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능원 사찰 향교 묘지등/2012.2.13. 충익사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아베베1 2012. 2. 14. 17:27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九

 諡狀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a_128_370b


公諱再祐。字季綏。嘗自號忘憂堂。玄風人。其上世有諱子儀仕高麗。爲金吾衛校尉。自是代有偉人。曾祖諱瑋。禮安縣監。祖諱之藩。成均館司成。贈承政院左承旨。考諱越。海西觀察使。贈禮曹判書。娶晉州128_370c姜氏。以嘉靖壬子八月戊寅生公。自幼倜儻有奇氣。及長。孝友篤至。操守堅確。居常處閒。恂恂有退讓君子之風。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有不可拔者。嘗從判書公聘上國。有相者奇其狀貌。謂曰。此人後必貴。當名滿天下云。後生時好讀書。兼通武藝。累捷鄕解。及廷對語。觸時諱報罷。萬曆丙戌。丁判書公憂。廬墓三年。終喪不入私室。服闋。遂廢擧子業。作亭岐江上。漁釣自娛。爲終老計。壬辰夏。日本兵作。公慨然投袂而起。傾家資募壯士。據新反倉粟。取草溪軍器。逋將散卒。招收並用。號令風揮。忠義動人。遠邇聞之。莫不128_370d響應。時賊將安國司聲言將向湖南。直抵鼎津。公樹栅要害處。設疑兵伏強弩以待之。賊憚其威聲。不敢濟。遂從陸路掠洛水東諸郡。公乃自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上賊多捷。時士未習兵。怯於進戰。公輒挺身先之。賊砲丸齊發而竟不能害。連日交兵。殺賊無算。亦不斬馘以獻功。撫視士卒如家人。至犯軍律當死。用法不少貸。賞罰嚴明。誠信素著。故能得人死力。初巡察使金睟見賊勢盛。不敢爲城守討賊計。託以勤王。行到龍仁。遇賊大敗而還。公告于衆曰。睟爲一路方伯。不死守封疆。欲出境偸生。喪師奔還。其罪128_371a可斬也。因疏陳行在。檄數其罪。睟大怒。以反逆論啓。幕下金景訥等移書列邑。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時金文忠公誠一受招諭之命。行到居昌。初見檄文。錯愕驚疑。問於前學諭朴思齊曰。再祐何如人也。巡察是王人。安敢乃爾。思齊答曰。再祐故監司郭越之子也。爲人慷慨有大節。每讀史至忠臣義士盡節處。未嘗不感憤流涕。常曰。吾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軀以報之。其素意如此。今日之事。雖未知其由。然巡察遇賊出境。顚沛奔還。軍情解體。事128_371b不可爲。故有此擧也。豈有他意哉。文忠大悟。卽致書于公。反復曉告。又馳啓行在。暴其忠義奮激狂疏戇直之狀。伸救甚力。上特下溫諭。勉以討賊。始授公幽谷道察訪。俄遷刑曹佐郞。公於是感泣拜受。誓以死報。激厲將士。屢戰皆捷。保障江右。爲恢復嶺南之基。時洛水以東屯據之賊。四出摽掠。恣行殺戮。民無所歸命。奔逬竄匿。將無孑遺。公自宜寧引兵來。住玄風之境。使突騎直至邑底以誘之。賊畏縮不敢出。公益爲疑兵。夜令人人持兩炬。炬皆三頭可爇火。迤邐數十里。鼓角齊鳴。一時擧火。若將掩襲之狀。忽又128_371c火滅鼓止。寂若無人。俄頃復如前。賊大驚疑。撤屯宵遁。他邑留屯之賊。望風亦潰。七月。上諭嶺南士民書曰。郭再祐布置異常。殺賊尤多。而不以功自達云。予尤奇之。恨予聞名之晩也。冬。陞折衝爲助防將。公擇驍勇壯健者數十騎以自隨。公衣紅衣騎白馬。從者亦如之。凡遇賊。鼓譟左右。躡以誘之。賊或空壘以逐之。追至山谷間。失公所在。賊方驚惑。忽見前崖有紅衣白馬者鼓譟而出。賊大驚追之。又失所往。但聞鼓角殷山。旗幟萆阿。賊不敢逼。公乃令軍士從樹木叢密中游弩迭射。殺傷甚多。賊輒敗走。其出奇制勝。128_371d以少擊衆。類如此。時完平李相公元翼以體察使開府于星州。使公築三嘉,玄風兩邑山城。將欲使楊總兵移駐嶺南。公言于體府曰。爲今日之計。當修山城。繕器械蓄資糧。先爲不可勝之勢。待時而動。此虛虛實實之論也。夫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若虎出於野。龍出於陸。童豎逐之。獱獺侮之。天兵之在湖南。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在野而龍出陸。亡乃不可乎。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屈膝。癸巳夏。拜星州牧使。甲午秋。棄歸。乙未春。拜晉州牧使。秋又棄歸。所至政淸如水。治稱神君。丁128_372a酉秋。賊復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昌寧之火旺山城。群情胥悅。公纔入城。賊將淸正游騎已到城下。公指揮諸軍。號令明肅。兵威益張。士氣益勵。於是積薪所館。以示必死無生意。一軍皆感憤思致死。賊旣薄城。公從容談笑。但令各堅所守曰。賊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賊果斂兵不戰。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賊鋒所指。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致書體府曰。齊城七十。卽墨獨全。安市孤城。能抗唐兵。列鎭雖潰。餘城未拔者。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時公有繼母喪也。 軍民莫不悼128_372b歎失望。公遂避地關東之蔚珍縣。衰絰居廬。持喪惟謹。不以顚沛流離。有所忽略。累命起復。終不應。戊戌。日兵撤歸。己亥冬。爲嶺南東道兵馬使。庚子。以島山城繕完事。再度啓請而朝廷不許。公以爲有官守者不得其職則去。上疏棄官歸。遂被臺劾。責靈巖。壬寅。賜環而歸。遂入琵瑟山。餐松辟穀。又就靈山滄巖築江亭。扁以忘憂。永謝煙火。蕭然若一道人也。甲辰春。拜南路察理使。巡審道內山城之必可修築者。夏。除善山府使。不赴。秋。拜安東府使。亦不赴。冬。陞嘉善。乙巳春。又以察理使被召。拜同知中樞府事。128_372c俄遷漢城右尹。秋。除仁同縣監。蓋以曾修天生山城故也。又不赴。戊申。宣廟上仙。光海卽位。又拜本道兵馬使。不赴。己酉春。被召不就。拜三道統制使。又不赴。庚戌春。被召不至。上中興三策疏。夏。承召入京。拜副摠管。尋遷漢城左尹。上疏極言時弊。聞者莫不悚歎。拜咸鏡道觀察使。上疏論譯官遠接使無君之罪。不報。公以言不見用。浩然南歸。光海卽遣宣傳官追到忠州。宣旨敦諭。公留忠州數日。上疏歸家。光海又遣注書諭旨益懇。公謝病不起。留陜川之海印寺。答友人書曰。靑松巖畔。飢則餐葉。白雲堆裏。渴則飮泉。128_372d一時人皆傳誦。公之在京也。完平,漢陰諸公日與之遊。賢士大夫莫不爭趨交謁。座不能容。癸丑夏。拜湖南兵馬使。有旨勉起。終不赴。時廷臣請殺永昌大君。公獨上疏言。八歲之兒。焉知逆謀。且大君見誅。慈殿必不能忍。如或有意外之變。則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不報。自是不復有意當世。常在江亭。杜門服食。有遺世獨立之意。丁巳春。疾病危篤。不許鍼藥曰。死生命矣。何用鍼藥爲。以四月十日啓手足。是日雷雨驟至。紫氣沖霄。春秋六十有六。深山窮谷。莫不驚歎。光海深加痛悼。亟命致賻賜祭。八月某日。128_373a葬于玄風縣南仇知山神堂之原。從先兆也。今上甲寅。士林爲之立祠。與存齋郭公並享。越三年丁巳。因大提學閔點建請。特爲宣額。公夫人商山金氏。萬戶諱行之女。南冥曹植之外孫女也。生二子。曰瀅,曰活。無外家者又三人。曰灘,曰溟,曰沐。瀅有二子。曰汝櫓,汝楫。餘子又二人。曰汝梯,汝梲。活有四子。曰汝桓,汝榟,汝樞,汝松。灘有一子曰汝棹。溟有一子曰汝檀。沐有三子。汝相,汝棱,汝柱。曾孫男嫡庶凡十六人。玄孫男凡六人。玄逸竊惟國家昇平百年。優禮臣下。士大夫食君衣君。荷國寵榮者。不爲不厚。一朝變生。不128_373b虞寇盜充斥。使君父蒙塵。越在草莽。不免震蕩暴露之苦。而一時方伯連帥之臣。奔北竄伏。偸生苟免者。前後相續也。公以草野書生。平生未嘗沾一命之官。顧獨奮然出萬死。不顧一生之計。糾合鄕兵。激以忠義。提數千烏合之卒。抗方張不測之寇。出奇制變。捷應機會。其所摧敗。旣足以暴當世而垂後來。卒能遊兵迭出。蔽遮沮遏。使賊不得逞。其分道荐食之策。爲國家中興根本。其忠其烈。斯已奇矣。晩復超然遠引。辟穀鍊氣。將與古之形解尸化者。相期紘垓之外。似若無意於當世者。而一聞朝論之愆違君德之128_373c爽失。則輒復封章極言。只知有國而不知有其身。其惓惓忠愛之篤。又如此。若公者豈所謂間世奇氣英毅忠壯烈丈夫者非耶。玄逸晩生遐陬。雖未能及公之世。得接儀刑。親承音旨。聞其風而讀其書。景仰忻慕之日久矣。癸酉歲。從宦在京師。一日公之曾孫昕將請易名之典。詣玄逸而言曰。願子之爲之狀也。玄逸辭不獲。遂就家牒中稍加檃括。第錄如右。以備太史之採擇。太常之議諡焉。謹狀。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九
 諡狀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存齋郭公諡狀 a_128_373c


128_373d公諱䞭。字養靜。玄風人。高祖諱安邦。益山郡守。以淸白著名。曾祖諱承華。成均進士。有淸介拔俗之標。爲士友所推。祖諱。有氣節操行。考諱之完。娶鄭氏女。以嘉靖辛亥某月某日生公。自兒幼時。恬靜和厚。便有成人儀度。宗黨皆器重之。年十八。從同縣洛川先生裴公紳遊。得聞大學格致誠正之說而心忻慕之。踰冠。聞寒岡鄭文穆公講道新安泗水上。遂往從之。益知有內外輕重之分。雖以家貧親老。不免從事擧業。其素志不在是也。萬曆丁丑。丁內艱。喪致哀祭致誠。凡喪祭儀節。與寒岡先生反復詳訂。一正流俗之128_374a謬。至他冠昏之儀。亦皆遵用古禮。一方人士多取以爲法。公孝友出天。又繼之以學力。事親之際。愉色惋容。承藉無違志。親或有過。則至誠規誨。以期開悟。處兄弟骨肉之間。和敬以睦。姻于外親。信於朋友。各盡其道。一家之內。旣翕且湛。常有鳧藻之樂。己丑。丁外艱。廬墓終三年。服闋。不復應擧。築數椽屋。扁曰存齋。日整衣冠危坐。專精讀書。本之以六經語孟洛建之書。潛心硏究。以極其趣。至於天文地誌卜筮等書。亦皆涉其流而識其槩。樂與勝己者遊。講析疑義。窮日夜不知倦。若寒岡鄭文穆公,大庵朴公惺,松庵金公128_374b沔。皆其道義交也。其於世俗聲利紛華。一味澹泊。不入乎心。家貧妻子告飢寒。曠然若不聞也。對親舊。未嘗言貧。坦蕩以自遣。少無尤怨切蹙之態。人有寸善片長。歆歎奬勉。惟恐不成其美。與鄕人俗子處。油油然色笑可親。以故賢者慕其義。不肖者感其德。敎子弟。必先之以小學。繼之以四書。勉以孝仁禮義之敎。申以溫恭和順之行。且譯內則,女戒等書。以敎女子子。使知貞淑孝謹之道。常以早患風痺。學問不博爲恨。其靜存動察之工。不以疾病呻吟少懈。壬辰之變。金公沔倡起義兵。起公佐其幕。多所裨益。時金文忠128_374c公誠一巡察嶺南。上其功狀。除自如道察訪。未幾。朝廷擢用才俊。特拜公安陰縣監。政尙寬仁。百姓愛戴。豪猾亦服。丙申冬。體察使李公元翼知公忠義。可任以事。檄公領三邑兵。守黃石山城。與金海府使白士霖分城而守。士霖守東北。公守西南。及賊薄城。自公所分始。公率將士。手弓臨賊。督戰不少懈。賊不敢逼。士霖使謂曰。劇寇薄城。得無畏心乎。公厲聲曰。旣以死誓。何畏之有。士霖率其屬潛遁。軍中一人大呼曰。白帥已去。太守何獨不去。公怒曰。此人訛言動衆。可斬也。使人偵之。士霖所守果空。於是士卒潰亂。勢不128_374d可遏。公之子若壻皆號泣曰。事無可爲者。何不早爲之所。公笑曰。此吾死所。何所之更圖。指軍器曰。不可以藉寇。遂焚之。明日賊登城。公據胡床不動。竟爲賊所害。致命前數十日。與友人詩曰。廟堂平昔講經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勖在成仁。其捐軀殉國之本意。素定於胸中如此。公之死也。二子履常,履厚抱持公大罵賊。並斫之。女爲柳文虎妻。時文虎亦在圍城中。幸脫走出城。妻隨夫出。文虎爲賊所獲。妻哭曰。所以不從父死。爲夫在也。今夫又不幸。何用生爲。遂自縊以死。家庭式穀之化。有以致128_375a之也。事聞。命旌其閭。贈兵曹參議。遣官致祭。履常,履厚俱贈正郞。至光海朝。加贈公參判。命置守塚人。至仁祖朝。特遣官致祭。顯宗大王十五年秋。士林爲之立祠。今上丁巳。宣額以褒之。公初娶全州全氏。有二男二女。男卽履常,履厚。女長卽柳文虎妻。季適縣監姜遵。後娶廣州安氏。無子女。始公之死事。公弟赾經營賊藪。出生入死。收瘞公屍于黃石城外。後數月。以其喪歸葬于玄風縣西花山先壟之側。公之二子。皆死無後。公幾絶不祀。今上壬申秋。大臣諸宰白上以爲故安陰縣監贈兵曹參判128_375b郭䞭。以先朝著節之臣。至今不得立後。其在褒崇激勸之道。實爲欠典。請以䞭之弟參奉赾之孫生員昌一爲履常後。以奉䞭祀。從之。旣又特贈吏曹判書。玄逸之生也後。居且僻遠。常恨未能得公之遺文家傳而讀之。以償其平生景仰忻慕之意。歲癸酉。忝天官之長。供職在京師。公之所後孫昌一持家牒詣玄逸言曰。此先祖家傳也。夫以先祖之所樹立。章章如此。而家世零替。迄未有顯揚褒贈之典。迺者幸因廷臣建白。得有進秩之榮。今又以士林疏陳。將有易名之典。願吾子之爲之狀也。玄逸以寡陋不文辭。其128_375c請愈勤。不得終辭。遂据其家牒。狀次之如右。嗚呼。公一个書生也。受一縣之寄於危亂之際。擁羸卒守孤城。以抗暴起方張之寇。力竭援絶。遂以身殉。今讀聖上褒贈之敎。諸公贊揚之語。爲之掩卷流涕也。夫忠義之性。出於人心之所固有。君臣之義。無所逃於天地之間。而當國事搶攘之日。士大夫出身殉國。死其官守。如公之爲者。有幾人耶。若非熊魚取舍之極素定。守死善道之義素明。安能一朝倉卒。從容自靖如此哉。若公者可謂不失其本心之正而無愧於臣人之義矣。聖朝之所以褒贈奬寵。以爲人臣忠義128_375d之勸者。固其宜也。自公盡節之後。名公鉅人敍述稱美之文。固多有之。如大庵朴公之誌。愚伏鄭公之銘。蒼石李公之傳。桐溪鄭公之傳後敍。皆可謂愨辭確論。而其於鋪張揚闡之道。無復遺恨矣。玄逸之愚。何敢贊一辭。更加評騭哉。遂就其中僭那删節。彙爲一編。牒太常以請節惠之典。謹狀。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九

西堂私載卷之十一
 墓表
忘憂堂郭公墓表 a_186_511c


忘憂堂郭公。當壬辰島夷之變。首起義兵。擊賊於嶺南。其186_511d 功甚奇。晩又棄官入山。餐松辟穀。其迹又甚奇。不唯爨婢蕘竪皆知公名。中朝人龔夢暘。甞抵公書云。翁之事功振古稀奇。吾中華莫不聞知若然者。公之名固已播於天下矣。世之談公者。動必以異人稱之。然不知公早遊曺南溟之門。得聞性理之說。其挺身赴國難。非出於一時之慷慨。而晩節謝病。又有見於儉德辟難之義。非故喜爲驚世絶俗之行而然也。公之墓在玄風縣南仇知山。盖公甞有遺命曰。龍蛇之變。二陵夷。九廟火。臣子之恥辱大矣。吾葬不用成禮。不封不樹。揜坎而止。無違吾志。至今百有餘年之間。不敢輒事增築。李侯友仁。漢陰相公之後孫也。來守是186_512a 邑。首謁公墓。周覽咨嗟以爲土不敢加。固所以遵公志。墓而無識。後之人又奚能知其爲公墓。於是邑之章甫。皆曰然。遂以告於今按使趙公顯命。趙公走書於某。俾爲之記。若公官閥事實。後當有隧道之銘。今只書所以識公墓之意。公諱再祐。字季綏。苞山人。生於嘉靖壬子。卒於萬曆丁巳。官至觀察使贈兵曹判書。是爲表。

茅谿先生文集卷之三
 雜著
忘憂堂事蹟 b_008_367d


郭再祐宜寧人也。變初閫兵退敗。邑鎭竄亡。聞金廵察晬曺兵使大坤之退遁。而賊鋒直指京都。乃招募射士。捐家財以給之。欲討衝斥之賊。陜川郡守田見龍誣以逆名。中止不起。招諭使金誠一貽書諭之。卽飜然而起。招兵治械。剋期辦集。自號天降將軍。紅衣羽笠。躍馬突陣。往來倐忽。賊以爲神。遮絶洛江之賊。賊不得犯境。宜民賴以爲安。以其廵察金晬之不斬退兵之曺大坤。且其自退於密陽之戰。移檄發言欲討之。鶴峯,松庵皆貽書責之遂止焉。自起兵以後。不008_368a顧本家。以討賊許身。所獲之賊。剖其肝而食之。雖百戰無不剋。沿江賊船。以此不得相通。且不得衝陷數郡者。郭之功也。人皆以將才許之。以功陞堂上職。典星晉二牧。竟爲左道兵使。以言事失當。謫居珍島。未久特宥之。復授職牒。又以爲善山府使。辭不赴焉。
  간본 아정유고 제3권
 문(文) - 전(傳)
홍의장군전(紅衣將軍傳)

곽재우(郭再祐)의 자는 계수(季綏)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황해 감사(黃海監司) 월(越)의 아들이다. 월이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재우가 곁에서 3년 동안을 모시고 있으면서 한 번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20여 세로, 사람들은 모두 그의 확고한 지조에 탄복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니,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특이하게 여기며 ‘천하에 이름이 가득할 것이다.’ 하였다. 《춘추(春秋)》를 통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여러 가지 사무에 관하여 두루 알고 병가(兵家)의 서적을 널리 읽었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집상(執喪 부모상에 예절을 다하는 것)에 슬픔을 다하였다. 이때 애첩(愛妾)이 병이 심하여 곧 죽게 되었는데 울면서 한 번 만나 보기를 청하니 재우는 사람을 시켜 영결(永訣)하기를,
“죽은 후의 부고는 받을 수 있지만 만나볼 수는 없다.”
하였다. 아버지의 복(服)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의령(宜寧)의 기강(岐江)에 정자를 짓고는 농사꾼 차림으로 한가히 노닐면서 고기잡이와 낚시질로 스스로 즐거워하여 장차 그대로 살다가 늙을 듯이 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0년(1592) 여름 4월에 왜놈들이 대거 침략해 오니 여러 고을들이 모두 지키지 못하고 패하였다. 재우는 이에 슬퍼하여 집의 사당(祠堂)에 고하고 가산(家産)을 털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중국에 갔을 때에 명 나라 황제가 붉은 비단을 하사하였는데, 이 비단을 재단하여 전포(戰袍)를 만들어 입고 흰 말을 타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 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이라고 호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가 전라도(全羅道)로 향한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정진(鼎津)에 이르렀으나 진창 때문에 행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먼저 포로들을 시켜 높고 건조한 곳에 기를 세우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건너려 하였다. 재우는 이것을 염탐하여 알고는 한밤중에 왜놈들의 기를 뽑아다가 바꾸어 진창 속에 꽂아 놓은 다음에 복병(伏兵)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적이 진창 속에 빠졌다. 이때 복병이 나와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윽고 적이 크게 쳐들어오니 재우는 우리 편 군사가 적어 맞설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 10여 명을 뽑아서 모두 흰 말을 타고 붉은 전포를 입히고는 기에다 ‘천강홍의장군’이라고 쓴 다음 나누어 산골짜기 깊은 곳에 지키고 있게 하고는 재우가 먼저 적진(敵陣)을 습격하여 유인하니, 적은 온 무리를 총동원하여 추격하는데 납으로 만든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끝내 맞히지 못하였다. 재우가 수목(樹木) 사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니 적이 바야흐로 놀라고 의심하던 차에 다시 보니 붉은 전포를 입고 흰 말을 탄 사람이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나와 빙 둘러서서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은 더욱 놀라고 의심하여 천신(天神)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니 재우가 드디어 숲 속에서 나와 어지럽게 활을 쏘아 곧 전멸시켰다.
이때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가 왕을 호가하려고 용인(龍仁)에 당도하였다가 패하여 산음(山陰)으로 돌아오니 민심이 울분하였다. 재우는 격문(檄文)을 전하여 김수의 8가지 죄를 말하고 장차 군사를 이동하여 공격하려 하니, 김수가 크게 노하여 반역죄(叛逆罪)로서 행조(行朝 임금이 순행 중에 임시 머무는 곳, 즉 행재소(行在所))에 논계(論啓)하였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처음 거창(居昌)에 도착하여 재우의 격문을 보고는 한동안 놀라다가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에게 묻기를,
“순찰사는 조정에서 명한 관리인데 재우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까지 욕한단 말인가?”
하였다. 사제는,
“재우는 나의 벗입니다. 사람이 충성스럽고 효도하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세상이 어지럽고 시기가 위태로운 때에 의사(義士)가 절의를 지킨 것을 보면 반드시 목메어 눈물을 흘리며 언제나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에 만일 환난(患難)이 있게 되면 나는 마땅히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 하였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순찰사가 경내(境內)를 탈출한 지 오래며 지금 갑자기 군사를 패하고 돌아오므로 대중의 마음이 화합치 못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부득이 이런 일을 했을 것이요, 결코 딴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일은 낯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조처에 대해서는 꼭 알 수 없으나 나는 시험삼아 재우를 위하여 조정(調整)해 보겠다.”
하고는, 김수와 재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두 편을 말리고 급히 계(啓)를 올려 재우를 구원하면서 그가 장수의 재질이 있음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재우도 상소하여 스스로 사실을 밝히니 상이 가상히 여겨 유곡찰방 겸형조정랑(幽谷察訪兼刑曹正郞)을 제수하였다.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이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들과 고성(固城)ㆍ사천(泗川)에 진영(陣營)을 연하고는 진주성(晉州城)을 대거 침략하는데, 군대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아래에 주둔하고 있으니 성일이 모든 장수들을 지휘하여 갑자기 쳐들어가 적을 무수히 살상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수만 명의 왜적이 다시 진주를 10겹으로 포위하고는 7주야 동안을 공격하니 재우가 선봉장(先鋒將) 심대승(沈大承)에게 밤을 틈타 진주의 북쪽에 있는 산에 올라가 횃불을 죽 늘어 놓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큰 소리로 ‘홍의장군이 호남(湖南)의 의병들과 함께 내일 왜적을 무찌를 것이다.’ 하게 하였는데, 그 다음날 호남의 의병장(義兵將) 최경회(崔慶會)가 살천(薩川)에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오니 적들은 이것을 바라보고는 놀라 주둔하고 있던 막사를 불사르고 도망쳤다. 상은 재우가 공을 자처하지 않음을 가상히 여겨 절충장군 조방장(折衝將軍助防將)을 제수하였다.
21년 왜의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진주의 지도를 보고 임진년(1592, 선조 25)에 두 번이나 패한 것을 분히 여겨 대장 행장(行長)ㆍ청정(淸正)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짖기를,
“진주를 무찌르지 못하면 바다를 건너오지 말라.”
하니, 이에 왜적들은 다시 진주를 포위하였다.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을 믿고 기강(岐江)을 건너 맞아 공격하려 하니, 재우가
“적세(敵勢)가 한창 강하고 우리의 군사는 훈련이 되지 못했으니 가벼이 진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종사(從事) 성호선(成好善)은 여러 장수들이 지체하는 것을 꾸짖고 권율과 함께 강을 건너 함안(咸安)으로 진격하다가 적의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을 듣고는 되돌아와 정진(鼎津)을 건넜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권율ㆍ이빈과 함께 전라도로 향하였으며, 흠차 총병(欽差總兵) 유정(劉綎)은 팔거(八莒)에 주둔하고, 흠차 유격(欽差游擊)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해 주지 않았다. 적이 진주성을 1백 겹으로 포위하여 8일 만에 함락하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ㆍ병사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ㆍ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가 모두 죽었으며, 군사와 민간인으로 죽은 자가 6만 명이었다. 재우가 두 번이나 진주를 구원했었는데 이때에는 가지 않았으니 적을 잘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제수하니,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재우로 하여금 삼가(三嘉)에다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쌓고 현풍(玄風)에다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도록 하였다. 이때 흠차 총병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었다. 원익은 양원에게 군사를 옮겨 영남(嶺南)에 주둔해 줄 것을 청하려 하니, 재우가 원익에게,
“산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계책입니다. 만일 양 총병(楊總兵 양원을 가리킨다)이 영남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범이 산의 숲에서 나오고 용이 깊은 못에서 떠나는 것과 같으니 여우와 삵이나 수달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익이 사례하면서,
“이같이 훌륭한 장군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재우는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는 의병을 거느리고 의령(宜寧)의 가력(嘉力)에 주둔하여 이광악(李光岳)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김덕령(金德齡)ㆍ홍계남(洪季男)을 좌우협(左右協)으로 삼아 곧바로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연해(沿海)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였다. 덕령과 계남은 뛰어나게 날래고 민첩하여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용맹을 자랑하면서 진격하니 적은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재우는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한다)를 재촉하여 적진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광악과 함께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데 사발만한 적의 대포알이 두 사람이 있는 뱃전을 지나 물속에 떨어져 한참 동안이나 소리가 울리고 물이 끓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소(談笑)하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여 감히 맞아 싸우지 못하였다. 재우는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25년,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되어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청정이 다시 대거 침략해 오자, 재우는 창녕ㆍ밀양(密陽)ㆍ영산(靈山)ㆍ현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엄히 하여 명령을 위반하는 자를 목 베며, 관사(館舍)에 땔나무를 쌓아놓아 사수(死守)할 뜻을 보이니, 온 군사가 두려워하여 재우를 벼락이나 귀신처럼 여겼다. 적은 이미 성 밑까지 쳐들어왔는데도 재우는 여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굳게 지키라.’ 명령하고 이르기를,
“왜놈들 자신이 병법(兵法)을 알고 있는데 어찌 쉽게 진격해 오겠는가?”
하였는데, 1주야를 경과하자 과연 싸우지 않고 물러가 서쪽으로 황석(黃石)을 무찌르고 남원을 함락하니 여러 고을이 모두 패하였다. 원익은 걱정하여 재우에게 군사를 해체하도록 하니 재우는 즉시 편지를 써서 답하기를,
하고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어머니 상(喪)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상이 특별히 3번이나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울진(蔚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손수 패랭이[蔽陽子]를 만들어 팔아서 자급(自給)하니 사람들은 그의 여막(廬幕)을 방어점(防禦店)이라 이름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어 섬에 있는 산성(山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여 2번이나 계(啓)를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대신(臺臣) 홍여순(洪汝諄)이 ‘직무를 유기하고 태만하였다.’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으로 귀양갔었는데, 뒤에 풀려 돌아와서 비파산(琵琶山)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벽곡(辟穀 곡식을 먹지 않고 곡식 이외의 것을 조금씩 먹는 것)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니 순행하여 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되어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상소하여 임해군 진(臨海君珒)을 벨 것을 청하였다. 여러 번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여 중흥(中興)에 대한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며 부름을 받고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수(金睟)가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재우에게,
“영공(令公)이 몇 년 동안 벽곡하였으니 어떻게 운검(雲劍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메겠는가?”
하고는 언제나 자기가 메었다.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어서는 상소하여 ‘전하(殿下)의 나라가 반드시 은(銀)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였다.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에 조사(詔使) 염등(冉登)이 탐욕스럽고 독직(瀆職)하며 횡포가 심하니, 재우가 상소하여 통역관과 원접사(遠接使)를 극히 비난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전라 병사를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의 신하가 영창대군 의(永昌大君㼁)를 죽일 것을 청하였는데도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재우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제 겨우 8세인 아이로서 모역(謀逆)이 무엇인지도 모를 터인데, 그대로 처형하였다가 자전(慈殿)께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혹시라도 자결(自決)하신다면 전하께서 장차 천하에 무슨 구실로 변명하시겠습니까? 신(臣)은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전하를 큰 불의(不義)에 빠뜨릴까 두려워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창암(滄岩)에 집을 짓고 스스로 망우당(忘憂堂)이라 하고, 거문고와 배 1척으로 세속을 떠나 한가로이 지내면서도 언제나 변보(邊報 일선 지대의 전쟁 소식)를 들으면 곧 초연(愀然)히 기뻐하지 않으면서,
“내가 비록 늙었으나 국난(國難)이 있으면 마땅히 싸움터에 나가야한다.”
하였다.
나이 66에 졸하였다.
재우는 군사를 행함에 있어 상벌(賞罰)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며 기율(紀律)이 정제(整齊)하였다. 군사들을 집안 식구처럼 사랑하여 모든 군사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법을 행할 때에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말 위에서 손수 북을 치고 사람들에게 젓대와 피리를 불면서 천천히 걷는 것으로 절도(節度)를 삼아 한가한 것이 마치 싸우지 않을 듯이 하고는 곳곳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왜적들이 오면 곧 활을 쏘며, 왜선을 쫓느라 언덕에 임하여 활을 쏘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는데, 적의 머리를 베어다 바쳐서 공을 요구하는 것은 의(義)에 맞지 않으며 공을 탐하여 목 베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의 귀를 베어 오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이노(李魯)는,
“공의 본의는 참으로 좋지만 모든 사람이 공(公)을 따라 힘을 다하여 싸우는데 누구인들 공명에 대한 욕심이 없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한다면 끝내는 반드시 싸움에 게을러질 것이오.”
하였다. 왜적을 지산(砥山 현재의 의령(宜寧) 지방)에서 무찔러 무수히 사살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 베는 것을 허락하니 군사들이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70여 급(級)을 베었는데도 공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군관(軍官) 조사남(曹士男)이 앞장서서 적선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찌르다가 마침내 거짓 죽은 체하는 왜적에게 찔림을 당하였다. 재우는 크게 슬퍼하여 통곡하면서,
“내가 목 베는 것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처사(處士) 조식(曹植)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일찍이 재우를 간택하여 외손서(外孫婿)로 삼고는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재우에게만 병서(兵書)를 가르쳤다. 재우는 이미 벽곡(辟穀)을 하고는 술을 마셔 크게 취할 때에 문득 문밖에다 귀를 기울이면 귓구멍에서 술이 콸콸 샘물처럼 쏟아져나오니, 대개 한갓 병서만을 안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기이한 술법(術法)을 통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홍의장군은 성품이 뛰어나고 정직 순박하여 다른 사람과 서로 어울리지 않았으니, 조정에 있으면 마땅히 화가 미칠 것이며 싸움터에 있으면 마땅히 패할 것이다. 그러나 공리(功利)에 담박하여 물욕에 벗어났으며 형세를 살펴 승리를 취하였고, 기이한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능히 세상의 재화를 면하여 일찍이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공리에 담박한 떄문이었다. 선무 공신록(宣武功臣錄 임진왜란을 평정한 공신록)에 조그마한 공로도 모두 기록하였는데, 홍의장군은 도리어 참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의장군의 공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주D-001]제(齊) 나라 …… 온전하였으며 : 전국 시대 제 나라는 연(燕)에게 크게 패하여 70여 성을 다 빼앗겼는데 오직 거(莒) 땅과 즉묵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즉묵 사람들은 전단(田單)을 장군으로 삼고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결국 제 나라를 회복하였다.《史記 卷82 單田列傳》
[주D-002]당(唐) 나라 …… 막아냈다 : 당 태종(唐太宗)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당군(唐軍)을 물리쳤다.
[주D-003]임해군 진(臨海君珒) : 선조(宣祖)의 서장자(庶長子)였는데 성품이 사나워서 세자(世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光海君)이 세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가등 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주D-004]은(銀) 때문에 망할 것 :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화옥(癸丑禍獄)을 말한다. 서양갑(徐羊甲) 등의 서류(庶類)들이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금품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들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모함하려고 하던 차에, 서양갑 등이 김제남도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나 영창대군 등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주D-005]조정의 …… 죽일 것 : 영창대군은 인목대비 소생으로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이다. 선조는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이를 안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이 광해군을 옹위하였다. 이들이 계축화옥(癸丑禍獄) 때에 영창대군이 역모(逆謀)에 가담했다고 무고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하였으며, 뒤에 마침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손에 참혹하게 죽었는데 그때 겨우 14세였다.
[주D-006]적의 …… 일 : 옛날 전쟁 때에 적의 시체의 왼쪽 귀를 베어 이것으로 공(功)의 신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