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duschsrhd

雁門傳箭息 鸞別佩珂鳴 崔德之관련 자료 (19대조고 영정등 )

아베베1 2012. 2. 26. 21:09

 

 

 

 

 

 

 

 

 

 

 

 

 

 

 

 

 

 

 

 

 

 

 

 

 

 

 

 

 

 

 

 

 

 

 

 

 

 

 

 

 

 

 

 

 

 

 

 

 

 

 

 

 

 

 

 

 

 

 

 

 

 

 

 

 

 

 

 

 

 

 

 

제목 崔德之畵像稿   
분류 人物 畵像
등록번호 사자 0296


본문 崔德之畵像稿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藝文館 直提學까지 역임하였던 烟村 崔德之(1384∼1455)의 화상 밑그림. 
 
설명 1(2), 117.0×77.0cm
촬영:1928. 6. 7.
소장:全羅南道 靈岩郡 北一面長 崔龍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崔德之)

[문과] 태종(太宗) 5년(140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3위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D5CB355C9C0B1384X0
가구(可久)
연촌(烟村)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생원(生員)
관직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최담(崔霮)
[조부]  성명 : 최을인(崔乙仁)
[증조부]  성명 : 최용봉(崔龍鳳)
[외조부]  성명 : 박인부(朴仁夫)
[처부]    성명 : 조안정(趙安鼎)

 

 

 

(崔德之)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최덕지(崔德之)

○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스스로 존양당(存養堂)이라고 호했다. 우리 태종(太宗) 때 급제하고, 여러 차례 주(州)ㆍ군(郡)의 수령을 맡아 왔는데, 모두 치적을 남겼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고, 시에 이름이 높았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암(靈岩)으로 물러가 살았는데, 그때의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시를 지어 주기를

 

고향으로 돌아감은 은둔한 계책이 아닐 것이니 / 歸田非隱計
출처는 정히 이같이 하느니 / 出處正如斯
한주는 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종은 규공을 중히 여겼다오 / 唐宗重戣孔
강산은 공을 기다리고 있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 / 猿鳥亦相知
종히 의리를 온전히 할 수 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이는 나의 스승인 것을 / 如公我所師
하였다. 〈본록(本錄)〉

 

○ 익산(益山) 수령이 되어 몸을 처신함이 검약(儉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세하고 밝게 하였다. 《명환록(名宦錄)》
海東雜錄[一]○權鼈
本朝[一]
崔德之

全州人。自號存養堂。我太宗朝登第。累典州郡。皆有聲績。世宗朝。官至集賢殿直提學。有詩名。文廟末年。棄官退老靈岩。一時名士皆餞之。成三問以詩贈之曰。歸田非隱計。出處正如斯。漢主思疏廣。唐宗重戣孔。江山如有待。猿鳥亦相知。終始能全義。如公我所師。 本錄 守益山。行己儉約。處事詳明。 名宦錄


G002+AKS-KHF_13CD5CB355C9C0B1384X0
가구(可久)
연촌(烟村)

 

                   天官承命原韻

                雁門傳箭息 鸞別佩珂鳴 崔德之

최덕지시구

유물명칭 : 최덕지시구
국적/시대 : 한국(韓國) / 려말선초(麗末鮮初)
재질 : 지(紙)
크기 : 가로 : 19 , 세로 : 18.5
작자/필자 : 최덕지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 문헌(文獻) / 서간류(書簡類)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장처 : 학교(學校) / 성균관대(성균관대)
유물번호 : 성균관대(성균관대) 000813-000
최덕지의 시구

<근묵(槿墨)>은 34책으로 이루어진 첩장본(帖裝本)으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우리나라 선현들의 묵적 가운데 서간류의 소품을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작가는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조선초기의 정도전(鄭道傳), 강회백(姜淮伯), 대한 제국기의 이도영(李道榮)에 이르기까지 약 1136명에 달한다. 연대는 대략 600여 년에 걸쳐 있다. 작가의 신분별로 보면 임금에서 사대부에 이르며, 직업별로 보면 관료, 학자, 승려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또한 서체별로 보면 행서가 595점, 초서가 468점으로 행초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서는 57점, 전예는 16점으로 전예해행초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

문장의 내용면은 서간이 720점, 시고가 353점, 제발 및 기타 잡문이 62점으로 내용면에서도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근묵에는 600년 간에 걸친 우리 선현들의 생활사를 볼수 있기에 옛 사람의 사생활의 실태는 이러한 서간첩(書簡帖)이 아니고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중요한 사회사의 자료가 된다.

서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운필하여 바쁜 가운데 비필난초(飛筆亂草)로 휘두른 것으로 그 필치는 유려하고 창달하여 보는 사람들의 심목을 흔결(欣決)케 하는 감동을 지니고 있다. 아무런 제약과 의도적인 작태가 없는 서간의 서품은 그것이 글씨의 본바탕이며 작가의 개성을 그대로 살린 작품으로 근묵은 600년의 살아 있는 서예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서간형식의 변천과 서압(署押)의 양상을 연구할 수 있어, 역사, 민속, 사회사, 서법연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최덕지(崔德之)

1384(우왕 10)∼1455(세조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수(迂?), 호는 연촌(烟村).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서산사(西山祠) 단암서원(丹岩書院) 록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天官承命原韻

雁門傳箭息 鸞別佩珂鳴 崔德之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등록번호 : 비등록문화재.

소재지 :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합경당.

분류 : 고문서.

소유자 :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관련자 : 연촌공(중랑장공파 5세).

 

 

 

연촌공의 친필로 “공원에서 함께 노래 한 시(貢院唱和詩) 차운(次韻)”의 일부로 보인다. 연촌공께서 문종 때 다시 벼슬에 나가 예문관 직제학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있을 때 공원(과거를 관장하는 곳)에도 소속하여 있었다.

 

어느 비 개인 봄날 문종께서 술과 안주를 공원으로 보내 주시므로 함께 일하던 영의정 하연, 예조참판 박팽년, 집현전제학 신석조, 사헌부집의 신숙주, 집현전부교리 성삼문, 집현전수찬 서거정, 이조참판 이사철, 집현전수찬 유성원, 예조정랑 강희맹, 사헌부장령 하위지, 예조판서 김례몽, 집현전수찬 이석형, 사헌부지평 이개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주고받은 시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불타고 일부만 전해온다.

전해오는 내용은 단 두 소절에 불과한데

 

 

 

雁門傳箭息(안문전전식) 안문에서 화살에 끼워진 소식을 전할 때

鸞列佩珂鳴(란열패가명) 임금님의 수레가 옥 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서 있구나

 

 

연촌공(1384∼1455)은 월당공(휘 담)의 막내아들로 휘는 덕지(德之)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 또는 존양당(存養堂)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남원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암에 은거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자경문으로 삼아 순덕고절한 정학지사로서 삶을 살았다. 연촌공의 후손은 남원종회와 영암종회이다.

 

 

 

 

崔德之


崔德之全州人文戶議霮子辛禑癸亥生字   迃叟烟村存養堂權近門人

 

(。太宗乙酉文科歴翰林三司)文宗

 

即位召拜藝文直提學以南原府使知有 權擥

 

韓明澮之事退老于靈巖永保村築 書楼扁以

 

存養時以元昊同称始退也

 

成三問諸人以(。詩)餞之以高其志者甚衆癸酉

 

 間國家多故炳幾保身世称明智亦有正 學世祖甲戌卒年七十二靈巖有院[주:三]

▼원문보기118b 처음으로

[주:兄弟文科兄 匡之 直提學直之都事] 3형제가 문과에 급제를 하셨다

 

 

 

 

 

유 적 명 : 영보정 (永保亭)
주 소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6
지정사항 : 기념물 제104호
시 대 : 조선
종 류 : 기타 위인선현유적
참고사항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 이해준, 1986, <영암지방의 유교문화 유적>, <<영암군의 문화유적>> ; 전라남도, 1986, <<문화유적총람>> ; 전라남도, 1992, <<문화재도록>>

영보정은 조선시대 문인이며 학자인 최덕지(1384∼1455)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의 영보촌에 안거하면서 그의 사위 신후경과 함께 전주 최씨, 거창 신씨 문족의 합력으로 건설한 정자이다. 창건 연대는 불명확하고 현재의 위치에 중건된 것은 163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부분적인 중.개수를 거쳐 유지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이 영보정에 영보학원이 설립되어 청소년들에게 항일 구국정신을 배양하기도 하였다. 영암 청년들의 항일 투쟁으로 손꼽히는 1931년의 “형제봉 만세운동”도 실제로 이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한 졸업생 및 청년 회원이 주축이 되었다. 영보정이란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한다. 이 정자는 건평 40평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각 추녀를 4개의 활주(活柱)가 받치고 있다.


유 적 명 : 주암서원
주 소 :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713 - 1
지정사항 : 문화재자료 제21호
시 대 : 조선
종 류 : 고분 원
참고사항 : 전라북도, 1990, <<문화재지>>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전라북도편.

조선 인조 8년(1630)에 건립, 광무 원년(1897) 폐쇄당하고 융희(隆熙) 2년(1907)에 재건되었다. 연촌 최덕지, 암계 최연손, 표계 장급, 사계 장경세 4 사람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건물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당인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4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영정각 전면에는 영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3칸의 솟을대문인 내삼문이 있다. 숙경재(肅敬齋)라는 현판이 걸린 강당은 정면 4칸(1280cm), 측면 3칸(740cm)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앞 1칸은 마루이다. 강당의 남동편에는 ‘전주최씨종대기적비(全州崔氏宗垈紀蹟碑)’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 전면에는 3칸짜리 솟을대문인 외삼문이 자리한다.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전주인물록

 

人物名臣 高麗 崔均 自幼力學出郡仁宗朝登第累遷少府主簿時宰相 崔允儀奉旨擇文士詳定禮儀均首居其選後允儀臨絡犻薦均王授閣門祗侯明宗朝以禮部侍郞充兵馬副使擊西京趙位寵柀執遇害贈禮部尙書 원주 崔陟卿 以吏登第毅宗初授京山府判官秩滿還京足不至權門者十餘年後再爲耽羅令累轉監察御史拜左正言知制誥官至禮部侍郞 秘書監 원주 李俊陽 以淸白達毅宗朝官至平章事 원주 崔甫淳 均之子平章事謚文定 원주 柳光植 風儀環偉淸儉節欲況重寡言高宗朝平章事 원주 柳韶 光植之子性剛亢許可不事産華位至平章事 원주 崔誠之 甫淳四世孫忠宣王時人官至僉議贊成事光陽君謚文簡公 원주 柳邦憲 官至門下平章事謚貞簡 원주 崔得枰 廉貞自守人皆敬憚官至選部典書致仕歷事烈宣肅三朝而忠宣尤器重之 원주 崔宰 得抨之子忠肅朝登第王以有父風除監察持平忠

<하권1030-3>

惠卽位乃裭其職及王被執如元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宰爲判官歎曰王之失德而非王自爲乃左右逢之耳逢之於前揚之於後吾實恥之稱疾不出恭愍朝封完山君謚之貞 원주 崔龍甲 擢第一人及第 원주 李資乙 擢第一人及第與崔龍甲俱有文才名 원주 崔七夕 有將師材 원주 崔龍角 改名永濡 侍中 阿之子櫂壯元爲海州牧使恭愍朝紅巾之亂賊兵犯境殉節後達忠烈祠于海州鵂巖 원주 李文挺 官至政堂文學 원주 崔瀁 號晩六 圃隱 鄭夢周甥姪登文科官至寶文閣大提學我 太祖龍興之日退居本府大勝洞享祀于西山祠今廢 원주 本朝崔府 官至判書謚靖簡 원주 李伯由 文挺之孫開國功臣封完城君 원주 柳義孫 登第官至吏曹判書有文名 원주 李思哲 登第靖灘功臣官至左議政 원주 崔德之 號存養堂 太宗朝人登文科集賢殿直提學 원주 崔敬之 登第官至弘文館副提學 원주 李瓊仝 文挺四世孫擢重試官至兵曹參判以文章名於世 원주 李繼孟 號墨巖登文枓

<하권1030-4>

官至左贊成謚日文平 원주 柳軒 登第官至大司諫 원주 柳崇祖 登第官至成均同知 원주 李廷鸞 文科官至府尹壬辰倭亂公先紏義旅常語子弟曰足底黑子汝等宜知之蓋死節之意已定終安全湖詳載名臣錄 원주 宗室湖城君柱 德源君 曙之曾孫初封湖城今卜居于本州萬曆壬辰倭寇猝迫都城失守宣祖大王播越龍湾公紏合義旅由海都謁于 行在所倭兵已屯平壤公奮力泣血自請先鋒直向平壤連日摶戰殺賊無數遂奏捷 上大喜進封湖城君錄宣武原從功一等賞賜田全州地 원주 黃璞 武科壬辰亂戰亡錦山事聞 贈兵使旌閭 원주 崔虎 武科壬辰倭亂戰亡錦山郡 贈兵曹參判旌閭 원주 李富永 ■力過人武科宣傳官戊午 天朝有深河之役徵兵 本朝以姜弘立爲都元師 金景瑞副之領兵赴授金將軍以助防將亦在行中檄公爲偏裨而從馬與賊遇於富車嶺劉都督喬遊擊相繼敗衂姜弘立 金景瑞皆投降惟助防一軍獨當巨寇矢石如雨而畫夜力戰虜兵累却忽狂風大起雲霧四塞砲路旣迷兮

<하권1031-1>

又折勢無奈何而猶且身冒白刃手釰當賊所格殺無數虜遣人誘降公與金將軍罵不絶口虜亦義之嘖嘖稱之曰柳下兩將眞忠臣也募生擒不得能身被十餘創貫賊箭而歿韓忠立 徐福男 崔得宗自軍中脫身而歸細傳其顚未焉遂招溾而歸葬於牧丹洞 원주 宋英耉 號瓢翁登第官至慶尙監司光海朝廢 母議起公守正抗義力斥邪論士咸猗重 원주 李興浡 號雲巖登文科官玉果縣監 仁廟賓天守制三年贈吏曹參議癸酉以忠節 命旌閭 원주 李起浡 號西歸 興浡生員丙寅虜使來公與伯氏抗疏請斬來使丁卯文科爲大同察訪與本方伯及諸員奉審箕子殿公獨不拜及丙子亂公與兄興浡及翰林 梁曼容倡率義旅行至淸州遇胡騎公挺釰大喝追斬九級長驅而進未及南漢三十里聞 大駕出城北首痛哭累拜養士春坊終不就陳情曰臣白牌至下大夫皆書大明年號知有大明而巳 顯廟贈都承旨 英宗甲子以忠節 命旌閭 원주 李尙眞 號晩庵 府尹 廷鸞曾孫文科官至右議政己巳壼議將廢以原任大臣瀝血抗章被

<하권1031-2>

謫北靑選入淸白吏 원주 卓祥 壬辰倡義丁酉殉節官至佐郞旌閭 원주 金億萬 武科官至訓鍊院判官壬辰倭亂聞 大駕去邠之報與弟守門將 億熙及其子部將 㥧北望痛哭伏釰赴義幸州之捷斬獲甚多錄宣武原從勳贈左承旨明年庚午 命旌閭 원주 金億熙 億萬弟武科守門將壬辰倭亂與兄赴敵多捷贈兵曹參議以忠節旌閭 원주 金㥧 億萬第四子武科部將以壬辰忠節贈兵曹參判命旌閭 원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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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윤공과 연촌공은  양촌 권근의 문화생이었다는 기사   

 

용호한록

龍湖閒錄二
第六冊
三一八, 東國文獻門生篇
 朝鮮 

 

薛聰 聰智 弘儒侯 원주 ·崔致遠 孤雲 文昌侯 。 원주 金良鑑 文安公 원주 ·崔冲 浩然 文憲公 원주 ·安裕 向玉 晦軒 。 원주 安晦軒門人。
辛蕆 德齋 원주 , 白頤正 上黨 원주 ·權溥 濟萬菊軒文正 원주 ·禹倬 官祭酒, 人稱祭酒先生 원주 白上黨門人 晦軒淵源 원주 李齊賢 仲思, 益齋 文忠公 원주 ·朴忠佐 子華 恥菴 。 원주 權菊軒門人 晦軒淵源。 원주 李糓 仲父稼亭 원주 ·李仁復 克禮 樵隱 文忠 원주 ·白文寳 和夫 澹庵 文簡 。 원주 恭愍時成均掌敎人。
李穡 頴叔 牧隱 文靖 원주 ·鄭夢周 達可 圃隱 文忠 원주 ·朴尙衷 誠夫 文正 원주 ·金九容 敬之 惕若齋 원주 ·李崇仁 子安 陶隱 원주 ·朴冝中 子虛 貞齋 。 원주

 

<2권35>

鄭圃隱門人 稼亭私淑 원주 從遊, 李在吾 順卿 石灘 원주 ·吉再 再父 冶隱 원주 ·權近 可遠 陽村 文忠 원주 ·權遇 慮甫 梅軒 陽村弟 원주 ·河演 淵亮 敬齋 文孝 원주 ·咸傅霖 東原君 蘭溪 원주 ·卞季良 巨卿 春亭 文肅 원주 ·李陽明 司藝 원주 ·趙庸 文貞公 원주 ·朴信 雪峰 。 원주 李牧隱門人 稼亭私淑 원주 ·河崙 大臨, 浩亭, 文忠 원주 ·鄭可宗 子固 원주 ·尹紹宗 憲叔 桐亭 원주 ·鄭道傳 宗之 政丞 원주 ·崔彪 叅知 。 원주 吉冶隱門人 圃隱淵源 원주 ·金淑滋 子培 江湖 원주 ·金峙 府使 원주 ·朴瑞生 大憲 원주 ·吉久 冶隱弟生員 원주 ·崔雲龍 佐郞 원주 ·吉師舜 冶隱子。 원주 權陽村門人 圃隱淵源 원주 , 金從理 直學 원주 ·許稠 仲通, 敬庵, 文敬 원주 ·孟思誠 誠之 文貞 원주 ·姜淮伯 伯父 通亭 원주 ·李源 次山 容軒 襄憲 원주 ·崔直之 郡守 원주 ·崔得之 少尹 直之弟 원주 ·崔德之 烟村 得之弟 원주 ·崔澄 贈判書 원주 ·崔廷達 奉事 원주 ·金懷愼 草堂 원주 , 權梅軒門人 圃隱淵源 원주 , 權採 用之 원주 ·安止 皐隱, 文靖 원주 ·鄭麟趾 伯睢號學易齋 文成 원주 ·金連枝 戴敬公 원주 ·李先齊 提學 。 원주 卞春亭門人 圃隱淵源 원주 , 鄭陟 明之 整庵 。 원주 李司藝門人 圃隱淵源 원주 , 金汶 直學 。 원주 趙文貞門人 圃隱淵源 원주 , 尹祥 別洞 원주 ·趙末生 文剛公 원주 ·裵桓 生員 원주 ·裵杠 尙志 원주 ·崔元亨 林川 원주 ·崔瑾 郡守 。 원주 世宗朝成均掌敎人, 黃鉉 大司成 원주 ·金匀 音斤字直之 文長公 원주 ·金泮 詞源 松亭 원주 ·金末 諡文長公 。 원주 世祖朝成均掌敎人, 鄭自英 知樞 원주 ·孔頎 大司成 원주 ·丘從直 正甫 安長 。 원주 俞希益 大司成 원주 ·俞鎭 直提學 。 원주

<2권36>

金江湖門人 冶隱淵源 원주 , 金宗直 季温號佔畢齋 文簡 。 원주 金直學門人 陽村淵源 원주 , 林守謙 益之 葛谷 。 원주 許敬庵門人 陽村淵源 원주 , 李克培 謹甫 翼平 원주 ·崔潭 安國 奉事 。 원주 金佔畢門人 江湖淵源 원주 , 金宏弼 大猷 寒暄 文敬 원주 ·鄭汝昌 伯勗 一蠹 文獻 원주 ·安遇 時叔 蘆溪 원주 ·廬祖仝 公緖 正郞 원주 ·郭承華 進士 원주 ·崔溥 淵淵 錦南 원주 ·李黿 浪翁 再思堂 원주 ·朴漢柱 天支 迃拙 원주 ·南孝温 伯恭 秋江 원주 ·金孟性 善源 止止堂 원주 ·表沿沫 字少遊號藍溪 원주 ·俞好仁 克己 㵢溪 원주 ·金勘 君諫 文敬 원주 ·李胄 胄之 忘軒 원주 ·曺偉 太虛 梅溪 원주 ·柳順汀 智翁 文成 원주 ·禹善言 楓崖 원주 ·金驥孫 仲雲 佐郞 원주 ·金馹孫 季雲 濯纓 원주 ·李穆 仲雍 評事 원주 ·金訴 君節 安樂 원주 ·辛永禧 德優 安亭 원주 ·權五福 嚮之 睡軒 원주 ·李繼孟 希醇 墨庵 원주 ·李宗準 仲鈎 慵齋 원주 ·康伯珍 子温 司諫 원주 ·姜景叙 子文 草堂 원주 ·任熙載 敬輿 勿庵 원주 ·朱溪君 宗姓名深源字伯淵 원주 ·元槩 叅奉 원주 ·李承彦 士雅 叅奉 원주 ·李鐵均 大司成 원주 ·楊漑 秀才 원주 ·周允得 秀才 원주 ·洪裕孫 篠叢 원주 ·李仁亨·金礪石 忠穆 殷卿 원주 ·姜渾 士浩 木溪 文簡 원주 ·南世周 典翰 원주 ·南袞 士華 원주 ·李孟專 耕隱 원주 ·李約東 平靖 원주 ·崔漢洪 鷄林 원주 ·方有寧 太和叅判 。 원주 成宗朝成均掌敎人, 盧自亨 大司成 원주 ·李文興 大司成 원주 ·權綸 大司成 。 원주 金寒暄從遊, 朱溪君 宗姓名深源字伯淵號醒狂 원주 ·許磐 文炳 원주 ·辛永禧 安亭 원주 ·金湜 東泉 원주 ·宋欽 知止堂 。 원주 金寒暄門人 佔畢淵源 원주 , 趙光祖 孝直 靜庵 文正 원주 ·金安國 國卿 慕齋 원주 ·金正國 國弼 思齋 원주 ·鄭鵬 雲程 新堂 원주 ·鳴陽正 宗姓名賢孫字世昌 원주 ·柳藕 養清 西峰 원주 ·李勣 仲栗 원주 ·李湛 仲久 靜存 원주 ·崔壽峸 可酸 猿亭 원주 ·成世昌 蕃仲 遯翁 文莊 원주 ·禹成勳 叅奉 원주 ·禹成允 而信進士 원주 ·禹成功 生員 원주 ·李長坤 希剛 琴軒 원주 ·鄭應祥 公瑞監察 원주 ·李延慶 長吉 灘叟 원주 ·尹信 任之 원주 ·

<2권37>

閔龜孫 瑞卿 典籍 원주 ·崔忠成 弼卿 山堂 원주 ·金絿 大柔 自庵 원주 ·朴漢參·柳桂隣 城隱 원주 ·孟權·終南守 宗姓名壽昌 恥齋 。 원주 鄭一蠧從遊, 任由謙 叔讓 昭簡 원주 ·趙廣臨 輿叔 奉事 원주 ·趙有亨 泰而 寺正 원주 ·李純 希文 牧使 。 원주 鄭一蠧門人 佔畢淵源 원주 , 盧友明 君亮 信古堂 원주 ·李希曾 魯翁 修撰 원주 ·高崇傑 伯高 榮天堂 。 원주 崔錦南門人 佔畢淵源 원주 , 尹孝貞 進士漁樵隱 원주 ·權遇蘭·林遇利·朴誾 仲說 挹翠 。 원주 朱溪君門人 佔畢淵源 원주 , 李耔 次野 陰崖 원주 ·金公亮·李希輔 伯益 安分堂 원주 ·宋世忠 恕甫 郡守 원주 ·柒山正 宗姓名濬孫 원주 ·南世健·金安老 頤叔 希樂 左相 。 원주 辛安亭門人 佔畢淵源 원주 , 金淨 元冲 冲庵 원주 ·蘇世讓 彥謙 陽谷 원주 ·蘇世良 元友 困庵 。 원주 金東泉門人 寒暄 私淑 원주 , 申命仁 龜峰 원주 ·吳希顏 景愚 원주 ·睦世枰 玄軒 원주 ·金胤宗 繼志 원주 ·趙瓊 瑩仲 원주 ·洪順福 顧庵 원주 ·申光溢·李世銘·申瑛 夷簡 원주 ·金德守 頤眞 원주 ·金德純 叅奉 원주 ·李中 而强 원주 ·柳諶。
朴仁誠·李信 告變者 원주 ·權緯·權經·崔命春 春源 松溪 원주 ·趙静庵從遊, 終南守 宗姓名昌壽號恥齋 원주 ·崇善正 宗姓名叢 원주 ·朴祥 昌世 訥齋 원주 ·金世弼 公碩 十清軒 원주 ·申鏛 大用 文節 원주 ·金絿 大柔 自庵 원주 ·潘硯秤 賛成 원주 ·安處順 順之 思齋 원주 ·朴世熹 而晦 道源齋 文剛公 。 원주 趙静庵門人 寒暄淵源 원주 , 成守琛 仲玉 聽松 원주 ·成守琮 叔玉, 聽松弟, 節孝 원주 ·趙昱 景陽 龍門堂 원주 ·白仁傑 士偉 休庵 文敬 원주 ·丁煥 用晦 檜山 원주 ·丁熿 季晦 游軒 원주 ·梁山甫 彥酸 瀟灑園 원주 ·羅湜 正源 長吟亭 원주 ·許伯琦 汝珍 三松 원주 ·洪奉世 欽仲 判決事 원주 ·鄭源 仲遠 承旨 원주 ·尹寬 栗翁 三休堂 원주 ·洪暹 退之 忍齋 景憲 원주 ·李希閔 孝翁 正郞 원주 ·李忠橽 子安 訥齋 원주 ·李文橽 子發 默齋 원주 ·朴世煦 仲温 訥齋 원주 ·尹忭

<2권38>

惧夫 知足庵 원주 李巙 士高 靜軒 원주 ·安曇 察訪 원주 ·李延慶 長吉 灘叟 원주 ·朴紹 彥胄 冶川 원주 ·崔汝身 巨川郡守 원주 ·趙希尹 景任 원주 ·奇遵 子敬 服齋 원주 ·洪順福 顧庵 。 원주 宋知止堂門人 淵源私淑 원주 , 梁彭孫 大春學圃。 원주 金慕齋門人 寒暄 私淑 원주 ·金麟厚 厚之 河西 文正 원주 ·李畬 文學 원주 ·柳希春 仁仲 眉岩 文節 원주 ·金有孚 元老 三友堂 원주 ·陳郁·曺守仁 縣監 원주 ·洪德仁 僉知 원주 ·姜克善 君實 醉竹 원주 ·金漢仁, 許忠吉 南溪 원주 ·沈連源 孟容 保庵 忠惠 원주 ·鄭宗榮 仁吉 恒齋 원주 ·權殷·朴壽春 景老 원주 ·金器 訓導 원주 ·朴蘭 泰叔 豊中 원주 ·李秀塢 仲實 원주 ·朴敢 彥擇 원주 ·鄭千齡 德遠 원주 ·朴漢老 景舒 원주 ·咸景忠 仲甫 원주 ·李塲 伯平 원주 ·李增 仲勉 원주 ·韓宗道, 李養忠 正純 원주 ·尹棐 景德 원주 ·沈銓 希明 원주 許汴 伯洪 원주 ·許淮 叔漢 원주 ·朴希年 邵老 원주 ·朴希載 德老 원주 ·朴士豪 僉知 원주 ·朴士傑 守正 원주 ·申漑 希實 원주 ·咸好問 思齋 원주 ·鄭滋 敏古 翰林 원주 ·鄭沼 仲涵 靑莎 원주 ·尹玉 東峯 원주 ·尹漑 汝沃 領相 원주 ·柳忠供·朴恬·朴希齡·朴士榮·洪彦平·金鉉·許磁 南仲 東涯 원주 ·徐應星 德樞進士 원주 ·李承幹 直卿 石湖 。 원주 金思齋門人 寒暄淵源 원주 , 鄭之雲 靜而 秋巒 원주 ·朴衡·朴用湛 而信 원주 ·鄭軾·柳仲良·柳公竹·黃彦忠。
鄭新堂門人 寒暄淵源 원주 朴英 子實 松堂 원주 ·朴耕 伯牛 。 원주 柳西峰門人 寒暄淵源 원주 , 李仲虎 風后 履素齋 원주 ·成悌元 子景 東洲 원주 ·禹彦謙 經歷 원주 ·吳謙 敬夫 二相 원주 ·朴應天·尙鵬南 得月子 원주 ·李湛 仲久 靜存 원주 ·鄭惟吉 吉元 林塘 원주 , 崔猿亭門人 寒暄淵源 원주 , 李井·李達亨。

<2권39>

 

李灘叟從遊李潤慶 兵使 浚慶兄 원주 ·李浚慶 東皐 。 원주 李灘叟門人 寒暄淵源 원주 ·盧守愼 寡悔, 蘇齋, 文懿 원주 ·康惟善 舟川 원주 ·沈鍵 正字 원주 ·徐敬德 可久 花潭 文康 원주 ·趙晟 養心堂 원주 ·尹鼎叔。
盧信古堂門人 一蠹淵源 원주 , 盧禛 子膺 玉溪 文孝 。 원주 李陰崖門人 朱溪君淵源 원주 , 金光頤。
金冲庵門人 安亭淵源 원주 , 金鳳祥 叅奉 。 원주 金頤眞門人 東泉淵源 원주 , 尹根壽 子固 月汀 원주 ·元豪 仲英 원주 ·李彦迪 復古 晦齋 文元 원주 ·中宗朝成均掌敎人, 柳崇祖 大司成 원주 ·尹卓 左尹 。 원주 盧蘇齋門人, 黃澳·白光勳 彰卿 玉峰 원주 ·盧大河·康復誠 明之竹磵 원주 ·沈喜壽 伯惧 一松 文貞 원주 ·金弘度。
徐花潭從遊, 閔箕 景悅 文景 원주 ·張可順 思齋 원주 ·禹南陽 處士 원주 ·李滉 景浩 退溪 文純 원주 ·曺植 楗仲 南溟 文貞 。 원주 徐花潭門人 灘叟淵源 원주 , 閔純 景初 杏村 원주 ·李之菡 馨伯 土亭 원주 ·朴枝華 守庵 원주 ·鍾城令 宗姓名球 원주 ·朴民獻 希正 瑟僴 원주 ·南彦經 時甫 東岡 원주 ·鄭復光 生員 원주 ·鄭復始 桂潭 원주 ·朴藜獻 直長 원주 ·朴淳 和叔 思庵 文忠 원주 ·許曄 太暉 草堂 원주 ·鄭介清 困齋 원주 ·崔般 處士 원주 ·金惠孫 郡守 원주 ·金漢麟 府使 원주 ·姜文佑·車軾 敬叔 郡守 원주 ·馬義慶·朴洲 鼎山 원주 ·洪仁祐 恥齋 원주 ·洪聖民 時可 拙翁 文貞 원주 ·李均·黃元孫·申湙·崔自陽·崔標地·金鎬 寺正 。 원주 梁學圃從遊趙光祖 靜庵 원주 ·金驥瑞 時見 敦睦齋 。 원주

<2권40>

梁學圃門人 知止堂淵源 원주 , 金景熹 用晦 芦溪 원주 ·梁應鼎 公爕 松川 。 원주 成聽松從遊, 李後白 季眞 靑蓮 원주 ·金繼輝 重晦 黃岡 원주 ·辛應時 君望 白麓 원주 ·李海壽 藥圃 원주 ·尹晛 松巒 원주 ·洪天民 栗亭 원주 ·李義健 峒隱 원주 ·高敬命 而順 霽峰 원주 ·權擘 習齋 원주 ·義寧正 宗姓, 名胤祖 원주 ·徐益 萬竹 원주 ·李廷馣 仲薰 忠穆 원주 ·白惟咸 承旨 원주 ·林億齡 大樹 石川 원주 ·南郊 孟夏 원주 ·鄭磏 士潔 北窓 。 원주 成聽松門人 靜庵淵源 원주 , 成渾 浩原 牛溪 文簡 원주 ·金行 長源 寺正 원주 ·郭希温·安馠 君晦 奉正 원주 ·朴宗文。
趙龍門門人 靜庵淵源 원주 , 李濟臣 夢應 清江 원주 ·沈守慶 希安 聽天 원주 ·陳旭·崔浩 判決事 。 원주 白休菴門人 靜菴淵源 원주 , 成渾 浩原 牛溪 원주 ·辛應時 君望 白麓 원주 ·趙堪 經歷 원주 ·愼齊賢·金行。
丁遊軒門人, 丁焰 晩軒 원주 ·李魯 正言 원주 ·權愉 縣監 。 원주 金河西門人 慕齋淵源 원주 , 卞成温 汝潤 壺岩 원주 ·奇孝諫 伯顧 錦江 원주 ·趙希文 月溪 원주 ·鄭澈 季涵 松江 文清 원주 ·吳健 德溪 원주 ·梁子徵 鼓岩 원주 ·南彦紀 考槃 원주 ·盧適 達大 원주 ·尹祁 艮輔 원주 ·申覺·徐台壽 大老進士 원주 ·金從虎 察訪先生子 원주 ·安璔·金齊顏 竹軒 원주 ·梁山海 茂弘 遯庵 。 원주 柳眉巖門人 慕齋淵源 원주 , 李好閔 孝彥 五峰 원주 ·李善慶·梁希尹·許筬 岳麓 원주 ·許篈 美叔 荷谷 원주 ·崔龍峰 生員。 원주 金三友堂門人 慕齋淵源 원주 , 洪聖民 時可 拙翁 원주 ·李海壽 大仲 藥圃 원주 ·黃廷式 仲洽 원주 ·黃廷彧 景文 芝川 원주 ·李㥈。
許南溪門人 慕齋淵源 원주 , 洪進 希吉 退村 원주 ·洪迪 太古, 荷衣 子進弟 원주 ·成詠·韓應寅·韓應箕·權斗文·權虎臣, 權俊臣, 李汝馪, 晉俊吉。

<2권41>

 

鄭秋巒門人 思齋淵源 원주 , 鄭之霖·安鴻·金殷輝。
朴松堂門人 新堂淵源 원주 , 從遊·李秀塢·李恒 恒之 一齋 원주 ·朴雲 龍庵 원주 ·金就成 眞樂堂 원주 ·金就文 久庵 就成弟 원주 ·申季誠 松溪 원주 ·朴紹 冶川 원주 ·朴諿 儒士 원주 ·崔應龍 松亭 원주 ·盧守誠 進士 원주 ·任守健·吉勉之。
李履素齋門人 西峰淵源 원주 , 金謹恭 惕庵 원주 ·徐起 孤靑 원주 ·李至男 瑞理 永膺 원주 ·柳祖訒 泛愛齋 원주 ·申煦 伯温 원주 ·錦川君 宗姓名玖 원주 ·順川君 名琯 錦川次弟 원주 ·朴應男 退庵 원주 ·朴應福 拙軒 원주 ·鄭芝衍 南峰 원주 ·朴漸 監司 원주 ·尹斗壽 子昻 梧陰 원주 ·李誠中 公著 坡谷 錦川弟 원주 ·崔滉 月潭 원주 ·李陽元 伯春 鷺渚 원주 ·奇大鼎 持平 원주 ·金有一·柳縝 郡守 。 원주 成東洲門人 西峰淵源 원주 , 成壽益·朴應順·宋應祥·宋應瑞·李廷顯·李應麒。
盧玉溪門人 信古堂淵源 원주 , 從遊·姜翼 介庵 。 원주 河孟寶·楊士衡 漁溪 。 원주 柳大成門人, 金應箕 伯春 屛庵 左相 。 원주 明宗朝童蒙掌敎人, 張崙 敎官 원주 ·俞任 敎官 원주 ·朴洲 鼎山 。 원주 尹月汀門人 頤眞淵源 원주 , 金尙憲 叔度 清陰 文正 원주 ·趙翼 飛卿 浦渚 文孝 원주 ·趙絅 日章 龍洲 文簡 원주 ·李廷龜 聖徵 月沙 文忠 원주 ·姜澯 德輝 監司 원주 ·徐渻 玄記 藥峯 忠肅 。 원주 李晦齋·從遊, 曺漢輔 忘機 원주 ·趙晟 伯陽 養心 원주 ·尹鼎·徐敬德 可久 花潭 文康 원주 ·孫仲暾 忘齋 。 원주 李晦齋門人 頤眞淵源 원주 , 權德麟 郡守 원주 ·金磁·安慶昌·李全仁 潜溪先生子。 원주

<2권42>

李退溪門人 花潭 私淑 원주 ·從遊, 李之菡 土亭 원주 ·沈鎬 逸齋 원주 ·鄭逑 道可 寒岡 文穆 원주 ·奇大升 明彥 高峯 文憲 원주 ·趙穆 士敬 月川 원주 ·黃俊良 仲擧 錦溪 원주 ·南致利·權好文 章仲 松岩 원주 ·李德弘 宏仲 艮齋 원주 ·李咸亨 平叔 원주 ·鄭惟一 子仲 文峯 원주 ·金誠一 士純, 鶴峯, 文忠 원주 ·柳成龍 而見, 西崖, 文忠 원주 ·禹性傳 景善 秋淵 원주 ·金就礪 而清 靜庵 원주 ·申沃 啓叔 원주 ·具鳳齡 景瑞 栢潭 원주 ·柳仲淹 希範 원주 ·柳雲龍 應見 謙庵 원주 ·權宇 定甫 松巢 원주 ·權春蘭 彥晦 晦谷 원주 ·朴光前 顯哉 竹川 원주 ·卞成振 汝玉 仁川 원주 ·李叔樑 大用 梅岩 원주 ·金富仁 伯榮 山南 원주 ·金富信 可行 養正 원주 ·金富倫 敦叙 雪月 원주 ·金富弼 彥昌 後凋 원주 ·金富儀 愼仲 挹清 원주 ·金坼 止叙 北崖 원주 ·琴應浹 浹之 日休 원주 ·琴應壎 壎之 勉進 원주 ·琴蘭秀 聞遠 惺齋 원주 ·金守一 汝友龜峯 鶴峰兄 원주 ·金八元 舜擧 芝山 원주 ·裵三益 汝友臨淵 원주 ·丁胤禧 景錫 원주 ·鄭崑壽 汝仁 忠翼 원주 ·金命元 應順 酒隱 忠翼 원주 ·金曄 子昻 夢村 원주 ·柳根 晦夫 西坰 원주 ·趙振 判書 원주 ·宋言愼 寡尤 壺峰 원주 ·李養中 公浩 西川 원주 ·李國弼 棐彥 원주 ·具賛祿·鄭士誠 子明 芝軒 원주 ·金隆 道盛 勿岩 원주 ·金希禹·金泰廷 監司 원주 ·南弼文 操菴 원주 ·尹欽中, 柳希魯·洪胖·李淳·李達 副正 원주 ·李天機·李㠐 先生侄 원주 ·李安道 逢原 蒙齋 원주 ·吳守謙 春塘 원주 ·權大器·李命旭·金㙉 九峰 원주 ·金箕報 文卿 원주 ·南夢鼈·金樂春·金德龍·金▣(土+勤) 栢菴 원주 ·琴輔 梅軒 원주 ·金生溟·朴士熹 默軒 원주 ·李元承·李宓 先生侄 원주 ·李寗·曺好益 士友 芝山 원주 ·崔雲遇 香湖 원주 ·金守雍 棄齋 원주 ·閔應箕·李山海 汝受 鵝溪 원주 ·鄭琢 子精 藥圃 貞簡 원주 ·金宇顒 肅夫 東岡 원주 ·李湛 仲久 靜存 원주 ·沈喜壽。
曺南溟從遊, 金大有 天祐 三足 원주 ·李希顏 黃江 원주 ·裵紳 洛川 원주 安演 頤應 원주 ·洪仁祐 應吉 恥齋 원주 ·成運 健叔 大谷 。 원주

<2권43>

曺南溟門人 花潭淵源 원주 , 吳健 子剛 德溪 원주 ·河沆 覺齋 원주 ·河洛 喚惺齋 沆弟 원주 ·柳宗智 湖溪 원주 ·趙宗道 大笑齋 원주 ·郭趐 禮谷 원주 ·李濟臣 陶谷 원주 ·鄭琢 藥圃 원주 ·河天樹 解叔 원주 ·金宇顒 肅夫 東岡 원주 ·崔永慶 守愚 원주 ·郭再祐 忘憂堂 원주 ·陳克敬 栢谷 원주 ·梁弘澍 西溪 원주 ·金孝元 仁伯 省菴 원주 ·朴齊仁 靜默 원주 ·李淡 雲塘 원주 ·朴澯 雪峰 원주 ·權文仁 正字 원주 ·李光友 竹溪 원주 ·權世倫 生員 원주 ·愼公弼 士勳 원주 ·孫天祐 撫松軒 원주 ·李天慶 日新 원주 ·李光坤 厚仲 원주 ·盧錞 子協 원주 ·成汝信 浮査 원주 ·李大期 正郞 원주 ·慶安令 宗姓名瑤 원주 ·河晉寳 司諫 원주 ·鄭構 縣監 원주 ·鄭仁弘 領相 원주 ·河應圖 縣監 원주 ·具忭 牧使 원주 ·俞大修 牧使 원주 ·李瀞 牧使 원주 ·文益成 玉洞 원주 ·林希茂 郡守 원주 ·李喜生 進士 원주 ·金信玉·李俊良 子修 信菴 원주 ·房應賢 沙溪 。 원주 李土亭門人 花潭淵源 원주 , 李山甫 鳴谷堂先生子 원주 ·宋齊民 海狂 원주 ·徐致武·朴春茂 察訪 원주 ·金應天 持平 。 원주 朴守庵門人 花潭淵源 원주 , 鄭碏 敎官 원주 ·李基稷·李基卨 蓮峰堂 基稷弟 원주 ·李大建 進士梧村 원주 ·李德胤 西溪 원주 ·許喬。
閔杏村門人 花潭淵源 원주 , 韓百謙 久庵 원주 ·洪履祥 慕堂 원주 ·洪可臣 晩全 文莊 。 원주 洪鸞祥, 文夢轅 喚醒 원주 ·李愼儀 石灘 원주 ·李惟侃 同樞 원주 ·金榮一·金昌一·洪瑄 木翁 。 원주 朴瑟僴門人 花漂淵源 원주 , 韓孝胤 郡守 。 원주 朴思菴門人 花潭淵源 원주 , 宋大立·李春元 元吉 원주 ·鄭介清。
朴鼎山門人 花潭淵源 원주 , 李珥 叔獻 栗谷 文成 원주 ·金廷睦·金廷昨·李愼誠·李貞民·李命麟·李命▣(犭+比)·李秀增·尹三聘·沈憬·成灠 聽松 。 원주

<2권44>

金蘆溪從遊, 宋麟壽 眉叟 圭庵 원주 ·梁應鼎 公燮 松川 원주 ·鄭滋 翊仙 翰林 원주 ·李萬榮 盛卿 竹陰 원주 ·徐應星 德樞進士。 원주 金蘆溪門人 學圃淵源 원주 , 金弘宇 伯容 佐郞 원주 ·安祉 大受 隱士堂 원주 ·吳希吉 韜庵 원주 ·金德宇 彥容 同知 원주 ·曺仁淑 淑之 叅奉 원주 ·徐弘涉·金仁宇 季容 訓導 원주 ·崔宗屹 叅奉 원주 ·徐滾 浩源 忠孝 원주 ·金泰宇 士容進士 원주 , 柳慶元 善長 主簿 원주 ·吳益昌 裕遠 沙湖 원주 ·金彦希 汝聖 滄決 원주 ·金麒壽 仁夫 叅奉 。 원주 成牛溪門人 聽松淵源 원주 , 金集 士剛 愼獨 원주 ·鄭曄 時晦 守夢 원주 ·李貴 玉汝 默齋 원주 ·吳允謙 士益 秋灘 忠貞 원주 ·黃愼 思叔 秋浦 文敏 원주 ·趙憲 汝式 重峯 文烈 원주 ·金尙容 景輝 仙源 文忠 원주 ·金權 而中 拙灘 원주 ·閔伯仁 苔泉堂 景清 원주 ·趙守倫 景止 風玉 원주 ·宋英耉 飄翁 원주 ·崔起南, 安邦俊 士牛 彥山 원주 ·姜沆 太初 睡隱 원주 ·李壽俊 台徵 志範 원주 ·李命俊 昌期 潜窩 원주 ·李春英 實之 體素齋 원주 ·趙存性 守初 龍湖 원주 ·南撥 公濟 華隱 원주 ·申應矩 子方 晩退 원주 ·申敏一 化堂 원주 ·鄭起溟 華谷 원주 ·宋淵 子深 芚菴 원주 ·尹烇 後村 忠憲 원주 ·李時白 釣岩 忠翼 원주 ·李郁 郡守 원주 ·沈宗敏 晴灣 원주 ·梁山璹 會元 佐郞 원주 ·金應會 別座 원주 ·權克中 楓潭 원주 ·曺健 士剛 白墅 원주 ·李大邦 奉事 원주 ·姜晉暉 子舒 원주 ·姜晉升 單亭 원주 ·邊慶胤 子餘 紫霞 원주 ·裵弘重 慕庵 원주 ·韓孝祥 生員 원주 ·金大賢 縣監 원주 ·尹民一 都正 원주 ·金宗儒·金▣(湯/土)·金興宇 生員 원주 ·魚夢麟 敎官 원주 ·俞大逸 德休 慵隱 원주 ·韓鳴 東潭 원주 ·李楘 文伯 松郊 원주 ·金嶷 南谷 원주 ·尹炷 弼善 원주 ·李復 景淳 원주 ·朴鎭壽 耆叔 원주 ·朴鐵壽·尹昕 陶隱 원주 ·尹▣(日+耳)·尹暄 次野 白沙 원주 ·吳億齡·吳德齡 晩翠 원주 ·宋眞耉 監司 원주 ·金孝俊·韓瓘 僉樞 원주 ·安邵·鄭宗溟 士朝 府使 원주 ·李進冕·俞大進 新浦 원주 ·尹民獻 叅議 원주 ·沈宗悅 士訥 郡守 원주 ·申得中·洪茂績 白石 원주 ·崔鑑·楊塤·具撥 子虛 원주 ·柳敬元 伸叔 원주 ·黃僴 縣監 원주 ·白海民·南宮蓂 別座 원주 ·尹仲鼎·白孝民 景述 원주 ·趙▣(金+處)·朴彦

<2권45>

哲·趙鑑·李大奎·趙鐸·李靈瑞·李光春·金樞·安石·金㙔·金子祥·高三養 進士 원주 ·安鍵·金君述·尹履行·俞應峋·柳復春·柳淹 希文 원주 ·呂啓吉 德夫 春江 원주 ·金玄度 必之 認齋 원주 ·崔繼祖·李恰·成汝學 學顏 鶴川 원주 ·金敏行 孤崖 원주 ·李馥 坡谷 원주 ·朴璘 靑蘿 원주 ·李▣(山+慶) 子瞻 원주 ·朴榮·辛慶孝 進士 원주 ·河虎坤 僉樞 원주 ·柳孝健·趙敬道 僉正 원주 ·李景震 叅奉 원주 ·柳滉 眞愚 원주 ·朴孝誠 府使 원주 ·趙浩 深源 원주 ·趙鍵·趙鉞 佐郞 원주 ·尹時 文翼公 원주 ·尹溭·洪靌 豊寧君 원주 ·李光後 縣監 원주 ·柳拱辰 叅議 원주 ·金偉男 樂山 원주 ·崔瀣·柳潤根 四益 원주 ·尹昉 可晦 穉川 원주 沈宗直 士敬 竹西 원주 ·韓嶠 士昂 東潭 원주 ·安和·李愼誠 奉事 원주 ·成文濬 滄浪 。 원주 李一齋門人 松堂淵源 원주 , 金千鎰 士重 健齋 文烈 원주 ·韓胤明 桐庵 원주 ·柳夢鶴 應瑞 원주 ·金坫 叅奉 梅堂 원주 ·宋琳·宋公弼·柳承春·金齊閔 寺正 鰲峰 원주 ·邊士貞 桃灘 원주 ·申漑·安璜·柳埏·奇孝諫 錦江 원주 ·柳忍·趙長雲 徐克弘·安昌國·柳洪源·趙長熙·安義 別提 勿齋 원주 ·柳永謙·金後進 直長 遠慕 원주 ·尹瓘·金大立 別提 月峯 원주 ·柳永謹·孫弘祿 別提 寒溪 원주 ·金現·金承緖 進士龍岩 원주 ·金見龍·尹根·金克寅·鄭彦悌·吳玠。
奇錦江門人 河西淵源 원주 , 吳希吉 鞱庵 。 원주 鄭松江門人 河西淵源 원주 , 成輅 石田 원주 ·權鞸 石洲 원주 ·李德彦 司諫 。 원주 徐孤青門人 履素淵源 원주 , 朴大·李德胤 西峰 。 원주 朴龍庵從遊, 金振宗 新齋 。 원주

<2권46>

金楊庵從遊·金繼·郭說·朴仁壽。
柳泛愛門人 履素淵源 원주 , 李廷馥 德薰 監司 원주 ·朴東望·朴東亮 子龍 南郭 。 원주 順川君門人 履素淵源 원주 , 鄭度。
尹梧陰門人 履素淵源 원주 , 金弘宇 伯容 白谷 원주 金清陰門人 月汀淵源 원주 , 趙錫胤 胤之·樂靜, 文孝 원주 ·趙復陽 仲初 松谷 원주 ·洪命夏 大而 沂川 원주 ·朴世采 和叔·玄石·文純 원주 ·尹舜擧 童土 원주 ·尹商擧 奉事 원주 ·申翊全 東江 원주 ·李殷相 說卿 東里 원주 ·曺漢英 守而 叅判 원주 ·柳時定 府使 원주 ·李挺岳·趙逢源·鄭榮漢·金壽增 延之 谷雲 원주 ·金壽恒 久之 文谷 원주 ·李文祥 進士 원주 ·金壽興 起之 退憂 원주 ·金得元 乃乾翫物 원주 趙浦渚門人 月汀淵源 원주 , 趙克善·俞棨 武仲 市南 원주 ·慶大浚 洗馬 원주 ·任㬇 生員 원주 ·曺舜弼 叅奉 원주 ·趙惟一 參奉 원주 趙養心堂門人 晦齋 私淑 원주 , 朴啓賢 君沃 灌園 원주 ·柳門·柳英門·鄭彦 任敎官門人, 尹國馨 達村 원주 鄭寒岡從遊, 李瀷 艮翁 원주 ·李碩慶 德岩 원주 ·金沔 松庵 원주 鄭寒崗門人 退溪淵源 원주 , 張顯光 重晦·旅軒·文康 원주 ·徐思遠 樂齋 원주 ·黃宗海 朽淺 원주 ·文緯 純夫 茅溪 원주 ·孫處訥 慕堂 원주 ·李原慶 畏齋 원주 ·呂大老 鑑湖 원주 ·宋遠器 壺軒 원주 ·郭趁 稚亭 원주 ·崔晛 監司 원주 ·李璣玉 竇岩 원주 ·任屹 叅奉 。 원주 金準 洗馬 원주 ·吳長 正言 원주 ·蔡夢▣(合+見) 投庵 원주 ·鄭錘·裵尙益 都事 원주 ·李潤雨 茂伯 石潭 원주 ·李彦英 浣亭 원주 ·李

<2권47>

▣(竹/舒) 東湖 원주 ·崔恒慶 竹軒 원주 ·金輳 正郞 원주 ·李天培·朴明胤 査翁 원주 ·李天封 白川 원주 ·裵尙龍 藤岩 원주 ·李蘭貴, 李堉 遠心堂 원주 ·李道孜 復齋 원주 ·李濯·呂燦·郭衞國 縣監 원주 ·宋光廷 正郞 원주 ·宋光啓 正郞 원주 ·李見龍 縣監 원주 ·朴羾衢 師傅 원주 ·都應·兪呂焯 都事 원주 ·金廷堅 菊園 원주 ·李命龍·朴明溥 叅判 원주 ·李安訥 東岳 원주 ·許穆 和甫 眉叟 원주 ·柳袗 修岩 원주 ·金應祖 鶴沙 원주 ·鄭四震 洗馬 원주 ·趙任道 澗松 원주 ·申悅道 掌令 원주 ·盧亨弼 師傅 원주 ·張慶遇 晩悔堂 원주 ·金慶長·李繽 學稼 원주 ·沈潗 恥軒 원주 ·沈之澤 子固 陋庵 원주 ·李成己 筆齋 원주 ·權泰一 藏谷 원주 ·康復修 清之 원주 ·李宜潤 無添堂 원주 ·李道由 通政 원주 ·李道輔 溢庵 원주 ·鄭蘊 桐溪 원주 ·李芬 嘿軒 원주 ·李道長 司諫 원주 ·睦大欽 苯山 원주 ·李厚慶 思齋 원주 ·河天樹·朴惺·柳宗智·金沔 志海 松庵 원주 ·崔晛。
奇高峰門人 退溪淵源 원주 , 鄭雲龍 霞谷 원주 ·高敬命 霽峰 忠烈 。 원주 趙月川門人 退溪淵源 원주 , 金中。
權松庵門人 退溪淵源 원주 , 鄭淵·權任·柳紀·安汝沃·奉孜意。
柳西崖門人 退溪淵源 원주 , 鄭經世 景任 愚伏 원주 ·金湜 忠簡 원주 ·李埈 蒼石 원주 ·金弘徵 省元 원주 ·金應祖 哂軒 원주 ·金延祖 正字 원주 ·金奉祖 持平 원주 ·柳袗 修岩先生子。 원주 朴竹川門人 退溪淵源 원주 , 宣達華。
吳德溪門人 南溟淵源 원주 , 吳僴 先生從弟。 원주 裵洛川門人 南溟淵源 원주 , 郭趁 存齋 원주 ·朴惺 大庵 원주 ·許寔 僉樞 。 원주

<2권48>

洪恥 南溟 私淑 원주 從遊·韓濩 石峯 원주 ·韓胤明 桐庵 원주 ·林薫 仲成 葛川 원주 ·林芸 瞻慕堂 원주 ·金範 後海 원주 ·劉好仁 天放翁 。 원주 成大谷門人 南溟淵源 원주 , 成允諧 和仲 松谷 원주 ·林悌 子順 白湖 。 원주 李栗谷從遊·宋翼弼 雲長 龜峯 원주 ·宋翰弼 季鷹, 雲谷 龜峯弟 원주 ·安敏學 楓崖 원주 ·柳贇 孤山 원주 ·成允諧 和仲 松谷 원주 ·朴光玉 景瑗 懷齋 원주 ·朴嗣宗 公繼 挹清 원주 ·鄭磏 士潔 北窓 원주 ·李夢奎 天休堂 원주 ·曺好益 芝山 원주 ·康復粹 清之 원주 ·禹伏龍 東溪 원주 ·徐仁元 監司 원주 ·許鏛 九一軒 원주 ·宋暄·朴宜 監役 원주 ·慶時經 別提 원주 ·具仁 監役 원주 ·朴知誠 潜冶 원주 ·洪翼文 生員 원주 ·權諰 思誠 炭翁 원주 ·崔蘊·李義健 峒隱 원주 ·尹根壽 月汀 。 원주 李栗谷門人 鼎山淵源 원주 , 金長生 希元, 沙溪, 文元 원주 ·趙憲 汝式, 重峯, 文烈 원주 ·鄭曄 時晦, 守夢, 忠肅 원주 ·李貴 玉汝, 默齋, 忠定 원주 ·尹昉 文翼 원주 ·李廷立 子政, 溪隱, 文僖 원주 ·崔澱 彥沉, 楊浦, 忠定 원주 ·崔濬 滄浪 文翼 원주 ·崔渙 秋浦 원주 ·崔湑·崔洛·洪千璟 松磵 원주 ·尹耆献 長貧 원주 ·邊以中 望庵 원주 ·宋爾昌 福汝 清坐窩 원주 ·李嶸 仲高 奉敎 원주 ·尹東老 水心齋 원주 ·成灠 聽竹 원주 ·韓嶠 子仰 원주 ·李培達 達天 원주 ·任鐸 直長 원주 ·洪龜祥·洪致祥·朴汝龍 舜卿 松崖 원주 ·金振綱 子長 원주 ·吳希舜 孝天 원주 ·洪錫胤 進士 원주 ·趙光玹 縣令 원주 ·金光運 希▣(亻+肅) 원주 ·姜海 汝容 원주 ·許克諶·許克誠·吳潔·奉聖民 監察 원주 ·金義貞·李成奉·李通 郡守 원주 ·尹聃 監察 원주 ·李潑 景涵 南溪 원주 ·安天瑞 應休 원주 ·沈禮謙 府使 원주 ·金興宇 叅奉 원주 ·趙曮·禹思仁·趙德容 別提 원주 ·李愼厚 子能 원주 ·李師善·尹孝献·沈友明·許昕·尹三起 監察 원주 ·金光佑 叔甫 원주 ·姜宗胤·姜德胤 奉事 원주 ·安琠 蟠松 원주 ·安興宗 士顯 원주 ·安光宗 生員 원주 ·趙光瑗

<2권49>

進士 원주 ·李璧·李絡 牧使 원주 ·金屹 士昻 원주 ·姜瑫 都事 원주 ·尹旭·金載·李康濟·李櫓 判官 원주 ·吳夢身·李德源·沈友恭·金景一·李純仁·李景恒 叅奉 원주 ·唐津守 宗姓名琮 원주 ·盧學番 副正 원주 ·許雨 直長 원주 ·姜燦 叅議 원주 ·徐渻 玄紀, 藥峰, 忠肅 원주 ·李希參·李廷麒 祥甫 竹友堂 원주 ·尹興·金洛瑞 進士 원주 ·柳舜翼 菁川 원주 ·李景震 誠甫 叅奉 원주 ·李成春·許昭 進士 원주 ·尹興門·李有慶 牧使 원주 ·趙嶙·俞瀣 直長 원주 ·李軫 牧使 원주 ·李質純 叅奉 원주 ·劉好仁 克己 山堂 원주 ·李晟·尹民献·金權 而中 拙灘 원주 ·安應休·松津守 宗姓, 名瑾, 琮弟。 원주 吳秋灘門人 牛溪淵源 원주 , 吳廷濟·具鳳瑞。
黃秋浦門人 牛溪淵源 원주 , 金友淹·沈世命。
趙風玉軒門人 牛溪淵源 원주 , 趙涑 滄江先生子 원주 ·李聖淵。
鄭愚伏門人 西崖淵源 원주 , 李文圭·洪鎭一·申尙哲。
金沙溪從遊, 宋象賢 泉谷 忠烈 원주 ·申▣(氵+昱) 用拙齋 원주 ·洪滂 芝溪 원주 ·朴東賢 活塘 원주 ·趙希逸 竹陰 원주 ·崔命龍 石溪 원주 ·李敬輿 白江 文貞 원주 ·吳允諧 晩雲 。 원주 金沙溪門人 栗谷淵源 원주 , 金集 士剛, 愼獨, 文敬 원주 ·宋時烈 英甫, 尤庵, 文正 원주 ·宋浚吉 明甫, 同春, 文正 원주 ·柳楫 用汝 白石 원주 ·李時稷 忠穆 원주 ·宋時榮 野隱 원주 ·金元亮 麋村 원주 ·閔崇 楊湖 원주 ·張維 谿谷 文忠 원주 ·鄭弘溟 子容, 畸庵, 文貞 원주 ·姜碩期 月塘 文貞 원주 ·申景禛 君受 忠翼 원주 ·具仁垕 仲載 忠武 원주 ·李眞源 士深 忠貞 원주 ·慶林君 宗姓名淀 원주 ·李尙逸 龍岩 원주 ·李有謙 叅議 원주 ·李廷祥 月崗 원주 ·尹元擧 龍西 원주 ·李德洙 怡愉 원주 ·李景穆 孝敏 원주 ·崔鳴吉 遲川 文忠 원주 ·李惟泰 草廬 원주 ·柳泰亨

<2권50>

應運 佐郞 원주 ·趙平 衡仲 洗馬 원주 ·任義伯 今是堂 원주 ·李公誨 誨之 敎授 원주 ·李尙馨 德先 天默齋 원주 ·閔後蹇 孝胤 正郞 원주 ·李楘 文伯 大憲 원주 ·金灝 止彥 郡守 원주 ·宋國澤 澤之 四友堂 원주 ·李榮仁 郡守 원주 ·李景奭 白軒 원주 ·洪百順 縣令 원주 ·梁源 佐郞 원주 ·尹弘國 護軍 원주 ·朴炳 牧使 원주 ·曺行立 兌湖 원주 ·金海壽 深源 縣監 원주 ·金東準 西式 鳳谷 원주 ·柳東輝 士明 都事 원주 ·金秀南 汝一 正郞 원주 ·李恒吉 子久 叅奉 원주 ·裵承祖 汝述 원주 ·金峻業 汝修 叅奉 원주 ·金伯生 汝仁進士 원주 ·金敬霖 君望 司諫 원주 ·閔興基 彥立 원주 ·趙慶起 德休正 원주 ·李咸吉 善宬 원주 ·趙尙禹 夏卿 時庵 원주 ·田穡 頴叔 원주 ·李峴 士瞻 원주 ·卞士浩 伯源 원주 ·韓成業 就雨 원주 ·金樟 用汝 원주 ·金鑑 子虛 원주 ·李琇 伯獻 원주 ·李垕 土厚 원주 ·金宗吉 立甫 원주 ·李屹 子嵈 원주 ·金滾 省谷 원주 ·黃沔 察訪 원주 ·姜怡 縣監 원주 ·郭鉉 三安 원주 ·李得志 進士 원주 ·李㤿 進士 원주 ·李以恂·李復吉 亨彥 都事 원주 ·趙完堤 德勤 奉事 원주 ·柳支厦 任之 원주 ·柳成厦 就之 원주 ·趙完培 德厚 원주 ·金斯立 立之生員 원주 ·金廷望 叔遇 縣監 원주 ·閔榮達 伯仁進士 원주 ·柳必昌 德甫 원주 ·崔爾立 君仰 원주 ·金自鍊 而精 원주 ·金坤寶 南重進士 원주 ·閔應蹇·洪思道·李時振·具瑩 瑩耿 竹牖 원주 ·孟世衡 霞谷 원주 ·林㙔 東里 원주 ·李榮先 叅奉 원주 ·李渫 汝精 원주 ·金自鍵 而啓 원주 ·金爰立 相之 원주 ·崔愼 謹甫 원주 ·李畯成 祥老 원주 ·柳時發 養叔 원주 ·成以健 士強 원주 ·崔▣(處+力) 而敏 원주 ·南山辟 子仰 원주 ·金好信 誠伯 원주 ·朴大亨 達夫 원주 ·李蓂 應堯 원주 ·姜宗孝 行源 원주 ·金自鑌 而重 원주 ·梁漸 會源 원주 ·李希芳 時雨 원주 ·金自南 汝責 원주 ·李舵 濟叔 원주 ·安訥 敏甫 원주 ·金廷泰 宗予 원주 ·李希英 怡實 원주 ·柳定民 子安進士 원주 ·鄭光源 誠溥 원주 ·楊震行 晋如 원주 ·金欖 眞汝 원주 ·金桂 秀汝 원주 ·權順昌 性之 同樞 원주 ·林廷老 懶學 원주 ·張次周 文哉 縣監 원주 ·羅文郁 賛夫 원주 ·金巘·曺漢英·金汝聲 遠而 원주 ·朴琮 子美 丹丘子 원주 ·柳玶 和甫 松庵 원주 ·李培昌 棟樂 원주 ·鄭叔周 佐郞 원주 ·具宏 羣山 。 원주

<2권51>

張旅軒從遊·鄭經世 愚伏 文莊 원주 ·郭再佑 忘憂堂 원주 ·徐思遠 樂齋 。 원주 張旅軒門人 寒崗淵源 원주 ·許穆 眉叟 文貞 원주 ·金應祖 鶴沙 叅判 원주 ·金湜 沙西 文毅 원주 ·柳袗 修庵 持平 원주 ·鄭四震 守庵 洗馬 원주 ·趙任道 澗松 持平 원주 ·盧亨弼 雲堤 師傅 원주 ·申悅道 懶齋 掌令 원주 ·金慶長 龜庵 원주 ·李▣(糸+宙) 學稼 원주 ·鄭克後 雙峯 師傅 원주 ·張乃範 克明堂 원주 ·權濤 東溪 叅議 원주 ·盧景任 敬庵 校理 원주 ·金烋 敬窩 원주 ·張慶遇 晩悔堂 叅奉 원주 ·李道長 應敎 원주 ·趙尙禹 時庵 원주 ·呂爾載 判書 원주 ·金羾 浴潭 원주 ·申佑德 直正 원주 ·呂爾載 提學 원주 ·蔡楘 栢浦 佐郞 원주 ·朴吉應 叅判 원주 ·李民寏 紫巖 叅判 원주 ·金瀁 陽灘 원주 ·張泉 南坡 叅奉 원주 ·許厚 觀雪 南臺 원주 ·盧亨運 素庵 원주 ·申達道 修撰 원주 ·柳□ 人皆石山 원주 ·安應昌·洪履一 府使 원주 ·姜大遂 大諫 원주 ·金光繼 敎官 원주 ·姜弘重 府使 원주 ·徐強仁 文岩 원주 ·鮮于浹 遯齋 원주 ·鄭四象 愚軒 원주 ·李善述 縣監 원주 ·李道昌 別座 원주 ·李廷機 慢翁 牧使 원주 ·呂孝曾 府使 원주 ·韓夢參 釣隱 원주 ·李廷相 蓴湖 郡守 원주 ·金厦樑 灘翁 持平 원주 ·張以兪 芥翁 원주 ·申起漢 縣監 원주 ·李之英 記注官 원주 ·申楫 司果 원주 ·金友益 正郞 원주 ·權益鄰 琴谷 원주 ·李惟泰 草廬 원주 ·李皖 叅奉 원주 ·鄭四勿·金益精·柳時稷·申泳道·孟世衡·具致用·成櫟 府使 원주 ·鄭好仁·崔晛 忍齋 監司 원주 ·朴敏修·任景尹·裵尙龍 藤庵 。 원주 趙重峰門人 栗谷淵源 원주 , 尹莒光·閔昱·朴廷虎·金節·全忠男·朴士振·全承業·金善復 以上, 皆錦山戰亡 원주 ·卜應吉 錦山戰亡 원주 ·申慶一 錦山戰亡 원주 ·徐應時 錦山戰亡 원주 ·尹汝翼 錦山戰亡 원주 ·金聲遠 錦山戰亡 원주 ·朴渾 錦山戰亡 원주 ·趙敬男 錦山戰亡 원주 ·高明遠 錦山戰亡 원주 ·姜夢祖 錦山戰亡 원주 ·金䈁 五者翁 원주 ·朴事三 安靜 원주 ·趙完基 先生子 원주 ·李宗彦·李宗喆·梁千會·朴允明·朴景修·崔重龍·崔虎 文伯戰亡 원주 ·許尙徵·金武哲·梁山璹。

<2권52>

 

鄭守夢門人 栗谷淵源 원주 ·申翊聖 君奭 東淮 원주 ·李明漢 天章 白洲 원주 ·羅萬甲 鷗浦 。 원주 金愼獨門人 沙溪淵源 원주 ·尹宣擧 吉甫 美村 원주 ·兪棨 武仲 市南 원주 ·尹文擧 汝望 石湖 원주 ·鮮于浹 遯齋 원주 ·洪錫 遜愚 원주 ·申炅 華隱 원주 ·權克中 靑霞子 원주 ·李文載 石洞 원주 ·李善基 郡守 원주 ·鄭基▣(后+旁)·韓聖臣·李燝 察訪 원주 ·李商雨 郡守 원주 ·趙錫祿 郡守 원주 ·趙寅·朴浩彦·李惟澤 縣監 원주 ·李惟孚 叅奉 원주 ·李惟益 遯谷 원주 ·李惟謙 縣監 원주 ·崔碩儒 縣監 원주 ·崔碩英 府使 원주 ·韓聖翼 判官 원주 ·金之白 敎官 원주 ·李翔 拙愚 원주 ·崔瑞琳 寬谷 원주 ·金南式 崇禎處士。 원주 宋同春 沙溪淵源 원주 從遊·宋時烈·兪棨。
宋同春門人, 閔維重 持叔, 芚村, 文貞 원주 ·宋奎濂 道源 霽月 원주 ·黃世禎 敎官 霽谷 원주 ·李翔 叅判 拙愚 원주 ·洪得箕 益平尉 원주 ·趙相愚 子直, 孝憲, 東岡 원주 ·洪得禹 叔範 원주 ·李遇輝 縣監 君晦 원주 ·宋殷錫 仁一 縣監 원주 ·羅良佐 顯道 원주 ·羅碩佐·金昌錫 都正 원주 ·南九萬 領相 藥泉 원주 ·柳尙運 領相 원주 ·宋奎淵 縣監 원주 ·宋基厚 持平 원주 ·崔世慶 善餘 원주 ·金震粹 郡守 원주 ·李相吉 叅奉 원주 ·李德老 察訪 원주 ·宋奎祥 生員 원주 ·宋奎昌 進士 원주 ·金東弼 進士 원주 ·金守煥 進士 원주 ·吳益升 順之 원주 ·申永植 伯久 원주 ·李䪹·鄭碩望·李楶·李頔·朴世振·李世徵 子誨 원주 ·朴世輝·宋尙敏 石谷 원주 ·高晦 侍直 원주 ·安相億·柳長民·李思永 縣監 원주 ·尹徵周 文甫進士 원주 ·朴世樑 縣監 원주 ·申啓澄 縣監 원주 ·權讓 都事 원주 ·宋得弼·郭鳴漢·閔任重·宋奎輝·朴盛一·朴善一·韓誨·宋有徵·宋道新·李德運·宋奎明·韓詗·李䪻·洪友顏·宋有安·任震昉·宋夏洛·宋炳奎·金得泗·趙鳴

<2권53>

世·李慶麟·宋奎炫·宋夏績 監役 원주 ·林遇箕·李慶鳳·延萬運·李德淵·宋來陽·宋有文·徐鳴遠·成老童·宋奎臨·朴思齊·郭儀漢·宋奎文·宋奎瞻·郭宗榦·宋有濟·金益秋·宋炳憲·閔呂重·韓聖輔 縣令 원주 ·金昱·潘啓榮·韓誡·李頲·李顧·閔元重·柳新·安世徵·閔泰重 進士 원주 ·宋炳賢 賢之 원주 ·宋奎運 進士 원주 ·宋後謙 進士 원주 ·李慶龜 叔徵 원주 ·南宮垣 叅奉 원주 ·宋夏圭·宋奎瑞 生員 원주 ·朴爾宗·宋溢 生員 원주 ·徐振遠 生員 원주 ·李枰 生員 원주 ·朴潾 生員 원주 ·宋光枓 監役 원주 ·宋虎吉·宋孝吉·宋光彬·宋光材·宋光柱·張文炯 君郁 원주 ·申晟 都事 원주 ·宋時燾 府使 원주 ·李橝 敎官 원주 ·宋時杰 郡守 원주 ·李尙翼 敎官 원주 ·張益炯·朴世輝 子晦 원주 ·朱棐·朱南老·尹搏·李尙賢。
宋尤菴從遊·金集 士剛 愼獨 원주 ·宋浚吉 明甫 同春 원주 ·朴世采 和叔 玄石 원주 ·金益勳 懋叔 光南 원주 ·金萬基 永叔 瑞石 원주 ·金壽增 延之 谷雲 원주 ·金慶餘 由善 松崖 원주 ·鄭瀁 晏叔 抱翁 원주 ·金壽恒 久之 文谷 원주 ·金壽興 起之 退憂堂 원주 ·洪▣(香+見) 正郞 원주 ·朴光後 士述 安村 원주 ·金昌協 仲和 農巖 。 원주 宋尤庵門人 沙溪淵源 원주 , 權尙夏 致道, 遂庵, 之純 원주 ·閔鼎重 大受, 老峯, 文忠 원주 ·李端夏 季周 畏齋 원주 ·李箕洪 汝九 直齋 원주 ·李選 擇之 芝湖 원주 ·李秀彦 美叔 聾溪 원주 ·李喜朝 同甫, 芝村, 文簡 원주 ·鄭澔 仲淳 丈岩 원주 ·宋尙敏 石谷 원주 ·朴世徵 子久 顏谷 원주 ·趙根 侈亨 損庵 원주 ·李橝 廈卿 石江 원주 ·具時經 濟伯 縣監 원주 ·延㝡績 茂卿 癡堂 원주 ·俞明胤 胤甫 正郞 원주 ·金益煦 仲明 正字 원주 ·金震粹 晦叔 縣監 원주 ·李碩堅 聖彌 郡守 원주 ·宋光栻 希張正郞 원주 ·韓聖輔 汝碩 府尹 원주 ·宋基厚 誠伯 聞道 원주 ·李相吉 重卿 縣監 원주 ·朴泰徵 徵之 縣監 원주 ·尹明遇 汝良 僉知 원주 ·

<2권54>

申曼 曼清 舟村 원주 ·申啓澄 聖▣(山/音) 縣監 원주 ·黃珽 允美 叅奉 원주 ·鄭普衍 晩昌 원주 ·韓聖佑 汝尹 叅判 원주 ·崔邦彦 美伯 同知 원주 ·高晦 汝根 侍直 원주 ·朴世根 子玉 虛谷 원주 ·朴世輝 子晦, 爲先生辨誣, 杖死 원주 ·李萬春 子元 원주 ·李萬亨 子夏 縣監 원주 ·金萬增 景能 都正 원주 ·金萬峻 君平 正郞 원주 ·閔泰重 士昻 平沙 원주 ·尹以健 體元 郡守 원주 ·任璧 大仲, 水村, 文僖 원주 ·宋炳文 文裁 正郞 원주 ·宋炳夏 子華 正 원주 ·宋炳遠 子徵 都事 원주 ·李涬 仲深 원주 ·李遇輝 君晦聽流 원주 ·金昌錫 文仲 都正 원주 ·金明錫 夢徵 원주 ·郭始徵 智叔 師傅 원주 ·黃鍍 度叔 僉正 원주 ·崔愼 子敬 縣監 원주 ·俞相基 公佐 縣監 원주 ·李湛 景和 郡守 원주 ·俞命賚 弼卿 慈敎堂 원주 ·鄭纘輝 景由 窮村 원주 ·洪重箕 九以 僉正 원주 ·李賀朝 樂甫 三秀 원주 ·宋相琦 玉汝 玉吾 원주 ·洪舜相 虞卿 원주 ·朴光一 士元 遜齋 원주 ·尹寀 爾和 원주 ·鄭存 長源 縣監 원주 ·李岱 叔固 隨窩 원주 ·李商翼 可成 僉正 원주 ·崔世慶 善餘 縣監 원주 ·金鎭玉 伯温 監司 원주 ·朴鐔 大叔 郡守 원주 ·金莘望 子衡 원주 ·郭文瑢 聖徵 원주 ·金得洙 魯源 원주 ·金得泗 逝汝 원주 ·金得沂 景魯 원주 ·金得汶 景閔 원주 ·郭櫓 濟伯 원주 ·呂有衡 士平 원주 ·朴明欽 敬五 원주 ·南溟擧 鵬路 원주 ·柳景彩 春甫 同知 원주 ·朴景錫 汝晶 원주 ·郭鳴漢 子遠 원주 ·趙匡漢 正郞 원주 ·李師顏 賢哉 원주 ·金瑜 俞玉 원주 ·李秀豊 元禮 원주 ·李季仁 仁甫 원주 ·閔鎭綱 府使 원주 ·李喬岳 伯瞻 叅判 원주 ·崔星瑞 景甫 僉知 원주 ·安重謙 益汝 直長 원주 ·宋命錫 蘭谷 원주 ·宋三錫·宋晦錫 希文 원주 ·宋奎纘 伯興 縣監 원주 ·許玩 樂而齋 원주 ·許㻐 集義齋 원주 ·許璜 瑩叔梅隱 원주 ·李範錫 子叔 奉事 원주 ·宋元錫 善長 원주 ·李東亨 泰卿 四友堂 원주 ·鄭慶欽 善叔 六吾堂 원주 ·尹搏 子上 원주 ·李燂輝 仲明 원주 ·李敏道 汝源 判官 원주 ·朴商澔 公翼 원주 ·鄭獻徵 賢哉 원주 ·朱汝奎·朴重繪 受世 素隱 원주 ·愼後尹·金九用·金是重·柳億 子壽 원주 ·韓如琦 伯圭 원주 ·金宅三 聾岩 원주 ·李顯稷·趙鳴世 善伯 원주 ·金相玉 振甫 원주 ·蔡文徵·洪友周·朴壕·朴世義·宋衡弼 商卿 원주 ·李先稷 奉事 원주 ·鄭維·玄以䂓·琴鳳儀 舜錫 원주 ·李憺·梁以杞·朱南老·閔元重·李命

<2권55>

益 聖兪 원주 ·崔有華·金益堅 文季 원주 ·金㶅·成晩徵 達卿 秋潭 원주 ·康用錫·閔周鏡·李相夏·吳再挺·李鼎華 縣監 원주 ·申永植 伯久 원주 ·呂有經 士常 원주 ·閔行重·韓士英·金九鳴·金昱·卞東䂓 世則 원주 ·洪禹徵·奇挺翼 松庵 원주 ·李德遠 道爾 參奉 원주 ·林守儉 養伯 林湖 원주 ·趙義耘 字而 百宜堂 원주 ·鄭祥龍 麟瑞 都事 원주 ·李鍼凞 文甫 營將 원주 ·卞東尙·洪胄華·李舜相 揆伯 원주 ·金鳳彩 伯五 원주 ·金克淳 叙五 원주 ·宋奭弼 參奉 원주 ·申日華 舜天 峻節 원주 ·蔡錫疇 禹瑞, 晩歸堂 원주 ·黃岭 獻叔 원주 ·潘時雨 聖之 원주 ·尹東鳴 善伯 원주 ·李處·李梓·趙光輔 士輝 원주 ·趙裕慶 仲寬 원주 ·鄭秀禎 周幹 원주 ·尹三擧 四梅堂 원주 ·禹夢岩·金道器 梅谷 원주 ·朴維章·朴孝曾 安騫 원주 ·羅重器 擊鏡 원주 ·柳必勳 聖瑞 墨塘 원주 ·朴始曾。
權寒水齋門人 尤庵淵源 원주 , 韓元震 德昭 南塘 원주 ·尹鳳九 瑞膺 屛溪 원주 ·李柬 公擧 嵬岩 원주 ·蔡之洪 君範 副率 원주 ·尹熀 晦甫 說書 원주 ·韓弘祚 永叔 司諫 원주 ·申兪 伯謙 원주 ·玄尙辟 彥明 洗馬 원주 ·崔厚徵 成仲 원주 ·尹升來 順卿 원주 ·李海遠·李頤根 可久 諮議 원주 ·宋相允 信甫 원주 ·黃宗河 子朝 원주 ·趙尙遠 汝成 원주 ·卞觀夏 禮甫 원주 ·兪默基 子成 원주 ·成爾鴻·李碩正·禹世·李聖蓍·趙觀彦·魚有成·孟淑·周氿潮 信大 靜坐 원주 ·尹魯東·郭守熀·金秀五·韓大震·李熙疇·鄭柔·金鼎疑·蔡應祥·蔡徵休·李夏炳·趙守琳·金光五·尹鳳陽·朴正源·卞熙夏·金錫汝·成文徵·申命鼎·李莢·李葩安·安大奭·李濯·李度遠·韓德全·韓啓震·李湛·郭守煥·成遠徵·朴振河·李星益 生員。 원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녹동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
G002+AKS-CI20_74954-04
이미지전체명칭 녹동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
이미지제목 녹동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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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정사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요약설명 녹동서원 소장 유물 중 현전하는 목판은 최덕지의 (연촌유고(烟村遺稿)) 등 관련 목판 53매, 김수항의 (문곡집(文谷集)) 400매, 최충성의 (산당집(山堂集)) 55매 등 508매이고 문서에는 1659년 존양녹동서원 영선물자 수집 통문(通文) 1매 등 다수의 문서가 있다.

 

숙종 38년 11월 19일 (무술) 원본474책/탈초본25책 (27/30)
1712년 康熙(淸/聖祖) 51년

 

 

 崔德之 등의 祠宇에 賜額해 줄 것을 청하는 文獻緯 등의 상소


○ 幼學文獻緯等疏曰, 伏以, 尊賢建祠, 士林衛道之至意, 揭虔宣額, 國家尙德之盛典。是以尊之斯有祠, 祠之斯有額, 下必申其懇, 上輒准其請者, 實次第當行之事也。惟我國家, 崇儒重道, 褒德尙賢, 聲敎所曁, 文四行缺然, 此固出於高山景仰之誠, 同得於秉彝好德之天, 而亦莫非國家風厲振作之效, 有以致之也。苟有可尊之賢而不尊, 祠可請之額而不請而賁之, 則不但爲多士之羞, 其爲有慊於聖朝倡導之化者, 豈淺淺哉? 此臣等所以敢陳。故直提學崔德之及其孫忠成, 故領議政臣金壽恒及其子判書臣昌協, 立祠尊祀之大略, 以祈宣賜恩額之典者也。夫四臣事績本末, 固非如臣等晩出蒙士, 所可揄揚其萬一, 而略敍鄕邦之所傳誦, 平昔之所覩記, 以備裁察, 伏願殿下, 少垂省納焉。蓋聞崔德之, 當我世宗時, 歷踐翰苑三司, 而後以南原府使, 退居本邑, 取孟子在心養性之訓, 以名其所居之書樓, 留心正學, 杜門不出。及文宗卽位, 召拜直提學, 奬以純實, 且將貿用, 而上書乞骸, 長往不返。噫, 發軔榮途, 卿相在前, 而芥視富貴, 賁趾丘園, 其高風淸節, 足以立懦廉頑, 而玩書樓三字之扁, 可知其存養之工, 觀聖祖一言之褒, 可得其純實之資, 則其所立之高, 所存之正, 實有遠過於人, 而足爲後來之師範也。抑臣等於此(臣等於此), 又有所感焉。德之之退歸, 在於文廟, 一時名賢, 送行惜去, 見於篇什者甚多, 而六臣之詩若文, 竝在其中, 稱慕企羡之意, 溢於言外, 則德之之於六臣, 可謂合志同方, 而其後國家多故, 六臣者終不免焉, 然則德之之退, 有若見幾知微者然, 此豈常人所可及者, 而至今聞風者, 尙且咨嗟想像, 有所興起, 則其樹立之卓, 有補於世敎, 亦豈下於當日自靖之諸臣哉? 此尤聖朝之所宜亟加褒闡, 不可少緩者也。至如其孫忠成, 受學於四行缺着工向裹四字缺書, 循環誦讀, 微辭奧旨數字缺融解, 而尤用力於朱子全書, 體驗躬行, 以爲一生受用之資。雖以微臣等之蒙陋, 未能窺測其所造之至於何極, 而以其見於外者言之, 平居儼然, 終日矜莊, 而接人應物, 渾是一團和氣, 聽其辭氣, 覿其德容, 莫不心醉而起敬。以故士林歸仰, 望若山斗, 此固遠邇之所同然, 而薰腴所被, 在臣等爲尤深且切, 使窮鄕僻邑之人, 得知學問之根基, 爲人之規範者, 實壽恒之賜也。若乃昌協, 早襲庭訓, 躬服儒行, 亦嘗隨壽恒, 往來于玆邑, 臣等亦嘗得其爲人, 而景服之有素矣。蓋其仕於朝也, 經筵啓沃, 發揮心學, 章奏勤懇, 講明治體者, 莫非學問中流出, 而及其屛處之後, 尤以斯道爲己任, 囂囂畎畝, 矻矻墳典, 潛心於格致誠正之學, 着力於操存涵養之功。刻厲奮發, 眞知力踐, 參訂論辨, 提示幽眇之旨, 造詣成就, 幾臻高明之域。雖其苦心靡改, 確節難拔, 終未得羽儀朝端, 翊贊儒化, 使一世之人, 咸被其澤, 而其有補於世敎, 作範於後學, 則雖謂之儒門之大宗師, 不爲過矣。是以一邑多士, 興敬於想像傾慕之餘, 感發於耳目濡染之地, 協力建祠, 以祀德之於前, 而且以配焉。齊聲倡義, 竝享壽恒於後, 而又以昌協配焉。以伸一方景仰崇奉之意, 而第以遐遠樸愚, 尙未能請額于朝, 使前賢妥靈之所, 不得列於邦家之祀典, 而聖朝右文之化, 不得宣於海嶠之下邑, 此實臣等之罪也。玆敢重繭於百舍之外, 齊籲於九重之下。伏乞聖明, 數字缺察四臣者之德邃學, 淸芬遺韻, 合爲士林以下缺。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文宗朝)崔德之

全州人其先自唐淸河浮海而來居完山今俗號客山者以此也父霮文科參議生四子匡之直之得之德之德之煙村迂叟早從陽村權近太宗乙酉生員文科直提學累典州郡皆有聲績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村扁其樓曰存養文宗元年召拜集賢殿學
士明年冬告老而歸上謂近臣曰曩於召對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予欲留之諸臣皆曰歸志已定不如從之以遂其志[주:人物考]

 

德之子凋凋子岱岱子連孫字子胤成宗庚子生員壯元己酉文科檢閱僉知[주:國朝榜目]兄直之文科知郡事得之以經明行修登薦官至典農少 尹兄弟三人皆受業于陽村[주:東儒師友錄]以上文宗

생원시에 연촌공의 손자인 연손선조님이 장원을 하셨다  

 

태종 34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12월 9일(경인) 1번째기사
사헌 감찰 최덕지·허맹을 파직하다 (조선왕보실록의 기사)

 


사헌 감찰(司憲監察) 최덕지(崔德之)·허맹(許孟)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감찰 김소남(金召南) 등이 감찰 김윤(金潤)·정곡(鄭谷)의 범한 것을 가지고 본부(本府)에 보고하였는데, 임금이 김윤 등의 범한 것이 다른 사람의 죄보다 경하다고 하여 특별히 직사에 나오도록 명하였다. 최덕지 등이 김윤정곡이 피혐(避嫌)하지 않고 취직한 것이 풍헌(風憲)의 직임에 어그러진다고 하여 본부에 고하였다. 최덕지 등을 불러 그 까닭을 묻고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4일 만에 석방하고 그 직을 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책 19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왕조실록 원문

○庚寅/罷司憲監察崔德之許孟職。 初, 監察金召南等以監察金潤鄭谷所犯, 課于本府, 上以所犯輕於他人罪, 特命就職, 德之等以不避嫌就職, 有乖風憲之任, 告于本府。 召德之等問其故, 囚于義禁府, 四日而釋之, 罷其職。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책 19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1월 25일(병진) 1번째기사
지김제군사 최덕지가 진주를 바치니 내구마 1필을 내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丙辰/知(金提)〔金堤〕郡事崔德之獻眞珠一枚, 賜內廐馬一匹。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최덕지(崔德之)가 진주 1매(枚)를 바치니, 내구마(內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41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 *왕실-사급(賜給)

 

 

세종 30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2월 10일(을해) 2번째기사
지함양군사 최덕지와 임강·안음·비안 현감 박지생·김명양·권후 등을 인견하다

 

○引見知咸陽郡事崔德之臨江縣監朴枝生安陰縣監金明諹比安縣監權厚等謂曰: “前此,只令二品以上守令接見。 予詳思之, 閭閻遐邈, 予不親往莅之。 選擇良吏, 分憂差遣, 其任不細, 故二品以下守令, 亦令親見以送。 今年夏旱冬燠, 明年農事, 未可知也。 今聞, 各道郡邑, 絶食之民頗多, 救民之術, 恒念于懷。 古者, 敎民以禮義廉恥, 今則衣食不足, 何暇治禮義? 衣食足則民知禮義, 而遠於刑辟。 爾等體予至懷, 以安養斯民爲務。”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최덕지(崔德之)·임강(臨江) 현감 박지생(朴枝生)·안음(安陰) 현감 김명양(金明諹)·비안(比安) 현감 권후(權厚)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이전에는 다만 2품 이상인 수령만을 접견하였으나, 내가 자세히 생각하여 보니, 시골의 먼 곳을 내가 친히 가서 다스리지 못하고 어진 관리를 선택하여 나의 근심을 나누어 주어 보내는 것이니, 그 임무가 가볍지 않다. 그런 까닭에 2품 이하의 수령도 또한 친히 보고 보내도록 하였다. 금년은 여름은 가물고 겨울은 더워서, 명년의 농사가 어떨지 알 수 없다. 이제 들으니, 각도 군(郡)·읍(邑)에 식량이 떨어진 백성이 꽤 많다고 한다.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항상 가슴에 생각하라. 옛날에는 백성에게 예의 염치(禮義廉恥)를 가르쳤으나, 지금은 의식(衣食)이 부족하니 어느 겨를에 예의(禮義)를 다스리겠느냐. 의식이 넉넉하면 백성들이 예의를 알게 되어, 형벌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기르는 일에 힘쓰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책 70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문종 10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10월 29일(갑오) 2번째기사
예문관 직제학 최덕지가 사직하고 물러나다

 

○藝文館直提學崔德之告老, 乞歸田里, 上謂都承旨李季甸曰: “頃於輪對, 與德之語, 爲人諄實, 未甚衰老。 留之何如?” 對曰: “歸志已決, 不可留也。” 從之。 德之, 年六十八。 世有冒年强立于朝者多, 德之未及致仕之年, 而能自引去, 時論稱之。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최덕지(崔德之)가 늙었다고 고(告)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윤대(輪對)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 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최덕지는 나이가 68세였다. 세상에는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서는 자가 많은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 아니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44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책수
烟村遺事 저자 崔德之 저
연촌유사 간행년대 1805년(순조 5).
古4650-20
1책 판본 사이즈 16.5×10.5㎝.
본문

"조선초의 문신 崔德之(1384~1455)의 시문집. 1805년(순조 5) 崔世榮이 편찬하였다. 권두에 宋煥箕의 서문이 실려 있다. 최덕지의 자는 可久, 호는 烟村․存養, 본관은 全州다. 1405년(태종 5) 式年文科에 同進士로 급제한 뒤 監察 등 三司의 淸要職을 거쳐, 김제군수․남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에는 영암의 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藝文館直提學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致仕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年老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詩賦를 지어주고 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친 인물로 평가된다. 전주의 西山祠, 남원의 舟巖書院, 영암의 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肅이다. 송환기의 서문에 이어 목록이 있고 뒤이어 최덕지에 대한 出處事蹟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 최덕지의 저작인 〈論貢法踏驗便否疏〉 1편과 〈題存養樓〉 2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어 朴彭年의 〈貢院唱和詩序〉와 河演의 元韻에 이어 차운시들이 모두 11수 수록되어 있는데, 申叔舟․成三問․河緯地․徐居正․姜希孟 등과 함께 최덕지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 이후 차례로 최덕지가 사임할 때 李成이 써 준 〈退休時送別詩序〉와 柳誠源․成三問․李塏․河緯地․鄭麟趾․申宿舟 등이 지은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朴彭年의 跋, 金宗瑞․安止․金銚․李先齊․鄭麟趾 등의 追詠, 宋乙開의 〈存養樓記〉, 李石亨 등 3인의 〈題存養樓〉 3수, 崔孝孫 등 13인이 〈題存養樓〉에 차운한 시 16수, 崔鳴吉․李景奭 등 6인의 追詠 16수, 金壽恒이 지은 〈題存養書院〉 1수, 金鎭商이 지은 〈題烟村先生畵像〉 1수, 金昌協의 〈書院請額疏〉, 愼天翊의 〈畵像贊〉과 〈畵像改粧贊〉, 후손 珽敬이 쓴 〈亂後文稿收錄誌〉가 실려 있다. 끝으로 李植의 後敘 (〈烟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敘〉), 宋時烈․朴世采․李端夏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元昊의 碣銘이 간략하게 붙어 있다. 부록으로 〈參議公遺事〉와 〈諸公讚詩〉, 〈小尹公墓碣〉이 수록되어 있다.최덕지의 글은 疏 1편과 詩 3수일 뿐인데, 〈論貢法踏驗便否疏〉는 일정한 크기의 논밭에서 일정한 양을 거두게 된 공법과 논밭에 가서 실제로 작황을 조사, 조세를 알맞게 정하는 損實踏驗法의 편리 여부를 가지고 고심하는 世宗에게 踏驗法을 시행하도록 권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조선 초기의 세법관계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또, 박팽년의 〈貢院唱和詩序〉는 당시 科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안순태)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단종(端宗)


단종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 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은 이름은 홍위(弘暐)이니 문종의 큰아들이다. 현덕왕후가 정통(正統) 6년 신유(辛酉) 세종 23년 7월 23일 정사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왕을 낳았다. 무진년 세종 30년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冊封)되고,경태(景泰) 원년 경오(庚午) 7월에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었으며, 임신년 5월에 왕위에 올랐다. 을해년 윤 6월 11일 을묘에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전하고, 7월 갑신에 높여 공의 온문 태상왕(恭懿溫文太上王)이 되었으며 천순(天順) 원년 정축 6월에 궁밖으로 물러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가 《국조보첩(國朝寶牒)》 구주(舊註)에는 ‘을해년에 강봉해서 군으로 되다’했고,《현덕왕후 천릉지(顯德王后遷陵誌)》에는 ‘병자년 5월에 밖으로 물러나 군(君)으로 강봉되었다’했고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정축년 6월에 밖으로 물러나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고 했다. 10월 24일에 영월(寧越)에서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는 3년이요, 상왕위에 있은 지는 2년이며, 나이는 17세였다.숙종(肅宗) 7년 신유에 대군으로 추봉(追封)되고 24년 무인에 왕위에 추복되었으며, 정조 6년 임인에 대왕에 대한 보감(寶鑑) 한 권을 엮어서 올렸다. 능은 장릉(莊陵)이다. 영월 북쪽 동을지(冬乙旨) 신좌(辛坐)에 있고 표석(表石)이 섰다. ○ 《선원보략(璿源譜略)》
○ 왕비 의덕단양제경정순 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송씨는, 본관은 여산(礪山)이오 판돈녕부사 여양군 증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判敦寧府事礪良君贈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 현수(玹壽)의 딸이다. 정통 5년 경신에 탄생하여 갑술년 정월 22일 갑술에 왕비에 책봉되고,을해년 7월에 높여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되었다가 정축년(1517) 6월에 강봉되어서 부인(夫人)으로 되었으며, 정덕(正德) 16년 신사(1521) 중종16년 6월 4일 갑신에 죽으니, 수(壽)는 82세이다. 숙종 무인년(1698)에 왕비위에 추복되었다. 능은 사릉(思陵)이다. 양주(楊州) 남쪽 군장리(群場里) 계좌(癸坐)에 있고 표석(表石)이 있다. ○ 《선원보략(璿源譜略)》
○ 세종신유년에 원손(元孫)이 탄생하니, 세종은 크게 기뻐하여 곧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군신의 조하(朝賀)를 받고 전 경내 죄인을 사하였다. 《모재집(慕齋集)》 《현릉개장지(顯陵改葬誌)》
○ 문종이 승하할 때 세자는 어리고 종실(宗室)은 강성한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에게 특히 명하여,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임금을 보필하라.” 하였다. 《야언별집(野言別集)》
○ 임신년에 단종이 왕위에 오르니, 나이가 12세라 영의정 황보인ㆍ좌의정 남지(南智) 병으로 휴가 중에 있었음ㆍ우의정 김종서 새로 임명되었음.ㆍ좌찬성 정분(鄭苯) 남지를 대신하여 정승이 되었음ㆍ우찬성 이양(李穰)ㆍ병조 판서 민신(閔伸) 후에 조극관(趙克寬)이 대신함ㆍ이조 판서 이사철(李思哲)ㆍ호조 판서 윤형(尹炯)ㆍ예조 판서 이승손(李承孫)ㆍ지신사(知申事) 강맹경(姜孟卿)ㆍ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신석조(辛碩祖) 등이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보좌하였다.
○ 헌부(憲府)가 정부의 당상관 및 여러 대군의 집에 잡인의 방문(분경(奔競))을 금하자고 청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현로(李賢老)가 대신에게 헌책(獻策)해서 이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세조는 안평대군과 도승지 강맹경을 통하여 여러 집정(執政)에게 “우리들에게 잡인의 방문을 금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의심함이니 우리들은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살 것인가. 분경에 관한 법은 일찍이 세종 및 대행왕(大行王)이 불가하다고 하셨다. 지금 임금이 그 즉위 초에 제일 먼저 종실을 의심해서 방금(防禁)을 가하니 이는 착한 이름을 펴지 못하고 고립되어 도울 이가 없게 되지 않겠는가, 이는 분명히 스스로 그 우익(羽翼)을 자르는 것이다.우리들은 국가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는 몸이니 감히 무심코 있을 수 없어서 말하는 것이니 이 위태롭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마음과 힘을 기울여 여러 대신과 더불어 같이 난관을 구제하려 했는데, 어찌 도리어 시기와 의심을 받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우리들은 주상에게 글을 올려 하소연할까 하다가 혹시 유사의 실수인지 몰라서 먼저 대신에게 고한다.”고 말하니, 황보인은 크게 놀랐으나 짐짓 모른 체 하면서 헌부에 허물을 뒤집어 씌웠다. 《황토기사(黃兎記事)》 ○ 이현로(李賢老)의 죽음은 다음 정난(靖亂)의 사항에서 보라.
○ 계유 원년, 이때에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여덟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근심하였다. 황보인ㆍ김종서ㆍ정분이 삼공이었는데, 종서는 지략이 많아 당시 사람이 대호(大虎)라 평하니,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였다. 《동각잡기》
○ 봄에 대사헌 기건(奇虔)은 글을 올려 시사를 극력 간하니 첫째 대신이 정부를 겸령(兼領)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대신을 높이고 제조의 임무에 전심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이며, 둘째는 창덕궁 수리낭청(修理郞廳)을 혁파하라고 청했으며, 셋째는 내의(內醫)김순의(金循義)ㆍ최읍(崔浥)ㆍ변한산(邊漢山) 등이 선왕의 병환을 돌볼 때에 태만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이것을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영상 황보인 등은 조종조에도 모두 대신으로써 겸령시켰다고 하여 기건의 의론을 따르지 아니하고,다만 김순의 등을 내의에서 제명하였다. 얼마 안 가서 기건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나가고 다시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옮겼다. 《야언별집(野言別集)》
○ 계유년(1453)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이룩되었다. 처음에 세종이 집현전 유신(集賢殿儒臣)에게 명하여 《역대병요》를 편찬하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책이 비로소 완성되자, 세조는 대궐에 나아가 편찬에 관여한 여러 선비에게 관자(官資)를 올리고,상급(賞給)을 주어 그 수고에 보답하기를 청하니, 이에 성삼문ㆍ유성원(柳誠源) 등 그 일에 참여한 이는 다 상급과 관자를 받았는데, 하위지(河緯地)만은 그때 사헌부 집의가 되어 중훈(中訓) 자급으로써 중직(中直)에 올랐으나 극력 사양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그는 “지금 임금이 어리고 나라에 의심이 짙은데 종실이 관직과 상여로써 조신을 농락하여서는 안 되고, 조신들도 종실에게 농락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여러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그 사양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하루는 면대해서 생각한 바를 다 말씀드리겠다고 청하였다.임금이 이를 대신에게 물으니, 황보인ㆍ김종서 등은, “대군이 전례에 따라 상을 청한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오며, 세종조에서는 위지가 찬집(撰集)한 공로로써 상급과 관자가 있어도 사양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단독으로 이와 같이 함은 옳지 못하오며, 일개 유신의 저 잘난 체 하려는 것 때문에 일을 바꿀 수 없으니 면대를 허락하지 마소서.” 하였다.위지는 또 아뢰기를, “세종조에서는 은혜가 위에서 나왔으므로 받았지만 지금은 은혜가 아래에서 나오니 받지 아니하려는 것이오며, 신은 형세가 매우 궁하고 사리가 극에 이르렀으니 조정에 설 수 없습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부득이 집의를 갈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명하였다. 얼마 후에 위지는 병을 핑계대고 시골에 내려갔다. 《서애집(西崖集)》 《정원일기(政院日記)》


 

[주D-001]고명 :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것.
[주D-002]대행왕 : 임금이 죽은 뒤 시호(諡號)를 아직 올리기 전의 칭호이니, 여기서는 문종(文宗)을 이른다.
[주D-003]여덟대군 :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ㆍ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ㆍ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등이 여덟 사람의 대군을 가리킨다.
[주D-004]삼공 : 3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주D-005]내의 : 내의원(內醫院)의 의관(醫官).
[주D-006]중훈 : 중훈대부(中訓大夫)를 이름이니, 종삼품(從三品) 관계(官階)이다. 중직대부(中直大夫)도 같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여기서 정난은 계유정난을 세조의 왕위찬탈)


황보인(皇甫 仁) 《세종조 상신록》
김종서(金宗瑞) 《문종조 상신록》
정분(鄭苯) 《상신록》
이양(李穰)
이양은, 종실 사람이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고, 세종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어서 정일품(正一品)에 오르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조극관(趙克寬)ㆍ조수량(趙遂良)ㆍ조번(趙藩)


조극관은, 본관이 양주(楊州)인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요,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의 조카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에 오르고, 세종조에 경상 감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향교동(鄕校洞) 네거리에서 죽었는데, 적몰하고 연좌되었다가 예종(睿宗)조에 해금되었다.조수량은 극관의 아우인데, 세종 경자에 문과에 오르고 계유년에 평안 감사가 되어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난을 만나 영광(靈光)으로 귀양갔다 《해동야언》에는 고성(固城)으로 귀양갔다 하였다 가 조금 뒤에 사사되었다.
조번은 극관의 종제인데, 계유년에 같이 화를 입었다.
번의 아우 이(籬)가 진사로서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었고, 김시습(金時習)ㆍ서거정(徐居正)과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다. 성종조에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상은 양주 조씨의 족보


민신(閔伸)


민신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조에 병조 판서가 되고 곧이어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뒤에 보관(復官)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임신에 세조가 연경에 갈 때에 신을 부사(副使)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민신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계유년에 정수충(鄭守忠)이 세조께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용(瑢)에게 붙었으니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황보인(皇甫麟)의 무리를 베는 시기에 이르러 신이 마침 현릉(顯陵)에 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삼군 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역사하는 장소에서 베었다. 신의 아들 보창(甫昌)ㆍ보해(甫諧) 등 다섯 사람도 모두 죽었다.


허후(許詡)


허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니, 영상 문경공(文敬公) 조(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에 문과에 오르고, 병진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더불어 문종의 고명을 받았는데, 계유년에 좌참찬으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 공의 가문은 충효를 대대로 가풍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여의고 상주 노릇함에 극히 애통히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기쁘게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세종조 20여 년 동안에 몸을 조심하고 입을 삼가 지켰다. 《추강집 본전》
○ 처음에, 허후가 승지에 올랐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아버지 허조는 홀로 근심하는 안색을 띠고 밤새 자지 않았다. 혹자가 물으니, 조가 말하기를, “천도로 보면 무엇이든지 차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인데, 내가 세상에 공덕도 없이 관품이 신하로서는 최고인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고, 자식도 승지가 되었으니. 허씨의 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들어맞았다. 《추강집》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안평대군 용은,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는 비해당(匪懈堂)이요,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계유년에 강화(江華)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장소공(章昭公)이다.
○ 공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와 문에 더욱 능하였으며,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좋은 경치를 찾아서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고, 또 남호(南湖)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t;십이경시(十二景詩).를 짓고, 또 .t;사십팔영.을 지었으며, 밤에 등불을 켜 달고 얘기하기도 하고 달빛 아래 배를 띄우기도 하며, 연구(聯句)를 짓기도 하며,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하니,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 소리를 하며,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는데,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으며, 바둑알에 도금(鍍金)도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얇은 비단을 짜게 해서 진서(眞書)ㆍ초서ㆍ행서를 휘갈겨 써서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 하는 처사가 모두 이와 같았다. 《용재총화》
○ 성간(成侃)이 크게 이름이 났으므로, 공이 사람을 시켜 청하니, 간이 가보고 시부로 화답하였다. 공경히 대접하여 보내고 후일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간의 어머니가 간에게 말하기를, “왕자의 도리로는 마땅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근신하며 다른 일이 없어야 하니, 어찌 사람을 모아 패거리를 만드는 일을 하겠는가.그 실패할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는 함께 사귀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두세 번 성간을 불렀으나, 끝내 왕래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공이 실패하여 죽었으니, 간의 집안 사람이 모친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은 용재의 중형이다.
○ 안평의 필법이 뛰어나고 갸륵하며 재기가 가장 우수하여, 조자앙(趙子昻) 맹부(孟頫)와 서로 견주어야 마땅한데, 공은 조자앙의 필법만을 본받았기 때문에, 속스러운 것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안평이 귀공자로서 처음으로 이 필법을 주창하여 온 세상을 휩쓸었다. 이 때문에 그 뒤 역대의 어필(御筆)이 우연히 모두 이 필법을 써서,드디어 나라 습속이 되었다. 근년까지 온 세상이 이 필법에 쏠려서 왕우군(王右軍 왕희지)과 자앙을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 “청지(淸之 안평(安平))가 왕우군의 필획으로 조자앙의 서체를 썼다.”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원교필결(圓嶠筆訣)》


박팽년(朴彭年)


박팽년은,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형조 참판으로 아버지 판서 중림(仲林)과 아우 네 사람과 아들 헌(憲) 등과 함께 모두 죽었다. 숙종 때에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려 주고, 영조 무인(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책에 나오는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였다. 문장이 온화하고 맑으며 필법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추강집본전》
○ 공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충성심이 있어 명 나라의 천순(天順)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는 정침(正寢)에서 자지 않고 항상 지게문 밖에 짚자리를 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답하기를,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있어, 천하가 당황하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치재일기(耻齋日記)》 ○ 《무인기문(戊寅記聞)》에는 이것을 하위지의 말이라 하였고, 혹은 두 공이 다 행하였다 한다.
○ 집현전의 문학하는 선비에 신숙주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ㆍ정인지 등이 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와 함께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는데, 성삼문은 문란(文瀾)이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하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제배들이 모두 팽년을 추앙하여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으니, 그가 경학ㆍ문장ㆍ필법에서 모두 능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모두 참화(慘禍)를 입어서 저술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용재총화》
○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서 부중(府中)에서 잔치하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풍악 소리 구슬프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가 오늘에는 도무지 모를레라 / 萬事如今摠不知
풍이 솔솔 불고 버들가지 푸르른데 / 柳綠東風吹細細
꽃이 핀 밝은 봄날 길고 기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이 이룬 대업은 금궤에 있는 책을 찾아 놓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취하도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아니하고 어이하랴 / 不樂何爲長不樂
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 노래하세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그 시를 부중에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신할 때에 김질(金礩)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성삼문은 정포은의 노래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지어 이르되,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소냐.” 하였다.[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며 女必從夫라 들 님마다 조츨소냐] 《추강집》
○ 공이 처형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들을 난신(亂臣)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년 때 사람(김종서 등을 말함)과 같지 않다.” 하였다.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군부(君父)에게 불효를 저질러 이런 화를 당하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되,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니 할 수 없다.” 하였다. 《추강집》
○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장성한 뒤 성종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지금 박 동지(同知) 충후(忠後)가 그 자손이다. ○《장빈호찬(長貧胡撰)》 《노릉지(魯陵誌)》
○ 부인 이씨(李氏)는 관비가 되어서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 공이 그 사위 이공린(李公麟) 평안 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이요,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아버지이다. 을 맞던 날에 공청에서 물러 나와 묻기를, “납폐하였는가?”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납폐는 하였지만 폐백을 대광주리에 담았으니, 이것이 무슨 무례인가요.”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취한 것이 이 때문이요” 하였다. 《병자록》 ○ 공린이 무과를 하였는데, 장인에게 연좌되어 폐고(廢錮)되었다가 성종조에 서용되어 현령이 되었고 연산조(燕山朝)에 또 아들 원에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 청주에 물러나서 살았다.
○ 공이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번드는데, 세종이 친히 나와서 잔에 술을 부어 돌렸다. 공이 취하여 엎어져서 고꾸라지매, 세종이 비단 남빛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 죽은 뒤에 공의 자손이 이 옷만을 여러 대 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옷과 신주를 함께 땅에 묻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보니, 신주는 완전하나 옷은 썩었다고 한다. 《병자록(丙子錄)》
○ 공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에 들었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명부에서 빼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고, 선조 초년에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밭을 주려 하매,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거마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마는 혐의스러우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 공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선조 신미에 처음으로 녹용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제수 받았다. 일찍이 계창이 공의 기제사날 꿈에 여섯 사람이 사당 문 밖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곧 여섯 분의 제사를 지냈다. 박숭장(朴崇章)이 기록한 것에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사대부 집에 훈공이 있어서 군을 봉한 조상은 의례 시조가 되어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선생의 사업은 어찌 봉군뿐이겠는가’ 하며, ‘영원히 조천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정식(定式)삼았다.” 하였다.
○ 대대로 회덕(懷德)에 살다가, 뒤에 전의(全義)로 옮겼는데, 지금도 박동(朴洞)에 유지(遺址)가 있다. 《노릉지(魯陵誌)》


박중림(朴仲林)


박중림은,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오르고, 정미에 중시에 뽑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박팽년과 같이 죽었다. 과보(科譜)에는 계유년에 죽었다 하였다.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장성하여서는 경적(經籍)에 정통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두니, 공이 문장과 덕행이 있다는 이유로 뽑히었다.
○ 병자에 박팽년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같이 죽었다. 처형에 임하여 여러 아들이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니, 효도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니라.”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성승(成勝)


성승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성삼문과 같이 죽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 을해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에 공이 도총부에서 번들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 하고, 곧 말을 몰아 돌아왔는데 딴 방에 누워서 집 사람들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사람을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병자년에 성삼문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여,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공과 유응부와 박정(朴崝)이 운검(雲劒)이 되었는데, 이 날 전내(대궐안)가 좁으므로, 운검을 그만 두게 되었다. 공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전교가 내렸으니,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공이 명회 등을 치려 하매 성삼문이 말렸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은,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세종 무오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에 중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병자년에 승지로서 아버지 승과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숙종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주고,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적동리(赤洞里)) 외가에서 났는데, 날 때에 공중에서 “났느냐.”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기 때문에 성삼문으로 이름 지었다. 사람됨이 소탈하여 얘기와 농담을 좋아하고 앉고 눕는 것도 절도가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주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뜻은 단단하고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한다. 《추강집》
○ 항상 임금을 경연청(經筵廳)에서 모시며, 보좌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병이 있어 여러 번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편복(便服) 차림으로 늘 성삼문과 이개에게 대가(大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니,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북경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로(白鷺) 그림에 넣을 시를 써 달라고 청하여서, 공이 건성으로 부르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 / 雪作衣裳玉作趾
갈대 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 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어 아랫 구절을 채워서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野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池)에 잘못하여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

하였다. 패관잡기
○ 북경에 가는 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쓰기를,

말머리를 잡고 두드리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 나라의 비와 이슬에 자랐는데 /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고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짓기를,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落落) 장송(長松)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이몸이 죽어가서 무어시될고 니 蓬萊山第一峯의 落落張松되여읜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 리라]” 하였다.
○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원(元)이다. 그 아내가 관비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추강집》
○ 명 나라 급사(給事) 장녕(張寧)이 시강(侍講) 예겸(倪謙) 문희(文僖) 에게 배웠는데, 예겸보다 십 년 뒤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다. 그때에 나이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스승 예시강(倪侍講)이 동국에 재사가 많다고 말하였는데,어찌 눈앞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하며, 이 때문에 시의 수창(酬唱)에 뜻이 없었다. 장녕이 지은 .t;예양론(豫讓論).을 혹자는 의심하기를, “의도가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중종조에 박호(朴壕)가 과거에 올라 육품관이 되었다가, 곧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대사간으로 있는 조(趙)라는 성을 가진 자가 반론하기를, “역신의 후손이 간관(諫官)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자, 조(趙)의 동배(同輩)들이 책하기를, “네가 감히 명신의 후손을 탄핵하고 논박하니,이렇게 무식하고서야 어떻게 그대로 간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조가 곧 병을 핑계하여 체직되고, 박이 도로 청반(淸班)에 올라 이조 판서까지 되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현종(顯宗) 임자년(1672)에 호조 아전[戶曹吏] 엄의룡(嚴義龍)이 우연히 인왕산(仁王山) 비탈 무너진 곳에서 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故)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성 승지의 신주는, 겉면(面)에는 성삼문(成三問) 무술생이라고 쓰고, 신주의 감중(坎中)에도 또 그와 같았다.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하고 신여(神輿)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공의 외후손인 진사 박엄찬(朴嚴纘)의 집에 봉안하고, 곧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에게 기별하니 와서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홍주 노은골에 아직도 공의 옛 생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기 감사는 김우형(金宇亨)이었는데, 연로(沿路)의 관원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영송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혹은 제수를 갖추어 제사지내는 이도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이로 말미암아 감동하여 구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 당시의 동지였던 다섯 분을 아울러 향사하기로 하고, 병진 여름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웠다.공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신주가 외손 박호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기 집 신주와 함께 묻었다. 이백여 년 뒤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장릉지》


이개(李塏)


이개는, 자는 백고(伯高) 또는 청보(淸甫)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 색(穡)의 증손이요, 종선(種善)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문장에 능하였다. 세종 병진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 중시(重試)에 뽑혀 직제학까지 지내다가 병자년(1456)에 죽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요,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 시와 문이 맑고 절묘하여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동각잡기》
○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대단히 친밀하여 출입하므로, 개가 경계하였다. 병자년에 일이 발각되매,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바보스럽게 여겼더니, 과연 비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구나.” 하였다. 《동각잡기》
○ 몸이 여위고 가냘퍼서 옷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신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추강집》
○ 단가를 짓기를,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가마귀눈비마자희난듯검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向 一片丹心이야 變줄이잇시랴]” 하였다.
○ 공이 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박사 성 간(成侃)과 집현전에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옥당에 봄은 따뜻하고 날은 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 玉堂春暖日初遲
졸며 남창에 의지하여 백치(白痴)를 기른다 / 睡倚南窓養白癡
우는 두어 마리 새의 소리는 낮 꿈을 놀래게 하고 / 啼鳥數聲驚午夢
살구꽃의 아리따운 웃음은, 새 시에 들어온다 / 杏花嬌笑入新詩

하였다. 성간이 차운(次韻)하기를,

어린 제비와 우는 비둘기 낮 시간이 더딘데 / 乳燕鳴鳩晝刻遲
봄이 찬 연못에는 버들이 어리석은 것 같구나 / 春寒太液柳如癡
집현전에서 졸음을 파하매, 바쁜 일이 없어서 / 鑾坡睡罷無餘事
때로 종이를 펼치고 작은 시를 쓴다 / 時展蠻牋寫小詩

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이 일찍이 그 형 성임(成任)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백고(李伯高)가 용이 되었다. 내가 붙들고 날아서 강을 건너는데, 떨어질까 두려워하였더니, 용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뿔만 굳게 잡으라’하였다.”고 하였다. 임(任)이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 명망이 높고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자네가 그 뿔을 붙잡았으니, 반드시 중시 장원에 뽑힐 것이라.” 하였다. 얼마 안되어,공이 죽임을 당하고 간도 또한 병으로 죽었다. 《용재총화》 ○ 총화에는 모두 공을 백고로 일컬었는데, 상촌집(象村集)에 끌어서(引用) 변명하기를, “백고는 청보의 또 하나의 자(字)인가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하건대, 《노릉지(魯陵誌)》에 《추강집(秋江集)》에 있는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청보라 하지 않고 백고라고 하였으니, 상촌이 《추강집》을 보지 못하고 이런 논란을 한 것이 아닌가.


하위지(河緯地)


하위지는,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자원하였고, 병자년(1456)에 예조참판으로 죽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공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말을 함에 버릴 것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禮)에 밝아,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비가 와서 땅이 질더라도 한번도 통행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 항상 집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경연에서 강의하여, 보정(補正)한 사항이 많았다. 《추강집》
○ 천순(天順)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 공이 일찍이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몽진(蒙塵)한 것은 천하가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지만, 어찌 황제의 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매양 바깥 사랑에 거처하고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으니, 능히 충의로 순국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단종이 왕위를 이으니,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공에게 도롱이를 빌렸는데, 공이 시로 답하기를,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는 분명히 백일이 임하여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주는 것이 아마도 뜻이 있으리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연우(煙雨)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하였는데, 대개 시사(時事)를 슬퍼함이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매, 공이 조복(朝服)을 다 팔아버리고, 전 사간(前司諫)으로 선산(善山)으로 퇴거하였다. 세조가 임금께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을해에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교서를 내리어 간곡히 불렀다. 공이 부름에 응하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녹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을해 이후의 녹은 따로 한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추강집》
남 추강(南秋江)의 《육신전》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승지로 승정원에 있을 때에 《노산조일기(魯山朝日記)》를 보았는데, 계유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편찬되자, 공에게 편찬에 참가한 공로로 상을 주었더니, 극력 사양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추강집》에 보인다.집의로 직제학이 되었다가 이어 병으로 휴가를 신청하여, 영산(靈山) 온천에 목욕한다고 하고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해 10월에, 세조가 정난(靖難)하자 임금께 아뢰기를, “지난번 하위지가 면대를 청하였을 때에 김종서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것과 같습니다. 위지를 다시 불러 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이에 드디어 좌사간에 임명하자, 공이 상소하였다. 추강이 기록하기를, “계유10월에 공이 조복을 팔고 전 사간으로 선산에 퇴거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불러서 나아가니, 예조 참판을 제수하고 심히 총애하였다.” 하였는데, 공이 선산으로 물러갔다는 것은 그럴듯하나, 그가 벼슬에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듯 하다.아마도 공이 상소한 뒤에 얼마 안되어 조정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이때에는 노산이 아직 왕위에 있었던 듯 하다. 《서애집》
○ 단종 즉위 초에 공이 병을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가 있는 중 김종서 등이 피살되매,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었다가,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부르므로 나와 예조 참판이 된 것은, 그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여헌집(旅軒集)》 .t;묘갈(墓碣).
○ 세조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공이 형신을 받을 때에 비밀히 달래기를, “네가 만일 음모에 참가한 사실을 숨기면 면할 수 있다.” 하였더니, 공이 웃고 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배양한 인재 중에 공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동각잡기》
○ 공은 선산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는데, 어렸을 때에 작은 서재를 짓고 형제와 더불어 문을 닫고 글을 읽어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묘가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는데, 부인 김씨와 합장(合葬)하였다. .t;묘갈(墓碣).
○ 공의 처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금부 도사가 그 아들들을 잡으러 왔다. 공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호(琥)요, 차자는 박(珀)이었다. 《동학사 초혼기(東鶴寺招魂記)》에는 연(璉)ㆍ반(班)이라 기록되었다. 박은 나이 이십 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도사에게 말하기를,“원컨대,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어머니에게 고할 말이 있소”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매, 박이 문안에 들어가 꿇어앉아 어머니께 고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니, 자식이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하여야 합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천한 종이 되더라도 부인의 의리로 마땅히 한 사람을 따를 것이요, 개와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드디어 재배하고 나와서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과연 공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유성원(柳誠源)


유성원은, 자는 태초(太初)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요, 사인(舍人) 사근(士根)의 아들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사예(司藝)로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 세종조에 《송사(宋史)》가 우리나라에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여러 번 명 나라에 청하였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송 나라 조정의 인물을 논하다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이 《송사》의 어느 전(傳)에 들었을까?” 하였다. 여러 사람은 “왕안석이 간신전에 들어야 한다.” 하였다.한두 사람이 반박하기를, “안석이 신법을 만들어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진실로 소인이다. 그러나, 문장과 절의가 일컬을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을 뿐이다.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다만 오활하고 고집이 셌기 때문이니,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의 무리에 넣을 수는 없고, 열전(列傳)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더니,공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사가 나왔는데, 과연 .t;열전.에 있었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강목(綱目)》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 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紀)》를 읽다가 탄식하고 시 한 구를 지었는데,
어쩌면 주의 여분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이었는고[那將周餘月 續我唐日月]” 하였더니, 뒤에 《강목》을 얻어 오니, 주자가 과연 주(周)를 내치고 당을 높였는지라, 익재가 매우 자부하였는데, 아무개를 감히 익재에게 견줄 수는 없지마는, 마땅히 제군의 항복을 받을 만은 하다.” 하였다. 《필원잡기》 《명신록》
○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기사 경오년 간에 흰 까치가 와서 깃들고 새끼가 모두 희었으며, 계유년에는 나무가 홀연히 다 말랐으므로, 공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화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더니, 공이 패하고 조금 뒤에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필원잡기》


유응부(兪應孚)


유응부는, 본관이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랐고,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莊)하고 날래며 활쏘기를 잘하며, 능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병자년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였다.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활쏘기와 사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새와 짐승을 만나면 쏘아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으나,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는 넉넉히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 농장에 왕래할 때, 형제가 따라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기러기를 쏘매,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추강집》
○ 공이 일찍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서 시를 짓되,

장군이 절(節)을 가지고 와서 국경을 진정시키니 / 將軍持節縝夷蠻
변방에 티끌이 없어지고 군사들이 조는도다 / 塞外塵淸士卒眠
해 긴 낮 빈 뜰에서 무엇을 구경하는가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 백 마리 누 앞에 앉았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다. 가히 그 기상을 알 수 있다. 《추강집》 《명신록(名臣錄)》
○ 일찍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에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주먹을 자랑하며 말하기를, “한명회와 권람을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긴 창과 큰 칼이 필요 없다.” 하였다.
《동각잡기》 《추강집》
○ 공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 양식이 떨어졌었다. 죽던 날에 그 부인이 울며 말하기를,“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화를 얻었다.” 하니,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에서 그 가산을 몰수하는데, 방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이 있었다.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동각잡기》 《추강집》
태사씨(太史氏)가 말하기를, “누군들 신하가 아니리요마는, 지극하다, 육신(六臣)의 신하 노릇함이여. 누군들 죽지 않으리요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받들 때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의 절개를 세웠다. 충분(忠憤)이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가을 서리 보다 늠름하여,백세 후에 신하된 자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충절은 천금(千金)이요, 한 몸을 터럭같이 여겨서 몸을 죽여 인을 이루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였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은 나라의 삼인(三仁)과 동국의 육신(六臣)이 행적은 다르나, 도는 같은지라, 이 또한 장하구나.’ 하였다. 세조가 정승이 되어서는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고, 왕위에 나가서는 덕이 우순(虞舜)을 짝하여 높고 크고 넓어서 이름할 수 없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세조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 고사리를 캐었으나, 주 무왕의 덕이 떨어지지 않았고,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에서 고기를 낚았어도, 한 광무(漢光武)의 공이 손상되지 않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만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가게 하였더라면, 상왕(上王)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덕이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졌도다. 공경히 조사를 지어 가로되,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 厲氣初濟
뭇 구멍이 막혔도다 / 衆窺爲塞
서리와 눈이 희게 덮였는데 / 霜雪皎皎
소나무만이 홀로 푸르도다 / 松獨也碧
신하의 머리는 / 有臣之首
임금 위한 마음으로 희었거니 / 愛君而白
그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 有頭可截
굽힐 수 없는 절개로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의 곡식은 / 他人之粟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孤竹)의 맑은 바람이요 / 孤竹淸風
시상(柴桑)의 밝은 달이로다 / 柴桑明月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가 한 움큼이로다 / 寃血一掬

하였다. 《추강집》 《육신전》
○ 노량(鷺梁) 남쪽 언덕 길가에 다섯 무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여기에서 죄인을 죽였다 한다. 이 있는데, 그 앞에 각각 작은 돌을 세워 표지를 하였다. 가장 남쪽은 박씨의 묘라 하고, 다음 북쪽은 유씨(兪氏)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이씨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성씨의 묘라 하고,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십여보 사이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어떤 중이 육신의 시체를 져다가 묻었는데 그 중은 김시습(金時習)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의 두 묘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성씨 부자의 묘인데,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 한다. ○ 일설에는 육신 묘가 다섯 무덤만 있고 하나는 없다 하는데, 하위지의 묘가 선산부 서쪽에 부인의 묘와 같이 있다는 것이 장현광(張顯光)의 기록에 보였으니, 하공은 시골에 반장(返葬)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허봉(許篈)이 말하기를, “부인을 씨(氏)라고 일컫는데, 지금 다섯 묘가 한 곳에 늘어 있으니, 부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반드시 관직을 일컫는데, 지금 씨(氏)라고만 일컬었으니, 당시의 의사가 오신(五臣)을 여기에 묻어 놓고는 감히 드러내어 새기지 못하고, 이렇게 일컬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지봉(芝峰)이 세 묘만을 일컬어 말하기를, “성삼문ㆍ박팽년ㆍ유응부의 묘가 틀림없다.”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어떤 사람이 가보니, 비석은 그대로 있는데, 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장릉(章陵)을 발인(發靷)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孝宗) 경인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崇古)가 다시 분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지봉유설》 《미수기언》 《노릉지》 《장릉지》 ○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갈(碣)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었다.
영남 일선부(一善府)에 하씨의 묘가 있고, 유씨(柳氏)만은 장사지낸 곳이 없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는 외손이 있는데 전하기를, “성씨 묘라는 것은 그 한 몸의 한 부분을 묻은 것이다.”고 하였다. 《기언》 ○ 숭고는 곧 박팽년의 칠대손이다.
○ 성종조에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종직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일 변이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장릉지》
○ 인종조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가 박팽년 등을 마음으로는 가상히 여기나, 위태롭게 의심하는 시기에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찍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당대에는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으니, 후세에 그 자취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이 말씀을 하여서 자손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동각잡기》 《노릉지》
○ 선조 병자에 박계현(朴啓賢)이 경연(經筵)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의 충성을 논하여 말하기를, “《육신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저술한 것인데, 전하께서 취하여 보시면, 그 자세한 사항을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육신전을 가져다 보고 놀랍고 분하여 이르기를, “지금 소위 《육신전》이라는 것을 보니, 극히 해괴하여 춥지 않아도 소름이 끼친다.옛적에 우리 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여, 하늘이 주고 백성이 귀의하였는데, 예부터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끝을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하고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이 자는 아조(我朝)의 죄인이다.옛적에 최호(崔浩)가 국사를 폭로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니, 이 사람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반드시 엄하게 국문하여 치죄할 것이다. 저 육신이 충신이라면, 왜 선위를 받던 날에 쾌히 죽어서 인신의 절개를 바치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리하지 못했다면, 왜 도망하여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지 못하였는가. 이미 세조를 신하로서 섬겨놓고 또 임금을 해치기를 몰래 도모하는 것은 옛날 예양(豫讓)이 깊이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저 육신이란 자들이 우리 조정에 무릎을 꿇고서 자객의 음모를 하여,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다가 일이 실패한 뒤에 의사로 자처하였니, 마음이나 행동에서 낭패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헛되게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이름을 없애는 것이 덕으로 갚는 것만 못하다.’ 하는데,성삼문 등의 마음이 잠시라도 그 임금[단종]에게 있지 않음이 없으면서 일부러 세조의 조정에 신하 노릇하여 장차 다른 날에 성공을 기약하였다. 어찌 못난 사람들처럼 스스로 개천에 목매어 죽어서 아는 이가 없게 하리오 했다면 이는 옳지 못한 처사이다. 만일 성공하는 것만 귀하게 여기고, 원수에게 신하 노릇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백이ㆍ숙제(伯夷叔齊)와 삼인(三仁)이 반드시 꾀하여 주 나라에 신하 노릇하면서 은(殷) 나라의 흥복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무리가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의 옳지 못함을 드러내어 의논한다. 이 글은 오늘날 신자(臣子)가 볼 것이 못되니, 내가 모두 거둬다가 불사르려 한다.만일, 이 책에 있는 말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엄중히 다스리려 한다.” 하였다. 삼공이 답하기를, “이 책이 민간에도 드물고 연대가 오래되어 없어졌는데 만일 수색하는 거조를 내린다면, 반드시 큰 소란만 일어나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홍섬(洪暹)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성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언사가 지극히 간절하여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선조가 이에 감동하여 깨달아서 그만 두었다. 《석담일기》 《장릉지》
삼가 상고하건대, 육신은 참으로 충절의 선비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말할 바가 아니요, 《춘추(春秋)》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기는 것도 또한 고금을 통한 의리라.” 하였거늘 박계현이 경솔하게 때아닌 의논을 내 놓아 주상께서 잘못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하겠다. 애석하게도 모신 신하들 중에, 김종직이 성종께 대답한 말을 임금 앞에서 아뢴 자가 없었다. 《동각잡기》 《노릉지》
○ 효종 3년 임진년(1652)에 태학생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정몽주(鄭夢周)의 무리에게는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박팽년ㆍ성삼문 등에게는 정려(旌閭)하는 은전(恩典)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명 나라 문황(文皇)이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들의 삼족(三族)을 멸하고서도, 마침내 말하기를, ‘자녕이 있으면 짐이 마땅히 쓰겠다.’ 하였고, 만력(萬曆) 초에 이르러 혁제(革除)할 때에 죄를 진 여러 신하들의 분묘에 유사(有司)를 시켜 제사지내고, 후손들을 후하게 구하고 등용하여 충절을 표창하고 장려하였는데, 우리 선조 대왕께서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여 교서를 내리어 육신의 후손을 등용하였으니, 전에 없는 넓은 은전(恩典)이 신종(神宗)과 일치하였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그들의 사당과 분묘에 충절을 표창하여, 선조 대왕의 뜻을 확장시켜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듣건대, 성삼문의 홍주(洪州) 옛 집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니, 만일 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表)한 것같이 하시면 지하의 썩은 뼈를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선왕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준수하고 드러내어 후세에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 《장릉지》
○ 효종(孝宗) 8년 정유년(1657)에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명 나라의 방효유는 실상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라, 수년이 못되어 그 문집을 간행하고 전사(專祠)를 지어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관대하고 심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삼문과 박팽년의 무리는 실로 방효유의 짝입니다.일찍이 성삼문은 연산(連山)에 살았고, 박팽년은 회덕(懷德)에 살았는데, 연산과 회덕에 모두 유현(儒賢)의 사당이 있으므로, 학자들이 두 사람을 함께 향사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의 전사에 비교할 것은 아닌데, 이것도 감히 못하옵니다. 전하께서 명 나라의 전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허락하여 주시어 한 지방사람들의 소원에 맞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효종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행하지 못하였다. 《육신유고(六臣遺稿)》 《장릉지》
○ 숙종(肅宗) 5년 기미년(1679)에 노량에 행차하여 군사를 사열할 때에, 영부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강 건너편에 성삼문 등 육신의 묘가 있는데, 지금 듣건대, 그 무덤이 모두 무너져서 평토가 되었다 합니다. 세조조에 역률(逆律)로 논하였지마는, 일찍이 선조조에 신하가 각각 제 임금을 위한 행동이라 하여 그 자손을 등용하였으나,이번에 가까운 곳에 행차하신 때를 계기로 만일 그들의 무덤을 봉식(封植)하는 특전을 내리시면, 실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도리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숙종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자손을 등용하는 처사가 있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그 무덤을 봉식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숙종 6년 경인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육신 및 황보인, 김종서의 원통함을 논하여 말하기를, “저 여러 신하들은 천명이 이미 구주(舊主 단종 (端宗))에게 끊어지고 운명이 이미 진인(眞人)에게로 돌아간 것을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끝내 본래의 뜻을 지키어 죽음에 이르러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각각 제 임금을 위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세조께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절을 만나 그들을 베었지마는 실로 그들의 지조를 가상하게 여겼으므로, 당시에 말씀하시기를, ‘삼문 등은 오늘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고, 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기를, ‘나는 둔(屯)한 때를 만났고 너는 태(泰)한 때를 만났으니, 일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다.만일 나의 한 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네모진 물건을 끼우는 것이다.’ 하였고, 세조가 병환이 있으실 때를 당하여, 예종이 정무에 참여하여 결재하는데, 첫째로 명하여 계유 병자에 죄를 입은 사람에 연좌된 이백여 인을 모두 방면하였으니, 이러한 은전이 이미 세조가 계신 때에 행해졌습니다. 선조의 유신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 등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선왕께서 심히 칭찬하시기를, “성삼문 등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라 하셨으니, 열성조의 남겨주신 뜻을 이어서 여러 신하의 죄명을 씻는 것은 전하께서 선대의 뜻을 계술(繼述)하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숙종이 답하기를, “육신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열성조에서 죄를 용서하지 않았으니, 분묘를 봉식하거나 선비들이 존묘(尊墓)하는 것만 금지하지 않을 뿐이요, 이 밖에 따로 은전을 가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국조보감》
○ 숙종 7년 신유년(1681)에 과천(果川) 유림이 통문(通文)을 내어 관학(館學)에 고하고, 노량강 남쪽 언덕에 육신의 사원(祠院)을 처음으로 세웠다. 구월에 상량하는데,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상량문을 짓고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다. ○ 《장릉지》
○ 숙종 17년 신미 9월에, 능에 거둥할 때에 노량진을 건너다가 육신 묘를 보고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판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육신묘가 비록 예로부터 전설은 있으나, 아직도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박팽년의 후손인 고(故) 군수(郡守) 숭고(崇古)가 표석을 고쳐 세워서,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할 뿐이요, 감히 분명히 조상의 분묘라고 말하지 못하여, 한 번도 제사를 무덤 앞에서 행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 이제 갑자기 행하면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노량 가에 육신의 사우(祠宇)가 있으니, 여기에서 치제하는 것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목창명(睦昌明)은 말하기를, “육신이 일찍이 복관(復官)된 일이 없으니, 나라에서 치제한다면, 제문에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절의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지금까지 복관을 하지 않았는가?” 하였으며, 덕원이 아뢰기를, “방효유 등 여러 사람들은 두어 대 후에 모두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같이 관대하지 못하여,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특별히 명하시면, 무엇이 불가 하오리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내 뜻은 다만 그 절의를 가장(嘉獎)하고자 하는 것이니,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그 사우도 사액(賜額)하고, 치제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일을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니,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하다고 허락하였다. ‘체제는 아직 천천히 하라.’ 하였다.《장릉지》
○ 이에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소를 올렸는데,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이 곧 임금의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숭장(崇獎)의 은전을 속히 베풀지 못하게 한 것을 공박하고, 이어서 복관(復官)ㆍ사액ㆍ치제를 빨리 거행하여 육신을 포숭(褒崇)하고 격려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분부하겠다.” 하였다.
숙종이 대신들을 인견할 때에 영상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 일로써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허목이 답하기를, “매우 불가하다.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 만세에 바뀌지 않는 정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좌상 목래선(睦來善)은 아뢰기를,“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뜻한 바가 있는 것 같고, 선배의 의논도 또한 여러 갈래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고, 우참찬 유명천(柳命天)은 아뢰기를, “그 자손을 등용하고 사우(祠宇) 세우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육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으니, 복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실상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하였고, 병판 민종도(閔宗道)는 아뢰기를,“제왕가의 일은 필부(匹夫)와 다르니, 오늘날 만일 포창의 거조가 있으면, 사방이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흠앙하여 마지않을 터인데, 어찌 시비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형판 윤이제(尹以濟)는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을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판 유명현(柳命賢)은 아뢰기를, “육신의 일은 사람마다 그들의 지조를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전하의 행차가 지나시는 즈음에 이미 느끼신 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한번 치제하시옵소서.” 하였고, 부제학 권해(權瑎)는 아뢰기를, “육신의 충절은 만고에 빛나는데, 세조가 말씀하시기를 당세의 난신이라고 한 것은 후세로 하여금 포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포창하는 은전이 전하의 마음으로써 결정되었으니, 참으로 거룩하신 일입니다.” 하였고,교리 이동표(李東標)는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신중한 의논은 육신의 절의를 높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뜻은 있습니다. 세조께서 난신으로 베고는 충의로 포창하였더라면 어찌 천고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와는 조금 다르나, 전하께서 그 절의를 포창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지금 자기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포창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왕가의 일은 선조(先朝)에 득죄한 자도 후에 추장(追獎)하는 일이 많은데, 오늘 전하의 말씀은 매우 훌륭하니, 신하들이 받들어 거행하는 데에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모든 신하들의 갑논을박이 각각 견해가 있어, 그러할 것이나 방효유의 빛나는 충절을 이미 성조가 인정하였고, 그 뒤에 시호를 준 것이 또한 관대한 은전에서 나왔으며, 세조께서 그들에 대하여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은, 그들을 가상히 여기시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춘추에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내가 알지 못함이 아니나, 제왕가의 일은 필부와 다르므로, 다만 그 절의를 포창하고 후인을 격려하고자 함이니, 오늘의 이 일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또 제문의 문자에 꺼리고 구애받음이 있다는 논의에 대하여는 지금 포창하려는 것은 오직 절의를 가상히 여기는 데 있으니,제문을 지을 때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도리에 신중해야 하며 용이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예랑(禮郞)을 시켜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 진사 민언심(閔彦諶)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급히 쾌한 결단을 내리시어 거듭 치제ㆍ복관ㆍ사액의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하였다. 숙종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본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으나, 다만 도리(道理)에 신중하게 해야 하기에 널리 물어서 재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였다.
○ 이조 참판 이현일(李玄逸) 지방에 있는 유신 의 논의의 대략에, “세조가 천명과 인심에 핍박되어 부득이 단종에게서 전위를 받았는데, 저 육신들이 자기가 섬기던 임금[端宗]에게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절개를 지켜 항거하고 충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일은, 주의 한통(韓通)ㆍ명의 경청(景淸)ㆍ고려의 정몽주와 같습니다. 대개 백이가 무왕을 그르게 여겼지만 공자가 가로되, ‘백이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하였으니, 백이를 칭송한 까닭으로 해서 무왕에게 해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한통이 주(周)에 충성을 바쳐 죽었는데, 송 태조가 후하게 추증하였고, 경청과 정몽주가 섬기던 임금에게 절개를 다하였는데, 명 나라 선종(宣宗)과 우리 태종이 복관도 명하고,포증(褒贈)도 명하였으니, 모두 절의를 숭장하여 후세 신하의 충의를 권한 것입니다. 하물며 세조가 육신을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이 실상 송 태조가 한통을 추증한 뜻과 같고, 또 은미한 뜻을 후세 자손에게 보인 것이니, 지금 이 일은 실로 선왕의 뜻을 잘 이어 받들어 실행하는 것입니다.또 어찌 털끝만한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 어름어름 선대의 일을 숨기려고 하면 도리어 세조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을 순히 한 거사에 누가 되고, 선조의 너그럽고 넓은 도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12월에 특명으로 육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민절사(愍節祠)라 사액(賜額)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국조보감》 ○ 또 명하여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벼슬을 회복하고 연산(連山)에 있는 성씨의 밭과 노비를 도로 내어 주었다. 전교하기를, “대개 국가가 먼저 힘쓸 것은 절의을 숭장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고,신하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또한 절의에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옛적 제왕들이 절의를 지키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고 포창을 한 이유이다. 생각건대, 저 육신들은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으리요마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충절이 수백 년 후에도 늠름하게 떨쳐져서 명 나라의 방효유ㆍ경청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침 선릉(先陵)에 행차하는 일이 있어 연(輦)이 육신묘 옆을 지나다가 내 마음에 더욱 느낀 바가 있었음에서랴. 슬프다,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모르겠는가. 내가 포창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들의 절의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후세의 충신이라 하신 세조의 말씀에 뜻이 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세조의 남겨준 뜻을 계승하고 세조의 거룩한 덕을 빛내는 것이다.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있으랴. 성삼문 등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치제하여 백대의 풍성(風聲)을 세우라.” 하였다. 《장릉지》
우승지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육신 중에 박팽년만이 혈족이 있어서 나라에서 써 주었고, 성삼문은 자손이 없고 외손만 있었는데, 연전에 서울 인왕산에서 우연히 매장된 신주를 얻었다 합니다. 지방에 유락(流落)한 외손이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오니, 만일 그곳의 감사로 하여금 그 성명을 찾아 아뢰게 하여, 써 주시면 더욱 전하의 거룩한 덕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지》
○ 장릉(莊陵)을 능으로 봉한 뒤에 총리사(摠理使) 최석정(崔錫鼎)이 장계(狀啓)하기를, “지난 을축 연간에 육신의 사당을 단종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던 옛 사당 남쪽에 창설하였는데 감사 홍만종(洪萬鍾)ㆍ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ㆍ군수 조이한(趙爾翰)이 상의하여 창건하고 엄흥도(嚴興道)를 배향하였다.보통 규정으로 말하면 능침(陵寢)과 화소(火巢) 안에 신하의 사당을 둘 수 없지마는, 능의 멀리 지방의 외진 곳에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육신들이 능침을 모시고 호위하는 것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만일 능에 봉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육신의 사당을 헐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보더라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니, 헐지 말고 그대로 두어 동시에 제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숙종이 대신들을 불러 볼 때에 영상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사당은 분묘와 다르니, 능의 화소 안에 그대로 두는 것이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촉한(蜀漢) 무후(武侯 제갈량)의 사당이 소열(昭烈)황제의 사당 근처에 있으므로, 두보(杜甫)의 시에 ‘군신(君臣) 일체로 제사를 같이한다.[一體君臣祭祀同]’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을 그대로 능 안에 두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상운이 아뢰기를, “소열황제의 사당은 촉한 때에는 반드시 백제성(白帝城)에 따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요, 뒷사람이 창설한 것 같으니, 오늘 이 일을 증거 삼을 수 없고, 또 봄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왕릉의 정자각(丁字閣)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육신의 제사를 행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최석정이 아뢰기를, “단종은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영녕전(永寧殿)에 올려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공신이 없었는데, 육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능에 모시어 호위하게 하는 것은 이승이나 저승이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들의 사당을 화소 밖에 옮겨 세운다면 섭섭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경(經)과 권(權)이 있어서, 반드시 전례(前例)에 구애될 것이 없으니, 사당을 그대로 두어서 옮기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호판(戶判)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정자각에서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예판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조천(祧遷)된 능에는 한식 차례 외에 없는데, 육신의 사당에는 춘추의 제향이 있을 것이니,이것도 또한 장애가 됩니다.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참찬(右叅贊) 서종태(徐宗泰)ㆍ이조 참판 이인환(李寅煥)ㆍ부제학 조상우(趙相愚)ㆍ우부승지 김우항(金宇杭)은 모두,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신리(神理)와 인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육신은 다른 신하와 처지가 다르니, 사당을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운다는 것은 옳은 줄로 모르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공신을 능에 모신 예가 있고, 이번에 사릉(思陵) 근처에 정씨(鄭氏) 분묘도 파서 옮기지 않기로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에도 그런 예를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사당은 그대로 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그 뒤에 화소 밖으로 옮겨 세웠다.


엄흥도(嚴興道)


엄흥도(嚴興道)는 영월(寧越) 호장(戶長)인데, 숙종 조에 공조 참의를 증직하고 영조 무인에 종이품을 증직하고, 뒤에 공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 선조 을유년(1685)에 군수 김늑이 흥도의 종손(宗孫)인 정병(正兵) 한례(漢禮)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고, 이어서 그 고을에 있는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고, 문안(文案)을 만들어 주었다. 《조야기문》
○ 숙종 무인년(1698) 겨울 주강(晝講) 때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엄흥도의 자손을 돌보아 주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한데, 근래에 들으니, 그 7대손 신무(信武) 형제가 청주 땅에 살고, 그 밖의 족속도 많다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본 뒤에 처분을 내려주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최석정이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주는 편지에 말하기를, “엄호장이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의를 붙든 것에 감탄하고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지금 후손의 등용에 대하여 어찌 인색하게 돌아보지 않을 뜻이 있으리오. 다만 엄신무가 말하기를, ‘그 아비 생존시에 송상(宋相) 시열(時烈)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었는데, 그 선조 호장의 사적을 기술하여 주기를 청하니, 송상이 허락하고 이루지 못하였으며, 계축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천봉(遷奉)할 때에 송상이 화양동에서 능 아래로 가는데, 그 아비가 따라 갔다.’ 한다. 내가 장릉에 있을 때에 육신 사당에서 기문(記文) 현판을 보았는데, 곧 송상이 지은 것으로서, 그 글에 이르기를, ‘무신 년간에 내가 경연에서 호장의 자손을 등용하자는 뜻을 아뢰고 그 뒤에 여러 곳으로 알아보았으나,찾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하였다. 이 글은 을축년에 지은 것이어서 엄신무의 아비가 송상을 따라다녔다는 계축년으로부터 십여 년이 되거늘,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무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영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장이 늙어 죽은 뒤에 자손이 없으므로 영월에 있는 분묘를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였다. 《명곡집(明谷集)》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인데, 문종의 부마(駙馬)이다.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에 봉해졌다. 시호는 헌민공(獻愍公)이다.
○ 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


정보(鄭保)


호는 설곡(雪谷)이요, 본관은 연일(延日)이니, 포은 정몽주의 손자요, 이조 참의 종성(宗誠)의 아들이다. 벼슬이 감찰ㆍ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윤정(允貞)이니, 주부이고, 다음은 윤화(允和)요, 끝은 윤관(允寬)이다. 윤화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올랐는데, 창방(唱榜)할 때에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공이 슬퍼하여 마침내 홧병을 얻었다. 병자의 변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월정만필》


권절(權節) 중귀(重貴)의 아들 엄(嚴)이 고려의 집의(執義)로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을 권(權)으로 회복하였다. 백 세(百歲)를 살았는데, 집에 있은 지 50 년에 한 번도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는 단조(端操)요,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집의(執義) 엄(嚴)의 손자요, 밀직사(密直司) 왕중귀(王重貴)의 증손이다. 고려말의 정승 왕후(王煦)는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아들이요, 아홉 봉군[九封君]중의 하나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길러서 아들을 삼고 성을 왕씨로 주었다.아들 중귀(重貴)가 밀직사로 공민왕 때에 화를 입었다. 중귀의 아들 숙(肅)ㆍ엄(嚴)이 이씨 조선에 들어와 성을 권으로 회복하였다. 세종 정묘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교리를 지냈는데, 병자 이후에는 미친 병을 칭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 어려서 기이한 상모(相貌)가 있고 힘이 남보다 뛰어나 남이(南怡)와 한 때에 함께 이름을 날렸다.
○ 세종조에 과거에 올랐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문무(文武)에 큰 재주가 있으니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여 그 그릇을 성취시키겠다.” 하여 특별히 사복 직장(司僕直長)을 제수하였다가 이어서 집현전 교리를 시켰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친밀히 하며 은밀히 대사를 귀띔하였다.공이 귀먹은 체 하며 응하지 않고, 드디어 자취를 감출 생각으로 미친 병을 칭탁하고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았으니, 절(節)이라는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그 재주와 그릇을 아끼어 첨추(僉樞)에 제수하고 충청 감사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죽은 뒤에 교리(校理)라는 관직명을 묘비에 썼다. 《지봉유설》 《후촌만록》
○ 처신할 방법을 그 조카인 은군자(隱君子) 권안(權晏)과 상의하여 몸가짐과 일에 대응함에 있어 검속을 하지 않고 정신병 든 사람같이 하며 그 몸을 마쳤다. 《율곡집(栗谷集)》 .t;율정난고서(栗亭亂稿序).
○ 단종에게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는데, 공과 원호(元昊)의 무리가 생육신이 된다. 일찍이 남의 집의 묵은 편지첩을 보니 공의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가 멀리 세상을 떠나버리니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후촌만록》
○ 공이 어렸을 때, 친척의 집안 여종이 와서 공의 어머니에게 말을 전하느라고 중문 옆에 섰는데, 공이 지나다가 기둥을 들고 여종의 치마폭을 그 밑에 넣었으나 여종은 알지 못하였다. 갈 때에야 알고 울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의 누이가 역시 엄청나게 힘이 세어 기둥을 들고 꺼내주었다. 권씨 옛 집에 맷돌 한 쌍이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전하기를, 공이 평일에 들고 치던 것이라 한다. 《후촌만록》
○ 공이 산에서 놀다가 이상한 중을 만났는데, 일부러 와서 힘자랑을 하였다. 공이 절에 있는 사기그릇을 모으게 하니 열 죽이나 되었다. 중으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퉁겨서 깨뜨리게 하였다. 두 죽까지 깨뜨리고 나서는 중이 손톱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공이 이어서 잠깐 사이에 여덟 죽을 다 깼는데 그 손톱 자국이 사기 그릇 죽마다 모양이 달랐다.어떤 것은 열 개의 눈썹같이 되고 어떤 것은 열 개의 화판(花瓣)같이 되었는데, 예리한 칼로 오린 것 같았다. 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공은 하늘이 내린 분이라.” 하였다. 《후촌만록》. 방언에 그릇 열 개를 한 죽이라 한다.
○ 숙종 임오에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육신 사당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고, 갑신에 경기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에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어 정려(旌閭)를 명하고 이조 판서의 증직과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영조 임자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 사당 옆에 세웠는데 팔현은 즉 김시습(金時習)ㆍ남효온(南孝溫)ㆍ원호(元昊)ㆍ권절(權節)ㆍ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정보(鄭保)ㆍ성담수(成聃壽)다. 뒤에 신설한 모든 사당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이 있어서 헐었더니 삼일 뒤에 예조의 공문이 내려왔는데 팔현사는 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미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조공(曺公) 하망(夏望)이 그 때에 부사로 있었는데 그 아들 명후(命後)가 친히 보고 아주 자세히 전하였다.


원호(元昊)


원호는,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호는 관란(觀瀾)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숙종조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무인에 최석정의 아룀으로 인함.
○ 단종 초기에 공이,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보고, 집현전 직제학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원주 남송촌(南松村)에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단종이 영월로 내쫓기니, 공이 영월 서쪽에 나가 집을 짓고 관란(觀瀾)이라는 호를 짓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읊조리기도 하고, 문을 닫고 책도 지으며, 아침저녁으로 단종 있는 쪽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정축에 단종이 승하한 뒤에, 3년상을 입고 복이 끝나매 다시 원주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문밖으로 나오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촌인 판서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하인들을 대동하지 않고 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으나, 굳건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동으로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으로 머리 두니, 장릉(莊陵)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t;명곡집 묘비(明谷集墓碑).
○ 친지들 가운데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많이 와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절대로 접하지 않았다. 한 관찰사가 따르는 하인들을 떼어놓고 평복차림으로 찾아갔다. 공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나와 만나서 대면하니 관찰사였다. 곧 손을 내두르며 달아나 들어가서 장차 몸을 더럽혀질 것 같이 하였다. 관찰이 무안하고 섭섭하여 돌아갔다. 관부(官府)와 가까운 것을 싫어하여 주천현(酒泉縣) 산골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마쳤다. 묘는 남송에 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공의 손자 숙강(叔康)이 예종조(睿宗朝)에 사관으로 화를 입으니, 공이 평생의 저술과 소장을 다 태워버렸다. 또 그 자제를 경계하되, “다시는 글을 읽어서 명리를 구하지 말라.” 하였다. .t;묘비. ○ 숙강의 일은 예종조에 보인다.
○ 군자가 말하기를,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은 지금의 백이(伯夷)요, 육신은 지금의 방효유(方孝孺)ㆍ연자녕(練子寧)이요,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ㆍ무항(霧巷 공의 사는 곳)은 육신보다도 오히려 기상이 높다.” 하였다. .t;묘비.


최덕지(崔德之)


최덕지는 호는 연촌우수(煙村迂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태종 을유(乙酉)에 문과에 올랐으며,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영암(靈岩)의 영보(永保)에 퇴거하여 그 서실(書室)을 존양(存養)이라 편액하였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 직제학을 제수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가서 나이 72세에 죽었다.
○ 계유년(1453)간에 국가에 사고가 많았으니, 공이 물러간 것은 참으로 기미를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기를, “밝은 지혜와 바른 학문과 높은 절개가 견줄 데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선현(先賢)으로 기록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명신록》


기건(奇虔)


기건은, 호는 청파(靑坡)이며, 본관은 행주(行州)이다.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제수받아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요,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 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민하고 학업이 정민하고 순수하였다. 집이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웠다. 《월사집(月沙集)》 .t;기대헌비(奇大憲碑).
○ 공은 단종조부터 벼슬을 쉬고, 문을 닫고 인사를 사절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세 번이나 공을 집으로 찾았는데, 공이 청맹(靑盲)으로 칭탁하였다. 세조가 바늘을 가지고 찌를 것처럼 하여 시험하니, 공이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았다. 세조는 마침내 공을 등용치 못하였고 공도 화를 면하였다. .t;묘비.
○ 이씨 조선의 인재가 세종조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도 지평에 뽑혔으니, 공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높은 이름이 일세의 중망을 받은 것이 어떠했겠는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이미 몸을 바치고서, 시국이 어지럽고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는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고,병을 핑계로 자취를 감추어 천년(天年)을 마침으로써 끝내 절개를 변치 않았으니, 명예도 또한 보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으로 임을 섬기고 선도(善道)로 명철보신한 것’이아닌가. .t;묘비.
○ 옛날에는 부인이 출입할 때, 머리쓰개가 없었는데, 공이 그것을 속칭으로 소위 너울[羅兀]이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 궁녀가 밖에 나갈 때에 쓴다 처음 만들어 바치니 지금도 쓴다.
○ 연안(延安)에 붕어가 나는 큰못이 있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관에서 붕어를 징수하거나 개인적으로 붕어를 요청하는 폐가 백성에게 미치므로, 사람들이 그 연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였다. 공이 부사가 되어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 하였다. 드디어 끊고 먹지 않으며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필원잡기》 .t;묘비.
○ 공은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한다.” 하였다. 《용재총화》
○ 제주의 예전 풍속에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장 언덕이나 구렁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제주 사람이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니,삼백여 명이 뜰 아래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땅에 드러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것이 없으니, 공이 응당 금년에 어진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까지 공의 세 아들이 다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 축(軸)이 아들 찬(禶)을 나아서, 뒤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월사집(月沙集)》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경은(耕隱)이요,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판(兵判)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심지가 먼저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밑에 살았다. 세종 정미에 문과에 뽑혔고, 한림(翰林)ㆍ정언(正言)을 거쳐 외임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갑술년간에 나라 일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선산 강정리(綱正里)에 살면서, 귀먹고 청맹이 되었다고 칭탁하여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은지 30여 년이었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궐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집이 가난하여 앉을 돗자리가 없었고, 먹을 때에 수저가 없었으나 태연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손이 많았으며 자녀가 아홉 사람 출입하는 데는 탈것이 없어서 걸어 다녔다. 사실이 《청백전》에 실렸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 김숙자(金叔滋)가 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귄 친구가 되었는데, 만년에는 병을 칭탁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김종직(金宗直)이 들어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였고,간혹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한집안의 처자라도 청맹이 거짓으로 칭탁한 줄 알지 못하였는데, 죽을 때에 임해서야 비로소 알았다. 부인 김씨와 함께 모두 나이 90세 죽었다. 《일선지(一善志)》 《해동잡록(海東雜錄)》 ○부제학 이준(李埈)의 일선지(一善志) 발문


조상치(曺尙治)


조상치는, 자는 자경(子景)이며, 호는 단고(丹皐)이다. 또는 정재(靜齋)라고도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문과로 병사(兵使)가 된 신충(信忠)의 아들이다. 기해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이 세종ㆍ문종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입어 오래도록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공양에 편리하도록 자청하여 합천(陜川)ㆍ함양(咸陽)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때에 집현전이 창설되었는데, 공이 부제학으로 뽑혔다.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드디어 문을 닫고 병을 일컬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이가 은퇴할 때가 못되었는데,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칭탁하기를,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세조가 그의 속뜻을 알고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다릿병을 칭탁하고 들어가 사은하지 않았다. 세조가 백관을 시켜 동대문에서 전송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벗어나 돌아갔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의 절조가 아니면 한 광무(漢光武)에게 용납될 수 없고, 한 광무의 성스러운 덕이 아니면 엄자릉의 높은 절조를 이루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유사(遺事)》
○ 단종조에 벼슬이 부제학이었는데,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마단(麻丹)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 이름이다. 에 퇴거하여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일찍이 큰 돌 한개를 얻어서 쪼지 않고, 꾸미지 않고, 그 표면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曹某)의 묘’라 하고, 자서(自序)하기를,‘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 앞에 세워라.” 하였다. 공이 죽으매, 여러 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었다.공이 일찍이 자규(子規 두견새)를 읊은 사(詞)에,

접동 접동 접동새 소리 / 子規啼子規啼
그 무엇을 호소하노 /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 돌아가리 / 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 땅을 날아서 건너고저 / 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는 깃을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 看他衆鳥摠安巢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 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로웁고 그 모습 초췌하다 / 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뉘라서 널 돌보리 /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랴 / 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 강개불평(慷慨不平)은 /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못 셀 것을 / 屈指難盡數

하였는데, 대개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자규 노래를 듣고, 느낌이 있어 화답한 것이다.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박팽년이 보내 편지에 말하기를, “행차 뒤에 일어나는 티끌을 멀리서 바라보니 높아서 미치기 어렵도다.” 하였고, 성삼문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箕山)ㆍ영수(潁水)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장(曺丈)의 죄인이라.” 하였다. 《영남가찬(嶺南家撰])》


조변륭(曺變隆)


조변륭은, 본관은 창녕이니, 단고(丹皐) 상치의 아들이다. 세종 갑자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 상치가 영남에 돌아가 숨던 때에 그의 아들인 변륭은 어버이가 영남에 있으므로 벼슬에 종사할 형편이 못되어 드디어 같이 돌아갔다. 뒤에 발탁되어 예조 참의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자손에게 유언하여 노릉조(魯陵朝) 부지괴원정자(副知槐院正字)라 묘석에 표하고 참의(叅議)직함은 쓰지 말라 하였다.


조려(趙旅)


조려는, 자는 주옹(主翁)이며, 호는 어계(漁溪)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니, 계유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종직의 방하(榜下).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단종이 내쫓긴 뒤에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고을 서쪽 원북동(院北洞)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수목이 울창하였는데, 공이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어계(漁溪)라 하였다. .t;본전(本傳). 《성창랑집(成滄浪集)》 ○ 《어계집(漁溪集)》이 한 권을 후손 영호(榮祜)가 안음(安陰) 군수로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 낙동(洛東)에 돌아와서 낚시질로 몸을 마치었으니,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金時習)과 같았다. 깊이 스스로를 숨겨서 사람들이 일컬을 것이 없었다. 일찍이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지은 그 시의 대략에,

머리 돌려 눈을 드니 강산은 저물었고 / 回頭擧目江山暮
땅은 넓고 하늘은 아득하니, 생각 또한 아득하다 / 地闊天張思渺茫
만고풍류 두목지(杜牧之)는 취미수(翠微峀)에 올랐는데 / 杜牧旣上翠微峀
국화 따는 도연명(陶淵明)은 술 오기만 기다림을 / 陶潛悵望白衣郞
복희씨와 헌원씨는 아득하여 슬픔이 한이 없고 / 羲軒遠矣悲何極
요임금과 순임근은 뵐 수 없어 절로 마음 슬프네 / 勛華不見心自傷
시 읊는 붓 밑에는 하늘땅이 넓었는데 / 沈吟筆下乾坤闊
취해서 어지러운 술잔 앞엔 세월마저 더디도다 / 爛醉樽前日月長
슬프다, 늙은 몸이 살아 늦도록 고생하니 / 嗟哉潦倒生苦晩
일편단심 고운 님을 꿈속엔들 잊을 소냐 / 懷佳人兮不能忘

○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 속에 싸서 두고 그 빛을 감추고 초목과 같이 썩어도 뉘우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 후인이 측량할 수 없다. 만일 서산(西山)의 백이ㆍ숙제가 당시에 났더라면 반드시 서로 더불어 마음을 터 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을 것이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지은 .t;비문.
○ 공이 일찍이 백이산(伯夷山) 밑에 살았는데, 숙종 기묘에 단종이 복위된 뒤에, 영남 선비 신만원(辛萬元) 등이 공의 절개와 행실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산 밑에 사당 서산서원(西山書院)이다. 을 세웠는데, 공과 김시습ㆍ원호ㆍ이맹전ㆍ성담수ㆍ남효온을 향사하였다.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자는 이수(耳壽)이며, 호는 문두(文斗)이다. 본관은 창녕이니, 교리 희(熺)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다.
○ 아버지 희가 성삼문에 연좌되어 폐고(廢錮 벼슬길을 막는 것)되었는데, 공은 지극한 행실과 높은 식견으로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물러가 살면서 한 번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 그 때 죄인의 자제는 의례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去就)를 보는데 머리를 숙이고 취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 공이 높은 가문의 자제로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촌사람들이 보기를 농사꾼같이 하였다. 그 조카 몽정(夢井 교리 담년(聃年)의 아들)이 경기 감사로 순시하던 차, 그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았으나, 고을 사람이 그의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물색하여 알아 가지고 그 문에 이르니, 초가집이 엉성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요,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는데, 공이 손을 저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우계집(牛溪集)》


윤혜(尹譓)


윤혜는,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관찰사 임(臨)의 손자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르렀다.
○ 단종이 내쫓기니, 공이 예조 좌랑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갔다. 임종시에 충효(忠孝) 두 글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 공의 숙부 지정(之定)이 딸이 있어 권완(權完)에게 출가하였는데, 완의 딸이 단종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완이 형을 받아 죽으니, 공이 밤에 신을 벗고 한강가로 도망하였으며, 이어서 가족을 끌고 호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t;본전(本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자는 열경(悅卿)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고려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일성(日省)이요,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인데,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동봉(東峰)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청간공(淸簡公)이다.
○ 숙종조에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사인(士人) 김시습이 중이 되어 세상에서 도망하였는데, 그 문장과 절행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뒤의 명현(名賢)들이 지금 세상의 백이(伯夷)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증직하고 치제하면 절의를 격려하는 도리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특별히 증직하라.” 하니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장릉지(莊陵志)》
○ 공이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능히 글을 알았다. 일가 할아버지[族祖]인 최치운(崔致雲)이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말은 늦게 하나 정신은 민첩하여 글에 대하면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 세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물었다.[桃紅柳錄三月暮]”는 것과,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珠貫靑針松葉露]”는 것 등이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읊기를, “비도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고. 누런 구름이 쪼각쪼각 사방으로 흩어지누나.[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다섯 살에 대학을 통하고 능히 글을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이름이 났다. 허 정승 조(稠)가 찾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자(老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다.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老木開花心不老]” 하매, 허정승이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 바 신동이다.” 하였다. 세종이 듣고 명하여 승정원으로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이 시험하기를, “동자의 공부는 백학(白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하매, 공이 대답하기를,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에 뒤집는도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하였다. 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앉아서, 시를 짓게 한 것이 많았다. 이창이 벽에 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이 그림을 두고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매, 곧 대답하기를,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가.[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혹은 그 아버지 일성(日省)을 불러서 전교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고자 하나, 남이 들으면 해괴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가르치고 길러,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곧 비단 오십 필을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니 공이 그 끝을 모두 이어서 끌고 나갔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명성이 한 나라에 진동하여 ‘다섯 살’이라고 불렀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이 임금의 포장을 받고서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단종 을해에 바야흐로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중이 되어 절에 의탁하였다. 《율곡집(栗谷集)》 《명신록(名臣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영발(映發)하며, 간솔(簡率)하고 경직(勁直)하였다. 시사를 슬퍼하고, 세속에 분개하여, 울적한 기운을 펴지 못하고 시속을 따라 처세하지 못하여, 드디어 물외에 방랑하였다.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렀다. 고도(故都)에 유람하여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온갖 서적에 빠짐없이 통달하여 사람이 거론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곧장 말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상하고 강개한 마음을 풀 데가 없어서, 세상 풍운ㆍ천석ㆍ화과(花果)ㆍ조수ㆍ인사의 시비ㆍ득실과 귀천ㆍ사생으로부터 성명ㆍ이기ㆍ음양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문장에 붙였기 때문에 그 글이 물이 솟구치고 산이 일어나듯 하며,산이 온갖 물상을 간직하듯이, 바다가 모든 생물을 감추듯이, 신(神)처럼 부르고 귀(鬼)처럼 화답함이 번갈아 나타나고, 단계별로 나와서 성률과 격조에 그리 유념하지 않아도 생각과 운치가 높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도리에 정밀하여 연구하고 수양하는 공부는 적으나,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여 자연스럽게 해득함이 있어서 의논이 유가(儒家)의 종지를 잃지 않았고,선교(禪敎)ㆍ도교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병폐의 근원을 연구하였으며, 선어(禪語)를 하기를 좋아하여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므로, 늙은 중으로서 그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자라도 감히 대항하여 변론할 이가 없었다. 명성이 일찍 드러 났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마음은 유(儒)이면서 행적은 불(佛)이었는데,세상 사람들이 해괴히 여길까 하여 짐짓 미친 태도를 취하여 실상을 숨기려 한 것이다. 선비가 글을 배우고자 찾아오면 나무나 돌로 때리거나 활을 쏘려 하면서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산전을 개척하기를 좋아하여 귀한 집 자제에게도 반드시 밭일을 시키니 끝까지 수업하는 자가 적었다.
○ 수락정사(水落精舍)에 들어가 살면서 도를 닦았다. 유생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법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또한 말하여 주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한 세상을 조롱하였다. 비록 불가에 들어가 세상을 피하였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거리에 자나다가 눈으로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한참 동안 박힌 듯이 서 있기도 하고,간혹 거리에서 소변을 보면서 뭇 사람들이 보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서로 다투어 기와조각과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아다녔다. 《명신록》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세조가 내전(內殿)에 중을 불러들여 법회(法會)를 벌였을 때, 공도 또한 뽑혀서 참여하였는데, 홀연 이른 새벽에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뒤를 밟으니,일부러 거리의 거름구덩이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거느리고 다니는 상좌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音調))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감돌았다. 매양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상좌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번 읊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성품이 술을 즐기어 취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세종 대왕을 뵈올 수가 없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며 지성껏 섬겼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이 대사를 받든 지가 오래나, 아직도 한번 설법을 들려주지 아니하니 대사의 청정(淸淨)하신 법안(法眼)을 마침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저희들이 방향을 잘 알지 못하니, 금 집게로 눈에 가린 것을 벗겨 주소서”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크게 법연(法筵)을 열라.” 하고, 공이 가사(袈裟)를 갖춰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중들이 가득 모여서 합장하고 꿇어 앉아 듣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모르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에 매었다.공이 또 말하기를, “소 먹일 꼴을 가져 오라.” 하여 소 엉덩이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사람의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담에 말하기를 소 뒤에 꼴이라 한다. 여러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책《금오신화(金鰲神話)》을 저술하여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후세에 반드시 설잠(雪岑)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책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전등신화(剪燈神話)》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평소의 심회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었다. 시집(詩集)에 미자(薇字)ㆍ궐자(蕨字)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에 비가 내린 뒤에 시냇물이 불어서 넘쳐 흐르는 때를 만나면 종이를 썰어 100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에 따르게 하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반드시 물살이 급한 곳을 택해 앉아서 읊조렸다.율시(律詩)나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지어 종이에 써서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고,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지은 시가 거의 100여 수나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 생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서 있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 문득 곡하며 그 부분을 깎아버렸다. 어떤 때는 종이에 시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 어떤 때는 나무로 농부의 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어서 책상 옆에 두고 하루종일 들여다 보다가 곡하고 불태워 버렸다.어떤 때에는 자신이 심은 벼가 심히 무성하여 이삭이 탐스러워 볼 만한데도, 술이 취한 때에 낫을 내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버리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달밤에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기를 좋아하였는데, 외우고 나면 반드시 울었다. 제목(除目)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대관이 된 자가 혹시라도 인망이 없으면 반드시 울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슨 죄를 졌는가.” 하였다. 《장릉지》
○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 등이 공을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막 대궐에 들어가느라고 사람을벽제(辟除)하고 있는데, 공이 헤진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띠고 패랭이를 쓰고 거리에서 거정을 만났다. 비켜서지 않고 머리를 제치고 쳐다보며 부르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 이 평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고 대답하며 초헌(招軒)을 멈추고 얘기하니, 온 거리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그때에 조정 벼슬아치 중에 공에게 모욕을 당한 자가 있어서 서거정을 보고 조정에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만 두게 그만 두게, 미친 사람을 상관할 것 있나. 지금 이 사람을 죄 주면 후세에 반드시 자네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네” 하였다. 《명신록》
○ 지관사(知館事) 김수온(金守溫)이, “맹자가 양(梁) 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본 일을 논함”이라는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 보였다. 유생 한 사람이 삼각산에 가서 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호 가 장난을 좋아하도다. 이것이 논제(論題)에 합당한가.”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런 제목을 못 낼 것이다.” 하고 붓을 달려 한 편을 지어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게.” 하였다.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읽다가 끝마치기 전에 갑자기 묻기를,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절에 있는고” 하였으니, 그를 알아봄이 이와 같았다. 그 논(論)에 대략 말하기를 “양혜왕은 본시 제후(諸侯)로서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가히 볼 것이 아니라.” 하였다. 《율곡집》 《명신록》
○ 도성에 들어오면 매양 향교동(鄕校洞) 남의 집에 붙어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이 찾아오면 공이 예(禮)를 갖추지 않고,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얘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모가 서대감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뒤에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수일 뒤에 서거정이 매양 다시 찾아와 보았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신숙주가 소시에 친한 친구로서, 공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 주인을 시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눕게 한 뒤에 가마에 태워 신숙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이 깨어 속은 줄 알고 놀라 일어나서 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열경이 어째서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였다. 공이 입을 다물고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그 뒤에는 종적을 더욱 비밀히 하였다.
○ 엄자릉(嚴子陵)의 조어도(釣魚圖)에 시를 지어 쓰기를,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위에서 연파(烟波) 낚는 저 늙은이 / 桐江江上釣煙波
생계는 소연(蕭然)하여, 도롱이 하나뿐이로다 / 生計蕭然一箇蓑
한(漢) 나라 천문대에 객성(客星) 아니 비쳤던들 / 漢殿若無星象動
깨끗한 몸 천추 뒤에 누명은 없을 것을 / 千秋定不婁名侯

하였다. 《노릉지》 ○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숙주가 태공(太公)ㆍ자릉(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시를 지어서 조롱하였다.” 하고 《후정쇄어(候鯖瑣語)》에는 태공의 조어도 시는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 하였으므로 서거정의 아래에 기록되었다.
○ 어떤 사람이 김수온이 좌정하고 일을 전하매, 공이 말하기를, “괴애(乖崖)가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좌화(坐化)하는 것이 예(禮)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만 귀히 여기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조우(祖雨)라는 중이 일찍이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자(莊子)》를 배웠다. 그 중이 어떤 종실(宗室)의 집에 이르렀는데 공이 뒤늦게 도착하여 짐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가 노(盧)에게 수학하였다 하니 그게 사람 축에 드는 자인가, 만일 여기 오면 내가 꼭 죽이겠다.” 하였다.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툭 뛰어 나오며 말하기를,“공이 감히 정승에게 공공연히 욕을 하니 나를 죽이고 싶거든 죽여 보라.” 하였다. 공이 조우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 하니,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싸움을 뜯어 말려서 조우가 간신히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그 뒤에 조우가 공을 수락산(水落山)에서 만났는데 공이 반가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찾아 왔는가?” 하고 밥을 지어먹게 하였다.밥이 들어와서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할 때, 숟갈을 입에 이르려 할 때마다 공이 미리 발로써 땅 위의 먼지를 밥숟가락에 묻혀서 한 술도 떠먹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노모(盧某)에게 수학하였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
○ 학조(學祖)는 공의 일가로서 중이 된 자인데, 공에게 승복하지 않고 매양 더불어 항거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동행하는데, 그 때에 날이 비로소 갰는데 길 옆에 산돼지가 칡뿌리를 파내서 깊은 웅덩이가 생긴 곳에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이 속에 들어가서 한번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려 하는데,네가 나를 따를 테냐?” 하고, 곧 둘이 흙탕물에 들어가서 철벅거리다가 나왔다. 공은 몸과 의복에 한 군데에도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다 젖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나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월정만필》
○ 신축 연간에 공이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고 나이 43세 글을 지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었는데, 그 대강에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펴신 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첫머리요, 삼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옵거늘, 어리석은 불효자가 가계를 이어받고도 이단(異端 불교)에 미혹타가 늦게 서야 후회하노라.[帝敷五敎 有親居先 罪列三千 不孝爲大 愚騃小子 似續本支 沈滯異端 末路方悔]” 하고,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전처럼 하다가 얼마 후에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중이 되었다. 《명신록》 《추강냉화》
○ 임인 이후에 세상이 장차 쇠락할 것을 알고 여염간에 버린 사람으로 처신하며 날마다 장예원(掌隸院)에서 노비에 관련된 문제로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말하기를, “너 그만 두어라.” 하였다. 정이 못 들은 체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위태롭게 여겨서 예전에 교유(交遊)하던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공이 혼자 거리의 불량한 자들과 같이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서 늘 바보처럼 웃었다. 뒤에 혹은 설악산(雪岳山)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春川)산에도 살기도 하여 출입이 일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천 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 자는 정중(正中)ㆍ홍유손(洪裕孫) 자는 자용(子容)ㆍ안응세(安應世) 자는 자정(子挺)ㆍ남효온(南孝溫)이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그의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빼앗아가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다시 홀연히 그 사람에게 반환을 청구하니, 그 사람이 주려하지 않았다. 공이 송정(訟庭)에 나가 대면하여 떠들썩하게 다투는데 무식한 장돌뱅이들 같았다. 마침내 승소하여 문서가 완성되니 품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개천 속에 던졌다.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무시함이 이와 같았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공이 풍악(楓岳)에 놀러가려 하는데 전날에 여러 명사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서로 대하여 담소하다가 홀연 몸을 창 바깥 두어 길 되는 곳으로 떨어뜨려 매우 다치고 숨도 못 쉬니 여러 손님들이 분주히 구환하여 깨어났다. 손님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하니 공은,“자네들은 다락원에 가서 나를 기다리기나 하게. 내가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리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손이 같이 다락원으로 가보니 공은 먼저 와 있었는데 조금도 떨어져 다친 기색이 없었다. 효온이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하여 환술(幻術)로 우리들을 공갈하고 속이는가.” 하였다.
○ 계축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나이 59세였다.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3년만에 사람들이 열어보니 얼굴이 산 것 같았다. 이분은 부처라 하면서 마침내 화장(火葬)을 하고, 그를 위하여 부도(浮圖)를 세웠다. 《명신록)》
○ 손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화상 두 본을 그리고, 스스로 찬(讚)을 짓기를, “네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네 말이 혹은 심(心) 매우 어리석으니, 너를 산골짝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다.[爾形至藐 爾言(一作心)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다. 《율곡집》 《미수기언(眉叟記言)》
○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 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세우고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저술한 시가 수만여 편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간혹 표절하여 자기가 지은 것으로 삼았다. 《사우행록》
○ 《사방지(四方志)》 1600, 《기산기지(紀山紀志)》 2백이 있고, 시권(詩卷)이 있는데 이자(李耔)가 그 글을 읽고 말하기를, “행색은 불가요, 행실은 유가라.” 하였다. 《미수기언》
○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사이에서 노닐기 좋아하였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공을 예로 대접하고, 다시 세속 살림을 회복하기를 권하니, 공이 편지로 사절하여 말하기를 “장차 긴 삽을 만들어서 복령(茯苓)과 백출(白朮)을 캐고, 일만(一萬) 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에 중유(仲由)의 무명옷을 기워 입고, 일천(一千) 산에 눈이 쌓일 때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떨쳐입으려 한다. 낙백(落魄)하여 세속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년 뒤에 나의 본 마음을 아는 이 있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율곡집》
○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맑고 흐리고 후하고 박함의 다름이 있어서 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의리(義理)로 말한 것이다. 김시습 같은 이는 글에 있어서는 천성적으로 얻었으니 문자(文字)에도 생지(生知)가 있는 것이다.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하는 것이 은미한 뜻은 숭상할 만 하나,꼭 명교(名敎)를 포기하고 멋대로 방자하게 처신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 그리하였는가.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어 후세에 김시습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하고 윤기(倫紀)를 붙든 것이 일월과 빛을 다툴 수 있어서 그 풍도를 듣고 나약한 사람도 태도를 확립할 수가 있었으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할 것이다. 《율곡집》
○ 명 나라의 천연(天淵)이란 사람은 원 나라 말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데 원 나라가 망하니,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은 내복(來復), 자는 견심(見心)이라 하였다. 수염은 깎지 않고 길렀다. 고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앤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뒤에 시를 지었는데 기롱하고 풍자하는 뜻을 머금고 있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아조의 매월당도 중이 되어서 수염을 기르고 말하기를, “머리를 깍은 것은 당세를 피한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는데 모르겠다. 내복의 기상을 사모함이 있어서 본받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부합한 것인가. 두 공의 절개가 대강같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계곡만필(溪谷漫筆)》
○ 허 하곡(許荷谷) 봉(篈)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이 되었으니 족히 볼 것이 없다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일절(一節)이 실로 중용(中庸)의 도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처신은 청(淸)에 맞고 폐인 노릇한 것은 권도(權)에 맞다[身中淸廢中權]는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였다.대답하기를, “매월(梅月)은 일종의 이상한 사람이다. 색은(索隱)ㆍ행괴(行怪)에 가까운 사람인데, 만난 시대가 마침 그러하여서 그 높은 절개를 이룬 것뿐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와 《금오신화(金鰲新話)》 같은 것을 보면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하다.” 하였다.


 

[주D-001]주의 …… 있었는고 : 당(唐) 나라 무후(武后)가 여주(女主)가 되어 당 나라의 국호를 없애고 주(周)라 하였다가 그가 죽은 뒤에 당 나라가 다시 회복되었다.그러므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무후의 집권시대에는 주의 연호를 썼는데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으면서 주의 연호를 빼고 대신 당의 연호를 썼다.
[주D-002]삼인(三仁) : 《논어》에 말하기를, “은 나라에 세 인인(仁人)이 있는데 미자(微子)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은 나라의 충신이다.
[주D-003]엄자릉(嚴子陵) :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친구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주D-004]고죽(孤竹) :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임.
[주D-005]시상(柴桑)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동리.
[주D-006]장릉(章陵) :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능호.
[주D-007]예양(豫讓) : 전국(戰國)시대 진(秦) 나라의 예양이 그의 주군인 지백(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고생을 겪으므로 그의 친구가 권하기를, “조양자 곁에 붙어서 신하 노릇을 하다가 기회를 노려 암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한 즉 그는 답하기를, “나도 그렇게 하면 일이 쉬울 줄 알지만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되어서 두 마음 갖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8]구언(求言) : 나라에 위급한 일이나 재변이 있을 때에 정치에 관한 좋은 의견을 해줄 것을 국중(國中)에 널리 구하는 것.
[주D-009]방효유(方孝孺) :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건문제(建文帝)의 왕위를 빼앗을 때 죽은 충신.
[주D-010]혁제(革除) : 명 나라 성조가 건문제를 제거한 것을 혁제(革除)라 함.
[주D-011]계유ㆍ병자 : 계유년(癸酉年)은 김종서가 죽은 해이고 병자(丙子)는 성삼문(成三問)이 죽은 때이다.
[주D-012]춘추에 …… 의리 :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지극히 엄하나 친(親)을 위하여 어버이에 관련된 나쁜 사실을 숨긴다 하였다.
[주D-013]한통(韓通) : 송 태조(宋太祖)가 임금이 되는 날에 후주(後主)의 신하 한통(韓通)이 대항하다가 죽었다.
[주D-014]경(經)과 권(權) : 경(經)은 정상적인 도리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한 도리를 말한다.
[주D-015]사릉(思陵) : 단종(端宗) 왕비 송씨의 능.
[주D-016]정려(旌閭) : 충신ㆍ효자ㆍ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
[주D-017]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 두견새는 임금이 죽은 혼이므로 존숭(尊崇) 한다는 말을 썼다.
[주D-018]기산(箕山)ㆍ영수(潁水) : 옛날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세상의 영화를 마다하고 숨어 살던 곳.
[주D-019]국화 따는 …… 기다림을 :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에 국화를 따고 있는데, 마침 흰옷을 입은 사람이 술을 가져 왔으니, 그것은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것이었다.
[주D-020]《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源)이 임금에게 쫒겨나서 애국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를 지었다. 이소는 장편의 운문(韻文)으로서 중국 사부(辭賦)의 조(祖)가 되었다.
[주D-021]미자(薇字)ㆍ궐자(蕨字) : 미(微)자ㆍ궐(蕨)자를 많이 쓴 것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꺾은 것을 의미한 것임.
[주D-022]제목(除目) : 관리(官吏) 임명(任命)의 명부.
[주D-023]벽제(辟除) : 재상이 출입할 때에 앞에 잡인이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
[주D-024]역책(易簀) : 죽을 때에 임하여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꾼다는 말.
[주D-025]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 자로(子路)가 죽을 때에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26]중유(仲由)의 무명 옷 :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인데 무명옷을 입고 좋은 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논어(論語)》에 있다.
[주D-027]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 : 진(晋) 나라 명사인 왕공(王恭)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눈 속에 걸어다니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 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는 것과 책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신록》
○ 주세붕이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해주에 문헌당(文憲堂)을 세웠는데 향선생(鄕先生)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을 모신 것이었다. 사우와 강당(講堂)ㆍ재사(齋舍)가 모두 향교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리고 유생을 뽑아서 거처하게 하고 경비를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도의 각 고을에서도 서원을 세우는 자가 있었다. 만력 4년 선조 9년 에 이르러서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지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모든 지방에서 다투어 본받게 되니 조정에서는 혹 사액과 사서(賜書)한 곳도 있으나, 명현을 모시는 사우이거나 특수한 지방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향사도 없으면서 서원을 세운 것이 더욱 많으니 대개 60~70개 소나 되었다. 《후청쇄어》
○ 서원은 송 나라 때에 비롯하여 원(元) 나라의 말기에 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에 각지에서 계속 건립하게 되었는데, 영천(永川)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함양(咸陽)에는 남계(灆溪)서원, 송도(松都)에는 숭양(崧陽)서원, 성주(星州)에는 천곡(川谷)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峯)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陶山)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巖)서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선대의 학자가 살던 곳이거나, 혹은 왕래한 곳으로 사우(祠宇)를 아울러 세워서 향사하였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동각잡기》
○ 각 지방의 향교는 곧 공자묘가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교육하므로 모든 서원에 비교하면 존비(尊卑)가 있다. 그러나 서원의 선비는 주세붕이 처음 세워 선비 중에서 해액자(解額者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가 거하게 하고, 비록 해액자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많이 아는 자로서 보충하도록 규율을 세웠으므로, 거기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였다. 향교는 생원ㆍ진사에 합격한 자는 가지 아니하고 대개 용렬한 잡것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자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향교를 천하게 보고 서원을 높이고 받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스스로 원유(院儒)를 가탁하여 수령을 깎고 추었으므로 수령 또한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후청쇄어》
○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騭)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豸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畫)”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綃]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은 선조가 어필로 써서 사액하였더니, 임진년 병란에 편액은 불에 탔는데 숙종이 다시 어필로 액을 써주었다.
○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열서원(義烈書院)을 세우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날 밤에, 가신의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착한 일에 감동하는 빛이 있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 재사(齋舍)에 갔는데, 이날 밤 또 꿈에 네 사람이 같이 문에 들어오면서 읍을 하고 당에 올라왔다고 한다. 《죽창한화(竹窓閒話)》. 이 일은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t;서원기(書院記).에 상세하게 말했다.
광해 때, 평양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우고 조정에서 향사의 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향사의 잘못은 김계휘(金繼輝)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 기자(箕子)는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데, 다시 사자(士子)들이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은 외람한 것입니다. 팔조(八條)의 교(敎)가 처음 동방에 펴졌으니, 이제 서원을 구도(舊都 평양)에 세우고 많은 선비가 모여서 장수(藏修)하고, 그가 끼친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면 족한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서울의 북쪽에 조계동(曹溪洞)이 있다. 이이첨(李爾瞻)이 조계동의 조자(曹字)가 조식(曹植)의 성자(姓字)와 같은 것을 이유로 사당을 세워서 조식을 향사하려 하여 서원을 짓고, 그 무리를 모아서 제 주구(走狗)들을 길렀다. 임숙영(任叔英)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남명을 향사한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를 향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 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식의 서원을 근년에 중흥동(中興洞) 어구에 세웠는데, 요새 들으니 어떤 사람이 모두 헐고 그 위패를 던지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이 서원은 적괴(賊魁) 이첨이 주장한 것이므로 유식한 사자(士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처음에 창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자는 모두 무뢰한 흉도로서, 서울과 지방에 폐를 끼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었으므로 이제 이런 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원에 대한 원망은 비록 이첨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조식은 유현(儒賢)인데 어찌 이첨의 개인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실로 사림의 욕됨이 되니, 청하옵건대, 소속 고을에 영을 내려, 군인을 많이 정해서 엄숙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암집(踈庵集)》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효종 때 서필원(徐必遠)의 상소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서원에 대해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기로 의논하였고, 숙종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명을 내려 각 도에 서원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영종 신유년에는 무릇 갑오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모두 훼철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필원의 소 결(缺)
○ 영종 신유년 영조 7년 4월에 전교하기를, “갑오년에 법을 정한 후에 조정에 아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또는 기설(旣設)된 서원에도 사사로이 추향(追享)한 자는 유현(儒賢)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고, 당시에 그것을 알고 묵인했던 감사는 이미 죽은 자 외에는 모두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가 처벌하며,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은 5년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에 아뢰지 않고 세운 사원 및 추향자를 알고도 묵인하는 감사는 잡아다 처벌하며,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삼등을 내리는 율로 다스리게 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년에 이 일로써 공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소위 조사한다고 하고 책임 얼버무리기만 일삼으니 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서원 외에 향현사(鄕賢祠)라 일컫고, 혹은 영당(影堂)이라 일컫고서 그 중에 세력이 있는 자면 감사와 수령이 덮어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후로는 감히 그 같은 짓을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로부터 특별히 공문을 보내 엄하게 단속하고, 또 조사한 보고가 온 후에, 조정에서 다만 훼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영대로 즉시 거행할는지 꼭 알 수 없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따로 관원을 파견하여 직접 가서 훼철시킨 뒤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 10월에 정언 어석윤(魚錫胤)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아, 저 태학에 이미 성묘(聖廟)를 받들었고, 각 도에는 향교(鄕校)가 있는데 막중한 대성(大聖)을 어찌 감히 사사로 서원을 세워 받들 수 있겠느냐. 지명이 비록 같으나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또 어찌 감히 마음대로 서원을 세우겠느냐.이 폐단을 버리지 아니하면 태학을 도리어 경하게 보고 사사 원우(院宇)를 중하게 볼 것이며, 나라에서 태학과 향교를 설치한 도리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하고 성인을 높이는 뜻이 차차 희미해 질 것이니, 태산(泰山)에 제사한 것을 배척한 공자의 말씀을 어찌 과하다 하겠는가. 위패는 거두어 향교에 묻고 화상은 거두어다 각 성전(聖殿)에 받들면,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가 갖추어 지리라.” 하였다.
○ 영종 때 명을 내려 예안(禮安)의 도산서원과 해주의 소현서원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보았다.


경기(京畿)

개성부(開城府) 숭양서원(崧陽書院) 만력 계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서경덕(徐敬德)ㆍ김상헌(金尙憲) 인조조의 정승ㆍ김육(金堉) 효종조의 정승ㆍ조익(趙翼) 효종조의 정승 ○ 곁에 정몽주 화상이 있다.
화곡서원(花谷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화담이 살았던 옛 터 :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 선조조의 정승ㆍ허엽(許曄) 선조조의 명신ㆍ민순(閔純) 추배(追配)하였다.
오관서원(五冠書院) 신유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 자는 성부(誠夫)이며 호는 반남(潘南),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냄. 목은(牧隱)의 문하생(목은의 문인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임. 목은의 매부로서 나이는 네 살 아래임) : 박세채(朴世采) 숙종조의 정승
숭절서원(崇節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 선조(宣祖) 임진조에 들었다.ㆍ김연광(金鍊光) 호는 송암(松巖)이며 송도(松都)에 살았다. 임진년에 회양(淮陽) 부사로서 사절(死節)하여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유극량 선조 임진조에 들었다.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인조 임오년에 세웠으며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인조조의 정승ㆍ이상길(李尙吉)ㆍ이시직(李時稷)ㆍ홍명향(洪命享)ㆍ황선신(黃善身)ㆍ권순장(權順長)ㆍ김겸(金兼) 이상은 동벽(東壁)에 모셨다.ㆍ심현(沈誢)ㆍ윤전(尹烇)ㆍ송시영(宋時榮) 호는 야은(野隱)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이상은 서벽(西壁)에 모셨다. 모두 강도사절(江都死節)에 상세하다.
서하영당(西河影堂) 갑자년에 세웠다. : 이민(李敏)ㆍ조관빈(趙觀彬)
□□영당(□□影堂) 병술년에 세웠다. : 이인엽(李寅燁)
보명영당(保明影堂) 영종 을축년에 세웠으며 갑곶나루[甲串津]에 있다. : 이성량(李成樑) 명 나라 영원백(寧遠伯)ㆍ이여매(李如梅) 명 나라의 도독(都督). ○ 모두 중국인이다.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계유년에 절터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기묘년의 명신ㆍ송시열(宋時烈)
석실서원(石室書院) 숭정(崇禎) 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ㆍ김상용ㆍ김수항(金壽恒) 현종조의 정승ㆍ민정중(閔鼎重) 숙종조의 정승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청절사(淸節祠) 병인년에 세웠으며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에 들었다. 곁에 박세당(朴世堂)의 화상이 있다.
임간서원(臨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남을진(南乙珍) 고려 문하부사(門下府事)이며, 호는 사천(沙川)ㆍ조견(趙狷) 태조조에 들어 있다.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으며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백인걸(白仁傑) 선조조의 명신ㆍ성혼(成渾)
자운서원(紫雲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숭정□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선조조의 명신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
풍계사우(豊溪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무진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구암서원(龜巖書院) 정사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이다.ㆍ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이며 벼슬은 고려 형조 참의ㆍ정성근(鄭誠謹)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정엽(鄭曄)ㆍ오윤겸(吳允謙)ㆍ임숙영(任叔英)
수곡서원(秀谷書院) 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仲)이며, 호는 동은(峒隱)이요,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며 집의를 승직하였다.ㆍ조속(趙涑)ㆍ이후원(李厚源) 효종조의 정승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수원(水原)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불에 탔다. : 송시열(宋時烈) 화상(畫像)이 있다.
남양(南陽) 용백사(龍栢祠) 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한 제갈량(漢諸葛亮)ㆍ송 호안국(宋胡安國)ㆍ윤계(尹棨)
안곡서원(安谷書院) 현종 무신년에 세웠으며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는데, 기유년에 철폐하였다가 경신년에 복구하였다. : 박세훈(朴世勳) 호는 백촌(栢村)이며, 벼슬은 첨정인데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ㆍ박세희(朴世熹) 기묘의 명현ㆍ홍섬(洪暹) 선조조의 정승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인조 계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 향(珦)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ㆍ이색(李穡) 태조조에 들었다.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육(金正堉) 모두 기묘의 명현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효종 경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충렬사(忠烈祠)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광해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조광조ㆍ김식(金湜) 기묘 명현ㆍ김육(金堉)ㆍ남언경(南彦經)ㆍ이제신(李濟臣)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안성(安城) 도기서원(道基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남파서원(南坡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홍우원(洪宇遠)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선조조의 정승ㆍ조경(趙絅)
화산서원(花山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 선조조의 정승
김포(金浦) 우저서원(午渚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교하(交河) 신곡서원(新谷書院)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풍덕(豐德) 귀암서원(龜岩書院) 을묘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이천(利川) 운봉서원(雲峯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서희(徐熙) 호는 복천(福訓)이며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냈다.ㆍ이관의(李寬義) 호는 율정(栗亭)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안국(金安國)
금천(衿川) 충현서원(忠賢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강감찬(姜邯贊) 고려 태사(太師)인데 시호는 인헌공(仁憲公)이다.ㆍ서견(徐甄) 태조조에 들었다.ㆍ이원익(李元翼)
□□영당(□□影堂) 인조가 옛터에 집을 짓게 하고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 : 이원익(李元翼)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 숙종 신유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단종조에 상세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태보(朴泰輔)
호계서원(虎溪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다. : 조종경(趙宗敬) 호는 독암(獨庵)이며 전한(典翰)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종경(宗敬)의 손자이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가 정미년에 훼철(毁撤)하고 을해년에 중건하였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ㆍ이건명(李健命)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신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評穆) 숙종 때의 정승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단상(李端相)ㆍ이희조(李喜朝) 호는 간암(艮庵)이며 추향하였다.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찬성을 증직하였다.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畫像)
가평(加平) 잠곡서원(潛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육(金堉)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ㆍ이의건(李義健)ㆍ김수항(金壽恒)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 무진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민준(閔純)ㆍ남효온(南孝溫)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김정국(金正國)ㆍ기준(奇遵) 기묘 명현ㆍ홍이상(洪履祥)ㆍ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이며 호는 추만(秋巒)이고, 사재(思齋)의 문인이다.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ㆍ이신의(李愼儀) 선조조의 명신ㆍ이유겸(李有謙)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만회(晩晦)이다.
통진(通津) 영당(影堂) 기사년에 사액하였다. : 장만(張晩)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峯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만력 신미년에 세웠고 천계(天啓)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ㆍ이목(李穆) 무오당적(戊午黨籍)조에 들었다.ㆍ성제원(成悌元) 명종 유일(遺逸)ㆍ조헌(趙憲)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서기(徐起) 선조 때의 학자
청강서원(滄江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황신(黃愼)
도산서원(道山書院) 계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득기(權得己) 호는 만회(晩悔)이며, 예조 좌랑을 지냈는데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권시(權諰)
부용강영당(芙蓉江影堂)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이만원(李萬元)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관찰사[箕伯]를 지냈다.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ㆍ김정(金淨) 기묘 명현ㆍ한충(韓忠) 기묘 명현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국계서원(菊溪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박증영(朴增榮) 호는 눌재(訥齋)이며, 교리를 지냈다.ㆍ변경복(卞景福) 호는 백음(栢陰)이다.ㆍ이덕수(李德洙)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이수언(李秀彦) 호는 농계(聾溪)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기암서원(機巖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강백년(姜栢年)
송천서원(宋泉書院)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ㆍ최유경(崔有慶) 호는 죽정(竹亭)이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ㆍ이정간(李貞幹)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ㆍ박광우(朴光祐) 을사당적조에 들었다.ㆍ이지춘(李之春)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장령을 증직하였다.ㆍ조강(趙綱) 호는 모계(慕溪)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이대건(李大建) 이시발(李時發)의 부(父)이다. 호는 오촌(梧村)이며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죽었다.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 하였다. 우상(右相)을 증직하였다.ㆍ이제신(李濟臣)ㆍ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ㆍ이인혁(李寅爀) 호는 매산(梅山)이며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이상 3인을 추배하였다.
백록서원(白麓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권상(權常) 호는 남강(南岡)이며, 동흥군(東興君)으로 봉하였다. 동지(同知)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변시환(卞時煥) 호는 일공(一筇)이며 흥덕(興德) 현감을 지냈다.
봉계서원(鳳溪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 선조조의 명신ㆍ신송(申誦) 호는 하은(霞隱)이며, 감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신집(申潗) 호는 종산(鍾山)이며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영당(□□影堂) 경인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
체화당(棣華堂) : 노계원(盧繼元) 호는 송헌(松軒)이다.ㆍ노후원(盧後元) 호는 국헌(菊軒)이다.ㆍ노종원(盧從元) 호는 매헌(梅軒)이며, 지평을 지냈다.ㆍ노일원(盧一元) 호는 죽헌(竹軒)이다.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봉상(李鳳祥) 병사로서 영종 무신년에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며, 좌찬성을 증직했다.ㆍ남연년(南延年) 영장(營將)이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홍림(洪霖) 비장(稗將)을 지냈고, 병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
팔봉서원(八峯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자(李耔) 기묘 명현ㆍ이연경(李延慶) 기묘 명현ㆍ김세필(金世弼) 기묘명현ㆍ노수신(盧守愼) 선조조의 정승
누암서원(樓巖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철훼(撤毁)하였다가 을사년에 복구하였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ㆍ권상하(權尙夏)
충렬사(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영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임경업(林慶業)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 호는 검재(黔齋)이며 승지를 지냈다.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 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ㆍ유근(柳根) 광해조의 문형(文衡)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 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ㆍ박세무(朴世茂) 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ㆍ전유형(全有亨) 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조광조(趙光祖)ㆍ정여창(鄭汝昌)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이언적(李彦迪) 명종 명현ㆍ이황ㆍ기준(奇遵)ㆍ이지함(李之菡) 선조 때 사람ㆍ홍가신(洪可臣) 호는 만전(晩全)이며 판서를 지냈다.ㆍ이덕민(李德敏) 처사이며 참봉을 지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ㆍ박지계(朴知誡) 4인은 무신년에 추향하였다.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선조조의 명신ㆍ이완(李莞) 순인의 종자(從子)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봉상(李鳳祥)
연기(燕岐) 봉암서원(鳳巖書院) 신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한충(韓忠) 기묘 명현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기ㆍ송시열
제천(堤川) 남당서원(南塘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윤선거(尹宣擧)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만력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성운(成運)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성제원(成悌元) 명종조의 유일로 보은(報恩) 현감을 지냈다.ㆍ조헌(趙憲) 신유년에 추향하였다.ㆍ송시열 을해년에 추향하였다.
산앙사영당(山仰祠影堂)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ㆍ송시열ㆍ권상하(權尙夏)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고려 때에 좨주(祭酒)를 지냈다. 호는 역동재(易東齋)이며 자는 보안(甫安)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ㆍ이황(李滉)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황종해(黃宗海) 호는 오천(杇淺)이다.
홍산(鴻山) 청일서원(淸逸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창렬사(彰烈祠) 삼학사(三學士)를 향사하였다.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용문영당(龍門影堂) 무인년에 세웠다. : 송시열
호계사우(虎溪祠宇) 숭정(崇禎) 신묘년에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 호는 경재(敬齋)이며 직제학을 지냈다.
대곡영당(代谷影堂) 계사년에 훼철하였다. : 전팽령(全彭齡)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사를 지냈다.
표충사(表忠祠)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조완기(趙完基)
신창(新昌)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술년에 세웠다. : 조익(趙翼)ㆍ조극선(趙克善) 자는 유선(有善)이며 호는 야곡(冶谷)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유일(遺逸)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청풍(淸風) 봉강서원(鳳崗書院) 신해년에 세웠으며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ㆍ김권(金權)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권상하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숭정 계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ㆍ송시열
귀산서원(龜山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윤전(尹烇)ㆍ윤순거(尹舜擧)ㆍ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며 벼슬은 진선(進善)을 지냈다.
팔현서원(八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는데, 지금은 액(額)을 충곡(忠谷)이라 한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익겸(金益兼)
휴정서원(休亭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유무(柳懋) 호는 휴계(休溪)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이항길(李恒吉) 호는 과암(果庵)이며 참봉을 지냈다.ㆍ김망(金望)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권□(權□) 호는 반곡(盤谷)이며, 감사를 지내고 영상에 증직되었다.
보령(保寧) 화암서원(花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지함(李之函)ㆍ이산보(李山甫)ㆍ이몽규(李夢奎)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며, 추향되었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혜학서원(惠學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웠고 경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세귀(李世龜) 호는 양와(養窩)이며, 목사를 지냈다.
용계서원(龍溪書院) 숙종 갑오년에 세웠다. : 윤증(尹拯)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서천(舒川) 명곡서원(鳴谷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산보(李山甫)ㆍ조헌(趙憲)ㆍ조수륜(趙守倫)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이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추향되었다.
부여(扶餘) 의렬사(義烈祠) 만력 을해년에 세웠고, 선조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성충(成忠)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을 지냈다.ㆍ흥수(興首) 백제의 좌평을 지냈다.ㆍ계백(階伯) 백제의 장군ㆍ이존오(李存吾)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ㆍ정택뢰(鄭澤雷) 호는 화강(花岡)이며, 광해조 때 남해(南海)에 귀향갔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ㆍ황일호(黃一皓) 호는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숙종 기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ㆍ이경여(李敬輿) 인조조의 정승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ㆍ송시영 위에 보라ㆍ송시열ㆍ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ㆍ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ㆍ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회덕(懷德)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에 옮겨 세웠다. : 정광필(鄭光弼) 중종조의 정승ㆍ김정(金淨)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이시직(李時稷)ㆍ송인수(宋麟壽)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과 송시영의 사당은 따로 있다.
정절사(靖節祠) 갑자년에 세웠다. : 송유(宋愉)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ㆍ백팽년(朴彭年)ㆍ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이며, 참봉을 지냈고 영상에 증직되었다.ㆍ송상민(宋尙敏) 호는 석곡(石谷)이며 좌랑을 증직하였다.ㆍ김경여(金慶餘) 부제학을 지냈으며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송애(松崖)이며 추배되었다.
종회사영당(宗晦祠影堂)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용호사우(龍湖祠宇) 정축년에 세웠다. : 강학년(姜鶴年) 호는 복천(復泉)이며, 장령을 지냈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ㆍ강세귀(姜世龜)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
미호서원(渼湖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규렴(宋奎濂)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이성(尼城) 노강서원(魯崗書院) 갑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윤황(尹煌)ㆍ윤문거(尹文擧)ㆍ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온양(溫陽) 정퇴서원(靜退書院) 기사년에 세웠다.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이며 수문제학(修文提學)을 지냈다. 사성(思誠)의 부(父)이며, 추향되었다.ㆍ홍가신(洪可臣)
충효사우(忠孝祠宇)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강봉수(姜鳳壽) 호는 창암(窓巖)이며 참찬에 증직되었다.ㆍ조상우(趙相禹) 호는 시암(時庵)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강백년(姜栢年)ㆍ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면천(沔川) 향현사(鄕賢祠) 병술년에 세웠다. : 이안눌(李安訥)
대흥(大興) 우천향현사(牛泉鄕賢祠) 정해년에 세웠다. : 이약수(李若水) 호는 우천(牛泉)이며 진사에 합격하였고, 기묘 명현이다. ○ 소정방사(蘇定方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청산(靑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조헌(趙憲)ㆍ송시열(宋時烈)
임천(林川) 칠산서원(七山書院) 정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ㆍ유계(兪棨)
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향현사(鄕賢祠):우남양(禹南陽) 호는 운곡(雲谷)이며, 처사를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만력 갑오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곡(李穀) 고려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으며, 호는 가정(稼亭)이다.ㆍ이색(李穡)ㆍ이종학(李種學) 호는 인재(麟齋)이며 제학(提學)을 지냈다.ㆍ이개(李塏)ㆍ이자(李耔)
진천(鎭川) 백원서원(百源書院) 가정(嘉靖) 임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종학(李種學)ㆍ김덕숭(金德崇)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읍 군수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여(李畬) 호는 송광(松匡)이며 문학(文學)을 지냈다.ㆍ이부(李阜) 호는 행원(杏園)이며, 교리를 지냈고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사당은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岩書院) 을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숙(柳淑) 고려조에서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사암(思庵)이다.ㆍ김홍욱(金弘郁) 호는 학주(鶴洲)이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인정서원(仁政書院)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세웠다.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라고도 한다. : 유방택(柳方澤) 호는 금헌(琴軒)인데 고려조에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ㆍ정신보(鄭臣保)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고려조에 인주(麟州) 수령을 지냈다.ㆍ정인경(鄭仁卿) 신보(臣保)의 아들인데, 고려조의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ㆍ유백유(柳伯濡) 방택(方澤)의 아들인데 호는 저정(樗亭)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연풍(延豐) 원천사(源泉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기홍(李箕洪) 호는 직재(直齋)이며 집의(執義)를 지냈다.
해미(海美) □□영당(□□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숙종조의 정승
진잠(鎭岑) 집성사(集成祠) 숙종 갑술년에 세웠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 숙종 계사년에 창건하였다. : 강응정(姜應貞) 생원에 합격하였고, 호는 화재(和齋)이다.ㆍ서익(徐益)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의주 목사를 지냈다.ㆍ양응춘(楊應春) 호는 도곡(道谷)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곡사(金谷祠) 무진년에 중건하였다. : 김수남(金秀南)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병조 정랑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비인(庇仁) 청절사(淸節祠) 경인년에 세웠다. : 유기창(兪起昌)ㆍ유여림(兪汝霖) 기창(起昌)의 아들인데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다.
전의(全義) 뇌암서원(雷岩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이상(李翔)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타우(打愚)이다.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담(李湛) 호는 정존재(鄭存齋)이며, 부학(副學)을 지냈다.ㆍ조극선(趙克善)
석성(石城) 봉호서원(蓬湖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윤문거(尹文擧)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가정(嘉靖) 임인년에 세웠고 명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ㆍ안축(安軸)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복주(福州)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ㆍ안보(安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ㆍ주세붕(周世鵬) 호는 신재(愼齋)이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단계서원(丹溪書院)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담(金淡)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기영사(耆英祠) 병진년에 세웠다. : 금축(琴軸) 호는 송계(松溪)이며, 진사이다.ㆍ남몽오(南夢鰲) 호는 삼송(三松)이며 진사이다.ㆍ박선장(朴善長) 호는 수서(水西)이며, 도사를 지냈다.ㆍ권호신(權虎臣) 호는 도은(陶隱)이며, 생원이다.
금성단(錦城壇) 영조 임술년에 세웠는데 은액충신신단(恩額忠臣神壇)이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도계견일사(道溪見一祠) 효종 정축년에 세웠다. : 이수형(李秀亨) 호는 도촌(桃村)이며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다.ㆍ이여빈(李汝馪) 호는 취사(炊沙)이며 전적(典籍)을지냈다.
초계(草溪) 청계서원(淸溪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다. : 이희안(李希顔) 명종조의 유일(遺逸)ㆍ김치원(金致遠) 호는 탁계(濯溪)이며, 찰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이대기(李大期) 호는 설학(雪壑)이며, 정랑을 지냈다.
송원서원(松原書院) 강희(康熙) 임신년에 세웠다. : 안우(安遇) 호는 노계(蘆溪)이며, 현감을 지냈다.ㆍ노필(盧㻶) 호는 묵재(墨齋)이며, 지평을 지냈다.ㆍ안극가(安克家) 호는 뇌암(磊巖)이며, 현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노극성(盧克誠) 호는 매죽와(梅竹窩)이며 직장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영주(榮州) 이산서원(伊山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선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삼봉서원(三峯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다. : 김이음(金爾音) 호는 삼로(三路)며,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호조 참판을 지냈다.ㆍ이해(李瀣) 명종조 사람ㆍ김개국(金盖國) 호는 만취(晩翠)이며, 정랑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융(金隆) 호는 물암(勿巖)이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오계서원(汚溪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다. : 이덕홍(李德弘) 호는 간재(艮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이개립(李介立)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이며 좌윤(左尹)을 지냈다.
장암서원(壯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귀산정사(龜山精舍) 만력 을묘년에 세웠는데, 상현사(象賢祠)라고도 한다. : 김담(金淡)ㆍ박승임(朴承任) 호는 소고(嘯皐)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김늑(金玏) 호는 백암(栢巖)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사계정사(泗溪精舍) 효종 경자년에 세웠다. : 황효공(黃孝恭) 호는 귀암(龜巖)이다.ㆍ나이준(羅以俊) 호는 매헌(梅軒)이며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진사로서 홀로 성전위판(聖殿位版)을 배행(陪行)하였다.
용궁(龍宮) 삼강서원(三江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
소천서원(蘇川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전원발(全元發) 호는 국파(菊坡)이며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를 지냈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마산리사(馬山里社)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는데 완택향사(浣澤鄕社)이다. : 정귀령(鄭龜齡) 호는 삼수(三樹)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옹(鄭雍) 수찬을 지냈다.ㆍ정사(鄭賜) 직제학을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ㆍ정환(鄭渙) 응교를 지냈다.ㆍ정광필(鄭光弼)
기천정사(箕川精舍)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문근(文瑾)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문관(文瓘) 근(瑾)의 아우이며, 호는 옥계(玉溪)고, 승지를 지냈다.ㆍ이구(李搆)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이문흥(李文興) 호는 몽암(夢庵)이며, 대사성을 지냈다.ㆍ안준(安俊) 호는 노포(蘆浦)이며 고려조에서 판봉상(判奉常)을 지냈다.
충효사(忠孝祠) 갑신년에 세웠다. : 반유(潘濡) 찰방에 증직되었다.ㆍ반충(潘沖) 호는 관물당(觀物堂)이다.
용곡리사(龍谷里社) 을축년에 세웠다. : 강응청(姜應淸) 호는 삼산(三山)이며 인의(引儀)를 지냈다.ㆍ강제(姜霽) 호는 백석(白石)이며, 이조좌랑을 지냈다.ㆍ강우(姜䨞) 호는 석봉(石峯)이며, 현감을 지냈다.
개령(開寧) 덕림서원(德林書院) 임진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정경세(鄭經世)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역동서원(易東書院) 융경 경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이식(李埴) 퇴계(退溪)의 아버지이며 진사이다.ㆍ이우(李堣) 호는 송재(松齋), 호조 참판을 지냈다. 퇴계의 숙부이다.ㆍ이해(李瀣)
분강서원(汾江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이현보(李賢輔)
향현사(鄕賢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계양(李繼陽) 진사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조부이다.ㆍ김효려(金孝廬) 진사이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사(東溪精舍) 숙종 기묘에 세웠다. : 금난수(琴蘭秀) 호는 성성재(惺惺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 문인인데 징역(徵辟)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양(英陽) 영산서원(英山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향현사(鄕賢祠) 숙종 기사년에 세웠다. : 남민(南敏) 당(唐)의 안렴사(按廉使)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로 삼았다. 본래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漂流)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월암서원(月巖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주(金澍) 호는 농암(礱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ㆍ하위지(河緯地)ㆍ이맹전(李孟專)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이다.
낙봉서원(洛峯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김숙자(金淑滋)ㆍ김취성(金就成) 호는 진락(眞樂), 처사이다.ㆍ박운(朴雲) 호는 용암(龍岩)이며 진사이다.ㆍ김취문(金就文) 호는 구암(久庵), 대사간을 지냈다.ㆍ고응섭(高應涉) 호는 왕곡(枉谷), 사성(司成)을 지냈다.
무동향현사(茂洞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전좌명(田佐命) 호는 성암(性庵), 좌랑을 지냈고, 우상(右相)에 증직되었다.ㆍ이우(李瑀) 호는 옥산(玉山), 이(珥)의 아우이다.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ㆍ전윤무(田胤武) 호는 가정(檟亭), 현감을 지냈다.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호는 석담(石潭),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 태창(泰昌) 경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성룡(柳成龍) ○ 또 김유신 사당이 있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칠원(漆原) 덕연서원(德淵書院) 신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세붕(周世鵬)ㆍ배세적(裵世績) 호는 정곡(靜谷), 현감을 지냈다.ㆍ배석지(裵錫祉) 호는 율리(栗里), 현감을 지냈다.ㆍ황협(黃悏) 호는 독회당(獨悔堂), 처사이다.ㆍ주박(周博) 세붕(世鵬)의 아들. 자는 약지(約之), 호는 귀봉(龜峯), 교리를 지냈다.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을사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윤흥신(尹興新) 다대포(多大浦)의 첨사를 지냈다.ㆍ노개방(盧蓋邦)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을축년에 세웠다. : 정발(鄭撥) 부산 첨사를 지냈다.ㆍ조영규(趙英珪) 양산(梁山) 군수이다.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문덕겸(文德謙) 교생(校生)이다.ㆍ김희수(金希壽) 비장(裨將)이다ㆍ송백(宋伯) 호장(戶長)을 지냈다.ㆍ김상(金祥) 부민(府民)이다.ㆍ송봉수(宋鳳壽) 비장을 지냈고, 판관에 증직되었다.ㆍ신여로(申汝櫓) 겸인(傔人)이다. ○ 문 밖에 정포(旌褒)된 이는 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발(撥)의 첩 애향(愛香)이다.
함안(咸安) 서산서원(西山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원호(元昊)ㆍ김시습(金時習)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 단종 때의 생육신이다.
도림서원(道林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덕암서원(德巖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다. : 조순성(趙純性) 동지좌중군(同知左中軍)을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ㆍ박한주(朴漢柱) 정언을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무오당적에 들었다.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ㆍ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송정서원(松亭書院) 임인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이후경(李厚慶) 호는 외재(畏齋), 현감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도고(李道攷) 호는 복재(復齋), 처사이다.
도천서원(道泉書院) 을해년에 세웠다. : 신사장(辛斯藏) 호는 곡강(曲江),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ㆍ이중(李中) 예조정랑을 지냈다.ㆍ배학(裵鶴) 호는 임천(林泉), 참봉을 지냈다.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표연말(表沿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에 들었다.ㆍ채수(蔡壽)ㆍ권달수(權達手)ㆍ채무일(蔡無逸) 호는 휴암(休庵), 헌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유포(柳砲) 호는 가촌(嘉村), 현감을 지냈다.ㆍ유달준(柳達遵) 호는 대암(臺巖), 생원이다.ㆍ이겸(李謙) 호는 수헌(睡軒), 진사이다.ㆍ정윤해(鄭允海) 호는 서귀재(鋤歸齋), 참봉을 지냈다.ㆍ이영갑(李英甲) 호는 야옹(野翁), 도사를 지냈다.
아곡정사(雅谷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박눌(朴訥) 찰방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남영(南嶸) 호는 고산, 군수를 지냈다.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박성민(朴成敏) 호는 수묵옹(守默翁)이다.ㆍ남근명(南近明) 호는 수운(峀雲),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유종인(柳宗仁) 호는 취미(翠微)이다.ㆍ홍약창(洪約昌) 호는 귀촌(龜村),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언양(彦陽) 반귀서원(磻龜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ㆍ정구(鄭逑)
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경산(慶山)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정경세(鄭經世)
장기(長鬐) 죽림영당(竹林影堂) 을유년에 세웠다. : 송시열
연일(延日) 오천서원(烏川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습명(鄭襲明)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을 지냈으며, 시호는 영양공(榮陽公)이다.ㆍ조몽주(趙夢周)
□□방묘(□□傍廟) 경신년에 세웠다. : 정사도(鄭思道) 호는 설곡(雪谷)이다.ㆍ정철(鄭澈) 선조조의 정승
자인(慈仁)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자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용계서원(龍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최문병(崔文炳) 호는 성재(省齋), 좌윤을 증직하였다.ㆍ이광후(李光後) 호는 매헌(梅軒)이다.ㆍ이창후(李昌後) 호는 죽헌(竹軒)이다.ㆍ김응명(金應鳴) 호는 취죽당(翠竹堂), 생원이다.
울산(蔚山) 구강서원(鷗江書院) 무오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무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이다. 지평(持平)과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귀천서원(龜泉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권수(權銖) 임진 때 사람 ○ 다른 책엔 “명천사(鳴泉祠) 현감 윤명운(尹明運)을 향사한다.”고 되어 있다.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밀양(密陽) 예림서원(禮林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고 숭정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박한주(朴漢柱)ㆍ신계성(申季誠) 호는 송계(松溪), 처사이다.
삼강향현사(三江鄕賢祠) 가정 계해년에 세웠다. : 민구령(閔九齡) 호는 욱재(勗齋), 처사다. 다섯 형제가 삼강(三江)에 집을 짓고 살고,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무신[虎臣]이 천랑(薦郞)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ㆍ민구소(閔九韶) 호는 경재(敬齋)이다.ㆍ민구연(閔九淵) 호는 우우재(友于齋)이다.ㆍ민구주(閔九疇)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ㆍ민구서(閔九叙) 호는 삼매당(三梅堂)이다.
중봉충효사(中峯忠孝祠) 정해년에 세웠다. : 손인갑(孫仁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노개방(盧盖邦) 교수였다. 임진란 때 함께 죽었다.ㆍ손약해(孫若海)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함께 죽었다.ㆍ신동현(申東顯) 호는 매당(梅堂), 판관에 증직되었다.
승려사우(僧侶祠宇)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ㆍ홍제당 유정(弘濟堂惟政)ㆍ기허당 영규(奇虛堂靈圭) 모두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현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호는 절효(節孝), 일손(馹孫)의 아버지이다. 지평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남계서원(南溪書院) 숙종 경진년에 세웠다. : 김지대(金之垈)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영헌공(英憲公)이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융경 무진년에 세웠다. : 박하담(朴河淡) 호는 소요당(消遙堂), 생원이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는 응청(應淸)이다.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숭정 계유년에 세웠으며, 영조 때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단성(丹城)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 때 창건하였으며 만력 임자년에 중건(重建)하였다. : 문익점(文益漸)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우문제학(右文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두릉서원(杜陵書院) 무자년에 이건(移建)하였다. : 권도(權濤) 호는 동계(東溪),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진년에 세웠다. : 정탁(鄭琢) 선조조의 정승
청곡향현사(淸谷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이천경(李天慶)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벽진(碧珍),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刑士保)ㆍ유자방(柳子芳)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향현사(鄕賢祠) 병신년에 세웠다. : 김맹성(金孟性) 호는 지지당(止止堂), 이조 정랑이다.ㆍ도형(都衡) 호는 행정(杏亭)이며 병조 좌랑이다.ㆍ송희규(宋希奎) 을사당적에 들어 있다.ㆍ김희삼(金希參) 호는 칠봉(七峯), 부사를 지냈다.ㆍ홍계현(洪繼玄) 호는 대암(臺巖), 처사이다ㆍ여희림(呂希臨) 지평을 지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
노강영당(老江影堂) 숙종 신묘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유계서원(柳溪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웠다. : 정곤수(鄭崑壽)ㆍ이순(李淳) 호는 야로(野老)이다.ㆍ박찬(朴澯) 호는 설봉(雪峯)이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김담수(金聃壽)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서계(西溪)이다.ㆍ박이장(朴而章)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용담(龍潭)이다.
신계향현사(新溪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이승(李承) 호는 청휘당(晴暉堂), 별제(別提)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경오년에 세웠다. : 송사이(宋師頤) 호는 신연(新淵), 참봉을 지냈다.ㆍ이홍량(李弘量) 호는 육일헌(六一軒), 참봉을 지냈다.ㆍ이홍우(李弘宇) 호는 모재(茅齋), 현감을 지냈다.ㆍ이홍기(李弘器) 호는 용재(容齋), 현감을 지냈다.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덕봉충렬사(德峯忠烈祠) 경진년에 세웠다. : 박영서(朴永緖) 갑자년 이괄의 변에 들어 있다.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을사년에 세웠다. : 이사룡(李士龍) 성주 포수(星州砲手)인데,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칠 때 청 나라에 징발되어 가서 탄환을 빼고 공포를 세 번 쏘다가 발각되어 난작(亂斫) 살해되었다.
안의(安義) 용문서원(龍門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ㆍ임운(林芸) 호는 첨모당(瞻慕堂),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ㆍ정온(鄭薀)
성천서원(星川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송준길(宋浚吉)ㆍ이숙(李䎘) 숙종조의 정승
역천사우(嶧川祠宇)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정유명(鄭惟明) 호는 역양(嶧陽), 진사이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온(蘊)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ㆍ임득번(林得蕃) 호는 석천(石泉),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귀연사우(龜淵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신권(愼權)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ㆍ성팽년(成彭年) 호는 석곡(石谷),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황암사우(黃巖祠宇)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 《임진록(壬辰錄)》에 들어 있다.ㆍ조종도(趙宗道) 위에 보라.ㆍ정용(鄭庸)ㆍ유개(劉盖) 두 의사(義士)의 사당은 따로 있다.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오건(吳健) 선조조의 명신
영해(寧海) 단산서원(丹山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우탁(禹倬)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
인산서원(仁山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이휘일(李徽逸) 참봉
구봉정사(九峯精舍)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박의장(朴毅長) 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를 탈환하였고 다섯 번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ㆍ박홍장(朴弘長) 의장(毅長)의 아우, 자는 사임(士任), 목사를 지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에게 굽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기사년에 세웠는데, 충렬사라고도 한다. : 박종문(朴宗文) 도사를 지냈다.ㆍ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임진년에 세웠다. : 박선(朴璿) 호는 도와(陶窩), 교관을 지냈다.ㆍ권경(權璟) 호는 대은(臺隱),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당주서원(溏洲書院) 만력 신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되었다. : 노진(盧禛) 선조조의 명신
백연서원(栢淵書院) 기유년에 세웠으며 사액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ㆍ김종직(金宗直)
도곡향현사(道谷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조승숙(趙承肅) 호는 덕곡(德谷), 고려조에서 부여 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ㆍ정복주(鄭復周) 호는 죽당(竹堂), 고려조에서 전농사(典農事)를 지냈다.ㆍ노숙동(盧叔同) 호는 송재(松齋), 대사헌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이며,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ㆍ노우붕(盧友朋) 호는 신고당(信古堂), 참봉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귀천 향현사(龜川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박맹지(朴孟智) 호는 춘당(春塘), 교리이다.ㆍ양관(梁灌) 호는 일로당(逸老堂), 동돈녕(同敦寧)을 지냈다.ㆍ강한(姜漢) 호는 금헌(琴軒), 현감을 지냈다.ㆍ표연말(表沿沫)ㆍ양희(梁喜) 호는 구졸재(九拙齋),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하맹보(河孟寶) 호는 우계(愚溪)이다.
영덕(盈德) 신안영당(新安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남강서원(南江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흥해(興海) 곡강서원(曲江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廸)ㆍ조경(趙絅)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도잠서원(道岑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도계향사(道溪鄕社)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박인로(朴仁老) 만호이다. 호는 무하옹(无何翁)이다.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유방선(柳方善)ㆍ곽순(郭珣)ㆍ이현보(李賢輔)ㆍ심지원(沈之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가정 신유년에 세웠고 천계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 설총(薛聰) 시호는 홍유후(弘儒侯)이다.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
옥산서원(玉山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숭렬사우(崇烈祠宇) 숙종 경진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최진립(崔震立) 임진란의 여러 장수[諸將]조에 들어 있다.
귀강사우(龜岡祠宇) 경오년에 세웠고 화상이 있다. :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자는 중사(仲思)이다. 고려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동강사우(東江祠宇)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손중돈(孫仲暾) 호는 우재(愚齋), 이조 판서를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인산영당(仁山影堂) 기해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을사년에 조령(朝令)으로 중건하였다.
진주(晉州) 은열사(殷烈祠) 천희(天禧) 신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강민첨(姜民瞻) 병부 상서ㆍ추밀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만력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최영경(崔永慶) 《기축록(己丑錄)》에 있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ㆍ최기필(崔琦弼) 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대각사우(大覺祠宇)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하항(河沆) 호는 각재(覺齋), 징사(徵士)다.ㆍ손천우(孫天佑) 처사이다.ㆍ김대명(金大鳴) 군수를 지냈다.ㆍ하응도(河應圖) 현령을 지냈다.ㆍ이정(李瀞)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년에 왜를 친 공이 있다.ㆍ유종지(柳宗智) 처사이다.ㆍ하수일(河受一) 정랑(正郞)을 지냈다.
종천사우(宗川祠宇) 정사년에 세웠다. : 하홍탁(河弘度) 호는 겸재(謙齋), 진사이다.ㆍ하진(河溍) 호는 태계(台溪), 헌납을 지냈다.ㆍ하연(河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 세종조의 정승
임천사우(臨川祠宇) 을유년에 세웠다. : 이준민(李俊民)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庵),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좌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익공(孝翼公)이다.ㆍ강응태(姜應台) 수찬을 지냈다.ㆍ하증(河憕) 처사이다.ㆍ한몽삼(韓夢參)
신당서원(新塘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지서(趙之瑞) .t;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정산향현사(鼎山鄕賢祠) 무인년에 세웠다. : 유백온(兪伯溫) 호는 정산(鼎山), 생원이다. : 정온(鄭蘊)ㆍ강숙경(姜叔卿)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하조(河潮) 벼슬은 지평(持平)ㆍ이제신(李濟臣) 처사ㆍ이담(李淡) 처사ㆍ하천주(河天澍) 처사ㆍ진극경(陳克敬) 처사ㆍ박민(朴敏) 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 신축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인계향현사(仁溪鄕賢祠) : 최탁 벼슬은 익찬(翊贊)
사천(泗天)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정(李禎) 호는 귀암(龜岩)이며, 자는 강이(剛而),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중종 때 괴과(魁科)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 김덕함(金德諴) 인조조의 명신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신천서원(新川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 하연(河演)ㆍ하우명(河友明) 호는 연당(蓮塘)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도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ㆍ하혼(河渾) 찰방(察訪)ㆍ김유(金紐) 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자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 박인(朴絪) 호는 무민당(无悶堂), 참봉이다.ㆍ박소(朴紹) 중종조의 명신(名臣)
명곡향현사(明谷鄕賢祠) 기미년에 세웠다. : 배일장(裴一長)
삼가(三嘉) 용암서원(龍巖書院) 만력(萬曆) 계묘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
고암사우(古巖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노흠(盧欽) 호는 입재(立齋), 진사이다.ㆍ이흘(李屹) 호는 노파(蘆坡), 세마(洗馬)를 지냈다.ㆍ임진무(林眞懋) 호는 임곡(林谷), 진사이다.
평천서원(平川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옥량(鄭玉良) 호는 경재(耕齋),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봉화(奉化)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萬曆) 갑진년에 세웠으며 사액(賜額)하였다. : 이황ㆍ조목(趙穆)
문계리사(文溪里社) 갑자년에 세웠다. : 금휘(琴徽) 벼슬은 사온령(司醞令)이다.ㆍ금원정(琴元貞) 호는 농수(聾叟), 진사(進士)이다.ㆍ유종개(柳宗介) 벼슬은 학유(學諭)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ㆍ금축(琴軸) 호는 남계(南溪), 참봉이다.
반천리사(盤泉里社) 병진년에 세웠다. : 김중청(金中淸) 호는 구전(苟全), 승지를 지냈다.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ㆍ원개(元凱) 참봉(參奉)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ㆍ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예연서원(禮淵書院) 숙종 갑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ㆍ곽재우(郭再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
송담사우(松潭祠宇)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박성(朴惺) 호는 대암(大庵), 부사(府使)를 지냈다.
청백사(淸白祠)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곽안방(郭安邦) 군수(郡守)ㆍ곽지운(郭之雲) 호는 연일당(燕日堂), 호조 좌랑을 지냈다.
풍기(豐基) 욱양서원(郁陽書院) 현종 임인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우곡서원(愚谷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유운룡(柳雲龍) 호는 겸암(謙巖), 목사(牧使)를 지냈다.ㆍ황섬(黃暹) 호는 식암(息庵), 대사헌을 지냈다.ㆍ이준(李埈) 호는 창석(蒼石), 부제학(副提學)이다.ㆍ김광엽(金光曄) 호는 죽일(竹日), 응교(應敎)를 지냈다.
예천(醴泉) 정산서원(鼎山書院) 만력(萬曆)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봉산서원(鳳山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권오복(權五福)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무인년에 세웠다. : 조용(趙庸) 호는 송정(松亭),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윤상(尹祥)ㆍ권오복(權五福)ㆍ정총(鄭塚)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 병오년에 세웠다. :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이기춘(李起春) 호는 옥산(玉山)이며 처사(處士)이다.
문연서원(文淵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박윤(朴潤) 호는 죽연(竹淵)이다.ㆍ박택(朴澤) 호는 요락당(樂樂堂), 처사이다.ㆍ윤규(尹奎) 호는 월오(月塢), 처사이다.ㆍ박정번(朴廷璠) 호는 학암(鶴巖),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최여계(崔汝契) 호는 매헌(梅軒)이며, 처사이다.
운천서원(雲川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영연사(靈淵祠) 신묘년에 세웠다. : 신덕린(申德麟) 호는 순은(醇隱), 대제학을 지냈다.ㆍ박은(朴誾)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정사현(鄭師賢) 호는 월담(月潭), 처사(處士)이다.
매림사(梅林祠) 정해년에 세웠다. : 정수강(鄭壽崗) 생원(生員)ㆍ오선기(吳善基) 호는 한계(寒溪), 처사이다.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ㆍ이전(李琠)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김식(金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안동(安東) 호계서원(虎溪書院) 만력(萬曆) 병자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주계서원(周溪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우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구봉령(具鳳齡) 호는 백담(栢潭),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사간을 지냈으며, 퇴계(退溪)와 백담(栢潭)의 문인(門人)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벌(權撥) 명종 때의 명신(名臣)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유성룡(柳成龍)ㆍ유진(柳) 성룡(成龍)의 아들이다. 호는 수암(修巖), 참판에 증직되었고 추향(追享)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우탁(禹倬)
청성서원(靑城書院) : 권호문(權好文) 호는 송암(松巖), 처사(處士)이다.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ㆍ김구용(金九容) 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ㆍ김양진(金揚震) 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경광서원(鏡光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다. : 배상지(裴尙志)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사복정(司僕正)이다.ㆍ이종준(李宗準)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권우(權宇) 호는 송소(松巢), 이계정사(伊溪精舍)로 옮겨져 독향(獨享)된다.ㆍ장흥효(張興孝) 호는 경당(敬堂), 추향(追享)되었다.
노림서원(魯林書院) 효종 계사년에 세웠다. : 남치리(南致利) 호는 비지(賁趾), 처사이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
사빈서원(泗濱書院) 을축년에 세웠다. : 김진(金璡) 호는 청계(靑溪),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성일(誠一)의 아버지이다.ㆍ김극일(金克一) 호는 약봉(藥峯), 사성(司成)을 지냈고, 성일(誠一)의 형이다.ㆍ김수일(金守一) 호는 귀봉(龜峯)이다.ㆍ김명일(金明一) 호는 운암(雲巖), 생원이다.ㆍ김성일(金誠一)ㆍ김부일(金復一) 호는 남악(南岳), 사성을 지냈으며 성일의 아우이다.
덕봉서원(德峯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용(金涌) 호는 운천(雲川), 병조 참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 묵계정사(默溪精舍)로 이봉(移奉)하였다.
묵계정사(默溪精舍) 병자년에 세웠다. : 옥고(玉沽) 호는 응계(凝溪), 장령(掌令)이다.ㆍ김계행(金係行) 호는 보백당(寶白堂),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ㆍ김용
이계정사(伊溪精舍) : 권우(權宇)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옮겨 모셨다.
백록리사(栢麓里社)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종준(李宗準)ㆍ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 진사이다.ㆍ정유일(鄭惟一) 호는 문봉(文峯)이며 대간(大諫)을 지냈다.ㆍ홍준형(洪俊亨) 호는 매헌(梅軒), 참봉이다.ㆍ김성구(金聲久)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추향(追享)되었다.ㆍ권두인(權斗寅) 정랑(正郞)을 지냈다. 추향되었다.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김경창(金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하동(河東) 영계서원(永溪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정여창(鄭汝昌)ㆍ김성일(金誠一)
청하(淸河) 학산서원(鶴山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창집(金昌集)
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허목(許穆)
운암향현사(雲巖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박신윤(朴身潤) 호는 우곡(愚谷)이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진민사(鎭民詞) 정덕(正德) 정축년에 세웠다. : 김용비(金龍庇) 고려조의 태자첨사(太子詹事)이다.
장대서원(藏待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 호는 송은(松隱), 진사이다.ㆍ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ㆍ신원록(申元祿) 호는 매당(梅堂)이다.ㆍ신지제(申之悌)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충렬사(忠烈祠) : 김홍술(金洪術) 고려조의 장군(將軍)이다.
청송(靑松) 병암서원(屛巖書院)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문경(聞慶)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숙종 계사년에 세웠다. : 김낙춘(金樂春)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ㆍ정언신(鄭彦信) 선조 때의 정승이다.ㆍ심대부(沈大孚) 호는 가은(嘉隱),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추향(追享)되었다.ㆍ이심(李襑) 호는 색은(穡隱), 찬성(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안귀손(安貴孫)ㆍ신숙빈(申叔彬) 처사(處士)이다. 개(槩)의 손자이다.ㆍ성만징(成晩徵) 호는 추담(秋潭), 교관(敎官)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고성(固城) 갈천서원(葛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이암(李嵒)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ㆍ노필(盧㻶)ㆍ어득강(魚得江)ㆍ조사석(趙師錫) 숙종 때의 정승
충렬사(忠烈祠) 만력(萬曆) 갑인년에 세웠으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유월사(柳月祠) 기축년에 세웠다. : 심광세(沈光世) 호는 휴옹(休翁),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비안(比安) 귀천서원(龜川書院) 숙종 기미년에 세웠다. : 박서생(朴瑞生) 호는 율정(栗亭),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우(李瑀)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 오봉서원(五峯書院) 가정 병진년에 세웠다. : 공자 화상(孔子畫像)
송담서원(松潭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향현사우(鄕賢祠宇) 순정 갑신년에 세웠다. : 최치원(崔致遠)ㆍ최응현(崔應賢) 호는 수헌(睡軒), 대사헌을 지냈다.ㆍ박수량(朴遂良) 기묘록에 들어 있다.ㆍ최운우(崔雲遇) 호는 도경(蹈景), 횡성(橫城) 현감을 지냈다.ㆍ최수(崔洙)ㆍ박공달(朴公達)ㆍ최수성(崔壽峸)
□□영당 정해년에 세웠다. : 오명준(吳命峻)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원충갑(元冲甲) 호는 응양(鷹揚), 상호군(上護軍)이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ㆍ김제갑(金悌甲)ㆍ원호(元豪)
도천서원(陶川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허후(許厚)
칠봉서원(七峯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원천석(元天錫)ㆍ원호(元昊)ㆍ정종영(鄭宗榮)ㆍ한백겸(韓百謙) 호는 구암(久庵)
광암향현사(廣巖鄕賢祠) : 정시한(丁時翰) 벼슬은 진선(進善)이다.
□□영당(□□影堂) 병인년에 전교(傳敎)를 내려 세웠다. : 익안대군방의(益安大君芳毅)
춘천(春川)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이정형(李廷馨)ㆍ조경(趙絅)
도포서원(道浦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신숭겸(申崇謙)ㆍ신흠(申欽)ㆍ김경직(金敬直) 호는 우정(憂亭), 벼슬은 사간(司諫)이다.
운곡영당(雲谷影堂) 갑신년에 세웠다. : 김수증(金壽增) 호는 곡운(谷雲), 참판을 지냈다.ㆍ김창흡(金昌翕)
울진(蔚珍) 귀암서원(龜巖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김시습(金時習)
고산서원(孤山書院) 기미년에 세웠다. : 임유후(任有後) 호는 만휴(萬休), 병조 참판을 지냈다.ㆍ오도일(吳道一) 호는 서파(西坡), 반대당의 배척을 받아 본 고을 수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향현사(鄕賢祠) 임자년에 세웠다. : 남사고(南師古)ㆍ주경안(朱景顔) 효자(孝子)이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몽양재(蒙養齋) 숙종 임진년에 비로소 향사하였다. : 전이석(田爾錫) 효자(孝子)ㆍ주필대(朱必大) 생원(生員)
귀장서당(龜藏書堂) : 전구원(田九畹) 생원
삼척(三陟) 부동사우(府東祠宇) 만력 기묘년에 세웠다. : 김효원(金孝元) 호는 성암(省庵)
용산서원(龍山書院) : 이세필(李世弼)
통천(通川) 휴산사우(休山祠宇) 기사년에 세웠다. 경덕사(景德祠) : 정구(鄭逑) 상렬사(尙烈祠)ㆍ최윤덕(崔潤德)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황응청(黃應淸)ㆍ황여일(黃汝一) 호는 해월(海月), 공조 참의를 지냈다.
향현사(鄕賢祠) 강희(康熙) 신해년에 세웠다. : 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명고리사(明皐里社) : 김담(金譚) 호는 탁계(卓溪)ㆍ장효갑(張孝甲) 호는 동명(東溟), 벼슬은 첨추(僉樞)이다.ㆍ장온(張薀) 호는 매헌(梅軒), 효자(孝子)이다.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숙종 을축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민충소사(愍忠小祠)ㆍ엄흥도(嚴興道)
평창(平昌) 둔계사우(遯溪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곽세익(郭世翼) 호는 둔계(遯溪), 벼슬은 사예(司藝)이다.
이천(伊川) 부서사우(府西祠宇) 을해년에 세웠다. : 박태보(朴泰輔)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금화(金化) 충장사(忠壯祠) 병신년에 세웠다. : 원호(元豪)
충렬사(忠烈祠) 경인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홍명구(洪命耈)
고성(高城) □□사(□□祠) 경오년에 세웠다. : 조지겸(趙持謙)


황해도(黃海道)

송화(松禾) 도동서원(道東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안악(安岳) 취봉서원(鷲峯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숭정(崇禎)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황주(黃州) 백록동서원(白麓洞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고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은율(殷栗) 율곡서원(栗谷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숙종 신묘년에 옮겨 세웠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충효사우(忠孝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박훈(朴薰) 호는 장련(長連)이며 현감을 지냈다.
김천(金川) 도산서원(道山書院) 숙종 임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제현(李齊賢)ㆍ이종학(李種學)ㆍ조석윤(趙錫胤)
민충사(愍忠祠) 갑술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중로(李重老) 좌방어사(左防禦使)이다.ㆍ이성부(李聖符) 우방어사(右防禦使)이다.ㆍ박영신(朴榮臣) 풍천 부사(豐川府使)ㆍ이사주(李師朱) 이천 부사(伊川府使)ㆍ윤정준(尹廷俊) 옹진 현령(瓮津縣令)ㆍ권호원(權浩源) 훈국초관(訓局哨官)ㆍ장면(張緬) 훈국초관ㆍ방흡(方潝) 방어군관(防禦軍官).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조에 상세하다.
평산(平山) 동양서원(東陽書院) 숭정 임오년에 세웠고 숙종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이색(李穡)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고려 때 세웠는데 임진ㆍ정유년의 병화로 불에 탄 것을 병자년에 중건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고려 때 사람으로 시호는 무공공(武恭公)이며, 철상(鐵像)이 있다.ㆍ유금필(庾黔弼) 고려 때 사람이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이며, 철상이 있다.
재령(載寧) 경현서원(景賢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
수안(遂安) 용계서원(龍溪書院) 현종조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한(漢) 나라 관녕(管寧)ㆍ이연송(李連松)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ㆍ강백년(姜栢年)
연안(延安) 비봉서원(飛鳳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경신년에 사액하다. : 주자(朱子)ㆍ최충(崔冲)ㆍ김굉필(金宏弼)ㆍ성혼(成渾)ㆍ이이(李珥)ㆍ박세채(朴世采)
현충사(顯忠祠) 숭정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이정암(李廷馣)ㆍ신각(申恪)ㆍ송덕윤(宋德潤) 첨사(僉使)ㆍ장응기(張應祺) 군수(郡守)ㆍ김대정(金大鼎) 부사(府使)ㆍ조광정(趙光庭) 생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해주(海州)에 살았다.
문화(文化) 봉강서원(鳳崗書院) 갑신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정계사원(程溪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유관(柳寬) 세종 때의 정승이다.
충효사(忠孝祠) 신묘년에 세웠다. : 유언겸(兪彦謙) 효자(孝子)ㆍ홍진(洪禛) 현령을 지냈는데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신천(信川) 정원서원(正院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고, 현종 신해년에 중건하였으며, 숙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해주(海州) 소현서원(紹賢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청성묘(淸聖廟)는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문헌서원(文憲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최충(崔冲) 호는 성재(惺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고려 태사(太師)이다.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동부자(海東夫子)로 일컬어진다.ㆍ최유선(崔惟善) 충(冲)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며, 추향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문헌서원 곁에 따로 세웠다. : 최영유(崔永裕)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고려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을 때 해주 목사로서 인신(印神)을 못에 던지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통인(通引)과 통인의 개도 따라 죽었다.
장련(長連) 봉양서원(鳳陽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 동서양사(東西兩祠)가 있는데 선조의 어필(御筆)로써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조헌(趙憲)ㆍ박세채(朴世采) 이상은 서사(西祠) 4위ㆍ안당(安瑭)ㆍ신응시(辛應時)ㆍ오억령(吳億齡)ㆍ김덕함(金德諴) 이상은 향현동사(鄕賢東祠) 4위
봉산(鳳山) 문정서원(文井書院)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계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강석기(姜碩期)
충렬사(忠烈祠)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김만수(金萬壽) 공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부사를 지냈다.ㆍ강찬(姜燦)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천수(金千壽) 형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백수(金百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구수(金九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광협(金光鋏)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옹(李蓊) 울진(蔚珍) 현감을 지냈다. 모두 임진 의병이다.
서흥(瑞興) 화곡서원(花谷書院) 병술년에 세웠다. : 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ㆍ김귤(金橘) 호는 검재(儉齋),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미년에 세웠다. : 유응부(兪應孚)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ㆍ유빈(柳蘋)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백현(白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ㆍ정린(鄭麟) 본 고을 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토산(兔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장연(長淵) 용암서원(龍巖書院) 선조 기축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ㆍ이이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 청천서원(淸川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ㆍ김덕함(金德諴)
충민사(忠愍祠) 신유년에 세웠고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남이흥(南以興) 병사(兵使)ㆍ김준(金浚) 본 고을의 목사이다.ㆍ이상안(李尙安) 강계(江界)ㆍ김상의(金尙毅) 귀성(龜城)ㆍ박명룡(朴命龍) 벼슬은 우후(虞侯)이다.ㆍ이희건(李希建) 용천(龍川)ㆍ장돈(張暾) 죽천(竹川)ㆍ김양언(金良彦) 태천(泰川)ㆍ송덕영(宋德榮) 맹산(孟山)ㆍ김언수(金彦壽)ㆍ한덕문(韓德文)ㆍ송도남(宋圖南) 영유(永柔)ㆍ윤혜(尹惠) 박천(博川)ㆍ함응수(咸應秀)ㆍ양진국(楊晉國)ㆍ임충서(林忠恕) 이들은 정묘년에 순절(殉節)하였다.
강서(江西) 학동서원(鶴洞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반(金泮)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숙종 신해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조호익(曺好益)ㆍ김육(金堉)
자산(慈山) 의열사(義烈祠) 신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최춘명(崔春命) 벼슬은 고려조에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ㆍ홍명구(洪命耈)ㆍ최경후(崔景候) 본 고을 부사이다.ㆍ김지저(金之佇) 판관
□생사(□生祠) 갑신년에 세웠다. : 이세재(李世載) 감사ㆍ정석빈(鄭碩賓) 부사ㆍ김의만(金義萬)ㆍ조익징(趙益徵) 부사
철산(鐵山) 쌍충사(雙忠祠)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원정(李元禎) 고려 때 철주(鐵州) 방어사(防禦使).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서 몽고난때 입절(立節)하였다.ㆍ이희적(李希勣) 판관으로 함께 죽었다.
충무사(忠武祠) 숙종 을해년에 세웠다. : 정봉수(鄭鳳壽)ㆍ김여기(金礪器)ㆍ정인수(鄭麟壽)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용강(龍岡) 오산서원(鰲山書院) 을미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정주(定州) 봉명서원(鳳鳴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신안서원(新安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畵像)
순안(順安) 성산서원(星山書院) 숭정 정해년에 세웠으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한우신(韓禹臣) 호는 정안(靜安), 추향되었다. 벼슬은 내자정(內資正)이다.
강계(江界)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숭정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ㆍ정구(鄭逑)ㆍ박대덕(朴大德) 호는 합강(合江)
쌍충사(雙忠祠) 선조 기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의(鄭顗) 고려조의 중랑장(中郞將)이다.ㆍ최춘명(崔椿命) 고려조의 추밀부사(樞密副使)다.
창성(昌城) 충렬사(忠烈祠) 기해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평양(平壤) 충무사(忠武祠)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김양언(金良彦)
충정서원(忠正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홍명구(洪命耈)
무열사(武烈祠) 제사조(諸祠條)에 상세하다.
용곡서원(龍谷書院) 효종 무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선우협(鮮于浹)
인현서원(仁賢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기자수용(箕子睟容)
벽동(碧潼)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귀성(龜城) 정공사우(旌功祠宇) 계미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서(朴犀) 고려조의 병사(兵使)이다. 침공한 몽고병을 방어한 공으로 정원 대도호(定遠大都護)에 승진했다.ㆍ김경손(金慶孫) 분도장군(分道將軍)이다.
영변(寧邊) 약봉서원(藥峯書院)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선천(宣川) 주자서원(朱子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충렬사(忠烈祠) : 김응하(金應河)ㆍ김만중(金萬重) 벼슬은 문형(文衡)이다.ㆍ박태보(朴泰輔)
충민사(忠愍祠) : 임경업(林慶業)
삼충사(三忠祠) 고려 목종 때에 거란(契丹)과 싸워 전사하였다. : 양규(楊規) 벽상공신(壁上功臣)이며, 서북도순검사(西北都巡檢使)이다.ㆍ김숙흥(金叔興) 벽상공신이며, 서북도지사(西北都指使)이다.ㆍ유백부(庾伯符) 통주부서(通州府署)
삭주(朔州) 금창서원(金昌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김익호(金翼虎) 호는 만학재(晩學齋), 효행과 우애가 있고 학문이 깊었다.
곽산(郭山) □□서원 인조 기축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ㆍ홍경우(洪儆禹) 호는 월포(月浦), 벼슬은 봉상첨정(奉常僉正)이다.
태천(泰川) 둔암서원(遯庵書院) 무술년에 세웠다. : 선우협(鮮于浹)ㆍ김익호(金翼虎)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박천(博川) 지천사우(遲川祠宇) 정해년에 세웠다. : 최명길(崔鳴吉)
의주(義州) 읍내사우(邑內祠宇) 숙종 16년 경오에 세웠다. : 을파소(乙巴素) 고구려의 국상(國相)ㆍ김상헌(金尙憲)
백마산성사우(白馬山城祠宇) 숙종 35년 을축에 세웠다. : 강감찬(姜邯贊)ㆍ임경업(林慶業)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제사(諸祠)에 들어 있다.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가정 계해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화상 사우(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는데 문회서원의 서쪽에 있다. : 이계손(李繼孫)ㆍ유강(兪絳) 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ㆍ이후백(李後白)ㆍ한준겸(韓浚謙)ㆍ이광하(李光夏) 감사ㆍ남구만(南九萬)ㆍ문덕교(文德敎) 호는 동호(東湖), 좌랑을 지냈고 행실이 올바름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아우 선교(善敎)가 왜병에게 살해되자 공은 의병을 수창(首倡)하였으나 자기가 지은 임진록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지 못했다. 현종 정미년에 추향되었다. 영종 때에 도령(都令)에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조헌(趙憲)ㆍ민정중(閔鼎重)
창의사(彰義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백응상(白應祥) 임진왜란 때에 묘파보(妙坡保) 권관(權管)으로 본부(本府) 판관에 승진되고 의사(義士)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ㆍ유응수(柳應秀) 삼수(三水)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아버지가 적에게 살해됨을 통분히 여겨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창의(倡義)하여 원수를 갚았다. 선조가 명을 내리어 별장(別將)을 삼았는데 영남에서 왜를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ㆍ이유일(李惟一) 부사(府使)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동위장(東衛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한인제(韓仁濟)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방원 만호(坊垣萬戶)로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북진(北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여섯 번 격파하였다.ㆍ박중립(朴仲立) 벼슬은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좌기장(左騎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이희록(李希祿) 벼슬은 첨정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유생(儒生)으로 의병을 일으켰다.ㆍ정해택(鄭海澤) 벼슬은 만호(萬戶)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길남(朴吉男)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의분심과 지략(智略)과 훌륭한 활솜씨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응숭(朴應嵩) 벼슬은 만호이며 군기정중위장(軍器正中衛將)에 증직되었다. 정유년에 유응수(柳應秀)를 대신하여 별장(別將)이 되었다.ㆍ이사제(李思悌) 판관이며, 부정(副正)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나이 겨우 19세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다.ㆍ한경상(韓敬商) 참봉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생원으로서 동위장(東衛將)이 되었고 임기응변과 지려(智慮)가 뛰어났다.ㆍ김응복(金應福) 직장(直長)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학식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격문을 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뒤에 문과에 올랐다.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길주(吉州) 명천서원(溟川書院) 병오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향현사(鄕賢祠) : 허유례(許惟禮)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장공(孝莊公)이며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다.ㆍ원충서(元忠恕) 참의에 증직되었다.ㆍ허진(許珍) 유례(惟禮)의 증손인데 도사(都事)에 증직되었다.ㆍ김국신(金國信)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ㆍ허수민(許秀敏)ㆍ허대성(許大成) 유례의 5대 손이다.ㆍ허성일(許誠一) 유례의 6대 손이다.
경성(鏡城) 창렬사우(彰烈祠宇)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임진록에 들어 있다.ㆍ이붕수(李鵬壽) 지평에 증직되었다.ㆍ강문우(姜文佑)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ㆍ최배천(崔配天) 판관(判官)에 증직되었다.ㆍ지달원(池達源)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이희당(李希唐)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증직되었다.ㆍ이기수(李麒壽) 좌랑에 증직되었다.ㆍ박유일(朴惟一)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서수(徐遂)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오경헌(吳慶獻)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묘우(□□廟宇) 고려조에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부(府)의 서쪽 2리에 있다. :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평장사(平章事)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선조 16년에 창건하였다.
청덕당(淸德堂) 을사년에 세웠다. : 성하종(成夏宗) 병사(兵使)이다. 창흥군(昌興君)으로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이다.
흥혜사우(興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다. : 이광하(李光夏) 판윤(判尹)으로서 선비 양성에 공을 세웠다.
회령(會寧) 현충사우(顯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ㆍ신세준(申世俊) 첨지(僉知)였는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최언영(崔彦英) 벼슬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다ㆍ오윤적(吳允迪)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허관(許灌)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정여경(鄭餘慶)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다.ㆍ윤립(尹岦) 벼슬은 예빈(禮賓)ㆍ이희백(李希白)ㆍ오준례(吳遵禮) 모두 수문장(守門將)이다.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행영사우(行營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김응하(金應河)
온성(穩城) 충곡서원(忠谷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기준(奇遵)ㆍ김덕함(金德諴)ㆍ유계(兪棨)
덕원(德源) 용진서원(龍津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창주영각(滄洲影閣) : 주자(朱子)의 화상(畫像)
문천(文川) 문포서원(文浦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영당(□□影堂) : 공자의 화상(畫像)
단천(端川) 복천영당(福川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문선왕(文宣王)의 화상(畫像)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 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안변(安邊) 옥동서원(玉泂書院) 만력 무신년에 중건하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ㆍ조석윤(趙錫胤)
삼현사(三賢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경승(李慶承) 호는 율도(栗島), 문과에 합격, 판관을 지냈다ㆍ이선승(李善承) 호는 미곡(薇谷), 감찰을 지냈다.ㆍ이지온(李之馧) 호는 빈교(貧郊), 참판을 지냈다.
정평(定平) 망덕서원(望德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김상헌(金尙憲)ㆍ조익(趙翼)ㆍ민정중(閔鼎重)
무산(茂山) □□사우(□□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주D-001]장수(藏修) :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라고 칭하였다.
[주D-002]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중국에서 시초의 서원인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하였다.
[주D-003]지명이 비록 같으나 :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으면 주자(朱子)가 살았던 중국의 운곡을 따라 주자의 서원을 세웠었다.
[주D-004]태산(泰山)에 …… 하겠는가 : 노(魯) 나라의 진산(鎭山)인 태산에 노 나라의 임금이 아니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인데, 권신(權臣)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므로 공자가 태산의 산신(山神)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절현사(節顯祠) : 현절사(顯節祠)의 오기인듯 하다.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연촌유고

 

 

G002+AKS-CI20_59005-01
이미지전체명칭 연촌유고
이미지제목 연촌유고 표지
이미지부분명칭1 *
이미지부분명칭2 표지
문화재지정사항 *
요약설명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글은 소(疏) 1편과 시 3수뿐. 최덕지의 글은 아니더라도 박팽년의 (공원창화시서(貢院唱和詩序))는 당시 과장(科場) 설시의 편모를 엿볼 수 있는 글.


G002+AKS-CI20_59005-01
이미지전체명칭 연촌유고
이미지제목 연촌유고 표지
이미지부분명칭1 *
이미지부분명칭2 표지
문화재지정사항 *
요약설명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글은 소(疏) 1편과 시 3수뿐. 최덕지의 글은 아니더라도 박팽년의 (공원창화시서(貢院唱和詩序))는 당시 과장(科場) 설시의 편모를 엿볼 수 있는 글.

 

 

 


 

 

 

 


 

 

 

녹동서원

 

 

G002+AKS-CI20_76564-00
이미지전체명칭 녹동서원
이미지제목 녹동서원 전경
이미지부분명칭1 전경
이미지부분명칭2 *
문화재지정사항 *
요약설명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 있는 서원. 1630년(인조 8)에 최덕지(崔德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1713년에 ‘녹동(鹿洞)’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했다. 최덕지 영정 및 유지 초본이 보물 제5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녹동서원
G002+AKS-CI20_76564-00
이미지전체명칭 녹동서원
이미지제목 녹동서원 전경
이미지부분명칭1 전경
이미지부분명칭2 *
문화재지정사항 *
요약설명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 있는 서원. 1630년(인조 8)에 최덕지(崔德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1713년에 ‘녹동(鹿洞)’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했다. 최덕지 영정 및 유지 초본이 보물 제5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성공 고려문화시중 휘아의 4세손 이신

조선 호조참의 휘 담,

연촌공의 부친되신 분이다

저에게는 20대 직계 조고  되시는 분이다  

 

최담유허비(崔霮遺墟碑)

 

 

有明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集」
賢殿直提學月塘崔公遺墟碑」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日立」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屢百」
年矣而巖臺諸刻尙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焉夫豈一時繁華之盛直以」
致然㢤公全州人諱霮烟村先生德之之考也烟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
曰吾先君生扵至正丙戌五月▨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
内侍拜叅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鄊子職極修而仍喜遯自非不」
求宦達丙子為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
鄊日以花木詩勾為事而優逰自▨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㕘議集賢殿提」
學又曰接人謙恭康强無比八旬以後騎馬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郷閭」
遇孫侄軰亦下馬受禮而鄊中慶吊迎餞無不與焉嘗餞府尹子月塘樓上呼两妓」
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湏記一閒人之勾甲寅六月得疾言語動」
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倐然而逝此其始終大畧而所謂丁巳」
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
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冝矣今寒碧堂亦公之江亭舊址」
而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逰是」
金節齊權陽村崔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
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烟村以淳德髙節為」
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後承繁衍文武顯達不▨盡述而孫生明曾孫秀孫」
忠成玄孫弼成繼成連孫六世孫命龍八世孫安俱以忠孝學行與爼豆之享今公」
子孫之賢若是其多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乆為他人所」
有公諸後孫合力▨取之而將立石以識之来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
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畧書之如此云」
崇禎四丁亥孟春 日 恩津宋稺圭撰 幷書前面」
有司十二世孫存中」
十四世孫一性」
十五世孫穆欽十六世孫偰謹書」

 

 

 

최담(崔霮) 유허비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월당(月塘) 최공(崔公) 유허비(遺墟碑)

전주부(全州府) 남문(南門) 밖에 계곡과 산의 경치가 뛰어난 금산(錦山)의 남쪽 옥류동(玉流洞)에 월당(月塘) 최공(崔公)의 유허가 있다.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으되 암대(巖臺 : 바위로 된 대)에 새긴 글씨는 아직도 완연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탄식하고 있으니 무릇 어찌 한때 성대한 영화를 누렸다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공은 전주 사람으로 휘(諱)는 담(霮)이니, 연촌(烟村) 덕지(德之) 선생의 부친이다. 연촌공(烟村公)은 손수 공의 실제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문자로 써 줄 것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병술년(충목왕 2, 1346년) 5월 일에 태어나셨는데 겨우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셨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임인년(공민왕 11, 136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참관(參官)에 제수되었다. 또 정사년(우왕 3, 137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사퇴하고 향리로 물러났으니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고 기꺼이 물러나 자락(自樂)하고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다.

병자년(태조 5, 1396년)에 어진 정승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封常寺少卿)으로 부임하였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훈지진주사(訓知珍州事)에 제수되었으나 경진년(정종 2, 1400년)에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꽃이나 나무를 읊는 시를 짓는 것으로 일삼았으며 느긋하게 노닐며 자적하였다. 병신년(태종 16, 1416년)에 노직(老職)으로 검교(檢校) 호조참의(戶曹參議)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에 제수하였으며 또 ‘사람들을 접함에 겸손하고 공손하며 건장하기가 비할 데 없다.’하였으니 팔순이 넘어서도 말을 탈 때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었으며 걸을 때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나 지팡이가 없이도 두루 마을길을 돌아다녔는데, 손자나 조카들을 만나면 또한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으며 마을의 경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월당루(月塘樓)에서 부윤(府尹)을 전별(餞別)할 때 기생 두 명을 불러 종이를 잡게 하고 곧바로 “기양(歧陽)에 들어가 조회(朝會)가 끝난 후에 호남(湖南) 한인(閑人) 한 사람을 기억해 주옵소서(願入歧陽朝罷後 湖南須記一閑人)”라는 구절이 들어간 절구(絶句) 한 수를 써내려 갔다.
갑인년(세종 16, 1434년) 6월에 병이 들었으나 말이나 행동이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으며 몹시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달 25일에 홀연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그 시종(始終)을 대략 기술하여 이른바 -몇 자 판독 불능- 명(明)나라 홍무(洪武) 10년(우왕 3, 1377년)이었으며 병자년(태조 5, 1396년) 우리 태조께서 명을 받으신지 5년 되던 해이다.
아, 공은 후덕(厚德)이 있는 데다 또 청복(淸福)까지 누려 당시에 뛰어난 경치를 보고 시로 짓고 문장으로 기리고 읊은 것이 많은데, 후인들이 그것을 외우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금 한벽당(寒璧堂) 또한 공이 노닐던 강가의 정자에 있던 옛터인데 암대(巖臺)에 새겨진 ‘광풍제월(光風霽月)’, ‘연비어약(鳶飛魚躍)’ 같은 글귀에서 공의 마음속 의취(意趣)를 상상해 볼 수 있으며, 김절재(金節齋), 권양촌(權陽村), 최만육(崔晩六) 제공(諸公)이 공과 더불어 이곳에서 노닌즉 어찌 ‘그 산을 보지 못했다면 그 나무라도 보기를 바라노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남은 광지(匡之)이고 차남은 직지(直之)이니 모두 집현전 직제학이며 삼남은 득지(得之)이니 전농시(典農寺) 소윤(少尹)이며 막내아들은 연촌(烟村)이 순덕(淳德)하고 절개가 높다고 여겼는데 -몇 자 판독 불능- 세종과 문종 양조의 명신(名臣)으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번창하였고 문무(文武)의 관리로 현달(顯達)하였으되 다 기술하지 못하지만 -이하 몇 자 의미 불명- 6세손 명룡(命龍), 8세손 안(安)은 모두 충효와 학행으로 향사(享祀)를 받고 있다.
오늘날 공의 자손으로서 어진 자가 이와 같이 많으니 시서(詩序)를 지어 이른바 선을 쌓은 집안에 남은 경사(慶事)가 있는 것이 올바른 이치로 믿을 만하며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유허(遺墟)가 타인의 소유가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공의 후손이 힘을 합해 먼 조상의 자취를 더듬어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자 함에 나를 찾아와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으니 관석(觀錫)과 겸석(謙錫)이다. 선조를 기리는 그 성의에 감동하여 거칠고 보잘것없는 글로나마 대략 이와 같이 쓴다.

숭정후 네 번째 정해년(순조 27, 1827년) 4월 일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가 짓고 아울러 전면 글씨를 썼다.

유사(有司) 12세손 존중(存中), 14세손 일성(一性), 15세손 목흠(穆欽), 16세손 설(偰) 삼가 쓰다.

 

 

 

최담유허비(崔霮遺墟碑)
 
시대
조선
연대
1827년(순조27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40cm, 너비 59cm, 두께 20cm
출토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소재지
(한국)성균관대학교 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3가 성균관대학교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송치규(宋稺圭) / 송치규(宋稺圭) / 미상
 
 
1827( 27) . () () () () () () () () .
1346( 2) 1434( 11) . () () .
, 1970 .
(), 1979 1,

 

 

최개(崔漑)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CD5CAC1CFFFFB1548X0
생졸년 1548(명종 3) ~ 1593(선조 26)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호국 > 의병
 
 

[상세내용]

최개(崔漑)에 대하여
1548년(명종 3)∼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로, 존양(存養) 최덕지(崔德之)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순(和順)에 머물던 최경회(崔慶會)가 격문을 띠워 의병들을 규합할 때, 이에 동참하고자 하였으나 연로하신 부친의 봉양 때문에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나라에 충성할 것을 권면(勸勉)함으로, 향촌의 의병들을 모집하여 최경회와 합류하였다. 최경회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려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1593년(선조 26)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해 오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수성을 위해 결사 항전하였다. 그러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함께 순절하였다.

 

[참고문헌]  영암군지   호남절의록   전남도지

[집필자]  고윤수

 

 

나와집
G002+AKS-CI20_17108-02
이미지전체명칭 나와집
이미지제목 나와집 표지
이미지부분명칭1 *
이미지부분명칭2 표지
문화재지정사항 *
요약설명 10권 4책.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기언정(奇彦鼎)의 시문집. 이 책의 내용 중 (최연촌화상기 崔烟村怜像記)는 최덕지(崔德之)의 행적에 관하여 찬(贊)한 것이다.

 

 

 

 

[명의록(名醫錄)]
[명의록(名醫錄)]
: [명의록(名醫錄)]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조선(朝鮮)
재질 : 지(紙)
크기 : 가로유물명칭 (가로) : 14.7 , 세로(세로) : 16.5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 문헌(文獻) / 기타(其他)
소장처 : 법인/사립(法人/私立) / 목아불교(목아불교)
유물번호 : 서(서) 000100-000
[명의록(名醫錄)]

 

 


유 적 명 : 영암 최성호 가옥 (靈巖崔成鎬家屋)
주 소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4-1
지정사항 : 중요민속자료 제164호
시 대 : 조선
종 류 : 고건축 고가
참고사항 : 김지민, 1986, <해남지방의 전통건축>, <<해남군의 문화유적>> ; 전라남도, 1986, <<문화유적총람>> ; 전라남도, 1992, <<문화재도록>>

연촌 최덕지 선생의 사위인 산정이 거처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현 소유자인 최성호씨 가족은 현재 13대 째 이 곳에서 살아오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모두 일자형 평면으로 된 안채, 바깥 사랑채, 안 사랑채, 그리고 곡간채가 한데 어울려져 구(口)자형의 배치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가옥의 출입은 안 사랑채 우측에 나 있는 대문을 통하여 진입하게 되어 있다. 문간채의 상량문에 “숭정 기원 사회갑 이십팔년 무신 구월 초칠일 정축 상량(崇禎紀元四回甲 二十八年戊申九月初七日丁丑 上樑)”이라 기록되어 있어 건립 연대는 1848년으로 생각되고 안채와 사랑채는 더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20세기 중반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일자 4칸 전후퇴집으로서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의 차례로 배열하였다. 구조는 2고주 5량이며 납도리집이다. 사랑채는 5칸 전퇴집인데 3칸만 헛퇴를 덧붙였고 최근에 서쪽 2칸을 달아냈다. 구조는 1고주 5량, 납도리이며 장혀는 쓰지 않았다. 네모기둥이고 낮은 덤벙주초이며 기단은 자연석 허튼쌓기로 처리하였다.

여지도서  全羅道   靈巖
壇廟 社稷壇 在郡西門外 원주 文廟 在鄕校 원주 城隍祠 在郡南門外 원주 厲壇 在郡北城外 원주

 鹿洞書院 在郡南三里直提學 崔德之俎豆所康熙己巳

 孫忠成配享甲戌領議政 金壽恒并享辛卯其子昌協配享 肅廟朝癸巳 賜額 원주 忠節祠 在郡南六十里 贈參判 鄭運俎豆所壬辰鄕人立祠 肅廟朝辛酉 賜額 원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여지도서  全羅道   靈巖
人物 高麗 崔知夢 初名聦博涉經史又精於卜筮太祖聞其名使占夢得吉兆曰必將統御三韓太祖喜改名知夢官至 太師謚敏休配享景宗廟庭焉 원주 本朝崔德之 號烟村本全州人登文科官至藝文館直提學 文廟朝見機告老而退六臣及一時明公皆作詩送之高其明哲鄕人營立書院 賜額鹿洞 원주 崔忠成 德之之孫天資超越見識高明受業於金宏弼讀聖賢書不掇晝夜南秋江所著師友錄極稱美之配享鹿洞書院 원주 崔吉男 德之之後 宣廟丁酉倭亂再逞國儲磬竭吉男以義穀輸納於南原兵賴無飢朝廷褒其功 除典牲

<하권0739-2>

主簿 원주 鄭運 河東人自少慷慨有大志登武科累典郡縣以忠貞報國四字銘釰自誓壬辰亂與統制使 李舜臣擊賊大敗之忽然中丸而死賊相賀曰鄭將軍死餘無足畏朝廷嘉其忠節 贈職旌閭鄕人立祠 賜額忠節 원주 朴成乾 號五恨登文科官至縣監棄官還鄕行義篤至動脩規度鄕人立祠享之 원주 朴權 成乾子登文科爲正言燕山時上疏極諫謫吉州 中廟反正赦還田里矣未及進用而卒 贈大司諫與五恨同享焉 원주 金完 克祧子生而白氣滿室經日乃散甲子适變以防禦使與都元帥 張晩合兵大破之賊爲其下所殺遂錄功封鶴城君官至兵使 贈兵曹判書謚襄武 원주 金宇天 克桃子性至孝五歲從舅氏官泣不食曰來時母親絶粒以此不忍食以義州判官甲子适變與其兄完破逆适錄振武勳 원주 金汝水 完之子武科壯元宰慶興胡人立石於厚春頌德官至兵使封海城君致仕而卒 上致祭 贈戶判 원주 金世器 汝水之子兒時李相國浣見之曰虎父有虎子登武科 上嘗試材上苑中連中三矢承 命角藝應機

<하권0739-3>

如神 上特加優獎仍拜咸鏡南兵使封鶴林君 원주 愼喜男 通禮 後庚曾孫號瀯溪進士登文科累經銀臺官至監司而卒 宣廟朝遣史官致祭 원주 愼天翊 喜男曾孫號素隱中進士登文科累經銀臺歷吏曹參議大司成副提學當光海亂政退去永保癸亥改 玉後始入淸選見勳臣脩私棄官歸鄕屢徵不就至禮曹參判而卒文章振一世 顯廟朝致祭焉 원주 愼海翊 喜男曾孫號湖山登文科名振一世當光海政亂無意進仕以佐郞卒時人皆惜之遺文與素隱集同附 원주 白光勳 號玉峯以文章名筆隆動一世白衣從事儐僚配享于李靑蓮書院 원주 白振南 光勳子號松湖文章筆法名於一國亦以白衣被選人皆稱之 원주 朴繼元 密陽人壬辰亂以前部將從都元帥 權慄多有忠義勳勞錄原從功一等 원주 崔慶昌 號孤竹進士登文科官至正言天姿豪爽素履淸潔配享于靑蓮書院 원주 曺行立 昌寧人魁偉方毅出入於文元公 金長生之門與文敬公 集友善嘗日吾親舊中只有曺百源在耳被篤歷四邑皆有聲績做呂氏鄕約

<하권0739-4>

洞人立祠享之 원주 徐希信 利川人進士登文科官至府使當光海時作功名弊屣詞歸臥江山天性孝友文章富瞻嘗作神明舍記膾炙京鄕轉入闕內世稱高節 원주 愼汝誼 通禮 後庚之後中生員以行義薦參奉不就丙子亂與弟汝源 汝訥廣募義旅多聚義穀將覲 王師行數日聞和成罷歸後 朝廷嘉其忠義錄用其子昤 除授禁府都事 원주 梁達泗 爲人慷慨膂力過人登武科以縣監丁憂還鄕嘉靖乙卯倭寇大至列邑奔潰賊兵猖撅達泗痛河北之無義士自念服麻從戎雖非孝禮不可以賊遺君遂召募丁壯指授方略又聚花郞盛服綵繡俱張百戱賊見而喜之皆往觀之建泗覘其無備率衆奮擊花郞輩亦翼而擊之城中亦皷噪從之五六萬賊徒屠戮殆盡倭徒不勝忿怒并力追之達泗佯敗而走誘引於無水淤泥處倭果追之盡陷於泥中達泗盡斬之南方以寧達泗以喪人恥詣元帥獻功復歸廬次而終至今嗟惜 원주 全夢星 勇力絶倫登武科官至縣監丁酉倭亂與弟夢辰及金德洽糾合義旅挺身獨戰殺死者甚衆賊復進夢星倚樹射

<하권0740-1>

賊應絃而倒弟夢辰忽中丸而死夢星少不動容終始力戰矢且盡乃呼曰爲國死敵人臣之責遂死於亂鋒中 肅廟朝道臣褒 啓 贈兵曹參議 원주 閔恂 舍人德鳳之子剛毅果敢壬辰亂 大駕播遷龍灣 御供之絶恂與奇孝曾諸人收聚糧饌器皿運納于 行在 朝家嘉其忠 除監察 원주 李繼鄭 登武科官至忠淸水使値壬辰亂戰亡事載勳錄 원주 李有吉 判書 後白之孫登武科以永柔縣令戰亡於壬辰亂 肅廟朝 贈兵曹參判 원주 朴泰初 羅州人監司 東說曾孫以學行薦 聞于朝拜佐郞不就號敬齋 원주 崔漑 全州人少尹得之之後事親至孝壬辰亂崔慶會以檄召之同入晉州夙夜籌畫不離主將之傍一日告于主將曰賊勢猖獗死日無餘請歸覲老父永訣而歸主將嘉其忠孝許之及期還主將益嘉重之及城陷與主將同死事 聞復其家其子興孝 興悌志切復讐服闋後收集義旅丁酉斬獲之功居多忠武公 李舜臣褒 啓兄弟皆授軍資監參奉 원주 孝子文益行 天性純孝力行恭儉李後白以孝廉屢薦 聞于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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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行不樂曰事親人子之當然而李公以此薦我寧不愧心遂不復見李公後 贈官工曹參議 원주 徐鑰 察訪 希恕子武科事親至孝負薪溫涼父病嘗糞以占輕重嘗爲西帥 柳琳所僻爲裨將自離庭後不食肉不聽樂琳一日開宴樂鑰獨不參琳問之對曰離親之日老病旣劇再見無期從征雖是爲國之事飮樂非其所安淚隨言落琳歎曰吾儕徐鑰之罪人卽日命還 肅廟朝道臣 啓聞 贈戶曹正郞 원주 高麗烈女崔氏 晉州戶長 鄭滿妻也詳載晉州烈女下 원주 金氏 中郞將 趙安鼎妻也年十七父卒十八夫沒十九母沒皆廬墓三年哀毁不掇不事生業事 聞旌閭 원주 本朝金氏 士人尹惟誠妻其夫病篤期刎其頸家人覺而救之未幾夫死截髮爲誓誓以從死晝夜伏柩前哭不絶聲及葬期已迫暗爲一書告訣父母託其孤抽力自刎救之已無及矣萬曆四十一年事 聞旌閭 원주 李氏 學生崔尙斗妻夫死常居柩傍哭不輟聲及葬時役入壙中舅極力扶出其後潛入魂房自縊而死 顯廟朝辛亥事 聞旌閭 원주 李氏 竹山

<하권0740-3>

安世雄妻也嫁才六朔夫得奇疾晝夜禱天願以身代未幾夫死哀毁哭擗自縊而死 肅廟朝事 聞旌閭 원주 劉召史 林者斤老味妻夫死親自歛襲引鎌自死今 上癸酉事 聞旌閭 원주 李氏 吳錫之妻成婚六朔夫死赴水溺死其婢元尙亦從溺死事 聞旌閭 원주 李氏 丁夢說妻其夫病死仍臥屍側俟昏飮藥而死今 上丙子事 聞旌閭 원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유 적 명 : 연촌 영당 (烟村影堂)
주 소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7
지정사항 : <지정사항 없음>
시 대 : 조선
종 류 : 고분 사묘
참고사항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 전라남도, 1986, <<문화유적총람>> ; 전라남도, 1992, <<문화재도록>>


영당은 목조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3문과 담장 안에 있으며 1932년에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모사품이 있고 진영과 유지초본이 좌우측에 봉안되어 있다. 현재 제실로 사용하고 있는 합경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며 내부에는 다수의 편액과 전적, 녹동서원 관련자료 등이 보관되어 있다. 1. 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崔德之影幀및油紙抄本) : 종손에 의하면 이 본은 어전에서 화사(畵師)가 직접 그렸다고 하나 화상의 복장이나 자세로 보아 어전에서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작품자체는 화사가 오랫동안 대상인물을 관찰한 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유지초본은 다른 유지초본이 안면 이하 또는 흉부까지만을 그리는데 비해 이것은 정본과 같은 크기여서 더욱 더 작가의 초안과정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1975년 5월 16일 보물 제594호로 지정되었다. 2. 목판: 목판은 영암읍 교동리에 있는 녹동서원에 있었으나 고종 5년(1868) 녹동서원이 훼철된 후로 이 곳에 옮겨와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연촌유사(烟村遺事)” 26판, “산당집(山堂集)” 54판, “문곡집(文谷集)” 540판 등 총 642판이 보관되어 있다. 목각의 크기는 25×50×4cm이며 목판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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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략
紀年東史約卷之十二 朝鮮茅亭李源益 編

本朝紀
丁丑世祖二年
 明英宗天順後元年 

遣使于明, 賀帝復位也 원주 明遣翰林修撰 陳鑑等賜錦幣大赦, 遠接使 朴元亨 원주
鑑與元亨酬唱若故舊, 臨還執手揮涕, 曰古人有千里神交者, 況累月相從乎,
降封上王爲魯山君, 遷于寧越, 降大妃爲夫人, 流錦城大君 瑜, 國朝寶牒云乙亥降封君顯德王后遷陵誌文云丙子五月遜于外皆誤也 원주
提學 尹士昀因市民金正水言, 宋玹壽 權完 完女冊妃時以膢入宮 원주 謀逆命鞫之取服敎, 曰前日宗親百官皆言上王得罪宗社, 不宜安居京師, 予固不允, 欲保初心, 今煽亂之徒, 繼踵不息, 予豈得以私恩不顧宗社之重, 特從群議降封魯山君, 出居寧越, 厚奉衣食以保終始, 乃命僉樞 魚得海率軍護送, 軍資正 金自行, 內侍府事 洪得孜從行, 又遣宦官安璐餞子華陽亭上, 王謂璐, 曰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是吾罪也, 時, 禁府都事 失其姓名 원주 陪上王至寧越西江淸冷浦, 夜坐曲灘峯上哀而作

<12권01_0499-2>

歌 後人金止男翻聲爲詞 원주 曰,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川流亦如我, 鳴咽去不休。 上王尋移寓於客舍東軒, 諺傳淸泠浦潦水沈沒移于客舍 원주 每登觀風梅竹樓, 夜使人吹笛有詞, 曰月白夜蜀魄啾, 一作月欲低蜀魂啼 원주 含愁情, 倚樓頭, 爾啼悲, 我聞苦, 無爾聲, 無我愁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一作子規啼明月樓 원주 又, 曰一自冤禽出帝宮, 孤身雙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聰。 時越境旱, 上王焚香禱雨雨, 輒注, 每淸曉袞龍袍翼善冠據榻而坐, 過者皆起敬入謁, 前副提學 曹尙治卒,
尙治旣歸終身坐不西向聞上王子規詞, 痛哭賡韻, 曰子規啼子規啼。 夜月空山何所訴, 不如歸不如歸, 望裏巴岑飛欲度。 看他衆鳥摠安巢, 獨向花枝血謾吐。 形單影孤貌憔悴, 不肯尊崇誰爾顧。 鳴呼人間冤恨, 豈獨爾, 義士忠臣增慷慨, 激不平屈指難盡數, 臨歿自題一頑石, 日魯山朝副提學 曹尙治之墓, 又自序, 曰魯山朝者明非今日之臣也,

 

<12권01_0500-1>

不書資階者, 著其不能濟君之罪也, 書副提學者, 以其不沒實也, 書逋人者言其亡命逋逃之人也, 囑其子樹之墓, 子孫畏禍埋之, 巡撫 宋侃復命于寧越,
侃, 官嘉善, 受上王命巡撫南方, 將還, 聞上王遜于寧越, 直入寧越, 復命辭歸, 痛哭失聲, 守校愕然欲收之, 有老吏私謂校, 曰君當謹所守而已, 奈何欲禍人乎, 守者乃止, 侃遂徑還礪山, 杜門絶世事, 及凶聞至, 走入窮山, 哭盡哀服喪三年, 隱於興陽 馬輪村山亭後十餘年, 家人跡而得之, 或縱酒大醉, 狂走岐路, 或登臨山水大哭, 人皆目之爲狂, 自號西齋, 携兩弟以終土人稱其地, 曰西齋洞, ○時, 有宮奴禿同典農寺奴尹生者, 持西瓜胡桃謁上王於越, 刑曹執之, 當斬, 上只命杖治之, 前集賢校理 具人文, 覲上王于寧越, 人文號睡翁, 與崔恒 朴彭年爲道義交, 擢科至集賢校理, 文宗嘗夜宣醞, 命賜貂衾, 侍寢殿側其寵遇如此, 及上受禪, 人文與成三問議出處三問欲從仕人文, 曰我則自廢矣, 未幾, 忤旨外補, 遂投紱歸海美舊廬, 托靑盲非相, 則足, 不出戶, 語家人, 曰時淸我眠方開, 一日三問自洪州來訪夜飮, 鴈一句詩, 曰誓將心裏鐵鑄得袖中椎。 人文沈吟不答, 三問, 曰怖死耶, 人文喟然太息, 曰天象人事吾察之審矣, 一死不足恤,

<12권01_0500-2>

其如事敗則禍吾, 君何哉, 三問遽曰吾醉矣, 遂罷及六臣死, 人文仰天歎, 曰求仁得仁亦何尤乎, 至是, 托病愈堅, 然時稱浴溫泉, 獨携小奚童出經月, 乃還, 顔貌瘁甚, 戚戚有不可掩者, 家人默揣其往覲越中而終不自言, 後人名之, 曰杜門洞,
錦城大君 瑜議擧兵事覺賜死, 革順興府分屬基川 榮川 奉化三邑,
錦城與順興府使 李甫欽, 號大田歷掌令老而飛文 원주 嘗慷慨流涕, 議復魯山, 賜金頂子珊瑚纓, 曰主辱臣死, 予豈忍坐而待死, 使之草檄, 曰姦臣用事誘掖宗親, 放默主上, 社稷傾覆, 今同心匡救, 神祗監玆, 將發順興兵迎魯山踰嶺會有官奴潛聽之, 因侍女竊檄走京師, 基川縣監 金孝洽聞之疾逐奮其檄上變, 甫欽知事露亦馳啓上, 乃遣少尹, 尹慈等按治賜錦城死, 盡誅黨與竹溪水爲赤, 錦城初繫獄一日, 裸身挺出不知所在, 一府大擾, 忽又自至, 曰我若逃避, 汝不得追矣, 然衆人死不如一人死也, 談笑自若, 整衣冠據胡床而坐, 金吾郞要拜殿牌錦城曰吾君在寧越遂東向慟哭四拜, 已飮藥未殊乃縊殺之, 甫欽坐單檄被誅, 初錦城嘗與南中義士議事於府前銀杏樹下及事敗焚其樹民謠之曰順杏復順興復順興復魯陵復後百餘年杏樹忽⊙蘖而邑復又百年餘魯陵復位邑人設壇樹下祭錦城及同死諸人○正宗御製祭錦城大君曰讀魯陵誌不涕非人死六生六爲臣盡臣奮于宗英錦城烈烈魯衛之親夷齊之節投荒賦鵬大嶺之南黃昏望美百粵巉巖珊瑚長纓鹿盧短鍔誰我從者與之偕作太守嚮慕有甲藏服灑血爲書月晦星蒙禍迫速獄變起屬垣非昧曆數又知吾君整衣拜訣不西而東始起於忠義竟死於鳥叫望帝草緣王孫鳴鳴竹溪長統雲旙 원주


<12권01_0501-1>


十月 二十四日 원주 , 魯山君卒, 時春秋十七在位三年在上王位二年葬于郡北冬乙旨洞 원주
 一本作王室之胃幼也之辟適丁一否運遜于僻邑 

自錦城被禍, 廷議朋興申叔舟乃獨啓, 曰去年李塏等以魯山爲名, 今瑜亦欲挾魯山倡亂, 魯山君不可安居也, 政府宗親繼之, 至是, 賜死, 禁府都事 王邦衍持藥到寧越, 踧踖不敢入府, 隷促之邦衍不得已入, 伏庭中, 魯山君具翼善冠袞龍袍出御堂中, 問所以來, 邦衍不能對魯山君顔色不變, 乃, 曰予無受旨處不可下庭, 汝來殺我, 邦衍等不敢仰視, 有一貢生常待側者, 請自當之, 以一條弓弦繋頸, 從座窓穴引之, 繩不足繼以布帶以縊之, 貢生行未出門九覈流血卽斃 원주 卽酉時也, 或云魯山聞錦城敗自盡此當時權臣奸媚之筆癸酉丙子實錄類如此 원주 雷雨大作, 咫尺不辨, 人物烈風拔木, 黑霧彌空, 徑夜不散, 時侍女從人爭投郡之東江, 浮屍滿江, 後人名爲落花巖○越郡諺傳村氓以事入官路遇魯山乘白馬螣蹋向東谷去氓伏謁道傍問官家將向何處魯山顧謂曰吾將往太白山矣氓拜送入官則已遇變矣 원주 戶長嚴興道往來獄街, 哭泣修棺, 官奴適作棺畏火置郡獄取而用之 원주 翌日率吏民營葬于冬乙旨, 興道族黨懼禍爭止之, 興道, 曰爲善被禍吾所甘心

<12권01_0501-2>

或云魯山被害復沈于江玉體泛泛洄洑去而復還十指如玉浮于水面陪吏 逸其名 원주 家有漆棺乃潛收玉體殮而葬之未幾又有昭陵之變命掘而沈之江吏不忍掘佯若掘去而還掩之或云被害之初棺殮不具只藁草爲殯一日有年少山僧來哭甚哀自言有通名蒙恤之分留連數日一夕負屍而逃一云焚之山谷一云投之江中今之陵臺謂之虛葬也未知孰是自後郡守相繼暴死傳爲凶地郡守 朴忠元具奠物以祭之其夜死而復甦祭文曰仁明之主 王室之胄適丁否運遜于僻郡 一片靑山萬古冤魂庶幾降臨式歆苾芬從此無患邑人有吉凶禍福皆就祀焉○魯山君夫人宋氏願處東郊, 瞻望魯陵, 自朝家營室于東門外, 號英嬪夫人別構草屋, 今永美亭洞 원주 素衣素食, 以終天年, 初申叔舟以功臣請受夫人爲婢, 上靳之,
殺宋玹壽, 鄭悰, 流漢南君⊙, 永豐君 瑔, 等尋卒,
臨瀛大君 璆謂鄭昌孫, 曰⊙瑔 玹壽與瑜同罪, 不可獨生, 鄭獜趾亦疏請之, 乃命絞玹壽及悰, 流⊙瑔皆死謫中, 時被死人崔沔 李方貞 朴閏 金得誠 李祥孫 權完 李貴 金印平 柳岱 尹奇 金得祥 吉由

<12권01_0502-1>

善 崔璨 曹熙 徐盛 金謙 許遂 洪九成 汝玉峯 崔永孫 崔白滌 陳有蕃 趙由禮 睦孝智 成文治 李聞禮 李敬 申之益 申之仲 申之謹內官嚴自治竝載東鶴寺魂記○初悰尙文宗女敬惠公主封寧陽尉時主少國疑人心憂畏悰以懿親爲上王所倚重及被禍公主從謫流離困阨而無怨誹色婦道益虔生男以生女告提絜遣孤哀毁盡節貞憙王后聞公主實有男將入宮中私自養育年七歲嬉戱宮中上問之后曰文宗血屬只有此兒敢率來私育上置膝上噓唏流涕名曰眉壽於是遣使迎公主于光州賜宅一區睿宗嘗曰敬惠公主之子豈可以亂臣子論也眉壽官至贊成慱雅好古望重於世魯山夫人屬後事眉壽世奉祭祀魯山忌辰忽有聲怳惚言餠盡矣卽更備餠以薦又嘗薦杮婢故落一顆令兒拾啖婢忽拘攣自伏庭中良久乃甦曰有王者具袞冕坐使人綁縳而責之解衣肩臂有鐵索痕云 원주
和義君 瓔卒于益山,
 東當作束 綱當作剛 

, 自魯山遜位和義君每獨居涕泣沾襟, 時宰聞之, 皆欲殺六臣事發, 上問此輩可置法乎, 和義君不對, 及錦城死, 乃爲魯山疏, 辨語多不諱, 遂得罪竝三子廢

<12권01_0502-2>

錮謫益山, 禁防甚密, 墻外設鹿角墻, 內掘井取給, 外人不得通, 竟瘐死, ○成聃壽字眉叟, 與成三問同祖, 石瑢父熺校理丙子酷受刑訊, 閉口不言, 謫金海, 廢錮聃壽足跡一不及都門, 有至性高識, 旣隱居不以世族自著, 從子夢井按道物色求之茅屋, 蕭然土床, 無席遺之席, 却不受, 曰此不合貧賤家也, 時罪累子孫, 或有就職, 聃壽竟不起, 釣魚江上, 悠然自適, 嘗有詩曰把竿終日越江邊, 垂足滄浪困一眠。 夢與白鷗飛海外, 覺來身在夕陽天。 ○金時習字悅卿號梅月堂, 或東峯, 碧山 淸隱 淸寒子, 生八月語遲而神警臨文, 口不能讀意, 則皆曉, 人號神童, 世宗召致政院試之, 曰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應聲, 曰聖主之德, 黃龍翻碧海之中, 賦三角山詩, 曰 東 聳三峯貫太淸, 登臨可摘斗牛星。 非徒岳峀興雲霧, 能使王都萬歲寧。 上, 曰欲親引見, 恐駭人聽直韜晦, 敎養待年長成, 就將大用, 賜帛五十疋, 使自運遂各綴其端曳之而出, 於是聲振一國稱, 曰五歲而不名, 二十一讀書三角山聞, 魯山遜位, 閉戶不出者, 三日, 乃大哭, 盡焚其書, 發狂陷于溷廁, 而逃之緇門, 僧名, 雪岑, 爲人貌瘦身短, 豪邁英發, 簡率勁直, 傷時憤俗, 氣菀不平, 自度不能隨世低仰, 遂放形骸遊方之外, 域中山川足跡殆遍, 聰悟絶人,

<12권01_0503-1>

不俟傳授而通貫文籍, 凡世間人事之得失是非貴賤死生至於性命, 理氣陰陽, 幽顯可知而言者一寓於文章, 故其爲辭也, 水湧風發, 山藏海潏, 神倡鬼酬, 聞見層出, 雖少玩索存養之功, 橫說竪論不失儒家宗旨, 自以聲名早盛, 而一朝逃世, 心儒跡佛, 故作狂易之態, 以掩其實, 有欲受學者逆擊以木石, 或彎弓將射, 以驗其誠, 喜開山田, 雖綺紈家臾, 必役耘穫, 以是鮮終始傳業者, 好白樹題詩, 諷詠良久輒哭而削, 或刻木爲農夫形置案側, 熟視亦哭而焚之, 見除目非人望, 則必哭, 曰斯民何罪。 時金守溫 徐居正皆待以國士, 居正方趨朝, 時習衣藍縷帶索遇諸市, 仰首呼, 曰 綱 中 居正字 원주 安穩, 居正駐軒笑語, 一市駭視守溫知館事, 以孟子見梁惠王論, 試諸儒, 時習聞之笑, 曰非此老不出此題, 乃走草成篇, 曰試瞞此老, 守溫讀未終遽問, 曰悅卿近住何寺, 其論大略以爲梁惠僭王, 孟子不當見云, 年四十七爲文以祭祖父, 曰罪列三千不孝爲大, 沈滯異端末蹃方悔, 遂娶安氏女爲妻, 放曠如舊一日, 見領相 鄭昌孫過市, 大呼, 曰彼漢宜休, 人危之絶交, 與南孝溫, 宗室貞恩安應世, 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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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孫爲方外交, 孝溫問我所見何如, 曰穴窓窺天君則何如, 曰廣庭仰天, 妻沒復還山作頭陁形, 喜遊江陵 襄陽間, 答襄陽宰柳自漢書, 曰其三歲能綴文, 作桃紅柳綠三月暮, 珠貫靑針松葉露等句, 五歲讀中庸 大學於李季甸門下, 政丞許稠, 曰余老矣, 以老字作句某應聲, 曰老木開花心不老, 許擊節歎賞, 曰此神童也, 旣而心事相違顚沛之際, 世宗顯陵相繼賓天, 故舊喬木盡爲鬼簿, 而異敎大興, 斯文凌蔑, 某之志已荒凉矣, 遂伴髠者遊山水, 然不欲以異道顯世, 故光廟屢召而不就, 處身益以疎曠, 使人不齒, 呼牛呼馬皆便應, 又聖上登極用賢從諫, 冀欲筮仕十餘年前, 復於六籍, 溫熟稍精。 而屢見身世相違。 如鑿枘孰知余之素志, 故復放浪於山水間矣, 將製長鑱, 用斲苓朮, 萬樹凝霜修仲由之縕袍, 千山積雪整王恭之鶴氅, 與其落魄而居世, 孰若逍遙而送生云, 居中興寺最久, 每雨後山水添流坐湍急處, 沈吟作詩, 或律或絶, 五言古風, 書于葉, 放流且書, 且放葉盡, 乃還, 申叔舟以同抱之友, 聞其入城使其主人勸酒醉臥, 輿入於叔舟之室, 酒醒知其見欺驚起欲去, 叔舟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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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手, 曰悅卿何不一言耶, 乃出太公, 子陵二叟鈞魚圖示之, 時習作詩, 云風雨蕭蕭拂釣磯, 渭川魚鳥已忘機。 如何老作鷹楊將, 終使夷齊餓採薇。 桐江江上釣烟波, 生計蕭條一箇簑。 漢殿若無星象動, 千秋定不累名加。 仍緘口絶裾而去, 自是踪跡益秘, 喉音淸禁能出商聲, 皓月中骨每詠楚騷, 一過輒淚下, 醉則曰不見我英廟, 流涕甚悲, 後入金鰲山作新話藏石室, 曰後世必有知岑者皆述異寓意也, 又作元子虛夜遇錄弘治癸丑終于鴻山無量寺, 遺戒無燒葬權厝寺側, 三年啓殯面如生, 以爲佛竟茶毗之畵老少二像自贊, 曰爾形至藐, 爾言太侗, 宜爾置之邱壑之中, 縣宰沈宗直始建閣安像名曰節義祠扁以淸風後移其閣於鄕校傍李滉曰梅月別是一種異人近於索隱行怪以所値之世適然遂成其高節耳 원주 ○趙旅字主翁號漁隱, 上受禪旅時在太學, 登明倫堂揖諸生歸隱于伯夷山下, 謝絶人間事, 日用事爲動循天, 則不露痕跡, 不欲人知之, 客至啖蔬糲, 所與言非桑麻是野談, 鄕人知有孝友之行, 而其篤學蘊中人無得以稱焉, 嘗自卜於鼎巖江上, 曰江水絶, 吾子孫乃亡, 又, 曰吾子孫當世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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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北若衰替移五峯相對處可大昌, 咸安有書院李孟專 元昊 金時習 成聃壽 南孝溫并享賜額, 世稱六臣生者, ○李孟專字伯純, 號耕隱, 金宗瑞之死以司諫退老網障村, 托以盲聾謝絶親朋, 雖家人妻子莫能測識, 惟與金宗直友披露心曲, 應答無礙, 曝穀爲鷄雀啄盡而任其攤棄。 卒終。 ○權節字端操號栗亭, 膂力絶倫, 慱通群書, 爲集賢校理, 世祖知有文武大才, 日, 臨其第杯酒款, 密屬以大事, 節輒稱醉聾終不對。 及受禪除僉知 監司皆不應, 遂謀出處于從子晏, 爲鞱晦之術, 托以狂易見人輒稽首。 曰干戈息肩。 國家太平。 聖主萬年。 手書格言, 敎子孫七十三卒。 ○元昊 原州人, 憲子, 自其謝病歸鄕里, 與世相絶, 及魯山遜位就越之西。 築室名以觀瀾, 或臨流嘯詠, 或閉戶著書。 晨夕瞻望涕泣, 以寓戀君之忱, 魯山被害, 服方喪三年, 制畢歸原州舊廬, 卽霧巷 원주 不出戶庭, 後又入酒泉縣山谷中, 從子判書 孝然屛徒御踵門請見堅不許。 上除戶曹參議召之, 以死自擔不應命, 坐必東向臥必東首以終焉, 蓋以寧越在舊居之東也, 其孫叔康以史官直筆被禍, 昊遂取平生著述及疏章, 盡焚之, 且戒其諸子勿讀書求名利,

 

崔德之號烟村 迃叟, 歷翰苑 玉堂, 以南原府使 退居靈巖 永保村, 扁其室, 曰存養, 癸酉之亂, 國家多故, 炳幾保身, 世稱明智, 謂之烟村霧巷, 比六臣較高者固也,

 

 ○尹譓, 以禮曹郞棄官入山, 臨終書忠孝二字屬其子, ○柳自湄 曼殊曾孫, 文科至監察, 禪授之際, 走入首陽之神光寺。 晩移西山, 遺誠治喪勿用浮屠法, 且, 曰吾不能死於君, 勿葬先人側也, ○申末舟 叔舟弟, 有文學, 靖難後超遷至大司諫, 然常悒悒不樂, 遂棄官歸淳昌。 自號歸來亭。 上以叔舟故亦不之罪, ○趙崇文 副正 瑜子, 武科至節度使, 子哲山與成三問爲中表, 及上王遜位, 崇文謂哲山, 曰事已至此, 惟有一死而已, 語及時事相對涕泣, 與六臣同謀事覺被禍, ○李啓基號玄山, 禪授後遞交河守, 歸常騎牛佩酒上下山谷, 使女僮引道, 男僕撞錚, 曰病自如此, 自己丑以後一意改之, 曰病已愈矣, 南孝溫記其事, ○洪勻士族人。 少以武士屬內禁衛, 上王遜位後, 忽得狂易疾丏乞於市, 得酒一甁則歸, 不滿必劫市婦而足之, 然取一掬而止, 約一酒家日必一往, 醉輒唱歌, 還家如是者十餘年, 短褐不掩脰, 人皆稱洪丏子, 類穢跡, 潔身之爲而人莫之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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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李仁孫爲右議政, 仁孫集後孫沈毅剛果諳錬舊典有五子克培 克墩 克增 克均 克堪皆貴顯 원주
○世子卒謚懿敬, 時春秋二十 원주 世子偶因感冒失和, 移處上之舊邸, 上亦移御親視醫藥, 命申叔舟同議及病亟, 玉顔如平生而氣息已盡, 上曰脩短命也, 其嗣皆幼, 不可不傳其貌以遺之, 召畵師崔涇 安貴生。 占分寸草圖而藏之, ○或說上一日酣寢夢見顯德王后挺劍至, 曰奮國足矣, 殺吾子何也, 卿有天命雖不可犯當殺卿子, 卽走東宮, 上驚悟時世子暴中惡已無及矣,
廢顯德王后爲庶人遷昭陵。
鄭獜趾等言。 顯德王后母及弟自愼謀及伏誅, 其父專已追廢爲庶人, 六臣被禍時使自愼通于其母俾達於上王故母子被刑追廢其父 원주 且魯山君已降封, 其母不宜尙保名位, 請廢爲庶人, 改葬從之, ○初, 昭陵夜半有婦人哭聲自陵中出云。 將壞予室, 予將疇依, 聲動村里, 未幾遷陵, 先剖石室, 欲曳出梓宮, 重不能勝, 人皆憂懼爲文祭之, 乃遷動暴置數日, 以民禮收葬,
冊海陽大君 晄, 字明照初字平甫 원주 爲世子, 貞憙王后誕生時春秋八歲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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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申叔舟爲右議政, 兼典文衡, 議政兼文衡始此 원주 ○祀圜邱, 賜酺受賀,
初, 東方白檀君感生祭天, 以報本, 祭天壇在摩尼山 원주 而麗羅濟及高麗皆因襲, 太祖築圓邱於南郊, 祀天檮雨, 太宗亦祈穀於圓邱, 旋以非天子不得祭天罷之, 會天旱, 人有言秦在西故只祭白帝, 我國在東亦宜祭靑帝, 卞季良亦言檀君自天而降, 非天子分封之地, 高皇帝亦知我國之祭天, 許以議從本俗法守舊章, 蓋謂海外之國始受命於天也, 太宗從其言, 復祀, 世宗時議者終以爲不便罷不擧者有年, 至是。 上深納梁誠之郊天享帝之語, 決意復祀, 命有司具儀註以冕服行祀, 如儀受百官賀, 賜諸道大酺三日, 行君臣同宴禮,
領議政 鄭獜趾上疏乞骸骨, 不許, ○慶尙道進嘉禾却之,
時, 上謂諫官, 曰予卽位以後言官不得盡言, 一則以予備嘗艱厄, 民之疾苦言之不介意, 一則以予好佛言之必怒, 一則小事言之必, 曰瑣瑣, 一則以予有嚴威言之恐罪, 以此進退商量不能展職, 予知其弊久矣, 言官宜知無不言, 有以體君安民爲慮, 又謂史官 金利用, 曰予之先, 史官亦言之對, 曰規諫非小臣之任也, 上, 日史官失言矣, 命罰以酒, 今後講武, 史官必備二員。 從實詳記, 承旨等亦須記之, 我國記事之文, 不及中國, 但求不爽實而已, 工拙不必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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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可疑 

群臣上尊號, 曰承天體道烈文英武, ○始令注書記注, ○定宗臣封爵之制, 以顯祿以下爲階 원주 ○常參時 陳刑名以爲例, 小交龍旂一纛一五衛旗五大角一小角一招搖旂一皆忠義奉持角則吹螺赤 원주 ○纂國朝寶鑑及東國通鑑,
竝命申叔舟撰成, 又改五禮儀, ○時, 印大藏經于陝川海印寺, 遣敬差官 尹贊董其役, 令各道伯, 助其費印, 五十件分藏名山巨刹, 紙凡三十八萬八千九百餘帖,
親試取姜子平等十三人, 別試取吳凝等十三人, 重試取李永垠等二十一人, ○以崔恒爲大提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미지 사진은  불암산의 모습이다 뒤에는 수락산 의모습 (2012.2. 촬영)