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휘 정 관련 자료

문성공 의령공파 12세손 휘정 관련자료

아베베1 2012. 2. 6. 00:28

 

 이미지 사진은 (2012.2.4. 삼각산 백운대에서 담은 사진임 ) 인수봉과 저멀리 도봉의정상부가

 

 

전주최공 고려문화시중 시 문성공 휘아

12세손 방조  참봉 휘 정 관련자료 

 

과거 및 취재     최정(崔珽)

 

[진사시]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증광진사 3등(三等) 27위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D5CC815FFFFB1568X0
대규(大圭)
생년 무진(戊辰) 1568년
합격연령 38세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경(京)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양시 양시(兩試)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최응봉(崔應鳳)
관직 : 유학(幼學)
[제]   성명 : 최수(崔璲)

[출전]   《만력 33년 을사 증광 사마 방목(萬曆三十三年乙巳增廣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의산古6024-118])

 

 

중종 22년 정해(1527,가정 6)

8월28일 (계유)
상이 제천정에서 관가하고 아울러 무재를 관람하다

상이 제천정(濟川亭)에 거둥하여 관가(觀稼)하고 아울러 무재(武才)를 관람하였다. 갑사 최정(崔珽)이 까치를 쏘아 잡아서 올리니 술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16 집 597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농업-권농(勸農)
 휘정의 장인  이조판서  신상 선생의  신도비의 내용  

 

象村稿卷之二十七

神道碑銘 一十一首
吏曹判書文節申公神道碑銘 幷序 a_072_106d


蓋當正德己卯。迺我中宗大王在宥之十四年也。圖惟至理。蘄措世於三代之盛。而靜庵趙先生以正學倡。營道同方之士。畢集揚廷。申文節公其一也。公諱鏛。字大用。平山人。鼻祖崇謙。佐麗祖創業。終以身072_107a脫主危。麗祖追封太師開國公。贈諡壯節。歷十三代而諿。典理判書。寔生晏。宗簿寺令。於公爲高祖。曾祖曰槩。相世宗大王。官至左議政。與黃翼成熹同心輔政。以文章事業著稱。卒諡文僖公。配享世宗廟庭。祖曰自準。觀察使。考曰末平。宗親府典籖。妣曰權氏。翼平公攬之女。成化庚子生公。生而穎拔異凡兒。纔齔已業書。不煩師承。輒曉經史大義。戊午。中進士。癸亥。登第選入藝文館爲檢閱。俄轉承政院注書。遞授西班。仍帶春秋館。與修燕山日記。參史局者皆一時名勝。而公最少。申相國用漑亟稱其才。戊辰。禮曹正郞司諫院獻納弘文館校理司憲府持平。己巳。進072_107b應敎知製敎。冬。竝丁內外艱。服闋。還拜應敎典翰,執義舍人,司諫,司僕寺正。躋授直提學。陞通政。副提學。入政院。由同副至都承旨。加嘉善。命爲平安觀察使。己卯。陟資憲。漢城府判尹。未久。擢拜吏曹判書。冬。遷禮曹判書兼同知絰筵春秋館成均館事。時群賢滿朝。急於有爲。嫉惡太過。有矯激之漸。公憂之。獨持大體。要調適其間。而北門之變遽作矣。顧公居平。用心平恕。與物無競。故不及於禍。然亦自此斂迹。退處散秩。朝京者再。觀風者三。曰京畿,全羅,慶尙。己丑。刑曹判書。庚寅。病辭爲西樞。秋。疾卒。享年五十一。葬于楊州峨嵳山辰坐之原。公資性端雅。風神森072_107c朗。望之如神仙中人。其居臺閣。格君論事。肫肫誠愨。不皦察偏類。能動人主之聽。而事亦歸正。閑靖寡慾。無私營。關折不到。門庭闃如。可設雀羅。善治史。馳騁古今。了了如昨日事。人若問之。似若不深解者。其謙虛類此。醉則賦詠。人皆膾炙。而亦不以爲事。執親之喪。羸毀幾滅性。孝愛之稟於天者然也。行植於內。德充於外。遭遇明時。若將有以展施也者。而不得究其用。惜也。公娶宗室富林君女。生三男二女。男長匡國進士。次弘國,華國。女長沈鏡。次某。匡國娶宗室固城君女。生五男一女。男曰曰硡曰碖曰確縣監曰硉部將。女曰權德輿觀察使。弘國娶趙應卿女。生一男四072_107d女。男曰硌縣監。女曰愼有相禮曰李重綱曰申克濟曰朴悌男。華國娶典籖尹懹貞女。生四男三女。男曰磼平城府院君。曰礏監役。曰砬漢城府判尹。曰硈南道兵使。女曰具思孟議政府左贊成。曰安景濂僉知。曰柳瀹。沈鏡有男某女適某。之出三人。男曰景福。女曰李澍,柳健。硡無嗣。碖之出五人。男曰景䄜府使。曰景祐縣監。曰景禛。曰景禮。女曰申楣。確之出十人。男曰景珍同知。曰景瓚。曰景瑗平寧君。曰景禔縣監。曰景琥僉知。曰景琛宣傳官。曰景▣。女曰李勵。曰趙璜。曰尹唯安。硉無嗣。權德輿之出二人。男曰克中。女曰李廷直。硌無嗣。以景禔後之。愼有之出四人。曰守072_108a乙曰守武曰守身曰守甲。李重綱無嗣。申克濟之出二人。男曰瀅。女曰朴憘縣監。朴悌男之出一人曰筵正郞。磼之出五人。男曰景禧平陵君。曰景祉監察。女曰尹民逸都正。曰洪戒元僉知。曰具憲。礏之出三人。男曰景祺奉事。曰景䙗都事。女曰崔珽參奉。砬之出五人。男曰景禛平城君。曰景裕東平君。曰景禋東城君。女曰信城君。宣祖大王第三子也。硈之出二人。男曰景。女曰尹。具思孟有四男六女。男曰宬綾海君。曰宖。曰容縣監。曰宏綾城君。女曰沈㤿縣監。曰洪憙同知。曰權裕男判官。曰金德望縣監。曰定遠大院君。曰李某。安景濂之出二人。曰大枏郡守。曰大杞072_108b縣監。柳瀹之出六人。男曰仁男宣傳官。曰義男生員。曰信男縣監。女曰朴恒吉都事。曰權克正同知。曰元慄。玄孫男女總若干人。今我主上殿下。卽定遠大院君之冢嗣。應天順人。撥亂反正。而臣景禛,景裕,景禋,宏。依光日月。翊運佐命。實贊重興之烈。俱是公之曾孫。龍興雲從。聖作物覩。猗歟休哉。豈公之蔭德所鍾者非耶。公歿九十九年而始豎麗牲之石。景祐氏尸而成之。屬欽敍其迹。欽之五代祖左正言曉。乃文僖公之弟也。名德相埒。欽言念本始。何敢不闡揚懿美。以式來者。繫以銘曰。
嗚呼文節。夙際昌朝。匪澄而淸。不矯而翹。漸鴻威鳳。072_108c賁乎其儀。用而未究。憖遺興咨。而公之世。王迹斯基。天衢擎日。緊公子姓。德厚流光。善積餘慶。公歿百年。有屹其碑。衣冠所託。精爽在茲。銘以貞之。後賢之思。

 

상촌선생집 제28권

신도비명(神道碑銘) 11수
이조 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吏曹判書文節申公神道碑銘) 병서


지난날 정덕(正德) 기묘년은 곧 우리 중종대왕께서 즉위한 지 14년째 된 해이다. 임금은 이상 정치를 이루고자 꾀하여 세상을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상황으로 돌려놓으려고 하였다.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은 정대한 학문으로 앞장서서 이끌고 도를 연구하여 길이 같은 선비들은 전부 모여 조정에서 뜻을 얻었다. 신 문절공(申文節公)은 그중에 한 분이다.
공의 휘는 상(鏛), 자는 대용(大用)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시조 숭겸(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하였고 마침내 몸을 던져 군주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나중에 태사(太師) 개국공(開國公)을 봉하고 장절이라고 증시하였다. 13대를 내려와 즙(諿)은 전리판서(典理判書)이고 이분이 종부시 영(宗簿寺令) 안(晏)을 낳았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개(槩)는 세종대왕을 도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마음을 합쳐 정사를 돌보았으며 문장과 사업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별세한 뒤에 문희공(文僖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부는 자준(自準)으로 관찰사이고 선고는 말평(末平)으로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이며, 선비는 권씨(權氏)로 익평공(翼平公) 남(擥)의 따님인데 성화(成化) 경자년(1480, 성종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자 재주가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이갈이를 할 때 벌써 글을 배웠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경사(經史)의 대체적인 뜻을 알았다. 무오년(1498, 연산4)에 진사에 급제하고 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뽑혀서 예문관으로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그뒤에 승정원 주서로 전임되었다가 체직되고 서반(西班)으로 제수되었는데 춘추관 벼슬을 계속 겸임하여 동료들과 함께 〈연산군일기〉를 찬수하였다. 사국(史局)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당시의 명류들이었는데 공은 나이가 가장 젊었으므로 상국(相國) 신용개(申用漑)가 항상 그 재주를 칭찬하였다.
무진년(1508, 중종3)에 예조 정랑,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기사년에 응교, 지제교로 승진하였다. 그해 겨울에 한꺼번에 내외상을 당하였으며 상복을 벗고 다시 응교, 전한, 집의, 사인, 사간, 사복시 정을 역임한 뒤에 승진하여 직제학에 제수되고 통정으로 올라 부제학이 되었다. 정원으로 들어가 동부승지로부터 도승지에까지 올랐으며 가선(嘉善)에 가자되고 어명으로 평안관찰사가 되었다. 기묘년에 자헌으로 올라 한성부 판윤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로 발탁되었으며 겨울에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ㆍ춘추관ㆍ성균관사로 옮겼다.
당시에 뭇 현인이 조정에 가득 차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자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악에 대한 배격이 너무 지나쳐서 근본 의도가 빗나갈 기미가 있었으므로 공은 이를 걱정하여 홀로 대체를 견지하고 그 중간에서 조정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북문(北門)의 변이 터지고 말았다. 다만 공은 평소에 마음을 공평하고 관대하게 가져 남들과 경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이로부터 자취를 거두고 산직으로 물러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나간 것이 두 번이고 관찰사로 나간 것이 세 번이었는데 경기ㆍ 전라ㆍ경상도였다. 기축년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경인년(1530, 중종25)에 병으로 사직하고 서추(西樞)로 나갔다. 가을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51세였고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진좌(辰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단아한데다 풍채는 의젓하고 맑아 바라볼 때 마치 신선 속의 인간 같았다.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루고 시사를 논할 때는 진지하게 정성을 다할 뿐 소인들에 대해 지나치게 따지지 않았으나 능히 군주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일 또한 정도로 돌아갔다. 마음이 잔잔하여 욕심이 적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선물꾸러미가 들어오지 않고 대문 안이 한적하여 참새그물을 칠 만하였다. 역사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여 고금을 마음대로 주물러 마치 어제의 일처럼 환히 알았으나 누가 혹시 물으면 잘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겸허한 덕이 이와 같았으며 술에 취하면 시를 짓고 그 시를 사람들이 다 회자하였으나 그 또한 일로 삼지 않았다. 어버이 상사를 치르면서 몸이 야윌 대로 야위어 거의 생명이 위급할 정도가 되었는데 타고난 효성과 사랑이 본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행실을 심고 밖으로는 덕을 채우고서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지닌 경륜을 장차 펴 보일 일이 있을 것도 같았으나 결국 다 쓰지 못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은 종실 부림군(富林君 이름은 식(湜))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사 광국(匡國)이고 그 다음은 홍국(弘國)과 화국(華國)이며, 장녀는 심경(沈鏡)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모인(某人)에게 시집갔다. 광국은 종실 고성군(固城君 이름은 강(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아 아들은 염(磏), 굉(硡), 윤(磮)과 현감 확(確), 부장(部將) 율(硉)이고 딸은 관찰사 권덕여(權德輿)에게 시집갔다. 홍국은 조응경(趙應卿)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아 아들은 현감 낙(硌)이고 딸은 상례(相禮) 신유(愼有)와 이중강(李重綱), 신극제(申克濟), 박제남(朴悌男)에게 시집갔다. 화국은 전첨(典籤) 윤회정(尹懷貞)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평삼부원군(平三府院君) 잡(磼), 감역(監役) 업(礏), 한성부 판윤 입(砬), 남도병사(南道兵使) 길(硈)이고 딸은 의정부 좌찬성 구사맹(具思孟), 첨지 안경렴(安景濂)과 유약(柳瀹)에게 시집갔다. 심경은 아들 모(某)를 두었고 딸은 모에게 시집갔다. 염에게서는 세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경복(景福)이고 딸은 이주(李澍)와 유건(柳健)에게 시집갔다. 굉은 후사가 없다. 윤은 다섯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부사(府使) 경리(景褵), 현감 경우(景祐), 경침(景琛), 경례(景禮)이고, 딸은 신미(申楣)에게 시집갔다. 확에게서는 열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동지(同知) 경진(景珍), 경찬(景瓚), 평령군(平寧君) 경원(景瑗), 현감 경시(景禔), 첨지 경호(景琥), 선전관 경침(景琛), 경정(景禎)이고 딸은 이려(李勵), 조황(趙璜), 윤유안(尹唯安)에게 시집갔다. 율은 후사가 없다. 권덕여에게서는 두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극중(克中)이고 딸은 이정직(李廷直)에게 시집갔다. 낙은 후사가 없어 경시로 아들을 삼았다. 신유에게서는 네 아들이 출생하여 수을(守乙), 수무(守武), 수신(守身), 수갑(守甲)이다. 이중강에게서는 후사가 없다. 신극제에게서는 두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형(瀅)이고 딸은 현감 박희(朴憘)에게 시집갔다. 박제남에게서는 한 아들이 출생하여 정랑 정(筳)이다.
잡에게서는 다섯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평릉군(平陵君) 경희(景禧), 감찰 경지(景祉)이고, 딸은 도정(都正) 윤민일(尹民逸), 첨지 홍계원(洪戒元), 구헌(具憲)에게 시집갔다. 업에게서는 세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봉사(奉事) 경기(景祺), 도사(都事) 경적(景)이고 딸은 참봉 최정(崔珽)에게 시집갔다. 입에게서는 다섯 자녀가 출생하였는데 아들은 평성군(平城君) 경진(暻禛), 동평군(東平君) 경유(景裕), 동성군(東城君) 경인(景禋)이고 딸은 신성군(信城君)에게 시집갔는데 선조대왕의 셋째 아들이다. 길에게서는 두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경휘(景)이고 딸은 윤길(尹)에게 시집갔다. 구사맹은 4남 6녀를 두어 아들은 능해군(綾海君) 성(宬), 홍(宖), 현감 용(容), 능성군(綾城君) 굉(宏)이고 딸은 현감 심엄(沈㤿), 동지 홍희(洪憙), 판관 권유남(權裕男), 현감 김덕망(金德望), 정원대군(定遠大君) 이모(李某)에게 시집갔다. 안경렴에게서는 두 아들이 출생하였으니 군수 대남(大楠)과 현감 대기(大杞)이다. 유약에게서는 여섯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선전관 인남(仁男), 생원 의남(義男), 현감 신남(信男)이고, 딸은 도사(都使) 박항길(朴恒吉), 동지 권극정(權克正), 원률(元慄)에게 시집갔다. 남녀 현손은 모두 약간 명이다.
지금 우리 주상전하는 곧 정원대군의 맏아드님이다.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난세를 다스려 정도로 복구시켰고 신(臣) 경진(景禛)ㆍ경유(景裕)ㆍ굉(宏) 등이 일원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시운과 천명을 도와 실로 중흥의 공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였는데, 이 모두 공의 증손이다. 용이 일어나면 구름이 그 뒤를 따르고 성인이 일어나면 만물이 그 교화를 우러러보는 법이니, 아, 거룩한 일이다. 이 어찌 공의 음덕에서 발로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 99년 만에 비로소 묘전의 비석을 세웠는데 경우(景祐)씨가 그 일을 맡아 성사시켰으며 흠에게 그 행적을 서술할 것을 부탁하였다. 흠의 5대조 좌정언(左正言) 효(曉)는 곧 문희공(文僖公)의 아우로서 명망과 덕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흠은 친족의 근본을 생각해 볼 때 어찌 감히 그 아름다움을 선양하여 후인에게 모범이 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문절공께서는 / 嗚呼文節
밝은 조정 만나시어 / 夙際昌朝
아니 씻어도 해맑고 / 匪澄而淸
아니 세워도 우뚝해 / 不矯而翹
기럭 봉황 흡사하여 / 漸鴻威鳳
그 의용이 빛났는데 / 賁乎其儀
풀어 써도 미진하여 / 用而未究
남긴 것은 한탄이라 / 憖遺興咨
지난날의 공의 세대 / 而公之世
제왕 업적 터 잡혔고 / 王迹斯基
조정에서 임금 보좌 / 天衢擎日
우리 공의 자손일레 / 繄公子姓
덕이 후해 빛 흐르고 / 德厚流光
선이 쌓여 경사 많아 / 善積餘慶
공이 죽은 백년 만에 / 公歿百年
그 비석이 우뚝하다 / 有屹其碑
의관이 의탁한 바라 / 衣冠所託
혼령이 이에 있으리 / 精爽在玆
명을 지어 전하거니 / 銘以貞之
뒷 현인들 생각하리 / 後賢之思


 

13세손 사헌부 감찰공  12대 조고 관련 왕실의궤의내용  

 

學正郭世翼
擧案者二司宰監主簿李桓
禮賓寺主簿朴進益
玉印執事二成均館典籍吳燦
申纘
擧案者二軍器寺主簿鄭德謙
司贍寺主簿吉瑞;外任代武兼邊益中;
箱差備官二禮賓寺別提李智
敦寧府參奉韓聖輔
怕差備官敦寧府奉事沈若溟
几差備官軍資監奉事金元瑞
臺差備官典牲署參奉崔世榮

 

 

帕差備敦寧奉事沈若溟
几差備軍資奉事金元瑞
臺差備典牲參奉崔世榮
卓差備四武兼權存林岱李德培李廷植執事
忠贊衛六名
一誌石奉詣山陵時輿士軍二百名;比己丑謄錄減一百名;領率部將
二員
望燭五百柄捧持人五百名內四百八十名忠贊衛
二十人內侍;每二十五名作一隊;領率部將二十員使令二十名限
天明明火;望燭義盈庫次知入量進排明火到山陵上山陵及返虞時幷同;
挽章九十六丈捧持軍九十六名預備十四合一百十名
雨備則捧持軍各自持去領率部將四員使令四名

 

 

 

申纘
擧案者軍器寺主簿鄭德謙
武臣兼宣傳官邊益中
魂帛虞主執事大祝弘文館副校理金宇亨
副司直金益廉
箱差備官禮賓寺別提李智
敦寧府參奉韓聖輔
帕差備官敦寧府參奉沈若溟
几差備官軍資監奉事金元瑞
臺差備官典牲署參奉崔世榮
虞主題主官議政府右參贊吳竣
浴主大祝副司果李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