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자료 /2012. 2.6. 문수사 탐방

2012.2.6 .삼각산 문수사 탐방

아베베1 2012. 2. 9. 13:28

 

                                 삼각산 문수사 (文殊寺)

 

 삼각산 문수사는 고례예종 4년 서기 1010년예 대감탄연국사가 창건한 절로 천년 고찰이다

 보현봉의 절묘한 산세와 문수봉의 산수아래 위치하는 사찰이며 삼각산의 높은 곳에 위치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탄연 선사께서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로 알려져 있다 유신 탄연 김부식등과 명필가 이시다.       

문수봉 아래 소재하며 좌측으로는 보현봉이 우측으로는 촛불바위  뒤로는 문수봉 정상과 북한산성 대남문아래에 소재하는  유서깊은 사찰이가도 하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사찰이었으나 최근에는 중창불사를 하는 중으로 여러 부속건물이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암행어사 박문수, 초대 대통령이신 이승만 전대통령과의 인연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고려조의 임금 서거정 남효은 이덕무..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문수사(文殊寺]



석탄연(釋坦然)

한 집이 어이 이리 고요하고 비었는가 / 一室何寥廓
온갖 인연 다 함께 적막하여라 / 萬緣俱寂寞
돌 틈을 뚫어 길 통하고 / 路穿石鏬通
구름 뿌리 통하여 샘물 떨어지네 / 泉透雲根落
밝은 달은 추녀 끝에 걸리었는데 / 皓月掛簷楹
시원한 바람은 숲 골짜기를 흔드네 / 涼風動林壑
누구라 저 상인 따라 / 誰從彼上人
맑게 앉아서 참 즐거움 배우리 / 淸坐學眞樂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해 21년(1167), 송 건도 3년ㆍ금 대정 7년



○ 봄 정월에 전라주로 안찰부사(全羅州路按察副使) 윤평수(尹平壽)가 민간에서 은(銀) 80근을 거두어 바쳤다.
○ 연등(燃燈)하는 날, 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갔다가 밤에 돌아와 관풍루(觀風樓)에 이르렀을 때,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의 말[馬]이 본래 길이 잘 들지 않는데다 징[鉦]과 북소리에 더욱 놀라 한 기사(騎士)의 시방(矢房 화살통)을 들이받아서 화살이 튀어나와 왕이 탄 가마 옆에 떨어졌는데, 돈중이 이 일을 자수하지 않았다. 왕이 깜짝 놀라 유시(流矢)가 날아온 것으로 오인하고, 빨리 달려 궁으로 돌아와서 궁성에 계엄(戒嚴)을 폈다.
○ 유사에 명하여 저자거리에 방(榜)을 걸기를 "활을 쏜 적(賊)을 고하는 자가 있으면, 유무직(有無職)을 막론하고 동반(東班)의 정랑(正郞)과 서반(西班)의 장군(將軍)직을 소원에 따라 제수할 것이고, 공사(公私)의 천례(賤隷)도 또한 관직에 참여를 허락할 것이며, 아울러 은(銀) 2백 근을 줄 것이다. 여자일 경우는 은 3백 근을 준다." 하였다. 잡지 못할까 염려하여, 황금 15근과 은병(銀甁) 2백 개를 거리에 달아 두고 적을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용력 있는 자를 뽑아서 내순검(內巡檢)이라 부르고, 두 번(番)으로 나누어 언제나 자색옷을 입고서 활과 검을 가지고 의장(儀仗) 밖에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비와 눈도 피하지 않고, 밤이면 새벽까지 순찰하고 경계하였다.
○ 왕이 적을 잡지 못한다고 조서를 내려 재신과 추신을 힐책하니, 체포된 자가 연달았다. 대령후(大寧侯) 경(暻)의 가동(家僮) 나언(羅彦)ㆍ유성(有成)ㆍ황익(黃益) 등에게 혐의를 두고 심하게 국문(鞫問)하니, 나언 등이 허위 자백을 하였다. 여러 왕씨와 재신ㆍ추신ㆍ백관ㆍ기로(耆老)들이 대궐로 나아가 죄인의 체포를 하례하고, 나언ㆍ유성ㆍ황익 및 유성의 처(妻)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또 임금의 호위를 신중히 하지 않았다 하여, 견룡(牽龍 임금의 시위와 궁궐의 호위를 맡았던 군대)ㆍ순검(巡檢)ㆍ지유(指諭 무관직)에서 14명을 시골로 귀양보냈다.
○ 3월에 왕이 비를 무릅쓰고 장흥원(長興院)에 행차하여, 중 각예와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고, 우승선 김돈중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 왕이 몰래 금신굴(金身窟)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베풀고,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ㆍ허홍재(許洪材)ㆍ각예 등과 더불어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워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겼다. 이보다 앞서, 청녕재 남쪽 기슭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고, 중미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정자 남쪽 시내[澗]에 흙과 돌을 쌓아 물을 저장하고, 언덕 위에 초가(草家) 정자를 지었는데 오리가 놀고, 갈대가 우거진 것이 완연히 강호(江湖)의 경치와 같았다. 그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소동(小僮)으로 하여금 뱃노래와 어부노래를 부르게 하여, 놀이를 마음껏 즐겼다. 처음 이 정자를 지을 때에 역군으로 하여금 본인이 식량을 싸 오게 하였는데, 한 역군이 매우 가난해서 마련하지 못하여 역군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누어 주어 먹였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먹이고 말하기를, “친한 사람을 불러서 함께 먹으시오." 하였다. 역군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했는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얻어 왔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얼굴이 추하니 누가 가까이하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를 깎아 팔아서 사 가지고 왔소." 하고, 이내 그 머리를 보이니, 그 역군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듣는 자도 슬퍼하였다.
○ 귀법사(歸法寺) 동쪽 고개에 행차하여, 시신(侍臣)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
○ 여름 4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 하청절(河淸節)이기에 만춘정(萬春亭)에 행차하여, 재신과 추신 시신과 더불어 연흥전(延興殿)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에서 채붕(綵棚)ㆍ준화(樽花)ㆍ헌선도(獻仙桃)ㆍ포구락(抛毬樂) 등의 놀이를 갖추어 행하고, 또 정자 남쪽 포구에서 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며 서로 시를 부르고 화답하다가, 밤에 이르러 비로소 파하였다. 만춘정은 판적요(板積窯) 안에 있는데, 연흥전(延興殿)이 있고, 남쪽에는 시냇물이 굽이쳐 돌고, 좌우에 송죽(松竹)과 화초를 심었다. 또 아담한 모정(茅亭)ㆍ초루(草樓)가 모두 일곱 군데나 있는데, 현판이 있는 것이 네 개가 있었으니, 영덕정(靈德亭)ㆍ수락당(壽樂堂)ㆍ선벽재(鮮碧齋)ㆍ옥간정(玉竿亭)이요, 다리를 금화교(金花橋)라 하고, 문은 수덕문(水德門)이라 이름하였다. 임금이 타는 배는 비단으로 꾸몄는데 뱃놀이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3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것으로, 모두 박회준ㆍ유장ㆍ백선연이 왕을 부추겨 한 것이다.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거늘, 의종이 못과 정자를 많이 만들어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괴롭혔으며, 항상 총애하는 자들과 향락만을 일삼고 국정을 돌아보지 않는데도 재상과 대간으로서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마침내 거제(巨濟)로 쫓겨가게 된 것은 마땅하다." 하였다.
왕의 아우 중 충희(冲曦)가 왕을 청녕재로 모시고 음식을 바치니, 왕이 각예(覺倪)와 시신을 불러 같이 마시고, 늦게 중미정 남지(南池)에서 배를 띄워 밤까지 놀았다. 충희는 바로 현희(玄曦)이다.
○ 청녕재에 잔치를 벌이고, 시를 지어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 5월에 임진현(臨津縣)에 행차하였다. 다음날 재추인 김영윤ㆍ서공ㆍ이공승ㆍ최온(崔溫)과 승선 이담(李聃)ㆍ허홍재(許洪材)ㆍ김돈중(金敦中) 등과 더불어 남강(南江)에 배를 띄워 날이 다하도록 즐겼다. 사간 임종식(林宗植)과 시어(侍御) 고자사(高子思)도 연회에 참석하였다. 한밤중이 돼서야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겼는데, 시종들은 미처 따르지 못하고, 고자사는 취해서 가지 못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임금의 한 몸에 사직(社稷)과 백성이 매여 있고, 대간의 직책이란 허물을 바로잡고 그릇된 것을 규탄하는 데 있다. 왕이 비록 위태로운 행차를 조심하지 않아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한다 하더라도 종식(宗植) 등이 간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따라서 환락에 빠져 임금을 수행하는 체모를 잃었으니, 매우 비루하다." 하였다.
장단현(長湍縣) 응덕정(應德亭)에 거둥하여, 배 가운데에 채붕(綵棚)을 매어 놓고 여악(女樂)과 잡희(雜戲)를 실었다. 물에 뜬 것이 모두 19척이었는데, 모두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좌우의 총애받는 자들과 더불어 잔치하여 즐겼다. 5경에 이르러서 서쪽 언덕에 올라 과녁을 세우고 그 위에 촛불을 놓고 좌우에게 명하여 쏘게 하였는데, 맞히는 자가 없었다. 내시 노영순(盧永醇)이 아뢰기를, “성인[왕]께옵서 과녁을 맞히심을 기다려서 신들이 맞히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쏘아 즉시 촛불을 맞히니, 좌우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담이 뒤따라 맞히니, 능라견(綾羅絹)을 하사하였다.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물놀이를 관람하고, 응덕정에서 촛불을 잡고 배에 올라 여러 가지 풍악을 성대하게 벌이고, 황락정(皇樂亭)을 지나다가 술자리를 베풀고 밤에 보현원에 이르렀다. 또, 만춘정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밤에 이담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 6월에 현화사(玄化寺)로 이어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성동(城東)의 사천(沙川) 용연사(龍淵寺) 남쪽에 두서너 길 되는 석벽이 냇가에 깎아 세운 듯이 서 있어, 그 이름을 호암(虎巖)이라 하는데, 흐르는 물이 여기 와서 머물러 괴어 있고,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는 말을 듣고, 내시 이당주(李唐柱)ㆍ배연(裵衍) 등에게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고 연복정(延福亭)이라 이름하고는, 네 귀퉁이에 기이한 꽃과 나무를 심었다. 물이 얕아서 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제방을 막고 호수를 만들었다. 그 땅이 흰 모래로 되어 있고 물결이 세차서 비만 오면 무너지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하니, 인민들이 주야로 쉬지 못해서 매우 괴로워하였다. 이날 재상ㆍ시신과 함께 정자 위에서 연회를 베풀고, 환락을 다한 뒤에 파하였다.
○ 가을 7월에 귀법사에 행차하였다가, 그 길로 현화사에 거둥하여 말을 달려서 달령(㺚嶺)의 다원(茶院)까지 갔는데, 호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미처 따르지 못하였다. 왕이 홀로 다원 기둥에 의지하여, 모시고 있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정습명(鄭襲明)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어찌 여기에 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 8월에 남경에 행차하였다. 행차가 가돈원(加頓院)에 이르니, 광주(廣州)에서 의위(儀衛)와 악부(樂部)를 갖추어 맞이하고, 말과 견여(肩輿)와 양산(陽傘)을 바쳤다.
○ 9월에 남경 유수가 예를 갖추어 거가(車駕)를 맞고, 양산 및 말과 소를 바쳤다. 밤에 내시(內侍)와 중방(重房)에게 활을 쏘게 하여, 과녁을 맞힌 자에게는 능견(陵絹)을 하사하였다.
○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ㆍ문수사(文殊寺)ㆍ장의사(藏義社) 등의 사찰에 행차하였다.
○ 연흥전(延興殿)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개인마다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 남경을 출발하여 파평현(坡平縣) 강에 이르러, 배 가운데서 여러 신하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시신들이 모두 취하여 예의를 잃었고, 추밀원사 이공승(李公升)은 쓰러져서 거가(車駕) 앞에 실었다.
○ 남경으로부터 돌아와 중앙과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은전(恩典)을 차등 있게 베풀었다. 이 행차 때에, 광주(廣州)의 장서기(掌書記) 김유(金鏐)가 백성에게서 추렴하여 진귀한 그릇 등을 바꾸어 가지고 환관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다. 이에 백선연ㆍ왕숙공 등이 김유를 천거하여 내시(內侍)로 들였다.
○ 겨울 11월에 예빈소경(禮賓少卿) 최현(崔儇)을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 하례를 사례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소부감 이위국(李衛國)을 보내어 생신을 하례해 왔다.

 

 사가 선생님의 문수사 의 시

 

東文選卷之十八
七言排律
三角山文殊寺


城南十里平沙白。城北數朶重岑碧。老守踈慵放早衙。出遊浩蕩尋幽跡。還他駕鶴楊州天。添却騎驢華山籍。官事欲了無奈癡。賞心易失尤堪惜。黃裾唱引大俗生。碧眼相携有高格。試攀崎嶇石逕斜。漸出像籠林嶺隔。俯臨絶谷但蒼茫。上到危巓增跼蹐。晴峯距日纔數尋。雲棧淩虛幾千尺。鳥飛杳漠楚天低。野廣分明漢江畫。非煙西望卽仙洲。大浸南連通水驛。一迴徙倚獨嗟咨。八極須臾可揮斥。懸磴參差九十層。舊躅依稀上下屐。奇哉不世靑蓮宮。云是大智眞人宅。石崛呀開苔蘚斑。林龍眩晃丹靑射。睟容宛若福城東。寶趺高馭金猊脊。相望遍吉長者居。誰識法界玄開闢。大慈的的蠲煩襟。一掬涓涓貯靈液。遊人恐觸天龍嗔。卜領試呪盃梭擲。煙霞影裏孤塔白。鍾梵聲中一燈赤。依然勝會移普光。應有妙供來香積。聞昔先王焚御香。至今中使祈宗祏。我來適値雲揚秋。僧留歡賞山色夕。倚簷列岫玉嵯峩。當檻瑤林錦狼籍。喜飡蔬食飫淸芳。旋借蒲團寄安適。語闌缺月入深扉。夜久微風吟聳栢。最憐禪榻靜寥寥。忽笑人生何役役。未能容易掛衣冠。倘可功名垂竹帛。淸眠恰被徤稚呼。紅暈已動鴉輪赫。擬追台崖招手人。愧同편001嶽攢眉客。莫嫌塵語汚靑山。曾演綸言直丹掖。


 

 

 

동문선 제18권

칠언배율(七言排律)
삼각산 문수사(三角山文殊寺)

 


이장용(李藏用)

성남 10리엔 희디 흰 모래벌판 / 城南十里平沙白
성북엔 두어 떨기 푸른 봉이 겹겹인데 / 城北數朶重岑碧
늙은 태수 게을러 일찍 공무 끝내고 / 老守疏慵放早衙
훨훨 나다니며 좋은 경치 찾아 가네 / 出遊浩蕩尋幽跡
양주의 학을 탐은 그만두고 / 還他駕鶴楊州天
화산의 나귀 타는 명부에 한 사람 보태리 / 添却騎驢華山籍
관사를 마치려 하나 어리석어 무가내요 / 官事欲了無奈癡
구경에 철 잃을까 가석하기 때문일세 / 賞心易失尤堪惜
노랑 옷들 벽제함은 너무나 속된 일 / 黃裾唱引大俗生
푸른 눈과 함께 감이 더욱 높은 격이것다 / 碧眼相携有高格
비탈진 돌길을 한참 돌아가다가 / 試攀崎嶇石逕斜
인간 세상 벗어나니 고개 숲이 또 막히네 / 漸出像籠林嶺隔
깊은 골을 굽어보니 아득하기만 / 俯臨絶谷但蒼茫
가파른 봉에 올라보니 더욱 오들오들 / 上到危巓增跼蹐
갠 봉우린 해와 상거가 겨우 두어 길인 듯 / 晴峯距日纔數尋
구름 속 잔도는 허공에 몇천 자를 솟았는고 / 雲棧淩虛幾千尺
나는 새 가물가물 남천이 나직하고 / 鳥飛杳漠楚天低
넓은 벌판을 또렷이 한강이 쭉 그었네 / 野廣分明漢江畫
서쪽으로 바라보니 연기낀 듯 신선 물가 / 非煙西望卽仙洲
남으로 흘러 흘러 큰 물과 통해 / 大浸南連通水驛
한 번 올라와 홀로 탄식하니 / 一廻徙倚獨嗟咨
팔극을 금방 내휘두를 듯 / 八極須臾可揮斥
가파른 돌층계 울툭불툭 90단에 / 懸磴參差九十層
희미한 옛 자취는 나무신이 앞뒤굽 / 舊躅依稀上下屐
어허 이게 세상 아닌 청련궁일세 / 奇哉不世靑蓮宮
이르되 대지진인이 이룩한 절이라고 / 云是大智眞人宅
휑 뚫린 석굴 벽에 이끼가 아롱지고 / 石崛呀開苔蘚斑
번쩍이는 용 숲 속에 단청이 휘황하구나 / 林龍眩晃丹靑射
인자한 부처님 얼굴 복성 동쪽 그대로인 듯 / 睟容宛若福城東
가부좌로 높게 금사자를 타셨네 / 寶趺高馭金猊脊
편길장자 계시는 곳 마주 바라보나 / 相望遍吉長者居
법계 현관을 뉘라서 열 줄 알리 / 誰識法界玄關闢
대자비의 환한 얼굴이 속세 생각 덮어주고 / 大慈的的蠲煩襟
영천이 졸졸 흘러 더운 번뇌 가시는데 / 一掬涓涓貯靈液
유인이 천과 용의 꾸지람이 두려워서 / 遊人恐觸天龍嗔
북처럼 잔을 던져 주문 외고 물 마시네 / 卜領試呪杯梭擲
이내랑 안개 속에 흰 탑 홀로 우뚝 섰고 / 煙霞影裏孤㙮白
종 소리 은은한데 붉은 등 하나 켜 있네 / 鍾梵聲中一燈赤
수승한 법회는 보광에서 옮겨온 듯 / 依然勝會移普光
갖가지 묘한 공양은 향적에서 오는 듯 / 應有妙供來香積
들으니 선왕께서 어향을 사르셨다고 / 聞昔先王焚御香
지금도 중사(궁중의 내시)들이 종사의 복을 비네 / 至今中使祈宗祐
내가 오니 때마침 가을인데 / 我來適値雲揚秋
중의 만류로 머물러 저녁 산빛을 보게 되네 / 僧留歡賞山色夕
처마 끝의 산봉은 옥처럼 뾰죽뾰죽 / 倚簷列岫玉嵯峨
난간 앞의 숲에는 비단필을 두른 듯 / 當檻瑤林錦狼籍
산나물에 깨끗한 밥을 반가이 배불리 먹고 / 喜飡蔬食飫淸芳
포단을 빌어 앉아 곤한 몸을 쉬노라니 / 旋借蒲圑寄安適
이야기가 조용하자 하현 달이 문에 들고 / 語闌缺月入深扉
밤이 깊자 미풍이 잣나무를 스치는데 / 夜久微風吟聳栢
대견할손 선탑은 이리 고요하다마는 / 最憐禪榻靜寥寥
우스워라 인생은 어찌 저리 부산한고 / 忽笑人生何役役
쉽사리 벼슬 옷을 못 벗어버리는 몸 / 未能容易掛衣冠
혹시나 공명을 죽백에 드리울 건가 / 倘可功名垂竹帛
아이놈이 부르기에 번쩍 단잠을 깨니 / 淸眠恰被健稚呼
먼동이 벌써 터서 붉은 해가 솟았네 / 紅暈已動鴉輪赫
태애(台崖)에 손짓하며 부르는 이 좇으려다 / 擬追台崖招手人
여산(盧山)의 눈썹 찡그리는 손 됨이 부끄럽네 / 愧同廬嶽攢眉客
진세의 말로 청산을 더럽힌다 꺼려 마소 / 莫嫌塵語汚靑山
일찍이 단액에 입직 임금 말씀 받잡던 몸 / 曾演綸言直丹掖


 

[주D-001]양주(楊州)의 학(鶴)을 탐 : 여기서는 양주(楊州)의 수령으로 있기 때문에 인용하였다.
[주D-002]화산(華山)의 나귀 : 화산처사(華山處士) 진단(陳摶)이 일찍이 흰 나귀를 타고 변중(汴中)으로 들어가려다가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고 나귀에서 떨어지며 말하기를, “천하가 이제야 정(定)해졌군.” 하였다. 여기서는 삼각산(三角山)을 화산이라 한 것이다.
[주D-003]노랑 옷 : 수령(守令)이 행차할 때 앞을 인도하며 갈도(喝道)하는 졸노(卒奴)배.
[주D-004]푸른 눈 : 고승(高僧)은 벽안(碧眼)이 많다 한다.
[주D-005]희미한 …… 앞뒤굽 : 진(晉) 나라 사령운(謝靈運)이 등산(登山)을 좋아하였다. 등산할 때에 나무신[屐]을 신고 산에 올라갈 때에는 나무신의 앞 니를 떼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떼었다.
[주D-006]인자한 …… 동쪽 : 《화엄경(華嚴經)》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 불법을 잘 아는 이)을 찾아 두루 다니다가 복성 동쪽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났다.
[주D-007]법계 현관(玄關) : 현묘(玄妙)한 도(道)와 관문. 《보등록(寶燈錄)》에, “현관을 크게 열고 바른 눈을 유통케 한다[玄關大啓 正眼流通].”하였다.
[주D-008]보광(普光) : 부처가 보광명장(普光明藏)에서《원각경(圓覺經)》을 설하였다. 보광명은 부처의 덕이 두루 밝다는 뜻이다.
[주D-009]태애(台崖)에 손짓하며 부르는 이 : 천태산(天台山) 벼랑으로 신선이 왕래한다는 곳. 이백(李白)의 시에, “신선이 나를 사랑한다면, 손을 들고 와 부르리라.[仙人如愛我 擧手來相招]”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0]여산(盧山)의 눈썹 찡그리는 손 : 진(晉) 나라 혜원사(惠遠師)가 도잠(陶潛)더러 자주 연사(蓮社)에 들라고 권하자, 연명(淵明)이 눈썹을 찡그리고 갔다. 《周續之 虞山記》
[주D-011]단액(丹掖) : 붉게 칠한 액성(掖省). 액성은 궁중의 문하성(門下省)ㆍ중서성(中書省).

 

명재유고 제4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조 판서 구당(久堂) 박공(朴公) 신도비명



현종대왕(顯宗大王) 12년 신해년(1671) 10월 병신일에 구당 박공이 송도(松都)의 관사(館舍)에서 별세하였다. 상이 유소(遺疏)를 보고 하교하기를, “죽음을 앞두고 아뢴 말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다른 날보다 배나 더하니, 매우 비통하도다.” 하였고, 인하여 공의 노모에게 여생을 마칠 때까지 나라에서 양식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금상(今上) 조정의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과 민정중(閔鼎重) 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박장원(朴長遠)이 모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니, 고인이 이른 바 ‘감히 그 몸을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정려(旌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겸손함으로 신칙하였고 몸가짐에 법도가 있었으므로 조신(朝臣)들이 누구나 공경하고 따랐으며, 사시(賜諡)의 은전을 청하지 말라고 유언을 한 것도 겸양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특별히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또 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비록 유언으로 경계하였지만, 애도하고 영예롭게 하는 은전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현양(顯揚)하는 비석만 유독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공의 여러 아들들이 내가 공의 뜻을 거의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아, 내가 어떻게 공의 뜻을 충분히 알겠는가.
공의 휘(諱)는 장원(長遠)이고 자는 중구(仲久)이다. 그 선조는 고령(高靈) 사람이다. 원조(遠祖) 휘 지순(之順)은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인데, 그 후손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대대로 벼슬하는 씨족이 되었다. 휘 지(持)라는 분과 휘 수림(秀林)이라는 분이 있어 모두 청렴함과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니, 모든 행적이 그 후손인 읍취헌(挹翠軒) 은(誾)이 지은 행장에 실려 있다. 고조 휘 세필(世弼)은 진사로 집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정(淨)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효성(孝誠)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며, 고(考) 휘 훤(烜)은 직장(直長)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또한 재능과 도량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비(妣)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충렬공(忠烈公) 현(誢)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4) 3월 무오일에 태어났다. 말을 배우자 곧바로 문자를 해독하였고, 앉을 때에는 다리를 뻗고 앉는 경우가 없었다. 6세 때에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이 자신은 보리밥을 드시고 공에게는 쌀밥을 먹이면서 공이 모르게 하였다. 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먹지 않았다. 8세 때에 시구(詩句)를 지으면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11세 때에 문예(文藝)가 크게 진보하니, 사람들이 공을 이필(李泌)과 안수(晏殊)에 견주었다. 일찍이 삼각산(三角山)에 놀러가 시를 지었는데, 상서(尙書) 정경세(鄭經世)가 공을 만나 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계로약명(溪路藥名)의 시를 지은 아이인가.” 하며 공의 노성(老成)한 기풍에 감탄하였다. 충렬공의 명으로 만퇴(晩退) 신공(申公)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다시 관찰사 김치(金緻)를 종유(從遊)하여 두시(杜詩)를 배웠다.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을 때부터 명성이 매우 자자했으나, 공은 이미 문예가 작은 기예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마음속으로 홀로 고인(古人)의 뜻과 일을 흠모하여 이전의 현인들을 배워 닮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병인년(1626, 인조4) 가을에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다. 겨울에 서도(西都)에서 혼례를 치렀다. 당시에 처조부 윤공 훤(尹公暄)이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불 가운데 비단 따위로 지은 것이 있자 공이 즉시 물리치고 포(布)로 된 것으로 바꾸게 하였다.
정묘년(162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계유년(1633)에 명나라의 조사(詔使) 정룡(程龍)이 와서 시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당대의 재사(才士)를 엄선하여 응수(應酬)하게 하니, 공이 포의(布衣)로서 그 선발에 끼었다.
갑술년(1634)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를 다해 상을 치렀는데, 삼복더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병자년(1636)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겨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에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공은 충렬공을 따라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강도가 함락되었을 때 충렬공이 부인 송씨(宋氏)와 절사(節死)하였는데, 송(宋)나라 종용당(從容堂)의 고사(故事)와 같은 일이다. 공은 모부인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무인년(1638)에 사천(史薦)에 들었다. 공은 국가의 화란(禍亂)을 혹독하게 겪어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므로 오랜 뒤에야 마지못해 강(講)에 나아갔다. 기묘년(1639)에 검열(檢閱)에 제수되었다가 봉교(奉敎)로 옮겼고, 경진년(1640)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감찰(監察)과 정언(正言),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마침 월과(月課)에서 〈반포오시(反哺烏詩)〉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에,
어느 선비가 어버이를 모시는데 / 士有親在堂
가난한 살림이라 좋은 음식 못 드리네 / 貧無甘旨具
미물인 새도 사람을 감동케 하나니 / 微禽亦動人
반포(反哺)하는 숲 까마귀에 눈물을 흘리노라 / 淚落林烏哺
하였다. 인조(仁祖)가 이 시를 보고 말하기를, “한 집안의 충효가 사람을 감동시키는구나. 해조로 하여금 미(米)와 포(布)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전란이 있은 뒤에 공이 상소를 통해 충렬공의 유소(遺疏)를 올리니, 상이 하교를 내려 비탄해하고 특별히 명하여 정려(旌閭)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와 같은 남다른 대우가 내렸던 것이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정언에 제수되어, “얼마 남지 않은 백성이 현재 도탄(塗炭)에 빠져 있으니, 안산(安山)의 어전(漁箭)을 다시 설치하지 마소서.”라고 아뢰었고, 또 “기근과 재이가 발생하였으니, 대군(大君)을 위해 저택을 짓지 마소서.”라고 아뢰었다. 이것은 공이 처음으로 간언한 일이었는데, 모두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니, 백성을 이롭게 해 주려는 마음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정성을 이미 이것을 통해 볼 수 있다. 가을에 명을 받들어 호서(湖西)에서 선비들을 시험하였고, 겸춘추(兼春秋)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찬수(纂修)에 참여하였다.
임오년(1642)에 지평이 되어, 혼조(昏朝) 때에 조정립(曺挺立)이 흉론(凶論)을 주창하여 대군(大君)의 원통한 죽음을 초래한 사실을 논하였고, 다시 사인(舍人) 유영(柳潁)이 술에 취해 체모를 잃은 일을 탄핵하였다. 그해 겨울에 옥당(玉堂)에 들어 수찬(修撰)이 되었다.
계미년(1643)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다. 직책을 맡아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자신을 바로잡아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항상 재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임하니, 정사가 평온하고 일이 간소해져서 경내(境內)가 편안하였다. 공무의 여가에는 손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베끼고, 또 성현이 경계한 말을 기록하여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였다. 안음현(安陰縣)은 산수가 수려한 고장으로 불렸는데, 정일두(鄭一蠹) 선생이 일찍이 이곳을 다스릴 때에 지은 광풍루(光風樓)와 제월당(霽月堂)이라는 건물을 공이 중수(重修)하고 기문(記文)을 지어 추념하고 앙모하는 뜻을 담았다. 당시에 말을 타고 나가 노닐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가기를 잊으니, 사람들은 공이 고을의 수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수찬으로 소환되었다. 을유년(1645)에 정언에 제수되었고 지제교(知製敎)에 뽑혔으며, 지평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하자 양사(兩司)가 의관(醫官)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고, 또 전랑(銓郞) 심희세(沈熙世) 등을 원찬(遠竄)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는 계사(啓辭)가 있었는데, 상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자 공이 인피(引避)하며 아뢰기를, “지금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하지 않아 이토록 혹독한 가뭄이 든 것은, 상하가 막히고 언로(言路)가 막힌 결과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만하는 기색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시니, 정의(情意)가 서로 막힌 상황은 바로 가뭄의 형세와 함께 심각합니다.” 하였다. 또 헌납(獻納)에 제수되었는데, 사직소의 말미에 아뢴 내용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자신에게 죄를 돌리시고 구언(求言)하며 옥사(獄事)를 살피겠다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당일로 대신(大臣)과 유사(有司)를 불러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맹서하여 퇴폐한 습속을 한 번에 씻어 버리고 문구(文具)의 말폐(末弊)를 통렬히 제거하소서. 구언을 하시면 ‘어떠한 폐단은 개혁할 만하고, 어떠한 정책은 없앨 만하다.’라고 하시고, 옥사를 살피시면 ‘누구의 원통함은 씻어 줄 만하고, 누구의 죄는 다스릴 만하다.’라고 하시어 백성의 이해(利害)를 헤아리시고 온 나라의 공의(公議)를 한결같이 따르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한 장의 승정원 문서로 몇몇 사람을 풀어주어 용서하는 조치를 취한 데 대하여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고사(故事)에 따라 책임만 때운 것이다.’ 하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내탕고(內帑庫)와 제사(諸司)의 비축 및 경외(京外)에 현재 남아 있는 미곡(米穀)을 계산해 보아 만약 1년의 비용을 지탱할 수 있다면 내년의 전조(田租)를 감해 주소서. 그리고 상공(常貢) 가운데 견감할 만한 것은 견감하고, 정지할 만한 것은 정지하소서. 달마다 부과하는 군기(軍器)와 같은 긴급하지 않은 역(役)은 모두 일단 혁파하여 백성들과 환난을 함께한다는 뜻을 보이신다면 백성들이 비록 죽음을 면하지 못할지라도 또한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안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하였다.
부수찬으로 옮긴 뒤에 명을 받들어 호남에서 선비들을 시험하였다. 겸사서(兼司書)가 되었다가 전조(銓曹)에 들어가 좌랑이 되었다. 당시에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국사(國事)를 맡고 있었는데, 그 아들 식(鉽)이 대성(臺省)에서 이미 벼슬을 하면서 전랑(銓郞)과 옥서(玉署)의 자리를 꾀하고 있었으나 공이 두 차례 그것을 저지하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에 역옥(逆獄)이 발생하자 문사랑(問事郞)에 차임되었고,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되었다. 공이 스스로 낭서(郎署)이면서 당상관의 관복을 입는 것을 편치 않게 생각하여 외직을 청하니,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보임되었다. 정해년(1647)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기축년(1649)에 승지에 제수되었다가 호조 참의로 옮겼으나, 조정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고 각기 주장하는 바가 분분하였으므로 다시 외직을 청하니,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었다. 마음을 다해 백성을 돌보니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하였으며,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어 백성들의 효심을 흥기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승지로 소환되었고, 중간에 공조 참의와 호조 참의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승정원에 재직한 기간이 길었다. 그리고 경연(經筵)에 자주 참여하여 사안에 따라 건의를 올렸는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결점을 바로잡고 미덕을 길러 주는 것보다 절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매번 지성으로 개도(開導)하기를 조용히 반복하였으되, 과격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추는 언사는 일찍이 없었으니, 상도 대부분 가납하였다.
계사년(1653, 효종4)에 사국(史局)에 새로 추천된 사관(史官) 가운데 합당하지 않은 자가 있어 선배에 의해 천거가 막혔는데,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그 일을 논하면서, “상벌을 내리는 권한이 전하에게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집의로 발탁하여 제수함으로써 포상(褒賞)하였다. 낙정(樂靜) 조공 석윤(趙公錫胤)이 대사헌으로서 서원리를 탄핵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다가 엄한 비지를 받고 인피하니, 대사간 목행선(睦行善)이 처치하여 조공을 체차하였다. 교리 이태연(李泰淵)이 차자를 올려 목행선을 배척하다가 도리어 나문(拿問)의 명을 받으니, 공이 재삼 간언하였다. 이튿날 옥당의 홍처윤(洪處尹) 등이 이태연을 나문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또 목행선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매우 엄히 노하여 홍처윤 등을 물리쳤다. 그리고 상이 다시 공에게 목행선의 파직을 청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재촉하여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은 바로 어제 이태연을 구호했던 자로서, 이태연을 구호했던 것은 목행선을 그르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상은 공이 논의를 주장했다고 의심하고 이튿날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원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말의 뜻이 매우 엄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이에 양사(兩司), 옥당 및 삼공(三公)이 번갈아 소장을 올려 공이 편당(偏黨)을 짓지 않았음을 밝혔고, 좌상 김공 육(金公堉)이 또한 아뢰기를, “모자(母子)가 함께 갈 수가 없으니, 효로 다스리는 정사에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흥해(興海)로 이배(移配)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적소(謫所)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한 번도 집의 뜰을 나가지 않고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였는데, 날마다 정해진 진도가 있었다.
갑오년(1654, 효종5)에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무술년(1658)에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는데, 정사가 엄하면서도 너그러우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해하였다. 당시에 많은 어진 선비들이 무리 지어 조정에 나아가게 되자 연이어 이조 참의와 부제학에 의망되었다. 겨울에 묘당이 올려 발탁하기에 합당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끼었다.
기해년(1659)에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다. 효종대왕이 승하하자 기년(期年) 동안 소찬(蔬饌)을 먹고 예법대로 방상(方喪)을 치렀다.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관동(關東) 지방에 큰 기근이 발생하자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구휼의 정사가 시급하다는 이유를 들어 공을 체직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시남(市南) 유공(兪公)새서(璽書)를 내리고 직질(職秩)을 올려 준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아뢰니, 잉임(仍任)되었다. 공이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새로운 자급(資級)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영동(嶺東)의 전세(田稅)와 신역(身役)을 모두 면제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기 위해 사려를 다해 조처하니, 한 지방의 백성들이 이로 인해 온전히 살아나게 되었다. 백성들이 돌을 깎아 송덕비를 세웠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간과 대사성, 형조 참판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신축년(1661)에 대사헌을 거쳐 다시 대사성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동춘 송공이 연석(筵席)에서 건의하기를, “인재를 배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대사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적임자를 찾아 구임(久任)시켜야 인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른 관직을 가진 사람이 겸대(兼帶)하는 것이 편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송공이 정엽(鄭曄)과 조석윤(趙錫胤)이 모두 겸대하였다고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현임 대사성도 여러 사람의 신망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였고, 대신(大臣)들도 이구동성으로 모두 구임시켜 임무를 완수하도록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하니, 대사간으로 옮겨 그대로 대사성을 겸직하였다. 공이 스스로 불안하여 연이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제수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3)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양남(兩南)에 어사를 파견하려고 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재이(災異)는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갇힌 죄수를 너그럽게 처리하고 재야의 선비를 찾아내어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일은 비록 구휼하는 정사이지만, 또한 억울함을 풀어 주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며 인재를 찾아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성, 예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공을 뒷걸음친다고 비방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이 물러나려는 것은 참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다른 사람의 비난을 정말 달게 받아들입니다.” 하였다. 공이 졸지에 지적을 받고서도 조금도 성내는 뜻이 없었으니,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이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있어 승자(陞資)되어 빈사(儐使)에 차임되었다.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사직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대사헌에 제수되어, 여러 궁(宮)의 면세전(免稅田)을 참작하여 제한할 것을 청하고, 여러 궁 및 각 아문, 사대부의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에 장원(莊園)을 설치하여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조사하여 혁파할 것 등을 청하였으며, 문성(文成)과 문간(文簡) 두 현신(賢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체직되어 한성부판윤 겸 도총관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64, 현종5)에 외직에 오래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연석에서 건의한 사람이 있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다시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자 힘써 사직하였는데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자들을 억누르고 침체된 자들을 진작하여 항상 왕 문정(王文正)이 장사덕(張師德)에 대해 말했던 것으로 사람을 대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벼슬을 구하던 세도가의 자제들이 모두 손을 움츠렸다.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고, 매복(枚卜)에 들었다. 공이 경(卿)의 반열에 발탁된 지 오래지 않아 공의(公議)가 먼저 공에게로 돌아간 것이었는데, 전후로 모두 일곱 차례 의망되었으나 끝내 등용되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소한 일 때문에 불안하여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감히 정사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니, 상이 노하여 신하의 분의(分義)로써 질책하고, 법부(法府)에 내려 죄를 다스리고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대신과 정원, 삼사가 간쟁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공은 즉시 나가 교외에 거처하였다. 그 뒤에 여러 신하들이 공을 위해 억울함을 많이 호소하였는데, 정공 유성(鄭公維城)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박장원은 청렴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니,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서용하라는 명이 내려 연이어 공조 판서, 형조 판서, 대사헌, 동지춘추관사, 제사(諸司)의 제조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665, 현종6)에 우참찬, 예조 판서, 도헌(都憲), 지의금부사, 동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상이 안질(眼疾)로 침을 맞았는데, 공이 아뢰기를, “안질을 다스리는 방도로는 마음을 담담하게 하고 사려를 줄이며 희로(喜怒)의 감정을 삼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였으며, 또 신료를 가까이하여 자주 접견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는데, 공이 장리(贓吏)의 죄를 논하기를, “이러한 부류에게 무슨 원통한 정상이 있다고 심리할 대상에 넣으십니까.” 하였다. 또 재이(災異)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제로(諸路)의 공천(公賤)을 찾아내 쇄환(刷還)하는 일에 대해 원망이 많은 것, 기보(畿輔)의 양전(量田)이 공평하지 못한 것, 군병의 신역(身役)에 대한 번포(番布)와 도주나 사망으로 인하여 징수하지 못한 포(布)를 헤아려 감하기를 청하는 것, 각 아문의 둔전(屯田)을 혁파하기를 청하는 것 등의 일을 아뢰었으며, 이어 국가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고 아뢰고, 임금의 덕성에 부족한 점까지 언급하여 경계해야 할 일을 낱낱이 진술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또 아뢰기를, “구언(求言)을 비록 부지런히 하시지만 응하는 자가 점점 드뭅니다. 여러 신하들의 소차(疏箚) 가운데 채택할 만한 것을 속히 취하여 결연히 실행하소서.” 하였다.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었는데, 진강(進講)할 때마다 입으로 풀이하고 손으로 그려 가며 설명하였고 언행과 주선(周旋)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해 보도(輔導)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오년(1666, 현종7)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옮겼다. 다시 겨울에 발생한 우레로 인해 인재를 수용해야 한다는 말을 거듭 아뢰어 침체된 채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인재를 특별히 천거하도록 청하였다.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대(兼帶)하였다.
정미년(1667)에 형조 판서, 도헌, 우참찬 겸 봉상시제조, 비국 당상(備局堂上)에 제수되었다. 온천의 행행(行幸)에 호종하고 나서 다시 도헌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당시에 양사에서 상신(相臣)이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논하니, 상이 7명의 간신(諫臣)을 모두 찬축(竄逐)하였다. 공이 청대(請對)를 통해 변론하여 구제하였고, 다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근래의 일은 단지 성상께만 치욕이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며 대간(臺諫)들이 계사를 올리기까지 한 것인데, 성상께서 갑자기 진노하시어 언로가 막히고 조정이 거의 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한재(旱災)와 상재(霜災) 속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과 세(稅)를 감면하고 진휼하는 정책,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여 역(役)을 고르게 하는 방도에 대해 힘써 아뢰었고, 또 아뢰기를, “옛날 사마광(司馬光)이 자신의 임금에게 진언(進言)하여 인(仁)과 명(明), 무(武)의 도를 다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인에 대해서는 넉넉한 듯하지만, 명과 무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족한 듯하다고 여기신다면 인 또한 사람들이 일컫는 인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으며, 끝으로 자신을 가다듬고 진작(振作)할 것과 학문에 힘쓰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할 것과 검약을 숭상하고 정사에 근면할 것과 구언(求言)하되 반드시 수용할 것 등의 내용을 아뢰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의 덕과 백성의 일에 대한 것으로서 정성스러운 마음이 끊이지 않았으니, 상이 답하기를, “깨우쳐 줌이 크게 절실하고 말의 뜻이 매우 간절하여 내가 매우 감탄하였다.” 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에 도헌, 참찬, 이조 판서, 좌빈객, 홍문관 제학에 누차 제수되었고, 문형(文衡)에 의망되었다. 공이 이조 판서와 지경연(知經筵)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아뢰기를, “지금 재이가 연이어 닥쳤으나 성상의 마음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풀어지시니, 뭇 신하들이 재이를 하찮게 여기고 편안하기를 탐내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처럼 양기(陽氣)가 화창한 시기를 맞아 조섭하는 여가에 편전(便殿)에서 신하들을 사대(賜對)하시되, 성실히 접견하여 고금(古今)의 일을 의논하고 정신을 발산하신다면 민심을 위로하고 천재(天災)를 조금이나마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당시 봄 가뭄이 극심해지자, 반드시 비를 내리게 하는 방도가 있고 나서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연석에서 간절히 아뢰었다. 그때에 시종신(侍從臣)의 부모로서 나이가 70인 자에게 추은(推恩)하여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음식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공이 수석(壽席)을 마련하여 영예로운 은혜를 기렸다.
여름에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어전에서 전랑(銓郞)의 권한이 너무 크다고 아뢰자 공이 그렇지 않다고 아뢰었는데, 김좌명의 말이 매우 공격적이면서 비방하는 말투였다. 이어서 상신(相臣)이 차자를 올려 이 기회를 틈타 중상(中傷)하자, 공은 힘써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겨울에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갔으나, 고시(考試)하는 데에 나아가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제수되어 사서(史書)를 고출(考出)하는 일로 강도(江都)에 갔다. 다시 우참찬과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미(米)와 포(布)를 하사하였다.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자 공이 힘써 사직하며 아뢰기를, “한갓 녹봉 때문에 벼슬하면서 외람되이 도(道)를 행하는 직책을 차지하여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사는 제 사정을 그 누가 모두 알겠습니까. 또한 어찌 세 번 네 번 들어와서 들어올 때마다 일을 그르치면서도 그만둘 줄 모르는 전조의 장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다섯 차례 상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당시에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였는데, 공이 두루 상고하고 널리 물어 중대한 예식을 잘 완수하였다.
경술년(1670)에 부묘의 예식을 감독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순릉(純陵)의 봉분을 다시 만드는 일로 함흥(咸興)에 갔다 와서 다시 도헌이 되었다. 가을에 팔도에 큰 흉년이 들자 상소를 올려 백성의 망극한 사정과 진정(賑政)이 소홀한 상황, 조정의 안일한 태도와 인재 등용에 있어서의 명성과 실제, 언로의 개폐(開閉) 등을 극언하고, 말미에 아뢰기를, “이러한 일들이 어찌 전하의 전일한 마음을 벗어나는 일이겠습니까. 마음이 큰 근본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학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일의 성패는 오직 전하께서 학문에 뜻을 두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으며, 아울러 조신(朝臣)들이 붕당을 일삼아 논의하면서 서로 다투느라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을 도외시하고 있는 실상을 아뢰었는데, 수천 마디의 곡진한 말이었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판윤, 도헌,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이미 누차 아뢰어도 효과가 없고 노력해도 세도를 되돌리지 못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는데, 조정이 공의 뜻을 알고서 다시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제수하니, 7월에 부임하였다. 그해에는 아사(餓死)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 근심거리가 눈앞에 산적한 형편이었고, 국가의 중신(重臣)이었던 옛사람들도 죽고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공은 어려운 시국에 대한 염려가 간절하여 한밤중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였다.
10월에 병이 났다. 별세하기 며칠 전에 여러 아들들에게 명하여 붓을 잡게 하고 구술(口述)하여 상소의 초(草)를 잡았는데, 백성을 구제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혼란을 다스리고 위태로움을 부지(扶持)하는 방도에 대해 아뢰고, 말미에 아뢰기를, “임금의 다스림은 ‘정일(精一)’의 16자(字)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학문을 힘쓰시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것이 오히려 옛날 명철했던 임금이 직분을 다하였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십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이 점을 유념하소서.” 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에 고자(孤子) 빈(鑌)이 상소를 통해 그것을 올렸다. 공의 향년(享年)은 겨우 60세였다. 그해 12월 정유일에 장단(長湍)의 선영 아래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장중하며 겸손하고 돈후하였으며 도량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후덕한 기운이 화평하였으니, 한눈에 상서로운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효심이 독실하였는데,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어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늘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으므로 모부인을 봉양할 때에 공경과 사랑을 극진히 하여 잠자리를 보살피는 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일에서부터 온화한 태도로 모시고 안색을 살펴 뜻을 받드는 일까지 모친의 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다 하였으니, 50년이 하루처럼 한결같았다. 매번 모부인을 위해 조용히 아뢰기를, “신하가 이미 국가에 몸을 바치기로 허락했다면 자신의 어버이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만약 위급한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바로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부디 제가 효도를 끝마칠 수 있기를 바라지 마소서.” 하였는데, 항상 도리로써 모친을 깨우쳐 드려 창졸간에 자식과 이별하더라도 의리를 편안히 여겨 지나친 상심(傷心)에 이르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공의 걱정하는 마음이 심원하여 미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고, 그 예법은 《가례(家禮)》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참고하여 사용하였다. 숙부를 매우 공경스럽게 섬겨 매일 반드시 나아가 문안을 드렸는데, 비바람이 불거나 공무(公務)가 있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으며, 음식과 의복을 반드시 모두 공급해 드렸다. 숙부의 상을 당해서는 장례에 필요한 온갖 물품을 모두 공이 마련하였다. 숙부가 일찍이 그 아들을 꾸짖어 뜰에서 매질하려고 하자 공이 종종걸음으로 뜰로 내려가 함께 잘못을 빌었는데, 마침 비가 내려 의관(衣冠)이 모두 젖었다. 당시에 이미 공의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았으므로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그 가법(家法)에 감탄하였다.
30여 년 동안 세 조정을 섬겼는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우러나왔고 청렴한 지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으므로 덕망이 절로 높아지고 사론(士論)이 모두 추중(推重)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무르며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머무는 것이 공의 평소 뜻이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임금께 직접 아뢰거나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는 자세하고도 간절하였으되, 과격하게 남의 잘못을 들추는 짓을 하지 않았으며, 사리를 조목조목 아뢰어 의리에 합치되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완곡하고 온순한 말 중에도 남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말들이 많았다. 특히 천재(天災)와 수해(水害), 한발(旱魃)에 관한 일과 백성을 돌보고 기근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간절히 마음을 다하였는데, 상소를 한 번 올리고 또 올려 반복하여 진달하되, 행여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만두지 않았고 세속의 여론이 암암리에 비난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 지금과 같은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논의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공은 천성이 본래 조용하고 세속을 좋아하지 않은 데다 또 병자호란 이후로 다시 세도(世道)를 담당할 마음을 갖지 않았는데, 모친이 시골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내직과 외직에서 머뭇거리며 결연히 물러나지 못하다가 끝내 그러한 뜻만 지닌 채 생을 마치고 말았다.
공은 벗과의 교유가 물처럼 담담하여 당대의 사류들과 비록 성기(聲氣)가 서로 같더라도 시비와 득실에 있어서는 또한 영합하지 않았다. 효묘(孝廟) 초년부터 많은 어진 선비들이 무리 지어 조정에 나아가 사람들이 모두 기대하였으나,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워 다투어 일어나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추종하지도 않고 부딪치지도 않으면서 조용한 가운데 온화하면서도 강인하게 대처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공에게 미칠 수 없었다.
공이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에는 공정함을 유지하려고 힘써 시의(時議)에 흔들리지 않으니, 공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점차 많아져 중간에 갑작스런 곤액을 만나기도 하였으나, 태연히 대처하였다. 오직 당의(黨議)로 분열되는 것을 깊이 근심하며 반드시 망국(亡國)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뒤 세도가 무너져 공이 염려했던 대로 되자 식자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공의 평생의 본말이 대략 이와 같았다.
약관에 이미 도(道)를 추구하려는 뜻이 있어 날마다 사서(四書), 《근사록(近思錄)》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 관련 여러 서적을 가지고 침잠(沈潛)하여 완미(玩味)하고 연구하였으며, 의혹이 있으면 매번 첨지(籤紙)를 붙여 표시를 해 두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보아, 붙여 둔 첨지를 모두 제거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면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으나 일찍이 남들과 논설하는 적도 없었고 또한 글을 지어 남에게 보인 적도 없었다. 공이 학문을 할 때는 온전하게 내면으로 마음을 쏟아, 마음을 잡아 보전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공부를 한시도 놓은 적이 없었으며, 자신 혼자만의 거처에 있을 때 더욱 힘써 삼갔다. 말년에 이르러 더욱 안온(安穩)하고 장중(莊重)하여 완전하게 덕을 이루었으니, 공의 공부가 순수하고 독실했던 까닭으로, 단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부인(貞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감찰 원지(元之)의 따님이고, 영의정 두수(斗壽)의 증손녀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였으며, 청빈함을 편히 여기고 시어머니를 잘 섬겼으며, 남편의 덕과 짝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병인년(1686, 숙종12)에 졸하니,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빈(鑌)이니 생원시에 장원하고 안산 군수(安山郡守)를 지냈는데, 상례(喪禮)를 치르다 죽어 칭송을 받았다. 차남은 선(銑)이니 여산 군수(礪山郡守)를 지냈고 청백한 집안의 전통을 이었다. 조정에서 장차 발탁하여 쓰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마침 병으로 졸하니, 사람들이 애석해하였다. 삼남은 심(鐔)이니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고, 현재 영천 군수(榮川郡守)이다. 막내는 진(鎭)이니 뜻을 쌓고 이름을 감추어 벼슬이 교관(敎官)에 그쳤다. 사위는 구봉징(具鳳徵), 지평 이민채(李敏采), 목사 이세귀(李世龜), 승지 이진수(李震壽)이다.
안산 군수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현감 성한(聖漢), 수한(壽漢), 홍구용(洪九容), 이덕소(李德邵), 첨정 증 우의정 심호(沈浩)이다. 여산 군수는 3남을 두었는데, 태한(泰漢)은 정자(正字)를 지냈고 성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학문에 힘썼으나 불행히도 요절하였다. 항한(恒漢)은 뜻과 행실이 형에 못지않았으나 역시 잇따라 요절하였다. 막내는 사한(師漢)이다. 2녀는 윤채(尹寀)와 함릉군(咸陵君) 이극(李極)에게 출가하였다. 영천 군수의 아들은 양한(亮漢)으로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딸은 어리다. 교관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구봉징의 1남은 정명(鼎明)이고, 지평의 계자는 이명(頤命)인데 판서이고, 목사의 1남은 광좌(光佐)인데 장원급제하여 응교(應敎)이다. 승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겸(道謙), 도순(道淳)이고, 사위는 조성수(趙星壽), 신최언(辛最彦)이다.
성한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광수(光秀), 용수(龍秀)이고, 사위는 송호손(宋好孫), 유계기(兪啓基)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심호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그다음은 어리다.
내외의 손과 증손이 수십 인이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과 나의 선인(先人)은 어려서부터 친분이 깊었다. 내가 시골에 숨어 사는 탓에 비록 한 번도 배알하지 못하였으나, 또한 외람되이 공의 인정과 장려를 받았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부친상을 당해 관(棺)을 모시고 교산(交山)에 반장(返葬)하였는데, 공이 마포(麻浦)의 강가로 나와 조문하였고, 그 이듬해 공도 별세하였다. 아, 이제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러 아들들이 처음 명문(銘文)을 부탁하자 사양하고 감히 경솔하게 떠맡지 않았는데, 수년 동안에 다시 서로 연이어 세상을 떠나 지금은 단지 셋째 아들 심 대숙(鐔大叔)과 장손인 부여 현감(扶餘縣監) 성한보(聖漢甫)가 생존해 있을 뿐이다.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어찌 이리도 어긋날 수 있는가. 공의 여러 아들들과 손자 태한이 각자 공의 말과 행실, 뜻과 사업을 기술하였고, 사위인 목사군(牧使君)이 다시 모아 매우 자세한 행장을 지었다. 대숙이 거듭 이전에 청했던 명문을 부탁하는데,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아, 공의 명문을 짓는 데 무엇이 부끄러우랴. 단지 나의 식견이 얕고 글솜씨가 변변치 못하여 명현(名賢)의 덕업(德業)을 칭술하기에 부족할 따름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는 백행의 으뜸이고 / 孝首百行
성은 만사의 근본이라 / 誠本萬事
아 구옹께서는 / 於惟久翁
효와 성 두 가지를 갖추었도다 / 乃有諸己
새를 희롱하던 노래자의 효심으로 / 萊子弄雛
증자의 양지를 실천하였고 / 曾輿養志
염계의 고고한 풍모로 / 濂溪高風
속수의 성실한 행동을 본받았었네 / 涑水實地
뛰어난 문학으로 조정에 올랐으나 / 文學登朝
어진 이의 벼슬길이 뒤늦게 트였으니 / 賢路晩亨
명성은 피하여도 높아만 갔고 / 名避愈隆
작위는 사양해도 더해만 갔네 / 爵辭愈嬰
떠나고자 하나 모친이 연로하시고 / 欲去親老
머물고자 하나 세상이 어지럽구나 / 欲留世艱
녹봉 받아 봉양하는 신세였지만 / 身縻祿養
물러나 한거함에 뜻을 두었네 / 志在退閑
얼굴빛은 기쁘고 온화했지만 / 怡愉于色
마음속은 근심하고 탄식했으니 / 憂歎于中
이러한 충심을 가슴에 품고 / 抱玆耿耿
결국 일생을 끝마쳤네 / 以至於終
백성을 이롭게 하려던 초심 / 致澤初心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였지만 / 雖未克展
그래도 소장은 아직도 남아 / 猶有章疏
공의 대략을 살필 수 있네 / 可以略見
아 공의 평생이 / 嗟公平生
은은하게 날로 드러나도다 / 闇然日章
한편으로 존양하고 한편으로 성찰함을 / 一存一省
세상 떠날 때까지도 잊지 않았네 / 至死不忘
어진 자손이 있어 / 有賢子孫
공의 덕을 능히 찬술했으니 / 克述公德
내가 외람되이 명을 지음에 / 我僭作銘
부디 어긋남이 없길 바라네 / 庶幾無忒


 

[주D-001]감히 …… 않는다 : 《예기(禮記)》 〈방기(坊記)〉에 “부모가 살아 계시면 자식은 감히 그 몸을 마음대로 하지 않으며, 감히 그 재산을 사사로이 쓰지 않는다.[父母在 不敢有其身 不敢私其財]” 하였다.
[주D-002]이필(李泌)과 안수(晏殊) : 이필(722~789)은 당(唐)나라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장원(長源)이다. 7세 때부터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고 궐에 들어가 기동(奇童)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新唐書 卷139 李泌列傳》 안수(991~1055)는 송(宋)나라 때의 문신으로 자는 동숙(同叔)이다. 진종(眞宗) 때에 신동(神童)으로 부름을 받아 시험을 치르고 진사(進士)의 자격을 받았다. 《宋史 卷311 晏殊列傳》 두 사람 모두 신동으로 이름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주D-003]계로약명(溪路藥名)의 시 : 박장원(朴長遠)이 지은 〈유삼각산문수사(遊三角山文殊寺)〉를 가리킨다. 그 시에 “나무꾼에 기대어 산골짝 길을 물어보고, 승려들과는 때로 약초 이름을 논하였네. 삼경에 선방 창 아래에서 잠을 깨니, 소나무와 계수나무 꽃그늘이 학 소리에 얽히었네.[溪路却憑樵客問 藥名時與寺僧評 三更睡覺禪窓下 松桂花陰繞鶴聲]”라고 하였다. 《久堂集 卷1 遊三角山文殊寺, 韓國文集叢刊 121輯》
[주D-004]만퇴(晩退) 신공(申公) : 신응구(申應榘:1553~1623)를 가리킨다.
[주D-005]서도(西都) : 평양(平壤)을 가리킨다.
[주D-006]종용당(從容堂)의 고사(故事) : 남송(南宋) 사람 조묘발(趙卯發)이 지주(池州)의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 원(元)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군대를 모아 대항했으나 막지 못하자, 부인 옹씨(雍氏)와 함께 자신의 서재인 종용당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450 趙卯發列傳》 심현(沈誢)도 1637년(인조15) 1월에 청(淸)나라 군대가 강화(江華)를 함락하자 부인 송씨(宋氏)와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仁祖實錄 15年 1月 22日》
[주D-007]사천(史薦) : 신임 사관(史官)을 뽑을 때에는 반드시 전임 사관의 천거를 통해 선발하는데, 이를 사천 또는 비천(祕薦)이라고 한다.
[주D-008]대군(大君) :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을 가리킨다.
[주D-009]유영(柳潁) : 대본에는 유영의 ‘潁’이 ‘頴’으로 되어 있으나 《문과방목(文科榜目)》, 《인조실록》 등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
[주D-010]정일두(鄭一蠹) …… 때 :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1494년부터 1498년까지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재임하였다.
[주D-011]사국(史局)에 …… 포상(褒賞)하였다 : 선배 사관(史官)인 사성(司成) 조복양(趙復陽)이 민점(閔點), 김징(金澄), 이기발(李起浡) 등을 사관에 천거하는 것을 별다른 이유 없이 허락하지 않자,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조복양과 현임 사관들이 당론(黨論)을 앞세워 세 사람을 배척하였다고 판단하고 조복양 등의 추고(推考)를 청하였다. 이 일로 인해 동료들의 논박을 받은 서원리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상벌을 내리는 권한이 전하의 손 안에 있지 않은 듯하니, 어찌 매우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붕당(朋黨)의 편파(偏頗)가 극심하여 친근한 사람이 아니면 한 사람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니, 평소 붕당의 폐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효종이 서원리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집의에 특진시켰다. 《孝宗實錄 4年 8月》
[주D-012]방상(方喪) : 임금이 죽었을 때에 부모상에 견주어 삼년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
[주D-013]동춘(同春) 송공(宋公) : 송준길(宋浚吉:1606~1672)을 가리킨다.
[주D-014]시남(市南) 유공(兪公) : 유계(兪棨:1607~1664)를 가리킨다.
[주D-015]새서(璽書)를 …… 고사(故事) :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태수(太守) 중에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으면, 옥새(玉璽)를 찍은 표창을 내려 장려하고, 직질(職秩)을 올려 주고 상금을 주었으며, 그들의 작위가 관내후(關內侯)에 이르렀을 때 공경(公卿)의 자리에 결원이 생기면 표창을 받은 태수 가운데서 선발하여 차례로 임용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資治通鑑 卷24 漢紀》
[주D-016]당시에 …… 있었는데 :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수록할 관원의 명단을 심사할 때에 본관록(本館錄)에서 탈락했던 자가 도당록(都堂錄)에 끼이게 된 것은 사사로움이 개입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아울러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지 못한 대사헌 박장원과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의 잘못을 논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뒷걸음치는 박장원 같은 자는 본래 꾸짖을 것도 없다.[退步如朴長遠 固無足責]”라는 구절이 있다. 《顯宗實錄 3年 6月 10日》
[주D-017]마땅히 …… 이유 : 박장원은 상소에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이유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재주가 없는 사람이 직책을 맡아 일을 그르치게 된다. 둘째, 항상 모친의 병환을 걱정해야 하므로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셋째, 몸이 쇠약하고 정신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넷째, 과분한 복은 재앙을 부른다. 《顯宗實錄 3年 6月 12日》 앞서 서필원의 상소에서 박장원을 가리켜 뒷걸음친다고 표현한 것은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과감히 지적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물러나 움츠린다는 의미인데, 박장원은 이를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의미로 잘못 파악하여 상소를 올린 것으로 보이며, 명재도 이 부분을 박장원의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박장원이 서필원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실록에 수록된 박장원의 상소에 대한 사관(史官)의 논평을 통해 알 수 있다.
[주D-018]문성(文成)과 문간(文簡) : 이이(李珥:1536~1584)와 성혼(成渾:1535~1598)의 시호(諡號)이다.
[주D-019]왕 문정(王文正)이 …… 대하니 : 왕 문정은 송나라의 재상 왕단(王旦:957~1017)으로, 문정은 시호이다. 그는 사람을 잘 감식하여 발탁하였고, 인사(人事)와 관련된 청탁을 들어주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일찍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장사덕(張師德)이 왕단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두 차례 그의 집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할 사람을 논의할 때에 왕단이 장사덕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여러 번 임금에게 장사덕이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선비의 덕행이 있다고 아뢰었는데, 뜻밖에 나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왔다. 장원급제를 하여 영예로운 진로가 본래 보장되어 있으니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만약 더욱 명리(名利)를 추구한다면 연줄도 없이 관직에 나아가는 자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하였다. 《宋史 卷282 王旦列傳》 박장원이 이조 판서로 재직하면서 왕단처럼 인사 청탁을 물리치고 공정하게 인재를 발탁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주D-020]매복(枚卜) : 의정(議政) 중에 결원이 생겼을 때, 왕명에 따라 시임(時任) 의정들이 빈청(賓廳)에 나와서 그 후보자로 원임(原任) 의정의 좌목(座目)을 써서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입계(入啓)하는 일을 말한다. 시임이 없을 경우에는 원임들이 입시하여 전단자(前單子)에 낙점을 받았고, 원임 가운데 적임자가 없을 경우에는 새로운 인물로 추가하여 뽑았다. 《六典條例 吏典 議政府 枚卜》 《銀臺條例 吏攷 大臣》
[주D-021]사소한 …… 않으니 : 1664년(현종5) 9월에 이조 판서 박장원이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가자(加資)해야 할 사람에 관한 초기(草記)를 갖추어 아뢰면서 잘못하여 가자 망단자(加資望單子)까지 함께 올리는 실수를 범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이 엄명을 내려 특별히 박장원을 추고하게 하니, 박장원이 사직소를 올리고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顯宗實錄 5年 9月 9日》
[주D-022]양사에서 …… 찬축(竄逐)하였다 : 1666년(현종7)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인이 청나라에서 몰래 염초(焰硝)를 매입한 일과 청나라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안추원(安秋元)이라는 사람을 감추어 준 일을 조사하였다. 청나라 사신들이 안추원의 일을 특별히 문제 삼아 조선의 대신(大臣)을 사율(死律)로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현종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사율을 감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해 9월에 허적(許積)이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대신의 감죄(減罪)를 주선하였는데, 청나라에서는 감죄의 대가로 벌금을 바치도록 하였다. 1667년 1월에 허적이 이러한 결정을 받아 돌아오자, 집의 이숙(李䎘), 장령 박증휘(朴增輝)ㆍ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ㆍ이하(李夏), 헌납 김징(金澄), 정언 조성보(趙聖輔) 등 7명의 대간(臺諫)들이 합계(合啓)하여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임금이 혼자 잘못을 책임지고 나라가 치욕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우의정 허적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은 내막도 자세히 모르고 함부로 대신을 탄핵했다고 하여 7명의 대간을 모두 원찬(遠竄)하였다.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주D-023]사마광(司馬光)이 …… 권하였습니다 :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즉위하여 사마광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자 사마광이 사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로서 인(仁)과 명(明), 무(武)의 세 조목을 제시했던 것을 가리킨다. 《宋大事記講義 卷14》
[주D-024]사서(史書)를 …… 갔다 : 1669년(현종10) 3월 초에 지춘추관사 박장원과 대교(待敎) 이인환(李寅煥)을 강화(江華)에 보내 실록(實錄)에서 정릉(貞陵)에 관한 사적(事跡)을 고출(考出)하도록 하였다. 《顯宗實錄 10年 3月 2日》
[주D-025]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였는데 : 신덕왕후는 태조(太祖)의 둘째 부인인 곡산 강씨(谷山康氏)로서, 능호(陵號)는 정릉(貞陵)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사후에 후궁(後宮)의 지위로 격하되어 종묘에도 부묘되지 못하였는데, 1669년(현종10) 1월에 송시열(宋時烈)이 건의하여 능이 복구되었고 그해 9월에는 종묘에 부묘되었다. 《顯宗實錄 10年》
[주D-026]순릉(純陵) :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부인인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의 능이다.
[주D-027]정일(精一)의 16자(字) :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선위(禪位)할 때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말한 16자를 가리킨다. 《書經 虞書 大禹謨》
[주D-028]숙부 :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박정(朴烶:1600~?)을 가리킨다.
[주D-029]새를 …… 효심 : 초(楚)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가 70살이 되어서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서 새끼 새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고 한다. 《山堂肆考》
[주D-030]증자(曾子)의 양지(養志) : 증자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고, 상을 물릴 때에는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고 싶은지를 여쭈었다. 그리고 증석이 “남은 음식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는데, 맹자가 이러한 증자의 행동을 가리켜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다.[養志]”라고 칭송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D-031]염계(濂溪) : 송나라의 명유(名儒) 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호이다.
[주D-032]속수(涑水) : 송나라의 명신(名臣) 사마광(司馬光:1019~1086)을 가리킨다.

 

久堂先生集卷之一

三角山文殊寺 a_121_012c



獨上高臺屬晩晴。雲開俯瞰漢陽城。天邊波浪長江走。霜後精神列嶽獰。溪路却憑樵客問。藥名時與寺僧評。三更睡覺禪窓下。松桂花陰繞鶴聲。


금선은 불타(佛陀)의 별칭. 문수는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Mañjunrī),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는 보살로 알려진다. 보현은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로,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곁에 시립하여 부처의 이(理)ㆍ정(定)ㆍ행(行)의 덕을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한성부(漢城府)



동쪽은 양주(楊州) 경계까지 10리, 남쪽은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은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양주 경계까지 10리.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盖鹵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都城)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封疆]을 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한양군(漢陽郡)이라 고쳤다. 《삼국사》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고,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하였는데, 지금 〈본기(本紀)〉를 상고하여 보니, “백제 시조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고, 성을 한강(漢江) 서북쪽에 쌓고,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38년에는 경내(境內)를 순찰ㆍ안무(按撫)하였는데, 북쪽으로 패하(浿河)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산은 온조왕 때부터 이미 백제 땅이었으며, 근초고왕이 남한산으로부터 옮겨 도읍한 것인데, 어찌 근초고왕이 빼앗았다고 할 것이겠는가.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만 《삼국사》에 의하여 적고, 그 본말(本末)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으며, 또 장수왕을 자비왕(慈悲王)이라고 잘못 적었기 때문에, 여기서 위와 같이 분변하여 바로잡은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또 양주라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이름하여 해주(海州)와 함께 왕도(王都)의 좌우 2보(輔)로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치고,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降等)하여 양광도(楊廣道)에 속하게 하였으며, 문종(文宗) 때에는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진시키고, 이웃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는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 밀기(密記)에 의하면,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으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옮겨 도읍하기를 청하고, 일지[日者] 문상(文象)이 거기에 따라서 함께 주장하니, 왕이 친히 와서 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에 도성을 경영하는 그 역사[役]를 감독하게 하여 5년 만에 완성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속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라 고쳤으며, 판부사(判府事)ㆍ윤(尹)ㆍ소윤(小尹)ㆍ판관(判官)ㆍ참군(參軍)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예종조(睿宗朝)에는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으로 불렀으며 소윤을 서윤(庶尹)으로 고쳤다. 판윤 1명은 정2품(正二品), 좌ㆍ우윤 각 1명은 종2품(從二品), 서윤 1명은 종4품, 판관 2명은 종5품, 참군 3명은 정7품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에서 겸하게 하였다. 경도(京都)의 호적[口帳]ㆍ시전(市廛)ㆍ가옥ㆍ전답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橋梁)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쟁투 구타[鬪歐]ㆍ 낮순찰[晝巡]ㆍ 검시(檢屍)ㆍ차량(車輛)ㆍ사고ㆍ잃어버린 마소의 낙계(烙契 낙인(烙印)) 등의 일을 맡아 하였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성씨】 본부(本府) 한(韓)ㆍ조(趙)ㆍ민(閔)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성씨는 모두 주관 육익(周官六翼)ㆍ윤회(尹淮)의 《지리지(地理志)》ㆍ 경상ㆍ전라 두 도의 관풍안(觀風案 감사의 전임자 명부)에 의거하였다. ○ 무릇 다른 고을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 다만 본적(本籍)만을 주(註)달아 둔다. 다음에도 이에 따른다.

【형승】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漢水]에 임하였다 《고려사》에, “북쪽으로 화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평하게 펼쳐졌으며,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번화(繁華)하다.” 하였다. 산하가 겹겹이 둘러 싸이고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바르고 고르다.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있다. 북악(北岳)이 뒤에 솟았으니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봉(南峯)이 앞에 높이 솟았는데 성곽이 사면으로 둘렀다. 모두 예겸(倪謙)의 〈등루부(登樓賦)〉에 있다. 범이 걸터 앉고 용이 서렸으니, 금성 천부(金城天府)로다. 모두 권우(權遇)의 시에 있다. 8도가 관활되고 겹으로 된 문[重門]에 딱다기[柝]를 치네. 장영(張寧)의 〈대평관(大平館)〉이란 시에 있다. 하늘이 만든 견고(堅固)함이로다. 권근(權近)의 시에,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漢水]는 철철 흐르니, 하늘이 만든 견고함이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장대하도다. 우리나라 일어나 천명 받고 한양에 도읍 정하자, 점쳐 보니 길(吉)하여 길이 좋으리로다.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 세차게 흐르는데, 하늘이 만든 땅 평탄하게 펼쳐 넓도다. 도로와 거리 고른데 배와 수레 모두 이르니, 도읍을 여기에 정하자 원근에서 모두 기뻐하네. 흐르고 흐르는 한강수 나라 도읍 둘렀는데, 지기[風氣]가 모인 곳에 둘러 싸여 완전하도다. 왕이 와서 자리 잡자 신민들 안정되었으니, 천만 년에 길이길이 삼한(三韓) 땅 진압[鎭]하리.” 하였다. 한 물은 남쪽을 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였네 권근의 시에, “한 물은 남쪽을 둘러 출렁거리며 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여 우뚝 솟았다. 중국의 번방(藩邦)이다 〈함허자(涵虛子)〉에, “이웃 나라가 모두 그 의(義)를 사모하여 서로 친해서 중국의 번방이 되었다.” 하였다.
【풍속】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에, “사람들이 모두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에 돈독하여, 중국의 풍속을 양성(釀成)하였다.” 하였다.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다 위와 같은 글에,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기 때문에,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고장이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한다.” 하였다. 천성이 유순하다 《후한서(後漢書)》에,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과 다르므로 공자가 가서 살려고 하였다.” 하였다. 백성과 물산이 크게 이루어졌다 예겸의 〈등루부〉에 있다. 노(魯) 나라처럼 어진 이가 많다 장영의 〈대평관〉이 시에 있다. 집집마다 순후[淳厖]하다 김식(金湜)의 시에,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점점 중화와 같아지니, 집집마다 순후하여 모두 봉해 줄 만하다.” 하였다. 시서(詩書)로 선비를 가르친다 김식의 시에, “폐백[玉帛]으로 천자(天子)에게 조회하니 마음이 간절하고, 시서로 선비를 가르치니 뜻이 화평하다.” 하였다. 의관으로 예양(禮讓)한다 김식의 시에, “집집마다 농사 짓고 누에[桑]치는 직업이며, 곳곳마다 의관으로 예양하는 모습이네.” 하였다. 시서(詩書)의 숲[藪]이다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조선은 동번(東藩) 중의 한 나라가 되었는데, 예의의 구역이요, 시서의 숲이므로, 특별히 첫째로 꼽는다.” 하였다.
【산천】 삼각산(三角山) 양주(楊州)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ㆍ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 고려 오순(吳洵)의 시에,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만 겹인고. 전녀에 누대(樓臺)에 올랐던 곳 추억(追憶)하니, 날 저문 절간에 종 소리 두어 번 울리네.” 하였다.
○ 고려 이존오(李存吾)의 시에,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大氣)에 구름 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長劒)이 꽂혔는데, 가로 보니 들쭉날쭉 푸른 연꽃 솟았네. 언젠가 두어해 동안 절간에서 글 읽을 제, 2년간 한강 가에 머물렀네. 누가 있어 산천이 무정타고 말하던가. 이제 와서 서로 보니 피차에 처량하네.” 하였다.
○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소년 시절 책을 끼고 절간에 머무를 제, 돌다리에 뿌려지는 샘물 소리 고요히 들었네. 멀리 보이는 서쪽 벼랑에 밝은 빛 반짝반짝, 두어 마디 종소리 저녁 햇빛 향해 치네.” 하였다.
○ “세 봉우리 깎아 내민 것 아득한 태고적이니, 신선의 손바닥이 하늘 가리키는 그 모습 천하에도 드물리. 소년 시절에 벌써부터 이 산의 참모습 알았거니, 사람들 하는 말이 등 뒤엔 옥환(玉環 양귀비) 살쪘다고 하네.” 하였다.

백악(白嶽) 도성(都城) 안, 궁성(宮城) 북쪽에 있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다. 타락산(酡酪山) 도성 안 동쪽에 있다. 무악(毋嶽) 도성 서쪽에 있다. 사현(沙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다. 녹반현(綠礬峴) 사현 북쪽에 있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한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 남쪽에 있는 것을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것을 작은 설마라고 한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水口)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지기(地氣)를 함축시키기 위하여서인 것 같다.
잠두봉(蠶頭峯) 시속에서는 가을두(加乙頭)라 부르고,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서술(敍述)에, “서호(西湖)는 도성과의 거리가 10리도 못 되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르러 형승(形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의 북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鰲頭]같으며 혹은 잠두(蠶頭)라고 한다. 언덕이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는데, 형세가 또 높아서 호수 가운데의 승경(勝景)을 모두 볼 수 있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용두(龍頭) 제일봉에 걸어서 오르니, 풍광이 한이 없는데 흥인들 다 할 수 있으리. 사방의 산과 물은 시정(詩情) 밖인데, 만리 건곤(乾坤)은 한 눈에 들어오네. 마을 집들은 북쪽으로 연이어 성곽에 가깝고, 고깃배는 서쪽으로 가매 바다 어귀 통했네. 주인이 술자리 마련하고 손을 자주 만류하니, 저녁 해가 어느덧 붉은 빛 사라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닻줄을 내리고 나룻가 산봉우리에 올라가니, 기이한 풍경 더욱더 많고 생각은 끝이 없네. 평생의 버릇[氣習]은 삼상(三上)에서 시 지었는데, 오늘 다시 호탕한 마음[豪狂] 술 한 번 취하게 마셨네.[酒一中] 산세(山勢)가 두루 감쌌는데 하늘은 저 멀리 높고, 강물 소리 컸다 작았다 바다의 조수와 통하였네. 자리에 앉은 이들 모두 다 신선 손인데, 지척간의 동화(東華)가 연홍(軟紅 홍진(紅塵))에 가려 있네.”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양화도 한 물굽이 겨우 지나서, 용두봉 저 위로 다시 올라가네. 높은 데 올라 장안(長安)길 바라보니, 가는 저 구름 빌려 이내 몸 싣고 돌아갈거나.” 하였다.
○ “용산에 함께 올라 저물녘 갠 풍경 바라보니, 백구(白鷗) 날아드는 저 물가에 배들 많이 매여 있네. 멀리 포구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열 두 봉우리에 저 머리에 달이 마침 밝아 오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도성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인데, 혹시나 기심(機心 술책(術策)을 부리는 마음)있어 갈매기를 친할 수 없으려나. 비가 오려는지 구름은 희묽게 번져 가고, 바람 소리 세찬데 물은 길게길게 흐르네. 산 위에 취해 누우니, 닭의 울음 정오를 알리고, 시 짓느라 세월도 잊었는데 또 보리가을[麥秋] 닥쳐 왔네. 반월(半月) 한가로움 오히려 즐거운데, 하물며 신세를 창주(滄洲 강호(江湖)와 같은 말)에 붙였음에랴.” 하였다.
○ 권건(權健)의 시에, “배 안에서 잠이 깨니 술기운 가시는데, 서늘한 밤 바람 이슬 옷에 스며 차구나. 우연히 흥이 나서 곤한 줄 모르고서, 달지고 연기 비낄 제, 느릿느릿 배 저어 돌아오네.” 하였다.
○ 박은(朴誾)의 시에, “사해(四海) 문장 소자첨(蘇子瞻)은, 우주(宇宙)간에 그 기개 다 용납하지 못하였네. 이름이 높으면 화(禍)가 되나니, 시구(詩句)를 헐뜯어서 모두 죄안(罪案)에 넣었네. 3년간이나 동파(東坡)에서 와력(瓦礫)을 주었는데, 그림자뿐인 외로운 신세 누가 이 몸 머물게 하려나. 촌야(村野)의 할머니가 만나서 하는 말이, 옛날의 부귀(富貴)는 봄꿈이 깨었다네. 선생은 아무 것도 개의(介意)치 않고, 높이 누워 문장만을 즐겼다네. 때로 가다 산수(山水)에 흥이 나면, 집을 나가 놀기도 자주 했네. 적벽강(赤壁江) 가을 칠월, 기망(旣望 16일) 달빛 더욱 맑았네. 일엽 편주에 흰 이슬 비꼈는데, 나는[飛] 신선을 끼고 먼 공중에 노닐꺼나. 뱃전 두드리며 노래 불러 조공(曹公 조조(曹操))에게 화답하는데, 퉁소 소리 애원(哀怨)하여 곡조가 되지 않네. 바가지 술잔 기울이며 손과 주고 받거니, 취해 누워 동방이 밝은 줄 몰랐네. 당시의 강신(江神)이 호방한 문장 도와주어, 몇 글자 우연히도 인간 세상에 남았네. 지금껏 펄펄 날아 구름 위에 오를 듯, 내 전날 읽어 보고 다시금 세 번 탄식했다네. 금년은 다행히도 같은 임술(壬戌), 좋은 놀이 고금(古今)이 일반이네. 서호(西湖)에서도 매우 기이한 누에 머리[蠶頭] 그 봉우리, 친구들아 가보지 않으려나. 우리 친구 세 사람 함께 웃는데, 따라온 두 손은 와서 같이 웃네. 마포(麻浦)로 나가서 작은 배 띄우니, 봄 강물이 처음 불어 한창일세. 가벼운 물결 일지 않고 바람 잔잔하니, 어느덧 좋은 경치 맑은 놀이 알맞았네. 사화(士華 남곤(南袞)의 자(字))의 얼굴에는 흥이 넘치는데, 좌중(座中)에 다리 뻗고 앉아[槃礴] 그 자리엔 관도 쓰지 않았네. 술 한 말 마시며 글 5백 자 쓰는데, 글자마다 용사(龍蛇)처럼 꿈틀거리니 그 누가 있어 붙들어 매리. 천 년 후에 알아주는 이 있는 줄 알면, 하늘 위의 소선(蘇仙 소동파) 응당 감탄하리. 황혼에 배를 띄워 흐르는 물빛 치며 가니, 서쪽으로 보이는 넓은 물결 끝이 없네. 사공이 돛대 멈추고 나에게 하는 말이, 잠두봉 지나면 물결 다시 사납다네. 어촌에 닻을 매고 장사배[商船]에 의지하니,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네. 저 달이 너무 밝아서 하늘이 밝은 달 아끼는 듯, 일부러 엷은 구름[微雲] 보내어 은하수에 점을 찍네. 버드나무들 저 멀리 깃발[旌纛]인 양 서 있고, 등불은 점점이 별처럼 빛나네. 시원한 비 서쪽에서 소리 내며 뿌리니, 큰 고기들 물결 가르며 모두들 도망해 숨누나. 이때에 옷을 여미고[擁褐] 술잔 돌리기 재촉하니, 그대의 좋은 글귀 폭탄 터지듯 사람을 놀라게 하네. 시령(詩令)을 지금 다시 내는데, 명은 엄하고 재주 모자라니 나는 도망치려네. 술잔 들고 달에게 물으며 소선(蘇仙)을 불러 보니, 공중에서 바람 타고 날개 돋칠 듯. 동방은 밝으려 하고 물기운 넘치니, 천지가 혼돈(混沌)해 개벽(開闢)하는 처음 같네. 돛대를 치며 다시 저어 연무(煙霧)를 뚫고 가니, 풀빛은 멀고 모래판은 긴데 까마귀 황새 어지러이 날아가네. 양화도 나룻가에 종일토록 비오니, 배 밑에서 맑은 시가 구슬처럼 빛나고 많네. 돌아와선 10일간이나 문 닫고 누웠는데, 머리 돌려 놀던 곳 생각하며 부질없이 팔을 걷네. 영웅들 흘러가고 천지는 늙었는데, 소선(蘇仙) 죽은 뒤에 해가 몇 번 바뀌었나. 옛부터 인간사가 매양 이러한 것인데, 우리 친구 벌써 백 년을 반이나 살았네. 오늘의 이 즐거움 헛되이 하지 말아, 흥이 나면 술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보세.” 하였다.
○ “성긴 비 강을 지나매 급한 소리 나는데, 작은 등불 달 대신 외로이 밝아 있네. 스스로 우습구나 천지간 하루살이[蜉蝣] 사는 듯, 만경창파에 갈대 하나[一葦] 비꼈는 듯. 이날 우연히 만나 애오라지 술을 마시나니, 옛 사람 보지 못하고 이름만 들었거니, 풍류(風流)는 천 년 만에 우리들에게 돌아왔는데, 비루하고 추솔(麤率)한 말 두서도 없어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강머리에 달 솟아 오르자 물결은 밤에도 희어, 우리들로 하여금 공명(空明 고요한 물에 비치는 명월(明月)의 경치)을 치게 하네. 시를 지으니 퉁소 화답 필요 없고, 꿈을 깨니 외로운 학이 강을 질러 지나는 데 놀랬네. 세상일 지금에 우리들 늙으려고 하는데, 강물은 예로부터 소리만 남았구나. 내 어찌 짧은 글로 신선의 붓을 따르리, 응당 저 하늘 구만 리 밖에 있으리라.” 하였다.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國都)의 동쪽 들[東郊]이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므로 울타리를 둘러쳐서 나라 말[國馬]을 기른다. 넓이가 34리이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지(蓮地)라고 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남쪽에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개천(開川) 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ㆍ목멱산(木覓山)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세종 26년에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도성 안 개천에 더러운 물건을 던지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기를, “신이 살피건대, 《동림조담(洞林照膽)》이란 책은 범월봉(范越鳳)이 지은 것인데, 월봉은 오계(五季 오대(五代)) 때의 한 술사(術士)였습니다. 그 중에서 말한 바, ‘명당(明堂)에 냄새 나고 더러우며, 불결한 물이 있으면 패역 흉잔(悖逆凶殘)의 징조이다.’한 것은 장지(葬地)의 길흉을 말한 것이요, 도읍지의 형세에 대해서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월봉의 의견으로는, 신도(神道)는 정결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물이 불결하면 신령(神靈)이 불안하여 그러한 징조가 있다는 것이요, 국가 도읍지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도읍하는 곳을 말씀드리면, 인가(人家)가 번성해지니 이미 인가가 번성해지면 자연히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쌓이니, 반드시 통하는 개천과 넓은 내가 있어, 그 사이를 가로 세로 흘러 그 나쁜 것을 떠내려 보낸 후에라야만 맑게 할 수 있는 것이니, 도성에는 그 물이 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도읍지의 물을 한결같이 산간의 청정(淸淨)한 물과 같이 하려 한다면, 이것은 사세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치로 말하더라도 사생(死生)이 길이 다르고 신(神)과 사람이 처지가 다른데, 무덤[塜地]에 대한 일을 어찌 국가 도읍지에 해당시키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상소를 보고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효첨의 의논이 정직하다.” 하고, 드디어 이현로의 말을 쓰지 않았다.

중량포(中梁浦) 도성 동쪽 15리에 있는데, 물이 양주(楊州)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豆毛浦) 상류에 있다. 도요연(桃夭淵) 살곶이[箭串]에 있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
한강(漢江)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사전(祀典)에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라 칭하고,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昌水)와 합하며,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한다. 광주(廣州) 땅에 이르러 도미진(度迷津)이 되고, 광나루[廣津]가 되며,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 나루가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 노돌)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나가 서강(西江)이 되고,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고,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는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하였다.
○ 고려조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강이 머니 하늘이 나직이 붙었고, 배가 가니 언덕이 따라 옮기네. 엷은 구름은 흰 비단처럼 가로 질렀고, 성긴 비는 실처럼 휘날리누나. 여울이 험하니 흐르는 물 빠르고, 봉우리 많으니 산은 끝나 더디구나.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자주 머리 돌리는 것은, 바로 멀리 고향을 바라봄일세.” 하였다.
○ 고려조 중 선탄(禪坦)의 시에, “혼자 강루(江樓)에 오르니 조망(眺望)도 좋아, 모래터에서 배 기다리는데 저녁 조수[晩潮] 돌아 오누나. 외로운 돛대 지나는 밖에 청산이 끝나고, 한 쌍의 새 돌아가는 가에 흰 빗발이 오누나.” 하였다.
○ 고려조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멀리 월악(月嶽)이 중원(中原 충주(忠州))에 비꼈는데, 한강(漢江)물이 거기서 발원(發源)되었네. 도도히 흘러 남국의 강기(綱紀)로 중요한 나루터인데, 푸른 물결 천길 속에 이무기와 자라[蛟龜]도 잠겨 있다네. 오는 소 가는 말 날마다 다함 없으니, 나루터에서 간간이 사공을 걱정시키네. 내 옛날 강정(江亭)에 올랐을 때, 기둥에 기대 서서 가을 바람 읊었다네. 광성(廣城)은 동쪽에 둘러있고, 화산(華山)은 서쪽에 솟았네. 바다와의 거리 수백 리이니, 썰물ㆍ밀물 어찌 통하리. 어찌하여 섬 오랑캐[島夷 왜구[倭]]는, 나는[飛] 저 기러기처럼 빠르게도 다니나. 날뛰며 이곳 지날 땐, 지키는 군사들 긴 활 버렸다네. 지금도 부로(父老)들 눈물 길게 흘리며, 사람 만나면 태평시절 즐겁던 일 이야기하네. 예성(禮成) 항구 여기가 해문(海門)인데, 고기잡이배 장사배들 베짜는 듯 드나들었네. 아, 언제나 그 옛날이 다시 올까.” 하였다.
○ 고려조 이곡(李穀)의 〈얼음 위로 한강을 건너며〉 라는 시에, “모래판에 지나는 길손 행색이 쓸쓸하니, 몇 번이고 빈 처마 밑에서 북두성 쳐다보았는고. 한밤중 세찬 바람 불어서 집 무너뜨리고, 흐르던 그 강물 얼어서 다리가 되었네. 잠깐 사이에 사람들 조심하니, 짧은 거리에도 말 잘 걷는다 자랑 말게. 위태한 길 지나고서 도리어 스스로 웃기를, 돌아가서 고기잡고 나무하면서 늙은 것만 못하리.”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말 타고 성곽을 나가, 고삐 멈추고 낚시터로 내려가네. 긴 강엔 새 한 마리 나는데, 석양에 돛대 두어 개 오누나. 촌가 나무꾼들은 여울에 의지해 모이는데, 초가집들은 언덕 곁에 벌였네. 한평생 호해(湖海)의 마음, 물 건너고서 도리어 배회(徘徊)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기문에, “조선 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거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금강(金剛)ㆍ오대(五臺) 두 산에서부터 발원(發源)한 물이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에 임하여 누(樓)가 있는데 한강루(漢江樓)이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14일인데,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와 한성부윤(漢城府尹) 김하(金何)가 나와, 황문(黃門) 사마(司馬 사마순(司馬恂)) 선생을 청하여 가서 놀았다. 이에 말을 타고 남대문으로부터 나갔는데, 지원(知院)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및 도감(都監)의 여러 분들이 함께 갔다. 구불구불 산길과 들길 사이를 지나, 날이 정오가 거의 되어서야 누 위에 이르렀는데, 국왕이 미리 보낸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계전(李季甸)과 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잔치를 벌이고 맞이하였다.
난간에 의지하여 둘러보니 강산의 좋은 경치가 모두 자리 사이에 들어왔다. 술이 돌아가기 시작한 다음, 내가 즉석에서 시 3장(章)을 지었는데, 도감에서 먼저 화려한 현판[華扁]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기다리다가, 나에게 지은 시를 써서 누 위에 걸라 하기에, 내가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는데 한성부윤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작은 배가 누 아래 메여있으니 한 번 타고 놀아보지 않겠소.’ 하기에, 내가 곧 자리를 치우게 하고 걸어서 배 가운데로 올라갔다. 배는 3척을 연결하였고, 가운데에 작은 집[小軒]을 세우고 띠풀로 덮었는데, 아래는 6, 7명이 앉을 만하며, 걸상을 만들었는데 자못 높았다. 내가 말하기를, ‘강산이 이러한데 도리어 처마뿔[簷角]에 가리어지니, 어찌 나의 바라봄을 넓게 하지 않겠는가.’ 하며, 명하여 낮은 걸상으로 바꾸게 하고, 술잔을 씻고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다. 언덕을 따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몇 리를 못 가서 다시 누 아래로 돌아왔는데, 호군(護軍) 매우(梅佑)가, ‘달이 벌써 떴습니다.’ 하기에, 그만 언덕 위로 올라와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서 공조 판서와 한성부윤이 다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쯤 가면 멀리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楊花渡)라고 하는데, 대개 각도에서 오는 양곡[餫餉]이 와 닿는 곳입니다. 나루 어귀에 몇 묘(畝)나 되는 푸른 돌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뒤섞여 서서 서로 마주 향한 것 같으며,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眺望)이 좋으니, 한 번 가서 놀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다시 황문(黃門)과 함께 갔다. 거기에 도착하니, 국왕이 미리 보낸 도승지 이사철(李思哲)과 병조 판서 민신(閔伸)이 장막을 설치하고 길가에서 맞이하였다.
말에서 내려 장막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걸어서 돌 깔린 산마루로 올라가 험한 곳에서 소나무를 의지하니, 모두 나무를 얽어 난간을 만들어 기울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차려 놓은 것이 매우 성대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돛단배들이 섬 사이에 나고 들며, 언덕 너머에는 좋은 전지(田地)가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 먼 산이 중첩되어 푸른 병풍이 둘러 벌인 것 같은데, 긴 바람은 바다 쪽에서 불어와서 선들선들 옷에 부니, 호연(浩然)한 마음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뜻이 있으니, 참으로 장쾌한 구경이다. 조금 있다가 자리에 앉아, 술이 몇 순배 돌아 갔는데, 공조 판서가 말하기를, “애석한 일은 퉁소 부는 손[客]이 없어 술을 권함이 없는 것이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풍악은 없지만 술 한 번 들고 시 한 번 읊는 것으로 넉넉히 그득한 정회를 풀 수 있소.’ 하니, 모두들 한 번 웃었다. 어부가 있어 그물질하여 비늘이 번쩍번쩍하는 고기를 잡아다 바치니, 꼬리가 퍼덕퍼덕하며 소반 위에서 움직였는데 빨리 삶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성부윤이 다시 배에 오르자고 하기에, 걸어서 평탄한 산록으로 내려와 교자를 타고 물가에 이르니, 여러 사람들이 벌써 언덕을 따라 내려와서 먼저 배에 이르렀다. 배에 올라 도사려 앉아[趺坐] 술을 얼마쯤 마신 후에 물결을 따라 내려가니, 두 겨드랑이로 삿대를 젓느라 때때로 얼굴에 물이 뿌려지는데, 분주히 언덕 위에 모여 구경하는 여자들이 천 명은 되어 보였다. 황문이 ‘어째서 저렇게 모였느냐.’고 물으니 한성부윤이 말하기를, ‘먼 지방 사람이 한 번 풍경을 보고자 하여 그러는 것 뿐이요.’ 하였다.
한성부윤이 멀리 송림(松林)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안에 있는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이라 하는데, 효령군(孝寧君)의 별장으로서 역시 한 번 놀 만하오.’ 하였다. 또 서로들 배에서 내려 육지로 걸어서 정자 아래에 이르니, 국왕이 벌써 술을 보내어 와 있었다. 다시 자리를 마련하고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어두워지며, 물결이 출렁거리고 솔바람[松風]이 물결처럼 소리가 났다. 내가 말하기를, ‘날이 벌써 저녁 때가 되고 비가 오겠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만 일어나서 교자를 타고 돌아왔는데, 관(館)에 이르니 밤 누수(漏水)가 두어 각[數刻]이 되었다.
아, 땅이란 반드시 사람이 있음으로써 승지(勝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으로도 우군(右軍 왕희지)이 없었다면, 무성한 숲 긴 대나무에 불과하였을 것이며, 황주(黃州)의 적벽(赤壁)으로도 동파(東坡 소동파)가 없었다면, 높은 산 큰 강에 불과하였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내가 어찌 감히 왕희지와 소동파에 비하리요마는, 시대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나 흥취는 한 가지이니, 어찌 글로써 기록함이 없겠는가. 또 인생의 회합(會合)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아름다운 지경[佳境]도 역시 많이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조선은 바다 밖에 있으니, 비록 이 사람과 이 경치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람이 누가 능히 더불어 회합하고 만날 수 있겠는가.
이번에 내가 욕되게도 조정의 사명을 받고 나와서, 잠시나마 여러 군자들과 여기서 놀고 노래하게 되었는데, 며칠이 안 되어 이별하고 가게 되니, 이런 놀이를 계속하려 하여도 원래 될 수 없는 일인데, 이 곳을 다시 우리들이 한 번 구경하고자 한들 또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내가 붓으로 적어 잊지 않으려 하며, 때로 한 번 펼쳐 본다면 만나 놀던 즐거움이 완연하게 항상 눈에 있을 것이니,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나, 산천을 구경하고 그 고장의 풍토(風土)를 기록하는 것은, 역시 사신 직책의 당연한 일이니 만일 잔치하여 노는 것만 일삼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닐 것이다. 놀이가 있은 다음날 17일에 적는다.” 하였다.
○ 예겸의 시에, “높은 누각에 올라서 기이한 경치 마음대로 보고, 누선(樓船)을 저어 푸른 강물에 떠 있네. 비단 닻줄 천천히 매어 푸른 석벽에 배 대었는데, 아로새긴 난간 사이에 옥술병[玉壺] 자주 전해 오네. 강산은 천년토록 그 옛빛 고치지 않는데, 손님과 주인 한때에 마음껏 즐기네. 저 멀리 달 밝고 사람 간 후엔, 백구만이 날아들어 거울 같은 맑은 물결 차지하리.” 하였다.
○ 기순(祁順)의 기문에, “조선국 성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물이 있어 한강이라 하는데, 근원이 오대(五臺)ㆍ금강(金剛) 두 산에서 나와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그 경치가 그윽하고 좋기로 유명하였으며, 강에 임하여 누대가 있는데 올라가 조망(眺望)할 만하기 때문에, 전인(前人)들 중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가서 놀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성종 7년) 2월에, 내가 행인사부(行人司副) 장정옥(張廷玉)과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겨우 일을 마치자, 한강에서 놀자고 청하는 이가 있으므로 응낙하였다. 이달 26일에, 관반사(館伴使) 찬성(贊成) 노사신(盧思愼), 참찬(叅贊)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숭례문(崇禮門)으로 나가 산길ㆍ마을 길을 지나 강가에 이르니, 임금이 미리 도승지 유지(柳輊)와 부승지 임사홍(任士洪)을 보내어 잔치를 누대 위에 배설하였는데, 의정(議政) 윤자운(尹子雲), 의정 김수온(金守溫), 중추(中樞) 임원준(任元濬), 중추(中樞) 성임(成任), 판서(判書) 이승소(李承召)가 모두 있었다.
이때 오랜 비가 새로 개어서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하늘 빛과 물빛이 서로 연하여 이난(二難)사미(四美)를 겸하였다. 여기서 누대에 올라 마음대로 조망하며 술잔 들어 서로 권하는데, 참찬 서거정이 율시 두 수를 지었으므로 내가 곧 화답하고, 다시 만강홍(滿江紅 사(詞)의 이름) 한 절[一闋]을 뒤에 붙였다. 얼마 있다가 서로 잡고 배에 올라가 강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니, 주민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앞을 다투는데, 물새ㆍ들새가 날아들어 고기잡이배와 안개 낀 수면 사이에 춤추니, 역시 호화찬란한 모습을 보기를 즐거워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치를 배 가운데 벌이고 생선을 삶고 사슴 고기를 구우며, 호탕하게 마시기를 한정 없이 하였다. 술이 취하여 내가 다시 가사[辭]두 장(章)과 율시 한 수를 짓고, 장정옥도 지은 것이 있기에 또 화답하였다.
몇 리쯤 가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니 이곳은 각 도의 양곡이 모이는 곳으로서, 창고(倉庫)가 층층이 솟아 산 형세와 서로 같다. 또 몇 리쯤 가서 용두산(龍頭山)에 오르니, 산이 물가를 내려다보는데, 여러 산봉우리 중에서 특출하여 맞은편 인가와 원근 도서(島嶼)간에 나고 드는 배들의 출몰하는 것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산 위에는 먼저 장막을 치고 술자리를 벌였음으로, 뜻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시 술 두어 순배를 마시고 율시 한 수를 짓고 돌아왔는데, 성중에 들어오니 누수가 초경을 알렸다.
대개 조선은 중국과의 거리가 수천 리이므로 국가[王事]가 아니면 올 수 없으니, 한강의 놀이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놀이가 어찌 특별히 기이한 것을 찾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시와 술로 즐기고 노는 것뿐이겠는가. 강의 남쪽은 옛날 백제요 백제의 동쪽은 옛날 신라인데,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는 또 당(唐) 나라의 유적이다. 그 자취를 찾으며 그 시절을 생각하니, 회고(懷古)의 생각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내 이번 놀이가 항상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잊을까 하여 여기에 적어 둔다.” 하였다.
○ 기순의 가사[辭]에, “저 강물이여 유유(悠悠)히 흐르는데, 거마(車馬)들 강 머리로 몰려드누나. 누선(樓船)을 타고 물결 가로질러, 잔잔한 흐름을 건너누나. 풍륭(豐隆 구름신)으로 뒤따르게 하고, 비렴(飛廉 바람신)으로 앞서 인도하게 하였네. 산은 분분(紛紛)히 와서 맞이하고, 구름은 나부끼어 나를 호위하누나. 회포를 풀어 놓고 크게 노래 부르고, 술잔을 들어 지체하네. 사람 그림자 물 가운데 감도는데, 새가 하늘가에서 나네. 동쪽 언덕에서 그윽한 난초 캐고, 남쪽 물가에서 꽃다운 지초(芷草)를 캐네. 미인을 생각함이여 오지 않으니, 패물 끈을 맺으며 멈칫거리네.” 하였다.
○ 옛 나루터 웅진(熊津)인데, 봄 물결 푸름이여 맑고 맑도다. 갓 쓰고 일산 받은 이 와서 노는데, 깃발들이 구름 같도다. 고기와 용을 불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이무기와 자라를 좌우(左右)로 모누나. 물 신령 놀라 빨리 달리는데, 하백[川伯]이 읍(揖)하고 맞이해 기다리네. 신선의 술을 잔에 따르고, 기린포[麟脯]에 문어회(文魚膾)라네. 하늘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황홀하게 나는 신선세계에 오르는 듯. 저 멀리 하늘가 바라보니 아득도 하여라, 어즈버 노래 부르고 한 번 웃어보세. 날이 저물어 오래 머물 수 없으니, 배를 멈추고 길에 올라야겠네. 흰 갈매기 쌍쌍이 나누나, 어찌하면 너와 함께 세상 일 잊을꼬.” 하였다.
○ 기순의 시에, “강머리 풍경이 누선에 가득 차니, 꽃과 버들 고움을 다투는 2월 봄철일세. 돛 그림자는 나는 새와 함께 지나가고, 피리 소리 늙은 용의 잠을 깨우네. 산이 두 언덕에 잇닿으니 구름과 숲이 합쳤고, 돌이 중류에 섰으니 흰 물결 뿌리네. 동국(東國)에 와서 높이 즐긴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예사로이 시와 술에 서로 끌렸다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놀잇배 대니, 인간 세계에 별천지 있는 줄 이제야 알겠다. 하필 신선과 함께 학을 타고 놀아야 하나, 그림 그릴 것 용면(龍眠 송 나라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에게 부탁할까. 해가 자라 등에 밝으니 황금빛 물결 치는데, 바람이 용의 머리 흔드니 푸른 구슬 뿌리네. 서호(西湖)를 서자(西子)에 비하겠는데, 이 좋은 강산에 흥이 일어나는 것 어찌하리.”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명승지 찾아와 놀며 놀잇배 띄우니, 봄철 강물 새로 불어 물결이 하늘 같네. 마음껏 시 읊으며 병 가운데 경치[壺中景]인가 하였고, 몹시 취하니 물 속에서 조는 것 같네. 해 지자 산에서 내려오니 도리어 담담(淡淡)한데, 회오리 바람[橫飆] 물결을 치니 다시 옷에 뿌리네. 소동파(蘇東坡)의 풍류 이제라서 없으리. 가려다가 도리어 늦은 흥에 끌리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한강에 엷은 안개 끼어 쪽빛보다 푸른데, 그림배[畫船] 맑은 놀이 운치 있구나. 아름다운 경치 좋은 철에 해외(海外)에 머무니, 좋은 산 좋은 물이 강남(江南)에 못지 않네. 갈매기 나루 어귀에 나는데 조수는 처음 부풀고, 시가 붓 끝에 들어오니 술이 반쯤 취했네. 깊은 언덕 숲 속으로 배 저어 들어가니, 공중에 가득한 푸른 산 기운이 부슬부슬 떨어지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긴 강이 아득하여 고요히 쪽빛 오르고, 양쪽 언덕에 물결 잔잔하여 거울[一鏡] 맑았네. 하늘 밖 봉우리들은 북쪽 끝까지[朔漠] 잇닿았는데, 눈앞의 그림 같은 경치 소상강 남쪽[湘南]을 상상케 하네. 미친 바람 거친 비에 배 비껴 띄워놓고, 자리를 다가앉아 술잔 권하니 손님 모두 취하였네. 희미하고 아득하니 어느 곳에 배를 댈까, 나루터의 버드나무 실처럼 드리웠네.” 하였다.
○ 고려 배중부(裵仲孚)의 시에, “산야의 정취[野情] 나그네 생각이 함께 아득하니, 마을 다리에 말 멈췄는데 해는 저물어가네. 자주 왕래한다고 저 강물도 싫어하는 듯, 일부러 풍랑(風浪) 몰아다 나그네 옷[征衣] 적시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침침한 천지에 바람 비 몰려오니, 천산(千山) 만학(萬壑)에 파도가 솟아나네. 강물이 넘쳐서 가도 끝도 없으니, 사공들 나루 아전[津吏] 서로 보며 놀라네. 저기 저 작은 배 빈 언덕에 매어 있으니, 부러진 돛대 썩은 노로 어찌 의지할 것인가. 아 어찌하면 만 섬을 싣는 큰 배를 얻어, 저 풍랑 뚫고 넘어 화살처럼 빨리 달려 별안간에 건널꼬.”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강물이 깊어 굴을 이루었는데, 고기잡이 노랫소리에 탁영곡(濯纓曲) 섞였네. 해가 멈추니 고기 비늘 유난히 번쩍이는데, 바람이 스쳐가자 가는 물결 일어나네. 배는 끊어졌는데 쪽빛 물 멀리 아득하고, 조수가 돌아가니 거울처럼 맑고 반듯하네. 내 어찌 늘그막에 작은 배 얻어 타고, 흰 갈매기 벗삼아 한평생 지내 볼거나.” 하였다.
노량(露梁 노돌) 도성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도승(渡丞) 한 사람이 있다. 또 과천현(果川縣)에도 있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곧 고양(高陽)의 부원현(富源縣) 땅이었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上流) 지방의 세곡(稅穀)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용산 한언국(韓彦國)의 서재에서 유숙하다〉라는 시에, “두 물은 용용(溶溶)하게 흘러 제비 꼬리처럼 갈라졌는데, 세 산은 아득하게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다른 해에 만일 구장(鳩杖)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하였다. 그 시 서(序)에 이르기를, “산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屈盤]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額]에 있으며,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 두 갈래가 되고, 강 밖에는 멀리 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산자(山字) 같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용산이 반쯤 한강수(漢江水)를 베개삼았는데, 푸른 솔은 산에 가득하고 마을에는 뽕나무라네. 동네엔 닭ㆍ개 소리 나는 수십 집, 초가 지붕 기울어진 데 점심 연기 일어나네.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찬 여울 건너가, 낙화(落花) 속 빈 대청에 들어 쉬누나. 아전이 와서 밥을 올리는데 들나물 섞였더니, 뒤따라 가져오는 강의 잉어가 별미(別味)로세.” 하였다.
삼전도(三田渡) 광주(廣州) 땅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요, 도승(渡丞) 1명이 있다. 마포(麻浦 삼개) 도성 서쪽에 있는데 곧 용산강의 하류이다.
○ 성간(成侃)의 시에, “검은 구름 한 조각 푸른 하늘 나직한데, 때때로 들리는 먼 물가의 외로운 학의 울음. 밤 사이 나루터에 남풍이 세차더니, 서강(西江) 물결 걷어다 빗발을 날리네. 고기 새끼들 나고 들며 다투어 거품 뿜는데, 풍이(馮夷 물귀신)는 물결치고 신령은 춤추네. 섬들[島嶼]을 휘어 싸서 홍몽(洪濛)으로 돌아가는데, 창에는 서늘한 기운 남은 더위 다 가시네. 강 기러기 어지러이 날며 끼룩끼룩 우는 소리, 마름과 연 이리저리 바람과 물결 따르네. 어옹(漁翁)이 닻줄 잃고 강에서 소리 치는데, 큰 배는 옆으로 기울고 작은 배 떠내려가네. 인간 세상 어느 곳이 지극히도 험하지 않으리, 별안간에 생애가 어찌 될지 모른다네. 낭간군자(琅玕君子 작자의 호) 한바탕 웃고 나서, 밤중에 잠 못 이루고 머리가 학(鶴)처럼 기울어지네.” 하였다.
『신증』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우뚝하게 높도다, 범바위[虎巖] 깎아선 모습 몇 천 길인고. 뭇 봉우리 높이 솟음이여, 용이 나는 듯 봉새가 춤추는 듯 다투어 솟아오르네. 아래는 긴 강 있어 쉬지 않고 흐름이여, 밤낮으로 성난 조수 바다 어귀[海門]에 통한다네. 강 머리에 뭉게뭉게 잇닿은 구름은 먹을 끼얹은 듯, 강루(江樓)에 주룩주룩 뿌리는 비는 물동이를 뒤엎은 듯. 모인 물 몇 삿대[篙]나 더 깊은고, 홍수(洪水)가 세차게 흘러 하늘 땅을 뒤덮네. 얼마 안 되어 바람 불고 빗소리 끊기니, 물결 무늬 주름잡고 거울처럼 고요해, 보이는 건 외로운 안개와 지는 노을이 얼기설기 얽히는 것뿐. 좋은 시절의 즐거운 일 저버릴 수 없어, 사공을 급히 불러 중류에 배 띄우네. 배다락[柂樓]에 의지하여 밤 깊도록 혼자 수심하는데, 저 하늘에 두둥실 찬 달이 떠오르네.
한 조각 흰 그림자에 강촌 밝아지니, 희고 흰 그 빛이 물에도 숲에도 흩어지네. 물 속에 이무기 뛰놀고, 깃들었던 갈가마귀 나누나. 생선 잡아 서리 같은 칼날로 가늘게 회를 치매, 은실이 날리는 듯 뱃노래 소리 속에 맑은 술병 열었구나. 미인이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칼인데, 맑고 시원한 선궁(仙宮)으로 나를 맞이하고, 자하주(紫霞酒) 부어 나를 권하려 하니, 이 내 몸 어느 사이 신혼(神魂)이 아득하네, 신령스런 자라 부르고 푸른 용 불러서, 흥(興)을 타고 신선 나라 바로 찾으려니, 천풍(天風)이 나를 끼고 소요(逍遙)하며 노네. 인간 세상 내려다보니 몇 겹의 티끌로 막혔으니, 소상강ㆍ동정호 좋다한들 이 경치 비길쏘냐. 소동파[蘇仙]의 적벽(赤壁)놀이 말할 것은 무엇인가. 영주(瀛洲)와 단구(丹丘) 신선의 짝이 아니면, 이런 놀이 얻을 수 없을 것을, 나같은 용렬한 인물 어찌하다 이런 은혜 입었나. 산사(山寺)에서 꿈깨자 술도 처음 깨니, 달은 지고 조수 나갔는데, 저 멀리 긴 물가에 배댔던 자리만이 보이누나.” 하였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세곡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인데 도승(渡丞) 1명이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한강의 옛 나루터 양화라고 하는데, 좋은 경치 골라 정자 지으니 물가에 가깝네. 멀리 보면 돛단배 먼 포구(浦口)로 떠나는데, 문득 들으니 우는 기러기 모래판에서 일어나네. 숲에 가린 부엌에서 솔잎을 불때고, 자리 위 봄 소반엔 여뀌 싹이 새로 났네. 황성[神京]을 떠나매 여기서 4천 리인데, 이곳에 와서 사신(使臣)의 성사(星槎) 멈출 줄 생각지도 못했네.” 하였다.
○ 얼음 풀린 봄 강에 물이 이끼 같은데, 놀잇배 천천히 저으며 술잔 함께 드누나. 적벽(赤壁)의 황니판(黃泥坂) 겨우 지나자, 또 구당(瞿塘)의 염예퇴(灩澦堆)를 지나게 되누나. 관서(官署)에서는 쉴새 없이 좋은 술 가져오는데, 고깃배에선 다투어 생선을 보내오누나. 인생의 즐거운 놀이 많이 있기 어려우니, 입을 크게 벌려 웃지 않으리.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물결이 출렁출렁 큰 자라 떠 있는 듯, 비에 젖은 이끼 흔적 푸른 빛 흐를 것 같네. 눈에 가득한 좋은 경치 지금이 6월인데, 하늘 가득 바람 비에 외로운 배 위에 있네. 고래처럼 술마시니 강해(江海)도 작은 것, 용처럼 읊으니 귀신도 수심하게 하네.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아침저녁 바다쪽에 정운(停雲)이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양화도 옛 나루터 맑고도 그윽한데, 불쑥 나온 기이한 산봉우리 푸른 강물 베개 삼았네. 술이 취하니 몸 밖의 일 다 잊는데, 빗소리는 객의 수심 씻지 못하네. 푸른 나무에 연기 엉기니 넓은 들이 희미하고, 바람은 돛을 보내어 먼 물가로 들어가네. 이별한 후엔들 좋은 모임 잊을건가. 저 바다 동쪽 머리에 이 내 꿈 항상 왕래하리.”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 맑은 연기 떠 있는데, 산색은 창창(蒼蒼)하고 푸른 물 흐르네. 하늘 위의 사신 행차[使華] 옥절(玉節)이 빛나는데, 인간 세계 명승지에 놀잇배 띄웠네. 백 편의 시로 주고 받으니 재주 겨루기 어려운데, 실컷 마시매 천고의 수심을 술이 씻노라. 하늘이 뜻이 있어 시 쓰기 재촉하여, 조각 구름 비를 머금고 머리 위에 벌써 다다랐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높은 누대에서 내려와도 정(情)은 끝이 없어, 또 다시 봄빛을 이끌고 강물에 배를 띄우네. 사람은 죽엽배(竹葉盃) 속에 취하는데, 배는 양화도 향해 가누나. 동해 저 멀리 외로운 섬 보일락말락, 남산 푸른 곳에 가벼운 구름 일어나네. 강호의 노는 운치 전부터 알았지만, 오늘의 이내 마음 백 배나 맑아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강해(江海)의 풍류는 10년의 정인데, 앉아서 강물 대하니 눈 다시 밝아지네. 산은 높은 선비 모습인양 언제나 거만하고, 물은 잘 쓰이는 붓[筆] 같아서 다시 이리저리 달리네. 배 다락[柂樓]에서 술을 드니 날이 방금 저물려는데, 나루터에서 시를 읊으니 조수 벌써 들어오네. 달 밝기 기다려 취한 몸으로 돌아가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 맑기도 하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만겹의 산은 만고의 정을 머금었는데, 봄 바람에 먼 곳 나그네 두 눈이 밝아지누나. 마을에 잇닿은 버들은 천 가지가 고운데, 섬을 덮은 운연(雲煙)은 한 줄기로 비꼈네. 갈가마귀 석양에 날아드니 등에 금빛 번쩍이는데, 고기가 잔잔한 물결을 부니 푸른 무늬 생기누나. 온 세상 강호가 땅에 가득하니 이내 가슴 한껏 넓어지는데, 신선의 뗏목 타고서 하늘 나라 올라갈거나.” 하였다.
『신증』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동쪽으로 오는 붉은 기운 강가에 뻗쳤으니, 도성[神京]이 지척인데 처소가 희미하네. 버들꽃 날아가고 실버들만 늘어졌는데, 연파(煙波) 위에 비 내리고 어부들 배 저어 가누나. 햇발이 구름 속에서 새[漏]니 붉은 빛 줄줄 나오고, 조수 휘몰아 언덕을 휘감으니 넓은 들 어딘지 모르겠네. 물결 치며 뛰놀고 노래하는 나루터 아이들이요, 언덕 위에서 그물 말리는 강변 집 딸이네. 푸른 창 붉은 난간이 누구네 집인가. 강 가까이 어른거리는 기장(奇章)의 별장이라네. 오는 소 가는 말 어느 때 끝날꼬, 배 돛대 총총한데 장사꾼 나그네들 분주하네. 해 지고 연기 잠겨 조망은 가이 없는데, 한 곡조[一聲] 뱃노래 어디서 들려오누나. 멀리 보이는 한강가에 나라의 창고인데, 조운선(漕運船) 해마다 바다에서 들어온다네. 강에 비낀 만 척 배 앞뒤 잇닿았는데, 사공이 노래하고 춤추니 용도 응당 말하리. 도읍지[神都]를 감싸서 억만 년에, 조종(朝宗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모임)하는 물결을 누가 막으리. 절월(節鉞)을 받들어 이곳을 지나가니, 강 건너는 친구들에게 주즙(舟楫 천자를 보좌하는 신하)의 재주 부끄럽네. 큰 소원은 이 물 기울여 기름진 은택을 이루어서, 억조 창생에게 고루 적셔 모두들 편안히 사는 것일세.”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서호(西湖) 가에서 술 들고, 시 읊으니 해[日]가 일 년만큼이나 길구나. 하늘가 저 멀리 새들 날아 지나고, 수풀 끝에 어렴풋이 밥짓는 연기 보이누나. 이 고장 신선 지경인데, 사람들은 이곽(李郭)의 신선을 그리워하네. 새벽녘 짙은 경치야, 서시(西施)인들 이보다 더 고우리.” 하였다.

저자도(楮子島)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하여 차지하였다.
○ 한종유의 시에, “10리 평평한 호수에 가랑비 지나갔는데, 갈대꽃 너머에 긴 피리 한 소리. 금솥의 국에 간을 맞추던 그 손으로, 지금은 낚싯대 메고 저물녘에 모래사장으로 내려온다네.” 하였다.
○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가에 앉으니, 언덕 저 건너 수양버들이 저물녘 서늘함을 불어 보내네. 산보하고 돌아오니 저 산에 달 떠오르는데, 지팡이 머리엔 아직도 연꽃 향기 남아 있구나.”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대략 이르기를, “경도(京都)는 뒤에 화산(華山)을 지고, 앞으로 한강(漢江)을 마주하여 형승(形勝)이 천하에 제일간다. 중국의 사군자(士君子)들이 사신(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시를 지으면서 놀며 구경하다 돌아가는데, 동쪽 제천정(濟川亭)에서부터 서쪽으로 희우정(喜雨亭)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리 사이에는, 공후귀척(公侯貴戚)들이 많이 정자를 마련하여 두어 풍경을 거두어 들였다. 동쪽 교외에는 또 토질이 좋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적당한데, 준마가 만 필은 되는 듯 바라보매 구름이 뭉친 것 같았다.
그 가운데의 높은 언덕은 형상이 가마[釜]를 엎어 놓은 것 같으며, 그 위에 낙천정(樂天亭)이 있는데, 우리 태종이 선위(禪位)하신 후 편히 쉬시던 곳이다. 남쪽으로 큰 장에 임하였으며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에 있는데, 물굽이 언덕이 둘러쌌고, 흰 모래 갈대 숲에 경치가 특별히 좋다. 세종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또 작은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 이에 정자를 수리하고 한가할 때 왕래하며, 화공(畫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대개 조종(祖宗)이 전하여 준 것을 빛내고 또 속세 밖에서 지내려는 본래의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니, 봄철이 되어 초목은 꽃다움을 다투고 푸른 안개 공중에 비꼈는데, 중류에서 사방으로 바라보면 돛단배 오르내리니, 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이 증점(曾點)이나 맹자(孟子)와 자리를 맞대고 함께 즐기는 것 같다. 혹 하늘과 땅이 화로처럼 더울 때에, 맑은 바람이 낯을 스쳐 오면 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이나, 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와도 같이 역시 옷깃을 헤치고 돌아가기를 잊을 것이다. 또 누각이 맑고 별과 달은 강물에 잠겼을 제, 때마침 거문고를 타면 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그 묘함을 알 자 없을 것이며, 다시 눈꽃이 하늘에 비껴 날며 백제(白帝)와 옥비(玉妃)가 뛰어 오르고 제압할 제는, 설령 옛날의 눈을 읊던 한퇴지(韓退之)나 나귀를 타고 가던 대씨(戴氏)도 고삐를 나란히 하여 와서 재주를 뽐내고 흥을 타고 서로 즐길 것이다. 대개 사시(四時)의 경치는 이렇게 같지 않지만 공의 즐거움은 한 가지인 것이다.
아, 누대(樓臺)와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가, 천하 고금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악양루(岳陽樓)와 등왕각(滕王閣)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하늘가 수천 리 밖에 있어서 귀로만 들을 수 있을 뿐 눈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가까이 도성 근처에 있어서 조석으로 가서 놀며 지극한 즐거움을 펼 수 있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잉화도(仍火島) 서강(西江) 남쪽에 있으며 목축장이 있는데,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 각각 1명씩을 보내어 목축(牧畜)을 감독하였다. 율도(栗島 밤섬) 마포(麻浦) 남쪽에 있는데 약초를 심고 뽕나무를 심는다.
『신증』 백운동(白雲洞) 인왕산(仁王山) 기슭에 있는데, 추부(樞府) 이염의(李念義)가 살던 곳이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길 가는 사람은 다만 뭇 산봉우리 푸른 것만 보니, 이곳에 공후(公侯)의 집이 있는 줄 어찌 알겠는가. 등나무 덩굴 굽어져서 뱀과 구렁이 숨었고, 돌문은 높아서 지나가는 우마(牛馬) 가리울 만하네. 풍악 소리 누대엔 높은 귀인들 많이 모였는데,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성정(性情)을 수양했네. 잔치 파하고 손들 돌아가는데 저 산 위에 달 뜨니, 한 누각 아름다운 경치 무엇이라 형용하리.” 하였다.
○ “일찍이 운종가(雲從街 종로거리) 옛 집에서 뵈었는데, 일만 인가(人家) 비늘처럼 다닥다닥 소란하기도 하였네. 어느 해에 집을 옮겨 한가한 데로 돌아왔나. 오늘 와서 그대 만나니 웃음과 이야기 향기롭네. 두어 이랑 아름다운 꽃 봄 지나서 늙었는데, 연못가에 가득 늘어진 버들 비 온 뒤 길어졌네. 산야의 운치 즐겨서 조회에 참여하기 게으르나, 사람들은 장차 묘당(廟堂)에 들어갈 것이라 말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백운동(白雲洞) 저 속엔 흰 구름이 그늘졌는데, 백운동 밖엔 홍진(紅塵)이 깊었네. 한 길이 돌고 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문득 도시(都市)에 산림(山林)을 감췄는데 놀랬네. 시냇물 졸졸 뜰을 따라 소리나고, 긴 솔이 반쯤 가리웠는데 바람이 읊조리네. 내겐 칡덩굴 사이에 고릉(觚棱 전당(殿堂)의 가장 높고 뾰족히 나온 모서리) 드러나는데, 화려한 집 그윽하여 언제나 침침하네. 묻노니, 그 누가 주인옹이 되었나, 전일에 높고 귀하던 장씨(張氏)나 김씨라네.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비단옷 입은 몸으로 연하(煙霞)의 마음 가졌네. 봄철이면 바위 골짜기에 산 꽃이 밝은데, 공중에 메아리치고 짹짹 산새가 우네. 황매우(黃梅雨 매실(梅實)이 익을 무렵에 오는 긴 장마) 가늘게 뿌릴 제 인가가 희미한데, 동문(洞門) 이끼 빛 푸르러 깊숙하네. 가을빛은 목욕한 듯 수풀 언덕 맑은데, 달 밝은 밤 일만 집에 다듬이 소리 맑게 들려오네. 나뭇가지에 흰 눈 쌓여 찾아오는 거마(車馬)가 끊어졌는데, 장작 불땐 따스한 기운 주단 이불 속에 생기누나. 골 가운데 풍경은 사시(四時)에 제각각인데, 물에서 갓끈 씻고 산에 오르누나. 기영(耆英 덕망이 있는 노인)들 맞이하여 높은 회합 가질 때면, 수레 타고 동구에 들어와 친구들 모이네. 아담한 노래 투호(投壺) 놀이 즐거움 다함 없는데, 몇 날 남은 기우는 해 푸른 산에 낮아지네. 제공(諸公)의 높은 기개 구름보다 높은데, 해마다 관개(冠盖)들 서로 와서 찾네. 태평풍월(太平風月)에 동부(洞府)도 넓으니, 좋은 땅과 좋은 사람 서로 만나매 사람들 부러워하네. 내가 들으니 송악산 왼쪽에 신선의 고장 있는데, 자하곡(紫霞曲) 그 노래 지금도 전해진다네. 풍류와 문아(文雅) 그 옛날 상상하니, 서로 위 될 듯 아래 될 듯, 천 년의 지음(知音)일세. 내 시가 거칠고 졸하여 곡조 이루지 못하는데, 혹시라도 거문고 곡조에 들어갈 수 있을런가. 유전(流傳)하여 한양(漢陽) 가요가 된다면, 옛 사람과 함께 회포 같이할 것을.”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송악산 5백 년에 왕기(王氣)가 다하였으니, 자하선인(紫霞仙人)이 의지할 곳 없었네. 화악(華嶽)의 태평 시대 만만세(萬萬歲)나 기약하는데, 백운동의 주인공이 자하선인의 꽃다운 자취 따르네. 왕성의 서북쪽 금잔지(金盞地)에, 소나무ㆍ상수리나무 그늘진데 좁은 길 희미하다. 바위에 걸치고 골짜기에 자리잡아 정사(精舍)를 지으니, 중화당(中華堂) 그 모습 저 멀리 보이누나. 물소리 냉랭(冷冷)하여 거문고ㆍ비파 울리는 듯, 시내 안개는 옹기종기 병풍 장막되었네. 아침에 나올 때엔 수 놓은 수레 휘장에 금어(金魚) 비치고, 저녁에 돌아와선 학창의(鶴氅衣) 긴 옷 입네. 여의(如意)를 가지고서 산호(珊瑚)를 부수지 않으며, 매[鷹] 부르며 눈 가운데 사냥도 아니하네. 가다가 좋은 날 만나 궁중에서 외척들 초대할 때엔, 특별한 은총 받아 왕궁으로 나아간다네. 기영(耆英)들 이따금 수레가 잇닿았는데, 방 휘장 열어 놓고 숲 기운 거두어 들이네. 화제(話題) 바뀌어질 땐 주미(麈尾)가 떨어지고, 술 기운 훈훈하니 초엽배(蕉葉盃 납작한 작은 술잔) 날리네. 바둑 놓고[彈碁] 장구 치며 못하는 것 없는데, 하물며 미인의 섬섬옥수로 악기를 다루는 것이랴. 마부는 말에 기대 서서 서쪽 성곽을 바라보는데, 흩어진 저녁 노을이 아침 햇빛 같네. 그윽한 사람의 이런 즐거움, 봄이고 또 가을이니, 운림(雲林)이 세상과 멀다고 누가 말하더냐. 나이 많고 지위 높은데 몸 또한 건강하니, 왜 다시 평지에서 위태로움 근심하리. 자손들 가진 홀(笏) 상 위에 가득하니, 집안의 번영 한평생에 족하네. 자하선인(紫霞仙人) 다시 올 수 있다면 응당 무릎을 꿇으리라. 아 백운동 주인 아니면 누구와 의지하리.” 하였다.

대은암(大隱巖)ㆍ만리뢰(萬里瀨) 모두 백악산(白嶽山) 기슭에 있는데, 곧 영의정 남곤(南袞)의 집 뒤이다. 박은(朴誾)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짓기를, “주인이 산봉우리에 있는데, 우리 집 향 피우는 화로라네. 주인이 계곡에 있는데, 우리 집 낙숫물이라네. 주인이 벼슬 높아 세력이 불꽃 같으니, 문 앞에 거마(車馬)들 많이도 문안 왔네. 3년 가야 하루도 동산은 들여다보지 않으니, 만일에 산신령 있다면 응당 꾸지람을 받았으리. 손이 왔는데 다른 사람 아니고, 주인의 친구로세. 문 앞을 지나며 들어가지 않는 것도 차마 할 수 없고, 발걸음 당장 돌리는 것도 도리 아니라. 바위 사이에서 잠시 쉬니, 풍경은 참으로 뜻밖에 만났네. 물결이 감추어져 안개로 쌌다가 나를 위하여 열리니, 울던 학과 우는 원숭이 놀라지도 않누나. 주인이 금옥(金玉) 있으면, 열 겹으로 싸 두어 누구에게 함부로 주리오. 자물쇠 굳게 봉하여 밤중에도 지키나, 시내와 산에 한낮이 옮아간 줄을 모르네. 앉아 있은 지 오래매 날 저무는데, 흰 구름 먼 산에서 일어나네. 무심하기는 내가 저 구름보다 못하고, 자취 있으니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대은암 앞에 쌓인 눈은, 봄들어 또 한 경치일세. 우연히 흥이 나서 놀러 왔고, 주인과는 기약도 없었네. 혼자 서 있으니 우는 새 가까이 오고, 길게 읊자니 붓 들기 더디어지네. 그대 집에서는 나의 방광(放曠)함을 용납하겠지만, 지금 사람들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네.”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목멱산(木覓山)에 있다. 명(明) 나라 당고(唐皐)가 우의정 이행(李荇)의 서재에 쓴 시에, “조선(朝鮮) 성 안 청학동에, 누가 이곳 찾아 높은 집 지었나. 내 지금 사절(使節) 따라 와서 처음으로 들으니, 청학선인(靑鶴仙人)의 글독[書甕]이라네. 선인이 우연히 시전(市廛)에도 나오지만, 때로 학을 타고 저 하늘 가에 논다네. 그의 의복 음식 무엇인가 물었더니, 자색 구름 의상(衣裳)에 옥처럼 맑은 산골 샘물 마신다네. 동문(洞門)이 바로 저기 구름 깊은 곳에 있으니, 책상 위 신선의 책 몇 권인지 모르겠네. 근래에 종적을 아는 사람 있어, 왕문(王門)에 데리고 들어가 수양한다네. 신선 사는 그곳이 인간 세상 같으랴, 청학이 소리내어 공중에서 울고 있다네. 밤 깊어도 저 산에 달 밝아 있고, 봄은 가도 바위 밑의 꽃은 전과 같이 붉다네. 선동(仙洞)을 그리워하며 가지는 못하니, 새 시[新詩]나 지어 마음을 표시하네. 저 멀리 황산(黃山) 66봉으로 머리 돌리니, 흰 학과 푸른 소나무가 초연한 먼 생각 일으키누나.” 하였다.
○ 명 나라 사도(史道)의 시에, “푸른 학 어느 해에 동문(洞門) 열었나, 도인이 이 곳 찾아 좋은 집 지었네. 자줏빛 언덕 붉은 절벽에 샘물 소리 섞였고, 푸른 전나무와 소나무에 새소리 끊기지 않네. 마음은 성현을 짝지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손으로 고금의 책 뒤지며 근원을 연구한다. 동국(東國)에 좋은 경치 많은 줄 내 알고 있지만, 한 번 가서 옥 술병 기울여 볼 길 없네.” 하였다.
○ 남곤의 시에, “일부러 그윽한 곳 찾아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주인이 손을 사랑하매 손은 돌아갈 줄 모르네. 그대 집에 술 떨어지면 내 집에서 가져 오세나, 남산에는 꽃이 피고 북악에는 꽃이 진다네. 청학은 벌써 신선의 골격(骨格) 알아보는데, 홍도(紅桃)는 어찌타 굳은 마음 괴롭히나. 풍류 있는 두 늙은이 조용히 노는 곳에, 아이들 보내 우리 즐거움 방해하지 말라.” 하였다.

【봉수】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첫째 것은 양주(楊州) 아차산(峩嵯山)과 응하니, 이것은 함경도와 강원도의 봉화[烽]요, 둘째 것은 광주(廣州) 천천현(穿川峴)과 응하니, 이것은 경상도의 봉화요, 셋째 것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로(陸路) 봉화요, 넷째 것은 무악 서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海路) 봉화요, 다섯째 것은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과 응하니, 이것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해로 봉화이다.
무악 봉수(毋岳 烽燧) 동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소질달산(所叱達山)과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세 번째 봉화에 응하며, 서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 봉현(蜂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네 번째 봉화에 응한다.
【궁실】 종루(鍾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집을 짓고, 세종조에 고쳐 층루(層樓)를 지었는데, 동서가 5칸이고 남북이 4칸인데, 종과 북을 달아 새벽과 저녁을 알렸다.
○ 권근(權近)의 종명(鍾銘) 서문에, “조선조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운 지 3년에, 도읍을 한강 북쪽에 정하고, 그 이듬해에 비로소 궁전을 지었다. 그해 여름에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게 하고, 완성된 다음 집을 큰 시가에 짓고 종을 달았는데, 성공한 사실을 기록하여 큰 사업을 후세에 전하려 함이었다. 옛날부터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큰 공을 세우고 큰 사업을 정하면 반드시 종과 솥에 명(銘)을 지어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땡땡ㆍ둥둥[鏗鍧]하여 후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깨우치게 하며, 또 넓은 도시[通都]의 큰 고을에서 새벽과 저녁에 두드리고 쳐서,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하니, 종의 용도가 큰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덕망이 날로 높아져 천명과 인심이 귀의하매 절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었으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도와서 모두 그 지혜와 힘을 다하였다. 하루 아침에 고려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시고서는 밤낮으로 염려하시며 법을 세우고 질서를 마련하여 자손 만대의 태평을 터 닦았으니, 공을 세웠다 할 만하고 사업을 정하였다 할 만하다. 이것을 명(銘)으로 새겨 소상하게 후세에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하는데, 무엇으로써 위(位)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인(仁)이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은 천지의 만물을 살게 하는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서 확충(擴充)하기 때문에 그 위(位)를 보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하늘과 사람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한 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날에,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중외(中外 중앙과 지방)가 편안하여, 포학한 정사(政事)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모두 생생(生生)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저 순임금이라도 여기서 더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더구나 명(銘)을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銘)에, ‘거룩할손 우리 임금, 명(命)을 받음이 크셨도다. 새 도읍 찾아오시니, 한강수 북쪽이었네. 옛날 송도(松都)에 있을 땐, 국운도 기구(崎嶇)하였지. 우리 임금 대신하시니, 포학(暴虐)을 덕으로 제거했네. 백성은 병기를 보지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청명해졌네.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 힘 모으니 태평성대에 이르렀네. 원근(遠近)의 사람들 비로소 오니, 이미 많고도 번성해졌네. 이에 그 종(鍾)을 만들어서, 새벽과 저녁 알리게 했네. 우리의 공열(功烈)을, 이에 새기네. 신도(神都)를 진정하여, 천만 년 전하리라.’ 했다.” 하였다.

종각(鍾閣) 경복궁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세조가 큰 종을 만들어 처음에는 사정전(思政殿)에 둘려 하다가 후에 종각을 여기에 짓고 달았다.
○ 신숙주(申叔舟)의 종명 서문에, “거룩하신 우리 주상전하께서, 태평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군비에 관한 일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어 사정전 앞 행랑에 설치하여 금군(禁軍)을 호령하여 정제하게 하였다. 우리 조정의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창업 개국하신 후로,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이 윗 대의 공업을 빛나게 이었으며, 세종 장헌대왕(世宗莊獻大王)에 이르러서는 가득 찬 것을 보전하고 이룬 것을 지키되 문화로써 정치를 하니,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병란을 보지 못한 지 30여 년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왕위에 계신 지 오래지 못하고 뒤를 이은 임금이 어렸는데, 권신(權臣)과 간신이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 정사를 흐려 어지럽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영특한 무력(武力)을 분발시키고, 충과 의를 격려하여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대업을 정하시니, 중흥 시기에 당하는 것이었다. 정사와 형법을 닦아서 밝히며 기강을 고치고 폐단을 제거하여 조종조의 옛 모습을 모두 회복하였는데, 먼저 군사에 관한 정치를 힘써서 이끌고 격려하기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1년이 되지 않아서 조정과 민간이 깨끗하고 편안해졌다. 궁중의 호위가 정제ㆍ엄숙하여 중외가 편안하고 북쪽 오랑캐와 해적이 와서 알현하고 정성을 바치며 잇달아 앞을 다투니,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되 생각하는 것이 깊고 계획하는 것이 멀어서, 중흥의 사업을 이룬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대개 큰 공업을 세운 자가 반드시 그 사실을 종(鍾)과 솥에 새겨 공덕을 밝히고 충훈(忠勳)을 기록하는 것은, 큰 사업을 전해서 후세에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 큰 그릇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명을 지어 새겨서 후세에 밝게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 신(臣) 숙주는 삼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숙입니다. 다음에 명을 붙입니다. 명에 말하기를, ‘거룩하신 우리 태조, 동쪽 나라 세우셨네. 성인과 성인 서로 계승하여, 교화 정치 더욱 높았네. 다스려도 항상 편안하지 못하니, 상제께서 경계를 보였네. 큰 운수 중간에 막혀, 나라가 편안치 못했네. 권신과 간신이 어지럽혀, 나라 정치 마음대로 하였네. 독한 연기 사나운 불길, 활활 번져 갔네. 하늘이 우리 임금 돌보아 용맹과 지혜 주었네. 신성한 위무(威武) 분발하여, 종묘와 사직 안정시켰네. 충성스럽고 어진 이 힘 다하여, 나비들이 밤 촛불에 날아들 듯 하였네. 큰 난리 평정하기를, 하루도 안 걸렸네. 나라 안이 편안하고, 노래 소리 즐겁기도 하네. 이때 우리 임금, 기강을 정돈하셨네. 우리 옛 법 회복하여, 모두 다 펼쳐 놓았네. 편안하다 맘 놓을세라, 위태로움 잊을세라. 나라 중흥 보전하려, 무비(武備)를 먼저 힘쓰셨다. 여기서 큰 종 만들어, 궁중에 달았네. 뗑뗑 둥둥 치는 소리에, 무사(武士) 벌여 섰네. 정정하고 당당한 모습, 장할손 우리 큰 사업이네. 위풍이 떨치고 빛나, 끝없이 멀리 퍼지네. 산융(山戎)과 도이(島夷)들, 위엄에 눌리고 덕에 감복하였네. 폐백 가지고 보물 바치며, 관문 밖에서 뵙네. 요사한 공기 깨끗이 가시고, 온 나라에 근심 없어졌네. 백성들 즐거워서, 아름답고 어젓하구나. 거룩하신 우리 임금, 순(舜)임금ㆍ우(禹)임금 짝 되시네. 선왕 사업이었지만, 임금의 의사로 창작하신 것일세. 충훈(忠勳)들 함께 따라 영특하신 무력 협찬하여, 큰 공적 세우니 우리 동방 은혜로세. 여기 큰 종에 명문 새기니, 협욕(陜鄏) 땅 함께 짝하네. 몇 천억 년 지내도록, 길이 전해 썩지 않으리.’ 했다.” 하였다.

대평관(大平館)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중국[中朝] 사신을 대접하던 곳. 관 뒤에 누(樓)가 있다.
○ 예겸(倪謙)의 〈눈[雪] 갠 뒤 누에 오르다〉라는 부(賦)에, “내가 황문(黃門) 사마(司馬) 선생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대평관에 멈추었는데, 관 뒤에 누가 있어 전망이 좋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초이레이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산보하니, 쌓인 눈이 처음 개였다. 선생이 나와 함께 올라, 경치를 바라보다가 붓을 가져 오라 하여, 일시의 좋은 풍경을 적으니, 감히 상림(上林)과 자허(子虛)를 따를 수는 없지만, 또한 남루(南樓)의 방일(放逸)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남국(南國)의 제후(諸侯)들이 문왕(文王)의 교화를 입어서 백성을 덕으로 다스린 남은 은혜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니, 시인(詩人)이 추우(騶虞 신령한 짐승의 이름)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내가 여기서 반드시 은혜를 조정으로 돌리는 것은 옛날 시인의 끼친 뜻이니, 보는 이는 이전 뜻에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부(賦)를 붙인다.
부에 말하기를, 성인은 임금 위에 계시며, 새 책력을 사방에 반포하였네, 동쪽나라 돌아보고 허리띠 같은 물 한하여 서로 바라보니, 어찌 충성ㆍ예절 다 하지 않으리. 때로 와서 조회하니, 특별 우대 더하는 것 마땅하여, 황실[九重]의 조서(詔書) 내리셨네. 이에 글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사신[皇華]으로 보내니, 마자(馬訾 압록강)를 건너고 낙랑(樂浪 평양)을 지났도다. 사신배 창해(蒼海)에 띄워 한양에 사절(使節)을 멈추었다. 황제 조서 선포한 다음 공당(公堂)에서 잠시 쉬노라니, 누(樓)가 있어 높기도 한데, 규모ㆍ제도 날아갈 듯, 그린 기둥 꿩 나는가. 새긴 난간 가시나무 화살 마귀도 쫓겠네. 밝은 산은 구슬 서까래에 비치고, 봄 구름 붉은 벽에 스치는 듯. 선선한 바람 거침 없이 들어오고, 높은 하늘에 도듬 놓고 홀로 섰네. 믿을 만하도다. 황학(黃鶴)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취미(翠微 푸른 하늘)도 움키리라. 넓은 희포 시원스레 풀어놓고, 큰 물결(洪濤 높은 곳의 공기)도 깨끗하게 씻어 내네. 삼춘(三春)이 처음 오고 육화(六花 눈)가 방금 개었다데. 흐렸던 것 걷어 버리고 얼굴 드러내어 밝은 햇빛 비쳐오네. 사마(司馬) 선생 나를 이끌어 층층 섬돌 밟고 여러 기둥 붙잡고 올라가, 굽은 난간 의지하여 높은 지붕 굽어보니, 온 누리가 얼음병[氷壺]인양 바라보이고, 구슬섬[瓊島] 신선 나라[蓬瀛] 여기인 듯 여겨지네. 삼한(三韓)의 거룩한 모습 장하기도 하여, 만고의 깊은 정 활짝 열리는도다. 자리 가까이 보면 소나무 푸른 수염 늘이고, 늙은 몸 꿈틀거려 옥룡이 다투어 날아가며, 검은 여의주 잡으려 싸우는 듯. 멀리 둘린 방문과 대문들 흰 벽돌 어슷비슷, 구슬 수풀 엇갈렸는데, 맑은 일만 기와 가득 쌓이고, 하얀 일천 문은 백회가 엉겨 있다. 산을 말하면 북악이 뒤에 솟은 데다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은 데다 성곽이 사면으로 둘렸으며, 높은 성벽 구불구불 서쪽으로 둘려 있고, 잇닿아 연이어서 높고 낮게 동쪽으로 뻗어 갔네. 물을 말한다면, 개천(開川)이 둘러 가는데, 은하수 내리 꽂은 것 같고, 한강수 넓게 흘러 발해(渤澥)로 들어간다. 고기들 편안하게 키워 주고, 논밭을 참으로 윤택하게 하여 준다. 그 중의 5감(監) 6시(寺) 등 여러 관청들은 종ㆍ북 소리 은은하고, 서로 다투어 높고 기이하네. 닭ㆍ개 소리 서로 들리니, 정교(政敎)의 시행 알 수 있는데, 읊조리고 감상함 끝없으니, 이내 몸 구이(九夷)에 있는 줄 모르겠어라. 선생이 웃으며 하는 말이, 경치 구경할 줄 그대 알면, 이 눈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풍년의 좋은 징조 상천(上天)이 주신 것이라네. 아, 우리 황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화기(和氣)로 평화를 이룩하시니, 맑은 기운 대지에 서리어 비 오고 개는 것 때 맞추어 만 백성 모두 기르나니, 신령한 기운 우내(宇內)에 퍼지고, 남은 물결 먼 나라에도 넘치나니, 기자(箕子)의 옛나라 백성들 많고 잘 되는 것 어느 것이 황제 은혜 아니겠는가. 내 이 말 듣고서 무릎 치며 노래하네. 층루(層樓)의 높음이여, 구조가 정밀하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올라가니 눈에 가득 은세계일세. 남은 은택 점점 퍼짐이여, 우리 황제 서울부터라네. 즐거운 이 밝고 밝은 낙토로세. 백성과 물건 풍성하다 동쪽 나라의 신하됨이여, 태평 시대 이루었다 천추 만대 가도록. 황제(명황(明皇))의 변방[屛翰] 굳건히 하리라.” 하였다.
○ 기순(祁順)의 〈등루부(登樓賦)〉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영락(零落)함이여, 고루하여 벗 적은 것 부끄럽다. 전철(前哲)의 규범 따름이여, 아름다움을 믿고 좋아하였도다. 영해(嶺海)의 먼 지역 싫어하여, 일찍부터 중원[中州]에 노닐었다. 견문이 넓지 못하다 함이여, 멀리 나아가서 두루 놀기 소원이었도다. 이 세상 좁고 험함을 슬퍼함이여, 인생 일생[浮生]이 얼마 안 됨을 탄식했도다. 뽕나무로 만든 화살 들고 사방으로 쏘는 것이여. 어찌 남아의 처음 뜻이 아니었던가. 혼자 좋아하며 만족해 함이여, 한평생 그르치지 않을런가. 우물 안 개구리와 하루살이도 제딴은 잘난 체 한다네. 옛날 굴원(屈原)의 멀리 놂이여, 말뿐이고 실제는 아니었도다. 어찌하여 사마공(司馬公)의 많은 지식도 중국에만 그쳤는가. 생각하면 구주(九州 중국)땅이 적막하고도 넓었건만, 내 발자취 절반이나 미쳤네. 봉호(蓬壺)의 좋은 경치 들음이여, 한 번 와서 숙원(宿願)을 풀려 했도다. 천자의 은명을 받음이여, 수레 달려 동한(東韓)으로 떠났도다. 천애(天涯)를 향해 달림이여, 아득한 길 멀고 멀도다. 아침에 도성[大都]에서 떠남이여, 계문(薊門)을 지나 잠시 쉬도다. 난하(灤河) 맑은 물에 씻음이여, 갈석(碣石)의 옛 자취 찾도다. 겹겹한 관문 산해(山海)가 높음이여, 높은 누대 작은 여염에 솟았도다. 요택(遼澤)이 얼고 흐리지 않음이여, 학야(鶴野)는 멀고도 황폐하도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황주(黃州)의 좋은 대숲[脩竹] 찾음이여, 봉산(鳳山)의 아침 볕[朝陽] 구경하도다. 개성을 지나며 숭악(嵩岳) 쳐다봄이여, 어느 사이 새 서울에 왔도다. 넓고 깊은 황제의 은혜 선포함이여, 나라 사람들의 시청[觀聽]을 놀라게 하는도다. 물러나와 대평관에 머무름이여, 맑은 흥 끝이 없구나. 누(樓)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일만 경치 한곳에 모였도다. 왕궁은 울울(鬱鬱)하고도 빛남이여, 성곽이 저 멀리 에워쌌도다. 앞에는 남산 뾰족하게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도다. 긴 행장은 아홉 거리에 잇닿았고, 크고 작은 집들 사방에 벌여 있도다. 창해(蒼海)가 그 어디메뇨, 동쪽을 바라보니 물결이 하늘에 닿아 끝이 없도다. 신산(神山)이 여기 있다더니, 아, 신선들 사는 곳이로다. 불현듯 마음 동하고, 뜻이 향함이여, 수레 차려 따라가는도다. 신령이 나에게 길한 점괘 알려 줌이여, 신관(神官)이 나를 도와 의심 없게 하도다. 비렴(飛廉 풍백(風伯))을 명하여 맑은 티끌 일게 함이여, 금영(黔嬴)이 앞길 인도하도다. 봉황새 어지럽게 날아들어 모임이여, 학이 훨훨 날며 그 아래 있도다. 여덟 용[八虯]의 꿈틀거리는 것 타고서 무지개 깃발 펄렁거리도다. 보배 검[寶劍]을 함지(咸池)에 담금이여, 큰 활을 부상(扶桑)에 걸도다. 좋은 음찬 가져 서로 맞이하여 구슬가지로 음식 장만하여 드리도다. 맑은 이슬의 정액(精液)을 마심이여, 화려한 꽃을 구슬에서 캐도다. 뭇 신선들의 아름다운 모습[妁約] 모임이여, 은근한 정으로 나를 맞아 주도다. 하늘의 별들처럼 빽빽하게 빛남이여, 구름 우레처럼 빠르게 달리도다. 망서(望舒)를 시켜 서로 잇닿게 함이여, 구망(勾芒 귀신 이름)을 불러 짝하도다. 두 의사의 깊은 속[綢繆]을 통함이여, 은밀한 분부를 하녀(下女)에게 주도다. 내 마음의 고요하고 맑음을 아름답게 여김이여, 나의 모습[余骨] 비범하다 하도다. 청허(淸虛)한 마을[府]에 나를 앉힘이여, 나를 백옥(白玉) 자리에 손님으로 모시도다. 얼음 복사, 푸른 연근 모두 다 진설함이여, 용고(龍膏)를 불러 앞에 오도다. 운하(雲和) 곡조 멀리 예상(霓裳) 춤 잘도 추네. 좋은 모임 아직도 흡족하지 못한데, 저 해는 빨리도 새벽을 재촉한다. 취하여 옷을 떨치고 크게 노래 부름이여, 여러 사람 칭찬이 놀랍도다. 옛날 놀던 일 생각하며 도성을 바라봄이여, 아홉 층 저 하늘 위에 있도다. 이곳이 즐겁지만 내 나라 아니니 어쩌면 머물러 놀까. 길게 읍하고 짐짓 이별함이여, 다시 사방 돌아보며 어물어물 떠나지 못하도다. 신선 수레 앞뒤로 달림이여, 온갖 신령들 옹위하고 나가도다. 구슬같은 새 글[新篇]을 줌이여, 장생(長生)하는 진결(眞訣)도 주도다. 큰 기운[一氣]의 매우 신령함이여, 맑고 깨끗하여 모자람이 없네. 천천히 절월(節鉞) 놓고 즐거워함이여, 불현듯 옛 고향 생각나네. 이 놀이 특별도 하여, 마음속에 또렷하여 잊기 어렵네. 신선되는 그 길이 있는지, 옛 사람의 애써 찾으려던 것이었네. 이내 몸이라고 못하랴 어디 한 번 만났으면. 제일 높은 것은 덕을 세움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요, 또 말[言]을 세움이라. 명성과 광채[聲光]를 온 누리에 전하여, 영원한 세대에 언제나 남으리니. 이것이 나의 마음에 바라는 일이니, 또 어찌 신선의 집을 부러워 하리오.” 하였다.
○ 고윤(高潤)의 〈등루시(登樓詩)〉에, “새벽에 홀로 조선루(朝鮮樓)에 오르니, 누대 앞 경치 어찌 그리 유유한가. 손으로 황학(黃鶴)을 불러도 오래토록 오지 않고, 여러 층의 처마, 겹겹이 포개진 집에 바람만 솔솔[颼颼] 부누나. 시 잘 짓던 이적선(李謫仙),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 내 문득 새로 지은 시 가져다 첫 머리에 쓴다네. 꽃 구경 좋다지만 얼마 안 가서 꽃 질까 애석해 하고,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수심 먼저 생긴다네. 악양루(岳陽樓) 또렷이 갠 날 냇가의 수림(樹林), 이 누의 그림 그대로보다는 못하리. 난간 밖의 저 산은 무한히도 푸른데, 흰 구름 들보에 가득 차고, 푸른 소나무 외롭다. 궁전이 서로 빛나 단청도 휘황찬란한데, 그 중에 사는 이는 정녕 신선이리라. 태양(太陽)이 내리 비치고 붉은 대문 열어 놓으면, 비단옷, 검은 모자 어지러이 서로들 들어간다네. 뉘 집의 새댁[小婦] 짙은 단장 다했는가, 구름 같은 머리, 검은 상투[鴉髻]에 황금 빛 곁들였네. 붉은 빛[血色] 비단 치마에 난초 사향 풍기는데, 주렴을 반만 걷고 술을 드리웠네. 여섯 거리 세 저자[市]에 노는 한량 많아, 푸른 실 끝 다투어 잡고 옥병을 끄네. 높고 낮은 풍악 소리 종일토록 들리니, 천금을 다 흩으면서 갑오(놀음) 빼기 안 구하네. 머리 돌리면 저기 저 한강물 부럽기도 하니, 도도(滔滔)하게 흘러가서 넓은 바다와 통한다네. 어저께는 놀잇배 타고 놀았는데, 가벼운 돛 조용히 연파(煙波) 중에 걸려 있었네. 은실같이 가늘게 썬 것, 양화도의 생선회인데, 실버들 저 사이에선 희우정(喜雨亭) 꾀꼬리 소리 들려온다. 즐거운 놀이 마치기 전에 궂은 비 내리고, 누로 돌아오자 하늘 벌써 개였네. 엄자릉(嚴子陵)이 창주(滄洲)의 나그네인 줄 그대 알지 못하나, 어찌 일찍이 배 삼킨 고래를 낚았던가. 천자가 불러도 가려 하지 않았는데, 밤중에 자다 보니 하늘의 별이 움직였다. 맑은 기풍, 높은 절개 사치하고 화려한 사람들 압도(壓倒)했는데, 지금도 역사에서 그 이름 전해 온다네. 높은 난간에 그저 기대어 길게 웃으려 하지만, 웃으면 하늘 사람들 놀라지 않을는지. 중산(中山)의 붓과 강주(絳州)의 먹으로, 종이[楮先生] 위에 한바탕 풍운 일으킬까. 만고의 모든 일 일소(一掃)하려 하나니, 중선(仲宣)의 울울한 것이야 말할 것 무엇 있으리. 안중에 보이는 것 천지가 넓을 뿐인데, 한 쌍의 날랜 새매 가을철이라 날아드네. 내일 아침 말을 타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이곳의 풍광은 어느 호걸이 차지할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화려한 집 층층 누대 구조도 깊은데, 3천 리 밖 외지에서 여기 한 번 올라 보네. 웃고 말할 때, 난간에 기댄 흥취 있었지만, 느낀 회포는 임 그리운 마음이니 어이하리. 바람은 소나무 물결 몰아 만학(萬壑)에서 불어오고, 하늘은 그림 펼쳐 외로운 흥 돋우누나. 흰 구름 땅 위에 가득하고 황학(黃鶴)이 나니, 사람은 요대(瑤臺)에 있고 자리엔 녹음(綠蔭)일세.” 하였다.
○ 명 나라 장영(張寧)의 시에, “높은 다락 아득하게 푸른 공중에 솟았는데,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바라보니 내 마음 이미 통하였다. 하늘과 땅이 은혜 있어 같이 덮고 실었는데, 중국과 오랑캐들 모두 다 한곳으로 모이네.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3천 리를 내려오니, 화악(華岳)이 서쪽으로 백이(百二) 겹이나 잇닿았네. 금 궁궐 옥 대문엔 수위(守衛)도 엄하고, 흰 깃발 누런 부월(斧鉞)로 장군들 정해졌네. 국경 남쪽 먼길엔 봉화 연기 끊어졌고, 북쪽 지역 여러 진영엔 방위도 웅장하도다. 온 누리 모든 제도 주(周) 나라 법칙인데, 강역은 모두 다 한(漢) 나라 봉역(封域)에 속하였다. 구성(九成)의 풍악 아뢰니 봉새들 모여 오고, 5색 상서 구름에 6룡이 달리누나. 상원(上苑)의 봄빛은 바다처럼 넓은데, 귀족들의 비단옷 무지개처럼 찬란하네. 옛부터 없었던 데에서 엮어 만들었고, 생민(生民)으로 아직 없었던 공업 잇달아 세웠네. 일만 나라들 수레로 배로 폐백 보내 오는데, 일천 집 가가호호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 들려온다. 교화는 구주[九服] 담장 밖까지 행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삼왕(三王) 예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억 년을 두고 변함 없으리.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를 건국한 임금) 공업 두 서울 함께 있으니, 신령의 조화로다. 황당한 말 도리어 장몽수(莊蒙叟 장자(莊子))를 웃게 하고, 부(賦)를 지으려니 좌대충(左大沖)을 기다려야겠네. 이 몸 이역(異域)에 사신 와서 생각해도 끝이 없는데, 마음은 서울에 있으나 바라보아도 다하기 어려워라. 전부터 동쪽 나라에 문화 풍속 좋으므로, 옛날부터 중국에서 대우도 융숭했네. 황실에 번병(藩屛)되어 절도(節度)를 숭상하고, 성인의 모범 형용하여 피폐한 백성 구휼하네. 안으로 경기에 접하니 백성들 편안하고, 밖으로 변방을 제어하니 요충지일세. 팔도에 병부(兵符)를 나누니 지방 풍속 좇았고, 겹문에서 딱딱이[折]를 쳐 흉한 일 있을까 방비했네. 수륙(水陸) 길 멀리 오니 시골 말씨 다르건만, 천지간에 봄 가득 차니, 풍경이야 어디나 같으리. 닭ㆍ개 소리 들리니 민가는 사방 들에 잇닿았는데, 연하(煙霞) 속의 산성(山城) 천 봉우리나 뻗었네. 흐르는 세월 또 한 번 봄철 따라 바뀌니, 미물(微物)들 모두 다 조물주(造物主)의 은택 입었네. 높고 낮은 곳 뽕나무 푸른 잎 퍼져 나니, 지정(池亭) 가의 살구나무 벌써 붉은 꽃 피었네. 빈 수풀에 땅이 좋으니 인삼(人蔘)이 자랐고, 먼 섬에 모래가 평평하니 큰 조개 많이 나네. 꽃다운 풀 돌아가는 나그네, 생각 흐리게 하는데, 푸른 이끼는 전에 놀던 자리 메꾸지 않았네. 시냇가의 남은 흰 점은 봄 오기 전 눈인데, 버들가지에 새로 난 누른 빛, 밤 사이 바람에 터졌네. 대숲 밖 서늘한 그늘에 갠 풍경 맑은데, 매화나무 곁 향기로운 아지랑이 새벽 들어 몽롱(朦朧)하네. 동산에 복사ㆍ오얏꽃 피니, 벌은 꿀을 빚고. 들판에 마른 쑥대 많으니, 사슴이 용(茸)을 기르도다. 꽃 떨어지고 피는 것 비단 오린 것 같은데,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날으는 쑥대같네. 흥이 오면 난간 의지하여 긴 피리 불고, 앉은 지 오래면 처마 끝 돌며 짧은 지팡이 짚는다네. 고절(高絶)한 행동은 서시(徐市) 나라 엿보려 하는데, 청허(淸虛)한 그 마음 무이궁(武夷宮)에 쉬는 것 같네. 부상(扶桑)과 석목(析木)이 가까운 듯하여, 방장(方丈)과 영주(瀛州)도 찾기 쉬운 줄 알겠네. 용처럼 뛰는 말 타고서 멀고 먼 길 가볼거나. 학처럼 늙은 나이 공동산(崆峒山)에 놀아 볼까. 향기로 둘러싸인 장막은 술로 돌려 있고, 구슬처럼 푸른 난간 비단 줄로 얽혀 있다. 좌석에 들어와 정이 있는 듯 제비는 춤추는데, 창을 지나도 말이 없으니 꾀꼬리 어찌 저리도 게으른가. 전각에 빛이 나니 황제의 필적 여기 있고, 거리에 기쁨 넘치니 채색 비단을 묶었어라. 어느 곳 시골에는 농악소리[社鼓] 들리는데, 여기저기 정원(庭院)에는 새긴 기둥 높이 섰네. 맑은 샘물 동리에는 조용한 집 아담한데, 흰 돌 세운 산문(山門)에는 옛 절이 높이 솟았어라. 있는 듯 다시 없어지는 아지랑이 들어오고, 차갑다가 잠시 더워지니 봄볕 푸근하다. 여러 층의 얼음 절벽 아래 언제나 여름철이 좋고, 높은 고개의 외로운 나무는 올해도 겨울을 견디어 내네. 사냥하러 나가면 꿩ㆍ토끼도 많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는 원래 아이들 금하지 않는다. 내와 언덕 둘러 싸였으니, 멀리 바라볼 만하다. 인물도 기특하고 많으니, 수려한 기운 모인 탓이리. 가죽 신 긴 소매는 일하러 나온 부인이요, 풀옷의 헌 패랭이는 관청에 매어 있는 품꾼일세. 부중(府中)에서 북을 치니 뭇 아전들 들어가고, 원외(苑外)에서 피리 불며 적은 군사[小戎] 훈련하네. 시골 할머니 성 안 들어 올 땐, 토산(土産) 포목 가져 오고, 흙화로에 불을 때어 동철을 주조(鑄造)하네. 월상(越裳)인양 거듭 통역하니 왕래에 편리하고, 노(魯) 나라인 양 어진 이가 많으니 선비들로 가득 찼네. 저 멀리 누선(樓船)은 바다 인 오게 하고, 비 개자 들판엔 농사짓는 이들 나가네. 바다 어귀 조수 나가니, 천마(天馬) 오르는 듯, 모래톱에 티끌 맑으니 외기러기 보이도다. 마읍(馬邑) 땅의 구릉(丘陵)은 얼마나 멀고 가깝나. 봉산(鳳山)의 풀 숲[榛莽]도 함께 아득하기만 하네. 그 옛날 임둔(臨屯)은 진번(眞番) 경계 연접했는데, 평양성 저 멀리 패수(浿水) 동쪽에 잇닿았네. 기자묘(箕子廟) 황량한 사당에 비석이 높이 섰고, 고려 시대 수자리 터엔 돌만이 험상궂네. 올라와 구경하는 이들 예나 이제나 그치지 않는데, 좋은 경치 모두 다 뇌락한 가슴속에 들어오네. 풍속을 묻는 옛일 오계자(吳季子)를 찾아볼까, 재주 없는 이내 몸 정승 주공(周公)이 부끄럽다. 묘금(卯金)을 마음대로 열람하려 천록(天祿)에 올랐고, 백옥에 글을 간직하니 사홍(射洪)에 가득 찼네. 일을 의논하다가는 스스로 양자(楊子 양웅(楊雄))의 말더듬이 부끄럽고, 시기에 통함은 중거(仲車)의 귀머거리가 부럽네. 묻혀 있는 이내 몸 개천 속의 나무가 우스운데, 세상에 드러나고 보면 뉘라서 부엌에 때는 오동[爨下桐]을 꺼리겠는가. 승지의 구경은 깊은 지경(地境) 탐하지만, 높이 올라가도 하늘엔 미치지 못한다네. 지경이 묘한 곳 당도하면 공교롭게도 서로 모이는데, 정이 극진한 곳에 이르면 짙어지기만 하여라. 이슬 묻혀 시를 쓰니 은붓대 젖는데, 석양녘에 술을 재촉하니 옥병이 다 비었네. 시 읊기를 다하니 외로운 회포 상쾌해지는데, 취한 뒤에 두 귀밑을 혐의하네. 난간을 의지해 거듭 바라본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이 좋은 풍경 좋아 시절이 태평함을 즐기노라.” 하였다.
○ 명 나라 장성(張珹)의 시에, “황명(皇明)의 기풍 한 번 떨쳐 호원(胡元) 풍속 쓸어내니, 옥이며 비단이며 육지로 해로(海路)로 만 나라들 와서 조회하네. 밝고 밝아 화락하기 반 년 동안, 곳곳에서 사람들 태평곡 노래하누나. 태평곡 들어온 지 오래니, 이 이름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하루 아침 명을 받들어 조선성(朝鮮城)에 나오니, 공관(公館)의 그 이름이 분명히 태평(太平)이네. 그 옛날 이 이름 지은 것 어찌 뜻없이 했으리, 길이길이 태평 세대 누리기 위해서리라. 내가 들으니 이 고장은 기자(箕子)의 옛 봉역(封域)인데, 순후한 그 풍속이 여러 변방 나라와 다르다네.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짜며 선비는 학문에 부지런한데, 의관도 점잖은 모습 중화(中華)의 풍속이네. 정성을 다하고 힘써서 신하 직분 다하니, 천자께서 보통으로 보지 않아 기쁜 일 지으시네. 새 황제 즉위하사 정사도 새로우니, 경하(慶賀) 예식 드렸다고 사신 보내 은총 베푸시네. 황제 말씀 선포하고 비단 폐백 나눠주느라, 몇 달 동안 분주하고 이제야 비로소 한가하네. 동행의 김태복(金太僕)이 나를 이끌어 태평관의 누(樓)에 올랐는데, 누가 높고 서늘한 기운 많아 5월이지만 가을 같네. 눈앞에 펼쳐진 풍경 모두가 구경할 만한데, 게다가 어진 임금 있어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빛난 잔치 크게 벌이고 멀리 온 수고 위로하는데, 취중에 올라 보니 이내 생각 끝간 데 없네. 그림 문지방 깊은 곳에 점심 연기 희미한데, 들말[野馬]은 오지 않고 발 아래에서 울음 우네. 물결 소리인양 저 메아리 노송 있는 고개에서 들리고, 꾀꼬리 북인양 수양버들 동쪽에 드나드네. 남산ㆍ북악이 진하게도 푸른데, 비 뒤의 뽕나무ㆍ삼이 푸른 띠를 둘렀어라. 천왕(天王)은 은총 내리고 나라는 근심 없는데, 또 한 번 새로운 기개 보겠노라. 태평관에 이제 와서, 높은 누에 다시 올라 크게 한 번 웃어보노라. 황명(皇明)이 천명받아 억만 년 전하리니, 다음 날에도 다시 와서 함께 읊고 구경하오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아로새긴 문지방, 비단 난간에 하늘 빛도 깊은데, 저 멀리 천상(天上)에서 사신은 부절 가지고 지금 왔네. 성주(聖主)가 은혜 베풀어 옥새 조칙 반포하는데, 국왕이 은혜 보답하여 단심(丹心)을 기울이네. 구름ㆍ연기 자리를 두르니 거문고ㆍ서책 윤(潤)이 나고, 소나무ㆍ전나무에 바람이 이니 새들 와서 지저귀네. 정원에 말 소리 없으니 봄빛이 고요한데, 발 가득 꽃 그림자 대낮에도 그늘이 생기누나.”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달빛 따라 누대에 오르니, 생각이 호연(浩然)하다. 문지방 의지하여 서 있으니, 졸음 오는 줄 모르겠네. 담장 저 건너로 등잔불 희미한데, 성곽 주위의 인가들 멀고 가깝게 잇닿았다. 전나무ㆍ잣나무 바람받아 그림자 움직이는데, 봉우리들 머리 들고 하늘을 맞이하는 것 같네. 돌아가기 재촉하는 북 소리 기다리지 말고, 술기운 어한(御寒)은 됐으니 잔 더 돌리지 말라 일렀노라.” 하였다.
○ “누에 오르니 밤 깊은 줄 모르니, 구경하려고 멀리서 온 데 참으로 비하겠네. 꽃은 아직 맺지 않았는데 봄은 벌써 눈에 가득하고, 나무에 그림자 생기니 달이 내 마음 알아주네. 경치는 보아도 다함 없으니 맑은 구경 외롭고, 시흥(詩興)은 처음 온 것을 써서 짧은 시에 붙이노라. 이 보소 이 나라 사람들 웃지를 마소, 산음(山陰)에 배질하던 옛 그림 다시 이으려네.” 하였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世宗) 12년에 고쳐서 관(館)으로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봄 성에 치장한 말[珂馬] 새벽부터 들끓는데, 저 멀리 청산에 멈추고 특별한 자리 벌였네. 시와 예(禮) 오랫동안 이어받아 사람들은 학문 좋아하고, 문(文)과 무(武) 서로 함께 해서 나라에 어진 이 많다. 돌아가려는 마음 밤마다 난하(灤河) 달빛에 오가는데, 객지 생각은 새벽에 한강물 위 연기와 같이 일어나누나. 떠난 뒤의 깊은 정 추억도 많을 것인데, 비단 주머니 주옥같은 시(詩) 더구나 많다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온 뒤에 총총히 한성(漢城)을 나갔는데, 가다가 말 세우고 돌아가는 이정(里程) 계산하네. 모화루 저 위에 쌍 술 두루미 술인데, 숭례문 그 앞엔 10대(隊)의 군사 있었네. 세자는 마음 깊이 이별하기 어려운 생각인데, 이 나라 신하들 아직도 떠나지 않으려 하네. 재삼 손들어 저으며 훈훈한 바람 따라 가는데, 저 소리 노래소리 가는 행렬 호위하네.” 하였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와서 조회하는 야인(野人)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독서당(讀書堂) 옛 용산(龍山)의 폐지한 절인데, 강 북쪽 언덕에 있다. 성종이 고쳐 지어 당(堂)을 만들고, 홍문관(弘文館)의 글읽는 곳으로 삼았으며, 일찍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수정배(水精杯)에 부어 권하고 관원에게 맡겨 두었다. 도금(鍍金)하여 받침[臺]을 만들고 거기에 새기기를, “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하라.”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0년에 옮겨 지었는데,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있다.
○ 조위(曹偉)의 〈용산독서당기〉에, 큰 집을 짓는 자는 미리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의 재목을 수십ㆍ백 년 전에 길러서 반드시 하늘에 높이 뻗치고 골짜기에 우뚝 솟아나기를 기다린 후에야만 취하여 기둥ㆍ들보의 재목으로 쓸 수 있으며, 만리 길을 가는 자는 미리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그 꼴[蒭]과 콩을 풍부하게 주고 안장과 안갑[鞍鞁]을 정비한 후에야만 연(燕) 나라ㆍ초(楚) 나라의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다스리는 이가 미리 어진 인재를 기르는 것 또한 무엇이 이와 다르랴. 이것이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삼가 생각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繼承)하여 문교의 정치가 날로 성하였으며, 세종대왕께서는 신명(神明)한 생각과 밝은 지혜가 어느 임금보다도 뛰어났으며, 제작(制作)의 기묘함이 모두 신명에 합치하였다. 제도와 문화는 선비가 아니면 함께 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널리 글하는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치도(治道)를 강습하게 하였으며, 또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자세히 연구하고 여러 서책의 많고 큰 것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적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하여, 처음으로 집현전의 문신(文臣) 권채(權採) 등 세 명을 보내어, 특별히 장기 휴가를 주어 산간의 절에서 편할 대로 글을 읽게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 등 여섯 명을 보내어, 천천히 공부하고 편히 쉬면서 크게 그 힘을 기를 수 있게 하였다.
문종이 왕위를 계승한 뒤로는 크게 선비의 일에 뜻을 두고, 또 홍응(洪應) 등 여섯 명에게 휴가를 주어 보내니, 여기서 인재의 성함이 일시에 극진하여서 저술 제작의 공이 중국을 짝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여서는 먼저 예문관(藝文館)을 개설하여 옛 집현전 제도를 회복하고,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크게 문적(文籍)에 정통하고 유술(儒術)을 높여 숭상하니, 인재의 육성(育成)이 옛보다도 더함이 있었다. 병신년에는 다시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써서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으며, 금년 봄에는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주어 장의사(藏義寺)에 가서 글을 읽게 하였으며, 음식 맡는 관리는 음식을 대고 술 맡은 관리는 술자리를 마련하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물건 하사하기를 자주하였다.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성 밖에 땅을 선택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는 장소로 삼게 하라.” 하니, 정원에서 회보하기를, “용산의 작은 암자가 지금 공청[公廨]에 속하여 폐기되었는데, 수리하면 앞이 틔어 밝으며 그윽하고도 넓어서, 공부하고 쉬는 데에는 여기가 제일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청원을 옳게 여기고, 관원을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여 두 달이 걸려 낙성되니, 집이 합하여 겨우 20칸이었다.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스하여 모두 알맞았다. 이에 ‘독서당’이라고 사액(賜額)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시경》 〈한록장(旱麓章)〉에, “개제(愷悌)한 군자여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는가.” 하였는데, 인재가 일어나는 것은 윗사람이 어떻게 작성(作成)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잘 양성한다면 선비들이 많이 있어 임금과 나라가 살 수 있지만, 잘 양성하지 못한다면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리요. 만일 선비 기른다는 이름만 좋게 여겨서 구차히 취한다면, 닭의 울음 소리를 내고 개 도둑질하는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가만히 움직일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에는 인재가 모두 상서(庠序)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도 주 나라의 선비 양성하는[造士] 법은 제일 자세하고 주밀하였다. 저 한(漢) 나라의 요재(翹材)와 당(唐) 나라의 등영(登瀛)은, 모두 구차스럽게 한때의 이름을 얻은 것뿐이니, 어찌 의논할 것이랴.
우리 국가에서 백 년 간 길러 오며 교화하여 열어 인도하는 방법과 장려하여 양성하는 규정이, 사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선비 양성하는 법과 서로 안팎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궁(泮宮)ㆍ옥당(玉堂) 이외에 또 어진 이 양성하는 장소를 두어서, 선택하기를 정밀히 하고 대우하기를 후히 하니, 이것이 저 《시경》 〈권여장(權輿章)〉에, “밥 먹을 때마다 남음이 없고 권여(權輿)를 잊지 못한다.”는 것과 어떠한가.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이 어진 이를 양성하여 만 백성에게 미친다.” 하였는데, 전하는 이의 말이, “어진이를 양성하는 것은 만 백성을 양성하기 위하여서이다.”고 한다. 지금 집을 주고 음식을 보내는 것이 직접 다스리는 일[治道]에는 관계가 없다. 나라 정사가 번거로운데 특별히 성상의 생각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사리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날 다스리는 일을 경륜하고 왕법을 빛내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들에 의하여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태평성대를 장식하고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혀서, 그 공과 이익이 멀리까지 미치게 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 등의 좋은 재목과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 등의 좋은 말을 미리 길렀다가 일시에 거두어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만 번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전하께서 급선무로 여기는 일이고, 멀리 전(前)의 군왕들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발에 응하는 이는 성상의 기르기 좋아하는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성인의 도리는 모두 서책 중에 퍼져 있다. 6경(經)의 깊은 뜻과, 여러 사기(史記)의 다르고 같음과, 백가서(百家書)의 넓고 많음을 반드시 다 거두고 넓게 찾아내어, 그 흐름을 지나서 정밀한 것을 모으고 그 모임을 보아서 요긴한 것을 찾으며, 그 넓은 것을 다하여 요약한 데로 돌아오게 한 후에야 깊이 나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皇)ㆍ왕(王)ㆍ제(帝)ㆍ패(霸)의 도리와 예(禮)ㆍ악(樂)ㆍ형(刑)ㆍ정(政)의 근본,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요지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사업에 시행하는 것은 힘써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자(董子 한 나라의 동중서)의 이른바, “학문을 힘써 하면 문견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지며, 도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이 날로 일어나고 크게 공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효험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옛 사람이 남긴 글의 찌꺼기만을 가져다 기록하고 외우는 자료로 삼으며, 비단같이 화려하게 이리저리 얽어 운(韻)을 달고 곡조를 맞추는 글만 지어서, 세상에 자랑하고 풍속을 현혹시킨다면 조정에서 선비들을 미리 양성(養成)한 본뜻이 아닌 것이다. 아! 학문의 공은 변화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오늘 한 문장을 읽고도 그대로 그 사람이고 내일 한 문장을 읽고도 역시 그대로 그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고 하였다. 또 자하(子夏)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다운 선비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정】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 예겸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한강 가에 섰는데, 시간을 내어 와 보니 정신이 상쾌해지네. 산 그림자 물 속에 잠기니 부용(芙蓉)이 푸르고, 옥 항아리에 향기 뜨니 호박(琥珀)이 봄빛이네. 날이 따스하니 일엽편주(一葉片舟) 가볍게 뜨고, 바람이 잔잔하니 봄 물결 가늘게 줄 짓네. 바다 어귀 저 물결 은하수에 닿은 듯, 신선 뗏목 타고서 하늘 나루터 찾아갈거나. ○ 도성 남쪽에 경치 제일 좋다더니, 한강 저 위에 높은 누대 서 있네. 멀리 나온 여러 재상들 좋은 잔치 마련하였는데, 가까이 내려다보니 한가한 어부 작은 배 저어가네. 만 겹이나 되는 봉우리들 여기저기서 읍하는데, 몇 쌍의 비오리 제멋대로 뜨고 잠기네. 적벽강의 옛 글이야 어찌 감히 따르랴만, 새 시(詩)나 지어서 이 좋은 놀이 적어 두려네.” 하였다.
○ 고윤(高潤)의 시에, “청신(淸新)한 시구는 먹 흔적 남겼는데, 여기 올랐던 사람들 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네. 누대에서 보는 좋은 경치 어제와 같지 않은데, 난간 밖의 긴 강물만 속절없이 절로 흘러 가네. 붉은 조서 내릴 때는 봉새 여기 멈췄는데, 놀잇배 지나가자 갈매기들 놀라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며 옛일 생각하는데, 바람이 흰 구름 보내 나무 위에 와 있구나.” 하였다.
○ “여름 날 누대에 오르니 비 지나 날씨 서늘한데, 앉으라 재촉하더니만 잔은 느리게 돌리네. 재주 없는 몸 사신으로 온 것 무어라 부끄러워하리, 글하는 이들의 이 모임 기쁘기만 하다네. 새 몇 마리 울며 오니 산은 적적하기만 한데, 외로운 돛 멀리 가니 물은 더욱더 망망하구나. 난간에 의지한 흐뭇한 흥 시(詩)로 다 거둘 수 없는데, 머리 돌리니 저 하늘가에 해 벌써 석양이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넓은 나루 내려다 보는데, 점점이 보이는 저 청산들 하나하나 참 모습이네. 화원에 향기 풍기니 춤추는 나비 날아들고, 고깃배에서 그물 드니 생선이 번득이네. 눈앞의 저 좋은 경치 누가 먼저 차지하였나. 주머니 속에서 시를 찾으니 내가 제일 가난하네. 오늘의 이 풍광이 어제 그것 아니니, 잠시 동안 서로 구경하는데 자주한들 어떠리.” 하였다.
○ 장영(張寧)의 시에, “동쪽 나라에 높은 누대있는데, 누대 앞엔 한강 물 흐르네. 광채 흔들림은 청작(靑雀) 배요, 그림자 떨어짐은 백구의 물가로다. 멀리 바라보니 저 하늘이 다한 듯하고, 공중에 솟았으니 땅이 떠 있는 것 같네. 여덟 창 열었는데 풍경ㆍ날씨 좋으니, 걸상에서 내려와서도 그대로 주춤거린다.”
○ “봄물이 오리 머리처럼 새파란데, 새벽 산은 소라뿔같이 푸르네. 조각 구름 먼 산에 걸치고, 외기러기 긴 물가로 내려오누나. 이역(異域)에서 일 아직 끝나지 않고 태평 시대에 혼자 깨어 무엇하나, 이곳에 오고 보니 시사(詩思)가 끝이 없네.”
○ “길이 머니 거마(車馬)가 적은데, 봄이 깊으니 풍경도 좋구나. 안개가 걷히니 산은 그림 같고, 바람이 맑으니 물결은 비단 같구나. 즐거운 일 좋은 철 만나니, 맑은 술 항아리에 노래도 호방(豪放)하네. 옛부터 문화[文物]의 지방이라, 가는 곳마다 잘도 지내네.”
○ “아득히 폭포가 급히 흐르는데, 저 멀리 돌 층계 평평하네. 산새는 울다 다시 멈추고, 강 포구는 흐리다가 개누나. 흥은 구름과 함께 가고, 정은 풀을 따라 함께 자라네. 양친을 볼 수 없으니, 다시금 신경(神京)을 생각하네.”
○ “좋은 구경 언제나 같으니, 아름다운 기약은 부를 것도 없다네. 올 때는 시골이 가깝다 여겼더니, 앉으니 객(客)의 회포 사라지네. 골짜기의 새 소리 서로 응하는데, 시냇가 꽃은 그림자 마주 흔들린다. 봄바람이 뜻이 있는 양, 목란(木蘭) 노를 불어 보내누나.
○ 물가는 바라봐도 끝없는데, 봉우리는 몇 층이나 되는지. 병들었을 땐 금귀약(金匱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땐 옥호빙(玉壺氷)을 마시고자 하네. 요해(瑤海 신선이 있는 곳)를 배질하여 건널 듯, 단구(丹丘 신선이 있는 곳)를 날아갈 것 같네. 문지방 의지하여 오래 섰으니, 고향 생각 문득 멀어지네.”
○ “흰 구름은 일지만, 황학(黃鶴)만은 오지 않네. 지경 깊으니 신선 고장 같고, 좋은 경치는 봉래산(蓬萊山) 생각나네. 취미는 원룡(元龍)의 호기인데, 시는 이태백의 재주 부끄럽네. 금곡(金谷)의 주름은 주거니 받거니, 취하여 쓰러짐을 비웃지 마라.”
○ 철은 바뀌지만, 강산은 고금에 같네. 점잖은 이들 몇 번이나 유람했나, 시와 술로 지금 다시 올라왔네. 경치 대하니 지난 일 생각나고, 풍속을 보니 내 마음에 맞네. 태평의 교화 멀리 퍼지니, 가는 곳마다 친구들 있네. ○ 네 필 말 끊임없이 달려가, 초연(超然)히 산에 앉았네. 술 향기는 춤추는 소매에 풍기고, 봄 기운 비단옷에 스미네. 돌길엔 솔꽃이 지는데, 성긴 발에 제비 나누나. 좌중이 모두 좋은 모임이라, 저물녘에도 돌아가자는 말 없네.
○ 옮기고 의지하며 아름다운 경치 다 보고, 이리저리 오가며 좋은 놀이 다 했네. 어진 임금 빈객을 좋아하고, 여러 정승 풍류에 바쁘다네. 취하고서도 그대로 마시고, 돌아가려다 다시 머무네. 내일 아침 태평관에서도, 머리 돌려 생각 끝없으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손님과 함께 누대에 올라 잠시 쉬려 하니, 벼슬살이 하려는 마음, 고향 생각 모두 다 아득하구나. 산에 오랜 비 지나니 구름 안개 모이고, 강은 봄 조수 곁들여 밤낮으로 흐르네.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 조는 학을 놀라게 하고, 저물녘 고기잡이 북 소리 한가로운 갈매기 날아가게 하네. 심상하게 발 밑에서 산 안개 일어나니, 아마도 이내 몸 푸른 하늘 제일 위에 있는가 싶네.” 하였다.
○ 김식의 시에, “누대 가의 풍악 소리 훈훈한 바람 풍기는데, 누대 밖의 꽃가지는 술에 비쳐 붉구나. 구름 그림자 물결 빛 하늘 위 아래요, 흰 모래 푸른 풀 언덕의 동쪽 서쪽이네. 오대산(五臺山) 옛길에 봄 언제나 있는데, 백제(百濟) 끼친 터엔 나무도 없구나. 취한 뒤 난간에 기대서서 햇빛 바라보니, 이내 몸 수정궁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강루 위에 올라 남풍에 의지하니, 눈 아래 산꽃 몇 점이 붉구나. 빛나는 오색 구름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넓은 강물은 절로 동쪽으로 흐르네. 안개 부슬비 자리를 스치니 시를 이루기 어렵고, 풍악이 어울리니 술잔이 잘도 비네. 취해지니 이내 몸 객지에 있는 줄 모르고, 도리어 아침 일찍 대명궁(大明宮)에 찾아뵙길 생각하네.”
○ “한강수에 배 띄우고서, 한강루에 다시 오르네. 강 꽃을 캐고 캐니 어느 새 한줌이 차고, 강 풀이 가느니 객의 수심 절로 나네. 강물 한 방울 길어다 벼루에 부으니, 먹물 구름처럼 넓게 깊게 번득이네. 검은 여의주 빛을 발하며 멀리 번져 나가니, 물 속의 용 두 마리 한낮에 굼틀거리는 듯. 한평생 별 따는 솜씨, 몇 번이나 약양루(岳陽樓)에 올랐던가. 동정호(洞庭湖) 물결 3만 8천 이랑, 푸른 산 한 점이 그 중앙에 있다네. 이 누대 역시 좋은 것이, 임 계신 서울 바라볼 수 있네. 오색 구름 저렇게 아득하니, 여기서 술이나 같이 할까. 취하여 난간 치며 황학에게 물으니, 황학은 보이지 않고 물 위에 원앙새만 나네. 나는 들었노라, 물은 깊어서만 좋지 않고, 누대는 높아서만 좋지 않다는 것을. 바다로 모여 가는 그것이 만고에 흘러 좋은 것이라네. 천하의 근심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 나중한 이 범가(范哥) 늙은이 한 명뿐이랴, 후세의 사람인들 어질고 호방한 이 없을 건가. 짧은 노래 다 부르고 또 길게 휘파람 부니, 누대의 달은 밤에 찬데 강 기러기만 울고 가누나. 거듭 와서 절월(節鉞) 멈추는 일 어느 해쯤 될는지, 성주(聖主)의 은혜 깊어 하늘같이 덮여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누대 앞에 바람 걷히니 흰 구름 퍼지는데, 여러 산의 붉고 푸른 빛 한 자리에서 보게 되네. 백제의 지형은 강물에 와서 끝나고, 오대산 흐르는 샘물 하늘에서 오네. 시를 쓰자니 최랑(崔郞 최호(崔顆))의 글귀 못 따른 것 부끄러우나, 술을 대하여는 이태백의 잔 사양하기 어려워라. 꽃과 새 앞에 가득하고 봄 경치 좋으니, 웃고 이야기하며 더디 돌아간들 어떠리.” 하였다.
○ 봄비 처음 개고 하늘도 높은데, 한강의 새 봄물 푸른 것이 삿대로 한 길일세. 구름 가의 붉은 조서(詔書)는 한 쌍 봉새가 날아오고, 바다 위의 푸른 산은 여섯 자라 타고 있네. 성곽을 둘러싼 갠 빛은 보리 물결 흔들리고, 발 너머 은은한 메아리 소나무 파도 흩어지네. 글하는 이들 모두 모여 수창하매, 시중(詩中)의 제일 호걸은 저버리지 마세.”
○ “만강홍(滿江紅 중국 노래 곡조의 이름) 한강의 풍광(風光) 좋을시고, 사람들 모두 다 해동에서 드물다 하네. 하늘이 준 기이한 경치요, 땅이 나눠 준 신령하고 수려한 기상이네. 금마군(金馬郡) 그 성(城)인들 옛날과 같으리, 신라의 인물들 모두 다 옛 사람 아니어라. 당 나라 도독부(都督府)를 기억하노니, 그 이름 곰나루터[熊津口]에 남기기도 했다네. 갈매기 친해지고 어룡(魚龍)은 소리치며, 산은 그림 같고 강은 술 같네. 노는 사람들 여기 와서 즐기느라, 오래된 것 잊었다네. 아름다운 모임은 등왕각(滕王閣)보다 뛰어나고, 그윽한 풍경은 난정(蘭亭)보다 못지 않네. 내일 아침 한 번 이별하면, 저 구름 바라보며 고개만 돌리리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오랜 비 처음 개니 갠 빛도 좋을시고, 누대 앞의 봄 물결 푸른 구름 뭉쳐 있다. 강 안개 막막하더니 바람 불어 걷히고, 산 안개[山翠] 부슬부슬 새가 가지고 오네. 배는 비단 닻줄 끌며 꽃 핀 나루터로 돌아가고, 술은 은하수 기울이듯 옥잔에 떨어지누나. 즐거운 모임 얼마인데 어찌 이별하기 쉬운가, 풍겨 다시 보려 하여 배회하고 또 배회하네.” 하였다.
○ “봄 강에 밤 비 와서 포도주처럼 넘치니, 새벽에 띄운 작은 배 절반이나 뱃전이 묻히네. 천상의 높은 모습[羽儀] 채색 봉황이 날아들고, 공중에 선 누각 신령한 자리 걸터 앉았네. 주렴을 잠깐 걷으니 산은 그림처럼 펼쳐지고, 채색 붓 한가로이 휘두르니 바다도 물결 움추리네. 웃으며 난간 의지해 마음놓고 한 번 취하니, 원룡(元龍)이 백 척인양 기개 더욱 호탕하여라.”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에 봄이 들어 꽃 늦게 피려는데, 좋은 술 천 병에 고기는 백 그릇[百堆]이나 되네. 한 장의 조서[璽書] 햇빛 따라 내리는데, 아홉 겹 하늘에서 사신이 오셨네. 산하(山河)가 안팎되니 위문후(魏文侯)의 나라인데, 주빈(主賓)이 마음껏 즐기니 이태백의 술잔이로다. 높은 누각에서 잠시 떠나 서로들 읍하고서, 놀잇배 강 위에 띄우고 다시 배회하였어라.”
○ “봄물이 새로 불어 한길[一丈]은 높았는데, 고기 잡는 늙은이 지난 해의 삿대 저어 보네. 연경[燕都]의 저 손님은 두 봉새 왔는데, 용백(龍伯)은 그 누가 큰 자라 낚을 것인가. 작은 나라에 높은 손님 천 년의 경사인데, 흰 갈매기 누런 학 한 강 물결 위에 있네. 좋은 경치 가득 안고 읊조리기 오래하니, 시단(詩壇)의 제일 호걸 그대인가 하노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누대 가운데 아름다운 모임[佳麗] 비단자리 펼쳤는데, 누대 밖의 푸른 산엔 비취빛 쌓이는 듯. 풍월은 옛날 황학 따라 가지 않았고, 연파(煙波)는 지금도 백구(白鷗)를 보내 오누나. 올라와서 주거니 받거니 지은 시 삼천 수요, 빈주(賓主)의 풍류는 백 잔 술이로다. 밤 깊어지기 다시 기다려 옥피리 부니, 달 떠서 두우(斗牛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밝은데 우리도 함께 배회하네.”
○ “한강의 봄물이 푸른 포도 같은데, 비 와서 새로 불으니 몇 삿대나 더 높아졌나. 한 뱃줄 천천히 당기는데 갈매기 놀라고, 세 산이 높이 솟았는데 금자라 걸터앉았네. 은소반의 가는 회는 붉은 실이 날고, 옥잔의 향기로운 술 푸른 물결 주름지네. 사신의 문장이 자리 가득한 이 놀라게 하는데, 나 같은 사람 지은 시 다시 더 거칠기만 하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청산이 하나하나 비단 병풍 펼쳤는데, 봄물이 새로 불어 흰 물결 넘치네. 오랜 비 우연히도 오늘에야 개니, 하늘이 응당 사신 옴을 위함이리라. 읊다 바라보니 냇가 버들은 황금 실인데, 어사주 백옥 술잔에 취해서 거꾸러지네. 푸른 벽 저 아래로 긴 뱃줄 천천히 끌어 갈 제, 하늘빛 구름 그림자 다 함께 배회하누나.”
○ “금 술단지에 출렁출렁 포도주 넘치는데, 누선(樓船)으로 옮겨 타니 물결이 한 삿대나 높네. 취해가니 한 말 술을 어찌 사양하리, 흥 겨우니 삼산(三山)의 큰 자라 낚으려 하네. 뱃사람 노 저어 안개 낀 물가로 돌아오고, 아이들 그물 끌어 푸른 물결 흥청이네. 십 리 강산을 저멀리 바라보니, 봄빛이 넓고 넓어 호방한 시흥 돕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누대 앞의 봄물이 거울처럼 열렸는데, 누대 밖의 청산은 푸른 것이 몇 더미냐. 주방[廚子]에서는 어느 새 금과일 보내 왔는데, 어부들 다투어 가며 번득이는 생선 가져 오네. 좋은 풍경 오래 봄은 시구에 의지하고, 정회를 푸는 데는 술잔이 있다네. 석양의 강가 풍경 무한히 좋아, 배 위에서 취하여 또다시 배회하네.” 하였다.
○ “비 온 뒤 저 강물 몇 자나 불었나. 삿대 깊이 들어가는 줄 아침에야 알았네. 인간 세상의 세월 나는 새 같은데, 바다 위의 구름과 안개는 큰 자라 너머에 있네. 봄철이 오니 점점 꽃이 바다 같은데, 잔을 기울이니 술에도 물결이네. 배 가운데서 한없이 담소가 길어지는데, 취중에 시를 지으니 말이 더욱 호방하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우뚝한 한 이층 누대 한강을 의지했는데, 동쪽 나라의 형승(形勝)이 어찌 이리도 좋은가. 갠 날씨 신기루 잇달아 세 섬이 희미하고, 찬 기운 조수 소리 보내 여덟 창에 들어오네. 나계(螺髻)에 구름 걷히니 산이 겹겹이 푸르고, 곤새[鵾 큰 새] 줄이 밤에 울리니 돌 위에 물 흐르네. 높은 누대 오르면 옛부터 시 지었는데, 오늘에사 필력(筆力)이 작대[杠]같지 못함이 부끄럽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왕창(王敞)의 시에, “끊어진 언덕에서 백 척 누대로 천천히 오르고, 푸른 발 놀잇배로 한강에도 떠 놀았다. 술잔은 폭포 기울이듯 앵무(鸚鵡 술잔 이름)가 날고, 새가 노래 소리 보내니 꾀꼬리 소리를 듣겠네. 소동파[蘇老]의 퉁소 소리 적벽(赤壁)에서 들리고, 안기생(安期生 옛 신선)의 학 수레 단구(丹丘)로 지나가네. 모쪼록 돌을 채찍질하여 동해를 보려 하지 않으나, 운수(雲樹) 저 사이로 십주(十洲)가 희미하게 보이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푸른 물가 내려다 보는데, 견여(肩輿)로 성을 나가 함께 올라 구경하네. 먼 포구에 노을 밝으니 비단인양 얼기설기, 급한 여울에 석양 비치니 가늘게 금이 부서지네. 관악산이 푸른 빛 보내와서 자리 위에 들어오고, 양화(楊花)가 빛 물결 띄어 성 저쪽에 떨어진다. 함께 노는 여러 재상들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배 잇고 술 두루미 옮기니 흥 다시 깊어지누나.” 하였다.
○ “높은 누대 강에 임하여 청계산(淸溪山 과천(果川)에 있음) 마주 앉으니, 이 하루 함께 노는데 술 아니 가져오리. 어부들의 즐거운 마음 드리는 것 보아 알 수 있고, 시인의 호방한 흥은 써 놓은 것에서 볼 수 있다. 횃불이 환하니 돌아가는 길 늦었는데, 밤 피리 저 메아리 여관에 들자 희미해지네. 취하여 누으니 미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여, 바로 독록(獨鹿 술 그릇)으로 가서 선이주[仙梨] 찾아보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큰 밧줄로 배를 끌어 얕은 물가 가르고 나가, 고관들 자리 정하고 거울 속에 앉았네. 노는 고기 물 위에 나오니 옥이 뛰는 듯, 밝은 달[好月] 산에서 엿보니 금이 솟아오르네. 술기운 넘치니 남은 추위 몸에 배어오는데, 횃불 연기 가로지르니 산이 반쯤 그늘지누나. 갠 날 보면 한강수 천 길은 깊은데, 오늘의 즐거운 마음 얼마나 깊을런지.
○ “동쪽으로 나오는 그 동안 많은 산천 지났는데, 가는 곳마다 필연(筆硯)이 소용됐네. 먼 곳 노니니 글 건장해야 하고, 좋은 곳에서 흥 나면 적어 남겨야 하는 법. 짐승 모양 화로에 향내[香煙] 풍기니 옷도 함께 향기롭고, 깊은 대문에 푸른 기운 엉기니 바라보아도 희미하네. 이 세상과 저 영주(瀛洲)는 원래 다른 것, 날아 오르매 교리(交梨 신선이 먹는 과실)를 물을 필요없네.” 하였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소나무가 서리고 굽으며 둘러 그늘져서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왕이 일찍이 남경(南京)에 거둥하다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본조(本朝 이조) 초기까지 있었다.
○ 고려조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푸른 솔 저 푸른 솔 길가에 났는데, 두어 그루 그늘 서로 이으니 덕있는 이에게 이웃이 있는 듯하네. 큰 줄기 올라가서 서린 모양 용인 듯, 꿈틀꿈틀 달아나고 굽혔다 다시 폈네. 가는 가지 멀리 뻗어 푸른 장막 펼쳤는데, 햇볕을 가로막아 서로 의지했네. 속에는 벽력(霹靂)을 감춘 듯 태음(太陰)을 기르고, 겉 껍질[莓蘢] 벗겨지고 떨어져 쭈글쭈글 비늘 생겼네. 태고 옛적 나고 자라 연대(年代)를 알 수 없는데, 도끼에 찍히지 않고 꺾여서 섶이 되지도 않았네. 심고 자란 것 응당 조화에 의지하였을 터이니, 지키고 보호하는데 지금은 신이 있는 줄 알겠다네. 내 지금 여기 오니 때마침 더운 날인데, 남풍이 낯을 스치고 티끌 불어 날리네. 말 안장에 기대어 맑은 그늘 아래 누우니, 어느새 찬 기운 생겨 온몸에 가득하네. 함께 앉은 나무꾼 4ㆍ5명 있는데, 그 중에는 우스개 소리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있네. 그 사람 하는 말이 먼 옛날 그 언젠가, 임금님 비 피하기 진(秦) 나라 황제 같이 했다네. 그래서 이 나무 봉(封)하여 장군으로 삼고, 지키는 이 대대로 녹봉 받아 임금 은혜 입었다네. 내 이 말 듣고서 근거 없는 일이라 웃었더니, 돌이켜 생각하면 속으로 슬프기도 하구나. 우연히도 저 곳에서 소나기를 만난 탓에, 수목이지만 오히려 특별한 대우 받았네. 그대들 부질없이 맹랑한 말 하지 마소. 이내 몸 여러 대 두고 이 왕조의 신하라네.” 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북쪽에 들이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으며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는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둘렀다.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 처음, 이곳을 목장(牧場)으로 삼았다. 임자년에 주상전하께서 사복제조 판중추원사(司僕提調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과 이조 참판 정연(鄭淵) 등을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는데, 주부(主簿) 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모두 주관하고 와서, 그 자세한 것을 나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와 정사(亭榭)는 모두 그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주서(周書) 중의 말을 화산 남쪽에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이름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하여, 집을 미루어 나라를 삼았으며,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무(武)를 쉬고 문을 닦으며, 말을 목장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놓아 먹이니, 그때에 맞게 한 것이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한가할 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르름이 이부자리 같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저무니,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세.” 하였다.

낙천정(樂天亭) 살곶이[箭串]에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에, “낙천정은 우리 주상전하가 때로 구경하고 놀던 곳이다. 전하(태종)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전하께 선위(禪位)하고 다음 농한기를 이용하여 나와서 동교(東郊)에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은 곳이 불쑥 솟아 형상이 가마 엎은 것 같으니, 대산(臺山)이라 명명하였다. 올라가 사면을 돌아보면 큰 강이 둘러 소(沼)가 되어 푸르게 물결치며 잇따른다. 연이은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가 서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서 언덕을 둘러싸고 마주보는데, 형세가 별들이 향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경치 좋은 곳이다.
전하께서 명하여 이궁(離宮)을 언덕 동북쪽 모퉁이에 짓게 하고, 풍우를 가리게 한 다음 드디어 정자를 언덕 위에 짓고, 좌의정 박은(朴誾)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박은이 《주역》 〈계사(繫辭)〉의 ‘낙천(樂天)’이란 두 글자를 취하여 드리니, 대개 전하의 한 일을 총괄하여 이것을 정자 이름에 붙이고, 또 지금의 즐거움을 뜻한 것이다.
신(臣)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기록하게 하였다. 신 계량이 가만히 생각건대,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 뿐이요, 낙이라는 것은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태극의 진리와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의 정기가 묘하게 합하고 엉기어 사람이 태어나게 되니,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뭇사람들이 태어나매 기품이 박잡하고 물욕이 가리는 것이니, 힘써서 천리를 따르려 하여도 또한 될 수 없거든 하물며 자연히 이치에 맞기를 바라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바탕으로 만물에서 으뜸으로 태어났으며, 청명하신 몸으로 덕성(德性)을 항상 활용하시니, 이래서 그 행하시는 일은 어느 것이나 천리의 유행(流行)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일찍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는, 신의모후(神懿母后)가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인사를 모두 물리치고 제릉(齊陵 신의왕후의 능) 곁에 시묘 살았으며, 전 왕조의 말년에 임금은 혼암(昏暗)하고 신하들은 서로 해치며 우리 태조를 모해하여, 화가 매우 급박하였을 때에는, 의를 주창하여 나라를 세우고 태조를 천승(千乘)의 높은 자리에 추대(推戴)하였다. 무인년에 권신(權臣)이 우리 태조의 편치 않음을 틈타서 어린이를 끼고 난을 꾸밀 때에는, 기미를 알아 섬멸하고 제거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며, 여론이 전하를 추대하여 세우게 되었지만 상왕(上王 정종(定宗))에게 양보하였으니, 맏이를 높인 것이다.
즉위한 후로는 항상 태조를 조석으로 모시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며, 병술년(태종 6년)에는 왕위를 사퇴하려 하니,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려는 뜻을 이루려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죽기를 불사하고 고집하고 태조도 힘써 중지시켰다. 그 후 3년 되는 무자(태종 8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초상 중에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부묘(祔廟)할 때에는 장마비가 내려서 전하께서 염려하였는데 전날 저녁에 천지가 깨끗이 개었으며, 일을 끝낸 3일 만에 비가 다시 왔으니, 하늘이 전하의 효성을 도와준 것이다. 상왕께 우애와 공경을 다하되 오래도록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은, 서책 중에 실린 옛날 사실에도 일찍이 없는 일이며, 회안군(懷安君)을 석방하고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은 대개 순임금이 그 아우 상(象)을 살린 일을 따르고, 주공(周公)이 법대로 행한 것을 본받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왕씨의 후손을 남겨 두어서 편안히 생활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와 국가를 공(公)으로 삼는 천지 같은 도량으로서, 곧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이 혁명하고서도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를 남겨둔 의리이며, 대국을 예절로 섬겨서 두 번이나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았으며, 천자가 매양 전하의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또 작은 나라를 사랑하되 인(仁)으로 하니 50년 간이나 큰 해가 되던 왜구[海寇]가 이마를 조아리고 예물을 바치며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 궁정에 계실 때는 좋은 얼굴로 화목하고, 제사를 받들 때는 엄숙하게 공경을 다하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간하는 말을 좇고 학문을 좋아하며, 검박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되,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다. 무릇 심신에 있어 행사에 나타나는 것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이치를 따르니, 역시 노력하여서 된 것이 아니요, 대개 우리 전하의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왕위에 계신 20년 간에 사방이 한결같이 평안하고 창고가 부유하고 충실하며, 백성은 전란을 당하지 않고 하늘은 감로(甘露)를 내려서 지극히 태평스러운 것이 전고에도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천리를 따르면 자연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선위 하실 때에는 춘추 아직 늘그막에 이르지 않았고, 건강이 일을 폐지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또 형세에 의하여 부득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소 신하들이 궁정에 서서 통곡한 것이 수일간이었지만, 마침내 마음을 돌리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왕위를 사양하기를 헌신짝 벗어 버리듯 하니, 역시 고금 제왕(帝王)에 아직 있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총명ㆍ효제하고 온인(溫仁)ㆍ근검하여 모든 일에 명을 받아 부탁하신 중임을 이어 받드니, 전하의 근심을 덜 만하며, 낙천정을 짓게 된 까닭이다.
신이 이 정자의 경치를 보니, 봄바람이 화기를 불어오면 아름다운 초목이 다투어 자라서 붉고 푸른 색이 깔리고 덮이며, 여름철 복중이 되어 대지가 화롯불처럼 뜨거울 때는 맑은 바람이 자리에 가득 차며, 가을이 강산에 찾아오면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 좌우에 비치고 어울리며, 퍼붓던 눈이 처음으로 개는데,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면 천 리가 한 빛이다. 우리 전하께서 상왕(정종(定宗))을 모시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부탁하는데, 주상전하께서 그 사이에 주선하여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여 즐거워하니,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 주상전하께서 즐거워하는 것은 천리(天理)요,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천위(天位)니, 저 순(舜)이나 우(禹)가 거기에 관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 관한 큰 계책이야 어찌 잠시인들 마음에 잊으랴. 그리고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 뛰논다는 것은 도의 큰 것이요, 《주역》 대축괘(大畜卦)에서 말한 산이나 감괘(坎卦)에서 말한 물은, 어진 이와 지혜 있는 이가 좋아하는 바이며, 하늘이 위에서 운행하는 것은 쉼 없는 기상이 나타남이고, 대지가 아래에서 고요한 것은 후덕한 형상이 현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화평한 모습으로 등람하여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잘 합하여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글이나 말로 그 만분의 1이나 형용할 수 있겠는가.
신이 글로 쓰는 것은 전하께서 천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여러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인데, 이러한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은 신하와 백성들도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천성의 참됨을 보고 느껴 흥기하여 각기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고, 각기 그 어른을 어른으로 여겨서 인륜의 도를 다하여, 전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은 풍속 교화의 아름다움이 저 우순(虞舜)이나 주(周) 나라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왕업(王業)의 영원함이 곧 높은 산 깊은 강물과 더불어 함께 하여 오래도록 다함이 없을 것이니, 아! 성대하도다.” 하였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의 하류 백사정(白沙汀)에 있는데, 세조가 자주 거둥하여서 군대를 사열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정자는 원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희우정(喜雨亭)이었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하였는데, 매해 농사를 살필 때 및 수전 연습[水戰]을 볼 때에 항상 이 정자에 거둥한다. 변계량(卞季良)의 〈희우정기(喜雨亭記)〉에, “용산의 입석(立石) 마을은 세상에서 놀기 좋은 강산이라고 말한다. 도성에서 겨우 몇 리쯤 되는데, 효령대군이 별장을 두었던 곳이다. 뒤에 한 언덕이 있으니 높고 꿈틀꿈틀하여 형상이 용이 서린 것 같은데,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휴식하는 장소로 삼기 위하여서이다. 군후(君侯)가 계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전하께서 일찍 수레를 타고 농사일을 순시하며, 이 정자에 올라 신에게 주식(酒食)과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그때 한창 파종할 철에 비가 흡족하지 못하였는데, 술을 반쯤 들자 비가 와서 종일토록 좍좍 내리니,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고 하사하였다. 신이 감격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우리 성상께서 하사한 것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신 부제학 장(檣)으로 하여금 희우정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쓰게 하여 집 벽에 걸었는데, 그대가 글을 지어 기록하라.’ 하였다.
하루는 군후를 모시고 가서 오르니, 정자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데, 화악(華岳 백악산)이 뒤를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 흐르며, 서남쪽의 여러 산이 창망(蒼茫)하고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안개와 물 밖에 저 멀리 보일락말락하였다. 굽어보면 고기와 새우를 또렷이 셀 수 있는데, 바람 실은 돛과 모래 위에 새들은 바로 자리 아래서 왕래하며,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잔과 노반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기가 날개를 끼고 푸른 바다에 오르는 것 같으며, 호연하기가 바람을 모아 신선 경지에 노는 것 같아서, 눈이 아찔하고 모발이 곤두서는데 모든 생각 잊고 말없이 오래도록 있다가 돌아왔다.
일찍이 생각건대 사람과 천지는 원래 일체(一體)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하였으니, 한 마디 말 한 가지 생각의 미세한 데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느끼는 기틀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덕은 대소가 있고 지위는 고하가 있으며, 감통(感通)하는 효험의 넓고 좁음과 더디고 빠름이 따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감통의 묘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제왕의 직책이요 성인(聖人)의 사업인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세상에 다시 없는 자질로 성인의 학문을 계속하여 밝혀서, 중과 화의 덕을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하는 효험을 극진히 한 것이니, 이야말로 넓고 커서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이 일은 특히 그 중에 한가지를 나타낸 것뿐이다.
대개 우리 전하의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은 안에 깊이 쌓여 있는 것으로서, 하루 아침 교외에 나가서 농사짓는 것을 보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 생각이 일어나서 그칠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니, 하늘의 감응이 시각을 어기지 않음도 여기서 온 것이다. 전하의 지극한 어짊과 후한 은택은 바로 이 비와 함께 흘러 퍼지고 널리 넘쳐서 천지간에 충만하여 근심하던 자가 기뻐하고 병든 자가 낫는 것이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어찌 그 생생하는 본 성품을 이루지 못함이 있겠는가. 희우로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은 하늘이 비를 내려줌을 감사하여 잊지 않으려 하는 까닭이다.
아! 저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이후로 중화의 도에 병든 자가 많아서 민물(民物)이 시들고 천지가 거칠어졌으니, 슬퍼할 만하도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은택을 입는 자는 금수나 초목의 미물(微物)까지도 어찌 영광이요 다행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푸른 띠를 띠고 붉은 자락을 끌면서 조정 위에 몸을 두어서 특별히 돌보아 주심을 받은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참으로 천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인 것이다. 군후는 또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높은 지위와 부귀하기가 비할 데 없고 깊이 전하의 우애를 받음에 있어서이겠는가. 더구나 전하께서 제후의 자리에 계시면서 군후에게 이 정자에서 술을 주어 조용히 주고 받기를 잠저(潛邸)에 계실 때나 다름없이 하니, 군후의 영광이야말로 붓이나 글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 전하의 우애하는 덕이 천성에 근거하고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 자신이 억조 신민의 주인이 됨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아! 지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후는 겸공(謙恭)하고 온후하여 부귀한 자리에 잘 거처하면서 거의 교만하고 자랑하는 기운이 없으니, 종실(宗室)에 모범이 되고 왕가(王家)를 호위하여 전하의 우애가 이렇게 지극하게 되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명승은 이것이 천지 개벽 때부터 있은 것인데, 어찌 오랜 동안을 감추어져 있다가 오늘에 와서야 알려지고 빛이 나는 것인가. 이것은 군후가 몸은 비록 명예와 부귀 중에 처해 있지만, 그 높이 세속에서 벗어난 생각이 일찍이 구학(丘壑)과 강호(江湖)의 사이를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의 주인이 이것을 주어서 위로하는 것이다.
산천 풍경의 아름다운 것으로 말한다면 아침 저녁과 4계절의 변화하는 모양이 병든 몸이기는 하지만 다른 날 다시 군후를 모시고 이 정자에 놀면서도 군후를 위하여 적을 수 있겠기에, 여기서는 조잡한 글로 군후께서 비루하게 여기지 않음에 대해 우러러 보답한다. 다만, 성상께서 정자에 이름을 붙인 본의에 대하여는 발명한 것이 없는데, 이것은 소라 껍데기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털끝으로 천지를 그리려 하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문자를 빙자하여 성명을 그 사이에 붙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을 알아줌이 아니겠는가. 반딧불의 작은 불빛이 해나 달의 빛을 의지하여 오래 있고 초목의 미미한 것이 천지에 붙어서 썩지 않음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드디어 흔연히 글을 쓰고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날아갈 듯한 새 정자, 붕새처럼 높이 앉았네. 누가 지었나, 어진 군후라. 임금이 서교(西郊)에 나가시니, 놀려함도 아니요 사냥함도 아니었네. 백성들 바야흐로 파종할새 밭에 가뭄 들어 염려하였네. 우리 임금 정자에 계시니, 때마침 단비 잘도 내렸네. 우리 임금 군후(君侯)에게 잔치 베푸니, 북소리도 은은하네. 정자(亭子) 이름 하사하니, 그 영광 전에 없던 일. 군후 머리 조아리며, 성덕을 하늘처럼 여기네. 군후 머리 조아리며 우리 임금 만년 살기 바라네. 문인에게 부탁하여, 영구히 전하려 하였네. 신이 절하고 글 지으니, 여러 선비들보다 앞섰네. 화악(華嶽)을 쳐다보니, 돌에 새길 만하네. 이 칭송하는 글 새겨, 천고에 밝게 전하리라.”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푸른 솔 깊은 곳에 정자 그윽한데, 배 대고 올라오니 취한 눈 밝아지네. 나루터의 풍파는 언제나 진정되려나, 바다 어귀의 집 같은 저 물결 언제 거두려나. 일만 집 촌락은 남쪽 포구에 잇닿았고, 일백 치첩(雉堞) 산성은 강 위에 버티고 있네. 이 경치에 넓은 회포 마음 놓고 한 번 취하리니, 덩굴 사이 밝은 달 물가에 비쳐도 좋으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저물녘에 높은 누대에 오르니,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언덕 위의 새 버들잎 강 나무와 함께 그늘지고, 물가 안개 가볍게 날아 들 구름 따라 뜨네. 난간에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구나. 돌아오는 길 도성 불빛이 점점 가까운데, 바다 저 동쪽엔 은빛 달 떠오르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응당 응거(應璩)ㆍ유정(劉楨)과 같이 즐거운 놀이 마련하고, 윤건(綸巾)과 우선(羽扇)으로 고운 물가 내려다보네. 유리빛 그림자 움직이니, 고기와 용이 희롱하고, 논이 비었으니 기러기와 따오기 도모하네. 두 언덕의 행인들은 나루터 가느라 바쁘고, 몇 척의 상선(商船)은 가을 바다에 떠 있네. 달 밝으면 소상강 신(神)의 비파 들을 것 같으니, 술집에 막수(莫愁 기생 이름) 있는 것 무엇이 부러우리.” 하였다.
○ “자라 머리에 집을 지으니 먼 형승(形勝) 들어오는데, 창에서 보이는 것 새 병풍 둘러친 듯 하여라. 난간 앞에 바다로 가는 물 양화(楊花)의 흰 물결인데, 성 밖의 하늘에 닿은 듯 모악(母嶽)의 푸른 봉우리라. 작은 저자에 사람 돌아가니 채색 배 매여 있고, 먼 하늘에서 학 내려와 굽은 물가에서 퍼덕이네. 푸른 일산(임금의 일산) 옛날에 농사일 구경하였는데, 여기가 서교(西郊)의 희우정 그곳이라네.”
○ “천지가 넓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는데, 한 조각 누대에 취한 늙은이 누웠네. 지경이 봉성(鳳城 서울)에 연접하였는데 연수(煙樹)가 합하였고, 강이 큰 구렁으로 들어가 바닷길 통하네. 고기 잡는 노래 처량하니 귀한 손님 슬퍼하고, 임금 글씨 휘황하니 공장이들 수고했네, 어디선가 한가한 사람 노 저어 오니, 악군(鄂君)이 향기로운 이불 달밤에 펼치네.”
○ “이내 몸 동정호(洞庭湖) 사이에서, 천원(川原)의 좋은 풍경 구경하네, 거마는 옛 나루터에 헤매고, 높이 뜬 따오기 먼 산에 닿았네. 풍경은 봄ㆍ가을이 다르고, 하늘 모습 밤낮으로 좋아라. 한공(韓公)은 옹졸한 사람, 온수(溫水)에서 속절없이 낚시만 하네.”
○ “성문 밖 지척인데, 일 없이 놀려는 것 아니네. 강물은 참으로 도도히 흐르고, 인사는 진실로 아득하구나. 날이 맑으니 소ㆍ양도 저녁 알고, 서리 내리니 초목이 가을 되었네. 굽은 난간에서 풍악 소리 나더니, 갈대꽃 물가로 퍼져가네.”
○ “서호의 유람하던 곳, 형승(形勝)은 이 정자가 제일이네. 구름은 사곡(賜谷)을 이웃했고, 풍류는 영화(永和)와 같네. 도성 사람들 절경이라 말하는데, 왕자가 별장 지었네. 이 세상의 그림 그리는 이, 저 모습 그릴 수 있는가.” 하였다.

영복정(榮福亭) 서강(西江) 북쪽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거둥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란 두 글자를 써서 정자의 편액으로 하고 이어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 한 세상에 영화롭고 백 년에 복 받는다는 뜻)이란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해석하여 하사하였다.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안국방(安國坊) 집 서쪽 동산에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왕림하여 ‘풍월(風月)’이란 두 글자를 하사하여 편액으로 하게 하고, 시 여섯 수를 지어 문신들에게 명하여 화답하게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문물이 태평한 세월 백 년 가운데, 공후(公侯)의 집 연못 정자에 또 봄바람 불어오네. 임금 글 하사하니 성신(星辰)인양 빛나고, 어사주 자주 내리니 우로(雨露)인양 풍성하네. 작은 물결 무늬져 오리처럼 푸르렀고, 온갖 꽃 점점이 단장하여 원숭이 같이 붉게 물들었네. 누대 앞 꽃봉오리도 은혜 받아 취한 것, 조회에서 물러나 소나무와 대나무의 주인옹(主人翁) 되네.” 하였다.
○ “열두 난간이 푸른 못 대하였는데, 높이 달린 금빛 편액에서 용의 광채 움직이네.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긴 천 년 승지(勝地)에, 버들 푸르고 꽃 피니 온갖 봄빛 향기롭네. 염막(簾幕)에 바람 풍기니 더위란 간 곳 없고, 지대(地臺)에 달 뜨니 은근히 서늘한 기운 생기네. 동평왕(東平王)의 선을 즐기는 일 어느 누가 허물 하리, 보잘것없는 식객 둔 맹상군(孟嘗君)을 어찌 일찍이 헤아리리요.”
○ “유리 같은 맑은 물 정자를 서늘케 하는데, 햇빛 반짝반짝 푸른 마름 뒤척이네. 쇠채로 줄을 골라서 비단 비파 울리고, 금구(金龜)로 술을 바꾸어 은병으로 보내오네. 밤 기운 서늘하니 연꽃에 달 비쳐 차고, 하늘이 맑으니 계수나무에 바람 풍겨 향기롭네. 일대의 이름난 왕자[維城] 그 모습 옥 같은데, 하간(河澗)의 예약으로 길이길이 강녕(康寧)을 누리길.”
○ “못 위에 줄줄이 잔무늬 물결지는데, 푸른 하늘 물 같고 구름 한 점 없네. 금 술 두루미 가는 그림자는 꽃 사이로 보이고, 옥 바둑알 울리는 소리 대 숲 너머로 들려오네. 동산 안 풍류 소리에 봄놀이 흥겹고, 귀한 손님 패물에 달빛이 아롱지네. 눈썹 사이엔 누른 햇무리 보이기도 하는데, 좋은 잔치 새로 베푸니 뺨 먼저 붉어지네.”
○ “당당한 저 시절 가고 찾고 하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 좋은 날에 구경할 마음 다시 생기네. 좋은 자리 골라 잡아 자리 펴니 꽃 기운 풍기고, 서늘한데 찾아내어 자리 옮기면 버들 그늘이 깊네. 악보 새로 편성하니 청탁음(淸濁音)이 나뉘는데, 전에 사들인 도서(圖書)엔 고금(古今) 일이 섞여 있네. 맑은 흥은 풍류가 담박(淡泊)을 겸하였으니, 작은 난간에 달 뜨면 외로운 술잔 벗 삼으리.”
○ “봄을 감춘 깊은 담에 따뜻한 연기 일어나니, 중국 사신이 하사품 가져 온 것 절하고 보내네. 비단 안장 철총(鐵驄)말은 버들 사이로 지나가고, 금방울 고운 비둘기는 꽃 흔들며 우네. 구중 궁궐 은혜도 중한데, 천상의 성신(星辰)은 지척간에 벌여 있다. 진중(珍重)한 성은(聖恩)에 응당 감격하여, 남산같이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 깊이 축원하노라.”

『신증』 황화정(皇華亭) 두뭇개[豆毛浦] 북쪽 언덕 위에 있다. 연산군(燕山君)이 이 정자를 지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다.
침류당(枕流堂) 한강 언덕에 있는데 경력(經歷)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 강혼(姜渾)의 시에, “인간 세상에 크게 숨은 한강 남쪽 늙은이, 조용히 거처하는 곳 성 밖의 침류당이네. 강산은 길이 돌아오지 않는 손을 짝하는데, 풍월은 참으로 무진장하구나. 솔 언덕에 새벽 일찍 학 앉은 나무 보겠고, 단풍 숲엔 저녁 늦게 낚시 배 매어두네. 오직 한 번 취한 그것으로 조물주에 보답하니, 풍당(馮唐)의 늙은 낭관 뉘라서 부러워하리.”
○ “한강 남쪽의 형승은 동방에서 이름났는데, 낚시질하는 저 늙은이 그 옆에 살며 주인 노릇하네. 강에 비 내릴 때는 붉은 잉어 뛰놀고, 산바람 지나면 흰 마름이 향기롭네. 문에는 속객(俗客) 없으니 그윽한 지경 이루었고, 술이 신이(神異)한 공 있어 취한 마을 들어가게 하네. 조물주 아마도 이 늙은이 편안케 하리니, 귀밑털 흩날리며 창랑에 노닌들 어떠리.”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한강 저 강 위 제천정(濟川亭) 곁에, 그대가 지은 집 이 당(堂) 있네. 갈매기ㆍ해오라기 시름 잊고 함께 이웃하는데, 구름ㆍ노을 서로 벗하여 같이 숨어 사노매라. 동ㆍ서문 밖엔 사람들 길 다투는데, 서쪽 변방 산 앞에 손이 배 띄우네. 헛된 명성에 분주하는 것 무엇에 소용되리, 백 년의 생애를 늙은 어부와 함께 하리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그대 경치 좋은 곳 찾아 푸른 강가 정했는데, 좋은 집 새로 지으니 조망(眺望)이 탁 틔었다. 벌린 멧부리 평평한 모래사장은 진정 생동하는 그림인데, 물오리 나는 해오라기 이 역시 풍류스럽도다. 주인은 높이 누웠으니 실컷도록 볼 것이고, 지나는 손 와서 놀 제 말이 그치지 않네. 언제나 벼슬 버리고 그대 따라가서, 반 삿대 맑은 강물에 가벼운 배나 띄워 볼까.” 하였다.

【역원】 노원역(盧原驛) 흥인문(興仁門) 밖 4리 지점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崇禮門) 밖 3리에 있다. 이상의 두 역은 바로 병조(兵曹)에 예속되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기로(耆老)들이 여기서 모여 술 마셨으며, 조말생(趙末生)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홍제원(洪濟院) 사현(沙峴) 북쪽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옷을 고쳐 입던 곳이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다. 전관원(箭串院) 살곶이 다리 서북쪽에 있다.
【교량】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대(仰釜日晷臺)가 있다.
○ 김돈(金暾)의 명(銘)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형상이 가마솥 같다. 바르게 둥근 테를 설치하였는데, 자(子)와 오(午)가 마주 선 것이다. 공간이 꺾인 데를 따라 돌아오니, 분각(分刻)을 기록한 것이다. 도수(度數)를 안에 새겼는데, 주천(周天)을 절반한 것이다. 신(神)의 몸을 그렸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이다. 각(刻)과 분(分)이 소상한데, 햇빛에 비친 것이다. 길가에 설치함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하였다.

대광통교(大廣通橋)ㆍ소광통교(小廣通橋) 모두 종루(鍾樓)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종루 동쪽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통운교 동쪽에 있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다. 장통교(長通橋) 광제교 동쪽에 있다. 수표교(水標橋)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尺村)의 수를 새겼는데, 빗물이 나면 거기에 의하여 깊고 얕음을 안다. 신교(新橋) 수표교 동쪽에 있다. 영풍교(永豐橋) 신교 동쪽에 있다. 대평교(大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磐橋) 살곶이에 있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洪濟院) 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 서쪽 시가이다.
【불우】 흥천사(興天寺)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년)에 우리 태조께서 명하여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정릉(貞陵)에 장사지내고 절을 그 동쪽에 지으니, 선종(禪宗 참선을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의 절이 되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이 있다. 후에 능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절은 그대로 두었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에, “성신(聖神)하신 우리 임금, 일찍부터 불법(佛法)을 받들었네. 손으로 금륜(金輪)을 잡고, 하늘 받들어 정치하셨네. 근엄하고 조심하여, 잠잘 겨를도 없으셨네. 신인(神人)이 협력하고 화합하여, 영험ㆍ은혜 함께 이르렀네. 크게 깨달음 있어, 부처 인연 널리 퍼졌네, 사리(舍利) 분신(分身) 설치하니, 희한한 사실 나타났네. 세상 이목 경동(驚動)하고, 천지에 광채 빛나네. 신령한 상서 진동하니, 억천 겁에 없는 일이네. 임금 마음 기뻐하사, 큰 맹세로 발원하였네. 높은 화상[睟容] 그려 모시고, 불경 뜻 풀이하셨네. 열성조에 복 주시고, 만백성에 미쳤네. 국사 사업 영원하여, 억만 년 가리라. 부처님의 도가 넓어서, 막힌 것 모두 뽑아주네. 우리 임금 본받으사, 큰 자비(慈悲)로 널리 구제하네. 금을 부어 종 만드니, 일체 중생 깨우쳐 주려함일세. 고생 멈추고 혼미한 것 깨우침이, 오고 오는 영원한 세상까지.” 하였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 교리를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 권근(權近)의 〈덕안전기(德安殿記)〉에 “건문(建文) 3년(태종 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이 명하여 터를 예전 사시던 집 동쪽에 정하고, 따로 이 새집을 짓게 하였다.
가을에 공사가 끝나니 신 근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그 사가(私家)를 광명(廣明)ㆍ봉선(奉先) 두 절로 만들었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려 함이었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국가를 대신 통치하게 되어 전대(前代)의 일을 생각하여 장차 이 집으로 절을 만들어서 영원히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는 장소를 삼으려 하니, 위로는 선조(先祖)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 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을 그지없도록 전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정전에는 석가모니의 출산(出山)하는 그림을 걸고, 또 북쪽 문미에는 그 위에 시렁을 만들어 가운데는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한 부를 봉안하고 동쪽에는 새로 새긴 대자능엄경(大字楞嚴經) 판본을 두며, 서쪽에는 새로 새긴 수륙의문(水陸儀文) 판본을 간직하였다. 좌우로 곁채를 지어 참선하고 강론하기에 편리하게 하며 곁에 작은 집을 지으니 네모진 못을 내려다 보게 되고 주방ㆍ곳간ㆍ문간ㆍ행랑 등이 모두 제자리에 놓여졌다. 공(功)은 금장식[側金]보다 못하지만 발원은 온 누리[轉輪]에 두루하여 모르는 가운데 보탬이 되고 분명하게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은택을 한정 없이 펴고 국가를 무궁하게 전하며 마침내는 티끌 세상을 벗어나고 바른 깨달음[正覺]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대가 기문을 지어 후세에 전하여 만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지켜서 변함이 없게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신 근이 물러나서 명을 받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적는다.” 하였다.
○ 서거정의 〈연당시(蓮塘詩)〉에, “작은 목 찰랑찰랑 잔 물결 푸른데, 연꽃 새로 피어 깨끗도 하구나. 천손(天孫)이 운금(雲錦) 베틀에서 짜낸 듯, 붉고 붉고 희고 흰 것 서로 비쳐 빛나네. 깨끗하고 높은 모습 진흙의 더러움 받지 않으니, 좋은 꽃들 마냥 풍류롭고 아름답다. 백발의 세속 늙으니 강남(江南)을 꿈꾸다가, 여기서 언뜻 이 꽃 보고 맑은 흥에 취하였네. 향기로운 바람 불고 불어 향기로운 안개 젖었는데, 난간을 의지한 저문 날에 두 소매도 젖었어라. 내 평생 꽃과 운치 죽도록 좋아하여, 사가(四佳)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10년이라네. 서로 만나매 상긋 웃으며 친구라 이름 부르니, 내가 꽃을 저버리지 않는데 꽃 어찌 나를 저버리리. 산중의 새로 판 못이 독보다 작은데, 화신(花神)이 벌써 신령한 종자 옮겨주기 허락했네. 내년 5월에 저 꽃들 만발하면, 벽통(碧筒)에 술 따라 3백 잔 마셔보려네. 그때 그대 술병 가지고 한 번 찾아오면, 노래 부르며 두 다리로 뱃전 두드려 보세나.” 하였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仁王山)에 있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한 구비 임천(林泉)이 좋은데, 천 그루 수목도 맑구나. 끊어진 암벽(巖壁)에 이끼 끼어 푸르고, 그윽한 시내엔 절로 난 꽃 환하여라. 겹겹의 봉우리에 구름 엉겨 그림자 지고, 절반쯤 저 고개 위에 소나무 서서 소리나네. 세상 공명 꿈인양 생각 없는데, 게으른 습성 이래서 이뤄졌네.” 하였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는데 세조조에 지었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신라가 황산벌에서 백제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ㆍ파랑(罷郞)이 진중에서 죽으니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지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시냇물 끊어졌는데 층층이 얼음만 쌓이고, 바람소리 요란하니 일만 구멍 울리네. 산 모습 겨울 되자 더 여위고, 눈빛은 밤에도 밝구나. 외로운 탑 달빛에 그림자 지고, 성긴 종소리 구름 밖에서 들리네. 분향하자 선실(禪室)도 따스한데, 단정하게 앉으니 마음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 “범궁(梵宮)이 계곡에 빛나는데, 목탁소리 공중에서 높이 들리네. 탑[榻]을 둘러 향연(香煙)이 푸르고, 창에 비쳐 햇빛 밝다. 눈 쌓여도 소나무 절개 안 변하고, 얼음이 합하니 물은 소리 없네. 제호(醍醐) 맛 하도 좋아서, 입안[齒頰]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연굴(演窟)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석적사(石積寺) 삼각산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자현(李資玄)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남경(南京 지금 서울)에 순행하여 그 아우 자덕(資德)을 보내어 행재(行在)에 나오게 하여, 청량사에 머물게 하였다. 일찍이 불러 보고 양성(養性)하는 요결(要訣)을 물었는데, 심요(心要) 한 편을 드리니 왕이 감탄 칭찬하며 대우가 매우 후하였다.

중흥사(重興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중 보우(普愚)가 일찍이 절 동쪽 봉우리에 집 짓고 살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하고, 영가체(永嘉體)를 모방하여 노래 한 편을 지었다. 보우가 죽자 이색(李穡)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오(李䫨)의 중수기에 이런 말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의 낭적사(狼跡寺)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그리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쳤다. 국가에서 천지의 재변과 수재ㆍ한재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게 하였는데, 언제나 즉석에서 영험이 있었다.” 하였다.
○ 고려조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구불구불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 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 밝게 빛이 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香穗]에 잇닿았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 소리 경뇌 소리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고승(高僧)의 마음, 인간 세상의 명리(名利)란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 또 덩굴 더위잡네. 처마 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 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 명 고승(高僧) 있어, 관공(觀公)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승가의 법당 높은 데 의지했는데, 예전 놀던 일 계산하니 오랜 세월 지났네. 어느 날 또다시 그 선탑(禪榻) 가에서, 등잔불 돋우고 조용히 앉아 찬 밤을 지내 볼꼬.” 하였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문수사(文殊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장용(李藏用)의 시에, “성 남쪽 10리에 평평한 모래 희기도 한데, 성 북쪽엔 두어 줄기 중첩된 봉우리 푸르구나. 늙은 원님 거칠고 게을러[疏慵] 공사 일찍 파하고, 마음대로 나가 놀며 그윽한 자취 찾네. 양주(楊州) 하늘에 학을 타고 날기도 하는데, 가다가는 나귀 타고 화산(華山) 길을 지나기도 한다네. 벼슬길 그만두려 하나 어리석어 어찌 하리, 좋은 일 가시기 쉬우니 더구나 애석하도다. 누른 소매 호통치며 인도하나 너무나 속되고, 반가운 눈빛으로 대하니 높은 격조 있는 듯하여라. 구불구불한 비탈길 더위잡고 올라가니, 으슥한 수풀 고개 차츰 막혀지네. 절벽 저 골짜기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한데,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니 더욱더 움추려지도다. 긴 해는 높은 봉우리에서 겨우 두어 길인데, 구름다리 공중에 건너질러 몇 천 자나 되나. 나는 새 까마득 초(楚) 나라 하늘에 닿았는 듯, 넓은 들 분명하여 한강의 그림이네. 안개 끼지 않은 저 서쪽에 신선 마을 보이는데, 큰 강물 남쪽은 나루터로 통해 있다. 한 번 돌아 옮겨 서서 혼자서 탄식하노니, 팔방 잠시간에 둘러 볼 수 있는 듯하여라. 매달린 돌층계 들죽날쭉 90층 되는데, 옛날의 그 자취 어슴푸레 오르내린 신 자국이런가. 기이하다 세상엔 없는 청련궁(靑蓮宮)인데, 크게 슬기로운 진인(眞人)의 집이 여기라네. 석굴(石窟)이 크게 열렸는데 돌이끼 아롱지고, 수풀 속의 감실[林龕] 빛나는데 단청이 눈부시네. 그린 모습 완연히 복성(福城) 동쪽 같은데, 보배로운 앉음 금사자 등에 높이 있다. 바라보면 길한 지역 장자(長者)의 거처인데, 법계(法界)의 현관(玄關 불법으로 들어가는 입구) 열려 있는 줄 뉘라서 알았으리. 큰 자비는 분명 세상 번뇌 제거하는데, 한 움큼 샘물 흘러 내려 영액(靈液)이 피어 있다. 노는 사람 천룡(天龍)의 꾸지람 혹시라도 두려워서, 마실까 주문 외며 물그릇 한 번 던져 본다네. 연하(煙霞) 그림자 속에 외로운 탑이 푸른데, 종소리ㆍ불경 소리에 등잔불 밝게 비치네. 의연한 좋은 모임 보광(普光)을 옮기니, 응당 묘한 공양 있어 향적(香積)으로 오리라. 옛날 선왕이 어향(御香)을 올렸다는데, 지금도 중국 사신 와서 종사(宗社 나라의 종묘와 사직단)의 안녕 기원한다네. 가을 풍경 찾아내 마침 찾아드니, 중 있어 만류하며 저녁 산색(山色) 구경하라네. 처마 의지한 여러 산봉우리 옥인 양 높이 서 있고, 난간에 닿아 있는 먼 수풀들 비단같이 펼쳐 있네. 채소 음식 즐거이 들며 맑은 향기 배불리고, 다시금 부들 자리 빌려 앉아 편한 것 찾았노라. 이야기가 길어지니 조각달 깊은 문에 들어오고, 밤이 오래니 은은한 바람 잣나무를 울어 스치네. 하도 좋을사, 선탑(禪榻)의 고요하고 적막함이여, 불현듯 웃음 나네. 인생들 무어라 허덕이나. 쉽사리 의관 벗지 못함은, 혹시라도 죽백(竹帛)에 공명 정하려는 것이어라. 맑은 잠 왼통 동자의 깨우는 대로 맡기니, 붉으스레 아침 해가 떠오르네. 천태산[台崖]에 손 흔들어 부르는 사람 따라가려 하나, 여산[盧嶽]의 눈썹 찡그리던 사람이 부끄럽네. 진세의 속된 말이 청산을 더럽히니 그대여 싫어 마소, 일찍이 임금 말씀 쓰며 궁중에 들어섰다네.” 하였다.
○ 고려조 탄연(坦然)의 시에,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가 저 스님[上人]따라, 고요히 앉아 참 즐거움 배우려나.” 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에 있다.
○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바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창생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의 발동으로써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이 자연 그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덕이 높은 황제와 명철한 군왕의 도는 조(祖)를 높이고 종(宗 조상(祖上))을 공경하여 그 효도를 넓히며,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인을 넓혀서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것이 넓다고 할 것이다.
불가[佛氏]의 말에는,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한 일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게 되는데,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어서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그 빠지는 것을 건져줄 수 있으니, 살아있는 이가 만일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죽은 이를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죽은 이의 혼이 아귀(餓鬼)가 되었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돌고 도는 보응(報應)을 면하며 살아 있는 이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여기서 효자 자손(慈孫)에서 우부(愚夫) 우부(愚婦)에 이르기까지 휩쓸려서 불도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하여 온 세상이 물결처럼[滔滔] 불도를 높이고 이것을 받드는데 수륙 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그 법 중에서도 제일 성대한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종 6년)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沙門] 신(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은 오르지 조종(祖宗)의 적선[積慶]에 의하여서이니, 조상에 대한 보답을 위하는 일이라면 힘쓰지 않는 것이 없다. 또 생각하니, 신하와 백성들이 혹은 나라 일에 죽고 혹은 스스로 운명하였는데, 주관하여 제사드릴 이가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쓰러져도 구원하지 못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옛 절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베풀어서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이 가서 자리를 찾아 보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ㆍ양달(陽達), 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峯山)까지 보고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여러 절들이 있지만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주상께서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志祥)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시행하게 하였는데, 내신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을 들였다. 그달 경진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2월 신묘일에 주상이 친히 왕림하여 세단(壇)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 행차하여 보았다.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는데 세 단은 모두 집을 3칸씩 지었으며, 중단과 하단 좌우에는 또 각각 목욕실 3칸 있고, 하단 좌우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이 갖추어져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모두 합하여 59칸이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그 제도에 맞았다.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이 또 친히 보시고, 정축일에 명하여 신 근(近)을 불러, ‘그 시종을 적어서 후세에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신 근이 가만히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군왕의 덕도 효보다 큰 것이 없다 하니, 조종 제사의 예의와 추모 숭봉하는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데 무엇이 효보다 더하리요. 그런데 성인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서 제사드리고 상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임하시니, 높여 받드는 일이 극진하다 할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자질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조에 빛나고 은택은 만물에 덮였으며, 선조를 받드는 마음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을 짝하는 제사가 이미 극진하고 부처에 귀의(歸依)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불기(佛記)를 받고 묘과(妙果)를 깨달아 얻을 수 있게 하며, 그 은택이 주인 없는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의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 물건에도 미치며 친근한 데에서 소원한 데에 이르고, 어두운 데에서 밝은 데에 나아간다면, 금일부터 무궁한 후일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의 큼과 이택(利澤)의 영원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르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연못가의 누대 둘러쌌는데, 땅 궁벽하고 하늘 깊은 곳에 동부(洞府) 열려 있다. 시내는 옥이 둘린 것같이 굽이치고, 산은 구름 솟은 것같이 형세가 높기도 하네. 중을 도태(陶汰)한 원위(元魏)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내고, 불도에 혹한 소량(蕭梁)은 슬플 것도 못 된다네.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김이 없으면 마음 자연 바르게 되는 법, 누가 인연 깨달은 이고 누가 여래(如來)이더냐.” 하였다.

도성암(道成菴)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이다.
【사묘】 백악신사(白嶽神祠) 백악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낸다.
○ 중악(中嶽) 삼각산을 여기 와서 제사 드리는데 삼각산 신은 북쪽에 있어 남향이고, 백악산 신은 동쪽에 있어 서향이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를 지낸다.
한강단(漢江壇)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매해 봄ㆍ가을에 제사를 드린다.
【고적】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을 신라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회복하고 장한성 노래를 지어서 그 공적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원년(신라 문무왕 1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신라의 정병이 모두 백제 가까이에 있어 안이 비었으니 공격할 만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아와서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서쪽에 진치고, 말갈은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하기 열흘이 넘으니 성안에서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는데, 문득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또 뇌우(雷雨)가 오며 번개 치니 적들이 겁내고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에 현종(顯宗)이 중이 되어 이 절에 거처하였는데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 하였다. 절에 늙은 중이 있어 방 안에 굴을 파고 숨긴 다음, 그 위에 평상을 두어서 불측한 변을 방지하였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시냇물 흐르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한 줄기 시냇물 백운봉(白雲峯)에서 나오니 만 리 먼 바다에 길이 절로 통하네.” 하였다. 잔잔하여 바위 아래 있단 말을 마소. 많은 시일 안 가서 용궁(龍宮)에 이른다네.” 하였다.

면악(面嶽) 고려조 숙종(肅宗) 9년에 최사취(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명하여 남경(南京)으로 삼을 장소를 찾아보게 하였다. 사취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의 형편을 살펴 보았는데 도읍지를 삼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에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符合)하니, 그 주간(主幹) 중심지 임좌병향(壬坐丙向)되는 곳에 형세를 따라 도읍을 삼고, 지형에 의하여 동쪽은 대봉(大峯)에 이르고 남쪽은 사리(沙里)에 이르며, 서쪽은 기봉(岐峯)에 이르고 북쪽은 면악에 이르게 경계를 정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지금 생각하면 면악은 백악인 것 같다.

추흥정(秋興亭) 옛 터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용산(龍山)은 원래부터 강산의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며, 강에는 배가 운행하고 육지에는 수레가 통행하여 이틀 밤낮이면 경도(京都)에 이를 수 있으므로 귀인들이 많이 별장을 마련하여 두었다. 전(前) 봉익(奉翊) 김공(金公)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휴양한 지 오래였는데, 우연히 사는 집 동쪽에서 한 언덕을 발견하니 높고 바르며 등이 굽어서 형상이 배를 엎어놓은 것 같았다. 드디어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솔 베어 서까래를 걸고 속새 베어 지붕을 덮었다. 땅이 높고 모진 것은 평평하게 하고 수목이 빽빽하고 가리운 것은 베어내니, 두루 다니며 사면으로 바라보아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이에 정자 이름 지어 주기를 김비감(金秘監)에게 청하여 추흥정(秋興亭) 세 글자를 써서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내가 그 한두 가지 그럴 듯한 것을 찾아서 이렇게 적는다.
천지의 운행은 다함이 없고 사시의 경치는 같지 않은데, 우리의 즐거움도 한 가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다. 내가 이 정자를 생각해보니 봄날이 따스하고 동풍이 화창하게 불어오면 숲 속의 꽃과 들판의 풀이 붉게 새로 피고 푸르게 깔리는데, 이때에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서성거리면 유연(悠然)히 공자가 ‘나는 증점(曾點)의 기상을 허여(許與)한다.’는 마음이 있으며 뜨거운 볕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쇠라도 녹이고 돌이라도 녹일 것 같으며, 천지가 이글이글 타는 화로 같아지는데, 이때에는 나무 그늘을 찾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산보하면 한만(汗漫)하기가 열어구(列禦寇)의 신선놀이와도 같다. 또한 찬 기운이 엉겨서 얼고 외로운 기러기 구름 속에서 울고 가면 등륙(滕六)이 재주를 피워 강과 하늘이 한 빛이 되는데, 이때에 일엽 편주 저어 오가면 높은 생각 맑은 운치가 섬중(剡中)에 가는 것과도 방불하다. 그런데 비감(秘監)은 어찌하여 가을의 흥치[秋興]만을 취한 것인가.
대개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는데, 오직 봄철의 화창함과 가을철의 맑음이 사람에게 적합하다. 그렇지만 봄철의 화창한 기운은 사람들을 게을러지게 하기 쉬운데, 무더위가 명령을 거두고 맑은 가을 소리가 음률을 맞추어 들려오게 되면 하늘 끝 땅 다한 데까지 청명하고 환하게 트이니, 그 기운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비록 공명과 부귀 같은 사람의 마음을 태우는 것이라도 변하여 청량하게 되는 것이다. 사시의 경치가 가을처럼 좋은 것이 없고, 가을 경치가 이 정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비감의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공은 나이 장성해서 중국에 벼슬하였으며, 교제한 이들은 모두 부하고 귀한 친구들이요, 놀고 본 곳은 모두 매우 굉장하고 사치스럽고 넓고 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속에 거두어 가지고 나와서 쇄락(洒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대개 맑은 자이다. ‘추흥’이라는 현판을 거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봄ㆍ여름ㆍ겨울철의 이 정자에서의 좋은 일은 그대가 곡진하게 말하여 숨김이 없으면서 가을 흥치의 좋은 것은 말만 하고 드러내지는 않으니 어쩐 일인가.’ 하였다. 다른 날 김비감과 함께 복건(福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공을 따라 이 정자에 올라서, 무릉(茂陵)의 가사를 노래하고, 안인(安仁)의 부(賦)를 화답하게 된다면, 가을 흥치의 설명은 그 좌우에서 취하여 쓰매 그 근원을 알게될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농가에서 고생 고생 쉬는 일 없더니, 곡식이 익게 되면 풍년을 기뻐하네. 정자 위에서 내가 이 즐거움 같이 하는데, 산 속의 사람들도 서로 함께 놀 수 있네. 들바람 쌀쌀하게 검은 모자에 불고, 강비는 부슬부슬 낚싯배에 뿌리네. 어찌하면 그대 따라 한 번 돌아가서, 정자에 올라 구경하며 10년 수심 삭여보나.” 하였다.

담담정(淡淡亭) 옛터가 삼개[麻浦] 북쪽 언덕에 있는데,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었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저녁해 서쪽으로 떨어지고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아득한 강산에 한없는 수심이어라. 천지가 다함이 있어 나도 늙었으니, 이 몸도 나중에는 백구 뜬 물가에서 지내려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찬 구름 막막하고 강물은 유유한데, 양쪽 언덕의 푸른 단풍[楓]나무 끝없는 수심일세. 외로운 등잔 마주 대한 채 밤중이 지났는데, 강에 가득한 비바람에 푸른 물가 어두워지네.” 하였다.

중흥동석성(重興洞石城)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자이다. 성 안에 산이 있어 높이 솟은 것이 노적 같으므로 세상에서들 노적산(露積山)이라 한다.
『신증』 쌍계재(雙溪齋) 옛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姜希孟)의 부(賦)에, “서울 왼쪽 경계요, 반궁(泮宮)의 북쪽 언덕이네. 풍운은 모여 흩어지지 않고, 동학(洞壑)은 아늑하고도 넓도다. 울창하게 많은 가지 아름다운 수목이요, 아롱지게 덮인 돌은 검푸른 이끼일세. 냇물이 갈려 흐르니 비녀 다리 인 듯, 돌에 고여 서려 있는 빗물 받으니 도는 듯. 잔잔한 소리 옥가락지 울리는 듯, 콸콸 흐를 제는 여러 사람 들레는 듯. 골 안에서 나온 지 얼마드냐. 글의 물결 윤색하여 인재를 기르도다. 범상하고 용렬한 자 흘겨보고 알지 못하여, 이 좋은 지역 풀 속에 묻혀 있게 하였네. 진정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겼음은, 어질고 준수한 이 기다려서 열어 주려 함이로세. 여기에 금헌(琴軒) 선생은, 높은 관원의 자손이요 화려한 집안의 맏이로세. 어지러운 세상 싫어하고 도를 즐기며, 정신이 명랑하고 기상이 빼어났다. 옛 책 읽기 즐겨하고, 역사를 섭렵하였네. 어찌 나이는 젊지만 그릇은 노성한가, 정말 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풍부하다. 흉금이 트였으니 개인 밤 달과 같고, 호방한 기운 뻗어나서 우주에 찼다네, 비단옷 옛 기습(氣習) 벗어나서, 천석(泉石)에 고질병 들었네, 관복을 두르고도 먼 것을 생각하며, 조시(朝市)에 젖어 있어 발길이 막혔어라. 그러므로 성중에서 살 곳을 찾아, 멀다고 여겨 찾지 않은 곳 없었다네. 반수(泮水)에 찾아보다가, 물 근원 다 가서야 이 자리 얻었다네. 남쪽을 앞으로 하고 북쪽을 등졌으니, 군자의 거처할 곳이로다. 이에 가시덤불 처 버리고 깊고 좁은 것 개척했네. 띠풀을 베고 재목을 모아,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했네. 따뜻한 방을 만드는데 밝고 맑게 하고, 바람 불어오는 격자창 성글게 사면으로 열었도다. 선생이 그 안에서 눕고 쉬며, 아침저녁 휘바람 불고 노래하네. 하늘 조화 자세히 관찰하며, 사시 변하고 바뀌는 경치 보노라. 봄철이 와서 화창한 볕이 공중에 가득하면, 언덕의 풀은 돋아나려 하고 땅은 처음으로 풀리며, 시냇가 누른 버들가지 흔들리고 동산의 복사꽃 붉게 타오른다. 풍연(風煙) 어두운 건 푸른 솔이로세. 글 읽는 소리[絃誦] 공자묘에서 들리는데 쌍계수(雙溪水) 깊고 맑게 흐름이여, 돌 여울로 내려오면서 영롱(玲瓏)하도다. 선생은 이때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예닐곱의 관(冠)을 쓴 어른과 동자를 데리고 스르릉 비파 울리어 정회를 펴면서, 기수(沂水)에 목욕하던 높은 자취를 사모하도다. 맑고 훈훈한 그 절기 되면 녹음 더욱 좋은데, 자색 제비 가벼운 바람에 날아들고, 누런 꾀꼬리 높은 언덕에서 노래한다. 어느 사이 뜨거운 햇볕 하늘에 있으면 붉은 구름 멈추고 가지 않는데, 쌍계수 맑고 차고 푸르며 구비 돌아 웅덩이지고 다시 흘러 버리도다. 선생은 이때 가는 베옷 풀어헤치고 바람을 쏘이며 서늘한 그늘 찾아 편안히 쉴 것이다. 매우(梅雨) 부슬부슬 내리고 그늘진 구름 덮여 있을 때면, 산앵도 타는 듯 붉게 익고 젖은 새는 갈 곳 없어 헤매는데, 쌍계수는 여러 골 물 받아 모아 형세 더욱 커져 공(空) 산에 메아리 치며 세차게 흐르도다. 선생은 이때면 청려장 손에 들고 짚신 발에 신고, 근본이 있으면 멈추지 않고 근원이 없으면 마르기 쉬운 이치 생각하도다. 쇠소리 나는 바람 슬슬 불고 비취 같은 하늘 맑게 개였는데, 무서리 수풀에 뿌리면 진홍빛 현란하니 취한 듯하여라. 꽃다운 국화 언덕 위에 피어 있고, 연잎은 쓰러져서 찬 못에 덮여 있다. 상쾌하고도 쓸쓸함이여, 마음대로 멀리 찾고 그윽한 경치 더듬게 하도다. 쌍계수는 맑고 밝아 거울 같으며, 푸르고 깨끗하여 쪽[藍] 같도다. 선생은 이때 향기로운 두루미 열어 놓고 흐르는 물 보며 좋은 손님 맞아 즐기도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흰 달이 광채를 더하게 되면, 밤들어 산은 적적 사람 없는 것 같은데, 귀뚜라미 울음소리 뜰 안에서 목 매인 듯 들려온다. 쌍계수는 차고 찬데 달은 더욱 빛이 밝아 은물결 사방에 흩어졌도다. 선생은 이때 거문고 어루만지며 한 곡조 연주하니 산과 물의 깊은 뜻을 줄줄이 엮어낸다. 삭풍(朔風)이 울부짖으면 긴 수풀 모두 비는데 찬 기운 몸에 해로울까 걱정하여, 나무등걸 지펴니 따뜻하게 한다. 쌍계수 얼음 얼어 새겨놓은 듯 깎아놓은 듯 거문고 소리 딩둥댕둥 울리도다. 선생은 이때 석양 주흥(酒興) 얼큰하여 붉은 털옷 걸치고서 남쪽 언덕에 서서 돌아갈 줄 모르니, 얼굴을 깎아내는 듯한 찬바람인들 아랑곳하리. 그리고 빽빽한 구름 잎사귀처럼 뭉치고 퍼붓는 눈 낙화처럼 날리는데, 공중에 흩어져서 노송나무를 덮고, 구렁을 메우고 언덕에 가득하다. 쌍계수 얼어붙어 소리는 없는데, 움틀꿈틀 은빛 뱀이 달리는 것 같아라. 선생은 이때 비단 휘장을 걷어올리며 창의 깁을 열고, 양고주(羊羖酒) 좋은 술 부어 가며 미인 시켜 거문고 뜯어 현묘(玄妙)한 곡조 들으며 즐기도다. 집안엔 봄철처럼 화창한 기운 덮이고, 사시의 차례 어지럽게 오고 가도다. 정말로 광경은 한이 없는데 세상 티끌 반걸음 저 밖이로다. 완연히 한 번 병 속에 들어간 것 같아라. 이야말로 땅의 영기가 기다렸다가 비장(祕藏)한 것 내어 준 것이냐. 가시덤불 베어내니 흙이 조강(燥剛)하도다. 뜰 안에서 말을 돌릴 만하니 객이 당에 오르도다. 집을 지어 안락하니 군자 여기서 편안하다. 군자 여기서 편안하여 천 년을 누리리라. 거듭 노래로 고하나니, 물소리 산을 두르고 산은 작은 집[蓬蓽] 가리웠네. 마음 편히 떨쳐가서 그윽하고 고독함 즐기노라. 무엇이 즐거운가, 성조(聖朝) 벗어나서, 어하(魚蝦)와 짝이 되고 미록(麋鹿)과 친구 되네. 내가 쌍계를 사랑함이여 강호도 산림도 아님일세. 몸은 비록 벼슬해도 마음만은 연하(煙霞)에 있네. 가서 따르고자 하였으나, 동부(洞府)가 깊고 깊었어라. 무엇으로 그대에게 주리오, 쌍남금(雙南金)이로다.” 하였다.

【명환】 신라 총명(聰明) 헌덕왕(憲德王) 17년에 북한산 도독(北漢山都督)이 되었다. 헌창(憲昌)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백여 명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여, 도읍을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잡아 죽였다. 김대문(金大問) 성덕왕(聖德王) 3년에 도독이 되었다. 변품(邊品) 도둑이 되었다. 찬덕(讚德)의 아들 해론(奚論)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椵岑城)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조에 부유수(副留守)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유응규(庾應圭) 나가서 남경의 수령이 되었는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맑고 간략함을 숭상하며 한 가지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아내가 젖을 앓는데도 채소국만을 먹으므로 아전 한 사람이 가만히 닭 한 마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그분이 평생에 선물을 받아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어찌 잘 먹고자 하여 그 분의 맑은 덕에 누가 되게 할 것인가.” 하니, 아전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유원순(兪元淳) 희종조(熙宗朝)에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었다. 오형(吳詗) 원종조(元宗朝)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왕규(王珪) 유수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홍자번(洪子藩) 유수판관(留守判官)이 되어 끼친 은혜가 있었다. 윤선좌(尹宣佐)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나가서 한양윤(漢陽尹)이 되었다. 조금 있다가 왕과 공주가 용산(龍山)에 갔는데 좌우 사람에게, “윤윤(尹尹)은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을 돌보아 주게 한 것이다. 너희들은 조심해서 아예 소란 피우지 말라.” 하였다. 박인헌(朴仁軒) 한양윤이 되었다. 정해(鄭瑎) 충선왕조(忠宣王朝)에 남경 유수(南京留守)가 되었다. 조문발(趙文拔) 남경 사록(南京司錄)이다. 박달상(朴達祥) 공민왕조(恭愍王朝)의 한양윤이다. 민제(閔霽) 한양윤이다.
【인물】 고려 한종유(韓宗愈)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고, 아홉 번째 승진하여 삼중대광 좌정승 한양부원군(三重大匡左政丞漢陽府院君)이 되었다가 그 고장으로 연로하여 물러났다. 젊었을 때, 당시의 명사들과 오가며 모여서 술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이름하여 양화도(楊花徒)라 하였다. 종유가 취하면 문득 일어나 춤추며 양화사(楊花辭)를 노래하기를, “그믐의 맑은 바람 기다려서 날아 올라 황각(黃閣 의정부(議政府)의 딴 이름) 가운데 이르리라.” 하니, 아는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조돈(趙暾) 처음 이름은 우(祐)이다. 쌍성총관(雙城摠管) 휘(暉)의 손자인데 대대로 동쪽 경계의 용진(龍津)에 살았으며, 약관(弱冠) 전에 충숙왕(忠蕭王)을 섬겼다. 그때 이속과 백성들이 도망하여 여진(女眞)으로 들어갔는데, 임금이 돈을 보냈는데, 해양(海陽)에 가서 백여 호를 데려오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여러 번 승진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가 되었으며,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홍적(紅賊)을 쳐서 패주시키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용진에서 죽었다.
【본조】 조인벽(趙仁璧) 돈의 아들이다.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조인옥(趙仁沃) 인벽의 아우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니, 윤소종(尹紹宗)이 군전(軍前)에 나가 곽광전(霍光傳)을 드렸는데, 태조가 인옥에게 읽게 하고 들었다. 여기서 왕씨(王氏)를 복위(復位)하는 의논을 극구 진술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지위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온(趙溫) 인벽의 아들이다. 개국 정사 좌명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에 참여하였으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조연(趙涓) 인벽의 아들이다. 태조조의 개국공신이며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조영무(趙英茂)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계생(趙啓生)ㆍ조말생(趙末生) 건문(建文) 신사년(태종 1년)과거에 장원하고 벼슬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조혜(趙惠) 연(涓)의 아들이다. 형조ㆍ호조 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겼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효자】 본조 홍계산(洪戒山) 어머니가 복병(腹病)을 얻어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계산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종(成宗) 무신년에 사실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한계련(韓繼璉) 외조모가 오래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왕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식(李植) 어머니가 오래도록 앓았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견(金壽堅) 어머니가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수견이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을 지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석련(金石連)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석련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복(服)이 끝나도 오히려 아침 저녁 상식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귀손(朴貴孫)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아버지가 병이 났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어머니 병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맹감(金孟監) 다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장성하여 계모의 상에 복을 다 입은 다음에는, 이어 생모를 위하여 추후로 3년복을 입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에 살며 조석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전호손(田好孫) 갑사(甲士 군인)이다.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지성스럽게 전 올리고 제사지냈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손수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지냈다. 일찍이 상중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돌아와서는 다시 3년상을 다하였다.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도 역시 술ㆍ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 왕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희(柳熙) 어머니가 악질(惡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金粹)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는데 삭망(朔望)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제물을 많이 차리고, 이웃 사람들을 청하여 즐겁게 하였다. 전후 시묘 살기 각각 백 일이었는데,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상사가 끝난 다음에도 소복으로 3년을 마쳤으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전 올리는 일을 폐지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붕이(朋伊)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나이 12세에 아버지가 악질을 앓으니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조어정(趙於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그 누이 막금(莫今)과 함께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다. 부모가 잇따라 별세하니 3년 간을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고, 나무 형상을 만들어서 조석으로 전 올리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새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올리며, 초하루마다 묘소에 올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함께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소비(少非)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죄인에 연루되어 길성(吉城)으로 귀양가고 어머니는 명천(明川)으로 귀양 갔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60리나 되었다. 소비가 낮에 관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서 어머니를 모셨다. 풀려 돌아오게 되자, 밥을 빌어서 봉양하며 따뜻하고 서늘한 데에 맞추어 마음을 다하였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숙미(淑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나이 14세에 어머니가 악질을 앓으니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렸는데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말금(末今) 사가의 천인이다. 나이 15세에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련(朴連) 사가의 천인이다. 부모가 일찍이 불교를 진심으로 믿었으므로 죽게 되니 집안이 모여서 화장하였다. 박련이 어릴 때 상사를 당하였으나, 장성하게 되어 슬퍼하고 사모함을 마지 못하여 화상을 그려 벽에 걸어두고, 날마다 상식(上食)드리며 남긴 의복을 가져다 시신을 불 태운 곳에 합장하고 6년 간을 시묘 살며 한 번도 집에 와 보지 않았고 또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충의】 본조 심원(深源) 종실(宗室)인데 주계군(朱溪君)에 봉해졌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일찍이 그 외숙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힘써 말하니, 성종이 사홍을 외지로 귀양보냈는데 연산군 말년에 와서 사홍이 세력을 얻으면서 마침내 심원을 죽였다. 지금 임금 초기에 작위를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아들 유령(幼寧)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는데 함께 살해되었다.
김동(金同) 종실 강녕부정(江寧副正) 기(祺)의 종이다. 연산군의 사랑하는 기생이 기(祺)의 집을 빼앗고, 기가 종을 시켜 자기를 욕한다고 호소하니, 연산군이 노하여 기 및 김동을 가두고 불로 지지며 심문하였는데, 동(同)이 말하기를, “죄는 나에게 있지, 주인은 모른다.” 하여 기는 벗어났지만, 동은 형벌을 받았다. 지금 임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공신옹주(恭愼翁主) 성종대왕의 딸인데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에게 출가하였다.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연산군이 갑자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게 되니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씨(柳氏) 좌의정 허침(許琛)의 아내이다. 침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친히 재물을 장만하였다. 연산조 때에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법이 엄하였지만, 그래도 예절을 지켜서 3년상을 마쳤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씨(朴氏) 승지 강경서(姜景敍)의 아내이다. 연산조 무오년에 경서가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니, 박씨가 걱정하고 상심하여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해를 넘겨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민씨(閔氏) 조성벽(趙成璧)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씨(金氏) 대사간 강형(姜詗)의 아내이다. 연산조 갑자년에 형이 살해되니 김씨는 제대로 먹지 않고 울부짖어 곡하다가 한 달이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동질비(同叱非) 관청에 매인 천인 범산(凡山)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니 3년간 복상(服喪)하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하루 세 번씩 상식을 드리며 시어머니 섬기기를 매우 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남씨(南氏) 부사(府使) 최계사(崔季思)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리고, 죽을 먹으며 상기를 마쳤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도리정균통조만(道理正均通漕輓)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도리(道理)가 바르고 고른데 배와 수레[漕輓]가 통한다 “강산이 겹겹으로 막히니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낫다.” 하였다. 화악최괴압한강(華嶽崔嵬壓漢江) 권우(權遇)의 시에, “화악(華嶽)이 높이 솟아 한강을 누른다 “금성(金城) 천부(天府)의 요해지는 이 이상 없는 것이다.” 하였다. 호거용반천고지(虎踞龍蟠千古地) 전인(前人)의 시에, 호랑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천고의 지역이다. “꿩의 문채요 새 나는 듯 구중궁궐이네.” 하였다.
팔영(八詠) 기전산하(畿甸山河)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기름지고 풍요한 기전(畿甸) 천리 땅에, 안팎의 산하(山河)는 백두 겹일세. 덕과 교화로 땅의 형세까지 겸하니, 역년(歷年)이 천 년을 가리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첩첩한 멧부리 기전(畿甸)을 둘렀고, 길게 흐르는 강물 도성을 둘렀네. 아름다운 이 형승(形勝) 하늘이 내린 것, 임금 도읍터 참으로 좋구나. 사방으로 거리 모두 비슷하고, 기름진 전원(田原) 농사 지을 만하네. 주민들 부유하고 많아 태평 세월 즐기니, 곳곳에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사방으로 나라 터도 멀고, 천년 왕조에 지리도 웅장하구나. 강산에 험요(險要)한 곳 조물주의 조화인데, 나라 세우고 여기에 경영하였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한 그 고장에 닭의 울음개 짖는 소리 들리누나. 우리 임금 덕을 닦아 시종 여일 조심하니, 크나큰 왕업(王業) 길이 무궁하리라.” 하였다.

도성궁원(都城宮苑) 정도전의 시에, “성은 높아 철옹(鐵瓮)인데 천 길이요, 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 해마다 상원(上苑 어원(御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 해마다 서울 사람들 놀며 즐기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하늘이 주신 큰 도읍지 장하기도 한데, 구름 걸친 저 사이로 성첩이 열렸네. 금벽(金碧)으로 단청한 추녀 성대하고 높은데, 검(劍)과 노리개 찬 이들 이 사이에 배회하누나. 상원(上苑)에서 봄을 즐기는데, 깊은 궁중엔 만수 축원 술잔 도네. 우리 임금 정사에 근면하여 조회보고, 꽃 그림자 사이 돌아 누대로 돌아가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날아갈 듯 저 도성 웅장한데, 크고 높음 존엄함을 상징하였네. 오색 구름 좋은 기운 참으로 천지에 가득하여, 그 기운 엉겨서 태평세월 이루네. 검(劍)과 노리개 찬 이 단궐(丹闕)로 달려나가고, 큰 깃발 작은 깃대는 자문(紫門)에 번득이네. 임금 얼굴 지척간에서 온화한 말씀 하사하시는데, 머리 조아리며 성은(聖恩)에 감사하누나.” 하였다.

열서성공(列署星拱) 정도전의 시에, “여러 관청들 높이 서서 서로 향하는 것, 별들이 북두칠성[北辰] 향하듯 했네. 달 밝은 새벽 거리는 물같이 고요한데, 굴레장식 울려도 작은 티끌 일지 않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줄같이 곧은 긴 거리 넓기도 한데, 별 두른 여러 관청 나뉘었네.” 하였다. 궁문 향해 관원들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많은 사람들 밝은 임금 보좌한다네. 여러 정사 공적을 이루었고, 뛰어난 인재들 모두 특출하구나. 거리에 가득[籠街] 갈도(喝道 길 비키라는 소리) 소리 쉴 새 없이 들리니, 관리들 퇴청하느라 한창 분주하구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하늘에 가까운 저 궁궐 깊숙도 한데, 별처럼 벌여 있는 관청들 많기도 하구나. 높은 오대(烏臺 사헌부)ㆍ봉각(鳳閣 의정부) 가장 맑고 화려한데, 마주 대하여 성대하고도 높다랗다. 밤 숙직땐 촛불 켜고, 새벽 조회 길엔 굴레장식 울리누나. 빛나는 우리 임금의 교화 덕에 티 없으니, 이 백성들 은혜의 물결에 젖었어라.”하였다.

제방기포(諸坊碁布) 정도전의 시에, “큰 집들[第室] 구름 위에 높이 섰고 여염집 땅에 가득 연이었네. 아침저녁으로 연화(煙火) 끊기지 않으니, 일대의 번화한 것 태평도 하여라.”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새 서울에 하늘 관청 열었는데, 여러 동리 판 위의 바둑처럼 펄쳐 있네. 천문 만호 어슷비슷한데, 관원들 날마다 상종하누나. 저자 가게 집집마다 풍요하고, 동산 정자 곳곳마다 기이하네. 멀리 저 달 아래 노래 소리 들려 오니, 태평 시기 이때이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얼기설기 여염집 조밀하고, 이리저리 도로가 나뉘었네. 천만 수레와 말들 스스로 떼지어, 오고가기 어찌 그리도 분분한가. 저자의 장사치 온종일 모이니, 거리의 종소리 바람 속에 번화한 것 알려주네. 이 시대는 문화를 펴는 때라, 대궐에 상서로운 구름 항상 엉기누나.” 하였다.

동문교장(東門敎場) 정도전의 시에, “종고(鍾鼓) 소리 쾅쾅 땅을 흔들고, 깃발 펄럭펄럭 공중에 휘날리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주선함이 한결 같으니, 몰아가서 싸움 할 수 있겠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다섯 장교[五校] 그 모습 장엄한데, 세 군영엔 호령도 잘 듣는다. 동문에서 징과 북소리 울려올 제, 일만 기병들 무기를 번득이네. 햇빛이 비치니 금빛 갑옷 선명하고, 바람이 이니 그림 그려 놓은 깃발 펄럭이네.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 불러 많은 공 이루어, 사방 나라에 웅장한 이름 떨치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지세는 평평하여 손바닥 같은데, 군용(軍容)의 신속함 우레 같네. 북치면 나가고 징치면 그치기 몇 번이나 되풀이했나, 일만 기병 다시 돌아오네. 진치는 것은 정명(精明)한 기술이고, 적의 기세 꺾는 것은 용결(勇決)한 재주일세. 이만하면 적국들 스스로 항복해 오게 할 것이니, 미리 병사를 양성함 어찌 부질없다 하리.” 하였다.

서강조박(西江漕泊) 정도전의 시에, “사방의 선박들 서강으로 몰려들어, 용 그린 배 앞서 끌어 1만 섬[斛] 풀어놓네. 그대여 저 창고의 썩는 쌀 보았는가, 정사 잘하는 일은 식량 넉넉하게 하는 데 있다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남해에 풍랑 고요하니, 서강에 선박들 모여드네. 검은 돛대 총총히 서서 구름 하늘 가리웠는데, 쌓인 노적 산과 가지런하네. 일천 창고의 썩고 남는 곡식, 창생 일만 집의 밥 짓는 연기이네. 공사간에 부유하고 저마다 편안하니, 왕실의 큰 사업 길이 길이 이어지리.”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조운(漕運)은 천리 길에 통하고, 누선(樓船)은 만 척이나 겹겹이 대었네. 긴 강에 물결 넓어 물가를 감싸는데, 조수 들어오니 많은 배 돛을 내리네. 공물과 부세(賦稅) 해마다 들어오고, 창고는 날마다 받아들이네. 백성의 양식 나라의 수요 모두 다 충족하니, 춤추며 성은에 보답하자.” 하였다.

남도행인(南渡行人) 정도전의 시에, “남쪽 나루터에 물결 도도(滔滔)한데 행인들 사방에서 모여들어 분주하네. 늙은이 쉬고 젊은이 짐 지고서, 즐거운 노래 앞뒤에서 주고받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관가 나루터 잡다하게 건너려니, 번화한 서울의 문턱이라 그러하다. 거리 정자 날마다 높은 수레에 맞이하여, 오가는 술잔 향기롭게 기울이네. 들길은 강 언덕에 잇닿았고, 물가 모래엔 물 흔적 남아있네. 오가는 사람들 모두 이 속에서 분주하니, 물 건너는 은혜 뉘라서 알 것인지.”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멀리 보이느니 아득한 저 길인데, 가로 흐르는 강물 여기저기 나루터일세. 남쪽에서 오고 북쪽으로 가는 사람 몇천 명 될는지, 끊이지 않고 날마다 들어온다네. 바람이 자니 배는 조용히 건너가고, 연기 개니 물 기운 새롭구나. 제천정(濟川亭) 그 위엔 송별ㆍ영접도 잦아, 흐뭇하게 화려한 자리 베풀었네.” 하였다.

북교목마(北郊牧馬) 정도전의 시에, “저 북쪽 들 평평하기 숫돌 같은데, 봄철 되면 풀 무성하고 샘물 좋다네. 일만 말 구름처럼 몰리고 까치처럼 뛰는데, 말 기르는 사람들 마음대로 서쪽 남쪽에 서성이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무성한 풀은 긴 들 저 밖에 있고, 맑은 냇물은 끊어진 언덕 가로 흐르네. 용마[龍媒] 일만 필 다투어 높이 뛰는데, 저 멀리 오색 꽃 잇닿았네. 언덕에서 뛰놀 적에 발굽에서 번개가 생기고, 바람결에 울음 우니 갈기에서 연기 출렁이네. 사특함 없는 그 생각 앞으로 나갈 수 있나니, 《시전》의 경시(駉詩) 한 편 우리 님께 드리려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들이 넓으니 푸른 연기 덮여 있고, 봄이 깊으니 푸른 풀 가지런히 자랐네. 달리고 뛰는 말떼들 동쪽으로 서쪽으로, 번갯불 번쩍이며 가볍게 굽놀리네. 물을 건너며 무리지어 마시고 바람 향해 서서 짝을 찾아 울음 우네. 말 기르는 사람들 하루종일 긴 언덕 오르내리니, 도롱이 삿갓에 비 젖어 쓸쓸하여라.” 하였다.

십영(十詠) 장의심승(藏義尋僧) 풍월정(風月亭) 시에, “푸른 언덕 일만 겹이 푸른 옥 같은데, 그 안에 있는 절 거의 3백 곳. 나는 샘물 폭포 되어 절벽에 걸렸는데, 바위 가에 큰소리 옷감이 찢기는 듯. 노는 사람 이 좋은 경치 두고 혼자서 돌아가리, 종일토록 중을 찾아 마주앉아 말하네. 머리 돌리니 인간 세상은 꿈만 같으니, 이곳은 정녕 노닐 만한 곳이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산 아래 찬 물결 옥 같은 시냇물인데, 동구 나가선 웅덩이 이루어 몇 백이더냐. 구름 깊은 곳 저 멀리 보배로운 당간(幢竿) 보이는데, 목탁 소리 떨쳐나서 산이 찢어지는 듯. 승려와 짝하기 좋아하여 머물고 가지 않는데, 현묘(玄妙)한 말 하다가는 문득 세상 말씨[侵綺] 부끄럽네. 백발 늙은이 돌아와서 우리들 찾으니, 이곳이 저 광산(匡山)의 글 읽던 곳인줄 알겠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세 봉오리 우뚝우뚝 옥을 깎아 세웠는듯, 전조(前朝) 시대의 옛 절이 8백 곳이나 된다네. 고목이 바위를 둘렀는데 누각(樓閣)이 겹겹이고, 우는 냇물 부딪히니 산 돌이 찢어지네. 내 옛날 중을 찾아 한 번 돌아가서, 밤늦도록 밝은 달 아래서 정담을 나누었지. 새벽 종 한 소리에 깊은 반성 생기지만, 백운이 땅에 가득하여 방향을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절 아래 맑은 냇물 푸른 구슬 흐르는 듯, 절 안에 사는 중은 수없이 많구나. 때로 뇌성소리인양 새벽 종이 울리는데, 높은 봉 무너질 듯 푸른 언덕 찢기는 듯. 한가한 틈타 성 밖 나와 중을 찾아가, 전의 셋과 후의 셋이 어떠한가 한 번 물어봤네. 동문이 깊숙하여 연하(煙霞)도 늙었으니, 멍하니 이 몸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레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절 뒤의 산봉우리 옥처럼 모였는데, 문 앞의 높은 나무 백 년도 지났으리. 임학(林壑)이 굽이굽이 돌아 깊고도 깊은데, 범종(梵鍾) 두어 소리 산이 찢어질 듯 울려 오네. 마른 여장(藜杖) 휘두르며 연기와 덩굴 헤쳐 들어가서, 한가로이 승방 찾아 중과 이야기하네. 오손도손 주고 받는 말 해가 지는 줄도 모르니, 세상 티끌 씻을 곳 여기가 아니던가.” 하였다.

제천완월(濟川翫月) 풍월정 시에, “은하수에 바람 없어 흰 물결 고요하니, 늙은 두꺼비 저 못 속의 그림자 들이마시고 있구나. 강 머리에는 백옥 소반 굴리는 것 같은데, 구름 저 사이에는, 벌써 황금 떡이 솟아났네. 높은 다락에 한 잔 술 차갑고 깨끗도 한데, 이 맑은 광경 대하니 백발도 모르겠네. 머리 돌리니 젓대 소리 어디서 들려오나, 밤 깊으니 예상곡(霓裳曲) 듣는 것 같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밤은 차고 강도 비어서 모든 소리 고요한데, 가는 발 반만 걷고 흰 달빛 맞이하네. 자색 연기 날아 흩어지니 하늘은 넓기만 한데, 얼음 바퀴 반쯤 나오니 금으로 떡을 만들었네. 비고 밝은 이 마음도 함께 맑고 깨끗하니, 밤 늦도록 학과 함께 흰 털을 흩날리네. 강 다락 어느 곳에서 쇠젓대 소리 들려오나, 맑은 흥 유유(悠悠)하게 강 구비에 퍼져가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가을 빛 일만 이랑 유리처럼 고요한데, 그림 기둥 구슬 발에 찬 그림자 어른거리네. 먼 하늘 구름 없어 쓸어버린 것 같은데, 앉아서 밝은 달 황금 떡 모양 나오기만 기다리네. 천지의 맑은 기운 뼈 속까지 스미는데, 밝은 광채 비쳐 털끝도 하나하나 세겠네. 밤은 깊고 깊은데 광경 더욱 기이하여서, 열두 구비 난간 모두 옮겨 의지하였다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달이 가을 강에 드니 강물이 고요한데, 백 척 다락 한가로이 누운 모습 돌탑[浮圖]과도 같구나. 달을 마주 앉으면 열 말[斗] 천 말 술 기울일 것을, 달처럼 둥근 3백 개의 떡은 해서 무얼 하나. 맑은 빛 찬 기운 위아래로 들어오니, 이 내 귀밑털 수풀처럼 일어서네. 다만 바라는 건 언제나 술 그릇 속의 술 비치는 것. 거울같이 둥글거나 갈구리 모양 굽은 것 무어라 생각하리.”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 위에 바람 없고 가을 밤 고요한데, 가는 구름 움직이지 않으니 그림자도 없구나. 난간 의지해 수정 발 걷어올리니, 바다의 용이 금색 둥근 떡 받들고 나오네. 하늘 빛 물빛 둘 다 맑고 깨끗하니, 한끝 맑은 그 빛에 흰 머리털 더욱 밝아지네. 문득 이 내 몸 광한궁(廣寒宮)에 있는가 의심하나니, 귓가에 예상곡(霓裳曲) 들려오는 것 같구나.” 하였다.

반송송객(盤松送客) 풍월정 시에, “오늘 아침 천리 길 떠나는 손 전송하니, 나를 대해 앉아 황금 술잔 사양마소. 떠나는 길에 술을 부으니 눈물자국 젖었는데, 이별하는 마음 얼마인가 수심도 그지없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삼상(參商)과도 같아, 가고 오는 저나 내나 모두 애끊는 일이로세. 바람을 당해 서서 세 번 탄식하고 다시 슬퍼하는 것은, 그리운 그대 볼 수 없고 마음만 망연하여서라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수레 일산 구름처럼 모여 먼길 손 전송하니, 술잔 소반 흩어진 데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머나먼 길 술도 다했는데, 가고 남는 일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 나니, 소리소리 귀에 들어 창자라도 끊게 하네. 별안간에 이별하면 천리 길 떨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망(蒼茫)하기만 하구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옛 친구 나를 이별하며 원유가(遠遊歌) 부르는데, 무엇으로 전송할까나 한 쌍 은 항아리 기울여보세. 성문 밖에 버들가지 어찌 차마 꺾을쏘냐, 방초에 남은 한 끊길 날이 있으리. 지난해에도 금년에도 길이 삼상(參商)처럼 떨어졌으니, 부자로 이별하나 가난으로 이별하나 애태우긴 한 가지라네. 양관곡(陽關曲) 세 곡조 노래 이미 끝났으니, 동쪽 구름 북쪽 나무 모두 함께 망망(茫茫)하여라.”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도성 정자에 만리 길 유람하는 저 손 보낼 적에, 취한 뒤 노래 길게 부르며 옥 항아리 두드리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삶은 구르는 쑥대 같으니, 백 년간 허덕이다 언제나 그만두나. 미인은 비파를 타서 청상곡(淸商曲) 연주하니, 좌중이 침울하여 창자까지 수심일세.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으니 어이할까나, 내일 아침 서로 생각하면 길만 망망하리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내 옛 친구 관문 밖으로 유람 보낼 제, 손에 한 쌍 꽃 그린 사기 항아리 들고 왔네. 단번에 수십 잔 들어도 술 아니 취하니, 이별의 한(恨) 길고 길어 끝없어라. 잦은 가락 급한 피리 궁상(宮商) 곡조 곁들이니, 가는 말 떠나지도 않아 창자 먼저 끊기노라. 슬프게도 이별하고 동서로 헤어지니, 만 겹 구름 낀 산 앞에 놓여 아득하네.” 하였다.

양화답설(楊花踏雪) 풍월정 시에, “북풍의 성낸 소리 밤새도록 메아리치더니, 아침에 내리는 눈 크기가 손바닥만하네. 넓고 넓은 천지 끝이 없는데, 언덕과 골짜기 평평해졌으니 깊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강촌 어가(漁家) 두어 채 초가집, 울타리 아래에 수북수북 은대[銀竹]로 가득 찼네. 이곳에 오면 흥이 절로 나, 시도 읊고 술도 들며 쉴 사이 없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강 머리에 바람 세차니 마른 나뭇잎 소리 내는데, 얼은 구름 땅에 붙으니 평평하기 손바닥 같아라. 잠시간에 눈 되어 바다를 덮어 오니, 언덕은 평평하고 골짜기 가득 차서 한 길이나 깊어졌네. 언덕에 의지한 어가(漁家) 여덟 아홉집에 술 판다는 푸른 깃발 대 끝에 휘날리니, 삼백 닢 청동전(靑銅錢) 가지고서, 바로 술청[壚頭]으로 나아가서 이내 몸 쉬어보리.”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북풍이 땅을 휩쓸고 모든 소리 메아리치는데, 강 머리의 눈조각 손바닥보다 더 크네. 망망한 은세계엔 인적 볼 수 없는데, 옥산(玉山)은 공중에 기대서서 천만 길 높았어라. 내가 이때 나귀 타고 가니 모자가 집 같은데, 은꽃은 눈을 어지럽히고 머리털 대처럼 곤두선다. 돌아오다 술 사서 청루(靑樓)에서 마시고, 취한 뒤 매화등걸 찾아가서 꽃 소식 찾아 보자.”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쌓인 눈 하얗고 북풍은 소리내니, 한(漢) 나라 궁중엔 선인(仙人)의 손바닥 얼어 부러졌네. 나귀 타고 강산에 취하여 시 읊으니, 흉중에 큰 기개 천 길 무지개처럼 펼쳐지네. 원안(袁安)이 흰 집에 누워 있던 일 우습고, 희만(姬滿)의 황죽(黃竹) 노래도 우습구나. 바로 시율(詩律)을 가지고 매우 엄함을 겨루었으니 설당(雪堂)에 높은 기풍 우러러 탄식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변의 갈매기 해오라기 그림자 볼 수 없는데, 하늘 위의 옥가루 신선의 손바닥에서 뿌려지네. 공중에 어지러이 흩어지며 바람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차 어느 사이 한 길이나 되었네. 열 말[斗] 천 말 술집마다 가득한데, 눈에 가득한 구슬꽃 대숲을 눌렀네. 옷을 잡혀 술을 사니 흥이 팔방에 비껴있어, 백 년의 인생사가 한순간에 식어졌다.”

목멱상화(木覓賞花) 풍월정 시에, “구름 한가롭고 봄 산은 높은데, 아지랑이 은은히 시내 다리에 잇닿았네. 산에 올라 꽃을 구경하고 취하기도 하였으니, 그대와 함께 종일토록 포도주 따랐지. 벌의 소리 새 울음은 촌가 담장에서 들려오고, 꽃 기운은 늦는 봄비 빚어낸다. 돌아오니 석양은 거리에 비쳐 기우는데, 운종가(雲鍾街 종로) 큰 거리에 인경[鍾鼓]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종남산 푸른 기운 구름 위에 높은데, 서울 장안 24개 다리 굽어본다. 앵무새와 꽃 한창 좋고 궁원(宮苑)도 깊으니, 옥술잔에 포도주 붓는 모임 상상한다. 구름 비단 단장하여 일만 집 담장을 이뤘는데, 한 쟁기 향기로운 비 거두네. 노끈 길다 해도 서쪽으로 지는 해 매지 못하는 법, 높은 다락 뗑뗑뗑 종고(鍾鼓)소리 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성 남쪽 지척에 산이 정히 높은데, 푸른 구름 열두 다리 더위잡고 올라가네. 화산(華山 북악산)은 옥부용(玉芙蓉)인 양 깎아 섰고 한강수 깊고 깊어 금포도(金葡萄) 물들었네. 장안 일만 집 온갖 꽃 핀 언덕 누대에 은은히 비쳐 붉은 비 같아라. 청춘(靑春) 제철에 와서 구경하는 이 얼마나 될는지, 낮이 길고 긴데 갈고(羯鼓)로 재촉하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남산에 앉아 보니 증성(曾城)도 높아, 어구(御溝)의 버들 무지개 다리에 스치네. 상원(上苑)에 꽃이 피니 붉은 노을 무르익고, 태액(太液 비원의 못)에 물결 따스하니 포도주 넘치는 듯, 큰 집[甲第]들 구름에 닿고 봄은 언덕에 가득한데, 동풍이 우유 같은 비를 불어 보내네. 천만 가지 붉은 꽃 고운 자태 머금어, 서로 재촉하여 마루 앞의 북 치지 않게 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인경산(引慶山 남산의 딴이름) 층층의 구름 속에 들어 높고, 공중에 백 자는 되게 무지개 다리 걸려있네.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흥이 다함 없고, 푸른 술 처음 익어 포도 빛이 진하여라. 천만가지 꽃핀 언덕이 어두운데, 어찌 즐기지 않고 풍우에 맡기리. 한강수 기울여 금빛 술동이에 더하고 일백 개 방망이로 뇌문고(雷門鼓) 마음껏 두드려 보려네.” 하였다.

전교심방(箭郊尋芳) 풍월정 시에, “봄철 교외에 가는 풀 비단자리 같은데,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애석해 하는구나. 푸른 옷 저 소년들 누대 모퉁이 오르더니, 높은 누각의 젓대와 퉁소 소리 정히 들리네. 버들가지 한들한들 녹음도 깊었는데 명일엔 그네가 담장 가에 걸렸으리.”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따스한 기운 평야[平蕪]에 들어 푸름이 자리 같은데, 풍광이 담탕(淡蕩)하여 사람에게 좋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창포 물가에 꽃을 따니, 눈에 가득 밝은 빛 온 누리가 봄이로세. 장수하고 단명함 다 같은 회계곡(會稽曲)인데, 하루살이 같은 인간 바삐도 호흡하누나. 술잔 받으면 무어라 흠뻑 취함을 사양하리, 꽃 밖에 저 멀리 석양 벌써 지려 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평평한 들판이 손바닥 같고 풀은 자리 같은데, 개인 날 따스한 바람이 진정코 사람 죽이네. 오늘 아침 술 사려고 푸른 옷 잡히고서, 삼삼오오 떼를 지어 좋은 봄 찾아갔네. 날으는[飛] 술잔 물굽이 도는 것보다도 급하여, 맑은 술동이 쉽게도 마르니 고래처럼 마심일세. 돌아올 때 준마 타고 달빛을 밟으니, 옥피리 남은 소리 살구꽃 떨어진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방초가 온전히 비단 자리보다 좋아, 날리는 꽃 퍼지는 녹음 사람을 수심하게 하네. 사녀(士女)들 서로서로 광음을 다투는 양, 비단 휘장 수놓은 장막 청춘을 비치네. 누런 수탉 대낮에 영롱한 노래 곡조, 흐르는 세월 한 호흡 같기도 하였어라. 급히 좋은 술 불러 좋은 계절 즐기고서, 거꾸로 실려 돌아올 때 검은 모자 떨어진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동교(東郊)의 푸른 풀 겹자리 깔렸는데 성을 나가니 상춘객 여기저기 보이네. 풍광이 얼핏 지나니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1년 중 행락은 봄에 해야 한다네. 술동이 열고 또 다시 계곡(溪曲)에 앉으니, 백 병 술을 한 입으로 마시는 것 마다하리. 마음껏 놀다가 달 밝아 돌아가려니, 석양이야 지고말고 관여하지 마세나.” 하였다.

마포범주(麻浦泛舟) 풍월정 시에, “개포에 가득 연광(煙光)이 푸르게 퍼지는데, 은은한 바람 솔솔[嫋嫋] 찬 물결에 불어가네. 강가의 작은 풀들 물들인 것보다 푸르르고, 언덕의 버들 황금 가지 이루었네. 놀잇배에 퉁소랑 북 싣고 나루터를 건너면, 푸른 향초, 붉은 향초 꽃다운 물가에 났으리라. 이리저리 저어 석양에 돌아올 제 고개 돌리니 모래판에 갈매기 날아드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소선(蘇仙)은 영수(穎水)에 배 띄워 무엇을 하였던고, 나도 이 놀이 좋아서 물결 위에 흥청이네. 봉창을 옮겨 어기여차 연파(煙波)를 거슬러 올라가니, 배 묶을 곳에 도리어 단풍든 가지 구나. 푸른 소라 천 점은 바다 서쪽 머리인데, 갈대꽃 한 언덕은 강 가운데 모래톱일세. 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를 치면서 가는 대로 흘러가니, 넓고 넓은 만 리 물결에 갈매기 따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서호(西湖)의 짙은 화장[濃抹] 서시(西施 중국의 미인)와도 같은데, 복사꽃 가는 비에 푸른 물결 일어나네. 흥청이며 돌아오니 물이 반 삿대나 불었는데, 날 저무니 죽지사(竹枝詞) 부를 사람 없네. 삼산(三山)은 금 자라 머리에 은은(隱隱)하고, 한강은 앵무주(鸚鵡洲)에 역력하네. 머뭇머뭇 기다려도 황학은 보이지 않는데, 날아드느니 한 쌍의 백구일세.”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호(濠)에 노는 데 반드시 혜시(惠施) 같아야 할까, 박달나무 베어서는 반드시 잔잔한 물에 두어야 할까. 아직은 서호(西湖) 향해 술을 싣고 노니는데 취해선 화정(和靖)의 매화 가지 꺾는다네. 청산은 수없이 강 머리로 나왔는데, 나무 빛은 저 멀리 창포 물가에 잇닿았네. 피리 불며 노래하기 마치지 못했는데 날 저물려 하니, 돌아와서 불현듯 한가히 조는 갈매기가 부러워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가슴 가득 청광(淸狂)한 마음 어디에 풀어보리, 놀잇배 이리저리 저어 잔잔한 물결따라 가네. 중류에서 용의 읊는 소리 들어 보는데, 언덕 저 너머로 어부의 피리 소리 한 가락 들려 오누나. 외로운 돛단배 하늘 저 끝에 가물가물, 오호(五湖)의 연파(煙波)가 창주(滄洲) 신선 있는 곳에 잇닿았네. 표연(飄然)한 이내 종적 어데다 비길꼬, 흐르는 물따라 정처없이 가는 몸 갈매기와 같구나.” 하였다.

흥덕상화(興德賞花) 풍월정 시에, “누대 그림자 겹겹이 물 속에 비치는데 누대 앞 연꽃 아침 이슬에 씻겼어라. 난간에 옮겨 의지하여 풍경을 구경하니, 6월의 맑은 향기가 모시옷에 풍겨난다. 붉은 깃대 푸른 일산 수없이 많은데, 마주앉아 때로는 총채를 휘두르네. 서늘한 기운이 뼈에 스며 구슬 자리 차가운데, 날 저물자 가벼운 바람 비를 불어오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누대 아래 모난 연못 맑기도 하여, 물 위에 뜬 붉은 연꽃 바람 이슬에 씻겼네. 난간 의지하여 구경하다가 달 밝을 때까지 이르니, 서늘한 밤 기운에 가는 모시 가벼운 옷 걸쳤어라. 묘련(妙蓮)의 꽃 열매 많기도 한데, 이내 몸 부끄러워 꼬리 아끼는 사슴 같네. 하늘 향기 찾으려해도 그곳을 알지 못하는데, 물 기운 서려서 개인 날에도 비 되어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절집의 단청이 물 속에 비치는데, 연꽃 처음 피어 깨끗하게 씻은 것 같구나. 부슬부슬 붉은 안개 구슬 난간에 뿌리는데, 향기로운 바람이 불려 하여 모시 소매 나부끼네. 때로 벽통주(碧筒酒) 수없이 마시는데 대낮에 큰 소리 하다가는 파리채도 휘두르네. 중이 손을 붙들며 밝은 달 기다리자는데, 작은 누대 한밤에 서늘하기 비올 때 같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연꽃 수없이 누대 아래 가득한데, 연줄기 무어라 미인 시켜 씻나. 맑은 향기 그윽하고 바람 살짝 이는데, 한 가닥 가을 기운 흰 모시인 양 시원하네. 술 취한데 술잔 계산 어찌 셈하리, 팔 잡고 글 논란할 제 파리채 휘두르는 것 잊었더라. 붉은 옷 떨어지기 전에 참으로 구경할 만한데, 내일 아침에 미친 비바람 어찌 할까나.”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한 못의 가을 물 맑아서 밑이 없는데, 만 줄기 부용화 이슬에 새로 씻겼네. 구름 비단인 양 널리 흩어져 눈앞에 있는데, 맑은 향기 은은히 모시옷에 풍기네. 늙은 중 재치 있어 오묘함 헤아리기 어려운데, 조용히 말하다가 흰털 총채 때로 짚네. 《연화경(蓮華經)》깊은 뜻 설명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만곡(萬斛)의 구슬알 한 번 비에 떨어지네.” 하였다.

종가관등(鍾街觀燈) 풍월정 시에, “서울 10리 천만 집에 거리 등불 곳곳마다 붉은 안개 감도네. 향 수레 보배 말 길 가득 지나가니, 취한 노래 노는 여자 얼굴이 꽃 같아라. 밝은 달 휘황하여 맑기가 대낮 같은데, 옆사람 오가는 것 작은 원숭이처럼 여기네. 인간 세상 즐거운 일 여기에 많나니, 음악 소리 끝나는 곳에 새벽녘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하늘 위의 항성(恒星)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황혼에 가는 곳마다 붉은 노을 감도누나. 긴 장대에 펄럭펄럭 채색 노끈 날리고, 구슬 나무에 번화하게 금속화(金粟花) 피었네. 산하(山河) 대지가 대낮으로 변했는데, 노랫소리 북소리 들끓으니 사람도 원숭이 같네. 소리 모아 다투어가며 부처 탄신 노래하니, 물결처럼 밀려 다니며 물시계의 물 다 떨어진 줄도 모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장안 성중 백만 집에, 하룻밤 연등 밝기가 노을 같구나. 3천 세계의 산호수(珊瑚樹)요, 24다리에 부용꽃이네. 동쪽 거리 서쪽 저자에 밝기가 대낮 같으니 아이들 놀라 달림이 원숭이보다 빠르네. 별들마냥 난간에 흩어져 그대로 있는데, 황금 누대 앞에 새벽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재촉한다.”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수없는 등불 수없는 집에 밝혔는데 붉은 빛 서로 비쳐 흐르는 노을 같구나. 옥 노끈엔 나직하게 명월주(明月珠)가 드리웠고, 구슬 가지엔 번화하여 영롱한 꽃 피어 있네. 어둔 거리 다 비쳐 밝은 낮 이루니, 구경하는 이들 기뻐 뛰며 조급하기 원숭일세. 아홉 거리의 풍악소리 태평세월 즐기는데, 어느 사이 종소리 오경 누수를 알려온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태평한 기상 일천 집에 넘치는데, 일천 집 성곽이 붉은 노을보다 밝았어라. 거리 메운 대말[竹馬] 달리며 호령하는데, 일만의 금련화 늘어진 꽃송이 다투어 구경하네. 밝은 별인양 찬란하니 밤이 대낮 같고, 높은 장대 구름 속에 드니 원숭이도 못 오르리. 좋은 말안장을 맞대고 구경하기 절반도 못 되는데, 새벽 화살이 금문(金門)의 누수 끝내기 재촉하네.” 하였다.

입석조어(立石釣魚) 풍월정 시에, “낚싯대 들고 한가로이 와서 혼자 기대섰는데, 비온 뒤 더한 물 아직도 푸르게 담겨 있네. 부령초 움직이는 곳에 물결무늬 흩어지고, 고기들 때로 뛰고 다시 잠긴다. 잠깐 동안 낚은 고기 회도 치고 국도 끓이니, 사오는 술병에 가득 차 있어라. 인생을 마음가는 대로 사는 일 옛날부터 중히 여겼으니, 엄광(嚴光)이 어찌 공후(公侯)를 부러워했겠는가.”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긴 냇물 언덕을 씻으니 돌만이 우뚝 섰는데, 벼랑 아래 맑은 소에 마름풀 푸르렀다. 깃은 가볍고 줄은 가는데, 미끼 향기로워, 큰 고기 깊숙히 잠기고 작은 고기 뛰노네. 살찐 고기 잡아 아이들 불러 빨리 국 끓이라 재촉하고, 좋은 술 따라내니 봄기운 병에 가득하여라. 비낀 바람 가는 비에 취해서 돌아오지 않고, 강호에 내 성명 모두 다 맡겼노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시냇가 괴이한 돌 사람처럼 섰는데, 가을물 영롱하여 차고 푸르게 비친다. 낚싯대 들고 찾아가서 푸른 풀 위에 앉으니, 백 척 은실에 금 잉어 번뜩이네. 가늘게 썰어 회를 치고 불에 익혀 국을 끓이니, 모래사장 위에 쌍옥병(雙玉甁) 자주 넘어지네. 취하자 다리 두드리며 창랑가(滄浪歌) 노래하니, 만고에 빛나는 이름은 있어 무엇하리.”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큰 바위 우뚝우뚝 물 굽어보며 섰는데, 맑은 못물 백 이랑 유리처럼 푸르구나. 한가로이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싯터에 앉으니, 노는 고기 미끼를 희롱하여 잠겼다 뛰어 오른다. 금빛 양념 가는 회가 쌀가루 국보다 나으니, 좋은 술 가득가득 은술병 기울어지네. 흠뻑 취하여 머리 밝은 달빛 아래 누웠으니, 유령(劉伶)의 주성(酒聖) 이름 내가 아닐런가.
○ 성임의 시에, “천 년의 우뚝한 돌 언덕 곁에 섰는데, 일만 길 맑은 못물 푸르기도 하구나. 노는 사람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시터에 앉으니, 수없는 고기들 거울 속에 뛰노네. 금빛 양념 옥같은 회에 향기로운 국물 곁들이니, 죽엽주(竹葉酒) 봄 향기를 몇 병이나 기울였나. 인생이란 마음대로 지내는 그것이 즐거운 일, 삼공(三公)으로도 어초(漁樵)의 이름 바꾸지 않으리라.” 하였다.

남산팔영(南山八詠) 정이오(鄭以吾)의 시.
운횡북궐(雲橫北闕) “옥엽(玉葉)은 금궐(金闕)에 비끼고, 붉은 기와 푸른 하늘에 비치네. 뗑뗑 누수 재촉하는데,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 일어나누나. 아름다운 기운 개인 날 서로 둘렀는데,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닿았네.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려니, 조심조심 일만 년을 누리소서.” 하였다.
수창남강(水漲南江) “장마물 들판을 덮었는데, 저 강의 흰 기운 성곽에 잇닿았네. 모래판[平沙] 휩쓸어 가고 온갖 냇물 다 모았네. 나루터에서 언덕이 묻힌 줄 알겠는데, 저 하늘 가 가는 배 아득하게 바라본다. 저녁 때 비 개이고 둥근 달 떠오르니, 용용(溶溶)한 그 모습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암저유화(巖底幽花)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 산중에 빽빽하게 녹음 무성하네. 물 건너니 그윽한 향기 풍기고, 가까운데 언덕 위 바위틈에 기이한 풀 있구나. 늦은 떨기 은일(隱逸)인 양 가련하고, 부질없는 꽃 흥망성쇠 애석하네. 이로부터 정(貞)하고 길(吉)하나니 하늘이 어찌 소나무 두었는가.” 하였다.
영상장송(嶺上長松) “집을 둘러 층층의 묏부리 솟아, 공중에 버텨 푸른 일산 되었네. 비가 개이니 구름 와서 희게 걸치고, 밤이 고요하니 달이 맑게 흥청 이네. 벽이 서 있은 지 천 년은 되어, 바람 따라 10리에 소리 들리누나. 이 모습 돌아보는 이 없고, 떠들썩 명예만 따라 경쟁하네.” 하였다.
삼춘답청(三春踏靑) 북쪽 바라보면 비록 성시(城市)이지만, 남쪽으로 오면 곧 동천(洞天)이라네. 꽃을 찾으니 바람이 맑게 불어오고, 풀은 밟으니 날씨가 따사롭다. 이런 모임 많은 사람 있으리, 고상한 정희 열선(列仙)보다 낫구나. □□□
구일등고(九日登高) 술병 차고 높은 데 오르는 날, 하늘도 맑은 9월초일세. 단풍 숲 먼 골짜기에 한창이고, 푸른 소나무 층층의 언덕 둘러쌌네. 남동(藍洞)은 시 짓던 곳이고, 용산(龍山)에 모자 떨어지던 때로다. 예나 이제나 취함은 같은 것, 마음에 맞으면 그 밖에 다른 무엇 구하리.
척헌관등(陟巘觀燈) 4월 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승평세월 이 얼마인가.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별 광채 북두칠성[北辰]으로 향했네.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연계탁영(沿溪濯纓) 정절(靖節 도연명의 시호) 선생은 다만 물에 다다랐고, 종군(終軍)은 일찍이 긴 노끈 청했네. 냇물 맑으니 발 어이 씻으리, 티끌 떨고 세상 물정 잊겠네. 천천히 흐르니 시내에 이끼 끼어 미끄럽고, 굽이쳐 돌아오니 옥 물결 감도네. 떨어진 붉은 꽃 물에 떠 동구 밖으로 나가니, 봉래(蓬萊) 영주(瀛洲) 여긴가 하노라.”


 

[주D-001]손바닥이……그 모습 : 중국의 화산(華山)에는 선인장[掌]이 높이 솟았으므로, 시인이, “선인장 위에 비가 처음 개었네.” 하였다.
[주D-002]삼상(三上) :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을 말한다.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 있는 말인데, 시를 생각하는 데에는 말 위, 베개 위, 측간 위의 세 가지가 가장 좋다는 말이다.
[주D-003]술……마셨네 : 술을 한 번 잘 마셨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대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의 시 가운데 ‘신금시부일중지(臣今時復一中之)’라는 구가 보이는데, 그것은 옛날 조조(曹操)가 서막(徐邈)을 부르니, 서막이 술에 취하여, “지금 성인(聖人)에 맞았다.”[중(中)은 중독(中毒)이란 뜻] 하였다. 당시에 금주(禁酒)하였으므로 술꾼들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는 현인이라는 은어(隱語)를 썼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4]동화(東華) : 당(唐) 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갔다.
[주D-005]시구(詩句)를……넣었네 :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이 소동파(蘇東坡)를 모함하되, 그가 지은 시(詩)를 지적하여 이것은 국가의 어느 일을 비방한 시요, 저것은 어느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일일이 지적하여 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 한다.
[주D-006]그림자뿐인……하려나 : 소동파가 귀양갔을 때에 장돈(章惇)이 그곳의 주민에게, 소동파에게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였다.
[주D-007]옛날의……깨었다네 : 소동파가 귀양가 있는데, 이웃에 사는 어떤 노파가 보고 말하기를, “내한(內翰)의 어젯날 부귀가 일장춘몽이요.” 하였으므로, 동파는 그 노파를 춘몽파(春夢婆)라 하였다.
[주D-008]적벽강(赤壁江)……노닐꺼나 : 이상은 〈적벽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주D-009]지금껏……오를 듯 :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인데, 여기서는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를 말한 것이다.
[주D-010]시령(詩令) : 여러 사람이 시를 지으면서 시간이라든지 기타 특수한 조건으로 제한하고 재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1]명당(明堂) : 풍수(風水)의 용어인데, 양택(陽宅)의 앞을 말한다.
[주D-012]남국의 강기(綱紀) : 《시경》 소아(小雅) 〈사월(四月)〉에, “도도한 강한이 남국의 강기가 되느니라.[滔滔江漢 南國之紀]” 하였다.
[주D-013]어찌하여……버렸다네 : 고려조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침략이 심하여,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 해상에까지 자주 들어왔으며, 고려 공민왕 22년 6월에는 왜선(倭船)이 양천(陽川)을 지나 한양부(漢陽府) 즉 서울에도 들어와서 약탈하였는데, 시중에 보이는 왜구의 사실은 이 일을 말한다.
[주D-014]호연(浩然)한……뜻 : 육조(六朝) 시대의 종각(宗慤)이 소원을 말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주D-015]풍악은……있소 : 이 구절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보인다.
[주D-016]무성한 숲……것이며 : 〈난정기〉에, “무성한 숲 긴 대나무[茂林脩竹]”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7]이난(二難) : 두 가지 얻기 어려운 것. 즉 어진 주인과 아름다운 손님을 말한다.
[주D-018]사미(四美) :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완상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을 말한다.
[주D-019]서호(西湖)를……비하겠는데 : 소동파의 〈서호시(西湖詩)〉에, “만일 서호를 서자(西子)에 비하면 넓은 화장과 진한 화장이[淡粧濃抹] 모두 서로 마땅하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서자(西子)는 옛날의 미인 서시(西施)를 말한 것이다.
[주D-020]병 가운데 경치[壺中景] : 한(漢) 나라 여남(汝南)에 한 노인이 약방[藥肆]을 내고 있었는데, 해가 저물면 병 속으로 들어갔다. 비장방(費長旁)이 몰래 그것을 보고 그에게 간청하여 함께 병 속에 들어가니, 별천지였다고 한다.
[주D-021]물 속에서 조는 것 :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하지장(賀知章)을 두고, “취해서 우물에 빠져 물 속에서 조네.” 하였다.
[주D-022]구장(鳩杖) : 비둘기 형상을 머리에 새긴 노인의 지팡이. 나라에서 공로 있는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언국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23]성사(星槎) :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황하(黃河)의 근원을 탐사(探査)하려고 뗏목에서 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 견우(牽牛)ㆍ직녀(織女)를 보았다는 고사.
[주D-024]염예퇴(灩澦堆) : 사천성(四川省)의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 초(楚)ㆍ촉(蜀)의 문호이다.
[주D-025]정운(停雲) :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정운〉이란 시의 자서(自序)에서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6]조각 구름 : 두보(杜甫)가 여러 사람과 야외(野外)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지은 시에,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이 검으니, 응당 비[雨]가 시 쓰기를 재촉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7]기장(奇章) : 당(唐) 나라 정승 우승유(牛僧孺)를 기장공(奇章公)이라 하였는데, 그는 특히 돌을 좋아하여 많은 기암괴석을 모았다.
[주D-028]절월(節鉞) : 지방에 병권(兵權)을 맡아 나가는 신하에게 임금이 절(節)과 도끼[鉞]를 주어서 보낸다.
[주D-029]이곽(李郭) : 한(漢) 나라 때에 명사(名士)인 이응(李膺)과 곽태(郭泰)가 낙양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전송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배를 타고 건너가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신선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高士傳》
[주D-030]금솥의……손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국에 간을 맞추는 데에 비유하면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으리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정에서 재상으로 정치하던 솜씨란 말이다.
[주D-031]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 : 증점(曾點)이 무우에 나가 바람 쏘이겠다 한 것은 《논어(論語)》에 있고, 호연한 기운을 길러야 한다는 말은 《맹자》에 보인다.
[주D-032]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초양왕(楚襄王)이 높은 대(臺)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여 ‘쾌하다[快哉]’ 하였다.” 한다.
[주D-033]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 : 《장자(莊子)》에, “열자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노니니 냉연(冷然)히 좋았다.” 하였다.
[주D-034]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 지음(知音)을 뜻하는 아양곡(峩洋曲)으로 춘추 시대 백아(백아)가 타고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의 곡조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峩峩兮若泰山]”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
[주D-035]백제(白帝)와 옥비(玉妃) : 백제와 옥비는 여기서는 눈[雪]의 신(神)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36]악양루(岳陽樓 남창에 있는 누각)와 등왕각(滕王閣) : 강서성(江西省)에 있으며 당(唐) 나라 고조의 아들 원영(元嬰)이 세웠다.
[주D-037]금어(金魚) : 당 나라 때에 3품 이상의 벼슬아치와 특사(特賜)를 받은 사람만이 금어(金魚)를 찼다.
[주D-038]학창의(鶴氅衣 학의 털로 만든 옷) : 학의 털로 만든 것인데 도사(道士)가 입는 옷이다.
[주D-039]여의(如意) : 진(晉) 나라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부유함을 자랑하는데, 하루는 왕개가 두어 자[尺]나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석숭에게 자랑하자, 석숭이 방망이를 들고 때려부수고는 제 집에 있는 것을 가져다 보이는데 5, 6척이나 되는 것이 여러 나무였다.
[주D-040]주미(麈尾) : 육조(六朝) 시대에 명사(名士)들이 청담(淸談)을 할 때에 주미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이야기하였으므로 주미의 털이 떨어졌다.
[주D-041]협욕(陜鄏) : 중국 주(周) 나라 떄의 지명인데,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었다. 주 나라 성왕(成王)이 보정(寶鼎)을 두어 두고 장래를 점치던 곳이다.
[주D-042]상림(上林)과 자허(子虛) : 상림과 자허는 모두 한(漢) 나라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부(賦) 이름이다. 처음 상여가 〈자허부〉를 지어 제후들이 유렵(遊獵)하는 모습을 말하였는데, 뒤에 한 나라 무제(武帝)의 칭찬을 받고서는, 다시 〈상림부〉를 지어 천자의 유렵하는 모습을 글로 옮겼다. 두 글이 모두 명문(名文)으로 알려졌다.
[주D-043]방일(放逸) : 옛날 진(晉) 나라의 유량(庾亮)이 은호(殷浩) 등 친구들과 함께, 가을밤에 남루에 올라가 호탕ㆍ방일(放逸)한 회포를 말하고, 글로도 읊은 것을 말한다.
[주D-044]가시나무 화살 :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은 복숭아나무 활과 함께 마귀 쫓는 데에 사용하였다.
[주D-045]뽕나무로 만든 화살 :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뽕나무로 만든 활[桑弧]과 쑥대로 만든 화살[蓬矢]로 천지사방을 향하여 쏘았는데, 이는 장차 원대한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의미였다. 《禮記 內則》
[주D-046]봉호(蓬壺) :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를 의미한 것으로 모두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주D-047]금영(黔嬴) :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금뢰(黔雷)라고도 한다.
[주D-048]망서(望舒) : 달을 둥근 바퀴로 생각하고 그 바퀴를 몰고 가는 신(神)을 망서(望舒)라고 한다.
[주D-049]용고(龍膏) : 용의 기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등유로 하면 특히 밝아 서광(瑞光)이라 이름한다.
[주D-050]신선의 집 : 옛날 중국에서 불도 불사의 신선으로 전하여 오는 왕자교(王子喬)와 적송자(赤松子)를 말하는데, 장수(長壽)하는 것을 교송지수(喬松之壽)라고도 한다.
[주D-051]중선(仲宣) : 위(魏) 나라 문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지금 호북성(湖北城) 당양현(當陽縣) 동남쪽 장수(漳水) 위에 중선루(仲宣樓)가 있는데, 왕찬이 여기에 올라서 〈중선루부〉를 지어 유명하다.
[주D-052]좌대충(左大沖) : 진(晉) 나라 문인 좌사(左思). 그는 학문이 높고, 글을 잘 지었는데, 또한 부(賦)에도 능하였다. 〈제도부(齊都賦)〉ㆍ〈삼도부(三都賦)〉 등은 모두 그가 지은 명문장이다.
[주D-053]서시(徐市) : 진시황(秦始皇) 때의 도사(道士)로서,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려면 동남(童男 순결한 남자아이) 5백 명과 동녀(童女 순결한 처녀) 5백 명을 데리고 가야 된다고 말하여, 진시황이 그대로 하여 주었는데, 그는 배를 타고 동해(지금의 발해)로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로 와서 영주하였다고도 한다.
[주D-054]무이궁(武夷宮)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 무이산은 옛부터 신선이 있는 곳이라 한다. 무이궁은 그 신선이 있는 궁이란 말이다.
[주D-055]석목(析木) : 석목은 하늘의 별의 위치이다. 그 위치는 중국 북경으로부터 우리나라까지에 해당된다.
[주D-056]월상(越裳) : 옛날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 남서방에 있는 월상국에서 이중 통역을 앞세우고 와서 조회하였다 한다.
[주D-057]마읍(馬邑) : 중국 산서성 북방 가에 있는 땅이다. 여기서는 단지 봉산(鳳山)과 상대해서 말한 것뿐이다.
[주D-058]봉산(鳳山) : 황해도 봉산인데, 중국 사신이 서울 오는 도중에 지난 길의 역정 중에서 기억나는 대로 쓴 것 같다.
[주D-059]오계자(吳季子) : 춘추 시대 오 나라의 제후 수몽(壽夢)이라는 사람의 넷째 아들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다. 북방에 와서 여러 나라의 민요와 음악을 듣고서 각기 그 나라의 풍속과 국민성을 알았다고 한다.
[주D-060]천록(天祿) : 한(漢) 나라 시대에 서적을 모아서 쌓은 곳이었다. 양웅이 이 천록각에서 서적을 읽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자,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주D-061]중거(仲車) : 송(宋) 나라 사람이다. 시골에 들어앉아 있었던 선비로, 귀가 절벽이어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므로 붓으로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난 일은 가장 빨리 알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적으로 여겼다.
[주D-062]선비 양성하는[造士] : 주 나라 학제(學制)의 하나인데, 학문이 우수한 이를 조사 또는 준사(俊士)로 하였으니, 대개 학문의 성취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3]요재(翹材) : 수재(秀才)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에서 요재관(翹材館)을 짓고, 어진 이들을 초청하여 거처하게 한 일이 있었다.
[주D-064]등영(登瀛) :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올라간다는 의미의 말이다. 당(唐) 나라의 태종(太宗)이 글하는 이들을 좋아하여 문학관(文學館)을 짓고, 문장이 뛰어나고 어진 선비인 방현령(傍玄齡) 등 18학사를 초청하여 거처하게 하며 극진히 대우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등영주’라 하였다.
[주D-065]범가(范哥) 늙은이 :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말한다.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선비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다.
[주D-066]등왕각(滕王閣) : 중국 강서성의 수부인 남창(南昌)에 있는 정자. 당(唐) 나라 고종(高宗)의 아들 원영(元嬰)이 강주 자사(江州刺史)로 있으면서 이 누각을 세웠는데 당시에 등왕에 봉해졌던 까닭으로 등왕각이라고 일컬음. 왕발(王勃)이 이곳에 이르러 〈등왕각서(滕王閣序)〉라는 글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주D-067]나계(螺髻) : 나환(螺鬟).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으로 산봉우리를 형용하는 말이다.
[주D-068]돌을 채찍질하여 : 진(秦) 나라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때에 진시황이 채찍으로 돌을 치면 그 돌이 날아가서 쌓을 자리에 놓였다 한다.
[주D-069]임금님……했다네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러 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만나 큰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하고, 그 소나무가 공이 있다고 하여 대부(大夫)로 봉(封)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주D-070]치첩(雉堞) : 성(城) 쌓는 데 몇십 걸음 씩 가다가 직선 밖으로 조금씩 내어 쌓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치첩이라고 한다. 원래 성을 공격하는 사람이 성 밑에 바짝 들어오면 성 위에서 방어할 수 없으므로 이런 치첩을 만들어서 방어한 것이다.
[주D-071]악군(鄂君) : 춘추 시대 초왕(楚王)의 이종 아우 자석(子晳). 악군이 배를 타고 가는데, 월(越) 나라 여인이 노래로 애모하는 정을 전달하였다. 악군이 이에 비단 이불로 덮고 자리를 같이하였다고 한다.
[주D-072]영화(永和) : 진(晉) 나라 목제(穆帝)의 연호(年號)이다. 그 영화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가 당시의 명사(名士) 41명과 회계산 아래 난정(蘭亭)에 모여 놀았던 고사가 있고 아울러 〈난정기(蘭亭記)〉라는 글을 남겼다.
[주D-073]동평왕(東平王) : 한(漢) 나라 광무제의 여덟째 아들 유창(劉蒼)인데, 광무제가 집에 거처할 때에 무엇을 즐기느냐고 물으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고 대답하였다.
[주D-074]금구(金龜) : 옛날 중국인들의 패물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의 문장가 하지장(賀之章)이 이 금구로 술을 바꾸어 이태백과 함께 술을 마신 사실이 있다.
[주D-075]하간(河澗) : 중국의 한 지방인데, 이 지방의 음악은 중국의 바른 음악으로 알려졌다. 여기서는 왕국의 정악(正樂)을 의미한다.
[주D-076]벽통(碧筒)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정공이 연잎에다 술을 빚어 넣어 그 술이 익은 뒤에 연잎 줄기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술을 빨아먹으며 그것을 벽통주라고 이름지었다.
[주D-077]양주(楊州) : 예전에 네 사람이 모여서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10만 관(貫)의 돈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는데, 한 사람은 허리에 10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 공중에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으니, 다른 세 사람의 것을 모두 겸한 것이다.
[주D-078]화산(華山) : 송(宋) 나라 반낭(潘閬)이 화산(華山)에 가서 시를 짓기를, “삼봉(三峯)이 하늘에 높이 솟은 것을 사랑하여 처들고 읊조리며 바라보느라고 나귀를 거꾸로 탔네.” 하였더니, 다른 이가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위야(魏野)가 시를 지어 주기를, “지금부터 화산의 도적(圖籍) 위에 반낭의 나귀 거꾸로 탄 것을 보태겠다.” 하였다.
[주D-079]교(郊)에서……제사드리고 : 예전에는 오직 천자라야만 교(郊)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주D-080]원위(元魏)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조(北朝)의 한 나라이다. 나라 이름은 위(魏)인데 황제의 성이 선비족(鮮卑族)의 척발씨(拓跋氏)였으므로 흔히들 척발위(拓跋魏)로 불렀는데 후에 성을 원(元)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고도 한다.
[주D-081]소량(蕭梁) :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의 한 나라인데 황제의 성이 소씨(蕭氏)였으므로 소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D-082]등륙(滕六) :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이다. 등륙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은 곧 눈이 왔다는 의미의 말이다.
[주D-083]섬중(剡中)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한 지명이다. 옛날 이곳에 대안도(戴安道)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의 친구인 왕자유(王子猶)가 눈오는 날 밤에 방문한 일이 있어 유명하다.
[주D-084]무릉(茂陵)의 가사 : 무릉(茂陵)은 한 나라 무제(武帝)의 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능으로 그(무제)의 대명사로 쓴 것이다. 그는 〈추풍사(秋風詞)〉라는 노래를 지러 불렀다.
[주D-085]안인(安仁)의 부(賦) : 안인(安仁)은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자(字)이다. 그는 〈추회부(秋懷賦)〉를 지었다.
[주D-086]병 속에 들어간 것 : 한(漢) 나라 때 호공(壺公)이라는 신선이 병 하나를 벽에 걸어두고 밤이면 그 병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는 사람 생활에 필요한 것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D-087]쌍남금(雙南金) : 중국에서는 예전에 남쪽 지방에서 나는 금(金)이 품질이 좋아서 북방에서 나는 금보다 값이 배나 되었다. 그래서 보통금 두 몫 되는 남쪽 금이라고 하여 쌍남금이라고 말한다.
[주D-088]광산(匡山) : 중국 여산(廬山)을 말하는데, 옛날 은자(殷者) 광유(匡裕)선생이 이 여산에 숨어서 글을 읽으며 지냈기 때문에 여산을 광려산(匡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D-089]예상곡(霓裳曲)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꿈에 월궁(月宮)에 올라가서 들은 음악을 기억하여, 그 곡조를 인간 세상에 전했다는데, 그것을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 한다.
[주D-090]삼상(參商) : 두 별의 이름이다. 삼성(參星)의 위치는 서쪽이요, 상성(商星)의 위치는 그와 반대쪽에 있으므로 이 두 별은 함께 보지 못하다. 따라서 사람이 떨어져 서로 만나지 못함을 비겨 말한다.
[주D-091]양관곡(陽關曲) : 예전 중국 사람들은 이별하는 자리에서 양관곡(陽關曲)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한다. 그 노래는 세 편(篇)으로 되었다.
[주D-092]원안(袁安) : 동한(東漢) 때에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왔는데, 원안이라는 사람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
[주D-093]설당(雪堂) :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에서 조그만 당(堂)을 짓고 그 네 벽에다 설경(雪景)을 그렸으므로 설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동파는 눈오는 날 여러 친구와 눈을 제목으로 한시를 짓는데 보통 눈에 대해서 쓰는 문자나 글자는 통 쓰지 아니하고 짓는다는 법칙을 세우고 지은 일이 있다.
[주D-094]갈고(羯鼓)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갈고라는 서방 민족 갈족의 악기를 잘 쳤다. 어느 이른 봄 아직도 꽃이 활짝 피지 아니한 때에 후원 화악루(花萼樓)에서 갈고로 한 곡조 쳤더니 후원의 꽃들이 일시에 활짝 피었다 한다.
[주D-095]뇌문고(雷門鼓) : 춘추 시대 월(越) 나라에 있던 북인데, 그 소리가 1백 리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주D-096]화정(和靖) : 화정은 송(宋) 나라의 처사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그는 항주(杭州) 서호에 살면서 황제가 벼슬시키려 하여도 거절하고 일생을 깨끗하게 살았는데, 그는 매화를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매화시는 유명하다.
[주D-097]유령(劉伶) : 진(晉) 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그는 술을 잘 마셔 한 자리에서 한 섬 술을 마시고 다섯 말[斗]로 해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덕송(酒德頌)〉을 지어서 술을 찬미하였다.
[주D-098]종군(終軍) : 한(漢) 나라 사람이다. 18세 때에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왕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라고 하였는데, 종군(從軍)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긴 노끈 하나를 주면 가지고 가서 남월왕의 목을 얽어 가지고 오겠다.”고 청하였다 한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석전(釋典)의 범문(梵文)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7)

석가(釋家)의 범문(梵文)을 유가(儒家)에서 거론해서는 안 될 것이나, 박식(博識)한 이로서는 또한 몰라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가끔 기록해 놓은 것들을 지금 대략 수록한다.
육심(陸深)의 《촉도잡초(蜀都雜抄)》에 “범문은 매우 자상하여 과일 같은 것도 다섯 가지 용어(用語)로 그 형태를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대추[棗]나 살구[杏] 등은 핵과(核果)라 이르고, 배[梨]나 벚[柰] 등은 부과(膚果)라 이르고, 야자(椰子)나 호도(胡桃) 등은 각과(殼果)라 이르고, 솔씨[松子]나 잣씨[柏仁] 등은 회과(檜果)라 이르고, 대두(大豆)나 소두(小豆) 등은 각과(角果)라 일렀다. 상고하건대, 자서(字書)에는 겉이 공(空)하거나 거치른 껍질이 있는 것을 회과(檜果)라고 했다.” 하였다.
출가(出家)한 사람을 필추(苾蒭)라 한다. 서천축(西天竺)에 ‘필추’라는 만초(蔓草)가 있는데, 이 풀이 오덕(五德)을 갖추었으므로 출가한 사람에 비유하여 ‘필추’라 이름하였다.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사미(沙彌)ㆍ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는 학법녀(學法女)로 지금의 신중[尼]인데, 머리를 기른 신중이다. 이것이 출가 오중(出家五衆)이다.
우바새(優婆塞) 불법(佛法)에 친근 승사(親近承事)하는 속인(俗人)이다.
우바이(優婆夷) 우바새처럼 불법에 친근 승사하는 속녀(俗女)이다.
바라밀(婆羅密) 도피인(到彼人)과 같은 말이다.
일체(一切) 시방(十方)과 삼세(三世)이다.
여래(如來) 본각(本覺)의 이름은 여(如)이고, 시각(始覺)의 이름은 내(來)인데, 본각과 시각이 실상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합해서 여래(如來)라 한다. 이렇게 보면 중생(衆生)은 본각만 있고 시각은 없으니, 이는 불래(不來)와 같은 것이다.
보살(菩薩) 보는 보제(菩提)로 각(覺)의 뜻인데 이른바 불과(佛果)를 구(求)하는 것이고, 살은 살타(薩埵)로 유정(有情)의 뜻인데 이른바 교화된 중생이다.
마하살(摩訶薩) 마하(摩訶)는 대(大)의 뜻이다.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이는 묘길상(妙吉祥)의 뜻이니 신해(信解)의 지(智)를 표(表)함이요, 또한 묘덕(妙德)이라고도 하니 이는 증지(證智)를 표함이다. 그러므로 ‘문수사리’라 한다. 《범어와정(梵語訛正)》에는 만수실리(曼殊室利)라 하였다.
보현보살(普賢菩薩) 체성(體性)이 주편(周遍)한 것을 보(普)라 하고, 인연을 따라서 성덕(成德)한 것을 현(賢)이라 한다.
보안보살(普眼菩薩) 청정(淸淨)한 제법(諸法)을 넓게 보니 이는 대지보안(大智普眼)이요, 중생을 널리 제도(濟度)하여 성불(成佛)케 하니 이는 대비보안(大悲普眼)이다.
미륵보살(彌勒菩薩) 이는 자씨(慈氏)인데 자(慈)는 곧 그의 성씨(姓氏)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이다. 이는 무승(無勝)의 뜻이니, 그가 수승한 덕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의 성씨를 들어 미륵(彌勒)이라고만 일컫는다.
세존(世尊) 제10호(號)이다. 그 위에는 호가 없으니, 세상에서 높인 바가 되었다. 일체불(一切佛)이 모두 10호가 있다.
다라니(陀羅尼) 이는 총지(摠持)이다.
청량(淸涼) 모든 의혹[惑]이 마음을 불태우면 극렬한 번뇌가 일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좋아하면 이것이 곧 청량이다.
진여(眞如) 진(眞)은 진실한 본체(本體)요, 여(如)는 불변(不變)의 성(性)이다.
열반(涅槃) 이는 정명(正名)이니 곧 적멸(寂滅)이다.
바라밀(波羅密) 바라는 피안(彼岸)이다. 밀(密)은 구족하게 하는 말인데 이를 번역하면 도(到)이다. 만일 회문(廻文)의 순(順)으로 따진다면 이는 속(俗)에서 응당 도피안(到彼岸)이라 해야 한다. 생사(生死)를 여의는 데 피안을 기준으로 하여 번뇌의 중류(中流)를 건너 피안의 열반에 이름을 말한다. 깨닫기 전에는 8만 4천의 번뇌뿐이지만, 깨달은 후에는 8만 4천의 바라밀이 된다.
사마타(奢摩他) 이는 지(止)의 뜻이다.
가라라신(歌羅邏身) 이는 박락(薄酪)이니, 정액(精液) 그대로 어머니 태(胎)에 있을 때를 말한다. 부모의 정혈(精血)을 받은 후 7일 이전은 박락과 같다.
마니(摩尼) 이는 여의(如意)이다.
사문(沙門) 출가인(出家人)이다.
바라문(婆羅門) 집에 있는 이로 유지인(有智人)이다.
아승기(阿僧祇) 이는 무수(無數)이다.
선나(禪那) 이는 정려(靜慮)이다.
유순(由旬) 이는 40리(里)인데 일설에는 16리라고도 한다.
금강(金剛) 세 가지 뜻이 있으니, 견(堅)ㆍ이(利)ㆍ명(明)이다.
반야(般若) 역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실상(實相)ㆍ관조(觀照)ㆍ문자(文字)이다.
겁파(劫波) 이는 시분(時分)의 뜻이니, 대겁(大劫)ㆍ소겁(小劫)ㆍ장시(長時)ㆍ단시(短時)가 느리고 빠름은 비록 다르지만 통틀어 시분이라 한다.
단함(檀含) 만행자(萬行者)는 범음(梵音)으로 단나(檀那)인데, 이는 보시(布施)의 뜻이다. 함(含)은 함섭(含攝)한다는 뜻이요, 만행은 보살(菩薩)이 때에 따라 행하는 행을 말하는데, 이 행이 꼭 만(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 큰 숫자만을 들었다.
제바반두(提婆盤豆) 이는 천친(天親)이니, 무착(無着)의 아우이다.
아승거(阿僧佉) 무착(無着)이라고도 하고 범음(梵音)으로 아승거이니, 천친(天親)의 형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이는 능인 적묵(能仁寂黙)이다.
승가람마(僧伽藍摩) 이는 중원(衆園)의 뜻이니, 승가(僧伽)는 곧 거기에 머무르는 대중[衆]이요, 남마(藍摩)는 곧 머무를 집이다.
안타회(安陀會) 중에게 세 가지 옷이 있는데, 이는 곧 오조(五條)인 하품의(下品衣)이다.
울다라(鬱多羅) 칠조(七條)인 중품의(中品衣)이다.
승가리(僧伽梨) 이는 곧 구조(九條) 내지 십오조(十五條)인 상품의(上品衣)이다. 복전의(福田衣)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전(水田)을 상징한 것이다.
두타(頭陀) 이는 두수(抖擻)의 뜻이니, 번뇌를 씻어 없애는 것이다.
아나함(阿那含) 이는 불래(不來)인데, 또는 불환(不還)이라고도 한다.
가리(歌利) 이는 극악(極惡)이다.
실라벌(室羅筏) 이는 사위(舍衛)이다.
기원(祇洹) 기수(祇樹)와 같은 말이다.
파악포마(破惡怖魔) 대비구(大比丘)이다.
벽지(辟支) 이는 독각(獨覺)이다.
무학(無學) 이는 나한(羅漢)이다.
초심(初心) 초학(初學)이니, 즉 배우는 사람이다.
가릉빈가(迦陵頻伽) 선금(仙禽)이다. 이 새는 소리가 매우 곱기로 유명한데, 불음(佛音)도 이와 같다.
문수(文殊) 이는 묘덕(妙德)이다.
찰제리(刹帝利) 이는 왕족(王族)이다.
전타라(旃陀羅) 이는 살자(殺者)이다.
마등가(摩登伽) 이는 기녀(妓女)이다.
바비가라(婆毗迦羅) 이는 황발(黃髮)이니, 외도(外道)이다.
사마타(奢摩他) 이는 지(止)의 뜻이다.
삼마발제(三摩鉢提) 이는 관(觀)이다.
삼마제(三摩提) 삼마지(三摩地)라고도 하고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定)이다.
도라면(兜羅綿) 빛은 서리[霜]처럼 희고 질은 부드러운데, 불수(佛手)의 부드러움도 이와 같다.
진제(眞際) 진심(眞心)이며, 실제(實際)이다.
미려거(彌戾車) 이는 낙구예인(樂垢穢人)이다.
업종자(業種者) 전도(顚倒)며, 망혹(妄惑)이다.
아인과(亞人果) 한 가지에 세 개씩 달린다.
청정안(淸淨眼) 확연 조료(廓然照了)이다.
가전연비라지자(迦旃延毗羅胝子) 미경(迷境)에 집착된 외도(外道)이다.
기바(耆婆) 이는 장수천신(長壽天神)이다.
말가리(末伽梨) 곧 가전비라(迦旃毗羅)의 무리이다.
암마라(菴摩羅) 아나율(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의 과일을 마치 장중(掌中)의 암마라과(菴摩羅果)처럼 보았다.
나율(那律) 이는 무루 나한(無漏羅漢)이다
범지(梵志) 외도(外道)의 통칭이다.
투회(投灰) 고행(苦行)하는 외도(外道)이다.
대다라니(大陁羅尼) 곧 수릉 정관(首楞正觀)이다.
비사(毗舍) 상고(商賈)이다.
수타(首陀) 농부(農夫)이다.
파라타(頗羅墮) 이근(利根)이다.
전타라(旃陁羅) 괴회(魁膾)이다.
암라식(菴羅識) 만법(萬法)을 환히 비추어 분별이 없으므로 대원경지(大圓鏡智)라 한다.
암마라(菴摩羅) 이는 무구(無垢)이다.
아비달마장(阿毗達摩藏) 이는 무비법(無比法)이다.
열반승(涅槃僧) 중의 내의(內衣)이다.
바니사타(婆尼沙陀) 진성(塵性)을 말한다.
약왕(藥王)ㆍ약상(藥上) 두 법왕자(法王子)인데, 그들이 말하기를 “나는 무량겁(無量劫)토록 세상의 양의(良醫)가 될 것이다. 입 속에는 무릇 10만 8천 종류나 되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초목(草木)ㆍ금석(金石)이 들어 있다.” 하였다.
아나율(阿那律) 이는 무탐(無貪)이다.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 이는 계도(繼道)이다.
교범발제(憍梵鉢提) 이는 우시(牛呵)이다.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 이는 여습(餘習)의 뜻이다.
부당왕찰(浮幢王刹) 세계(世界)의 바다 밖에 있는 모든 향수해(香水海)의 통호(通號)이다.
대세지(大勢至) 지혜(智慧)의 빛으로 일체(一切)를 두루 비추어, 삼도(三塗)를 떠나서 무상력(無上力)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고 한다.
관음(觀音) 관세음(觀世音)이란 원오 원응(圓悟圓應)의 호이다. 소리[音]에다 관(觀)이라고 한 것은 관지(觀智)로 비추어 보는 것이요, 이식(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석(帝釋) 제석이 도리천주(忉利天主)가 되어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통솔한다.
사천왕(四天王) 제석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하면서 세계(世界)를 거느린다.
사천태자(四天太子) 곧 나타(那吒)의 유인데, 모두가 능히 귀신(鬼神)을 구사(驅使)한다고 한다.
금륜(金輪)ㆍ속산(粟散) 모두 인왕(人王)인데, 속산은 곧 작은 나라의 임금이다.
거사(居士) 은거(隱居)하면서 뜻을 구하고, 의(義)를 행하여 도를 깨친 이의 칭호이다.
아전저가(阿顚底迦) 이는 무선심(無善心)이다.
삭가라(爍迦羅) 이는 금강(金剛)이니,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는다.
모다라(母陀羅) 인계(印契)의 뜻인데, 묘인(妙印)이 있다.
야율(耶律) 즉 삼장(三藏) 중, 대승(大乘)ㆍ소승(小乘)의 계(戒)에 대한 통칭이다.
소승(小乘) 품법(稟法)으로 계(戒)를 삼아 그 말(末)만을 대강 다스리는 것이다.
대승(大乘) 섭심(攝心)으로 계를 삼아 그 본(本)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열사(熱沙) 만일 음탕한 생각을 단절시키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으려는 자는, 마치 사석(沙石)으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천백겁(千百劫)을 경과해도 다만 열사(熱沙)일 뿐인 것이다.
파순(波旬) 마(魔)의 이름이다.
비판(裨販) 불법(佛法)에 붙어서 탐(貪)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마하실달다반달라(摩訶悉怛多般怛囉) 이는 대백산개(大白傘蓋)이니, 곧 장심(藏心)이다. 사계(沙界)를 널리 비추는 것을 대(大)라 하고, 몸에 망혹(妄惑)을 끊는 것을 백(白)이라 하고, 일체(一切)를 덮어주는 것을 산개(傘蓋)라 한다.
남지가(藍地迦) 청면금강(靑面金剛)이다.
군다리(軍茶利) 금강(金剛)의 다른 호칭이다.
비구지(毗俱胝) 또한 대신변자(大神變者)이다.
빈나야가(頻那夜迦) 저두(猪頭)와 상비(象鼻) 두 사자(使者)이다.
장자(長者) 천축(天竺)에서는 거부(巨富)를 장자(長者)라 한다.
다라니(陀羅尼) 이는 총지(摠持)이니, 곧 혜성(慧性)이다.
색건타(塞犍陀) 이는 온(蘊)이다.
발라폐사(鉢羅吠奢) 이는 십이입(十二入)의 입(入)이다.
찰제리(刹帝利) 《명의집(明意集)》에 “이는 전주(田主)이니, 세간대지(世間大地)의 주인으로 곧 왕종(王種)이다.” 하였다.
나율(那律) 곧 아누루타(阿㝹樓駄)인데, 이는 무탐(無貪), 또는 여의(如意)의 뜻이다.
손타라(孫陀羅) 사랑스럽고 예쁜 아내의 이름이다.
우루빈라(優樓頻螺) 이는 목과(木瓜)이니, 가슴팍이 불룩 튀어나와 마치 목과와 같기 때문인데, 마치 지금의 구흉(龜胸)과 같다.
가야(伽耶) 곧 상두산(象頭山)이다.
약차(藥叉)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땅에 있고 하나는 허공에 있고 하나는 하늘에 있다.
나찰(羅刹) 가외(可畏)이다.
구반다(鳩槃茶) 염매귀(厭魅鬼)이다.
비사차(毗舍遮) 담정귀(噉精鬼)이다.
부단나(富單那) 열병귀(熱病鬼)이다.
마혜수라(魔醯首羅) 《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십지보살천(十地菩薩天)의 이름인데, 그는 일념(一念)으로 삼천세계(三千世界)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숫자를 알므로, 용왕(龍王)이 비를 내릴 때면 마혜수라가 떨어지는 빗방울 숫자를 죄다 분별하여 헤아린다고 한다.
실리라(室利羅) 일명은 설리라(設利羅)이고 또는 사리(舍利)라고도 한다.
사리(舍利) 이는 골신(骨身)이다.
굴순포(屈旬布) 이는 면포(綿布)이다.
찬리채(鑽籬菜) 이는 닭[鷄]이다.
수준화(水浚花) 이는 물고기[魚]이다.
이니(伊尼) 이는 사슴[鹿]의 이름이다.
향적반(香積飯) 이는 밥[飯]이다.
향적주(香積廚) 이는 포주(庖廚)이다.
삼매(三昧) 이는 정사(正思)이다. 이를테면, 정(定)에 들었을 때 소연경(所緣境)에서 생각을 바르게 하기 때문에 정사(正思)ㆍ등지(等持)라 한다. 우리나라 원효 법사(元曉法師)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논석(論釋)을 지었는데, 그 초석제목(初釋題目) 가운데 “삼매는 정사이다.” 하였다.
이제 일찍이 보았던 것을 대략 초(鈔)하였는데, 범문(梵文)은 곧 서축(西竺)의 방언(方言)이다. 불서(佛書)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에 중국의 자음(字音)으로 그것을 번역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음절(音切)은 또 중국의 것과 다르니, 그 음에 서축(西竺)의 말이 어찌 다 담길 수 있겠는가. 범서(梵書)는 특히 음에 장점이 있으므로,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은 어문(語文)의 세계가 판이한 데다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도 다시 구별이 있으니, 그 뜻만 알고 넘어갈 뿐, 그 음은 논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또 불가(佛家)의 어류(語類)를 해석해 놓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일월(日月) 인도(印度)이다.
일신(日神) 소리야(蘇利耶)이다.
월신(月神) 소마(蘇摩)이다.
화성(火星) 앙아라가(盎哦羅迦)이다.
수성(水星) 부타(部陀)이다.
목성(木星) 물리하파피저(勿哩訶婆跛底)이다.
토성(土星) 사내이선절라(沙乃以宣折囉)이다.
금성(金星) 수갈라(戍羯羅)이다.
일조(日照) 지바하라(地婆訶羅)이다.
화(火) 시기(尸棄)이다.
양염(陽炎) 마리지(摩利支)이다.
불열(不熱) 다사타(茶闍它)이다.
무열(無熱)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이다.
맹풍(猛風) 비람신(毗嵐迅)이다.
염해(鹽海) 바갈라(婆竭羅)이다.
수(水) 아가(阿迦)이다.
석(石) 아습마(阿濕麽)이다.
지(池) 하라태(賀邏駄)이다.
주(洲) 제(提)이다.
임(林) 바나(婆那)이다.
안(岸) 다라(多羅)인데, 구명(舊名)은 식다(息多)이다.
지동(地動) 차라(遮囉)이다.
회수(灰水) 차라바니(差羅波尼)이다.
본성(本性) 마등가(魔登迦)이다.
심(心) 질다야(質多耶)이다.
육단심(肉團心) 흘리타야(紇利陀耶)이다.
의(意) 말나(末那)이다.
대슬(大膝) 구치라(拘絺羅)이다.
장대(長大) 지율가(地㗚伽)이다.
부모(父母) 오바제집(鄔婆弟鏶)이다.
부(夫) 바제(婆弟)이다.
부(婦) 바리야(婆利耶)이다.
조부(祖父) 왕사리다(王闍梨多)이다.
동자(童子) 구마라(拘摩羅)이다.
효(孝) 보제류지각(菩提流支覺)이다.
장부(丈夫) 포사(逋沙)이다.
거사(居士) 가라월(迦羅越)이다.
역사(力士) 바리한(婆里旱)이다.
석녀(石女) 선제라(扇提羅)이다.
청정사녀(淸淨士女)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이다.
중생(衆生) 복호선나(僕呼繕那)이다.
노(奴) 태색가(駄索迦)이다.
걸사(乞士) 비구(比丘)이다.
소사(小師) 탁갈라(鐸曷攞)이다.
제자(弟子) 선려(宣驪)이다.
교(敎) 아함(阿含), 또는 본문급다(本門笈多)라고 한다.
신학(新學) 아이이(阿夷怡)이다.
애(愛) 갈타사(羯吒斯)이다.
지(智) 야나(若那)이다.
지(智) 다가초근(多伽稍根)이다.
의(義) 아시(阿施)이다.
언어(言語) 화타(和陀)이다.
야행(夜行) 자리(遮梨)이다.
환래(喚來) 화야(火夜)이다.
간(慳) 말차라(末差羅)이다.
후(厚) 가나(伽那)이다.
문신(文身) 편선나(便善那)이다.
명(名) 나마(那摩)이다.
품(品) 발거(跋渠)이다.
희(喜) 도라(都羅)이다.
환희(歡喜) 아난(阿難)이다.
환희(歡喜) 난타(難陀)이다.
무지(無知) 마하라(摩訶羅)이다.
와(訛) 갈살(喝薩)이다.
선재(善哉) 바도(婆度)이다.
기재(奇哉) 하호(河呼)이다.
기특(奇特) 하사리이(何奢理貳)이다.
무간의(無慳義) 사비함라(四毗含羅)이다.
치(癡) 모하(慕何)이다.
진에(嗔恚) 제필사(提鞸沙)이다.
심입(深入) 니연저(尼延底)이다.
견래(遣來) 아나(阿那)이다.
견거(遣去) 입식반나(入息般那)이다.
일왕래(一往來) 사다함(斯陀含)이다.
불래(不來) 아나함(阿那含)이다.
무진의(無盡意) 아차말(阿差末)이다.
부동(不動) 두로(頭盧)이다.
구(救) 다라(多羅)이다.
공로(功勞) 나로(那勞)이다.
두수(抖數) 두타(頭陀)이다.
무단정(無端正) 천악신(天樂神) 아수라(阿修羅)이다.
인욕(忍辱) 찬제(羼提)이다.
능활(能活) 기바(耆婆)이다.
견고(堅固) 발건제(鉢犍提)이다.
무유(無有) 니리야(泥犁耶)이다.
무간(無間) 아비(阿鼻)이다.
악(惡) 가리(歌利)이다.
화열(和悅) 바사닉(波斯匿)이다.
무우(無憂) 아육(阿育)이다.
전승(戰勝) 기아(祇阿)이다.
대술(大術) 마하마야(摩訶摩耶)이다.
선치(善治) 비내야(毗奈耶)이다.
인연(因緣) 니타나(尼陀那)이다.
비유(譬喩) 아바타야(阿波陀耶)이다.
미증유(未曾有) 아부달마(阿浮達摩)이다.
불가왕(不可往) 준가(駿迦)이다.
우란(盂蘭) 도현(倒懸)이다.
바나(婆拏) 구도현(救倒懸)이다.
비바사(鼻婆沙) 종종설(種種說)이다.
협장(篋藏) 비륵(毗勒)이다.
분별론(分別論) 비바사바제(毗婆闍婆提)이다.
청량(淸涼) 시라(尸羅)이다.
도피안(度彼岸) 바라밀(波羅密)이다.
사념처(四念處) 비발나사(毗跋那斯)이다.
여의(如意) 마노시야(摩奴是若)이다.
역(力) 바라(婆羅)이다.
원(願) 니저(尼底)이다.
유괴(有愧) 저가(底伽)이다.
찬탄(讚歎) 패닉(唄匿)이다.
성음(聲音) 바사니(婆闍尼), 또는 바바림(婆婆啉)이다.
변재(辨才) 발저바(鉢底婆)이다.
아례(我禮) 화남(和南)이다.
예배(禮拜) 나모실갈라(那謨悉羯羅)이다.
비(悲) 가루나(迦樓那)이다.
심(尋) 비달가(毗怛伽)이다.
사(伺) 비자라(比遮羅)이다.
재시(財施) 달친(達嚫)이다.
타(他) 소위(所謂)이다.
이염(爾焰) 소지(所知)이다.
구(垢) 마라(摩羅)이다.
제일의(弟一義) 바라말타(波羅末陀)이다.
박(縛) 바타(婆陀)이다.
욕(欲) 아라가(阿羅伽)이다.
서(書) 이거(離佉)이다.
구(句) 파타(波陀)이다.
순숙(純熟) 구담(瞿曇)이다.
불휴식(不休息) 건타하제(乾陀訶提)이다.
호현(好賢) 수발타라(須跋陀羅)이다.
정거(淨居) 수타라(首陀羅)이다.
정행(淨行) 바라문(婆羅門)이다.
자각동중생(自覺同衆生) 보살(菩薩), 또는 보제살타(菩提薩埵)이다.
정식(靜息) 염마(琰魔)이다.
지혜(知慧) 반야(般若)이다.
정려(靜慮) 타연나(駄演那)이다.
무동(無動) 아촉(阿閦)이다.
신영(身影) 빈바장자(頻婆長者)이다.
무상(無常) 살가나살(薩迦那薩)이다.
분리(分難) 아라밀(阿羅密)이다.
이합(離合) 살삼마사(殺三摩娑)이다.
사유(思惟) 말제희(末提希)이다.
원(院) 나마(羅摩)이다.
소사(小舍) 구타가(拘吒迦)이다.
주(柱) 곧 번(幡)이다.
향실(香室) 건타구지(犍陀俱胝)이다.
단(壇) 만다라(滿茶邏)이다.
의복(衣服) 진월(震越)이다.
내의(內衣) 사륵(舍勒)이다.
고의(蠱衣) 교사야(憍奢耶)인데, 명주 옷이다.
세면의(細綿衣) 자린타(遮隣陀)이다.
마의(麻衣) 추마(芻摩)이다.
군(裙) 니박사나(泥縛些那)이다.
엄액(掩掖) 승기지(僧祇支)이다.
금대(金帶) 미하(彌訶)이다.
사화(屣鞾) 함박(函縛)이다.
대세포(大細布) 굴순(屈㫬)이다.
목면(木綿) 섬바(睒婆)이다.
겁구(刦具) 가바라(迦婆羅)인데, 즉 목면(木綿)이다.
세면(細綿) 도라면(兜羅綿)이다.
세포(細布) 두구라(頭鳩羅)이다.
견(絹) 나바타(那波吒)이다.
주(酒) 미번(味飜)이다.
정식(正食) 포사니(蒲闍尼)이다.
부정식(不正食) 거사니(佉闍尼)이다.
오담식(五噉食) 반자포선니(半者蒲善尼)이다.
오작식(五嚼食) 반자가단니(半者珂但尼)이다.
정식물(叮食物) 거타니(佉陀尼)이다.
자자식(自恣食) 발화라(鉢和羅)이다.
능후(能嗅) 가라니(迦羅尼)ㆍ갈라나(羯羅拏)이다.
능상(能嘗) 지야시흘박(砥若時吃縛)이다.
초(麨) 단발나(但鉢那)이다.
맥(麥) 가사착(迦師錯)이다.
걸식(乞食) 분위(分衛)이다.
곡(斛) 거리(佉梨)이다.
단(篅) 바하(婆訶)이다.
수이십곡(受二十斛) 마투(摩偸), 또는 재(宰)이다.
인(印) 우단나(優檀那)이다.
곡구(曲鉤) 바리(婆利)이다.
경(磬) 건치(犍稚), 또는 종(鐘) 이름이다.
주(籌) 사라(舍羅)이다.
병(甁) 군지(軍持)이다.
자와(瓷瓦) 치가(稚迦)이다.
노수(瀘水) 살라벌나(薩羅伐拏)이다.
응기(應器) 발다라(鉢多羅)이니, 곧 발(鉢)이다.
철발(鐵鉢) 건속잔(犍俗琖)이다.
연등(燃燈) 제원갈(提洹竭)이다.
백산개(白傘蓋) 살달다(薩怛多), 또는 반달라(般怛羅)이다.
금고(金鼓) 밀사아(密奢兒)이다.
간(竿) 자변지(刺變胝)이다.
당(幢) 탈사(脫闍)이다.
잡색(雜色) 만다라(曼陀羅)이다.
색(色) 구란타(俱蘭吒)이다.
금색(金色) 이니연(伊尼延)이다.
묘색(妙色) 소루바(蘇樓婆)이다.
청색(靑色) 니라(尼羅)이다.
적색(赤色) 아라나(阿羅那)이다.
황색(黃色) 건타라(犍陀羅)이다.
백색(白色) 노혜저가(盧醯咀迦), 또는 맹사야간숙리(虻沙夜間叔離)이다.
자색(紫色) 나차(羅差)이다.
흑색(黑色) 흘리변나흑(訖里變拏黑), 또는 가다(迦茶)이다.
창색(蒼色) 빙가라(氷伽羅)이다.
소색(素色) 수다라(修多羅)이다.
흑광(黑光) 가타라(迦陀羅)이다.
화색(華色) 야수타라(耶輸陀羅)이다.
향(香) 건타라야(乾陀羅耶)이다.
곽향(藿香) 가취(迦臭)이다.
소합(蘇合) 돌로슬검(咄嚕瑟劍)이다.
훈육(薰陸) 군두로(君杜嚕)이다.
모향(茅香) 재바(灾婆)이다.
용뇌(龍腦) 갈포라(羯布羅)이다.
백교(白膠) 살사라바(薩闍羅婆)이다.
사향(麝香) 모모사바하(莫莫娑婆訶)이다.
운향(芸香) 다게라(多揭羅)이다.
침향(沈香) 아가로(阿烥嚧)이다.
안식(安息) 졸구라(拙具羅)이다.
울금(鬱金) 다구마(茶炬磨)이다.
제호(醍醐) 우류만타(優留曼陀)이다.
이구(離垢) 전단(旃檀)이다.
금(金) 소대라(蘇代羅)이다.
은(銀) 아로파(阿路巴)이다.
산호(珊瑚) 발파사복라(鉢擺娑福羅)이다.
호박(琥珀) 아습마게바(阿濕摩揭婆)이다.
거거(車璖) 모바락게랍바(牟婆洛揭柆婆)이다.
마노(瑪瑙) 마라가례(摩羅伽隷)이다.
이구(離垢) 마니주석(摩尼珠石)이다.
적색주(赤色珠) 발마라가(鉢摩羅迦)이다.
적보(赤寶) 견숙가(甄叔迦)이다.
영락(瓔珞) 길전라(吉田羅)이다.
동철(銅鐵) 정용(淨用)이다.
보계(寶髻) 염나시기(罽那尸棄)이다.
대보(大寶) 포체란라(袍體蘭羅)이다.
보적(寶積) 자나가라(刺那伽羅)이다.
육(六) 사(沙)이다.
십만(十萬) 낙문(洛文)이다.
백억(百億) 구지(具胝)이다.
만억(萬億) 나유타(那由他)이다.
무앙수(無央數) 아승기(阿僧祇)이다.
화수(花樹) 아수가무우(阿輸伽無憂)이다.
수(樹) 파력(婆力)이다.
경목(梗木) 가리라고(軻梨羅苦)이다.
한림(寒林) 타(它)이다.
양지(陽枝) 필탁법작(韠鐸法嚼)이다.
초목심(草木心) 우율타(汙栗駄)이다.
화(花) 유변바(有變婆)이다.
천화(天花) 불파제(弗把提)이다.
내화(柰花) 말리(末利)이다.
황백색화(黃白色花) 우발라(優鉢羅)이다.
백련(白蓮) 분타리(分它利)이다.
청련(靑蓮) 구발라(漚鉢羅)이다.
적련(赤蓮) 발특마(鉢特摩)이다.
황련(黃蓮) 구모타(枸某陀)이다.
황백향화(黃白香花) 첨박(瞻搏)을 첨복(瞻蔔)이라 한다.
과(果) 바라(頗羅)이다.
내(柰) 암라(菴羅)이다.
호도(胡桃) 파라사(播羅師)이다.
시(柹) 진두가(鎭頭伽)이다.
율(栗) 독가(篤伽)이다.
이(李) 거릉가(居迦)이다.
사자(獅子) 승가피(僧伽彼)이다.
상(象) 가야(迦耶)이다.
우(牛) 구마제(瞿摩帝)이다.
독자(犢子) 바차부라(婆蹉富羅)이다.
야우(野牛) 실가라(悉伽羅)이다.
미후(彌猴) 마사타(摩斯佗)이다.
토(兔) 사사가(舍舍伽)이다.
서(犀) 갈가(竭伽)이다.
마(馬) 아습바(阿濕婆)이다.
생조명(生鳥鳴) 아습박구(阿濕縛窶)이다.
마이(馬耳) 액온박나(額溫縛拏)이다.
녹(鹿) 리가라(密利伽羅)이다.
묘성안(妙聲雁) 가릉빈가(伽陵頻伽)이다.
야응(夜鷹) 시나(嘶那)이다.
앵무(鸚鵡) 조타(臊陀)이다.
안(雁) 승바(僧婆)이다.
치(雉) 가빈사라(伽頻闍羅)이다.
계(鷄) 구구타(鳩鳩咜)이다.
계족(鷄足) 굴굴타파니(屈屈咜播尼)이다.
원앙(鴛鴦) 작가라바(斫伽邏婆)이다.
백설(百舌) 사라(舍羅)이다.
합(鴿) 가포덕가(伽布德伽)이다.
공작(孔雀) 마전라(摩田羅)이다.
치(鴟) 아리야(阿利耶)이다.
취(鷲) 고율타(姑栗陀)이다.
취족(鷲足) 기사굴(耆闍崛)이다.
조(鵰) 게라사(揭羅闍)이다.
용(龍) 나야(那耶)이다.
용맹(龍猛) 나갈가수나(那曷伽樹那)이다.
교(蛟) 궁비라(宮毗羅)이다.
규(虯) 숙숙라(叔叔羅)이다.
귀(龜) 비라나(毗羅拏), 또는 갈차바(羯車婆)이다.
경(鯨) 마갈(摩竭)이다.
악(鰐) 실수마라(失水摩羅)이다.
역귀(疫鬼) 나리련(羅利連)이다.
화신(火神) 악초니(惡初尼)이다.
풍신(風神) 바유(婆庾)이다.
초적(草賊) 주리(朱利)이다.
사약(蛇藥) 균부살지(菌裒殺地)이다.
황병(黃病) 사가마라(闍迦摩羅)이다.
풍병(風病) 산야사폐(珊若娑廢)이다.
불가치병(不可治病) 아살사(阿薩闍)이다.
생(生) 흘나(仡那)이다.
생사(生死) 말라남(末剌諵)이다.
무량수(無量壽) 무량타(無量陀)이다.
동수(童壽) 구마라습바(鳩摩羅什婆)이다.
방분(方墳) 솔도(窣堵), 또는 원총(圓塚)이다.
총(塚) 사마사나(舍摩奢那)이다.
신자(身子) 사리불(舍利弗), 또는 일추자(日鶖子)이다.
수주(數珠) 발색모(鉢塞莫)이다.
석장(錫杖) 극기라(隙棄羅)이다.
거예(去穢) 가사(袈娑)이다.
중숙의(中宿衣) 안타회(安陀會)이다.
단좌구(壇坐具) 한 폭(幅)의 첩(氎)으로 만든 니사(尼師)이다.
공덕의(功德衣) 가치나(伽絺那)이다.
이는 다 불경(佛經)에 인하여 분문유휘(分門類彙)한 것인데, 그 대강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내전(內典)을 읽으면서 이것을 가져 가려운 곳을 긁는다면, 혹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단서(異端書)를 어찌 굳이 알려고 할 필요야 있겠는가.
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고전간행회본 권 39)

석교는 불법(佛法)이요, 범서는 불자(佛字)요, 불경은 석전(釋典)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불경은 천축(天竺)의 가유위국(迦維衛國) 정반왕(淨飯王)의 태자(太子)인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법한 것이다. 석가는 주 장왕(周莊王) 9년 4월 8일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뚫고 나와 세상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기이하여 32상(相)80종호(種好)가 있었다. 태자의 자리를 내던지고 출가(出家)하여 도(道)를 배워 근행(勤行)하고 정진(精進)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깨달았으므로 불(佛)이라 한다. 또는 불타(佛陀)ㆍ부도(浮屠)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 호어(胡語)이고, 화어(華語)로 번역하면 정각(淨覺)이다.
석가(釋迦)의 설(說)에 ‘사람의 몸이 비록 생(生)과 사(死)의 다른 점은 있지만 정신은 언제나 없어지지 않는다. 현존(現存)하는 몸 이전에 무량(無量)의 몸을 거쳐 왔다. 계속 닦아 익혀서 정신이 청정(淸淨)해지면 불도(佛道)를 이룬다. 천지(天地)의 밖과 사유(四維 건(乾:서북)ㆍ곤(坤:서남)ㆍ간(艮:동북)ㆍ손(巽:동남))의 상하에도 다시 천지가 있어 그 끝이 없다. 그러나 모두 성(成)과 패(敗)가 있는데, 한번 성하고 한번 패한 것을 1겁(劫)이라 한다. 지금으로부터 천지 이전까지는 무량겁(無量劫)이 있었다. 겁마다 반드시 수많은 부처가 도를 얻고 세상에 나와서 교화를 하는데, 그 수는 동일하지 않다. 지금 이 겁 가운데 반드시 천불(千佛)이 있을 것인데, 맨 처음부터 석가에 이르기까지 벌써 칠불(七佛)이 된다. 그 다음은 의당 미륵(彌勒)이 세상에 나와 삼회(三會)가 경과하도록 법장(法藏)을 연설(演說)하여 중생(衆生)을 개도(開導)할 것이다. 이 도를 닦는 데는 4 등(等)의 과(果)가 있는데, 첫째 수다원과(須陀洹果), 둘째 사다함과(斯陀含果), 셋째 아나함과(阿那含果), 넷째 아라한과(阿羅漢果)이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자는 출입(出入)ㆍ생사(生死)ㆍ거래(去來)ㆍ은현(隱顯) 어느 것에도 걸림[累]이 되지 않으며, 아라한 이상 보살(菩薩)에 이른 자는 불성(佛性)을 깊이 체득하여 성도(成道)하기에 이른다. 불(佛)마다 멸도(滅度)한 후에는 유법(遺法)을 서로 전하는 시대에 있어 정법(正法)ㆍ상법(象法)ㆍ말법(末法) 3등으로, 수박(粹駁)한 차이가 있고 시대의 원근(遠近)도 각기 다르다. 말법 이후에는 중생이 우둔하여 업행(業行)이 갈수록 나빠지고 수명(壽命)이 점점 짧아지다가, 수백 수천년을 지나면, 아침에 태어났다가 저녁에 죽기까지에 이른다. 그런 뒤에 대수(大水)ㆍ대화(大火)ㆍ대풍(大風)의 재이(災異)가 있어 일체를 제거하고 나서 다시 사람을 탄생시키면 이들은 또 순수함[粹]으로 복귀되는데, 이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며, 하나의 소겁마다 한 부처가 세상에 나온다.’ 하였다.
당초 천축국(天竺國) 안에 외도(外道)들이 많았는데, 모두 수화(水火)와 독룡(毒龍)을 구사(驅使)하여 그 변환(變幻)이 능란하였다. 석가가 고행(苦行)할 적에 이 모든 사도(邪道)들이 몰려들어 석가의 마음을 어지럽히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석가가 불도를 깨달은 뒤에 그들은 다 복종하여 모두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 제자 중에 남자는 상문(桑門)이라 하는데 번역하면 식심(息心)이요, 통틀어 승(僧)이라 하는데 번역하면 행걸(行乞)이며, 여자는 비구니(比丘尼)라 한다. 이들은 다 수발(鬚髮)을 깎고, 번뇌를 버리고 집을 떠나서 서로 함께 거처하면서 마음을 닦고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생명을 유지하면서 행(行)을 닦는다.
승(僧)에게는 2백 50계(戒)가 있고, 니(尼)에게는 5백 계가 있다. 속인(俗人)으로서 불법을 믿는 사람을 남자는 우바새(優婆塞), 여자는 우바이(優婆夷)라 하여, 모두 살(殺)ㆍ도(盜)ㆍ음(淫)ㆍ망언(妄言)ㆍ음주(飮酒)를 금하는데, 이것이 소위 5계(戒)이다. 석가가 세상에 나와 교화한 49년 동안에, 천(天)ㆍ용(龍)ㆍ인(人)ㆍ귀(鬼)까지 모두 와서 설법을 듣고, 득도(得道)한 제자가 무려 백천 만억으로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 뒤에는 구시나성(拘尸那城)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2월 15일 반열반(般涅槃 열반(涅槃)과 같다)에 들었다. 열반은 이원(泥洹)이라고도 하는데, 번역하면 멸도(滅度)이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도 한다.”
그의 도가 청정(淸淨)하고 적멸(寂滅)하기 때문에 입적(入寂) 또는 멸도라고 한다.

불씨(佛氏) 내력

불(佛)의 내력과 시종(始終)에 대해서는《수서》 경적지가 비록 해박하다고는 하겠으나, 이러니저러니하는 여러 설(說)들이 있으니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불설(佛說)에 “석가여래는 중천축(中天竺)의 마하타국(摩訶陀國) 정반왕의 태자이다. 모호(母號)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인데, 그는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하였다. 주 소왕(王) 26년 (갑인) 4월 8일에 탄생하였다. 그의 호는 실달태자(悉達太子)인데, 모후(母后)가 별세하자 이모[姨]인 교담미(憍曇彌)가 길렀다. 그가 막 태어났을 때, 손으로 천지(天地)를 가리키며 스스로 말하기를 ‘천상과 천하에 나만 존귀할 뿐이다.[天上天下 惟我獨尊]’라 하였다. 자라서는 총명하고 성스럽고 슬기로워 늘 속세를 떠날 뜻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동문(東門)을 나갔을 때 정거천(淨居天)이 아주 늙은 사람으로 화하여 곁에 나타났고, 또 남문(南門)을 나갔을 때는 정거천이 크게 병든 사람으로 화하여 나타났고, 서문(西門)을 나갔을 때는 또 죽은 사람으로 화하여 나타났고, 북문(北門)을 나갔을 때는 또 비구(比丘)로 화하여 나타났다. 이에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의 이치를 목격한 그는 속세를 떠날 뜻이 배나 깊어졌다.
대왕(大王 정반왕(淨飯王)을 가리킨다)이 우타이(優陀夷 실달태자의 학우(學友))를 시켜 그에게 출가의 뜻을 가라앉히도록 간하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불로(不老)ㆍ무병(無病)ㆍ불사(不死)ㆍ불별(不別)의 네 가지 원(願)이 있다.’ 하므로, 왕은 야수타라(耶輸陀羅 실달태자의 비(妃))를 명해 보호를 배나 더하게 하고 이어 야수타라를 통해 이르기를 ‘왕이 후사(後嗣)가 없으니, 자식 하나만 낳아 주면 곧 출가를 허락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그가 야수타라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문득 임신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라후(羅睺 실달태자의 아들)는 하늘로부터 화생한 것이요, 부모의 회합을 거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뒤에 라후라 존자(羅睺羅尊者)로 호칭된 자가 바로 그다.
이윽고 그는 19세가 되는 해에 출가하면서 건척(犍陟 실달태자가 타던 말 이름)을 타고 마부 차닉(車匿)을 데리고 북문(北門)을 탈출하여 아라라가 선인(阿羅邏迦仙人)의 처소에 찾아가 수년 동안 고행(苦行)하여, 30세가 되는 계미년(癸未年) 4월 8일 녹야원(鹿野苑)에서 성도(成道)하였다. 지금 비구승(比丘僧)의 머리 깎는 풍습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수달장자(須達長者)가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고 그를 맞아들였는데,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수백 나한(數百羅漢) 등 늘 설법을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그가 일생에 걸쳐 설한 말들은 패다수엽(貝多樹葉)에 적혀 있어 이를 서로 전하면서 경문(經文)이라 이름하였는데, 모두 7천 27권이 되며, 그는 79세 되던 해 2월 15일 밤에 입멸(入滅)하였다.” 주 목왕(周穆王) 53년(임신)에 해당된다. 하였다.
《내전(內典)》에 “석가의 성(性)은 찰리(刹利)인데, 막 태어났을 때 대지(大智)의 광명(光明)을 놓아 시방세계(十方世界)를 환히 비추었고, 땅에서는 금련화(金蓮花)가 솟아나와 저절로 두 발을 받들었는데, 이 때 석가는 손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獅子吼)를 내었다. 때는 주 소왕(周昭王) 24년 4월 8일이었다. 그는 나이 19세에 출가하여 단특산(檀特山)에서 도를 닦아 30세에 성도한 다음 천인사(天人師)라 호칭되고, 녹야원(鹿野苑)에서 사체(四諦)의 법륜(法輪)을 굴려 논도 설법(論道說法)하면서 49년간 세상에 머물다가 청정한 정법(正法)을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하며 계(偈)를 주고 나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 이르러 오른편으로 누워 발을 포개고 담담하게 입적(入寂)하였다. 때는 주 목왕(周穆王) 52년 2월 15일이었다.
《사기(史記)》에 “주 소왕(周昭王) 26년(갑인) 4월 8일에 우물 물이 넘치고 궁전(宮殿)이 진동하고 밤에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자, 태사(太史) 소유(蘇繇)가 점(占)을 쳐보고 나서 ‘서방(西方)에 성인(聖人)이 났다.’ 했다.” 하였다.
진(晉) 나라 이석(李石)의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부처의 본호(本號)는 석가문(釋迦文)인데, 곧 천축(天竺) 석가위국왕(釋迦衛國王)의 아들이다. 4월 8일 밤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였는데, 32상(相)이 있었다. 때는 주 장왕(周莊王) 9년이요, 노 장공(魯莊公) 7년 여름 4월인데, 이날 항성(恒星)은 나타나지 않고 밤이 환히 밝았다. 석가는 주 소왕 24년(임자) 4월 8일에 탄생하여 주 목왕 52년(신미) 2월 15일에 입적하여 수(壽)가 80이었는데, 혹은 79세라고도 한다.
《개황삼보기(開皇三寶記)》를 상고해 보면 ‘주 장왕 9년에 부처가 탄생하고 광왕(匡王) 4 년에 부처가 열반에 들었다.’ 하였으니, 만일 이 말과 같다면 부처는 계사년에 탄생하여 임자년에 열반에 들었으므로, 수는 80이 된다. 《보요경(普曜經)》에 이르기를 ‘도솔천(兜率天)에서 신(神)이 내려와, 서역(西域) 가유위국(迦維衛國) 정반왕의 후비인 마야부인의 배에 잉태되었다가 오른쪽 옆구리를 찢고 탄생했다.’ 한다.” 하였다.
《남제서(南齊書)》 고환전(顧歡傳)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불(佛)ㆍ도(道) 이가 (二家)가 교(敎)를 세운 것이 본디 달라서 학자들이 서로 비난한다. 고 환이 저술한 이하론(夷夏論)에 ‘대저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데는 의당 성전(聖典)에 의거하여 이교(二敎)의 근원을 추심해야 하기 때문에 경구(經句) 두 가지를 표시한다. 도경(道經)에 「노자(老子)가 함곡관(函谷關)을 거쳐 천축(天竺) 유위국(維衛國)에 들어갔다. 유위국의 국왕부인(國王夫人)은 이름이 정묘(淨妙)인데, 노자가 정묘의 낮잠 자는 틈을 타서 태양의 정기(精氣)를 타고 정묘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음해 4월8일 한밤중에 정묘의 왼쪽 옆구리를 찢고 나와서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7보(步)를 걸었다. 이로부터 불도(佛道)가 일어났다.」한 말은 「현묘내편(玄妙內篇)」에서 나왔고, 불경(佛經)의 「석가가 성불(成佛)하는 데까지는 진겁(塵劫)의 수를 겪어 왔다.」한 말은《법화경》ㆍ《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나왔고, 또「국사(國師)ㆍ도사(道士)와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되었다.」한 말은 《서응본기(瑞應本起)》에서 나왔다.’ 하였다. 고환은 이에 대해 논하기를 ‘오제(五帝)ㆍ삼황(三皇)은 부처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국사나 도사로 말하자면 노자ㆍ장자(莊子)보다 나을 사람이 없고, 유림의 종장으로 말하자면 또 어느 누가 주공(周公)ㆍ공자를 초월하겠는가. 그럼 만일 공자ㆍ노자 같은 이가 부처가 아니라면 누가 그에 해당된단 말인가. 그러나 이경(二經 도경과 불경)에서 말한 바가 마치 부절(符節)이라도 맞춘 듯이, 도(道)가 곧 불(佛)이요 불이 곧 도이다 하였는데, 그 성(聖)에 도달함은 다 같지만 그 행적은 상반(相反)되어서, 혹은 빛을 간직하여 가까운 데를 밝히고, 혹은 영혜(靈慧)를 빛내어 먼 데까지 보이게 한다.’ 하였다.”
진강(陳剛)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은 불도가 서역에서 온 종교(宗敎)라고 하는데, 재장(齋長)이 어찌하여 불씨(佛氏)도 오래 살기를 탐내는 소인(小人)이라 하였던가? 불씨의 설(說)은 공(公)을 숭상하여 일체의 세사(世事)를 죄다 버려 관여하지 않으며, 생각마저도 끊어 마음을 항상 공공 무아(空空無我)하게 한다. 이목(耳目)이 있어도 그 시청(視聽)을 없애어 이목을 항상 공하게 하고, 구체(口體)ㆍ수족(手足)ㆍ음양(陰陽)의 형체가 있어도 모두를 억제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백체(百體)를 항상 공하게 하고는 정(精)ㆍ기(氣)ㆍ신(神) 세 가지를 하나로 만들어 성령(性靈)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세상에 존재하기를 힘쓰니, 이는 생(生)을 탐(貪)하고 유(有)를 탐하는 마음으로, 진공(眞空)을 한답시고 진실(眞實)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天地)의 정화(精華)를 도둑질해다가 다시 천지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하니, 이는 천지 간의 큰 도둑이다. 이를 어찌 진공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상고하건대, 부처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어머니 꿈에 큰 백상(白象) 한 마리가 들어왔던 것이 잉태되어 날마다 배가 점점 불러지다가 나중에는 감당하기조차 어려웠고, 그가 태어날 때는 그의 어머니 배를 찢었으므로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태어나게 되었다. 이야말로 하늘이 괴이한 사람을 내어 온 천하를 어지럽히려는 것이기에 먼저 그 어머니를 죽인 것이다. 세간(世間)의 악물(惡物)인 효조(梟鳥)ㆍ갈자(蝎子)ㆍ독사(毒蛇) 같은 것들이 태어날 때에 반드시 그 어미가 먼저 죽고 나서야 나온다. 그런데 소위 부처의 탄생이 어찌 이런 악류(惡類)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는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자기 어머니를 죽였건만, 세상 사람들은 곧장 재(齋)를 설치하고 초제(醮祭)를 마련하여 백방으로 자기 어머니를 위해 부처에게 기복(祈福)을 한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한 부처이고 보면,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상고하건대, 부처는 서역에서 범왕국주(梵王國主)가 되어 아리따운 처첩(妻妾)이 많았는데 이들을 보살(菩薩)이라 칭했으며, 금백(金帛)ㆍ재보(財寶)도 극히 많았다. 나라는 비록 부유하지만 땅이 워낙 협소하여 기세가 매우 약한 데다가 사린(四隣)의 나라들은 모두가 강포(强暴)하여 늘 그들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불국(佛國)은 병마(兵馬)가 미약하여 그들을 대적할 길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쳐서는 궁여지책으로 몸을 수행하고 선을 좋아한다[修行好善]는 한 가지 설을 제창하고 게다가 사생(四生)ㆍ육도(六道)ㆍ보응(報應)ㆍ윤회(輪回) 등의 허다한 표방(標榜)까지 내세워 그 사린을 우롱한 것인데, 그의 의사는, 너희들이 금세(今世)에 우리 백성을 살육하고 우리 재물을 노략질하면 후세에 반드시 견마(犬馬)로 환생하여 우리에게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12년 동안에 걸쳐 사린(四隣)이 과연 그 설에 우혹(愚惑)되었으므로 불(佛)이 다시 귀국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그 나라를 완취(完聚 성곽(城郭) 같은 곳의 헌 데를 고치고 백성을 모음)하고 예전대로 부강을 누리며 자자 손손 안전을 얻게 되었다. 불은 본디 지모(智謀)로 진공(眞空)을 내세워 허다한 실리(實利)를 획득한 것이요, 그가 어떤 도술을 가져 우리 중국을 교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중국에 성인의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데 기인된 것이다. 사람이란 욕심이 많으면 의혹된 생각이 더욱 많아져, 요순(堯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가 천명한 도의에는 향하지 못하고 오직 불자(佛子)에게만 빠져들어 은총을 기원하게 된다.
성인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 욕심을 없애고 귀신을 멀리하여 떳떳한 인도(人道)를 다하게 하였는데, 불자는 오직 자기 한 몸뚱이만을 알 뿐, 천하 국가를 전혀 도외시하는 것을 선회(善悔)로 삼고, 인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진공이라 여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도 공이 될 수 없다. 탐욕과 망령된 기원으로 사람을 유인하여 바른 인도를 그르쳤을 뿐, 모두가 공을 구하는 일념(一念)이 아니다.” 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불경(佛經)마다 첫머리에 야수타(耶輸陀)와 마후라(摩候羅)라는 자가 기재되었는데, 불씨(佛氏)가 출가하기 전에 장가들어 맞아온 아내가 야수타이고, 여기에서 낳은 아들이 마후라이며, 출가한 지 12년 만에 돌아와 처자와 다시 만났고, 또 그의 처자는 그가 돌아갔을 때 매우 비통해 했다는 말과, 사자(射子)에게 일러 모든 천신(天神)을 가르쳤다는 말과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에 관한 말이 많았으니, 이는 불(佛)도 우리 이륜(彛倫)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그의 무리들이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다만 억지로 정연(情緣)을 억제하는 것이 진속(塵俗)을 떠나는 것으로 여긴 때문에 모두가 처자 없이 홀아비로 살아온 것이지, 어찌 불(佛)ㆍ노(老)의 근본 교리가 이와 같으랴.
《불법금탕편(佛法金湯編)》에 “진 시황(秦始皇) 30년(갑신)에 서역의 사문(沙門) 실리방(室利防) 등 18인이 범어 (梵語)로 쓴 불경의 원본을 가지고 함양(咸陽)에 들어오자 유사(有司)가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임금은 이속(異俗)이라 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에 실리방 등이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婆羅密多)를 염(念)하자, 몸에서 광명(光明)이 나와 사방을 밝게 비추고 서기(瑞氣)가 맴돌아 감옥에 꽉 차더니 갑자기 장륙(丈六 1장(丈) 6척(尺))의 금신(金神)이 나타나 금강저(金剛杵)를 휘둘러 옥을 부수고 나오므로, 임금이 놀라 뉘우친 나머지 곧 그들에게 예우를 후히 했다.” 하였다.
명(明)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태평청화(太平淸話)》에 “변산(卞山)에 있는 초왕(楚王)의 사당에 양 간문제(梁簡文帝)가 비기(碑記)를 지었는데, 그 비기에 ‘항우(項羽)가 부처를 섬겨 당구제(唐丘除)를 죽이지 않았다.’ 하였고, 또 ‘항왕(項王)이 나물밥[蔬食]을 먹었다.’ 는 글이 있으니, 항우도 일찍이 부처를 섬겼던 것이다.” 하였다.
《열자(列子)》에 “주 목왕(周穆王) 때에 서역(西域)에서 화인(化人 선인(仙人) 또는 환인(幻人)과 같다)이 왔다.” 하였으니, 아마 불(佛)을 가리킨 듯하다. 그러나 이때에는 불이 아직 나오기 전인데, 이른바 “날아서 하늘에 올라 화인(化人)의 궁(宮)에 이르렀다.” 한 말이 주목할 만하다. 또 “상 태재(商太宰 상(商)은 송(宋) 나라, 태재(太宰)는 관명(官名)이다)가 공자(孔子)에게 성인(聖人)을 묻자, 공자도 삼황(三皇)ㆍ오제(五帝)를 내리 열거하면서 모두 성인이 아니라 하고 서방(西方) 사람을 성인으로 인정했다.” 하였으니, 서방 사람이란 곧 불을 가리킨 듯하며, 또 “서방 사람으로 성인이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고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는 불에 해당되므로 세상이 더욱 의심하는 바이다.
대저 “천독(天毒)이라는 나라는 《산해경(山海經)》에 기재되어 있고, 축건(竺乾)의 스승은 도를 주사(柱史 주하사(柱下史)의 약칭, 즉 노자(老子)를 가리킨다)에게서 들었다.” 하였는데, 이는 양 문공(楊文公 문공은 양억(楊億)의 시호)의 글에 나온 말이다.
불교(佛敎)는 이미 주(周)ㆍ진(秦) 시대부터 있었다. 불(佛)은 대지(大地)의 음달인 서역에 있어, 해가 반드시 뒤늦게 비추며 땅이 다 서쪽으로 기울고 물이 다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공(空)으로 성(性)을 말하였고, 공자는 대지의 양달인 중국에 있어, 해가 반드시 먼저 비추며 땅이 다 동쪽으로 기울고 물이 다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실(實)로 성을 말하였으니, 지기(地氣)에 의해서도 그렇게 된 것인가보다. 불(佛)은 성(性)을 영(影)에서 얻고 유(儒)는 성을 형(形)에서 얻는다. 이 때문에 유는 인도(人道)를 밝히고 불은 귀도(鬼道)를 밝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유ㆍ불의 차이점이다.
불도 이미 교리가 있는 이상 나름대로 문자(文字)가 있으므로, 소위 그 범자(梵字)라는 것을 패다수엽(貝多樹葉)에 써서 전한다.
원(元) 나라 성희명(盛熙明)의 천축서(天竺書)를 논한 《법서고(法書考)》에 “서역(西域)에 있는 오천축(五天竺 오인도(五印度)와 같은 말로 동인도ㆍ서인도ㆍ남인도ㆍ북인도ㆍ중인도를 말한다)의 문자가 각기 조금씩 다른데, 중천축의 문자만을 가장 정통으로 삼는다. 대를 깎아 붓을 만들고 패다수엽으로 종이를 삼아 썼는데, 글씨 종류가 자그마치 64종이나 된다.” 하였다.
여러 서번(西蕃)의 문자들이 비록 변천은 각기 다르나 그 음운(音韻)은 범음(梵音)을 이어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범음이라 하고 범서(梵書)라 하지 않는 것은 음률(音律)이 서로 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음(音)으로써 뜻을 가져오기 때문이고, 중국의 문자처럼 육의(六義)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조환광(趙宦光)이 말하기를 “중국 글자의 자모(字母)는 산만하여 질서가 없고 그 명칭이나 법칙도 도무지 정립된 것이 없지만 범문(梵文)은 실담(悉曇) 문자가 주축이 되어, 모(母) 34와 성(聲) 16이 있다. 이 모와 성이 서로 곱해져서 5백 44자(字)가 되고 소리[聲]도 이 숫자와 같으면서도 겹쳐지는 음(音)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이 전전하여 다시 곱해져, 형(形)ㆍ성(聲)ㆍ의(義)ㆍ훈(訓)이 한량없이 생긴다.
실담총지(悉曇總持)는 대해다라니(大海陀羅尼)라고도 하는데, 다라니는 주문(呪文)임이 분명하다. 이는 당승(唐僧) 법천(法天)이 타본(他本)과 대조하여 바로잡고 이를 채택하여 실담(悉曇)의 수총지(首總持)를 삼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문수문자경(文殊文字經)》과 《화엄경(華嚴經)》의 자모(字母),《반야경(般若經)》의 자모, 《석담경(釋談經)》과 《야오사장(若烏思藏)》의 자모는 곧 소서천(小西天)의 자모인데, 모가 30, 성이 5이다.” 하였다.
정초(鄭樵)의 화범(華梵 중국과 서역)에 대한 논(論)에 “여러 서번의 문자가 각기 다르나 많이 범서(梵書)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것이 중국에 흘러들어 온 뒤에 대대로 대홍려(大鴻臚)의 직(職)이 있었으나 경(經)을 번역하고 윤문(潤文)하는 관리가 그 요지(要旨)를 다 통효(通曉)하지 못하였을까 염려되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범서는 왼쪽으로 돌려서 써나가기 때문에 형세가 오른쪽을 향하고, 화서(華書)는 오른쪽으로 돌려서 써나가기 때문에 형세가 왼쪽을 향한다. 화서는 곧은 획이 교착되어 문자를 이루고, 범서는 비스듬한 획이 얽히어 서체를 이룬다. 화서는 글자 하나에 음도 하나만이 해당되지만, 범서는 글자 하나에 간혹 여러 음이 해당될 수 있다. 화서는 글이 종선(縱線)으로 곧게 서로 이어지고, 범서는 횡선(橫線)으로 비스듬하게 서로 엮어진다. 화서는 눈으로 보아서 전하기 때문에 글씨에 자상하고, 범서는 입으로 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마치 악보(樂譜)와 같아서 글씨의 형체를 대략만 기록할 뿐이다. 화서는 읽을 때 소리를 판별하기 때문에 소리에서 가차(假借)하고, 범서는 읽을 때 음을 판별하기 때문에 음에서 가차한다. 《칠음운감(七音韻鑑)》을 살펴보면, 이 책은 서역(西域)에서 나온 것으로 거문고의 칠현(七絃)에 맞추어졌고 천뢰(天籟 천지 자연의 소리)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종(從)ㆍ형(衡)ㆍ정(正)ㆍ도(倒)가 전전하여 도형(圖形)을 이루어 자연의 글 아님이 없으므로 그 정미로움이 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으로만 만들어진《운서(韻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칠음의 학(學)을 학자(學者)들이 연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화서에는 이합(二合)의 음만 있고 이합의 글자는 없으나, 범서에는 이합ㆍ삼합ㆍ사합의 음이 있고, 또 그에 따른 글자도 있다. 화서는 그것이 금보(琴譜)에만 있다. 대저 중국 사람은 음에 능숙하지 못하다. 지금 범승(梵僧)의 주문(呪文)으로 비를 부르면 비가 오고 용(龍)을 부르면 용이 나타나서 잠깐 사이에 소리를 따라 변화하지만 화승(華僧)은 아무리 그 소리를 배워도 실효가 없으니, 이는 실로 음성을 내는 방법이 미진해서이다. 서역 사람들은 음을 분별함이 음에 있고 글자에 있지 않으며, 중국 사람들은 글자를 분별함이 글자에 있고 음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범서는 매우 쉽다. 다만 이 두어 가지의 굴곡(屈曲)이 있을 뿐이다. 차별점(差別點)이 많지 않고 또 문리(文理)가 형성되지 않으면서도 무궁한 음이 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매우 음을 분별하지 못하여 절운학(切韻學)같은 것도 한 대(漢代) 이전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실은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른바 운도(韻圖)의 유에 대해서도 석자(釋子)들은 흔히 말을 잘하는데, 유자(儒者)들은 모두 기례(起例)조차도 알지 못하니, 이는 그 원류(源流)가 저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화서(華書)는 글자의 조립이 극히 조밀하고 점획(點畫)도 극히 많아서 범서(梵書)에 비교하면 실상 서로 요원하다. 그러므로 범서에는 무궁한 음이 있고 화서에는 무궁한 글자가 있다. 범서는 음에 오묘한 뜻이 있고 글자에는 문채가 없으며, 화서는 글자에 변통이 있고 음에는 치수(錙銖)가 없다. 서역 사람들은 음에 뛰어나서 얻는 것이 들은 것을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이곳의 참다운 교체(敎體)는 청정(淸淨)하여 음문(音聞)에 있으므로, 우리의 삼마제(三摩提)가 모두 듣는 것을 따라 들어왔다고 하고, 또 목근(目根)의 공덕은 작고 이근(耳根)의 공덕은 많다는 설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문(文)에 뛰어나서 얻는 것이 보는 것을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천하가 글자를 아는 사람은 유능하고 슬기롭게 여기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고 용렬하게 여긴다.” 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서번(西番)에서 천방국(天方國)ㆍ묵덕나(黙德那)가 가장 먼 곳으로, 현장(玄奘 당(唐) 나라 때의 중)이 불경(佛經)을 가져온 지역이므로 서로 전하기를 불국(佛國)이라 한다. 그 경(經)은 36장(藏)으로 되어 3천 6백여 권이나 되고, 그 글씨는 전서(篆書)ㆍ초서(草書)ㆍ해서(楷書) 세 가지 법이 있다.” 하였다.

범서(梵書)의 종류

범서(梵書)는 64종(種)이 있다. 명 나라 미공(眉公) 진계유(陳繼儒)의 《언폭여담(偃曝餘談)》에 “정반왕(淨飯王)이 밀다라(密多羅)로 하여금 태자(太子)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태자는 맨 처음 취학(就學)할 적에 가장 기묘한 것을 좋아하여, 우두전단(牛頭旃檀 인도에서 나는 고귀한 향나무 이름)으로 수판(手版)을 만들고는 순수한 칠보(七寶)사연(四緣)을 장엄(裝嚴)하고, 온갖 특수한 천향(天香)을 그 등에 바른 다음, 이를 갖고 비사밀다라(毘奢密多羅) 아사리(阿闍黎)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존사리(尊闍黎)는 나에게 무슨 글을 가르치겠습니까? 여기서부터는 태자가 널리 글에 대해 말한 것이다. 혹시 범천(梵天)이 설(說)해 놓은 글입니까? 지금 바라문(婆羅門)의 글인데, 모두 음(音)이다. 아니면 거로(佉盧)의 슬질서(蝨叱書), 수(隋)에서 노순(盧脣)이라고 한다. 부사가라선인설서(富沙迦羅仙人說書) 수에서 초과(草果)라 한다.ㆍ아가라서(阿迦羅書) 수에서 절분(節分)이라고 한다.ㆍ몽가라서(瞢迦羅書) 수에서 길상(吉祥)이라고 한다.ㆍ야미니서(邪寐尼書) 미(寐)는 망비(亡毗)의 반(反)이다. 수에서 대진국(大秦國)이라고 한다.ㆍ앙구리서(鴦瞿梨書) 수에서 지언(指言)이라고 한다.ㆍ야나니가서(耶那尼迦書) 수에서 타서(駄書)라고 한다.ㆍ바가라서(婆迦羅書) 수에서 자우(牸牛)라고 한다.ㆍ바라바니서(婆羅波尼書) 수에서 수엽(樹葉)이라고 한다.ㆍ바류사서(波流沙書) 수에서 악언(惡言)이라고 한다.ㆍ부여서(父輿書)ㆍ비다도서(毗多荼書) 수에서 기시(起尸)라고 한다.ㆍ타비도국서(陀毗荼國書) 수에서 남천축(南天竺)이라고 한다.ㆍ지라거서(脂羅佉書) 수에서 형인(形人)이라고 한다.ㆍ탁기로나바다서(度其荖那婆多書) 수에서 우선(右旋)이라고 한다.ㆍ우바가서(優婆迦書) 수에서 엄치(嚴熾)라고 한다.ㆍ승거서(僧佉書) 수에서 산계(算計)라고 한다.ㆍ아바물타서(阿婆勿陀書) 수에서 하(霞)라고 한다.ㆍ아면로마서(阿㝹盧摩書) 수에서 순(順)이라고 한다.ㆍ비야매사라서(毗耶寐奢羅書) 수에서 잡(雜)이라고 한다.ㆍ타라다서(陀羅多書) 오장 변산(烏場邊山)이다.ㆍ서구야니서(西瞿耶尼書) 수미(須彌)의 서쪽이다.ㆍ아사서(阿沙書) 소륵(疏勒)이다.ㆍ지나국서(支那國書) 이것이 곧 대당국(大唐國)이다.ㆍ마나서(摩那書) 과두(科斗)이다.ㆍ말도차라서(末荼叉羅書) 중자(中字)이다.ㆍ비다실저서(毘多悉底書) 척(尺)이다.ㆍ부수바서(富數波書) 화(華)이다.ㆍ제바서(提婆書) 천(天)이다.ㆍ나가서(那迦書) 용(龍)이다.ㆍ야차서(夜叉書)ㆍ건달바서(乾闥婆書) 천(天)의 음성(音聲)이다.ㆍ아수라서(阿修羅書)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ㆍ가루라서(迦婁羅書)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ㆍ긴나라서(緊那羅書) 비인(非人)이다.ㆍ마후라가서(摩睺羅伽書) 천지(天地)이다.ㆍ미가차가서(彌迦遮迦書) 모든 짐승의 소리이다.ㆍ가가루다서(迦迦婁多書) 새의 소리이다.ㆍ부마제바서(浮摩提婆書) 지거천(地居天)이다.ㆍ안다리차제바서(安多黎叉提婆書) 허공(虛空)이다.ㆍ울다라구라서(鬱多羅拘羅書) 수미(須彌)의 북쪽이다.ㆍ포루바비제아서(逋婁婆毗提阿書) 수미다(須彌多)이다.ㆍ오차바서(烏差婆書) 거(擧)이다.ㆍ이차바서(膩差婆書) 척(擲)이다.ㆍ바가라서(婆伽羅書) 해(海)이다.ㆍ발사라서(跋闍羅書) 금강(金剛)이다.ㆍ이가바라거리가서(梨伽婆羅佉犁伽書) 왕복(往復)이다.ㆍ비기다서(毗棄多書) 식잔(食殘)이다.ㆍ아토부다서(阿菟浮多書) 미증유(未曾有)이다.ㆍ사바다라발다서(奢婆多羅跋多書) 거전(擧轉)이다.ㆍ니차발다서(尼差跋多書) 척전(擲轉)이다.ㆍ바타리거서(婆陀梨佉書) 상구(上句)이다.ㆍ비구다라바타나지서(毗拘多羅波陀那地書) 종이증상구(從二增上句)이다.ㆍ야바타수다라서(耶婆陀輸多羅書) 증상구이상(增上句已上)이다.ㆍ말도바신니서(末荼婆哂尼書) 중류(中流)이다.ㆍ이사야바다바지마다서(梨娑邪婆多婆恀比多書) 제산(諸山)의 고행(苦行)이다.ㆍ다라니비차리서(陀羅尼卑叉梨書) 관지(觀地)이다.ㆍ가가나비려차니서(伽伽那卑麗叉尼書) 관허공(觀虛空)이다.ㆍ살포사지니서(薩蒲娑地尼書) 일체 약초인(一切藥草因)이다.ㆍ사라승가아니서(娑羅僧伽阿尼書) 총람(總覽)이다ㆍ살바위다서(薩婆韋多書) 일체 종음(一切種音)이다. 입니까?’
그때에 태자는 이상의 글을 이야기했는데 이 글의 종류는 무려 64종이나 된다.
옛날에 글을 만들었던 사람이 무릇 세 명이 있다. 첫째는 이름이 범(梵)인데 그의 글은 오른쪽으로 써나가고, 그 다음은 거로(佉盧)인데 그의 글은 왼쪽으로 써나가고, 셋째는 창힐(蒼頡)인데 그의 글은 아래로 써내려간다. 범과 거로는 천축(天竺)에 살았고,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창힐은 중국에 있었으며, 범과 거로는 정천(淨天)에서 법을 취했다고 한다.” 하였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글 만든 사람에 대해 이 설을 인용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은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거로의 슬질서(蝨叱書)는 수(隋)에서 노순(盧脣)이라 하는데 불서(佛書)에서는, 첫째는 범(梵)이고 셋째는 창힐(蒼頡)이라 망언(妄言)하였으니, 이 또한 유서(儒書)를 은연히 억누르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를 유동보살(儒童菩薩)이라 칭하는 것과 같은 유이다.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서역(西域)을 기록한 글에, 노순서(盧脣書)ㆍ연엽서(蓮葉書)ㆍ절분서(節分書)ㆍ대진서(大秦書)ㆍ타승서(駄乘書)ㆍ자우서(牸牛書)ㆍ수엽서(樹葉書)ㆍ기시서(起屍書)ㆍ우선서(右旋書)ㆍ복서(覆書)ㆍ천서(天書)ㆍ용서(龍書)ㆍ조음서(鳥音書) 등 64종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유양잡조(酉陽雜組)》에 나타나 있다.
보유(補遺)로는, 석(釋) 신공(神珙) 등의 《절운(切韻)》, 석 처충(處忠)의 《원화운보(元和韻譜)》, 석 지유(智猷)의 《보수가자절운(補修加字切韻)》, 석 종언(宗彦)의 《사성등제도(四聲等第圖)》, 석 정홍(靜洪)의 《운영(韻英)》, 석 진공(眞空)의 《직지옥약시문법(直指玉鑰匙門法)》등이 있다.
불교에 종파(宗派)가 있기 때문에 그 경도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이 있고 선좌(禪坐)와 계율(戒律)이 있다.
명 나라 금화(金華) 사람 송렴(宋濂)이 말하기를 “서방(西方)의 성인(聖人)이 중생 제도의 큰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나와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곧장 발제하(跋提河)에 이르러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를 연설하여 법문을 갖추었는데, 사람마다 성식(性識)ㆍ근엽(根葉)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대승ㆍ소승의 설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부처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인 대가섭(大迦葉)이 아난(阿難) 등 5백 인과 함께 그의 언행을 추후 찬술하여 문자로 엮어서 12부(部)로 만들었는데, 그후 수백 년이 지나 나한(羅漢)과 보살(菩薩)이 나와 서로 이어가면서 논(論)을 지어 그의 뜻을 찬명(贊明)하였다. 그러나 부처가 말하기를 ‘내가 멸도(滅度)한 후에 정법(正法)이 5백년, 상법(像法)이 천 년, 말법(末法)이 3천 년이다.’ 하였다. 그 뜻은 이와 같으나 전적(典籍)을 추심해 보면 한대(漢代) 이전에는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다. 혹은 이르기를 ‘오래 전부터 이미 유포(流布)되었었으나 진(秦) 나라 시대에 이르러 없어졌다.’ 한다.” 하였다. 불법이 중국 및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온 내력과 경(經)의 삼장(三藏)ㆍ보유(補遺)ㆍ찬술(纂述)ㆍ석각(石刻)ㆍ전서(篆書)ㆍ패엽(貝葉)과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의 팔만 대장경(八萬大藏經)을 아울러 변증하려 한다.
송렴(宋濂)이 말하기를 “불경이 중국에 들어온 경위에 대해,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가서 부도(浮屠)의 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고 애제(哀帝)때에 박사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이, 대월지왕(大月氏王)이 이존(伊存)을 시켜 입으로 전수해 준 부도경(浮屠經)을 배워 옴으로써 중국에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꿈에 금인(金人)이 궁전(宮殿)의 뜰에서 비행(飛行)하므로 이를 조신(朝臣)들에게 물었는데, 부의(傅毅)가 부처[佛]라고 대답하자 명제가 낭중(郎中) 채암(蔡愔) 및 진경(秦景)을 천축(天竺)에 사신으로 보내어 불경(佛經)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및 석가(釋迦)의 입상(立像)을 구해 오게 하였다. 이때 이들은 사문(沙門)인 섭마등(攝摩騰)ㆍ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동(東)으로 돌아왔다. 그때 채암 등이 백마(白馬)에다 불경을 싣고 돌아왔으므로 낙성(洛城)의 옹문(雍門) 서쪽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워서 그들을 거주하게 하고, 그 경은 난대 석실(蘭臺石室)에 저장하였고 또 청량대(淸涼臺) 및 현절릉(顯節陵) 위에는 불상(佛像)을 그려 붙였다.
장제(章帝) 때에 초왕(楚王) 영(英)이 불법을 존숭(尊崇)하기로 소문이 나자, 서역에서 불경을 싸들고 온 사문(沙門)들이 매우 많았다. 영평(永平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연호, 58~75) 연간에 축법란이 또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였는데, 그 나머지 전해온 역서(譯書)들은 통하지 않는 데가 많다. 환제(桓帝) 때에 이르러 안식국(安息國)의 사문인 안정(安靜)이 불경을 싸들고 낙양(洛陽)에 와서 번역한 것이 가장 잘 되었다. 영제(靈帝) 때에는 월지국(月支國)의 사문인 지참(支讖), 천축의 사문인 축불삭(竺佛朔) 등이 불경을 번역하였는데, 지참이 번역한 《이원경(泥洹經)》2권을 학자들은 본지(本旨)에 매우 적합하다고 여겼다.
한말(漢末)에 태수(太守) 축융(竺融)도 불법을 숭상하였고, 삼국(三國)시대에는 서역의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불경을 싸들고 오(吳)에 와서 번역하자, 오주(吳主)인 손권(孫權)이 크게 경모하여 믿었다. 위(魏)의 황초(黃初 위 문제(魏文帝)의 연호, 220~226) 연간에는 중국 사람들이 비로소 불계(佛戒)에 귀의(歸依)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에 앞서 서역의 사문이 여기에 와서 《소품경(小品經)》을 번역하였으나 수미(首尾)가 서로 어긋나서 통하지 않았다. 감로(甘露 위 고귀향공(魏高貴鄕公)의 연호, 256~259) 연간에는 주사행(朱仕行)이라는 사람이 서역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러 불경 구십장(九十章)을 얻어왔는데, 진(晉) 나라 원강(元康 진 혜제(晉惠帝)의 연호, 291~299) 연간에 업(鄴)에서 이를 번역하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제(題)하였다. 태시(太始 진 무제(晉武帝)의 연호, 265~274) 연간에는 월지국(月支國)의 사문인 축법호(竺法護)가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불경을 많이 얻어 낙양(洛陽)에 와서 번역하였는데, 부수(部數)가 매우 많다. 불교가 동토(東土)에 유입된 것이 이때부터 성해졌다.
석륵(石勒 오호(五胡) 16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별칭) 시대에 상산(常山)의 사문인 위도안(衛道安)이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불경을 날마다 1만여 언(言)씩을 외었는데, 호승(胡僧)이 번역한 《유마경(維摩經)》과 《법화경(法華經)》이, 그 깊은 뜻이 다 해명되지 못했다 하여, 여기에 생각을 몰두한 지 10년 만에 심신(心神)을 깨우쳐, 그 어긋난 점을 바로잡고 해석(解釋)을 널리 선양시켰다. 이때 중국에 분란(紛亂)이 일어나 사방이 격절(隔絶)되자, 도안(道安)이 문도(門徒)를 인솔하고 남쪽으로 신야(新野)에 내려가 돌아다니면서 현종(玄宗 심원(深遠)한 도(道)의 뜻으로 여기서는 곧 불도를 가리킨 말이다)을 도처에 유포(流布)시키기 위해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법성(法性)은 양주(揚州)로, 법화(法和)는 촉(蜀)으로 가고, 도안 자신은 혜원(慧遠)과 함께 양양(襄陽)으로 갔다가 뒤에 장안(長安)에 이르자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왕명(王名))이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도안은 천축의 사문인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법문(法門)에 통했다는 소문을 평소 들었던 터이라 그를 데려오도록 부견에게 당부했었는데, 구마라습 역시 도안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요배(遙拜)하며 존경하였다. 요장(姚萇 후진 주(後秦主)의 이름)의 홍시(弘始) 2년에 구마라습이 장안에 이르렀으나 이때는 도안이 죽은 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므로 구마라습은 매우 슬프고 한스러워 했다. 이어 구마라습이 경론(經論)을 대거 번역하였는데, 도안이 바로잡은 것과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이, 뜻이 마치 하나 같아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당초 진(晉) 나라 원희(元熙 공제(恭帝)의 연호, 419~420) 연간에 신풍(新豐)의 사문인 지맹(智猛)이 지팡이를 짚고 서역 화씨성(華氏城 중인도(中印度)의 마게타국(摩揭陀國)에 있는 고성(故城))에 이르러 《이원경(泥洹經)》및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은 다음 동(東)으로 고창(高昌)에 와서 《이원경》을 번역하여 20권으로 만들었다. 뒤에 천축의 사문인 담마라참(曇摩羅懺)이 다시 호본(胡本)을 싸들고 하서(河西)에 오자, 저거몽손(沮渠蒙遜 오호(五胡) 16국의 하나인 북량(北涼)의 시조)이 사신을 고창(高昌)에 보내어 지맹(智猛)의 경본(經本)을 가져다가 서로 참고 대조하게 하려 하였으나, 그가 돌아오기 전에 몽손이 파멸되었다. 요장(姚萇)의 홍시(弘始) 10년에 지맹의 경본이 비로소 장안(長安)에 도착되자 번역해서 30권으로 만들었고 담마라참이 또 《금광명경(金光明經)》등을 번역하였다.
이때 장안에 들어온 호승(胡僧)이 수십 명이었는데, 그 중 구마라습이 가장 재덕(才德)이 뛰어나서, 그가 번역한 《유마경》ㆍ《법화경》ㆍ《성실론(成實論)》등 제경(諸經)과 담무참(曇無懺)이 번역한 《금광명경(金光明經)》, 담마라참(曇摩羅懺)이 번역한《이원경(泥洹經)》은 모두 대승(大乘)의 학(學)이 되었고, 또 구마라습이 번역한 《십송률(十誦律)》과 천축의 사문인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장아함경(長阿含經)》ㆍ《사분율(四分律)》과 도거륵(兜佉勒)의 사문인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번역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과 담마야사(曇摩耶舍)가 번역한 《아비담론(阿毗曇論)》은 모두 소승(小乘)의 학이 되었다. 기타의 경(經)ㆍ논(論)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로부터 불법이 유통하여 온 천하에 편만하였다.
동진(東晉)의 융안(隆安 안제(安帝)의 연호, 397~401) 연간에 또 계빈(罽賓 서역의 국명(國名))의 사문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ㆍ《중아함경(中阿含經)》을 번역하였고,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 405~418) 연간에는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화엄경(華嚴經)》의 3만 6천 게(偈)를 얻어와 금릉(金陵)에서 번역하였다. 또 사문 법현(法顯)이 장안(長安)에서부터 천축에 이르기까지 30여 나라를 거치면서 경(經)ㆍ율(律)이 있는 곳을 따라 그곳에서 쓰고 있는 글과 말을 배워 번역, 기록해 가지고 돌아와 금릉에 이르러 천축의 선사(禪師)인 발라(跋羅)와 함께 변정(辯定)하여 《승기율(僧祇律)》이라 하였는데, 학자들이 그를 전수한다.
제(齊)ㆍ양(梁) 및 진(陳)에도 외국(外國)의 사문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번역한 것으로는 법문(法門)이 될 만한 큼직한 부서(部書)는 없다. 양 무제(梁武帝)가 크게 불법을 숭상하여 화림원(華林園)에다 석씨(釋氏)의 경전(經典)을 전부 모았는데, 모두 5천 4백 권이었다. 이때 사문 보창(寶唱)이 경의 목록(目錄)을 찬하였다. 또 후위(後魏) 때에는 태무제(太武帝)가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정벌하고 나서, 사문들이 많이 불률(佛律)을 어기고 떼지어 추행을 한다는 이유로 유사(有司)에게 일러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블상(佛像)을 불태우거나 부수게 함으로써 장안의 승도(僧徒)가 일시에 섬멸되었다. 기타 지역에서는 이 조치를 미리 듣고 도망치거나 숨어서 살아남은 자가 열에 한두 명쯤 되었다.
그후 문성제(文成帝) 시대에는 다시 불도를 수복(修復)하게 하였다. 희평(熙平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의 연호, 516~518) 연간에 사문인 혜생(慧生)을 서역(西域)에 보내어 모든 경ㆍ율에서 채집하여 1백 70부(部)를 얻어왔고, 영평(永平 북위 선무제(宣武帝)의 연호, 508~511) 연간에도 천축의 사문인 보제류지(菩提留支)가 불경을 대거 번역하여 구마라습(鳩摩羅什)과 서로 대등하였는데, 그가 번역한 《지지경(地持經)》ㆍ《십지론(十地論)》은 모두 대승교(大乘敎)에 해당되는 것으로 학자들이 중히 여겼다. 후제(後齊)는 업(鄴)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불법(佛法)을 개혁시키지 않았는데, 주 무제(周武帝) 때에는 촉군(蜀郡)의 사문인 위원숭(衛元嵩)이 글을 올려, 승도(僧徒)들이 외람하다고 일컬음으로써 무제(武帝)가 조서를 내려 일체 철폐시켰다.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581~600) 원년에 고조(高祖)가 온 천하에 조서를 내려, 마음대로 출가할 수 있게 하고 이어 호구(戶口)를 계산하여 돈을 거두어 불경과 불상을 만든 다음 경사(京師) 및 병주(竝州)ㆍ상주(相州)ㆍ낙주(洛州) 등 큰 도시에는 관(官)에서 필사한 《일체경(一切經)》과 아울러 절 안에 비치하고, 또 별도로 필사하여 비각(祕閣)에 수장하도록 함으로써 온 천하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이 앞을 다투어 서로 경모(景慕)하여 민간(民間)에 있는 불경이 육경(六經)보다 수십 수백 배나 더 많았다.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 605~617) 연간에는 또 사문인 지과(智果)를 시켜 동도(東都) 안에 있는 도량(道場)에서 모든 경의 목록(目錄)을 찬하고 맥락(脈絡)을 분별하여 부처가 말해 놓은 경을 3부(部)로 만들었는데, 첫째는 대승(大乘), 둘째는 소승(小乘), 셋째는 잡경(雜經)이고, 기타 후인(後人)들이 가탁(假託)해서 만든 것 등은 별도로 1부를 만들어 의경(疑經)이라 하였다. 또 보살(菩薩) 및 여러 대덕(大德)들의 깊은 해석과 오묘한 뜻이 불교의 이치를 찬명(贊明)할 만한 것들은 논(論)이라 하였고 계율(戒律)은 대(大)ㆍ중(中)ㆍ소(小) 3부(部)의 구별을 두었다. 또 배우는 사람들이 그 당시의 행사(行事)를 기록해 놓은 것을 기(記)라 하였는데, 모두 11종이다.
왕의(王禕)의 《청암총록(靑巖叢錄)》에 “불씨(佛氏)의 학문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세존(世尊)의 대제자(大弟子) 아난다(阿難陀)가 총지(總持)를 많이 듣고 또 큰 지혜(知慧)가 있어, 세존이 말해 놓은 것들을 결집(結集)하여 수다라장(修多羅藏 부처가 말한 교법을 모은 총칭)을 만들자, 여러 존자(尊者)들이 서로 전후(前後)하여 화원(化源 교화(敎化)의 본원(本源)이라는 뜻)인 우바라(優波羅 율장(律藏)의 뜻)를 천명하여 사부율(四部律 율부(律部)의 네 가지.《십송률(十誦律)》ㆍ《사분율(四分律)》ㆍ《승기율(僧祇律)》ㆍ《오분율(五分律)》을 만들고 비니(毗尼 부처가 제자들을 위하여 마련한 계율의 총칭)라 하였다. 금강살타(金剛薩埵)는 비로자나(毗盧遮那)에게서 친히 유가(瑜珈) 5부(部)를 받았는데, 이것이 소위 비밀장구(祕密章句)이고, 무착(無着)ㆍ천친(天親)은 자주 지족천(知足天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하나인 곧 도솔천(兜率天)을 가리킨다)에 올라 자씨(慈氏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지칭하는 말)에게 자문하여 논(論)을 만들어 대승(大乘)을 발명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유식(唯識)의 종지(宗旨)이다. 천축의 용승(龍勝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이명(異名))은 자기가 얻은 비라(毗羅)의 강요(綱要)를 넓혀 중관론《中觀論)》이라 하였고, 돈황(燉煌)의 두법순(杜法順)은 《화엄경》의 불가사의한 경지에 깊이 들어가 깊은 뜻을 크게 선양하였는데, 소위 《화엄법계관(華嚴法界觀)》이다. 이것이 비니(毗尼)의 법의 대략 이다.
한(漢) 나라 영평(永平) 2년부터 불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왔는데, 그 후 서로 종(宗)을 달리하여, 교종(敎宗)ㆍ선종(禪宗)ㆍ율종(律宗) 세 파로 갈라졌다. 위(魏) 나라 가평(嘉平 제왕(齊王)의 연호, 249~253) 초기에는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비로소 《승기계본(僧祇戒本)》을 가지고 낙양(洛陽)에 이르자 담무덕(曇無德)ㆍ담체(曇諦) 등이 그를 계승하여 갈마수계(羯磨授戒)하는 법을 세웠고, 당(唐) 나라 때 종남산(終南山)의 징조율사(澄照律師) 도선(道宣)이 소(疏)를 지어 천명함으로써 사분율(四分律)이 드디어 크게 행해졌는데, 이것이 곧 남산종(南山宗)이 되었다.
살타(薩埵)는 유가(瑜珈)의 교법을 용맹(龍猛)에게, 용맹은 이를 용지(龍智)에게, 용지는 이를 금강지(金剛智)에게 전수했다. 당 나라 개원(開元 현종(玄宗)의 연호, 713~741) 연간에 금강지가 중국에 와서 만다라단(曼茶羅壇)을 크게 세우고 법사(法事 불법을 수행 또는 선전하는 일)를 열자, 대지선사(大智禪師)ㆍ도인선사(道氤禪師)ㆍ대혜선사(大慧禪師)ㆍ일행선사(一行禪師) 및 불공 삼장(不空三藏)이 모두 와서 그를 스님으로 존경하였는데, 이것이 곧 유가종(瑜珈宗)이 되었다.
당 나라 정관(貞觀 태종(太宗)의 연호, 627~949) 3년에 삼장(三藏 경ㆍ율ㆍ논 등을 번역한 스님의 일컬음) 현장(玄獎)이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자은법사(自恩法師) 규기(窺基)에게 전수하자, 규기가 여기에다 구설(舊說)을 망라하여 널리 소(疏)ㆍ논(論)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은종(慈恩宗)이다.
양(梁)ㆍ진(陳) 연간에는 북제(北齊)의 혜문(惠聞)이 《중관론(中觀論)》을 읽고 오지(奧旨)를 깨달은 다음 용승(龍勝)에게 멀리서 예배(禮拜)하여 스승으로 삼고,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의 삼관(三觀)인 지관법문(止觀法門)을 열어 법화(法華)의 종지(宗旨)를 혜사(慧思)에게, 혜사는 이를 천태국사(天台國師) 지의(智顗)에게 전수하여, 그 설(說)이 크게 갖추어졌다. 지의는 이를 관정(灌頂)에게, 관정은 이를 지위(智威)에게, 지위는 이를 혜위(惠威)에게, 혜위는 이를 현랑(玄朗)에게, 현랑은 이를 잠연(湛然)에게 전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천태종(天台宗)이다.
수(隋) 나라 말엽에 두순(杜順)이 법계관법(法界觀法)을 지엄(智儼)에게, 지엄은 이를 현수(賢首) 법장(法藏 현수의 이름)에게 전수했는데, 청량국사(淸涼國師) 징관(澄觀)에 이르러 그 학문을 추종하여 종지(宗旨)로 삼아 《화엄경》의 소론(疏論) 수백 수만 언(言)을 저술하였고, 규봉(圭峯 종밀의 별호) 종밀(宗密)이 그를 계승하여 그 교화가 널리 퍼지니, 이것이 바로 현수종(賢首宗)이다.
유가종(瑜珈宗)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남산종(南山宗) 역시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세상에 행해지는 것으로는 자은종(慈恩宗)ㆍ천태종(天台宗)ㆍ현수종(賢首宗)뿐인데, 그 중에서는 천태종이 가장 성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세상의 이른바 교종(敎宗)이다.
세존(世尊)의 대법(大法)이 가섭(迦葉)으로부터 28대(代)를 전수하여 보제달마(菩提達摩)에 이르러,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의 뜻을 크게 넓히어 불립문자(不立文字 법은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어 문자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로 성(性)을 보아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인데, 달마는 혜가(慧可)에게, 혜가는 승찬(僧璨)에게, 승찬은 도신(道信)에게, 도신은 홍인(弘忍)에게, 홍인은 조계산(曹溪山)의 대감선사(大鑑禪師) 혜능(慧能)에게 전수하여 그 법이 비로소 성해졌다. 혜능의 두 제자인 회양(懷讓)ㆍ행사(行思)가 다 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갔는데, 회양은 도일(道一)에게 전수하니, 도일의 학문은 강서(江西)에서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는 회해(懷海)에게, 회해는 희운(希運)에게, 희운은 임제 혜조대사(臨濟慧照大師) 의현(義玄)에게 전수하였는데, 의현이 삼공문(三空門 즉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내세워 학도(學徒)들을 책려(策勵)하니, 이것이 바로 임제종(臨濟宗)이다. 회해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한 파는 위산(潙山)의 대원선사(大圓禪師) 영우(靈佑)가 초조(初祖)이고, 영우는 앙산(仰山)의 지통대사(智通大師) 혜적(慧寂)에게 전수하였는데, 서로 이어 제창하고 화답하여 미묘한 현기(玄機)가 이루 멎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위앙종(潙仰宗)이다. 행사(行思)는 희천(希遷)에게 전수하였는데, 희천의 학문을 호남(湖南)에서 종주로 삼았다. 그는 도오(道悟)에게, 도오는 숭신(崇信)에게, 숭신은 선감(宣鑑)에게, 선감은 의존(義存)에게, 의존은 운문(雲門)의 광진대사(匡眞大師) 문언(文偃)에게 전수하였는데, 문언의 언어(言語)는 마치 청천벽력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이 귀를 가렸다. 이것이 바로 운문종(雲門宗)이다. 현사(玄沙) 사비(師備)는 사실 문언의 동문우(同門友)였는데, 그는 계침(桂琛)에게, 계침은 이를 법안대사(法眼大師) 문익(文益)에게 전수하였다. 문익은 비록 화엄(華嚴)의 육상(六相)에 의거하여 종지(宗旨)를 천명하기는 했으나, 고원(高遠)에게 독립하여 세정(世情)에 상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법안종(法眼宗)이다.
희천(希遷)을 종주로 한 또 다른 한 파는 개조(開祖)가 약산(藥山) 유엄(惟儼)인데, 유엄은《보경삼매(寶鏡三昧)》ㆍ《오위현결(五位顯訣)》ㆍ삼종루진법(三種漏盡法)을 담성(曇晟)에게, 담성은 이를 동산(洞山)의 오본대사(悟本大師) 양개(良价)에게, 양개는 이를 조산(曹山)의 원증대사(元證大師) 본적(本寂)에게 전수하여 다시 크게 떨쳤으니, 이것이 바로 조동종(曹洞宗)이다.
법안종(法眼宗)은 두 번 전수하여 연수(延壽)에 이르러 고구려(高句麗)에 흘러들어왔고, 앙산(仰山)은 세 번 전수하여 파초대사 철(芭蕉大士徹)에 이르렀는데,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 944~947) 연간에 이르러서는 없어져 계승되지 못하였다. 운문종(雲門宗)ㆍ조동종(曹洞宗)도 비록 근근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마치 실낱처럼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임제종(臨濟宗) 하나만은 방대한 조직으로 무궁한 발전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성하니,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이른바 선종(禪宗)이다.
율종(律宗)은 하나같이 남산종(南山宗)을 종주로 삼았다. 진오 지국율사(眞悟智國律師) 윤감(允堪)이 저술한 《회정기(會正記)》등의 글은 실로 육십가(六十家)의 석의(釋義) 외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이 바로 회정종(會正宗)이다. 대지율사(大智律師) 원조(元照)에 이르러서는 다시 《법화경》의 개현(開顯)에 대한 원의(圓義)를 분별하여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를 지어 여기에도 회정설(會正說)이 있기는 하나 《회정기》와 같지는 않으니, 이것이 바로 자지종(資持宗)이다. 이 2개의 종파가 지금 비록 병존하고는 있으나 학자들이 대부분 자지종을 따르니,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이른바 율종(律宗)이다. 대저 불도라는 것이 처음부터 2개의 문(門)이 있는 것은 아니나, 석가의 시대가 멀어지면서부터 교원(敎源)도 멀어져서 유파(流派)가 더욱 여러 개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래서 조사(祖師)가 다르고 지도함이 달라 각기 종파를 세워 서로가 모순을 만들어낸다. 선종은 교종이 명상(名相)에 침체한다고 비방하고, 교종은 선종이 공적(空寂)에 치우친다고 비방하며, 율종의 경우는 비록 선ㆍ교가 다같이 갖는 바이기는 하지만 취사(取捨)가 각기 다르다. 선ㆍ교의 학자들까지도 각기 이의(異議)를 내세워 서로 더 나은 점을 선택하니, 하나는 저쪽, 하나는 이쪽이 되어 서로 통하지 않는다.
교종(敎宗)으로 말하자면, 자은(慈恩)은 3개의 교를 세웠고, 천태(天台)는 4개의 교로 나누었고, 현수(賢首)는 또 5개의 교로 만들었다. 선종으로 말하자면, 혜능(慧能)과 신수(神秀)가 다같이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받았지만, 혜능은 돈종(頓宗)이, 신수는 점종(漸宗)이 되었고, 도일(道一)과 신회(神會)가 다같이 혜능에게서 법을 받았지만, 도일은 회양(懷讓)에게서 밀계심인(密契心印)을 받았고, 신회는 지해(知解)에서부터 회복되었으니, 그 서로 다름이 이와 같다.
심지어 천태종 같은 것은 교종의 1파인데도 사명(四明) 지례(知禮)와 고산(孤山) 지원(智圓)의 성선설(性善說)ㆍ성악설(性惡說)이 마치 빙탄(氷炭)처럼 서로 부합되지 않으며, 임제종은 선종의 1파인데도 혹은 방(棒)으로, 혹은 할(喝)로 하다가, 횡천(橫川)에 이르러서는 다시 게송(偈頌)으로 하여, 마치 모난 것과 둥근 것이 서로 걸맞지 않는 것과 같아서, 지파(支派)들이 서로 어긋나고 논설(論說)이 수다하여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하였다.
《초목자(草木子)》의 불론(佛論)에 “석가가 청련화(靑蓮華)를 꺽어 보이자 가섭(迦葉)이 미소를 띠었다. 이로부터 기미(機微)를 보여 바로 달마(達摩)에 전수되었는데, 말을 하여서 능히 작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이 밖에는 별다른 종지가 없다. 이로부터 선종은 다 이를 초조(初祖)로 삼았다.” 하였다.
달마는 곧 동토(東土 중국을 가리킴)의 초조인데, 그는 말하기를 “사람의 성정은 본디 착하기 때문에 애써 수행하지 않아도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하였다.
불설(佛說)에 “욕계(欲界)에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번뇌를 여의는 것을 선(禪)이라 하고, 집착도 없고 의지함도 없이 항상 광명(光明)이 앞에 나타나는 것을 선이라 하고,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법의 근본을 깨닫는 것을 선이라 하고, 입으로는 도를 잘 말하면서 실제의 얻음이 없는 것을 하마선(蝦蟆禪)이라 하고, 입으로 설법하지 못하는 자를 아양선(啞羊禪)이라 하고, 중도 아니요 속도 아닌 자를 조서선(鳥鼠禪)이라 하고, 외모는 중이나 마음이 속된 자를 독거사(禿居士)라 한다.” 하였다.
청(淸) 나라 장조(張潮)의 《주대기연(奏對機緣)》제사(題辭)에 “부처가 입적(入寂)할 무렵에 정법안장(正法眼藏)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대가섭(大迦葉)에게 부촉(付囑)하고 아울러 아난(阿難)에게 명하여 가섭을 도와서 법을 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전전하여 달마(達摩)에 이르러서는 그가 중국에 들어와 9년 동안 면벽(面壁)하였다. 2조(祖) 혜가(慧可)는 눈[雪] 위에 서서 팔목을 끊자 달마가 드디어 의발(衣鉢)을 그에게 부촉해 주었고, 3조ㆍ4조ㆍ5조ㆍ6조는 각기 의발을 전수하지 않고 법게(法偈)만 전수하였는데, 그 후 몇 번 전수된 뒤로는 위앙(潙仰)ㆍ임제(臨濟)ㆍ조동(曹洞)ㆍ운문(雲門)ㆍ법안(法眼) 등 5개의 종으로 나누어져 모두 세상에 전하여졌다. 그러다가 근대에는 임제종ㆍ조동종만이 존재하는데, 임제종의 한 지파(支派)가 더욱 성하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불도가 비록 이단(異端)이기는 하지만, 그 교 가운데는 곧 성인의 말들이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화장세계(華藏世界)는 원만(圓滿)하고 광대(廣大)하여, 아무 흠결도 없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두루 비추어서, 상(相)이 아니면서도 상이 되고 연(緣)이 아니면서도 연이 되며, 같은 것이 아니면서도 같고, 다른 것이 아니면서도 다르니, 진실로 사유(思惟)를 잘하면 곧 성체(聖諦)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왜 교(敎)와 선(禪)ㆍ율(律)이 서로 다르게 나누어졌으며, 또 어째서 서로 모순을 만들어 가면서 전문적인 것을 내세우며, 또 어째서 무기를 들고 공격하여 그 사설(師說)을 배반하는가. 그러나 장안(長安)에 들어온 자들 가운데 그 길은 동서와 남북으로 다르지만 그 종말에 이르러서는 다같이 선(善)에 요점을 두고 있으니, 배우는 이들은 그 취향에 따라 분류된다는 점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 교 중에는 나물만 먹으면서 마두(魔頭)를 섬기는 것이 있는데, 송(宋) 나라 때 방납(方臘)이라는 자가 이 법을 가지고 민중을 고혹시켰다. 이것이 장각(張角)에게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맨 처음 복건성(福建省)에서부터 시작되어 온주(溫州)에 흘러들어온 다음 드디어 이절(二浙 절강성(浙江省)의 동부와 서부)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들이 사람을 현혹시키는 데는, 역시 고약(蠱藥)과 부수(符水)를 사용하고 《금강경(金剛經)》을 외며, 색상(色相)으로써 자아(自我)를 본다는 설로 사도(邪道)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신(神)이나 불(佛)을 섬기지 않고 해[日]ㆍ달[月]에만 예배(禮拜)하여 이를 진불(眞佛)로 여겼는데, 이것을 금강선(金剛禪)이라 하였다. 또한 방술(房術)과 환술(幻術)을 잘하는 그들은, 인생(人生)은 괴로운 것이므로 그를 죽여 주는 것이 곧 그를 괴로움에서 구제하는 길이라 여겨 이를 도인(度人)이라 하는데, 도인을 많이 한 사람은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네 가지 종류의 사이비 불교가 있는데, 하나는 회회교(回回敎)이고, 하나는 번승(番僧)의 연설환희불교(演揲歡喜佛敎)이고, 하나는 서장(西藏)의 황교(黃敎)이고, 하나는 서장의 홍교(紅敎)이다.
회회교는 하늘을 섬기면서도 불도(佛道)와 비슷하니, 이것이 곧 석씨(釋氏)의 이교(異敎)로, 마합마(馬哈麻)를 초조(初祖)로 삼는데 역산(曆算)에 능하며,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여자 거느리는 것은 일반 사람과 똑같이 한다. 연설환희불교는, 번승(番僧)이 사람과 가축(家畜)을 때려잡아 그의 피를 부처의 입술에 발라 환희불(歡喜佛)이라 하고, 남녀가 발가벗은 채 서로 끌어안고 음란한 짓을 하는 모양의 불상을 만들고는 사람을 죽여 골절(骨節)로 수주(數珠)와 음기(飮器)를 만들어 주육(酒肉)을 먹고 음란한 짓을 하며, 여러 가지로 참혹한 해독을 끼치면서, 자칭 마후라불(摩睺羅佛)이라 한다. 이 교가 곧 불교 중에 가장 음란하고 악한 것이니, 곧 불교의 외도(外道)이다. 황교(黃敎)는 전장(前藏)의 종객파(宗喀巴)를 초조(初祖)로 삼고 대보법왕(大寶法王)이 그 교주(敎主)가 되어 누른 색깔의 옷과 누른 관(冠)을 썼기 때문에 황교라 이름하였다. 홍교(紅敎)는 후장(後藏)의 다이제(多爾濟)를 개조(開祖)로 삼고 소보법왕(小寶法王)이 그 교주가 되어, 붉은 옷에 붉은 모자를 썼기 때문에 홍교라 이름하였다.
대보법왕과 소보법왕이 세상에 전생(轉生)하여 교대해 가면서 서로 사제(師弟)가 되어 반선(班禪)이라 호칭하였는데, 모두가 환술(幻術)이 있었고, 체상(體相)이 마치 도금(鍍金)해 놓은 것 같았다. 서번(西番)에서는 이를 활불(活佛), 또는 성승(聖僧)으로 일컬었다.
홍교는 자기네 도(道) 가운데서도 벌써 외도(外道)가 되었다. 심지어는, 노사고달이(魯思古達爾)의 당(黨)이 도량(道場)을 만들어 색단파(色丹巴)를 초조(初祖)로 삼고, 찰달극(札達克) 곧 저주술(咀呪術)이다.ㆍ분포이(奔布爾) 곧 살육술(殺戮術)이다. 를 범행(梵行 맑고 깨끗한 행실)으로 여기기까지 하여, 그 해독이 더욱 심하였다. 촉침(促浸) 구명(舊名)은 대금천(大金川)이다. 과 찬랍(攢拉) 구명은 소금천(小金川)이다. 의 추장(酋長)과 도중(徒衆)들도 모두 라마(喇嘛)의 명(命)에 따랐다. 라마는 중국 말로 번승(番僧)인데, 그들은 전경루(傳經樓)와 연설벽(演揲壁) 라마사(喇嘛寺)의 동서벽(東西壁)을 말한다. 에 모두 음설(淫褻)하고 불초(不肖)한 상(狀)을 만들어 놓고 이를 환희불(歡喜佛)이라 하였다. 달사랍(達思拉)은 홍교가 소지하는 경(經) 이름이다. 홍교는 가장 탐내고 성내고 살육을 자행하는 교이다. 그들은 청 성조(淸聖朝) 53년에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었는데, 서장(西藏)을 정복한 다음 그들의 경전을 불태워버렸다. 고종(高宗) 건륭(乾隆) 45년(경자)에 황자(皇子)를 보내어 황교(黃敎)를 맞아오게 하였는데, 대보법왕(大寶法王) 반선(班禪)이 건륭 46년(신축) 열하(熱河)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서장(西藏)의 홍교와 황교의 유래에 대한 변증설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불법의 동래(東來)

불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내력에 대해, 법안종(法眼宗)이 두 번 전하여 연수(延壽)에게 이르러서 고구려(高句麗)에 흘러 들어왔다는 사실로 본다면, 고구려에 가장 먼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임신)은 바로 동진(東晉) 열종 효무제(烈宗孝武帝)의 함안(咸安 371~372) 2년이요, 진왕(秦王) 부견(苻堅)의 건원(建元 365~385) 8년이다. 이 해에 진왕이 부도(浮屠) 혜순(惠順) 편에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보내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법안종이 두 번 전하여 고구려에 흘러들어왔다는 것인가보다. 영류왕(榮留王) 8년(을유)은 당 고조(唐高祖) 무덕(武德 618~626) 8년인데, 이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佛)ㆍ노(老)의 법을 구해왔으니,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전말이다.
신라(新羅)로 말하자면, 법흥왕(法興王) 12년(을사)은 양 고제(梁高帝) 보통(普通 520~527) 6년이다. 이해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오자 왕이 불교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군신(群臣)이 믿지 않으므로, 근신(近臣)인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사람이 “신(臣)을 목베어 군신의 의논을 바로잡으소서.” 하고 왕께 주청하였으니, 그의 뜻은 본디 자기 하나가 희생되어서 불도를 일으키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목을 베려 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목에서 마치 젖과 같은 하얀 피가 솟아나오므로 뭇사람들이 감히 비난하거나 훼방하지 못하였다. 법흥왕 15년(무신)은 양 고제의 대통(大通 527~529) 2년인데, 이해에 처음으로 불법이 행해졌다.
진흥왕(眞興王) 10년(기사)은 양 고제의 태청(太淸 547~549) 2년인데, 이해에 양 나라에서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왔고, 12년(신미)은 양 태종(梁太宗)의 대보(大寶 550~551) 2년인데, 이해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거행하였으며, 14년(계유)은 양 세조(梁世祖)의 승성(承聖 522~555) 2년인데, 이해에 월성(月城)의 신궁(新宮)을 절로 만들었고, 26년(을유)은 후량(後梁) 세종(世宗)의 천보(天保 562~585) 4년이요, 진 세조(陳世祖) 천가(天嘉 560~565) 6년인데, 이해에 진 나라에서 중[僧] 편에 불경을 보내왔다.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스스로 법운왕(法雲王)이라 호칭하였고, 왕비 역시 비구니(比丘尼)라 호칭하였다. 진평왕(眞平王) 35년(계유)은 수 양제(隋煬帝)의 대업(大業 605~617) 9년인데, 이해에 수 나라에서 왕세의(王世儀)를 우리나라 황룡사(黃龍寺)에 보내어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는 ‘애장왕(哀莊王) 8년(807)에 왕명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거제도(巨濟島)에서 판각하여, 그 판(版)은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저장하였다.’ 하나 이는 와전(訛傳)이다. 애장왕 7년(병술)에는 불사(佛寺)를 새로 창건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것이 신라 시대 불법의 전말이다.
백제(百濟)로 말하자면, 침류왕(枕流王) 원년(갑신)은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376~396) 9년인데, 이해에 호승(胡僧) 난타(難陀)가 진 나라로부터 와서 불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고, 성왕(聖王) 19년(신유)은 양 고조(梁高祖) 대동(大同 535~546) 7년인데, 이해에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열반경의(涅槃經義)》를 표청(表請)하였다.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 7년(911)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는데, 이해가 곧 주량(朱梁 즉 후량(後梁)을 가리킨다)의 건화(乾化 태조의 연호, 911~914) 원년이다. 궁예는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는 동시에 큰아들은 청동보살(靑童菩薩), 막내아들은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칭하고, 밖에 나갈 때는 동녀(童女)들을 시켜 번개(幡蓋)와 향화(香火)를 받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 또 비구승(比丘僧) 2백여 명에게 명하여 뒤를 따르면서 범패(梵唄)를 부르게 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1년(918)에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치고 비로소 팔관회(八關會)를 거행하였으며, 2년(기묘)에는 도성(都城)에 10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4년(신사)에는 팔관회 잡기(雜技)를 정지시켰고, 8년(을유)에는 살던 집을 절로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현종(顯宗) 1년(경술)에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를 회복시켰고, 8년(정사)에는 또 살던 집을 절로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문종(文宗) 2년(무자)에는 백고좌 도량(百高座道場)을 내전(內殿)에 설치하였고, 6년(임진)에 또 설치하였으며, 13년(기해)에는 백성들 중에 아들 셋을 둔 경우에는 아들 하나는 중으로 만들 것을 규정하였고, 18년(갑진)에는 인왕 도량(仁王道場)을 내전에 설치하였다.
순종(順宗) 원년(1083)에 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선종(宣宗) 1년(갑자)에 비로소 승과(僧科)를 설치하였으며, 2년(을축)에는 백좌 도량을 내전에 설치한 다음 비로소 대가(大駕) 앞에서 불경을 받들고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4년(정묘)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어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였고, 6년(기사)에는 13층(層) 금탑(金塔)을 내전에 세우고 아울러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다. 예종(睿宗) 1년(갑오)에 백좌 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4년(정유)에도 백좌 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으며, 7년(경자)에는 송(宋) 나라로부터 불골(佛骨)을 맞아다가 금중(禁中)에 들여왔다. 인종(仁宗) 13년(1135)에 중 묘청(妙淸)의 반란(叛亂)이 있었다. 명종(明宗) 1년(1171)에 백좌 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11년(신축)에는 인왕 도량(仁王道場)을 내전에 설치하였으며, 16년(병오)에는 《인왕경(仁王經)》을 내전에서 강(講)하였다. 충선왕(忠宣王) 원년(1308)에는 팔관회를 정지시켰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세종(世宗) 1년(1419)에 오교(五敎)를 혁파하여 선(禪)ㆍ교(敎) 양종(兩宗)만 남겨 두었다. 세조(世祖) 10년(1464)에 성중(城中)의 중부(中部)에 있는 경흥방(慶興坊)에다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발행하였다. 성종(成宗) 8년(정유)에 축수재(祝壽齋)를 혁파하고, 23년(임자)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였다. 중종(中宗) 7년(임신)에는 원각사를 철폐하고 선ㆍ교 양종을 혁파하였으며, 11년(병자)에는 기신재(忌辰齋)를 혁파하였다. 명종(明宗) 6년(1551)에 양종의 선과(禪科)를 혁파했다가 12년(정사)에 다시 설치하고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귀양보냈는데, 이는 보우가 불사(佛事)를 널리 벌여 세상을 미혹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조(宣祖) 25년(임진)에는 승통(僧統)을 두었는데, 이는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중 휴정(休靜)을 불러 승군(僧軍)을 모집하게 한바, 휴정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고 또 격문(檄文)을 돌려 관동(關東)의 유정(惟政),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승군을 모집하여 성원(聲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후로는 8도(道)의 사찰(寺刹)에 모두 승군이 있었는데, 남한(南漢)ㆍ북한(北漢)ㆍ화성(華城)ㆍ밀양(密陽) 등지의 사찰에 있는 중들이 총섭(摠攝)이나 승장(僧將)이 되어 승군을 영솔하였다. 이것이 조선조 시대 불교 연혁(沿革)의 대략이다.

불경(佛經)

송(宋)의 삼조예문지(三朝藝文志)에 “당(唐) 나라 개원(開元 현종(玄宗)의 연호, 713~741) 연간의 석장(釋藏) 목록은 모두 5천 48권이고, 정원(正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785~805) 연간의 석장 목록은 또 2백 75권으로 되어 있는데, 석전(釋典)에 대한 서적은 있지 않다. 황조(皇朝 송(宋) 나라를 이름)에 이르러 다시 번역(飜譯) 사업을 벌인바 태평흥국(太平興國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976~983) 초기에서 지도(至道 송 태종의 연호, 995~997) 2년에 이르기까지 2백 39권을 번역하였다. 다시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1008~1016) 4년에 이르기까지 1백 75권을 번역하였는데, 윤문관(潤文官) 조안인(趙安仁) 등이 새 목록을 편찬하여 대중상부의 법보(法寶)로 삼았다. 함평(咸平 송 진종의 연호, 998~1003) 초기에는 운승(雲勝)이 조서를 받고 《장경수함색은(藏經隋函索隱)》6백 60권을 편찬, 임금의 조서까지 끼워 넣고, 당 나라 정원(正元) 연간 이후로 권(卷)의 끝 부분에 붙여진 모든 장경(藏經)을 더 보탠 다음 이를 아울러 모각(摹刻)하게 하였는데, 유안인(劉安仁)이 또 나누어《대종묘각비전(大宗妙覺祕銓)》이라 이름하고, 진종(眞宗)의 《법음집(法音集)》에서 논(論)ㆍ송(頌)ㆍ찬(贊)ㆍ시(詩)만을 뽑아 3권으로 만들어 《법음지요(法音旨要)》라 이름하여, 이를 간행 반포하였다. 천희(天禧 송 진종의 연호, 1017~1021) 말엽에 이르기까지 또 70권을 번역하였는데, 대승경(大乘經)이 3백 34권이고, 대승률(大乘律)이 1권, 대승론(大乘論)이 29권, 소승경(小乘經)이 81권, 소승률(小乘律)이 5권, 서방성현집(西方聖賢集)이 29권이다.” 하였다.
《영녕원윤장기(永寧院輪藏記)》에 “석씨(釋氏)의 서적이 5천 48권인데, 그 조목은 논(論)ㆍ계(戒)ㆍ참(懺)ㆍ찬(贊)ㆍ송(頌)ㆍ명(銘)ㆍ기(記)ㆍ서(序)ㆍ녹(錄)으로, 중들이 만들어 놓은 데서 섞여나온 것이 태반을 차지하고, 경(經)으로 일컬어진 것은 모두 1천여 권이며, 그 가운데서 중들이 외고 읊는 것은 6~7품(品)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호응서(胡應瑞)의 《필총(筆叢)》에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에《불법록(佛法錄)》은 첫째 계율(戒律), 둘째 선정(禪定), 셋째 지혜(智慧), 넷째 의사(疑似), 다섯째 논기(論記)로, 모두 5천 4백 권이고, 4백 59질(帙)이다.’ 했다.”하고, 또 말하기를 “석장(釋藏)은 당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5천 48권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 수천여 권이 증가되었다. 육자연(陸子淵)이 이르기를 ‘지금의 장경(藏經)은 응당 옛날 그 숫자대로가 아니다.’ 하였으니, 아마 그 동안에 더 보탠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서역(西域)의 경목(經目)에 비교한다면, 겨우 천백 분의 1밖에 안 된다. 다만《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는 6천여 권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도리어 그때보다 숫자가 줄었으니, 이것으로 보아 번역된 숫자가 육조(六朝) 시대보다 줄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당(唐)ㆍ송(宋) 때에 이르러서는 선설(禪說)이 우세하고 경전(經典)은 조금 열세를 보였다.” 하였다.
불서(佛書)를 내전(內典)이라 하는 데 대해서는, 송 나라 때의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상고해 보니,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하여 “개성(開成 당 문종(唐文宗)의 연호, 836~840) 2년 2월에 왕언진(王彦進)이 왕명을 받들어 《내전목록(內典目錄)》12권을 만들었다. 내전은 대저 석가의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수백의 나한(羅漢), 그리고 매양 설법을 듣던 자 수천 명이 그 당시 부처가 논설해 놓은 말들을 모두 패다라(貝多羅) 잎에 써서 정리해 둔 것으로, 서로 전해 오면서 경문(經文)이라 이름하였다.” 했다. 이것이 곧 불경(佛經)의 본서(本書)이다.
불교의 시문(詩文)도 각기 이름이 있다. 양자(楊子)의 《치언(巵言)》에 “불시(佛詩)를 게(偈), 불문(佛文)을 별(莂)이라 한다.” 하였고, 유희(劉熙)의 《석명(釋名)》에는 “별(莂)은 별(別)이니 중앙에 큰 글씨를 써서 가운데를 갈라 구별한다는 뜻이다.” 하였으며, 《속설부(續說郛)》에는 포형(包衡)이 말하기를 “불서(佛書)는 1조(條)를 1칙(則)이라 한다.” 하였는데, 홍경로(洪景盧)의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도 이를 인용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불서(佛書)를 1박(縛)이라고 한다.” 하였고, 서계해(徐季海)는 불경(佛經)에 쓰기를 “위로 겹겹이 쌓여서 범협(梵夾 즉 패엽경(貝葉經)을 말함)과 같다.” 하였으며, 양신(楊愼)의 《병탑수환불전(病榻手欥佛典)》에는 “다라수엽(多羅樹葉)에 쓴 글이 모두 2백 40박(縛)이 있다.” 하였으니, 박(縛)은 옛날 견(絹) 자로, 곧 권(卷)과 같다.
불경(佛經)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경장(經藏)이 모두 35부(部)에 5천 48권이다.
《열반경(涅槃經)》1부가 7백 48권인데 또 하나는 4백 권으로 되어 있고, 《보살경(菩薩經)》1부가 1천 21권인데 또 하나는 3백 60권으로 되어있다. 《허공장경(虛空藏經)》1부가 4백 권인데 또 하나는 허공(虛空)을 영허(靈虛)로 하여 20권으로 되어 있고, 《수능엄경(首楞嚴經)》1부가 1백 1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은의경대집(恩意經大集)》1부가 50권인데 또 하나는 40권으로 되어 있고, 《결정경(決定經)》1부가 1백 40권인데 또 하나는 40권으로 되어 있다. 《보장경(寶藏經)》1부가 45권인데 또 하나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화엄경(華嚴經)》1부가 5백 권인데 또 하나는 81권으로 되어 있다. 《예진여경(禮眞如經)》1부가 9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고 《대반야경(大般若經)》1부가 9백 16권인데 또 하나는 6백 권으로 되어 있다. 《대광명경(大光明經)》1부가 3백 권인데 《대광명경》을 또 하나는《대광경(大光經)》으로 하여 30권으로 되어 있고,《미증유경(未曾有經)》1부가 1천 1백 10권인데 또 하나는 5백 30권으로 되어 있으며,《유마경(維摩經)》1부가 1백 7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삼론별경(三論別經)》1부가 2백 70권인데 또 하나는 42권으로 되어 있고, 《금강경(金剛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1권으로 되어 있다. 《정법론경(正法論經)》1부가 1백 20권인데 또 하나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불본행경(佛本行經)》1부가 8백 권인데 또 하나는 1백 16권으로 되어 있다. 《오룡경(五龍經)》1부가 32권인데 또 하나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보살계경(菩薩戒經)》1부가 1백 16권인데 또 하나는 60권으로 되어 있다. 《대집경(大集經)》1부가 1백 30권인데 《대집경》을 또 하나는 《대과경(大果經)》으로 하여 30권으로 되어 있고, 《마갈경(磨竭經)》1부가 3백 30권인데 하나는 《마갈경(磨蝎經)》으로, 또 하나는 《마갈경(磨喝經)》으로 하여 1백 40 권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法華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10권으로 되어 있고, 《유가경(瑜珈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상보경(常寶經)》1부가 2백 60권인데 또 하나는 1백 70권으로 되어 있고, 《서천론경(西天論經)》1부가 1백 3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승기경(僧祇經)》1부가 1백 56권인데 또 하나는 1백 10권으로 되어있고, 《불국잡경(佛國雜經)》1부가 1천 9백 50권인데 또 하나는 1천 6백 38권으로 되어 있다. 《기신론경(起信論經)》1부가 1천 권인데 또 하나는 50권으로 되어 있고, 《대지도경(大智度經)》1부가 1천 80권인데 또 하나는 90권으로 되어 있다. 《보위경(寶威經)》1부가 1천 2백 80권인데 또 하나는 1백 40권으로 되어 있고, 《본합경(本閤經)》1부가 8백 50권인데 또 하나는 본(本)을 금(今)으로 하여 50권으로 되어 있다. 《정률문경(正律文經)》1부가 2백 권인데 또 하나는 10권으로 되어 있고, 《대공작경(大孔雀經)》이 2백 20권인데 또 하나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유식론경(唯識論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10권으로 되어 있고, 《패함론경(貝含論經)》1부가 2백 권인데 또 하나는 《패함론경》을 《견함론경(見含論經)》으로 하여 10권으로 되어 있다.
당(唐) 나라 현장(玄奘)이 서역(西域)에서 삼장(三藏)을 얻어가지고 오다가 물에 빠뜨려 그를 돌 위에 펼쳐 놓고 말렸는데, 책장이 돌에 붙으므로 그것을 떼 내다가 《본행경(本行經)》의 끝장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본행경》의 끝장이 지금까지 온전치 못하다. 그 때 《본행경》을 말리던 돌 위에 글자의 흔적이 그대로 돌에 박혀서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보유(補遺) 및 제가(諸家)의 찬술(纂述)은 다음과 같다.
《유교경(遺敎經)》ㆍ《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ㆍ《살달타경(薩怛陀經)》ㆍ《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ㆍ《패다파력차경(貝多婆力叉經)》ㆍ《준제경(準提經)》ㆍ《심지관경(心地觀經)》ㆍ《보은경(報恩經)》ㆍ《인과경(因果經)》ㆍ《다심경(多心經)》ㆍ《지장본원경(地藏本願經)》ㆍ《전등록(傳燈錄)》ㆍ《염송(拈誦)》ㆍ《십지론(十地論)》ㆍ《화정지(華亭智)》의《불조통기(佛祖統紀)》ㆍ석 행균(釋行均)의 《용감수경(龍龕手鏡)》3권ㆍ원중도(袁中道)의 《선문본초(禪門本草)》ㆍ《금강경구이(金剛經鳩異)》1권ㆍ김인서(金人瑞)의《염불삼매(念佛三昧)》ㆍ석 법현(釋法玄)의 《불국기(佛國記)》ㆍ양현지(揚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ㆍ단성식(段成式)의 《경락사탑기(京洛寺塔記)》ㆍ《미륵전비(彌勒傳碑)》ㆍ《석씨요람(釋氏要覽)》등이다.
우리나라의 보유(補遺)로는, 고려 시대 국사(國師) 의천(義天)이 새로 출간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신라 시대 석 원효(釋元曉)의 《삼매경소(三昧經疏)》, 석 의상(義湘)의 《법계도서추동기(法界圖書錐洞記)》, 원감국사(圓鑑國師)의 《어록(語錄)》, 요세(了世)의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 지눌(知訥)의《결사문(結社文)》ㆍ《상당록(上堂錄)》ㆍ《법어(法語)》ㆍ《가송(歌頌)》,고려 석 혜심(慧諶)의 《심요(心要)》, 혼구(混丘)의 《어록(語錄)》2권ㆍ《가송잡저(歌頌雜著)》2권ㆍ《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2권ㆍ《중편염송사원(重編拈頌事苑)》30권, 견명(見明)의《어록(語錄)》2권ㆍ《게송잡저(偈頌雜著)》ㆍ《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2권ㆍ《조파도(祖派圖)》2권ㆍ《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ㆍ《제승법수(諸乘法數)》7권ㆍ《조정사원(祖庭事苑)》30권ㆍ《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30권, 태고(太古)의 《어록(語錄)》, 원증국사(圓證國師)의 《어록》, 보제존자(普濟尊者)의《어록》, 나옹(懶翁)의 《삼가(三歌)》,《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1권, 일선(一禪)의《자기산보문(仔夔刪補文)》, 득통(得通) 함허당(涵虛堂)의 《현정론(顯正論)》1권ㆍ《원각경소(圓覺經疏)》3권ㆍ《반야경오가설의(般若經五家說誼)》1권, 의천(義天)의 《석원사림(釋苑詞林)》,《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등이 있다.
일본(日本) 중[僧]의 찬술(纂述)을 첨부하면, 유예(酉譽)의 《미타경주기(彌陀經註記)》,《만다라초방대기(曼陀羅抄方大記)》, 지증대사(智證大師)의 《연보(年譜)》, 최징(最澄)의 《법화경주(法華經注)》12권, 《금광명경주(金光明經注)》5권,《인왕경주(仁王經注)》3권,《무량의경주(無量義經注)》3권, 호명(護命)의 《연심장(硏心章)》, 공해(空海)의 《십주심론(十住心論)》, 의진(義眞)의《천태의집(天台義集)》 혜심승도(惠心僧都)의《일승요결(一乘要訣)》ㆍ《왕생요지(往生要旨)》ㆍ《아미타불경소(阿彌陀佛經疏)》ㆍ《대승대구사초(大乘對俱舍抄)》ㆍ《천태종이십칠의문(天台宗二十七疑問)》, 우다제(宇多帝)의 《광석류의(廣釋流義)》, 증현(證賢)의 《귀명본원초(歸命本願抄)》ㆍ《서요초(西要抄)》ㆍ《왕생지요결(往生至要訣)》,원명(圓明)의 《관경소기(觀經疏記)》10권, 응연법사(凝然法師)의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ㆍ《정토원류장(淨土源流章)》등이 있다.
【석각(石刻) 불경(佛經)】서장(西藏)의 석애산(石崖山)에 범서(梵書)로 된 대비주(大悲呪) 1편(篇)이 있는데, 청(淸) 나라 죽타(竹垞) 주이준(朱彝尊)의 석각불경기(石刻佛經記)에 “태원현(太原縣)의 서쪽 5리에 풍욕산(風峪山)이 있는데, 풍욕산 입구에는 풍혈(風穴 땅속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 구멍)이 있다. 서로 전하기를 ‘신(神)이 이르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면서 구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는 바람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다. 어떤 사람이 흙으로 그 구멍을 막고 그 안에 석불(石佛)을 세우고 또 석주(石柱)에 불경을 새겨서 빙둘러 세웠는데 그 석주가 모두 1백 26개나 된다. 그 후에 오랜 세월이 흘러 뱀 같은 것들이 그 안에 서식하므로, 아무리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병오년 3월에 내가 그 지방 사람을 대동, 횃불을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 그 서법(書法)을 자세히 살펴보니, 근대의 서법으로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주마다 3면(面)이 가려져서 그 전부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당대(唐代) 이전에는 서책(書冊)을 옮겨 필사하는 것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가죽이나 대, 또는 부들을 잘라 엮어서 필사하는 데 사용하였고, 불경도 산화(山花)나 패엽(貝葉)을 엮어 모아 책을 만들었으므로, 이 때문에 학자들이 평생토록 필사해 보았자 그 백분의 1도 다 써 모으지 못하였으니, 어려운 일이다. 석경(石經)은 채옹(蔡邕)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지러져 없어진 것이 많았다. 당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정담(鄭覃)ㆍ주지(周墀)가 다시 경조(京兆)에 새겼고, 후당(後唐) 장흥(長興 명종(明宗)의 연호, 930~933) 연간에는 다시 베껴 써서 이를 출간(出刊)하였다. 아주 어려운 방법을 버리고 아주 쉬운 방법을 선택한 이후부터 서적(書籍)이 날로 성하여졌으나 세상 학자들은 그 쉬운 점에 의한 경홀한 마음이 생겨 혹은 묶어만 놓고 보지 않으니 어찌 되겠는가. 이 어찌 날로 성해진다는 것이 도리어 날로 쇠해진 격이 아니겠는가.
북조(北朝) 시대 군신(君臣)들은 석씨(釋氏)를 숭봉하기 때문에 석각한 불경과 불상이 어느 곳에도 많이 있다. 태원(太原)에 사는 나의 친구 부산(傅山)이 평정현(平定縣)의 산중(山中)에 들어갔다가 잘못 벼랑길에 빠져들어, 어느 동굴 입구에서 석경(石經)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나 풍욕산에 있는 것 모두가 북제(北齊) 천보(天保 문선제(文宣帝)의 연호, 550~559) 연간의 글자였으며, 방산석경(房山石經)은 수(隋) 나라 때부터 새겨진 것인데, 그 서법이 매우 다양하다.
지금 불궁(佛宮)에 있는 승도들이 작은 데는 백 명, 많은 데는 무려 수천 명이나 되지만, 불법의 요지를 통달한 자는 모두가 언어와 문자를 쓸데없는 것이라 하여, 불경을 강설하는 자도 이따금 차치해 버리고 탐탁잖게 여긴다. 아, 불설(佛說)이 비록 성인(聖人)의 말에는 어긋나지만, 모두가 그 나라 선생 장자(先生長者)의 말이다. 기왕 그 법을 쓰면서 그 선생 장자의 말을 죄다 버린다면 과연 어찌 되겠는가? 구경(九經)의 글은 서안부(西安府)의 학궁(學宮)에 있는데, 유자(儒者)들이 비록 다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를 얻어본 자는 다 아낄 줄을 안다. 그런데 풍욕산(風峪山)에 소장되어 있는 불경의 경우는, 승도들이 그렇게 많아도 누구 하나 돌아보는 자도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불도의 쇠미해진 것이 우리 유도(儒道)의 쇠미해진 것보다 더 심하지 않는가. 부산(傅山)이 내 말을 듣고, 그렇다고 하기에 이렇게 써서 기(記)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정조(正祖) 20년(병진)에 《은중경(恩重經)》을 옥석(玉石)에 새기라 명하였고, 또 어필(御筆)을 화성(華城)의 용주사(龍珠寺)에 소장하였는데, 이는 대개 현륭원(顯隆園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가리킨다)의 원찰(願刹)이기 때문이었다.
【전서(篆書) 불경(佛經)】 왕오(王鏊)의 《진택장어(震澤長語)》에 “송(宋) 나라 영은사(靈隱寺)의 중 막암도(莫菴道)가 전서 모으기를 좋아하여 《금강경(金剛經)》이 여러 체의 전서로 갖추어졌다. 이것이 꼭 다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변모되어 온 역대의 서법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패엽경(貝葉經)】 돈원거사(遯園居士 청(淸) 나라 장조(章詔)의 호)의 《제사기물기(諸寺奇物記)》에 “보광사(寶光寺)에 서역에서 가져온 패다파력차경(貝多婆力叉經)이 있는데, 패엽의 길이는 6~7촌(寸)쯤 되고 넓이는 그 절반이나 되고 잎사귀의 질은 마치 섬세한 어린 싹의 죽순(竹筍) 껍질과 같으며, 부드럽고 반지르르한 것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다. 불전(佛典)에 이르기를 ‘패다수(貝多樹)는 마가타국(摩伽陀國)에서 나는데, 크기는 6~7장(丈)이고 추운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으며 그 잎은 글자를 쓸 수 있다. 패다파력차는 번역하면 엽수(葉樹)이다. 경(經)의 글자는 크기가 마치 붉은 팥알만하고 횡서(橫書)로 쓰인 글씨는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 모양과 같은데, 무슨 경인지 알 수 없다. 겉에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꼭 끼워 놓았는데, 그 나무는 삼나무[杉] 같아서 무늬가 조밀 섬세하여 사랑스럽다.’ 했다.” 하였다.
또 《제사기물기》에 “이 패엽경은 6~7 백 년 동안을 지탱할 수 있다.” 했다.
우리나라 경기도(京畿道) 장단부(長湍府) 보봉산(寶鳳山)의 화장사(華藏寺)에 패엽경이 있는데, 고려(高麗)의 중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서역의 중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가서 사사(師事)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경이다. 이 경의 길이는 포척(布尺)으로 반 자쯤 되고 너비는 4촌(寸)쯤 되는데, 그 빛깔은 희고 무늬와 결은 마치 자작나무 껍질과 같으며 두께도 그와 같다. 한 잎에 6~7행(行)씩 범자(梵字)가 쓰여졌고 세자(細字)가 쓰여진 것까지 합하면 모두 천여 잎이나 되는데, 위아래 두 군데에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맸으며, 겉에는 양쪽으로 나무 조각을 대어 꼭 끼워 놓았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패다료게(貝多寮偈)에 상고해 보면 “패다는 천축(天竺)의 나무 이름이다. 그 정어(正語)로 다라(多羅)라 하는데, 이것이 곧 안수(岸樹)이다. 높이는 49척이고 녹음[蔭藹] 또한 그와 같으며, 잎의 너비와 길이는 마치 불설(佛舌)과 같고 빛이 윤택하여 물체가 비칠 정도여서, 금서(金書)ㆍ은서(銀書)ㆍ칠서(漆書) 등을 쓰기에 알맞다. 모든 아난총지(阿難總指)의 글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이 유사천(流沙川)의 상류(上流)에 있는데, 이 산에 다라수(多羅樹)가 많이 난다.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수국(隨國)에서 생산된 화피(樺皮)ㆍ패엽지(貝葉紙)ㆍ소백첩(素白氎)에 이 주문(呪文)을 썼다.” 하였고,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략소주(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注)》에 “불이(佛耳)가 마치 말린[捲] 화피와 같다.” 하였으니, 화피는 천축에도 생산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북관(北關) 막바지에 이 나무가 많이 있는데, 그 속껍질이 희고 깨끗해서 글씨를 쓸 만하다.
【불경(佛經)의 절운훈고(切韻訓詁)인 《용감수경(龍龕水鏡)》】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유주(幽州)의 중 행균(行均)이 불서(佛書) 중의 글자를 모아 절운훈고를 만드니, 모두 16만 자였다. 이를 4권으로 나누어 《용감수경》이라 호칭하였는데, 연(燕)의 중 지광(智光)이 여기에 서(序)를 썼다.” 하였고, 조씨(晁氏 송(宋) 나라 조 공무(晁公武)를 가리킴)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 “《용감수경》 3권은 거란(契丹)의 중 행균이 찬하였는데, 모두 2만 6천 4백 30자에 주석이 16만 3천 1백여 자이다.” 하였다.
【범아(梵雅)】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안구(安丘)에 사는 예부(禮部) 마응룡(馬應龍)이 《범아》 12권을 찬하였는데, 제1은 석언(釋言), 제2는 석의(釋義), 제3은 석상(釋相), 제4는 석교(釋敎), 제5는 석불(釋佛), 제6은 석보살(釋菩薩), 제7은 석성문(釋聲聞), 제8은 석외도(釋外道), 제9는 석인륜(釋人倫), 제10은 석천문(釋天文), 제11은 석지리(釋地理), 제12는 석조수(釋鳥獸)이다.” 하였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또한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는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신라(新羅) 시대 고찰(古刹)이다. 경판(經板)은 해인사 보안당(普眼堂) 남쪽과 북쪽 두 각(閣)에 저장되어 있는데, 모두 15칸[間]에다 옆이 3칸으로 도합 90칸이다. 한가운데 3층으로 시렁을 설치하고는 경판을 가득 꽂아 놓았는데, 경판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반이고 너비는 주척으로 2척이며, 변격(邊格)만 있고 오사란(烏絲欄)은 없다. 12항(行)에 항마다 14자(字)인데 글자의 크기는 마치 바둑알만하고, 글씨는 매우 해정하나 별로 취할 만한 것은 없다. 경판은 모두 옻칠을 하였는데 별로 윤이 나지 않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銅]를 얇게 올려 장정(裝釘)하였다.
《고적지(古籍志)》에 상고해 보면 “신라 경장왕(景莊王) 때에 합천(陜川)의 이서(里胥 촌락의 하급관리)인 이거인(李居人)이 명부(冥府 저승)에 들어가 삼목인(三目人)을 만나 염왕(閻王)에게 발원(發願)하고 이승[陽界]에 돌아와 왕에게 고하여, 왕의 명으로 거제도(巨濟島)에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판각하여 해인사에 옮겨 저장했다.”고 하였으나 그 설이 황당무계하여 믿기가 어렵다.
《경목(經目)》 3권이 있는데 천(天) 자에서 시작하여 동(洞) 자에 이르렀고, 각 함(函)은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婆羅密多經)》 6백 권에서부터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1백 권까지인데, 모두 1천 5백 63부(部)에 6천 5백 29권이며, 인지(印紙)가 7천 7백 28첩(牒)인데, 첩마다 두 장(張)씩이다. 이 밖에도 베껴 쓴 것이 있다.
우리나라 세조(世祖) 때에 《절목(節目)》 1책을 탑인(搨印)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천순(天順 영종(英宗)의 연호, 1457~1463) 2년(무인)에 대장경 인쇄할 계획을 세웠다가 천순 3년(기묘) 2월에 비로소 일에 착수(着手)하여 그해 9월에 준공(竣工)하였는데, 계양군(桂陽君) 증(璔)ㆍ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 등이 감동관(監董官)이 되고, 판선종사(判禪宗事) 수미(守眉)ㆍ해인사(海印寺)의 주지(住持) 죽헌(竹軒)이 감무관(監務官)이 되어 정작 38만 5천 8백 95첩(貼)의 인지(印紙)를 들여서 대장경 50건(件)을 인쇄하여 그 중 47건을 다음과 같이 각 사찰(寺刹)에 나누어 저장하였다. 합천 해인사에 2건, 고령(高靈) 반룡사(盤龍寺)에 4건, 진주(晉州) 백암사(白巖寺)에 1건, 오대사(五臺寺)에 1건, 칠불사(七佛寺)에 1건, 응석사(凝石寺)에 1건, 성주(星州) 용연사(龍淵寺)에 1건, 안봉사(安峯寺)에 1건, 영산(靈山) 보림사(普林寺)에 1건, 밀양(密陽) 재악사(載岳寺)에 1건, 안동(安東) 백련사(白蓮寺)에 1건,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 1건, 중방사(中方寺)에 1건, 대둔사(大芚寺)에 1건, 경주(慶州) 천룡사(天龍寺)에 1건, 불국사(佛國寺)에 1건, 함양(咸陽) 군자사(君子寺)에 1건, 의령(宜寧) 보리사(菩提寺)에 1건, 영천(永川) 거조사(居祖寺)에 1건, 정각사(鼎脚寺)에 1건, 상주(尙州) 관음사(觀音寺)에 1건,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 1건, 지평(砥平) 상원사(上元寺)에 1건,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1건, 강진(康津) 만덕사(萬德寺)에 1건, 영암(靈巖) 도갑사(道岬寺)에 1건, 능성(綾城) 쌍봉사(雙峯寺)에 1건, 장흥(長興) 성불사(成佛寺)에 1건,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에 1건, 무장(茂長) 참당사(懺堂寺)에 1건, 남원(南原) 승련사(勝蓮寺)에 1건,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에 1건, 진원(珍原) 하청사(下淸寺)에 1건, 태인(泰仁) 운주사(雲住寺)에 1건, 무안(務安) 법천사(法泉寺)에 1건, 광주(光州) 징심사(澄心寺)에 1건, 담양(潭陽) 용천사(龍泉寺)에 1건, 보은(報恩) 복천사(福泉寺)에 1건, 옥천(沃川) 지륵사(地勒寺)에 1건,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에 1건으로, 모두 50건 내에 47건이 이상과 같이 각 사찰에 저장되었고, 나머지 특수 인쇄한 3건은 해인사에 1본, 흥천사(興天寺)에 1본, 예조(禮曹)에 1본씩 각기 보관되었다.
누판기(鏤版記)에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무신년(戊申年)에 고려국 대장도감(高麗國大藏都監)이 칙명을 받들고 판각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탑인(搨印)한 그 책의 경권(經卷) 아쪽에, 하나는 “계묘세(癸卯歲)에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고 판각했다.”고 새기고, 또 하나는 “갑진세(甲辰歲)에 판각했다.”고 새겼는데, 고지(古志)에는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판각했다.”고 하였다. 애장왕은 당 덕종(唐德宗) 16년(경진)에 즉위하여 10년 만인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806~820) 4년(기축)에 헌덕왕(憲德王)에게 시해되었으니, 그가 재위한 기간에는 아예 정묘년이 없다. 고려를 통틀어 계묘년이 여덟 번, 갑진년이 여덟 번이고 보면, 이는 아마도 고려 시대에 주조한 것인 듯하다.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에 “무신년에 판각했다.”고 하였으니, 고려조의 정종(定宗) 3년, 목종(穆宗) 11년, 문종(文宗) 22년, 인종(仁宗) 6년, 명종(明宗) 18년, 고종(高宗) 35년, 충렬왕(忠烈王) 30년, 공민왕(恭愍王) 7년이 다 무신년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맨 처음 판각한 것으로 본다. 《고려사(高麗史)》의 종실전(宗室傳)을 상고하건대, 대각국사는 곧 문종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인데, 송 철종(宋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 행세하였다. 국사가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고는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비로소 화엄(華嚴)을 닦아 오교(五敎)를 통달하였다. 선종(宣宗) 2년(을축)은 곧 송 신종(宋神宗)의 원풍(元豐 1078~1085) 8년인데, 이해에 의천이 사사로이 제자 2명과 함께 송 나라 상인(商人)인 임영(林寧)의 배를 몰래 타고 송 나라에 들어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얻어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고, 또 주청하여 흥왕사(興王寺)에다 교장도감(敎藏都監 고려 때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의천이 설치한 관청)을 설치하고는 요(遼)ㆍ송(宋) 등지에서 무려 4천 권에 이르는 많은 서적을 구입해다가 모두 간행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본부를 두고 있다가, 이윽고 남쪽으로 내려가 명산(名山)을 두루 편람한 다음 해인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는 사자를 보내어 그를 맞아다가 흥왕사의 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왕고(王考) 청장관선생(靑莊館先生)이 찬한 《앙엽기(盎葉記)》에 “의천(義天)은 곧 선(宣宗)ㆍ숙종(肅宗)의 아우이다. 선종 2년(을축)은 곧 송 신종(宋神宗) 원풍(元豐) 8년이요, 요 도종(遼道宗) 대안(大安 1085~1094) 원년이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경판(經版)에 대해, 고지(古志)에는 이르기를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판각했다.’ 하였으나, 애장왕이 재위한 10년 동안에는 아예 정묘년이 있지 않으니, 이는 아마 고려 선종 4년(정묘)에 의천이 판각한 경판을 애장왕 정묘년에 판각한 것이라고 와전된 것이다. 의천이 이미 해인사에 물러와 거주하였으니, 이 절 안에 경판을 저장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내가 해인사에 가 놀면서, 시험삼아 세조(世祖)가 탑인한 경권(經卷) 두 책의 아래쪽을 살펴보니, 하나는 ‘계묘세에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했다.’고 새겼고, 또 하나는 ‘갑진세에 판각했다.’고 새겼으며, 또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에는 ‘무신년에 고려국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했다.’ 하였다. 의천이 간행한 것은 모두 5천여 권인데, 지금 소장되어 있는 원수(元數)는 6천 5백 29권으로, 그 수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은 계묘년 이후로 해마다 보각(補刻)하였기 때문이니, 의천이 판각하지 못했던 것은 1천 5백여 권이다.” 하였다.
경판의 변격(邊格)에 다 글자를 새겼는데 천자문(千字文)으로만 하였고, 어느 경, 어느 권, 어느 장에는 가끔 보충해 넣은 것이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조선조에서 보충 판각한 것이다. 대개 중국 급고각(汲古閣)의 서적과 서로 비견할 수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충조(虫鳥)가 거기에 서식하지 못하고 먼지도 쌓이지 않는다고 하나, 모두 거짓말이다.
해인사의 경을 담은 궤(櫃)는 무설전(無說殿)에 저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4년은 곧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1736~1795) 5년(경자)이다. 이해 정월 8일에 이 무설전에 불이 나 경을 담은 궤가 불타버렸고 다른 절에 저장된 것도 누차 병화(兵火)를 겪었으므로, 혹시라도 남아 전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효종(孝宗) 10년(기해)에 해인사 법당(法堂) 삼불상전(三佛像殿) 안의 불상 밑에 도금(鍍金)된 석탑(石榻) 2좌(座)와 대장경 경판의 제3행(行) 일대가 그해 정월에 땀을 뻘뻘 흘렸다고 하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나에게도, 대장경 조각이 고려조의 조각임을 증거할 만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상고하건대, 주이준(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에서 《설루집(雪樓集)》에, 경수사(慶壽寺)에 대장경을 시주한 데 대해 쓴 정거부(程鉅夫)의 비문(碑文)을 인용하여 “서방(西方)의 성인(聖人)은 허공(虛空)으로 본(本)을 삼고 적멸(寂滅)로 종(宗)을 삼았는데, 그의 서적은 무려 5천 48권에 이른다. 후세에 그 서적을 존중하여 대보장(大寶藏)을 세워 저장하고는 이름을 대장경이라 하였다. 동남쪽 바닷가의 나라인 고구려는 예부터 시서 예의(詩書禮義)의 나라로 칭하던 곳으로, 불도를 신봉함이 더욱 성실하였는데, 원(元)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그들이 순조로이 내부(來附)하므로, 세조 황제(世祖皇帝)가 그들을 은혜로 감싸주고 예로 대우하여, 부자(父子)가 왕위(王位)를 이어가게 하고 아울러 외생(外甥 사위)의 서열에 있게 하였다. 지금의 왕은 또 총명하고 충효(忠孝)가 돈독하여 황제와 황태후(皇太后)의 깊은 총애를 받아오다가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7~1307) 을사년에는 대장경 1부를 경수사에 시주하고는 그 공덕(功德)을 상(上)에게 돌렸는데, 이 경수사는 역대 황제들의 복을 비는 곳이 되었다. 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 ” 하였다.
이로 본다면, 대덕 을사년은 원 성종(元成宗) 9년이요 고려 충렬왕(忠烈王) 31년으로, 이해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를 갔는데, 이때에 대장경을 가지고 가서 경수사에 시주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고려에서 대장경을 판각했다는 명증이 아니겠는가.
또 상고하건대, 정족산성(鼎足山城)은 경기도(京畿道) 강화부(江華府) 삼랑산(三郞山) 위에 있고 이 성 안에 전등사(傳燈寺)가 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기에 실록(實錄)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사고(史庫)가 있다. 고려 충렬왕의 비(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중 인기(印奇)를 시켜 배를 타고 송(宋) 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간행해다가 절에 저장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때에 아직 대장경을 판각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다. 충렬왕은 송 도종(宋度宗) 함순(咸淳 1265~1274) 10년(갑술)에 즉위하였으니, 이때가 곧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264~1294) 11년이다. 그때는 고려가 송 나라와는 국교가 단절되었고 벌써 원 나라에 귀순하여 신하 노릇을 해온 지가 오래이다. 그런데 어찌 배를 타고 송 나라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구해다가 절에 시주했단 말인가. 이 또한 본국에서 새로 탑인하여 시주한 대장경을 중이 잘못 송 나라에서 구입했다고 한 것이다.
이 밖에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인조(仁祖) 15년은 곧 명 의종(明毅宗) 숭정(崇禎 1628~1644) 10년(정축)이다. 이 해 가을 서호(西湖)에 표박(漂泊)하는 배가 한 척 있었는데, 배 안에 사람은 없고 대장경 함(函)만 실려 있었고 그 위에는 ‘중원 개원사 개간(中原開元寺開刊)’이라 쓰여 있었다. 그래서 서호 사람들이 이를 비국(備局)에 바쳐 상(上)께 진달하자, 상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찰 중에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 있으면 이를 그 절에 주어서 영원토록 잘 간직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8도(道) 중에 개원사로 이름한 절은 한 절뿐이었는데, 그 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기 때문에 별도로 사자를 보내어 그 함(函)을 저장하게 하였다. 그 사적이 《남한지(南漢志)》에 나타나 있고 또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의 사실이고 보면 이것이 응당 유실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팔만대장경이라 칭하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팔만 사천(八萬四千)이라 칭하는데, 이는 마치 대계(大戒)가 8만 4천여 조(條)로 되어 있는 것과 같으니, 이는 큰 숫자만을 들어서 말한 것이요 경권(經卷)이 8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왕고(王考)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3천여 권만을 간행하고 종이가 없어서 그만 두었으며,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이를 다시 간행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했다.” 하였다.

불사(佛史)

원(元) 나라 중 화정지(華亭智)의 《불조통재(佛祖統載)》와 《불조통기(佛祖統紀)》가 있는데, 불조에 대해서는 불가에 또 달리 사책(史策)이 있다.

불상(佛像)

불교를 받드는 자는 부처를 끝없이 존숭하여 불상을 설치해 놓고 공양하는 일이 있는데, 그 유래를 어찌 변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본(日本) 양안상순(良顔尙順)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서역(西域) 천축(天竺)의 마가타국(摩伽陀國)에 있는 수달장자(須達長者)의 장원(莊院)에서 7리(里)쯤 가면, 석가당(釋伽堂) 세 채가 있으니, 바로 석가(釋迦)의 입상(立像)ㆍ좌상(座像)ㆍ와상(臥像)이 봉안되었다. 석가당에 봉안된 불상(佛像)은 굴천대산세존(掘穿大山世尊)이 직접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석가당 앞에는 민가(民家)가 세 거리[三街]로 연이어 있으며, 석가당의 길이는 각기 2리(里)씩이고 세 당의 전체 길이는 6리 반쯤 된다. 높이는 2리 남짓하며, 기둥[柱]의 경(徑)은 1백60 사이[間]이고 둘레는 5백 사이이다. 불지(佛指)의 크기는 3사이이다. 그 불상은 본디 토석(土石)으로 만들었었는데, 참배하는 사람들이 금박(金箔)을 입혀 그대로 수천 년을 지내 왔기 때문에 그만 금상(金像)이 되어 버렸다. 영취산(靈鷲山) 높이는 1리이고 유사천(流沙川)의 상류에 있다. 에 좌선석(座禪石)이 있는데, 그 바위의 높이가 32정(町)으로 유사천의 상류에 우뚝 솟아 있으니, 매우 기이한 돌이다. 그 위에 좌선당(座禪堂)이 있고 석가상(釋迦像) 1구(軀)가 안치되어 있다.” 이 산에는 다라수(多羅樹)가 많이 있는데, 옛날 이 나무 잎에 글씨를 썼다. 하였다. 이것이 불상의 시초이다.
불상이 맨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마련했던 금인(金人)이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 “곽거병(霍去病)이 농서(隴西)를 떠나 언지산(焉支山) 천여 리를 지나다가,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금인을 얻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금인을 만들어 천신(天神)의 주(主)로 삼고 제사를 지낸 것이니, 불상이 곧 그 유법(遺法)이다.” 하였다.
한 무제(漢武帝)는 감천(甘泉)에 사당을 세워 금인을 안치하고는 ‘경로신사(徑路神祠)’라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불상과 근사하기 때문에 《진사(晉史)》ㆍ《수사(隋史)》에서 이를 근거로 삼았다.
《설루집(雪樓集)》에 “석가여래는 정반왕의 태자로 갑인년 4월 8일에 태어났는데, 이 해가 주 소왕(周昭王) 24년이다. 그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그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은 도리천(忉利天)에 왕생(往生)하였다. 소왕 42년(임신)에 그는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 수도하여 주 목왕(周穆王) 3년(계미)에 성도(成道)하고, 8년(신묘)에는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도리천에 올라가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였다. 우전왕(優塡王)은 그를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자 전단(旃檀)으로 불상을 만들었는데, 목건련(目犍連)은 불상에 미비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몸소 장인(匠人) 32명을 데리고 도리천에 올라가 석가의 상을 자세히 살펴보기를 세 번이나 거듭한 뒤에야 그 진상을 만들 수 있었다. 불상이 이루어지자 국왕(國王)과 신민(臣民)이 불상 받들기를 마치 부처 받들 듯 하였다. 이 해에 부처가 도리천에서 다시 세상에 내려오자, 이 불상이 몸소 부처를 맞아 머리를 조아리며 뵈었다. 이에 부처가 불상의 이마를 만지면 기(記)를 주었는데, 그 기에 ‘내가 멸도(滅度)한 지 천 년 후에는 네가 진단(震旦 중국을 말한다)에 가서 인천(人天)을 널리 제도하라.’ 했다.” 하였다.
이로부터 불상은 서역에서 1천 2백 85년 간 있다가 구자(龜玆)에서 68년, 양주(涼州)에서 14년, 장안(長安)에서 17년, 강남(江南)에서 1백 73년, 회남(淮南)에서 3백 67년, 다시 강남에 이르러 21년, 변량(汴梁)에서 1백 77년, 북쪽으로 연경(燕京)에 이르러 지금의 성안사(聖安寺)에서 12년, 그리고 북쪽으로 상경(上京)의 대저경사(大儲慶寺)에 이르러 20년을 있었고, 남쪽으로 연궁(燕宮)의 내전(內殿)으로 가서 있은 지 54년 만인 대원(大元) 정축년 3월에 연궁에 불이 나자, 상서(尙書) 석말공(石抹公)이 다시 성안사에 맞아 여기서 59년 동안 있었다. 세조(世祖) 지원(至元) 12년에는 대신(大臣) 패라(孛羅) 등을 보내 맞아다가 만수산(萬壽山) 인지전(仁智殿)에 봉안했으며, 정축년에는 대성수만안사(大聖壽萬安寺)를 창건하고 기축년에는 인지전으로부터 만안사의 후전(後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는데, 원정(元貞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5~1297) 원년에는 성종(成宗)이 친히 나가 공양하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우전왕(優塡王)이 불상을 만든 때로부터 지금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1314~1320) 3년(병진)까지의 연대를 계산해 보면 2천 3백 7년 간이다.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 “인지전으로부터 만안사의 후전에 옮겨 봉안했다가 백 40여 년 만에 경수사(慶壽寺)에 봉안하였고,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17년에 이르러 경수사에 봉안된 지 백 20여 년 만에 경수사의 화재(火災)로 인하여 상(上)에게 표(表)를 올려 취봉사(鷲峯寺)에 옮겨 봉안하였는데, 지금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573~1620) 25년에 이르기까지 58년 동안 봉안되었으니, 우전왕이 불상을 만든 해, 즉 주 목왕(周穆王) 12년(신묘)으로부터 지금 만력 25년(정유)에 이르기까지를 계산해 보면 모두 2천 5백 80여 년이다.” 하였다.
【금상(金像)】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 “우전왕(優塡王)이 일찍이 교장(巧匠)들을 동원하여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불상을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공양 예배하였다. 이때에 파사국왕(波斯國王)도 교장들을 모아 ‘여래(如來)의 상은 마땅히 진금(眞金)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곧 자마황금(紫磨黃金)으로 여래의 상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 또한 5척(尺) 남짓하였다. 이때부터 염부제(閻浮提)에 비로소 불상 2좌(座)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수다라요의경주(修多羅了義經注)》에 “여래(如來)의 눈은 마치 포도 송이와 같고 귀는 화피(樺皮)를 말아 놓은 것과 같고 코는 쌍조갑(雙爪甲)과 같고 혀는 언월도(偃月刀 칼의 한 가지. 마치 초생달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름)와 같고 몸은 보주(寶珠)처럼 빛이 난다.”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에 “묘장엄왕(妙莊嚴王)이 말하기를 ‘여래의 입술 빛깔은 붉고 선명하기가 마치 빈바과(蘋婆果)와 같다.’ 했다.” 하였고, 《수능엄경(首楞嚴經)》에는 “도라면(兜羅綿)의 빛이 마치 서리빛과 같은데, 유연(柔軟)한 부처의 손도 그와 같다.” 하였으며, 《남사(南史)》에는 “부처의 머리털은 푸르고 가늘어서 마치 우사(藕絲 연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섬유(纖維))와 같다.” 하였고, 《남사》 부남국전(扶南國傳)에는 “부처의 머리털은 1장(丈) 2척(尺)인데 청감색(靑紺色)이다.” 하였으며, 유경승(劉景升)은 이르기를 “월지국(月支國)에는 부처의 머리털을 유리(琉璃) 항아리에 담아 놓았다.” 하였다.
【중원(中原) 불상(佛像)】 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에 “불상이 본래의 것은 속되고 소박하여 사람들로부터 공경심을 자아내지 못하였는데, 잘 조각된 지금의 불상은 대옹(戴顒)에게서 비롯되었다. 대옹이 일찍이 불상 하나를 조각하면서 이를 장중(帳中)에 감추어 두고는, 어떻게 하면 좋고 어떻게 하면 나쁘다는 남들의 평을 들어서 그대로 고쳤는데, 그 작업을 10여 년 동안 계속하여 완성시켰다. 화백(畫伯)인 진(晉) 나라 대규(戴逵)가 불상을 주조 또는 조각을 잘 했는데, 이가 곧 대옹의 아버지이다. 수(隋) 나라 위지발질나(尉遲發質那)가 불상을 잘 조각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을공(乙恭) 역시 불상을 잘 조각하였고, 당(唐) 나라 양혜지(楊惠之)는 소상(塑像)을 잘 만들었다.” 하였다.
《원사(元史)》 방기전(方技傳)에 “유원(劉元)이 일찍이 아니가니(阿尼哥尼)를 사사(師事)하여 서역(西域)의 범상(梵像)을 배웠는데, 절묘(絶妙)한 기예(技藝)의 소유자로 일컬어졌다.” 하였고, 《철경록(輟耕錄)》에는 “유원이 일찍이 도사(道士)가 되어, 소상(塑像)을 만드는 데 뛰어나서 천하에 누구든 그와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솜씨 가운데 박환(搏換)이라는 것이 있는데, 토우(土偶) 위에다 비단을 덮고 그 위에 칠을 입힌 지 조금 뒤에 그 토우를 빼어 버리면 그 칠 입힌 비단이 곧 불상으로 된다. 그의 관직은 태학사(太學士)였다.” 하였다.
【대불상(大佛像)】 여기는 중국과 우리나라 및 외국(外國)에 있는 대단히 큰 불상들을 기록하였다. 불상에 대해 청(淸) 나라 죽타(竹坨) 주이준(朱彝尊)의 제가산사벽(題柯山寺壁 가산사의 벽에 제함)에 “부처가 서역에서 탄생하였는데, 물론 다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무리가 한 명제(漢明帝)의 꿈에 장륙금인(丈六金人)으로 나타남으로 인해, 드디어 장륙불신(丈六佛身)이라 하여 《본행경(本行經)》 및 《아육왕전(阿育王傳)》에 넣었는데, 가산사(柯山寺)의 석상(石像) 같은 경우는 또 그보다 배나 길다. 이것이 곧 성교서(聖敎序)에서 말한 사팔상(四八相)이다. 대개 불교가 동방(東方)에 들어옴으로부터 승려(僧侶)들이 사람의 이목(耳目)을 현혹시키기에만 전념하여 산(山)의 골수(骨髓)를 다투어 깎아 못쓰게 만들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높이가 3장(丈)이 되는 석상(石像)은 의주(宜州) 북산사(北山寺)의 것이고, 좌구(坐軀)가 5장이고 입형(立形)이 10장이나 되는 것은 신창(新昌) 석성사(石城寺)의 것이고, 병주(幷州) 동자사(童子寺)의 경우는 높이가 1백 70척이고, 북곡(北谷) 개화사(開化寺)의 것은 높이가 2백 척이고, 한가(漢嘉)에 있는 석상은 1천 척이고, 여양(黎陽)에 있는 것은 또 그보다 더 크다. 이보다도 더 괴이한 설이 있다. 범협(梵夾)에서는 이를 근거로 더욱 견강부회하여 일컫기를 ‘비바시불(毗婆尸佛)은 키가 60유순(由旬)의 거리만큼 크고 시기불(尸棄佛)은 키가 40유순의 거리이며, 비사바불(毗舍婆佛)은 키가 32유순의 거리이고, 구류손불(拘留孫佛)과 구나사모니불(拘那舍牟尼佛)은 모두 키가 25유순의 거리이며, 가섭(迦葉)은 키가 16장이었다.’ 하였다. 그러나 군자(君子)를 그럴싸한 방법으로는 속일 수 있지만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이어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가정부(嘉定府)의 대불산(大佛山)에 있는 불상의 높이는 47장이고 너비는 15척이고 누각(樓閣)은 10층이며, 사천(四川) 가정부(嘉定府)의 구정산(九頂山)에는 산을 깎아 미륵대상(彌勒大像)을 만든 바, 높이가 3백 30척으로 대층각(大層閣)을 세워 복개하였는데, 이는 위고(韋 皐) 때에 이르러 15년 동안의 공사 끝에 완성된 것이다.
일본(日本) 양안상순(良顔尙順)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천비야태이(天比夜太伊) 수달장자(須達長者)의 장원(莊院)에서 7리(里)쯤 가면 석가당(釋迦堂) 세 채가 있으니, 여기에는 바로 본존불(本尊佛)의 입상(立像)ㆍ좌상(座像)ㆍ와상(臥像)이 봉안되었다. 그 당에 봉안된 불상은 굴천대산세존(掘穿大山世尊)이 직접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당 앞에는 민가(民家)가 세 거리[三街]로 연이어 있으며, 당의 길이는 각기 2리이고 세 당의 전체 길이는 6리 반쯤 된다. 높이는 2리 남짓하며 기둥[柱]의 경(徑)은 1백 60사이[間]이고 둘레는 5백 사이이다. 불지(佛指)의 크기는 3사이[間]이다. 그 불상을 본래는 토석(土石)으로 만들었었는데, 참배하는 사람들이 금박(金箔)을 입혀 그대로 수천 년을 지내왔기 때문에 그만 금상(金像)이 되어버렸다.” 하였으니, 그 크기를 알 만하다. 이것이 서역(西域) 천축(天竺)의 본상(本像)이다.
일본 대화국(日本大和國) 대사(大寺)에 있는 큰 불상은, 높이가 5장 3척 5촌이고 면(面)의 길이가 1장 6척이고 너비가 9척 5촌이고 눈썹이 5척 4촌 5푼이고 눈 길이가 3척 9촌이나 된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호서(湖西) 은진현(恩津縣) 반야산(般若山)의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석미륵(石彌勒)은 높이가 54척이요, 호남(湖南) 금구현(金溝縣) 금산사(金山寺)의 미륵전(彌勒殿)에 있는 금불입상(金佛立像) 3구(軀)는 5~6장씩이나 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불상들이다.
이상의 여러 불상들이 비록 크다고는 하지만,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외기(坤輿外記)》에서 말한 것과 비교하면 거리가 멀다. 《곤여외기》에 “서아가아성(西亞嘉亞省)에는 목성(木星)에게 공양하기 위해 돌로 만든 인형(人形)이 대단히 크고, 대서양(大西洋) 낙덕해도(樂德海島)의 해구(海口)에 있는 동인입상(銅人立像)은 높이가 몇 유순(由旬)의 거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한 손에는 활을 쥐고 또 한 손에는 등(燈)을 잡고 있다. 가장 큰 배[舶]가 그 사타구니 밑으로 드나들고 혹은 겨드랑 밑으로 드나들며, 사람이 연등(燃燈)을 하려면 그의 배[腹]를 경유하여 작은 손가락으로 올라가서 불을 붙인다.” 하였으니, 그 크기를 알만 하다. 우리나라의 불상을 거기에 비유하면 마치 난쟁이를 용백국(龍伯國) 사람에게 비유함과 같다.
【천화불상(天畫佛像)】 천지의 조화가 융합되면 무슨 물건이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마치 오영야(吳寧野)가 이른바 “산하(山河) 대지(大地)에서도 다 공(空)을 볼 수 있고, 기왓장이나 조약돌, 진흙 같은 것도 모두가 불성(佛性)을 간직하고 있다.” 한 말이 곧 그런 뜻에서이다.
수 문제(隋文帝)의 합리불(蛤蜊佛)이 있고 송(宋) 나라 조무구(晁無咎)의 저골백불(猪骨白佛)이 있다.
【저골여래상(猪骨如來像)】 《묵장만록(墨莊漫錄)》에 “획가현(獲嘉縣)에 사는 주씨(周氏)라는 사람이 돼지를 잡았는데, 유씨(劉氏)라는 사람의 개가 돼지의 두골(頭骨)을 주워먹고는 으르렁거리기만 하고 4일 동안이나 밥을 먹지 않았다. 유씨가 그 개를 잡아 해부해 보니, 개의 왼쪽 위의 어금니 안에 엄지 손가락만한 고깃덩이가 박혀 있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여래상(如來像)이었다. 이 여래상은 상투에 좁쌀 같은 구슬이 박혔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부좌(跏趺坐)한 자세로 앉아 있었으며 동자(瞳子)에는 장엄상(莊嚴相)이 은연중에 갖추어져 있었다.” 하였다.
【우골여래상(牛骨如來像)】 《묵장만록(墨莊漫錄)》에 “진주(眞州)의 어느 부잣집에서, 여러 마리의 개가 우경골(牛脛骨) 하나를 가지고 서로 먹으려고 다투므로, 사람이 그를 빼앗아 쪼개어 보니, 그 뼈 속에 들어 있는 혈수(血髓)가 벌써 굳게 어려 마치 옥(玉)처럼 하얀데다가 천연적으로 하나의 보살(菩薩) 형체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의문(衣紋)ㆍ영락(瓔珞)ㆍ상호(相好)가 아주 기특하여, 아무리 사람이 직접 조각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는 부처의 자비(慈悲)로운 화신(化身)이 어디에나 나타나, 살생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계한 것이다.” 하였다.
【은행대사상(銀杏大士像)】 청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신축ㆍ임인 연간에 경구(京口)에서 전함(戰艦)을 만들었다. 이때 강도(江都) 유씨(劉氏)의 정원에 백여 년이나 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역시 전함용으로 벌채되었다. 목수가 이 은행나무를 톱으로 썰어내자, 나무의 무늬에 완연한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 2좌(座)가 있었고 그 수식(首飾)이 천연스러우므로, 뭇사람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 이를 성남(城南)의 복연암(福緣菴)으로 보내었다. 이때 소주(蘇州)의 서광사(瑞光寺)에 관음상이 있었는데, 이 역시 큰 나무 속의 무늬가 천연으로 결성(結成)된 것이다.” 하였다.
【대나무 속[竹中]의 대사상(大士像)】 인암(訒菴)의 《우필(偶筆)》에 “휴령(休寧)의 판교(板橋)에서 어떤 사람이 대나무를 벌채하다가 한 대나무가 몹시 단단하여 두세 번씩이나 찍어서야 잘라졌는데, 이 대는 모두 13마디로 마디마다 속에 다 관음대사상이 들어 있으므로, 곧장 본촌(本村)의 암자(菴子)에 모셔 놓고 공양하였다.” 했다.
【달마상이 비치는 돌[達摩影石]】 《앙엽기(盎葉記)》에 “숭산(嵩山)의 달마암(達摩菴) 안에 있는 달마상(達摩像) 안전(案前)에 높이는 겨우 2척에 너비가 그 절반쯤 되는 돌이 있는데, 달마의 형체가 완연히 그 돌 위에 비치어 씻으면 씻을수록 더욱 뚜렷해진다. 대개 그 암자 위로 4리쯤 가면 달마동(達摩洞)이 있는데, 이 돌은 곧 달마가 9년 동안 면벽(面壁)했던 것이기에 그의 정신(精神)이 이를 인연해서 밖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하였다.
【채소 꽃에 담긴 여래상[菜花如來像]】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채품(菜品) 중에 무[蕪菁]ㆍ배추[菘菜] 같은 유는 가뭄을 만나면 그 줄기에서 많은 꽃이 피어 마치 연꽃 같기도 하고 혹은 용(龍蛇)의 형상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본성이기에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1068~1077) 연간에 빈객(賓客) 이급(李及)이 윤주(潤州)의 수(守)로 있을 때 정원의 야채 꽃이 모두가 연꽃으로 변하여 피고, 이어 여러 꽃마다 불좌(佛坐) 하나씩이 들어 있었는데, 불좌의 형상이 마치 조각한 것처럼 생기었고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불볕에 쪼여 말려도 그 불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이군(李君)의 집에서 부처를 신봉함이 매우 독실하기 때문에 이런 기이한 일이 있다.’ 했다.” 하였다.
【사람의 심장에 들어 있는 관음상[人心中觀音像]】송렴(宋濂)의 《잠계문집(潛溪文集)》에 “임천(臨川)의 승려(僧侶)가 입적(入寂)하여 시신을 불에 태울 때, 심장만은 타지 않고 오색(五色)의 광채가 나면서 뼈도 아니고 돌도 아닌 불상이 나왔고, 또 어떤 휘사(徽士)가 죽어 화장(火葬)을 할 적에, 심장 안에 마치 조각한 것과 같은 관음상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다 사람의 의지가 분산되지 않아서 정령(精靈)과 기액(氣液)이 감응된 형상이다.” 하였다.
【보타암(普陀巖)의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에 보타암이 있고 거기에 대사상이 있는데, 화만(華鬘)이 천연스럽고 죽림(竹林)앵무(鸚鵡)선재(善財)용녀(龍女)의 형상도 모두 다양하게 갖추어졌다. 금객(琴客) 정생(程生)은 일찍이 몇 매(枚)를 구경했다.” 하였다. 《숙원잡기(菽園雜記)》에는 “보타(普陀)는 범어(梵語)로 백(白)인데, 낙가화(落迦華)를 말한다. 이 산에 산반화(山礬花)가 많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바위 속의 불상[巖中佛像]】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근래 이경심(李慶深)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 고성(固城)에 영(營)을 설치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우물을 파게 하였는데, 10장(丈)쯤 깊이 파들어가도 물은 없고 밑에 반석(磐石)만 있으므로, 곡괭이를 사용하여 더 뚫어 내려가자 그 속에서 기와가 5~6장쯤 나오고 그 밑에는 또 반석이 들어 있었으며, 또 근래 황주(黃州)에 성(城)을 쌓을 때, 산석(山石)을 뚫어 내다가 바위 속에서 조그마한 불상 하나를 얻었는데, 이 또한 알 수 없는 이치이다.” 하였다.

불화(佛畫)

당(唐) 나라 왕유(王維)의 문수불이도(文殊不二圖), 양(梁) 나라 장승유(張僧繇)의 로사나불(盧舍那佛), 구룡상(句龍爽)의 보타관음(普陀觀音), 이공린(李公麟)의 화엄변상(華嚴變相), 오도원(吳道元)의 공작명왕(孔雀明王)ㆍ등각보살(等覺菩薩)ㆍ여의보살(如意菩薩)ㆍ탁탑천왕(托塔天王)ㆍ호법천왕(護法天王)ㆍ행도천왕(行道天王)ㆍ청탑천왕(請塔天王)ㆍ화수길용왕(和修吉龍王)ㆍ온발라용왕(嗢鉢羅龍王)ㆍ발난타용왕(跋難陀龍王)ㆍ덕차가용왕(德叉伽龍王)ㆍ남방보생여래(南方寶生如來)ㆍ북방묘성여래(北方妙聲如來), 양정원(楊庭元)의 오비밀여래(五祕密如來)ㆍ사유보살(思維菩薩)ㆍ인왕보살(仁王菩薩)ㆍ장수보살(長壽菩薩)ㆍ칠구지보살(七俱胝菩薩), 범경(范瓊)의 강탑천왕(降塔天王), 신징(辛澄)의 불공구보살(不空鉤菩薩)ㆍ보인보살(寶印菩薩)ㆍ보단화보살(寶檀花菩薩)ㆍ시향보살(侍香菩薩)ㆍ헌화보살(獻花菩薩), 왕상(王商)의 불림풍속(拂菻風俗), 왕비한(王祕翰)의 자재관음(自在觀音)ㆍ보타라관음(寶陀羅觀音)ㆍ암거관음(巖居觀音), 무동청(武洞淸)의 시향금동(侍香金童)ㆍ산화옥녀(散花玉女), 당(唐) 나라 범경의 대비관음삼십육비상(大悲觀音三十六臂像), 촉(蜀) 나라 장남본(張南本)의 대불좌대상(大佛坐大像), 당 나라 조공우(趙公祐)의 정좌불(正坐佛)ㆍ피발관음상변(披髮觀音相變), 이백시(李伯時)의 장대관음(長帶觀音), 당 나라 오도자(吳道子)의 백묘십팔응진도(白描十八應眞圖)가 있고, 청(淸) 나라 냉길신(冷吉臣)이 성조육십성수화(聖祖六十聖壽畫)와 나한도(羅漢圖)를 그려 바쳤는데, 그림의 길이가 20여 장(丈)이나 되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김동필(金東弼)이 소장한 오도자(吳道子)의 묘금여래상(描金如來像)이 있고, 이광호(李光浩)의 시승천불도(施僧千佛圖)가 있으니, 이 천불도는 부처가 마치 겨자씨[芥子]만큼 자잘하게 되었는데, 화면에 물을 뿜어야 모양이 나타나 꿈틀거리는 것같이 보인다. 경주(慶州) 분황사(芬皇寺)의 관음상(觀音像)과 진주(晉州)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이 있는데, 이 유마상은 신라 때 솔거(率居)가 그렸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달마절로도해도(達摩折蘆渡海圖)와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가 있다.
금강산(金剛山) 정양사(正陽寺) 사문(寺門) 안에 육각(六角)으로 된 무량각(無梁閣)의 좌우 4벽(壁)에 제불(諸佛)ㆍ천왕(天王)ㆍ법신(法神) 40위(位)를 그려 붙였는데, 이것을 원(元) 나라 때, 화사(畫師)가 오도자(吳道子)의 필적을 모사해다가 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견문록(見聞錄)》을 상고해 보건대, 송(宋) 나라 희령(熙寧 신종(神宗)의 연호, 1068~1077) 9년(병진)에 고려에서 다시 최사훈(崔思訓)을 사신으로 보내어 조공(朝貢)할 적에, 최사훈이 화공(畫工)을 대동하고 가서 상국사(相國寺)의 벽화(壁畫)를 모사해 갈 것을 요청하여,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고 그 모두를 모사하여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 화공이 필법에 자못 정교하였다. 금강산 무량각에 있는 벽화가 바로 이것이다.

관음대사교(觀音大士敎) 전래의 시말

우리나라에 관음대사교가 들어온 시말(始末)을 보면 온릉(溫陵) 개원련사(開元蓮寺)에 있었던 비구(比丘) 계환(戒環)의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관음(觀音)이란 세상의 언음(言音)을 관찰하는 것이니, 원오(圓悟)와 원응(圓應)의 호칭이다. 음(音)에다 관(觀)이라 말한 것은, 관지(觀智)로 비추어 보는 것이요 이식(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였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략소주(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注)》는 배휴(裵休)가 찬하고 종밀(宗密)이 과주(科注)를 붙였는데, 여산(如山)의 서(序)에 보(菩)는 보리(菩提)로 각(覺)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얻은 바의 불과(佛果)이고, 살(薩)은 살타(薩埵)로 유정(有情)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교화된 중생(衆生)이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고도 칭한다.” 하였다. 불전(佛典)에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관음대사(觀音大士)라고도 칭하는데, 남해(南海) 낙가산(落伽山) 조음동(潮音洞)의 보타암(普陀巖)에 거처하고 있다.” 하였다. 《숙원잡기(菽園雜記)》에 “보타(普陀)는 범어(梵語)로 백(白)인데, 낙가화(落伽華)이다. 이 산에 산반화(山礬花)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에 보타암석(普陀巖石)이 있고 그 암석에 대사상(大士像)이 있는데, 화만(華鬘)이 천연스러우며, 죽림(竹林)ㆍ앵무(鸚鵡)ㆍ선재(善財)ㆍ용녀(龍女)의 형상이 다양하게 갖추어졌다. 금객(琴客) 정생(程生)이 일찍이 몇 매(枚)를 구경했다.” 하였다.
대개 관음대사는 자죽림(紫竹林 절강성 정해현에 있는 지명) 안에 있으면서 맑은 감로수(甘露水)가 든 병(甁)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가지고 일체중생을 널리 제도(濟度)한다고 한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불교는 하나의 공적(空寂)뿐이다. 그러나 관음대사만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온갖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하니, 이 또한 공자(孔子) 이후의 맹자(孟子)와 같다. 관음대사가 세상에 나타난 상(相)은 본시 여러 가지인데, 지금 소상(塑像)이나 화상(畫像)에 흔히 여인상(女人相)으로 만드니, 이는 잘못이다. 기왕 ‘대사’라 일렀으니 어찌 여인이 될 수 있겠는가. 또한 기왕 ‘성불(成佛)’이라 일렀으니 남상(男相)이든 여상(女相)이든 다 있을 수 없다. 대저 상(相)이 있으면 정(情)이 있어서 음란한 생각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서(佛書)에 상고하건대 ‘어람묘녀(魚籃妙女)가 곧 관음대사이다.’ 했다.” 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의 《거이록(居易錄)》에 “오천장 문(吳天章雯 천장은 오문의 자)의 설(說)에 ‘계주(薊州) 독락사(獨樂寺)의 관음각(觀音閣)이 3층인데, 그 액자(額字)는 이태백(李太白)이 썼다. 이 각의 들보와 두공(枓栱)은 모두 나무와 나무를 서로 걸어서 만들었고 도끼나 자귀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기미년(己未年) 지진(地震)으로 관아(官衙)나 민사(民舍)가 하나도 남아난 것이 없었으나, 이 각만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보살상(菩薩像)의 높이는 이 각과 똑같아서 약 6장(丈) 남짓한데, 산조목(酸棗木 멧대추나무)으로 만들었다.’ 하였다. 나의 고향인 치천현(淄川縣) 황부촌(黃埠村)에 산조목 한 그루가 있는데, 그 크기가 두 아름이나되니, 월동(粤東)에 있는 용수(榕樹)의 크기보다 못하지 않다.” 하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상이 가장 크다. 그러나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매우 성행하였는데도 관음상(觀音像)만은 오로지 말해 놓은 것이 없는데, 옛날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가 지은 관음원기(觀音院記)에서 상고할 수 있다. 관음원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1086~1094) 5년에 고려왕(高麗王)의 아우인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바다를 건너 불법(佛法)을 물으러 왔을 때 제형(提刑 형벌이나 옥사(獄事)를 맡은 벼슬) 양걸(楊傑)이 그의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그가 그 멀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온 것은 불법을 고려에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1126~1127) 연간에 병화(兵火)가 연속되자, 관음전(觀音殿)의 주지 도언(道言)이 대사상을 우물 속에 숨겨 두었는데, 병(兵)이 물러간 후에 여럿이 대사상(大士像)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와력(瓦礫)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즉시 우물을 파본바 그 속에 대사상이 들어 있었으니, 그 신령하고 기이함이 이와 같았다. 심지어는, 비를 빌거나 날씨가 화창하기를 빌면 그 비는 대로 즉시 영험이 있었으며, 현신(現身)을 하기도 하고 현몽(現夢)을 하기도 하여, 그에 대한 기록이 어느 시대나 끊이지 않았다. 송조(宋朝)에서도 부처에게 공양(供養)한 사실이 모두 기록에 나타나지만, 더욱이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보타도량(補陁道場)을 중건(重建)하여 모든 절차가 매우 장엄(莊嚴)했음에랴. 고려는 중국과 거리가 멀어도 시골 구석구석에서 소동파(蘇東坡)의 ‘봄 누에 다 자라고 보리 반쯤 익었는데, 앞뒷산에 주룩주룩 비가 내리네. 농부들은 일손 멎고 쫓겨가는데, 흰옷 입은 선인은 고당에 앉았구나.[蠶欲老麥半黃 前山後山雨浪浪 農夫輟耒女廢筐 白衣仙人在高堂]’라는 우중유천축영감관음원시(雨中遊天竺靈感觀音院詩)를 매우 잘들 외지만, 이 시가 있는 줄만 알았지 불(佛)이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세 번이나 조명(朝命)을 받고 강절(江浙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지키게 된 인연으로 천축(天竺)에 들어가 대사(大士)의 상을 예배하였는데, 대저 정성들여 기도만 하면 그 영험이 마치 메아리처럼 빨랐다. 요사이도 외람되이 또 성은(聖恩)을 입어 부재상(副宰相)에 올라 다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천축의 사적을 대략 살펴보건대, 관음보살은 신통력이 광대하여 온 중생(衆生)에게 무외(無畏)를 베풀고 원력(願力) 또한 홍심(弘深)하여 일체의 유정(有情)을 제도하며, 삼십이응(三十二應)을 나타내어 달이 1천 강에 비치듯[月印千江]하고 천백억의 신(身)으로 화현하여 물이 대지를 흐르듯[水行大地]해서, 아무리 멀어도 못가는 곳이 없고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므로, 온 세상이 다 거기에 귀의(歸依)하여 사람마다 믿고 따를 줄을 안다. 그런데 고려만은 아직 전우(殿宇)가 없고 또 불교를 받드는 일이 결여되어 있다. 생각건대, 마땅히 목불(木佛)과 금불(金佛)을 만들고 소상(塑像)과 화상을 만들며 금폐(金幣)를 내어 사찰을 짓고 주옥(珠玉)을 들여 장엄(莊嚴)을 갖추어야만이 군생(群生)에게 유익하고 성상(聖上)에게 복이 돌아가며, 다음으로 국토(國土)까지 안락(安樂)을 누릴 것이다. 삼가 사적의 본말을 적어 고려의 여러 상공(相公)에게 고하노니, 바라건대, 국왕(國王)에게 계백(啓白)하여 특별히 전우와 불상을 만들고 장엄을 갖추어 숭봉하오. 이렇게 하면 거의 불법이 유통되어 사람마다 신봉할 줄을 알게 되리니,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7~1307) 8년 6월 일.”
상고하건대, 대덕은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이니, 곧 고려의 충렬왕(忠烈王) 30년(갑진)이다. 이때부터 관음교(觀音敎)가 우리나라에 유전된 것이다.
【관음(觀音)의 현령(顯靈 영험을 나타냄)】 능가사(楞伽寺)는 흥양(興陽)의 팔령산(八靈山) 기슭에 있는데, 옛날 유구국(琉球國)의 태자(太子)가 표박(漂泊)하다가 잘못 이 절에 도착하였다. 그가 본국(本國)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7주야(晝夜)를 관음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자, 관음대사가 현신(現身)하여 그를 겨드랑이에 끼고 파도를 헤치며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절의 중이 관음상을 그려 놓았는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서울의 창의문(彰義門) 밖, 옥천암(玉泉菴) 밑에 있는 한 바위에 대사상(大士像)이 새겨졌고 평산(平山) 총수(蔥秀)에 있는 석벽(石壁)에도 대사상이 새겨졌는데, 모두 단아하고 아름답다.
《화감(畫監)》에 “고려에 있는 관음 화상이 매우 정교하다. 그 화법의 근원은 당(唐) 나라 을지승(乙遲僧)의 필법에서 나온 것인데, 그의 필법이 흘러 고려에 이른 것이다.” 하였다. 을지승이란 곧 당 나라 을지발질나(乙遲發質那)를 말한다.

석씨(釋氏)의 명호(名號)

석가의 명호에 대해 주해가 매우 많으나, 지금 대략만 수록한다. 《수다라요의경(修多羅了義經)》에 상고해 보면 “여래(如來)의 경우, 본각(本覺)의 이름은 여(如)이고 시각(始覺)의 이름은 내(來)인데, 시(始)와 본(本)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衆生)은 본각만 있고 시각은 없으니, 이는 여(如)일 뿐, 내(來)는 되지 못한다.” 하였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능인적묵(能仁寂黙)이라는 것이다. 보(菩)는 보리(菩堤)로 각(覺)이라는 것이니 이는 곧 얻은 불과(佛果)이고, 살(薩)은 살타(薩埵)로 유정(有情)이라는 것이니 곧 교화된 중생(衆生), 즉 마하살(摩訶薩)인데, 마하는 대(大)의 뜻이다.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은 묘수(妙首), 또는 묘길상(妙吉祥)이라 하는데, 신해지(信解智)를 나타내기 때문에 묘덕(妙德)이라고도 하고 또한 증지(證智)를 나타내기 때문에 문수사리라고도 하며, 《범어와정(梵語訛正)》에는 만수실리(曼殊室利)라 하였다. 보현보살(普賢菩薩)로 말하면, 체성(體性)이 두루 미침을 보(普)라 하고 곳에 따라 성덕(成德)함을 현(賢)이라 한다. 보안보살(普眼菩薩)로 말하면, 제법(諸法)의 청정(淸淨)함을 널리 보니 이는 대지보안(大智普眼)이요, 중생(衆生)의 성불(成佛)함을 널리 보니 이는 대비보안(大悲普眼)이다. 미륵(彌勒)은 자씨(慈氏)이다. 자(慈)는 그의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인데 이는 무승(無勝)이라는 뜻이다. 그는 수승(殊勝)한 덕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금 성만 일컬어 미륵이라 한다.” 하였다.
관음(觀音)에 대해, 《수능엄경해(首楞嚴經解)》에 “관음이란 세상의 언음(言音)을 본다는 뜻이니, 원오(圓悟)ㆍ원응(圓應)의 호칭이다. 음(音)에다 관(觀)을 말한 것은 관지(觀智)로 비추어보는 것이지 이식(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석(帝釋)은 도리천주(忉利天主)가 되어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통령(統領)하였고 사천왕(四天王)은 제석의 신하가 되어 세계(世界)를 통령하는 자이다. 거사(居士)는 은거(隱居)하여 뜻을 구하고 의(義)를 행하여 도(道)를 깨닫는 자의 호칭이다. 《금강경(金剛經)》의 금강에 대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바로 ‘견(堅)ㆍ이(利)ㆍ명(明)’이요, 《반야경(般若經)》의 반야에 대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바로 ‘실상(實相)ㆍ관조(觀照)ㆍ문자(文字)’이다. 사문(沙門)은 근식(勤息)이란 뜻으로 많은 선(善)을 지성으로 닦고 번뇌를 지식시키는 것이니, 이는 승도(僧徒)들의 공통된 호칭이다. 두타(頭陀)는 즉 두수(抖擻)라는 뜻이니, 모든 번뇌를 털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수다라요의경》에 “사문(沙門)은 출가(出家)한 사람의 호칭이고, 바라문(婆羅門)은 집에 있으면서 지(智)를 가진 사람의 호칭이다. 열반(涅槃)은 곧 적멸(寂滅)이라는 것이고, 승가람마(僧伽藍摩)는 중원(衆園)이라는 뜻인데, 승가(僧伽)는 곧 거기에 머무르는 대중[衆]이요, 남마(藍摩)는 곧 대중이 머무를 수 있는 처소[園]이다.” 하였다.
대비구(大比丘)는 《수능엄경》에서 파악(破惡)ㆍ포마(怖魔)라 번역하였다. 벽지(辟支)는 곧 독각(獨覺)이라는 뜻이고, 무학(無學)은 곧 나한(羅漢)이라는 뜻이며, 가야(伽倻)는 산명(山名)인데, 즉 상두산(象頭山)이다. 유순(由旬)은 40리(里)를 말하는데, 16리라고도 한다. 약차(藥叉)에 대해서는, 고산(孤山)이 말하기를 “약차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땅에 있고, 둘째는 허공에 서 있고, 셋째는 하늘에 서 있다.” 하였다. 나찰(羅刹)은 가외(可畏)라는 뜻이고 구반다(鳩盤茶)는 곧 염매귀(厭魅鬼)라는 뜻이다.
【십대제자(十大弟子)】 두타제일(頭陀第一)에 가섭(迦葉), 다문제일(多聞第一)에 아난(阿難), 지혜제일(智惠第一)에 사리불(舍利弗), 해공제일(解空第一)에 수보리(須菩提), 설법제일(說法第一)에 부루나(富樓那), 신통제일(神通第一)에 목련(目連), 논의제일(論議第一)에 가전연(迦栴延), 밀행제일(密行第一)에 나후라(羅睺羅), 천안제일(天眼第一)에 아나율(阿那律), 지율제일(持律第一)에 우바리(優婆離)이다. 상고하건대, 제2조(祖)인 아난존자(阿難尊者)는 석가의 종제(從弟)로 본명(本名)은 아난타(阿難陀)인데, 이는 곧 경희(慶喜)의 뜻이다.
【십육응진(十六應眞)】 명(明) 나라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십팔나한게(十八羅漢偈)에 “십육응진이란, 사대부주(四大部洲)에 분거(分居)한 부처의 십육대제자(十六大弟子)를 말하는데, 이는 다 범상(梵相)이다. 뒤에는 범한(梵漢)이라 하여 노(老)ㆍ소(少)가 각기 여덟씩으로 되었으니, 만일 그와 같다면 이미 그 본래의 뜻과는 어긋난 것이다. 십팔(十八)이라고 칭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였다.
【칠중비구(七衆比丘)】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사미(沙彌)ㆍ사미니(沙彌尼)는 출가(出家)한 오중(五衆)이고, 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는 집에 있는 이중(二衆)이다. 상고하건대, 식차마나는 학법녀(學法女)이니 지금의 장발(長髮)한 비구니이고, 우바새는 불법을 친근하게 받드는 속인(俗人)이고 우바이는 우바새와 같은 속녀(俗女)이다.
【사천왕(四天王)의 명상(名狀)】 다문천(多聞天)은 범명(梵名)으로 비사문(毗沙門)인데, 복덕(福德)으로 이름이 사방에 알려졌다. 왼손은 쭉 펴서 창을 잡고 오른손은 굽혀서 불탑(佛塔)을 떠받들었으며, 머리에는 금빛 갑옷을 입고 두 발로는 여인(女人)을 꼭 밟았으며, 겨드랑이 밑에는 운기(雲氣)가 끼어 있다. 지국천(持國天)은 범명으로 제두뢰타(提頭賴吒) 호지국사(護持國士)인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앞을 향해 손바닥에 보주(寶珠)를 쥐고 광채를 발사하여, 착한 사람은 상주고 악한 사람은 벌을 준다. 증장천(增長天)은 범명으로 비류륵차(毗留勒叉)인데,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성덕(盛德)을 증장시킨다.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고서 2부(部)의 귀중(鬼衆)을 통솔하는데, 하나는 이름이 구반다(鳩槃茶)로 동과(冬瓜)와 같은 염매귀(厭魅鬼)이고, 또 하나는 벽여다(薜荔多)이니, 이는 곧 아귀(餓鬼) 가운데 아주 못난 것들이다. 광목천(廣目天)은 범명으로 비류박차(毗留博叉)인데, 일명은 잡어(雜語)로 능히 여러 가지의 말을 한다. 왼손에는 창을 쥐고 오른손에는 붉은 새끼[索]를 잡고서 눈을 부릅뜨고 입을 딱 벌려, 그 위엄으로 사악(邪惡)들을 궤산(潰散)시키기 때문에 광목(廣目)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는 2부(部)의 귀중(鬼衆)을 통솔하는데, 하나는 이름이 비사사(毗舍闍)로 사람의 정기(精氣)를 빨아 먹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사백사병(四百四病)을 얻어 고민하도록 하고 또 오곡(五穀)의 정(精)을 빨아 먹어서 국가를 기근(飢饉)으로 몰아넣으며, 다른 하나는 이름이 독룡(毒龍)으로 그 독을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다 죽는다.

불조(佛祖)

제1조(祖) 가섭(迦葉)에서부터 제28조 달마(達摩)에 이르러, 달마가 동토(東土)의 제1조가 되었고, 제2조가 혜가(慧可), 제3조가 승찬(僧璨), 제4조가 도신(道信), 제5조가 홍인(弘忍), 제6조가 혜능(慧能)이다. 상고하건대, 원 나라의 중 화정지(華亭智)가 지은 《불조통재(佛祖統載)》에 “달마는 관세음대사의 화신이다.” 하였고, 양(梁)의 보지선사(寶誌禪師)도 “대사의 화신이 달마와 때를 같이하여 남북으로 화현(化顯)했다.” 하였다.

사찰(寺刹)

한 명제(漢明帝) 때 서역(西域)의 중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백마(白馬)에다 불경을 싣고 낙양(雒陽)에 와서 홍려시(鴻臚寺)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중이 거주하는 곳을 사(寺)라 한 것이다.
청(淸) 나라 주이준(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에 “상고하건대, 요(遼)ㆍ금(金)으로부터 원(元)에 이르기까지, 도성(都城)에 불사(佛寺)를 세우지 않는 해가 없었고, 명(明) 나라 때에는 대당(大塘) 사람치고는 불사를 세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1465~1487) 연간에는 경성(京城) 안팎에 칙명으로 세워진 사관(寺觀)이 6백 39군데나 되었다. 《청회전(淸會典)》에 상고하건대, 성조(聖祖) 강희(康熙) 4년도 예부(禮部)의 통계에 따르면, 직성(直省)에서 칙명으로 건립된 큰 사묘(寺廟)가 모두 6천 73군데이고 작은 사묘(寺廟)가 모두 6천 4백 9군데이며, 사사로 건립한 큰 사묘가 모두 8천 4백 58군데이고 작은 사묘가 모두 5만 8천 6백 82군데이며, 승(僧)이 21만 2백 91명이고 도(道)가 2만 1천 2백 86명이고 니고(尼姑)가 모두 8천 6백 15명이며, 사묘가 도합 7만 9천 6백 22군데이고 승ㆍ도ㆍ니고가 도합 24만 1백 93명이었다.” 하였다.
사찰을 상고하건대, 천축(天竺) 불국(佛國)에 5개의 정사(精舍)가 있으니, 첫째는 급고독원(給孤獨園), 둘째는 영취산(靈鷲山), 셋째는 미후강(獮猴江), 넷째는 암라수(菴羅樹), 다섯째는 죽림원(竹林園)이다. 방옹(放翁) 육유(陸游)는 말하기를 “천하의 명산(名山) 가운데 화산(華山)ㆍ청성산(靑城山)ㆍ모산(茅山)에만은 절이 없다.” 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은 말하기를 “제남(濟南) 노산(勞山)에도 절이 없었는데, 명 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감산대사(憨山大師)가 해인사(海印寺)를 노산에 건립했다가, 얼마 안가서 도류(道流)들의 소송으로 인해 견책을 받고 월동(粤東)에 가서 수자리살이를 했다.”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북관(北關)의 백두산(白頭山)에만 절이 없다. 우리나라 사찰의 시초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부도(浮屠) 혜순(惠順)이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중 굉연(宏演)이 찬한 《도선전(道詵傳)》에 “처음 도선이 당(唐)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불법을 배울 때, 일행선사가 삼한(三韓)의 산수도(山水圖)를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병이 나면 혈맥(血脈)을 찾아 침(針)도 놓고 뜸질도 하면 낫듯이, 산천(山川)의 병도 그와 같아서 혹 절을 건립하여 불상을 세우고 탑을 세우면 마치 사람에게 침 놓고 뜸질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비보(裨補)라 한다.’ 하였는데, 뒤에 도선이 5백개의 사찰을 비보하였다.” 했으니, 지금 곳곳에 있는 석불(石佛)ㆍ부도(浮圖)가 아마 그때에 세운 것인가 보다. 지금 사찰을 따져보건대, 8도(道)의 해협이나 산 구석구석에 사찰 없는 데가 없어, 크고 작은 절이나 암자의 숫자가 무려 천여 곳이나 된다.

승니(僧尼)

중국 승니의 시초로 말하면, 한(漢) 나라 때 양성후(陽城侯) 유준(劉俊)에게 출가(出家)를 허락함으로써 이가 곧 승(僧)의 시초이고, 낙양(洛陽)의 부인(婦人) 아반(阿潘) 등이 출가함으로써 이가 곧 니(尼)의 시초이며, 석가의 이모인 교담미(憍曇彌)는 곧 서역에서 출가한 비구니의 시조이다. 상고하건대, 여종옥(呂種玉)의 《언정(言鯖)》에 《번우잡기(番禺雜記)》를 인용하여 “광동(廣東)ㆍ광서(廣西) 지방에 있는, 가정을 거느리고 있는 중들을 소위 화택승(火宅僧)이라 한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서관(西關)이나 북관(北關) 지방에, 처자를 거느리고 집에 있는 중들을 재가승(在家僧)이라 한다. 라마승(喇嘛僧)은 곧 서장(西藏) 등지에 있는 번승(番僧)의 호칭인데, 이들은 주육(酒肉)도 먹고 처자도 거느려 속인(俗人)들과 똑같다.

승도(僧徒)의 명호(名號)

대화상(大和尙)은 석륵(石勒 후조(後趙)의 고조(高祖)를 가리킴) 때에 불도징(佛圖澄)을 부르던 호칭이고, 법사(法師)는 석륵 때에 구마라습(鳩摩羅什)을 부르던 호칭이다. 국사(國師)는 진(晉) 나라 초기에 구마라염(鳩摩羅炎)이 구자국(龜玆國)에 가자 구자국의 왕이 그에게 요청하여 불렀던 칭호이고, 대사(大師)는 당 중종(唐中宗)이 만회(萬回)를 법령공대사(法靈公大師)라 부르고 요진(姚秦 요장(姚萇)이 세운 후진(後秦)) 때에 라습(羅什)을 대사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아사리(阿闍梨)는 제자의 행동을 잘 바로잡아 준다는 뜻으로, 정행수(正行隨)라고도 한다. 좌수(座首)는 옛날에 고승(高僧)들이 강자(講者)를 고좌(高座)라 한데서 온 것이고, 선사 수좌(禪師首座)는 당 선종(唐宣宗)이 중 변장(辯章)을 삼교수좌(三敎首座)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장로(長老)는 《아함경(阿含經)》에서 말한 삼장로(三長老)이다. 상인(上人)은 불설(佛說)에 “속에는 지덕(智德)이 들어 있고 밖에는 수승한 행적이 있어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을 상인이라 한다.” 하였다. 승록(僧錄)은《승사략(僧史略)》에 “당 문종(唐文宗)이 처음으로 좌우(左右)의 승록을 두었다.” 하였고, 승정(僧正)은《석씨요람(釋氏要覽)》에 “진(秦) 나라 때 승략법사(僧䂮法師)를 승정으로 삼았다.”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필추(苾蒭)는 출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천축국에 필추라는 만초(蔓草)가 있는데, 이 풀이 오덕(五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출가한 사람을 비유하여 부른 것이다.
《송사(宋史)》에 상고하건대 “선화(宣和 휘종(徽宗)의 연호, 1119~1125) 원년에 ‘불호(佛號)를 대각금선(大覺金仙)이라 고치고 나머지는 선인(仙人)ㆍ대사(大士)라 하고 승(僧)은 덕사(德士)라 하여, 복식(服飾)을 바꾸고 성씨(姓氏)를 칭하며, 사(寺)는 궁(宮)으로, 원(院)은 관(觀)으로, 여관(女冠)은 여도(女道)로, 니(尼)는 여덕(女德)으로 각기 고쳐 부르라.’고 조서했다.” 하였다.

의발(衣鉢)

청(淸) 나라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육조(六祖)의 가사(袈裟)는 달마(達磨)로부터 전해 온 것으로, 본디 서역의 제불(諸佛)들이 서로 법(法)을 전수받던 신기(信器)인데, 이것은 곧 서역의 굴순포(屈㫬布)이니 목면(木綿)으로 만든다. 발우[鉢]는 위주(魏主)가 하사한 데서 연유된 것인데, 검붉은 빛이 나는 도기(陶器)로 빛이 투명하여 물체가 비칠 만하다. 육조가 황매(黃梅 5조(祖) 홍인(弘忍)의 자)에게 법을 전수받을 때 이르던 축사에 ‘가사는 싸움의 발단이 되니, 너희들은 전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그 무리들이 그것을 보배로 여겨 수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잘 보전되었다. 당(唐)의 숙종(肅宗)ㆍ대종(代宗)과 송(宋)의 인종(仁宗)은 모두 그 가사를 대내(大內)에 들여오도록 요청하여 공양 예배했었는데, 뒤에는 모두 사자(使者)를 시켜 조계사(曹溪寺)로 돌려보내도록 조칙하였다.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불의명(佛衣銘)을 지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장거(莊渠) 위교(魏校)가 광동(廣東)의 독학사(督學使)로 나가서 불씨(佛氏)를 이단(異端)이라 하여 가사는 가져다 불태워 버리고 발우는 두들겨 부숴버렸다. 그런데 장거는 본래 자식이 있었으나 이 신기(信器)를 훼손한 이후로 후사가 끊기는 보응(報應)을 받았다고 한다.” 하였다.

소림사(少林寺)의 승군(僧軍)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소림사의 중에게 내린 교사(敎辭)가 있는데, 그 교사에 ‘왕세충(王世充)이 분수 아닌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여 천리(天理)를 어기므로 법사(法師) 등이 모두 기변(幾變)을 깨닫고 미리 묘인(妙因)을 알아차려 저 흉적(兇賊)을 사로잡고 이 정토(淨土)를 넓혔으므로 내가 듣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뜻밖에 지금 동도(東都)가 위급하니, 그들을 조석 간에 섬멸하여 유종(有終)의 큰 공을 세우고 좋은 규범을 후세에 보이라.’ 하였는데, 이때에 공을 세운 사람이 13명이었다.” 하였다.
배최(裵漼)의 소림사비(少林寺碑)에 “이른바, 지조(志操)ㆍ혜탕(惠瑒)ㆍ담종(曇宗) 등 가운데 담종만이 대장군(大將軍)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작위를 받지 않고 전지(田地) 40경(頃)을 하사받았으니, 이것이 소림사의 승병(僧兵)이 일어났던 전말이다.” 하였고, 《위서(魏書)》에 상고해 보건대, “효무제(孝武帝)가 5천 기(騎)를 인솔하고 전하(瀍河)의 서쪽 양왕(揚王)의 별사(別舍)에서 묵을 때, 사문(沙門)의 도유나(都維那)인 혜진(惠臻)이 옥새[璽]를 등에 지고 천우도(千牛刀)를 갖고서 따랐다.” 하였다. 《송사(宋史)》에는 “범치허(范致虛)가 중 조종인(趙宗印)을 선무사 참의관 겸절제군마(宣撫司參議官兼節制軍馬)에 충용시키자, 종인이 중들을 모아 1군(軍)을 조직하여 존승대(尊勝隊)라 호칭하고 또 동자(童子)로 1군을 조직하여 정승대(淨勝隊)라 호칭했다.” 하였다.
명 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소림사의 중 월공(月空)이 도독 만표(萬表)의 격문(檄文)을 받아가지고 송강(松江)에서 왜적(倭賊)을 방어할 때, 그의 무리 30여 명이 스스로 부오(部伍)를 만들어 철봉(鐵棒)으로 왜적을 격살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송(宋) 나라 정강(靖康) 흠종(欽宗)의 연호, 1126~1127) 연간에는 오대산(五臺山)의 중 진보(眞寶)가 같은 승도와 함께 산중에서 무사(武事)를 익혔는데, 흠종(欽宗)이 그를 편전(便殿)으로 소대(召對)한 다음, 산으로 돌아가서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금(金) 나라에 대항하라고 명하자, 그가 산에 돌아가 승병을 모아 주야로 고전 끝에 사찰이 모두 불타버리고 승병들이 금 나라에 함몰당했다. 이에 금인(金人)들이 백방으로 그에게 항복하라고 꾀었으나 끝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우리의 법(法) 가운데 구사(口四)의 죄(罪)가 있다. 내가 이미 송 나라 황제에게 죽기로 허락해 놓고 어찌 다시 망언(妄言)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태연히 죽임을 받았다.
덕우(德祐 남송(南宋) 공종(恭宗)의 연호, 1275~1276) 말엽에는 상주(常州) 만안(萬安)에서 의거(義擧)한 중이 있었는데, “세상이 위태할 땐 나가 장수 되었고, 난리 평정되자 다시 중이 되었네.[時危聊作將 事定復爲僧]" 하는 시를 지었다.
내가권법(內家拳法)이 있는데, 황백가(黃白家)의 내가권법에 대한 서적은 소대총서(昭代叢書)에 들어 있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정묘어정무예도보통지(正廟御定武藝圖譜通志)》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나라 선조(宣祖) 25년(임진)에는 승통(僧統)을 두어 휴정(休靜)ㆍ유정(惟政)ㆍ의엄(義嚴)을 장수로 삼아 승군을 거느리고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고, 또 영규(靈圭)는 제독(提督) 조헌(趙憲)의 금산(錦山) 싸움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곽진경(郭震卿 중 의엄(義嚴)을 가리킨다)은 환속(還俗)한 중인데, 인조(仁祖)가 도총섭(都摠攝) 의엄화상(義嚴和尙)에게 하사한 시에 “충의 빛내어 임금에 보답해야지, 연하 탐하여 산 속에 숨지 말아다오 [直將忠義酬明主 莫向煙霞棲碧山]" 하였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내고 뒤에 환속한 이가 바로 곽진경인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상고해보면, 곽진경의 일이 명 나라 신보(申甫)의 일과 같은데, 곽진경은 머리를 깎았을 당시에 장수가 되었고 신보는 모자를 쓴 뒤에 장단(將壇)에 올랐으니, 이 점이 같지 않다. 우리나라 8도의 사찰에 승장(僧將)과 승병(僧兵)을 둔 제도는 임진왜란 이후에 처음 생긴 것인데, 대저 소림사의 승병을 모방하여 설치된 것이다.

석씨(釋氏)에 관한 잡사(雜事)

【불골사리(佛骨舍利)】 《제사기물기(諸寺奇物記)》에 “천계사(天界寺)에 불아(佛牙)가 있는데, 넓이는 1촌(寸)쯤 되고 길이는 5촌쯤 된다.” 하였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가정주(嘉定州) 앞 능운사(凌雲寺)에 1척(尺) 남짓한 불아(佛牙)가 있는데, 보시(布施)하는 이가 주사(朱砂)로 불아를 본떠다가 집에 돌아와 공양했다.” 하였다.
우리나라 영남(嶺南) 통도사(通度寺)에는, 당(唐) 나라 초기에 신라(新羅)의 중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천축(天竺)에 들어가 석가의 두골사리(頭骨舍利)를 얻어다가 절 뒤에 탑(塔)을 만들고 묻어 놓았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탑이 조금 기울어졌다. 우리나라 숙종(肅宗) 44년(을유, 1705)에 중 성능(聖能)이 중수(重修)하려고 그 탑을 헐자, 그 안에 쓰여 있기를 “외도 성능이 중수하리라.[外道聖能重修]" 하였고, 비단 보자기에다 부처의 두골(頭骨)을 싸 넣은 은함(銀函)의 크기가 마치 동이만 한데, 비단 보자기가 이미 천여 년을 지났는데도 썩지 않고 새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또 조그마한 금합(金盒)에 저장해 놓은 사리(舍利)는 광채가 유난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사리가 봉안된 비각(碑閣)은 이미 고쳐 세워졌다.
사리를 불전(佛典)에서 실리라(室利羅), 혹은 설리라(設利羅)라고도 하고 또는 골신(骨身), 불골(佛骨)이라고도 하는데, 곧 골분(骨分)에 연유된 것을 통칭 사리라 한다.
《광명경(光明經)》에 이르기를 “사리는 정혜(定慧)를 닦은 데서 얻어진 것이므로 매우 얻기 어려운 것인데, 사리를 얻는 것은 상등의 복전(福田)을 얻은 것이다.” 하였다. 《대론(大論)》에 이르기를 “뼈를 부순다고 사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요, 경권(經卷)으로 수양을 쌓아야 사리가 나온다.” 하였다. 사리에는 세 가지 빛깔이 있는데, 골사리(骨舍利)는 백색이고, 발사리(髮舍利)는 흑색이고, 육사리(肉舍利)는 적색이다. 보살(菩薩)과 나한(羅漢)이 다같이 세 가지가 있다.
불사리(佛舍利)에 대해 맹희(孟熙 명(明) 나라 유적(鎦績)의 자)의 《비설록(霏雪錄)》에 “불사리는 망치로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았는데, 제자(弟子) 하나가 시험삼아 망치로 치자 곧 부서졌다. 시험해 보면 사리는 동남(童男)ㆍ동녀(童女)의 발근(髮根)을 가져 끌어 올릴 수 있다.” 하였고, 《물리소지(物理小識)》에도 “동남ㆍ동녀의 발근은 사리를 따라오르게 할 수 있고 유향(乳香)을 오래도록 묵히면 거기에서 사리가 나올 수 있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지금 사람을 화장시킬 때 짚으로 만든 거적에다 물을 적시어 섶나무 위에 덮는데, 만일 올볏짚[早稻藁]으로 된 거적일 경우에는 그 회즙(灰汁)이 떨어져 시체의 뼈에 닿는 곳이 마치 사리와 같다.” 하였다. 패설(稗說)에 “사리를 서각(犀角 무소의 뿔) 위에 얹어 놓으면 즉시 녹는다.” 하였고,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영양각(羚羊角)으로 사리를 두들기면 부술 수 있지만, 다른 쇠붙이로는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는다.” 하였다.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일찍이 수도승(修道僧)을 화장(火葬)하는 데서 나온 사리를 얻었는데, 모양은 마치 콩[大荳]처럼 생긴 것으로 물 속에 들어가면 수면(水面)에 구멍이 생기고 또 여러 가지 괴상한 광채가 나타났다. 세조가 이를 제신(諸臣)에게 보이자, 어떤 사람이 시험삼아 서각(犀角)으로 만든 칼자루 위에 올려 놓으니, 잠깐 동안에 다 녹아버렸다. 세조가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리란 음정(陰精)이 응결된 것이고 서각은 곧 남방(南方)에 있는 지극한 양물(陽物)이기 때문에, 음이 양에 의해 녹는 것입니다.” 하였다.
세속에 전하기를 “사람이 사리를 삼키면 정신력이 배나 좋아진다 하므로, 어떤 사람이 사리를 삼켰으나 효험은 보지 못하고 뒤에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낙도(落島)로 귀양갔다.”고 하는데, 어떤이는 이에 대해 “사리를 삼킨 죄악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하였다.
《묵장만록(墨莊謾錄)》에 이르기를 “정화(政和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1111~1117) 7년(정유)에 진주(眞州) 교외(郊外)의 어떤 집에서 양(羊)을 도살했는데, 이 집에서 고기를 사간 사람이, 고기의 근육 속에 마치 옥처럼 빛이 찬란한 사리가 가끔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 마을 전 주민이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였고, 반지항(潘之恒)의 《반당소지(半塘小志)》에는 “위고(韋皐)에게는 앵무새[鸚鵡]의 사리가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승불(僧佛)에게서만 사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수(禽獸)에도 사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사리주(舍利珠)를 저장해 놓았는데, 빛깔은 청색이다. 맨 처음 수정(水晶)으로 된 조그만 그릇에 담은 다음 금합(金盒)에 넣고, 이를 다시 은감(銀龕)에 넣은 다음 동발(銅鉢)로 맨 위의 피갑(皮匣)을 만들었으며, 겉에는 채색 보자기로 1백 겹이나 쌌다.
【마등가(摩騰迦)의 진신(眞身)】 《석림연어(石林燕語)》에 “지금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에 마등가의 진신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다. 마등가가 처음 나올 때 백마(白馬)에 경(經)을 싣고 왔었는데, 그는 죽은 뒤에도 시체가 파괴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마르거나 썩지 않았다. 칠관(漆棺)에 담은 채 석실(石室)에 넣고는 문고리를 매우 튼튼하게 잠그고 그 열쇠는 그 고을 관아(官衙)에서 간직하는데, 구경하려는 사람은 곧장 열쇠를 요청하여 받아 가지고 촛불을 잡고 들어가야만 자세히 볼 수 있다.” 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장성(長城) 밖 백운탑(白雲塔)의 석감(石龕) 안에 요(遼) 나라 당시에 입정(入定)한 중의 시신이 있는데, 육신이 지금까지 부패되지 않은 채 약간의 체온이 있고 살결도 유연(柔軟)하다. 다만 눈을 감았고 숨을 쉬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유시법(留屍法)을 상고해 보건대, 《물리소지(物理小識)》에 “시체를 썩지 않게 하려면 금(金)이나 옥(玉), 수은[汞]ㆍ운모(雲母)로 염(斂)을 한다.” 하였다. 《확변록(確辨錄)》에는 “자기 스승이 앉아서 죽었다는 명목으로 자기 스승을 파는 무리가 있어, 망사(砂)에다 용뇌향(龍腦香)과 수은[汞]을 섞어 코에 넣고 누향(耨香)으로 마취시키면 육신이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하였다.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죽은 사람의 입에 진주(眞珠) 한 알을 넣어두면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 하였고,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외기(坤輿外記)》에는 “노국(露國)에 기름[脂膏]이 나는 나무가 있는데, 향기가 매우 짙으며 발이살마(拔爾撒摩)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나무의 기름을 시신에 바르면 천년이 지나도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서역(西域)에는 수천 년을 지난 조사(祖師)의 시체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부패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마등가와 요(遼) 나라 때 중의 시신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도 아마 이런 방법에서 온 것이 아닐까?
【승랍(僧臘)】 승니(僧尼)가 머리 깎고 중이 된 때로부터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의 햇수를 승랍이라 한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백팔세노비구상찬후(百八歲老比丘像讚後)에 “석가가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나서 등창[背痛]으로 죽은 날까지의 수(壽)가 겨우 80세인데, 또는 79세라고도 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백세를 채운 이는 혜수나연제려야사(惠秀那連提黎耶舍)이고, 햇수가 이보다 좀더 많은 이는 아희나단도개(阿喜那單道開)이며, 징관(澄觀)이 1백 2세, 이조(二祖) 혜가(慧可)가 1백 7세, 영탄 일조(靈坦日照)가 1백 8세, 백승광 법장(帛僧光法藏)이 1백 10세, 나란타사(那蘭陀寺)의 계현(戒賢)이 1백 11세, 불도징(佛圖澄)이 1백 17세, 도방(道房) 조주(趙州)의 종심(從諗)이 1백 20세, 숭악(嵩岳)의 혜안(慧安)이 1백 28세, 승감승군행준도선(僧椷僧群行遵道仙)이 1백 30세, 이보다 1세가 더 많은 이가 이조(二祖) 아난(阿難), 광주(廣州)의 원명(圓明)이 1백 38세, 동토(東土)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1백 50세, 원적(圓寂)이 1백 55세, 보리류지(菩提流志)가 1백 56세, 삼장 발달라(三藏鉢怛羅)가 2백 70세, 승경법희(僧景法喜)가 3백여 세, 순타 삼장(純陀三藏)이 6백 세, 걸가국(磔伽國)의 대림보살(大林菩薩)이 7백 세, 중천축(中天竺)의 달마국다(達摩掬多)가 8백 세, 서축(西竺)의 장이(長耳)가 1천 세, 서천(西天)의 보장(寶掌)이 1천 72세였다. 그러나 불법(佛法)에서는 장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깨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깨치기만 한다면 7세에 깨쳤던 용녀(龍女)의 나이도 적은 것이 아니요, 깨치지 못하면 억겁(億劫)의 수를 누리더라도 많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전경(轉經)】 양신(楊愼)의 《단연총록(丹鉛總錄)》에 “당시복완(唐詩服玩)을 상고하건대 ‘어떤 중[僧]이 수집 전경했다.’ 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이 글을 베껴 쓰는 것을 전경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서방(西方)의 풍속은 죽은 사람을 천도(薦度)하는 데 있어, 규목(規木)과 원목(圓木)으로 두 개의 수레바퀴 모양을 만들어, 하나는 범전(梵篆)으로 빈서(牝書)를 쓰고 하나는 범전으로 모서(牡書)를 쓰는데, 빈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모서는 밖에서 안으로 향한다. 빈륜(牝輪)은 아래에 놓고 모륜(牡輪)은 위에 놓은 다음 기계(機械)로 원형(圓形)으로 굴리는데, 삼먁모태(三藐母駄)란 것이다. 내가 아주(雅州)를 지나다가 서역의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의 말이 이러하였다. 그들의 글도 중국과 같은 것이 있으니, 국(國) 자의 경우 구(口) 자와 대(大) 자를 따라 쓰되, ‘’은 모서이고 ‘’는 빈서이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지금 연도(燕都)의 인수사(仁壽寺)에서 라마승(喇嘛僧)이 송경(誦經)할 때 사용하는 목종(木鐘) 하나가 있어 용문(龍文)이 그려졌는데, 이 종은 쉬지 않고 한없이 자전(自轉)하다가 송경이 끝나면 종도 저절로 그치니, 이것이 바로 옛날 전경의 유가 아닌가 한다.
【전륜장(轉輪藏)】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에 이르기를 “양(梁)의 부대사(傅大士)를 혹은 선혜대사(善慧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라고도 하는데, 이름은 흡(翕), 자는 현풍(玄風)이다. 이가 처음 전륜장(轉輪藏)을 만들었는데, 큰 층감(層龕) 한가운데다 기둥 하나를 세운 다음 8면(面)의 문을 열어놓고 모든 경(經)을 채워 놓았으니, 이것을 전륜장이라 한다.” 하였다.
【초학 타좌(初學打坐)】 석서(釋書)에 초학의 타좌법이 있는데, 보드라운 자리를 두껍게 깔고 헐렁한 옷차림에 허리띠를 푼 다음, 결가부좌(結跏趺坐)나 혹은 반가부좌(半跏趺坐)하여 허리ㆍ척추ㆍ머리ㆍ목의 뼈가 서로 버티게 하고, 귀는 어깨와, 코는 배꼽과 서로 마주 보도록 앉아, 허리ㆍ등성이ㆍ입술ㆍ이[齒]가 서로 잘 접착되게 하며, 눈은 약간 떠야 하고 완전히 감아서는 안 된다. 만일 완전히 감을 경우에는 졸음이 쉬 올 염려가 있다. 몸은 반드시 곧고 반듯하여 그 모습이 부도(浮屠)와 같아야 하고 앉기는 편안히 하여 자연스럽게 해야 하며 호흡은 코로 하되, 거칠거나 빠르거나 오래 멎거나 꽉 막아서는 안 되므로 내쉬고 들이쉬는 데에 모름지기 면면히 이어지게 해야 하는데, 어디까지나 억지로 하여서도 안 된다. 이리하여 일체 선악(善惡)에 대한 사량(思量)을 죄다 끊은 다음 염(念)하는 것을 곧 각(覺)으로, 각하는 것을 곧 무(無)로 하여 오래오래 지나가면 염할 나위도 없이 저절로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출정(出定) 할 때에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서 편안한 자세로 일어나야 한다. 만일 이 뜻을 터득하면 사대(四大)가 경쾌해지므로 이것이 이른바 안락법(安樂法)이다. 상고하건대, 이것이 바로 선가(禪家)의 입정술(入定術)이다. 도가(道家)에서도 이렇게 하는데, 이것이 곧 호수법(互修法)이다.
불법(佛法)에 좌선(坐禪)에 대한 세 가지 법이 있다. 불설(佛說)에 “항상 스스로 깨달아서 사상(思想)을 끊어버리고 혼침(昏沈)한 데 빠져들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며, 외부의 것은 내부에 들여오지 않고 내부의 것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을 좌라 하며, 외부의 어떠한 감촉에도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좌라 한다.” 하였다.
【백골관(白骨觀)】 진계유(陳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에 “백골관법(白骨觀法)은 곧 선가(禪家)의 조그마한 술(術)이다. 즉 ‘오른쪽 발의 엄지발가락에 종기가 나 문드러져서 농(膿)이 흘러나와 점점 정강이를 거쳐 무릎을 지나 허리에까지 이르고, 왼쪽 다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되며, 이어서 점점 농이 더 흘러 허리와 배ㆍ가슴을 지나 목과 이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문드러져 버리고 백골(白骨)만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백골 밖에 없다는 것을 역력히 관(觀)하여 한 부분도 빼놓지 않는다. 이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관한 지 얼마 뒤에는 다시 ‘백골을 관하는 자는 누구이며 백골은 또 무엇이냐.’고 생각한다면, 육체와 나는 언제나 두 가지로 분리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어 ‘백골도 점점 나와 분리되어 처음에는 1장(丈)쯤 분리되어 가다가 나중에는 5장ㆍ10장 내지 백장ㆍ천장까지 분리되어 간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백골까지도 나와 아무런 관계가 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계속해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와 육체는 본디 두 가지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내가 잠시 이 육체 안에 의탁해 있을 뿐, 어찌 이 육체가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아서 내가 항상 그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를 알게 된다. 이같이 해야만 그 죽고 삶이 천지와 동일할 수 있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좌선 입정(坐禪入定)은 바로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과 생각나는 것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곧 신(神)이 형(形)에서 가벼이 여의는 것을 힘쓰는 것이니, 그 이치가 도가(道家)와는 다르다. 도가는 형과 신이 서로 합하게 하고 석씨는 형과 신이 서로 여의게 한다. 불가(佛家)에 백골관이 있는데, 맨 처음에 ‘이 육체는 한 점(點)의 정기(精氣)에서 비롯하여 점점 임신(妊娠)을 거쳐 뱃속에서 자라 출생한 다음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노쇠한 시절, 병들어 죽은 시절을 거쳐, 시체가 퉁퉁 불어났다가 바싹 말라버리고 이어 오래되면 백골로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이미 백골이 되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나면 자기 몸을 항상 마치 백골처럼 여기게 된다. 이는 마음이 육체를 버리고 이탈해서 조금이라도 연연하는 근심거리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이는 석씨의 공부 중에 가장 하급이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이상의 말 대로라면 백골관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겠다.
【불씨(佛氏)의 오계(五戒)】 살생(殺生)하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사음(邪淫)하지 않는 것, 망언(妄言)하지 않는 것, 음주(飮酒)하지 않는 것이다.
【육바라밀(六波羅密)】 바라밀승(波羅密僧)은 피안(彼岸)에 이른 이를 말하고, 육바라밀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이다.
【십악(十惡)】 몸의 세 가지[身三]인 살(殺)ㆍ도(盜)ㆍ음(淫), 입의 네 가지[口四]인 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어(妄語)ㆍ기어(綺語), 뜻의 세 가지[意三]인 질(嫉)ㆍ에(恚)ㆍ치(痴)이다.
【삼생(三生)】 불경(佛經)에 의하면, 과거(過去)ㆍ현재(現在)ㆍ미래(未來)를 삼생이라 하였다.
【삼세(三世)】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다.
【육통(六通)】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안통(神眼通)ㆍ신이통(神耳通)ㆍ혜안통(慧眼通)ㆍ혜이통(慧耳通)이다.
【선(禪)의 삼종(三宗)】 종밀(宗密)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 “첫째는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 둘째는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셋째는 진현심성종(眞顯心性宗)이다.” 하였다.
【교(敎)의 삼종】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에 “첫째는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 둘째는 밀의파상현성교(密意破相顯性敎), 셋째는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이다.” 하였다.
【벽지(辟支)와 탑(塔)】 벽지는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서 독각(獨覺)이라 하였고, 탑은 곧 부도(浮屠), 또는 부도(浮圖)라고도 하는데, 정각(淨覺)이라는 것이다. 불설(佛說)에 “이것은 마음을 전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부도라 한다.” 하였으니, 즉 탑이다.
진자정(陳子鼎)이 말하기를 “운남(雲南)의 영취산(靈鷲山)에 수많은 사찰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대개 천축국(天竺國)의 영역(領域) 안에 있다. 이곳은 옛날 아육왕(阿育王)의 봉강(封疆)으로 그가 일찍이 8만 4천 개의 탑을 세웠고 대리석으로 된 탑기(塔基)도 수백 개나 되었는데, 모두가 그의 구지(舊址)이다. 송(宋) 나라 건덕(乾德 송 태조(宋太祖)의 연호, 963~968) 2년에 사문(沙門) 3백 명에게 조칙하여 천축국에 들어가서 사리(舍利) 및 범서(梵書)를 구해오게 한바, 개보(開寶 송 태조의 연호, 968~976) 9년에 비로소 그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기록해 놓은 노정기(路程記)에 ‘외봉(巍峯)ㆍ계족산(鷄足山)ㆍ우바국다석실(優婆掬多石室)ㆍ왕사성(王舍城)ㆍ취봉(鷲峯)ㆍ아난반신사리탑(阿難半身舍利塔)ㆍ필발라굴(畢鉢羅窟)이 있다.’ 했다.” 하였으니, 지금 상고하건대, 모두가 대리국(大理國)의 고적(古蹟)이다. 대개 그 당시 서번(西番)을 경유하여 천축국에 들어갔다가 되돌아 동쪽으로 대리국에 도착한 것은 남조(南詔)가 이미 몽씨(蒙氏)의 땅이 되어서 검촉(黔蜀)의 길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백고통(白古通)》에 “석가(釋迦)가 이해(洱海)에 있으면서 여래(如來)의 자리를 증득(證得)하였다.” 했고, 불전(佛典)에는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서로 일치한다. 또 석가가 죽을 당시에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있다가 뒤에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계족산과 영취산은 서로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데다 필발라굴(畢鉢羅崛)의 사리탑(舍利塔)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니, 《통기(通紀)》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오선록(吳船錄)》ㆍ《구당서(舊唐書)》가 모두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불국(佛國)이라는 것은 곧 전남(滇南)의 이해(洱海)에 있는 나라로, 8월달 밤에는 바다에서 산호수(珊瑚樹)가 나서 두어 길의 높이로 자라는데 어부들은 다 볼 수 있으며, 금사강(金沙江)의 양쪽 언덕은 모두 백사(白沙)인데 불서(佛書)에 이른 항하사(恒河沙)가 바로 이것이다.
청(淸) 나라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내가 경오년에 금릉(金陵)에 있으면서 장간(長干)의 승사(僧舍)에서 글을 읽었는데, 하룻밤에는 탑(塔)에서 방사(放射)되는 광채를 보았다. 처음에는 하나의 실낱 같은 빛이 탑문(塔門) 안에서 계속 나오다가 점차 각 문에서까지 다 빛이 나더니, 그 빛이 더욱 많아지고 더욱 빛나면서 동시에 각 문으로 뿜어내었다. 이 탑은 9층으로 층마다 문이 8개씩인데, 층마다 문을 4개씩 닫아 놓았으므로 9층 가운데 열린 문을 계산해 보면 모두 36개이다. 이 36개의 문에 오색(五色)으로 가닥이 진 36개의 금광(金光)이 나와서 층층이 서로 이어져 맨 꼭대기 층에까지 달하였고, 그 금광 한가운데에는 석가존상(釋迦尊像)이 각기 1좌(座)씩 나타났는데 연화(蓮花) 위에 앉은 모습으로 상(相)ㆍ호(好)가 광명하고, 당번(幢幡)과 보개(寶蓋)에는 향화(香花)가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은 진정 내가 목격한 것이다. 옛말에 ‘당승(唐僧)이 구해온 사리(舍利)를 탑 속에 넣어 두었던바 그 사리가 이따금 빛을 방사하는데, 그 모양이 진정 한 가지뿐이 아니었다.’ 하는데, 내가 본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서울의 원각사(圓覺寺) 탑은 한성부(漢城府) 대사동(大寺洞)에 있는데, 바로 이곳이 고려 시대 조계종(曹溪宗) 원각사(圓覺寺)의 유지(遺址)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탑은 원(元) 나라 때에 공주(公主)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연경(燕京)에서 조각한 것을 우리나라에 시사(施捨)한 것인데, 무릇 10층쯤 되고 네 귀퉁이의 돌은 모두 옥(玉)에 다음가는 돌이었다. 탑 전면(全面)에는 불상(佛像)ㆍ운기(雲氣)ㆍ규룡(虯龍)ㆍ영산회(靈山會)의 상(相)이 조각되었는데, 극히 정교하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구가 여기에 불을 놓아 태운 다음 철삭(鐵索)으로 탑신(塔身)을 묶고 끌어당겨 헐어버렸으므로, 지금 몇 층은 탑신 옆에 내려져 있다. 내가 일찍이 중제(仲弟) 및 친구 몇 사람과 함께 그 탑 밑에 가서 그 고적(古蹟)을 완상해 보니, 탑 맨 아래 제1층 동쪽 면(面)에 이 본탑(本塔)과 생김새가 똑같은 탑 하나를 조각해 놓았는데 불꽃이 한창 치솟아 오르는 모양이었고, 또 그 곁에는 몇 사람이 쇠투구[鐵兜]에 철삭을 묶어 가지고 탑 꼭대기에 씌운 다음 그를 끌어당겨서 헐어내리는 모양이 조각되었다. 아마 이 탑을 조각할 때에 이 탑이 왜구들에 의해 불타버릴 것을 미리 알고서 그런 모양들을 조각해 놓았는지, 마치 도참(圖讖)처럼 하나하나가 다 들어맞았으니, 역시 탑으로서는 이상한 것이다.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의 회암사(檜巖寺) 탑은 고려 때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말엽에 포천(抱川) 사람, 용문(龍門) 조욱(趙昱)의 후예인 조기(趙其)가 무뢰한 몇 사람과 함께 이 탑을 헐고 보물들을 훔쳐갔는데, 그 안에 순금소불(純金小佛) 6구(軀)와 순은소불(純銀小佛) 33구가 있었고, 옥함(玉函)에는 송(宋) 나라 때 송설재(松雪齋) 조맹부(趙孟頫)가 필사한 불경(佛經) 1박(縛)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곧 명주베에 쓴 금니서(金泥書)였다. 중들이 그 도굴범들을 관아에 고발하여 관아에서 그들을 체포해 가두었는데, 당시 재상(宰相)이던 번암(樊菴) 채제공(蔡濟恭)이 그 죄수들을 풀어주고 금불(金佛)ㆍ은불(銀佛)을 징수해 보니 금불 몇 구는 이미 용화(熔化)시켜버렸고, 아울러 자앙(子昂 조맹부(趙孟頫)의 자)의 진적(眞蹟)도 추심해보니 여러 장이 없어졌다. 이래서 헐어진 탑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절은 이미 텅 비어버리고 탑만 우뚝하게 서 있다. 탑 곁에는 나옹(懶翁)ㆍ무학(無學)ㆍ지공(指空)의 비(碑) 및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이 탑 역시 다른 탑과는 특수하다. 송도(松都)의 경천사(敬天寺) 탑도 국중에서 유명한 것이다.
【석가세존고행상(釋迦世尊苦行像)】 왕세정(王世貞)의 석가세존고행상송(釋迦世尊苦行像頌)에 “수많은 겁(劫) 이전에는 향적여래(香積如來)였었다는데 지금 어째서 아직도 배우는 자리[學地]에 있으며, 마야부인의 뱃속에서 제천(諸天)의 옹호를 받으면서 설법을 했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사리시(闍黎侍) 하나도 없으며, 도솔궁(兜率宮)에서 상묘(上妙)의 천식(天食) 공양을 받았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겨우 가사(袈娑) 한 벌에 밥 한 그릇뿐이며, 장륙금강(丈六金剛)은 무너지지 않는 법신(法身)이라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파리하며, 인간 세상에 태어날 적에 두루 7보(步)를 거닐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두 다리가 마치 매어 놓은 것과 같으며,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자기만이 높다고 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묵묵하게 이(咦) 1자(字)도 말하지 않는지. 끝내는 누가 옳고 그른지 모르겠다.” 하였다.
【여래성도상(如來成道像)】 왕세정의 여래성도상송(如來成道像頌)에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명성(明星)이 출현하던 때에 갑자기 깨치니, 별천지(別天地)가 생겨나고 대삼천계(大三千界)가 모두 발 밑에 깔려 있으며, 아승기겁(阿僧祇劫 무수(無數)의 겁(劫)의 뜻)이 전부 다 한눈에 들어왔다. 수보리(須菩提)와 제석(帝釋)은 다 크게 기뻐하여 법륜(法輪)을 가지고 때로 이르는데, 파순(波旬)만은 빨리 열반(涅槃)에 들기를 요청하면서 ‘나의 마사(魔事)를 방해하지 말라.’ 하였으니, 참인지 거짓인지. 아, 끝내는 파순도 그렇고 운문(雲門)도 그렇다.” 하였다.
【십지보살(十地菩薩)】 《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십지보살은 ‘마혜수라(摩醯首羅)’라는 이름을 가진 천신(天神)인데, 일념(一念)으로 삼천세계(三千世界)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를 알므로, 용왕(龍王)이 비를 내릴 때는 이 마혜수라가 그 빗방울의 수를 죄다 헤아린다고 하였다.
【우담화(優曇花)】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부처가 세상에 나오기 어려운 것이 마치 우담화가 피기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무화과(無花果) 나무에서 꽃이 피기 만큼 어렵다는 데 비유한 것이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는, 우담화는 천 년 만에 한번 꽃이 핀다고 한다.
【장생전(長生田)】 동기창(董其昌)의 호주 복산 인수원 장생전 기(湖州福山仁壽院長生田記)에 “세상에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물건이 없는데, 장생전이 있다고 하니 옳은 말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생전이 중[僧]에게만은 꼭 있다. 대개 사바세계(娑婆世界) 밖에는 향적사(香積士)가 있고 반라(飯籮) 가에는 굶어죽은 사람도 많은데, 이 밭은 정전(情田)도 아니요 식전(識田)도 아니다. 이는 곧 위음왕(威音王)이 준 것이요 불조(佛祖)가 전등(傳燈)한 것이다. 보리(菩提)로 종자(種子)를 삼고 정진(精進)으로 농기구(農器具)를 삼고 노지백우(露地白牛)로 일꾼을 삼아, 1백 유순(由旬)의 넓은 땅을 갈면서 밭 경계도 나누지 않고 미래(未來)의 억겁세계를 거치면서 주인도 바꾸지 않으며, 앙산(仰山)이 벼를 베고 조주(趙州)가 의발(衣鉢)을 씻은 바가 다 이 물건이다. 옛날 석옥노인(石屋老人)이라는 이가 인수원(仁壽院)에서 이 뜻을 선양하여 석사(石嗣)가 사는 곳을 보방(寶坊 절의 미칭(美稱))으로 만들었는데, 나쁜 무리가 수백의 군중을 거느리고 떼를 지어 식륜(食輪)만 늘 추진하므로 법도(法道)가 쇠해지고 탐욕(貪欲)을 깨뜨리기 어렵게 되어, 천인(天人)의 공불(供佛)이 끊어지고 꽃 머금은 새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의중상인(宜中上人) 적감(寂鑑)이라는 이가 있어 계행(戒行)이 엄정하고 원력(願力)이 견고하여, 약간의 밭을 모으고 돌에 새겨 사실을 기록하여 영원히 후세에 남기었다. 대저 구주(九州)의 밭 중에 호주(湖州)가 소유한 것이 그 얼마나 되며, 호주의 밭 중에 인수원(仁壽院)에서 소유한 것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능곡(陵谷) 또한 봉래(蓬萊)에 있고 강산(江山) 또한 화서(禾黍)를 슬퍼하는데, 상인(上人)이 어찌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뜻에 어둡겠는가. 혹시라도 석옥노인(石屋老人) 같은 큰 선지식(善知識)이 있으면 모셔다가 이 산에 머무르게 하고 법석(法席)을 널리열어 무생인(無生忍)을 설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장생전이요 가사(袈裟) 한 쪽을 펴게 하는 것이 바로 끝없는 천맥(阡陌)이다. 상인이 예(禮)를 마치고 가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하였다.
【약왕(藥王)】계환(戒環)의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약왕보살(藥王菩薩)ㆍ약상보살(藥上菩薩) 두 법왕자(法王子)의 말에 ‘우리는 무량겁(無量劫)토록 세상의 양의(良醫)가 되어 입으로 무려 10만 8천 종류나 되는 사바세계의 초목 금석(草木金石)을 맛보았다.’ 했다.” 하였다.
【지옥(地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본래는 8대지옥(大地獄)이나 각기 16개씩의 지옥이 딸려 있어 이를 근변(近邊)이라 하는데, 모두 합하면 1백 36개의 지옥이 된다. 혹은 2백 72개의 지옥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첫째 알부타(頞部陀), 둘째 니랄부타(尼剌部陀), 셋째 알찰타(頞哳吒), 넷째 확확파(臛臛婆), 다섯째 호호파(虎虎婆), 여섯째 온발라(嗢鉢羅)인데 일명(一名)은 청련화(靑蓮華)이고, 일곱째 발특마(鉢特摩)인데 일명은 홍련화(紅蓮華)이고, 여덟째 마하발특마(摩訶鉢特摩)인데 일명은 대홍련화(大紅蓮華)이다. 이상의 지옥은 매서운 추위가 엄습하는 곳이기 때문에 팔한지옥(八寒地獄)이라 한다. 첫째 등활(等活), 둘째 흑승(黑繩), 셋째 중합(衆合), 넷째 호환(嘷喚), 다섯째 대호환(大嘷喚), 여섯째 초열(焦熱), 일곱째 대초열(大焦熱), 여덟째 무간(無間)인데 일명은 아비(阿鼻)이다. 이상의 지옥들은 매서운 더위가 엄습하는 곳이기 때문에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 한다. 일본(日本)에도 지옥이 있는데, 모두가 높은 산마루에 있다. 이들 산마루에는 항상 불이 이글이글하여 온천(溫泉)이 끊이지 않는다. “천축국(天竺國)이나 중국의 높은 산에도 다 지옥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온천(溫泉)이 흐르고 불꽃이 발발하는 산을 속칭 지옥이라 한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지옥에 대한 설이 옛적에는 전혀 없었는데,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 윤회(輪回)ㆍ보응(報應)의 설이 있게 됨에 따라 지옥의 설도 있게 된 것이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지옥에 대한 설이 송옥(宋玉)의 초혼편(招魂篇)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나오는 장인(長人)이나 토백(土伯)야차(夜叉)나찰(羅刹)의 무리이고 난토(爛土)뇌연(雷淵)도산(刀山)검수(劍樹)의 지옥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문인(文人)의 우언(寓言)이기는 하지만 뜻이 그럴싸하다. 그래서 위진(魏晉) 이후의 문인들이 그 말을 부연하여 석씨(釋氏)의 글에다 부합시켰다. 옛날 송(宋) 나라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염입본(閻立本)이 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를 그렸는데,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이 그것을 얻어서 도리어 더 심하게 부연시켜 놓았다.’ 하였으니, 실은 송옥의 글이 그 허수아비[俑]가 되었던 것을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오잡조(五雜組)》에 “사람이 죽어서 염라왕(閻羅王)이 된 이로는 한금호(韓擒虎)ㆍ채양(蔡襄)ㆍ범중엄(范仲淹)ㆍ한기(韓琦) 같은 이들이 전기(傳記)에 누누이 나타나 있고, 근세의 해 서(海瑞)ㆍ조용현(趙用賢)ㆍ임준(林俊) 같은 이들도 다 어떤 사람이 저승[冥間]에서 그들을 보았다 한다.” 하였다.
불경에 의하면, 명부(冥府)에는 선악(善惡)의 장부(帳簿)를 두어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복적(福籍)에 기록하기 때문에 선근(善根)을 심은 자를 복전(福田)이라 하au,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일체중생이 지옥에 떨어져서 모진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제도(濟度)할 것을 서원(誓願)하고, 늘 지옥에 가서 육환장(六環杖)를 휘둘러 옥문(獄門)이 열리면 신수(神水)로써 고통받는 중생을 씻어주고 잇따라 업풍(業風)을 불어 형체를 이루어 준다고 한다.
【지옥시왕(地獄十王)】 불경 중에 《시왕경(十王經)》이 있는데, 이 시왕 중 염마왕(閻摩王)은 혹 염마라(閻摩羅)라고도 하고 또는 가운데 글자를 생략하여 염라(閻羅)라고도 하니, 이를 번역하면 쌍왕(雙王)이다. 《우란분기(盂蘭盆記)》에 이르기를 “오라버니와 누이동생이 모두 지옥주(地獄主)가 되었는데, 오라버니는 남자에 대한 일을 다스리고 누이동생은 여자에 대한 일을 다스리기 때문에 쌍왕이라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시왕경》의 시왕 중, 첫째는 진광왕(秦廣王) 부동(不動), 둘째는 초강왕(初江王) 석가문불(釋迦文佛), 셋째는 송제왕(宋帝王) 문수(文殊), 넷째는 오관왕(五官王) 보현(普賢), 다섯째는 염마왕(閻摩王) 지장(地藏), 여섯째는 변성왕(變成王) 미륵(彌勒), 일곱째는 대산왕(大山王) 약사(藥師), 여덟째는 평등왕(平等王) 관음(觀音), 아홉째는 도시왕(都市王) 세지(勢至), 열째는 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 아미타(阿彌陀)인데, 오도(五道)는 곧 지옥도(地獄道)ㆍ아귀도(餓鬼道)ㆍ축생도(畜生道)ㆍ인도(人道)ㆍ천도(天道)이다.
【사자좌(獅子座)】 불서(佛書)에 이르기를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방장(方丈)은 3만 2천의 사자좌를 수용할 수 있어, 제삼선천(第三禪天)인 변정천(遍淨天)의 사람 60명이 함께 침두(鍼頭)에 올라앉아 설법을 들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는 마치 경(經)의 주설(注說)에 “염부리(閻浮提)에다 침봉(針鋒) 하나를 세워놓고 도솔천(兜率天)에서 겨자씨[芥子] 하나를 굴러내려 이 겨자씨가 침봉에 꽂히도록 한다.”는 뜻과 같은 예(例)이다.
【목어(木魚)와 건치(犍稚)】 상고하건대, 지금 사찰에 달아놓은 목어(木魚)에 대해, 석씨(釋氏)가 이르기를 “염부리(閻浮提)는 곧 거오(巨鰲)의 등에 실린 곳으로, 거오가 가려움증이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게 되면 산이 따라 진동하기 때문에 그 거오의 형상을 본떠 달아놓고 치는 것이다.” 하였고, 《석씨요람(釋氏要覽)》에는 이르기를 “종(鐘)ㆍ경(磬)ㆍ석(石)ㆍ판(板)ㆍ목어(木魚) 등 두들겨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대중을 집합시킬 수 있는 것을 모두 건치(犍稚)라 한다.” 하였다.
【독고(獨鈷)】 석전(釋典)에 의하면, 독고(獨鈷)ㆍ삼고(三鈷)ㆍ오고(五鈷)를 금강저(金剛杵)라 하는데, 진언종(眞言宗)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승복(僧服)】 가사(袈裟)에 대해, 양신(楊愼)이 말하기를 “가사를 수전의(水田衣), 도와의(稻哇衣)라고도 한다.” 하였고, 내전(內典)에는, 가사(毠㲚), 또는 소요복(逍遙服)ㆍ무진의(無塵衣)라고도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무구의(無垢衣), 또는 이진의(離塵衣)ㆍ공덕의(功德衣)ㆍ대의(大衣)ㆍ승가리(僧伽梨)라 명명하였다.
《원시비서(原始祕書)》에 상고해보면 “당(唐) 나라 무후(武后) 조(曌)가 풍소보(馮小寶)를 총애하여 그를 중[僧]으로 만들고 이름을 설회의(薛懷義)라 하여 양국공(梁國公)을 봉하였기 때문에 의(衣)와 모(帽)를 모두 조복(朝服) 모양에 맞추어, 직철(直綴)이니, 편삼(偏衫)이니, 관의(寬衣)니 이름한 데다 금수(錦繡)를 더 넣고는, 살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겨 가사(袈裟)를 더하고 발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신을 신도록 하였다. 관(冠)은 오복(五福), 또는 비로(毗盧)라고 하는데, 혹은 팔보(八寶)로 장식하고 금옥(金玉)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무릇 불상(佛像)을 그리는 데 있어 당상(唐像)이니, 범상(梵像)이니 하는 설이 있게 된 것이 무후(武后)에게서 비롯되었다.” 하였다.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에 “중들이 입은 옷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안타회(安陀會)인데, 즉 5조(條)의 하품의(下品衣)로 명칭을 행도(行道)라고도 하고 또는 무츤신등의(務襯身等衣)라고도 한다. 둘째는 울다라승(鬱多羅僧)인데, 즉 7조의 중품의(中品衣)로 입중설법의(入衆說法衣)라고도 한다. 셋째는 승가리(僧伽梨)인데, 즉 9조 내지 25조의 상품의(上品衣)로 복전의(福田衣)라고도 한다. 이 복전의는 곧 수전(水田)에서 곡식이 나는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궁성(宮城)이나 마을에 들어갈 때에 곧 이 옷을 입는다.” 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라마승(喇嘛僧)은 곧 서장(西藏)의 번승(番僧)인데, 이들은 모두 붉은 선의(禪衣)를 입고 누른 죄계관(左髻冠)을 쓰고 팔뚝을 드러내고 맨발인데다 손발에는다 사슬을 채우고 귀에는 금고리를 달고 팔뚝에는 용 무늬[龍文]를 자자[刺]하였다. 대보법왕(大寶法王)은 황색보로(氆氌 양털로 짠 모직물)로 된 관을 썼는데, 말 갈기 같은 털이 달렸고 모양은 마치 가죽신처럼 생겨 높이가 두 자 남짓하며, 또 금으로 짠 선의(禪衣)를 입었는데, 소매가 없이 왼쪽 어깨에 걸쳐 온몸을 옷으로 쌌다. 그리고 옷깃 오른쪽 겨드랑 밑으로 오른 팔뚝을 드러내었다. 반선(班禪)은 금 삿갓[金笠]을 쓰고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다.” 하였다.
유 득공(柳得恭)의 《난양록(灤陽錄)》에 “서장(西藏)의 중들은 옷 색깔을 누르게도 하고 붉게도 하는데, 누른 빛을 아주 보배로 여긴다. 그 옷의 생김새는 깃만 있고 소매는 없는데, 어깨에 걸쳐 등을 가리고는 두 팔뚝으로 여미고 다닌다. 이 옷이 마치 우리나라의 천의(薦衣)라는 것과 흡사하다. 천의는 화음(華音)으로 선의(禪衣)라는 것인데, 서장의 중들을 본받아 왔던 원(元) 나라 풍속을 고려(高麗)가 또 그를 본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관(冠)은 마치 조그마한 포단(蒲團)처럼 생겼는데, 황색으로 물들인 양모(羊毛)가 여기저기에 장식되어, 머리에 쓰면 머리털이 헝클어진 것과 같이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승모(僧帽)에 곡갈(曲葛)이 있고, 승립(僧笠)에 굴립(屈笠)ㆍ약립(蒻笠)ㆍ송락(松絡)이 있고, 승의(僧衣)에 장삼(長衫)ㆍ주차이(周遮衣)가 있다.” 하였다.
【화만(華鬘)】 석전(釋典)에 의하면, 화만은 본디 서역(西域)에 사는 여인(女人)들의 수식(首飾)이었는데,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에도 혹 씌운다고 하였다.
【여의(如意)】 이는 마음의 표신(表信)이기 때문에 보살(菩薩)들이 다 갖는 것인데, 모양은 마치 운엽(雲葉)처럼 생겼고, 또는 전서(篆書)의 심(心) 자와 같기도 하다. 《수다라요의경(修多羅了義經)》에 “마니(摩尼)는 곧 여의(如意)라는 것이다.” 하였다.
【석장(錫杖)】 석도(釋徒)들이 뱀 같은 것들을 물리치기 위해 짚는 것이다.
【수주(數珠)】 일명(一名)은 염주(念珠)인데, 백 8개이다. 서역(西域)에서는 사람의 지골(指骨)이나 상황(象璜)으로 만들어서, 진언(眞言)을 외거나 불호(佛號)를 염(念)할 때 그 수를 헤아리는데, 중들은 이를 보리주(菩提珠)라 한다. 원숭이가 이 수주를 보면 근심을 하므로, 승(僧)이나 니(尼)가 다 목에 걸어서 가슴에 드리운다.
【범패(梵唄)】 승 적지(僧適之)의 《금호자고(金壺字考)》에 “범패의 음(音)은 범패(范敗)인데, 선음(禪音)으로 읊는 소리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의 사문(沙門)은 이를 인도(引導)라 이름하는데, 마치 세속(世俗)의 장가(長歌)와 같은 것이다.
먼저 중이 되었다가 뒤에 머리를 기르고 벼슬한 사람으로는,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篇)》에서 말한 송(宋) 나라 탕혜휴(湯惠休), 당(唐) 나라 가도(賈島)ㆍ송경(宋京)과 우리나라의 곽진경(郭震卿)이다. 먼저 벼슬하다가 뒤에 머리 깎고 중이 된 사람으로는 남제(南齊)의 유협(劉勰), 양(梁) 나라 유지린(劉之遴)ㆍ장찬(張纘), 송 나라 요덕조(饒德操)인데 모두가 명사(名士)이며, 명(明) 나라 방이지(方以智)도 명사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에 승달(僧炟)이 있다.
먼저 니(尼)가 되었다가 뒤에 황후(皇后)가 된 여인은 당(唐) 나라 무후(武后) 조(曌)이다.
【도첩(度牒)】 무릇 평민(平民)으로서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는 데는, 관(官)에서 도첩을 주어야만 머리를 깎을 수 있다.
【축발(祝髮)ㆍ계도(戒刀)】 축발은 곧 치발(薙髮)의 뜻이요 치발은 곧 민둥머리가 되도록 머리를 깎는다는 것인데, 머리를 깎은 후에 계(戒)를 받는다. 《물리소지(物理小識)》의 척두불용도법(剔頭不用刀法)에 “석황(石黃)ㆍ석회(石灰)ㆍ유황(硫黃) 각 1돈[錢]을 곱게 분말하여 물에 타서 머리에 발라 1시간쯤 지난 다음에 빗[抿子]만 가지고 긁어내리면 머리가 곧 다 깎여진다.” 하였다.
【응량기(應量器)】 혹은 양기(量器)라고만 칭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곧 중의 발우[鉢]이다. 《능엄경(楞嚴經)》에 “아난(阿難)이 응기를 가지고 성(城) 안에 들어가 차례로 행걸(行乞)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것이 곧 응량기이다.” 하였다. 《목련경(目連經)》에도 나타나 있다.

총론(總論)

도가(道家)의 서적은 주(周) 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한대(漢代)에 성하고 진(晉)ㆍ당(唐) 시대에 극치를 이루었으며, 석씨(釋氏)의 서적은 한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양대(梁代)에 성하고 수(隋)ㆍ당 시대에 극치를 이루었다. 이 모두가 남송(南宋) 시대에 와서 조금 뜸해졌다가, 석씨는 다시 원대(元代)에 와서 극성하여졌고, 도교 역시 그럴싸하게 전개되었으나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또다시 약세를 보였다.
유흠(劉歆)의 《칠략(七略)》에는 석씨를 논한 것이 없고 왕검(王儉)ㆍ임방(任昉)의 석전(釋典)은 다 위작(僞作)이며,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은 석(釋)ㆍ도(道) 2가(家)를 별도로 기록하였고,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도 대략 그와 같다. 《신당서(新唐書)》경적지에서는 이를 자가(子家)의 끝에 붙였고 《통고(通考)》에서는 이를 따라 편성하였다. 대체로 도가는 본디부터 구류(九流)에 들어 있으니, 석전만이 별도로 열거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도장(道藏)과 석장(釋藏)은 편질(篇帙)이 매우 많고 또 본디 방외(方外)의 학설이고 보면 문류(門類)를 나누어 별도로 기록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니 《신당서》경적지 및 《통고》의 예와 같이만 하여도 타당할 것 같다.
그런데 《구당서(舊唐書)》에는 석전을 수록하지 않았고, 청 나라 때 만든 도서집성(圖書集成)ㆍ사고전서(四庫全書)ㆍ사고회요(四庫薈要)에도 모두 도가ㆍ석가를 수록하지 않았으니, 아무리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치더라도, 역대의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듯싶다. 내가 지금 도가와 석가를 논하는 것은, 세상에서 유가(儒家)ㆍ도가ㆍ석가 삼교(三敎)라 일컬어 마치 솥발[鼎足]처럼 평등하게 여겨온 지 오래이기 때문에, 도가ㆍ석가는 오로지 전고(典考)로만 삼기 위해 이 논을 지은 것이다. 삼교를 논한 것으로 말하자면, 당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삼교론형(三敎論衡)》이 있으며, 안연년(顔延年)의 《삼교주영(三敎珠英)》은 1천 권에 달하도록 많다.
유도(儒道)는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불도(佛道)의 경우는 그 유래가 훨씬 늦은데도 일종의 영혜(靈慧)만으로 어쩌면 그렇게 인물(人物)을 가장 쉽게 감화(感化)시켰는지 모르겠다.
반지항(潘之恒)의 《반당소지(半塘小志)》에 의하면 “치아탑(雉兒塔)은 천불각(千佛閣) 밑에 있고, 옛날 여주(廬州)에는 앉아서 죽은 고양이가 있었고, 협중(峽中 촉(蜀) 지방 삼협(三峽)의 약칭. 구당협(瞿唐峽)ㆍ무협(巫峽)ㆍ서릉협(西陵峽))에는 앉아서 죽은 원숭이가 있었고, 이공택(李公擇 공택은 송 나라 이상(李常)의 자)의 집에는 앉아서 죽은 뱀이 있었고, 위고(韋皐)의 집에는 앵무새[鸚鵡]에게서 사리(舍利)가 나왔고, 영녕현(永寧縣)에서는 서서 죽은 참새가 있었고, 심지어 승 상(僧爽)에게는 설법을 듣는 닭이 있었고, 생공(生公)에게는 설법할 적에 머리를 끄덕거린 돌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하였다.
도보(陶輔)의 《상유만지(桑楡漫志)》에 “유가는 천리(天理)를 순종하는 자이고 도가는 천리를 우회(紆回)하는 자이고 석가는 천리를 벗어나는 자이다.” 하였고, 팽여양(彭汝讓)의 《목궤용담(木几冗談)》에는 “석가에서는 ‘도도(屠刀)만 놓아버리면 당장에 성불(成佛)할 수 있다.’ 하였고, 도가에서는 ‘항상 청정(淸淨)하면 문득 천존(天尊)을 볼 수 있다.’ 하였고, 유가에서는 ‘아무리 하우(下愚)라도 다 요순(堯舜)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였다.
용촌(容村) 이광지(李光地)는 말하기를 “도가의 요지는 정(精)ㆍ기(氣)ㆍ신(神)이고, 불가의 요지는 계(戒)ㆍ정(定)ㆍ혜(慧)이니, 2씨의 요지가 서로 같은 바가 있다. 대개 이른바 도가에서 말하는 양정(養精)은 곧 불가에서 말하는 계이고, 도가에서 말하는 양기(養氣)는 곧 불가에서 말하는 정이고, 도가에서 말하는 양신(養神)은 곧 불가에서 말하는 혜이다. 그러나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도가에서는 비록 신을 말하지만 소중하게 여긴 것은 기이니, 이는 신을 빌어 기를 단련하고 성(性)을 길러 수명을 늘이는 것이요, 불가에서는 비록 기를 말하지만 소중하게 여긴 것은 신이니, 이는 형체를 떠나서 신만 존재시키고 마음을 밝혀서 성을 보는 것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성(性)은 유가에서 말하는 신(神)이고, 도가에서 말하는 명(命)은 유가에서 말하는 기(氣)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심(心)은 유가에서 말하는 의(意)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성은 유가에서 말하는 심이다. 유교(儒敎)의 경우, 그 마음을 바르게 했을 때 그 마음의 소재를 모를 리 없고, 그 뜻을 성실히 했을 때 그 뜻의 소재를 모를 리 없고, 그 기를 기를 때 그 기의 소재를 또한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은 이(理)인데, 이는 곧 성(性)이요 성은 곧 명(命)이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유가의 글은 마음을 간직하고 성을 기르는 학문이고, 도가의 글은 마음을 닦고 성을 수련하는 공부이고, 불가의 글은 마음을 밝히고 성을 보는 요지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유도는 인(人)에 밝은 것이고, 도가는 신(神)에 밝은 것이고, 불가는 귀(鬼)에 밝은 것이다.
진광정(陳光庭)이 말하기를 “한 친구가 ‘삼교(三敎 유(儒)ㆍ불(佛)ㆍ도(道))가 동일한 것인가?’고 묻기에, 내가 ‘동일하다.’ 하였고, ‘어째서 동일한가?’고 묻기에, 내가 ‘목적은 하나같이 인민을 제도(濟度)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한 처사(處士)가 ‘그렇다면 다른 바가 없는데, 왜 꼭 겸해야 하는가.’고 묻기에 내가 ‘공자(孔子)의 집대성(集大成)은 겸하지 않고서도 겸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도가(道家)는 사람을 제도하는 데 있어, 정(精)ㆍ기(氣)ㆍ신(神)을 모아서 영아(嬰兒)로 환원시키기도 하고 자유자재로 왕래하여 하늘에도 나고 땅에도 난다. 그러나 만물이 다 피폐되는 것이거니 어찌 죽지 않는 이치가 있겠는가. 불가(佛家)는 사람을 제도하는 데 있어, 탐진(貪嗔)을 버리고 육체를 벗어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며 하늘과 땅을 밝게 안다. 그러나 만물이 다 내것[我]이거니 어찌 공(空)에 도피할 데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의 교(敎)만은 그와 달라, 임금은 임금 노릇을, 신하는 신하 노릇을,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자식은 자식 노릇을, 남편은 남편 노릇을, 아내는 아내 노릇을 하여, 제각기의 직분에 순종하고 천성(天性)에 따르기를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이것이 곧 장생(長生)이요,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와서 어디에 집착됨이 없으니 이것이 곧 진공(眞空)이다. 성인(聖人)의 도는 천리를 순종하는 것밖엔 아무것도 없다. 어찌 도가나 불가처럼 이러니저러니 하는 잡다한 논설이 있겠는가.’ 했다.” 하였다.

별고(別考)

한(漢) 나라 영평(永平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연호, 58~75) 7년에 명제(明帝)의 꿈에, 몸은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이마가 햇빛처럼 빛나는데다 신장(身長)이 장륙(丈六)이나 되는 사람이 공중을 날아서 전정(殿庭)에 들어왔다. 꿈을 깬 명제가 다음날 이 사유를 부의(傅毅)에게 묻자, 부의가 말하기를 “신(臣)이 듣건대, 서역(西域)에 있는 불경(佛經)이 모두 날아다니는 큰 신통력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폐하의 꿈에 현신한 것입니다.” 하므로, 명제가 깨닫고 즉시 우림랑(羽林郞) 채암(蔡愔), 박사(博士) 진경(秦景)ㆍ왕준(王遵) 등 13명을 서역에 보내어 불법을 들여오게 하였다. 그러자 채암 등 일행이 총령(葱嶺)을 넘어 서역의 천축국(天竺國)에 들어가 불법을 맞아오다가 중로(中路)인 월지국(月氏國)에 이르러, 민둥머리에 방포(方袍)를 걸치고 상모(相貌)가 기이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범승(梵僧)을 만났다. 이에 그들과 함께 각기 백마(白馬)를 타고 석가의 진상(眞像)과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싣고서 동쪽으로 건너와 복명하였으니, 때는 벌써 영평 10년이 되었다. 명제는 매우 기뻐하며 친히 불상을 맞아다가 홍려사(鴻臚寺)에 봉안하는 한편, 도상(圖像)을 그려놓고 청량대(淸涼臺)에 나아가 정례(頂禮)하였으며, 잇달아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하고 이존(二尊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가리킴)에게 요청하여 사원(寺院)에 가서 설법하게 하였다.
이 해 겨울에 가뭄이 들자, 오악도사(五嶽道士) 하정지(賀正之)ㆍ저선신(褚善信) 등 6백 90인이 서로 “황제가 우리의 도교를 버리고 불교만 숭상하니, 마음이 매우 불쾌하다.” 하고는 곧 도중(徒衆)을 거느리고 도경(道經)을 갖고서 경사(京師)에 이르러 표(表)를 올리기를 “불교와 우리 도교를 비교하여 그 진위(眞僞)를 시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명제가 상서령(尙書令) 송상(宋庠)을 시켜, 그들을 장락궁(長樂宮) 앞으로 불러들여 놓고 조칙하기를 “도사(道士)와 승(僧)들은 원소일(元宵日)에 백마사 남문(南門) 밖으로 집합하라.” 하고는 동(東)ㆍ서(西) 양단(兩壇)을 설치해 두었다가 그날에 이르러 시험을 보았다. 그리하여 서단(西壇)에서는 도경(道經)을 불태우는데, 6백여 권이 순식간에 다 타버리고 노자(老子)의 《도덕경》 5천언(言)과《청정경(淸淨經)》 1권만 남았는데, 이 밖에 전하는 도가의 서적은 후세에 두광정(杜光庭)이 찬한 것들이다. 그리고 동단(東壇)에서는 불경을 불태우는데, 《사십이장경》이 조금도 타지 않고 5색(色)의 신광(神光)만이 나타나며 하늘에서는 보화(寶花)가 뿌려지고 선악(仙樂)이 다투어 울렸으므로, 군중들이 다 미증유(未曾有)를 찬탄하였다.
태부(太傅) 장연(張衍)이 모든 도사들에게 이르기를 “시험을 해 보았으나 불법을 이기지 못하였으니, 모두 불법에 귀의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하정지(賀正之)ㆍ저선신(褚善信)은 부끄러움을 통감한 나머지 모두 기(氣)가 차서 스스로 죽고, 혜통(惠通) 등 6백 20인은 모두가 관(冠) 홀(笏)을 내던져 버리고 불가에 투신하였다.
양왕(梁王)의 《불통(佛統)》에 “부처는 동인도(東印度)에서 태어났으니, 그때가 바로 주 장왕(周莊王) 9년 4월 8일이었고, 한 명제(漢明帝) 영평(永平) 8년에 그 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본디 동인도는 사람의 성질이 굳세고 살벌을 좋아하여, 전사(戰死)하는 것을 아주 좋은 일로 여기고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아주 상서롭지 못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노자(老子)가 함곡관(函谷關)을 떠나 부도법(浮屠法)을 만들어 그들을 교화했는데, 남녀가 다 머리를 깎되 신체는 상하지 않게 하여 이를 부도라 하였다. 이어 주 장왕 9년 4월 8일에는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고 별이 비오듯이 쏟아지더니, 이날 밤에 석가가 탄생하였다. 뒤에 그가 노자의 도를 잘 닦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종(宗)으로 삼아 불(佛)이라 호칭하였다. 불이란 곧 중국에서 부르는 신(神)의 호칭이요, 그 다음으로는 보살(菩薩)이 있다. 그 나라는 인종이 번성하여 외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 나라에 왕생(往生)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불교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서역 인도에 파급되었다가 다시 서역 인도를 거쳐 중국에 돌아온 것이니, 이교(夷敎)는 아니다. 노자는 실로 불조(佛祖)이며 불(佛)은 실로 노자의 법을 부연했던 것이다. 신(神)은 곧 불이고 불은 곧 신으로, 다만 중국과 외국의 자음(字音)이 서로 다른 것에 불과하다. 유가(儒家)는 황제(黃帝)의 제자(制字)에서 비롯되어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의 화생(化生)하는 묘도(妙道)를 발달시켰으니, 황제는 실로 유조(儒祖)인데, 어째서 후세에 황제ㆍ노자를 이단으로 치는지 모르겠다.
노자의 아들 종(宗)은 현달하여 가통(家統)을 잘 계승하였고, 석가의 아내인 야수타(耶輸陀)와 아들인 마후라(摩睺羅)는 석가가 죽을 때에 뛰고 울부짖으며 매우 애통해 하였으니, 불도 역시 인륜 도덕을 떠난 외도(外道)는 아니다. 그런데 후세에 나쁜 폐단이 생기어 인륜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단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주D-001]32상(相) : 부처의 몸에 갖춰져 있는 32가지의 표상(表象). 32대장부상(大丈夫相)이라고도 하는데, 이 상을 갖춘 이는 속세에 있으면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출가(出家)하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32상은 예를 들면, 1. 발바닥이 판판한 것, 2. 손바닥에 수레바퀴 같은 금이 있는 것, 3. 손가락이 가늘면서 긴 것 등등이다.
[주D-002]80종호(種好) : 부처의 몸에 갖춰져 있는 훌륭한 것 80가지. 80수형호(隨形好)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1. 손톱이 좁고 길고 엷고 구리빛으로 윤택한 것, 2. 손가락ㆍ발가락이 둥글고 길며 다른 사람보다 고운 것, 3. 손과 발이 제각기 같아서 별로 다름이 없는 것 등등이다. 원전에는 82호(好)로 되어 있으나 80종호의 잘못인 듯하다.
[주D-003]일체종지(一切種智) : 삼지(三智)의 하나. 일체 만법(一切萬法)의 별상(別相)을 낱낱이 정밀하게 아는 지혜, 곧 부처의 지혜를 가리킨다.
[주D-004]겁(劫) : 도저히 연월일(年月日)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가리킨다. 대개 개자겁(芥子劫)과 반석겁(磐石劫)이 있는데, 개자겁이란 둘레 40리 되는 성 안에 개자를 가득 채워 놓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3년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그 개자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요, 반석겁이란 둘레 40리 되는 돌을 천인(天人)이 삼수의(三銖衣)를 입고서 3년마다 한 번씩 스쳐서 그 돌이 다 달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주D-005]미륵(彌勒) : 대승보살(大乘菩薩). 자씨(慈氏)라고도 번역하는데, 중인도 바라내국의 바라문(婆羅門) 집에 태어나 석존(釋尊)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있다가, 석존이 입멸(入滅)한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면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한 뒤에 삼회(三會)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주D-006]삼회(三會) :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나서 화림원(華林園)에 모인 대중을 위하여 세 차례의 큰 법회(法會)를 열고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법장(法藏) : 불교의 경전(經典)을 가리키는 말. 경전의 수많은 법문, 곧 온갖 법의 진리가 갈무리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주D-008]멸도(滅度) : 중의 죽음. 곧 열반(涅槃)과 같은 말로, 생사(生死)의 큰 고난을 없애어 번뇌(煩惱)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다.
[주D-009]정법(正法) …… 말법(末法) : 석존이 입멸한 후에 그 교법과 교법을 실천하는 수행과 수행에 의하여 증득(證得)하는 증과(證果)가 있고 없음을 따라 시대를 3기(期)로 나눈 것. 부처가 멸도한 후 5백 년간을 정법시(正法時)라 하는데, 이 기간은 교(敎)ㆍ행(行)ㆍ증과가 모두 구비한 때이고, 정법시대 이후의 1천 년간을 상법시(象法時)라 하는데, 이 기간은 교와 행은 있으나 증득하는 사람이 없는 때이고, 상법시대 이후 1만 년간을 말법시(末法時)라 하는데, 이 기간은 교법만이 있는 때이다.
[주D-010]업행(業行) : 업(業)과 같은 말로, 몸ㆍ입ㆍ뜻으로 지어지는 말과 동작과 생각하는 것과 그 세력을 말한다. 즉 이 세 가지의 작용에 의하여 선악을 짓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업은 사업(思業)인 의업(意業), 사이업(思已業)인 신업(身業), 구업(口業) 곧 신ㆍ구ㆍ의 3업으로 나눈다.
[주D-011]정거천(淨居天) : 색계(色界)의 제사선천(第四禪天)에 구천(九天)이 있는데, 그 구천 중, 성문(聲聞) 제3과(果)인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證得)한 성자(聖者)가 거주하는 5종(種)의 하늘, 즉 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주D-012]사자후(獅子吼) : 부처의 설법(說法)을 사자의 영각[哮吼]에 비유하는 말이다.
[주D-013]사체(四諦)의 법륜(法輪) : 사체는 사성체(四聖諦)라고도 하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말한다. 체(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으로 고체(苦諦)는 현실의 인생을 고(苦)라고 관하는 것이요, 집체(集諦)는 고의 원인이 되는 애욕(愛欲)과 업(業)이요, 멸체(滅諦)는 깨달을 목표이니 즉 이상(理想)의 열반이요, 도체(道諦)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니 즉 실천하는 수단이다. 법륜(法輪)이란 곧 교법(敎法)을 말하는데, 부처의 교법이 중생의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윤보(輪寶)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것과 같으므로, 법륜이라 한다.
[주D-014]가차(假借) : 육서(六書)의 하나. 어떤 뜻을 지닌 음을 적는 데 적당한 글자가 없을 때 뜻은 다르나 음이 같은 글자를 빌려 쓰는 일. 예를 들면 영(令)은 호령(號令)의 뜻인데 이를 빌려서 현령(縣令)의 영(令)으로 쓰는 따위를 말한다.
[주D-015]삼마제(三摩提) : 삼마지(三摩地)와 같은 말로 곧 정(定)의 뜻인데, 마음을 한곳에 모아 산란치 않게 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주D-016]칠보(七寶) : 일곱 가지의 보옥(寶玉). 금(金)ㆍ은(銀)ㆍ유리(瑠璃 : 검푸른 보옥)ㆍ파려(玻瓈 : 수정)ㆍ차거(硨磲 : 백산호)ㆍ적주(赤珠 : 적진주)ㆍ마노(碼碯 : 짙은 녹색의 보옥)를 가리킨다.
[주D-017]사연(四緣) :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그 연(緣)을 넷으로 나누는 것. 즉 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주D-018]아사리(阿闍黎) : 불교에서 스승을 일컫는 말. 그냥 사리라고도 하는데, 교수(敎授)ㆍ궤범(軌範)ㆍ정행(正行)이라 하여, 제자의 행위를 교정하며 그의 사범이 되어 지도하는 큰 스님이다.
[주D-019]유동보살(儒童菩薩) : 불자(佛者)가 공자(孔子)를 일컫는 말. 《변정론(辨正論)》에 “중니(仲尼)는 곧 유동보살인데, 오탁(五濁 : 불교에서 말하는 겁(劫)ㆍ견(見)ㆍ명(命)ㆍ번뇌(煩惱)ㆍ중생(衆生)의 오탁)을 제도하고 오상(五常 : 오륜(五倫)과 같음)을 선포했다.” 하였다.
[주D-020]홍시(弘始) : 후진(後秦)의 참제(僭帝) 요장(姚萇)의 아들인 요흥(姚興)의 연호인데, 여기 원문에서 요장의 연호로 쓰인 것은 착오인 듯싶다.
[주D-021]무착(無着)ㆍ천친(天親) : 무착은 북인도(北印度) 건다라국 부루사부라성(犍陀羅國富樓沙富羅城)의 바라문 출신. 처음에는 소승화지부(小乘化地部)에 들어가 출가하여 빈두라(賓頭羅)를 따라 소승의 공관(空觀)을 닦았는데, 뒤에는 법상 대승(法相大乘)의 교화를 선양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논소(論疏)를 지어 대승경(大乘經)을 해석하였다. 천친은 무착의 아우로 세친(世親)이라고도 하는데,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하여 크게 이름을 드날렸다.
[주D-022]비라(毗羅) : 비라는 인도 마갈타국 화씨성(摩竭陀國華氏城) 출신으로 부법장(付法藏) 제 12조인 가비마라(迦毗摩羅)의 준말이다. 처음에는 3천의 제자를 거느린 외도였으나 뒤에 마명(馬鳴)에게 설복되어 제자들과 함께 불교에 귀의하여 남인도에서 교화에 힘쓰고 《무아론(無我論)》 1백 게송(偈頌)을 지어 외도를 깨뜨렸으며, 그 교법(敎法)을 용수(龍樹)에게 전수하였다.
[주D-023]갈마수계(羯磨授戒) : 불교에서 수계(授戒)하는 의식. 맨 처음 대중(大衆) 앞에서, 아무에게 수계 의식을 거행할 뜻을 알리는 표문(表文)을 백문(白文)이라 하고, 그 다음에 계를 받는 자에게 계법(戒法)을 주는 뜻을 기록한 표문을 갈마문(羯磨文)이라 하는데, 백문은 한 차례를 읽고 갈마문은 세 차례를 읽으므로 일백 삼갈마(一白三羯磨)라 한다.
[주D-024]유가(瑜珈) : 상순일치(相順一致)의 뜻으로 일체의 경(經)ㆍ행(行)ㆍ과(果) 등을 말한다. 경은 마음과 상응하고, 행은 이치와 상응하고, 과는 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주D-025]유식(唯識) : 삼라만상은 심식(心識) 밖에 실존한 것이 아니어서, 오로지 심식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주D-026]육상(六相) : 화엄종(華嚴宗)에서, 만유(萬有)의 모든 법에 낱낱이 6종(種)의 모양이 있음을 말한 것인데, 그 내용은 여기서 생략한다.
[주D-027]개현(開顯) : 개권 현실(開權顯實)의 준말로, 권교(權敎)인 방편을 치우고 진실한 교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석가의 일대(一代) 50년 중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까지의 40여 년 동안은 방편교(方便敎)를 진실한 듯이 말했을 뿐 방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법화경》을 설하면서부터 “3승교는 방편이고 1승교는 진실이다.” 하여, 방편을 치우고 진실을 나타냈던 것이다.
[주D-028]명상(名相) : 모든 사물에는 명과 상이 있는데, 귀에 들리는 것을 명, 눈에 보이는 것을 상이라 한다. 다같이 헛된 것으로 법(法)의 실성(實性)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나, 범부(凡夫)들은 이 명상을 분별하여 여러 가지 망혹(妄惑)을 일으킨다.
[주D-029]공적(空寂) : 우주(宇宙)에 만사 만물의 형상이 있는 것, 또는 형상이 없는 것 모두가 실체(實體)는 공무(空無)하여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나위가 없다는 말이다.
[주D-030]혹은 …… 할(喝) : 방(棒)은 몽둥이요, 할은 큰소리로 꾸짖는 것. 선가(禪家)의 문답(問答)에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큰소리로 꾸짖는 수행을 말하는데, 방은 덕산(德山 : 당〈唐〉 때의 고승 견성선사〈見聖禪師〉)에서 비롯되었고, 할은 임제(臨濟)에서 비롯되었다.
[주D-031]가섭(迦葉) …… 띠었다 :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할 때 법좌(法座)에 올라 연꽃을 들고 말없이 대중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 응하는 이가 없었는데,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의 참뜻을 깨닫고 슬며시 웃었다. 그러자 석가가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이 있으니, 이제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하였다. 이는 곧 이심전심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주D-032]회광반조(回光返照) : 선종(禪宗)에서 쓰는 말로 언어(言語)나 문자(文字)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회고 반성(回顧反省)하여 바로 심성(心性)을 조견(照見)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3]하마선(蝦蟆禪) : 두꺼비는 뛰는 것만 알고 다른 활동을 알지 못하므로, 선(禪)하는 사람으로 한쪽에만 고집하고 자유로운 행적이 없음을 꾸짖는 말이다.
[주D-034]아양선(啞羊禪) : 아양은 벙어리 염소. 지극히 어리석은 중이 선악의 계율(戒律)을 분별치 못하여 죄를 범하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것을, 죽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염소에게 비유한 것이다.
[주D-035]조서선(鳥鼠禪) : 조서는 박쥐. 파계(破戒)한 비구(比丘)를 비유하는 말. 즉 중도 아니고 속인(俗人)도 아니라는 뜻이다.
[주D-036]독거사(禿居士) : 독은 까까머리라는 뜻이요, 거사는 집에 있는 남자 신도(信徒)란 뜻으로, 계율은 파괴하고 법을 지키지 못하는 비구를 말한다.
[주D-037]면벽(面壁) : 벽을 향하여 좌선(坐禪)하는 것. 달마(達磨)가 중국에 와서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에 들어가 경전(經典)을 강설하지도 않고 9년 동안 석벽(石壁)을 향하여 좌선을 하였다.
[주D-038]혜가(慧可) …… 끊자 : 혜가는 선종(禪宗)의 제2조(祖)가 되었는데, 그가 숭산 (嵩山) 소림사(小林寺)로 달마(達磨)를 찾아가서 눈 속에 앉아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왼팔을 끊어 그의 굳은 뜻을 보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크게 깨달았다.
[주D-039]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 광명변조(光明遍照)의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곧 부처의 신광(身光)ㆍ지광(智光)이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법계에 두루 비추어 원명(圓明)한 것을 의미한다.
[주D-040]화장세계(華藏世界) :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준말로, 석가모니불의 진신(眞身)인 비로자나불의 정토(淨土). 가장 아래는 풍륜(風輪), 풍륜 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고, 향수해 가운데 대연화(大蓮花)가 있으며, 이 연화 안에는 무수한 세계를 포장(包藏)하고 있다 한다.
[주D-041]사바세계(娑婆世界) : 곧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가리키는데,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을 참고 견디며, 또 이 국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히 중생들 사이에 참고 견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에서 감인 세계(堪忍世界)라고도 한다.
[주D-042]사유(思惟) :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자세히 생각하는 수행을 말한다.
[주D-043]팔관회(八關會) : 고려 때의 불교 의식(儀式). 음력 11월 15일에는 개경(開京)에서, 10월에는 서경(西京)에서 거행했는데, 주로 천령(天靈)ㆍ오악(五岳)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 등 토속신(土俗神)에게 제지내는 의식이었다.
[주D-044]백고좌(百高座) : 법회(法會) 이름. 사자좌(獅子座) 백을 만들고 큰 스님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법회이다.
[주D-045]승과(僧科) : 국가에서 승려(僧侶)에게 보이던 고시(考試) 제도. 고려 광종(光宗) 때에 이 제도가 창시되어 선종(宣宗) 때는 문과(文科)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되었다.
[주D-046]경찬회(慶讚會) : 불상(佛像)ㆍ경전(經典)을 맞이하거나, 절ㆍ탑 등의 건축을 마쳤을 때에 거행하는 법사(法事)로, 곧 그 성공을 경축하는 것이다.
[주D-047]오교(五敎) : 우리나라 불교의 각 종파를 총칭하던 말. 소승교(小乘敎)ㆍ계율교(戒律敎)ㆍ법상교(法相敎)ㆍ밀교(密敎)ㆍ원교(圓敎)인데,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D-048]도승법(度僧法) : 승니(僧尼)가 출가(出家)할 적에 나라에서 허가증을 발급해 주던 제도. 이것은 본디 중국에서 세금을 면하기 위하여 출가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 폐단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였었다.
[주D-049]기신재(忌辰齋) : 조상의 기일(忌日)에 불공을 드려 그 명복을 비는 일이다.
[주D-050]승통(僧統) :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승직(僧職)의 하나. 총섭(摠攝), 또는 섭리(攝理)라고도 한다.
[주D-051]방산석경(房山石經) : 불전 석경(佛典石經)의 하나. 하북성(河北省) 평산현(平山縣)의 서북에 있는 방산(房山)에서 수(隋) 나라 때 정완법사(靜琬法師)가 맨 처음 불전을 돌에 새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후 도공(導公)ㆍ의공(儀公)ㆍ섬공(暹公)ㆍ법공(法公) 등이 서로 뒤를 이었고, 요(遼)의 통리대사(通理大師)에 이르기까지 이 작업이 존속되어 불전을 새긴 돌이 무려 2천 3백여 개에 달하였다.
[주D-052]변격(邊格) : 책지(冊紙)의 맨 가에 굵게 둘러 친 선(線)을 말한다.
[주D-053]오사란(烏絲欄) : 책지(冊紙)의 맨 갓줄을 제외한 한가운데의 자잘한 검은 선을 가리킨다.
[주D-054]사찰에 저장되었고 : 이상 열거된 건수가 맞지 않는다.
[주D-055]사팔상(四八相) : 석가에게 갖춰져 있다는 삼십이상(三十二相). 곧 4×8=32로 된 말이다.
[주D-056]유순(由旬) : 인도(印度)에서 말하는 이수(里數)의 단위. 전륜왕(轉輪王)이 하루동안에 갈 수 있는 길로 40리에 해당함. 또 대유순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라고 하는데,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주D-057]용백국(龍伯國) : 옛날 거인(巨人)이 살던 나라 이름.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용백국에는 거인이 있어 몇 발자국만 떼면 오산(五山 :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는 대여〈代輿〉ㆍ원교〈員嬌〉ㆍ방호〈方壺〉ㆍ영주〈瀛洲〉ㆍ봉래〈蓬萊〉의 다섯 산을 가리킨 듯함)에 이른다.” 하였고, 《하도옥판(河圖玉版)》에는 “용백국 사람은 키가 30길이나 되고 수명이 8천 세나 된다.” 하였다.
[주D-058]죽림(竹林) :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 가란타촌(摩竭陀國迦蘭陀村)에 있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말한다. 석가가 성도한 후 가란타장자(迦蘭陀長者)가 부처에 귀의하고 죽림원(竹林園)을 바쳐 거기에 이 정사를 지었으니, 이것이 최초의 절이 되었다.
[주D-059]앵무(鸚鵡) : 전설에 의하면 인도의 수달장자(須達長者)에게 두 앵무불(鸚鵡佛)이 있어 아난(阿難)을 위해 사체(四諦)의 법(法)을 설(說)하였다 한다.
[주D-060]선재(善財) : 《화엄경》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준말. 그는 53명의 선지식(善知識 : 선우〈善友〉의 뜻)을 두루 찾아 뵙고, 맨 나중에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 십대원(十大願)을 듣고 아미타불 국토에 왕생(往生)하여 입법계(入法界)의 원(願)을 이루었다 한다.
[주D-061]용녀(龍女) : 《법화경》에 나오는 사가라 용왕(裟伽羅龍王)의 딸을 가리키는데, 나이 겨우 8세에 지혜(智慧)가 숙성하여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교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깨닫고, 석가에게 와서 남자의 몸으로 되어 보살행을 수행하고 남방무구세계(南方無垢世界)에 가서 성불하였다고 한다.
[주D-062]삼십이응(三十二應)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하려 할 때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32종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1. 불(佛), 2. 독각(獨覺), 3. 연각(緣覺), 4. 성문(聲聞), 5. 범왕(梵王), 6. 제석(帝釋) 등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주D-063]왕세충(王世充) : 수(隋) 나라 사람. 성품이 교사하여 양제(煬帝)에게 벼슬하다가 양제가 시해(弑害)된 후 스스로 정제(鄭帝)라 칭하였다. 뒤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 : 당 태종〈唐太宗〉)과 싸워 크게 패하여 항복하였으나 장안(長安)에서 살해되었다.
[주D-064]정혜(定慧) : 정은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혜는 현상(現象)인 사(事)와 본체(本體)인 이(理)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주D-065]복전(福田) : 여래(如來)나 비구(比丘) 등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이에게 공양하면 복이 되는 것이,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 다음에 수확하는 것과 같으므로 복전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남의 복전이 되어줄 만한 이를 말한다.
[주D-066]경권(經卷) : 부처의 교법을 적은 경율(經律) 등의 경전. 옛적에는 책이 두루마리로 되었으므로 권(卷)이라 한다.
[주D-067]위고(韋皐) …… 있었다 : 당(唐) 나라 때 위고의 집에 매우 영리한 앵무새가 있었는데, 하루는 놀래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은 채 날개를 거두고 죽었다. 이를 불에 태우고 보니 사리(舍利)가 나왔으므로, 위고가 탑(塔)을 세워서 그 사리를 간직했다고 한다.
[주D-068]입정(入定) : 마음을 한 경계에 정하고 고요히 선정(禪定)에 드는 것인데, 여기서는 죽은 중을 가리킨다.
[주D-069]천도(薦度) : 법회(法會)ㆍ독경(讀經)ㆍ불공(佛供) 등을 베풀어 죽은 이의 영혼을 정토(淨土)나 천계(天界)에 왕생(往生)하도록 기원하는 일을 말한다.
[주D-070]출정(出定) : 중이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주D-071]사대(四大) : 세상 만물의 원소(元素)가 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가리키는데, 사람의 신체도 이 네 가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하여 인체를 지칭한 것이다.
[주D-072]피안(彼岸) : 모든 번뇌와 고통의 세계인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서, 이상경(理想境)인 열반(涅槃)의 저 언덕을 말한다.
[주D-073]이(咦) : 웃는 소리, 또는 크게 부르는 소리. 스승이 학인(學人)을 일깨워 줄 적에 법어(法語)의 결말에 뜻이 극진하고 말이 지극하여 내는 소리이다.
[주D-074]파순(波旬) : 살자(殺者)ㆍ악자(惡者)의 뜻. 욕계(欲界) 제6천(天)의 임금인 마왕(魔王)의 이름. 그는 항상 악한 뜻을 품고 나쁜 법을 만들어 수도하는 사람을 요란시키고 사람의 혜명(慧命)을 끊는다고 한다.
[주D-075]운문(雲門)도 그렇다 : 문언선사(文偃禪師)가 소주(韶州) 운문산(雲門山)에 있었으므로, 전하여 그를 가리킨다. 어느 때 한 중이 찾아와서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부처는 똥 닦은 막대기이다.”고 대답한 그의 화두(話頭)가 있는데 여기서는, 불법이 광대하여 나쁜 파순(波旬)도, 좋은 운문도 따질 나위가 없다는 뜻으로 그냥 인용한 말인 듯하다.
[주D-076]위음왕(威音王) : 공겁(空劫 : 괴겁(壞劫) 다음에 세계가 완전히 공무(空無)하여졌을 때부터 다시 다음 성겁(成劫)에 이르기까지의 20중겁(中劫)을 말함) 시대에 맨 처음 성불(成佛)한 부처. 한없이 오랜 옛적, 또는 맨 처음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주D-077]전등(傳燈) : 등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이므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교법(敎法)에 비유하는데, 이 교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하여 가는 것을 전등이라 한다.
[주D-078]보리(菩提) : 도(道)ㆍ지(智)ㆍ각(覺)의 뜻으로, 불교 최고의 이상(理想)인 불타(佛陀) 정각(淨覺)의 지혜를 말한다.
[주D-079]노지백우(露地白牛) : 한데 서 있는 큰 백우거(白牛車)를 말하는데, 일승법(一乘法 : 승은 타는 것으로, 곧 수레나 배에 중생들을 싣고 깨닫는 경계에 수송해 준다는 뜻)에 비유한 것이다. 《法華經 譬喩品》
[주D-080]앙산(仰山)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산 이름. 당(唐) 나라 말엽에 고승 혜적선사(慧寂禪師)가 산신(山神)의 지시를 받고 개산(開山)하여 절을 창건한 다음 불교를 크게 떨쳤으므로, 전하여 혜적선사를 가리킨다.
[주D-081]조주(趙州) : 당(唐) 나라 때 고승(高僧) 진제대사(眞際大師)가 조주의 관음원(觀音院)에 있었으므로 그를 일컫는데, 그는 조주에서 불교를 크게 떨쳤다.
[주D-082]성주괴공(成住壞空) : 네 가지의 겁(劫). 성겁(成劫)은 세계(世界)가 이루어져서 인류(人類)가 살게 된 최초의 시대를 말하고, 주겁(住劫)은 이 세계가 존재하는 기간을 말하고, 괴겁(壞劫)은 이 세계가 괴멸하는 기간을 말하고, 공겁(空劫)은 괴겁 다음에 이 세계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부터 다시 다음 성겁에 이르기까지의 중겁(中劫)을 말한다.
[주D-083]선지식(善知識) : 곧 선우(善友)의 뜻으로, 부처가 말해 놓은 교법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D-084]무생인(無生忍) :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준말. 불생 불멸(不生不滅)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安住)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곧 보살이 초지(初地), 또는 칠지(七地)ㆍ팔지(八地)ㆍ구지(九地)에서 얻는 깨달음이다.
[주D-085]장인(長人) : 고대(古代) 만이(蠻夷)의 국명(國名).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의하면 “장인국(長人國) 사람은 키가 3~4장(丈) 씩이나 된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장인국 사람을 가리킨다.
[주D-086]토백(土伯) : 땅속의 괴물(怪物). 곧 땅속 제후(諸侯)의 장(長)이라는 데서 토백이라 한다.
[주D-087]야차(夜叉) : 8부중(部衆)의 하나. 약차(藥叉)라고도 하는데, 나찰(羅刹)과 함께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의 권속이 되어 북방(北方)을 수호한다고 한다.
[주D-088]나찰(羅刹) : 가외(可畏), 또는 식인귀(食人鬼)의 뜻으로, 악귀(惡鬼)의 이름이다. 야차(夜叉)와 함게 비사문천왕의 권속이 되었다 한다.
[주D-089]난토(爛土) : 토사(土司)의 이름. 토사란 변방(邊方)의 토만(土蠻)을 맡은 벼슬의 호칭이다.
[주D-090]뇌연(雷淵) : 뇌신(雷神)이 산다는 못을 말한다.
[주D-091]도산(刀山) : 도검(刀劍)의 산. 십지옥(十地獄)의 하나이다.
[주D-092]검수(劍樹) : 곧 검림지옥(劍林地獄)을 가리키는데, 이 지옥에는 뜨거운 철환(鐵丸)이 과일처럼 달려 있고 높이 24유순(由旬)이나 되는 검의 숲이 있다고 한다.
[주D-093]구류(九流) : 아홉 학파(學派). 즉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이다.
[주D-094]생공(生公) …… 있었으니 : 양(梁) 나라 때 고승(高僧) 생공이 호구사(虎丘寺)에서 경(經)을 강할 적에 돌을 모아 놓고 그들을 청중(聽衆)으로 삼았는데, 돌들이 설법을 듣고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주D-095]도도(屠刀) : 백정의 칼인데, 여기서는 곧 집착을 말한다.
[주D-096]오악도사(五嶽道士) : 중국 오대 명산(五大名山)의 부적[符]을 가진 도사로, 도교인을 가리킨다. 동악(東嶽 : 태산(泰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장수할 수 있고,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서 상해를 받지 않고, 중악(中嶽 : 숭산(嵩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거만(巨萬)의 재물을 취득할 수 있고, 서악(西嶽 : 화산(華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병인(兵刃)의 피해를 받지 않고, 북악(北嶽 : 항산(恒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수난(水難)을 면하고 복록(福祿)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완당전집 제9권
시(詩)
세모승(細毛僧)



가는 털 총총 돋고 실올 칭칭 감긴 것을 / 細毛蒙茸窠亂絲
산 중이 이기 함께 기름에다 볶아내서 / 山僧膏熬同梨祈
다리 꺾인 솥가에 조각조각 오려내니 / 折脚鐺邊切片片
붉고 누른 그 빛깔은 패유리를 뚫는구나 / 紺黃色透吠琉璃
콩물 타서 국 만들면 눈보다 더 하얗고 / 羹以菽乳白勝雪
소금을 뿌려 두면 배보다 상쾌하네 / 糝之鹽晶快於梨
천주 역시 이걸로써 상공에 충당하니 / 天廚亦以充上供
어찌 저 영액이나 경미일 뿐이리요 / 何啻靈液與瓊糜
문수의 제호가 바로 이게 아니던가 / 文殊醍醐即此否
향적의 반공도 보다 나을 것이 없네 / 香積飯供無過之
길가의 찬 우물이 품으로는 제일이라 / 路傍井冽品第一
기름 향기 도리어 샘의 덕과 어울리네 / 膏香却與泉德宜
크나큰 원력에다 크나큰 자비로서 / 發大願力大慈悲
피안의 중생제도 바라밀을 보시(布施)하네 / 檀波羅蜜爲法施
남대령은 하도 높고 해는 정히 대낮이라 / 南大嶺高日卓午
길손이 더위 먹어 구슬땀이 흥건한데 / 行人中暍汗淋漓
한 사발로 배를 불려 헐떡증이 갈앉으니 / 一椀定喘如實石
종전의 열난 비장 유쾌히 씻었구려 / 快滌從前熱惱脾
행전 매고 백 리 길을 어렴 없이 달려가니 / 行縢定走一百里
양옆의 겨드랑에 맑은 바람 으시으시 / 兩腋仙仙淸路岐
빈한한 과천 계집 촌 막걸리 자랑컨만 / 果州寒女夸村釀
제조 솜씨 범속하여 하잘것이 없고말고 / 家火凡鍊徒爾爲
길가는 사람마다 중의 공을 찬양하니 / 行人無不贊僧功
동서남북 어디가도 이런 공덕 또 있으리 / 功德東西南北空


 

[주D-001]이기 : ‘棃祈’는 ‘梨其’인데 약초임.
[주D-002]패유리 : 《연감류함(淵鑑類函)》에 “수미산(須彌山)에 패유리가 있는데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쇠도 부수지 못한다.” 하였음.
[주D-003]천주 : 별 이름임.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紫宮東北維外六星曰天廚 主盛饌”이라 하였음.
[주D-004]문수의 제호 : 문수는 문수사리(文殊師利)임. 제호는 《열반경(涅槃經)》에 “從乳出酪 從酪出生酥 從生酥出熟酥 從熟酥出醍醐 最上 佛亦如是”라 하였음. 불가어에 관정제호(灌頂醍醐)가 있는데 지혜로써 사람에게 수입(輸入)함을 이름.
[주D-005]향적 : 향적주(香積廚)의 준말인데 승가(僧家)의 식주(食廚)로서 대개 향적불국(香積佛國)의 향반(香飯)의 뜻을 취한 것임.
[주D-006]바라밀[檀波羅蜜] : 단은 단월(檀越)의 뜻이고 바라밀은 범어에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피안(彼岸)에 당도하는 것으로 역하였음.
[주D-007]대낮[卓午] : 정오를 말함. 이백의 시에 “飯顆山前逢杜甫 頭戴笠子日卓午”라 하였음.
[주D-008]행전[行縢] : 베의 천으로 퇴육(腿肉)을 감는 각반(脚盤)을 말함.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추강집 제3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문수사(文殊寺)에 적다



먼 나무 하늘 닿아 저녁바람 보내주는데 / 遠樹參天進晩風
나그네 먼길 옴은 고승을 보기 위함일세 / 遊人遠涉爲雙瞳
연명은 이제 벌써 백련사에 들어왔건만 / 淵明已入白蓮社
여산의 혜원공을 미처 만나지 못했구나
/ 未見廬山惠遠公


 

[주D-001]연명(淵明)은……못했구나 : 내가 이미 문수사에 도착했으나 만나려는 스님을 아직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연명과 혜원(惠遠)의 이야기는 호계삼소(虎溪三笑) 고사에서 전한다. 호계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내이다. 진(晉)나라 때 혜원법사(惠遠法師)가 동림사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넘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東林十八高賢傳》 혜원은 대체로 ‘慧遠’으로 되어 있으나 문헌에 따라 ‘惠遠’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춘정집 추보(追補)
제문(祭文)
서 승지(徐承旨) 선(選) 가 아우 종준(宗浚)에게 고하는 제문



아, 아우여 / 嗚呼弟乎
이렇게 되고 말았단 말인가 / 而至然耶
상에 임하여 애통해 기절하겠으니 / 臨喪慟絶
또한 그만이구나 / 亦已焉哉
네가 비록 병을 지녔다 하나 / 謂雖帶病
혹 천명을 누리리라 여기고 / 容或有年
나는 짐짓 벼슬살이에 이끌려 / 且牽仕宦
직분을 다하려 애쓰느라 / 供職惟虔
능히 너에게 나아가 / 未能就汝
조석으로 보살피지 못하였으나 / 晨夕撫視
어찌 하루저녁에 / 豈期一夕
이렇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 / 乃至於此
아, 슬프구나 / 嗚呼哀哉
백발의 자친은 / 白髮慈顔
어떤 심정이겠으며 / 何以爲情
눈물을 닦는 제수씨는 / 抆淚孀婦
어찌 살 것이며 / 何以爲生
슬퍼하는 자식들은 / 哀哀有子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할지 / 何怙何依
말하자니 길어져 / 言之長也
눈물이 뺨 위에 흘러내린다 / 涕泗交頤
아, 슬프구나 / 嗚呼哀哉
부모님의 기거 안부를 살피면서 / 庶幾溫凊
여생을 위로해드리고 / 以慰餘齡
너의 처자를 길러서 / 育汝妻子
평안하게 하는 것이 / 俾其平寧
오직 나의 직분이리니 / 惟予之職
감히 스스로 힘쓰지 않으랴 / 敢不自勖
아, / 嗚呼
사람에게 사특하고 바름이 있음에 / 人有邪正
신은 화와 복을 내리니 / 神禍以福
이 이치 밝고 밝아 / 斯理昭昭
만고에 한결같았다 / 萬古一日
생각건대 혼령은 / 惟靈
처신과 벼슬살이를 / 行己莅官
한결같이 곧게 하였으니 / 一出於直
장수를 누림이 마땅한데 / 宜其享于多壽
홀연히 중도에 끝났구나 / 而忽焉中絶
아, 슬프구나 / 嗚呼哀哉
비록 그러하나 / 雖然
일찍 죽어도 구차하지 않고 / 就夭不苟
오래 살아도 깨끗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 就壽不淑
죽어도 망하지 않아야 / 死而不亡
그 도가 사특하지 않음이다 / 其道不慝
삼각산 / 三角之山
문수사에 / 文修之寺
혼령의 행차 맞이하여 / 式邀靈馭
여기에 그치게 하고 / 於焉以止
치전(致奠)하는 자리에 제문을 올려 / 陳辭于奠
나의 슬픔을 펴니 / 以敍予悲
혼령은 아는가 / 靈其知也耶
아니 모르는가 / 其不知也耶

 

견한잡록(遣閑雜錄)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 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
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하였다.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 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동국이상국후집 제11권
서(序)
동국 제현(東國諸賢)의 글씨를 평론한 데 대한 서 병찬 진양공(晉陽公)이 짓게 하였다.



대저 서계(書契)가 생긴 지는 이미 오래다.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어 결승(結繩)을 대신하게 된 뒤에는 조적(鳥跡)ㆍ과두(蝌蚪)ㆍ전주(篆籒)ㆍ예서(隸書)의 서법이 생겼다. 후대에 내려와서는 그 서체에다 더욱 번화함을 보태게 되었다. 그래서 진서(眞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ㆍ비백(飛白)등 각체가 생겨 마치 가을 국화나 봄 난초와 같으므로 그 어느 것도 폐지할 수가 없다.
또 옛날 문인(聞人)ㆍ운사(韻士)로서 글씨에 능한 자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느 한 체만을 전공한 자도 있었고, 여러 체를 겸한 자도 있었다. 진(晉) 나라에 와서는 왕 희지(王羲之)를 제일로 삼았는데, 앞서는 양 무제(梁武帝)가 그의 서체를 평하기를,
“용이 천문(天門)에서 뛰고 범이 봉각(鳳閣)에 누웠다.”
하고, 후대에는 당 문황(唐文皇)이 그의 서체를 찬(贊)하기를,
“연기가 아른거리고 이슬이 맺히고 봉이 날고 용이 서리는 듯하므로 마음으로 흠모할 만한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
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특히 일소(逸少 왕 희지를 든 것은, 대개 우리나라의 제일인자는 일소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먼저 그 짝을 들었을 뿐이다. 제일인자란 누구인가. 바로 김생(金生)이란 분인데 그 분은 신필(神筆)이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세상에서 전하기를,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갑자기 김생 앞에 이르러《제석경(帝釋經)》을 써 달라고 청하기에 다 쓰고 나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나는 제석(帝釋)의 사자(使者)인데, 나에게 명하여 글씨를 받아 오라고 해서 온 것이다.’ 하고는 온데간데 없었다.”
한다. 또 안양사(安養寺)의 편액(扁額)을 썼는데, 몇 년 후에 그 편액을 건 집이 남쪽으로 기울어지므로 곧 김생에게 청하여 집 북쪽에 글씨를 쓰게하니 그 뒤에 집이 도로 반듯해졌다 하며, 또 청룡사(靑龍寺)의 편액을 쓰니 구름과 안개가 항시 꼈다 하며, 또 학사 홍관(洪灌)이 김생의 글씨를 싸가지고 송(宋) 나라에 들어 가니, 조정 제현이 보고 감탄하기를,
“뜻밖에 오늘날 왕 우군(王右軍)의 진적(眞蹟)을 보게 되었다.”
하므로, 홍관이 답하기를,
“이것은 우군의 글씨가 아니라 우리나라 김생의 글씨입니다.”
고 여러 번 말하였으나 끝내 믿지 않았다 하니, 김생의 글씨가 우군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김생을 신품(神品)의 제1로 꼽아야 하리라.

왕사(王師) 탄연(坦然)의 글씨는 행서(行書)에 더욱 뛰어났다. 매양 그 글씨를 보면 정채(精彩)가 넘쳐서 마치 부용(芙蓉)이 못 가운데서 솟은 것과 같고, 굳센 뼈와 윤택한 살이 서로 안배되어 마치 뛰어난 목수가 재목을 잘 배치해 놓은 것과 같이 조화되었고 또한 조착(彫鑿)한 흔적이 없으니, 이 어찌 배워서 된 것이겠는가. 반드시 하늘에서 받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탄연의 글씨를 신품의 제2로 삼는 것이 당연하리라.

진양공(晉陽公) 최우(崔瑀)의 글씨는 진서ㆍ행서ㆍ초서를 겸하지 않은 것이 없다. 초서는 마치 빠른 매가 공중에 날고 가벼운 바람이 안개를 마는 듯하고, 진서와 행서는 마치 진마(陣馬)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느리게 가거나 달리는 것이 규제에 맞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구름을 뚫을 듯한 분일(奔逸)한 기운이 있어서 그 기운을 조금만 풀어 놓으면 또한 스스로도 능히 그것을 막지 못한다.
공이 일찍이 대관전(大觀殿)의 편액을 썼는데, 당시 기 상국(奇相國)도 편액을 잘 썼었다. 그가 공이 쓴 편액을 보고는 놀란 기색을 하여 스스로 복종하였다 하니, 참으로 신품이라 할 만하다.
다만 듣건대, 공은 나의 품평에 들기를 바라지 아니하여 빠지고자 하니 이것은 겸사의 덕이라 아름답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사의에서 한 말이 아니라, 바로 일국의 공망(公望)인 것이다.
그분이 만일 ‘내가 지금 국정을 맡았으므로 사람들이 혹 아첨할 것이다’ 한다면, 그 가운데는 또한 정직한 선비도 있을 터인데, 어찌 모두 일시의 아첨하는 말을 취하여 만세의 비방거리로 전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비록 그렇지 않을지라도 후세에 품평하는 자가 또한 오늘날의 의논과 같다면, 공이 비록 피하려 한다 해도 피할 수 있겠는가. 청컨대 신품의 제3에 처하소서.

원외랑(員外郞) 유신(柳伸)의 글씨는 대저 행서와 초서 두 체를 혼용해서 쓰기를 좋아하였다. 옛날 왕자경(王子敬)이 이 체를 좋아했는데 사람들은 그 체를 초서도 행서도 아니라고 하였으며, 또 행초(行草)라고도 하였다.
유신이 왕자경에 대하여 비록 쓰는 체는 같지 않더라도 역시 그 유법(遺法)이라 하겠다. 그 체는 순전히 근골(筋骨)만을 숭상하니, 그 기상은 장사(壯士)가 칼을 빼들고 적군에게 달려가려는 것에 비유해도 좋고, 기마(驥馬)가 파리하게 서서 준골(駿骨)을 더욱 드러내는 것에 비유해도 역시 좋다. 이 또한 신을 통한 것이요, 일생에 익혀서 된 것이 아니니, 마땅히 신품의 제4에 처해야 하리라.

군주(君主)로 말하면 태조(太祖)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이 모두 글씨를 잘 썼다. 그러나 지존(至尊)은 품평할 바가 아니니 모두 생략하였다. 기타 사대부(士大夫)나 승려(僧侶)ㆍ일사(逸士)로서 글씨를 잘 쓴 자 중에는 학사(學士) 홍관(洪灌)ㆍ재상(宰相) 문공유(文公裕)ㆍ종실(宗室)인 승통(僧統) 충희(冲曦)ㆍ수좌(首座) 도휴(道休)ㆍ시랑(侍郞) 박효문(朴孝文)ㆍ재상 유공권(柳公權)ㆍ소성후(邵城侯) 김거실(金居實)ㆍ재상 기홍수(奇洪壽)ㆍ학사 장자목(張自牧)ㆍ산인(山人) 오생(悟生)과 요연(了然) 등을 또한 묘품(妙品)ㆍ절품(絶品)으로 차서를 정하지만, 내가 그들의 글씨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우열을 품평하지 않겠고, 그들의 글씨를 모두 모아서 본 다음에 갖추 논하겠다. 그렇지 못하면 후세의 달통한 식견을 가진 자가 명백히 구별하도록 맡겨둔다. 신품 네 현인(賢人)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각 찬한다.


김생(金生)

아침 이슬이 맺히고 저녁 연기가 일어나며 성낸 교룡이 뛰고 신령스런 봉황이 난다. 김생과 왕 희지는 몸은 비록 다르나 솜씨는 같았다.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한 것은 천연의 신비가 붙은 것이다. 신기하고 기이하여 말로 전하기 어렵도다.


탄연(坦然)

환하기는 명월(明月)이 구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찬란하기는 부용(芙蓉)이 못에서 솟아난 것 같다. 연약하여 미부인(美夫人)과 같다고 이르지 말라. 밖은 곱지만 속은 근골이 박혀있다. 한 점 한 획이 알맞게 조화되니. 인위로 된 것이 아니라 신(神)이 만든 것이다.


진양공(晉陽公)

아침 해가 구름에서 솟는 것도 그 글씨의 선명함에는 족히 비유할 수 없고 난새가 날고 봉황이 나는 것도 그 글씨의 끝없이 나부끼는 것에는 족히 비유할 수 없다. 더없이 연약하지만 그중에는 강함이 있고, 더없이 강하지만 도리어 유연함이 있다. 기골과 풍류를 오직 공이 겸하였으니 천부(天符)와 신계(神契)를 자연에서 얻었도다.


유신(柳伸)

높은 기상은 사나운 뱀이 머리를 치켜든 듯, 엄한 기상은 긴 창이 삼엄하게 벌여 있는 듯, 무슨 노여움 있기에 주먹을 이렇게 휘두르고 무슨 싸움이기에 힘을 이렇게 드날리는가. 칼날과 송곳은 순전한 강철이로다. 그 사람의 시대는 점점 멀어지는데 그 글씨는 더욱 빛나네.


[주D-001]창힐(蒼頡) : 황제(黃帝) 때의 사관(史官). 그가 조적(鳥跡)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 한다.
[주D-002]왕 우군(王右軍) : 왕 희지를 가리킴. 그가 진 원제(晉元帝) 때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주D-003]천부(天符)와……얻었도다 : 글씨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약천집 제1권
시(詩)
세 번째

김생을 장인(丈人)으로 보고 행촌을 벗으로 삼으니 / 丈視金生友杏村
탄연과 영업은 아들과 손자뻘이라오 / 坦然靈業是兒孫
석봉은 뒤에 나와 한갓 비대하기만 하니 / 石峯後出徒肥大
삼백 년 동안 공이 홀로 높구나 / 三百年來公獨尊

[주D-001]김생(金生)을 …… 삼으니 : 김생(711~791)은 신라 때의 명필로,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이다.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칭해졌고 송(宋) 나라에도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알려졌다. 장인(丈人)은 어르신 또는 선배를 이른다. 행촌(杏村)은 고려말의 문신인 이암(李嵓 : 1297~1364)의 호로, 초명은 군해(君亥)이고, 자는 고운(古雲)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이라고 일컬어졌다.
[주D-002]탄연(坦然)과 영업(靈業) : 탄연(1070~1159)은 고려의 승려이며 명필가이다. 호는 묵암(默菴)이며, 속성(俗姓)은 손씨(孫氏)로, 교위(校尉) 숙(肅)의 아들이다. 선교(禪敎)의 중흥에 이바지 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였는바, 국사(國師)에 추증되고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영업은 확실하지 않다.
[주D-003]석봉(石峯) : 조선 중기의 명필인 한호(韓濩 : 1543~1625)의 호이다. 자는 경홍(景洪)이며, 개성(開城) 출신으로, 글씨를 잘 써 한석봉 서체(書體)를 이루었다

 

필원잡기 제1권
필원잡기 제1권



서거정(徐居正) 저(著)

○ 일찍이 상고하건대,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가 총 3천 7백 85년이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년까지가 역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 역년(歷年)의 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세우자 기자가 봉해졌으며, 한(漢)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 태조(宋太祖)가 장차 일어날 때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한 것도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시대이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같은 날에 즉위하여 우(虞) 나라와 하(夏) 나라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는데, 향년(享年)이 1천 48세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하지 않아서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서 옛 기록을 적은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요의 시대에는 인류 문화가 밝게 선양(宣揚)되었는데, 하(夏)ㆍ상(商)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나빠져서 임금이 왕위(王位)에 있음이 장구한 자도 40~50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상수(上壽)는 백 년, 중수(中壽)는 60~70년, 하수(下壽)는 40~50년인데, 어찌 단군만이 1천 백 년에 가까운 수를 갖고 한 나라의 왕위에 있었으리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임금이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으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 말도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을까.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시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천지가 아득한 날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박달 나무가에 내려왔다 하네 / 檀君降樹邊
몇 대를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 世傳不知幾
지내온 햇수는 천 년이 넘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이는 그 대를 전함과 역년(歷年)이 오래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한 것이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이었으며, 뒤에 임금 준(準)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 병오년에 위만(衛滿)이 침입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기씨(箕氏)가 평양에서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여 이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점령한 것만을 기록하였고, 기씨의 세계(世系)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상고해 보니, 함허자(涵虛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安東國) 동쪽에 있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를 삼아서 은(殷)은 뒤를 이어 중국의 번방(藩邦 속국)을 삼았는데, 주(周)가 망함으로부터 후한(後漢)까지 천여 년을 지나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전통이 끊어졌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의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갈 때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의(醫)ㆍ무(巫)ㆍ음양복서(陰陽卜筮) 등속과 온갖 공인(工人)과 기예(技藝)들이 모두 따라갔기 때문에, 반만(半萬)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공손강의 찬탈이란 것은 근거가 없고, 5천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 함허자(涵虛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통역으로 말을 알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 결과 부자와 군신의 도리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의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백공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원ㆍ무당ㆍ음양복서의 술법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로써 여덟 가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재물로써 속죄(贖罪)하고, 상해(傷害)한 자는 곡식으로 속죄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니,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신의(信儀)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룩하였으니, 성인의 교화라 이를 만하다. 병기(兵器)로써 싸우지 말기를 가르치기를, ‘하루의 난리는 10년이 지나도 안정되지 못하여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덕으로써 강포(强暴)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義)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였으며 중국의 번방(藩邦)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역대(歷代)로 중국을 친히 하고 신임하여 봉작(封爵)을 받고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예의의 도(道)가 없어지지 않아서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各代)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나라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말하게 된 것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함허자의 논술이 《한서(漢書)》와 대략 같은데 우리 동국의 풍속에 세밀하였다. 역대의 여러 역사서와 국조의 《혼일지(渾一誌)》에 논술한 바는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 우리나라의 분야(分野)는 옛 사람은 연도(燕都 북경)에 비겼었는데, 기사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경의 분야에서 나오니, 일관(日官 천문을 보는 관리)이 아뢰기를, “이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연경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정통황제(正統皇帝)가 북정(北庭)에서 함몰되었고, 우리 세종대왕이 승하(昇遐)하였으니 연경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일리가 있을 듯하다.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며, 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양(漢陽)인데, 그 중 명당(明堂) 터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 터가 된다는 것은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고려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세우고 오얏나무[李]를 심었으며, 이성(李姓)을 가려서 부윤(府尹)을 삼고 왕도 해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그 지기를 눌렀었다.
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한양 명당(漢陽明堂)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리라고 한 것만 쓰여 있고 그 땅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두 궁궐의 정전(正殿)을 살펴보면 다 임좌병향이니, 억측하건대 고려에서 잡은 곳도 이 두 궁터에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술사(術士)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이가 있어 승문원(承文院)의 옛 터가 바로 명당자리라 하고, 혹자는 또 종묘 낙천정(宗廟樂天亭) 자리가 대지(大地)라고 한 것은 다 식견이 얕고 근거가 없는 말이다.
○ 도선은 백제(百濟) 사람이다. 일찍이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서 냇가에 놀다가 아름답고 큰 오이[瓜]를 얻어서 먹었는데 갑자기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니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냇가에 버렸더니 바야흐로 추울 때인데,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날아와서 위아래로 싸고 덮어서 십여 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출가하여 입산수도하였는데,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ㆍ지리ㆍ음양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또 당(唐)에 들어가서 승려인 일행(一行)의 술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전하는 도참은 모두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간에 당본(唐本)인 《성요(星曜)》 한 질(秩)을 얻었는데, 그 책에 고려국사부(高麗國師賦)라 한 것이 있으니, 의논이 정미(精微)하여 도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야율초재(耶律楚財)와는 시대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니, 이는 의심스러울 만하다. 어쩌면 고려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법을 비밀히 전하여 동방에는 전해 주지 아니하고 중국에 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영암현 도갑사(靈巖縣道岬寺)에 도선의 비(碑)가 있고 또 구림(鷗林 갈매기가 모였던 숲)이 있다.
○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頫)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당(唐)으로부터 진(晉)까지의 시대는 서로 멀지 않은데도 당의 문황(文皇)은 천자의 큰 힘으로써,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구할 때에 소이(蕭異)를 보내어 많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사년 간에 학사인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필법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것을 감탄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날마다 당시의 명유(名儒) 6~7명과 더불어 조용히 논담(論談)하였으니, 조공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문유(文儒)로 이제현(李齊賢) 선생 같은 분도 그와 또한 많이 시종했다. 왕이 동으로 돌아올 때에 문적과 서화 만 첨(萬籤)을 싣고 왔으니, 조맹부의 수적이 동국에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동국에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杏村) 이암(李嵒) 한 사람뿐이다.
○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인데,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하였다. 송(宋) 나라 숭녕(崇寧) 때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들어갔었더니,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족자에 글씨를 쓰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우군의 진적(眞跡)을 얻어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필적이 있으리오.” 하였다. 관이 항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었다.
근간에 조학사 자앙(趙學士子昻 조맹부)의 창림사비 발문(昌林寺碑跋文)을 보니 이르기를, “위의 글씨는 당 나라 때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본(刻本)이라도 이보다 크게 낫지 못할 것이다. 옛 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과연 옳다.” 하였으니, 조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
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 사대(事大)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름지기 정밀하고 간절하여야 한다. 고려 때에 요인(遼人)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 삼으려 하니,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었는데, 이론과 실지가 명백 간절하였으므로 요제(遼帝)가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명 태조(明太祖) 29년 하정(賀正)할 때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표문을 지었고,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西城君)정총(鄭摠)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윤색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표문과 전문의 말이 모멸에 가깝다고 노여워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 등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의 지제고(知制誥) 최보순(崔甫淳)이 금 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오마(五馬)가 강을 건너 진제(晉帝)가 새 임금이 됨을 나타내었고, 육룡(六龍)이 등극하니 주역(周易)의 대인(大人)을 봄과 부합한다.” 하였는데, 그때 금나라 군주는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었으므로, 이러한 사실에 저촉된 것을 미워하여 그 칙명에, “진(晉) 원제(元帝)의 일을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보순은 이로 인하여 견책을 당하였으니, 최보순의 표사(表辭)가 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일을 인용함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김과 정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우신관(祐神館)에 가보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을 놓았는데,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 등은 아는가?” 하고 말하기를, “옛날 황제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서 영생(永生)하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東明王)의 출생에 유화(柳花)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 말기에 인심이 다 우리 태조께 돌아왔으나,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조금 다른 형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왕(桓王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 환조로 추존됨)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 때였는데, “주(周) 나라가 비롯 옛 나라이나, 천명이 새롭도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도통(都統) 최영(崔瑩)이 죽을 때에, “이광평(李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이 항상 말하기를 ‘판삼사(判三司 태조)가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하더라.” 하였으니,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담당한 대신으로서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것은 무진년(태조가 등극한 해)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 태종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환국함에 미쳐 우리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 태조)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서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는 말을 태종이 친히 뽑아 고르는데 하열(下列)에 있는 말을 제 일등으로 하기를 명하니, 마부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말을 진상하자 문황이 보고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맨 먼저 올린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준마(駿馬)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옛 사람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합문(閤門)을 나가기 전에, 언제나 글을 반드시 백 번씩 읽으며, 《좌전(左傳)》과 《초사(楚詞)》는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하면서도 글 읽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지니,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다. 이때 오직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쓴 간찰문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천 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뛰어나셨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유익한 일이나 글씨 쓰고 글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 노쇠하여 정무는 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다 왕의 재결을 거쳐서 이룩되었으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니, 가히 하늘의 운행과 같이 정성이 쉬지 않는다 하겠다.
○ 세종이 처음 아악(雅樂)을 제정함에 중추(中樞) 박연(朴煗)이 도와서 이룩하였다. 박연은 앉으나 누우나 매양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률(音律)의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룩하니, 세종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ㆍ간의대(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며, 모두가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여러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나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다하여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였는데, 그 주석이 정밀하지 못하고 구두가 명백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해서 많은 책을 널리 채집하여 일에 따라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간주(間註)를 달아서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와 《원위(源委)》, 《석문(釋文)》, 《집람(集覽)》 등의 책을 의거해서 깎고 보태었으며, 미진한 곳은 다른 책을 상고하여 보충하였다. 혹 글이 이해하기 곤란한 곳은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해하고, 혹은 글 구(句) 밑에 구자(句字)를 써서 구두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글자의 해석과 번음(飜音)에 이르러서도 상세하게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가 왕의 재량으로 이룩한 것인데,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이름 하였다. 《강목통감(綱目通鑑)》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근래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강목통감집람(綱目通鑑集覽)》을 보니,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자못 많고, 또 주해를 글 구(句) 밑에 넣지 아니하고 매권(每卷)의 끝에 붙여서 열람하기에 불편하였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나라의 《훈의》를 제일로 쳐야 할 듯하다. 또 《훈의》가 이룩된 것은 정통(正統) 병진년 이었고, 《집람》이 이룩된 것은 근일의 일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편찬할 때에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더라면 반드시 탄상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 태종이 일찍이 주자(鑄字)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썩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이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중국의 좋은 글자 모양으로 고쳤는데, 이전 것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였으며 이를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이 명하여 좋은 음양자(陰陽字)의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극히 정교하였으며 이를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컸는데 인쇄한 서책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쓴 글자 모양과 강희안(姜希顔)의 쓴 글자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인쇄한 서책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졌다. 지금에 동자(銅字)는 다 공장(工匠)들이 훔쳐갔기 때문에 목활자(木活字)를 겸하여 사용하므로 글자의 크고 작은 것과, 새 것과 헌 것이 같지 아니하며 글줄이 고르지 못하니, 옛날 인쇄한 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 세종은 문치(文治)에 힘씀이 만고에 뛰어나서 경자년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사(文士)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으며, 뒤에 30명으로 증원하였다가, 또 20명으로 고쳐서 열 사람은 경연(經筵)의 일을 맡고, 열 사람은 서연(書筵)을 겸직하였다.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니, 문장 하는 선비가 성대히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었는데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수년 사이에 요직에 있는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영상 정인지(鄭麟趾), 좌상 이사철(李思哲), 영상 정창손(鄭昌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ㆍ안지(安止), 판서 김조(金銚), 참판 김돈(金墩), 판중추부사 김균(金鈞)ㆍ김말(金末), 영상 신숙주(申叔舟), 좌상 권람(權擥), 참찬 박중손(朴仲孫), 영상 최항(崔恒), 판서 김담(金淡),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의정 윤자운(尹子雲),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 참판 노숙동(盧叔仝), 판서 양성지(梁誠之)ㆍ성임(成任)ㆍ이극감(李克堪), 부윤 이명겸(李鳴謙), 판서 김예몽(金禮蒙), 영중추부사 노사신(盧思愼),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찬성 홍응(洪應), 참찬 이승소(李承召), 참판 이파(李坡), 판서 이병(李苪), 부윤 조근(趙瑾)ㆍ강희안(姜希顔), 판서 강희맹(姜希孟), 부윤 최선복(崔善復), 참판 박첩(朴捷) 등이며, 불초하지만 나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또 박중림(朴仲林)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과 같은 이는 한때 현달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농담하기를, “화(禍)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였는데, 유성원이 실패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고 집현전도 얼마 후 없어지고 말았다.
○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을 양성하여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오히려 아침에는 관청에 나가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청에서 그 비용을 공급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가 되게 하였다. 앞에는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승지 권채(權採), 직전(直殿) 남수문(南秀文)이 있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었으며, 그 밖의 사람도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종조(文宗朝)에는 남양군(南陽君) 홍응(洪應)과 한산군(韓山君) 이파(李坡)가 있었고, 보잘것없는 나도 여기에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거룩한 일이었다.
○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희우정(喜雨亭)에 행차하여 동정귤(洞庭橘) 한 소반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고 손수 소반 위에 쓰기를
향기로운 향나무는 코에만 좋고 / 旃檀便宜鼻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데 / 脂膏偏宜口
귀여울사 동정귤은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였는데, 자획이 용사(龍蛇)가 꿈툴 거리는 듯하고 광채가 빛났다. 내가 일찍이 그 글자를 임서(臨書)하여 간직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 문종은 지혜가 밝고 정밀하였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제문(棘城祭文 해주에 여귀(癘鬼)가 심하여 제사한 글)을 지어서 올렸더니, 문종이 보고 주묵(朱墨)으로 고치고 몇 마디 말을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精)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으나, 정이 있는 것이면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나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며,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마는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여, 글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문장 하는 신하와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다.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매,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슬퍼하고 사모하니, 어떤 망녕된 자가 말하기를, “능히 신술(神術)을 부려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 하므로 영종이 그 신술을 시험하기를 명하였으니, 효험이 없자 그 자가 말하기를, “태종이 인종과 함께 한가롭게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다다라서 모란꽃을 감상하시느라 인간에 다시 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니, 영종이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크게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세종의 초상(初喪) 때에 요망한 중이 와서 이런 술책을 아뢰므로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니, 이치에 없는 거짓말이므로, 문종도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 세조(世祖)는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평시에 의논이 개연(慨然)히 당 태종(唐太宗)을 흠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하찮게 여겼는데,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와 더불어 고금의 제왕(帝王)을 의논하다가, 당 태종에게는 미칠 수 없다고 하니,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는 당 태종보다 크게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쳐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므로, 양녕이 말하기를, “당 태종은 한 조그만 일로 장온고(張薀古)를 죽였는데, 전하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의 가법(家法)이 바른 것은 당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세조가 빙긋 웃었다. 또 포주강(蒲州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자 양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균(千鈞)의 활[弩 쇠뇌]은 작은 쥐를 보고 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는 유의하옵소서.” 하였으니, 양녕의 소견이 역시 기이하였다.
○ 세조가 일찍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이니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대는 숨김 없이 말하라.”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적에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마땅히 절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 ‘현재 부처에게는 절하고 과거의 부처에게는 절을 아니 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웃고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정도(正道)이고, 절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라 생각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중국 환관 황엄(黃儼)이 제주에서 동불(銅佛)을 가져 왔는데, 그가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을 하고 뒤에 예를 행하게 하니, 태종께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황엄은 마음이 흉험(凶險)하여 트집하기를 좋아하니 권도를 좇아 부처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태종께서 이르기를,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엄이 굴복하고 드디어 예를 행하였으니, 거룩한 임금의 소견은 각기 같은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또 웃었다.
○ 세조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내가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보니, 감색(紺色) 무명에 범을 그린 갖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었으며, 갓끈은 순 무명으로 하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니, 비록 한 문제(漢文帝)가 옷을 빨아서 입었다는 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 입술이 두터웠는데, 세조가 일찍이 희롱하기를, “어효첨은 순후(淳厚 순후(唇厚)와 음이 같다)하다.” 하였는데, 의정 윤사분(尹士芬)은 볼에 험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文獻) 박원형(朴元亨)이 대답하기를, “윤사분은 시험(猜險 시험(腮險)과 음이 같다)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조는 음양지리의 글에도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 사주책)는 유학자가 궁리(窮理)하는 하나의 일인데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대강 보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가 가령서(假令書 사주책 풀이) 한 편을 지어보라.” 하므로,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 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바쳤더니, 세조가 이르기를, “내가 녹명서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가령서를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책을 펴보면 스스로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또 나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의 정월은 병인(丙寅)이요, 갑일과 기일의 생시(生時)는 갑자(甲子)이니, 육십갑자를 가지고 추산하면 그 수(數)가 7백 20이 되니, 7백 20년을 가지고 7백 20일과 시(時)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四柱)는 51만 8천 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인구가 성할 때에는 1천 5백~6백만에 이르니, 억조 중생이 어찌 51만 8천 4백에만 그치리이까. 지금 항간에서 사주는 꼭 같아도 화복(禍福)은 전연 같지 않은 자가 있으니,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일찍이 한두 명이 있는데,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백 명뿐이겠습니까. 또 거리가 천 리가 되면 풍(風)이 같지 아니하고 백 리가 되면 속(俗)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四海) 민족이 다름이 없으며, 중국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ㆍ이서(吏胥)ㆍ서인(庶人)의 구분이 있어서 작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다 구별할 수 있으나, 사해 민족의 풍속은 혹 금수와 같아서 귀천의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51만 8천 4백 명의 녹명(祿命)에 매어서 그 같지 않음이 이같이 분분하겠습니까. 녹명의 글을 족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혹은 말하기를, ‘이순풍(李淳風)ㆍ이허중(李虛中)ㆍ소요부(邵堯夫)ㆍ서자평(徐子平) 등은 백발백중으로 맞았는데, 어찌 그 모두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밝은 거울이 여기 있어서 물건이 와서 비추면 좋고 나쁜 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순풍ㆍ소요부의 무리는 마음이 본래 허령(虛靈)해서 밝기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사물(事物)이 그 앞에 이르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저절로 나타나 속이지 못하니, 후세 술사들이 한갓 옛 사람의 글로써만 51만 8천 4백 명의 명수로써 천하 억조의 인명을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서는 믿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세조가 웃고 이르기를, “자네 말이 옳다.” 하였다.
○ 예종(睿宗)이 처음 집정하여 대단한 각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옥체(玉體)가 점점 위태하였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쓰기를, 모두 예종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죽어서 이 시호(諡號)를 얻으면 만족하겠다.” 하였는데, 몇 달이 못 되어서 승하하니, 군신들이 시호를 예종으로 올려 과연 성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아! 슬프도다.
○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는데, 점(占)을 치는 이가 보고, “수명이 길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아버지 문청공(文淸公) 탄(坦)이 말하기를, “만약 덕을 쌓으면 조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의 중에게 들었는데, 덕을 쌓는 조목이 세 가지가 있는바,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흘러가는 물에 목욕하지 말고,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너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국재가 종신토록 이 일에 명심하고 힘써서 잠시 동안이라도 어기지 않았는데 마침내 85세의 수(壽)를 누렸고, 지위가 일품에 이르렀으며, 한 가문(家門)에서 봉군(封君)한 이가 아홉 사람이나 되어, 복록(福祿)의 융성함이 고금에 거의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익재(益齋)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자(戊子)와 기미(己未)가 임사(壬巳)의 녹(祿)과 만나 서로 맞아 발복하였으니, 이는 천지조화의 묘함이다.” 하였으니, 점치는 이가 수명이 길지 못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여색에 있어 담담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국산 물건을 무역(貿易)하는 데에 무심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낯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데, 혼인의 예식에 으레 중국의 물건을 사용하니, 나도 시속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함은 성인의 제도인데, 내가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앞에 한 말은 농담일세.”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일찍이 경사(京師 남경)에 갔었는데,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驛吏)의 삿갓을 빌렸다가 돌려주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하고 그 값을 요구하므로, 공이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다. 뒤에 어떤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은 것을 공에게 씌워서 그 값을 요구하니, 공이 또 주려고 하였는데, 사신(使臣) 발라(孛羅)가 그 속임을 알고 우리를 국문하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이분이 전에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이요,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여, 발라가 그에게 벌을 주었다.
○ 권문충공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가 있었는데,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을 적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밖에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곳)로 불려서 나갔었다. 하루는 태조가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은쟁반 하나를 주고 활을 쏘아 내기를 하게 하였다. 무신(武臣)들은 차례로 쏘았으나 모두 과녘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문충공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으나, 이날에는 한 화살에 명중시켜 은쟁반을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활 쏘는 법으로써 그 덕(德)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새벽에 관아(官衙)에 나갔는데,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신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서리(胥吏)가 이를 고하였는데,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해가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가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불러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나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고, 이색의 외모가 훤출하지 못하다고 황제가 이르기를, “이 늙은이는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색이 환국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의 말을 실언이라 하였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치한 지 백여 년인데 여러 군주가 대(代)를 이어 나라를 지켜서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규모와 제도가 한(漢)ㆍ당(唐)보다 크게 뛰어나니, 어찌 속이 없는 임금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색은 큰 유학자이니, 고황제의 큰 인물됨을 알지 못하였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것인가.
억측하건대, 고황제는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영웅들을 통어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하여 대업(大業)을 창조하는 데에 정신을 두었으니, 그가 이색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어린애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 같이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색을 뜻도 고황제가 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일을 알 수 없는데 외국 사람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거만하고 업신여기는가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 광무(漢光武)가 마원(馬援)을 대접하듯 고황제가 이색을 대접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다.
○ 문정공 조용(趙庸)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20여 년을 있었는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인재 양성에 공이 있었다. 대개 문장은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썼는데 문장과 논리가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에 한 서생(書生)이 원 나라의 책문(策問) 가려 뽑은 것을 구해 비장(祕藏)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문정공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 동안만 빌려주었는데, 문정공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하고는 약속한 날짜에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공이 그 서생과 같이 글방에 있으면서 책문(策問) 서너 편을 외웠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으니, 서생이 이를 우연히 익힌 것이라 하고, 여려 책문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외우게 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분은 비록 장순(張巡)이라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문정공 맹사성(孟思誠)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에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지켰다. 공은 경자생(庚子生)인데 일찍이 장난으로 계묘계(癸卯契)에 들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있을 적에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인가를 물으므로 문정공이 경자생 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조정에서 물러나오자 계중(契中)에서 동갑이 아니라고 제명되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이 천성으로 음률을 깨쳐서 항상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공사(公事)를 아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일을 아뢰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아뢰러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었고, 더욱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묘하였으며, 지위는 일품에 이르고 향년은 87세이다. 일찍이 남산 모퉁이에 집을 정하고 두개의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었는데, 복건(幅巾) 쓰고 여장(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을 끌며 한가롭게 거니는 모양은 깨끗하여 신선과 같았다. 그가 해서로 쓴 헌릉비(獻陵碑)와 전서로 쓴 성균관 비의 글씨는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조(世宗朝)에 상서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자못 대체(大體)를 얻었다.
○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信)은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문정공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정숙공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우리 임금이 간관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 두렵 도다 / 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이 시를 종이와 붓이 없어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쓰고, 눈을 부릅뜨며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께 아뢰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여귀(癘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석방하였다.
그 뒤에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해적을 만났는데, 해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위로 뛰어들어서 행구(行具)를 약탈하니, 사람들은 손도 놀리지 못하였으나, 공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찬찬히 지휘하니, 해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행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애가 담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하였으니, 그 절은 성 안에 있었다. 공이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연모(軟帽)에 지팡이와 신을 갖추고 걸어서 다니며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그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 일찍이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 문경공(文敬公) 성석린(成石磷)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楊伯顔)의 막하(幕下)가 되어 왜적을 방어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어 형(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졸고 있었는데 꿈결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공은 쑥대 관[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쑥대 관은 쑥으로 머리를 싼다는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죽음을 면하고 제명(除名)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수상(首相)이 되어서 말하기를, “내 꿈에 호관(蒿冠)은 고관(高官)의 뜻이다.” 하였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록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신돈을 가리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깨어나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어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정성이 이같이 지극하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
○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은 본관이 진주다. 그 어머니가 꿈에 자라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어릴 때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었고, 갑사(甲士)로 숙위(宿衛)에 보임되어 궁문에 숙직하였는데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상림원(上林苑 비원) 온실에서 가꾼 매화 몇 분(盆)을 궁문 곁에 옮겨 두려 할 적에,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 이 책임을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울타리 가에 마소[馬牛]를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도 하는 것인데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오.”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거칠고 사나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기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武)에 능함으로써 발탁(拔擢)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일찍이 동북면(東北面)을 지킬 적에 야인(野人)이 3백 근이나 되는 강력한 활을 공에게 당겨보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술상을 놓고 즐겁게 마시면서 또 말하기를, “이 활은 매우 잘 만들었다.” 하고는,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과 같이 만들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서 그 활을 불에 구워 힘이 조금 풀어지게 한 뒤에, 여유만만하게 활을 가득히 당기니, 야인들이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였다.
○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諸公)들은, “성상(聖上)에 속(屬)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諸公)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종[奴]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종[婢]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 정렬공 최윤덕(崔潤德)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雲海)는 변방(邊方)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고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으며, 때로는 양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짐승을 많이 잡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가축을 먹이는데 큰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여러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공은 급히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발에 죽이고, 집에 와서 양수척에게 알리기를,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양수척이 가보니, 한 마리의 큰 범이었다. 이에 양수척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가군(家君 필자인 사가(四佳)의 아버지 곧 서미성(徐彌性))께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양수척이 최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가군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여 재주를 시험하니,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못내 칭찬하였으나, 가군께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나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곧 사냥꾼의 기술이요,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시고, 곧 활을 쏘고 적을 막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을 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일찍이 보좌관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막 책에 글씨를 쓰려 하였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이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스러운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자전(字典)) 한 질(秩)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볼 뿐이었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과 뜻,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대해서 백에 하나라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한가히 있을 적에는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뿔을 뺀 것을 쓰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시를 읊었는데, 시품(詩品)이 기이하고 궁벽하여 고시(古詩)에 가까웠으며, 필법(筆法)이 굳세어 서법에 부합하였다. 소년 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서 손수 썼더니, 하호정(河浩亭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 하연을 가리킴)이 시를 짓고 하문학이 직접 쓰니, 역시 한 세상의 보배이다.” 하였다. 문효공이 경상도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정승 남지(南智)가 아사(亞使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공은 매우 중히 여겨 보좌관이라 하여 낮게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진주(晉州)에 가서, 문효공이 산천과 경물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니, 공의 본관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공(南公)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산수는 비록 좋지마는, 품관(品官 안찰사를 가리킴)은 매우 못났다.” 하였으나, 문효공이 크게 웃으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공과 같이 정승에 올랐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효양공(孝襄公) 김효성(金孝誠)은 장양공(莊襄公) 남수(南秀)의 아들이다. 장양은 그 아내 길(吉)씨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효양공의 나이 4ㆍ5세 때에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함께 앉는 것을 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 비둘기를 보니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동서(東西)에 따로 떨어져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고, 슬피 우니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아뢰니 이 말을 들은 길씨도 눈물을 흘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공의 나이가 57세에 어머니 길씨가 죽자 시묘 살이를 하고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은 근대에 비길 데가 없으며, 시품(詩品)이 매우 고고(高古)하고 서화도 절묘하였으니, 그 시호(諡號)를 민(敏)으로 한 것은 적당한 칭호라 할 것이다. 시법(諡法)에,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敏)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 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敏)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김은 아주 잘못이다. 아들 부윤(府尹) 희안(希顔)의 자(字)는 경우(景愚)인데, 그림ㆍ시ㆍ글씨 세 가지에 절묘하여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시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고 그림은 유송로(劉松老)ㆍ곽희(郭熙)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여 재주와 덕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적에,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그것을 썩혀서 땅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게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함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였다. 조공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 되었을 적에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同僚) 중에 쌀 3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아니하였고, 뒤에 공석(公席)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사람들이 그 자랑하는 것을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남의 청탁을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며, 뒤에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권준(權蹲)은 총명(聰明)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관리의 체통을 잘 알았다. 일찍이 형조의 관리가 되어 옥사를 귀신같이 판결하였다. 어떤 두 강도가 한 가족 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심증은 다소 있었으나 물증이 분명하지 못하여 전후(前後) 관리가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이 거의 4ㆍ5년이었다. 하루는 안숙공이 두 도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내가 한 마디 할 터이니 너희들은 숨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하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위가 이러이러한 것인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빼물며 말하기를, “이분이 일찍이 도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한 일을 이같이 자세히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 갑오년 봄에,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 판서 조극관(趙克寬), 참판 권극화(權克和), 참판 김돈(金墩) 등이 모두 문과에 실패하고 수원(水原) 연정(蓮亭)에 이르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실의에 빠져 번뇌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일에 성공한다면 이슬비 자욱하고, 함박눈 펄펄 내리며, 밝은 달빛은 주렴으로 들어오고 연꽃 향기는 자리에 가득할 적에, 그대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 족히 오늘의 일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비가 자욱하다면 눈이 펄펄 내리지 못할 것이고, 눈이 펄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며, 또 연꽃 향기를 어찌 눈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리오. 어찌 말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가.” 하였더니, 문경공은 응답이 없었다. 그해 가을 과거에 문경공은 장원이 되고, 제공들도 연달아 과거에 뽑혔다. 임자년에 문경공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자 제공들이 모여서 전별(餞別)하는데, 조(趙) 판서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수원 눈 속의 연꽃을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문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들과 함께 보려고 하였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공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그 고을에 순행하니, 조공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갔는데 때마침 연꽃이 한창 이었으므로 서로 보고 웃었다. 문경공이 시를 지었는데,
비와 눈 흩날리는데 달빛은 밝고 / 雨雪霏霏月政明
연꽃의 맑은 향기 정자에 가득하네 / 荷香荏苒滿亭淸
당시의 이런 말 신비로워라 / 當時此說神應秘
20년 전에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 二十年前事已成
하였다.
○ 문장공(文長公) 김균(金鈞), 문장공 김말(金末), 대사성(大司成) 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연구가 깊어서 동시에 성균관에 제수되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인재양성에 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는데, 김반은 먼저 죽었고, 남은 두 김공은 모두 80이 넘도록 살아 벼슬은 1품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를 모두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함을 장(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받음이 마땅하다.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그때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가 물으니, 공이 문리(文理)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쉬지 아니하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 이래로 사범(師範)의 으뜸이다.
○ 문장공 김말(金末)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들으니, ‘천 사람의 눈[眼 지식을 이름]을 열어주는 이는 음덕의 보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學館)의 직책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이는 나의 학문이 거칠고 거짓되어 남에게 은덕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죽을 무렵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笏)을 잡고 단정하게 앉았는데, 가족들이 통곡하니 공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내가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壽)가 높지 않음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상리(常理)이니 바름을 얻고 죽으면 어찌 다행하지 않는가.” 하고, 곧 죽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나서 글을 올려, 환관(宦官)들의 연각건(軟脚巾)을 쓰고 오사모(烏紗帽)를 씀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例)에 의해 일반 관을 쓰게 할 것을 극론하였다. 그 말에,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그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그 갓을 바꾸지 않은 것은 환관의 무리를 사대부들과 혼동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말은 매우 적절하였으나, 여러 환관들이 눈을 흘겼기 때문에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기건(奇虔)공이 일찍이 연안부(延安府)에 부임하였는데, 그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公私)로 청탁이 많아 폐단이 백성에게도 미쳤다. 그 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사가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조롱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 / 六年何事業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도다 / 喫盡一池魚
하였다. 기공(奇公)이 이런 평을 면하려고 6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는 제주의 복어(鰒魚)가 연안의 붕어와 같이 많았으나 3년을 역시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고집은 탄복하였으나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판서 김조(金銚)는 일찍이 문학으로 유명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였는데 모두가 술이 취하였다. 세종께서, “오늘 제군(諸君)들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말하라.” 하니, 김조가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搨 임금의 자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해바라기꽃인데, 신하의 자리를 뜻함) 밑에서 진퇴부복(進退俯伏)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등의 소원도 김조와 같습니다.” 하여, 임금이 웃었다.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담박 하며 소탈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나, 도둑을 잘 다스렸다. 일찍이 충주(忠州)ㆍ안동(安東)ㆍ경주(慶州) 세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도둑질한 죄를 범한 증거가 있으면, 조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니, 도둑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나, 잘못 죽인 자도 많아서 공의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남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은 몸집이 커서 음식을 남보다 유달리 많이 먹었는데, 항상 큰 그릇의 밥 한 그릇과 찐 닭 두 마리와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불고기와 독주(毒酒)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먹지 아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불고기를 먹어도 마침내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 선생이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제공(諸公)들도 차례로 마셨는데,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것이 우리들로부터 고사(故事)가 되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 술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엄준하여,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간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적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방(榜 시험 발표)이 나왔기에 보니, 그 아들 오(烏)도 합격되었다.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試官)을 꾸짓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오(烏)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결국 시관을 내쫓았다.
정절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탁한 것은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게 하여 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는 잃지 않았다. 전례(前例)에 공청(公廳)에서 모일 적이면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함께 막차(幕次)를 연접시키고, 혹 술을 마실 적에는 장막을 걷고 이름을 권장음(捲帳飮)이라 서로 붙였다. 만약 금주령(禁酒令)이 있을 적에는 대관(臺官)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으로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서, 대사헌인 정절공의 책상 앞에 굴러갔었다. 여러 대장(臺長)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토록 대사헌의 앞에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무를 마칠 적에 정절공이 관리에게 말하기를, “저기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인가. 수정(水精) 구슬이 몇 알이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아전들이 대답하기를,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해 오는 술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가량 들어갈 만하였으니, 이는 금주령을 당하면 술잔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는 천성이 호매 하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 사람을 평론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만약 공자의 문하에서 놀았으면, 순수한 안자(顔子)나 독실한 증자(曾子) 같은 분에게는 진실로 미칠 수 없으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문성공이 접대관이 되어서 일을 주선하고 교제하여 빈사(儐使)의 체모를 지켰으며, 또 같이 고금을 의논하고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니, 예겸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어느 날 밤에 같이 앉아서 시강(侍講)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자,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적에 시강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데 어떻게 갈 것인가.” 하니, 공이 “이금오(李金吾)가 두렵소.” 하자, 예겸은, “왕옥여(王玉汝) 는 만나지 마시오.” 하고는,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구(對句)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상소하는 것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비로소 성행하였다. 문열공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려 하니, 동렬(同列)로서 벼슬이 문열공의 위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매양 말리기를, “예로부터 정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이는 마침내 화를 받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시종들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밝히고 도울 뿐이요, 간쟁(諫諍)하는 일은 그 직책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게.” 하였다. 문열공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름이 있으니, 국사를 논하다가 실패하는 영광이 침묵하다가 당하는 수치만 못하다.” 하고, 마침내 하관(下官)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극간(極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상관이 끝내 여기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니, 여론이 그 상관을 기롱하였다. 상소를 올릴 적마다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고, 마침내 크게 쓸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았다.
○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은 어려서 큰 뜻을 두었고 책을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재주와 명성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도 태연히 처하여 가슴속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맹교(孟郊)의 시에,
문 밖을 나가면 곧 막힘이 있으니 / 出門卽有礙
그 누가 천지를 넓다고 했던가 / 誰謂天地寬
한 것을 외우며, “맹교가 낙방하여 슬퍼하고 곤궁한 것은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어서였는데, 지금 자네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더니, 익평공은 웃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는데, 뒤에 익평공이 35세에 선비로서 장원에 뽑히고, 46세에 정승에 올라 한때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대개 과거에 실패하면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 선비의 상정(常情)인데, 공의 큰 도량이 이와 같으니, 맹교의 불우(不遇)함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 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체로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고, 사사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參議)가 되어 하루는 정방(政房)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후일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文士)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으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러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 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군 교관(外郡敎官)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縣監)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대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고,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는 과연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이 사람을 쓰고 버릴 적에 한결같이 공정하게 함이 이와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하고 간결하여 겉치레를 아니 하며,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저 양보함을 보이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았다. 글을 짓는 데에도 옛 사람의 규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장하고 풍부함이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물결이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구비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변려문(騈驪文)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과 전문(牋文)이 다 그 손에서 나왔었다. 중국 사람이 매양 우리나라 표문(表文)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분명치 못하며, 비록 선유(先儒)인 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 한문의 토)이 있으나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의 선비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 주어 고금(古今)의 책을 고증(考證)하여 구결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하고 상감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최항)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매양 질문을 받으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성(寧城 최항이 뒤에 영성부원군이 됨)이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은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陳鑑)ㆍ고윤(高閏)ㆍ장녕(張寧)ㆍ진가유(陳嘉猶) 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공이 매번 빈관(儐官 접대관)이 되어 주선하고 교제하기를 모두 마땅하게 하였다. 사신 장녕이 일찍이 문헌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으면 마땅히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밑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咸吉道)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적에,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과 길주 목사(吉州牧使) 설정신(薛丁新)을 죽이고는 그 고을을 점거하고 반역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심복을 보내어 수령들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들이 간 곳마다 서로 합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공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 함흥(咸興)에 이르니, 그날 밤에 역적들이 또 난을 일으켜서 감사 신면(申㴐)을 죽이고는 병력을 이동하여 공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칼을 뽑아 들고 뜰에 담같이 둘러섰으나, 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웃으며 말하기를 태연하게 하니 도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적의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간사함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이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니, 도적들 중에 혹 뉘우쳐서 공을 위하여 주선하고 돕는 자가 있어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의 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고르게 …… 주겠다.”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噲)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 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裘)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 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당(唐) 나라 말기에 정곡(鄭谷)이 시를 잘 지어 세상에서 유명하였는데 그때 사람이 그 관직에 따라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만년(晩年)에 도관(都官)이 되었다. 어느 날 구양영숙(毆陽永叔)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劉元父)가 농담하기를, “매성유의 벼슬이 반드시 여기에 그칠 것이다. 예전에는 정도관(鄭都官)이 있었고 지금은 매도관(梅都官)이 있다.” 하였다. 자리에 있는 손님들이 다 놀라고 매성유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아니 되어 매성유가 병들어 죽었다. 내가 젊어서 윤서(尹恕)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윤서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과거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만 되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 두겠다. 남자가 명정(銘旌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기) 위에 정언(正言) 두 글자를 쓰면 만족하다. 제군(諸君)들은 의심치 말라.” 하였는데, 윤서와 내가 갑자년 과거에 올라서 경오년과 신미년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임명되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벼슬을 그만 둘만하다.”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병들어 죽었다. 유원보가 매성유에게 농담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말이 과연 그대로 부합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 문충공(文忠公) 권양촌(權陽村)이 일찍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말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를 만들었는데, 이는 내용이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포함하였으며, 정묘하고 심오하여 옛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하여 후학(後學)에게 무궁한 이치를 열어주었다.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凶)하다.’ 한 말은, 그 대강만 들어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인 것인데 그 뜻이 깊다. 그 조카인 권채(權採) 선생이 또 이 《입학도설》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 및 《혹문(或問)》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유행발육(流行發育)하는 형상과, 학자(學者)가 기질을 변화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는데, 그 덕으로 나아가는 선후의 조목은, 공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 등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 공부하는 방법의 깊고 얕은 의미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논설로써 단정하였으며, 그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논설은 양촌(陽村)의 뜻을 발명하여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근세에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성불도(成佛圖)가 있고, 종정도(從政圖)가 있는데, 모두 투자(骰子 주사위)를 사용한다. 권채(權採) 선생이 작성도를 만들었는데, 그 종목이 열세 가지가 있으니, 도상론(圖象論)ㆍ성리론(性理論)ㆍ음양론(陰陽論)ㆍ조화론(造化論)ㆍ기질론(氣質論)ㆍ성경론(誠敬論)ㆍ자질론(資質論)ㆍ공부천심론(功夫淺深論)ㆍ용공작철론(用工作輟論)ㆍ현지론(賢智論)ㆍ우불초론(愚不肖論)ㆍ진덕선후론(進德先後論)ㆍ총론(總論) 등인데, 13논(論) 중에 또 다소의 절목(節目)이 있으며, 역시 주사위를 사용한다. 주사위 6면(面)에 성(誠)ㆍ경(敬)ㆍ사(肆)ㆍ위(僞) 4자를 썼는데, 성ㆍ경은 두 번씩 썼으며, 그 글자는 다 수(數)로 나누어서,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로써 나아가는 순서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하기는 싫어하고 놀음하기를 좋아하니, 성불도(成佛圖)와 종정도(從政圖)와 같은 것은 역시 장기와 바둑의 한 종류이다. 한갓 시일만 허비하고 마음 쓸 바는 없는데, 선생이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당초에 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가 그것을 즐겨 하여 그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을 장기나 바둑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ㆍ경ㆍ사ㆍ위의 등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ㆍ경ㆍ사ㆍ위는 곧 학자의 마음 쓰는 경지이다. 주사위로 인하여, 처음 배우는 이에게 도(道)를 지시함이 더욱 친절한 것이다. 이 도(圖)로써 성인의 도(道)를 구하면 비록 어리석고 어린이들이라도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으며,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도(圖)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선생이 죽었으니, 지금 아는 이는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은 중부(仲父) 양촌의 풍모가 있다.
○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일찍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한 것을 취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권선징악이 될 만한 것을 더 넣어서 책을 만들어 이름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 하고,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의 뜻은, ‘경서(經書)는 바야흐로 진강하는 중이요, 고려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므로 거울삼아 경계하기에 가장 간절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으니, 보기에 유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평하는 이는 이르기를, “경서는 도(道)를 실은 것이니 전부 성인의 말씀이다. 진덕수의 편찬이 모두 구차한 것이 아닌데, 지금 다 깎아버리면 의리에 온당치 못하니, 옛 《대학연의》에 《고려사》를 보태 넣으면 근사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유산(鄭惟産)이 과거에 이름을 봉하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응시하는 여러 선비들이 시권(試券 시험지) 머리에 성명ㆍ본관ㆍ부ㆍ조ㆍ증조ㆍ외조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고 시험 보기 며칠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과장(科場)을 개시하는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관(主文官 시관(試官))이 글의 제목 몇 개를 적어 가지고 궁궐 문에 나아가 봉하여 올리면, 임금이 친히 뜯어보고 각각 글제 위에 낙점(落點)하고는 봉하여 도장을 찍어서 내어주면, 주문관이 받아서 시원(試院)에 가지고 간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봉함을 뜯고 글제를 내면 당직한 승선(承宣)이 금인(金印 어보(御寶))을 받들어 시원에 가서 주문관과 같이 앉아서 거자(擧子 과거 보는 사람)의 권봉(券封)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주고 주문관 또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당직한 승지가 시원에 이르러 권봉을 뜯고 급제자를 발표한다. 제2장(第二場)도 이와 같다. 제3장(第三場)에서는 이경(二更)에 이르러서 글제를 내고 다른 것은 같다. 이틀 사이를 두고 주문관이 각각 합격된 시권(試券)의 표면에다가 등급의 차례를 적은 황지(黃紙)를 붙이고 함에 봉하여 궁궐로 올린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고 승선(承宣) 두 사람이 그 함을 받들어 임금 앞에서 봉함을 뜯고 문신(文臣)과 승선이 그 과거의 등급을 읽되, 상하의 등급은 모두 주문의 의망에 의하여 방(榜)을 붙인다. 그 에도 대개 이와 같이 해 왔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는데, 시권에 이름을 봉하는 것은 고려와 같고 나머지는 모두 같지 않다. 그 수권관(收卷官)ㆍ봉미관(封䌤官)ㆍ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역서(易書) 등의 일은 다 원(元)의 제도를 따랐고, 양쪽에 시장(試場)을 설치함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혹은 강경(講經)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때에 따라 달랐다.
○ 예전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문무과(文武科)의 방(榜)을 내는 날에는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어사화(御史花)와 어사주(御史酒)를 내렸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皁盖]을 주었으니, 당시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世祖) 때에 문과는 일산을 주고 무과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아낙네들도 모두 문과와 무과의 구별을 알게 되니,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곧 파하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다.
○ 구례(舊例)에는, 벼슬이 정3품에 이르면 문과 시험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6품에 이르면 생원(生員) 진사과(進士科)에 나가지 않았는데, 당상관으로서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에서 시작되었고, 종친(宗親)의 극품(極品 정일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영순군(永順君)에서 시작되었으며, 부마(駙馬) 극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세조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내 없어졌다.
○ 근일에 과장(科場)에서 부의 제목을 내었는데, 해동청(海東靑 매(鷹))이라 한 것이 있었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註)에 보면 옛 사람의 시구(詩句) 중에
아름다운 글귀는 천하의 이백보다 묘하고 / 麗句妙於天下白
높은 재주는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 高才駿似海東靑
한 것이 있는데, 어떤 과거에 온 선비가 잘못 해석하기를, “아름다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이는 오직 백고(白高) 한 사람이니, 그 재주의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하였다. 이에 온 과장이 덩달아 따라서 백고(白高)를 부(賦)의 제목으로 삼아 심지어 시를 짓기를
해동청의 보라매여 / 繫海東之爲靑
백고의 높은 재주와 같도다 / 同白高之駿才
하였는데, 시관도 이것을 모르고 선발하여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이 말을 듣는 이는 심히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 국조 이래로 과장(科場)의 문체가 평온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 이후로 한두 사람의 문사(文士)가 괴이하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니, 4, 5 ,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西崑 오대(五代) 및 송초(宋初)의 시풍)의 문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국학(國學 성균관)과 과장에서는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내친 고사(故事)를 들어서, 그 중에 심한 자를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예전과 같아지나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였다. 근래 전시 책문(殿試策文)의 기두(起頭)에 한 유생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 披沙揀金有太冶之精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말을 잘 아는 사람)의 밝음이 있도다 / 執策臨馬有伯樂之明
하였고, 한 유생은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 天開於子
땅은 축시에 열리고 / 地闢於丑
사람은 인시에 열린다 / 人生於寅
하였으니, 그것은 부화(浮華)하여 절실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 구례(舊例)에는 여러 과거의 회시(會試)에는 매번 삼장(三場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세 시험)을 보는 날에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별도로 궁내에서 술과 과일을 내려서 여러 시관(試官)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제생(諸生)들에게도 묽은 죽과 청주(淸酒) 수십 동이를 주어 목마름을 풀어주었는데, 식례(式例)가 나오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근래에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參試官)이 희롱으로 한 구(句)를 지었는데
좌주(시관)는 약주 한 잔도 안 먹었는데 / 座主下飮香醪一盞
어찌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가 / 何烘其頭
제생들은 먹물 몇 되를 달게 마시니 / 諸生甘吸墨水數升
모두 그 입술이 검어졌도다 / 皆黔其吻
하였다. 나도 한 구를 남겼는데
차주발은 오늘로부터 비로소 커지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지난해에 가득하였음을 기억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였더니,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갑오년 초시(初試)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복시(覆試)에서도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후로 한 사람뿐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신유년에 생원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삼한(三韓) 이후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司成) 남계영(南季英)은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역시 그 다음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와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이고, 형과 동생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정언(正言) 유자빈(柳自濱)과 교리(校理) 유자한(柳自漢)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오른 이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성렬공(成烈公) 황수신(黃守身)과 영의정 심온(沈溫)과 좌의정 심회(沈澮)이다.
○ 조선조에 장원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부원군 권람(權擥)ㆍ영성(寧城)부원군 최항(崔恒)ㆍ남양(南陽)부원군 홍응(洪應)이며, 고려에 장원하고 조선조에 정승이 된 이는 유량(柳亮)과 맹사성(孟思誠)이다.
○ 갑인년 별시(別試)에 영성부원군 최항은 장원이 되었고, 창녕(昌寧)부원군 조석문(曺錫文)은 방안(榜眼 2등)이 되었고, 연성부원군 박원형(朴元亨)은 탐화(探花 3등)가 되었으며, 능성(綾城)부원군 구치관(具致寬)은 병과(兵科 3등)가 되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으로 올랐으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과장에 나와서 보이는 과거) 때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과거 본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뽑아서 올리니, 태종(太宗)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장원을 뽑던 옛 일을 따를 것이다.” 하고, 손가는 대로 뽑아보니, 곧 문경공(文景公) 권도(權蹈)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더니, 지금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번 과거는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등은 자기 문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좌주(座主)의 예(禮)를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殿試) 때에 독권관이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을 제4등으로 추천하였다. 방이 나오자 문종(文宗)께서 이르기를, “권람은 몇 째가 되었는고.”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넷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어보게 하시고는 네 번 째에 이르러 “이 글이 진실로 장원이라.” 하고, 친히 제1등으로 뽑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踶)로 바꾸었는데, 제(踶)의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모두 임금이 내린 것이다.


 

[주D-001]이금오(李金吾) : 당 나라 두보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먹으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 하니, 금오가, “두렵다.” 했다. 금오는 지금의 검찰청장의 직이므로 이렇게 희롱한 것이다.
[주D-002]왕옥여(王玉汝) : 왕옥여(王玉汝)는 아마도 한옥여(韓玉汝)의 잘못인 듯하다. 송나라 한진(韓縝)의 자가 옥여인데 법을 엄하게 다스리므로 당시 사람들이, “차라리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한옥여를 만나지 말라.” 한 말이 있다.
[주D-003]동방삭(東方朔) : 한(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조정에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