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산당공집 휘 충성

문성공 7세손 산당공 선조님이 구례화엄사에서 소학을 강론하신 (기사)

아베베1 2012. 1. 16. 23:29

  

 

 

추강 남효은 선생은

  문성공 7세손 방조 이신 산당공 휘 충성의 스승 되시는 분이다

  남추강 선생이 구례 화엄사를 유람 하실때 뵙고 잠시의 시간을 가진것으로 추정된다

 

추강집 제6권

잡저(雜著)
지리산 일과(日課)



정미년(1487, 성종18) 9월 27일 계해일
진주(晉州) 여사등촌(餘沙等村)을 출발하여 단속사(斷俗寺)로 향하였다. 동구(洞口)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 암문(巖門)에 들어가서 1리쯤 지점에 단속사가 있었다. 예인(隸人)의 집이 감나무 숲과 대나무에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큰 가람(伽藍)이 있었다.
그 문에 ‘지리산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이 있으니,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짓고, 금나라 대정(大定) 12년 임진년(1172, 고려 명종2) 1월에 세운 것이다. 절 서쪽에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이 있으니, 당나라 위위경(衛尉卿) 김헌정(金獻貞)이 짓고, 원화(元和) 8년(813, 신라 헌덕왕5) 9월에 세운 것이다. 절 북쪽에 감현 선사(鑑玄禪師) 통조(通照)의 비석이 사람들에 의해 뽑힌 채로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세속의 무리들이 한 짓입니다.”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은주(金殷周)가 짓고, 개보(開寶) 8년 갑술년(974, 고려 광종25) 7월에 세운 것이다.
절 안의 동북쪽 모퉁이에 방 한 칸이 있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독서하던 방이다. 절 뜰에 매화 두 그루가 있으니, 전조(前朝)의 정당문학(政堂文學) 강통정(姜通亭)이 손수 심은 것인데 매화나무가 지난 4, 5년 전에 말라죽어 그 증손 용휴(用休) 선생이 다시 심었다.
나는 탄연선사비명을 읽은 뒤에 들어가서 주지 성공(聖空)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공은 일암(一庵)의 문인으로, 나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시 나와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비석을 보고, 들어가서 강용휴가 심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누각 위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 강용휴가 지은 〈종매기(種梅記)〉를 읽었다. 성공이 나에게 밥을 대접하고 또 시종에게도 밥을 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주인과 작별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조연(糟淵)에 이르러 알몸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니, 물과 바위가 맑고 산뜻하였다. 조연 북쪽에 샘이 있는데, 바위 표면에서 솟구쳐 나와서 유달리 맑고 시원하였다. 나는 손으로 움켜서 마셨다.
광제암문을 도로 나와서 불령(佛嶺)을 넘어 백운동(白雲洞)을 지나갔다. 백운동의 물이 덕천(德川)의 물과 합쳐져서 태연(苔淵)이 된다. 태연의 하류는 곧 진주의 남강(南江)이다. 태연을 지나 덕천의 벼랑 위를 따라 10여 리를 갔다. 긴 냇물을 내려다보니 확 트이고 시원하여 마음이 상쾌하였다. 동구를 다 지나서 양당(壤堂)이라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나무와 밤나무가 뒤덮고 있었다. 사립문이나 닭과 개들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이나 주진촌(朱陳村)인 듯하였다.
그 오른쪽에 시천동(矢川洞)이 있다. 시천은 진주의 속현(屬縣)이다. 그 현의 아전들은 지리산 석교(釋敎)가 되기를 바라서 벼슬이 호장(戶長)이나 기관(記官)에 이르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가 체임(遞任)되면 다시 속인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오랜 풍습이 되어 관장(官長)도 그 풍속을 고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德山寺)에 이르렀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그 왼쪽에 있는 냇물은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龍淵)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婦淵)이라 한다. 그 깊이는 한량이 없다.
주지 도숭(道崇)은 일찍이 비해당(匪懈堂)을 만난 뒤에 선림(禪林)에 이름이 있었는데, 비해당이 패망하자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었다. 나를 만나 담론하며 매우 기뻐하였고, 나와 시종들에게 밥을 대접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이야기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리 형유(泂裕), 의문(義文), 의화주(誼化主) 등이 모두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갑자일(28일)
도숭, 형유 등과 함께 용연과 부연을 둘러보았는데, 연못 곁의 대나무가 감상할 만하였다. 의화주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식사 뒤에 도숭이 의문으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부연에서 위로 올라가 붉게 물든 나무숲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금장암(金藏庵), 해회암(解會庵)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석상암(石上庵), 백왕암(百王庵), 도솔암(兜率庵), 내원암(內院庵)을 지난 뒤에 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돌아 대숲 속으로 들어가서 어렵게 뚫고 지나왔다. 회방령(檜房嶺)에 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갈대밭으로 들어갔고, 갈대밭을 다 지나서 싸리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길이 몹시 험난했다.
산길로 40리를 가서 보암(普庵)에 들어가니 감나무와 대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지승 도순(道淳)이 감을 따서 대접하였다. 도순은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뜻을 간파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스스로 ‘나밖에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고는 불경을 외거나 염불하는 것을 그만두고 앉거나 누울 때에 언제나 음경(陰莖)을 드러내 놓았고, 다방면으로 계책을 내어 승도(僧徒)를 모아 선림(禪林)의 종주(宗主)가 되려는 자였다. 나와 처음 담론할 때는 조금 합치했지만, 재차 얘기할수록 망녕된 주장이 들쭉날쭉하고 윤회의 법칙을 고집하였다. 한밤중에 나에게 기침(起寢)이나 잘 하라고 하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을축일(29일)
보암을 출발하였다. 동상원사(東上院寺)를 바라보면서 문수암(文殊庵)의 삼밭을 지나 나무 밑의 냇가를 걸어갔다. 어지러운 돌밭에는 길이 없고,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 산길을 표시한 것이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아가다가 갑자기 법계암(法界庵) 길을 잃었다. 또 산비를 만나 석굴 아래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비가 개어 다시 길을 가서 향적암(香積庵)에 이르렀다.
암자에 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름이 일경(一冏)으로, 자못 총명하여 선지(禪指)를 깨달았고, 일찍이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대의를 대략 간파하였다. 일경이 나에게 《육조단경(六祖檀經)》을 보여 주었는데, 자못 청정(淸靜)하여 애호할 만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병인일(30일)
의문, 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上峰)으로 올라갔다. 구름에 묻히고 바람에 깎이어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 서리가 매섭고 땅이 얼어 추위가 산 아래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는데 우리들이 뚫고서 올라갔다. 상봉에 올랐을 때에 이른바 천왕(天王)이라는 것을 보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倻夫人)이 이 산의 신령이 된 것으로, 당세의 화복(禍福)을 주관하다가 장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날 자입니다.” 하였다. 그 말이 어찌 이리 황당하며 근거가 없단 말인가. 나는 사당 모퉁이의 바위 부리에 앉았다. 엷은 구름이 사방으로 걷히어 산과 바다를 헤아릴 수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 밑에 있었다. 사당 안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의문(鄭義門)의 현판 기문이 있고, 내 벗 김대유(金大猷) 등의 이름이 현판 위에 적혀 있었다. 저녁이 되어 향적암으로 도로 내려오니, 왕복 20리 길이었다.

10월 초하루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 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를 뚫고 계족봉(雞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가서 빈발암(貧鉢庵)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 영신암(靈神庵)이 있고 암자 뒤에 가섭전(伽葉殿)이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영험이 있다는 곳이다. 내가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무딘 석상만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위를 쳐다보며 산 하나를 올라갔는데, 이름이 좌고대(坐高臺)이다. 상ㆍ중ㆍ하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으니, 심신(心神)이 놀라 두근거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는 좌고대보다 더 높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위를 내려다보니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의문(義文)이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는 두려움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날 서쪽 방면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鷄龍) 등의 여러 산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다. 잠깐 있다가 빈발암으로 도로 내려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 무렵에 지는 해가 암자에 걸렸는데 아래의 인간 세상은 밤처럼 어둡게 보였다.

무진일(2일)
빈발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을 통과하고 서쪽 산 정상의 수목 속으로 30리를 가서 의신암(義神庵)에 이르렀다. 암자 서쪽은 모두 긴 대나무이고, 감나무가 대나무 사이에 뒤섞여 나 있었다. 붉은 감이 햇빛에 투명하였다. 방앗간과 뒷간도 대나무 사이에 있었다. 근일에 구경한 아름다운 경치로는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
전(殿) 안에는 금불(金佛) 하나가 있었다. 서쪽 방에 승상(僧像) 하나가 있어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의신조사(義神祖師)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다가 도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에 이 산의 천왕(天王)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를 권하고 스스로 굴뚝새〔鷦鷯〕가 되어 길을 인도하므로 조사가 그 새를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러 굴뚝새가 수리〔鵰〕로 변하였으니, 지금도 그 고개 이름을 초료조재(鷦鷯鵰岾)라고 합니다. 수리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삼칠일(三七日)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가 또 중무주(中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칠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또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는 또 상무주(上無住) 터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곳은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지만,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스스로 들어가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진하며 이름을 바꾸어 무주조사(無住祖師)라 하였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암자 앞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에 대숲 속을 통과하여 세 개의 큰 내를 건너 내당재(內堂岾)에 올랐다. 북쪽으로 초료조재를 보며 남쪽으로 풀숲 속으로 내려가 30리를 가서 칠불사(七佛寺)에 이르렀다. 절의 본래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사찬(沙飧) 김공영(金恭永)의 아들로 이름이 옥보고(玉寶高)라는 사람이 있었다. 거문고를 메고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여 년 동안 거문고로 마음을 닦으며 30곡을 작곡하여 매일 연주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거리의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고 꽃을 감상하다가 홀연히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왕이 일명(一名)이 문복(聞福)인 악사(樂師) 안장(安長)과 일명이 견복(見福)인 악사 청장(請長)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니, 바로 옥보선인(玉寶仙人)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재계하자, 옥보가 왕 앞에 이르러 30곡을 연주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안장과 청장으로 하여금 익혀서 악부(樂府)에 전하게 하였다. 또 그가 거처하던 절에 큰 가람을 세우니, 37국(國)이 모두 이 절을 으뜸으로 여겨 원당(願堂)을 삼았다. 형 수좌(泂首坐)는 선법(禪法)을 조금 알아 산중 승려들의 스승이 된 사람인데, 이상은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기사일(3일)
이 절의 온 법주(溫法主)가 나에게 옥보고의 사적을 보여 주었는데, 형 수좌가 말한 것과 같았다. 작별할 때에 형 수좌가 나에게 시를 청하기에 내가 절구(絶句) 한 수를 남겼다.
서쪽으로 금륜암(金輪庵)에 올랐다. 전 선사(田禪師)가 우리를 맞아들여 과일을 대접하였다. 다시 청굴(靑窟)을 지나 시내 하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은 것이 두 번이었다. 처음에는 멀리까지 헤매다가 돌아왔고 끝에는 조금 갔다가 돌아왔다. 큰 고개 하나를 넘어 벌초막(伐草幕)에 이르렀다. 벌초막의 위쪽에 새로 지은 초막 한 칸이 있었다. 설근(雪根)이라는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 김치, 간장을 가져다주었다. 이날 내 발에 못이 박혀 간신히 걸으며 30리를 갔다.

경오일(4일)
설근, 의문과 함께 반야봉(般若峰)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봉우리 북쪽에 혼흑동(昏黑洞)과 월락동(月落洞)이 있고 초막 한 칸이 있었으니, 설근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북쪽의 중봉산(中鳳山)은 곧 빈발봉(貧鉢峰)의 북쪽 줄기이다. 산등성이 끊어진 곳에 적조암(寂照庵), 무주암(無住庵) 등의 암자가 있다. 또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金臺庵)이 있다. 반야봉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萬福臺)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妙峰庵)이 있고,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으니, 일명이 황령암(黃嶺庵)이다. 반야봉 남쪽에 고모당(姑母堂)이 있고, 고모당 남쪽에 우번대(牛翻臺)가 있으니, 우번 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선인대 동쪽이 곧 쌍계동(雙溪洞)이다. 빈발봉은 반야봉의 동쪽에 있고, 천왕봉(天王峰)은 또 그 동북쪽에 있다.
나는 서쪽으로 반야봉 중봉(中峰)을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본 뒤에 우동수(牛銅水)를 내려다보았다. 물이 마르고 흰 벌레만 우물에 가득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이날 누른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산 아래 보이는 곳은 남원(南原)뿐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의문이 초막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왕복 20리 길이었다.

신미일(5일)
쌀 다섯 되를 남겨 두고 설근과 작별하였다. 식사 뒤에 벌초막을 출발하여 연령(淵嶺)을 지나 고모당에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보월암(寶月庵), 당굴암(堂窟庵), 극륜암(極倫庵) 등의 암자를 지났다. 승려가 이르기를 “송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가 총애하던 비(妃)가 죽어 꿈속에 인종황제에게 고하기를 ‘첩은 고려국(高麗國) 지리산 남쪽 화엄사(花嚴寺) 골짜기의 지옥에 들어갔으니, 원하건대 첩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절을 지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슬퍼하며 극륜사(極倫寺)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은 문헌상의 근거가 없어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날 30리를 가서 봉천사(奉天寺)에 닿았다. 절은 대숲 속에 있고, 누각 앞의 긴 시내가 대나무 밑을 지나가며 우니,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이날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별을 들었다. 늙은 주지 육공(六空)은 신축년(1481, 성종12)에 산을 유람할 때 개성(開城)의 감로사(甘露寺)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나를 누각 위로 영접하고 선당(禪堂)에 묵게 하였다.

임신일(6일)
비에 막혀 봉천사에서 머물렀다. 누각 위에 앉아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누각 창에 붙였다.

계유일(7일)
수좌(首坐) 도민(道敏)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선산 김씨(善山金氏)라고 일컬으며 내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쌀 다섯 되를 선사했다. 최충성 필경(崔忠成弼卿)과 김건 자허(金鍵子虛) 등이 지급암(知及庵)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黃芚寺)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花嚴寺)로, 명승(名僧)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塔殿)이 있는데, 전각이 몹시 밝고 산뜻하였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니 긴 시내가 가로로 걸쳐 있는데, 그 아래가 웅연(熊淵)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婦人)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
저녁에 필경과 자허가 나를 찾아왔다. 법주(法主) 설응(雪凝)이 인도하여 그의 방에 묵게 하고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필경 등이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설응은 비록 불자(佛者)이지만 일찍이 제학(提學) 유진(兪鎭)에게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배운 사람이라서 우리들의 말을 듣고도 거북해하지 않았다. 밤을 새우며 얘기하였다.

갑술일(8일)
황둔사 비물 선사(非勿禪師)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필경과 자허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나에게 봉천사에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육공 대사가 다시 우리들을 청하므로, 내가 필경 등과 함께 도로 봉천사에 들어갔다. 밤에 《근사록》을 보았다. 그때 지급암의 오 수좌(悟首坐)가 우리들의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음을 잡거나 성찰하는 공부는 유가와 불가가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을해일(9일)
설응이 그 제자를 시켜 종이를 가지고 봉천사로 와서 시를 청하거늘 내가 오언(五言) 장편(長篇)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또 필경, 자허 두 사람과 작별하니, 필경이 흰쌀 4말을 주며 작별하였다.
나는 황둔사 앞의 큰길을 따라 구례(求禮) 정정촌(鼎頂村)을 지나갔고, 강변을 따라가다가 웅연 벼랑길을 지나갔다. 온 산은 비단으로 수 놓였고, 물은 콸콸거리며 산을 뚫고 울었다. 걸어서 30여 리를 가니 정신이 상쾌하였다. 진주(晉州)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雙溪川)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人家)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小堠)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雙溪寺)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이오?”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을 3, 4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 杖策欲尋靑鶴洞
숲 너머로 들리는 건 원숭이 울음뿐 / 隔林惟聽白猿啼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은 저 멀리이니 / 樓臺縹緲三山遠
이끼 속에 어렴풋이 네 글자 적혀 있네 / 苔蘚依稀四字題
하였으니, 석문 안 쌍계사 앞이 여기가 아니겠는가. 쌍계사 위 불일암(佛日庵)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절 앞에 광계(光啓) 3년(887, 신라 진성여왕1) 7월 모일에 세운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 있으니, 바로 문창후가 교서(敎書)를 받들어 짓고 글씨와 전액(篆額)도 아울러 쓴 것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소(慧昭)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고, 고국에 돌아와서 이 절을 창건하고 임금을 위해 염불하며 일생을 마쳤다. 문창후가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하니, 선사는 문자선(文字禪)을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창후가 어찌 추앙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내가 비석을 다 읽고서 나무뿌리로 된 다리를 건넜다. 산승(山僧)이 전하기를 “문창후가 손으로 나무뿌리를 틀어잡고 시냇물을 건너자, 그 뿌리가 점점 커져 다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600년 뒤에 들불에 타게 되었으나 아직도 검은 줄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절 앞에 흰 국화 몇 떨기와 사계화(四季花) 한 그루가 있었다. 내가 꽃 사이에 앉아 쉬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다. 절의 부엌은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을 끌어들이니, 대통 끝에 물소리가 울렸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으니, 친구 여경(餘慶)징원(澄源)이 이 방에서 글을 읽었다. 방 앞에 팔영루(八詠樓) 옛터가 있으니, 곧 문창후가 거처하던 방이다. 지금은 큰 대나무 수십 줄기만 있을 뿐이다. 밤에 선당(禪堂)에서 묵었다. 객승 학유(學乳)가 있었다. 일찍이 여경을 따라 반야봉을 유람한 사람으로, 내가 그와 함께 선(禪)을 얘기하였다. 나에게 시를 애써 요구하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병자일(10일)
시냇물을 10여 리쯤 거슬러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불일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바로 혜소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암자 앞에 청학연이 있으니, 고운(孤雲)이 일찍이 그 위에서 노닐었다. 내가 암자의 승려 조성(祖成)에게 찾아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길이 궁벽하여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普珠庵)에 올랐다. 바로 보주 선사(普珠禪師)의 옛 거처이니, 암자의 이름이 이로 인하여 붙여진 것이다. 어떤 노승(老僧)이 나에게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詩韻)이 원숙(圓熟)하며 청광(淸曠)하고 주밀(周密)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시 짓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나에게 차운하기를 요구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고운은 돌아가서 머물지 않고 / 孤雲歸不駐
청학은 돌아옴이 어찌 더딘가 / 靑鶴返何遲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 人物無今古
맑고 빈한한 가도의 시일세
/ 淸寒賈島詩
내가 보기에 조성은 재능이 비상하고 유가(儒家)의 기상이 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이날 눈이 내렸다.

정축일(11일)
조성이 나의 봉천사(奉天寺) 율시(律詩)에 화운(和韻)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조성과 작별하고 보주암을 지나 불지령(佛智嶺)에 올랐다가 묵계동(默溪洞)으로 내려가니, 물과 바위가 매우 맑고 기이하였다. 오서연(鼯鼠淵), 광암연(廣巖淵), 용회연(龍廻淵)을 지나고 비문령(碑文嶺)을 넘어 사자암(獅子庵)에 이르렀다.
이 암자에 있는 승려 해한(海閒)과 계징(戒澄)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한은 바로 나의 젊은 날 불가(佛家)의 벗이다. 10여 년을 보지 못했더니,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이때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 떴고 큰 대나무가 암자를 에워싸고 있는데 가지 끝의 높이가 사람 키의 3, 4십 배 정도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오랜 회포를 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무인일(12일)
해한이 나에게 굳이 머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식사 뒤에 해한, 계징 등과 함께 내려가서 오대사(五臺寺)를 구경하였다. 절 앞에 고려 국자 사업(國子司業) 권적(權適)의 〈수정사기(水精社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송나라 소흥(紹興) 8년(1138, 고려 인종16)에 세워진 것이다. 수정(水精)은 일명이 여의주(如意珠)이다. 무자년에 맹승(盲僧) 학열(學悅)이 나라에 건의한 뒤에 탈취하여 그것을 낙산사(洛山寺) 탑 속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안치하였다. 비문을 다 읽고 들어가 누대 위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나에게 감을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사자암으로 도로 올라갔다.

기묘일(13일)
해한, 계징과 작별하였다. 정축일(11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와 노복 다섯 사람에게 해한이 모두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오대사를 지나 또 부윤(府尹) 하숙부(河叔孚)의 집을 들렀다. 집이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였으며 채소밭이 앞에 일구어져 있고 대나무 숲이 두루 펼쳐졌으니, 중장통(仲長統)이 〈낙지론(樂志論)〉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40여 리를 걸어가서 다시 여사등촌에 이르렀다.


 

[주D-001]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 : 원문은 ‘皎然禪師碑銘’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참조하여 ‘皎’를 ‘坦’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아래도 같다. 현존하는 이 비명의 사본(寫本)에는 ‘대감국사비문(大鑑國師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현재 비는 전하지 않는다. 대감국사의 휘가 탄연이다.
[주D-002]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이다.
[주D-003]원화(元和) : 당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주D-004]개보(開寶) 8년 갑술년 : 개보는 송나라 태조의 연호이다. 갑술년은 개보 7년으로,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D-005]강통정(姜通亭) : 강회백(姜淮伯 : 1357~1402)을 가리킨다. 통정은 호이다.
[주D-006]용휴(用休) 선생 : 강귀손(姜龜孫 : 1450~1505)을 가리킨다. 용휴는 자이다.
[주D-007]주진촌(朱陳村) : 중국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백거이(白居易)의 〈주진촌〉 시에 등장한다. 깊은 산속에서 외부와의 왕래 없이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주씨(朱氏)와 진씨(陳氏)의 마을이다.
[주D-008]용연(龍淵)이라 하고 : 원문은 ‘白龍淵’으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에 근거하여 ‘白’을 ‘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당호(堂號)이다.
[주D-010]기침(起寢) : 절에서 새벽에 일어나 종을 치고 부처에게 염불 배례하는 일을 말한다.
[주D-011]뚫고서 올라갔다 : 원문은 ‘穿土’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에 근거하여 ‘土’를 ‘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김대유(金大猷) :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을 가리킨다. 대유는 자이다.
[주D-013]수리 : 원문은 ‘師’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소후(小堠) : 역로(驛路)의 10리마다 설치하는 작은 돈대(墩臺)이다. 돈대에는 거리와 지명을 새겨 넣는다.
[주D-015]광계(光啓) :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주D-016]문자선(文字禪) : 글을 통해 선학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주D-017]여경(餘慶) : 홍유손(洪裕孫 : 1431〜1529)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소총(篠叢) 또는 광진자(狂眞子)이다. 남효온 등과 함께 죽림칠현으로 자처하였다.
[주D-018]징원(澄源) : 양준(楊浚)의 자이다.
[주D-019]고운(孤雲) :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주D-020]인물은……시일세 : 옛날의 가도(賈島)와 같은 인물의 시라는 것이다. 가도는 당나라 시인으로,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평생토록 몸이 수척하고 몹시 곤궁하였다고 한다.
[주D-021]권적(權適) : 원문은 ‘權迪’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 권64〈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社記)〉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소흥(紹興) :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주D-023]중장통(仲長統) :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자(字)가 공리(公理)이다.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 속에 한가히 노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낙지론(樂志論)〉을 지어 자신을 뜻을 밝혔다. 《古文眞寶後集 卷1》

 

 


   이미지사진은 2011.8.26. 구례화엄사 탑방시 담은 사진이다  대웅전의 모습

 남추강이 기록한 내용의 석탑은 바로 이석탑을 말하시는 것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婦人)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