의 뜻‚ ‘袂袖口’라는 말의 타당성 여부‚ 括髮免布의 의미‚ ‘齊衰以下는 袒免한다’는 구절의 의미‚ ‘去冠及上服’의 해석‚ 三日杖과 五日杖 등 杖制의 차이‚ 九族의 범위‚ 讀祝할 때의 위치‚ 낮 제사에서의 초 사용 여부‚ 侑食의 의절‚ 一食九飯에서 九飯의 의미 등 ≪家禮≫에 대한 柳貴三의 질문에 답한 글.
答高益之-益謙-問-小學 (17) 1690. ≪小學≫에 대한 高益謙의 질문에 답한 글. ‘旬月에 소학 공부를 마친다’고 할 때의 旬月의 의미‚ 四拜의 근거‚ 婢妾의 의미‚ 三不去와 七去가 중복될 때의 처리‚ 士冠禮에 사용되는 冠의 의미‚ 中人之性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宋文叔-奎炳-問-喪禮 (21) 1685. 喪禮에 대한 宋奎炳의 질문에 답한 글. 관직이 없는 자나 성인이 아닌 자의 銘旌에 쓸 칭호에 대한 내용.
答權以文-博-問-小學 (21) 1686. ≪小學≫에 대한 權博의 질문에 답한 글. 立敎에서 ‘밤에 장님으로 하여금 詩를 읽게 한다’는 구절의 의미‚ 年數와 학문의 단계‚ 塾·庠·序·學의 의의‚ 6德의 순서‚ 8刑의 순서‚ ‘顔色을 整齊한다’는 말의 뜻‚ 君臣이하에 대해서 소략한 까닭‚ 자제에 대한 훈계 방법‚ 나무 아래 危坐하는 것의 의미 등에 관한 내용.
答申伯武-世雄-問-小學 (31) 1690. ≪小學≫에 대한 申世雄의 질문에 답한 글. 朋友之交에서 ‘交’字를 쓴 이유‚ 陳氏가 程子의 主敬공부로 소학을 보충한다고 한 이유‚ 子婦의 朝謁 시기‚ 通論에서 붕우간의 사귐이 자세하지 않은 이유‚ 立敎라 하고 立學이라 표현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南幼安-磐-問-改葬 (36) 1686. 遷葬할 때의 복색‚ 哭婢의 수행 여부 등 改葬하는 禮에 대한 南磐의 질문에 답한 글.
答徐生-宗積-問-喪禮 (36) 1687. 喪禮에 대한 徐宗積의 질문에 답한 글. 服喪 중의 練祭와 祥祭의 실행 여부 및 祭饌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洪士式-重揩-問-祭禮 (37) 1686. 忌祀에 三獻하는 일의 의미 등 祭禮에 대한 洪重揩의 질문에 답한 글.
答洪士式問-祭禮 (37) 1688. 發靷 전에 사망한 이의 어버이 기일을 만났을 때의 祭奠‚ 할머니의 再忌日에 妻에 대한 朝夕上食 여부‚ 秋夕의 축문‚ 죽은 이의 생일과 先忌가 만났을 때의 祭饌 등 祭禮에 대한 洪重揩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生擇之問-喪禮 (39) 1681. 上食에서의 술 사용 여부‚ 진설하는 순서‚ 상황에 따른 祝辭의 措語 문제 등 喪禮에 대한 梁擇之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生時鎬問 (39) 1668. 蔡時鎬의 물음에 답한 글. 七星板을 쓰지 못했던 闕禮에 대한 처리문제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生孝閔問-禮 (40) 1674. 李孝閔에게 답한 글.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아들이 없어 자신의 아들을 문중의 뜻에 따라 伯父의 뒤를 잇게 하고 禮曹에 呈文하지는 못한 상황에서 모친상을 당했을 때의 예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生涑問-喪禮 (41) 1686. 돌아가신 아버지의 初朞와 5대조의 忌祀가 겹쳤을 때의 예를 행하는 순서와 의절 등 喪禮에 대한 李涑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儀卿-羽成-問-祭禮 (42) 1680. 祭禮에 대한 李羽成의 질문에 답한 글. 죽은 부인에 대한 服 중의 사당 제사 여부에 대한 내용.
答錦昌姪問-祭禮 (43) 1686. 大祥 뒤 祔廟하기 전에 祠堂에 고하는 날짜와 의절 및 告辭‚ 班祔한 神主를 遞遷할 때의 祝辭 등에 대한 朴泰定의 질문에 답한 글.
伊洛淵源圖 (1) 남송 이후 원말까지 주자학의 계통을 그림으로 정리해 놓은 것. 周敦頤에서 程子와 朱熹를 거쳐 朱丹溪 등에 이르는 것을 설명. 특히 주희의 연원을 程頤가 아닌 程顥에서 楊時와 李侗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論敬提要 (2) 1667. 敬에 대한 제반 논의들을 모은 글. ≪大學或問≫에서 主一無適을 위주로 하는 持敬에 대한 논의의 요지를 얻고 李之濂 등과의 토론과 고증을 거쳐 朱熹·趙光祖·李滉·李珥 등의 敬에 대한 논의를 초록하여 놓은 글.
明道選士說 (14) 程顥가 논한 學校를 짓고 師儒를 높이고 선비를 취한다는 논의를 바탕으로 周禮 이래의 선비 선발과 학교 제도의 관계 등에 대하여 논한 내용.
柳道卿字說 (16) 柳貴三의 원래 이름은 台三이고 字는 公輔였는데‚ 同宗 중에 같은 이름이 이미 있다하여 이름을 貴三으로‚ 자를 道卿으로 고치게 되었다며 이름과 자를 바꾼 경위와 군자의 도 중 가장 귀한 용모와 안색‚ 언어 등 3가지를 깊이 체득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記白沙先生傳畵事 (16) 李恒福이 金瑬에게 인조가 그린 그림을 전해 주며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추대하라고 한 뒤 인조가 비를 피하여 김류의 집에 들르면서 인연이 되어 반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는 내용.
記綿谷葬山事 (19) 1691. 綿谷의 지세와 장사 지낸 곳의 風水 및 金川에 이주하여 장지를 정하며 門人들과 함께 書堂을 짓게 된 전말을 기록한 내용.
奇高峯四七後說辨 (23) 奇大升의 四七後說에 대해 논변한 글. 孟子가 말한 四端의 擴充을 理의 發로 볼 수 있고 七情의 요약을 氣의 發로 볼 수 있다며 四端七情을 理氣로 分屬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
張谿谷駁玄繩編辨 (25) 張維의 玄繩編에 반박하여 논변한 글로 性情과 動靜의 관계‚ 善惡과 氣의 관계에 대한 내용.
退溪文集記疑疑義 (27) 1683. 李滉의 ≪退溪文集≫을 읽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각 板 별로 찾아내어 의문점을 기록하고 풀이한 글.
栗谷先生年譜考證一 (1) 1668. ≪栗谷先生年譜≫에 대한 考證. 尹宣擧와 宋時烈의 위임을 받아 문집이나 日記와 서로 다른 것 등 잘못되거나 빠진 것 등을 추가하거나 바로잡아 고증한 내용.
栗谷先生年譜考證二-答尹子仁 (38) ≪栗谷先生年譜≫에 대해 考證한 글. 尹拯의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힌 글로 윤증의 질문과 박세채의 답이 함께 실려 있다.
栗谷先生年譜考證三-答尹子仁 (46) ≪栗谷先生年譜≫에 대해 考證한 글. 尹拯에게 왕복하며 윤증의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힌 글로 박세채의 답만 실려 있다.
魯史零言凡例 (51) 1674. ≪魯史零言≫의 凡例. 傳文과 外傳 처리 방법‚ 刪節‚ 年數와 人名 정돈법‚ ≪魯史零言≫이라는 書名의 뜻 등에 대한 내용.
修栗谷先生四書分註取舍凡例 (54) 李珥의 ≪四書分註≫를 取捨하여 수정하는 범례. 취사할 때의 표기 원칙‚ 李珥의 圈點 여부에 따른 책 별 표기의 차이‚ 취사의 원칙 등에 대한 내용.
關西昏喪契約束 (56) 1686. ≪關西昏喪契≫ 규약의 조목. ≪文公家禮≫를 대체로 삼을 것‚ 절목 講定의 이유‚ 昏喪 요절에 대한 講習‚ 禮服과 禮器의 공동 사용‚ ≪喪禮備要≫의 이용‚ 책벌과 상호부조 등에 대한 내용.
魏晉 (1) 1663. 魏晋에 대한 사론. 漢이 쇠하는 것을 틈타 천자를 위협하고 아들에게 簒逆을 가르친 曹操와 그들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국권을 장악한 司馬昭 등이 결국 五胡에게 능멸을 당하고 신하된 자들의 好利가 그치지 않는 단서를 열었다는 내용.
送從祖兄汝道歸榮湖南序 (2) 1654. 朴世模가 朴紹와 朴東說의 뒤를 이어 장원이 된 것을 칭송하고 덕을 닦아 두 할아버지의 풍모를 이을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
送趙通川赴郡序 (3) 趙億이 땅이 척박하고 백성도 적은 通川의 수령으로 부임해가는 것을 전송하는 글로 아름다운 경치 등을 들어 위로하고 훌륭한 정사를 펼치라고 당부하는 내용.
楊江雜詠序 (5) 1681. 李重基·李厚基·李行健·李行遠·李行進 등이 楊江에서 唱酬한 ≪楊江雜詠≫ 서문. 외할아버지인 申欽‚ 從祖인 朴東說 등과의 관계‚ 이중기 등의 생애를 간략하게 밝히고 증손 李徵明의 요청에 따라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내용.
寄贈李汝常序 (7) 李珥의 從玄孫인 李汝常에게 보낸 글로 程子가 말한 文章과 訓詁의 학문이 科擧를 위한 학문으로 바뀌어 근래 京華의 사족들이 誦業을 꺼리는 폐단이 심해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儒者의 학문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는 내용.
孤竹詩集後叙 (9) 1683. 崔慶昌의 시문집인 ≪孤竹詩集≫의 後叙. 白光勳과 함께 梁應鼎과 李後白의 문하에서 배워 八文章 혹은 二十八宿로 일컬어졌던 인물로 활쏘기와 書法‚ 玉簫의 음률에도 능했던 것과 증손 崔碩英의 부탁으로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글
韓山知足堂記 (12) 1664. 韓山에 있는 權讓의 서당인 知足堂의 記文. 권양이 韓山에 복거하면서 지족당이라는 당명을 지은 경위와 知足의 의미를 밝힌 내용.
楊州晦谷齋舍記 (14) 1691. 楊州 晦谷에 있는 宜寧南氏 齋舍의 記文. 南致勗과 南彦純의 묘가 자리한 터를 健元陵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사받은 일‚ 재사를 후손인 南九萬이 중건한 경위 등을 적은 글.
題晦翁答黃子耕 (16) 1660. 朱熹가 병중에 跏趺坐하고 눈으로 코 끝을 보며 存心養氣에 힘쓰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한 내용을 좌석 모퉁이에 써놓게 된 경위를 題한 글.
跋神訣 (16) 1664. 집안에 전해오며 아버지가 곁에 두고 보던 ≪神訣≫의 발문. 養生家의 말과 道佛의 修戒의 방도도 섞여 있지만 병통이 있을 때 對症의 약으로도 쓸 만하다는 내용.
題綠水亭詩集後 (17) 1676. 李萬雄의 ≪綠水亭詩集≫ 뒤에 題한 글. 勇退하여 거문고와 술로 상하의 사람들과 林壑에서 즐기고 싶다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할아버지 李濟臣의 遺業을 확충하는데 힘을 썼다는 내용.
跋藏六堂集 (18) 趙龜錫의 시문집인 ≪藏六堂集≫의 발문. 아들 趙泰東의 부탁으로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鄭弘溟의 門人으로 成渾의 제자였던 아버지를 이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典雅한 문체로 申最 등의 칭송을 받았다는 내용.
李氏聯珠集後題 (19) 1681. 李一相‚ 李弘相 등 延安李氏들의 시를 모은 ≪李氏聯珠集≫ 뒤에 題하여 이들 인물들의 문장과 생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글.
書重刊慶壽集後 (20) 李貞幹의 ≪慶壽集≫ 重刊本 뒤에 쓴 글. 李行迪과 외손 鄭始成이 다시 간행한 경위와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효성으로 봉양받고 포상의 은혜를 누린 것을 칭송하는 내용.
書尹氏諸丈筆蹟卷 (22) 1682. 尹舜擧·尹文擧·尹宣擧의 筆蹟을 모은 책에 쓴 글.
閑居錄後題 (22) 朴淳 등의 자취가 남아있는 도성에서 백여 리 떨어진 龍虎洞에서 閑居自樂하던 兪瑒의 ≪閑居錄≫ 뒤에 題한 글.
書沈漁村辛卯事後 (23) 후손 沈澄의 부탁으로 金安老를 추천했다가 뒤에 김안로를 추천한 것을 후회했던 沈彦光 형제의 1531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글 뒤에 써 준 내용.
跋滄洲遺稿 (24) 1683. 沈之漢의 시문집인 ≪滄洲遺稿≫의 발문. 아버지 沈倬과 함께 광해군 때 유배되었고 반정 뒤 등용되었으며 詩에 힘써 그 시가 맑고 방탕하지 않으며 전아하며 속되지 않아 唐詩의 규모를 잃지 않았다는 내용.
題崔西村沂手蹟後 (24) 西村 崔沂의 手蹟 뒤에 題한 글. 1616년 간흉에 의해 화를 당했으나 죽음으로 그 의리를 바꾸지 않았던 인물로 남아있는 絶句 몇 수를 조카인 柳成運이 작은 첩으로 만들어 와서 題하게 되었다는 내용.
題翠微堂遺址事蹟後 (25) 1685. 南在의 ≪翠微堂遺址事蹟≫ 뒤에 題한 글. 어려서 吉再의 문집에서 시 몇 수를 보고 당시 높은 공을 세워 선비들의 사표가 되었던 것을 감탄하였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 후손 南磐이 이 책을 보여주어 題하게 되었다는 내용.
跋知止堂集 (26) 1686. 宋欽의 시문집인 ≪知止堂集≫의 발문. 중종과 명종 때 청렴결백하게 임금을 섬기고 맑은 정절이 있던 인물이었다는 것과 후손 宋命賢의 부탁으로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경위를 기록.
跋木川馬氏族譜 (27) 1691. 木川馬氏 族譜의 발문. 고려 태조에 의해 마씨 성을 받게 된 일‚ 많은 사람들이 泯滅된 것에 대한 아쉬움‚ 조선 개국 후 서울로 이사하지 않았던 개성 주민들을 100여 년간 停擧한 일에 대한 아쉬움 등을 기록한 내용.
題孝子李用濟-橈-哀辭後 (27) 1691. 孝子 李橈의 哀辭 뒤에 題한 글. 자손이 어려 효행이 드러나지 않고 泯滅될까 염려된다는 내용.
告外五代祖妣許氏墓文 (28) 宗姪인 朴泰斗를 대신하여 지은 5대조 할머니 許氏의 묘를 오랜만에 찾아 掃墳하면서 고하는 축문.
遷葬金川時告先府君墓文 (28) 1676. 金川에 천장할 때 아버지 朴漪의 墓에 고하는 축문.
告先妣墓文 (29) 1676. 어머니 신씨의 墓에 改葬하게 될 것임을 고하는 축문.
改定祭禮告先墓文 (29) 宗姪인 朴泰斗를 대신하여 지은 祭禮 때 先墓에 고하는 축문.
祭申洗馬-昪-文 (29) 1665. 申昪에 대한 제문.
祭姨兄趙觀察-龜錫-文 (30) 趙龜錫에 대한 제문.
祭韓秀才-世萬-文 (31) 韓世萬에 대한 제문.
祭從伯父僉樞公-濠-文 (31) 1668. 從伯父인 朴濠에 대한 제문.
祭朴秀才-亨陽-文 (32) 1669. 朴亨陽에 대한 제문.
祭趙通川文 (32) 1672. 趙億에 대한 제문.
祭元觀察仲擧文 (33) 1673. 元萬里의 묘에 제사지낼 때의 제문.
祭趙生榮期墓文 (34) 1685. 趙榮期의 묘에 제사지낼 때의 제문.
義禁府都事贈左承旨宋公墓碣銘 (1) 1683. 宋時喆의 아들인 宋光淹의 묘갈명.
唐津縣監宋公墓碣銘 (2) 宋光洵의 묘갈명.
中部參奉梁公墓碣銘 (5) 梁渭南의 묘갈명.
水原白公墓碣銘 (8) 白弘基의 묘갈명.
僉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李公墓碣銘 (10) 1685. 李顯英의 아들인 李徽祚의 묘갈명.
牛峯縣令李公墓碣銘 (13) 1686. 李擎夏의 묘갈명.
成均生員林公墓碣銘 (15) 林溜의 묘갈명.
宣敎郞閔君墓碣銘 (17) 閔聖徽의 從弟 閔聖淸의 묘갈명.
果川縣監閔公墓碣銘 (18) 閔忠亮의 묘갈명.
承政院都承旨贈吏曹參判鄭公墓碣銘 (20) 1690. 鄭士偉의 묘갈명.
成均進士贈左承旨朴公墓碣銘 (22) 1691. 朴戫의 묘갈명.
新溪縣令贈領議政李公墓碣後記 (25) 李徵明의 증조부인 李重基의 墓碣 後記.
龍驤衛副司果贈吏曹參判崔公墓表 (25) 崔確의 묘표.
司饔院奉事權君墓表 (27) 兪棨와 宋時烈 門人인 權誨의 묘표.
軍器寺僉正朴公墓表 (29) 權鞸의 門人인 朴潾의 묘표.
景陽道察訪贈左承旨權公墓表 (31) 權韠의 조카이며 門人인 權俌의 묘표.
司道寺主簿邊公墓表 (32) 1681. 成渾의 제자인 邊友益의 묘표.
綾城府院君諡忠穆具公墓表 (34) 具宏의 묘표. 5대조 具致弘의 묘 곁에 장사지냈다가 1681년 그 동북쪽 炭峴으로 이장한 경과와 손자 판윤 具鎰의 청으로 묘표를 쓰게 된 경위를 밝힌 내용.
刑曹判書贈領議政諡忠靖趙公墓表 (35) 1685. 申欽의 사위이며 李恒福 門人인 趙啓遠의 묘표.
贈貞夫人朴氏墓表 (38) 朴應仁의 딸이요 柳洬의 妻이며 柳誠吾의 養母인 貞夫人 朴氏의 묘표.
儀賓府都事贈左參贊李公墓表 (39) 1690. 李耈俊의 묘표.
贈戶曹參判李公墓表 (41) 李耈俊의 아들이며 李行泰의 아버지인 李德基의 묘표.
通德郞朴君墓表 (43) 朴文龜의 묘표.
恭人李氏墓誌銘 (1) 1667. 李貴의 孫女인 金世鼎의 妻 恭人 李氏의 墓誌銘.
掌樂院僉正朴公墓誌銘 (3) 朴瀰의 아들이며 鄭弘溟의 門人인 朴世橋의 묘지명.
安人曺氏墓誌銘 (6) 曺漢英의 손녀로 林泳의 妻인 安人曺氏의 묘지명.
義禁府都事曹公墓誌銘 (8) 成渾의 門人인 曺麒瑞의 묘지명.
靑松沈君墓誌銘 (10) 權韐·鄭曄 門人인 沈世熙의 할아버지 石灘 沈之演의 묘지명.
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 (12) 鄭澈의 증손인 鄭慶演의 묘지명.
全義郡夫人李氏墓誌銘 (15) 1683. 우의정 李行遠의 딸로 朗原君 李의 妻인 全義郡夫人 李氏의 묘지명.
積城縣監南公墓誌銘 (16) 1685. 南宗伯의 묘지명.
戶曹佐郞南公墓誌銘 (18) 南雋龜의 묘지명.
雲峯縣監鄭公墓誌銘 (20) 鄭澈의 손자 鄭沄의 묘지명.
贈貞敬夫人申氏墓誌銘 (22) 申翊聖의 장녀요 洪命夏의 처로 貞敬夫人에 추증된 선조의 외손녀 申氏의 묘지명.
承政院右副承旨金公墓誌銘 (23) 金世鼎의 묘지명.
昌平縣令沈公墓誌銘 (27) 四山監役‚ 昌平縣令 등을 지낸 沈櫟의 묘지명.
貞夫人徐氏墓誌銘 (30) 1689. 徐景의 딸‚ 李萬雄의 妻‚ 李徵明의 어머니인 貞夫人 徐氏의 묘지명.
學生朴君墓誌銘 (32) 1690. 金克亨·尹文擧 門人인 朴世櫶의 묘지명.
同知中樞府事權公墓誌銘 (33) 權順昌의 묘지명.
贈貞夫人趙氏墓誌銘 (36) 趙遠期의 딸이요 李景奭의 외손녀로 申琓의 妻인 貞夫人 趙氏의 묘지명.
成均生員朴君墓記 (38) 1677. 朴世彙의 묘기.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 (1) 1663. 玄谷 趙緯韓의 행장.
高祖司諫院司諫贈領議政冶川先生朴公行狀 (20) 朴英의 門人인 고조부 朴紹의 행장.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朴公行狀 (30) 朴東說의 아들로 朴東彦에게 出繼한 懦軒 朴潢의 행장.
孝子副司果贈戶曹參議金公行狀 (41) 효자 金忠伯의 행장.
承政院左副承旨沈公行狀 (1) 沈之漢의 행장.
刑曹佐郞贈戶曹參判柳公行狀 (8) 柳尙運의 아버지이며 柳鳳輝·柳鳳徵의 할아버지인 柳誠吾의 행장.
養考秀士府君行蹟 (12) 1664. 養父였던 叔父 觀海 朴濰의 행적.
先祖高麗判典校寺事朝鮮贈領議政府事錦城府院君潘南先生事蹟 (15) 1681. 선조인 朴尙衷의 행적에 관련된 기록을 高麗史와 개인 문집 등에서 수집한 글. 國學에서 李穡·鄭道傳 등과 함께 유학을 진흥시키고‚ 恭愍王 사후 李仁任 등과 맞서 원의 사신을 명으로 잡아 보낼 것 등을 주장한 일 등에 대한 내용.
孺人李氏行錄 (28) 1687. 李貴의 손자인 光州牧使 李恒과 박세채 누이의 딸로 貞明公主의 손자인 洪重楷의 妻였던 孺人 李氏의 行錄.
沈君鐸小傳 (30) 1678. 임진왜란 때 㺚川에서 싸우다 전사한 沈鐸의 傳.
都巡邊使申公傳 (32) 1678. 임진왜란에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한 都巡邊使 申砬의 傳.
挽金成川-必振(1692)‚ 聞南判書雲卿-龍翼-訃‚ 崔丈漢卿-後亮-病中次春字韻以寄之玆用續貂‚ 次申甥成甫-聖夏-寄示韻‚ 哭李參判擇之-選‚ 次文生明仲-後開-寄示韻‚ 聞申叔弼-翼相-移家入南陽海中賦此却寄二首‚ 挽李參判重習-慣‚ 讀退栗二先生四七說示金叔涵-載海‚ 書堂庭前蓼有紅白二色命奚奴剪其白者有賦‚ 聞老峯-閔鼎重-凶訃‚ 哭趙伯靜-仁壽‚ 七月初旬月夜偶吟‚ 咏前溪釣磯二首‚ 臨津有感二首‚ 在楊山時偶吟平日住迹多事中輟今於省墓東陽路中足成之因此庶見流離跋疐之蹤云爾十二首‚ 敬省新壟翌日上後洞禪菴偶吟‚ 歸過臨津‚ 姜叔重-錫朋-扶病遠訪臨別書此以贈二首‚ 挽洪蓮川-澤普-內‚ 挽李主簿-之燈‚ 晉陽趙使君祥甫-儀徵-歷訪口占以贈時適重陽日也‚ 挽沈驪州龍卿-壽亮-二首‚ 感秋偶吟‚ 次李甥久叔-眞望-留贈韻二首‚ 挽久堂-朴長遠-遷葬二首‚ 雪夜有懷書齋諸友賦此以示之-兪檝韓德恒金載重‚ 挽金生國卿-士珎-六首‚ 挽梁僉樞-錫九-二首(1693)‚ 迎汝吉-泰遜-姪婦櫬於廣灘雪涕有作二首‚ 余以神衰不欲作句語來住墳庵寶盖山人聰印進一絶遂次之‚ 松京路中偶吟‚ 病中志懷‚ 七月十八日夜待崔汝和不至‚ 挽林綾州-渙-姪三首‚ 寄賀會津再從兄-世楷-壽席‚ 哭金上庠伯雨-濡-六首‚ 謹次金河西詠仁宗大王墨竹韻‚ 贈別鄭結城-庥‚ 冬至日偶吟‚ 三月念四日後病勢猝谻不得見客戱書二首(1694)李君實-世華-申子平-懹-因坤宮復位同日赴召戱贈一絶‚ 余不作燕行別語久矣今被兪行臺-得一-强責要爲異地面目兼示正副二价‚ 錦平之北也主上賜宸章以寵其行錦平請賡載甚勤窃敢有賦三首‚ 九月晦日將再赴朝有感信筆‚ 十月十四日將奉審徽陵有往先壟之命感作‚ 敬望諸陵有作‚ 送申公獻-琓-再使燕山‚ 退歸後許夏昌來訪書以贈之‚ 乙亥元日戀闕有感‚ 挽朴進士-文開.
頒示中外戒勿朋黨敎書 (1) 1694. 왕명으로 朋黨을 경계하기 위하여 頒布한 교서. 왕이 極을 세우면 조정에 있는 사람에게는 형제나 朋友의 의리가 있는데 임금이 極을 세우지 못해 편당짓는 풍습이 이어졌다. 宣祖 이후 東西로 나뉘고 반정 이후 保合의 미덕이 있었으나 기해년 복제로 격화되었다. 갑인년 이후 軋轢이 커져 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폐해가 커졌다. 이제 朋黨의 폐해를 경계한 敎書를 내리니 이후 조정에 틈을 만들거나 편당을 지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내용.
辭議政府右贊成疏一 (5) 우찬성은 大儒나 元勳의 자리로 자신에게 맞지 않고 병이 있다며 사양한 첫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右贊成疏二 (6) 坤宮의 位號가 회복되는 등 좋은 날에 실험해 보았으나 증명되지 않았던 인물인데다가 병이 있다며 우찬성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右贊成疏三 (8) 경연에 도움줄 것이 없고 고질병이 있다며 우찬성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左議政疏 (10) 재상의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인물이 아님과 병을 들어 좌의정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再辭議政府左議政疏 (12) 앞서 들어가 낭패만 당하고 돌아왔는데 다시 나아가 깨끗한 조정을 어지럽히고 簡選을 욕되게 할 면목이 없다며 재차 좌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문.
三辭議政府左議政疏 (14) 維新된 뒤에 鼎席이 비어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등을 들어 좌의정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四辭議政府左議政疏 (17) 才力의 부족과 질병을 들어 좌의정을 사양하는 네 번째 상소문.
五辭議政府左議政疏 (18) 신병을 들어 좌의정 직을 사양하는 다섯 번째 상소문.
六辭議政府左議政疏 (21) 국가 안위에 관계되는 일을 질병이 있는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여섯 번째 상소문.
七辭議政府左議政疏 (23) 직명을 갈아주면 들어가 뵙고 물러나겠다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일곱 번째 상소문.
到延西入八辭議政府左議政疏 (24) 延西驛에 도착하여 정승의 직책을 갈아주어 賀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여덟 번째 상소문.
九辭議政府左議政疏 (28) 散班으로 賀班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아홉 번째 상소문.
到城外十辭議政府左議政疏 (29) 성밖에 도착하여 나와서 仰對하려는 이유를 설명하고 직명을 갈아 散班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열 번째 상소문.
從駕到高陽落後申乞退歸疏一 (31) 御駕를 따라가 능을 展謁한 뒤 高陽에서 떨어져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 첫 번째 상소문.
申乞退歸疏二 (35) 병상과 모자간의 정을 아뢰며 다시 물러나게 해달라고 청하는 두 번째 상소문.
申乞退歸疏三 (37) 모자간의 정을 헤아려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세 번째 상소문.
中路待罪告歸疏 (39) 중로에서 待罪하며 돌아가겠다는 상소문. 老母에게 문안하고 家廟에 焚黃의 예를 행한 뒤 병세를 헤아려 조정에 나아가겠다는 내용.
N辭社稷暑提調仍請召還承旨疏 (42) 사직서의 神室을 修改해야 하는데도 오랫동안 아뢰지 못한 잘못 등을 들어 사직서 제조를 사양하고 승지를 소환하기를 청하는 상소문.
因雷變乞免疏 (44) 우레의 재변으로 인하여 직을 면하게 해줄 것과 祗敬하고 寅畏하여 부지런히 힘쓸 것을 청하는 상소문.
再進城外待罪仍請命賜進退疏 (45) 모친과 자신의 병을 아뢰고 국가에 누를 끼친 것을 성밖에 나와 待罪하면서 進退에 관한 명을 내려주기를 청한 상소문.
退歸後申辭職名疏一 (48) 모친의 병을 아뢰고 돌아온 뒤 職名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청나라 사신이 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물러난 것은 아니며 사신이 와 있을 때 힐문하는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 체직해 달라는 내용.
申辭職名及兼帶三任疏二 (50) 다리 등 병세의 악화를 들어 임무를 보지 못해 殿最마저 빠뜨리게 했다며 社稷署의 都提調와 禁衛營 都提調 및 扈衛廳 大將의 임무를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申辭職名疏二 (51) 병상 등을 들어 다시 겸하고 있는 모든 직명을 체직해 주기를 청하는 두 번째 상소문.
承旨傳諭聖旨後申辭職名兼帶及常祿疏 (52) 1695. 승지가 聖旨를 傳諭한 뒤 신병을 들어 다시 직명과 겸대하고 있는 직책 및 常祿을 사양하는 상소문.
疾作不得參鞫箚 (1) 1694. 南九萬과 함께 鞫獄에 참여하라는 명에 대해 설사 등의 병으로 鞫問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아뢰는 차자.
進別單啓箚四本箚 (2) 병으로 일을 맡아 볼 수 없음을 아뢰며 함께 올린 別單의 啓箚 4본. 첫째는 임금의 請納을 넓혀 기사년의 일은 바로잡되 신중하게 도모할 것. 둘째는 國體를 높여 왕이 표준을 세워 국정과 법령을 공정하게 할 것. 셋째는 人心을 따르는 것으로 배필을 바꾸었던 일을 바로잡고 閔黯과 張希載를 공정하게 처리할 것. 넷째는 당론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인재를 당색으로 쓰지 말고 현명한지를 중시할 것. 그리고 1683년에 올린 箚子의 두 번째 조목과 萬言疏 중의 세 번째 조목 즉 朋黨의 폐해를 지적한 것을 첨부하여 올림.
因議啓事乞遞職名兼辭食物箚 (1) 1694. 네 가지 차자 중 3번째 차자에서 논한 내용이 한 시절의 諸宰에 관한 것으로 金吾에서 待命하게 하였는데 경대부를 죄에 빠뜨리고도 병으로 인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직명을 갈아주기를 청하고 먹을 것을 내려준 것을 사양하는 내용.
因議啓事乞遞職名箚 (2) 자신으로 인해 議啓가 미루어지고 있는 것을 들어 직명을 갈아주기를 청한 차자.
中殿受鍼問安後待罪箚 (3) 중전이 침을 맞은 뒤 2품 이상 관원들이 문안하는 데 참여하지 못한 것을 待罪하는 차자.
請勉留領議政南九萬箚 (4) 領議政 南九萬이 茂長 儒生 姜敏著의 상소로 인해 자리를 내놓고 성밖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구만이 更化 이래 비었다시피 했던 鼎席을 지키며 綸序를 이뤘고‚ 時議와 모순이 있다지만 국가를 생각해서 한 일이니 지성으로 勉留하라는 箚子.
請勉召廟堂諸臣因陳兵判憲司二事箚 (5) 영의정 南九萬과 우의정 尹趾完이 모두 소를 올리고 下鄕하여 廟堂이 텅비었으니 정성으로 불러올 것을 청함. 유생의 상소로 대신이 배척받는 것은 폐해가 크고‚ 유생의 상소로 兵符를 바치고 나간 尹趾善을 推勘하여 병조의 정무가 지체되지 않도록 할 것을 청한 箚子.
辭三省推鞫委官仍遞箚 (7) 獄情의 首末도 모르는 것과 신병을 들어 三省推鞫의 委官을 사양하고 체직을 청한 箚子.
請更勉召領議政南九萬箚 (9) 영의정 南九萬을 힘써 부를 것을 다시 청하는 箚子. 儒生이 大臣을 비방한 것은 위험하다고 한 말로 인해 유생의 소에 禁令이 내려지고 남구만이 이를 들어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니 訝惑스럽다. ‘親迎’이라는 말은 李元翼을 나오게 하려던 조처로 왕과 신하에게 모두 좋은 일인데 옥당에서 잘못 거론한 것이다. 영의정과 우의정 등을 더욱 성의를 다해 소환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因承宣勉諭略陳曲折兼以不參鞫廳待罪箚 (11) 南九萬의 권유로 왕이 承宣을 보내 勉諭한 일로 인해 곡절을 아뢰고 鞫廳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待罪하는 箚子.
辭常祿箚 (12) 宿疾로 일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고 입성한 3개월간 행공한 날이 거의 없었다며 녹봉을 사양하는 箚子.
申論前日筵中未究之說箚 (14) 전날 경연 중에 자세히 아뢰지 못한 것을 다시 논한 箚子. 張希載의 일은 世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南九萬의 주장에 대해 중궁이 편안할 때 희빈과 세자도 편안할 것이라며 중궁을 폐할 때 그리고 복위된 뒤에 모해하려 했던 사람들은 처벌하여야 한다는 내용.
不參坤殿受炙問安待罪仍請開經筵箚 (19) 중전이 뜸 뜨는 데에 문안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일로 待罪하고 왕의 부스럼 증세도 나았으니 경연을 다시 열 것을 청한 차자.
請行海西大同法箚 (21) 海西에 大同法을 시행하기를 청하는 箚子. 해서는 국가의 近畿로 부역이 번다하고 모든 백성들이 원하고 있는데도 西北의 두 도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대동법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신의 需用이나 量田 문제도 이미 요량할 수 있고 戶曹 등에서도 이의가 없으니 시행하자는 내용.
不參誕日賀班待罪仍請解職歸養箚 (23) 병으로 誕日 賀禮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待罪하고 72세 노모에 대한 情理와 신병을 들어 직책을 면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 차자. 梁得中·朴振仁 등 1688년 經明行修로 추천되었으나 직을 제수받지 못한 사람과 함께 沈梯 등을 經明行修로‚ 李之老 등을 行義純固로 추천하는 내용.
論雷雹之災箚 (26) 우레와 우박의 재해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차자. 왕이 喜怒를 폭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재해에 一心으로 자신을 지켜 私意가 틈타지 않도록 恐惧修省하라는 내용.
辭扈駕時乘轎隨後箚 (29) 留都하라는 명을 받았다가 南九萬의 갑작스런 병으로 隨駕하되 교자를 타고 따르라는 명이 내리자 왕이 말 위에 앉아 가는데 신하로써 병이 있다고 하여 교자를 탈 수는 없다고 사양하는 내용의 차자.
陵所陳前日奉審事狀仍請隨便落後箚 (29) 恭陵과 順陵의 莎草를 보완하는 일에 대한 의견과 능소를 전날 봉심한 결과를 아뢰고 병세를 들어 편한 대로 뒤에 떨어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차자.
中路陳落後曲折箚 (30) 뒤를 따라 가던 중 통증이 일어 부득이 길 곁 村舍 溫突에서 조섭하다가 다시 冷幕에 나오면서 심해져서 중로에 낙후하게 되었다는 곡절을 아뢰는 차자.
敢申前席辭職之請兼陳失對曲折箚 (31) 경연에서 사직을 청한 것을 다시 아뢰고 1689년 權大運의 상소를 고찰해보고 그 내용이 오히려 承順했던 것임을 들어 경연에서 권대운에 대해 잘못 대답한 곡절을 아뢰는 차자.
受命修陵請仍省先墓箚 (33) 徽陵의 莎草를 改修하라는 명을 받고 辭朝하면서 능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선조들의 산소에 성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한 차자.
不參啓覆待罪箚 (34) 山陵의 일과 선조의 산소에 성묘하고 돌아와 復命하는데 급하여 神幾가 안정되지 않아 啓覆하는데 불참한 것을 待罪하는 차자.
請蠲坡州糴米仍陳淸白吏故事箚 (35) 恭陵에 幸行한 행차를 치른 파주 백성들의 糴米를 덜어줄 것‚ 李浚慶의 ≪東皐集≫ 등에 나오는 청백리 고사를 들어 廉謹과 淸白吏의 이름이 혼잡한 것을 실록을 고찰하여 바로잡을 것을 청한 차자.
不參世子誕日賀班待罪仍進萬言附錄箚 (39) 고질병으로 인해 徽陵을 봉심한 뒤 병이 도져 世子 誕日의 賀班에 불참한 것을 待罪하고 萬言疏 附錄을 올린 차자.
進稽古錄申請退歸箚一 (42) <稽古錄>을 올리면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다시 청하는 첫 번째 차자.
申請退歸箚二 (47) 병으로 일을 감당할 수 없고 늙은 모친도 병석에 있다며 물러나게 해주기를 다시 청하는 두 번째 차자.
申請退歸箚三 (48) 신병과 청나라 사신이 곧 올 것이라며 물러나게 해주기를 다시 청하는 두 번째 차자. 병사를 다스리고 尙武하여 孝宗의 뜻을 이으려고 하는 일보다는 천재지변으로 요동하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내용.
甲戌閏五月二十九日熙政堂引見 (1) 1694. 좌의정 직을 사양하다가 올라와 熙政堂에서 引見했을 때의 기록. 中殿의 복위 등 근래의 처분은 백성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鞫獄을 함께 조사하자는 남구만의 의논에 대해서 옥사의 본말과 시비를 알지 못하여 참여하기 어렵다고 아뢰는 내용.
六月二十一日熙政堂召對 (4) 熙政堂에서 召對하여 ≪綱目≫의 梁紀를 강했을 때의 기록. 宮闈와 상벌에 대해 논함. 張希載의 처벌을 둘러싼 大臣과 臺閣 사이의 갈등과 이로 인한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처리를 논함. 4조목의 차자의 뜻을 아뢰고 붕당의 경과와 폐해를 논함. 廢妃할 때 논쟁하다 귀양간 이들의 복직과 느슨하게 일을 처리하고 발언에 실수한 徐文重의 처벌을 주장.
七月十九日熙政堂請對 (13) 熙政堂에서 請對했을 때의 기록. 붕당을 경계하는 교서를 지어 올려 黨論의 근원과 경과를 아뢰고 편당을 없앨 것과‚ 張希載 등 中宮을 모해한 자들에 대한 臺諫들의 청을 따를 것을 주장함. 經明行修 등 인재 천거를 위한 절목을 논하고 林泳·申翼相·金昌協·李畬·丁時翰 등을 천거함.
七月二十三日熙政堂引見 (31) 熙政堂에서 大臣과 備局의 신하들을 함께 引見했을 때의 기록. 文殊山城을 감독할 신하의 교체‚ 비어있는 史官의 추천‚ 청백리의 선정 문제 등에 대해 의논함. 1688년 책자로 올렸던 내용을 備局에 내려 의논할 것을 청하고 그에 따라 거취를 결정할 것임을 아룀. 법전에 금령만 실려있고 敎化에 대한 조목이 없으니 鄕約을 敎令이라 이름짓고 해당 官司에 돌려 민간의 풍속이 무너지는 것을 막자고 청한 내용.
甲戌八月初七日宣政殿晝講 (1) 1694. 宣政殿에서 ≪大學衍義≫의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술에 대한 경계‚ 湯 盤銘의 교훈‚ 玉堂 관원에게 讀書堂의 법규를 따라 經學에 힘쓰도록 할 것‚ 올린 상소의 綱領과 條目 등을 구명할 책자를 올리는 일 등에 대한 내용.
八月初八日晝講 (5) ≪大學衍義≫ <湯之盤銘> 등에 대한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오랫동안 師儒의 장관이 없어 士習이 투박해졌으니 대사성 徐宗泰의 사직을 들어주지 말 것‚ 陵幸에 드는 비용을 견감할 것 등에 대한 내용.
十月初四日熙政堂晝講 (8) 熙政堂에서 ≪大學衍義≫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술에 대한 경계‚ 전에 올린 책자의 綱領과 조목을 진달하는 일‚ 內官 文撤의 일을 辨析한 일의 부당성‚ 任元耈의 상소에 대한 처리‚ 權大運의 석방 여부‚ 宋時烈을 논박하는 데 참여한 일로 귀양갔다가 母親喪을 당한 權瑎에 대한 처리 등에 대해 의논한 내용.
十月初八日熙政堂晝講 (20) 熙政堂에서 ≪大學衍義≫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社稷의 修改‚ 천둥과 번개와 같은 재이에 대한 실질적인 修省의 필요성‚ 淸白吏와 전쟁에 죽은 사람의 자손을 녹용하는 일‚ 書院의 疊設을 금지하는 일‚ 鄭濟先의 석방 문제 등에 대한 내용.
十月十三日熙政堂引見 (24) 熙政堂에서 大臣과 備局 신하에 대한 引見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尹趾完에 대한 비답‚ 天災와 異變에 대한 대책‚ 科擧 위주 인재 등용의 폐단‚ 淸白吏의 抄選‚ 徐文重·鄭載禧·金時傑 등의 등용 여부 등에 대한 내용.
十一月初七日熙政堂晝講 (30) 熙政堂에서 ≪大學衍義≫ <牧誓>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淸白吏와 廉謹吏의 선발에 관한 기록의 고증과 廉謹吏의 선발‚ 영의정의 체통을 상했다하여 파직된 申汝哲과 大臣을 논하였던 任元耈의 서용 등에 대한 문제와 차자와 그 부록에 대한 시행 여부를 왕이 裁量하여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
十一月初九日巳時晝講 (37) ≪大學衍義≫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女色의 경계‚ 養心과 학문의 도리‚ ≪心經標題≫의 교정‚ 蔭仕 및 초야에 있는 사람으로 經學에 밝은 자를 경연에 출입하게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十一月初十日熙政堂啓覆 (41) 熙政堂 啓覆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죄인 姜同의 推案에 대한 啓覆‚ 萬言疏의 실행 여부‚ <稽古錄>의 진달‚ 內需司와 舊宮家의 折受 혁파 여부 등에 대해 논의한 내용.
睦來善論罪議 (1) 1694. 睦來善의 죄를 정하기 위한 收議에 응해 아뢴 글. ‘不恭順’이란 어구는 奏文을 모방한 것이지만 ‘不恭’과 ‘不敬’은 목내선이 말을 만든 것이니 勘處해야 하지만‚ 대신의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결단하라는 先王들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는 내용.
恩津人弑主革邑罷守當否議 (1) 恩津 사람이 주인을 시해한 일로 고을을 혁파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일이 마땅한지를 묻는 수의에 답한 글. 형벌에서 綱常을 가장 앞에 둔 뜻을 헤아려 혁파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2) 史官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서계. 神氣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상소하여 자신의 정성을 아뢰겠다는 내용.
再度宣諭疏批後書啓 (3) 상소에 비답을 내리며 宣諭한 뒤에 비상한 예우에 물의가 일어날까 한다며 질병과 허물로 나아갈 수도 상소를 올릴 수도 없어 어찌 답할지 모르겠다고 書啓한 내용.
拜左議政遣史官別諭後書啓 (3) 좌의정에 임명하고 史官을 보내 別諭한 뒤에 올린 서계. 사양하는 상소를 들어준 뒤 갑자기 새로운 명이 내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내용.
史官傳諭前疏批後書啓 (3) 史官이 전의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 올린 서계. 物議를 기다리고 있던 중 懃懇한 비답을 감당할 수 없고 병으로 인해 감히 무엇이라 대답할 바가 없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狀啓 (4) 史官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하며 함께 올라오라는 명을 전한 뒤에 병세와 情勢를 들어 사양하고 신기가 안정된 뒤 다시 상소하겠다는 내용.
史官傳諭再疏批後狀啓 (4) 史官이 두 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하자 사례하고 병세를 들어 사양하는 내용.
史官觀病少間後狀啓 (5) 史官이 병세를 보고 난 뒤 올린 狀啓로 신병으로 인해 소명을 받기 어렵다는 내용.
史官傳諭三疏批後書啓 (6) 史官이 세 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서계. 비답에 사례하고 질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다며 待罪하는 내용.
再次史官新到後狀啓 (7) 함께 가자는 사관에게 질병으로 인해 먼저 돌아가게 한 뒤 다른 史官이 새로 도착한 뒤에 올린 장계로 설사로 인해 장도에 오를 수 없다는 내용.
史官狀啓回諭及四疏批傳諭後狀啓 (7) 史官이 狀啓에 대한 回諭 및 네 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 올린 장계로 설사와 더위로 인해 출발할 수 없다는 내용.
承旨六疏批傳諭後書啓 (8) 승지가 6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初志를 고수하려는 것은 아니며 상소의 말이 倫次가 없어 죄를 더했다고 대죄하는 내용.
承旨七疏批傳諭後書啓 (8) 승지가 7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번거롭게 한 것을 待罪하고 재주와 질병을 들어 사양하는 내용.
承旨八疏批傳諭後書啓 (9) 승지가 8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기력이 조금 나아지면 상소하여 아뢰겠다는 내용.
重臣九疏批傳諭後狀啓 (9) 重臣을 보내 9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大禮가 임박하였으니 하루 이틀 조섭한 뒤 장도에 오르겠다는 내용.
承旨別諭傳諭後書啓 (10) 승지가 別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鼎席이 비어 있으니 병세가 조금 덜하기를 기다려 대궐에 나아가겠다는 내용.
承旨再度別諭傳諭後書啓 (10) 승지가 재차 別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날이 밝기를 기다려 入對하겠다는 내용.
承旨別諭傳諭後書啓 (11) 승지가 別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영의정이 들어온 즈음에 조정에 또 하나의 일을 만들어 죄를 더했다며 차자를 올려 뜻을 아뢰겠다는 내용.
備忘記史官傳諭後書啓 (11) 史官이 備忘記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왕이 宣諭한 것과 御醫를 보내 간병하도록 한 것에 사례하고 병이 조금 나은 뒤 상소를 올리겠다는 내용.
承旨傳諭疏批後狀啓 (12) 승지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세와 老母와 떨어져 있는 사정 등을 아뢰는 내용.
承旨傳諭疏批後狀啓 (13) 승지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없고 承宣이 오래 머물러 고을에 폐가 되고 있다는 내용.
承旨傳諭疏批後狀啓 (13) 승지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자신의 병세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내용.
承旨傳諭回諭後書啓 (14) 승지가 回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병세와 정세 등을 아뢰는 내용.
承旨傳諭聖旨後狀啓 (15) 1695. 승지가 傳諭하고 함께 올라오라는 명을 들은 뒤 올린 장계.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자리에 展轉하면서 진퇴의 명을 기다린다는 내용.
答李同甫-喜朝 (1) 169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지가 10여 일이나 되었다며 조가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와 恩典에 옛 신하들을 생각한다는 내용.
答南領相-九萬 (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7년간이나 막혀 있다가 조정에 돌아온 것을 축하하고 坤宮을 복위하는 경사 뒤에 국가를 안정시키는 문제와 鞫獄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泳 (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중전이 威儀를 회복한 기쁨을 전하고 보여준 책자의 내용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尹子仁-拯 (3) 尹拯에게 답한 편지. 坤宮이 復位된 경사 뒤의 거취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4) 林泳에게 답한 편지. 거취와 출처의 의리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李士亨-泰壽 (5)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 등이 문제를 느슨하게 처리하려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南相國 (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上變者의 정절이 남구만의 처분과 맞지 않는다며 大臣과 張希載를 가볍게 처분하는 것에 반대의 뜻을 피력하는 내용.
答柳悠久-尙運 (6)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금일의 상황은 明正한 듯하지만 窒礙가 많아 평생의 친구들이 나오기 어려워함이 1688년보다 심하다며 둘 다 가하다는 입장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吳貫之-道一 (7)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調劑에 유의하여 更化 이후의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내용.
答南相國 (7) 南九萬에게 다시 상소를 올릴 것이라고 전하는 편지.
別紙 (7)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감히 仰對할 것이 없고 특히 武將의 성명이나 형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은 없지만 勳戚에 편향되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答南領相 (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출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염려한다는데 나아가기 어려운 일이 있어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려 한다는 내용.
別紙 (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로 金世翊 등을 장수의 망에 추천하는 내용.
答崔汝和-錫鼎 (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입장‚ 李貴의 章疏를 모아 간행할 때 최씨 일가가 배척받았다는 것에 대한 해명‚ 鄭齊斗와 陽明學에 대하여 問答한 일에 대한 내용.
答兪寧叔-得一 (10)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거취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別紙 (11)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顯宗이 온천에 幸行했을 때 宋時烈이 체직해주지 않으면 감히 나아갈 수 없다고 하여 체직된 뒤 서울에 도착하여 몇 달간 있었던 일을 들어 자신의 출처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金士直-楺 (12) 金楺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御營大將의 추천 문제 등 將薦에 참여한 경위를 밝힌 내용.
答李同甫 (12)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송시열이 온천에 도착하여 직책을 면한 뒤 隨駕한 일을 들어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趙德而-大壽 (13) 趙大壽에게 답한 편지. 1683년과 1688년의 상황과 비교하며 자신의 거취 문제와 금일의 時事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具濟伯-時經 (14)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世道의 책임으로 권면한 것에 사례하고 현재의 시세가 밖으로는 明正하지만 안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며 조정의 의논과 士習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文明仲 (14) 文後開에게 답한 편지. 自重은 儒者의 것이지 출사하려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며 更化 뒤 鼎席이 비어있는 상황에서 儒家의 출처는 군신의 대의를 폐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15)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冊禮의 習儀를 위해 入城한 것을 치하하고 죄수의 국문은 坤殿의 寃을 伸雪하는 문제와 公論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柳悠久 (16)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나랏일이 크게 무너져 구제할 대책이 없다며 나아가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돌아가 自靖할 것이고 머물 곳은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는 내용.
答李廈卿-橝 (17) 李橝에게 답한 편지. 斯文을 변무하겠다는 것에 대해 상대를 공격하는 일은 無益할 것이라고 만류하는 내용.
答宋道深-光淵 (17) 宋光淵에게 답한 편지. 나아가 다시 청하려는데 어떤 처분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尹子仁 (18) 尹拯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정승자리가 모두 비고 국사가 와해될 상황이어서 4가지의 차자를 올리고 朋黨에 대한 조목을 頒示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거취를 전하는 내용.
別紙 (19)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朋黨을 없애고 협동한 뒤 兵事를 다스리려는 상소의 의도를 전함. 그 외 閔鼎重과 金壽恒 신원 문제‚ 윤증을 천거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내용.
與南相國 (20)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軍國의 機務를 재결하여야 할 상황 등을 들어 儒生의 상소에 구애되지 말고 나올 것을 청하는 내용.
答李廈卿 (21) 李橝에게 답한 편지. 왕이 아뢴 것을 들어주었지만 영의정도 儒疏와 物議로 인해 자리가 불안하여 보합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어서 조만간 물러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2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儒生의 상소에 구애되어 조정에서 떠난 것은 잘못이니 왕의 걱정과 國勢의 위기 등을 헤아려 조정에 나아오라는 내용.
答李生命鼎 (22) 李命鼎에게 답한 편지. 편지로 질문해 온 국가의 大事 3가지 일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 (23) 林泳에게 답한 편지. 임영의 병세에 대한 염려와 大獄이 아직 정돈되지 않아 物情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을 전하고 영의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24)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30여 년간의 교분‚ 1683년 함께 입조한 일‚ 1688년 귀양간 일‚ 함께 大任을 맡은 것 등을 들어 조정에 나올 것이라는 소식에 반가움을 전하는 내용.
答南相國 (2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안부와 거취를 전하는 내용.
答林德涵 (26) 林泳에게 답한 편지. 임영의 병세와 병에 대한 치료‚ 鞫獄의 감쇄‚ 張希載의 일에 公案이 마련되고 교서가 반포되면 돌아갈 것이라는 거취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 (27)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보여준 글에서 朋舊라는 구절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與南相國 (2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東萊 사건에서 세공을 실어보내는 일‚ 文殊山城에 대한 일‚ 謁聖初試에 관한 일 등에 대해 정승들간의 의견을 조정하는 내용.
與李君輔-世弼 (28)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근교에 있다가 立朝하여 4가지 차자를 올린 뒤에 왕을 만나 영의정을 불러올 것을 청한 것 외에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었다는 내용.
答南相國 (2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東萊 사건과 文殊山城에 대한 일‚ 初試에서의 폐단을 막는 일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힘.
與南相國 (29)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頒示할 문자를 만들어 올릴 것인데 이 일이 政府에 내려져 견제당할 것을 염려하여 보내니 보아달라는 내용.
與鄭眞卿-尙樸 (29) 鄭尙樸에게 보낸 편지. 경연에서 萬言疏를 廟堂에 내려 논의해줄 것을 청한 일‚ 대동과 均役 및 量田에 대한 의견이 아직 결정되지 않고 있는 것‚ 선비를 가르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與南相國 (29)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經行之士를 議薦하기 위한 절목‚ 弘文錄과 都堂錄을 정하는 일‚ 兪得一을 擬望하는 일에 대한 내용.
答朴大叔-鐔 (30) 朴鐔에게 답한 편지. 편지에 사례하고 자신의 거취에 대해 전하는 내용.
與崔汝和 (1) 1694.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 經筵에서 經行으로 선비를 선발하기를 청하여 廟堂에 稟處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酌定하였는지 그 경과를 묻는 내용.
與柳悠久 (1) 1694.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서용하기로 한 사람을 淸望에 擬望하는 문제와 弘文錄과 都堂錄 천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士亨 (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成均館의 節目 撰出에 대한 廟堂과의 異見 조정‚ 과거의 폐단을 진언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與李同甫 (2)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출처 문제를 의논하고 大目에 經行으로 천거할 만한 이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추천해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
答李君輔 (2)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모든 사람들이 나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데도 賀禮에 참여하겠다며 조정에 나온 것을 해명하고 자신이 올린 상소의 시행 여부에 대한 결정을 기다려 거취를 정하겠다는 내용.
別紙 (3)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李徵明 通淸 문제로 인한 訛言에 대한 염려를 전하고 經明行修를 천거하는 일의 경과를 설명함. 또한 儒士를 높이는 풍조가 쇠하였음을 아쉬워하는 내용.
答申子平 (4) 申懹에게 답한 편지. 鬱陵島의 일에 대해 榻前에서 領相과 다투며 힘을 다했지만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음을 전하는 내용.
答南相國 (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왕이 8월 6일 경연 중에 자신의 萬言疏를 備局에 내렸으니 이제 남구만이 처리하기에 달려 있어 자신은 처분을 기다릴 뿐이라고 전하고 천거 문제에 대한 吳道一의 상소에 回啓하는 일로 인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편지.
答鄭眞卿 (6) 鄭尙樸에게 답한 편지. 筵中의 啓辭로 인하여 야기될지도 모를 화에 대하여 염려함. 量田과 大同 문제‚ ≪警民編≫과 ≪擊蒙要訣≫ 등으로 선비를 가르치는 문제‚ 考講 문제 등에 적절하게 대처한 것을 격려하는 내용.
與南相國 (6)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삼사 관원의 擬望‚ 廉謹의 선발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묻고 상의하는 내용.
與鄭眞卿 (7) 鄭尙樸에게 보낸 편지. 선비를 추천할 때 沈梯와 高益謙을 천거할 것과 量田 등의 문제에 대하여 善處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尹子仁 (7) 入朝한 뒤 자신의 거취를 밝히고 布衣로 소견하겠다는 尹拯에게 常理와 正法에 따르기를 권하는 편지.
答林德涵 (8) 林泳에게 자신의 안부와 거취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陵幸 뒤 다시 歸養을 청할 것이라며 고립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時勢와 자신과 어머니의 건강과 안부를 염려하는 내용.
答金象卿-夢臣 (9) 金夢臣에게 답한 편지. 御駕에 낙후한 뒤 高陽에 머물며 물러나겠다고 청한 자신의 거취를 전하고‚ 松都에서 ≪警民篇≫·≪擊蒙要訣≫·≪小學≫·≪家禮≫ 등을 遵用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선비의 천거‚ 量田 문제를 善處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南相國 (9)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병세와 거취에 대해 전하고 鬱陵島의 일로 인하여 東萊에 보낸 狀本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公獻 (10) 申琓에게 답한 편지. 과거 합격자의 出榜‚ 社稷署의 修改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賜額 문제로 올라 온 載寧의 院生들을 잘 헤아려 善處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南相國 (10)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金吾의 鞫獄이 끝난 것을 축하함. 訓鍊大將 申汝哲의 파직을 청한 일에 대해 신여철 같은 오래된 장수를 한 가지 실수 때문에 파직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밝히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할 것을 당부함.
答南相國 (1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체통을 들어 訓將을 파직하라고 아뢴 일의 잘못을 지적함. 廉謹의 선발에 대해 吏曹와 李浚慶의 기록이 다르다면 실록의 기록을 참작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12) 林泳의 병을 염려하여 서울에 와서 의약의 힘을 얻어 보기를 바란다고 답한 편지. 更化 뒤에 조정에 나아갔으나 뜻을 행하지 못하고 陵幸에서 回鑾할 때 歸省한 자신의 거취를 전하는 내용.
別紙 (13) 林泳에게 1689년의 일에 대한 옥사의 처리과정과 이를 둘러싼 노소 갈등의 경과를 전하는 편지. 남구만·尹趾完 등이 張希載를 구원하고 禧嬪을 예우하려 해서 궁중의 시비가 바르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내용.
與李子三-畬 (15) 李畬에게 보낸 편지. 廟堂에 부친 萬言疏가 행해지면 소명에 응할 것이라는 내용과 金昌協·이여·林泳·趙相愚 등 함께 도와줄 인물들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申公獻 (16) 申琓에게 답한 편지. 社稷의 神室을 중건할 날짜‚ 중건에 쓸 재목‚ 중건을 담당할 都提調의 차출 등에 대해 의논한 내용.
與崔汝和 (16)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 萬言疏를 올린 뒤 조정의 재결을 기다려 출처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柳悠久 (17)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除目 중에 儒士를 별도로 천거하지 못했다는 외방의 비판 속에서도 천거를 기다리지 않고 마감해버린 잘못을 지적하고 영상과 함께 다시 의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南相國 (1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朴紹를 추장하는 일로 왕에게 아뢴 내용 중 ‘相垺’라는 표현과 ‘以爲定論’이란 구절에 대해 嶺南 士論의 비판도 있으니 조만간 고쳐 달라는 내용.
與申子平 (18) 申懹에게 보낸 편지. 신숭겸의 덕이 탁월하므로 申崇謙 祠宇의 일은 후손이라도 도와주어도 무방할 것이라는 내용.
與柳悠久 (18) 청렴한 이를 의논하여 뽑는 일에 대해 柳尙運과 상의하는 편지. 청렴한 이를 뽑는 일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與南相國 (18)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廉謹한 이를 가리는 일에 한 두 사람을 더 보태고 싶다는 의견을 전하고 선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의논하는 내용.
答金叔涵 (19)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萬言疏를 올렸는데 경연에서 다시 抄錄하여 왕의 재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그 쓰임 여부에 따라 진퇴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20) 尹拯에 대해 답한 편지. 靈光에 있는 사당에 姜沆 외에 宋時烈과 尹宣擧를 함께 배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南相國 (2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林泳 등의 거취와 申汝哲의 파직으로 인한 物情의 불안 등 인사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崔說書-啓翁 (21) 崔啓翁에게 답한 편지. 4월에서 8월까지 大片紙로 문틈을 견고하게 붙여 大成殿에 박쥐가 드나드는 것을 막으라는 내용.
答金象卿 (22) 金夢臣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안부와 去就를 전하고 量田하는 일과 선비를 가르치는 일 등 백성을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南相國 (22)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두 해 동안 陵役을 겪은 파주 사람들을 위해 坡州 玄花倉에 대한 조처‚ 파주 糴穀을 移減하는 일 등을 金浦 등의 예에 따라 헤아려 주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士亨 (23)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올린 상소의 근본을 附錄으로 다시 올려 쓰이던 쓰이지 않던 자세히 알리려고 하는데 상소문의 완성이 늦어지고 있다는 내용.
與宋玉汝-相琦 (24) 宋相琦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말로 인해 돌아갈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닌가 염려하고 해명하는 내용.
與任大年-元耈 (24)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金榦 등과 萬言疏의 附錄을 수집하여 베끼는데 지체되고 있음을 알리고 禁制의 수정‚ 敎令의 첨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朴喬伯-泰漢 (24) 朴泰漢에게 답한 편지. 侵虐하는 습관은 李珥도 선조 때 禁制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것으로 이 시점에 침학 문제를 논하는 것은 文士와 儒士의 기롱을 받을 뿐이라는 내용.
答泰初姪 (25) 朴泰初에게 1683년 이후 萬言疏를 올린 경위와 상소 후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전하는 편지. 廟堂에서 함께 일하자고 불러 놓고 함께 일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
與柳鳳瑞 (26) 柳鳳瑞에게 보낸 편지. 朴紹의 諡號를 청하는 글에서 ‘相垺’라는 것과 ‘以爲定論’이란 글자가 과중하여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아직도 고쳐주지 않은 것에 대해 그 경위를 상세히 물어 답해주기를 청하는 내용.
與李子三 (27) 李畬에게 보낸 편지. 어제 경연에서 상소를 채용하겠다는 말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 또한 유생들의 상소 草本을 李畬가 就正해 주었다고 하는 趙尙迪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묻는 내용.
與尹子仁 (27) 尹拯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상소에 대해 議處를 기다리고 있으니 거취의 결정이 이 달을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閔彦暉-以升 (27) 閔以升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어가를 陪從하지 못하여 待罪하다가 상소를 올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承宣이 계N속 오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兪大叔-集一 (28) 兪集一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이미 出場하였으나 客使가 와서 부득불 歸養하겠다고 청해 놓았다는 내용.
答許夏昌 (28) 許에게 답한 편지. 상소에서 出場할 뜻을 비추면서 한편으로는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해명함. 또한 北郊에 築城하는 일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大成-畬 (29) 遺訓 때문에 새로 제수된 명을 사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李畬에게 출처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가정만 중하게 여기지 말고 잘 헤아려 처리하라는 내용.
與宋玉汝 (29) 宋相琦에게 보낸 편지. 전 날 경연 중에 올린 ≪心學至訣≫이 玉堂에 있을 것이니 잘못된 글자 등을 校正하여 하나는 베껴 두고 하나는 다시 올릴 수 있도록 청하라는 내용.
與李大成 (29) 李畬에게 보낸 편지. 殿試에서 조차 말이 과격했던 일‚ 과거장에서 시험을 보면서 으레 이야기하는 풍조 등 科擧의 事體가 잘못되어 가는 것과 조정의 의논이 어그러진 것을 개탄하는 내용.
與南相國 (30) 南九萬에게 儒生의 상소와 憲府의 啓 등이 갑자기 나왔지만 왕이 이미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사직할만한 근거가 없다고 만류하는 편지. 그 외 충청과 황해 지역 도적 토벌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士亨 (31) 李泰壽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상소에서 청한 內需 및 政府에 대한 일은 영의정과 왕이 모두 행하기 어렵다고 하니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聖學의 大體를 기록한 <稽古錄>을 올린 뒤에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31)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憲府의 啓에 대해서는 왕이 批旨로 밝혔고 유생들의 상소 문구에도 남구만이 사직해야 할 만한 내용은 없으니 잘 헤아려 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李大成 (32) 李畬에게 보낸 편지. 時事의 궤멸이 분명한 가운데 入朝하였으니 경연과 備局의 의논을 조화하는데 힘을 기울이라는 내용.
答泰尙姪 (32)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돌아가기로 했으나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히고 朴誾의 묘비를 새로 세우는 일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金士肯-構 (33) 안부와 출처 문제에 대해 金構에게 답한 편지.
答金士直 (33) 金楺에게 갑자기 酷寒을 만난 것을 위로하고 상소에서 청나라 사신 문제를 거론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與南相國 (33)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처리‚ 청나라 사신으로 인한 자신의 거취‚ <稽古錄>을 올린 일 등에 대한 내용.
答宋道深 (35) 宋光淵에게 답한 편지. 낙후된 죄는 용서받았지만 상소에 대해 廟堂에서 행하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돌아가려는데 承宣이 따라와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宋玉汝 (35) 宋相琦에게 답한 편지. 사신의 牌文이 오기 전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반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경연 등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經筵故事>와 <稽古錄>을 올리는 내용.
答柳悠久 (37)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객과 對坐할 수도 없다고 전하고 權衡을 잡고 있으니 사대부의 廉恥와 名節을 진작하여 천명하는데 힘쓰라는 내용.
答南相國 (3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承宣과 함께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움직일 수 없다며 承政院에 머물러 있는 상소의 輕重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염려하는 내용.
答尹相國-趾完 (38)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통증이 추위로 심해져서 상소를 남겨두고 돌아왔는데 承宣이 뒤따라와 황공하다는 내용.
答黃周卿-世楨 (38) 黃世楨에게 답한 편지. 돌아온 뒤의 안부를 전하고 宋時烈이 자신에게 世道를 담당할 것으로 보았다는 말과 조정에 나아간 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季通-潗 (40) 李潗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이 조정에 들어 온 뒤 돌아왔는데 酷寒 속에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 曺家의 疑禮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伯祥-徵明 (40) 李徵明에게 보낸 편지. 登對하겠다며 承宣의 소환을 청한 일의 윤허 여부 등 자신의 거취에 대한 내용.
與李君輔 (41)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封事를 올린 뒤 받아들이지 않아 내려 온 뒤 趙相愚와 徐宗泰 등이 명을 받고 내려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汝晦-德明 (42) 李德明에게 답한 편지. 坤聖을 변무한다며 영의정을 공격하고 韓重赫을 신원하려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입장‚ 능행을 겪은 다른 곳처럼 坡州의 糴穀을 감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趙子直-相愚 (43) 趙相愚에게 답한 편지. 상소를 올렸지만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헤아리고 있다며 질병과 정세를 들어 필경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44)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허리와 다리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다시 사양하는 글을 올렸다는 것과 <稽古錄>을 왕에게 올렸다는 것을 전하는 내용.
別紙 (44) 청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의 출처 문제 등에 대해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別紙.
答李同甫 (45)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승지가 계속 내려오고 召還한다는 批旨를 받은 상황에서의 출처 문제와 일할 만한 단서가 마련되지 않고 있는 시세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45) 자신의 출처 문제에 대해 林泳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이 물러나 있지만 廟堂과 왕이 자신이 올린 상소를 실행할 의지가 없으니 물러나 講學하겠다는 내용.
與柳悠久 (46)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 遞職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전하고 都目政에서 새로 천거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答沈善長-元浚 (47) 沈元浚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萬言疏가 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들이 있지만 衆論을 따라 만언소를 채용한다면 국가와 世道를 위한 일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내용.
答李同甫 (1) 169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과 조화하여 國事를 함께 하고 싶지만 모두 尹拯을 천거하지 않은 잘못을 지적하고 臺省에서도 宋時烈이 賢邪를 분변하던 면모를 좇지 않는 잘못을 말하니 皇極을 주로 하여 好惡를 밝히려는 자신의 의견과는 맞지 않는다는 내용.
與徐君望-宗泰 (2) 徐宗泰에게 보낸 편지. 문묘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의 시호에 ‘道德博文’의 ‘文’字를 쓰지 않는다는 견해를 비판하고 朴淳의 비문과 宋時烈의 諡狀으로 보아 朴紹에게 이러한 시호를 내린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해명하는 내용.
答權致道-尙夏 (3) 權尙夏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서 儒士 및 蔭官 중 학식이 있는 자를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사람 속에 뽑혔을 것이라고 전하는 내용.
答宋玉汝 (3) 宋相琦에게 거취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忠原에 수령으로 나가게 된 것은 부모를 봉양하는데는 편하겠지만 조정에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4)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남구만과 자신의 안부 및 거취를 논하고 사신으로 인해 海西 量田을 명년으로 미루는 것과 關東의 改量을 실행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南相國 (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海西 방백이 먼저 10고을을 量田하기로 했다가 연기되고 방백이 임기만료로 돌아오게 되어 자신이 청한 大同과 양전이 虛套로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한 내용.
別紙 (6)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盧以益과 尹夏濟 옥사의 경위‚ 옥사의 처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關北伯-權是經 (7) 權是經에 답한 편지. 서울에 있는 동안 한 가지도 시행되지 않고 黃海道 大同마저 다시 거론하기 어렵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嶺西의 兵營 설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關東伯-申懷 (7) 申懷에게 답한 편지. 6품에 추천하는 일로 文東道와 梁得中이 각각 曺植의 풍과 司馬遷의 ≪史記≫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지적하고 朴泰初·金榦·李箕疇·朴鐔 등을 추천하는 내용.
答柳悠久 (8)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學術로 추천할 때 文東道는 曺植의 풍이 있고 梁得中은 司馬遷의 ≪史記≫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正學에 방해가 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朴泰初·金榦·李箕疇·朴鐔 등을 추천하는 내용.
與尹子仁 (8) 尹拯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栗谷別集≫의 勘定 작업이 지연된 경위‚ 金集의 ≪疑解續≫이 도착했는데 자세히 볼 틈이 없다는 것‚ 宋時烈의 遺藁의 지연 등에 대한 내용.
別紙 (9) 尹拯에게 보낸 편지. 遯巖書院에 父子師弟를 同享하는 것의 부당성‚ 윤증을 천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명.
與尹大憲子敬-榗 (10) 尹榗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소환을 청하는 啓를 중지해주기를 요청함.
答南相國 (11) 1695. 새로 卜相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청나라 사신 소식 등 時事와 병으로 보아 자신은 다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등을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與泰初姪 (12)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청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 다시 올라가라는 의견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萬言疏에 대해 廟堂이 행하기 어렵다 하고 왕도 發落하지 않고 있어 실행이 어려워지고 老少의 싸움은 극에 달한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해 상의함.
與金直卿-榦 (12) 金榦에게 보낸 편지. 사신 응접에는 따로 마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行公하는데 급급하지 말라는 의견을 밝히고 李喜朝와 李世弼 등의 출처 문제에 대해서 논한 내용.
與柳相國 (13)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다른 사람의 여론에도 부응하는 것이라며 새로 정승으로 임명된 것을 축하함.
答李汝九-箕洪 (13)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大政에 새로 제수되었다는 소식에 儒者의 출처는 隱遁하는 것과는 달라 지위와 才分에 따라 君臣의 의리를 다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힘.
答南相國 (14)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한 수고를 위로하고 자신은 巡撫使 절목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없음을 밝힘.
答尹子仁 (15) 1692. 尹拯에게 ≪栗谷別集≫ 중 入山에 관계된 구절과 ≪爲學之方≫ 중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을 고칠 것이니 뒤에 다시 봐줄 것을 청한다고 답한 편지.
別紙 (16)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趙翼의 ≪浦渚遺書≫의 내용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어 발문 쓰기를 사양하고 십수 책만 인쇄하여 자손과 학우들에게만 보내기를 권했는데 趙持恒이 尹拯에게 의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是非 문제는 자신이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大學≫과 ≪中庸≫의 抄刪에 長篇의 統論이 많아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17) 尹拯에게 답한 편지. 家叔의 喪을 겪은 뒤의 안부를 전하고 趙翼에 대한 文字 기술 문제‚ <爲學標錄>의 標題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尹子仁別紙 (17)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成守琛에게 長房과 祠堂을 건립하려는 논의에 대해 經禮에 따라 조천하는 것만이 비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힘.
答尹子仁 (19) 尹拯에게 답한 편지. 樓院의 장례에 모였을 때 토론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閔以升의 편지를 통해 들은 ≪源流≫ 校正의 곡절‚ 成守琛 祧遷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尹子仁 (20) 1693. 尹拯에게 답한 편지. 墓祭의 준거‚ 南溪精舍의 편액‚ ≪源流≫의 곡절‚ 坡山의 祧遷‚ 분실한 ≪栗谷外集≫의 再送‚ 文士의 習氣가 있는 ≪十三經注疏≫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崔錫鼎과 왕복한 格致說에 모두 문제가 있는 李世龜의 학문에 대한 염려 등.
與尹子仁 (21) 1695. 尹拯에게 보낸 편지. 金榦과 梁處濟 등의 도움을 받아 교정한 金集의 ≪疑禮問解續≫ 1책을 보내니 첨가하거나 刪定하여 보낼 것과 정승이 된 뒤의 호칭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 (22) 1692.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閔以升에 답하는 편지에 보인 ‘微文ꝯ節’이라는 구절에 대해 三年喪紀에 朱子의 定論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내용.
答崔汝和 (2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친구들의 부고가 이어지는 것에 대한 감회‚ 妾母에 대한 복제 문제‚ ≪東儒師友錄≫에 도움이 될 근래의 文集과 개인 기록 등을 빌려 줄 것 등의 내용.
答崔汝和 (23) 169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朝夕의 哭을 파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한 견해와 부친의 遺命을 고려하여 마음에 편안한 대로 행하라는 내용.
答崔文叔-奎瑞 (24) 1693. 崔奎瑞에게 답한 편지. 성안에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벼슬이 없었던 것을 위로하고 최규서의 형이 金集의 말을 기록해놓은 遺草를 보여 달라는 내용.
別紙 (24) 崔奎瑞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병약한 자신의 아들 대신 형수가 大宗을 이을 후사를 먼 곳에서 구해 온 일의 타당성 여부 등 立後 문제에 대한 물음에 의견을 밝힘.
答林德涵 (25) 169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집 안팎의 계속되는 우환‚ 큰 가뭄 속의 農情에 대한 염려‚ ≪經書講疑≫의 진행 상황‚ ≪小學≫ 공부를 소홀히 하는 학문 태도에 대한 비판 등.
與林德涵 (27) 林泳에게 보낸 편지. 흉년으로 인해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는 海西 등의 상황‚ 延白에서의 講學 활동에 대해 전하고 門人들의 안부와 학문활동에 대해 묻는 내용.
答林德涵別紙 (28) 1693.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데 주력하다 禪에 들어가게 될 것을 염려하고 鄭齊斗의 陽明學‚ 崔錫鼎과 李世龜의 格致에 대한 訓義 등을 비판하는 내용.
答林德涵 (29) 林泳에게 답한 편지. ≪栗谷別集≫ 및 ≪年譜後本≫ 중 이이의 入山 문제에 대한 尹拯의 편지에 송시열이 분노한 일‚ 羅州 유생들이 세운 朴尙衷 祠堂의 移安 문제 등에 대한 내용.
別紙 (31) ≪大學≫의 輯註에 나오는 絜矩의 의리 및 喪 중의 昏禮에 대해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答林德涵 (32) 林泳에게 답한 편지. 경서에 대한 작업 중인데 李喜朝와 金楺의 도움을 받기 어렵게 되었다. ≪南華經≫을 본다는 소문에 대해 경계하고‚ 師友 門人들의 동향과 안부를 묻는 내용.
與林德涵 (34) 1694. 林泳에게 병을 생각하여 응접을 삼갈 것을 당부하고 兪正重과 愼爾定 등의 유명한 의원을 소개함. 또한 약을 잘 헤아려 먹을 것을 부탁하는 편지.
答沈聖可-權 (35) 1693. 沈權에게 여러 일들과 행적이 뒤섞여 부탁받은 비문이 늦어졌음을 전하고 유배 중에 사당을 받드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任大年 (35)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張拭의 ≪洙泗言仁≫‚ 朱熹의 ≪儀禮經傳≫‚ ≪樂經≫이 완성되지 못하거나 인멸된 것이 아쉬워 ≪文獻通考≫ 등에 실린 律呂의 기록을 모았으니 자세히 살펴달라는 내용.
答趙汝常-持恒 (37) 1692. 趙持恒에게 답한 편지. 趙翼의 문집 중 遺書에 朱子에 未安한 곳이 있으니 십수 권만 인쇄하여 자손 및 친구와 학문하는 이만 소장하게 하라는 의견을 다시 한 번 밝힌 내용.
答李壽翁-世龜 (37) 1693.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尹拯에게 장차 ≪十三經注疏≫에 힘쓰겠다고 한 말을 듣고 文士들이 博學하는 데 힘쓰는 폐해를 지적함.
與權致道 (38) 1692. 權尙夏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 遺文의 편찬을 맡고있던 宋疇錫의 죽음으로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자료를 수습하는 것이 정돈하는 것보다 중요할 것이라는 내용.
與李君輔 (39)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鄭齊斗를 찾아보았는지 물음. ≪栗谷別集≫과 ≪東儒師友錄≫의 首尾가 고르지 못한 폐단을 바로잡고 崔永慶이나 金宇顒‚ 柳成龍 등을 내려 쓴 곡절을 설명하여 빠뜨리지 말 것 등을 당부함.
答梁季通-處濟 (40) 梁處濟에게 姜翼의 碣文에 대해 상의하는 편지.
與梁季通 (40) 1694. 梁處濟에게 보낸 편지. 文東道에 대한 평가의 애매함을 지적하고 金集의 ≪疑禮問解續≫을 편집한 것이 집에 없다며 찾는 내용.
答成汝望-世柱 (40) 1692. 成世柱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모친상에 연이어 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의 主喪을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喪祭禮에 대한 내용.
答申參奉-銓 (41) 申銓에게 답한 편지. 喪으로 인해 禫祭할 달에 미루어진 大祥을 행했을 때 담제도 함께 행할 것인지와 담제를 행하지 않고 大祥만 할 때의 복색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내용.
答朴晦叔-銑 (42) 1693. 朴銑에게 답한 편지. 여러 번 찾아왔는데도 강학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출처와 거취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朴喬伯 (42) 朴泰漢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데 自得하기를 힘쓰고 士友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異端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며 경계하는 내용.
答李子望東耈 (43) 1692.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安分樂命하라는 말 등을 유념하겠다며 잘못을 스스로 줄이려고 하나 잘 되지 않아 근심이라는 내용.
答高益之-益謙 (43) 1693. 高益謙에게 답한 편지. 경내에 학문에 뜻을 둔 자가 7-8명이나 되는 것을 축하하고 언행이 儒林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고 학문에 더욱 유념하라는 내용.
答金直卿 (1) 1692. 金榦에게 답한 편지. 家禮에 대한 질문에 別幅으로 답했다는 것‚ 李世弼·李世龜·崔錫鼎과 窮止의 竝用 문제로 토론한 것‚ 成世柱가 서신을 보낸 일 등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 (1) 金榦에게 답한 편지. 복제설에 대한 의견과 開元禮에 근거한 ≪家禮≫를 하나의 제도로 삼고 經傳의 註疏를 쓰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견을 밝힘.
答金直卿 (2) 1693. 金榦에게 답한 편지. 수십 일간 講學도 않고 책 하나도 參證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개탄하는 내용.
答金直卿 (2) 1694. 金榦에게 답한 편지. 예설로 閔以升·李世弼 등이 잇따라 움직이며 갈등을 일으키게 한 것을 질책하고 임지에서 알아서 하도록 버려두라고 답한 내용.
答金直卿 (3) 金榦에게 답한 편지. 遺模를 자세히 교정해준 노고를 치하하되 근래 사우들간의 토론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염려하는 내용.
與李同甫兄弟 (4) 1693. 李喜朝 형제에게 보낸 편지. 歷代史와 ≪讀詩要義≫의 진행 상황을 전하고‚ ≪考亭淵源≫과 經書에 나오는 先儒 姓氏의 완성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
與金士直 (5) 金楺에게 보낸 편지. ≪讀詩要義≫ 완성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면서 ≪讀詩要義≫를 편찬하는 의의와 경과에 대해 설명함.
答閔彦暉 (7)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禮輯≫의 두 가지 조목‚ ≪栗谷年譜≫‚ <太極問答>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疑輯≫ 兩本 및 ≪通典禮說≫의 소재를 찾는 내용.
答閔彦暉 (8) 1694. 중전의 복위를 기뻐하고 贊成에 임명된 뒤의 進退 등에 대해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答沈明仲-世熙 (8) 1693.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에 대한 평가와 송시열과의 관계를 해명함. 師友들이 교제하는 도리‚ 심세희 어머니 狀文을 찬하는 일에 대한 내용.
答崔士重-世進 (10) 1692. 崔世進에게 답한 편지. ≪二書要解≫를 보냈다며 海州 선비들이 핑계하며 학문에 나오지 않는 데에 대한 염려와 과거 응시의 폐단을 지적하고 崔瑞吉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
答朴大叔 (12) 1694. 朴鐔에게 답한 편지. 평소 바른 말로 규계하던 이로는 李之濂이 있었는데 이제 책려해 줄 사람이 없다며 士友간의 관계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申列卿-佾 (13) 1693. 申佾에게 답한 편지. 院宇의 修改를 축하함. ≪要訣≫을 중심으로 삼아 持身讀書에 힘을 다할 것과 ≪小學≫·≪大學或問≫에 침잠할 것을 권하고 <要訣爲學圖>를 보내니 참고하라는 내용.
答金錫文 (14) 金錫文에게 답한 편지. 배운 바가 俗儒와 다르다고 칭송하고 이사한 뒤 소식을 듣지 못하다 族子가 수령이 되어 찾아 뵌 것을 계기로 소식을 전하니 답을 달라는 내용.
答李夏卿-熙夏 (15) 李熙夏에게 답한 편지. 마음을 안정시키고 조용히 생각하여 일체의 쓸데없는 일을 제거하고 오로지 정밀하게 구하면 될 것이라는 내용.
答申雲卿-漢立 (16) 1694. 申漢立에게 답한 편지. 九容九思의 요목과 實體를 힘써 행하고 근본을 세워 ≪大學≫에 나아가겠다는 학문의 자세를 격려하고 講目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알려주겠다는 내용.
答李生益材 (17) 李益材에게 답한 편지. 祠宇에 告祝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洪昌平-禹錫-別紙 (17) 洪禹錫에게 답한 편지 別紙. 平澤의 院宇에 享祀할 인물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朴一和-尙淳 (18) 1692. 朴尙淳에게 보낸 편지. 3년 동안의 안부를 묻고 은거하는 중에도 학문에 마음을 두기를 권하고 先王府의 지문을 새기는 일 등에 대해 의논함.
答金叔涵 (18)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중외의 동지들이 서거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감회를 전하고 ≪朱子大全≫ 書札의 答問 考正을 李萬挺에게 부탁했다는 것을 알림.
答金叔涵別紙 (19) 1694.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3세 이하에 거두어 기른 養父母에 대한 복제 문제에 대해 고증함.
答趙德叟-泰耈 (21) 1692. 趙泰耈에게 답한 편지. 학문의 大志를 세우고 ≪大學≫과 ≪小學≫에 힘쓸 것‚ 막힌 것은 師友에게 나아가 講明할 것‚ 服이 없는 처의 아버지‚ 어머니의 형제에 대한 제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李士粹-彦純 (21) 李彦純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는 節度가 있어야 하며 實地의 공부란 스스로 마음을 주인으로 삼아 조처할 뿐 바깥 사람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
答李士亨 (22) 誄文에 있는 眞訣‚ 喪祭儀撮要에 관한 일‚ 編著 작업 등에 대해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答羅仁卿-斗甲 (23)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안부를 전하고 三賢의 門人에 대해 ≪己丑錄≫ 등을 통해 확인해줄 것을 부탁함.
答羅仁卿 (24)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孝悌 친목에 힘쓰느라 독서하여 致知할 겨를이 없다고 했는데 이제 뜻을 세워 竝進하고 있는지 묻고 멀리 있어 講學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善長 (24) 沈元浚에게 답한 편지. 饋奠할 때에도 틈이 있으면 ≪小學≫·≪大學≫·≪論語≫·≪孟子≫ 등을 읽어 의리를 자득하고 躬行 心得을 위주로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沈善長 (24) 沈元浚에게 보낸 편지. 喪禮로 몸을 보존하지 못할 정도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居憂의 절목은 성현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居喪으로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도 불효라는 내용.
答李武叔-彦緯 (25) 1693. 李彦緯에게 보낸 편지. 근래 선비들이 학문에 마음두지 못하는 것이 과거와 생계 때문이라는 말을 염려하는 내용.
與鄭伯虞-束益 (26) 鄭束益과의 오랜 일을 추억하고 遯居自樂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안부를 묻는 편지.
答宋文叔-奎炳 (26) 宋奎炳에게 답한 편지. 여러 벗들이 서원에 거처하며 강습한다는 소식에 격려하는 내용.
答金汝厚-載重 (27) 1692. 金載重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서 독서와 실천의 관계를 논하고 ≪小學≫으로 근본을 세운 다음 독서하여 ≪大學≫의 格致의 의리를 알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伯武-世雄 (28) 申世雄에게 답한 편지. 操心의 요체는 ≪心經≫에 두고‚ 敬은 程子의 主一無適을 위주로 하면 內外가 합해질 것이라는 내용.
答申英仲 (29) 1694. 申英仲에게 답한 편지. 朱門의 6書를 먼저 읽고‚ 孔門의 6經을 읽으며 이 외에 ≪心經≫과 ≪家禮≫ 등을 시기에 맞게 힘쓰라는 것 등 ≪要訣≫ 등에 나오는 讀書의 차제에 대한 내용.
答崔士遜-敏學 (29) 1692. 崔敏學에게 답한 편지. 立志와 노력은 다른 이들이 미치지 못할 바인데 기량이 넓지 못하고 實功이 온전하지 않으니 弘毅하고 敬畏하여 自得하는데 힘쓰기를 당부하는 내용.
答崔士遜 (29) 1693. 崔敏學에게 답한 편지. 근래 하고 있는 공부를 묻고 태만해지거나 聲名과 利祿에 빠지는 병통이 없이 노력한다면 능히 성취할 것이라는 내용.
答韓仲常-德恒 (30) 1692. 韓德恒에게 답한 편지. 오랫동안 서로 모이지 못하였는데 학문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며 조만간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자는 내용.
答申成甫 (30) 申聖夏에게 답한 편지. 학문을 하겠다는 뜻을 격려하고 心身을 收斂하는 데는 ≪小學≫<敬身篇> 만한 것이 없으니 자세히 살펴 힘써 행하라는 내용.
答申成甫 (31) 申聖夏에게 문장하는 습속 등에 물들지 않고 학문에 힘을 다하는 것을 격려하고 근래 편집한 ≪居家要義≫를 보기를 권유하는 편지.
答申成甫 (31) 申聖夏에게 학문하려는 뜻이 원대하고 깊어 근래의 습속과 다른 것을 칭찬하는 편지.
答申成甫 (31) 申聖夏에게 ≪大學≫ 格致章에서 正心을 먼저 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답한 편지.
答申成甫 (33) 申聖夏에게 답한 편지. 대학을 의심하고 변환하는 것은 陸王의 무리일 뿐이라며 ≪小學≫의 明倫敬身과 ≪大學≫의 格致誠正으로 학문하고 가벼이 의견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李季通 (34) 李潗에게 답한 편지. 이집과 任璟 등이 老佛에 왕래하고 詞章에 歸宿하고 虛名을 사모하고 知行의 實功을 꺼리며 正學을 鷄肋과 같이 여기는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答黃擧卿-翊良 (35) 1693. 黃翊良에게 답한 편지. 지난해에 仙鄕의 벗들과 종유하던 이들이 과거에 나서는데 홀로 고요함을 지키며 독서하는 것을 격려하고 鐵山의 金南烈과의 교유를 권하는 내용.
答權季文-尙游 (35) 1692.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是非를 밝히고 世道를 부지할 계책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와 자신의 거취에 대해 밝히고‚ 아들이 서울에서 고한 것에 대해 자신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함.
答辛錫孝 (36) 1693. 辛錫孝에게 답한 편지. 안부를 묻고 전에 물은 ≪近思錄釋義≫는 병으로 자세히 답할 수 없으니 반드시 箚錄하여 두었다가 다른 날을 기다려 토의하겠다는 내용.
答宋命賢 (36) 宋命賢에게 답한 편지. 친구가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막은 것은 정황을 알기 어렵지만 지나치게 준엄하면 병폐가 될 듯하다는 내용.
答崔平甫-衡 (37) 1692. 崔衡에게 답한 편지. 祭儀 축문의 문자‚ 四時의 正祭를 追復하기 전에 먼저 俗祭를 없애는 것에 대한 염려‚ 光山 朴君의 夭折과 같은 제자들의 동향 등에 대한 내용.
與崔平甫 (37) 崔衡에게 보낸 편지. 開城의 痘疫으로 올라오기 어려우니 林令과 羅友와 공부를 함께 하면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祭儀는 正本을 빌려 謄本을 교정한 뒤 시행할 것‚ ≪小學≫으로 큰 근본을 세우고 ≪大學≫의 格致 공부로 이어지는 爲己之學에 힘쓸 것을 권하는 내용.
答崔平甫 (38) 1693. 崔衡에게 답한 편지. 林泳과 朴泰初와 함께 강마할 것‚ 가지고 있는 ≪讀記≫와 ≪要解≫가 어느 것을 베낀 것인지 묻고 修改할 것이 많으니 여항에 전파하지 말라고 당부함.
答金聖任-相殷 (38) 金相殷에게 追喪 문제는 효성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이미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답한 편지.
答崔子益-補 (39) 1692. 崔補에게 ≪小學≫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한 편지.
與愼子貞-無咎-敬所-無逸-兄弟 (39) 1693. 愼無咎와 愼無逸 兄弟에게 보낸 편지. 선비들이 추앙을 받는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학문에 우선하고 과거는 다음으로 할 것을 당부함. 자신이 ≪退溪集≫과 ≪朱子大全≫을 번갈아 읽고 있는데 이단을 밝히고 삿된 것을 끊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내용.
答梁哀-得中 (41) 1694. 梁得中에 답한 편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墓文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인편이 되는대로 내려보내겠다는 내용.
答李季章-世瑍 (41) 1693. 李世瑍에게 답한 편지. 金載海 등과 ≪朱子大全≫도 읽었다는 것을 격려하고 文儒가 되지 말고 存心致知에 힘을 기울여 실질적인 것에 힘쓰라고 당부함.
答李上舍-眞儒 (42) 李眞儒에게 답한 편지. 次子가 主喪할 때의 題主는 傍註를 비워두고 祝辭는 섭행한 것으로 말할 것 등의 의견을 밝힘.
答李上舍 (42) 李眞儒에게 학문과 科名의 관계에 대해 답한 편지로 操行을 더하여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학문에 實이 없을 것이고 과거를 하여도 得失에 움직여 싸울 뿐 수립하는 것은 없게 될 것이라는 내용.
答李久叔 (43) 1692. 李眞望에게 답한 편지. 요새 선비들이 科業과 詞章을 記誦하는 일에 뜻이 분산되어 性과 道에 보탬이 없는 것을 염려하고 선비된 자는 성현의 경전을 主業으로 삼아 人道를 닦고 正學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
答李久叔 (44) 1693. 李眞望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서 科擧와 詞章까지 욕심을 부리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니 存心致知에 주로 힘쓰고 다른 것에 미혹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具子受-鼎勳 (44) 1692. 具鼎勳에게 답한 편지. ≪大學≫의 小註는 章句를 100여 차례 읽고 나서 읽을 것‚ 복제의 기간은 成服日을 기준으로 할 것 등의 내용.
答李遠卿-緬 (45) 李緬에게 답한 편지. 沈俔의 작고 등 海西 선비들의 동향과 ≪擊蒙要訣≫·≪小學≫·≪大學≫·<白鹿洞規>·<敬齋箴> 등을 위주로 하는 학문의 순서와 방도 등에 대하여 알려주는 내용.
答李遠卿士章-綖 (47) 李緬과 李綖에게 답한 편지. 崔瑞吉이 죽었는데 가보지도 못하는 것을 애석해하고 ≪二書要解≫‚ ≪周易口訣≫ 등의 작업 진행에 대해 질문함.
答李遠卿 (48) 1693. 李綖에게 답한 편지. 養生報本의 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묻고 그것이 사우들에게 해가 되고 신선술을 좇아간 사람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
答金汝精-克成 (1) 1693. 金克成에게 답한 편지. 학문의 대체는 窮理하는 공부에 있다. ≪荀子≫·≪莊子≫·≪列子≫ 등을 看讀하는 것은 玩物喪志하게 될 위험이 있고‚ ≪大學或問≫ 등을 읽으면 知行이 서로 긴밀하여 節約하는 공부에 더욱 뜻을 둘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安岳鷲嶺院生 (1) 1692. 安岳 鷲嶺書院의 원생에게 답한 편지. 서원이 본래의 뜻을 잃고 과거를 위해 선비들이 서로 접하는 장소가 된 것과 院長이 강학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院長 자리를 승낙하여 강학하고 싶은 맘은 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렵다는 내용.
答遯巖院生 (2) 1694. 遯巖書院의 원생에게 金長生과 申欽과의 관계 등을 들어 원장을 승낙하는 내용.
答遯巖院生 (2) 1694. 遯巖書院의 원생에게 답한 편지. 尼懷간의 시비는 있었지만 이미 金集이 李珥가 李彦迪의 잘못을 지적했어도 함께 從祀할 수 있다고 한 예가 있으니 尹宣擧를 宋時烈과 함께 配享하는 것은 불가할 것은 없지만 金長生과 김집이 主配의 관계로 되어 있으면 스승과 함께 배향하게 되어 위차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遯巖院生 (3) 遯巖書院의 원생에게 답한 편지.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 들어있던 사람들과 이번 편지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다른 것 등으로 보아 서로 다툼과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나 宋時烈과 尹宣擧를 並享하는 문제는 전에 편지한 것과 같고 송시열이 윤선거를 공격한 것은 있을 수 있지만 후생이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내용.
答道峯院儒 (4) 道峯書院 원생들에게 답한 편지. 원장 자리를 맡았지만 외간에 事端이 많고 논의가 정해지지 않은 때에 원장의 임무를 계속하기 어려워 보내 온 단자를 돌려보낸다는 내용.
答道峯院儒 (4) 1695. 宋時烈의 도봉서원 향사 문제에 대해 道峯書院 원생들에게 답한 편지. 並享과 配食 여부‚ 거행할 시기‚ 축문의 문사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抱川花山院生 (5) 1694. 抱川 花山書院의 원생들에게 답한 편지. 永平 玉屛書院의 일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병이 좀 나으면 坡山과 長湍 등지는 수십 리 안에 있어 다른 서원과 한꺼번에 가서 강학하기로 한 것이고 화산서원은 오가며 강학하기 어려워 청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
答永同書院諸生 (6) 1695. 院宇에 奉安하는 위차를 결정할 때 時代와 道德 중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의견이 달라 감히 말할 수 없고 宋時烈이 살아있을 때 이미 院長으로 자처하였으니 昆弟의 倫序만 아니라면 그 의리를 따라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泰恒姪 (6) 1692. 朴泰恒에게 답한 편지. 사당 봉안이 遷墓로 인하여 늦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祭儀와 祭饌‚ 예를 행할 장소‚ 攝行 문제 등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
答泰恒姪 (7) 1693. 朴泰恒에게 답한 편지. 사당에 奉遷하는 일을 급히 거행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祝辭‚ 改題의 儀節 등과 回婚禮의 節次에 대해 답한 내용.
與泰初姪 (8)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錦城 祠宇의 일‚ ≪栗谷年譜≫의 일‚ 林泳·梁處濟·金載海의 학문 등에 대한 의견과 ≪大學≫·≪近思錄≫의 讀記‚ 祭儀 등에 관한 내용.
與錦平孫 (9) 祧主를 埋安할 때 臥安할 것인지 立安할 것인지 前例를 살펴 朴弼成에게 답한 편지.
答弼明孫 (10) 1692. 朴弼明에게 답한 편지. 증조부 형제가 각자 하나의 宗이 되었으니 宗孫이 婚主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弼英孫 (10) 朴弼英에게 답한 편지로 芸館에서 간행한 ≪小學≫이 栗谷本이라는 것에 기쁨을 전하고 겨울부터 봄까지는 오로지 ≪小學≫과 ≪家禮≫만 보라는 내용.
答弼純孫 (10) 禫祭를 행할 절차 등에 대해 朴弼純에게 답한 편지.
答弼仁孫 (11) 存心의 요체 등에 대하여 朴弼仁에게 답한 편지.
答弼仁孫 (11) 1693. 눈병으로 독서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학문의 근본은 躬行하는 것이 있으니 마음을 보존하여 修身에 힘쓰라고 朴弼仁에게 답한 편지.
答尹子仁問-禮 (12) 妾이 女君의 黨을 위해 입어야 할 服制에 대한 尹拯의 질문에 대해 답한 글.
答李君輔問-東儒師友錄 (13) 1692. ≪東儒師友錄≫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李仲虎의 <心性情圖>와 李彦迪에 대한 李珥의 설 포함 여부‚ 李滉의 語錄‚ 朴淳·奇大升·黃俊良 등의 일‚ 柳成龍·金誠一의 순서‚ 崔永慶·金宇顒·成渾에 대한 기록의 처리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問-禮 (17) 1693. 형수의 장례에 형과 조카의 妻를 일시에 개장할 때의 절차‚ ≪家禮≫에 나오는 主櫝의 제도 등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 (19) 1692.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大學≫ 正心章과 體用의 문제‚ 格物物格에 대한 李世龜·鄭齊斗의 異說 비판‚ 외조부모 봉사손의 아들이 제사할 의절과 題主‚ 妾母에 대한 妾子 아들의 服制 등에 대한 내용.
答申公獻問-祭禮 (25) 祭禮에 관한 申琓의 질문에 답한 글. 私親의 喪으로 家廟 제사를 감쇄하기 어려울 때 私喪을 아들이 대행하는 문제와 제사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金子懷問-喪禮 (27) 祔祭를 행하지 못한 妻를 추가로 先廟에 班祔할 것인지 여부. 형에게 출계한 아들의 服色‚ 練祭 때의 의복과 신발‚ 主祭‚ 祝辭 등에 대한 金洪福의 질문에 답한 글.
答尹仲綱-世紀-問-喪禮 (29) 1693. 小祥日을 물렸을 경우의 初忌日 別奠‚ 8세 童子의 服制 문제 등에 대한 尹世紀의 질문에 답한 글.
答尹仲綱問-喪禮 (30) 變除하는 날을 宗子가 成服한 날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喪에 대해서 들은 날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尹世紀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家禮 (32) 1692. 爐合과 酒果의 위치‚ 銘旌을 쓰는 요령‚ 제사에서 炙肝의 사용 여부‚ 상을 당한 이에 보낸 慰疏의 答疏에 姓名을 말하는 이유 등 ≪家禮≫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禮 (35) 죽은 嫡子의 초상을 맞아 3년 斬衰服을 입는 규정이 있는데도 참최가 너무 과중하다고 한 이유‚ 기년복을 입었을 때의 變除 시기 등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再問 (36) 金榦에 대한 질문에 답한 글. 아들에 대한 服制 變除 절차와 복색‚ 正體의 의미‚ 자식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경우‚ 次子 및 庶子 承重과 正體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問 (1) 1693. 李世龜의 질문에 답한 글. ≪大學≫ 經1章 止於至善에서 ‘止’字의 의미‚ ≪家禮≫ 通禮 祠堂章 附註에 대한 해석‚ 大宗과 小宗의 의미‚ 제사에 참여한 主婦의 의절‚ 深衣의 제도‚ 喪禮에서 襲衣할 때 握手하는 방법‚ 小殮 뒤 尸床을 옮기는 의절 등의 내용.
答李同甫問-二書要解 (9) 1694. ≪二書要解≫에 대한 李喜朝의 질문에 답한 글. 人心道心章 ‘滋長’의 뜻과 ‘微’자에 대한 해석‚ 閑邪存誠章의 ‘心一’ ‘閑邪’과 敬以直內章의 ‘敬以直內’의 의미‚ 通禮 祠堂 附註의 사당 제도‚ 齊衰의 月數‚ 家廟 祠堂의 兩堦 제도 등에 대한 내용.
答金仲固-栽-問-喪禮 (13) 1692.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祥祭 뒤의 복색‚ 網巾의 제도‚ 祥祭 뒤 사당에 신주를 들일 때의 奠 및 哭拜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羅顯道-良佐-問-學 (14) ≪大學≫의 大旨를 忠恕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羅良佐의 질문에 답한 글.
答羅顯道再問 (16) 1693. 四書 중 ≪大學≫의 大旨만 말하지 않은 이유와 ≪대학≫의 大旨는 무엇인가 하는 羅良佐의 재질문에 답한 글.
答羅顯道問-喪禮 (19) 1694. 虞杖과 虞祭 뒤의 朝夕上食 등 虞祭에 관한 일‚ 祔祭의 복색‚ 3년 내의 朔望 참여 여부‚ 俗節의 祭饌 문제 등 喪禮에 대한 羅良佐의 질문에 답한 글.
答朴大叔問-學 (20) 集註의 ‘如或見之’의 의미‚ 孟子와 朱子 등의 伯夷·伊尹 및 子賤·子貢 등에 대한 평가 문제 등에 대한 朴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柳道卿-貴三-問-禮 (21) 1693. 장자와 장손이 죽고 장손에게 아들이 없어 후사를 세우지 못했을 때의 主喪‚ 모친 장례 뒤 부친상을 당했을 때의 几筵·朝夕奠·복색 등에 관한 柳貴三의 질문에 답한 글.
答趙君範問-喪禮 (22) 1692. 喪禮에 대한 趙楷의 질문에 답한 글. 腰絰을 만드는 재료‚ 直領의 제도에 대한 내용.
答洪士式-重楷-問-禮 (24) 할머니 諱日에 伯父가 入葬할 때의 祭饌과 의절에 대해 물은 洪重楷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漢臣-是翁-問-禮 (24) 1692. 禮에 대한 崔是翁의 질문에 답한 글. ‘外甥’가 지칭하는 것‚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이가 姉妹에 대해 입을 복제‚ 書院 건립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李子望問-喪禮 (27) 1693. 服 중에 죽은 사람의 장례 전에 素饌을 써야 하는지 여부‚ 題主가 아이일 때의 祝辭‚ 禫祀에서 閏月 계산‚ 남편 생전에 쫓겨났던 妻妾을 남편의 사당에 모시는 문제 등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士亨問-喪禮 (28) 喪禮에 대한 李泰壽의 질문에 답한 글. 復의 의미‚ 조석에 곡하는 자세‚ 點茶時의 예‚ 조문할 때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함께 있을 때의 의절‚ 妻의 신주를 둘 곳 등에 대한 내용.
答趙德叟問-喪禮 (30) 부친을 장례 전에 어머니를 改葬할 때의 복색 제도 등에 대한 趙泰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趙德叟問-禮 (31) 1694. 다른 집으로 옮겨 祔祭할 때 合祀할 위차‚ 장사 전에 家廟를 옮겨 봉안할 때의 의절 등에 대한 趙泰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士遜問-論語 (1) 1693. ≪論語≫에 대한 崔敏學의 질문에 답한 글. <序說> 程子小註 ‘改容更貌’의 뜻‚ 땅 속으로 36도 들어가 보이지 않는 南極을 알 수 있는 이유‚ 공자가 詩를 刪定했다고 했을 때 ‘刪定’의 뜻‚ 三統의 뜻‚ 禘 제사‚ 子賤을 不器의 군자라고 한 이유‚ 冉求를 공격하라고 한 이유‚ ‘성인의 도가 커서 천하의 일과 만물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士粹問 (13) 1692. 경서의 經文·章句 및 諸家 註解를 읽는 방법‚ 返魂한 뒤 이사했을 경우의 喪禮 의절‚ 練祥과 忌日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 등에 대한 李挺英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汝精-擇之-問-喪禮 (16) 1693. 喪禮에 대한 梁擇之의 질문에 답한 글. 어머니와 長兄의 상이 겹쳐 빈소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의 상제‚ 嫡子가 없고 妾長子에게는 賤妾子만 있고‚ 妾次子에게는 正妻 소생이 있을 경우 후사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 답한 내용.
答申列卿問-禮 (17) 禮에 대한 申佾의 질문에 답한 글. 아버지와 어머니 묘의 좌우를 바꾸는 문제‚ 后土에 제사할 때의 의절과 祝辭‚ 합장할 때 먼저 장사지낸 곳에 고하는 말‚ 襲奠의 陳設‚ 祔祭할 때의 祝辭 등에 대한 내용.
答文明仲問-喪禮 (20) 곡하는 위치‚ ≪儀禮≫에서 ‘下室에 먹을 것을 드린다’고 할 때의 ‘下室’‚ 저녁 곡 끝난 뒤의 혼백 위치‚ 靈床寢具의 방향과 發靷 뒤의 처리‚ 望奠‚ 平土 뒤의 后土祭‚ 返魂할 때 말과 가마를 사용하는 근거 등 喪禮에 대한 文後開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進士-時亨-問-改葬禮 (22) 改葬할 때의 几筵‚ 上食‚ 虞祭 등의 禮에 대해 李時亨에게 답한 글.
答李進士問-喪禮 (23) 喪禮에 대한 李時亨의 질문에 답한 글. 父親喪 중 모친을 改葬할 때의 복색‚ 동일한 빈소의 사용 여부‚ 行喪하는 날짜‚ 개장할 때 靈座의 설치 여부 등.
答申雲卿問 (25) 申漢立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 首章 人性의 綱 내용‚ ≪小學≫ 明倫敬身과 ≪大學≫ 誠意正心修身과의 관계‚ ≪小學≫과 ≪家禮≫ 祠堂章의 ‘屋覆’의 뜻‚ 昏禮 상차림과 致賻‚ 四時祭의 終獻 의절‚ 后土祭‚ 四名日의 墓祭‚ 상복 裁斷의 척도 등에 대한 내용.
答閔寡悔-愼-問-喪禮 (31) 1692. 후손 없이 먼저 죽은 형에 대한 입후를 미루고 참최복을 주관할 때 題主의 호칭 문제에 대한 閔愼의 물음에 답한 글.
答權賓之-鑌-問-論語 (32) 1693. ≪論語≫에 대한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學而>의 務本에 관한 圖說‚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의 吐‚ 小事와 大事의 구분‚ <八佾>篇 樂舞의 수‚ 正理의 질서와 禮樂‚ 告朔의 禮 등에 답한 내용.
答權賓之問-禮 (39)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初終 易服의 去冠 절차‚ 殮과 襲의 절차와 복색‚ 小祥 때의 복색‚ 喪禮에서 喪禮備要의 위치‚ 上食‚ 朔日과 望日의 設饌‚ 后土 제사의 陳設‚ 外棺 사용 여부‚ 朝祖의 儀節‚ 轆轤 사용 여부‚ 玄纁‚ 茅沙‚ 분묘의 크기 등에 대한 내용.
答權賓之問-喪禮 (49) 喪禮에 대한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부친상 중에 모친을 改葬할 때의 복제와 절차‚ 合葬할 때 后土神에 대한 祝辭 등.
答權賓之問-喪禮 (50) 翣의 위치‚ 虞祭나 卒哭 이하 大祭 및 朝夕上食과 朔望奠의 陳設 등 喪禮에 대한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祭儀 (51) 1692. 時祭할 때 처 이하의 자리를 정한 근거‚ 魚湯과 肉湯 사용의 근거‚ 侑食할 때 匙箸의 위치 등 祭儀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禮 (53) 親喪 變除 절목‚ 練祭만 행하려다 祥祭와 禫祭를 행하면서 白笠을 쓴 지 1년 이상 쓰게 되었을 경우의 조처 등 海西의 時俗을 변통하는 일 등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心經 (1) 1693. ≪心經≫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心經≫ 序註中의 標錄에 讀書記라 칭할 만한 것이 없다는 설에 대한 고증을 비롯하여 ≪心經≫의 해석 등에 대한 의견.
答鄭眞卿問-家禮 (1) ≪家禮≫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儀節歷數圖> 등 ≪家禮≫에 실린 그림‚ 斜長의 길이에 대해 말한 것이 서로 다른 이유 등 가례의 해석‚ 고증 등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答金士直問-喪禮 (1) 1692. 喪禮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遣奠의 祝 사용 여부‚ 玄纁奠의 의절‚ 題主에서 ‘顯’字의 사용 여부‚ 조카가 상주일 때 숙부의 亞獻 여부 등에 대한 의견.
答金士直問-禮 (2) 1693. 禮經에 內外族 자매들의 복제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喪禮 (3) 喪禮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改葬할 때 관이 썩어 고쳐 염습해야 할 때의 合葬 절차‚ 3년복을 입은 자 등의 改葬時 복색.
答沈善長問 (4) 1692. ≪居喪雜儀≫ 등에 대한 沈元浚의 질문에 답한 글. 장례 후의 返魂‚ 几筵과 廬墓 제도‚ 장례 전후의 上食과 奠酌‚ 几筵의 곡·焚香·展拜 근거‚ 參降과 辭神‚ 卒哭 후의 時祭 장소‚ 墓祭‚ 祭饌의 品數 등 상제례 및 본성과 기품의 차이 등 17개조에 대한 답변.
答申伯武問-心經 (13) 1693. ≪心經≫에 대한 申世雄의 질문에 답한 글. <心學圖>에서 ‘心’의 뜻‚ 人心이라고 할 때 사람이 지칭하는 것‚ 克己復禮와 誠‚ 赤子와 孩提의 의미 등에 대한 답변.
答李汝晦問-家禮 (16) ≪家禮≫에 대한 李德明의 질문에 답한 글. 권1 大小宗圖板 ‘親盡할 때 嫂를 別處한다’는 말의 뜻‚ 別子‚ 班祔‚ 親盡한 신주의 처리‚ 昏禮를 치를 수 있는 복제‚ 括髮‚ 進饌 등에 관한 내용.
答李遠卿問-喪禮 (26) 師의 의미와 위치‚ 스승의 服制에 대한 李緬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崔子益問-喪禮 (26) 1692. 改葬할 때의 告廟 절차‚ 發靷‚ 返哭할 때 靈車 앞에 말이나 轎子가 앞에서 이끄는 근거‚ 朝祖할 때의 절차 등 崔補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聖任問-家禮 (28) ≪家禮≫에 대한 金相殷의 질문에 답한 글. 祠堂 龕室내에 新薦을 위한 탁자 사용 여부‚ 親盡의 禮‚ 冠禮 및 혼례의 賓主의 예‚ 상례에서 絞紟할 위치 등.
答權質甫-益文-問 (31) 부친상 중에 할머니의 禫祭를 叔父가 행할 때의 축문 등에 대한 權益文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季通問-喪禮 (32) 1692. 喪禮에 대한 李潗의 질문에 답한 글. 喪이 있음을 알릴 때 宗家에서 朝祖의 예를 인용하여 행하는 것의 타당성‚ 土神 제단의 위치와 축문‚ 장례할 때 선영에 고하는 절차 등.
答李季通問-禮 (33) 李潗의 질문에 답한 글. 후사없이 죽은 장손 대신 후실 소생이 主喪했을 때 장손의 처가 입후할 경우의 복제에 대해 차자의 主喪은 攝行일 뿐 嫡孫을 입후하여 承重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답한 내용.
答金南烈問-喪禮 (35) 1693. 金南烈의 질문에 답한 글. 大夫와 士의 方相의 수‚ 玄纁의 척도‚ 大祥에 ‘小心畏忌不惰其身’ 등의 글자 사용을 금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金汝厚問-祭禮 (36) 祭禮에 대한 金載重의 질문에 답한 글. 忌祭 때 晨謁을 행하는 시기‚ 諸父가 終獻을 하지 못하는 이유‚ 여러 대의 묘가 한 곳에 있을 때 墓祭의 祝辭 등에 대한 내용.
答尹汝弼-明相-問-喪禮 (37) 子婦의 상에 禫와 練祭를 행할 것인가의 여부‚ 期功의 상에 柩에 대한 哭拜 절차‚ 모친상에 几筵을 철수한 뒤의 展拜‚ 어린아이의 장례‚ 俗節 제사 음식 등 喪禮에 대한 尹明相의 질문에 답한 글.
答權銓問-喪禮 (39) 出系한 아들이 생부의 상에 입어야 할 복색에 대한 權銓의 물음에 답한 글.
答姜櫟兄弟問-喪禮 (1) 1692. 姜櫟 형제의 喪禮에 대한 질문에 답한 글.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같은 달에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 상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
答姜櫟再問 (4) 姜櫟의 질문에 답한 글. 喪이 겹칠 때의 상례에 대한 鄭經世 주장의 타당성 여부‚ 變除할 때의 복색 등에 대하여 답한 글.
答姜櫟問 (8) 1693. 姜櫟의 질문에 답한 글. 宗子가 아파서 練祭와 祥祭를 물려 행했을 때 기한이 지난 뒤의 几筵과 上食 여부 및 宗子가 상복입는 기한을 채우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兪岦問-禮 (9) 1692. 兪岦의 질문에 답한 글. 家廟와 墓의 節祭에 宗子나 宗孫이 참가하지 못하고 攝行할 때의 祝辭‚ 心喪 중인 사람이 임시로 帶를 바꾸어 매는 것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내용.
答呂生光周問-喪禮 (10) 1693. ≪問解≫의 ‘喪中에 담제와 길제는 행할 수 없다’는 구절에 대한 呂光周의 질문에 心喪 중에 할아버지의 禫祭와 吉祭를 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답한 글.
答金汝精問 (10) 金克成에게 답한 글. 禮에서 ‘唱喏安置萬福’의 의미‚ <說饌圖>에서 醋楪을 淸醬 등으로 대신하는 문제‚ 亞獻과 三獻의 의미‚ 상 중 출타했을 때의 望哭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汝精問-禮 (12) 金克成에게 답한 글. 定省할 때 拜揖하는 예‚ 스승을 좌석 사이에서 參謁할 때의 예‚ 君祭先飯하는 예‚ 부친상 중 조모상 등 喪이 겹쳤을 때의 복색 등에 대한 답변.
答金汝精問 (14) 金克成에게 답한 글. 性과 德의 차이‚ 元亨利貞에서 元과 太極의 관계‚ 제사에서 생선과 고기의 사용 방법‚ 后土 및 墓祭에서 布席을 ‘設卓’이라고 하는 이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初姪問 (16) 朴泰初에게 답한 글. ‘王宮과 國都’ ‘大全’ ‘明德’의 ‘德’ ‘格物致知’의 ‘格’과 ‘至’ ‘自慊’ 등의 의미‚ 語類의 ‘知覺이 理에는 없다가 氣가 모여 형체를 이루면서 이와 기가 합하여 知覺할 수 있게 된다’는 설에 대한 답변.
答庶族姪泰崇問 (28) 庶族姪인 朴泰崇의 질문에 답한 글. 復官되지 않은 사람의 題主‚ 낳아 준 할머니의 神主에 대한 호칭‚ 외가의 제사‚ 朔望祭 때의 焚香 절차‚ 墓祀를 묘에서 행할 수 없을 경우 家廟에서 대행하는 문제‚ 瘟疫이 있을 때의 제사 여부‚ 産家의 제사 등에 대한 내용.
答錦平孫問 (29) 錦平尉 朴弼成에게 답한 글. 3명의 처를 남편과 한 곳에 장사지낼 때 장지의 배치 순서가 거꾸로일 경우 墓祭에서 獻爵하는 순서.
答弼明孫問 (32) 1692. 朴弼明에게 답한 글. 四時의 節祀·忌祭·墓祭에 服이 가벼운 사람이 行薦할 때의 예‚ 제사를 제대로 행할 수 없을 때의 讀祝 여부‚ 居喪할 때의 禰祭 등에 대한 내용.
顔子傳授爲仁圖 (1) 1693. 孔子의 문하 중 大道를 이어받았다는 顔子의 학문을 세상에 밝히기 위하여 曺植이 그려 놓은 그림을 수정하여 학문의 요체를 밝힌 그림.
手錄 (2) 程朱 이후의 성리학 전통‚ 漢儒에서 明儒에 이르기까지의 학문 경향‚ 羅欽順·許衡 등에 대한 평가‚ 학문의 工程‚ 格物致知에 대한 王守仁의 설 비판‚ ≪中庸≫·≪心經≫ 등 경전에 대한 이해와 같은 학문적 입장이 드러난 내용을 모아 놓은 글.
諭東陽書院諸生文 (8) 1693. 東陽書院의 諸生들에게 俗儒들처럼 문장과 詞章을 위주로 한 과거 공부나 異端이 아니라 성현이 전수한 학문에 힘쓸 것을 曉諭하는 글.
紫雲書院院規 (11) 1693. 紫雲書院의 규칙. 取士 법‚ 堂長에서 色掌까지의 선발과 업무 분장‚ 복색과 식사 등의 일상 예절‚ 현판‚ 강당에서의 과거준비 금지‚ 처벌과 削籍 등에 관한 21개 조항.
父在爲母服制辨 (14) 1694.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한 복제가 齊衰 杖朞가 되는 이유에 대해 논변한 글.
太極圖陰靜陽動位置說 (18) 1692. <太極圖>에서 陰靜을 오른쪽에‚ 陽動을 왼쪽에 둔 이유에 대해 朱熹·權近·李滉의 설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易八卦次序方位陰陽不同說 (19) ≪周易≫ 八卦의 次序를 나타낸 그림에서 陰陽의 위치가 方位圖 및 河圖洛書와 다른 이유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妾祖母承重服當否議 (20) 妾子와 妾孫이 아버지를 承重할 때와 하지 않았을 때에 각각 妾祖母의 상에 입을 복에 대하여 ≪禮記≫ <喪服小記> 등을 통하여 고증한 글. 승중하였을 경우는 心喪만을 할 것이며 승중하지 않았을 경우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服喪을 행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學法總說 1692. 李萬挺을 위해 지은 글. 천지만물에 모두 道가 있는데 그 중 人道가 가장 귀하여 天地에 참여하여 化育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
記栗谷先生入山時事 (1) 1694. 이이가 입산한 일에 대한 여러 설에 대해 규명해 놓은 글. 違親變形했다는 비판에 대해 규명하였으나 논란을 염려한 宋時烈의 반대로 別集의 年譜에 싣지 않았던 내용임.
書院考證補 (4) 書院과 鄕祠에 배향할 기준에 대해 고증한 글. 서원과 향사가 구분없이 섞여 폐단이 많은데 朱熹의 滄州書院과 南康 三賢祠 五賢堂의 규례에 道學과 名論에 따라 文廟·書院·鄕祠에 배향하는 순서가 있으니 이제 그 순서가 문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題涬溟齋詩卷後 (5) 1692. 涬溟齋 尹順之의 ≪涬溟齋詩卷≫ 뒤에 題한 글. 尹斗壽의 손자인 윤순지는 申欽과 唱酬한 뒤 유명해졌고‚ 정묘호란 뒤 화를 당해 은거하다가 뒤에 일본과 중국에 사신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 아들의 부탁으로 시문을 刪定하였다는 내용.
跋楸灘集 (6) 吳允謙의 시문집인 ≪楸灘集≫ 발문. 오윤겸이 스승인 成渾에게서 마음이 화평하다는 평을 들었고 反正 이후 조정에서 비방에 맞서 싸우지 않고 경연에서 ≪大學≫ 공부를 권한 인물이었다며 손자 吳道一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跋日用諸訓 (7) <日用諸訓>의 발문. 일찍 홀로 되고 가난하여 제사하지 못하다가 1656년이래 ≪家禮≫를 따라 음식을 차려 행했는데 四時의 墓祭 등을 없애지 못하고 李珥의 ≪要訣≫에 있는 제도를 따라 행하였다. 이제 ≪溫公雜儀≫를 합하고 이정하여 자손이 대대로 지키도록 한다는 내용.
跋栗谷手寫退溪四七說 (8) 1693. 李珥가 成渾을 위하여 손수 베낀 李滉의 <四端七情說>에 대한 발문. 중간에 鄭之雲과 李恒 등의 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校理로 강릉에 있던 시절에 쓴 것임. 이황과 奇大升의 논변 뒷부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대승과 이이의 설이 같기 때문일 것이라는 내용.
跋長山遺稿 (9) 長山 元斗樞의 시문집 발문. 원두추는 천성이 깨끗하고 榮利를 멀리하던 인물로 고문에 능하였다. 문집 안에 있는 <四七理氣說> 등은 굳이 말로 논할 필요가 없고‚ 문장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趙翼·張維·鄭弘溟 등에게 아낌을 받았다는 내용.
跋坡州鄕約 (10) 坡州鄕約의 발문. 파주는 李珥의 고향으로 목사 邊協이 조정의 명에 따라 향약을 행하였다. 이이의 해주향약 등이 행해지고 있는데 정작 파주에서는 마멸되어 없어졌다. 南宮鉉 등이 이이 만년에 정한 것을 기준으로 損益하여 향약을 정하였다는 내용.
再跋栗谷別集 (11) 1694. ≪栗谷別集≫의 발문. ≪栗谷續集≫과 ≪外集≫에 이어 자신이 宋時烈 등과 함께 왕복하며 追補하여 別集을 완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入山과 관련된 구절과 <太極問答> 등의 내용을 산정한 과정을 서술한 내용.
甲戌元朝箴 (12) 1694. 새해 아침에 堯舜에서 정자와 주자에 이르기까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의 근본을 상기하고 침묵과 겸손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
載寧景賢書院移安告文 (12) 1694. 載寧의 景賢書院의 朱熹와 李珥의 신위에게 새로운 사당에 移安한다고 아뢰는 글.
新廟祝文 (12) 載寧 景賢書院의 朱熹 신위가 좁고 홍수의 피해가 잦아 옛 터 남쪽에 새로운 사당을 지어 移安하고 李珥를 配享한다고 아뢰는 축문.
拜議政府左議政因歲事告家廟文 (13) 조정이 변혁되어 중전이 복위되고 자신이 의정부 좌의정으로‚ 아들 朴泰殷은 內寺敎官으로 임명되었음을 家廟에 고하는 글.
先廟告追贈領議政文 (13) 아버지가 領議政에‚ 어머니가 貞敬夫人에 추증되었음을 사당에 고하는 글.
祭李生員廷碩文 (14) 1692. 李廷碩에 대한 제문.
祭家叔參奉文 (14) 參奉을 지낸 叔父에 대한 제문.
祭老峯閔相國文 (16) 1692. 閔鼎重에 대한 제문.
祭恥庵李公-之濂-文 (16) 李之濂에 대한 제문.
題李楊州汝瑞-元龜-文 (18) 1693. 李元龜에 대한 제문.
祭張淮陽-善冲-文 (19) 張善冲에 대한 제문.
祭成汝中-至善-文 (20) 1694. 成至善에 대한 제문.
祭徵之-泰徵-姪文 (20) 朴泰徵에 대한 제문.
祭崔士溫-瑞吉-文 (21) 崔瑞吉에 대한 제문.
祭梁君-禹疇-文 (22) 梁禹疇에 대한 제문.
平安道觀察使金公神道碑銘 (1) 1693. 金汝鈺의 신도비명.
弘文館副提學贈吏曹判書辛公神道碑銘 (6) 辛應時의 신도비명.
禮曹判書贈右議政李公神道碑銘 (12) 1694. 李一相의 신도비명.
順陵參奉朴公墓碣銘 (20) 1692. 朴承任의 후손인 朴忠基의 묘갈명.
尙衣院僉正成公墓碣銘 (23) 成渾의 증손‚ 成文濬의 손자인 成熙周의 묘갈명.
承政院左承旨朴公墓碣銘 (25) 朴世城의 묘갈명.
楊根郡守申侯墓碣銘 (29) 1693. 申欽의 증손이며 李敏求의 외손인 申弼華의 묘갈명.
禮曹佐郞任公墓碣銘 (31) 任潚의 묘갈명.
濟用監正趙公墓碣銘 (33) 玄洲 趙纘韓의 아들이며 李植의 사위인 趙備의 묘갈명.
義禁府都事梁公墓碣銘 (37) 曺植·成渾의 門人인 梁弘澍의 묘갈명.
進士李公墓表 (1) 1692. 金長生의 門人인 李得志의 墓表.
江原道觀察使林公墓表 (3) 訥齋 朴祥의 門人 林億齡의 묘표.
禮賓寺正贈吏曹參判李公墓表 (5) 李恒福의 아들인 李井男의 묘표.
吏曹參判李公墓表 (7) 李恒福의 후손 李時術의 묘표.
通德郞成公墓表 (11) 成渾의 증손이며 成㮨의 아들로 尹宣擧에게 從遊한 成熙命의 묘표.
知中樞玄谷先生趙公墓表 (13) 1692. 黃廷彧·尹根壽의 門人으로 權韠 등과 詩社를 결성했던 玄谷 趙緯韓의 묘표.
學生崔公墓表 (16) 崔孝宣의 묘표.
內資主簿鄭公墓表 (17) 北窓 鄭@의 아우인 古玉 鄭碏의 묘표.
通德郞閔公墓表 (19) 효자 閔濚의 묘표.
贈左承旨朴公墓表 (20) 朴潢의 아들 朴世桓의 묘표.
氷庫別檢申公墓表後記 (21) 趙錫胤·金集의 門人인 내종형 申公의 묘표 후기.
丹陽郡守李公墓誌銘 (23) 申欽의 門人 李旭의 묘지명.
通德郞李公墓誌銘 (25) 李時術의 사위인 이종형 李尙濂의 묘지명.
繕工監僉正金公墓誌銘 (27) 金寅亮의 묘지명.
大丘府使朴公墓誌銘 (29) 朴東說의 門人 朴徹의 묘지명.
養妣孺人趙氏行狀 (33) 1693. 趙緯韓의 딸로 朴濰의 처이며 박세채의 양어머니인 조씨의 행장. (이희중)
문집명 남계집 (南溪集)(17c)
간략서지 奎 6267南溪 朴世采의 시문집. 正集 87권‚ 續集 22권‚ 外集 16권 合 125권 56책.
간략해제 간행 경위 등을 기록한 刊記가 없어 문집이 이루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저자의 手稿로 이루어졌다는 正集과 外集‚ 續集은 이루어진 시기가 다른 듯하다. 저자의 수고본을 바탕으로 筵臣 李重協의 건의와 景宗의 간행 지시에 따라 후손 朴弼傅가 編次를 정하고 門人 李世瑍이 교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으로 입장을 정한 제자들이 연보를 교정한 데 이어 문집 간행까지 주도하려고 하였으나 손자인 朴弼傅가 끝까지 원고를 내놓지 않아 좌절되었다. 영조 즉위 후 蕩平을 闡揚하면서 탕평에 동조하던 宋寅明 등에 의해 간행이 적극 추진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趙顯命이 1731년경 대구감영에서 간행하였다. 규장각에는 < 6267> 외에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는 ≪南溪文續集≫ 9책(< 4937>)‚ ≪南溪文外集≫ 8책(<奎 4911>)‚ ≪南溪文正集≫ 39책(<奎 4915>) 등도 소장되어 있다.
편저자 박세채 (朴世采)
저자개요 1631-1695 (인조 9-숙종 21)字: 和叔‚ 號: 南溪·玄石‚ 本貫: 潘南‚ 父: 朴漪‚ 母: 平山 申氏(欽의 女)
저자내용 조선후기의 정치가‚ 학자. 遺敎七臣으로 불리던 선조의 舊臣 朴東亮의 손자이며‚ 申欽의 외손으로 11세에 조부인 박동량으로부터 ≪擊蒙要訣≫을 배웠다. 숙부 朴濰에게 출계하여 숙모 趙氏에 의해 양육되었으나 14세에 부친이 사망한 뒤 죽은 형 대신 다시 돌아와 가계를 이었다. 1648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 성균관 유생들이 李珥와 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남의 柳㮨 등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捲堂을 주도하다가 효종의 배척을 받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58년 추천을 받아 이듬해 翊衛司 洗馬에 除拜되는 등 顯宗 때까지 여러 차례 山林職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효종의 산릉으로 수원이 결정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洪命夏에게 알리고 服制 문제에 宋時烈 등의 의견에 동조하여 尹鑴에게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다. 또 1667년 표류한 林寅觀 등을 청나라에 압송하자 李端相 등에게 반대 의견을 알렸다. 현종 말년에 정신병에 걸린 閔世益을 대신하여 아들 閔愼이 할아버지의 상에 代服하게 한 사건으로 숙종 즉위 뒤 南人의 배척을 받아 削去仕版되었다. 尹宣擧 墓碣文 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尹拯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680년 庚申換局 이후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3년 宋時烈의 권유로 조정에 나왔으나 金益勳 사건 등으로 大臣과 臺閣이 맞서고 송시열이 비판받을 때 臺閣의 편에 서면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少論으로 분류되었다. 물러났다가 1688년 少論이 힘을 얻어갈 무렵 다시 나왔으나 1689년 己巳換局으로 다시 물러나 은거하였는데 송시열의 죽음에 3개월간 素帶하였다. 1694년 甲戌換局 후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李珥와 成渾을 文廟에 다시 봉사하고 왕의 명에 따라 붕당의 폐해를 경고하는 교서를 지어 반포하게 하면서 蕩平論을 제기하였다. 또한 자신의 개혁안을 담은 12개조의 萬言疏와 箚子를 다시 올리고 黃海道에 大同法을 시행하기를 청하는 등 개혁안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영의정 南九萬 등과 장희빈 사건에 연루된 張希載 등의 처리에 이견을 보이고 왕도 개혁안 채택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물러나 이듬해 사망했다. 대체로 李珥의 학문을 사숙하며 李滉의 문집을 통해 이를 절충하려는 입장을 지녔으며 性理學과 尊周大義의 의리에 철저하고 제자인 鄭齊斗 등의 陽明學을 변척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문집 외에도 예학과 경학에 관련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내용제목 南溪集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6267
권제 권제목:正集 卷二
제목 없음. 過楊經理鎬去思碑(1646)‚ 丁亥立春有感(1647)‚ 三月十一日曉夢得一句日雨過春草見遺香覺而足之(1648)‚ 廣陵拜外王父申文貞公墓‚ 聞韶蓮亭偶吟‚ 病中懷尹希仲鑴‚ 感物‚ 請栗牛二先生從祀時作‚ 除夕志懷呈閔子昻丈(2수)‚ 聞白江-李敬輿-相國南歸(1650)‚ 六臣墓‚ 有感(7수)‚ 西湖過王父梧窓公舊居有感‚ 感物有作(3수)‚ 得京報(3수)‚ 讀孟子(2수)‚ 志感(2수)‚ 秋日感懷‚ 悼馬行‚ 病起望春感物有作呈洪兄大而-命夏-因事不果 (1652)‚ 哭淸陰-金尙憲-先生(2수)‚ 讀文山集有感時纔聞淸老訃‚ 癸巳立春日偶書呈子昻丈(1653)‚ 次退溪先生憶陶山梅韻(2수)‚ 雨後登西園次晦菴夫子春日偶成韻‚ 次李彛仲-敏敘-寄示韻‚ 曉過南漢城下有感‚ 春日感懷(1654)‚ 坡山道中‚ 臨溪‚ 城南漫興(5수)‚ 偶吟(2수)‚ 次申子晉-碩亨-丈韻‚ 次子晉丈遣懷韻(2수)‚ 詠菊‚ 次子晉丈前寄韻(5수)‚ 次子晉丈後寄韻(5수)‚ 熟復顔子希舜之語感而有賦‚ 乙未春帖(1655)‚ 二月晦始雨志喜‚ 哭樂靜-趙錫胤-令丈(3수)‚ 懷南陽叔父-渟-旅櫬(1656)‚ 過金化戰場‚ 病中苦懷(3수)‚ 入永平白雲山阻雪信宿聖俊上人禪房‚ 偶感靖節事題新曆‚ 送金延之-壽增-赴石城(2수)‚ 1657)‚ 春望‚ 題高城鑑湖堂‚ 鑑湖訪先公舊居有感‚ 聞尹吉甫-宣擧-丈承召入城兩日風雨不得相訪苦吟志懷 (1658)‚ 病吟(2수)‚ 七月十五夜翫月偶吟‚ 臘月十六夜‚ 尹希仲曾索晦菴文集未報適得仁山前編聊敢幷呈幽憂之中因此竊有所感偶成長律仰浼高案尙無以見僣而蘄敎之也(1659)‚ 春日風雪異常‚ 寒食日有感‚ 到鳳城舊庄作‚ 道中‚ 孝宗練日哭班作(1660)‚ 宣武祠將行春祭有感(1661)‚ 病中聞元君始-萬春-將陪大閤原平相國-斗杓-赴燕書贈(1662)‚ 江樓夜坐懷李養而-之濂‚ 偶吟之懷(2수)‚ 懷尹子仁-拯‚ 始到西湖作‚ 二哀詩-幷引‚ 夜臥偶吟‚ 晩晴有作(3수)‚ 詠月‚ 對菊(2수)‚ 冬夜偶吟‚ 記夢‚ 李兄士常-恒-以長律二十韻要和其中蓼莪之感尤足起余竊欲效顰兼述鄙懷久而病澁未果玆於立春日閑坐試筆仍用呈覽‚ 去年行(1663)‚ 西門外玄谷-趙纘韓-先生宅松壇感舊(2수)‚ 玄谷村訪王父舊墟(2수)‚ 江上偶吟‚ 五月四日卽孝廟諱辰値雨有感‚ 移居玄石村作‚ 雨中苦懷‚ 次權兄禮卿-讓-韻‚ 挽羅海州于天-星斗-(2수)‚ 送趙高敞-億-之任‚ 甲辰立春書懷‚ 懷東溟-鄭斗卿-丈‚ 懷楊湖-閔嶪-丈‚ 過白沙遺祠‚ 過鄭松江墓‚ 春雨‚ 次鄭上庠-廣徵-韻‚ 次養而閱明季遺聞韻(2수)‚ 登仙遊峯作‚ 追次尹子仁游楓嶽用栗谷先生韻見寄之作‚ 西門秋夜聽草蟲有感(2수)‚ 秋夜偶吟‚ 王山渡口敬望寧陵‚ 將入谷雲阻雨‚ 谷雲示金堪輿‚ 謁紫雲書院‚ 高嶺寺‚ 病中志懷‚ 將歸.
詩 (1) 避厲入城作(1665)‚ 聞鄭杆城-瀁-丈遷其先松江相國墓挐舟東歸‚ 次養而寄示韻‚ 端居卽事(2수)‚ 余得足疾今五年矣鍼藥無效方自爲撓偶讀晦菴先生贈程道人之作聊感攀和‚ 七月一日‚ 初秋夜吟‚ 夜臥偶吟寄養而‚ 秋雨滯西城‚ 與養而訪楊湖丈新居仍登望遠亭次冲菴用天使韻之作(2수)‚ 重陽前日訪東溟丈暮歸有作錄呈‚ 讀魯陵志寄童土-尹舜擧-丈‚ 西城月夜示趙士威-得重‚ 重過楊經理碑下‚ 行經松都有作‚ 次養而松都懷古韻‚ 送族兄仲八-世柱-先歸洛中‚ 次許使君仲玉-珽-韻留贈‚ 古金郊館‚ 過崧陽書院‚ 崇義祠用東溟韻與愼仲任-景尹-共賦‚ 過思菴遺祠‚ 次士常兄寄示韻‚ 曉起‚ 丙午元日在坡山作‚ 將入白雲山與李兄幼能-端相-同行歷拜其先君白洲-李明漢-墓感而有作(2수)‚ 送楊湖丈游楓岳‚ 過高陽癸巳戰場‚ 過聽松牛溪兩先生墓有感‚ 登花石亭舊墟‚ 客舍曉起‚ 崔漢卿-後亮-次前日溫泉韻以示奉酬‚ 浴後洪秀才-聖叙-與再從弟仲瞻-世標-觀魚川邊余輩病不從遂次其韻‚ 伏聞孝廟於亂後西行時經過湯泉感而有賦‚ 次洪秀才雨後翫月韻‚ 謁花谷書院‚ 訪馬巖太學有感‚ 路見餓莩者慘然有作‚ 雨中端居‚ 前宵月色甚佳偶得二律敬呈白軒相國閤下不敢避僣也‚ 訪楊湖丈不遇登喜雨亭‚ 奉寄尤齋-宋時烈-靑川精舍(2수)‚ 雪(1667)‚ 高王父祠廟奉往林郡預到江頭久坐口號贈族姪錦昌副尉-泰定‚ 李生子望-東耈-百里徒步從我于玄江留講數旬於其辭歸不勝戀歎書此爲贈(3수)‚ 桂陽閔丈-昕-相遇於稠人中已且十年近以兩絶來問厚意不可負也玆故續貂浼呈幸博一粲(2수)‚ 郊行偶作‚ 寒食日有感‚ 抱寒疾(2수)‚ 獨獜齋遺稿‚ 次幼能兄過石室偶吟韻‚ 南門外奉僉樞族父-煥-從叔父-濠-二公會話歸家夜適無寐謹步篷字韻以呈‚ 曉吟‚ 至後月夜偶吟‚ 訪楊湖丈歸路作‚ 詠雪‚ 戊申立春感懷‚ 偶書(3수)‚ 月夜有感‚ 上元(2수)‚ 聞沂川-洪命夏-相之喪明將發引病不能往掩淹涕以書(3수)‚ 鳳村大父舊居有作‚ 三月旣望夜‚ 詠當歸草‚ 白采叔-以受-汝三-以復-諸生辭歸精舍闃然偶成‚ 讀重峯集‚ 挽郭掌令-聖龜-丈‚ 七夕‚ 酬桂陽閔丈‚ 是月十五日與士威及宋子文-斗章-諸君泛舟西湖‚ 哭鄭正-瀁-丈‚ 漢卿水部在津所寄示諸作聊次津字一韻以報‚ 送養而歸湖中‚ 追次族兄季肯-世堂-簑字韻贈別燕山之行‚ 梁生季通-處濟-寄一絶有乾惕無咎之語遂次其韻時余承召未赴‚ 小至夕偶作‚ 冬至日‚ 雨中志懷‚ 夜起偶吟‚ 病中作(2수‚ 1669)‚ 記夢-幷引‚ 挽尹正-舜擧-丈‚ 曉起感懷(2수)‚ 三月十五日在淨土寺是日三宮幸溫泉‚ 步出溪上次晦菴武夷精舍韻‚ 病後閑眺次明道郊行卽事韻‚ 卽事‚ 挽宋扶餘伯興-奎禎‚ 沈生-世綸-來訪偶吟一絶以贈之‚ 雨中不寐作‚ 挽魯西-尹宣擧-先生(3수)‚ 酬養而留贈(2수)‚ 偶尋珠尼洞寺贈元上人‚ 曉覺‚ 燕山懷古贈愼行臺仲任(2수)‚ 次栗谷牛溪二先生題僧軸韻(2수)-幷引‚ 過惠陰嶺馬上口號‚ 送靜齋發引于東關廟雪涕有作‚ 李重賚-啓晩-遠來相訪一宵旋返不勝悵然‚ 酬養而次晦菴雪中懷人韻‚ 夜吟‚ 家奴取薪有一老査襍於其間從弟世集持歸以爲木假山置於案側仍賦五言律來示戱次其韻‚除夕上墓河梁氷薄移就銅雀船路‚ 過白休菴遺墟(1670)‚ 交河道中望海‚ 寒泉感懷‚ 自露梁乘舟歸西湖作‚ 與養而子文及高汝根-晦-訪衿陽紫霞洞歇馬溪上次養而韻‚ 宿三幕寺別養而‚ 伏聞今日春宮行冠禮不勝畎畝之祝有作‚ 過牙山高湧山次王父九日登高韻‚ 歷拜李忠武舜臣墓‚ 到華陽洞作‚ 葩串(2수)‚ 仙游洞‚ 次宋秀才-疇錫-韻‚ 溪上謾吟(3수)‚ 過慶徵君-延-閭‚ 新昌蓮堂偶吟(1672)‚ 偶吟示沈士磬-俔-任大年-元耈-二生-幷引‚ 雪夜詠懷(5수)‚ 癸丑立春書懷‚ 挽石湖-尹文擧-令丈‚ 移 偶栗 浦値 寒食 日作 ‚ 哭同 春堂 -宋 浚吉 -先 生( 2수)‚ 哭 楊湖 丈靈 几‚ 馬 場舊 寓偶 吟( 2수 )‚ 卽事(2수)‚ 次沈明仲-世熙-寄示韻‚ 紫雲書院次朱子濂溪書堂韻‚ 登熊潭臺上作‚ 謁坡山書院‚ 甘露寺次晦軒先生韻‚ 挽東溟先生(3수)‚ 延安平遠堂次梧陰諸公韻‚ 望首陽山作‚ 過海州主治有感-幷引‚ 謁隱屛書院‚ 謝沈君-瓘-携酒遠訪‚ 重陽登金谷江岸‚ 十五夜登壓海樓示同遊諸君‚ 寧陵靈駕今將進發於黃驪而臣適待罪秋曺不克往哭於陵前路次雪涕有作以寓無窮之痛‚ 除夕在秋曺後洞作(2수)‚ 觀桃源圖(2수‚ 1674).
送養而入堤峽(1675)‚ 過東淮-申晩-靑白堂‚謁石室遺祠‚ 宿祠宇村舍夜夢尤齋丈遺以詩札寫在綿布云北方無紙故如此感而有賦(2수)‚ 楊山途中有感(6수)‚ 歷拜申兄用晦-炅-季良-最-墓有感(4수)‚ 奉次尤齋道中韻‚ 次李君-光周-留贈韻‚ 曉起偶吟(2수)‚ 謁沂川書院‚ 敬過長陵有感‚ 坡山道中聞皇朝吳將軍三桂使蒙古兵襲取瀋陽將會圍北京雖未辨虛實不覺喜躍仍有所述(5수)‚ 雨後散步(2수)‚ 山谷有歸來兮逍遙西江波浪何時平之語晦翁見之以爲可以泣鬼神率意命筆寄懷南海(12수)‚ 楊寓茅茨成已久矣七月初吉始引井爲塘夕坐偶吟時方大旱(2수)‚ 次蔡伯瑞-龜章-韻‚ 渡龍津‚ 平丘過金大成忠簡二公墓(2수)‚ 東坡驛有感‚ 哭任榮川-濬-丈‚ 戱贈南仲輝-二星‚ 次兪顯叔-晦一-寄示用朱文公自警韻(2수)‚ 金久之-壽恒-相久謫朗州思欲以句語寄懷偶閱先王父在謫時贈仙源淸陰二先生之作怵然興感步韻却寄(2수)‚ 酬羅生仲輔-碩佐-留贈‚ 臘月十一日雨雪舟渡錢浦‚ 携家到砥平玄淵作(2수)‚ 去歲初李養而入堤峽有詩相贈久未酬謝今適意到次韻寄之‚ 將作湖西行出次澤堂-李植-墳菴‚ 敬過英寧二陵(2수)‚ 過稷山丁酉戰場有感‚ 牙州懷古(2수)‚ 訪外先祖尙成安公林川遺基‚ 扶餘白馬江懷古‚ 到定山彌勒堂尹子仁子恕-推-兄弟來會別後有作‚ 成歡驛樓新成頗壯麗‚ 過弘慶寺碑次鄭松江韻‚ 雨後水原道中望冠岳山有感‚ 敬過孝陵‚ 次海伯趙弟公擧-師錫-寄仲輝韻‚ 挽李叅判-俊耈-令丈‚ 次李季周-端夏-寄示韻‚ 過婆娑城‚ 過中良浦有感-幷引‚ 拜義谷曾叔祖退菴公墓(2수)‚ 次族姪泰徵寄示韻‚ 蓮城山下有懷參奉家叔-淲-兼示仲瞻弟(2수)‚ 曉發忘憂里回望京闕有感‚ 八月十七日過王山灘聞閔尙書大受-鼎重-持叔-維重-仲季來會崇陵次前孝廟練日韻却寄翌日是國祥‚ 夜坐偶吟(2수)‚ 洪川泛波亭次林塘諸公韻‚ 訪壽泰寺歸時由詠歸坪作‚ 洪陽感古‚ 雪後過東湖讀書堂懷靜齋兄有感‚ 寄別柳弟悠久-尙運-赴江界‚ 玄巖偶吟示士磬諸君‚ 出驪江路中作‚ 季春卄六與君始諸友重尋泰安洞歸路逶迤訪東溪而上洞壑奇邃實近地所罕翌朝有作示李載叔-堉‚ 次林德涵-泳-留贈韻却寄(2수)‚ 偶吟寄尤齋籬中‚ 聞寅伯-申晸-兄來省先墓於忠原往訪一宿歸路有作却寄兼示公擧弟‚ 記夢-幷引‚ 贈羅顯道-良佐-奉親還洛中(2수)‚ 北原新寓喜雪(2수)‚ 中原道中有感‚ 可興村感舊(2수)‚ 寄題申玉爾-汝栻-斗月亭‚ 過水落山有感‚ 助浦憶金元會-澄‚ 渡迷半程有小洞峯巒奇秀石澗琮琤可愛賦而記之‚ 驪州路上拜從舅申承旨-翊亮-墓有作‚ 過衿陽樂靜丈舊居‚ 旱旣太甚不耐畎畝之憂偶記先王父己未七月十五日詩謹步其韻以志之時戊午六月三日夜也‚携李生仁甫-時春-諸人泛舟蟾江翠屛下‚ 訪龍頭亭‚ 寄冲鳳寺讀書二生時仁甫與趙君-頊-共讀小學(2수)‚ 謝韓山李使君仲周-紳夏-歷訪仍充別語‚ 過孤山‚ 次文谷-金壽恒-韻寄李姪同甫-喜朝-幷引(2수)‚ 次金起之-壽興-相退憂堂追步朴思菴空字韻以塞記銘之請‚ 楊江滯雨錄示權致道-尙夏(2수)‚ 雨中書懷(2수)‚ 夜過寧陵‚ 睡覺不寐詠太極圖‚ 挽李樂甫-藼(1680)‚ 四月一日大雨近歲所未有喜賦‚ 次金士直-楺-韻-幷引‚ 五月二十五日大雨志喜旋聞尤齋諸人皆蒙恩霈(2수)‚ 次外王父送淸陰韻贈申兄寅伯赴燕山盖皆以六月登程也‚ 聞同甫病蘇賦此却寄‚ 蒙朴大叔-鐔-自石室院舍來訪適坐病故不克就謝詩以代之(2수)‚ 風雨孤坐偶閱先王父墓下呈仲氏之作不勝愴感謹步其韻‚ 挽趙正-泰相(2수)‚ 挽趙江西復亨-根(2수)‚ 挽崔校理周卿-後尙(1681)‚ 挽成知事-稷-丈‚ 谷雲金延之取崔孤雲流水籠山語以名溪亭仍次韻求和於諸公玆敢續貂‚ 新齋正對南漢山城有感‚ 六月卄四日生朝有感書以志之‚ 送德涵試士湖南(3수)‚ 謝申叔弼-翼相-屢訪山齋‚ 族兄仲固-世堅-沈疾不得相見者已將十年矣不堪悵菀賦此奉寄‚ 與季肯兄泰徵姪約宿佛巖寺翌日歸家徵姪獨滯却寄‚ 挽曹兄判官-敬彬‚ 次李弼卿-翊相-寄示韻以謝‚ 送南仲輝赴燕山‚ 挽姜鍾城叔夏-碩昌‚ 贈申公獻-琓-北行(3수)‚ 挽龍溪李處士-榮元-遷葬‚ 大雪後翫月偶吟.
壬戌立春日感懷(1682)‚ 正月卄九日朝廷遣官宣諡於先祖潘南先生墓次翌日致祭感歎之懷‚ 文會書院東西祠成已踰年矣余始來謁有作示閔春卿-震元-諸君‚ 拜東陽雲峯祠有感‚ 助浦訪愼仲任書室‚ 挽慶寧郡主‚ 江西寺壓海樓感舊次壁上諸人韻‚ 湖西僧惠忍進一絶因示尤翁所贈西林達觀四大字‚ 送尹叔麟-趾完-奉使日本(2수)‚ 雨後復登壓海樓有感‚ 次沈丈-宗迪-孔潭書室膺召命自是不敢歸省安山先壟今年九月乃克詣闕陳情而退又以事故遷就十二月初旬始得遂志感韻‚ 沈丈聞余明齋-尹拯-會于甘露寺有詩相寄次韻以酬‚ 送玉爾赴高城‚ 送養而赴靑山‚ 庚申五月猥而有賦‚ 過三田渡‚ 恭聞聖上草哀痛敎頒示于八方不覺感涕以書(1683)‚ 靜然亭有作‚ 三月十三日在闕庭感作‚ 寄贈李留守彛仲‚ 八月五日壽母生朝次晦翁先生韻‚ 與沈丈及諸學子會宿孔潭書室時中秋翌日也‚ 登東湖梨花亭有作‚ 挽兪玉果-瑾‚ 伏聞聖候已得安復喜極有作是日適冬至‚ 明聖王大妃挽詞(3수‚ 1684)‚ 雨後松亭作‚ 寄淮陽張使君叔涵-善冲‚ 次載叔韻‚ 挽草廬-李惟泰-丈‚ 送南右相雲路-九萬-使燕山(2수)‚ 次仲任追寄韻兼奉沈丈‚ 恭書摹刻毅宗皇帝非禮勿動四字後‚ 次韻張叔涵四聖御筆歌(1685)‚ 二月卄七日是五冠書院賜額寒食來路謹叅祭列有賦‚ 次任大年示院中諸益韻‚ 族孫錦平-弼成-北行日迂路來見於助浦書贈(2수)‚ 雨中過廣津‚ 送權君敬-持-赴錦山(3수)‚ 禿浦哭淸城金相-錫冑-歸櫬‚ 挽趙副學光甫-持謙(2수)‚ 送同甫姪赴鎭川(3수)‚ 挽貞明公主‚ 至月十日夜‚ 寄藍浦鄭使君眞卿-尙樸(2수)‚ 送任大年赴寧海‚ 聞崔汝和-錫鼎-略退燕行之期無路拚別偶吟三絶以寄之(1686)‚ 挽崔叅判逸之-逸‚ 挽族姪察訪泰維(3수)‚ 過東津有感寄南雲路相時有燕山再行‚ 敬題端午賜扇後(2수)‚ 送任汝諧-元聖-赴大同督郵‚ 挽李掌令-三錫(2수)‚ 寓石室院齋偶吟志懷(2수)‚ 訪養而溪堂路中作‚ 將移家坡山登舟於平丘江上‚ 次許夏昌--詠新居韻兼奉地主申玉爾‚ 次 權兄 說卿 -說 -寄 贈韻‚ 偶浪洞感古有作‚ 挽 驢陽 府院 君閔 公- 維重 (2수) ‚ 挽韓執義魯詹-泰東‚ 挽朴秀才師賢-希古‚ 送李子文-東郁-赴鍾城(3수)‚ 戊辰元日志感‚ 留棲天神山文殊庵偶吟‚ 挽李判書彛仲(3수)‚ 挽鄭判樞-知和‚ 挽李右相仲羽-䎘‚ 七月入朝蒙恩遆職後出舍玄石江上感而有賦寄示汝和‚到高嶺寺偶吟‚ 待命之餘不敢歸家轉寓棠山小庵適値慈親生辰有作‚ 送族姪主牧泰輔棄官歸時李成二先生有黜享事也‚ 雨後望春有作(2수)‚ 挽白汝三‚ 次滄海-許格-丈寄意之作‚ 七月十八朝聞尤齋於是日歸葬隋城雪涕有作‚ 挽尹正言公度-世喜‚ 庚午元日偶書(1690)‚ 承李君實-世華-來別栗谷店舍賦此以謝‚ 宿花石亭偶閱文谷一絶感涕追步‚ 過牧丹山懷牧隱先生‚ 鵲川新基示同行崔士溫-瑞吉-諸君‚ 溫泉留別兪顯叔(2수)‚ 次晦庵夫子日用自警韻示精舍諸生‚ 滄海丈寄示所次白生重晦-海明-戊辰歎要和余坐病昏不克續貂謹以長律申謝‚ 挽許滄海丈(2수)‚ 夏日病苦偶書‚ 松都金生國卿-士珎-來讀書堂得疾徑歸余適感痛不克面別詩以替意‚ 中秋前夕病吟‚ 翫菊(2수)‚ 偶飜呂與叔詩語示金生宇卿-普‚ 挽李領樞-尙鎭‚ 聞淸兵大敗於韃子勢甚危急慨然有作(2수)‚ 挽兪留守伯圭-瑒(2수)‚ 助浦留別追送諸君(崔瀜·尹殷聘·申世雄·李綖)‚ 挽朴承旨仲憲-元度‚ 耳聾‚ 寄豐壤李進士-后晟-丈‚ 錦城崔生平仲-衡-留學數月而歸臨別書贈(2수)‚ 今年寒食是上巳前一日爲淸明次少陵小寒食韻時在花谷‚ 挽恥菴-李濂(3수)‚ 東陽書院偶吟志感‚ 挽尹副學養一-敬敎‚ 挽趙同樞-逢源-丈(2수)‚ 挽兪顯叔‚ 五月三日夕小泛前溪(2수)‚ 書堂月夜偶吟‚ 次李秀夫-萬挺-寄示韻‚ 五哀詩-幷引‚死別已矣生別惻惻溪齋關雨黙坐馳想懷不自裁書用識哉時六月流頭後二日也(7수)‚周甲生朝雪涕志感‚ 挽李尙州大而-恢(2수)‚ 過香洞約會尤翁處有感‚ 楊江獨渡‚ 趙相公擧之行病不能送貧不能贐老懷益惡書此爲贈‚ 挽金星州夏卿-禹錫‚ 次李生-潗-留贈韻‚ 挽李都事-徵龜-弟(2수)‚ 挽李判書弼卿‚ 冬至後大雪書堂偶吟‚ 聞淸國大敗假道將入于白山朝廷議欲準許憂憤有賦‚ 寄知禮徐使君士和-文淑.
辭侍講院進善疏一 (1) 1668. 시강원 진선에 제수된 뒤 이를 사양하는 상소문. 죄를 입어 물러나 있은 지 20여 년에 추천을 받았으나 이제 나아가면 스스로 欺罔하는 것을 무겁게 할뿐이니 물러나 평소의 뜻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
辭侍講院進善疏二 (2) 柳㮨에 대한 처리 문제로 成均館 儒生들과 捲堂했던 일로 스스로 屛廢하였던 점을 들어 시강원 진선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侍講院進善疏三 (3) 시강원 진선에 제수된 뒤 前 朝에 사은하지 못했던 일과 자신의 능력 및 신병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再除侍講院進善疏 (6) 시강원 진선에 다시 제수된 뒤 지난달에 이미 체직되었는데 다시 소명이 내려 經筵에 들라는 것은 조정의 名器를 욕되게 할뿐이라며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申召及再除侍講院進善疏一 (9) 1669. 시강원 진선에 다시 제수된 뒤 신병을 들어 經筵의 강학을 비울 수 없으니 급히 올라오라는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申召及再除侍講院進善疏二 (11) 시강원 진선에 다시 제수된 뒤 거듭된 召命을 신병을 들어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因閔愼査事首罪疏 (13) 1673. 閔愼이 아버지 閔世益 대신 할아버지 閔嶪의 服을 대신하게 한 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자신이 首罪라며 죄를 청한 상소문.
擬上申請罪名疏 (20) 1674. 閔愼의 일로 刑曹에서 명을 기다린 지 11朔이나 되었는데 아직 죄가 정해지지 않았다며 罪名을 정해주기를 청하는 상소문. 閔愼은 자신을 믿고 따랐을 뿐이니 자신의 죄를 다스려 달라는 내용.
辭召命及成均館司業疏一 (21) 1680. 閔愼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의논에는 모순이 있지만 자신에게 지적된 죄목이 모두 인륜과 法義에 중대한 것이라서 편안히 직책을 맡을 수 없다며 소명 및 성균관 사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及成均館司業疏二 (24) 자신의 죄가 君臣父子에 관계되는 중한 것이며 山林儒士를 구하여 勸講하는 직책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들어 소명 및 성균관 사업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司憲府執義疏 (27) 물러나 형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형편과 신병을 들어 召命 및 司憲府 執義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及再除司憲府執義疏一 (29) 자신의 志氣와 經術이 모두 미치지 못하여 經席과 臺閣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며 召命 및 司憲府 執義에 다시 제수된 것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再除司憲府執義疏二 (31) 병이 심해졌다며 召命 및 司憲府 執義에 다시 제수된 것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疏一 (1) 1681. 나아가 謝恩만 하는 것은 自守하는 것만 못한데 자신은 소명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
辭召命疏二 (3) 소명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 서울에 올라왔는데 大行王妃의 因山을 당하여 여관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돌아가는 중에 병을 얻어 村舍에 머물러 있다는 내용.
辭召命疏三 (5) 旱災로 인하여 다시 부른 소명에 신병을 들어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因災訪問疏 (6) 旱災와 地震으로 인하여 사람을 보내 묻자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있는 분수로 보아 자문에 응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疏 (9) 山林 元老를 불러들이는 중에 자신이 虛名때문에 끼어있을 뿐 召命에도 응하지 않고 재해에도 고하지 않고 禮를 물었을 때도 답하지 않았었다며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及再除成均館司業疏 (11) 召命과 성균관 사업의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문. 朱子가 南康에 있을 때의 封事와 災異에 대한 箚子를 인용하여 警戒에 힘쓸 것을 진달하는 내용.
辭召命疏 (13) 1682. 召命에 사양하는 상소문. 질병 등을 이유로 소명을 사양하고 아울러 宋時烈의 보고에 따라 이루어진 ≪心經釋疑≫를 校正하라는 명을 사양하는 내용.
辭司憲府執義疏 (15) 寒食 성묘 중의 설사 등 신병을 들어 사헌부 집의의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承政院同副承旨疏 (16) 出納하는 임무에 맞지 않고 병이 있다며 승정원 동부승지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吏曹參議疏一 (18) 낮은 벼슬을 사양하고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없고 왕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데다 병이 깊다는 것을 들어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
辭吏曹參議疏二 (20) 계속된 諭音에 사례하고 두통과 설사 등 자신의 병세를 진술하며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
辭吏曹參議疏三 (22)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 뜻을 아뢰고 사양하려고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며 띠고 있는 직책을 먼저 갈아주면 병세를 보아 나아가겠다는 내용.
詣闕陳情疏 (23) 자신이 어리석어 내려진 虛禮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며 宮闕에 이르러 사정을 아뢰는 상소문.
辭出入筵席之命兼辭食物疏 (28) 학문도 없고 신병이 있어 감당할 수 없는데다가 사직한 뒤 待罪하는 중이라며 筵席에 들어오라는 명과 먹을 것을 내려 준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상소문.
引對後申辭告歸仍進經筵故事疏 (31) 引見한 뒤 다시 사직하고 돌아가겠다고 아뢰고 자신이 편집한 程子와 朱子의 經筵故事를 올리는 상소문.
經筵故事 (1) 程頤가 경연에 참여했던 시절의 故事와 정이가 올린 글을 모아 올린 상소문. 續綱目과 年譜에 보이는 程頤의 인물됨과 徵召 과정을 소개하고 이 글이 宋 哲宗 때 程頤가 崇政殿 說書로 징소되어 上奏한 經筵 3事와 이후 經筵에서 奏對한 것을 모은 것이라는 내용.
論經筵箚子 (2) 經筵을 논한 程頤의 箚子에 자신의 의견을 부연한 글. 송나라 哲宗이 즉위한 뒤 經筵의 임무‚ 傅保의 직책‚ 寅畏의 道 등 經筵에 관한 3가지 일을 논한 내용. 勸講과 輔導의 임무에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내용.
乞六參日上殿箚子 (8) 程頤가 올린 차자. 勸講하는 관원이 경전의 뜻을 밝히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니 더위로 경연을 파한 동안에도 며칠에 한 번씩은 儒臣을 대하라는 내용.
三學看詳文 (8) 內舍와 上舍 등 학교에서 시취하는 옛 제도의 의의를 말한 程頤의 箚子에 덧붙여 최근의 학교가 功利와 詞章을 위주로 하고 어진 이를 가려 선비를 가르치도록 하는 본의를 잃었다고 경계하는 내용.
上太皇太后書 (10) 程頤가 皇太后에게 4월말에서 中秋까지 더위로 講을 파하게 되는 시기에도 內殿이나 시원한 곳으로 講官을 불러 강학할 것을 권하고 어린 황제를 輔導할 방도를 아뢴 글을 인용하여 肅宗에게 藥石으로 삼을 것을 권함.
語錄-附 (16) 禁中 후원에 坊을 만들면서 金으로 水桶을 만드는 것을 막은 일 등 程頤의 행적을 語錄에서 뽑아 놓은 글.
年譜-附 (19) 程頤가 황제 앞에서 왕으로서의 도리 대신 ‘顔子가 그 樂을 고치지 않았다’는 구절을 講한 이유를 門人들에게 해명한 일 등 經筵講義에 관한 것 중 文集에 빠진 내용을 연보에서 뽑아 놓은 글.
論冬至稱賀箚子 (21) 居喪의 禮를 들어 冬至 賀禮 대신 위로의 예를 행하고 勸講할 것을 청한 程頤의 箚子.
又上太皇太后疏 (22) 程頤가 太皇太后에게 垂簾聽政 뒤에는 當日에 講官을 불러 講하자고 청한 내용.
乞就寬凉處講讀奏狀 (22) 程頤가 여름으로 더워지니 시원한 곳으로 옮겨 강독하기를 청한 내용.
又上太皇太后疏 (23) 程頤가 太皇太后에게 여름 더위를 피해 延和殿 등에서 강할 것을 청하였는데 給事中이 이를 반대하자 宋이 건국된 뒤에도 행해졌던 것을 들어 殿上에서 강설하는 전례가 있다는 것을 말한 程頤의 상소문에 講學이란 正心을 요체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인 내용.
論開樂御宴奏狀 (28) 喪禮 중에 황제가 음악과 함께 연회를 여는 것이 예의 본의를 잃고 人情을 해친다며 이를 파할 것을 청하는 程頤의 奏狀에 너무 엄하다고 비판한 蘇軾의 잘못을 지적하며 程子의 師道에 유념하기를 청한 내용.
經筵故事 (1) 朱熹가 경연에 참여했던 시절의 故事와 경연과 관련하여 올린 상소문 등을 모은 글. 宋 나라 寧宗이 즉위한 뒤 煥章閣 待制 兼 侍講으로 46일 동안 7차례 進講한 내용.
甲寅行宮便殿奏箚一 (2) 朱熹가 宋나라 孝宗 사후 칭병하며 나오지 않은 光宗 대신 즉위한 寧宗에게 올린 奏箚에 부연한 글. 人倫의 變을 만나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먼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다한 뒤에야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는 내용.
二 (5) 宋나라 寧宗이 즉위한 뒤 朱熹가 올린 두 번째 奏箚에 부연한 글. 우선 儒臣을 불러 經藝를 토론하고 詞章이 아니라 居敬에서 출발하여 讀書를 통하여 窮理하여야 하며‚ 明나라의 도움으로 守成할 수 있었으니 居敬을 근본으로 삼고 어진 이를 구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병사를 양성하여 복수를 기약하자는 내용.
山陵議狀 (12) 송나라 孝宗의 산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趙彦逾이 땅이 얕고 물이 있어 적당하지 않다고 지적하여 의논이 분분할 때 朱熹가 올린 議狀. 術家의 말이긴 하지만 幽明이 머물 곳이니 땅을 잘 가려 길지를 얻어야 할 것이며 여러 곳을 얻은 뒤 地理를 잘 아는 관원을 보내 서로 비교하라는 내용.
十月辛丑始講自經首止第三節 (14) ≪大學≫의 첫 머리부터 3절에 대한 朱熹의 경연 강의. ≪大學≫ 공부의 의의‚ 明德과 新民의 뜻‚ 明德과 新民에서 止於至善에 이르는 것에 대한 설명과 사물의 本末과 始終의 先後를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는 내용.
年譜-附 (22) 朱熹의 강의가 성의를 다하고 명백해서 왕이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연보의 내용.
乙巳晩講自第四節止第六節 (22) ≪大學≫ 4절부터 6절에 대한 朱熹의 경연 강의. 格物에서부터 修身까지를 明德으로‚ 齊家부터 平天下까지를 新民으로 나누어 物格에서 天下平까지의 뜻을 설명하고 修身이 근본이 됨을 설명함.
乞進德箚子 (26) 덕에 나아갈 것을 청한 朱熹의 箚子와 이를 周易 乾元의 道에 비긴 해설. 元后는 백성의 부모로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 하며 농사와 가난을 모르니 경전과 역사를 가까이 하고 대신을 자주 불러 백성의 休戚을 구하여야 함. 또한 학문에 뜻을 두어 氣質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내용.
乞不以假故逐日進講箚子 (31) 까닭을 꾸며대지 말고 날마다 진강할 것을 청하는 朱熹의 箚子와 당시 왕이 처음에는 嘉納하였으나 소인들의 방해로 끝을 보지 못해 혼란한 군주가 되었다는 해설.
乞差官看詳封事箚子 (32) 雷雨로 인한 求言에 封事한 것을 자세히 살핀 뒤 차차 시행할 것을 청한 朱熹의 箚子. 잘못된 것을 아뢰는 대신 신료의 말을 잘 살피라고 한 이유에 대한 해설.
乞瑞慶節不受賀箚子 (34) 황제의 梓宮이 아직 殯殿에 있으니 瑞慶節의 하례를 받지 말라고 청한 朱熹의 차자.
經筵故事∕庚戌講傳首章 (1) ≪大學≫ 首章에 대한 朱熹의 經筵 講議. 康誥의 ‘文王이 능히 明德을 밝혔다’라는 것에서 ‘밝음이 體라는 것을 알아 어둡고 협소한 데 빠지지 않아 至善에 이르러야 한다’는 克明峻德에 이르기까지의 강의와 이에 대한 해설.
經筵留身面陳四事箚子 (3) 近習에 따라 東宮 3백여 간을 修葺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자간의 윤리로 上皇帝에게 문안하는 예를 폐하지 말아야 한다. 관리의 진퇴를 멋대로 하지 말고 조정의 기강을 엄하게 하여야 한다. 山陵을 잘 가려 새로 조성하여 壽皇의 유체를 편히 하여야 한다는 4가지 일에 대해 의견을 아뢴 朱熹의 차자와 이에 대한 해설.
閏十月戊午朔晩講傳二章 (11) ≪大學≫의 傳 2章에 있는 湯 盤銘의 ‘日新’‚ 康誥의 ‘新民’‚ ≪詩經≫의 ‘維新’ 등에 대하여 경연에서 강한 내용과 이에 대한 해설.
附-年譜 (16) 朱熹가 日新 등을 강한 것은 人主에게 더욱 부지런하기를 경계한 글이라는 내용.
庚申早講傳三章 (16) 朱熹가 경연에서 ‘止於至善’을 해석한 ≪大學≫ 傳 3장의 ‘畿內 천리는 백성들이 사는 곳’이라는 구절 이하 文王의 德을 칭한 구절 등에 대해 강한 내용.
論災異箚子 (20) 朱熹가 경연에서 까만 안개가 사방을 막아 도성에서는 사람을 지척에서 분간할 수 없고 얼굴에 모래흙이 달라붙는 재이를 당해 황제의 恐懼修德을 청한 차자와 이에 대해 부연한 내용.
乞令看詳官面奏箚 (22) 관원들이 臣庶들의 封事를 자세히 살펴 올린 책자가 완비되었으니 經幄에서 面奏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箚子.
辛酉晩講傳四章止五章 (22) 孔子가 백성들이 송사를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 뜻을 풀이한 ≪大學≫ 傳 4章에서 物格知至의 뜻을 풀이한 傳 5章까지에 대한 경연 강의와 이에 대한 설명.
乞討論喪服箚子 (29) 朱熹가 올린 箚子. 한나라 文帝 이후 시작된 短喪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통을 이은 송나라 寧宗에게 孝宗의 嫡孫으로서 대신 執喪하며 斬衰 3년복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권하는 내용.
面奏祧廟箚子 (31) 송나라 태조의 高祖였던 僖祖 등의 사당 훼철을 반대하고 祧廟할 것을 주장한 箚子와 이에 대한 설명.
丙戌晩講傳六章 (34) ≪大學≫ 傳 6章 誠意와 愼獨에 관하여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과 주자의 大學講義가 여기서 끝났다는 설명.
乞修三禮箚子 (39) ≪예기≫를 존중한 王安石이후 ≪儀禮≫가 파하여지고 제생들도 虛文만 외우고 있어 자신이 의례에 注疏를 달던 중이라며 한가한 곳에 사람을 모아 편찬을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한 朱熹의 箚子. 뒤에 주희가 경연에서 올린 주차의 의의와 年譜 등에서 뽑은 기록을 덧붙임.
史官傳諭後辭召命疏 (1) 1682. 사관이 와서 筵席에 출입하라고 傳諭한 뒤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疏 (3) 우레와 무지개의 재앙을 당하여 민심의 소재가 곧 天心이라는 것을 알고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의견을 아뢰며 召命을 사양한 상소문.
辭召命疏 (5) 1683. 재이로 인하여 경계할 말 등을 청한 傳諭에 대해 신병과 부족한 재질을 들어 사양한 상소문.
史官傳諭後辭召命疏 (6) 사관을 보내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제수의 순서가 尹拯보다 앞서고 또한 大臣의 예로 부른 것은 예의가 倒置되었다는 것과 身病을 들어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赴召到中路辭召命疏 (8) 소명을 받고 올라오는 길에 신병과 자신의 진퇴에 국가의 안위가 걸려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들어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到城外辭召命疏一 (11) 성밖에 도착한 뒤 內醫와 약물을 보내 看病해준 것에 사례하고 經筵의 책임은 감당할 수 없어 이미 그만두었다며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到城外辭召命疏二 (13) 성밖에 도착하여 소명을 사양하며 올린 두 번째 상소문. 곧바로 경연에 나오라는 傳諭는 隱逸이나 儒術이 있는 선비를 招筵하는 예이니 관직 없이 경연에 나아갈 수 없으며 宋時烈도 부르니 올라왔는데 오만하게 군다는 말도 있다지만 이미 정승에 올랐던 송시열과는 처지가 다르니 自處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내용.
入城後乞賜進退疏 (15) 入城한 뒤 병이 더 심해졌다며 進退를 분명히 내려 달라는 내용의 상소문.
辭賜食物且命闕內入直疏 (15) 먹을 것을 내리고 궐내에 入直하도록 한 것은 大老를 우대하는 예로 자신은 이를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한 상소문.
辭吏曹參議並申前請疏 (17) 淸選을 주관하는 이조참의 직을 이미 사양하여 체직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 뜻을 아뢰었으며 자신은 大老와 여러 선비를 초청하여 경연을 열고 국정을 도모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며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吏曹參議疏 (18) 재이로 인하여 이조참의를 사양하는 상소문. 修省을 더하여 私慾을 이기고 殷나라 太戊처럼 改過遷善하여 삼가고 공경하며‚ 高宗처럼 나라를 편안하게 하기를 청한 내용.
三辭吏曹參議兼請還寢家舍之命疏 (20) 불초하다며 이조참의 직을 세 번째 사양하고 湖西에서 올라온 宋時烈과 사정이 달라 성내에 머물 곳이 있다며 금령을 어기고 내려 준 집을 돌려주겠다고 청한 상소문.
辭賜貂帽疏 (21) 경연에서 옥 장식을 받았는데 다시 貂帽를 하사받는 것이 송구하다며 사양한 상소문.
四辭吏曹參議兼陳筵講未盡之義疏 (22) 이조참의 직을 사양하며 경연에서 미쳐 陳達하지 못한 敬과 義의 뜻을 거듭 아뢴 상소문.
詣闕辭賓廳會議疏 (25) 벼슬이 宰臣의 반열에 끼어 있지 않고 言責 論事할 관직에 있지 않다며 宋時烈의 청에 따라 三司와 宰臣이 함께 하는 賓廳 회의에 참여하도록 한 것을 사양한 상소문.
五辭吏曹參議疏 (26) 이조참의는 초야에 있던 자신이 차지할 관직이 아니고 병으로 한 번도 政事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체직되지 않고 강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과 宋時烈의 소 중에 거론된 것 등을 들어 이조참의 직을 사양한 다섯 번째 상소문.
六辭吏曹參議疏 (27) 신병으로 3월 5일 주강에 나아가지 못했던 것 등을 들어 이조참의 직을 사양한 여섯 번째 상소문.
七辭吏曹參議兼請勉留致仕臣宋時烈疏 (28) 신병과 淸望을 가리는 임무에 맞지 않음을 들어 이조참의 직을 일곱 번째 사양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바꾸어 줄 사람은 宋時烈 밖에 없으니 致仕하려는 것을 힘써 만류하여야 한다고 청한 상소문.
辭兼帶成均館祭酒疏一 (30) 성균관 대사성 趙持謙이 이미 잘 살피고 있다며 成均館 祭酒 직을 兼帶하라는 명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兼帶成均館祭酒疏二 (32) 경연에서 輔導할 책임과 이조참의 직책도 감당할 수 없고 병도 있다며 겸하고 있는 成均館 祭酒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因違牌八辭吏曹參議疏 (33) 경연에서도 실수가 많았고 병으로 3월 17일 開政할 때 牌招에 응하지 못했다며 이조참의 직을 사양하는 여덟 번째 상소문.
因臺論徑歸留上告歸疏 (34) 대간의 의논이 일자 상소를 남기고 돌아가겠다고 고하는 상소문. 조정의 의논이 어긋나는 것을 염려하여 송시열과 함께 사헌부의 의논을 참작하여 처리했는데도 臺閣이 論啓를 정지하지 않는 것은 (金益勳의 처벌에 대하여) 함부로 말한 탓이요 擬望에 대해서도 대간의 평을 초래하였다고 自引하는 내용.
再遣承旨傳諭後乞賜明旨進退疏 (37) 승지를 보내 누차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재주와 역량‚ 大官과 小官의 양 쪽 의견을 보합하지 못한 잘못을 들어 자신의 進退에 관한 明旨를 내려 주기를 청하는 상소문. 왕이 奏對하는 말에 의견을 고치지 않는 잘못을 지적함.
請依前定進講心經綱目疏 (1) 1683. 전에 정한대로 ≪心經≫과 ≪綱目≫을 進講할 것과 돌아 온 宋時烈과 李翔이 돌아가는 것을 만류할 것을 청한 상소문.
因廟議筵說請賜罷退疏 (4) 諡號 追上 문제에 대한 廟堂에서의 의논과 경연 석상에서 金重夏의 일을 대신에게 물으라고 청한 것이 체통에 어긋난 일이었다는 의논이 있음을 들어 退斥해줄 것을 청한 상소문.
辭命賜月廩疏 (5) 進講하는데 큰 도움이 없었다며 月廩을 내려주라는 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進心學至訣疏 (7) ≪心學至訣≫을 올리는 상소문. 公私와 義利를 분별하는 공부의 근본은 居敬 하나에 있어 전에 아뢴 敬義에 대한 말과 경전 속의 敬字를 모두 거두어 넣은 것이 ≪心學至訣≫이라는 내용.
辭再除吏曹參議兼進冊子疏本疏 (10) 政事로 인해 臺論을 입고서 다시 경연에 참여하는 것은 조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라며 이조참의에 다시 제수된 것을 사양하고 鄭逑의 ≪心經發揮≫와 趙翼의 <持敬圖說>을 참작하여 만들었으니 ≪心經≫을 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상소문.
申辭再除吏曹參議疏 (11) 이조판서 李䎘이 臺評을 만나 辭免한 데는 자신도 책임이 있고 貢法의 편부를 논한 일 등으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며 이조참의에 다시 제수된 것을 거듭 사양하는 상소문.
請修德立政以爲致賢之道因乞命有司禱雨疏 (12) 돌아가려던 전 참의 尹拯을 부른 것처럼 어진 이를 부를 것을 청하고 3월이래 旱災가 혹심하다며 有司를 보내 비를 빌 것을 청한 상소문.
陳餓死人事因請疏決勿輕放宥疏 (13) 長湍府의 굶어 죽은 백성을 감사가 방문하여 상세히 구휼하고 冤獄을 審理하되 신중히 하여 간사한 사람이 가벼이 은혜를 받는 폐단을 답습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상소문.
請預議賑恤畿民之策因乞召還致仕臣宋時烈疏 (15) 보리 싹이 마를 정도로 심한 旱災는 경기 역시 마찬가지이니 진휼할 대책을 의논할 것과 致仕한 宋時烈에게 休致를 허락한 명을 거두고 소환할 것을 청한 상소문.
請太廟位版改正太字疏 (19) 태조에게 追諡하는 일을 결정하면서 위판은 改題하지 않기로 하였다는데 전에 恭靖大王의 位版을 개제한 일이 있으니 太廟의 위판도 太字로 改正하여야 할 것이라는 상소문.
辭工曹參判及兼帶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 (21) 公道를 회복하라는 기대와 성균관 章甫들의 講習을 주선하라는 명을 감당할 수 없고 신병이 있다며 공조참판 직과 겸하고 있는 成均館 祭酒 및 비변사 당상을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工曹參判及兼陳前日請召致仕臣宋時烈曲折疏 (23) 조정에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공조참판을 다시 사양하고 이전에 致仕한 宋時烈을 소환하기를 청한 곡절에 대해 아뢴 상소문. 趙持謙이 말한 것처럼 休致를 收還하라고 청한 것으로 송시열이 의심하고 있다는 데 사실은 휴치를 召還하자는 뜻이었다는 내용.
三辭工曹參判兼請收還遆罷臺臣之命疏 (25) 공조참판을 다시 사양하고 大臣과 臺臣의 다툼은 金益勳의 일이 단서인데 경연에서 화약 등의 말이 나오자 대각이 중대한 국론으로 생각한 것이고 大臣이 이를 꺼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니 臺臣을 체직 혹은 파면한 명을 환수하여야 할 것이라고 청한 상소문.
出謝登對後四辭工曹參判兼請許歸疏 (29) 臺閣이 金益勳을 탄핵한 일로 大臣과 대각이 다루고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들어 공조참판을 네 번째로 사양하며 돌아가겠다고 청한 상소문. 대각이 大臣이나 宋時烈을 직접 배척하지 않았는데도 벌을 받는 것은 잘못이며 대간에게 邪毒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었다는 내용.
五辭工曹參判並請收還前後資級職名仍告歸疏 (33) 소명을 받은 지 4년‚ 경연에 출입한지 반년에 한가지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공조참판을 사양하고 전후에 내려진 資級과 직책도 환수할 것을 청한 상소문.
陳時務萬言疏 (1) 1683. 현종 연간에 기초하고 1683년에 올렸다가 뒤에 다시 올려 논의된 12개조 時務 상소문. 1조는 큰 뜻을 분발해야 하니 王道를 살피고 大義를 밝게 하라. 2조는 聖學을 힘써야 하니 經筵에 부지런하고 大本을 바르게 하며 君子를 가까이 하고 小人을 멀리 하라. 3조는 內治를 바르게 함이니 宮圍를 엄히 하고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라. 이때 궁위를 엄격히 하려면 內需司를 폐지하고 宦侍를 경계하며 戚屬을 가르쳐야 한다. 4조는 規模를 세워야 하니 忠厚함을 숭상하고 엄격하게 하라. 5조는 기강을 진작함이니 상벌을 공정하게 하고 賢邪를 분변하며 朋黨을 타파하고 요행을 억제하라. 붕당을 타파하기 위해 二賢을 포양하고 嶺南을 수합하며 敎誡를 엄하게 하여야 한다. 6조는 賢才를 구함이니 論薦하고 通用하라. 7조는 言路를 열어야 함이니 求言하고 納諫해라. 求言을 위해 왕이 스스로 책하고 看詳官을 두어야 한다. 8조는 法을 제정함이니 政事를 부지런히 듣고 의정부의 옛 제도를 회복하며 삼공·육경·삼사의 장관·감사를 가려 임명하며‚ 長吏를 선택하여 久任하고‚ 超遷과 黜陟을 잘 하라. 잘 가려 임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郞僚를 불러 쓰고 치적이 있는 이를 長吏로 불러 쓰되 내외직을 교대로 임명하고‚ 출척을 위해서 御史를 파견하여야 한다. 9조는 先祖의 법전을 찬술함이니 經濟司를 설치하고 經濟六典을 참고하며‚ 續錄을 수정하며 先正의 疏章을 채택하여 옛 폐단을 개혁하고 새 법제를 반포하라. 10조는 선왕을 본받음이니 鄕黨·經界·학교 문제이다. 향당을 위해서 士民을 명백히 분변하고‚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農桑·水利·社倉을‚ 학교를 위해서는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선발하는 법을 정비하고 貢擧와 鄕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11조는 軍政을 정돈함이니‚ 내정과 군제를 정하고 將材를 뽑고 訓鍊을 밝게 하라. 군제에서 5위를 회복하여 親兵을 정선하고 장재를 뽑기 위해 兵法을 강론하며‚ 훈련을 밝게 하려면 器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며 戰馬를 준비하여야 한다. 12조는 守禦에 전심함이니 산성을 수리하고 行營을 설치하며 바닷가와 변방에 큰 鎭을 설치하라. 산성을 수리하기 위해 험한 곳에 의거하고‚ 들판에 적이 이용할 것을 없애며 큰 진을 설치하기 위해 土兵을 모집하여 屯田을 설치하고‚ 여러 섬을 개발하여 水戰을 익히고 전함을 준비하여야 한다. 마지막은 군주의 心學의 요령을 논함.
史官三度傳諭後申請收還職名兼辭召命疏 (1) 1683. 사관이 세 차례 傳諭한 뒤 직책을 거두어 줄 것을 거듭 청하고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문. 전에 나아간 것은 宋時烈이 성안에 있어 함께 국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송시열이 나오지 않고 조정에 있을 때 말했던 것은 시행되지 않았으니 올라오라는 명을 따를 수 없다는 내용.
三請收還職名兼辭月廩疏 (5) 직책을 환수하기를 세 번째 청하며 月廩을 사양하는 상소문. 경연에 나가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仍申辭月廩疏 (7) 나아갔을 때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들어 사헌부 대사헌을 사양하고 宋浚吉이나 宋時烈도 還鄕하며 돌려보냈던 것을 들어 月廩을 다시 한 번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司憲府大司憲仍乞亟賜罪黜疏 (9)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면서 송시열의 휴치를 召還하기를 청한 상소문의 경과를 해명하고 죄를 청한 상소문.
因右議政金錫冑箚斥請罪疏 (14) 우의정 金錫冑가 자신이 세 조정에 출사하며 관료들과 결탁하고 있다고 배척하는 차자를 올린 것에 대해 세 조정에 출사한 적도 없고 조정에 있으면서 오히려 붕당을 깨뜨리려고 노력하였다고 변명하는 상소문.
到白川三辭司憲府大司憲疏 (16) 縉臣이 의혹하고 물정이 비등하여 自靖해야 할 상황이라며 白川에 도착하여 사헌부 대사헌 직을 세 번째 사양한 상소문.
歸自城外陳情辭戶曹參判仍請加護聖躬疏 (17) 성밖에서 돌아가겠다는 뜻을 아뢰면서 호조참판 직을 사양하고 聖躬을 더욱 보호하기를 청한 상소문.
請治妖巫之罪並再辭戶曹參判疏 (21) 妖巫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고 호조참판 직을 다시 사양하는 상소문.
嚴批後待罪並三辭戶曹參判疏 (23) 1684. 엄한 비답을 받고 함부로 망언하여 慈聖의 덕에 누를 끼친 죄를 들어 待罪하면서 세 번째로 호조참판을 사양한 상소문.
辭召命疏 (24) 견식이 어둡고 時議에 죄를 얻어 顚沛되기에 이르렀고 수족이 마비되는 증상이 있다며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25) 자신이 직책에 맞지 않고 山陵의 일이 다가오면 자리를 띤 채 물러나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이조참판을 사양한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27) 직책을 받은 지 3개월에 자신은 병이 있고 이조참판 자리는 비워둘 수 없는 자리라며 사양한 두 번째 상소문.
復請追還職名兼請罪黜疏 (1) 1684. 尹拯이 宋時烈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를 비판한 崔愼의 상소를 비판하고 윤증을 변무한 상소문. 윤증의 편지가 師生의 체통을 손상할 듯하여 이를 만류한 적이 있지만 윤증의 본의가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다. 윤증을 만나서 사과하게 하려 했고 송시열도 알려진 말을 듣고 자제에게 말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최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攻斥하기에 급급하여 尹宣擧를 함께 모욕하여 師生 사이를 끊을 뿐 아니라 윤증을 억울하게 顚沛하게 한 것이다. 송시열과 윤증이 서로 막힐 조짐을 알고 조화시켜 사생의 사이를 보전하고자 하였는데 뜻하지도 않은 일로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이제 자신도 윤증과 서로 譏議하여 송시열을 무함하고 욕한다는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죄를 청한다는 내용.
因因災訪問辭召命疏 (5) 재해로 인하여 찾아와 묻는 것에 대하여 하늘을 대신해 만물과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인군의 도리와 재앙의 관계를 논하며 관리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조목을 돌아보고 근원을 바르게 하여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올리면서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一 (9) 전에 조정에 들어갔을 때 실패했고 지금도 物論과 합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二 (10) 왕을 보필하고 신하들을 卞正하고 풍속을 바로잡아야 할 憲職을 감당할 수 없고 몸에 마비가 일어나서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11) 왕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해야 하고 先大妃의 練祭도 다가오고 있는 즈음이지만 상소를 올려 사양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다며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12) 이미 人事에 간여하여 物議를 입고서도 홀로 벼슬에 남아 있는 사실과 병을 들어 이조 참판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13) 1685. 전에 立朝하여 이미 실패한 적이 있고 古義를 지키겠다며 朝旨를 어기고 있으니 처벌해달라며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15) 병이 있고 이조참판 직을 오랫동안 비워두게 했다며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因因災訪問辭召命疏 (16) 1685. 지난번에 入朝하였다가 조정에서 善人과 惡人을 등용하고 처벌하는 것과 조정의 의논이 서로 맞지 않게 한 죄가 있다며 소명을 사양함. 재이를 만나 求言하고 減膳하는 것 외에 戒懼 謹獨하여 백성을 보전하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疏 (19) 張善沖이 재기가 老成하고 言議가 공평하며 바른 인물이라고 신구하며 銓曹에 있을 때 그를 천거한 허물이 있었음을 들어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내용.
辭吏曹參判疏 (21) 조정에서 실질적인 정사를 행하여 실효를 책임질 인물도 아니고 臺論을 무시하고 張善沖을 위하여 分疏한 잘못이 있다며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吏曹參判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一 (22) 1686. 재주가 시의에 맞지 않고 物議에 협동하지 못하여 물러났고 求言에 응하지 못했다며 이조참판 및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二 (26) 지난번에 나아갔다가 실패한 잘못을 되풀이하여 조정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이조참판 및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사양한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疏 (27) 반년 가까이 經幄에 있으면서 크게 도움을 준 것이 없고 새로 강하는 易經에 대해서도 모른다며 筵席에 참여하라는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再辭召命因進朱子大全拾遺疏 (28) ≪朱子大全拾遺≫를 올리고 재차 소명을 사양한 상소문. ≪朱子大全拾遺≫는 熊氏의 翰墨大全 등에서 朱子가 族人 등에게 남긴 글들을 모아 宋時烈 등과 함께 語類 등을 참작하여 二程遺文의 예에 따라 편집한 책이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疏 (30) 조리하고 올라오라는 왕명에 여름에 더위를 무릅쓰고 돌아오다가 병이 더쳤음을 아뢰면서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召命疏 (31) 1687. 災異에 보필할 재주가 없음이 이미 드러났다며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修己를 정사의 근본으로 삼아 기질의 치우침 등을 살피고 皇極을 위주로 誠에 나아가 조처의 번거로움 등을 반성할 것을 청한 내용.
復請追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一 (34) 겸임하고 있는 직책을 환수해주지 않아 오랫동안 빈자리로 있다며 직명 및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추가로 환수해 줄 것을 다시 청하는 첫 번째 상소문.
復請追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二 (36) 관직에 물러나고서 좨주와 비국의 직책을 몇 년간 띠고 있던 일이 전례에 없다며 직명과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환수해 줄 것을 청한 두 번째 상소문.
復請收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疏三 (38) 田野에 물러나 있어 변방의 급한 일들을 알 수 없다며 직명과 겸임하고 있는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 직을 추가로 환수해 줄 것을 다시 청한 세 번째 상소문.
辭召赴長陵疏 (40) 長陵의 遷奉 여부가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천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幸行 중에 부른 데 대해 평소의 분수를 지킬 수 있게 해달라며 사양한 상소문.
辭命陪從入城疏 (41) 과거의 허물이 지금의 일에도 단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자책하고 병을 들어 陪從하여 성에 들어오라는 명을 사양한 상소문.
辭召命疏 (1) 1687. 長陵에 幸行했을 때 능과 災異에 관한 일을 아뢰고‚ 조정에 나갔을 때 협동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붕당의 근원으로 지목받은 情迹과 신병을 들어 소명을 사양하는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一 (3) 이전에 실패한 일로 自靖해야 하고 상황이 당시와 다를 바가 없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二 (5) 자신이 이미 실패하였으며 신병이 있다는 것을 들어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三 (7) 병이 깊어 3개월이나 일어나지 못해 벼슬에 나갈 기약이 없다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一 (8) 1688. 亞銓이나 憲長에 제수된 뒤 몇 달간 자리가 비어 있게 한 것은 宣祖 이래 선비를 대우한 것을 고질적인 폐단으로 만들 것이라며 이조참판 직을 체직하여 줄 것을 청한 첫 번째 상소문.
辭吏曹參判疏二 (10) 선비를 대우하는 폐단을 거론하고서 다시 나아가기 어렵다며 신병과 재능 부족을 들어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召命及吏曹參判疏 (11) 선비를 대우하는 일에 恩禮인 文과 어진 선비를 얻고자 하는 實이 있는데 자신은 實이 없으니 자신에 대한 예우는 文만 승하게 할 것이라며 소명 및 이조참판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申辭吏曹參判兼陳諸路饑荒疏 (13) 신병을 들어 이조참판 직을 다시 사양하면서 각 도의 기근에 대해 아뢰는 상소문. 平山 사족들의 餓死 등 황해도에서 들은 것을 아뢰고 황해도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湖嶺과 서북 변방 사이에 끼어 진휼에 소홀하였다며 廟堂에 명하여 별도로 區劃하여 줄 것을 청하는 내용.
辭吏曹判書疏 (15) 조정에 나왔다가 廟堂과 臺閣의 논의가 어그러진 것을 잘못 조처하여 黨比로 지목된 일과 人才와 물정에 밝지 못함을 들어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再辭吏曹判書疏 (17) 오랜 黨習으로 서로 다투어 견해가 다른 자를 배척하여 쫓아내는 상황에서 서로 협동하게 할 책임이 있는 銓衡‚ 즉 이조판서 직에 적당하지 않고 신병이 있다는 것을 들어 재차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三辭吏曹判書疏 (19) 전에 패했던 일에 開釋받지 못하였고 신병이 있음을 들어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褒貶과 都目 등은 기한을 어길 수 없는 일이며 헛된 거조에 구애되어 실무를 폐하지 말아야 하니 빨리 체직하여 달라는 내용.
四辭吏曹判書疏 (21) 나라에 누를 끼친 것이 이미 많다며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네 번째 상소문.
五辭吏曹判書兼進癸亥陳時務疏疏 (22) 다섯 번째 이조판서를 사양하면서 1683년에 올리려던 時務疏를 올리는 상소문.
六辭吏曹判書疏 (24) 慈殿의 건강이 좋지 않고 大政을 지연해서는 안될 것인데 자신에게는 신병이 있다며 이조판서 직을 사양한 여섯 번째 상소문.
七辭吏曹判書疏 (26) 나아가기 어려운 정세와 신병을 들어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일곱 번째 상소문.
到高陽八辭吏曹判書疏 (28) 병을 조리하며 고양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뢰고 아뢸 것은 이미 며칠 전 책자로 만들어 올렸으니 그 말을 들어주고 이조판서 직은 면해 달라고 청하는 여덟 번째 상소문.
到城外九辭吏曹判書疏 (29) 성밖에 도착하였음을 아뢰고 새로 제수된 명을 거두고 東朝가 쾌차하여 회복되는 날에 잠시 召對를 내려 줄 것을 청하는 아홉 번째 상소문.
還授後辭吏曹判書疏一 (30) 다시 제수된 뒤 이조판서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아뢰었던 말로 인해 상하가 서로 버틴 지 수개월이라며 進言한 것이 밝게 분별하지 못하여 누를 끼친 죄를 다스려 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
還授後辭吏曹判書疏二 (31) 이조판서에 도로 제수된 뒤 두 번째 올린 상소문. 開釋하여 준 것에 사례하고 범한 것이 國體에 관계되고 銓衡을 비운 지 거의 반년이 되어 都目大政이 체모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명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
辭司憲府大司憲疏一 (34) 전에 실패한 흠과 뒤의 狂妄했던 허물로 체직된 뒤 겸하고 있던 것도 체직해주기를 청하려다가 先后의 장례가 임박하여 감히 하지 못하고 있던 중이라며 사헌부 대사헌 직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辭司憲府大司憲疏二 (35) 병과 情迹으로 보아 사헌부 대사헌 직을 수행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右參贊疏 (36) 1689. 병과 직무로 보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며 의정부 우참찬 직을 사양하는 상소문.
復請追還職名及兼任成均館祭酒備邊司堂上仍自劾疏 (38) 직명 및 겸임하고 있던 성균관 좨주와 비변사 당상을 거두어 주기를 다시 청하면서 自劾하는 상소문. 자신이 늘 黨比를 경계하였으나 죄를 얻은 신하들을 논하는 가운데 당비가 있다는 혐의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점‚ 李珥와 成渾의 遺文과 事蹟을 印刊하기를 청한 적이 있었는데 어제 館學에서 文廟에서 내치기를 청하고 이를 들어주어 (10년도 안되어) 출향되었는데 道理로 왕을 설득할 수도 없으니 포양하기를 청한 자신을 벌해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
壬戌熙政堂啓箚 (1) 1682. 立志를 근본으로 삼아 군자와 가까이하고 소인은 멀리할 것과 또 扁鵲 같은 무리를 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할 것을 아뢴 箚子.
癸亥熙政堂啓箚 (3) 1683.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 趙光祖가 靖國功臣에 외람되게 참여한 이들을 削除하도록 청한 일을 들어 勳籍을 追錄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
啓箚二 (5)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 朋黨을 깨뜨리는 길을 논한 것으로 역적의 獄事나 奸黨에 관련되지 아니한 자들은 마땅히 參用해야 된다는 내용.
啓箚三 (8)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 程子와 朱子의 논의를 들어 明에 대한 의리를 되새기고 청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을 의리를 논하는 내용.
戊辰熙政堂啓箚 (12) 1688.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첫 번째 조목. 군신이 서로 막혀 宮府가 서로 다르고 朋比의 습속이 있으니 中庸의 誠實을 君德의 요체로 삼으라는 내용.
啓箚二 (15)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두 번째 조목. 훈척이 성하던 때에 金壽恒이 대간과 모순되어 언로를 막히게 했음. 李端夏는 經術 등에는 능하지만 번거로운 것을 결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왕의 擧措가 마땅해야 함을 논한 내용.
啓箚三 (18)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세 번째 조목. 喜怒가 마땅해야 하니 金萬重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내용.
啓箚四 (19)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네 번째 조목. 齊家의 도리를 논한 것으로 宮禁에 대해 지적한 李徵明과 韓聖佑 등을 청요직에 낙점하지 않는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啓箚五 (22) 熙政堂에서 引見하였을 때 올린 차자의 다섯 번째 조목. 친족을 사랑하는 도리를 논함. 東平君 李杭의 일로 臺諫과 맞선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惠民署 提調의 직을 파직하고 다른 종친들과 균등하게 대할 것을 청한 내용.
壬戌九月二十一日熙政堂引見 (1) 1682. 熙政堂에서 있었던 引見 기록. 實德을 닦고 적절한 조처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것 등을 아뢴 내용.
癸亥二月四日熙政堂引見 (4) 1683. 熙政堂에서 있었던 引見 기록. 元老가 등대하던 때에 함께 국사를 도모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여서 차자를 올렸다는 것과 왕과 慈殿이 內帑을 내어 진휼하는 마음을 늘 잃지 않아 始終이 하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아뢰었다는 내용.
二月十四日熙政堂召對 (7) 희정당에서 있었던 召對 기록. ≪心經≫을 강하면서 분노가 발동할 때 이를 경계하면 政令이 마땅할 것이라고 아룀. ≪大學≫과 ≪聖學輯要≫에 뜻을 두기를 청함. 전에 올린 차자의 뜻을 낱낱이 아룀. 소대를 마치면서 玉圈 한 쌍과 貂帽를 받았다는 내용.
二月二十六日熙政堂晝講 (12) 희정당에서 ≪詩傳≫<桑柔章>을 강했던 晝講 기록. 朱子의 封事와 程顥의 疏章을 경연 외에 다시 살펴볼 것을 청함. 宋나라 仁宗이 韓琦 등에게 筆札을 주어서 陳達하게 한 것을 본받기를 권유함. 인재를 널리 찾는 방도에 대해서도 토론했다는 내용.
三月三日晝講 (16) ≪詩傳≫<崇高> 8장을 강한 晝講 기록. ≪心經≫의 敬義 공부를 학문의 요체로 삼을 것‚ 군신이 서로 도울 것을 아룀. 內需司와 宮家의 훈척 및 좌우의 近習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 政官이 인물을 등용하는 일이 청탁에 좌우되어 공의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함. 대사성을 가려 뽑아 교육에 전념할 것‚ 金益勳의 일에 대해 臺閣과 廟堂 사이의 갈등에 공정하게 처치할 것‚ 尹拯을 성의를 다해 불러 올 것‚ 宋時烈의 휴치를 허락하지 말 것 등을 아뢴 내용.
三月八日熙政堂晝講 (23) 熙政堂에서 ≪詩傳≫<江漢> 6장과 <常武> 6장을 강한 晝講 기록. 周 宣王 때의 일과 宋時烈의 致仕 문제에 대해 의논한 내용.
三月十六日熙政堂召對 (26) 熙政堂에서 ≪心經≫<不遠復章>을 강했던 召對 기록. 君臣간의 分義와 학문의 근본을 논함. 程子와 朱子의 封事를 정밀히 抄하여 왕이 보는데 대비하기를 청한 내용.
三月二十日熙政堂晝講 (29) 熙政堂에서 ≪詩傳≫<我將> 1장에서 <思文> 1장까지를 강한 晝講 기록. 인조 반정 60주년의 감회‚ 朱子의 시와 인조 반정 이후의 명에 대한 태도를 들어 淸나라에 대한 복수를 논함. 경연에서 문답을 통하여 논란할 것을 청하는 내용.
四月二日熙政堂引見 (33) 熙政堂에서의 引見 기록. 무지개의 변고에 대하여 陳戒하며 愼獨의 공부를 청함. 어영대장 尹趾完이 여러 曹에 한 번도 의망되지 못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풍년을 기다려 貢案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한 내용.
四月四日宣政殿晝講 (37) 宣政殿에서 ≪詩傳≫<良耟> 1장을 강한 晝講 기록. 농사짓는 민간의 疾苦를 알기를 청함. 金重夏의 일에 대하여 삼사에서 청한 대로 죄상을 엄히 국문하여 다스릴 것을 청한 내용.
四月八日熙政堂朝講 (41) ≪詩傳≫<泮水> 8장을 강한 熙政堂에서의 朝講 기록. 경전의 내용을 논하고 金重夏와 金渙을 誣告罪로 다스려야 한다고 아뢴 내용.
同日宣政殿夕講 (43) ≪詩傳≫<閟宮> 9장을 강한 宣政殿에서의 夕講 기록. <程朱封事>와 ≪朱子大全≫의 주해를 베껴 올리는 문제와 여인들이 差備門을 마음대로 출입하는 일로 인해 宮禁을 더욱 엄히 할 것에 대해 아뢴 내용.
四月十日宣政殿晝講 (46) ≪詩傳≫<商頌>의 <那> 1장에서 <玄鳥> 1장까지 강한 宣政殿에서의 晝講 기록. 송시열이 청했던 威化島回軍의 일로 태조에게 尊號와 諡號를 올리는 문제를 여러 대신과 함께 논의할 것을 청함. 金重夏의 일‚ 서북 변방의 수비와 軍政을 닦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癸亥四月二十一日熙政堂晝講 (1) 1683. ≪心經≫<顔子問仁章>의 ‘洪爐點雪’을 강한 熙政堂에서의 晝講 기록. 月廩 외에 먹을 것을 賜給해 준 것은 宣祖 때의 成渾‚ 孝宗 때의 宋時烈과 宋浚吉 외에는 예가 없는 일이라며 사양함. 태조의 諡號에 威化島回軍의 일을 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다시 물어 처치할 것을 아뢴 상소이지 改題를 동시에 하자는 뜻이 아님을 해명함. 송시열이 金化로 갈 때 궁가 경영을 지적한 臺閣의 뜻을 왕이 용납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지적했음을 전하는 내용.
四月二十二日晝講 (5) ≪心經≫<仲弓問仁章>을 강한 晝講 기록. 李滉의 主敬 공부와 ≪心經≫의 중요성에 대해 아룀. 태조의 諡號를 가상하되 改題하지 말자는 金錫冑의 견해나 시호를 가하고 改題해야 된다는 설을 절충할 것이 아니라 威化島回軍에 대한 追諡 자체를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한 내용.
四月二十八日宣政殿晝講 (8) ≪心經≫<天命之謂性章>을 강한 宣政殿에서의 晝講 기록. 戒懼愼獨의 뜻‚ 宋時烈의 복귀‚ 尹拯에 대한 권면‚ 貢案 개정‚ 사치를 금하는 일‚ 貢物主人의 폐단‚ 大同法 시행 등에 대한 내용.
四月二十九日晝講 (15) ≪心經≫<潛雖伏矣章>을 강한 晝講 기록. 謹獨 공부와 李滉의 ≪心經懸吐≫를 수정하여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아뢴 내용.
五月一日晝講 (17) ≪心經≫<誠意章>을 강한 晝講 기록. 愼獨 및 誠敬의 의의와 孝宗과 顯宗 시절의 강학‚ 臺閣의 언론 문제 등에 대한 내용.
五月十日熙政堂引見 (23) 熙政堂에서 請對했을 때의 引見 기록. 한재가 혹심하니 대신을 따로 보내 기도할 것‚ 팔도의 가뭄으로 인해 貢稅 등을 실어오는 배가 없어지면서 쌀값이 급등한 경기 지역에 대한 진휼책을 마련할 것‚ 求言과 審理로 하늘을 감응시켜 재앙을 그치게 할 것‚ 성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다하고 사심을 버릴 것‚ 宋時烈과 尹拯을 지극한 정성으로 불러 올 것‚ 李端夏의 經學과 李敏敍의 절조를 알아주고 은거하는 선비인 朴世堂과 柳譚厚 등을 조정에 초치할 것 등을 청한 내용.
六月五日熙政堂晝講 (32) ≪心經≫<誠意章>을 강한 熙政堂에서의 晝講 기록. 종묘에서 친히 비를 빌 것. 臺閣이 진언한 것은 金益勳 사건으로 인한 것이지 宋時烈을 바로 배척한 것이 아니며 송시열의 논의가 지당한 것도 아닌데 대간을 邪毒이라는 말로 너무 엄하게 대한 것은 잘못이니 대각에 대한 명을 환수할 것. 金渙·全翊戴·金重夏를 국문해야 한다는 내용.
丁卯十月十一日長陵行幸時引見 (44) 1687. 長陵에 行幸한 왕을 崔錫鼎의 주선으로 引見했을 때의 기록. 遷陵 문제의 타당성 여부를 논함. 능의 화재가 속출하는 등 재이가 계속되고 있는 중에 왕이 喜怒에 마땅함을 잃어버릴까 경계하며 더욱 힘쓰기를 청한 내용.
戊辰七月十三日熙政堂引見 (46) 1688. 熙政堂에서 인견했을 때의 기록. 올린 책자 중에 왕이 喜怒에 바름을 잃고 擧措에 마땅함을 잃었던 것을 지적했던 것을 상기시키고 지난 상소에 아뢴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에 힘쓸 것을 아뢰는 내용.
仁敬王后練祭設行當否議 (1) 1681. 仁敬王后 練祭 설행 여부에 대한 收議에 의견을 밝힌 글. 여항의 匹夫의 상에도 자세히 자문하지 못하여 일세의 웃음이 되었으니(閔愼 집안 喪禮) 감히 의견을 아뢸 수 없다는 내용.
恭靖大王廟號議 (1) 仁敬王后의 練祭에 대한 收議에도 감히 아뢰지 못했으며 더구나 恭靖大王의 廟號 문제는 宗廟에 관계된 것이니 신하로서 가벼이 대답할 수 없다는 내용.
恭靖大王位版改題及永昭殿上食哭等議 (2) 恭靖大王의 位版을 改題하는 일과 永昭殿과 翼陵에 祥祭후 上食하고 哭하는 일에 대한 收議에 가벼이 답할 수 없다는 내용.
永昭殿禫後五享大祭用樂議 (2) 永昭殿에 禫祭를 지낸 뒤 五享大祭에 음악을 쓸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의견을 밝힌 收議. 담제 후 山陵에서 哭泣하거나 魂殿에서 上食하는 것은 한때의 임시 편의에서 나온 것으로 이른바 禮에도 없는 예이고 다른 大祭에 음악을 쓰는 것은 五禮儀에 갖추어져 있으니 폐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
文廟廟制及馬融等八儒黜廟議 (3) 우리 나라의 文廟에만 동서 두 문을 만든 것은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을 것이며 제사지내는 전례에 올리거나 물리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논의인데‚ 다른 變通도 없이 단지 馬融 등을 삭제하여 내쫓기만 하는 것은 합당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文廟程朱陞配及中朝我國諸儒從祀議 (4) 1682. 陞拜 및 從祀하는 일로 지척하는 것은 외람되어 감히 아뢸 수 없다는 내용.
何蕃等三人立廟當否議 (4) 1683. 당나라와 송나라의 신하인 何蕃 등 3명의 立廟에 대해 감히 아뢸 수 없다는 내용.
孝宗大王世室議 (5) 孝宗을 世室로 올리자는 宋時烈의 의견에 대한 가부를 묻는 收議에 답한 글. 효종이 大義를 실천하고 中華와 夷狄에 없었던 功烈을 세웠으니 世室로 삼는 것이 옳지만 정성과 신중함을 다하여야 하니 역대에서 이미 행한 禮制와 先儒의 의견들을 널리 상고하고 대신들에게 다시 물은 뒤 왕이 친히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
仁祖大王世室同告宗廟當否議 (6) 仁祖를 孝宗과 함께 世室로 하여 宗廟에 고하는 것이 타당한 지를 묻는 收議에 답한 글. 인조가 난을 평정하고 중흥을 이룩하여 不遷之廟로 삼는 것이 마땅하고 漢나라의 太祖와 太宗을 함께 추존한 사례도 있으니 함께 올릴 근거가 있다는 내용.
擬上太祖大王追加尊號議 (7) 太祖에게 尊號를 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글. 尊號를 올리는 일이 古禮가 아니라 唐에서 시작된 것이며 朱熹 등도 존호를 올리자고 청한 일이 없지만 신하로서 감히 논할 것은 아니니 널리 묻고 깊이 생각하라는 내용.
各陵祭享素饌當否議 (7) 1684. 능의 제향에 素饌만 쓰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를 묻는 收議에 답한 글. 산릉 제사가 宗廟와 饌品이 다른 점은 있지만 ≪禮經≫에 근거가 없으니 古禮에 따라 제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제사하려면 수백년간 준행한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
拜陵時新舊兩陵祭禮服色議 (8) 拜陵할 때 崇陵의 신구 兩陵에서의 祭禮 服色에 대해 獻議한 글. 조정에서 稟議한 것을 왕이 재결하라는 내용.
心經講訖繼講春秋大學衍義孰當議 (9) 1685. ≪心經≫의 강을 마치고 ≪春秋≫와 ≪大學衍義≫ 중 어느 것을 계속하여 강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묻는데 獻議한 글. ≪大學≫은 성인의 淵源으로서 百王의 규범인데 이미 ≪大學章句≫와 ≪大學或問≫이 있고 ≪大學衍義正補≫와 ≪聖學輯要≫가 있으니 이것을 羽翼을 삼고 ≪大學衍義≫를 주로 講해야 한다는 내용.
永昭殿五享用牲用樂議 (10) 永昭殿 五享에 음악과 희생을 쓰는 일에 대해 獻議한 글. 경전에 명문이 없으면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해야 하지만 나라가 喪期 중에 있고 왕이 主喪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因歲饑宗廟祭享變通當否議 (10) 1686. 기근으로 인한 宗廟 祭享의 변통 문제에 대해 獻議한 글. 우의정 李端夏가 아뢴 것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지만 변통한 뒤 조정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의 名實이 조금 미진하게 되지 않을지 우려된다는 내용.
黃俊良書院黜享議 (11) 1687. 趙光祖 등의 신원을 청한 사람을 배척했던 黃俊良을 서원에서 黜享해야 할지를 묻는 일에 獻議한 글. 李滉이 황준량을 애석히 여기는 글을 남겼던 것을 참고하여 이미 배향된 이를 쫓아내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永寧殿祝辭氂正議 (12) 永寧殿 祝辭의 釐正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는 收議에 답한 글. ≪通典≫과 ≪文獻通考≫ 등의 서적을 모두 찾아 어그러진 것이 확인된 뒤에야 예에 따라 개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留疏批答史官傳諭後書啓 (1) 1682. 남겨둔 소에 대한 批答을 사관이 전유한 뒤 올린 書啓로 다시 움직이고자 하나 할 수 없어 석고대죄한다는 내용.
再度傳諭後書啓 (1) 재차 전유한 뒤 올린 書啓로 증세가 악화되어 기동할 수 없어 나가서 만날 수도 없을 정도이니 다시 아뢸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回還時書啓 (2) 1683. 史官이 상소의 批答을 傳諭하고 돌아갈 때 올린 書啓로 차차 병세를 보아 부축받으며 길을 떠나 엄명에 응하겠다는 내용.
太祖大王追上尊號不對書啓 (3) 太祖大王의 尊號를 추상하는 것을 묻는 데 대답하지 않은 일로 올린 書啓. 臺諫에게 注擬가 마땅함을 잃었다고 논박을 받은 상황에서 宗廟에 관한 일에 답할 수는 없었다는 내용.
再度書啓 (3) 太祖大王의 尊號를 추상하는 것을 묻는 데 대답하지 않은 일로 다시 올린 書啓로 宗廟의 일이 중하고 君父의 명이 엄하니 다시 묻는다고 답할 수는 없다는 내용.
因事徑歸承旨傳諭後狀啓 (4) 일로 인해 먼저 돌아가다가 승지가 傳諭하자 올린 狀啓로 일에 대해 뜻을 굽힐 수 없을 때는 머물러 하는 일이 없는 것보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나으니 허락해달라는 내용.
再遣承旨傳諭後狀啓 (5) 재차 승지를 보내 傳諭한 뒤 올린 狀啓로 온갖 병이 생겨 명을 받들기 어려우니 며칠 더 조리하겠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6) 史官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병이 나아지면 올라가겠다는 내용.
上疏告歸史官傳諭備忘後書啓 (6)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아뢴 것에 대해 史官이 備忘記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명일 다시 상소를 올린 뒤 進退의 명을 기다리겠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狀啓 (6) 史官이 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나아가서 한 가지도 補益한 일이 없고 새로 부임한 뒤 병으로 아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다시 나아가기 어렵겠다는 내용.
史官再度傳諭後狀啓 (7) 史官이 재차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이 조금 안정된 뒤 다시 아뢰겠으니 旱災가 심한 때에 고을에서 近侍(왕명을 받들어온 史官)를 供饋하는 폐단을 생각하여 使命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
史官三度傳諭後狀啓 (8) 史官이 세 번째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세가 심해져 상소하는 글자를 쓰기도 어려워 席藁하며 刑章을 기다릴 뿐이라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狀啓 (8) 史官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田野에 돌아와 自靖하려는 마음이며 병을 수습할 수 없어 집에서 席藁하고 있다는 내용.
長陵回駕落後史官傳諭後書啓 (9) 1687. 長陵에서 回駕할 때 뒤에 떨어진 뒤 史官의 傳諭를 받고나서 올린 書啓로 回駕할 즈음 갑작스런 寒疾로 부득이 낙후했다며 정세나 병으로 보아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10) 史官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두통과 현기증이 함께 일어나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내용.
四辭冢宰史官傳諭疏批後書啓 (10) 1688. 이조판서 직을 네 번 째 사양한 상소에 대해 史官이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近侍를 보내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조금 있다가 상소를 올려 아뢰겠다는 내용.
八辭冢宰史官傳諭疏批後書啓 (11) 이조판서 직을 여덟 번째 사양하고 사관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왕이 傳諭한 것에 사례하고 집을 떠나 다시 상소를 올리겠다는 내용.
到城外史官傳諭後書啓 (11) 성밖에 이르러 史官이 傳諭한 뒤 올린 書啓로 더위로 며칠 조치하여 성밖에 도착하였는데 며칠 더 있어야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12) 사관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사관과 함께 오라고 하는데 두통 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내용.
史官傳諭後書啓 (12) 史官이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감히 仰對할 수 없어 상소로 아뢰겠다는 내용.
與李惺菴-壽仁 (1) 1658. 李壽仁에게 보낸 편지. 尹善道가 疏를 올려 先正(宋時烈)을 무고하여 도하가 흉흉한 상황을 전하는 내용.
答李彛仲 (1) 1659. 李敏敍에게 答한 편지. 제수된 관직에 출사하지 않고 過限이 지나도록 肅拜하지 않은 자를 遞改하기를 기다리겠다는 내용.
答金和順-克亨 (2) 金克亨에게 답한 편지. 喪服의 개정‚ 冢宰 체직 등 현안과 山陵으로 정해진 水原에 대해 적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한 내용.
與洪判書-命夏 (2) 洪命夏에게 보낸 편지. 孝宗의 山陵을 水原府治에 정한 것에 대해 地法·移鎭·五患 세 가지 폐단을 지적하고‚ 黃驪의 弘濟洞이 풍수도 좋고 백성의 田舍를 빼앗지 않아도 되며 의리로 보아 世宗과 짝할 수 있어 좋은데 왕이 南海(尹善道)에 惑해 있으니 摠護使로써 이를 적극 막아달라는 내용.
與尹魯西 (8) 1660. 尹宣擧에게 보낸 편지. 예론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의견이 서로 분리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與洪相國-命夏 (9) 1664. 洪命夏에게 보낸 편지. 雲南과 貴州에서도 南明이 청나라에 졌다는 凶報가 청의 국서에 있지만 사신으로 갈 때 허실을 잘 살펴야 할 것이고 패하였더라도 20여 년간 남명의 사적은 남아있을 것이니 잘 살펴 오라는 내용.
答李學士彛仲 (10) 1665.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뜻하지 않게 관직에 추천을 받았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洪相國 (10) 洪命夏에게 답한 편지. 정중한 답장에 사례하고 사퇴한 이유에 대해 알리는 내용.
答洪相國 (11) 1667. 洪命夏가 言路문제로 죄를 引咎하고 성을 나섰다는 말을 듣고 답한 편지.
答李幼能 (12)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明나라는 우리에게 君臣의 의리와 父子의 은혜가 있는데 표류하여 온 漢人들을 청나라에 보내려는 조정의 처치는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
答李幼能 (14)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명나라가 아직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丞相이 時議에 흔들리면 箚子를 올리거나 面對해서라도 (한인을 청나라로 소환하지 않는 것을) 관철시켜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幼能 (15)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표류한 사람들을 북쪽으로 보낸 조정의 조처는 잘못된 것이며 그들을 鄭成功 管下라고 하는 말은 그들을 永曆帝의 사람이 아니라고 핑계하여 죽이려는 것일 뿐이라는 내용.
答李幼能 (16) 1668.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草莽臣이라 자칭한 것‚ 空館했던 일 등 상소문의 구절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申寅伯兄 (17) 申晸에게 답한 편지. 소를 올려 사면하려 했는데 왕의 온천 幸行으로 行公하지도 사면을 받지도 못한 것에 대해 의논한 내용.
與趙復亨 (19) 趙根에게 보낸 편지. 사양하는 상소에 대해 引咎하며 屛廢하는 고질이 있다는 등으로 宋浚吉이 아뢰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虛名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해달라는 내용.
答李養而 (20)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筵席에 입시하라는 명을 듣고 상소를 올렸는데 批答이 내리지 않은 일로 인해 출처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別紙 (2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內修外攘에 의한 復讎雪恥와 이를 위한 出處의 의리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閔楊湖 (26) 1669. 閔嶪에게 답한 편지. 계속되는 소명에 어찌해야 하는지 의논하는 내용.
答李判書錫爾-慶億 (27) 李慶億에게 안부를 전하고 자신의 行止에 대해 답한 편지.
答李養而 (2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국가경비로 들어올 화폐와 곡물을 감하고 內帑까지 모두 헤아려 1년간 쓸 비용을 제한 나머지를 가지고 貿易하여 구제하게 할 것 등 전국의 큰 기근을 구제할 방안에 대한 내용.
與李養而 (31) 李之濂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고조부 朴紹와 같이 화를 입었던 사람들은 모두 시호를 받았는데 박소에게는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다며 사우들이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 내용.
與宋尤齋 (33) 1673.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閔愼의 일에 대해서 왕이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신하들이 제대로 아뢰지 않고 있어 자신이 아뢸 것이라며 상소문의 문자를 보아달라고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34) 尹拯에 답한 편지. 閔愼의 일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데 宋時烈에게 내린 批答이 嚴峻하고 뜬소문까지 돌아 동지라던 이들도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내용.
答南觀察雲路 (3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承重하는 복에 대해 朱子의 설 등을 근거로 대답한 일로 인해 몇 달째 대죄하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
答宋尤齋 (36) 167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閔愼의 일로 대죄하고 있는 상황과 거취를 전하고 새 능을 만들고 옛 무덤을 여는 일‚ 栗谷年譜 문제 등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趙復亨 (38) 趙根에게 복제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國制에 근거하여 衆婦의 복으로 大功을 입어야 할 것이며 지난 번 복제에 3년을 주장하는 자들이 受重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예경에 근거가 없고 제왕의 높음은 복제 때문이 아니라는 내용.
答南雲路 (39)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중원에 큰 난이 있었다는데 나라는 허약하고 백성은 빈궁하여 무엇으로 도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與李養而 (3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閔愼의 일로 올린 상소가 환급되어 성밖에서 대죄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는 내용.
與宋尤齋 (41)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새로 어린 왕이 등장하고 중원에서는 난이 일어나 이제 중국을 회복할 기미가 보이는 상황에서 거취 문제를 의논하는 내용.
答宋尤齋 (4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大功의 주장을 주도하였다는 말이 퍼져 있다는 것‚ 吳三桂 등이 毅宗의 제2자를 옹립하였다는 소식 등에 대한 내용.
答閔判書持叔 (45) 閔維重에게 時論이 변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근심을 전하는 편지.
答張判書靜之-善澂 (1) 1675. 張善澂에게 답한 편지. 削籍 당한 뒤에 상황이 여러 번 바뀌어 위태로운 지경에 놓인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林德涵 (1) 1680. 林泳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서 進講할 사람으로 장차 추천할 것이라며 헤아려 처리할 것을 당부하고 국면을 勳戚이 주도하여 장차 分岐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내용.
答李養而 (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상소하여 사양하고 있는 상황 등을 전하고 栗谷集과 語錄에 대하여 어떤 의논이 오갔는지를 묻는 내용.
答崔學士汝和 (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거취에 대하여 상의하는 내용.
答宋尤齋 (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5) 林泳에게 답한 편지. 사헌부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凶逆을 주관하는 자들이 蓄謀했다고 하는 설‚ 朝廷과 民生에 처할 원칙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宮府나 時俗과 어긋나서 받을 비방에 잘 헤아려 대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金相國久之 (6)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世臣의 의리를 생각하라는 충고에 대해 오활하여 時俗에 굽힐 수 없다고 답함. 그 외에 元老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 金麟厚 행장 찬술 등에 대한 내용.
答金判樞起之 (7)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다시 나올 수 있게 된 것을 世道와 斯文을 위해 축하함. 자신의 거취 문제‚ 吳三桂 亂의 虛實과 本末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8) 林泳에게 답한 편지. 許衡에 대한 의논들이 각기 다른데 丘瓊山의 설이 옳은 듯 하다는 의견을 밝히고 출처 문제에 대해 논한 내용.
答林德涵 (9) 林泳에게 답한 편지. 중전의 상에 士民의 哭班에 참여하고 成服이 지나면 소장을 올려 사양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9)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去就 문제‚ 저술의 편집‚ 啓運宮 복제에 대한 金長生과 張維의 설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金直卿-榦 (11) 金榦에게 답한 편지. 지금의 조정이 更化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려움을 만날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위험한 激浪 속에서 자신을 가벼이 시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자신의 거취와 출처의 의리에 대하여 논한 내용.
與尹子仁 (13) 1681. 尹拯에 보낸 편지. 箚子로 孝宗의 뜻을 밝히고 朴尙衷의 일을 청하여 가납을 받았다는 것‚ 자신의 출처‚ 金集家 등에 있는 善本을 취하여 李珥의 글과 日記를 편집하는 일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邊美卿-烋 (14) 邊烋에게 國恤服制에서 하루를 달로 바꾼 것은 ≪大明會典≫을‚ 13일에 탈상하고 30일에 길복을 회복한 것은 ≪國朝五禮儀≫의 조목을 하나씩 섞어서 준용한 것이라고 답한 편지.
答尹子仁別紙 (15)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국휼시의 제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族姪이 貴戚을 탄핵한 뒤 윤증과 자신을 중심으로 宋時烈과 맞서 分黨하려한다는 소문과 송시열을 배척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는 내용.
答林德涵 (16) 林泳에게 답한 편지. 지난 여름 朱熹의 재이를 없애는 방도에 대해 올렸다가 時論을 만났었는데 이번에 別諭에 상소하여 답하여야 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18) 168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상소에 거취문제를 언급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18) 林泳에게 답한 편지. 대궐에 이르러 청하고 물러나는 일을 尹拯하고 상의했는데 체직되지 않은 채 어제 다시 소명을 받았다며 어찌해야 할지 의견을 구하는 내용.
答林德涵 (19) 林泳에게 답한 편지. 편지로 보내온 상소문을 읽으니 민심을 얻고 군정을 닦을 것‚ 戚里와 黨比의 고질적인 폐단을 언급한 것 등이 앞뒤가 잘 갖추어져 있고 觸犯한 것도 빠진 것도 없다는 의견을 전하고‚ 力行과 致知의 순서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兪參判伯圭 (20) 兪瑒에게 답한 편지. 국가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거나 內修外攘을 통해 천하를 회복하는 사업을 쉽게 여겨 나아가면 패할 뿐이겠지만 군신의 의리로 보아 편안할 수 없어 도성에 이르러 아뢴 뒤 돌아가겠다는 내용.
與尹子仁 (21) 尹拯에 보낸 편지. 소장을 올려 사양하고 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牛溪續集≫에 ‘변괴에 처해서는 權道로 행한다’는 宋翼弼의 주장에 成渾이 깊이 승복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들어 출처를 논하는 내용.
與林德涵 (22) 林泳에게 보낸 편지. 관직을 받지 않고서 登對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왕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과 사위가 宋時烈의 편지를 가지고 온 것 등에 대한 내용.
與李判書彛仲 (23) 李敏敍에게 登對했다가 급히 돌아오게 된 것을 밝힌 편지.
答金士直 (23) 金楺에게 답한 편지. 宗國이 망하고 이적이 멋대로 횡행한지 오래되어 힘을 다해도 어려운 시절임을 들어 출처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宋觀察道深-光淵 (25) 宋光淵에게 보낸 편지. 황해도의 士風이 무너지고 습속이 비루해졌으며 부역이 번거로움을 알려주고 ≪小學≫·≪家禮≫·≪擊蒙要訣≫ 등으로 교육할 것을 권장하는 내용.
答林德涵 (26) 1683. 林泳에게 답한 편지. 臺諫의 언론이 國論에 가까운데도 사림을 부양하고 淸議를 펴야 할 大臣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염려하고 자신과 尹拯 등의 거취에 대해 논한 내용.
答金相國 (27)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世祿休戚’이라는 표현은 喬木世臣이라는 의미라고 해명하면서 손을 놓고 있으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물러나서는 안될 것이라고 충고하는 내용.
答宋尤齋 (28) 宋時烈에게 지난해 가을 江郊에서 만나 春秋大義를 위주로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고 동의하였던 것을 상기시키고 마땅히 나아가 일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라고 권하는 편지.
答宋尤齋 (29)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평생 大義를 밝히기 위해 애쓴 노력은 본받아야 하지만 지금은 상하가 지혜를 합해야 할 상황으로 公正和平한 바탕 위에 작고 세세한 것에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명하는 내용.
與尹子仁 (31) 尹拯에 보낸 편지. 宋時烈에게 윤증의 입장을 설명하니 조금의 의심스런 장애도 없다며 윤증을 부르는 것도 쾌히 응락했다는 소식과 入城하여 報復雪恥의 뜻을 아뢰고 청나라의 年號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것 등 자신과 윤증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李判書季周 (32)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입성한 뒤의 자신의 안부와 거취를 알리고 宋時烈에게 賓客은 많지만 충성스럽게 인도하는 이가 드무니 이단하 같은 사람이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33) 尹拯에 답한 편지. 왕의 기대가 虛禮가 아니라는 것‚ 李珥가 成渾에게 출사를 권했던 것‚ 국사가 危亡한 것 등을 들어 출사를 권하고 당시의 정세와 宋時烈의 근황을 알리는 내용.
與閔驪陽-維重 (35) 閔維重에게 보낸 편지. 각 도의 기근에 도성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江都의 쌀을 활용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大憲叔弼 (36) 申翼相에게 답한 편지. 조정의 擧措‚ 尹拯의 출사‚ 孝宗을 世室에 추가하기로 한 일‚ 신익상의 아버지 묘표 찬술 등에 대한 내용.
與宋尤齋別紙 (36)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別紙. 世室에 들어가는 것을 告廟하는 것이 뒷날 사당에 들어갈 때 頒告하는 것과 중첩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
答金判樞 (37)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大臣과 臺閣의 갈등에 대해 전일에 진정시킬 계책이 막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미 通議가 있으니 자신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어렵다는 내용.
與閔相國大受 (37)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의 致仕 문제와 西方에서 일어난 급한 일을 처리할 대책이 필요하다는 내용.
答南判書雲路 (38)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인재를 정선하기 위한 절목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손자를 통해 온 편지를 받고 송시열이 말한 것을 한가지 예로 논단하기는 어렵다고 답한 내용.
答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逆獄과 奸黨‚ 本色의 黨名만 지키는 자‚ 시비를 알고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자 등을 輕重에 따라 구분한 뒤 본색의 당명을 견지한 자는 일단 써보고 출척을 결정해야지 가리지 않고 모두를 逆心과 私黨이라고 몰아붙인다면 갈등이 수습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宋尤齋 (39)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위로는 왕에게 아래로는 宋時烈에게 죄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 편안할 수 없어 상소를 남겨두고 돌아왔다는 내용.
與閔驪陽 (40) 閔維重에게 보낸 편지. 시골에 있을 때 듣기로는 도성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하니 貢物을 裁省하는 일은 인심에 따라 裁省廳이 마감한 문서를 그대로 두었다가 풍년이 들면 貢案을 바로잡은 뒤 금번 문서를 참고하며 전에 지급한 米布는 舊例에 따라 처리하자는 내용.
與閔驪陽 (40) 閔維重에게 보낸 편지. 裁省廳의 일을 변통하는 문제에 대해 廟堂과 상의하여 다시 아뢸 것을 청하고 성균관 주변에 사는 泮人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申觀察叔弼 (41) 申翼相에게 보낸 편지. 廟堂에서 의논한 西路의 일을 전하며 王法을 밝히고 인심을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요‚ 城池를 수리하고 器械를 수선하고 군량을 마련하는 것은 그 다음이니 인재를 가려 변방의 득실을 강구하고 군율을 명백히 관장하라는 내용.
答李士亨-泰壽 (4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偏黨과 大臣과 臺諫이 角立하던 상황에서 사리와 물정을 살펴 선처할 것을 권하고 사리상 대간이 옳다는 입장을 밝힌 내용.
與李養而 (4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다시 나와보니 정세가 더 어려워져 私意가 행해지고 의논이 무너져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대소관원 사이에 처하여 양쪽에 모두 죄를 얻었다는 내용.
答崔汝和 (4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言路가 宰相 뿐 아니라 宋時烈을 옳지 않다 하는 상황이라 調劑하지 않고 한 편의 주장에 서게 되면 국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後進의 言路는 扶植하는 것이 옳지만 서로 공정한 곳에 들어가려 힘써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43) 尹拯에 답한 편지.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예우가 전에 비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전하며 출사를 바란다는 내용.
答宋尤齋 (1) 168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毗盧峯에 올라 동해를 바라본 감회와 경연에서 ≪心經≫과 ≪綱目≫을 강하기로 한 것‚ 李翔의 還鄕과 尹拯이 도성에 도착하여 사양한 일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休致를 허락하면서도 머물라고 한 것은 국가대사를 논하고 宗社를 보존하려는 것이니 국가의 大義를 생각하고 떠도는 말에 구애되지 말라는 내용.
答李仲羽 (3) 李䎘에게 답한 편지. 돌아가고자 하나 아직 체직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薦目의 곡절을 別紙를 통해 밝히겠다는 내용.
別紙 (3) 李䎘에게 답한 편지 別紙. 새로 천거한 사람이 너무 많지만 東北西의 4도는 너무 적고‚ 銓曹에서 중외의 추천으로 묘당에서 정한 이를 注擬할 때 公的이라 하면서 사사로이 구제해주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추천이 잘못되었다는 비방이 있다는 내용.
與金相國 (4)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李喜朝가 박세채의 상소에 대하여 金壽興의 집에서 오간 논의를 전한 데 대해 자신의 상소 내용을 해명한 글. 物情을 順協하여 조정의 거조가 和平公正하면 臺閣의 연소한 무리도 믿게 되어 공론이 행해질 것이라는 내용.
答鄭士仰-齊斗 (5)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전일 아뢴 상소가 마땅히 떠날 의리를 밝힌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三峯集≫은 玉堂에 보냈다고 알리는 내용.
答林德涵 (6) 林泳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편지를 통해 힘을 합쳐 일하기로 하고 도성에 들어온 뒤 반년 동안의 정세와 자신의 거취를 전하고 金益勳의 削黜 문제로 인한 大官과 小官의 분열‚ 尊號와 諡號문제‚ 貢物 裁省‚ 休致한 송시열의 召還을 청한 일 등으로 송시열과 의견이 벌어진 경위 등을 밝힌 내용.
與尹子仁 (8) 尹拯에 보낸 편지. 조정에 나온 뒤 경연에 드나들며 송시열의 뒤를 이어 왕의 마음을 바로잡고 붕당을 타파하며 內修外攘을 청하여 대신의 자문을 받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사단이 일어 廟堂과 臺閣이 싸움터처럼 되었음을 전하고 薦擧科와 朝官을 久任하라는 주장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留守彛仲 (10)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다스리는 곳에 대해 수령들이 내놓은 대책들이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안정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하니 고식적인 것을 버리라는 내용.
答宋尤齋 (1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묘당과 의견이 맞지 않아 자신이 아뢴 일은 시행되지 않고 여러 대간이 죄를 얻어 감히 뜻을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송시열에 대한 休致의 還收를 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 등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申大諫公獻 (13) 申琓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조정에 있고 여러 번 부르기에 나오면서 일대 기회라 생각했는데 이제 廟堂은 儒士를 싫어하고 대소가 서로 협력하지 않고 함정을 만들며 당을 수립하는 기치를 세우고 병통을 상소하면 죄를 얻으니 국가의 일이 근심스럽다는 내용.
答任汝諧 (14) 任元聖에게 답한 편지. 進上品을 실어보내는 일‚ 復戶하고 馬政을 정비하는 일 등 驛의 폐단을 釐正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沈德升-梯 (15) 沈梯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의견이 다른 것은 威化島回軍 문제 등 몇 가지뿐이며 또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데‚ 명백한 의논도 없이 송시열과 다른 의견을 세워 그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훈척의 일로 大臣과 臺閣이 대립하던 중 대각이 체직되는 것을 그냥 볼 수만 없어 진언했다가 채택되지 않아 물러났다는 내용.
答趙光甫-持謙 (17) 趙持謙에게 답한 편지. 당시의 사세가 헤아리지도 않고 파면하며 배척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라며 마음 쓰지 말고 經學 등 선대의 학업을 계속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成汝中-至善 (18) 成至善에게 선비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도에 대해 답한 편지.
與鄭士仰 (18) 鄭齊斗에게 출처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전한 편지.
答金都事-始徽 (18) 金始徽에게 답한 편지. 선비를 가르칠 때의 원칙과 요령에 대한 내용.
別紙 (19) 金始徽에게 답한 편지 別紙. 선비들을 교육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목.
答李士亨 (2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왕의 患痘症에 매일 나아간 것을 侍藥廳을 설치한 것 같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내용.
與申叔開-啓華 (22) 申啓華에게 보낸 편지. 妖巫의 죄를 거론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妖巫의 죄를 거론하는 일‚ 조정을 調和하기 위하여 宋時烈을 만나고 尹拯에게도 편지를 보낸 일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別紙 (23) 尹拯에게 李端夏와 함께 宋時烈을 만났을 때 오간 얘기를 전하는 편지 別紙. 御營大將 金益勳 문제와 許璽·許瑛의 옥사문제에 대한 견해차를 확인하고 諡號와 裁省廳의 문제 및 대간의 입장을 옹호한 일 등에 대해서는 사제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의견 차이일 뿐임을 송시열도 동의하고 조정에서 훈척의 위치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내용.
與尹子仁 (29) 1684. 尹拯에게 보낸 편지. 윤증의 말이 완급을 벗어남이 있다고 지적하며 壬辰倭亂 때의 扈駕 문제‚ 족보에서 成渾의 扈駕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楊時의 일을 인용한 문제에 대하여 입장을 밝힌 내용.
答沈德升 (29) 沈梯에게 답한 편지. 更化 후 罰이 공명정대하지 못했으며 色目 때문에 어진 이를 쓰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 인조 때 두 당이 병용되다 서인이 오로지 쓰이면서 틈이 어그러진 것이니 이편저편을 논하지 말고 어질고 재주있는 이를 등용하여 보합하여야 한다는 내용.
答羅顯道 (32)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墓碣 사건 이후의 경과를 밝히고 상소에서 崔愼을 분명하게 배척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해명함. 宋時烈에게 병통이 있지만 尹拯이 ‘義利雙行 王伯幷用’이라 한 것이나 宋浚吉·李惟泰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내용.
答宋尤齋 (3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文 사건 이후의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송시열에게 平心으로 선처할 것을 부탁하는 내용.
別紙 (3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宋時烈 집안에서 香洞問答을 기록한 것이 한쪽 편에 의해 왜곡되어 전파되고 있는 것을 염려하고 世道의 책임‚ 臺諫의 得失‚ 追號 문제에 대한 곡절 등 당시 현안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힌 내용.
答申觀察公獻 (39) 申琓에게 답한 편지. 가을에 量田을 수정할 때 세금과 民弊 중 민폐를‚ 豪强과 빈약한 사람 중에서는 빈약한 자를 우선하여 선처해야 한다는 점‚ 선비를 가르치는 절목은 옛 법과 현재 조정의 제도 사이에서 잘 참작하여 행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李同甫 (39)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조상의 산소에 대한 일‚ 懷尼(송시열과 윤증) 간에 왕복한 편지의 득실과 사건의 향방‚ 성균관의 논의에 대한 염려‚ 師友錄의 편찬 등에 대한 내용.
答羅顯道 (40)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산골짜기 잔약한 읍이라 선비도 책도 없어 詩書禮樂을 가르치기 어렵겠지만 훈장을 세워 독려하며 ≪警民編≫·≪擊蒙要訣≫·≪小學≫·≪家禮≫ 등을 가르치고 문리가 좀 나아진 뒤 四書 등을 차례로 가르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李君輔-世弼 (41) 168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賑政에 임하는 자세와 糴穀과 內帑을 청하거나 京司에서 돈을 빌려 진휼에 쓰는 것 등의 조처에 대해 논의함. 宋時烈과 尹拯의 일로 통문이 도는 것을 염려하고 사우들이 강학하며 이치를 밝혀 大道에 함께 나아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泰尙姪 (42)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다스리고 있는 지역이 王化로부터 소외된 것에 대한 조처와 管餉의 문제에 대한 내용.
答泰尙姪 (43)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이익을 좋아하고 사치를 숭상하는 폐단을 變通하고 나서 그 뒤에 風敎를 시행하라는 내용.
與柳判書悠久別紙 (1) 1685.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別紙. 戶曹判書가 된 것을 축하하고 호조판서로서 명망높았던 朴東亮·黃愼 등의 자취를 살펴 사치의 폐단을 마음에 새기고 절검에 힘쓰라는 내용.
答柳悠久 (3)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經費를 주관하는 이는 나라 편에‚ 진휼을 주장하는 이는 백성 편에 서게 된다는 말은 있지만 君民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 직분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鄭眞卿 (3) 鄭尙樸에게 답한 편지. 都約正이라 개명한 것의 名實과 立約 끝에 관리에 관한 내용은 향약의 條貫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힌 글.
答林德涵 (4) 1686. 林泳에게 답한 편지. 변방의 신하가 越境하는 것을 엄금하지 못하여 임금이 벌금을 내게 한 죄를 논한 臺諫을 삭직한 것은 잘못된 조치이며 崔錫鼎 등이 文學있는 이를 천거하라고 하는데 적절한 인물이 많지 않다는 내용.
答閔彦暉-以升 (6) 閔以升에게 太極說과 去就의 의리 등에 대해 답한 편지.
答尹觀察叔麟 (7) 1687.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關北의 문교가 이미 행해졌는데 또 교정하려 한다는데 변방을 설치한 의의는 따로 있으니 弓馬를 변하여 絃誦하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라는 내용.
答金領樞 (7)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집이 陵幸길 곁에 있어 부득불 나아가 뵙고 나서 이미 실패했던 것을 들어 배종하기를 사양하였는데 왕명이 계속 이르니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崔汝和 (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養士節目을 변통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9)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정승에 임명되었다니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과 宮府의 체모를 융화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黨比에 의지하여 言路를 막고 국사를 잘못 이끌지 않도록 勉學에 힘쓰고 공평한 사람을 구하여 서로 의논하라고 권유하는 내용.
答吳貫之-道一 (10) 1688.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현재 상황은 元氣가 이미 사라진 사람과 같아서 誠心과 公道로 鎭靜해야 할 상황이니 공평한 의논을 해치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는 내용.
答金觀察士肯-構 (11) 金構에게 답한 편지. 진휼에 마음을 다할 것‚ 李珥 이후 海西에서 立朝한 사람이 없어 다른 도보다 세금이 더욱 무거우니 父老에게 물은 뒤 蠲減할 것‚ 大同法 등을 시행하여 혜택을 입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12)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天心을 돌리고 世道를 구해 國脈을 이어주고 민생을 구제하는 것을 의연히 담당할 기상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13)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陪衛하여 환도하면서 車駕가 지나는 곳에 致祭는 하면서도 小民을 돌보는 일은 없었다고 아쉬워하고 海甸에 흉년이 심하여 백성들이 다 없어질 지경이니 진휼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公獻 (14) 申琓에게 답한 편지. 다른 곳에 혐의가 있다하여 時事 문제에 너무 너그럽게 하지 말 것과 林泳이 錦城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하여 염려를 전하는 내용.
與李大諫文瑞-奎齡-別紙 (14) 李奎齡에게 보낸 편지. 門人 중에서 閔以升이 博學하고 맑은 절조가 있고‚ 金榦은 아는 것이 정밀하고 변치 않는 행실이 있고‚ 朴泰初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학문에 힘쓰고 있어 臺省에 추천할만하다는 내용.
答申公獻 (15) 申琓에게 답한 편지. 追錄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거취 문제에 관해 해명하는 내용.
答兪學士寧叔-得一 (16)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君輔 (17)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조정의 의논이 무너진 상황이라 나아가는 것은 불가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儒者의 도는 부르면 나아가고 쓰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어서 낭패할 위험성이 있다해도 단정하기는 어려우니 손익을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1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예전에 실패했던 일로 引罪하고 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출처 문제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林德涵 (19) 林泳에게 답한 편지. 금일의 世道가 위태로운 기미가 없지 않지만 왕이 宮庄의 법을 정하는 등 기회가 없지 않을 듯하여 함께 다스리기를 도모할 수 있을까하고 기다리던 중 대비의 병이 깊어져 어렵게 되었다는 내용.
別紙 (19)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萬言疏를 올리면서 그것이 채용되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정했는데 批旨에 소를 다시 올리라는 것이 없더라며 當局하는 이들이 오라고 간청해 놓고 들어오니 함께 일하려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
答吳貫之 (20)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재능이 부족하고 전에 실패했는데도 왕을 도와 치리를 도모하려고 나와 萬言疏를 올렸는데 왕의 뜻을 보니 근본적인 것을 하려는 뜻이 없어 곧 辭狀을 올리고 떠나려 한다는 내용.
答兪寧叔 (21)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왕에게 나아가 머물렀다는 것은 왕이 侍藥하는데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요 선배도 그런 일이 있었고 자신이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것과 6번의 상소 끝에 나온 자신의 출처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사관의 傳諭 뒤 封事를 다시 올리고 처분을 기다리다 다시 글을 올려 체직을 청했는데 그 사이에 憲府의 차자와 유생들의 상소가 서로 견제되어 험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내용.
答李同甫 (22)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7번째의 상소 후 사관이 돌아간 뒤 집을 떠나면서 다시 사양하는 계를 올려놓고 高陽에서 상황을 보아 처신할 것이라며 나아가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염려하는 내용.
與林德涵 (23) 林泳에게 보낸 편지.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니 글자마다 실질적이어서 사양할 만한 의리가 없어 古人이 소명을 받고 나아와 사직하는 예를 따라 성에 도착하여 한 번 상소할 것이라 말하고 미리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한 번 찾아오라는 내용.
與參奉叔 (23) 숙부에게 보낸 편지. 친척과 친구들이 세도가 변하면서 여러 儒者들이 낭패했던 것을 들어 나아가지 말라고 하지만‚ 儒者의 도에 따라 나간 뒤 대비의 건강과 왕의 비답을 본 뒤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5)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諭에 下敎한 것이 모두 箚子에서 논한 것들이어서 명을 받아들여 성에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5) 林泳에게 답한 편지. 왕의 마음을 開悟하여 조정의 의론을 和協할 각오를 전하는 내용.
與崔汝和 (26)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차자를 올린 경위와 延曙의 村舍에 머물다가 廟堂에서 두 정승에게 물으려 한다고 하니 그 회답을 기다려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與趙相國公擧 (27) 趙師錫에게 보낸 편지. 정승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국사가 어그러져 있으니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돌리고 아래로는 조정의 의논을 진정시켜 달라는 내용.
與南相國 (2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상소를 올린 것은 한 선비의 진퇴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忠毅에서 나온 것이라며 왕이 자신이 이떤 이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與任大年 (28)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泮疏가 궤산된 뒤 門人들이 상소하려는 것에 대해 자신의 본래의 죄에 문인에게 왕명을 거역하도록 가르친 죄를 더하는 것이 되며 宋時烈이 화를 당할 때에도 程朱의 예를 들어 의가 아니라고 했었다며 더구나 지금은 소인들이 참소한 것이 아니고 왕이 일시적으로 배척한 것이니 引咎하고 죄를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
答李夏卿-熙夏 (28) 李熙夏에게 답한 편지. 萬言封事와 5조목의 啓箚를 올린 뒤 왕이 東平君 등에 대한 일을 들어주고 別諭를 내렸는데‚ 楨·柟의 일과 儲嗣 문제가 거론되면서 왕이 진노하여 대신은 栫棘되고 자신도 직책에서 물러나 성밖에 머물고 있으며 사세를 보아 진퇴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雲卿-志逵 (29)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이번에 출사한 것은 사세를 헤아리지 않고 하고자 하려다가 패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출사하지 않아야 하는데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내용.
答林德涵 (30) 林泳에게 답한 편지. 못다한 직분을 다 할 수 있기에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左相의 차자 뒤에도 요사한 사람들만 계속 세를 얻고 있다는 내용.
答季肯兄 (31)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 시세가 변할 것을 미리 참작하지 못했으니 자신은 오활한 儒者라 할 만하다고 자탄하는 내용.
答吳貫之 (31)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吳允謙이 奏本한 일은 일시의 변괴에 대처하여 나라를 존속시키려는 의리일 뿐 만세에 통하는 常道는 아니었으니 금일 卞正할 것은 本意를 다시 밝힐 뿐 가벼이 움직여 누를 끼치지 말고 공평하고 관대함으로 왕의 마음을 돌리고 떠도는 논의를 진정시켜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柳悠久 (32)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대비의 상에 削版된 사람 등이 입어야 할 상복‚ 擧哀 절차 등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내용.
答宋尤齋 (3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지난 해 왕복한 편지의 말이 엄준하여 뒤에 계속 말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장려하는 편지를 받아 송구하다며 국사를 어그러뜨린 것을 자책하는 내용.
答崔汝和 (3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草莽에서 일어난 뒤의 출처는 군신의 의리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중대한 책무를 맡고 世道가 더 해진 상황에서 나온 것은 잘못이 아니며 箚子가 嘉納되려던 중 갑자기 時事가 잘못된 것은 時運이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35) 尹拯에 답한 편지. 호남의 상소문으로 오히려 윤증이 낭패하게 되고 世道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염려‚ 송시열이 성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하니 후손인 成至善 형제 등에게 成渾을 신변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권하라는 내용.
答姜叔重-錫朋 (36)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自守의 의리를 강조한 편지에 답한 것으로 儒者를 자처하는 사람의 출처관에서 볼 때 왕의 은혜를 입고서도 끝내 나아가지 않을 수는 없다는 내용.
答趙相國 (37) 1689.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時事가 점점 어려워져 뜻은 머물고자 하지만 머물래야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는 내용.
答金相國起之 (38)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몇 개월 죄를 기다리다 너그러운 은혜를 입었다며 물러날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나니 나라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고 염려하는 내용.
答李沃溝-克亨 (38) 李克亨에게 답한 편지. 軍保 훈련을 수령이 별도로 하기는 어렵다는 것‚ 量田을 조정의 명 없이 고칠 수 없으니 陳田과 起耕 여부를 실제로 踏驗하여 획급할 것‚ 敎養할 때 의리와 行檢을 알게 하고 時文만 외우는 폐단을 막을 것 등 고을의 병폐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 (39) 林泳에게 답한 편지. 유생들의 상소에 따른 갑작스러운 黜享 뒤에 宋時烈을 머물게 할 것을 청했던 일‚ 두 현인을 襃揚했던 것 등을 들어 自劾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던 상황과 심경‚ 제자들의 학문과 안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夏卿-禹錫 (40) 金禹錫에게 답한 편지. 黜享 등 時事에 대한 염려를 전하고‚ 왕의 마음은 돌리지 못하고 국가에 누만 끼치게 될 뿐이며 이런 문제로 縉紳들이 모여 상소한 예가 없으니 상소 여부는 잘 상의하여 선처하라는 내용.
與兪寧叔 (41) 兪得一에게 보낸 편지. 관직에 있을 때 抑强扶弱하고 仁恕寬弘의 도로 근본을 삼아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忠厚함이 적은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林德涵 (42) 林泳에게 답한 편지. 臣民이 모두 조정의 일을 근심하고 있는 상황이라 자신이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내용.
答李君輔 (42)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南九萬이 유배되었는데 자신도 죄를 기다리는 상황이라 감히 極論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과 서원 黜享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君獻-世璞 (43) 李世璞에게 답한 편지. 黜享에 대한 일은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
答任大年 (44) 1691.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詞章과 科擧에 대한 일은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장졸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방어할 대책을 준비하여야 하는데 北漢山城을 쌓는 일 등이 아직 정해지지 않는 등 착수하는 일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上淸陰金先生 (1) 1650. 金尙憲에게 올린 편지. 조부 朴東亮‚ 외조부인 申欽과의 관계를 들고‚ 자신이 禮로써 선생께 나아가겠다고 청한 내용.
答元留守-斗杓 (2) 1652. 元斗杓에게 답한 편지. 開城留守가 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
答申東江-翊全-舅氏 (3) 1658. 외숙인 申翊全에게 답한 편지. 仁義禮智를 橫列로 해야 할 것이라는 등 20章圖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내용.
與李惺菴 (3) 1653. 李壽仁에게 보낸 편지. 영화를 버리고 벼슬의 자취도 끊고 성현의 책을 읽고 있다는 그를 격려하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
答閔楊湖 (4) 閔嶪에게 답한 편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私親을 위하여 1등급을 내려서 服制를 행하라는 구절에 대해 견해를 밝힌 내용.
與閔楊湖 (6) 閔嶪에게 보낸 편지. 大祥 때 變服하는 절차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與閔楊湖別紙 (7) 1667. 閔嶪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季母가 돌아가서 成服하고 장례 치르기 전인데 季父가 돌아가셨을 때의 几筵 설치 문제 등 상례 절차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元聘君 (8) 1658. 元萬里에게 답한 편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는 태도‚ 출처와 학문의 도리 등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宋時烈이 召命에 응하여 나온 뒤의 결과에 대해 관심과 염려를 표하는 내용.
與金和順-克亨 (11) 金克亨에게 보낸 편지. 尹鑴에게 잘못을 지적한 편지를 보냈으나 듣지 않으니 윤휴에게 가르침을 주어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해주라는 내용.
答金和順 (12) 1662. 金克亨에게 답한 편지. 尹鑴가 재주와 식견이 높지만 학문에 병통이 있고 처세가 선하지 못함을 근심하였다며 절교하게 된 과정을 밝힌 내용.
答申敎官-碩亨 (13) 申碩亨에게 답한 편지. 시절이나 자리가 맞지 않는데도 나아가는 것은 잘못이라며 금일의 상황이 나아가 벼슬할 시점이 아니라고 충고하는 내용.
與宋同春堂 (14) 1664. 宋浚吉에게 보낸 편지. 아직 뵙고 문하에 들지 못해 아쉽다며 조만간 뵙고 싶다는 내용.
答宋尤齋 (15) 166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操養救治의 요체를 묻고 李珥의 연보 자료를 채록하고 수집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近思釋義≫의 校讎작업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16) 166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高祖를 잇는 宗子가 先世에 행하던 것과 俗禮를 따르겠다며 朱子家禮를 따라 행하려 하지 않는 경우의 대처 방법‚ 時祭에서 大宗과 小宗의 순서‚ 보름날 제사의 진설‚ ≪朱子家禮≫와 ≪疑禮問解≫에 나오는 祭饌의 차이‚ 외할아버지에 대한 奉祀‚ 婦人의 상복 제도‚ 居喪할 때의 제사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別紙 (19) 166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부친의 여러 형제들에 대한 칭호‚ 사당 제사나 상례에 薦獻할 품목‚ 服이 다했지만 정이 도타운 친척에 행할 禮‚ 外族의 喪에 대한 변통‚ 大功의 喪에 폐할 일과 할 일‚ 伯魚에 대한 孔子의 상례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宋尤齋 (22) 1668.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선조의 묘에 쓸 文字는 碑碣에 敍事를 위주로‚ 表記에 議論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둘 다 할 수 없어서 碣銘을 청한 것인데 序文이 墓表에 가깝게 되어 있다며 서문 일부를 줄여달라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2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物格과 格物의 개념에 대한 李滉과 李珥의 설을 고증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
與宋尤齋別紙 (25)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別紙. 朱熹가 喪服을 토론하기를 청한 箚子와 ≪通典≫ 및 ≪儀禮≫ 喪服圖式 등을 근거로 嫡孫으로 承重한 자의 代服 규정이 천자의 예에 한정된 주장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승중한 사람의 服制·主喪·主祭·遞遷 등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宋尤齋別紙 (3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紫雲書院 移建 문제에 대한 의견과 자운서원에 白仁傑을 雙廟의 西位로 병향하는 것이 불가한 세 가지 이유를 밝힌 내용.
答宋尤齋別紙 (34) 1674.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尹宣擧의 狀文에서 贈職으로 칭한 이유‚ 尹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尹鑴에게 윤선거가 취했던 입장‚ 尹鑴와의 관계에 대한 서술 부분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宋尤齋 (36)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狀文을 수정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송시열의 견해에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懷川書院에 宋浚吉을 배향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君父의 大喪을 만나서 哭班에 나아갔다가 다시 나와 東城에 머물고 단지 두 번의 殮과 成服할 때에만 왕복하여 哀臨하는 거취가 정당한 것인지 묻는 내용.
與宋尤齋 (3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大葬이 있기 전날 저녁에 능 아래 도착하여 待罪할 것이라는 소식에 대해 근래 일이 소망 없는 상황에서 틈을 타서 함부로 나아가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니 山陵에 나아가는 것을 재고하라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4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로 鄭夢周 비문의 문장과 내용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글.
答宋尤齋別紙 (4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朴尙衷을 포장하기 위하여 올리는 諡狀 초고에 대한 의견과 李彦迪·宋麟壽의 연보 등에서 冶川 朴紹가 조정에 있을 때의 행적을 고증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한 내용.
答宋尤齋 (4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冶川 朴紹의 행장을 써 준 것에 감사하고 陳荀과 元成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宋尤齋 (4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임진왜란 중 罪籍에 있어 自靖하겠다며 扈駕하지 않았던 成渾의 出處에 대한 입장‚ 金壽恒에게 易을 읽도록 권한 일‚ 尹宣擧의 묘갈문 수정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1) 167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흉흉한 소문에 대한 위로와 聖學의 연원을 강구하여 책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지난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있었던 일은 너무 엄하게 처리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2) 167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부친이 돌아가신 뒤 3년 이내에 모친상을 당했을 경우의 禮‚ 喪禮 중 婚禮와 冠禮를 행할 수 있는 服制의 범위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5) 168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서울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을 축하함. 朴尙衷의 포증을 도와준 것을 사례하고 박상충이 元나라를 배척한 일과 太祖의 回軍이 모두 華夷의 大防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내용.
答宋尤齋別紙 (6)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別紙. 親喪 중 國恤을 당했을 때의 복제와 제사 문제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9) 168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孟子의 好辯에 대해 養氣와 知言을 위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異端을 배척하는 문제는 성현이 天理를 잡고 天討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배척하기 좋아하는 것이 될 뿐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宋尤齋 (10) 168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拯의 편지들이 분수를 범하고 말에 실수한 것은 있지만 먼저 윤증에게 유감의 뜻을 보일 것을 권함. 尹宣擧의 江都일을 거론하여 평생 붕우의 의리를 어긋나게 하고 아들(윤증)의 망극한 정을 상하게 하며 국론을 분열시킨 것은 세도에 해가 될 뿐이니 공평하게 행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宋尤齋 (12)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尹拯 문제에 대한 자신의 편지 내용을 해명함. 伯父 碑文의 찬술‚ 栗谷別集에서 入山과 관련된 구절의 처리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宋尤齋 (1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학문‚ 윤선거 부자가 尹鑴를 애석하게 여겨 구호한 일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송시열이 죽은 뒤 尹拯이 윤휴의 학문을 높일 것이라고 했다는데 윤증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는 내용.
與尹魯西 (15) 1658. 尹宣擧에게 안부를 전하고 서울에 올라오면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
答尹魯西 (16) 윤선거가 사양하고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與尹魯西別紙 (16) 1662. 尹宣擧에게 보낸 편지 別紙. 淸州에서 있었던 宋時烈과의 문답 내용 중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다시 질문함. 母子간의 명분을 위주로 한 송시열의 견해에 대한 의문‚ 養父母에 대한 喪服‚ 양부모 신주의 호칭과 제사 등에 대한 내용.
答尹魯西 (20) 1667.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出處 문제‚ 成渾에 의해 이루어진 李珥의 문집 및 이이와 성혼의 年譜를 수정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尹魯西 (21) 1668.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파주에 있는 坡山書院의 位次를 雙廟로 分享하는 문제‚ 妻喪 중에 祖母상을 당했을 때의 상례 등에 대한 내용.
答尹魯西別紙 (22) 尹宣擧에게 답한 편지 別紙. ≪牛溪續集≫에 分註하는 일 등 文集 刪定에 대해 의견을 밝힘. 坡山書院과 紫雲書院에 成守琛과 白仁傑을 위해 雙廟를 두는 일‚ 자운서원을 移建하는 일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草廬 (25) 李惟泰에게 보낸 편지. 만나본 감회를 전함. 時事의 변동으로 群賢들과 이유태가 모두 유배되는데 자신은 아직 죄가 정해지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는 내용.
答尹進士-忠甲 (26) 1688. 尹忠甲에게 답한 편지. 젊어서 외숙인 申翊全에게 명성을 들었으나 찾아보지 못하다가 金泳 등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감회를 전하고 책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는 내용.
答趙高陽-逢源 (27) 1675. 趙逢源에게 답한 편지. 時論의 배척으로 인해 加律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유배되어 있는 스승 宋時烈을 위한 上章은 잘 헤아려 善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趙僉樞 (28) 1682. 趙逢源에게 답한 편지. 權近이 卒하기 전에 登第하여 敎授官이 되었던 일‚ 金時習이 13세 때 배웠던 사실 등을 들어 金泮이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崔而栗-寬 (28) 1674. 崔寬에게 답한 편지. 侍養之親에 대한 3년간 心喪 여부와 題主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變禮에 대한 내용.
答權說卿 (29) 1664. 權說에게 답한 편지. ‘春王正月’이라는 말 등 경전에 나오는 正月에 대한 해석을 고증하고 64卦의 卦變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希仲 (31) 1660. 尹鑴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평만 하고 있다는 것을 尹宣擧의 편지를 통해 알고 있다. 別紙를 통해 의견을 다시 밝히니 허물을 고치기를 바란다는 내용.
別紙 (31) 尹鑴에게 답한 편지 別紙. 獻議에 응하여 異論을 처음 제기한 것‚ 斬衰服을 입어야 한다는 설로 宗統의 문제를 일으켜 許穆의 의논을 도운 것‚ 尹善道가 상소한 뒤 인심이 汲汲해지고 중외가 해괴해 하는 상황에서 조정에 잘못된 의논을 일으켜 儒賢을 흔들고 權勢에 아부하여 實學을 방해한 것 등이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내용.
答李雲擧-翔 (40) 1684. 李翔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행장 문제 등 尹拯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崔道卿-碩儒-巨卿-碩英-兄 (41) 1656. 金集의 사후 崔碩儒와 崔碩英 형제에게 스승에 대한 服制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李翔의 의견을 들어 深衣에 조금 성긴 포를 쓰고 帶는 細布나 혹은 모시를 써서 夾縫하고 絰은 원래의 제도로써 하라는 내용.
答崔漢卿 (42) 1672. 崔後亮에게 맏아들의 立後가 결정되기 전 服喪을 누가 주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입후가 확정되기 전에는 父子라 칭할 수 없으니 發靷 등을 둘째 아들이 주관하도록 하고 입후가 확정된 다음 다시 처리하라는 내용.
答崔漢卿 (43) 입후가 확정되지 않아 次子가 題主가 되었을 때의 祝辭 호칭에 대해 崔後亮에게 답한 편지. 예조에 喪家의 예로 입후를 청하되 허락을 받지 못하면 次子가 題主일 때 祝辭에 ‘孝’字를 쓰지 못하도록 한 李滉의 설에 따르라는 내용.
答愼仲任 (43) 1663. 愼景尹에게 답한 편지. 母親喪 중에 부친의 무덤을 改葬하여 合葬할 때 几筵을 합하지 말고 斬衰의 喪禮를 원용하라는 내용.
與金元會 (1) 1657. 金澄에게 보낸 편지. 금일에 화를 당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지만 허물은 자신에게도 있다고 했던 말 등 그와 만났을 때의 일을 추억하고 안부를 전하는 내용.
答金元會 (1) 金澄에게 답한 편지. 몸을 檢束하는 데 태만하거나 견고한 기풍이 없을까 조심하고 日用動靜에서 시작하여 점차 實地에 나아가도록 하라는 내용.
答金元會 (2) 1671. 金澄에게 답한 편지. 代服의 근거는 朱子의 奏箚에 근거하였고 題主와 遞遷의 문제는 一室을 비워 둘 수 없는 것이라며 閔愼의 대복 문제에 대한 입장을 설명한 내용.
答金元會 (3) 1673. 金澄에게 답한 편지. 荊川의 承重論은 할아버지를 위한 복이 부친을 대신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趙昱의 일은 乙卯倭變이라는 비상시의 일로 기록이 모순이 있을 수 있으니 大旨를 보존하여 훗날의 考訂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洪國寶-錫龜 (4) 1672. 洪錫龜에게 답한 편지. 상을 당한 후의 改題‚ 告祝에 대한 변통‚ 生員과 進士의 妻에 걸맞은 呼稱 등 상례의 격식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글.
與李大而-恢-別紙 (4) 李恢에게 보낸 편지 別紙. 동생의 장자를 형에게 立後하여 후사를 삼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答李佐郞-恒-兄 (6) 1671. 李恒에게 답한 편지. 禫服을 하고 祥祭할 수는 없을 것이며 더구나 祥祭를 폐하고서 禫祭를 행할 근거는 없으니 창황 중에 제사하지 못한 연유를 几筵에 고한 뒤에 날짜를 가려 제사를 행하라는 내용.
與具百朋-錫 (7) 1683. 具錫에게 보낸 편지. 인조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오가던 곳에 새로 집을 짓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與尹泰升-堦 (7) 1673. 尹堦가 海西에 가는 것을 위로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
答李汝輝-之翼-別紙 (7) 1673. 李之翼에게 답한 편지 別紙. 부의에 사례하고 보내온 것이 분에 넘치는 것이어서 4가지 중 1가지만 받고 나머지는 풀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다는 내용.
與金夏卿別紙 (8) 1681. 金禹錫에게 보낸 편지 別紙. 白川 文會書院에 이미 賜額이 있어 함부로 배향하기 어려운데도 院儒들이 추가로 배향할 것을 의논해오자 이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元仲擧-萬里 (10) 1666. 元萬里에게 禫祭의 儀節에 대해 답한 편지.
與元君始 (10) 1682. 元萬春에게 보낸 편지. 糴政으로 비방이 일어 곤란에 처한 것을 위로하고 軍務를 다스림에 너그러움과 엄함을 병용하여 분수로 제어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라는 내용.
答南仲輝 (11) 1659. 東銘의 뜻에 대한 南二星의 질문에 답한 편지.
與金延之 (11) 1683. 金壽增에게 보낸 편지. 武夷櫂歌의 大意에 대한 李滉과 奇大升의 설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金起之 (12) 1674.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20살이 못되어 죽은 이의 상례는 古禮에는 없고 開元禮와 程子에 비로소 장사지내고 返虞하고 신주를 세우는 예가 생겼으니 卒哭과 祔祭는 행하지 말되 虞祭는 3차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起之 (12) 1685.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왕의 侍藥에 노고가 많았음을 위로하고 나아가지 않아 혐의를 피하고 분수를 지키겠다는 뜻을 피력하는 내용.
答金久之 (13) 1676.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海西로 옮겨 ≪周易≫ 등을 읽고 있는 근황을 알리고 四書·≪小學≫·≪近思錄≫은 聖學의 연원이고 ≪大學衍義≫·≪聖學輯要≫ 등도 볼만하다며 성리학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金久之 (14) 1677.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김수항의 아버지 金光燦에 대한 글을 부탁받은 뒤 일의 경과에 대해 알리는 내용.
與閔大受 (15) 1671.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문집이 분류에 법도가 없고 詩 등 차례가 도치되어 있으며 異本이 많이 있어 이를 다시 모으고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사실과 宋時烈과 善寫하여 간행하기로 합의하여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내용.
答閔大受 (16) 1676.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李蕃에게서 민정중을 西班에 붙인다는 명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며 위로함. 宋時烈에게 학문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며 講席에 참여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
與閔大受 (17) 1681.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栗谷先生續集 간행건과 松都 儒生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조를 祠宇에 모시는 일을 품해 준 것에 사례하고 世系는 別幅에 기록하여 보내겠다는 내용.
與閔大受 (18) 1690. 閔鼎重에게 보낸 편지. 병으로 귀양길을 마중하지 못했다며 안부를 묻는 내용.
答閔持叔 (18) 1667. 閔維重에게 답한 편지. 宋浚吉의 상소로 인하여 물의가 비등한 것을 염려함. 金尙憲이나 趙錫胤 등이 龍鱗을 건드리는 언론을 피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풍조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며 出處와 言行이 사우들의 바램에 부합하기를 부탁한다는 내용.
答閔持叔 (19) 1682. 閔維重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가 出繼한 뒤 돌아가셨을 때 本生의 할아버지에게는 아버지를 따라 1등급을 내려 大功服을 입고 從祖라 칭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季周別紙 (20) 1676.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朱子가 戒謹恐懼를 持敬의 근본이라 본 것은 명확하지만 宋時烈이 誠을 戒愼恐懼의 근본으로 삼아 마친다고 한 것은 誠을 持敬의 근본이라고 할 수 없으니 잘못이라며 持敬에 대하여 논변한 내용.
答李季周 (21)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誠身存心과 致知 등에 대한 내용.
答李季周 (22) 1677.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聞見錄과 劉元承 手編에 달리 기록되어 있는 生薑樹頭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季周 (23) 1680.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 辭謝하겠다는 말에 國史를 改修하는 막대한 거사를 피하지 말라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季周別紙 (24) 1681. 李端夏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尹宣擧의 강화도에서의 행동에 대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밝히고 그의 처만 먼저 죽게 하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는 비방에 대해 그 부인이 婦德이 높고 ≪小學≫과 烈女傳에 능한 인물로 自決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해명하는 내용.
與李季周 (25) 1685. 李端夏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後事문제에 대해 宋時烈의 주장으로 죽은 李繼를 대신하여 李綖을 찰방의 次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함. 차자를 후사로 정한 데다가 이연이 이계보다 오히려 나이가 많다는 주장도 있으니 형제의 倫序로 보아 잘못이고 이계의 처가 입후하여 남편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一宗이 둘로 분기하게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용.
與李幼能 (27) 1664.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先稿의 狀草 교정‚ 永寧殿 문제‚ 편집한 禮書를 살펴보는 일‚ 李滉 遺文의 편집‚ 出處와 去就 등에 대한 내용.
與李幼能 (28)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崔君의 集覽은 李滉의 편지와 李珥의 <補遺後議> 등을 수록하지 않고 補解의 설명이 선인들이 정한 것과 어그러진 것이 많아 변파했다는 점. 崔君이 易에 밝다 하여 함께 강학하려 했는데 병통이 있어 애석하니 구습을 버리고 正見에 힘쓰도록 도와주라는 내용.
答李幼能別紙 (30)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別紙. 太極은 易에 있어서 그 綱領과 意思를 발하는 것일 뿐 洪範과 서로 體用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
與李幼能 (32)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세도가 쇠미해져 학문하려는 자가 적고 뜻이 있는 자도 은둔하거나 文章과 經術에 국한되어 정정당당하고 치우치지 않는 이가 적은 것을 염려함. 尹鑴에게 보냈던 服制私議를 개정했던 喪服正義는 說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보내지 못하였으니 뒷날을 기다려 得失을 아뢰겠다는 내용.
答李幼能 (33)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次第를 논하고‚ 학문의 폐단은 聖學에 전심하지 않는데서 나오는데 科場에 드나들었으나 知命에 이르러 朱子를 스승으로 삼아 주자를 이은 적통이 되었던 이황과 달리 자신은 가정에서 보며 자란 詞章의 습속을 일찍이 버리고서도 本源의 경계에 애매하고 編著하느라 大業을 日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외에 喪服正義와 師友錄을 편저하는 일에 대해 상의함.
答李養而 (35) 165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편지를 보내 격려하고 충고해 준 것에 사례하는 내용.
答李養而 (36) 1660.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知와 識의 의미‚ 道와 文이 둘이 아니라는 설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別紙 (3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儀禮≫ 納徵에 나오는 폐백의 양에 대한 고증‚ 사대부가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同姓간의 혼인 문제에 대해 고증하고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 (39) 1663.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喪服傳 疏에 ‘長子를 위해서는 모두 斬으로 한다’는 문장이 있다는 申啓澄의 말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別紙 (40)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復讎는 5세에 그치고 원수 갚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친다’라는 설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與李養而 (42) 李之濂에게 보낸 편지. 강하며 토론하다가 헤어질 때 다투는 듯이 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객기로 사람들과 논쟁하여 소인으로 귀결될 것을 일일이 책하여 준 것에 감사하고 洪錫箕와 함께 禮經을 講할 것을 권하는 내용.
答李養而 (43) 1666.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夷狄을 물리치고 中華를 높일 수 있으면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돌아와야 할 것이라며 출처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李養而 (44)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孔子·孟子·朱子에 대한 제후의 예우와 出處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養而 (45)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春秋에 諸侯가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초빙해주기를 청한 일은 있지만 자신의 왕조에서 스스로 나아간 예는 없다는 것‚ 孟子와 朱子의 출처 의리를 설명하고 소명을 받았을 때는 예우를 기다리고 바뀌지 않았을 때에는 나아가기 전에 의견을 고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養而 (1) 166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朱書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을 사례하고 奏箚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養而 (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持敬에 대해 ‘居敬은 整齊嚴肅을 위주로 하는 것이고 存心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持敬은 存心과 整齊嚴肅 양면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程子가 말한 主一을 위주로 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 (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출처와 持敬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養而 (9) 1669. 李之濂에게 보낸 편지. 소략한 李珥의 狀碑를 수개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묻는 내용.
答李養而 (10) 1672.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李珥 문집의 일로 번거롭게 한 것을 사례하고 문집을 고치는 경위를 밝히고 비록 成渾과 李珥가 감당한 것이지만 顚倒되고 빠진 것이 많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임을 밝히는 내용.
答李養而 (11)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李珥 문집 글귀를 바로잡는 일‚ 저술한 次序와 大全의 式例를 따라 편집하고 舊本과 다른 것은 분류하여 첨가하는 문제‚ 舊本에 별도로 考異 1권을 넣어 次序와 門類가 전도되어 있는 잘못을 논하고 뒤에 나오는 것을 續集으로 만드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李養而 (13) 1677.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朋友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朴東亮의 事狀이 완성되었으면 전후 두 본을 모두 보여달라고 청하는 내용.
答李養而 (13) 1678.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옛 친구와 교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잘 헤아린 뒤 때에 따라 의리에 처하여 바름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養而 (14) 168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이지렴 아들 편에 보낸 편지를 받은 뒤 1682년 이래 입장이 달랐고 시세에 구애되어 다 답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들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내용.
答尹子仁 (15) 1662. 張栻의 ≪南軒先生文集≫을 빌려 본 감회를 尹拯에게 밝힌 편지. 主敬窮理하는데 도달하여 朱熹와 왕복하여 의논한 것이 모두 탄복할 만 하다는 내용.
與尹子仁 (15) 1664. 尹拯에게 보낸 편지. ≪易經≫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모여 강론하고 있음을 전하는 내용.
別紙 (16)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로 五世復讎 설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18) 尹拯에 답한 편지 別紙. ≪朱子語類≫의 백세의 원수를 논한 것‚ 9세의 원수를 논한 것‚ 魯나라 莊公의 일‚ 송나라 孝宗의 일 등을 고증하여 복수는 5세에 그친다는 설에 대하여 밝힌 글.
答尹子仁 (22) 尹拯에 답한 편지. 복수는 5세에 그친다는 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재론하는 내용.
答尹子仁 (24) 1666. 尹拯에 답한 편지. 영남 선비들이 文廟 배향문제를 거론한 일‚ 師友의 篇目을 초록하여 책을 만드는 일‚ <箕子實記>를 별도로 싣는 일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別紙 (25) 1668. 尹拯에 보낸 편지 別紙. 父母의 상을 함께 당했을 때의 의절과 복색‚ 朝祖의 禮‚ 前室과 后室에 대한 葬法‚ 棺槨과 遺衣의 제도 등에 대한 의견을 보내니 살펴보고 아버지와 스승에게 보여 가르침을 받아 의견을 보내 줄 것을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28) 尹拯에 답한 편지. 宋時烈에게서 부탁받은 年譜의 교정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9) 尹拯에 답한 편지. 成守琛의 출처 문제 등 出處의 義理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내용.
別紙 (31)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윤증 집안의 <昏禮笏記> 중 혼인 당사자나 主婚이 朞年服 이상의 상을 입었을 경우의 의절‚ 見舅姑禮‚ 혼례 복색 등 의심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尹子仁 (33) 1673. 尹拯에 답한 편지. 이이의 문집 刪定과 연보의 추가기록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 (34) 尹拯에게 보낸 편지. ≪栗谷詩集≫과 ≪別集≫ 附錄의 편집‚ 紫雲書院의 還安‚ 자운서원 移建 논의‚ 白仁傑의 신주 처리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
答尹子仁 (35) 尹拯에 답한 편지. 李珥의 문집‚ 閔氏의 疑禮 문제‚ 紫雲書院의 새 비석 건립 등에 대한 宋時烈과의 논쟁 경과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6) 1674. 尹拯에 답한 편지. 李之濂과 예에 관해 토론한 뒤 이지렴의 학문과 인품 등에 대하여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 (38) 尹拯에게 답한 편지. 國恤 중의 제사 문제‚ 北方의 일에 대한 준비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8) 1675. 尹拯에 답한 편지. 尹宣擧 墓碣文의 수정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9) 尹拯에 답한 편지. 時事 변화 중의 거취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9) 1680. 尹拯에 답한 편지. ≪心學至訣≫과 ≪朱子家禮≫의 冠婚禮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別紙 (41) 尹拯에 답한 편지 別紙. 士의 冠婚禮에 관련된 문제‚ 喪禮 중의 관혼례‚ 祠堂 제도와 상제례의 의절과 복색‚ 殿牌에 대한 예‚ 署押과 花押의 근거 등에 대한 내용.
再答尹子仁 (1) 1681. 尹拯에 다시 답한 편지. 師友錄에서 李滉과 曹植 門人들의 순서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2) 1682. 尹拯에 답한 편지 別紙. 宋時烈과 윤증 간에 墓碣文字 이전에 두 집안이 서로 크게 저해될 만한 것은 없었으므로 묘갈문자 사건 이후 학술과 언행의 문제점을 공격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며 송시열을 攻斥할수록 尹宣擧에게도 해가 될 뿐이라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3) 1683. 尹拯에 답한 편지의 別紙. 朴尙衷의 상소에 대하여 宋時烈이 建請한 데 대한 朴世堂 부자의 이의제기로 일어난 일의 곡절을 알리는 내용.
答尹子仁 (4) 1684. 尹拯에 답한 편지. 甘露寺에서 보여준 편지와 權生을 통해 전해진 편지의 내용이 다른데다가 편지가 전파되면서 宋時烈이 더욱 분노하여 수습할 길이 없게 만든 것과 師生의 의리가 있는데 질문조차 않고 비난한 것 등을 책하는 내용.
與尹子仁 (6) 尹拯에게 보낸 편지. 師生의 의리를 폐해서는 안되며 스승을 배척한 말을 한 잘못을 지적하고 善處하여 사림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내용.
答尹子仁 (9) 尹拯에 답한 편지. 伸辯한 상소 뒤 廟堂에서 논의된 師生의 의리 문제에 관한 의논을 전하고 木川에서의 일과 송시열의 편지에 대한 윤증의 처신에 대하여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14) 1686. 尹拯에 답한 편지. 師生의 의리와 윤증의 처신을 논하고 묘갈문에 대해서는 宋時烈이 실수한 것이지만 그 뒤의 행동은 윤증이 지나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로 인해 黨議가 성해진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17) 1687. 尹拯에 답한 편지. 羅良佐·韓聖輔의 상소로 피차 竝立하는 상황 속에서 보합하려는 노력이 실패하고 宋時烈의 분노와 사림의 비방을 받게 되었다며 이제 邪正을 명백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니 함부로 재결하여 偏私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
答尹子仁 (18) 1689. 尹拯에 답한 편지. 宋時烈을 죄 주려는 이들이 자신들을 도울 사람을 찾으려 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윤증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政目에 올랐으니 벼슬을 주어도 사양해야 할 것과 靈光에 있는 사당의 일‚ 趙翼의 遺書에 있는 註釋의 내용에 대한 염려를 전하는 내용.
與尹子仁 (19) 尹拯에게 보낸 편지. 朴泰輔가 명목도 애매하게 화를 당한 일을 애통해하고 상소하여 신변하는 것도 어려울 형세여서 죄만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
答尹子仁 (19) 1690. 尹拯에 답한 편지. 宋時烈과 윤증 사이 갈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달라졌다는 소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송시열이 화를 당한 뒤에 지켜야 할 의리‚ 朴泰輔의 죽음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1) 尹拯에 답한 편지. 서울에서 전해오는 소식에 두 집안(윤증-박세채)에 대해 의논이 분분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던 중 이에 관한 윤증의 편지를 받았었다며 그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別紙 (22) 1691. 尹拯에게 답한 편지. 伯夷와 叔齊 사당의 위판·獻爵·籩豆·拜禮·祭享月日‚ 사당 건립 전에 疏를 올려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내용.
答趙平叔-持衡 (24) 1658. 趙持衡에게 답한 편지. ≪春秋公羊傳≫의 註에 나오는 ‘未及弑’라는 구절의 해석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李重賚 (24) 1663. 李啓晩에게 답한 편지. 出繼한 사람이 本生의 부모를 위해 입어야 할 복제와 變除 절목에 대한 내용.
答南雲路 (25) 1676.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남구만이 洛閩(二程子‚ 朱子)의 책을 읽고 있다는 것과 아들에게 학문에 종사하도록 권했다는 金壽恒의 편지에 기뻐하는 내용.
答南雲路 (26) 168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箕子의 사적을 뽑아 ≪範學全編≫을 만드는 중 우리 문헌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어 한스러웠다며 남구만이 완성하였다는 史藁 중 箕子 이전의 일에 대해 받아 보았으면 싶다고 청한 내용.
答李彛仲 (26) 1677.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
答李彛仲 (27) 1682.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낭패한 뒤의 심정을 전하고 끝내 견제되어 한번도 의리를 펴지 못할까 두렵다는 내용.
與李擇之-選 (27) 1672. 李選에게 보낸 편지. 宋浚吉의 죽음을 애도하고‚ 金麟厚 후손들의 청에 따라 狀本을 맡게 되었음을 알리며 그간의 의혹은 아들 朴泰殷을 통해 직접 묻겠다는 내용.
答李擇之 (28) 1676. 李選에게 답한 편지. ≪武侯全書≫를 얻어 볼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내용.
答李擇之 (28) 1681. 李選에게 답한 편지. 李箕疇·徐文淑과 함께 趙光祖의 ≪靜菴先生遺稿≫를 완성하여 멀지않아 帶方에서 간행될 것이라는 사실과 李穡의 事蹟에 대한 내용.
與李擇之 (29) 1689. 李選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이 유배에서 돌아오던 길에서 화를 당한 것을 슬퍼함.
答趙公擧 (30) 1667.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兒名 대신 攝主로 고할 때와 兒名을 主喪으로 할 때의 호칭 문제에 대한 내용.
與趙公擧 (30) 1687. 趙師錫에게 보낸 편지. 정승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고 정승으로서 일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
答金斯百-錫冑 (30) 1663. 金錫冑에게 답한 편지. 申最·申儀華 등의 연이은 죽음을 슬퍼하고 瞿公을 배향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金斯百 (31) 1668. 練祭와 祥祭를 變除하는 날짜를 계산하는 기준과 禫祭의 의절 등에 대해 金錫冑에게 답한 편지.
答尹叔獜 (32) 1682. 定性論에 대한 尹趾完의 질문에 답한 편지.
答尹叔獜 (33) 1685.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조처하여 시행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영남 사람을 위해 깊이 축하한다고 격려하고 인재를 찾는 일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叔弼-翼相 (33) 1678. 申翼相에 답한 편지. 柳尙運과 마음을 합해 서북 변방을 專管하는 일을 잘 도모해주기를 기대한다는 내용.
答申叔弼 (33) 1681. 申翼相에 답한 편지. 李珥 문집 편집 진행을 알리고 ≪警民編≫을 반포하여 風敎를 장려한 뒤 나은 자를 조정에 추천하도록 하라는 내용.
答柳悠久 (34) 1685. 왕이 喪中에 음악을 듣는 것‚ 근래 간행된 책을 玉堂에 보내는 문제에 대하여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答柳悠久 (35)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關西에 ≪儀禮通解續≫이 없을 것이므로 베껴 올려보낸다는 내용.
答申聖時-啓澄 (36) 1666. 申啓澄에 답한 편지. 嫡庶正體說의 적용 범위‚ 承重의 의리와 승중할 때의 복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聖時 (39) 申啓澄에 답한 편지. 適子에서 適子로 이어가는 承重의 의리와 승중할 때의 복제 등에 대해 재론한 내용.
答申聖時 (43) 1673. 申啓澄에게 답한 편지. 閔愼 집안의 變禮 문제로 인해 같은 士友들에게조차 공격받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 내용.
別紙 (44) 申啓澄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閔愼이 廢疾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복을 입는 근거를 밝히고 아들이 攝主하는 문제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李廈卿-橝 (1) 1667. 李橝에 답한 편지. ≪大學箚記≫를 고증하고 정리하였으니 보아달라고 청함. 院祠에 사액을 청하는 일은 중첩된 사액을 금하는 명이 있어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
答李廈卿 (2) 李橝에 답한 편지. ≪大戴記≫와 ≪小戴記≫의 출처‚ 현재의 ≪大戴禮≫와 ≪禮記≫로 이루어진 경위 등에 대한 내용.
答崔美伯-邦彦 (2) 1685. 崔邦彦에게 답한 편지. 개인적인 복상 중 守陵官으로 임명된 경우의 출처 의리와 부탁한 ≪山堂集≫ 발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좀더 기다리라고 하는 내용.
答具濟伯-時經 (3) 1681.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論語標釋≫에 대한 논의‚ 사액받은 文會書院 외에 白川에 다른 院祠를 세우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高汝根 (4) 高晦에게 답한 편지. 性情의 구분을 지칭하는 體用과 動靜을 말하는 終始의 관계에 대한 宋時烈의 견해에 의문을 표한 내용.
答高汝根 (4) 1669. 高晦에게 답한 편지. 朱熹가 각각의 저술을 刪述한 순서와 경위‚ 露粱의 사육신 사당에 관한 論議 등에 대한 내용.
答高汝根 (6) 1671. 高晦에게 답한 편지. 종가의 사당에 朝祖하는 예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高汝根 (7) 1682. 高晦에게 답한 편지. ≪大學≫ 傳7장의 正心을 體用의 측면에서 볼 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答高汝根 (7) 1690. 高晦에게 답한 편지. 師友에 대한 服制의 기간과 복색 등에 대한 내용.
與宋子文 (8) 1658. 宋斗章에게 보낸 편지. 典樂六藝에 대한 여러 경전의 註에 대한 내용.
與宋子文 (8) 1664. 宋斗章에게 보낸 편지. ≪小學≫과 四書 등을 熟讀하고 통하지 않는 것은 작은 표를 붙이거나 別紙에 기록하여 다시 생각해보고 친구와 만났을 때 商量하면 좋을 것이라는 내용.
答宋子文別紙 (9) 宋斗章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宋時烈이 조급하고 고집이 심하여 成文濬과 申應榘의 일 등을 잘 고쳐 주지 않았으니 함께 도모하기 어렵다는 것‚ 尹拯이 행장은 쓰겠다고 했으니 家狀 대신 遺事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趙士威 (10) 1671. 趙得重에게 답한 편지. 시아버지의 죽음이 며느리 殯所를 만든 뒤에 있었을 때 며느리에게 肉饍을 올리는 일과 장례 순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趙士威 (11) 1677. 趙得重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狀文을 改撰하는 일 등에 대하여 해명하는 내용.
答羅顯道 (12) 1667. 宗子를 뵙는 예‚ 見舅姑禮의 절차‚ 폐백 유무 등 婚禮節目에 대해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答羅顯道 (13)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見舅姑禮에서의 폐백 여부와 婚禮와 冠禮에서의 見舅姑禮의 차이 등에 대해 재론함.
答羅顯道 (14) 1672.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서 독서와 講學의 의의‚ 宋浚吉의 상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答羅顯道 (15) 1681.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를 遷葬할 때의 복색‚ 槨의 교체‚ 忌祭 등 緬禮 절목에 대해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答羅顯道 (16) 1687.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일시의 物議에 격동하지 말고 상소 여부를 신중히 헤아려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羅仲輔碩佐 (17) 1688. 羅碩佐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정도를 밝힌다면서 名實이 모순되어 조야를 紛紛하게 한 것도 흑백을 단정한 데서 말미암았다고 비판하고‚ 시비와 흑백은 일시에 정해질 것이 아니니 급급하게 애쓰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는 내용.
答金景能-萬增 (18) 1659. 金萬增에게 답한 편지. 장례할 날짜를 점치는 일의 便否를 밝힘.
答金景能 (19) 1661. ≪論語疑義≫의 차례‚ 朱子와 程子의 ‘主一無適’과 ‘至淺’의 의미 등에 대하여 金萬增에게 답한 편지.
答李平叔-后平 (19) 1668. 李后平에게 답한 안부 편지.
答沈德升 (20) 1677. 沈梯에게 답한 편지. ≪小學≫의 수정 보충 작업‚ 偏黨의 폐단을 염려하고 교제·임용·혼인에 각각 의리를 참작하여 善處하라는 내용.
答成汝中-至善 (21) 1672.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자가 用工하는 방도 중에 成渾이 韓瑩仲 등에게 답한 편지만큼 절실한 것이 없다며 이를 더욱 확충하면 될 것이라는 내용.
答成汝中 (21) 1673.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성품이나 현재의 불안한 위치로 보아 서원에 관한 책임을 맡을 수 없다며 사양하는 내용.
答成汝中 (22) 1676.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皇明諸儒事蹟≫의 釐正 補錄‚ ≪師友錄≫ 중 坡山一脈에 대한 수정‚ <書室記>와 <心經跋>을 쓰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成汝中 (23) 1680.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謝恩 여부는 자세히 살펴 처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成汝中 (23) 1682. 成至善에게 답한 편지. 經書를 읽는 법‚ 성지선의 할아버지 成㮨에 대한 文字와 言行錄의 일에 대해 알리는 내용.
與成汝中 (24) 1691. 成至善에게 보낸 편지. 講習의 중요성과 나이 차이가 10년도 못되니 벗으로 대하자고 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는데 知舊로 대하자는 내용.
答成子章-文憲 (25) 1664. 成文憲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 있어서 科擧의 폐단과 관통하여 깨닫지 못하며 얽매어 나아가지 못하는 병통을 지적하고 함께 토론하며 자세히 살피자고 당부하는 내용.
答成子章 (26) 成文憲에게 답한 편지. <禮運> 本文에는 七情에 惧가 있었는데 程頤가 <好學論>에서 懼 대신 樂을 넣은 이유에 대해 李滉·朱熹의 견해를 인용하여 고증함.
答成子章 (27) 成文憲에게 답한 편지. 四端의 分屬과 理發氣隨 등의 설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李汝九-箕洪 (27) 1665.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主一無適하여 存養省察하면 학문의 功이 이를 것이니 이에 힘쓰라는 내용.
答李汝九 (28)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과거를 그만 두려는 것을 격려하고 학문을 위해서는 외모를 嚴肅整齊하는 것보다는 程子가 말한 敬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汝九 (29) 1670.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孟子疑義≫를 보내며 그 성과를 논하고 宋時烈과의 문답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알려주겠다는 내용.
答李汝九 (30) 1676.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편지에서 논한 省察의 의의 등 工夫 문제에 대해 靜坐와 是非 등에 대한 송시열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내용.
答李汝九 (32) 1684.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몰래 비방하는 의논을 일으켰다는 말‚ 거짓으로 받았다는 말 등 자신과 尹拯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해명하고 시세에 매이지 않고 편당하지 않은 뒤에야 공정한 논의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내용.
答李子望 (33) 1668.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독서하여 窮理하고 의심나는 곳은 자세히 기록하여 두었다가 만났을 때 토론하면 師友를 자주 만나지 않아도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답한 내용.
答李子望 (33) 1669.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科場에 나간 뒤 학문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고 물러서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고 격려하는 내용.
答李子望 (33)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관직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없다는 탄식에 대해 鄭汝昌·趙憲 등이 監官을 하고 있을 때의 예를 들어 격려하고 결혼한 姉妹의 服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子望 (34)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先儒들에게서 이미 體用終始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따라 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고 立心用功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子望 (34) 1670.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日用과 학문하는 데 있어서의 병통을 지적하고 敬을 위주로 하여 涵養 공부를 꾸준히 할 것을 부탁하는 내용.
答梁季通 (35) 1669.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독서는 誦習을 위주로 하되 의리를 潛心玩味하여야 하며 詞章하는 습관을 멀리하고 실지공부에 힘쓰라는 내용.
答梁季通 (36)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禮書의 편집 문제와 근래 학자들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實功에 힘쓰지 않고 겉모습만 스스로 높이려는 풍조를 염려하는 내용.
答梁季通 (36)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禮로 인한 비방에 대해 朱熹의 箚子가 定論이 될 만하다며 嫡孫代喪의 설이 士庶와는 관련이 없는 설이라는 말을 반박하는 내용.
答權致道 (39) 1689. 權尙夏에 답한 편지. 世道가 변해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에 대해 위로하고 자신도 죄에 걸려들어야 마땅한데 자신은 죄망에서 빠졌다며 世道를 염려하는 내용.
答宋道深 (39) 1686. 宋光淵에게 답한 편지. 朝命 없이 사사로이 개설하는 것이니 ≪五禮儀≫를 따를 수는 없고 鄕飮酒儀 등을 본뜰 것 등 養老宴의 절목에 대한 내용.
答趙光甫 (40) 1684. 趙持謙에게 답한 편지. 왕후의 因山에 참여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與吳貫之 (40) 1683.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公議를 회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自尊하여 自守하는 데 소홀하고 사람을 논하고 일에 대처할 때 愛憎과 好惡가 많으며 술 때문에 실수하여 가까운 사람에게 배척받는다는 말을 들었다며 몸과 마음을 잘 단속하라는 내용.
答吳貫之 (41) 1684.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오도일이 정사에 省約하여 백성들이 편히 여기고 선비를 가르쳐 풍속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실을 평가하고 罷榜하는 일에 편중된 것이 있었다며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화합하고 협동할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龍卿-壽亮 (42) 1666.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근래에는 과거에만 힘쓰고 師友들을 인도할 이가 없어 立志가 견고하지 못함을 염려하는 내용.
答沈龍卿 (43)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喪중에도 독서에 힘쓰는 것을 치하하고 3가지의 책을 한꺼번에 보지 말고 우선 그대로 두었다가 ≪近思錄≫을 마치고 ≪節要≫를 읽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沈龍卿 (43) 1669.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 나아가려는 성의를 격려하고 ≪楸灘遺稿≫를 얻어보고 싶다는 뜻을 밝힌 내용.
答沈龍卿 (44) 1677.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겠다는 결심에 기쁨을 표시하고 서울의 선비들이 과거에 매달리거나 山水나 遊戱에 빠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龍卿 (45) 1690.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歲暮를 맞는 감회와 안부를 전하고 自强하기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沈龍卿 (45) 1691. 沈壽亮에게 平山에 遷葬하는 일이 마무리된 사실을 전하는 편지.
答崔汝和 (1) 1681. 관직이 있는 자가 국휼 장례 전에 禫祭를 행하는 문제‚ 돌아올 때 올린 상소가 口舌에 오른 일 등에 대해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答崔汝和 (1) 168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禫祭를 행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呂祖謙의 문집을 조만간 얻어 보고 싶다고 청함.
答崔汝和 (2) 松江 鄭澈의 시호가 정해진 경위‚ 文會書院의 일을 敷奏하는 문제 등에 대해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與崔汝和別紙 (3) 1686.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 別紙.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集成 등 우리 나라에 없는 책을 書肆에서 찾아 볼 것을 청하는 내용.
答崔汝和 (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崔鳴吉의 일을 顯刻하는 것을 부탁받았지만 1623년 朴東亮에 대한 臺諫의 논의에 참여하여 本末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미 박동량에 대한 논의에 관련된 인물의 幽誌를 거절했던 전례를 들어 답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설명하는 내용.
答崔汝和 (5) 1690.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鄭尙樸과 함께 ≪中庸讀記≫를 읽었다는 것‚ 鄭相詹에 대한 추천‚ 平遠堂의 記文을 보내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別紙 (6) 1691.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別紙. 鄭齊斗가 陽明學을 하는 것이 염려스러운데 최석정 마저 閔以升에게 朱熹와 다른 주장을 했다며 염려하는 내용.
答申公獻 (7) 1686. 申琓에게 답한 편지. 養士節目에 대하여 답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士習과 世道를 염려하면서 儒生들의 捲堂 수습 방법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公獻 (7) 申琓에게 답한 편지. 거취 문제에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公獻 (8) 1690. 申琓에게 답한 편지. 居喪 중 ≪大學≫·≪小學≫의 讀書記 등을 읽으며 經學을 하고자 한다는 신완을 격려하고 거상 중에 誌文을 스스로 쓰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趙伯靜-仁壽 (9) 1678. 趙仁壽에게 답한 편지. ≪近思錄≫에 대한 저술인 集解·釋義·備考와 朱熹의 주석을 비교하고 ≪近思錄≫을 공부하는 자세를 알려주고 科擧 소식에 흔들리지 말 것을 부탁하는 내용.
與沈明仲-世熙 (10) 1667. 沈世熙에게 아름다운 자질과 청명한 지조로 文辭·글씨·그림에 능하면서도 자취를 끊고 산에서 爲己之學하는 것을 칭찬하고 앞으로도 時俗에 옮겨가지 말기를 당부하는 편지.
答沈明仲 (1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坡州에 집짓는 일을 葬事로 인해 명년 봄으로 미루었다고 전하고 陰陽과 太極의 體用‚ 음양과 道와의 관계 등에 대해 설명한 내용.
答沈明仲 (11) 1668. 沈世熙에게 ≪論語≫에 나오는 ‘仕而優’라는 말의 의미와 출처의 도리에 대해 답한 편지.
答沈明仲 (11) 沈世熙에게 ≪論語≫를 마쳤으면 ≪孟子≫로 넘어가되 訓釋에 너무 매이지 말고 義利·養氣·性善을 논하는데 요점을 두어 體驗을 확충하고 涵養하는 공부에 힘쓰라는 내용의 편지.
答沈明仲 (12)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높고 비천함을 분별하는 기준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 (13) 167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안부를 묻고 ‘思慮’의 뜻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沈明仲 (13)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氣質의 생성과 운행‚ 陰陽·動靜과 기질의 관계‚ 기질의 淸濁粹駁‚ 음양과 五行의 分屬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明仲 (14) 1672.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부모를 위하여 과거에 나아가는 문제에 대해 聲名과 利祿을 歸趣로 삼을까 염려된다며 출처의 의리를 잘 헤아려 결정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沈明仲別紙 (16) 1678.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精粗와 本末의 설에 대한 질문에 대해 釋義에 보이는 견해에 대해 설명하고 五行·陰陽·太極의 관계 및 李珥와 朱熹의 입장과 이에 대한 宋時烈의 반응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明仲 (19) 168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妾子가 있는 長子의 立後 문제‚ ≪大學≫ 正心章에서 體用·動靜·工夫의 관계‚ ≪心學至訣≫을 수정하지 못한 채 먼저 올리게 된 경위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 (20) 1682.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講學이 폐하고 명성과 이해만 좇는 세간의 습속을 염려하고 氣質說과 形生神發說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明仲 (21) 1684. 沈世熙에게 國恤 전후의 禫祭 시행 여부와 國恤葬祭에 대하여 답한 편지.
答鄭眞卿 (22) 1691. 鄭尙樸에게 답한 편지. ≪要解疑輯≫을 산삭하고 고정하는 일과 高益謙 등 다른 사우의 안부를 묻는 내용.
答鄭眞卿高益之 (22) 鄭尙樸과 高益謙에게 답한 편지. 山房에서의 講習을 격려하고 ≪小學≫과 ≪大學≫ 공부의 중요성‚ 白鹿洞規의 의미를 강조함. 정상박이 陸九淵의 학문에 빠져드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李士重-鼎新 (23) 1679. 上食 여부‚ 卒哭 뒤 朔日의 제사‚ 위차를 정하는 법‚ 虞祭 등 改葬節目에 대해 李鼎新에게 답한 편지.
答白采叔 (24) 1669. 白以受에게 답한 편지. 길례에 개인 집에서 빛깔있는 床을 사용하는 문제‚ 아버지가 자식을 제사할 때의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白汝三 (25) 1668. 白以復에게 답한 편지. 늘 우러르고 어느 때 어느 장소이든 잊지 말고 반복해서 없어지지 않는 지경이 되도록 공부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縉雲-軒佐 (25) 1673. 李軒佐에게 답한 편지. 讀書에 대한 의논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장과 도의 관계‚ 時文의 可否에 대한 질문은 갈등만 많고 비루한 것이라서 답할 수 없고 경전의 뜻이나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서 물으면 답해 주겠다는 내용.
與李縉雲 (25) 1675. 李軒佐에게 보낸 편지. 과거 응시의 득실‚ 병이 있을 때에도 공부에 완급은 있을 수 있지만 미루어 둘 수는 없다는 내용.
答林德涵 (26) 1668. 林泳에게 답한 편지. ≪소학≫ 공부가 종신토록 계속 되어야 할 것을 金宏弼·金麟厚의 예를 들어 권하고 미처 發明하지 못한 것은 우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6) 1669. 林泳에게 답한 편지. 讀書에 대한 자세와 ≪小學疑義≫를 저술한 의의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8) 林泳에게 답한 편지. 表兄 李端相의 죽음을 추모하고 이단상이 임영에 대해 크게 기대했었다고 회고하는 내용.
答林德涵 (28) 1672. 林泳에게 답한 편지. 과거에 나아간 뒤의 出處 문제‚ 實心과 實功이 없는 병통에 대해 경계하는 내용.
答林德涵 (29) 1673. 林泳에게 답한 편지. 沈潛發揮하여 도덕을 이룬 사람으로는 李滉이 있을 뿐 자신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며 조만간 이루어질 講學에서 ≪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大學≫을 도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고 主敬으로 두 가지를 관통하는데 힘쓸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31) 林泳에게 답한 편지. 학문의 道는 독서와 긴절한 공부‚ 潛心體認에 있고 성현의 말은 ‘爲己’로 귀결되며 그 요체를 朱子의 <便殿奏箚>와 魏應仲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니 깊이 玩味하라는 내용.
答林德涵 (32) 1677. 林泳에게 답한 편지. 自得의 공이 있어야만 학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독단적인 견해를 자득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文辭를 알지 못하고 의리에 통할 수는 없을 것이니 절충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34) 1678. 林泳에게 답한 편지. 문장의 의리를 구하는 것보다 이치를 얻어야 할 것이라는 말‚ 自得의 설‚ 熟讀精思한다는 말 등 학문의 태도‚ 師生간의 호칭과 의리에 대해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내용.
別紙 (40) 林泳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송시열의 견해를 받아들인 金幹과 金栽 형제의 견해 등 心性과 明德의 관계를 논한 여러 가지 설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林德涵別紙 (43)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見識이 자세하지 못하거나 禍福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경계하라는 내용.
答林德涵 (43) 1683. 林泳에게 답한 편지. 懷尼간의 일에 대한 상소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상소를 올린 뒤 尹拯의 거조가 자신이 상소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아쉬움을 밝힌 내용.
別紙 (44)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尹宣擧의 행장과 墓碣文의 일에서부터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일어난 일의 경과를 설명하고 자신이 양가 사이에서 선처하지 못하여 조정의 일로 번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송시열과 윤증의 장단점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 (1) 1685. 林泳에게 답한 편지. 懷尼是非의 師道에 대해 士論에 논란이 생기자 李滉과 奇大升의 예를 들어 宋時烈과 尹拯 사이의 의리에 대해 논한 내용.
答林德涵 (3) 1686. 林泳에게 답한 편지. ≪小學讀記≫·≪心學至訣≫의 修改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朱熹나 李滉과 달리 李珥·成渾은 경전에 대한 토론이 부족하여 아쉬웠는데 자신도 경전을 토론할 만한 이가 없어 아쉽다는 내용.
答林德涵 (4) 1687. 林泳에게 답한 편지. 心喪에 5등급이 있다는 설에 대한 고증‚ ≪聖賢遺模≫ 7책에 대한 소감 등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5) 林泳에게 답한 편지. ≪聖賢遺模≫·≪疑禮類輯≫ 등의 편저‚ 스승에 대한 服制 문제를 둘러싼 사우들과의 토론 결과를 알리고 서당을 지어 강습할 계획‚ 南九萬이 주도하고 있는 조정에 들어가야 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6) 1688. 준엄한 유지를 받고 난 뒤의 거취 등에 대하여 林泳에게 답한 편지.
答林德涵 (6) 1689. 자신의 거취와 안부‚ 귀향한 뒤의 講學에 대하여 林泳에게 답한 편지.
答林德涵 (7) 1690. 林泳에게 답한 편지. 痘疫을 파한 뒤의 귀향 여부‚ 남쪽의 가뭄 소식‚ 눈병 속에서의 공부‚ 梁處濟 등 다른 제자들의 학문과 안부에 대해 염려와 격려를 전하는 내용.
別紙 (8)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宋時烈의 사후에 素帶 3월을 행한 일로 인한 윤증과의 토론 경위‚ 자신이 素帶한 뒤 老少 양편의 입장이 갈리고 다툼이 벌어진 경과를 설명한 내용.
答林德涵 (10) 1691. 林泳에게 답한 편지. 윤증의 일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에 대해 유념할 것이라고 전하고‚ 자신의 글을 모아 편집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林德涵 (11) 林泳에게 답한 편지. 緬禮를 치른 일‚ 李世龜·鄭齊斗와 格物의 뜻 및 陽明의 학문에 대해 변호한 일‚ 李珥의 ≪栗谷別集≫의 정돈‚ 서울 선비들의 상황‚ 尹拯의 일 이후 金昌協이 자취를 끊은 것 등을 전하는 내용.
答林德涵 (12) 林泳에게 답한 편지. ‘居敬致知 體仁精義’라는 말의 병통을 지적하고 <白鹿洞規>과 <敬齋箴>의 중요성을 강조함. 湖南의 선비를 수습하여 고무시키는 일‚ 金載海와 토론한 일‚ 사우들의 學問에 대한 염려‚ 懷尼간의 일 이후의 서울 주변 선비들의 동향‚ ≪自警編≫·≪六禮疑輯≫ 편저의 진행 등을 전하는 내용.
答鄭士仰 (15) 1667.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高祖를 祧遷하기 미안하다면 別室에 봉안해서 處變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내용.
答鄭士仰 (16) 1677. 鄭齊斗에게 조정과 향리에 있을 때의 거취 등에 대하여 답한 편지.
答鄭士仰 (16) 1685.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士友간에 틈이 생겨 수습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며 학문이 이단에 흐르지만 않는다면 피차간의 시비를 멈추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鄭士仰 (17) 1686.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陽明學에 출입한다는 의심이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鄭士仰 (18) 1687.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晦菴이 둘째이고 陽明이 첫째라고 했다는 말이 양명이 낫다는 것인지 묻고 이황의 양명학 비판 등을 들어 致良知와 親民의 설의 문제점을 지적함. 佛家의 맥락과 통한다는 것‚ 朴世堂 등이 老莊에 註하고 ≪大學≫과 ≪論語≫의 集註를 지적하다 죄를 입은 것‚ 道家에 빠져있는 金子益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 등을 들어 왜 이단을 창설하여 사우를 潰裂시키는가 묻고 正學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는 내용.
答鄭士仰 (21) 1688.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閔以升 등과 모여 王學의 시비를 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柳成龍이 陸九淵의 글은 佛書에 그 중심이 있는 것을 보고 象山의 학문을 버렸다는 것을 들며 자신이 만든 양명을 비판하는 책을 보기를 권하는 내용.
答鄭士仰 (22) 1690.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王陽明에게 미혹되어 程朱의 正脈을 버린 지 10년이 지났는데 언제 正學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며 왕양명의 高弟들 중 잘못을 깨닫고 정학에 돌아온 자들이 있었다는 기대를 전함.
與鄭士仰 (23)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아들 朴泰殷의 일에 대한 염려를 전하고 閔以升이 정제두의 뜻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양명학의 잘못에서 벗어났는지 묻는 내용.
答鄭士仰 (24) 1691.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傳習錄≫에 보이는 ≪대학≫에 대한 해석과 致良知에 대한 개념을 비판하고 양명학이 實이 없는 空言으로 사람마다 달라져 禪家의 話頭와 같아 惑世誣民할 뿐이라고 지적하는 내용.
與鄭士仰 (25)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이전의 의견을 버리고 바른 학문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라며 이 달 내에 찾아와 함께 강할 것을 권하고 李世弼 형제에게 格物의 訓義에 대해 답하면서 보니 程朱의 설 만한 것이 없었다는 내용.
答李伯祥-徵明 (26) 1667. 祥祭 뒤에 祔祭‚ 告祔 등의 순서와 절차 등의 문제에 대해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答李伯祥 (27) 1669. 金長生이 아버지 金繼輝의 喪에 李珥를 위하여 奔哭하고 大功의 복을 하였다는 것 등을 들어 스승을 위한 服制 문제와 弔服의 제도 등에 대하여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答李伯祥 (27) 1680. 國恤 중에 虞祭와 卒哭祭와 같은 殷祭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答李伯祥 (28)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나라에 상이 있을 때의 喪祭禮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伯祥 (29) 1689.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綱目≫과 ≪朱子大全≫ 공부는 수년간 玩味하지 않으면 효과를 보기 어려우니 喪 중에는 ≪論語≫와 ≪心經≫ 등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
答沈士磬別紙 (29) 1669. 沈俔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居喪 중의 일을 격려하고 멀리 있어 함께 강학하지 못하는 아쉬움‚ 坡山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라는 안부를 전함.
答沈士磬 (30) 1673. 沈俔에게 답한 편지. 병으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四書를 거듭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利祿을 구하면 유익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沈士磬 (30) 1674. 沈俔에게 답한 편지. 閔愼의 代服 사건으로 처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전하고 國恤 중의 祥祭와 昏禮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士磬 (30) 沈俔에게 답한 편지. 四書를 다시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뜻을 분별하는 데 두어야지 利祿 등을 구하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沈士磬 (31) 1678. 沈俔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과거에 나아가도록 허용한 이유를 설명하고 任元耈가 과거에 나아갔다가 과거가 罷場과 復科를 반복하는 상황 속에 놓인 것을 안타까워함.
答沈士磬 (32) 1681. 沈俔에게 답한 편지. 정세가 어지럽지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부모 봉양과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沈士磬 (32) 1683. 沈俔에게 답한 편지. 세도가 어그러지고 논의가 궤멸되어 東西分黨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며 黨習을 타파하려고 했으나 스스로도 배치됨이 심하였다고 자책하는 내용.
答李載叔 (33) 1675. 李堉에게 답한 편지. 여러 차례 臺章이 올라가 조만간 유배될지도 모른다며 이러한 시절에는 자취를 감추고 自修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는 내용.
答李載叔 (33) 1676. 李堉에게 답한 편지.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논하고 莊敬으로 持養하는 법이 조만간 유익할 것이라 격려하고 ≪大學≫과 ≪論語≫에 대한 공부의 진도를 묻는 내용.
答李載叔 (34) 1678. 李堉에게 답한 편지. 겨울철에 ≪小學讀記≫를 勘定하고 요새는 ≪大學≫을 공부하고 있다는 안부‚ 할아버지가 계실 때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제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 (35) 李堉에게 답한 편지. ≪大學≫을 整頓하는 작업의 진행‚ 할아버지가 계실 때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제에 대한 再論‚ 氣質에 대한 논란 등에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載叔 (36) 1680. 李堉에게 답한 편지. 학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책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尹拯·尹宣擧와는 門人에게 가르칠 것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는 내용.
答李載叔 (37) 1681. 李堉에게 답한 편지. 子路가 잘못을 고치는 것을 좋아하였다는 말의 의미‚ 齊衰服과 朞年服이 다한 뒤 傍親重服者들이 朔望祭에 곡하는 문제의 변통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 (38) 1687. 李堉에게 답한 편지. 易에 대한 問目에 답하고 ≪心學至訣≫에서 마음 다스리는 방도를 참고할 것‚ 제자들이 講學을 위해 精舍를 짓는다는 소식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同甫別紙 (39) 1680.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別紙. ≪近思錄≫ 각 편의 의의와 分註 목록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同甫別紙 (40) 1681.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 別紙. 胡元을 등지고 大明에 귀의하려던 박상충의 의리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李同甫 (42) 1681.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孟子≫ 浩然章과 ≪中庸疑義≫의 내용을 둘러싼 문답 경위에 대해 밝힌 내용.
答李同甫別紙 (43) 1687.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尹宣擧의 거취와 尹拯의 행동에 대한 입장과 宋時烈과 윤증의 일에 대해 邪正으로 논할 수 없고 이미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니 각자 자신의 견해를 지키되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라며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李同甫 (45) 1688.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成渾·尹宣擧에 대한 일은 스승을 위한 변명이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마땅한 것도 아니며 本意와 배치된 것이 심하니 세상의 허다한 의논과 시비를 가슴에 담아두지 말라고 권하는 내용.
答李同甫 (46) 1690.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세도가 어지러워져 惡言이 그치지 않고 斯文의 長老를 배척하는 것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을 한탄하고 이런 때일수록 서로 勉學하여 明德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任大年 (1) 1672.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 나아가는 태도와 工程에 대해 勸勉하고 大志를 잃지 않으면 과거 공부를 겸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내용.
答任大年金士直 (1) 任元耈과 金楺에게 답한 편지. 李滉의 體認功夫에 대한 설‚ ‘한 곳에 着心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
答任大年 (2) 1678.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과장에 나갔다가 세 번 罷榜하고 세 번 復科한 상황 속에서의 출처와 거취 문제를 논함.
答任大年 (4) 1684.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沈世熙의 죽음을 추모하고 居憂하여 弔哭하는 일에 대해 답한 내용.
答任大年 (4)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筵几 아래에서 서로 다툰 일을 경계하고‚ 재상이 되어도 해이해지지 않았던 吳允謙과 鄭曄 등을 본받으라는 내용.
與任大年 (5) 1686.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전에 孔子의 <十翼>을 모아 둔 것에 呂氏의 ≪周易古經≫을 별도로 베끼어 本義로 註를 달아 놓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 일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任大年 (6) 1690.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喪에 素帶한 일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내용.
答任大年 (7)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別幅으로 지적한 말이 각박하게 된 것에 대해 해명하고 더욱 讀書 窮理한 뒤 절충하기를 청하라는 내용.
與任大年 (8) 1691.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東儒師友錄≫의 작업 진행상황을 묻고 師友의 義理가 중한 것을 보려는 것이니 더욱 경계하여 살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
別紙 (8)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儒者들이 자신의 글을 수습하는 것의 정당성과 자신이 저술을 하는 이유 등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任大年 (9) 任元耈에게 ≪淵源錄≫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편지.
答閔春卿 (10) 1681.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書院에 제향하는 인물에서 趙錫胤이 배제된 이유를 해명하고‚ 書院과 祠宇는 道學과 鄕賢 여부 등을 명확히 구분하여 폐단을 막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閔春卿 (11) 1687.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出處와 時議에 대한 의견‚ 先儒들의 성씨와 행적을 살필 자료와 그 자료의 취사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閔春卿 (12)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경서를 읽는 차례‚ ≪小學≫이 集說을 위주로 한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 (12) 1673. 金榦에게 답한 편지. 攝行할 경우 攝主하는 이의 妻를 우선 主婦로 하라는 내용.
答金直卿仲固-栽 (12) 1674. 金榦과 金栽에게 답한 편지. 衰絰의 正服을 입은 것이 아니라면 君喪을 당해 복을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
答金直卿仲固 (13) 1675. 金榦과 金栽에게 답한 편지. 閔愼이 유배된 상황에서 어떤 결과에 이를지 모르겠고 자신도 편안히 있기 어렵다는 처지를 전하는 내용.
答金直卿 (13) 1681. 金榦에게 답한 편지. 四書諺解의 修正‚ 禫祭할 날을 가리는 문제‚ 國恤時 출입할 때의 복색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金直卿 (14) 1682. 金榦에게 답한 편지. 형제 모두 가정의 바램에 따라 과거에 마음을 두어야 할 상황에서 編禮 등을 도와 준 것에 사례하고 凡例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金直卿 (15) 1684. 金榦에게 답한 편지. 과거 응시의 득실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仲固 (16) 1686. 金榦과 金栽에게 답한 편지. 스승에 대한 服制의 淵源과 근거에 대해 고증하는 내용.
答金仲固 (16) 1674. 金栽에게 답한 편지. 鄭汝昌의 학문에 대한 평가‚ 출처의 의리에 대해 밝히고‚ 金榦이 涵養에 독실한 나머지 강학하고 토론하는 일을 폐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
答金仲固 (17) 金栽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태도를 논하고 스승의 일로 상소하는 것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18) 1672. 金楺에게 性과 太極의 관계‚ 中和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편지.
答金士直 (18) 1673. 金楺에게 답한 편지. ≪小學≫의 중요성‚ 학문과 수양의 태도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19) 1674. 金楺에게 답한 편지. 예설이 명백하고 엄정하지만 文義와 논설에 치우치지 말고 居敬持志의 實質에 마음을 둘 것을 권하는 내용.
答金士直 (20) 金楺에게 답한 편지. 變禮를 논해 국가에는 근심을‚ 山林에게는 수모를 끼치게 한 것을 반성함. ≪近思錄≫의 의심스런 조목과 江左에 있는 선비들의 소식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 (21) 1676. 金楺에게 답한 편지. 几筵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하는 이유‚ 成服할 때에 朝哭과 朝奠하는 일‚ 靈床을 거두는 일 등 상례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金士直 (21) 金楺에게 보낸 편지. 金榦 형제와 講學하는 즐거움과 기대를 전하고 일상생활에서 操存涵養에 더욱 힘써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金士直 (22) 1681. 金楺에게 답한 편지. 과거 응시 여부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속된 무리를 본받아 喪次에서 급급하게 응시하지는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
與金士直 (22) 1682. 金楺에게 보낸 편지. 門人들에게 어지러운 때를 당해 독서를 통해 각자를 잘 단속하여 爲己之學에 힘쓰고 國事에 대해 물으면 가벼이 답하지 말라고 단속하는 내용.
答金士直 (23) 金楺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日記 중 白仁傑이 撰한 것에 대한 처리‚ ≪孟子≫에 나오는 出處의 도리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 (24) 1684. 金楺에게 답한 편지. 沈俔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감회와 회고‚ 禫祭의 시행 여부‚ 서울 주변의 時勢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金士直 (24) 金楺에게 보낸 편지. 正學을 하다가 時文과 詞章에 들어가는 것은 喬木이 산 속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金士直 (25) 1685. 金楺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처신에 관한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金士直 (28) 金楺에게 답한 편지. 과거 응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金士直 (29) 金楺에게 답한 편지. 銀臺(승정원)에 다시 들어가게 된 일‚ 孝宗 시절의 일 등 자신의 거취 문제를 해명하고 趙光祖의 ≪靜菴集≫ 교정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30) 1689. 金楺에게 답한 편지. 더욱 몸을 살피고 덕을 닦기를 바란다는 내용.
與金士直 (30) 1690. 金楺에게 보낸 편지. 讀書記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科擧에 대해 어떻게 조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敎法要旨>를 보낸다는 내용.
答金士直 (32) 金楺에게 답한 편지. 立志를 절실하게 할 것을 강조하고 근래 詞章과 科擧와 仕宦 등의 일로 처음 세운 뜻이 없어질까 우려되니 내실을 돈독히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또한 朴知誡의 ≪潛冶遺藁≫ 교정 상황을 물음.
答金士直 (34) 1691. 金楺에게 답한 편지. 韓聖輔와 관련된 變禮 문제에 대해 別幅으로 의견을 보내니 자세히 살피라고 부탁하는 내용.
答金士直 (34) 金楺에게 답한 편지. 김유의 외할아버지 李義吉의 墓道文字를 찬하는 일로 章陵의 典禮에 대한 金長生과 朴知誡 사이의 논란을 해명함. 김유에게 ≪東儒師友錄≫ 교정을 부탁함.
答金士直 (35) 金楺에게 답한 편지. 김유의 외할아버지인 李義吉의 墓道文字를 찬하는 일로 李珥와 成渾을 推尊했다는 구절 및 이의길이 관여한 전례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與李猶龍-之老 (36) 1672. 李之老에게 보낸 편지. 義理之學에 종사하는 태도를 논하고 의리의 權衡을 갖출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吳子順-遂昌 (37) 1675.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西韃의 시끄러운 소식을 염려하고 요새 무슨 책을 읽는지 묻는 내용.
答吳子順 (37)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家禮의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한 문목에 답한 것을 보내었다고 전하고 더욱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吳子順 (37) 1678.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海西의 학자들이 科擧에만 매달리는 것에 대한 염려 등을 전하는 내용.
答吳子順 (38) 1686. 吳遂昌에게 보낸 편지. 科擧에 집착하지 않음을 칭찬하고 병이 좀 나았을 때 舊業을 수습하여 5書 및 ≪心經≫·≪近思錄≫을 玩味하라고 권하는 내용.
與崔士溫 (38) 1678. 崔瑞吉에게 보낸 편지. ≪心經≫을 標錄하는 일을 끝냈다는 소식을 전하고 海西에 있는 이들이 科業에 구애되거나 가난과 병으로 스스로 분발하는 기세가 없는데 이 근심을 면하게 할 사람이라며 격려하고 李行泰가 내려갈 것이니 서로 만나보라는 내용.
答崔士溫 (39) 1680. 崔瑞吉에게 답한 편지. 朝命을 받고 아직 거취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과 李時春과 ≪心經≫ 標題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묻는 내용.
與崔士溫 (40) 1691. 崔瑞吉에게 보낸 편지. 조용한 때를 택해 공부하러 찾아오기를 권하는 내용.
答朴一和-尙淳 (40) 1675.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저술을 纂輯하는데 善寫해서 도와 줄 이가 없다는 소식을 전하고 거상 중에도 학문 탐구에 더욱 뜻을 두기를 권함. ≪小學≫과 喪禮를 수정한 것을 보내며 의논할 곳이 있으면 다시 반복하여 살피자는 내용.
答朴一和 (41) 1677.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姜錫朋과 함께 ≪家禮≫를 講했다는 소식에 자세하게 할 것을 권하고 ≪近思錄≫을 독실히 볼 것과 標題 수정한 것으로 강하면서 본대로 평해 주기를 청한 내용.
答姜叔重 (41)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딸이 23세이면 시집가야 한다는 ≪儀禮≫의 疏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학문의 進步와 학문에서 사우들의 역할에 대해 답한 내용.
答姜叔重 (42) 1678.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近思錄≫ 공부를 위한 방법을 권하고 李滉의 ≪心經口訣釋義≫에 標題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청하는 내용.
答姜叔重 (43) 1691. 姜錫朋에게 답한 편지. 病 중의 공부에 대해 의견을 전하고 師友의 도가 무너져 서울의 後生들이 서로 비판하는 병통을 염려하는 내용.
答鄭慶由-纘輝 (43) 1676. 鄭纘輝에게 답한 편지. 先先生 碑文 내용 중의 出處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宋質夫 (44) 1677.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大學≫과 ≪大學或問≫ 공부에 대한 내용.
答宋質夫 (45) 1681.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사액을 받은 北祠에 배향된 인물을 보고없이 멋대로 교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전하고 金宇顒 등의 인물됨‚ 書院과 祠에 배향될 조건의 차이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宋質夫 (46) 1691.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史論에 대한 편집의 진행을 묻고 ≪東萊博議≫에 대한 평가‚ 胡傳과 ≪唐鑑≫의 기록 여부 등 편집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내용.
答金叔涵-載海 (46) 1677.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朱熹가 말한 바 학문하는 이들이 讀書하여 存養한 뒤 바른 곳에 나아가 是非를 증명하는 것도 하나의 道인데‚ 沈世熙나 金榦의 형제들이 여기에 뜻을 두고 있다는 내용.
答李雲卿 (1) 1687.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뜻이 너무 큰 데 있는 것 같으니 朱子가 말한 ‘병통이 무엇인지 알면 그 약을 쓸 것’이라는 말에 따라 공부에 힘쓰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李雲卿 (1)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전하는 말에 상례 치르는 동안 童蒙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專一할 수도 없고 기운이 약해 병을 부를 수도 있고 讀書에 방해될 것이니 경계하라는 내용.
答李雲卿 (2) 1688. 李志逵에게 답한 편지. 鄭齊斗가 陽明學에 빠져 그 병통을 고치기 어려운데 자신의 견해를 알렸으니 그 잘못을 고칠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
答朴大叔 (2) 1677. 朴鐔에게 답한 편지. 蓬山에서 講學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를 격려하는 내용.
答朴大叔 (3) 朴鐔에게 답한 편지. 근래 학문하는 자의 名實이 문란해진 것을 우려하는 내용.
答朴大叔 (5) 1680. 朴鐔에게 답한 편지. 師友의 도가 폐해져 깨우쳐 경계하여 주는 이가 없는 때에 깨우쳐 준 것에 감사하고 ≪小學≫과 ≪大學≫에 더욱 힘쓰기를 권하는 내용.
答朴大叔 (6) 朴鐔에게 情에 지나치게 되는 병통과 博文廣知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하여 답한 편지.
答朴大叔 (7) 1681. 朴鐔에게 답한 편지. 송시열이 있는 자리에서 의논을 발해 세속의 시비에 말려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숨기고 겸손한 공부에 뜻을 두라고 충고하는 내용.
答朴大叔 (7) 朴鐔에게 답한 편지. 명승 속에 드나들면서도 時事에 간여하는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것은 위태로운 기상이니 안정하며 공부하라고 충고하는 내용.
答朴大叔 (8) 1690. 朴鐔에게 답한 편지. 國喪 때의 제사 의절과 饌品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權季文-尙游 (8) 1678.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李侗의 看中의 설에 대해 불교의 觀心과 비교한 李滉 등의 설을 들어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
答權季文 (9)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程顥와 程頤 형제의 甥女의 歸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權季文 (10)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太極 全體의 설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仁甫 (11) 1680. 토지신에 대한 제사의 복색과 절차‚ 明器의 사용 여부‚ 臘日祭 등의 문제에 대해 李時春에게 답한 편지.
與李仁甫 (12) 1682. 李時春에게 상을 치르는 중에도 몸을 잘 보존하기를 권하는 편지.
答李仁甫 (12) 1686. 李時春에게 답한 편지. ≪小學≫과 四書·≪家禮≫·≪心經≫·≪近思錄≫ 등을 깊이 읽고 그것을 체득하여 誠을 주로 삼아 敬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
與李君輔 (13) 167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억울함을 發明하겠다는 의견을 낸 것이 어그러진 것에 안타까움을 전하고 ≪近思錄≫ 등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격려하는 내용.
答李君輔 (14) 1678.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罷榜 등으로 인해 儒士들이 失脚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수년간 近畿의 집에 머물며 안정하여 학문할 것을 권하는 내용.
答李君輔 (16) 1680. 부모의 상과 왕의 상이 겹쳤을 때의 복제와 제사에 대하여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16) 1681. 금일의 時勢에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서 출사하여 벼슬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16) 1682.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여자의 상에 남편 쪽 사람만이 主喪할 수 있다는 것 외에 題主‚ 제사 때의 순서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 (17) 1685. 수령으로 나가 백성을 다스리느라고 강습할 틈이 없다고 한 말을 경계하고 수령으로서 진휼에 임할 자세 등에 대해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18) 1690.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상에 素帶하고 加麻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李世龜의 병‚ 鄭齊斗의 陽明學‚ 閔以升 등의 학문 태도에 대한 염려 등을 전하는 내용.
答李君輔 (19)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小學≫을 근본으로 삼아 居敬을 위주로 하여 먼저 큰 것을 세울 것을 당부함. 李珥가 동방에 格致하려는 선비가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자신이나 친구들이 모두 實이 부족했다고 한탄하고 李世龜가 大學格物說을 논한 卷軸을 보았으면 한다는 내용.
答李君輔 (21) 1691.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鄭齊斗가 王陽明의 학문에 빠져들어 왕양명의 학문을 崇禮門에‚ 주자를 敦義門에 비견하고 있다는 것 등을 염려함. 그에게 보였던 <陽明學辨> 1통을 보내니 나머지 무리에게도 너그러이 대하지 말고 꾸짖어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李壽翁-世龜 (22) 1675. 李恒福의 후손인 李世龜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비에 새길 草藁의 일을 의논하고 文辭를 업으로 삼고 功名을 취하려는 풍조를 경계하는 내용.
答李壽翁 (23) 1679.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練祭 뒤 새벽에 哭하는 문제 및 학문의 至訣과 要道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 (24) 1680.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母后와 坤殿의 卒哭 전의 사대부가의 제사 문제에 대해 여러 설을 들어 고증한 내용.
答李壽翁 (25) 1682.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婦人의 칭호는 남편의 實職을 따라야 한다는 설‚ 新舊의 葬禮에 각각 제사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壽翁 (26) 1686.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이세구의 아버지 墓表의 일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알리고 과거 응시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李壽翁 (27) 1687.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文士의 弊習을 경계하는 내용.
答李壽翁 (27) 1688.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國恤 卒哭 후에 昏禮와 冠禮를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 (27) 1691.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通典≫<禮部>와 ≪五先生禮說≫을 합하여 편찬한 ≪六禮疑輯≫ 교정작업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전하고 格物說에 대한 입장을 밝힌 글을 보낼 것이라는 내용.
答兪顯叔 (28) 1678.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小學≫을 따라 공부할 것을 권유함.
答兪顯叔 (28) 1682.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典祀의 升黜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李世弼의 상소가 나오자 자신을 의논의 근원으로 지목하고 있다며‚ 許衡의 출처에 대한 李滉의 의논과 이에 대한 宋時烈의 비판 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내용.
答兪顯叔 (29) 1684.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哭泣이 부당하다는 설‚ 正筋의 의미‚ 祭禮에서 進茶 후 밥을 섞는 의절의 적용 여부‚ 廬墓 제도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한 의견.
答兪顯叔 (29) 1685.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祥祭 뒤에 쓰는 網巾의 제도‚ 懷尼 是非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그 경과에 대한 내용.
答兪顯叔 (30) 1686.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文詞를 숭상하는 것은 道를 해치는 것으로‚ 讀書하여 의리를 깊이 체득하여 행할 것을 권유함.
答李士亨 (31) 1681. 선비들이 학문하면서 기질의 치우침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答尹惠甫-志和 (32) 1686. 尹志和에게 답한 편지. 보여준 <絜矩章圖>의 그림이 자세하다는 칭찬과 함께 일부 글자와 내용의 분절 등에 대해 교정하여 주는 내용.
答尹惠甫仲深-志源 (32) 尹志和와 尹志源에게 답한 편지. 祖父母의 服制 중 과거에 응시하는 문제에 대해 부형에게 물어서 하되 중점은 조부모의 상에 두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季晦 (33) 1681. 申曄에게 답한 편지. 왕에게 올렸던 ≪心經釋義≫를 돌려 받아 增刪하는 일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부제학에게 전해달라는 내용.
答宋德普-淳錫 (34) 1691. 宋淳錫에게 답한 편지. 전쟁에 임해서 처하는 도리에 대한 의견.
答金仲和-昌協 (35) 1682.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金壽增이 어린 자식의 상을 당한 것을 위로하고 開元禮 등을 근거로 요절한 사람의 상례 절목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南子聞-鶴鳴 (35) 1676. 南鶴鳴에게 답한 편지. 朱熹 학문이 文義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면서 吳氏를 근거로 들었는데‚ 王安石 계열인 오씨의 학문은 陸九淵을 위주로 하여 왕안석보다 폐해가 더 큰 인물이었다고 비판하는 내용.
答兪寧叔 (37) 1683.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상소를 올린 일로 慈聖에게 누를 끼칠까 근심하고 있으며‚ 또 분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忌墓와 練祥 등의 절차에 대한 의견내기를 사양하고 別幅으로 올린다고 밝힘.
答金子懷-洪福 (37) 1691. 金洪福에게 답한 편지. 定州에서 인편을 통해 편지와 물건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고 변방의 외임은 解免할 길이 없으니 일단 나아가라는 내용.
答柳集仲-成運 (38) 1685. 柳成運에게 답한 편지. 國恤時에 개인의 상제례를 물려 행하는 일과 <忠正堂記>를 아직 쓰지 못했다는 내용.
答李子文 (38) 1691. 李東郁에 답한 편지. 외직에 나가서 닥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위로하고 잘 대처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別紙 (39) 李珥의 <箕子實記> 외에 기록이 소략한 箕子의 사적을 모아 安州牧에 부탁하여 ≪範學全編≫을 펴내게 된 경위와 기자의 치적 등에 대해 기술한 내용.
答閔彦暉-以升 (40) 1682.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선비들이 과거 공부와 벼슬에만 뜻을 두는 것을 염려하며 石室에 거처하며 공부하는 것을 격려하는 내용.
答閔彦暉 (41) 1687.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鄭齊斗의 陽明學 경도에 대한 비판.
答閔彦暉 (42) 1690.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衿陽의 講學 소식을 들었다며 기쁨을 전하고 許晦仲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전하는 내용.
答閔彦暉 (42)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許晦仲이 산 속에 들어간 것이 老莊의 放曠하는 풍조에 흐를까 염려하는 내용.
答權質甫-益文 (43) 1682. 權益文에게 답한 편지. 居敬窮理 공부를 강조하고 이를 요령있게 설명한 成渾의 ≪爲學之方≫이란 책이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함.
答權質甫 (44) 1686. 權益文에게 답한 편지로 마음 수양에 대해 논하는 내용.
答崔漢臣-是翁 (45) 1690. 崔是翁에게 답한 편지. 독서가 실제의 공부로 이어지지 못하면 多讀할지라도 책은 책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일 것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李玉汝-惟材 (1) 1682. 李惟材에게 답한 편지. 시어머니 服喪 기간에 見姑하는 예‚ 시집가고 장가가는 나이에 차이를 둔 이유 등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
答李季成-世勉 (1) 1686. 李世勉에게 답한 편지. 初忌日과 初喪이 겹쳤을 때에 초상의 날짜를 물리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季成 (2) 1688. 李世勉에게 답한 편지. 慕華峴 북쪽 길 곁에 엎어져 있던 楊經理의 去思碑를 다시 세우는 일은 청나라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라 피해야 할 것이니 가까운 곳에 별도로 세워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士粹-彦純 (2) 1691. 李彦純에게 답한 편지. 遺命이 중하기는 하지만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하니 사당에 유명을 따르지 않은 사유를 고하고 立後하도록 하라는 내용.
答李士粹 (3) 李彦純에게 답한 편지. 먼저 큰 뜻을 세우고 存心에 힘쓰는 것을 공부의 근본으로 삼고 난 뒤 讀書하여 窮理할 것과‚ ≪擊蒙要訣≫에 이은 ≪小學≫ 및 ≪大學≫의 공부와 ≪近思錄≫을 공부할 것 등에 대한 내용.
答李常卿-尙恒 (4) 1690. 李尙恒에게 답한 편지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논한 내용.
答羅仁卿-斗甲 (5) 1687.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학문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데 대해 朋黨의 폐가 고질이 되고 師友의 도가 무너져 학문을 하는 이를 비웃는 상황임을 말하고‚ 처음의 뜻을 돈독히 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성내지 않게 된 뒤에 다시 물어오면 답해 주겠다는 내용.
答羅仁卿 (6)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黨比하는 습속이 강학에도 방해가 될 것임‚ 動靜사이의 공부에 대한 내용.
答羅仁卿 (6) 1689.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독서와 궁리를 먼저 한 뒤에 致知가 밝아지고 행하는 것이 더욱 독실해질 것이니‚ 朱熹가 先後에서는 知를 먼저 하되 輕重에서는 行을 중하게 본 것은 바로 이같은 뜻이었다는 내용.
答柳道卿-貴三 (7) 1687.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心經≫은 放心을 모으고 德性을 높이는 요령으로 存性의 방도일 뿐인데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 어렵다는 내용.
答柳道卿 (8) 神主‚ 喪服의 制度를 잃었을 경우‚ 어린아이의 杖‚ 葬禮에 地灰를 쓰지 않는다는 설 등에 대해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答柳道卿 (8) 1688. ≪中庸≫과 ≪大學≫을 마치면 먼저 ≪論語≫와 ≪孟子≫의 大註를 通讀할 것을 권하고 吉祭를 행할 시기 등에 대해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答柳道卿 (9) 1689.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景賢錄과 退溪에 대한 기록을 梁君 등과 講習하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
答柳道卿 (9) 1690. 柳貴三에게 답한 편지. 朱子의 서신에 대한 공부에 진력하고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는 내용.
答黃擧卿-翊良 (10) 1688. 黃翊良에게 봄이 지난 뒤 틈을 내어 서당에 올 것을 권하는 내용의 편지.
答高益之 (10) 1687. 高益謙에게 답한 편지. 서원에서 무슨 책을 강습하고 있는지 묻고 汝良과 잘 사귀며 서로 힘쓰도록 격려하라는 내용.
答金希敬-道元 (10) 1688. 金道元에게 답한 편지. 서책을 공부하더라도 沈潛하여 玩味하고 의리를 涵養하는 공부를 할 것을 말하고 崔柱河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黃汝器-埴 (11) 1689. 黃埴에게 답한 편지. 학문은 평생의 사업이니 우선 ≪擊蒙要訣≫을 더 玩味하고 居敬·窮理·力行을 학문의 宗旨로 삼아 體驗하고 수양하라는 내용.
答李秀夫 (12) 1687. 李萬挺에게 답한 편지. 학문한다는 것은 병통을 살펴 바로 잡는 것이며 이에는 主一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권하고‚ 성인이라 할지라도 精一한 공부가 있는 뒤에야 道心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격려하는 내용.
答李秀夫 (12) 1690. 李萬挺에게 답한 편지. 心卽理說은 陽明이나 禪家에서 宗旨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경계하고‚ ≪周易≫을 읽을 때 初學하는 사람이 本義의 占치는 것에 빠지면 현혹될 것이라며 鄭逑가 宣祖에게 했던 말을 들어 경계하는 내용.
答李秀夫 (13) 1691. 李萬挺에게 답한 편지. 敬字의 뜻에 대해 설명하고‚ 독서의 차례로 우선 ≪小學≫과 ≪大學≫을 읽고 ≪論語≫·≪孟子≫·≪詩經≫·≪書經≫을 읽은 다음 ≪周易≫과 ≪春秋≫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함.
答兪濟卿-楫 (15) 1691. 兪楫에게 답한 편지. 成南平의 喪에 孫의 복제로 小功도 이미 잘못이니 易月이나 8세 이하에 服이 없다는 것 등은 아예 논할 것이 못된다는 내용.
答崔平甫 (15) 1691. 崔衡에게 답한 편지. ≪小學≫을 마친 뒤 ≪心經≫과 ≪家禮≫ 등의 책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스스로 힘쓸 것‚ 講目에 대한 저술을 소개하고‚ 宋時烈과 尹宣擧 사이의 일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 내용.
答崔平甫 (16) 崔衡에게 답한 편지. 집안에 슬픈 일을 당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 학문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金宇卿-普 (17) 1689. 金普에게 보낸 편지. 松都에 儒老가 없어 함께 공부할 만한 이가 없다고 하더니 학문과 과거를 둘 다 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격려하는 내용.
答黃季和-燮 (18) 1691. 黃燮에게 답한 편지. 海西에 있을 때 홀로 학문하겠다고 왔던 것을 격려하고‚ 主一無適의 공부를 더하면 병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권하는 내용.
答崔汝會-瀜 (18) 1690. 崔瀜에게 답한 편지. 要訣에서 가르치는 것은 持身을 독실히 하고 讀書를 부지런히 한 뒤에야 是非와 의혹을 가릴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生-南烈 (19) 1691. 金南烈에게 답한 편지. 학문은 ≪擊蒙要訣≫로 시작하고 소학과 대학을 종신토록 힘써 居敬工夫로 始終이 통하고 動靜이 합당한 이후에 다른 경전에 힘써야 함. 平壤의 黃翊良이나 定州의 金希敬과 왕래할 것을 권함.
答沈生- (20) 沈에게 답한 편지. 성중에서 師生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꺼리는 상황에 이른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李士安-熙靖 (20) 1690. 李熙靖에게 보낸 편지. 詩文이나 佛經 공부에 빠지지 말고 ≪小學≫·四書·≪心經≫·≪近思錄≫ 등 性理書를 공부하라고 권함.
答康道卿-世鳴 (21) 1684. 康世鳴에게 답한 편지. 스승의 상을 당한 것을 위로하고 加麻하는 제도의 環絰白巾의 복색과 기한‚ 長子를 위한 3년복의 범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
答尹君弼-遇成 (22) 1672. 尹遇成에게 답한 편지. ≪家禮≫는 자세히 살펴 익숙하지는 않으나 큰 방도는 알고 있는 듯하니 ≪心經附註≫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心經≫ 공부 방법에 대해 밝힌 내용.
答李叔玉-世瓘 (23) 1672. 李世瓘에게 답한 편지. 학문이란 자신의 立志와 用工이 관건이지 반드시 스승이나 다른 사람을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
答李季通-潗 (23) 1691. 李潗에게 답한 편지. 科擧에 매달려 詞章에 힘쓰는 풍조를 비판하는 내용.
答李樂甫-賀朝 (24) 1689. 부모상 중에 죽은 자식의 복제 문제에 대해 李賀朝에게 답한 편지.
與任群玉-璟 (25) 1690. 任璟에게 보낸 편지. 안부를 묻고 자신의 진퇴 문제 등에 대한 생각을 전하는 내용.
答金生亨祉 (26) 1672. 金亨祉에게 답한 편지. 先祖의 유고를 보고 年譜 등의 일부 구절과 宋時烈 운운한 것에 이견을 표시하면서‚ 李滉과 李珥의 長處를 밝힌 내용.
答李存吾-紳 (26) 1675. 李紳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栗谷先生續集≫ 4책과 ≪外集≫ 3책의 편집경위를 밝힌 내용.
答李存吾 (27) 1687. 李紳에게 답한 편지. 중국에도 伯夷와 叔齊의 서원이 없으니 중국의 淸節祠의 예에 따라 사당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存吾安卞玉--兩君 (27) 1691. 李紳과 安에게 답한 편지. 海州의 伯夷와 叔齊의 사당에 대해 사당의 版題‚ 獻爵과 籩豆와 拜禮‚ 날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趙汝常-持恒 (28) 1688. 趙持恒에게 답한 편지. 趙翼의 행장은 일부 고쳤다는 소식을 전하고 다만 遺書에서 朱熹의 ≪四書集註章句≫를 고친 것은 儒家의 宗法에서 금기사항이기 때문에 中外에 널리 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그 서문을 쓸 수 없다고 거절하는 내용.
答趙汝常 (29) 1690. 趙持恒에게 답한 편지. 행장의 문자를 고치는 일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遺書의 跋文은 윤증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며 거절하는 내용.
答閔定甫-光益 (30) 1671. 代服의 문제에 대해 주자의 견해 등을 들어 閔光益에게 답한 편지.
答閔定甫 (31) 1673. 代服의 문제에서 논란이 된 題主와 祧遷에 대한 의견과 宋時烈과 의견을 조율한 경위를 閔光益에게 답한 편지.
答李善鳴-鳳朝 (32) 1677. 李鳳朝에게 답한 편지. 李恒 서원 중에 문하생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를 묻는 내용.
答李子益-萬謙 (32) 1673. 李萬謙에게 답한 편지. 奠禮의 절목 중 無官이라 한 것은 儒士를 가리킨 것이니 黑布巾 아닌 素巾을 쓰게 한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
答趙聖登-泰東 (33) 1673. 趙泰東에게 답한 편지. 追服할 때의 절차‚ 祥練의 예를 행하는 날짜‚ 几筵과 上食 문제 등 상례에 관해 답한 내용.
答趙聖登 (34) 1682. 趙泰東에게 답한 편지. 뒤에 후사가 된 사람이 추복할 때의 복제에 대한 내용.
答趙聖登 (34) 1690. 趙泰東에게 답한 편지. 尹拯과의 관계‚ 의논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비판 등에 대해 해명한 글.
答李儀卿-羽成-別紙 (35) 1685. 李羽成에게 답한 편지 別紙. 중국과 우리의 친족 범위와 通婚의 범위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石潭院儒 (36) 1687. 石潭書院 유생들에게 金長生을 追享하는 일에 대하여 이견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 주선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한 편지.
答六臣祠宇諸生 (37) 1682. 死六臣 祠宇의 諸生들에게 답한 편지. 사육신 사우의 位次와 稱號‚ 鄕貫 등에 대한 내용.
答靈光鄕祠諸生 (38) 1684. 靈光 鄕祠의 諸生들에게 답한 편지. 고을의 유생들이 尹宣擧의 서원 건립 및 尹煌의 合享‚ 尹宣擧의 追享 문제로 이견이 있다는데 뒷날 서로 싸우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내용.
答平壤諸生 (39) 鄕案과 鄕憲에 대해 의견을 구한 平壤의 유생들에게 답한 편지. 鄕憲 만으로 오랫동안 서로 싸우던 감정이 풀어질 수는 없으니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해서 忠信과 禮讓을 확충해나가라는 내용.
答洪生時萬 (40) 1685. 洪時萬에게 답한 편지. 仁賢書院의 懸板으로 程子의 <四勿箴>과 朱子의 <敬齋箴>과 <白鹿洞規>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崔生昪 (41) 1684. 崔昪에게 답한 편지. 서원을 세우려다 禁令으로 인하여 鄕祠를 세울 것인지‚ 옛 사당에 合享할 것인지 논의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或人 (41) 1658. 環絰 등 啓殯할 때의 복색 등 喪禮에 관해 의견을 밝힌 편지.
答或人 (42) 1689. 道問學을 지름길이라 하는 말의 의미‚ 知行의 竝進과 敬義를 夾持하는 공부‚ 實功에 힘쓸 것 등 학문하는 태도에 관해 의견을 밝힌 편지.
答或人 (43) 1691. 病을 잘 조섭하기를 부탁하고 병중의 공부에 대해 답한 편지.
與朴進士-之相 (1) 1669. 族譜의 增修 등에 대하여 朴之相에게 보낸 편지.
答朴稷山 (1) 朴稷山에게 답한 편지. 次子를 편애하여 동생에게 형의 뒤를 잇게 하려고 장자의 立後를 반대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니‚ 次子의 아들을 長子에게 立後하도록 설득하라는 내용.
與參奉叔兼示諸姪 (2) 숙부와 여러 조카들에게 보낸 편지. 朴尙衷 이래 선조의 업적을 추모하고 조카들에게 학문하는 태도 등에 대해서 권면하는 내용.
與經歷-世基-宗兄 (6) 1665. 朴世基에게 보낸 편지. 제사 때에 職銜과 旁題를 고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與林川宗兄 (6) 1670. 종형에게 보낸 편지. 5대조 신위의 祧遷 문제‚ 제례 의절에 관한 도설 등에 대한 내용.
與仲固兄 (8) 1672. 朴世堅에게 보낸 편지. 맏조카의 과거 합격을 축하하며 여러 조카들이 朴尙衷과 朴紹 이래 선조들을 계승하여 近習에 물들지 않고 있음을 기뻐하는 내용.
答季肯兄 (9) 1666. 祝辭 등에 대해 상의해 온 朴世堂에게 祧할 때 신주를 묻는 것이 옛 사람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답한 편지.
與季肯兄 (9) 1668. 朴世堂에게 보낸 편지. 중국에 가는 길에 ≪朱子家禮≫의 원류로 우리 나라에는 없는 책인 ≪溫公書儀≫를 구해 올 것을 부탁하는 내용.
答季肯兄 (10)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 外祖의 服을 입는 문제 등에 대해 별지에 의견을 밝히겠다는 내용.
別紙 (10)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立後하라는 명이 내려져 사당에 고했어도 本親의 복을 그대로 행하여야 하며 繼後한 외할아버지의 복제를 추후에 입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내용.
與季肯兄 (11) 1681. 朴世堂에게 보낸 편지. 선조 朴尙衷 대한 비문을 宋時烈에게 부탁하자는 내용.
答季肯兄 (12) 朴世堂에게 답한 편지. 선조 朴尙衷이 고려에 온 원나라의 사신을 물리치자고 한 것은 대명 사대 의리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송시열이 대명의리를 천명한 것이라고 비문에 쓴 것은 잘못이므로 고쳐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이 두 가지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
答晦元-世煜-弟 (15) 1664. 朴世煜에게 답한 편지. 아이가 어려 상례를 섭행할 때의 祝辭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晦仲弟 (16) 1663. 長子가 立後하고 난 뒤 次子로서 承重한 아들을 위하여 斬衰 3년복을 입는 것은 古禮에 맞지 않는다고 답한 편지.
與景時-世集-弟 (17) 1673. 朴世集에게 보낸 편지. 학문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科業만 일삼으며 流俗과 時文에 휩쓸리는 것을 경계한 내용.
答景時弟 (18) 1687. 慘傷을 당한 李僉樞家의 복제와 제사에 대하여 朴世集에게 의견을 밝힌 편지.
與城中諸宗姪及兩錦都尉 (18) 1676. 성중에 있는 여러 조카들 및 都尉들에게 보낸 편지. 사당의 관리와 제사‚ 제사에 참여하는 일 등의 규례를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내용.
答泰徵姪 (20) 1672. 朴泰徵에게 답한 편지. 安陰에 있는 선조의 무덤 관리하는 일‚ 고조부의 행장을 宋時烈에게 부탁하고 시호를 청하는 일‚ 族譜 문제 등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泰徵姪 (21) 1678. 朴泰徵에게 답한 편지. 근래 서울의 士風이 무너지고 동지들은 흩어졌는데 李世弼·兪晦一 등이 공부에 뜻을 두어 ≪心經釋義≫ 등을 함께 공부하고 있음을 전하는 내용.
答泰尙姪 (21) 1681.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見舅禮에서 폐백이 있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尙姪 (22)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선조의 諡狀 및 立碑 문제를 논하는 내용.
答泰尙姪 (23) 1684.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선영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염려하고‚ 족보를 만드는 일을 비방하는 의견에 대해 반론하는 내용.
答泰斗姪 (24) 朴泰斗에 답한 편지. 伯父에게 出後하여 증조의 종계를 이었을 때 생부의 神主를 처리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泰斗姪 (24) 朴泰斗에 답한 편지. 閔氏 5世 祖考妣와 작은 承旨公 묘와 한 岡에 있는 沈氏祖考妣를 祔廟할 때의 墓祭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斗姪 (26) 1680. 朴泰斗에 답한 편지. 妻의 기년복을 입은 자가 墓祭에서 三獻을 드린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與泰遜泰輔姪別紙 (26) 1681. 朴泰遜과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先祖 顯彰이 贈諡와 旌閭만 논의되고 있다는 말에 분묘 소재 고을에 사당을 세우게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淳姪 (28) 1678. ≪禮記≫ 등에 관해 朴泰淳에게 답한 편지. 서울 주변 인사들이 과거를 본업으로 삼아 경전을 자세하게 공부하지 않는 폐단 등에 대한 내용.
與泰輔姪 (28)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벌을 받게 된 것은 오히려 할 일을 행한 탓이라 격려하며 이 기회에 더욱 공부에 힘쓸 것을 권한다는 내용.
答泰輔姪 (29) 1681.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 朴尙衷이 올렸던 상소에 북원의 사신을 명백히 물리치자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과 宋時烈이 올린 글에 혐의를 두는 것을 반박하는 내용.
與泰輔姪 (30) 1682.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祀典에 대한 상소가 너무 과격하여 붕당의 피해가 가문에 미칠까 경계하는 내용.
答泰輔姪 (33)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 원나라와 명나라의 연호 사용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이미 이단을 숭상한다는 소문이 조야에 무성한 상황에서 비문에 옛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좋은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며 경계하는 내용.
答泰輔姪 (36) 1683.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 개성 사람의 일은 別幅에 자세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
別紙 (36) 朴泰輔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潘南 박씨라고 주장하는 朴而厚 등을 族譜에 別錄하는 문제‚ 松都의 祠宇의 설립에 따른 物力‚ 墓祭를 위한 제도의 정비‚ 潘南 박씨의 연원 등에 관한 내용.
答泰初姪 (39) 1685.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讀書箚記를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칭찬과 懷尼是非에 관한 입장이 師友의 도를 해치는데 이르지 않도록 태도를 신중히 하라는 내용.
與泰初姪 (40)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錦城의 祠宇에 高祖를 배향하게 된 것을 기뻐함. 讀書箚記를 본 소감 등을 토로한 내용.
答泰初姪 (41) 1687.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時事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錦城의 사당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묻는 내용.
與泰初姪 (41) 1689.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유배가 계속 되는 時事에 대한 감회‚ 士友의 消息과 동향에 대한 내용.
答泰初姪 (42)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世事에 대한 염려와 제자들의 동향을 알리고 文辭 위주의 학문 경향에 대한 염려 등에 대한 내용.
答泰初姪 (43) 1691.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大學後問>을 받아 보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小學≫·≪大學≫·≪中庸≫·≪近思錄≫의 讀書記와 ≪心經≫·≪家禮≫의 要解를 빌려 보되 정돈되지 않은 것이니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
與弼成族孫 (44) 1674. 族孫 弼成에게 보낸 편지. 楊山 小碑의 일에 대해 잊지 않고 있음을 알리는 글.
答弼成族孫 (44) 1680. 族孫 弼成에게 답한 편지. 君服이 있을 때의 私祭 여부에 대한 옛 도리와 현실의 차이에 대해 밝힌 내용.
答弼純族孫 (45) 1690. 族孫 弼純에게 답한 편지. 王父의 3년상 내에 손자의 喪이 생겼을 때 王父의 祔祭 여부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글.
答閔楊湖問-喪禮 (1) 練服의 제도 등에 대한 閔嶪의 질문에 대해 견해를 밝힌 내용.
答宋尤齋問-學 (2) 1681. 明史에서 太祖가 ≪尙書≫ 蔡傳의 天文에 착오가 있다고 한 구절에 대한 이해‚ 春王正月에 대한 王陽明의 설명 등에 대한 宋時烈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權說卿問-春秋 (4) 1667. 公羊 三世의 의미‚ 曹伯이 世子로 하여금 조회하게 하였다는 기사에 대한 해석 등 春秋의 기사에 대한 權說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李進士-后晟-問-祭禮 (6) 1689. 支子가 宗家와 다른 곳에 살고 있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을 때의 忌祭 祭禮에 대한 李后晟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金元會問 (7) 1651. 학문의 의미와 敬의 의미에 대한 金澄과의 문답. 敬이란 本體는 虛明하여 비어 있지만 眞實하게 되면 중심에 주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元會問-學 (7) 金澄과의 문답. 人心을 제어하고 道心을 확충한다는 말의 의미‚ 過不及이 惡으로 흘러간다면서 道心에 過不及이 있다고 한 말의 타당성 여부‚ 人心 및 道心과 七情의 관계‚ 中을 구하기 위한 공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元會問-學 (14) 金澄과의 문답. 過不及이 惡으로 흐를 수 있다는 말은 程顥와 朱子에게서 나왔으니 분명한 말이지만 過不及을 人心에만 소속시키는 것‚ 惡으로 흐른다는 것은 過에만 해당되고 不及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등은 정자나 주자의 본의는 아니라는 내용.
答南仲輝問學-喪禮 (15) 喪禮에 대한 南二星과의 문답. 奔喪을 계산하는 기준 및 小祥을 행하는 기준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의절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答金起之相問-學 (18) 1680. 金壽興과의 문답. 浩然之氣와 血氣‚ 道心과 人心‚ 性命과 形氣의 바름과 사사로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외에 주자가 말한 知言의 뜻‚ ≪孟子要略≫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지의 여부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季周問 (22) 1675. 李端夏와의 문답. 仁宣王后 小祥에 罷散된 이들과 土人들이 客舍 중문 밖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 외에 白帽 착용의 타당성 여부‚ 昏禮의 <設饌圖>에 나오는 것들의 구체적인 내용‚ <昏禮圖>의 소재처‚ 昏禮할 때 지낼 제사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季周問-浩然章 (23) 1677. 道義와 氣의 관계 등 ≪孟子≫ 浩然章에 대한 李端夏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養而問-禮 (24) 1663. 李之濂의 질문에 답한 글. 閏月의 의미‚ 전실과 후실을 제사에 배향할 때의 위치‚ 스승의 喪에 입을 복제‚ 從母의 남편과 舅의 妻의 복제‚ 成笙歌하는 날짜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問-國恤禮 (25) 1683. 國恤禮에 대해 尹拯에 답한 글. 國恤에서의 冠‚ 국휼 뒤의 혼인‚ 國葬이전의 私喪의 장례‚ 왕의 상중에 부모상을 당했을 때의 복제‚ 國葬 이전의 제사‚ 외방에서 임금의 상을 당했을 때 哭禮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問-國恤禮 (32) 1688. 國恤禮에 대해 尹拯에 답한 글. 李珥의 설과 金集의 설을 각각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設奠과 脫服 등에 대한 宋翼弼의 설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당의 俗節과 朔望奠을 행할 것인가? 奔喪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을 재론함.
答洪道長-受泰-問-禮 (35) 1674. 攝主한 뒤의 練祭와 祥祭 및 改題의 절목 등에 대한 洪受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洪邦叔-受濟-問-禮 (36) 1691. 洪受濟의 질문에 답한 글. 側室의 아들이 있는데 先庭에 죄를 지었다고 하여 조카나 從孫을 키워 奉祀하게 하거나 외손이 봉사하도록 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柳悠久問-禮 (37) 1685. ‘부친에게 복이 있을 때’라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한 柳尙運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美伯問-鄕飮酒禮 (1) 1680. 賓主를 맞이하여 서로 절하고 술을 따르는 일‚ 揖讓하고 俎豆를 물리는 일 등 鄕飮酒禮의 절차에 대한 崔邦彦의 질문에 답한 글.
答具濟伯問-喪禮 (4) 1682.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맏아들이 자신의 妻를 위한 제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具時經의 질문에 답한 글.
答趙士威問-喪禮 (6) 1665. 主祭할 嫡長姪이 承重服을 입고 있을 경우의 祔祭에 대한 趙得重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元-萬春-問-祭禮 (6) 1670. 祭禮에 대한 李萬春의 질문에 답한 글. ≪家禮≫와 ≪擊蒙要訣≫의 견해가 다른 忌祭의 齋戒 문제‚ 모친상에 아버지 대신 아들이 축문을 읽는 문제‚ 제사에 사용하는 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文憲-問 (7) 1660.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大功服 장례 전의 과거 응시 문제‚ 服喪 중의 복색‚ 外方에 있는 喪人의 형제가 치러야 할 禮‚ 奉祀할 범위 등 예에 관한 문제와 命과 分의 의미‚ 과거 응시의 義理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近思錄 (9) 1661. ≪近思錄≫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近思錄≫에서 ≪中庸≫이 ≪詩經≫과 ≪書經≫ 뒤에 있는 이유를 비롯하여 大畜 卦‚ 錙銖‚ 分限‚ 思慮‚ 四百四病‚ 存養‚ 簡編‚ 失節 등의 의미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近思錄 (11) ≪近思錄≫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禮樂刑政이 미치지 않는다’ ‘解額窄處’ ‘立春에 선조에 제사하다’ ‘機事’라는 구절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祭禮 (13) 1664. 성인이 되어 죽은 長子의 立後 문제와 先世의 제사를 반드시 장자에게 입후한 이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成子章問-家禮 (14) 1669. ≪家禮≫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昭穆‚ ‘節祀를 正宗으로 줄인다’는 말 등의 뜻과 笄禮를 宗婦가 아닌 모친이 주관하는 이유‚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는 말에서 부인이 지칭하는 것‚ 상제례의 복색과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心經 (21) 1665. ≪心經≫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知와 仁守를 精一에 分析하는 의의‚ 克己復禮에 대한 程子의 해석‚ 天理人欲에 대한 胡五峯의 설명‚ 孟子의 楊墨 배척에 대한 朱子의 견해‚ 索性이라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中庸 (26) 1667. ≪中庸≫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修道에서 修字의 의미‚ 和而不流한 君子를 덕을 이룬 군자라 할 수 있는가‚ 공자가 ‘九夷에게 가서 거하고자 한다’고 한 말의 의미‚ 鬼神의 情狀과 德‚ 祧遷과 昭穆의 제도‚ 誠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喪禮 (36) 1668. 喪禮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목욕한 뒤 復衣를 벗기는 절차‚ 繼母의 장례 전 生母를 改葬할 때의 儀節‚ 개장할 때 虞祭와 옛 무덤에서 柩를 꺼내는 의절‚ 喪人 출입시의 服制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汝九問-論語 (1) ≪論語≫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孝悌’ ‘巧言令色’ ‘學則不固’ ‘色莊’ ‘忠恕’‚ ‘述而不作’ 등의 의미와 ‘學稼(농사일을 배우는 것)’가 이단인가‚ 王安石에 대한 평가‚ 四敎의 범주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子望問-喪禮 (28) 1682. 復과 哭의 순서‚ 小殮 전의 弔服‚ 장자의 상을 당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하여 成服하는 시기‚ 殮의 절차‚ 조문할 때 주인과 客의 예 등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望問-喪禮 (29) 1683. 反哭한 뒤 묘에 곡할 때의 복색‚ 虞祭와 時祭의 절차‚ 부모의 상 중 이웃의 상에 대한 조문 여부 등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季通問-昏禮 (30) 1669. 昏禮 때 사당을 뵙는 절차‚ 시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시어머니만 계실 때의 見舅姑禮‚ 신부가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사당에서 뵐 때 고할 호칭‚ 신부가 사당을 뵙는 시기와 폐백 여부 등 昏禮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季通問-喪禮 (32) 1688. 모친의 練祭 전에 모친상에 主喪을 하던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에 題主와 축문의 호칭 변경‚ 練祭와 祥祭의 택일‚ 前喪의 祔祭를 행하는 순서‚ 모친과 부친의 合葬 절차 등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季通問 (34) 1691. 服喪 중 사망한 아버지 대신 아들이 代喪할 때의 절차‚ 부모가 같은 날 죽었을 때의 제사‚ 아들이 아버지와 신분이 달라졌을 때 제사‚ 蓋頭·七星板·沐浴·殮襲 등 상례 절차와 복색‚ 灰隔과 明器 등의 제도‚ 각종 상제례의 祭奠 등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權致道問-學 (1) 1681. 四端七情에 관한 李珥와 朱熹의 설에 대한 이해 기준‚ ≪大學≫의 正心에 대한 體用 위주의 경전과 心의 用 위주의 章句에 대한 이해 기준을 물은 權尙夏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近思錄 (1) 1666. ≪近思錄≫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太極而無極’ 註의 ‘上天之載’의 해석‚ 陰陽의 동정을 通·善·復·性으로 설명하는 문제‚ 陰陽과 五行을 병칭하는 이유‚ 仁義·陰陽·剛柔의 體用 구분‚ 善惡과 陰陽의 분별 등에 대한 내용.
答沈龍卿問-喪禮 (8) 1666. 喪 중의 忌祭와 墓祭‚ 묘에서의 壓尊‚ 생신에 지내는 제사 등 喪禮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近思錄 (8) 1666. ‘元은 善의 長이다’‚ ‘舜이 천하를 가졌으나 간여하지 않았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虛實은 動靜의 機요 陰陽은 剛柔의 시작이다’‚ ‘귀신은 二氣의 良能이다’는 구절등 ≪近思錄≫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 (15) 1680. ≪範學全編≫ 첫 머리에서 河圖를 뺀 이유‚ ≪春秋補說≫ 서문에서 程子를 程氏라고 쓴 이유 등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家禮 (17) 1682. 사당에 신주를 봉안하는 의절‚ ≪家禮≫<祭饌後說>에 나오는 俗節 및 속절 제사의 素饌 사용 여부‚ 冠禮의 복색과 의절 등 家禮에 대한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喪禮 (22) 1683. 喪禮에 대한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복상 중 왕의 喪을 당했을 때 상복을 벗는 시기‚ ≪春秋公羊傳≫과 ≪書傳≫에 나오는 殷祭의 의미‚ ‘오랫동안 장사하지 않았다’는 구절의 의미‚ 適子와 支子가 지내는 제사의 차이‚ 흉년시 犧牲을 줄이는 것의 타당성 등에 대한 내용.
答崔文叔-奎瑞問-喪禮 (1) 1682. 喪禮에 대한 崔奎瑞의 물음에 답한 글. ≪家禮≫에서 갓끈에 대해 규정하지 않은 이유 및 練服‚ 斬衰의 絞帶‚ 葛絰의 大小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崔文叔問-喪禮 (1) 1683. 왕에 대한 服喪 제도 붕괴의 원인이 漢 文帝의 短喪이었다는 것 등 喪禮에 대한 崔奎瑞의 물음에 답한 글. 관직 有無와 왕에 대한 복제 문제‚ 君母의 상 중 형제에 대한 服喪 문제‚ 國恤 중의 국가 祀典 및 혼인에 대한 내용.
答李景源-河-問 (4) 1667. 李河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曲禮>의 ‘立必正方’과 ≪禮記≫<將適>의 ‘思對命’의 의미‚ ‘부족한 것은 말할 때가 아니라 그 말이다’는 구절의 의미‚ 家禮에서 아버지 神主에 자색을 쓰는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李景源-河-問-喪禮 (6) 1668. 喪禮에 대한 李河의 질문에 답한 글. 할머니에 이어 부모가 연이어 돌아가셨는데‚ 練祭 후 承重한 장손 마저 죽고 장손의 아들은 아직 어릴 때의 복제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論語 (8) 1667. ‘事物所以當然之故’라고 하고 ‘事物所以當然之理’라 하지 않은 까닭‚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의 뜻 등 ≪論語≫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沈明仲問-論語 (13) 1667. ≪論語≫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片段을 이루어 成章했다고 할만한 공자의 제자가 누구인가를 비롯하여 褻慢한 紅紫色을 朝服으로 삼은 이유‚ 공자의 나이 고증‚ 臧文仲에게 ‘文’이란 시호를 내린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孟子 (18) 1669.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孟子가 스스로 지었다면서 ‘孟子曰’이라 쓴 이유‚ 顔子의 ‘말하지 않아도 교화됨’과 맹자의 ‘큰 敎化’의 차이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孟子 (22) 1670.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楊朱에 대한 程子 註의 의미‚ ‘放淫辭’의 뜻‚ ‘自得居安’에 대한 ≪孟子≫와 ≪大學≫의 의미 차이‚ ‘博文約禮’의 約이 지칭하는 것 등에 대한 의견과 ≪孟子≫ 내의 誤脫字 등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問-小學 (25) ‘古者小學’의 古를 ≪小學集說≫에서 夏商이라 했는데 ≪小學集註≫에서는 빼버린 이유‚ ‘親友之道’에서 ‘道’字와 ‘化與心成’의 ‘化’字의 뜻‚ 大學發揮와 ≪小學≫ 편집의 先後 등 ≪小學≫의 해석‚ 내용상의 혼란‚ 刊本 사이의 正誤 문제 등에 대한 沈世熙의 물음에 답한 내용
答沈明仲問-小學 (32) ‘漿醋水’의 醋가 지칭하는 것‚ ‘情이 動한 것을 欲이라 한다’ 등의 의미‚ 五行·人事·天道와 陰陽動靜의 관계 등 ≪小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大學 (36) 1675. 心과 明德을 나누어 말한 이유‚ 五行·五常·五臟의 분속‚ 正心과 動靜의 관계‚ 衆人의 의미‚ 平天下章에서 誠正 만을 말한 이유 등 ≪大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近思錄 (39) 1675. ‘無極而太極’에서의 ‘極’‚ 善惡貴賤과 陰陽動靜의 先後와 體用‚ 태극과 음양의 동정‚ ‘人物에 품수된 이후에 性이라는 이름이 있다’에서 理 대신 性이라고 한 까닭‚ 主靜說 등 ≪近思錄≫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 (1) 1682. 沈世熙에게 답한 글. ≪中庸≫의 首章과 2章의 對說‚ 章句序의 分節‚ 사람의 형성에서 理와 氣‚ ‘天命率性則道心’에서 道心과 道의 관계 등 ≪中庸≫에 관한 질문과 ≪心學至訣≫의 편차 등에 대한 의견에 다시 답한 내용.
答沈明仲-昏禮 (8) 1689. 婿婦服의 변화‚ 納采와 納幣의 차이‚ 納吉이라는 용어의 부적절함‚ 여자의 꾸밈과 親迎할 때의 饌品 등 昏禮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祭儀 (9) 1691. 祭儀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敍立한다는 말의 의미‚ 龕의 구체적인 제도‚ 축문의 호칭‚ 焚香‚ 술잔 따르는 절차‚ 進饌‚ 土神祭의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白采叔問-喪禮 (13) 1668. 外孫奉祀 문제‚ 諱할 때의 남녀 구분‚ 承重孫의 妻를 위한 祖父母의 服制‚ ‘庶子의 妻를 위하여 主喪을 하지 않는다’는 규정의 의미 등 喪禮에 대한 白以受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士仰問 (14) 1680. ≪孟子≫가 食色을 중히 여겼다는 것에 대한 朱熹의 해석에 나타난 출처와 存亡의 의리‚ ≪孟子≫와 ≪中庸≫에서의 ‘性’의 의미 차이‚ 私親典禮에서의 小宗과 大宗 문제에 대한 의견 등 ≪孟子≫와 典禮에 대한 鄭齊斗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士仰問-喪禮 (18)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從姪의 喪을 섭행할 때의 題主‚ 虞祭와 祔祭의 주관자‚ 祔祭의 祝辭‚ 遷廳의 의미 등 喪禮에 대한 鄭齊斗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士仰再問 (21) 題主의 호칭‚ 祔祭 섭행시의 호칭‚ 부인의 섭행 여부‚ 卒哭 당시의 호칭을 바꾸어야 할 때의 祔祭 축문 등 喪禮에 대한 鄭齊斗의 재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喪禮 (23) 1669. 아버지가 계실 때 모친의 祥祭 뒤 上食·几筵·祔廟 문제 등 喪禮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喪禮 (27) 深衣 대신 中單衣를 사용하는 잘못‚ 居廬의 의미‚ 士의 望奠 여부‚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의 상에 대한 의절‚ 上食의 근거 등 喪禮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近思錄 (30) 1672. ≪近思錄≫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太極 流行의 묘함과 無窮함‚ 公·恕·愛의 순서가 있는데 葉氏가 恕愛를 公보다 먼저 풀이한 이유‚ 程顥가 ‘학문을 할 때 먼저 標準을 세운다’고 한 이유‚ ≪近思錄≫의 次序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問-孟子 (32) 1684. ≪孟子≫에 대한 李堉의 질문에 답한 글. 仁愛와 體用‚ 군자에게 있어서 仁民愛物의 難易‚ 梁 惠王과 齊 宣王의 동일한 질문에 孟子의 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 등에 대한 내용.
答李載叔問-易 (34) 1687. ≪易≫에 대한 李堉의 질문에 답한 글. 八卦 명칭을 만든 사람‚ 象의 의미‚ 90餘萬里 80里 13‚600餘息 등의 근거‚ 사람과 사물의 用舍‚ 閑邪의 뜻‚ 39板의 ‘進修惕厲’의 의미‚ 鬼神과 天地의 分別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同甫問-學 (40) 1681. 不動心과 養氣의 뜻 및 관계‚ 心의 개념 등에 대한 李喜朝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 (1) 1672. 張載 등 宋代 학자들의 主一工夫‚ 讀書와 靜坐 등을 통해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近思錄 (2) 1676. 五行과 陰陽의 관계와 動靜‚ 鬼神‚ ‘理와 氣가 합하여 氣質을 이룬다’는 말에 대한 李珥의 비판‚ 涵養·致知·力行의 순서‚ 博學의 의미‚ 無欲과 寡欲의 의미 등 ≪近思錄≫에 대한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大學 (17) 1676. 明德의 의미‚ ‘虛靈不昧’와 心‚ 格物과 物格에 대한 李珥 등의 說‚ ‘新民’ ‘進德’의 뜻 등 ≪大學≫의 해석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喪禮 (28) 1680. 小祥 때 練服 및 練冠‚ 腰絰의 제도‚ 卒哭 뒤 喪服의 變除‚ 絞帶의 제도 등 喪禮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 (32) ≪小學≫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면 23살에 혼인한다’는 말의 뜻‚ 張觀과 李若谷에 대한 기록의 고증 문제 등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 (33)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생애 고증‚ ≪大學≫ 本末章 大畏民志와 格致章에서 각각 知本이라는 말을 한 이유‚ 致知誠意와 知行의 관계‚ 誠意正心修身과 工夫의 功效‚ ≪小學≫<內則>의 ‘男鞶革’에서 ‘鞶’과 ‘博學不敎 內而不出’에서 ‘內而不出’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問-孟子 (1) 1681. 孟子가 子思의 門人인가에 대한 고증‚ ‘5畝의 집에 뽕나무를 심어 50이 된 자는 비단옷을 입게 한다’와 ‘仁者無敵’의 의미‚ 맹자가 齊나 梁에 간 까닭‚ 雪宮에서 齊 宣王을 만났을 때 나온 樂의 의미 등 ≪孟子≫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中庸 (6) 1683. 性情과 德行의 관계 및 ‘期月’‚ ‘治人’에서 ‘治’‚ ‘鬼神의 情狀’이라 할 때의 ‘情狀‚ ‘三恪’‚ ‘達孝’ 등의 의미 등 ≪中庸≫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中庸 (11) 九經의 效‚ ‘兩盡’ ‘不息則久’의 ‘久’字‚ ‘永終譽’와 ‘蚤有譽’의 ‘譽’의 의미 등 ≪中庸≫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浩然章 (13) 1685. 不動心의 의미‚ 大勇의 의미 등 ≪孟子≫ <浩然章>의 내용과 해석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喪禮 (22) 1691. 부인이 本生의 舅姑를 위해 입어야 할 복색‚ 孫婦가 남편을 위하여 本生의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를 위해 입어야 할 복색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仲固問-喪禮 (23) 1684. 할머니의 承重服 복상 중 조부모 및 부모의 무덤을 옮길 때의 복색‚ 遷葬과 할머니의 小祥이 겹칠 때의 기일‚ 연로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遷葬을 섭행할 수 있는지 등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仲固問-喪禮 (24) 1691.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상례에 소용되는 각종 복색의 제도‚ 喪禮의 각종 奠의 근거와 의절‚ 예에 부합하지 않는 祭儀를 돌아가신 지 3년 내에라도 고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近思錄 (30) 1676. ≪近思錄≫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乾이란 天이요 乾하다는 것은 하늘의 性情이다’ 라는 말에서 性情의 구분‚ 忠信의 의미‚ ‘生하는 것을 性이라 이른다’ 라는 말에서 性의 의미‚ 程顥 好學論 중 ‘中이 동하여 七情이 나온다’는 말과 程頤 定性書 중 ‘사람의 情에는 각기 가리운 바가 있다’는 말의 뜻‚ 군자와 소인의 구분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大學 (1) 1676. ≪大學≫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王公이하 서인의 자제가 소학에 들어가 배운다고 할 때의 王公의 의미‚ ≪管子≫ 弟子職의 의미‚ 明德·親民·至善과 知行의 관계‚ 絜矩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中庸 (3) 1680. ≪中庸≫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不偏이 中이다’ 할 때의 不偏과 動靜의 관계‚ ‘一陰一陽이 道이다’라는 말에서 道의 의미 및 道와 性의 관계‚ 三山 潘氏가 말한 發의 의미‚ 戒愼恐惧와 動靜의 관계‚ ‘活潑潑’ ‘責己’ ‘費隱’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金士直問-孟子 (11) 1680. 利에 대한 慶源 輔氏의 풀이‚ 造端托始의 뜻‚ ‘觳觫한 모습으로 죄도 없이 死地에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는 구절의 뜻‚ 志와 氣의 動과의 관계‚ ‘義襲’의 의미‚ 性情의 體用 및 明明德의 관계 등 ≪孟子≫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喪禮 (15) 1690. 할아버지 상에 입을 承重服의 절목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사람이 本生의 여러 친족에 입어야 할 복색 등 喪禮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喪禮 (16) 1691. 尹世休 장례 전에 長子 尹夏明도 죽어 하명의 아들 得莘이 承重하였는데‚ 다시 세휴의 아내가 세휴와 하명의 小祥 전에 죽었을 때 세휴의 아내를 위한 득신의 복제 기간과 상례의 의절 등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猶龍問-喪禮 (19) 1672. 喪禮에 대한 李之老의 질문에 답한 글.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모친을 祔葬했을 때 墓祭의 服飾‚ 卒哭 뒤 先世에 행하지 못한 제도의 사용 여부‚ 각종 상제례의 구체적인 의절과 복색의 제도 등에 대한 내용.
答吳子順問-家禮 (27) 1675. ≪家禮≫에 대한 吳遂昌의 질문에 답한 글. 寢廟의 기능‚ 樻의 용도‚ 冠婚禮를 행하지 못하는 경우‚ 관례의 의절과 位次‚ 挿衣와 飯含에 소용되는 물건‚ 緇冠을 쓰지 않는 이유‚ 袒·辟領·腰紩·大帶의 제도‚ 시집간 어머니 등에 대한 복제‚ 翣에 그린 亞字 및 雲氣의 의미‚ 제사에서 여자의 獻爵 등에 대한 내용.
答崔士溫問-家禮 (34) 1686. ≪家禮≫에 대한 崔瑞吉의 질문에 답한 글. ≪要訣≫에서 3대를 제사하자는 근거‚ 상례와 제사의 각종 의절‚ 喪禮에 참작할 禮書‚ 상례 각 절차의 쓰이는 복색의 제도와 근거‚ 부친 생존시 어머니를 위한 朞年服 등 각종 복제의 근거‚ 石人·望柱의 근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士章-綖-問-喪禮 (1) 살아 있을 때 肉饌을 쓴 亡母의 喪 중 素饌의 사용 여부‚ 朝夕奠의 魂魄 개폐 여부‚ 喪人의 盥洗‚ 어린아이의 服制‚ 槨 사용 여부 등 당시 흔히 행해지던 예들의 정당성에 대한 李綖과의 문답.
答朴一和問-小學 (5) 1675. 20세에 裘帛을 갖춘다는 구절‚ 30세에 아내를 둔다는 구절 등 ≪小學≫에 실린 내용의 구체적 적용 여부나 ≪小學≫의 字句 중 의심나는 부분에 대한 朴尙淳과의 문답.
答朴一和問-喪禮 (15) 啓殯時 絰의 추가 사용 여부‚ 中單·衰·新婦三月奠菜說의 타당성‚ 元妣와 繼室에 대한 祠版과 葬法‚ 喪中의 祀 등 喪禮에 관해 朴尙淳에게 답한 글.
答姜叔重問-詩 (16) ≪詩經≫<周南>의 <關雎>와 <漢廣> <秣其馬>의 해석‚ <召南> <何彼農矣>를 <周南>이 아닌 <召南>에 넣은 이유‚ 叶韻의 의미‚ 大序와 小序의 의의 등 ≪詩經≫의 감상과 해석에 대한 姜碩昌과의 문답.
答姜叔重問-改葬 (35) 姜碩昌과의 문답. 墓를 연 뒤 奠을 행할 때 靈座의 설치 여부‚ 考妣를 동시에 遷葬할 때의 奠과 上食‚ 虞祭 실시 시기‚ 改葬時 복색 등 改葬할 때의 禮에 대한 질문에 답한 내용.
答鄭慶由問-大學 (1) 1675. ≪大學≫ 讀法을 9단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 대학 傳文 通讀時 從頭와 前頭의 개념‚ 大學·小學·王宮·國都가 지칭하는 것 등 ≪大學≫에 대한 鄭繼輝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慶由再問 (6) 1676. ≪大學≫ 序文에 소학에 대한 언급이 소략한 이유‚ 心을 오행에 배속하는 문제‚ 虛靈의 의미 및 理氣와의 관계‚ ≪大學≫을 前章과 後章 및 工夫와 功效로 나누는 문제‚ 傳7章 ‘正其心’의 의미‚ 傳10장의 내용 분절 방법 등에 대한 鄭繼輝의 질문에 답한 글.
答宋質夫問-理學通錄 (18) 1676. 吳伯豊書의 ‘學究’‚ 菩提心·棒喝禪宗·三魂七魄 등 ≪理學通錄≫에 나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개념에 대한 宋徵殷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伯瑞問-朱書節要 (22) 1678. ≪朱書節要≫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家廟와 宗廟의 제도‚ 物의 개념‚ ‘中’의 의의‚ 靜과 動의 의미‚ 공부에서 敬과 致知의 관계‚ 心과 性情의 관계‚ 가묘에서 庶母의 위치‚ 心性의 發과 意·情의 관계 등에 대한 내용.
答蔡伯瑞問-近思錄 (31) ≪近思錄≫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太極陰陽과 體用의 관계‚ 사람의 기품과 理의 善惡에 대한 程顥의 주장‚ 天地와 聖人의 體用 관계‚ 顔子에 대한 程頤의 평‚ 꿈속에서 일어난 일과 靜中動의 연관성‚ 程子가 曾子와 子思의 기상을 논하지 않은 이유‚ 孔明의 기상‚ 程頤·程顥의 行狀 중의 구절 등에 대한 내용.
答金叔涵問-中庸 (1) 1686. ≪中庸≫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中庸 序의 庶幾라는 말의 뜻‚ ‘二者雜於方寸之間’에서 雜의 의미‚ ‘莫見乎隱’ 註에 나오는 獨의 의미‚ 朱熹가 中和를 位育에 分屬한 것에 대한 의견‚ ‘體物而不可遺’의 뜻 등에 대한 내용.
答金叔涵問-太極圖 (5) 1688. 陰靜陽動圖의 모양‚ 五行圖의 순서‚ 陰陽·太極·無極의 개념‚ 태극과 음양의 動靜‚ 오행의 생성과 변화‚ 五行과 太極의 관계‚ 男女·人物의 생성과 氣化·形化‚ 中正仁義의 五行 分屬‚ 主靜의 의미 등 太極圖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叔涵問-大學 (20) 1690. 新民과 止至善에 대한 해석‚ 格致와 知行‚ ‘物有本末’에서 本末의 뜻‚ 讀書記의 君臣과 父子의 순서‚ 修身章에서 孝·弟·慈를 말하지 않은 이유‚ 修身의 근본에 대한 權近의 해석 등 ≪大學≫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雲卿問-喪禮 (25) 1686. 모친을 부친 묘에 祔葬한 뒤의 묘제‚ 三虞와 卒哭을 뒤에 행하게 될 때의 返魂 절차‚ 設饌‚ 제사에서 물을 올릴 때의 습속과 進茶의 관계 등 喪禮에 대한 李志逵의 질문에 답한 글.
答朴大叔問-喪禮 (28) 明器·豊碑·松脂의 사용‚ 居憂할 장소‚ 居憂할 때의 講學‚ 降神 중 哭을 그치는 이유‚ 喪祭 중의 讀書 여부‚ 玄纁의 제도‚ 제사할 때의 자리 등 喪禮에 대한 朴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權季文問-近思錄 (33) 1678. ≪近思錄≫ 제4권 제1단의 ‘靜虛動直’에서 動字의 뜻‚ 兩儀와 四象의 관계 등 ≪近思錄≫에 대한 權尙游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泰而-行泰-問-禮 (45) 1686. 禮에 대한 李行泰의 물음에 답한 글. 冠禮의 구체적인 의절과 喪禮의 각종 복색과 의절의 근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泰而問 (50) 1689. 李行泰의 물음에 답한 글. 舅姑의 부모에 대한 신부의 奠幣‚ 三殤의 喪에 대한 神主와 靈座‚ 婦人에 대한 題主式 등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李仁甫問-祭禮 (1) 1679. 李時春과의 문답. 伯叔父의 妻에 대한 服制‚ 복제 기간이 장례 이전에 지났을 때 장례 때 입을 복색‚ 祖考妣의 忌日에 상을 당할 경우의 擧哀 여부‚ 아이를 낳는 날의 제사 여부 등 각종 제례의 의절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仁甫問-國恤禮 (4) 1680. 國恤禮에 대해 李時春에게 답한 글. 私人의 장례 전에 國哀를 당했을 때의 복제 문제로 民庶의 方喪 3년 시행 여부‚ 병으로 관부에 들어갈 수 없을 때 擧哀하는 의절‚ 朔望에 모여 곡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 (8) 李時春에게 답한 글. 고조의 신주를 長旁에 봉안한 뒤 사당이 없는 支子의 冠婚禮 主人‚ 宗子보다 혼인하는 자가 어른일 때 昏書의 措語‚ 舅姑가 이미 돌아가셨을 때 신부가 뵙는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改葬禮 (9) 1682. ≪疑禮問解≫에 나오는 부친상 중 어머니를 改葬할 때의 服色과 의절‚ 伯母의 小祥과 격해 아버지의 상을 만났을 경우의 의절 등 改葬할 때의 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答李仁甫問-國恤禮 (11) 1684. 관직의 유무에 따른 國恤禮 服色과 冠‚ 祥祭 기간이 지난 뒤 衰服을 입고 있는 경우의 几筵과 上食‚ 처를 위한 杖朞服 중의 제사 등 國恤禮에 대한 李時春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君輔問 (13) 1680. 며느리 喪의 儀節‚ ≪喪禮備要≫의 喪主에 대한 규정‚ ≪大學≫의 ‘密察此心之存否’라는 구절에서 ‘密察’의 의미 등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君輔問-大學 (15) 1681. 正心의 의미‚ ‘所發遂明’의 ‘發’字와 ‘明’字의 의미‚ 李珥의 明明德에 대한 설과 發·明의 관계‚ 心의 動靜과 體用‚ 敬直과 正心의 관계 등 ≪大學≫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君輔問 (21) 1688.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性命의 뜻‚ 氣가 用事한다고 할 때 ‘用事’의 의미‚ 李珥가 人心과 七情을 一例로 보는 것에 대한 이해‚ 欲·虛靈·動靜의 의미‚ 正心章에 대한 體用의 관점에서의 이해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問-大學 (35) 1690. 李珥의 格物物格說에 대한 李世弼의 비판적 질문에 대해 李珥의 입장을 옹호한 글.
答李壽翁問 (1) 1680. 喪禮와 ≪大學≫ 등에 대한 李世龜와의 문답. 玄纁의 위치‚ 外棺의 두께‚ 表石을 세우는 위치 등 喪禮 및 格物에 대한 諺解‚ 正心 1장의 뜻 등 ≪大學≫에 대한 질문에 답함. 그 외에 李珥가 刪定한 ≪小學集註≫ 중 의심스러운 것을 변석하여 讀書記를 만들었다는 내용.
答李壽翁問 (4) 1682. 合葬時의 禮에 대한 李世龜와의 문답. 先塋에 옮겨 합장하기 전에 길일에 임시로 開土할 때의 禮‚ 합장을 위해 열어 놓은 묘의 慰安祭‚ 죽은 시점이 다른 합장 묘에 대한 服色‚ 告廟 및 居喪 중에 詩經을 공부해도 좋은지 여부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士亨問-喪禮 (6) 1691. 喪禮에 대한 李泰壽와의 문답. 상복을 입고 있는 기간 중의 제사‚ 사위로 立後에 의해 생질관계가 된 경우의 복제 등 喪禮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宋希文-晦錫-問-孟子浩然章 (8) 1680. ≪孟子≫ 浩然章에 대한 宋晦錫과의 문답. ≪孟子≫ 浩然章이 不動心을 위주로 한다면서 養氣를 말하는데 치중한 이유‚ 浩然之氣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그 근본을 어디에서 체험할 수 있는가 등 浩然章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閔秀卿-采萬-問-家禮 (15) 1682. ≪家禮≫에 대한 閔采萬과의 문답. 朝夕의 奠과 上食의 관계‚ 奠을 올릴 때 남녀의 위치‚ 虞祥 등에서의 杖의 사용 여부‚ 李珥가 말한 俗祭의 喪服의 의미‚ 선조의 생신에 사당에서 제사하는 것의 타당성‚ 제사할 때의 設饌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權君敬問-學 (19) 1683. 文王 八卦 등에 대한 權持와의 문답. 文王 八卦의 進退에 대한 이해와 邵雍의 形體郛郭之說에 의한 心性情意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仲深-涬-問-喪禮 (23) 1671. 喪禮에 대한 李涬과의 문답. 士虞禮에서의 輯杖‚ 虞와 卒哭 때 부인에 지팡이를 써야 하는지의 여부‚ 吉凶이 섞여 있을 때의 복색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鄭仲淳-澔-問-喪禮 (24) 1679. 喪禮에 대한 鄭澔의 질문에 답한 글. 練祥禫祭를 행하기 전에 먼저 變除하는 것‚ 祥 전에 遷祔하여야 할 경우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鄭仲淳問-喪禮 (24) 1680. 喪禮에 대한 鄭澔의 질문에 답한 글. 禫祭 때 먼저 服制를 除하고 제사를 설행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沈善長-元浚-問-學 (25) 1691. 沈元浚과의 문답. 의리를 확충하는데도 불구하고 利慾의 유혹이 있는 까닭‚ 학문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讀書 방법 등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 답한 내용.
答沈善長問-學 (28) 1691. 沈元浚과의 문답. ≪大學≫ 三綱領에서 논하는 학문의 工程‚ 학문의 차례‚ 聖學에 대한 점진적인 用功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閔彦暉問-手錄 (30) 1690. 閔以升에게 답한 글. 성현의 出處‚ 經傳 要目의 기원‚ 光武帝와 王亮·魏徵에 대한 朱子의 논의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崔漢臣問-禮 (32) 1688. 崔是翁에게 답한 글. 國恤이 있을 때 관리와 士人의 喪祭禮‚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이의 遷轉‚ 功臣의 별묘 설립 문제‚ 承重者의 복제‚ 부친 상 중 할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崔漢臣問 (33) 1689. 崔是翁과의 문답. 承重한 사람이 어머니와 처에 대해 입을 服制‚ 國恤 중의 除喪 의절‚ 稅服 등 喪禮에 관한 문제와 七情과 四端의 分屬‚ ≪心經≫ 程說에 대해 李珥가 宋翼弼에 답한 편지가 문집에 실리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崔漢臣問 (40) 1690. 崔是翁과의 문답. 師不立服의 근거에 대한 고증‚ 除服할 月數 계산의 기준 시점‚ 부친상 중에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 陰陽造化의 說에 대한 견해‚ 하늘과 땅이 서로 어떻게 의지하고 있는가‚ ≪性理大全≫과 ≪心經≫에서의 學의 개념 차이‚ ≪栗谷集≫<性情圖>와 ≪心經≫에서 誠의 분배가 다른 이유‚ 宋時烈 喪 때 素帶 3개월을 한 일 등에 대하여 답한 내용.
答羅仁卿問 (1) 1685. 羅斗甲과의 문답. 家禮의 深衣 제도‚ 幞頭의 착용 여부‚ 盥盆帨巾의 설치 장소‚ 자식이 없는 후실에 대한 제사‚ 멀리 시집 가 친정 어버이 상에 참석하지 못했던 딸의 禮‚ 부친 생존시 모친상에 대한 복제 등에 관한 내용.
答羅仁卿問 (3) 1690. 羅斗甲과의 문답. ≪大學≫의 止至善과 平天下章 및 ≪中庸≫의 中和의 개념‚ 誠의 개념‚ ≪孟子≫ 仁人心章에 보이는 仁과 心의 분별 등에 관해 문답한 내용.
答柳道卿問-心經 (9) ≪心經≫에 대한 柳貴三과의 문답. ≪心經≫ 人心道心章의 同行異情 등 ≪심경≫ 각 구절의 해석에 대해 짧게 답한 내용.
答柳道卿問-家禮 (10) 1690. ≪家禮≫에 대한 柳貴三과의 문답. 家廟圖‚·深衣圖·冠禮圖·昏禮圖·韜藉式·嫂則別處後其子私祭·宗國에서 爲候祭 등까지 ≪家禮≫의 용어와 의미‚ 해석에 대해 짧게 답한 내용.
答黃擧卿問-家禮 (20) 1685. ≪家禮≫에 대한 黃翊良의 질문에 답한 글. 緇冠註·祭儀·魂帛의 의의와 용어에 대해 설명한 내용.
答黃擧卿問 (21) 1687. 黃翊良의 질문에 답한 글. ≪心經≫의 正心章呂氏小註‚ 大註打酒有灰‚ 鷄鳴而起章大註‚ 養心章大註와 <要訣圖>의 <要訣爲學圖>에 대한 내용.
答高益之問-禮 (22) 1687. 高益謙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시집간 祖母의 服制에 대한 의견을 밝힘.
答高益之問-小學 (23) 1690. ≪小學≫에 대한 高益謙과의 문답. 朱子가 말한 ‘這須是自見得’에서 ‘這’의 의미‚ 13세와 15세(成童) 때 배우는 것의 차이 등에 대한 내용.
答金汝精-克成-問-學 (35) 1688. 金克成에게 太極의 全體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 道德性命의 의미를 밝힌 내용.
答金汝精問-禮 (36) 1689. 金克成과의 문답. 神主를 추가로 봉안할 때의 儀節‚ 스승의 어버이와 처에 대해 상복을 입지 않는 까닭 등에 대해 밝힌 내용.
答兪濟卿問-喪禮 (37) 1690. 喪禮에 대한 兪楫과의 문답. 유즙이 祭服이라 본 것은 실은 喪服임. 그 외 ‘3년내에는 아들이 几筵에 있으므로 參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의 뜻‚ 墨衰의 사용 여부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兪濟卿問-喪祭禮 (37) 喪祭禮에 대한 兪楫과의 문답.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모친에게 입을 복제‚ 생부에 대한 복제‚ 장자가 외방에 있고 衆子가 집에 있을 때의 成服 절차‚ 支子 立後와 外孫 奉祀의 타당성 여부‚ 親盡 뒤 신주를 別室에 모시는 일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士粹-彦純-問-禮記 (41) 1688. ≪禮記≫에 대한 李彦純과의 문답. ‘禮는 마땅함을 따르고 使臣은 時俗을 좇아야 한다’는 구절의 의미 등 ≪禮記≫의 해석 등에 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敬先-華相-問-喪禮 (1) 1691. 李華相에게 本生親의 상례 때의 服色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南幼安-磐-問-改葬 (2) 1686. 家廟에 龕室이 없을 때 遷葬을 고하는 법 등 改葬 儀節에 대해 南磐에게 답한 글.
答沈淨如-澂-問-祭禮 (2) 1690. 祭禮에 대한 沈澂의 질문에 제사의 世數가 다한 사대부의 신위를 그대로 둘 수 없고 祧한 뒤 別宗의 후손들이 돌아가며 제사하는 것도 二宗을 만들 혐의가 있다고 답한 글.
答元生-夢翼-問-喪禮 (3) 1687. 童子도 絰과 杖을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 同宮을 朝祖할 경우의 문제 등 喪禮에 대한 元夢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生-時泰-問-祭禮 (4) 1687. 從兄 李時春의 집에 1세의 젖먹이만 있어 攝主하여야 하는데 祝辭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李時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朴生-浩遠-問-禮 (5) 小祥이 지난 뒤 立後한 사람이 追服하는 節目과 추복 기간 및 題主 문제‚ 계후한 아버지의 신주를 改題할 시점 등에 대한 朴浩遠의 질문에 답한 글.
答閔生-濚-問-禮 (8) 1669. 낳아 준 어머니에 대한 服‚ 입후한 어머니에 대한 제사‚ 시아버지가 며느리 상에 主喪을 할 수 없을 경우의 禮‚ 招魂한 장례의 의절 등에 대한 閔濚의 질문에 답한 글.
答閔生-濚-問-禮 (9) 1670. 心喪의 變除 절차에 대해 閔濚에게 답한 글.
答鄭直長-涖-問-喪禮 (10) 1682. 妻喪에 別室을 두어 신주를 둔다는 설‚ 아버지가 계실 때의 어머니의 복제 등에 관해 鄭涖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東陽院儒問-院規 (10) 1691. 東陽書院 院生들이 院規에서 의심되는 것이나 이해되지 않는 점을 질문한 것에 답한 글. 院規 중 학문에 있어서의 鄕校와 書院의 역할 차이를 고려하여 ‘鄕校의 완전하고자 함’과 ‘書院의 자세함’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 掌議 등의 연한‚ 동서의 분별‚ 南草 흡연에 대한 규정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或人問-祭禮 (13) 1660. 점치는 도구인 环珓의 제도‚ 제사할 날을 점치는 것에 대한 先儒들의 설에 대해 답한 글.
答或人問-禮 (13) 1691. 長孫의 폐질로 承重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을 때 장손의 아들의 위치‚ 國恤時 私人의 복제를 마칠 시기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答仲巨-世陞-兄問-祭禮 (13) 1660. 할아버지의 신위가 설치되지 않았을 때 모친상에 祔祭하는 일‚ 상주가 宗子가 아닐 경우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과 祝辭의 호칭 등에 대해 朴世陞에게 답한 글
答泰徵姪問-喪禮 (14) 1682. 아들이 없는 사람의 상례에 대한 朴泰徵의 질문에 답한 글. 부인을 主喪 삼기보다는 조카가 主喪이 되어 顯叔父라 칭하고 旁題없이 기년복을 입은 뒤 立後가 결정된 뒤에 告祝하여 改題하면 될 것이라고 답한 글.
答泰初姪問-大學 (15) 1685. ≪大學≫에 대한 朴泰初의 질문에 답한 글. 集註 아래의 小註를 명나라 儒臣이 찬한 것인지의 여부‚ 經1章의 明明德의 앞 明字에 대한 章句의 해석 등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答泰初姪問-大學 (28) 1691. ≪大學≫에 대한 朴泰初의 질문에 답한 글. 明明德에 대해 章句에서는 ‘발한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아진다’라고 하고 經文에서는 致知誠意를 위주로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차이점을 설명함.
答泰夏姪問-喪禮 (33) 1687. 練祭 때의 복식에 대한 朴泰夏의 질문에 답한 글.
答泰昌姪問-喪禮 (34) 喪禮에 대해 朴泰昌에 답한 글. 卒哭 뒤 祔祭를 행하지 못한 경우의 禮‚ 喪中의 墓祭‚ 대낮 제사에서 촛불 사용 여부‚ 제사 중 方笠의 착용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泰昌姪問-祭禮 (36) 1687. 祭禮에 대해 朴泰昌에게 답한 글. 時俗을 家禮로 바꿀 때의 예‚ 齋戒 등은 古禮보다는 ≪家禮≫를 따를 것‚ 아이에게 痘患이 있는 경우의 제사 문제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淳姪問-易 (37) 1677. ≪周易≫에 대해 朴泰淳에게 답한 글. <洪範>에서 雨·霽·蒙·驛·克을 점의 조짐이라고 한 이유‚ <繫辭>의 ‘形而上者는 道이다’라는 말에서 喜怒哀樂의 未發을 형이상이라 할 수 있는지의 여부‚ 陰陽의 위치와 길흉의 관계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淳姪問-禮記 (38) 1678. ≪禮記≫에 대한 朴泰淳의 질문에 답한 글. <曲禮> 및 <檀弓> 曾子易簀章과 孔子蚤作章 등 각 章에 의미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泰淳姪問-喪禮 (39) 1684. 喪禮에 대한 朴泰淳의 질문에 답한 글. 子婦가 죽어 장례를 치른 뒤 그 남편이 음식을 供饋하지 않는 이유‚ 子婦의 복이 끝난 뒤 几筵을 그대로 두지 않는 이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輔姪問-喪禮 (40) 1679. 喪禮에 대한 朴泰輔의 질문에 답한 글. 朱熹가 居喪 중 黑衰로 家廟에 공궤했던 禮를 우리 나라에서 시행하지 않고 있는 이유‚ 本生 부모와 養父母에 대한 喪禮 등을 설명하는 내용.
聖學知行路脈之圖 (1) 성현의 학문 大要를 執中·爲人·思誠·居敬으로 보고 精一 아래 博文-約禮‚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博學·審問·愼思·明辯-薦行‚ 盡心·知性·知天-存心·養性‚ 窮理-反躬을 知-行으로 병렬시킨 뒤 각 단계마다 그것을 전수한 핵심적 인물과 저술을 연결시켜 그림으로 설명한 내용.
聖賢出處之圖 (3) 1668. 성현의 出處를 나아가 벼슬을 구한 사람‚ 處하여 自守한 인물‚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處한 사람들로 구분하여 圖說하고 각각의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놓은 글.
道統前後相承之圖 (4) 伏羲에서 朱熹까지 道統이 이어지는 것을 ≪周易≫·≪孟子≫·≪近思錄≫·≪中庸序≫·≪晦菴行狀≫ 등을 근거로 하여 圖說한 내용.
中庸總圖 (4) 朱熹의 ≪中庸章句≫ 목록을 바탕으로 ≪中庸≫ 전체를 中和·費隱·誠明·尙絅 4章을 4支로 삼은 뒤 각 장절의 핵심적인 개념‚ 말한 사람 등으로 나누어 간단히 圖說한 내용.
刊定林隱程氏心學圖 (6) 1686. 中國 元代 理學者인 程復心의 <心學圖>에 대한 李滉과 李珥 학설의 미비점을 보완 정리하여 圖表로 나타낸 것.
要訣爲學圖 (7) 1686. 학문을 하는 要訣을 李珥의 ≪擊蒙要訣≫ 등을 참고하여 窮理와 居敬‚ 力行으로 나누어 圖說한 내용.
經傳要目 (9) 1677. ≪小學≫과 四書·≪近思錄≫·≪續近思錄≫·三經·三禮·≪樂經≫·≪春秋≫ 등의 경전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재와 참고 서목 및 경전의 기본적인 의의와 ≪小學≫ - ≪近思錄≫ - ≪大學≫ - ≪論語≫ - ≪孟子≫ - ≪中庸≫ - ≪詩經≫ - ≪書經≫ - ≪禮經≫ - ≪易經≫ - ≪春秋≫ 등으로 이어지는 독서의 순서 등에 대해 설명한 내용.
改訂小學總論 (17) 1686. 朱熹의 ≪小學≫과 ≪大學≫에 대한 통론과 소학·대학의 순서와 관계에 대한 程子 등의 말‚ 소학 편찬‚ 소학의 讀法 등에 대한 말을 조목별로 모아 놓은 글.
隨筆錄 (1) 1667년 이후 기록하기 시작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모은 隨筆. 각 경전에 대한 견해나 경전 해석을 둘러싼 논의‚ 李滉과 李珥의 涵養 및 存養에 대한 개념 정의‚ 이황의 天命圖에서 비롯되는 四端七情과 理發·氣發의 견해차에 대한 입장 등 철학적 개념에 대한 견해‚ 역대의 학문 전통과 許衡과 吳澄·薛瑄 등 중국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 鄭夢周 등 우리 나라의 인물들에 대한 評 등이 있다. 그 중에 李珥의 變通論에 대한 높은 평가 등이 주목된다. 그 외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山城의 역할 등 한국과 중국의 역대 典故‚ 經書 口訣과 釋義‚ 중국과 우리의 聲音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 등에 대한 내용.
矯病說 (1) 학문을 닦는 방법은 병폐를 알고 이에 맞는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
中庸費隱說 (1) ≪中庸≫의 費隱에 대해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글.
主一說 (3) 1656. 敬에 대한 여러 설 중 程子가 논한 主一無適의 설이 안팎을 합한 것이기 때문에 밖을 위주로 한 整齊로 설명하는 朱熹의 설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내용.
滿腔子惻隱之心說 (5) 1658.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 모두 본심을 얻어 사람마다 측은지심이 있고 천지만물이 모두 渾然하여 一體가 된다는 내용.
葬法昭穆說 (5) 1667. 장사지낼 때 墓의 순서와 昭穆의 차례를 朱子와 程子의 설을 인용하여 고증한 글.
酌定祭饌圖說 (7) 1670. 제사 상의 자리 배치를 儀節과 五禮儀 士大夫의 時享 제도에 근거하여 그린 것으로 尹拯을 위하여 짓고 朴泰徵에게 보여주었던 내용.
後說 (9) 제사 상위에 차릴 음식의 수와 자리에 대해 도설하고 설명한 글. 時享과 墓祭 등의 祭品을 바로잡았음을 밝히고 제사의 의의와 절차 등에 대해 논하는 내용.
文廟配從說 (15) 1673. 중국에서 송과 명을 거쳐 文廟 및 啓聖墓 제도가 성립되고 位次가 결정되는 과정을 논하는 내용.
爲學之方圖說 (17) 1676. 李珥의 문집 ≪續集≫에 있는 <爲學之方圖>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四端理發七情氣發說 (21) 1683. ≪朱子語類≫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설에 대해 李滉·奇大升·李珥의 논변을 설명함.
敎士說贈成汝中 (23) 1683. 湖南 南平縣에 나가 있던 成至善의 요청에 따라 선비를 가르치는 데 필요한 규범에 대해서 설명한 글.
國恤卒哭前葬祭說 (24) 1683. 國恤 卒哭 전에 개인의 상제례와 각종 제사는 관직유무 등에 따라 어떻게 조처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고증한 글.
主櫝說 (26) 1684. 신주와 櫝의 규격 등 신주와 독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글.
讀書淺說 (28) 1690. 李尙恒을 위하여 讀書에 관한 여러 책의 말을 수집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글.
喪祭値疫痘說 (33) 1690. 喪祭 중에 痘疫을 만났을 때의 조처에 대해 朱熹와 李滉·鄭逑·金長生의 글을 인용하여 논증한 글.
格物訓義說 (37) 1691. ≪二程全書≫에서의 格物에 대한 訓義와 朱熹가 ≪大學≫에서 이 개념을 채용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 고증한 내용.
良知天理說 (41) 王陽明의 ‘내 마음의 良知가 곧 天理’라는 말에 대해 羅欽順의 ≪困知記≫와 程頤·朱熹의 말을 들어 비판한 글.
服制私議-幷圖 (1) 1660. 尹鑴가 繼統의 설에 입각하여 제기한 斬衰 3년설에 대해 朞年服이 옳다는 것을 고증한 글.
父死爲祖爲母異服議 (20) 1667. 부친이 돌아가셔서 아직 成殯하지 않았을 때와 성빈한 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服制‚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 이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 3년 이후에 돌아가셨을 때의 服制가 다른 이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 글.
爲師弔服加麻議 (20) 1669. 스승의 상에 입을 복식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集平日偶記 (1) 1667. 평소 들었던 이야기를 기록해놓은 글. ≪易≫<繫辭> 範圍의 ‘圍’字와 匡郭의 의미‚ 人心과 道心의 의미‚ 人後된 자가 부모를 위해 입는 복제‚ 心喪의 제도와 服色‚ 張載의 ‘天體物而不遺’라는 말의 뜻‚ 孝悌에 대한 李珥와 宋翼弼의 논의‚ 金長生과 朴知誡의 論禮‚ 國忌 때의 素食 여부 등에 대한 내용.
記少時所聞 (11) 젊은 시절 들었던 인물들의 일화들을 기록한 글. 金長生이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에 갔을 때 아버지의 숫가락질 수까지 헤아렸다는 효행‚ 해학을 즐기던 아버지마저 그가 들어오면 해학을 그쳤다는 金尙憲의 곧고 바른 성품‚ 김상헌을 찾아뵈었을 때 나눈 대화‚ 卜術에 능했던 姜緖의 고사‚ 東人이었던 姜絪이 徐敬德의 사당에 서인 朴淳이 배향되었다고 절하지 않았던 일‚ 李滉에 대한 존숭을 둘러싸고 睦長欽과 나눈 이야기‚ 金安國·徐敬德·閔箕의 고사‚ 李潤雨에게 들은 李珥에 관한 고사‚ 이이와 기녀 柳枝의 일‚ 이황과 鄭逑의 고사‚ 宋翼弼이 당대 명필이던 李山海 대신 이이에게 題主를 부탁한 일‚ 좁쌀로 제사를 올려야 했던 趙憲‚ 李恒福과 李德馨의 우정‚ 이항복의 광해군 때 행적‚ 김장생과 鄭經世에 대한 申欽의 평‚ 權韠의 고사‚ 金集의 부인 兪氏와 李珥의 庶女인 小室의 일‚ 金瑬·張維·李時白 등의 고사‚ 붕당의 대략적인 경과‚ 宣祖의 죽음과 관련된 고사 등에 대한 내용.
記孝宗初時事 (1) 1649. 5월 8일 중전이 궐에 도착한 뒤 仁祖가 승하한 날부터 6월에 金弘郁 등이 金自點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까지 효종 즉위를 전후하여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글.
記己丑泮事 (2) 1650. 1649년 가을 성균관 유생들이 李珥와 成渾의 從祀를 청하려고 회의할 때 효종이 즉위한 직후라 급급하게 논하지 말자고 주장하였고 金集이나 宋時烈·兪棨도 모두 時宜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자신이 병으로 물러난 사이에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되어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뜻은 이루지 못하고 李象震과 柳㮨 등에 의해 두 선생이 무고만 당했다는 내용.
記庚寅泮事 (3) 1650. 5월 李伯獜이 柳㮨을 儒籍에서 삭제하고 성균관 유생 李弘相이 柳㮨을 付黃하고 睦來善 등이 이에 반발하여 떠난 일에서부터 鄭維城과 睦謙善의 대립‚ 申命圭 등의 捲堂‚ 嶺南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유직에 대한 付黃 제거‚ 이에 대한 金壽恒 등의 반발‚ 朴世采 등의 상소와 空館‚ 8월 趙錫胤의 옹호 상소가 있기까지를 월별로 나누어 기록한 내용.
記楊湖閔丈事 (6) 1673. 閔嶪의 사후 있었던 閔愼의 代服에 관여한 계기와 사건의 전말‚ 자신의 주장의 근거 등을 기록해 놓은 글.
記王父梧窓公癸亥被罪始末 (9) 할아버지인 朴東亮이 인조반정 뒤에 죄를 얻게 된 시말에 대해 기록한 글.
記論著大旨 (22) 자신의 저술의 大旨를 밝혀 놓은 글. 첫 번째 箕子의 언행이 민멸되는 것이 아쉬워 저술했다는 ≪範學全編≫을 비롯하여 ≪先聖手筆≫·≪讀詩要義≫·≪春秋補編≫·≪惡經遺編≫·≪家語外編≫·≪聖賢遺模≫·≪讀書記≫‚ ≪心經≫과 ≪家禮≫에 대한 저술인 ≪二書要解≫‚ ≪白鹿洞規解≫·≪心學至訣≫·≪敎法要旨≫‚ ≪三先生遺書≫·≪六禮疑輯≫·≪稽治錄≫·≪新定自警編≫·≪中興遺蹟≫·≪明季殉節錄≫‚ ≪耘谷詩史≫·≪增刪風雅≫·≪古今文宗≫‚ ≪淵源續錄≫·≪理學通錄補≫·≪東儒師友錄≫·≪朱子大全拾遺≫·≪靜菴集≫·≪四書諺解≫·≪退溪語錄≫‚ ≪栗谷續集≫ 및 ≪外集≫·≪別集≫‚ ≪崇孝錄≫·≪二先生遺稿≫·≪鳳村集≫·≪寄齋雜記≫·≪汾西集≫·≪先稿≫‚ ≪變禮質問≫ 등 자신이 기술하였거나 편집한 책의 목록과 저술한 이유와 大旨 등에 대해 기록한 내용.
記潘南先生褒贈記事 (28) 1691. 선조인 朴尙衷에 대한 褒贈과 관련된 일을 기록한 글.
記先世葬法 (32) 각 지역의 선조들의 묘에 조상을 장사지내는 위치와 장사지내는 방법의 변화 등에 대해 짧게 기록한 내용.
潘南先生不署呈北元書辨 (1) 선조인 朴尙衷이 李仁任 등이 北元에 글을 보내려하자 鄭道傳 등과 함께 恭愍王이 이미 明나라를 섬기기로 하였던 것을 들어 署名하지 않은 것을 失君하였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논변하는 글.
崔氏大學補解辨 (2) 1664. 崔氏의 ≪大學補解≫에 대하여 논변한 글. 최씨가 格致傳을 改正하여 고증한 것에 대해 대학의 經傳 본문‚ 최씨의 해설‚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순서로 논변함.
好名辨 (9) 1673. 근래에 流俗으로 道學을 비난할 때 好名을 구실로 삼는 풍조가 있다며 孔子 이래의 好名에 대한 설을 고증한 글.
尹氏禮說辨 (12) 1674. 尹鑴의 禮說을 辭官說 등 각 조목별로 인용하고 朱子의 설과 다른 것‚ 주자의 본래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을 들어 논변한 글.
太極圖勉齋五行說辨 (22) 1676. <太極圖>와 黃幹의 五行說에 대한 논변. 먼저 태극도에 대한 해설 6조목을 인용한 뒤 태극과 陰陽의 관계‚ 五行의 流行 등에 대해 논변한 글.
石表辨 (27) 1680. 4품 이상의 관원은 龜趺와 螭首를 갖춘 9尺 높이의 神道碑‚ 5품이하는 圭首와 方趺에 4尺 높이의 墓碣‚ 관직 유무에 상관없이 가능한 墓表 등의 제도에 대해 고증한 내용.
王陽明學辨 (29) 1691. 王陽明의 학술에 대해 논변한 글. 古本 ≪大學≫을 程子 등이 개정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고본에 빠진 것이나 잘못이 없다는 왕양명의 설을 비판함. 新民을 親民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 格物良知의 설 등이 실린 ≪傳習錄≫의 續編 머리의 <大學問>에 대해 李滉과 羅欽順의 ≪困知記≫ 등을 근거로 논변함. ≪大學≫의 致知와 ≪孟子≫의 良知를 섞어 만든 致良知라는 개념을 비판함. 心卽理說이 禪學에 유사한 곳에 흐를 수 있음을 비판함. 그 외 朱子晩年定論說에 대한 비판 등 각 항목별로 왕양명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 병통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
退溪四書質疑疑義一 (1) 1677. 李德弘이 기록했던 李滉의 <四書質疑> 내용에서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宋時烈·尹拯의 의견을 기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論語≫<序說>에 나오는 家世를 家傳과 같다고 한 것에 대한 의견‚ ≪論語≫<憲問>篇에 나오는 夷狄의 범위와 下學上達의 개념‚ ≪論語≫<陽貨>篇의 六言·六蔽·五美·四惡에 대한 文體가 서로 다른 것을 통해 본 ≪論語≫의 판본에 대한 이해‚ <子張>篇의 形而上과 形而下에 대한 이해 등의 개념과 우리말로 音釋할 때의 구체적인 번역의 오류 등에 대해 일일이 의견을 밝힌 내용.
退溪四書質疑疑義二 (29) 李滉의 <四書質疑> 내용에서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宋時烈·尹拯의 의견과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孟子≫의 四端七情 및 人心道心의 관계에 대한 입장‚ 知를 擴充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입장‚ ≪中庸≫<序說>의 ‘虛靈知覺’에 대한 의견‚ ≪中庸≫ 首章의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에 대한 이해‚ ≪中庸≫ 2章에 나오는 庸의 개념‚ ≪中庸≫ 12章의 ‘潑潑’의 개념‚ ≪大學≫의 經1章 ‘知止而後有定’의 뜻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退溪四書質疑疑義三 (46) 1681. 李滉의 <四書質疑> 내용 중 의심스러운 것을 宋時烈·尹拯과 토론한 뒤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李滉의 서신에서 말한 ‘妙한 도리와 정밀한 의리는 頭緖에 端緖가 많이 있다’는 말의 뜻‚ ‘천명을 듣고 心悅誠服한다’는 말의 의미‚ ≪論語≫<序說>에 나오는 子貢이 공자 사후 홀로 3년을 居喪했다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 德에 근본이 있다는 말의 의미‚ ≪大學≫의 物格에 대한 이해‚ ≪退溪集≫<昏儀>에 나오는 婦婿 사이의 절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朱子大全記疑疑義上 (1) 1680. ≪朱子大全≫의 11권 1板의 ‘封事’라는 말이 漢나라에서 諫院이 章奏할 때 皂囊으로 封進한데서 오는 말이었다고 고증한 것을 비롯하여 ≪朱子大全≫의 각 권 판별로 개념‚ 역사적 사실‚ 인물 등에 관해 간단히 해설 및 고증한 글.
朱子大全記疑疑義下 (41) ≪朱子大全≫ 14권의 ‘奏箚一’에서 ‘一’字가 잘못인 듯 하다는 것 등을 비롯하여 ≪朱子大全≫의 각 권 각판 별로 개념과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간단히 설명 혹은 고증한 글.
儀禮喪服父爲長子釋義 (1) 1666. ≪儀禮≫ 喪服條에 나오는 아버지가 長子를 위하여 입는 복에 대하여 논증한 것으로 원래 <喪服正義>라는 제목을 가진 글. 뒤에는 <長子承重斬齊異服之圖>가 실려있다.
朱子乞討論喪服箚釋義 (14) 1672. 朱熹가 천자도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혹은 嫡孫이 承重한 할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3년상을 행해야 한다며 短喪에 반대하고 喪服에 대해서 토론하여 정할 것을 청한 箚子를 細註와 함께 인용하고 그 뜻을 풀이한 글. 주희의 차자는 천자와 제후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承重한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며 代服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
書院考證一 (1) 朱熹와 李滉 및 李珥와 成渾의 문집 중에 실린 書院에 관한 말을 모아 고증한 글. 서원의 기원에 대한 4개 조목‚ 道學과 鄕賢의 從祀에 관한 3개 조목‚ 서원은 온전히 道學을 위하여 세웠다는 것을 논한 2개 조목‚ 서원의 설립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을 논한 2개 조목 등으로 서원의 본뜻을 알아 뒷날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
書院攷證二 (6) 1675. 서원에 從祀하는 원칙을 유형별로 고증하여 놓은 글. 부자가 같은 서원에서 아버지가 주향으로 아들이 배향으로 있는 文定書院‚ 사제간에 주향과 배향으로 함께 있는 서원‚ 부자나 사제간에 竝享된 서원‚ 오로지 道德을 위주로 배향한 서원‚ 時世를 위주로 한 서원‚ 한 宮 안에 3廟를 나눈 것‚ 한 廟 안에 3室을 둔 것을 각각 구분하고 예를 들어 고증한 내용.
論祖亡父有廢疾不當代服祧遷者考證 (8) 1673.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廢疾이 있어 代服하고 祧遷하는 것이 不當하다는 논의에 대한 고증. 攝主‚ 아버지가 아직 빈소를 만들지 못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服祖周攝主‚ 아버지 계실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등에는 代服祧遷할 수 없음을 논함.
論祖亡父有廢疾當代服祧遷者攷證 (11) 1673.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에게 廢疾이 있을 때 代服하고 祧遷해야 되는 경우를 모아 宋時烈에게 보낸 것으로‚ 閔愼이 할아버지를 위해 代服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제시한 내용.
師友考證 (1) 1686. 스승과 친구 사이의 의리와 예에 대하여 고증한 글. 스승을 구하는 道‚ 스승을 섬기는 의리‚ 처음 뵐 때의 예‚ 섬기는 예‚ 스승과 제자의 호칭‚ 스승의 상에 처할 의리‚ 心喪의 의리와 복제‚ 朋友의 상에 처할 도리 등에 관해 각각의 전고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내용.
章陵稱號尊崇考證 (20) 1691. 章陵의 호칭이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나온 신하들의 章疏를 뽑아 요약하고 근거를 고증한 글. 1623년 반정 후 私廟의 호칭에 대한 前例를 찾아 아뢴 鄭經世의 啓‚ 別廟論을 주장한 崔鳴吉의 상소‚ 각각의 주장을 호칭·服喪·廟享·근거에 따라 나누어 요약해놓은 도표‚ 이러한 논의의 근거를 人後의 의미‚ 大宗小宗‚ 祖廟禰廟‚ 宣帝와 光武帝가 私親을 높인 의의로 나누어 싣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피력해 놓은 經史參攷 등의 내용.
近思錄釋疑考正凡例 (1) 1660. ≪近思錄釋疑≫를 考正할 때의 범례. 처음에 落字만 채워 넣으려다가 잘못된 곳이 많아서 인용된 본문과 釋疑를 서로 참고하여 李珥가 말한 ‘刪節하되 감히 한 글자도 첨가하지는 말라’는 원칙에 따라 고정했다는 내용.
栗谷先生四書諺解修正凡例 (3) 李珥의 ≪四書諺解≫를 수정할 때의 원칙과 기준을 적어 놓은 범례. ≪孟子≫<萬章下>篇부터 口訣이 완성되어 있지 않아 책의 순서를 ≪大學≫-≪論語≫-≪中庸≫-≪孟子≫로 하였고‚ 해석은 간편한 것을 위주로 하여 ‘子曰’의 글자 사이나 也字 아래 訓이 없는 것 등을 감히 고치지 않았다는 것 등의 내용.
增修潘南世譜 (4) 1669. 潘南 朴氏의 族譜를 增修할 때의 凡例. 舊譜의 羅州라는 명칭을 나주의 여러 박씨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潘南으로 바꾸었다는 것‚ 繼後한 이는 本生 아래에는 出繼라고만 적어 다른 사람의 후손이 된 것을 중히 하였다는 것‚ 庶出은 항렬의 끝에 附書하고 사위는 前室인지 後室인지를 반드시 써서 所出을 분별할 것 등의 내용.
文會書院院規 (6) 1673. 白川 文會書院의 院規. 성현을 스승으로 ‘居敬窮理 明體適用’을 요체로 삼을 것‚ 道學과 性理에 관한 저술을 읽어 외우되 正學이 아니면 서원에서는 읽지 말 것 등을 비롯하여 선비의 선발‚ 掌議의 선출‚ 朔望 등의 의절‚ 청소와 복색 등의 생활 준칙‚ 서원 일 외에는 일체 수령을 만나지 말 것‚ 과거 준비자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 등에 대한 내용.
南溪書堂學規 (10) 1689. 서당에 들어올 선비의 자격‚ 행동 준칙과 자세 등 서당에서의 구체적인 생활 규칙을 정한 南溪書堂의 學規.
抄朱字語類四段示諸子姪 (12) ≪朱子語類≫ 중 4가지 항목을 가려 뽑아 아들과 조카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모아놓은 글. 과거와 문장에 대한 태도‚ 독서에 임하는 태도 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
抄高王父冶川先生碑文示兒輩 (15) 1671. 고조부인 朴紹의 비문 내용을 抄하여 아들에게 보여주고 조상을 본받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글.
增修世譜告諸宗文 (20) 1669. 1642년 만들어졌던 族譜를 증수하게된 경위와 족보 편찬의 원칙을 여러 宗人들에게 알리는 글.
文會書院講議 (23) 1682. 白川 文會書院에서의 강의 내용을 기록한 글. 任元聖‚ 閔震元 등과 함께 가서 ≪敎法要旨≫ 등 여러 책을 강하면서 과거의 폐해‚ 陸九淵 학문의 잘못 등을 지적했다는 내용.
花谷丙舍講義 (24) 花谷丙舍에서의 강의 내용을 沈俔이 기록한 글. 劉鎭邦·睦天純 등과 함께 가서 ≪中庸或問≫과 中仁誠敬의 義理에 대하여 강론한 내용.
居家要義 (26) 1685. 일상생활이나 가정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밝힌 글.
王叔文 (1) 王叔文에 대한 史論. 그는 명성만을 취했을 뿐 진실로 忠眷하려는 뜻이 없었으며‚ 결국 貞元의 화를 불러왔을 뿐이니‚ 옳은 인물이 아니라고 비판함.
漢光武 (1) 1665. 한나라의 光武帝에 대한 史論. 伯升을 죽이도록 권한 朱鮪와 여러 능을 발굴한 樊崇에게 관직을 주고 토지를 내린 것은 천리를 어기고 인륜을 무너뜨리게 하는 잘못이었다는 내용.
送金久之赴燕山序 (3) 1653. 燕京에 사신으로 가는 金壽恒을 전송하는 서문. 淸에 대해 복수하려면 春秋의 大義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崇孝錄序 (4) 1661. 先祖인 朴尙衷과 朴紹의 事蹟을 모아 <崇孝錄>을 편찬하였다는 내용의 서문.
李重賚字序 (6) 1662. 친구인 李啓晩의 요청에 따라 重期라는 字를 ≪尙書≫<說命>篇의 啓沃의 의리에 근거하여 重賚로 바꾸어 주고 그 의미를 밝힌 글.
送尹吉甫丈游楓嶽序 (7) 1664. 宋時烈과 尹拯에 이어 尹宣擧가 金剛山에 놀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전송하며 감회를 밝힌 서문.
潘陽二先生遺藁目錄序 (10) 1669. ≪東文選≫ 등에 실려 있는 朴尙衷의 시문과 疑義·對策·絶句 등 朴紹의 유고를 모으고 자신이 이를 교정하여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의 서문.
魯史零言序 (11) 李恒福이 ≪春秋左傳≫을 토대로 만든 ≪魯史零言≫에 박세채가 붙인 서문. 전란 중에 초고만 남아 있던 것을 후손 李時淵과 李世龜 부자가 정돈한 뒤 자신의 訂正을 거쳐 간행하였다는 내용.
一齋先生集序 (13) 1674. 李恒의 시문집인 ≪一齋集≫ 서문. 후손 李星益의 요청과 이항이 朴紹와 同門이었던 인연으로 자신이 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增刪濂洛風雅序 (15) ≪增刪濂洛風雅≫의 서문. ≪濂洛風雅≫는 원래 宋末 金履祥이 선배 성리학자들의 箴訓·諷詠을 뽑아 만든 책인데 기록된 것이 너무 많고 訓詠 중에는 빠진 것이 있어 여러 성리서와 ≪大全≫ 등을 참고하여 增刪하였다는 내용.
長吟亭集序 (17) 1678. 羅湜의 시문집인 ≪長吟亭集≫ 서문. 나식은 趙光祖의 제자로 金安國·朴英의 칭송을 받고 모두 우러러보았는데 형제가 함께 李煇의 일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화를 당해 흩어지고 詩賦 80여 편만 남아있는데 高遠한 뜻‚ 충성과 효성이 잘 나타난 것들이라는 내용.
春秋補編序 (19) 1678. ≪春秋補編≫의 서문. ≪春秋≫는 朱熹의 정본이 없고 읽는 자들이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어 程子와 朱熹의 ≪全書≫ 등에 나오는 ≪春秋≫에 대한 내용을 찾고 분류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는 내용.
忠定公章疏序 (21) 1681. 李貴의 章疏를 모은 ≪忠定公章疏≫의 서문. 이귀는 李珥의 經濟之學을 계승한 인물로 軍國의 큰 계획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이에 후손과 함께 그가 남긴 상소를 정돈하여 간행하게 되었다는 내용.
家語外編序 (24) 1681. ≪家語外編≫의 서문. 孔子의 언행이 諸子에 섞여 玉石을 분별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워 魯論의 뒤를 이어 성인의 말을 모아 모순되는 것을 考訂하고 異端의 어그러진 말은 刪定하여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靜觀齋集序 (25) 1682. 李端相의 문집인 ≪靜觀齋集≫의 서문. 이단상은 名家의 자제로 효종 때 巖穴에서 나온 현인들과 經義와 世道를 논했으나 세도가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알고 은거하며 程朱의 遺訓을 玩味하여 中外의 학자들이 따랐던 인물이었다. 맏아들 李喜朝가 유고를 수습하여 편집하고 尹趾善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게 되었다는 경위를 밝힌 내용.
範學全編序 (27) 1684. <洛書>·<洪範>·<皇極> 등을 모아놓은 ≪範學全編≫의 서문. <易圖>에 실린 <洛書>와 ≪尙書≫의 <洪範>으로 皇極에 대해 미루어 추론하다가 王褘의 <洛書辨>‚ 章潢의 <洛書洪範>‚ 채씨의 <洪範皇極論> 등을 보았는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몰랐다. 결국 洪範九疇는 洛書를 해석하여 經緯를 삼고 皇極의 수를 支流로 참고하면 미혹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 흩어져 있는 箕子의 행적을 찾아 싣고 <洛書>·<洪範>·<皇極> 등을 합하여 책을 만들었다는 내용.
重刊慕齋先生集序 (29) 1687. 金安國의 문집인 ≪慕齋先生集≫을 重刊할 때 박세채가 붙인 서문. 金構가 김안국·金正國을 모신 서원이 있는 龍岡 고을 수령이 된 뒤 서원 유생들과 함께 문집을 중간하였다는 내용.
白川郡文會書院記 (1) 1673. 白川 文會書院의 記文. 趙光宗 등이 서당을 짓고 상소하여 선조에게서 文會라고 사액을 받았으나 비워져 있다가 趙光庭 등이 중수하고 朱之蕃의 필적을 받아 걸었다. 이제 南康의 白鹿書院을 모범으로 삼아 과거를 위한 학문이 아닌 伊尹의 뜻과 顔淵의 학문에 힘써야 할 것이라는 내용.
坡州花石亭記 (4) 1677. 臨津江 栗谷 북쪽에 있는 정자인 花石亭의 記文. 이이가 물러나 거처하던 곳이며 사신들도 오가며 題詠을 남겼고 西南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왜의 침입 후 빈터로 남겨진지 백여 년에 후손들이 옛 터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부탁해왔다. 후손들이 이이의 유업을 지켜 변하지 않고 또한 학문에도 힘쓰기를 바란다는 내용.
玄石滄浪亭記 (6) 1684. 漢江 玄石의 창랑정은 한강 서남쪽 승경 속에 있으며 원래 鄭氏의 옛 정자가 있던 곳이다. 그 곳 북쪽에서 10여 년 살았는데 뒤에 재종질 朴弼成이 정자를 다시 지었다. 황해도에 가 있다가 10여 년만에 주인과 함께 와서 머물며 ‘淸濁을 자신이 취한다’는 뜻에서 나온 滄浪의 의미를 끌어 그 감회를 기록한 내용.
平山九峯書堂記 (8) 1685. 平山 九峯書堂의 기문. 1683년 황해도 東陽 綿谷에 유생 李廷碩의 요청으로 서당을 설치하게 된 의의‚ 건물을 완성한 감회‚ 성인의 덕을 상징하는 九를 들어 당명을 지은 의의‚ 서당의 제생들이 갖추어야 할 학문 태도 등에 대해 기록한 내용.
春川府鄕校重修記 (10) 1686. 春川鄕校의 重修記. 향교의 교육이 무너진 것을 안타까와하고 李滉의 도학과 申崇謙의 忠義의 자취가 있는 춘천에 關防이 설치되면서 향교가 더욱 퇴폐했다가‚ 宋光淵이 부임하여 교육을 진흥시키면서 향교를 重修하였다는 경위를 밝히고 선비를 기르는데 기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
平山府東陽書院記 (13) 1687. 平山에 있는 東陽書院의 기문. 申崇謙과 李穡을 모시는 서원을 세운지 40년만에 지탱할 수 없게 되었는데 1685년 선비들의 건의로 신숭겸의 후손인 수령 申曄 등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게 되었다는 경위와 신숭겸과 이색의 업적과 학문에 대해 기리는 내용.
延安府平遠堂重修記 (15) 延安에 있는 平遠堂의 重修記. 선조 때 尹斗壽가 객관 남쪽에 堂宇를 짓고 李珥가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제 100여 년만에 무너져 가는 것을 崔錫鼎이 중수하였다는 경위와 堂號인 平과 遠의 의미를 들어 축원하는 내용.
書小學題辭後 (1) <小學題辭> 뒤에 붙인 글. 朱熹가 經史에서 수집하여 ≪小學≫을 편찬한 경위를 설명함.
書己丑所擬上疏十二條後 (2) 七月入朝蒙恩遆職後出舍玄石江上感而有賦寄示汝和‚到高嶺寺偶吟‚1656. 1649년에 상소하려던 十二條의 상소 조목 일부를 개정하면서 그 경위를 밝힌 글.
題邵康節觀物詩後 (4) 邵雍의 <觀物詩> 뒤에 題한 글. 밤에 서쪽 정원을 거닐다가 은하수를 보거나 봄에 초목을 보고 自得하는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性理大全≫에 있는 邵雍의 시를 보고 깨닫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자 기록한다는 내용.
跋先王父寄齋雜記 (5) 1658. 朴東亮의 ≪寄齋雜記≫ 발문. ≪기재잡기≫는 박동량이 사관의 직책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목격한 時事를 기록한 것으로 체례가 각기 다르고 通紀도 없지만 시사를 목격한 것이 크고 시비와 賢否를 가릴 기준이 될만하여 박세채 자신이 바로잡아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書明史修明曆法卷後 (6) 1662. ≪明史≫의 <修明曆法卷> 뒤에 붙인 글. 曆象은 그 요령을 얻기 어려운데 1647년 明의 大統曆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아 毅宗 때 徐光啓와 서양 사람들에게 책력을 수정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을 申炅에게 들었으나 당시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孝宗 때 일식과 월식에 차이가 생기자 신경이 명나라에서 수정했던 역서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못하고 집안 일로 嶺海에 떠돌다 죽어 그 법이 전하지 못했다. ≪明史≫를 읽다가 신경에게 들었던 것과 부합된 것을 발견하고 그 감회를 적은 내용.
題六書總目 (8) ≪六書總目≫에 題한 글. 뜻을 잘 살피지 못하고 입으로만 외울까 염려하여 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 總目을 만들었다는 내용.
跋神訣 (8) 1664. ≪神訣≫의 발문. 아버지가 항상 좌우에 두고 보던 것으로 養生家의 말과 道佛이 섞여 있어 때로 괴이한 곳으로 흐르기는 하지만‚ 淸心寡慾과 謹言省事를 주로 삼아 병으로 혼미할 때 바로잡는 약이 되었다고 밝히고‚ 1659년 화재 이후 스스로 여러 책에서 補緝하였다는 내용.
跋活塘公所讀大學 (9) 1665. 朴東賢이 읽었던 ≪大學≫에 붙인 발문. 박동현은 朴紹의 맥을 이어 온 사람으로 학문에 힘쓰고 조정에서도 바른 언론을 보인 사람인데 遺文과 서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증손 朴泰定이 그 책을 가지고 배우러 온 것을 기뻐한다는 내용.
跋一髮千鈞 (10) ≪一髮千鈞≫의 발문. 主一無適을 위주로 한 持敬 공부에 대한 朱熹와 李滉의 의논에 趙光祖·李珥·成渾의 설을 합해 ‘늠름한 데 이르라’는 뜻으로 ≪一髮千鈞≫이라 이름하였다는 내용.
書敎法要旨後 (11) 1668. 朱熹가 白鹿洞에 게시한 것 외에 각 책에 산재하고 있던 것을 抄錄하여 만든 ≪敎法要旨≫ 뒤에 그 책이 이루어진 경위 등을 기록한 글.
跋宗英忠肅公遺稿 (12) 李晬의 시문집인 ≪宗英忠肅公遺稿≫ 발문. 이수는 光海君 때 여러 종실과 함께 大妃를 폐하려는 李爾瞻의 잘못을 상소하였다가 뒤에 유배되었던 인물로 후손 李箕疇가 遺文과 譜狀을 보여주며 요청해와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跋四書讀法 (13) 1668. ≪四書讀法≫의 발문. 원래 주자가 ≪中庸≫과 ≪大學≫에는 <序說>을‚ ≪論語≫와 ≪孟子≫에는 <서설>과 <讀書法>을 썼는데 명나라 때 ≪大全≫을 만들면서 ≪중용≫과 ≪대학≫의 讀法을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는 ≪논어≫와 ≪맹자≫에는 <서설> 뿐 <독서법>이 없어 四書의 讀法을 모아 편집하였다는 내용.
跋閔龍巖傳 (14) 1670. ≪閔龍巖傳≫의 발문. ≪민용암전≫을 成至善에 의해 본 적이 있는데 趙世煥이 판각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려 한다하여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경위를 밝히고 민용암이 匹士로서 절개를 세웠고 깨끗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던 인물이라는 내용.
跋朱子大全拾遺 (15) 1672. ≪朱子大全拾遺≫의 刪定 경위를 밝히고 續考의 편집을 다짐하는 발문. 문헌이 많은 중국에서라면 아마 배는 더 되었을 것이라며 程敏政이 말한 後集 등을 끝내 얻어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내용.
書心經後論後 (16) 李滉의 <心經後論> 뒤에 붙인 글. 程敏政은 朱熹의 고향에서 태어나 정밀한 ≪心經附註≫를 편찬하였고 문장도 典雅하지만 道一編의 설로 주희가 만년에 陸九淵과 합하였다 주장하여 陽明學의 폐단을 열어 놓았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
跋書院事蹟 (19) 1673. ≪書院事蹟≫의 발문. 당시 서원의 폐단을 지적하며 황해도에 서원을 설치하여 선비를 가르치면서 문집에서 서원에 관계된 것을 뽑아 모범을 삼고 원류를 찾으려고 尹拯의 도움을 받아 ≪書院事蹟≫을 완성하였다는 내용.
跋寒岡先生甲申手帖 (20) 李珥가 사망한 3일 뒤 이이의 편지에 답한 鄭逑의 편지인 <寒岡先生甲申手帖> 발문. 이이가 죽고 成渾과 정구도 고립된 것이 아쉽다는 내용.
跋理學通錄補集 (23) 李滉의 ≪理學通錄≫에 추보한 ≪理學通錄補集≫의 발문. 李滉의 ≪理學通錄≫은 성리학의 중요 저술이지만 간행되지 못한 채 추보할 것이 있어 1673년 禮說로 인해 刑曹에서 명을 기다리던 중 ≪文獻通考≫·≪吾學編≫·≪皇明通紀≫·≪一統志≫ 등과 성혼이 손수 批點하여 標註한 것을 참조하여 ≪朱書節要≫의 예를 모방하여 책을 이루었다며 주서절요와 표리가 될만할 것이라고 경위와 의의를 밝힌 내용.
書外王父手書經世編年晉事後 (24) ≪經世編年≫<晉事>에 申欽이 손수 써놓은 것을 신흠이 돌아간지 50여 년만에 보게 된 감회를 밝힌 글. 신흠이 邵雍의 ≪經世書≫를 좋아하여 春川에 유배되었을 때 연경에서 사다가 읽고 ≪先天窺管≫ 중에 自得한 것을 보여 주었다. 또 아들 申翊相과 손자 申最도 이 책에 능통하여 업적을 남겼고 자신도 申最와 함께 토론한 적이 있다는 내용.
跋伊洛淵源續錄 (25) ≪伊洛淵源續錄≫의 발문. 중국의 謝學士가 펴낸 것으로 朱子 이후 인물 108인에 대한 것을 彙集하였다는 내용.
跋栗谷先生續集 (26) 1675. 李珥의 ≪栗谷先生續集≫ 발문. 白川에 내려갔을 때 從玄孫 李紳에게 石潭에 草藁 9권이 있다는 것을 듣고 얻어 읽었다. 그 뒤 옛 친구들이 소장한 것들을 참조하여 8권으로 만들어 續集을 삼고 나머지는 外集으로 하였다는 내용.
跋履素齋心性情圖 (28) 李仲虎의 <心性情圖> 발문. 金榦을 통해서 보게 된 경위를 밝히고 上中末圖로 구성된 도설의 내용에는 金木水火土를 五性에 배속하지 않고 四端을 七情에 예속시키지 않는 등 애석한 점이 있지만 人性의 근본을 밝히고 성학의 모범을 세우고자하여 그 공이 적지 않다는 내용.
再跋寄齋雜記 (29) 1676. 朴東亮의 ≪寄齋雜記≫에 재차 쓴 발문. 기재잡기는 임진왜란에 사관들이 모두 도망한 상황에서 박동량이 6部의 通郞으로 春秋를 兼管하여 쓴 것으로 병자호란 뒤 李植이 ≪선조실록≫을 다시 만들 때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내용.
跋聽松先生心經 (30) 1677. 成守琛이 소장했던 ≪心經≫ 跋文. ≪心經≫은 중국에서는 중히 여기지 않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趙光祖 이후 李彦迪·李滉·曹植·成渾 등이 ≪近思錄≫과 짝을 이뤄 전수하였다. 당시 성수침이 손수 보았던 책을 200년이 지나서 5대손 成至善이 가지고 와 부탁하길래 발문을 써 준다는 내용.
跋從大父鳳村集 (31) 1677. 朴東說의 시문집인 ≪鳳村集≫ 발문. 金尙憲의 권유에 따라 아들인 朴濠가 박세채에게 부탁하여 朴東亮의 시문들과 함께 모으고 박동열은 鳳村으로‚ 박동량은 鳳洲라 칭하던 것을 따라 ≪봉촌집≫으로 이름하게 되었다는 내용.
書耘谷詩史後 (1) 1677. 元天錫의 詩史 뒤에 붙인 글. 申欽의 ≪晴窓軟談≫에서 元天錫의 節義를 알 게 된 뒤 다른 사람에게서 할아버지 朴東亮이 편찬한 선생의 詩史를 얻어 보았다. 10여 년 뒤 原州에 살면서 이 책을 얻어 ≪청창연담≫에 실린 시와 신흠의 의논‚ 조선왕조 開國과 관련된 내용을 모아 함께 엮었다는 내용.
題武侯心書後 (1) 諸葛亮이 지었다는 ≪武侯心書≫ 뒤에 題한 글. 諸葛亮의 저술 목록을 전하는 ≪文獻通考≫이나 다른 기록에도 관련된 기록이 없어 진위를 알 수 없음을 애석해 하는 내용.
跋心學至訣 (2) 1678. ≪心學至訣≫ 발문. 성리학의 요체인 居敬에 대해 鄭逑가 ≪心經≫을 發揮하여 敬에 대해 논한 말들을 모았다. 그러나 本源이나 條理에 빠진 것이나 번거로운 것이 많아 이를 蒐輯 整頓하고 趙翼의 <持敬圖說>을 참고하여 이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書喪禮通載後 (3) 1679. 申儀慶의 ≪喪禮通載≫ 뒤에 쓴 글. 1674년 禮 문제로 待罪할 무렵 成至善을 통해 받아보았는데 ≪喪禮備要≫와 여러 설을 모아 고증하였고 뒤에 자신의 의논을 붙인 것은 ≪家禮輯覽≫과 같으니 ≪비요≫와 ≪집람≫이 이 책 초고본과 거의 같다는 내용.
跋童蒙須知 (5) 朱熹의 ≪童蒙須知≫를 다시 편집하여 간행하면서 쓴 발문. 우리 나라에서는 表章하지 않다가 金安國이 영남에서 간행하고 盧守愼이 註解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전쟁 때문에 인멸된 것을 안타까이 여겨 노수신의 문집에서 뽑고 字訓과 <夙興夜寐箴解>를 붙여 보기에 편하도록 하였다는 내용.
書擊蒙要訣後 (6) 李珥의 ≪擊蒙要訣≫ 뒤에 쓴 글. 12세에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배운 이래 여러 번 읽었는데 體用이 구비되어 유자들의 準繩이요 학문을 시작할 때의 頂門一針이라 할만하다. 祭儀 등 생전에 미처 수정하지 못한 것이 있지만 큰 병통은 아니다. 제의를 뺀 뒤 李滉의 ≪聖學十圖≫‚ 成渾의 ≪爲學之方≫과 함께 하나로 합하였으니 요결로 규모를 정하고 위학지방으로 나아간 뒤 성학십도로 극진하게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
跋退溪先生語錄 (7) 1676. 朴世采가 재편집한 ≪退溪先生語錄≫ 발문. 林泳이 보여준 ≪退溪先生語錄≫은 잘못된 것이 있어 善本을 구해 교정하고 ≪晦菴語錄≫을 모방하여 분류한 뒤 李德弘의 <溪山記>를 참고하여 완성하였는데 학문에 들어가는 데에 절실한 것이라는 내용.
書外王父甲子收議後 (8) 1680. 鄭澈의 신원 문제에 대한 申欽의 甲子收議 뒤에 쓴 글. 鄭澈의 인물됨과 행적을 밝히고 모두 비판이 두려워 신원에 적극 나서지 못했는데 申欽이 정철이 공정한 사람인 것을 알아 伸雪하자는 의견을 내었다며 문집에도 남아있지 않은 그 글을 본 감회를 기록한 내용.
書稽治錄後 (11) 1681. <稽治錄> 뒤에 쓴 글. 顯宗대에 世子侍講院에 제수되자 六官의 時務를 조목별로 제시하고 程顥·程頤 두 선생의 <稽古爲治之規>를 덧붙인 것으로‚ 14년 지난 뒤에 梁處濟가 베껴놓은 것을 본 감회를 기록한 내용.
跋遯庵全書 (12) 鮮于浹의 ≪遯庵全書≫ 발문. 金世寬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히고 經訓의 大義를 깊이 알아 자득한 것이 넉넉하다고 칭송하였다. 선우협은 箕子의 후예이며 豪傑한 선비로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陶山書院과 張顯光 등을 섭렵한 뒤 龍岳山 廢寺에서 제자를 키워 서북 학자들이 존경하여 따른 인물이었다는 내용.
跋秋泉遺文 (13) 李直彦의 문집인 ≪秋泉遺文≫ 발문. 이직언이 임진왜란에 화의를 반대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고‚ 정묘호란에 오랑캐와의 맹약을 반대하는 등 3번의 환난에 3번의 큰 절개를 세운 인물이었다는 것과 손자 李震華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경위를 밝힌 내용.
跋栗谷先生外集 (14) 李珥의 문집인 ≪栗谷先生外集≫의 간행 경위를 밝힌 발문. 石潭書院에 소장된 3책의 초고본 <經筵日記>와 李瑀가 가지고 있던 서간첩‚ 李景臨이 찬한 연보‚ 安邦俊의 遺事를 모아 字劃의 진위를 고증하고 여러 판본을 참고하여 이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跋栗谷先生別集 (15) 李珥의 문집인 ≪栗谷先生別集≫의 발문. 이이가 손수 기록한 <太極問答>과 다른 사람의 기록 등을 수습하여 ≪二程全書≫의 체제를 모방하여 책을 이루었다는 내용.
跋栗谷年譜 (15) 李珥의 ≪年譜≫ 발문. 尹宣擧의 뜻에 따라 이전 연보 교정에 참여하여 <年譜攷證>을 이루고 宋時烈과 尹拯의 刪定을 거쳐 별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별본은 朱子 연보의 예에 따라 중첩시키지 않고 大旨를 취하여 편하고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였다는 내용.
跋栗谷四書諺解 (16) 李珥의 ≪栗谷四書諺解≫의 간행 경위를 밝힌 발문. 成渾의 ≪續集≫을 읽다가 이이의 ≪孟子音解≫가 좋다는 말을 보고 金長生家에 소장된 것을 얻어 보았는데 간행된 것과 다르고 근래 口訣의 병폐를 고칠 수 있는 것이라 경학의 指南을 삼을 만 하다는 내용.
跋靜菴先生文集 (17) 1681. 靜菴 趙光祖의 문집 간행 경위를 설명한 발문. 李箕疇가 文蹟을 수록해 놓은 것을 바탕으로 年譜를 완성하고 후손에게 초본을 얻고 李選의 고정 등을 거쳐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는 내용.
跋滄浪集 (19) 1682. 成文濬의 ≪滄浪集≫ 발문. 成至善이 申翼相을 도움을 받아 간행하면서 발문을 요청해왔다. 성문준은 아버지 成渾의 사후 배척받다가 반정 후 등용되었으나 외직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문집에 실린 <太極辨>과 <洪範說>은 전대에 밝히지 못했던 것이니 후학이 講學할 만하다는 내용.
書東儒師友錄後 (20) 1683. ≪東儒師友錄≫을 쓴 이유와 경위를 밝힌 글. 道學의 淵源을 상고할 길이 없어 弱冠이래 신라시대부터 仁祖때까지 성명과 자취를 수집하여 20권으로 編次하였고 李珥 이후의 일은 대략 모으기는 했지만 좀더 보충한 뒤에야 편집하여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題李處士詩卷 (21) 處士 李居周는 仁祖 초에 해주로 이사하여 정묘호란에도 가족을 온전하게 보존했던 인물로 經史百家를 섭렵하고 시도 沈鬱하고 典雅하였으며 훗날 다시 유학에 뜻을 두고 후진을 가르쳤다. 그의 손자에게 詩卷을 받아보고 그 감회를 시권 뒤에 題한다는 내용.
跋龍溪遺稿 (21) 李華相의 증조부 龍溪公의 시문집 ≪龍溪遺稿≫ 발문. 시에 능하여 權韠 등과 함께 즐기며 宋翼弼과 金長生에게 배워 반정 뒤 크게 쓰일 인물이었지만 먼저 죽어 아쉬웠는데 그 시를 얻어 볼 수 있어 감격스럽다는 내용.
跋樂全歸田錄 (22) 申翊相의 시를 모은 ≪樂全歸田錄≫의 발문. 樂全稿에 남한산성에서 올린 상소와 물가에 은둔하던 시절의 시가 많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중 歸全錄을 간행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외숙 신익상이 風流와 行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병자호란에 격문을 불사르며 사수하기를 청하고 항복한 뒤에는 寒士와 같이 살며 瀋陽에 가서도 뜻을 변치 않았다는 내용.
跋汾西集 (23) 朴瀰의 시문집인 ≪汾西集≫ 발문. 박미는 張維에게 큰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사람으로 평생 저술한 시와 잡문을 박세채 자신이 편집하였는데 아직 간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손자 朴泰斗에게 주어 조만간 간행하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
題烟村遺蹟後 (24) 崔德之의 ≪烟村遺蹟≫ 뒤에 題한 글. 최덕지가 문종 때 미리 물러나 存養樓를 지어 재난을 면했고 程朱의 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때에 ‘存養’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을 闡揚하는 내용.
題二書要解後 (25) ≪心經≫과 ≪家禮≫를 뽑아 편집하고 풀이한 ≪二書要解≫ 뒤에 題한 글. 시골에서라도 ≪心經≫과 ≪家禮≫를 읽으면 스스로 미루어 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심경≫과 ≪가례≫의 의의를 밝힌 내용.
跋吳林溪達濟手帖 (26) 1684. 吳達濟의 필적을 모은 手帖의 발문. 三學士가 淸에 대해 抗言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추모하고 손자 吳遂一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글.
跋晩退軒遺稿 (27) 申翼相의 할아버지인 申應榘의 시문집 ≪晩退軒遺稿≫의 발문. 신응구는 평생 성리서들을 읽어 見識이 투철하였던 인물로 기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손자 신익상이 家藏하고 있던 유고를 보니 몇 편 안되지만 發明한 것이 많아 간행을 권유하였다는 내용.
跋新定自警編 (27) ≪新定自警編≫의 발문. ≪自警編≫의 門類가 자세하지 않고 뜻이 잡다해서 增刪하고 朱熹의 <名臣錄>의 뜻을 붙였다는 내용.
跋紀年通攷 (28) 1685. 星江 趙見素의 ≪紀年通攷≫ 발문. 野史에는 잡스럽고 잘못된 말이 많고 믿을 만한 것이 드문데 조현소가 典故에 힘써 ≪皇明通記≫와 ≪撮要寶鑑≫‚ 碑狀 문자 등을 참고하여 중국과 조선의 治亂과 離合을 정돈하여 놓았다는 내용.
跋程朱二先生箴規 (29) 1685. 程子와 朱子의 箴規 발문. 程子와 朱子의 <四勿敬齋箴>과 <白鹿洞規>에는 공부의 절목이 자세히 갖추어져 있어 平壤 仁賢書院의 院儒들이 와서 規束을 청하길래 두 선생의 箴規를 걸어 놓기를 권했다는 내용.
書退牛栗三先生遺書後 (29) 李滉의 ≪聖學十圖≫‚ 成渾의 ≪爲學之方≫‚ 李珥의 ≪擊蒙要訣≫을 모아 판각한 ≪退牛栗三先生遺書≫ 뒤에 쓴 글. 沈壽亮의 요청으로 3가지 책을 합하여 1책으로 만들게 된 경위를 밝히는 내용.
跋河西集 (30) 1685. 金麟厚의 시문집인 ≪河西集≫의 발문. 김인후가 仁宗에게 侍講하며 君臣交修의 道를 가졌으나 어려운 時運을 만났다고 아쉬워하고 문집이 인멸될 지경이 되어 金壽恒의 주선으로 후손 金時瑞의 부탁을 받아 자신이 편집하여 다시 간행하게 되었다는 경위를 기록한 내용.
跋道學正脈後 (31) 權韠의 ≪道學正脈≫ 뒤에 쓴 발문. 시에만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권필이 正學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朴知誡와 宋淵을 통해서 들었는데‚ 이제 沈廷熙에게서 권필이 淵源과 理學을 손수 초록하고 圈點하여 玩誦한 자취가 있는 ≪道學正脈≫을 얻어 보게 되어 그 감회를 기록한다는 내용.
跋山堂集 (32) 山堂書客 崔忠成의 시문집인 ≪山堂集≫의 발문. 최충성은 독서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金宏弼 門人으로 이단을 배격하였으며 유명한 산을 섭렵하였던 인물인데 崔邦彦을 통해 시문을 얻어 보고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題楊湖詩稿後 (33) 閔嶪의 시집 뒤에 題한 글. 민업은 玄谷 趙緯韓의 門人으로 글씨에 俗氣가 없고 시는 고결하며 문장은 간략하면서도 훌륭헀는데 학문에 대한 것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는 내용.
題申哨官夢憲哀詩叙後 (33) 申夢憲의 同宗 申復一이 쓴 신몽헌 哀詩 서문 뒤에 題한 글. 金應河와 함께 원정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申夢憲의 일을 기록한 申復一의 서문에 신몽헌의 손자의 청에 따라 題하게 된 경위를 밝힌 내용.
跋先公中峯集 (35) 아버지 朴漪의 시문집인 ≪中峯集≫의 발문. 朴漪가 병자호란 이후 바닷가에 살다가 서울에 돌아와 지은 시를 5권으로 모으고‚ 요절한 숙부 朴濰의 글을 함께 모았다는 내용.
跋石峯遺稿 (36) 1687. 韓脩의 문집인 ≪石峯遺稿≫의 발문. 韓脩는 자질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명종 때 曺植·李恒 등과 함께 추천을 받았으며 당론이 성해지자 자취를 감추고 自守하였는데‚ 시 등에서 그 뜻을 볼 수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
題全縣監應星事實後 (37) 全應星의 손자 全聖翊이 朴泰初에게 부탁하여 全應星이 倡義한 병사와 함께 栗峙에서 큰 적을 만나 죽은 일을 기술한 글에 題한 내용.
獅子硯銘-幷引 (1) 목각으로 사자를 새기고 벼루와 筆墨을 둔 獅子硯에 새긴 명. 楊萬世가 趙緯韓에게 주었는데 병란에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져 왔다는 내용.
釰銘-幷引 (1) 1677. 집안에 전해 오던 검을 改粧한 뒤에 새긴 銘.
一所銘-幷引 (1) 1680. 一所라 自號한 뒤 자신을 경계하는 銘. 敬을 萬善의 근본으로 삼아 종신토록 종사할 것이라는 내용.
四十箴 (2) 1670. 40세에 뜻을 구하는데 힘쓰고 학문에 힘써 나아가겠다며 자신을 경계하는 箴.
六十箴-幷引 (3) 1690. 60세에 40에 箴을 세운 이후의 공부를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箴.
趙氏聘幣書 (4) 1668. 아들 朴泰殷의 처가 될 趙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尹氏聘幣書 (4) 둘째 아들 朴泰輿의 처가 될 尹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李氏聘幣書 (5) 1670. 셋째 아들 朴泰正의 처가 될 李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回宋氏書 (5) 1673. 장녀가 시집 갈 집안인 宋時烈家에서 폐백을 받고 혼인을 허락하는 글.
申氏聘幣書 (5) 1674. 넷째 아들 朴泰晦의 처가 될 申氏에게 폐백을 전하는 글.
回申氏書 (6) 1681. 둘째 딸이 시집 갈 집안인 申氏家에서 폐백을 받고 혼인을 허락하는 글.
回李氏書 (6) 1689. 셋째 딸이 시집 갈 집안인 李氏家에서 폐백을 받고 혼인을 허락하는 글.
魯岡書院上樑文 (6) 1673. 魯岡書院의 상량문. 尹煌의 의리‚ 成守琛 이래의 가학과 金長生의 학맥을 잇는 尹宣擧의 사당을 짓게 된 의의를 서술하는 내용.
晩醒亭新居上樑文 (8) 1687. 晩醒亭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의 새로운 거처의 상량문. 주인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가 늙어서는 세상에 은둔하려고 새로 어버이를 모실 곳과 강학한 장소를 짓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는 내용.
告高祖僉正公還安文 (10) 1659. 朴炳을 대신하여 지은 글로 朴炳의 고조부인 朴兆年의 신주를 長房에 祧遷하였다가 옛 사당 서쪽 방으로 還安함을 고하는 글.
出寓西湖時告家廟文 (10) 1662. 西江 村舍에 나가 몸을 조리하겠다고 家廟에 고하는 글.
超授宗簿寺主簿告家廟文 (11) 1665. 宗簿寺 主簿에 제수되었음을 家廟에 고하는 글.
謁先祖潘南先生墓文 (11) 1665. 선조인 朴尙衷의 묘를 찾아보고서 올리는 글.
自坡山歸告家廟文 (13) 1669.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계속 내려 坡山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체되고 있음을 家廟에 고하는 글.
立碑時告曾祖考墓文 (13) 1674. 돌아 가신지 70여 년만에 비를 다시 세우면서 증조할아버지인 朴應福의 墓에 고하는 글.
到延安喪次告亡子文 (14) 1679. 죽은 아들의 喪次에 이르러 고하는 제문.
拜司業時因歲事告廟文 (16) 1680. 성균관 司業에 제수된 뒤 사당에 고하는 글.
奉安朴思菴畵像文 (17) 朴淳의 畵像을 봉안하면서 올리는 글.
白川文會書院奉安二先生祠並配重峯趙公祭文 (17) 1681. 白川의 文會書院에 李珥와 成渾 두 선생을 並享하고 趙憲을 配享하면서 올린 제문.
春秋享祀祝文 (18) 白川의 文會書院의 李珥와 成渾에 대한 享祀의 축문.
奉安四賢祠文 (18) 白川의 文會書院에 安瑭·辛應時·吳億齡·金德咸을 봉안하는 글.
春秋享祀祝文 (19) 安瑭·辛應時·吳億齡·金德咸에 대한 享祀의 축문.
拜承旨後因歲事告家廟文 (19) 1682. 승지에 제수된 뒤 家廟에 고하는 글.
尼山魯岡祠春秋享祭文 (20) 1683. 尼山의 魯岡祠에 제향된 尹煌·尹文擧·尹宣擧의 봄가을 제향의 祭文.
詣闕陳情後告家廟文 (20) 災異로 인해 이조참의에 제수되어 궐에 이르러 진정한 뒤 가묘에 고하는 글.
魯湖祠春秋享祀祝文 (20) 1683. 魯湖祠에 배향된 死六臣 6인에 대한 봄가을 享祀의 祝文.
乞退後因歲事告家廟文 (21) 1683. 이조참의와 공조참판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한 뒤 가묘에 고하는 글.
吳林溪遺服埋安祝文 (21) 1684. 할아버지의 옷을 할머니 무덤 뒤에 묻는 吳達濟의 손자를 대신해 써준 축문.
平山雲峯祠移安祝文 (22) 平山 雲峯祠의 개수를 위하여 신위를 移安할 때의 祝文.
還安祝文 (22) 平山 雲峯祠의 개수를 마치고 신위를 還安할 때의 祝文.
遷居坡山告土地文 (22) 1687. 坡山으로 이사하면서 토지신에게 고하는 글.
新居成報祀土地文 (22) 1687. 새 거주지를 이루고 토지신에게 報祀하는 글.
高陽文山書院奉安四先生祠祭文 (22) 1688. 高陽의 文山書院에 閔純·南孝溫·金正國·奇遵을 奉安하면서 올린 祭文.
擢授吏曹判書因忌事告家廟文 (24) 이조판서에 제수된 뒤 가묘에 고하는 글.
忤旨遞職後告家廟文 (24) 熙政堂에 들어가 소매 속에 있던 5조목의 차자를 올린 뒤 宗班을 공격한 일로 대죄하다가 돌아와 가묘에 올리는 글.
蒙仍授職名後告家廟文 (24)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본래의 직책과 겸대하고 있던 직명을 그대로 두라는 명이 내린 뒤 가묘에 고하는 글.
改立石表時告七代祖僉樞公文 (25) 7대조인 朴林宗과 陽川 許氏의 石表를 고쳐 세우면서 고하는 글. 병으로 누운 宗孫 朴之相을 攝行하는 朴世集을 대신하여 써준 글.
海州二子廟奉安祭文 (25) 1691. 해주에 孤竹國 출신의 충신 伯夷와 叔齊의 사당을 세워 봉안할 때의 제문.
春秋享祀祝文 (26) 伯夷와 叔齊에게 봄가을 享祀할 때의 축문.
平山遷葬時告考妣文 (27) 1691. 아버지 朴漪와 어머니 평산 신씨의 묘를 평산으로 천장할 것을 고하는 글.
祭淸陰金先生文 (1) 金尙憲의 장례 7일 전에 올린 제문.
祭從叔父南陽公文 (3) 1656. 從叔父인 朴渟에 대한 제문.
祭內兄春沼申公文 (4) 內兄인 申最에 대한 祭文.
祭叔舅東江申公文 (4) 1662. 外叔 申翊全에 대한 祭文.
祭族父林川公-炳-文 (6) 1663. 族父인 朴炳에 대한 祭文.
祭外舅廣州府尹元公文 (6) 장인 元斗樞에 대한 제문.
祭金和順文 (8) 1664. 金克亨에 대한 祭文.
祭原平元相國文 (9) 妻의 백부인 元斗杓에 대한 祭文.
祭表兄判書李公-一相-文 (11) 1666. 表兄인 李一相에 대한 祭文.
祭再從兄參判公-世模-文 (12) 1668. 재종형 朴世模에 대한 제문.
祭沂川洪相國文 (13) 아들 朴泰殷을 보내 올린 沂川 洪命夏에 대한 祭文.
祭李星州-斗陽-文 (15) 李斗陽에 대한 祭文.
祭內兄申晉夫-暹-文 (15) 內兄 申暹에 대한 祭文.
祭魯西尹先生文 (15) 1669. 魯西 尹宣擧에 대한 祭文.
祭表兄靜齋李公文 (17) 表兄인 靜觀齋 李端相에 대한 제문.
祭從母夫判書趙公-啓遠-墓文 (19) 1670. 從母夫인 趙啓遠에 대한 祭文.
祭宋子文文 (20) 1673. 宋斗章에 대한 제문.
祭族兄承旨公-世城-文 (21) 朴世城에 대한 祭文.
祭楊湖閔先生文 (22) 閔嶪에 대한 제문.
祭白軒李相國文 (24) 白軒 李景奭에 대한 제문.
祭外祖考文貞公象村申先生遷葬文 (24) 1675. 외할아버지인 象村 申欽의 墓를 48년 만에 廣陵으로 遷葬할 때에 올린 제문.
祭同春堂宋先生遷葬文 (26) 宋浚吉의 墓를 遷葬할 때에 올린 제문.
祭昇平都正-潤-墓文 (26) 朴潤의 묘에 제사하는 제문.
祭亡姉文 (27) 1679. 누이에 대한 제문.
祭族兄金浦公-世相-文 (28) 1680. 朴世相에 대한 제문.
祭判書張公-善澂-墓文 (28) 張善澂의 墓에 제사하는 제문.
祭仲姑文 (30) 1680. 고모인 나주 박씨에게 아들 朴泰殷을 보내 제사하는 제문.
祭沈士磬文 (31) 1684. 門人 沈俔에 대한 제문.
祭伯舅樂全申公遷葬文 (32) 1685. 외숙인 申翊聖의 묘를 遷葬할 때 올린 제문.
祭南判書仲輝文 (32) 南二星에 대한 제문.
祭沈全州-榥-夫人文 (33) 1687. 沈榥의 夫人에 대한 제문.
祭朴生-文壁-文 (33) 朴文壁에 대한 제문
祭崔卓叔-柱河-文 (34) 崔柱河에 대한 제문.
祭從姪校理-泰萬-文 (35) 1689. 朴泰萬에 대한 제문.
祭李仁甫文 (36) 李時春에 대한 제문.
祭族姪坡州-泰輔-文 (37) 1689. 朴泰輔에 대한 제문.
祭李判書彛仲文 (38) 1690. 李敏敍에 대한 제문.
祭李載叔文 (39) 李堉에 대한 제문.
祭尤齋宋先生文 (40) 1691. 尤菴 宋時烈에 대한 제문.
先祖潘南先生褒贈紀事碑 (1) 1682. 朴尙衷의 褒贈이 이루어진 경위와 李仁任 세력에 맞서 北元에 사신을 보내려는 일 등을 막았던 일 등 박상충의 행적에 대해 기록한 글.
知中樞府事諡靖惠成公神道碑銘 (3) 成渾의 손자이며 成文濬의 아들인 成㮨의 신도비명.
禮曹判書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 (7) 1685. 朴東說의 門人이며 李德馨의 손녀사위인 浩庵 李基祚의 신도비명.
濟用監正贈吏曹判書申公神道碑銘 (13) 申應榘의 아들이며 申翼相의 아버지로 趙守倫의 門人인 申湸의 신도비명.
黃海道兵馬節度使鶴城君贈兵曹判書金公神道碑銘 (16) 1687. 鶴城君 金完의 신도비명.
禮曹參判贈領議政申公神道碑銘 (21) 申欽의 아들인 외숙 申翊全의 신도비명.
禮曹參判思齋金公神道碑銘 (27) 1691. 思齋 金正國의 신도비명.
先祖議政府左議政錦川府院君諡平度公墓碑銘 (33) 朴尙衷의 아들이며 李穀의 외손인 先祖 釣隱 朴訔의 묘비명.
曾祖司憲府大司憲贈領議政潘川府院君朴公碑陰記 (39) 1670. 증조부 朴應福의 碑陰記로 후손 이름과 관직‚ 묘비가 50여년 만에 다시 세워진 경위‚ 인품 등에 대한 내용.
黃海道觀察使贈吏曹參判朴公碑陰記 (41) 1676. 朴東說의 碑陰記로 遷葬하면서 음기를 기록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朴東說이 成渾에게 배우고 洪聖民 등 여러 인물에게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었다는 내용.
孝子慶州鄭君墓碣銘 (1) 鄭勳의 묘갈명.
吉州牧使朴公墓碣銘 (3) 1673. 柳祖訒의 門人 朴東望의 묘갈명.
處士贈執義金公墓碣銘 (6) 許曄의 門人 처사 金繼의 묘갈명.
淮陽府使贈禮曹參判金公墓碣銘 (8) 松巖 金鍊光의 묘갈명.
南原府使柳公墓碣銘 (11) 崔沂의 외손 柳時定의 묘갈명.
處士瀟洒翁梁公墓碣銘 (13) 趙光祖의 門人인 梁山甫의 묘갈명.
慶州府尹贈左贊成元公墓碣銘 (16) 1684. 朴知誡의 門人으로 元斗杓의 아우이며 박세채의 장인인 元斗樞의 묘갈명.
處士楊湖閔公墓碣銘 (21) 趙緯韓·金長生·張顯光의 門人인 閔嶪의 묘갈명.
通川郡守趙公墓碣銘 (25) 1685. 趙緯韓의 아들인 趙億의 묘갈명.
工曹正郞贈戶曹參判金公墓碣銘 (27) 金構와 金楺의 할아버지이며 朴知誡의 門人인 金克亨의 묘갈명.
昭格署參奉介菴姜公墓碣銘 (1) 1685. 介菴 姜翼의 묘갈명.
順天郡守贈領議政李公墓碣銘 (3) 李珥의 再從弟 李通의 묘갈명.
刑曹正郞贈左贊成李公墓碣銘 (8) 1686. 李碩基의 묘갈명.
鍾城府使金公墓碣銘 (10) 金元立의 묘갈명.
掌樂院僉正贈左承旨朴公墓碣銘 (13) 朴世喬의 묘갈명.
司饔院參奉金公墓碣銘 (16) 金詠의 묘갈명.
健元陵參奉李公墓碣銘 (18) 李鳳男의 묘갈명.
贈司憲府持平李公墓碣銘 (19) 李鵬壽의 묘갈명.
禮曹參判李公墓碣銘 (22) 1690. 李俊耈의 묘갈명.
承政院左承旨趙公墓碣銘 (26) 趙纘韓의 묘갈명.
龍宮縣監趙公墓碣銘 (30) 趙纘韓의 아들 趙休의 묘갈명.
弘文館校理贈吏曹參判趙公墓碣銘 (33) 宋英耈와 任叔英 門人 趙重呂의 묘갈명.
敬陵參奉李公墓碣銘 (36) 1691. 朴知誡 門人 李義吉의 묘갈명.
同知中樞府事朴公墓碣銘 (41) 金長生과 金玄成 門人 守愚 朴煥의 묘갈명.
工曹佐郞具公墓碣後記 (45) 1684. 墓碣의 後記. 具公은 시로 유명하였고 일세의 명사와 사귀며 반정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이라는 내용.
戶曹判書延城君贈領議政諡忠靖李公墓表 (1) 1664. 李貴의 아들인 李時昉의 묘표.
議政府右參贊尹公墓表 (3) 1669. 菊磵 尹鉉의 묘표.
海州牧使羅公墓表 (5) 1675. 羅萬甲의 아들이며 鄭曄의 외손으로 張維·鄭弘溟의 門人이었던 安定 羅星斗의 묘표.
成均生員朴君墓表 (7) 1677. 생원 朴世彙의 묘표.
公州牧使李公墓表 (9) 李恒福의 손자 李時顯의 묘표.
工曹參議贈吏曹參判牛山安公墓表 (10) 朴光前·成渾 門人인 牛山 安邦俊의 묘표.
承政院左副承旨晩退申公墓表 (13) 申用漑의 현손으로 成渾·李珥의 門人인 晩退 申應榘의 묘표.
宗室平城令墓表 (16) 종실인 平城令 李의 묘표.
司憲府大司憲贈吏曹判書諡忠貞金公墓表 (17) 1684. 醒翁 金德諴의 묘표.
處士沈公墓表 (22) 1685. 鄭逑·張顯光 門人인 처사 沈之澤의 묘표.
六世祖僉知中樞府事府君墓表 (24) 1686. 6세조인 朴林宗의 묘표.
議政府左議政鄭公墓表 (25) 1689. 좌의정 鄭知和의 묘표.
錦昌副尉朴君墓表 (31) 1689. 박세채의 族姪이며 門人으로 昭顯世子의 사위인 朴泰定의 묘표.
北部參奉馬公墓表 (34) 1690. 馬羲慶의 묘표.
敦寧府都正朴公墓誌銘 (1) 1657. 朴紹의 아들로 朴緝에게 입후했으며 柳祖訒에게 배웠던 朴應仁의 墓誌銘.
吏曹參判錦洲君朴公墓誌銘 (3) 1662. 朴東善의 아들인 朴炡의 묘지명.
承政院左承旨宋公墓誌銘 (8) 1674. 宋時喆의 묘지명.
社稷署參奉贈戶曹參判李公墓誌銘 (11) 沈世熙의 외조부인 弦齋 李瑑의 묘지명.
珍山郡守宋公墓誌銘 (13) 宋時烈의 형 宋時黙의 묘지명.
翊衛司翊衛柳公墓誌銘 (16) 鄭弘翼의 門人인 柳忠傑의 묘지명.
都摠府都事贈兵曹參判吳公墓誌銘 (19) 吳應鼎의 아들인 吳稷의 묘지명.
孺人趙氏墓誌銘 (21) 趙翼의 손녀이며 李時白의 외손녀로 朴泰斗의 妻인 孺人 趙氏의 묘지명.
黃海道觀察使李公墓誌銘 (23) 1676. 夢灘 李萬雄의 묘지명.
順天府使贈漢城府左尹吳公墓誌銘 (26) 吳應鼎의 묘지명.
同知中樞府事贈吏曹判書李公墓誌銘 (29) 李行健의 묘지명.
議政府左議政原平府院君元公墓誌銘 (1) 1676. 朴知誡의 門人인 元斗杓의 묘지명.
吏曹參判朴公墓誌銘 (9) 朴世模의 墓誌銘.
崔君雲卿墓誌銘 (13) 崔曇의 묘지명.
榮川郡守任公墓誌銘 (15) 任濬의 묘지명.
南陽府使朴公墓誌銘 (18) 1677. 朴渟의 묘지명.
僉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朴公墓誌銘 (20) 申欽의 사위인 朴濠의 묘지명.
同知中樞府事贈領議政金公墓誌銘 (23) 1677. 金尙憲의 아들인 金光燦의 묘지명.
沈君式汝墓誌銘 (26) 1678. 尹文擧의 사위로 尹宣擧에게 배웠으나 요절했던 沈楷의 묘지명.
全羅道觀察使金公墓誌銘 (27) 金構와 金楺의 아버지로 宋浚吉 門人이었던 金澄의 묘지명.
敦寧府僉正贈吏曹參判姜公墓誌銘 (33) 1681. 姜秀崑의 묘지명.
尙衣院正鄭公墓誌銘 (35) 鄭澈의 손자인 抱翁 鄭瀁의 묘지명.
弘文館校理朴公墓誌銘 (38) 朴宗阜의 묘지명.
刑曹佐郞贈戶曹參判柳公墓誌銘 (41) 柳誠吾의 묘지명.
司憲府大司憲贈左議政鄭公墓誌銘 (1) 1681. 鄭澈의 아들인 畸菴 鄭弘溟의 묘지명.
開城府留守李公墓誌銘 (5) 1682. 李後山의 묘지명.
議政府領議政洪公墓誌銘 (8) 沂川 洪命夏의 묘지명.
宗室蓬山君墓誌銘 (17) 1683. 李炯信의 묘지명.
處士朴公墓誌銘 (20) 처사 朴璘의 묘지명.
趙君平叔墓誌銘 (22) 1685. 趙翼의 손자이며 趙持謙의 형인 趙持衡의 묘지명.
廣興倉守朴公墓誌銘 (24) 朴世相의 묘지명.
刑曹判書贈領議政諡忠靖趙公墓誌銘 (28) 1686. 趙啓遠의 묘지명.
高祖考司諫院司諫贈領議政冶川先生墓誌銘 (1) 朴英의 門人인 高祖父 冶川 朴紹의 묘지명.
全羅道觀察使趙公墓誌銘 (9) 1687. 藏六堂 趙龜錫의 묘지명.
皇明鄕學生朝鮮國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田君墓誌銘 (12) 1687. 田好謙의 묘지명.
翊衛司翊衛崔公墓誌銘 (14) 1689. 崔徽之의 묘지명.
季父學生朴公墓誌銘 (18) 1689. 季父인 朴澬의 묘지명.
司憲府掌令贈吏曹參議冶谷趙公墓誌銘 (19) 1690. 李命俊·朴知誡·趙翼 門人인 冶谷 趙克善의 墓誌銘.
議政府領議政沈公墓誌銘 (26) 1691. 晩沙 沈之源의 墓誌銘.
先考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府君墓記 (35) 1690. 朴東亮의 아들로 申欽의 門人이며 사위였던 아버지 朴漪의 墓記.
伯父錦陽君朴公墓誌後記 (37) 朴瀰가 自撰 墓誌를 기록한 뒤에 일어난 일‚ 부마로 선발될 때의 일화‚ 元宗 추숭을 반대한 일 등을 기록한 後記.
先考司憲府掌令府君行狀 (1) 박세채의 아버지인 朴漪의 행장.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退菴朴公行狀 (13) 柳祖訒·成悌元의 門人인 退菴 朴應男의 행장.
伯父錦陽君朴公行狀 (27) 貞安翁主의 남편으로 宣祖의 부마이며 李恒福과 申欽 門人이었던 박세채의 백부 汾西 朴瀰의 행장.
司諫院司諫贈弘文館副提學朴公行狀 (35) 1664. 活塘 朴東賢의 행장.
弘文館副提學靜齋李公行狀 (41) 靜觀齋 李端相의 행장.
弘文館副修撰贈吏曹判書諡文靖河西先生金公行狀 (1) 河西 金麟厚의 행장.
成均生員贈吏曹參議魯西先生尹公行狀 (10) 魯西 尹宣擧의 행장.
議政府右議政鄭公行狀 (34) 陶村 鄭維城의 행장.
議政府領議政平城府院君諡忠翼申公行狀 (1) 申砬의 아들인 申景禛의 행장.
弘文館典翰惺菴李公行狀 (11) 惺菴 李壽仁의 행장.
成均生員趙公行狀 (24) 趙光庭의 행장.
議政府左議政諡文孝浦渚先生趙公行狀 (28) 浦渚 趙翼의 행장.
廣興倉守贈左承旨李公行狀 (49) 1689. 李惇五의 행장.
柳先生祖訒傳 (1) 1667. 李仲虎 門人으로 예학에 밝았으며 鄭芝衍·朴應男 등과 교분을 나누었던 泛愛 柳祖訒에 대한 약전.
西湖三高士傳 (4) 西湖 주변에 있던 李之涵의 土亭의 자취를 더듬고 그 뒤에 일어난 인물들인 蓮峯 李基卨‚ 石田 成輅‚ 石洲 權韠 등에 대한 略傳을 기록한 글.
處士海狂宋公傳 (7) 처사 海狂 宋齊民의 전기. 李之涵 門人으로 生民에 뜻을 두고 醫局을 두어 치료하였다. 魚鹽을 이용해 비용을 만들고 神祠 뒤의 소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왜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金德齡을 구원했고 기근에는 배로 곡식을 날라다 구휼하였다. 왜와의 화친에 반대하며 복수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돌아다니며 제자를 가르쳤던 인물이라는 내용.
高麗太師壯節申公別傳 (19) ≪高麗史≫와 ≪輿地勝覽≫ 등에 기록이 실려 있는 申崇謙에 관한 기록을 모으고 뒤에 贊을 붙여 놓은 전기.
靜庵趙先生年譜 (1) 靜庵 趙光祖(1482-1519)의 年譜.
栗谷李先生年譜上 (1) 李珥의 年譜로 출생에서부터 1575년(40세) 12월에 朴淳에게 편지한 일과 병으로 면직되고 護軍에 제수될 때까지의 기록.
栗谷李先生年譜下 (1) 李珥의 年譜로 1576년(41세) 栗谷에 돌아간 일부터 1687년 文廟에 종사되고 문집의 續集‚ 外集‚ 別集이 완성되기까지의 기록.
搜訪人才事目 (1) 1683. 인재를 등용할 때 지켜야 할 절차 등을 밝힌 事目. 인재를 구하여 어질고 능력있는 인물을 등용하기 위해 중종 때 趙光祖가 요청한 薦擧科의 법과 程子가 논한 選士法을 참고하여 정하였음. 천거할 관원의 범위‚ 천거할 숫자‚ 薦目에 구애되지 말 것‚ 잘못 추천했을 때 連坐하는 법을 엄히 할 것‚ 천거할 만한 재주가 있는데도 죄에 빠질까 두려워하여 천거하지 않는 자에 대해 문책할 것 등 11조목의 내용.
吏曹因搜訪人才八道文 (6) 이조에서 인재를 찾는 일로 각도 관찰사에게 통보한 글. 搜訪人才節目을 알리고 監司가 아뢸 때 3등으로 구분하여 추천한 사람‚ 人品 등을 別單으로 보고할 것 등을 지시하는 내용.
上已次少陵曲江韻‚ 送申兄寅伯-晸-歸覲光山‚ 寄李彛仲‚ 寄金兄一正-佐明-安邊謫所‚ 南城晩眺寄靜之-善澂(1648)‚ 送李兄咸卿-一相-出守錦城‚ 懷李兄幼能-端相‚ 敬次先君韻寄均上人-幷引‚ 己丑立春日雪二首(1649)‚ 風雨曉聞鷄‚ 太華春雪歌‚ 送再從兄汝道-世模-下第南歸‚ 露梁送從兄與乘-世橋-上忠原‚ 懷申寅伯兄李弼卿-翊相-時棲道峯(1650)‚ 別柳弟悠久-尙運‚ 別李兄汝端-元龜‚ 將歸‚ 辛卯寒食日雪(1651)‚ 贈申兄季良-最-還往川任所‚ 新院‚ 城南漫興(1654)‚ 贈朴眞卿-安期-赴瓮津‚ 次申子晉-碩亨-丈遣懷韻‚ 挽崔安山-振海-戚丈(1655)‚ 僑居得寒疾偶吟(1656)‚ 挽權處士-師吉‚ 客夜用圃隱先生韻‚ 曉發抱川‚ 巴陵渡(1657)‚ 歸思‚ 阻雪公山示金堪輿-兌厚-二首‚ 七月十五夜翫月偶吟(1658)‚ 人有寄示遊覽自然海上之作者次韻以報二首(1659)‚ 僑居漫詠‚ 朝日‚ 初秋旣望夜(1662)‚ 江上偶吟(1663)‚ 挽韓生-世五‚ 夏間業族父丹陽公-煥-命以醫字一絶和進纔得二句旋遭喪慘不敢遂今始續貂‚ 西門石橋月夜步歸‚ 宿山谷村‚ 到從兄蓮城丙舍作‚ 待幼能兄於明月亭感作三絶‚ 楊山道中‚ 重陽月夜‚ 將歸‚ 挽宋進士-國蓍(1665)‚ 楊山感舊二首‚ 吹笛橋‚ 次李養而-之濂-詠溫泉韻‚ 抱城分路贈沈上庠-宗迪‚ 滯雨楊蓬萊山下‚ 寒食日聞李尙書-一相-兄入地雪涕有作‚ 重經松都‚ 次李星州-斗陽-丈寄示韻‚ 雨夜偶吟‚ 四月八日次崔漢卿-後亮-憶觀燈韻‚ 族父永春公-垓-經歷松都時創小閣蓮塘上名曰淸香先伯父汾西公有詩記之今行偶到此歇馬有感敬次其韻‚ 霽夕偶吟二首‚ 西城夜坐‚ 登蠶頭峯作‚ 彛仲中書見訪不遇留題一絶而去戱次其韻(1667)‚ 江樓風雨偶吟‚ 有聞‚ 挽成上舍-震昌‚ 送汝瑞兄赴慶山(1668)‚ 雨中卽景‚ 晴後外軒口號‚ 酬寄崔水部漢卿‚ 宿楊山夕夢見趙兄禹瑞翌朝馳省其墓感作一絶‚ 送鑑湖堂主人崔丈-琢-東歸(1669)‚ 曉起感懷‚ 夜作‚ 謾吟‚ 次權兄說卿-說-寄示韻(1670)‚ 金而精就礪退陶門人也聞其世居蓮城仕至諸寺正歿而從葬先塋第身後只有一庶子今亦已絶矣余適路出其墓又無表識遂感歎有作‚ 西亭晩步二首‚ 新昌客館次聽松先生手書杜律韻‚ 寄寅伯兄時以接倭官在萊山‚ 留贈主倅再從兄廈卿-世樑(1672)‚ 松厓次南郭大父韻(1673)‚ 挽李執義世卿-有相‚ 鳳頭亭別李樂甫-藼(1675)‚ 驪陽歸路‚ 臨津憶趙通川-億‚ 與洪生聖則-有龜-訪上院寺翌日歸路作‚ 重陽前夕散步‚ 重陽病吟‚ 過山壇追次白沙-李恒福-先生韻‚ 助浦悼姜粹卿-文粹‚ 寄愼仲任-景尹-三首‚ 雪後發松都‚ 渡迷津二首‚ 松都懷洪少尹國寶-錫龜-兼示其季聖則‚ 驪江道中‚ 阻雨竹山店舍‚ 過牙山王父謫寓攬涕以書二首‚ 過李相國白江-李敬輿-舊居‚ 過禿城‚ 過基谷‚ 哭金元會-澄-靈筵歸路志感二首‚ 九月旣望偶步西園次少陵登高韻是夕風雨‚ 睡覺詠懷‚ 到坡山病臥寄趙高陽-逢源-丈‚ 曉發德淵村‚ 神勒寺月夜贈李兄士常-恒-南歸‚ 挽李上庠-師命-內二首‚ 贈羅顯道-良佐-奉親還洛中‚ 中原‚ 冒雨過月溪峽‚ 具濟伯-時經-吳子順-壽昌-自首陽來訪仍與同宿金谷村閔春卿-震元-亦自龜巖至翌日敍別歸路有作却寄‚ 牛場途中‚ 安山哭朴僉知-瞰-二首‚ 到泰安洞草深不得深東北兩源悵然而歸‚ 楊江滯雨錄示權致道-尙夏‚ 挽金上舍-道凝‚ 挽孟右尹元徵-冑瑞(1679)‚ 挽洪國寶二首(1680)‚ 次兪伯圭-瑒-令公寄示韻‚ 聞李同甫-喜朝-病蘇賦此却寄‚ 挽南雲路-九萬-大夫人‚ 挽趙正-泰相‚ 挽領相女李氏婦八韻(1681)‚ 月夜偶吟‚ 懷寅伯兄二首‚ 寄趙士達-逢源-丈‚ 寄題申夷簡公祠下-幷引‚ 贈士磬二學徒-成冑昌·康世鳴(1682)‚ 沈丈-宗迪-次人字韻以示謹步申謝‚ 挽李沃溝-廷麟‚ 寄申公獻-琓-代言時遊楓岳未還‚ 挽林德涵-泳-母夫人‚ 挽李弼卿女尹氏婦(1683)‚ 謝淸風崔使君漢卿寄酒‚ 挽兪參判-瑒-夫人(1684)‚ 道中贈愼仲任‚ 題沈丈次栗谷外集卷尾‚ 送李姪久而-益壽-赴忠淸亞幕(1685)‚ 暮春訪孔潭書室贈沈丈‚ 崔以遠來訪東陽關雨少留及其辭歸書此以謝‚ 羅顯道-良佐-使君壽親縣齋諸客有詩遠徵拙句步寄‚ 挽尹忠州汝休-嘉績‚ 挽永安尉洪公-柱元-遷葬‚ 挽朴判書-長遠-夫人(1686)‚ 挽朴察訪-成阜‚ 偶到禿浦次參奉叔寄示韻(1687)‚ 挽延陽府院君李公-時白-夫人‚ 蔡進士-時鏡-寄示一絶未報遽聞其凶訃今始次韻爲挽二首‚ 過蘿菴寺懷申留守寅伯兄歸櫬‚ 挽柳兄奉事-燦然-二首(1688)‚ 翌日風雨大作‚ 白川洪使君-萬熙-歷訪溪居索別語甚勤率爾口店以贈之‚ 挽李右相仲羽-䎘‚ 挽宋生希文-晦錫-二首(1689)‚ 挽李判官夢卿-廷龍-二首‚ 挽曹上舍--二首‚ 挽兪上舍-卨言-二首(1690)‚ 次兪寧叔-得一-歸江舍寄示韻‚ 挽申坡州玉爾-汝拭-二首‚ 挽成進士-虎錫‚ 次顯導寄示菊秋壽席韻‚ 歸路與鄭眞卿-尙樸-謁五冠書院將尋紫霞洞適値眞卿疾作不遂有賦(1691)‚ 挽李僉正文翁-星齡‚ 偶作‚ 雨中見釣者‚ 挽李參奉-基-二首‚ 寄題大興楓巖書堂爲李生啇泰作‚ 挽李判書弼卿‚ 安東權生-命大-遠來相訪玆以一絶申謝‚ 挽趙都事-錫命‚ 寄李文若-觀周-二首‚ 挽楊掌令-顯望.
行到高陽辭再除司憲府掌令疏 (37) 1669. 遞職되어 돌아가다가 高陽에 이르렀는데 風憲의 직임으로 다시 부르자 신병을 들어 체직하여 줄 것을 청한 상소문.
辭承政院同副承旨疏 (38) 1682. 承宣은 비워 둘 수 없는 자리라며 신병과 모친의 병환을 들어 체직을 청한 상소문.
因犯馬之失申辭疏 (40) 1683. 親黨의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辟除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같은 품계인 줄 알고 피하지 않아 王子의 행차에 犯馬하였다며 체직을 청한 상소문.
答元聘君-斗樞 (1) 1658. 元斗樞에게 보낸 편지. 흉년을 맞아 荒政에 힘쓰기를 권하고 9월 1일 왕이 贊善 二宋(宋時烈·宋浚吉)을 召見하였다는 소식에 기대를 가진다는 내용.
答金修撰-萬均 (1) 1659. 金萬均에게 보낸 편지. 顯宗 즉위 뒤의 의절에 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幼能兄 (2) 1666.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湖西의 유생들이 李珥와 成渾의 신원을 위한 상소를 올리겠다는 논의에 대해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汝九-箕洪 (3)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自靖하겠다는 뜻을 표하고 鞏仲의 일 등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尹子仁-拯 (3) 1667. 尹拯에게 답한 편지. 庶子의 說에 대해 자신의 견해가 잘못임을 승복하고 服制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養而 (4)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李端相에게 領議政이 이유도 밝히지 않고 할 수 없다고만 한다는데 事勢가 어떠한지 묻고‚ 직명을 쓰지 않은 辭狀을 吏曹로 보냈다는 내용.
與李幼能 (5)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晦菴全書≫를 공부하고 있다며 漂人을 송환하는 잘못‚ 旱害에 대한 救荒 문제 등을 염려하는 내용.
答李幼能 (6)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표류한 사람들의 송환 문제를 염려하고 金尙憲 年譜를 보기를 청하는 내용.
答宋尤齋-時烈 (7) 宋時烈에게 표류한 사람들의 일과 ≪栗谷年譜≫를 교정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편지.
答李養而 (8) 1668. 宋時烈 등에게 조정에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지만 지금 상황은 나아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편지.
答李養而 (9)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時勢를 거론하며 나아가기를 주장한 것에 대해 孝宗 때 나아갔던 것과는 다르다며 宋時烈이 지금 나아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내용.
答李幼能 (10) 李端相에게 답한 편지. 이조에서 憲官에 제수하기를 청하였다는 소식에 사양하기 위한 상소의 초고를 보내니 刪定하여 달라는 내용.
答宋尤齋 (1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벼슬에 추천되어 소장을 올려 사양하려던 중 왕이 온천에 행행하게 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구하는 내용.
與宋相國-時烈 (12)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상소에서 自處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
答李學士擇之-選 (12) 李選에게 보낸 편지. ≪栗谷年譜≫의 진행 상황 등에 대해 알리는 내용.
答尹子仁 (13) 尹拯에게 답한 편지. 왕이 온천에 行幸하는 바람에 올리지 못한 辭狀을 다시 올리기 위해 소장 등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
答南觀察使雲路 (14) 1673.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鄭斗卿의 遺藁를 간행할 규례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李同甫 (14) 167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太后服은 본래 不杖朞로 군주의 복제와 같지 않다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 (15) 尹拯에게 답한 편지.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할 수 없다는 설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
答李養而 (16) 閔愼의 代服 사건 뒤의 곡절 등에 대해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答具濟伯 (18) 1675.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物議가 다시 격해지고 있어 代服이나 개인적으로 服制를 논한 것으로 죄를 입게 될지도 몰라 여러 벗을 위하여 章牘을 抄定하고 있다는 내용.
答金士直-楺 (19) 1680. 金楺에게 답한 편지. 庚申換局 이후 변화하고 있는 정국에서의 자신의 처신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閔春卿 (19) 閔震元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辭免을 청하고 있음을 밝히고 과거 공부를 하더라도 俗人들의 습속에 빠지지 말 것을 권유하는 내용.
答林學士德涵 (20) 林泳에게 답한 편지. 벼슬에 나아갔을 때의 자세와 勸講의 요체를 말함. 사우들 중 朴鐔· 鄭齊斗의 直諒함‚ 李箕洪·沈世熙의 講磨하는 힘 등을 알아 도움을 받으라는 것과 자신과 尹拯의 出處 문제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1) 宋時烈의 登對를 전후한 상황‚ 자신의 출처 등에 대해 林泳에게 답한 편지.
答林德涵 (23) 林泳에게 답한 편지. 山陵 기일이 임박한 상황에서 성밖에 도착하여 상소하고 있는 자신의 안부와 宋時烈의 동향에 대해 전하는 내용.
答泰孫姪 (23) 朴泰遜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保合하여 시절을 구하는 것과 물러나 스스로 편안해지는 것 사이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24)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朱熹가 災異에 올린 상소를 근거로 해서 올린 상소가 朝議와 맞지 않아 狼狽하게 된 것을 전하고 사직 상소의 문구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내용.
與林德涵李君輔-世弼 (25) 1682. 林泳과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안부를 전하고 朴泰輔의 소로 인해 자급이 올려질 것이라는 소식에 자신의 거취문제를 상의하는 내용.
答李君輔 (27)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로 출처 문제에 대한 내용.
答金判樞-壽興 (28) 金壽興에게 답한 편지. 성안에 들어가 사직을 아뢰면서 뜻을 아뢰려고 하나 병세로 보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宋尤齋 (2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尊兄 혹은 老兄이라는 칭호‚ 再拜 운운하는 말은 감당하기 어렵다며 사양하고 출처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29) 林泳에게 답한 편지로 史官이 다시 내려온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30) 林泳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여러 동지들이 힘을 합해야 하는데 潰裂이 심해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
答宋尤齋 (3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도성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아무도 저해하고 거꾸러뜨리려 할 리 없지만 인심이 무너지고 士習이 더럽혀져 시세를 잘 알고 대처하지 않으면 만회하여 바로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신은 한 번 나와서 움직여 보았으나 모두에게 무익하여 돌아왔으니 다시 나아가기 어렵다는 내용.
答尹子仁 (31) 尹拯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廣津에서 만난 일을 전함. 尹拯에게 거취를 자신과 함께 하자고 청함. 四書諺解의 補完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與宋尤齋 (32) 1683.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休致를 청했으나 만류하여 머물게 될 듯하다는 소식을 들었음을 전하고 자신도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
答金士肯-構-士直 (33) 金構와 金楺 형제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들어간다는 것을 전하는 내용.
與尹子仁 (34) 尹拯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崇陵村에 머물고 있으며 명일 忘憂里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宋時烈이 休致를 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내용.
與宋尤齋 (34)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경연에서 미진했던 것을 초본으로 올리며 의견을 구하는 내용.
答李參判弼卿 (35) 李翊相에게 답한 편지. 효종과 현종 때 權奸과 싸워 등용된 李翔이 조정에 나와서 하는 일을 보니 생각과 다르다며 그에 대한 공의가 어떤지 묻는 내용.
答李君輔 (3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休致를 還收하라고 청하는 문제에 대하여 송시열과 이야기한 것을 전하는 내용.
答金仲和-昌協 (36)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薦目 등 천거와 관련된 일을 의논하고‚ 宋時烈의 休致를 還收하는 것은 名義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다고 밝힌 내용.
與宋尤齋 (36)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이조판서의 回啓의 내용과 ≪心經釋義≫를 가져왔는데 원래 李喜朝가 문하에서 찾아 올린 것이라 하니 찾아서 보여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
與尹判書泰升-堦 (36) 尹堦에게 보낸 편지. 성균관의 泮人들이 도살하는 가게를 하면서 魚市들과 서로 다투고 있다하니 善處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宋尤齋 (37)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廷議의 향배가 어찌 흘러갈지 알 수 없다며 자신은 參贊의 望 때문에 臺評을 받고 있다고 전함.
與宋尤齋 (37)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臺評이 있는데도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전함.
答宋尤齋 (3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왕에게 물러가겠다고 고하고 自劾하였다는 것을 전하고‚ 袖箚의 내용은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도에 대한 것이라는 내용.
答申判書寅伯 (38) 申晸에게 답한 편지. 憲府에서 推勘하라는 엄준하고 격발된 논의가 일어나서 自劾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왕이 감당할 수 없는 禮를 더해주니 부득불 다시 사양하는 말을 아뢰어야 하겠다는 내용.
與宋尤齋 (3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묘당에서 송시열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의리를 밝힘.
答宋尤齋 (4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묘당에서 의논한 일에 대한 곡절과 李翔이 추천한 人事로 인해 일어난 문제‚ 進講할 책자의 결정 과정에 대해 해명.
與尹子仁 (40) 尹拯에게 보낸 편지. 近侍의 발자취가 계속 이어지면서 한 번 움직일 기미가 보인다는데‚ 일에는 때에 따른 의리도 있을 수 있으니 나오는 것을 잘 헤아려보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宋尤齋 (4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송시열이 還都하여 裁度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旱魃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
答金相國 (42)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나오기를 기다려 조금의 效用이라도 되기를 바란 것인데 점점 잘못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앞으로 善類를 보호하는 데 힘써 달라는 내용.
答崔汝和-錫鼎 (42)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이룬 것 없이 비방만 일고 調齊寅協하는 도리가 부족하다는 내용.
答李同甫 (43)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의 箚本을 읽어보니 정성스럽고 성실하여 聖學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데 비답의 말이 뜻에 차지 못하게 된 것은 金昌協 등 여러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내용.
與吳知申元徵-斗寅 (43) 吳斗寅에게 보낸 편지. 조정에서 할 만한 것이 없어 돌아왔는데 月廩이 내렸다며 월름은 宋時烈과 宋浚吉에게나 내렸던 것으로 지위나 分限으로 보아 함부로 받을 수 없다는 내용.
答吳貫之-道一 (44)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時勢와 利害에 견제되어 공정하고 화평한 도를 행하지 못한다면 물러나 自靖하는 것이 구차히 미봉하다가 바른 이치를 잃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공정하고 화평한 도리로 善處하라는 내용.
答李同甫 (4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을 침척했다하여 朴泰維가 죄를 입고 다시 4명의 학사가 송시열의 일과는 무관한데도 죄를 입었으니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 염려하고 서울 士人들의 공론에 대해 묻는 내용.
與泰維姪 (45) 朴泰維에게 보낸 편지. 유배된 곳에서 讀書하고 몸을 더욱 검칙하여 조상의 뜻을 어기지 않도록 하라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내용.
答李君輔 (45)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趙持謙 등이 죄를 입은 뒤 전일 조정의 의논과 상관이 있으면서 애매하게 있을 수 없어 상소하였는데 비답이 더욱 황공하여 일이 어디까지 이를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宋尤齋 (4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상소의 글을 문제삼아 송시열과 다른 문호를 세우려한다는 비판에 대해 시호 추상‚ 裁省의 일을 해명하고‚ 자신이 물러나는 날 영의정이 장차 臺閣이 송시열을 침척하려 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분명하지 않다는 내용.
答具濟伯 (46)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있으면서 同流로서 합하면 일이 없었겠지만 臺閣이 大臣의 상소로 인하여 견책을 받는 것이 너무 무거워 부득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
答李君輔 (47)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趙持謙에 대한 말이 무엇을 위주로 한 것인지 묻고‚ 근래 方外와 門生의 소들의 분분함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며‚ 분별하기도 어려운 일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수치스럽다는 내용.
答趙大憲公擧-師錫 (47)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왕의 건강이 회복되어가는 것을 기뻐하고 東城에서 侍藥하는 소식을 들으면서 分義를 펴고 있다고 전하는 내용.
答崔漢卿 (48) 崔後亮에게 답한 편지로 자신의 거취가 편안하지 않음을 말하고‚ 왕이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도 이르지 않았으니 宋時烈과 만나는 것은 어렵겠다는 내용.
答李同甫 (48)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과 만나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고 서로 異見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송시열도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내용.
答李士亨-泰壽 (48)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상소에서 인용했던 왕과 大妃의 병환에 李珥가 취했던 행동에 대해 고증하고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서 해명한 내용.
與鄭士仰-齊斗 (49) 鄭齊斗에게 보낸 편지. 국상 뒤의 자신의 거취에 대해 밝힌 내용.
與宋尤齋 (4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慈聖에 대한 哭班이 파한 뒤의 거취를 전하고‚ 妖巫의 일은 아뢸 수 밖에 없었던 것‚ 국휼시의 哭禮 의절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柳悠久 (50)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國恤 卒哭 前에 관직에 있는 사람이 三獻의 盛祭를 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전하는 내용.
答宋尤齋 (50)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거취에 대해 묻고 國恤時에 처할 예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與申叔弼-翼相 (51) 申翼相에게 보낸 편지. 城役이 완성되었다면 민력을 해치지 않도록 하면서 兵甲과 粮餉을 준비할 것을 권하고 ≪範學全編≫ 등의 교정 및 간행에 대해 알리는 내용.
與宋質夫-徵殷-別紙 (52) 1684. 宋徵殷에게 보낸 편지. ≪香洞問答≫이라 하여 전파되고 있는 것에 대해 연유를 묻고‚ 만남 당시의 경위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다시 한 번 밝힌 내용.
答李同甫 (53)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맏아들의 병환 등 안부를 전하고 체직되도록 힘써 준 것에 사례하고‚ 경연에서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해 모른다는 내용.
答李養而 (1) 1684.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낭패한 뒤의 감회를 말하고‚ 여러 사람을 調和하겠다는 설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이라고 염려하는 내용.
答金相國-壽恒 (1) 金壽恒에게 답한 편지. 출처의 의리에 대해 말하는 내용.
答宋尤齋別紙 (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金益勳에 대해 경연에서 아뢴 내용과 尹拯이 成文濬 집안이 보존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에 대해 해명함. 연소배들의 지나친 의혹은 의리로써 깨우쳐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朴進士文開 (3) 朴文開에게 답한 편지. 다스림을 돕기 위한 3가지 대책에 대한 의견과 靑蘿公의 詩稿·行蹟·誌文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 (3)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상소의 ‘陰相譏議’한다는 표현에 대해 해명하고 득실과 是非에 공정한 마음과 밝은 이치로 시세에 구애되지 않고 편당하지 않은 뒤에야 자신도 다른 사람도 믿을 것인데 근래 그런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내용.
答宋質夫 (4) 1685.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태학의 상소를 진정하는데 힘쓰고 浮議에 움직이지 말라는 내용.
答鄭眞卿 (5) 1686. 鄭尙璞에게 답한 편지. 鄕約의 約正·都契長·都約正의 명칭에 대한 의견‚ 坐次 문제‚ 社倉 설치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힘.
答林德涵 (6) 林泳에게 從遊하던 사람도 자취를 끊고 혹은 호칭을 덜어내는 상황이라는 것 등을 전하는 편지.
答南相國雲路 (6)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청나라의 重罰을 오히려 왕이 홀로 당하게 된 상황을 개탄하고 잘 도모하여 왕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도록 노력해달라는 내용.
答南相國 (7)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陵廟의 일에 자신이 감히 獻議하지 못하는 事理를 설명하고 십분 참작하여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梁季通-處濟 (7) 梁處濟에게 鎭校에서 配位를 훼철하여 先聖을 배척하여 모욕하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밝힌 편지.
答金士直 (8) 金楺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서 있었던 山陵을 옮기는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힘.
答吳貫之 (9) 1688.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조정에 나아가서 취할 도리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申公獻 (9) 申琓에게 답한 편지. 吳道一과 兪得一에게 편지를 보여 자신의 뜻을 미리 알리라는 내용.
答吳貫之 (9)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李同甫 (10)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士友들의 의견을 전하며 상의함. 懷尼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崔副學汝和 (11)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超授된 뒤 자신이 감당할 재능이 없고 여러 위기가 있어 행하기 쉽지 않다는 내용.
答崔汝久-錫恒 (12) 崔錫恒에게 답한 편지. 士友들이 출사하지 말라고 하는데 최석항 형제만 나오기를 권하고 있다며‚ 出處에 어려움이 있으니 반복하여 헤아린 뒤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12)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宮庄 문제와 전일의 상소에서 宋時烈을 위하여 아뢴 말이 너무 重하여 조정이 시끄러워지게 한 것은 애석하다는 내용.
答申公獻 (13) 申琓에게 답한 편지. 쓰려는 것인지 단순히 예우한 것인지도 정해지지 않고 批旨에도 별다른 말이 없는 상황에서의 출처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 (13)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自靖하라는 의견을 이해하지만 나아가면 한 번 시험하여 쓸 뜻이 있을까 하여 상소한 것인데 왕의 뜻을 모르니 가벼이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徐君望-宗泰 (14) 徐宗泰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이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에 成渾에 대한 追論이 있어 편지로 그것에 대해 물었다는 내용.
答兪寧叔 (14)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거취에 대해 전하는 내용.
與徐君望 (14) 徐宗泰에게 보낸 편지. 批旨를 받고 萬言疏를 올리고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
答申公獻 (15) 申琓에게 답한 편지. 萬言疏와 새로운 상소문을 올린 뒤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申公獻 (15) 申琓에게 답한 편지. 東朝의 증세로 侍藥廳이 설치된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兪顯叔-晦一 (16) 兪晦一에게 답한 편지. 從祀에 대한 상소도 듣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을 위한 太學 유생들의 상소가 끝내 올려졌다는 소식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
答金叔涵-載海 (17)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去就에 대한 의견에 대해 楊時 등의 出處의 예를 들어 자신의 뜻을 밝힌 내용.
答兪顯叔 (17) 兪晦一에게 諸賢의 예를 들어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與申公獻 (18) 申琓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올린 萬言疏를 베끼겠다는 청을 거절하는 내용.
答崔汝和 (1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출처와 거취에 대한 내용.
答宋德普-淳錫 (19) 宋淳錫에게 답한 편지. 慈殿의 건강도 좋지 않은 상황이라 부득불 행하고 있다는 내용.
答鄭士仰 (19)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왕이 侍藥하는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20) 林泳에게 답한 편지. 7-8차의 상소에도 체직을 허락하지 않아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金士直 (20) 金楺에게 답한 편지. 7번째 상소 이후 왕의 지극한 대우와 왕의 侍藥을 들어 성에 일단 들어가 다시 사양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2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왕을 성내게 하였으니 자기 한 사람만 죄를 얻는데 그치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나라를 위해 自愛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李文瑞-奎齡 (21) 李奎齡에게 답한 편지. 宗室 문제로 인해 왕이 노하였다며 大臣과 玉堂이 請對한 뒤를 기다려 거취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21) 林泳에게 답한 편지. 이조참의 직을 師生의 의리를 들어 거절하여 반드시 해가 있을 것이라는데‚ 올린 상소가 마땅한 것이었는지 잘 헤아려 處할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
答洪內翰-重夏 (22) 洪重夏에게 답한 편지. 올린 책자와 啓箚를 史局에 보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일이 조금 안정된 뒤에 보내겠다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책임을 지고 사직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처리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林德涵 (22) 林泳에게 답한 편지. 비변사에서 다시 청한 뒤의 일과 太學의 상소가 올라간 뒤의 일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與崔汝和 (2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북쪽 변방에서의 행색에 대한 감회와 거취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泰初姪 (23)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여름에 拜命하여 상소한 뒤 왕의 노여움을 사서 南九萬 등은 栫棘되고 자신은 서쪽 교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
與趙相國公擧 (23)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상소로 인해 두 정승이 栫棘된 일로 인한 감회와 염려를 전하고 최선의 길을 잘 생각하여 物論을 수용할 것을 청함.
答申公獻 (24) 申琓에게 답한 편지. 아직 두 정승에 대한 일에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太學의 상소가 왕을 더욱 격하게 할 것을 염려하는 내용.
與吳貫之 (25) 吳道一에게 보낸 편지. 두 정승이 出場하기를 기다려 머물고 있는데 廟堂의 請對와 臺閣의 伏閤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외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物議가 있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내용.
與成汝中 (25) 成至善에게 보낸 편지. 李喜朝가 尹宣擧에게 妄言한 허물이 많다고 말한 것을 괴이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내용.
答林德涵 (26) 林泳에게 답한 편지. 趙師錫이 伸救하는 箚子를 올렸다는 소식에 왕의 批答을 궁금해하고 거취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兪寧叔 (26)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堂僚들이 서로 마음을 함께 하여 國事를 다스리려한다는 소식의 사실 여부를 묻는 내용.
答柳悠久 (27)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여러 사람이 힘써 왕의 분노를 돌이키고 士論을 회복할 기미가 있다는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
答趙相國 (28) 趙師錫에게 답한 편지. 國事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지 모르겠다고 염려하고 왕의 마음을 돌리고 조정의 의논을 진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泰徵姪 (28) 朴泰徵에게 답한 편지. 선현의 규모를 회복해보고자 나아가 상소를 올렸던 것인데 대신을 栫棘시키고 패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
答尹子仁 (28) 尹拯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출처로 인한 결과‚ 史局에서 萬言疏를 보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은 일‚ 李喜朝와 懷川의 問答‚ 從享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吳貫之 (29)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왕이 開釋해주고 두 정승도 용서하기로 한 것과 崔錫鼎과 오도일이 잇달아 자리를 얻었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내용.
與尹堯佐-景勳-別紙 (30) 1689. 尹景勳에게 보낸 편지. 洪重夏가 史筆에 대비하고자 하여 1683년의 상소문 및 登對했을 때의 箚子를 청하여 나중에 올리겠다고 하였는데 홍중하가 복상 중이고 자신의 자취도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어 쉽게 올릴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
與泰輔姪 (30) 朴泰輔에게 보낸 편지. 옥에서 나왔지만 楚毒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니 안심하고 몸을 잘 보전하라는 내용.
與李惺菴-壽仁 (30) 李壽仁에게 보낸 편지. 이수인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지어 보내면서 그 경위를 밝힌 내용.
答閔楊湖-嶪 (31) 行止의 義理에 대해 閔嶪에게 답한 편지.
答閔楊湖 (31) 閔嶪에게 답한 편지. 庶子의 長子를 위한 복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閔楊湖 (32) 閔嶪에게 답한 편지. 卒哭에 띠는 絰의 재료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閔楊湖 (33) 閔嶪에게 답한 편지. 상중에 傳重하는 것을 重하게 여겨 불가불 禫祭를 행할 수밖에 없다는 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힌 내용.
與申敎官-碩亨 (34) 申碩亨에게 보낸 편지. 李珥 등을 공격하던 이들의 계책은 대간과 筵席에서 좌절시켰지만 발언한 사람에게는 녹을 받아 봉양하려는 뜻이 꺾인 것을 위로하는 내용.
答申敎官 (34) 1655. 申碩亨에게 답한 편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公議로써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후 더욱 신중하고 절도있게 행동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敎官 (37) 1659. 申碩亨에게 답한 편지. 왕이 山林에게 위임하고 인재를 수습하는 즈음의 출처의리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與宋尤齋 (38) 1676. 宋時烈에게 李先生 原圖 등에 대한 의견을 보낸 편지.
答宋尤齋別紙 (39) 1677.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別紙로 物에 本末이 있다는 말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宋尤齋別紙 (40) 1678.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倪士毅가 편한 ≪四書集成≫‚ 鰲峯 熊氏의 ≪九疇解≫‚ 栗谷의 <太極問答>‚ <四書圈點>‚ <讀書口訣釋義>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
答宋尤齋 (42) 1681.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문집을 편집하는 일에 관한 내용.
答宋尤齋 (43)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先祖의 褒贈이 어그러진 것‚ ≪範學全編≫과 ≪東儒師友錄≫ 등의 저술‚ 李珥의 ≪石潭野史≫에 대한 호칭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宋尤齋 (45) 1682.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문집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온 두 종류의 <太極問答> 처리 문제와 ≪心經釋義≫를 올리는 문제에 대한 내용.
與宋尤齋 (46) 1683.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송시열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致仕를 청하고도 賓客을 전처럼 引接하는 것은 輕重이 도치된 것이라며 致仕의 의리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내용.
答宋尤齋 (47) 1685.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尼城의 선영에서 행해질 尹拯家의 장례에 가면 사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사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라고 권유하는 내용.
答宋尤齋 (48) 1686. 宋時烈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栗谷集≫을 편집하는 일‚ 朱熹의 遺文을 刪定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與宋尤齋 (49) 1687.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두 집안이 어긋나고 격해진 상황과 物議가 자신을 亂의 본원이라고 배척하는 것을 개탄하는 내용.
與宋尤齋 (50) 1689.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哭班에 교묘하게 어겼다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德遠에서 長鬐로 移配되었을 때 위로하는 내용.
與愼仲任-別紙 (1) 1690. 愼景尹에게 보낸 편지로 교제할 때 面簽에 쓰는 용어와 교제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 師友의 도를 논하는 내용.
答金元會 (3) 金澄에게 답한 편지. 東西의 朋黨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분변‚ 趙憲이 상소하여 변척한 일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한 내용.
答李原州-晸 (3) 1675. 李晸에게 답한 편지. 먹을 것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고 일부만 받고 돌려보내게 된 연유 등을 밝히는 내용.
與尹泰升 (4) 1673. 尹堦에게 보낸 편지. 國事와 벗에 대한 처분 등에 대한 우울한 감회를 밝히는 내용.
答金起之別紙 (4) 1685. 金壽興에게 보낸 편지 別紙. 李珥에 立後할 사람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閔大受-鼎重 (7)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여흥민씨족보≫에 병자년에 죽은 閔仁伯의 아들 閔龍巖 일가 13명이 죽은 義烈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
答閔大受別紙 (7) 1673.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別紙. 李珥의 서원을 묘에서 옮기는 일의 편부에 대한 내용.
答閔大受 (8) 1678.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파주에 있는 李珥의 비문을 다시 撰하여 세우는 일‚ 서원을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의 경과와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내용.
答閔大受 (9)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碑文을 고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고쳐야 할 문구는 別幅으로 보내니 왕복하여 바로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
別紙 (10) 閔鼎重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因厭棄不復就’라는 구절 등 李珥의 碑文 중 고쳐야 할 문구에 대한 의견과 그 근거를 밝힌 내용.
與李季周-端夏 (11) 1678. 李端夏에게 보낸 편지. 沈貞 등이 몰래 臺諫을 사주한 것을 師友錄에 기록하였다고 알리고 敬字의 뜻을 모은 책자를 만들어 올리니 보아달라고 청하는 내용.
與李幼能 (12) 1667. 李端相에게 보낸 편지. 부모의 상이 겹쳐 있을 때 虞祭와 祔祭를 치르는 순서 등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내용.
答李養而 (12) 1676.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尹拯과 만난 일 등을 전하는 내용.
答李養而 (14) 1678. 李之濂에게 답한 편지. 할아버지 朴東亮에 대해 100년 동안 밝히지 못했던 心事를 開釋하여 준 것을 사례하는 내용.
與尹子仁別紙 (14) 尹拯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집안의 禮를 宋時烈 등에게 물어 상의하는 문제‚ 成渾의 연보에 대한 고증‚ 鄭曄의 ≪近思錄釋疑≫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15) 1665. 尹拯에게 답한 편지. 復讎의 설에 대해 일단 의견을 수용하겠지만 뒷날 재론할지도 모르겠다는 내용.
答尹子仁 (16)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鑴의 논저에 대한 반론을 말하고 成渾과 李珥의 연보를 교정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내용.
答尹子仁 (17) 尹拯에게 답한 편지. 禮에 대한 申啓澄의 질문에 대해 의견을 묻고 ≪東儒師友錄≫의 凡例와 目錄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別紙 (19)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適子에서 適의 뜻‚ 適에서 適으로 서로 이어가야 한다는 뜻‚ 罪로서 廢한다는 것‚ 庶子가 무엇을 지칭하는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1) 尹拯에게 답한 편지. ≪家禮≫에 대해 의문을 품하는 문제‚ ≪大學≫에 대한 講學‚ 林鄕의 院議에 대한 견해‚ 李珥의 年譜 문제 등에 대한 내용.
與尹子仁 (22) 1668. 尹拯에게 보낸 편지. 아들의 冠婚禮를 위해 宋時烈이 정한 節目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고 冠服과 饌品‚ 喪祭의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내용.
與尹子仁別紙 (23) 1670. 尹拯에게 보낸 편지 別紙. 醋醬·魚肉·酒果·脯醢의 사용 여부 등 제사의 饌品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4) 尹拯에게 답한 편지. ≪師友錄≫의 편찬‚ 李珥 年譜의 改修‚ 스승을 위한 服制‚ 祭饌의 密果‚ 祠宇 등의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5) 1670. 尹拯에게 답한 편지. 養父母를 위한 복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別紙 (26) 1671.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李珥의 年譜를 교정하는 작업과 文集을 改編하여 고쳐 베끼는 작업의 진행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27) 1672.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에 대한 狀本‚ 李珥의 문집을 改編하는 일의 진행 상황을 알리고 예에 대해 再論하는 내용.
答尹子仁 (29) 尹拯에게 답한 편지. 栗谷 年譜을 對勘하고 續集과 外集 등으로 편차하는 문제에 대해 師門에 품하여 줄 것을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29) 尹拯에게 답한 편지. 李珥에 대한 文字‚ 語錄 拾遺를 연보에 붙이는 문제‚ 紫雲書院에 並享하는 문제‚ 成渾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與尹子仁 (30) 尹拯에게 보낸 편지. 狀藁의 득실에 대한 송시열과 문답한 편지 초본을 올리니 본 뒤에 마땅하게 고쳐 보냄이 어떠한가 청하는 내용.
答尹子仁別紙 (31) 1674.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立宗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2)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 문제로 인해 講磨한 정의를 바꿀 수는 없으니 公議를 기다려 서로 힘쓰고 화평해지길 기다리라고 권유함. 그 외에 家禮標題‚ ≪魯史零言≫의 訂正‚ 國恤卒哭 이전의 제사 문제‚ 書院事迹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3)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文의 일에 대해 同志가 죽은 친구를 평하는 일과 後學이 先輩를 높이는 일이 같을 수는 없으니 華陽에 돌아가 있는 宋時烈에게 大意로 고쳐 주기를 다시 품하고 송시열이 修改해 주어 다시 紛紜한 근심이 없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
別紙 (34)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國恤 중에 사대부의 殷祭 여부‚ 宋時烈이 잘못이라는 의견과 尹宣擧에 대한 의심으로 서로 다투면 斯文의 재앙이 될 것이고 조용히 품하면 희망이 없지 않을 것이니 잘 헤아리기를 바란다는 내용.
答尹子仁 (35) 1675. 尹拯에게 답한 편지. 尹宣擧의 墓碣을 수정하는 일‚ ≪師友錄≫·≪理學≫ 등에 대한 편찬 작업‚ ≪心經≫에 標題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別紙 (37)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尹宣擧 墓碣에 대한 의견‚ 師友錄의 진행 상태‚ ≪朱文拾遺≫ 및 李珥의 四書·≪小學≫·≪近思錄≫ 口訣 및 四書圈點‚ 書院의 事蹟과 式例 등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 (38) 1677. 尹拯에게 답한 편지. 윤선거의 墓文 수정‚ 東鶴寺와 鐵瓮에서의 만남을 전후한 시기의 의리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
答尹子仁 (39) 尹拯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와 스승에 대한 의리 문제와 東鶴寺에서의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윤증이 학문하여 바른 것을 지켜 先德을 떨쳐야 하지 引咎하여 자취를 끊어 自靖할 일은 아니라는 내용.
答尹子仁 (41) 尹拯에게 답한 편지. 李珥의 ≪四書標記≫·≪近思錄口訣≫ 등에 대한 수습을 위해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
答尹子仁 (42) 尹拯에게 답한 편지. 출처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書院의 祝辭를 보아주기를 청하고‚ 흉년의 조짐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尹子仁 (43) 1683. 尹拯에게 답한 편지. 李惟泰의 일을 거론하는 것에 반대함. 別集의 교정‚ ≪四書諺解≫의 완료에 대한 내용.
答尹子仁別紙 (1) 1683.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栗谷集≫ 別集에 대한 윤증의 질의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 되돌려 준 글.
答尹子仁 (2) 1683. 尹拯에게 답한 편지. 사직상소의 어구에 대해 상의하고 潘南의 祠宇를 봉안하는 제문을 부탁하는 내용.
與尹子仁 (3) 尹拯에게 보낸 편지. 妖巫의 일로 上章한 일‚ 10월 高陽에서 宋時烈을 만나 臺閣의 得失 등을 논하다가 말이 엄해져서 수습할 길이 점점 어그러졌다는 것 등을 전하는 내용.
答尹子仁 (4) 1684. 尹拯에게 답한 편지. 지난해 이후 忠原으로 이주하려던 계획을 李志逵의 叔姪과 함께 田土를 얻어 다시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
答尹子仁 (5) 尹拯에게 답한 편지. 師生의 의리에 비추어 보면 尹拯에게도 세밀하지 못한 허물이 있었으며 편지 사건은 자신에게도 不敏하게 행동한 죄가 있다는 내용.
與尹子仁 (6) 1685. 尹拯에게 보낸 편지. 狀을 지은 뒤 십여 년간 일을 彌縫하여 保合하려고 애썼으나 실패하고 師友간에 의혹을 풀기를 바랐는데 실패했다고 자책하는 내용.
與尹子仁 (7) 尹拯에게 보낸 편지. 1683년이래 붕당을 타파하려다 도리어 붕당을 만들고 師友를 보전하려다 오히려 어그러지게 하였다며 자책함. 宋時烈도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고 했다는 것에 기대하고 있다며 후회한다면 善處해보라고 부탁하는 내용.
別紙 (9) 尹拯에게 보낸 편지 別紙. 박세채가 尹拯을 해하려 한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인해 師生의 설이 퍼진 곡절과 ≪香洞問答≫의 曲折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與尹子仁 (10) 尹拯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에 대한 윤증의 태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내용.
答尹子仁 (13) 1690. 尹拯에게 답한 편지. 윤증의 편지에서 말한 일에 대해서는 다른 말들을 불러올 염려가 있어 말하지 않겠다고 밝힘. 그 외 重服의 疑禮‚ ≪六禮疑輯≫의 편찬 등에 대한 내용.
答李重賚-啓晩 (14) 1665. 李啓晩에게 답한 편지. 모친이 먼저 사망했을 때의 祔廟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彛仲 (14) 1653. 李敏敍에게 답한 편지. 비가 갠 뒤 小園에서 놀다가 만물이 생기는 뜻을 생각하여 滿腔子의 惻隱之心을 빌어 설명한 내용.
答尹叔獜-趾完 (16) 1681.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出場 여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깊이 생각하라는 내용.
答李雲峯-翔 (16) 1684. 李翔에게 답한 편지. 윤증과의 관계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申叔弼別紙 (17) 1682. 申翼相에게 답한 편지의 별지. 李珥의 문집 續集 간행과 관련된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士安-熙靖 (18) 1690. 李熙靖에게 보낸 편지. 다른 것을 좇지 않으면 명예를 더럽히지는 않게 될 것이라며 행동할 때 이것을 미루어 생각하라는 내용.
答申聖時-啓徵 (18) 1676. 申啓徵에게 답한 편지. 李恒 門人의 행적‚ 李之濂이 보여준 禮說의 내용‚ 李惟泰의 甲寅禮說 중 의심스러운 부분‚ 柳希春의 저술이 아직 남아 있는지 등에 대해 묻는 내용.
答羅顯道 (19) 1683.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墓祭를 어디에서 지내고 合墓에서 獻爵하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羅顯道別紙 (20) 1685. 羅良佐에게 답한 편지 別紙. 面마다 교육시킬 사람이 없는 경우 향교에 모여 교육시키는 문제‚ 俗吏의 폐단‚ 客舍 앞에서 下馬하는 규정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成子章-文憲 (20) 1669. 成文憲에게 답하는 편지. 머물고 있는 곳에 책이 갖추어지지 않아 질문에 자세히 답할 수 없다고 전하고 文義보다 實功에 나아가도록 힘쓰라는 내용.
答李汝九 (21)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논란이 된 敬圖는 병중에 보려고 베껴 두었던 것인데 갑자기 宋時烈을 거쳐 전전하면서 이로 인해 배척을 받게 된 것이라며 허물하지 말아달라는 내용.
答李汝九 (22) 1669.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경책하는 말이 도움이 되었다고 전하고‚ 와서 지켜보면 다소 이해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며 그렇게 할 것을 권하는 내용.
與李汝九 (22) 李箕洪에게 보낸 편지. 成渾의 ≪爲學之方≫의 근거를 확인한 뒤 약간 수정하여 ≪爲學圖說≫을 만들어 別幅에 베껴 보낸다는 내용.
答李汝九 (23) 1678.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動靜을 分作하였다는 것‚ 規程을 스스로 세웠다는 설 등으로 자신을 비판한 것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
答李汝九 (25) 1682.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爲學之方續集≫을 ≪節要≫ 본문과 對勘하되 간략하게 하여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할 것과 趙光祖의 ≪靜菴集≫과 ≪年譜≫ 등의 일에 대한 내용.
答梁季通 (25) 梁處濟에게 답한 편지. 예설이 횡행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口舌로 서로 다투게 될 수 있다며 高晦와 왕복하여 논쟁한 것을 경계한 내용.
答趙光甫-持謙 (26) 1684. 趙持謙에게 답한 편지. 韓泰東이 굽히지 않아 宿怨을 야기하면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내용.
答沈龍卿-壽亮 (26)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상중의 조문은 형제가 아니라면 이웃에도 가지 않는 것이라고 禮에 밝혀져 있다는 내용.
答沈龍卿 (26) 1668. 沈壽亮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 문하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말고 허실과 경중을 잘 헤아려 종사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崔汝和 (27) 168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趙光祖의 ≪靜菴集≫ 및 ≪年譜≫의 體例를 정하는 문제‚ 명나라 초에 濮公이 고려를 정복한 절개로 樂浪侯로 봉해졌다는 기사에 대한 고증 등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 (2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朱子의 觀心法과 불교의 觀心法을 비교하고‚ ≪東儒師友錄≫을 보내니 살펴 바로잡아 달라고 청함.
答趙伯靜-仁壽 (28) 1685. 趙仁壽에게 답한 편지. 거취 문제에 대한 내용.
答沈明仲-世熙 (29)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한번 와서 회포를 풀고 토론하기를 바란다는 내용.
與沈明仲 (29) 沈世熙에게 보낸 편지. 海州에서 근래 강학이 성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격려하고 ≪近思錄≫을 강할 때 함께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明仲 (30)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妻의 喪에 누구의 이름으로 고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아들의 이름으로 고하는 것은 바른 예가 아니라는 의견을 밝힘.
答沈明仲 (30) 1675.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한 두 집의 사사로운 일로 사림의 큰 근심과 국가의 염려를 만들었다고 自省하고 심세희가 부탁한 誌文에 대해 상의.
答林德涵 (31) 1682. 林泳에게 답한 편지. 林泳의 출처에 의견을 밝히고 ≪心經≫과 ≪近思錄≫에 대한 공부를 강조.
答林德涵 (31) 1684. 林泳에게 답한 편지. 四學에서 尹拯이 李珥를 攻斥하였다하여 팔도에 通文을 돌렸다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林德涵別紙 (32) 1686.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와 스승을 위한 心喪의 복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林德涵 (33) 林泳에게 보낸 편지. 門人과 門下·門生·學生 등 호칭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 등에 대하여 의견을 밝힘.
答鄭士仰 (34) 1680. 鄭齊斗에게 답한 편지. 國恤時의 제사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李伯祥-徵明 (35) 1669. 李徵明에게 답한 편지. 白布로 된 直領 등이 현재 행해지는 복제이니 옛 冠과 深衣를 회복하기 어렵다면 요즘 행해지는 복제를 따르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라는 내용.
答李同甫 (35) 1673.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活物이라고 표현한 구절‚ 1664년에 올린 상소의 시말 등 李端相의 碑碣을 追改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李同甫 (36) 1675.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을 위해 門生들이 訟寃하려는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힘.
與李同甫別紙 (37) 1679.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중국본 四書의 凡例‚ 宋과 元의 여러 유자들의 책‚ ≪家語≫‚ ≪洪範解≫‚ ≪南軒集≫ 文公序에 나오는 章奏가 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고증‚ 朱熹의 편지를 초록한 ≪續近思錄≫과 ≪翰墨大全≫‚ ≪栗谷年譜≫에 나오는 ≪四書小註≫ 등의 작업 진행에 대한 내용.
答任大年-元耈 (39) 1672.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張載의 설에 귀착되어 伊洛을 下位로 간주하게 될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내용.
答任大年 (40) 1678.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韓愈의 문장에 익숙하고 慈堂의 뜻을 어길 수 없어 과거 응시를 폐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任大年別紙 (41) 1690.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民風과 習俗이 다른 북쪽에서 사람들과 웃고 해학하는 태만함이 보인다며 학문에 힘쓰고‚ 政事에 유념할 것을 충고하는 내용.
與閔春卿別紙 (41) 1683. 閔震元에게 보낸 편지. 李滉의 ≪退溪先生語錄≫의 편찬 여부‚ 門人錄의 존재 여부‚ 예안과 안동일대에 <洪範>이 소장되어 있는지 등을 알아봐 줄 것을 청하는 내용.
答金士肯士直 (43) 1680. 金構와 金楺에게 답한 편지. 紫雲書院의 비문을 閔鼎重 등과 상의하는 문제‚ 文集을 고치는 일에 대한 내용.
別紙 (43) 金構와 金楺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紫雲書院의 비문 중 入山 사실 등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
答金士直 (46) 1683. 金楺에게 男主가 없는 뒤에야 女主를 세우는 것이고 아버지의 형제와 조카가 모두 男主가 될 수 있으니 우선 伯氏로 題主를 삼으라고 답한 편지.
答金士直 (47) 金楺에게 ≪朱子語類≫에 濮王에 대한 의론이 있지만 補論을 더해 삼가는 도로 삼고자 한다고 답한 편지.
答朴一和-尙淳 (47) 1677.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국가의 禁制를 무릅쓰고 直論하겠다는 것에 대해 門人과는 다르니 분수를 지켜 독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경계하는 내용.
答朴一和 (47) 1691. 朴尙淳에게 답한 편지. 나이 60이 넘어 기운이 쇠해 다른 집안의 문자를 지어주기 어렵다고 거절하는 내용.
答宋質夫 (1) 1690. 宋徵殷에게 답한 편지. ≪自警編≫을 정돈하는 것과 歷代의 史論을 商確하는 것을 도와줄 것을 청하고 尹拯의 상소 중 尹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朴大叔 (1) 1690. 朴鐔에게 보낸 편지. 鄭齊斗에게 陽明의 병통이 있으니 程朱의 학문으로 조용히 깨우치라는 내용.
答權季文-尙游 (2) 1678. 태극의 全體가 각기 一物 속에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해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答李君輔 (3) 1680.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여자의 상에 主喪하는 일은 禮經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適庶와 同宮이냐 異宮을 논하지 말고 아버지에게 주상을 하도록 하라는 내용.
答李君輔 (3) 1683.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承重한 사람의 처의 복제에 대한 의견과 宋時烈이 소명을 받아 나오는 것을 이세필이 홀로 근심하는 것에 대한 의견.
答李壽翁 (4) 1680. 돌아가며 행하고 主祭를 내지 않는 일의 타당성 여부와 承重服 중의 時祀 등의 祭禮에 대해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答李士亨 (4) 1688. 國恤이 있을 때의 忌祭 여부‚ ≪二書要解≫ 등의 校讎‚ 독서와 독서 후의 토론 방법 등에 대해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答李士亨 (5) 1690.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禮經≫에서는 大宗 및 大夫외에는 立後하지 않는데 요새는 支子와 遠族도 반드시 繼後함은 개탄스럽지만 정자와 주자 역시 막지 않았고 오늘날에는 5服 안에 들어 있는 이가 없어도 모두 立後하고 있으니 홀로 옛 뜻을 따라 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
答李士亨 (5)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立後 문제의 근거에 대해 고증하고 입후할 이를 정하는 문제는 ≪大典≫을 위주로 하되 동종이 없으면 遠宗에서 입후한 예도 있으니 상의하여 정하라는 내용.
答李士亨 (6) 169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大學≫의 格致와 ≪小學≫이 학문의 근본임을 모르는 폐단을 지적하고 ≪擊蒙要訣≫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긴절한 공부부터 하여 忠信篤敬한 뒤에 경전을 읽고 의리를 구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宋叙九別紙 (7) 1681. 宋疇錫에게 답한 편지 別紙. ≪栗谷續集≫과 ≪外集≫ 등의 간행에 대한 내용.
答金仲和 (8) 1682.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主를 세우지 않고 사당에 들어가면 先塋에 告한다’는 것의 실행 여부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金仲和 (8) 1684. 金昌協에게 답한 편지. 國恤 初喪에는 詩를 짓지 않았던 전례를 들어 김창협 동생에 대한 挽辭를 거절하는 내용.
與李子文-東郁 (8) 1683. 李東郁에게 보낸 편지. 국경으로 나가게 된 것 등에 대해 안부를 전하는 내용.
答閔彦暉 (9) 1685.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續錄≫이나 ≪晦菴本錄≫의 첨입‚ ≪疑禮類輯≫을 大體로 하고 ≪通典≫·≪五先生禮說≫·≪東儒禮書答問≫을 합해 책을 만든 일‚ 재해로 인한 求言에 誠字로 답한 일 등에 대한 내용.
答權質甫-益文 (10) 1681. 아내가 남편을 제사하는 것과 제사할 때 顯辟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 등에 대해 權益文에게 답한 편지.
答羅仁卿-斗甲 (10) 1690.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林泳의 편지 등을 통해 들은 사우 門人들의 학문과 안부를 전하고 문장에만 힘쓰는 폐단 등을 염려하는 내용.
答羅仁卿 (11)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士友들의 안부와 讀書窮理 공부의 부족‚ 湖路의 기근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李進伯-漸 (11) 1687. 朔祭 등 유배지에서의 居喪 문제 등에 대해 李漸에게 답한 편지.
答沈生 (12) 1691. 沈에게 답한 편지로 슬픔 중에 공부하는 것을 위로하고 ≪大學或問≫ 등을 공부할 것을 권하는 내용.
答鄭君啓-世沃 (12) 1690. 主喪할 남자가 없는 喪에서 題主의 호칭 등에 대해 鄭世沃에게 답한 편지.
答泰尙姪 (12) 1684. 족보 문제로 인한 비방에 대해 조카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答泰初姪 (13) 1689. 조카 朴泰初에게 답한 편지. 士元의 무덤을 지날 때 슬퍼서 눈물이 나왔다는 내용.
答泰吉姪 (13) 1680. 조카 朴泰吉에게 답한 편지. 더운 날씨 중의 服喪을 위로하고 支子에 대한 제사를 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답한 내용.
答具濟伯問-朱書節要 (13) 1664. ≪朱書節要≫의 <曹晉叔書>에 ‘論劉共父到闕’이란 구절이 산삭된 일 등 ≪朱書節要≫에 대한 具時經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景能-萬增-問 (14) 1662. <太極圖>에서 ‘無極而太極’에 대한 諺解‚ ‘各一其性’이란 말의 뜻‚ 陰陽과 事物의 始終 등과 ≪家禮≫의 祔祭 註에 대한 해석 등에 대한 金萬增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元-萬春-問-祭祀 (15) 1670. 主婦가 亞獻하는 경우 四拜‚ 祭酒 獻酌 여부 등 祭祀에 관한 李萬春의 질문에 답한 글.
答成子章問 (16) 1660. 조부모의 喪에 袒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男女의 嫁娶의 절목 등에 대하여 成文憲에게 답한 글.
答成子章問-近思錄 (16) 1661. ≪近思錄≫의 ‘無斁’ ‘長貳’ ‘近貴에게 예를 더한다’는 말의 뜻 등에 대하여 成文憲에게 답한 글.
答成子章問-家禮 (16) 1669. 旁親에 후사가 없을 때의 班祔‚ 親姻에서 姻의 범위‚ 負笈이라는 말의 뜻 등 ≪家禮≫에 대한 成文憲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汝九問-學 (18)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邵雍의 ‘心은 性의 郛郭이요 太極이다’는 말의 뜻‚ 朱熹의 ‘心은 사람의 神明’ ‘심은 음양이요 性은 太極’이라는 말의 뜻‚ ≪大學≫ 明明德에서 明字와 物格에서 格字의 뜻 등에 대한 내용.
答李汝九問-孟子 (19) 1670. <梁惠王> 首章 魏侯의 이름자의 音을 묻는 것을 비롯한 ≪孟子≫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汝九問-論語 (1) 武王의 德에 대한 평가‚ <鄕黨>에 보이는 성인의 氣象과 行事‚ 子夏가 말한 ‘仕優學優’ 설의 의미 등 ≪論語≫에 대한 李箕洪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子望-東耈-問-喪禮 (3) 1682.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冠을 벗어야 하는 근거‚ 襲‚ 靈座‚ 제사할 때 윤달의 처리‚ 柩衣‚ 소생이 없는 죽은 妻의 부모상에 대한 복제 등에 대한 내용.
答梁季通問 (4) ≪喪禮備要≫의 祠堂제도‚ 明衣‚ 旁親의 服‚ 庶子로 후사가 된 사람의 외조부에 대한 복‚ 계모의 부모 등을 위한 복‚ 明器의 便房‚ 辭神‚ 신주를 받들고 돌아왔을 때의 절차 등에 대한 梁處濟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小學 (7) 1664. ‘知思’ 두 글자의 聲音 등 ≪小學≫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小學 (10) 忠君을 말하지 않은 이유‚ 道가 하나라는 말과 元亨利貞의 관계‚ 仁義禮智의 四德‚ 四端과 七情‚ ‘仁義禮智의 性을 기른다’는 말의 의미 등 ≪小學≫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龍卿問-近思錄 (14) 1666. 形而上에서 ‘形’字의 의미‚ ‘하늘이 水火木金土를 낳는다’는 말‚ ‘五行이 각각 그 性이 하나씩 있다’는 말 등 ≪近思錄≫에 대한 沈壽亮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文叔-奎瑞-問-喪禮 (15) ‘正服이 불변하다’는 설의 의미 등 喪禮에 대한 崔奎瑞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文叔問 (15) 私喪의 再期가 지난 뒤 君喪의 복이 남아 있을 때 복색‚ 집안에 庶母와 妻가 있을 때의 복을 마치는 순서‚ 國恤 卒哭 전에 忌祭와 墓祭 등을 행할 것인가의 여부 등에 관한 崔奎瑞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孟子 (17) 1669. ‘석 달간 왕이 없으면 조문한다’ 할 때 굳이 3개월인 이유 등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孟子 (17) 1670. 去와 徙의 뜻‚ 舜이 섭정한 시기의 나이에 대한 고증 등 ≪孟子≫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小學 (18) 士相見禮의 註에 대한 해석‚ 아버지가 부를 때의 행동 등 ≪小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小學 (19) 習과 性이 이루어진다는 말의 의미 등 ≪小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大學 (20) 1675. 序에 나오는 ‘天降生民’의 뜻‚ 책을 만들 때 ‘采而輯之’한다는 말의 의미 등 ≪大學≫에 대한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明仲問-中庸 (21) 1682. ≪中庸≫의 番陽李氏‚ 蒙齋袁氏‚ 仁壽李氏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 沈世熙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祭儀 (22) 1691. 凡拜와 俠拜의 의미 등 祭儀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彦章-鉦-問-大學 (22) 1673. 大人이 지칭하는 것‚ 明德이 性情을 통섭하는지 여부 등 ≪大學≫에 대한 鄭鉦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俔問-近思錄 (24) 1672. ‘釋迦가 恍惚한 사이에 心性의 그림자를 보았지만 그 속은 도무지 보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 등 ≪近思錄≫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沈士磬問-小學 (24) 1676. ‘德崇業廣’의 의미‚ ‘女事를 배워 衣服을 바친다’는 말의 뜻 등 ≪小學≫에 대한 沈俔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小學 (28) 1673. ≪小學集註≫의 明父子之親과 明君臣之義‚ 明夫婦有別‚ 明朋友之交‚ 明長幼之序 등의 내용 및 分節‚ 句讀 등 ≪小學≫에 대한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任大年問-近思錄 (35) 1676. ≪近思錄≫ 言箴의 註에 나오는 ‘發’字의 뜻을 묻는 任元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仲固裁問-小學 (35) 1676. ≪小學≫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 本註 대신 栗谷先生本으로 소학을 읽는 것이 좋은지를 비롯하여 소학에 대한 내용.
答金仲固問-喪禮 (41) 1684.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3개월 뒤 除服할 때의 儀節에 대해 4개월째 되는 朔에 자리를 베풀고 곡한 뒤 벗으라고 답한 내용.
答金仲固問-喪禮 (41) 1691. 麻腰絰과 葛絰을 양쪽 정강이 사이에서 서로 교차하게 하는 이유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大學 (41) ≪小學≫에 대해 序文이나 或問에 자세히 설명한 이유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孟子 (41) 1680. ≪孟子≫의 ‘曰文王何可當也’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猶龍-之老-問-喪禮 (42) 1672. 追贈받은 선조에게 焚黃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題主를 고치기 위해 고하는 말에 대한 李之老의 질문에 답한 글.
答吳子順問-家禮 (42) 1675. ≪家禮≫에 대한 吳遂昌의 질문에 답한 글. 劉氏孩孫과 劉氏璋이 누구인지‚ ‘角黍’는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는 내용.
答朴一和問-小學 (43) 1675. 三不去할 것이 있는 사람이 七去之惡이 있을 경우의 처치 등과 ≪小學≫에 대한 朴尙淳의 질문에 답한 글.
答姜叔重-錫朋-問-詩 (1) ≪詩經≫<大雅><生民>의 旣醉의 集傳의 註에 대한 의문 등 ≪詩經≫에 대한 姜錫朋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慶由-纘輝-再問-大學 (1) 1676. ≪大學≫ 序에 대한 小註의 禮에 대한 설명‚ 氣質의 淸濁과 粹駁 등의 문제에 대한 鄭纘輝의 질문에 답한 글.
答宋質夫問-理學通錄 (2) 1676. 陳膚仲書의 ‘招拳惹踢’의 讀音과 字解 등 ≪理學通錄≫에 대한 宋徵殷의 질문에 답한 글.
答宋質夫問-國恤禮 (4) 1688. 國恤 卒哭 전의 練祥 의절 등 國恤禮에 대한 宋徵殷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伯瑞-龜章-問 (4) 1675. ≪大學≫의 明德을 心德으로 볼 수 있는지‚ 知止章의 知의 뜻‚ 物格章의 意 등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伯瑞問-近思錄 (6) 程頤의 ‘밝지 않으면 움직여 갈 곳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면 밝은 것이 쓸 데가 없다’는 말에서 明이 지칭하는 것 등 ≪近思錄≫에 대한 蔡龜章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叔涵問-喪禮 (6) 1681. 出喪한 뒤에 嫡子가 다른 곳에 있다가 하루 뒤에 비로소 부고를 들었을 때 小祥과 變除할 때의 기일 산정 원칙 등에 대한 金載海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雲卿-志逵-問-喪禮 (7) 1689. 喪禮에 대한 李志逵의 질문에 답한 글. 几를 撤하기 전에 遷葬할 때의 의절‚ 宗子와 함께 살지 않는 支子의 妻가 죽었을 때의 의절‚ 支子가 妻를 위해 祭廳을 만드는 것‚ 제사에서 辭神의 절차‚ 前后室을 부친의 神主에 배향하는 일‚ 喪을 당한 뒤의 後娶‚ 아버지 계실 때 모친상 禫祭 후 복색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獻-世璞-問-昏禮 (10) 1683. 昏禮에 대한 李世璞의 질문에 답한 글. 宗子가 有故일 때의 昏主‚ 宗子가 다른 곳에 살 때의 祖禰의 사당 告辭‚ 사위가 부인의 부모 및 친족들을 뵐 때 사당에 고하는 절차‚ 바로 親迎하기 어려운데 사위가 부인의 부모와 相見하는 것도 괜찮은가 하는 등의 내용.
答李君獻問-喪禮 (12) 1688. 喪禮에 대한 李世璞의 질문에 답한 글. 成服을 하지 못했을 때 練祥의 月數를 계산하는 법‚ 부고를 듣는 즉시 성복한다는 구절과 4일 만에 성복하는 구절이 모순되는가‚ 忌日 지난 뒤 祥祭 전의 朝夕 上食의 시행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李泰而-行泰-問-冠禮 (13) 1686. 冠禮에서 巾을 받는다는 글이 없이 贊者가 건을 가지고 꿇어앉아 나아간다고 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 그때 冠弁도 함께 가지고 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李行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泰而問-小學 (13) 1688. ≪小學≫에 대한 李行泰의 질문에 답한 글. ‘遊居有常’에서 ‘居’의 의미‚ 첫닭울음 뒤의 행동 순서‚ 沃盥의 예‚ 潄潄口를 潄口라고 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李泰而問-擊蒙要訣 (14) 1691. ≪擊蒙要訣≫과 ≪家禮≫의 墓祭와 朔望祭 의절 차이‚ 朔望의 진설‚ 時祭를 사당에서 행하는 문제‚ 寒食이 俗節에 들어 있지 않은 이유‚ 제사에 初獻만 행하라고 한 이유‚ 祭饌에서 醋菜의 菜가 지칭한 것‚ 望哭할 때의 設位‚ 望柱石의 의미‚ 본생부모의 상에 대한 慰狀의 표현 등 李行泰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仁甫-時春-問-國恤禮 (16) 1680. 國恤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服喪 중 國恤을 당하여 成服할 때의 복색‚ 成服 뒤 朝夕上食을 회복했을 때 祭饌‚ 집에 있을 때는 私服을‚ 밖에 나와서는 君服을 입는 것은 어떠한가 등의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17) 1680.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國恤 때 개인의 喪祭禮‚ ≪五禮儀≫의 大中小祀가 지칭하는 것‚ 土神에 대한 제사 복색과 절차‚ 柩衣제도‚ 反哭할 때 말과 교자를 사용하는 근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0) 1680.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靈床을 철한 뒤 復衣의 위치‚ 시집간 딸이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조문받는 의절‚ 딸이 시집에 돌아간 뒤의 의복과 음식‚ 先塋에 祔葬할 때 祖先에 고하는 절차‚ 朝祖의 祖의 뜻‚ 反哭의 의절‚ 茅莎의 禮‚ 玄酒로 설하고 不斟하는 이유‚ 사당을 세울 신주의 祔祭 여부‚ 계모에 대한 출가한 딸의 복제‚ 遷移한 長房의 神主를 처리하는 방법‚ 合葬의 葬法‚ 庶孫의 所生母에 대한 복제 등의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4) 1681.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출계한 형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의 喪主‚ 權葬의 의리‚ 朝祖의 禮‚ 伯父가 禰廟일 때 伯母의 祔廟‚ 어머니의 조카인 伯母를 一家에 几筵을 설할 때 祭奠의 선후‚ 衰絰로 出入하는 문제‚ 상중에 친구의 죽음을 당했을 때의 의절‚ 친척과 친구를 길에서 만났을 때의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7)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練祭에 負版辟領衰를 없앤다는 의미‚ 練祭 때 婦人의 복색‚ 가난하여 옷을 바꿀 수 없을 때의 조처‚ 남편의 變除 절목‚ 練祭의 祝辭‚ 虞祭와 祥祭 때의 參神 절차에 있어서 아들과 남편의 차이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29)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어머니의 心喪 중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의 복색‚ 어머니를 할아버지 사당에 祔廟하는 문제‚ 출계한 뒤 후손이 없는 형의 묘를 고치는 일‚ 시어머니 상 중 남편을 改葬할 때의 복색‚ 重服의 복색‚ ‘重服 중 새로운 죽음이 있으면 成服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喪禮 (31) 1683. 喪禮에 대하여 李時春에게 답한 글. 婦人의 首絰‚ 腰絰‚ 醋楪과 醋菜‚ 三鼎과 五鼎‚ 부모상 중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의 의절‚ 親知의 상에 편지로 위로하는 문제‚ 廬次의 진설‚ 시어머니 상과 本親의 상이 겹칠 때의 의절 등의 내용.
答李仁甫問 (32) 1684. 李時春의 질문에 답한 글. 3년 내 忌祭에 1獻만 한다는 말의 뜻‚ 祥祭를 略行하려는 경우의 讀祝 여부‚ 祥祭 뒤 禫祭 전의 조문에 대한 대처 방법 등에 대한 내용.
答李仁甫問 (34) 1684. 李時春의 질문에 답한 글. 國恤禮時 개인 제사‚ 節祀의 의리와 儀節‚ 大祥 때의 복색‚ 大祥과 禫祭의 祝文式‚ 사당을 새로 세울 支子를 임시로 할아버지 사당에 祔祭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士秀-挺英-問-禮 (36) 1679. 禮에 대한 李挺英의 질문에 답한 글. 여자의 상복을 정하는 의리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士秀問-喪禮 (38) 1688. 喪禮에 대한 李挺英의 질문에 답한 글. 國恤時의 三虞祭·卒哭祭·祔祭‚ 죽은 동생의 상에 아버지가 主祭할 때의 題主 호칭‚ 국휼 때 사대부가의 返魂儀物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問-大學 (39) 1687. ≪大學≫에서 仁과 愛의 관계‚ 慮와 思의 의미 등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壽翁問-喪禮 (41) 1680. 喪禮에 대한 李世龜의 질문에 답한 글. 朝夕上食과 朔望奠을 동시에 거행하는 문제‚ 靈座 交倚를 비워 둘 것인지 여부‚ 할머니의 忌祭를 支子가 돌아가며 행할 때의 獻爵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問 (42) 1682. 李世龜의 질문에 답한 글. 喪中의 山神祭 의절‚ ≪魯史零言≫의 해석‚ 家禮의 晨謁과 祭禰에 대한 규정이 刪定된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李武叔-彦緯-問-喪禮 (44) 1681. 喪禮에 대한 李彦緯의 질문에 답한 글. 齊衰의 練衣와 朞服한 사람의 복색‚ 출가한 여자의 除服 의절‚ 祔祭를 大祥 뒤로 옮기는 문제‚ 主祭 부재중의 練祭 祝文‚ 心喪 중인 사람의 墓次에서의 哭拜 여부‚ 상례 중 친척을 相見할 때의 의절‚ 모친을 위한 心喪 중 禫祭의 복색‚ 뵙지 못한 조부모 기일의 의절 등에 대한 내용.
答李季章-世瑍-問-喪禮 (45) 1691. 喪禮에 대한 李世瑍의 질문에 답한 글. 두 형의 상이 이어졌을 때 먼저 죽은 형 묘 옆에 맏형을 장사지낼 때도 先墓에 고하는 절차를 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고할 때의 題主‚ 祝辭에 대한 내용.
答閔秀卿-采萬-問-家禮 (1) 1682. 喪중의 朝夕哭 의절‚ 几筵에서의 儀節‚ 어머니를 장사지내면서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에 합장할 때의 題主 등 家禮에 대한 閔采萬의 질문에 답한 글.
答兪寧叔問-國恤禮 (2) 1683. 國恤禮에 대한 兪得一의 질문에 답한 글. 국휼 중의 墓祭와 忌祭‚ 朔望奠과 薦新의 의절‚ 3개월 된 親喪의 장례를 國葬 뒤로 미루어야 하는지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子懷-弘福-問-喪禮 (4) 1691. 喪禮에 대한 金弘福의 질문에 답한 글. 次子가 出繼하여 죽은 형의 후사가 되었을 때의 복제와 호칭‚ 제사시의 祝文 및 題主‚ 朝祖 여부‚ 別居하는 경우 장사 전의 家廟 제사 여부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權質甫-益文-問 (6) 1685. ≪論語≫<八佾>篇의 ‘成事不說 遂事不諫’이라는 구절의 의미와 諺解‚ <大學序>의 分節 등에 대한 權益文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漢臣-是翁-問-禮 (7) 1688. ≪栗谷先生集≫ 말단의 <宋龜峯答書>의 辨說 내용에 대한 崔是翁의 질문에 답한 글.
答柳道卿-貴三-問-小學 (8) 1688. ≪小學≫에 대한 柳貴三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이 지칭하는 것‚ 六德의 순서‚ 六樂·五射·五御가 지칭하는 것‚ 鬌가 무엇인가‚ 객과 主人이 각각 먼저 절하는 경우‚ <實明倫>에서 朋友간의 믿음을 말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내용.
答柳道卿問-家禮 (12) 1690. 喪服啚旁註에 대한 金長生의 해설의 정당성 여부‚ 外畢의 뜻‚ ‘袂袖口’라는 말의 타당성 여부‚ 括髮免布의 의미‚ ‘齊衰以下는 袒免한다’는 구절의 의미‚ ‘去冠及上服’의 해석‚ 三日杖과 五日杖 등 杖制의 차이‚ 九族의 범위‚ 讀祝할 때의 위치‚ 낮 제사에서의 초 사용 여부‚ 侑食의 의절‚ 一食九飯에서 九飯의 의미 등 ≪家禮≫에 대한 柳貴三의 질문에 답한 글.
答高益之-益謙-問-小學 (17) 1690. ≪小學≫에 대한 高益謙의 질문에 답한 글. ‘旬月에 소학 공부를 마친다’고 할 때의 旬月의 의미‚ 四拜의 근거‚ 婢妾의 의미‚ 三不去와 七去가 중복될 때의 처리‚ 士冠禮에 사용되는 冠의 의미‚ 中人之性의 의미 등에 대한 내용.
答宋文叔-奎炳-問-喪禮 (21) 1685. 喪禮에 대한 宋奎炳의 질문에 답한 글. 관직이 없는 자나 성인이 아닌 자의 銘旌에 쓸 칭호에 대한 내용.
答權以文-博-問-小學 (21) 1686. ≪小學≫에 대한 權博의 질문에 답한 글. 立敎에서 ‘밤에 장님으로 하여금 詩를 읽게 한다’는 구절의 의미‚ 年數와 학문의 단계‚ 塾·庠·序·學의 의의‚ 6德의 순서‚ 8刑의 순서‚ ‘顔色을 整齊한다’는 말의 뜻‚ 君臣이하에 대해서 소략한 까닭‚ 자제에 대한 훈계 방법‚ 나무 아래 危坐하는 것의 의미 등에 관한 내용.
答申伯武-世雄-問-小學 (31) 1690. ≪小學≫에 대한 申世雄의 질문에 답한 글. 朋友之交에서 ‘交’字를 쓴 이유‚ 陳氏가 程子의 主敬공부로 소학을 보충한다고 한 이유‚ 子婦의 朝謁 시기‚ 通論에서 붕우간의 사귐이 자세하지 않은 이유‚ 立敎라 하고 立學이라 표현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南幼安-磐-問-改葬 (36) 1686. 遷葬할 때의 복색‚ 哭婢의 수행 여부 등 改葬하는 禮에 대한 南磐의 질문에 답한 글.
答徐生-宗積-問-喪禮 (36) 1687. 喪禮에 대한 徐宗積의 질문에 답한 글. 服喪 중의 練祭와 祥祭의 실행 여부 및 祭饌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洪士式-重揩-問-祭禮 (37) 1686. 忌祀에 三獻하는 일의 의미 등 祭禮에 대한 洪重揩의 질문에 답한 글.
答洪士式問-祭禮 (37) 1688. 發靷 전에 사망한 이의 어버이 기일을 만났을 때의 祭奠‚ 할머니의 再忌日에 妻에 대한 朝夕上食 여부‚ 秋夕의 축문‚ 죽은 이의 생일과 先忌가 만났을 때의 祭饌 등 祭禮에 대한 洪重揩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生擇之問-喪禮 (39) 1681. 上食에서의 술 사용 여부‚ 진설하는 순서‚ 상황에 따른 祝辭의 措語 문제 등 喪禮에 대한 梁擇之의 질문에 답한 글.
答蔡生時鎬問 (39) 1668. 蔡時鎬의 물음에 답한 글. 七星板을 쓰지 못했던 闕禮에 대한 처리문제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生孝閔問-禮 (40) 1674. 李孝閔에게 답한 글.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아들이 없어 자신의 아들을 문중의 뜻에 따라 伯父의 뒤를 잇게 하고 禮曹에 呈文하지는 못한 상황에서 모친상을 당했을 때의 예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生涑問-喪禮 (41) 1686. 돌아가신 아버지의 初朞와 5대조의 忌祀가 겹쳤을 때의 예를 행하는 순서와 의절 등 喪禮에 대한 李涑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儀卿-羽成-問-祭禮 (42) 1680. 祭禮에 대한 李羽成의 질문에 답한 글. 죽은 부인에 대한 服 중의 사당 제사 여부에 대한 내용.
答錦昌姪問-祭禮 (43) 1686. 大祥 뒤 祔廟하기 전에 祠堂에 고하는 날짜와 의절 및 告辭‚ 班祔한 神主를 遞遷할 때의 祝辭 등에 대한 朴泰定의 질문에 답한 글.
伊洛淵源圖 (1) 남송 이후 원말까지 주자학의 계통을 그림으로 정리해 놓은 것. 周敦頤에서 程子와 朱熹를 거쳐 朱丹溪 등에 이르는 것을 설명. 특히 주희의 연원을 程頤가 아닌 程顥에서 楊時와 李侗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論敬提要 (2) 1667. 敬에 대한 제반 논의들을 모은 글. ≪大學或問≫에서 主一無適을 위주로 하는 持敬에 대한 논의의 요지를 얻고 李之濂 등과의 토론과 고증을 거쳐 朱熹·趙光祖·李滉·李珥 등의 敬에 대한 논의를 초록하여 놓은 글.
明道選士說 (14) 程顥가 논한 學校를 짓고 師儒를 높이고 선비를 취한다는 논의를 바탕으로 周禮 이래의 선비 선발과 학교 제도의 관계 등에 대하여 논한 내용.
柳道卿字說 (16) 柳貴三의 원래 이름은 台三이고 字는 公輔였는데‚ 同宗 중에 같은 이름이 이미 있다하여 이름을 貴三으로‚ 자를 道卿으로 고치게 되었다며 이름과 자를 바꾼 경위와 군자의 도 중 가장 귀한 용모와 안색‚ 언어 등 3가지를 깊이 체득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記白沙先生傳畵事 (16) 李恒福이 金瑬에게 인조가 그린 그림을 전해 주며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추대하라고 한 뒤 인조가 비를 피하여 김류의 집에 들르면서 인연이 되어 반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는 내용.
記綿谷葬山事 (19) 1691. 綿谷의 지세와 장사 지낸 곳의 風水 및 金川에 이주하여 장지를 정하며 門人들과 함께 書堂을 짓게 된 전말을 기록한 내용.
奇高峯四七後說辨 (23) 奇大升의 四七後說에 대해 논변한 글. 孟子가 말한 四端의 擴充을 理의 發로 볼 수 있고 七情의 요약을 氣의 發로 볼 수 있다며 四端七情을 理氣로 分屬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
張谿谷駁玄繩編辨 (25) 張維의 玄繩編에 반박하여 논변한 글로 性情과 動靜의 관계‚ 善惡과 氣의 관계에 대한 내용.
退溪文集記疑疑義 (27) 1683. 李滉의 ≪退溪文集≫을 읽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각 板 별로 찾아내어 의문점을 기록하고 풀이한 글.
栗谷先生年譜考證一 (1) 1668. ≪栗谷先生年譜≫에 대한 考證. 尹宣擧와 宋時烈의 위임을 받아 문집이나 日記와 서로 다른 것 등 잘못되거나 빠진 것 등을 추가하거나 바로잡아 고증한 내용.
栗谷先生年譜考證二-答尹子仁 (38) ≪栗谷先生年譜≫에 대해 考證한 글. 尹拯의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힌 글로 윤증의 질문과 박세채의 답이 함께 실려 있다.
栗谷先生年譜考證三-答尹子仁 (46) ≪栗谷先生年譜≫에 대해 考證한 글. 尹拯에게 왕복하며 윤증의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힌 글로 박세채의 답만 실려 있다.
魯史零言凡例 (51) 1674. ≪魯史零言≫의 凡例. 傳文과 外傳 처리 방법‚ 刪節‚ 年數와 人名 정돈법‚ ≪魯史零言≫이라는 書名의 뜻 등에 대한 내용.
修栗谷先生四書分註取舍凡例 (54) 李珥의 ≪四書分註≫를 取捨하여 수정하는 범례. 취사할 때의 표기 원칙‚ 李珥의 圈點 여부에 따른 책 별 표기의 차이‚ 취사의 원칙 등에 대한 내용.
關西昏喪契約束 (56) 1686. ≪關西昏喪契≫ 규약의 조목. ≪文公家禮≫를 대체로 삼을 것‚ 절목 講定의 이유‚ 昏喪 요절에 대한 講習‚ 禮服과 禮器의 공동 사용‚ ≪喪禮備要≫의 이용‚ 책벌과 상호부조 등에 대한 내용.
魏晉 (1) 1663. 魏晋에 대한 사론. 漢이 쇠하는 것을 틈타 천자를 위협하고 아들에게 簒逆을 가르친 曹操와 그들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국권을 장악한 司馬昭 등이 결국 五胡에게 능멸을 당하고 신하된 자들의 好利가 그치지 않는 단서를 열었다는 내용.
送從祖兄汝道歸榮湖南序 (2) 1654. 朴世模가 朴紹와 朴東說의 뒤를 이어 장원이 된 것을 칭송하고 덕을 닦아 두 할아버지의 풍모를 이을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
送趙通川赴郡序 (3) 趙億이 땅이 척박하고 백성도 적은 通川의 수령으로 부임해가는 것을 전송하는 글로 아름다운 경치 등을 들어 위로하고 훌륭한 정사를 펼치라고 당부하는 내용.
楊江雜詠序 (5) 1681. 李重基·李厚基·李行健·李行遠·李行進 등이 楊江에서 唱酬한 ≪楊江雜詠≫ 서문. 외할아버지인 申欽‚ 從祖인 朴東說 등과의 관계‚ 이중기 등의 생애를 간략하게 밝히고 증손 李徵明의 요청에 따라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내용.
寄贈李汝常序 (7) 李珥의 從玄孫인 李汝常에게 보낸 글로 程子가 말한 文章과 訓詁의 학문이 科擧를 위한 학문으로 바뀌어 근래 京華의 사족들이 誦業을 꺼리는 폐단이 심해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儒者의 학문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는 내용.
孤竹詩集後叙 (9) 1683. 崔慶昌의 시문집인 ≪孤竹詩集≫의 後叙. 白光勳과 함께 梁應鼎과 李後白의 문하에서 배워 八文章 혹은 二十八宿로 일컬어졌던 인물로 활쏘기와 書法‚ 玉簫의 음률에도 능했던 것과 증손 崔碩英의 부탁으로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글
韓山知足堂記 (12) 1664. 韓山에 있는 權讓의 서당인 知足堂의 記文. 권양이 韓山에 복거하면서 지족당이라는 당명을 지은 경위와 知足의 의미를 밝힌 내용.
楊州晦谷齋舍記 (14) 1691. 楊州 晦谷에 있는 宜寧南氏 齋舍의 記文. 南致勗과 南彦純의 묘가 자리한 터를 健元陵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사받은 일‚ 재사를 후손인 南九萬이 중건한 경위 등을 적은 글.
題晦翁答黃子耕 (16) 1660. 朱熹가 병중에 跏趺坐하고 눈으로 코 끝을 보며 存心養氣에 힘쓰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한 내용을 좌석 모퉁이에 써놓게 된 경위를 題한 글.
跋神訣 (16) 1664. 집안에 전해오며 아버지가 곁에 두고 보던 ≪神訣≫의 발문. 養生家의 말과 道佛의 修戒의 방도도 섞여 있지만 병통이 있을 때 對症의 약으로도 쓸 만하다는 내용.
題綠水亭詩集後 (17) 1676. 李萬雄의 ≪綠水亭詩集≫ 뒤에 題한 글. 勇退하여 거문고와 술로 상하의 사람들과 林壑에서 즐기고 싶다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할아버지 李濟臣의 遺業을 확충하는데 힘을 썼다는 내용.
跋藏六堂集 (18) 趙龜錫의 시문집인 ≪藏六堂集≫의 발문. 아들 趙泰東의 부탁으로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鄭弘溟의 門人으로 成渾의 제자였던 아버지를 이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典雅한 문체로 申最 등의 칭송을 받았다는 내용.
李氏聯珠集後題 (19) 1681. 李一相‚ 李弘相 등 延安李氏들의 시를 모은 ≪李氏聯珠集≫ 뒤에 題하여 이들 인물들의 문장과 생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글.
書重刊慶壽集後 (20) 李貞幹의 ≪慶壽集≫ 重刊本 뒤에 쓴 글. 李行迪과 외손 鄭始成이 다시 간행한 경위와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효성으로 봉양받고 포상의 은혜를 누린 것을 칭송하는 내용.
書尹氏諸丈筆蹟卷 (22) 1682. 尹舜擧·尹文擧·尹宣擧의 筆蹟을 모은 책에 쓴 글.
閑居錄後題 (22) 朴淳 등의 자취가 남아있는 도성에서 백여 리 떨어진 龍虎洞에서 閑居自樂하던 兪瑒의 ≪閑居錄≫ 뒤에 題한 글.
書沈漁村辛卯事後 (23) 후손 沈澄의 부탁으로 金安老를 추천했다가 뒤에 김안로를 추천한 것을 후회했던 沈彦光 형제의 1531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글 뒤에 써 준 내용.
跋滄洲遺稿 (24) 1683. 沈之漢의 시문집인 ≪滄洲遺稿≫의 발문. 아버지 沈倬과 함께 광해군 때 유배되었고 반정 뒤 등용되었으며 詩에 힘써 그 시가 맑고 방탕하지 않으며 전아하며 속되지 않아 唐詩의 규모를 잃지 않았다는 내용.
題崔西村沂手蹟後 (24) 西村 崔沂의 手蹟 뒤에 題한 글. 1616년 간흉에 의해 화를 당했으나 죽음으로 그 의리를 바꾸지 않았던 인물로 남아있는 絶句 몇 수를 조카인 柳成運이 작은 첩으로 만들어 와서 題하게 되었다는 내용.
題翠微堂遺址事蹟後 (25) 1685. 南在의 ≪翠微堂遺址事蹟≫ 뒤에 題한 글. 어려서 吉再의 문집에서 시 몇 수를 보고 당시 높은 공을 세워 선비들의 사표가 되었던 것을 감탄하였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 후손 南磐이 이 책을 보여주어 題하게 되었다는 내용.
跋知止堂集 (26) 1686. 宋欽의 시문집인 ≪知止堂集≫의 발문. 중종과 명종 때 청렴결백하게 임금을 섬기고 맑은 정절이 있던 인물이었다는 것과 후손 宋命賢의 부탁으로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경위를 기록.
跋木川馬氏族譜 (27) 1691. 木川馬氏 族譜의 발문. 고려 태조에 의해 마씨 성을 받게 된 일‚ 많은 사람들이 泯滅된 것에 대한 아쉬움‚ 조선 개국 후 서울로 이사하지 않았던 개성 주민들을 100여 년간 停擧한 일에 대한 아쉬움 등을 기록한 내용.
題孝子李用濟-橈-哀辭後 (27) 1691. 孝子 李橈의 哀辭 뒤에 題한 글. 자손이 어려 효행이 드러나지 않고 泯滅될까 염려된다는 내용.
告外五代祖妣許氏墓文 (28) 宗姪인 朴泰斗를 대신하여 지은 5대조 할머니 許氏의 묘를 오랜만에 찾아 掃墳하면서 고하는 축문.
遷葬金川時告先府君墓文 (28) 1676. 金川에 천장할 때 아버지 朴漪의 墓에 고하는 축문.
告先妣墓文 (29) 1676. 어머니 신씨의 墓에 改葬하게 될 것임을 고하는 축문.
改定祭禮告先墓文 (29) 宗姪인 朴泰斗를 대신하여 지은 祭禮 때 先墓에 고하는 축문.
祭申洗馬-昪-文 (29) 1665. 申昪에 대한 제문.
祭姨兄趙觀察-龜錫-文 (30) 趙龜錫에 대한 제문.
祭韓秀才-世萬-文 (31) 韓世萬에 대한 제문.
祭從伯父僉樞公-濠-文 (31) 1668. 從伯父인 朴濠에 대한 제문.
祭朴秀才-亨陽-文 (32) 1669. 朴亨陽에 대한 제문.
祭趙通川文 (32) 1672. 趙億에 대한 제문.
祭元觀察仲擧文 (33) 1673. 元萬里의 묘에 제사지낼 때의 제문.
祭趙生榮期墓文 (34) 1685. 趙榮期의 묘에 제사지낼 때의 제문.
義禁府都事贈左承旨宋公墓碣銘 (1) 1683. 宋時喆의 아들인 宋光淹의 묘갈명.
唐津縣監宋公墓碣銘 (2) 宋光洵의 묘갈명.
中部參奉梁公墓碣銘 (5) 梁渭南의 묘갈명.
水原白公墓碣銘 (8) 白弘基의 묘갈명.
僉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李公墓碣銘 (10) 1685. 李顯英의 아들인 李徽祚의 묘갈명.
牛峯縣令李公墓碣銘 (13) 1686. 李擎夏의 묘갈명.
成均生員林公墓碣銘 (15) 林溜의 묘갈명.
宣敎郞閔君墓碣銘 (17) 閔聖徽의 從弟 閔聖淸의 묘갈명.
果川縣監閔公墓碣銘 (18) 閔忠亮의 묘갈명.
承政院都承旨贈吏曹參判鄭公墓碣銘 (20) 1690. 鄭士偉의 묘갈명.
成均進士贈左承旨朴公墓碣銘 (22) 1691. 朴戫의 묘갈명.
新溪縣令贈領議政李公墓碣後記 (25) 李徵明의 증조부인 李重基의 墓碣 後記.
龍驤衛副司果贈吏曹參判崔公墓表 (25) 崔確의 묘표.
司饔院奉事權君墓表 (27) 兪棨와 宋時烈 門人인 權誨의 묘표.
軍器寺僉正朴公墓表 (29) 權鞸의 門人인 朴潾의 묘표.
景陽道察訪贈左承旨權公墓表 (31) 權韠의 조카이며 門人인 權俌의 묘표.
司道寺主簿邊公墓表 (32) 1681. 成渾의 제자인 邊友益의 묘표.
綾城府院君諡忠穆具公墓表 (34) 具宏의 묘표. 5대조 具致弘의 묘 곁에 장사지냈다가 1681년 그 동북쪽 炭峴으로 이장한 경과와 손자 판윤 具鎰의 청으로 묘표를 쓰게 된 경위를 밝힌 내용.
刑曹判書贈領議政諡忠靖趙公墓表 (35) 1685. 申欽의 사위이며 李恒福 門人인 趙啓遠의 묘표.
贈貞夫人朴氏墓表 (38) 朴應仁의 딸이요 柳洬의 妻이며 柳誠吾의 養母인 貞夫人 朴氏의 묘표.
儀賓府都事贈左參贊李公墓表 (39) 1690. 李耈俊의 묘표.
贈戶曹參判李公墓表 (41) 李耈俊의 아들이며 李行泰의 아버지인 李德基의 묘표.
通德郞朴君墓表 (43) 朴文龜의 묘표.
恭人李氏墓誌銘 (1) 1667. 李貴의 孫女인 金世鼎의 妻 恭人 李氏의 墓誌銘.
掌樂院僉正朴公墓誌銘 (3) 朴瀰의 아들이며 鄭弘溟의 門人인 朴世橋의 묘지명.
安人曺氏墓誌銘 (6) 曺漢英의 손녀로 林泳의 妻인 安人曺氏의 묘지명.
義禁府都事曹公墓誌銘 (8) 成渾의 門人인 曺麒瑞의 묘지명.
靑松沈君墓誌銘 (10) 權韐·鄭曄 門人인 沈世熙의 할아버지 石灘 沈之演의 묘지명.
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 (12) 鄭澈의 증손인 鄭慶演의 묘지명.
全義郡夫人李氏墓誌銘 (15) 1683. 우의정 李行遠의 딸로 朗原君 李의 妻인 全義郡夫人 李氏의 묘지명.
積城縣監南公墓誌銘 (16) 1685. 南宗伯의 묘지명.
戶曹佐郞南公墓誌銘 (18) 南雋龜의 묘지명.
雲峯縣監鄭公墓誌銘 (20) 鄭澈의 손자 鄭沄의 묘지명.
贈貞敬夫人申氏墓誌銘 (22) 申翊聖의 장녀요 洪命夏의 처로 貞敬夫人에 추증된 선조의 외손녀 申氏의 묘지명.
承政院右副承旨金公墓誌銘 (23) 金世鼎의 묘지명.
昌平縣令沈公墓誌銘 (27) 四山監役‚ 昌平縣令 등을 지낸 沈櫟의 묘지명.
貞夫人徐氏墓誌銘 (30) 1689. 徐景의 딸‚ 李萬雄의 妻‚ 李徵明의 어머니인 貞夫人 徐氏의 묘지명.
學生朴君墓誌銘 (32) 1690. 金克亨·尹文擧 門人인 朴世櫶의 묘지명.
同知中樞府事權公墓誌銘 (33) 權順昌의 묘지명.
贈貞夫人趙氏墓誌銘 (36) 趙遠期의 딸이요 李景奭의 외손녀로 申琓의 妻인 貞夫人 趙氏의 묘지명.
成均生員朴君墓記 (38) 1677. 朴世彙의 묘기.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 (1) 1663. 玄谷 趙緯韓의 행장.
高祖司諫院司諫贈領議政冶川先生朴公行狀 (20) 朴英의 門人인 고조부 朴紹의 행장.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朴公行狀 (30) 朴東說의 아들로 朴東彦에게 出繼한 懦軒 朴潢의 행장.
孝子副司果贈戶曹參議金公行狀 (41) 효자 金忠伯의 행장.
承政院左副承旨沈公行狀 (1) 沈之漢의 행장.
刑曹佐郞贈戶曹參判柳公行狀 (8) 柳尙運의 아버지이며 柳鳳輝·柳鳳徵의 할아버지인 柳誠吾의 행장.
養考秀士府君行蹟 (12) 1664. 養父였던 叔父 觀海 朴濰의 행적.
先祖高麗判典校寺事朝鮮贈領議政府事錦城府院君潘南先生事蹟 (15) 1681. 선조인 朴尙衷의 행적에 관련된 기록을 高麗史와 개인 문집 등에서 수집한 글. 國學에서 李穡·鄭道傳 등과 함께 유학을 진흥시키고‚ 恭愍王 사후 李仁任 등과 맞서 원의 사신을 명으로 잡아 보낼 것 등을 주장한 일 등에 대한 내용.
孺人李氏行錄 (28) 1687. 李貴의 손자인 光州牧使 李恒과 박세채 누이의 딸로 貞明公主의 손자인 洪重楷의 妻였던 孺人 李氏의 行錄.
沈君鐸小傳 (30) 1678. 임진왜란 때 㺚川에서 싸우다 전사한 沈鐸의 傳.
都巡邊使申公傳 (32) 1678. 임진왜란에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한 都巡邊使 申砬의 傳.
挽金成川-必振(1692)‚ 聞南判書雲卿-龍翼-訃‚ 崔丈漢卿-後亮-病中次春字韻以寄之玆用續貂‚ 次申甥成甫-聖夏-寄示韻‚ 哭李參判擇之-選‚ 次文生明仲-後開-寄示韻‚ 聞申叔弼-翼相-移家入南陽海中賦此却寄二首‚ 挽李參判重習-慣‚ 讀退栗二先生四七說示金叔涵-載海‚ 書堂庭前蓼有紅白二色命奚奴剪其白者有賦‚ 聞老峯-閔鼎重-凶訃‚ 哭趙伯靜-仁壽‚ 七月初旬月夜偶吟‚ 咏前溪釣磯二首‚ 臨津有感二首‚ 在楊山時偶吟平日住迹多事中輟今於省墓東陽路中足成之因此庶見流離跋疐之蹤云爾十二首‚ 敬省新壟翌日上後洞禪菴偶吟‚ 歸過臨津‚ 姜叔重-錫朋-扶病遠訪臨別書此以贈二首‚ 挽洪蓮川-澤普-內‚ 挽李主簿-之燈‚ 晉陽趙使君祥甫-儀徵-歷訪口占以贈時適重陽日也‚ 挽沈驪州龍卿-壽亮-二首‚ 感秋偶吟‚ 次李甥久叔-眞望-留贈韻二首‚ 挽久堂-朴長遠-遷葬二首‚ 雪夜有懷書齋諸友賦此以示之-兪檝韓德恒金載重‚ 挽金生國卿-士珎-六首‚ 挽梁僉樞-錫九-二首(1693)‚ 迎汝吉-泰遜-姪婦櫬於廣灘雪涕有作二首‚ 余以神衰不欲作句語來住墳庵寶盖山人聰印進一絶遂次之‚ 松京路中偶吟‚ 病中志懷‚ 七月十八日夜待崔汝和不至‚ 挽林綾州-渙-姪三首‚ 寄賀會津再從兄-世楷-壽席‚ 哭金上庠伯雨-濡-六首‚ 謹次金河西詠仁宗大王墨竹韻‚ 贈別鄭結城-庥‚ 冬至日偶吟‚ 三月念四日後病勢猝谻不得見客戱書二首(1694)李君實-世華-申子平-懹-因坤宮復位同日赴召戱贈一絶‚ 余不作燕行別語久矣今被兪行臺-得一-强責要爲異地面目兼示正副二价‚ 錦平之北也主上賜宸章以寵其行錦平請賡載甚勤窃敢有賦三首‚ 九月晦日將再赴朝有感信筆‚ 十月十四日將奉審徽陵有往先壟之命感作‚ 敬望諸陵有作‚ 送申公獻-琓-再使燕山‚ 退歸後許夏昌來訪書以贈之‚ 乙亥元日戀闕有感‚ 挽朴進士-文開.
頒示中外戒勿朋黨敎書 (1) 1694. 왕명으로 朋黨을 경계하기 위하여 頒布한 교서. 왕이 極을 세우면 조정에 있는 사람에게는 형제나 朋友의 의리가 있는데 임금이 極을 세우지 못해 편당짓는 풍습이 이어졌다. 宣祖 이후 東西로 나뉘고 반정 이후 保合의 미덕이 있었으나 기해년 복제로 격화되었다. 갑인년 이후 軋轢이 커져 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폐해가 커졌다. 이제 朋黨의 폐해를 경계한 敎書를 내리니 이후 조정에 틈을 만들거나 편당을 지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내용.
辭議政府右贊成疏一 (5) 우찬성은 大儒나 元勳의 자리로 자신에게 맞지 않고 병이 있다며 사양한 첫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右贊成疏二 (6) 坤宮의 位號가 회복되는 등 좋은 날에 실험해 보았으나 증명되지 않았던 인물인데다가 병이 있다며 우찬성을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右贊成疏三 (8) 경연에 도움줄 것이 없고 고질병이 있다며 우찬성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辭議政府左議政疏 (10) 재상의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인물이 아님과 병을 들어 좌의정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再辭議政府左議政疏 (12) 앞서 들어가 낭패만 당하고 돌아왔는데 다시 나아가 깨끗한 조정을 어지럽히고 簡選을 욕되게 할 면목이 없다며 재차 좌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문.
三辭議政府左議政疏 (14) 維新된 뒤에 鼎席이 비어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등을 들어 좌의정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문.
四辭議政府左議政疏 (17) 才力의 부족과 질병을 들어 좌의정을 사양하는 네 번째 상소문.
五辭議政府左議政疏 (18) 신병을 들어 좌의정 직을 사양하는 다섯 번째 상소문.
六辭議政府左議政疏 (21) 국가 안위에 관계되는 일을 질병이 있는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여섯 번째 상소문.
七辭議政府左議政疏 (23) 직명을 갈아주면 들어가 뵙고 물러나겠다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일곱 번째 상소문.
到延西入八辭議政府左議政疏 (24) 延西驛에 도착하여 정승의 직책을 갈아주어 賀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여덟 번째 상소문.
九辭議政府左議政疏 (28) 散班으로 賀班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아홉 번째 상소문.
到城外十辭議政府左議政疏 (29) 성밖에 도착하여 나와서 仰對하려는 이유를 설명하고 직명을 갈아 散班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며 좌의정을 사양하는 열 번째 상소문.
從駕到高陽落後申乞退歸疏一 (31) 御駕를 따라가 능을 展謁한 뒤 高陽에서 떨어져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 첫 번째 상소문.
申乞退歸疏二 (35) 병상과 모자간의 정을 아뢰며 다시 물러나게 해달라고 청하는 두 번째 상소문.
申乞退歸疏三 (37) 모자간의 정을 헤아려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세 번째 상소문.
中路待罪告歸疏 (39) 중로에서 待罪하며 돌아가겠다는 상소문. 老母에게 문안하고 家廟에 焚黃의 예를 행한 뒤 병세를 헤아려 조정에 나아가겠다는 내용.
N辭社稷暑提調仍請召還承旨疏 (42) 사직서의 神室을 修改해야 하는데도 오랫동안 아뢰지 못한 잘못 등을 들어 사직서 제조를 사양하고 승지를 소환하기를 청하는 상소문.
因雷變乞免疏 (44) 우레의 재변으로 인하여 직을 면하게 해줄 것과 祗敬하고 寅畏하여 부지런히 힘쓸 것을 청하는 상소문.
再進城外待罪仍請命賜進退疏 (45) 모친과 자신의 병을 아뢰고 국가에 누를 끼친 것을 성밖에 나와 待罪하면서 進退에 관한 명을 내려주기를 청한 상소문.
退歸後申辭職名疏一 (48) 모친의 병을 아뢰고 돌아온 뒤 職名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문. 청나라 사신이 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물러난 것은 아니며 사신이 와 있을 때 힐문하는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 체직해 달라는 내용.
申辭職名及兼帶三任疏二 (50) 다리 등 병세의 악화를 들어 임무를 보지 못해 殿最마저 빠뜨리게 했다며 社稷署의 都提調와 禁衛營 都提調 및 扈衛廳 大將의 임무를 사양하는 두 번째 상소문.
申辭職名疏二 (51) 병상 등을 들어 다시 겸하고 있는 모든 직명을 체직해 주기를 청하는 두 번째 상소문.
承旨傳諭聖旨後申辭職名兼帶及常祿疏 (52) 1695. 승지가 聖旨를 傳諭한 뒤 신병을 들어 다시 직명과 겸대하고 있는 직책 및 常祿을 사양하는 상소문.
疾作不得參鞫箚 (1) 1694. 南九萬과 함께 鞫獄에 참여하라는 명에 대해 설사 등의 병으로 鞫問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아뢰는 차자.
進別單啓箚四本箚 (2) 병으로 일을 맡아 볼 수 없음을 아뢰며 함께 올린 別單의 啓箚 4본. 첫째는 임금의 請納을 넓혀 기사년의 일은 바로잡되 신중하게 도모할 것. 둘째는 國體를 높여 왕이 표준을 세워 국정과 법령을 공정하게 할 것. 셋째는 人心을 따르는 것으로 배필을 바꾸었던 일을 바로잡고 閔黯과 張希載를 공정하게 처리할 것. 넷째는 당론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인재를 당색으로 쓰지 말고 현명한지를 중시할 것. 그리고 1683년에 올린 箚子의 두 번째 조목과 萬言疏 중의 세 번째 조목 즉 朋黨의 폐해를 지적한 것을 첨부하여 올림.
因議啓事乞遞職名兼辭食物箚 (1) 1694. 네 가지 차자 중 3번째 차자에서 논한 내용이 한 시절의 諸宰에 관한 것으로 金吾에서 待命하게 하였는데 경대부를 죄에 빠뜨리고도 병으로 인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직명을 갈아주기를 청하고 먹을 것을 내려준 것을 사양하는 내용.
因議啓事乞遞職名箚 (2) 자신으로 인해 議啓가 미루어지고 있는 것을 들어 직명을 갈아주기를 청한 차자.
中殿受鍼問安後待罪箚 (3) 중전이 침을 맞은 뒤 2품 이상 관원들이 문안하는 데 참여하지 못한 것을 待罪하는 차자.
請勉留領議政南九萬箚 (4) 領議政 南九萬이 茂長 儒生 姜敏著의 상소로 인해 자리를 내놓고 성밖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구만이 更化 이래 비었다시피 했던 鼎席을 지키며 綸序를 이뤘고‚ 時議와 모순이 있다지만 국가를 생각해서 한 일이니 지성으로 勉留하라는 箚子.
請勉召廟堂諸臣因陳兵判憲司二事箚 (5) 영의정 南九萬과 우의정 尹趾完이 모두 소를 올리고 下鄕하여 廟堂이 텅비었으니 정성으로 불러올 것을 청함. 유생의 상소로 대신이 배척받는 것은 폐해가 크고‚ 유생의 상소로 兵符를 바치고 나간 尹趾善을 推勘하여 병조의 정무가 지체되지 않도록 할 것을 청한 箚子.
辭三省推鞫委官仍遞箚 (7) 獄情의 首末도 모르는 것과 신병을 들어 三省推鞫의 委官을 사양하고 체직을 청한 箚子.
請更勉召領議政南九萬箚 (9) 영의정 南九萬을 힘써 부를 것을 다시 청하는 箚子. 儒生이 大臣을 비방한 것은 위험하다고 한 말로 인해 유생의 소에 禁令이 내려지고 남구만이 이를 들어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니 訝惑스럽다. ‘親迎’이라는 말은 李元翼을 나오게 하려던 조처로 왕과 신하에게 모두 좋은 일인데 옥당에서 잘못 거론한 것이다. 영의정과 우의정 등을 더욱 성의를 다해 소환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因承宣勉諭略陳曲折兼以不參鞫廳待罪箚 (11) 南九萬의 권유로 왕이 承宣을 보내 勉諭한 일로 인해 곡절을 아뢰고 鞫廳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待罪하는 箚子.
辭常祿箚 (12) 宿疾로 일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고 입성한 3개월간 행공한 날이 거의 없었다며 녹봉을 사양하는 箚子.
申論前日筵中未究之說箚 (14) 전날 경연 중에 자세히 아뢰지 못한 것을 다시 논한 箚子. 張希載의 일은 世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南九萬의 주장에 대해 중궁이 편안할 때 희빈과 세자도 편안할 것이라며 중궁을 폐할 때 그리고 복위된 뒤에 모해하려 했던 사람들은 처벌하여야 한다는 내용.
不參坤殿受炙問安待罪仍請開經筵箚 (19) 중전이 뜸 뜨는 데에 문안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일로 待罪하고 왕의 부스럼 증세도 나았으니 경연을 다시 열 것을 청한 차자.
請行海西大同法箚 (21) 海西에 大同法을 시행하기를 청하는 箚子. 해서는 국가의 近畿로 부역이 번다하고 모든 백성들이 원하고 있는데도 西北의 두 도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대동법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신의 需用이나 量田 문제도 이미 요량할 수 있고 戶曹 등에서도 이의가 없으니 시행하자는 내용.
不參誕日賀班待罪仍請解職歸養箚 (23) 병으로 誕日 賀禮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待罪하고 72세 노모에 대한 情理와 신병을 들어 직책을 면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 차자. 梁得中·朴振仁 등 1688년 經明行修로 추천되었으나 직을 제수받지 못한 사람과 함께 沈梯 등을 經明行修로‚ 李之老 등을 行義純固로 추천하는 내용.
論雷雹之災箚 (26) 우레와 우박의 재해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차자. 왕이 喜怒를 폭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재해에 一心으로 자신을 지켜 私意가 틈타지 않도록 恐惧修省하라는 내용.
辭扈駕時乘轎隨後箚 (29) 留都하라는 명을 받았다가 南九萬의 갑작스런 병으로 隨駕하되 교자를 타고 따르라는 명이 내리자 왕이 말 위에 앉아 가는데 신하로써 병이 있다고 하여 교자를 탈 수는 없다고 사양하는 내용의 차자.
陵所陳前日奉審事狀仍請隨便落後箚 (29) 恭陵과 順陵의 莎草를 보완하는 일에 대한 의견과 능소를 전날 봉심한 결과를 아뢰고 병세를 들어 편한 대로 뒤에 떨어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차자.
中路陳落後曲折箚 (30) 뒤를 따라 가던 중 통증이 일어 부득이 길 곁 村舍 溫突에서 조섭하다가 다시 冷幕에 나오면서 심해져서 중로에 낙후하게 되었다는 곡절을 아뢰는 차자.
敢申前席辭職之請兼陳失對曲折箚 (31) 경연에서 사직을 청한 것을 다시 아뢰고 1689년 權大運의 상소를 고찰해보고 그 내용이 오히려 承順했던 것임을 들어 경연에서 권대운에 대해 잘못 대답한 곡절을 아뢰는 차자.
受命修陵請仍省先墓箚 (33) 徽陵의 莎草를 改修하라는 명을 받고 辭朝하면서 능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선조들의 산소에 성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한 차자.
不參啓覆待罪箚 (34) 山陵의 일과 선조의 산소에 성묘하고 돌아와 復命하는데 급하여 神幾가 안정되지 않아 啓覆하는데 불참한 것을 待罪하는 차자.
請蠲坡州糴米仍陳淸白吏故事箚 (35) 恭陵에 幸行한 행차를 치른 파주 백성들의 糴米를 덜어줄 것‚ 李浚慶의 ≪東皐集≫ 등에 나오는 청백리 고사를 들어 廉謹과 淸白吏의 이름이 혼잡한 것을 실록을 고찰하여 바로잡을 것을 청한 차자.
不參世子誕日賀班待罪仍進萬言附錄箚 (39) 고질병으로 인해 徽陵을 봉심한 뒤 병이 도져 世子 誕日의 賀班에 불참한 것을 待罪하고 萬言疏 附錄을 올린 차자.
進稽古錄申請退歸箚一 (42) <稽古錄>을 올리면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다시 청하는 첫 번째 차자.
申請退歸箚二 (47) 병으로 일을 감당할 수 없고 늙은 모친도 병석에 있다며 물러나게 해주기를 다시 청하는 두 번째 차자.
申請退歸箚三 (48) 신병과 청나라 사신이 곧 올 것이라며 물러나게 해주기를 다시 청하는 두 번째 차자. 병사를 다스리고 尙武하여 孝宗의 뜻을 이으려고 하는 일보다는 천재지변으로 요동하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내용.
甲戌閏五月二十九日熙政堂引見 (1) 1694. 좌의정 직을 사양하다가 올라와 熙政堂에서 引見했을 때의 기록. 中殿의 복위 등 근래의 처분은 백성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鞫獄을 함께 조사하자는 남구만의 의논에 대해서 옥사의 본말과 시비를 알지 못하여 참여하기 어렵다고 아뢰는 내용.
六月二十一日熙政堂召對 (4) 熙政堂에서 召對하여 ≪綱目≫의 梁紀를 강했을 때의 기록. 宮闈와 상벌에 대해 논함. 張希載의 처벌을 둘러싼 大臣과 臺閣 사이의 갈등과 이로 인한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처리를 논함. 4조목의 차자의 뜻을 아뢰고 붕당의 경과와 폐해를 논함. 廢妃할 때 논쟁하다 귀양간 이들의 복직과 느슨하게 일을 처리하고 발언에 실수한 徐文重의 처벌을 주장.
七月十九日熙政堂請對 (13) 熙政堂에서 請對했을 때의 기록. 붕당을 경계하는 교서를 지어 올려 黨論의 근원과 경과를 아뢰고 편당을 없앨 것과‚ 張希載 등 中宮을 모해한 자들에 대한 臺諫들의 청을 따를 것을 주장함. 經明行修 등 인재 천거를 위한 절목을 논하고 林泳·申翼相·金昌協·李畬·丁時翰 등을 천거함.
七月二十三日熙政堂引見 (31) 熙政堂에서 大臣과 備局의 신하들을 함께 引見했을 때의 기록. 文殊山城을 감독할 신하의 교체‚ 비어있는 史官의 추천‚ 청백리의 선정 문제 등에 대해 의논함. 1688년 책자로 올렸던 내용을 備局에 내려 의논할 것을 청하고 그에 따라 거취를 결정할 것임을 아룀. 법전에 금령만 실려있고 敎化에 대한 조목이 없으니 鄕約을 敎令이라 이름짓고 해당 官司에 돌려 민간의 풍속이 무너지는 것을 막자고 청한 내용.
甲戌八月初七日宣政殿晝講 (1) 1694. 宣政殿에서 ≪大學衍義≫의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술에 대한 경계‚ 湯 盤銘의 교훈‚ 玉堂 관원에게 讀書堂의 법규를 따라 經學에 힘쓰도록 할 것‚ 올린 상소의 綱領과 條目 등을 구명할 책자를 올리는 일 등에 대한 내용.
八月初八日晝講 (5) ≪大學衍義≫ <湯之盤銘> 등에 대한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오랫동안 師儒의 장관이 없어 士習이 투박해졌으니 대사성 徐宗泰의 사직을 들어주지 말 것‚ 陵幸에 드는 비용을 견감할 것 등에 대한 내용.
十月初四日熙政堂晝講 (8) 熙政堂에서 ≪大學衍義≫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술에 대한 경계‚ 전에 올린 책자의 綱領과 조목을 진달하는 일‚ 內官 文撤의 일을 辨析한 일의 부당성‚ 任元耈의 상소에 대한 처리‚ 權大運의 석방 여부‚ 宋時烈을 논박하는 데 참여한 일로 귀양갔다가 母親喪을 당한 權瑎에 대한 처리 등에 대해 의논한 내용.
十月初八日熙政堂晝講 (20) 熙政堂에서 ≪大學衍義≫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社稷의 修改‚ 천둥과 번개와 같은 재이에 대한 실질적인 修省의 필요성‚ 淸白吏와 전쟁에 죽은 사람의 자손을 녹용하는 일‚ 書院의 疊設을 금지하는 일‚ 鄭濟先의 석방 문제 등에 대한 내용.
十月十三日熙政堂引見 (24) 熙政堂에서 大臣과 備局 신하에 대한 引見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尹趾完에 대한 비답‚ 天災와 異變에 대한 대책‚ 科擧 위주 인재 등용의 폐단‚ 淸白吏의 抄選‚ 徐文重·鄭載禧·金時傑 등의 등용 여부 등에 대한 내용.
十一月初七日熙政堂晝講 (30) 熙政堂에서 ≪大學衍義≫ <牧誓>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淸白吏와 廉謹吏의 선발에 관한 기록의 고증과 廉謹吏의 선발‚ 영의정의 체통을 상했다하여 파직된 申汝哲과 大臣을 논하였던 任元耈의 서용 등에 대한 문제와 차자와 그 부록에 대한 시행 여부를 왕이 裁量하여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
十一月初九日巳時晝講 (37) ≪大學衍義≫ 晝講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女色의 경계‚ 養心과 학문의 도리‚ ≪心經標題≫의 교정‚ 蔭仕 및 초야에 있는 사람으로 經學에 밝은 자를 경연에 출입하게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十一月初十日熙政堂啓覆 (41) 熙政堂 啓覆에 참여했을 때의 기록. 죄인 姜同의 推案에 대한 啓覆‚ 萬言疏의 실행 여부‚ <稽古錄>의 진달‚ 內需司와 舊宮家의 折受 혁파 여부 등에 대해 논의한 내용.
睦來善論罪議 (1) 1694. 睦來善의 죄를 정하기 위한 收議에 응해 아뢴 글. ‘不恭順’이란 어구는 奏文을 모방한 것이지만 ‘不恭’과 ‘不敬’은 목내선이 말을 만든 것이니 勘處해야 하지만‚ 대신의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결단하라는 先王들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는 내용.
恩津人弑主革邑罷守當否議 (1) 恩津 사람이 주인을 시해한 일로 고을을 혁파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일이 마땅한지를 묻는 수의에 답한 글. 형벌에서 綱常을 가장 앞에 둔 뜻을 헤아려 혁파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書啓 (2) 史官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서계. 神氣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상소하여 자신의 정성을 아뢰겠다는 내용.
再度宣諭疏批後書啓 (3) 상소에 비답을 내리며 宣諭한 뒤에 비상한 예우에 물의가 일어날까 한다며 질병과 허물로 나아갈 수도 상소를 올릴 수도 없어 어찌 답할지 모르겠다고 書啓한 내용.
拜左議政遣史官別諭後書啓 (3) 좌의정에 임명하고 史官을 보내 別諭한 뒤에 올린 서계. 사양하는 상소를 들어준 뒤 갑자기 새로운 명이 내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내용.
史官傳諭前疏批後書啓 (3) 史官이 전의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 올린 서계. 物議를 기다리고 있던 중 懃懇한 비답을 감당할 수 없고 병으로 인해 감히 무엇이라 대답할 바가 없다는 내용.
史官傳諭疏批後狀啓 (4) 史官이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하며 함께 올라오라는 명을 전한 뒤에 병세와 情勢를 들어 사양하고 신기가 안정된 뒤 다시 상소하겠다는 내용.
史官傳諭再疏批後狀啓 (4) 史官이 두 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하자 사례하고 병세를 들어 사양하는 내용.
史官觀病少間後狀啓 (5) 史官이 병세를 보고 난 뒤 올린 狀啓로 신병으로 인해 소명을 받기 어렵다는 내용.
史官傳諭三疏批後書啓 (6) 史官이 세 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서계. 비답에 사례하고 질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다며 待罪하는 내용.
再次史官新到後狀啓 (7) 함께 가자는 사관에게 질병으로 인해 먼저 돌아가게 한 뒤 다른 史官이 새로 도착한 뒤에 올린 장계로 설사로 인해 장도에 오를 수 없다는 내용.
史官狀啓回諭及四疏批傳諭後狀啓 (7) 史官이 狀啓에 대한 回諭 및 네 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 올린 장계로 설사와 더위로 인해 출발할 수 없다는 내용.
承旨六疏批傳諭後書啓 (8) 승지가 6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初志를 고수하려는 것은 아니며 상소의 말이 倫次가 없어 죄를 더했다고 대죄하는 내용.
承旨七疏批傳諭後書啓 (8) 승지가 7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번거롭게 한 것을 待罪하고 재주와 질병을 들어 사양하는 내용.
承旨八疏批傳諭後書啓 (9) 승지가 8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기력이 조금 나아지면 상소하여 아뢰겠다는 내용.
重臣九疏批傳諭後狀啓 (9) 重臣을 보내 9번째 상소에 대한 批答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大禮가 임박하였으니 하루 이틀 조섭한 뒤 장도에 오르겠다는 내용.
承旨別諭傳諭後書啓 (10) 승지가 別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鼎席이 비어 있으니 병세가 조금 덜하기를 기다려 대궐에 나아가겠다는 내용.
承旨再度別諭傳諭後書啓 (10) 승지가 재차 別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날이 밝기를 기다려 入對하겠다는 내용.
承旨別諭傳諭後書啓 (11) 승지가 別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영의정이 들어온 즈음에 조정에 또 하나의 일을 만들어 죄를 더했다며 차자를 올려 뜻을 아뢰겠다는 내용.
備忘記史官傳諭後書啓 (11) 史官이 備忘記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왕이 宣諭한 것과 御醫를 보내 간병하도록 한 것에 사례하고 병이 조금 나은 뒤 상소를 올리겠다는 내용.
承旨傳諭疏批後狀啓 (12) 승지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세와 老母와 떨어져 있는 사정 등을 아뢰는 내용.
承旨傳諭疏批後狀啓 (13) 승지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없고 承宣이 오래 머물러 고을에 폐가 되고 있다는 내용.
承旨傳諭疏批後狀啓 (13) 승지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傳諭한 뒤에 올린 狀啓로‚ 자신의 병세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내용.
承旨傳諭回諭後書啓 (14) 승지가 回諭를 傳諭한 뒤에 올린 書啓로‚ 병세와 정세 등을 아뢰는 내용.
承旨傳諭聖旨後狀啓 (15) 1695. 승지가 傳諭하고 함께 올라오라는 명을 들은 뒤 올린 장계.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자리에 展轉하면서 진퇴의 명을 기다린다는 내용.
答李同甫-喜朝 (1) 169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지가 10여 일이나 되었다며 조가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와 恩典에 옛 신하들을 생각한다는 내용.
答南領相-九萬 (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7년간이나 막혀 있다가 조정에 돌아온 것을 축하하고 坤宮을 복위하는 경사 뒤에 국가를 안정시키는 문제와 鞫獄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泳 (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중전이 威儀를 회복한 기쁨을 전하고 보여준 책자의 내용에 대해 고증한 내용.
答尹子仁-拯 (3) 尹拯에게 답한 편지. 坤宮이 復位된 경사 뒤의 거취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林德涵 (4) 林泳에게 답한 편지. 거취와 출처의 의리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李士亨-泰壽 (5)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 등이 문제를 느슨하게 처리하려는 것을 염려하는 내용.
答南相國 (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上變者의 정절이 남구만의 처분과 맞지 않는다며 大臣과 張希載를 가볍게 처분하는 것에 반대의 뜻을 피력하는 내용.
答柳悠久-尙運 (6)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금일의 상황은 明正한 듯하지만 窒礙가 많아 평생의 친구들이 나오기 어려워함이 1688년보다 심하다며 둘 다 가하다는 입장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吳貫之-道一 (7) 吳道一에게 답한 편지. 調劑에 유의하여 更化 이후의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내용.
答南相國 (7) 南九萬에게 다시 상소를 올릴 것이라고 전하는 편지.
別紙 (7)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감히 仰對할 것이 없고 특히 武將의 성명이나 형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은 없지만 勳戚에 편향되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
答南領相 (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출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염려한다는데 나아가기 어려운 일이 있어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려 한다는 내용.
別紙 (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로 金世翊 등을 장수의 망에 추천하는 내용.
答崔汝和-錫鼎 (8)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입장‚ 李貴의 章疏를 모아 간행할 때 최씨 일가가 배척받았다는 것에 대한 해명‚ 鄭齊斗와 陽明學에 대하여 問答한 일에 대한 내용.
答兪寧叔-得一 (10)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 거취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別紙 (11) 兪得一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顯宗이 온천에 幸行했을 때 宋時烈이 체직해주지 않으면 감히 나아갈 수 없다고 하여 체직된 뒤 서울에 도착하여 몇 달간 있었던 일을 들어 자신의 출처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金士直-楺 (12) 金楺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御營大將의 추천 문제 등 將薦에 참여한 경위를 밝힌 내용.
答李同甫 (12)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송시열이 온천에 도착하여 직책을 면한 뒤 隨駕한 일을 들어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趙德而-大壽 (13) 趙大壽에게 답한 편지. 1683년과 1688년의 상황과 비교하며 자신의 거취 문제와 금일의 時事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具濟伯-時經 (14) 具時經에게 답한 편지. 世道의 책임으로 권면한 것에 사례하고 현재의 시세가 밖으로는 明正하지만 안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며 조정의 의논과 士習에 대해 염려하는 내용.
答文明仲 (14) 文後開에게 답한 편지. 自重은 儒者의 것이지 출사하려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며 更化 뒤 鼎席이 비어있는 상황에서 儒家의 출처는 군신의 대의를 폐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15)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冊禮의 習儀를 위해 入城한 것을 치하하고 죄수의 국문은 坤殿의 寃을 伸雪하는 문제와 公論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柳悠久 (16)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나랏일이 크게 무너져 구제할 대책이 없다며 나아가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돌아가 自靖할 것이고 머물 곳은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는 내용.
答李廈卿-橝 (17) 李橝에게 답한 편지. 斯文을 변무하겠다는 것에 대해 상대를 공격하는 일은 無益할 것이라고 만류하는 내용.
答宋道深-光淵 (17) 宋光淵에게 답한 편지. 나아가 다시 청하려는데 어떤 처분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尹子仁 (18) 尹拯에게 답한 편지. 조정에 정승자리가 모두 비고 국사가 와해될 상황이어서 4가지의 차자를 올리고 朋黨에 대한 조목을 頒示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거취를 전하는 내용.
別紙 (19) 尹拯에게 답한 편지 別紙. 朋黨을 없애고 협동한 뒤 兵事를 다스리려는 상소의 의도를 전함. 그 외 閔鼎重과 金壽恒 신원 문제‚ 윤증을 천거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내용.
與南相國 (20)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軍國의 機務를 재결하여야 할 상황 등을 들어 儒生의 상소에 구애되지 말고 나올 것을 청하는 내용.
答李廈卿 (21) 李橝에게 답한 편지. 왕이 아뢴 것을 들어주었지만 영의정도 儒疏와 物議로 인해 자리가 불안하여 보합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어서 조만간 물러날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2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儒生의 상소에 구애되어 조정에서 떠난 것은 잘못이니 왕의 걱정과 國勢의 위기 등을 헤아려 조정에 나아오라는 내용.
答李生命鼎 (22) 李命鼎에게 답한 편지. 편지로 질문해 온 국가의 大事 3가지 일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答林德涵 (23) 林泳에게 답한 편지. 임영의 병세에 대한 염려와 大獄이 아직 정돈되지 않아 物情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을 전하고 영의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24)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30여 년간의 교분‚ 1683년 함께 입조한 일‚ 1688년 귀양간 일‚ 함께 大任을 맡은 것 등을 들어 조정에 나올 것이라는 소식에 반가움을 전하는 내용.
答南相國 (2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안부와 거취를 전하는 내용.
答林德涵 (26) 林泳에게 답한 편지. 임영의 병세와 병에 대한 치료‚ 鞫獄의 감쇄‚ 張希載의 일에 公案이 마련되고 교서가 반포되면 돌아갈 것이라는 거취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 (27)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보여준 글에서 朋舊라는 구절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與南相國 (2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東萊 사건에서 세공을 실어보내는 일‚ 文殊山城에 대한 일‚ 謁聖初試에 관한 일 등에 대해 정승들간의 의견을 조정하는 내용.
與李君輔-世弼 (28)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근교에 있다가 立朝하여 4가지 차자를 올린 뒤에 왕을 만나 영의정을 불러올 것을 청한 것 외에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었다는 내용.
答南相國 (28)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東萊 사건과 文殊山城에 대한 일‚ 初試에서의 폐단을 막는 일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힘.
與南相國 (29)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頒示할 문자를 만들어 올릴 것인데 이 일이 政府에 내려져 견제당할 것을 염려하여 보내니 보아달라는 내용.
與鄭眞卿-尙樸 (29) 鄭尙樸에게 보낸 편지. 경연에서 萬言疏를 廟堂에 내려 논의해줄 것을 청한 일‚ 대동과 均役 및 量田에 대한 의견이 아직 결정되지 않고 있는 것‚ 선비를 가르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與南相國 (29)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經行之士를 議薦하기 위한 절목‚ 弘文錄과 都堂錄을 정하는 일‚ 兪得一을 擬望하는 일에 대한 내용.
答朴大叔-鐔 (30) 朴鐔에게 답한 편지. 편지에 사례하고 자신의 거취에 대해 전하는 내용.
與崔汝和 (1) 1694.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 經筵에서 經行으로 선비를 선발하기를 청하여 廟堂에 稟處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酌定하였는지 그 경과를 묻는 내용.
與柳悠久 (1) 1694.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서용하기로 한 사람을 淸望에 擬望하는 문제와 弘文錄과 都堂錄 천거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士亨 (1)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成均館의 節目 撰出에 대한 廟堂과의 異見 조정‚ 과거의 폐단을 진언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與李同甫 (2)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출처 문제를 의논하고 大目에 經行으로 천거할 만한 이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추천해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
答李君輔 (2)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 모든 사람들이 나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데도 賀禮에 참여하겠다며 조정에 나온 것을 해명하고 자신이 올린 상소의 시행 여부에 대한 결정을 기다려 거취를 정하겠다는 내용.
別紙 (3) 李世弼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李徵明 通淸 문제로 인한 訛言에 대한 염려를 전하고 經明行修를 천거하는 일의 경과를 설명함. 또한 儒士를 높이는 풍조가 쇠하였음을 아쉬워하는 내용.
答申子平 (4) 申懹에게 답한 편지. 鬱陵島의 일에 대해 榻前에서 領相과 다투며 힘을 다했지만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음을 전하는 내용.
答南相國 (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왕이 8월 6일 경연 중에 자신의 萬言疏를 備局에 내렸으니 이제 남구만이 처리하기에 달려 있어 자신은 처분을 기다릴 뿐이라고 전하고 천거 문제에 대한 吳道一의 상소에 回啓하는 일로 인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편지.
答鄭眞卿 (6) 鄭尙樸에게 답한 편지. 筵中의 啓辭로 인하여 야기될지도 모를 화에 대하여 염려함. 量田과 大同 문제‚ ≪警民編≫과 ≪擊蒙要訣≫ 등으로 선비를 가르치는 문제‚ 考講 문제 등에 적절하게 대처한 것을 격려하는 내용.
與南相國 (6)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삼사 관원의 擬望‚ 廉謹의 선발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묻고 상의하는 내용.
與鄭眞卿 (7) 鄭尙樸에게 보낸 편지. 선비를 추천할 때 沈梯와 高益謙을 천거할 것과 量田 등의 문제에 대하여 善處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尹子仁 (7) 入朝한 뒤 자신의 거취를 밝히고 布衣로 소견하겠다는 尹拯에게 常理와 正法에 따르기를 권하는 편지.
答林德涵 (8) 林泳에게 자신의 안부와 거취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陵幸 뒤 다시 歸養을 청할 것이라며 고립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時勢와 자신과 어머니의 건강과 안부를 염려하는 내용.
答金象卿-夢臣 (9) 金夢臣에게 답한 편지. 御駕에 낙후한 뒤 高陽에 머물며 물러나겠다고 청한 자신의 거취를 전하고‚ 松都에서 ≪警民篇≫·≪擊蒙要訣≫·≪小學≫·≪家禮≫ 등을 遵用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선비의 천거‚ 量田 문제를 善處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南相國 (9)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병세와 거취에 대해 전하고 鬱陵島의 일로 인하여 東萊에 보낸 狀本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申公獻 (10) 申琓에게 답한 편지. 과거 합격자의 出榜‚ 社稷署의 修改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賜額 문제로 올라 온 載寧의 院生들을 잘 헤아려 善處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南相國 (10)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金吾의 鞫獄이 끝난 것을 축하함. 訓鍊大將 申汝哲의 파직을 청한 일에 대해 신여철 같은 오래된 장수를 한 가지 실수 때문에 파직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밝히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할 것을 당부함.
答南相國 (1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체통을 들어 訓將을 파직하라고 아뢴 일의 잘못을 지적함. 廉謹의 선발에 대해 吏曹와 李浚慶의 기록이 다르다면 실록의 기록을 참작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林德涵 (12) 林泳의 병을 염려하여 서울에 와서 의약의 힘을 얻어 보기를 바란다고 답한 편지. 更化 뒤에 조정에 나아갔으나 뜻을 행하지 못하고 陵幸에서 回鑾할 때 歸省한 자신의 거취를 전하는 내용.
別紙 (13) 林泳에게 1689년의 일에 대한 옥사의 처리과정과 이를 둘러싼 노소 갈등의 경과를 전하는 편지. 남구만·尹趾完 등이 張希載를 구원하고 禧嬪을 예우하려 해서 궁중의 시비가 바르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내용.
與李子三-畬 (15) 李畬에게 보낸 편지. 廟堂에 부친 萬言疏가 행해지면 소명에 응할 것이라는 내용과 金昌協·이여·林泳·趙相愚 등 함께 도와줄 인물들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
答申公獻 (16) 申琓에게 답한 편지. 社稷의 神室을 중건할 날짜‚ 중건에 쓸 재목‚ 중건을 담당할 都提調의 차출 등에 대해 의논한 내용.
與崔汝和 (16)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 萬言疏를 올린 뒤 조정의 재결을 기다려 출처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柳悠久 (17)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除目 중에 儒士를 별도로 천거하지 못했다는 외방의 비판 속에서도 천거를 기다리지 않고 마감해버린 잘못을 지적하고 영상과 함께 다시 의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南相國 (1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朴紹를 추장하는 일로 왕에게 아뢴 내용 중 ‘相垺’라는 표현과 ‘以爲定論’이란 구절에 대해 嶺南 士論의 비판도 있으니 조만간 고쳐 달라는 내용.
與申子平 (18) 申懹에게 보낸 편지. 신숭겸의 덕이 탁월하므로 申崇謙 祠宇의 일은 후손이라도 도와주어도 무방할 것이라는 내용.
與柳悠久 (18) 청렴한 이를 의논하여 뽑는 일에 대해 柳尙運과 상의하는 편지. 청렴한 이를 뽑는 일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與南相國 (18)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廉謹한 이를 가리는 일에 한 두 사람을 더 보태고 싶다는 의견을 전하고 선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의논하는 내용.
答金叔涵 (19)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萬言疏를 올렸는데 경연에서 다시 抄錄하여 왕의 재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그 쓰임 여부에 따라 진퇴를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20) 尹拯에 대해 답한 편지. 靈光에 있는 사당에 姜沆 외에 宋時烈과 尹宣擧를 함께 배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내용.
答南相國 (21)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林泳 등의 거취와 申汝哲의 파직으로 인한 物情의 불안 등 인사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崔說書-啓翁 (21) 崔啓翁에게 답한 편지. 4월에서 8월까지 大片紙로 문틈을 견고하게 붙여 大成殿에 박쥐가 드나드는 것을 막으라는 내용.
答金象卿 (22) 金夢臣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안부와 去就를 전하고 量田하는 일과 선비를 가르치는 일 등 백성을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南相國 (22)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두 해 동안 陵役을 겪은 파주 사람들을 위해 坡州 玄花倉에 대한 조처‚ 파주 糴穀을 移減하는 일 등을 金浦 등의 예에 따라 헤아려 주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李士亨 (23)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자신이 올린 상소의 근본을 附錄으로 다시 올려 쓰이던 쓰이지 않던 자세히 알리려고 하는데 상소문의 완성이 늦어지고 있다는 내용.
與宋玉汝-相琦 (24) 宋相琦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말로 인해 돌아갈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닌가 염려하고 해명하는 내용.
與任大年-元耈 (24) 任元耈에게 보낸 편지. 金榦 등과 萬言疏의 附錄을 수집하여 베끼는데 지체되고 있음을 알리고 禁制의 수정‚ 敎令의 첨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朴喬伯-泰漢 (24) 朴泰漢에게 답한 편지. 侵虐하는 습관은 李珥도 선조 때 禁制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것으로 이 시점에 침학 문제를 논하는 것은 文士와 儒士의 기롱을 받을 뿐이라는 내용.
答泰初姪 (25) 朴泰初에게 1683년 이후 萬言疏를 올린 경위와 상소 후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전하는 편지. 廟堂에서 함께 일하자고 불러 놓고 함께 일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
與柳鳳瑞 (26) 柳鳳瑞에게 보낸 편지. 朴紹의 諡號를 청하는 글에서 ‘相垺’라는 것과 ‘以爲定論’이란 글자가 과중하여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아직도 고쳐주지 않은 것에 대해 그 경위를 상세히 물어 답해주기를 청하는 내용.
與李子三 (27) 李畬에게 보낸 편지. 어제 경연에서 상소를 채용하겠다는 말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 또한 유생들의 상소 草本을 李畬가 就正해 주었다고 하는 趙尙迪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묻는 내용.
與尹子仁 (27) 尹拯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상소에 대해 議處를 기다리고 있으니 거취의 결정이 이 달을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용.
答閔彦暉-以升 (27) 閔以升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어가를 陪從하지 못하여 待罪하다가 상소를 올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承宣이 계N속 오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兪大叔-集一 (28) 兪集一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이미 出場하였으나 客使가 와서 부득불 歸養하겠다고 청해 놓았다는 내용.
答許夏昌 (28) 許에게 답한 편지. 상소에서 出場할 뜻을 비추면서 한편으로는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해명함. 또한 北郊에 築城하는 일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大成-畬 (29) 遺訓 때문에 새로 제수된 명을 사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李畬에게 출처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가정만 중하게 여기지 말고 잘 헤아려 처리하라는 내용.
與宋玉汝 (29) 宋相琦에게 보낸 편지. 전 날 경연 중에 올린 ≪心學至訣≫이 玉堂에 있을 것이니 잘못된 글자 등을 校正하여 하나는 베껴 두고 하나는 다시 올릴 수 있도록 청하라는 내용.
與李大成 (29) 李畬에게 보낸 편지. 殿試에서 조차 말이 과격했던 일‚ 과거장에서 시험을 보면서 으레 이야기하는 풍조 등 科擧의 事體가 잘못되어 가는 것과 조정의 의논이 어그러진 것을 개탄하는 내용.
與南相國 (30) 南九萬에게 儒生의 상소와 憲府의 啓 등이 갑자기 나왔지만 왕이 이미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사직할만한 근거가 없다고 만류하는 편지. 그 외 충청과 황해 지역 도적 토벌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士亨 (31) 李泰壽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답한 편지. 상소에서 청한 內需 및 政府에 대한 일은 영의정과 왕이 모두 행하기 어렵다고 하니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聖學의 大體를 기록한 <稽古錄>을 올린 뒤에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31)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憲府의 啓에 대해서는 왕이 批旨로 밝혔고 유생들의 상소 문구에도 남구만이 사직해야 할 만한 내용은 없으니 잘 헤아려 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
答李大成 (32) 李畬에게 보낸 편지. 時事의 궤멸이 분명한 가운데 入朝하였으니 경연과 備局의 의논을 조화하는데 힘을 기울이라는 내용.
答泰尙姪 (32) 朴泰尙에게 답한 편지. 돌아가기로 했으나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히고 朴誾의 묘비를 새로 세우는 일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答金士肯-構 (33) 안부와 출처 문제에 대해 金構에게 답한 편지.
答金士直 (33) 金楺에게 갑자기 酷寒을 만난 것을 위로하고 상소에서 청나라 사신 문제를 거론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與南相國 (33)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처리‚ 청나라 사신으로 인한 자신의 거취‚ <稽古錄>을 올린 일 등에 대한 내용.
答宋道深 (35) 宋光淵에게 답한 편지. 낙후된 죄는 용서받았지만 상소에 대해 廟堂에서 행하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돌아가려는데 承宣이 따라와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
答宋玉汝 (35) 宋相琦에게 답한 편지. 사신의 牌文이 오기 전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반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경연 등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經筵故事>와 <稽古錄>을 올리는 내용.
答柳悠久 (37)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객과 對坐할 수도 없다고 전하고 權衡을 잡고 있으니 사대부의 廉恥와 名節을 진작하여 천명하는데 힘쓰라는 내용.
答南相國 (37)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承宣과 함께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움직일 수 없다며 承政院에 머물러 있는 상소의 輕重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염려하는 내용.
答尹相國-趾完 (38) 尹趾完에게 답한 편지. 통증이 추위로 심해져서 상소를 남겨두고 돌아왔는데 承宣이 뒤따라와 황공하다는 내용.
答黃周卿-世楨 (38) 黃世楨에게 답한 편지. 돌아온 뒤의 안부를 전하고 宋時烈이 자신에게 世道를 담당할 것으로 보았다는 말과 조정에 나아간 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李季通-潗 (40) 李潗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이 조정에 들어 온 뒤 돌아왔는데 酷寒 속에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 曺家의 疑禮에 대한 의견을 밝힌 내용.
與李伯祥-徵明 (40) 李徵明에게 보낸 편지. 登對하겠다며 承宣의 소환을 청한 일의 윤허 여부 등 자신의 거취에 대한 내용.
與李君輔 (41)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封事를 올린 뒤 받아들이지 않아 내려 온 뒤 趙相愚와 徐宗泰 등이 명을 받고 내려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내용.
答李汝晦-德明 (42) 李德明에게 답한 편지. 坤聖을 변무한다며 영의정을 공격하고 韓重赫을 신원하려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입장‚ 능행을 겪은 다른 곳처럼 坡州의 糴穀을 감하는 일 등에 대한 내용.
答趙子直-相愚 (43) 趙相愚에게 답한 편지. 상소를 올렸지만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헤아리고 있다며 질병과 정세를 들어 필경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
答南相國 (44)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허리와 다리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다시 사양하는 글을 올렸다는 것과 <稽古錄>을 왕에게 올렸다는 것을 전하는 내용.
別紙 (44) 청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의 출처 문제 등에 대해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別紙.
答李同甫 (45)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승지가 계속 내려오고 召還한다는 批旨를 받은 상황에서의 출처 문제와 일할 만한 단서가 마련되지 않고 있는 시세에 대한 내용.
答林德涵 (45) 자신의 출처 문제에 대해 林泳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이 물러나 있지만 廟堂과 왕이 자신이 올린 상소를 실행할 의지가 없으니 물러나 講學하겠다는 내용.
與柳悠久 (46)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 遞職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전하고 都目政에서 새로 천거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答沈善長-元浚 (47) 沈元浚에게 답한 편지. 자신의 萬言疏가 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들이 있지만 衆論을 따라 만언소를 채용한다면 국가와 世道를 위한 일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내용.
答李同甫 (1) 1694. 李喜朝에게 답한 편지. 영의정과 조화하여 國事를 함께 하고 싶지만 모두 尹拯을 천거하지 않은 잘못을 지적하고 臺省에서도 宋時烈이 賢邪를 분변하던 면모를 좇지 않는 잘못을 말하니 皇極을 주로 하여 好惡를 밝히려는 자신의 의견과는 맞지 않는다는 내용.
與徐君望-宗泰 (2) 徐宗泰에게 보낸 편지. 문묘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의 시호에 ‘道德博文’의 ‘文’字를 쓰지 않는다는 견해를 비판하고 朴淳의 비문과 宋時烈의 諡狀으로 보아 朴紹에게 이러한 시호를 내린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해명하는 내용.
答權致道-尙夏 (3) 權尙夏에게 답한 편지. 경연에서 儒士 및 蔭官 중 학식이 있는 자를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사람 속에 뽑혔을 것이라고 전하는 내용.
答宋玉汝 (3) 宋相琦에게 거취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힌 편지. 忠原에 수령으로 나가게 된 것은 부모를 봉양하는데는 편하겠지만 조정에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
與南相國 (4)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 남구만과 자신의 안부 및 거취를 논하고 사신으로 인해 海西 量田을 명년으로 미루는 것과 關東의 改量을 실행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南相國 (5)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海西 방백이 먼저 10고을을 量田하기로 했다가 연기되고 방백이 임기만료로 돌아오게 되어 자신이 청한 大同과 양전이 虛套로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한 내용.
別紙 (6) 南九萬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 盧以益과 尹夏濟 옥사의 경위‚ 옥사의 처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關北伯-權是經 (7) 權是經에 답한 편지. 서울에 있는 동안 한 가지도 시행되지 않고 黃海道 大同마저 다시 거론하기 어렵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嶺西의 兵營 설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關東伯-申懷 (7) 申懷에게 답한 편지. 6품에 추천하는 일로 文東道와 梁得中이 각각 曺植의 풍과 司馬遷의 ≪史記≫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지적하고 朴泰初·金榦·李箕疇·朴鐔 등을 추천하는 내용.
答柳悠久 (8) 柳尙運에게 답한 편지. 學術로 추천할 때 文東道는 曺植의 풍이 있고 梁得中은 司馬遷의 ≪史記≫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正學에 방해가 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朴泰初·金榦·李箕疇·朴鐔 등을 추천하는 내용.
與尹子仁 (8) 尹拯에게 보낸 편지. 李珥의 ≪栗谷別集≫의 勘定 작업이 지연된 경위‚ 金集의 ≪疑解續≫이 도착했는데 자세히 볼 틈이 없다는 것‚ 宋時烈의 遺藁의 지연 등에 대한 내용.
別紙 (9) 尹拯에게 보낸 편지. 遯巖書院에 父子師弟를 同享하는 것의 부당성‚ 윤증을 천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명.
與尹大憲子敬-榗 (10) 尹榗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소환을 청하는 啓를 중지해주기를 요청함.
答南相國 (11) 1695. 새로 卜相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청나라 사신 소식 등 時事와 병으로 보아 자신은 다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등을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與泰初姪 (12)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청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 다시 올라가라는 의견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萬言疏에 대해 廟堂이 행하기 어렵다 하고 왕도 發落하지 않고 있어 실행이 어려워지고 老少의 싸움은 극에 달한 상황에서의 거취에 대해 상의함.
與金直卿-榦 (12) 金榦에게 보낸 편지. 사신 응접에는 따로 마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行公하는데 급급하지 말라는 의견을 밝히고 李喜朝와 李世弼 등의 출처 문제에 대해서 논한 내용.
與柳相國 (13) 柳尙運에게 보낸 편지. 다른 사람의 여론에도 부응하는 것이라며 새로 정승으로 임명된 것을 축하함.
答李汝九-箕洪 (13) 李箕洪에게 답한 편지. 大政에 새로 제수되었다는 소식에 儒者의 출처는 隱遁하는 것과는 달라 지위와 才分에 따라 君臣의 의리를 다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힘.
答南相國 (14) 南九萬에게 답한 편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한 수고를 위로하고 자신은 巡撫使 절목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없음을 밝힘.
答尹子仁 (15) 1692. 尹拯에게 ≪栗谷別集≫ 중 入山에 관계된 구절과 ≪爲學之方≫ 중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을 고칠 것이니 뒤에 다시 봐줄 것을 청한다고 답한 편지.
別紙 (16)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趙翼의 ≪浦渚遺書≫의 내용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어 발문 쓰기를 사양하고 십수 책만 인쇄하여 자손과 학우들에게만 보내기를 권했는데 趙持恒이 尹拯에게 의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是非 문제는 자신이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大學≫과 ≪中庸≫의 抄刪에 長篇의 統論이 많아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尹子仁 (17) 尹拯에게 답한 편지. 家叔의 喪을 겪은 뒤의 안부를 전하고 趙翼에 대한 文字 기술 문제‚ <爲學標錄>의 標題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尹子仁別紙 (17) 尹拯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成守琛에게 長房과 祠堂을 건립하려는 논의에 대해 經禮에 따라 조천하는 것만이 비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힘.
答尹子仁 (19) 尹拯에게 답한 편지. 樓院의 장례에 모였을 때 토론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閔以升의 편지를 통해 들은 ≪源流≫ 校正의 곡절‚ 成守琛 祧遷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묻는 내용.
答尹子仁 (20) 1693. 尹拯에게 답한 편지. 墓祭의 준거‚ 南溪精舍의 편액‚ ≪源流≫의 곡절‚ 坡山의 祧遷‚ 분실한 ≪栗谷外集≫의 再送‚ 文士의 習氣가 있는 ≪十三經注疏≫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崔錫鼎과 왕복한 格致說에 모두 문제가 있는 李世龜의 학문에 대한 염려 등.
與尹子仁 (21) 1695. 尹拯에게 보낸 편지. 金榦과 梁處濟 등의 도움을 받아 교정한 金集의 ≪疑禮問解續≫ 1책을 보내니 첨가하거나 刪定하여 보낼 것과 정승이 된 뒤의 호칭에 대한 내용.
答崔汝和 (22) 1692.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閔以升에 답하는 편지에 보인 ‘微文ꝯ節’이라는 구절에 대해 三年喪紀에 朱子의 定論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내용.
答崔汝和 (23)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친구들의 부고가 이어지는 것에 대한 감회‚ 妾母에 대한 복제 문제‚ ≪東儒師友錄≫에 도움이 될 근래의 文集과 개인 기록 등을 빌려 줄 것 등의 내용.
答崔汝和 (23) 1694. 崔錫鼎에게 답한 편지. ‘朝夕의 哭을 파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한 견해와 부친의 遺命을 고려하여 마음에 편안한 대로 행하라는 내용.
答崔文叔-奎瑞 (24) 1693. 崔奎瑞에게 답한 편지. 성안에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벼슬이 없었던 것을 위로하고 최규서의 형이 金集의 말을 기록해놓은 遺草를 보여 달라는 내용.
別紙 (24) 崔奎瑞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병약한 자신의 아들 대신 형수가 大宗을 이을 후사를 먼 곳에서 구해 온 일의 타당성 여부 등 立後 문제에 대한 물음에 의견을 밝힘.
答林德涵 (25) 1692. 林泳에게 답한 편지. 집 안팎의 계속되는 우환‚ 큰 가뭄 속의 農情에 대한 염려‚ ≪經書講疑≫의 진행 상황‚ ≪小學≫ 공부를 소홀히 하는 학문 태도에 대한 비판 등.
與林德涵 (27) 林泳에게 보낸 편지. 흉년으로 인해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는 海西 등의 상황‚ 延白에서의 講學 활동에 대해 전하고 門人들의 안부와 학문활동에 대해 묻는 내용.
答林德涵別紙 (28) 1693.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데 주력하다 禪에 들어가게 될 것을 염려하고 鄭齊斗의 陽明學‚ 崔錫鼎과 李世龜의 格致에 대한 訓義 등을 비판하는 내용.
答林德涵 (29) 林泳에게 답한 편지. ≪栗谷別集≫ 및 ≪年譜後本≫ 중 이이의 入山 문제에 대한 尹拯의 편지에 송시열이 분노한 일‚ 羅州 유생들이 세운 朴尙衷 祠堂의 移安 문제 등에 대한 내용.
別紙 (31) ≪大學≫의 輯註에 나오는 絜矩의 의리 및 喪 중의 昏禮에 대해 林泳에게 답한 편지 別紙.
答林德涵 (32) 林泳에게 답한 편지. 경서에 대한 작업 중인데 李喜朝와 金楺의 도움을 받기 어렵게 되었다. ≪南華經≫을 본다는 소문에 대해 경계하고‚ 師友 門人들의 동향과 안부를 묻는 내용.
與林德涵 (34) 1694. 林泳에게 병을 생각하여 응접을 삼갈 것을 당부하고 兪正重과 愼爾定 등의 유명한 의원을 소개함. 또한 약을 잘 헤아려 먹을 것을 부탁하는 편지.
答沈聖可-權 (35) 1693. 沈權에게 여러 일들과 행적이 뒤섞여 부탁받은 비문이 늦어졌음을 전하고 유배 중에 사당을 받드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任大年 (35) 任元耈에게 답한 편지. 張拭의 ≪洙泗言仁≫‚ 朱熹의 ≪儀禮經傳≫‚ ≪樂經≫이 완성되지 못하거나 인멸된 것이 아쉬워 ≪文獻通考≫ 등에 실린 律呂의 기록을 모았으니 자세히 살펴달라는 내용.
答趙汝常-持恒 (37) 1692. 趙持恒에게 답한 편지. 趙翼의 문집 중 遺書에 朱子에 未安한 곳이 있으니 십수 권만 인쇄하여 자손 및 친구와 학문하는 이만 소장하게 하라는 의견을 다시 한 번 밝힌 내용.
答李壽翁-世龜 (37) 1693. 李世龜에게 답한 편지. 尹拯에게 장차 ≪十三經注疏≫에 힘쓰겠다고 한 말을 듣고 文士들이 博學하는 데 힘쓰는 폐해를 지적함.
與權致道 (38) 1692. 權尙夏에게 보낸 편지. 宋時烈 遺文의 편찬을 맡고있던 宋疇錫의 죽음으로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자료를 수습하는 것이 정돈하는 것보다 중요할 것이라는 내용.
與李君輔 (39) 李世弼에게 보낸 편지. 鄭齊斗를 찾아보았는지 물음. ≪栗谷別集≫과 ≪東儒師友錄≫의 首尾가 고르지 못한 폐단을 바로잡고 崔永慶이나 金宇顒‚ 柳成龍 등을 내려 쓴 곡절을 설명하여 빠뜨리지 말 것 등을 당부함.
答梁季通-處濟 (40) 梁處濟에게 姜翼의 碣文에 대해 상의하는 편지.
與梁季通 (40) 1694. 梁處濟에게 보낸 편지. 文東道에 대한 평가의 애매함을 지적하고 金集의 ≪疑禮問解續≫을 편집한 것이 집에 없다며 찾는 내용.
答成汝望-世柱 (40) 1692. 成世柱에게 답한 편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모친상에 연이어 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의 主喪을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喪祭禮에 대한 내용.
答申參奉-銓 (41) 申銓에게 답한 편지. 喪으로 인해 禫祭할 달에 미루어진 大祥을 행했을 때 담제도 함께 행할 것인지와 담제를 행하지 않고 大祥만 할 때의 복색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내용.
答朴晦叔-銑 (42) 1693. 朴銑에게 답한 편지. 여러 번 찾아왔는데도 강학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출처와 거취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朴喬伯 (42) 朴泰漢에게 답한 편지. 학문하는 데 自得하기를 힘쓰고 士友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異端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며 경계하는 내용.
答李子望東耈 (43) 1692. 李東耈에게 답한 편지. 安分樂命하라는 말 등을 유념하겠다며 잘못을 스스로 줄이려고 하나 잘 되지 않아 근심이라는 내용.
答高益之-益謙 (43) 1693. 高益謙에게 답한 편지. 경내에 학문에 뜻을 둔 자가 7-8명이나 되는 것을 축하하고 언행이 儒林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고 학문에 더욱 유념하라는 내용.
答金直卿 (1) 1692. 金榦에게 답한 편지. 家禮에 대한 질문에 別幅으로 답했다는 것‚ 李世弼·李世龜·崔錫鼎과 窮止의 竝用 문제로 토론한 것‚ 成世柱가 서신을 보낸 일 등에 대한 내용.
答金直卿 (1) 金榦에게 답한 편지. 복제설에 대한 의견과 開元禮에 근거한 ≪家禮≫를 하나의 제도로 삼고 經傳의 註疏를 쓰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견을 밝힘.
答金直卿 (2) 1693. 金榦에게 답한 편지. 수십 일간 講學도 않고 책 하나도 參證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개탄하는 내용.
答金直卿 (2) 1694. 金榦에게 답한 편지. 예설로 閔以升·李世弼 등이 잇따라 움직이며 갈등을 일으키게 한 것을 질책하고 임지에서 알아서 하도록 버려두라고 답한 내용.
答金直卿 (3) 金榦에게 답한 편지. 遺模를 자세히 교정해준 노고를 치하하되 근래 사우들간의 토론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염려하는 내용.
與李同甫兄弟 (4) 1693. 李喜朝 형제에게 보낸 편지. 歷代史와 ≪讀詩要義≫의 진행 상황을 전하고‚ ≪考亭淵源≫과 經書에 나오는 先儒 姓氏의 완성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
與金士直 (5) 金楺에게 보낸 편지. ≪讀詩要義≫ 완성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면서 ≪讀詩要義≫를 편찬하는 의의와 경과에 대해 설명함.
答閔彦暉 (7)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禮輯≫의 두 가지 조목‚ ≪栗谷年譜≫‚ <太極問答>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疑輯≫ 兩本 및 ≪通典禮說≫의 소재를 찾는 내용.
答閔彦暉 (8) 1694. 중전의 복위를 기뻐하고 贊成에 임명된 뒤의 進退 등에 대해 閔以升에게 답한 편지.
答沈明仲-世熙 (8) 1693. 沈世熙에게 답한 편지. 宋時烈에 대한 평가와 송시열과의 관계를 해명함. 師友들이 교제하는 도리‚ 심세희 어머니 狀文을 찬하는 일에 대한 내용.
答崔士重-世進 (10) 1692. 崔世進에게 답한 편지. ≪二書要解≫를 보냈다며 海州 선비들이 핑계하며 학문에 나오지 않는 데에 대한 염려와 과거 응시의 폐단을 지적하고 崔瑞吉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
答朴大叔 (12) 1694. 朴鐔에게 답한 편지. 평소 바른 말로 규계하던 이로는 李之濂이 있었는데 이제 책려해 줄 사람이 없다며 士友간의 관계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申列卿-佾 (13) 1693. 申佾에게 답한 편지. 院宇의 修改를 축하함. ≪要訣≫을 중심으로 삼아 持身讀書에 힘을 다할 것과 ≪小學≫·≪大學或問≫에 침잠할 것을 권하고 <要訣爲學圖>를 보내니 참고하라는 내용.
答金錫文 (14) 金錫文에게 답한 편지. 배운 바가 俗儒와 다르다고 칭송하고 이사한 뒤 소식을 듣지 못하다 族子가 수령이 되어 찾아 뵌 것을 계기로 소식을 전하니 답을 달라는 내용.
答李夏卿-熙夏 (15) 李熙夏에게 답한 편지. 마음을 안정시키고 조용히 생각하여 일체의 쓸데없는 일을 제거하고 오로지 정밀하게 구하면 될 것이라는 내용.
答申雲卿-漢立 (16) 1694. 申漢立에게 답한 편지. 九容九思의 요목과 實體를 힘써 행하고 근본을 세워 ≪大學≫에 나아가겠다는 학문의 자세를 격려하고 講目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알려주겠다는 내용.
答李生益材 (17) 李益材에게 답한 편지. 祠宇에 告祝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洪昌平-禹錫-別紙 (17) 洪禹錫에게 답한 편지 別紙. 平澤의 院宇에 享祀할 인물에 대해 의견을 밝힘.
與朴一和-尙淳 (18) 1692. 朴尙淳에게 보낸 편지. 3년 동안의 안부를 묻고 은거하는 중에도 학문에 마음을 두기를 권하고 先王府의 지문을 새기는 일 등에 대해 의논함.
答金叔涵 (18)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 중외의 동지들이 서거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감회를 전하고 ≪朱子大全≫ 書札의 答問 考正을 李萬挺에게 부탁했다는 것을 알림.
答金叔涵別紙 (19) 1694. 金載海에게 답한 편지의 別紙. 3세 이하에 거두어 기른 養父母에 대한 복제 문제에 대해 고증함.
答趙德叟-泰耈 (21) 1692. 趙泰耈에게 답한 편지. 학문의 大志를 세우고 ≪大學≫과 ≪小學≫에 힘쓸 것‚ 막힌 것은 師友에게 나아가 講明할 것‚ 服이 없는 처의 아버지‚ 어머니의 형제에 대한 제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힘.
答李士粹-彦純 (21) 李彦純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는 節度가 있어야 하며 實地의 공부란 스스로 마음을 주인으로 삼아 조처할 뿐 바깥 사람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
答李士亨 (22) 誄文에 있는 眞訣‚ 喪祭儀撮要에 관한 일‚ 編著 작업 등에 대해 李泰壽에게 답한 편지.
答羅仁卿-斗甲 (23)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안부를 전하고 三賢의 門人에 대해 ≪己丑錄≫ 등을 통해 확인해줄 것을 부탁함.
答羅仁卿 (24) 羅斗甲에게 답한 편지. 孝悌 친목에 힘쓰느라 독서하여 致知할 겨를이 없다고 했는데 이제 뜻을 세워 竝進하고 있는지 묻고 멀리 있어 講學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答沈善長 (24) 沈元浚에게 답한 편지. 饋奠할 때에도 틈이 있으면 ≪小學≫·≪大學≫·≪論語≫·≪孟子≫ 등을 읽어 의리를 자득하고 躬行 心得을 위주로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與沈善長 (24) 沈元浚에게 보낸 편지. 喪禮로 몸을 보존하지 못할 정도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居憂의 절목은 성현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居喪으로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도 불효라는 내용.
答李武叔-彦緯 (25) 1693. 李彦緯에게 보낸 편지. 근래 선비들이 학문에 마음두지 못하는 것이 과거와 생계 때문이라는 말을 염려하는 내용.
與鄭伯虞-束益 (26) 鄭束益과의 오랜 일을 추억하고 遯居自樂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안부를 묻는 편지.
答宋文叔-奎炳 (26) 宋奎炳에게 답한 편지. 여러 벗들이 서원에 거처하며 강습한다는 소식에 격려하는 내용.
答金汝厚-載重 (27) 1692. 金載重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서 독서와 실천의 관계를 논하고 ≪小學≫으로 근본을 세운 다음 독서하여 ≪大學≫의 格致의 의리를 알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申伯武-世雄 (28) 申世雄에게 답한 편지. 操心의 요체는 ≪心經≫에 두고‚ 敬은 程子의 主一無適을 위주로 하면 內外가 합해질 것이라는 내용.
答申英仲 (29) 1694. 申英仲에게 답한 편지. 朱門의 6書를 먼저 읽고‚ 孔門의 6經을 읽으며 이 외에 ≪心經≫과 ≪家禮≫ 등을 시기에 맞게 힘쓰라는 것 등 ≪要訣≫ 등에 나오는 讀書의 차제에 대한 내용.
答崔士遜-敏學 (29) 1692. 崔敏學에게 답한 편지. 立志와 노력은 다른 이들이 미치지 못할 바인데 기량이 넓지 못하고 實功이 온전하지 않으니 弘毅하고 敬畏하여 自得하는데 힘쓰기를 당부하는 내용.
答崔士遜 (29) 1693. 崔敏學에게 답한 편지. 근래 하고 있는 공부를 묻고 태만해지거나 聲名과 利祿에 빠지는 병통이 없이 노력한다면 능히 성취할 것이라는 내용.
答韓仲常-德恒 (30) 1692. 韓德恒에게 답한 편지. 오랫동안 서로 모이지 못하였는데 학문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며 조만간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자는 내용.
答申成甫 (30) 申聖夏에게 답한 편지. 학문을 하겠다는 뜻을 격려하고 心身을 收斂하는 데는 ≪小學≫<敬身篇> 만한 것이 없으니 자세히 살펴 힘써 행하라는 내용.
答申成甫 (31) 申聖夏에게 문장하는 습속 등에 물들지 않고 학문에 힘을 다하는 것을 격려하고 근래 편집한 ≪居家要義≫를 보기를 권유하는 편지.
答申成甫 (31) 申聖夏에게 학문하려는 뜻이 원대하고 깊어 근래의 습속과 다른 것을 칭찬하는 편지.
答申成甫 (31) 申聖夏에게 ≪大學≫ 格致章에서 正心을 먼저 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답한 편지.
答申成甫 (33) 申聖夏에게 답한 편지. 대학을 의심하고 변환하는 것은 陸王의 무리일 뿐이라며 ≪小學≫의 明倫敬身과 ≪大學≫의 格致誠正으로 학문하고 가벼이 의견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答李季通 (34) 李潗에게 답한 편지. 이집과 任璟 등이 老佛에 왕래하고 詞章에 歸宿하고 虛名을 사모하고 知行의 實功을 꺼리며 正學을 鷄肋과 같이 여기는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答黃擧卿-翊良 (35) 1693. 黃翊良에게 답한 편지. 지난해에 仙鄕의 벗들과 종유하던 이들이 과거에 나서는데 홀로 고요함을 지키며 독서하는 것을 격려하고 鐵山의 金南烈과의 교유를 권하는 내용.
答權季文-尙游 (35) 1692. 權尙游에게 답한 편지. 是非를 밝히고 世道를 부지할 계책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와 자신의 거취에 대해 밝히고‚ 아들이 서울에서 고한 것에 대해 자신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함.
答辛錫孝 (36) 1693. 辛錫孝에게 답한 편지. 안부를 묻고 전에 물은 ≪近思錄釋義≫는 병으로 자세히 답할 수 없으니 반드시 箚錄하여 두었다가 다른 날을 기다려 토의하겠다는 내용.
答宋命賢 (36) 宋命賢에게 답한 편지. 친구가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막은 것은 정황을 알기 어렵지만 지나치게 준엄하면 병폐가 될 듯하다는 내용.
答崔平甫-衡 (37) 1692. 崔衡에게 답한 편지. 祭儀 축문의 문자‚ 四時의 正祭를 追復하기 전에 먼저 俗祭를 없애는 것에 대한 염려‚ 光山 朴君의 夭折과 같은 제자들의 동향 등에 대한 내용.
與崔平甫 (37) 崔衡에게 보낸 편지. 開城의 痘疫으로 올라오기 어려우니 林令과 羅友와 공부를 함께 하면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祭儀는 正本을 빌려 謄本을 교정한 뒤 시행할 것‚ ≪小學≫으로 큰 근본을 세우고 ≪大學≫의 格致 공부로 이어지는 爲己之學에 힘쓸 것을 권하는 내용.
答崔平甫 (38) 1693. 崔衡에게 답한 편지. 林泳과 朴泰初와 함께 강마할 것‚ 가지고 있는 ≪讀記≫와 ≪要解≫가 어느 것을 베낀 것인지 묻고 修改할 것이 많으니 여항에 전파하지 말라고 당부함.
答金聖任-相殷 (38) 金相殷에게 追喪 문제는 효성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이미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답한 편지.
答崔子益-補 (39) 1692. 崔補에게 ≪小學≫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한 편지.
與愼子貞-無咎-敬所-無逸-兄弟 (39) 1693. 愼無咎와 愼無逸 兄弟에게 보낸 편지. 선비들이 추앙을 받는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학문에 우선하고 과거는 다음으로 할 것을 당부함. 자신이 ≪退溪集≫과 ≪朱子大全≫을 번갈아 읽고 있는데 이단을 밝히고 삿된 것을 끊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내용.
答梁哀-得中 (41) 1694. 梁得中에 답한 편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墓文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인편이 되는대로 내려보내겠다는 내용.
答李季章-世瑍 (41) 1693. 李世瑍에게 답한 편지. 金載海 등과 ≪朱子大全≫도 읽었다는 것을 격려하고 文儒가 되지 말고 存心致知에 힘을 기울여 실질적인 것에 힘쓰라고 당부함.
答李上舍-眞儒 (42) 李眞儒에게 답한 편지. 次子가 主喪할 때의 題主는 傍註를 비워두고 祝辭는 섭행한 것으로 말할 것 등의 의견을 밝힘.
答李上舍 (42) 李眞儒에게 학문과 科名의 관계에 대해 답한 편지로 操行을 더하여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학문에 實이 없을 것이고 과거를 하여도 得失에 움직여 싸울 뿐 수립하는 것은 없게 될 것이라는 내용.
答李久叔 (43) 1692. 李眞望에게 답한 편지. 요새 선비들이 科業과 詞章을 記誦하는 일에 뜻이 분산되어 性과 道에 보탬이 없는 것을 염려하고 선비된 자는 성현의 경전을 主業으로 삼아 人道를 닦고 正學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
答李久叔 (44) 1693. 李眞望에게 답한 편지. 학문에서 科擧와 詞章까지 욕심을 부리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니 存心致知에 주로 힘쓰고 다른 것에 미혹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
答具子受-鼎勳 (44) 1692. 具鼎勳에게 답한 편지. ≪大學≫의 小註는 章句를 100여 차례 읽고 나서 읽을 것‚ 복제의 기간은 成服日을 기준으로 할 것 등의 내용.
答李遠卿-緬 (45) 李緬에게 답한 편지. 沈俔의 작고 등 海西 선비들의 동향과 ≪擊蒙要訣≫·≪小學≫·≪大學≫·<白鹿洞規>·<敬齋箴> 등을 위주로 하는 학문의 순서와 방도 등에 대하여 알려주는 내용.
答李遠卿士章-綖 (47) 李緬과 李綖에게 답한 편지. 崔瑞吉이 죽었는데 가보지도 못하는 것을 애석해하고 ≪二書要解≫‚ ≪周易口訣≫ 등의 작업 진행에 대해 질문함.
答李遠卿 (48) 1693. 李綖에게 답한 편지. 養生報本의 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묻고 그것이 사우들에게 해가 되고 신선술을 좇아간 사람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
答金汝精-克成 (1) 1693. 金克成에게 답한 편지. 학문의 대체는 窮理하는 공부에 있다. ≪荀子≫·≪莊子≫·≪列子≫ 등을 看讀하는 것은 玩物喪志하게 될 위험이 있고‚ ≪大學或問≫ 등을 읽으면 知行이 서로 긴밀하여 節約하는 공부에 더욱 뜻을 둘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安岳鷲嶺院生 (1) 1692. 安岳 鷲嶺書院의 원생에게 답한 편지. 서원이 본래의 뜻을 잃고 과거를 위해 선비들이 서로 접하는 장소가 된 것과 院長이 강학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院長 자리를 승낙하여 강학하고 싶은 맘은 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렵다는 내용.
答遯巖院生 (2) 1694. 遯巖書院의 원생에게 金長生과 申欽과의 관계 등을 들어 원장을 승낙하는 내용.
答遯巖院生 (2) 1694. 遯巖書院의 원생에게 답한 편지. 尼懷간의 시비는 있었지만 이미 金集이 李珥가 李彦迪의 잘못을 지적했어도 함께 從祀할 수 있다고 한 예가 있으니 尹宣擧를 宋時烈과 함께 配享하는 것은 불가할 것은 없지만 金長生과 김집이 主配의 관계로 되어 있으면 스승과 함께 배향하게 되어 위차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答遯巖院生 (3) 遯巖書院의 원생에게 답한 편지.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 들어있던 사람들과 이번 편지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다른 것 등으로 보아 서로 다툼과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나 宋時烈과 尹宣擧를 並享하는 문제는 전에 편지한 것과 같고 송시열이 윤선거를 공격한 것은 있을 수 있지만 후생이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내용.
答道峯院儒 (4) 道峯書院 원생들에게 답한 편지. 원장 자리를 맡았지만 외간에 事端이 많고 논의가 정해지지 않은 때에 원장의 임무를 계속하기 어려워 보내 온 단자를 돌려보낸다는 내용.
答道峯院儒 (4) 1695. 宋時烈의 도봉서원 향사 문제에 대해 道峯書院 원생들에게 답한 편지. 並享과 配食 여부‚ 거행할 시기‚ 축문의 문사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내용.
答抱川花山院生 (5) 1694. 抱川 花山書院의 원생들에게 답한 편지. 永平 玉屛書院의 일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병이 좀 나으면 坡山과 長湍 등지는 수십 리 안에 있어 다른 서원과 한꺼번에 가서 강학하기로 한 것이고 화산서원은 오가며 강학하기 어려워 청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
答永同書院諸生 (6) 1695. 院宇에 奉安하는 위차를 결정할 때 時代와 道德 중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의견이 달라 감히 말할 수 없고 宋時烈이 살아있을 때 이미 院長으로 자처하였으니 昆弟의 倫序만 아니라면 그 의리를 따라야 할 것이라는 내용.
與泰恒姪 (6) 1692. 朴泰恒에게 답한 편지. 사당 봉안이 遷墓로 인하여 늦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祭儀와 祭饌‚ 예를 행할 장소‚ 攝行 문제 등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
答泰恒姪 (7) 1693. 朴泰恒에게 답한 편지. 사당에 奉遷하는 일을 급히 거행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祝辭‚ 改題의 儀節 등과 回婚禮의 節次에 대해 답한 내용.
與泰初姪 (8) 朴泰初에게 보낸 편지. 錦城 祠宇의 일‚ ≪栗谷年譜≫의 일‚ 林泳·梁處濟·金載海의 학문 등에 대한 의견과 ≪大學≫·≪近思錄≫의 讀記‚ 祭儀 등에 관한 내용.
與錦平孫 (9) 祧主를 埋安할 때 臥安할 것인지 立安할 것인지 前例를 살펴 朴弼成에게 답한 편지.
答弼明孫 (10) 1692. 朴弼明에게 답한 편지. 증조부 형제가 각자 하나의 宗이 되었으니 宗孫이 婚主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내용.
答弼英孫 (10) 朴弼英에게 답한 편지로 芸館에서 간행한 ≪小學≫이 栗谷本이라는 것에 기쁨을 전하고 겨울부터 봄까지는 오로지 ≪小學≫과 ≪家禮≫만 보라는 내용.
答弼純孫 (10) 禫祭를 행할 절차 등에 대해 朴弼純에게 답한 편지.
答弼仁孫 (11) 存心의 요체 등에 대하여 朴弼仁에게 답한 편지.
答弼仁孫 (11) 1693. 눈병으로 독서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학문의 근본은 躬行하는 것이 있으니 마음을 보존하여 修身에 힘쓰라고 朴弼仁에게 답한 편지.
答尹子仁問-禮 (12) 妾이 女君의 黨을 위해 입어야 할 服制에 대한 尹拯의 질문에 대해 답한 글.
答李君輔問-東儒師友錄 (13) 1692. ≪東儒師友錄≫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李仲虎의 <心性情圖>와 李彦迪에 대한 李珥의 설 포함 여부‚ 李滉의 語錄‚ 朴淳·奇大升·黃俊良 등의 일‚ 柳成龍·金誠一의 순서‚ 崔永慶·金宇顒·成渾에 대한 기록의 처리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李君輔問-禮 (17) 1693. 형수의 장례에 형과 조카의 妻를 일시에 개장할 때의 절차‚ ≪家禮≫에 나오는 主櫝의 제도 등에 대한 李世弼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汝和問 (19) 1692. 崔錫鼎의 질문에 답한 글. ≪大學≫ 正心章과 體用의 문제‚ 格物物格에 대한 李世龜·鄭齊斗의 異說 비판‚ 외조부모 봉사손의 아들이 제사할 의절과 題主‚ 妾母에 대한 妾子 아들의 服制 등에 대한 내용.
答申公獻問-祭禮 (25) 祭禮에 관한 申琓의 질문에 답한 글. 私親의 喪으로 家廟 제사를 감쇄하기 어려울 때 私喪을 아들이 대행하는 문제와 제사 절차 등에 대한 내용.
答金子懷問-喪禮 (27) 祔祭를 행하지 못한 妻를 추가로 先廟에 班祔할 것인지 여부. 형에게 출계한 아들의 服色‚ 練祭 때의 의복과 신발‚ 主祭‚ 祝辭 등에 대한 金洪福의 질문에 답한 글.
答尹仲綱-世紀-問-喪禮 (29) 1693. 小祥日을 물렸을 경우의 初忌日 別奠‚ 8세 童子의 服制 문제 등에 대한 尹世紀의 질문에 답한 글.
答尹仲綱問-喪禮 (30) 變除하는 날을 宗子가 成服한 날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喪에 대해서 들은 날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尹世紀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家禮 (32) 1692. 爐合과 酒果의 위치‚ 銘旌을 쓰는 요령‚ 제사에서 炙肝의 사용 여부‚ 상을 당한 이에 보낸 慰疏의 答疏에 姓名을 말하는 이유 등 ≪家禮≫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問-禮 (35) 죽은 嫡子의 초상을 맞아 3년 斬衰服을 입는 규정이 있는데도 참최가 너무 과중하다고 한 이유‚ 기년복을 입었을 때의 變除 시기 등에 대한 金榦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直卿再問 (36) 金榦에 대한 질문에 답한 글. 아들에 대한 服制 變除 절차와 복색‚ 正體의 의미‚ 자식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경우‚ 次子 및 庶子 承重과 正體 등에 대한 내용.
答李壽翁問 (1) 1693. 李世龜의 질문에 답한 글. ≪大學≫ 經1章 止於至善에서 ‘止’字의 의미‚ ≪家禮≫ 通禮 祠堂章 附註에 대한 해석‚ 大宗과 小宗의 의미‚ 제사에 참여한 主婦의 의절‚ 深衣의 제도‚ 喪禮에서 襲衣할 때 握手하는 방법‚ 小殮 뒤 尸床을 옮기는 의절 등의 내용.
答李同甫問-二書要解 (9) 1694. ≪二書要解≫에 대한 李喜朝의 질문에 답한 글. 人心道心章 ‘滋長’의 뜻과 ‘微’자에 대한 해석‚ 閑邪存誠章의 ‘心一’ ‘閑邪’과 敬以直內章의 ‘敬以直內’의 의미‚ 通禮 祠堂 附註의 사당 제도‚ 齊衰의 月數‚ 家廟 祠堂의 兩堦 제도 등에 대한 내용.
答金仲固-栽-問-喪禮 (13) 1692. 喪禮에 대한 金栽의 질문에 답한 글. 祥祭 뒤의 복색‚ 網巾의 제도‚ 祥祭 뒤 사당에 신주를 들일 때의 奠 및 哭拜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羅顯道-良佐-問-學 (14) ≪大學≫의 大旨를 忠恕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羅良佐의 질문에 답한 글.
答羅顯道再問 (16) 1693. 四書 중 ≪大學≫의 大旨만 말하지 않은 이유와 ≪대학≫의 大旨는 무엇인가 하는 羅良佐의 재질문에 답한 글.
答羅顯道問-喪禮 (19) 1694. 虞杖과 虞祭 뒤의 朝夕上食 등 虞祭에 관한 일‚ 祔祭의 복색‚ 3년 내의 朔望 참여 여부‚ 俗節의 祭饌 문제 등 喪禮에 대한 羅良佐의 질문에 답한 글.
答朴大叔問-學 (20) 集註의 ‘如或見之’의 의미‚ 孟子와 朱子 등의 伯夷·伊尹 및 子賤·子貢 등에 대한 평가 문제 등에 대한 朴鐔의 질문에 답한 글.
答柳道卿-貴三-問-禮 (21) 1693. 장자와 장손이 죽고 장손에게 아들이 없어 후사를 세우지 못했을 때의 主喪‚ 모친 장례 뒤 부친상을 당했을 때의 几筵·朝夕奠·복색 등에 관한 柳貴三의 질문에 답한 글.
答趙君範問-喪禮 (22) 1692. 喪禮에 대한 趙楷의 질문에 답한 글. 腰絰을 만드는 재료‚ 直領의 제도에 대한 내용.
答洪士式-重楷-問-禮 (24) 할머니 諱日에 伯父가 入葬할 때의 祭饌과 의절에 대해 물은 洪重楷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漢臣-是翁-問-禮 (24) 1692. 禮에 대한 崔是翁의 질문에 답한 글. ‘外甥’가 지칭하는 것‚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이가 姉妹에 대해 입을 복제‚ 書院 건립의 타당성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李子望問-喪禮 (27) 1693. 服 중에 죽은 사람의 장례 전에 素饌을 써야 하는지 여부‚ 題主가 아이일 때의 祝辭‚ 禫祀에서 閏月 계산‚ 남편 생전에 쫓겨났던 妻妾을 남편의 사당에 모시는 문제 등 喪禮에 대한 李東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士亨問-喪禮 (28) 喪禮에 대한 李泰壽의 질문에 답한 글. 復의 의미‚ 조석에 곡하는 자세‚ 點茶時의 예‚ 조문할 때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함께 있을 때의 의절‚ 妻의 신주를 둘 곳 등에 대한 내용.
答趙德叟問-喪禮 (30) 부친을 장례 전에 어머니를 改葬할 때의 복색 제도 등에 대한 趙泰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趙德叟問-禮 (31) 1694. 다른 집으로 옮겨 祔祭할 때 合祀할 위차‚ 장사 전에 家廟를 옮겨 봉안할 때의 의절 등에 대한 趙泰耈의 질문에 답한 글.
答崔士遜問-論語 (1) 1693. ≪論語≫에 대한 崔敏學의 질문에 답한 글. <序說> 程子小註 ‘改容更貌’의 뜻‚ 땅 속으로 36도 들어가 보이지 않는 南極을 알 수 있는 이유‚ 공자가 詩를 刪定했다고 했을 때 ‘刪定’의 뜻‚ 三統의 뜻‚ 禘 제사‚ 子賤을 不器의 군자라고 한 이유‚ 冉求를 공격하라고 한 이유‚ ‘성인의 도가 커서 천하의 일과 만물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李士粹問 (13) 1692. 경서의 經文·章句 및 諸家 註解를 읽는 방법‚ 返魂한 뒤 이사했을 경우의 喪禮 의절‚ 練祥과 忌日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 등에 대한 李挺英의 질문에 답한 글.
答梁汝精-擇之-問-喪禮 (16) 1693. 喪禮에 대한 梁擇之의 질문에 답한 글. 어머니와 長兄의 상이 겹쳐 빈소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의 상제‚ 嫡子가 없고 妾長子에게는 賤妾子만 있고‚ 妾次子에게는 正妻 소생이 있을 경우 후사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 답한 내용.
答申列卿問-禮 (17) 禮에 대한 申佾의 질문에 답한 글. 아버지와 어머니 묘의 좌우를 바꾸는 문제‚ 后土에 제사할 때의 의절과 祝辭‚ 합장할 때 먼저 장사지낸 곳에 고하는 말‚ 襲奠의 陳設‚ 祔祭할 때의 祝辭 등에 대한 내용.
答文明仲問-喪禮 (20) 곡하는 위치‚ ≪儀禮≫에서 ‘下室에 먹을 것을 드린다’고 할 때의 ‘下室’‚ 저녁 곡 끝난 뒤의 혼백 위치‚ 靈床寢具의 방향과 發靷 뒤의 처리‚ 望奠‚ 平土 뒤의 后土祭‚ 返魂할 때 말과 가마를 사용하는 근거 등 喪禮에 대한 文後開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進士-時亨-問-改葬禮 (22) 改葬할 때의 几筵‚ 上食‚ 虞祭 등의 禮에 대해 李時亨에게 답한 글.
答李進士問-喪禮 (23) 喪禮에 대한 李時亨의 질문에 답한 글. 父親喪 중 모친을 改葬할 때의 복색‚ 동일한 빈소의 사용 여부‚ 行喪하는 날짜‚ 개장할 때 靈座의 설치 여부 등.
答申雲卿問 (25) 申漢立의 질문에 답한 글. ≪小學≫ 首章 人性의 綱 내용‚ ≪小學≫ 明倫敬身과 ≪大學≫ 誠意正心修身과의 관계‚ ≪小學≫과 ≪家禮≫ 祠堂章의 ‘屋覆’의 뜻‚ 昏禮 상차림과 致賻‚ 四時祭의 終獻 의절‚ 后土祭‚ 四名日의 墓祭‚ 상복 裁斷의 척도 등에 대한 내용.
答閔寡悔-愼-問-喪禮 (31) 1692. 후손 없이 먼저 죽은 형에 대한 입후를 미루고 참최복을 주관할 때 題主의 호칭 문제에 대한 閔愼의 물음에 답한 글.
答權賓之-鑌-問-論語 (32) 1693. ≪論語≫에 대한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學而>의 務本에 관한 圖說‚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의 吐‚ 小事와 大事의 구분‚ <八佾>篇 樂舞의 수‚ 正理의 질서와 禮樂‚ 告朔의 禮 등에 답한 내용.
答權賓之問-禮 (39)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初終 易服의 去冠 절차‚ 殮과 襲의 절차와 복색‚ 小祥 때의 복색‚ 喪禮에서 喪禮備要의 위치‚ 上食‚ 朔日과 望日의 設饌‚ 后土 제사의 陳設‚ 外棺 사용 여부‚ 朝祖의 儀節‚ 轆轤 사용 여부‚ 玄纁‚ 茅沙‚ 분묘의 크기 등에 대한 내용.
答權賓之問-喪禮 (49) 喪禮에 대한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부친상 중에 모친을 改葬할 때의 복제와 절차‚ 合葬할 때 后土神에 대한 祝辭 등.
答權賓之問-喪禮 (50) 翣의 위치‚ 虞祭나 卒哭 이하 大祭 및 朝夕上食과 朔望奠의 陳設 등 喪禮에 대한 權鑌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祭儀 (51) 1692. 時祭할 때 처 이하의 자리를 정한 근거‚ 魚湯과 肉湯 사용의 근거‚ 侑食할 때 匙箸의 위치 등 祭儀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禮 (53) 親喪 變除 절목‚ 練祭만 행하려다 祥祭와 禫祭를 행하면서 白笠을 쓴 지 1년 이상 쓰게 되었을 경우의 조처 등 海西의 時俗을 변통하는 일 등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答鄭眞卿問-心經 (1) 1693. ≪心經≫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心經≫ 序註中의 標錄에 讀書記라 칭할 만한 것이 없다는 설에 대한 고증을 비롯하여 ≪心經≫의 해석 등에 대한 의견.
答鄭眞卿問-家禮 (1) ≪家禮≫에 대한 鄭尙樸의 질문에 답한 글. <儀節歷數圖> 등 ≪家禮≫에 실린 그림‚ 斜長의 길이에 대해 말한 것이 서로 다른 이유 등 가례의 해석‚ 고증 등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答金士直問-喪禮 (1) 1692. 喪禮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遣奠의 祝 사용 여부‚ 玄纁奠의 의절‚ 題主에서 ‘顯’字의 사용 여부‚ 조카가 상주일 때 숙부의 亞獻 여부 등에 대한 의견.
答金士直問-禮 (2) 1693. 禮經에 內外族 자매들의 복제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士直問-喪禮 (3) 喪禮에 대한 金楺의 질문에 답한 글. 改葬할 때 관이 썩어 고쳐 염습해야 할 때의 合葬 절차‚ 3년복을 입은 자 등의 改葬時 복색.
答沈善長問 (4) 1692. ≪居喪雜儀≫ 등에 대한 沈元浚의 질문에 답한 글. 장례 후의 返魂‚ 几筵과 廬墓 제도‚ 장례 전후의 上食과 奠酌‚ 几筵의 곡·焚香·展拜 근거‚ 參降과 辭神‚ 卒哭 후의 時祭 장소‚ 墓祭‚ 祭饌의 品數 등 상제례 및 본성과 기품의 차이 등 17개조에 대한 답변.
答申伯武問-心經 (13) 1693. ≪心經≫에 대한 申世雄의 질문에 답한 글. <心學圖>에서 ‘心’의 뜻‚ 人心이라고 할 때 사람이 지칭하는 것‚ 克己復禮와 誠‚ 赤子와 孩提의 의미 등에 대한 답변.
答李汝晦問-家禮 (16) ≪家禮≫에 대한 李德明의 질문에 답한 글. 권1 大小宗圖板 ‘親盡할 때 嫂를 別處한다’는 말의 뜻‚ 別子‚ 班祔‚ 親盡한 신주의 처리‚ 昏禮를 치를 수 있는 복제‚ 括髮‚ 進饌 등에 관한 내용.
答李遠卿問-喪禮 (26) 師의 의미와 위치‚ 스승의 服制에 대한 李緬의 질문에 답한 내용.
答崔子益問-喪禮 (26) 1692. 改葬할 때의 告廟 절차‚ 發靷‚ 返哭할 때 靈車 앞에 말이나 轎子가 앞에서 이끄는 근거‚ 朝祖할 때의 절차 등 崔補의 질문에 답한 글.
答金聖任問-家禮 (28) ≪家禮≫에 대한 金相殷의 질문에 답한 글. 祠堂 龕室내에 新薦을 위한 탁자 사용 여부‚ 親盡의 禮‚ 冠禮 및 혼례의 賓主의 예‚ 상례에서 絞紟할 위치 등.
答權質甫-益文-問 (31) 부친상 중에 할머니의 禫祭를 叔父가 행할 때의 축문 등에 대한 權益文의 질문에 답한 글.
答李季通問-喪禮 (32) 1692. 喪禮에 대한 李潗의 질문에 답한 글. 喪이 있음을 알릴 때 宗家에서 朝祖의 예를 인용하여 행하는 것의 타당성‚ 土神 제단의 위치와 축문‚ 장례할 때 선영에 고하는 절차 등.
答李季通問-禮 (33) 李潗의 질문에 답한 글. 후사없이 죽은 장손 대신 후실 소생이 主喪했을 때 장손의 처가 입후할 경우의 복제에 대해 차자의 主喪은 攝行일 뿐 嫡孫을 입후하여 承重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답한 내용.
答金南烈問-喪禮 (35) 1693. 金南烈의 질문에 답한 글. 大夫와 士의 方相의 수‚ 玄纁의 척도‚ 大祥에 ‘小心畏忌不惰其身’ 등의 글자 사용을 금하는 문제 등에 대한 내용.
答金汝厚問-祭禮 (36) 祭禮에 대한 金載重의 질문에 답한 글. 忌祭 때 晨謁을 행하는 시기‚ 諸父가 終獻을 하지 못하는 이유‚ 여러 대의 묘가 한 곳에 있을 때 墓祭의 祝辭 등에 대한 내용.
答尹汝弼-明相-問-喪禮 (37) 子婦의 상에 禫와 練祭를 행할 것인가의 여부‚ 期功의 상에 柩에 대한 哭拜 절차‚ 모친상에 几筵을 철수한 뒤의 展拜‚ 어린아이의 장례‚ 俗節 제사 음식 등 喪禮에 대한 尹明相의 질문에 답한 글.
答權銓問-喪禮 (39) 出系한 아들이 생부의 상에 입어야 할 복색에 대한 權銓의 물음에 답한 글.
答姜櫟兄弟問-喪禮 (1) 1692. 姜櫟 형제의 喪禮에 대한 질문에 답한 글.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같은 달에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 상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
答姜櫟再問 (4) 姜櫟의 질문에 답한 글. 喪이 겹칠 때의 상례에 대한 鄭經世 주장의 타당성 여부‚ 變除할 때의 복색 등에 대하여 답한 글.
答姜櫟問 (8) 1693. 姜櫟의 질문에 답한 글. 宗子가 아파서 練祭와 祥祭를 물려 행했을 때 기한이 지난 뒤의 几筵과 上食 여부 및 宗子가 상복입는 기한을 채우는 문제에 대한 내용.
答兪岦問-禮 (9) 1692. 兪岦의 질문에 답한 글. 家廟와 墓의 節祭에 宗子나 宗孫이 참가하지 못하고 攝行할 때의 祝辭‚ 心喪 중인 사람이 임시로 帶를 바꾸어 매는 것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내용.
答呂生光周問-喪禮 (10) 1693. ≪問解≫의 ‘喪中에 담제와 길제는 행할 수 없다’는 구절에 대한 呂光周의 질문에 心喪 중에 할아버지의 禫祭와 吉祭를 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답한 글.
答金汝精問 (10) 金克成에게 답한 글. 禮에서 ‘唱喏安置萬福’의 의미‚ <說饌圖>에서 醋楪을 淸醬 등으로 대신하는 문제‚ 亞獻과 三獻의 의미‚ 상 중 출타했을 때의 望哭 여부 등에 대한 내용.
答金汝精問-禮 (12) 金克成에게 답한 글. 定省할 때 拜揖하는 예‚ 스승을 좌석 사이에서 參謁할 때의 예‚ 君祭先飯하는 예‚ 부친상 중 조모상 등 喪이 겹쳤을 때의 복색 등에 대한 답변.
答金汝精問 (14) 金克成에게 답한 글. 性과 德의 차이‚ 元亨利貞에서 元과 太極의 관계‚ 제사에서 생선과 고기의 사용 방법‚ 后土 및 墓祭에서 布席을 ‘設卓’이라고 하는 이유 등에 대해 답한 내용.
答泰初姪問 (16) 朴泰初에게 답한 글. ‘王宮과 國都’ ‘大全’ ‘明德’의 ‘德’ ‘格物致知’의 ‘格’과 ‘至’ ‘自慊’ 등의 의미‚ 語類의 ‘知覺이 理에는 없다가 氣가 모여 형체를 이루면서 이와 기가 합하여 知覺할 수 있게 된다’는 설에 대한 답변.
答庶族姪泰崇問 (28) 庶族姪인 朴泰崇의 질문에 답한 글. 復官되지 않은 사람의 題主‚ 낳아 준 할머니의 神主에 대한 호칭‚ 외가의 제사‚ 朔望祭 때의 焚香 절차‚ 墓祀를 묘에서 행할 수 없을 경우 家廟에서 대행하는 문제‚ 瘟疫이 있을 때의 제사 여부‚ 産家의 제사 등에 대한 내용.
答錦平孫問 (29) 錦平尉 朴弼成에게 답한 글. 3명의 처를 남편과 한 곳에 장사지낼 때 장지의 배치 순서가 거꾸로일 경우 墓祭에서 獻爵하는 순서.
答弼明孫問 (32) 1692. 朴弼明에게 답한 글. 四時의 節祀·忌祭·墓祭에 服이 가벼운 사람이 行薦할 때의 예‚ 제사를 제대로 행할 수 없을 때의 讀祝 여부‚ 居喪할 때의 禰祭 등에 대한 내용.
顔子傳授爲仁圖 (1) 1693. 孔子의 문하 중 大道를 이어받았다는 顔子의 학문을 세상에 밝히기 위하여 曺植이 그려 놓은 그림을 수정하여 학문의 요체를 밝힌 그림.
手錄 (2) 程朱 이후의 성리학 전통‚ 漢儒에서 明儒에 이르기까지의 학문 경향‚ 羅欽順·許衡 등에 대한 평가‚ 학문의 工程‚ 格物致知에 대한 王守仁의 설 비판‚ ≪中庸≫·≪心經≫ 등 경전에 대한 이해와 같은 학문적 입장이 드러난 내용을 모아 놓은 글.
諭東陽書院諸生文 (8) 1693. 東陽書院의 諸生들에게 俗儒들처럼 문장과 詞章을 위주로 한 과거 공부나 異端이 아니라 성현이 전수한 학문에 힘쓸 것을 曉諭하는 글.
紫雲書院院規 (11) 1693. 紫雲書院의 규칙. 取士 법‚ 堂長에서 色掌까지의 선발과 업무 분장‚ 복색과 식사 등의 일상 예절‚ 현판‚ 강당에서의 과거준비 금지‚ 처벌과 削籍 등에 관한 21개 조항.
父在爲母服制辨 (14) 1694.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한 복제가 齊衰 杖朞가 되는 이유에 대해 논변한 글.
太極圖陰靜陽動位置說 (18) 1692. <太極圖>에서 陰靜을 오른쪽에‚ 陽動을 왼쪽에 둔 이유에 대해 朱熹·權近·李滉의 설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易八卦次序方位陰陽不同說 (19) ≪周易≫ 八卦의 次序를 나타낸 그림에서 陰陽의 위치가 方位圖 및 河圖洛書와 다른 이유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妾祖母承重服當否議 (20) 妾子와 妾孫이 아버지를 承重할 때와 하지 않았을 때에 각각 妾祖母의 상에 입을 복에 대하여 ≪禮記≫ <喪服小記> 등을 통하여 고증한 글. 승중하였을 경우는 心喪만을 할 것이며 승중하지 않았을 경우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服喪을 행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學法總說 1692. 李萬挺을 위해 지은 글. 천지만물에 모두 道가 있는데 그 중 人道가 가장 귀하여 天地에 참여하여 化育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
記栗谷先生入山時事 (1) 1694. 이이가 입산한 일에 대한 여러 설에 대해 규명해 놓은 글. 違親變形했다는 비판에 대해 규명하였으나 논란을 염려한 宋時烈의 반대로 別集의 年譜에 싣지 않았던 내용임.
書院考證補 (4) 書院과 鄕祠에 배향할 기준에 대해 고증한 글. 서원과 향사가 구분없이 섞여 폐단이 많은데 朱熹의 滄州書院과 南康 三賢祠 五賢堂의 규례에 道學과 名論에 따라 文廟·書院·鄕祠에 배향하는 순서가 있으니 이제 그 순서가 문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題涬溟齋詩卷後 (5) 1692. 涬溟齋 尹順之의 ≪涬溟齋詩卷≫ 뒤에 題한 글. 尹斗壽의 손자인 윤순지는 申欽과 唱酬한 뒤 유명해졌고‚ 정묘호란 뒤 화를 당해 은거하다가 뒤에 일본과 중국에 사신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 아들의 부탁으로 시문을 刪定하였다는 내용.
跋楸灘集 (6) 吳允謙의 시문집인 ≪楸灘集≫ 발문. 오윤겸이 스승인 成渾에게서 마음이 화평하다는 평을 들었고 反正 이후 조정에서 비방에 맞서 싸우지 않고 경연에서 ≪大學≫ 공부를 권한 인물이었다며 손자 吳道一의 청에 따라 발문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
跋日用諸訓 (7) <日用諸訓>의 발문. 일찍 홀로 되고 가난하여 제사하지 못하다가 1656년이래 ≪家禮≫를 따라 음식을 차려 행했는데 四時의 墓祭 등을 없애지 못하고 李珥의 ≪要訣≫에 있는 제도를 따라 행하였다. 이제 ≪溫公雜儀≫를 합하고 이정하여 자손이 대대로 지키도록 한다는 내용.
跋栗谷手寫退溪四七說 (8) 1693. 李珥가 成渾을 위하여 손수 베낀 李滉의 <四端七情說>에 대한 발문. 중간에 鄭之雲과 李恒 등의 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校理로 강릉에 있던 시절에 쓴 것임. 이황과 奇大升의 논변 뒷부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대승과 이이의 설이 같기 때문일 것이라는 내용.
跋長山遺稿 (9) 長山 元斗樞의 시문집 발문. 원두추는 천성이 깨끗하고 榮利를 멀리하던 인물로 고문에 능하였다. 문집 안에 있는 <四七理氣說> 등은 굳이 말로 논할 필요가 없고‚ 문장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趙翼·張維·鄭弘溟 등에게 아낌을 받았다는 내용.
跋坡州鄕約 (10) 坡州鄕約의 발문. 파주는 李珥의 고향으로 목사 邊協이 조정의 명에 따라 향약을 행하였다. 이이의 해주향약 등이 행해지고 있는데 정작 파주에서는 마멸되어 없어졌다. 南宮鉉 등이 이이 만년에 정한 것을 기준으로 損益하여 향약을 정하였다는 내용.
再跋栗谷別集 (11) 1694. ≪栗谷別集≫의 발문. ≪栗谷續集≫과 ≪外集≫에 이어 자신이 宋時烈 등과 함께 왕복하며 追補하여 別集을 완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入山과 관련된 구절과 <太極問答> 등의 내용을 산정한 과정을 서술한 내용.
甲戌元朝箴 (12) 1694. 새해 아침에 堯舜에서 정자와 주자에 이르기까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의 근본을 상기하고 침묵과 겸손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
載寧景賢書院移安告文 (12) 1694. 載寧의 景賢書院의 朱熹와 李珥의 신위에게 새로운 사당에 移安한다고 아뢰는 글.
新廟祝文 (12) 載寧 景賢書院의 朱熹 신위가 좁고 홍수의 피해가 잦아 옛 터 남쪽에 새로운 사당을 지어 移安하고 李珥를 配享한다고 아뢰는 축문.
拜議政府左議政因歲事告家廟文 (13) 조정이 변혁되어 중전이 복위되고 자신이 의정부 좌의정으로‚ 아들 朴泰殷은 內寺敎官으로 임명되었음을 家廟에 고하는 글.
先廟告追贈領議政文 (13) 아버지가 領議政에‚ 어머니가 貞敬夫人에 추증되었음을 사당에 고하는 글.
祭李生員廷碩文 (14) 1692. 李廷碩에 대한 제문.
祭家叔參奉文 (14) 參奉을 지낸 叔父에 대한 제문.
祭老峯閔相國文 (16) 1692. 閔鼎重에 대한 제문.
祭恥庵李公-之濂-文 (16) 李之濂에 대한 제문.
題李楊州汝瑞-元龜-文 (18) 1693. 李元龜에 대한 제문.
祭張淮陽-善冲-文 (19) 張善冲에 대한 제문.
祭成汝中-至善-文 (20) 1694. 成至善에 대한 제문.
祭徵之-泰徵-姪文 (20) 朴泰徵에 대한 제문.
祭崔士溫-瑞吉-文 (21) 崔瑞吉에 대한 제문.
祭梁君-禹疇-文 (22) 梁禹疇에 대한 제문.
平安道觀察使金公神道碑銘 (1) 1693. 金汝鈺의 신도비명.
弘文館副提學贈吏曹判書辛公神道碑銘 (6) 辛應時의 신도비명.
禮曹判書贈右議政李公神道碑銘 (12) 1694. 李一相의 신도비명.
順陵參奉朴公墓碣銘 (20) 1692. 朴承任의 후손인 朴忠基의 묘갈명.
尙衣院僉正成公墓碣銘 (23) 成渾의 증손‚ 成文濬의 손자인 成熙周의 묘갈명.
承政院左承旨朴公墓碣銘 (25) 朴世城의 묘갈명.
楊根郡守申侯墓碣銘 (29) 1693. 申欽의 증손이며 李敏求의 외손인 申弼華의 묘갈명.
禮曹佐郞任公墓碣銘 (31) 任潚의 묘갈명.
濟用監正趙公墓碣銘 (33) 玄洲 趙纘韓의 아들이며 李植의 사위인 趙備의 묘갈명.
義禁府都事梁公墓碣銘 (37) 曺植·成渾의 門人인 梁弘澍의 묘갈명.
進士李公墓表 (1) 1692. 金長生의 門人인 李得志의 墓表.
江原道觀察使林公墓表 (3) 訥齋 朴祥의 門人 林億齡의 묘표.
禮賓寺正贈吏曹參判李公墓表 (5) 李恒福의 아들인 李井男의 묘표.
吏曹參判李公墓表 (7) 李恒福의 후손 李時術의 묘표.
通德郞成公墓表 (11) 成渾의 증손이며 成㮨의 아들로 尹宣擧에게 從遊한 成熙命의 묘표.
知中樞玄谷先生趙公墓表 (13) 1692. 黃廷彧·尹根壽의 門人으로 權韠 등과 詩社를 결성했던 玄谷 趙緯韓의 묘표.
學生崔公墓表 (16) 崔孝宣의 묘표.
內資主簿鄭公墓表 (17) 北窓 鄭@의 아우인 古玉 鄭碏의 묘표.
通德郞閔公墓表 (19) 효자 閔濚의 묘표.
贈左承旨朴公墓表 (20) 朴潢의 아들 朴世桓의 묘표.
氷庫別檢申公墓表後記 (21) 趙錫胤·金集의 門人인 내종형 申公의 묘표 후기.
丹陽郡守李公墓誌銘 (23) 申欽의 門人 李旭의 묘지명.
通德郞李公墓誌銘 (25) 李時術의 사위인 이종형 李尙濂의 묘지명.
繕工監僉正金公墓誌銘 (27) 金寅亮의 묘지명.
大丘府使朴公墓誌銘 (29) 朴東說의 門人 朴徹의 묘지명.
養妣孺人趙氏行狀 (33) 1693. 趙緯韓의 딸로 朴濰의 처이며 박세채의 양어머니인 조씨의 행장. (이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