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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贈) 청암 찰방(靑巖察訪) 최군(崔君) 효자 최경 자료

아베베1 2012. 1. 31. 00:59

    

 

 

    전주최공 문성공  고려문화시중  휘아 시 문성공  12세손

   조선 효자 최 경

   11대 방조 선조님의 효성이 높아서 높은 산처럼 우러러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가문을 빛낸 선조님의 효성이 후세에 전해 올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주신  선조님의 효성에

   후손은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전주최공 문성공 연촌공 의령공 후손

    

10세손  휘  낙수  휘수  미수  득수(효자)  미수  기수

11세손              (판관 )                             휘 응성                                       12세손                                                    휘 경(효자)

13세손                                                    휘 기만

 

 한 집안  조부 손자 효자가 가문의 영광을 빛나게 하였는데 

 어리 석은 후손은 부모에게 효도 하지 못하는 아쉬움 이제사

 후회 하고 효도 할 곳을 찾아도 효도 할것이 없으니 

 아... 아 안따까운 현실이 되었구나 

 참으로 행하지 못한 아쉬움 눈물로 달래 보지만   ... 

 

 자식은 어비이를 섬기고자 하나 어버이는 계시지 않으니

 이런 불효가 어디있는가 ....

 

 송강 정철 선생님의 한시 한구절이

 

 어버이 살았을때 섦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 하리 ..

 평생에 고쳐 못할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선조님의 높은 명현의 기상, 학문, 순덕 고절 효행 사상을 기리며 ..

   

  후손은 머리를 조아리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몇자를 올리다 . 

               

                  문성공  25세손  올림        

                                                                                                              

                                                                                                            

 

 

명재유고 제44권

행장(行狀)
증(贈) 청암 찰방(靑巖察訪) 최군(崔君) 행장 갑인년(1674, 현종15)


군의 휘는 경(璥)이고 자는 중윤(仲潤)이다. 그 선조는 전주인(全州人)으로 고려(高麗) 때 시중을 지낸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예이다. 7세조는 덕지(德之)이니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으며, 문장이 있고 덕이 높다고 알려졌다. 우리 문묘조(文廟朝) 때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조정에서 만류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상이 공의 상(像)을 그리라고 명하여 내려 주었다. 그 당시에 명망 있는 인사인 성근보(成謹甫) 같은 제현들이 모두 시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으니, 소 태부(疏太傅)에 비견할 만하였다. 후에 향인(鄕人)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증조는 언청(彦淸)이니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지냈으며,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의 외손이다. 조부는 기수(耆壽)이다. 충암(冲庵) 김 문간공(金文簡公)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휘 응생(應生)을 낳았으니, 바로 군의 선고이다. 선비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선무랑(宣務郞) 석창(錫昌)의 딸이다.

 

군은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 3월 22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지극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대추나 밤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부모에게 올렸다. 조금 자라서는 부모의 뜻을 따르고 받들었으며 일찍이 어긴 적이 없었으나,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간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지극히 화락하게 지냈다.
13세에 김씨에게 장가들었다. 김씨의 집안은 자못 부유하였으므로 의식이 조금 나았는데 군은 번번이 입지 않고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부모는 변변치 못한 음식도 계속 드시지 못하고 몸에 걸칠 온전한 의복이 없는데, 자식이 무슨 마음으로 홀로 이것을 누리겠는가.”
하니, 김씨 집안에서 그 말에 감동하여 매번 군의 부모에게 재물을 주고 도와주었다.

 

군의 부친이 병이 심해지자 군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사정이 급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드렸다.

상을 당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 물품을 마련할 수 없어서, 무릇 7일 만에 빈소를 차리고 7개월 만에 장사 지냈다. 빈소를 차리지 못했을 때는 낟알도 입에 넣지 않았으며 소리 내어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장사 지내기 전에는 밤낮으로 빈소 곁을 지키며 조석으로 곡하며 제물을 올리면서 하나의 예라도 태만히 하지 않았다. 장사 지내고 나서는 거친 밥을 먹고 누추한 집에 살며, 몹시 춥더라도 방을 따뜻하게 하지 않고 심한 더위에도 문을 열지 않고 시원한 곳에 나가지 않았다. 상복을 벗지 않고 단정히 앉아 종일 예경(禮經)을 읽었는데 일찍이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다만 글자를 따라 손가락으로 집어 가며 살펴볼 뿐이었다.

 

산소가 집과 20리 거리에 있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에는 걸어가서 살펴보았으며 춥거나 덥다고 해서 폐하지 않았다. 연제(練祭)가 지나면 예(禮)에 나물과 과일을 먹어도 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맛이 좋은 것이라 하며 차마 먹지 못하였다. 처가 일찍이 병이 위독했는데 사람을 보내 물어보고 끝내 들어가서 얼굴을 보지 않았다. 상기가 끝나고 나서도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사당을 배알했다. 손톱을 깎거나 머리를 자르면 부모의 유체라고 하며 땅에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이듬해 병을 얻었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다가, 끝내
경인년(1650, 효종1) 9월 21일에 졸하니 나이 겨우 25세였다. 군을 아는 사람은 그의 요절을 애석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군은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인 15세부터 독서에 진력하여, 그 뜻을 끝까지 탐구하고 의심나거나 분명치 않은 것이 있으면, 종이로 표시하였다가 자기보다 나은 벗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물어보았다. 질병이 있지 않으면 낮에 누워 있거나 의관을 벗고 지낸 적이 없었다. 본디 술을 잘 마셨으나 나중에는 절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사람됨이 공손하여 일찍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는 집안사람에게 속임수를 보여 주지 말라 하며 말하기를,

“어린이를 교육할 때는 단정하지 않으면 안 되니 옛날부터의 방법이 그러하였다.”
하였다. 상스러운 말로 노복을 질타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꾸짖으며 금지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군의 다른 행실을 볼 수 있다. 군은 병이 위독하여 능히 일어나 앉을 수가 없는데도 서책을 벽 위에 붙여 놓고 읽었다.
아, 군은 자질이 아름답고 행실이 독실한 데다가 또 능히 이와 같이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니 하늘이 그에게 수명을 더 주었다면 성취한 바가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버이의 상을 당해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을 상해 세상을 떴으니, 애처로울 뿐이다.
유인(孺人) 김씨(金氏)는 고령인(高靈人)으로 명립(名立)의 딸이니, 또한 사대부가의 덕행이 있었다. 시부모를 섬기며 봉양하는 도구를 아끼는 바가 없이 군의 효심을 따라 했다. 부모에게는 후사가 없고 오직 유인만 있었다. 부모의 상에 유인이 몸소 궤전(饋奠)을 받들었는데 한결같이 남자처럼 행하였다.
과부가 되자 무릇 자신을 봉양하는 것은 일체 포기하고 의식과 거처가 추운지 더운지를 살피지 않으며 말하기를,
“죽지 못한 사람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오직 고아가 된 어린아이만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농상(農桑)에 힘써 예전의 산업을 잃지 않게 했다. 아이가 조금 자라자 매우 독실하게 학문에 힘쓰라고 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훈계이다.”
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엄한 말로 엄숙하게 경계하였으며 때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었다. 이 때문에 아들들이 아버지처럼 어려워하였다. 비복을 대할 때는 은혜로우면서도 위엄 있게 하였다. 아들들의 손님이 오면 비록 군핍하더라도 반드시 정성을 다해 대접하며 말하기를,
“사람 집에 손님이 없는 것은 박하게 대접했기 때문이다. 사람 집에 사람이 오는데 어떻게 마음을 다해 대접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제사를 받들 때는 매우 삼갔으며 찬을 갖추되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으며 사람들이 먼저 먹지 못하게 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종족과 이웃에게 제사 음식을 나눠 주었는데 아래로 종에게까지 모두 두루 미쳤다. 새로 난 물품이 있으면 반드시 즉시 사서 천신했다. 시부모의 기일에는 반드시 제수를 갖추어 보내 도와드렸다.
병이 들자 의원과 약을 굳게 거부하고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고, 또 내가 죽지 못한 것은 너희가 어렸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들이 장성했으니 내가 죽는다 해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였다. 또 돌아보고 경계하며 말하기를,
“오직 너희 두 사람이 화락하게 지낸다면 지하에서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인은 갑자년(1624, 인조2) 2월에 태어나서 정미년(1667, 현종8) 1월에 세상을 떴다.
처음에 군을 이산(尼山) 월곡(月谷)에 장사 지냈는데, 갑진년(1664) 3월 공주(公州)의 남쪽 구동(九洞) 신향(辛向)의 언덕으로 개장하였으며 유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무신년(1668)에 군이 살던 회덕(懷德)의 향인들이 군의 사실과 행적을 열거하여 조정에 아뢰기를,
“최경(崔璥)의 효성은 옛사람에게도 드문 것이어서 사대부와 백성들이 칭송해 마지않습니다.”
하니, 모두 이 사람을 민몰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상이 유사에게 명하여 군에게 무공랑(務功郞)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을 추증하게 하였다.
탄옹(炭翁) 권 선생(權先生)이 그의 묘표에 제하기를 ‘효자와 어진 아내의 묘[孝子令妻之墓]’라 하였으니 아, 사람들에게 선인이 되라고 권할 수 있는 것이다.
군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으니, 기만(基萬)과 기억(基億)이다. 기만은 탄옹에게 배웠는데 그 어미가 졸하였을 때 상례(喪禮)를 잘 지켰다고 칭해졌다. 나의 선군자(先君子)가 일찍이 그 집을 지나면서 병을 무릅쓰고 나아가 조문하며 효자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기만이 나에게 그에 대한 행장을 청하였다. 아, 선군자가 허여하시고 탄옹도 묘갈명을 지어 주셨고, 성스러운 조정에서도 포양(褒揚)한 바인데 글재주가 부족한 내가 무어 덧붙일 말이 있겠는가. 드디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그 요점만 차례대로 기술하여 돌려준다.


 

[주D-001]성근보(成謹甫) : 근보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다른 자는 눌옹(訥翁)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주D-002]소 태부(疏太傅) :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였던 소광(疏廣)을 말하는데,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으로 자는 중옹(仲翁)이다. 선제 때 박사(博士)가 되고, 지절(地節) 연간에는 태자태부가 되었다. 조카 소수(疏受)에게 이르기를, “‘족한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하였다. 관직과 명망이 드러났으나 더 있게 되면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사직하고 낙향(落鄕)하였다. 낙향한 뒤 황제와 태자로부터 받은 수많은 보화를 자기 집안의 치부에는 쓰지 않고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혹 누가 자손을 위하여 치산(治産)하라 권하면, “자손이 어질면서 재물이 많으면 그 뜻을 손상하게 되고, 자손이 어질지 않으면서 재산이 많으면 허물만 더할 뿐이다.”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漢書 卷71 疏廣傳》
[주D-003]일두(一蠹)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저서로는 《일두집(一蠧集)》이 있다.
[주D-004]충암(冲庵) : 김정(金淨, 1486~1521)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다른 호는 고봉(孤峯)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冲庵集)》이 있다.
[주D-005]천계(天啓) …… 태어났다 : 대본에는 ‘天啓丙寅生’이라고 되어 있는데, 《탄옹집(炭翁集)》 권12 〈최효자묘갈명개산정(崔孝子墓碣銘改刪定)〉에 ‘生天啓丙寅 三月卄二日’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6]경인년 …… 졸하니 : 대본에는 ‘庚寅九月終’으로 되어 있는데, 《탄옹집》 권12 〈최효자묘갈명개산정〉에 ‘卒庚寅 九月卄一日’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7]처음에 …… 3월 : ‘君初葬尼山月谷 ▨▨三月’로 되어 있는데, 《탄옹집》 권12 〈최효자묘갈명개산정〉에 ‘君初葬尼山月谷 甲辰三月’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甲辰’으로 번역하였다.
[주D-008]탄옹(炭翁) : 권시(權諰, 1604~1672)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이다.

 

 

炭翁先生集卷之十二
 墓碣銘
崔孝子墓碣銘改刪定 a_104_473c


104_473d君諱璥。字仲潤。生長懷德宋村。懷乃鄒魯之鄕。鄕人狀其行。轉聞于朝曰。崔璥誠孝。得之天性。其制行古人所罕。士夫庶氓。莫不歎誦。謂斯人不可使泯沒。己酉四月。贈務功郞靑巖道察訪。君本全州人。高麗平章事阿之後。七世祖德之。直提學。名德丕顯。文廟禮遇之。年滿退居靈巖。一時諸賢如六臣。皆贈詩以別之。全州靈巖人。立祠享之。曾祖彥淸。濟用奉事。一蠹鄭先生之外孫。祖耆壽。考應生。沖庵金先生之外曾孫。妣恩津宋氏。錫昌之女。大族世有聞人。君稟美質。篤志力行。勤學好問。不幸短命。生天啓丙寅104_474a三月廿二日。卒庚寅九月廿一日。先生長者皆惜其早夭。金氏世居尼山。高麗高陽府院君南得之後。祖水軍虞候潔。考奉直郞名立。妣丹陽禹氏。學生忠男之女。孝於親。父病臨死。血其指進之。旣嫁。順承內助爲賢婦。旣寡。養孤游學以有成。生甲子二月廿七日。卒丁未正月廿九日。君初葬尼山月谷。甲辰三月。改葬公州南大谷辛向之山。金氏祔葬。男基萬。娶學生慶州崔淨女。基億。娶驪興閔光熠女。基萬要余墓表。銘孝子令妻之云。非余妄也。樂道人善者。其傳以揚之。銘曰。
104_474b孝子令妻。餘慶不匱。子孫保之。永錫爾類。


 

명재유고 제3권
시(詩)
최주일(崔主一) 기만(基萬) 에 대한 만사 3수


명현의 후예이자 선인의 집안에서 / 名賢之後善人家
효자가 뒤를 이어 총전을 받았었지 / 孝子仍蒙寵典加
그대는 또 한평생 행실이 도타웠는데 / 君又平生惇行義
어이하여 명이 짧아 탄식하게 하느뇨 / 如何無命使人嗟

 

주일(主一)은 최연촌 덕지(崔煙村德之)의 후예이자 일두(一蠹) 선생의 외손(外孫)이다. 그의 선고(先考)인 최경(崔璥)도 효행(孝行)으로써 포증(褒贈)을
입었다.

탄방에서 당시에 성(誠)에 대해 가르치니 / 炭坊當日敎人誠
한 글자가 종신토록 행할 만하였었네 / 一字終身儘可行
사문으로 향한 정이 줄곧 지극하였으니 / 終始師門情獨至

이 마음 이익과 명예 위한 게 아니었지 / 此心非爲利兼名
상제에 쏟은 마음 세상에서 드물었고 / 盡心喪祭世猶稀
유정함을 지키는 삶 도(道)에 거의 가까웠지 / 靜守幽貞又庶幾
과거 급제 못 한 것을 다들 아쉬워하나 / 文未成名皆爲惜
욕됨이 없어야 온전히 돌아가는 것이라네 / 不知無辱是全歸


 

[주D-001]탄방(炭坊)에서 …… 가르치니 :

 

탄방은 최기만(崔基萬)의 스승인 탄옹(炭翁) 권시(權諰)를 가리키는 듯하다. 《탄옹집(炭翁集)》 권12에 최기만의 아버지 최경(崔璥)의 묘갈명이 ‘최효자묘갈명개산정(崔孝子墓碣銘改刪定)’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명재유고 제44권
행장(行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증(贈)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탄옹(炭翁) 선생 권공(權公) 행장 갑인년(1674, 현종15)


본관은 경상도(慶尙道) 안동부(安東府)이다.
증조는 휘(諱)가 덕유(德裕)이니 종묘서 영을 지냈으며, 비(妣)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니 숙인(淑人)이다.
조부는 휘가 극관(克寬)이니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비는 함안 윤씨(咸安尹氏)이니 영인(令人)으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가 득기(得己)이니 예조 좌랑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비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니 숙인(淑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의 휘는 시(諰)이고 자(字)는 사성(思誠)이며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행(幸)의 후예이다. 태사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는데 견훤(甄萱)이 포석정(鮑石亭)에 침입했을 때 길창군(吉昌郡)에서 고려 태조를 맞이하여 견훤을 토벌하였다. 고려 태조가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했다 하여 드디어 권씨 성을 내려 주고 길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로 삼았으므로, 그로 인하여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태사 이후 몇 대를 지나 찬성 단(㫜)에 이르러 명망과 덕행이 드러났다. 찬성의 아들 보(溥)는 정승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호는 국재(菊齋)이다. 사가(史家)들은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칭한다. 국재의 넷째 아들 후(煦)에게 충선왕(忠宣王)이 왕씨 성을 내려 주었는데, 손자인 부윤(府尹) 숙(肅)에 이르러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비로소 원래의 성을 회복하였다.
3대 후손이 대사헌 홍(弘)이니, 문장(文章)이 있고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므로 당대의 명신이 되었다. 대사헌의 아우 휘 박(博)은 벼슬이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으며, 강직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여러 번 큰 고을을 맡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인 서령공에게 아들이 넷이 있었으니, 둘째 아들은 이조 판서 휘 극례(克禮)이고 감역공은 막내이다. 감역공에게 아들이 없어 이판공의 작은아들로 후사를 삼았으니, 바로 좌랑공이다.
좌랑공은 광해조(光海朝)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폐모(廢母)의 논의가 일어나자 바닷가 골짜기로 은둔하고서,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자호를 만회(晩悔)라 하였으며 문학과 절행으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독서참의(讀書僭疑)》가 있다. 이 부인(李夫人)은 종실인 구성도정(龜城都正) 첨(瞻)의 딸이다.
공은 만력 갑진년(1604, 선조37) 12월, 경오일인 2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온아하고 단정하고 정중해서 함부로 유희를 하지 않았고, 남보다 훨씬 더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9세에 그림자를 읊은 시를 지었는데,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네가 따라오니, 은미한 마음이 가는 곳을 너는 응당 알겠구나.[一步動時爾已隨 微心去處爾應知]”라고 하였으니, 대개 이른바 ‘마음을 잡아 보전하는[操存]’ 방법을 이미 안 것이다.
겨우 10여 세에 시서(詩書)를 능히 외우고 제자백가와 역사서를 두루 읽었다. 성동(成童)의 나이가 지나자 문득 학문에 뜻을 두어, 이기설(理氣說), 사칠변(四七辨) 같은 것에 대해 깊고 오묘한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음으로 깨닫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투철하고 깨끗하고 상쾌하여, 사람들이 안자(顔子)가 다시 살아왔다고 여겼다.
임술년(1622, 광해14)에 부친 만회공(晩悔公)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을 해쳐 병이 되어 거의 위태하게 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삼년상을 마쳤다. 그때는 이미 인묘(仁廟)가 반정(反正)을 한 후라 비로소 과거 시험을 보기는 하였으나,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문장을 익히는 것을 즐겨 하지 않았다. 일찍이 한성시(漢城試)의 대책(對策)에서 다스림과 교화의 도에 대해 극론하였다.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이 당시의 고관(考官)이었는데 결코 속유(俗儒)의 글이 아니라고 하며 장원으로 뽑으려고 하였으나, 어떤 참고관(參考官)이 격식에 어긋난 문자가 있다는 이유로 두 번째에 두었다. 사마시(司馬試)에는 더욱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한번 응시해서 합격하였다. 회시(會試) 때에 마침 비가 내리니 즉시 멈추고 들어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선비가 진실로 뜻이 있으면 결코 과장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더구나 비를 무릅쓰고 들어간다면 더욱 부끄럽고 욕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대개 공이 꿋꿋하고 고원한 뜻을 가지고 뭇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에 국가에서 막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고 정신을 가다듬고 덕을 닦아 오랑캐를 물리치기를 힘쓰면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현재(賢才)를 추천하라고 명하자, 드디어 제공들이 공을 추천하며 말하기를,
“권시는 이름난 아비의 아들로 뜻이 독실하고 힘써 행하니, 후일 세상에 이름을 얻을 선비는 반드시 이 무리일 것입니다.”
하니, 즉시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하였다. 공이 나아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음보(蔭補)로 벼슬하는 것은 세신(世臣) 집안의 의리로는 감히 사양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은 유학(儒學)으로 천거를 논하는 자리인데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난리가 진정되자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시사(時事)를 몹시 원통해하며 매번 술을 마신 후에는 강개한 마음으로 슬픈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 통곡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금주위(錦州衛)의 싸움에 군대를 보내어 도와주게 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무릇 군수(軍需)는 전부(田賦)에서 조달되니, 이는 농사짓는 백성들도 본의 아니게 참여해서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조정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어 만부득이 군대를 보내지만, 우리 같은 필부들은 들에서 밭을 갈 뿐인데 차마 군대를 보내는 일을 도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일찍이 힘써 밭 갈며 집안을 꾸려 나갔는데, 이런 이유로 인하여 농사짓는 것조차 포기하여 곤궁하게 되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경진년(1640) 여름에 또 대군사부에 제수되었다. 그때는 막 전화(戰禍)를 겪고 난 후라 사대부들이 대부분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대군이 심양(瀋陽)에 있었으므로 사부도 마땅히 그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실로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했다가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신하는 부끄럽고 욕된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또 만약 위험하고 어렵다 하여 미리 물리친다면, 어느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여장을 꾸려 나아가려고 하면서, 또 조정에 건의하여 천하의 대의를 잊어서는 안 되고 와신상담의 뜻을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고 진달하려고 하였는데, 지우와 친구들이 다투어 만류하여 드디어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탄식하며 멀리 은둔할 뜻이 있어 고개 넘어 문경(聞慶)의 호암산(皓巖山) 아래에 살면서,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세상과 단절하며 오직 날마다 촌의 백성이나 시골 노인들과 벗하며 지내려고 하였다. 그사이에 선릉 참봉(宣陵參奉),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에 제수되었고, 무자년(1648, 인조26)에는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諮議)로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기축년(1649)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즉시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를,
“이렇게 망극한 날을 당하니, 옛일을 잘 알고 예서(禮書)를 읽은 사람이 더욱 생각난다.”
하였다. 공이 생각하기에, ‘나의 분수로 헤아려 보면 감히 갈 수 없지만, 나라에 대상(大喪)이 났으니 앉아서 조정의 명을 사양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궐문 밖으로 달려가 곡하였다. 재차 상소를 올려 사정을 진달하며 예우하여 부르시는 뜻을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하고서, 또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용기와 지혜를 타고나시어 춘궁(春宮)에 계실 때부터 사서인들이 목을 빼고 기대하며 전하를 위해 죽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성군(聖君)을 내주신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아, 천하가 도탄에 빠지고 해내(海內)에 주인이 없는데, 하늘과 선왕께서 전하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책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천심을 잘 받들어서, 한번 천하를 바로잡아 업적을 넓히고 한번 치욕을 갚으려는 뜻을 실행하며, 나라를 중흥시키는 책임을 떠맡아서 하늘이 부여해 주신 크고 아름다운 명에 답하여 드날릴 것을 생각하시는 것은, 비록 상복을 입고 애통해하는 중이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소를 들이고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왔다. 소명의 전지가 곧 내렸는데 말뜻이 더욱 지성스러웠다. 공은 질병으로 정장(呈狀)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으며, 인산(因山)이 또 임박해 오자 드디어 대궐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혹 거취(去就)를 의심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포부가 있어서 자중하는 선비가 아니다. 신하의 분의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하였다. 입경할 때에 미쳐서 이미 공조 좌랑에 올려 제수되었는데, 국상(國喪)에 쓰는 기구를 갖추어야 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사은(謝恩)하였다. 공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우리 임금을 처음 뵙는 자리인데 아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상소를 초하여 의견을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들으니, ‘사람이 태어나 명을 받는 것은 인의(仁義)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무릇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거나 한 가지의 불의(不義)를 행하여 천하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하지 않으며, 그것을 하면 살고 하지 않으면 죽는다 해도 오히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인의의 실체입니다. 신하가 이것을 버리면 입신(立身)하여 군주를 섬길 수 없고, 후왕(后王)이 이것을 버리면 자리를 지켜 백성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지금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상황이 걷잡을 수가 없이 모두 그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확연하고 크게 공변되게 하고 확고하여 뽑히지 않게 하시어, 반드시 공리(功利)를 내치고 인의를 밝히시어 천하를 위해 창도하고 백성들을 위해 솔선수범하소서.
신이 들으니, ‘인은 사랑을 위주로 하고,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어버이가 친하게 하던 바를 사랑하고 어버이가 존중하던 바를 공경하고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고 어버이의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제왕의 효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오늘 조상께 효도하는 마음을 넓히시어, 필부의 인에 교착되지 마시고 제왕의 효를 더욱 확충하소서. 반드시 천하로써 생각하시고 구차하게 ‘어찌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지 마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롭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지 말게 하소서. 오직 함께 인의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만 힘쓰소서.
신의 생각에는 무릇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뜻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마치 활 쏘는 자가 명중하는 데 뜻을 세우는 것 같이 하며, 장기를 두는 자가 이기는 데 뜻을 두는 것 같이 하여, 교졸(巧拙)과 강약(强弱), 지속(遲速)과 성패(成敗)를 계산하지 마시고 오직 반드시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것만 생각하소서. 전하께서 큰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크게 해 보겠다는 뜻을 떨치고 천지와 같이 도량을 넓히시어, 고식적인 것에 안주하지 마시고 낡은 인습에 얽매이지 마소서.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작은 일에 얽매여 자신을 작게 여기지 마시고, 으쓱거리면서 남을 막지 마소서. 천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에서 도를 구하며, 인재를 사랑하고 작은 선도 기록하며, 잗달고 번거로운 것을 생략하고 대체(大體)를 지니소서. 그리하여 많은 인재들과 여러 사람들의 말이 도처에서 모여들어 각기 그 능력을 팔고 각기 그 소회를 다하면, 하해와 같이 받아들이며 하늘같이 덮어 주고 땅처럼 실어 주어 조용히 절충하면,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것이 모두 가늠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서 여러 계책과 모든 힘들이 전하의 앞에 집중될 것이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우리나라는 좁고 작아서 큰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신은 분명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땅 가운데서 나무가 나서 자람이 승(升)이니, 군자가 그 상을 보고 덕을 순히 닦아서 작은 것을 쌓아 높고 크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땅속에서 나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미미하나 구름을 뚫고 해를 가릴 만큼 크고 번성하게 자랄 싹을 이미 지니고 있으므로 마침내 동량(棟梁)의 재목이 되는 것입니다.
군자가 작은 것을 쌓아서 큰 것을 이루는 것도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좁고 작지만 전하께서 하시는 바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떠한 분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순 임금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연과 증삼(曾參)은 선비인데도 오히려 그러했거늘, 하물며 임금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전하의 책무로서 가장 서둘러야 할 일은, 오직 먼저 의(義)와 이(利)를 분별해서 밝히고 제왕의 효를 넓히고 큰일을 하겠다는 뜻을 분발해서 작은 것을 쌓아서 큰 것을 이루는 공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바야흐로 하늘이 주시고 조종이 주시고 선왕께서 맡겨 주신 뜻에 유감이 없게 되어서 전하께서 능히 일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가납(嘉納)한다는 비답을 내리고, 또 해사(該司)에 명하여 달마다 양식과 반찬을 주라고 하였다.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인산(因山)을 마친 후 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때 청음(淸陰) 김 문정(金文正)과 신재(愼齋) 김 문경(金文敬) 두 공이 원로로 입조(入朝)하고, 동춘(東春) 송공 준길(宋公浚吉)과 우암(尤庵) 송공 시열(宋公時烈) 등 제공이 모두 초빙되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탁류를 내보내고 청류(淸流)를 드러내며 악을 제거하고 선을 장려하니, 유속을 크게 놀래켰으나 패할 징조가 이미 보였다. 공은 본분을 지켜 홀로 행하며 거취도 조용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시를 지었는데,
성주가 부지런히 뛰어난 인재를 초빙하니 / 聖主孜孜招俊乂
빼어난 무리들이 끊임없이 산림에서 일어나네 / 群英袞袞起山林
한가한 이 사람 외람되이 자리만 채우고 있으니 / 閑人備數眞叨忝
도성을 떠나며 보국하려는 맘만 괜히 품어 보네 / 去國空懷報國心
라고 하였으니, 공의 은미한 뜻을 볼 수 있다. 돌아온 지 한 달 남짓 지나서 형조 좌랑에 제수되고, 후에 공조 정랑,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1656, 효종7)에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으로 부름을 받았다. 대개 효묘(孝廟)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홀로 온 천하에 임어하시려는 뜻이 있었으나, 얼마 후 신하들이 궤란하여 족히 책임을 지워 일을 맡길 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다시 산림의 선비를 등용하여 국정(國政)을 함께할 것을 생각한 것이다. 공과 양송(兩宋) 제공이 전후로 명을 받았다. 공이 재차 병으로 사임하니, 성상께서 비답하기를,
“그대를 강관(講官)에 제수한 것은 그 의도가 우연이 아니니, 다시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떠나면서 또 상소하여 사직하고, 해조에서도 우선 체직을 허락하라고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고 재촉하여 부르는 것이 더욱 은근하였다.
여름에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즉시 입대를 명하여 위로하고 유시를 내려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마땅히 어진 선비를 얻어야 한다. 더구나 세자를 교도(敎導)하는 일은 더욱 어려우니, 반드시 글을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거처하며 훈도하게 하고자 한다.”
하고, 또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었다. 공이 사례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온 것은 직무를 수행하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고, 다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상소를 올리는 것이 미천한 분수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직접 와서 사정을 아뢰고 물러나고자 해서입니다. 민간의 질고는 참으로 많으니 어찌 오늘 일일이 셀 수 있겠습니까. 우(禹) 임금이 말하기를, ‘덕으로 선정을 베풀 수 있으며, 정치의 근본은 백성을 양육하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늘 백성을 양육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조정은 백성을 양육하는 정사를 잊지 않는다면 이것이 생민들의 복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의 분수에 맞는 것이 아니니 결단코 머무를 수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탑전에서 면대하여 속마음을 이미 진달하였으니, 신은 감히 구차하게 형식에 따라 다시 번거롭게 글로 써서 아뢰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며칠을 머무르다 도성을 나왔는데 병으로 기읍(畿邑)에서 지체하였다. 상이 듣고 즉시 별유(別諭)를 뒤따라 내리시니, 공이 부득이 도로 들어왔다. 대개 등대(登對)했을 때 성상의 말씀이 자상하시고,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셨는데 되지 않자, 이내 이르기를,
“이와 같이 무더운데 어찌 잠시 왔다가 갑자기 돌아가는가? 일찍이 들으니 서울에 형이 있다던데 만약 형제가 서로 만나 보고, 그대로 보양관(輔養官)이 된다면 다행이겠다.”
하니, 공은 감읍하여, ‘성상의 뜻이 독실하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이렇게 가인(家人)이나 부자(父子)처럼 위곡하게 말씀하시니 참으로 차마 바로 결별할 수 없는 점이 있다.’라고 여겼다.
이미 다시 들어오기는 했으나, 오히려 분수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아뢰기를,
“원컨대 직명을 해직하여 편의대로 머물게 하고, 때로 소명을 내리어 들은 바를 아뢰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혹 이와 같이 한다면 내 마음에 얻은 바가 있을 듯하다. 하필 허명(虛名)으로 서로 다그치겠는가.”
하였다. 즉시 체직하고 산반(散班)을 주라 명하고,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 열릴 때마다 입시하게 하였다.
경연에 입시하여 처음으로 진언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서연에서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분별을 대략 아뢰었습니다. 능히 선을 밝히고 행실을 성실하게 하여 자신에서 집안까지 집안에서 나라와 천하에 미치지 못하고, 공천하(公天下)로 마음을 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공(功)이 천하를 덮더라도 요점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을 패도라 합니다.
상대와 나를 한가지로 보며, 자신을 완성시키고 나아가 타인도 원만하게 이루어 주면 집안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할 뿐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천하로 근심을 삼고, 반드시 뜻을 참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부터 평천하에까지 미치니, 이것을 왕도라 합니다.”
하였다. 효묘가 책을 덮으라고 명하고 탄식하기를,
“천하의 근심에 대해서는 우선 말하지 말라. 오직 이 사방의 경계도 능히 수습할 수 없으니, 장차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들으니, ‘건(乾)을 아버지라 칭하고, 곤(坤)을 어머니라 칭하니, 백성들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데 하루라도 그 어버이를 잊을 수 없으니, 그렇다면 사람이 하늘을 섬기는데 참으로 하루라도 하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을 잊을 수 없다면 마땅히 하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진실로 하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천하의 백성이 모두 하늘의 자식이요 우리의 동포이니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필부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임금은 천하국가의 책임이 한 몸에 모여 있는 자리이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때에 천하의 근심을 감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치는 한가지이지만 현상은 다른 것이고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는 것이니, 비록 천하의 근심으로 근심하더라도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먼저 그 집안을 다스리고 먼저 그 몸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 하였으니, 마음과 뜻 사이와 일을 하는 즈음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만민이 복종하지 않고 천지도 변이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천지에 위치하여 만물을 기르는 공은 성정이 예의와 법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임금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하고 조심조심하며 삼가고 두려워해서 중화(中和)의 공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만민들이 보고 감화를 받게 한다면 군자는 허물을 고쳐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소인은 표면적으로 변화될 것이니, 그런 연후에 다스림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데는 갈래가 많으나 그 근본을 말하면, 백성을 기르는 것이 근본이며 백성을 기르는 것은 농사에 힘쓰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소하(蕭何)가 말하기를, ‘백성을 길러 어진 이를 초치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파촉(巴蜀)을 수용하고 삼진(三秦)을 도로 평정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현인을 초치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기를 꾀하되 백성을 기르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참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인 것입니다.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양식을 넉넉하게 하고 군대와 병기를 충분하게 하면 백성들이 신의를 지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정치의 요체가 양식을 풍족하게 하며 군대와 병기를 충족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공이 다시 물으니, 또 말하기를, ‘군대와 병기를 버리라.’라고 하였으니, 양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정치를 하는 데 가장 앞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공이 또 묻기를, ‘부득이하여 버린다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을 먼저 버립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양식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만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석에 이르기를, ‘임금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백성에게 신의를 잃지 않아서, 백성으로 하여금 또한 차라리 죽을지언정 나에게 신의를 잃지 않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신의가 가장 위이니 참으로 백성으로 하여금 윗사람이 백성을 기른다는 것을 모두 알게 하고, 윗사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게 하여, 각각 농사에 힘쓰고 생육하여, 양식이 풍족하고 윗사람을 믿게 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바야흐로 조정에서 강무(講武)하려는 뜻은 민간에 알려졌는데, 백성을 기르려는 뜻은 아직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믿지 못하고 있으니,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 조정의 뜻을 믿어서 군대와 병기를 충족하게 갖추는 일이 그만둘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저들은 모두 ‘이것은 모두 우리를 학대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불신하는 백성들을 쓴다면 장차 해로움만 있을 것이니, 어찌 이로움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또 조정에서 영장(營將)을 설치한 폐단에 대해 논하여 아뢰기를,
“영장은 바로 중군(中軍)으로 곧 주진장(主鎭將)이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특별히 중대한 권리를 주어 주진장까지도 총령(摠領)하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도 위태롭고 불안한 상태인데 유사시에는 서로 견제할까 걱정됩니다.
조종조에서는 매 도마다 감사와 병사를 두어 총령하게 하였고, 또 각 진(鎭)을 설치하고 목사를 절제사로 삼아 각기 속읍의 병마(兵馬)를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중군을 두어 하관으로 삼아서 목사에게 명을 받아 전적으로 무사(武事)를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참으로 옛 법을 거듭 밝혀 감사와 병사를 잘 택하여 총령하게 하고, 또 각 진의 주장(主將)을 잘 택하여 영장으로 하여금 명을 따르게 한다면, 마음과 힘을 합쳐서 대소가 서로 화합하고 경중이 서로 걸맞게 될 것이니, 어찌 무비(武備)가 갖추어지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오늘 일찍이 듣지 못했던 말을 많이 들었다.”
하였다.
그때 금상(今上 현종(顯宗))이 춘궁(春宮)으로 계셨는데, 춘추가 겨우 성동(成童)을 넘었는데도 이미 제왕의 학문에 뜻을 두고 왕도와 패도의 책략, 마음을 잡아 보전하는 방법 및 인(仁)에 내외의 구별이 없다는 것 등을 물어 반드시 그 심오한 뜻을 듣고자 하였다. 공이 해석하여 명백하게 분석하고 반복해서 추구해 밝혀 주되, 끊임없이 힘쓰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금상께서도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였으며, 서연에 임할 때마다 해가 저문 뒤에도 수라를 드시는 것을 잊었다. 매번 아뢰기를,
“서연에서 대략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우고서 파한다면, 단지 겉치레로만 하는 것이니 참으로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날마다 궁료(宮僚)를 붕우같이 친근히 대하시고, 한가로이 지낼 때에도 인접(引接)하소서. 때로는 의리(義理)와 문자를 논하고 때로는 고금의 사적에 대해 말하며, 때로는 한담도 나누며 정의가 서로 부합되어서 서로 권계하고 보익하게 된다면 저절로 훈도되고 인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깊이 받아들였다.
공이 연석에서 모실 때마다 논변을 꾸미지 않고 오직 지성으로 서로 감동시키되 간곡하고 간절하게 말하였다. 때로는 옛날의 바른 도리를 끌어다 비유하고, 간혹 여항에서 떠도는 쉬운 말로 비유해서 깨우쳐 주었다. 사람들이 혹 번잡하고 지루하여 싫어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피하지 않았다. 또 경(經)의 뜻을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미루어서 임금이 일을 행하는 실상에 귀결시켰으며, 그 득실을 헤아려 체득하여 실행할 것을 권면하였다. 임금도 그 지성에 감동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뜻이 부합되는 것이 나날이 깊어졌다. 그러나 공은 스스로 공언(空言)만 하고 실제 행하는 것은 없으니, 빈사(賓師)와 유현(儒賢)의 반열에 염치를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고 여겨, 물러가기를 구하는 뜻이 더욱 간절하였다.
7월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에 제수되었으니, 대개 조정에서 한가로운 자리를 맡게 하여 우대하려는 뜻을 붙인 것이다. 공은 평소에 질병이 많았는데 타향살이가 오래되니 병세가 점점 고질이 되었다. 또 밝은 시대에 어진 이를 대우하는 도리를 감당할 수 없고, 잠시는 있었으나 오래 있을 수는 없다고 여겨, 드디어 결심하고 돌아가기를 청한 상소를 세 번 올렸다. 상이 비답하기를,
“아, 어쩌면 물러가고자 하는 마음이 이렇게까지 심한가? 항상 경연 석상에서 의리를 명확히 분석해 준 것은 비단 그 오묘한 뜻이 조리가 분명하고 잘 통할 뿐만이 아니었다. 무릇 의논을 할 때 풍간(諷諫)의 뜻을 붙여서 말하기도 하고, 혹은 피하지 않고 직언하기도 하며 힘써 나를 허물이 없는 경지로 들이고자 그 뜻을 다하였다. 내 일찍이 흔연히 스스로 기뻐하며 맛난 술을 마시고도 흥건히 취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 능히 이렇게 해 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 뜻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세자도 매우 연연해하고 있는데, 사적으로 교류하는 예가 없어서 만류하지 못할 뿐이다. 그대는 이런 지극한 뜻을 헤아리라.”
하였다. 공이 병이 위독하다 하니, 상이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우선 돌아가라고 허락하며, 차도가 있거든 다시 올라오라고 하였다. 또 해조에 명해서 말을 지급해 주라고 하였다. 공이 도성을 나와 상소를 올려 해직을 청하며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큰일을 해야 할 때에는 큰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떨치셔야 합니다. 문무(文武)의 도리는 모두 방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오직 마땅히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의 힘을 기르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며 병사와 식량을 마련하여 백성을 넉넉하게 하고 병사를 강하게 하시면 됩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몸을 경건히 하고 임금 노릇을 바르게 하시면 됩니다. 신이 아뢸 만한 것은 없습니다만, 가만히 하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조정에 언로가 아직 크게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찌 언관이 말한 내용이 혹 법도에 맞지 않았거나 말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너그러이 포용하시고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료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는 경술(經術)로 한 시대에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춘궁(春宮)을 도와서 올바르게 인도할 사람을 논할 때에는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공공연히 하는 말인데 죄로 인하여 폐출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유철(兪㯙)이 죄를 지었는데, 신은, 전하께서 그가 화를 전가시키려고 한다고 여기시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신이 들으니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에서도 비방지목(誹謗之木)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언로를 널리 열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일을 논하는 신하는 모두 충심(忠心)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지 참으로 다른 뜻은 없으니,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각자 그 재주를 다하게 하는 것이 성군께서 사람을 쓰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입니다.”
하였다. 효묘가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권시가 상소에서 언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니, 내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고, 곧바로 유철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8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령에 제수되고, 11월에 다시 제수되고, 정유년(1657, 효종8) 2월에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정장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5월에 또 집의로 소명하며 이르기를,
“지난번 그대가 돌아갈 때 내가 감히 억지로 만류하지 못했으나 항상 마음속으로 절실하게 그리워하였다. 지금 재앙을 만났으니 허물을 반성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보필해야 하는데, 그 책임을 그대를 버려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내가 장차 그대에게 집을 주고 계속하여 녹봉을 주어 나의 좌우에 두고자 한다.”
하였다. 상소하여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한 통의 상소가 멀리서 올라오니 옛정이 다시 살아나고 얼굴을 마주한 것 같이 황홀하니 군신 간에 뜻이 부합하는 것이 참으로 적지 않음을 알겠다. 나는 간절하게 그리워하는데 그대는 번번이 돌아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과인은 생각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자가 경모해 마지않는 마음을 유독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세 차례 상소하였으나, 진선(進善)으로 옮겨 제수하며, 부지런히 부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부득이 9월에 대궐로 나아오니, 즉시 명하여 곡식과 고기를 계속 대어 주게 하고, 해사에서 집을 수리해 주고 태의(太醫)가 진찰하게 하니, 공이 황송하여 사례하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에 세자가 회강(會講)하는 예를 오랫동안 폐지한 상태여서 공이 서연(書筵)에서 아뢰어 행할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니 혹 비용이 많이 든다 하여 어렵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공이 개연히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회강을 행하기를 청한 것은 춘궁의 진학(進學)에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부와 빈객을 끊임없이 접하다 보면 보익(補益)됨이 더욱 많아질 것이요, 상하가 서로 믿고 대소가 의지하고 앙모하게 되면, 저군(儲君)의 아름다운 명성이 더욱 드러날 것이니, 어찌 종사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비로소 들으니, 회강을 설행할 때 으레 연례(燕禮)를 행하는데 호부에서 물력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오랫동안 폐하고 설행하지 않는다고 하니, 신은 저도 모르게 탄식하였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지금 설행한다 해도 다만 한때의 형식적인 것일 뿐이지 도리어 보익하는 실질적인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강의가 끝나면 사부 이하가 한가하게 담론이나 하고 기타 연례를 행하여 주고받는 형식은 일체 정파(停罷)하소서. 그리하면 일을 항상 행할 수 있어서 권강(勸講)하는 도리에 거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 세자가 공경(公卿)을 예경하는 뜻으로 간략하게나마 잔치를 벌이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한 접시의 과실과 한 그릇의 음료로도 수작할 수 있습니다. 《시경(詩經)》에 ‘너풀너풀 박잎을 따다가 그것을 삶았네. 술이야 여기 있으니 한 잔 들어 맛을 보게나.[幡幡瓠葉 采之亨之 君子有酒 酌言嘗之]’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예물은 박해도 예의는 은근하며 자주 모이다 보면 정이 두터워질 것이니 어찌 풍성하기만을 바라겠습니까?”
하니, 상이 깊이 받아들이며 논한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하였다.
10월에 시민당(時敏堂)에서 회강례(會講禮)를 행하였다. 예전의 관례에는 사부와 빈객이라도 모두 부복하고 강하였다.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예전에는 경연의 강관(講官)도 앉아서 강하였습니다. 서연의 사체는 또 경연과 차별이 있으니, 사부와 빈객으로 하여금 모두 앉아서 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진선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이에 사와 빈객이 모두 앉아서 강하였다. 《맹자》 제인벌연장(齊人伐燕章)을 강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왕면(王勉)이 말한 ‘아랫사람에게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의 어짊이 있고, 윗사람에게 걸(桀)이나 주(紂)의 난폭함이 있으면 가하다.’라고 한 것과 장자(張子)가 말한 ‘이 일의 사이에는 털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라는 것은 그 뜻이 실로 같습니다. 임금의 입장에서 말하면, 내가 이미 인을 해치고 의를 해쳐 천하에 한 사람의 지아비가 되었을 경우 아랫사람 중에 탕왕이나 무왕같이 어진 이가 있다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때에 동춘 송공(同春宋公)도 찬선으로 입시하였는데, 이에 주자(朱子)가 말한, “고기를 먹되 말[馬]의 간을 먹어 보지 않아도 맛을 모르지는 않는 법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여러 강관도 아뢰기를,
하니, 공이 아뢰기를,
“이런 말은 모두 신하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합니다. 임금의 입장에서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잔적(殘賊)독부(獨夫)라는 말입니다. 지금 저하께서는 항상 독부를 면할 것을 생각하여 모름지기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지 마소서. 한 가지의 불의(不義)를 행하거나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 이것이 바로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는 유이니 매우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탕왕이 하(夏)나라의 걸(桀)을 내치고 무왕이 상(商)나라의 주(紂)를 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신하들이 꺼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회피하고 빙빙 돌려 말하려고 하였는데, 공은 이 의리는 임금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 거리낌이 없이 다 말하였다.
공은 세자의 앉은 모습이 조금 구부러진 것을 보고 문득 아뢰기를,
“다시 정좌하소서. 용모를 바르게 하는 것은 비록 작은 예절이나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이어서 공경을 다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말하였다. 끝으로 아뢰기를,
“오늘만을 위해 말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궁중에 들어가 거처할 때라도 항상 오늘과 같은 마음으로 조금도 태만함이 없게 하소서. 또 바라건대, 형식만 꾸미는 것을 줄이고 이런 거조를 자주 행하여 이 마음을 항상 이어 가게 하십시오.”
하니, 세자가 모두 공경히 받아들였다.
어느 날 상이 참석한 경연에서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공은 병으로 입시하지 못하였는데 드디어 상소하여 강의한 장(章)의 뜻을 논설하고, 인하여 그 설을 미루어 정지문(鄭之問)의 일을 언급하며 주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힘써 말하였다. 정지문은 광해조(光海朝) 때 모후(母后)를 폐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말이 극도로 흉악하고 참혹하였다. 반정(反正)한 후에도 홀로 하늘이 내리는 주벌을 받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각에서 그의 죄를 추론(追論)하였다. 효묘(孝廟)가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즉시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이 상소에서 언급한 것인데, 비록 극형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공은 병이 심하여 여러 달을 입시하지 못했다. 무술년(1658, 효종9) 봄에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또 녹봉을 계속 주라는 명을 환수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했다. 그때 나의 선군자(先君子)가 명소를 받고 궐에 나아가 사정을 진달하였다. 효묘가 입대하라고 명했으나 감히 나아오지 못했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윤선거는 세상에 명망이 있고 뜻이 높은 사람이니, 성상께서 그 어짊을 존경하고 사모하되 그 뜻을 꺾지 마십시오. 사복(士服) 차림으로 소견하는 것은 왕공이 필부(匹夫)에게 굽히는 것이니, 이것은 제왕의 성대한 예이고 천고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논한 말이 실로 나의 뜻과 부합된다. 마땅히 사복 차림으로 인견하겠다.”
하고, 즉시 백의(白衣)로 입대하라고 명하였으나, 선군자가 특별한 대우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 하여 궐하에 상소를 남겨 둔 채 도성을 나왔다. 상은 공이 선군자와 인우(姻友) 사이라는 것을 알고 사사로운 혐의를 피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어진 이를 아끼는 것을 마음으로 가상하게 여겼다.
얼마 후 승지로 발탁하여 제수하였다. 네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니 찬선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병으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4월에 또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임금을 만난 이래로 엎드려서 편하게 병이나 살피면서 하는 일 없이 헛되이 직명을 띠고 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신을 책망하며 모두 이르기를, ‘저 사람은 그렇게 극진하게 임금의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묵묵히 한마디 말도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세상의 드문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라고 하니, 이것은 한 나라의 공공연한 말입니다.
왕도의 요체와 제왕의 학문에 대해 어찌 신이 언급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쇠한 것을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여 한 시대를 바로잡겠다면 밤낮으로 부지런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좌하여 성상의 뜻에 보답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만 하시니, 신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이 지극히 바라는 일입니다. 십일(什一)의 세법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곧고 올바른 천하의 법입니다. 지금 농민들이 소작지에서 1결당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쌀 200두(斗)이니 부렴(賦斂)으로 쌀 20두를 내면 참으로 십일의 세법이 됩니다. 다만, 모든 공가(公家)에서 세금을 부과한다면 백성들이 바쳐야 할 것은 으레 몇 배나 더 됩니다. 지금 대동미(大同米), 삼수량(三手糧), 세미(稅米)는 합하여 15두 남짓인데, 백성들이 내는 것은 거의 30두 정도가 되고, 본읍의 부역(賦役)은 백성으로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또 약간의 쌀로 낸다면 이미 십일의 세법이 되지 않습니다. 또 더구나 1결의 땅에서 쌀 200두를 거둔다고 기필할 수 없는 데이겠습니까.
신이 어릴 때 일찍이 부로(父老)들의 말을 들으니,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수세하는 법은, 해마다 그해의 풍흉을 살펴서 9등으로 나누어 상상(上上)은 20두, 하하(下下)는 4두를 거두고 이 외에는 백성에게 달리 부과하는 것이 없었다.’라고 합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백성이 곤궁하여 농사의 풍흉은 따지지 않고 매양 하하를 따라서 윗사람의 것을 덜어 내어 아랫사람에게 보태 주는 정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 도감(都監) 사졸들의 늠료를 이어 주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약간의 쌀말을 더 거두었으니, 바로 이른바 삼수량(三手糧)입니다. 지금 대동은 다시 10두나 혹 13두를 더 거두는데 연분(年分)의 상하는 따지지 않습니다. 근래에 흉년이 든 해가 많았는데 일체의 부세가 혹 상상의 세보다 지나치니, 백성의 근심과 원망은 논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어찌 십일세를 거두는 정사이겠습니까. 신은 민생이 날로 초췌해져 그들이 원망하고 배반하는 생각을 금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식량은 백성의 하늘입니다. 노 애공(魯哀公) 때 사나운 제(齊), 진(晉), 오(吳), 초(楚)의 사이에서 곤경을 겪고 있었는데, 유약(有若)이 어찌 상황을 알지 못하여서 10분의 1세인 철법(徹法)을 쓸 것을 권하였겠습니까. 등 문공(滕文公)이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데도 맹자가 정전(井田)을 시행하여 인정(仁政)을 행할 것을 권하였으니, 대개 천하에 정사를 행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백성을 안정시켜야 되니 강무(講武)하여 백성을 소요시킬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신도 본디 그렇게 여겼으나 매양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현들의 말씀에 ‘백성을 7년을 가르치면 전쟁에 나아가게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백성을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가르치려고 하였다면 농사에 힘쓰고 강무하는 법을 어찌 일찍이 편벽되게 폐할 수 있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오늘날은 백성을 기르는 뜻에 전일하지 못하여 민생은 날로 어려워지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요체를 얻지 못하고 다만 형식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망과 한탄이 날로 쌓여서 유사시에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우니, 신은 삼가 염려가 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먼저 민심이 날로 흩어지고 아름다운 풍속이 날로 무너지는 것을 근심하시어, 효제충신의 가르침으로 진작시키소서. 계속하여 온 나라의 땅을 균일하게 하여 그 수를 총괄하고 민병의 수를 모아서 그 대략을 안 연후에,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기르소서. 병사는 정예롭게 하는 데 요점을 두고 숫자를 늘리기를 요구하지 말며 오직 실용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소서.
어진 이에게 직위를 주고 능력 있는 이는 직무를 맡게 하여 그 장점을 취해서 각각 그 재주에 맞게 일을 시키면 누군들 등용할 수 없겠습니까. 중숙어(仲叔圉)는 외교를 맡아 빈객(賓客)을 다스리고, 왕손가(王孫賈)는 국방을 맡아 군려(軍旅)를 다스리고, 축타(祝鮀)는 종묘(宗廟)의 일을 다스리니, 위 영공(衛靈公)이 무도한 임금이었는데도 오히려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명철하고 성스러우신 전하께서 한 시대의 인재에게 일을 맡긴다면, 천 리의 안과 백료의 사이에 어찌 합당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병사와 식량의 일을 다스려서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상께서 모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되 돌아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병으로 오래도록 직무를 살피지 못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그에 따라 비방하여 드디어 상소를 올리고 도성을 나왔다. 상이 예관을 뒤따라 보내어 유시하며 머물기를 권하고, 또 중추부(中樞府)로 옮겨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그때 상의 체후가 편치 않았기에 공이 비록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차마 멀리 돌아가지 못하고 기읍(畿邑)에서 머물렀다. 상이 유소(諭召)를 계속 내리시어 예관이 전후로 끊임없이 이어지니, 또 부득이하여 8월에 도로 도성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효묘가 다시 서연에 출입하라고 명을 내렸다.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고 아울러 중추부의 직함까지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이 참으로 분수에 넘치는 직명으로 구애받지 않는다면, 다시 도성 아래에서 반년이나 일 년을 살면서 형제가 서로 종유하며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또한 신에게는 차마 궁궐을 멀리 떠나지 못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또 송시열과 송준길이 바야흐로 총애와 대우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능히 시종여일 서로 믿고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성상의 마음에 보답할 것입니다. 도유우불(都兪吁咈)하며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정치를 토론하고 심의하는 여가에, 송시열 등이 신에게 타산지석이 되어 서로 왕래하며 그 과실을 찾아서 다듬는 기술을 다하기를 허락해 준다면, 신이 무어 꺼릴 것이 있어서 그 벗들을 위해 어리석은 신의 정성을 다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신의 생각을 송시열과 사적으로 말하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에게 갑자기 전해지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미 직명이 체직되었는데 다시 보도(輔導)하는 직임을 받는다면 이것은 바로 이익을 독점하는 농단(龍斷)과 같습니다. 신은 오직 떠나서 그만두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기읍의 우거(寓居)로 다시 나왔다. 다시 예관을 보내어 유소를 내리니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대순(大舜)은 묻기를 좋아하며 천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남의 악을 감춰 주고 선한 일은 드러냈으며, 양단(兩端)을 잡아서 백성에게 그 중도를 썼으니, 이것이 대순이 된 까닭이다.’라고 합니다. 대개 말의 득실과 선악은 논하지 않고 모두 위에 아뢴 연후에 그 선한 말을 택하여 그 적절한 것은 쓰고 선하지 않은 말은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찌 일찍이 그 악을 드러냈겠으며 더구나 또 그 말을 배척했겠습니까.
대저 비방지목을 세운 것은 천하의 말을 듣고자 해서입니다. 비방하는 말이 어찌 능히 반드시 선하고 다 옳겠습니까. 예전에는 군신 상하가 서로 교회(敎誨)하고 훈고(訓詁)하였으므로, 간쟁(諫諍)을 서로 허여하고 시비를 바로잡아 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하거나 선하지 않거나를 막론하고 천근하고 원망하는 말까지 다 듣고 모두 진달하여, 군신 상하가 서로서로 반성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며 양단을 잡아 중도를 썼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기상이 없는 듯합니다.
대개 말하기를, ‘좋은 말은 위에 아뢸 수 있지만 좋지 않은 말을 어떻게 위에 들리게 하겠는가?’라고 하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위에 아뢰어 살피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위에서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대순의 뜻이 아니라고 봅니다. 대개 말하기를, ‘좋지 않은 말을 어찌 그 그른 것을 구별해서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합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구별하는 것은 가하나, 배척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묻기를 좋아하는 뜻이 아닙니다. 대개 일을 말한 것이 옳으면 쓰고 옳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되니, 배척하여 죄주고 금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거의 백성들의 입을 막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묻고 살피기를 좋아하여 남의 악을 감춰 주고 선한 일은 드러내는 일에 몸소 솔선하시어 아랫사람들을 앞장서서 인도하소서. 그렇게 하면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오직 서로 경계하고 서로 가르치는 것만 알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천리 밖의 말이 들려올 수 있어서 천하를 다스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였다. 기해년(1659, 효종10) 2월에 또 명을 내려 특별히 부르고 유지를 내렸다. 그 대략에,
“그대가 떠난 뒤로 지금 벌써 한 해가 넘었으니, 마음속의 생각은 허전하여 거듭 굶주린 듯하다. 처음에는 잠시 근기(近畿)로 간다더니 곧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어찌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직 오지 않은 어진 이도 오히려 오게 하려고 생각하는데, 예전에 나아왔던 어진 이를 어찌 그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또 찬선으로 부르니 공이 누차 상소하여 사양하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 매양 어린아이, 도망자, 물고자의 군보(軍保)에 대해 말하기를,
“오늘날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서 백성을 상하게 하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군보에게 포(布)를 받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침징(侵徵)하고 강보에 싸인 아이에게까지 징수를 독촉한다 하니 이것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직하는 상소로 인하여 또 언급하여 아뢰기를,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도망자, 물고자, 어린아이에게 포를 거두는 것을 특별히 탕척(蕩滌)하라고 명하셨다 합니다. 백성들이 처음에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감격하며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은 이 일은 바로 한번 호령을 내리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니, 아래에서 강하가 터지듯이 시원스레 명령을 수행하여 민심에 흡족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성명(成命)을 내리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혹 미루고 지체하다 보면 드디어 폐기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면 전하의 지극히 정성스럽고 지극히 인자한 은택이 아래에 두루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한다면 애초에 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찌 믿음을 저버릴 리가 있겠는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대개 공이 효묘와 만난 지 10여 년 동안 나아오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으나 감히 거짓으로 사양하거나 구차하게 꾸미지 않았다. 공이 입대(入對)하였을 때 올린 말과 상소로 올린 문자는, 비록 한마디의 간단한 말이라도 곧바로 충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효묘도 애연히 성심으로 믿었으니, 일찍이 비답하여 유시하는 말에, “소장을 살펴보니 그대의 충성스럽고 순후하며 질박하고 성실한 모습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 이미 그대를 알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대가 비록 천언만어를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대를 버려두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공은 스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로운 대우이니, 임금의 명을 앉아서 저버릴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득불 나왔으며, 나오고 나서는 유현(儒賢), 빈사(賓師)의 지위가 끝내 자기의 분수에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득불 물러났다. 그러나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정성은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후로 올린 면직을 청하고 물러가기를 구하는 상소에서도 진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쇠한 것을 일으키고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 근본을 먼저 바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행하는 방도, 덕을 쌓고 인을 쌓는 일, 하늘에 천명이 영원하기를 비는 방도에 대해 간절하였다. 그리고 사적인 생각을 버리고 언로를 여는 것, 민심을 수습하고 인재에게 일을 맡기는 것,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 백성의 풍속을 선하게 하고 재용을 절약하는 것, 농업에 힘쓰게 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는 정사, 창름을 열어 진대하는 방책에 이르기까지 말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말한 것은 모두 간절하고 절실했다.
효묘도 오랫동안 더욱 믿었으며 지난번 맨 나중에 내린 비지에 이르기를,
“아, 그대같이 충후하고 독실한 사람이 나와서 세상의 쓰임이 되지 못했는데, 다른 것은 무어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내국에 명하여 약물을 주게 하고 병을 조리하고 올라오게 하라고 하였다.
5월에 효묘가 승하하였다. 공이 부음을 듣고 애통해하며 즉시 달려가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길을 떠나지 못했다.
6월에 금상(今上 현종)이 유지를 내려 부르기를,
“내가 장차 선왕께서 그대를 대우하던 정성을 본받아서 그대를 좌우에 두고자 한다. 그대는 선왕께 보답하려 했던 도리로 나 소자에게 보답하라.”
하였다.
7월에 대궐로 나아갔다. 인산(因山) 후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드디어 명을 받들었다. 이어 상소하여 군보(軍保)에게 포를 받는 것과 재전(災田)에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대해 아뢰었다. 그 대략에,
“임금이 하늘을 이어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도리가, 어찌 백성으로 하여금 경작할 수 없는 공전(空田) 때문에 세금의 독촉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죽은 사람과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에게까지 포를 징수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차라리 나라와 백성이 함께 죽을지언정 이것은 결단코 해서는 안됩니다. 오패(五覇)는 힘으로써 인(仁)의 행위를 빌렸는데, 비록 빌리기는 했지만 인이 아니면 패업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패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그들은 틀림없이 개혁할 것입니다.
혹자는 완악한 백성에게 속임을 당할까 염려하지만, 신은 차라리 백성이 나라를 저버릴지언정 나라가 백성을 저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진 마음과 은택이 백성들의 골수에 스며들면 백성들도 교화되고 인을 행하게 되어 감히 윗사람을 속이지 못할 것이요, 차라리 윗사람이 우리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윗사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을 모두가 가질 것입니다.”
하고, 또 면대하여 힘껏 말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2월에 특지를 내려 한성부 우윤에 올려 제수하였다. 대개 공이 선왕조 때부터 매양 탑전에서 아뢰기를,
“정치를 하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백성의 수를 총괄한 이후에야 호령을 내려 시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왕자(王者)가 인정(仁政)을 행하고자 해도 만일 백성의 수를 총괄하지 못하면 인정도 말미암아 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호적법이 폐기되어 없어졌으니 백성들을 총괄하여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이번의 명은 대개 호적의 일을 책임 지우려고 한 것이다. 여러 번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명을 받들고 드디어 호적법을 거듭 밝혔다. 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법은 폐기되고 해이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약 형벌을 엄격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하지 않는다면, 폐기된 것을 손질하여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호적에서 누락된 자를 사죄(死罪)로 논할 것을 아뢰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의 정령이 명백하게 믿음을 얻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안일해져서 법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데 갑자기 사죄를 가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속여 법망에 걸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또 비록 사죄로 논하더라도 범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주벌하고자 해도 이루 다 주벌할 수 없을 것이고, 주벌하지 않는다면 법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애초에 설행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국법에 호적에서 누락된 자는 변방에 강제로 이주시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법이 엄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느슨하게 버려두고 시행하지 않아 폐기되고 해이해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옛 법을 적용하고 여러 해 동안 시행해서 오래되어도 느슨해지지 않는다면 저절로 폐기된 것을 손질하여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연신이 오활하다고 쟁론하였으나, 상이 마침내 공의 말을 따랐다.
그때 팔도에 기황(饑荒)이 드니, 공이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을 전적으로 수령에게 맡겨 주어 기민을 구제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두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감격하여 보답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길이 없었는데, 병조나 경조(京兆)는 빈사(賓師)의 지위가 아니므로 드디어 진력하려고 하였다.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날마다 관아에 출근하여 지치고 힘들어서 몸이 수척해졌는데도 돌보지 않았다.
경자년(1660, 현종1) 1월에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금부에 전부터 내려오는 관례는, 단지 죄수의 공초(供招)를 받아 입계할 뿐이요, 그 사이의 가부(可否)를 논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걸핏하면 때를 넘겨 갇혀 있는 자가 항상 가득했다. 공이 장관에게 청하여 죄의 경중을 논의하고 실상을 조사하여 죄인을 관대하게 처결하여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근고에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효묘의 상에 대한 대왕대비의 복제(服制)를 논의할 때, 대신이 국제(國制)에,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라는 글을 인용하여 기복(朞服)으로 정하였다. 이해 여름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기복이 옳지 않다고 하며 연일(練日)을 계기로 고쳐서 자최(齊衰) 3년으로 할 것을 청하였다. 유신(儒臣)들에게 의견을 물으라고 명하니, 우암(尤庵)과 동춘(同春) 두 공은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있는 사종설(四種說)을 주장하며 의견을 내어 허목의 설이 그릇되었음을 논변하였는데, 공은 허목의 설을 옳다고 여겼다.
얼마 후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하며, 전적으로 양송(兩宋)을 공격하였는데 말뜻이 흉악하고 음험하였다. 아마 윤선도는 사림의 의견이 나누어지는 것을 엿보고 예를 논의하는 것에 가탁하여 화란을 만들려는 계획을 실행한 것이다. 우암은 먼저 도성을 떠났고 동춘 또한 창황히 성을 나가니, 조야에서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양사(兩司)에서는 드디어 윤선도를 법에 의하여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우암ㆍ동춘 두 공과 어려서부터 도의를 강설하며 사귀었고 다 같이 효묘의 예우를 받았다. 임금이 승하하는 애통한 일을 만났을 때, 금상은 유충한 나이로 홀로 외롭게 상중에 계셨기 때문에 공과 양송을 의지하고 중시하는 것이 더욱 지극하였다. 공은 돌아가서 살 생각을 하였으나 차마 물러갈 결심을 하지 못하고 두 공과 정성껏 마음과 힘을 다하기를 기약하였는데, 우암이 먼저 유언(流言) 때문에 물러갔다. 공이 개연히 불가하다고 여기며 말하기를,
“우리가 오늘날 믿고 있는 것은 성심(聖心)뿐입니다. 비록 온갖 방법으로 무고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오직 마땅히 자신을 반성하며 더욱더 삼가고 두려워할 뿐이니 어찌 이것 때문에 거취를 가볍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세상에 큰일을 해 보고자 하는 자가 임금이 믿어 주어 조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모름지기 자신의 과실을 지적하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앞에서 진달하게 하여,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 연후에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과실을 하나라도 말하자마자 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버린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당우(唐虞) 때의 기상은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개 요순의 시대에도 비방지목을 세웠습니다. 무릇 요순이 위에 있고 직설(稷契)이 아래에 있었는데, 무슨 비방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군신 간에 서로 경계하고 신칙하고자 하는 것은 그 극단의 방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비방이라고 말했다면 그중에 부도한 말이 반드시 많이 있었을 것인데, 직과 설이 그 비방을 듣고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참소하고 비방하는 말이 떠돌고는 있지만, 성상께서 조금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며, 사업을 이으려는 의지가 독실하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실로 떠날 수 있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우암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동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단지 성주(聖主)를 떠날 수 없어서일 뿐입니다. 장차 변변치 못한 재주로 무너져 내리는 큰 강을 막아야 하는데, 만나는 크고 작은 일마다 모두 역경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형께서는 마음을 크게 가지시고 역량을 키우시어, 만나는 역경마다 모두 증익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성주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백성은 우리의 동포이니 어느 누군들 선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한세상을 함께하여 성주가 잘 다스리는 구역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하였다.
공은, 두 공과 서로 기대하는 것이 결국 헛된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요, 만사가 산산이 부서져서 다시 큰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수천 자의 상소를 초하여 공과 두 공이 서로 경계해야 할 말을 다 진술하고, 또 말하기를,
“대순(大舜)이 사람을 취한 도리는 악을 감춰 주고 선을 드러내는 데 있었습니다. 윤선도(尹善道)가 헐뜯고 시기한 상황은 몹시 미워할 만하더라도 성상께서는 마땅히 그 악을 감춰 주어 천하의 언로를 열어 놓아야지 그를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조정에서는 한번 윤선도의 죽을죄를 용서하고, 뒤따라 송준길에게 유시하되 ‘군신 간에 성심으로 서로 믿었다면 결단코 사람들의 말 때문에 갑자기 가 버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책망한다면, 그래도 뒤미처 중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공의 이 논의는 이날 특별히 말한 것이 아니라, 선왕조 때부터 매양 언로를 넓힐 것을 말하면서 연연해하던 것이었으며, 양송 등 제공들과 평일에도 간절하게 말하던 것이었다.
어떤 이가 《서경》 〈우서(虞書)〉에 이른바 ‘참언을 미워하는 의리[堲讒]’와 《대학》에 이른바 ‘추방하여 유배한다.[放流之]’라는 뜻을 가지고 풍자하였다. 아마 그 말이 너무 분별이 없는 것 같았는데도 공은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으니, 대개 그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상소를 올리니 정원에서 말을 많이 하며 비난하고 배척한 이후에 입계하였다. 공이 즉시 도성을 나오니, 상이 듣고 이르기를, “권 우윤이 또 도성을 떠났으니 서운한 내 마음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사관을 보내 하유하라고 명하였다. 다음 날, 삼사가 공이 윤선도를 구호한다는 이유로 공을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입대하여 힘써 배척하는 자가 있자, 비로소 윤허하였다.
공이 돌아오다가 광주(廣州)의 선영 아래에 이르러 머물러 살았다. 공이 떠나고 나서 시론이 더욱 준열하니 친구와 문생들이 모두 연루될까 두려워 감히 왕래하지 못했으나, 공은 태연하게 처신하였다. 사는 집은 바람과 해를 가리지 못하고 조석 끼니가 없어 하루걸러 식사를 하였으나, 곤궁을 견디면서 한결같이 절개를 지키고 종시토록 과실이 없었다. 한가한 날에는 도잠(陶潛)의 시를 읽고 그 운자에 화답하여 뜻을 나타내었다. 남들과 말할 때 일찍이 시류에 배척당한 것으로 허물하거나 후회하는 뜻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충성과 믿음으로 능히 남에게 부합되지 못함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 겨울에 동춘이 조정에 나아가 상에게 아뢰기를,
“권시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니 끝내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드디어 좌윤에 제수하였는데, 두 번 병으로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기유년(1669)에 공산(公山)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임자년(1672, 현종13) 1월, 신미일인 24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별 탈이 없다가 갑자기 기후가 평상시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권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놀랍고 슬프다. 선조에서 예우하던 신하이니 관직을 추봉(追封)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특별히 정2품의 관직을 추증하고 되도록이면 제수를 넉넉하게 제급하라.”
하였다. 또 본도에 명해서 장례 때 역군(役軍)을 보내 주라고 하였다. 이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3월, 을묘일인 9일에 유성현(儒城縣) 동남쪽 보문산(普文山) 사정촌(沙井村)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려서 가정에서 배웠는데, 만회공(晩悔公)이 항상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단지 마음에 터럭만큼의 허위(虛僞)도 없게 하고, 일에는 옳음을 구할 뿐이다.”
하며, 매양 사람들로 하여금 “매사에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두 번째 의에 떨어지지 말게 하라.[每事必求是 毋落第二義]”라고 하였으니, 공은 어려서부터 이미 학문하는 것은 다른 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박잠야(朴潛冶)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선생은, “예는 반드시 근본과 실질을 귀하게 여기고, 도는 반드시 효제(孝悌)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하니, 공이 기뻐하며 사모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내면에 마음을 쓰고 조금이라도 외면에 힘쓰려는 뜻이 없었다. 무릇 스스로 처신하고 남을 대하는 것을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여 상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없었고, 가슴속이 막힘이 없이 트여 밝고 환하였다. 일찍이 “장부의 심사는 마땅히 청천백일과 같아야 한다.”라는 선유(先儒)의 말씀을 사모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참으로 이 기상을 보전할 수 있다면 성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무릇 명예를 좋아하는 자가 착한 명성을 좋아한다면 이것도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겨우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만 있게 되면 그 선을 하려는 마음이 이미 참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학자는 명예라는 한 글자에 대해서 맹렬하게 살피고 힘써 제거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싹트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연후에 학문을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귀히 여기는 이유이다.”
하였다.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이치를 궁구할 때에는 반드시 진실로 알고 실제적으로 체득하는 것으로 기약해서, 구차하게 하거나 중도에 그만두지 않았다. 독서할 때에는 마음을 맑게 하고 생각을 정밀하게 해서 그 취지를 연구하였다. 참으로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고인의 말이라도 감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기를,
“고인의 말을 의심해서는 안 되지만, 마음에 이미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억지로 의심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자기 마음이 이미 참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어떻게 능히 고인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고인의 말에 대해 감히 의심한 것은 아니요, 강구하여 의심나지 않는 경지까지 도달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의례(儀禮)》를 읽을 때도 문자에 얽매이지 않았고 반드시 그렇게 제작이 된 까닭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궁구하면서 말하기를,
“군자가 예를 행하는데 참으로 능히 성인이 제작한 본뜻을 안다면, 일일이 도수의 말단적인 것을 따질 필요 없이 유추하여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예의 본뜻을 궁구하지 않고 다만 절문(節文)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면, 하나의 장고(掌故)만 있어도 족할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미처 말씀해 주지 않았고, 본받을 만한 형식이 없는 것들은 행할 수 없을 것이니, 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혼례(婚禮)의 서직(黍稷)에 대해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먼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조석으로 늘 쓰는 물품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반드시 서직을 썼다. 지금 우리 동방에서는 메벼를 늘 쓰는데 예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서직을 쓴다. 이것은 이른바 기왕의 자취를 따르기에 급급한 것이요, 선왕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실용에 힘쓰는 것이 이와 같았다.
무릇 만나는 일마다 의리를 지켜 반드시 이치에 합당한지를 구하되 항상 조금이라도 어긋날까 두려워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흉중에 시비가 양립하여 결정할 수 없으면, 모름지기 먼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분별하여 인심에서 나온 것은 버리고 도심에 근원한 것은 보전할 뿐이다. 일에 임할 때마다 이렇게 대처한다면 경지의 절반은 넘어섰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중용(中庸)의 도는 능하기 어렵다고 옛 성인이 말했다. 범인이면서 범상한 도를 쓰고자 한다면 도리어 비루한 데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문에 의지와 기개를 지닌 선비는 매양 엄격하게 하여 중도를 넘는 것을 귀히 여기면서 중용은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그 도가 있으면 사람마다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애초에 행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중도를 넘는 것을 고상하게 여긴다면, 저 중용은 빈자리가 되고, 성인의 도는 행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옳은 것인가?”
하였다. 이런 까닭에 일에 임할 때마다 평상적인 것과 쉬운 도로 하고, 감히 통쾌해하거나 격발시키는 논의를 하지 않았다. 반복해서 살피고 헤아려서 반드시 중을 얻은 이후에 그치고자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모든 의리에 대해서, 수십 년 전에 의심했던 것을 수십 년 후에 깨달은 것도 있고, 젊었을 때 옳다고 여겼는데 늙어서 그릇됨을 알았거나, 젊어서 그르다고 여겼는데 늙어서 옳았음을 알게 된 것이 많다. 이로써 의리가 무궁하고 견문과 학식에 얕고 깊음이 있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대략 얻은 바가 있다고 대번에 자족하면 안 된다.”
하였다.
공은 몸가짐을 공경스럽게 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일찍이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태도는 너무 엄숙하게 하지는 않았으나 오만함이 몸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언어는 말이 적고 간략한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나 상스럽고 난잡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부지런하고 착실하여 일찍이 방자하거나 지나친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송영보(宋英甫)가 매우 돈독하게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서 지켜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학문을 잘하는 것을 사모하였으나 다만 너무 엄격한 것을 병통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지나치게 엄격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는 마음에 구애되어, 끝내 내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대개 비록 엄격하게 하더라도, 요점은 이 마음을 잃지 않고 수렴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막 그 엄격한 것을 병통으로 여길 때 이 마음은 이미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공이 스스로 겸손하게 하는 말이지만, 공덕을 쌓고 오랫동안 힘써서 늙어서도 해이해지지 않는 점을 또한 볼 수 있다.
평소에 종일토록 말한 것이 의리의 설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한 몸, 한마음, 하나의 일, 하나의 행동으로부터 천하 고금의 치란 득실과 인재의 현부(賢否)에 이르기까지 그 지극한 것을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일에 응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참되고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하여 표리가 한결같았으며 언행이 서로 어긋나는 근심이 없었다. 대개 이것은 일생 동안 진실한 것에 힘써서 결국은 이로써 덕을 이룬 것이다.
공은 태어나서 다섯 해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18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스스로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고 하여 종신토록 애통해하였다. 때로는 그리움에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기신(忌辰) 때마다 비통해하며 어린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듯이 애도하고 추모하다가 병이 되어 여러 날을 앓았다. 셋째 형이 요절하자 공은 그때 겨우 성동(成童)의 나이였는데 형을 위해 형의 언행과 시문을 모아 기록하고 《비통록(悲痛錄)》이라 하니, 사람들이 보고서 가엾게 여겼다.
경자년(1660, 현종1)에 도성을 떠날 때 중형이 연로하여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고 중형을 위해 광주(廣州) 선영 아래에서 몇 년 동안 머물러 우거하였다. 또 서제(庶弟)가 남쪽 고향에서 살고 있었는데 조석으로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돌아가자 날마다 서로 마주 대하며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조석으로 취사를 함께했으며 때로 색다른 맛있는 것을 얻었는데 만약 외지로 출타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면 반드시 나누어 남겨 두어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동생이 죽자 그의 처자를 염려하며 의식(衣食)을 돌보아 주었는데, 임종하던 날 아침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종족과 친족 사이에 은의가 매우 돈독하여 질병이 있거나 장사를 치를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염려하였으며, 고아나 과부, 빈궁한 이가 있으면 힘써 도와주고 반드시 온갖 방법을 다하여 두루 구휼하였다.
규문(閨門)에서는 항상 화락하고 화목한 것을 위주로 하였다. 매양 칭하기를,
“고인이 말하기를, ‘울지 않는 아이는 누군들 안아 주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저 효자와 순손(順孫)은 사람마다 모두 기를 수 있으니, 순하지 않은 자를 기를 수 있어야 비로소 선하다 할 수 있다.”
하였다.
공이 자손을 가르칠 때에는 어릴 때부터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를, “욕심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조금 자라면 반드시 충성과 믿음, 돈후함으로 가르쳤다. 학문을 하게 되어서는 먼저 《소학(小學)》으로 가르치고 다음에는 경서(經書)를 가르쳤으며, 외가류(外家類)와 사조류(詞藻類)를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비록 과거를 위한 글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성경현전(聖經賢傳)을 읽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릇 독서란 장차 고인을 배워서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단지 과거에만 현혹되어 공리(功利)의 주머니가 되니 탄식할 만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능히 그 도리를 다하여 지키는 바를 잃지 않는다면, 이 역시 학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인들은 과업과 학문을 두 개의 일로 여겨, 과업을 일삼았으면 문득 학문을 포기해 버린다. 이것은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저 어리석은 백성과 천민 중에 석불(釋佛)의 도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데 그 행동과 마음 씀씀이가 다른 사람과 자별하다. 석불의 도가 이단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학문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선으로 향할 수 있는데, 더구나 우리 유교의 학문이겠는가.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이와 같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독서할 때는 이 마음이 바로 수렴되어 다른 때에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이 마음을 수렴한다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생기니 독서하는 일은 잠시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매번 이르기를,
“선비에게 과장(科場)은 임금을 섬기는 처음 길이니 터럭만큼이라도 구차하거나 기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아들 권기(權愭)가 과장에서 우연히 옛날 자신이 지어 보았던 글이 출제되자 감히 쓰지 못하니 사람들이 지나친 고집이라고 여겼으나, 실은 공이 평소에 훈계한 것이 그 마음에 익숙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은 사람을 대할 때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 친한 이와 소원한 이를 막론하고 모두 그 정성을 다하였다. 무릇 사람들과 일을 논할 때는 줏대 없이 남의 말에 따라 구차하게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직 곧바로 궁구하고 통렬하게 변별하여 시비와 득실의 의리가 밝아지게 하였다. 비록 촌의 종과 어리석은 남자라도 그를 위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갖추어 말하였으며 간곡하게 되풀이하기를 반복하고, 그가 아는 것이 없다 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처음에는 그것이 지루하다고 싫어했으나 결국에는 모르는 사이에 점점 스며들고 깊이 젖어 들게 되어 참으로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거주하는 곳의 향인들이 매양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와서 질의하고 나서 행하였으며, 여항에서 다투고 힐난할 일이 있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면, 반드시 “권공에게 들어보면 반드시 내가 옳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하니, 남들에게 믿음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 매우 측은히 여겼다. 매양 칭하기를,
“건(乾)을 아버지라 칭하고, 곤(坤)을 어머니라 칭하니, 백성들은 나의 동포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악은 마땅히 형제의 악으로 보아야 한다. 주공(周公)이 비록 부득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주벌하였지만 그 마음은 필시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면서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뜻으로 미루어 보면 무릇 사람들이 악한 짓을 하면 비록 부득불 미워하지 않을 수 없지만 불쌍히 여기는 뜻은 항상 그 사이에 두어야 한다. 만약 기뻐하며 문득 폭로하여 널리 퍼지게 한다면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들의 과실은 마음의 선악에 달려 있지 않고, 다만 일의 시비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을 말하면서 바로 그 일의 시비를 밝혀야 하는 이유는, 저 시비의 공정함은 남과 내가 감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악에 대해서는 군자는 본디 지적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는데 더구나 심술의 미묘한 곳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남의 과오를 보면 그 득실을 밝혀 말하되 일찍이 남의 심술이 바르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고, 사람과 마주하고 말하면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만약 그 사람과 마주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타인을 마주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또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군자가 자기 집에 있으면서 말을 내면 천리 밖에서도 호응한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입 밖으로 말을 냈는데도 모가 듣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가 있으니, 매우 그른 것이다.”
하였다.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말한 자는 반드시 의도가 있어서 말한 것이요, 그 심기(心機)를 써서 알게 된 것이니, 그 마음이 이미 공정치 못한데 어떻게 그 말을 믿겠는가.”
하며, 항상 몹시 미워하였기 때문에 공을 대할 때는 감히 남의 비밀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사람들과 논의할 때 일찍이 구차하게 동조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시비라는 것은 천하의 공적인 것이면서 사람이 마땅히 함께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부자와 사제간이라도 억지로 합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원종(元宗)을 추숭하는 의논이 일자 공이 감히 잠야(潛冶)와 뜻을 합치하지 않으니, 잠야의 문하가 모두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비방하였다. 공이 개연히 말하기를,
“사우(師友)라는 것은 도의를 강론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의견이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마음이 이미 같지 않은데 억지로 같게 한다면,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고 그것으로 사우를 속이는 것이니, 차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후에 양송(兩宋)이나 제공(諸公)들과 우의를 나누면서도 대소 논의에서 또한 같지 않은 것이 많았는데, 그 젊은 문생들이 대부분 공박하여 배척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모두 성인의 경지에 이르면 차이가 없겠으나, 그 나머지부터는 차이가 없지 않으므로 붕우가 강론하며 연마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지금 반드시 차이가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면 군자가 도의로 사귀는 것이 아니요, 바로 서로 도와 잘못을 숨겨 주는 소인의 붕당이다. 또 시비와 이동(異同)은 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것인데, 번번이 다르다고 하여 공격한다면 사우나 붕우들이 끝내 궤멸된 후에 그만둘 것이니, 이런 도에는 비록 천하를 준다 하더라도 하루아침도 편히 지내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공의 말이 대략 증험되었다.
이웃 읍에 창주서원(滄洲書院)이 있으니, 바로 조중봉(趙重峯)을 향사하는 곳이다. 어떤 사람과 밭을 가지고 다툼이 있자 공이 불가하다고 여겼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서원의 일이 비록 그르더라도 드러내 말해서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면 안 되니, 사림을 부호(扶護)하는 도리는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자, 공이 이르기를,
“선비가 서로 쟁론하는 것은 다만 일의 시비를 헤아릴 뿐이니, 어찌 형세의 강약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또 군자가 일반 사람들보다 나은 점은 오직 그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지금 그른 점을 말해서 능히 고친다면 사림을 부호하는 것이 무엇이 이보다 낫겠는가.”
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상소를 올릴 때 자제와 친구들이 모두 다투어 말하기를,
“반드시 시론에 죄를 얻게 될 것이고 양송(兩宋)에게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복제(服制)를 혹은 기년(朞年)이라 하고 혹은 3년이라 하는데, 조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사이에 있는 것이지, 본디 국가의 치란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약 윤선도(尹善道)가 죽는다면 참으로 나라에 누가 되고 두 벗도 후세에 변명할 말이 없을까 염려된다. 내가 구차하게 시대에 영합하고자 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군부를 속이고 아래로는 붕우를 저버리는 것이다.”
하고, 결국은 중지하지 않고 올렸다. 그로 인해 전패하게 되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남들이 경계해 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며 마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원망하거나 노하여 더욱 책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감히 스스로 옳다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를 대우하는 정성과 도리에 극진하게 하지 못했는가를 염려하였다. 비난하거나 헐뜯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몹시 두려워하며 몸을 닦고 반성하고, 감히 그 사람에게 성내지 않았다. 일찍이 소명을 받들고 입조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가 대부분 헐뜯고 비방하거늘, 문생과 친구 중에 눈을 부릅뜨고 공박하여 따지자고 하는 이가 있었다. 공이 즉시 편지를 보내 책망하기를,
“어떤 이가 나를 그르다고 논하는 것을 듣고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 공박하여 따지는 것은 평소에 붕우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어찌 붕우가 나를 가볍게 대우하는가. 평소에 남을 대우하기를 감히 박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남이 비방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스스로 반성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몹시 두려워하며 몸을 닦고 반성하여 자신이 친히 당한 것처럼 하라고 하였지, 감히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라고 하지 않았고 감히 공박하고 헐뜯으라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천둥이 오면 곰곰이 새겨 보며 두려워하여 복을 부르는 도이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결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아마 서로 이끌어 당을 이루는 뜻이니, 간절히 바라건대 붕우들은 경계하여 그리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윤선도의 일을 말하고 도성을 떠나자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갑자기 공과 절교하였다. 공은 오히려 옛 정의를 변치 않고 말하기를,
태지(泰之)가 평소에 매양 나의 과실을 말해 주었으니, 일찍이 서로 아끼던 사이이다.”
하고, 끝내 절교하지 않았는데, 그 후에 이공이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알고 공에게 나아와 사과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군신, 부자, 형제, 붕우 사이에는 다른 도가 없다. 서로 가르치고 경계하여 허물이 없는 경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하였다. 매양 친구가 다른 사람과 다투고 힐난하는 것을 보면, 그 이해와 승부는 걱정하지 않고 오직 그가 실수할까를 염려하였다. 시골에 거주하며 일찍이 한 번도 남들과 다툰 적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혹 무도하게 하면 곧바로 받아들이고 보복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남을 용납할지언정 남에게 용납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향인(鄕人)들과 지낼 적에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각각 그 정의(情誼)를 다하였으며, 향인들이 서로 방문하면 심한 병이 아니면 즉시 영접하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계하지 않았다. 혹 질문이 있으면 하나하나 설명하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에게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절대 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싯적에는 농사에 힘써 몸소 동복을 거느리고 농사짓는 밭이랑에 섞이거나, 심지어 머슴들이 물을 대고 빼고 하는 사이에서도, 지극히 공정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번거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감격하여 믿어 마지않았다.
사람에게 질병이 있어 위급하게 되면 무릇 구호할 수 있는 경우에는 아끼거나 인색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웃 사람에게 병이 있었는데 필요한 약이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공에게 비축해 둔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구하니, 즉시 비축해 둔 것을 다 주었다. 집안사람이 나누어 남겨 두려고 하니, 말하기를,
“집안에는 현재 질병을 앓는 사람이 없지만, 저들은 다 얻지 못하면 위급함을 구제할 수 없다. 내 어찌 차마 후일을 위하여 아끼는 바가 있으랴.”
하였다.
초상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달려가 힘을 다하여 서둘러 살펴 주는 의리를 다하되, 반드시 친한 이로부터 소원한 사람에게 미쳤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붕우의 상에는 온 힘을 다하되 친척의 죽음은 돌봐 주지 않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붕우를 중히 해야 하는 까닭은 친한 이를 친히 한다는 도리를 밝히기 위해서인데, 지금 이와 같이 어긋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은 사양하거나 받는 것에 대해서 일찍이 분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명분이 없는 물건은 티끌 하나라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령이 안부를 물으며 선사한 물건은 더욱 경솔하게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오늘날의 수령은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니, 선물을 주는 수령이나 그것을 받는 사람 모두 잘못이다.”
하였다.
평소에 비록 재야에 있었으나 하루도 나라에 대한 근심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매양 조정의 득실을 들으면 근심하거나 기뻐하는 기색을 나타내며, 곧바로 그에 대한 시비를 설명하면서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마지않았다.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로는 세상사에 뜻이 없어 무릇 몸을 편안하게 해 주는 도구도 모두 평소와 달랐고 처자와 권속의 생활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옛사람은 오랑캐가 멸망하지 않으면 / 古人胡未滅
옥우가 무너지거나 기울어져도 그냥 두었지 / 屋宇任頹傾
이 뜻을 누가 능히 계술할 것인가 / 此意誰能述
마음 깊이 품은 생각 절로 편치 못하구나 / 幽懷自不平
하였다. 매양 이르기를,
“조정에서 만약 원수를 갚아 설욕하려는 의지가 있어서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채찍을 잡는 사람이 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다.”
하였다. 이 때문에 뜻이 있는 선비들 중에 혹 오늘날의 시세로는 벼슬할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면, 공은 놀라서 말하기를,
“선비라면 단지 임금이 큰일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보고 거취를 결정할 뿐이다. 지금 조정이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있다면, 선비는 스스로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주께서 만일 큰일을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은 200년 동안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자기 한 몸만을 깨끗하게 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효묘가 큰 뜻을 분발하니 공이 먼저 일어나 소명에 달려가고, 여러 어진 이들이 계속하여 몰려드니, 실로 한 시대의 성대한 일이었다. 다만 공이 매양 이르기를,
“근세의 당론은 사람의 심덕을 매우 심하게 해친다. 비록 주공의 재주가 있더라도 조금이라도 당론을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악을 행하는 것이 장차 이르지 못할 곳이 없어 부화뇌동하거나 편당을 지어 사리(私利)를 도모하고, 악한 것을 감춰 주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포용하는 일만 반복할 뿐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군자는 자기를 이루었으면 반드시 남을 이루어 주고자 하니, 구적(寇賊)을 변화시켜 신민으로 삼고, 간흉을 교화하여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만물과 모두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대인의 마음 씀씀이이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다만 같은가 다른가를 가지고 그르다 바르다고 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거취를 삼고, 부화뇌동하는 것을 현인으로 존경한다고 하고, 과격하게 들추어내는 것을 악을 미워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천하의 공정함을 참으로 얻지 못하고 다만 사사로운 것만 구제하니, 이것이 이른바 당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끝내 공 자신을 조정에 안정시키지 못하였고, 제현도 끝내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개 공의 학문은 이(理)로 주를 삼고 성(誠)으로 본을 삼았으며, “천지의 대덕을 일러 생(生)이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항상 말을 할 때면 생을 말하고 살(殺)을 말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만년에 추구한 것은 심(心)과 이회(理會)였으며, 믿음이 말보다 앞서고 체용(體用)이 원활하고 본말이 상응하였다.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남을 대하였으며, 출처와 진퇴를 때에 따라 의롭게 처신하였다. 자신감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조를 지켜 헐뜯음과 명예, 영화와 치욕이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항상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당당히 대적하겠다.’라는 기상을 지니고 있어서, 행하는 바가 지성스럽고 간절하였으므로 화기애애하여 본심의 덕을 온전히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의 귀천과 현우를 막론하고 참으로 덕을 좋아하는 양심이 있고, 사사롭게 계교하여 양심이 민멸된 자가 아니라면, 경모하고 차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세상을 다하도록 쇠하지 않았다. 아, 이것이 어찌 부드러운 말씨와 웃는 낯빛을 한다고 해서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이겠는가. 우암은 공을 지목하여 “순수하여 잡된 것이 없는 군자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에 대해 잘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은 천문(天文), 지지(地志), 산수(算數), 성력(星曆), 이치(吏治), 병기(兵機) 및 경계(經界)의 법, 우역(郵驛)의 정사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강구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여러 실용적인 것에서 요점을 얻고자 하며, 매양 이르기를,
“정주(程朱) 이후의 학자는 그 책을 읽고 그 말을 외우는 데도 겨를이 없다. 비록 책을 저술하고자 하더라도, 마치 뇌사(耒耜)의 제도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서 다시 복제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 때문에 평상시에 저술한 바가 없어 문집 약간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부인은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공조 정랑을 지낸 휘 지경(知警)의 딸이다. 온화하고 은혜로우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비단옷을 거의 입지 않았으며,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가업을 이루었다.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로 공이 영남에 피해 살자 곤궁하게 살아가면서도 빈천을 함께 편안하게 여기며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공이 옷을 나누어 주고 찬을 거두어 종족에게 후하게 하면 그 뜻을 따르고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선조를 제사 지내며 추모하는 도리에 있어서 뜻을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으며 의식대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녹봉에다 쌀과 고기를 계속 대 주고 별도로 내려 주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모두 여러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부인이 흔연히 뜻을 받들고 터럭만큼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처음에 난을 겪은 후에 친정 부모님을 여러 해 동안 찾아뵙고 문안하지 못하였는데, 아버지 정랑공이 세상을 뜨니 부인이 종신토록 애통해하였다. 매양 양친의 기일이면 번번이 방에 신위를 설치하고 스스로 제사 지내며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붙였다.
자녀를 사랑하여 그 자애로움을 극진히 하되 의방(義方)으로 가르쳤으며, 비복을 대할 때는 은혜로 어루만져 주고 부릴 때에는 법도가 있었으니, 규문의 안은 항상 화평하였다.
공이 졸하기 전에 부인에게 이미 병이 있었는데 공의 상을 당하여 너무 심하게 슬퍼하다가 그해 4월 20일에 이어 졸하자, 공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큰아들은 기(愭)로 지평이고, 둘째 아들은 유(惟)이다. 큰딸은 나 증(拯)에게 시집왔고, 둘째 딸은 윤의제(尹義濟)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는 송도현(宋道顯)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기는 3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종(以鍾), 이용(以鏞), 이현(以鉉)이고, 큰딸은 김원섭(金元燮)에게 시집갔으니 학유(學諭)이고, 둘째 딸은 이정흥(李鼎興)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성익창(成益昌)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는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정(以鋌), 이개(以鍇), 이진(以鎭)이고, 딸은 이영석(李寧錫)에게 시집갔다.
증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행교(尹行敎), 윤충교(尹忠敎)이고, 딸은 임진영(任震英)에게 시집갔다.
윤의제는 2녀를 두었고, 송도현은 1남 1녀를 두었다.
증손 남녀 10여 인은 모두 어리다.
공이 졸한 이듬해 향리(鄕里)의 자제 및 종유하던 선비들이 덕을 사모하는 마음은 매우 깊으나 우러러 정을 붙일 데가 없는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이에 서로 의논하여 비석을 세워 묘에 표시하기로 하고, 당세의 덕이 높은 군자의 글을 얻어 뒤쪽에 새기고자 하였다. 지평인 아들 형제가 공의 평생의 일과 행적을 서술하여 나에게 주며 차례로 엮어 행장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아, 내가 공을 섬긴 것이 도합 26년이다. 그 처음에는 아득하여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이 그 끝을 알지 못하였다. 이후 공의 언행을 묵묵히 엿보니, 표리가 성(誠)에 근본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근본이 정해진 것이 없는데도 저절로 법을 이루는 것 같았으며, 좌우에서 근원을 맞이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연후에 배웠으되 능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외람되게도 매우 돈독하게 공의 사랑을 받았으며, 자상하게 몸소 가르쳐 일깨워 주신 것은 끝이 없었다. 당시에는 혹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마음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오랜 후에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더욱 징험할 수 있었다.
다만 한스러운 점은 다음과 같다. 능히 몸 바쳐 종사하여 나의 재주를 다하지도 못하였고, 평소에 기대하던 지극한 뜻을 저버렸다. 지금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여 실지로 의거하여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내게 무슨 견문과 학식이 있어 덕의의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하여 내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인가.
돌아보건대 윤자(胤子)가 기록한 것은 넘치지도 속이지도 않아서 다시 군더더기 사설(辭說)이 필요 없다. 삼가 그것을 인하여 서술하여, 붓을 잡은 이의 채택에 대비하는 바이다.


[주D-001]창녕 조씨(昌寧曺氏) : 대본에는 ‘咸安尹氏’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70집에 수록된 《월사집(月沙集)》 별집(別集) 권6 〈권극례묘표(權克禮墓表)〉에, ‘考諱德裕……妣昌寧曺氏 父右贊成昌寧君繼商’이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함안 윤씨(咸安尹氏) : 대본에는 ‘昌寧曺氏’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76집에 수록된 《만회집(晩悔集)》 부록(附錄) 〈가장(家狀)〉에, ‘考繕工監監役官副司果諱克寬 妣咸安尹氏’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서령공에게 …… 극례(克禮)이고 : 한국문집총간 35집에 수록된 《소재집(穌齋集)》 권10 권박(權博)의 묘갈명에, ‘男長曰德裕 生員宗廟署令 娶右贊成昌寧君曺繼商女 生男克仁 次克義早逝 次克禮 次克智 次克寬’이라고 되어 있다. 서령공에게 아들이 다섯이 있었고 극례가 셋째 아들인데 둘째 아들이 요절하여 아들을 넷이라 하고 극례를 둘째 아들이라 표현한 듯하다.
[주D-004]바닷가 골짜기 : 《만회집》 부록 〈가장〉에, ‘壬戌春二月 乃入忠淸道泰安大海之曲居焉’이라고 되어 있으니, 태안(泰安)의 바닷가에 은거한 것을 알 수 있다.
[주D-005]금주위(錦州衛)의 …… 되었는데 : 1640년(인조18)에 청나라가 명나라 금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므로 영병장(領兵將) 유림(柳琳)을 금주위로 파송한 일을 말한다.
[주D-006]청음(淸陰)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이다. 다른 호는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청음집(淸陰集)》이 있다.
[주D-007]신재(愼齋) : 김집(金集, 1574~1656)의 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다. 자는 사강(士剛)이고, 다른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가 있다.
[주D-008]양송(兩宋) :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말한다.
[주D-009]백성을 …… 있습니다 : 항우(項羽)가 진(秦)나라를 멸하고 패공(沛公)을 험지인 파촉(巴蜀) 땅의 한왕(漢王)으로 봉하니, 한왕이 노하여 항우를 공격하려 하자, 소하(蕭何)가 아뢰기를, “백성을 잘 길러 어진 이를 오게 하고 파촉을 수용하고 삼진을 도로 평정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養其民以致賢人 收用巴蜀還定三秦 天下可圖也]” 하니, 한왕이 옳게 여기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漢書 卷39 蕭何傳》 삼진(三秦)은 진의 관중(關中)을 셋으로 나눈 옹(雍)ㆍ새(塞)ㆍ적(翟)으로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지역을 말한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한 후 항복한 진나라 장수 장감(章邯)ㆍ사마흔(司馬欣)ㆍ동예(董翳) 세 사람에게 봉해 주었다.
[주D-010]유철(兪㯙)이 죄를 지었는데 :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소신(小臣)’이라 칭한 승지 유도삼(柳道三)의 파직을 주장하다가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효종의 노여움을 사 진도(珍島)에 위리안치되었다. 《承政院日記 孝宗 7年》
[주D-011]비방지목(誹謗之木) : 임금이 반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의 과실을 기록하게 한 나무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에 “옛날 천자가 정치에 대해서 들을 경우……요 임금은 감간의 북[敢諫之鼓]을 설치하여 과오가 있으면 이것을 치게 했고, 순 임금은 비방의 나무[誹謗之木]를 세워 놓고 여기에 선과 불선을 쓰도록 했으며, 탕왕은 사직(司直)을 두어 과오를 바로잡게 했으며, 무왕은 계신지도(戒愼之鞀)를 세워 놓고 이것을 흔들도록 했으니, 미세한 과오도 범하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하였다.
[주D-012]설행한다 : 대본에는 ‘說’로 되어 있는데, ‘設’의 오자로 보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시경(詩經)에 …… 보게나 : 《시경》 〈호엽(瓠葉)〉에 있는 시로 하찮은 물건이라도 빈객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주D-014]고기를 …… 법이다 :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에 “한 경제(漢景帝) 때 원고생(轅固生)과 황생(黃生)이 탕(湯)과 무왕(武王)이 걸(桀)ㆍ주(紂)를 주멸하고 천자가 된 데 대하여 시비를 쟁론하자, 경제가 ‘고기를 먹되 말의 간은 먹어 보지 않아도 맛을 모르지 않고, 학문을 논하는 자가 탕과 무왕의 수명(受命)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어리석음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혐의스러운 언동을 피해야 함을 이른 것이다. 또한 《주희집(朱熹集)》 권57 〈답진안경(答陳安卿)〉에 “주나라 문왕(文王)은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고서도 은(殷)나라를 섬겼으니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라는 글을 논하며 이 말을 인용하였으니, 비록 그냥 놓아두고 따지지 않는 것은 의리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D-015]태백(泰伯)과 …… 은미합니다 : 《논어》 〈태백〉에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수 없게 하였구나.” 하고, “문왕은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고서도 복종하여 은나라를 섬겼으니, 지극한 덕이라 이를 만하다.”라며 덕을 찬미하였다.
[주D-016]잔적(殘賊)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인(仁)을 해치는 사람을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사람을 잔(殘)이라 하며, 잔적한 사람을 일부(一夫)라 한다.”라고 하였다.
[주D-017]독부(獨夫) :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紂)가 무도하여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났으므로 주는 한 사람의 남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泰誓下》
[주D-018]선군자(先君子) : 명재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를 말한다.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미촌(美村)ㆍ노서(魯西)ㆍ산천재(山泉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노서유고(魯西遺稿)》가 있다.
[주D-019]유약(有若)이 …… 권하였겠습니까 : 《논어》 〈안연(顔淵)〉에 “노 애공(魯哀公)이 유약(有若)에게 묻기를, ‘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재용이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유약이 답하기를, ‘어찌하여 철법(徹法)을 쓰지 않습니까?……백성이 풍족하면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며,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다면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겠습니까.’ 하였다.” 하였다. 이는 군주와 백성이 일체라는 뜻을 말하여 세금을 많이 거두려는 것을 저지한 것이다.
[주D-020]맹자가 …… 권하였으니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등문공이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물으니, 맹자가 답하기를 ‘하후씨는 50묘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나라는 70묘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나라는 100묘에 철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니 철은 통한다는 뜻이요, 조는 빌린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하였는데, 주석에, “정전(井田)의 제도를 만들어 아홉 구역으로 나누어 한가운데는 공전(公田)이 되고, 그 바깥은 여덟 집에 각기 한 구역을 주어 단지 그 힘을 합쳐 공전을 경작하게 하고 다시 그 사전(私田)에 세를 내지 않게 하였다.” 하였다.
[주D-021]백성을 …… 있다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말하기를, ‘선인이 7년 동안 백성을 가르치면 또한 싸움터에 나아가게 할 수 있다.’ 하였다.” 하였는데, 백성을 가르치면 윗사람을 친애하고 관장을 위하여 죽을 줄 알 것이니, 싸움터에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주D-022]도유우불(都兪吁咈) : 도(都)와 유(兪)는 찬성의 의미, 우(吁)와 불(咈)은 반대의 의미를 표하는 감탄사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우가 말하기를, ‘아, 훌륭합니다. 황제이시어, 지위에 있음을 삼가소서.’ 하니, 제순이, ‘아, 너의 말이 옳다.[禹曰都愼乃在位 帝曰兪]’ 하였다.” 하였으며, 또 〈요전(堯典)〉에 “사악(四岳)이 곤(鯀)을 추천하니, 요 임금이 말하기를, ‘아, 너희 말이 옳지 않다.[帝曰 吁 咈哉]’ 하였다.” 하였는데, 후세에서는 군주와 신하가 자유롭게 정치를 논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주D-023]대순(大舜)은 …… 까닭이다 : 이 말은 《중용장구》 제6장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순 임금에 대해 말한 것이다. 순 임금이 큰 지혜가 된 까닭은 자신의 지혜를 쓰지 않고 남에게서 취하였기 때문이고, 그 지혜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 도가 행해지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다.
[주D-024]비방지목 : 임금이 반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의 과실을 기록하게 한 나무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에 “옛날 천자가 정치에 대해서 들을 경우……요 임금은 감간의 북[敢諫之鼓]을 설치하여 과오가 있으면 이것을 치게 했고, 순 임금은 비방의 나무[誹謗之木]를 세워 놓고 여기에 선과 불선을 쓰도록 했으며, 탕왕은 사직(司直)을 두어 과오를 바로잡게 했으며, 무왕은 계신지도(戒愼之鞀)를 세워 놓고 이것을 흔들도록 했으니, 미세한 과오도 범하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하였다.
[주D-025]효묘의 …… 때 :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기간을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지, 3년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국제(國制)에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장자와 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조항을 채택하여 기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허목(許穆)의 상소로 다시 논란이 되어 격렬하게 논쟁하였다. 《顯宗實錄》
[주D-026]사종설(四種說) : 아무리 승중(承重)이라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을 수 없는 네 종류가 있다는 설이다. 첫째는 정통(正統)이고 친자식인 체(體)이면서도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이니, 이를테면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감히 종묘(宗廟)를 받들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전중이면서도 정통과 체가 아닌 경우이니 이를테면 서손(庶孫)이 후사(後嗣)가 되었을 때이고, 셋째는 체이면서도 정통이 아닌 경우이니 이를테면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웠을 때이고, 넷째는 정통이면서도 체가 아닌 경우이니, 이를테면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웠을 때이다. 《儀禮注疏 卷29 喪服》
[주D-027]어떤 …… 의리 : 1660년(현종1) 4월 25일에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부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이 차자를 올려, 간특하고 흉악한 윤선도(尹善道)를 처벌하고 그를 비호한 권시(權諰)의 말에 흔들리지 말라고 청하였다. 차자의 내용 중에 “권시가 이에 감히 비호하려는 계책을 부렸으니, 공론을 무시하고 조정을 가벼이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흉하고 간사하여 선한 이들을 무고하여 해코지하는 자를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한다면, 이는 순 임금이 참언을 미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시인(詩人)이 굳이 참소하는 자를 맹수에게 던져 주라고 읊지는 않았을 것이며, 《주관(周官)》에 유언비어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다. 《顯宗改修實錄》 《瑞石集 卷7 玉堂論尹善道權諰箚, 韓國文集叢刊 144輯》
[주D-028]만회공(晩悔公) : 만회는 권시(權諰)의 부친인 권득기(權得己, 1570~1622)의 호이다. 자는 중지(重之), 다른 호는 거원자(居元子)이다. 저서로는 《만회집(晚悔集)》이 있다.
[주D-029]박잠야(朴潛冶) : 잠야는 박지계(朴知誡, 1573~1635)의 호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지(仁之),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권득기, 조익(趙翼), 권필(權韠) 등과 교유하였는데, 그 인연으로 형인 박지경(朴知警)의 딸과 권시(權諰)가 혼인하였다. 저서로는 《잠야집(潛冶集)》이 있다.
[주D-030]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의 인격을 위한 학문으로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31]장고(掌故) : 장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예전의 제도나 고사를 말한다. 《사기(史記)》 권128 〈귀책열전(龜策列傳)〉에 “효문제와 효경제는 옛 제도를 답습하였을 뿐, 복서의 이치를 강구하거나 시험할 겨를이 없었다.[孝文孝景因襲掌故 未遑講試]”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다. 둘째는 한(漢)나라 때 설치한 예악 제도를 관장하는 관리를 뜻하기도 하는데, 《사기》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에 “이때 복생은 아흔이 넘었고 늙어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상을 불러 장고인 조조를 파견해서 전수받게 하였다.[是時伏生年九十餘 老不能行 於是乃詔太常使掌故朝錯往受之]”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뜻이 다 통한다.
[주D-032]송영보(宋英甫) : 영보는 송시열(宋時烈)의 자이다.
[주D-033]공은 …… 여의었는데 : 대본에는 ‘公生五歲而喪所恃 十八而孤’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04집에 수록된 《탄옹집(炭翁集)》 〈연보〉에는 ‘萬曆 三十七年 己酉(先生六歲) 正月 丁母夫人李氏憂, 天啓二年 壬戌(先生十九歲) 九月 丁晩悔先生憂’라고 되어 있다. 나이를 계산하는 방식의 차이로 보아 대본대로 번역하였다.
[주D-034]주공(周公)이 …… 주벌하였지만 : 관숙 선(管叔鮮)과 채숙 도(蔡叔度)는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이다. 무왕이 천하를 평정한 다음 선에게는 관(管) 지역을, 도에게는 채(蔡) 지역을 영지로 주고,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보좌하며 은나라 유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무왕이 죽고 아들 성왕(成王)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주공이 섭정하니, 관숙과 채숙은 주공이 성왕에게 불리하게 정무를 처리할 것이라고 의심하고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무경을 살해하고 관숙과 채숙을 죽였다. 《史記 卷35 管蔡世家》
[주D-035]원종(元宗) :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 1580~1619)를 말한다.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로 인빈(仁嬪) 김씨(金氏) 소생이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대원군(大院君)에 추존되었다가, 1627년(인조5) 원종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은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주D-036]조중봉(趙重峯) : 중봉은 조헌(趙憲, 1544~1592)의 호이다. 본관은 배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 다른 호는 후율(後栗)ㆍ도원(陶原)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의병장(義兵將)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사(戰死)하였다. 저서로는 《중봉집(重峯集)》이 있다.
[주D-037]경자년에 상소 : 1660년(현종1) 4월 24일에 올린 상소이다. 효종의 상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3년으로 해야 하고,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한 윤선도(尹善道)를 죄주지 말 것을 아뢰면서, 송시열과 송준길의 일까지 언급하였는데, 이 상소로 인하여, 양송(兩宋)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삼사(三司) 관원들에게 논박을 받아 파직되었다. 《顯宗實錄》 《炭翁集
[주D-038]천둥이 …… 도이다 : 《주역(周易)》 〈진괘(震卦)〉에 “천둥이 칠 때에 돌아보고 돌아보면 웃고 말함이 즐거우리니.[震來虩虩笑言啞啞]”라고 하였는데, 단사의 전(傳)에 “천둥이 칠 때 능히 두려워하여 스스로 닦고 스스로 삼가면 도리어 복(福)과 길(吉)함을 이루게 된다.”라고 하였다.
[주D-039]태지(泰之) : 이유태(李惟泰, 1607~1684)의 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초려(草廬),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와 교유하였으며,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주D-040]천만 …… 대적하겠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공손추에게 용(勇)에 대해 논하면서, 증자(曾子)가 공자에게 들었다는 대용(大勇)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갈관박(褐寬博)이라도 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당당히 대적하겠다.” 하였다.
[주D-041]어찌 …… 것이겠는가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공손한 자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남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빼앗는 군주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어찌 공손하고 검소하게 할 수 있겠는가. 공손함과 검소함을 어찌 음성이나 웃음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주D-042]윤의제(尹義濟) : 164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정백(正伯)이며, 우찬성 윤휴(尹鑴)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아버지 윤휴는 사사(賜死)되고, 윤의제는 극변(極邊)에 유배되어 병사하였다.
[주D-043]좌우에서 근원을 맞이하여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가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여 학문의 세계에 깊이 나아가려는 것은 스스로 체득하려고 해서이다. 스스로 체득한 바가 있으면 거처하기를 편히 하게 되고, 거처하기를 편히 하면 이용하는 것이 깊고, 이용하는 것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해 쓸 때 그 근원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체득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학문의 조예(造詣)가 깊으면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을 취할지라도 물의 근원을 만나듯 도(道)의 근원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명재유고 제32권
명(銘)
노학재(老學齋)에 관한 명 병서 ○ 병자년(1696, 숙종22)

옛날 정이천(程伊川)이 여진백을 칭찬하기를, “진백은 늙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는데, 늙어서도 배우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이는 더욱 사랑스럽다.” 하였다. 사람이 젊고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당연히 힘써 노력하지만 대체로 사람이 늙으면 혈기가 쇠해지고 총명이 줄어들면서 생각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이는 굳은 의지가 있어서이다. 이 의지는 혈기에 따라 쇠해지는 것이 아니건만 이 의지가 성실한 자가 적으므로, 이런 점에서 이천이 그를 사랑한 것이다. 내 친구 안정(安定) 나현도(羅顯道)는 금년에 나이가 쉰아홉인데 재실의 이름을 ‘노학’이라 붙였으니, 그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이에 그를 위해 명을 짓고 그것으로 나 스스로도 경계하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자연의 운행이란 시냇물 같아 / 逝者如川
밤낮으로 잠시도 쉼이 없다네 / 日夜靡息
사람이 그 사이에 존재하면서 / 人於其間
홀로 머물래도 될 수 있으랴 / 獨駐焉得
어제는 꽃다운 나이였는데 / 昨日妙齡
오늘은 머리 빠진 노인 되었네 / 今朝禿翁
하늘의 원리가 그러하거니 / 天機乃爾
어떻게 빠르다 말을 하리오 / 豈云忽忽
기운은 흐름 따라 바뀌겠지만 / 氣之相禪
그 이치는 그대로 변함이 없네 / 理則自如
바깥의 육신은 성쇠 있으나 / 外有盛衰
내 안의 마음은 영허 없다네 / 內無盈虛
사방 한 치 되는 한 조각 마음 / 方寸一片
거기에 이치가 담겨 있나니 / 寔理所宅
환하게 그것이 밝게 빛나서 / 瑩然其明
흠결이 하나 없는 거울 같다네 / 如鑑未蝕
그 본체 본성을 능히 지니고 / 體而克存
일어나는 감정도 추슬러야지 / 用乃不忒
중이라 말하고 화라 하는 것 / 曰中曰和
이것이 그야말로 선의 극치지 / 斯善之極
학문의 방도라 말하는 것도 / 學之爲道
여기에 이르기를 추구하는 것 / 求致於是
여기에 아직도 아니 갔거든 / 是之未至
조금도 멈춰서는 안 되는 거지 / 不容其止
이것을 밝히고 진실해지며 / 明之誠之
바르고 올곧게 행해 가야지 / 直之方之
안과 밖을 다 같이 길러 가면서 / 表裏交養
잊어서도 안 되고 조장도 말라 / 勿助忘之
짧디짧은 해그림자 쉽게 지건만 / 短景易頹
가야 할 길 멀어서 아득하여라 / 遐路方悠
이런 때 자신을 채찍질하여 / 于時鞭策
더더욱 쉬어선 아니 되겠지 / 愈不可休
만약에 기어이 날이 저물면 / 苟曰已暮
마침내 가는 수레 멈추게 되지 / 遂輟行輈
돌아갈 데 없어 막연해지면 / 茫然無歸
어두운 길에서 헤맬 수밖에 / 匍匐道周
마지막 숨결을 내쉴 때까진 / 一息尙在
이 일은 아직도 안 끝났다네 / 此事未已
새벽부터 한밤중 잠들 때까지 / 夙興夜寐
어찌 감히 스스로 포기를 하랴 / 其敢自棄
내 본성 공경하고 벗을 삼아서 / 我敬我友
강건하고 독실하게 실천해야지 / 剛健篤實
당당하게 발붙이고 굳건히 서서 / 立定脚跟
시종일관 한결같이 행해 가야지 / 終始若一
나이와 함께 덕이 더 높아지고 / 德與年彌
공도 따라 날마다 새로워지게 / 功隨日新
힘써 부지런히 노력을 하되 / 俛焉孜孜
저 성인을 보고 본받아야지 / 視彼聖人

[주D-001]나현도(羅顯道) : 나양좌(羅良佐, 1638~1710)로, 현도는 그의 자이다. 호는 명촌(明村)이고 본관이 안정(安定)이다.
명재유고 제18권
 서(書)
최주일(崔主一) 기만(基萬) 에게 답함 기유년(1669, 현종10) 4월 30일

삼가 선부군(先府君)께서 포증(褒贈)의 은전은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부군의 지극한 행실의 실상과 여러 애시(哀侍)들의 어버이를 현양(顯揚)하는 정성이 성조(聖朝)께 밝게 아뢰어졌으니, 여러 애시들의 효심에 슬픔과 광영이 망극하리라 생각되니 감동스런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말씀하신 증(贈) 자를 넣느냐 넣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비루한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지성스럽게 물어주시니, 감히 억측으로라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조정에서 그 지아비에게 증직을 하면 그 처는 응당 봉(封)하는 교지를 함께 받는 것인데, 이런 경우에는 증 자를 쓰는 데 대해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아서 달리 봉증(封贈)한 일이 없었고 단지 지아비의 직위에 따라서 해당 품계의 봉호(封號)를 얻었을 뿐이니, 이 뜻으로만 고하고 제주(題主)를 고쳐 쓸 때 증 자를 쓰지 않는 것이 이름과 실제에 어긋나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살피지 못했으니 막중한 예를 잘못 결정할까 두렵습니다. 다시 널리 물어서 처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C-001]최주일(崔主一) : 최기만(崔基萬)으로, 주일은 자이다. 최경(崔璥)의 아들이며,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문인이다

 

 

명재유고 제18권
 서(書)
최주일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7월 14일

명재유고 제18권
 서(書)
최주일에게 답함 무오년(1678, 숙종4) 3월 5일

김군 재남(金君載南)이 이곳에 들러 그대 또한 저쪽 편 사람들에게 동요되어 상소할 것이라고 하기에 그와 함께 탄식하였으니, 편지를 보내 중지시키려고 하는 것은 곧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대의 주장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대의 주장을 의심했다면 어찌 감히 중지시키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김군이 전한 말은 지나친 듯합니다.
지금 보내오신 편지를 보니 찬양하는 것과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일을 구별하여 두 건의 일로 삼으셨는데, 제 생각에는 이것은 하나의 일로서 나눌 수 없는 것이고, 무슨 일이 되었든 이런 시기에 이런 상소를 진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령 그대가 사문(師門)의 마음을 깊이 알고 사문의 도에 진실로 복종한다면 단지 굳게 지키는 것이 이른바 자신을 위하는 성실한 학문이 되고, 편당의 의론을 하는 자들과 함께 휩쓸리지 않는 것이 곧 참으로 사문을 존경하는 것이고 사문을 잘 배우는 것입니다. 한번 저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준론(峻論)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십보백보의 차이일 뿐입니다. 게다가 저는 들어가지 않고서 헤아린다는 말을 들었지만 들어가고 나서 헤아린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일단 들어간 뒤에는 준론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탄옹을 존모하는 정성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뒤지겠습니까. 매번 혼자서 탄식하기를, “살아서는 모르는 자들의 비방을 면치 못하고, 죽어서는 또 저 쪽 사람들에게 연루되었으니, 참으로 탄옹의 불행이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대가 이 일을 하기를 원치 않은 것인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김군이 또 그대가 저쪽 사람들에게 스승을 배반했다는 비방을 들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기에, 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곧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니, 어찌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대가 저를 믿는다면 이번 일을 중지하고 저들에게 사절하기를, “내가 스승을 존경하는 방법은 그대들과 다르니 구차하게 같이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저들 또한 어떻게 다시 편당으로써 그대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저를 믿지 않는다면 저 또한 감히 다시 어리석은 견해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근자에 퇴옹(退翁)이 편찬한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읽었는데 스승과 제자, 그리고 붕우 간에 문답한 것이 심신에 절실한 위기지학(爲己之學) 아닌 것이 없었으니, 천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가다듬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왕래하는 편지와 비교하면 어찌 천양지차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근래에 스스로 반성한 것이 자못 깊어 한 번 말씀드렸는데, 벗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휘 기억은 

     증 찰방공의 2남 되시는 분이다

      당시 충남 공주에 거주 하시는

櫟泉先生文集卷之十八


崔公基億傳 丙辰 a_221_378d


崔公基億。公州人。少讀書。頗喜武事。登丙辰武科。已而深自愧悔。歸伏田間。以備局郞,宣傳官召。皆不赴。朴泰恒爲方伯。聞其名。以禮辟。置幕下。弊衣破笠。居處蕭然。嘗謁告歸。朴特與綿布二端。使作衣資。辭以無名。終不受。朴始疑其沽名。潛令人搜其歸裝。則有米三升。馬鐵一部。乃謂之曰。君旣謂公家物。不可輕用。則此去君家僅五十里。乃持公庫米鐵以去。是無221_379a用於路中。而將以利家。吾未見其廉也。公謝曰。今日之歸。將吊一友人。仍過宿而去。故座首某。卽同里人。知某乏粮。饋之米。以其故舊故受之。馬鐵曾自家中携至。以待從廵之需。某固不敢妄取也。朴徐聞其實然。甚歎服而敬憚之。洪相致中爲北伯。啓請爲禆將。時判官久闕。公以中軍爲兼官。號令嚴肅。政化大行。隣境有九十老人。擔舁至。願一識面。進以櫻桃一枝曰。生長北地且百年。未嘗聞做治如明公者。嗟歎而去。還京爲監察。尋棄歸。李光佐爲湖南伯。以康津爲弊邑難治。請得剛明廉謹吏。朝廷起公以遣。至則吏221_379b畏民服。數月之間。綽有成效。時節度使行操。至順天。方張宴奏妓。而公入謁。諸妓蒼黃俯伏於庭。節度甚怒。詰首妓曰。康津乃小邑吏。汝輩在我左右。乃爲彼下。是謾我也。妓曰。婢輩。亦非不知有此體面。而以康津威令。震慴隣境。故猝見其至。不覺驚恐趨伏也。節度。亦驚異。乃赦妓罪。居四月。卒於官。貧無以爲斂。邑人請合賻錢戶各十文。公之子晩錫。亦廉士也。固請減七文。旣卒斂。餘五十兩。出付之官。兼官以爲此爲治喪而合者。有餘當用之靷葬。今留之無處。散之無術。強之猶不受。方伯聞之。使買一駿馬。以導靈車。晩221_379c錫謝。已得族人馬爲導。招官吏嚴飭。勿敢用此馬。吏乃追至。不敢見。繫馬於村前橋下而去。晩錫竟歸之本邑。晩錫性端嚴好學。居家有至行。姊夫二人。皆京裏浮薄人。好氣凌人。雖以康津公之嚴。嘲戲自如。而見晩錫。輒斂膝却坐。其見憚如此。涵滀自晦。人無知者。嘗與李尙觀。爲莫逆交。或時往還。尹拯聞而慕之。三造其門不得見。其不撓名勢。多此類云

 

역천집 ( 櫟泉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櫟泉先生文集
판심제 櫟泉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05年刊
권책 19권 10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9×15.4(㎝)
어미 上白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46-가161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21
저자
성명 송명흠(宋明欽)
생년 1705년(숙종 31)
몰년 1768년(영조 44)
晦可
櫟泉
본관 恩津
시호 文元
특기사항 李縡의 門人. 宋浚吉의 玄孫
가계도
宋光栻
宋炳遠
都事
宋堯佐
郡守
坡平尹氏
尹扶의 女
宋明欽
淸風金氏
金道洽의 女
宋時淵
申韶의 女
側室
宋希淵
宋躍淵
宋履淵
趙成逵
金希柱
宋文欽
한정당집(閒靜堂集)
靑松沈氏
沈聖希의 女
宋致淵
申思迪의 女
宋時淵
金寧
金光默
黃仁燾
洪相吉
尹得敬
閔克烈
金濟謙
李眞偉
宋炳翼
牧使
宋堯臣
宋堯佐
宋堯輔
宋堯弼
宋堯協

기사전거 : 墓誌銘(任聖周 撰, 鹿門集 卷24), 宋堯佐墓誌(李縡 撰, 陶菴集 卷43), 宋堯佐妻墓追誌ㆍ宋堯佐家狀(宋明欽 撰), 宋炳遠 墓表(權尙夏 撰, 寒水齋集 권32)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숙종 31 1705 을유 康熙 44 1 10월 21일, 漢城 濟生洞에서 태어나다.
숙종 44 1718 무술 康熙 57 14 生祖父인 牧使公 宋炳翼의 喪을 당하여 懷德의 宋村으로 돌아오다.
숙종 46 1720 경자 康熙 59 16 金道洽의 딸 淸風金氏와 혼인하다.
경종 2 1722 임인 康熙 61 18 1월, 부친이 해직되어 沃川 同安里로 돌아가다. ○ 4월, 塗谷(龍湖)으로 거처를 옮기다. 이후 擧業을 폐하고 性理學에 전념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19 10월, 부친상을 당하다. ○ 12월, 부친을 塗谷에 장사 지내다. 「閨鑑」을 편찬하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21 4월, 祖母 李夫人의 상을 당하여 長孫으로 承重하다. ○ 7월, 懷德 宋村으로 거처를 옮기다.
영조 3 1727 정미 雍正 5 23 3월, 〈自警語〉를 쓰다. ○ 8월, 金聖采와 함께 關西를 유람하다. ○ 花田에 가서 陶菴 李縡를 뵙고, 이후 계속 왕래하며 질의하다.
영조 4 1728 무신 雍正 6 24 9월, 부친이 독서하던 장소인 聞慶의 瓶泉으로 갔다가 俗離山을 유람하다. ○ 동생 宋文欽과 佳山寺에서 독서하다.
영조 5 1729 기유 雍正 7 25 부친의 家狀을 찬하고, 陶菴 李縡에게 墓誌를 청하다. ○ 겨울, 「煌煌集」을 편찬하다.
영조 7 1731 신해 雍正 9 27 제생들과 講會를 행하다.
영조 8 1732 임자 雍正 10 28 10월, 淸州에서 閔鎭遠을 만나다.
영조 9 1733 계축 雍正 11 29 瓶泉亭舍를 중수하다.
영조 10 1734 갑인 雍正 12 30 2월, 坡州를 유람하다. 紫雲書院, 花石亭, 來蘇亭을 돌아보다. ○ 3월, 陶菴 李縡가 내방하다. ○ 4월, 豆溪로 陶菴을 찾아 뵙고 「玄繩錄」을 질의하다. ○ 5월, 飛來庵 玉溜閣에서 宋能相과 함께 독서하다.
영조 11 1735 을묘 雍正 13 31 1월, 〈自警箴〉을 짓다.
영조 12 1736 병진 乾隆 1 32 1월, 豆溪로 가서 陶菴을 찾아 뵙고 같이 鳳林洞을 유람하다. ○ 2월, 尙州 興巖으로 가서 洛東江을 舟遊하다.
영조 14 1738 무오 乾隆 3 34 3월, 동생 宋文欽과 함께 華陽洞을 유람하다. ○ 11월, 光州 無等山을 유람하다.
영조 15 1739 기미 乾隆 4 35 2월, 黃山을 유람하다. ○ 6월, 恭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12월, 閔遇洙와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고 太極圖說을 강론하다.
영조 16 1740 경신 乾隆 5 36 道峯書院을 찾아가다. ○ 金元行을 방문하다.
영조 17 1741 신유 乾隆 6 37 1월, 「同春先生年譜」를 중간하다. ○ 3월, 申韶와 함께 太極圖說을 강하다.
영조 21 1745 을축 乾隆 10 41 11월, 寒泉에 가서 陶菴을 뵙고 栗谷全集稟目을 적어 올리다.
영조 22 1746 병인 乾隆 11 42 10월, 金聖梓와 俗離山을 유람하다. ○ 陶菴 李縡를 곡하다. ○ 侍講院 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영조 23 1747 정묘 乾隆 12 43 4월, 寒泉에 가서 陶菴의 靈筵에 곡하다. ○ 東宮의 賜扇과 賜曆을 받다.
영조 24 1748 무진 乾隆 13 44 봄, 楸谷에 正寢을 짓고 櫟泉이라 개명하다. ○ 大報壇에 毅宗皇帝를 追享할 것을 건의하다.
영조 26 1750 경오 乾隆 15 46 5월, 衛率에 제수되다. ○ 7월, 宗簿寺 主簿에 제수되다. ○ 9월, 상이 온천으로 행행하며 召命하자 상소하여 사직하다. ○ 10월, 忠淸 都事에 제수되다. ○ 12월, 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 27 1751 신미 乾隆 16 47 聖廟位號를 釐正하기를 건의하다.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48 2월, 掌令에 제수되었으나 上書하여 사직하다. ○ 10월, 宋文欽의 둘째 아들 宋時淵을 후사로 삼다. ○ 12월, 동생 閒靜堂 宋文欽을 곡하다.
영조 29 1753 계유 乾隆 18 49 1월, 軍資監 正에 제수되다.
영조 30 1754 갑술 乾隆 19 50 2월, 특별히 書筵官에 제수되고 別諭가 내렸으나 上書하여 사직하다.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51 2월, 申韶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 7월, 玉果 縣監에 제수되다. ○ 8월, 왕세자의 소견에 응하여 「大學」을 강하고 勉戒를 올리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52 봄, 진휼을 행하다. ○ 2월, 小朝가 下諭하자 上書하여 饑民救濟策을 아뢰고, 金麟厚와 柳彭老 등의 賜額을 청하다. 鄕校를 옮겨 세우고 尤庵, 同春을 追享하다. 詠歸書院祭儀를 개정하다. ○ 9월, 모친상을 당하다. ○ 11월, 櫟泉으로 돌아오다.
영조 35 1759 기묘 乾隆 24 55 2월, 世孫講書院 右勸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4월, 華陽洞을 거쳐 瓶泉으로 돌아가다. ○ 10월, 執義에 제수되고 勸讀을 겸하였으나 사직하다.
영조 36 1760 경진 乾隆 25 56 2월, 方山書堂에서 강학하다. ○ 通政大夫로 자급이 오르고 禮曹 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 37 1761 신사 乾隆 26 57 3월, 동부승지,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 8월, 講書院 諭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 38 1762 임오 乾隆 27 58 2월, 沁都로 姑母를 찾아 뵙고 花石亭에 오르다. ○ 崇賢書院의 유생이 山長이 되기를 청하다. ○ 4월, 再從姪 宋志淵과 華陽洞에 갔다가 俗離山을 유람하다. ○ 8월, 世孫 贊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12월, 사관을 통해 잇달아 別諭가 내렸으나 啓辭를 올려 사양하다.
영조 39 1763 계미 乾隆 28 59 2월, 景賢堂에 입시하여 「中庸」을 강하다. ○ 경연중 金時粲, 尹蓍東 등을 구원하여 엄한 하교를 받다. 상소 내용 중 赤芾의 비유가 외척과 근신의 중용과 탕평책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엄한 하교를 받고 田里로 방축되다.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60 9월, 金元行과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 12월, 지난번 상소로 인해 당론을 했다는 이유로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다.
영조 43 1767 정해 乾隆 32 63 崇賢書院에서 講會하다.
영조 44 1768 무자 乾隆 33 64 竹林書院의 유생이 山長으로 청했으나 사양하다. ○ 4월, 瓶泉에서 「同春先生文集」을 수정하고, 興巖으로 가서 「同春先生文集」 刊役을 지휘하다. ○ 5월, 同春舊堂에서 여러 아우, 조카들과 講學하다. ○ 7월 13일, 塗谷에서 졸하다. ○ 8월, 復官의 명이 내리다. ○ 9월, 錦山 川內里에 장사 지내다.
영조 48 1772 임진 乾隆 37 - 官爵을 追奪하고 아들 宋時淵은 제주로 원찬되다.
영조 50 1774 갑오 乾隆 39 - 復官되다.
정조 16 1792 임자 乾隆 57 - 燕岐 葛山으로 이장하다.
순조 5 1805 을축 嘉慶 10 - 1월, ‘文元’으로 시호를 내리다. ○ 文集이 간행되다.(宋時淵의 識)

기사전거 : 年譜, 墓誌銘(任聖周 撰, 鹿門集 卷24),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同春 宋浚吉의 후손으로 忠淸 山林을 대표하여 중망을 받아왔으나 계미년(1763)의 상소로 인해 사후에도 관작의 복관과 추탈이 반복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저자의 시문은 아들 宋時淵이 쓴 跋文에 의하면, 저자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애초 남긴 원고가 많지 않았고, 또 산일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사후에 宋時淵과 門下生이 수습하여 편차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저자의 동문이자 인척 관계였던 鹿門 任聖周, 渼湖 金元行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金元行(1702~1772)이 宋致淵에게 보낸 편지(與宋姪致淵, 渼湖集 卷8)에, 저자의 연보에 실려 있는 晝講 기사와 經筵日記의 내용이 중복되니 「栗谷全書」의 예에 따라 연보에 그 내용을 자세히 실어서 문집과 같이 출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 또 1778년 任聖周의 편지(答舍弟穉共, 鹿門集 卷11)를 보면, 櫟泉의 遺稿를 수정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며 家狀을 속히 修改해야 한다고 했는데, 1786년에 任聖周가 찬한 저자의 墓誌銘에는 文集이 家藏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묘지명이 지어질 즈음에는 문집의 수집과 편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하다. 1788년에는 저자의 동생 宋文欽의 「閒靜堂集」이 간행되었고 또 저자의 문집에 관여해 왔던 任聖周가 졸하였다. 그 후 1805년 저자에게 諡號가 내리고 아들인 宋時淵이 星州 牧使로 부임하면서 그동안 정리해 왔던 문집과 연보 도합 10책을 목판으로 간행하게 되었다.《초간본》 현재 이 초간본은 규장각(奎4850), 장서각(4-6274),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616),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711) 등에 소장되어 있다.
宋時淵의 識에서, 저자가 졸한 지 38년 만에 간행하였는데 西南의 여러 郡에서 경비를 보태어 수백 본을 찍어 친지들에게 배포했다는 기사로 보아, 당시 충청도 산림과 서원에서 경제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생전에 각지의 書院 山長을 요청받아 왔던 것과 관련지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冊板이 文義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간행 역시 충청도 지역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집 외에 저자의 저술로는 「宋櫟泉疏末條陳」 이란 題名으로 1763년 經筵官으로 있을 때 王世子를 위하여 故事를 進說한 上疏 1책이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글은 본집에 실려 있지 않다.
본서의 저본은 1805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識(宋時淵 撰), 墓誌銘(任聖周 撰, 鹿門集 卷24)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19권 10책으로 18권 9책은 저자의 시문이고, 1책은 부록으로 저자의 연보이다. 序文은 없고, 권말에 저자의 아들 宋時淵이 지은 識가 있다. 卷首에 總目이 있고, 권마다 각각 目錄이 있다.
권1~3은 詩(379)이다. 1721년에 先祖의 韻을 次韻해 지은 〈飛來水閣敬次先祖韻〉을 시작으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1은 1734년까지, 권2는 1735~1746년까지, 권3은 1747년부터 말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저자가 관직 생활을 거의 한 적이 없으므로 시를 수창한 대상도 대부분 일가 친척이나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고, 시의 내용 또한 저자가 유람한 지역이나 배알한 서원들, 독서하며 공부하던 곳의 풍치를 읊은 것이 많다. 주로 宋堯濟, 金聖梓, 金元行, 金道澤, 閔鎭遠 등과 次韻한 詩가 많고, 특히 동생 宋文欽과 차운하고 화답한 시가 많다. 〈余於窮病…〉은 워낙 우애가 두터웠던 저자가 동생 宋文欽이 翊贊으로 경성에 있을 때 杜子의 同谷七歌를 읽고 아우에게 화답을 구하며 지은 시인데, 이 시를 받고 宋文欽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한다.
권4는 疏(14), 書啓(8), 獻議(6)이다. 疏는 1746년 11월에 諮議를 사직하는 疏를 시작으로 諭善, 禮曹 參議, 贊善 등 대부분 관직을 사직하는 소이고, 1763년 召命을 받고 廣津에 도착하여 自劾한 소 등이다. 특히 1763년에 올린 〈出城後更陳筵對未畢之懷疏〉에서, “近習에 정을 두거나 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관직이 모두 私人에게 돌아가 赤芾을 한 자가 삼백 명일 것입니다.”라고 한 말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탄핵 상소가 빗발치고 결국에는 관직이 삭탈되고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었다가 1774년에야 완전 복관되었다.
書啓는 1762년 2월에 黑石 村舍에 머물 때 사관이 와서 傳諭한 뒤에 올린 〈黑石村舍史官傳諭後書啓〉, 12월에 瓶泉에 있으면서 別諭를 받들고 올린 〈在瓶泉承別諭後書啓〉, 1763년에 상경하면서 올린 〈興仁門外承手書後書啓〉 등이다.
獻議는 大報壇에 毅宗皇帝를 追享할 것을 청한 〈大報壇追享毅宗皇帝議〉, 宋의 文天祥과 陸秀夫의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한 〈宋文天祥陸秀夫二忠臣建祠當否議〉, 孝章世子嬪인 賢嬪 趙氏의 喪에 大妃殿의 服制에 대한 〈賢嬪喪大妃殿服制議〉 등이다.
권5~11은 書(296)이다. 권5는 1721년 부친에게 「小學」에 대해 질문한 글을 시작으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從伯父, 再從弟 宋益欽, 舍弟 宋文欽, 再從姪 宋在淵, 아들 宋時淵 등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대부분 안부와 근황을 묻는 것이고, 동생과 주고받은 것 중에는 太極圖說, 生之理 등 성리학에 대한 문답이 있다. 권6은 스승인 陶菴 李縡, 蟾村 閔遇洙, 渼湖 金元行 등과 주고받은 것이다. 陶菴 李縡에게는 墓制, 喪服, 祭器 陳列 등에 대해 문의하였고, 金元行과는 禫祀나 吉祭 등에 대해 문답하였다. 권7은 宋能相(士能), 任聖周(仲思), 申韶(成甫) 등과 주고받은 것인데, 〈答任仲思〉에서는 스승의 문집인 「陶菴集」에 대한 의논이 실려 있다. 권8은 金鎭商, 金聖梓, 金相戊, 李敏輔 등과의 편지인데 性理學에 대한 논의가 자세히 실려 있다. 권9는 金寧(遠之), 任靖周(穉共) 등과 주고받은 것인데, 〈答金遠之〉는 敬以直內, 存心養性, 鵲巢章 등에 대해 답한 것이고, 〈答李士深洪載〉는 禰位, 出嫁女練後服色, 喪中忌祭 등 여러 의절에 대한 물음에 답한 것이다. 권10은 宋必健(順汝), 宋堯濟(仁甫), 金霽行(季通) 등과 주고받은 것인데, 喪禮, 祭禮 등에 대한 물음에 조목조목 답하였다. 권11은 許權(乃衡), 尹禧炅(士晦), 房錫弼(汝良) 등과 주고받은 것이다.
권12~13 앞부분은 雜著(25)이다. 1736년 任聖周, 宋文欽, 宋能相과 「大學」의 道, 知止, 明德, 性과 知覺, 自欺, 新民 등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玉溜講錄〉, 警句를 이것저것 모아 놓은 〈雜識〉, 花田에서 李縡와 성리학에 대해 문답한 〈花田記聞〉, 스스로 지켜야 할 警句를 모아 놓은 〈自警語〉, 집안에서 지켜야 할 것을 모아 놓은 〈家儀〉, 1768년 「同春集」을 중간하면서 제정한 〈同春先生文集改正凡例〉, 〈書室儀〉, 戊申亂에 陜川 郡守로서 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金鼎運에 대한 呈文 등이다.
권13 뒷부분~14 앞부분은 序(5), 記(8), 題跋(5), 論(1), 箴銘(2), 上樑文(3), 祝文(17)이다. 序는 저자가 지은 閨門 안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적은「閨鑑」, 古人들의 遜言 篤行 등을 기록한「煌煌集」, 「丹陽禹氏族譜」, 塾翁 柳興龍의 遺稿, 蔡五峯遺蹟에 대한 서이다. 記는 저자가 寓居하던 塗谷의 경치를 쓴 〈龍湖山水記〉, 辛巳年 꿈을 기록한 〈辛巳記夢〉, 閔普光의 처 鄭氏의 행실을 기록한 〈烈婦鄭氏旌閭記〉 등이다. 題跋은 〈同春先生年譜小識〉, 金相戊가 찬한 退陶의 禮說跋에 대한 題後, 〈宋氏忠孝錄跋〉 등이다. 또 齊 襄王 때의 사람인 貫珠者에 대한 인물평인 〈貫珠者論〉, 1735년 元日에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을 지은 〈自警箴〉, 金相戊가 지은 困菴銘에 和韻하여 지은 〈困菴銘〉이 있으며, 上樑文은 玉果鄕校, 長城 筆巖書院의 廓然樓, 尙州 西山書院을 重修할 때의 上樑文이다. 祝文은 同春先生의 年譜를 開刊할 때 家廟에 고한 문, 櫟泉 田舍의 터를 닦을 때의 축문, 玉果縣의 社稷에 대한 祈雨文, 田里로 放歸된 후 가묘에 고한 문 등이다.
권14 뒷부분~15는 祭文(31), 碑(3)이다. 祭文은 從叔父, 從伯父, 外舅, 亡弟 宋文欽, 尤庵 遷葬時, 閔鎭虞 등에 대한 것이고, 碑는 冶隱 吉再의 遺墟碑와 〈百世淸風碑追記〉, 寒圃齋 李健命이 귀양살이 했던 곳의 遺墟碑이다.
권16~18은 墓碣銘(6), 墓表(6), 墓誌銘(15), 行狀(4), 遺事(7), 傳(2)이다. 茂朱 府使 金述魯, 內弟 尹東旭 등의 墓碣銘과 祖父 宋炳遠, 持平 李道吾, 金聖應 등의 墓表와 부친 宋堯佐, 先妣尹氏, 再從弟 宋益欽, 任適, 外舅 金道洽 등의 墓誌銘이고, 부친의 家狀, 從姑母인 李思勗 妻 宋氏, 金錫衍, 申圾의 行狀과 祖妣, 父親, 장인 金道洽, 閔鎭遠의 遺事와 청렴 강직하게 살다간 崔基億, 타고난 효자인 成再의 傳이다.
권19는 年譜이다. 1805년 諡號를 받고 延諡禮를 행한 일까지 기록하였는데, 1763년에 입시하여 「中庸」을 강한 내용과 동궁을 모시고 「孟子」를 강하고 晝講에 입시한 일을 자세히 실었다. 이는 본래 경연일기를 따로 편차했다가 연보에 합쳤기 때문이다.
맨 뒤에 아들 宋時淵이 찬한 識가 실려 있다.

필자 : 金恩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