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龜亭先生遺稿上

龜亭先生遺稿上(남재)

아베베1 2012. 2. 17. 21:50

 

 

龜亭先生遺稿上

 附錄
神道碑銘 並序○十代孫九萬撰 a_006_641b


維我南氏自英毅公諱敏籍英陽以來。簪紳相承。至高麗中葉。有樞密院直副使諱君甫。移貫宜寧。是生豐儲倉副使諱益胝。是生靈光郡事諱天老。是生檢校門下侍中敬烈公諱乙蕃。敬烈之配鷄林崔氏。參議諱茳之女。是生公四世祖考及妣也。公以忠定王三年辛卯歲生。初諱謙。歲辛亥。李穡知貢擧。公中同進士第五。歷職無可攷。時當麗季極亂。聖祖將興。公志存經濟。契合風雲。及乎禪代之際。有辭功遜賞之意。遯于荒墅。太祖旣受命。思公甚。物色求得。006_641c賜名曰在。蓋喜其尙在也。公自字以敬之。蓋敬君賜之意也。策開國勳一等第十三。拜中樞院學士兼司憲府大司憲。封宜城君。疏陳創業初急先務十一事。二年六月。差奏聞使將赴京。上遣公弟將軍贄賜衣酒。九月。回自京師。啓曰。帝厚待之。且命曰。爾國使臣道遠煩費。自今三年一朝。三年甲戌。帝以本國表辭倨傲有嘖言。太宗以靖安君自請使行。擧朝皆危之。公日。靖安君有此行。吾輩安枕死於此乎。亦自請以副价行。行中諸人或有不敬盡於侍御。獨公執禮甚恭。及如京事解。帝優禮遣還。四006_641d年乙亥正月。遭敬烈公憂。七月。上引見于便殿。勸以薑桂之滋。五年丙子十二月。以藝文館春秋館太學士。爲都兵馬使。從都統處置使金士衡。征一歧對馬島。上出南門外餞之。都堂餞于漢江。翌年正月。還師。七年戊寅。以政堂文學。奉命致祭于松岳。聞芳碩之亂作。弟誾爲罪首。還謁于諸王子。有欲並害公者。太宗曰。某素不與誾同心。不可連坐。其歸我第。及事定。宥放于外。俄召還。庚辰正月。定宗卽位。公於闕庭大言曰。卽今當立靖安君爲儲嗣。不可緩也。河崙因公言上言于定宗曰。天意人心可知。006_642a請早定位號。上許之。太宗定策之功。公實首發。曁太宗卽位。首置世子書筵官。以趙浚及公與鄭摠學業可備勸講。命爲從官。品拜師傅賓客之職。三年癸未。拜慶尙道都觀察使。條陳時務報政府。政府啓聞許施。上聞公因禁令斷酒。而勤於職事。慮或生病。十二月。賜宮醞任所。仍命自今服藥用酒。而四年甲申五月。拜議政府贊成事。十月。臺諫刑曹以李居易之黨劾公。上下三省官于巡禁司鞫問。命公視事。公詣闕謝恩。且陳昔者效力危難之事。上曰。卿雖不言。予豈不知。卿其勿疑。八年戊子。006_642b持平崔自海論事忤旨。勒歸其家。執義權遇等待罪。公以大司憲言于上曰。臺諫。人主耳目。言雖不中。亦不可加罪者。所以開言路廣視聽爲萬世計。上卽命自海等就職。十四年甲午。拜右議政。宜寧府院君。以監春秋館事掌試取士。上曰。權蹈,成槪,李賀,李隨皆朝士也。無中試者。可見掌試之公。上命河崙及公改修高麗史曰。恭愍王以下事多不實。宜更竄之。同年。陞拜左議政。十五年乙未。解相職。以勳兼修文殿大提學世子傅。十六年丙申。拜領議政。而已免。世宗元年己亥十二月十四日。以勳封。卒于006_642c第。停朝市。致賻賵庇葬具。太常議諡曰忠景。上備法駕。率百官幸公第。賜祭弔孤。其祭文略曰。惟卿廊廟偉姿。山河秀氣。有貫穿百家之學。有酬酢萬變之才。翊戴聖祖。開億萬年無疆之洪休。當我上王入覲天庭。陪從跋涉。捍禦艱難。逮至踐阼。裨益弘多。在予沖人。尤爲藥石。矧卿於寡人有舊恩之好。卿之孫則有連姻之慶。謂將儀表百僚。弼亮四海。今其已矣。何以爲心。上王遣宰臣尹淮賚敎賜祭。其文略曰。惟卿性姿英豪。識見高邁。仗義決策。密定創業之宏規。應天順人。協贊開國之偉績。曩予朝覲之日。006_642d乃爲副貳之官。不憚跋踄之勤勞。實同甘苦於蚤夜。逮當纂承之後。益申弼亮之功。何知一病之作。遽爲九原之逝。興言及此。慟悼無已。太祖之定鼎漢陽也。親卜仙寢於健元陵。以陵外佛巖山下注洞之原賜公。爲日後陪葬之地。且賜其近田民。使傳之永世。爲守塚戶。故先葬敬烈公。繼葬公焉。公之舊宅。漢師南部明哲坊第二里城底。亦國初定都時。術者以上命擇基賜之者也。公別構一堂于宅之西南隅。揭號曰翠微。寔終南山之未及上處也。宅邊有一巖。其狀類龜。公因自號龜亭。而亭或作巖。巖或作庵。006_643a公豁達多大略。外似不檢。內實明察。文章平正淸麗。尙論者以經濟之器曠達奧雅之目歸之。旁通算術。究前人所未解。世謂之南算。四年壬寅。以上王命。追配太祖廟庭。遣使賜祭。配食如禮。健元陵碑陰刻。書功臣四十人。而公居第十四。其後獻陵碑陰。亦刻功臣三十九人。而公居第十三。配卞韓國大夫人坡平尹氏。高麗侍中瓘之後。判三司事坡平君靖厚公虎之女。先公卒。葬于長湍地松都天壽院後。後配淑安宅主南陽洪氏。觀察使彝之女。葬地闕未聞。尹夫人育二男。長景文。兵曹議郞。次景武。議郞三006_643b男。長左議政智。次直提學簡。次宜山君暉。尙太宗女貞善公主。公以間世之才。妙年發軔。經綸草昧。晚歲持衡。保佑盈盛。其謨猷籌策。軒天地懸日月。必有不勝僂指而數者。然今年代旣遠。家乘多佚。至若金櫃石室之莊。又非外人所可窺。玆用搜輯稗史斷簡之餘。掇拾子孫口語之傳。略成文字如此。嗚呼。此何足以光于前而垂于後也。雖然。當時紀實之語。猶幸有獻英二廟致祭之文。公之盛德大業。此亦可得其梗槪。又何恨也。昔漢得天下定宗廟。陳平之功居多。而自傷其多陰謀曰。吾世卽廢。終不能復起。宋之006_643c諸功臣如曹翰者。及其身死。子孫有行乞。而曹彬獨以厚德遺後。奕世通顯。若公則諸孫及公時已貴盛。而下世今三百年。苗裔蕃衍。愈久而未艾。此又曹氏之所未及。噫。欲知水源。當觀於其流。欲知木本。當觀於其葉。今欲考公之德。可懲者在此。烏足問紀事之詳略也。銘日。天命神武。拯濟荒屯。締搆之功。必藉良臣。麗運欲訖。聖神勃興。奇才異人。如響斯應。惟時協策。曰有忠景。勳則開國。位則議政。旣贊其創。且佐其治。蕭法曹守。兼而有之。歷事四朝。鐫功二陵。陪葬寢園。配食006_643d廟庭。顯顯令德。受祿于天。生榮死哀。其孰與肩。又有賢孫。黃閣繼登。餘慶之遠。及于雲仍。俾爾熾昌。惟公是庇。式至于今。宜念所自。眷慕流風。年已三百。墓道無樹。裔人之責。玆綴遺事。繼之以詩。刻石視後。永永無期。
龜亭先生遺稿上
 世系
世系 a_006_624c


公姓南氏。諱在。宜寧人。遠祖諱敏。以唐按廉使當新羅景德王一云聖德王 時。卜居于寧海府英陽縣。封英006_624d毅公。仍爲本貫。後有諱倜。及第。諱翼。檢校太子詹事。封英陽君。諱謙。 一云讓衛尉注簿,令同正。生五子。皆登第。諱淑孫。檢校禮賓卿。諱之卓。 卓一云倬 及第。諱奕。 一云奭禮卿。諱鎭勇。大將軍。俱顯于麗朝。
高祖諱君甫。通憲大夫樞密院直副使。葬宜寧。仍移籍。
曾祖諱益胝。承奉郞豐儲倉副使。贈▣▣▣▣▣
祖天老。奉順大夫知靈光郡事。贈門下省侍中。
考諱乙蕃。翊戴補祚贊化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省侍中宜寧府院君。贈諡敬烈公。
006_625a外祖崔茳。參議。本慶州。
公前配卞韓國大夫人坡平尹氏。判三司事坡平君靖厚公虎女。守太尉文肅公瓘之十代孫女也。後配淑安宅主南陽洪氏。觀察使彝女。二子皆尹夫人出

 

 

 

 

 

 상기의 사진은  귀정 남재의 시조공인  남군보의  묘소이다 (2012.2.14 ) 방문하여 담은 사진이다  

 

의령인 남재, 남은은 형제는  조선개국공신이다 남재의 선친은 남을번은 두문동 27현중의 한분이다

남군보의 후손들은   남재 남은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남재 남은 남이 남구만  남효은 등 많은 고관 대작을 배출한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영의정 홍문과대제학등  

남군보의 묘지는 경남 의령군 서동  의령 향교옆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 지어진 경모제와 묘지가 단장 되어있다 .     

 

   

구정유고 ( 龜亭遺藁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龜亭先生遺藁
판심제 龜亭先生遺藁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69年刊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7×16(㎝)
어미 上白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451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
저자
성명 남재(南在)
생년 1351년(고려 충정왕 3)
몰년 1419년(조선 세종 1)
초명
敬之
龜亭
본관 宜寧
시호 忠景
특기사항 李穡의 문인
가계도
南天老
知靈光郡事
南乙蕃
門下省侍中
慶州崔氏
參議 崔茳의 女
南在
坡平尹氏
判三司事 尹虎의 女
南景文
兵曹議郞
南景武
議郞
南陽洪氏
觀察使 洪彜의 女
南誾
參贊門下府事

기사전거 : 世系ㆍ年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충정왕 3 1351 신묘 至正 11 1 개성부 小洞에서 태어나다.
공민왕 20 1371 신해 洪武 4 21 3월, 成均生員으로 진사시에 합격하다. ○ 6월, 親臨殿試에서 同進事 제5인으로 합격하다.
우왕 6 1380 경신 洪武 13 30 閤門祗候가 되다.
우왕 12 1386 병인 洪武 19 36 전라도 안렴사가 되다.
창왕 1 1388 무진 洪武 21 38 9월, 右司議大夫가 되다.
공양왕 1 1389 기사 洪武 22 39 12월, 判典校寺事 兼司憲府執義가 되다. ○ 具成佑와 함께 李崇仁의 불효불충을 탄핵하다.
공양왕 2 1390 경오 洪武 23 40 1월, 왕명을 받고 邊安烈ㆍ李琳 등을 국문하러 한양, 전주 등지에 나가다. ○ 4월, 威化島回軍 후 회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社稷의 大計를 논한 일로 공신에 錄勳되다. ○ 윤4월, 왕의 長湍 거둥을 반대했던 일로서 鐵原府使로 좌천되다. ○ 10월, 楊廣道廉問計定使가 되다.
태조 1 1392 임신 洪武 25 42 4월, 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削職되고 水原의 순군옥에 갇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곧 소환되다. ○ 6월, 密直司左副代言이 되다. ○ 7월, 태조 즉위 후 中樞院學士 兼大司憲에 제수되고 宜城君에 봉해지다. ○ 8월, 純忠奮義同德佐命開國功臣 1등에 책훈되다. ○ ‘在’의 이름을 하사받다. 자를 敬之라 짓다. ○ 9월, 時務疏를 올리다.
태조 2 1393 계유 洪武 26 43 1월, 入侍하여 불교의 폐단을 논하다. ○ 6월, 奏聞使로 중국에 가다. ○ 9월, 귀국하다. 奏聞使로 명 나라와 관계개선을 이룬 일로 判中樞院事가 되다.
태조 3 1394 갑술 洪武 27 44 3월, 參贊門下府事가 되다. ○ 6월, 중국에 올린 表文이 불손하다하여 靖安君(태종)을 소환하니, 趙胖 등과 함께 수행하다.
태조 4 1395 을해 洪武 28 45 2월, 부친상을 당하다. ○ 7월, 回軍功臣 3등에 녹훈되다.
태조 5 1396 병자 洪武 29 46 12월, 起復하다. ○ 예문 춘추관 태학사로서 五道都兵馬使가 되어 都統處置使 金士衡을 따라 對馬島를 정벌하다.
태조 7 1398 무인 洪武 31 48 정당문학이 되다. ○ 8월, 동생 南誾이 역모한 일로 宜寧으로 쫓겨나다. ○ 10월, 특명으로 소환되다. ○ 漢城府 南小門洞 明哲坊에 宅基를 하사받다. 堂號를 ‘翠微’라 하고 宅邊 바위의 형상을 따라 ‘龜亭’으로 自號하다.
정종 2 1400 경진 建文 2 50 1월, 靖安君의 세자 책봉을 계청하다.
태종 1 1401 신사 建文 3 51 판중추원사가 되다. ○ 趙浚ㆍ鄭摠과 함께 世子의 書筵官이 되다.
태종 3 1403 계미 永樂 1 53 6월, 경상도 도관찰출척사가 되다. ○ 10월, 時務疏를 올리다.
태종 4 1404 갑신 永樂 2 54 3월, 開城府留後가 되다. ○ 5월, 議政府 贊成事가 되다.○ 10월, 臺諫ㆍ刑曹에서 李居易의 黨으로 탄핵하였으나 왕의 특명으로 공무를 보다.
태종 8 1408 무자 永樂 6 58 대사헌이 되다. ○ 8월, 의정부의 상소로 인하여 체직되다.
태종 11 1411 신묘 永樂 9 61 10월, 佐命原從功臣 1등에 錄勳되다.
태종 12 1412 임진 永樂 10 62 10월, 우정승이 되다.
태종 14 1414 갑오 永樂 12 64 3월, 監春秋館事로서 會試를 관장하여 鄭麟趾 등 33인을 뽑다. ○ 4월, 관제의 改名에 따라 판의정부사가 되다. ○ 왕명으로 河崙과 함께 「高麗史」를 수찬하다.
태종 15 1415 을미 永樂 13 65 손자 南暉가 貞善公主와 결혼하다. ○ 9월, 修文殿 大提學이 되다.
태종 16 1416 병신 永樂 14 66 3월, 영의정이 되다. ○ 親試에서 鄭之澹 등 9인을 뽑고, 重試에서 金赭 등 5인을 뽑다. ○ 10월, 辭免하다.
세종 1 1419 기해 永樂 17 69 12월 14일, 서울 明哲坊 사저에서 졸하다. 왕이 친히 弔祭하고 ‘忠景’(危身奉上曰忠 由義而濟曰景)의 시호를 내리다.
세종 2 1420 경자 永樂 18 - 2월, 楊州 注谷山에 장사 지내다.
세종 3 1421 신축 永樂 19 - 11월, 태조묘정에 배향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 11대손 南鶴鳴 등이 수집한 유고를 후손 南龍翼 등이 1권으로 편집하다.
고종 6 1869 기사 同治 8 - 20대손 南一祐가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11대손 南鶴鳴이 1675년 여러 문헌과 문집 중에서 수집하여, 世系 및 현달한 자손의 기사를 첨부하여 1編으로 만들었다.
그 후 祀孫 南磐이 三代記聞을 수집하여 ‘翠微’라 이름하고 저자의 詩ㆍ世系事實 및 자손 기사와 저자의 손자 南智와 南簡의 事蹟을 붙여 1권을 만들었다. 이것을 1689년 南鶴鳴이 교정하고 11대손 南龍翼에게서 跋을 받았으나, 世故로 인해 간행되지 못하고 編帙도 산일되었다.
그 후 20대손 南一祐가 후손가에서 舊本을 구해서 교정하고, 시문 약간과 年譜ㆍ碑狀을 추가, 첨부하여 1869년에 처음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上ㆍ下 2권의 활자본으로서, 체제는 구본을 따르되 일부의 내용을 增刪하였고, 뒤에 忠簡公(南智)과 直提學公(南簡)의 事實을 附編하였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古3428-451), 연세대도서관, 간송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69年刊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이 중 부편된 忠簡公事實과 直提學公事實은 영인에서 제외하였다.

기사전거 : 跋(후손 南鶴鳴ㆍ南龍翼ㆍ南一祐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상ㆍ하 2권 합 1책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저자의 시문과 附錄으로 되어 있다. 시는 모두 10題로서 칠언절구 9제, 오언율시 1제가 실려 있는데 이 중 2제는 缺詩이다. 文은 2편으로, 李崇仁을 탄핵하는 疏와, 1392년 대사헌 재임 시 올린 시무에 관한 상소가 실려 있다. 이어 世系ㆍ年譜, 그리고 家譜ㆍ輿地勝覽ㆍ秋江冷話 등에서 채록한 遺事가 실려 있다. 또 附錄으로 功臣軸을 비롯하여 賜祭文ㆍ行狀ㆍ碑誌 등이 실려 있다.
하권은 역시 附錄으로 되어 있다. 諸人의 贈寄詩ㆍ次韻詩를 비롯하여, 저자의 이름이 들어 있는 健元陵의 碑陰記, 저자가 세운 祠ㆍ樓의 記文 등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跋文 3편이 실려 있다. 1675년 11대손 南鶴鳴이 문집을 처음 편집하고 지은 발문과 그 후 1689년 문집 간행을 시도할 때 11대손 南龍翼의 발, 그리고 1869년 초간본을 간행할 때 20대손 南一祐가 지은 것이다.

필자 : 吳世玉

 

龜亭先生遺稿上
年譜
年譜 a_006_625a


辛卯元順帝至正十一年。 麗朝忠定王三年 公生于開城府大平館東小洞私第。
壬辰 恭愍王元年
甲午。弟誾生。
006_625b庚子。公十歲。戊申皇明太祖洪武元年
庚戌。公二十歲。
辛亥
三月。以成均生員參進士試。
六月二十六日。親臨殿試。中同進士第五人。賜及第。知貢擧。政堂文學李穡。同知貢擧。評理田祿生。
乙卯 辛禑元年
庚申。公三十歲。
拜閤門祇候。
006_625c丙寅。
拜全羅道按廉使。 春夏番
丁卯
戊辰 辛昌元年
九月。拜右司議大夫。
己巳 恭讓王元年
十二月二十一日。拜判典校寺事兼司憲府執義。
庚午。公四十歲。
正月。奉命鞫邊安烈于漢陽府。
初。辛禑之廢也。領三司事金佇欲謀迎辛禑。事覺006_625d繫獄。言與安烈等共謀爲內應。郞舍尹紹宗等上疏請下安烈。明正典刑。王命削其職流漢陽。大司憲成石磷上疏請誅安烈。王下紹宗等疏於憲司曰。就貶所更勿鞫誅之。憲司夜遣錄事孫元湜。移牒漢陽府尹金伯興誅安烈。都評議使司啓曰。大臣不可不問其故便置極刑。王命公及左司議吳思忠往鞫之。行至碧蹄驛遇元湜。只誅安烈而還。邊安烈傳
二月。奉命鞫李琳于全州。鞫琳子貴生于忠州。
初。金佇邊安烈之獄起。辭連琳及貴生。流遠地。其006_626a後安烈之誅也。曰。謀迎辛禑。豈獨我歟。亦有所言。金伯興不問。命吏出外斬之。尹紹宗等言。自古亂臣賊子。未有無黨而敢爲惡者。安烈腹心部將通山君李乙珍必與其謀。不可不問。王命憲官鞫乙珍于淸州。辭連琳及貴生。乃遣公及左獻納咸傅霖。鞫琳于全州地及貴生于忠州。其後諫官尹紹宗等上疏曰。今見執義南在及獻納咸傅霖等同鞫李貴生獄辭。云去歲十月。禹仁烈先到邊安烈家。貴生隨父琳繼至。安烈謂琳曰。今李乙珍,李庚道,郭忠輔等害侍中李 我太祖舊諱。然後仁烈與王006_626b安德,禹洪壽等往驪興迎辛禑。計已定矣。仁烈不言微笑。其情固當鞫問。貴生之言明白。與臣等所論奏金佇之言。如出一口。請明正典刑。不許。 李琳傳。琳卽辛禑謹妃之父也。
三月。請寢長湍幸行。不從。
丙子。王將幸長湍。公與諫官李舒諫止之。王不聽。己卯。遂次禮成江。觀戰艦習火戰。庚辰還宮。 高麗史
四月九日。 壬寅 錄威化島回軍功。
敎曰。僞主辛禑恣行不道。乃與崔瑩欲犯遼陽。將使國家得罪天朝。社稷存亡。間不容髮。守侍中006_626c我太祖舊諱 與前侍中曹敏修。首倡大義。諭諸將定策回軍以安社稷。其同心協力者。侍中沈德符,鷹揚上護軍南誾等四十五人。皆賜功臣。故領三司事邊安烈等七人。雖已身死。功不可忘。禮曹判書尹紹宗,判典校寺事南在等於回軍之際。以社稷大計。援古贊計。亦可嘉也。褒賞之典。有司擧行。高麗史
閏四月八日 庚午。辭職。
以前月諫長湍之幸。不得其言。辭職。 高麗史
九日 辛未。左遷拜鐵原府使。006_626d十六日 戊寅。刑曹判書韓尙質等。以左遷請寢事上疏。
尙質等以爲今臺省以言貶外。請授京官以開言路。王不聽。 高麗史
十月十日。拜楊廣道廉問計定使。
辛未
壬申 本朝太祖大王元年
四月一日 壬子。因諫官疏削職流遠地。五日召還。
左常侍金震陽,右常侍李擴,右司議李來,左獻納李敢,右獻納權弘,左正言柳泝。論三司左使趙浚,前政堂文學鄭道傳,前密直副使南誾,前判書尹006_627a紹宗,前判事南在,淸州牧使趙璞等曰。鄭道傳起身賤地。竊位堂司。欲掩賤根。謀去本主。無由獨擧。織成萋菲之罪。連坐衆多之人。趙浚於一二卿相間。偶起讎嫌。與道傳同心。相扇變亂。賣美權勢。誘脅諸人。於是患失乾沒之輩。希旨生事之徒響應而作。其中南在,南誾爲扇亂之羽翼。尹紹宗,趙璞爲造言之喉舌。唱和而起。廣張罪網。施刑於不可刑之人。求罪於本無罪之地。衆心危懼。咸怨咨嗟。一以傷天地生物之和。二以傷殿下好生之德。歲庚午。淸州大水。辛未。城市乘桴。天災荐至。年穀不006_627b登。豈非所召也。又臣等聞誾嘗陳言曰。殿下內多慾而外施仁義。此言何謂也。且誾於國家。別無殊功。驟登台府。殿下之賜大矣。乃希合浚,道傳之意。曾無感恩知足之心。敢發輕辱不敬之言。所以激上意而逞其欲也。其用意如此。誠可畏哉。蓋此人輩厥罪惟均。殿下若因循不斷。不惟天怒人怨。恐有不及之後悔也。臣等本非故欲害人者也。但以公義如此。事勢如此。故不敢不請。伏望殿下收浚,誾,在,紹宗,璞等職牒功券。鞫問其罪。明正典刑。垂戒後來。疏上。留中不下。震陽等牒憲司。發史卒守006_627c浚,誾家。明日。伏閤更請。王召侍中沈德符,鄭夢周議。遂依申流浚,道傳遠地。削在,誾,紹宗,璞職。亦流遠地。大司憲姜淮伯,執義鄭煕,掌令金畝,徐甄,持平李作,李申疏請浚等罪。並劾判典校寺事吳思忠與紹宗同。乞並究理。命削職流遠地。震陽等言。古人曰。去草不去根。終當後生。去惡不去根。其惡長。浚,道傳。惡之根也在,紹宗,誾,璞。養其根而滋蔓者也。請將浚等並置極刑。王命移流道傳于光州。浚于泥山。在,誾,璞,紹宗,思忠皆聚水原。遣巡衛府千戶金龜聯,刑曹正郞李蟠與楊廣道觀察使姜006_627d隱同鞫。未行。我太祖大王自海州輿疾夜還于邸。鄭夢周,李穡,禹玄寶以謂若劾浚,在,誾置極刑。則璞,紹宗,思忠輩。不足制也。陰誘臺諫。連日交章。伏閤廷爭。請誅浚,道傳。王命先鞫誾等諸人。辭連道傳。然後可並鞫之。及夢周誅。我定宗啓曰。若不問夢周之黨。請罪臣等。王不得已下臺諫于巡軍。且曰。流之於外可矣。不必問也。翌日。兩府詣闕請鞫。命判三司事裴克廉,門下評理金湊同,巡軍提調金士衡等治之。震陽曰。鄭夢周,李穡,禹玄寶使李崇仁,李種學,趙瑚。謂臣等曰。門下侍中李006_628a我太祖舊諱 恃功專擅。今墜馬病篤。宜先翦羽翼趙浚等。然後可圖也。於是囚崇仁,瑚,種學與其弟種善,夢周弟禮曹判書過,司宰令蹈及其黨鄭寓,李堂鞫之。皆服。乃召浚還。在,思忠並復職。宥道傳,誾,紹宗。流震陽,擴,來,敢,弘,煕,畝,甄,作,申,崇仁,瑚,種學,種善,寓,過,蹈,堂于遠地。玄寶孫成範,淮伯弟淮季。皆王愛壻。故玄寶之黨及淮伯皆不坐。泝亦以病免。我太祖麾下尹虎,柳曼殊,黃希碩等上書請治夢周之黨。王從之。奪震陽,擴,崇仁,瑚,種學,種善告身。其後臺諫交章請究問震陽等情狀以正其罪。006_628b王命更勿鞫訊。但據前日獄辭。分其輕重以聞。於是。杖震陽一百流遠地。 金震陽傳按龍飛御天歌。侍中鄭夢周忌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與其黨同謀。欲危太祖。太祖以世子奭朝見而還。出迎于黃州。遂畋于海州。墜馬。夢周聞之有喜色。嗾臺諫曰。李諱今墜馬病篤。宜先翦羽翼趙浚等。然後乃可圖也。乃劾三司左使趙浚,前政堂文學鄭道傳,前密直副使南誾,前禮曹判書尹紹宗,前判典校寺事南在,淸州牧使趙璞。王下其書都堂。夢周從中扇之。將浚等六人並流遠地。分遣其黨巡軍千戶金龜聯,刑曹正郞李蟠等。就貶所鞫間。將殺之。時太宗廬于齊陵之側。聞太祖墜馬而還。又聞夢周欲以太祖入京之日爲亂。乃馳迎于道。至碧瀾渡。告以夢周之謀。太祖力疾通宵而行。未明入京。夢周嗾省憲交章請誅浚,道傳等。太祖曰。如此誣枉。不可不辨。將造朝而病不能起。遣定宗及判懿德府事李和,006_628c前密直副使李濟,知密直司事黃希碩,禮曹判書趙珪等詣闕啓曰。今省憲論浚於立殿下之際有立他之議。而臣沮之。浚之所議者何人。聞臣沮之之言者伊誰。請召浚等。與臺諫明辨是非。往復再三。王不聽。讒構愈急。禍且不測。太宗密請殺夢周。太祖曰。死生有命。但當順受而已。終不聽。命太宗速還。終汝大事。太宗不得已至崇敎里舊邸。憂虞未決。俄有叩門聲。急出視之。乃廣興倉使鄭擢。極言生民利害決於斯時。而群小之構亂如彼。公何去也。王侯將相。寧有種乎。太宗卽還太祖邸。謂和,定宗及濟日。父公不聽吾言。然夢周不可不殺。我當任其咎。和,定宗及濟許諾。召麾下土判典客寺事趙英珪等曰。李氏之忠於王室。國人所知。今爲夢周所陷。加以惡名。其無一人爲李氏效力者耶。英珪曰。願盡力。太宗使英珪,海州牧使趙英茂,中郞將高呂,判軍器寺事李敷。入都評議使司擊夢周。忽有辟除之聲。出視之則夢周到門矣。以太祖庶兄元桂之壻司宰副令卞仲良洩其謀。夢周知之。欲觀變故。托以006_628d問疾而來也。太祖待夢周如初。和白太宗曰。誅夢周此其時矣。公怒可畏。奈何。太宗曰。機不可失。命英珪至定宗邸取劍要於路邊。敷,呂等隨之。時前判開城府事柳源死。夢周過弔其家遲留。故英珪等得備兵器以候之。夢周至。英珪馳擊不中。夢周顧叱。策馬而走。英珪馳及擊馬首。夢周墜而走。呂等斬之。太宗入告。太祖大驚而興。震怒曰。吾家素以忠孝聞。汝等擅殺大臣。國人以我爲不知乎。予欲仰藥而死也。太宗日。夢周等將陷我家。豈合坐而待亡。明日。太祖遣希碩啓王曰。夢周等黨比罪人。陰誘臺諫。誣陷忠良。今已伏罪。請召浚,誾等與臺諫辨明。王曰。吾將出臺諫于外。時太祖因怒病劇。至不能言。太宗與諸叔兄議。遣定宗啓曰。若不問夢周之黨。請罪臣等。王不得已乃下臺諫于巡軍獄。命判三司事裴克廉等鞫之。並杖流遠地。
六月十九日。拜密直司左副代言。
006_629a七月十七日 丙申。我太祖大王卽位。
二十八日 丁未。拜中樞院學士兼司憲府大司憲。封宜城君。
敎書曰。中樞院學士南在等。識天命之去就。察人心之向背。以民社大義。決意定策。推戴寡躬。共成大業。其功甚大云云。 宗孫磐所錄
八月二十日 己巳。策純忠奮義同德佐命開國功臣一等第十四人。
上曰。中樞院學士南在等。在前朝政亂之時。注意006_629b寡躬。以至今日。固守不變。其功可賞。次賜功臣之號。其褒賞之典。令有司擧行。命功臣都監立碑以紀其功。建長生殿在北部通明坊 以圖其形。錫土田臧獲。嫡長世襲。不失其祿。子孫雖有罪犯。宥及永世。載諸信書以賜之。 世乘命功臣以下。龍飛御天歌註。
祇受賜名。
公初諱謙。麗季極亂。聖祖將興。公志存經濟。契合風雲。及乎禪代之際。有辭功避賞之意。隱於宜山。不知所之。太祖旣受命。思公功大。物色求得之。賜名曰在。蓋喜其無恙尙在也。初字未詳。而006_629c賜名後自字敬之。蓋敬君賜之意也。
九月。上時務疏。
十一日 己丑。啓請宅主毋令給祿。
啓曰。祿者古先哲王所以養士大夫之供職事者也。今功臣之母及妻封宅主者亦許食祿。殿下待功臣之意則厚矣。然一家之內。並受天祿。不合於義。乞上女公主王子翁主外。宅主毋令給祿。國初。王子之妻封翁主。雖非王子之妻。亦或封翁主。上曰。開國功臣父母妻。旣於錄券封爵。有爵無祿可乎。 龍飛御天歌註
以大護軍李扶,奉常少卿許晐。請鞫問事上疏。
006_629d扶,晐有不遜語。公上疏曰。自古帝王之興。惟天所命。不關世類。今殿下以寬仁大度。當王氏衰亂之季。天命乃歸。群臣推戴。奄卽大寶。今李扶,許晐等不思殿下再造之恩。鼓煽妖言。以惑衆心。宜令有司鞫問治罪。 國朝寶鑑
癸酉
正月十六日 壬戌。入侍極陳佛氏之弊。
六月。差奏聞使。
將行。上遣公弟將軍贄賜衣酒。
九月。回自京師。
006_630a帝厚待之。且命之曰。爾國使臣行李往來。道遠費煩。自今三年一朝。 金石一班
甲戌
三月 丙戌。拜參贊門下府事。
六月。差陳奏副使。
皇朝以本國表辭 帝以本國遣人至遼東。齎布帛金銀。假以行禮誘邊將。又遣人說誘女眞。潛渡鴨綠江等事。下手詔責之。上表辨明。其略曰。至若行禮於遼東。是亦景仰於上國。當使价往來之際。有賓主交接之儀。在禮則然。於誘何敢。其有女眞隸于東寧。旣皆作軍而當差。安有遣人而說誘。但遼東都司起取脫歡不花之時。其管下人民或有不卽隨行者。由彼安土。非臣勒留。無所供於我邦。各自守其舊業。鄭道傳之辭也。倨傲。大怒。命遼東毋納朝006_630b鮮之使。使臣至遼東。不得入而還者凡五輩。已而帝遣使諭上送親男。時太宗爲靖安君。上曰。天子若有所問。非汝莫能對。太宗對曰。臣爲宗社大計。豈能辭避。上涕出曰。萬里之路。能無恙而還乎。朝臣皆爲太宗難之。公曰。靖安君有萬里之行。吾輩高枕死於此可乎。乃自請往。遂命太宗。與趙胖及公奉表如京師。
十二月。復命。
帝引見再三。優禮遣還。時本國與大國通信不久。道路艱阻。公經草澤之中。歷燕齊至南京數萬餘006_630c里。而坐轎中手布算。度前幾里有山有川。無不洞然。華人莫不異之。 國朝寶鑑及龍飛御天歌。時本國以下。家乘。
乙亥
二月。丁敬烈公憂。
七月朔 王辰。特命引見于便殿。勸以薑桂之滋。二十二日 癸丑。錄回軍功臣三等。賜田地三十結。
王旨曰。前朝高麗之季。僞主辛禑頑凶狂悖。乃與其臣崔瑩。謀攻遼陽。督責諸將。將渡鴨江。時予爲左軍都統使。諭諸將以謂以小國犯天子之境。於義不順。況得罪天朝。則東方之民殆無類矣。諸006_630d將悉能明曉逆順。當時師若渡江。東民安得安堵至今。惟爾諸將。聽寡人之言。仗義還師。以安東方。肆予寡躬。得有今日。若論其功。宜在旌賞。中樞院學士南在等二人。雖不預師行。其於還京。社稷大計擬議之際。援古贊計。可依三等功臣崔鄲之例。褒賞之典。有司擧行。 錄券
丙子
十二月三日 丁亥。起復。拜藝文館,春秋館太學士。五道都兵馬使。征一歧對馬島。
公與都統處置使金士衡啓行。上出南門外餞006_631a之。各賜毛冠甲胄弓矢敎書。都堂餞於漢江。 東國文獻備考
丁丑
正月。班師。
三月。服闋。
戊寅惠帝建文元年。
拜政堂文學。
八月二十八日 己巳。弟誾被禍。
時公奉命禱祀于松岳。弟誾與鄭道傳之謀。聞變自還。謁于諸王子。有欲並罪者。太宗曰。在素006_631b不與誾同心。不可連及。其歸我第。 戊寅記事
十月。放于宜寧縣。
初。太宗欲全公命。置于第。母夫人謂死於誾亂。哭之甚。公拔鬚送之。母夫人曰。不死矣。事定。見母夫人于果川田莊。仍留止。及聞治誾黨與。公懼。微服避之。大將軍馬天牧。逢諸完山路上。拘置其官。來告於朝。有是命。誾性豪邁無檢束。自幼好奇計。開國之際。功在上列。然以不學無識。贊成康氏奪嫡之計。遂與道傳等圖擅國柄。欲去宗室。卒及於禍。年四十五。 戊寅記事
006_631c特命召還。
祇受宅基賜給。
上定鼎之時。命術者擇基。賜公家基漢城府南小門洞。公別構一堂于宅之西南隅。揭號曰翠微。以詩酒自娛。寔終南山之未及上處也。宅邊有一巖。其狀類龜。公因自號曰龜亭。龜亭或稱龜庵。一作巖 遺址今尙存。 南小門。卽京城東南隅光煕門坊。卽明哲坊。有翠微堂遺址及池井。
己卯 定宗大王元年
庚辰。公五十歲。
006_631d正月。啓請冊儲。
太宗平定鄭道傳之亂。時人皆欲請於太祖以爲世子。太宗固讓。請以定廟爲世子。定廟曰。當初建議開國。至於今日之事。皆是靖安之功。我不可爲世子。太宗讓益固。定廟曰。然則我有以處之。至時。公於闕庭大言曰。卽今當令靖安君爲世子。玆事不可緩也。太宗聞而責之。及朴苞之亂。參贊門下府事河崙啓曰。若無靖安君。大事不成。亦安有今日乎。且以昨日之事蓋指公闕庭之請也 觀之。天意人心。亦可知矣。請早定位號。006_632a定廟曰。卿等之言甚善。遂冊爲世子。蓋定策太宗。皆公與河崙之力也。 龍飛御天歌註及東閣雜記
辛巳 太宗大王元年
拜判中樞院事
拜世子書筵官
上卽位之初。首降德音。以定東宮之位。置書筵官。以公及門下左侍中趙浚,簽書中樞院事鄭摠。其學業皆可以備勸講之任。命爲師傅賓客。 朝鮮經國大典。鄭道傳撰。
兼監倉安集轉運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
006_632b壬午成祖永樂元年癸未
六月。拜慶尙道都觀察使黜陟使。
十月三十日 甲戌。上時務疏。
公條陳時務。其一道內防禦之虛疏。以壯勇之皆侍衛于京故也。請除之以充船軍。其一陸輸之弊。民皆苦之。請依舊漕運。其一倉庫田租。自納米以來。民困於轉輸。且此道納布易。納米難。請依舊收布。政府啓聞。除侍衛五百人。
閏十一月。宣醞于任所。
006_632c公因禁令斷酒。而勤於職事。上慮其生病。宣內醞于任所。仍命自今服藥用酒。 東國文獻備考
甲申。
遞歸。
三月。拜開城府留後。
五月 乙亥。拜議政府贊成事。
七月二十五日 甲子。漢陽毋岳相宮都。幸行扈駕。
十月二十日 戊子。遭劾。特命視事。
臺諫,刑曹劾公守直。以爲李居易之黨也。己丑。上召三省掌務李致,正郞趙末生,正言卓愼等006_632d敎曰。劾贊成事南在守直何也。仍下三省掌務于巡禁司鞫問。公詣闕謝恩。上命公視事。公使朴錫命啓曰。初。臣爲慶尙道都觀察使。見代而來。李居易至臣家饋酒食。仍曰。吾與汝弟。交則甚厚。今汝弟死矣。吾欲待汝如汝弟。汝亦待我如▣弟也。臣聞其言。跪而對曰。令公毋忘我也。我亦不忘令公也。爲是臣亦一往其家而已。若居易宿於臣家。臣宿於居易家。則居易大臣也。臣亦宰相也。二家伴人僕從。豈不知之。戊寅年臣得罪之時。居易欲加死刑於臣。臣至今未忘。豈與居易爲黨乎。006_633a且在漢京。殿下爲靖安君。臣進見。乃許坐於西廳。臣曰。朝鮮基業。畢竟歸于公家。當其時。戮力輔佐矣。殿下聞而墮淚。傳于錫命曰。卿雖不爲如此之言。予豈不知乎。卿其勿疑。公拜謝而退。 世乘
乙酉
丙戌
丁亥
戊子。拜大司憲。
啓請執義權遇等就職。
時浚慕華樓南池。功久未就。司憲府劾提調官朴006_633b子靑。上怒。召責持平崔自海勒歸其家。執義權遇等皆待罪。公啓日。臺諫。人主之耳目也。言雖不中。亦不加罪者。所以開言路廣視聽爲萬世計也。子靑被劾事不足論。設若奸臣用權。事關大體。而臺諫緘默不言。則非細故也。上卽命遇等就職。 國朝寶鑑
八月十八日。因政府疏。駁遞大司憲。
己丑
庚寅。公六十歲。
辛卯
006_633c十月二十一日。錄佐命原從功臣一等。賜田地三十結奴婢三十口。
王旨曰。南在等三十八員。爰自潛邸。夙夜翊衛。服勞不怠。式至今休。其勞可賞。南在等歲在甲戌。又從寡躬。入覲天庭。勤勞跋涉。其功可賞。子孫蔭職。宥及後世。 錄券
壬辰
十月。拜議政府右政丞。
癸巳
甲午
006_633d三月九日。親試取鄭麟趾等三十三人。
公以監春秋館事掌會試。策天人相感之道於慶會樓下。取新生員鄭麟趾,趙瑞康等。上曰權蹈,成漑,李賀,李隨。皆朝士也。而無中試者。可見掌試之公也。
四月。改官制。仍拜判議政府事。
承命修高麗史。
改官制。仍拜左議政。封宜寧府院君。
乙未。
孫睴尙貞善公主。
006_634a上敎大臣曰。予有一女年尙幼。然及國家無事。欲令適人。廣求士族家。已得議郞南景文之子。凡爲駙馬者。不患貧賤。若門閥子孫。習於驕奢。鮮有不敗者。此兒雖議政之孫。議政已老。其父早世。鞠於寡毋。端不驕逸。故今已選定。以其無驕逸之習也。國朝寶鑑○議郞卽龜亭長子。駙馬卽宜山尉暉。暉孫怡枉被誅。後絶嗣。
五月。因緩治閔無悔獄。遭劾免。
獻宗廟酌獻禮議。
禮曹上儀註。上下詢。公曰。孔子稱宗廟之禮。煩則怠。簡則慢。不煩不簡。乃可久行。 東國文獻備考
006_634b九月二十一日。拜修文殿大提學。
丙申
三月二十五日。拜領議政。
親試取鄭之澹等九人。重試金赭等五人。
十月。辭免。
丁酉
戊戌 世宗大王元年
己亥。
孫簡中生員試。
十二月十四日 甲申。公卒于京城明哲坊第。壽六十九。
006_634c訃聞。停朝市。致賻米豆七十石紙二百卷。官庇葬事。
特命撤肉膳。
時兩宮 上王世宗 行幸在外。爲撤肉膳。群臣以山嵐瘴氣可畏。請勿減肉。上曰。君聞大臣卒減膳。雖無古制。臣爲君喪三年。君爲臣三日去肉膳。不亦可乎。仍命立大臣喪三日減膳之法。
十五日。上王遣宰臣尹淮賜祭。
十九日。親臨弔祭。贈諡忠景公。
上備法駕。率百官幸公第賜祭。上不及其門六006_634d七步許下馬入幄次。公孫智伏道左以迎。命智奠爵。典祀少尹金尙直讀敎祭文訖。上還駕。智伏道左哀哭。上軾而過。
庚子
二月。以一等禮葬于楊州注谷戌坐辰向之原。 庚兌龍艮。得木丙破。
初。太祖之定鼎漢陽也。親卜仙寢於健元陵。以陵外佛巖山注洞卽花蝶洞。俗稱注乙谷。之原賜公。爲日後陪葬之地。且賜旁近田土臧獲。使傳之永世。爲守塚戶。故先葬敬烈公而繼葬公焉。
006_635a辛丑
十一月 戊辰。特命廟庭配享。
太上王與領議政柳廷顯及李原,卞季良,許稠,趙末生,李之剛,李陽德,金益精等置酒。敎曰。高麗太祖配享功臣凡六。今我太祖配享惟四人耳。議其有功者加配享何如。開國之時功之大小。予盡知之。戊辰。又敎金益精曰。李濟,南在,南誾等倡義開國。皆當配享太廟。然在之配享與否。令禮官議于三議政以聞。在若不宜配太祖。則當配於予矣。廷顯等皆無異議。
006_635b壬寅
正月五日 癸亥。遣使賜祭。
上朝新宮。遣使賜祭于公及弟宜城君誾。諭以將配食太祖廟庭。諡誾 剛武。
九日。親行宗廟春享大祭。躋配于太祖廟庭。
壬申 純祖大王十二年
九月十五日。遣楊根郡守鄭度采賜祭于墓所

 

 

龜亭先生遺稿上
遺事
遺事 a_006_635b


公歷事太祖 恭靖太宗世宗四朝二十八年。位至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006_635c經筵,春秋館,書雲觀事。修文殿大提學,世子師。策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封宜寧府院君。 家譜○宜寧或作宜山,宜城。佐命今作同德。
南在。誾之兄。開國功臣。官至議政。封宜山府院君。諡忠景。 輿地勝覽。宜寧人物條。
公豁達多大略。外似不檢。內實明察。文章平正淸麗。詳明算法。自中國初來。人莫有能解者。公卽究得之。世謂南算。 公五代孫永興公行狀。公六代孫別坐彥紀所撰。
先龜亭公好酒多大略。然謹言語。未嘗少失。好與客着棋。終日不倦。客問其故。答曰。生人有氣。必有言語。006_635d有言語則不及朝廷者鮮矣。終日着棋。可以避言諱也。人服其謹愼。
先龜亭公持心大謹。不檢形外。一日。着國家所禁衣服朝於闕。有人諫於家曰。大臣亦爲禁服耶。龜亭瞿然呼婢曰。我朝會時服何衣耶。人服其雅量宏遠。不審衣服。 以上。秋江冷話。○秋江名孝溫。公五代孫。故稱先。冷話其所著小記。
南政承在罷相。養閒於墨寺洞本第。日以棋局爲事。有墨寺長老屢造焉。相與圍棋。而長老陽不勝。公大喜。旣脫其衣。又脫其冠。至於中裙則長老不敢脫。哀懇再三然後免。日暮而長老還寺。則公使婢子三三006_636a人持米豆饌物以遺之。由是長老無日不脫衣。而所得日增。公亦不知也。有閔姓朝官往謁。公亦與之對棋。閔臨局。爭道不遜。至以手犯公頂。公不悅曰。此客氣豪。得志則得志。不得志則不得志也。 靑坡劇談
公之親筆着押。載於公之季氏宜城君誾遺子孫書末端。其書書之素絹。末曰。證保同生兄開國功臣南着押。

公慶尙道宜寧人。少登第。通古達今。歷敭臺省。出入中外。有經濟之才。及革代之際。翊戴之謀多出於公。甲戌間。上王以世子人朝。公從行。一時偕行宰相006_636b頗不恭。獨公禮敬。逮至戊寅。其弟誾與鄭道傳,沈老生謀去諸嫡。上王以公不與謀。置諸私第。事定。免死流之。上王日。南在與其弟不好。人所共知。必無與知之理。後復召還。累官至領議政。就封府院君。上王以耆舊。特加禮貌。年六十九卒。其孫暉尙上王第四女貞善公主。其少也家貧。一奴一馬以祗候。九年不遷。 史臣所錄
公第在終南之巓。別構一堂于宅西南隅而揭號曰翠微。前鑿蓮池。池邊有一鴨脚樹。甚高大。鬱爲禁中之所指點。列聖憑望。認以爲某家樹也。至宣廟006_636c己丑年間。樹忽枯死。宣廟遣中使就視焉。 國朝名臣錄太祖旣定健元陵之後。與公憩于前嶺。命名曰忘憂里。以其下民田特賜公。以爲守塚之戶。又賜以副用之地。以寓萬歲後陪葬之意也

 

의령남씨 貫祖 재실 방문   의병의날 참석한 재경 향우회 임원  [2011-06-18 오후 12:27:00]
 
 

지난 6월 1일 제1회 의병의 날 국가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재경 의령군향우회(회장 권영보) 임원들로 구성된 고향방문단 70여명은 이날 오후 의령읍 서동에 위치한 의령남씨 관조(貫祖) 재실 및 묘역 등을 방문했다.

이들의 방문을 영접한 의령남씨 의령종친회(회장 남기등)의 남기청 직전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의령남씨 관조 밀직(密直)공을 기리기 위해 1766년에 건립한 구 재실과 공의 유허비 및 묘역 등은 노후로 인해 지난 2007년 4월에 종현들의 헌성금 13억원을 들여 지금처럼 대대적인 신축 및 정화사업을 완료하였다.”며 “관조의 옛 비각은 몇 해 전에 경남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되었으나 신축 과정에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경남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되지 못한 400~500여년 된 옛 재실과 백일홍 나무 2그루를 또 다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받기 위해 문중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행사를 주선한 남상태 재경 의령군향우회 고문과 남기업 재경 의령군향우회 기우회장은 환영사에서 재경 향우님들께서 유서 깊은 의령남씨의 근원인 관조 밀직공을 모신 재실과 유허비각 등을 방문해주셔서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이들 방문단 일행은 4년 전 신축한 ‘추재‘(楸齋)의 대청에 마련된 다과를 들면서 의령남씨 문중의 내력을 설명들은 후 관조의 비각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귀경길에 올랐으며, 경기도 이천IC 인근에 있는 ‘일품정’ 한정식에서 이 행사를 주선한 남상태․남기업 씨와 의령남씨 의령종친회가 대접한 저녁 식사를 하며 귀경 여정의 마지막 정담을 나누었다.

재경 의령군향우회 임원들의 이번 의령남씨 문중 순방은 몇 해 전부터 고향 알기 차원에서 군내 각 문중을 방문하는 연례행사의 일환이다. 재경 향우회 고향방문단은 지난해 4월 의병제전 때는 용덕면 죽전리에 있는 담양전씨문중의 태암서원(경남도 문화재자료) 등을 방문(본보 253호 7면 보도)했으며, 내년에는 군내의 진주강씨 문중의 문화재 등을 견학할 계획이다. 박해헌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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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남씨 始祖와 貫祖는 누구

우리나라 남씨(南氏)는 ‘3관4파’(三貫四派)로 분류되지만 모두 영의(英毅)공 남민(南敏)을 시조로 삼고 있다. 시조 영의공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 봉양부(鳳陽府, 지금의 하남성) 여남(汝南) 사람으로서 김충(金忠)이란 성명을 갖고 있었다. 김충은 신라 경덕왕 14년(755) 안염사(案廉使)가 되어 당의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의 유린(有隣,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 신라로 귀화하면서 신라왕으로부터 ‘남민’이란 성명과 함께 ‘영의(英毅)’란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본보 제180호 8면에 상보).

그 후 고려 충렬왕 때(1230년경)에 시조 영의공(남민)의 후손인 홍보(洪甫), 군보(君甫), 광보(匡甫) 등 3형제가 공을 세워 장남인 홍보공은 ‘영양군’(英陽君), 차남 군보공은 ‘의령군’(宜寧君), 3남 광보공은 ‘고성군’(固城君)에 각기 봉해짐에 따라 영양남씨, 의령남씨, 고성남씨 등으로 ‘남씨 3관’을 이루게 되었다.

‘의령남씨 관조 의령남공 군보지묘’ 비석에는 “남공(南公) 휘(諱) 군보(君甫)는 영양(英陽)에서 의령으로 이관(移貫)하시어 묘소가 의령에 있었으나 한 때 실전(失傳)되었다. 의령 현감(縣監) 황선(黃瑄)의 징몽(徵夢)으로 묘소를 발견하여 개축하고 묘석을 세워 시장(始葬)같이 하였다는 사실이 진주목사 최립(崔岦,1539-1612)이 찬(撰)한 묘표(墓表)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시조와 관조에서 뿌리를 내린 의령남씨는 현재 전국에 25여만 후손들이 번창하여 뻗어나가고 있으며 많은 후손들이 그 시대마다 남을 빛내고 있다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 乙珍, 조선조의 개국공신 在 ,誾 형제, 고려 조선을 통하여 정승(政丞)이 7명,大提學은 8명, 駙馬는 3명, 贊成은 2명, 六卿判書는 24명,漢城判尹은 3명,將帥는 10명, 功臣은 9명, 忠臣은 18명,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만도 140여명, 그 밖에도 孝子,烈女, 奉朝賀, 入耆社, 錄淸白吏, 選入湖堂, 諡封君, 賜諡號되신 분들도 너무 많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많은 자손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정․관계에서는 總理 悳祐, 長官 悳祐, 載熙, 국회의원은 松鶴, 載熙, 相敦, 平祐, 景弼 등이 있고, 고등고시 합격자도 50여명이며, 석․박사학위 소지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의령남씨 문중에서는 관조 밀직공의 묘소(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400번지)에서 매년 춘향(春享:음 3.1)과 추향(秋享: 음 9.9)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편집부(urnews21@hanmail.net)

부친  남을진은 두문동 72현중의 한분이시며 아드님은 조선개국 공신이 되는 상황이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


동쪽으로 포천현(抱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또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되기도 하며,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이다. 남쪽으로는 광주 경계까지 67리이고, 또는 82리가 되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40리이고, 파주(坡州) 경계까지는 33리이다. 북으로는 적성현(積城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인데, 창화군(昌化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쳤다. 고려 초에는 승격하여서 견주(見州)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는 양주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 곧 옛 양주 -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 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었다. 6년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 옛터에 옮기고, 그대로 양주라 불렀다.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12년에 승격하여서, 목으로 만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풍양현(豐壤縣) 주(州)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다. 신라에서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豐德)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포천에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본현에 내속하였다.
【진관】 주(州) 하나 파주. 군(郡) 하나 고양. 현 다섯 영평(永平)ㆍ포천ㆍ적성ㆍ교하(交河)ㆍ가평.
【관원】 목사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 갑자년에 이 지역을 비워서 놀이하는 장소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분할하여서 이웃 고을에 예속시켰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매성(買省)ㆍ창화(昌化)ㆍ내소(來蘇)ㆍ견주(見州).
【성씨】 견주 이ㆍ김ㆍ송ㆍ신(申)ㆍ백ㆍ윤ㆍ피(皮). 한양 한ㆍ조(趙)ㆍ민ㆍ신(申)ㆍ함(咸)ㆍ박ㆍ홍(洪)ㆍ부ㆍ최ㆍ정(鄭) 모두 來姓이다. 예(艾) 촌. 풍양 조(趙)ㆍ이ㆍ강(姜)ㆍ윤ㆍ유(劉). 사천 이ㆍ경(耿)ㆍ임(任)ㆍ송ㆍ허.
【형승】 세 영(嶺)이 하늘에 꽂힌 듯하다[三嶺揷天] 이색의 시에, “깍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 하였다.
【산천】 불곡산(佛谷山) 주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삼각산 주 남쪽 39리 지점에 있다. 한성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도봉산(道峯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아차산(峩嵯山)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수락산(水落山)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 주엽산(注葉山) 주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천마산(天馬山)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주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소요산(逍遙山) 주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묘적산(妙寂山)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왕방산(王方山)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 적었다. 고령산(高嶺山)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갈립산(葛立山)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대산(金臺山) 주 남쪽 75리 지점에 있다. 검암산(儉巖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홍복산(弘福山) 주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소라산(所羅山)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차유령(車踰嶺) 주 동쪽 65리 지점에 있다. 벽석령(碧石嶺) 주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문령(石門嶺)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효성현(曉星縣) 주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고려 고종 때에 김산(金山) 군사가 풍양 효성현을 침범하자, 관군(官軍)이 산 바깥쪽에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노원역(盧原驛)까지 추격하였는데, 참수(斬首)한 것이 매우 많으니, 우마(牛馬)와 의량(衣糧)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전두령(田頭嶺)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추현(槌峴)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주을동(住乙洞)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녹양평(綠楊坪)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양진(楊津)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대탄(大灘) 주 북쪽 7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체천(砌川)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연천ㆍ영평을 지나 서남쪽 임진으로 들어간다. 풍양천(豐壤川) 풍양현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천마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광진에 흘러든다. 백달천(白達川) 주 동쪽 85리 지점에 있다. 일곡천(一谷川)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홍복산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삼기강(三岐江)에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동쪽 67리 지점에 있다. 노지(蘆池)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ㆍ옥돌 옥돌은 갈립산에서 산출한다. 잣ㆍ송이ㆍ은어.
『신증』 녹반(綠礬) 주 서쪽 청송리(靑松里)에서 난다.
【봉수】 아차산 봉수(峨嵯山烽燧)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을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 서울 남산) 첫째 봉을 응한다. 대이산 봉수 주 동쪽 50리에 있다. 북쪽으로 포천현 잉읍재(仍邑岾)를 응하고, 남쪽으로 아차산을 응한다.
【궁전】 풍양궁(豐壤宮) 풍양현 동쪽에 있다. 연희궁(衍禧宮) 주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봉선전(奉先殿)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있다. 우리 세조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학교】 항교(鄕校) 주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영서역(迎曙驛) 주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찰방(察訪)의 본도인데, 속역이 여섯이다. 벽제(碧蹄)ㆍ마산(馬山)ㆍ동파(東坡)ㆍ청교(靑郊)ㆍ준예(狻猊)ㆍ중련(中連)이다. ○ 찰방은 한 사람이다. 평구역(平丘驛)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 한곳을 찰방하는데, 녹양(綠揚)ㆍ안기(安奇)ㆍ양문(梁文)ㆍ봉안(奉安)ㆍ오빈(娛賓)ㆍ쌍수(雙樹)ㆍ전곡(田谷)ㆍ백동(白冬)ㆍ구곡(仇谷)ㆍ감천(甘泉)ㆍ연동(連洞) 등이다. 녹양역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 오세문(吳世文)의 시에, “꽃이 있어 마을 값이 중하고 버들 없어 역 이름 외롭다. 높은 나무엔 해 먼저 비치고, 마른 잎엔 바람 먼저 분다.” 하였다.
쌍수역 풍양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주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광인원(廣仁院)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상지원(相知院) 주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도공원(陶孔院) 주 동쪽 74리 지점에 있다. 덕해원(德海院)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30리 거리이다.
○ 서거정의 시에, “누구네 집 울타리에 가시 삽짝 닫혔네. 버들은 우거지고 꽃 폈는데, 빛나게 또 마을 하나, 날 저물어 절룩 나귀 갈 곳 몰라 하는데, 작은 다리 밑에 물 흐르고 달빛이 밝혀 주네.” 하였다.
○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번 웃으니, 수없는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 이루었네. 돌아오고자 부질없이 십 년을 귀래시(歸來詩)만 지으니, 백발(白髮)은 다정하게 짐짓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도제원(道濟院) 풍양현 남쪽 15리쯤에 있는데, 토원(兎院)이라 하기도 한다.
【불우】 회암사(檜巖寺)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중창기(重創記)에, “우리나라 산수 경치가 천하에 이름이 났으며, 불사로서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또 몇 십 개인지 모르지만, 인사(仁祠) 제도의 극진한 것과 법왕(法王)ㆍ행화(行化)의 체제를 갖춘 것은 회암(檜巖)같은 것이 없다. 옛적 천력(天曆 원 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西天博伽納提尊者)가 이 절터를 보고, ‘서천 아란타사 터와 꼭 같다.’ 하고, 또 ‘가섭불(迦葉佛) 때에 벌써 큰 도량이 되었다.’ 하였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그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 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임시로 집을 덮어서 그 대개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현릉왕사보제존자(玄陵王師普濟尊者)가 지공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記)를 받고, 드디어 여기에 와서 살았다. 이에 크게 창건하고자 하여, 책임을 나누어 맡기고 바쁘게 불연(佛緣)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공역이 반도 못되어서 왕사도 또한 서거(逝去)하였다.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澗) 등이 왕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그가 남긴 규모를 계승하여 공역을 마쳤다.” 하였다.
○ 목은 문정공이 기를 쓰기를,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으로 향했고, 전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이 5칸이다.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이 1칸이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이 3칸이다.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인데 각 3칸이다. 동쪽 방장 동편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3칸이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정(大藏殿)이 3칸이다. 보광전 동쪽과 서쪽에서 좌우로 나뉘어, 여러 전이 우뚝하게 섰고, 여러 요사들이 높고 낮게 되었으며, 종루(鐘樓)ㆍ사문(沙門)과 부엌의 장소와 빈객(賓客)의 자리가 질서정연하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 62칸이었다.” 하였다.
○ 이로부터 재간(才幹)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 불전을 시작했으나 승료(僧寮)까지는 미처 못했고, 혹 종루는 보수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리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면 북쪽이 또 상했다. 이는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큰 총림이 거의 빈 집이 되었다.
○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임진년 봄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의지(懿旨)를 전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한 부인으로서 조부의 여음(餘蔭)을 받들어 우리 세조대왕을 돕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아 길렀다. 이것은 비록 황천(皇天)이 동방(東方)을 돌보신 것이나, 또한 오랜 세대로 덕을 닦은 것이 불법에 근본하였던 것이다. 예부터 자애로운 어미가 그 자손을 보호하고자 하고, 충신이 그 임금의 장수를 빌고자 하면, 오직 삼보(三寶 부처)에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암은 동국에서 큰 가람(伽藍 절)이다. 세 화상(和尙)이 서로 이어서 개산(開山)하였는데, 세 개의 산과 두 가닥 물 사이라는 말이 지공(指空)에서 비롯하였으니, 실상 임금의 장수를 빌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곳이다. 내 들으니, 터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전사(殿舍)의 섬돌을 잡석(雜石)으로 쌓았기 때문에, 창건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집이 벌써 퇴락하였다 한다. 지금 간각(間閣)의 제도는 옛날대로 하여 고치지 않고, 뜰에 박힌 것은 모두 다듬은 돌로써 바꾸고자 하는데, 공역(工役)을 계산하니 초창하는 것보다 두 배나 된다. 경(卿)도 또한 덕을 심은 인과(因果)가 있었으므로, 공주(公主)와 짝할 수 있었으니, 경은 힘을 다해서 나의 넓은 원심(願心)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현조(顯祖)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중수(重修)하는 일이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과 곡식 저축이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양사(正陽寺) 주지(住持) 처안(處安)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재질로서, 그를 따를 자가 적습니다.” 하니, 의지(懿旨)로써 허락하였다. 드디어 처안(處安)을 회암사에로 이주(移住)시키고, 재물과 곡식 따위 비용은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모자라는 대로 보급하여 쓰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부원군도 또한 개인의 재산을 내어서 모자라는 것을 제공하였다. 처안이 승도(僧徒)와 속인(俗人)으로서 자원(自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일한 것을 계산하여 품값을 주도록 아뢰었다. 날마다 만 여명을 사역 시켰으나 감독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껏 하였다. 그 해 월 일에 시작해서 거의 열 석 달을 지나 마쳤다. 전사(殿舍) 칸살은 다시 고친 것이 없고, 난간과 담의 넓고 좁음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어도 방문과 문 차면이 더욱 넓어졌고, 단청을 칠하여 더욱 현란하였다. 백여 년 퇴락한 옛 절이 일조에 새로운 보찰(寶刹)로 변하게 되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노송나무 푸르고 돌 기세 완악 한데, 잎 사이 풍우로 공중 기후가 차다. 늙은 중 출정(出定)하여 성색(聲色)을 잊으니, 머리 위에 구슬 같이 세월이 달리는 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에 익은 여장(藜杖) 짚고 절 찾아가니, 장송(長松)이 바위에 기대어 나지막하네. 산 이름을 중에게 묻지 않고, 문에 걸린 현판에서 큰 글자 본다. 만학(萬壑)에 구름 피니 숲이 더 깊고, 천년 일 아득한데 새 자주 운다. 삼사탑(三師塔)이 칡덩굴 넘어 있어 꼭대기에 오르려니, 마음 더욱 아득하다.” 하였다.
봉선사(奉先寺) 주엽산(注葉山) 광릉(光陵) 남쪽 둔덕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기문에, “봉선사(奉先寺)란 것은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세조 대왕을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성화(成化) 기원(紀元) 4년에 우리 세조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여러 신하가 양주(楊州) 땅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터를 가렸는데, 산은 주엽(注葉)이고 둔덕은 운악(雲岳)이다. 그해 12월에 세조 대왕의 현궁(玄宮)을 받들어 장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의지(懿旨)를 내리기를, “우리 대행대왕께서 몸소 큰 변란을 만나, 백성이 크게 원망하는 것을 바로잡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은 동방이 생긴 이래로 비교할 데가 없다. 국가가 불행하여 갑자기 뭇 신민을 버리시니, 아, 애통하다. 옛 제도를 상고하니, 선왕의 능침(陵寢)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를 설치하였다. 지금 큰일을 마쳤으니, 경들은 절 지을 터를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신 정현조(鄭顯祖),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신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陵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능실(陵室) 남쪽에 깊숙한 구역 하나가 있는데, 산이 감돌았고 물이 차서 절 터로서 알맞으므로, 신 현조 등이 아뢰어서 허락을 받았다.
○ 기축년 6월에 짓기 시작하여, 가을 9월에 마쳤다. 칸살을 계산하면 총 89칸이고, 검고 붉은 것을 발라서, 극히 선명하였다. 불전과 승료(僧寮)가 빛나고 넓으며, 방울과 목탁이 바람만 불면 절로 울렸다. 천석(薦席)과 상탑(床榻)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빗장과 방망이 따위 도구와, 집기 따위도 넉넉하게 구비하여, 여러 사찰 중에 비교될 곳이 없었다. 전지(田地)와 노비ㆍ전곡(錢穀) 등 상주하기 위해 밑천으로 하는 숫자는, 영구히 부처와 중의 공양을 위한 것으로서 별도로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여기에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해 9월 7일에 세조를 위한 천도(薦度)를 크게 베풀어서 낙성(落成)하였다. 또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절을 지었으나 능침과는 둔덕이 서로 격했으니, 절 곁에다가 진전(眞殿)을 지어서 하늘에 계신 대행대왕의 혼령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여, 저승에서 노니는 데에 이롭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절 동쪽에다가 영전(影殿)을 건립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이름하였다. 참봉(參奉) 두 사람을 두어서 새벽과 저녁에 배알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헌관을 보내서 능실(陵室)과 같이 예배하였다. 이에 제조 신 정현조 등이 돌아와서 일이 완성됨을 아뢰니,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 ‘봉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 들으니, 예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후(后)의 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과 주(周) 나라의 태사(太姒)의 사적은 경전에 나타났고, 그 일도 빛남이 있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우리 세조를 보좌하였다. 잠저에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영특한 지략과 과단함으로써 성덕(聖德)에 이바지하였다. 집을 변화시키고, 국가로 만들어서, 큰 명(命)이 붙는 데가 있게 하였다. 사적(史籍)을 살펴도 성덕의 높음과 내조(內助)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우뚝하였다. 비록 도산이 하(夏) 나라를, 태사가 주(周) 나라를 도왔다 하더라도, 우리 대비 전하보다 낫지는 못하리라.
○ 들으니, 산 사람을 섬기는 데에 공경을 다한 자는 반드시 죽은 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고, 처세(處世)하는 가르침을 높이는 자는 반드시 출세(出世)하는 법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신과 효자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능히 그 덕을 온전히 하는 도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위해 애통해하는 정성과, 추모하고 기도하는 뜻에 이미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큰 가람을 묘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창건했고,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펼쳐서, 초승(超昇)하는 편제(便梯)를 일으켰다. 이것은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덕을 더욱 온전히 한 것이며, 여러 어진 덕을 겸비한 후비들과 나란히 할 수 있다. 또한 전대 제왕에도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종명(鐘銘)〉에, “삼가 생각건대,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대왕 전하(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大王殿下)께서는 구오(九五)에 오르시고 금륜(金輪)에 임어(臨御)하시니, 신화(神化)가 미치는 곳에 가까운 데는 편히 여기고 먼 데서는 두려워하였으며, 백성과 만물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14년이 되어 불행히도 숙연(宿緣)은 다하였고 명수(命數)는 피하기 어려우며, 뭇 신하들은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심을 당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命)과 통하여, 우러러 호곡하심이 다함 없었다.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사모하였다. 이에 광릉(光陵) 곁에다가 큰 절을 영건(營建)하여 ‘봉선사’라 이름하고, 유사에게 큰 종을 주조(鑄造)하도록 명하였다. 해당 관원이 왕의 뜻을 받들고 이에 부씨(鳧氏)를 상고하고, 금과 주석을 헤아려, 여섯 가지 재료를 형성하였다. 본[模範]이 이루어질 무렵에 신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종이라는 기물이 쇠로 된 것 중에서는 가장 크다. 그 소리가 용용(舂容)하여 먼 데는 놀라게 하고 가까운 데는 두렵게 하며, 그 묘함이 위로는 삼천(三天)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를 겸한다. 타왕(吒王)이 윤회(輪回)를 받고 꿈에도 종치기를 원했고, 제파(提婆)가 두번 울려서 크게 진교(眞敎)를 일으켰다. 인연 공덕(因緣功德)을 어찌 모두 말하랴. 지금 이 종으로써 육부(六府)를 깨우치니, 어찌 특히 도려(道侶)가 깊은 각성(覺醒)을 말하며, 아득한 무리가 고뇌(苦惱)를 그칠 뿐이리요. 반드시 아득한 현궁(玄宮)에도 통하여, 좌우에 들리면, 돈연(頓然)히 불지(佛智)를 더하여, 피안(彼岸)에 속히 오를 것이다. 하물며, 우리 세조대왕은 성한 덕과 높은 공이 만고에 빛나고,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는 정성이 천지와 함께 다함이 없음에랴. 이러한 바를 종정(鐘鼎)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삼가 절하며 머리 조아리고 명(銘)하기를, “능침 곁에다 보찰(寶刹) 지으니, 금벽(金碧)이 우뚝하게 솟아났구나. 법악(法樂)이 인간의 세계와 하늘에 울리니, 묘한 소리 유명(幽明)을 화하게 한다. 그 중에 커다란 방망이 있어, 고래가 투그리듯 소리가 높다. 연모로써 두드려서 울리기만 하면, 귀 있는 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제진(諸塵)을 떠나지 않고, 삼기(三紀)가 합친 다음 이루어진다. 듣는 것이 있어도 들림이 없고, 마땅히 실(實)을 듣는 본성이 있다. 능히 듣는 자, 어찌 옳으랴. 본래는 실상, 청정(淸淨)뿐이다. 청정하면 때와 더러움 없이 이것을 이름하여 대원경(大圓經)이라 한다. 사람마다 이 이치 갖추어져서, 한 번만 들어도 깨치게 된다. 위로 통함은 아가니(阿伽尼)에게, 옆으로 둘리는 건 항하사(恒河沙)까지 법이 다하면 끝없는 삶의 복리가 이루어진다. 열성(列聖)이 올라서 바로 보니, 모든 형체 있는 것이 삼매에 든다. 삼광(三光)의 돗수가 순리로 되고, 만 백성이 요사(夭死)와 역질이 없다. 진묵검(塵墨劍)이 지나도록 요도(瑤圖)와 함께 나라는 반석 같아 견고하리라. 산이 평지 되고 바다는 말라도, 공덕은 마침내 닳지 않으리라.” 하였다.

개경사(開慶寺) 옛날에는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는데, 능침과 가깝다하여 지금은 남곡(南谷)에 옮겼다. 중대암(中臺菴)ㆍ백운암(白雲庵)ㆍ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아울러 소요산에 있다. 고령사(高嶺寺) 고령산에 있다.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범굴사(梵窟寺) 아울러 기슭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 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하였다.
묘적사(妙寂寺) 묘적산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이 있다.
○ 신종호(申從護)의 시에, “한가히 생대(生臺) 밑에 앉아 있으니, 임궁(琳宮)에 밤들어 적적하구나. 매화(梅花) 보고 시 지으니 격(格)이 여위고, 차 달이며 술 마시니 취기 가신다. 깊은 원(院)에 바둑 소리 급하고, 주렴(珠簾)에 촛불이 일렁거린다. 밤이 새면 서울로 떠나야 할 터,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도하다.” 하였다.
불곡사(佛谷寺) 불곡산에 있다. 수락사(水落寺) 수락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食後)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하였다.
○ 앞사람의 서문에,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수락산에 왕래한 것도 또한 두 번이며, 이 시를 우연히 벽 위에다가 적은 지도 지금 30여 년 전이다. 그저께 일암 전상인(一菴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장단 백태수(長湍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었다.’ 하면서, 나에게 그릇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갑자기 짓고 문득 버려서 한두 마디의 말로 상자에 남겨 둔 것이 없다. 하물며 광망한 소년 적에 지은 것으로 유전(流傳)시킬 뜻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하였겠으며, 32년 전 일이 아득하게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찌 그릇된 글자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한번 읽어보니, 운자(韻字) 단 것과 글자 놓은 것에 불만스러운 곳이 있다. 반드시 나의 유치한 시절의 잘못이거나, 혹 외우는 자의 잘못이 아닐까. 우선 그냥 두었으나, 옛일을 생각하니 능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드디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드렸다. 일암은 그때 불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이다. 후일 일암과 함께 한번 놀게 된다면 나의 말을 마치겠다.” 하였다. 그 시(詩)에, “산중(山中) 옛절에 유람하던 일, 손꼽으니 지금 벌써 30년이다. 객과 함께 거닐면서 많은 시간을 중을 위해 머물렀다. 한가한 긴 날, 꽃이 짙고 대나무 빽빽하여 지역이 깊고, 나무 늙고 바위 돌아 작은 누(樓)를 안았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소년 적 지난 일이 유유하여라.” 하였다.
○ “유유한 지난 일은 소년 적일세. 취한 중에 필세(筆勢)가 용솟음쳤다. 판벽(板壁)에 내 쓴 것은 무심하였고, 화등(花藤)에 중 베낌은 다사(多事)도 하다. 붉은 소매 푸른 비단은 본분 아닌 것이 부끄럽고, 흰머리 누른 티끌 속에 늙음이 밉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높은 봉에 또 오르면 쾌함 있으리.” 하였다.
○ “다시 최고봉(最高峯)에 오르고 싶다. 정(井 별 이름)을 지나 참(參 별 이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한낮에 새 한 마리 머리로 날아 지나고, 푸른 산은 여러 용이 눈아래 노는 듯, 금은(金銀) 불찰(佛刹)은 3천 계(界)이고, 금수(錦繡) 강산은 백 두 겹이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해질 무렵 앉아서 차를 끓이며.” 하였다.
○ “저녁 해 떨어지고 차 끓는 소리, 청산은 거만한 듯 아랑곳없다. 굽어보니 구름은 평지에 일고, 쳐다보니 폭포는 반공(半空)에 난다. 꽃비는 누(樓)에 가득 옷이 다 젖고, 베갯머리 송도(松濤)는 뼈에 사무친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청련(靑蓮)과 결연(結緣)하여 여생 보내리.” 하였다.
○ “여생에 결연하기 첨 마음일세. 서글퍼라 연래에 눈 같은 머리. 원(願) 맺기가 옅지 않음 누가 알리. 산에 들면 안 깊을까 항상 염려라. 스님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총림(叢林)과 가깝구나 불암 촌서(村墅)가.” 하였다.
○ “총림이 불암산 가까이 있고, 산 밑에는 내 집이 두어 칸 있다. 도잠(陶潛)의 세 가닥 길, 적막하여도 양로(楊老)의 한 구역 집 반환(盤桓)하노라. 나물 캐고 죽순 구워, 예삿일이고 국화 보내고 매화 맞았다 하여라.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저문 나이 내 신세가 함께 따르리.” 하였다.
불암사(佛巖寺) 불암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 소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하였다.
석천사(石泉寺) 수락산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죄다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홍복산에 있다. 정토사(淨土寺) 주 서쪽 59리 지점 백련산(白蓮山)에 있으며,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
【사묘】 사직단 주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여단 주 북쪽에 있다. 양진사(楊津祠) 광나루[廣津] 아래쪽에 있다. 용에게 제사하는 단이 있는데, 봄ㆍ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린다. 신라 때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社)에 올렸는데, 지금은 소사(小社)에 기재되어 있다.
【능묘】 건원릉(健元陵) 본조 태조의 능이다. 주 남쪽 57리 지점인 검암산(儉巖山) 기슭에 있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 권근(權近)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서 치운(治運)을 열어 주는 데에는, 반드시 상서(祥瑞)가 먼저 있어서, 천명(天命)에 부합(符合)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우(夏禹)가 일어날 때에 하늘에서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왕으로 될 적에는 꿈과 점괘가 합치하는 상서가 있었다. 한당(漢唐) 이래로도 역대(歷代)로 일어날 때에 각각 부합하는 상서가 있었다. 이것은 지혜로써 구할 수 없고, 힘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성철(聖哲)한 자질과 신무한 덕을 소유하고서 큰 운수에 응하여 탄생하고, 요도(瑤圖)를 잡아서 발흥한 다음이라야 쇠퇴한 세상을 변화시켜 다스려지는 태평한 세상으로 돌리고, 큰 기업(基業)을 창건하여 통서(統緖)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니, 모두 하늘에서 주는 것이고, 사람의 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 용잠(龍潛)에 있을 때에, 나가면 장수이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에 천명에 부합한 상서가 전후로 아울러 이르렀다. 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잡고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다.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자는 공이 아니면 누구인가.’ 하였으니, 하우(夏禹)의 현규(玄圭)와 주무(周武)의 점괘와 합치하는 꿈을 꾼 것과 거의 되좇아 짝할 만하다. 장수로 되어서는 경술년에 올라(兀羅)를 공격하면서 군사가 압록강을 넘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고, 경사년 운봉 전첩(雲峯戰捷)에는 군사가 장단을 나서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한 고조(漢高祖) 망탕(芒碭)의 운기(雲氣)와, 송(宋) 태조 진교(陳橋)의 일광(日光)과 또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무진년에 요(遼)를 공격하라는 최영의 핍박을 당했다. 밖으로는 감히 상국(上國) 경계를 침범하지 못할 형편이고, 안으로는 감히 폭군(暴君)의 영을 어길 수 없었다.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오직 딱하기만 하여 군사를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 여러 날 장마가 졌으나, 물이 매우 붇지 않았는데, 의기로써 군사를 돌이켜 언덕에 오르니, 큰물이 때맞추어 와서 온 섬이 빠져 버렸다. 한 광무(漢光武)의 호타하(滹沱河) 얼음과 원 세조(元世祖)의 전당(錢塘) 조수가, 모두 그 미담(美談)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구변도(九變圖)라는 국판[局]과 십팔자(十八子)라는 설(說)이 단군 때부터 벌써 있었던 것인데, 수천 년을 지난 지금에 징험된다. 또 이상한 중이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그 말이 위에 말한 단군 때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합치하였다. 이것은 또한 광무(光武)의 적복부(赤伏符)라는 것과 유사하다. 비기(祕記)가 비록 떳떳하지 못하다 하나, 또한 이치가 혹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번 징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봄이 참으로 증거 있는 것이다.
신이 삼가 선원(璿源 임금의 족보)을 상고하니, 이씨는 전주(全州)에서 이름난 씨족이었다. 신라 적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휘 한(翰)으로부터, 그 후 23대 황렬고 환왕(皇烈考桓王)까지 여러 대로 승적(承籍)한 아름다움을, 우리 태조께서 용잠하실 때에 선정(先正) 신 이색(李穡)이 지은 환왕 묘비에 갖추어 기재하였다. 그 뒤에 태조께서 대업을 창건하시고 대통을 드리우신 신기한 공과 거룩한 업적으로써 4대를 추존 할 때에, 문신 정총(鄭摠)이 지은 환왕 정릉(定陵)의 비에 모두 적었다. 신이 지금 명을 받들었으나 감히 작은 것을 아뢰지 못하고, 우선 큰 것만을 모아서 말한다.
사공(司空)이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대를 지나 긍휴(競休)에게 와서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다. 13대를 지나 황고조 목왕(皇高祖穆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원 나라에 벼슬하여 천부(千夫)의 장이 되었고, 4대로 거듭 벼슬을 이어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원 나라 운수가 쇠하여지므로, 황고 환왕이 들어와서 고려에 벼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서 중국의 도성(都城)을 침범하고,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유린(蹂躙)하였으나, 천하에서 그 칼날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지정(至正 원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적이 왕경(王京)을 함락하므로, 공민왕이 서울을 버리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시켰다. 우리 태조께서 앞장서서 싸움을 이기니, 위엄이 비로소 떨쳤다. 다음 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쫓아버렸고, 또 다음 해 계묘년에는 거짓 임금 탑첩목(塔帖木)을 축출하였다. 날카로운 기세를 꺾고 적군을 물리쳐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니, 이 때문에 공민왕의 믿고 의지함이 더욱 중하였다. 여러 번 장상(將相)이 되어 중외(中外)로 나들면서 도적을 제압해서 민생을 편하게 하여, 여러 번 특별한 공을 세웠다. 호령(號令)이 명백하고 신실하여, 추호도 백성에게 범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제하려는 활달한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후한 덕이 천성에서 나왔다. 묘당(廟堂)에서 계획하는 여가와 전진(戰陣)에서 창을 던져 두는 여가에, 명유(名儒)를 맞이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열심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혹 밤중까지 자지 않고 더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아서,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뜻이 있었다. 용맹스런 계략은 세상을 뒤덮고, 영걸찬 예기는 무리에서 뛰어났으므로, 일시의 물망(物望)이 또한 주목(注目)하지 않는 자 없었다.
공민왕이 갑자기 죽자, 명령(螟蛉)이 왕위를 도절하고 권세 잡은 간신이 국정을 멋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어 탐탁하고 살륙함이 끝이 없었다. 시중 최영은 이를 분하게 여겨, 주륙(誅戮)하면서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은 태조가 청충용렬(淸忠勇烈)하다 하여, 특히 천거하여 우시중(右侍中)으로 삼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越)을 주면서, 망령되이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도록 핍박해서 보냈다. 이에 위화도(威化島) 행차가 있었는데,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대의(大義)를 가지고 군사를 돌렸다. 그리하여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21년 무진 6월에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명유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아서, 서정(庶政)을 고쳐 새롭게 하여 일국을 편하게 하였다. 이때에 처음에는 탐포한 무리의 탁하고 어지러운 정사를 만났고, 다음에는 광패한 신하가 틈을 만들어 잡게 됨을 당하여, 나라가 아주 위태하고 화란을 측량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화위복하는 힘이 아니었더라면, 온 나라 민생이 거의 혼란되었을 것이다.
이색이 우리 태조에게 아뢰기를, ‘공이 지금 의거하여 군사를 돌리고 죄인을 쳐서 중국을 높였다. 노부(老夫 이색 자신)가 윗자리에 있어 이 국정(國政)을 같이 맡았으니, 공의 충성을 황제에게 모두 아뢰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하고, 기일을 정하여 중국 서울에 갔다. 우리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가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를 서장관(書狀官)에 충수하여, 이색을 따라 함께 조회하게 하였다.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후하게 예하여 보내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의 교지(敎旨)를 받으니, 딴 성씨를 왕씨(王氏)의 뒤로 삼은 것을 책망한 것이었다. 태조는 여러 장수와 함께 왕씨의 종친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뽑아 세웠다. 마음껏 보좌하고 정사와 형벌을 명백히 하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억지로 빼앗은 것을 징계하고, 벼슬을 중히 하여 용렬하고 외람한 자를 도태하니,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잘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공명이 높으니 시기함을 받아 참소가 서로 얽히는데, 정창은 일에 어두워, 도리어 참소에 의혹되었다. 우리 태조는 지위와 공명이 너무 가득한 것으로써 전문(箋文)을 올려 노퇴(老退)하기를 청했으나 해임되지 않았다. 마침 서쪽으로 갔다가 병에 걸려서 돌아왔는데, 모해하려는 자가 틈을 타서 화가 신변에 절박하였다. 우리 전하는 시기에 따라 변을 제어하여 뿌리를 잘라버리니, 지당(支黨)이 와해되고 정창은 정사에 어두워서 국세가 불안하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홍무 25년 임신 가을 7월 16일에 하늘이 전하를 도와서,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명과 함께 의기를 주창하여 추대하게 하니, 신료와 부로가 모의하지 않아도 마음이 모두 같았다. 우리 태조께서 변을 듣고 놀라서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민심이 절박하여 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당(堂)에 내리지 않고 나라를 변화시켰고, 나라를 바꾸어[易姓] 명을 받기가 구슬을 굴리는 것같이 쉬웠다. 하늘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덕 있는 이를 돕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요. 곧 지중추(知中樞) 조반(趙胖)을 보내어 천자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 백성이 이미 이씨를 높여서 백성에게 병화(兵火)가 없고 각자 천명에 따르니, 상제(上帝)의 명이다.’ 하였다. 또 계속하여 칙서로서, ‘나라 이름을 무엇이라 고쳤느냐.’ 하여, 유성(流星)같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므로, 곧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나라 이름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조서하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으로써 근본하여 계승하고, 하늘을 본떠서 백성을 기르며, 영원히 후사(後嗣)가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우리 태조의 위정(威靜)이 본래 나타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용맹에 복종하고, 충의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슬기를 높이고, 공덕이 높이 들리었으므로 간택함이 황제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황명(皇命)을 청할 때를 당하여, 문득 유음(兪音)을 받았음이니, 어찌 우연한 일인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친아들을 조정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통하고 이치에도 밝으며, 일찍이 중국 조정에 조회하였다는 것으로써 곧 보내어 황명에 응하였다. 중국 서울에 가서 아룀이 성지(聖旨)에 합당하니, 후한 예로써 위로하여 보낸 것이었다.
그해 겨울 10월에 도읍을 한양에 정해서, 궁실을 건축하고 종묘를 건립하였다. 추존하여 황고조 목왕(穆王)과 황고조 비(妣) 효비 이씨(孝妃李氏)를 제1실에, 황증조 익왕(翼王)과 황증조 비 정비 최씨(貞妃崔氏)를 제2실에, 황조 도왕(度王)과 황조비 경비 박씨(敬妃朴氏)를 제3실에, 황고 환왕과 황비 의비 최씨(懿妃崔氏)를 제4실에 봉사(奉祀)하였다. 또 각 산릉(山陵)에는 능을 수호하는 민호(民戶)를 두고 때에 따라 제사하였다. 예악(禮樂)을 닦아 제사ㆍ절차를 삼가고, 장복(章服)을 제정하여 위의(威儀)를 분변하였다. 학자(學資)를 넉넉히 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녹봉을 증가하여 사대부를 권장하였다. 분쟁하는 소송을 분변하고, 수령(守令)의 출척(黜陟)을 신중히 하니, 폐단이 죄다 없어지고 모든 정사가 화창하였다. 제후(諸侯)의 법도는 삼가 사대(事大)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전함(戰艦)을 갖추어서 도적 막는 것을 엄하게 하였다. 황제가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오고, 왜국(倭國)에서 보배를 바쳤다. 해적(海賊)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잇따라 와서 항복하니, 사방이 안정하여 백성이 편하고 불자가 성하였다. 우리 태조의 높고 넓으신 성덕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맹과 지혜이며, 또 총명하시어 뛰어난 무위(武威)로써 적을 죽이지 아니하고, 헌걸차고 거룩하여 범상하지 아니하니 호걸스러운 임금이라 하겠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의 표문(表文)으로 인해 꾸지람을 당하고,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하여 가지 않고 가만히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여 항명(抗命)하기를 꾀하였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편하지 못한 틈을 타서 여러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孽)을 끼고서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밤에 사제(私第)에 모였는데 화기(禍機)가 급박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기미를 밝혀 죽여 없애고, 상왕(上王)이 적장(嫡長)이므로, 세자(世子)로 봉하기를 청하여, 이륜(彝倫)을 바로잡으니, 종사(宗社)가 이에 안정되었다. 9월 정축일에 우리 태조께서는 병환이 낫지 않으시어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셨다. 상왕은 뒤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고, 또 국가를 창건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다 우리 전하의 공이라 하여, 우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우리 태조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께서도 또한 병환이 계시어,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시고 사신을 보내어 황명을 청하니,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고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셨다.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 여름 4월에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봉하고 잇따라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전하에게는 용포(龍袍)와 면류관(冕旒冠) 따위 구장복(九章服)과 비단ㆍ깁ㆍ서적 등속을, 왕비에게는 관(冠)ㆍ포(袍)와 비단ㆍ깁 따위를, 우리 태조에게는 비단과 깁을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약재(藥材)ㆍ실ㆍ깁과 보배로운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아울러 와서, 중한 총권(寵眷)이 옛날에는 없었다.
영락 6년 무자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가 74세였다. 왕위에 있은 것이 7년이고, 노년(老年)이어서 정사를 보지 않은 것이 11년이었다. 신민이 다 어버이처럼 임어(臨御)하여서 영원히 영양(榮養)을 누리도록 축원하였는데, 일조에 신선이 되어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애통하여라. 우리 전하께서 애모하심이 다함 없었다. 양암(諒闇)에서 예대로 다하며, 군신을 거느리고 책보를 받들어서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이해 9월 9일 갑인에 도성 동쪽 양주 검암산에 장사하였는데, 능 이름을 건원이라 하였다. 능 곁에다가 절을 설치하여 이름을 개경(開慶)이라 하고, 명복(冥福)을 빌었다. 초상 장사에 예를 성심껏 하여, 옛 예전(禮典)을 꼭 따랐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부고하니, 황제가 놀라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특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내리고, 글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그 대략에, ‘생각건대, 임금이 명달하고 착함을 좋아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천도(天道)를 공경히 따랐고 의를 힘쓰며, 충성을 드리어 사대하는 데에 공손히 삼갔다. 한 지역 백성을 보호하고 부(富)하게 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의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특히 하사하였다. 임금의 현저한 공덕은 비록 옛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고명을 하사하여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서하고 보물(寶物) 주는 것이 특히 후하고, 총권(寵眷)하는 예가 구비하여 유감이 없었다. 오직 우리 태조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으로 앞에서 터를 닦았고, 우리 전하의 부모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는, 뒤에서 받들어서 성군(聖君)과 성군이 서로 이어 능히 천심(天心)에 화합하였다. 그러므로 정성이 신명에 통하고 복과 경사가 종사(宗社)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서 끝까지 크게 하늘과 사람, 상하(上下)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니, 아, 성대(盛大)하시었다.
첫째 비(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에서 여러 대를 살던 집안에서 나셨다. 증직(贈職)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 경(卿)의 딸인데 먼저 승하 하였다. 처음 시호는 절비(節妃)였는데, 뒤에 승인 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탄생하였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께서 다섯째이다. 맏이는 방우(芳雨)로서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죽었다. 다음 셋째는 방의(芳毅)인데 익안대군(益安大君)이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 넷째는 방간(芳幹)인데 회안대군(懷安大君)이고, 다음 여섯째는 방연(芳衍)인데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딸로서 맏이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으니, 같은 이씨는 아니며, 다음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먼저 승하하여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였다. 2남 1녀를 탄생하였다. 아들로서 맏이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증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는데,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며 모두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配位)는 김씨인데, 지금은 왕대비(王大妃)로 책봉되었고, 증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이고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민씨(靜妃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 문도공(文度公)인 휘 제(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세자 제(禔)이고, 다음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며, 다음은 금상(今上) 충녕군(忠寧君)이요, 다음은 어리다. 맏딸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 이백강(李伯剛)에 출가하였다.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연(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2남을 낳았는데, 맏이는 복근(福根)인데 봉녕군(奉寧君)이고, 다음은 덕근(德根)인데 원윤(元尹)이다. 익안군(益安君)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석근(石根)을 낳았는데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군(懷安君)은 문하찬성사 벼슬을 추증받은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맹중(孟衆)을 낳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로 천명(天命)받은 임금을 보니, 신령한 상서의 경사는 당시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이 반드시 자세히 기록하고 특별히 쓴 것은 밝은 덕이 부합함을 밝히어 분에 넘게 나라를 얕보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간책에 빛나서 무궁하게 빛을 흘렸다. 지금 우리 조선이 일어날 때에는 천명을 받은 부험이 사방으로 모여들어 옛보다 빛났다.
이것은 비록 덕(德)에 인한 것이고, 경사할 것이 아니나, 하늘의 돌봄이 이 때문에 더욱 드러났다. 그리하여 마땅히 큰 덕이 천명을 받아, 이미 그 지위를 얻고 또 장수함이 마땅하다. 큰 기업이 우뚝하여 뽑히지 않으며, 큰 복이 내려서 다함이 없어 천지와 함께 장구하였던 것이다. 신은 못 쓸 재질(材質)로서 외람되이 사필을 잡았으니, 진실로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에 외람되이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감히 뜻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성덕을 포장(鋪張)하여 밝은 빛을 드리우지 않으랴. 그러나 신 근(近)은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공덕을 발양하여 밝으신 성지(聖旨)에 보답하기가 부족하오나, 이것은 소라 껍질로써 강과 바다의 물을 측량하고, 붓끝으로 천지를 모사하려는 것과 같다. 어찌 능히 그 물가에나마 이를 것이며, 방불하게나마 엿볼 수 있겠는가. 삼가 보고 들은 공덕을 뽑아서 감히 손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명(銘)을 바친다. 명에 이르기를, 멀고 아득한 옛날에 양의(兩儀 천지)가 비로소 열렸다. 사람이 참여하여 셋으로 되었는데,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에 길게 하고 다스리게 하여 이에 덕 있는 이를 돌보았으니, 하늘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나 명수(命數)가 있었다. 우(禹)에게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의 꿈은 점과 합치하였으니, 역대의 증거는 사책(史策)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은 처음부터 왕적(王跡)에 기초(基礎)가 있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다.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으며, 무지개가 햇빛에 엉겼었다. 상서가 잇달았으니, 하늘의 마음이 분명하였다. 고려 운수가 마치게 되어 전복(顚覆)을 스스로 취하였다. 임금은 어둡고 정승은 참혹하였다. 농삿달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과 틈을 얽었다. 나라가 이미 미약하여 위태하였다. 우리 군사가 의(義)로 돌리어 죄인을 이에 잡았다. 충성이 위에 알려지니, 황제 마음이 즐거웠었다. 윤음(綸音)을 잇달아 받아, 왕씨 종사를 다시 잇게 하였다. 도리어 혼약(昏弱)하여 천록(天祿)이 다 되었다. 역수(曆數)가 돌아가게 되므로, 여정(輿情)이 이에 박절하였다.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저자 가게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고황(高皇)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나라를 두면서 백성에게 병화(兵禍)도 없이 천명을 순종했다.’ 하였다. 잇달아 국호를 내렸는데, 조선으로 복구(復舊)하게 하였다. 터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수(漢水) 북쪽이었다. 백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곳이었다. 궁실이 높직하고, 종묘가 날 듯하다. 공경히 조종(祖宗)에게 제사하고, 왕작(王爵)으로 높이었다. 인(仁)이 두터워 살리기를 좋아하니, 다스림이 성하며 화하기를 생각하였다. 온갖 제도가 갖추어지니, 만 가지 교화(敎化)가 흡족하였다. 신민(臣民)과 부로(父老)가 춤추고 노래하였다. “옛날에 우리가 전복되어 어육(魚肉)될 뻔하였는데, 지금은 우리 다 소생하여, 은택에 젖었도다. 밭갈고 우물 파서 부모를 섬기고 처자(妻子)를 기른다. 만년토록 수(壽)하시어 많은 복을 누리소서. 이에 정사에 싫증이 나서 맏이에게 전하였다. 맏이는 또 공 있는 분에게 사양하여 부자 형제 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기미를 밝히는 것이 촛불 같았다. 싸락눈이 엉기다가 햇볕만 보면 풀려지는 듯하였다.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가 더욱 도타왔다. 새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단정한 것은 모두 우리 님의 공이었다. 대명을 사퇴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돌아가는 데가 있었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공손함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효제(孝悌)가 신에 통하니, 황제의 돌보심이 더구나 우악(優渥)하였다. 총애하여 주는 것이 해마다 와서 산 같고 뫼 같았다. 사방이 편하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정숙(靜肅)하였다. 상(喪)을 만나 조심하며 애모(哀慕)하고 뛰며 굴렀다. 황제 듣고 놀라며 슬퍼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곡(吊哭)하고, 대뢰(大牢)로 제사지냈다. 후한 부의(賻儀)와 칙서(勑書)로서 아름다운 시호를 포창(褒彰)하고, 휼전(恤典)을 갖추어 신칙하였다. 하늘에서 보우(保佑)하여 종시(終始) 변하지 않았다. 큰 복이 면면(綿綿)하여 자손이 천(千)이고 억(億)이어서 만년이 되도록 종사를 보전하리라. 높은 산이 날아가고 바닷 물은 말라도 종사는 길이길이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다.” 하였다.
○ 변계량이 지은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는 지극한 덕과 많은 공으로써 대업을 처음 이룩하였다. 다스림에 날마다 부지런히 생각하다가, 이에 편하지 못함이 오래이므로, 선위(禪位)하고 오래 영양(榮養)을 누리기를 도모하였는데, 영락(永樂) 무자년 봄 정월에 또 편하지 못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하늘에 빌고 수명(壽命)을 청하여 조금 나았다. 다섯 달을 지나 또 병이 발작하여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양주 검암산(儉巖山)에다가 예장(禮葬)하였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산 내맥(來脈)은 장백산(長白山)을 뿌리로 하여 2천여 리를 뻗쳐 내렸다. 철령(鐵嶺)에 와서 꺾어져 서쪽으로 다시 수백 리를 와서 우뚝한 것이 백운산(白雲山)이다. 또 남쪽으로 백여 리를 뻗어 와서, 북으로 모이면서 남으로 향하였으니 곧 검암산이다. 능(陵)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능에서 바로 병방(丙方)인 4백 21척 지점에 비(碑)를 세워서, 우리 태조 공덕을 기록하였는데, 훌륭한 것을 기록하여 이미 상세하였다. 전하께서는 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을 비 뒷면에 새기고, 정사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의 또한 시기에 응해, 계책을 정해서 우리 태조의 창업 수통(創業垂統)하신 사업을 넓힌 자들도 아울러 새겨서, 민멸(泯滅)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신 계량에게 기문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니, 하늘이 큰 덕 있는 이를 낳아서, 이 백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반드시 팔다리같은 보필하는 신하가 전후(前後)에서 분주하여서, 앞에 개발하고 뒤에는 지킨, 다음이라야 큰 공업이 성취하고, 큰 사업이 영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일어날 때에도 문무 대신이 천명을 밝게 알고 능히 좌우에서 계적(啓適)하였다. 무인년에 정사(定社)한 것과 경진년에 좌명(佐命)함 같은 것은, 또한 훌륭한 친척과 좋은 보필이 서로 더불어 보익(輔翼)하여, 그 공을 성취시켰고 큰 복을 영구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비석에다가 명을 새겨서 장래에 빛나게 할 것이며, 우리 전하께서 조상의 공업(功業)을 드날리고, 공신을 표창한 아름다움도 또한 아울러 전하여서, 영원토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현릉(顯陵) 본조 문종(文宗)의 능인데,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신증』 지금 임금 8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부장(祔葬)하였다. 광릉(光陵) 본조 세조(世祖)의 능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부장하였다. 고을 동쪽 41리 지점인 주엽산(注葉山) 직동(直洞)의 남쪽이다. 서울과는 60리쯤 되는 거리이다. 회묘(懷墓) 주 남쪽 57리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 10리 되는 거리이다. 유량묘(柳亮墓) 주 동쪽 80리 지점이다. 조운흘묘(趙云仡墓) 아차산에 있다. 남재묘(南在墓)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갑손묘(鄭甲孫墓) 주 동쪽 44리 지점에 있다. 윤형묘(尹炯墓) 주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신숙주묘(申叔舟墓) 송산리(松山里)에 있다. 이직묘(李稷墓) 주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윤자운묘(尹子雲墓) 주 서쪽 내죽리(乃竹里)에 있다. 조말생묘(趙末生墓) 주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영응대군묘(永膺大君墓) 주 동쪽 47리 지점에 있다. 홍응묘(洪應墓) 주 동쪽 63리 지점에 있다. 『신증』 연산군묘(燕山君墓)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박원종묘(朴元宗墓)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성희안묘(成希顔墓)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질묘(宋軼墓)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용개묘(申用漑墓)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유순묘(柳洵墓)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남곤묘(南袞墓)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사천폐현(沙川廢縣)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내이미(內尒米)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사천(沙川)이라 고쳐서 견성군(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대모산성(大母山城)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9백 6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수철성(水鐵城) 주 북쪽 51리 지점에 있다. 둘레는 3백 57척이고, 높이는 14척이며 적성(積城)과 서로 마주 있다. 해촌처(海村處)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산처(松山處)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권맹손(權孟孫) 부사(府使)가 되었다.
【인물】 고려 송저(宋詝) 견주(見州) 사람이며 젊어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에 어사 중승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집 종이 법을 범했으므로 잡아다 다스렸는데, 그 때문에 파직되었으나 곧 우간의대부로 제수받았다.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어서는 무신(武臣)에게 미움을 받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식견있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저가 외방으로 나간 뒤에는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자는 말이 틀림이 없었다.” 하였다. 뒤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조운흘(趙云仡) 풍양현(豐壤縣)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 과거에 올랐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사직하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밑에 살았다. 신우(辛禑) 때에 기용되어 좌간의대부로 제수되었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전보(轉補)되었다가, 또 물러나서 광주(廣州) 고원(古垣) 강마을에 살았다. 판교(板橋)ㆍ사평(沙平) 두 원(院)을 중수하고 원 주인이라 자칭하였다. 해어진 옷과 짚신으로 심부름꾼과 함께 노역(勞役)하니, 길가는 자들이 그가 지난날에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으나, 곧 병으로써 사직하고 광주 별장에 돌아갔다. 또 검교 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배명(拜命)되었다. 검교는 예에 따라 녹을 받는 것이나, 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람됨이 뜻 세우기를 기고(奇古)히 하여, 기이하고 높아서 뇌락하고 거룩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동하며, 시세에 따르기를 즐기지 않았다. 죽을 무렵에 자신의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조운흘은 본래 풍양 사람이다. 고려 태조의 신하였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고, 공민왕 때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 과거하여 서울과 지방 관직을 역임하였다. 다섯 주의 원을 겪었고, 다섯 도 관찰사를 지냈다. 비록 큰 성적(成績)은 없었으나, 또한 비루한 짓도 없었다. 나이 73세가 되어 광주 고원성(古垣城)에서 병들어 죽었고 후사(後嗣)는 없다. 일월(日月)을 주기(珠璣 폐역)으로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을 제물로 삼아서,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가야(摩訶耶)에 장사하였다. 공자(孔子)의 행단(杏壇) 위에나, 석가(釋迦)의 쌍수(雙樹) 밑에인들 고금으로 성현이라고 어찌 홀로 있는 자가 있으리요. 아, 인생사(人生事) 이것으로 마쳤다.” 하였다.
본조 조익정(趙益貞) 과거에 올랐고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고, 한평군(漢平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효자】 본조 최효손(崔孝孫) 부모가 함께 죽자, 죽을 때까지 무덤을 지켰다. 성종(成宗) 21년에 이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윤금(閏今)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갔다. 윤금은 용기를 내어 범을 치고 아버지의 영장을 빼앗았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교원우족맥장추(郊原雨足麥將秋)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서울 산하(山河) 중에서 몇째 주인가. 들녘에 비 흡족하니 보리 익으려 한다. 못을 보면 능히 정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들에 가서 머리 식히며 다시 계획한다. 부임(赴任)하는 누가 백학(白鶴)을 탔나. 다정한 객 청루(靑樓)를 꿈꾼다. 지명은 같아도 풍류는 다른데, 시름 속에 공연히 꾀꼬리만 운다.” 하였다. 운간계견무릉원(雲間鷄犬武陵源) 이인로(李仁老)의 풍양현 시에, “봉우리 밑 인가(人家)는 양삭(陽朔) 경계와 같고, 구름 속에 개ㆍ닭 소리는 무릉도원인가. 사군(使君)이 노란 소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리 이삭 일렁이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 하였다. 산연화악중(山連華岳衆) 권우(權遇)의 시에, “나귀를 타니 야취(野趣)가 많아, 천천히 저녁 빛 속에 걷는다. 역로(驛路)에는 모래와 먼지가 어둡고, 고을 성에는 수목이 울창(鬱蒼)하다. 산은 화악과 연이어서 많고, 물은 한수에 들어가서 길다. 이곳이 뽕나무 뿌리에 알맞아서, 칠경 초당(草堂) 짓기로 기약한다.” 하였다. 운외종성욕석양(雲外鐘聲欲夕陽) 이원(李原)의 사천현(沙川縣) 시에, “시냇가 풀 빛 아침비와 연했고, 구름 밖 종소리는 해질 무렵이다. 길손이 여가 없음을 스스로 웃는다. 내 말만 공연히 병들게 한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영아】 수어중영(守禦中營) 인조조(仁祖朝)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은 본목사(本牧使)가 겸하였다. ○ 속읍(屬邑)으로는 양주(楊州)ㆍ양근(楊根)ㆍ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ㆍ지평(砥平) 등이다.
【성지】 양진성(楊津城) 아차산(峩嵯山)의 동쪽 언덕 광진(廣津)의 위에 있으며 한강수에 접 해 있는데 광주(廣州) 평고성(坪古城)과 더불어 한강을 건너서 마주 있다.
○ 백제 시조(始祖)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천도하여 한산(漢山)에 성을 쌓고 한강 서북을 한성민(漢城民)으로 나누었다. 《여지승람고적(輿地勝覽古蹟)》에 이르기를, “장한성(長漢城)은 한강의 윗쪽에 있는데 신라가 중진(重鎭)을 두었으나 후에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다시 찾았다 한다.”
대모성(大母城) 서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9백 6척이다. 수철성(水鐵城) 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3백 5십 7척이고 적성(積城)과 수철성은 서로 맞은편에 있다. 중흥동고성(重興洞古城) 북한산성 안에 있으며 산영루(山映樓)의 좌우편에 유지(遺址)가 있다. 백제 개루왕(盖婁王) 5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14년에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한양의 중흥산성을 수리하게 한 것은 장차 왜적(倭敵)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성의 둘레는 9천 5백 17척인데 지금은 북한산성 안에 들어간다.
○ 이 성은 백제 때에 시작하였으나 백제의 도성(都城)은 아니다.
아차산고성(峩嵯山古城) 산의 정상(頂上)에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풍양고성(豐壤古城) 고현(古縣)이 서쪽으로 1리이다. 검암산고루(儉巖山古壘) 산의 서쪽 봉우리 두 곳에 있으며, 선조(宣朝) 임진(壬辰)년에 의병장(義兵將) 고언백(高彦伯)이 쌓은 것이다.
【궁실】 풍양행궁(豐壤行宮)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蹕)하셨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진전】 봉선전(奉先殿) 광능(光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세조(世祖)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는데 임진란 때에 강화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다시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영변(寧邊)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또다시 개성(開城)에 봉안하였다가 다시 경도(京都)의 영희전(永禧殿) 때문에 봉전을 폐했다.
【역참】 구곡역(仇谷驛) 동남쪽으로 90리에 있다.
【방면】 고주내(古州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5리이다. 주내(州內) 곧 읍내(邑內)이다. 어등산(於等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별비곡(別非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진대(榛代)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진관(眞官)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미곡(尾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상도(上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하도(下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8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둔야(屯夜) 처음이 15리, 마지막이 30리이다. 귀지(龜旨)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망우리(忘憂里)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해등(海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광석(廣石) 처음이 25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천천(泉川)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0리이다. 현내(縣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5리이다. 산내(山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영근(嶺斤)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회암(檜巖)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접동(接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건천(乾川)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금촌(金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시북곡(柴北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미음(美音)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고양주(古陽州)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노원(蘆原)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백석(白石)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석적(石積)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신혈(神穴)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진답(陳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이담(伊淡)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청송(靑松)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진도】 미음진(美音津) 동남쪽으로 70리에 있으며 광주(廣州)와 통한다. 광진(廣津) 동남쪽으로 75리에 있다. 광주(廣州)에 보라. 대탄진(大灘津) 대탄강에 있으며 연천(漣川)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목장】 전곶장(箭串場) 아차산(峩嵯山)의 서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15리이다. 국초(國初)에 설치했는데 명종(明宗) 10년에 사복제조(司僕提調) 상진건(尙震建)이 청설(請設)하여 석책(石柵)의 둘레가 30리이며 감목관(監牧官)이 있다. 수능(綏陵)을 옮겨 봉안하게 되니 목장을 철폐(撤廢)하였다.
【능침】 정능 남쪽 50리의 사아리(沙阿里)이니 경도(京都) 혜화문(惠化門) 밖이다. 태조(太祖)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데 기신(忌辰)은 8월 13일이다. 처음에는 능이 도성 안의 황화방(皇華坊)에 있었으나 태종 9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묘(墓)로 강등시켰는데 현종 10년에 다시 능으로 복귀하였다. ○ 영(令)ㆍ참봉(參奉)이 각 한 사람이다. 사능(思陵)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의 능인데 기일은 6월 4일 이다.
숙종 24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令)ㆍ참봉 각 한 사람이다.
온릉(溫陵) 장흥면(長興面) 서쪽에 있으며 산수가 동(洞)을 둘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50리이다. 중종비(中宗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愼)씨의 능인데 기일은 12월 7일이다. 영종 16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ㆍ참봉이 각 한 사람이다. 태능(泰陵) 노원면(蘆原面)에 있는데 중종비(中宗妃) 문정왕후(文定王后) 윤(尹)씨의 능으로 기일은 4월 7일이다. ○ 직장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강릉(康陵)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明宗) 대왕의 능이다. 기일은 6월 28일이다. 왕후 심(沈)씨도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정월 2일이다. ○ 별검(別檢)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목릉(穆陵) 건원릉(健元陵) 두 번째 언덕에 있는데 선조대왕 능이며, 기일은 2월 1일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6월 27일이다. 인무왕후 김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는데 기일(忌日)은 6월 28일이다. ○ 별첨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휘릉(徽陵)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비 장열왕후(莊烈王后) 조(趙)씨의 능인데 기일은 8월 26일이다. ○ 별검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숭릉(崇陵) 건원릉 서남쪽 다른 언덕에 있는데 현종대왕의 능이며 기일은 8월 16일이다. 명성(明聖)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12월 5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의릉(懿陵) 천장산(天藏山)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15리이다. 경종(景宗) 대왕 능이며 기일은 8월 25일이다. 선의(宣懿) 왕후 어(魚)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9월 29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혜릉(惠陵) 숭릉의 좌측 언덕에 있으며 경종비(景宗妃)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으로 기일은 2월 7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원릉(元陵) 건원릉의 우측 언덕에 있는데 영종 대왕 능이며 기일은 3월 5일이다. 정순(貞純)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정월 12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수릉(綏陵) 건원릉 좌측 언덕에 있으며 익종(翼宗) 대왕 능인데 처음에는 천장산(天藏山)에 장례했는데 헌종 병오년에 용마봉(龍馬峯)으로 옮겼다가 철종 을묘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기일은 5월 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경릉(景陵)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헌종대왕 능이니 기일은 6월 6일이다. 효현(孝顯) 왕후 김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8월 25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순강원(順康園) 풍양(豐壤)에 있으며 인빈(仁嬪) 김씨의 원이니 기일은 10월 29일이다. ○ 수봉관(守奉官)이 두 사람이다. 소녕원(昭寧園) 고령산(高嶺山)에 있으며 숙빈(淑嬪)의 원이니 기일은 3월 9일이다. ○ 수봉관이 두 사람이다. 수길원(嫂吉園) 소녕원 국내(局內)에 있으며 정빈(靖嬪) 이씨의 원이니 기일은 11월 16일이다. ○ 소녕원 관이 겸해서 보살핀다. 휘경원(徽慶園) 달마동(達馬洞)에 있는데 처음에는 배봉(拜峯)에 장례했었으나 철종 계해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수빈(綏嬪) 박씨의 원이니 기일은 12월 2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덕흥대원군 묘(德興大院君墓) 수락산(水落山)에 있으며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鄭)씨도 합장했으니 곧 선조대왕 황고(皇考)ㆍ황비(皇妃)의 묘이다. 회묘(懷墓) 천장산(天藏山) 남쪽 지맥에 있으며 성종 폐비(成宗廢妃) 윤(尹)씨의 묘이니 연산주의 어머니이다. 연산주가 즉위 때에 회릉(懷陵)으로 올려 불렀으나 중종 원년에 묘로 강등했다. 연산주 묘(燕山主墓) 해등면(海等面)에 있는데 처음에는 강화에 장례했으나 중종 7년에 왕자의 예로써 해등촌(海等村)으로 옮겼다. 신씨 묘(愼氏墓) 회묘(懷墓)의 국내(局內)에 있으니 곧 연산주 폐비의 묘이다. 성묘(成墓)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선조 후궁 공빈(恭嬪) 김씨의 묘이니 광해주의 어머니이다. 광해 계축년에 성릉(成陵)이라 추호했으나 인조 원년에 묘로 강등하였다. 광해주 묘(光海主墓) 군장리에 있으니 인조 21년 제주(濟州)에서 옮겼다.

 

【사원】
도봉서원(道峯書院) 선조 계유년에 건축하여 같은 해에 사액을 내렸다. 영종 을미년에 어필로 액을 달았다. 조광조(趙光祖)ㆍ송시열(宋時烈) 모두 경도(京都) 문묘(文廟)에 보인다. 석실서원(石室書院) 효종 병신년에 건축하여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용(金尙容) 강화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경도 종묘에 보인다. 김수항(金壽恒) 자는 구지(久之)이고 호는 문곡(文谷)이니 상헌(尙憲)의 손자이다. 숙종 기사년에 화를 당했는데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정중(閔鼎重)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니, 숙종 임신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좌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단상(李端相)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요 연안(延安) 사람이다. 벼슬은 부제학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청절사(淸節祠) 숙종 병인년에 건축해서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 정절사(旌節祠) 숙종 임진년 건축하고 정종 갑진년에 사액하였다. 남을진(南乙珍) 의령(宜寧)사람이며 벼슬은 고려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였고, 본조가 개국하자 감악산(紺岳山) 석굴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아니하니, 태조가 그의 거소를 찾아서 사천백(沙川伯)을 봉하였다. 조견(趙狷) 처음 이름은 윤(胤)이고 자는 거경(巨卿)인데, 평양 사람이다. 본조에서 여러 번 부르니 도망가서 이름을 견(狷)으로 바꾸었다. 호는 송산(松山)인데 본조에서 그의 공훈을 기록하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했으나 굴하지 아니하였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고읍】
견주(見州) 동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 매성군(買省郡)인데 마홀(馬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쳐서 두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중성(重城), 파평(坡平)은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정종(定宗) 2년에 다시 현주군(縣州郡)으로 하였는데 창화현(昌化縣)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6년에 양주에서 치소(治所)를 이곳 현주로 옮겼다가 뒤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 고려 문종(文宗) 13년에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아뢰기를 양주 경계안의 견주에 읍을 둔 지 백년이 되었으니 사(使)를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균정(均定)해 줄 것을 다섯 번이나 조정에 요청하였다. ○ 지금 고주내(古州內)이다.
풍양(豐壤)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 골의노(骨衣奴)이다. 노(奴)는 내(內)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여 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풍양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해서 후에 포주(抱州)로 하였다가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풍양에 속하였다.


 

[주D-001]구오(九五) : 《주역》괘에 구(九)와 오(五)는 영위(陽位)이므로 임금에 비하였다.

 

 

경기(京畿)

개성부(開城府) 숭양서원(崧陽書院) 만력 계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서경덕(徐敬德)ㆍ김상헌(金尙憲) 인조조의 정승ㆍ김육(金堉) 효종조의 정승ㆍ조익(趙翼) 효종조의 정승 ○ 곁에 정몽주 화상이 있다.
화곡서원(花谷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화담이 살았던 옛 터 :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 선조조의 정승ㆍ허엽(許曄) 선조조의 명신ㆍ민순(閔純) 추배(追配)하였다.
오관서원(五冠書院) 신유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 자는 성부(誠夫)이며 호는 반남(潘南),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냄. 목은(牧隱)의 문하생(목은의 문인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임. 목은의 매부로서 나이는 네 살 아래임) : 박세채(朴世采) 숙종조의 정승
숭절서원(崇節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 선조(宣祖) 임진조에 들었다.ㆍ김연광(金鍊光) 호는 송암(松巖)이며 송도(松都)에 살았다. 임진년에 회양(淮陽) 부사로서 사절(死節)하여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유극량 선조 임진조에 들었다.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인조 임오년에 세웠으며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인조조의 정승ㆍ이상길(李尙吉)ㆍ이시직(李時稷)ㆍ홍명향(洪命享)ㆍ황선신(黃善身)ㆍ권순장(權順長)ㆍ김겸(金兼) 이상은 동벽(東壁)에 모셨다.ㆍ심현(沈誢)ㆍ윤전(尹烇)ㆍ송시영(宋時榮) 호는 야은(野隱)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이상은 서벽(西壁)에 모셨다. 모두 강도사절(江都死節)에 상세하다.
서하영당(西河影堂) 갑자년에 세웠다. : 이민(李敏)ㆍ조관빈(趙觀彬)
□□영당(□□影堂) 병술년에 세웠다. : 이인엽(李寅燁)
보명영당(保明影堂) 영종 을축년에 세웠으며 갑곶나루[甲串津]에 있다. : 이성량(李成樑) 명 나라 영원백(寧遠伯)ㆍ이여매(李如梅) 명 나라의 도독(都督). ○ 모두 중국인이다.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계유년에 절터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기묘년의 명신ㆍ송시열(宋時烈)
석실서원(石室書院) 숭정(崇禎) 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ㆍ김상용ㆍ김수항(金壽恒) 현종조의 정승ㆍ민정중(閔鼎重) 숙종조의 정승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청절사(淸節祠) 병인년에 세웠으며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에 들었다. 곁에 박세당(朴世堂)의 화상이 있다.
임간서원(臨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남을진(南乙珍) 고려 문하부사(門下府事)이며, 호는 사천(沙川)ㆍ조견(趙狷) 태조조에 들어 있다.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으며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백인걸(白仁傑) 선조조의 명신ㆍ성혼(成渾)
자운서원(紫雲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숭정□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선조조의 명신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
풍계사우(豊溪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무진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구암서원(龜巖書院) 정사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이다.ㆍ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이며 벼슬은 고려 형조 참의ㆍ정성근(鄭誠謹)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정엽(鄭曄)ㆍ오윤겸(吳允謙)ㆍ임숙영(任叔英)
수곡서원(秀谷書院) 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仲)이며, 호는 동은(峒隱)이요,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며 집의를 승직하였다.ㆍ조속(趙涑)ㆍ이후원(李厚源) 효종조의 정승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수원(水原)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불에 탔다. : 송시열(宋時烈) 화상(畫像)이 있다.
남양(南陽) 용백사(龍栢祠) 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한 제갈량(漢諸葛亮)ㆍ송 호안국(宋胡安國)ㆍ윤계(尹棨)
안곡서원(安谷書院) 현종 무신년에 세웠으며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는데, 기유년에 철폐하였다가 경신년에 복구하였다. : 박세훈(朴世勳) 호는 백촌(栢村)이며, 벼슬은 첨정인데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ㆍ박세희(朴世熹) 기묘의 명현ㆍ홍섬(洪暹) 선조조의 정승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인조 계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 향(珦)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ㆍ이색(李穡) 태조조에 들었다.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육(金正堉) 모두 기묘의 명현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효종 경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충렬사(忠烈祠)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광해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조광조ㆍ김식(金湜) 기묘 명현ㆍ김육(金堉)ㆍ남언경(南彦經)ㆍ이제신(李濟臣)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안성(安城) 도기서원(道基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남파서원(南坡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홍우원(洪宇遠)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선조조의 정승ㆍ조경(趙絅)
화산서원(花山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 선조조의 정승
김포(金浦) 우저서원(午渚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교하(交河) 신곡서원(新谷書院)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풍덕(豐德) 귀암서원(龜岩書院) 을묘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이천(利川) 운봉서원(雲峯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서희(徐熙) 호는 복천(福訓)이며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냈다.ㆍ이관의(李寬義) 호는 율정(栗亭)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안국(金安國)
금천(衿川) 충현서원(忠賢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강감찬(姜邯贊) 고려 태사(太師)인데 시호는 인헌공(仁憲公)이다.ㆍ서견(徐甄) 태조조에 들었다.ㆍ이원익(李元翼)
□□영당(□□影堂) 인조가 옛터에 집을 짓게 하고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 : 이원익(李元翼)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 숙종 신유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단종조에 상세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태보(朴泰輔)
호계서원(虎溪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다. : 조종경(趙宗敬) 호는 독암(獨庵)이며 전한(典翰)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종경(宗敬)의 손자이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가 정미년에 훼철(毁撤)하고 을해년에 중건하였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ㆍ이건명(李健命)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신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評穆) 숙종 때의 정승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단상(李端相)ㆍ이희조(李喜朝) 호는 간암(艮庵)이며 추향하였다.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찬성을 증직하였다.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畫像)
가평(加平) 잠곡서원(潛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육(金堉)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ㆍ이의건(李義健)ㆍ김수항(金壽恒)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 무진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민준(閔純)ㆍ남효온(南孝溫)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김정국(金正國)ㆍ기준(奇遵) 기묘 명현ㆍ홍이상(洪履祥)ㆍ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이며 호는 추만(秋巒)이고, 사재(思齋)의 문인이다.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ㆍ이신의(李愼儀) 선조조의 명신ㆍ이유겸(李有謙)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만회(晩晦)이다.
통진(通津) 영당(影堂) 기사년에 사액하였다. : 장만(張晩)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峯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정조 3년 기해(1779,건륭 44)
 2월29일 (갑신)
경기 유생 조항이 조견의 사당에 은액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

경기 유생(京畿儒生) 조항(趙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고려조(高麗朝) 때 온전히 절개를 지킨 신하들 가운데 월등히 뛰어나다고 칭송할 만한 사람은 오직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뿐이라고 합니다. 남을진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 신(臣) 남재(南在)의 숙부입니다. 왕씨(王氏)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현(沙川縣) 감악산(紺嶽山) 아래에 은거하였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누차 정초(旌招)하였으나 끝내 명(命)에 응하지 않자 성조(聖祖)께서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의 둘레에 있는 지역을 봉(封)하여 주고 사천백(沙川伯)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조견은 곧 평양백(平陽伯) 조준(趙浚)의 아우입니다. 고려조의 국명(國命)이 바뀌자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는데 태조(太祖)께서 그의 거처로 거둥하여 조준을 시켜 데리고 나오게 하였으나 조견은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태조께서 청계(淸溪) 한 구비를 봉(封)하여 주었습니다. 숙묘(肅廟) 임진년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사천(沙川) 땅에다 묘우(廟宇)를 짓고 두 신하를 나란히 제향(祭享)하였는데 유독 조정의 은액(恩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표양(表揚)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45 집 95 면
【분류】 *역사-전사(前史) / *윤리(倫理) / *풍속-예속(禮俗)


[주D-001]성조(聖祖) : 태조(太祖).
[주D-002]임진년 : 1712 숙종 38년.

 

 

 

정조3년 기해(1779,건륭 44)

2월29일(갑신)

  경기 유생 조원(趙沅) 등 221인이 상소하여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에게 특별히 표양(表揚)하는 은전을 베풀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고려조에서 절개를 온전히 지킨 신하로는 또 남을진과 조견 두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예(禮)를 숭상하고 절의를 포장(褒獎)한 것은 실로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대우한 것에 못지 않으며, 저 두 신하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는 정충(貞忠)과 고절(孤節)은 은(殷) 나라의 백이ㆍ숙제와 제(齊) 나라의 왕촉(王蠋)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순정(純正)한 신하일 뿐만 아니라 인륜의 기강을 붙잡아 세우고 풍화(風化)를 도움으로써 만세토록 변함없는 인신(人臣)의 도리를 열었으니, 그 공은 다만 한 올의 실이 구정(九鼎)을 매달고 있었던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을 포장할 방도에 대해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임진년(1712, 숙종38)에 여러 선비들이 모의하여 묘우(廟宇)를 세우고 두 신하를 아울러 배향하였는데, 그 제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어사(御史) 이정응(李挺膺)이 널리 사론(士論)을 채집하여 사실대로 아뢰고 이어서 시호(諡號)의 글과 사액(賜額)의 은전을 청했습니다만, 일을 맡은 신하가 즉시 봉행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면서 관례를 쫓았으므로 당시에 드러내어 밝힐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신들이 탄식하고 원통해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포양하는 은혜를 베푸시고 빨리 화액(華額)을 반하(頒下)하시어 향읍(鄕邑)의 선비들로 하여금 존현(尊賢)하는 성의를 이루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헤아려 생각해야 할 점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정조 8년 갑진(1784,건륭 49)
 윤 3월1일 (병진)
경기 유생 정동우가 고려 말 충신 남을진·조견의 사우에 화액을 원하니 시행케 하다

경기(京畿)의 유생(儒生) 정동우(鄭東羽) 등이 상소하기를,
“고려 말엽의 충절신(忠節臣)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의 사원(祠院)이 아직도 선액(宣額)하는 명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남을진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남재(南在)의 숙부(叔父)로,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익혔으며, 만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벼슬이 문하 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왕씨(王氏)의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데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양주(楊州)의 고사천현(故沙川縣)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하였으며, 고려 왕조의 운명이 끝났음을 듣고는 머리를 풀고 통곡(痛哭)하다가 감악산(紺岳山)의 석굴(石窟)로 들어 갔었습니다. 조선(朝鮮) 태조가 그를 불러들였지만 남을진은 거절하기를 더욱 굳게 하였으므로, 태조가 대단한 칭찬을 더하고 그가 살고 있는 주위를 봉(封)하여 주고는 사천 백(沙川伯)이라고 불렀습니다.
조견은 바로 개국 원훈인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정몽주(鄭夢周)와는 친하게 지냈으며 명예와 절개를 스스로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준이 〈태조를〉 익대(翊戴)할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국가의 교목 세가(喬木世家)로 국가가 보존되면 당연히 보존되고 국가가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해야 합니다. 달가(達可)는 국가의 주석(柱石)같은 존재이니 만약 구하는 것이 달가와 다르면, 이는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며 국가가 멸망하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조준이 그의 뜻을 알고 영남(嶺南)으로 떠나게 하였는데, 미쳐 돌아오지 못해서 고려 왕조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으므로,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옮겨서 청계산(淸溪山)에 머물었는데,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임명하자 조견이 말하기를, ‘송산(松山)에서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성세(聖世)의 백성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날 태조가 조준과 10수 기(騎)를 따르도록 하여 청계산에 거둥하자, 조견이 굳게 누워 이불로 낯을 감추거늘, 태조가 이르기를, ‘손님과 주인 자격으로 서로 볼 수 없겠는가?’라고 하자. 그제야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지 않았는데, 청계산 일면(一面)을 봉(封)해 주고 석실(石室)을 쌓아 정절(貞節)을 표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조견은 지금의 임금이 〈석실을〉 쌓도록 명한 것이니, 구국(舊國)의 신하가 거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즉시 양주(楊州)로 옮겨 머물면서 스스로 호(號)를 송산(松山)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두 신하가 충절을 지켜 신하가 되지 않은 뜻은 은(殷)나라의 백이(伯夷)·숙제(叔齊)나 제(齊)나라의 왕촉(王躅)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많은 선비들이 재물을 모아 사천(沙川)의 옛 터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빨리 화액(華額)을 내려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원전】 45 집 437 면
【분류】 *역사(歷史) / *사상(思想) / *인물(人物)


[주D-001]교목 세가(喬木世家) :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맹자》 양혜왕(梁惠王) 하(下)에, “이른바 오랜 나라라는 것은 교목을 말함이 아니라, 세신을 말함이다.”라고 했음.
[주D-002]달가(達可) : 정몽주(鄭夢周)의 자(字).

 

정조3년 기해(1779,건륭 44)
7월22일(갑진)
  경기 유생 송문석(宋文錫) 등 207인이 상소하여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의 사원(祠院)에 사액(賜額)할 것을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전에 고려의 충절신(忠節臣)인 남을진과 조견의 사원에 사액하는 일로 이구동성으로 호소하여 비지(批旨)를 받았는데, 마땅히 헤아려 처리하겠다고 하교하시고 또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신 등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엄숙히 비답을 읽고는 감격스러우면서도 낙심할 뿐이었습니다. 아, 신 등의 소청이 비록 백세의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일은 항상 알면서도 행하지 않아 마침내 옛 습관을 따라 우물쭈물 하다가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마는 것에 대해 걱정하게 되는데, 도처에서 이와 같습니다. 신 등이 어찌 감히 다시 앞사람의 태만함을 따라만 하고 거듭 청하여 조정에서 살펴주시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아, 저 두 신하의 굳은 절개와 곧은 충성은 죽기를 맹세하고 변치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에 따라 처신한 것이 진실로 길재(吉再), 서견(徐甄), 원천석(元天錫) 세 신하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세 사람의 평론과 조정의 융숭한 보답에 차이가 없어야 하거늘 길재, 서견, 원천석에게는 이미 은혜로운 사액을 내리셨으면서 오직 이 남을진, 조견 두 신하만은 한결같은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국체(國體)와 사의(事義)에 있어 크게 손상됨이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밝게 명하여 빨리 화액(華額)을 반포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헤아려 처리하겠다고 하교하였으니, 그대들의 도리로 볼 때 진실로 공손히 처분을 기다려야 된다.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번거롭고 시끄럽게 하는가?”
하였다.
정조8년 갑진(1784,건륭 49)
윤3월1일(병진)
  생원(生員) 정동우(鄭東羽) 등 190인이 상소하여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에게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한 데 대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두 신하가 세운 절의(節義)의 전말에 대해 진달하기를 청합니다. 남을진은 바로 개국 원훈(開國元勳) 남재(南在)의 숙부(叔父)로,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익혔으며, 벼슬이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에 이르렀습니다. 왕씨(王氏)의 정치가 어지럽게 되자 가재(家財)를 모두 털어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종족(宗族)을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 힘이 종사(宗社)를 부지하지 못하고 살아남아 차마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될 수 없으니, 오늘 이별을 고할까 한다.’ 하고서, 다음 날 벼슬을 버리고 양주(楊州)의 고사천현(故沙川縣)으로 돌아가 은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왕조가 망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고서 감악산(紺嶽山) 석굴(石窟)로 들어가서 눈으로 하늘의 햇빛을 보지 않았습니다. 태조(太祖)께서 어찰(御札)로 조정에 나오도록 권면하였는데, 남을진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한 몸으로 두 성(姓)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내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이 굴 밖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태조가 대단히 칭찬하시고 그가 살고 있는 주위를 봉(封)하여 주고는 ‘사천백(沙川伯)’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굴 안에서 죽었는데, 사인(土人)들이 그 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고 이름 지었고, 지나는 자는 모두 그곳을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조견은 바로 개국 원훈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초명(初名)은 ‘윤(胤)’인데 정몽주(鄭夢周)와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평소 명예와 절개로써 스스로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준이 태조를 도와 추대할 뜻이 있음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국가의 교목세가(喬木世家)로 국가가 보존되면 당연히 보존되고 국가가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그 뜻을 알고 내보내어 재차 영남(嶺南)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미처 돌아오기 전에 고려 왕조가 망하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이름을 ‘견(狷)’으로 고치고 자(字)를 ‘종견(從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국가가 멸망하였는데 죽지 않는 것은 개와 유사함이 있고 또 개에게 옛 주인을 그리워하는 의리가 있음을 취한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가서 매양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경(松京)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는데, 그럴 때면 문득 검은 구름이 송악(松嶽)에서 일어나 청계산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충성에 감응한 것이라고 말하고 그 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고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제수하고 조서(詔書)로 그를 부르자 조견이 대답하기를, ‘송산(松山)에서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성인(聖人)의 백성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태조께서 탄식하면서 이르시기를, ‘조견은 뜻이 금석(金石)과 같아 빼앗을 수가 없다.’ 하시고, 청계산 일면(一面)을 봉해 주고 석실(石室)을 쌓아 정절(貞節)을 표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견은 ‘지금의 임금이 쌓도록 명한 것이다.’고 하고서 즉시 양주로 옮겨 머물면서 스스로 호(號)를 ‘송산(松山)’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소나무는 시들지 않고 산은 옮겨지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고 또 송악을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지금의 송산리(松山里)가 그곳입니다.
아, 저 두 신하는 충절을 지켜 신하가 되지 않는 뜻을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습니다. 그 일이 혁혁하여 마치 어제 일과 같으며,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백대(百代)를 흥기시키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또 선대왕조(先大王朝) 때 어사(御史) 이정응(李廷膺)이 사실에 의거해 진계(陳啓)하여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사액해 주시는 은전을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일을 해조에 내려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마침 조정에 일이 있었던 관계로 거행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두 신하의 우뚝한 절의를 굽어살피시어 속히 편액을 내려 주도록 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사적이 탁월하다고 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주D-001]우리 …… 교목세가(喬木世家)로 : 이 부분은 앞뒤의 문맥이 통하지 않아 《승정원일기》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吾家 國之喬木

 

 

 騎牛先生文集卷之二
 附錄
杜門洞七十二賢錄麗未。忠臣立節死義者多。其餘則杜門屛迹於當世。或不仕自靖者。通稱杜門洞七十二人。同其義理。而不但屛居於松京之謂也。 a_007_368b


007_368b鄭夢周。字達可。號圃隱。延日人。趙英珪椎殺于架資橋。靑竹卽生橋上。因號善竹橋。金澍。號籠巖。善山人。恭讓朝。以禮判奉使天朝。還到鴨綠江。聞運訖。寄夫人書曰。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仍送朝衣。夫人下世後以此合葬。且以發書曰爲我忘日。遂入中原。居淅江。李存吾。號石灘。慶州人。恭愍九年登第。授監察糾正。見時事亂。憂憤成疾卒。贈大司成。立祠。007_368c鄭樞。淸州人。見天命有歸。憤惋不平。疽發背卒。諡文簡。崔瀁。號昭六。會州人。受學於其舅鄭圃隱之門。文科大提學。我太祖龍興之日。握手曰。吾友崔瀁來耶。賜田祿不受而終。享西山祠。吉再。字再父。號冶隱。善山人。種竹御賜田。手把黃花祭伯夷。以注書知國將亡。棄官歸隱金烏山。南乙珍。宜寧人。沙川伯。林先味。007_368d元天錫。號耘谷。曹義生。孟裕。溫陽人。文尙書。與其子同隱。都膺。初名兪。字子芸。官佐平贊成事。見天命有歸。社門屛迹。太宗賜號靑松堂。賜詩曰。愛看靑松節。貞榦手以摩。寒岡千仞上。霜雪不曾磨。李思之。號麗隱亭。京山 今碧珍 人。官至郞將。父希慶爲麗朝元帥。征阿只㧞都。還爲零賊所害。人皆曰。死於國事。忠也。公在革命之初。杜門屛迹。而謂其子曰。吾志已定。爾則學優登仕於本朝007_369a宜也。陶東明。號雙檜。以文學孝友著于世。爲南臺掌令。見天命有歸。入杜門洞。屢徵不起。詳載名義錄。金自粹。字純仲。號桑村。慶州人。官大司成。以忠淸觀察使。見時事亂。退居安東。母喪。廬墓三年。事聞旌閭。張安世。玉山人。官德寧府尹。不仕。本朝。隱居遂志詩曰。元氣雙分上古前。興亡物色尙森然。還鄕事遠丁千歲。治水功餘禹八年。黃菊炯斕兼白酒。蒼髥偃蹇挹高巓。宦遊只欲扶王化。何用007_369b區區富貴全。程廣。好巾川。麗朝官侍事。知國禍。棄官歸。鞠襦。太祖朝。火其廬。杜門不出。以遂立節不服之義。子孫因屬潭陽吏。韓哲沖號夢溪。官典書。麗亡。不二臣節。隱於杜門洞。終歸尙州白原山。羅天瑞。字定伯。見運訖。與其子闔門祗候直鄕及吉冶隱同出處。成漙。官刑曹摠郞。麗亡遯去。太祖以臺諫召不就。贈兵判。007_369c李明成。公州人。官監察御史知製誥。國將亂。棄官歸伊川。李穡。字穎叔。號牧隱。韓山人。詩曰。長松之下石爲臺。西望蒼然大野開。指點首陽孤竹處。有誰能辨所由來。鄭地。錦城人。海道元帥。力贊太祖威化回軍。不參開國勳。歸老故鄕。諡景烈。立祠光州。並藏甲衣。河自宗。號木翁。晉州人。官軍部尙書。麗末。僞疾不起。終老鄕里。領相敬齋演之父。007_369d李養中號石灘。廣州人。官刑判。國初。遯居廣州。被竄不屈。金震陽。字子靜。號草屋子。雞林人。官左常侍。與李擴等劾流趙浚,鄭道傳等。杖流遠地。尋卒。安省。官直提學。太祖拜平壤伯不受。命錄淸白。一目差少。太祖命名。李思敬。號送月堂。全義人。趙忠肅。字敬夫。號德谷。咸安人。詩曰。豈無三月無君歎。只愧干名甚乞墦。許徵。官縣令。見國將亡。以巡檢遯居吉州。007_370a崔文漢。忠肅王駙馬。知國將亡。遯居江陵。徐甄。利川人。申德隣。號醇隱。高靈人。官禮儀判雪。麗亡。退居光州。孟希德。官典敎令。國亡。退居東浦。金若恆。若時弟。官執義。麗亡。入皇朝不還。贈贊成。光山君。裴尙志。官判司僕寺事。入 皇朝。與中書郞抗禮不屈。麗亡。退居安東金溪村。種松柏以見志。號柏堂。興海人。007_370b李繹之。號南谷。永川人。官寶文提學。見國將亡。棄官歸居龍仁南谷。李行。字周道。號騎牛子。諡文節。驪州人。官吏曹判書大提學。麗亡。屢徵不起。謫平海。邊肅。金光致。洛城人。與兄上洛伯得培。平紅巾及倭冠。麗亡。退居尙州不仕。李種學。號麟齋。韓山人。牧隱子。李陽昭。進士。與太祖同榜。退居漣州靑華洞。太祖幸其家。詩酒相樂。除谷山郡守。騎牛到007_370c官。三日棄歸。終老銀杏亭。上賜以葬山。閔楡。府院君。見國運訖。退居通津鳳翔里不仕文益漸。號大庇齋。南平人。江城君。嘗使上國。藏綿核筆管而來。見國運訖。退居鄕里。卒立詞。林貴椽。羅州人。麗亡不仕。曹希直。官正言。與李存吾疏斥奸旽。謫珍島。太祖龍興。有勸仕。自比夷齊之節。終不出仕。作鴨鷗亭嘉興水邊利終。金士廉。金承吉。007_370d趙瑜。金濟。號白巖。善山人。平海郡守。籠巖兄。蹈海詩。呼船東問魯連津。五百年今一箇臣。可使孤魂能不死。願隨紅日照中垠。趙鐵山。范世東。具鴻。尹忠輔。成思齊。昌寧人。官寶文直提學。麗亡。入杜門洞。名子曰杜。歸昌寧。007_371a金沖漢。柳玽。號碧隱。朴門壽。閔安富。蔡王澤。領護軍。麗亡。浮海而南。隱居臨坡。宋皎。官典書。屛居礪山。崔七夕。全州人。七月七曰。討馬島有大勳。賜名。車原頫。號雲巖。延安人。官諫議大夫。太祖屢徵不起。不就勳業。金子進。光山人。官司評。麗亡。退居羅州。以麗字名007_371b其田山亭井。趙胤。金若時。若恆兄。鄭溫。李涓。宋寅。郭樞。蔡貴河。號多義堂。隱居多義村。


騎牛先生文集卷之二
 附錄
不朝峴言志錄 a_007_371d


洪武二十五年壬申秋七月哉生魄乙未。卽麗氏運訖。本祖受命之際也。忠臣烈士之徒。罔有臣僕之志。自靖其義之所當盡。於是焉齊登松都市東南峴。掛朝天之冠。戴蔽陽之笠。南登不朝峴。朴007_372a門壽曰。天命有歸。國事已非。吾屬盍各言其志。成思齊曰。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曹義生曰。甘心杜門。死而後已。林先味,高天祥曰。惟當從者義。田貴生曰。深入於山。耕者誰知。李崇仁曰。陶河之世。嗟己遠矣。李孟藝曰。願灑淸風於雷首。柳玽曰。磻溪直鉤。釣周何意。田祖生曰。欲爲耕者。何山可往。具鴻曰。伯夷何人我何人。禹玄寶曰。去國季札。終身可效。趙永肅曰。伯夷之餓亦我意也。蔡貴河曰。東瞻開城。非復我土。西望首陽。忍忘一心。李行曰。西望首陽。忍食周粟。徐仲輔曰願不北面於新007_372b朝。愧二心之人。邊肅曰。樓宋誰家子。其操可慕。朴諶曰。願尋高麗山。申晏曰。新王非我王。忍作二王臣。朴寧曰。橫島安在。欲往茫然。高天祐曰。願歸田里。趙安鄕曰。時已非矣。不去何求。言訖。咸望松京曰。夷齊何人。曾餓西山。流涕而皆曰。可去矣。時鄭夢周殉國於善竹橋。李穡已見放韓山。吉再先去金烏山。朴門壽歸排祿洞。田貴生逃入絶島。成思齊退居於午正門外山谷間。李祐,李孟藝隱東鼇川。趙捐,具鴻,元寶隱松山。曹義生,林先味,高天祥,徐仲輔皆入杜門洞。李守生,鄭煕良,金震陽,李007_372c種學並流遠地。崔瀣隱猊山。柳玽隱五鳳山。元天錫隱雉岳山。金澍,禹玄寶入中國。崔瀁入中臺山。趙承肅歸德谷。全五倫入瑞雲山。趙珙遯栗原。金自粹隱秋嶺。李思敬隱肅薪里。李遂生隱栗里。金若時隱金光里。南乙珍隱古沙川。蔡貴河隱多義峴。朴諶隱立巖。趙安鄕隱泉山。邊肅隱鴨山。朴寧隱法峴。徐隱積巖。李行隱醴泉洞。申晏歸黃衣山。李淪歸桃灘。李養中遯廣陵。徐甄遯襟陽。林卓歸錦城。金英庇隱古石山。宋桂歸洪陽。高天祐,邊龜壽,安從約,金俊,尹珪,朴忱,許錦,裴尙志,李惟仁,007_372d閔普,文成,車,嚴,張,金沖漢,李,金煒,閔安富,田祖生之徒。歸排祿洞。而皆抗不二之節。取其義而成其仁焉。當時士大夫皆高尙其道。希之者惟恐不及。更相標榜。爲之稱號。


貞齋先生逸稿卷之三
 摭遺
杜門洞言志錄 a_008_530d


008_531a有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秋七月哉生魄丙申。卽麗朝運訖。本朝受命之際也。忠臣烈士罔有臣僕之志。自靖其義之所當盡。於是焉齊登松都市東南峴。戴蔽陽之笠。掛朝天之冠。因登不朝峴。各言其志。李崇仁曰。陶河之世。嗟已遠矣。柳珣曰。磻溪直鉤。釣周何意。禹玄寶曰。去國季札。終身可效。田祖生曰。欲爲耕者。何山可往。李孟芸曰。願灑淸風於雷首。曺義生曰。甘心杜門洞。死而後已。田貴生曰。深入於山。耕者誰知。林先味,高天祥咸曰。惟當從其義。趙琚曰。吾當觀變。死而後已。蔡貴河曰。東瞻松京。非復我008_531b土。西望首陽。忍忘一心。徐輔曰。願不北面於朝。愧二心之人。朴諶曰。願尋高麗山。申晏曰。新王非我王。忍作二王臣。邊肅曰。樓宋誰家子。其操可慕也。朴寧曰。橫島安在。欲往茫然。金沖漢曰。願從伯夷。採薇西山。高天祐曰。願歸田里。徐仲輔曰。國破君亡。余將焉往。趙安卿曰。時已非矣。不去何求。閔安富曰。混跡農夫。是吾志也。金明理曰。國破君亡。吾將何去。朴門壽曰。天命有歸。國事已非。成思齋曰。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言訖。咸望松岳曰。夷齊彼何人。曾守西山餓。流涕而已。皆曰可去矣。時鄭夢周已殉國於善竹橋。李008_531c穡見放韓山。金九容卒于江門。吉再先去金烏山。田貴生逃入絶島。朴門壽歸排祿洞。趙琚先隱雲藏山。李孟芸隱東鼇川。趙承肅歸隱德谷山。曺義生,林先味,高天祥皆入杜門洞。趙狷隱松山。李守仁,鄭煕,金震陽,李種學幷流遠地。柳珣隱五鳳山。金澍,禹玄寶入中國。崔瀣退猊山。元天錫隱松嶽。徐仲輔入杜門洞。全五倫歸瑞雲。崔瀁入中臺山。朴宜中退碧骨。趙洪遯栗原山。金自粹隱秋嶺。李思敬入肅薪里。李遂生隱栗里。金若時入金光里。蔡貴河退多義峴。趙安鄕隱泉山。南乙珍入古沙川。朴諶隱立巖。邊肅入居008_531d鴨山。朴寧逃法峴。徐輔遯積巖。李行退醴泉洞。申晏歸黃衣山。李瀹遯桃灘。李瀁中隱廣陵。徐甄隱矜陽。林卓歸錦城。金英退古石山。邊貴壽,安從約,高天祐,金埈,尹,朴忱,許錦,裴尙志,具鴻,李唯仁,成思齊,閔普文,車原頫,嚴泰憲,金沖漢,李 失名,金瑺,閔安富,申德隣,申包翅,田祖生,張安世,宋桂之徒。遠遯于頭流山下排祿洞。而皆抗不二之節。取其義成其仁焉。當時士大夫皆高尙其道。希之者惟恐不及。更將標榜。爲之稱號。 儒臣李大建撰

 

貞齋先生逸稿卷之三
 摭遺
海東忠義錄 a_008_531d


008_532a麗朝忠臣不死自靖之人。鄭夢周,吉再,李穡,金澍,趙胤,韓喆仲,羅天瑞,金若時,鄭溫,金自粹,徐甄,崔文漢,許徵,趙琚,李思敬,成溥,趙承肅,李明誠,閔安富,金明理,鄭地,李瀁中,金震陽,安省,金若恒,河自宗,裵尙志,李釋之,崔瀁,▓信忠,車原頫,金士廉,李行,邊肅,孟希道,申德隣,申包翅,金沖漢,金光致,李涓,李種學,李陽昭,朴宜中,閔愉,元天錫,文益漸,林先味,曹義生,孟姓人,朴門壽,林貴緣,蔡貴河,成汝完,崔淸,郭樞,趙鐵山,尹忠輔,柳珣,蔡王澤,宋皎,南乙珍,趙瑜,李集,姜撲。楊根有洗耳亭歸農浦。廣州有望主峴。若盧侍中,白尙008_532b書,趙舍人,漁隱,歸隱之流。未得傳名。良可悲夫。 府使金椿撰

貞齋先生逸稿卷之三
 摭遺
華海師傳 a_008_533c


林休庵先味,曺遠村義生,孟龍湖好性,李二憂堂瓊,朴貞齋宜中俱以丁丑生。又與圃隱同甲。洪武二十五年壬申。公五十六歲。四月四日。鄭圃隱殉節。有輓哭奠。諸賢皆來二憂堂。各言其志。世所傳言志錄足也。陶隱歸於陶。牧隱歸於牧。貞齋歸於農。樹隱金沖漢歸於樹。松溪朴太始歸於故莊。耘谷歸於雉岳。二008_533d憂歸於墓庭下。脫冠振衣於松柏枝。共會不朝峴而作別。二憂,遠村,龍湖,休庵同入杜門洞。乃洪武二十五年十月十六日也。麗末義士二三十許人。每歲春秋。會元處士家雉岳山頂。因巖爲壇。自變祀至革祀。祭列聖。至驪興,江華,杆城後王。
列聖。檀君以爲創啓東方始基之君。箕聖以爲東方變夷行夏之君。當時國史皆淪亡喪泯。消於仲夫之變。太祖開國之君。以爲開國之功。至恭愍驪興江華。變以垂亡。故曰變祀。杆城王革命後革國。008_534a故改曰革祀。以驪興江華杆城王者。取朱子書綱目帝在房州之義。亦曰後王者。取後漢劉禪謂後主之意。恭讓則新國爲諡。故義不用之。
有道之士友殺身死義。扶綱振紀成仁者。皆配祀之。
有道之士。祀弘儒,文憲。又安晦軒,易東,不諼,簡齋。配箕子之祀。前壇圃隱亦當配而主於死義之祀。故拘於疊設未配。弘儒之配申守忠。文憲之配申氏三世及先生二子二孫。又崔敏庸,韓子純,金行瓊。文安配,晦軒配白文節頤正父子及洪奎,申衍,申淑,朱悅,柳璥,薜公儉,洪子藩,辛藏,權溥,李伯謙,金008_534b利用,宋英,安于器等。禹易東配鄭僐,李晟,閔宗儒,朴全之,金開物,金怡,金台鉉,金承用,韓宗愈,李兆年,崔有渰,尹莘傑,朴孝修,金倫,崔瀣,韓渥,朴遠,尹宣佐,金仁沇,羅益禧,許悰,崔文度等。素從學文成。文成沒後以文成命宗師易東者也。如李齊賢,朴忠佐,李穀初師白頤正。後宗師易東者也。皆從易東配食。年紀爲後生。晚學於易東者。與申文貞雖同師易東。易東沒後以易東之命。不較年紀皆歸師文貞。故配食於文貞之位左前。次序於先生仲季之位右前列。次配以元明之學者。文貞之後生008_534c年紀者。雖宗師文貞。亦師簡齋。故皆以爲配食簡齋位前左右。皆以當日碩德聞人。皆配箕子前壇。而自恭愍至杆城時。殺身死義人及罔僕者。別爲壇。祀於諸先生位前正中。左以申省齋,申矢直伯淸主東。右以鄭圃隱夢周,成杜門子思齊主西。左以禹養浩玄寶追同東主。以李牧隱穡追同西主。配享則皆從主位左右。太祖之配惟太師申壯節。以勳功名聞人。無一入享參配。此不尙功名利之義。而憎出時輩人夙慕者耳。恭愍驪興江華皆無配。而但哀其變。哭其喪。杆城則以世子奭配。而008_534d哭其革。蓋道之傳心及行之有德。殺身成仁。罔僕扶綱。皆斯道之淵脈。故享於箕聖及太祖之位前。而每祭時紙主設位。讀迎送神辭。祭畢祝焚。辭。黃衣翁▓晏與堂姪浩製。祝。耘谷自製。質牧隱。牧養追主後。卓愼改正。設位分次。雖諸人公議。實耘谷立議主張。入享人無姓無之。惟申,禹氏最多。
從參壇祀貞齋朴宜中,遠村曺義生,樹隱金沖漢,龍湖孟好性,休庵林先味,桑村金自粹,松溪朴太始,醇隱申德隣,林卓,閔安富,申包翅,田貴生,李孟芸,高天祥,田祖生,李崇仁,蔡貴河,柳洵,邊肅,高天祐,徐輔,朴008_535a寧,徐仲輔,李㭲,趙狷,趙安鄕,朴湛,李守仁,全五倫,鄭煕,趙洪,李遂生,季思敬,南乙珍,李行,金大庇,李淪,安從約,邊貴壽,朴忱,金浚,尹,具鴻,閔普,李唯仁,裴尙志,車原頫,朴門壽,吉仁迪,宋,李,嚴,蔣,潘,洪,韓 七人紙缺失名等不僕新國諸公。源源往來。從參與立壇祀諸人同節。樹綱常於已傾之天地。明彝倫於已晦之日月。先是先生 申不諼齋賢 斥國師普愚。故普愚常欲除去先生之徒。至是壬寅自七月。士禍火熾羅張。乙巳。遍照爲國師。火網愈熾。推素書笥。燒盡虐爐。八月。籬圍先生遁第。十月加棘。一世間父子兄弟誡語008_535b先生者。轉輾愈錮。而三四在朝者。惟待上天之曙晴。但逗遛而含忍默痛。至丙午。鄭樞爲左司議。李存吾爲正言。丁未。李仁任爲侍中。大辟章徒。以李穡爲大司成。鄭夢周爲博士。申德隣,金九容,朴尙衷,朴宜中,崔元凱,李崇仁兼敎官。尹澤,安魯生等爲敎導官。直學士李穡請行三年喪。頒綸定禮。鄭夢周請行倣朱子家禮。令士庶立廟。內建五部學堂。外設鄕校。以爲興化立敎之本。李穡曰。日者先生獨行三祀。喪禮之說及答鄭夢周之訓。詳聞諸金九容,朴宜中,安魯生諸子矣。

 

 

硏經齋全集卷之五十四
 草榭談獻一
南乙珍,趙瑜,李陽昭。 a_275_125b


南乙珍宜寧人。事高麗爲參知門下府事。王氏政亂。棄歸楊州之沙川縣。躳耕以自給。其從子曰在。佐275_125c太祖開國爲元勳。太祖問在曰卿叔父安在。在對曰在沙川。上下令楊州徵之。乙珍辭不起。被髮逃之紺岳山中。與世相絶。太祖知其不可奪。環其所居而封之。號曰沙川伯。後人刻其像於石室。且俎豆以祀。
趙瑜淳昌人。有至行。幼喪母。能致哀謹禮。居後母憂亦如之。父沒躬負土以葬之。高麗之末。士大夫不行三年之喪。獨瑜與冶隱先生吉再,圃隱先生鄭夢周行之。始以進士及第。事高麗至副正。高麗亡。國朝屢以官徵之。至檢校漢城尹皆不就。世宗嘉之。表275_125d其閭曰孝子前副正趙瑜之門。其書麗朝官者。示不臣之。以成瑜之志也。後徙順天之謙川。湖南人俎豆之。瑜子崇文節度使。崇文與成三問等俱死。
李陽昭字汝建。順天人。高麗代言師古子。以太宗誕降之歲丁未生。以洪武壬戌中司馬。亦太宗榜也。由是益欵好相得。及麗朝革。遯于漣川之陶唐谷中。太宗三年求得之。爲置酒其家。枉駕自迎。陽昭叙微時事甚悉。上卽爲詩曰秋雨半晴人半醉。命陽昭賡之。卽對曰暮雲初捲月初生。月初生者。上微時幸姬名也。上下床握陽昭手曰子眞余故275_126a人也。將返欲與陽昭俱。固辭不就。卽除谷山郡守。初陽昭從上讀書谷山山中。甞戱言我欲爲此郡。得復見舊遊時山川。上之除以此。陽昭又不起。上嘉之。名其山曰淸華。取伯夷之淸及希夷之太華也。且爲陽昭作宅山下。額曰李華亭。昭陽不居之。移搆茅屋於林中。扁曰安分堂。手植文杏於庭。鼓琴自娛。自號琴隱。臨沒自書㫌曰高麗進士李陽昭。恐其沒後書本朝官也。上歎曰生而不可屈。死當成其志。贈謚淸華公。賜葬地以葬。
勝國守節之士。多在本朝勳舊家。勳舊早知天命275_126b所歸。得歸依眞主。以靖禍亂。助太平無彊之福。獨守節者不樂是也。寧困苦窮約。與木石而塊處。不願立聖人之朝。與功臣爲伍。盖洛邑頑民之志也。不有是也。亦何以光革除之際哉。

貞齋先生逸稿卷之三
 摭遺
華海師傳 a_008_533c


林休庵先味,曺遠村義生,孟龍湖好性,李二憂堂瓊,朴貞齋宜中俱以丁丑生。又與圃隱同甲。洪武二十五年壬申。公五十六歲。四月四日。鄭圃隱殉節。有輓哭奠。諸賢皆來二憂堂。各言其志。世所傳言志錄足也。陶隱歸於陶。牧隱歸於牧。貞齋歸於農。樹隱金沖漢歸於樹。松溪朴太始歸於故莊。耘谷歸於雉岳。二008_533d憂歸於墓庭下。脫冠振衣於松柏枝。共會不朝峴而作別。二憂,遠村,龍湖,休庵同入杜門洞。乃洪武二十五年十月十六日也。麗末義士二三十許人。每歲春秋。會元處士家雉岳山頂。因巖爲壇。自變祀至革祀。祭列聖。至驪興,江華,杆城後王。
列聖。檀君以爲創啓東方始基之君。箕聖以爲東方變夷行夏之君。當時國史皆淪亡喪泯。消於仲夫之變。太祖開國之君。以爲開國之功。至恭愍驪興江華。變以垂亡。故曰變祀。杆城王革命後革國。008_534a故改曰革祀。以驪興江華杆城王者。取朱子書綱目帝在房州之義。亦曰後王者。取後漢劉禪謂後主之意。恭讓則新國爲諡。故義不用之。
有道之士友殺身死義。扶綱振紀成仁者。皆配祀之。
有道之士。祀弘儒,文憲。又安晦軒,易東,不諼,簡齋。配箕子之祀。前壇圃隱亦當配而主於死義之祀。故拘於疊設未配。弘儒之配申守忠。文憲之配申氏三世及先生二子二孫。又崔敏庸,韓子純,金行瓊。文安配,晦軒配白文節頤正父子及洪奎,申衍,申淑,朱悅,柳璥,薜公儉,洪子藩,辛藏,權溥,李伯謙,金008_534b利用,宋英,安于器等。禹易東配鄭僐,李晟,閔宗儒,朴全之,金開物,金怡,金台鉉,金承用,韓宗愈,李兆年,崔有渰,尹莘傑,朴孝修,金倫,崔瀣,韓渥,朴遠,尹宣佐,金仁沇,羅益禧,許悰,崔文度等。素從學文成。文成沒後以文成命宗師易東者也。如李齊賢,朴忠佐,李穀初師白頤正。後宗師易東者也。皆從易東配食。年紀爲後生。晚學於易東者。與申文貞雖同師易東。易東沒後以易東之命。不較年紀皆歸師文貞。故配食於文貞之位左前。次序於先生仲季之位右前列。次配以元明之學者。文貞之後生008_534c年紀者。雖宗師文貞。亦師簡齋。故皆以爲配食簡齋位前左右。皆以當日碩德聞人。皆配箕子前壇。而自恭愍至杆城時。殺身死義人及罔僕者。別爲壇。祀於諸先生位前正中。左以申省齋,申矢直伯淸主東。右以鄭圃隱夢周,成杜門子思齊主西。左以禹養浩玄寶追同東主。以李牧隱穡追同西主。配享則皆從主位左右。太祖之配惟太師申壯節。以勳功名聞人。無一入享參配。此不尙功名利之義。而憎出時輩人夙慕者耳。恭愍驪興江華皆無配。而但哀其變。哭其喪。杆城則以世子奭配。而008_534d哭其革。蓋道之傳心及行之有德。殺身成仁。罔僕扶綱。皆斯道之淵脈。故享於箕聖及太祖之位前。而每祭時紙主設位。讀迎送神辭。祭畢祝焚。辭。黃衣翁▓晏與堂姪浩製。祝。耘谷自製。質牧隱。牧養追主後。卓愼改正。設位分次。雖諸人公議。實耘谷立議主張。入享人無姓無之。惟申,禹氏最多。
從參壇祀貞齋朴宜中,遠村曺義生,樹隱金沖漢,龍湖孟好性,休庵林先味,桑村金自粹,松溪朴太始,醇隱申德隣,林卓,閔安富,申包翅,田貴生,李孟芸,高天祥,田祖生,李崇仁,蔡貴河,柳洵,邊肅,高天祐,徐輔,朴008_535a寧,徐仲輔,李㭲,趙狷,趙安鄕,朴湛,李守仁,全五倫,鄭煕,趙洪,李遂生,季思敬,南乙珍,李行,金大庇,李淪,安從約,邊貴壽,朴忱,金浚,尹,具鴻,閔普,李唯仁,裴尙志,車原頫,朴門壽,吉仁迪,宋,李,嚴,蔣,潘,洪,韓 七人紙缺失名等不僕新國諸公。源源往來。從參與立壇祀諸人同節。樹綱常於已傾之天地。明彝倫於已晦之日月。先是先生 申不諼齋賢 斥國師普愚。故普愚常欲除去先生之徒。至是壬寅自七月。士禍火熾羅張。乙巳。遍照爲國師。火網愈熾。推素書笥。燒盡虐爐。八月。籬圍先生遁第。十月加棘。一世間父子兄弟誡語008_535b先生者。轉輾愈錮。而三四在朝者。惟待上天之曙晴。但逗遛而含忍默痛。至丙午。鄭樞爲左司議。李存吾爲正言。丁未。李仁任爲侍中。大辟章徒。以李穡爲大司成。鄭夢周爲博士。申德隣,金九容,朴尙衷,朴宜中,崔元凱,李崇仁兼敎官。尹澤,安魯生等爲敎導官。直學士李穡請行三年喪。頒綸定禮。鄭夢周請行倣朱子家禮。令士庶立廟。內建五部學堂。外設鄕校。以爲興化立敎之本。李穡曰。日者先生獨行三祀。喪禮之說及答鄭夢周之訓。詳聞諸金九容,朴宜中,安魯生諸子矣。

 硏經齋全集卷之五十八
 蘭室史料一
羅麗遺民傳 a_275_196a


新羅王子興光。知國將亡。遁于光州爲民。子孫因籍焉。仕麗朝。八世相傳爲平章事。洞號平章。
新羅王子失其名。敬順王金傅子也。王國弱土削。欲降高麗。王子曰當與忠臣義士。以死守社稷。豈可輕以與人乎。王不聽。王子哭辭王。率其僚屬。入皆骨山玉鏡峰巓。倚巖爲屋。麻衣草食終其身난001
兪義臣。新羅阿飡三宰。新羅亡。義臣自以新羅世臣。275_196b不服于高麗。太祖惡之。降爲杞溪縣戶長。
尙氏無名。出於木川。麗太祖旣合三韓。百濟民屢驚擾。賜五姓獸畜以辱之。尙氏之先得象姓。後改以尙。卽我朝議政震之先也。
李純由。新羅卿。不受高麗命。廢爲吏。子孫居星山。遂爲星山人。高麗政堂文學兆年。卽其後也。
鐵原有古塚。相傳苜蓿政承墓。不知所謂。芝峰李睟光曰故老言弓裔時宰相辰起明者。見弓裔無道。托疾不仕。號曰苜蓿軒。盖其墓也난002
李穡字穎叔號牧隱。韓山人。父文孝公糓。事忠定王。275_196c官都僉議贊成事。穡學問精博。尤邃於性理書。蔭補元國子監生員。赴庭試對策。翰林學士歐陽玄,禮部尙書王思誠。擢穡第二甲。玄曰吾道東矣。穡知元將亂。棄官東歸。恭愍王命穡及我太祖同參大政。喜曰予得用文武第一流也。辛禑十四年。太祖自威化島回軍。廢禑擇立宗室。曺敏修欲立辛昌。密問穡。穡曰當立前王之子。昌遂立。以穡爲門下侍中。初恭愍薨。太祖皇帝怒高麗每徵大臣入朝。皆畏不敢行。穡曰今國家有釁。王及執政不親朝。無以辨之。遂與李崇仁,金士安。如京賀正。且請王官監國。穡見275_196d太祖威德日盛。恐未還有變。以太宗爲書狀官而行。帝素聞穡名甚禮之。從容言曰汝在元朝爲翰林。應解漢語。穡以漢語遽對曰請親朝。帝未曉曰說甚麽。禮部官傳奏曰某久不入朝。語頗艱澁。帝笑曰汝之漢語。正似納哈出。時田制大壞。我太祖與大司憲趙浚。欲革私田。穡以爲舊法不可輕改。持不從。穡謁禑于黃驪府。未幾乞解職。擧李琳自代。恭讓王卽位。新祼于太廟。有司請撤禑母神主。穡曰此事未保其終。姑徐之。於是左司議吳思忠,門下舍人趙璞等。劾穡立昌謁禑。流穡長湍。穡子種學竄順天。275_197a又因臺䟽遣思忠,田時,李翺鞫穡。穡言回軍議立之際。敏修與昌外祖李琳謀。某以昌爲對。無首勸擅立之語。去年朝京師。禮部尙書李原明曰汝國逐父立子。天下安有是理。王與崔瑩。何爲被拘。予應之曰崔瑩敎王犯遼陽。將軍曺敏修與李 太祖舊諱 以爲不可。到義州不敢發。瑩數趣之。不獲已回兵繫瑩獄。於是王怒欲害諸將。故太后廢王。置于江華。去開京二十餘里。舊都勝地。怡養性情。且宰相侍衛儀仗器物朝夕膳奉。皆如平昔。何放之有。及還。李侍中曰原明之言。耳可得聞。口不可道。驪興地遠。迎置近地。可免放君275_197b之名。吾但語此而已。思忠持取辭乃還。時王昉,趙胖還自京師。白王曰禮部召臣等曰爾國人有坡平君尹彜,中郞將李初者。來訴于帝。言高麗李侍中立王瑤爲王。非宗室。乃李侍中姻親也。瑤與李侍中謀動兵。將犯上國。宰相李穡等以爲不可。卽將李穡,曺敏修,李琳,邊安烈,權仲和,張夏,李崇仁,權近,李種學,李貴生等殺害。將禹玄寶,禹仁烈,鄭地,金宗衍,尹有獜,洪仁桂,陳乙瑞,慶補,李仁敏等遠貶。宰相等潛遣我。來告天子。仍請親王動天下兵來討。仍出彜,初所記穡,敏修等姓名示之。胖與彜,初等對辨曰。本國275_197c事大以誠。安有是乎。因問彜曰爾位至封君。頗知我乎。彜愕然失色。禮部官曰天子聖明。亦知其誣。爾速還國。語王及宰相。將彜書中人等鞫問來報。於是㙜諫相繼上䟽。請鞫彜,初之黨。王留中不下。會贊成池湧奇與宗衍善。密語曰公名在彜,初書中。危哉。宗衍懼乃逃。卽下玄寶,仲和,補,夏,仁桂,有獜于巡軍獄。令㙜省刑曹雜治之。初有獜從弟思康無行。甞爲僧犯贓。亡入上國。改名彜。彜家臣丁夫介。從胖入京師。見而不言。及還言于有獜家。有獜在獄。憂憤不食而死。囚夫介。逮繫穡及琳,安烈,仁敏,崇仁,近,種學,貴生275_197d等于淸州獄。遣門下評理尹虎,密直副使朴經,右司議李擴,刑曹佐郞申孝昌。田時與楊廣道都觀察使柳玽鞫之。諸囚皆不服。忽雷雨大作。暴毁城南門衝北門。城中水深丈餘。漂沒官舍。民居殆盡。獄官攀木免。王命釋諸囚。安置穡于咸昌。尋宥之。特許從便。三年憲府請復治穡,種學不從。論之不已。王勉從之。復流咸昌。諫官又論之流遠地。尋許京外從便。穡上書謝恩。王驛召穡及崇仁,種學還京。太宗旣殺鄭夢周。鞫諫官金震陽等。辭連穡,種學,種善。流種學,種善于外。王曰卿二子得罪。卿可於兩江之外。惟所適爾。275_198a穡憮然曰臣無田宅。安歸乎。遂貶衿州徙驪興。及王氏亡。臣庶罔不歸順于我太祖。而太祖敬重穡。穡時住五㙜山。廷議欲殺之。太祖特原之。乙亥屢以書召之。於是穡以草笠白直領細絛帶。擔轎而來。引對便殿。太祖下座。接以賓禮。穡長揖不拜。太祖曰願安承敎。穡曰亡國大夫。不可以啚存。歸死故山足矣。俄而侍講官以次列進。太祖陞榻。穡曰老夫無座。遂起。太祖知不可留。步出中門。揖而別。賜田及米豆酒肉曰卿老矣。宜養體氣。穡托言齋素故也。又賜室材。令造宅以居。丙子五月一日。請歸避暑275_198b於驪興月喃村。時太祖臨朝决機務。不遑引見。初三日。自碧瀾渡乘舟。溯江護行。中使亦來。初七日至淸心樓下燕子灘。將登舟。世傳中使進酒疾作。召男種善於都下。有僧語其道。穡擧手揮之曰死生之理。吾無疑矣。卒於舟中。人多疑之。以爲其卒無愧鄭夢周云。盖王氏子孫多死於舟中。鄭道傳,趙浚之計也。種學官簽書密直司事。種德官知密直司事。皆登第貴顯。麗亡並杖殞。壬申六月。穡在驪江村墅。門生有來謁者。携入深谷。竟日大哭。暮而偕歸曰小豁吾胷臆。盖傷二子之死也。
275_198c徐甄利川人。恭愍時登第。恭讓四年爲掌令。與省憲金震陽,李擴等。請罪趙浚,鄭道傳,南誾。及鄭夢周殉國。以甄及諸言者爲黨與。悉流遠地。是年王遷原州。高麗亡。我太祖定鼎漢陽。甄遯居衿陽縣。坐不北向。終身不見漢陽城。甞有詩自傷曰千載神都隔杳茫。一云千古神都隔漢陽 忠良濟濟佐明王。統三爲一功安在。却恨前朝業不長。大臣㙜諫論以謳歌思亂。請鞫之抵罪。太宗作色曰甄高麗之臣。不忘其君。乃其情也。置毋問。後復固請。上曰甄不北面我家。亦夷齊之流也。何可罪之。宣祖朝修撰許篈請褒之。命275_198d贈大司諫。賜祭於墓。宰臣尹根壽建白。封忠臣塚立祠。
禹玄寶字原功。丹陽人。恭愍時。以文學爲春秋撿閱。轉左司諫大夫。辛禑二年。以密直提學進政堂文學。爲門下贊成事。十二年與判門下府事曺敏修,贊成事張子溫,簽書密直司河崙如元。謝命謚襲封事。十四年春。王出行西海。令留守王城發五部丁壯。聲言從王獵。實政遼也。其五月。太祖回軍。禑特拜右侍中。禑廢。罷侍中。辛昌二年。金佇獄起。以爲玄寶迎禑於驪興。陰與益陽謀作亂。郞舍伏閤請罪。昌不聽。免 275_199a官而已。尋判三司事。恭讓立。有尹彝李初事。逮繫赦出。許外方從便。㙜省以爲不可宥。付處鐵原。尋召復官。及益陽死。安置鷄林。其明年高麗亡。太祖賜功臣爵號。辭不受。上特厚賜之。待以故舊之禮。請歸田里。特進丹陽伯。時玄寶沒。年六十八。追爵領議政謚忠靖。後子孫每以十月上日修祀事。其告享之文曰。孝後孫某。敢用粢盛醴齊。祗薦歲事于先祖考高麗門下侍中府君。流離去國。興滅之際。苦心之操。危身之忠。以遺我子孫後世。先祖妣竹山朴夫人配食尙饗。墓在古長湍東二十里金谷。
275_199b金澍善山人。事恭讓王。官禮儀判書。壬申如皇朝賀節。十二月二十二日。回到鴨綠江。聞麗亡。東向慟哭。書付僕夫。與家人訣曰。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吾度江無所容。我知夫人孕。生男名楊燧。女則曰命德。送朝衣靴。戒夫人歿合祔。毋庸誌碣。使後無知我者。以今發書日祭我。遂還入皇朝。太祖皇帝問在邦何官。立拜禮部尙書。辭不受。命賜尙書祿終其身。遁居荊楚。生三女。子孫多登朝籍。至萬曆丁酉。皇朝遣使冊封日本。有幕官許惟誠者。隨至東萊。自言澍彌甥。盖澍三女。惟誠之先。爲女壻之一也。且言欲275_199c見新谷之金。我人不知新谷爲善山村名。答以金無新谷鄕貫者。許竟未與金相見。夫人開城尹柳思雨女。果生子命之楊燧。後改燧爲普。文科官宣慰使。左議政文戴公應箕其曾孫也。澍衣靴藏于府東諸宮村艮坐原。鄕人立祠祀之。立祠之日。長虹起於墓上。亘於礎。建架樑時亦然。其先居善之走兒里。澍移居新谷。世稱籠巖先生。
崔瀁字伯涵號晩六。全州人。鄭夢周之甥也。夢周殉國。瀁南走入中㙜山。披緇者三年。終老于完山先墓側鳳岡里。我太祖幸溫陽召見。長揖不拜曰。生於275_199d同里。長於一衾。科第同榜。出入同朝。情同昔日之兄弟。禮殊今日之顔面。終不屈節而死。年六十四。官吏部尙書。州人立祠。
李行字周道號騎牛子。驪州人。仕高麗至藝文舘大提學。我太祖卽位。首見敦迫。欲致之朝。終不起。隱於平海民間。壬子卒。年八十二。贈謚文節。行以文章著稱。有集行于世。
李集字浩然號遁村。廣州人。父唐南生員。集以恭愍王乙未登第。甞劾妖僧辛旽不道事。旽欲陰中之。集負其父遁匿永川。後退居驪州。躬耕讀書。自放於山275_200a水。力學博識。倜儻多大節。以文章著名當世。與李穡,鄭夢周友善。夢周贈詩曰道直忤時俗。詩成逼正音。田祿生再爲慶尙道都巡問使。辟集爲幕府。李崇仁,權近,鄭道傳皆以詩文送之。麗亡不仕。丁卯卒。官判典校寺事。
洪龜豊山人。高麗中郞將。知麗將亡。隱居高陽高峯山下。不復仕。將終曰子孫生於麗代者。毋赴新朝科。明我罔僕之志也。子孫守其戒。豊山之洪。中微者以此。
閔愉驪興人。覩麗祚垂盡。以府院君退居通津鳳翔275_200b里。入我朝不仕。仍沒于鳳翔里。
郭綏元高麗中正大夫三司左尹。外裔宋文正先生時烈撰墓表陰記曰墓舊有小表石。刻曰宣德三年三司左尹郭綏元之墓。在卯方。以此㴑而計之。入我朝三十七年。仍以前朝職名終焉。可謂偉然大節。
趙誼世居漢陽鄕校洞。我太祖定鼎漢陽。誼棄家而之他。終身不仕。子末生入我朝。官兵曹判書大提學。謚文剛。
具賢佐綾州人。高麗判司宰監事。我太祖受命。歸隱海美鳳生山中。臨歿手書高麗某官具某之墓。俾275_200c表其阡。飭曰葬我毋出此山。子人文寶城郡守。樹節於莊陵朝。
李養中廣州人。官刑曹左參議。與我太宗友善。及本朝開國。遯居廣州。上特拜漢城尹不受。上甞幸廣州。召與道舊。養中以野服。携瑟獻魚酒。歡然而罷。上竟不奪其志。官其長子遇生以奬之。常分太官珍羞。存問不絶。
孟希道自號東浦。至正乙巳登文科爲翰林。歷修文館提學。洪武戊辰。見麗政已亂。屛居韓山。移溫陽胡田。精硏易學。從而學者甚多。性愛山水。搆室五峯下。275_200d左右圖書。以琴鶴自隨。臨瀑流駕小橋。名曰紫霞洞仙人橋。嘯咏翺翔。終身不出。我太宗屢徵不起。對使者延頸以俟刃。上知不可屈而徵其子。希道不得已使長子思誠赴之。思誠卽崔瑩孫婿也。每自京師來省也。希道命手鋤圃畦。示從仕非雅志也。鄕人立祠祀希道。額曰靜退書院。在郡南。
朴文彬字桃隱。密陽人。官寶文閣學士國子太師。我朝徵以大司成不起。贈左贊成謚文節。後裔縣令興生。
邊肅。本中國人。當元末來仕高麗。爲工曹判書。賜籍275_201a原州。麗亡退居白川。終於家。
尹忠輔茂松縣人。爲安城郡事。麗亡棄官遯于驪州。
金士廉安東人。官按廉使。新羅敬順王後裔也。麗亡自以前朝舊臣。隱於陶山。我太祖以左司諫屢徵不起。及歿命不起塚。上錄其子孫。腏食西原松泉書院。
郭樞淸州人。新羅侍中祥後裔也。麗末爲壯元。官寶文閣大提學。麗亡樞以身事麗朝。拜贊成不受。謚文良。
成汝完昌寧人。初名漢匡號怡軒。年二十八登文科。275_201b歷事忠肅,忠惠,忠穆,忠定,恭愍,恭讓王。官知門下府事。乙卯辛禑立。時汝完爲政堂文學。與李穡共理國事。丙辰仲子石瑢登第。丁巳三子石因登壯元第。而長子石璘前已擢丁酉科。至是陞密直提學。己巳恭讓卽位。石璘,石瑢以穡黨幷流外。先是侍中趙浚邀座主穡設宴。石璘賀以詩曰得士方知座主賢。侍中獻壽侍中前。天敎好雨留佳客。風送飛花落舞筵。汝完怒曰士之忌才。甚於妬婦。不讓而賦。不思保爾身乎。壬申我太祖開國。徙豪傑大族於漢師。汝完以松京宅付其季子郞將石璠。癸酉移寓南城外翰林275_201c洞。尋以耆老特拜輔國崇祿大夫撿校門下侍中封昌寧府院君。屢召之。固辭以前朝臣不起。後與南陽君洪永通等。參慶會樓布衣宴。獻三子而請歸。上義而許之。居抱川王方山下界流村。初汝完見高麗將危。預卜地於是。遂築妙德菴。改號王方居士。服居士服。閉門不出。語其子曰吾居此以王氏方之義也。死必葬此山。有杜門峰。居人至今道之。丁丑正月二十二日卒。壽八十九。上賻賜米豆以葬。謚文靖。
趙狷平壤人。初名胤。官麗朝知申事。兄浚我朝開國功臣。狷與鄭夢周。共輔王室。自以受王氏厚恩。知兄275_201d浚有靖亂之志曰。我家非喬木臣耶。當與國存亡。浚知不可奪。使按廉嶺南。未及還麗亡。狷痛哭入頭流山。改名狷字從犬。盖國亡不死。有類於犬。且犬有戀主之誠也。與人言。詬罵佐命勳臣。浚懼其及禍。白于上。載狷名於勳籍。拜戶曹 一云吏曹 典書。胤辭曰願采松山之薇。不願爲聖人之氓。轉入淸溪山。登高望松京而哭。人指其峯曰望京峰。上幸淸溪。命以賓主之禮。狷始出揖不拜。欲諭起之。以衾鞱面。卧而不起。厲聲答曰尙記與我共事王氏時乎。上知不可屈。悵然而還。命封淸溪一曲。任便居住。築石室與之。亦275_202a不之處。移住楊州松山而歿。遺戒子孫至三世廢科䆠。銘㫌毋書我朝爵秩。及卒太宗震悼。卛百官哭。輟朝市三日。贈謚平簡。諸子不遵狷命。墓表書戶曹典書趙狷之墓。竪訖碑忽中折。只存趙狷之墓四字。人謂精忠所感。狷甞過殷山縣詩曰首陽亦周地。薇蕨累淸風。知有此山在。應先箕子東。亦有感而發也。
蔡貴河仁川人。登第官戶部典書。麗亡隱於杜門洞以終。
崔宰全州人。有文學德望。麗季乞身而退。謚文貞。
金將有慶州人。新羅敬順王傅之後。官版圖判書。麗275_202b季退居報恩。子孫因家焉。後裔文簡公凈。我中宗朝己卯名臣。
金光叙平章事坵之後。麗亡歸扶安而老焉。子孫爲扶安人。
孔俯號漁村。始祖紹仕於元。東來封昌原伯。子孫因著籍昌原。俯與李穡,鄭夢周相友善。入我朝屢徵不起。後孫大司憲瑞獜。我中宗朝己卯名臣。
成思齊昌寧人。官直提學。父政丞有得。麗季名其子曰杜。送之昌寧。自往松都之杜門洞不出。後裔上言。配食松都表節之祠。
275_202c金若時光州人。羅季王子興光後。官奉常大夫典議副令兼進賢舘直提學。太祖微時。與若時同庚相好。及太祖開國。若時與其妻徒行之廣州金光村山谷中。架木爲簷。以蔽風雪。村老怪若時衣冠。往往來問。不之答。饋酒食亦不受。仰天僾唈。人莫測其懷。亦不知何許人。名其洞曰不傳語洞。上物色得之。饋食物。手書賜誠明坊第。末書以松軒御號。蓋待以布衣交也。又授以原官欲強之。若時託靑盲終不起。亦不居賜第。甞謂家人曰吾國亡不能遐遁者。以先人丘墓在耳。我死葬此。不封不。用二石左右以識275_202d之。及卒從其言。年七十二。顯宗時若時後孫宇亨爲承旨。夜對語及若時事。上歎其節操。 英宗時廣州人兪憲柱等達于朝。贈職而祭社云。
周瑜尙州人。擧進士。國亡屛居不仕。副提學世鵬其玄孫也。
林蘭秀扶安人。西河椿曾孫。官典書。王氏亡退居公州三歧村。搆一亭名曰獨樂。我太祖嘉其節。賜環亭十里地。世宗使摠制申穡致祭於廟。題額曰林氏家廟。
林興。蘭秀季子。年十九。從李穡游。因學于權近。論禮275_203a說。二十以學行除散員同正及錦州知事。皆不赴。及聞辛禑沒。不食魚肉者久之。二十五受學於善山吉再。以養親辭歸。再曰游余門者未有如林興之誠孝也。甞過公州北銅穴山。春蕨方生。乃和夷齊采薇歌曰。薇兮薇兮生微微。首陽何處是。淸風千古夢依依。若使當年孤竹在。應知不必嘆無歸。其父疾革。興引刀斫指。得延其命旬餘。人謂孝感所致。本朝嘉蘭秀之節。徵其子孫堪仕䆠者。竟不令就。及卒翰林金光說誄曰猗介于石。克紹而幹。盖實記也。
林千石琴師也。知麗運將訖。抱琴入嶺南商山白華275_203b山。皷琴不出。聞麗亡號慟投臺下水死。時林鳥悲鳴。山谷慘憺。至今山中人相傳林氏臺。
金子粹字純仲號桑村。鷄林人。恭愍末。擢文科壯元。辛禑初爲正言。時慶尙道都巡問使曺敏修擊倭密城。斬數十級。禑賜衣酒。敏修上箋謝。命子粹製回敎。子粹辭曰敏修怯懦。多殺士卒。密城小捷。功不掩罪。禑怒下子粹巡衛府鞫之。流突山戍。恭讓時斥佛敎。且請誅佞臣金㙉。王怒甚欲罪之。尋止。子粹素與鄭夢周,李穡友善。見時政亂。退歸安東之鄕里。及本朝開國。堅卧不起。太宗嘉之。以刑曹典書徵之。子粹275_203c嘆曰爲人臣。國亡與亡義也。行至廣州秋嶺。遺命子孫曰吾今死矣。葬於是。作絶命詞曰平生忠孝意。今日有誰知。遂卒。卽葬於秋嶺下。八世孫弘郁爲忠淸道觀察使。立石記之。
吉再字再父號冶隱。海平人。父知錦州事元進。再以至正癸巳生于善山。旣長就商山朴蕡。始聞性理之學。仍游李穡,鄭夢周,權近之門。甲寅入國子監中生員試。癸亥中司馬監試。近語人曰從余學者。毋如吉再父也。我太宗在潛邸入學。再甚相得。洪武丙寅登科。補淸州司錄不就。恭愍己巳。拜門下注書。恭讓275_203d庚午。辭以母老棄官歸。庚辰太宗在春宮。與書筵官論遺逸士曰再剛直人也。不見久矣。正字田可植再鄕人也。備言再至行。上下令徵之。堅卧不起。州官督令就道。再乘傳至。上啓定宗。授奉常博士。再不詣闕謝。上書曰再於昔日。得與邸下讀書泮宮。今日召再。不忘舊也。然再於辛朝登科筮仕。及王氏復位。卽歸于鄕。若將終身者。今蒙徵召。欲上謁。從仕則非再志也。上曰子之所言。乃綱常不易之道也。義難奪。然召者吾也。官之者上也。可辭於上。再遂上箋。略曰臣本寒微。仕於辛氏之朝。至門下注275_204a書。臣聞女無二夫。臣無二主。乞放歸田里。以遂臣不事二姓之志。孝養老母。以終餘年。定宗問權近日再抗節不事。在古人何以處之。對曰嚴光不屈。光武從其志。再若求去。宜許之。定宗嘉其節。優禮遣之。命本州復其家㫌其閭。太宗爲上王。敎曰再不事二君。眞義士也。聞有子可召用。遂驛召子師舜。再謂師舜曰君先乎臣。三代後罕有也。汝在草萊。而君先召之。恩義曠絶。汝當效我事高麗事朝鮮也。師舜除宗廟副承詣都。再疾革。妻申氏告以招師舜行。再曰君父一也。旣往於君矣。聞訃而來可也。卒年六275_204b十七。上命賻米豆賜轝丁。贈左司諫大夫。甞敎曰再進講詩一篇而還。是自比於箕子陳洪範也。善山仁同。皆立祠祀之。
南乙珍。宜寧人。事高麗爲參知門下府事。及本朝開國。棄官歸耕于楊州之沙川縣。太祖甞問其從子在曰卿之叔父安在。在對曰在沙川縣。太祖招之。堅不起。被髮逃於紺岳山中。太祖知其志不可奪。環所居而封之。號曰沙川伯。後人刻其像於石崖。且俎豆而祀之。
李陽昭字汝建。順天人。代言師古之子。生於丁未。卽275_204c太宗誕降之歲。皇明洪武壬戌中司馬。亦太宗同榜也。高麗亡。遯于漣川陶唐谷。太宗三年求得之。躬迎陽昭。置酒道舊。且以官徵之。陽昭終不起。乃命造宅山下使居之。陽昭移搆茅屋於深林中。扁曰安分堂。手植文杏於庭。以琴書自娛。號曰琴隱。臨卒自書銘㫌曰高麗進士李某。恐其身後書以本朝官資也。文杏至今繁茂。名其地銀杏之亭。
王白二尙書失其名。麗末居廣州退村里。種杏數百株。至今其里多杏。其前有望主嶺。二尙書月朔所北望痛哭處也。
275_204d元天錫字子正號耘谷。原州人。恭愍時進士。太祖微時使定宗往學於天錫。學成而歸。及太祖自威化回軍。人心皆歸。有受禪之漸。天錫作書以諫。及麗亡隱居赤岳山。躬耕養父母。敎授諸生。定宗東游幸赤岳。訪天錫。匿不見。留舊日爨婢。上立溪上石。召問先生何之。婢曰求友於太白山。上厚賫婢。授天錫子泂基天監務。留告身而返。後人名其石曰太宗臺。天錫有詩稿。戒子孫秘藏廟中。盖直書革除間事。多後世不能知者。後孫竊開之。大懼曰吾家族矣。燒其稿不傳。其詩多傳于世。辛禑稱前王。昌稱元275_205a子。其傷昌詩。前王父子各分離。萬里東西天一涯。可使一身爲庶類。寸心千古不遷移。又有前王賜死詩曰一國豈能流景祚。九原難可雪幽寃。又傷崔瑩被刑李穡被讒詩。皆記實。而其咏權近詩逸一句。只傳投閣揚䧺草太玄。近有陽村談義理。世間何代不生賢。申欽曰詩雖質朴。直書無隱。比之麗史。不啻日星螮蝀之相懸。
鄭矩▣▣편001人。號雪壑齋。事高麗爲左諫議大夫。不仕本朝。太宗時以龍潛之舊屢徵不至。賜釰以迫之。不能屈。後以賓禮謁見。命書健元陵碑額。卽授275_205b寶文閣提學。又不受。賜之宅一區不居。賜之葬地。亦遺命不葬。卒謚靖節。嶺南之安義縣。卽其鄕也。鄕人立祠祠之。


[난-001]新羅王子失其名。…… 麻衣草食終其身。 : 新羅王子重出
[난-002]鐵原有古塚。…… 盖其墓也。 : 苜蓿政丞重出
[편-001]▣▣ : 東萊

孝子里旌閭閣記 庚戌 a_296_051b


海州東六十里鰲川上不周山下。有所謂孝子里。孝子卽高麗贊成川隱李公孟芸。而我太祖以御筆三字旌厥宅里者也。公生稟異質。性純於孝。麗社旣屋。引謝疊山母在不死之義。負親逃海。入少連大連之鄕。卜居于玆區。山樵水漁。以供甘旨。愉色婉容。以養心志。侍湯則夜帶嘗糞。焚香禱辰。守制則啜粥廬墓。指禿穿臼。馴致冰潭躍鯉。雪田產瓜。至諴攸格。無感不通。時人之目以王祥曾子者。實無媿焉。移孝爲忠。痛心鼎革。掛朝冠於東峴。灑淸風於雷首。與296_051c杜門洞七十子。晦身土室。矢心自靖。發孤憤於聲詩。和牧隱之黃花。聖朝三徵。不奪所守。其懷松采薇之節。凜凜乎洞竆宙而媲三光。公之孝。可謂有始有終。於乎懿哉。噫。君臣之倫。靡所逃於覆載。不容閒於食息。而麗氏舊臣。滔滔是欺天讕人。賣國販君。惟公以小微子遺裔。承大隱公庭訓。又從圃牧冶諸賢遊。倡明絶學。講究性理。見得極天罔墜之大經大義。卽其充養有素。乃能所在盡分。卜商之竭力。殷仁之罔僕。咸萃于一身。儘朱子所云活孝推將去。而古語兩節幷弘。二理同極者。其庶幾乎。猗歟我聖祖。以武296_051d王式商容之心。範天地廓淵藪。讚徐甄之詩。訪元天錫之閭。封趙狷南乙珍於松山沙川。而未聞旌表門閭。獨於公命碣其里而特揭勝國官銜。奬忠褒孝之典。一擧而該盡。奎章爛日星。丹楔耀鄕井。建極規模之仁厚宏達。於斯爲盛。可但爲礪世敎尙名節之一端哉。下百世而聞公風者。靡不激勸興慕。以忠則腏享于表節祠。以孝則追配於達禮祠。用極其崇報。而視公舊里則烏頭赤腳。巋然炳烺於百劫滄桑之餘。使人起好懿之良心。思與之齊。然則斯閣之存。其有裨於民彝物則者。詎可量哉。爲公雲仍者。296_052a圖所以聿修毋忝。錫類不匱。乃不負國家象德崇賢之盛意。李氏乎其欽念哉。洪武丁丑始旌閭。後四百五十三年崇禎之四庚戌記。謁文者。卽公後孫最綱誠力篤摯。亦不可以不書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