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정덕(正德) 기묘년은 곧 우리 중종대왕께서 즉위한 지 14년째 된 해이다. 임금은 이상 정치를 이루고자 꾀하여 세상을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상황으로 돌려놓으려고 하였다.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은 정대한 학문으로 앞장서서 이끌고 도를 연구하여 길이 같은 선비들은 전부 모여 조정에서 뜻을 얻었다. 신 문절공(申文節公)은 그중에 한 분이다.
공의 휘는 상(鏛), 자는 대용(大用)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시조 숭겸(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하였고 마침내 몸을 던져 군주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나중에 태사(太師) 개국공(開國公)을 봉하고 장절이라고 증시하였다. 13대를 내려와 즙(諿)은 전리판서(典理判書)이고 이분이 종부시 영(宗簿寺令) 안(晏)을 낳았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개(槩)는 세종대왕을 도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마음을 합쳐 정사를 돌보았으며 문장과 사업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별세한 뒤에 문희공(文僖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부는 자준(自準)으로 관찰사이고 선고는 말평(末平)으로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이며, 선비는 권씨(權氏)로 익평공(翼平公) 남(擥)의 따님인데 성화(成化) 경자년(1480, 성종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자 재주가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이갈이를 할 때 벌써 글을 배웠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경사(經史)의 대체적인 뜻을 알았다. 무오년(1498, 연산4)에 진사에 급제하고 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뽑혀서 예문관으로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그뒤에 승정원 주서로 전임되었다가 체직되고 서반(西班)으로 제수되었는데 춘추관 벼슬을 계속 겸임하여 동료들과 함께 〈연산군일기〉를 찬수하였다. 사국(史局)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당시의 명류들이었는데 공은 나이가 가장 젊었으므로 상국(相國) 신용개(申用漑)가 항상 그 재주를 칭찬하였다.
무진년(1508, 중종3)에 예조 정랑,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기사년에 응교, 지제교로 승진하였다. 그해 겨울에 한꺼번에 내외상을 당하였으며 상복을 벗고 다시 응교, 전한, 집의, 사인, 사간, 사복시 정을 역임한 뒤에 승진하여 직제학에 제수되고 통정으로 올라 부제학이 되었다. 정원으로 들어가 동부승지로부터 도승지에까지 올랐으며 가선(嘉善)에 가자되고 어명으로 평안관찰사가 되었다. 기묘년에 자헌으로 올라 한성부 판윤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로 발탁되었으며 겨울에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ㆍ춘추관ㆍ성균관사로 옮겼다.
당시에 뭇 현인이 조정에 가득 차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자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악에 대한 배격이 너무 지나쳐서 근본 의도가 빗나갈 기미가 있었으므로 공은 이를 걱정하여 홀로 대체를 견지하고 그 중간에서 조정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북문(北門)의 변이 터지고 말았다. 다만 공은 평소에 마음을 공평하고 관대하게 가져 남들과 경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이로부터 자취를 거두고 산직으로 물러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나간 것이 두 번이고 관찰사로 나간 것이 세 번이었는데 경기ㆍ 전라ㆍ경상도였다. 기축년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경인년(1530, 중종25)에 병으로 사직하고 서추(西樞)로 나갔다. 가을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51세였고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진좌(辰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단아한데다 풍채는 의젓하고 맑아 바라볼 때 마치 신선 속의 인간 같았다.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루고 시사를 논할 때는 진지하게 정성을 다할 뿐 소인들에 대해 지나치게 따지지 않았으나 능히 군주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일 또한 정도로 돌아갔다. 마음이 잔잔하여 욕심이 적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선물꾸러미가 들어오지 않고 대문 안이 한적하여 참새그물을 칠 만하였다. 역사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여 고금을 마음대로 주물러 마치 어제의 일처럼 환히 알았으나 누가 혹시 물으면 잘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겸허한 덕이 이와 같았으며 술에 취하면 시를 짓고 그 시를 사람들이 다 회자하였으나 그 또한 일로 삼지 않았다. 어버이 상사를 치르면서 몸이 야윌 대로 야위어 거의 생명이 위급할 정도가 되었는데 타고난 효성과 사랑이 본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행실을 심고 밖으로는 덕을 채우고서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지닌 경륜을 장차 펴 보일 일이 있을 것도 같았으나 결국 다 쓰지 못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은 종실 부림군(富林君 이름은 식(湜))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사 광국(匡國)이고 그 다음은 홍국(弘國)과 화국(華國)이며, 장녀는 심경(沈鏡)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모인(某人)에게 시집갔다. 광국은 종실 고성군(固城君 이름은 강(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아 아들은 염(磏), 굉(硡), 윤(磮)과 현감 확(確), 부장(部將) 율(硉)이고 딸은 관찰사 권덕여(權德輿)에게 시집갔다. 홍국은 조응경(趙應卿)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아 아들은 현감 낙(硌)이고 딸은 상례(相禮) 신유(愼有)와 이중강(李重綱), 신극제(申克濟), 박제남(朴悌男)에게 시집갔다. 화국은 전첨(典籤) 윤회정(尹懷貞)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평삼부원군(平三府院君) 잡(磼), 감역(監役) 업(礏), 한성부 판윤 입(砬), 남도병사(南道兵使) 길(硈)이고 딸은 의정부 좌찬성 구사맹(具思孟), 첨지 안경렴(安景濂)과 유약(柳瀹)에게 시집갔다. 심경은 아들 모(某)를 두었고 딸은 모에게 시집갔다. 염에게서는 세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경복(景福)이고 딸은 이주(李澍)와 유건(柳健)에게 시집갔다. 굉은 후사가 없다. 윤은 다섯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부사(府使) 경리(景褵), 현감 경우(景祐), 경침(景琛), 경례(景禮)이고, 딸은 신미(申楣)에게 시집갔다. 확에게서는 열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동지(同知) 경진(景珍), 경찬(景瓚), 평령군(平寧君) 경원(景瑗), 현감 경시(景禔), 첨지 경호(景琥), 선전관 경침(景琛), 경정(景禎)이고 딸은 이려(李勵), 조황(趙璜), 윤유안(尹唯安)에게 시집갔다. 율은 후사가 없다. 권덕여에게서는 두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극중(克中)이고 딸은 이정직(李廷直)에게 시집갔다. 낙은 후사가 없어 경시로 아들을 삼았다. 신유에게서는 네 아들이 출생하여 수을(守乙), 수무(守武), 수신(守身), 수갑(守甲)이다. 이중강에게서는 후사가 없다. 신극제에게서는 두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형(瀅)이고 딸은 현감 박희(朴憘)에게 시집갔다. 박제남에게서는 한 아들이 출생하여 정랑 정(筳)이다.
잡에게서는 다섯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평릉군(平陵君) 경희(景禧), 감찰 경지(景祉)이고, 딸은 도정(都正) 윤민일(尹民逸), 첨지 홍계원(洪戒元), 구헌(具憲)에게 시집갔다. 업에게서는 세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봉사(奉事) 경기(景祺), 도사(都事) 경적(景
)이고 딸은 참봉 최정(
崔珽)에게 시집갔다. 입에게서는 다섯 자녀가 출생하였는데 아들은 평성군(平城君) 경진(暻禛), 동평군(東平君) 경유(景裕), 동성군(東城君) 경인(景禋)이고 딸은 신성군(信城君)에게 시집갔는데 선조대왕의 셋째 아들이다. 길에게서는 두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경휘(景
)이고 딸은 윤길(尹
)에게 시집갔다. 구사맹은 4남 6녀를 두어 아들은 능해군(綾海君) 성(宬), 홍(宖), 현감 용(容), 능성군(綾城君) 굉(宏)이고 딸은 현감 심엄(沈㤿), 동지 홍희(洪憙), 판관 권유남(權裕男), 현감 김덕망(金德望), 정원대군(定遠大君) 이모(李某)에게 시집갔다. 안경렴에게서는 두 아들이 출생하였으니 군수 대남(大楠)과 현감 대기(大杞)이다. 유약에게서는 여섯 자녀가 출생하여 아들은 선전관 인남(仁男), 생원 의남(義男), 현감 신남(信男)이고, 딸은 도사(都使) 박항길(朴恒吉), 동지 권극정(權克正), 원률(元慄)에게 시집갔다. 남녀 현손은 모두 약간 명이다.
지금 우리 주상전하는 곧 정원대군의 맏아드님이다.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난세를 다스려 정도로 복구시켰고 신(臣) 경진(景禛)ㆍ경유(景裕)ㆍ굉(宏) 등이 일원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시운과 천명을 도와 실로 중흥의 공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였는데, 이 모두 공의 증손이다. 용이 일어나면 구름이 그 뒤를 따르고 성인이 일어나면 만물이 그 교화를 우러러보는 법이니, 아, 거룩한 일이다. 이 어찌 공의 음덕에서 발로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 99년 만에 비로소 묘전의 비석을 세웠는데 경우(景祐)씨가 그 일을 맡아 성사시켰으며 흠에게 그 행적을 서술할 것을 부탁하였다. 흠의 5대조 좌정언(左正言) 효(曉)는 곧 문희공(文僖公)의 아우로서 명망과 덕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흠은 친족의 근본을 생각해 볼 때 어찌 감히 그 아름다움을 선양하여 후인에게 모범이 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문절공께서는 / 嗚呼文節
밝은 조정 만나시어 / 夙際昌朝
아니 씻어도 해맑고 / 匪澄而淸
아니 세워도 우뚝해 / 不矯而翹
기럭 봉황 흡사하여 / 漸鴻威鳳
그 의용이 빛났는데 / 賁乎其儀
풀어 써도 미진하여 / 用而未究
남긴 것은 한탄이라 / 憖遺興咨
지난날의 공의 세대 / 而公之世
제왕 업적 터 잡혔고 / 王迹斯基
조정에서 임금 보좌 / 天衢擎日
우리 공의 자손일레 / 繄公子姓
덕이 후해 빛 흐르고 / 德厚流光
선이 쌓여 경사 많아 / 善積餘慶
공이 죽은 백년 만에 / 公歿百年
그 비석이 우뚝하다 / 有屹其碑
의관이 의탁한 바라 / 衣冠所託
혼령이 이에 있으리 / 精爽在玆
명을 지어 전하거니 / 銘以貞之
뒷 현인들 생각하리 / 後賢之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