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내용]
최세영(崔世榮)에 대하여
1613년(광해군 5)∼1686년(숙종 1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몽여(夢與)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는 최희수(崔稀壽)이고, 조부는 최응하(崔應夏)이다. 부친 최탁(崔琢)과 모친 채충익(蔡忠益)의 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서선적(徐善積)의 딸 연산서씨(連山徐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과묵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매일 과목을 정해서 공부하였다.
1650년(효종 1) 증광시 생원 2등 18위로 합격하였다. 그해 부친의 별세로 관직에 뜻을 둘 수 없었으나 3년상을 마친 후,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에 임용되어 관사축(管司畜)의 직무를 오랫동안 맡았다.
제향(祭享)은 중대한 일인데 부당하게 혼용되어 있음을 대로사(待虜使)에 건의하니,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듣고는 사람들과 의논하여 그 부서를 별도로 관장하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 산릉감조관(山陵監造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을 거쳐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역임하였다. 향리의 유생인 권감(權鑑)의 옥사를 처리할 때 권감의 무리들이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려고 하였지만, 시종일관 올바르게 판단하고 의연하게 대처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권감의 무리들은 고지식한 현감이라며 옥사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 처리하였다.
1682년(숙종 8)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평릉찰방(平陵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향년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최방언(崔邦彦)·최방진(崔邦藎)·최방현(崔邦顯)이다.
묘는 충청남도 공주(公州)에 있다.
증조는 최희수(崔稀壽)이고, 조부는 최응하(崔應夏)이다. 부친 최탁(崔琢)과 모친 채충익(蔡忠益)의 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서선적(徐善積)의 딸 연산서씨(連山徐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과묵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매일 과목을 정해서 공부하였다.
1650년(효종 1) 증광시 생원 2등 18위로 합격하였다. 그해 부친의 별세로 관직에 뜻을 둘 수 없었으나 3년상을 마친 후,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에 임용되어 관사축(管司畜)의 직무를 오랫동안 맡았다.
제향(祭享)은 중대한 일인데 부당하게 혼용되어 있음을 대로사(待虜使)에 건의하니,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듣고는 사람들과 의논하여 그 부서를 별도로 관장하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 산릉감조관(山陵監造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을 거쳐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역임하였다. 향리의 유생인 권감(權鑑)의 옥사를 처리할 때 권감의 무리들이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려고 하였지만, 시종일관 올바르게 판단하고 의연하게 대처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권감의 무리들은 고지식한 현감이라며 옥사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 처리하였다.
1682년(숙종 8)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평릉찰방(平陵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향년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최방언(崔邦彦)·최방진(崔邦藎)·최방현(崔邦顯)이다.
묘는 충청남도 공주(公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