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1.10. 삼각산 산행

2012.1.10.삼각산 (사기막 -능선 -해골바위-숨은벽 -백운대 -하루재 -영봉 -오크밸리)

아베베1 2012. 1. 10. 23:27

                                               삼각산  산행

 

 

  ▶ 일시 : 2012.1.10. 11:28- 15:40분

  ▶ 장소: 삼각산  

  ▶ 누구와 일행과 떨어져서 혼자서

  ▶ 산행코스

      사기막골 구씨선산입구 - 사기막골 -사기막골 능선 -해골바위 - 숨은벽 -사잇길 - 깔딱고개 -

      바람골 - 사잇길 - 백운대 정상- 하산 -위문 - 백운산장 - 인수암 -산악구조대 -하룻재 -영봉정상

      헬기장 -육모정 고개 - 용국사 -오크밸리 - 뒷풀이 120번 종점앞 00식당 -1161- 창동 -전철 -우리집

 

    

 임진년 새해에  ...

 삼각산 산행을 시작하였다

 일행과 함께하기 위하여 집에서 소요산행 전동차에 승차하여 의정부 가능역에 하차하여 20여분을 기다려서 34번 버스에

 승차하여  사기막골 입구에 하차 하여서 일행을 찾으니 시간이 늦은 관계로  일행을 만날 수가 없었다

 전화도 되지 않는다  일행과  산행을  할수가 없어서 .. 삼각산 정도야 자주로 가는 곳이고 어느곳으로 가도 길을 모르는 곳이

없으니  산행을 시작하였다  둘레길을 따라 진입하여 사기막능선으로 접근하여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사기막능선으로 진입하여 혹시나하고 기다려도 만날 수가 없었다  해골바위 에서 몇장을 남기고 숨은벽 능선으로

 혼자서 걸어갈려니 역시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간단하게 몇장을 담고  사잇길 갈딱고개를 치고 오른다

 그곳에는 두분이 산을 오르신다 바람골을 지나서 양지 바른곳에서 준비해간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고  백운대를 오른다

 백운대에는 10여분정도가 산행을 하신다 정상에서 간단하게 부탁하여 태극기를 배경으로 인정샷을 남기고 하산을 한다.

 백운산장 으로 접근하여 인수암 산악구조대 를 거져서 하룻재 다시 영봉으로 진입을 하여서 영봉정상 헬기장 육모정 고개

  용국사를 거쳐  오크밸리 방향으로 이동중에 일행을 만난다 반가운 이산가족의 상봉이었다 일행중 두분이 바쁜관계로 일찍 하산하여 귀가중으로   본대는 조금 있으면 하산을 하신 단다  그랜드호텔입구 공사장에서

 20여분을 기달려서 일행과의 만남이었다 간단하게 됫풀이에 참석하고 귀가를 한다

 결방지역과 잔설이 남아 있어서 위험한 구간이 여러곳이 있었지만 ...  혼자서 가는 쓸쓸한 산행이었지만 그런대로 빡센산행을 

마쳤다 ..  겨울산헹이고 위험한 코스로 인하여... 일행을 다른 코스로 진입을 하여서 만날 수 없었다     

 

   

 

        혼자서 산행 하는길 

  

    인생은 홀로와서 홀로가는길 

    산행을 할때도 혼자서 

 

    늘 쓸쓸하고 외로운

    나와의 싸움이지 않았던가 

 

   자연속에 살아가는 

   산나그네는 늘 자연이 그리운것을

 

   수도 서울의 진산인 삼각의 최고봉인 백운봉에 올라

   임진년 새해의 소망을 마음속 으로 빌어보네

 

   임진년  한해도 건강하고 가족의 안녕과 

   소원을 그리고 안전산행을 두손 모아서 기원하네

 

   수만은 선현분이 올라서 즐거움을 찾던

   삼각의 여러봉우리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힘들고 어려운 하루의 안전산행을 무사히 마침에

   나그네는 감사의 마음전할 뿐이네 ...

 

    늘 나그네를 반겨주는  삼각의 자연에 머리숙여 

    다시한번 감사를 드린다 .

 

     임진년 새해 1월 10일 삼각산 일원 산행을 마치고 몇자 남기다

      

  

 

    

     

↗ 삼각산 둘레길 충의길 의 모습 

↗ 삼각산 둘레길 충의길 의 모습

 

 ↗ 삼각산 둘레길 효자길의 모습 이곳에서 우회  

↗ 삼각산 둘레길 효자길의 모습 이곳에서 능선으로 진입  

 ↗ 삼각산 둘레길 효자길의 모습 이곳에서 능선으로 진입 어릴적 자주로 외던 삶이그대를 .. 

 ↗ 삼각산 사기막능선 중간에서 바라본 숨은벽 능선 주변의 모습  

  ↗ 삼각산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숨은벽 인수봉 등  

 ↗ 삼각산 해골바위에도 얼음이

 ↗ 삼각산 이곳으로 올라갈려니 잔설이 있고하여 우회

↗ 삼각산 건너편의 바위가 영장봉 능선으로 모습

 ↗ 삼각산 숨은벽에는 아직도 잔설이 후사면에도

  ↗ 삼각산 해골바위도건재하고

  ↗ 삼각산 영장봉 정상 지난 12월 다녀 왔던곳

  ↗ 삼각산 숨은벽의 위용 잔설이

 

 

 

 

 

 ↗ 삼각산 숨은벽의 초입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

  ↗ 삼각산 저가 사랑하는 곳 도봉의 모습이 한눈에

 

 

 

  ↗ 삼각산 인수봉의 악어능선의 모습

 ↗ 삼각산 만경대 국망봉의 모습이 눈속에 오리바위도 한눈에  

  ↗ 삼각산 인수봉의 위용 

  ↗ 삼각산 백운대에서 바라본 염초봉등 

 ↗ 삼각산 백운대 어렵게 부탁하여 담았다

 

 ↗ 삼각산 인수봉 악어능선 자세히 보면 악아거 보인다  

 ↗ 삼각산 백운대 추운관계로 산객이 많지 않다

 ↗ 삼각산 하산길에 만경대 능선의 모습

 

 ↗ 삼각산 정상 백운대에 암각화가 있다  암각화가 마모되어 해독이 불가한각자가 많음 

     자세히 보니 기미독립 ,,육당 최남선 .. 훼손하지 말고 영원히 ..독립운동의 민족의 혼아 

 

백운대 최정상 암반에 새겨져있는 3.1독립운동에 관한 한자 해서체(楷書體) 69자의 한자와 대략의 한글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에 경성부(서울) 청진정(청진동)의 경인생 육당 최남선이 썼고, 기미년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

만세는 해주 수양산인 정재용이 선도했다”는 내용으로, 황해도 해주 의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정재용(1886-1976)선생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새긴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作成 京城府 淸進町,

六堂 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 萬歲導唱,

海州 首陽山人 鄭在鎔也 丙寅生]

 

위의 글이 새겨진 네 모퉁이에는 조금 더 큰 글체로 敬 天 愛 人이 새겨져 있으며 뜻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입니다.

 

 ↗ 삼각산 인수봉의 위용 철모바위 일명 귀바위  


【건치연혁】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취하여 성을 쌓고,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성을 나가 달아나다가 해를 당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설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韓山州) 군주(軍主)를 임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 2보(輔)를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여 양광도(楊廣島)에 예속시켰다. 문종(文宗) 때에 승격시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아, 유수 1명ㆍ부유수 1명ㆍ판관(判官) 1명을 두고 이웃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의하여,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도성(都城)을 건립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고, 일자(日者 천문관)ㆍ문상(文象)이 따라서 주장하니, 임금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경도(京都)의 구장(口帳 호구장부)ㆍ시전(市廛)ㆍ가사(家舍)ㆍ전토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투구(鬪毆 쟁투와 구타 상해)ㆍ주순(晝巡)ㆍ검시(檢屍)ㆍ거량고실(車輛故失)ㆍ우마낙계(牛馬烙契) 등의 일을 맡게 하여, 판부사(判府事)ㆍ윤ㆍ소윤(小尹)ㆍ판관ㆍ참사(參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예종조(睿宗朝)에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이라 하고 소윤을 서윤(庶尹)이라고 하였다. 영종 조(英宗朝)에 참군을 고쳐 주부(主簿)로 하였는데 그 밑에 5부(部)가 있었다.

 

 

 ↗ 삼각산 영봉에서 바라본 모습 역광이고 흐리다 

  ↗ 삼각산 영봉 중간지점에서 바라본 도봉의 모습  (상장능선 9봉 오봉의모습 도봉의 최고봉인 한눈에)

 

↗ 삼각산 영봉으로 가는 오크밸리

 

   하루가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홀로의 추억이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다산 선생이 백운대를 노래한시

 

 

다산시문집 제2권
 시(詩)
백운대에 올라가[登白雲臺] 곧 삼각산(三角山)의 중봉(中峯)이다


어느 뉘 뾰족하게 깎아 다듬어 / 誰斲觚稜巧
하늘 높이 이 대를 세워 놓았나 / 超然有此臺
흰 구름 바다 위에 깔려 있는데 / 白雲橫海斷
가을빛 온 하늘에 충만하구나 / 秋色滿天來
육합은 어우러져 결함 없건만 / 六合團無缺
한번 지난 세월은 아니 돌아와 / 千年漭不回
바람을 쏘이면서 휘파람 불며 / 臨風忽舒嘯
하늘 땅 둘러보니 유유하기만 / 頫仰一悠哉


 

[주D-001]육합 : 천지와 동서남북.

 

 

牧隱詩藁卷之十九

 
三角山上雲 a_004_238d


華山絶頂白雲飛。自負無心何處歸。我豈不知巖下宿。只嫌絶學道人稀。

我生行止儘悠悠。消息盈虛摠不憂。且問無心如可學。商山四皓豈難求。

問雲雲答語皆眞。我亦當時洒落人。莫道心中有査滓。邇來無處避風塵。
牧隱詩藁卷之四
 
三角山 a_003_565b


三峯削出太初時。仙掌指天天下稀。松影扶疏橫日月。巖姿濃淡雜煙霏。聳肩有客騎驢去。換骨何人駕鶴歸。自少已知眞面目。人言背後玉環肥。
牧隱詩藁卷之十九
 
三角山上雲 a_004_238d


華山絶頂白雲飛。自負無心何處歸。我豈不知巖下宿。只嫌絶學道人稀。

我生行止儘悠悠。消息盈虛摠不憂。且問無心如可學。商山四皓豈難求。

問雲雲答語皆眞。我亦當時洒落人。莫道心中有査滓。邇來無處避風塵。
月沙先生集卷之三十八
 記 下
三角山記 a_070_128b


還自金剛。余懷悄然不樂。眞唐人所謂峴山回首望。如別故鄕人者也。經年禮部。接應文墨。益不適意。連上三章乞解官。孤坐書室中。門外忽有剝啄聲。問之。乃重興老釋性敏,沙彌天敏也。性敏。余空門友也。約遊三角素矣。有書曰。山中霜晩。楓葉政酣。過數日則衰矣。若有意來訪。毋失此時云。余方遐想蓬萊。飄然有御風浮游之意。得此書。意不自制。卽理屐戒行。顧獨行殊寂寥。正想間。申丈子方適有書至。余覆書曰。山僧邀我賞楓菊。我070_128c今行矣。子若有意。便可相待於弘濟橋間。且山中不可無篴。君家笛奴。可卽携去也。所謂笛奴。卽億良。以篴名擅長安。亦余舊識也。附書去訖。念申丈之寄我書。我之要申丈行。俱非素約。不能必其行。隣有桂城都正子齊。翩翩公子也。伻諭之卽諾。歸路。起而竝轡。朴甥大健亦隨。時癸卯九月十五日也。天敏引路。余與子齊。各携酒二榼。匹馬單童。掩面行。人莫有識者。路走一從者。招篴工李山守。從者來報曰。問於伶師李龍壽。則山守不在云。余與子齊悵然而行。至弘濟橋。子方不來。又悵然。到重興石門。子方坐石上。迎謂曰。何來遲也。我等候多時070_128d矣。但笛奴則已隨人宴云。恨君書晩也。余以意外得子方爲幸。不暇他念。行至閔漬巖洞口。篴聲出自溪水間。諦聞之。似億良聲。從者覘之。果然。方隨申平川諸公酣宴云。余使從者諭之而去。到寺門日纔下舂。性敏與諸僧。顚倒迎坐月臺。子齊渴甚。解榼吸冷酒一椀。仍勸余共之。忽聞篴聲自遠而近。俄有一人來拜視之。億良也。問何以得脫。則曰。聞從者之言。不敢後。托患河魚。從間道來云。余與諸君拍手歡甚。卽令吹一曲。賞以大杯。少焉月已上前峯矣。秋天寥廓。無一點雲。山空谷靜。萬籟俱沈。笛聲淸徹。如從緱嶺來。夜深聯被僧房。懸燈臥話。070_129a依然少年負笈時也。早起步下山映樓舊址。仍訪響玉灘。時微霜纔過數夜。楓葉如染猩紅。靑松黃菊。競姸於溪壑。眞是錦繡世界。余謂子方曰。性敏不欺余矣。子方笑曰。君不欺我矣。余曰。君亦不負約矣。遂相與胡盧。仰見三角。翠色突兀。呼僧問白雲臺路。則僧曰。亂後絶無來往。路絶久矣。雖居僧亦不曾一見。只露積峯微有樵路。而上頭則難上云。余謂子方曰。吾儕俱已白髮。此行亦偶然。今來不上一峯。則後期其可必乎。子方曰。吾年長君十歲。何望陟危峯乎。早食畢。登寺後小庵。朴甥尋小徑欲上露積峯。余策杖隨之。子方謂子齊曰。吾二人070_129b豈忍獨後。貽譏於月沙乎。遂先後攀躋。怪石錯道。十步九顚。及到峯下。巖峻逕昃。絶無着足處。天敏與二僧先上。從石罅用木爲梯。垂帶引之。束身而上。始得窮最高頂。頂窄僅可坐十餘人。茫不可俯視。合眼定神。扶携互依。少憩而望之。西南大海。遠自靑齊。浮雲落日。銀界茫茫。目力有盡。而望勢無際。所可記者。水落,峨嵯,冠岳,淸溪,天磨,松岳,聖居諸山。纍纍如丘垤。月溪峽拆。驚波西注。漢水一帶。如拖氷練。彎回屈曲。環繞王都。遙峯亂嶼。隱見雲際。老僧指而示余曰。彼爲某山。此爲某水。余時惝怳不能辨。第唯唯而已。都城百萬家。逼近不能見。070_129c但見脚底炊煙粧點一活畫。雲隙露一螺髻。知是終南山也。渴喉生塵。急解酒沃之。興酣傾盡數壺。余醉而歌。子齊起舞。笛聲隨風散入層霄。恍似劉安鷄犬遺響白雲。眞一三淸夢遊也。坐間望見石門上。有人昂首揮白衣若有招者。余等訝之而不解。所以興盡下山。酒壺亦傾。歸路似捷。俄頃之間。已到寺。回視杖屨之地。杳如隔世。諸僧具軟泡勸飯。臥蒲團歇定。忽有人來叩曰。俺是老樂師李龍壽弟子某也。老師昨因從者尋笛聽。知宗伯老爺有此行。今朝與琴手朴某。載酒迎候於閔漬巖。望見諸公在半空上。恐久不下。向來揮衣而呼者。卽俺070_129d等也。老師敢請歸路少駐。畢賞武陵秋色。余與子方。驚嘉相顧曰。李樂師。今之李龜年也。風致乃如是也。遂別山僧。緣溪信行。爭流競秀。應接不暇。纔出洞門。李樂師已抱琴迎拜。時秋漲不盡。水聲激激。奇石嵌空。玲瓏可愛。長松掩映。蒼翠襲人。余與諸君。赤足踏流。解衣坐石。行廚迭薦。肴核狼藉。或流觴競飮。或擧網得魚。子齊折楓枝揷頭上。余摘菊花泛酒杯。醉後樂甚。拍手蹈足。淸絃妙曲。較工爭奇。皆千古希聲。子方曰。三人固是國手。而今日更覺十分淸絶。豈地勝而然耶。三人曰。非但地勝。今日幸遇群仙之會。俺等亦情興俱到。音調自高。若070_130a有神助也。日暮群起。俁俁亂舞。醉後逬馬路上。笛不輟而琴亦時奏。行人望之如神仙。少焉月從東上。余復興發。馬上引滿大白。黃昏上沙嶺。先走人少寛門限。到城外。萬井無人。月色如晝。問餘樽尙多。呼門將出拉之。共坐洗盞更酌。爛奏數曲。醉不知返。及到家。夜已三鼓。
 군정편 3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