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조선의 산수

지리고(地理考) 13 조선의 산수

아베베1 2012. 1. 12. 23:24

 

 ▶ 이미지사진은 태안반도의 여섬의 모습 (2011.11. 솔의향기길 트레킹시 담았다 )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 백악(白岳) -혹은 북악(北岳)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한성부(漢城府)의 경내에 있다. 본조(本朝) 초에 조선국의 왕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국성(國城)의 북쪽에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왕성에 웅거해 있으면서 북악산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향해 있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에는 백악이 있다.
○ 용두봉(龍頭峯) -혹은 용산(龍山)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조선국의 한강 동쪽에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이르면 한강 가에서 잔치를 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배를 띄워 용두봉에 올라가 강산의 승경(勝景)을 두루 구경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각산은 경도(京都)의 진산(鎭山)으로, 남쪽으로 문수봉(文殊峯)에 이르러 백악(白嶽), 응봉(鷹峯), 인왕산(仁王山)이 되는데, 왕궁(王宮)이 거기에 있다. 낙산(酪山)이 그 왼쪽에 솟아 있고, 무악(毋岳)이 그 오른쪽에 걸터 있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서 공읍(拱揖)하고 있고, 한강이 그 남쪽을 흐르니, 이곳은 참으로 만대토록 영원할 크나큰 터전이고 하늘이 만들어 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이다. 백악은 혹 북악(北岳)이라고도 하는데, 도성 안 정북쪽에 있다. 목멱산은 바로 동월(董越)의 《조선부》에서 말한 남산이다. 용두봉은 바로 잠두봉(蠶頭峯)으로, 혹 용산이라고도 하며, 양화도의 동쪽 강 언덕에 있다.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 마천령(磨天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천령은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으며, 조선에서는 동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천령은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
○ 극적혼산(克敵昏山)
《금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연골사호(烏延鶻沙虎)는 갈라로(曷懶路) 극적혼산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 북쪽 지역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영강산(永岡山)ㆍ올평산(兀平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영강산은 함흥 주변에 있다. 또 올평산이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을리골령(乙離骨嶺)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철령(鐵嶺) -안변부(安邊府)의 남쪽에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소백산(小白山) -바로 백두산의 남쪽 봉우리로 압록강이 발원하는 곳이다-ㆍ충천령(沖天嶺) -삼수부(三水府)의 서쪽에 있다-ㆍ증산(甑山) -단천부(端川府)의 서쪽에 있다-ㆍ회산(檜山) -이원현(利原縣)의 서쪽에 있다-ㆍ성대산(聖代山) -북청부(北靑府)의 북쪽에 있다-ㆍ입원산(立元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도안산(道安山) -정평부(定平府)의 남쪽에 있다-ㆍ비백산(鼻白山) -정평부의 북쪽에 있다-ㆍ우선산(遇仙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박산(大博山) -영흥부(永興府)의 서쪽에 있다-ㆍ반룡산(盤龍山) -문천군(文川郡)의 서남쪽에 있다-ㆍ검화산(劍華山) -바로 검봉산(劍峯山)의 잘못된 표기로, 안변부(安邊府)의 서남쪽에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백산 이하는 압록강조(鴨綠江條)에 나오고, 증산은 두만강조(豆滿江條)에 나오고, 회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온다.
○ 적유령(狄踰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삭주(朔州)의 서북쪽에 적유령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적유령은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에 있다.
○ 소철산(小鐵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철산은 압록강의 동쪽 강 언덕, 의주(義州)의 경내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곳이다. 또 서남쪽은 요동 경내의 승복도(僧福島)와 피도(皮島)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철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용골산(龍骨山) -어떤 데에는 용호산(龍虎山)으로 되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골산은 용주성(龍州城)의 동쪽에 있다. 용주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동녕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군(龍川郡)이며, 용골산은 용천군의 동쪽에 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호산은 용천군의 진산(鎭山)이다.
○ 웅골산(熊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골산은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웅골산은 철산군의 동쪽에 있다.
○ 장화산(長花山)ㆍ천성산(天聖山)ㆍ영산(靈山)ㆍ향산(香山)ㆍ웅화산(熊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산은 철주(鐵州)의 서남쪽에 있다. 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철주는 지금의 철산군이며, 장화산은 철산군의 서남쪽에 있다.- 천성산은 은주(殷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며, 천성산은 은주현의 동북쪽에 있다.- 영산은 선주(宣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주는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며, 영산은 선천부의 동남쪽에 있다.- 향산은 연주(延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며, 향산은 영변부의 동쪽에 있는데, 어떤 데에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웅화산은 곽주(郭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곽주는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곽산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을 웅화산에 해당시키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상의 주(州)는 모두 동녕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성산은 은주의 동북쪽에 있고, 영산은 선주의 서남쪽에 있고, 웅화산은 곽주군의 동북쪽에 있다. 또 육령산(育靈山)이 선주군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가 살펴보건대, 육령산은 영산(靈山)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한 것인 듯하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천군(龍川郡) 성의 동쪽에 있다.
○ 굴암산(屈巖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굴암산은 정원부(定遠府) 성의 동쪽에 있는데, 바위 골짜기가 구불구불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부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여지승람》에는 굴암산(窟菴山)으로 되어 있는데, 굴암산은 구성부의 동쪽에 있다.
○ 천마산(天馬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마산은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는 마산(馬山)으로 되어 있다. 천마산은 옛 정주의 북쪽에 있다.
○ 능한산(凌漢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산군 성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능한산은 곽산군의 동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 서쪽 강 언덕에 능한산이 있다.
○ 봉두산(鳳頭山)ㆍ가산령(嘉山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두산은 바로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산령이 가장 높은데, 그 꼭대기에는 ‘효성(曉星)’이라고 하고 ‘망해(望海)’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모두 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두산은 가산군 북쪽에 있다. 가산령이 《여지승람》에는 서문령(西門嶺)으로 되어 있는데,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산령은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가산군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한 것이다.
○ 마두산(馬頭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寧州)의 동쪽에 있다. 영주는 동녕로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며, 마두산은 안주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의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역시 마두산이 있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과 《대명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은 바로 한 산이다. 영주는 영주(寧州)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천보산(天寶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에 있는데, 산에는 사리(舍利)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보산은 영유현(永柔縣)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서쪽 경계에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장수를 파견해 천보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마읍산(馬邑山)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마읍산이 평양부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노양산(魯陽山) -혹은 용산(龍山),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ㆍ금수산(錦繡山)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는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고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금수산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池]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수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평양의 진산(鎭山)이다.
○ 위산(葦山)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위산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산은 평양부의 서남쪽에 있다.
○ 모란봉(牧丹峯)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계사년(1593)에 대군(大軍)이 평양성에 다가가자 왜적들이 모란대(牡丹臺)를 지키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모란봉은 금수산에 있다.
○ 토산(兔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묘(箕子墓)는 평양성 서북쪽 모퉁이의 토산에 있는데, 평양성과의 거리가 반 리도 채 안 되며, 산세가 몹시 높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 건복산(乾伏山)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적과 통하게 하였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평양의 건복산 기슭에서 만났다.
○ 관문산(觀門山)ㆍ화산(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土山縣)의 북쪽에 있다. 토산현은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여지승람》에는 관음산(觀音山)으로 되어 있다. 관문산은 상원군의 북쪽에 있다.-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화산은 상원군의 동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의 북쪽에 있고,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는데, 모두 토산현 경계의 큰 산이다.
○ 금당산(金堂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黃州) 삼화현(三和縣)의 서북쪽에 있다. 황주는 동녕로에 속하며,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다섯 현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당산은 삼화부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 삼화현의 서북쪽에 있다. 지(志)에 이르기를, “삼화는 황주에서 서남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정방산(政方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방산은 황주의 경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산은 황주의 남쪽에 있다.
○ 자비령(慈悲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송나라 순희(淳煕) 2년(1175)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자비령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조위총이 복주(伏誅)되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西京) 이하 60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동녕로를 설치하고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서흥부(瑞興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평양에서 경도(京都)로 통하는 옛길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강역고(高麗疆域考)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명 파령(巴嶺)이라고도 한다. 《중주집(中州集)》을 보면, 왕적(王寂)의 ‘송장중모사삼한시(送張仲謀使三韓詩)’에 이르기를, “압강에선 도엽이 아침에 건너는 걸 맞이하고, 파령에선 송화로 밤중에 탕 끓이리라.[鴨江桃葉朝迎渡 巴嶺松花夜煮湯]” 하였는바, 중국 사람들도 파령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에서 평안도 지역이 특별히 상세하여, 매번 이르기를, “주(州)는 동녕로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원나라 때 절령(岊嶺) 북쪽 지역이 동녕로에 속하여 산천의 이름이 원나라의 판도(版圖)에 실려 있으므로 《대명일통지》를 찬수하는 자가 상세하게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개막산(蓋幕山) -삭주(朔州)의 북쪽에 있다-ㆍ수양산(首陽山) -해주(海州)의 동쪽에 있다-ㆍ구금산(駒芩山) -황주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ㆍ악산(嶽山) -바로 약산(藥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변부의 서쪽에 있다-ㆍ이산(耳山) -영변부의 북쪽에 있다-ㆍ백벽산(白碧山) -운산군(雲山郡)의 서쪽에 있다-ㆍ태조산(太祖山) -안주(安州)의 동쪽에 있다-ㆍ대목산(大木山)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로, 강동현(江東縣)의 북쪽에 있다-ㆍ무학산(舞鶴山) -강서현(江西縣)의 북쪽에 있다-ㆍ부석산(傅石山)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로, 송화현(松禾縣)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막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오고, 악산 이하는 청천강조(淸川江條)에 나오고, 백벽산은 대령강조(大寧江條)에 나오고, 태조산 이하는 대동강조(大東江條)에 나온다.
○ 성불령(成佛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불령은 북쪽으로는 산을 베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개는 평산부(平山府)의 서쪽에 있다.
○ 총수산(蔥秀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수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해 있는데, 삐쭉 솟아 있어서 빼어나게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산(聰秀山)인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일찍이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총수산은 평산부의 북쪽에 있다.
○ 노고달령(奴古達嶺)
《요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북도(北道)를 경유해 진격하여 노고달령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패주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을 보면, “소배압이 북도를 경유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의 고개에 이르러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하였는바, 노고달령이 개성의 서쪽에 있음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송악(松嶽) -혹은 숭산(崧山)이나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해 있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는 송산(松山)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악은 개성부의 북쪽에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숭산은 개성부에 있는데, 일명 숭악(嵩岳)이라고도 한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웠다.
○ 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天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거(聖居), 송악(松嶽), 천마(天磨)는 모두 산 이름이다. 송악은 바로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성거산과 천마산은 동북쪽에서 뻗어나왔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하늘에 꽂힌 듯이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봉우리는 마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운데 한 봉우리는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낮아서 마치 시자(侍者)의 모습과 같다. 산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보기에 매우 좋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거산과 천마산은 모두 송악의 북쪽에 있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흥동(大興洞)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木蓮花)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 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오봉봉(五鳳峯)
《무몽원집(無夢園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지(志)를 보면, 오봉봉은 개성부에 있는데, 봉 아래에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다.
○ 오관산(五冠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오관산은 경기 장단부(長湍府)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마치 관(冠)과 같이 둥글게 모여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역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평산령(平山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산령은 개성부에서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흙 빛깔이 모두 붉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도봉산(道峯山)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원(淸源) 아래 제9대인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봉산은 양주(楊州)의 남쪽에 있다.
○ 금강산(金剛山)
《화엄경(華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더불어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한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은 조선의 강원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그 이름이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로부터 동방에 금강산이 있어 법희보살(法喜菩薩)이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로 인하여 금강산이라고 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 안에 있다. 일백 곳에서 흘러나와 날리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져 내려 그 형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만폭동이라고 한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산봉우리가 있어 오인봉(五人峯)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이 하나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탓에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칡넝쿨을 부여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가운데가 방아 절구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관음보살이 빨래를 한 곳이다.”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면 빠른 여울물이 돌에 엉키면서 벼랑에 부딪치는데, 물방울이 눈처럼 휘날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구슬을 뿜고 눈을 흩날리면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은 12층이고, 작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만폭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아래의 못을 주연(珠淵)이라고 한다. 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귀담(龜潭)이라고 부른다. 또 한 못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화룡담(火龍潭)이라고 한다. 그 위에 봉우리가 있는데,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만폭동 안에 보덕굴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쇠 기둥을 바깥쪽에 세운 다음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다가 만들고는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하였다. 관음각을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손으로 만질 수 없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세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포구산(浦口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포구산은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동쪽으로 9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포(高城浦)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계단과 같이 층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 같은데, 돌의 빛깔은 모두 희어서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한계산(寒溪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계산은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 산 위에는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바로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수백 척이나 떨어져 내려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며, 계곡의 물은 이리저리로 흘러서 무려 36번이나 건너야만 한다. 나무들은 마치 갈대자리를 말아 세운 듯이 위로 하늘에 솟았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하며,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으며, 반석이 평평하여 둘러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으며, 가느다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는데, 바위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고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있다. 이에 마치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다. 층층다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서 으뜸이다.
○ 분려산(分黎山)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는 분려산이 있다. 분려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이다. 분려산은 한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니, 금강산이 아니면 바로 오대산(五臺山)이다.
○ 오대산(五臺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의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나온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릉(江陵)은 옛 명주(溟州)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三韓)에는 12동천(洞天)이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동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산은 강릉부의 서쪽에 있다.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산(單單大山)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가 통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함경도 검산(劍山)의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철령, 금강산, 오대산에 이르기까지가 대관령인데,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는바, 바로 단대령이다.” 하였다.
○ 황룡산(黃龍山) -흡곡현(歙谷縣)의 서쪽에 있다-ㆍ추지령(秋池嶺) -바로 추지령(楸池嶺)의 잘못된 표기로, 통천군(通川郡)의 서쪽에 있다-ㆍ두사산(頭蛇山) -바로 두타산(頭陀山)의 잘못된 표기로, 양구현(楊口縣)의 북쪽에 있다-ㆍ장산(張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오갑산(五甲山)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김화현(金化縣)의 북쪽에 있다-ㆍ공작산(孔雀山) -홍천현(洪川縣)의 동쪽에 있다-ㆍ치악산(雉岳山)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다-ㆍ우두산(牛頭山)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ㆍ관악산(冠岳山) -과천현(果川縣)의 서쪽에 있다-ㆍ수리산(修理山) -안산군(安山郡)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산 이하의 산들은 해조(海條)에 나오고, 오갑산 이하의 산들은 한강조(漢江條)에 나온다.
○ 임존산(任存山)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서부(西部)의 임존산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임야기산(任射岐山)으로 되어 있다.
○ 부용산(富用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용창산(富用倉山)은 바로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이다. 그 산은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으며, 산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 둔 곡식이 많은데, 변경(邊境)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쓰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것이므로 부용(富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홍주산(洪州山)ㆍ동원산(東源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루어져 있다. 또 동쪽에는 금이 산출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 위에는 못[潭]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충주(忠州)의 서쪽 경계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홍주가 이 산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조금 동쪽에 동원산이 있는데, 금이 산출된다.” 하였다.
○ 소석산(小石山)
《후위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긴 뱀처럼 흉악한 것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석산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 월악산(月嶽山)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충주를 도륙하자, 사람들이 월악사(月嶽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월악산은 충주의 동쪽에 있다.
○ 속리산(俗離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리산은 충청도 보국현(報國縣) -삼가 살펴보건대, 보은현(報恩縣)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 있다. 산봉우리 아홉 개가 뾰족하게 솟아 있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고 일컬었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꼭대기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층이 쌓인 돌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공중에 높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며, 그 너비는 사람 3000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문장대 위에는 가마솥만 한 구덩이가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는다. 이 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서 허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팔교(八橋)와 구요(九遙)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 끝인 듯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보면 또다시 멀고 멀다. 이렇게 아홉 번을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구요라고 한 것이다. 구요 속에는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져서 흐르는데, 한 굽이마다 하나의 다리가 있어, 도합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교라고 한다. 첫 번째 다리는 수정교(水精橋)로,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그 각 속으로 다닌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갈령(葛嶺) -마땅히 부여현(扶餘縣)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백제 성읍조(百濟城邑條)에 나온다.
○ 차현산(車見山) -바로 차현(車峴)의 잘못된 표기로, 공주(公州)의 북쪽에 있다-ㆍ가야산(加耶山) -해미현(海美縣) 북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조(海條)에 나온다.
○ 조령(鳥嶺) -주흘산(主屹山)을 덧붙인다.
《광여기(廣輿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충주에 있는데,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다.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경주(慶州)의 서북쪽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尙州)의 경계에 접해 있다.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는데,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관목(灌木)이 우거져 있어서 말을 타고 줄지어서 갈 수가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남도(南道)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21년(1593)에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버리고 도망치자, 별장(別將) 유정(劉綎)이 상주에서 왜적들을 추격해 조령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험고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별장 사대수(査大受)가 충주에서 괴산감(槐山監)으로 넘어가 조령의 뒤편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책을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서쪽으로 27리 되는 곳에 있다. 주흘산은 문경현 북쪽에 있으면서 문경현의 진산(鎭山)인데, 조령과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명시종(明詩綜)》을 보면, 조선 사람인 이효칙(李孝則)의 조령(鳥嶺) 시가 실려 있는바, 그 시에 이르기를,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秋風黃葉落紛紛 主屹山高半沒雲]”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령(竹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령은 충주의 동쪽에 있는데, 구부러진 길이 빙빙 돌아서 자못 험준하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왕경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달아났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노음산(露陰山)
《정지거시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운흘(趙云仡)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음산은 상주의 서쪽에 있다.
○ 빙산(氷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빙산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동남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빙산의 큰 바위아래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폭이 4척 8촌, 가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아래에서 곧장 밑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한 길이며, 길이는 겨우 한 길까지만 잴 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구부러져서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부터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굳게 얼다가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도산(島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산은 울산군(蔚山郡) 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마귀(麻貴) 등이 울산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자, 왜적들이 모두 도산으로 달아나 산 앞에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세우고 버티면서 지켰다. 도산은 울산성보다 높은 데다가 왜적들이 또 그 위에 새로 석성(石城)을 쌓아 몹시 견고하였다. 이에 중국 군사들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는 패해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산은 울산부(蔚山府)의 남쪽에 있다.
○ 백석산(白石山)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ㆍ청량산(淸涼山) -영양현의 서쪽에 있다-ㆍ모자산(母子山) -영천현(永川縣)의 북쪽에 있다-ㆍ파음산(巴音山)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로, 상주(尙州)의 서쪽에 있다-ㆍ적암산(赤巖山)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로, 무주부(茂州府)의 동쪽에 있다-ㆍ화악산(華岳山) -밀양부(密陽府)의 북쪽에 있다-ㆍ금오산(金鼇山) -경주(慶州)의 남쪽에 있다-ㆍ윤산(輪山) -동래부(東萊府)의 북쪽에 있다-ㆍ웅산(熊山) -웅천현(熊川縣)의 북쪽에 있다-ㆍ무계산(武溪山)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동강조(洛東江條)에 나온다.
○ 지리산(智異山) -혹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두시전주(杜詩箋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지(志)를 보면, 지리산은 남원부(南原府)에서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진(女眞)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산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른다.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 시(詩)의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에 대한 주석과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에 있는데, 바로 남원의 남쪽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글과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두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다.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줄로 통해 있다. 몸을 구부리고 올라가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사방이 모두 기름진 옥토(沃土)라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 구정봉(九井峯)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석(動石)은 월출산(月出山) 구정봉 아래에 있다. 세 개의 돌이 층암(層巖) 위에 튀어나와 있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꼭대기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그 무게는 비록 수백 명을 동원해도 움직일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석(靈石)이라고 칭하며, 군(郡)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구정봉은 영암현(靈巖縣) 월출산에 있다.
○ 황산(黃山)
《유서찬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충청도는 옛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황산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은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의 서쪽에 있는바, 충청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모악산(母岳山) -태인현(泰仁縣) 동쪽에 있다-ㆍ무목산(無木山)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로, 광주(光州)의 동쪽에 있다-ㆍ송경산(松京山)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로, 순천부(順天府)의 서쪽에 있다-ㆍ천관산(天冠山) -장흥부(長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용잠산(龍岑山)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로, 담양부(潭陽府)의 서쪽에 있다-ㆍ추월산(秋月山) -담양부의 서쪽에 있다-ㆍ한라산(漢拏山)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악산은 금강조(錦江條)에 나오고, 무목산 이하의 산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 서산(瑞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탐라(耽羅)의 바다 속 남쪽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땅이 뒤흔들려서 우레가 치는 듯하였는데, 7일 밤낮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갰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둘레는 40여 리이다.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석유황(石硫黃) 같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전공지가 그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산은 정의현(旌義縣)에 있다.

이상은 경내에 있는 산(山)이다.

○ 장자도(獐子島)
《초학집(初學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적(敵)이 조선을 약탈하여 황해도(黃海道)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욱(周文郁)이 수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장자도(獐子島)에 신인(神人)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뭇등걸을 타고 바다에 떠 있게 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장자도는 지금의 신도(薪島)로, 용천부(龍川府)의 남쪽에 있다.
○ 석도(蓆島)ㆍ초도(椒島)ㆍ가도(椵島) -혹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東寧路)의 선주(宣州)는 석도진(蓆島鎭)을 관할한다. ○ 맹주(孟州)는 초도진(椒島鎭)과 가도진(椵島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도는 바로 석도(席島)인 듯한데, 은율현(殷栗縣) 서쪽에 있다. 초도는 풍천부(豐川府) 서쪽에 있고, 가도는 철산부(鐵山府) 남쪽에 있다.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1년(1621)에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을 구원하러 갔다가 피도에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피도는 또한 동강(東江)이라고도 하는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둘레가 80리이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 해안에서 바닷길로 80리를 가면 바로 청(淸)나라 경계이며, 그 동북쪽 바다 너머는 바로 조선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피도는 바로 가도이다.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진한 눈썹과 같으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새가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礁石)이 많을 뿐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도와 소청도는 모두 장연현(長淵縣)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도는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명 대청서라고도 한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그의 형의 아들인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고려로 내쫓고서는 그로 하여금 대청도에 살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다. 대청도와 가까운 곳에 또 소청서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대청도 안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궐 터가 있어 부서진 기왓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청요(靑瑤)이다.
○ 몽금도(夢金島) -장연현(長淵縣)의 서쪽에 있다-ㆍ정족도(鼎足島) -초도(椒島) 근처에 있다-ㆍ사야구미(沙也九味) -대청도 근처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백령도(白翎島) -대청도 서쪽에 있다-ㆍ교동도(喬桐島) -강화부(江華府)의 서쪽에 있다-ㆍ각화도(覺華島) -바로 강화도이다-ㆍ연자도(硯子島)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부도(大富島)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합굴(蛤窟)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그 산이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주민들도 많이 산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가면서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다.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급수문(急水門)과 비교해 볼 때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굴은 마땅히 예성강(禮成江)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개성부(開城府) 남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사는 백성들도 매우 많다. 산등성이에는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바다를 오가는 자들은 모두 제사 지낸다.
○ 자연도(紫燕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연도는 바로 광주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館舍)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쓰여 있다. 주민들이 사는 초가집도 많이 있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연도는 인천부(仁川府)의 서쪽에 있다.
○ 마전도(麻田島)ㆍ고사도(古寺島) -이들 두 섬은 마땅히 초도(椒島)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ㆍ득물도(得勿島) -어떤 데에는 덕물도(德勿島)로 되어 있으며,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 및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구두산(九頭山)ㆍ당인도(唐人島)ㆍ쌍녀초(雙女礁)ㆍ화상도(和尙島)ㆍ우심서(牛心嶼)ㆍ계심서(鷄心嶼)ㆍ섭공서(聶公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9일에 마도(馬島)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하여 맑고 윤기가 도는 것이 보기 좋았다. ○ 당인도(唐人島)는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며,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 쌍녀초는 그 산이 아주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이 없다. 앞에 있는 산은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는 않았다. 뒤에 있는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 출발해 이어 이 쌍녀초를 지나갔다. ○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다. 산속에는 호랑이가 많이 산다. 옛날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바로 그 유적(遺蹟)이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 섬을 화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 우심서는 작은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있어 그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牛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을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未時) 정각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몹시 뾰족한데 바짝 다가가서 보면 마치 담과 같다. 대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로 보는 것과 세로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화상도는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위에는 엽로사(葉老寺)가 있다. ○ 당인도는 청주(淸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구두산과 서로 가깝다. ○ 쌍녀초는 《고려도경》을 보면 섬과 같다고 하였는데, 순전히 돌로 이루어진 섬을 초(礁)라고 한다.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두산은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숲의 나무가 몹시 무성하게 자라 있다. ○ 우심서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또 계심서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를 보면, 고려의 당인도에서는 만화초(滿花草)가 산출된다고 하였는데,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당인도는 바로 이곳이다. 이제 《고려도경》의 해도일록(海道日錄)을 근거해 보면, 8일에 해미현(海美縣)의 마도(馬島)에서 출발해 북쪽을 향해 가 9일에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등 여러 섬을 지나고, 이날 인천부(仁川府)의 자연도에서 묵었다. 그런즉 이들 여러 섬은 모두 태안(泰安) 앞바다 북쪽에서 인천 앞바다 남쪽 지역에 있는 것이다.
○ 아자섬(鵶子苫)ㆍ마도(馬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자섬은 또한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마도는 대개 청주(淸州)의 경내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를 평상시에는 이곳에 방목(放牧)해서 기르므로 마도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고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도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나라 안의 방목지(放牧地)이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고 하였다. 알자섬과 가깝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알자섬은 청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도는 해미현의 서쪽에 있으며, 알자섬은 바로 태안군(泰安郡)의 갈도(葛島)이다. 《고려도경》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軋)이라고 한다.”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이르기를, “고려의 방언에 삿갓을 개(蓋)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본주(本注)에 “개(蓋)의 음은 갈(渴)이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알(軋)과 갈(葛)은 같은 음임이 분명하다.
○ 용도(龍島) -태안군의 북쪽에 있다-ㆍ원산도(元山島)ㆍ오평도(烏平島) -이들 두 섬은 모두 태안군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군산도(羣山島)ㆍ횡서(橫嶼)ㆍ자운섬(紫雲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羣山島)는, 산의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러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 군산정(羣山亭)이 있으며,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주민들의 집은 10여 호가 있다. ○ 횡서(橫嶼)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한 산이 특히 크며,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돌 밑뿌리를 둘러 있다. 한 개의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며,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 횡서에서 묵었다. 일찍 출발하였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였는데, 그것을 자운섬(紫雲苫)이라고 하였다. 가로지른 봉우리가 들쭉날쭉 포개져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푸른빛이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산도는 만경현(萬頃縣)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고군산도(古羣山島)라고 한다. 횡서와 자운섬은 마땅히 군산도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는 전주(全州)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서 성(城)과 같다. 그 남쪽에는 횡서가 있는데, 역시 안섬이라고도 한다.
○ 궤섬(跪苫)ㆍ춘초섬(春草苫)ㆍ빈랑초(檳榔礁)ㆍ보살섬(菩薩苫)ㆍ죽도(竹島)ㆍ고섬섬(苦苫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궤섬(跪苫)은 백의도(白衣島)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춘초섬(春草苫)은 궤섬의 바깥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에는 모두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면 울창하다. ○ 빈랑초(檳榔礁)는 형태가 빈랑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직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가리켜서 뱃사람들이 빈랑초라고 한다. ○ 보살섬(菩薩苫)은 고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일찍이 기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 죽도(竹島)는,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였으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들 가운데에는 또한 장(長)이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다. ○ 고섬섬(苦苫苫)은 죽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산의 생김새가 비슷한데, 역시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마치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살섬, 자운섬, 고섬섬, 춘초섬, 궤섬은, 《고려도경》을 보면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섬들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빈랑서(檳榔嶼)는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를 보면,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과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耽羅國)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지금 해미(海美), 태안(泰安), 남포(藍浦), 흥덕(興德) 등지에서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한두 곳이 아닌바, 《고려도경》 및 《수서》에서 칭한 죽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고섬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의 위도(蝟島)이다. 그 밖의 다른 섬은 전라도 서해에 있는 섬들이다.
○ 월서(月嶼)ㆍ난산도(闌山島)ㆍ백의도(白衣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서(月嶼)는 둘인데, 흑산(黑山)에서의 거리가 아주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하는데,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작은 배가 그 사이로 통행할 수가 있다. ○ 난산도(闌山島)는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벽같이 우뚝 서 있으며,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암초는 마치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 백의도(白衣島)는 세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비스듬히 자란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보기가 좋다. 또한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의도와 난산도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대월서와 소월서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에서 말한 세 섬은 나주(羅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 흑산도(黑山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매우 가깝다. 처음에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한데, 바짝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속에다가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의 바닷길을 보면, 이곳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그 당시의 관사(館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을 바꿨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는다. 섬 위에는 주민들이 사는 부락이 있는데, 나라의 대죄인(大罪人)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항상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적마다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까지 전달하는데, 봉화를 올리는 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宋史)》를 보면,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타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다시 5일 만에 고려의 흑산에 도착한다.” 하였고, 《원사》를 보면, “지원(至元) 5년(1268)에 일본의 정벌을 의논하면서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명하여 흑산도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였다. 이 섬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해도(海道)의 요충지로써, 고려에서는 흑산현(黑山縣)을 두었으며, 뒤에 나주에 속하였다. 나주에서의 거리가 뱃길로 900리이며, 둘레가 35리이다.
○ 백산(白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도(排島)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한 산이 보이는데, 아주 큰 것이 마치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으며, 햇빛이 쬐는 곳은 마치 옥같이 희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과 흑산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은 전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바로 백수산(白水山)이다. 당나라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高侃)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을 백수산에서 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은 흑산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 백수산을 끌어다 대었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 구룡도(九龍島)ㆍ고금도(鼓金島)ㆍ가덕도(加德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에 진린(陳璘)이 해상을 전담하여 관할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부총병(副摠兵)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등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전함(戰艦) 수백 척을 모두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고금도(鼓金島) 등 여러 섬에 정박시켜 두었다. 충청도에 구룡도란 섬이 있는데, 수족(水族)들이 신령스럽고 괴이스럽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절수영(浙水營)의 중군(中軍) 방일신(方一新)이 절병(浙兵) 3000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서 고금도에 주둔해 있는 등자룡에게 가다가 9월 29일에 이 섬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총을 쏘아 수족들을 놀래키자, 태풍이 갑자기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樓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 한꺼번에 뒤집어져서 몰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금도는 바로 고금도(古今島)의 음이 변한 것으로, 고금도는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있다. 가덕도는 웅천현(熊川縣)의 남쪽에 있고, 구룡도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추자도(楸子島)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5년(1740)에 소전현(蕭田縣)의 백성이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조선국의 추자도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자도는 영암군(靈巖郡)의 남쪽에 있다.
○ 한산도(閒山島) -어떤 데에는 안산도(鴈山島)로 되어 있다-ㆍ칠산도(漆山島)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고 한산(閒山)을 침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군사가 궤멸되어 드디어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서해 입구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도는 고성군(固城郡) 남쪽에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총병(摠兵)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계금(季金)과 우승은(于承恩)에게 남병(南兵)을 거느리고서 조선의 수병(水兵)과 함께 장기(長鬐), 진도(珍島)를 경유해 안산도(鴈山島)에 이르러서 의병(疑兵)을 펼쳐 방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산도는 한산도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산도는 경주의 서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서해 입구이다. 오른쪽으로는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가 막고 있어서 전라도의 외번(外藩)이 된다. 이곳을 한번 잃으면 연해변에 방비가 없게 되어, 천진(天津)과 등주(登州), 내주(萊州)가 모두 돛을 한 번만 올리면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한산도와 가까운 곳에 또 칠산도(漆山島)가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경주에 들어오고 한산도를 침입하면서 밤중에 칠산도를 습격하였는데, 관군이 궤멸되어 달아나 마침내 한산도를 잃었다. 이에 왜적들이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해서 함락시켰다.
○ 죽도(竹島)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도는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부산에 배를 정박시키고는 죽도를 왕래하면서 점차 양산(梁山), 웅천(熊川)을 핍박하였다. 얼마 뒤에 양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도는 울산부의 남쪽에 있다.
○ 송도(松島)ㆍ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송도, 울산, 부산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우산도는 바로 왜적들이 이른바 송도(松島)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한 섬으로, 사방 100리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때 그 나라를 토벌하여 정복하였다. 지금의 울진현(蔚珍縣)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하였고, 《수도제강》을 보면, “울진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을 천산도(千山島)라고 하는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하였다. 천산도는 바로 우산도의 잘못된 표기이며, 완릉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봉래산(蓬萊山)은 그 높이가 2만 리인데, 울이국(鬱夷國)이 있다.” 하였고, 왕유(王維)의 ‘송일본조감서(送日本晁監序)’에, “부상(扶桑)은 냉이 같고 울도(鬱島)는 부평(浮萍) 같으리라.” 하였는데, 울이국이나 울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절영도(絶影島)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ㆍ국도(國島) -안변부(安邊府)의 동쪽에 있다-ㆍ저도(豬島)ㆍ웅도(熊島) -두 섬은 영흥부(永興府)의 동쪽에 있다-ㆍ묘도(卯島) -바로 난도(卵島)의 잘못된 표기로,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ㆍ신도(薪島)ㆍ연도(連島) -두 섬은 덕원군(德源郡)의 동쪽에 있다-ㆍ화도(花島) -함흥부(咸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사도(沙島)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이상은 도서(島嶼)이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리고(地理考) 13

해동역사 속집 제15권
 지리고(地理考) 15
산수(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 환도산(丸都山)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도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동북쪽에 있다. 한나라 때 고구려의 왕 이이모(伊夷模)가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진(晉)나라 때에는 모용황(慕容皝)에게 격파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환도산은 압록강과 파저강(婆豬江) 사이에 있다. 고구려 환도성조(高句麗丸都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정현(赬峴)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5년(244)에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 고궁(高宮)이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정현(赬峴)에까지 이르러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성(丸都城)에 올라가 고구려가 도읍한 곳을 도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현과 환도산은 서로 이어진 것이다.
○ 요산(遼山) -지금의 혼하(渾河)가 나오는 장령(長嶺)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소요수조(小遼水條)에 나온다.
갈석산(碣石山)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살펴보건대, 장성은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갈석산은 지금의 압록강 서쪽의 책(柵)을 세운 곳 동쪽 머리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右碣石)은 바로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평주(平州)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은 지금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바, 이곳에서 말한 갈석과는 다르다. 고려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左碣石)이 되는바, 《통전》에서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우공추지(禹貢錐指)》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태강지리지》를 보면, “낙랑의 수성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하였고, 《통전》에는 이르기를, “지금 고려의 옛 경계 안에 있는데, 바로 몽염(蒙恬)이 수축한 바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왕백후(王伯厚)는 이르기를,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이 되고, 평주의 남쪽에 있는 것이 우갈석이 된다.” 하였는데, 이는 경문(經文)에 나오는 우(右) 자를 아래로 끊어 읽은 것이다. 김길보(金吉甫)는 고려에 있는 것을 좌갈석이라 하고, 사문도(沙門島)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발해(渤海)의 입구에 해당되는 철산(鐵山)을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이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갈석은 한 곳일 뿐인데 어찌 우갈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렇다면 도산(導山)의 글에 우 자가 없는 갈석은 좌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길보가 취한 바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 주필산(駐蹕山)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9년(645)에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을 크게 격파하고는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바꾸어 주필산이라고 고쳤다. ○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주필산은 구사(舊史)에 의거하면 본디 이름이 육산(六山)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산(首山)은 요양주(遼陽州) 서남쪽 15리에 있다. 해성현(海城縣)의 경계와 이어져 있는데, 일명 수산(手山)이라고도 하고, 또 주필산이라고도 한다. 《위지(魏志)》를 보면, “경초(景初) 2년(238)에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가 요동에 이르렀는데, 8월 병인 밤에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의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의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요양부(遼陽府)에 주필산이 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그 산꼭대기에 며칠 동안 주필하고서는 돌에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세속에서는 수산(手山)이라고 칭한다. 산꼭대기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으로 생긴 곳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정관 19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하고 백애성(白崖城)의 항복을 받은 다음 안시성(安市城)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는데, 고구려의 욕살(褥薩) 고연수와 고혜진이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이에 태종이 산에서 내려가 군사를 이끌고 임하자,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모두 항복하였다. 인하여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주필산이라고 고치고는 중서 시랑(中書侍郞)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서 그 공을 기록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곳에서 말한 주필산은 안시성에 있는바, 요성(遼城) 근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사(遼史)》에서 말한 바는 《당서》와 맞지 않는다. 《방여기요(方輿記要)》를 보면, “개주위(蓋州衛) 동쪽 분수령(分水嶺)의 여러 산은 바로 당나라 태종이 주필한 곳이다.” 하였다.
○ 금산(金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667)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진격하여 금산에 이르렀다.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의 군사를 대파하고는 고구려의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巖) 등 세 성을 함락시켰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27리 지점에 황금산(黃金山)이 있는데, 설인귀가 고구려의 군사를 금산에서 격파하였다고 하는 금산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를 보면, 금산은 마땅히 흥경(興京)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 석성산(石城山)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석성산은 개평현성(蓋平縣城)에서 동북쪽으로 1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일명 고려성산(高麗城山)이라고 한다. 세속에서 전해 오기를, 그 안에 용담(龍潭)이 있는데, 초하룻날 밤에 달이 보인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토인(土人)들이 이곳에 살면서 병란을 피하였다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이르기를, “석성산은 요양주(遼陽州)에서 동북쪽으로 57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횡산(橫山)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설인귀가 요동에 주둔해 있으면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을 만나 횡산에서 싸웠다. 고구려 군사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자 10여 명을 석성(石城) 아래에서 쏘아 죽였는데, 설인귀가 산 채로 사로잡았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악성(熊岳城)은 고구려의 성인데, 당나라 때 설인귀가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과 웅산(熊山)에서 싸우다가 활을 잘 쏘는 자를 석성에서 잡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를 가지고 《당서》를 참고해 보면, 웅산은 바로 횡산이며, 석성산과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다.
백석산(白石山)
《수서(隋書)》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설세웅(薛世雄)이 요동의 전역(戰役)에서 우문술(宇文述)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패하였다. 돌아올 적에 백석산에 주둔하였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당하였는데, 설세웅이 격파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석산은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 명왕산(明王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병산(東屛山)은 복주(復州)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명산(明山)이 복주위(復州衛)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명왕산이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 왕의 아들을 동명(東明)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다가 장사 지냈다. 지역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아마도 바로 이 산인 듯하다.” 하였다. 지금 복주의 동쪽에 있는 여러 산들 가운데에는 명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없다. 그리고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은 복주의 지역이 아니다. 현지(縣志)를 보면, 또 지금의 동병산이 바로 명산이라고 의심하여 드디어는 동명왕묘(東明王墓)를 능묘조(陵墓條)에 끼워 넣었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요양부에 명왕산이 있다.” 하였는바, 반드시 요양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금의 명칭이 달라서 상고할 수가 없다.
○ 역산(易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23년(649)에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 군사와 역산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新唐書)》에는 역산이 갈산(曷山)으로 되어 있다.- 에서 싸워 격파했다. 그날 밤에 고구려의 군사들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고신감이 또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역산은 마땅히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동남쪽 바닷가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천산(泉山)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겸모잠(鉗牟岑)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간(高侃)이 반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였으며, 또 천산에서 격파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수산은 바로 천산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모산(東牟山)천문령(天門嶺)
《신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渤海)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백성들을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보존하였는데,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지역이다. ○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대장군(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조칙을 내려 발해를 치게 하니, 대조영(大祚榮)이 도망쳤다.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모산은 영고탑(寧古塔)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 강역총론조(渤海疆域總論條)에 나온다. 천문령은 《대명일통지》에 의거하면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경계 안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장령자(長嶺子)인 듯하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주산(天柱山)은 승덕현성(承德縣城)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자, 발해의 대씨(大氏)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모산 지역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견고히 하였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심양위(瀋陽衛)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지금 -원문 빠짐- 정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는 없다. 그런즉 이 산이 바로 옛날의 동모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설은 매우 잘못되었다.
○ 녹산(鹿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가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다. ○ 주에 이르기를, “부여는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개 녹산은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이상은 경계 밖에 있는 산(山)이다.

보술수(普述水)
《후위서(後魏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몽(朱蒙)이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도중에 큰 강 하나를 만났다. 그런데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이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주몽이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른 다음, 거기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보술수는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건너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高句麗紇升骨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비류수(沸流水)
《삼국지》 관구검전(毌丘儉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5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 고궁(高宮)이 군사를 거느리고 비류수 가로 나아가 갈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고궁이 잇따라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환도(丸都)를 도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비류수는 환도성의 서쪽 경계에 있는바, 동가강(佟家江)과 서로 가까운 강인 듯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르기를, “비류수의 상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다.” 하였는데, 바로 이 물이다. 동사(東史)에서 성천부(成川府)의 비류강(沸流江)을 비류수에 해당시키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염난수(鹽難水)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서개마현(西蓋馬縣)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간다.
《명사(明史)》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화(成化) 3년(1467)에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건주여진(建州女眞)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조선의 왕이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강순(康純)을 보내어 1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과 발저강(潑豬江)을 건너게 하였는데, 구미(九獼)의 여러 채(寨)를 쳐부순 다음 많은 적을 참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발저강(潑豬江)은 바로 파저강(婆豬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가강(佟家江)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에서 남쪽으로 802리 되는 곳에 있는데, 통가강(通加江)이라고도 하며,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만나는데, 바로 옛 염난수(鹽難水)이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하였고, 《당서》 고구려열전을 보면, “압록수는 서쪽으로 염난수와 합류한다.” 하였고, 《성경통지》를 보면, “동가강은 그 근원이 장백산 남쪽의 분수령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샘이 골짜기 안에서 나와 모여 하나로 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합이민하(哈爾民河) 등 여러 물을 받아들이며, 압록강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에 ‘대충강(大蟲江)이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남쪽으로 4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은 용봉산(龍鳳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봉황성(鳳凰城)의 경계 안에는 대충강이 있다고는 들리지 않는바, 아마도 바로 동가강일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가강은 바로 파저강이다.
○ 소요수(小遼水) -남소수(南蘇水)를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에는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遼水)가 나오는 곳이다. 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서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북쪽으로 흘러 새외(塞外)를 지나간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요수는 그 근원이 요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대량수(大梁水)와 합류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하(渾河)는 승덕현(承德縣)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새외(塞外)에서 나와 흥경(興京) 경계 안으로 흘러들어서 요양주(遼陽州)의 서북쪽에 이르러 태자하(太子河)와 만나는데, 바로 옛 소요수이다. 살펴보건대, 지금 혼하는 그 근원이 장령자(長嶺子)의 납록와집(納綠窩集)에서 나오는데, 이를 납록하(納綠河)라고 한다. 납록하는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흘러 들어와 갈상아하(噶桑阿河)와 만나 혼하가 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흥경 경계 안을 지나는데, 이곳에 소패하(小貝河)가 있어서 개원현(開原縣) 경계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하며, 또 소자하(蘇子河)가 있어 흥경 경계로부터 서북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소수(南蘇水)는 《대청일통지》에 의거하면 흥경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남소성조(高句麗南蘇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대요수(大遼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대요수가 있는데, 그 근원이 말갈(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로 안시(安市)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시는 바로 당나라 문황(文皇)이 공격하였던 성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하(遼河)는 봉천부(奉天府)에서 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과 서쪽의 두 근원이 변경 밖에서 흘러와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개원현(開原縣)과 철령현(鐵嶺縣) 두 현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승덕(承德), 요양(遼陽), 해성(海城)의 서쪽을 지나며,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망평현(望平縣)에는 대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변경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요하는 구려하(句驪河)라고도 하며, 지금은 거류하(巨流河)라고 한다. 거류하는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이 있다.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너무 멀어서 상고할 수가 없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역시 장백산 서북쪽에 있는 여러 와집(窩集) 안에서 나와 흑이소하(黑爾蘇河) 등과 합류한 다음 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나가 서북쪽으로 흘러 등자촌(鄧子村)을 감돈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꺾어지면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마침내 서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명안패륵둔(明安貝勒屯) 동쪽 10리 되는 곳에서 변방에서 흘러온 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흘러 철령현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청하(淸河)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다시 쌍협구(雙峽口)의 서남쪽으로 들어가 두 물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내요하(內遼河), 외요하(外遼河)라고 한다. 다시 현의 서남쪽을 돈 다음 합해져서 하나가 된다. 개성(開城)에 이르러서 거류하가 되었다가 또 나누어 흐르다가 다시 남쪽에서 모여 해성현(海城縣)의 서쪽을 지나면서 태자하(太子河)와 합류하는데, 이곳을 삼차하(三汊河)라고 하며, 여기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하(河)는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나누어지는 곳이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진흙탕길 200여 리에 흙을 깔고 다리를 만들어서 건넌 곳으로, 지금도 이 지역 100여 리 이내에는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길을 갈 수가 없다. 강희(康煕) 58년(1719)과 옹정(雍正) 6년(1728)에 서로 잇달아서 길을 닦아 점차 평탄한 길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 흑이소하는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남쪽에 있는 고이낙와집(庫爾諾窩集)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른다. 그 서쪽의 한 근원은 바로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로, 그 근원이 고북구(古北口)에서 북쪽으로 5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몽고(蒙古)의 극서극등(克西克騰) 경계 안의 백이흑하이홍(百爾黑賀爾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고북구 바깥에 있는 몽고의 여러 주목지(駐牧地)를 지나면서 북쪽으로는 객라목륜하(喀喇木倫河)를 받아들이고, 남쪽으로는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서북쪽 변경 밖에 이르러서 흑이소하와 합류하여 변경으로 들어가서 요하가 된다. 《한서》 지리지나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한 요수의 근원은 모두 지금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지류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며, 동쪽에서 나오는 한 근원에 대해서는 《통전》에서 처음으로 말하였다.
○ 대양수(大梁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대량수는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소요수(小遼水)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자하(太子河)는 요양주(遼陽州)에서 북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옛날의 대량수로, 일명 동량하(東梁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살수선산(撒水禪山)에서 나와 위자곡(葦子谷) 동쪽에서부터 변방으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주의 서북쪽에 이르러서 혼하(渾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해성현(海城縣) 서북쪽에 이르러서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양현의 대량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에 이르러서 요하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동쪽 산으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흘러 혼하와 합류하여 소구(小口)가 되고,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또 태자하라고도 하며, 대량수라고도 한다.” 하였다. 《금사(金史)》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국명(國名)이 올로홀필자(兀魯忽必刺)이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태자하는 그 근원이 간라산(幹羅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500리를 흘러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이른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혼하에 이르러 합해져 소구가 된 다음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방여기요》를 보면, “태자하는 바로 옛 연수(衍水)로,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연수에 숨어 있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태자하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 오골강(烏骨江)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에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자,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을 성원하였다. ○ 주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부터 동북쪽 바다로 가면 오호도(五湖島)에 이르고, 다시 500리를 가면서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청니포(靑泥浦), 도화포(桃花浦), 행인포(杏人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을 지나서 오골강(烏骨江)에 이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골강은 바로 오골성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강으로, 압록강에서 서쪽으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고구려 오골성조(高句麗烏骨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귀단수(貴端水)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영휘(永徽) 6년(655)에 정명진(程名振) 등이 고구려를 치고자 요수(遼水)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와 맞서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격파하였다.
○ 살하수(薩賀水)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1년(668)에 이적(李勣)이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부여성을 습격해 왔는데, 이적이 이들을 살하수(薩賀水) 가에서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설하수(薛賀水)로 되어 있다. 설하수는 개원현(開原縣) 근방에 있어야 한다.
엄호수(淹淲水)ㆍ개사수(蓋斯水)
《후한서(後漢書)》 부여열전(夫餘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 북이(北夷)의 색리국왕(索離國王)의 시아(侍兒)가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왕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엄호수(淹淲水) -원주(原注)에, “지금 고구려 안에 개사수(蓋斯水)가 있는바, 이 강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였다.- 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떼 지어 물 위로 떠올랐으므로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너갔다. 이어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엄시수는 개원현의 북쪽에 있어야 한다. 동사(東史)에서 지금의 대정강(大定江)을 그에 해당시키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개사수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홀한해(忽汗海)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왕성(王城)은 홀한해에 임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호이합하(虎爾哈河)는, 영고탑의 동남쪽이 모두 이 물가이다. 그 근원은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경계에서 나와 옛 회령성(會寧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90여 리를 흘러 영고탑성의 남쪽을 감돈 다음 다시 꺾어져서 북쪽으로 700여 리를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간다. 당나라 때에는 홀한하(忽汗河)라고 하였고, 발해 대씨(大氏) 때에는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물로써 주 이름을 삼은 것이다.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발해의 왕성은 홀한해에 임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금나라 때에는 또 금수(金水)라고 이름하였는데, 세속에서 금(金)을 안출호(按出虎)라고 하는바, 안출호수(按出虎水)가 이곳에서 근원하므로 금원(金源)이라고 이르며, 건국하고는 이를 인하여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또 홀아해하(忽兒海河)라고 하였다.
오루하(奧婁河)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자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달아나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는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걸걸중상이 이미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나라를 세우고는 발해라고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루하는 승덕현(承德縣)에 있는데, 오루(奧婁)는 바로 읍루(挹婁)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루하는 태백산의 동북쪽, 홀한하와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성경통지》에서 승덕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미타호(湄沱湖)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에서는 세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미타호의 붕어[鯽]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미타호는 지금의 흥개호(興凱湖)인 듯하다.
속말수(粟末水)
《후위서》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이 3리 남짓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速末水)라고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속주(涑州)는 속말강(涑沫江)과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대개 속말강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동강은 길림 오라성의 동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이름은 송화강(松花江)이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諾尼江), 흑룡강(黑龍江) 등과 만나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옛 속말수(粟末水)이다. 《위서(魏書)》를 보면,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이 3리 남짓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라고 한다.” 하였고, 《당서》를 보면,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속말수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의 근원은 태백산에서 나와 북쪽에 이르러 타루하(它漏河)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성종(聖宗) 태평(太平) 4년(1024)에 조서를 내려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치게 하였다.”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를 보면, “상경로(上京路)에 혼동강(混同江), 송와강(宋瓦江), 압자하(鴨子河)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혼동강은 바로 송아리강(松阿里江)이다. 일명 압자하라고도 하며, 일명 속말강이라고도 하고, 일명 송와강이라고도 하고, 일명 송화강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혼동강은 개원성(開元城)에서 북쪽으로 15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온다. 옛 이름은 속말하(粟末河)이며, 세속에서는 송와강이라고 부른다. 북쪽으로 흘러 금나라의 옛 회령부(會寧府) 아래를 지나 오국성(五國城)에 도달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송화강은 개원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금나라의 옛 남경성(南京城)을 지난 다음 회배강(灰扒江), 혼동강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바, 이는 송화강과 혼동강을 두 강으로 여긴 것이다. 이제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 압자하를 혼동강으로 고쳤는바, 혼동강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오며,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송아리강(松阿里江)이라고 부른다. 《금사》 지리지에는 송와강(松瓦江)이 있는데, 이는 송아리강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 나오는 송화강은 바로 송와강의 글자가 변한 것이다. 《금사》 제기(帝紀)를 보면, ‘혼동강은 일명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한다.’는 글이 있는데, 이는 그 하류의 두 강이 서로 만나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혹자는 이 강을 송화강이라고 하는데, 이는 살합련강(薩哈連江)을 혼동강으로 여긴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건대, 금나라 세종(世宗)이 강신(江神)을 책봉(冊封)한 글에 이르기를, ‘강의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왔다.’ 하였는바, 이 강이 혼동강을 지칭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송와강이니 송화강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음을 따라서 글자를 취한 것으로, 이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강은 동쪽과 서쪽 두 개의 근원이 있다. 동쪽 근원은 장백산 산꼭대기의 연못에서 나와 여울이 되어 빠르게 흐르다가 천 길이나 되는 폭포를 이루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토랍고(土拉庫)라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개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대토랍고(大土拉庫), 서쪽에 있는 것을 소토랍고(小土拉庫)라고 부르며, 여기에서 수십 리를 가서 다시 합류해 흐른다. 그 동쪽에 또 낭목낭고하(娘木娘庫河)와 합극통길하(合克通吉河)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장백산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들어온다. 서쪽 근원의 물 역시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액흑눌음하(額黑訥音河)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새음눌음하(賽音訥音河)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장백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동쪽 근원의 물 및 여러 샘에서 나온 물과 합해져 한 물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하천에서 흘러오는 물을 모은 다음 주성(州城)의 동남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간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백도눌성(白都訥城)의 서쪽을 돈 다음 다시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諾尼江)의 물과 합류하고, 다시 동북쪽으로 돌아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호이합하(虎爾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6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흑룡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200여 리를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오는 오소리강(烏蘇哩江)과 합류하고, 다시 조금 꺾어져서 북쪽으로 흘러 걸륵아흑(乞勒兒黑)과 진비아합(眞飛牙哈) 등 여러 부(部)의 지역을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곳까지 총 3500여 리를 흐른다.
○ 흑수(黑水)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서로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약수(弱水)
《진서(晉書)》 숙신씨열전(肅愼氏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는 바로 말갈인데, 말갈은 북쪽으로 흑수 지방까지 닿아 있다. 그런즉 약수는 흑수인 듯하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夫餘)의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하였는데, 역시 이 물을 가리킨다.

이상은 경계 바깥에 있는 수(水)이다.

[주D-001]이이모(伊夷模) : 고구려 산상왕(山上王)의 이름이다.
[주D-002]고궁(高宮) : 고궁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다.
[주D-003]정현(赬峴)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에는 “동천왕이 이때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죽령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李丙燾)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5쪽 주》
[주D-004]갈석산(碣石山) : 갈석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灤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D-005]왕백후(王伯厚) : 백후는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자이다. 왕응린은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을 지었다
[주D-006]김길보(金吉甫) : 길보는 송나라 김이상(金履祥)의 자이다. 김이상은 《통감전편(通鑑前編)》을 지었다.
[주D-007]그 산꼭대기에 …… 주필하고서는 : 원문에는 ‘駐蹕其嶺數日’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에 의거하여 ‘駐蹕其巓數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백석산(白石山) : 어느 곳인지 자세하지 않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백석산이란 지명은 후세의 역사서나 지리서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금도서집성》 등을 보면 해성과 수암 사이에는 백산, 활석령, 백사산 등 백석산과 관련되는 산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백석산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산으로는 해성과 수암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백사산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8쪽》
[주D-009]동모산(東牟山) :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여 굳어지고 있다.《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 신서원, 1994, 85쪽 주》
[주D-010]천문령(天門嶺) : 천문령의 위치는 정겸(丁謙)의 장광재령설(張廣才嶺說),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승덕현(承德縣) 서쪽설, 송정등(松井等)의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分水嶺)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설 등이 있다.《발해의 대외 관계사 85쪽 주》 북한에서는 요령성 창무현 서쪽 산간 지대에 있는 고개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11]백제(百濟) : 이곳에서의 백제에 대해 《동사강목》에서는 백제는 고구려의 오류인 듯하다고 하였고,《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 역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너무도 거리가 맞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의 오기(誤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1쪽》
[주D-012]보술수(普述水) :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비류수(沸流水)와 같은 말이다. 동가강(佟佳江)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
[주D-013]큰 강 : 《양서(梁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되어 있는데, 엄체수는 소요수(小遼水)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比定)된다.《삼국사기》에는 엄호수(淹淲水)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의 소주(小註)에 “일명 개사수(蓋斯水)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주D-014]흘승골성(紇升骨城) :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5]비류수(沸流水) :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이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평양의 동북쪽으로 추정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동가강의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4쪽 주》
[주D-016]갈구(梁口) : 이병도는 갈구(梁口)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이 합류되는 곳인 지금의 부이강구(富爾江口)로 비정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3쪽 주》
[주D-017]염난수(鹽難水) :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주D-018]구미(九獼) : 원미(元彌)의 잘못된 표기이다.
[주D-019]귀단수(貴端水) :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20]엄호수(淹淲水) : 엄니수(掩泥水), 엄시수(掩施水)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기되나, 이는 엄니수(掩泥水)를 잘못 쓴 것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가 틀림없다. 엄리는 큰 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나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21]색리국왕(索離國王) : 이병도는 색리(索離)는 고려(高麗), 혹은 구려(句麗)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22]오루하(奧婁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挹婁河), 홀한하(忽汗河)라고도 한다.
[주D-023]속말수(粟末水) :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을 가리킨다.
[주D-024]약수(弱水) :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약수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며,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병도는, 약수는 송화강(松花江)을 지칭하는 듯하다고 하였고, 북한에서는 흑룡강(黑龍江)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4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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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4
산수(山水) 2 경내(境內)의 수(水)


○ 바다 -제수(諸水)의 총설(總說)을 덧붙인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朝鮮國) -지형은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전라도의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닿았으며,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등 여러 섬이 바다의 동남쪽에 널려 있으면서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마주 바라보고 있다.- 은 동쪽, 서쪽, 남쪽의 삼면이 모두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북은 길고 동서는 좁다. -북쪽으로는 동경(東經) 11도(度) 4분(分), 북위(北緯) 42도가 약간 못 되는 장백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동남쪽 모퉁이의 바다에 있는 대마도와 서남쪽 모퉁이의 바다에 있는 한라산(漢拏山)까지에 이르는데, 북위는 34도이다. 그러나 그 실제 지역은 바닷가에 있는 진해성(鎭海城)과 고성(固城)으로, 북위가 34도 4분인바, 거리가 7도 반으로 1870여 리이다. 서쪽으로는 동경 8도, 북위 40도인 압록강(鴨綠江) 해구(海口)로부터 동북쪽으로는 동경 14도 반, 북위 42도 반인 토문강(土門江) 입구에 이르는바, 거리가 6도 반으로, 1600여 리이다. 왕경(王京)에서 동쪽으로는 동경 12도 6분, 북위 37도 5분인 양양(襄陽)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동경 9도, 북위 37도 4분인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는바, 동서 간의 거리는 900리이며, 양쪽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오직 남쪽 경계만이 조금 넓은데, 그 동남쪽 모퉁이의 동경 13도 8분, 북위 35도 3분인 좌수성(左水城)에서부터 서남쪽 모퉁이의 동경 8도 6분, 북위 34도 7분인 무안성(務安城)까지는 거리가 1300여 리이다.- 토문강(土門江) 남쪽 둔치에서부터가 조선의 동북쪽 경계이다. -나라에서 동북쪽으로 가장 먼 곳은 경원부(慶源府)의 서북쪽에 있는, 동경은 13도를 넘어 14도에 가깝고, 북위는 42도 조금 넘는 온성(穩城) 및 미천진성(美踐鎭城)이고, 가장 동쪽에 있는 곳은 경원부 동남쪽에 있는 경흥성(慶興城) 및 이봉파(李鳳坡)로, 동경 14도 5분, 북위 42도 5분인 토문강 입구에 해당된다. 또 남쪽은 해안에 있는 서수락성(西水洛城)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미천진(美踐鎭)은 바로 미전진(美錢鎭)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북쪽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서 토문강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토문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바다는, 토문강 입구에서 이봉파(李鳳坡) 동쪽을 경유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면 서수락성(西水洛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수라성(西水羅城)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간 다음, 또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큰 산의 기슭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200리가량 가다가 꺾어져서 남쪽으로 굽이굽이 300여 리를 간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서 조금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간다. 여기에서 비로소 꺾어져서 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단천성(端川城)의 동쪽을 지난다. -동경 12도 6분, 북위 40도 7분이다. 서수락성에서 이곳까지는 바닷가에 성곽이 없고 큰 산이 많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다. 단천에 이르러서야 조금 넓어지는데, 그 동쪽의 바닷물은 맑고 깨끗하여 10여 길 아래까지 훤히 들여다보여 다른 곳의 바다와는 다르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하나의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한 물은 단천에서 서북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중간에 세 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합해져 동남쪽으로 200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단천부(端川府)의 남대천(南大川)으로, 근원은 원산(圓山)에서 나와 가덕천(加德川)과 합류하여 단천부의 치소 남쪽에 이르고, 또다시 서쪽에서 흘러온 복대천(福大川)과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다가 이성(利城)의 동쪽을 지나 -이성의 서쪽에 회산(檜山)과 성대산(聖代山)이 있다.-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북청성(北靑城) 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성대산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세 개의 물이 합해져서 동남쪽으로 2백 수십 리를 흘러 북청성 동북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강(洛江)으로, 근원이 성대산(聖代山)에서 나온다. 또 하나의 물이 회산에서 나오고 하나의 물은 성의산(聖義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북청부의 동쪽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홍원성(洪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홍원성(洪原城)으로 되어야 한다.- 동쪽의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요원수(要原水)로, 근원이 북청부의 중산(中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홍원현(洪原縣)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수구가 있는 앞바다에는 도서(島嶼)가 있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입원산(入元山)의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함흥성(咸興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이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정평현(定平縣)의 북쪽 경계를 지나며,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도안산(道安山)의 동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성천강(城川江)으로, 근원이 함흥부의 낙림산(樂林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에서 흘러온 원천(元川)과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영흥성(永興城) 동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근원이 두 개인데, 하나는 서북쪽으로 정평현 서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른다. 여기에서 양덕(陽德)의 우선산(遇仙山) 동쪽에서 흐르는 물이 서쪽에서 와서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영흥의 북동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용흥강(龍興江)으로, 근원이 영흥부의 철옹산(鐵瓮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면서 오른쪽으로는 운곡천(雲谷川)의 물을 합하고 왼쪽으로는 요덕천(耀德川)과 비류천(沸流川)의 물을 합한 다음, 영흥부의 북쪽을 경유해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우선산(遇仙山)은 어느 산인지 상세하지 않다.- 수구가 있는 앞바다에는 바로 화도(花島), 사도(沙島)가 있으며, 그 동쪽에는 웅도(熊島), 연도(連島)가 있고, 그 동남쪽에는 신도(薪島), 묘도(卯島), 저도(猪島), 국도(國島)가 있어서 원근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연도는 홍원의 동쪽에 있는데 가장 북쪽에 있으며, 묘도는 조금 큰데 가장 동쪽에 있으며, 국도는 가장 남쪽에 있다. 나머지 섬들은 모두 함흥이나 영흥과 가까운 바다에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묘도는 아마도 난도(卵島)의 글자가 잘못된 듯하다.- 바다는, 영흥의 동북쪽에 있는 수구에서 동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대박산(大博山) 북쪽의 평지(平地)를 지나고, -여기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이 바로 국도(國島)이다.-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고원성(高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고원성(高原城)으로 되어야 한다.- 동쪽을 지난다. -동경 12도 5분, 북위 39도이다.- 여기에서 또 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문천성(文川城) 동북쪽의 경계에 소수구가 있다. -물은 큰 근원이 두 개인데, 문천성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하나는 동남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동쪽으로 흘러 100여 리를 가다가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반룡산(盤龍山)과 문천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문천의 배기이천(配岐伊川)을 말한 것인 듯한데, 용흥강과 합류하는 물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간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덕원성(德源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안변성(安邊城) 동북쪽의 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으로 평강성(平康城) 동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검화산(劍華山) 남쪽, 황룡산(黃龍山) 북쪽을 지나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안변성의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변부의 남대천(南大川)이다. 그 근원이 평강(平康)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안변의 북쪽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흡곡성(歙谷城)과 통천성(通川城) 동쪽을 지나고, -남북 간의 거리가 모두 50리이다.- 조금 남쪽으로 가면 고성(高城) 동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추지령(秋池嶺)의 남쪽 기슭에서 나와 동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추지령은 추지령(楸池嶺)으로 되어야 한다.- ○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금성(金城)의 동쪽을 지나고, -금성의 서쪽은 바로 금성산(金城山)이며, 금성산의 서쪽은 바로 회양성(淮陽城)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회양부는 금성의 동쪽에 있는바, 여기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양양성(襄陽城)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두사산(頭蛇山)이 있는데, 수구가 있다. -두사산은 바로 금성산 남쪽에 있는 행간산(行幹山)이다. 그 서쪽은 바로 금강산(金岡山)이며, 또 그 남쪽은 장산(張山)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두사산은 두타산(頭陀山)으로 되어야 한다. 두타산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 소양강(昭陽江)에 합해지는바, 여기에서 양양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금강산은 마땅히 금강산(金剛山)으로 되어야 한다. 금강산은 두타산의 동쪽에 있는바, 여기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장산은 어느 산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강릉성(江陵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삼섭포(三涉浦) -삼가 살펴보건대, 삼척포(三陟浦)로 되어야 한다.- 의 동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울진성(蔚珍城)의 동쪽을 지나게 되는데, 그 동남쪽 바다 건너에는 천산도(千山島) -삼가 살펴보건대, 우산도(于山島)로 되어야 한다.- 가 있으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동경 130도, 북위 36도 8분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평해성(平海城) 동남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봉화성(奉化城)의 동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두 개의 근원이 합해져서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는 바로 천산도가 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영해성(寧海城) 동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예안성(禮安城) 동쪽의 백석산(白石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영덕성(盈德城) 동남쪽으로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진보현(眞寶縣) 동쪽의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영덕성의 남쪽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오포(烏浦)로 들어가는 영덕현의 오십천(五十川) 하류를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직보현(直寶縣)은 마땅히 진보현(眞寶縣)으로 되어야 한다.- 이곳의 남쪽 해안은 청하성(淸河城)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흥해성(興海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연일성(延日城)의 동남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남쪽에 있는 영천성(永川城) 동쪽의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보현산(普賢山)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연일성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연일의 남쪽 해안은 장로일성(長老日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장기성(長鬐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지역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좌병성(左兵城)의 동쪽 경계를 지나고,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태화강(太和江)이다. 태화강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가 있다. -바로 양산성(梁山城) 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오는 물로,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좌수성(左水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조선 경계의 동남쪽 끝모서리인데, 동경 14도가 약간 못 되고, 북위 35도 2분이 조금 넘는다.-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동남쪽 모서리가 끝나는 지역이 된다. -동경 14도가 조금 못 되고, 북위 34도 9분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3백 수십 리 되는 바다 건너편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는데, 큰 섬이다. -대마도의 모양새는 서북쪽으로부터 비스듬하게 굽었으며, 서남쪽은 뾰족하고 길면서 안으로 굽었다. 그 가운데에는 가지가 있어서 서쪽으로 꺾여 큰 칼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북쪽 뾰쪽한 곳부터 서남쪽 뾰족한 곳까지에는 긴 산이 죽 뻗어 있어서 마치 등뼈와도 같다. 길이가 300리가량 되고, 너비는 가운데는 100리이고 앞부분과 뒷부분은 수십 리이며, 뾰족한 곳은 10여 리이다. 동경 14도, 북위 33도 8분에서부터 동경 15도가 약간 못 되고, 북위 34도 4분까지 이른다. 대개 조선 동남쪽 해방(海防)의 요충지로, 서북쪽으로는 절영도(絶影島) 및 동래현(東萊縣)과 정면으로 마주해 있고, 서남쪽으로 김해(金海)의 동쪽에 있는 대수구(大水口)까지가 400리가량 된다.- 바다는, 좌수성의 동남쪽 지역에서 비로소 서쪽으로 꺾인다. 서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기장성(機長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바로 기장 서쪽 경계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동래성(東萊城)의 남쪽을 지나는데, 동래성의 남쪽에서 30리 되는 해안이 바로 부산이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절영도가 있다. -해안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대수구가 있다. -동경 13도, 북위 34도 6분이다.- 이것은 조선 동남쪽의 큰 하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동강(洛東江)으로, 낙동강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 바다는, 김해성 남쪽에서 서쪽으로 100리를 가면 웅천성(熊川城) 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십 리나 되는 큰 섬이 있는데, 가덕(加德)과 천성(天城)이라고 한다. -서로 간의 거리가 5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가덕과 천성은 바로 두 진의 이름으로, 모두 가덕도(加德島) 안에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창원성(昌原城) 남쪽 경계 및 우병성(右兵城) 남쪽을 지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섬이 있는데, 영등도(永登島)라고 한다. -섬은 길이가 70리이고 너비가 30리이다. 섬의 동쪽을 우수영(右水營)이라 하고 섬의 서북쪽을 거제(巨濟)라 하며, 섬의 남쪽은 지설포(知泄浦)이다. 역시 조선 남방(南防)의 요충지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거제도로, 영등(永登)은 바로 섬 안에 있는 진(鎭) 이름이다. 지설포는 지세포(知世浦)로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진해성(鎭海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사천(泗川)의 남쪽 경계에 있는 고성(固城)의 남쪽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곤양성(昆陽城) 남쪽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섬이 있다. -섬 주위를 돌자면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고, 다시 동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가며, 여기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간다. 한 뾰족한 부분은 북쪽 해안을 향하여 있고, 한 뾰족한 부분은 남쪽을 향하여 있다. 너비는 100리이고, 길이는 80리이며, 섬 가운데는 50리이다. 북쪽에 있는 것을 남해성(南海城)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진조항(珍助項)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것을 평산포(平山浦)라고 한다. 북쪽 해안까지의 거리가 3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하동성(河東城)까지의 거리가 5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큰 섬은 바로 남해부(南海府)로, 남해부는 섬 안에 있다. 진조항은 미조항(彌助項)으로 되어야 한다. 미조항 및 평산포는 모두 섬 안에 있는 진 이름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하동성(河東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두치강(豆恥江)으로, 두치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100리를 가면 좌수성의 남쪽에서 조금 서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북쪽에 있는 낙안성(樂安城)의 동북쪽 송경산(松京山) 기슭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송경산은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흥양성(興陽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가면 천관산(天冠山)의 수구가 있다. -천관산은 흥양성 서북쪽에 있는 낙안(樂安) 및 보성(寶城)의 남쪽에 있다. 물은 천관산의 서북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장흥성(長興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병성(兵城)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는 수십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양강(汭陽江)으로, 그 근원이 나주(羅州)의 쌍계산(雙溪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장흥부를 감싼 다음, 서쪽으로 흘러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병성(兵城) 및 강진성(康津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해남성(海南城)을 지난다. 또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하나의 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창평(昌平)의 동북쪽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광주(光州)의 남쪽 경계를 지나 무목산(無木山)의 북쪽에 이른다. 또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데, 서북쪽에 있는 정읍(井邑) 서쪽의 용잠산(龍岑山) 남쪽 언덕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무목산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和順) 남쪽과 능주(綾州)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영암(靈巖)의 북쪽을 지난다. 또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데, 능주의 남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우수성(右水城)의 서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는 넓어서 수십 리나 된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호강(沙湖江)이다. 사호강은 근원이 담양부(潭陽府)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황룡천(黃龍川)과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정읍의 서쪽에서 온다고 하는 물이다.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나주(羅州)의 치소(治所)를 감싼 다음,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영암의 북쪽에 이르러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덕진포(德津浦)의 물과 합류한다. 이것이 이른바 능주의 남쪽 산에서 온다고 하는 물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무목산은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이고, 용잠산은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곳 해구(海口)에서 서남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을 흑산도(黑山島)라고 하며, 그 남쪽에 있는 조금 큰 섬을 여도(㻌島) -삼가 살펴보건대, 진도(珍島)의 잘못된 표기이다.- 라고 한다. 또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먼 곳에 가장 큰 섬이 있는데, 제주도(濟州道)라고 한다. -흑산도는 해구의 서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남해성(南海城) 해안과의 거리가 100리이며, 북쪽으로 무안(務安)의 남쪽 해안과의 거리가 50리이다. 모양새가 거위알처럼 생겼는데, 가운데에 흑산(黑山)이 있으며, 둘레가 50여 리이다. ○ 진도는 흑산도에서 동남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해성 해안과의 거리가 90리이다. 모양새가 길면서도 네모지게 생겼다. 남쪽에 금이산(金伊山)이 있으며, 그 북쪽을 남도포(南桃浦)라고 한다. 둘레가 100리가량 된다. ○ 삼가 살펴보건대, 여도(㻌島)는 진도(珍島)로 되어야 한다. 금이산은 바로 금갑(金甲)의 글자가 잘못된 것으로, 이는 섬 안에 있는 진(鎭) 이름이다. ○ 제주도는 진도에서 동남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해성 해안과의 거리가 1백 수십 리이다. 모양새는 세모지게 생겼으며, 동서 간의 거리가 130리이고,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의 거리는 100여 리이고, 북쪽에서 서남쪽까지는 90여 리이다. 섬 가운데에 한라산(漢拏山)이 있으며, 북쪽을 제주(濟州)라 하고, 동남쪽을 정의(旌義)라 하고, 서쪽을 대정(大靜)이라 하는데, 조선의 서남쪽 바다를 방비하는 요충지이다. 동경은 4도 5분에서 9도 약간 못 미치는 데까지 이르고, 북위는 34도에서 34도 3분까지 이른다.- ○ 해구(海口)의 서쪽에는 무안성(務安城) 남쪽 경계인데, 조선 서남쪽의 모퉁이 지역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꺾어져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무안성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산기슭을 지나며,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남평성(南平城) -삼가 살펴보건대, 함평성(咸平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용잠산(龍岑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장성(長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는바, 본문이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무장성(茂長城)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조금 길게 꺾어져서 서쪽으로 간 다음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고창성(高敞城)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조금 굽어들면 부안성(扶安城) 서쪽 경계를 지나며, 조금 북쪽으로 가면 수구가 있는데, 바로 옥구성(沃溝城) 서남쪽 경계이다. -물은 근원이 두 개이다. 남쪽 근원의 물은 동남쪽에 있는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금구성(金溝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만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고부성(古阜城)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만전성(萬塡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부안(扶安)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만난다. ○ 북쪽 근원의 물은 추월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성(金堤城)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임피(臨陂) 남쪽과 만전성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남쪽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의 길이는 300여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남쪽 근원의 물은 바로 동진강(東津江)으로, 근원이 정읍현(井邑縣)의 내장산(內藏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에 이르러서 태극포천(太極浦川)의 물과 만나 만경(萬頃)의 남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북쪽 근원의 물은 바로 사수강(泗水江)으로, 근원이 용담현(龍潭縣)의 주줄산(珠崒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의 북쪽과 임피의 남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만전성(萬塡城)은 바로 만경(萬頃)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옥구성(沃溝城) 서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과 바다를 격해 30리 되는 곳에 섬이 있어 군산도(羣山島)라고 한다. -섬은 타원형으로 둘레가 60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서천(舒川) 남쪽의 수구가 있는데, 바로 옥구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는 물로, 역시 조선의 큰 하천 가운데 하나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강(錦江)으로, 금강조(錦江條)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강 입구에서 바다를 격해 정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는 섬을 원산도(元山島)라고 한다. 그 남쪽에서 조금 동쪽에 있는 섬을 군산도라고 하는데, 앞에서 나왔다. 원산도의 모양새는 길이가 60리이고, 폭이 20리이다. 북쪽으로는 요아량(要兒梁) 지역과의 거리가 4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오평도(烏平島)와의 거리가 90리이다. 이 섬들은 모두 이 강 서쪽면의 수구이다.- ○ 바다는, 수구에서 북쪽으로 가면 기해저(岐海渚)이고, 다시 북쪽으로 가면 시인성(施仁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인성(庇仁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과 수성(水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영(水營)이다.-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결성(結城)의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태산성(泰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태안성(泰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동남쪽 경계의 해저(海渚)를 지나고,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꺾어져서 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요아량(要兒梁)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흥량(安興梁)의 잘못된 표기이다.- 지역을 지나는데, 바로 태산현 남쪽 지역이 한 줄기로 뻗어서 바다로 들어간 곳으로, 모양새가 코끼리의 코처럼 생겼다. 동쪽으로는 수성, 시인성의 해안을 바라보는데, 거리가 3, 4십 리이다. 바다는, 요아량의 남쪽으로부터 돌아서 서북쪽으로 가면 요아량의 서쪽을 지나는데, 그 서쪽은 오평도이다. -섬은 둘레가 50리이고 동쪽으로 요아량 해안과의 거리가 60리이다.- 바다는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태산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그 바깥은 덕물도(德勿島)이다. -섬은 거위알처럼 생겼으며, 둘레가 5, 6십 리이고, 동쪽으로 태산 해안과의 거리가 50리이다.- 여기에서 또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가면 태산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그 바깥쪽은 용도(龍島)이다. -섬의 모양새는 약간 길게 생겼으며, 둘레는 50여 리이고, 남쪽으로 해안과의 거리는 30여 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면 단산성(端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산성(瑞山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산 북쪽으로 지나는데, 조금 동쪽에 수구가 있으며, 수구의 서쪽이 바로 대부도(大富島)이다. -물은 동쪽에 있는 청주(淸州)의 서쪽 큰 산에서 나오며, 전의(全義)의 동북쪽에 이르러서 서북쪽으로 흘러 천안성(天安城)의 동북쪽 경계를 경유한 다음 동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성(安城)과 양성(陽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직산성(稷山城)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 있는 차현산(車見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진위(振威)의 남쪽과 평택(平澤)의 북쪽을 지난 다음 또 서북쪽으로 흐른다. 여기에서 북쪽에 있는 금천성(衿川城) 동북쪽의 관악산(冠岳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수원성(水原城)의 남쪽, 아산성(牙山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평성(富平城)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이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신창(新昌)의 남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예산성(禮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서남쪽에 있는 가야산(加邪山)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 다음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덕산성(德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서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아산성의 서쪽, 면천성(沔川城)의 동북쪽을 지나 흘러오는 물과 이곳에서 합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면천성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남양성(南陽城)의 남쪽, 당진성(唐津城)의 북쪽을 지나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수성의 남쪽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발원지에서부터 500여 리를 흐른다. ○ 삼가 살펴보건대, 경기와 호서(湖西) 두 도가 나뉜 경계의 대진(大津)은 그 근원이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선원천(禪院川)으로 양지현(陽智縣) 곡돈현(曲頓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돈곶진(頓串津)으로 청양현(靑陽縣) 백월산(白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미륵천(彌勒川)으로 공주(公州)의 차현(車峴)에서 나온다. 선원천은 서남쪽으로 흘러 소사(素沙)의 들판에 이르러서 왼쪽에서 흘러오는 아주천(牙洲川)의 물과 합류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오른쪽에서 흘러오는 항곶천(亢串川)의 물과 합류한 다음 평택현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공진포(貢津浦)에 이른다. 돈곶진은 남쪽으로 금마천(金馬川), 미륵천(彌勒川), 승선천(昇仙川) 등 여러 물과 합류하여 아산(牙山)과 면천(沔川) 두 현의 사이로부터 오는 물과 합류하여 대진(大津)이 되어서 또다시 서쪽으로 당진현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수도제강》에서 이른 바 근원이 청주(淸州)의 서쪽 산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아주천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 흘러가다가 천안성(天安城)의 경계를 지나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만난다고 한 것은 바로 선원천이다. 또 차현산(車見山)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있어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미륵천이다. 차현산은 바로 차현(車峴)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또 한 물이 관악산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항곶천으로, 그 근원이 수원부의 광교산(光敎山)에서 나오는바, 관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또 신창(新昌)의 남쪽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어서 예산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고 한 것은 바로 돈곶진이다. 또 가야산에서 흘러나오는 한 물이 있어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금마천으로, 그 근원이 홍주(洪州)의 오서산(烏棲山)에서 나오는바, 가야산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덕산의 경계를 지나서 서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승선천이다. ○ 수구에서 정서쪽으로 바다에 있는 섬이 대부도인데, 섬의 모양새는 둥글고, 둘레가 50여 리 된다. 동북쪽으로 수성 해안과의 거리가 40리이다.- ○ 바다는, 수구가 있는 수성(水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원부이다.- 서쪽으로부터 또다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가면 인천성(仁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조금 동쪽에 조선의 대수구(大水口)가 있는데, 이는 큰 하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한강(漢江)이다. 한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수구의 동남쪽 바다에 대부도(大富島)가 있으며, 수구의 정서쪽에서 약간 북쪽에 정포(井浦)가 있는데, 큰 섬으로 둘레가 200리이며, 가운데에 강화성(江華城)이 있다. 섬의 모양새는 네모졌으면서도 서남쪽이 뾰족하다. 동쪽으로는 교하성(交河城) 해안까지의 거리가 40리이다. 바로 예전에 각화도(覺華島)라고 하던 섬이다. 이 섬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 섬이 연자도(硯子島)인데, 섬의 모양새는 둥글면서도 긴 벼루 모양으로 생겼다. 남쪽으로 용도(龍島)ㆍ덕물도(德勿島)와 100여 리를 떨어져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면서 바깥쪽 대수구가 된다. ○ 바다는, 강 입구에 있는 교하성(交河城)의 서쪽에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100리가량 가면 임진강(臨津江) 입구가 되는데, 임진강 역시 큰 하천이다. -해구(海口)의 바깥쪽은 동남쪽에 있는 강화도(江華島)와 북쪽에 있는 교동성(喬桐城) 큰 섬으로 대수구(大水口)를 삼는다. ○ 임진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임진강 입구에서 북쪽으로 가면 풍덕성(豐德城)의 서남쪽 지역이 되는데, 조금 서북쪽에 하나의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성강으로, 예성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해구의 동남쪽은 바로 바다 가운데에 교동성이 있는데, 큰 섬이다. 섬의 모양새는 길게 네모졌는데, 서남쪽이 뾰족하다. 둘레는 200리로 강화도와 비슷하며, 해안까지의 거리는 40리이다.- ○ 바다는, 수구로부터 서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연산(延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연안(延安)의 잘못된 표기이다.- 남쪽이 되는데, 하나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구잠산(駒岑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건수성(建水城) 서북쪽과 봉산성(鳳山城)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배천성(白川城) 남쪽으로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수양산(首陽山) 남쪽 기슭 및 연산성(延山城)의 남쪽을 돈 다음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는 30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해주(海州)의 삼탄(三灘)으로, 근원이 평산부(平山府)의 성불산(成佛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단역(靑丹驛)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구잠산은 황주(黃州)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나, 구현은 삼탄의 근원이 아닌바 상세히는 알 수가 없다. 건수(建水)는 검수(劍水)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바다는, 연산성의 남쪽으로부터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강익성(康翊城) -삼가 살펴보건대, 강령성(康翎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옹진성(瓮津城)의 서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가면 장연성(長淵城)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바다 가운데에 초도(椒島)가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풍천성(豐川城)의 서쪽을 지나는데, 바다 가운데에 백령도(白翎島)가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동쪽으로 100리가량 가면 은율성(殷栗城)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8, 9십 리를 가면 삼화성(三和城) 남쪽이 되는데, 패수구(浿水口)가 있다. -동쪽으로 봉산(鳳山), 배천(白川)에서 서쪽으로 연산, 강령, 옹진, 장연에 이르기까지는 뒤쪽으로 모두 산을 등지고 있는데, 산이 끊이지 않고 연속되어 뻗어 있다. 여기에서 또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풍천(豐川), 송화(松花), 장련(長連)이 되며, 동쪽으로 가면 안악(安岳)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산들이 서려 있다. 그러므로 이곳 수백 리의 지역은 서쪽, 남쪽, 북쪽 삼면이 모두 바닷가에 닿아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송화는 바로 송화(松禾)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지금 대동강(大同江)이라고 한다. -대동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삼화성(三和城) 남쪽에 있는 수구에서부터 꺾어져서 북쪽으로 200여 리를 가면 함종성(咸從城)과 증산성(曾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증산성(甑山城)으로 되어야 한다.- 두 성의 서쪽을 지나고,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영유성(永柔城) 서북쪽을 지나며,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바로 순안성(順安城) 서북쪽에 있는 큰 산의 북쪽에서 나오는 물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통덕천(通德川)으로, 그 근원이 순안에 있는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숙천부(肅川府)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숙천성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안주(安州)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청천강(靑泉江)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淸川江)으로, 청천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대정강(大定江)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령강(大寧江)으로, 대령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가면 나청하(那靑河) 소수구가 있다. -나청하는 가산성(嘉山城) 서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봉두산(鳳頭山) 동쪽과 나청청(那靑廳) 서쪽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대천하(大川河)의 소수구가 있다. -대청하는 북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봉두산의 서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흘러 정주성(定州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상의 두 수구는 대정강과 청천강 두 수구와의 서로 간의 거리가 100리 사이에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대천하는 바로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인 듯하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정주의 서남쪽 경계 및 곽산성(郭山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동래천(東來川) 소수구가 있다. -동래천은 삭주(朔州) 북쪽에 있는 산과 개막산(蓋幕山)이 서로 연결된 곳에서 나오는데, 여기에서 북쪽으로 산 너머가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에 있는 오등성(敖登城), 요곽이성(遼郭爾城), 창성(昌城)의 세 성이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흘러 곽산성(郭山城) 서쪽과 선천성(宣川城) 동쪽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동로강(東路江)으로, 그 근원이 구성(龜城)의 마구리산(馬仇里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선천부(宣川府)의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오등성과 요곽이성 두 성에 대해서는 압록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선천성(宣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며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천하(宣川河) 소수구가 있다. -선천하는 북쪽 산에서 나오며, 그 산 너머의 서북쪽이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에 있는 숙주성(宿州城)이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흘러 철산(鐵山)의 동쪽 기슭을 돌아서 선천성의 서남쪽 경계 지점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선천부의 청강(淸江)으로, 그 근원이 보리산(菩提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철산군의 동쪽 경계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숙주는 삭주(朔州)의 음이 와전된 듯하다.- ○ 바다는,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철산성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용천성(龍川城)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삭천하(朔川河) 소수구가 있다. 용천성에서 하천 건너편의 북쪽 둔치에 바로 의주성(義州城)이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의 애주(愛州)이다. -삭천하는 동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용천성의 북쪽과 의주성의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진강(古津江)으로, 그 근원이 천마산(天磨山)의 동남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양책관(良策館)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애주는 바로 의주이다.- ○ 바다는, 삭천하의 수구로부터 의주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그 서쪽은 바로 압록강 수구이며, 서북쪽 둔치는 성경(盛京)과의 경계가 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막혀 있다. 그러므로 차풍(次風) 제소남(齊召南)이 수도(水道)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바다를 강(綱)으로 삼아 두만강 입구부터 시작하여 바다를 따라서 남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올라가 압록강 입구까지 이르렀는데, 매번 해구(海口)로부터 원류(源流)를 거슬러 올라갔는바, 마치 강(綱)을 쳐들면 목(目)이 따라 올라오는 것과 같아 자못 치밀하고 상세하다. 이는 본국의 여도(輿圖)를 살펴보고서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과 군(郡)의 호칭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제 조목에 따라서 변정(辨正)하였다. 큰 강 중에 다른 서책에도 나와서 각각의 목(目)을 세운 것은 각 목의 아래에다 나누어 붙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경계는 동쪽, 서쪽, 남쪽 삼면이 모두 바다에 닿아 있으며, 그 동해의 물은 맑고 깨끗하여 10길 남짓의 아래에까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고려의 동쪽에 임해 있는 바다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10길 아래에까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동남쪽으로는 명주(明州)가 바라다보이는데, 물이 모두 푸르다.” 하였다.- 구지(舊志)를 보면, 서쪽의 큰 바다에는 황주(黃州)의 장명진(長命鎭)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통강(大通江)으로 들어간다. 또 백주(白州)와 해주(海州)의 서쪽은 모두 바닷가와 가깝다. 강희(康煕) 50년(1711)에 조선국의 섬인 몽금도(夢金島), 정족도(鼎足島), 사야질구미(沙也叱九味) 등지가 모두 봉천부(奉天府)의 금주(金州)ㆍ복주(復州)ㆍ개주(蓋州)ㆍ해주(海州)와 서로 가깝다는 이유로, 봉천부의 장군(將軍) 및 부윤(府尹)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서 연해(沿海)에 사는 백성들이 조선과 가까운 바다에 가 고기잡이하는 것을 엄금하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문휘고(同文彙考)》를 보면, “강희 49년(1710)에 중국 예부(禮部)에 보낸 자문에, ‘오차포진(吾叉浦鎭)과 몽금도(夢金島) 앞바다, 초도진(椒島鎭)과 정족도(鼎足島) 앞바다, 소청도(小靑島)와 사야구미(沙也九味) 앞바다에 중국의 고기잡이 배가 끊임없이 오가서 변경에 사는 백성들이 놀라 소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칙령을 내려 금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강희 50년에 예부에서 봉천부의 부윤에게 자문을 보내어 금령(禁令)을 신칙하게 하였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바는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오차포(吾叉浦)는 장연현(長淵縣)에 있으며, 초도(椒島)는 풍천부(豐川府)에 있다.
○ 한강(漢江) -옛날에는 열수(列水)라고 하였으며, 혹 여강(驪江)이라고도 한다. ○ 습수(濕水)와 산수(汕水)를 덧붙인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쪽에 있다. ○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 ○ 주(注)에 이르기를, “열(列)은 물 이름으로, 지금 대방(帶方)에 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예로부터 혹 한수라고 하였음이 명백하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의 분려산(分黎山)은 열수(列水)가 근원하는 곳이다. 열수는 서쪽으로 점제(黏磾)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820리를 흘러간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세 강이 합해져 열수(列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듯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습수와 산수는 아마도 한강의 별원(別源)으로 회양(淮陽)과 보은(報恩)에서 나오는 물인 듯하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한강은 국성(國城)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근원은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남쪽은 바로 옛 백제국이다. ○ 양화도(楊花渡)는 왕성의 서남쪽, 한강 가에 있는데, 각도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이곳에서 모두 모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은 또 웅진강(熊津江)이라고도 하는데, 국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五台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두 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왕성(王城)은 이 강을 의지하여 험고함으로 삼는다. 한강의 남쪽은 바로 옛 백제국 지역이다. 명(明)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구원하자 왜적들이 왕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이여송이 성안에 들어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에 임하여 왜적의 후미를 뒤쫓아가 철수하는 자들을 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 양화도는 국성의 서남쪽, 한강 가에 있는데, 각도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모두 이곳에서 모은다. 혹자는 바로 임진도(臨津渡)라고 한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京畿)에 여강(驪江)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강의 물이 여주(驪州)의 경계에 이르면 혹 여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인천성(仁川城)의 북쪽에서 조금 동쪽은 조선의 대수구이다. 대수의 근원은 남파(南派)와 북파(北派)가 있다. 남파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우통(于筒)에서 나오는 한강의 정원(正源)이다.- 는 동쪽으로 장산(張山) -삼가 살펴보건대, 장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에서 나와 두 개의 물이 합해져서 서쪽으로 흘러 우두산(牛頭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 남쪽 기슭, 청풍성(淸風城)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 서쪽에 한 개의 강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섬강(蟾江)이다.- 이 있어, 동북쪽에 있는 영시촌(寧市村) 서쪽의 공작산(孔雀山) -삼가 살펴보건대, 공작산은 홍천현(洪川縣)의 남쪽에 있다.- 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섬강의 근원은 횡성현(橫城縣)의 덕고산(德高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흥원진(興元津)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제천성(堤川城)의 서남쪽에 있는 치악산(雉岳山)의 남쪽 기슭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가 원주의 동남쪽 경계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음성(陰城)의 동북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충주(忠州)의 서쪽 및 여주(呂州)의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천민천(天民川)으로, 그 근원이 충주의 소속리산(小俗離山)에서 나와 북동쪽으로 흘러 여주의 경계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원주성(原州城)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이주성(利州城) -삼가 살펴보건대, 이천(利川)으로 되어야 한다.- 의 북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은천(新恩川)으로, 그 근원이 지평현(砥平縣)의 부동산(不動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한강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광주성(廣州城)의 북쪽과 양근(楊根)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비정(碑亭)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조선의 국성(國城) 동남쪽에 있는 삼각산(三角山) 앞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북쪽 근원에서 나온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은 양근의 경계에서 한강에 합해지는바, 여기에서는 국성의 동남쪽에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북쪽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연강(新淵江)으로, 그 근원이 회양부(淮陽府)의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에서 나온다.- 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동북쪽의 금성(金城) 동남쪽에 있는 추지령(秋池嶺) -삼가 살펴보건대, 추지령(楸池嶺)으로 되어야 한다.- 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은 바로 신진(新津)으로, 근원이 회양의 말휘령(末暉嶺)에서 나온다.- 서쪽으로 흘러 서북쪽에서 흘러온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철령(鐵嶺)의 은계천(銀溪川)이다.- 과 합류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낭주(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낭천(狼川)으로 되어야 한다.- 의 동남쪽 경계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진은 북서쪽으로 흘러 은계천과 합류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신연강에 들어간다.- 하나는 회양성의 북쪽 산 및 남쪽의 금성산(金城山)에서 나온 두 개의 물이 합류해서 서쪽으로 흘러 양구성(楊口城) 및 인제성(麟蹄城)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회양의 북쪽 산과 금성산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이미 합류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가평성(加平城) 남쪽 경계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남쪽 근원에서 흘러오는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소양강(昭陽江)이다.- 이 동남쪽에 있는 금강산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동북쪽으로 흘러 평창성(平昌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양강은 근원이 오대산의 북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춘천부(春川府)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신연강과 합류하는바, 여기에서 가평군에 이르러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 개의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진 다음에는 서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오갑산(五甲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오신산은 김화현(金化縣)에 있다. 세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져서 오신산을 지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 남쪽 기슭과 홍천성(洪川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춘천성(春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횡성(橫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홍천강(洪川江)으로,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백치(柏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신연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저평성(底平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지평(砥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 경계와 포천성(抱川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양근성(楊根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그 북쪽 둔치에 있는 산은 바로 양주성(楊州城)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돌아서 삼각산(三角山) 앞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광주(廣州)에서 흘러온 남파(南派)의 물과 합류한다. ○ 남파와 북파 두 개의 강이 이미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서는 국성(國城)의 안산(案山)의 남쪽 기슭 -국성은 동북쪽으로부터 동쪽, 남쪽, 서쪽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쪽에 동경 10도 6분이 조금 넘고, 북위 37도 6분인 작은 산이 있는데, 산 너머 동쪽이 양주(楊州)이며, 그 북쪽 80리 되는 곳에 백악산(白岳山)이 있다. 백악산의 동북쪽은 적성(積城)이다. 또 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이 바로 임진강(臨津江)이다. 백악산에서 서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이 고양성(高陽城)이고, 또 서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이 파주(坡州)이다. 파주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이 바로 임진강이다. 국성의 서남쪽에는 산이 가로질러 있으면서 안산(案山)이 되는데, 동서쪽으로 수백 리에 뻗쳐 있으면서 강물을 따라서 안대(案對)가 되었다. 굉자원(宏滋院)이 성에서 서남쪽으로 50여 리 되는 곳의 산 사이에 있다. ○ 강물은 또 서쪽으로 흘러 안산의 남쪽 기슭을 돈 다음 과천성(果川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과천성은 국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또 과천의 서남쪽에는 용인성(龍仁城)이 있다. 또 서남쪽에는 관악산(冠岳山)과 수리산(修理山)이 있다.- 을 지나 1백 수십 리를 흘러 양천성(陽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산성(安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앵봉천(鸎峯川)을 말하는 듯하다. 앵봉천은 근원이 삼각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공암진(孔巖津)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을 받고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흘러 김포성(金浦城)의 서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수원성(水原城)의 북쪽 산에서 흘러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부평성(富平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통진성(通津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의 남쪽 둔치에는 인천성(仁川城)이 있고, 북쪽 둔치에는 교하성(交河城)이 있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100리이다. ○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종횡(縱橫)으로 10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보면, 한강 외에는 800리나 되는 큰 강이 없으니 아마도 한수(漢水)가 열수(列水)인 듯하다. 《산해경》을 보면, 맥국(貊國)은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맥국은 지금의 관동(關東) 지방인바, 과연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 또 세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져서 구불구불 800리를 흐르는바, 열수가 한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강은 그 근원에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오대산의 우통(于筒)에서 나오고, 하나는 회양(淮陽)의 금강산에서 나오는데 이를 신연강이라고 하고, 하나는 그 근원이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문장대(文藏臺)에서 나오는데 이를 달천(達川)이라고 한다. 오대산에서 나오는 물은 남쪽으로 흘러 정선군(旌善郡)을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충주(忠州)에 이른다. 여기에서 달천이 괴산(槐山)과 연풍(延豐) 두 현 사이를 지나 남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 충주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여주(驪州)를 지나고 양근군(楊根郡)에 이른다. 여기에서 신연강이 북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는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廣州)의 경계를 감돌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경성(京城)의 남쪽을 감돌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교하군(交河郡)의 남쪽에 이른다. 여기에서 임진강(臨津江)이 북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하여 풍덕부(豐德府)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살펴보건대, 《무비지(武備志)》를 보면, 우리나라의 지도에 팔도의 여러 강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대청일통지》에서는 한강을 또 웅진(熊津)이라고 하였고, 또 양화도(楊花渡)가 바로 임진도(臨津渡)라고 하였고, 또 백마강(白馬江) 하류가 한강에 합류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류강(沸流江)이 한강으로부터 나뉘어 흘러 대동강(大同江)에 합해진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잘못된 것을 다시 잘못 전하면서 바로잡지 않은 탓에 그렇게 된 것이다.
○ 달천(達川)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속리산의 산꼭대기에는 문장대가 있는데, 문장대 위에서 한 물이 나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한강의 별파(別波)로, 앞에 나오는 안설(按說)에 상세하게 나온다.
○ 임진강(臨津江) -옛날에는 대수(帶水)라고 하였으며, 혹 호로하(瓠蘆河), 청강(淸江)이라고도 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는 대수(帶水)가 있다. 대수는 서쪽으로 흘러 대방(帶方)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원(上元) 2년(675)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거느리고 호로하를 건너가서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였다.
《황명세법록(皇明世法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산동(山東) 문등현(文登縣)의 성산위(成山衛)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호로하로 들어가 신라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수는 지금의 임진강으로, 옛날의 칠중하(七重河)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사군강역 대방군조(四郡疆域帶方郡條)에 나온다.- 칠중성은 바로 적성현(積城縣)이다. 지금 임진강이 흐르다가 적성의 서쪽에 이르러서 호로탄(瓠蘆灘)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유인궤가 강물을 건넌 곳이다.
《요사(遼史)》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야율분노(耶律盆奴) 등이 고려를 정벌하면서 개경(開京)에 들어가서 왕경(王京)을 크게 약탈하고 불사른 다음 청강(淸江)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야율분노가 이미 개경을 약탈하고서 청강에 이르렀으니, 청강은 개경 남쪽에 있는 강임이 분명하다. 《명시종(明詩綜)》에 실려 있는 조선 이행(李荇)의 임진강(臨津江) 시에 이르기를, “임진에서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나루터를 물으면서 청강에 가네.[臨津催早發 問渡卽淸江]” 하였다. 이에 의거하면 청강이 바로 임진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선부(朝鮮賦)》의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진강은 장단부(長湍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이 임진을 건너서 개성을 약탈하였는데, 얼마 뒤에 이여송(李如松)이 개성에 주둔해 별장(別將) 사대수(査大受)를 파견하여 임진을 지키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책응(策應)하게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진강은 동북쪽에 있는 이천성(伊川城)의 서북쪽 큰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협(安峽)의 북쪽을 지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큰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정산탄(靜山灘)으로, 그 근원이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안협현(安峽縣)의 북쪽에 이르러서 임진강에 합류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삭녕성(朔寧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한 개의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마룡연(馬龍淵)이다.- 이 있어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철원(鐵原)의 남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룡연은 그 근원이 평강현의 상현(霜峴)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철원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삭녕의 남쪽에 이르러서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하나의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탄강(大灘江)이다.- 이 있어서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가평(加平)의 북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홀러 김화성(金化城)의 남쪽 경계와 영평성(永平城)의 북쪽 경계 및 연천성(連川城) -삼가 살펴보건대, 연천성(漣川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탄강은 그 근원이 회양부(淮陽府)의 쌍령(雙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철원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연천현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마전성(麻田城)의 남쪽 경계와 적성(積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큰 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러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에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이 바로 백악산(白岳山)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파주(坡州)의 북쪽 경계와 장단성(長湍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한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沙川)이다.- 이 동북쪽에 있는 개창부(開昌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의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장단의 북쪽 경계 및 개성부의 남쪽 경계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을 서쪽으로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천은 그 근원이 송도(松都)의 성거산(聖居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송도천(松都川)과 판적천(板積川)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에 들어간다.- 송악(松岳)은 바로 조선의 중악(中岳)으로, 백악(白岳)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이 되어 다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 강은 근원에서 7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강은 그 근원이 안변부(安邊府) 영풍고현(永豐故縣)의 방장동(防墻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이천부(伊川府)의 경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삭녕군(朔寧郡)의 경계로 들어갔다가 서남쪽으로 흘러 장단부(長湍府)의 남쪽을 돌아 교하군(交河郡)에 이르러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예성강(禮成江) -저탄(豬灘)을 덧붙인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성강은 두 산 사이에 있는데, 돌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데, 이것이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으로 몹시 험악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급수문은 그 문이 바다 섬과는 닮지 않았으며, 흡사 무협(巫峽)의 강로(江路)와 같았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바로 물길이다. 수세가 산협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어, 요란하기가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일로(一路)에 시냇물이 있는 곳에는 모두 소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았다. 보산관(寶山館) 근처에 시내가 있어 저탄(楮灘)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탄(豬灘)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라고 하는데, 폭이 20여 길이나 되는데도 역시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성항(禮成港)은 개성부의 남쪽에 있는데, 예성강의 하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또 급수문이 있는데, 《대명일통지》를 보면, 개성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흡사 무협과 같이 생겼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풍덕성(豐德城)에서 조금 서북쪽에 한 수구(水口)가 있다. 그 물의 근원은 동북쪽에 있는 곡산성(谷山城)의 동북쪽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서 곡산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서 흘러온 하나의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신계성(新溪城) 북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수산성(遂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수안성(遂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남쪽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에서 흘러온 큰 물과 합류하는데, 이 물은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토산성(兎山城)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송악산 개창부(開昌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開城府)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 산의 남쪽 기슭을 돈 다음 서쪽으로 흘러 동금천성(東金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서금천성(西金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이곳에서 금천하(金川河)와 합쳐지는데, 금천하는 동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동금천성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두 개의 근원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평산성의 남쪽을 지나는 물과 합류한다. 서쪽에서 흘러온 금탄하(金灘河)는 서쪽으로 흘러 서금천성을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만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풍덕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은 바로 예성강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원류(源流)가 지나는 바와 별파(別派)가 합류되는 바에 대해서 모두 뒤섞어서 말하여 어거지로 해석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금천성은 하나일 뿐인데, 이곳에서는 동금천성과 서금천성 두 개로 말하였으니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이른바 금탄하라는 것도 역시 어느 물을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5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성강은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신계현(新溪縣)의 서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평산부(平山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저탄(豬灘)이 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급수문은 아마도 이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 오조천(吾助川) -박연(朴淵)을 덧붙인다.
《허문목집(許文穆集)》의 회란석시(廻瀾石詩) 서문(序文) -허국(許國)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적에 지은 것이다.- 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조천 가에 병풍처럼 생긴 돌이 있어서 오조천의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 돌의 이름이 없었다. 이에 내가 그 돌을 명명하여 ‘회란석(廻瀾石)’이라 하였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연(朴淵)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는데, 모양이 마치 석옹(石甕)과 같이 생겼으며, 속을 들여다보면 온통 검은색이다. 반석이 있어 그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이를 도암(島巖)이라고 한다. 물이 절벽에 이르러서는 성난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나 되어 마치 흰 무지개가 허공에 걸린 듯하고, 눈발이 흩날리는 듯하며,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전설에, “옛날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연못가에서 젓대를 불고 있었는데, 용녀(龍女)가 그 소리를 듣고는 감동하여 그를 불러서 남편으로 삼았으므로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오조천은 바로 어조천(語早川)이 와전된 것이다. 그 근원은 송도의 천마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고연담(姑煙潭)과 박연폭(朴淵瀑)이 되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금천군(金川郡)의 서쪽을 돌아 조읍포(助邑浦)에 이르러서 예성강으로 들어간다.
○ 금강(錦江) -혹은 웅진강(熊津江), 백강(白江),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하기도 한다.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成山)에서 바다를 건너 웅진강(熊津江)의 어귀에 이르렀다. 백제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와서 저항하였는데, 크게 싸워서 격파하고는 백제를 모두 평정하였다. ○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주류성(周留城)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켰다. 2년에 유인궤(劉仁軌)가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백강의 입구에서 왜병(倭兵)들을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웅진은 국성의 남쪽에 있다. 옛 백제의 해구(海口)로, 당나라에서 이곳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백강은 웅진의 동남쪽에 있는데, 역시 큰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전주(全州)의 서쪽 경계에 닿아 있다. 당나라 용삭 3년(663)에 유인궤가 수군을 이끌고 웅진에서 주류성으로 나아가면서 백강의 입구에 이르러서 왜병과 만나 네 번을 싸워 모두 이겼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백마강은 청주(淸州)의 남쪽에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긍주(矜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천(舒川)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백마강이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청주의 경계를 들어갔다가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천안군(天安郡)의 경계를 지나고, 여기에서 꺾어져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그 하류는 한강에 합해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강이 일본의 서적에는 백촌강(白村江)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르기를, “천지천황(天智天皇) 2년(663)에 백촌강(白村江)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웠다.” 하였다.- 지금의 백마강이다. 지금 백마강의 상류를 웅진(熊津)이라고 하는데, 《당서》에서 칭한 웅진은 백강의 하류에 있는바, 이는 바로 고금(古今)의 칭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백강과 백마강을 나누어서 두 강으로 하였으며, 또 백마강을 한강에 끌어대어 합하였으니, 몹시 잘못되었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속리산에서 나오는 한 물은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천(舒川)의 남쪽 수구 역시 조선의 하나의 큰 하천이다. 강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하나는 동남쪽에 있는 금산성(錦山城) 동남쪽 경계의 적암(赤巖) 서북쪽 기슭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적천(赤川)으로, 그 근원이 무주부(茂朱府)의 적상산(赤裳山) 동쪽에서 나오는바, 적암은 바로 적상(赤裳)의 잘못된 표기이다. 금강은 그 근원이 장수현(長水縣) 분수치(分水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무주의 서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적천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금산성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제원천(濟源川)으로, 그 근원이 금산군 월봉산(月峯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진산성(珍山城)의 동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서남쪽에 있는 고산성(高山城)에서 나와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흘러 영동성(永同城)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천(松川)이다.- 이 동남쪽에 있는 파음산(巴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웅이산은 상주(尙州)에 있다.- 의 북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황간성(黃磵城)의 북쪽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천은 그 근원이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간현의 북쪽을 지나 영동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흘러 옥천성(沃川城)의 북쪽을 지나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회덕성(懷德城)의 북쪽과 문의성(文義城)의 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진잠성(珍岑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진잠성(鎭岑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을 지나며,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공주(公州)의 동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 북쪽의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동진강(東津江)으로, 그 근원이 충주(忠州)의 망이산(望夷山)에서 나온다.- 은 동북쪽에 있는 조령(鳥嶺)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안성(淸安城)의 서쪽 경계와 진천성(鎭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 있는 음성(陰城)과 괴산(槐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청주(淸州)의 서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 있는 보은(報恩)의 동쪽, 개경(開慶)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문경(聞慶)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청주의 남쪽 경계와 회인(懷仁)의 북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상의 두 물은 모두 동진강의 별파(別派)인데,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전의(全義)의 남쪽 경계와 문의(文義)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공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남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진강은 망이산으로부터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진천현(鎭川縣)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현(燕岐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 두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져서는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공주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성(燕岐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지난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부여성(扶餘城)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100리가량을 흐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석성(石城)의 북쪽 경계와 정산성(定山城)과 임천(林川)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 강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초포(草浦)로, 그 근원이 계룡산(鷄龍山)에서 나온다.- 은 동쪽에 있는 연산(連山)의 동북쪽, 진잠(珍岑)의 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산(泥山)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노성현(魯城縣)이다.- 의 남쪽 경계와 여산(礪山)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은진성(恩津城)의 북쪽을 지난다. 이곳에서 또 서남쪽에 한 물이 있어서 남쪽에 있는 전주(全州) 서남쪽의 모악산(母岳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익산성(益山城)의 서쪽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물은 어느 물인지 상세하지 않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용안(龍安)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함열(咸悅)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남쪽과 북쪽에서 흘러온 작은 물을 각각 만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큰 산의 남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정산과 임천의 큰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초포는 서쪽으로 은진현 서쪽의 강경(江景)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 이미 합류한 다음에는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청양(靑陽)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한산성(韓山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서천성(舒川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주현(州縣)에서 흘러오는 수십 개 근원의 물을 합하여 거의 1000리나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금강의 근원은 장수현(長水縣)의 분수치(分水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영동현(永同縣)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송천(松川)의 물이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흘러 옥천현(沃川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용천(龍川) -바로 《고려도경》에서 칭한 물이다.- 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산현(靑山縣)의 남쪽 경계를 돌아서 흘러와 합류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진강이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된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웅진(熊津)이 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여현(扶餘縣)의 동쪽에 이르러서 백마강(白馬江)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초포(草浦)의 물을 모은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두치강(豆恥江) -전탄(錢灘)과 광탄(廣灘)을 덧붙인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원균(元均)의 수군을 습격하여 한산도(閑山島)를 빼앗았다. 이에 왜적들이 수로와 육로로 한꺼번에 나와 왜선이 2, 3일도 되지 않아 광양(光陽)의 두치진(豆恥津)에 정박하였는데, 두치진은 남원(南原)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 우리나라의 각 장수들이 여러 차례 왜적들을 참획하였다. 12월에 광양의 전탄(錢灘)에서 싸워 왜적 4명의 수급을 참획하였고, 11월에 보성군(寶城郡) 광탄(廣灘)에서 싸워 왜적 1명을 참획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동성(河東城)의 서쪽에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물은 북쪽에 있는 남원성(南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남원(南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곡성(谷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이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요천(蓼川)으로, 그 근원이 장수현(長水縣)의 장안산(長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두치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영례성(永禮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구례(求禮)의 잘못된 표기이다.-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무목산(無木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나와 송경산(松京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및 순천성(順天城)의 북쪽을 거쳐 동남쪽으로 흐르는 한 물이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수(洛水)로, 그 근원은 장흥부(長興府)의 웅치(熊峙)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무등산의 서쪽을 돈 다음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두치진에 합류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광양성(光陽城)의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이 바로 하동성(河東城)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두치강은 일명 섬강(蟾江)이라고도 한다. 그 근원이 진안(鎭安)의 마이산(馬耳山) 중대(中臺) 및 전주(全州)의 웅치(熊峙)에서 나와 이 두 물이 합해져서 남쪽으로 흘러 남원부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요천(蓼川)을 지난 다음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낙수(洛水)가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흘러 광양현의 동쪽을 지나서 전탄(錢灘)이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서 칭한 광탄(廣灘)은 바로 낙수(洛水)의 상류이다.
○ 낙동강(洛東江) -진강(晉江)을 덧붙인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속리산에서 나오는 한 줄기 물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곡천(豬谷川)으로, 그 근원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대수구(大水口)가 있는데, 조선국 동남쪽의 큰 하천으로, 바로 진강(晉江)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을 진강으로 잘못 알았다.- 이다. 진강의 물은 북쪽의, 왕경(王京)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는 영천현(榮川縣)의 북쪽 큰 산에서 나오는데, 그 산맥은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과 소백산(小白山)으로부터 꾸불꾸불 서리면서 2000여 리를 내려오다가 봉화현(奉化縣)의 서쪽, 예안현(禮安縣)의 서북쪽에서 봉우리를 일으키며, 지봉(支峯)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두 줄기로 갈라져 남쪽으로 가 각 군현(郡縣)의 경락(經絡)이 되면서 바다까지 닿는다. 이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沙川)을 가리키는 듯한데, 사천의 근원은 안동부의 백병산(白屛山) 및 봉화현의 문수산(文殊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된다.- 은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영천현의 동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안동성의 서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백석산(白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백암산은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 의 물을 받아들인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소천(小川)으로, 그 근원이 영양현의 검마산(劍磨山)에서 나온다. 낙동강의 정원(正源)이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소천(小川)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청량산(淸涼山)의 서쪽 기슭을 지나고, -삼가 살펴보건대, 소천이 이미 황지에서 나온 물과 합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청량산의 서쪽, 안동부의 동남쪽을 지난 뒤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사천과 합류한다.-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의성(義城)의 서쪽 경계와 용궁성(龍宮城)의 동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의 북안성(北安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안성(比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서쪽에서 흘러온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위수(渭水)이다.- 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수는 그 근원이 의흥현(義興縣) 화산(華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비안현(比安縣)의 동쪽을 감싸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풍유천(豐酉川)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천군(醴川郡)의 와전으로, 천(川)의 이름으로 잘못 안 것이다.- 이 있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함창성(咸昌城)의 북쪽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곡천(豬谷川)으로, 속리산에서 흘러나온다. 이미 앞에 나왔다.- 서쪽에서 온 상주(尙州) 서북쪽의 파음산(巴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서 나온 물과 만나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이수(伊水)로, 그 근원이 상주의 웅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인동성(仁同城)의 서쪽과 선산(善山)의 동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령성(開寧城)의 동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감천(甘川)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적암(赤巖)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오다가 서남쪽에서 흘러온 거창(居昌)의 물과 합류한 다음 또다시 동쪽으로 금산(金山)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온 한 물과 합류하여 성주(星州)의 북쪽, 개령(開寧)의 남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감천은 그 근원이 지례현(知禮縣)의 대덕산(大德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면서 직지천(直旨川)과 아천(牙川)을 모으고, 꺾어져서 동쪽으로 흘러 선산부(善山府) 옥산(玉山)의 동쪽에 이르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호강(琴湖江)이다.- 이 있어 합류한다. 이 물은 동북쪽에 있는 경주(慶州) 서북쪽과 영천(永川) 동남쪽의 모자산(母子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하양성(河陽城)의 남쪽을 경유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공곡성(恭谷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칠곡성(漆谷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 경계를 지나 꺾어져서 정남쪽으로 흐르다가 대구성(大邱城)의 서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호강은 그 근원이 청송부(靑松府)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천(永川)과 하양(河陽) 두 현 사이를 지나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대구부의 북쪽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가야천(伽倻川)이다.- 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남쪽에 있는 협천성(浹川城)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고령성(高靈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가야천은 그 근원이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원풍성(元風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현풍성(玄風城)이다.- 남쪽과 의령성(宜寧城) 북쪽으로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흘러 창녕(昌寧)의 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진강(晉江)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남쪽에 있는 운봉(雲峯)의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함양(咸陽)의 남쪽과 단성(丹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산음(山陰)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산청현(山淸縣)이다.- 의 물을 받아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삼가(三嘉)의 남쪽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양천(梁川)으로, 그 근원이 삼가현의 화지현(花旨峴)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진강에 합류한다.- 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흘러 진주(晉州)의 남쪽을 지나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공원성(恭原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칠원성(漆原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을 지나 굽이굽이 동북쪽으로 700리를 흘러와서 합류하는데, 이 물이 바로 사천(泗川)인 듯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강은 그 근원이 무주부(茂朱府)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지리산에서 나오는 임천(瀶川)의 물과 합류해 동쪽으로 흘러 단성현(丹城縣)의 북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양천(梁川)을 지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진주의 남쪽을 지나며,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사천은 바로 현 이름인데, 잘못 진강이라고 하였다.- ○ 여기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흘러 영산성(靈山城)의 서쪽을 지난다. -영산(靈山)은, 큰 산맥(山脈)이 모자산(母子山)에서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경주(慶州), 손인(蓀仁), 경산(慶山), 화랑(火郞), 청도(靑道)의 다섯 성을 지난 다음 남쪽으로는 창녕(昌寧)에 이르러서 무계산(武溪山)이 되고, 동남쪽으로는 영산성(靈山城)의 북쪽에 이르러서 화악산(華岳山)이 되는데,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손인은 바로 자인(慈仁)의 잘못된 표기이며, 화랑은 아마도 화왕(火王)의 와전인 듯하다. 화왕산성(火王山城)은 창녕의 북쪽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응천(凝川)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동북쪽에 있는 밀양(密陽)의 북쪽에서 나와 경산(慶山)의 서남쪽 산 및 동북쪽에 있는 손인(蓀仁) 동쪽의 금오산(金鼇山)에서 나오는 물과 만난 다음 남쪽으로 흘러 언양(彦陽)과 양산(梁山)의 서쪽 경계와 밀양의 동쪽 경계를 지나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응천은 그 근원이 현풍(玄風)의 비슬산(琵瑟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청도군(淸道郡)을 감싸 흐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밀양부의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 동쪽 언덕은 동래(東萊)의 서쪽 경계이다. 동래의 북쪽에는 윤산(輪山)이 있고, 김해의 서쪽에는 웅산(熊山)이 있다. 강구(江口)의 동남쪽은 바로 절영도(絶影島)이고, 또 큰 바다 건너편의 동남쪽에는 대마대도(對馬大島)가 있다. 이 물은 근원으로부터 길게 1000리를 흐르면서 수십 성의 산에서 나오는 물을 모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강(晉江)은 경주(慶州) 서남쪽에 있는 사주성(泗州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성(泗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북쪽에 있는데, 혹 서강(西江)이라고도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마귀(麻貴)가 울산성(蔚山城)을 공격하면서 군사를 파견해 서강(西江) 입구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의 수로(水路)를 막게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강이 과연 사천현 북쪽을 지나기는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경주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막은 수로는 바로 울산부의 태화강(太和江)인데, 진강이라고 하였으니, 더욱더 잘못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은 그 근원이 안동(安東)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여러 물을 모은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예천군(醴川郡)의 남쪽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속리산에서 나오는 저곡천(豬谷川)의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대구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금호강(琴湖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영산현(靈山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진강(晉江)이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김해부(金海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흩어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랑강(三浪江)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탈취하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 한산(閑山)을 침입하였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이 송도(松島), 울산(蔚山), 부산(釜山)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경략(經略) 형개(邢玠)가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에 대해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영은 부산에 있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영은 서생포(西生浦)에 있다. 부산을 격파하고자 할 경우에는 육로로는 반드시 양산(梁山)의 서북쪽을 경유해야 하는데, 이곳에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한 필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악하다. 남원(南原) -삼가 살펴보건대, 원(原) 자는 연문(衍文)인 듯하다.- 을 경유할 경우에는 삼랑(三浪)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이 두 곳은 모두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요충지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삼랑은 아마도 낙동강 하류의 삼차하(三叉河)를 가리키는 듯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랑강(三浪江)은 양산군(梁山郡)의 남쪽에 있다. 구지(舊志)를 보면, 양산(梁山)의 서북쪽에는 험준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두 필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하며, 남쪽에는 삼랑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양산과 삼랑을 탈취하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갔다.
○ 태화강(太和江)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울산(蔚山)에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울산의 남쪽에 도산성(島山城)이 있는데, 도산성은 산세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견고함으로 삼았다. 성 한가운데에 강이 하나 있어 부채(釜寨)와 통할 수 있으며,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거쳐 부산과 통할 수 있다. 왜적들이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쌓았는데, 반구정(伴鷗亭), 성황당(城隍堂), 태화강(太和江)이 모두 도산(島山)의 앞에 있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로일성(長老日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장기성(長鬐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위산성(尉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울산성(蔚山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쪽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울산성의 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쪽으로 흘러 좌병(左兵)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좌병영(左兵營)이다.- 의 남쪽 경계를 지나 1백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태화강은 그 근원이 경주의 단석산(斷石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부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신라에 도착하자, 신라의 왕이 즉시 흰 끈으로 얼굴을 묶고 앞에 와서 강화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고는 거듭 맹세하기를,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또 아리나예하가 거꾸로 흐르고 냇물의 돌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지 않는 한, 봄가을로 조공을 빠뜨릴 경우에는 하늘의 신령과 땅의 귀신이 함께 우리들을 토벌할 것입니다.” 하였다.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압록강(鴨綠江)은 삼한(三韓)에 있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면,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은 천하의 세 대하(大河)라고 하였는바, 압록강은 세 대하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서기》에서 이른 바 아리나예하는 바로 압록강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신라 나해왕(奈解王) 때의 일이다. 이 당시에 신라의 강역은 경상좌도(慶尙左道)에 그쳤는바, 아리나예하는 마땅히 한나라의 대수(大水)로, 만일 태화강이 아니라면 과연 낙동강을 가리킬 것이다. 일본인이 아리나예하가 압록강이라고 한 것은 망녕된 설이다.
○ 대동강(大同江) -옛날에는 패수(浿水), 대통강(大通江)이라고 하였다. ○ 비류강(沸流江)과 흑하(黑河)를 덧붙인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서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에 살았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현(浿水縣)의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臨浿縣)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 지리지를 보면 임패현이 없다.- 동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주(水經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허신(許愼)이 이르기를, “패수는 누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鏤方東入海]” 하였고, 어떤 데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 하였으며, 십삼주지(十三州志)에는 이르기를,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쪽에 있으며, 누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패수는 대개 패수현에서 나와 누방현을 경유하는 것이다. 옛날에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리가 없다. 그 지역은 지금 고구려의 국성(國城)이다.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을 찾아가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평양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의 조선현(朝鮮縣)을 경유하는데, 조선현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로, 한나라 무제(武帝) 때 설치하였다. 그런데 서북쪽으로 흐르므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고금(古今)의 일을 상고해 보건대, 일이 어긋난다. 이는 대개 《수경》에서 잘못 증험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東入於海]’ 한 곳의 동(東) 자를 위 구절에 붙이면 《수경》의 글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주서(周書)》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치소(治所)는 평양성(平壤城)이다. 그 성의 남쪽은 패수에 임해 있다.
《수서(隋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읍은 평양성인데, 산을 따라서 굽이지게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해 있다. 매년 초에 패수 가에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왕이 요여(腰輿)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펼쳐 놓고 이를 관람한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이 사는 곳은 평양성인데,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다. 성은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外城)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에 임해 있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요동(遼東)의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낙랑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통강(大通江)은 평양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패수이며, 강 가운데에 조천석(朝天石)이 있다. 당나라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여 사로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부》 주(注)에 이르기를, “평양의 기린석(麒麟石)은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에 들어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 위로 나와 승천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 당시의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하였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동강은 바로 옛날의 패수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통강은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데, 대동강이라고도 하며, 옛 이름은 패수이다. 《사기》를 보면, “진(秦)나라 때 요동고새를 수리하고는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으며, 한나라 초기에는 연인(燕人) 위만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서는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여러 종족 및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역속(役屬)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는 한나라의 순체(荀彘)가 요동에서 나와 조선을 쳐서 조선의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렀다.” 하였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에 패수현(浿水縣)이 있는데,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개 왕험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경》을 보면,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는 내호아(來護兒)가 강호(江湖)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로 들어갔는데, 평양과의 거리가 600리 되는 곳이었다. 얼마 뒤에 고구려의 군사에게 패하여 도로 해포(海浦)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다. 당나라 용삭(龍朔) 1년(661)에는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패수 가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평양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만력 21년(1593)에는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에 이르자, 왜적들이 온 힘을 다해 막아 지켰다. 이여송이 그곳의 지형을 헤아려 보고는, 동쪽과 남쪽은 모두 강에 임하여 있고, 서쪽은 산을 타고 있어 가파르며, 북쪽은 모란봉(牧丹峯)이 높이 솟아 있어서 최고의 요해처임을 알아내었다. 이에 이여송이 장수를 보내어 모란봉을 공격하게 하고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사면에서 성에 기어 올라가게 해 마침내 함락시켰다. 얼마 뒤에 이여송이 개성(開城)에 주둔해 있으면서는 별장(別將) 양원(楊元)을 평양에 주둔시켜 대동강을 제압해 군량을 운송할 수 있게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비류강(沸流江)은 강동군(江東郡)의 남쪽에 있는데, 한강(漢江)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강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한강조(漢江條)의 안설(按說)에 나왔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는 지금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바로 대통강(大通江)이다.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큰 근원이 있다. 남쪽의 근원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동쪽에 있는 문천성(文川城)에서 서북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의 서쪽 기슭에서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류강(沸流江)으로, 그 근원은 양덕현(陽德縣)의 오강산(吳江山)에서 나온다.- 산에서 나온 근원이 하나는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조금 북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초천(草川)이다.- 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북쪽에 있는 덕양(德陽) -삼가 살펴보건대, 양덕(陽德)으로 되어야 한다.- 의 동남쪽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초천은 그 근원이 양덕현 삼방령(三方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비류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이것이 패수가 되어 성천성(成川城)의 동남쪽 경계에 이르러 다른 남쪽 근원의 물과 합류한다. 남쪽 근원의 다른 하나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능성강(能成江)이다.- 는 동남쪽에 있는 곡산성(谷山城)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 다음 다시 굽이굽이 서북쪽으로 200리를 흘러 다른 남쪽 근원의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비류강은 서쪽으로 흘러 성천부의 북쪽에 이르러서 대동강과 합해지는바, 이곳에서 비류강이 성천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능성강과 합해진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곡산성 -삼가 살펴보건대, 곡산(谷山)은 오자(誤字)인 듯하다.- 의 남쪽을 지난 다음,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삼등성(三登城) 대목산(大木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 경계와 상원성(祥原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 근원의 물은 바로 대동강의 정원(正源)이다. 능성강은 그 근원이 두류산(豆流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곡산부의 북쪽 경계를 감싸 흐른 다음에 서쪽으로 흘러 삼등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대동강과 합류한다.- ○ 북쪽의 근원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동북쪽에 있는 양덕현(陽德縣) 북쪽의 우선산(遇仙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계(錦溪)로, 그 근원이 옛 순천(順川)의 강서산(江西山)에서 나온다.- 서쪽으로 흘러 동북쪽에서 흘러온 맹산성(孟山城) 동남쪽 산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굽이굽이 200리를 흘러 은산성(殷山城)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계는 서쪽으로 흘러 은산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북쪽의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막탄강(瘼灘江)이다.- 은 정평성(定平城)의 서북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맹산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덕천성(德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개천성(价川城)의 동북쪽 경계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막탄강은 그 근원이 맹산현의 안도리산(安都里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맹산현의 북쪽 경계를 지나 대동강에 들어간다.- 또 다른 정북쪽의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의 정원(正源)으로, 영원군(寧遠郡)의 내낙림(內樂林)에서 나온다.- 은 영원성(寧遠城)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큰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원성의 동쪽 경계와 덕천성의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천성의 동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다른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또 다른 근원에서 나온 물이 동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내낙림에서 나온 대동강이 서남쪽으로 흘러 덕천현의 동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막탄강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은산현(殷山縣)의 서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금계를 지나고서 다시 서쪽으로 흐른다.- ○ 여기에서 약간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은산성의 서남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산성(燕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자산(慈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동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강동성(江東城)의 서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상원(祥原)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은 바로 능성강이다.- ○ 여기에서 서쪽으로 100리를 흘러 중화성(中和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평양성(平壤城)의 동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쪽으로 흘러 평양성 남쪽을 지난다. -평양은 바로 옛 왕험성(王險城)으로, 기자(箕子)의 고도(故都)이다. 한나라 때에는 일찍이 낙랑군의 치소(治所)를 두었으며, 진(晉)나라 이후로는 고구려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당나라가 평양을 함락하자 고구려가 비로소 평정되었다. 오대(五代) 때에는 왕건(王建)이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는 비로소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다. 지금 성에서 동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금수산(錦繡山)이 있으며, 그 북쪽에는 순천성(順川城)이 있고, 또 그 북쪽에는 큰 산이 있다. 이 산은 동북쪽에 있는 영원(寧遠)에서부터 뻗어 내려와 서남쪽으로 향산(香山)이 되고,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순안성(順安城)이 되며,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와 무학산(舞鶴山)이 되며, 다시 남쪽으로 강 입구에 이르는데, 총 500리를 끊이지 않고 남쪽으로 패수를 감싸고서 내려온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은 중화성의 북쪽 산이 되어 안산(案山)이 되며, 여기에서 남쪽은 황주(黃州) 및 봉산(鳳山)이다.- 평양성 남쪽에서부터는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30리를 흐르는데, 이곳을 대동강이라고 한다. 대동강은 강서성(江西城)과 용강성(龍岡城) 두 성의 동남쪽을 지나 삼화성(三和城)의 동남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황주(黃州) 북쪽에서 흘러오는 흑하(黑河)가 동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오는 안악(安岳)의 물을 합한 다음 다시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 흑하는 그 근원이 상원(祥原) 동남쪽의 경계에 있는 큰 산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이 합해져서 서쪽으로 총 300리를 흐른 다음 상원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황주의 북쪽 경계와 중화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흘러 삼화성(三和城)의 동남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안악에서 흘러온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흑하는 아마도 흑교천(黑橋川)인 듯하다. 대동강이 남쪽으로 흘러 중화현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흑교천을 지난 다음 급수문(急水門)을 통해 나가는데, 남쪽으로 황주(黃州), 재령(載寧), 안악(安岳) 등처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 절양해(絶瀼海)를 이룬다.- ○ 안악에서 흘러오는 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어초천(於草川)이다.- 은 동북쪽에 있는 황주의 동쪽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주의 남쪽과 봉산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재령성(載寧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안악의 동북쪽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어초천은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 천자산(天子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주의 남쪽을 지난 다음 급수문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대동강과 절양해에서 만난다.- 또 다른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진(迎津)이다.- 은 서남쪽에 있는 바닷가의 장연성(長淵城) 동북쪽에 있는 부석산(傅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 송화성(松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화성(松禾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남쪽과 신산성(信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천성(信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북쪽을 지나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영진(迎津)은 그 근원이 송화현(松禾縣)의 달마산(達摩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신천군의 북쪽을 돌아 절양해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신천(信川)의 남쪽 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해주성(海州城)의 북쪽을 지나오는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전방천(箭防川)으로, 그 근원이 해주의 수양산(首陽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월당강(月唐江)과 만나 절양해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안악성의 동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다른 근원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어초천(於草川)이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90리를 흘러 동쪽에서 흘러온 흑하와 합류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 대동강은 이미 남쪽에서 흘러온 물을 합한 다음에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 800리를 흘러가는바, 조선의 서북쪽에 있는 큰 하천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동강은 바로 패수로, 그 근원은 영원군 내낙림의 백산(白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막탄과 금계 등 여러 물을 합하여 성천부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비류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사천(蛇川)을 지난다. 여기에서부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삼등현의 서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능성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합류한 물은 평양성의 남쪽을 돌아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으로 발로하(發蘆河)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급수문을 통과하면서 왼쪽으로 어초천을 지나고, 남쪽으로 월당강과 만나서 절양해가 되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살펴보건대, 《위략(魏略)》을 보면, “한(漢)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는 격수(湨水)를 조선과 연의 경계로 하였다.” 하였다. 격수는 하내(河內)의 물 이름으로, 《춘추(春秋)》를 보면, 양공(襄公) 16년 3월에 양공이 진후(晉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거자(莒子), 주자(邾子), 설백(薛伯), 기백(杞伯), 소주자(小邾子)와 더불어 격량(湨梁)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이곳이 연(燕)과 조선(朝鮮)의 경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격수는 패수(浿水)의 오자(誤字)이다. 그리고 《당서(唐書)》를 보면, 현경(顯慶) 5년(660)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저강(沮江), 요동(遼東), 평양(平壤)의 길로 나아갔으며, 지리지(地理志)에는 이르기를, “패강(貝江) 입구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을 얻었다.” 하였다. 저강(沮江)이니 패강(貝江)이니 하는 것도 패강(浿江)이 와전된 것이다.

부(附) 패수(浿水)에 대해 잘못된 것을 밝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漢)나라의 패수현(浿水縣)이었다. ○ 패수는 또한 이하(泥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물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어니하(淤泥河)는 해성현(海城縣) 성에서 서남쪽으로 65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요사》를 보면, “요양현은 한나라 때 패수현으로, 그 북쪽에 패수가 있는데, 또한 어하(淤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이라고도 하는데, 물 안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하였는데, 《대명일통지》에서는 이 설을 그대로 따랐으며, 이어 또 조선의 대통강(大通江)을 패수라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어니하는 그 근원이 성수산(聖水山)에서 나와 흘러 미진산(迷眞山)의 서쪽에 이르러서 흩어지는바, 이 물이 바로 요동 지방의 헌우락으로, 조선의 경계 안에 있는 패강(浿江)과는 같지 않다.
《사군지(四郡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계 안에는 세 개의 패수가 있는 듯하다. 그 첫 번째는 《사기》에 나오는 패수로,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넜다.” 하였는데, 이것은 압록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당서》에 나오는 패수로, “평양부의 남쪽 가는 패수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다. 세 번째는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패수로, 평산부(平山府)의 저탄(豬灘)을 패강(浿江)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세 개의 패수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이지 패수가 아님을 밝혔는데, 이것은 제대로 된 설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압록강은 바로 마자수이다. 마자수와 패수가 동시에 낙랑군과 현도군 두 군에 나누어 보이고 있으니, 압록강이 패수가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하였다.- 그리고 또 《요사》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요양(遼陽)의 패수는 참으로 한(漢)나라 때의 패수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요사》는 요양부(遼陽府)를 평양(平壤)이라고 하였으므로, 또다시 어느 한 물을 가리켜 패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요사》가 찬수되기 전에 나온 《당서》에 평양의 남쪽 가가 패수임을 분명하게 말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는 태반이 두찬(杜撰)인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고기(古記) 및 《요사》 지리지는 모두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나라의 여지(輿地)를 밝힐 수가 있다. 저탄(豬灘)을 가리켜 패수라고 한 것은, 이것은 가탁하여 이름한 것이니 따지고 말고 할 것도 못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에서 저탄을 패수라고 한 것은, 백제의 온조(溫祚)가 북쪽으로 패강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이다. 백제의 패강은 바로 곡산부(谷山府)의 능성강(能成江)이 대동강에 합해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단지 평양부의 한 패수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견이 좁아서 《사기》를 읽으면서는 문득 연(燕)과 진(秦)의 동쪽 경계가 지나치게 먼 것을 의심하고, 또 위만이 건넌 강이 대동강이 아닌 듯하다고 의심한다. 이것이 바로 세 개의 패수 설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연과 진의 동쪽 경계가 어디까지이며, 위만이 동쪽으로 건너와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지금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나라 때에서 멀지 않은 시대에 나온 《수경주》나 《주서》, 《수서》, 《당서》에서 평양성의 남쪽 물을 패수라고 한 것을 정확하다고 믿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연과 진의 동쪽 경계가 대동강을 지난 것과 위만이 살았던 왕검성(王儉城)이 평양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조선조(朝鮮條)에서 상세하게 밝혔다.
○ 월당강(月唐江)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불당강(月不唐江)은 황주(黃州) 안악현(安岳縣)의 동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불당강은 황주 안악현의 동쪽에 있는데,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지(舊志)를 보면, 안악현은 황주에서 남쪽으로 1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불당강은 바로 월당강이다. 그 근원은 서흥부(瑞興府) 웅파산(熊坡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서흥부의 남쪽을 경유하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봉산군의 남쪽을 경유하고서 북쪽으로 흘러 대동강과 급수문(急水門)에서 만난다.
○ 사수(蛇水) -어떤 데에는 다하(茶河)로 되어 있다-ㆍ타하(陀河)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龍朔) 2년(662)에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가 고구려와 사수(蛇水) 가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패하여 전사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開泰) 7년(1018)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蕭排押)이 고려와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사이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수는 평양의 서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용삭 초에 방효태 등이 고구려를 칠 적에 영남(嶺南)의 군사로써 사수에서 벽을 쌓았다. 송나라 천희(天禧) 2년(1018)에 거란이 고려를 정벌할 적에 사하(蛇河)와 타하(陀河) 두 물에서 싸워 패하고서 돌아왔다. 구지(舊志)를 보면, 두 물은 모두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사수는 그 근원이 자산부(慈山府) 웅초덕산(熊草德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요사》에서 이른 바 다하(茶河)를 《대청일통지》에서는 사수라고 하였는데, 이는 음이 비슷하여서 그런 것인가? 타하 역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물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 발로하(發蘆河)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2년(669)에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근행(李謹行)에게 조서를 내려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근행이 발로하(發蘆河)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서로 이끌고 신라로 도망갔는바, 4년 만에 평정된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함형(咸亨) 4년(673)에 연산도 총관(燕山道摠管) 이근행이 고구려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호로하(瓠蘆河)의 서쪽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내가 《당서》 유인궤열전(劉仁軌列傳)을 살펴보건대, 호로하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북쪽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로하는 평양성의 서쪽에 있는데, 당나라 때 이근행이 이곳에서 신라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로하는 경주(慶州) 서쪽 경계에 있다. 구지(舊志)를 보면,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 북쪽에 있다. 당나라 함형 4년에 이근행이 호로하의 서쪽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고, 함형 5년에는 유인궤가 동쪽으로 신라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 호로하를 끊고서 신라의 대진(大鎭)인 칠중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로하는 그 근원이 자산부의 자모산(慈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순안현(順安縣)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평양부의 서쪽을 지나 대동강에 들어간다. 유인궤가 건넌 호로하는 바로 장단부(長湍府)의 임진강(臨津江)인바, 발로하와 혼동하여 칭해서는 안 된다. 《자치통감》에서는 발로하를 잘못 호로하라고 하였는데, 호삼성의 주(注)에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유인궤가 건넌 물이라고 하였으며, 《대청일통지》에서는 또다시 잘못된 호삼성의 주를 답습하였으니, 전혀 틀렸다.
○ 청천강(淸川江) -옛날에는 살수(薩水)라고 칭하였다.
《수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우문술(宇文述)이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문술에게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기를 청하자, 우문술이 돌아왔다. 우문술이 살수를 건널 적에 고구려의 군사가 후군(後軍)을 습격하였다. 이에 크게 무너져서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鴨綠水)에 이르렀는바, 450리를 행군한 셈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살수는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의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옛 이름은 살수이다.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살수는 《대명일통지》를 보면,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바, 지금 성경(盛京)의 경계 바깥에 있다.” 하였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주성은 아래로 살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로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를 칠 적에 패한 곳이다. 또 청천강이라고도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천강은 안주성의 동쪽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역시 살수라고도 한다. 수나라 대업 8년에 우문술 등이 고구려를 칠 적에 압록수를 건너서 고구려의 대신인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우문술이 동쪽으로 살수를 건넌 다음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는데, 평양성이 험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우문술이 군사를 철수하면서 살수에 이르러서 군사가 반쯤 건넜을 적에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여러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 장사(將士)들이 앞을 다투어 도망쳐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렀는바, 450리를 행군하였다. 지금은 대령강(大寧江)이라고도 한다. 구지(舊志)를 보면, 평양과 황주는 서쪽으로 대령강으로 막혀 있고, 동쪽은 대통강(大通江)으로 막혀 있어서 ‘양쪽 강의 중간’이라고 이른다. 본조(本朝) 강희(康煕) 37년(1698)에 조선에 흉년이 들자, 조선에서 표문을 올려 중강 개시(中江開市)를 열 것을 청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저축해 둔 미곡(米穀)을 수로와 육로로 4만 석을 운송하여 중강(中江)에 이르러서 매매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천강과 대령강을 한 강이라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개시(開市)를 한 중강(中江)은 바로 압록강인데, 잘못 청천강이라고 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주의 서남쪽 경계에 청천강(靑泉江)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淸川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수구(水口)가 있다. 청천강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한 근원은 동북쪽에 있는 영원성(寧遠城) 동북쪽의 큰 산에서 나오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의 정원(正源)으로, 강계부(江界府)의 갑현(甲峴)에서 나온다.- 덕천(德川)의 동북쪽 근원에서 나와 흘러서 패수로 들어가는 물과 단지 한 산을 격하여 있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서천성(西川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희천성(煕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으로 지나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끼고 돈 다음 영변성(寧邊城)의 남쪽에 이르러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악산(岳山)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약산(藥山)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의 남쪽 기슭을 돌아 안주의 동북쪽에 이르러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 북쪽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공포(孔浦)이다.- 은 남쪽 근원에서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하고, 다시 서쪽으로 굽이굽이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천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여러 산의 북쪽 기슭과 이산(耳山)의 뒤쪽과 영변성의 북쪽 경계를 돈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악산의 서쪽 기슭을 돌아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포는 그 근원이 운산군(雲山郡) 유동령(柳洞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변부(寧邊府)를 돈 다음 남쪽으로 흘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주성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 500리를 흘러간다. ○ 두 근원의 물은 근원에서부터 합해지는 곳까지가 400리이며, 가운데에는 단지 20여 리의 사이를 두고 산으로 막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청천강은 옛날의 살수이다. 그 근원은 강계부의 갑현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희천군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영변부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공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주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해망(海望)의 모퉁이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부터 흘러온 대령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대령강(大寧江) -혹은 대정강(大定江)이라고도 한다. ○ 박천군(博川郡)에 있는 강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은 박천군(博川郡)에 있으니, 바로 옛날에 주몽(朱蒙)이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준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동사(東史)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또 박천강이라고도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천군의 서쪽에는 대정강이 있는데, 혹 대령강이라고도 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은 동북쪽에 있는 청천강(靑泉江) 북쪽 근원의 서쪽을 격해 있는 산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창성강(昌城江)으로, 그 근원이 벽동군(碧潼郡) 구계령(九階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태천현(泰川縣)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대령강으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령강의 정원(正源)으로, 의주의 천마산(天磨山)에서 나온다.- 과 합류한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박천성(博川城)의 남쪽에 있는 백벽산(白碧山)의 남쪽을 지나 북쪽에서 흘러온 운산(雲山)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송림천(松林川)을 가리키는 듯하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구성(龜城) 동북쪽 산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구성강(龜城江)으로, 그 근원이 구성부 팔영령(八營嶺)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태천현(泰川縣)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대령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받아들인 다음 남쪽으로 흘러 큰 산의 북쪽 기슭을 돌아 가산성(嘉山城)의 남쪽 경계와 안주성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400여 리를 흐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령강은 창성강, 구성강 등 여러 강의 물을 모은 다음 남쪽으로 흘러 청천강과 합류한다.- ○ 해구(海口)의 동남쪽은 청천강(靑泉江)과의 거리가 20리이다. 근원으로부터 흘러오면서 청천강과는 단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데 불과하다.
○ 압록강(鴨綠江) -옛날에는 마자수(馬訾水)라고 하였으며, 혹 애강(靉江),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한다. ○ 독로강(禿魯江)을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서개마현(西蓋馬縣)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지나는 고을이 둘이고, 1200리를 흘러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안평현(西安平縣)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하며,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의 북쪽에 있다.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가 있는데, 그 근원은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鴨綠)이라고 부른다. 강물은 국내성(國內城)의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安市)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평(安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를 타고 건너야 하므로 이를 의지하여 참호로 삼는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는 일명 압록강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이라고 한 것이다. 요동에서의 거리가 500리이다. 국내성의 남쪽을 지나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한 물과 합류하는데, 바로 염난수이다. 두 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의 물 가운데에서 이 물이 가장 커서 푸르고 맑은 물결이 일렁이며, 지나가는 나루에는 모두 대선(大船)을 놓아둔다. 그 나라에서는 이 강을 의지하여 천참(天塹)으로 삼는다. 물의 너비는 300보이다.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50리 되는 곳에 있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쪽으로 480리 되는 곳에 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서북쪽으로 거란과 접해 있다. 압록강을 의지하여 험고함으로 삼는데, 강은 너비가 300보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쪽으로 56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시(安市)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압록수에서 무위(武威)를 뽐내었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 압록강은 조선 국성(國城)에서 서북쪽으로 1450리 되는 곳에 있다. ○ 큰 강이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러 대통강(大通江)으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고, 큰 강은 바로 압록강 하류의 별파(別派)이며, 대통강은 바로 대총강(大總江)의 음이 변한 것이다. 뒤의 안설(按說)에 상세하게 나온다.
《명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전요지(全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요양성(遼陽城)에서 동쪽으로 53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 협주성(夾州城)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독로강(禿魯江) -삼가 살펴보건대, 독로강은 그 근원이 함흥부(咸興府) 설한령(雪寒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을 경유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을 지나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 다음 애주(艾州)에 이르러서 파저강(婆豬江)과 함께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일명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하며, 혹 애강(靉江)이라고도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익주(益州)는 지금의 의주(義州)로, 중국의 음으로는 같다.- 장백산 남쪽의 여러 시냇물이 남쪽으로 모여들어 큰 강을 이루어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가강(佟家江)과 만난 다음 다시 500리를 흘러 봉황성(鳳凰城)의 동남쪽을 돌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동남쪽은 조선과의 경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길림(吉林), 오라(烏喇)에서 남쪽으로 977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조선과의 경계를 나누며, 봉황성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옛날의 마자수이다.
《황여고(皇輿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하에는 세 개의 대수(大水)가 있으니,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鴨綠江)이 그것인데, 압록강은 또한 외이(外夷) 지역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바로 화이(華夷)의 경계가 된다.
《향조필기(香祖筆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 두 물줄기 외에 북쪽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하고 압록강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먼 변방 바깥에 있어서 우(禹) 임금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다.
《장거유서(莊渠遺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지(大地)의 산맥(山脈)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을 조산(祖山)으로 삼는데, 남쪽의 산맥과 북쪽의 산맥이 가장 크다. 북쪽의 산맥은 유연(幽燕) 지방에서 끝나는데, 대하(大河)가 이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 압록강과 만난다. 동쪽에는 하사(下沙)가 있는데, 이곳은 산과 물이 한 번 크게 모여 만나는 곳이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바로 옛날의 마자수이다. 그 근원은 장백산 남쪽 기슭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에서 나누어 나와 합류한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온 물이 동쪽에서 와 모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조선의 북쪽 경계에서 나온 몇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장백산 서쪽 지역의 이어진 산들의 남쪽 기슭에서 나온 모든 물이 십이도구(十二道溝)로부터 두도구(頭道溝)에 이르기까지 모두 몰려들어 수세가 비로소 왕성해진다. -강물이 남쪽으로 흘러 조선의 사산성(謝山城)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건천구(建川溝)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사산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서 흘러온 물이 모여든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인선위(因禪衛), 낙언성(諾言城), 소진성(小辰城)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신갈이보(新噶爾堡)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남쪽에 있는 삼산성(三山城)에서 나온 한 물이 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옛 보(堡)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십이구(十二溝) 및 십일구(十一溝)의 물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충천령(沖天嶺) 동쪽의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으로 십구(十溝), 구구(九溝), 팔구(八溝)의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칠구, 육구, 오구, 사구의 물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삼구, 이구 및 두구(頭溝)의 물을 받아들인다. ○ 삼가 살펴보건대, 사산성은 혜산진(惠山鎭)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고, 건천구는 아마도 허천강(虛川江)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며, 인선위는 인차외보(仁遮外堡)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낙언성은 바로 나난보(羅暖堡)의 음이 변한 것이며, 소진성은 바로 소농보(小農堡)의 잘못된 표기이고, 신갈이보는 바로 신갈파지보(新噶坡知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삼산성은 아마도 삼수부(三水府)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그 ‘삼산성에서 나온 물이 와서 합류한다.’ 한 것은 아마도 장진강(長津江)을 가리키는 듯하고, 옛 보는 바로 옛 갈파지보(葛坡知堡)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모아산(帽兒山)의 동쪽 기슭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굽이져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30리를 흐른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가운데에 모래밭이 있어서 서쪽으로는 이자구(李子溝)의 물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는 해낙이(該諾爾)의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으로 이하(里河)의 물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한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만포성(滿浦城), 발등성(發登城), 고산리성(高山里城) 세 성 -삼가 살펴보건대, 발등성은 바로 벌등성(伐登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세 진(鎭)은 모두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에 있다.- 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네 개의 작은 물이 흘러와서 모인다. -그 가운데 큰 것을 백마령하(白馬嶺河)와 파성자하(破城子河)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도로하(圖魯河)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독로강(禿魯江)의 음이 변한 것이다. 앞글에 나온다.- 가 동쪽에 있는 장걸성(張傑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강계부(江界府)의 음이 변한 것이다.- 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조금 남쪽에 마역하(馬驛河)가 있어 서쪽에서 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미원촌(未源村)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오로량수(五老梁水)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위수(渭水)로, 그 근원이 강계부의 두읍령(杜邑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위원군의 남쪽을 지나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가 동남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지고이성(地古爾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직동보(直洞堡)로, 중국음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이산(理山)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세 개의 작은 물이 서북쪽에서 와서 합류한다. -지고이성 북안(北岸)에 곧장 있는 것을 유수하(楡樹河)라고 한다. 또 그 남쪽에 작은 물이 있으며, 또 그 남쪽에 있는 것을 차구(叉溝)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가강(佟家江)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산양공성(山陽公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산양회보(山羊會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금하(東金河)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동건강(童巾江)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동건강은 그 근원이 초산부(楚山府)의 유도막령(踰都幕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산양회진(山羊會鎭)을 지나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소비성(小丕城), 대비성(大丕城), 필동성(必東城) 세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해하(東垓河) -삼가 살펴보건대, 소비성과 대비성 두 성은 바로 소파아진(小坡兒鎭)과 대파아진(大坡兒鎭) 두 진의 음이 변한 것이고, 필동성은 벽동군(碧潼郡)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동해하는 아마도 벽동천(碧潼川)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필동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소거류성(小巨流城) -삼가 살펴보건대, 소길호리진(小吉號里鎭)의 잘못된 표기이다.- 과 대수고성(大水高城), 대길로성(大吉魯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길호리진(大吉號里鎭)이다.- 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창성부(昌城府)의 자잔천(自潺川)이다.- 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상주걸하(常州傑河)가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오등성(敖登城)과 요곽이성(遼郭爾城) -삼가 살펴보건대, 오등성은 어정진(於汀鎭)인 듯하다. 요곽이성은 바로 묘동보(廟洞堡)로, 중국음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과 창성(昌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객점하(客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장점하(長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소자가하(蘇子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포서하(浦西河)가 서북쪽에 있는 대전(大甸)으로부터 흘러나와 남쪽으로 흘러 합류하며, 그 남쪽에 작은 물이 있어 흘러와서 모인다. 여기에서 숙주성(宿州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아포하(阿布河)가 서북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아포하는 바로 애합하(愛哈河)로, 그 근원이 애합변문(愛哈邊門) 바깥의 동북쪽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근원이 합해져 서남쪽으로 흘러 유조변(柳條邊)으로 들어가 석두성(石頭城)의 서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유조변을 나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애주성(愛州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 -삼가 살펴보건대, 의주의 옥강천(玉江川)인 듯하다.- 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세 갈래로 갈라져서 20리를 흘러간 다음 다시 합해져 구련성(九連城)의 동남쪽을 지난다. -구련성은 조선의 애주성과 강안을 마주하여 경계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강물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영아하(永阿河)가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의주의 서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합련하(哈連河)가 서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장백산(長白山)의 위치는 동경 11도 8분 북위 41도 9분이며, 강어귀의 위치는 동경 8도 북위 40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압록강은 그 근원이 백두산의 큰 연못에서 나와 땅속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나와 혜산진(惠山鎭)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 삼수부(三水府)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옛 무창(茂昌)의 경계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독로강(禿魯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초산부(楚山府)의 서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파저강(婆豬江)이 새외(塞外)로부터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의주(義州)의 북쪽에 이르러서 세 갈래로 갈라져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해져 하나가 된다. 청수량(淸水梁)에 이르러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 -중국 쪽에 있다.- 과 합해지고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된다. 이 두 갈래가 위화도(威化島)를 감싸 흐르다가 다시 합해져서 대총강(大總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덕래하(德來河) -바로 대령강(大寧江)의 상류이다-ㆍ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 -대매하와 소매하는 바로 압록강 상하의 요충지가 되는 진(津)이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서북계 연혁 취청천강이북지조(取淸川江以北地條)에 나온다.
○ 이하(泥河) -덕원군(德源郡)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북계 연혁 여발해접계조(與渤海接界條)에 나온다.
○ 활녈수(活涅水) -어떤 데에는 활녜수(活禰水)로 되어 있다-ㆍ벽등수(闢登水)ㆍ을리골수(乙離骨水)ㆍ삼잔수(三潺水) -이상의 여러 물은 정평부(定平府) 등지에 있다.
《금사(金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이록고수(移鹿古水) -함흥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합라로조(合懶路條)에 나온다.
○ 복간수(僕幹水) -함흥부 이북의 지역에 있다-ㆍ주아문수(注阿門水) -정평부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다-ㆍ도온수(陶溫水) -어떤 데에는 토온수(土溫水)로 되어 있다. 마땅히 온성부(穩城府) 등지에 있어야 한다-ㆍ도롱고수(徒籠古水) -바로 종성부(鍾城府)의 오롱소수(吾籠所水)이다.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여여진위계조(與女眞爲界條) 및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혼동수(渾疃水)ㆍ성현수(星顯水)ㆍ잔준수(僝蠢水)ㆍ소빈수(蘇濱水) -이상의 여러 물은 삼수부 등지에 있다.
《금사》 본기(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 연혁 휼품로조(恤品路條) 및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알목하(斡木河)
《쌍괴잡초(雙槐雜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주위(建州衛), 해서위(海西衛), 올자위(兀者衛) 등의 사람들은 먼저 알목하에 살면서 칠성(七姓)의 야인(野人)들과 원수 관계가 되어 조선으로 달아나 투항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알목하는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 무산령(茂山嶺)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회령부의 서쪽에 이르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당초에 알목하 지역은 여진의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조선 세종(世宗) 14년(1432)에 칠성(七姓)의 야인들이 알목하를 침공하여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를 살해하자, 그의 동생인 범찰(凡察) 등이 경원부(慶源府) 근처의 지역으로 옮겨 와서 살기를 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빈틈을 타 알목하에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 두만강(豆滿江) -혹은 토문강(土門江), 도문수(徒門水), 통문하(統門河), 아야고하(阿也苦河), 애호강(愛滹江)이라고도 한다. ○ 팔하천(八下川)을 덧붙인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열전에 이르기를, “고려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을 수축하자, 혼탄(渾坦)이 석적환(石適歡)과 도문수(徒門水)에서 군사를 합하여 고려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사》 석토문열전(石土門列傳)을 보면, 석토문은 한자(漢字)로는 신도문(神徒門)이라고 쓰는바, 이를 근거로 해서 보면 도문(徒門)이 토문(土門)임은 분명하다.- ○ 세기에 이르기를, “요나라에서 경조(景祖)를 생여진절도사(生女眞節度使)로 삼으니, 통문수(統門水)의 온적흔부(溫迪痕部), 신은수(神隱水)의 완안부(完顔部)가 모두 서로 뒤를 이어 와서 귀부하였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 꼭대기에는 연못이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토문강은 영고탑성(寧古塔城)에서 남쪽으로 6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조선의 북쪽 경계를 감싸고 흐른 다음 다시 동남쪽으로 꺾어져서 여러 물을 모아 바다로 들어간다.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대명일통지》를 보면, 아야고하가 있는데, 그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 장백산의 물 가운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토문강이 있을 뿐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없다. 살펴보건대, 《금사》의 유가열전(留可列傳)을 보면, 유가(留可)는 통문(統門)과 혼준수(渾蠢水)가 합류하는 지역의 오고륜부(烏古倫部) 사람이다. 지금 혼춘하(渾春河)가 남쪽으로 흘러 토문강과 합해지니, 통문은 바로 토문(土門)의 음이 변한 것이다. 또 《명사》 지리지를 보면, 도문하(徒門河)가 있는데, 강물은 건주위(建州衛)의 동남쪽을 지나 10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바, 이 강이 바로 도문하로, 아야고하와는 당연히 같은 한 물이다.” 하였다. ○ 토문강은 조선국의 서북쪽 경계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 동남쪽 기슭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萬曆) 20년(1592)에 왜병들이 평양에 모여 있으면서 격문(檄文)을 보내어 조선에 고하기를, “부산에서 평양까지 오는 데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그런 데다가 풍신수길과 가등청정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만강(豆滿江) 가에 이르게 하였는바, 그 일대가 모두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토문강은 그 근원이 장백산 꼭대기의 동쪽 기슭에서 나오는데, 이를 토문색금(土門色禽)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흘러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또 수십 리를 흐른다. 이곳에서 한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하고, 또 두 근원이 합해진 한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데, 이 두 물은 모두 장백산의 지봉(支峯)에서 나오는 물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한 물이 있어 두 근원의 물을 합하여 서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이 물 남쪽은 바로 조선국이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북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남쪽 둔치로 작은 물 두 개와 큰 물 하나를 받아들인다. -두 개의 작은 물은 모두 증산(甑山) 북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100리가량을 흐른다. 하나의 큰 물은 홍단하(洪丹河)라고 하는데, 그 근원은 서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세 연못에서 근원하는 물을 합하여 동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한 작은 물을 합한 다음 다시 북쪽으로 흘러 증산의 동쪽 기슭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홍단하는 바로 홍단하(紅丹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조금 동쪽에 아궤개토문(阿几个土門)이 있어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한 다음 동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아궤개색금(阿几个色禽)은 장백산 산꼭대기에서 동북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 있다. 그 서쪽은 바로 이아모색금(泥牙母色禽)과 이아고색금(泥牙庫色禽)인데, 서북쪽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이 되는 물이다. 이 물은 산 동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진 한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는데, 역시 토문강의 별원(別源)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00리를 흐르며 남쪽 둔치에서 두 개의 물을 받아들인다. -한 물은 어순하(魚順河)라고 하는데, 남쪽으로부터 두 근원에서 나온 물을 합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한 물을 합하여 300여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또 한 물은 파하천(波下川)이라고 하는데, 세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굽이굽이 2백 수십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파하천은 바로 팔하천(八下川)으로,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 원산(圓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다가 회령부성 북쪽으로 지나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큰 산의 동쪽 기슭에 이르러 꺾어져 북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온 두 개의 물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쪽 언덕에는 조선의 무산성(茂山城)이 있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쪽 언덕에는 조선의 양옹성(良雍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양영보(梁永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동북쪽으로 평지(平地) 가운데를 1백 수십 리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물 세 개를 받아들이는데, 그 동남쪽 언덕에는 바로 조선의 방산보(方山堡) 및 회령(會寧), 고령(高岭)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령진(高嶺鎭)이다-, 왕탄(王坦)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방원보(防垣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종성(鍾城), 동관(潼關), 옹대(雍大)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달보(永達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등 일곱 성이 있는데, 모두 강가에 있다. 이곳에서 한 작은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온다. 그 북쪽 언덕에서 큰 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기까지 사이에는 갈합리하(噶哈里河)가 있다. 갈합리하는 북쪽의 흥안령(興安嶺) 서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물을 합한 다음 꺾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복아합토하(卜兒哈兔河)를 합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하는데, 이 역시 큰 하천이다. 이곳과 마주한 남쪽 둔치에 바로 조선의 온성(穩城)이 있다. -갈합리하는 흥안령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합달하(哈達河)가 있어, 서북쪽에 있는 마아호리령(馬兒呼里嶺)의 큰 산에서 나와 몇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을 합한 다음 동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활혼산(活渾山)에서 나온 애의육하(艾衣六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활궤하(活几河) 및 동쪽에서 흘러오는 살기고하(薩其庫河)를 받아들이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살극득향령(薩克得享嶺)의 부아합하(付兒哈河)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합순하(哈順河)를 받아들인다. 갈합리하는 근원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이미 400여 리를 흘러왔는데, 이곳에서 다시 복아합토하가 서쪽에서 와서 합해져, 두 개의 큰 물이 와서 모이는 것이다. ○ 갈합리하는 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토문강과 합류한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꺾어져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세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한 물은 이름이 없고, 한 물은 호란하(呼蘭河)라고 하고, 한 물은 미첨하(米瞻河)라고 한다.- 여기의 남쪽 둔치에는 조선의 미천진성(美踐鎭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미전진성(美錢鎭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있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또 동영액하(東英額河)가 있어 흘러 와서 합류한다. 이곳의 서쪽 둔치에는 바로 조선의 순진성(循鎭城)이 있고, 남쪽은 경원부성(慶源府城)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휘춘촌(輝春村)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혼춘촌(渾春村)이다.- 의 서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휘춘하(輝春河)가 있어 동북쪽에서 나와 10여 개의 물을 합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휘춘하는 동북쪽에 있는 여러 산속에서 나와 서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우비첨사리하(牛非尖舍利河)와 서쪽에서 흘러오는 부답족혼하(夫答足渾河)를 합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면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서백하(西白河)와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심계랍고하(心鷄拉庫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합이달산(哈爾達山)의 물 및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 남쪽에서 흘러오는 호로하(虎魯河), 이아하(你牙河), 하화리하(下禾里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합달하(哈達河), 늑특하(勒忒河)를 합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합달하를 합한다. 그러고는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흐르면서 조선의 서쪽 언덕에서 흘러오는 물 두 개를 받아들인다. -한 물은 경원부(慶源府)의 남쪽 물로, 서남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고, 한 물은 전원포(前元舖) 앞 물로,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100여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경원부의 남쪽 물은 바로 오룡천(五龍川)으로,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의 갈성령(葛城嶺)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건원보(乾原堡)에 이르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전원포(前元舖)는 바로 안원보(安原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꺾어져 남쪽으로 20리를 흐른 다음 다시 꺾어져 동쪽으로 흐르면서 남쪽 둔치의 한 물 -바로 아산포(阿山舖)의 남쪽에 있는 한 물로, 길이가 1백 수십 리이다.- 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동북쪽으로 20여 리를 흐르면서 -바로 오아곤산(烏兒滾山)의 남쪽에서 80리쯤 되는 곳이다.- 동쪽 둔치에는 무산성(茂山城)이 있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무산(茂山)은 아마도 중국쪽의 성 이름인 듯하다.- 북쪽의 물을 받아들인다. 이 물 이름은 서수락천(西水洛川)으로, 그 근원이 동원(東源) -삼가 살펴보건대, 동해(東海)로 되어야 한다.- 가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물 두 개를 받아들이고, 다시 북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무산성의 동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무산성 북쪽으로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또 북쪽에 한 물이 있는데, 이름은 없으며, 그 남쪽 둔치의 물굽이진 곳에 바로 조선의 경흥성(慶興城)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의 위치는 동경 14도 5분, 북위 42도 5분이다. 해구의 남쪽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그 동쪽에 있는 하나의 산이 바로 대도살합(代都薩哈)이다. 또 동쪽으로 수십 리 되는 곳이 바로 서사하도(西思河島)이다. 섬과 산의 북쪽은 바로 화탁화하(火擢火河)의 해구이다. 이 강은 근원에서부터 1000여 리를 흐르는데, 서쪽 둔치의 경흥성에서 남쪽 물가까지를 색봉파(索鳳坡)라고 하고, 다시 남쪽으로 대해구(大海口)까지를 서수락성(西水洛城)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토문강, 도문강, 통문강, 두만강은 모두 한 강으로, 음이 변한 것이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을 보면, 장백산은 압록강, 혼동강(混同江),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하였다. 애호강은 바로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음이 변한 것으로, 역시 두만강이다. 두만강의 근원은 백두산의 남쪽, 갑산부(甲山府)의 천평(天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무산부의 서쪽으로 지나고 회령부의 경계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알목하(斡木河)와 팔하천(八下川)을 지난다. 여기에서 꺾어져 북쪽으로 흘러 온성부의 북쪽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갈합리하(葛哈里河) -중국쪽 지역에 있다.- 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경원부(慶源府)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후춘강(後春江) -바로 혼춘하(渾春河)로, 중국쪽 지역에 있다.- 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오룡천(五龍川)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경흥부의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 합란하(合蘭河)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란부(合蘭府),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지에 5개의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호리개(胡里改)로, 이곳에는 호리개강(胡里改江)과 혼동강(混同江)이 있으며, 또 합란하(合蘭河)가 있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호리개는 금나라의 호리개로(胡里改路)로, 지금 우리나라 육진(六鎭) 북쪽, 영고탑(寧古塔) 동쪽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연혁 합란부조(合蘭府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호리개강은 바로 오소리강(烏蘇哩江)이다. 지금 육진 북쪽의 물로써 스스로 바다에까지 도달하면서 크기로도 오소리강과 나란히 칭할 만한 강으로는 두만강이 있을 뿐이다. 그런즉 합란하는 바로 두만강인 듯하다.
부(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인 달단(韃靼)과의 경계 지역에 큰 강이 있는데, 이름을 보려천(保呂川)이라고 하며, 그 너비가 15리이다. 매년 8월에서 3월까지는 강물이 굳게 얼어 강을 메우는데, 얼음의 두께가 세 자 남짓이나 되어 육지에서와 같이 배 밑에 수레바퀴를 달아 밀고서 다닐 수가 있으며, 사람들은 신발 바깥쪽에 못을 박고서야 걸어다닐 수가 있다. 3월 이후에는 얼음이 풀려서 다시 큰 강이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보려천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너비가 15리나 된다고 한 것은 망녕된 것으로, 상고할 수가 없다.


 

[주D-001]그 동쪽의 바닷물은 : 원문에는 ‘其東南海水’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其東面海水’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수구가 …… 있다 : 원문에는 ‘縣海中有島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懸海中有島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03]우선산(遇仙山) : 원문에는 ‘右仙山’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여도(㻌島) : 원문에는 진도(鎭島)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및 …… 다음 : 원문에는 ‘之延山城之南’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及延山城之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홍천현(洪川縣) : 원문에는 홍주현(洪州縣)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善德王)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써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08]무협(巫峽) : 양자강의 상류에 있는 세 협곡 가운데 하나로,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주D-009]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10]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주D-011]백촌강(白村江) : 《당서》에는 백강(白江), 《삼국사기》에는 기벌포(伎伐浦)로 되어 있다. 강경(江景) 근처의 금강(錦江)이라는 설과 변산반도(邊山半島) 남쪽의 줄포만(茁浦灣)이라는 설이 있다.
[주D-012]서남쪽으로 …… 지나 : 원문에는 ‘西南流經黃磵縣山’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西南流經黃磵縣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또다시 …… 이르러서 : 원문에는 ‘又西南置燕岐縣之南’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又西南至燕岐縣之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 원문에는 ‘兩朝平壤錄’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5]임천(瀶川) : 원문에는 ‘臨川’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 낙동강(洛東江)이나 알천(閼川)이라는 설이 있으나, 반드시 고유명사로 보이지는 않고 대하(大河), 대수(大水)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7쪽 주》
[주D-017]요동고새(遼東故塞) : 이병도(李丙燾)는 요동고새는 바로 번한새(番汗塞)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쪽)》
[주D-018]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障)은 상하 두 곳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大同江) 북안(北岸)에 비정(比定)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주D-019]600리 : 60리의 잘못된 표기이다. 《수서(隋書)》에는 60리로 되어 있다.
[주D-020]다시 …… 이르는데 : 원문에는 ‘又西經南至三和城東南’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又西稍南至三和城東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격수(湨水) : 패수(浿水)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달라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은 대동강으로, 정약용(丁若鏞)은 압록강으로, 이병도(李丙燾)는 청천강으로, 북한의 학자들은 대릉하(大凌河)로 비정하여 일정하지 않다.
[주D-022]이곳이 …… 말인가 : 원문에는 ‘河與於燕朝鮮之界耶’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何與於燕朝鮮之界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 이에 대해서 김상기(金庠基)는, “이는 고려 측의 기록에 보이는 석천(石川) 즉 지금의 황화천(皇華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하와 타하 두 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다타이(茶陀二)의 이(二)를 숫자로 본 데서 나온 착오이다.” 하였다.《高麗時代史 99쪽 주》
[주D-024]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소자하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4쪽》
[주D-025]중강 개시(中江開市) : 의주(義州)의 건너편인 중강(中江), 즉 지금의 마자대(馬子臺)에서 열었던 중국과의 무역을 말한다. 임진왜란 중에 기황(飢荒)을 계기로 요동의 미곡(米穀)을 수입하기 위하여 선조 26년(1593)에 처음 열었으며, 난이 끝나고 선조 34년(1601)에 폐지하였다. 다음 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열었으며,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폐지하였다. 그 뒤 청나라가 개국하자 인조 24년(1646)에 다시 열었는데, 이를 중강 후시(中江後市)라 한다.
[주D-026]유가열전(留可列傳) : 원문에는 ‘有可傳’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7]홍단하(紅丹河) : 원문에는 ‘洪丹’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심계랍고하(心鷄拉庫河) : 원문에는 ‘心難拉庫河’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