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1.27. 수락산

2012.1.27. 수락산 산행

아베베1 2012. 1. 29. 23:35

 

忍齋先生文集卷之二
 碑誌
有明朝鮮國德興大院君神道碑銘 幷序 a_032_312a


公諱岹。字景仰。中宗恭僖大王之第八子。母安氏。在後宮中。最被寵眷。貴至淑容。以嘉靖庚寅三月初五日。生公。公生九歲。封德興君。壬寅。娶河東府院君鄭麟趾之孫。判中樞府事世虎之女。誕三男一女。男長曰鋥。次曰鏻。次則今上殿下。公於己未五月初九日。病卒。壽僅三十。是年九月十七日。葬于楊州南面水落山戌坐辰向之原。夫人端莊靜順。治家謹032_312b肅。三子一女。敎以義方。鋥封河原君。娶左議政洪暹之女。生三男一女。男曰引齡,享齡,錫齡。 皆幼 洪氏早歿。後娶忠義衛李義老之女。鏻爲叔父錦原君岭之後。封河陵君。娶同知中樞府事申汝悰 女生 。一女。幼。女適儒士安滉。生一男二女。男曰應元。夫人旣寡。常恨未亡。憂烈成疾。丁卯五月十八日。病不救。痛哉。夫人在殯。明廟賓天。今上入承大統。天道倚伏。未易量也。靈柩將引。遣承旨及內侍護其喪。又令各司一員。送至郊外。卜得是年八月初九日。祔窆于德興兆次。同塋異室。葬用王妃父母之例。喪期將終。命攸032_312c司就本第營立家廟。庚午春。大臣啓請依宋英宗尊濮王故事。追崇德興君爲德興大院君。夫人稱府大夫人。國有祭告。稱皇伯父母。遣官告廟。又用大君例。陞奉祀子爵從一品。錫以田土臧獲。以優祀祭之具。喪旣畢。河原索神道銘于暹曰。否則無以詔後世。銘曰。父我靖陵。娶彼德門。德門惟何。生此碩媛。兩美作配。天不與年。禍爲福倚。龍躍于淵。迎于代邸。大統靈承。載崇位號。無競殊稱。有蘆之原。淑氣攸鍾。山擁水護。若堂有封。

 


 

梅月堂詩集卷之十
詩○遊關東錄
水落殘照 a_013_245a


一點二點落霞外。

 

三个四个孤鶩歸。

 

峯高剩見半山影。

 

水落欲露靑苔磯。

 

去雁低回不能度。

 

013_245b鴉欲棲還驚飛。

 

天涯極目意何限。

 

斂紅倒景搖晴暉。


 

 

 

매월당집 ( 梅月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梅月堂集
판심제 梅月堂詩集
간종 활자본(改鑄甲寅字)
간행년 1583年刊
권책 詩集 15권ㆍ文集 8권 합 9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6.4×16.9(㎝)
어미 上下三葉花紋魚尾
소장처 日本 蓬左文庫
소장도서번호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3
저자
성명 김시습(金時習)
생년 1435년(세종 17)
몰년 1493년(성종 24)
법명 雪岑
悅卿
梅月堂, 東峯, 淸寒子
본관 江陵
시호 淸簡
특기사항 南孝溫ㆍ安應世ㆍ洪裕孫 등과 교유
가계도
金元侃
郞將
金日省
忠順衛
仙槎張氏
金時習
南氏
訓鍊院都正 南孝禮의 女
安氏

기사전거 : 世系圖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종 17 1435 을묘 宣德 10 1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다.
세종 21 1439 기묘 正統 4 5 李季甸 문하에서 「중용」ㆍ「대학」을 읽다. ○ 세종의 부름을 받고 〈三角山詩〉를 짓다. 詩才를 인정받아 비단 50필을 하사받다. ○ ‘五歲童子’로 불리다.
세종 29 1447 정묘 正統 12 13 金泮ㆍ尹祥에게 수학하다.
세종 31 1449 기사 正統 14 15 모친상을 당하다.
~ ~ ~ ~ ~ ~ ~ 訓鍊院 都正 南孝禮의 딸과 결혼하다.
세조 1 1455 을해 景泰 6 21 三角山 重興寺에서 독서하던 중 단종이 遜位한 사실을 알고 서책을 태우고 승려가 되다. 法名을 雪岑이라고 하다.
~ ~ ~ ~ ~ ~ ~ 水落山(水落精舍)ㆍ金鰲山 등지에서 修道하다.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24 〈遊關西錄〉을 짓다.
세조 6 1460 경진 天順 4 26 〈遊關東錄〉을 짓다.
세조 9 1463 계미 天順 7 29 〈遊湖南錄〉을 짓다.
~ ~ ~ ~ ~ ~ ~ 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다.
세조 11 1465 을유 成化 1 31 慶州 남산에 金鰲山室을 짓고 독서하다. 茸長寺 梅月堂書齋에서 「金鰲新話」를 짓다.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33 효령대군의 청으로 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하다.
세조 14 1468 무자 成化 4 35 금오산에서 〈山居百詠〉을 짓다.
~ ~ ~ ~ ~ ~ ~ 仙槎縣(蔚珍) 酒泉臺 옆에 우거하다. 근처 聖留窟에 머물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47 還俗하여 祖父의 祭祀를 지내다.
~ ~ ~ ~ ~ ~ ~ 安氏와 결혼하다.○ 부인상을 당하고 다시 산에 들어가 중이 되다.
성종 16 1485 을사 成化 21 51 〈禿山院記〉를 짓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56 9월, 重興寺에 머물던 중 金馹孫ㆍ南孝溫의 방문을 받고, 함께 白雲臺ㆍ도봉산을 유람하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57 雪岳山에 들어가다.
성종 24 1493 계축 弘治 6 59 2월, 鴻山縣 無量寺에서 졸하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 王命으로 芸閣에서 문집을 간행하다.(李山海의 序)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 梅月祠(慶州)에 專祀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 彰節書院(寧越)에 享祀되다.
숙종 30 1704 병술 康熙 43 - 西山書院(咸安)에 享祀되다.
영조 38 1762 임오 乾隆 27 - 八賢祠(寧越)에 享祀되다.
정조 6 1782 임인 乾隆 47 -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 ‘淸簡’의 시호를 받다.
- - 1927 정묘 - - - 후손 金鳳起가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金時習傳(李珥 撰)ㆍ文集附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散失된 自書詩稿를 李耔가 구하여 이것을 補寫ㆍ추가하여 3권으로 엮고 1521년 序를 지었다. 그 후 朴祥ㆍ尹春年이 시문을 수집하고, 尹春年이 저자의 傳을 붙여 간행하였는데《舊本》, 구본은 전하지 않는다.
1583년(선조 16)에 선조가 芸閣에 명하여 改鑄甲寅字로 간행하게 하였다.《甲寅字本》 갑인자본은 구본을 증보한 것으로 보여지며, 권수에 이자ㆍ李山海가 지은 序 2편과 윤춘년ㆍ이자가 지은 傳 2편이 실려 있고 詩集과 文集으로 나누어 총 23권 9책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 본은 현재 국내에는 完本이 없고 日本 蓬左文庫에 完本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이 본의 傳寫本이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에는 零本 2책(권8~9, 권12~13)이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인조 때 17권 9책으로 改刊되었다고 「朝鮮圖書解題」에 기술되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1927년에 후손 金鳳基가 附錄을 부편하여 新活字로 간행하였다.《新活字本》 신활자본은 詩集 15권ㆍ文集 6권ㆍ부록 2권 합 23권 6책으로 되어 있으며, 附錄에는 여러 문헌에서 뽑은 저자관계 기록ㆍ서원봉안문ㆍ祭文 등이 실려 있다. 또한 畫像과 遺筆ㆍ世系圖가 첨부되어 있는데, 畫像과 遺筆에는 각각 宋時烈이 지은 跋이 실려 있다. 권미에 후손 金鳳起의 跋과 任事錄이 있다. 이 본은 현재 간송미술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본에는 附錄이 빠져 있다.
文集과 별도로 詩集만이 1583년에 癸酉字로 간행되었는데, 완본은 전하지 않고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零本으로 소장되어 있다. 또한 關西ㆍ關東ㆍ湖南ㆍ金鰲를 유람하면서 지은 詩로 엮은 「四遊錄」이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간행 년도와 간행자는 모두 불명인데, 두 편의 後序로 보면 저자의 自書詩稿에서 「四遊錄」과 紀行詩 수십 수를 뽑고 권수에 肖像과 淸寒圖書를 첨부, 간행한 것이 初刊이고 그 후 초간본을 바탕으로 木板 1책으로 간행한 것이 중간본이다. 중간본은 문집 甲寅字本 이후에 慶州尹 尹貽永의 협조를 받아 간행된 것이다. 「四遊錄」은 현재 간송미술관, 고려대 만송문고, 규장각,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583년에 간행된 改鑄甲寅字本으로 日本 蓬左文庫藏本이다. 이 중 권13의 第11板이 권23의 제11판으로 錯簡되었으므로 同一本인 고려대학교 晚松文庫藏本에서 補完하였고, 또 권17의 제3판이 落張이므로 同本의 傳寫本인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에서 補寫하였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詩集 15권ㆍ文集 8권 합 9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521년에 쓴 李耔의 序, 1583년에 쓴 李山海의 序와 尹春年이 지은 〈梅月堂先生傳〉 그리고 선조의 명으로 1582년에 지은 李珥의 〈金時習傳〉이 실려 있다. 이어 目錄이 있다.
詩集 권1~8에는 各體詩를 주제나 제재(내용) 혹은 문체별로 묶어 小題를 달아 편차하였다. 권별 소재를 보면, 권1에는 古風ㆍ紀行ㆍ述懷, 권2에는 詠史ㆍ詠東國故事ㆍ懷舊ㆍ時事ㆍ宮殿ㆍ陵廟ㆍ題人居室ㆍ居室ㆍ閑適ㆍ卽景ㆍ堂宇ㆍ城郭ㆍ田圃, 권3에는 仙道ㆍ釋老ㆍ隱逸ㆍ寺觀ㆍ節序, 권4에는 夢ㆍ晝夜ㆍ月ㆍ雨雪ㆍ風雲ㆍ山岳ㆍ江河ㆍ泉石ㆍ溪澗ㆍ樓閣ㆍ亭榭ㆍ園林ㆍ燕飮ㆍ菓實ㆍ書畫ㆍ文章ㆍ婦女ㆍ文房ㆍ器用ㆍ燈燭, 권5에는 食物ㆍ酒ㆍ茶ㆍ禽ㆍ獸ㆍ蟲ㆍ魚ㆍ竹ㆍ木花草, 권6에는 菜ㆍ菌蕈ㆍ投贈ㆍ簡寄ㆍ尋訪ㆍ酬答ㆍ惠貺ㆍ送別ㆍ遊賞ㆍ題詠, 권7에는 疾病ㆍ醫藥ㆍ傷悼ㆍ山居集句ㆍ調詞ㆍ樂章, 권8에는 歌ㆍ行ㆍ吟ㆍ和陶가 각각 실려 있다. 권9~14에는 遊覽時 지은 작품들을 엮어 편명을 달았는데, 권9에는 1458년에 엮은 〈遊關西錄〉, 권10에는 1460년에 엮은 〈遊關東錄〉, 권11에는 1463년에 엮은 〈遊湖南錄〉, 권12에는 1473년에 엮은 〈遊金鰲錄〉이 실려 있고 위 「四遊錄」 末尾에는 각각 後志가 첨부되어 있다. 권13에는 〈關東日錄〉, 권14에는 1486년경에 지은 〈溟州日錄〉이 실려 있다. 권15에는 賦와 雜體詩가 실려 있다.
권16 이하는 文集으로, 권16~17에는 雜著 20편, 권18에는 論 4편, 권19에는 贊 31편이 각각 실려 있다. 권20에는 傳(10편)ㆍ說(9편)ㆍ辨(3편)ㆍ序(1편)ㆍ義(8편), 권21에는 銘(8편)ㆍ箴(3편)ㆍ記(1편)ㆍ誥(1편)ㆍ篇(1편)ㆍ書(3편), 권22에는 騷賦(7편)ㆍ琴操(1편)ㆍ辭(1편), 권23에는 騷註(1편)ㆍ雜說(3편)이 각각 실려 있다.

명재유고 제4권
시(詩)
약천(藥泉) 남 상국(南相國) 구만(九萬) 에 대한 만사

서계의 풀 묵은 지 몇 년이나 지났던가 / 西溪宿草幾回春
공이 또 바람처럼 저승으로 떠났구려 / 公又飄然去返眞
동갑내기 늙은 몸은 아직도 죽지 않고 / 雌甲殘生猶未死
부러워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본다오 / 不堪長羨望蒼旻

[주C-001]남 상국(南相國) : 남구만(南九萬 : 1629 〜 1711)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 또는 미재(美齋)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소론(少論)의 영수로 숙종 대에 환국(換局) 정국에서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펼쳤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D-001]서계(西溪)의 …… 지났던가 : 서계의 풀은 박세당(朴世堂) 무덤의 풀을 가리킨다. 박세당이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가 지내면서 자호를 서계초수(西溪醮叟)로 삼은 바 있다. 박세당은 1703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재유고 제20권
서(書)
박태보 사원에게 보냄 4월 27일


동봉영당(東峰影堂)은 내 생각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를 유자(儒者)라고 주장하자니 명분은 바른데 사적이 뒷받침하기 어렵고, 승려라고 주장하자니 승려들이 그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그 허탄한 말을 빙자할 따름일 것이니 절의(節義)와 풍교(風敎)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참으로 옳지만은 않은 내 견해로 남의 다 된 일을 기필코 막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건물을 절반 이상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조만간 한번 찾아갈 것이니, 한가히 지내는 중에 좋은 감상거리가 하나 더해질 것입니다.
내가 당한 구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찍 장자(長者)에게 말하지 않고서 사적으로 공의(公議)를 등진 일을 논했다고 하여 그것을 죄로 삼고 있습니다. 전날 장문의 편지를 제때에 보내지 않은 일을 염려했던 그대의 견해 또한 명견(明見)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의리를 정밀히 분석한 공부에 대해 부끄럽고 탄복하였습니다. 기왕의 일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앞으로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두렵습니다.


 

[주D-001]동봉영당(東峰影堂) :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서계(西溪)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계미년(1703, 숙종29)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우리 공은 / 惟公
반남공 맥을 이은 후손이시고 / 潘南一脈
선조 야천 유풍을 이어받았지 / 冶川遺風
공의 재덕 밖으로 환히 빛났고 / 英華彪外
진실함과 신의를 맘에 지녔네 / 忠信在躬
나간 때가 시대와 서로 어긋나 / 進與時違
물러나서 곤궁함을 고수하였지
/ 退而固窮
천지에 부끄러움 하나 없도록 / 俯仰無怍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네 / 一其始終
아아, / 嗚呼
나라의 큰 동량이 될 만하다고 / 人嘗期公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했었지 / 可當棟隆
그러나 불러도 안 움직인 건 / 招麾不動
금세엔 오직 공이 유일하다네 / 今世惟公
어째서 높은 자리 마다하고서 / 曷不廊廟
시골집에 파묻혀 은거하였나 / 而沒蒿蓬
탐욕을 청렴하게 만드는 절개 / 廉頑一節
그 어찌 크나큰 공이 아니랴 / 抑豈非功
아아, / 嗚呼
큰아들 직언하다 목숨을 잃고 / 大兒死直
작은아들 충언으로 목숨 잃으니 / 小兒死忠
한집안에 훌륭한 이 다 모인 건 / 一家萃美
고금에 어느 집안 이와 같으랴 / 今古誰同
양주 땅에 위치한 수락산 서쪽 / 水落之西
도봉에서 보자면 동쪽 언덕에 / 道峯之東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묻히니 / 父子同歸
그 정기 더욱더 크다 하겠네 / 正氣彌穹
아아, / 嗚呼
어느새 세도 이미 땅에 떨어져 / 世道旣喪
시비와 흑백이 뒤섞인 세상 / 緇素相蒙
쏙닥쏙닥 참소하는 못된 이들이 / 緝緝翩翩
번번이 임금을 기만하였네 / 儘欺天聰
그러나 사람 마음 쉬이 안 속고 / 人心難誣
천리는 자연스레 공변되나니 / 天理自公
백 년 뒤엔 가렸던 진실 드러나 / 百載之後
어둠을 깨치고서 훤히 밝으리 / 昭如發矇
아아, / 嗚呼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나 / 後死殘喘
온갖 감회 마음에 교차한다네 / 百感縈中
의리로는 조문이 당연하지만 / 義當素車
칩거한 벌레와 똑같은 신세 / 身作蟄蟲
술 한 잔에 이 글로 유식하자니 / 緘辭侑觴
마음 다 표현할 길이 없구나 / 言不盡衷
말은 비록 다 하지 못한다 해도 / 言雖不盡
그대와 내 마음 서로 통하리 / 方寸可通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초본(初本)
아아, 지난 경진년(1700, 숙종26) 가을, 마지막으로 선영(先塋)을 찾아 하직을 드리기 위해 떠난 길에 누이의 무덤까지 돌아보고는 공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때 공은 나의 얼굴이 속티를 벗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나는 공의 총명이 줄지 않은 것에 대해 감탄하였습니다. 봄추위와 가을더위처럼 사람이 늙어 강건한 것은 결국 오래갈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서로 웃으며 이별하였는데, 이 이별이 실로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덧 무덤에서 공을 장사 지낼 날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근근이 명을 이어 가는 거의 죽어 가는 목숨이라 장사(葬事)에 가 볼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략 슬픈 감회를 적어 멀리서나마 술 한 잔을 올려 유식(侑食)하게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아, 공은 반남공의 후예이고 야천의 후손입니다. 공은 재덕이 밖으로 환히 드러났고 진실함과 신의를 안에 지녔으며, 그 뜻과 식견은 심원(深遠)하였고 지조는 확실하게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국과 역량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다들 공이 정계에 나가서 중요한 지위에 오르면 당연히 임금을 바로잡고 정사를 바르게 하는 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명(召命)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은 절조를 지녔기에 나라의 위대한 야인(野人)이 되셨습니다. 이미 그 뜻이 시대와 어긋나서 물러나겠다고 일찍 판단한 뒤로는, 명리의 길은 영영 끊어 버렸고 안빈낙도하는 빈한한 선비가 되어 농사짓고 나무하는 것을 생애로 삼았으니, 그 뒤로는 단지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의표가 세상 밖에 초연한 것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공이 비록 조정에서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탐욕스런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이 확고한 뜻을 지니게 만드는 것으로 세도(世道)에 도움을 준 점에서는, 어찌 그 공(功)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은 본래 예문관과 홍문관에서 활약한 분이므로 경연(經筵) 석상이나 정부의 고위직이 알맞은 자리인데, 나무하는 거친 시골에서 노닐며 산골에서 험난하게 사는 길을 택하였으니, 마음은 비록 형통하였으나 몸은 여의치 못했고 뜻은 비록 펼쳤으나 도(道)는 굴곡졌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두 아들이 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명하였으나 큰아들은 직언을 하다 죽고 작은아들은 충언으로 죽었습니다. 비록 그 맑은 이름과 빼어난 절조가 크게 나라와 집안의 빛이 되기는 하였지만 난초가 꺾이고 구슬이 깨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셈이니, 집안사람의 정리(情理)로 볼 때에는 세간에 보기 드문 참혹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아, 그리고 올여름의 일은 또 뜻밖에 벌어진 일인데, 이는 쏙닥거리며 참소하는 무리들이 임금을 기만한 것입니다. 만약 자애로운 성상의 특별 배려가 아니었다면 먼 섬으로 유배 갔다가 유골을 수습해 와야 하는 지경을 거의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공의 집안처럼 선을 행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며 굽히지 않고 바른 도리를 지켜 가는 집안에 유독 이러한 재앙이 많단 말입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공의 이른바 《사변록(思辨錄)》은 차분히 오랫동안 침잠하여 연구한 것을 기록하여 권질(卷帙)을 이룬 것입니다. 비록 간간이 선현의 뜻을 넘나드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공의 뜻이 어찌 감히 이설(異說)을 세우려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의심을 질정(質正)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회재(晦齋)나 포저(浦渚) 같은 여러 선정(先正)들도 일찍이 했던 것입니다. 현석(玄石)이 이른 바 “한집안 내에서 의견이 비록 다르더라도 집안을 위하는 취지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적절한 비유라고 할 만합니다. 신미년(1691, 숙종17) 중하(仲夏)에 석림(石林)의 회합에서 형이 상자에서 그 책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나는 그때 누님을 잃은 슬픔이 극심하여 그 책을 차분히 보지 못하고 《논어》와 관련된 설만 대략 보았습니다. 대부분 모두 평이하면서도 절실한 것으로 구이지학(口耳之學)의 공허한 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에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한가한 가운데 얻은 것으로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책을 보는 데 있어 너무 얕게 보고 너무 국한 지어 보려는 병폐가 있는 듯하여 대략 저의 견해를 피력하여 논변하였으나 의견이 일치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설의 경우에는 미처 두루 연구하지 못하였기에, 돌아온 뒤에 그 책을 빌려 와서 한번 검토할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침침하고 정신이 혼미한 데다 글을 짚어 가며 읽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라 다시 생소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에 끝내는 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타고난 능력 면에서 생각이 꽉 막히다 보니 곳곳에서 일을 간과함으로써 친구 간의 직분을 크게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을 꼭 늦다고만 할 수는 없고 타산지석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편지를 써서 대략이나마 저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형의 생각은 과연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변록》에서 사람을 논한 대목[論人]의 경우에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의 청탁(淸濁) 구분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실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곧은 말과 바른 의론을 하기에는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삼보결록(三輔決錄)》처럼 별도로 논저(論著)를 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에게 써 준 글에서 등한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일에 도움도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재앙만 초래하게 되어 또다시 성대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하였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들을 고명한 공에게 질정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모두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아, 나라에 별일이 없을 때에 시골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으며, 이제는 땅속으로 편안히 돌아가 부자와 형제가 같은 산에 묻히게 되셨습니다. 살아서는 연연한 것이 없고 죽어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아아, 공으로서는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오직 황혼 녘에 홀로 서 있으면서 친척과 친구들을 거의 다 떠나보낸 채 뒤늦게 죽는 저의 괴로운 심정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자리를 마련하여 공의 무덤을 향해 곡하고 자식을 대신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정신이 혼몽하여 속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주C-001]서계(西溪) :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호이다. 자는 계긍(季肯)이고 호는 잠수(潛叟) 또는 서계이다.
[주D-001]반남공(潘南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 박상충(朴尙衷)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간신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2]야천(冶川) : 박소(朴紹, 1493~1534)의 호이다. 자는 언주(彦胄)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주D-003]나간 …… 고수하였지 : 박세당은 1668년(현종9)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 당쟁에 혐오를 느껴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것을 말한다.
[주D-004]큰아들 …… 잃고 : 큰아들은 박태유(朴泰維, 1648~1686)이다. 1683년(숙종9) 지평으로서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김익훈(金益勳)을 탄핵하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주D-005]작은아들 …… 잃으니 : 작은아들은 박태보를 말한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주D-006]아버지와 …… 묻히니 : 박세당과 박태유의 무덤은 양주 수락산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있다.
[주D-007]올여름의 일 : 박세당이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이경석을 폄하하는 내용이 있다 하여 결국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소척(疏斥)을 받았고 그 결과 삭탈관작(削奪官爵)과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처분을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08]만약 …… 것입니다 : 이경석의 일로 문외출송의 처분을 받고 박세당은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는데, 처음에는 대간의 계사로 옥과(玉果)에 원찬(遠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판윤(判尹)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원찬의 명이 환수되어 5월에 석천(石泉)으로 돌아갔다.
[주D-009]회재(晦齋)나 …… 것입니다 :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성리학에 근본을 두면서도 자율적인 학문 자세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치보망장(格致補亡章)’을 인정하지 않고 경(經) 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으로 옮기려고 한 것이 그 실례이다. 포저(浦渚) 조익(趙翼)도 《곤지록(困知錄)》ㆍ《중용주해(中庸註解)》ㆍ《대학주해(大學註解)》ㆍ《서경천설(書經淺說)》 등을 지었는데, 주희의 장구(章句)와 다른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주D-010]한집안 …… 것 :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한 말은, 집안 내에 의견이 서로 달라도 결과적으로는 집안을 위한 것이듯이 경전의 글 뜻을 다르게 보더라도 결국은 경전의 근원적 의미를 찾으려는 데로 귀결되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남계집(南溪集)》 권82 〈의정부좌의정시문효포저선생조공행장(議政府左議政諡文孝浦渚先生趙公行狀)〉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D-011]신미년 …… 회합 : 명재는 신미년(1691, 숙종17) 3월에 누나의 상을 당하여 4월에 양주(楊州)로 달려가 곡(哭)하고 그곳 석림사(石林寺)에 머물렀는데, 그때 박세당이 사서(四書)에 대한 《사변록(思辨錄)》을 가지고 와서 의의(疑義)를 논한 것을 말한다.
[주D-012]삼보결록(三輔決錄) : 한대(漢代)의 조기(趙岐)가 장안(長安)의 고적(古蹟)과 인물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매월당(梅月堂)의 옛 자취를 찾다 3수


불경을 읽지도 않고 좌선도 하지 않았으니 / 不讀梵經不坐禪
출가하고도 여전히 집에 있을 때와 같았네 / 出家因似在家年
광달한 노래와 통곡은 무뢰함은 아니지만 / 狂歌痛哭非無賴
외로운 달과 찬 매화는 일찍 인연이 있었지 / 孤月寒梅夙有緣
지금까지 우뚝한 산속에 자취가 남았고 / 遺跡至今危嶂裏
예로부터 깎아지른 벼랑 가에 누대가 황량하네 / 荒臺終古絶崖邊
누구에 의지하여 동봉이라는 글자를 기억해 내어 / 憑誰記作東峯字
인간 세상에 남겨 두어 호사가가 전하도록 하겠는가 / 留與人間好事傳
어떤 본에는 ‘한가한 사람에게 남겨 두어 왕래하며 전하게 하겠는가.[留與閑人往來傳]’로 되어 있다.

등나무 덩굴은 섬돌 감싸고 풀은 길을 덮으니 / 藤蔓籠階草覆逕
깊은 숲 가을 저물어 다니는 사람 끊어졌네 / 深林秋晩斷人行
적막한 바위의 거처에 남긴 자취 대하고서 / 巖栖寂寞對遺跡
속절없이 천고의 맑은 풍모 생각노니 서글퍼라 / 怊悵空懷千古淸

텅 빈 산 지는 해에 나그네 마음 슬픈데 / 空山落日客心哀
누런 잎 푸른 이끼 옛 누대 덮었구나 / 黃葉蒼苔遍古臺
덧없는 세상 모든 인연 그대 이미 끝났으니 / 浮世萬緣君已了
무엇하러 여기에 이르러 배회하겠는가 / 何須到此更徘徊


 

[주C-001]매월당(梅月堂) :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자는 열경(悅卿), 또 다른 호는 동봉(東峯)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이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승려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하며 절개를 지켰다.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저서에 《매월당집》이 있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옛터가 수락산 동봉(東峯)에 있었는데, 서계가 동봉사우(東峯祠宇)를 세워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西溪集 卷22 年譜》
[주D-001]외로운 …… 있었지 : 김시습의 호가 매월당(梅月堂)이므로 매화와 달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여러 사람과 수락산(水落山)에 오르다 3수


두 손으로 벼랑을 잡고 두 무릎으로 기어올라 / 兩手爬崖兩膝前
고생 끝에 해가 기울어서야 꼭대기에 이르렀네 / 日斜辛苦到層顚
끼었다 개었다 하는 구름바다를 돌아보고 / 回看雲海相呑吐
이어져 늘어선 봉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네 / 却指岑巒互接連
가슴속에 답답함 사라짐 절로 느끼겠나니 / 自覺胸中無芥滯
하늘 밖에 세속의 번뇌를 어찌 알겠는가 / 豈知天外有攀緣
목마르매 다시 부지의 물을 마시고 / 渴來更酌鳧池水
왕교를 불러다 열선을 묻노라 / 喚取王喬問列仙

십 년 동안 이 봉우리 아래에서 늙어 가며 / 十年休老玆峯下
초가집이 옥당보다 낫다 스스로 자랑하네 / 自詑茅茨勝玉堂
오늘 문득 높은 정상에 오르고 나니 / 今日却登高頂上
비로소 천지가 바늘 끝에 모였는가 했지 / 始疑天地集針芒
숲에 비치는 서리 맞은 잎엔 가을빛이 한창이고 / 映林霜葉酣秋色
바다에 뜬 구름 파도엔 햇빛이 어른거리네 / 浮海雲濤盪日光
흥에 겨운 한때 애오라지 흡족함을 취하니 / 乘興一時聊取愜
무엇하러 돌아갈 길 바쁘다 쉬이 말하랴 / 何須容易道歸忙
이상은 태유(泰維)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외로운 봉우리 땅에 솟아 그 형세 우뚝하니 / 孤峯拔地勢嵬嵬
언뜻 보매 부용이 손바닥 위에 핀 듯하여라 / 乍似芙蓉掌上開
지금까지 고사의 은거한 자취 남았는데 / 高士今留隱跡
노니는 사람 선대에 이르는 일 드물어라 / 游人罕得到仙臺
아침에 폭포에서 은하수 떨어짐을 보고 / 瀑流朝見銀河落
밤에 오리 그림자 따라 섭현으로 돌아오네 / 鳧影宵從葉縣回
젊은이들이야 이 산에 오름 싫어하지 않겠지만 / 年少登山應不厭
노쇠한 몸 감히 후일 다시 오길 바라겠는가 / 衰遲敢望異時來
이상은 이성석(李聖碩)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주D-001]부지(鳧池) : 수락산 선부봉(仙鳧峯) 아래에 있는 못 이름인 듯하다.
[주D-002]왕교(王喬) :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왕자교(王子喬)로, 생황을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잘 내었는데, 신선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으로 들어가 도술을 배운 지 30여 년 후 백학(白鶴)을 타고 구씨산(緱氏山) 산마루에 올라가 며칠을 있다가 떠나 버렸다고 한다. 《列仙傳 王子喬》
[주D-003] : 대본에는 자획의 일부가 결락되어 있는데, 태학사에서 간행한 《서계전서(西溪全書)》에 의거하여 ‘至’로 고쳤다.
[주D-004]폭포에서 …… 보고 : 폭포의 물이 쏟아져 흐르는 광경을 형용하였다. 이백(李白)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 “나는 물줄기 곧장 삼천 척 높이로 쏟아져 내리니, 아마도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가 하여라.[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하였다.
[주D-005]오리 …… 돌아오네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도술을 지닌 왕교(王喬)가 섭현 영(葉縣令)을 지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늘 조정에 와서 명제를 알현하였다. 그가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오고 수레도 타지 않았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명제가 비밀리에 태사(太史)에게 그 진상을 알아보라고 명했는데, 태사가, 그가 오는 시기에 한 쌍의 오리가 동남방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가 다시 날아오는 때를 기다렸다 그물로 덮쳤는데, 그물 속에는 몇 해 전에 황제가 상서대(尙書臺) 관원들에게 하사한 가죽신 한 짝만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여기서는 수락산에 선부봉(仙鳧峯)이 있으므로 이른 말인 듯하다.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광해군을 안치하다. 세자를 폐하고 사사하다. 붙임


3월 19일에 부원군들이 합계하기를, “폐주ㆍ폐비ㆍ폐동궁ㆍ폐빈 세자의 처 를, 마땅히 대비의 하교대로 각 곳에 위리안치해야 할 것이지마는, 신들이 거듭 생각해 보건대 먼 지방 외딴 섬에는 뜻밖의 환이 없지 않겠으니, 가까운 교동(喬桐) 등지에 안치하여 엄하게 수직하여 허수로운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정사록》
○ 18일에 대장이 아뢰기를, “임 소원(任昭媛)을 잡아서 금부로 이송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폐주가 있는 곳에 시녀가 없다고 하니 이 사람을 보내라.” 하였다. 《정사록》
○ 20일에 대비가 하교하기를, “역괴 혼(琿)이 아직도 대궐에 있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시각도 용납 못할 대역을 어찌 편히 앉혀놓고 있느냐. 경들은 위로 종묘사직을 위하여 빨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런 후에야 내가 대궐로 옮겨갈 것이니, 경들은 나를 위하여 소홀하게 처리하지 말 것이다. 내 경들에게 두 번 절하며 청하노라.” 하였다.
○ 광해군과 비 유씨(柳氏)와 폐세자 질(祬)과 그 빈 박씨 등을 강화에 안치하되, 각각 동문ㆍ서문 안에 두도록 명하였다. 《속잡록(續雜錄)》
○ 21일에 판윤 이괄이 폐주와 폐세자를 압송하여 강화부(江華府)로 나갔다. 《속잡록》 《정사록》
○ 광해를 강화로 옮기려고 하는데 김류가 아뢰기를, “뱃길이 험악하니 청컨대 육로로 편히 가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대비께서는 폐비를 다른 섬에 따로 있게 하셨으나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하겠으니, 차라리 이것으로 대비에게 책망을 받겠노라.” 하였다. <승평 묘비>
○ 정엽이 광해가 옮겨간다는 말을 듣고는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폐주가 비록 자신의 죄로 하늘에 버림받았으나, 군신이 일찍이 섬기던 분이니, 그가 나갈 때에 울면서 보내야 할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이 안색이 변하며 대답이 없었다. 정엽이 혼자 그리하려 하였는데,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정수몽 묘비>
○ 4월 10일에 임금이 이르기를, “폐주의 죄악이 비록 중하나 선왕의 혈육이니, 그가 그곳에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이 절로 흘러내린다. 이제 겨울옷을 입을 때가 되었으니 베와 솜을 넉넉히 내려보내라.” 하였다. 《공사견문》
○ 대비가 광해를 꼭 죽이려고 하니, 공신들도 모두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 울면서 말하기를, “광해가 스스로 하늘에 버림받았으니, 폐출하는 것은 마땅하나 죽이는 것에 대해서라면 일찍이 그를 섬긴 노신으로서는 차마 들을 말이 아니니 마땅히 지금 떠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경의 말을 듣고 보니 감히 목숨을 보전해 주길 힘쓰지 않겠소.” 하였다. <완평년보(完平年譜)>
○ 임금이 이미 광해를 강화부에 옮긴 후에 이중로(李重老)를 특별히 부윤으로 임명하고 이르기를, “경은 경의 조상이 우리 태조를 섬기던 일을 아는가? 경은 마땅히 그 일을 생각하여 폐인을 잘 대우하라.” 하였다. 중로가 절하며 사례하고 강화에 부임하여서는 각별한 정성으로 대접하고 조금도 실례함이 없었다. 광해가 처음에는 의심하여 끼니를 잘 들지 않다가 뒤에는 다른 일이 없을 것을 믿었다. 이성구(李聖求)와 김기종(金起宗)이 후임이 되어 한결같이 모범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임금의 사람 알아보는 밝음에 탄복하였다. 《강화지(江華誌)》
○ 광해가 일찍이 병이 들었는데, 정엽이 중종이 연산군 대우하던 전례를 인용하여 아뢰기를, “신이 광해군을 섬긴 것이 10년이 넘습니다. 견마(犬馬)가 주인 생각하는 옛 정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며 말끝에 눈물이 떨어졌다. 임금이 안색이 변하여 의복과 쓰일 물건을 보내도록 명하였다. <수몽 묘비>
○ 5월 22일에 강화 부윤 이중로가 장계하기를, “이달 21일 삼경에 폐동궁이 담 안에서 흙을 파내어 70척(尺) 정도의 구멍을 뚫어 도망쳐 나가는 것을 잡았습니다.” 하였다. 《정사록》
○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강화에서 땅을 파고 도망치려던 사건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관리된 자는 마땅히 자주 돌아다니고 상세하게 살펴서 뜻밖의 변을 막아야 할 것인데, 땅을 그만큼 파려면 괭이와 가래를 쓴 것이 반드시 여러 날 걸렸을 것인데도 전연 알지 못하고 있다가 탈출한 뒤에 발자국 소리로 요행히 깨달았다고 하니, 청컨대 부윤 이중로를 잡아 국문하소서.” 하였다. 6월 25일에 중로를 다시 부윤으로 임명하였다.
○ 폐동궁이 봉서(封書)와 은(銀)과 쌀밥을 손에 지니고 있었는데, 피봉(皮封)에 쓰기를, “해서 방백(海西方伯) 앞……” 이라 하였기 때문에 황해 감사 이명(李溟)과 그 아들 민수(敏樹)를 체포하였다.
○ 강화 별장 권채(權綵)ㆍ내관 박수홍ㆍ나인 막덕(幕德)ㆍ황대익(黃大翼)ㆍ이응성(李應星)ㆍ신차룡(申車龍) 등을 잡아다 국문하였는데, 권채는 매를 맞아 죽었다.
○ 25일에 금부도사가 장계하기를, “폐동궁을 도로 위리안치시켰습니다.” 하였다.
○ 강화 부윤이 24일 미시(未時)에 폐빈 박씨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을 장계하였다.
○ 처음에 폐빈 박씨와 같이 있는 나인이 인두를 가지고 땅에 구멍을 내고 폐동궁을 밀어 내보내었는데, 나온 뒤에 방향을 몰라 방황하는 동안에 지키던 군사가 알고서 잡아넣으니, 박씨가 나무에 올라 바라보다가 그 잡히는 것을 보고는 땅에 떨어져 3일 간 음식을 전폐하다가 목을 매어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공사견문》 《속잡록》
○ 전교하기를, “폐빈의 의금(衣衾)과 관을 갖추어 내려보낼 일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26일에 양사가 합계하기를, “전하께서 폐동궁에게 극진하게 해주었는데도, 폐동궁이 은혜를 저버리고 도망하여 스스로 하늘에 버림을 받았으니, 전하께서 끝내 보전해 주려 하셨지마는 되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의로서 결단하여 묘당(廟堂)의 의논을 따라주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아뢴 것을 들으니 놀라고 괴이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다. 대의로서 결단하라는 말은 이 무슨 말이냐? 질(祬)이 구멍을 판 것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소치이니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 정상을 생각하면 어찌 가련하지 않느냐. 폐조 때에 골육간의 참변이 거의 없는 해가 없었으니, 그것이 좋은 일이던가. 내가 오늘날 다시 이런 일을 당할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같은 의논을 하지 말 것이며, 폐동궁의 생명을 보전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정사록》
○ 이때 우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폐동궁의 일은 대신과 삼사, 그리고 2품 이상에게 의논을 수렴하겠습니다.” 하니, 이에 양사에서 발계(發啓)하였다.
○ 27일에 사간 정온(鄭蘊)이 아뢰기를, “폐동궁이 도망쳐 나간 변은 말만 하여도 마음이 섬뜩합니다. 독부(獨夫)의 몸으로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위치에 처하여 비록 제 도리를 다한다 하여도 용서될 수가 없는데, 스스로 죄를 지어 종전에 없던 변을 내었으니, 종묘사직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임금의 덕을 이끌어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명성이 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신하의 직분입니다. 폐조(廢朝) 때 있었던 골육간의 참변은 진실로 전하의 하교와 같습니다. 인심이 이반하고 천명이 끊어진 것이 끝내 이로 말미암았던 것이니, 오늘의 일이 비록 그때와는 다르나 성덕에 어찌 손익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신이 어제 수의(收議)하라는 명을 받들고 신의 의견을 대략 아뢰고자 하였더니, 양사의 여러 관원들이 수의해서는 안 되고 양사가 합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또 다른 의견을 고집하였으나 날은 저물고 황급하여 따라가 참여하게 된 것인데, 지금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어리석은 마음이 스스로 격발됩니다. 폐세자 처단에 반대하던 처음 생각을 굳게 지키지 못하여 자칫 전하의 성덕(聖德)을 그르치게 할 뻔한 죄가 크오니, 청컨대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정사록》
○ 이에 대사헌 오윤겸(吳允謙)과 대사간 박동선(朴東善)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깊이 염려하여 변고에 처리할 방법을 경솔하게 아뢰었더니, 어제 전하의 비답을 받고 감격하던 중에 정온의 말을 들으니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옵니다. ……” 하였다. 헌납 이목(李楘)과 정언 신천익(愼天翊)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당초의 의견은 정온과 같았습니다. ……” 하였고 집의 조희일(趙希逸)은 피혐하여 아뢰기를, “임금의 미덕을 받들어드리는 데에 신이 어찌 감히 남의 뒤에 처져서 잘못된 의견을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 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그들을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 6월 2일에 대사헌 이귀와 지평 심기원ㆍ김자점이 아뢰기를, “폐인(廢人) 질(祬)이 구멍을 뚫고 도망쳐 나간 것은 형적을 측량하기 어려우니, 나라 사람이 함께 놀랄 일이요, 국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죄입니다. 대비께서 말씀이 계시었고 정부의 의논이 모두 같았으니, 삼사가 합계하여 대의로 결단할 것을 청한 것은 실로 한 나라의 공통된 공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그 말을 번복하여 앞뒤가 모순되게 피혐으로 떠들썩하며, 서로 잇달아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하여 이미 연계(連啓)하지도 않고 또 정계(停啓)하지도 아니 하니, 대간의 일을 의논하는 채통을 크게 잃었습니다. 청컨대 양사를 모두 바꾸소서.” 하였다.
○ 3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죄인 질(祬)을 빨리 처단하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 이때 이귀ㆍ김자점ㆍ심기원은 폐세자를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고 윤황(尹煌)ㆍ이준(李埈)ㆍ김상(金尙)은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더니, 그날로 이준을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윤황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김상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내보내었다. 7일 정사
○ 부제학 정경세(鄭經世)ㆍ부응교 이민구(李敏求)ㆍ교리 심액(沈詻)ㆍ수찬 이경여(李敬輿) 등이 상소하기를, “신등이 합사(合司)한 공론에 대해 그 처음 설을 번복할 수 없으니,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사헌 이귀ㆍ대사간 이현영(李顯英)ㆍ집의 정종명(鄭宗溟)ㆍ사간 정온ㆍ장령 이상급(李尙伋)ㆍ지평 김자점ㆍ헌납 김세렴(金世濂)이 아뢰어 그 피혐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고 공격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서 양사가 출사하기를 청하고, 18일에 또 양사의 청을 쾌히 따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는 그대들에게서 이런 의논이 나올 줄 생각 못하였는데,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니 놀랍고 괴이함을 금치 못하겠다. 이러한 의논을 하지 않도록 하여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라.” 하였다.
○ 21일 조강(朝講)에 삼사에서 합하여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부득이 그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 부제학 정경세가 병이 심하여 삼사에서 합계할 때 참여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다.
○ 22일에 금부에서 아뢰기를, “폐인 질에 대한 삼사의 계사에 대의로 결단하라는 말만 있고 정한 형률이 없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이원익ㆍ원임 기자헌(奇自獻)ㆍ정창연(鄭昌衍)은 병으로 의견을 아뢰지 못하였고, 우의정 윤방(尹昉)이 의논하기를,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되, 또한 이것도 임금의 명에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금부도사 이유형(李惟馨)을 보내어 폐세자에게 죽음을 내리니, 25일에 스스로 목을 매었다. 전교하기를, “의금(衣衾)과 관은 폐빈(廢嬪)의 전례에 따라 내려보내라.” 하였다. 무덤은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 동쪽 기슭 끊어진 둔덕에 있다. 《일월록》과 《공사견문》의 합록
○ 이때 대간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의정 이원익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 비록 위에서 죄를 준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오히려 다투어야 할 것인데, 이제 아래 사람들이 죽이기를 청하니 도리상 차마 하지 못할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 자손에게 보여주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였을 때 원익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다.
○ 이때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질(祬)이 범한 죄에 대해 살려야 옳을지 죽여야 옳을지는 부인이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덕을 닦았느냐 닦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으며 덕을 닦고 닦지 않음은 마음을 조심하고 방심하는 데에 달려 있으며 마음을 조심하고 방심함은 잠깐 동안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부터 아침에 천자가 되면 저녁에 일개 평민이 되고자 하여도 되지 못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오늘처럼 조심하지 않으신다면 전하보다 어진 이가 다시 없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앞사람이 한 일을 뒷사람이 본받는 것이오니, 원컨대 질을 죽이지 마시어 그것으로 뒷날 내 자손을 보전할 계책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 폐세자에게 죽음을 내리니, 영의정 이원익ㆍ집의 이준(李埈)ㆍ장령 윤황(尹煌) 등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사헌부에서 그들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조익(趙翼)이 불가함을 힘써 말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조포저(趙浦渚) 시장>
○ 폐세자의 일이 발각되자 나졸이 옷 속에 든 편지를 찾아내었는데 편지는 황해 감영(黃海監營)으로 부치는 것이었다. 이에 감사 이명(李溟)을 잡아서 문초하였다. 이명이 명을 받고는 부고(府庫)를 봉하고 문서를 정리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비록 죽더라도 국가에서 여러 해 저축한 것을 손실시킬 수는 없다.” 하고, 일을 마친 뒤에 잡혀왔다. 임금이 그를 늦게 잡아온 것에 화를 내자, 금오랑(金吾郞)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좋게 여기었고, 이귀가 그의 억울한 사정에 대해 매우 힘써 말했으므로 임금이 즉시 그를 풀어주었다. 《염헌집(恬軒集)》
○ 이때 이명(李溟)이 잡혀오자, 형벌로 문초하기를 청하여 추안(推案)이 내려졌는데, 이귀가 아뢰기를, “이명의 사람됨이라면 폐모론이 한창 일어나던 때에 이항복을 구원하다가 탄핵을 심하게 받았으며, 또 정온을 사주하였다고 흉적에게 거슬려서 삭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최기(崔沂)가 억울하게 죽은 뒤에 그의 형 이충(李冲)이 첩에게 최기의 전답을 사주었는데, 이명은 형이 죽은 뒤에 다시 최기의 아내에게 그 전답을 돌려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으니, 이명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은데도 불행하게 지금 강화 옥사에 연루되었습니다. 폐인의 계집 종 막덕이 가진 편지의 봉투에 “해서 순상(海西巡相 황해 감사)”이라 쓰고, 그 편지의 끝에 “서경병로(西坰病老 유근(柳根))라 쓴 것은 가짜가 분명합니다. 폐인이 이름 있는 이의 별호[西坰]에 가탁하여 흉계를 꾸민 것은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명이 오랫동안 폐조(廢朝 광해의 조정)에서 버림받다가 10년 만에 겨우 황해 감사를 얻었고 우리 성조(聖朝)에서도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으니 별다른 원한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인 만큼 폐인과 함께 모반한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연평일기》
○ 처음 폐세자 질이 태어나던 무술년 12월 4일에 태어났다. 날 아침에 대궐 뜰 마당 웅덩이에서 연(蓮)이 나서 갑자기 꽃을 피우더니 금방 떨어졌다. 궁중에서 모두 기이한 상서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폐위되어 강화에 안치되니 나이 26세였다. 배를 타고 가면서 시를 읊기를,

티끌 속의 뒤범벅이 미친 물결같구나 / 塵寰飜覆似狂瀾
걱정한들 무엇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 何必憂愁心自閒
26년은 참으로 한 바탕 꿈이라 / 二十六年眞一夢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 / 好須歸去白雲間

하였다. 또 위리(圍籬)되었을 때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에,

본시는 한 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 / 本是同根何太薄
이치로는 마땅히 서로 아끼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을 / 理宜相愛亦相哀
어떻게 이 조롱(鳥籠) 벗어나 / 緣何脫此樊籠去
녹수 청산 마음대로 왕래하랴 / 綠水靑山任去來

《공사견문》 《속잡록》 《응천일기(凝川日記)》
○ 일찍이 경술년 5월에 폐세자가 인정전(仁政殿)에서 관례와 책봉을 거행하였다. 예를 행하고서 사령(赦令)을 반포할 때 집사 유중룡(柳仲龍)ㆍ이유청(李幼淸)이 교명을 받들고 인정전을 나오다가 넘어져서 땅에 떨어졌다. 《응천일기》
광해가 처음 즉위하여서는 후궁을 많이 두고 아들 많이 두기를 원하였는데, 중년에 꿈을 꾸니 비단 도포를 입은 대관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르기를, “임금이 남의 아들을 많이 죽였으니 임금은 한 아들도 보전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많은 아들을 원하느냐.” 하였다. 이후 광해가 우리나라에 와 있는 중국의 술자(術者)에게 단산(斷産)할 방법을 구하여 부적과 주문을 쓰기까지 하였다. 그때 있었던 궁인이 늙어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때 아들 낳기를 바라면서 그 부적과 주문을 미워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우리에게 끝까지 자녀가 없었던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하였다. 《공사견문》
○ 숙종 임술년에 봉상 판관(奉常判官) 정유제(鄭維悌)가 상소하기를, “청컨대 왕손의 예에 따라 폐세자에게 봉작을 추봉(追封)하소서.”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에 막혀서 시행되지 않았다. 《공사견문》
○ 광해의 딸은 숙의 윤씨가 낳았는데, 윤씨는 사족(士族)의 적출이라 한다. 그 딸이 뒤에 사인(士人) 박징원(朴徵遠)에게 시집가는데, 임금이 그의 혼수를 도와주고 또 전날의 궁인에게 가보라고 명하였다. 《공사견문》
○ 계해년 10월 8일에 폐비 유씨가 죽으니, 나이 48세였다. 《공사견문》
○ 폐비가 강화에서 병으로 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염습(斂襲)에 소용되는 의금(衣衾)과 관 등의 물건을 속히 내려보내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가 아뢰기를, “폐비는 폐빈의 상사와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행하여야 할 상례 절차를 유신들에게 널리 상고하게 하여 사흘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시키고, 닷새 동안 고기 없는 반찬을 들고, 예조의 당상관과 낭관을 보내어 초상을 살피게 하고 경기 감사에게 상식(上食)과 갖가지 전(奠)을 차려 내려보내게 하고, 일을 아는 나인[解事內人] 두 사람을 내려보내고 친척 한 사람을 호상에 참여시켜야 합니다. 연산은 중종 반정 초에 연산군으로 호를 강등하였는데, 이번에는 애초에 강봉(降封)시킨 절차가 없으니, 먼저 강봉할 일로 전교로 받든 후에, 강봉한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는 읍호(邑號)를 명정에 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상례는 왕자의 예로 하고 무덤의 한계는 연산 때보다 300보(步)를 더 주었고, 장례에는 특히 수도(隧道)를 만들게 하였으며, 반혼(返魂)은 장흥동(長興洞) 옛 집으로 하게 하였는데, 예조 당상관과 낭관이 성문 밖에 나와서 맞았다. 《조야기문》 《월사집(月抄集》 《남궁록(南宮錄)》
○ 폐비 유씨가 일찍이 불도를 숭상하여 믿었는데, 대궐 안에 금부처를 모셔두고 친히 기도하여 섬기며 복을 구하였다. 또 궁중에 나무로 새기고 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이 매우 많았는데, 여러 군데 사찰에 내려주었다. 항상 하늘에 빌기를, “후생에서는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공사견문》
○ 반정하던 날, 폐비 유씨가 수십 명의 궁녀와 함께 밤을 틈타 후원으로 가서 어수당(魚水堂) 속에 숨어 있었다. 이틀 동안 군사가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유씨가 말하기를, “내 어찌 숨어 살기를 꾀할 것인가.” 하고, 궁인을 시켜 “중전이 여기 있다.”고 외치라고 하니, 궁인이 모두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한(韓)씨 성을 가진 보향(保香)이라는 여인이 자청하여 계단 위에 서서 “중전이 여기 있다.”고 말하였다. 대장이 그때 교의에 걸터앉아 있다가 곧 일어나서 군사로 하여금 진(陣)을 약간 물러나게 하였다. 보향이 유씨의 뜻을 받아 묻기를, “주상은 이미 나라를 잃었으니, 새로 선 분은 누구요?” 하였다. 대장이 “선조대왕의 손자인데 누구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오? 부귀를 위한 것이오?” 하니, 대장이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거의 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새 임금을 받들어 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부귀를 위한 것이겠소.” 하였다. 보향이 “이미 의거라고 칭한다면 어찌 전왕의 비를 굶겨 죽이려고 하오.” 하니, 대장이 듣고 즉시 인조에게 아뢰어 조석 음식을 퍽 후하게 하였다. 《공사견문》
○ 갑자년 이괄의 난에 폐주를 강화에서 배로 태안(泰安)으로 옮겼다가 적을 평정한 후에 다시 강화로 돌아왔다. 그때 왕명을 받든 별장과 선전관 등이 임금이 주신 표신을 받들었다 하여 도중에 관사에 들게 되면 저들이 함께 웃방[上房]에 들고 폐주를 서쪽 채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후 양사에서 “그들이 버릇없이 스스로 웃방에 든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탄핵하여 연이어 글을 올리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별장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벼슬에서 파면되었다.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 병자년 겨울에 폐주가 강화에서 교동(喬洞)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정축년에 서울에서 나올 때, 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ㆍ신경원(申景瑗)ㆍ신경인(申景禋)ㆍ홍진도(洪振道) 등이 연명으로 경기 수사(京畿水使) 신경진(申景珍)에게 글을 보내기를, “잘 처리하시오.” 하였다. 이것은 광해주를 몰래 없애라는 뜻이었는데 경진이 따르지 않았다.
○ 정축년 2월 《조야첨재》에는 5월로 되어 있다. 에 교동에서 또 제주로 옮겼다. 그때 호송하는 별장이 되기를 요청하는 무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공을 세울 계책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경진 등의 뜻이었다. 《병자록(丙子錄)》
○ 광해를 옮겨 안치시킬 때 따라간 궁비 중에 성질이 모질고 교활한 자가 있었는데, 모시는 데 삼가지 않으므로 광해가 꾸짖었다. 계집종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영감이 일찍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다달이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하여 심지어 김치판서[沈菜判書]ㆍ잡채참판(雜菜參判)이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 철에 따라 비단 용포와 털옷을 올리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사사로 올리는 길을 크게 열어 심지어는 장사치ㆍ통역관으로 하여금 벼슬길에 통할 수 있게 하였소? 후궁의 의복과 음식은 또 각각 그 맡은 관청에서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 구하고 송사하는 자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여 민심을 크게 무너지게 하였소? 영감께서 사직을 받들지 못하여 국가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해놓고, 이 섬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나에게 모시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속으로 부끄럽지 않소? 영감께서 왕위를 잃은 것은 스스로 취한 것이지마는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속에 갇혀 있단 말이오?” 하였다. 이에 광해는 고개를 숙이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다만 탄식할 뿐이었는데, 이것을 본 자는 그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어 이르기를, “반드시 이 계집종에게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다른 일로 인하여 과연 좋지 못하게 죽었다 한다. 《공사견문》
○ 그때 폐주를 제주로 옮기는데, 호송하는 사람에게 엄중히 분부하여 그 가는 곳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배 위의 4면은 모두 휘장으로 막았다가 배가 닿은 뒤에야 비로소 알리었다. 이때 무신 이원로(李元老)가 호행 별장(護行別將)이 되었는데, 뱃길이 험난하여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배가 멈춘 다음 휘장을 떼고 내리기를 청하여 제주라고 알리니, 광해가 깜짝 놀라며 크게 슬퍼하여,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제주 목사가 맞이하여 문안하며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겠습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 하니, 광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 광해가 제주에 있을 때 이시방(李時昉)이 목사로 있었다. 고을 사람을 단속하여 밥상을 깨끗이 하여 올렸더니, 광해가 대접이 전과 다른 것을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지난날 나에게 은혜를 받은 자일 것이다.” 하니, 늙은 궁인이 “아닙니다.” 하였다. 광해가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니, 궁인이 말하기를, “대감이 전일에 신하들을 등용하고 내치는 데 한결같이 후궁의 비방과 칭찬을 따랐습니다. 이 목사가 만약 일찍이 부정한 길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던 자라면 반드시 옛 임금을 박대하여 지난 저의 행적을 덮으려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기가 이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광해가 뒤에 시방(時昉)인 줄 알고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다. 《공사견문》
○ 광해가 섬에 위리안치된 후에 중사(中使)가 방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아서 임금에게 바쳤는데, 그것은 곧 부인의 편지로서 다만 안부뿐이었다. 임금이 안팎이 엄하지 않았다 하여 지킨 자를 처벌하고, 또 한 방에 있던 임소용(任昭容)을 잡아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하였으나, 끝내 그 편지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임을 몰랐다. 신흠(申欽)이 국청의 여러 재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 임금의 총희(寵姬)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하고, 또 그 형을 받는 것을 내려다보고 지휘하였으니 후세의 의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사견문》
○ 신사년 7월 7일 《병자록》에는 2일이라 하였다. 에 광해가 제주에서 죽으니, 나이는 67세였다. 부고를 듣고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5일 동안 소찬을 들었으며, 특히 예조 참의 채유후(蔡裕後)를 보내어 낭료(郞僚)들을 거느리고 중사(中使)와 함께 호상(護喪)하여 오게 하고, 각도 감사가 배행하여 제전(祭奠)을 감독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장례를 왕자 군(君) 1등의 예로 치르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특히 명하여 수도(隧道)를 쓰게 하고 장생전(長生殿) 재궁(梓宮 임금의 관)으로 관을 바꾸고 염(斂)을 다시 하게 하였으며, 승지를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고 10월 4일 양주(楊州)에 장사 지냈다. 평일에 신하 노릇한 이는 모두 소찬을 나흘까지 하였다. 《공사견문》
숙종 27년 신사 3월 26일에 승지 이세재(李世載)가 주강(晝講)에 나아가 아뢰기를, “광해의 묘가 양주에 있는데 봉사하는 외손이 가토(加土)를 하려고 하여도 힘이 미치지 못하여 역군을 청하려고 예조와 비국(備局)에 호소하였으나 전하께 아뢰지 않았습니다. 광해를 물리친 후에 인조께서는 그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약을 내렸고, 광해가 죽자 재상들이 장사를 삼가지 않는다고 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지금 무덤에 가토하는 때에 마땅히 역사를 도와주는 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다고 여겨 역군을 내려주라 명하였다. 《공사견문》
○ 광해의 장사에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논하기를, “전하께서 대궐에서 한 번 곡을 하고, 백관이 옷을 바꾸고 아문(衙門)에 모여 곡을 하며, 상두꾼은 모두 흰 베두건을 하는 등의 절차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이시백이 차자를 올려 예관을 잡아 문초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동춘집(同春集)》
○ 개똥이[介屎]는 전 선조(宣祖) 때의 늙은 궁인이었다. 선조에게 사랑을 입었는데 사람됨이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가 스스로 불안한 것을 추측하여 알고는 은밀히 광해와 접촉하여 뒷날의 계획을 세웠다. 약으로 선조를 시(弑)하는 참변도 그 손에서 나왔으나, 광해는 실로 미리 음모에 관계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전하기를, “당시의 사초에 바로 쓰기를 ‘약밥이 동궁에서 왔는데 얼마 안 되어 승하하였다.’ 하였다. 이 약밥이란 것은 지금 시속에 과일을 섞은 찰밥으로 대개 선조가 오랜 중병 끝에 동궁에서 올린 약밥을 먹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한때 혹 의심하는 말이 있었으나, 소위 당시의 사관이란 반드시 유영경(柳永慶)의 무리일 것이니 기록한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하였다. 또 전하기를, “인조가 일찍이 이 말을 힘써 물리쳐 이르기를, ‘당시 선조께서 위독하실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선왕께서 병을 앓으신 뒤에 맛있는 음식을 생각할 즈음, 동궁의 약밥이 마침 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잡수시고 기(氣)가 막혀서 이내 돌아갔을 뿐이었다.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을 실로 밝히기 어렵다.’ 하였다. 인조의 말이 이와 같으나 대비가 광해의 죄를 헤아릴 때, 군부를 시해(弑害)했다는 대목을 분명히 들어서 말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 사실을 아주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광해가 탐욕스럽고 음란하였으므로 개똥이가 안팎에서 제 마음대로 하며 이첨과 한 마음이 되어 어울렸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기강이 전연 없었으니, 대궐 안의 모든 일이 그의 손에서 한결같이 결정되었다. 궁녀가 광해의 잠자리를 모시는 것도 광해가 개똥이의 허락을 얻어야 되었기 때문에 개똥이가 여러 계집에게서 뇌물을 받았는데, 그 값의 많고 적음에 따라 광해로 하여금 동침하게 하면 광해가 감히 거스르지 못하였다. 하루는 광해가 개똥이를 데리고 잠자리에 들려 하였는데, 박씨라는 옛 상궁이 땅에 꿇어앉아 간하니 광해가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또 개똥이의 말을 어기는 일이 있을 때는 성내어 말하기를,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 하니, 광해가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이 때문에 추한 소문이 바깥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개똥이가 음탕하고 교활한 상놈 정몽필(鄭夢弼)이라는 자를 매우 사랑하여 양아들이라 하고 바깥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여 두고 몽필을 살게 하였는데, 만금의 재물을 쌓아 두었다. 몽필이 드디어 세력을 크게 행하여 백성들의 전답과 노비를 강제로 빼앗아 문서를 바치게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제집에 사사로 만든 옥에 가두니, 이름을 □궁(□宮)이라 하였다. 개똥이가 밤과 새벽에 드나들며 몽필과 거리낌 없이 거처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음란한 행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개똥이가 몽필에게 빠져서 겸하여 윤 소의(尹昭儀)를 중매하여 몽필과 음행하게 하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일월록》
○ 선조가 승하하니, 중독으로 돌아갔다고 소문이 떠돌았다. 유의(儒醫) 성협(成浹)이 입시하였다가 나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도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권득기(權得己) 만회(晩晦) 같은 이가 끝내 광해조에 벼슬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인 것이다. 반정이 되자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가 연명으로 소를 올려 광해의 시역(弑逆)을 성토하려고 이해의 조카 의길(義吉)이 그 소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끝내 소를 올리지는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박세채(朴世采)가 원두표에게 물으니 원두표가 답하기를,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의 교서 외에 또 언문으로 된 교서가 있어 광해의 죄상을 주워 모았는데, 작은 사실이라도 다 들추어 내었으나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여기에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은 큰일이니, 당시 비록 그러한 소문이 있었으나 지금 언문 교지를 가지고 보더라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렵다.’ 하여 그만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조익은 통유문(通諭文)에 이 한 가지 조목을 매우 분명히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남계집(南溪集)》
○ 이의길이 올리려고 했던 복수를 청하는 소의 대략에, “폐인이 세자가 된 것은 처음에 아예 얻지 못할 것을 얻었던 것인데, 오랜 뒤에 선왕이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위치를 위태롭게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이 날로 심해져 속으로 흉악한 생각을 몰래 품었습니다. 선왕이 만년에 이르러는 더욱 짐승 같은 자에게 큰 자리를 맡길 수 없음을 알고 세자를 바꾸려는 뜻이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 간인(奸人)들이 그 틈을 엿보아 이간질하였습니다. 선왕의 오랜 병환이 처음 나았을 때 모든 백성들이 좋아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으니 사람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약밥에 대한 말이 항간에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선왕이 위독할 때, 의원 성협이 명을 받고 들어가 진찰해 보니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고 빛깔과 증후가 무원록(無寃錄) 중독조(中毒條)에 있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협이 물러나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니, 사류(士類)로서 이 말을 들은 이는 벼슬을 버리고 갈 뜻이 있어 국문(國門)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로 아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계축년의 옥사는 이첨이 꾸민 일인데, 소위 서양갑(徐羊甲)의 격문(檄文)이란 것도 이첨 등이 꾸며서 만든 것입니다. 첫머리에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이첨이 폐인의 흉악한 역모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음이 분명하니, 이 격문에 어찌 모르고 썼겠습니까. 당시 죽음을 당한 궁인이나 내시 중에는 죽을 때 거리낌없이 말을 하여 시역의 사실을 언급한 자도 있었습니다. 바깥의 소문이 비록 분명하지 않다 하여도 또한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또 들으니 고문을 받던 어떤 자가 꼭 할 말이 있다며 이미 말을 꺼내었지만 그 입을 쳐서 말을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장형(張衡)의 입을 막아서 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후의 사실이 양광(楊廣)과 매우 비슷하고 사실의 증거가 더욱 분명합니다.” 하였다. 《양곡집(亮谷集)》
광해가 시역에 직접 간여하였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이첨이 시역의 음모를 실행한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는데, 반정때 여러 신하들이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반정하던 날 바로 이첨을 베었기 때문에 끝내 그 시역의 죄를 밝히지 못하였으니 통분을 금할 수 없다. 또 광해가 비록 시역에 간여한 자취가 없다 하더라도 약밥이 이미 동궁에서 나왔으니 장오(張敖)가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는가. 춘추(春秋)의 법대로 할 것 같으면, 마침내 약을 맛보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첨은 비록 죽었지마는 그때 궁인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필시 있을 것인데, 어찌 가볍게 들추기 어렵다고 말하여 마침내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인가. 국경에서 돌아와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죄를 책하여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청야만집》
○ 시역이 어떤 죄명인데, 의심스럽고 전해 들은 말을 가지고 전일 섬기던 임금에게 덮어씌울 수 있단 말인가. 《양곡집(亮谷集)》에 실려 있는 이의길의 복수를 청하는 소[擬請復讐疏]는 의리상 매우 온당치 못하니, 그 당일 여러 사람이 처음에는 그 소를 올리려다가 바로 중지한 것은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사실을 끝까지 추궁하여 성토하지 못했고 보면 결정나지 않은 안건을 문집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여 보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심지어 짐승에게 큰 일을 부탁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어찌 할 수 있는 것인가. 본래 묘당의 통유문(通諭文)에 이런 말을 넣은 것도 역시 어진 사람으로서의 실수이니 수몽(守夢)이나 계곡(谿谷)을 시켜 이 글을 짓게 하였으면 결코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D-001]독부(獨夫) :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여 민심을 잃으면, 그것은 임금이 아니라 고립된 독부(獨夫)라 한다.
[주D-002]덕을 …… 적국(敵國) : 오기(吳起)가 위(魏) 나라 무후(武侯)와 배를 타고 가다가 말하기를,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 된다.”고 하였다.
[주D-003]장형(張衡) : 수(隋) 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가 아버지인 문제(文帝)를 죽였는데 뒤에 장형(張衡)이 다른 일로 형벌을 받으면서 그 사실을 말하려고 하자 입을 쳐서 죽여 말을 못하게 하였다.
[주D-004]장오(張敖) : 한 나라 고조(高祖)가 그의 사위인 조(趙) 나라 임금 장오(張敖)에게 들리어 유숙하는데, 장오의 신하인 관고(貫高)가 고조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었다. 장오는 그 음모를 몰랐으나 역시 죄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처벌을 받았다.
[주D-005]약을 …… 죄 : 허(許) 나라의 임금이 병중에 약을 먹다가 중독되어 죽었는데, 춘추(春秋)에, “허 나라의 세자(世子) 지(止)가 그 임금을 시(弑)하였다.”고 썼다. 그것은 세자인 지가 아버지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지 않았다고 죄를 준 것이다.
[주D-006]국경에서 …… 죄 : 진(晉) 나라 조순(趙盾)이 임금에게 미움을 받아 망명의 길을 떠나는 중도에서, 조천(趙穿)이 그 임금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춘추(春秋)에 쓰기를, “조순이 임금을 죽였다.” 했으니, 그것은 조순이 망명하다가 임금이 죽은 줄 알고 국경을 넘지 않고 왔으며, 돌아와서는 임금을 죽인 조천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조순이 임금을 죽인 것과 같다는 뜻이다.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광해군


광해군의 휘는 혼(琿)이며, 선조의 둘째 아들이요, 공빈(恭嬪) 김씨가 낳았다. 을해년에 나서 처음에 광해군으로 책봉되었다가 만력(萬曆) 기유년에 왕위에 올랐고 천계(天啓) 계해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강화에 방치되었다가 갑자년에 이괄의 난리로 인하여 태안(泰安)으로 옮겼고 반적(叛賊)이 평정된 다음 강화에 돌아왔다. 병자년(1636) 겨울에 교동도(喬桐島)에 옮겼다가 정축년 2월에 제주(濟州)로 옮겼다. 신사년에 죽었는데 인조 19년 67세였다.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공빈의 무덤과는 소 울음 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거리였다.
○ 신해년에 존호(尊號)를 체천희운준덕홍공(體天熙運峻德弘功)이라고 올렸고 병진년에 존호를 서이입기명성광렬(敍彛立紀明誠光烈)이라고 올렸다.
○ 폐비(廢妃) 문성군 부인(文城郡夫人) 유씨(柳氏)는, 판윤(判尹) 자신(自新)의 딸로 병자년에 나서 계해년 10월에 죽었는데, 향년 48세이며 적성동에 장사 지냈다. 광해의 무덤과 같은 언덕이면서 무덤은 다르다.
○ 폐세자(廢世子) 지(祬)는 무술년에 나서 경술년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계해년에 폐위되었다. 뒤에 강화에 보냈더니 7월에 땅굴을 파고 몰래 빠져 나왔으므로 사헌부에서 논계(論啓)하여 사사하였는데 나이는 26세였다. 양주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에 장사 지냈다.
○ 폐세자 빈(嬪) 박씨는 무술년에 났고 계해년 5월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시습(金時習)


○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다. 조금 자라자 말을 더듬어 가이 말은 잘하지 못하였으나, 붓과 먹을 주면 그 생각을 모두 글로 썼다. 세조 때에 세상을 달갑잖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불렀다. 스스로 그의 호(號)를 동봉(東峯)이라 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환속(還俗)하여 죽었는데, 《매월당 역대년기(每月堂歷代年紀)》와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 열경(悅卿)은 난 지 여덟 달 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민첩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였어도 뜻은 모두 통하였다. 본전(本傳)
○ 동봉(東峯)이 세 살에 어눌하여 아직 말은 잘 못하였으나, 그의 외조부가 글귀를 뽑아 가르치기를,
꽃이 난간 앞에서 웃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花笑檻前聲未聽
하니, 곧 병풍에 그린 꽃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또 가르치기를,
새가 수풀에서 우나 눈물은 보기 어렵도다 / 鳥啼林下淚難看
하니, 또한 병풍에 그린 새를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이는 말로는 못하나 뜻은 능히 통하는 것이다.
○ 세 살에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또렷이 읊기를,
비는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메서 울리는고 / 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 세 살 때에 그 할아버지에게 묻기를, “시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니, 할아버지가, “일곱 글자를 이어 놓은 것을 시라고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렇다면 일곱 자를 엮을 테니 첫 글자를 불러 보시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봄 춘(春) 자를 부르자, 곧 응하기를,
봄비가 세 휘장 밖으로 내리니 기운이 열리도다 / 春雨新幕氣運開
하여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다. 세종이 그 말을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임금의 뜻을 전하고 사실인지 아닌지 묻는데, 안아 무릎 위에 놓고 임금이 이름을 불러 이르기를, “네가 능히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곧 응하기를,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 / 來時襁湺金時習
하였다. 또 벽 위의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짓겠느냐?” 하니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 小亨舟宅何人在
하였다. 그가 지은 시와 글이 적지 않다. 곧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 하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고 제가 가지고 가라고 하였더니, 드디어 그 끝을 이어 가지고 끌고 나가므로 사람들이 또한 기특하게 여겼다.
○ 청한자(淸寒子)가 손을 만나 소식을 물을 제, 마구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기쁜 빛이 돌았고, 만약 거짓 미친 체하여 실상을 감추고 있는 바가 있다고 하면 눈썹을 찌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 어떤 때는 벼[禾]를 심어 잘 자라서 이삭이 볼 만하게 되면 술취하여 낫을 휘둘러 모조리 땅에 쓰러뜨리고서는 목놓아 울었다. 상동
○ 시를 지을 때에는 종이가 떨어져야 그만두었고, 시가 다 되면 그것을 곧 불살라 버렸다. 상동
○ 거짓 미친 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 그에게 도를 물으려 하는 사람이 백 천이나 되었지만 겉으로 미처 날뛰는 꼴을 하여 혹은 나무나 돌로 때리려 하고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그 사람의 뜻을 떠보았다. 상동
○ 산에 들어가서 서 있는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시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써 놓고 한참 읊조리다가는 문득 울면서 깎아 버리곤 하였다. 상동
○ 총명이 뛰어나 사서 육경(四書六經)은 어려서 스승에게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 같은 것은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모조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 외우면 잊지 않았으므로 평소에 일찍이 글을 읽은 적이 없으며 또한 책궤를 지고 따라다니며 배우지 않았으나 고금의 문헌을 빠짐없이 통달하였다. 상동
○ 다섯 살 때,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그의 이름을 듣고 그 집으로 찾아가 곧 불러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 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더니, 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 꽃이 피니 속은 늙지 않았도다 / 老木開花心不老
하였다. 문경공이 무릎을 치고 감탄하면서, “이것이 이른바 기동(奇童)이다.” 하였다. 본집(本集)
○ 난 지 여덟 달 만에 저절로 글을 알았고, 세 살 때에 능히 글을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여덟 달에 남의 말을 알아듣고 / 八朔解他語
세 돌에 능히 글을 지었다 / 三朞能綴文
하였다. 상동
〈구일유수유(九日有茱萸 9월 9일에 산에 올라 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는 풍습〉 시에 이르기를,
다시 수유를 쥐고 자세히 보니 / 更把茱萸仔細看
올해도 어이하면 지난해 같이 즐길꼬 / 今年何似去年歡
가을 바람 능히 사람의 터럭을 흩날리기는 하나 / 秋風能解人間鬢
약간 묻은 서리를 지워 말리지 못하네 / 纔着霜花抹未乾
하였다. 상동
○ 동봉(東峯)이 육경(六經)과 사서(史書)를 싣고 관동의 산수를 두루 다니며, 기장 심을 땅을 얻어 농사짓고 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박주를 가지고 그의 손을 잡고 슬퍼하다가 시를 지어 천리에 서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을 하였다. 상동
○ 매소(梅蘇 매요신(梅堯臣)과 소순흠(蘇舜欽))의 옛일을 본떠 오금언(五禽言)을 지었다. 포곡(布穀)은 지금의 산비둘기이고. 탈폐고(脫敝袴)는 발고(鵓鴣 집비둘기)와 같고, 기첩부(欺妾婦)이며, 아욕사(我欲死)이며, 불여귀(不如歸)며, 소연(巢燕)이며, 추앵(秋鶯 가을 꾀꼬리)을 말한 것이다.
○ 대언(大言)ㆍ소언(小言 한시(漢詩)에 있어서 율시(律詩)를 말함) 두 편을 지었는데, 대언은 큰 것을 극언(極言)하고, 소언은 작은 것을 극언하여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 길가는 도중에서 난초가 풀 속에 시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 벼루[硯]를 씻은 뒤에 스스로를 비웃어 희롱하여 지은 시에,
어찌 도경 고개 위의 구름을 얻어 / 安得陶景嶺上雲
끌어다가 옥전의 금화를 삼고 [종이] / 攤爲玉牋之金花
송섬(宋纖)의 천길 깎아지른 언덕을 / 宋纖千丈磨崖
단계(좋은 벼룻돌이 나는 곳)의 금경(거울)으로 삼고 / 爲端溪之金烱
두꺼비 뱃속에 동정호를 간직하고[먹물] / 蟾蜍腹裏藏洞庭
중산의 천 마리 붓을 다 달토록 [붓] / 禿盡中山千首穎
휘두르면 바람이 휩쓸고 구름이 모여드는 듯하고 / 其揮也風掃雲聚
당기면 북두가 줄고 은하가 도는 듯할꼬 / 其曳也斗轉河廻
하였다.
○ 산중에 있을 때, 산나물을 노구솥에 끓이면서 시로 적었는데,
동정에는 눈이 아직 안 녹았는데 / 洞庭雪未消
눈 속에서 산나물이 돋아났구나 / 雪底山蔬秀
캐어다가 노구솥에 끓이니 / 採之煮小鐺
보글보글 지렁이 우는 소리 같네 / 細細蚯蚓鳴
족히 내 주림을 채우며 / 足以充吾飢
가히 여생을 보전할 만하도다 / 可以保餘生
우습다 부귀한이여 / 可笑鐘鼎人
명리에 구차스럽구나 / 區區利與名
어찌 노구솥 안 나물의 / 何似鐺中蔬
한결같이 화평한 맛과 같으리오 / 一味和且平
하였다.
○ 약재(藥材)의 이름을 이용하여 진퇴체(進退體 시를 짓는 데 운을 쓰는 한 가지 격식) 한 편을 지었는데,
사나이 먼 뜻[애기풀]이 있으니 / 丈夫有遠志
해가 저물면 마땅히 돌아오리[승검초의 뿌리] / 歲暮行當歸
솔이 늙으니 복령[솔뿌리에 생기는 균류] 자라고 / 松老伏苓長
가을이 깊으니 마[산우]는 살찌도다 / 秋深山芉肥
벼슬살이는 강계처럼 맵고 / 宦情薑桂辣
세상길은 홍연(수은과 단사의 화합물)과 다르도다 / 世路汞鉛違
가난한 선비는 괴로움을 일찍 겪었으니 / 措大苦曾歷
일찍 쉬어 시비를 잊어버리라 / 早休忘是非
하였다.
○ 산중에 네 가지 새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일깨워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사금언(四禽言)을 지어 그것으로 세상을 경계하기를, “누구를 위하여 잇속을 따르느냐[爲誰趨利]. 역시 허공을 잡으려 말라[亦莫把空]. 돌아감만 같지 못하리[不如歸]. 슬프고 슬프다[悲悲].” 하였다.
○ 산중에 내 죽고자 하는 새[我欲死鳥]가 있다 하여 시를 지었는데,
내 죽어 산허리에 묻히려 하니 / 我欲死埋山岡
4월의 청매가 귀걸이 같도다 / 四月靑梅如耳鐺
깊은 숲 속에 먹을 만한 것이 없으니 / 深林無物可以食
마른 가지로 날아가 헛되이 애를 끊는구나 / 飛向枯枝空斷腸
새여 새여 네 어이하리 / 禽兮禽兮奈爾何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것을 생각지 않느냐 / 不思夷齊飢首陽
하였다.
○ 세상의 부유한 사람이 자봉(自奉)하기를 오히려 아끼니, 하물며 남을 구제할 수 있으리오. 돈꿰미와 곡식을 썩히고, 후세 자손이 교만하고 사치하고 호협하게 하여 누(累)가 친척에게까지 미침을 탄식하여서 간귀(慳鬼)를 읊어 경계하였다.
○ 집을 짓되 움과 같이 하여 뒤쪽은 담이고 앞쪽은 벽인데, 책과 벼루를 곁에 늘어놓고 ‘지명환도(知命環堵)라 이름하고 명(銘)을 지어 벽에 붙이니 벽이 창이 되어 빛을 가리어 사랑스러웠다. 겉은 비록 꾸밈없이 질박하나 안은 단정하고 탁 트이었다.
○ 꽃동산 가꾸기 게을러[懶治花塢]의 시에,
돌을 쌓아 벽돌 삼아 꽃동산을 만들어 / 積石爲甃築花塢
해마다 호미질하고 깨끗이 쓸었네 / 年年鋤治又淨掃
오늘까지 더할 나위 없이 부지런히 공들였더니 / 邇來無復事勤劬
새 가지는 우거지고 묵은 가지는 마른다 / 新枝盤鬱舊枝槁
이제는 다시 무성함을 다스리지 않게 되니 / 從玆不復理繁蕪
일을 좋아함이 일 없음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도다 / 好事不如無事好
하였다.
○ 일찍이 말하기를, “처신하기가 몹시 힘드니, 인간 세상에는 살 수가 없다. 다섯 가지 불가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려면 옷차림에 정신을 써야 하는데, 빨래하고 옷 지을 사람이 없으니 첫째의 불가다. 아내나 첩을 얻으면 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생계에 얽매어 빈부에 자재로울 수 없으니 둘째의 불가요, 또 어찌 도연명(陶淵明)의 적씨(翟氏)나 양홍(梁鴻)의 맹광(孟光)과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셋째의 불가이다. 옛 친구가 가엾이 여겨 벼슬자리에 천거하더라도 지위가 보잘것없고 녹이 박하여 체면을 유지할 수 없고, 성품 또한 어리석고 정직하기만 하여 소인(小人)의 무리들에게 용납될 수 없으니 이것은 넷째의 불가요, 깊은 골짜기에 살아 다만 산수 좋은 것만 좋아하고 밭갈고 김매는 일 같은 것은 개의(介意)하는 바 아니고, 골짜기를 나와 살길을 구하면 남들은 곧 여전히 몹시 곤궁하다 할 것이다. 입신하기가 이러하니 이것이 다섯째 불가이다.” 하였다.
○ 산중에 열 가지 경취(景趣)가 있으니, “하나는 향을 피우고 높이 누워 있음이요, 둘은 약을 먹고 도인(導引)함이요, 셋은 동산에 물주고 남새에 호미질함이요, 넷은 몸소 밭갈이하여 국록(國祿)에 대신함이요, 다섯은 섶을 꺾고 땔나무를 줍는 일이요, 여섯은 바구니를 들고 나물 캐기요, 일곱은 맑은 못에 낚시 드리우기요, 여덟은 깊은 골짜기에서 약초 캐기요, 아홉은 평상(平床)을 옮기어 글 읽기요, 열은 언행에 구속받지 않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음이다.” 하였다.
○ 산에 들어가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매양 밤중에 홀로 앉아 〈이소경(離騷經)〉을 외우고는 통곡하고 돌아왔다.
○ 〈밤이 얼마쯤 되었나[夜如何]〉 2편을 지었는데,
밤이 얼마쯤 되었는가 밤이 아직 반도 못 깊었는데 / 夜如何其夜未央
총총한 별은 찬란하게 빛을 뿜네 …… / 繁星燦爛生光芒
하고, 그 끝 편에,
밤이 얼마나 되었는가 밤이 새려는데 / 夜如何其夜向晨
뭇 별이 광망을 거두고 북극성만 남아 있네 …… / 衆星收芒餘北辰
하였다.
○ 세상살이에 서툴러 성(城) 동쪽에 몇 이랑 밭을 빌려 콩과 조를 심어 거두었다. 그것을 읊은 시에,
내 성 동쪽에 밭을 빌려 / 我乞城東畝
힘써 일하여 봉록을 대신하려 했더니 / 作力代學干
절반은 참새와 쥐[탐관오리를 가리킨다]가 경작하였으나 / 雖半雀鼠耕
깨끗한 신하의 얼굴을 열 만하도다 / 足啓淸臣顔
……
아첨하고 교만하지 않음에 만족하노니 / 甘處不諂驕
길이 탄식할 것 없도다 / 足以無永嘆
하였다.
○ 〈고기 낚는 늙은이를 비웃는 글[嘲釣叟]〉 2편이 있으니, “하나는 태공(太公)이 주(周) 나라 왕실을 도와 그 임금을 베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를 온전히 하지 못한 비웃음이요, 하나는 엄자릉(嚴子陵)이 하찮은 절개를 지키노라 한조(漢祖)의 중흥을 돕지 못한 비웃음이다.” 하였다.
○ 동봉이 담장 밑에 남새밭을 만들어 7,8종의 풀을 심고, 여덟 수의 시를 지어서 적었는데, 목숙(苜蓿 거여목)ㆍ산약(山藥 마의 뿌리)ㆍ산계(山薊 삽주)ㆍ황정(黃精 죽대 뿌리)ㆍ당귀(當歸 승검초 뿌리)ㆍ자강(子薑)ㆍ훤초(萱草 원추리)ㆍ홍료(紅蓼 여귀)가 곧 그것이다. 조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이 〈청한자를 제사하는 글[祭淸寒子文]〉에,
환술을 나타내어 기적을 세우니 / 現幻術而立奇
참으로 공이 불을 미워함이로다 / 誠我公之惡斯
하였다.
○ 동봉이 금오산(金鰲山)에 살 적에 눈 내리는 밤에 화로를 끼고 있노라면,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하고 바람 불어 대 소리만 솨솨 하는데, 산동(山童)과 함께 재를 긁으면서 글자를 쓰고 옛사람의 글귀를 모아 산거(山居) 백 수를 이루었다.
○ 하늘은 이마라, 높아서 위가 없고 맑기가 가히 없다. 기운이 있어 빙빙 돌아 운행이 쉬지 않는다. 해와 달, 별들이 광명하게 매달려 있고 바람과 비, 서리와 이슬은 그 기운이 화(化)하여 떨어지는 것이다.
○ 악장(樂章)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꿩이 군자를 힘쓰다[有雉勗君子]〉요, 또 하나는 〈갈대가 현인을 생각한다[蒹葭思賢]〉였다.
○ 동봉이 충신을 열거하고 돌이켜 슬퍼하면서 찬(贊)을 지었는데, 용방(龍逄)ㆍ비간(比干)ㆍ기자(箕子)ㆍ이제[伯夷叔齊]ㆍ난성(欒成)영유(甯兪)왕촉(王蠋)신포서(申包胥)굴원(屈原)장량(張良)소무(蘇武)공승(龔勝)이업(李業)무후(武侯)악비(岳飛)문천상(文天祥)이다.
○ 청한자(淸寒子)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산림에 거처하매 봉우리를 마시고, 시냇물을 쪼으면서[飮峯啄澗] 반드시 법도를 정제(整齊)하였으므로 나아가서 당대의 스승이 되었다.” 하니, 음봉탁간(飮峯啄澗)은 돌로 양치질 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한다[漱石枕流]는 뜻이다.
○ 전주(全州) 종이를 금강전(錦江牋)이라고 부르는데, 매월당(梅月堂)의 시에,
금강 봄 물 매끄러운 종이에 / 錦江春水膩魚牋
한가로이 새 시를 지어 두어 편 쓴다 / 閑製新詩寫數篇
큰 붓 한 번 휘두르니 천둥치고 비 내리는 듯 / 鉅筆一揮電雨動
흰구름 쌓인 속에 그린 용이 꿈틀거리는 듯 / 白雲堆裏畵龍飜
하였다.
○ 관서(關西)에 졸 제, 평양 서쪽에 들어가 석벽(石壁)에 꽂은 시가 있었는데,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평양성 서쪽 푸른 바닷가 / 君不見平壤城西滄海潯
포구의 석벽이 비녀처럼 깎아지른 것을 / 浦口石堧如削簪
큰 물결 굉음을 울리며 파도에 휩쓸리니 / 巨灇鳴瀧入海濤
흡사 패옥과 생황소리 같다네 / 怡似環珮笙鏞音
또 보지 못하였는가. 바닷가 부들 우거진 마을에 / 又不見海堧菰蒲鄕
봄 모종 잘 자라고 가을 벼 향기로운 것을 / 春苗芃芃秋稻香
8월 9월 벼 익을 때에 / 八月九月稻熟時
옥을 일고 구름으로 밥 지어 수저로 떠서 맛보네 / 淅玉炊雲翻匙嘗
하였다.
○ 산중에서 읊은 〈지초시(地椒詩)〉가 있는데,
지초가 봉우리 높이에 났으니 / 地椒生峯危
매운 향기 몽정보다 더하네 / 香辣勝蒙頂
달빛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씻고 / 浥之淸澗月
푸른 돌솥에 달여 / 煎此靑石鼎
단정히 절방에 앉았노라 / 端坐上方窓
내 코를 찔러 봄잠을 깨우네 / 激我春睡醒
하였다.
○ 도연명(陶淵明)에 화답한 시가 60여 편 있는데 〈화도(和陶)〉라고 이름하였다.
○ 〈하시(荷詩)〉에,
이른 봄 연한 줄기는 삶아 먹을 만하고 / 春前莖嫩堪爲茹
늦가을에 뿌리 살쪄 김치 담글 만하도다 / 秋後根肥可作菹
하였는데, 지금 시골 남새밭에 많이 심으니, 맛이 향기로워서 먹을 만하다.
○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양육을 받았는데, 외로운 외손자라 하여 아들처럼 사랑하여 길렀다.
○ 〈삼나무를 심다[種杉]〉라는 시에,
동풍이 너의 겨울 가지를 길렀는데 / 東風長汝歲寒枝
비와 이슬을 한 자 되는 몸에 담뿍 받았구나 / 兩露偏承一尺姿
내 정원에 심어 북돋우니 / 種我公庭伋培土
뭇 꽃이 업신여긴다 탓하지 말라 / 煩君莫說衆芳欺
하였다.
○ 〈죽순을 보호함[護筍]〉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봄바람이 어린 죽순을 불러 일으키니 / 春風喚起籜龍兒
비단 같은 이끼 뚫어 낱낱이 올망졸망하구나 / 抽錦穿苔介介癡
가시를 꽂아 울타리 둘러 짐승을 막으니 / 挿棘編籬防獸觸
내일 아침이면 파릇파릇 순을 보리라 / 明朝應見碧參差
하였다.
○ 변산(邊山)에서 개 한 마리가 바위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가 한 해가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동봉이 일찍이 호남에 놀면서 시를 지었는데,
으르렁거리는 산개 바위틈에 엎드렸는데 / 狺狺山犬伏岩霔
구름은 솔숲으로 돌아 가고 해는 기울었도다 / 雲返松關日已斜
개도 생각 있어 세상 물정 잊었는데 / 狗亦有心忘物外
세상 사람 어이하여 분요함을 피하지 않느뇨 / 世人何不避喧嘩
하였다.
○ 〈부앙(俯仰)〉시에,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아득히 가이 없는데 / 俯仰杳無垠
그 가운데 이 몸이 있구나 / 其中有此身
삼재(천ㆍ지ㆍ인)에 참여하여 함께 섰으니 / 三才叅幷立
한 가지 이치가 저절로 분명하구나 / 一理自分明
욕심에 끌리면 미물이 되고 / 形役爲徵物
몸을 닦으면 곧 큰 군자 되리라 / 躬行卽大君
하였다.
○ 〈푸른 전나무[綠檜]〉라는 시가 있는데,
뜰 앞의 푸른 전나무 하늘까지 자랐는데 / 庭前綠檜叅天長
뼈마디 크고 굳세어 굽힐 줄 모르네 / 骨節老大剛不僂
몸뚱이 송백 같아 세속을 따르지 않고 / 體備松栢不隨俗
기품은 지출을 머금어 맑은 향기 풍기도다 / 氣含芝朮淸香馥
하였다. 또 소나무와 전나무로 이엉하고 오두막을 지어, 그것을 글제로 삼아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낙엽으로 방석을 삼고 / 落葉以爲氈
마른 등걸로 두공을 삼네 / 枯査以爲櫨
구름과 아지랑이로 장막을 삼고 / 雲霞爲帳幕
푸른 산으로 병풍을 삼는도다 / 碧山爲屛風
하였다.
○ 동봉이 도롱이를 사 입고 홍수를 구경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는데,
백 전으로 새로 도롱이를 사 입고 / 百錢新買綠蓑衣
다리에서 큰 물을 구경하고 늦게 돌아오도다 / 觀漲溪橋帶晩歸
가는 비에 바람은 그치지 않는데 / 細雨斜風吹不斷
어깨를 솟구치고 사립으로 들어오네 / 一肩高聳入蓬扉
하였다.
○ 친구의 방문을 기뻐하여 지은 시에,
나그네 살이에 찾아오는 사람 없어 / 客裏無人弔
사립문 종일토록 닫혀 있네 / 柴扉盡日關
무심히 세상일을 보고 / 無心看世事
눈물 속에 구름 낀 산을 생각하네 / 有淚憶雲山
옛 친구는 사이가 멀어지고 / 故舊星踈濶
친한 벗은 전혀 오가지 않네 / 親朋絶往還
반갑다, 그대 반날을 머무르니 / 喜君留半日
마주 보고 얼굴 한 번 펴네 / 相對一開顔
하였다.
○ 〈동풍악(東風惡)〉 한 편을 노래하였는데,
동풍이 나쁘도다, 동풍이 나쁘도다 / 東風惡東風惡
쌀쌀한 봄바람 그칠 새 없구나 / 料峭無時休
……
만약에 동풍을 인심에 비할 양이면 / 若將東風比人心
동풍이 질 낮음을 부끄러워하리라 / 東風忸怩爲下風
하였다.
○ 일찍이 호남에서 놀았는데, 전날 놀던 고장 이름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기를,
먼 데 바라보니 산이 무등인데 / 望遠山無等
가는 길 골짜기에 꾀꼬리가 있도다 / 程途谷有鶯
향기로운 밭 벼는 옥구에 풍년인데 / 香秔豐沃溝
서리맞은 귤은 장성에 비치는구나 / 霜橘映長城
하였으니, 유앵(有鶯)은 골짜기 이름, 무등은 산 이름, 옥구와 장성은 모두 고을 이름이다.
○ 〈추한 꽃[醜花]〉ㆍ〈아리따움[美艶]〉 두 편이 있는데, 〈추한 꽃〉은 하나〈얼굴이 □[面 □]〉, 둘 〈오목 눈[凹眼]〉, 셋 〈코가 큼[鼻大]〉, 넷 〈입술이 두꺼움[唇厚]〉, 다섯 〈쑥대머리[蓬頭]〉, 여섯 〈이지러진 귀[窳耳]〉요, 〈아리따움〉은 하나 〈붉은 입술[絳唇]〉, 둘 〈복사빛 뺨 [桃腮]〉, 셋 〈버들 눈썹[柳眉]〉, 넷 〈높게 틀어올린 머리[雲髻]〉, 다섯 〈금비녀[金釵]〉, 여섯 〈우유빛 살결[酥乳]〉이라 하였다.
○ 〈산중 초목 7영(山中草木七詠)〉이 있는데, 하나 〈오래 묵은 잣나무[古栢]〉, 둘 〈산에 저절로 난 대나무[山竹]〉, 셋 〈후추나무[地椒]〉, 넷 〈골짜기에 난 난초[谷蘭]〉, 다섯 〈인삼(人蔘)〉, 여섯 〈만년송(萬年松)〉, 일곱 〈삼수지(三秀芝 1년에 세 번 솟는 지초)〉이다.
○ 금오산(金鰲山)에 살면서부터 멀리 노닐기를 기뻐하지 않고, 다만 매인 데 없이 한가히 노닐며 매화와 대를 찾아 읊고 취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 성질이 편벽되어 가난하여도 빌지 않았고 주어도 받지 아니하였다. 〈동서명(東西銘)〉을 본떠서 〈남북명〉을 지어 남쪽과 북쪽 벽에 붙여 놓았다.
○ 하늘은 위에 있어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밝히며, 별들은 총총하다. 추위와 더위의 교체와 어둠과 밝음이 갈마드는 것은 질서 있는 움직임이요, 땅은 아래에 있어 하늘에 순종하고 산천초목은 흐르고 솟고 우거지고 마르고 하는 것이 모두 역시 질서 있는 움직임이다. 〈동봉서〉
○ 형적(形迹)이 있는 위험은 막을 수 있으나 형적이 없는 위험은 누르기 어렵다. 토목의 역사(役事)를 일으켜 궁실(宮室)을 수축하고, 창고가 넘쳐 씀씀이가 사치하고, 풍속이 부박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담론만 맑고 높으며, 정령(政令)을 아침에 내고 저녁에 고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위험한 형적이니, 곧 형적 없는 위험이다. 상동
○ 산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물에 임하면 그 맑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며, 돌에 앉으면 그 굳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솔을 보면 그 절개 곧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달을 마주하면 그 밝음을 배울 것을 생각한다. 상동
○ 덕(德)은 재주의 근본이요, 재주는 덕의 남은 것이니, 옛날부터 재주가 넉넉하면서 덕이 모자라는 사람은 먼저 곧으나 뒤가 흐린 흠을 면하지 못한다. 상동
○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마르는 버섯[朝菌]은 해를 보면 마르고, 대춘(大椿)은 8천 년을 춘추로 삼으며, 하루살이는 아침에 났다 저녁에 죽고, 상서로운 새는 천 년을 한 평생으로 삼는다. 그러니 조균(朝菌)이 대춘(大椿)이 되고, 하루살이가 상서로운 새가 되려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늙고, 늙으면 죽는 것은 정해 놓은 이치인데, 요행히 장수를 누리는 자는 또한 괴상한 물건이다 하였다.
○ 성인(聖人)의 말은 글은 간략하나 뜻은 풍부하고, 부처[浮屠]의 말은 글은 번거로우나 뜻은 비어 있다 하였다.
○ 같은 짐승이지마는 고라니나 사슴이 마당에 오면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기며, 개나 양이 산에 살면 사람들이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사는 곳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 천길 높은 곳에 사는 봉황은 가시나무에 살지 아니한다. 가시나무에 살면 매미나 꾀꼬리가 희롱하여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돌 쌓인 아름다운 대나무 숲에 높이 날아야 가히 그 상서로움을 나타낼 것이요, 깊은 못의 용은 말 발자국 속에 고인 물에는 놀지 않는다. 말 발자국 속에 고인 물에서 놀면 거머리나 지렁이가 붙들고 기롱할 것이니, 반드시 용문(龍門)의 뛰는 물결에 헤엄치고 놀아야 가히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 백이 숙제의 뜻이 비록 그때 사람들과 다르기는 하였으나 후세의 신하된 사람들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는 다르지 않다. 수레를 모는 데 비유하면, 수레를 밀고 끄는 것이 팔을 쓰는 방법은 비록 다르나 모두 뜻은 수레를 모는 데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깊은 골짜기와 넓은 들에 사는 짐승은 추워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더워도 서늘하게 할 수가 없다. 먹는 것은 누린내 나는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의 순이지마는 앓지 않고 일찍 죽지 않는 까닭은 몸을 보호함에 마음을 쓰지 않는 까닭이다.
○ 거미가 모이면 손님이 오고, 까막까치가 지저귀면 좋은 일 궂은 일이 있다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천지의 기운을 고루 타고나서 일원(一元)의 묘리에 함께 자라났기 때문에 비록 기품(氣稟)에는 차이가 있으나 알고 깨닫는 성정(性情)에는 일찍이 다름이 없으므로 사람의 일이 은연히 동하면 다른 물류(物類)가 먼저 응하여 알리는 것이다.
○ 도(道)를 싣고 있는 것이 역(易)이요, 그것을 발휘(發揮)한 것이 점(占)이다. 앞서기로는 천백 세(世) 전의 일과 이후로는 천백 년 후의 일이며, 천하 안에 있는 온갖 물건의 드러난 형상이 제각기 다름에 대하여 문밖에 나오지 않고서도 그 흥폐(興廢)와 길흉을 아는 것은, 역의 이치는 도(道)를 갖추고 있으며, 도의 본체(本體)는 나에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 위의(威儀)를 삼가고 조심함은 덕(德)의 짝이다. 그것이 정(情)에 있으면 희로애락이 되고, 몸에 있으면 언어 행동이 된다. 그것이 몸가짐에 있으면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리고, 관대(冠帶)에 있으면 보불(黼黻)을 수놓고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첨시(瞻視)를 높여 엄연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다.
○ 임금의 몸은 천지(天地)와 같아 크게 포용하여 밖이 없고, 해ㆍ달과 같이 항상 밝아서 잘 비추며, 산악과 같아 두텁고 무거워서 옮기기 어려우며, 강과 같아 깊고 넓게 적셔주면서도 마르지 않는다.
○ 유능한 군주는 반드시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아, 화근이 우물쭈물하는 데서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화근이란 무엇이냐? 청담고론(淸談高論)은 화의 근원이요, 궁실이나 원유(園囿)는 화의 터전이다. 무익한 것을 함부로 숭상하는 것은 화의 번짐이요, 사랑 받는 여인이 은밀히 들어가 임금을 뵙는 것은 화의 근원이다. 간사한 무리가 아첨하고 참소하는 것은 화의 매개요, 주연을 베풀고 흥청거리는 것은 화의 날개요, 사냥하고 유람하는 것은 화의 형틀을 지고 정수리를 마멸시키는 것이다.
○ 태평한 세상의 정치는 간소하면서도 무게가 있고, 어지러운 세상의 정치는 번거로우면서도 가볍다.
○ 옛사람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찍이 잠깐 동안도 마음에서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명절에는 배례하고 성묘하며, 제삿날이면 추천(追薦)한다. 산소(山所)에서는 잡목을 금하고, 소나무나 가래나무를 심는 것이 모두 추모의 정을 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동봉서(東峯書)〉
○ 송진으로 단술을 만들면 술을 대용할 수 있는데, 먹기가 좀 쓰기는 하지마는 술은 독이 있으나, 이것은 독이 없으니 오장(五臟)을 편안케 할 것이다. 〈추강(秋江)에 답한 편지〉
○ 수(數)에는 대기(大期)가 있고 소기(小期)가 있으니, 대기는 음양이 한번 닫혔다가 열림이요, 소기에는 한 시간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하루에 다 하는 것이 있고, 한 달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한 해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한 대(代)에 다하는 것이 있다. 시간에 다하는 것은 기후(氣候)요, 날로 다하는 것은 낮과 밤이요, 달로 다하는 것은 초하루 그믐이요. 해로 다하는 것은 더위와 추위요, 대로 다하는 것은 인간 세상과 인물(人物)이 함께 죽는 것이다. 〈동봉서〉
○ 요즘 과거볼 때에 쓰는 문장을 보면 아름다운 듯하나 따지고 보면 뜻이 없다. 그 말이 비록 입에 흐르는 듯하나 새벽 이슬이나 봄 서리와 같다.
○ 곡식을 심는다는 것이 보리에서 조에 이르기까지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밤이 여물어 거두어들이는 것이 수십 섬이나 될 것인데 며칠 안 가서 산쥐가 모조리 없애 버리어 남은 이삭이라고는 없어진다. 만일 모자라서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포철(鋪餟 하는 일 없이 관록을 타 먹음)을 구한다면 선비의 지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
○ 산림에 사는 선비는 삼베옷이 남루하여 겨우 무릎을 감추고 갈건(葛巾)이 드러나 머리털을 가리지 못한다. 〈산림서〉
○ 북극성은 하늘의 중추(中樞)로서 늘 그 자리에 있어 움직이지 않아 기(氣)의 주인이 되고, 하늘의 중심에 있어서 수레바퀴의 굴대와 같고 맷돌의 배꼽 같아서 움직이려 하여도 움직일 수 없다. 〈동봉서〉
○ 수(壽)를 연장하는 방법은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며, 탐욕을 줄이고 잠을 가벼이하며, 희로(喜怒)를 알맞게 하는 것이다. 대개 언어에 절도가 없으면 허물과 걱정이 생기고 음식에 절제를 잃으면 몸이 허약해진다. 탐욕하면 위란(危亂)이 일어나고, 잠이 지나치면 게으름이 생기며, 희로가 알맞음을 잃으면 그 성명(性命)을 보전하지 못한다.
○ 우(虞 염려)는 생각의 즈음이요, 복(福)은 경사의 기본이요, 연(宴)은 편안함의 때요, 화는 독의 싹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업은 우려(憂慮)로써 흥하고 일예(逸豫 편하게 즐김)로써 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잘 다스리는 사람은 다스리기를 원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순응하는 것이다. 다스리고자 하면서 몸소 실천하지 아니하면 백성이 배반하는데, 백성이 배반한다고 하여 형벌을 가하면 위태한 길이다.
○ 뜻이란 마음이 가는 것이니, 뜻이 이르는 곳에는 아무리 굳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고 높아서 이르지 못할 것이 없으니, 그 나아가는 방향에 사(邪)와 정(正)의 구분만이 있다.
○ 지금 속인들은 무식하여 위세(位勢)가 있으면 하루살이나 개미가 태양에 향하는 것과 같고, 위세를 얻으면 꼽추가 굽히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다.
○ 여러 봉우리 청산과 한 조각 흰구름은 불청객(不請客)이 되고, 말 없는 짝이 된다.
○ 만년에는 유독 거리의 개구쟁이나 미치광이와 함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 늘 바보짓을 하고 항상 웃으며 출입이 무상하니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우명행록》
○ 세조가 섭정한다는 말을 듣고 수락산 정사(水落山精舍)로 들어가 살면서 유생(儒生)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수련(修練)하는 일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상동
○ 성시(城市)에 노닐면 빈 배가 물결을 타듯하고, 산림에 숨어서는 외로운 구름이 쓸쓸히 흩어지는 것 같다. 〈동봉서〉
○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였으며, 섬기기를 지성껏 하였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은 방법에 어두우니 금비(金篦 금으로 만든 살촉 같은 것으로 안질에 쓰는 도구인데, 여기서는 깨우친다는 말이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하니, 동봉이 말하기를, “좋다. 법연(法筵)을 크게 열라.” 하고, 가부좌(跏趺坐)로 앉았다. 중들이 모여서 꿇어앉아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동봉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 매었다. 또 말하기를, “꼴 다발을 가져오라.” 하여 소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어(法語)를 듣고자 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소는 가축 중에서 가장 우둔한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리에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인(俗人)들은 ‘소 뒤에 꼴 놓기’라고 한다.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추강(秋江)과 더불어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 되어,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도(佛徒)가 되었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아니하였으며, 늘 거리를 지나가다가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어버리고 한참 동안 박은 듯이 서 있기도 하고, 혹은 문득 거리 길을 돌아서 가면 여러 아이들이 기와조각을 던져 쫓았으므로 세상 사람이 미치광이 중으로 지목하였다. 상동
○ 금오산에 들어가 글을 지어 석실(石室)에 간직하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들을 기술한 것으로 우의(寓意)가 있다.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서 지은 것인데 곧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상동
○ 세로[竪]로 말하면, 해와 달의 왕래, 별들의 운행, 추위와 더위의 갈마들음, 음양의 교대, 차고 비고 성하고 쇠함이 모두 기(氣)요, 가로[橫]로 말하면, 산천과 악독(岳瀆)의 융결(融結), 비바람과 서리와 이슬들의 시행(施行), 초목의 자라고 마름, 인물의 움직이고 쉼, 성현(聖賢)의 어리석은 무리와의 구별, 청탁과 순수와 잡박(雜駁)의 가지런하지 않음은 모두 기가 천지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이다. 〈복기편(服氣篇)〉
○ 복기(服氣)란 오신(五神)을 지키고 사정(四正)을 따르는 것이다. 5신은 심장ㆍ간장ㆍ허파ㆍ지라ㆍ콩팥이요, 4정은 말ㆍ행동ㆍ앉기ㆍ서기를 바르게 함이다. 상동
○ 잘 다스리는 임금은 군자를 대접하기를 지초와 난초같이 하고, 소인을 피하기를 범이나 뱀과 같이 한다. 〈군자와 소인의 변(辨)〉
○ 만약, 좋은 날을 만나면 맑은 물과 향불을 갖추어 옛 선현에게 예배하고, 혹은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명월(明月)을 맞이하면 눈물을 뿌리면서 돌아오기를 잊어버리곤 하였다. 〈집서(集序)〉
○ 청한자의 시구(詩句)의 용어(用語)는 성률(聲律)에 구애 받지 않으나 전장(典章)이 문란하지 아니하고, 사화(詞華)를 꾸미지 아니하나 큰 옥덩어리처럼 더욱 아름답다. 〈집서〉
○ 성질이 간이(簡易)하고 꾸밈이 적으며, 성품이 또 세상 물정에 어두운 데가 많았다. 그러므로, 담론이 맹랑하며 세속을 희롱하였다. 〈집서〉
○ 성품이 매인 데가 없고 호탕하여 세상 형편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세할 수가 없어, 드디어 때로는 중에게 때로는 속인에게 형적을 의탁하여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가슴속에 쌓인 많은 불만을 발산시켰다. 〈집서〉
○ 모여든 중생의 승업(勝業)을 위하여 한 절에 들어가 그 중들에게 화전(火田)을 갈기를 권하여 거두어들인 것이 조금 푸짐했다. 곧 나무를 깎아서 통을 만들어 산골짜기에 늘어놓고 그 안에다가 술을 빚어 두고 표주박으로 퍼먹기를 몇 달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그가 세상을 비분(悲墳)함이 이와 비슷한 것이 많았다. 〈집서〉
○ 의사란 진실로 반치(反置 약을 짓는 데나 병을 고치는 데 있어서 두고 안 둘 것을 잘 가림)를 알맞게 할 수 있다면 이끼나 쇠똥과 말똥 따위로도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은 모두 양의(良醫)다. 〈인재설(人才說)〉
○ 목수가 진실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할 줄 알면 큰 것은 대들보가 되고, 가는 것은 서까래가 될 것이며, 부소(扶蘇)의 줄기나 나무 조각 하나가 모두 아름다운 재목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상동
○ 인생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명리(名利)에 급급하고 생업에 골몰함이 마치 뱁새가 능초[苕]에 연연하고 박[瓠]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유관서록(遊關西錄)》
○ 일찍이 어느 깊은 산에서 표주박 한 개를 가지고 암자 뒤의 폭포를 받아 손에 받들고 꿇어 앉아 인시(寅時 밤 4시)로부터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만약 물이 쏟아지면 다시 부어서 유시에서 인시까지 여전히 받들고 꿇어 앉아 있었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잘 드는 칼 같은 어금니가 있어, 또 제 수레바퀴의 고임 나무를 물어서 내가 가지 못하게 하였고 또 다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 한다. 상동
○ 동봉이 종이나 밭과 집을 남이 빼앗아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일찍이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가 다시 그 사람을 따라가 돌려달라 하고, 몸소 관가에 가서 맞대고 싸우며 떠들어대기를 거리의 장사치들의 다툼질 하듯 하였다. 마침내 시비가 가려져 관의 문서[官卷]가 이루어지매 소매 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도랑 속에 던졌다. 그가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수언(粹言)》
○ 관동을 유람하고 난 뒤 호남에 이르니, 주민들이 부유하고 물산이 넉넉하기가 관동에 4ㆍ5배나 되었다. 백제가 이것에 의지하여 강했으며 교만하여 망한 것이다. 《유호남록(遊湖南錄)》
○ 만 길 낭떠러지 쳐다보기도 힘드는데 / 蒼崖萬丈仰難企
뇌우가 이 돌 위의 버섯을 길렀구나 / 雷雨長此石上耳
안은 터실터실하나 겉은 매끈한데 / 內面髼鬆外面滑
따다가 매만지니 맑기가 종이 같도다 / 摘來煩摑淸似紙
〈석이버섯을 읊음〉
○ 아름다운 돌이 가시 얽힌 산꼭대기에 있고 / 美石在荊顚
밝은 달이 깊은 못에 잠겼도다 / 明月沈重淵
양공의 쪼음을 만나지 못하니 / 不遇良工琢
누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인 줄을 알리 / 誰知無價珍
동봉의 시
○ 옷과 관과 신은 백성의 가죽[皮]이요, 술과 밥 따위의 음식물은 백성의 기름이다. 〈애민의(愛民義)〉
○ 기린은 우리[牢] 안에 매였고 개 돼지가 날뛰는구나 / 麒麟縶牢兮犬豕跳梁
봉황은 조롱 안에 갇혔고 닭오리가 훨훨 나는구나 / 鳳凰鎖籠兮雞鴨翶翔
〈의조상루(擬弔湘纍)〉
○ 한 어린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서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꼬리를 끌어 처량한 느낌이 있었다. 매양 달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어린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낭송하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심장의 신(神)은 눈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눈이 빛을 탐하게 되어 오래 보면 피를 상하고, 콩팥의 정(精)은 귀로 나타나는 것이니 귀가 소리를 탐하게 되어 오래 들으면 콩팥을 상하고, 지라의 넋[脾魄]은 코로 나타나는 것이니 코가 냄새를 탐하여 냄새를 오래 맡으면 지라를 상하게 된다. 〈수진편(修眞篇)〉
○ 말을 많이 하면 담(膽)을 상하고, 오래 누워 있으면 기(氣)를 상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살[肉]을 상하고, 오래 서 있으면 콩팥을 상하고, 오래 걸으면 간을 상한다. 상동
○ 만약, 보지 않고 듣지 않아 눈을 감고 입을 막음이 극에 달하면, 사람도 진화(進化)하지 못한 명령(螟蛉)이나 진흙 속에 도사린 소라와 같을 것이다. 상동
○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일찍이 길에서 어떤 노파가 두부를 주자 곧 시를 읊었는데,
품질이 맷돌 속에서 나왔는데 / 稟質由來兩石中
원광이 해가 동쪽에서 솟는 것과 같도다 / 圓光正似日生東
삶은 용, 구운 봉황에는 미치지 못하나 / 烹龍炮鳳雖莫及
머리털이 없고 이 빠진 늙은이에게 가장 적합하구나 / 最合頭童齒豁翁
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온 나라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지목하여 ‘다섯 살’이라고만 불렀고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였다. 〈행장(行狀)〉
○ 어버이가 죽자 그 무덤자리를 가려 편안히 장사지내는 데 풍수에 구애되지 않았다. 대개 그 편안한 곳을 가리되, 첫째는 흙의 두께를 가리고, 둘째는 물의 깊이를 가리고, 셋째로는 소나무나 가래나무가 자랄 만한가, 넷째는 세상이 바뀌어도 갈아서 밭을 만들 수 없고, 다섯째는 가까워서 시제(時祭)를 지내기에 편리한가. 이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 장사 지내는 것이 군자의 행할 바이다. 비록 시체라도 구천(九泉)에 편안히 거처하게 함은, 역시 인자하고 사랑하는 깊은 뜻을 잊어버리지 못해서다. 〈상장서(喪葬書)〉
○ 경태(景泰 명(明)의 대종(代宗)의 연호) 을해년(1455)에 삼각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세조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문을 닫고 나가지 않기를 사흘, 하루 저녁은 갑자기 통곡하더니 그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거짓 미친 체하여 뒷간으로 빠져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스스로 설잠(雪岑)이라고 불렀다. 행적(行迹)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만나 갈기를 흔들면서 길게 울고,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를 만나 재주를 다하여 거문고를 탔다. 〈동잠서(東岑書)〉
○ 성인(聖人)은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말 없이 도를 행한다. 성인은 시키지 않아도 믿는다. 〈천지편(天地篇)〉
○ 잘 다스리는 임금은 형벌은 있고 놓아줌[赦]은 없으며, 매우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정치에 있어 변경함이 없다. 〈형정의(刑政義)〉
○ 덕(德)은 행(行)의 실속이요, 행은 덕의 나타남이다, 덕이 넉넉하면 행은 저절로 나타나고, 행함에 허물이 없으면 덕이 저절로 빛난다. 〈덕행의(德行義)〉
○ 옛날의 성왕(聖王)은 그 궁실을 낮추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하려고 하며, 의복을 아무렇게나 하고 백성을 두껍게 입혀 따뜻하게 하려고 하며, 음식을 변변치 않게 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며, 스스로 만족하여 위대한 척하지 않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자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백성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게 하고자 하였다. 〈인군의(人君義)〉
○ 임금이 궁실에 있으면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고, 수레나 가마를 탔을 때에는 백성의 화평을 생각하여, 예사로이 바치는 물건도 대견히 여기고 어여삐 여겨야 하니 어떻게 망령되이 무익한 짓을 하여 백성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애민설(愛民說)〉
○ 어진 정치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여 이 업을 힘쓰는 데 있을 뿐이다. 그것을 권하는 방법은 번거롭고 시끄럽게 명령을 내려 아침에 깨우치고 저녁에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거둬들이기를 적게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여 그때를 빼앗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매월당설(梅月堂說)〉
○ 한 말을 가지고 평생을 행할 것은 ‘충서(忠恕)’다. 충서로 처하면 변고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좋은 말이 네 거리를 달리는 것 같아서 비록 천하를 멋대로 달려도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상변설(常變說)〉
○ 강직하게 그릇됨을 고치게 하는 것은 쓴 듯하나 실은 달고, 온갖 행동으로 아첨하는 것은 평안한 듯하나 마침내는 위태한 것이다. 군자를 가까이하면 갈수록 가경이요, 소인을 접하는 것은 혜서(鼷鼠)라 몸을 죽이는 독약이다. 〈군자와 소인의 변(辨)〉
○ 지금의 평양 남쪽에 정전(井田)이 있어 길을 경계하여 여덟 집이 정전을 같이 하고 있다. 허물어진 담과 집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매월당(梅月堂)
○ 〈동이음(同異吟)〉이 있는데 이르기를,
같고 다르고 다르고 같고 같고 다르고 다르니 / 同異異同同異異
다르고 같고 같고 다르고 다르고 같고 같도다 / 異同同異異同同
같고 다른 참소식을 알려거든 / 欲知同異眞消息
높고 높은 최상봉에서 보고 알라 / 看取高高最上峯
하였다. 상동
○ 날마다 거문고를 타면서 〈백설(白雪 노래 이름)〉을 노래하니,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뜻을 아는 자가 부르지도 않는데 와서 당하(堂下)에서 듣는 것은 반드시 뜻밖의 일이라고 놀랄 것은 없다. 상동
○ 청한자는 유교를 행하면서 불교의 형적(形跡)이요, 성리(性理)에 밝고 불교에 대하여도 널리 알았다. 상동
○ 사람이 나면 팔자가 각기 다르고 수요(壽夭)도 또한 각각 차이가 있으나 같은 배에 탄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함께 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고, 한 싸움터의 군졸이 동시에 싸움에 지면 간(肝)과 뇌(腦)가 땅에 흩어지는 것은 이것이 대개 천지 만물의 운수가 그런 것이다. 상동
○ 청한자가 하루는 과격히 큰소리로 말하기를, “불교의 이치는 자못 깊다. 그러나 유학은 본래 단계가 있어 건강한 자가 사다리를 올라감과 같아서 가까스로 한 발을 들면 겨우 한 칸에 도달하니, 한 순간에 깨닫는 통괘한 즐거움은 없으나 우유 함영(優遊涵詠 한가롭고 침착하게 학문의 진리를 음미함)의 맛이 있다.” 하였다. 〈매월당서(梅月堂序)〉
○ 하늘과 땅의 호흡(呼吸)은 동지(冬至) 뒤는 ‘호(呼)’가 되고, 하지(夏至)뒤는 ‘흡(吸)’이 되는데 그것은 1년의 호흡이요, 자시(子時) 이후는 ‘호’가 되고 오시(午時) 이후는 ‘흡’이 되는데 이것은 하루의 호흡이다. 상동
수락산(水落山)에 우거(寓居)하고 있을 적에 비 내린 뒤에 산골 물이 불을 때면 종이를 찢어서 종이 조각 1백여 장을 만들어 가지고 반드시 여울이 빠른 곳을 골라 거기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시를 짓는데 혹은 절구(絶句), 혹은 율시(律詩), 혹은 고풍(古風)을 종이에 써서 흐르는 물에 띄워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또 쓰고 또 흘러 보내고,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 하여 종이가 다 떨어져서야 돌아왔다. 척언(摭言)
○ 너는 양 밖의 양이요 / 如是羊外羊
나 역시 사람 밖의 사람이로다 / 我亦人外人
똑같이 물건 밖의 물건이니 / 同是物外物
각기 몸 밖의 몸을 보전하자 / 各保身外身
하였다. 매월당〈영양(羚羊)〉
○ 일찍이 금오산에서 지내면서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 《금오신화(金鰲新話)》몇 권을 지었는데, 시를 지어 그 책 끝에 쓰기를,
오막살이 푸른 담요 따뜻도 한데 / 矮屋靑氈喓有餘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한 달밝은 밤이로다 / 滿窓梅影月明初
등잔 돋우고 밤새 향 피우고 앉았으니 / 挑燈永夜焚香坐
사람이 보지 못한 책을 볼까 두렵구나 / 恐看人間未兒書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풍기(風氣)는 무심한 것이어서 풍토가 맞지 않으면 저절로 산천의 독기(毒氣)가 되는 것이니,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몸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에 닿아서 자연히 병이 되고, 범하면 혹 죽기도 한다. 〈귀신론(鬼神論)〉
○ 매양 옛 도읍(都邑)에 노닐 때마다 반드시 배회하고 머뭇거리면서 비분강개하여 슬피 노래부르며, 몇 달 동안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본집(本集)
○ 평양에 설지(舌池)가 있는데 전하기를 한 노파가 혀를 씻은 곳이라고 한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하찮은 이를 탐내다가 큰 은혜를 잊었으니 / 小利貧來忘大恩
한 마디의 말이 만년의 원한이 되었도다 / 一言便作萬年寃
지금 못물이 피로 흐려졌으니 / 至今池水渾成血
사람이 말하기를 미친 할미 혀 씻은 흔적이라네 / 人道癡嫗洗舌痕
하였다. 상동
○ 〈산사(山畬 산전)〉시에
돌밭 험하여 돌투성인데 / 石田多犖确
그나마 절반은 덩굴투성이 / 高下半藤蘿
깊은 산골에 있으니 / 縱是山深處
해마다 구실[科 각종 조세] 면함직하네 / 年年可免科
하였다. 상동
○ 〈나는 그만 못하네[我不如行]〉 두 편을 지어 스스로 탄식하였는데, 하나는,
나는 장자방이 / 我不如張子房
한 권의 소서로 한왕을 도움만 못하다 / 一部素書佐漢王
하였고, 둘째는,
나는 제갈공명이 / 我不如諸葛孔明
두 편의 표를 올려 충성을 다함만 못하다 / 兩章上表輸忠誠
하였다. 상동
○ 동봉의 한 평생 품고 있던 마음을 세상 사람은 엿보지 못하였다. 시를 지을 제 고비 미(薇), 고사리 궐(蕨) 자를 즐겨 쓴 것도 그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척언
○ 속은 어둔하고 겉은 약은 것이 소인의 성질이요, 속으로 야무지고 겉은 트인 것이 군자의 길(吉)함이다. 〈환도명(環堵銘)〉
○ 즐거움이란 쾌적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와 쾌적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잘 조화되고 쾌적하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그 즐거움을 같이하는 것이다. 〈천지편(天地篇)〉
○ 생(生)을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에 젖어들고, 인(仁)을 베푸는 혜택이 사방에 흐르면 비바람이 때를 맞추고 음양이 질서 있어, 세상이 태평하여 기린을 매어 둘 수 있고, 까치가 둥지를 틀 것이다. 매월당편(梅月堂篇)


 

[주D-001]어찌 …… 얻어 : 도홍경(陶弘景)은 양(梁) 나라 때에 산중에 있는 도인(道人)인데, 그의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는고, 영(嶺) 위에 흰구름이 많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는 글귀가 있다.
[주D-002]송섬(宋纖)의 …… 언덕을 : 남조 시대의 은사(隱士)인데 태수(太守) 마급(馬岌)이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탄식하며 글을 지은 것에. “붉은 벼랑 천 길[丹崖千丈]”이란 글귀가 있다.
[주D-003]벼슬살이는 …… 맵고 : 새앙과 육계(肉桂)는 오래될수록 매워진다. 그러므로 늙을수록 기력이 정정하고 강직한 사람을 가리켜 강계지성(薑桂之性)이라 한다. 《송사(宋史)》에, “새앙과 육계는 늙어서 더욱 맵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4]적씨(翟氏) : 도연명(陶淵明)의 처인데, 연명의 뜻을 받아 숨어 사는 가난한 생활을 편안히 하였다.
[주D-005]맹광(孟光) : 후한(後漢)시대 양홍(梁鴻)의 처인데 남편의 높은 뜻을 받아 숨어 살았다.
[주D-006]도인(導引) : 신선한 공기를 체내(體內)로 이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이다.
[주D-007]〈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간신의 모함으로 임금에게 쫓겨나 애국지성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離騷)라는 장편의 서정시를 지었다. 이(離)는 조(遭), 소(騷)는 우(憂)의 뜻으로 근심을 만났다는 뜻이다.
[주D-008]고기 …… 글 : 신숙주(申叔舟)가 강태공(姜太公)과 엄자릉(嚴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고 한다.
[주D-009]태공(太公)이 …… 비웃음이요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위수(渭水) 가에서 처음 만나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호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뒤에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나라 왕 주(紂)를 쳐서 주(周) 나라를 세웠다.
[주D-010]엄자릉(嚴子陵) …… 비웃음이다 : 엄자릉(嚴子陵)이 한(漢) 나라 광무제에게 불려갔다가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 아래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주D-011]용방(龍逄) : 하(夏) 나라 걸왕(桀王)의 신하 관용방(關龍逄)인데, 걸왕의 무도함을 간하다가 피살되었다. 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로서 주왕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은 비간(比干)과 나란히 불리우는 충신이다.
[주D-012]난성(欒成) : 난성자(欒成子)인데 춘추시대 진(晉) 나라 대부로 무공(武公)이 진 나라 애공(哀公)을 쳐서 죽이고 난성자에게 상경(上卿)의 높은 벼슬로 불렀는데 난성자가 싸우다 죽었다.
[주D-013]영유(甯兪) : 공자가 칭찬한 영무자(甯武子)이고 위(衛) 나라 대부인데,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드러난 공적이 없는 것 같다가, 나라가 위태하매 충성을 다하여 타국에 잡혀가 죽게 된 임금을 구하여 왔다. 《論語》
[주D-014]왕촉(王蠋) :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齊) 나라를 쳐서 멸하고 획읍(劃邑)이란 시골에 사는 어진 사람 왕촉을 불렀더니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면서 목매어 죽었다.
[주D-015]신포서(申包胥) :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와 형이 죄없이 죽으매 오자서가 초(楚) 나라에서 망명하여 달아나다가 친구 신포서를 보고, “내가 장차 초 나라를 망치리라.” 하니, 신포서는, “자네가 망친다면 나는 회복시키리라.”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초 나라를 망치매 임금은 국외로 달아났다. 신포서가 진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할 적에 일곱 날 일곱 밤을 뜰에 서서 울자 진왕이 감동되어 군사를 빌려 주어 신포서가 초 나라를 다시 회복하였다.
[주D-016]굴원(屈原) :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 충간(忠諫)이 용납되지 않아 멱라수(汩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울분에 넘친 많은 서정적인 시를 썼다.
[주D-017]장량(張良) : 한(漢)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충신으로, 자는 자방(子房)이다. 소하(蕭何)ㆍ 한신(韓信)과 함께 한 나라의 삼걸(三傑)이라 일컫는다.
[주D-018]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잡히어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절개를 굳게 지킨 공으로 전속국(典屬國)을 받았다.
[주D-019]공승(龔勝) :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의 충신으로,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단식하여 죽었다.
[주D-020]이업(李業) : 전한(前漢) 말기의 고사(高士)로 왕망(王莽)의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산중에 숨었더니 뒤에 공손술(公孫述)이 촉(蜀)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업을 부르기를, “오면 공후(公侯)의 높은 벼슬로 대접할 것이요, 오지 않으려면 이 약을 먹으라.” 하고, 독주(毒酒)를 보내니 업은 마시고 죽었다. 공손술이 크게 놀래 부의로 비단 백 필을 보내자 업의 아들은 도망하고 받지 않았다.
[주D-021]무후(武侯) :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운 제갈량(諸葛亮).
[주D-022]악비(岳飛) : 남송(南宋)의 무장이며 충신으로서, 여러 차례 금인(金人)의 침입을 격퇴하여 용명을 떨쳤다.
[주D-023]문천상(文天祥) :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된 후 임금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元) 나라 군사에 대항하였으나 실패, 사로잡혀 유폐(幽閉) 생활 3년에 참형을 당하였다. 그의 〈정기가(正氣歌)〉는 옥중에서 지은 것으로 후세의 충신과 의사(義士)들을 고무하였다.
[주D-024]대춘(大椿) : 전설상의 큰 나무 이름으로 인간의 3만 2천 년을 1년으로 한다고 하며, 장수(長壽)함을 대춘지수(大椿之壽)라고 한다.
[주D-025]보불(黼黻) : 옛날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에 놓은 수인데, 보(黼)는 검은빛과 흰빛으로 도끼의 모양을 수놓은 것이요, 불(黻)은 검정과 파랑으로 아(亞)자 모양을 수놓은 것이다.
[주D-026]천리마가 …… 울고 : 백락은 말이 좋고 나쁨을 잘 감별하였다고 한다.
[주D-027]백아(伯牙)가 …… 탔다 : 백아는 춘추시대의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종자기는 같은 시대의 초(楚) 나라의 음악가인데,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곡조를 잘 알아들었고 그 마음도 깨달았다고 한다.
[주D-028]혜서(鼷鼠) : 쥐의 일종인데 주둥이에 독이 있어 사람을 물면 죽는다. 그러나 그 주둥이에 사람이 물려도 아픔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유쾌한 기운을 느끼므로 죽어도 모른다.
[주D-029]정전(井田) : 중국 삼대(三代) 때의 농지 분배의 제도인데, 1리 사방의 농지를 상(井)자형으로 9구역을 만들어 가운데 1구역을 공전(公田), 다른 8구역을 사전(私田)이라 하여 백성의 8집에 나누어 각각 농사를 지어 차지하고, 공전은 8집이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주D-030]《전등신화(剪燈新話)》 : 명(眀) 나라의 구우(瞿佑)가 지은 괴담(怪談) 소설집으로 21편이 실려 있다.
[주D-031]금오신화(金鰲新話) :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산에 살면서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서 단편 소설집이다. 중국의 《전등신화》를 본떠서 지은 것인데 현재에는 다음의 5편만이 남아 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南炎浮州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주D-032]소서(素書) : 진(秦) 나라의 황석공(黃石公)이 짓고. 송(宋) 나라 장상영(張尙英)이 주석을 붙인 책인데, 도(道)ㆍ 덕(德)ㆍ 인(仁)ㆍ 의(義)ㆍ 예(禮)의 다섯을 일체로 삼아 부드러움으로써 강함을 누르고 물러감으로써 나아감을 꾀한다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忍齋先生文集卷之二
 碑誌
有明朝鮮國德興大院君神道碑銘 幷序 a_032_312a


公諱岹。字景仰。中宗恭僖大王之第八子。母安氏。在後宮中。最被寵眷。貴至淑容。以嘉靖庚寅三月初五日。生公。公生九歲。封德興君。壬寅。娶河東府院君鄭麟趾之孫。判中樞府事世虎之女。誕三男一女。男長曰鋥。次曰鏻。次則今上殿下。公於己未五月初九日。病卒。壽僅三十。是年九月十七日。葬于楊州南面水落山戌坐辰向之原。夫人端莊靜順。治家謹032_312b肅。三子一女。敎以義方。鋥封河原君。娶左議政洪暹之女。生三男一女。男曰引齡,享齡,錫齡。 皆幼 洪氏早歿。後娶忠義衛李義老之女。鏻爲叔父錦原君岭之後。封河陵君。娶同知中樞府事申汝悰 女生 。一女。幼。女適儒士安滉。生一男二女。男曰應元。夫人旣寡。常恨未亡。憂烈成疾。丁卯五月十八日。病不救。痛哉。夫人在殯。明廟賓天。今上入承大統。天道倚伏。未易量也。靈柩將引。遣承旨及內侍護其喪。又令各司一員。送至郊外。卜得是年八月初九日。祔窆于德興兆次。同塋異室。葬用王妃父母之例。喪期將終。命攸032_312c司就本第營立家廟。庚午春。大臣啓請依宋英宗尊濮王故事。追崇德興君爲德興大院君。夫人稱府大夫人。國有祭告。稱皇伯父母。遣官告廟。又用大君例。陞奉祀子爵從一品。錫以田土臧獲。以優祀祭之具。喪旣畢。河原索神道銘于暹曰。否則無以詔後世。銘曰。父我靖陵。娶彼德門。德門惟何。生此碩媛。兩美作配。天不與年。禍爲福倚。龍躍于淵。迎于代邸。大統靈承。載崇位號。無競殊稱。有蘆之原。淑氣攸鍾。山擁水護。若堂有封

 

 

 고봉별집 부록 제2권
 소(疏)
청향소(請享疏)


삼가 아룁니다. 유자(儒者)를 높이고 도를 중시하는 것은 성왕(聖王)의 아름다운 덕이고, 성무(聖廡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은 치세(治世)의 거룩한 법입니다. 대체로 학문이 공자의 도를 발명하기에 충분하고 공업이 공자의 도를 돕기에 충분하다면 공자의 사당에 올려 배향해서 사문으로 하여금 흥기하는 바가 있게 하고 후학으로 하여금 우러러 믿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열성조(列聖朝)가 이미 시행해 온 규례입니다. 그리고 우리 선왕(先王)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정치를 하여 유교를 우선으로 밝히시고 사문의 중대한 전례(典禮)와 선비들의 소원을 즐거운 마음으로 시행하면서 도와 권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명유(名儒)의 사원(祠院)에는 반드시 은액(恩額)의 은전을 내리고 공자의 묘정(廟庭)에 올려 배향시키자는 소청을 특별히 허락하셨으니, 이는 어진 이를 높이고 덕 있는 이를 숭상하여 사림을 격려하고 유교의 교화를 흥기시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거룩하지 않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궁벽하게 해변에 위치하여 상고 때에 인인(仁人)ㆍ현자(賢者)의 교화가 없었고, 여조(麗朝)에 들어와서도 이름난 인물이나 기국이 있는 선비가 없지는 않았으나 숭상하는 것은 문장이며 훈업(勳業) 따위였습니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비로소 정주(程朱)의 학을 전수받았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저술한 것이 없고, 문강공(文康公) 권근(權近)은 문장과 학식을 지녔으나 〈입학도(入學圖)〉에 사단ㆍ칠정을 좌우로 나누어 썼으니, 이는 이기(理氣)가 두 갈래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학자들은 두 갈래 이기론을 답습하여 더 이상 이론이 없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중용장구(中庸章句)》 주자 집주에 ‘기(氣)로써 형상을 이루고 이(理)도 또한 붙어 있다〔氣以成形 理亦附焉〕’ 하였으니, 이와 기는 분명히 선후가 있다.” 하고, 연신(筵臣)인 기묘(己卯 조광조(趙光祖))는 말하기를 “학자는 마땅히 성(性)을 알아야 하고 반드시 마음을 기를 것은 없다.” 하였습니다. 명종(明宗) 초년에 학문을 한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어떤 이는 심(心)에 체용(體用)이 없다고 하고 어떤 이는 성(性)이 먼저 움직인다느니 심이 먼저 움직인다느니 하였습니다. 이 당시는 송조(宋朝)의 초년이라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아직 나오지 않아 사학(士學)이 바르지 않고 도술(道術)이 밝지 못하던 상황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스로 속학(俗學)에서 벗어나 우뚝 서고 홀로 걸어〔特立獨行〕 명성(明誠)의 학을 하고 어두운 이기(理氣)의 이치를 밝혀낸 자가 있다면 성문(聖門)에 세운 공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나라 문명의 운은 명종 선조 연간보다 왕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때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한 시대의 저명한 진유(眞儒)로서 크게 사종(師宗)이 되어 경전을 깊이 궁구하고 의리를 강명하여 문하에 들어온 선비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다만 제대로 그 문에 들어가 종묘와 백관의 아름다움을 얻어 본 자는 대개 적었습니다. 당시에 선정신(先正臣) 문헌공(文獻公) 기대승은 고명하고 탁월한 자질로 정심하고 독실한 학문을 지니고서 조존(操存)ㆍ천리(踐履)와 어묵(語默)ㆍ동정(動靜)을 오직 도산(陶山)을 따르고, 조정에서의 경륜과 굉강(宏綱)ㆍ대용(大用)도 또한 오직 퇴계(退溪)를 법으로 삼았는데, 도산과 퇴계는 다 이황의 별호입니다. 기대승은 자품이 생지(生知)에 가깝고 학문은 천인(天人)을 통달하여 영매(英邁)함이 세상에 으뜸이고 간결한 성품에 남을 허여함이 적었지만, 이황에 대해서만은 성심으로 열복한 것이 공자에게 칠십 제자가 감복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황 역시 극도로 추대하여 항상 스승 자리를 양보하고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만날 때마다 기대승에게 물어보았으며 다른 문인은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사칠이기(四七理氣)를 논한 것은 비로소 천고의 비밀을 밝힌 것인데 이황이 누차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기대승을 따랐고 밝고 넓은 경지를 홀로 보았다고 허여하였으니, 독실하게 밀고 장려하며 허여해 준 정도는 정문(程門)의 유양(游楊)이나 주문(朱門)의 황채(黃蔡)와 비교해 보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였겠습니까. 이황의 학은 참으로 주자의 학을 계승하였고 기대승의 학은 곧 이황의 학이니, 연원의 순정(純正)함과 조예의 정심(精深)함은 백세(百世)를 두고 기다려 보더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 우리나라는 신라와 고려 이후로 문유(文儒)ㆍ석사(碩士)가 걸출하게 나와서 세상에 이름이 나고 도를 보위한 공이 있으면 간혹 성무(聖廡)에 올려 배향하여 후학이 우러러 믿고 모범으로 따르는 방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기대승은 이황의 적전(嫡傳)으로 끊어진 도학을 앞장서서 일으켜 오묘한 성리(性理)를 남김없이 밝혔는데도 아직 종사(從祀)의 대열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성조(聖朝)에서 우연히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일로 백세의 공론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우울해하는 것이니, 이 어찌 또한 오늘을 기다려서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로 놓아 둔다.〔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하였고, 자공(子貢)은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성리(性理)와 천도(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쉽게 들어 보지 못하였다.〔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먼 시골의 몽학(蒙學)으로서 선현의 도덕과 학문의 큰 핵심처에 대하여 어찌 감히 그 일부분이나마 엿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대승의 언론과 덕업이 본집(本集)에 더할 나위 없이 매우 명백하게 실려 있어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밝게 비춰 주고 있으니, 그 이치를 궁구한 요지는 《왕복서(往復書)》에 나타나 있고 세상을 경륜하는 모책은 《논사록(論思錄)》에 나타나 있으며 문장의 모범은 원집(元集)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밖에 제현(諸賢)의 문집에 뒤섞여 나오는 것들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들이 그중 한두 가지를 기술하여 예람(睿覽)에 제공하오니,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살펴 주소서.
기대승은 천품이 영매(英邁)하고 총명이 뛰어나 5, 6세 때에 이미 육갑생왕(六甲生旺)의 이치를 통하였습니다. 8세에 향숙(鄕塾)에 취학하여서는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마주 대하되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함께 배우는 다른 아이들이 읽는 글까지 아울러 암송하고 고문 가운데 난해한 부분도 한 번만 보면 터득하였으니, 이는 그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그런 것입니다.
14, 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이 이미 성취되어 붓이 종이에 떨어지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10줄의 글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가는가 하면 독서력과 기억력이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계부(季父)인 응교(應敎) 기준(奇遵)이 기묘팔현(己卯八賢) 중 한 사람으로 화를 입었기 때문에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인 19세 때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눈물을 흘렸으며, 더욱더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어 과거 공부를 하찮게 보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종사하여 노산(蘆山) 속에 집을 짓고서 부지런히 글을 읽기를 소씨(邵氏)가 백원(百源)에서 한 것처럼 한 지가 10여 년이었습니다. 성정(性情)의 오묘함에 흠뻑 젖어들고 천인(天人)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여 《대학》의 ‘격치성정(格致誠正)’부터 ‘수제치평(修齊治平)’까지, 《중용》의 ‘천명솔성(天命率性)’부터 ‘무성무취(無聲無臭)’까지를 대강령으로 잡고서 세밀히 분석하였으니, 이는 그 힘을 들임이 정밀하고 철저하여 그런 것이었습니다.
명종 무오년(1558, 명종13)에 비로소 벼슬하여 조정에 진출하였는데 당시에 이황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있었습니다. 기대승이 찾아가 인사하니 한 번 보고 흔연히 의기가 합해져 도의의 교우(交友)가 정해졌습니다. 이황은 귀향하고 기대승은 서울 집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추만 처사(秋巒處士) 정지운(鄭之雲)이 찾아와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강론하였는데, 기대승은 즉시 그 자리에서 변석하여 설파하기를 “그림과 학설에 잘못된 곳이 많아 정론(定論)이 되지 못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황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서찰로 묻기를 “사우(士友) 간에 전하는 논쟁 내용을 듣고 더욱 그 도설(圖說)이 허술하고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소. ‘사단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를 겸하였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다.’라고 고친다면 병폐가 없겠소?” 하니, 기대승이 서찰로 변론하여 답하였습니다.
〈천명도설〉은 바로 정지운이 만든 것으로 그 도설을 그의 스승 문간공(文簡公) 김안국(金安國)에게 가지고 가서 질정하였는데, 안국이 말하기를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에 대해서는 많은 공부를 하지 않고는 섣불리 논의할 수 없다.” 하고, 책상 위에 두고서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한편 학자가 찾아오면 내보이고 이야기도 하였으나 끝내 한마디도 개정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정지운이 이 때문에 유감으로 여겼습니다. 명종 중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로 불려 들어간 정지운이 이 도설을 가지고 제현(諸賢)에게 가서 보이자 모두들 잘되었다고 하였고, 이황도 서문(序文)을 지어 장려하였습니다. 다만 그 그림 가운데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나누어 쓴 것을 이황이 고치기를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기가 서로 발한다〔理氣互發〕’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기대승이 답서에 말하기를 “자사(子思)와 맹자(孟子)가 기준을 삼아 말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만약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여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와 기가 갈라져서 두 가지가 되는 것이며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이 기(氣)를 타지 않는 것이 되니, 말의 뜻에 병폐가 없을 수 없을뿐더러 후학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또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수한 이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이 발하는 것은 기를 겸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면 앞의 설보다는 약간 나은 것 같으나 저의 뜻에는 또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대체로 성이 금방 발하여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을 때 본연의 선이 곧바로 수행된다는 것이 바로 맹자의 이른바 사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순수하게 천리(天理)가 발한 것이긴 하지만 칠정의 밖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곧 칠정 가운데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發而中節〕’의 묘맥(苗脈)인 것입니다. 대개 이(理)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材料)로서 두 가지가 사실 구분이 있긴 하나, 사물(事物)에 있을 때에는 다 혼합되어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는 약하고 기는 강하며 이는 조짐이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유행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에 과불급(過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칠정의 발이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성의 본체가 혹 완전하게 나타나지 못하는 점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선이란 곧 천명(天命)의 본연이고 악이란 곧 기품(氣稟)의 과불급인 것이고 보면, 이른바 사단ㆍ칠정은 애초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학자들은 맹자가 선(善) 일변도로 나아가 부각시켜 지시한 뜻을 살피지 못한 채 으레 사단ㆍ칠정을 구별하여 논하니, 저는 이 점을 병폐로 여깁니다.” 하였습니다.
기대승이 정지운에게 답한 글에 “퇴계 선생이 ‘밖으로 느끼면 형기(形氣)인데 어떻게 그 발(發)이 이(理)의 본체가 될 수 있는가.’ 하셨는데, 이 또한 온당치 않습니다. 맹자가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喜而不寐〕’고 한 것은 희(喜)이고, 순(舜)이 ‘사흉을 주벌했다.〔誅四凶〕’고 한 것은 노(怒)이니, 이것이 어찌 이의 본체가 아닙니까. 대개 퇴계 선생은 오로지 칠정을 형기에 느끼어 일어나는 것으로만 여기셨기 때문에 이러한 병폐가 있게 된 것입니다. 희로(喜怒)가 비록 형기에 느끼어 생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린 아기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인(仁)의 이치가 곧 응하여 측은한 마음이 이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형기에 느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비록 밖으로부터 느낌을 받았더라도 중간에는 실로 이 이(理)가 곧 서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황에게 답한 글에 “사단ㆍ칠정을 상대적으로 거론하여 그림에 게시하고 선하지 않음이 없다느니 선과 악이 있다느니 하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두 개의 정(情)이 있는 것처럼 의심할 것입니다. 또 비록 두 개의 정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그 정 가운데 두 개의 선(善)이 있어서 하나는 이(理)에서 발하고 하나는 기에서 발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니, 온당하지 않습니다. 주자가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성이고 생장수장(生長收藏)은 정이다.’ 하고, 또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이고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는 정이다.’ 하였으니, 곧 기를 타고 유행하는 실상을 볼 수 있으며 사단 또한 기입니다. 주자가 ‘이를테면 측은은 기이고 능히 측은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이다.’ 하였으니, 이 말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주자가 ‘천지의 성은 태극 본연의 묘리로 만수(萬殊)의 일본(一本)이고 기질의 성은 두 기가 어울려 운행하여 생긴 것으로 일본이면서 만수이다.’ ‘기질의 성은 곧 이 이(理)가 기질 속에 떨어져 들어가 있는 것일 뿐 따로 한 성(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는데, 저의 생각은 천지의 성은 천지상에 나아가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기질의 성은 인물(人物)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면에 나아가 말한 것으로 봅니다. 비유하자면 천명의 성은 하늘 위의 달이고 기질의 성은 물속의 달입니다. 달이 비록 하늘에 있고 물에 있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달이란 점에 있어서는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 위의 달은 달이고 물속의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른바 가려진 것이 없지 않다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천지의 측면에서 이기(理氣)를 나누어 본다면 태극은 이(理)이고 음양은 기이며, 인물의 측면에서 이기를 나누어 본다면 건순오상(健順五常)은 이이고 혼백오장(魂魄五臟)은 기입니다. 이기가 사물에 있을 때는 비록 혼합되어 나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 물건이 각기 한 물건이 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지와 인물의 측면에서 이와 기를 나눈다면 하나의 물건이 각자 나름대로 하나의 물건이 되는 것도 틀리지 않으나, 만약 성의 측면에서 논한다면 바로 하늘 위의 달과 물속의 달처럼 하나의 같은 달이니, 위치한 장소에 따라 분별하여 말한 것일 뿐 다시 따로 한 개의 달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 위의 달은 하늘에 귀속시키고 물속의 달은 물에 귀속시킨다면 또한 그 말이 한쪽에 편중된 점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사단ㆍ칠정이란 것은 곧 이(理)가 기질에 떨어져 들어간 이후의 일로서 물속의 달빛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그 빛 가운데 칠정은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으며 사단은 밝기만 한 것입니다. 칠정이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는 것은 사실 물의 청탁 때문에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게 된 경우이니, 이는 빛이 아무리 밝아도 물결의 일렁임을 면치 못해서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감히 묻습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이(理)에서 발한 것입니까, 기에서 발한 것입니까? 그리고 발하여 절도에 맞아서 어느 경우든 선하지 않음이 없는 선과 사단의 선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기는 능히 응결하고 조작하지만 이(理)는 곧 정의(情意)도 없고 계탁(計度)도 없고 조작도 없다. 다만 기가 응취한 곳이면 이(理)가 곧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 하였는데, 이제 이와 기가 서로 발용(發用)하고 그 발함이 또 서로 호응한다고 말한다면 이(理)가 곧 정의가 있고 계탁이 있고 조작이 있는 것이 됩니다. 또 그렇게 되면 이와 기 두 가지가 마치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속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번갈아 나와 용사(用事)하고 서로 수종(首從)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될 것입니다. 도리를 차근차근 쌓아 올라가는 곳에서는 털끝만큼의 오류도 있어서는 안 되니 여기에서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가 간곡하게 변론한 것이 맑고 시원하기 그지없는데 과거 사람이 밝히지 못한 점을 밝힌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 뒤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호발(互發)의 설을 논변하면서 기대승의 변론에 대해 직절(直截)하고 명백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와 같다 하고 또 의논이 생동하고 탁월하다고 평가하자 학자들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겼으니, 이것이 사문의 대공안(大公案)이 된 까닭입니다.
이황이 또 물격설(物格說)을 가지고 기대승에게 묻기를 “용(用)은 비록 인심(人心)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용이 되는 묘리는 실로 이(理)가 발현하는 것인데, 인심이 이르는 바에 따라 이르러 가지 않는 곳이 없고 그 처한 경우에 따라 발현하여 이르러 가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이(理)의 지극히 신묘한 용〔至神之用〕이 아니겠소?” 하니, 기대승이 답하기를 “무위(無爲)의 체(體)와 지신(至神)의 용(用) 등의 말씀은 숨은 이치를 밝혀 더욱 정밀합니다. 다만 자세히 보면 그 사이에 자재(自在)하지 못하는 하자가 있는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뒷날 제유(諸儒)들이 논변하기를 “고봉의 이 말이 비록 적요(寂寥)한 구절이긴 하지만 자재라는 글자를 쓴 것을 보건대 참으로 《대학혹문(大學或問)》의 ‘이(理)가 극치에 도달했다.〔理詣其極〕’는 뜻을 얻은 것으로서 이것이 정밀하고 확실한 듯하니 마땅히 이로써 정답을 삼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고봉은 기대승의 별호입니다. 여기에서 그 조예의 정밀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고(故) 유신(儒臣) 이항(李恒)과 〈태극도(太極圖)〉를 논하였는데, 이항은 태극과 음양이 일물(一物)로서 도(道)와 기(器)의 구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기대승이 서찰로 논변하기를 “〈태극도〉의 가장 위 한 동그라미는 바로 이른바 태극이고 그 아래 한 동그라미는 이른바 양동음정(陽動陰靜)인 것이고 중간의 작은 동그라미는 곧 태극의 본체이니, 이것은 이른바 ‘음양에 나아가 그 본체를 가리킨 것이고 음양을 섞어서 말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음의 정(靜)은 곧 태극의 체(體)가 똑바르게 서는 바이고, 양의 동(動)은 곧 태극의 용(用)이 유행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태극이 음양으로써 체용을 삼는 것이 아니고 단지 태극의 체용이 음양을 통해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대개 태극은 상(象)이 없고 음양은 기(氣)가 있기 때문에 그 유행하는 즈음에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같은 때에 문정공 김인후(金麟厚)가 논변한 것을 보고 이항에게 서찰을 보내 변론하여 밝혔는데, 또한 기대승의 견해와 부합하였습니다.
명나라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호를 정암(整菴)이라 하는데, 《곤지기(困知記)》를 지어 이기(理氣)를 일물(一物)이라 하면서 주자의 이른바 ‘소이연(所以然)’을 그렇지 않다고 하여 만약 ‘소이(所以)’라는 글자를 붙이면 곧 두 개의 물이 된다고 하고, 또 도심(道心)을 체(體)라 하고 인심(人心)을 용(用)이라 하였습니다. 이 글이 새로 나오자 세상의 학자들은 그 시비를 가리지 못한 채 간혹 깊이 좋아하여 독실히 믿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무진년(1568, 선조1) 5월에 기대승이 대사성으로 입궐하였다가 옥당(玉堂)에 이르러 부제학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곤지기》를 논하였는데, 노수신이 정암의 말을 두고 지당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하니, 기대승이 그 틀린 점을 힘껏 변박하기를 “주자가 ‘도심은 성명(性命)의 정(正)에 근원을 두고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온다.’라고 하여 사실 이와 기를 나누어서 말하였습니다. 정암은 이를 기로 알아 이와 기를 하나의 물(物)로 여겼기 때문에 도심을 성(性)이라 하고 인심을 정(情)이라 하여 갖가지 신기한 설이 다 이로부터 나왔습니다. 어찌 성현이 서로 전수한 바꿀 수 없는 설을 등지고 나정암의 신기한 설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변론하였습니다.
대개 그 정견(正見)은 정론과 유사한 사이비 학설에 현혹되지 않아 오도(吾道)의 본원을 밝히고 이단(異端)의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상세하고 풍부하며 빛나고 위대하여 순수하게 한결같이 정도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이황이 그를 존경함이 특별히 깊었던 이유입니다. 대개 그 부드러움과 팽팽함이 서로 도움이 되고 궁성(宮聲)과 치성(徴聲)이 서로 어울리는 것은 몇 시대 만에야 한 번 만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후배 제유(諸儒)들이 “기대승과 이황의 관계는 마치 횡거(橫渠 장재(張載))와 정씨(程氏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과 주자의 관계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이황이 보낸 서찰에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성에 들어간 걸음은 매우 낭패스러웠으나 오직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나 보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명언은 곧 기대승의 자입니다. 또 말하기를 “공은 영매(英邁)한 기운과 동량(棟樑)의 그릇으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을 때는 이름이 원근에 널리 퍼졌고 나온 뒤에는 온 나라가 모두 그대에게 경도되었다.”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 보낸 서찰에 “이번 과거에서 인재를 많이 얻었는데 그중에서도 기명언은 문장과 인물이 진작 듣던 것보다도 뛰어나다. 국가가 이런 선비를 얻어 쓰게 되었으니 실로 사문의 큰 경사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황이 입조(入朝)했다가 사직하고 돌아갈 때 선조(宣祖)께서 맞아들여 하문하시기를 “천거하고 싶은 자가 있는가? 이 세상에 누가 학문을 한 사람인가?” 하시니, 이황은 유독 기대승을 들어서 대답하고 통유(通儒)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대개 이황은 여러 조정을 거친 노신(老臣)으로서 기묘ㆍ을사의 제현(諸賢)을 두루 보고 명종과 선조 두 조정을 섬겼습니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명현이 모두 그의 문정(門庭)에 출입하였으나 마음이 계합하여 추천한 경우에 있어서는 오직 기대승을 우선으로 꼽았으니, 그가 중하게 여김을 받은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지난날 유신(儒臣) 장현광(張顯光)이 말하기를 “퇴계는 항상 염장(斂藏)과 염퇴(廉退), 청수(淸修)와 고절(苦節)의 도로써 스스로를 지키고, 고봉은 언제나 초양(超揚)과 발월(發越), 직절(直截)과 준특(峻特)의 의로써 스스로 힘썼다. 그래서 기상이 서로 맞지 않는 듯하지만 독실히 믿어 의심하지 않고 아끼고 좋아하여 싫어함이 없는 뜻은 갈수록 농도가 짙어져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 기울였으니, 고봉만이 퇴계에게서 절제를 취한 것이 아니라 퇴계 또한 고봉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기묘년과 을사년 이후로 선류(善類)가 참화를 받고 사기(士氣)가 꺾여서 정론(正論)이 굽혀져 펴지지 않고 유화(儒化)가 폐해져 일어나지 않은 지가 거의 수십 년이 되었는데, 기대승이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홀로 풍도(風度)를 견지하였습니다. 당시에 윤원형(尹元衡)과 이량(李樑)이 세력을 잡고 용사(用事)하여 사류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기대승은 기운이 강하고 말이 엄하여 거의 넘어질 뻔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동시대의 여러 군자들과 힘을 합쳐 공격하여 조정을 맑게 하고 공도(公道)를 확장시켰습니다. 그리고 경연에 출입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대해 극진히 개진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우쳤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의(公議)를 신장시켜 깊이 맺힌 원한을 씻어 주고 봉증(封贈)의 전례(典禮)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또 지(誌)ㆍ장(狀)ㆍ제(祭)ㆍ뇌(誄) 등의 글을 지어 그들의 거룩한 도덕을 선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학(士學)이 그로 인하여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고 사문이 그에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기대승이 선현을 표장하고 도를 높이며 학문을 일으킨 공이야말로 옛날의 대현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다 할 것입니다.
정묘년(1567, 명종22) 5월 공의전(恭懿殿)의 대상(大喪)에 대한 복을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예제(禮制)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습니다. 당시 퇴계가 서울에 있으면서 “예에 있어서 형수와 시숙 사이는 복이 없는 법이니 상께서는 복이 없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히 그 말을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대승이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나갔다가 나중에 입성하여 말하기를 “인묘(仁廟)께서 나라에 군림하셨으니 금상은 자연 계체(繼體)의 복이 있다. 어찌 형수와 시숙의 예를 적용할 수 있는가.” 하니, 이황이 그 말을 듣고서 생각해 보고 마음에 섬뜩하여 앞서의 견해를 고치고 말하기를 “만약 기명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천고의 죄인이 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고, 조정에 서찰을 보내어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윤두수(尹斗壽)는 말하기를 “정축년(1577, 선조10) 11월 국상(國喪 공의전의 상) 때 한두 사람의 이론이 있기는 했지만 계체(繼體)의 복인 기년복으로 정하여 위아래가 틈이 없게 되었다. 고봉의 정밀한 조예와 퇴계가 의리를 받들어 행한 일로 인하여 온 나라가 덕을 보았으니 끼친 혜택이 크다고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명종을 부묘(祔廟)할 때에 인종을 앞당겨 조천(祧遷)하자는 논의가 나오자 기대승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힘껏 말하여 부정한 설을 깨뜨렸고, 원묘(原廟)의 의절(儀節)과 덕흥(德興)의 전례(典禮)도 모두 기대승의 의논을 따라 예제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는데, 세속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기대승의 문집은 난리를 겪는 동안 판(板)을 잃어버려 심오한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날로 없어져 가고, 오직 문장을 지닌 제공(諸公)이 찬양하여 기술한 것 가운데 그나마 상고할 만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시에 “태고 멀리 희헌을 추구하였고, 진원이라 추로를 소급하였네.〔羲軒追古遠 鄒魯遡源眞〕” 하였고,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의 시에 “다른 시대 사람을 사숙하여서, 연원일랑 고정을 소급하였네.〔異代人私淑 淵源遡考亭〕” 하였습니다. 고 충신 최경회(崔慶會)의 글에 “한유(韓柳)를 능가하여 문장이야 여사이고 정주(程朱)를 계승하여 도덕을 실천하였네.” 하였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기개는 호준(豪俊)하고 경국제세를 자임하여 사류의 영수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문민공(文敏公) 김계휘(金繼輝)는 “그의 언론을 듣노라면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가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서 봄날에 얼음 녹듯 시원해짐을 가슴속에 느꼈다. 정직함과 진실함과 식견이 많은 그 세 가지를 갖추었으므로 학자들이 우러르기를 태산북두처럼 하였다.” 하였고, 고 유신(儒臣) 이식(李植)은 “고봉이 중년에 조정에 들어가니 사대부가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처럼 바라보고 의지하여 믿었으며, 언제나 조정에 큰 의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고봉의 한마디 말을 기다려 결정하였다. 선류(善類)가 참화를 당하고 권간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때를 당하여 사기(士氣)가 시들어 부진하였는데 고봉이 그 사이에 우뚝하게 서서 마치 제방이 거센 물을 막는 것처럼 하였고, 명현(名賢)을 끌어들여 조정에 진출시키고 간소배(奸小輩)를 꺾어 물리쳤으며, 힘써 청의(淸議)를 부추기고 교화의 법을 닦아서 밝혔기에 사림이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다. 경연에서 논사(論思)하면서 임금께 권면하고 진강하기를 밝고 간절히 하여 의리와 이욕 및 왕도와 패도의 구분, 고금 치란의 기미, 군자ㆍ소인이 진퇴ㆍ소장(消長)하는 경계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하고 극진히 개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임금도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면서 날로 장려를 더하니 시속 사람들이 ‘작은〔小〕 기묘(己卯 조광조)’로 지목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올바르게 되었으나 기대승이 죽은 뒤에 세도(世道)가 곧 어그러져 동서로 당이 나뉘어 진신(搢紳)들이 서로 반목하였으니, 선배로서 중간에서 힘써 조정을 하던 자도 그 화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식자(識者)가 이로 인하여 논하기를 “고봉이 만약 생존해 있었다면 당론을 아마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깊이 알고서 잘 말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임신년(1572, 선조5)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갔다가 병으로 체직하고 돌아갈 때 한 시대의 명사들이 한강으로 모두 나와 전별하였습니다. 그때 한 좌객이 묻기를 “공과 같은 문장과 도학으로 어찌 만언소(萬言疏)를 올리지 않고 돌아가십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당시의 임금이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의 재능만 드러내 보이는 것이 될 뿐 국가에는 도움이 없는 것이다.” 하였고, 또 묻기를 “사대부로서 세상에 지위를 확고하게 세우고 처신함에 있어서 시종 지니면서 지켜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군자의 출처는 마땅히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다음은 반드시 때를 알고 형세를 살펴 구차해지는 문제가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며, 끝으로 목숨을 걸고 도를 잘 지키기를 기약할 뿐이라는 뜻인데, 그 말을 들은 자들이 탄복하였습니다.
선묘(宣廟)께서는 기대승이 도중에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특별히 어의(御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도록 하셨으나 당도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상께서 슬퍼하며 애석히 여기시고 예로써 장사지내 주도록 하셨으며, 경석(經席)에서 논사(論思)한 말을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기거주(起居注 《승정원일기》)에서 초출(抄出)하여 한 권의 책으로 모아 예람(睿覽)에 갖추도록 하셨으니, 여기에서 임금과의 교감이 융중(隆重)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세상을 일찍 떠나 그 영명한 재주며 통달한 식견과 지극히 공정한 마음이며 나라를 걱정하는 혈성(血誠)을 세상에 다 시행하여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는 모두가 시운과 관계된 바로서 뜻있는 선비들이 지금까지도 슬퍼하는 바입니다.
기대승은 천품이 매우 높아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하였는데 지극한 행실과 높은 식견은 이미 7, 8세 어린 나이에 드러났습니다. 조금 자라서 학문에 뜻을 둘 때는 곧 옛 성현으로 스스로 기약하여 정밀히 생각하고 깊이 깨달으며 용감하게 나아가고 근실하게 행동에 옮겼으니, 쌓은 공력은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정에 들어가 시행한 정사도 성대하여 훌륭하고 끼친 영향 역시 충분히 후세를 격동시킬 만하며, 도(道)의 큰 근본을 앞장서서 천명하되 명백하고 통쾌하게 하여 대체로 학자의 정법이 되었으니, 그 공은 한때에 이익과 은택이 사람들에게 미친 것보다도 오히려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호남은 멀리 해변에 위치하여 자고로 유현(儒賢)이 창도(倡導)한 교화가 없었으므로 인문(人文)이 미비하고 풍속이 혼탁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호남은 본디 귀역(鬼蜮)의 소굴이었는데 김인후와 기대승이 나옴으로 인하여 선비 된 자가 비로소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아 명유(名儒)가 뒤를 이어 일어났다.” 하였는데, 이는 진정 사실입니다.
기대승이 남쪽 지방의 많은 선비들과 풍영정(風詠亭)과 서석산(瑞石山 무등산) 사이에서 강학(講學)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도내(道內)의 제생(諸生)이 가장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 모두 교화되었으니, 대체로 남전(藍田)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옛 제도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강규(講規)에 대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여 시의에 맞도록 하고 강령 조목을 다듬어 거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옛 풍속이 일신되고 유교가 크게 일어나서 명인이 배출되고 충신ㆍ의사가 전후에 걸쳐 계속 일어나 세상에서 문명의 고을이요 다사(多士)의 지방이라고 일컫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이겠습니까. 이제까지도 항간에 뜻이 있는 선비로서 그 글을 읽고 완미하는 자는 그 풍도를 흠모하고 그 도의를 사모하여, 모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자식은 효도하고 신하는 충성하며 오도(吾道)를 높이고 이단을 배척할 줄 아는가 하면, 널리 배우고 예로써 검속하는 뜻과 본성을 견지하고 사심을 다스리는 방도에 대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환히 알아서 떨쳐 일어나고 있으니, 사문에 대한 덕업(德業)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기대승의 도학은 신들과 같은 말학(末學)으로서는 그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다만 제현들이 논의한 것을 가지고 진달하였으니,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세도가 쇠미해지고 이단이 멋대로 날뛰어 심지어는 나라를 해치고 집안을 망치는데도 혼미하여 돌이킬 줄 모르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이는 필시 스승의 학문이 밝지 못하고 선비의 추향이 정해지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이제 만약 도학의 바른 전통을 표장(表章)하여 모두가 보고서 법으로 삼게 한다면 국가가 근본을 돈독히 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점에 있어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사설(邪說)을 잠재우고 인심을 바로잡는 급선무가 될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아술(蛾術)의 공에는 어둡지만 오랫동안 아육(莪育)의 교화에 젖었기에 문치(文治)의 성대(聖代)를 만나서 감히 성무(聖廡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해 달라는 청을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거룩하고 밝은 전하께오서 굽어 살피시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널리 하문하시어 덕음(德音)을 아끼지 마시고 특별히 윤허를 내리신다면 어찌 한 지방 신하들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아마도 국가 백세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신들은 하늘을 우러르고 성상을 바라보며 황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정예환(鄭禮煥)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듣건대 문묘(文廟)에 제사하는 예를 정한 뜻은 장차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를 가장 윗자리에 모시고 뭇 제자들을 나열하여 모시며, 역대에 덕을 쌓고 경(經)을 보위한 여러 선유(先儒)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성인의 도를 드러내고 성인의 말씀을 천명한 자가 있으면 종사(從祀)의 의절에 참여시키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는 다 그 덕과 공으로 인한 것입니다.
명나라 성화(成和 명 헌종(明憲宗)) 연간에 유신(儒臣) 유정지(劉定之)가 올린 〈문묘종사의(文廟從祀議)〉를 보건대 “좌구명(左邱明) 이하 경사(經師) 22인은 세도(世道)가 쇠미한 때를 당하여 그 유경(遺經)을 지켜 서로 전수해 주며 강론하고 주석을 내는 등 각자 그 재주를 다하여 후세의 학자를 기다렸다. 따라서 그들이 이룬 공은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의 자손이 비록 쇠약하여 떨쳐 일어난 일은 없으나 그래도 희성(姬姓 주(周) 왕조의 성)의 종묘사직을 지켜 춘추 시대를 겪으면서도 멸망에 이르게 하지 않고 요행히도 보존시켜 온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중니(仲尼)는 소왕(素王)이고 칠십자(七十子)는 곧 창업(創業)을 도와준 자들이고 경사(經師)는 그 전통이 보존되도록 도운 자들이다.” 하였습니다. 그들 이외에 경교(經敎)에 대하여 표장(表章)하거나 유술(儒術)에 대하여 발명(發明)한 것이 없으면 아무리 논자(論者)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다음간다고 추대한 제갈 무후(諸葛武侯)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올려서 종사의 대열에 넣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사전(祀典)의 정밀한 뜻과 큰 줄거리에 대하여 그 만분의 일이나마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학문은 명물(名物 훈고학(訓詁學))을 위주로 하였고 왕보사(王輔嗣 왕필(王弼))의 도는 노장(老莊)을 뒤섞어 정밀하고 순수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오히려 경을 풀이한 공 때문에 천하 만세가 한마음으로 종사시키며 이론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덕이며 공이 그들과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는 데다 정온(精蘊)한 성도(聖道)를 드러내고 후학에게 태평한 길을 열어 준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정신 문헌공(文憲公) 기대승 같은 이는 이제까지도 문묘에 올려 배향하는 예를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선정의 고향 지역 후진으로서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그 풍도를 흠모해 온 지 오래입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문모(文母)께서 수렴청정(垂簾聽政)하시고 성명(聖明)한 군주께서 왕위를 이어받아 새로운 정사를 막 시작하시면서 유자(儒者)를 높이고 문교(文敎)를 지향하는 가법을 힘쓰시는 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선조(先朝)의 고명후박(高明厚博)한 업과 개물성무(開物成務)의 공을 추구하고 따르며 실수 없이 잘 계승하여 장차 선왕께서 물려주신 큰 책임을 분명하게 받들고 우리나라 억만 년 무궁한 큰 터전을 길이 공고히 하고 계시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들이 서로 함께 임금에게 한 번 호소하지 아니하고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감히 목욕재계하고 상소문을 지어 사림의 공론을 진달하니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궁벽하게 해변에 위치하여 인문(人文)이 늦게 열렸습니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비로소 정주(程朱)의 학을 제창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혼란한 상황이라서 미처 저술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뒤를 이어 굉유석덕(宏儒碩德)이 수없이 일어나 경(經)의 뜻을 강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理)와 기(氣)가 두 갈래라는 논의는 정론에서 어긋났습니다. 이로부터 한 번 변하여 이기선후(理氣先後)라는 설이 나오고 두 번 변하여 심(心)에 체용(體用)이 없다는 논이 나오고 세 번 변하여 성(性)이 먼저 움직이느니 심이 먼저 움직이느니 하는 변(辨)이 나와서 마치 송조(宋朝) 초기에 〈태극도(太極圖)〉가 나오기 전의 상황과 같이 성문(聖門)의 지결(旨訣)이 어지럽고 두서가 없게 되었습니다.
명종 선조 연간에 이르러 정치와 문교가 아름답고 밝아지게 되었으니,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을 이어 성대하게 종사(宗師)가 되어 경전에 깊이 젖어들고 성리(性理)를 가려 분석하였습니다. 또한 기대승은 자질이 생지(生知)에 가깝고 학문은 천인(天人)을 관통하여, 조예가 뛰어난 식견과 깊이 들어가 자득한 공이야말로 이황의 정통을 전수받은 고족(高足)이라 할 만했습니다. 조존성찰(操存省察)과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오직 이황만을 따르고 가정에서의 품행과 조정에서의 정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오직 이황을 법도로 삼았습니다. 게다가 이황 또한 극도로 추대하여 외우(畏友)라고 칭찬하며 마치 주자와 채원정(蔡元定)의 관계처럼 대하였고, 매번 선현이 밝히지 않은 깊은 뜻이나 후학으로부터 까다로운 질문을 받게 되면 장문의 서찰을 누차 보내어 꼭 기대승에게 물어서 회답을 기다린 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니, 그가 사문(師門)에 중하게 여겨진 정도는 기타 동문의 선비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돌아보건대 신들과 같은 얕은 학문과 좁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분수 넘게 함부로 옛 군자가 성취한 수준을 평론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선배들이 추론(推論)한 것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노산(蘆山) 아래에 집을 짓고 10여 년 동안 진지하게 공부를 한 일은 소요부(邵堯夫)가 백원(百源)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던 것과 같은 점이 있고, 세상에 한번 나와서는 이황이 알아주어 “무오년에 도성에 들어간 걸음에서는 오직 대승을 얻어 본 것이 다행이었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양중립(楊中立)에 대하여 “오도(吾道)가 남쪽으로 갔다.”고 한 경우와 비슷합니다.
《논사록(論思錄)》 한 책을 읽어 보면, 제왕의 대도(大道)를 드러내 밝히고 성정(誠正)의 깊은 공을 진술하여 반드시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인도하고 지치(至治)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정숙자(程叔子)가 진정한 시독(侍讀)이 되었던 것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또 왕복서(往復書) 4편을 읽어 보면, 부드러운 마음과 겸손한 뜻으로 성정(性情)과 이기(理氣)의 심오함을 정밀히 탐구하고 굳은 창자와 억센 힘으로 번다하고 화려한 유혹을 싸워 이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밀하기는 명주실이나 쇠털과도 같아서 물을 담아도 새지 않고 우러러볼수록 높고 뚫을수록 단단했는데도 뜻을 이루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으니, 이는 주 부자(朱夫子)가 당시에 했던 공부와 비슷했다 할 것입니다. 그 밖에 유포된 문집과 남아 있는 어록(語錄)들도 모두 후학들에게 혜택을 주고 백세(百世)를 격려할 만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성덕(盛德)과 이러한 실천을 생각하고 후유(後儒)의 칭송과 흠모함을 참작하며 제가(諸家)의 존경과 믿음으로 방증한다면, 대승이 문묘에 향사(享祀)되는 것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나마 이는 오히려 그 덕행을 범범하게 논한 것에 불과합니다. 대체로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논이야말로 학자에게 참으로 절실하고도 절실한 관건으로서 사도(斯道)의 전통이 그 덕에 이어지고 유지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이 한 치 한 푼 사이를 찌르고 들어갈 만큼 예리하고 견해가 실오리나 털끝만 한 차이를 구별할 만큼 정밀하여 상자에 가득 차고 서가(書架)에 가득 쌓여 거의 갑과 을이 서로 송사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기대승은 세밀하게 탐구하여 자기의 견해를 따로 세워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문제점을 분변하여 바로잡고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의 오류를 물리쳐 깨뜨리는 등 그가 세운 논조와 구사한 말은 한 글자 한 글귀가 백세에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신들은 청컨대 남아 있는 서책에 뒤섞여 나오는 말들을 가지고 전하를 위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옛날 명묘조(明廟朝)의 처사(處士)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짓자 당시의 제현(諸賢)으로서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황(李滉)은 서문(序文)을 지어 장려하였는데, 다만 그림 가운데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고 두 쪽으로 나누어 쓴 것을 이황이 고쳐 “사단은 이의 발(發)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지운이 또 그 설을 가지고 기대승에게 와서 강론하니, 기대승이 그 자리에서 변파(辨破)하기를 “그림과 학설에 잘못된 곳이 많아 정론이 되지 못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황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서찰로 묻기를 “사우(士友) 간에 전하는 논쟁 내용을 듣고 허술하고 잘못된 것을 더욱 깨달았다. ‘사단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를 겸하였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다.’라고 고친다면 병폐가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기대승이 답하기를 “자사(子思)와 맹자(孟子)가 기준을 삼아 말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 칠정 이외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만약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여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와 기가 갈라져서 두 가지가 되는 것이며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이 기를 타지 않는 것이 되니, 말의 뜻이 병폐가 없을 수 없을뿐더러 후학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또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이 발하는 것은 기를 겸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면, 앞의 설보다는 약간 나은 것 같으나 저의 뜻에는 또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대체로 성(性)이 금방 발하여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을 때 본연의 선이 곧바로 수행된다는 것이 바로 맹자의 이른바 사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순수하게 천리(天理)가 발한 것이긴 하지만 칠정의 밖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곧 칠정 가운데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發而中節〕’의 묘맥(苗脈)인 것입니다. 대개 이(理)는 기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재료로서 두 가지가 사실 구분이 있긴 하나, 사물에 있을 때는 다 혼합되어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는 약하고 기는 강하며 이는 조짐이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유행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과불급(過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칠정의 발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성의 본체가 혹 완전하게 나타나지 못하는 점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선이란 곧 천명(天命)의 본연이고 악이란 곧 기품(氣稟)의 과불급인 것이고 보면, 이른바 사단ㆍ칠정은 애초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학자들은 맹자가 선(善) 일변도로 나아가 부각시켜 지시한 뜻을 살피지 못한 채 으레 사단ㆍ칠정을 구별하여 논하니, 저는 이 점을 병폐로 여깁니다.” 하였습니다.
또 정지운에게 답한 글에서 “퇴계가 ‘밖으로 느끼면 형기(形氣)인데 어떻게 그 발(發)이 이(理)의 본체가 될 수 있는가.’ 하였는데, 이 또한 온당치 않습니다. 맹자가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喜而不寢〕’고 한 것은 희(喜)이고 순(舜)이 ‘사흉을 주벌했다.〔誅四凶〕’고 한 것은 노(怒)이니, 이것이 어찌 이(理)의 본체가 아닙니까. 대개 퇴계는 오로지 칠정을 형기에 느끼어 일어나는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병폐가 있게 된 것입니다. 희로(喜怒)가 비록 형기에 느끼어 생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인(仁)의 이치가 곧 응하여 측은한 마음이 이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형기에 느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비록 밖으로부터 느낌을 받았더라도 중간에는 실로 이 이(理)가 곧 서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퇴계는 곧 이황의 호입니다.
또 이황에게 답한 글에서 “사단ㆍ칠정을 상대적으로 거론하여 그림에 게시하고 선하지 않음이 없다느니 선과 악이 있다느니 하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두 개의 정(情)이 있는 것처럼 의심할 것입니다. 또 비록 두 개의 정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그 정 가운데 두 개의 선이 있어서 하나는 이(理)에서 발하고 하나는 기에서 발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니, 온당하지 않습니다. 주자가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성(性)이고 생장수장(生長收藏)은 정(情)이다.’ 하고, 또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이고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는 정이다.’ 하였으니, 곧 기를 타고 유행하는 실상을 볼 수 있으며 사단 또한 기입니다. 주자가 ‘이를테면 측은은 기이고 능히 측은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理)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주자가 ‘천지의 성은 태극 본연의 묘리로 만수(萬殊)의 일본(一本)이고 기질의 성은 두 기가 어울려 운행하여 생긴 것으로 일본이면서 만수가 된 것이다.’ ‘기질의 성은 곧 이 이(理)가 기질 속에 떨어져 들어가 있는 것일 뿐 따로 한 성(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는데, 저의 생각은 천지의 성은 천지상에 나아가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기질의 성은 인물(人物)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면에 나아가 말한 것으로 봅니다. 천명의 성은 비유하자면 하늘 위의 달이고 기질의 성은 물속의 달입니다. 달이 비록 하늘에 있고 물속에 있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달이란 점에 있어서는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 위의 달은 달이고 물속의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른바 가려진 것이 없지 않다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천지의 측면에서 이기(理氣)를 나누어 본다면 태극은 이(理)이고 음양은 기이며, 인물의 측면에서 이기를 나누어 본다면 건순오상(健順五常)은 이이고 혼백오장(魂魄五藏)은 기입니다. 이기가 사물에 있을 때는 비록 혼합되어 나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 물건이 스스로 하나의 물건이 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성(性)의 측면에서 논한다면 바로 하늘 위의 달과 물속의 달처럼 하나의 같은 달이니, 위치한 장소에 따라 분별하여 말한 것일 뿐 다시 따로 한 개의 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른바 사단ㆍ칠정이란 것은 곧 이(理)가 기질에 떨어져 들어간 이후의 일로서 물속의 달빛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그 빛 가운데 칠정은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으며 사단은 밝기만 한 것입니다. 칠정이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는 것은 물의 청탁 때문에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게 된 경우이니, 이는 빛이 아무리 밝아도 물결이 일렁임을 면치 못해서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감히 묻습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이(理)에서 말한 것입니까, 기에서 말한 것입니까? 그리고 발하여 절도에 맞아서 어느 경우든 선하지 않음이 없는 선과 사단의 선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기는 능히 응결하고 조작을 하지만 이(理)는 곧 정의(情意)도 없고 계탁(計度)도 없고 조작도 없다. 다만 기가 응취한 곳이면 이(理)가 곧 기 가운데에 존재한다.’ 하였는데, 이제 이와 기가 서로 발용(發用)하고 그 발함이 또 서로 호응한다고 말한다면 이(理)가 곧 정의가 있고 계탁이 있고 조작이 있는 것이 됩니다. 또 그렇게 되면 이와 기 두 가지가 마치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속을 나누어 차지하고는 번갈아 나와서 용사(用事)하고 서로 수종(首從)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될 것입니다. 도리를 차근차근 쌓아 올라가는 곳에서는 털끝만큼의 오류도 있어서는 안 되니 여기에서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가 간곡하게 변론한 것이 통창하고 시원하여 과거 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학자 나흠순(羅欽順)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보면 또 이(理)와 기를 일물(一物)로 여긴 나머지 주자의 이른바 ‘소이연(所以然)’을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만약 ‘소이(所以)’라는 글자를 붙이면 곧 두 개의 물이 된다고 하였고, 또 도심(道心)을 체(體)라 하고 인심을 용(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글이 새로 세상에 나오자 세상의 학자들은 그 시비를 가려내지 못한 채 어떤 이는 매우 좋아하여 독실하게 믿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기대승이 그 잘못됨을 힘껏 변박하여 “주자가 ‘도심은 성명(性命)의 정(正)에 근원을 두고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온다.’고 하여 사실 이(理)와 기를 나누어서 말하였다. 그런데 나씨는 이(理)를 기로 알아 이와 기를 한 물(物)로 여겼기 때문에 도심을 성이라 하고 인심을 정이라 하여 갖가지 신기한 설을 다 이로부터 내놓게 된 것이다. 어찌 성현이 서로 전수한 바꿀 수 없는 설을 등지고 그의 사이비(似而非) 논설을 따를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변론하였습니다. 대개 이 두 설은 광명하고 위대하여 순수하게 오로지 정도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바로 이황이 특별히 그에 대해서만은 옷깃을 여미었던 까닭입니다.
그 뒤에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선정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등이 주옥과 족보처럼 받들고 소중히 전수하여 마침내 기대승의 한마디 말을 어두운 밤길의 촛불이나 지남으로 여기었고, 오늘날까지 명리가(名理家)들이 학문의 표준으로 삼아 걸음마다 좇아 강마하고 따르며 익히고 있는 바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유문(儒門)의 정론(正論)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장차 만세 심법(心法)의 연원이 될 것이니, 성리의 핵심을 쪼개어 깨고 학해(學海)의 진로를 열어 제시한 것으로 볼 때 성문(聖門)에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정주(程朱)의 문하에서 도학을 전수받은 현인 가운데 스승의 설을 받들어 이치의 근본을 탐구한 자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정문(程門)의 사양좌(謝良佐)여희철(呂希哲)유작(游酢)양시(楊時)와 주문(朱門)의 양집(楊楫)채원정(蔡元定)섭미도(葉味道)진순(陳淳) 등도 모두 이러한 뜻을 말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송(宋)ㆍ명(明) 이후 도통(道統)을 서로 주고받은 제유(諸儒)로서 하기(何基)왕백(王柏)김이상(金履祥) 같은 이들도 심학(心學)을 강론할 때는 미진한 점이 없었지만 그 역시 이러한 뜻을 미루어 밝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자와 주자가 단서를 약간 열어 놓고서 후인의 정밀한 탐구를 기다린 지 몇백 년이 지난 뒤에 기대승이 나와 비로소 세밀히 분석했던 것인데, 터득한 도를 풀어 놓으면 온 천하에 가득 차고 거두어들이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서 과거의 성인을 계승하고 미래의 후학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경(經)을 전공하여 훈고(訓詁)와 문의(文義)에만 몰두하였을 뿐 심성(心性)을 보존하여 기르고 독실히 실천한 내실이 없는 한진(漢晉) 시대의 경사(經師)와 견주어 본다면 덕의 고하와 공의 대소가 어찌 하늘과 땅처럼 현격할 뿐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경사는 문묘 종사의 반열에 오르지 않은 자가 없거늘 기대승만은 유독 부자(夫子)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크게 사림의 유감이 되지 않겠으며 유자를 높이고 도를 중시하는 성조(聖朝)의 치도에 있어서도 어찌 일대 흠전(欠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아, 기묘년과 을사년 이후로 선류(善類)가 참화를 받고 사기가 꺾여 정론(正論)이 굽혀 펴지지 않고 유화(儒化)가 폐지된 채 진작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기대승이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홀로 풍도(風度)를 견지하였습니다. 당시는 윤원형(尹元衡)과 이량(李樑)이 권세를 부릴 때인데 기대승은 기운이 강하고 말이 엄하여 거의 넘어질 뻔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동시대의 여러 군자들과 힘을 합쳐 공격하여 조정을 맑게 하였습니다. 또 경연에 출입하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대해 극진히 개진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우쳤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의(公議)를 신장하여 깊이 맺힌 원한을 씻어 줌으로써 마침내 봉증(封贈)의 전례(典禮)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또 지(誌)ㆍ장(狀)ㆍ제(祭)ㆍ뇌(誄) 등의 글을 지어 그들의 거룩한 도덕을 선양하였으니, 사류가 이로부터 일어나고 사도가 이에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제(禮制)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기대승의 정밀한 견해가 곧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정도에 합치되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과거 공의전(恭懿殿)의 대상(大喪)을 당했을 때, 이황이 “예에 있어서 형수와 시숙 사이는 복이 없으니, 상께서는 복이 없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히 그 말을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기대승이 당시에 원접사 종사관으로 나갔다가 나중에 입성하여 말하기를 “인묘(仁廟)께서 나라에 군림하셨으니 금상은 자연 계체(繼體)의 복이 있다. 어찌 형수와 시숙의 예를 적용할 수 있는가.” 하니, 이황이 그 말을 듣고서 생각해 보고 마음에 섬뜩하여 앞서의 견해를 고치고 말하기를 “만약 기명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천고의 죄인이 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고, 또 조정에 글을 보내어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고 상신 윤두수(尹斗壽)는 말하기를 “고봉의 정밀한 조예와 퇴계가 의리를 받들어 행한 일로 인하여 온 나라가 덕을 보았으니, 끼친 혜택이 크다고 하겠다.” 하였는데, 고봉은 기대승의 호이고 명언은 곧 대승의 표덕(表德 자(字))입니다. 그 뒤에 명종(明宗)을 부묘(祔廟)할 때 인묘(仁廟)를 앞당겨 조천(祧遷)하자는 논의가 나오자 기대승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힘껏 말하여 부정한 설을 깨뜨렸고, 원묘(原廟)의 의절과 덕흥(德興)의 전례를 모두 기대승의 의논을 따라서 천륜(天倫)의 상도(常道)에 어긋남이 없고 인정(人情)의 분수에 합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업과 공적에 나타난 간단한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당대의 저명한 진유(眞儒)요 사론(士論)의 지주(砥柱)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조(國朝)의 명유(名儒)ㆍ석사(碩士)들의 찬미와 추복(推服)이 이구동성으로 똑같으니, 이 점으로도 대강 고봉의 훌륭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시에 “태고 멀리 희헌(羲軒)을 추구하였고, 진원(眞源)이라 추로(鄒魯)를 소급하였네.” 하였고,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의 시에 “다른 시대 사람을 사숙하여서, 연원일랑 고정을 소급하였네.” 하였습니다. 고 충신 최경회(崔慶會)의 글에 “한류(韓柳)를 능가하여 문장이야 여사이고 정주(程朱)를 계승하여 도덕을 실천하였네.” 하였고, 문민공(文敏公) 김계휘(金繼輝)의 말에 “그의 언론을 듣노라면 마치 장강대하가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 학자들이 우러르기를 태산북두처럼 하였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의 말에 “사대부가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처럼 바라보고 의지하여 믿었으며, 언제나 조정에 큰 의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고봉의 한마디 말을 기다려 결정하였다. 선류(善類)가 참화를 당하고 권간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때를 당하여 사기가 시들어 부진하였는데 고봉이 그 사이에 우뚝하게 서서 마치 제방이 거센 물을 막는 것처럼 하였고, 명현(名賢)을 끌어들여 조정에 진출시키고 간소배(奸小輩)를 꺾어 물리쳤으며, 힘써 청의(淸議)를 부추기고 교화의 법을 닦아서 밝혔기에 사림이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다. 경연에서 논사(論思)하면서 임금께 권면하고 진강하기를 밝고 간절히 하여 의리와 이욕 및 왕도와 패도의 구분, 고금 치란의 기미, 군자ㆍ소인이 진퇴ㆍ소장하는 경계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하고 극진히 개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임금 또한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면서 날로 장려를 더하니 세상 사람들이 소기묘(小己卯)로 지목하였다.” 하였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의 말에 “고봉은 박학(博學)과 웅변(雄辯)을 갖춘 데다 천인(天人)ㆍ성명(性命)의 이치와 백가(百家)ㆍ중기(衆技)의 설을 한결같이 다 분명하게 가려냈다. 이에 퇴계가 자기의 견해를 많이 굽혀 따르며 밝고 넓은 경지를 홀로 보았다는 것으로 허여하였으니, 창을 잡고 방에 들어간 경우라고 말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들의 이번 소청은 참으로 감화를 받은 바가 있어서요, 감히 근거 없는 말로 높고 지엄하신 임금께 아뢰는 것은 아닙니다.
아, 기대승은 호남에서 생장하고 도덕이 높아 남전(藍田)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옛 제도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강규(講規)를 모두 닦아 거행하여 폐지된 것을 일으켰으니, 교화가 향당(鄕黨)에서 이루어지고 은혜가 학교에 미치어 그 유풍과 여운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벅차게 감격시키고 있습니다. 신들이 천 리 먼 길을 걸어와 임금께 호소하는 것이 어찌 겉으로만 부화하게 흠모하여 그만둘 만한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하신 전하께서는 묘당(廟堂)에 하문하고 널리 공론을 채집하시어 특별히 선정신 문헌공 기대승을 문묘에 종사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성상의 덕을 빛내고 사문을 다행하게 하소서. 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전하께 호소하며 삼가 유음(兪音)이 내리기를 기다립니다.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근일에 이 문제에 대해 대신의 연주(筵奏)가 있었다. 그런데 문묘에 종향(從享)하는 것은 막중한 예가 아닌가.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기(氣)로써……있다 : 주자 집주 원문에는 ‘附’ 자가 ‘賦’로 되어 있다.
[주D-002]우뚝 서고 홀로 걸어 : 《예기(禮記)》〈유행(儒行)〉에서 온 말로, 뜻과 행실이 고결하여 시류(時流)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03]종묘와……적었습니다 : 퇴계의 진면목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자장(子張)〉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말을 빌려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말을 전하자 자공이 “집에다 비유하자면 나의 담장은 어깨 높이라 나의 살림을 엿볼 수 있지만, 부자의 담장은 몇 길이라 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알 수가 없소. 그런데 그 문으로 들어가 본 이도 사실 드무니 숙손무숙의 말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4]유양(游楊) :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의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유작(游酢 : 1053~1123)과 양시(楊時 : 1053~1135)를 아울러 부른 말이다. 유작은 자는 정부(定夫), 호는 광평(廣平),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양시는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검남(劍南)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나종언(羅從彦)과 이동(李侗) 등을 거쳐 주자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주D-005]황채(黃蔡) : 황간(黃榦 : 1152~1221)과 채원정(蔡元定 : 1135~1198)을 아울러 부른 말이다. 황간은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채원정은 자는 계통(季通),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아들 채연(蔡淵), 채항(蔡沆), 채침(蔡沈)에게 가학으로 계승되었다.
[주D-006]군자는……둔다 : 《논어》〈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7]부자(夫子)께서……못하였다 : 《논어》〈공야장(公冶長)〉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8]소씨(邵氏)가……것 : 소씨는 송나라 소옹(邵雍)을 말한다. 소옹이 젊었을 때 소문산(蘇門山) 백원(百源) 위에 몇 년 동안 살면서 몸소 밥을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는 한편 학문에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宋元學案 卷9 百源學案上》
[주D-009]‘격치성정(格致誠正)’부터 ‘수제치평(修齊治平)’까지 : 《대학장구》의 팔조목으로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주D-010]‘천명솔성(天命率性)’부터 ‘무성무취(無聲無臭)’까지 : 《중용장구》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글이다. 천명솔성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기품을 성이라 하고 그 본성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을 도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의 약칭이고, 무성무취는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의 약칭이다.
[주D-011]정지운(鄭之雲) : 1509~156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다. 김정국(金正國)과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에 천거하는 이가 있었지만 나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치를 구명하고, 그 뒤 1553년(명종8) 퇴계의 의견을 따라 다시 정정하였다. 정지운이 당시 들고 온 〈천명도설〉은 퇴계의 가르침을 받아 정정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오류가 있다고 고봉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주D-012]원형이정(元亨利貞)은……정이다 : 《회암집(晦庵集)》 권67〈원형이정설(元亨利貞說)〉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3]천지의……아니다 : 두 구절 모두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에 수록된 말이다.
[주D-014]기는……존재한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에 실려 있는 말이다.
[주D-015]음양에……아니다 : 《성리군서구해(性理群書句解)》에서 주자가 〈태극도(太極圖)〉를 설명하며 한 말이다.
[주D-016]도심은……나온다 : 주자가 〈중용장구 서(中庸章句序)〉에서 한 말이다.
[주D-017]부드러움과……되고 :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경계하고 돕는다는 말이다. 성질이 급했던 서문표(西門豹)는 부드러운 가죽〔韋〕을 몸에 지녀 관대함을 유지하고, 성질이 느슨했던 동안우(董安宇)는 팽팽한 시위〔弦〕를 몸에 지녀 긴장함을 유지했다. 《韓非子 觀行》 여기서는 성격이 관유한 퇴계와 자질이 강명한 고봉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말이다.
[주D-018]장현광(張顯光) : 1554~1637.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누차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줄곧 사양하고 산림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여헌집》, 《성리설(性理說)》,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주D-019]5월 : 7월의 잘못인 듯하다. 명종의 승하는 6월 28일이었고, 〈고봉 선생연보〉에도 7월에 공의전(恭懿殿)의 복을 논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20]공의전(恭懿殿)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 1514~1577)의 존호이다.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따님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다.
[주D-021]계체(繼體) : 밖에서 들어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2]덕흥(德興)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 : 1530~1559)를 말한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패(景伂)로, 선조의 부친이자 중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창빈 안씨(昌嬪安氏)이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으니 그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 균(均)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고, 1570년(선조3) 덕흥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묘는 의정부시 수락산(水落山)에 있다.
[주D-023]희헌(羲軒) : 복희씨(伏羲氏)와 헌원씨(軒轅氏)를 아울러 부른 말이다. 모두 고대의 성군(聖君)으로, 여기서는 풍속이 순박한 시대를 말한다.
[주D-024]추로(鄒魯) : 맹자의 고향과 공자의 고국을 아울러 부른 말로, 공맹의 유학을 가리킨다.
[주D-025]고경명(高敬命) :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으로 부친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였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과 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제봉집》과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주D-026]고정(考亭) : 주자가 강학한 장소로, 그 학파를 고정학파라고 한다. 여기서는 주자학을 의미한다.
[주D-027]한유(韓柳) : 한유(韓愈 : 768~824)와 유종원(柳宗元 : 773~819)을 아울러 부른 말이다. 한유의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출신이다.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수사에 치중하는 변려문을 반대하고,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고문(古文)을 창도하였다. 저서에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유종원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하동(河東)이며 장안(長安) 출신이다. 고문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며, 산수시에 특히 뛰어나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저서에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고문운동을 주도하였다.
[주D-028]정직함과……세 가지 : 도움이 되는 벗의 세 가지 덕목을 말한다. 공자가 도움이 되는 벗의 세 유형을 거론하며 “벗이 정직하고 벗이 진실하고 벗이 식견이 많으면 도움이 되는 벗이다.〔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고 하였다. 《論語 季氏》
[주D-029]장유(張維) : 1587~163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조 참판, 부제학 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호종하였다. 뒤에 대제학이 되었고,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론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계곡집》과 《계곡만필(谿谷漫筆)》 등이 있다.
[주D-030]남전(藍田) 여씨향약(呂氏鄕約) : 남전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고을 이름이다. 여씨향약은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는 등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6 善行》
[주D-031]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 송나라 4대 서원의 하나로,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에 있다. 1179년(고려 명종9) 주자가 남강군 태수(南康軍太守)로 부임하여 예전의 학관을 중수하고, 직접 강학을 하던 곳이다. 주자가 여기에 정한 동규(洞規)는 오륜(五倫)ㆍ오교(五敎)ㆍ수신(修身)ㆍ처사(處事)ㆍ접물(接物)에 대한 요령을 정해 놓은 것이다.
[주D-032]아술(蛾術)의 공 : 아(蛾)는 개미를 뜻한다. 개미는 하찮은 벌레이지만 끊임없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계속하여 마침내 큰 둑을 만든다. 학문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닦아야 성취가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예기》〈학기(學記)〉에 “개미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워 익힌다.〔蛾子時術之〕” 하였다.
[주D-033]아육(莪育)의 교화 : 아육은 어린 다북쑥이 자라서 약쑥이 되듯이 부모가 어린 아기를 길러 장성시킴을 비유한 말인데, 스승도 부모처럼 무지몽매한 사람을 가르쳐 어질게 만들어 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詩經 小雅 蓼莪》
[주D-034]문묘종사의(文廟從祀議) : 명 헌종 원년인 1465년(세조11) 12월에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이신(李伸)이 원나라 학자 유인(劉因)을 문묘에 종사시키자고 말하자 헌종이 유신(儒臣)들에게 그 가부를 논의하게 하였는데, 태상시소경 겸 시독학사(太常寺少卿兼侍讀學士) 유정지(劉定之)가 그것은 불가하다는 뜻으로 올린 글이다. 《續文獻通考 卷48 學校2》
[주D-035]이윤(伊尹)과……인물 : 명나라 방효유(方孝孺)가 지은 〈제갈무후찬(諸葛武侯贊)〉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두고 “그분의 훌륭함 논해 보자면 이윤과 여상에 버금가네.〔論其所存 伊呂流亞〕”라고 찬양하였다. 《遜志齋集》
[주D-036]문모(文母) :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로서 황모(皇母)와 같다. 여기서는 순조(純祖)의 조모이자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를 가리키는 듯하다. 《시경》〈주송(周頌) 옹(雝)〉에 “이미 황고(皇考)를 높이고 문모를 높이게 하셨도다.〔旣右烈考 亦右文母〕” 하였다.
[주D-037]개물성무(開物成務) : 사물의 진상(眞象)을 드러내어 인사(人事)로 하여금 각기 그 온당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주역》〈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易)은 개물성무하고 천하의 일체 도리를 포괄하니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夫易開物成務 冒天下之道 如斯而已者也〕” 하였다.
[주D-038]소요부(邵堯夫)가……것 : 소요부는 송나라 소옹(邵雍)을 말한다. 소옹이 젊었을 때 소문산(蘇門山) 백원 위에 몇 년 동안 살면서 몸소 밥을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는 한편 학문에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宋元學案 卷9 百源學案上》
[주D-039]양중립(楊中立)에……경우 : 중립은 송나라 양시(楊時)의 자로, 검남(劍南) 장락(長樂) 사람이다. 양시가 24세 때인 1076년(고려 문종30)에 진사(進士)가 되어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스승의 예를 갖추어 정호(程顥)를 영창(潁昌)에서 찾아뵈었다. 정호는 그를 인정하여 높이 평가하고 글을 다 배우고 돌아갈 때 다정하게 전송하면서 “오도가 남으로 가는구나.” 하였다고 한다. 《宋元學案 卷25 龜山學案》
[주D-040]정숙자(程叔子)가……것 : 정숙자는 정이(程頤)를 말한다. 철종(哲宗) 초기에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의 천거로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가 되어 장엄한 모습으로 항상 민첩하게 임금을 일깨웠다. 여공저와 범순인(范純仁)이 경연에 입시하였다가 정이의 강설(講說)을 듣고 감탄하여 “진정한 시강이다.” 하였다고 한다. 《宋元學案 卷15 伊川學案上》
[주D-041]우러러볼수록……단단했는데도 : 성인의 도를 부단히 배우는 것을 말한다. 《논어》〈자한(子罕)〉에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다.〔仰之彌高 鑽之彌堅〕” 하였다.
[주D-042]사양좌(謝良佐) : 1050~1103. 자는 현도(顯道),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상채(上蔡) 사람이다. 정호(程顥)가 지부구사(知扶溝事)로 있을 때 수학하였다. 상채학파(上蔡學派)의 비조로서 상채(上蔡) 선생으로 불렸다. 그의 사상은 다분히 선불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주자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가 있다.
[주D-043]여희철(呂希哲) : 1039~1116. 자는 원명(原明)이며, 변경(汴京) 사람이다. 여공저(呂公著)의 아들로, 범조우(范祖禹)의 추천을 받아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를 지냈다. 정이(程頤)와 나이가 서로 비슷하였지만, 정이의 학문을 깊이 존경하여 나중에는 스승으로 섬겼다. 저서에 《형양공설(滎陽公說)》이 있다.
[주D-044]유작(游酢) : 1053~1123. 자는 정부(定夫), 호는 광평(廣平),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주D-045]양시(楊時) : 1053~1135.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검남(劍南)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나종언(羅從彦)과 이동(李侗) 등을 거쳐 주자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주D-046]양집(楊楫) : ?~1213. 자는 통로(通老), 호는 열당(悅堂)이며, 장계(長溪) 사람이다. 양방(楊方), 양간(楊簡)과 함께 주자를 사사하여 ‘삼양(三楊)’이라고 일컬어졌다. 저서에 《열당문집(悅堂文集)》이 있다.
[주D-047]채원정(蔡元定) : 1135~1198. 자는 계통(季通),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 채발(蔡發)에게 정자의 학문을 배웠으며, 뒤에 주희에게 찾아가 수학하여 그의 이학(理學)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권신 한탁주(韓侂胄)가 이학을 위학(僞學)이라며 금하자,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학문과 강학에만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채연(蔡淵), 채항(蔡沆), 채침(蔡沈)에게 가학으로 계승되었다. 저서에 《홍범해(洪範解)》, 《팔진도설(八陳圖說)》 등이 있다.
[주D-048]섭미도(葉味道) : 초명은 하손(賀孫), 자는 지도(知道),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수(文修)이며,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 사람이다. 주자를 사사(師事)하였는데, 당시 주자학(朱子學)을 금하고 있던 터라 지공거(知貢擧) 호굉(胡紘)의 배척을 받았다. 저서에 《사서설(四書說)》 등이 있으며, 《주자어록(朱子語錄)》을 편집하였다.
[주D-049]진순(陳淳) : 1159~1223. 자는 안경(安卿), 호는 북계(北溪),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장주(漳州) 용계(龍溪) 사람이다. 주자가 장주 태수(漳州太守)로 있을 때 나아가 수학하여 황간(黃榦)과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 저서에 《북계자의(北溪字義)》 등이 있다.
[주D-050]하기(何基) : 1188~1269. 자는 자공(子恭), 호는 북산(北山), 시호는 문정(文定)이며, 금화(金華) 사람이다. 주자의 문인인 황간에게 수학하였다. 금화산(金華山) 북쪽에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며 주자학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왕백(王柏), 김이상(金履祥), 허겸(許謙)과 함께 ‘금화 사선생(金華四先生)’이라 불렸다. 저서에 《대학발휘(大學發揮)》, 《중용발휘(中庸發揮)》, 《태극도설발휘(太極圖說發揮)》 등이 있다.
[주D-051]왕백(王柏) : 1197~1274. 자는 회지(會之) 또는 백회(伯會), 호는 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금화(金華) 사람이다. 조부 왕사유(王師愈)는 양시(楊時)의 제자이고, 부친 왕한(王瀚)은 여조겸(呂祖謙)에게 수학하였으며, 자신은 하기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벗 왕개지(汪開之)와 함께 주자가 주해한 사서에 대해 정밀히 연구하였으며, 저서에 《독역기(讀易記)》, 《독서기(讀書記)》 등이 있다.
[주D-052]김이상(金履祥) : 1232~1303. 자는 길보(吉父), 호는 차농(次農),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난계(蘭溪) 사람이다. 송말원초 때 학자로, 왕백과 하기에게 배웠다. 원나라가 들어서자 벼슬하지 않고 인산(仁山)에 은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산 선생’이라 불렀다. 저서에 《상서주(尙書注)》, 《논어집주고증(論語集注考證)》, 《맹자집주고증(孟子集注考證)》 등이 있다.
[주D-053]창을……경우 : 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한 3책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이를 읽고 논박하여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잡고서 나를 치는구나.” 하고 탄식한 데 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여기서는 고봉이 퇴계의 설을 깊이 이해한 뒤에 퇴계의 이론을 가지고 퇴계의 주장을 비판하여 더 발전시켰음을 말한다.

 

壺谷集卷之十五
 
看瀑亭記 a_131_343a


西溪先生集卷之七
 序 十十九首
水落山詩後序 a_134_136d


三角,道峯。近都之雄。與夫水落鼎峙而尊。故能使四134_137a旁諸山。斂袵環向。大小戢戢。似兒比孫。蓋峻拔之勢。二阜甲乙。幽絶多奇。東峯是最。雖彼終南太華之鎭咸京。少室嵩高之配洛邑。論其壯麗。未足喩也。嘗與數子。登于絶頂。初則崎嶇入深。若坐井而墮冢。終而軒豁無憑。似御風而登仙。固亦人間之一快也。至其城郭隱映。萬戶夕煙。江流曲折。千里朝宗。西南則雲海澒洞。東北則嵐嶂杳冥。獻奇效媚。隨步而異。心目不能領其要。丹靑不能寫其狀。又豈非寰內之瓌觀也。時則秋景向衰。江山淸瘦。楓崖黦丹。菊潭殞黃。旣憀慄而興感。亦悽惻而傷懷。況乎淸寒舊拪。藤老樹134_137b死。人亡跡廢。怊悵獨來。對蒼壁之萬仞。挹遺芬於千古。益令人慨然增其不平也。夜宿禪院。朝飮鳧池。徘佪眷戀。若不可捨。豈人情爾耶。抑山川使然也。旣下。爲詩各若干篇。歲在丁巳維九月晦。記之以文。西溪樵叟

 

 

 西溪先生集卷之七
 편001
送崔參判 錫鼎 赴燕序 a_134_139d


士不幸而生偏陋。未覩夫中國之大而履先王之舊迹。但讀書傳。馳情萬里。寄懷千載。有時撫卷。興歎抑鬱。中宵而不自得。寧不哀哉。其幸而得備行人。游乎中國。覩前之欲覩而未覩。踐向之思踐而未踐。斯可以償宿負愜素期。無復有餘恨遺嘅也。而乃又不幸。世有汚隆。涉其域履其土。見其人觀其俗。衣冠而變易久矣。文物而掃除盡矣。舊國故都。悵然而已。玆又134_140a不足悲歟。今子之行。將過遼東歷薊丘。想軒后而思幼安。彼逃難全志。遺風旣遠。驅獸肇錄。聖跡遂泯。則詎不有以起遙慕激深感。悒悒而懷不可作之恨耶。子之所得於是行者。將不過此。聊道之。以爲子之贈。子至彼也。其必念余言哉。


[편-001]十 :

 西溪先生集卷之七
 편001
遲川集序 a_134_140d


語云。太上立德。其次立事。其次立言。此本末之論也。德爲本而事與言爲末。餘德苟有於身。施之以爲事業功烈。發之以爲言語文章。考其功之所就。觀其文之所著。其所存之本。斯可見矣。又孰得以蔽之哉。竊嘗謂崔文忠公。有大功於世者三。與諸公定謀決策。黜昏亂翼明聖。明彝倫於天地之間。此公之功一134_141a也。方禮議之興。諸老長者或不能深明乎昭穆之序不可以毫髮紊也。源流本末之統不可以毫髮間也。乃引旁說之疑似而參之。蓋擧世靡然趨之而不復察其誤。於是。公獨蒙衆口之訕謗。辨群議之得失。其論甚詳。其言甚覈。終有不可以奪之者。遂使尊親之分。得以大定。此公之功二也。西敵漸張。強弱之不抗。又孰不知。而諸公悠悠坐談空虛。曾莫爲觀時詘信之圖。至兵及城下。上下始覺。當此之時。雖素負專聶之決。當倚信布之勇。無不變色失氣。不省所以爲。公乃以不滿六尺之身。亦無數騎之從。馳入敵軍。以緩134_141b其鋒。六馭之投間改路。得趣南漢。誰之力歟。剽掠已遍於五路。圍守不解於孤城。江都傾陷。腹心先潰。出入兵間。周旋左右。以口舌鬪鋒鏑。以脆柔調暴桀。卒能全社稷於垂覆。安生民於旣危。此又誰之功也。東土之人。得奠其枕席。保其子孫。皆公之賜。顧今之談者。賴其力而訾其人。不已舛乎。公之論事。委曲明切。無愧陸宣公。而俯仰之間。輒微動盈溢之氣。見其爲英果所發。此又豈止近代所未有而已也。前輩於文。皆推谿谷。公之平日。亦未嘗不讓其能。愚獨以爲谿谷不免爲鈆槧所役。尙不如公之流出胸中。綽134_141c有餘味。蓋蘊蓄明識。形於言語。非人所及。詩亦絶高。世之自負其工者。或莫能彷彿。由此論之。向所謂考觀其事業文章。可以見其人之所存者。在公爲何如也。公之詩文共幾卷。名之曰遲川集。見行于世。嗚呼。斯集也將久而不敝。後之欲知公者。於此求之。庶乎得其一二。
134_141d西溪先生集卷之七


[편-001]十 :

西溪先生集卷之九
 誌銘 一四首
完陵君崔公墓誌銘 a_134_183b


公諱後亮。字漢卿。姓崔氏。自號靜修齋。其先完山人。高麗世純爵。官上將軍。其後蟬聯。代有聞人。九代祖有慶。國初。參贊議政府事。諡平度。生士康。左贊成。諡敬節。高祖諱嶪終。氷庫別提。曾祖諱秀俊。不仕。大父諱起南。少以文行著名。晩擢第。歷館閣檢舍。値光海時。卒官通政永興府使。父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諱鳴吉。初配張夫人。玉城府院君晩之女。夫人無子。文忠公取弟吏曹參判惠吉子爲嗣。公是也。母九畹李公春元之女。以丙辰八月二十日生公。三歲134_183c失母。九歲而文忠公使張夫人子之。十二歲而夫人又卒。及丙子之難。公纔踰弱冠。時文忠繼娶許夫人。公奉母避兵江都。及江都陷。城中士女多被搶掠。公挺身往見虜將。排劍槊以入。立於前。虜將異而問之。公對曰。聞軍中禁不得侵撓李相國,崔尙書家。我乃崔尙書子。特來相聞。虜將問何以驗之。對曰。驗諸國人。於是虜將詢得其實。出令護崔尙書家。城中人賴以得全者衆。文忠公主和議。淸人知之。李公廷龜。名聞華夷。故爲之保全此二家。當仁祖二十年壬午秋。淸人得獨步事。文忠公被拘瀋陽。禍且不測。公日134_183d夜叩心。乘遞三赴瀋。周旋前後事。竟得解。乙酉歲。文忘公始東還。客有言者曰。公之子年少書生。能潛消大禍。其才如是。文忠唯云才出於誠。至丁亥五月。遭文忠公憂。喪祭無違禮。初公在瀋中。病怔忡及眼障。及是增劇。辛卯。疾稍間。中生員。孝宗甲午。補南別殿參奉。病不仕。復除四山監役。未久亦罷。年五十以後。舊疾益蠲。至顯宗丙午。拜翊衛司侍直。敍陞歸厚別提。遷宗簿主簿,工曹佐郞,忠勳都事。庚戌春。出爲白川郡守。是年秋大饑。餓莩載道。公殫心拯活。造屋五十餘間。以居流丐之民。擇邑中善良任之。以事134_184a飭吏胥絶奸弊。每朝。躬至賑所。分饋粥糜。男女不得雜坐。疾病必有養也。其土着者。計口給糧。無廢耕作。至秋大熟。民不病焉。公曰。活千人者。非誠不能。吾敢忽諸。未久。以疾去官。其民思之。久而不已。父老相與言曰。歲在辛亥。生民大困。向非崔侯。我無類矣。爾有子孫。誰之賜也。因立碑頌德焉。今上乙卯。爲司僕僉正。公不樂仕宦。數月病免。太僕膏腴地。居之者多濡滯。及公去之速。老吏以爲異事。後又拜珍山,沔川。皆不赴曰。吾年衰多病。不如在家之安。己未春。又除榮川郡守。亦非意所喜。勉赴一歲而又免歸。庚申歲。134_184b討逆會盟。公以勳胄進階通政。明年春。除淸風府使。地勝俗淳。嘯詠自適。扁舟藍輿。放意山水間。郡亦以治。秩滿歸。民爲立碑。乙丑。公年七十。因子列侍從推恩。復進階嘉善。襲封完陵君。拜漢城左尹兼副摠管。數月解官。淸坐終日。對客觀棋。種花蒔藥以自娛曰。古謂草澤閑人。居王公之上。吾雖非草澤。得爲閑人以終餘年。不亦樂乎。己巳。時事又變。公杜門謝客。絶不談世事。至癸酉十二月一日。卒于正寢。壽七十八。明年二月。葬于楊州天磨山下板谷負艮之原。從先兆也。夫人祔焉。公天資英果。和而能莊。愛人喜施。人134_184c皆傾慕。文忠公深倚仗。內而家政。外則邦猷。無不參定。其在瀋中。鄭文學雷卿。謀殺鄭命守。事覺。禍不測。公憐之。獻詩孝宗曰。天下卽今無節俠。窮途知己更誰憑。虞卿急士歸公子。莫使侯生恨信陵。孝宗爲之悒然。時孝宗以大君。亦質于瀋也。參判公聞鄭公將被禍。慮公與其謀。甚憂之。文忠公笑曰。毋憂也。是子豈浪死者哉。及西報至。公果無他。諸公聞之。皆稱爲父子知己。淸陰金公。白江李公。旣與文忠同拘瀋。淸陰謂文忠曰。古人樂有賢父兄。今公有子弟賢。豈不樂乎。白江東還。每語公。嘖嘖不已。公少從谿134_184d谷游。中嬰沈痾。雖不能專於學。然好觀前史。終日忘倦。其律已甚嚴。留瀋館者三年。常獨居。關西稱妓樂之盛。往來經由。或至數月。泊然一無所近。及夫人卒。不蓄姬妾。唯子弟侍側而已。內行甚備。與弟應敎後尙。友愛篤至。田宅僮僕。必擇其良以與。其資贈庶妹亦厚曰。先公血屬。唯此二人。豈可使其窮乏也。應敎君語其室曰。吾於世無心契。獨有兄爲知己。又曰。吾兄正大人。庶弟後章。早孤無依。養於家。使得成立。及諸親從之貧窮者。多經紀其嫁娶。尤謹奉先。置祭田立祠堂修譜牒。爲遠祖樹墓碑。凡祭祀。遵文忠遺敎。134_185a不敢過。公有沈慮遠度。爲前輩所賞重。如淸陰,浦渚,谿谷,延陽,白江諸老。深加奬許。李咸陵澥,朴公潢,具公鳳瑞。皆託以忘年。當顯宗世。黨議紛爭。多以爲憂。公獨語諸子曰。今日猶太平。汝輩後當自知。及甲寅以後。朝著屢變。士大夫多被刑禍。庚申。舊人復進用於時。公謂不出數年。事又當變。或言時無釁隙。公笑曰。世故推遷則釁自生矣。已而。有己巳之事。公言卒皆驗。諸人爭廢妃事被禍。公時已疾困。聞之流涕曰。吾歷世變多矣。老病不死。又見此事。己巳。奪資爲通政。甲戌。改紀。公已下世。復官致祭如儀。夫人134_185b安氏。觀察使獻徵之女。莊重端愨。淸素簡深。性勤紡績。絶去芬華。撫恤窮族。曲有恩意。撫御婢使。得其歡心焉。生以辛酉九月十日。卒以癸丑四月。壽僅五十三。擧三男二女。男長錫晉縣令。次錫鼎領議政。次錫恒大司諫。女適進士尹濟明,正郞申轂。縣令四男。昌憲生員。昌演司議。昌敏,昌億。議政一男。昌大校理。二女。適李聖輝,李景佐。尹濟眀一女。適趙命迪。申轂五女。長李聖臣。次尹敬龍。餘幼。昌憲一男守哲。一女李明復進士。昌演二男四女。昌敏二男一女。昌億一女皆幼。銘曰。
134_185c文忠有子。完陵挺擢。方世變初。天地反覆。江都傾陷。一城魚肉。刀矟如林。不懾不愕。殊類動色。保我邦族。壬午之事。禍尤不測。三走浿瀋。風餐露宿。連環可解。神鬼震薄。及夫東還。袖手斂迹。無事可見。我仕以祿。亦縻郡紱。少試勞勣。晩躋貳列。封爵乃續。非嗇厥施。天人互得。旣耆旣壽。胤嗣赫奕。載銘幽穸。庸詔千億。
134_185d西溪先生集卷之九


 西溪先生集卷之十一
 碑銘 五首
領議政完城府院君崔公神道碑銘 a_134_224d


才足以救一代危亡之禍。識足以破衆論疑似之惑。忠則爲社稷之計策而身家不顧。勇則撫虎狼之爪134_225a吻而顧色不懾。斯皆爲天下之至難而君子之所深與也。若相國文忠公者。其志槩所存。功業所立。豈不亦炳朗前後。卓絶今昔也哉。雖其苦心血誠。可質神明。獨得之見。不同於衆。深至之論。難諧於俗。所以訾議四起。幾沈一世。天定終必勝。人心不可誣。蓋不待百年。先生長者並公時而稱公者。其言漸出。學士大夫後公時而談公者。其論漸平。至是則公之平日自靖於心者。可以有辭于天下後世而無愧色矣。公諱鳴吉。字子謙。姓崔氏。其先全州人。自高麗至本朝。名德相望。曾大父諱嶪。氷庫別提贈吏曹判書。大父134_225b諱秀俊。不仕。贈左贊成。父諱起南。永興府使贈領議政。三世贈官。皆以公貴。議政公號晩翁。少游牛溪之門。文行著名。爲時所擠。宦不達。母全州柳氏。觀察使永立女。公生以宣祖十九年丙戌乙巳。爲生員狀元。仍擢文科。申玄軒謂人。子謙雖羸疾。終必爲名世器。選槐院。己酉。薦史館不就。敍典籍數年中。歷監察諸曹郞。坐事削黜。丙辰丁內艱。己未丁外艱。光海失道。虐殺永昌。幽閉大妃。公與諸公。密議建大策。諸公謁仁祖於私第。公獨不肯曰。義無私謁。久之。議不時決。公以爲引日持久。大事易敗。乃自卜日定計。134_225c癸亥三月癸卯。奉仁祖承大統。迎大妃於西宮。首除吏曹佐郞。轉正郞。夏。擢拜參議。是冬。策靖社功臣一等。進階。封完城君。參判吏曹。甲子春。逆适稱兵。大駕南巡。公爲摠督副使。會張元帥破賊於鞍嶺。乙丑春。上箚論官制。宜稍復古。以正治本。不果用。爲副提學。移大司憲。俄拜副學。箚陳十二事。皆切中時病。上之始踐大位。追尊元宗爲大院君。尊仁獻王后爲啓運宮。及丙寅仁獻薨。上欲服三年。朝議引爲人後不貳斬。合辭爭之。上又欲服杖期。諸臣又力請降服不杖期。以上弟綾原爲喪主。公獨言134_225d父爲士。子爲天子諸侯。葬以士。祭以天子諸侯。今日之禮。唯此爲的證。旣而。諸公論說紛紜。莫適所定。公又上劄萬餘言。極論降服立後之失曰。殿下乃承重也。非出繼也。直承祖統而目以爲人後。君之父母而待之以旁親。其蔽將至於毀禮制滅大倫。可不懼哉。仍請立別廟而自主祭。重忤朝議。被參解職。丁卯春。北兵渡浿。長驅深入。朝野洶懼。旣師及平壤。則騰書於我以要和。公以爲敵張甚。宜巽辭緩其鋒。諸公意合。令張新豐爲書答其意。然敵人進兵不已。上出幸江都。而北使再以和未求見上。公復言兵134_226a交使在其間。可聽。朝延從之。北兵至平山而和始決。於是師退不復東。時敵近而行朝兵單弱。上下危怖。計唯在和。但不敢言。及至敵退。則又紛然以和咎公。言者交章請貶竄。不許。公旣不安於朝。久處江上。秋。遷章陵。將過都城。衆議以私親之喪。不當穿城以過。欲發民治道城東峻坂。公獨爭以爲不可。大臣亦悟乃止。啓運旣禫。將合祔。公復請別建廟稱禰制樂章。爲論者所斥。求出觀察京畿。至己巳。前後輩論議不合。有老少之目。昇平愬於上。指名流五六人爲朋黨。上怒甚。竄世堂先公及兪公伯曾,羅公134_226b萬甲。而張公維。亦出補羅州。公極陳前後輩相責望。非爲朋黨。上感悟。三學士俄皆放還。張公亦徵。時公掌治軍籍成。進階。明年。拜右參贊。毛文龍旣死。陳繼盛代領其衆。劉興治又殺繼盛而代之。我欲興兵問罪。公曰。椵島雖飢疲。衆猶數萬。困獸猶能傷人。況數萬之衆。懷必死之心。憑依險阻。今乃環守孤島。曠日糧竭。欲戰則難。欲罷損威。動衆越海。不計農時。與死寇角。非計也。後兵果不發。辛未春。召諸功臣於春暉堂。世子及兩王子皆侍上。親擧觴勸酒。又賀公新得男。一時以爲榮。夏。上欲追崇章陵。廷議134_226c爭不可。欲請之天子。又以爲不可。五月。特授公副提學。蓋上意以公持論稍異廷臣。欲以自助。公又劄陳廷臣議禮之失。且申別廟之說曰。加隆之擧。禮無明文。事涉義起。廷議不同。而奏請居先。朝廷之不敢承順。固也。議禮以來。于今九年。老師宿儒。旁搜廣引。皆非今日的證。獨葬以士。祭以諸侯。最爲可据。臣之所執。只此耳。壬申。拜宗伯。兼藝文提學。上敎曰。聖人之孝。以尊親爲大。考廟不可久在陋巷。禰位不可遂空。令禮官速議。公又請倣光武故事。建別廟。上嚴責之。蓋公所請。唯在別廟。減之爲降服。加134_226d之爲追崇。皆非公意。故始忤朝議。終被上責。冬。拜吏曹判書。進崇政。授兩館大提學。又兼體察副使。公前後秉銓。破朋黨恢公道。進賢才退罷軟。選用得人。世稱中興以來。秉政公明。以公爲首。乙亥春。解銓。夏。長地官。丙子春。以疾免。夏。長夏官。又以病辭。秋。判漢城。是年春。淸人始稱帝使來。朝議欲無納其書。但以口語拒之。公謂彼跨據大漠。無所受制。肆然稱帝。誰復禁止。而必欲藉口於我。其心或難知。若但拒以口語事。暗昧無證。如使反其辭以誣我。我則何以自解於天下。今宜爲一書。言大號不可僭。臣節不可易。因134_227a將虜書及我所答。聞于皇朝。飭兵馬以待其變。彼以春信弔祭爲名而已。悖者乃八固山及蒙古王子書也。報其禮而拒其悖。於計爲宜。今特有早晩。等是被兵。但不可朦朧以見賣。輕絶以促兵。北使果以不受書。發怒徑歸。公知必有兵。見上曰。虜使徑歸。渝盟必矣。請早講戰守。時朝議紛然。斥和而無備敵之策。公獨深憂之。上箚曰。近日臺諫皆斥和。而廟堂無定算。旣不用言者決戰守。又不用臣策以緩禍朝。虜騎長驅。生靈魚肉。宗社播越。咎將誰任。臣願體臣帥臣。開府關西。約束諸將。有進無退。移書瀋陽。備134_227b陳大義。因探虜情。使彼無他意。姑守兄弟之約。內修政事。以爲後圖。如其不然。堅守龍灣。決於一戰。雖計未萬全。猶愈於束手待亡。一向媕婀。欲言進戰。不無疑懼。欲言羈縻。又恐謗議。江氷將合。禍迫目 前。特汝議定。我已渡江者。不幸近之矣。公知倉卒挑釁。憂在必亡。每欲巽辭緩禍。得以其間爲戰守策。冒衆議屢陳計。言者爭以主和攻公。公又言石晉時景延廣激契丹之怒。桑維翰請遜辭以謝出。帝不聽。其後不能自存。始復請稱臣。契丹不許而晉遂亡。朱子於綱目敗延廣。胡安國亦譏延廣。輕背信好。自生釁端。亡其134_227c身以及其君。夫人臣謀國。不存遠慮以致亡。其事雖正。罪不可逃也。宣祖時。天朝諸將倦用兵有和計。令我請於天朝。成渾謂可許。李廷馣繼發。將被罪。渾憐其忠。於上前救解。宣祖大怒。自是論者攻渾益急。渾言韓胄伐金。先儒罪之以危社稷。張南軒亦言金不可伐。此以宗社爲重。而相時度力爲義耳。今日旣無石晉兵力。又非祖宗之讎。是非得失。不難定矣。議者謂丁卯和固不害。今虜已僭號。不可通使。彼之僭號。非我所當問也。臣爲此羈縻之言者。非敢不顧是非。徒爲利害之說。酌之以時義。參之134_227d以往迹。信其必然。嘗竊以國弱虜強。姑守丁卯之約。緩數年之禍。築城儲糧。益固邊備。斂兵觀釁。計無出此。出入爭議。焦唇乾舌。不自知止。豈有他哉。閔宗國之將危。一身利害。不暇計耳。群議又譁然改之。十一月。還天官。十二月。淸主自將伐我前鋒。輕騎疾馳。數日至西郊。十四日。上幸江都。至南門。而敵騎塞路。上駐駕御城樓。召群臣問計。時事急。上下失色。不知所出。公進曰。事在呼吸。不可緩也。臣以單騎逆之。責其渝盟。彼若意不在好。肆其兇暴。臣死劍下。若不拒臣。客主相遇。往復難問。躊躇之頃。可以得間。近134_228a京之固。無如南漢。請回駕馳入。以觀其變。上曰。計則可矣。卿獨捨命投虎口。以解君之急。古人所難。嗟歎而遣之。公又言李景稷慷慨有氣節。請與俱。及辭行。徹禁兵。二十騎使從出城。從騎皆散。公獨與李公及一軍校疾馳。及於沙嶺而遇敵騎。駐馬與語。詰其敗盟興兵之故。敵將但請早決和戰。公故久與之。言語反復。日且昃矣。於是上得東出水溝門。馳入南漢。公與敵騎俱行入都城。以所與敵言者。聞於行朝。至明日將夕而不得報。敵人大怒。以公欺己。欲害公。或不可曰。和未成。不可遽殺。進兵南漢。公等歸134_228b入見上。執手勞公曰。使廷臣皆如卿忠。豈有今日。因嗚咽流涕。時城中兵不滿萬。不能分堞以守。而敵騎大至。被山布野。圍城數重。旁出四劫。上下凜凜不保朝夕。然敵猶日遣人索和曰。和成。兵可卽罷矣。顧群議紛紛。攻和益峻。大臣持不決。公獨慨然曰。今日之計。和與戰耳。而欲戰兵弱。言和則忌。一朝城陷。上下魚肉。置宗社何地。被圍四十餘日。城幾陷者數矣。援絶糧竭。薪蒭並盡。敵以飛礟擊碎。城無完堞。人心崩沮。欲和者益多。於是而和書始成。金公尙憲痛哭於朝。手裂其書。公拾而補之曰。裂書者不可無。而134_228c補書者亦宜有。諸公皆憂不免靑城之辱。公獨曰。虜非貪我土地。其意止在於和。保無他虞。江都陷而敗報至。敵又誇我以俘獲。滿城震駭。乃有城下之盟。實丁丑正月晦日。師退而上始還都。四月。進登右揆。時煨燼盈目。庶事草草。公進以慰勉君心。退以彌縫朝政。內外稍定。上自下城後。常悒悒臨朝不怡。公諫上以爲志者。萬事之本。氣又輔志以行。養其志氣。不撓不挫。然後功可以成。一不如意。參爾摧喪。天下事無可爲。興衰傾否。更何望乎。又曰。夏有一成少康以興。越棲會稽。句踐以霸。況今國家境土無缺。134_228d祖宗德澤未艾。號令無壅於四方。財力尙餘於三南。唯在殿下立志如何。苟欲有爲。何憂不濟。公之苦心調護。其言如此。又請復署事改官制罷。銓曹郞薦。臺諫避嫌。稍正謬規。以爲撥亂刷恥之圖。下公卿議。言多異同。卒不行。又請令諸道錄陣亡將士及忠臣烈女。次第旌褒。戰場胔骼。募人掩瘞。官爲設祭。俘人贖還。制其價多少。毋得踰越。在途無資者。運粟以濟。以此所還甚衆。秋。進左揆。亂後。牛多疫死。農告病。公謂禍劇於兵。嚴屠禁。益鑄鋤斸。給貧民以利耕。下城日。約無召我兵以犯中國。是秋。竟來徵兵。李延陽請134_229a遣公以辭。公赴瀋。言我之事明三百年矣。興兵助攻。義不可。反覆爭論。淸人不能奪。其還贖俘人數千以歸。戊寅秋。進上相。北人復侵中國徵我兵。公以爲城下之盟。勢窮力屈。計非得已。今日助兵。義不可許。不肯從。淸人大怒。嘖言日至。擧朝大震。公言於上曰。我一二大臣。爲此事死。始有辭於天下後世。況此臣實主之。請往自當。於是復赴瀋。旣至則諸貴人列坐於堂。引公入詰曰。誰沮助兵。公對曰。我爲上相。無所不當。知事出於我。不敢逃死。淸主義而釋之。終公在相府。一不助兵。始公之行。人謂必死。公亦自度不免。134_229b以喪具隨。親戚子弟。皆哭送於道。公乃夷然。己卯。上寢疾久。而宮中有巫蠱獄。辭連貞明公主家。密旨令公窮其獄。公執不可。事下。又爭之力。上益怒。故遣公使于瀋。而責三司以不論公之罪。公道封章乞罷曰。臣所以不忍於公主者。不敢負先王也。不敢負殿下也。使臣待懷一切。輕起大獄。是誠難信之臣殿下安所用之。又反復江充李泌事。然以此獄終不竟到龍灣。疾甚不可行。朝廷許副价致命。庚辰春。乞解得請。二月。歸至京。又坐事罷。壬午秋。復拜相。屢祈免。敦勉不已。出視事。至十月而又赴瀋。丁丑。具134_229c請成。本末移咨陳都督弘範。冀得轉聞于皇朝。海道險遠。往來斷絶。書之必至。不可知。欲更得可往者。必歸報。會西邊獲一僧名獨步。舊居香山。游椵島。因亂不得還。轉入中國。留洪承疇軍中。戊寅秋。承疇遣獨步。歸詗東事。而爲巡江卒所得。西帥林慶業。送至京。公與語。謂堪屬此事議。白上具奏文及移咨軍門。遣獨步泛海。復入中國。至辛巳秋。中國還我俘。而獨步又與俱來得回咨。略曰。貴國苦情。天人共鑑。歷世貞順。勞不可泯。雖暫迫時勢。見窘於虜。豈復忍督過。安心協力。以效桑楡。時公居閑矣。申平城爲相。請134_229d公更撰咨文。再遣獨步。淸人覘知之。怒我來詰。捐萬金得不究。及洪承疇兵敗降。備言其事。我不知也。會李烓潛商事覺。淸人挾世子縛致烓鳳凰城。烓欲謁國陰事以祈生。遂告獨步事。於是淸人責我大臣來置對。事將不測。議者或謂事無證。不如諱之。公曰。彼知漢船往來。今不以實。益其疑。且事不可知。終至跡露則禍必重。不如以實禍。止吾與慶業死而已。上以公故。猶豫不忍決。遂行至龍灣。或謂公曰。前後送僧。皆出慶業。終不得免死。等死以委之。公可脫禍。非有負也。公曰。不可。初欲立名義於天下。臨死生則134_230a委諸人以自免可乎。諸公歎曰。忠臣烈士。固不當如是耶。時慶業亦被逮道亡命。公旣至鳳城。淸人盛兵威。引公于庭。問誰主遣僧。公曰。我實爲之主。而林慶業裝遣。旣非王命。又不與諸人謀。於是以其對。致之瀋陽。淸主使械送公。幽之北館。北館者。死獄。癸未。始移南館。時金公尙憲。李公敬輿。亦同拘一館。華人俘瀋者嗟歎言曰。東方卿相。爲中朝被執於此者三人。足見其重義也。公幽縶四年。危辱備至。常讀易不輟。甲申。淸人入燕。略定南北。乙酉。始歸我世子及兩王子。公與諸公同還。秋。寓居鎭川。結茅臥龍溪134_230b上。冬被召入都。丙戌。賜廢姜死。公乞全恩。不許。是秋。公疾甚。御醫來視。分御膳以賜。旣殆則候問相望。竟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于家。上爲之五日不御肉。三日輟朝。中使視喪。官尤殯殮。內出衣被以襚。三年致祿。所以哀恤。出於例後。上臨朝喟然曰。安得忠於上如崔完城者乎。是年八月。葬于淸州治北大栗里負坎之原。前夫人仁同張氏。右贊成晩之女。後夫人陽川許氏。宗廟令嶙之女。皆祔葬。初張夫人無子。公取從子後亮爲嗣。後許夫人生子後尙。時之士大夫。旣立後而子生。使所生子主祀。流而爲俗。公134_230c以爲父子已定。天倫有序。不可易也。請於朝。以後亮主祀。因著爲令。後亮卒官漢城左尹。襲封完陵君。後尙官止應敎。側出一女。適僉知具鐄。左尹男長錫晉縣令。次錫鼎領議政。次錫恒監司。女適進士尹濟明,正郞申轂。應敎以錫鼎爲後。公資性英果。有沈機遠識。處大議當大難。慮安而色定。勇往直前。未嘗游移兩端。沮奪衆口。望之而體不勝衣。接之而聲出金石。其所得於天者蓋如此。少游白沙,玄軒之門。二公皆深見推許。與趙公翼,張公維,李公時白。早年定交。講磨切磋。至老不變。世稱四友。學士大夫。咸歸美焉。襟134_230d懷坦夷。不設畦畛。勇於改過。樂於從善。人規其失誠心開納。喜形於色。及際遭中興。聖君在上。賢士滿朝。公以元勳。職居樞要。身任經濟。每欲保合群才。改紀庶政。以固國勢。以禦外侮。其所區畫。見於章奏。莫不精確。然前困禮論。後激和議。枘鑿不入。終不克大展。可勝歎哉。然別廟之說。折衷變禮。根据經史。以明禰祖之失。至於和議。審量時義。初不欲橫挑強敵。自速顚覆。又不忍以宗社之重。從溝瀆之諒。此與明之嘉靖。宋之靖康。不可比論也甚明。而人或眩於名實。絀心徇跡。至欲同科而共譏。不亦舛乎。臨事善斷。134_231a剖析是非。若指諸掌。衆言叢雜。卓守不撓。每至上前。論事堅執。上或厲聲。公輒更辨。必極所言。一日。延陽進對。見公反覆固爭。得請乃已。出謂公曰。小事何爭之力。公曰。事無大小。皆有是非。豈可委以細事而苟徇人主意乎。延陽歎服後嘗曰。大臣爭是非於上者。唯公而已。又曰。完城事業。其大者有八。反正贊臣復之業一也。議禮明父子之倫二也。單騎赴敵。以緩其鋒三也。冒謗主和以存宗社四也。力拒徵兵。視死如歸五也。送信天朝。以身自當六也。善處人骨肉七也。不染朋比八也。延陽知公最深。故134_231b其言如此。張谿谷每稱公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臣也。李公敬輿曰。屈子之忠。忠而過。遲川之忠。亦過於忠者也。世堂竊觀公精硏經傳。會通典訓。上下四子所得者深。故其見於事業。發諸論議。皆本於此。固非膚學淺識遽能窺其一二。所以詆疵紛然。蜂起蝟集。猝不可解。嗚呼。末流滔滔。一往不返。大迷其源。至於如此。無足異也。雖然。此於公奚損。要之可質於百世耳。公之文章。理趣爲主。至於奏議。世皆推以筆端有舌。所著詩文十九卷。經書記疑若干冊。世堂旣嘗序公遺集矣。今相國又屬以墓刻之銘。不134_231c敢辭。謹據誌狀。敍次事行。系之銘曰。
天生英彥。以爲一世。棟梁舟楫。乃扶乃濟。無我或戾。繄我所賴。玆惟文忠。厥功之大。羽翼明聖。蕩除陰沴。乾坤泰寧。日月廓霽。章陵服議。群儒多蔽。毛皮藩壁。外鍵內閉。尊親未定。大義將晦。公獨奮舌。剖疑破滯。天秩民彝。待我昭揭。大運靡恒。衣裳變改。愍予東土。先罹毒害。滔天勢壯。捲地鋒銳。身餌虎口。爲社稷衛。孤城援絶。江都又潰。爾我相顧。小大憒憒。曾無一人。遠算深計。竭忠殫力。奔走內外。非公是仗。孰當救敗。四封如舊。七廟以祭。保我家邦。迄于萬載。134_231d曁玆北人。脅之反吠。誓心守義。甘於殞斃。北館幽幽。經年縶繫。敵知憚敬。大難卒解。嘻公功烈。古無匹對。我銘神道。擧迹之最。刻之金石。永久靡替。
西溪先生集卷之十一
西溪先生集卷之十四
 墓表 十五首
西溪樵叟墓表 a_134_290d


134_291a樵叟姓朴。世堂其名也。其先兩世貞憲,忠肅。並顯於仁祖之世。叟生四歲而忠肅公棄背。八歲而遭寇難。孤貧失學。及十餘歲。始受業於其仲兄。亦不自力。年三十二。當顯宗初元。用科第登仕。列侍從八九年矣。自見才力短弱。不足有爲於世。世又日頹。不可以救正也。乃解官去。退居東門之外。去都郭三十里落山西谷中。名其谷石泉洞。因自稱西溪樵叟。臨水爲屋。不治籬樊。植以桃杏梨栗繞其居。種爪開稻畦。賣樵爲生。當農月。身未嘗不在田間。與荷鋤負耒者相隨行。初亦間赴朝命。後屢召不起。居三十餘年而134_291b終。壽踰七十。葬於其所居宅後百數十步。嘗著通說。明詩書四子之指及註老莊二書以見意。蓋深悅孟子之言。以爲寧踽踽涼涼無所合以八。終不肯低首下心於生斯世爲斯世。善斯可矣者。此其志然也。

西溪先生集卷之二十一
 附錄
諡狀 a_134_424a


公諱世堂字季肯號西溪樵叟。少號潛叟。潘南之朴。爲東方大姓。而始顯於麗季。十代祖尙衷爲右文館直提學。與圃牧諸賢並稱。主禑初。諫背明事元之非。爲權奸所害。至本朝追諡文正。九代祖訔佐太宗爲左相。有勳德諡平度。五傳至文康公諱紹。世稱冶川先生。以正學直道。擯于憸壬。遯荒以卒。官止司諫。是爲公之高祖。曾祖諱應川。隱德敦行。筮仕爲司134_424b宰監正。贈左贊成。祖諱東善。官至議政府左參贊。贈領議政諡貞憲。考諱炡。早年登第。策靖杜勳。官至吏曹參判封錦洲君。贈吏曹判書諡忠肅。立朝鯁直。敢言不諱。朝廷肅然敬憚之。妣楊州尹氏觀察使安國之女。以己巳八月十九日。生公于南原衙舍。公幼時雖當游戲急遽之際。未嘗跣足而行。步履間或掠物而致欹傾則必就而整之。其資性之端正如此。公旣少孤又經喪亂。年踰十歲。始受學。文理未甚貫通而時能透得他人見不到處。長老奇之。旣長淹貫書籍。而必探賾其義。窮解乃已。己丑遭內艱。與134_424c兩兄朝夕哭泣。哀毀過節。隣里親舊。莫不悲歎。公文藝夙成。聲名藉甚。顯宗庚子秋。魁解額。始擧生員。仍中增廣交科。又魁殿試。人稱其晩。例授成均館典籍。移禮兵曹佐郞。壬寅拜司諫院正言。時工曹判書缺。上命大臣以亞卿薦擬。大臣以金公佐明應命。遂得擢拜。公啓曰國家擇任人才。當先示以公。而不出於肺腑之親。遠外聽聞。豈不以爲下之所擧。卽爲希旨。上之所授。或係偏私耶。恐累淸朝大公之道。啓日後無窮之弊。不可不速改。以彰聖上無私之明。又以大司成之任。所係極重。如非學識通明。端134_424d重雅正之士。莫宜居之。大司成李殷相雖有文才。未允士望。擧此兩事。欲爲論啓。而僚議不一。見輕之失著矣。請命褫斥。金竟還收。徐公必遠貽書曰不意衰世有此好議論。異日靑史將曰國有人焉。同春宋公亦有書於藥泉曰朴諫一着。聖朝風采堪誇。癸卯拜持平。論都承旨任義伯躁進無恥。專務譎詭。喉舌之長。自是淸朝峻望。安有目以鄙夫。爲人所賤如義伯。而得以濫處哉。義伯附麗時論。其相好者多不悅。陽坡鄭公語客曰朴某有乃父之風。人之門地。不可不見。朝廷有別薦之命。鄭公以可合擢用薦134_425a公。時有玉堂新錄之擧而公不得參。物議譁然以爲彈劾巨室之故。是年冬。以御史按江都軍儲。甲辰春選入玉堂拜修撰。俄轉校理。丙丁之亂。被禍家子孫立朝者當北使之來。輒陳疏解職。時上將臨接北使於館所。校理金萬均自以被禍人之孫。不欲隨駕。陳疏乞免。徐公必遠爲都承旨。退却其疏。啓請罷職。卽允其啓。諫官將劾徐公。僚議不一。俱引避而處置歸於玉堂。公箚直立異者。時議紛然。醜謗朋興。懷川大加忿詈。至有悖言。冬以御史廉問海西。乙巳春爲副校理。因登對悉陳海西民瘼。以爲年久還上134_425b之逋欠。諸般身役之未收。督徵於隣族。盡賣田宅。亦難還償。卽今民怨。無大於此。欲求應天之道。無逾安民之策。還上逋欠身役未收。無論多寡。一倂蕩滌。庶可以慰民心而弭天災矣。丙午正月。上將奉大妃幸溫泉。時有虹變。公因入侍啓曰。自上深憂慈殿症候。欲收沐浴之效。爲臣子者。何敢有所云云。第念淫虹之變。自古可畏。當警懼之日。出幸數百里外。豈非大可憂者乎。願加深思焉。又論內帑之弊曰。嘗聞此司國初所無。而刱於中世云。闕中供用。自有進排之物。雖無內司。何患無財。直以種種所用。不134_425c可煩責於該司。歷代因循。不能革罷。良可歎也。三月隨駕溫泉。乘輿疾驅。侍衛軍卒多顚仆。或致殞斃。玉堂議上箚陳戒。同僚難於爲辭。公立構以進。略曰人君擧動。萬姓屬目。固宜徐行緩驅。節以和鑾。古所謂吉行五十。師行三十者。非但觀瞻所係。不欲示輕遽之色而已。蓋亦以萬衆偕動。不可竭力於一日之間也。伏見御駕微疾其驅。衛士奔馳。先後顚仆。奄奄垂盡。見之駭慘。隨聞殞命者至於二人。下卒雖微。其命至重。何忍恬視其死而不思所以改轍也。上嘉納之。上於路次。欲觀兵。公進曰奉慈殿留134_425d住路次。已極未安。今日又是國忌齋戒。雖尋常公事。亦不得出納。況此觀兵之擧。豈非未安之甚者乎。上不聽。旣還遭南夫人喪。卜葬于水落山西麓長者谷。愛其泉石之勝。名其洞曰石泉。遂有卜居之意。秋爲北評事。丁未夏以修撰召還。時上憫旱有求言之敎。公應旨陳疏。首以立聖志爲刻勵圖治。轉衰爲盛之本。次論視事稀闊之失。仍及大臣厭事之弊。請自今廓然奮發。日御法殿。召接臣僚。責勵大臣。以盡其職。又言隣族侵徵之怨。軍制變通之宜。縷縷五六千言。無非明白切實。痛中時病。上雖134_426a賜優答。未見採施。識者恨之。是年七月。上將禱雨社稷。旣駕入幕次。因玉候未寧。命大臣攝行。蓋難於冒夜行事。臺臣請質明親行。公進曰今日親祭。當以至誠感天。而攝行之擧。實爲未安。古云吾不與祭如不祭。有故而不能與祭。古聖猶以爲如不祭。況今親詣壇下。不躬祀事。不亦未安乎。質明行。禮周以後通行。何不可之有。八月又爲副校理。諸臣因引對議凶歲裁減之事。公請罷尙方染色。減太僕馬匹。以其經費補用賑需。時東宮將講小學。上以諺解句讀多艱澁不雅。命玉堂考證改定。諸134_426b僚莫有能當之者。公乃詳加玩索。以爲諺解之錯誤。本由於註說之失旨。遂並與註說。而辨駁之。同僚皆嫌其改易。公終不撓。凡所舛誤者。逐段論辨。付籤以進。上命就質于兩宋。懷川大加稱贊。歎其所論之明的。其中一二條。姑令仍舊。餘皆從之。俄遷持平。旋爲校理。時銓曹以注擬忤旨特褫。臺諫及儒臣相繼陳諫。又被嚴旨。公以爲前後言事者。但知爲被譴諸臣分疏。而不敢言上躬之闕失。故轉輾至此。遂自製箚草。略曰夫君臣之際。體貌爲重。古昔帝王。雖有譴讁於其臣。亦未嘗不意嚴而辭謹。不比閭巷134_426c罵詈之爲。今殿下迫蹴重臣如僕隷。愚視臺閣如嬰兒。又以慢辭加之於經幄之臣。雖古失道之君。其言語之不愼。恐不過是。凡事之可否。在理而已。不在於聲氣之間。或下之所陳。理有不可。則殿下不惜開曉。若其合理。亦須俯從。臣效其忠。君昭其德。相爭以公。和氣藹溢。夫孰曰不可。又何必先肆聲氣。自損其威重也。諸僚以箚辭直截。慮致轉激而難之。公曰不然。明主可以理奪。遂上之。天怒爲之少霽。館中皆服。公久有休官之計。而顧無以解職。不製月課。得例罷。戊申遂決意歸石泉。築室而居焉。連除三司春134_426d坊之職。皆不赴。秋拜吏曹佐郞。時上將幸溫陽。公當隨駕而猶不拜命。親舊有貽書責之以義理。譏之以固執者。猶不應。上特命拿問定罪。旣出爲校理兼文學。冬復爲吏部郞兼持平。充赴燕書狀官。公以出疆遠役。義不可辭。出而膺命。渡江之日。書狀官例行搜檢。而前此奉使者謾不擧行。公一一考閱。至夜始罷。在道所過山川道里及地名。我人之往來者流傳多誤。公考諸中華往牒及大明一統誌。凡所可疑者。詢諸居民。多所証正。一行老譯輩皆驚服焉。己酉三月復命。在燕館時適當上元夜。與正副134_427a使出街觀燈。及還臺官有致憾於正使者並論彈之。公歸石泉舊棲。自是連除校理,獻納,銓郞等職皆不赴。庚戌秋爲通津縣監。公以外任不比內職。強起赴任。時値辛亥大歉。竭誠賑政。訪民疾苦。一意不怠。不分土着與流丐。一視而並賑。又請得江都米。裁其闊狹而均分之。一境無餓死者。秋以獻納召還。遂不赴朝。厥後連除三司亞長諸職辭褫。癸丑九月有寧陵遷奉之擧。公以都廳受敦匠之命。義不敢辭。卽董事于陵所。凡列邑進供。爲下吏所操切。多有刀蹬濫觴之弊。公令所供之物。無所點退。諸所需用。134_427b制其緊歇而策應之。工匠役價。量其鉅細而酌定之。又必早起治事。終日不息。弊省而事辦焉。無何以病褫任。甲寅二月拜司諫。時仁宣王后昇遐。入謝恩命而歸。自是七年之間。屢除三司之官。間爲宗簿正密陽府使皆不起。庚申討逆策勳會盟後。命靖社功臣衆子並加資。公亦加階通政。俄有陳白者還收。秋爲應敎。疏辭不許。繼而下別諭曰。爾之恬退淸苦之節。近所罕有。予常嘉奬。每欲招致之於朝廷者也。前後除職。遜辭懇款。不肯就命。終不得挽回爾心。予尤恨焉。迨玆新授。特降心腹之告。深示虛佇134_427c之意。爾勿固辭。從速上來。公上疏辭謝略曰。臣以疾病纏困。中仕而止。孤兩朝隆眷。負犬馬微志。此臣之所自悼。衆之所見憫。況貧病人皆有。而獨臣緣病而蒙恬退之褒。緣貧而被淸苦之奬。是則貧與病亦有幸於其間也。上優批回諭。冬擢除同副承旨。陳疏辭職。優批不許。適値仁敬王后昇遐。公卽入城謝恩。踰月而褫職。翌日出城。自此遂不復入脩門。其入城也吟一絶曰。十年林下棲蹤穩。一日塵中逐影忙。堪笑石泉居士意。到頭無乃便荒涼。其出城也復吟曰。粘身世網憂終陷。抽跡山樊得早歸。來往也134_427d知譏屑屑。勒移行亦到巖扉。雅意所存。自發於吟詠之間也。其在政院。常擁衾而臥。諸承旨笑曰院中古規。盡壞於今日。金淸城語人曰見季肯儀狀。已成山野之態。辛酉爲忠淸道觀察使辭褫。癸亥以後屢除大諫,副學,吏議等職皆不赴。己巳廢妃之變。士類百餘人相率陳疏。吳判書斗寅,李參判世華爲疏首。次胤泰輔士元製疏。疏入上震怒。夜半出御仁政門。親鞫三臣。俱被慘刑。而士元應對無少屈。受刑尤酷。公聞報驚惶。馳到闕下則已下禁府矣。及其出獄。公謂曰吾以汝爲必死。今觀神氣。不無生理。因134_428a率往至露梁。留數日創甚濱危。乃與訣曰向也或冀回生。今則已矣。死生之際。須自從容。及其死也。載以素車。葬于東岡。是後朝命久不及焉。甲戌夏中宮復位。因筵臣言賜公食物。又命贈士元官。旌表其門。仍賜祭。公入觀焉。是日拜同副承旨。出城辭褫。六月特除戶曹參判。辭不許。俄移大諫,副學。乙亥春又以特旨超拜工曹判書。先是尹相國趾完以疾釋負。而留疏盛稱公可倚任。故有是命。公上疏辭職曰伏聞大臣以疾辭召。輒擧臣誤天聰。伏想聖明亦已洞察其言之虛誕。無毫毛彷彿。134_428b而特以平日隆禮大臣。而故欲慰藉其意。輕此爵命爾。又曰病若可勉。以大臣之忠而豈其堅辭召命。如不可勉。曾不能以自悲其身者而悲臣乎哉。是後爲參贊都憲者三判尹者再。復爲工曹判書兼知經筵,弘文提學。並不應命。戊寅以年滿七十入耆社。己卯春筵臣有以兩子泰維,泰輔俱經侍從。且有恬退之節爲言者。特命加崇政階。公上疏辭免。略曰。臣之得此恩數。一則爲臣亡故兩賤息侍從恩紀。雖緣比例混擧。而在於公朝事體。不免推類太廣之失。在於微臣衷私。益增追念不窮之痛。恐非兩134_428c盡公私之義。一則爲臣有恬退之節。臣之半生藉此疑似之迹。誣世罔上。蒙受殊渥。前旣非一。設令臣之以此見推於衆論。眞實而非虛妄。左右之進言。不當煩瀆之若是。奬與之隆旨。亦不當媟越之至斯。再疏有曰國家典章。老人加秩。多係卑官。罕及宰列。其意有在。皇明法例以子推恩。只於白身。而但假子銜。不復別與官職。寧有子弟官品尙低。而推恩加秩於其位高之父兄者乎。其於事理國體。倒置莫甚云云。公自以今此超資。無義可據。尤以爲不安。俄拜禮曹判書。褫移西樞。公旣階一品。忠肅公例當推恩加134_428d贈。子弟以爲請。公曰先子以功勳旣有贈爵。豈可以吾老職之故而加贈虛秩。掩朝家紀績之榮哉。不許。庚辰秋拜吏曹判書。六疏得褫。辛巳秋仁顯王后昇遐。公有疾不得奔哭闕下。詣本州成服而歸。初白軒李相國早位卿相。而懷川宋相未及大顯。其相推薦慕悅特深。及宋相名位已隆。與白軒稍有釁端。用隱語致譏於賀壽之文。而軒相家未之覺。其後白軒上箚論事。宋相疑其有所指斥於己。乃陳疏自辨。而擧白軒曾製三田碑文事。至比於孫覿。詆辱備至。一時諸公莫不惋愕。公自立朝時。已惡懷川之爲134_429a人。及撰白軒碑文。據事直書。辭義嚴峻。文未及脫藁。有傳其句語於主時論而黨懷川者。於是衆怒如沸。儒生之投合時議者。有疏辨請罪之論。而不得原文。未卽發。有爲劃計者曰原文旣未得。且此一事孤單。恐不足以驚動天聽。某曾有四書集註論辨之事。若以改易朱子章句爲罪。可以執言。時有金昌翕者自托於方外而喜干預朝廷事。心有所憾。輒馳盡詈辱。至是又投長札於公之門人。極其醜悖。以爲公欲凌侮朱子。故攻斥尊慕朱子之人。其意極陰譎。其言甚悖戾。其書蜚傅。其同好者多在要津。內外和應。百134_429b般揣摩。或變換字句。或架鑿空虛。誘激儒生。使之陳疏。而目之以侮聖醜正。請罪其人焚其書。疏入上下該曹稟處。時金鎭龜爲宗伯。以請令朴某及李景奭後孫呈納所改註說與碑文論處之意回啓。尹世紀爲畿伯。移文本州。恐喝督促。急於星火。及納冊子。禮曹再啓謂宜明辨嚴斥。請令儒臣逐段辨破。並與碑文投之水火。捃㵂滋甚。禍機益急。公之門人修撰李坦,進士李翼明等相繼陳疏。言此輩之怒。只在於碑文數句語。此則臣師平素之見。本自如此。臨文直筆。無所撓避。豈有私好惡於其間哉。至於辨論經傳。134_429c私自箚錄。前人之所已行。而今欲藉重於此。洩忿於彼。歷擧先正解經同異之說爲言。金萬埰時在喉司。沮遏其疏。先自論斥。以售其先發制人之計。疏入不省。上旣從禮曹啓。仍命削奪官爵。門外黜送。臺官請遠竄。二啓而允之。金鎭龜時又兼判金吾。其佐貳有欲擇配湖南善地者。鎭龜乃定配于玉果。玉果素稱病鄕。故必欲置之於死地也。蓋當壬戌之歲。公之長胤泰維爲持平。首發萬埰父益勳遠竄之啓。至是諸金乘機逞憾。無所不至。時癸未四月也。公病不省事。及聞有臺啓。瞿然曰雖病不可偃臥吾室。乃134_429d具囚服詣城外待命。及命下。將舁疾赴配。判尹李寅燁上疏有曰。某今年七十有五矣。重得奇疾。氣息奄奄。朝暮就木。而今若配之以荒裔。迫之以嚴程。則必將死於道路。特丐其縷喘。終於牖下。豈不有光於聖上仁厚之德哉。某退休林下已四十年。高風峻節。絶塵離群。有足以振勵衰俗。荷聖朝之褒崇。爲一世之推許。而徒以篋笥之私記。遽罹嶺海之遠謫。實非所望於聖朝。況某俱喪兩子。孑然隻影。獨寄人世。而泰輔之樹立如彼卓卓。傳曰子文之後。猶將十世宥之。有功於民則子孫雖有罪過。尙且寬貸。134_430a今以泰輔之節。不能保其父。則其憫惻憐傷爲如何哉。上納其言。遂寢竄配之命。臺諫復啓請還收。久而乃停。公始歸本第。自是疾尤沈綿。至秋挾感遂革。屬纊之日。謂左右曰今日我當死。何不設席以待。遂扶掖遷于廳事而卒。享年七十五。是年十月。葬于宅後百餘步乙坐之岡。南鄭兩夫人並祔。從治命也。前配宜寧南氏。國初名相在之後。金城縣令一星之女。間愬不行於家庭。和樂不失於娣妹。後配光州鄭氏。副護軍時武之女。撫慈諸孤。猶己出。執祀甚栗。宗黨稱之。後視公官秩並贈貞敬夫人。南夫人生二134_430b男。長曰泰維。擢文科官止持平。居家孝悌。立朝剛直。不容於時。卒窮阨以死。次曰泰輔。文科壯元。官止弘文館副應敎。有文章才學。己巳諫死後旌閭贈吏曹判書。鄭夫人生一男二女。男泰翰。筮仕爲齋郞。女長適正郞李濂。次適金弘錫。今爲文學。側出女適引儀呂必建。持平初娶參奉金夏振女。生一女適進士李德孚。後娶士人鄭女。生二子弼基,弼謨。弼基娶士人任震英女。生三男四女。男師心。女適趙漢弼。餘幼。應敎娶完南府院君李厚源女。無子。取弼謨爲後。一女適進士李德海。弼謨娶僉正辛受和女。生三男134_430c二女。男師允。餘幼。泰翰初娶士人李喜重女。生一男一女。男弼遜。女適崔象德。後娶士人黃植女。生三男二女。男弼運。餘幼。李濂一男二女。男顯弼進士。女適尹勛,徐命宅。金弘錫五男二女。男光獻光彥光喆。女適李倚重。餘幼。公生四歲而忠肅公下世。旣長不能記其儀形。常展忠肅公遺像。必泫然。每語及先故。必下氣低聲含悽而言。聞者感歎。當先忌則必入城而參焉。哭泣之哀。無異三年之內。及其末年。自貞憲公以上三世皆當祧遷。移奉于公家。公奉其祭祀。克致誠恪。雖至老耋。未嘗少懈。公常病近世祭禮家家不134_430d同。又古今異宜。難於適從。及得玄石與明齋往復所定圖說而悅之。略加增損。務合人情。遂爲定式而行之。公旣少孤。伯氏護軍公亦早世。事仲氏承旨公如嚴父。友敬備至。或失其意則下立庭前。終日拱手。不命之坐。不敢上。第三兄處士君年歲相近。隨肩讀書。未嘗相捨。及沒而無嗣。寡嫂尹氏卽美村先生之女也。公命次胤繼其後。而迎于家奉養備至。及己巳禍變之後。又奉迎于石泉。辛未尹氏遘癘。時公年旣衰暮。而終始視藥。及其喪。家人及親舊苦勸出避。公不聽。手執禮書。指揮斂襲。成服後始移他所。外祖觀察134_431a公汎海朝天。舟覆不返。公每痛其不得考終。語必悲咽。撫念從姪。恩意備至。每歲時或得外方例餽。必先計內外先代祭祀所用。然後始許供用。此則公居家行誼之篤也。公見解之明睿。得之天稟。加以工夫精密。自退閒之後。遂專意於四書。積年沈潛。融會貫通。然後始乃隨得隨錄。而於庸學尤加致力。至於詩書則蓋以得於四子者推之。迎刃縷解。沛然有餘。旣成書。名曰思辨錄。蓋取愼思明辨之義也。或謂辭語不能宛轉者。公曰論辨之際。辭語之不能宛轉。勢固然矣。以七十子之服孔子。而子路之言。至謂子之迂也。134_431b古人於其心之未契者。不厭極言竭論。不如後世之不問義理之如何。只察言語之末以爲驚怪者也。當公休官之初。玄石屢勸用力於學問工夫。公笑而不答。後玄石復有所云云。公乃作詩以見意。云求名求利等勞神。誰似愚夫解爲身。無事意慵兼廢詠。餘生天許作人人。其小序曰人說和叔欲我寧求作詩人。余聞而撫掌曰吾弟所以憂我者。豈有他哉。正憂其猖狂謬戾。卒之無所善其名以死耳。憂之固當。然其所欲我者未當。與吾爲詩人。寧爲閒人耳。夫求爲詩人。求有小名。名在人間。在我吾將爲名乎爲人乎。聊134_431c述意以賦一絶。亦欲吾弟聞而笑之也。此則公專心爲己之學也。公嘗註老莊之書。尹明齋慮其流耽。貽書戒之。公答曰老莊之說。雖舛聖人大法。又不至都無可採。乃爲說者所亂。使其意不明。旣不得其所以舛於聖法者。又倂與其可採而泯之。在二子醇疵俱掩。在後人去取皆迷。有足悼歎。所以不揆淺陋。略爲箋解也。尤嚴於斥佛。嘗曰先儒所謂彌近理大亂眞者。亦是過與之辭。佛氏豈有近理者乎。孟子論陳仲子。不過曰避兄離母。惡得爲廉。其闢揚墨。不過以無父無君。蔽其罪。彼三子者豈無可觀者。旣曰無人倫134_431d則餘不足言。彼佛則無父無君。合揚墨而爲一。其言寧有是非之可言耶。況其所謂近理者則只是脫胎於老莊者乎。公嘗言陽眀集初未得全書。但見其傳習錄。何其言下頓悟者之若是其多也。其弟子之浮夸無實如是。其師之所存。可推而知也。及得全書。遂段評駁曰。專務新奇。都是穿鑿。人之流入是學者。不知何所取而然也。此則公排闢異端之嚴也。自公休退之後。年少後生。束脩願學。爭赴門下。公皆欣然受之。爲構書齋而處之。不問門地高下。隨其才品賢愚。皆至誠敎誨。其或有可敎者則愛惜特甚。課督有程。134_432a每當冬月。學子多聚。公必早坐鱣席。以次授業。勤勤懇懇。猶恐其不能解聽。雖已領得而又重言之。或引喩事物之易見者。或假設以俚淺之言以曉之。雖蒙學之士。莫不厭足而心悅。其或有疾病則至誠憂念。極力救護。聞其死亡則必設位而哀臨。存恤其家。請學之士。常滿書齋。或訓誨經史。或勸課製述。問答講論。終日不倦。夕後則組帶列侍。談笑從容。至夜乃罷。日以爲常。春夏則杖屨多在田間。子弟挾冊隨往。藉草壟上。對坐講劘。每値除夜申夕。必置酒食。與之達宵團欒。常於花辰月夕。携冠童逍遙溪邊。風詠而歸。134_432b公平生未嘗有引而自高之意。及門之人率皆請肄文藝詞章之業。公亦皆諄諄誘導。俾得成就。嘗曰欲業文藝者。讀書必先探究其義理。旣得於義理則其於文藝。不期進而自進。若但專意於記誦章句而已。則雖於文藝。亦不可成。及至晩年。及門之士甚盛。亦皆承公指敎。文行並進。第名登朝者甚多。或至宰列。而能以名節自礪。蔚爲世用。斯亦近代所未有也。此則公成就後學之功也。公天資篤厚。氣象嚴重。望之儼然有不可犯之色。而及其接人。言笑款洽。和氣藹然。人皆敬憚而親慕之。平生最惡矯情近名之事。絶134_432c去駭俗苟難之行。平居恂恂無異於人。而至於義理所關則一刀截斷。未嘗有毫髮游移。見道極明。析理甚精。於子思所謂不明不措不得不措者。蓋嘗服膺而用力。故思辨旣熟。觸處洞然。凡經傳文義之艱深難解者。衆方疑晦。莫得其頭緖。公徐以一言發其歸趣。便令人脫然開悟。至其平居言論。則類皆平易慤實。未嘗有一毫高遠之說。聽之雖似尋常。而苟知悅而繹之則見其義理無窮。皆可終身服行。藻鑑甚明。預言人賢邪成敗。後多驗焉。或有制行之高。似乎難及。而若見其心術之不善則痛斥之。行事雖有錯謬。134_432d而情有可恕者則不棄也。不以一世之毀譽而有所取舍愛惡。故其初則頗與人觝牾。及其後人始服焉。處朋友立朝廷。羞爲骫骳隨波之行。故世或目之以固滯。然當事處義。雖己巳有所定。必好問於人。不擇賢愚高下。苟有可採者。不吝舍己。至於講論文義。雖後學蒙識。若有一得之見。則傾倒奬與。其心無係着。物我無間如此。性簡亢少許可。而至於論人則必取其一長。未嘗有求備之意。與世寡合。絶交游簡還往。而至於當官奉職則一心勤恪。未嘗有厭事之意。是時懷川主時論。當路諸人競相和附。進退與奪。唯視134_433a其向背。公獨持讜議。不肯隨其俯仰。於是側目者衆。公知不可有爲於世。乃歎曰與其屈志辱身。聽其翕張。豈若潔吾身行吾志。以終於畎畝間哉。戊申罷官歸石泉田舍。初亦間出應命。後遂稱病篤終不起。石泉地磽确不宜穀。遂躬自治農。農月則與荷鋤員耒者。盡日於田間。終歲作苦。又種果賣樵爲生。而簞瓢亦至屢空。實有人所不堪者。公處之晏如。略無幾微之見於外。時携門下諸生。嘯詠溪上。自有無限好氣象。平生言行。一本於忠信。而敎導後學。必以此爲主。嘗曰忠信人之所得以爲人者也。可不念哉。嘗著134_433b訓戒以遺子孫。首言身後喪祭之節則以節約爲主。次及讀書爲學之方則以忠信爲本。末及兄弟親愛之道則以不聽婦人言爲先。又以三年上食非古禮。嘗曰異日吾死後。汝曹宜深念吾言。無惑於紛紛者之論。古禮旣明。吾意素定。汝曹雖由此得罪於衆。不可輕背吾訓。及公沒後其家一遵遺訓。卒哭後徹上食。唯於朔望設殷奠。公嘗戒門弟子曰士大夫行身處事。當務誠實。不可矯飾。設若陷於罪戾。言苟以實則人或相恕。飾辭文過則非但人無救之者。吾過愈深矣。嘗曰天之生民。皆有其職。若小民之怠棄其業。134_433c不能自食者。士大夫之不事其事。自以爲高致者。皆天之棄人也。又曰凶德有二。傲與惰也。傲者忤於物。情惰者害于身。公心地寬大。執守堅貞。凡世間是非榮辱。無足以動其心者。惟心之所安。義之所宜。執之而不撓。行之而不疑。至於出處大防。毅然自守。雖賁育莫能奪。先聖所稱可以托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者。非公之謂歟。嗚呼。世之知公者鮮矣。聖朝之所奬。與一世之所尊尙。不出乎恬退一節。而抑不知公於學問有深造獨得之見。眞正篤實之工。潛心經訓。硏賾精微。平日制行。未嘗規規於繩134_433d尺。而表裏誠愨。始終如一。苟非深知爲己之學。洞見大道之源。能如是乎。顧公病世之儒者類多徇華遺實。矯情干譽。常自處以閑人。不欲以學問爲名。微意所在。人孰得以知之哉。竊觀自古辭榮退閑之士。或以宦成名立。年至縣車。或以時危世亂。見幾色斯。如疏太傅張季鷹當時歎其高。後世稱其美。若公者以年則未及強仕。以時則遭遇聖明。又無立錐之地蓋頭之瓦。而只以言不行道不合。浩然而歸。結茅爲屋。墾石爲田。糲飯菜羹。人不堪其苦。而悠然自得。樂而忘憂。此固合於用捨行藏之義。今乃以勇退急流。134_434a爲褒公之第一義。其亦淺之爲知公也。不佞先祖遲川公與公之先子錦洲公。早有同盟之誼。而契許特深。先君子與公同里閈相善。不佞粤自幼少時。稔聞公言論風節。景仰有素。及長與二胤後先登朝。繼修舊誼。情好無間。亦嘗訪公幽居。獲拜床下。或至移日開懷與語。討論經史。娓娓忘倦。雖無束脩之禮。寔有執鞭之願。若論其情誼。與及門之士何異。自謂慕公之篤知公之深。非世之等閑尊慕者比也。公之孫弼基兄弟䄂家狀來請易名之文。義不可辭。因其狀文就加删潤。兼以平日悅服於心者。撰次如右。敢邀節134_434b惠之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崔錫恒撰。
西溪先生集卷之二十一
 明谷集卷之二十六
 墓誌
淸河縣監南公墓誌銘 a_154_406b


君諱啓夏。字子長。自號隱几翁。系宜寧。遠祖諱在。本朝開國功臣。諡忠景。高祖彥純。武科左承旨。曾祖楫。154_406c漢城判官。祖爀不仕。考文星。振威將軍。妣南陽洪氏。寢郞澍之女。崇禎癸未生。薦補繕工監役。遷內贍主簿,活人署別提,禁府都事。出爲淸河縣監。秩滿歸。乙酉三月廿八日卒。享年六十三。葬尼山龍頭岡。卽居第之背。六十擧武也。初娶完山崔氏。僉使俊明之女。平度公有慶之後。卽我同宗也。葬在楊州水落山。南氏先兆。不佞曾述墓誌。後娶禮安李氏。通德郞泰英之女。崔氏三男。鶴增生員。今長寧殿參奉。鶴徵,鶴應。李氏二男。鶴興,鶴升。二女幼。君少游龍西尹公之門。習家禮於明齋。喪祭盡其誠。處宗黨睦友。當官恪154_406d勤。不畏疆禦。爲吏廉而惠。聽訟必明辨。治盜必詳覈。留意文敎。五坊各設義倉。倣朱文公故規。以俸餘補助。遺愛久而不沫。鄕居草屋蕭然。解歸之日。甁粟屢空。敎諸子以篤學。勿尙論議。有靑氈一冊。曰祭祀盡誠敬。書籍勤玩讀。土地食舊德。臧獲須善遇。舊物毋毀傷。以遺子孫。君於藥泉先生。爲群從。先生愛重之。余與相善。殆三十年。今於墓文。何可溢辭。銘曰。
子長。龜亭之後裔。藥泉之族弟。居官爲廉吏。處鄕爲善士。其少施而未究者。將以歸成于後

 

 明谷集卷之二十六
 墓誌
淸河縣監南公墓誌銘 a_154_406b


君諱啓夏。字子長。自號隱几翁。系宜寧。遠祖諱在。本朝開國功臣。諡忠景。高祖彥純。武科左承旨。曾祖楫。154_406c漢城判官。祖爀不仕。考文星。振威將軍。妣南陽洪氏。寢郞澍之女。崇禎癸未生。薦補繕工監役。遷內贍主簿,活人署別提,禁府都事。出爲淸河縣監。秩滿歸。乙酉三月廿八日卒。享年六十三。葬尼山龍頭岡。卽居第之背。六十擧武也。初娶完山崔氏。僉使俊明之女。平度公有慶之後。卽我同宗也。葬在楊州水落山。南氏先兆。不佞曾述墓誌。後娶禮安李氏。通德郞泰英之女。崔氏三男。鶴增生員。今長寧殿參奉。鶴徵,鶴應。李氏二男。鶴興,鶴升。二女幼。君少游龍西尹公之門。習家禮於明齋。喪祭盡其誠。處宗黨睦友。當官恪154_406d勤。不畏疆禦。爲吏廉而惠。聽訟必明辨。治盜必詳覈。留意文敎。五坊各設義倉。倣朱文公故規。以俸餘補助。遺愛久而不沫。鄕居草屋蕭然。解歸之日。甁粟屢空。敎諸子以篤學。勿尙論議。有靑氈一冊。曰祭祀盡誠敬。書籍勤玩讀。土地食舊德。臧獲須善遇。舊物毋毀傷。以遺子孫。君於藥泉先生。爲群從。先生愛重之。余與相善。殆三十年。今於墓文。何可溢辭。銘曰。
子長。龜亭之後裔。藥泉之族弟。居官爲廉吏。處鄕爲善士。其少施而未究者。將以歸成于後

 

 西溪先生集卷之二十一
 附錄
諡狀 a_134_424a


公諱世堂字季肯號西溪樵叟。少號潛叟。潘南之朴。爲東方大姓。而始顯於麗季。十代祖尙衷爲右文館直提學。與圃牧諸賢並稱。主禑初。諫背明事元之非。爲權奸所害。至本朝追諡文正。九代祖訔佐太宗爲左相。有勳德諡平度。五傳至文康公諱紹。世稱冶川先生。以正學直道。擯于憸壬。遯荒以卒。官止司諫。是爲公之高祖。曾祖諱應川。隱德敦行。筮仕爲司134_424b宰監正。贈左贊成。祖諱東善。官至議政府左參贊。贈領議政諡貞憲。考諱炡。早年登第。策靖杜勳。官至吏曹參判封錦洲君。贈吏曹判書諡忠肅。立朝鯁直。敢言不諱。朝廷肅然敬憚之。妣楊州尹氏觀察使安國之女。以己巳八月十九日。生公于南原衙舍。公幼時雖當游戲急遽之際。未嘗跣足而行。步履間或掠物而致欹傾則必就而整之。其資性之端正如此。公旣少孤又經喪亂。年踰十歲。始受學。文理未甚貫通而時能透得他人見不到處。長老奇之。旣長淹貫書籍。而必探賾其義。窮解乃已。己丑遭內艱。與134_424c兩兄朝夕哭泣。哀毀過節。隣里親舊。莫不悲歎。公文藝夙成。聲名藉甚。顯宗庚子秋。魁解額。始擧生員。仍中增廣交科。又魁殿試。人稱其晩。例授成均館典籍。移禮兵曹佐郞。壬寅拜司諫院正言。時工曹判書缺。上命大臣以亞卿薦擬。大臣以金公佐明應命。遂得擢拜。公啓曰國家擇任人才。當先示以公。而不出於肺腑之親。遠外聽聞。豈不以爲下之所擧。卽爲希旨。上之所授。或係偏私耶。恐累淸朝大公之道。啓日後無窮之弊。不可不速改。以彰聖上無私之明。又以大司成之任。所係極重。如非學識通明。端134_424d重雅正之士。莫宜居之。大司成李殷相雖有文才。未允士望。擧此兩事。欲爲論啓。而僚議不一。見輕之失著矣。請命褫斥。金竟還收。徐公必遠貽書曰不意衰世有此好議論。異日靑史將曰國有人焉。同春宋公亦有書於藥泉曰朴諫一着。聖朝風采堪誇。癸卯拜持平。論都承旨任義伯躁進無恥。專務譎詭。喉舌之長。自是淸朝峻望。安有目以鄙夫。爲人所賤如義伯。而得以濫處哉。義伯附麗時論。其相好者多不悅。陽坡鄭公語客曰朴某有乃父之風。人之門地。不可不見。朝廷有別薦之命。鄭公以可合擢用薦134_425a公。時有玉堂新錄之擧而公不得參。物議譁然以爲彈劾巨室之故。是年冬。以御史按江都軍儲。甲辰春選入玉堂拜修撰。俄轉校理。丙丁之亂。被禍家子孫立朝者當北使之來。輒陳疏解職。時上將臨接北使於館所。校理金萬均自以被禍人之孫。不欲隨駕。陳疏乞免。徐公必遠爲都承旨。退却其疏。啓請罷職。卽允其啓。諫官將劾徐公。僚議不一。俱引避而處置歸於玉堂。公箚直立異者。時議紛然。醜謗朋興。懷川大加忿詈。至有悖言。冬以御史廉問海西。乙巳春爲副校理。因登對悉陳海西民瘼。以爲年久還上134_425b之逋欠。諸般身役之未收。督徵於隣族。盡賣田宅。亦難還償。卽今民怨。無大於此。欲求應天之道。無逾安民之策。還上逋欠身役未收。無論多寡。一倂蕩滌。庶可以慰民心而弭天災矣。丙午正月。上將奉大妃幸溫泉。時有虹變。公因入侍啓曰。自上深憂慈殿症候。欲收沐浴之效。爲臣子者。何敢有所云云。第念淫虹之變。自古可畏。當警懼之日。出幸數百里外。豈非大可憂者乎。願加深思焉。又論內帑之弊曰。嘗聞此司國初所無。而刱於中世云。闕中供用。自有進排之物。雖無內司。何患無財。直以種種所用。不134_425c可煩責於該司。歷代因循。不能革罷。良可歎也。三月隨駕溫泉。乘輿疾驅。侍衛軍卒多顚仆。或致殞斃。玉堂議上箚陳戒。同僚難於爲辭。公立構以進。略曰人君擧動。萬姓屬目。固宜徐行緩驅。節以和鑾。古所謂吉行五十。師行三十者。非但觀瞻所係。不欲示輕遽之色而已。蓋亦以萬衆偕動。不可竭力於一日之間也。伏見御駕微疾其驅。衛士奔馳。先後顚仆。奄奄垂盡。見之駭慘。隨聞殞命者至於二人。下卒雖微。其命至重。何忍恬視其死而不思所以改轍也。上嘉納之。上於路次。欲觀兵。公進曰奉慈殿留134_425d住路次。已極未安。今日又是國忌齋戒。雖尋常公事。亦不得出納。況此觀兵之擧。豈非未安之甚者乎。上不聽。旣還遭南夫人喪。卜葬于水落山西麓長者谷。愛其泉石之勝。名其洞曰石泉。遂有卜居之意。秋爲北評事。丁未夏以修撰召還。時上憫旱有求言之敎。公應旨陳疏。首以立聖志爲刻勵圖治。轉衰爲盛之本。次論視事稀闊之失。仍及大臣厭事之弊。請自今廓然奮發。日御法殿。召接臣僚。責勵大臣。以盡其職。又言隣族侵徵之怨。軍制變通之宜。縷縷五六千言。無非明白切實。痛中時病。上雖134_426a賜優答。未見採施。識者恨之。是年七月。上將禱雨社稷。旣駕入幕次。因玉候未寧。命大臣攝行。蓋難於冒夜行事。臺臣請質明親行。公進曰今日親祭。當以至誠感天。而攝行之擧。實爲未安。古云吾不與祭如不祭。有故而不能與祭。古聖猶以爲如不祭。況今親詣壇下。不躬祀事。不亦未安乎。質明行。禮周以後通行。何不可之有。八月又爲副校理。諸臣因引對議凶歲裁減之事。公請罷尙方染色。減太僕馬匹。以其經費補用賑需。時東宮將講小學。上以諺解句讀多艱澁不雅。命玉堂考證改定。諸134_426b僚莫有能當之者。公乃詳加玩索。以爲諺解之錯誤。本由於註說之失旨。遂並與註說。而辨駁之。同僚皆嫌其改易。公終不撓。凡所舛誤者。逐段論辨。付籤以進。上命就質于兩宋。懷川大加稱贊。歎其所論之明的。其中一二條。姑令仍舊。餘皆從之。俄遷持平。旋爲校理。時銓曹以注擬忤旨特褫。臺諫及儒臣相繼陳諫。又被嚴旨。公以爲前後言事者。但知爲被譴諸臣分疏。而不敢言上躬之闕失。故轉輾至此。遂自製箚草。略曰夫君臣之際。體貌爲重。古昔帝王。雖有譴讁於其臣。亦未嘗不意嚴而辭謹。不比閭巷134_426c罵詈之爲。今殿下迫蹴重臣如僕隷。愚視臺閣如嬰兒。又以慢辭加之於經幄之臣。雖古失道之君。其言語之不愼。恐不過是。凡事之可否。在理而已。不在於聲氣之間。或下之所陳。理有不可。則殿下不惜開曉。若其合理。亦須俯從。臣效其忠。君昭其德。相爭以公。和氣藹溢。夫孰曰不可。又何必先肆聲氣。自損其威重也。諸僚以箚辭直截。慮致轉激而難之。公曰不然。明主可以理奪。遂上之。天怒爲之少霽。館中皆服。公久有休官之計。而顧無以解職。不製月課。得例罷。戊申遂決意歸石泉。築室而居焉。連除三司春134_426d坊之職。皆不赴。秋拜吏曹佐郞。時上將幸溫陽。公當隨駕而猶不拜命。親舊有貽書責之以義理。譏之以固執者。猶不應。上特命拿問定罪。旣出爲校理兼文學。冬復爲吏部郞兼持平。充赴燕書狀官。公以出疆遠役。義不可辭。出而膺命。渡江之日。書狀官例行搜檢。而前此奉使者謾不擧行。公一一考閱。至夜始罷。在道所過山川道里及地名。我人之往來者流傳多誤。公考諸中華往牒及大明一統誌。凡所可疑者。詢諸居民。多所証正。一行老譯輩皆驚服焉。己酉三月復命。在燕館時適當上元夜。與正副134_427a使出街觀燈。及還臺官有致憾於正使者並論彈之。公歸石泉舊棲。自是連除校理,獻納,銓郞等職皆不赴。庚戌秋爲通津縣監。公以外任不比內職。強起赴任。時値辛亥大歉。竭誠賑政。訪民疾苦。一意不怠。不分土着與流丐。一視而並賑。又請得江都米。裁其闊狹而均分之。一境無餓死者。秋以獻納召還。遂不赴朝。厥後連除三司亞長諸職辭褫。癸丑九月有寧陵遷奉之擧。公以都廳受敦匠之命。義不敢辭。卽董事于陵所。凡列邑進供。爲下吏所操切。多有刀蹬濫觴之弊。公令所供之物。無所點退。諸所需用。134_427b制其緊歇而策應之。工匠役價。量其鉅細而酌定之。又必早起治事。終日不息。弊省而事辦焉。無何以病褫任。甲寅二月拜司諫。時仁宣王后昇遐。入謝恩命而歸。自是七年之間。屢除三司之官。間爲宗簿正密陽府使皆不起。庚申討逆策勳會盟後。命靖社功臣衆子並加資。公亦加階通政。俄有陳白者還收。秋爲應敎。疏辭不許。繼而下別諭曰。爾之恬退淸苦之節。近所罕有。予常嘉奬。每欲招致之於朝廷者也。前後除職。遜辭懇款。不肯就命。終不得挽回爾心。予尤恨焉。迨玆新授。特降心腹之告。深示虛佇134_427c之意。爾勿固辭。從速上來。公上疏辭謝略曰。臣以疾病纏困。中仕而止。孤兩朝隆眷。負犬馬微志。此臣之所自悼。衆之所見憫。況貧病人皆有。而獨臣緣病而蒙恬退之褒。緣貧而被淸苦之奬。是則貧與病亦有幸於其間也。上優批回諭。冬擢除同副承旨。陳疏辭職。優批不許。適値仁敬王后昇遐。公卽入城謝恩。踰月而褫職。翌日出城。自此遂不復入脩門。其入城也吟一絶曰。十年林下棲蹤穩。一日塵中逐影忙。堪笑石泉居士意。到頭無乃便荒涼。其出城也復吟曰。粘身世網憂終陷。抽跡山樊得早歸。來往也134_427d知譏屑屑。勒移行亦到巖扉。雅意所存。自發於吟詠之間也。其在政院。常擁衾而臥。諸承旨笑曰院中古規。盡壞於今日。金淸城語人曰見季肯儀狀。已成山野之態。辛酉爲忠淸道觀察使辭褫。癸亥以後屢除大諫,副學,吏議等職皆不赴。己巳廢妃之變。士類百餘人相率陳疏。吳判書斗寅,李參判世華爲疏首。次胤泰輔士元製疏。疏入上震怒。夜半出御仁政門。親鞫三臣。俱被慘刑。而士元應對無少屈。受刑尤酷。公聞報驚惶。馳到闕下則已下禁府矣。及其出獄。公謂曰吾以汝爲必死。今觀神氣。不無生理。因134_428a率往至露梁。留數日創甚濱危。乃與訣曰向也或冀回生。今則已矣。死生之際。須自從容。及其死也。載以素車。葬于東岡。是後朝命久不及焉。甲戌夏中宮復位。因筵臣言賜公食物。又命贈士元官。旌表其門。仍賜祭。公入觀焉。是日拜同副承旨。出城辭褫。六月特除戶曹參判。辭不許。俄移大諫,副學。乙亥春又以特旨超拜工曹判書。先是尹相國趾完以疾釋負。而留疏盛稱公可倚任。故有是命。公上疏辭職曰伏聞大臣以疾辭召。輒擧臣誤天聰。伏想聖明亦已洞察其言之虛誕。無毫毛彷彿。134_428b而特以平日隆禮大臣。而故欲慰藉其意。輕此爵命爾。又曰病若可勉。以大臣之忠而豈其堅辭召命。如不可勉。曾不能以自悲其身者而悲臣乎哉。是後爲參贊都憲者三判尹者再。復爲工曹判書兼知經筵,弘文提學。並不應命。戊寅以年滿七十入耆社。己卯春筵臣有以兩子泰維,泰輔俱經侍從。且有恬退之節爲言者。特命加崇政階。公上疏辭免。略曰。臣之得此恩數。一則爲臣亡故兩賤息侍從恩紀。雖緣比例混擧。而在於公朝事體。不免推類太廣之失。在於微臣衷私。益增追念不窮之痛。恐非兩134_428c盡公私之義。一則爲臣有恬退之節。臣之半生藉此疑似之迹。誣世罔上。蒙受殊渥。前旣非一。設令臣之以此見推於衆論。眞實而非虛妄。左右之進言。不當煩瀆之若是。奬與之隆旨。亦不當媟越之至斯。再疏有曰國家典章。老人加秩。多係卑官。罕及宰列。其意有在。皇明法例以子推恩。只於白身。而但假子銜。不復別與官職。寧有子弟官品尙低。而推恩加秩於其位高之父兄者乎。其於事理國體。倒置莫甚云云。公自以今此超資。無義可據。尤以爲不安。俄拜禮曹判書。褫移西樞。公旣階一品。忠肅公例當推恩加134_428d贈。子弟以爲請。公曰先子以功勳旣有贈爵。豈可以吾老職之故而加贈虛秩。掩朝家紀績之榮哉。不許。庚辰秋拜吏曹判書。六疏得褫。辛巳秋仁顯王后昇遐。公有疾不得奔哭闕下。詣本州成服而歸。初白軒李相國早位卿相。而懷川宋相未及大顯。其相推薦慕悅特深。及宋相名位已隆。與白軒稍有釁端。用隱語致譏於賀壽之文。而軒相家未之覺。其後白軒上箚論事。宋相疑其有所指斥於己。乃陳疏自辨。而擧白軒曾製三田碑文事。至比於孫覿。詆辱備至。一時諸公莫不惋愕。公自立朝時。已惡懷川之爲134_429a人。及撰白軒碑文。據事直書。辭義嚴峻。文未及脫藁。有傳其句語於主時論而黨懷川者。於是衆怒如沸。儒生之投合時議者。有疏辨請罪之論。而不得原文。未卽發。有爲劃計者曰原文旣未得。且此一事孤單。恐不足以驚動天聽。某曾有四書集註論辨之事。若以改易朱子章句爲罪。可以執言。時有金昌翕者自托於方外而喜干預朝廷事。心有所憾。輒馳盡詈辱。至是又投長札於公之門人。極其醜悖。以爲公欲凌侮朱子。故攻斥尊慕朱子之人。其意極陰譎。其言甚悖戾。其書蜚傅。其同好者多在要津。內外和應。百134_429b般揣摩。或變換字句。或架鑿空虛。誘激儒生。使之陳疏。而目之以侮聖醜正。請罪其人焚其書。疏入上下該曹稟處。時金鎭龜爲宗伯。以請令朴某及李景奭後孫呈納所改註說與碑文論處之意回啓。尹世紀爲畿伯。移文本州。恐喝督促。急於星火。及納冊子。禮曹再啓謂宜明辨嚴斥。請令儒臣逐段辨破。並與碑文投之水火。捃㵂滋甚。禍機益急。公之門人修撰李坦,進士李翼明等相繼陳疏。言此輩之怒。只在於碑文數句語。此則臣師平素之見。本自如此。臨文直筆。無所撓避。豈有私好惡於其間哉。至於辨論經傳。134_429c私自箚錄。前人之所已行。而今欲藉重於此。洩忿於彼。歷擧先正解經同異之說爲言。金萬埰時在喉司。沮遏其疏。先自論斥。以售其先發制人之計。疏入不省。上旣從禮曹啓。仍命削奪官爵。門外黜送。臺官請遠竄。二啓而允之。金鎭龜時又兼判金吾。其佐貳有欲擇配湖南善地者。鎭龜乃定配于玉果。玉果素稱病鄕。故必欲置之於死地也。蓋當壬戌之歲。公之長胤泰維爲持平。首發萬埰父益勳遠竄之啓。至是諸金乘機逞憾。無所不至。時癸未四月也。公病不省事。及聞有臺啓。瞿然曰雖病不可偃臥吾室。乃134_429d具囚服詣城外待命。及命下。將舁疾赴配。判尹李寅燁上疏有曰。某今年七十有五矣。重得奇疾。氣息奄奄。朝暮就木。而今若配之以荒裔。迫之以嚴程。則必將死於道路。特丐其縷喘。終於牖下。豈不有光於聖上仁厚之德哉。某退休林下已四十年。高風峻節。絶塵離群。有足以振勵衰俗。荷聖朝之褒崇。爲一世之推許。而徒以篋笥之私記。遽罹嶺海之遠謫。實非所望於聖朝。況某俱喪兩子。孑然隻影。獨寄人世。而泰輔之樹立如彼卓卓。傳曰子文之後。猶將十世宥之。有功於民則子孫雖有罪過。尙且寬貸。134_430a今以泰輔之節。不能保其父。則其憫惻憐傷爲如何哉。上納其言。遂寢竄配之命。臺諫復啓請還收。久而乃停。公始歸本第。自是疾尤沈綿。至秋挾感遂革。屬纊之日。謂左右曰今日我當死。何不設席以待。遂扶掖遷于廳事而卒。享年七十五。是年十月。葬于宅後百餘步乙坐之岡。南鄭兩夫人並祔。從治命也。前配宜寧南氏。國初名相在之後。金城縣令一星之女。間愬不行於家庭。和樂不失於娣妹。後配光州鄭氏。副護軍時武之女。撫慈諸孤。猶己出。執祀甚栗。宗黨稱之。後視公官秩並贈貞敬夫人。南夫人生二134_430b男。長曰泰維。擢文科官止持平。居家孝悌。立朝剛直。不容於時。卒窮阨以死。次曰泰輔。文科壯元。官止弘文館副應敎。有文章才學。己巳諫死後旌閭贈吏曹判書。鄭夫人生一男二女。男泰翰。筮仕爲齋郞。女長適正郞李濂。次適金弘錫。今爲文學。側出女適引儀呂必建。持平初娶參奉金夏振女。生一女適進士李德孚。後娶士人鄭女。生二子弼基,弼謨。弼基娶士人任震英女。生三男四女。男師心。女適趙漢弼。餘幼。應敎娶完南府院君李厚源女。無子。取弼謨爲後。一女適進士李德海。弼謨娶僉正辛受和女。生三男134_430c二女。男師允。餘幼。泰翰初娶士人李喜重女。生一男一女。男弼遜。女適崔象德。後娶士人黃植女。生三男二女。男弼運。餘幼。李濂一男二女。男顯弼進士。女適尹勛,徐命宅。金弘錫五男二女。男光獻光彥光喆。女適李倚重。餘幼。公生四歲而忠肅公下世。旣長不能記其儀形。常展忠肅公遺像。必泫然。每語及先故。必下氣低聲含悽而言。聞者感歎。當先忌則必入城而參焉。哭泣之哀。無異三年之內。及其末年。自貞憲公以上三世皆當祧遷。移奉于公家。公奉其祭祀。克致誠恪。雖至老耋。未嘗少懈。公常病近世祭禮家家不134_430d同。又古今異宜。難於適從。及得玄石與明齋往復所定圖說而悅之。略加增損。務合人情。遂爲定式而行之。公旣少孤。伯氏護軍公亦早世。事仲氏承旨公如嚴父。友敬備至。或失其意則下立庭前。終日拱手。不命之坐。不敢上。第三兄處士君年歲相近。隨肩讀書。未嘗相捨。及沒而無嗣。寡嫂尹氏卽美村先生之女也。公命次胤繼其後。而迎于家奉養備至。及己巳禍變之後。又奉迎于石泉。辛未尹氏遘癘。時公年旣衰暮。而終始視藥。及其喪。家人及親舊苦勸出避。公不聽。手執禮書。指揮斂襲。成服後始移他所。外祖觀察134_431a公汎海朝天。舟覆不返。公每痛其不得考終。語必悲咽。撫念從姪。恩意備至。每歲時或得外方例餽。必先計內外先代祭祀所用。然後始許供用。此則公居家行誼之篤也。公見解之明睿。得之天稟。加以工夫精密。自退閒之後。遂專意於四書。積年沈潛。融會貫通。然後始乃隨得隨錄。而於庸學尤加致力。至於詩書則蓋以得於四子者推之。迎刃縷解。沛然有餘。旣成書。名曰思辨錄。蓋取愼思明辨之義也。或謂辭語不能宛轉者。公曰論辨之際。辭語之不能宛轉。勢固然矣。以七十子之服孔子。而子路之言。至謂子之迂也。134_431b古人於其心之未契者。不厭極言竭論。不如後世之不問義理之如何。只察言語之末以爲驚怪者也。當公休官之初。玄石屢勸用力於學問工夫。公笑而不答。後玄石復有所云云。公乃作詩以見意。云求名求利等勞神。誰似愚夫解爲身。無事意慵兼廢詠。餘生天許作人人。其小序曰人說和叔欲我寧求作詩人。余聞而撫掌曰吾弟所以憂我者。豈有他哉。正憂其猖狂謬戾。卒之無所善其名以死耳。憂之固當。然其所欲我者未當。與吾爲詩人。寧爲閒人耳。夫求爲詩人。求有小名。名在人間。在我吾將爲名乎爲人乎。聊134_431c述意以賦一絶。亦欲吾弟聞而笑之也。此則公專心爲己之學也。公嘗註老莊之書。尹明齋慮其流耽。貽書戒之。公答曰老莊之說。雖舛聖人大法。又不至都無可採。乃爲說者所亂。使其意不明。旣不得其所以舛於聖法者。又倂與其可採而泯之。在二子醇疵俱掩。在後人去取皆迷。有足悼歎。所以不揆淺陋。略爲箋解也。尤嚴於斥佛。嘗曰先儒所謂彌近理大亂眞者。亦是過與之辭。佛氏豈有近理者乎。孟子論陳仲子。不過曰避兄離母。惡得爲廉。其闢揚墨。不過以無父無君。蔽其罪。彼三子者豈無可觀者。旣曰無人倫134_431d則餘不足言。彼佛則無父無君。合揚墨而爲一。其言寧有是非之可言耶。況其所謂近理者則只是脫胎於老莊者乎。公嘗言陽眀集初未得全書。但見其傳習錄。何其言下頓悟者之若是其多也。其弟子之浮夸無實如是。其師之所存。可推而知也。及得全書。遂段評駁曰。專務新奇。都是穿鑿。人之流入是學者。不知何所取而然也。此則公排闢異端之嚴也。自公休退之後。年少後生。束脩願學。爭赴門下。公皆欣然受之。爲構書齋而處之。不問門地高下。隨其才品賢愚。皆至誠敎誨。其或有可敎者則愛惜特甚。課督有程。134_432a每當冬月。學子多聚。公必早坐鱣席。以次授業。勤勤懇懇。猶恐其不能解聽。雖已領得而又重言之。或引喩事物之易見者。或假設以俚淺之言以曉之。雖蒙學之士。莫不厭足而心悅。其或有疾病則至誠憂念。極力救護。聞其死亡則必設位而哀臨。存恤其家。請學之士。常滿書齋。或訓誨經史。或勸課製述。問答講論。終日不倦。夕後則組帶列侍。談笑從容。至夜乃罷。日以爲常。春夏則杖屨多在田間。子弟挾冊隨往。藉草壟上。對坐講劘。每値除夜申夕。必置酒食。與之達宵團欒。常於花辰月夕。携冠童逍遙溪邊。風詠而歸。134_432b公平生未嘗有引而自高之意。及門之人率皆請肄文藝詞章之業。公亦皆諄諄誘導。俾得成就。嘗曰欲業文藝者。讀書必先探究其義理。旣得於義理則其於文藝。不期進而自進。若但專意於記誦章句而已。則雖於文藝。亦不可成。及至晩年。及門之士甚盛。亦皆承公指敎。文行並進。第名登朝者甚多。或至宰列。而能以名節自礪。蔚爲世用。斯亦近代所未有也。此則公成就後學之功也。公天資篤厚。氣象嚴重。望之儼然有不可犯之色。而及其接人。言笑款洽。和氣藹然。人皆敬憚而親慕之。平生最惡矯情近名之事。絶134_432c去駭俗苟難之行。平居恂恂無異於人。而至於義理所關則一刀截斷。未嘗有毫髮游移。見道極明。析理甚精。於子思所謂不明不措不得不措者。蓋嘗服膺而用力。故思辨旣熟。觸處洞然。凡經傳文義之艱深難解者。衆方疑晦。莫得其頭緖。公徐以一言發其歸趣。便令人脫然開悟。至其平居言論。則類皆平易慤實。未嘗有一毫高遠之說。聽之雖似尋常。而苟知悅而繹之則見其義理無窮。皆可終身服行。藻鑑甚明。預言人賢邪成敗。後多驗焉。或有制行之高。似乎難及。而若見其心術之不善則痛斥之。行事雖有錯謬。134_432d而情有可恕者則不棄也。不以一世之毀譽而有所取舍愛惡。故其初則頗與人觝牾。及其後人始服焉。處朋友立朝廷。羞爲骫骳隨波之行。故世或目之以固滯。然當事處義。雖己巳有所定。必好問於人。不擇賢愚高下。苟有可採者。不吝舍己。至於講論文義。雖後學蒙識。若有一得之見。則傾倒奬與。其心無係着。物我無間如此。性簡亢少許可。而至於論人則必取其一長。未嘗有求備之意。與世寡合。絶交游簡還往。而至於當官奉職則一心勤恪。未嘗有厭事之意。是時懷川主時論。當路諸人競相和附。進退與奪。唯視134_433a其向背。公獨持讜議。不肯隨其俯仰。於是側目者衆。公知不可有爲於世。乃歎曰與其屈志辱身。聽其翕張。豈若潔吾身行吾志。以終於畎畝間哉。戊申罷官歸石泉田舍。初亦間出應命。後遂稱病篤終不起。石泉地磽确不宜穀。遂躬自治農。農月則與荷鋤員耒者。盡日於田間。終歲作苦。又種果賣樵爲生。而簞瓢亦至屢空。實有人所不堪者。公處之晏如。略無幾微之見於外。時携門下諸生。嘯詠溪上。自有無限好氣象。平生言行。一本於忠信。而敎導後學。必以此爲主。嘗曰忠信人之所得以爲人者也。可不念哉。嘗著134_433b訓戒以遺子孫。首言身後喪祭之節則以節約爲主。次及讀書爲學之方則以忠信爲本。末及兄弟親愛之道則以不聽婦人言爲先。又以三年上食非古禮。嘗曰異日吾死後。汝曹宜深念吾言。無惑於紛紛者之論。古禮旣明。吾意素定。汝曹雖由此得罪於衆。不可輕背吾訓。及公沒後其家一遵遺訓。卒哭後徹上食。唯於朔望設殷奠。公嘗戒門弟子曰士大夫行身處事。當務誠實。不可矯飾。設若陷於罪戾。言苟以實則人或相恕。飾辭文過則非但人無救之者。吾過愈深矣。嘗曰天之生民。皆有其職。若小民之怠棄其業。134_433c不能自食者。士大夫之不事其事。自以爲高致者。皆天之棄人也。又曰凶德有二。傲與惰也。傲者忤於物。情惰者害于身。公心地寬大。執守堅貞。凡世間是非榮辱。無足以動其心者。惟心之所安。義之所宜。執之而不撓。行之而不疑。至於出處大防。毅然自守。雖賁育莫能奪。先聖所稱可以托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者。非公之謂歟。嗚呼。世之知公者鮮矣。聖朝之所奬。與一世之所尊尙。不出乎恬退一節。而抑不知公於學問有深造獨得之見。眞正篤實之工。潛心經訓。硏賾精微。平日制行。未嘗規規於繩134_433d尺。而表裏誠愨。始終如一。苟非深知爲己之學。洞見大道之源。能如是乎。顧公病世之儒者類多徇華遺實。矯情干譽。常自處以閑人。不欲以學問爲名。微意所在。人孰得以知之哉。竊觀自古辭榮退閑之士。或以宦成名立。年至縣車。或以時危世亂。見幾色斯。如疏太傅張季鷹當時歎其高。後世稱其美。若公者以年則未及強仕。以時則遭遇聖明。又無立錐之地蓋頭之瓦。而只以言不行道不合。浩然而歸。結茅爲屋。墾石爲田。糲飯菜羹。人不堪其苦。而悠然自得。樂而忘憂。此固合於用捨行藏之義。今乃以勇退急流。134_434a爲褒公之第一義。其亦淺之爲知公也。不佞先祖遲川公與公之先子錦洲公。早有同盟之誼。而契許特深。先君子與公同里閈相善。不佞粤自幼少時。稔聞公言論風節。景仰有素。及長與二胤後先登朝。繼修舊誼。情好無間。亦嘗訪公幽居。獲拜床下。或至移日開懷與語。討論經史。娓娓忘倦。雖無束脩之禮。寔有執鞭之願。若論其情誼。與及門之士何異。自謂慕公之篤知公之深。非世之等閑尊慕者比也。公之孫弼基兄弟䄂家狀來請易名之文。義不可辭。因其狀文就加删潤。兼以平日悅服於心者。撰次如右。敢邀節134_434b惠之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崔錫恒撰。
西溪先生集卷之二十一

 

明谷集卷之三十三
 諡狀
吏曹判書晩休朴公諡狀 a_154_540c


公諱泰尙。字士行。姓朴氏。籍羅州之潘南縣。十一世祖諱尙衷。高麗末。官右文館直提學。自是世著名德。曾祖諱東善。議政府左參贊。贈領議政。諡貞憲。祖諱炡。策勳靖社。吏曹參判錦洲君。贈吏曹判書。諡忠肅。考諱世堅。承政院右承旨。贈吏曹判書。妣贈貞夫154_540d人崔氏籍海州。大司憲有源之孫。公生以崇禎九年丙子十二月初五日。生甫七日而虜難作。負抱襁褓以避兵。顚連道路。幾不保。因多病。十歲後。始知讀書。不煩師而學日進。解悟超詣。凡有作述。見者歎異。甲午。中進士。甲辰。丁內憂。居喪盡禮。爲鄕䣊所稱服。己酉秋。補童蒙敎官。不仕。辛亥冬。魁庭試。主試諸公。相賀得人。例授成均館典籍。二日而旋拜兵曹佐郞。公不樂名驟盛。不就考。壬子春。復拜典籍。再授兵曹佐郞。遷司諫院正言。考試湖西。開場。擧子有來請改題者。公不聽。俄有急呼火起火藥者。滿庭驚沸。同坐亦154_541a欲起視。公止之曰。此欲惹起亂場耳。愼毋動。已而諸生擁進喧嚷。請開門避火。公笑曰。火起何處。誠如汝言火發焰焇。人已入熛焰中。可及避乎。汝但安坐綴文。諸生乃相顧愕然。卒得興訛者數十人。禁治之。人服其臨事從容。有鎭物之量。還拜司憲府持平。掖庭人有行禱祀者。公執治如法。癸丑春。遞拜兵曹佐郞。旋拜正言。上因微事。罷推兵曹參議孟胄瑞。公入侍。論其不可。語多截直。上怒甚。公猶爭之強。鄭相國太和進曰。近來言事人。承一未安之敎。輒皆引避。未有固爭之意。臣心常非之。今日朴泰尙誠得諫臣154_541b之體。宜優容。上意解。終納公言。鄭相國退謂人曰。今見朴正言前席爭論。辭不少撓。眞可畏人。夏。季父判書公爲司諫。以親嫌遞。爲兵曹佐郞。遷持平。因災異。與同僚上箚。以七事陳戒。言皆剴切。秋。選入弘文館。爲副修撰,校理。出爲咸鏡北道兵馬評事。沿邊列邑鎭將戍卒咸憚戢。其有宿弊爲兵民害者。稟報監司。多所釐改。邊氓賴安。甲寅秋。入拜吏曹佐郞,正郞。兼南學敎授,春秋館記注官。移校理。冬。復拜吏曹。乙卯春。以暗行御史。廉察湖南還。兼漢學敎授。遷修撰。兼校書館校理。病遞。夏拜副修撰。上疏論得失。觸時154_541c諱免。秋。陞司藝。除尙州牧使。辭不赴。丙辰夏。又以暗行廉察咸鏡道。秋。拜洪州牧使。平易近民。務通下情。州以大治。舊例沿海州縣。遇稅船於界內覆敗者。漉出其米。散之民戶。令及秋還償。爲官者率慢不爲意。吏益怠事。不以時擧。及至聚衆撈米。則米入水已經累日。敗爛不可食。又多被偸。減以分佈民間。民不勝其冤苦。公到州之明年。益山稅船敗于州界。公得報。卽疾馳行百餘里。到船處。命衆分櫓。負索曳出沈舟。舟起而米斛悉完。移載他船。就海岸曬乾。米不甚傷。屬歲飢。民爭取去。惟恐或後。因此濟活甚衆。丁巳秋。154_541d以親老辭歸。戊午。敍拜軍資監正。己未。移宗簿寺正。轉司藝禮賓司僕正。冬。擢重試陞通政。拜承政院同副承旨。轉至左承旨。庚申春。吏曹判書李元禎廣樹私黨。濁亂朝廷。上怒削其職。備忘中有太阿倒持之語。院僚以爲元禎有罪。非如莽,卓。備忘之語。恐欠稱停。欲請删改。公聯名覆奏。又於金相國壽恒之特敍也。上引見諸承旨。擧金公乙卯上箚。詢問其有罪與否。諸僚語皆依違。公獨進對鑿鑿。白其受罪曖昧。上仍命拿鞫其時論啓臺諫。公復進曰。金壽恒久典文衡。屢掌銓柄。當時憸小輩惡之者甚衆。彼論154_542a啓臺諫。難逭搆誣之罪。然當時聖敎嚴峻。臺臣等特逢迎上旨。以濟其私耳。今自上但明燭其欺蔽之狀。直加罪罰可矣。至於拿鞫。實無可問。亦關後蔽。仍又極言人臣之阿意逢迎。其罪固大。而人君亦不當輒以一時喜怒。取快目前。終貽後日之悔。其說反覆不已。蓋以深規當初自上處分之失當意甚明切。上皆嘉納。旣退。諸僚深服公倉卒陳對。明白切當。以爲不可及。議者以爲元禎削黜。機在轉移。覆逆之啓。公不當參。金相國忠直。不爲盛陳。乃但明其冤而已。臺諫當拿鞫。乃再三陳達。至寢成命。謗議紛154_542b然。久而未已。夏。拜吏曹參議。時鄭公載嵩爲銓長。任事者欲間執政。權勸其引金萬重爲右侍。鄭公不聽。竟用公以自助。一日公就鄭公。鄭公問曰。吾輩當更化之初。未諸物情。注擬多不協當路意。將奈何。公曰。但當平心秉公。人謂不能則退而已。何必強所不能。求合於人。鄭公喜曰。唯唯。吾意正如此。公歸。鄭公顧謂子弟曰。吾今得賢僚。不負所知。由是勳戚家皆不平。秋。遞拜刑曹參議。轉兵曹參知,參議。冬。仁敬王妃薨。春曹缺佐貳。領相文谷金公。以公權春曹事。時上御昌慶宮。殯殿在慶德宮。喪又拘忌。兩宮154_542c不得相通。大小事皆取決於公。禮多變節。酌處合宜。事以辨治。人無異議。金相國深加歎服。謂人曰。素知朴令優於文雅。不料其才識至此。旣而卽眞。遞兵曹。移司諫院大司諫。病遞。還禮曹。辛酉春。拜吏曹參議。公不樂居銓地。凡五疏辭。再違召命。引疾愈力。上但賜告終不許。勉就職。務抑躁競淸仕路。靳戚里子先擬銓郞。戚里子時在言地。捃摭庚申事劾公。至詆以瞻顧媕婀。方李元禎之削黜。金相國之收敍也。消長之勢已成。如使巧於進取者當之。必乘機投間。務合時好。而公之雅意。不涉於黨論。傾奪之間。但直陳154_542d是非。規正君德。謂當以墜淵加膝。存誡於進退之際。欲使聖朝擧錯。如持衡稱物。一出於引君當道之意而喜爲一切之論者。乃反訾謷於前。言官今又恣意侵詆。可勝歎哉。上旣不允其啓。又於公辭章。優批以安之。公力辭解職。其後人或言臺論之不正。公輒曰。當時天怒嚴重。入侍諸臣。擧皆惶怖。前席奏達之言。記注者未免遺漏。亦有失本旨者。臺官得於傳聞。有此駁論。誠不足怪也。夷然不以介意。金相國歎曰。朴令公之處謗。人不可及。夏。再爲戶曹參議。冬。除仁川府使。以親病不果赴。壬戌夏。拜禮曹參154_543a議。秋。遞授僉知中樞。遷掌隷院判決事。移成均館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冬。拜大司諫病遞。癸亥春。丁外憂。守制哀毀。情禮兩盡。服闋。拜刑曹參議。轉兵議。時大司成闕。上重其選。命大臣擇擬。領相文谷金公,左相鄭公知和啓以自非十分表著之人。則難以厭服物情。當品中惟朴泰尙合此任。於是復拜大司成。夏。陞授平安道觀察使。辭陛日。上引見謂曰。八道方伯。爲任最重。卿必知之。卿出入近侍。才望素著。且知秉心公平。故特授西藩。卿其勉旃。公三年中十入銀臺。上之照臨眷注於是乎不偶矣。關西當燕154_543b路。多發金貨。予賈人取贏。以度公用。吏日夜抱案牘所籌算。不出利賄消息。公常顰蹙曰。安見士大夫爲此牙儈主耶。冬。邊民潛出境。戕殺淸人。淸使來詰。朝廷召公聽勘于京。而未有符信。公歎曰。道臣行止。何等重大。而乃以尺紙招麾。脫有變。豈不敗誤耶。卽出次境上。馳聞以不敢輕離官次之意。朝廷始發遣宣傳官。持符合驗。仍欲收公所佩符。公擧手辭曰。寧有旨追逮我乎。不然。我自以方伯赴召。此符何可得耶。收符者懼。踧踖而退。人聞之。皆以公爲得體。離營之日。士女奔走擁車。多有泣下者。公在西僅五月。而民154_543c之愛慕如此。北使旣還。卽拜吏曹參判。未幾病遞。丙寅春。拜大司成。兼承文院提調,備邊司有司堂上,同知經筵事。夏。還拜吏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移戶曹參判。秋。拜司憲府大司憲。病遞。爲都承旨。兼藝文館提學。冬。復拜吏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丁卯春。遞拜工曹禮曹參判。夏。移兵曹。有憚公居內者。薦公出爲咸鏡道觀察使。北路比歲凶荒。民罹飢饉。流離失業。公惠困窮明聽斷。減稅蠲賦。興利除害。戊辰秋。歲又失稔。公知民將大困。預戒州郡節用儲粟。又計列邑倉實及民戶。算口賦糧。以至麥熟。其不足者。請154_543d于朝。移嶺南近海關西近山郡邑倉粟。得三萬六百石。至己巳春。泛海踰嶺。水陸不絶。賑哺以時。人忘歲儉。是夏秩滿。入授同知中樞府事。遷刑曹參判。秋。轉戶曹。冬。充弔慰使赴燕。行李蕭然。惟往來資糧與衣衾而已。通事輩私相謂曰。不曾見如公淸者。公旣行。改授同知中樞府事。庚午春復命。再爲禮曹參判。公自己巳還朝。不樂從仕。每有除拜。輒以疾免。秋。出爲江陵府使。俗多豪。素號難治。公至。擊強宗撫羸弱。前是爲府者。非列卿丐閑。卽名士左補。率多養高不事事。訟牒山積。久者至五六十年。公剖決無滯。案牘悉154_544a空。豪勢莊屯。多在境內。主者因緣侵漁。爲民所苦。吏不敢何問。公悉摛治之。奸暴斂跡。一境帖息。邑人立碑以寓去後思。聽事之暇。課竹種梅。日嘯詠其間。若忘世者然。在江三年而歸。築室先墓下。與季父判書公。杖屨朝夕。談耕論文。歡然爲終老計。癸酉秋。拜黃海道觀察使。病不赴。特命罷職。甲戌夏。特除同知義禁府事。繼授吏曹參判。時上盡逐用事者。召復舊人。舊人又逬散在外。朝著殆空。上問公之來。日三四。公不得已入城拜命。未幾超拜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子右賓154_544b客,都摠府都摠管,承文院提調。俄薦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撰進中宮復位玉冊文。公還朝之初。聖上順天意察人心。迎還坤聖。再正壼位。時鼎席一空。春曹惟參議在職。而升復降還。出於倉卒。禮儀節目。未有所講。議者多恨其草草。徐相國文重爲西銓長。邀公于第。欲聯名陳疏。請竢大臣及宗伯入朝。講定儀節。以重大禮。議未定。而政院先已啓請。因罷歸。及是有欲搆擠南相國,徐相國者。嗾儒生朴尙絅與臺官鄭澔。相繼投疏。論斥兩相。或曰人倫斁絶。或曰欲閼成命。仍並中公。禍機甚危。公出城外。154_544c上章待罪。上優批開釋。召命旁午。且除禮曹判書。以冊禮迫期。敦諭促還。公強起視事。秋。拜議政府右參贊。兼知經筵春秋館事。冬。轉左參贊。移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乙亥春。兼內醫院提調。還左參贊。俄還禮曹。東宮入學。公爲博士。加冠爲贊冠。搢紳稱艶。又撰進冠禮敎書。夏。遷大司憲。卽避遞。拜左參贊。因求言上疏。略曰。向者疏決時。權大運則以久被任使。閔其老死瘴海。鄭維岳則以其父死於國。母年九十。並許放歸。此出於念舊恤老之德意。非以其罪有一分可恕也。權愈等三人。則大臣發言初議宥釋。臣154_544d以其罪涉護逆持難。因有量移之命。伊日之事。自外泛觀。則重罪先放之疑。諒不爲過。但旣曰重罪先放。則似不無次罪之可以容議者。此所以大臣陳箚而有會議之擧也。年少新進。徒以峻激爲事。不念國體損傷。誠爲可惜。然何至有沮撓君命之計。而嚴敎出於情外。三司擧皆惶怖。此由上下情志之未孚。而其事又將因壹廢食。渙散至此。何事可做。深願聖明更取大臣請對時所陳說話。早賜裁處。兼採三司之論。務令情志交孚。可否相濟。調和鎭定。以服人心。又曰。今日偏黨之弊。終必亡國。滔天之禍。有不可勝154_545a言。李師命,李翔之事。按獄諸人。乘時逞志。窮極慘毒。到今稱冤。復官有以致之也。然其獄辭。初無明白辨覈之端。而徑先復官。安得無是非之議乎。吳道一,閔震炯之言。所以發也。旋遭詆斥。使不得接迹。抑獨何哉。前之逞志慘毒。固出於私忿。而今之曲爲扶救。亦未知其無挾私之心也。黨同伐異。務爲偏私者。在臣下。誠有目前之利。而其於國家。將何所賴。殿下於此等處。非不洞照是非。而一切容受。曾無別白之敎。賞罰是何等大柄。而不自摠攬。惟事因循。乃至於此。尙何望振肅頹綱。使人知所勸勉也哉。時在罪籍者154_545b甚多。大臣請會議於朝堂。有所疏釋。而臺臣不肯會議。詣闕引避。議不得成。上責之以沮撓君命。李師命,李翔俱復官。副提學吳道一言師命罪不可貰。修撰閔震炯言翔負累不當伸。俱爲臺議所斥。故公言如此。上答曰。所陳之說。予當留意焉。昨年更張之初。被譴諸臣。一倂復官。此無非慘被宵人之毒正。至冤極痛者。可以快伸公議。而於予心無所遺憾矣。而至於李師命,李翔之事。則於予心終有所不快。蓋是非之天。不泯而然也。李師命之復官。雖非出於罪犯之可伸。而第致祥之當初復官。備忘中非曰無罪。蓋154_545c念貴主毋我負人之義。則師命身負重罪。混同復官。實無所據。有關後弊。李翔之負犯。亦非細故。而向時之人。乘時逞憾。雖不無慘刻之事。而不可以此容恕。故終始堅執矣。頃日儒臣陳達。適在憫旱之日。故不得不許。更爲思惟。罪無可恕。而遽變前見。不但爲執法之不固。是非混淆。刑賞乖舛。則不自摠攬惟事因循之說。實中予病。烏得免乎。此兩臣復官之命。並令還收。以嚴懲勵。以正是非。時論快之。忌嫉者亦衆。秋。移禮曹。上候不豫。侍藥有勞。加正憲階。拜工曹判書。冬。還拜禮曹。丙子春。拜吏曹判書。公廉方公正。一154_545d洗淆雜。掄選注擬。惟視才器稱否。人莫敢干私。亦無有怨滯者。輿情悅服。是歲大飢。流民之聚京城者。無慮數萬。朝廷就東西城外。爲茇蘧分處之。粥糜以哺於是。管其事者五六人。公主城東。日親往。至誠監檢。嘗粥糜而視稀稠。以防奸偸。飢民擁前上手曰。公有德意。隱恤我民。今雖死無恨。公自經癸亥憂服。受病已深。及後出鎭奉使。驅馳勞頓。傷損非一。漸至羸瘁。甲戌以來。感激恩遇。夙夜在公。略無休時。疾益痼。形神甚憊。或勸公宜思調息。公歎曰。吾病之殆。寧不自知。但國家不幸。屢遭變故。今日廷臣。惟思退保。不念154_546a國事。是豈人臣事君之道哉。吾年踰六十。位躋上卿。無以仰報主恩。今惟盡瘁所職。死而後已。猶是吾分耳。二月。疾勢增劇。屢疏乞解。上終不許。人亦以公雅不欲久居權要。故有不信。及其末疏言辭悲切。多來問候者。公病中猶念職事不置。精神少定。則必酬應簿書。又上疏論賑政。凡諄諄如夢中語者。皆憂國憫時之事。上遣掖庭人問疾。賜御廚珍饌。公已不能言。惟對使涕泣而已。公以不得解職爲深恨。領相南公入侍啓曰。冡宰職務曠廢。請姑解。上曰。向遣別監問其疾。云朝夕難支。今過累日。尙無所聞。154_546b其病勢或有差道否。南相公對曰。病已殆。不可起。頃來屢辭。近日則病谻。亦不能陳疏。今若許遞。雖在病困中。亦必知感矣。上不得已許遞。上之倚任眷惜之重如此。傍人以解職告。公開目作氣曰。遞職乎。眉間微有喜色。旋拜刑曹判書。遞付龍驤衛副護軍。竟以五月初七日。考終于建德坊第。享年六十一。卒之日。上自搢紳。下及輿臺。莫不歎惜。或有踵門痛哭者。訃聞。輟朝二日。弔祭致賻如例。仍勅有司庀喪葬。特從優典曰。以表予震悼軫恤之意。世子亦遣宮官來弔。擇賜棺一具。存沒哀榮至矣。以七月初六日。154_546c永窆于楊州之水落山先公墓南枕卯之原。公聰穎有美質。叔父處士公稱之曰。此子純靜可敎。旣長。端莊溫粹。恬靜寡欲。孝友之性。根於天賦。其事親也。誠敬兩至。考判書公晩嬰疾。委身床第。公供仕之外。侍左右終日。十年如一。不見惰容。若有不安節。顏色焦然。一夜之間。輒至黧黑。及居憂。躬執奠饋。朝夕哭泣。三年之內。未嘗以疾病廢。每値先忌。前期澡浴。至老猶然。及祀之日。哀慕如喪時。與弟佐郞公。自爲知己。塤篪唱和。怡怡湛樂。佐郞不幸早世。撫其孤如己出。對之。輒含淚疚懷。宗族之窮貧不能自存者。憂念矜154_546d恤。若己有是。少養於外家。敬事兩舅。篤愛諸從。及其遘毒癘遭五喪。親舊畏不敢顧問。諸從幼不能親事。公勤於醫藥。愼於殯殮。至襄窆。擧五柩歸舊隴。獨領童僕數指。凡月餘而葬完禮。無所闕。人皆難其事而服其義。性不喜紛華。淡然自守。簡交遊絶造請。口不出粗俗之語。足不蹈衆趨之途。升沈推分。寵辱不驚。趙相國師錫嘗以枯淡譏之。公笑而不答。或曰。枯淡亦自難得。人以爲知公之言。公嘗與佐郞公對棋。小報適到。忠勳都事有缺。佐郞公戲曰。此窠可規也。公正色責之。其謹於進取。此可見矣。好誘掖後生。每以154_547a古人言行文章。諄諄指誨。中心樂易。不設町畦。遇會心人。欣然傾倒。間以雅謔。談笑不倦。和氣藹然。氣度簡潔。語默有節。人謂其過於峻整。見逐名利營分表者。如將浼已。乙卯。群小當國。銓郞有以無薦而得之者。一日就公議薦人。公曰。何爲來問我。其人曰。銓郞通選。必咨先生。此古規。公寧不知乎。公正色曰。吾未見近日還有古規。其人大慙。不敢復言。家甚貧。簞食屢空。未嘗問有無。舊居先廬。外無廳事。設木榻以處賓客。客有三人踵至。以次辭起。矮簷破壁。寒署俱困。而處之晏如。雄饒膩膏之地。不能汚其操。象譯駔儈154_547b之類。莫敢玷其名。田園僮使。無少增益。百口仰哺。官祿不足。則稱貸以度。及卒。斂葬之具。待贈襚而後辦。甁無餘粟。篋無遺衣。問喪諸客。莫不嗟服。徐相國文重謂人曰。見其內堂。湫隘樸陋。殆甚寒士家。信乎淸素可敬。公始以文學。得侍經幄。乙卯以後四五年間。遭擯斥。及進階貂玉。數出入講筵。論難經旨。辭理明切。旁推餘意。諷規時政。上常傾聽嘉納。裨益弘多。立朝忠亮。濟以淸愼。其在州府外藩。嚴明寬惠。吏畏民懷。處喉司。奏對詳明。有懷無隱。居國子則士以矜式。治六官則事克修擧。於天官。自郞舍至冢宰。人不154_547c敢以非義相托。門庭如水焉。公於爲文。淵深精確。不尙浮夸。詩亦不求新奇。閑淡簡遠。尤長衡鑑。老生新學。爭求品題。而刺論利病。一無所失。各自歎服。以爲古人不如。及興文衡。士望洽然。掌試取文。專求贍暢典雅。黜華靡骩骳者。數年之間。文體爲變。玩心經訓。深詣精通。亦未嘗向人言。魯西尹先生與先判書公書曰。得與令胤若季肯相見。又與和叔語。箇箇豪傑也。金相國錫胄嘗謂人曰。今人數知禮之家。必稱林下。科第立身者。輒皆輕視。然以吾所見。博學而該於禮者。近無踰朴士行也。一時推許。蓋亦不輕。物理人154_547d情。無不纖悉。雖難算之物。不待握籌。先已默通其數。其諳練詳密如此。公常以存誠爲齋號。又號晩休子。配貞夫人豐壤趙氏。滄江先生諱涑之女。滄江公於人少許可。獨愛重公。公少時嘗自鄕入都。就候滄江。先生聞公至。卽令左右屛除室中。更飭衣冠而後見公。因謂侍者。此大儒。不可以年少忽之。其見敬禮。不欲以子壻畜之者如此。凡育四男三女。男長與季皆有才。未娶而夭。弼純禮山縣監。次弼健靑陽縣監。女長適府使申瓁。次佐郞李壽涵。次參奉李秉哲。弼純二男四女。男長師任,師伯。女適崔守約。次進士李喆154_548a輔,辛最敏。季幼。弼健三男二女。男師休,師儉。餘幼。申瓁妻男長錫夏。次翊夏黃海兵使。次迪夏。女長適縣令趙海壽。次文科李獻章,郡守李眞淳,朴道根。李壽涵妻一女適尹志溟。李秉哲妻五男四女。男華重,台重,箕重。女金煇。餘並幼。嗚呼。公立朝三十年。顯晦之迹。焯然在人耳目。非有溢言曼辭以誣逝者。不佞先祖遲川公與錦洲公。有靖社同盟之誼。契好甚密。兩家父子。世修交好。今於諡狀之託。義不敢辭。謹据行狀所錄。撰次如右。以徼易名之典。
154_548b明谷集卷之三十三


定齋後集卷之三
 [行狀]
有明朝鮮通訓大夫行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捴府都捴管朴君行狀[南鶴鳴] a_168_328a


君諱泰輔。字士元。號定齋。羅州之朴。爲世甲族盖久。高麗末潘南先生諱尙衷。本朝左議政諱訔。冶川先生諱紹。有大名。冶川於君。爲五代祖也。曾祖諱東善。參贊貞憲公。祖諱炡。參判忠肅公。父今判書西溪168_328b 翁世堂。母我伯姑贈貞夫人宜寧南氏。以甲午五月降。出後叔父諱世垕。母卽坡平尹氏。魯西先生諱宣擧女也。君與我同年生。而月日稍後。我自孩提。同居殆十年。共游學相長大。中雖分宅。出入起居。不與共者無幾。今承溪翁之命。記述君生平。其可以不文辭。遂抆涕而爲之叙曰。君少而英銳異常。文藝夙成。自十一二歲爲詩。應口而成。發輒驚人。凡於世間物情。亦皆洞透。人或以不自重爲言。溪翁獨笑而不呵責曰。自當有到處。果自冠後。痛加勉抑。存佩韋之戒。言語步履。安詳有度。不見一二年者皆驚。以爲非復168_328c 昔日也。十六歲。娶完南府院君李相公厚源女。自合巹之日。戒婦以善養親。凡於嫁服粧奩之屬。壻身裘帛之具。悉命去之曰。此非寒士所宜。婦家人皆驚恠而不敢違。自是專習詩書四子及宋諸儒說。口誦手繹。沉潛玩味。遂取所嘗唱和爲集者擲棄而謂我曰。吾輩事不當在此也。二十二。以經義中生員。越二年。擢謁聖試狀元。華聞大播。人皆以一見爲榮。而君益自謙挹加勉。以志不在溫飽而一不幸自處。由典籍轉禮曹佐郞。坐試塲出題事。謫宣川半年宥還。仍遘所生繼妣憂。在心制已。錄弘文。庚申冬。卽除修撰。時168_328d 年未三十。而館中諸學士。無出其右。凡有箚論。咸推讓於君。而君奮筆直前。指陳得失。無係乎偏黨。不動於毁譽。人敬而畏之。或多不悅。其所相引重鯁亢文學之士者如趙公持謙。林公泳。盖不過一二人而已。選入湖堂。亦以才望。終不能摧剛刓方。求合於時。如是者數年。在罷斥多。間以玉堂。爲親乞郡。不許。只賜衣食資。上䟽論李判書端夏恇㥘喪守。求媚上下。不合銓長。金淸城錫胄建議陞黜泮享之不當。又以爲吳始壽坐傳臣强之說。囚繫當死。宜先鉤得諸譯而取服。今拷掠之刑。將欲徑加於己。忝大臣之位者168_329a 於事軆。何如也。以此忤旨而被謗。不容於朝。壬戌冬。出伊川縣監。五年而不召。君於奉養之外。毫絲不入己。縣本山峽薄陋。爲官者多不擇。文簿條令。率皆鹵莽。略無頭緖。君曉夕孜孜。爬櫛無遺。間讀書敎士。以身爲矜式。邑人大悅。丙寅春。罷還。復踐玉堂。拜吏曹佐郞。暗察湖南。黜其尤無良而爲民害者。仍陳兵判李師命按道征利。至今爲弊根。宜一傡痛革。以此朝多仄目。而南民則稱眞御史。陞應敎。値議遷長陵。君以爲地家禍福之說。近巫史星曆。本不足道。時獻議數十人。言當遷者居三之二。其一亦不敢明言。168_329b 君獨能痛陳之。上責其妄率。已而更乞外。牧坡州。治如在伊時而益厲。吏民畏愛之。聲績益著。廟堂議薦擢方面者屢。而竟亦不果。己巳春。有牛栗兩賢黜享事。君不欲在州。奉行引免。家居月餘。値中宮將遜于私第。事機危急。君旣爲儒生。監察等各構諫䟽。散官七十餘人。臨夕會坐公廨。又欲陳䟽。得文字數度語。互有得失而無爲之去取者。君慨然筆削。手自繕寫投進。卽夕設親鞫。先命拿入䟽頭吳判書斗寅及其次二人。君謂吳判書曰。旣同䟽事。又定文寫䟽。皆自我手。不可苟免。公入上前。據實以對。168_329c 無含糊覆盖。以欺君也。預使從人備囚服以待。俄而逮君入置對。神氣自若。辭旨明切。左右觀聽。莫不動色。旣徹夜備受拷掠。及明。下兵曹又鞫。每當供辭署名。跪必謹。運筆如常。嗚呼此豈一時勉强而可能耶。當其時。風霆猝發。觸之者靡不碎。在庭大小。股慄失度。而君不撓不激。陳義辨理。感動神明。有足以起聖上惻隱愛惜之心。故末乃少霽威怒。而止於海島之竄。君自獄中。手書感戴之意。以示家人。嗚呼。此豈沽名自說者之所爲哉。彼忍能對君上。以君䟽語爲無狀者。獨不愧其心哉。然而秉彛之在人。有不168_329d 可誣者。君之出獄。道路婦孺。皆擁觀流涕。平生不一識面者。奔走來問。窮日夜不止。此孰使之然哉。金吾郞押君出。以君病創不可行啓聞。舁到鷺梁南岸調治。至五月五日朝。喉隘不通勺水。君乃曰吾今死矣。訣別慈夫人。又欲備述置對時辭語曲折以授。人盖知傳說多不同。故爲正訛謬。而西溪翁以其氣促止之。出廳外。拊心而哭。君使人傳白曰。毋過悲傷。重不孝之罪也。徐命移己卧凈席。恬然而逝。賓朋各出賻襚。余爲解五采絛帶。助深衣襲具。旣殯舁還。葬楊州水落山西麓長者谷負甲之原。卽西溪翁林莊之168_330a 後。而我伯姑幽宅之左麓。得年僅三十六。而得男輒不育。只有一女。君臨絶。請以兄持平之少子弼謨爲後。有詩文集六卷。易義刪註。投壺儀各一卷。嘗欲收摭東賢粹語。爲近思續錄。又以其餘。編東國事文類聚而並未成書。君之行義。多可書。而己巳一事。足以有辭於天下後世。餘可略也。盖論其邁往之資得於天稟者高。氣質之變由於工夫者深。有一於此。亦可以樹立一世。况兼之者哉。其事親也。能致先意養志之大節。而晨昏溫凊之末。亦未嘗忽略。其飭躬也。雖負絶倫超俗之遠識。而繩尺步趨之細。亦未嘗放過。168_330b 嗚呼。豈不賢哉。君才長政事。䟽通而不流。文章勁健條暢。論者以爲見識辭致。殆非近世所見。嚮若無中道之夭扎而效用當世。則其所成就。必有卓卓可觀者。而今則已矣。甯不悲哉。顧其當變故倉卒之際。能不愛一死。以扶植人紀。使不至陷墜而不可救者。其於世道。輕重又如何矣。及壼位旣復。中外人士爲立祠鷺梁及坡州伊川。朝廷亦贈君吏曹判書兼大提學。致祭。㫌其閭曰忠臣某之門。嗚呼。日月之更。人孰不仰。而君之當時抗對之言。又安知不爲今日明主悔端之助乎。觀於君沒未久而復君官爵168_330c 者。可知之矣。謹具君終始如此。略備秉筆者採擇。我伯姑。卽我祖考金城縣令贈領議政諱一星之女。而左議政諱智八代孫。左承旨諱彦純玄孫也。我祖考下世日。君年十二歲。祖考嘗謂家人曰。人於童丱時。可决其平生。如某者。其氣魄雖在今至御前。必無難色。以今觀之。可謂不負所期云。戊寅春日。內兄南鶴鳴謹狀。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사원(士元)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유세차 숭정 기사년(1689, 숙종15), 초하루가 병인일인 6월 10일 을해일에 유봉(酉峰)에 병들어 칩거해 있는 이 사람은 사원이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도 가서 영결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동생 윤졸(尹拙)을 대신 보내어 영전에 술 한 잔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고하는 바이다.
아아,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는 탄식은 삼대(三代) 때부터 있어 왔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말세에 더욱이 어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와 같은 재주를 옛사람에게 비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세에서 찾아본다면 그 걸출함에 짝할 사람이 없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대는 총명함이 매우 뛰어나고 사리에 대한 고찰이 철저하므로 그 역량을 확충해 가면 선현(先賢)의 학문을 충분히 계승할 수 있으며, 식견과 사려가 매우 깊은 데다 견지한 뜻이 강하고 바르므로 그 뜻을 행해 간다면 세도(世道)의 중임(重任)을 충분히 맡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비루함으로는 그대를 따라갈 수 없지만 내 심지 확고부동하여 실로 평생 뜻을 같이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름으로써 세인들이 일컬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대가 단지 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이 이룬 정도를 행하였고 성대한 조정에 간언(諫言)한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끼치게 한 정도로만 인식되게 하였는가. 아아, 하늘이여. 도대체 이 세상에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그대에게 재능을 부여해 준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그 당시에 뇌성벽력이 쳐서 하룻밤 사이에 원통한 피가 조정의 뜰에 뿌려졌는데, 그때 그대의 일편단심은 귀신이 옆에 있었어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비록 사람들이 대신 죽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서도 구차하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고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속이지 않았으니, 그때 몸은 비록 죽어 갔지만 견지한 뜻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그때 그대의 철석같이 단단한 심장과 충의로 뭉쳐진 간담은 밝은 태양과 빛을 겨룰 만큼 열렬한 것이었으니, 이와 같은 신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후일 성상께서 비록 후회하였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아아, 그때 그 뜰 안에 가득 모여 있던 자들치고 그 누군들 사람의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임금의 잘못을 익숙하게 보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저 비루한 사람들을 어찌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 조정의 인후(仁厚)한 기풍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병들게 되었다는 탄식이 어찌 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재앙이나 복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르러 오는 경우는 모두 천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군자는 원칙대로 행하면서 그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르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곧으면서도 남의 단점을 들추는 일이 없이 논의는 항상 대체(大體)를 따르고 각박한 것을 중시하지 않으며 기개와 절조는 충후한 데에 바탕을 두어 일찍이 편벽된 적이 없는 그대로서는, 의당 형벌의 화를 당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듣건대 그대가 국문장에 나아갔을 때 또 그 태도가 차분하고 언사가 분명하여 듣는 사람들을 절실하게 만들고 뭔가를 느끼게 하는 논리만 있었고 저촉이 되거나 반발을 부르는 기운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그대의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 기이한 화를 당한 행적을 보면 그대의 선조(先祖)인 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과 거의 같다. 문장(文章)이나 지행(志行)도 모두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만한데, 문정공의 경우에는 자손들이 번성하여 지금까지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가문이 되었다. 이를 보면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는 법인데, 어찌하여 그대에게 있어서만은 유독 한 점의 혈육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인가. 그 재앙은 같은데 받은 복이 같지 않으니, 공의 경우에는 명이 거듭 불행한 것이 또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너무나 불쌍한 우리 누님이 일찍 남편의 상을 당하고 그대를 얻어서 아들로 삼았는데, 그대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일가가 모두 칭송하고 부러워하였다. 게다가 그대는 또 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누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것으로 봉양하였으니, 이는 우리 백고모(伯姑母)에게 이혜중(李惠仲)이 있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작년에 그대가 파주(坡州)의 관아에 있을 때 누님의 면전에서 만년의 복을 경하드렸는데, 그때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우리 누님이 노년에 또 이런 혹독한 고통으로 애간장이 녹아도 호소할 곳이 없게 될 줄을. 아아,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나로서는 그대에게 기대한 것이 실로 많았다. 우리 선친이 남긴 글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데, 내가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탓으로 선친께 욕을 끼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그 문집을 일찍 세상에 내놓아서 취모멱자(吹毛覓疵)의 빌미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차 세상의 분란이 다소 진정되기를 기다려 그대에게 그 문집의 편정(編訂)을 맡겨 간행함으로써 영구히 후세에 남길 작정이었다. 그리고 또 나는 항상 사람들이 참소를 당하는 재앙이 실로 후세에까지 유전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예컨대 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이나 우계(牛溪)가 선비를 죽였다는 무함 같은 것이 그것으로, 이는 단지 당시의 혼란 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종의 사악한 설이 지금까지 전습되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선친께서 당하신 일도 어찌 양현(兩賢)보다 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 줄기 정기(正氣)를 지닌 채 거센 물결 속의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서서 명실의 구분을 매우 분명히 하고 공사(公私)를 확실히 분변함으로써 사류(士類)의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고 세상의 교화를 돕는 것을 내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려고 했었는데, 이러한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문(斯文)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부류들이 은밀히 좋아하고 있으니, 우리 도(道)에 있어서의 재앙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내 조카 가교(可敎)를 잃었는데 지금 다시 그대를 잃고 말았으니, 노쇠함과 병으로 인해 죽을 날이 가까운 나로서는 이 실낱같은 목숨을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 도와주는 사람 없는 맹인처럼 또한 죽기 전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나는 처음에 그대가 고문을 당하던 당일에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늘이 실로 그대를 살리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였고, 또 피와 살이 터지고 문드러진 뒤에도 평소와 같이 정신이 의연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 ‘마음이 가는 곳에 기운도 반드시 따라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결국 끝내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대가 남쪽으로 오면 큰길에서 만나 악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날 소식이 없다가 부음이 갑자기 이르러 오니,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끝났으니, 너무나 슬프고 애통할 뿐이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죄를 더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다가 그 봉양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또 평소에 지니고 있던 포부가 이제는 한결같이 모두 수포가 되고 말았으니, 그대 스스로 불행을 애도해 보건대 그대 또한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대의 대인(大人)께서 그대를 장차 거처하고 있는 곳의 옆 산기슭에 묻으려 하고 있는데, 인간 세상 부자간의 정리에서 오는 그 애통함을 어찌 차마 다시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재주가 없는 아들이 병사하였더라도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대처럼 상리(常理)에서 크게 벗어난 죽음을 당한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병든 몸으로 칩거하고 있는 중이라 사람 간의 도리를 거의 못하고 있기에, 달려가서 마주하고 한 번 통곡한 뒤에 그대의 관이 땅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홀로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울고만 있을 뿐이니, 나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아아, 그대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한 달이 지나도록 진정할 수가 없다. 오래 이 세상에 남아서 끝없는 세상의 변화를 눈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다. 곧 있으면 나도 저승으로 그대를 따라가지 않겠는가. 글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고 통곡으로도 내 슬픔을 다 풀 길이 없다. 밝고 밝은 영령은 부디 이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다.


[주C-001]사원(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자이다. 호는 정재(定齋)이다.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인데, 숙부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에 노량진에서 죽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D-001]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 : 공원로는 송나라 인종 때의 신하인 공도보(孔道輔, 1086~1139)로, 원로는 그의 자인데, 1033년에 곽 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를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추지완은 송나라 철종(哲宗) 때의 신하인 추호(鄒浩, 1060~1111)로, 지완은 그의 자인데,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 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 鄒浩》
[주D-002]하룻밤 …… 뿌려졌는데 : 숙종조에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박태보가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궁궐 뜰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그 당시 박태보는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말투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3]후일 …… 후회하였지만 : 박태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숙종이 크게 후회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그 뒤 1694년(숙종20)에 중궁을 복위시키고 박태보에게 정경(正卿)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를 하도록 조처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4]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 : 곽임종은 후한(後漢) 때의 명현(名賢)인 곽태(郭太, 128~169)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168)에 태부(太傅)인 진번(陳蕃)과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모살(謀殺)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벌어진다. 그 일로 오히려 진번과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이어 700여 명이 유배당하거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곽태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들에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현인이 이제 사라졌으니 나라가 병들게 되었다는 시가 있는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 漢室亡矣]”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005]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당시 친명파(親明派)의 한 사람으로 친원파(親元派)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6]그대에게 …… 말인가 : 박태보는 이후원(李厚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그래서 형 박태유(朴泰維)의 작은아들인 박필모(朴弼謨)를 후사로 삼았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7]누님이 …… 삼았는데 : 박태보의 아버지는 박세당(朴世堂)이다. 박세당은 형 박세후(朴世垕)가 일찍 죽자 박태보를 그의 후사(後嗣)로 보냈는데, 이 박세후의 부인이자 박태보의 양어머니가 바로 명재의 누나이다.
[주D-008]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 박태보는 1675년(숙종1)에 2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677년 24세 때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9]백고모(伯姑母)에게 …… 있다 : 이혜중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으로, 혜중은 그의 자이다.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 작은아버지 이정여(李正輿)에게 입양되었는데, 이정여의 부인이 바로 명재의 고모이다. 여기서는 명재의 고모가 이민적을 헌신적으로 키웠고 이민적도 효성이 지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태보도 명재의 누나에게 지극한 효자였다는 말이다.
[주D-010]작년에 …… 경하드렸는데 : 1688년(숙종14)에 박태보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가게 되고, 그해에 명재의 누나 환갑연을 파주 관아에서 치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11]노년에 …… 줄을 : 기사환국 때 박태보가 고문을 받고 유배 가다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12]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 : 율곡 이이(李珥)가 젊은 시절에 잠시 금강산(金剛山)에 입산하여 선(禪)에 뜻을 둔 것을 두고 명재 당시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라는 설이 유포된 것을 말한다.
[주D-013]우계(牛溪)가 …… 무함 :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우계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도록 했다는 경상도 유생들의 상소로 성혼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기도 한 것을 말한다.
[주D-014]오늘날 …… 일 :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의 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가서 병든 부친을 뵙고 죽겠다고 하고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빠져나온 것을 두고 노론(老論)으로부터 공격받은 일을 말한다.
[주D-015]그대의 대인(大人) : 박세당을 말한다.
[주D-016]그대를 …… 있는데 : 박태보는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매장되었다.
명재유고 제35권
묘표(墓表)
박사원(朴士元) 묘표 기묘년(1699, 숙종25)

오호라, 이곳은 반남(潘南) 박군 태보(朴君泰輔) 사원(士元)의 묘이다. 세상의 도가 땅에 떨어진 뒤로 참된 학문을 하는 선비가 드물고 참된 재주를 지닌 사람을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우리 사원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몇 년 만 더 살았더라면 군의 학문이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고서 심원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며, 군의 재주가 큰일을 맡아서도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군을 세상에 내려 주고서 다시 중도에서 죽게 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군은 갑오년(1654, 효종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출중하여 특정한 분야 없이 널리 공부하였고, 책을 보면 반드시 그 의미를 파고들어 아무리 은미한 말이나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한 번만 보고도 분석해 내어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다. 문장은 이치를 담는 데에 주력하여 한 자라도 구차하게 쓰지 않았으며 함축되고 노련하게 지었으니, 본디 가법(家法)이 있었던 것이다.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4세에 과거에 장원하였으며, 얼마 후 죄 아닌 죄로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경신년(1680, 숙종6)에 비로소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니, 당대 뛰어난 선비들이 아무도 앞서지 못하였다.
군은 사람됨이 과감하고 명쾌하여 일을 만나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밀고 나갔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더욱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군 또한 외직을 요청하여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5년 동안 나가 있었다. 오랜 뒤에 전랑(銓郞)을 거쳐 응교로 승진하였다가 또다시 부모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갔다. 그 이듬해가 바로 기사년(1689, 숙종15)이다.
상이 중궁(中宮)을 바꾸려고 하자 군이 당시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여러 사람과 함께 상소를 올려 기휘(忌諱)를 범하는 간언을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마자 정국(庭鞫)을 설치하였는데, 군이 앞에 나서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윽고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말투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기면서도 애처로워하였다. 진도(珍島)로 유배를 가다가 노량강(露梁江) 가에 이르러 세상을 마치니, 같은 해 5월 5일이었다.
예전에 노소재(盧蘇齋)강주천(康舟川)의 묘문(墓文)에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기를 천 번 치고 만 번 치도다.[仰天搥胸 千椎萬椎]”라는 말로 슬퍼하였는데,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예의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것이 지극한 슬픔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것임을 알겠다.
군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이 매우 후회를 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6년이 지난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잘못을 크게 깨달아 중궁을 복위시키고 군에게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의 조처를 내려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해와 달이 바뀜에 따라 은전이 구천에까지 미쳤으나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한 일이다.
군은 식견과 사려가 깊고 원대하며, 논의가 강경하고 충후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 문묘(文廟)의 배향(配享)과 출향(黜享)에 대해 논하면서,
“겸손한 덕을 숭상하고 신중한 도를 지켜서 임금의 치우친 생각을 바로잡는다.”
하였으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대의(大義)를 매우 잘 실천한 것이다.
일찍이 암행 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전라도 한 도에서 일어나는 흥판(興販)의 폐단에 대해 아뢰고, 경향(京鄕) 각지에서 이익의 추구에 매달리는 사태를 망국의 징조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맹자가 의(義)와 이(利)를 분별한 것과 부합된다 하겠다.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보고서 늘 진심으로 탄복하여 ‘이와 같은 식견과 주장에 견줄 만한 것은 세상에 별로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군이 죽지 않았더라면 임금이 반드시 등용하여 도움을 받았을 텐데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하고 후세에 군을 아는 사람들에게 공원로(孔原魯)추지완(鄒志完)의 절개 정도로 인식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아, 이는 군의 운명이요 시운(時運)의 불행이라 하겠다. 옛사람이 그 억울함을 하늘에 하소연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것이 어찌 악 무목(岳武穆)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정묘년(1687, 숙종13)에 우리 선친이 무함을 당했을 때 여러 문인이 소장을 올려 변호하려고 하자 군이 이들을 위해 붓을 잡았는데, 사림에서 그 내용을 옳게 여겼다. 그 밖에 세도(世道)와 관계된 문장들이 매우 많았다. 유집(遺集) 약간 권이 세상에 전하므로 후세 사람들이 상고해 볼 수 있다.
군의 호는 정재(定齋)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선대는 고려 말에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있고, 조선 중종 때에 사간(司諫)을 지낸 소(紹)가 있었는데, 모두 정학(正學)과 대절(大節)을 지키다 당시에 곤액을 당하였다. 군이 이 두 분을 닮았으나 불행의 정도는 그중에서도 제일 심하였다. 증조 휘 동선(東善)은 참찬을 지내고 정헌공(貞憲公)의 시호를 받았고, 조부 휘 정(炡)은 참판을 지내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았다. 부친 세당(世堂)은 지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으며,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현령 일성(一星)의 따님이다. 판추공(判樞公)의 숙형(叔兄) 휘 세후(世垕)가 일찍 죽어 군을 후사로 삼았는데, 양가(養家)의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바로 내 누님이다.
군의 효성은 지극한 성품에서 나와 양가의 모친을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에 순종하여 부드러운 얼굴로 봉양한 것이 비록 자기를 낳아 준 부모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예전에 우리 큰 고모가 현숙하고 명철하였으나 일찍 과부가 되어 이민적(李敏迪)을 양자로 들였는데 모자간에 사랑이 매우 깊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고모를 보고 덕만 있고 명이 박하니 하늘이 훌륭한 아들로 보답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가친척들이 우리 누님을 칭찬할 때도 또한 그런 말을 하였다. 이는 우리 집안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외부 사람들은 더러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누님은 늙어서 또 군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 그 복을 끝까지 누리지 못하였으니, 우리 고모보다 명이 더욱 박하다 하겠다. 너무도 슬픈 일이다.
군은 상공(相公) 이후원(李厚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판추공이 또다시 군의 형인 지평 태유(泰維)의 작은아들 필모(弼謨)를 군의 후사로 삼고, 또 군의 묘표를 세우고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
“그 애가 비록 짧은 세상을 살았지만 그래도 후세에 전할 만한 행적이 없지 않으니, 부디 한마디 적어 주어서 끝내 잊히지 않게 해 주게나.”
하였고, 군의 벗 남학명(南鶴鳴)이 또 자신이 지은 행장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나는 늙고 혼매하여 문장이 먼 미래까지 전해지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군이 세운 업적이 어찌 사람들이 말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 드러나거나 묻히는 그런 것이겠는가. 다만, 그 대강을 모아 위와 같이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묘소임을 알게 할 뿐이다. 아, 슬프도다.

[주D-001]죄 아닌 …… 유배되었다가 : 1677년(숙종3) 10월에 증광 별시 고시관으로 들어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미진불여악석(美疢不如惡石)’이라는 구절을 시제(試題)로 낸 일로 논척을 받고 선천에 유배된 것을 가리킨다.
[주D-002]노소재(盧蘇齋) :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주D-003]강주천(康舟川) : 주천은 강유선(康惟善)의 호이다.
[주D-004]공원로(孔原魯) : 원로는 공도보(孔道輔:985~1039)의 자이다. 그는 송나라 인종(仁宗) 때 인물로 명도(明道) 2년(1033)에 곽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이므로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주D-005]추지완(鄒志完) : 지완은 추호(鄒浩:1060~1111)의 자이다. 그는 송나라 철종(哲宗) 때 인물로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두 번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鄒浩》
[주D-006]옛사람이 …… 사람뿐이었겠는가 : 옛사람은 남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1137~1181)을 가리키고, 악무목은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1103~1142)로 무목(武穆)은 시호이다. 고종 때에 악비가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 화친을 주장하는 진회(秦檜)의 모함에 걸려 죽은 사건을 두고서 여조겸이 “매번 악 무목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곧장 하늘에 호소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박태보(朴泰輔)를 악비에 견준 것이다. 《葛庵集 卷21 書東巖李公潑南溪李公洁事實記後, 韓國文集叢刊 128輯》
[주D-007]유집(遺集) …… 전하므로 : 박태보(朴泰輔)의 《정재집(定齋集)》은 원집 9권과 별집 5권이 7책으로 편집되었으며, 부친 박세당(朴世堂)에 의해 1702년(숙종28) 양주(楊州)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 묘표는 문집이 간행되기 3년 전에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