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묘역및 묘지탐방 /회산군 묘역 탐방

2012. 1.13.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다섯째 아들 회산군 묘역탐방

아베베1 2012. 1. 13. 18:54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


성종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의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 세조 2년 7월 30일 신묘에 세자궁에서 낳았다. 신사년에 처음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가 성화(成化) 무자년에 현록대부 자을산군(顯祿大夫者乙山君)이라 더 올렸다. 기축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안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홍치(弘治) 7년 갑인 12월 24일 기묘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왕위에 있은 지는 25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강정(康靖) 온량(溫良)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이라 하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인조 13년 을해에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광주(廣州) 서학당동(西學堂洞)의 임좌이다. 을묘년 4월 6일에 장사 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비(妃)는 휘의신숙공혜 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청주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明澮)의 딸이다. 경태(景泰) 7년 병자 10월 11일 정미에 연화방(蓮花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정해년에 가례를 거행하였으며 기축년에 왕비로 책봉되고,갑오년 성종(成宗) 5년 4월 15일 기사에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19세였다. 연산주(燕山主) 정사년에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순릉(順陵)이다.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 산 묘좌이다. 갑오년 6월 7일에 장사 지냈다.
○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묘(起畝)의 딸이다.
○ 계비(繼妃)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 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평정공(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 호(壕)의 딸이다. 천순 6년 임오 세조 7년 6월 26일 기축에 신창(新昌)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계사년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기해년에 윤비가 쫓겨났으므로 경자년에 드디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주 정사년에 자순(慈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갑자년에 화혜(和惠)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嘉靖) 9년 경인 중종 25년 8월 22일 기묘에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69세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경인 10月 29일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의 왼쪽 산 간좌에 장사 지냈다. 이다.
○ 아들 열 여섯과 딸 열 둘을 두었다.
사(嗣) 중종대왕(中宗大王)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낳았다.
첫째 딸 신숙공주(愼淑公主) 정현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첫째 아들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융(㦕)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순(恂) 숙의(淑儀) 하씨(河氏)가 낳았다.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인데, 첨정 증찬성 치(菑)의 딸이다.
셋째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 귀인(貴人) 정씨(鄭氏)가 낳았다.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인데 능천군(綾川君) 증 찬성 수영(壽永)의 딸이다.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수(㥞) 숙의 홍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니, 생원 증 찬성 하림(河臨)의 딸이다. 후취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적(磧)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 회산군(檜山君) 염(恬)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인데 찬의 증 찬성 방언(邦彦)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봉안군(鳳安君) 봉(㦀) 귀인 정씨가 낳았는데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인데 판관 증 찬성 성기(成紀)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견성군(甄城君) 돈(惇)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고 봉사(奉事) 증 찬성 우호(友灝)의 딸이다.
여덟째 아들 익양군(益陽君) 회(懷)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인데 첨지 증 찬성 문창(文昌)의 딸이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관(慣) 숙용(淑容) 심씨(沈氏)가 낳았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인데, 인의(引儀) 증 찬성 간(簡)의 딸이다. 후취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군수 증 찬성 수중(守中)의 딸이다.
열째 아들 경명군(景明君) 침(忱)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첨정 증 찬성 첩(堞)의 딸이다.
열한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낳았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지중추 증 찬성 건(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무산군(茂山君) 종(悰) 명빈(明嬪) 김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수(銖)의 딸이다.
열세째 아들 영산군(寧山君) 전(恮) 숙용(淑容) 심씨가 낳았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니, 군수 증 찬성 순로(順路)의 딸이다. 후취는 경주 정씨(慶州鄭氏)이고 별좌(別坐) 증 찬성 홍선(弘先)의 딸이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열네째 아들 운천군(雲川君) 인() 숙의 홍씨가 낳았다. 아내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참의 증 찬성 인손(仁孫)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양원군(楊原君) 희(憘)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고 충의위(忠義衛) 증 찬성 경(經)의 딸이다. 후취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니 정(正) 증 찬성 종손(終孫)의 딸이다.
첫째 딸 혜숙옹주(惠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고원 위 문효공(高原尉文孝公) 신항(申沆)인데 본관이 고령(高靈)이다. 그 아버지는 참판 종호(從濩)이다.
둘째 딸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풍원위(豐原衛) 임숭재(任崇載)인데 본관이 풍천(豐川)이며, 그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셋째 딸 공신옹주(恭愼翁主) 귀인 엄씨(嚴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그 아버지는 낭성군 양호공(琅城君襄胡公) 보(堡)이다.
넷째 딸 경순옹주(慶順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시호는 영희공(榮僖公)이며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그 아버지는 부사 회(懷)이다.
다섯째 딸 경숙옹주(敬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인데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그 아버지는 현령 종원(宗元)이다.
여섯째 딸 정순옹주(靜順翁主) 숙의 홍씨(洪氏)가 낳았다. 남편은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인데, 본관이 봉화(奉化)이다. 그 아버지는 주부 현(鉉)이다.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인데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그 아버지는 참봉 광세(光世)이다.
여덟째 딸 경휘옹주(慶徽翁主) 숙용 권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인데, 본관이 파평이고, 그 아버지는 부사 승세(承世)이다.
아홉째 딸 휘정옹주(徽靜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인데,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그 아버지는 승지 흔(忻)이다.
열째 딸 정혜옹주(靜惠翁主) 귀인 정씨가 낳았다. 남편은 청평위(靑平尉) 한기(韓紀)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그 아버지는 판서 형윤(亨允)이다.
열한째 딸 정숙옹주(靜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정(正) 승류(承柳)이다.
○ 의경세자(懿敬世子 성종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세조는 자산군(者山君)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국과 도량이 웅걸스러웠으므로 세조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궁중에 있을 때, 마침 뇌성이 진동하여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내시 백충신(白忠信)이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으니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벼락이 전상(殿上) 좌우 기둥을 때렸다.”고 기록되었다.좌우에 있던 사람이 모두 넘어지고 넋을 잃었으나 《오산설림》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도 얼굴 빛이 변하고, 여러 왕손들은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성종은 전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이상히 여겨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애의 기국과 도량은 우리 태조를 닮았다.” 하였다. 《오산설림》에는 “세조가 정희왕후에게 이르기를, ‘뒷날의 나라 일은 마땅히 이 애에게 맡길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예종(睿宗)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었으므로 정희왕후가 성종으로써 대를 잇도록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안팎이 매우 불안하였다. 신숙주가 왕대비에게 아뢰기를, “속히 상주(喪主)를 결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왕대비는 성종으로써 왕통을 잇게 하고 친히 정사를 보살폈다.
예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월산군이 차례에 해당되나 정희왕후가 차례를 건너 뛰어 성종으로 위를 잇게 하였다. 성중은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었으나 오히려 조정이 편안하고 일이 없었다. 권 충정공(權忠定公) 벌(橃)의 을사년 상소
○ 임금이 열세 살에 들어와 왕통을 잇고 학문에 독실하며 어질고 밝아서 태평시대의 성군이 되었다.
○ 임금은 총명하고 영걸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는데 더욱 성리(性理)의 학문에 이해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의 글과 역법(曆法), 음악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고 활쏘기, 글씨, 그림도 또한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렀다.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며 제사는 사고가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몸소 지내고 몸을 삼갔다. 세 분 대비를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으며,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은혜와 예절로써 대우하고 종실 여러 친족들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보고 술을 내어 가인례(家人禮)를 행하여 매우 화락하였다.
○ 임금이 몸소 경안전(景安殿)에 제향(祭享)하고 경연으로 돌아오자 영경연(領經筵) 한명회(韓明澮)와 최항(崔恒)이 아뢰기를, “제사 지낸 후에 또 경연에 나오시니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나는 하루의 시간도 아끼는데, 재계하는 날은 할 수 없지마는 제사지낸 후에는 경연을 정지할 수 없다.” 하였다.
○ 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지금 날이 점점 길어가니 임금께서는 경연의 석강(夕講)에 나가야 할 것이요, 내시들과 늘상 함께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상(院相)김질(金礩) 등이 아뢰기를, “지금 한창 더위가 심한데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경연에 나오시면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되오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도 편전에서 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은 “내가 촌각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리오. 그리고 조신들을 편복으로 접견할 수 없소.” 하였다.
대비가 임금이 쉴 사이 없이 글 읽는 것을 보고, “피로하지 않으시오?” 하니 임금은 “읽고 싶어서 읽으니 피로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첨재(僉載)》
○ 임금은 학문에 뜻이 독실하여 아침ㆍ낮ㆍ저녁의 세 때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선비를 불러 강론을 마치고는 편복으로 마주 앉아 술을 내리면서 조용히 고금의 치란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을 물으니 전각 안에는 촛불 하나만을 켰을 뿐이었다. 때로 밤중에 이르러 선비들이 크게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御前燭]을 주어 본원까지 바래다 주게 하였으니, 곧 당 나라 금련거(金蓮炬)의 고사와 같은 뜻이었다. 《용재총화》
○ 이때 혜장왕비(惠莊王妃)ㆍ회간왕비(懷簡王妃)ㆍ양도왕비(襄悼王妃)가 한 궁중에 거처했는데 임금은 세 분을 똑 같이 섬기었다. 또 임금은 대비를 위하여 날마다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내수사의 여종 5~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얼굴과 재예(才藝)가 뛰어났더니 항상 임금에게 추파를 보내었다.임금은 이를 깨닫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는 궁중에서 작은 연회도 베풀지 아니하였다. 또 임금은 사고가 없는 한 날마다 세 번 경연에 나오고 세 번 대비전에 뵈러 갔으며 종실들을 불러 후원에서 술도 마시고 활도 쏘았다.종실들을 대하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태평시대의 좋은 일이지마는 논하는 이는 혹 말하기를, “연산군(燕山君)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니 애석한 일이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綠)》
○ 임금은 해서(楷書) 쓰는 법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으니,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바가 깊다. 또 묵화에도 뜻을 두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뛰어난 재능으로서, 모방하여 익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옛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 하여 약간 솜씨를 보인 것인데, 짧은 종이[寸牋]와 작은 서폭(書幅)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공경하며 감상하고 겹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귀중히 여기기를 주옥보다 더하였다. 《용천담적기》
후일에 중종(中宗)은, 일찍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필법을 볼 줄 안다고 하여, 궐내에 불러들여 간직했던 몇 장의 글씨를 내려주면서, “궐내에서는 성종과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것을 가려내어 들이라.” 하였다. 세창이 분류하여 아뢰었다.
○ 임금은 매양 월산대군(月山大君)을 궐내에 불러들여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나가 있을 때에는 편지로서 서로 수창(酬唱)하기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참외를 내려주는 시에,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 新苽初嚼水精寒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 兄弟親情忍獨看

하였다. 대개 그 우애의 지극함을 문자에서도 상상할 수 있었다. 《지봉유설》 《소문쇄록》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을 내 보이는 이가 있는데 종이와 필체가 보통 것과 달랐다. 그 종이에 쓰이기를,

깊숙한 정자는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고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 高樹俯潺湲
화류(驊騮 준마)는 푸른 풀밭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산기슭에 있구나 / 春在翠微間

하고, 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기대 선 무한한 뜻에 / 憑欄無限意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 하네 / 依約故山秋

하고, 또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 問兄何事送羲娥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 遐想洋琴與渭歌

하고, 또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 期會親戚 聘招佳妓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마는 은혜는 곧 형제이다 / 義雖君臣 恩則兄弟

하였다. 이것을 보건대, 임금의 평상시 희필(戱筆)임을 알겠다. 《소문쇄록》
○ 임금의 학문은 깊고 넓으며 문사(文詞)는 넓고 명백하였다. 글하는 선비 노사신(盧思愼) 등을 명하여 《여지승람》ㆍ《동국통감》ㆍ《삼국사절요》를 편찬하게 하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서적을 많이 간행케 하였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한서(前漢書》ㆍ《진서(晋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綱目)》ㆍ《통감(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전서(朱子全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 등이다. 그 밖에도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의 정난(靖難)에 한 장사치가 공이 매우 컸던 터라 세조가 어필을 내리기를, ‘세 번 죽을 죄를 지어도 용서 받는다.[三死無與]’ 하였다. 임금(성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그 장사치가 사람을 죽였는데 법 맡은 관원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논죄하였더니, 그 장사치가 세조의 어필을 올렸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교지를 내리기를,“선왕께서 손수 쓰신 유교(遺敎)가 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시오.” 하였다. 임금은 곤란해하며 말하기를, “선왕의 유교는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요, 사람을 죽인 자가 죽게 되는 것은 만세의 공법(公法)이니 어찌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써 만세의 공법을 폐기하겠습니까.” 하였다. 대비는 “비록 그렇지만 선왕의 유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용서해 주오.” 하였다.임금은 두 번 세 번 반대하면서, “대비께서 저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감히 나라 일을 맡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다른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소서.” 하였다. 대비는 “그렇다면 임금이 알아서 하오.” 하였다. 임금은 그 장사치를 곤장으로 치게 하였으나 끝내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밀부(密符)를 만들도록 명하여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두세 명의 중신에게 나누어 주어서 임금이 부를 적에 증거물로 삼게 하고 또 불의의 변고를 막도록 하였다.
○ 영안도(永安道)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 “본도는 조종(祖宗)께서 탄생하고 일어난 땅이므로 주(周)의 기산(岐山)이나 한(漢)의 패읍(沛邑)과 같사오나 다만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거나 서울에 가서 벼슬한 사람은 백 명에 한, 두 사람도 못 되어 조정의 예의ㆍ풍속과 문물의 아름다움을 귀와 눈으로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풍기(風氣)와 습성에 국한되어 오로지 억세고 사나운 것이 풍속이 되고 활쏘기,말타기로 업을 삼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형들도 가르치지 않고 자제들도 뜻을 두지 않으며, 공리만 서두르고 거짓을 일삼으며 예의를 버리고 기력만 숭상하게 되니, 습관이 풍속이 되어 드디어는 교만한 군사가 되고 맙니다. 지난번에 역적(이시애(李施愛))이 한번 일어나자 온 도민이 쏠리듯이 따라갔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고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기습(氣習)을 개혁시키고 교화를 밝히는 방법은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육진(六鎭)이 궁벽한 곳일지라도 자질이 영특하고 민첩한 사람이 왕왕 있으니, 바라건대, 영흥부(永興府)의 향교에 학업이 정밀하고 해박하며 명망이 있는 문관을 교수로 임명하여 여러 고을의 총명ㆍ민첩한 소년들을 가려 모아서 가르치고, 또 향교에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그 경비로 쓰도록 하소서.” 하였다.
○ 2년 신묘 겨울에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으므로 교지를 내려 직언을 구하였다. 임금이 보경당(寶敬堂)에 나와서 원상(院相) 김질(金礩)을 불러 조정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의논하였다.대비가 교지를 전하기를 “나의 일가 친척 중에서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봉록(俸祿)만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 혜성이 나타난 변괴는 아마 이에 관계된 것일 것이니 두려움이 실로 크다. 현명하고 준수한 선비로서 산림에 물러가 숨은 이를 마땅히 찾아서 불러 오라.” 하였다.
○ 3년 임진에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송골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임금이 경연에 나가자 신종호(申從濩)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매우 걱정하고 부지런하실 때이온데, 지금 궐내의 응방에서는 해동청을 기르고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완호(玩好)에 마음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이것은 아마 하늘을 공경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하는 실상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군자의 과실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니 내가 어찌 그 과실을 숨기리오.” 하고, 즉시 명하여 매[鷹]를 놓아 주게 하고 다시는 기르지 아니하였다.
○ 명하여 역대 제왕과 후비들의 본받을 만한 점과 경계할 점을 채록(採錄)하고 정리해서 세 편을 만들고,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 《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 하였다.
○ 임금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다가 한 나라 조조(晁錯)의 상서(上書) 중에,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모두 개간되지 못했고 놀고 있는 백성이 모두 농사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니, 시강관(侍講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도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중[僧]의 무리들이 군역(軍役)을 피하기를 도모하고 놀고 앉아 먹는 백성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다 쫓아버리기는 어려우나 청컨대, 승려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은 “사헌부로 하여금 규찰케 하라.” 하였다.맹현(孟賢)은 또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친히 밭 갈아서 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祭物))을 만들고 후비는 몸소 누에를 쳐서 제사 지낼 예복을 만들었으니 이는 제사를 중히 여겨 근본(조상)을 잊지 않고 갚는 것입니다. 한 나라 문제(文帝)는 가의(賈誼)의 말에 감동되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습니다. 예문이 갖추어 있는데도 조종조(祖宗朝)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은 원컨대, 임금께서 친히 적전을 갈아서 위로는 자성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힘쓰는 뜻을 모범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은 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명하여, “적전 가는 의식을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 6년 을미에 어떤 사람이 익명서를 승정원에 붙였는데 그 뜻은 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대비는 임금에게 정사를 돌려 주니 임금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대비가 듣지 않았으므로 또 원상(院相) 한명회로 하여금 대비에게 아뢰게 하였다. 명회가 대비에게 아뢰기를,“지금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이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대비는 따르지 않고 정사를 돌려주었다. 한명회가 아뢴 말에 온당치 못한 뜻이 있으므로 교지를 내려서 꾸짖었다.이에 양사에서 번갈아가며 세조가 언어가 불경한 죄로 양정(楊汀)을 죽이고 정인지(鄭麟趾)와 정창손(鄭昌孫)을 귀양 보냈던 일을 인용하면서 명회를 국문하기를 굳이 청했으나 왕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도 글을 올려 명회의 말 잘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자광이 다시 글을 올렸으나 말에 잘못된 점이 있어 파직되었다. 《야언별집》
○ 집현전이 폐지된 후에 독서당(讀書堂)도 폐지되었더니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먼저 홍문관을 열어 집현전의 옛 제도를 회복시켰다.
○ 7년 병신에 관각의 여러 사람이 건의하여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ㆍ양희지(楊熙止)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허침(許琛)ㆍ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후에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落成式)을 올렸다. 그 이튿날 감사하다는 글을 지어가지고 대궐에 나아갈 때 붉은 보로 싼 함을 메고 기생과 음악을 뒤따르게 하였다.
○ 명을 내려 신농(神農)ㆍ요제(堯帝)ㆍ순제(舜帝)ㆍ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은 고종(殷高宗)ㆍ주 문왕(周文王)ㆍ무왕(武王)ㆍ한 문제(漢文帝)ㆍ당 태종(唐太宗)과 주 문왕의 후비(后妃)ㆍ주 선왕(周宣王)의 강후(姜后)ㆍ제화(齊華) 맹희(孟姬)번희(樊姬)ㆍ한의 풍소의(馮昭儀)반첩여(班婕妤)명덕왕후(明德王后)ㆍ당(唐)의 문덕왕후(文德皇后)원헌황후(元獻皇后) 등의 모범될 만한 사적과 오왕 부차(吳王夫差)ㆍ한 무제(漢武帝)ㆍ진 무제(晋武帝)ㆍ당 명황(唐明皇)ㆍ덕종(德宗) 등 처음에는 현명하였으나 후에는 어두웠던 임금들의 사적을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글 잘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고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보면서 권면ㆍ경계의 자료로 삼았다.
○ 8년 정유에 사축서(司畜署)에서 가축 기르는 비용이 많이 들므로 명하여 가축의 수를 줄이게 하였다. 호조에서 돼지 3백 마리를 사재감(司宰監)에 맡겨 포육(脯肉) 만들기를 청하니, 임금은 “3백 마리를 어찌 차마 한꺼번에 죽이겠는가. 재신(宰臣)과 종신(宗臣)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 전에는 국왕이 탄생한 날에는 훈구(勳舊)의 신하가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며 복을 빌었는데 임금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복을 구하되 사특한 짓을 하지 않는다.’ 했으니,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겠는가. 그것을 폐지하라.” 하였다.
이때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이 글을 올려 축수하는 재(齋)를 폐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그대가 정도(正道)를 진술하고 이단(異端 불교)을 배척하여 나로 하여금 요ㆍ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자 하니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어두운 사람이지마는 실로 그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지금 말한 것을 따르겠노라.” 하였다.
○ 12년 신축 11월에 장원서(掌苑署 화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에서 영산홍(映山紅) 화분을 하나 올리니, 임금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은 인위(人爲)로 된 것이니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다시 올리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은 매양 경연에서 부지런히 강론을 듣고서도 오히려 범위가 넓지 못하다 하여 2품 이상 벼슬로서 고문될 만한 사람을 뽑아 차례로 참시(參侍)케 하고 그 칭호를 특진관이라 하였다.
○ 15년 갑진 5월에 명을 내려 조맹부(趙孟頫)의 서자(書字)를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에 걸어 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친히 왕우칭(王禹儞)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주면서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우칭의 기문이 비록 집정(執政)하는 이를 위해 지었던 것이지만 벼슬 자리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이것으로 좌우명을 삼을 만하다. 하물며 승정원은 추기(樞機)의 처지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은 일찍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각도에서 바치는 물품을 줄이게 하니 경상 감사가 아뢰기를, “해산물 같은 것은 구하기가 매우 쉬우니 종전대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뜻으로는 비록 갸륵하지마는 임금이 아랫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 또한 간절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0년 기유에 장령 이승건(李承健)이 황해도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향시에서 책문(策問)을 내어 본도의 여러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물으니, 영유 훈도(永柔訓導) 권계동(權季同)이 대답하기를, ‘오직 부처를 공양해야만 능히 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그 말이 명교(名敎)에 해로운 점이 있기에 내쫓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불교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대개 지각 있는 사람이면 이것을 당연히 물리칠 것인데, 계동은 남의 사표(師表) 되는 처지에 있으면서 유교를 배반하고 부처에게 아첨하여 불교로써 백성 구하는 방법을 삼으려 하니, 사도(邪道)로 백성을 미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는가. 사헌부로 하여금 국문케 하라.” 하였다. 또 손수 쓴 글씨로 교지를 내려,
“내가 일찍이 중들이 천륜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소모시키는 것을 미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뽑고 세상의 교화를 굳건히 하고자 했는데,지금 유생들이 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들어 쓰는 시기를 당하여 요ㆍ순의 도리는 진술하지 않고 부처의 법을 주창하게 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절에 가서 사신(捨身)하고 당 나라 헌종(憲宗)이 예불했던 것과 같이 하도록 하려 함이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국문케 하여 먼 지방으로 내쫓게 하라.” 하였다.
○ 대사헌 허침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왜인이 귤(橘)나무를 바치고 유구국(琉球國)의 사자도 또한 이상한 나무를 바쳤다 하니 만약 전하께서 이것을 받으시면 저들은 전하께서 먼 지방의 물건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다투어 와서 바칠 것이오니, 어찌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임금은 “지난번에 유구국에서 바친 나무는 약재이므로 받았다. 귤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니 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지중추 고태필(高台弼)은 아뢰기를, “신은 제주 사람이온데 제주에서 진주 앵무배(眞珠鸚鵡杯)를 바치므로 백성에게 폐를 끼침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것은 그 용도가 나라에 이로움은 없으면서 백성에게 폐만 끼치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4년 계축 6월에 임금이 병환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라야만 병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근시에게 이르기를,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고기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나의 구복(口腹)을 위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느냐.” 하였다.
○ 25년 갑인 겨울에 임금은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사를 결재(決裁)하고 쉬지 아니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의관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 임금이 글을 좋아하고 두 임금(세종ㆍ세조)을 계승하여 유림(儒林)을 사랑하며 장려함이 보통 규모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당대 문장에 걸출한 선비들이 옥당에 빛났다. 조위(曹偉)ㆍ신종호(申從濩)ㆍ유호인(兪好仁)ㆍ김흔(金訢)ㆍ성희안(成希顔)이 더욱 우대를 받아 항상 저술한 것을 그날 그날 써서 바치었다.조위와 유호인이 모두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외직을 원하므로 특히 쌀을 보내어 그 어버이를 우대하였다. 조위가 상사(喪事)를 당하자 치제(致祭)하여 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임금의 은총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함께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하였다. 인재를 고무하고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켰으니 진실로 천년을 두고 있기 어려운 장한 일이었다.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있을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치었다. 임금이 편전의 문 밖에까지 나가 맞으며 그를 위로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에 이 매로써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또 야대(夜對)할 적에 술과 과실을 주니 희안이 감자(柑子)와 귤 여 나무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술이 취하여 정신을 잃었으므로 내시가 엎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실이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 이튿날 임금은 감자와 귤 한 쟁반을 옥당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어제 희안이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므로 지금 내려준다.” 하였다.희안은 이 은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반정의 의거를 일으켜 은혜를 갚았으니 임금의 선비 대우하는 정성과 사람을 알아 보는 밝음이 진실로 남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안이 위태한 시국을 바로 잡아 안정하게 만들어 훈공(勳功)이 길이 국가에 남았으니 임금이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금이 착한 일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허종(許琮)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에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는 없다.”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재상 이영은(李永垠)과 이곤(李坤) 두 사람이 기생 하나를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 하였는데, 간관이 죄를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고 서로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거늘,임금은 “옛날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 가는 세상의 일이다. 나는 차마 이 세상을 쇠망해 가는 세상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대간(臺諫)의 파직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 그대들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임금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오는데 육승지(六承旨)가 각기 소속 관청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해당 관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금께 바치었다. 임금은 반드시 그 승지와 관원과 더불어 사리를 되풀이 연구하여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게 하고 옳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것이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하고 반드시 그 성명을 기록하여 훗날의 승진에 대비하였다. 수령과 변장들이 부임할 때에도 또한 반드시 한 사람씩 불러 보고 먼저 그 사람의 출신 내력과 친족 교우 관계를 묻고, 다음은 공사를 처리하고 군졸을 어루만지며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서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고 또 이어 등급을 뛰어 승진시켜 주며,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쫓고 아울러 그를 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주었다. 비록 시종하는 신하나 외국에 사신 가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이 자기가 그 임무를 감당하기 힘들게 여겨지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감히 부임하지 못하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임금께서 한 수령이 특이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뽑아 올려 집의(執義)를 명했다. 삼사에서 글을 번갈아 올려 다툰 지 수일 만에 또 그 사람을 승진시켜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삼사에서 또 극력 논란하자, 수일 만에 또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삼사는 드디어 중지하고 다시 논란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만약 이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그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내시가 충청도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임금은 조용히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일을 묻고 이어 그 밖의 이야기도 물었다. 내시는 답하여 아뢰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에게 어떤 객(客)이 있었는데, 한 기생을 보고 매우 사랑했으나 기생은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이별할 때에 객은 울면서 차마 작별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문(廣文) 도사(都事) 이 좌석에 있었으므로 문객은 광문의 손과 기생의 허리띠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의 이별하는 서러움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가.’ 하니 광문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자지작(紫芝雀) 띠는 가는 허리에 둘리었고 / 紫芝雀帶橫腰細
흑서화(黑黍靴) 신은 발에 맞아 편안하다 / 黑黍張靴着足安

했으나 문객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싱긋이 웃으면서 이내 광문의 이름을 기둥에 써 두었다. 훗날에 특별히 광문을 홍문록(弘文錄)에 들게 하니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이 불러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홍문록은 한 때의 공론(公論)을 채용하였으되 일찍이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은 “권력 있는 이에게 쫓아 다녀서 얻은 것이 공정하냐?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져 채용된 것이 공정하냐?” 하였다.그 사람 사헌부의 언관이 힘써 다투거늘 임금은 말 소리와 얼굴 빛에 노기를 띠며 나가라고 꾸짖으니, 그 사람은 벌벌 떨면서 나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임금이 다니는 길로 나갔다. 임금은 눈여겨 보다가 이윽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제가 가야 될 길도 알지 못하면서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광문이 결국 옥당에 들어 왔는데 아주 기특한 재주 있는 인물이었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임금은 당대의 인물을 이리저리 다루었는데 그 수단이 매우 능란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고 있을 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우연히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그 종이를 살펴보니,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선사한 물목 단자(物目單子)였다. 임금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영에 나가서 육승지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사한다면 예의를 돌보지도 않고 받겠는가?” 하니,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하였다. 좌승지만은 자리를 피하여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에게는 90세가 된 늙은 어미가 있사온데, 평소부터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사했으므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종이를 내어 보이고,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임금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는데, 한 장령이 축관(祝官)이 되어 축 읽을 때를 당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임금이 그 사람을 풍산 만호(豐山萬戶)로 임명하니 간관이 논쟁하였다. 임금은 “명색이 문관이라 하면서 축문 한 자도 읽지 못하는구나. 활 쏘는 것은 안다 하니 한 성보(城堡)나 지키면 족하지.” 하였다. 2, 3개월 후에 불러서 다시 전일의 벼슬을 시켰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어떤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원통한 일 풀어주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사인(士人) 강신(姜信)이 썼습니다.” 하였다. 곧 강신을 불러 해서와 초서를 써서 바치게 하더니, “해서는 비할 데가 없으리만치 잘 썼다.” 하고, 드디어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란 벼슬을 주고 자주 불러 보았다. 몇 년 동안에 벼슬 등급을 뛰어 판결사(判決事)에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역시 재능이 그 직무에 알맞았다. 《기재잡기》
○ 이번(李蕃)은 안강현(安康縣) 경주(慶州)에 소속되었다. 에 살았는데, 자질이 준수하고 얼굴이 단정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경주부(慶州府)의 향교에서 스승에게 배우고 친구를 사귀어 배우니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도 또한 정묘하였다.임금께서 이번이 향시에 장원했던 작품을 보고 이를 칭찬하여 즉시 역마를 타고 오라고 명하여 종이와 붓을 주어 다시 시험해 보았다. 또 의복과 식품 비용까지 내려 주고 성균관에 머물게 하여 그 학업을 마치게 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번은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언적(彦迪)이다.
임금이 일찍이 밤에 놀다가 보니 멀리 삼각산(三角山)에 불이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했더니, 서생이 등불을 달아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묻기를, “무엇하러 이렇게 부지런하며 고생하느냐?”고 하니 서생은 “과거에 급제하려고 한다.” 하였다. 임금은 그 사람에게 명하여 절구(絶句)를 짓게 하고 이내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베어 자기 집 문 앞에 세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시켜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문 앞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급제한다 하는데, 문 앞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좋은 징험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하였다.또 물어 이르기를, “강송(講誦)을 잘 하는가? 제술(製述)을 잘 하는가?” 하니 답하여 아뢰기를, “다 잘 하는데도 수십 년 동안이나 과거에 억울하게 실패하였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즉시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는 나이 75세가 되었는데, 이천(利川)에 살고 있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깊었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였다. 계묘년에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으로 불려 와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강송(講誦)하게 하고,서거정(徐居正)ㆍ허종(許琮)ㆍ이극기(李克基) 등에게 명하여 성리의 근원과 천지의 도수(度數) 및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세차역법(歲差曆法) 등을 논하게 하니 관의는 분변하여 대답함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였다. 임금은 감사에게 명하기를, “전 찰방 이관의가 성리학에 정통하고 숙달했다 하므로 불러 시험해 물어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았다.장차 크게 쓰려고 했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 많음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고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의복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감사는 그 지방의 수령을 시켜 미곡을 주어 내가 그 사람을 표창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 최한정(崔漢楨)은 성품이 순량(醇良)하고 근실하기에 임금이 후한 대우를 하니, 승지 임사홍(任士洪)이 그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기를,“최한정은 나이 많으니 시독(侍讀)하는 데 적합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대답하지 않고 어필로써 한정의 이름을 쓰고 등급을 뛰어 대사헌으로 임명하니 사홍은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사림(士林)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용재집(容齋集)》
○ 임금이 장차 반궁(泮宮)에 행차하여 옛 글을 강론하고 직언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노사신(盧思愼)과 이승소(李承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한 일이 있었다.이칙(李則)이 나와 아뢰기를, “노사신과 이승소는 노성(老成)한 대신인데도 아뢴 바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성균관에 행차하여 다시 무슨 말을 구하시렵니까.” 하자 임금이 그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 안계송(安繼宋)의 부인은 세종의 손녀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딸이다. 임금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돌아오다가 그 집에 들려 보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간할까 염려하여 흥인문(興仁門) 안의 둘째 다리에 이르러서야 타고 있던 연(輦)을 갑자기 배고개[梨峴]에 있는 계송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간관이 과연 논란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계송의 아내는 몸에 무명베 검은 적삼을 입고 손수 길쌈을 하다가 허둥지둥하면서 임금을 영접하여 뵈었다. 임금은 특별히 계송에게 장악원 봉사(掌樂院奉事) 벼슬을 주고 바로 그 날에 사은숙배(謝恩肅拜)케 하고, 또 행차 중에 썼던 금ㆍ은 그릇을 모두 다 내려주게 하였다. 《안씨추록(安氏追錄)》 ○ 후손의 집에 임금이 앉았던 방석이 있어 항상 집 안에 달아 두었는데 해가 오래 되매 삭아서 없어졌다.
계송은 자는 자윤(子胤)이며, 스스로 박전경수(薄田耕叟)라 불렀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팔대손(八代孫)이다. 천성이 어리석어 시 짓고 술 마시는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벼슬은 직장(直長)으로 17년이나 있어도 옮기지 아니하였다. 《추강록(秋江錄)》
○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임금에게 청하기를, “홍상(洪常)의 숙부 칭(儞)이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으나 아내가 병이 나서 부임하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본직을 갈아 주소서.” 하니, 임금은 명하여 경직(京職)으로 임명하였다. 대사간 손비장(孫比長) 등이 차자를 올려,“홍칭의 사정(私情)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 기한을 정하여 쓰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은 편지로 답하기를, “대사간의 말이 대단히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일은 사정이요, 공정한 것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과실을 듣고 곧 고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 직무를 다하니 나는 이를 매우 칭찬하노라.” 하였다. 《국조모열(國朝謨烈)》
○ 임금은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한 집안의 부자 사이처럼 하였으나 정사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실정을 숨기고 행실을 꾸미지 못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서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으나, 대궐 문 밖에 나가서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서로 기뻐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대개 임금의 뛰어난 밝음과 위엄있는 덕에 신하들이 감화를 받은 것이다. 《오산설림》
○ 임금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기가 물과 같은 옥 술잔 하나가 있었는데, 임금은 매양 술이 취하면 다른 신하에게도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종실의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이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지니 술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은 임금의 술 많이 마심을 은연히 간하는 뜻이었다. 임금도 또한 그것을 허물하지 아니하였다. 《오산설림》
○ 함경도의 유생 박원령(朴元齡)이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남의 소(疏)를 대신 써서 올렸다. 임금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박원령이 썼다고 대답하였다. 승정원으로 불러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화살통[箭筒]을 내어 주면서 그 거죽에 글을 써서 바치게 하고, 곧 임금은 손수 글씨를 쓴 병풍을 내려 주었다. 비록 작은 기예(技藝)라도 칭찬하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필원잡기》
진사 박원령이 글씨를 조금 쓸 줄 알므로 임금은 이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 고을에 글을 내리고 종이와 붓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영광스러움이 향리에 빛나고 떨쳐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작은 기예가 어찌 족히 임금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랴마는 임금은 자기가 능하다 하여 남의 잘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장려함이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이다.이로 인하여 문장ㆍ서화(書畫)ㆍ공예 등 온갖 기술이 모두 격찬을 받아 진보되었으니, 이것으로 임금의 고무(鼓舞)ㆍ격려시키는 기틀이 특히 한 번 찡그리고 웃는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임금이 진심으로 좋아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온갖 방법으로 권장ㆍ신칙(申飭)하고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웠더라도 다만 소란ㆍ번잡하고 퇴폐ㆍ나타(懶惰)함만 볼 뿐이지 능히 이처럼 깊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지평 유경(劉璟)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에 나오시지 않고, 행차하실 때에도 음악을 폐지 하셨습니다. 예(禮)에 기년복(朞年服)은 임금은 입지 않고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니, 청컨대, 의(義)로써 정을 끊으소서.” 하였다.임금은 “조회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아뢴 대로 할 것이지만은 대신의 죽음에도 오히려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거늘, 하물며 친형의 시체가 지금 빈소에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음악을 듣겠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이 한 왕자만을 매우 사랑하여 흔히 치우치는 일이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은 즉시 성상소(城上所)의 장령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글 한 구절을 써서 주었는데, 그 글에,

세상 사람이 늦은 가을 국화를 가장 사랑하나니 / 世人最愛霜後菊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 此花開後更無花

라 하였다. 그 사람이 눈물을 닦고 나갔는데 얼마 후에 임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산설림》

 

 

 

성종

 

최하림(崔河臨)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D5CD558B9BCB1455X0
진국(鎭國)
대허당(大虛堂)
생몰년 1455(세조 1) ~ 1486(성종 17)
시대 조선 전기
본관 미상
활동분야 관료
 
최계사(崔季思)
 

[상세내용]

최하림(崔河臨)에 대하여
1455년(세조 1)∼1486년(성종 17). 자는 진국(鎭國), 호는 대허당(大虛堂).

아버지는 전행 교하현감(前行交河縣監) 통훈대부(通訓大夫) 최계사(崔季思)이며, 성종의 아들로 숙용 홍씨(淑容洪氏) 소생인 완원군(完原君) 이수(李燧)의 장인이다. 1480년(성종 11)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9위로 합격하였다. 1480년(성종 11) 김경충(金敬忠)이 주도하여 중 학능(學能)이 흥덕사(興德寺) 중창을 위해 역사를 일으킨 것과, 그에 뒤이어 중 학전(學專)이 흥천사(興天寺)를 중창한다고 나라의 군역을 동원하여 공역에 참석케 한 점과, 또 중 설의(雪誼)가 원각사(圓覺寺) 대광명전(大光明殿)의 불상을 돌려놓고는 스스로 돌아앉았다는 낭설을 퍼뜨려, 만백성을 혹세무민한 것에 대해 처벌할 것을 청원하는 상소에, 남궁찬(南宮燦).이오(李鰲).이유청(李惟淸) 등과 함께 참여하여 국문을 당하였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로 그가 지은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했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그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룰 여유가 없어 우인들이 부의를 모아 장례를 치렀다. 저서로 《안택기(安宅記)》가 전한다.

[참고문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朝鮮王朝實錄  韓國人名大辭典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박경이


 

[주D-001]세실(世室) : 종묘(宗廟)에 모시는 신주(神主)는 위로 4대(代)가 넘으면 옮기게 되는데 공덕(功德)이 높은 임금은 특히 옮기지 않고 영원히 받들게 되는데, 이것을 세실이라 한다.
[주D-002]가인례(家人禮) : 왕실에 있어서 조정례(朝庭禮)와 가인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조정례에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성종에게 신하가 되지마는, 가인례에서는 월산대군이 형이 되고 성종은 동생이 된다.
[주D-003]원상(院相) : 국상(國喪) 직후에 임시로 국정을 대리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주D-004]금련거(金蓮炬)의 고사 : 임금 앞에만 쓰는 촛불인데, 당 나라 선종(宣宗)이 한림학사 영호도(令狐綯)를 불러서 밤 늦게까지 담화하다가 돌려 보낼 때에 금련거를 주어 앞에서 인도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5]밀부(密符) : 옛날 임금이 특정한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로서 주는 것인데, 부(符)라는 것은 동철(銅鐵)로 만든 것으로 두 조각을 내어 한 조각은 임금이 지니고, 다른 한 조각은 장수나 지방관이 지니어 일이 있을 때에 마음의 표시[信標]를 삼았던 것이다.
[주D-006]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로서, 그 토지에서 나는 수확으로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한 임금이 친히 경작함으로써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주D-007]강후(姜后)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어느날 강후와 동침한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났더니, 강후가 문 밖에 엎드려 사과하기를, “첩의 허물로 왕이 늦게 일어나시어 정사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맹희(孟姬) : 제(齊) 나라 화씨(華氏)의 딸이 예법을 지켜 정당한 예절을 갖추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 하여 늦도록 처녀로 있었더니, 임금이 듣고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이를 맹희라 하였다.
[주D-009]번희(樊姬) : 초(楚) 나라 장왕(莊王)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번희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0]풍소의(馮昭儀) :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풍소의를 데리고 상림원(上林苑)에서 동물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와 성제에게 덤벼들므로 풍소의가 곰 앞에 가로 막아섰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1]반첩여(班婕妤) : 한 나라 성제의 후궁이었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장신궁(長信宮)에 있었는데, 반첩여가 임금을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참소한 자가 있어 성제가 반첩여를 잡아 문초하였더니, 반첩여가 아뢰기를,“저주는 귀신에게 비는 것인데, 귀신이 아는 것이 있다면 사특(邪慝)하게 하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귀신이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하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2]명덕왕후(明德王后)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황후인데 어질고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후세의 황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주D-013]문덕황후(文德皇后) : 당 나라 태종이 하루 아침에 조회를 파한 뒤에 내궁에 들어가서 옷을 벗으면서 노한 어조로 “내가 장차 이 촌 늙은 이를 죽여 버리리라.” 하였다. 문덕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위징(魏徵)이 여러 신하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였다.” 하므로 황후가 엎드려 절하며 “임금이 밝아야 신하가 직언(直言)을 하는 것이니 축하합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4]원헌황후(元獻皇后) : 당 나라 숙종(肅宗)의 어머니. 현종의 궁인으로서 숙종을 임신했을 때 현종이 낙태시킬려고 하였는데 꿈에 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 그것을 막더니 과연 중흥주인 숙종을 낳았다.
[주D-015]장온고(張蘊古) : 당 나라 사람인데, 태종에게 대보잠(大寶箴)이라는 임금의 좌우명이 될만한 격언을 지어 올렸다.
[주D-016]왕우칭(王禹儞) : 송(宋) 나라 사람인데, 조회때 신하가 시간을 기다리는 휴게실에다 대루원(待漏院)이라는 대신을 경계하는 기문(記文)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주D-017]추기(樞機) : 문을 여닫는 문지방인 돌저귀를 말하는데, 사람의 말[言語]하는 일을 추기에 비하였다. 승정원은 임금의 말[言語]을 관할하는 곳이므로 추기하고 하였다.
[주D-018]육승지(六承旨) :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를 말하는데, 순위에 따라 육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 보았다.
[주D-019]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선거ㆍ임명하는 기록을 말하는데, 교리ㆍ수찬의 선거는 먼저 칠품(七品) 이하의 홍문관원이 뽑힐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의중의 사람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말한다.

 

 

회산군(檜山君)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다섯째 아들. 숙의(淑儀) 남양홍씨(南陽洪氏) 소생으로, 김굉필(金宏弼)에게 가르침

 

을 받음. 연산군(燕山君) 때 궁전(宮田)을 반납했다가 중중(中宗)이 즉위하자 노비(奴婢)와 전답(田畓)·

 

사저(私邸)를 하사받음.

 

 

시대: 조선전기  연도: 1481-1512

  ☞  회산군의 영모제 의 모습

   ☞ 회산군묘역주변에서 바라본 도봉의모습 모습

  ☞ 회산군 양위의 묘소 모습

   ☞ 회산군 묘역주변의 영모제 신도비의 모습 

 

  ☞ 회산군 묘역뒤에서 바라본 조망의 모습

 ☞ 회산군 묘역뒤에서 바라본 조망의 모습

 ☞ 회산군 지묘 묘석

     영원군 부인 안씨 지묘 묘석  

 

 

 ☞ 회산군 양위의 모습  

 ☞ 회산군 우측  동자석의 모습

 ☞ 회산군 묘역 좌측동자석의 모습

 ☞ 회산군 문인석의 모습

 ☞ 회산군 묘역 문인석의 모습

 

 ☞ 점면에서 바라본 회산군  묘역의 모습

☞ 회산군 묘역내 신도비 최근에 세워진 신도비의 모습

 ☞ 회산군 묘역내 창선대부 서창수전주이공휘 墉府군 지묘 묘석

                       

 

 ☞ 회산군 묘역내 상락정 전주이공 휘 수립부군지묘 모습

 

☞ 회산군 묘역내 영모제의모습  

 

 ☞ 회산군 묘역내 신도비문의모습

 ☞ 회산군 묘역내 신도비문 전면 

 ☞ 회산군 묘역내 신도비 측면

 

 

 

 

  ☞ 회산군 묘역내 느티나무의 모습 

 ☞ 회산군 묘역아래 선릉왕자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